종교개혁의 정신과는 전혀 다른 그러한 사상은 신비주의자들의 저서와 설교집과 신자들의 참회를 듣는 신부의 관례에 관한 세밀한 모든 규칙 속에서도 또한 발견된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긍정하는 정신과 전 자아의 표현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정신을 찾아보게 된다. 그러한 태도와 함께 우리는 일찍이 12세기에 널리 전파된 예수를 본받는다는 생각과, 인간은 신과 같이 되기를 동경할 수 있다는 신앙을 발견한다. 신자들의 참회를 듣는 신부에 대한 규칙은 각 개인의 구체적인 사정에 대한 큰 이해를 보여주었으며, 주관적인 개인차를 인식하게 했다. 그들은 죄라는 것을 개인이 그것 때문에 타락하여 부끄러워해야 하는 점으로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이해하고 고려해야 할 인간적인 약점으로 다루었다. 위의 사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중세의 교회는 인간의 존엄성과 의지의 자유, 그리고 인간의 노력이 효용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동시에, 또한 신과 인간과의 유사성과 신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인간의 권리를 강조했다. 인간은 모두가 신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평등하여 형제와 같다고 생각되었다. 중세 말기에 이르러 자본주의의 발생에 따라서 당혹감과 불안감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의지와 인간의 노력이라는 역할을 강조하는 경향도 더욱 커져갔다. 르네상스의 철학과 중세 말기의 가톨릭 교의는 바로 자기의 경제적 지위로써 권력과 독립의 감정을 가지게 된 사회집단에 유포되고 있는 정신을 반영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루터의 신학은 중산계급의 감정을 표현했는데, 그 중산계급은 교회의 권위에 대해 투쟁하며 새로운 유산자 계급에 대해서는 분노를, 신흥 자본주의에는 위협을 느끼고, 또한 무력감과 개인적인 허무감에 압도되고 있었다. 루터의 사상체계는 가톨릭적인 전통과 판이하다는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프로테스탄티를 신봉하는 여러 국가에서 루터의 교의가 채택될 경우에는 다른 어떤 면보다도 더욱 강조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러한 견해는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인간에게 독립성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즉, 루터가 교회로부터 그 권위를 빼앗아서 이를 개인에게 부여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의 신앙과 구원의 개념은 주관적 및 개인적인 경험이기 때문에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으며, 개인이 스스로 획득할 수 없는 것을 타율적으로 부여하는 권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루터와 칼빈의 교의의 이러한 면을 칭찬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그러한 교의는 근대사회에 있어서 정치적 및 정신적인 자유가 발전해 가는 하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특히 그 발전은 앵글로색슨 제국에서는 퓨리터니즘의 사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근대적 자유의 또 다른 측면은 개인에게 가져다 준 고독과 무력함인데, 이러한 측면도 독립의 측면과 마찬가지로 역시 프로테스탄티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 책은 주로 하나의 무거운 책임과 위험으로서의 자유를 문제로 하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한 면만을 보고, 루터와 칼빈의 교의 중에서 자유의 이와 같은 부정적인 측면의 근거가 되고 있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루터는 인간의 본성에는 선천적인 악이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의 의지는 악을 지향하게 되어 어떠한 인간이라도 그 본성을 그대로 지니고는 도저히 선한 행위를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사악하며 비도덕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 본성의 타락과 선을 선택할 자유의 결여는 루터의 전 사상체계의 근본적인 개념 중의 하나이다.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그는 사도 바울의 <로마서>의 주석을 시작했다. '이 편지의 본질은 육신의 모든 지혜와 정의를 - 비록 그것이 우리의 눈과 또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뚜렷이 비치어 진실하게 보인다 할지라도 - 파괴하고 전복시켜 이를 섬멸시키는데 있다. 우리의 눈앞에 전개된 정의와 지혜가 우리의 마음속으로부터, 또한 우리의 공허한 자아로부터 파괴되고 전복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 자기 노력으로는 어떠한 선도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부패성과 무력함을 확신하는 일이야말로 신의 은총이 내리게 되는 본질적인 조건이다. 자기 자신을 비하하여 개인적인 의지와 자부심을 타파할 때 비로소 신의 은총이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신은 우리 자신의 정의와 지혜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정의와 지혜로써, 즉 우리자신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아니요, 우리 자신 속에 깃들어 있는 것도 아닌, 어딘가 외부로부터 찾아드는 정의에 의해서 우리를 구원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정의는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오며 이는 우리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보다 더 극단적인 표현은 7년 후 <노예의 지론>이라는 루터의 소책자 속에서 엿볼 수 있는데, 이는 의지의 자유를 옹호한 에라스무스의 생각을 공격하기 위하여 씌어진 것이다. '...이리하여 인간의 의지는 말하자면 신과 악마 사이에 있는 야수와 같다. 만일 신이 그 위에 깃들게 되면 그는 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것이다. 이는 마치 <시편>속에 '내가 주님 앞에서는 하나의 짐승이오나 나는 항상 주님과 같이 있노라.'라고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다. 그런데 만일 악마가 그 위에 깃들게 되면 곧 악마의 의지대로 따른다. 과연 어느 기수를 따를 것인가, 또한 어느 편을 구하는가 하는 것은 그 자신의 의지의 힘이 아니라 바로 그 기수 자신이 그것을 붙잡으려고 싸우는 것이다.' 루터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러한(자유의지의)명제를 전적으로 내버리고 싶지 않은 경우에도 (그것을 내버리는 것이 안전하며 가장 경건한 태도이긴 하지만) 우리는 선한 양심에 따라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즉, 인간에게 적어도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한 그것은 인간 위에 자리잡고 있는 자들에게 사용될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자들에게만 사용될 것이다. ...인간은 적어도 신을 향해서는 <자유의지>를 허용하는 한 그것은 인간 위에 자리잡고 있는 자들에게 사용될 것이 아니라 바로 인간 아래에 자리잡고 있는 자들에게만 사용될 것이다. ...인간은 적어도 신을 향해서는 <자유의지>를 갖지 못하며, 신의 의지에 대해서도 또는 악마의 의지에 대해서도 포로이며 노예이며 하인이다.' 사람이란 신의 수중에 들어 있는 무력한 하나의 도구이며, 근본적으로 악한 성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의 유일한 직무는 신의 의사에 전적으로 자기를 위임하는 일뿐이다. 그러면 신은 무한한 정의의 힘으로 그를 구원할 수 있다는 교의는, 루터와 같이 절망과 불안과 회의에 사로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열렬히 확실성을 추구하고 있던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명확한 해답은 아니었다. 루터는 마침내 그의 의혹에 대한 해답을 발견했다. 1518년, 그는 갑자기 계시를 받았다. 인간은 그 스스로의 공적 여하로 구원될 수는 없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일이 과연 신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냐 아니냐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만일 신앙심만 가지고 있다면, 인간은 능히 구제를 확신할 수가 있다. 신앙이란 신에 의해서 인간에게 부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일단 신앙에 대하여 의심할 수 없는 주관적인 경험을 가지게 된다면 구원을 확신할 수가 있다. 개인은 본질적으로 신과 이러한 관계를 맺는데 감수성이 예민하다. 인간은 신앙의 체험을 통해서 일단 신의 은총을 받게 되면 그 본성이 변하게 된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행위 속에서 그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며, 그리스도의 정의가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상실된 그 자신의 정의를 회복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일생을 통해서 결코 완전하게 도덕적이 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래적인 악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얼른 생각하기에, 신앙을 자신의 구원에 대한 의심할 여지없는 주관적인 체험이라고 보는 루터의 교의는, 그의 퍼스낼리티와 1518년까지의 그의 교의의 특징인 강렬한 회의의 감정과 심히 모순되는 것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회의로부터 확신으로의 변화는 모순되기는커녕 하나의 인과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회의의 성질에 대해서 지금까지 말해 온 바를 회상해 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유로운 사고에 입각하여 이미 성립되어 있는 견해를 의심해 보는 합리적인 회의는 아니었다. 그것은 외계에 대해서 불안과 증오의 태도를 취하는 인격이 가지는 고독과 무력함으로부터 나타나게 되는 비합리적인 회의였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회의는 합리적인 해답으로는 결코 해결될 수 없다. 그것은 개인이 의미 있는 세계의 구성분자가 될 때 비로소 해소될 수 있다. 만일 이러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경우에는 마치 루터와 그가 대표하고 있던 중산계급에는 일어나지 않았던 것과 같이 회의는 침묵을 지키다가 지하로 숨어 들어가게 될 뿐이다. 이런 일은 절대적인 확실성을 약속해 주는 어떤 공식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다. 우리가 루터에게서 발견하는 것과 같은 '확실성에 대한 강렬한 추구는 순수한 신앙의 표현이 아니라 도저히 참을 수 없는 회의를 극복코자 하는 요구에 뿌리박고 있다.' 루터식의 해결방법은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데, 그들은 단지 신학적인 말을 사용치 않을 뿐이다. 즉, 그들은 고립된 자아를 개방시킴으로써, 또한 개인의 외부에 있는 압도적으로 강력한 힘의 도구가 됨으로써 확실성을 찾아내고 있다. 루터에 있어서 이러한 힘이란 신이었는데, 그는 절대적인 복종을 함으로써 확실성을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는 이렇게 하여 그 회의를 어느 정도 침묵시킬 수 있었지만, 그것이 참말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즉, 그는 죽을 때까지 그 회의를 극복해 나가야 했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신앙에는 전적으로 다른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신앙은 인류에 대한 내적인 관련성과 인생 긍정의 표현일 수도 있고, 또한 개인의 고독과 인생에 대한 부정적 태도에 뿌리박은 깊은 회의의 감정에 대한 반작용의 구성일 수도 있다. 루터의 신앙은 그와 같은 보상적인 성질을 갖고 있었다. 회의의 의미 및 그것을 침묵시키려는 노력을 이해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는 단지 루터의 신학과 이제 곧 검토하게 될 칼빈신학에 관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근대인의 근본문제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회의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 되고 있는데, 이 회의를 침묵시키고자 하는 요구는 근대철학과 과학을 발전시키는 데 가장 강력한 자극제가 되었다. 그러나 수많은 합리적인 회의는 합리적인 해답을 통해서 비로소 해결되어 왔지만 비합리적인 회의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는 인간이 소극적인 자유로부터 적극적인 자유로 발전하지 않는 한 결코 소멸될 수가 없다. 회의를 침묵시키고자 하는 근대적인 방법에는, 강제로 성공을 추구한다든가 또는 '확실성'을 보증해 주는 한 사람의 지도자에 복종하는 일이라든가 하는 식으로 실로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모든 해결방법은 단지 회의에 대한 '자각'을 제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회의 그 자체는 인간이 그 고독을 극복하지 않는 한, 그리고 이 세계에 있어서의 그의 위치가 그의 인간적인 요구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것이 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중세 말기 루터의 교의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의 심리적인 상태와는 과연 어떻게 관련되어 있었을까. 이미 우리가 고찰해 온 바와 같이 낡은 질서는 점점 붕괴되어 가고 있었다. 각 개인은 확실성의 보장을 상실하여 자본가와 독점가 같은 새로운 경제력에 위협을 당했다. 협동주의는 경쟁으로 대치되어 가고 있었으며, 하층계급에 대하여 루터주의가 호소한 사정은 중산계급에 대하여 호소한 바와는 전혀 달랐다. 도시의 빈민들을 비롯하여 농민들까지도 절망적인 생활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들은 무자비하게 착취를 당했으며, 전통적인 권리와 특권은 박탈당했다. 그들은 농민봉기라든가 도시의 혁명적인 움직임으로 나타나는 혁명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복음은 일찍이 원시 기독교가 노예와 노동자들을 위하여 행한 바와 같이 그들의 희망과 기대를 뚜렷하게 표현했으며, 가난한 자들로 하여금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도록 인도했다. 루터는 권위를 공격하고 복음의 말을 그 교의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러는 한은 지금까지의 다른 복음주의 적인 성격을 띤 종교운동과 마찬가지로 이들 반항적인 대중에게 호소했던 것이다. 물론 루터는 그에 대한 대중의 충성을 받아들여 그들을 지지하기는 했지만, 거기에도 한도가 있었다. 즉, 농민들이 교회의 권위를 공격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운명을 개선하기 위하여 주제넘게도 지나치게 많은 요구를 할 때 그들과 손을 끊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농민들은 혁명적인 계급으로 발전하여 모든 권위를 전복시키고 중산계급의 중대한 관심을 가지고 유지해 온 사회질서의 기반을 파괴할 위협을 주었다. 중산계급은 이미 우리가 언급한 바와 같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계층에 있어서까지도 빈곤계급의 요구에 대해 방어할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귀족과 교회와 독점가의 특권뿐만 아니라 그들 중산계급 자신의 특권까지도 파괴하려는 혁명운동에 대해서는 강렬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 대단히 부유한 계급과 대단히 빈곤한 계급의 중간에 처해 있는 관계로 중산계급의 위치는 반작용도 복잡하여 많은 점에서 모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은 법률과 질서를 유지하고자 했지만, 그들 자신은 발전되어 가는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심히 위협을 당했다. 중산계급 가운데서 가장 성공한 자라 할지라도 소수의 대자본가들에 비해 보면 그 부와 권력이란 형편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생존하여 번영을 누리기 위해서는 맹렬히 싸워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유산계급의 사치한 모습을 볼 때마다 그들의 왜소감은 한층 더 증대되어 갔고, 그들의 마음은 선망과 분노의 감정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대체로 중산계급은 봉건적 질서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유리하게 되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 루터의 인간상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율배반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그를 정신적인 권위에 얽매어 놓은 일체의 결연관계로부터는 자유롭게 되지만 그러나 바로 이러한 자유는 고독과 불안은 남겨 허무감과 무력감으로 인간을 압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이 자유롭고 고립화된 개인은 개인의 허무함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짓눌려버린다. 루터의 신학은 이와 같은 무력감과 함께 회의의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루터가 종교적인 말로 그려낸 인간상은 현대의 사회적 및 경제적 발전의 영향을 받은 개인의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중산계급의 구성원은, 마치 루터가 인간을 신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 묘사한 것과 같이 새로운 경제력 앞에서는 무력한 존재였다. 그러나 루터는 그의 설교를 듣던 사회계급 속에 널리 유포된 허무감의 의미를 분명히 밝혀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의 해결을 제시했다. 단지 자기 자신의 무의미함을 인정할 뿐만 아니라 자기를 철저하게 비하하여 개인적인 의지의 흔적을 모두 내버리는 한편, 개인적인 힘을 부인하고 비난함으로써만 비로소 개인은 신의 은총에 접하게 될 희망을 가질 수가 있다. 루터의 신에 대한 관계는 완전한 복종이었다.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의 신앙에 대한 생각은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즉, 만일 그대가 완전히 신에게 복종하여 자신의 무의미함을 인정하게 된다면, 전능하신 신께서는 기꺼이 그대를 사랑하여 구원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그대가 모든 결함과 의심을 가진 개인적인 자아를 철저한 자기말살로 제거해 버린다면, 그대는 비로소 그대 자신의 허무감으로부터 해방되어 영광스러운 신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루터는 교회의 권위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지만, 또 한편 사람들을 전제군주 적인 권위에, 즉 구원을 받는 본질적인 조건으로서 인간의 전적인 복종과 자아의 절멸을 요구한 신의 권위에 복종시켰다. 루터의 '신앙'은 자기를 깨끗이 버림으로써 비로소 사랑을 받게 된다는 확신을 의미했는데, 이는 국가라든가 또는 '지도자'에 대한 개인의 전적인 복종의 원리와 많은 점에서 공통성을 가지는 하나의 해결방법이다. 루터가 권위를 두려워하고 또한 그것을 사랑했다는 것은 그의 정치적 신념 속에서도 또한 나타나고 있다. 물론 그는 교회의 권위에 대항하여 싸웠고, 새로운 유산자 계급 - 그 일부는 성직자 계급의 상층계급에 속했다 - 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는 한편 어느 정도까지 농민의 혁명적인 경향을 지지했지만, 그는 황제라는 세속적인 권위에 대한 복종을 가장 열렬히 요구했다.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 비록 사악하고 신앙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그 권위와 권력은 선한 것이며 이는 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다. ...따라서 권력이 있어 그것이 번창하는 곳에는 신이 그것을 명령하기 때문에 권력은 존재하고 계속 유지되어 간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은 폭도들의 행동이 아무리 정당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폭동을 허용하기보다는 오히려 지배를 - 그것이 아무리 악독한 것이라 할지라도 - 존속시키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군주는 아무리 포악하다 할지라도 여전히 군주여야 한다. 군주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러 신민들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소수자를 죽여야 할 경우가 있다.' 루터가 권위에 집착하며 또한 그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은 무력한 대중인 폭도들에 대한 그의 증오와 경멸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특히 그들이 일정한 한계를 넘어 혁명적 기도를 하게 되었을 때 그러했다. 그의 욕설 가운데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비밀리에 또는 공공연히 반란보다 해롭고 극악무도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구타하고 살해하고 찌르게 하자. 이것은 마치 사람들이 미친 개를 때려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와 같다. 만일 당신네들이 그 미친개를 때려잡지 않으면 그 개가 당신들에게 달려들어 당신들은 물론이요 모든 사회를 짓밟을 것이다. ' 루터의 퍼스낼리티는 그의 교의와 마찬가지로 권위에 대해서는 서로 용납되지 않는 이중성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권위와 전제군주 적인 권위에 위압을 느끼고 있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의 권위에 반항했다. 대중에 대한 태도에서도 같은 모순을 볼 수 있다. 대중이 자신이 설정해 놓은 한계 내에서 반항하는 한은 그는 그들의 편을 들었다. 그러나 대중이 그가 시인하는 권위마저 공격할 때에는 그들에 대해 격렬한 증오와 비난을 나타냈다. 도피의 심리학적인 메카니즘을 취급하는 장에서 우리는 권위를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무력한 인간에 대한 증오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 바로 '권위주의적 성격'의 전형적인 특징이라는 사실을 제시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점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세속적인 권위에 대한 루터의 태도는 그의 종교적인 교의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개인 자신의 공적에 관한 한 개인으로 하여금 무가치하고 무의미하게 느끼도록 하는 동시에, 또한 인간이란 신의 수중에 있는 무력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끼게 함으로써 루터는 개인으로부터 자신과 인간의 존엄성의 감정을 빼앗았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존엄성의 감정이야말로 세속적 권위의 압박에 대하여 강력하게 반항하기 위한 전제가 되는 것이다. 역사의 진전과정에 있어서, 루터의 교의는 멀리까지 그 영향을 미쳤다. 일단 개인이 자기의 자부심과 존엄성의 감정을 상실하게 되면 그는 심리적으로 중세기적 사고방식의 특징이었던 감정, 즉 인간과 그의 정신적인 구원과 또 그 정신적인 목적을 바로 삶의 목적으로 생각하는 감정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생활이 자기를 떠나서, 이를테면 경제적 생산력이라든가 자본의 축적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는 역할을 받아들이게 된다. 경제문제에 관한 루터의 견해는 전형적으로 중세기적이었는데, 이는 칼빈의 견해보다도 훨씬 더 중세기적이었다. 그는 인간의 생활이 의당 경제적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증오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경제문제에 관한 생각이 전통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개인의 무가치함을 강조한 것과는 대조적이어서, 인간은 단지 세속적인 권위에 복종할 뿐만 아니라 경제적 성과라는 목적을 위해서도 그의 삶을 종속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발전에의 길을 열어놓았다. 오늘날 이러한 경향은 파시스트에 있어서 그 절정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인생의 목적은 '보다 더 높은'권력 소지자와 지도자 및 민족공동체를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칼빈의 신학은 앵글로색슨 제국에 대하여 마치 루터의 신학이 독일에 대하여 갖고 있던 것과 같은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본질적으로는 신학적 및 심리학적으로 루터와 같은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칼빈도 또한 교회의 권위와 그 교의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반대했지만 그에게 있어서도 종교란 역시 인간의 무력함에 근거하고 있었다. 즉, 자아의 부정과 인간적 자부심의 파괴라는 것이 그의 전사상체계의 '중심사상'이다. 오직 이 세상을 멸시하는 자만이 내세를 위한 준비에 헌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는 마땅히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데 바로 이러한 자기부정이야말로 신의 권능에 의존하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내면적인 약함과 우리 자신의 비참함을 의식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이야말로 무엇보다도 더 우리로 하여금 신을 신뢰하여 이를 확신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개인은 자기가 바로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의 이성은 물론이요 우리의 의지도 결코 우리의 사고와 행위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육신이 바라는 대로 우리에게 편리한 것을 추구하는 일을 우리의 목표로 삼지 말자. 우리는 결코 우리들 자신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은 물론이요, 우리들의 소유물인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반대로 우리는 신의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신을 위하여 살고 신을 위하여 죽도록 하자. 왜냐하면 - 만일 인간이 자기 자신에 따라서 행동하게 되면 이는 인간을 파괴시키는 가장 심한 해독이 될 것이므로 - 자기 자신에 관하여 어떤 것을 알려 하지 않고, 원치 않으며, 오직 우리 앞을 걸어가는 신에 의해서 인도되는 일이야말로 유일한 구원의 안식처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 자신을 위해서 덕행을 하려고 애써서는 안 된다. 그러면 허영심 이외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영혼 속에 악의 세계가 깃들어 있다는 것은 고래로부터의 진리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대들이 구원도리 수 있는 길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여 일체의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고, 신이 그대들에게 요구하는 일과, 또한 신에게 즐거움이 된다는 유일한 이유로 추구해야 할 일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는 것뿐이다.' 칼빈도 또한 선한 일만 하면 반드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을 부인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전적으로 선한 일을 할 자격이 결여되어 있다. '아무리 경건한 사람이 행한 일이라도, 준엄한 신의 심판 앞에서 비난받지 않는 일이란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 칼빈의 사상체계의 심리학적인 의미를 이해하려고 할 경우, 원칙적으로 루터의 교의에 대해서 언급한 바와 같은 사실이 들어맞는다. 칼빈도 또한 심한 고독감과 위협을 느끼고 있던 보수적인 중산계급의 사람들에게 거의 가르침을 베풀었다. 그런데 그들의 감정은 개인의 무의미함과 무력함 또는 개인적인 노력의 공허함을 가르치는 칼빈의 교의 속에 표현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루터와 칼빈의 교의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루터 시대의 독일은 전반적으로 중세계급뿐만 아니라 농민과 도시의 빈민들도 모두 자본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위협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 제네바는 비교적 번영된 공동체였다. 제네바는 15세기 초반까지는 중요한 유럽 시장중의 하나였다. 칼빈 시대에는 이런 점에서 리용에 이미 압도당하고 있었지만, 아직 다분히 경제적 안정성을 보존하고 있었다. 대체로 칼빈의 추종자들은 주로 보수적인 중산계급의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프랑스, 네덜란드 및 영국에 있어서도 주로 그를 따르는 자는 발전된 자본가 집단이 아니라 직공들과 소상인들이었다. 그들 직공과 소상인의 일부는 이미 다른 사람들보다 번영된 생활을 누리고 있었으나, 집단적으로 볼 때는 자본주의의 발생으로 말미암아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사회계급에 대해서 칼비니즘은 이미 우리가 루터주의에 관해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들의 심리에 호소했다. 칼비니즘은 자유의 감정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무의미함과 무력감도 표현했다. 그리고 완전한 복종과 철저한 자기 부정을 함으로써 개인은 비로소 새로운 안정을 바랄 수 있다는 가르침을 통하여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칼빈의 교의와 루터의 교의 사이에는 수많은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이 책의 사상의 주류에는 중요치 않다. 여기에서는 오직 두 가지 차이점만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그 하나는 칼빈의 예정설이다. 아우구스티누스나 아퀴나스, 또는 루터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예정설에 비해서 칼빈의 예정설은 그의 전 사상체계의 주석 중의 하나로 - 아마 그의 중심적인 교의로 - 되어 있다. 그는 , 산의 어떤 사람들에게는 은총을 예정하거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천벌을 결정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예정설에 새로운 면을 부여했다. 구원이냐 영원한 천벌을 받느냐 하는 것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선행을 했느냐 또는 악행을 했느냐 하는 결과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부터 신에 의해서 예정되어 지는 것이다. 신은 어찌하여 한 사람은 선택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천벌을 내리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이 탐구해서는 안 되는 하나의 비밀이다. 신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자기의 무한한 힘을 보이고 싶었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뿐이다. 칼빈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신은 신의 정의와 사랑에 대한 관념을 유지하려는 모든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랑도, 심지어는 정의도 가지고 있지 않은 전제군주의 특성을 갖고 있다. 신약성서와는 정반대로 칼빈은 사랑의 최고의 역할을 부정하여 '스콜라 학파의 인간들이 믿음과 소망보다도 사랑이 제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병적인 상상력의 단순한 망상에 불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예정설에는 심리학적으로 보면 이중적인 의미가 있다. 즉, 예정설은 개인의 무력함과 무의미한 감정을 표현하여 이를 강조하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이 예정설만큼 강렬하게 표현한 교의는 또 없다. 인간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은 완전히 그의 힘 밖에서 이루어졌으며, 따라서 이러한 결정을 변경시키기 위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다. 인간이란 신의 수중에 들어 있는 하나의 무력한 도구에 불과하다. 이 칼빈의 교의가 가지는 또 하나의 의미는 루터의 교의와 같이 비합리적인 회의를 침묵시키는 작용에 있는데, 이는 칼빈과 그의 추종자에게 있어서 루터의 경우와 동일했다. 얼핏 보기에 예정설의 교의는 회의를 침묵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강화시키는 것 같이 생각된다. 개인은 전 보다더, 그가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천벌을 받도록 정해져 있는가 구원을 받도록 정해져 있는가를 알고자 하는 의혹에 사로잡히는 것이 아닐까. 자기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칼빈은 그러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아무런 구체적인 증거도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와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선택된 인간이라는 확신을 실제로 품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확신을 이미 우리가 루터의 교의에서 분석했을 때와 같은 자기부정의 메카니즘에 의해서 획득했다.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예정설의 교의는 가장 안정성을 가지는 것이었다. 일단 구원을 받게 된다면, 그 구원의 상태를 위태롭게 하는 일을 감행하는 자는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구원은 그 자신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라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루터의 경우에서와 같이 근본적인 회의는 절대적인 확실성을 추구하게 했다. 예정설의 교리는 바로 그러한 확실성을 부여했지만, 회의는 여전히 그 뒤에 숨어 있었다. 따라서 자기가 소속하고 있는 종교단체야말로 인류 중에서 신에게 택함을 받는 사람들의 단체라고 생각하는 보다 더 열렬한, 광적인 신념을 가지고 그러한 회의를 수없이 침묵시켜야 했다. 칼빈의 예정설에는 여기에서 분명히 말해 두어야 할 하나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예정설은 나치스의 이데올로기 속에 가장 생생한 형태로 나타나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즉,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불평등이 있다는 원리이다. 칼빈의 생각에 의하면, 인간은 두 가지 종류가 있다. - 즉, 구원되어지는 인간과 영원한 천벌을 받도록 정해진 인간이 그것이다. 이러한 운명은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이미 결정되어 있어, 이 세상에 있어서의 어떠한 행위로도 이를 변경시킬 수가 없고, 또한 인간들 사이에 어떠한 연대성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원리에는 인간의 연대성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기반으로 되어 있는 하나의 요소, 즉 ' 인간이 가진 운명의 평등'이라는 요소가 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파의 사람들은 참으로 천진난만하게도 자기들이야말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며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에 의해서 천벌을 받도록 정해진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신앙이 심리적으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심한 멸시와 증오로 나타났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실상 그들은 신에 대해서마저 그와 같은 증오감을 나타냈다. 근대사상이 인간의 평등을 더욱 긍정하게 되었지만, 칼빈파의 원리도 결코 완전한 침묵을 지키고 있지는 않았다. 인간은 그 인종적 배경에 따라서 근본적으로 불평등하다는 원리도 역시 합리화된 동일한 원리의 확인이다. 따라서 그 심리학적 의미는 같은 것이다. 칼빈의 교의가 루터의 교의와 다른 또 하나의 대단히 중요한 점은 도덕적인 노력과 고결한 생활의 중요성을 한층 더 강조하고 있는 점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어떠한 행위로도 '그 운명을 변경'시킬 수 없으나, 능히 노력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구원을 받은 사람에 속하는 하나의 증거이다. 인간으로서 반드시 획득해야 할 미덕은 겸손과 중용, 모든 사람이 자기의 정당한 몫을 가지는 의미에서의 정의, 그리고 인간을 신과 연결시키는 경건함이다. 칼비니즘이 더 발전하면 고결한 생활과 끊임없는 노력의 의의를 강조하는 일도 중요성을 갖게 되며, 특히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서 나타나게 되는 세속적인 생활에 있어서의 성공도 구원의 표시라고 하는 생각이 중요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칼비니즘의 특징이었던 고결한 삶에 대한 특별한 강조는 또한 특수한 심리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칼비니즘은 끊임없는 신의 말씀에 따라서 살아가야 하며, 결코 그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교의는 얼핏 생각하면 인간의 노력은 그의 구원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는 교의와 모순되는 것같이 보인다. 따라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숙명론자의 태도가 훨씬 더 적절한 응답인 것 같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심리학적으로 생각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불안한 상태를 비롯하여 무력함과 무의미한 생각, 특히 사후의 세계에 대한 회의는 실제로 어느 누구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정신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이와 같은 두려움에 휩싸인 인간은 누구라도 나태하게 삶을 향락한다든가 또는 장차 일어날 일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참을 수 없는 불안한 상태와 자기 자신의 무의미함에 대한 위축된 감정으로부터 도피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은 칼비니즘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된 바로 그 특징으로서, 그것은 열광적인 활동과 '무엇'을 하고 자 하는 충동의 발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활동은 강제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즉, '개인은 회의와 무력의 감정을 극복하기 위하여 활동을 해야 한다' . 이와 같은 노력과 활동은 내면적인 힘과 자기확신의 결과가 아니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절망적인 도피이다. 이와 같은 메카니즘은 개인이 심한 공포에 사로잡혔을 경우에 쉽게 볼 수 있다. 몇 시간 내에 자기의 병 - 치명적일지도 모르는 중병 - 에 대해서 의사의 진찰을 받으려고 하는 인간은 반드시 심히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되는 법이다. 대체로 그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러한 불안이 그의 마음을 위축시키지 않는 경우에는, 그 정도가 심하건 심하지 않건 간에 미친 사람과 같은 행동을 취하게 되는 일이 가끔 일어난다. 그는 층계를 오르락내리락하거나 닥치는 대로아무나 붙잡고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여 이야기를 하거나 아니면 책상 위를 정돈하거나 편지를 쓸지도 모른다. 또는 평상시와 같은 일을 계속하는 수도 있겠지만, 보다 더 활발하고 열광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된다. 그의 노력이 어떠한 모양으로 나타나건 간에 그것은 불안한 마음 때문에 불러일으켜진 것이며, 미친 사람 같은 행동으로 무력감을 정복하고자 한다. 칼비니즘에 있어서의 노력에는 또 다른 심리적인 의미가 있었다. 저 끊임없는 되풀이되는 노력에도 지치지 않는 다는 사실, 또한 세속적인 일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행위에 있어서도 성공한다는 사실 등은 아무튼 택함을 받은 인간의 하나라고 하는 명백한 증거였다. 이와 같은 강제적인 노력이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그 활동으로 목적하는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신의 활동과 지배를 떠나 이미 결정된 '어떤 사실이 과연 나타날 것이냐 아니냐를 지시해 주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에 있다.' 이러한 메카니즘은 잘 알려져 있는 강박적 신경증이 가진 하나의 특징이다. 그러한 신경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중대한 일의 결과가 과연 어떻게 될까 두려워 할 때에는 그 해답을 기다리는 동안 창문이나 가로수의 수를 헤아린다. 만일 그 수가 짝수이면 사태가 순조로울 것으로 생각하나, 홀수일 때는 실패의 '징조'라고 생각한다. 이와 같은 회의는 어떤 특수한 경우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 생애에 걸쳐서 나타난다. 돌을 센다든가 혼자서 트럼프를 친다든가 도박을 하는 일이 불안과 회의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저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서 트럼프를 칠지도 모르는데, 여기서는 오직 미래를 드러내주는 하나의 분석만이 그의 행동의 은폐된 작용을 밝혀줄 수 있다. 칼비니즘에 있어서는 이러한 노력의 의미는 종교적 교의의 일부분이었다. 본래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도덕적인 노력에 관계되었지만, 그 후로는 직업상의 노력과 또한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사업상의 성패에 보다 더 중점이 두어지게 되었다. 성공은 신의 은총을 받은 징조이며 실패는 천벌을 받은 징조로 나타났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끊임없는 노력과 일을 하려는 충동은 인간의 무력함에 관한 근본적인 확신과 모순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은 심리적인 당연한 결과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노력과 작업은 완전히 비합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러한 노력과 작업을 통해서는 인간의 운명을 변경시킬 수 없다. 왜냐하면, 개인이 어떠한 노력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과는 관계없이 운명은 신에 의해서 이미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력과 작업은 단지 이미 예정된 운명을 예견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하다. 그와 동시에 광적인 노력은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무력감에다 안심을 주는 것이었다. 노력과 작업을 하나의 목적 그 자체로 보는 이와 같은 새로운 태도는 중세 말기 이래로 인간에게 발생한 가장 중요한 심리적인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사회에 있어서나 인간은 살아가고자 하는 한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많은 사회가 노예들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는데, 따라서 자유인은 '보다 더 숭고한' 직업에 헌신할 수가 있었다. 그러한 사회에 있어서는 노동을 한다는 것은 자유인답지 않은 일이었다. 중세사회에서도 역시 노동이라는 무거운 짐은 사회계층의 여러 계급 사이에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하게도 착취를 당했다. 그러나 작업에 대한 태도는, 그 후 근대에 발달한 것과는 달랐다. 작업은 이익을 목적으로 시장에서 파는 상품을 생산한다는 추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구체적인 필요에 따라서, 그리고 자기의 생계를 세우기 위한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일했다. 막스 베버가 특별히 보여준 바와 같이, 전통적인 생활수준을 유지해 가는 데 필요한 이상으로 일을 하려는 충동은 없었다. 중세사회의 어떤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작업을 생산하는 능력을 실현하는 것으로 보고 즐겁게 여겼다. 또한 다른 많은 사람들은 일을 '해야 되었기' 때문에 일을 했으며, 이러한 필연성은 외적인 압력에 의해서 결정된 것이었다. 근대사회의 새로운 점은 사람들이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보다는 내적인 충동에 의해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이는 다른 사회에서는 대단히 엄격한 주인만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적인 충동은 모든 에너지를 동원하여 그날그날의 업무에 종사하게 하는 데는 외적인 강제보다도 더욱 효력이 있다. 외적인 강제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반항이 따르게 되는데, 이러한 반항은 작업의 효과를 방해하며, 또 사람을 지성과 창의와 책임을 필요로 하는 어떤 분화된 작업에 부적당하게 만든다. 그런데 인간이 스스로 노예감독이 되어 일을 할 경우에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만일 인간의 에너지의 대부분이 일에 대한 방향에 집중되지 않았더라면 확실히 자본주의는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상 일찍이 자유인이 하나의 목적, 즉 작업을 위하여 그토록 철저하게 그들의 정력을 발휘한 시대는 없었다. 열심히 일을 하려는 충동은 근본적인 생산력의 하나인데, 이는 산업조직의 발달에 있어서는 증기와 전기에 못지 않은 중요성을 가진다. 우리는 지금까지 주로 중산계급의 구성원 사이에 널리 침투되어 있는 불안과 무력감에 대해서 논의했다. 이제 우리는 극히 간략하게 설명했을 뿐 상세하게 언급치 못한 또 하나의 특성을 검토해 보아야 하는데, 그것은 '적개심과 원한'이다. 중산계급이 심한 적개심을 가졌다는 사실을 그리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정서적인 표현과 감각적인 표현이 방해를 당한다던가, 또는 자기의 존재 그 자체가 위협을 당하게 되면 보통 누구라도 적개심을 가지고 반항할 것이다. 우리가 이미 고찰한 것과 같이, 대체로 중산계급은, 특히 상승일로를 달리는 자본주의의 해택을 조금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좌절하여 심한 위협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적개심을 증진시키는 또 다른 요소가 있었으니, 그것은 교회의 고위 성직자들을 위시하여 소수의 자본가들이 과시하는 사치와 권력이다. 그런 것에 대한 강렬한 질투는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적개심과 질투가 쌓여 갔지만, 중산계급 사람들은 하층계급사람처럼 그러한 감정을 직접 표현할 수는 없었다. 하층계급 사람들은 자기들을 착취하는 부자들을 증오하여 그들의 권력을 전복시키고자 했다. 이와 같이 그들은 중오심을 표현할 수 있었다. 상층계급도 또한 권력을 장악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직접 침략성을 나타낼 수가 있었다. 중산계급 사람들은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즉, 그들은 사회를 안정시키고자 했으며, 결코 그것을 전복시키려고는 하지 않았으며, 누구나 보다 더 번영하여 전체의 발전에 참여하고 싶어했다. 따라서 그들은 적개심을 공공연하게 나타낼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런 감정은 억압된 채로 있어야만 했다. 그러나 적개심을 억제한다는 것은 그런 감정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못하게 했을 뿐 그 자체를 제거하지는 못했다. 더구나 직접적으로 표현되지 않고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는 적개심은 전체적인 사람됨, 또한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에까지 침투해 갈 정도로 - 합리화되어 변장한 형태로 - 증대했다. 루터와 칼빈은 이와 같이 일반에게 널리 퍼져 있는 적개심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단지 이 두사람이 인간적으로 보아 역사상 지도적인 인물, 특히 종교적인 지도자들 중에서 가장 증오에 사로잡힌 인물이었다는 의미에서뿐만 아니라,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의 교의는 적개심으로 그럴듯하게 꾸며져 억압을 당하여 심한 적개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만 호소할 수 있었다는 의미에서이다. 이러한 적개심의 가장 뚜렷한 표현은 그들이 생각하는 신의 개념 속에, 특히 칼빈의 교의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신의 개념은 잘 알고 있지만, 신이라는 것을 칼빈처럼 전제적이며 무자비한 존재로 생각하는 일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칼빈이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신은 어떤 사람을 미리 영원한 천벌을 받도록 정해놓았지만, 단지 그렇게 하는 것이 신의 힘의 표현이라는 것 이외에는 그일에 아무런 타당성도 이유도 없었다. 물론 칼빈 자신도 이러한 신의 개념에 대해서 당연히 예상되는 반대이론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정의롭고 사랑을 베푸는 신의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 그가 만든 미묘한 이론은 전혀 납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들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발휘하여 그들의 복종과 굴욕을 요구하는 그러한 전제적인 신의 개념은 중산계급 자신의 적개심과 선망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적개심과 분노는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계에서도 표현되었다. 그 주요한 형태는 도덕적인 분노인데, 이는 루터시대로부터 히틀러시대에 이르기까지 하층 중산계급이 가지는 변함 없는 특징이었다. 이 계급은 부와 권력을 가지고 삶을 즐길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실상 선망의 정을 느꼈지만, 이러한 분노와 선망을 도덕적인 의분의 말, 또는 이들 상층계급 사람들은 영원한 고뇌로 말미암아 마침내 벌을 받게 되리라는 신념으로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적대적인 긴장은 또 다른 방법으로 표현되었다. 제네바에 있어서의 칼빈의 제도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질투와 적개심으로 특징지어지고 있는데, 사랑과 동포애의 정신은 그의 전제적 제도 안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칼빈은 부를 믿지 않았지만, 그와 동시에 빈곤에 대해서도 거의 아무런 동정심도 갖지 않았다. 칼비니즘의 그 후의 발전과정에 있어서는, 이방인에게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경고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무자비한 태도와 일반적인 질투의 분위기가 때때로 나타났다. 신에 대한 적개심과 질투의 표현 및 도덕적인 의분이라는 형식을 취하는 간접적인 표현이외에 적개심이 표현되는 또 하나의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이미 루터와 칼빈이 얼마나 열렬히 인간의 사악성을 강조했으며, 모든 미덕의 근거로서 자기비하와 겸손을 가르쳤는지를 고찰했다. 그들이 마음속에 의식하고 있던 것은 극도의 겸손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자기비난과 자기비하의 심리적인 메카니즘을 잘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종류의 '겸손'이란 결국 심한 증오에 뿌리박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다. 이는 그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외계로 향해지지 않고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작용한다. 이러한 현상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가 서로 모순되기는커녕 원칙적으로 서로 평행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적개심은 보통 의식적으로 분명히 나타날 수 있는 반면에, 일반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한 적개심은(병적인 경우는 예외로 하고) 무의식적이어서, 간접적이며 합리적인 형태로 표현되고 있다. 그 하나는 바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자기의 사악성과 무의미성을 적극적으로 강조하는 일이다. 또 하나는 양심이라든가 의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난다. 마치 자기 혐오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겸손이 존재하는 것과 같이 적개심에 기인되지 않은 순수한 양심의 요구라든가 의무감도 존재한다. 이와 같은 순수한 양심은 완전한 퍼스낼리티의 일부를 형성하는 것이며, 그 요구에 따르는 일은 자아 전체를 긍정하는 일이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래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종교적인 합리화와 세속적인 합리화에 기인하여 근대인의 생활에 널리 퍼져 있는 '의무'의 의식은 다분히 자기 자신에 대한 적개심으로 채색되어 있다. '양심'이란 자기 스스로 마음속에 끌어들인 하나의 노예감독이다. 양심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믿는' 소원과 목적을 따라서 행위 하게끔 하고 있지만, 그 소원과 목적이란 따지고 보면 외부의 사회적인 요구가 내재화된 것이다. 양심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정하고도 잔인하게 쾌락과 행복을 금하여, 그 전 생애를 통해 어떤 신비적인 죄과에 대한 속죄를 하게 한다. 이것은 특히 초기 칼비니즘과 후기의 퓨리터니즘에 특유한 '세속적 금욕주의'의 근저이기도 하다. 이러한 근대적인 겸손과 의무감에 근거하고 있는 적개심은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을 설명해준다. 즉, 그와 같은 겸손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병행하며, 또한 자존심이 실제로 사랑과 자비와 대치된다는 것을 말한다. 순수한 겸손과 그 동료들에 대한 순수한 의무감을 가진다면 이렇게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비하와 자기부정적인 '양심'은 오직 적개심의 일면에 불과하며, 그 다른 측면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멸시와 증오이다. 종교개혁시대의 자유의 의미에 대한 간략한 분석을 기초로 하여 볼 때, 자유라는 특수한 문제와 사회과정에 있어서의 경제적, 심리적 및 이념적 요소의 상호작용이라는 일반적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도달한 결론을 요약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봉건사회라는 중세적 체제의 붕괴는 사회의 모든 계급에 대해서 하나의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즉, 개인은 홀로 떨어져서 고립되었다. 개인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이러한 자유는 이중적인 결과를 가지고 있었다. 인간은 종전에 누렸던 안정성과 더불어 의심의 여지가 없었던 소속감을 상실했으며, 경제적 및 정신적으로 개인적인 안정을 바라는 요구를 만족시켜 주던 세계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는 고독과 불안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그는 또한 독립적으로 행동하며 생각하는 자유를 가지고 스스로의 주인이 되었으며 따라서 다른 사람의 명령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뜻대로 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사회계급의 구성원이 가지고 있던 현실적인 삶의 상황에 따라서 이러한 두 종류의 자유도 불평등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성공한 사회계급만이 상승일로를 달리는 자본주의로부터 이익을 얻어 실제로 부와 권력을 누렸다. 그들은 스스로의 활동과 합리적인 계산의 결과로서 확대되고 정복하며, 지배하고 또 재산을 모을 수가 있었다. 이 새로운 유산귀족은 저 문벌귀족과 더불어 새로운 자유의 열매를 향유하며 새로운 정복과 개인적 창의성을 획득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다. 또 한편 그들은 대중을 지배해야 하고 서로 싸우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그들의 지위도 역시 근본적으로 불안과 근심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체로 자유의 적극적인 의미는 새로운 자본가들 사이에서 지배적이었다. 그것은 새로운 귀족의 지반 위에서 성장한 문화, 즉 르네상스의 문화 속에 표현되고 있다. 르네상스의 예술과 철학 속에는 물론 때로는 절망과 회의가 여전히 나타나고 있으나, 인간의 존엄성과 의지와 지배에 대한 새로운 정신이 표현되었다. 개인의 활동과 의지의 힘을 이와 같이 강조하는 일은 중세말기의 가톨릭 교의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시대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권위에 반항하지 않고 그 권위의 지도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유의 적극적인 의미와, 인간이 자기 운명의 결정에 참여하는 일과 인간의 힘과 존엄성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의지의 자유를 강조했다. 또 한편, 도시의 빈민인 하층계급, 특히 농민들은 자유를 위한 새로운 요구에 자극되어, 점점 증진되어 가는 경제적 및 인간적인 압박에 종지부를 찍고자 하는 열렬한 희망을 갖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잃어버릴 것은 거의 없었고, 얻어야 할 것은 많았다. 그들은 교의상의 세밀한 구별에는 별로 흥미를 갖지 않고 오히려 성서의 근본적인 원칙, 즉 우애와 정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여러 가지 희망은 수많은 정치적인 반항과 종교운동 속에 적극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었는데,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발생 당시에 전형적이었던 타협하지 않는 정신으로서 특징지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요한 관심은 중산계급의 반응에 있다. 자본주의의 대두는 물론 독립과 창의를 증대시켰지만, 이는 중산계급에게는 일대 위협이 되었다. 16세기 초만 하더라도 중산계급에 속하는 개인은 아직도 새로운 자유로부터 많은 권력과 안정을 얻을 수는 없었다. 자유는 힘과 자신보다는 오히려 고독과 개인의 무의미성을 초래하였다. 그밖에 그는 로마 교회의 성직자를 포함한 유산계급이 누리고 있는 사치와 권력에 대하여 더욱 맹렬한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바로 이러한 무의미성과 분노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었다. 즉, 그것은 신의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인간의 신뢰감을 파괴하여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멸시하고 불신하도록 가르침으로써 인간을 하나의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만들었다. 또한 그것은 세속적인 권력 앞에 굴복하고, 세속적인 권력이 만일 도덕적인 여러 원리와 모순되는 경우에는 단순히 그것이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는 도저히 정당화되지 않는 원리를 내버렸다. 그리고 그와 같이 함으로써 프로테스탄티즘은 유대,기독교적 전통의 근거가 되어 온 모든 요소를 내버리고 말았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의는 개인과 신과 세계의 모습을 제시하였다. 그런데 그 교의 속에서는 개인이 느끼는 무의미함과 무력함이란 바로 인간 그 자체의 성질로부터 유래된 것이며, 따라서 인간은 그가 느끼는 대로 느껴야 한다는 신앙으로서 이러한 감정이 정당화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교적인 원리는 단지 중산계급의 구성원이 느끼고 있던 것을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태도를 합리화시켜 체계화함으로써 그것을 확대시키고 강화했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는 그 이상의 일을 했으니, 즉 개인에게 불안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자신의 무력함과 인간본성의 사악성을 철저하게 시인함과 더불어 그의 전 생애를 지은 죄를 속죄하는 과정으로 보고 극도의 자기비하와 끊임없는 노력을 함으로써 비로소 그 회의와 불안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쳤다. 또한 완전한 복종을 통해서 비로소 신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며, 신이 구원하려고 작정한 사람들 중에 속하게 되리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위협 당하고 추방되어 고립된 인간이 새로운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의 방향을 정함으로써 그것과 관계를 맺으려던 인간적 요구에 대한 응답이었다. 경제적 및 사회적 변화로부터 유래하여 종교적 원리에 의해서 강화된 새로운 성격구조가 이번에는 도리어 사회적 및 경제적인 발전을 추진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이러한 성격구조 속에 뿌리를 박고 있던 바로 이러한 성질 - 일을 하고자 하는 충동, 절약하려는 열의, 삶을 쉽사리 인간 이외의 권력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세, 금욕주의, 강제적인 의무감 - 이야말로 자본주의사회의 생산적인 힘이 된 성격이다. 그것 없이는 근대의 경제적 및 사회적 발달은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인간의 에너지가 특수한 형태로 형성된 것인데, 바로 그러한 형태를 취함으로써 인간의 에너지는 사회과정 가운데서 하나의 생산적인 힘이 된다 .새로 형성된 성격의 특성에 따라서 행동하는 일은 경제적인 필요라는 견지에서도 유익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행위는 이 새로운 퍼스낼리티의 모든 요구와 불안에 응답해 주기 때문에 심리적으로도 또한 만족을 주었다. 이러한 원칙을 보다 더 일반적인 말로써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사회과정은 개인의 생활양식을 결정함으로써, 즉 다른 사람들과 작업에 대한 관계를 결정함으로써 개인의 성격구조를 형성한다. 새로운 이념은 - 그것이 종교적인 것이건, 철학적인 것이건, 또는 정치적인 것이건 - 이러한 변화된 성격구조로부터 유래하여 또한 그것에 호소하며, 따라서 그것을 강화하고 충족시켜 고정화시켜 간다. 새로 형성된 성격의 특성은 이번에는 오히려 경제적 발전을 촉진시키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사회과정에 영향을 미친다. 새로운 성격의 특성은 본래 새로운 경제력의 위협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발달된 것이지만, 그것은 서서히 새로운 경제적 발전을 촉진 강화하는 생산적인 힘이 되어간다. 제 4장 근대인에 있어서의 자유의 양면성 앞장에서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주요한 교의가 내포하는 심리학적인 의미를 주로 분석해 보았다. 그 분석에 의하면, 새로운 종교적인 원리는 중세기적 사회조직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대두로 말미암아 야기된 심리적인 여러 요구에 따르는 것이었다. 분석은 이중적인 의미를 갖고 있는 자유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즉, 중세사회의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는 개인에게 새로운 독립의 감정을 부여했지만, 동시에 고립되어 있다는 감정을 주어 개인으로 하여금 회의와 불안에 사로잡히게 했고, 마침내는 새로운 형태의 복종 및 강제적이며 비합리적인 활동을 감행케 했다는 사실이 그 분석을 통해서 명백히 드러났다. 이 장에서는 자본주의사회의 진보된 발달은 종교개혁시대에 시작되었던 변화와 동일한 방향에서 퍼스낼리티에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밝히고자 한다. 프로테스탄티즘의 교의에 의해 사람들은 근대적 산업 체제하에서 담당해야 할 역할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를 하였다. 이러한 체제와 그 관례 및 그로부터 생기는 정신은 생활의 모든 분야에 파급되어 인간의 퍼스낼리티 전체를 형성하며, 우리가 이미 앞장서 검토한 바와 같은 모순을 강화하였다. 즉, 근대적 산업체제는 개인을 발전시켰지만 - 결국 개인을 보다 더 무력하게 했다. 또한 그러한 조직은 자유를 증대시켰지만 - 한편 새로운 형태의 의존심을 낳았다. 우리 인간의 성격구조 전반에 미친 자본주의의 영향을 설명하려고는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직 일반적인 문제의 한 측면, 즉 자유의 발달과정의 변증법적인 성격에만 논점을 집중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표는 근대사회의 구조가 동시에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즉, 인간은 보다 더 독립적, 자율적, 비판적이 되었다는 사실과, 또한 보다 더 고되어 외롭고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자유의 문제를 모두 이해할 수있느냐 없느냐는 이러한 과정의 양면을 봄으로써, 그 한편을 추구하고 있을 때 또 다른 한편의 진로를 잃어버리지 않는 능력 여하에 달려있다. 우리는 비변증법적인 사고 방식에 익숙하여, 두 개의 서로 모순된 경향이 동시에 하나의 원인으로부터 생겨나는 데 대하여 의심을 품기 쉽기 때문에 이러한 일은 어렵다. 더구나 자유의 정당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자유의 부정적인 면, 즉 인간에 대한 자유의 중압이 대체 무엇인지 이해하기 곤란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쉽지 않은 것이다. 하기야 근대사에 있어서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는 '낡은'형태의 권위와 속박에 대항하여 싸우는 데 주의가 집중되었던 관계로, 만일 이러한 전통적인 속박들이 제거되면 제거될수록 인간은 더 많은 자유를 얻게 된다고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 낡은 적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다른 성질을 가진 새로운 적이 대두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적이란 본질적으로는 외부적인 속박이 아니라 퍼스낼리티의 자유를 충분히 실현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소이다. 이를테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의 승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신앙의 자유는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서 신앙을 갖는 것을 불허했던 교회와 국가의 권력에 대한 승리이기는 하지만, 한편 근대인은 자연과학의 여러 방법으로는 증명되지 않은 사실을 믿는 내면적인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데 대해서는 충분히 인식치 못하고 있다. 혹은 또 다른 예를 든다면,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자유를 위한 승리의 마지막 단계라고 느끼고 있다. 물론 언론의 자유는 '낡은'속박에 대한 싸움의 마당에서 얻어진 중요한 승리이기는 하지만, 근대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대부분이 모든 사람이 역시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또한 근대인은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 즉,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을 갖추지 못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독창적인 사고능력이야말로 어느 누구도 그의 사상을 표현하는데 간섭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에 의미를 부여해준다. 또한 우리는 인간이 자기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그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 또는 무엇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는 것과 같은 외적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우리는 여론과 '상식'같은 익명의 권위가 가지는 역할을 경시하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순응하기 위해 깊은 배려는 하는가 하면 그러한 기대에 어긋나는 것을 심히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 여론과 상식의 힘은 극히 강력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외부에 있는'권력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롭게 되는데 열중하여 '내부에 있는'속박과 강제와 공포의 사실 - 이러한 것들은 자유가 그 전통적인 적에 대해서 쟁취한 승리의 의미를 훼손시킨다- 에 대해서는 맹목적이 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의 문제는 근대사의 과정에서 지금까지 획득해 온 자유를 보다 더 많이 획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자유를 부정하는 힘에 대해서 자유를 수호하는 것만이 그 전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지금까지 획득해 온 자유는 전력을 다하여 수호해 가야 하지만, 자유의 문제는 단지 양적인 것이 아니라 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고 있다. 즉, 단지 전통적인 자유를 보존하여 이를 증대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자아를 실현시켜 이러한 자아와 삶을 믿게 할 수 있는 새로운 자유를 획득해야 할 것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산업체제가 이와 같은 내면적인 자유에 미친 영향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려면, 우선 자본주의가 인간의 퍼스낼리티의 발달에 기여한 거대한 진보상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사실상 이러한 면을 무시한 근대사회에 관한 비판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모두 비합리적인 낭만주의에 기인하는 것이며, 이는 근대에 있어서의 인간의 가장 중요한 업적을 진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를 파괴하기 위하여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사게 된다. 자본주의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키는 가운데 시도했던 것을 정신적, 사회적 및 정치적으로 계속해 갔다. 경제적 자유가 그러한 발전의 기반이 되었으며 중산계급은 그 투사였다. 개인은 이미 하나의 고정된 사회조직에 의해서는, 그 전통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전통적 한계를 넘어 개인이 발전할 여지가 비교적 적은 고정된 사회조직에 의해서는 조금도 구속을 받지 않게 되었다. 개인은 근면과 지식과 용기와 절약 및 행운이 허용하는 한에 있어서 경제적 부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고, 또한 그렇게 될 것이 기대되었다. 따라서 성공의 기회라든가 실패할 위험은 모두 자기 자신 의 것이 되었으며, 또한 각자가 다른 사람과 싸우는 치열한 경제적 투쟁에서 죽거나 상처를 입는 일도 자기 자신의 책임이 되었다. 봉건제도하에서는 각 개인이 그 생활을 확장시킬 수 있는 범위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제도 하에서는 개인, 특히 중산계급의 구성원은 - 수많은 제한에도 불구하고 - 자기 스스로의 업적과 활동을 통해서 성공할 기회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눈앞에 하나의 목표를 발견하여 그것을 향하여 진력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러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때때로 가졌다. 그는 자기 자신에 의존하여 책임있는 결정을 내리며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미신과 무시무시한 미신을 포기할 줄 알게 되었다. 사람은 점차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 즉, 사람은 전에는 듣지도 꿈꾸지도 못했던 정도로 자연의 힘을 지배했다. 사람은 평등하게 되었다. 즉, 일찍이 인류의 통일을 방해하는 자연적인 성벽이었던 계급과 종교의 차이는 소멸되고 인간은 서로를 인간존재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 세계로부터 점차 신비적인 요소가 감소되어 갔으며, 사람은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그리고 환상을 거의 갖지 않고 바라보게 되었다. 정치적 자유도 발전되어 갔다. 상승일로를 달리는 중산계급은 그 경제적 힘으로 정치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고 그렇게 하여 얻은 정치권력으로 경제적 진보를 위한 많은 가능성을 창조했다. 영국과 프랑스의 대혁명 및 미국의 독립전쟁은 바로 이러한 발달을 가리키는 이정표이다. 정치적 영역에 있어서의 자유의 진보는, 인간의 평등과 자기네들이 선출한 대표자들을 통해서 정치에 참여하는 평등의 권리가 그 기본적인 원리로 되어 있는 근대적 민주국가에서 그 절정에 달했다. 사람마다 자기 자신의 이익에 따라서, 그와 동시에 국민의 공공복리를 위하여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되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자본주의는 단지 인간을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적극적인 자유를 증대시켜 능동적이며 비판적이고 책임질 수 있는 자아를 성장시키는 데 막대한 공헌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본주의가 점점 발전해 가는 자유의 과정에 미친 하나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것은 개인을 더 한층 고립시킴으로써 무의미함과 무력함을 안겨주었다. 여기서 우선 다루어져야 할 요소는 자본주의 경제의 일반적인 특징 중의 하나인 개인적인 활동의 원리이다. 모든 인간이 정연하고 뚜렷한 사회조직 속에서 어떤 고정된 위치를 지니고 있던 중세의 봉건제도와는 반대로,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는, 개인은 완전히 자기 자신의 힘으로 서게 되었다. 그가 무엇을 하느냐 또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하는 일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것이 되었다. 이 원리가 개성화의 과정을 촉진시킨 것은 명백한 일이며, 근대 문화의 명예로운 측면을 이루는 데 중요한 항목의 하나로 항상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으로부터의 자유'가 점점 진전하여 갈 때, 이 원리는 개인간의 모든 유대를 끊음으로써 개인은 동료로부터 고립되어 분리된 자가 되었다. 그 발전은 종교개혁의 가르침에 의해서 준비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에선 개인의 신에 대한 관계는 교회의 일원이라는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교회는 개인과 신을 결부시키는 매개체이고, 한편으론 인간의 개성을 제한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개인을 집단의 구성부분으로서 신 앞에 맞서게 했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티즘은 개인을 오직 혼자 신과 맞서게 한 것이다. 루터에 있어서의 신앙은 전적으로 주관적인 경험이며, 또 칼빈에 있어서의 구제의 확신도 이와 마찬가지로 주관적인 성격의 것이었다. 개인은 신 앞에 혼자 서게 되면 압도감을 느껴 완전한 복종을 함으로써 구제를 바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정신적 개인주의는 심리학적으로는 경제적 개인주의와 그다지 다른 점이 없다. 어느 경우에나 개인은 완전히 고독하며, 고립된 상태에서 신이라든가 경쟁자라든가 또는 비인간적인 경제력이라고 하는 우월한 힘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신에 대한 개인주의적 관계는 인간의 세속적 활동에 있어 개인주의적인 성격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였었다.' 이 경제체제의 개인주의적 성격은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지만, 이 경제적 개인주의의 영향이 인간의 고독을 증대시켰다는 일은 의심스럽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검토하려는 점은, 자본주의에 대해 가장 널리 통용되고 있는 생각과는 모순되고 있다. 이러한 통념이 전제하는 것은 근대 사회에 있어서는 인간이 모든 활동의 중심 및 목적이 되었다는 일, 인간이 하는 일은 다 자기 자신이 하는 것이며, 이기심이나 자기 중심주의라는 원리가 인간 활동의 가장 강력한 동기라는 사실들이다 이 장 첫머리에서 설명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우리도 지금 말한 사실을 어느 정도 올바른 것으로 생각한다 .확실히 인간은 지난 4백년 동안에 자기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 많은 일을 해왔다. 더구나 그에게 있어 자기 자신의 목적이라고 생각된 많은 일이 실은 자기의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만일 '자기'라는 것이 '노동자'라든가 '공장주'가 아니라, 감정적이고 지성적이며 감각적인 모든 능력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을 뜻하는 것이라면 자본주의는 개인의 긍정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기 부정과 금욕주의도 초래했다. 이 자기부정과 금욕주의는 직접 프로테스탄트의 정신에 연결되어 있다. 이 문제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앞 장에서 설명되었던 일을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세적 조직에서의 자본은 인간의 하인 격이었지만, 근대적 조직에선 자본이 인간의 주인이 되었다. 중세사회에서는, 경제활동은 목적에 대한 수단이었다. 그 목적인 인생 그 자체였다. 또는 - 가톨릭 교회가 설명한 바와 같이 - 인간의 정신적인 구제였다. 경제적 활동은 필요한 것이며, 부조차도 신의 목적에 봉사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외적 활동은 그것이 인생의 목적을 촉진시켜주는 한도 안에서만 의미와 존엄성을 지니게 된다. 그 자신을 위한 경제활동과 그 자신을 위한 획득욕은 마치 그 반대현상이 근대사상에 비합리적인 것처럼 중세의 사상가에게는 비합리적인 것으로 생각되었다. 자본주의에 있어서는 경제적 활동과 성공과 물질적 획득 그 자체가 목적이 된다. 경제적 조직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과 자본을 축적하는 일이 자기 행복과 구제라는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목적 그 자체로서 행하는 일이 인간의 운명이 된다. 인간은 거대한 경제적인 기계의 톱니바퀴가 되었다. -또한 자본을 많이 가진 인간은 중요한 톱니바퀴이다 - 그러나 그 톱니바퀴는 항상 자기 외부에 있는 목적에 봉사하는 것이다. 인간을 초월한 목적에 쉽사리 자기를 복종시키고자 하는 이런 경향은 실제로는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준비되었다. 물론 루터나 칼빈의 정신에 있어서는 경제적 활동의 이 같은 우월성을 인정하는 일만큼 인연이 먼 일은 또 없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그 신학적인 가르침에 있어 인간의 정신적인 지주와 인간의 존엄과 자랑스러운 감정을 파괴함으로써, 또 모든 활동이라는 것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목적을 보다 더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설명함으로써 이런 경향을 발달시키는 기반을 만든 것이다. 앞의 장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루터의 가르침에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인간의 성질이 사악하다는 것과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아무 소용도 없다는 것을 강조한데 있다. 칼빈도 또한 마찬가지로 인간의 죄악성을 강조하고, 인간은 철저하게 그 자존심을 부정해야 한다는 것, 또 인간생활은 오로지 신의 영광을 지향하는 것이지 결코 자기 자신의 영광을 지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체계 전체의 중심사상이었다. 그리하여 루터와 칼빈은 근대사회에서 인간이 취해야 할 역할에 대한 심리적인 준비를 부여한 것이다. 즉, 자신의 존재가 무의미하다고 느끼는 것과, 자기의 목적이 아닌 목적을 위해 오로지 자기 생활을 종속시키려고 준비하는 것이다. 일단 인간이 정의도 사랑도 갖지 않은 신의 영광을 위해 오직 그 수단이 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것은 경제적 기계에 - 때로는 한 사람의 '지도자'에게 - 대한 하인의 역할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히 준비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경제적 목적에 수단으로서 복종하는 일은 자본의 축적을 경제적 활동의 목적으로 하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수성에 기인되어 있다. 인간은 이익을 얻기 위해 일을 한다. 그러나 획득한 이익을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자본으로서 투자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이 증대된 자본은 다시 투자되어 새로운 이윤을 낳으며, 이런 과정이 계속 되풀이된다. 물론 사치나 '엄청난 낭비'를 위해 돈을 뿌리는 자본가는 항상 존재했지만, 자본주의의 고전적인 대표자들은 일하는 것을 즐거워했지 소비하는 일을 즐거워하지는 않았다. 자본을 소비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축적한다는 이 원리는 근대적 산업조직의 장대한 업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없어서는 안 될 전제이다. 만일 인간이 일에 대한 금욕적인 태도, 수중에 들어온 이윤을 경제적 조직의 생산력을 위한 발달에 투자하려는 욕구를 갖고 있지 않았다면 자연의 정복은 이 정도로 진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질적 욕망을 채우기 위한 끊임없는 투쟁이 종말을 고하게 된 미래를 마음속에 그릴 수 있기 된 것도 사회의 생산력이 이처럼 증대함으로써 비로소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본의 축적을 위해 일한다는 원리는 객관적으로는 인류의 진보에 대해 큰 가치를 갖고 있으나, 주관적으로는 인간이 인간을 초월한 목적을 위해 일하고, 인간이 만든 그 기계의 종이 되어, 나아가서는 개인의 무의미함과 무력함의 감정을 자아내게 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자본을 가지고 그 이윤을 새로운 투자로 돌릴 수 있는 근대사회에서의 인간에 대해 논의해 왔다. 그들은 대자본가이건 소자본가이건 경제적 기능의 수행, 자본의 축적이라는 일에 온 힘을 다 기울였다. 그러나 자본이 없이 노동력을 팔아 그 생활을 유지해 나가야 할 인간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들의 경제적 지위가 가져온 심리적 영향은 자본가의 경우와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우선 첫째로 고용된다는 것은 시장의 법칙, 호경기, 불경기 또는 고용주가 쥐고 있는 기술적 개량 여하에 좌우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들은 고용주에 의해 직접 조종되었고, 고용주는 그들에게 있어 복종해야 할 뛰어난 힘을 지닌 대표자가 되었다. 이런 사실은 특히 19세기 이전의 또는 19세기를 통한 노동자의 지위에 대해 말해준다. 그 이후에는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에게도 힘을 주어, 그들은 조종의 대상이었던 상태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직접적이거나 개인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는 일 외에, 사회전체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역시 자본가의 특징이 된 금욕정신과 인간을 초월한 목적에 복종하는 정신이 스며들고 있었다. 이것은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어떤 사회에 있어서나 그 문화 전체의 정신은 그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지배계급의 정신에 의해 결정된다. 그 이유는 강력한 지배계급이 교육제도, 학교, 교회, 신문, 극장을 지배하는 힘을 가지며, 그것으로써 자기의 사상을 모든 인간에게 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이러한 지배계급은 대단히 많은 특권을 갖고 있으며, 하층계급은 단순히 그들의 가치를 받아들이거나 모방할 뿐 아니라 그들과 심리적으로도 동화되려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주장해 온 일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인간을 초인간적인 경제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서,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이미 심리적으로 준비되었던 금욕주의와 개인의 무의미한 정신을 증대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근대인의 희생적 태도나 금욕주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사리의 추구를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사실과 모순된다. 객관적으로는 자기 이외의 목적에 봉사하는 종이 되고 있으면서도 주관적으로는 자기 이익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실을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프로테스탄티즘의 정신과 근대적인 이기주의의 신조를 어떻게 화해시킬 수 있을까. 프로테스탄티즘은 비이기적인 일을 강조하는데 대해 근대의 이기주의는 마키아벨리의 말을 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간행동의 가장 강력한 원동력이며, 개인적 이익의 추구는 어떠한 도덕적 고려보다 강하여, 인간은 자기 아버지의 죽음보다 오히려 재산을 잃는 것을 더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모순은 단순히 비이기적인 것을 강조하는 일이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이기주의를 감추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함으로써 설명될 수 있을까.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까지는 올바른 일이겠지만, 충분한 해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해답이 어떤 방향에 있는가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심리적으로 복잡한 이기심이라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루터나 칼빈, 또 칸트나 프로이트 사상의 근저에 있는 가정은 이기심과 자애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다. 즉,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덕이며,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죄이고, 또한 타인에 대한 사랑과 자기에 대한 사랑이 서로 상응되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론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사랑은 원래 어떤 특정한 대상에 의해 '야기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속에 잠재하는 어렴풋한 것으로 '대상'은 단지 그것을 현실화시키는 데 불과하다. 증오는 파괴를 구하는 강렬한 욕망이며, 사랑은 어떤 '대상'을 긍정하려는 정열적인 욕구이다. 즉, 사랑은 '좋아하는 일'이 아니다. 그 대상의 행복, 성장, 자유를 지향하는 적극적인 추구이며 내면적인 연결이다. 그것은 원칙적으로 우리까지 포함한 모든 인간과 모든 사물에 향하게끔 할 수 있도록 준비되고 있다. 배타적인 사랑이란 그 자체가 하나의 모순이다. 확실히 어떤 특정한 인간이 뚜렷이 사랑의 '대상'이 되는 일은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특정한 선택을 이루게 하는 요소는 대단히 많으며, 또한 대단히 복잡하므로 여기서 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어떤 특수한 '대상'에 대한 사랑은 한 사람의 인간 속에 어렴풋했던 사랑이 현실화하여 집중화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낭만적인 연애관이 말하는 것처럼,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서 단 한사람뿐이라든가, 그런 사람을 찾아내는 일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라든가,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은 다른 모든 것에서 물러나는 일이라든가 하는 것은 아니다. 단 한 사람에 대해서만 경험되는 사랑은, 바로 그 사실로 말미암아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새도매저키즘적인 집착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사랑에 포함되는 근본적인 긍정이 애인에게 향해질 때, 그것은 애인을 본질적으로 인간적인 성질이 구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이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은, 종종 생각되고 있는 것처럼 특정 인간에 대한 사랑의 '뒤에서' 추상된 것이 아니며, 또한 특정 '대상'과의 경험을 확대한 것도 아니다.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사랑은 물론 발생적으로는 구체적인 개인과의 접촉에 의해 획득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특정 인간에 대한 사랑의 전제로 되어 있다. 이리하여 원칙적으로는 나 자신도 타인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다. 나 자신의 생활, 행복, 성장, 자유를 주장하는 일은,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준비와 능력이 존재하고 있는 데 뿌리박고 있다. 이 같은 준비를 가진 자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그것을 가지고 있다. 오직 타인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자는 전혀 사랑할 줄 모르는 자이다. 이기주의와 자애란 동일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반대인 것이다. 이기주의는 탐욕의 일종이다. 모든 탐욕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하나의 불만족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참다운 만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탐욕은 한없이 깊은 구렁으로,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욕구를 끝까지 추구하게 하여 인간을 지치게 한다. 잘 관찰하면 이기적인 인간은 언제나 불안하여 자기 일만 생각하고 있지만 결코 만족치 못하고, 항상 침착성을 잃고, 충분한 것을 얻지 못했다든가, 뭔가를 놓쳤다든가, 뭔가를 빼앗긴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보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자에게 타는 듯한 선망을 품고 있다. 다시 면밀히 관찰해 보면, 특히 무의식적인 동력을 관찰해 보면, 이런 종류의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좋아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깊은 자기 혐오를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외관상의 모순된 수수께끼는 쉽게 풀 수 있다. 이기주의는 바로 이 자애의 결여에 뿌리박고 있다.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인간이나 자기 자신을 시인하지 않는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다. 그는 순수한 호의와 긍정의 기반 위에만 존재하는 내면적인 안정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는 자기 자신에 신경을 쓰고,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을 획득하려고 탐욕적인 눈초리를 번득여야 한다. 그에게는 근본적인 안정과 만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소위 자기도취적인 인간에게도 해당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위해 물건을 얻으려고 부심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칭찬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는 인간이다. 이런 인간은 표면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대단히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자기 자신을 좋아하지 않고 있는 것이며 그들의 나르시시즘(자기도취증)은 - 이기주의와 마찬가지로 - 자애가 근본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무리하게 보상해 보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자기도취적인 인간은 그의 사랑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빼앗아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한다고 지적했다. 이 설의 전반은 옳지만 후반은 잘못되어 있다. 자기도취적 인간은 타인은 물론 자기 자신도 사랑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를 이기주의의 심리학적인 분석으로 이끈 본디의 문제로 되돌아가자. 우리는 근대인이 자기의 이익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믿으면서도 사실상은 그의 생활을 자기의 것이 아닌 목적에 바치고 있다는 모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칼빈이 인간존재의 유일한 목적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신의 영광이어야 한다고 느꼈던 사실을 발견했다. 우리는 이기주의가 참된 자아에 대한 긍정과 사랑, 즉 모든 능력을 가진 구체적인 인간존재 전체에 대한 긍정과 사랑의 결여에 입각해 있는 것을 나타내려고 했다. 근대인이 행동할 때 그 관심사가 된 '자아'는 '사회적인 자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는 개인에 대해 밖으로부터 예상되는 역할에 의해 구성되어 있고 실제로는 사회에 놓인 인간의 객관적인 사회적 기능을 단순히 주관적으로 위장한 것에 불과하다. 근대적 이기주의는 참된 자아의 욕구불만에 입각한 탐욕이며, 그 대상은 사회적 자아이다. 근대인은 자아의 극단적인 주장을 특징으로 삼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의 자아는 약화되어 전체적 자아의 일부분 - 지성과 의지력 - 으로 축소되고, 퍼스낼리티 전체의 다른 모든 부분을 제외하는 결과를 자아내고 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자연을 차차로 정복한 결과 개인적 자아도 보다 강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것은 어느 정도 진실일 것이다. 그런 한 그것은 개인의 발달의 적극적인 측면이며, 우리도 그것을 그대로 보아넘기려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는 점에선 현저하게 앞섰지만, 사회는 창조된 그 힘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다. 생산조직은 기술적인 관점에서는 합리화되었으나,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인 것을 수반하고 있다. 경제적 위기와 실업과 전쟁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의 세계를 건설했다. 공장과 가옥을 세우고, 자동차와 의복을 만들고, 곡물과 과일을 지배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손으로 만든 생산물과는 소원해졌다. 그는 실제적으론 이미 그가 세운 세계의 주인은 아니다. 반대로 인간이 만든 세계가 인간의 주인이 되었다. 그 주인 앞에 인간은 머리를 숙이고 될 수 있는 한 아양을 떨며 속이고 있다. 자기 손으로 한일이 자기의 신이 된 것이다. 그는 자기 이익에 의해 행동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모든 구체적인 능력을 가진 그의 전체적인 자아는 그의 손으로 만든 그 기계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도구가 되었다. 그는 여전히 세상의 중심이라는 환상을 품고 있지만, 더구나 그는 일찍이 선조들이 신에 대해 의식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처럼 자기 자신을 무의미하고 무력한 것이라고 강하게 느끼고 있다. 근대인의 고독감과 무력감은 그의 모든 인간관계가 지니고 있는 성격에 의해 다시 박차가 가해진다. 개인과 개인의 구체적인 관계는 직접적이고 인간적인 성격을 잃고 속임수와 수단의 정신으로 화해 버렸다. 시장의 법칙이 모든 사회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지배하고 있다. 경쟁자들 사이의 관계는 상호간 인간의 냉정함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어떠한 인간도 경제적인 일을 수행할 수 없다 .그러기 위해선 서로 싸워야 하며, 필요하다면 타인을 경제적인 파멸로 몰아넣는 일마저도 불사하게 된다. 고용주와 고용인과의 관계도 이와 같은 무관심한 정신으로 일관되고 있다. '고용주'라는 말은 자초지종이 포함된 말이다. 즉, 자본의 소유자는 다른 인간을 마치 기계를 '고용하는'것처럼 고용하는 것이다. 고용주나 고용인은 서로가 다 스스로의 경제적 이익을 구하여 상대방을 이용하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서로가 목적에 대한 수단의 관계이고 서로가 다 상대방의 도구가 된 것이다. 그 둘은 상호간의 효용성 이외에 다른 어떤 인간적인 관계를 갖는 것은 아니다. 상인과 그 고객과의 관계를 지배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수단적인 것이다. 고객은 이용되어야 할 하나의 대상물이며, 그가 원하는 것을 상인이 만족시키려는 구체적인 인간은 아니다. 일에 대한 태도는 수단적인 성질의 것이다. 중세의 직공과는 반대로 근대의 공장주는 원래 그가 생산한 것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는 본질적으로 그가 투자한 자본에서 이윤을 얻기 위해 생산하고 있는 것이며, 그 제품은 완전히 시장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시장의 어떤 방면에 투자하면 유리한가를 결정한다. 경제적인 관계뿐 아니라 인간적인 관계도 이 소외된 성격을 띠고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존재의 관계가 아니라 물건과의 관계이다. 그러나 이 수단과 소외된 정신중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황폐된 예는 아마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일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상품을 팔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팔며, 자기 자신을 마치 상품처럼 느끼고 있다. 육체 노동자는 그 육체의 에너지를 팔고, 상인과 의사와 샐러리맨은 그 '인격'을 팔고 있다. 그들은 그 생산물이나 그 봉사를 팔기 위해선 하나의 '인격'을 갖고 있어야 한다. 이 인격은 남의 마음에 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밖에도 그 인간은 많은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그 특수한 지위가 요구하는 에너지와 창의와 기타 여러 가지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상품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인간의 질적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아니 바로 인간존재 그 자체를 결정짓는 것은 시장이다. 만일 어떤 인간이 갖고 있는 성질이 아무런 효용가치가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다. 마치 팔리지 않는 상품이 가령 사용가치는 있다 하더라도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리하여 자신이라든가 '자아의 감정'이란 단순히 타인의 자기에 대한 생각을 가리키고 있는데 불과하다. 그것은 시장에 있어 인기나 성공과는 관계없이 자기의 가치를 확신하고 있는 자아는 아니다. 만일 타인으로부터 요구되는 인간이라면 그는 쓸모있는 인간이며, 만일 인기가 없으면 그는 쓸모없는 인간이다. 자기 평가가 '인격'의 성공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 어째서 인기라는 것이 근대인에게 그토록 놀랄만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느냐 하는 이유이다. 어떤 실제적인 일이 순조롭게 되느냐 안 되느냐 하는 일뿐만 아니라, 자존심을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열등감의 심연으로 빠지느냐 빠지지 않느냐 하는것도 다 인기와 관련되고 있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개인에게 가져다 준 새로운 자유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종교적 자유가 이미 그에게 주고 있던 영향을 더욱 발전시켰다는 사실을 제시하려고 했다. 개인은 점점 고독해지고, 점점 고립되어 자기 밖에 있는 어떤 압도적인 강력한 힘에 조종되는 하나의 도구가 되어 버렸다. 그는 '개인'이 되었으나 어쩔 수 없는 불안한 개인이 되었다. 이 숨겨진 불안이 노출되는 것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조건은 있었다. 우선 첫째로 그것은 자아를 지탱해 주는 재산의 소유이다. 인간으로서의 그와 그가 갖고 있는 재산은 분리시킬 수가 없었다. 옷이나 집은 그의 육체의 일부인 동시에 그의 자아의 일부분이기도 했다. 자신의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덜하려면, 보다 많은 소유물을 가져야한 했다. 만일 재산을 갖고 있지 않거나 잃거나 하면, 그것은 '자아'의 중요한 부분을 잃는 일이며, 남이 보나 자기 자신이 보나 하나의 떳떳한 인간일 수가 없었다. 자아를 지탱하는 다른 요소는 명성과 권력이었다. 그것들은 때로는 재산의 소유에서 생겨나고, 때로는 경쟁을 이겨낸 승리에서 직접 생겨나기도 했다.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거나 타인을 지배하거나 하는 일은 재산이 준 지주를 더강화하고, 불안한 자아의 후원자가 되었다. 재산이나 사회적 명성을 거의 갖지 않은 인간에게는 가족이 개인적인 위광을 부여하는 원천이었다. 가족 가운데서는 개인을 '상당한 인물'로 느낄수 있었다. 그는 처자를 거느리고, 무대의 중심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단순하게도 자기 역할을 자연의 권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사회적 세계에선 있으나 마나였지만, 가정에서는 왕이었다. 가족 외에 국가적인 명예(유럽에서는 종종 계급적인 명예)에 또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했다. 개인적으로는 보잘것없는 인간일지라도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이 다른 여러 집단보다는 우월하다고 느낄 수만 있다면 그것을 자랑으로 삼을 수 있었다. 약체화된 자아를 지탱하는 이같은 요소는 이 장의 첫머리에서 설명한 여러 가지 요소, 즉 현실의 경제적, 정치적 자유와 개인적 창의에 대한 기회나 합리적인 계발의 증대같은 것과는 구별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요소는 실제로 자아를 강화시켜 개성과 독립성과 합리성을 발전시킨다. 이에 반해 지주로서의 요소는 단순히 불안과 근심을 메우는 일을 도와준데 불과하다. 그 요소는 불안과 걱정을 근절시킨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준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이 의식적인 안정감을 표면적인 것으로, 지주가 존재하는 한 지속해 가는 것에 불과했다. 종교개혁에서 지금까지의 유럽 및 미국의 역사를 상세히 분석해 보면 '...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에 대한 자유로'라는 진화 속에 이 같은 두 가지 모순된 경향이 평행을 이루고 있는 모습 - 또는 오히려 의식적으로 얽혀 있는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런 분석은 이 책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 되므로, 뒷날의 발표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어떤 시대나 어떤 사회적 집단에선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가 존재한 일은 있었다. 일반적으로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에 있어 중산계급이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낡은 질서의 대표자들을 이겼을 때가 그러했다. 적극적인 자유를 구하는 이 싸움에서 중산계급은 프로테스탄티즘이 인간의 자율과 존엄을 강조한 그 측면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한편, 가톨릭 교회는 자기의 특권을 지키기 위해 인간의 해방에 대항하여 싸우는 계급과 결탁하였다. 근대의 철학사상에 있어서도 이미 종교개혁의 신학적 교의에서와 마찬가지로 자유의 두 측면이 혼합되어 있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칸트나 헤겔에 있어 자율과 자유란 그들의 사상체계의 중심적인 요청이다. 더구나 그들은 개인을 전능적인 국가의 목적에 종속시키고 있다. 프랑스 혁명시대의 철학자나 19세기에 있어서의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스티르너, 니체는 개인은 자기의 성장이나 행복과 관계없는 어떤 목적에도 종속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단호한 어조로 표현했다. 그러나 같은 시대의 반동 철학자들은 개인이 정신적 권위나 세속적 권위에 종속하는 일을 뚜렷이 요청했다. 19세기 후반 및 20세기 초에는 적극적인 자유를 구하는 경향이 그 정점에 달했다. 중산계급이 거기 가담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 계급도 또 활발한 자유의 주체가 되어 스스로의 경제적 목적과 아울러 인간성이라는 광범한 목적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자본주의의 독점적 경향의 증대는 인간적 자유에 대한 두 경향의 비중을 바꿔버린 것 같다. 개인적 자아를 약화시키려는 요소가 강해지고 개인을 강하게 하는 요소가 비교적 약해졌다. 개인의 무력감과 고독감이 증대하고 모든 전통적인 속박으로부터의 '자유'가 보다 더 강화되는 한편, 개인의 경제적 상과에 대한 가능성은 좋아지게 되었다. 그는 거대한 힘의 위협을 받고 있다. 이런 사정은 15세기나 16세기의 상황과 유사한 점이 많다. 이러한 발전의 중요한 요소는 독점자본의 힘이 증대한 일이다. 우리의 경제조직의 일부에 자본이 집중된다는 일(부 집중은 아니다)은 개인의 창의와 용기와 지식의 성공가능성을 완전히 봉쇄해 버렸다. 독점자본이 승리를 얻은 부문에서는 많은 인간의 경제적 독립이 파괴되었다. 싸우는 인간, 특히 대부분의 중산계급 사람들에게는 싸움은 인간의 창의와 용기에 대한 신뢰감이 무력감과 불안감에 대치되는 부조리에 대한 싸움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거대한 숨은 힘은 소수의 집단에 의해 행사된다. 그리고 그 결정에 사회 대부분의 운명이 달려 있다. 1923년의 독일의 인플레이션과 1929년의 미국의 공황은 불안감정을 증대시키고, 자기 노력으로 전전해 가는 희망과 성공의 무한한 가능성을 믿는 전통적인 신념을 산산이 분쇄해 버린 것이다. 소규모 또는 중간 규모의 실업가는 우월한 자본의 압도적인 힘에 의해 본질적으로는 위협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때로는 이윤을 획득하고 그 독립을 유지해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위로부터의 위협으로 말미암아 그의 불안과 무력함이 전보다 훨씬 더 증대했다. 그는 전에는 동등한 자와 싸웠지만, 이제는 거인과 같은 독점적인 경쟁자와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근대적 산업의 발달에 의해 새로운 경제적 기능을 갖게 된 독립된 상인의 심리적 상태는 일찍부터 독립했던 상인의 심리상태와는 판이했다. 이 차이는 주유소의 소유자를 보면 알 수 있다. 주유소의 소유자란 중산계급의 새로운 타입으로 종종 인용되는 독립된 상인이다. 그들의 대부분은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있다. 그들은 마치 식료품집 주인이나 양복을 만드는 재봉사처럼 자기의 사업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독립된 상인의 낡은 타입과 새로운 타입이란 얼마나 심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식료품집 주인은 많은 지식과 숙련을 필요로 했다. 그는 많은 도매상인들 중에서 가장 품질이 좋은 상품을 적절한 값으로 팔려는 의도에서 사업처를 택하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고객들을 갖고 있었으며, 그들의 희망을 알아야 함을 물론, 그들이 물건을 사는 데 의논상대가 되어 주어야 하며, 그들 개인과 신용거래를 해도 좋겠는가를 결정해야 했다. 대체로 보아 옛날의 상인의 역할을 단순히 독립적일 뿐 아니라 숙련과 개성적인 봉사와, 또한 지식과 활동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런데 주유소의 소유주는 이와는 다르다. 그가 파는 것은 하나의 정해진 상품, 즉 기름과 휘발유이다. 그는 정유회사와의 제약에 계한되고 있다. 그는 휘발유와 기름을 가득 채우는 동일한 행위를 계속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숙련과 창의와 개인적 활동이 개입될 여지는 옛날의 식료품집보다 훨씬 더 적다. 그의 이윤은 두 가지 요소로 결정되어 있다. 즉, 휘발유와 기름에 대해 지불해야 할 가격과 주유소에 멈추는 자동차 운전수의 수에 의해 정해진다. 이 두 요소는 도저히 그로서는 지배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단지 도매상인과 고객 사이의 대리인 노릇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가 사업주에 고용되어 있는가 또는 '독립된' 상인인가는 심리적으로 볼 때 거의 문제시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분배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 있는 톱니바퀴에 불과하다. 사무 노동자들(화이트 칼라)의 수는 대기업의 확대와 더불어 불어났지만, 그 같은 인간에 의해 성립된 새로운 중산계급에 대해서도 그들의 상태가 옛날 소규모의 독립된 상인의 상태와 아주 다르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독립되지 않았으나, 실제로는 성공의 기반이 되는 창의와 지식을 발전시킬 기회가 그 옛날의 재봉사와 식료품집 주인과 같은 정도로, 또는 그보다 더 많이 있었던 게 아니냐고. 이것은 어떤 의미에선 올바르지만, 어디까지가 올바른가는 의문이다. 하여간 심리적으로 보면 화이트 칼라의 상태는 옛날과는 판이하다. 그는 거대한 경제적 기계의 일부로 고도로 특수화된 일에 종사하며, 같은 위치에 있는 수백에 달하는 사람들과 심한 경쟁을 하여 만일 낙오되면 용서없이 추방당한다. 요컨대, 그가 성공할 기회는 보다 더 많아졌다 하더라도, 그는 옛날 상인이 지니고 있던 안정과 독립을 완전히 잃었다. 그리고 그는 단지 기계의 크고 작은 톱니바퀴의 존재로 하락했다. 그 기계는 그에게 일정한 템포를 강요하지만 그는 그 기계를 지배할 수 없다. 그 기계에 비하면 그는 전적으로 보잘것없는 존재인 것이다. 대기업의 광대함과 그 우월한 힘에서 생기는 심리적인 영향은 노동자에게도 미치게 된다. 옛날의 소기업에선 노동자는 그의 주인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으며 그 기업 전체와도 친밀감이 있어 그것을 실제로 조사해 볼 수도 있었다. 그는 시장의 법칙에 따라 고용 또는 해고 되었지만, 그 주인이나 기업과는 어떤 구체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자기가 어떠한 기반 위에 서 있는가를 알고 있다고 느꼈다. 수천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공장에선 인간은 이것과는 완전히 다른 상태에 놓인다. 주인은 하나의 추상적 상이 된다- 그는 전혀 주인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경영'이란 그가 간접적으로밖에 참여할 수 없는 익명의 힘이며, 거기에 대해서 그는 개인으로서는 거의 무의미한 존재이다. 이런 대기업 속에서의 노동자란 자기의 특수한 일에 관계된 작은 부분밖에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상태는 어느 정도 노동조합에 의해 균형이 잡혀 왔다. 노동조합은 단순히 노동자의 경제상태를 개선했을 뿐 아니라 노동자에게 중요한 심리적 영향을 미쳤다. 즉, 그와 맞설 거인과 비교하여 그에게도 힘과 뜻이 있다는 감정을 부여해 주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수많은 조합은 그 자신 거대한 조직으로 발전하여, 개개의 노동자는 조합에 의무를 다하고 때로는 선거도 하지만, 여기에서도 그는 또한 큰 기계 속의 작은 톱니바퀴에 불과한 존재이다. 조합은 각 성원의 적극적인 협동에 의해 지탱되는 기관이 되어 각 성원이 그 조직의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그 움직임에 책임을 느끼게 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 오늘날에 있어서 개인의 무의미는 단지 상인과 고용인과 육체 노동자의 역할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물건을 사는 고객의 역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다. 지난 수십 년에 고객의 역할에도 상당한 변화가 생겼다. 독립된 상인의 소매상점에 찾아오는 고객은 반드시 개인적인 친절로 대하게 되었다. 즉, 그가 사는 물건은 그 상점 주인으로서는 소중한 것이었으며, 그는 중요한 사람으로 영접되었고, 그의 소망은 일일이 의논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산다는 행위 그 자체가 그에게 자기의 중요함과 품위의 감정을 부여해 주었다. 백화점의 경우, 그 관계는 너무도 차이가 난다. 고객은 우선 그 거대한 건물과 수많은 점원들, 잔뜩 진열된 상품에 의해 압도된다. 그 모든 것에 비해 그는 자기가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를 느끼게 된다. 백화점의 입장에서 보면 인간으로서의 그는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않았으며, '한 사람'의 고객으로서의 뜻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백화점은 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고객이라도 놓친다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며, 아울러 그와 똑같은 이유로 다른 고객들까지도 놓치게 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고객은 추상적인 고객으로서 중요시될 뿐이지 구체적인 고객으로서 중요시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들어오는 것을 기뻐하는 자도 없으며, 그의 요구에 특히 관심을 보여주는 자도 없다. 산다는 행위는 마치 우체국에서 우표를 사는 것과 같은 것이 되었다. 이런 상태는 다시 근대의 광고방법에 의해 한층 더 강화된다. 옛날 상인의 장사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합리적이었다. 그는 자기 상품을 잘 알고 고객이 요구하는 물품도 잘 알고 있어, 그러한 지식에 입각하여 팔려고 했었다. 물론 그가 하는 이야기는 전적으로 객관적이 아니고 가능한 한 권유도 했을 것이다. 더구나 효과를 올리기 위해서는 오히려 합리적이고 사리에 밝은 이야기였어야 했을 것이다. 거대한 근대광고는 이와는 다르다. 그것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 호소한다. 최면술의 암시처럼 그 목적물에 대해 감정적인 인상을 준 다음 지적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온갖 수단을 다해 고객에게 강한 인상을 주려고 한다. 즉, 같은 일을 몇번이고 반복하거나, 사교계의 귀부인과 유명한 권투선수에게 어떤 상표의 담배를 붙여 물게 함으로써 권위 있는 이미지가 생기게 한다든가, 아름다운 소녀의 성적인 자극으로써 고객을 끌어들여, 동시에 그의 비판력을 마비시키려고 한다든가, 또 어떤 샤쓰나 비누를 삼으로써 전생애가 갑자기 변화하는 듯한 공상을 자극하거나 한다. 이 모든 방법은 본질적으로 비합리적이다. 그런 것은 마치 영화처럼 공상적인 성질에 의해 어떤 만족을 인간에게 주는데, 그와 동시에 인간의 비소함과 무력함의 감정도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둔화시키는 이런 방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수많은 명백한 공격보다 훨씬 더 위험하며, 발매 금지당하는 그런 에로틱한 문학보다도 훨씬 더 비도덕적 - 인간의 동일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아 - 이다. 소비자운동이 소비자의 비판력과 품위와 감각을 회복시키고자 노동조합운동과 같은 방향으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그 범위는 지금까지로서는 신중한 첫발을 내디딘 정도에 불과하다. 경제적 영역에 해당하는 일은 또 정치적 영역에도 해당된다. 민주주의의 초기 시대에는 개인의 어떤 일을 결정짓기 위해 구체적이며 적극적으로 선거에 참가하는 여러 가지 결정이 있었다. 결의사항은 후보자와 마찬가지로 개인에게도 잘 알려져 있었다. 선거는 종종 도시의 전체 시민이 모여 있는 곳에서 이루어져 개인도 실제로 수에 포함될 수 있는 구체적인 성질을 갖고 있었다. 지금은 선거인이 거대한 정당과 직면하게 되었는데, 정당은 마치 산업의 거대한 조직과 마찬가지로 먼 곳에 떨어져 있지만 강제성을 띠고 있다. 결과는 복잡하나, 한편 그것을 은폐하려는 모든 수단으로 인해 점점 복잡해졌다. 선거인은 선거할 무렵이 되면 후보자에 대해 뭔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라디오 시대가 되면서부터는 후보자를 그렇게 가까이서 보게 되는 일은 없으며, '자기의'후보자를 음미하는 최후의 수단도 잃어버리게 된다. 실제로 그는 정당의 간부들에 의해 두서너 사람의 후보자 중에서 선택을 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후보자들은 '자기가' 선정한 것이 아니라, 서로 전혀 알지도 못한다. 여기서도 또한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추상적인 관계뿐이다. 고객에 대한 광고의 영향과 마찬가지로 정치선전의 방법도 선거인 각자의 무의미감을 조장하고 있다. 슬로건을 되풀이하거나, 문제가 된 일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을 강조하는 일은 선거인의 비판력을 마비시킨다. 그의 사고에 대해 뚜렷이 합리적으로 호소하는 일은 정치선전에 있어서는 -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 원칙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예외이다. 선전에 나타나는 정당의 거대한 힘과 크기에 직면하면, 선거인 각자는 자기가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광고와 정치선전이 공공연하게 개인의 무의미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전적으로 그와는 반대이다. 광고나 선전은 개인에게 아첨하여 그를 중요한 존재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그의 비판적 판단과 통찰력에 호소하는 듯이 가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면은 본질적으로는 개인의 비판력을 우둔하게 하여 판단의 개인적 특성을 어리석게 만든다. 물론 지적할 필요도 없이 지금 말하고 있는 선전 전부가 비합리적이라는 것은 아니며, 각 정당과 후보자에 의해 선전에 내포되는 합리적인 요소가 각기 비중이 다르다는 것이다. 개인의 무력함에 다시 박차를 가하는 다른 요소가 있다. 경제적 정세는 전보다도 훨씬 복잡하고 대규모적이다. 개인은 그것을 내다볼 수 있는 힘을 점점 상실하고 있다. 또 개인이 직면하는 위협은 그 깊이를 더하고 있다. 몇 백만 명이라는 경제조직의 실업은 불안의 감정을 증대했다. 물론 공공기관에 의한 실업자의 구제는 단순히 경제적일 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실업의 결과를 크게 완화했으나, 여전히 광범한 대중에게는 실업상태의 괴로움이 심리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며, 실업의 두려움은 그들의 전 생활을 어둡게 하고 있다. 일자리를 갖는다는 일이 - 비록 그 일이 어떤 것이 든간에 - 많은 사람들에게는 인생에서 바랄 수 있는 전부이자 기쁨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실업은 또 노인을 한층 더 위협하는 것이 되었다. 많은 일자리에선 비록 미숙하더라도 적응만 할 수 있으면 젊은 사람만이 환영된다. 왜냐하면, 젊은 사람은 특수한 부서가 요구하는 작은 톱니바퀴로 쉽사리 변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 위협이 또 개인의 무력감을 증대하고 있다. 확실히 19세기에도 몇 차례의 전쟁은 있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 이래로 파괴의 가능성은 굉장한 것이 되었으며, 전쟁으로 말미암아 영향을 받는 사람들의 범위는 한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든 인간을 포함할 정도로 확대했다. 그 결과, 전쟁의 위협은 악몽이 되었다. 그 악몽은 실제로 자기 나라가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기 전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겠지만, 역시 그들의 생활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져주고 두려움과 무력감을 증대하고 있다. 내가 스케치한 광경은 현대의 모든 '양식'에 들어맞는다. 개인이 매몰되어 버리는 거대한 도시, 산처럼 높이 솟은 빌딩, 라디오에 의한 끊임없는 소음의 공격, 하루에 세 번씩이나 변하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신문의 큰 표제, 백 명이나 되는 소녀들이 완전히 개성을 버리고 시계처럼 정확함을 과시하면서, 원활하면서도 대단히 힘찬 기계처럼 연기하는 쇼, 계속해서 울리는 재즈의 리듬... 이런 많은 사실들이 개인이 스스로 지배할 수 없는 차원에 직면하게 되는 한 무리의 표현이다. 이 지배할 수 없는 차원에 비교하면 개인은 극히 작은 미립자에 불과하다.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행진하는 병사와 끝없이 돌아는 벨트와 어울려 일하는 노동자처럼 보조를 맞추는 일뿐이다. 그는 행동하고 있지만 독립과 중요한 것에 대한 감각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미국의 일반 사람들이 이 같은 공포와 무의미한 감정에 얼마나 사로잡혀 있는 가는 미키마우스 영화의 인기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미키마우스의 한 주제는 - 여러 가지 변화는 있겠지만 - 항상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작은 것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것의 박해를 받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강한 것은 작은 것을 죽이거나 삼켜 버리려고 한다. 작은 것은 도망치게 되는데, 결국은 도망에 성공하여 때로는 적에게 해를 끼치게 된다. 만일 이 테마가 사람들의 감정적 세계에 대단히 밀접하게 파고들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똑같은 한 가지 주제의 여러 가지 변화를 계속해서 관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강력하고 밉살스러운 적에게 위협을 받고 있는 작은 것은 분명히 관객 자신이다. 그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가의 표현이며, 자기 자신을 동일시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물론 해피앤드가 아니라면 언제까지나 매력은 지속되지 않는다. 사실상 관객은 공포와 함께 자신의 비소함을 신변에 느끼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구원을 받아 강한 것을 정복함으로써 유쾌하기 된다. 그러나 - 그리고 이것은 이 '해피앤드'의 소중하고도 슬픈 부분인데 - 그의 구제는 대체로 도망치는 능력과 예측할 수 없는 우연에 달려 있다. 거대한 것이 그를 붙잡지 못하는 것은 그 우연 때문이다. 현대에서의 개인의 상태에 대해서는 이미 19세기의 선견지명이 있는 사상가들이 예견하고 있었다. 키에르케고르는 회의로 인해 괴로워하고 고독과 무의미한 감정에 압도된 무력한 개인을 그리고 있다. 니체는 뒷날 나치즘에서 노출된 것과 같은 니힐리즘이 다가오고 있음을 내다보고 있다. 그리고 그가 현실에서 본 무의미한, 목표도 지니지 않은 개인을 부정하는 것으로서 '초인'을 그리고 있다. 인간의 무력함이라는 주제는 프란츠 카프카의 저작 속에서도 확실히 볼 수 있다. 그는 그의 <성>이라는 작품 속에서, 신비적인 성의 주민들과 사귀고자 하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그 성의 주민들은 그에게 무엇을 할 것인가를 이야기해 주고, 세상에서의 그의 위치를 가르쳐줄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의 전생에는 성의 주민들과 사귀고자 하는 광기어린 노력으로 점철되어 있지만, 그는 결코 성공하지 못한 채 헛되고 안타까운 감정에 사로잡혀 외톨이로 남게 되는 것이다. 고독과 무력의 감정은 줄리앙 그린의 다음과 같은 한 구절에 아름답게 표현되어 있다. '우리는 우주와 비교하면 아주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것을 나는 알았다. 또 우리는 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처럼 철저하게 쓸모 없다는 것은 어떤 뜻으로 봐선 압도적인 동시에 안심시키는 일이기도 하다. 인간의 사고 범위를 초월한 형상이나 차원은 완전히 압도적이다. 과연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있을까. 우리가 거꾸로 떨어져 들어가는 그 환상의 혼돈 속에서도 단 한 가지 진실성을 가지고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 사랑이다. 다른 모든 것은 무가치한 것이고 공허한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암흑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우리는 두려워하고 있다. ' 그러나 이런 사상가들이 그린 것과 같은, 또는 소위 수많은 신경증 환자가 느끼고 있는 것과 같은 이런 개인의 고독과 무력한 감정을 보통 사람은 전혀 의식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그에게는 너무나 무서운 일이다. 그것은 매일같이 판에 박은 듯한 활동, 개인적 또는 사회적인 관계에서 발견하는 확신과 칭찬, 사업에 있어서의 성공, 모든 종류의 기분전환, '즐거움' '교제' '유람' 등에 의해 은폐된다. 그러나 어둠속에서 휘파람을 불어도 빛은 나타나지 않는다. 고독과 공포와 혼미는 여전히 남는다.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그것을 참을 수는 없다. 그는 '...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무거운 짐을 견디어 나갈 수가 없다. 그들은 소극적인 자유에서 적극적인 자유로 전진 할 수 없는 한, 결국 자유로부터 도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도피의 중요한 사회적 통로는 파시스트 국가에서 일어났던 것과 같은 지도자에의 예속이며, 또한 우리 민주주의국가에 널리 보급되고 있는 강제적인 획일화이다. 사회적인 형태로 되어 있는 도피의 두 가지 방법을 말하기 전에, 나는 독자에게 도피라는 복잡한 심리적 메카니즘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들어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우리는 이미 앞 장에서 이 메카니즘의 일부분을 다루었다. 그러나 파시즘과 근대 민주주의에 있어 인간의 자동기계화의 심리적인 뜻을 충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심리적 현상을 단순히 일반적인 방법으로서 이해할 뿐 아니라, 그 기능을 상세히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길을 우회하는 것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논의 전체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심리적 문제를 그 사회적, 문화적인 배경 없이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현상도 그 근거를 이루고 있는 심리적인 메카니즘의 지식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다음 장에서는 이런 메카니즘을 분석하고 개인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항을 명백히 하고자 한다. 그리고 고독과 무력에서 피하려고 할 때 우리는 새로운 형의 권위에 예속하든가, 또는 이미 이루어진 행동양식에 강제적으로 순응해 감으로써 우리가 개인적 자아로부터 탈출하려는 노력을 제시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