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든 종류의 대규모적인 행정이 필연적으로 '관료주의적', 즉 소외된 형태의 행정이 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관료주의적인 풍조가 얼 마나 치명적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철저하게 생활의 모든 분야에 퍼져 있는지를 깨닫 지 못하고 있다. 관료주의적 풍조는 의사와 환자, 부부간의 관계와 같이 전혀 있을 것 같지 않은 분야에까지 나타난다. 관료주의적 방법은 1. 인간을 물건처럼 다루고, 2. 이 물건에 대 한 수량화와 지배를 보다 쉽고 값싸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질적인 면보다는 양적인 면으로 다루는 것이라고 정의를 내릴 수 있다. 관료주의적 방법은 통계자료에 의하여 지배된다. 즉, 관료들은 '눈앞에 서 있는 살아 있는 존재의 반응'보다는 통계자료에 의해 만들어진 고정 적인 규칙에 기초하여 어떤 일을 결정한다. 그들은 그런 형에 들어맞지 않는 5~10%의 사람 들을 희생하더라도, 통계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사례에 따라 문제점을 해결한다. 관료들은 개 인적인 책임을 두려워하여 항상 규칙의 배후에 숨는다. 그들의 안정감과 자부심은 규칙에 대한 그들의 충성에 있는 것이지 인간양심의 법칙에 대한 충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히만(Eichmann)은 관료의 극단적인 예이다. 그가 수십만의 유대인을 죽음의 가스실로 보냈던 것은 그들을 미워해서가 아니다. 그는 누구를 미워하지도 사랑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의 의무에 충실했을' 뿐이다. 그는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때 마치 그들을 독일로부 터 신속히 이민시키는 책임을 맡았을 때처럼 의무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 한 것은 규칙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그는 규칙을 어겼을 때에만 죄의식을 느꼈다. 그는 단지 학생시절 수업중에 빈둥거렸을 때와 공습기간중에 엄폐하라는 명령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두 경우에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고 진술했다(이러한 진술에 의해 그의 입장은 불리해졌 다). 이것은 물론 아이히만이나 다른 관료들에게 사디슴적인 요소-다른 생물을 지배함으로 써 만족을 얻는-가 없었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사디슴적인 경향은 관료 들에게는 단지 이차적인 요소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일차적인 요소는 인간적인 감응 의 결핍과 규칙에 대한 숭배이다. 나는 모든 관료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성격논리학적 의미에서의 관료는 아니다. 둘째로 대개의 경우 관료주의적 태도가 그 인간 전체를 지배하여 그의 인간적인 측 면까지 제거해 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관료 가운데는 아직도 많은 아이히만이 있다. 다 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은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었다는 점뿐이다. 병원의 관 료가 환자는 의사의 처방이 있어야 한다는 그 병원의 규칙 때문에 위독한 환자를 거절했다 면, 그의 행동은 아이히만이 했던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관료주의적 규약의 어떤 조 항을 위반하기보다는 빈민을 굶주리도록 내버려두기로 결정한 사회사업가의 행동도 마찬가 지다. 이러한 관료주의적 태도는 단지 관리들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의사, 간호 원, 교사, 교수들 속에도, 많은 부부관계와 부자관계 속에도 존재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 일단 하나의 숫자로 격하되면 관료주의자는 철저히 잔인한 행동을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행동에 비례할 만큼 지독한 잔인성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니라, 상대 방에 아무런 인간적인 연대감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료는 사디스트보다는 그 포악성 이 덜하지만 훨씬 더 위험스럽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부에는 양심과 의무의 갈등이 전혀 없 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내부에는 양심과 의무의 갈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양심이란 바로 그들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기 때문에 동정과 공감의 대상으로서의 인간이란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불친절하고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관료가 아직도 오래 전에 창립된 기업이나, 복지후생성 같은 거대한 조직, 병원, 감옥 등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런 곳에서는 말단 관리라도 가난하 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보다 큰 권력을 휘두른다. 현대산업사회의 관료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다소의 즐거움을 맛보기는 하지만, 불친절하지도 않고, 사디슴적 경향도 거의 없다. 그러나 역시 우리는 그들 속에서 사물-그들의 경우에는 '체제'-에 대한 저 관료주의 적인 충성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체제'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회사는 그들의 가정이며, 회사의 규칙은 그것이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신성시된다. 그러나 낡은 형태이건 새로운 형태이건 관료는 참여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존재할 수 없 다. 왜냐하면, 관료주의적인 정신과 개인의 능동적인 참여정신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사회과학자들은 비관료적이고 대규모적인 새로운 행정형태를 고안해 내야만 한다. 그리고 그 새로운 형태는, 단순한 규칙의 적용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과 상황에 대한 반응 (또는 '책임')에 의해 움직이는 형태여야 한다. 비관료주의적인 행정은, 관료들의 반응의 잠재적인 자발성을 고려하고, 비용 절감에 대한 맹목적인 숭배가 뿌리뽑힐 때에야 실제로 '가능해진다'. 조재적 사회의 건설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는 그밖의 많은 방책에도 관련되어 있다. 다 음에 제시하는 방안이 나의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나는 오히려 다음에 제시하는 생각의 대부분이 인도주의적인 저작가들에 의하여 여러 가지 형태로 이미 제시되 었던 것이라는 사실에 크게 고무되어 있다. 1. '기업광고와 정치적 선전에 있어서 모든 세뇌적인 방법은 금지되어야 한다.' 이 세뇌 적방법이 위험한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지도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사도록 강요할 뿐 아니 라, '만일' 우리가 제정신이라면 원하지도 필요로 하지도 않을 정치적인 대표자를 선택하도 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최면적 방법에 의한 선전으로 인해 우리 정신을 완 전히 조절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끊임없이 증대하는 위험과 싸우기 위해서는 '상 품뿐만 아니라 정치가들을 위한 모든 형태의 최면적인 선전을 금지시켜야만 한다. ' 광고 와 정치선전에 쓰이는 최면적인 방법은 정신적인 건강, 특히 명석하고도 비판적인 사고와 정서적 독립에 아주 위험하다. 철저히 연구해 보면, 마약중독의 피해는 세뇌적인 방법이 주 는 피해에 비하면 몇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이 밝혀질 것이다. 잠재의식적 암시 로부터 끊임없는 반복, 성적인 욕망에 호소하여 우리의 합리적 사고를 빗나가게 하는 반 최면적 방법(즉, 미국항공회사의 텔레비전광고인 '저는 린다예요. 올라타세요' 같은 것)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세뇌적 방법이 우리의 정신에 엄청난 피해를 주고 있다. 순전히 암시적 방법으로 폭격처럼 쏟아지는 광고, 특히 텔레비전 광고는 우리의 정신을 무디게 만들고 있 다. 이성과 현실감각에 대한 이러한 공격은 장소, 날짜, 시간을 불문하고 항상 개인을 따라 다닌다.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고속도로를 자동차로 달릴 또 후보자의 정치연설을 들을 때 등등. 이러한 암시적인 방법이 지니는 독특한 효과는 우리의 정신을 흐리게 만들고, 믿지 도 않고 믿지 않는 것도 아닌 모호한 의식상태에 빠뜨려 우리의 현실감각을 앗아 가는 것이 다. 집단 암시의 해독을 중지시키면, 소비자들은 마약 중독자가 마약을 끊었을 때 나타나는 금단증상을 나타낼 것이다. 2. '부유한 나라와 빈곤한 나라의 격차는 좁혀져야 한다.' 그런 격차가 더욱 심해지면 파 국이 오리라는 것은 거의 의심할 여지가 없다. 빈곤한 나라들은 산업화된 국가에 의한 경제 적인 착취를 이제 숙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소련은 아직도 위성국들을 식민지식 방법으로 착취하면서도 위성국 국민들의 저항을 서구에 대한 정치적인 무기로 이용하고 있 다. 원유가의 인상은 원료를 싸게 팔고 완제품을 비싸게 사야만 하는 체제를 종식시키기 위 한 식민지 민족들의 요구의 서막이자 상징이다. 역시 같은 의미에서 베트남 전쟁은 식민지 제민족의 정치 및 군사에 대한 지배가 끝났음을 알리는 개시의 상징이었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해 아무런 근본적인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백인사회 의 요새 속으로 역병이 퍼져 들어오거나, 기근으로 절망에 빠진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이 아 마도 산업화된 세계의 동조자들의 도움을 받아 파괴행동을 자행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는 조그마한 핵무기나 생물학 무기를 사용하여 백인의 요새를 혼돈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이러한 파멸의 가능성은 기아와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들이 억제되었을 때에만 막을 수 있 다. 또한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산업화된 국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러한 원조 는 부유한 나라들의 경제적인 이해관계나 정치적인 기득권 같은 조건이 없이 무상으로 주어 져야 한다. 이것은 또한 자본주의의 정치, 경제적 원칙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이식시키려는 의도와 무관하게 주어져야 한다. 물론 경제적인 원조를 제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버(예컨 대, 사업이나 자본 투하에 의해서)은 경제 전문가들이 결정해야 할 문제이다. 그러나 진정한 전문가로서의 자격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리고 뛰어난 두뇌뿐만 아니라 만 족한 해결책을 모색하려고 애쓰는 상냥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이러한 목적에 봉사할 수 있다. 이러한 전문가들을 규합하고 또 그들의 충고에 따르기 위해서는 소유지향은 크게 약 화되고 연대감과 사랑의 감정(동정이 아닌) 등이 되살아나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이 지구상에 현재 살아 있는 동시대의 인류들에 대한 사랑뿐만 아니라 우리들 후손들에 대 한 사랑까지도 포함한다. 지구의 자원을 계속해서 낭비하고 지구를 오염시키며 핵전쟁을 준 비하는 등의 행위보다도 우리의 이기심을 더 잘 드러내주는 것은 없다. 우리는 우리의 후손 에게 이처럼 파손된 지구를 서슴없이 유산으로 물려주려 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적 변환은 과연 일어날 것인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세계가 알아 두어야 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런 내적 변환이 일어나지 않는 한 부유한 나라와 빈곤 한 나라 사이의 격차는 손댈 수 없는 지경으로 벌어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3. '오늘날 자본주의 및 공산주의 사회의 대부분의 불행은 연간 수입을 보장해 줌으로 써 없어질 것이다.' 이 생각의 요지는 모든 인간이 그가 일을 하든 안하든 관계없이 굶주림에서 벗어나고 주 거를 소유할 절대적인 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생존을 유지해 가는데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보다 많이 받을 필요도 없지만 그것보다 적게 받아서도 안 된다. 이러 한 권리는 기독교에 의해서 요청되고 많은 '원시'종족들에 의해 실천되어 온 오래 된 규범 이 지만, 오늘날에는 새삼스러운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인간은 그들이 '(사회에 대한 의무) 를 다하느냐 않느냐에 관계 없이 생존을 위한 절대적인 권리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 늘 날 이것은 우리의 애완동물에게나 보장된 권리이지 인간들에게 보장된 권리는 아니다. 개인적인 자유의 영역은 그러한 법률에 의해 엄청나게 확대될 것이다. 다른 사람(예를 들 면, 부모, 남편, 사장)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사람들은 굶주림을 강요받지 않게 될 것이며, 다른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재능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잠시 어느 정도의 궁핍한 생활을 감수할 용의만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의 복지국가는 이러한 원리를 거의 받아들였다. 그러나 '거의'라는 말은 실은 '진정으로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는 의미 가 있다. 관료주의가 아직도 사람들을 '지배'하고, 욕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연간 소득이 보장되면, 검소한 방과 최저한의 음식물을 얻기 위하여 요구되는 '증거서류'를 갖출 필요는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낭비적이고,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관료체제가 복지계획을 관리 할 필요는 없어지게 된다. 연간 수입이 보장됨으로써 진정한 자유와 독립이 보장된다. 따라서 착취나 지배에 입각한 체제, 특히 여러 형태의 독재체제에서는 이런 계획은 용납될 수가 없다.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무료상품(가령 무료 승차와 무료 우유배급)의 제안조차 끈질기게 거부해 온 것이 소련 체제 의 특징이다. 무료 의료봉사만은 예외지만, 그것도 순수한 의미의 무료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경우 무료봉사는 분명한 조건에 대해서만 제공되기 때문이다. 즉, 병이 들어야 만 무료치료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대규모적인 복지관료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현재 의 비용, 그리고 신체의 질병, 범죄, 마약중독(이 모든 것은 강제와 권태에 대한 여러 형태 의 저항이다)을 다루는 데 드는 비용을 생각하면, 누구든 원하는 사람에게 일정액의 연수를 보장해 주는 데 드는 비용이 이러한 사회보장체제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보다 아마 적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람은 선천적으로 게으르다'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는 실행 가능성도 없 고 또 위험한 생각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상투적인 말은 근거가 없는 것이다. 그 것은 힘없는 사람들에게 권력을 휘두르려는 사람들을 합리화시켜주는 슬로건에 지나지 않는 다. 4. 여성은 가부장적 지배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여성이 가부장적 지배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사회가 인간화 되는 데 기본적인 요건이다. 남성에 의한 여성지배가 시작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6천 년 전, 즉 농산의 잉여생산물로 인하여 노동자의 고용과 착취, 군대의 조직, 강대한 도시국가의 건설 등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부터였다. 그 이래 중동과 서방사회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세계문명은 여성을 정복한 '남 성 연합'에 의해 지배되어 왔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이러한 승리는 남성의 경제력과 그들이 건 설한 군사적인 기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양성간의 투쟁은 계급간의 투쟁만큼 역사 깊은 것이지만, 그 형태에 있어서는 전자가 좀 더 복잡하다. 왜냐하면, 남성은 여성을 일하는 암컷으로서뿐만 아니라 어머니로서, 애인으로 서, 또 위안자로서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양성간의 투쟁형태는 때로는 공공연하고도 잔인 한 형태를 띠지만, 대부분은 잠재적이다. 여성은 힘의 우위에 굴복하지만, 여성 특유의 무기 로써 반격했다. 남성을 조롱하는 것이 그들의 주된 무기이다. 인류의 절반을 다른 절반이 지배해 왔고, 또 아직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양성 모두에 대해 막대한 손실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남성은 승리자로서의 특성이, 여성은 피해자로서 의 특성이 습관화되었기 때문이다. 남녀간의 이런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남성 쪽에서는 우월 감, 또한 여성 쪽에서는-비록 의식적으로 남성 우위에 저항하는 여성들까지도-열등감이라는 해악으로부터 풀려나지 못하고 있다(무조건적인 남성우월론자인 프로이트는 유감스럽게도, 여성의 무력감은 페니스가 없다는 실망감에 기인하는 것이며, 남성들의 불안감은 '거세공포' 때문이라고 가정하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 우리가 문제삼는 것은 양성간에 일어나는 싸움의 증상이지 생물학적 해부학적 차이는 아니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지배가 무력한 대중에 대한 한 강력한 집단의 지배와 매우 흡사하다 는 것은 많은 자료가 제시하고 있는 바다. 한 예로서, 백 년 전 미국 남부의 흑인이 처한 상 황과 당시의 여성이 처한 상황의 휴사함을 생각해 보라. 오늘날도 이것은 마찬가지다. 흑인과 여성은 흔히 어린아이로 비교되었다. 즉, 그들은 감정적이고, 어리석고, 현실감각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내리는 결정은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책임감은 없지만 매력 적이라고 생각되었다(프로이트는 거기에 여성은 남성보다는 덜 발달된 양심, 즉 초자아를 가지고 있으며, 남성에 비해 자기도취적이라는 항목을 덧붙였다). 보다 약한 자에 대한 권력의 행사는 현존하는 가부장제의 본질이다. 또한 그것은 비산업 화된 국가에 대한 지배나 어린아이나 청소년에 대한 지배의 본질이기도 하다. 따라서 한창 유행하고 있는 여성해방운동은 중대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늘날의 사회가(자 본주의 사회이건 공산주의 사회이건) 기초로 삼고 있는 권력의 원리에 대한 위협이 되기 때 문이다. 여성의 해방이 남성이 다른 집단을 지배하는 힘, 예를 들어 식민지 백성을 지배하는 힘의 공유를 바라지 않는 것이 분명한 경우라면 말이다. 만약 여성해방운동이 '반권력'의 표 자로서의 역할과 기능을 확인할 수 있다면, 여성은 새로운 사회를 위한 투쟁에 결정적인 영 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이미 해방을 위한 기초적인 변혁은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후세의 역사가들은 20세기의 가장 혁명적인 사건은 여성 해방의 시작과 남성우위의 붕괴라고 기술할 것이다. 그러나 여 성해방을 위한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으며, 남성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다. 남성의 여성에 대한 전반적 관계(성적인 관계를 포함하여)는 가상적인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며, 그들 은 이미 남성우위의 신화를 인정하기를 거부한 여성들에 대해서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젊은 세대의 반권위주의적 경향은 여성해방운동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이 반권위주 의운동은 지난 60년대에 그 절정을 이루었다. 많은 변화과정을 거치면서 이제 체제에 대한 대부분의 반항아는 근본적으로 다시 '선량해졌다'. 그러나 가부장적, 또는 다른 권위에 대 한 숭배는 그 기세가 꺾여버렸으며, 권위에 대한 지난날의 '외경'은 되살아나지 않을 것같다. 권위로부터의 해방과 병행하는 것이 성에 대한 죄의식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이제 성에 대 한 이야기를 금기시하거나 죄악시하는 경향은 없어진 것 같다. 성의 혁명의 여러 측면의 상 대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즉, 성은 더 이상 놀라운 것이 아니며,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수단으로 사용되지도 못할 것 이다. 따라서 더 이상 성 때문에 복종이 강요되지도 않을 것이다. 5. '최고문화협의회, 즉 정부, 정치가, 시민들에게 지식을 필요로 하는 모든 문제에 대하여 조언을 해 줄 책임을 지는 기구가 설립되어야 한다.' 문화협의회의 구성원은 그 나라의 지식인과 예술가 집단의 대표자들로서,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성실성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야 할 것이다. 그들은 FDA가 확장된 형태인 새로운 조 직체의 구성을 결정할 것이며, 정보를 전파할 책임을 맡을 사람들도 선출해야 할 것이다. 문화계 각 분야의 뛰어난 대표가 누구인가 하는 것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의견일치가 이루 어져 있다. 따라서 그러한 협의회에 적합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은 쉽게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물론 이 협의체는 정설이 된 견해에 반대하는 사람들, 예컨대 정치, 경제, 사회학 분 야의 '급진주의자'와 '개혁론자'들의 대표도 참여시켜야 하며, 이것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 는다. 이 일을 수행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은 협의체의 구성원을 '찾는'데 있지 않고, 그들 을 '선택하는'데 있다. 왜냐하면, 그들을 국민투표에 의하여 선택할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다 고 정부가 임명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을 선택하기 위한 다른 방법이 모색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3, 4명의 핵심 멤버를 찾아낸 다음, 서서히 그 집단에 필요한 전체 인원, 말하자면 50명에서 1백 명 등으로 범위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문화협의회는 여 러 가지 문제에 관한 특수연구를 적당한 인물이나 기관에 위임할 수 있도록 충분한 예산이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6. '유효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보급하는 체제가 확립되어야 한다.' '정보'는 효과적인 민 주정치의 구성을 위한 근본적인 요소이다. '국가의 안전'을 위한다는 구실로 정보를 은폐한다거나 왜곡하는 일은 중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처럼 부당한 정보의 은폐가 없다 하더라도 현재 일반시민에게 주어지는 필요한 진짜 정보의 양이 거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또한 이것은 일반시민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흔히 보아온 바와 같이 대부분의 선 거에서 뽑힌 대표자들, 정부의 관리, 군대, 기업체의 지도자들도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지 못 한 채 종부의 여러 대리기관이 퍼뜨리고 보도기관들이 그대로 전하는 아주 거짓된 정보를 듣고 있다. 따라서 부당하게도 이4들의 대부분은 기껏해야 전적으로 조작된 지식을 갖고 있 을 뿐이다. 그들은 배후에서 작용하고 있는 힘을 이해할 능력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가 싫증나도록 들어 온 그들의 이기심과 부정직이 아니더라도 장래의 사태 진전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릴 능력을 거의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대재난을 해결 하기 위해서는 정직하고 영민한 관료가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몇몇 '거대한' 신문을 제외한다면 정치, 경제, 사회의 자료에 관한 사실적인 정보마저도 극 도로 제한되어 있다. 이른바 대신문들은 정보 제공이 나은 편이지만, 정보를 왜곡하는 데도 그에 못지않다. 뉴스의 편파적인 취사선택, 편향적인 제목, 흔히 기사내용과 일치하지 않는 제목, 외관상으로는 합리적, 교훈적인 언어로 위장되어 있는 당파적인 사설 등으로 그들은 정보를 왜곡한다. 사실상 신문, 잡지, 텔레비전, 라디오 등은 사건을 원료로 하여 뉴스라는 상품을 생산해낸다. 팔리는 것은 뉴스뿐이며, 보도기관은 어느 사건이 뉴스이고 어느 사건이 뉴스가 아닌가를 결정한다. 가장 좋은 정보라는 것도 기껏해야 기성품이며, 사건의 표면적인 현상에만 언급할 뿐이다. 그러므로 시민들에게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보고 사건의 보다 깊은 원인을 알아낼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는 일은 거의 없다. 뉴스의 판매가 장사인 한, 신문이 나 잡지는 (무절제할 정도로) 판매성이 높은 기사와 광고주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는 기사를 실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충분히 제공된 정보를 바탕으로 한 의견이나 결정이 가능하도록 하려면 정보의문제는 다 른 방법으로 해결해야만 한다. 그와 같은 방법의 예로 한 가지만 들어보자. 즉, 최고문화협 의회의 가장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는 전국민의 필요에 응할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여 알려줌으로써 참여 민주주의의 면접집단에게 토론의 근거를 마련해 주어야 할 것이다. 이러 한 정보는 정치적인 결정이 행해지는 모든 분야의 기초적인 사실과 기초적인 대안을 포함하 고 있어야 한다.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 경우 소수 의견과 다수 의견을 모두 발표해서 이것 을 모든 시민, 특히 면접집단들에게 모두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고문화협의 회는 이 새로운 뉴스 보고기구의 임무를 감독할 책임을 질 것이며, 물론 라디오와 텔레비전 은 이러한 정보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7. '과학적 연구는 산업 및 방위에 그것을 응용하는 일과는 분리되어야 한다.' 지식욕에 어떤 제한을 가한다면 인간 발전을 저해하는 일이 되겠지만, 과학적인 연구의 결과를 모 두 실제적으로 응용하려고 하는 것도 극히 위험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조해 왔듯이, 유전학이나 뇌수술, 정신의약, 그밖의 다른 많은 분야의 어떤 발견은 잘못 이용되면 인간에 게 커다란 해가 될 것이다. 그러나 사업 및 군사적 이익을 위해 모든 새로운 이론적 발견 이 자유롭게 응용되도록 허용하는 한 그 위험은 피할 수가 없다. 다라서 기업의 이윤이나 군사적인 편의를 위해서 과학적인 연구를 응용하려는 결정은 억제되어야 하며, 새로운 이 론적 발견을 실제로 응용할 필요성 여부를 결정하는 통제기구가 설치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통제기구는 물론 법적으로나 심리적으로 기업, 정부, 군부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어야 한 다. 최고문화협의회가 이 통제기구를 임명하고 감독할 권한을 가져야 할 것이다. 8. 이상 제시된 제안을 실천에 옮기는 데는 어려움이 많겠지만, 여기에다 새로운 사회의 또 하나의 필수요건, 즉 '핵무기의 철폐'를 첨가하게 되면 이 어려움은 거의 극복하기 어렵 게 된다. 대규모적인 군수산업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우리 경제의 병적인 요소의 하나이다.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미국에서조차 군사예산의 부담 때문에 건강과 복지와 교육에 관한 예 산을 삭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살상의 수단으로밖에 쓸모가 없는 총포의 생산 때문에 그 재 원을 탕진하고 있는 한 국가가 사회적 실험을 위한 비용을 감당해 낼 수는 없을 것 같다. 게다가 나날이 강대해져 가는 군사적 관료체제가 공포와 종속을 더욱 가중시키고 있는 분위 기에서는 개인주의와 능동성의 정신은 지속될 수가 없다. 2. 새로운 사회, 그 실현 가능성 기상의 급변같이 세게의 많은 지역에 일거에 기근을 가져올 수 있는 자연현상은 그만두고 라도 대기업의 권력, 대중의 무관심과 무능력, 핵전쟁의 위협, 생태학적 위험 등을 고려해 볼 때 '과연 구원의 적당한 기회가 있을까'하는 의문이 짙어진다. 상거래의 관점에서는 그런 가능성은 없다.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단 2%의 승산에다가 자기의 전재산을 걸거나 이 득의 가능성이 거의 없는 위험한 사업에다가 큰 자본을 투자할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것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문제가 되면 그 가능성이 아무리 작더라도 '적당 한 기회'는 '현실적 가능성'으로 해석해야 한다. 생명이란 확률놀이도 아니고 사업적인 거래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 구제 의 가능성을 찾아내야 한다. 이를테면, 의술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가령 환자가 회복할 가 망이 거의 없을 때라도 책임 있는 의사라면 '이제 가망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든지, 진통제 만을 투여한다든지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방 법을 강구할 것이다. 병든 사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현사회의 구제의 가능성을 생명의 관점에서가 아닌 투기나 상업의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 은 상업사회의 정신이 만연되어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정서가 없이 일이나 오락으로 바 쁘게 살아가는 일은 크게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오늘날의 기술 정치적 견해는 그다지 지혜 로운 것이 못 된다. 이 기술정치적 견해는 그다지 지혜로운 것이 못 된다. 이 기술정치적 견 해는 '만약' 잘못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결국 기술 정치적 파시즘이 등장하더라도 별로 나쁘지 않을는지도 모른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적인 관측이다. 기술정치적 파시즘은 필연적으로 파국을 초래할 것이 다. 비인간화된 '인간'은 지나치게 광적이 된 나머지 장기적으로는 생존력이 있는 사회를 지 탱해 나갈 수 없을 것이며, 단기적으로는 핵무기나 세균전 무기의 자멸적인 사용을 억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몇 가지 우리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희망적인 요소가 있다. 그 첫째는 차츰 많은 사람들이, 즉 메사로빅, 페스텔, P. 에를리히 및 A. 에를리히,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주 장해 온 다음과 같은 진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서구사회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 서는 '순수한 경제적인 근거에서' 새로운 윤리,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 인간적 유대, 협동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감정적, 윤리적 고려는 차치하고라도, 이성에 대한 이러한 호소는 적 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가볍게 보아서는 안된다. 역사적으로 여러 국민이 때때로 자신들의 중대한 이해관계, 더 나아가서는 생존에 대한 욕구에까지도 반하는 어처구니없는 행동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죽느냐 사느냐'하는 문제는 그 들과는 관계가 없다고 지도자로부터 설득당하고, 또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었기 때 문이다. 그들이 진실을 인식했더라면 정상적인 신경생리학적 반응이 일어났을 것이다. 즉, 생명의 위협에 대한 자각이 거기에 대한 방어행동을 일으켰을 것이다. 또 한 가지 희망적인 전조는 오늘날의 사회체제에 대한 불만의 표시가 증대하고 있다는 점이다. 점점 많은 사람들이 '세기의 불안'을 느끼고 있다. 그들은 그것을 억제하려는 모 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억압을 의식하고 있다. 그들은 고립의 불행과 '공존'의 공허를 느낀다. 그 들은 또 스스로의 무력감과 스스로의 삶이 무의미함을 느끼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히 느끼지는 못하지만, 다른 누가 말해 주기만 하면 충분히 그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역사로 볼 때 공허한 쾌락적 생활은 단지 소수 엘리트에게만 가능하였다. 그들은 본 질적으로 제정신을 잃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권력을 쥐고 있다는 것과,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행동해야 된다는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공허한 소비생활은 경제적, 정치적으로 무력하며 개인적인 책임감도 거의 없는 전체 중산계급의 것 이 되어 있다. 서구사회의 과반수는 행복스러운 소비형의 혜택을 알고 있으며, 그리고 그런 혜택을 입고 있으면서도 그것으로는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수가 점점 늘고 있다. 또한 그들은 많이 소유한다고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발견하기 시작했다. 전통적인 윤리적 가르침이 한동안 실험대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이제 경험에 의해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중산계급적인 사치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들에게만 낡은 환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그들은 서구 사회의 중하층계급과 '사회주의' 국가의 대다수 국민들이다. 사실상 '소 비 를 통한 행복'이라는 부르즈와적 희망은 아직 그 부르조아적 꿈이 성취되지 못한 나라에서 가장 생생하게 살아 있다. 탐욕과 시기는 극복될 수 없다는 강력한 주장 중의 하나, 즉 탐욕과 시기는 인간의 본성 에 강하게 뿌리박고 있다는 주장은 연구의 진척에 따라 점점 그 설득력을 잃고 있다. 탐욕 과 시기가 그토록 강한 것은 그것의 '본질적인 강도'때문이 아니라, 다 같이 이리가 되자는 공중의 압력에 저항하기 어렵다는 데에 기인한다. 사회적인 풍토를 바꾸고, 시인 혹은 부인 의 가치관을 바꾸기만 하면 이기심에서 이타심으로의 변혁은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여기서 존재지향이 인간본성에 내재하는 강한 잠재성이라는 전제로 되돌아가자. 소수만이 소유양식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으며, 반면에 또 다른 소수는 존재양식에 완전히 지배되고 있다. 둘 다 우위를 차지할 가능성을 찾고 있으며, 어느 쪽이 우위를 차지하냐는 사회구조에 의해 좌우된다. 존재 지향이 주도하는 사회에서는 소유경향은 소멸되고 존재양식이 자란다. 우리 사회처럼 소유경향이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그 반대현상이 일어난다. 그러나 생존의 새 로운 양식은 비록 억압되어 있기는 하지만 언제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이 개종 하기 전에 이미 바울이 될 수 있는 요소가 내재하지 않는 한 바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회적 변혁과 관련해서 새로운 것이 장려되고 낡은 것이 억제될 때 저울대는 실상 소유 로부터 존재로의 변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새로운 '인간'과 낡은 '인간'의 차 이는 하늘과 땅 사이의 차이는 아니다. 그것은 방향 변화의 문제이다. 새로운 방향으로 한 걸음 내디디면 바로 다음 것이 뒤따를 것이며, 방향을 옳게만 잡았다면 시작은 반인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고려해야 할 고무적인 측면은, 역설적이지만 지도자들까지 포함한 대 부분의 사람들을 특징짓고 있는 소외의 정도에 관련된 문제이다. 앞에서 '시장적 성격'을 논 할 때 지적했듯이 소유와 축재에 대한 욕심은 단순히 (체제속에서) 잘 기능하려는 경향, 자 신을 단순한 상품으로 교환하려는 경향에 의해 수정되어 왔다. 광적으로 자기의 소유물, 특 히 자아에 집착하는 축재적 성격보다는 소외된 시장적 성격이 변화하는 것이 훨씬 쉽다. 대부분의 인구가 '독립생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던 백 년 전에는 변화에 대한 최대의 장 애는 재산과 경제적인 독립을 상실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에서 오는 저항이었다. 마르크 스는 노동자 계급이 유일한 대규모의 종속계급이었던 시대에 살았다. 또 마르크스의 생각으 로는 그들이 가장 소외된 계급이었다. 오늘날은 인구의 대부분이 '종속적'이며 실제로 대부 분이 '고용되어' 일하고 있다. 그리고 적어도 미국에서는 전통적 중산계급의 축재적 성격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층은 육체노동자들뿐이며, 그들은 오늘날 보다 소외되어 있는 중산층보 다 변혁에 대해 더욱 페쇄적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은 매우 중요한 정치적 결과를 초래한다. 사회주의는 모든 계급 의 방향, 즉 계급 없는 사회를 추구하면서도 주로 '노동자 계급', 즉 육체노동자에 호소하 고 있다. 오늘날의 노동자 계급은 (상대적으로 말하면) 1백 년 전에 비해 소수집단이다. 권력을 획득하기 위하여 사회민주주의 정당은 중산층의 지지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 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들의 강령을 사회주의적인 이상에서 자유주의적인 개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노동자계급을 인도주의적인 변혁의 지렛대로 인정함 으로써 사회주의는 필연적으로 모든 다른 계급의 저항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들 다른 계급들은 노동자 계급에게 자기네들의 재산과 특권을 빼앗길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날 새로운 사회에 대한 호소는, 소외로 인해 고통받고 있는 모든 사람, 모든 피고용자 들, 새로운 사회의 출현으로 자기 재산이 위협받지 않을 모든 사람들을 향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소수에 그치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관련된 문제이다. 그것은 어느 누 구의 재산도 위협함이 없이 수입에 관한 한에서는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의 생활수준을 높여 줄 것이다. 고위관리직의 높은 보수는 낮아질 필요가 없겠지만, 새로운 사회체제가 작동하게 되면 그들은 구시대의 상징으로 남기를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새로운 사회의 이상은 모든 정당의 노선을 초월할 것이다. 즉, 많은 보수주의 정당 은 그들의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이상을 잃지 않을 것이며, 많은 자유주의 정당과 좌익 정당 도 마찬가지이다. 각 정당은 자기들이야말로 인도주의의 참된 가치를 대표한다고 설득함으 로써 유권자를 유혹한다. 그러나 모든 정당의 배후에는 두 진영만이 존재할 뿐이다. 즉, ' 사 랑하는 진영과 사랑하지 않는 진영이다'. 만일 사랑 쪽에 가담애 있는 모든 진영이 정당 의 상투성을 버리고 그들이 모두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는 점을 실감할 수만 있다면, 가능성은 뚜렷하게 증대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특히 대부분의 시민은 당파적인 충성과 당의 슬로건 에는 차츰 흥미를 잃어가고 있으므로, 그 가능성은 특히 높아진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동경 하고 있는 것은 지혜와 신념을 갖고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용기있는 인간이다. 이런 희망적인 요인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사회적 변혁의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 우 리의 유일한 희망은 새로운 이상의 활력적인 견인력이다. 체제의 변혁이 없이 이렇게 저렇 게 개혁을 시도하는 것은 결국 헛일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강력한 동기라는 추진력이 따 르지 않기 때문이다. '공상적' 목표가 오늘날 지도자들의 '현실주의'보다 훨씬 현실적이다. 새 로운 사회와 새로운 인간의 실현은 이윤, 권력, 지식과 같은 낡은 동기가 존재, 공유, 이해와 같은 새로운 동기에 의해 대치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 또한 시장적 성격은 생산적인 사랑 의 성격에 의해 대치되어야 하며, 사이버네틱스 종교는 급진적인 인도주의의 새로운 정신에 의해 대치되어야 한다. 실제로 유신론적 종교가 밑바탕을 이루지 않은 사람들에게 있어 근본적인 문제는 인도주 의적인 '종교성'으로의 개종이라는 문제이다. 인도주의적인 '종교성'은 종교가 아니며, 독단 적 인 교리도 기구도 갖고 있지 않은, 석가에서 마르크스에 이르는 비신적인 종교적 운동이 오 랜 기간에 걸쳐 준비해 온 것이다. 우리는 이기주의적인 물질주의와 신에 대한 기독교적인 개념의 용인 사이의 선택에 직면해 있는 것이 아니다. 사회생활 그 자체가-노동, 여가, 인간 관계의 모든 측면에서-'종교적 정신'의 표현이 될 것이며, 이것과 별도의 어떤 종교도 필 요 없게 될 것이다. 비신적인, 제도화되지 않은 새로운 '종교성'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현존하 는 종교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로마의 관료주의에서 비롯된 로마 카톨릭 교회는 복 음서의 정신 '그 자체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사회주의 여러 나라'가 '비 사 회주의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거짓된 사회주의는 진정한 인도주 의적인 사회주의로 대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중세 후기의 문화가 번창한 것은 사람들이 '신의 나라'의 이상을 따랐기 때문이다. 근대사 회는 사람들이 '지상의 진보된 나라'의 성장이라는 이상에서 활력을 얻음으로써 번영을 이 루 었다. 그러나 금세기에 와서 이러한 이상은 '바벨 탑'의 이상으로 타락했다. 이제 그것은 무 너지기 시작했으며, 결국은 그 폐허 속에 모두를 묻어버리고 말 것이다. 만약 신의 나라와 지상의 나라가 '정'과 '반'이라면 하나의 새로운 '합', 즉 중세 후기의 사회의 정신적 핵심 과, 르네상스 이래의 합리적인 사고 및 발달된 과학의 총합이 이 혼돈에 대신하는 오직 하 나의 선택이다. 이 총합이 곧 '존재의 나라'이다. 역자의 말 본서는 신 프로이트 학파의 거성으로 알려져 있는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저서 'To Have or To Be'의 완역본이다. 원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책에서 그는 현대인의 생활 양식을 '소유'와 '존재'로 이분했다. '소유'와 '존재'의 양극 사이에서 다양하게 존재하는 인 간 들에게, 물질적 소유와 탐욕의 '소유양식'에서부터 창조하는 기쁨을 나누는 '존재양식'으로 의 일대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본서의 주된 내용이다. 자본주의가 낳은 병폐의 하나인 '소유양식'은 주체와 객체를 모두 사물화한다. 이에 따르 는 생산과 소비의 악순환이 현대사회의 실체임을 파악한 프롬은 집착을 탈피하여 변화를 수 용하고 모든 관계를 살아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존재양식'으로 바꾸도록 이끈다. 본서는 이론에만 머물지 않고 실질적인 방안까지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특징인데, 그 실 현 가능성은 미루고라도 세밀한 관찰과 예리한 통찰력을 바탕에 깔고 있어 더욱 높이 평가 되고 있다. 삶을 긍정하는 '극단적 인도주의자'의 견지에서 새로운 삶과 미래를 열망하는 프 롬은, 현실적인 변혁의 수단에 까지 눈을 돌려서, 중앙집권을 배제하고 개인이 완전한 정보 를 얻을 수 있는 '참여 민주주의'의 원리를 주장했다. 갖가지의 진보적인 이론이 학문으로서의 정착을 준비하는 오늘날, 본서가 우리에게 제시 하는 미래사회는 쉽게 이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질문명이 산출한 난제들에 대한 해결 책으로서는 수용자의 근본적인 태도가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파시즘의 물결이 유럽을 휩쓸고 대중을 휘어잡고 있던 당시의 체험이 '근대인에게 있어서 의 자유의 의미'를 추구하는데 일생을 바치도록 프롬을 자극했던 사실은 그의 저서를 읽는 모든 이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오늘날 사상 전역에 걸쳐서 미치는 프롬의 영향력은 심지어 '시 좌익'에까지 미치고 있다. 이는 시대를 직시한 학자에게 주어진 정당한 대가로 평가된다. 프롬은 1900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부모 사이에서 출생했다. 하이델베르크, 프랑 크푸르트, 뮌헨 등의 대학에서 사회학과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다시 베를린 대학에 들어가 정신분석학 공부를 했다. 1933년, 미국으로 건너간 프롬은 예일, 미시건, 뉴욕 등의 대학에서 강의를 했고, 멕시코 대학을 거쳐 최근에 이르기까지 연구 및 저술에 전념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본서 외에 '자유로부터의 도피', '건전한 사회', '사랑의 예술' 등을 들 수 있다. 본서는 금세기의 탁월한 사회 사상가의 한 사람인 저자가 그 일생을 바친 연구의 결실이 다.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데 자상한 지침이 되 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