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부터 내려오는 신학적 및 세속적 의미에서의 죄는 권위주의적 구조 안에서 나온 개념이 며, 이 구조는 생존의 소유양식에 속한다. 이런 구조 안에서는 우리의 인간적 중심이 우리 자신에 있지 않고 우리가 복종하는 권위에 있다. 우리가 행복에 이르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산적 능동성에 의해서가 아니고 수동적 복종과 그 결과로서의 권위에 따른 시인에 의해서 이다. 우리는 지도자(왕, 여왕, 또는 하느님 등의 세속적 혹은 영적 지도자)를 '가지며', 그에 대한 신뢰를 또한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아무도 아닌 한 (자신을 못 찾는 한) 안정감 을 '갖는다'. 굴종이 반드시 굴종으로 의식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것은 부드러울 수도 있고 엄격할 수도 있으며, 정신적, 사회적 구조가 전적으로 권위주의적일 필요는 없으며 다 만 부분적으로 그렇다는 등의 사실을 내세움으로써 '우리는 우리 사회의 권위주의적인 구 조를 내면화할 정도로 소유양식 속에 깊이 빠져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지고 있던 권위, 불복종, 죄에 대한 개념은 알폰스 아워(Alfons Auer)가 지극히 간격하게 강조한 바와 같이 매우 인도주의적인 것이었다. 즉, 그는 불합리 한 권위에의 불복종의 죄가 아니며 인간의 '복리'를 침해하는 것이 죄라고 하였다. 따라서 아퀴나스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복리에 어긋나게 행동하지 않는 한 신은 우리에 의해서 모독될 수 없다.' 이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토 마스 아퀴나스에게 있어서 인간선(bonum humanum)은 완전히 주관적인 욕망에 의해 독단 적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며, 본능적으로 주어진 (스토아 학파적 의미로는 '자연적인') 욕 망에 의한 것도 아니며, 또 신의 독단적 의지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을 생각 해야만 한다. 그는 그것은 인간본성과 그 본성에 기초해서 우리의 만족스런 성장과 복리에 기여하는 규 범에 대한 우리의 이성적인 이해에 의해 결정된다고 보았다(토마스 아퀴나스는 충실한 교회 의 아들이요, 혁명적 분파에 대항하여 당시의 사회질서를 옹호하던 인물이었으므로, 비권위 주의적 윤리의 순수한 대변자가 될 수 없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두 가지 종류 의 불복종에 대해 모두 '불복종'이라는 말을 사용했기 때문에 그의 입장에 내재하는 모순 을 모호하게 하였다.) 불복종으로서의 죄는 권위주의적 구조, 즉 '소유'구조의 일부분이 되고 있지만 존재양식을 근거로 한 비권위주의적 구조에서는 이것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다른 의미 또한 성서 중 인간 타락의 이야기 속에 암시되어 있으며, 그 이야기를 달리 해석함으로써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은 인간을 에덴 동산에 살게 한 다음, 생명의 나무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 매는 따먹지 말라고 경고했다. '인간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보고 하느님은 여자를 창조하였다. 그리고 남자와 여자는 하나가 되도록 하였다. 둘은 다 발가벗고 있었지만 '그들 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 말은 보통 옛날부터의 성적 관습, 남자와 여자는 성기가 노출 되면 부끄러워할 것이라고 여기는 관습의 입장에서 해석되고 있다. 그러나 원문이 뜻하는 것이 이게 전부는 아닌 것 같다. 더 깊이 생각해보면,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남자와 여자가 완전히 서로 대했지만 그들은 부끄러워하지도 않았 고 부끄러워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서로를 각 개인으로 분리된 낯선 사람으로 경험하지 않고 '하나'로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 전인간적 상황은 타락 이후에 극단적으로 변한다. 남자와 여자는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즉, 이성을 갖게 되고 선악을 의식하게 되고, 서로를 분리된 존재로 의식하게 되며, 그들의 본래의 일체성이 깨어지고 서로 타인이 되어 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서로 밀 접하지만 나뉘어져 멀리 떨어진 것처럼 느낀다. 그들은 아주 깊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동료 를 '발가벗은' 채 대하면서 동시에 서로간의 거리, 그들을 갈라놓고 있는 말할 수 없는 심연 을 경험하는 수치를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인간으로서의 만남, 즉, 벌거숭이로 서로 를 바라보는 이 만남을 가리기 위해 '각각 나뭇잎을 허리에 감았다' 그러나 죄나 수치는 가림으로써 없앨 수가 없다. 그들은 서로 사랑의 손길을 뻗치지 않았다. 아마 그들은 육체적 으로 서로를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결합이 인간의 소원함을 풀어주지는 못한다. 그들이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서로를 대하는 태도에 암시되어 있다. 즉, 이브는 아 담을 보호하려 하지 않으며, 아담은 이브를 변호하지 않고 벌을 면하기 위해 그를 죄인으 로 탄핵한다. 그들은 무슨 죄를 범했는가? 사랑의 결합행위 속에서 격리를 극복할 수 없는 분리되고 고 립된 이기적 인간으로서 서로를 대한 것이다. 이 죄는 바로 우리 인간생존 속에 뿌리박혀 있다. 내재된 본능에 의해 생활이 결정되는 동물의 특징인 자연과의 원초적 조화를 박탈당 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이성과 자의식이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다른 인간과의 완전 한 격리를 경험하지 않을 수 없다. 가톨릭 신학에서는 존재의 이런 상태, 사랑에 의해서 다 리가 놓여지지 않은, 서로간의 완전한 격리와 불화의 상태가 '지옥'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견딜 수 없다.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든 이 절대적 격리라는 고문을 극복해야 만 한다. 굴종에 의해서건 지배에 의해서건 혹은 이성과 의식을 침묵함으로써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방법들이 가져다주는 성공은 순간적일 뿐이며, 진정한 해결에의 길을 가로막는다. 이 지옥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우리가 갇혀 있 는 자기중심적인 뇌옥에서 벗어나 손을 뻗어 세계와 우리 자신을 '하나'로 하는 것뿐이다. 자기중심적인 분리가 엄청난 죄라면 그 죄는 사랑의 행위 속에서 보상(atonement)될 수 있 다. 분리의 죄는 불복종의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사면'이 아닌 '치유'를 필요로 한다. 그리 고 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그 치유의 요소이다. 라이너 풍크(Rainer Funk)는 내게 비합일(disunion)로서의 죄의 개념은 예수의 비권위주 의적 죄의 개념을 따르는 일부 신부들에 의해서도 제시된 적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앙리 드 뤼박의 저서에서 발췌한) 다음과 같은 예를 제시했다. 즉, 오리게네스(Origenes)는 이렇게 말했다. '죄가 있는 곳에는 다양성이 있다. 반면에 덕이 지배하는 곳에는 단일성이 있고 합 일(oneness)이 있다.' 또 증성자 막시무스(Maximus)는 아담의 죄로 인해 인류가 (내 것과 네 것 사이의 투쟁이 없이 조화로운 전체여야 하는데 개인이라는 모래 먼지로 변모했다' 고 말하고 있다. 아담으로 인해 파괴된 본래의 합일에 관한 비슷한 사상은 성 아우구스티누스 의 사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으며, 또한 아워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 속에서도 찾을 수가 있다. 다음은 드 뤼박이 요약한 것이다. '회복작업으로서의 구원 은 필연적으로 잃어버린 합일의 부활, 즉 신과의 초자연적인 합일, 또 동시에 인간들 상호간 의 합일을 다시 얻는 것으로 보인다.' 요약하면 권위주의적 체계인 소유양식에서는 죄는 불복종이며 참회, 징벌, 새로운 굴종에 의해 극복된다. 존재양식, 즉 비권위적인 체계에서는 죄는 해소되지 않는 소원함이며, 이것 은 이성과 사랑의 충분한 개화로 하나가 됨으로써 극복된다. '타락'의 이야기는 두 가지로 해석된다. 그것은 이야기 자체가 권위주의적 요소와 자유주 의적 요소의 혼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 속에서 각각 불복종과 소외로서의 죄 의 개념은 완전히 상반되어 있다. 구약에 나오는 바벨 탑의 이야기도 마찬가지 사상을 내포하고 있는 것 같다. 인류는 모든 인류가 하나의 언어를 갖고 있다는 사실로 상징되는 합일의 상태에 도달하였다. 권력을 추 구하는 그들 자신의 야망 때문에, 거대한 탑을 '소유하려는' 갈망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의 합일을 깨뜨리고 뿔뿔이 흩어진다. 어떤 의미로는 이 탑의 이야기는 제 2의 '타락'이며 인간 성의 역사적 죄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신이 인간의 합일과 그에 따른 힘을 두려 워한다고 되어 있어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그 경 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란케 하여 그들을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세기 11 : 6 ~ 7).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타락의 이야 기도 마찬가지다. 거기서도 신은 남자와 여자가 두 나무의 과일을 먹을 경우 그들이 발휘하 게 될 힘을 두려워한다. 5. 죽음의 공포와 삶의 확인 사람이 자기 재산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소유물에 바탕을 둔 안전의식이다. 나는 이 생각을 한 걸음 더 진전시켜 보고자 한다. '재산'에 집착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을 잃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은 가능할지도 모른 다. 그러나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죽음에 대한 공포는 어떻게 할 것 인가? 그것은 다만 늙은이와 환자만의 두려움일까? 아니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는가? 우리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우리의 전생애를 침식하고 있는가? 죽음의 공포는 우리가 나아가 병으로 삶의 한계에 다가갈수록 더욱 강렬해지고 더욱 의식하게 되는 것인 가? 유년기에서 노년기까지의 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현상을 조사하고 그것이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다루려면 정신분석학자들의 체계적인 대규모 연구가 필요하다. 이 연구를 개인적인 사례에 국한할 필요는 없고, 사회정신분석학의 기존 연구방법을 사용해 서 대집단을 대상으로 조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연구 결과가 현재는 없으므로, 우리 는 얼마 안 되는 데이터로부터 잠정적 결론을 끌어내야만 한다. 인간 내면에 깊이 숨어 있는 불멸에 대한 욕망이 아마 가장 중요한 데이터이리라. 이 욕 망은 인체를 보존하려는 여러 의식과 신앙에서 나타난다. 한편 오늘날의, 특히 미국에서 볼 수 있는 사체의 '미용'에 의한 죽음의 부정도 단순히 죽음을 위장함으로써 죽음의 공포를 억누르려는 기도를 말하는 것이다. 참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밖에 없다-그것은 석가, 예수,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가르친 방법이다. 그 방법은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을 소유물로 경험하지 않는 것'이다. 죽음의 공포는 얼핏 삶의 정지에 대한 두려 움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죽음은 우리와 관계가 없다고 에피쿠로스가 말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은 죽음은 아직 우리 곁에 없으며, 죽음이 닥쳐왔을 때는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분명히 죽음에 앞서 일어 날지도 모르는 고통과 아픔에 대한 두려움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두려움은 죽음의 공 포와는 다른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는 이와 같이 불합리한 것으로 보이지만 삶이 소유로 서 경험될 때에는 그렇지 않다. 그 경우의 공포는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고 '소유한 것을 잃는 데' 대한 것이다. 내 육체를 잃는 두려움, 내 자아, 내 재산, 내 주체를 잃는 데 대한 두려움이며, 비주체의 심연을 대해야 하는 두려움, '잃어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이다. 소유양식 속에 사는 한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해야 한다. 어떤 이상적인 설명도 이 두려움 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바야흐로 죽음의 시간에라도, 삶에 우리가 결합되어 있다 는 재확인, 우리 자신의 사랑을 불태우는 다른 사람들의 사랑에 대한 반응에 의해서 두려움 을 경감시킬 수 있다. 죽음에 대한 공포를 없애는 것은 죽음을 위한 준비로서가 아니라 ' 소유양식을 감소하고 존재양식을 증대하는' 끊임없는 노력으로서 시작되어야 한다. 스피노 자가 말한 것처럼 현명한 사람은 오직 삶에 대해 생각할 뿐,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 는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은 사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과 마찬가지 다. 모든 형태의 소유에의 갈망, 특히 자아의 속박을 벗어나면 죽음에 대한 공포는 더욱 약 해질 것이다.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6. 지금, 여기 과거, 미래 존재양식은 지금, 여기(hic et nunc)에만 존재하고, 소유양식은 다만 시간 속에만, 즉 고 거, 현재, 미래에 존재한다. 소유양식에서는 우리는 우리가 '과거'에 모은 것, 즉 돈, 토지, 명상, 사회적 지위, 지식, 자녀, 기억 등에 구속된다. 우리는 과거를 생각하며 과거의 감정(혹은 명상처럼 생각되는 것)을 '기억함'으로써 느낀다(이것이 감상의 본질이다). 우리는 과거'이며' '나는 과거의 나 (Iam what I was)'라고 말할 수 있다. '미래'는 이윽고 과거가 될 것에 대한 예측이다. 미래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소유양식으로 경험된다. 예를 들면, '이 사람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는 표현의 뜻은, 이 사람은 지금은 기지고 있지 않지만 이윽고 많은 것을 '소유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드 회사의 광고 문구는 '당신의 미래에는 포드가 있다'인데, 이 말은 미래의 '소유'를 강조한 것이다. 어떤 사업 거 래에서 '선물상품'을 팔고 사는 것도 비슷한 예이다. 소유의 기본적 경험은 과거를 다루는 미래를 다루든 똑같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마주치는 점이다. 즉, 시간의 경계역이다. 그러나 그것이 연결하는 두 영역과의 질적인 차이는 없다. 존재는 반드시 시간 밖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시간이 존재를 지배하는 영역은 아니다. 화 가는 물감, 캔버스, 붓과 씨름해야 하며, 조각가는 돌, 끌과 씨름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들의 창조적 행위, 그들이 창조하려는 것의 '비전'은 시간을 초월한다. 그것은 한 순간의 번득임, 또는 여러 번의 번득임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그 비전 속에서 시간은 경험되지 않는다. 사상 가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이 사상을 적는 행위는 시간 속에서 일어나지만 그 사 상을 생각해 내는 것은 시간 밖에서 일어난 창조적 사건이다. 이것은 존재의 모든 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사랑의 경험, 기쁨의 경험, 진리를 파악하는 경험은 시간 속에서 일어 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 '지금 그리고 여기는 영원이다.' 즉, 시간을 초월하 고 있다. 그러나 영원은 흔히 오해되고 있는 것처럼 무한정으로 계속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거와의 관계에 대해서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성립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우리 가 언급한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고 되새기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과거를 '소유'하는 양식에 있어서는 과거는 죽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과거를 되살아나 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과거의 상황을 마치 그것이 지금 여기서 일어난 것과 같은 신선함 으로 경험할 수가 있다. 즉, 과거를 재창조할 수 있으며, 그것을 되살릴 수 있다(상징적으로 말하면, 죽은 자를 부활시킬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과거는 과거이기를 중지하고 지금 그 리고 여기에 '존재한다'. 미래도 또한 그것이 마치 지금 그리고 여기 있는 것처럼 경험할 수가 있다. 이런 현상은 우리 자신의 경험 속에 미래의 상태가 아주 충분히 예측되어, '객관적으로'만, 즉 외적인 사실로서만 미래일 뿐 주관적 경험으로서는 미래가 아닐 때 생긴다. 이것이 (유토피아적 백 일몽과는 대조적인) 진정한 유토피아적 사고의 본질이며, 진정한 믿음, 즉 미래를 현실로서 생생하게 경험하기 위해 '미래의' 외부적 실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 믿음의 기초이다. 과거, 현재, 미래, 즉 시간의 모든 개념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로 인해서 우리의 삶 속으로 파고든다. 즉, 제한된 우리의 삶, 끊임없이 신경을 써야 하는 우리 육체의 요구, 우리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용해야 하는 물질세계의 본질, 이런 것들이 시간을 우리 삶 속으 로 파고들게 한다. 우리는 영원히 살 수 없다. 유한하기 때문에 우리는 시간을 무시할 수도, 시간으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밤과 낮, 잠과 깨어 있음, 성장과 노쇠의 리듬, 노동으로 우 리 자신을 지탱하고 방어해야 할 필요성, 이런 모든 요소들은 우리가 살기를 바라는 한, 또 우리 육체가 우리에게 살기를 원하는 한 시간을 '존중하도록' 강요한다. 그러나 우리가 시간 을 '존중하는' 것과 우리가 그에 '굴복하는' 것은 별개의 것이다. 존재양식에서는 우리는 시간을 존중하지만 그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시간의 존중은 소유양식이 지배하는 때 는 '굴복이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물건만이 물건이 아니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물건이 된다. 소유양식에서는 시간이 우리의 지배자가 된다 존재양식에서는 시간은 왕위를 잃고,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을 지배하는 우상이 되지 못한다. 산업사회에서는 시간이 최고의 지배자가 된다. 오늘날의 생산양식은 모든 행동이 정확한 '시간제한' 속에 행해질 것을 요구한다. 끝없는 일관작업의 콘베어 벨트뿐만 아니라, 그렇 게까지 지독하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우리 활동이 시간에 의해 지배된다. 또한 시간은 단순 히 시간일 뿐만 아니라, '시간은 돈이다'. 기계는 최대한으로 이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기 계는 스스로의 리듬을 노동자에게 강요한다. 시간은 기계에 의해서 우리의 지배자가 되었다. 우리는 자유시간에 한해서만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작업을 조직화하듯이 우리의 여가까지도 조직화한다. 또 한 우리는 완전히 게을러짐으로써 시간이라는 전제군주에 반항한다. 시간의 요구에 불복종 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자유롭다는 환상을 갖지만, 실상 우리는 이때 시간이라는 감옥으로부터 잠시 가석방되어 있는 데 불과하다. 제 3 편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제 7 장 종교, 성격, 사회 이 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명제를 다루고자 한다. 즉, 사회의 변화가 사회적 성격의 변화와 상호작용을 한다는 것, 또 '종교적' 충동이 철저한 사회적 변화를 달성하도록 남녀를 움직이 는 데 필요한 에너지를 제공한다는 것, 인간의 마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때, 즉 새로 운 헌신의 대상이 현재의 대상에 대체될 때 새로운 사회가 도래한다는 것 등이다. 1. 사회적 성격의 기초 이와 같은 고찰의 출발점은, 흔히 개인의 성격구조가 그가 속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 는 상호의존되어 있다는 설이다 나는 개인의 정신적 영역과 사회경제적 구조의 혼합을 '사 회적 성격'이라고 부른다. 한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는 그 구성원들이 해야 할 일을 '하고 싶어' 하게끔 그들의 사회적 성격을 형성시킨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 성격은 사회구조에 한 층 안정성을 주는 시멘트로서, 또는 특정한 환경하에서 사회구조를 파괴하는 다이나마이트 의 작용으로서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사회적 성격과 사회구조 사회적 성격과 사회구조의 관계는 아무래도 정적인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관계에 있어서 두 요소는 다같이 끝이 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어느 한 요소의 변화는 양자의 변화를 뜻한다. 대다수의 정치혁명가들은 우선 근본적으로 정치적 및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켜야만 하며, 그러면 제 2의 거의 필연적인 단계로서 인간의 정신도 변화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 리고 일단 확립된 새로운 사회는 반자동적으로 새로운 인간을 만들어낸다고 믿고 있다. 그 들은 구시대와 같은 성격에 의해 움직이는 새로운 엘리트가, 혁명이 창조한 새로운 사회 정 치적 제도 안에서 옛 사회의 조건들을 재창조하려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래서 혁명 의 승리는, 그 완전한 발달을 방해받은 사회경제적 발전을 가능케 한 역사적 단계로서는 패 배가 아니지만, 혁명 그 자체로서는 패배이다.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은 전형적인 예이 다. 레닌은 원래 성격이 사람의 혁명적 기능에 중요하다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만년에는 스 탈린의 성격적 결함을 날카롭게 꿰뚫어본 후 그 견해에 극단적으로 변화를 일으켜, 유언장 에서 그 결함 때문에 스탈린을 자신의 후계자로 해서는 안된다고 요청한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그 반면에 우선 인간의 본성-의지, 가치, 성격-이 변해야만 하며, 그런 다음에 비로소 진정으로 인간적인 사회가 건설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그들 의 오류를 증명하고 있다. 순수한 정신적 변혁은 항상 사적인 범위에 머물거나 작은 오아시 스에 한정되어 왔으며, 정신적인 가치관에 관한 가르침에 반대되는 가치관의 실행과 결합될 때는 완전히 무력해지곤 했다. 2. 사회적 성격과 '종교적' 욕구 사회적 성격은, 어떤 형의 성격을 필요로 하는 사회적 요구에 응하고, 개인의 성격을 조건 으로 하는 행동 요구에 응하는 것 이상의 뜻깊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사회적 성격은 인간 의 선천적인 종교적 욕구까지도 충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분명히 밝혀두지만, 여기서 쓰 고 있는 '종교'라는 용어는 반드시 신이나 우상과 관련된 체제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또 종 교로서 의식되는 어떤 제도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다. 이 용어는 '개인에게 방향 설정의 테 두리와 헌신의 대상을 주는 사상과 행동의 체제를 공유한' 집단을 말한다. 이처럼 광범한 의미에서 이 단어를 생각해 볼 때 과거와 현재의 그 어떤 문화, 그리고 미래의 그 어떤 문 화도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와 같은 '종교'에 대한 정의는 그 명확한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동물, 나무, 황금이나 돌로 만든 우상, 보이지 않는 신, 성스러운 사람, 또는 악마 적인 지도자를 숭배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조상, 국가, 계급 혹은 당파, 돈 혹은 성공을 숭 배할지도 모른다. 이런 종교는 파괴성이나 사랑의 발전을 초래할 수도 있고, 지배 또는 단결 의 발전을 초래할 수도 있다. 더 나아가 그것은 그들의 이성의 힘을 증대시키거나, 또는 마 비시킬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기들의 체제를 속세의 그것과는 다른 종교적인 것으로 의식 할지도 모르고, 자신들이 종교를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세속적인 목표, 즉 권력, 돈, 성 공과 같은 것들에 대한 자신들의 헌신은 실제적인 것과 편리한 것에 대한 관심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석할는지도 모른다. 문제는 '종교가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종교냐 '이다. 즉, 특히 인간적인 힘을 발휘케 하여 인간의 발전을 촉진시키는 종교냐, 아니면 인 간의 성장을 마비시키는 종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어떤 특정의 종교가 행동에 동기를 주는 힘을 가질 경우, 그 종교는 교의와 믿음의 총체 는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특정한 성격구조에 뿌리박고 있으며, 그것이 어느 집단의 종교일 경우에는 사회적 성격에 뿌리를 박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종교적 태도는 우리의 성격구 조의 한 양상으로 생각될 수도 있다. '우리는 우리가 헌신하는 대상이며, 우리가 헌신하는 것은 우리의 행동을 자극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개인은 개인적 헌신의 진 정한 대상조차 미처 깨닫지 못하고 '공식적인' 신앙을 '비밀'스럽지만 진정한 종교라고 착 각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의 종교를 믿는다고 주장하면서 권력을 숭배한다면, 권 력의 종교는 그 사람의 비밀스러운 종교이며, 그에 대해 그의 이른바 공식적인 종교, 예를 들어 기독교는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종교적인 욕구는 인류라는 '종'의 기본적인 존재조건을 기초로 하고 있다. 침팬지나 말이 나 제비가 종이듯이 우리 인간도 종이다. 각 종은 그 고유의 생리학적, 해부학적 특징에 따 라 정의를 내릴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정의되고 있다. 인류에 대해서는 생물학적 측면 에서의 일반적인 협약이 있다. 나는 인류는-인간의 본성은-'정신적으로'도 정의될 수 있다 고 시사했다. 동물계의 생물학적 진화과정에서 동물 진화의 두 가지 경향이 합해질 때 인 류라는 종이 나타난다. 그 한 가지 경향은 '본능에 의해 행동을 결정하는 정도가 계속 줄 어드는 것이다(여기서 말하는 '본능'이란 지식을 배제하는 현대적인 의미의 본능이 아니 라 타고난 충동이라는 의미의 본능이다)'. 본능의 본질에 관한 견해가 많은 논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생각해 볼 때, 동물이 진화의 각 단계에서 보다 높이 오를수록 그 동물의 행동 은 계통발생적으로 짜여진 본능에 의해 결정되는 정도가 적어진다는 것은 널리 인정되고 있 는 일이다. 본능에 의해 행동을 결정하는 정도가 끊임없이 감소되는 과정은 연속적 현상으로 도표화 될 수 있는데, 그 도표의 원점에서 본능적 결정의 정도가 가장 높은 동물진화의 최저 형태 를 볼 수 있다. 이것은 동물의 진화와 더불어 감소되어 포유동물에 이르러서는 어느 수준에 달한다. 영장류로 발달하는 과정에서 그 정도가 다시 감소되는데, 원숭이와 유인원 사이에도 큰 격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람(Homo)'의 종에 이르면 본능적인 결정은 최저한도에 이 른다. 동물진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또 한 가지 경향은 '두뇌, 특히 신피질의 성장'이다. 여기 서도 우리는 진화를 연속으로 도표화할 수 있다. 한쪽 끝에는 가장 원시적인 신경조직과 비 교적 적은 수의 신경세포를 가진 최하동물들이 있고, 다른 끝에는 보다 크고 복잡한 두뇌조 직, 특히 인간의 영장류 조직의 두 배 크기가 되는 신피질과 정말 엄청난 수의 신경세포간 연결조직을 가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있다. '이 데이터로 본다면, 인류는 본능적 결정이 최소한도에 이르고 두뇌의 발달이 최대한도 에 이른 진화의 시점에 나타난 영장류라고 정의할 수 있다.' 최소한도의 본능적 결정과 최 대한도의 두뇌 발달의 이와 같은 결합은 동물의 진화에서 지금까지 일어난 일이 없으며, 생 물학적으로 말하면 그것은 완전히 새로운 현상이다. 최고로 영리한 영장류의 기계적 사고를 능가하는 특질-자의식, 이성, 상상의 능력-을 소 유하고 있으면서, 한편 본능의 명령에 의해 행동하는 능력이 모자랐기 때문에 인류는 생존 을 위해 방향 설정의 테두리와 '헌신의 대상'이 필요했다. 자연계와 사회적 세계의 지도-세계 및 그 속에서의 인간의 위치가 체계화되어 있고 내적 으로 결합되어 있는 그림-가 없으면, 인간은 혼란에 빠져서 목적의식을 갖고 일관성 있게 행동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 방향을 설정할 방법도 없고, 각 개인에게 부딪쳐 오는 모든 인상들을 조직화할 수 있는 기준을 발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계는 우리에게는 의미가 있으며 주위 사람들과의 의견 일치를 통해서 우리는 자기 생각에 관해 자신을 갖는 다. 설사 지도가 틀렸더라도 그것은 심리적인 기능을 이행한다. 그러나 지도가 완전히 틀린 적은 없었으며, 또 완전히 옳은 적도 없었다. 지도는 언제나 삶의 목적에 도움이 되는 여러 현상을 충분한 근사치로서 설명한다. 지도는 삶의 '실제'가 모순과 불합리성으로부터 해방되 는 정도까지만 현실과 일치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방향 설정의 테두리가 존재하지 않는 문화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은 인상적인 사실이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혹 각 개인이 그와 같이 일목요연한 지도를 갖고있지 않다고 부인할 수도 있으며, 또 자신들의 판단대로 경우에 따라 삶의 다양한 현상과 사건에 대치해 나간다고 믿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자신의 철학은 상식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뿐이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모든 개념이 일반적으로 인정된 좌표계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이 런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다른 인생관에 부딪치게 되면, 그것을 '미치광이 같다'거나 '불합 리하다'거나 '철부지 같다'고 판단하면서, 한편 자신은 완전히 '논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좌 표계에 대한 뿌리 깊은 욕구는 특히 어린아이들에게서 명백히 나타난다. 어린아이들은 어 떤 나이에 이르면 얼마 안 되는 데이터를 이용해서 교묘한 방법으로 자신의 방향 설정을 위 한 테두리를 만든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알려주는 목표도 필요하므로 지도만으로 행동의 지침을 삼을 수는 없다. 동물에게는 이런 문제는 없다. 그들의 본능은 지도뿐만 아니라 목표 까지도 제공해 준다. 그러나 우리는 본능적 결정이 결핍되어 있는데다가 나아갈 수 있는 여 러 방향을 생각하게 해주는 두뇌를 갖고 있으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력투구할 수 있 는 헌신의 대상, 즉 모든 노력의 초점, 그리고 모든 사실상의 공언된 가치관의 토대이다. 그 와 같은 헌신의 대상이 필요한 것은 우리의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결집시키고, 의심과 불안 정에 싸여 있는 우리의 고립된 존재를 초월하고, 삶의 의미에 대한 우리의 욕구에 응답하기 위해서이다. 사회경제적 구조, 성격구조, 그리고 종교적 구조는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만일 종교 적 체제가 널리 보급된 사회적 성격과 부합되지 않고 삶의 사회적 습관과 모순된다면, 그것 은 단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종교적 체제 그 자체를 인식하지는 못하더라도 우리는 '진 정한' 종교적 구조를 찾기 위해서 그 배후를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성격의 종교적 구 조에 내재된 인간의 에너지가 다이나마이트의 작용을 하지도 않고 특정의 사회경제적 조건 을 침식하는 경향도 보이지 않는 경우라면 말이다. 그런데 일반적인 사회적 성격에는 언 제나 개인적인 예외들이 있듯이, 일반적인 종교적 성격에도 개인적인 예외가 있다. 그들은 흔히 종교혁명의 지도자가 되거나 신흥종교의 교주가 된다. 모든 '고등'종교의 경험적 핵심으로서의 '종교적' 방향 설정은 대개 이런 종교들의 발전 과정에서 왜곡되어 왔다. 자신의 개인적인 방향 설정에 있어서 의식적으로 어떻게 생각하는 가 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각 개인은 자신이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고도 '종교적'일 수 있다-혹은 자신을 기독교도라고 생각하면서도 비종교적일 수도 있다. 우리는 개념적이고 제도적인 측면은 제쳐두고라도 그 '경험적' 내용을 표현할 단어를 갖고 있지 않다. 따라서 사람의 '종교성'을 표현하는 개념적 구조에 관계 없이 나는 '경험적'이며 주관적인 방향설 정에 있어서는 인용부호를 써서 '종교적'이라고 말한다. 3. 서구세계는 과연 기독교적인가 유럽에서 최초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치하의 로마 제국이었으며, 그 뒤 '독일인의 사도'인 보니파키우스 교황에 의한 북유럽 이교도들의 개종이 있었고, 8세기에 는 다른 나라들이 이어 개종했다고 한다. 이것은 역사서적과 대부분의 사람들의 견해에 따 른 것이다. '그러나 유럽은 과연 진정으로 기독교화되었던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대답을 하고 있지만, 면밀히 분석해 보면 유럽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대개가 속임수였다. 다시 말하면, 12세기부터 16세기가지의 기독교로의 개종은 기껏해야 제 한된 개종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그 시기를 전후하여 수세기 동안에 이루어진 개종은 대부 분 이데올로기로의 개종이며, 어느 정도는 교회에 대한 진지한 굴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수많은 순수한 기독교적인 운동을 제외하면 그것은 마음의 변화, 성격구조의 변화를 뜻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서의 4백 년 동안에 유럽은 기독교화되기 시작했다. 교회는 기독교 교리를 재산과 가격 의 조정, 빈민의 지원에 적용하도록 강제했다. 재산을 비난할 뿐더러 기독교 교리에로의 복 귀를 요구하는 신비주의의 영향을 크게 받아 다소 이단적인 많은 지도자들과 분파가 생겼 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 신비주의는 반인권주의적인 휴머니즘 운동 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이런저런 이유로 인해 여성들이 신비주의적인 교사로서 학생으 로서 두드러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계종교에 관한 생각들, 또는 단순한 비교리적 기독교 사상 등이 많은 기독교 사상가들에 의해 주창되었다. 심지어는 성경의 하나님이라는 관념조 차 의문의 대상이 되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신학적, 비신학적 휴머니스트들은 그들의 철학과 그들이 그런 유토피아에서 13세기의 경향을 계승했다. 그리고 실제로 중세 후기('중세 르 네상스')와 르네상스 사이에는 적당한 분계선을 명확하게 그을 수가 없다. 르네상스의 전성 기와 말기의 정신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에 아르츠(Frederick B. Artz)의 글을 요약하여 인 용해 보겠다. '사회면에서는, 중세의 위대한 사상가들은 신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까지도 무한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경제면에서는, 그 들은 노동은 전략이 아니라 존엄의 근원이며, 어떤 인간도 자기의 복리와 무관한 어떤 목적 을 위해 이용되어서는 안되며, 정의가 임금과 가격을 결정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정치면에 서는, 그들은 국가의 기능은 도덕적인 것이며, 법과 그 집행에는 기독교의 정의의 관념이 깃들어야 하며,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는 항상 상부상조의 의무를 바탕으로 삼아야 한 다고 가르쳤다. 국가, 재산, 그리고 가족은 모두가 신이 그것들을 지배하는 사람들에게 맡 긴 것이며, 그 모든 것은 보다 성스러운 목적에 이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 세의 이상은 모든 국가와 모든 민중은 하나의 거대한 공동체의 일부라는 강력한 믿음을 담 고 있다. '국가 위에 휴머니티가 존재한다'라고 한 괴테의 말처럼, 그리고 캐벨(Edith Cavell ; 제 1 차 세계대전 때 병사들의 탈주를 도와준 혐의로 독일군에게 총살당한 영국의 간호원)이 1915년 처형 전날 밤에 그녀가 가지고 있던 '그리스도의 모방'의 여백에 쓴 것처럼 "애국심만으로는 부족하다".' 만일 유럽의 역사가 13세기의 정신 속에서 계속되었더라면, 그리고 그것이 서서히 진화적 인 방법으로 과학적 지식과 개인주의의 정신을 발전시켜 왔더라면, 우리는 지금 행복한 상 태에 있게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성은 조작된 지성으로, 개인주의는 이기주의로 타락하 기 시작했다. 기독교화의 짧은 시기가 끝나고, 유럽은 본래의 이교신앙으로 되돌아 갔다. 비록 개념이 다르긴 하지만, 하나의 믿음은 기독교의 그 어떤 분파든지 모두 포괄한다. 그 것은 인간들에 대한 사랑 때문에 생명을 바친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다. 그는 사랑의 영웅, 권력 없는 영웅이었다. 그는 힘을 사용하지 않았고, 다스리기를 원하 지 않았고, '소유'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존재의 영웅, 남에게 주는 영웅, 공유의 영웅 이었다. 이러한 특질은 로마의 빈민들에게뿐 아니라 이기주의로 질식상태에 있던 부자들 일 부에게까지도 깊이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지적인 관점에서 보면 예수는 기껏해야 솔직하다 고 생각될 수 있는 정도였지만,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호소하는 바가 있었다. 사랑의 영웅에 대한 믿음은 수십만의 지지자를 얻었는데, 그들 중 다수가 생활관습을 바꾸거나 스스로 순 교자가 되었다. '기독교의 영웅은 순교자였다.' 유대교의 전통과 마찬가지로 최고의 성취는 신이나 동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순교자는 그리스와 게르만의 영웅들로 대표되 는 이교의 영웅들고 정반대이다. 그들 영웅들의 목표는 정복하고, 승리하고, 파괴하고, 강탈 하는 것이었다. 즉, 그들의 삶을 충족시키는 것은 자부심과 권력과 명성과 훌륭한 살육의 기 술이었다(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의 역사를 강도단의 역사에 비유했다). 이교의 영웅들은 인간의 가치를 권력의 획득과 그 고수에 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승리의 순간에 전장에서 기 꺼이 죽었다.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정복자들과 강탈자들의 영광을 시적으로 뛰어나게 묘 사한 작품이다. 순교자의 특징은 '존재'하고, 주고, 나누어 갖는 것이며, 영웅의 특징은 '소 유'하고, 약탈하고, 강요하는 것이다(여기에 덧붙여 둘 것은, 이교의 영웅이 생긴 것은 모권 중심사회에 대한 가부장적 승리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한 것은 최초의 정복행위였으며, 힘을 최초로 착취에 사용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남자가 승리를 거둔 이후에 모든 가부장적 사회에서는 이런 원리가 남성 성격의 기초가 되었다). 우리들 자신의 발전에 있어서, 서로 용납하지 않고 대립되는 이 두 전형 중 어느 것이 아 직도 유럽에서 우세할까? 우리 자신과 모든 사람들의 행동, 그리고 우리의 정치 지도자들을 살펴보면, 좋고 가치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전형이 이교의 영웅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의 역사는, 기독교로의 개종에도 불구하고, 정복과 자만과 탐욕으로 점철되어 있다. 즉, 우리의 최고 가치는 남들보다 강해지고, 승리하고, 남들을 정복해서 착취 하는 것이다. 이 가치들은 '남자다움'이라는 이상과 일치한다. 그래서 싸우고 정복할 수 있 는 자만이 참된 남성이고, 힘을 행사함에 있어서 강하지 못한 사람은 약한 자이며, '남자 답지 못한' 사람이 된다. 유럽의 역사가 정복, 착취, 힘, 제압의 역사라는 것은 굳이 증명할 것도 없는 사실이다. 이런 요소가 거의 모든 시대의 특징이었으며, 어떤 종족이나 계급도 이 런 사실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경우와 같은 종족 학살을 포함하여 십 자군과 같은 종교적 기업행위까지도 예외는 아니다. 이런 행동은 겉으로 드러난 경제적 및 정치적 동기만을 가졌던 것일까? 노예상인들, 인도의 지배자들, 인디언 살육자들, 아편 수입을 위해 중국인에게 개항을 강 요한 영국인들, 1, 2차 세계대전의 선동자들, 그리고 다음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자들, 이들 은 모두가 마음속으로는 기독교도였던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기독교도 로 남아 있는데 지도자들만이 탐욕스런 이교도였던 것일까? 만약 사실이 그렇다면 우리는 보다 용기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지도자들은 얻을 것이 더 많았기 때문에 때로는 추종자들보다 더 탐욕스러웠던 게 틀림없지만, 정복하 고 승리하려는 소망이 그때나 지금이나 사회적 성격의 일부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자신의 계 획을 실현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다만 과거 2세기 동안의 여러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의 격렬하고 광적인 열광과, '최강의 힘' '명예' 또는 이익이라는 이미지를 수호하기 위해 수백만 명이 국가적 자살의 위험을 무릅쓴 사실을 돌이켜보기만 하면 된다. 도 다른 실례로서, 소위 평화의 대의에 봉사 한다는 현대 올림픽 경기를 보는 사람들의 광적인 민족주의를 생각해 보자. 실제로 올림픽 경기의 인기 그 자체가 서구 이교주의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그들은 이교의 영웅, 즉 승자 와 가장 강한 자, 가장 자기주장이 강한 자를 찬미하면서도, 고대 그리스 올림픽 경기의 모 방으로서의 현대 올림픽을 특징짓는 장삿속과 선전의 더러운 야합은 모른체하고 있다. 기 독교 문화에서는 그리스도 수난극은 독일 남부의 작은 마을 오베람메르가우의 그것으로서 관광객들 사이에 대단한 평판을 얻고 있다. 지금 말한 것이 모두 진실이라면 어째서 유럽인과 아메리카인들은 현대에 맞지 안는 기독 교를 깨끗이 포기하지 않는가?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규율을 잃고, 나아가 사회적 결합이 위협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있다. 즉, 위대한 박애자인 동시에 자기를 희생하는 신 으로서의 그리스도를 확고하게 믿는 사람들은 소외된 방식으로 이 믿음을 변형시킬 수가 있 다. 이들은 예수가 '자기들을 대신하여' 사랑을 한다는 경험으로 신앙을 변질시키는 것이 다. 예수는 이렇게 해서 우상이 된다. 예수에 대한 신앙은 인간 자신의 사랑의 행동을 대신해 주는 것이 된다. 단순하고도 무의식적인 공식이 나온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온갖 사랑을 다하신다. 우리는 그리스 영웅적 행동을 계속하며 살아갈 수가 있다. 그렇게 해도 우 리는 구원받는다. 그리스도에 대한 소외된 '신앙'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일의 대용이기 때 문이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 자신의 탐욕스런 태도에 대한 손쉬운 구실이 되기도 한다는 것 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마지막으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사랑한다고 하는 지극히 뿌리 깊은 욕구가 있기 때문에 늑대처럼 행동하면 반드시 죄의식을 느끼게 된다고 나는 믿는다. 사랑 에 대한 신앙을 공언함으로써 전혀 사랑이 없다는 데 대한 무의식적 죄책감에서 오는 고 통을 어느 정도는 느끼지 않게 된다. 산업종교 중세말 이후의 종교적, 철학적 발달은 매우 복잡하므로 이책에서 모두 다룰 수는 없다. 그 특징은 두 가지 원칙 사이의 투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두 가지 원칙이란 신학적 또는 철학 적 형태를 띤 정신적인 기독교 전통과, 소위 '산업주의라는 종교 또는 사이버네틱스(인공두 뇌학)의 시대'가 발달하면서 여러 가지 형태를 띠고 나타난 우상과 비인간성을 숭배하는 이 교적인 전통이다. 중세 후기의 전통을 이은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이 중세가 끝난 이후에 최초의 '종교적' 정신의 위대한 개화를 이루었다.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성, 인류라는 공동체의식, 그리고 정 치와 종교에 있어서의 범세계적인 공동체의식, 그리고 정치와 종교에 있어서의 범세계적인 공동체의식이 거침없이 표현되었다. 17세기와 18세기의 계몽사상은 휴머니즘의 또 다른 위 대한 개화를 보여준 것이다. 칼 베커(carl Becker)는 계몽주의 철학이 13세기의 신학자들에 게서 발견할 수 있는 '종교적 태도'를 어느 정도가지 나타냈는가를 밝혔다. '이런 신념의 근거를 살펴보면, 사상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소위 '철학가'들이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중세사상으로부터 입은 은혜를 배반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계몽주의 사상의 결과로 나타난 프랑스 대혁명은 정치적인 혁명 이상의 것이었다. 토크빌이 지적한 대로 (베커의 인 용에 의함) 그것은 '정치혁명이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혁명)의 성격을 띠었으며, 그 양상으로 볼 때도 종교혁명의 기능을 했다. 회교나 프로테스탄트의 저항처럼 프랑스 대혁명 은 국경과 민족을 넘어 설교와 선전에 의해서 퍼져나갔다.' 19세기와 20세기의 급진적인 휴머니즘에 대해서는 산업주의 시대의 우상숭배에 대한 휴머니즘의 저항에 대해 논의할 때 언급하기로 하겠다. 그러나 그 논의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휴머니즘과 병행하여 발달해 온, 그러나 역사적 현시점에서 인류를 파괴하려 하고 있는 새로운 이교에 대한 문제점들을 여기서 지적해야겠다. '산업종교'의 발달을 위한 최초의 기초를 마련해 준 변화는 바로 루터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에 있어서의 모성적인 요소의 제거였다. 문제의 핵심을 벗어난 불필요한 우회처럼 보일 는지 모르겠으나, 잠시 이 문제에 대해 논해야겠다. 왜냐하면, 이것은 새로운 종교와 새로 운 사회적 성격의 발달을 이해하는 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두 가지 원칙, 즉 부계중심사회와 모계중심사회라는 원칙에 따라 구성되었다. 모계 사회의 중심은 애정을 품고 있는 어머니이다. 모성의 원리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어머 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자식이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들이 바로 자신 의 (또는 다른 어머니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머니의 사랑은 훌륭한 행동으로 얻어 지거나 또는 잘못을 저질렀다고해서 잃어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다. 모성애는 '자비'와 '동 정', 헤브라이 어로는 rachamim이며, 그 어원은 rechem, 즉 '자궁'이다. 그 반면에 아버지의 사랑은 '조건부'이다. 그것은 자녀의 훌륭한 태도에 따라 좌우된다. 아버지는 자신과 가장 닮은 아이를 가장 사랑한다. 즉, 자신의 재산을 물려주고 싶은 아이 를 가장 사랑한다. 아버지의 사랑은 잃어버릴 수도 있지만 잘못을 회개함으로써 다시 얻을 수 있고 복종함으로써 새로워질 수도 있다. 아버지의 사랑은 '정의'이다. 부드러운 어머니다움과 억센 아버지다움이라는 이 두 가지 원칙은 모든 인간에게 남성다 운 측면과 여성다운 측면을 갖게 할 뿐만 아니라 모든 남성과 여성으로 하여금 자비와 '동 시에' 정의에 대한 욕구를 갖게 한다. 인간의 마음속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열망은 하나의 성좌처럼 보인다. 그 성좌의 양극(모성과 부성, 여성과 남성, 자비와 정의, 감성과 이성, 본 성과 지성)은 하나로 종합되어 있고 이 종합 속에서 두 양극은 대립을 피하게 된다. 그같 은 종합은 부계중심사회에서는 충분히 실현될 수가 없지만, 가톨릭 교회에는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모든 것을 사랑하는 어머니로서의 동정녀 마리아와, 어머니답게 무조건적으로 모든 것을 용서해 주는 사랑의 모상으로서의 교황과 신부가 있는가 하면, 그와 동시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교황을 신부가 있는가 하면, 그와 동시에 모든 권력을 장악하고 있 는 교황을 정점으로 부계 중심의 관료제라는 엄격한 가부장적인 요소가 또한 병존하고 있었 다. 종교적 체제에 있어서의 이러한 모성적인 요소는 생산과정에서의 자연에 대한 관계와 일 치한다. 즉, 직인과 마찬가지로 농부의 일도 결코 자연에 대한 적대적이며 착취적인 공격은 아니다. 그것은 자연과의 협동이다. 약탈이 아니라 자연을 그 자체의 법칙에 따라 변형시키 는 것이다. 루터는 북부 유럽의 도시 중산층과 세속적인 군주를 중심으로 순수한 가부장적인 형태의 기독교를 확립했다. 이 새로운 사회적 성격의 본질은 사랑을 얻기 위한 유일한 길로서 ' 노동'을 해야 한다는 가부장적인 권위에 대한 굴복이다. 이런 기독교의 배후에서 '산업종교'라는 새로운 '비밀' 종교가 일어났다. 그것은 종교로 인정되고 있지는 않으나 현대 사회의 성격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산업종교는 순수한 기독교와는 완전히 모순된다. 그것은 인간을 경제의 노예로 만들고 인간 자신이 만든 기계 의 노예가 되기를 강요한다. 새로운 사회적 성격을 기초로 한 산업종교의 중심은 강력한 남성적인 권위에 대한 공포와 그에 대한 복종이며, 불복종에 대한 죄악감의 양성, 그리고 극도의 이기주의와 적대심으로 인한 인간유대의 상실이다. 비록 산업종교가 그 일반적인 원칙이 정하는 범위내에서 개인주 의와 자유를 신장하기는 하나, 이 산업종교에 있어서 '신성한 것'은 노동, 재산, 이익, 권력 뿐이다. 기독교를 엄격한 가부장적인 종교로 변형시켜 놓음으로써 산업종교를 기독교적인 용어로 표현할 수 있다. '시장적 성경'과 '사이버네틱스 종교'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서부터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사회적 성격의 변화를 살펴보는 것이 현대 인간사회의 특성과 비밀종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이다. 16세기에 발달하기 시작하여 19세기 말까지 적어도 중산층을 계속 지배했던 성격구조는 권위주의적, 저축적 성격이었다. 그것은 그 뒤 서서히 '시장적 성격'과 혼합되거나 혹은 그것으로 대치되 었다. 내가 이런 현상을 시장적 성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그것이 인간 자신을 상품으로, 그리 고 인간의 가치를 '사용가치'로서가 아닌 '교환가치'로 보는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 이다. 인간의 존재는 '퍼스낼리티 시장'에 내던져진 상품이 되어 버렸다. 평가의 원칙은 퍼 스낼리티 시장에서나 상품시장에서나 모두 마찬가지이다. 전자는 인간의 퍼스낼리티를 팔 기 위해 내놓았고, 후자는 상품을 내놓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경우에도 그 가치는 교환 가치에 의해 정해지며 '사용가치'는 필요조건이기는 하나 충분조건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공 에 대한 필요조건으로서 한편으로는 인간의 자질과 숙련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퍼스 낼리티가 차지하는 비중이 경우에 따라 변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퍼스낼리티 요소'가 항상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성공을 크게 좌우하는 것은 사람들이 시장에서 얼마나 자신을 잘 팔 수 있는가, 얼마나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사람들에게 잘 알리는가, 얼마나 멋지게 자신을 '포장'하는가, 다시 말해서 자신이 '쾌활한', '건전한', '의욕적인', '믿음직한', '야심에 찬' 인간인지 아닌지, 나아가서는 가정적 배경은 어떠하며, 어떤 사교클럽에 속해 있는가, 어떤 일에 '적절한(right)'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따위에 의해 좌우된다. 어떤 형태의 퍼스낼리티가 요청되는가 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일하고자 하는 그 특정 분야에 좌우된 다. 증권업자, 세일즈맨, 비서, 철도원, 대학교수, 호텔 지배인은 각기 다른 종류의 퍼스낼리 티를 요구한다. 이들 직업이 모두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적으로 충족되어야 할 조건 은 바로 그 직업이 요구하는 퍼스낼리티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태도를 형성하는 것은 어떤 주어진 일을 수행하기 위한 기술과 소양이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자신의 퍼스낼리 티를 적응'시킬 수 있어야만 한다. 만일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할 수 있는 것이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하다고 한다면, 결국 자부심은 자신의 능력, 다시 말해서 사용 가치와 비례 할 것이다. 그러나 대분분의 경우 성공은 얼마나 자기 자신의 퍼스낼리티를 잘 팔 수 있 는가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서 경험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 이 판매자이며, 팔려야 할 상품이란 것을 경험하게 된다. 즉, 문제가 되는 것은 그의 생활이 나 행복이 아니라 팔기에 적합한 상품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시장적 성격이 목적으로 삼는 것은 퍼스낼리티 시장의 모든 조건 아래에서 바람직한 인물 이 되도록 하기 위해 완전하게 적응하는 것이다. 시장적 성격의 퍼스낼리티는 (19세기 사람 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집착할 만한 자아, 자기 자신에게 고유한, 변하지 않는 자아를 소유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신이 원하는 바로 그 사람이오'라고 이야기할 수 있도 록 끊임없이 자신을 변형시킨다. 이와 같이 시장적 성격구조를 가진 사람은 단지 최대의 능률을 가지고 사물을 움직이고 일하는 외에는 아무런 목적도 없다. '왜' 그렇게 바삐 움직여야 하는가, 또는 왜 최대의 능 률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그럴싸한 대답을 못한다. 그저 '더 많은 일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또는 '회사를 더 키우기 위해서'라고 합리화를 한다. 그들은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왜' 다른 방향으로 가지 않고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 하는 철학적이고 종교적인 질문에 대해서 거의 관심이(적어도 의식적으로는) 없다. 다만 커다란 그리고 항시 변하는 자아를 갖고 있을 뿐이며, 아무도 진정한 자아, 핵심 또는 동일성의 감각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 현대사회의 이같은 '동일성의 위기'는 그 사회 구성원 들이 자아를 상실한 하나의 도구로 전락함으로써 빚어진 것이다. 원시적인 개인의 동일성 이 한 씨족사회에 소속된 회원이란 것에 있듯, 현대사회 구성원의 동일성은 몸담고 있는 기업(혹은 거대한 관료체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적 성격에는 사랑도 미움도 없다. 선한 것이든 악한 것이든, 감정을 제거하고 오로지 두뇌에 의해서만 제 기능을 하는 사회구조에는 그런 '낡아빠진' 정서는 적합하지가 않다. 왜 냐하면, 이같은 정서는 시장적 성격의 주된 목적인 물건을 팔고 교환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 문이다. 좀더 정확히 말해서, 그런 정서는 자신이 하나의 부속품으로 소속해 있는 '거대한 기계'의 논리에 따른 '기능'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가 몸담고 있는 관료체제내 에서의 승진에 의해 잘 작용하고 있는가 외에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 는다. 시장적 성격의 소유자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도 자신에 대해서도 깊은 애착이 없기 때 문에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이 이기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에 대한, 그리고 타인에 대한 관계가 아주 약하기 때문이다 이같은 사실은 핵무기의 위험이나 생태학적인 파멸에 대해 그 위험성을 알려주는 온갖 구체적인 자료를 알고 있으면서도 인간 이 왜 그 점에 관심을 쏟지 않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자신의 생존에 관계되는 위험성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매우 용기가 있거나 이기심이 없을 것 이라는 가정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자신의 아이들이나 그 뒤에 올 세대를 위한 관심이 없는 것을 보면 이 설명은 설득력이 없다.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한 관심의 결여는 '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도 정서적인 연대감을 상실함으로써 빚어진 결과이다. 사실 어느 누구도 시장적 성격과는 친밀하지 않고, 도 시장적 성격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과도 가깝지 않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어째서 물건을 사거나 소비하기를 좋아하는가, 그러면서도 왜 그들이 산 물건에 대해 깊은 애착이 거의 없는가 하는 난문에 대해서는 시장적 성격이 갖는 현상에 서 가장 의미 깊은 대답을 찾을 수 있다. 시장적 성격은 애착심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에 결 국 인간으로 하여금 사물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들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떤 물건이 주는 위엄이나 위안이고 물건 그 자체는 아무런 실체도 갖고 있지 않다. 물건이란 오로지 소비의 대상일 뿐이다. 친구나 애인도 마찬가지다. 그들 사이에는 아무런 깊은 연대감이 없기 때문 에 그들 역시 소비의 대상인 것이다. 시장적 성격은 주어진 상황 아래에서의 '적합한 기능'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그 소유 자는 이 세계에 대해서 단순히 두뇌만 가지고 대응한다. '이해'라는 의미의 이성은 '호모사 피엔스'만이 갖는 특질이다. 실제적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조작적 지성'은 동 물이나 인간에게 공통적이다. 이상이 없는 그런 조작적 지성은 동물이나 인간에게 공통적이 다. 이성이 없는 그런 조작적 지성이 위험한 것은 이성적인 관점에서 볼 때 스스로를 파괴 하는 방향으로 인간을 움직이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억제되지 않은 조작적 지성이 우수하 면 우수할수록 그만큼 더 위험하다. 순전히 과학적이고 소외된 지성이 초래하는 결과와 비극을 가장 적절하게 이야기한 사람 은 다름 아닌 과학자 찰스 다윈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30세가 될 때까지는 음악과 시와 그 림을 매우 좋아했는데 그 이후로는 그런 즐거움에 대한 취미를 잃었다면서, 그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내 머리는 많은 사실들 가운데서 일반적인 법칙을 끌어내는 일종의 기계가 되어 버린 듯 하다... 그렇게 즐기던 취미의 상실은 바로 행복의 상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성의 정서적 인 요소를 약화시킴으로써 지성에 해를 주었으며, 나아가서는 도덕적 인격에까지 해를 주었 으며, 나아가서는 도덕적 인격에까지 해를 주었던 것 같다." 다윈이 기술한 그런 과정은 그 의 시대 이후 지금까지 급속도로 진행되어 왔다. 따라서 이제는 이성과 감정의 분리가 거의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데 특히 흥미로운 것은 그런 이성의 퇴보가 가장 엄격하고 혁명적인 과학(예를 들면, 이론물리학)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지도적 탐구자들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 았다는 사실이다. 그런 지도적 탐구자들, 예를 들어, A.아인시타인, N.보어, W.하이젠베르 크, E.슈뢰딩거 등은 철학적, 정신적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두뇌에 의한 조직적 사고의 지상권은 정서생활의 위축을 초해한다. 정서생활은 촉진되지 도 않았고 필요치도 않거니와 오히려 출세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어린이의 수준 이상 으로 성숙하지 못했다. 그 결과, 시장적 성격의 소유자는 감정적 문제가 관련되는 한에서는 기묘하게 단순하다. 그들은 '감성적인 사람들'에 끌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단순함으로 인해 그들이 성실한 사람인지 협잡꾼인지를 판단할 수가 없다. 이 사실은 어째서 그렇게 많 은 협잡꾼들이 정신적, 종교적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가, 그리고 강한 감정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정치인들이 어떻게 해서 시장적 성격 소유자에게 강하게 호소하는가를 설명해 준다. 또한 시장적 성격 소유자가 왜 순수한 종교적 인물과 강한 종교적 감정으로 위장한 선전원 을 구별할 수 없는가를 설명해 준다. 이러한 유형을 나타내는 말이 '시장적 성격'이란 용어 하나밖에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소외된 성격'이란 마르크스의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나타낼 수도 있다. 즉, 이런 성격의 소 유자는 자신의 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다른 사람, 심지어는 자연으로부터 도 소외도어 있다. 정신병리학적 용어를 빌면, 이런 시장적 인간은 정신분열증의 소유자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정신분열증을 가진 다른 사 람과 어울려 살면서 일을 성공적으로 해내는 정신분열증을 가진 사람은 이 정신분열증의 성격이 좀더 '정상적'인 환경에서 가질 불안감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원고에 마지막 손질을 하고 있을 때 나는 마이클 맥코비(Michael Meccoby)의 "책략가 -새로운 기업가들"이라는 원고를 읽을 기회를 가졌다. 맥코비는 미국의 가장 큰 두 개의 기 업을 골라 그 간부, 매니저, 기술자 등 모두 2백 50명을 인터뷰하여 그들의 성격구조를 분석 하였다. 그가 발견한 많은 사실들은, 정서적 측면이 제대로 개발되지 않은 채 두뇌적 성질만 우수한 사이버네틱스적 인간에 대해 내가 서술한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맥코비에 의해 언 급된 간부들과 매니저들이 미국 사회의 지도자들이며 또한 장차 지도자가 될 것이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맥코비의 발견이 갖는 사회적 중요성은 매우 크다. 시장적 성격의 '사이버네틱스적 종교'는 그 전체의 성격구조와 일치한다. 불가지론 또는 기독교의 배후에 완전히 이교적인 종교가 숨겨져 있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 하고 있다. 그러한 이교를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종교 또는 종 교 조직체의 교리에 대한 의식적인 생각에서 추론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사람들이 행하는 것(또는 행하지 '않는' 것)에 의해 추론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언뜻 보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통적인 종교의 신에 의한 첫 번째 창조에 대치할, 이 세계의 '제 2의 창조'를 행할 수 있는 기술적인 역량을 인간이 획득함으로써 스스로를 신의 자리로 끌어올렸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 다음과 같이 공식화할 수도 있다. 즉, 인간은 신의 자리에 이를 수 있는 기계를 만들고, 그 기계를 잘 다룸으로써 신에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선택한 이 같 은 공식은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실제로 심한 '무력'상태에 있는 인간이 과학과 기술에 관련하여 자신이 '전능'하다고 '상상'하고 있는 점이다. 사이버네틱스 종교가 갖는 이와 같은 측면은 좀더 희망적인 발전의 시기와 일치한다. 그 러나 우리가 이 세계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이 결여된 상태에서 우리 자신을 고립화하면 할 수록, 그리고 동시에 파국적 재난을 피할 수 없게 되면 될수록, 이 새로운 종교는 그만큼 더 욱 해로운 것이 된다. 우리는 기술의 주인이 되는 대신 그 노예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한때 창조의 중요한 요소였던 기술이 (인도의 여신 칼리처럼) 파괴의 여신이라는 또 하나의 모습 을 드러내고 있다. 인간들은 자기 자신은 물론 자녀들까지도 기꺼이 이 여신에게 희생시키 려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좀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에 의식적으로 매달리는 동안은 사 이버네틱스적 인도주의는 인간이 파괴의 여신의 숭배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있다. 이 명제는 여러 가지 입증자료를 갖고 있지만, 다음 두 가지 사실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 은 없다. 첫째는 초강대국들이(그리고 다른 나라까지도)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핵무기를 계 속 생산하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모든 핵무기와 핵무기의 원료를 생산하고 있는 원자 에너 지 공장을 없애는 등의 건전한 해결책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생태학적인 파국의 위험을 종식시키는 대책이 전혀 강구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류의 생존 을 위한 진지한 계획이 전혀 마련되지 않고 있는 것이다. 4. 휴머니즘의 지향 사회적 성격이 비인간화되고, 또한 산업종교와 사이버네틱스 종교까지 생겨나게 되자, 이 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새로운 휴머니즘이 출현했다. 이 새로운 휴머니즘은 중세 말 에서부터 계몽주의 시대에 걸쳐 일어났던 기독교적 및 철학적 휴머니즘을 바탕으로 하고 있 다. 이러한 저항은 범신론적 또는 무신론적인 철학적 사상에서뿐만 아니라 유신론적인 기독 교 사상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상반되는 두 입장에서 이루어졌다. 하나는 정치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취한 낭만파이고, 다른 하나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그밖의 사회주의자들이 다(무정부주의자들도 몇 명 포함되어 있다). 우익과 좌익은 산업체제와 그것이 인간에게 미치는 악영향을 비판하는 데 있어 의견을 같 이했다. 프란츠폰 바더와 같은 가톨릭 사상가나 벤자민 디즈레일리 같은 보수적인 정치 지 도자들은 이런 문제를 때로는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같은 방법으로 정식화했다. 이 양쪽의 차이점은 인간이 물건으로 변모하는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방법에 있 다. 우익 쪽에 선 낭만주의자들은 산업사회의 거침없는 '발전'을 중지시키고, 비록 어느 정 도의 수정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사회질서를 이전의 형태로 되돌려놓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 책이라고 생각했다. 그 반면 좌익 쪽에서 나온 저항은, 때로는 유신론적인 용어로 때로는 무신론적인 용어로 표현되었지만, '급진적 휴머니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경제적 발전 은 멈출 수 없을 뿐 아니라 사회질서를 이전의 형태로 되돌려놓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진보를 계속하는 한편, 인간이 소외로부터 기계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그리고 비인간 화의 운명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믿 었다. 사회주의는 중세의 종교적인 전통과 르네상스 이후의 과학적인 사고와 정치적 행동을 모두 종합한 것이었다. 그것은 비록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표현을 하지만, 불교처럼 이기심과 탐 욕으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종교적인' 대중운동이었다. 마르크스 사상이 소련 공산주의와 서구의 혁신주의적 사회주의에 의해 만인의 부의 달성 을 목적으로 하는 유물론으로 왜곡됐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나는 여기서 마르크스 사상의 특성을 간단히 설명해야 할 필요를 느낀다. 헤르만 코헨, 에른스트 블로흐, 그리고 그밖의 몇몇 학자들이 과거 몇십 년 동안 이야기해 온 것처럼, 사회주의는 예언적인 메시아 사상에 대한 세속적인 표현이었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메시아 사상에 대한 세속적인 표현이었다. 이 것을 설명하려면 메시아 시대의 특성을 마이모니데스(Maimonides)의 법전에서 인용하는 것 이 아마도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현자와 예언자들이 메시아 시대를 기다린 것은 이스라엘이 세계를 통치하고, 이교도들을 지배하고, 다른 나라들보다 우월해지거나, 또는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열망은 이스라엘이 그 누구의 방해도 간섭도 받지 않고 그 계명과 지혜에 전념할 수 있도록 자유롭게 되고, 그럼으로써 다가올 세계에서 가치 있는 삶을 누리는 것이었다. 메시 아의 시대에는 기근도 전쟁도 없을 것이며, 시기와 반목도 없을 것이다. 또한 거리에서 재화 가 넘칠 것이며, 안락이 모든 사람의 손끝에 닿게 될 것이다. 온 세계에 살고 있는 모든 사 람들은 주님을 알고자 하는 데 전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매우 현명해 져서 지금은 감추어져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알게 될 것이며, 인간 마음의 가장 높은 경지 에 이르러 창조주를 알게 될 것이다. 성서에 기록된바, '물이 바다를 덮음과 같이 이 땅에는 여호와를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찰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서 11 : 9)" 이러한 서술에서 보 는 바와 같이, 역사의 목적은 인간이 권력이나 사치에 몰두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신을 이해하고 지혜를 가꾸는 데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메시아 시대에는 전세계에 평화 가 이루어지고, 시기가 없어지며, 물질적으로 풍부해질 것이다. 이 내용은 마르크스가 그의 '자본론' 제 3 권 맨 끝부분에서 기술한 인생의 목적과 아주 비슷하다. "자유의 나라는 필요에 의한 강압과 외부적인 효용 때문에 노동이 요구되는 그러한 시기 가 지나가기 전에는 오지 않는다. 이 용어의 엄밀한 뜻으로 볼 때, 자유의 영역은 물질적 생 산의 영역을 벗어나 바로 사물 자체의 본성 속에 존재한다. 미개인이 자기가 필요한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나아가 그것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그리 고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나아가 그것을 번식시키기 위해 자연과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 로, 문명인도 모든 사회형태 속에서, 그리고 가능한 모든 생산양태 속에서 그런 행위를 해야 한다. 자신의 발전과 함께 원하는 것이 증가하기 때문에 그에 따라 당연히 필요의 영역은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필요와 동시에 생산의 힘도 증가하며, 그로 인해서 필요는 충족된다. 이 영역에 있어서의 자유는, 사회화된 사람과 연합된 생산자들이 자연과의 관계를 합리적으 로 조정하여 자연에 의해 지배를 받는 대신에 오히려 자연을 그들 공통의 통제하에 둠으로 써만 얻어질 수 있다. 즉, 인간본성에 가장 적절하고 또한 '가장 어울리는' 조건 아래에서 가장 적은 에너지를 써서 일을 성취하는 것만이 이같은 영역에서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것 이다. 그러나 필요의 영역은 항시 남아 있다. 그것을 넘어서야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인 간적 힘의 개발', 즉 진정한 자유의 영역이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자유의 영역은 결핍 의 영역이 그 기초가 되어야만 비로소 번창할 수도 있다. 노동시간의 단축은 그 근본적인 전제이다." 마르크스는 마이모니데스처럼, 그리고 기독교나 다른 유대교의 구원의 가르침과는 대조적 으로 궁극적으로 종말적인 해결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즉, 인간과 자연 사이 의 모순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나 결핍의 영역은 가능한 한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 아래 놓이게 된다. '그러나 필요의 영역은 항상 남아 있다.' 그 목표는 '진정한 자유의 영 역을 목적으로 하는 인간의 힘의 개발'이다. '온 세계가 전념하는 일은 주님을 알고자 하는 일이다' 라는 마이모니데스의 견해는 자유의 영역 '그 자체가 목적인 인간의 힘의 개발'이 라는 마르크스의 견해이다. 인간의 삶의 두 가지 다른 형태인 소유와 존재는 새로운 '인간' 출현을 위한 마르크스 사상의 중심을 이루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양식을 놓고 마르크스는 경제학적 범주에서부터 심리학적 및 인류학적인 범주에 이르기까지 설명하는데, 그것은 신약과 구약, 그리고 에크하 르트에 대한 논의에서 보아왔던 것처럼 동시에 근본적인 '종교적' 범주에까지 언급된다. 마 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사유재산은 우리를 너무 어리석고 편협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물건을 소유 하고 있을 때, 자본으로서의 가치가 있을 때, 또는 그것을 직접 먹고 마시고 입고 할 때, 요 컨대 어떤 방식으로든 그것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있을 때에만 그것이 우리 것이 된 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모든 육체적 또는 지적 의식은 모두 다 소외된 의식, 즉 소유의 식으로 대치되어 버렸다. 인간은 그의 내적인 부를 낳기 위해서는 이 절대적인 빈곤에 빠 질 수 밖에 없었다.' 소유 및 존재에 대한 마르크스의 개념은 그의 다음과 같은 문장에 요약되어 있다. '당신의 존재가 희미하면 희미할수록, 그리고 당신의 삶의 표현이 적어지면 적어질수록 당신은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또한 당신의 삶은 그만큼 더 소외될 것이다... 경제학자들은 그들이 당신의 삶과 인간성으로부터 빼앗아 간 모든 것을 재화나 부의 형태로 되돌려준다.' 마르크스가 여기에서 말하고 있는 '소유의식'은 에크하르트가 말한 '자아속박', 즉 사물과 자아에 대한 열망과 같다. 마르크스는 소유나 소외되지 않은 사유재산 그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바로 '생존의 소유양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인간의 삶의 목적은 사치와 부가 아니며, 또한 빈곤도 아니다. 사실 마르크스는 사치와 빈곤을 '모두' 악덕으로 보았다. 절대 적 빈곤은 인간의 내적 부를 낳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러면 이 낳는다는 행위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응되는 사물에 대해 우리의 능력을 적극 적으로 능동적으로, 그리고 소외되지 않은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시 계속해 서 말한다. '세계에 대한 그의(인간의) 모든 인간적인 관계들-보고, 듣고, 냄새맡고, 맛보고, 접촉하고, 생각하고, 관찰하고, 느끼고, 바라고, 행동하고, 사랑하는 것-요컨대, 개인의 모든 기관들은... 바로 인간의 대상적 행위(대상에 대한 행위)에서 그 대상을 제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인간적 현실을 제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제것으로 만드는 것은 '존재'양식에 있어서의 형태이지 소유양식의 형태는 아니다. 마르크 스는 이 소외되지 않은 능동성의 형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은 (인간)이고, 세계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인간적인 관계라고 가정해 보자, 그렇다 면 사랑은 오로지 사랑과, 신뢰는 오로지 신뢰와 교환될 수 있다. 그밖의 것도 마찬가지다. 만일 당신이 예술을 즐기고 싶다면, 당신은 예술적인 소양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 고 남에게 영향을 주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그들에게 자극을 주고 용기를 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당신의 모든 관계가 당신이 바라는 대상과, 당신의 현실의 개인적인 생활의 대상과 일치하는 명확한 표현이 되어야만 한다.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상대방의 사랑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면, 즉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서의 자 신을 나타냄으로써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면, 당신의 사랑은 무기 력하고 불행한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상은 곧 왜곡되어 버렸다.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1백 년은 일찍 태 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는 이미 모든 가능성의 한계에 이르렀 으며, 따라서 혁명이 눈앞에 닥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죽은 후 엥겔스가 이야 기했듯이, 그들은 완전히 잘못 판단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본주의 발달의 절정에서 그들의 새로운 가르침을 내놓았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쇠퇴하고 결정적인 위기가 시작되기까지는 1 백 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는 점은 예견하지 못했다. 자본주의의 절정기에 번졌던 반자본주 의자들의 생각은, 만약 그것이 성공하려면 자본주의 정신으로 완전히 변형되었어야만 했다. 그것은 역사적인 필연성이었다. 그리고 그런 일은 실제로 일어났다. 서구의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그들에 대한 철저한 반대자들, 즉 소련의 안팎에 있는 공산주 의자들은 모두 사회주의를 최대의 소비와 기계의 최대한 이용을 목적으로하는 순전히 경제 적인 개념으로 변형시켰다. 소박하고 평민적인 흐루시초프는 그의 '굴래쉬(goulash)' 공산주 의(보다 많은 소비물자의 생산과 생활수준 향상을 강조한 공산주의, 굴래쉬는 헝가리식 스 튜)의 개념에 의해서 사회주의의 목적은 자본주의가 극소수에게만 주는 소비의 즐거움을 국 민 모두에게 골고루 주는 것이라는 생각을 나타냈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부르즈와적 마르크스의 초기 저서 가운데 몇몇 구절은 (그것들은 대부분 '젊은' 마르크스의 '이상주의 적'인 오류라고 모독되었다)서구의 복음서의 말처럼 정중하게 암송되었다.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발달의 절정의 시대에 살았다는 사실은 또 다른 중요성을 갖고 있 다. 마르크스는 그 시대의 산물로서 그 당시의 부르즈와 사상과 행위에 통용되는 태도와 개 념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를 들면, 그의 저서뿐만 아니라 그의 인격에도 엿보 이는 권위주의적인 성향은 사회주의 정신에 의해서보다는 가부장적인 부르즈와 정신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는 '공상적인'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인'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데 있어 고 전학파 경제학자들의 이론에 따랐다. 경제는 인간의 의지와는 전혀 관계 없이 그 자체의 법 칙에 따른다고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마르크스도 사회주의는 경제법칙에 따라 '필 연적으로' 발달한다는 점을 입증해야 할 필요성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 결과, 그는 가끔 역 사의 과정에서 인간의 의지와 상상력의 영향을 도외시한, 결정론적인 것으로 오해되기 쉬운 공식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 자본주의 정신에 대한 그런 무의식적인 양보는, 마르크스의 체제가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와 같다는 왜곡을 조장시켰다. 만약 마르크스가 자본주의가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하는 오늘날에 그의 사상을 피력했다 면 그의 '진실한' 메시지는 크게 영향력을 미쳤을 것이며, 어쩌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실상 '사회주의'니 '공산주의'니 하는 말조차도 많이 달라졌다. 적어 도 마르크스의 사상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는 사회주의 정당 또는 공산주의 정당이라면, 소 련의 정체가 어떤 의미에서도 사회주의 체제가 '아니며', 사회주의는 관료적이고 물질중심 적이며 소비지향적인 사회체제와는 양립할 수 없고, 또한 소련 체제의 성격이라고 볼 수 있 는 유물론과 두뇌지상주의(그것은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다)와도 양립할 수 없다는 확신을 그 기초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회주의의 부패는 다음 사실, 즉 순수하고 급진적인 휴머니스트의 사상은 마르크스의 사 상과 일치하지 않거나 또는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의 사상과 일치하지 않거나 또는 그의 사 상에 반대하는 개인이나 집단으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설명해 준다. 그들 중에는 과거에 공산주의 운동의 활동 요원이었던 사람들도 있다. 여기서 마르크스 이후의 급진적인 휴머니스트들을 모두 다룰 수는 없으므로, 그들의 사상 가운데 몇 가지 예를 들어 보겠다. 비록 그들 급진적 휴머니스트들의 개념은 크게 차이가 있고, 때로는 서로 완전히 모순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생각과 태도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1. 생산은 경제체제가 아니라 인간의 현실적인 요구에 따라야 한다. 2. 인간과 자연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단, 그것은 착취의 관계가 아닌 협력관계가 되어야 한다. 3. 서로의 대립은 연대의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4. 모든 사회적 제도의 목적은 인간의 복지와 불행의 방지에 있어야 한다. 5. 최대한의 소비가 아니라 인간의 복리를 증진시키는 건전한 소비를 지향하여 노력해야 한다. 6. 개인은 사회생활에서 수동적이 아니라 능동적인 참여자가 되어야 한다. 알베르트 슈바이처의 사상은 서구문명의 위기가 임박했다는 극단적인 전제하에 출발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 우리가 문화적으로 자기파괴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은 누가 보기에도 명백하다. 지금 남 아 있는 것도 벌써 안전하지 못하다. 그것이 아직 남아 있는 것도 벌써 안전하지 못하다. 그 것이 아직 남아 있는 것은 다른 것을 이미 굴복시켜 버린 파괴적인 압력에 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자갈 위에 세워져 있다. 그 다음의 산사태가 그것을 휩쓸어버릴 것이다... 현대인의 문화적 능력이 위축된 것은 그를 에워싸고 있는 환경이 그를 왜소하게 만들고 정신적으로 해를 입혔기 때문이다." 산업사회 속에 있는 인간존재를 '인간성 상실의 위험 속에 있는... 부자유하고... 산만하 고...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지으면서 슈바이처는 다음과 같이 말을 계속한다. '발달된 조직을 갖고 있는 이 사회가 인간에게 엄청난 힘을 미치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 인간'의 의존도도 커져서 그는 스스로의 정신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 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새로운 중세로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은 자유로운 개인으로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들이 속한 집단에 의해 인도되기 때문에, 사유의 독립성을 희생함으로써- 달리 될 수도 없겠지만-진리에 대한 신념도 잃어버렸다. 우리의 지적이고 정서적인 생활은 파괴되었다. (공적인 일들을 지나치게 조직화함으로써 결국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조직 이 되어 버렸다).' 그는 산업사회의 특성을 자유의 결핍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과잉노력으로 보았다. '2, 3세 기 동안 많은 사람들은 (인간적) 존재로서가 아니라 (일하는) 존재로만 살아왔다.' 인간의 본질은 위축되고 그런 위축된 부모들에 의해 어린아이들이 양육되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인 간적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결핍되고 말았다. '이윽고 어른이 된 사람 또한 지나치게 직업에 예속되어 점점 더 천박한 오락에 탐닉, 거기에 굴복하게 되었다... (자아의식의 상실 과 분산, 그리고 절대적인 수동성은 현대인간에게 있어서는 육체적 욕구가 된다).' 결과적 으로, 슈바이처는 노동의 감소, 그리고 과잉소비와 사치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자인 슈바이처 도미니코 수도사인 에크하르트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임무는 세상사와 동떨어진 정신적인 자만에 은닉해서는 안 되며, 사회의 정신적인 완성에 기여하려는 능동적인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만약 현대인들 가운데 인간적이 고 윤리적인 마음가짐을 그대로 가진 사람이 거의 없다면, 개인적인 도덕성을 조국의 제단 에다 끊임없이 제물로 바칠 최소한의 이유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이 집단과 활발한 교류를 계속하면서 그 집단을 완전케 하도록 하는 힘을 집단에 부여해야 한다)." 그는 오늘날의 문화적 및 사회적 구조는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으며, 그리고 그 파국으로 부터는 '옛 르네상스보다 훨씬 더 위대한' 르네상스가 일어날 것이며, 파멸을 원치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믿음과 태도로 자기혁신을 이루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이 르네상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합리적 사고가 인간에게 갖다주는 행위원칙이다. 그것 은 인간이 만들어낸 이상적이며 실용적인 역사 발전의 유일한 원리가 될 것이다... 나는 (만약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면 이러한 혁명이 일어날 것)이라는 나의 믿음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 산업사회의 가장 급진적인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서 슈바이처가 산업사회에 있어서의 진 보와 만인의 행복이라는 신화를 깨어버린 사실은 대체로 무시되어 왔다. 그것은 아마도 그 가 신학자였고, 또한 적어도 철학적으로 '생명에 대한 외경'을 윤리의 기초로 삼은 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산업화된 생활을 통해서, 인간사회와 세계의 부패와 타락 을 인식했다. 그는 20세기 초에 벌써 인간의 취약성과 예속성을 보았으며, 또한 강박적인 노 동의 파괴적 영향과 노동과 소비를 보다 줄여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연대의식과 생 명에 대한 외경에 의해 만들어지는 집단생활이라는 르네상스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슈바이처의 사상에 대한 소개를 마치기 전에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그가 기독교의 형이 상학적인 낙관론과는 대조적으로 형이상학적인 회의론자였다는 사실이다. 이 점이 바로 인 생은 지고의 존재에 의해서 주어지고 보증된 아무런 의미도 갖고 있지 않다는 불교사상에 그가 그토록 이끌렸던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만약 인간 이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거기에 (인간)과 (인류)의 목적과 목표와 뜻이 통 하는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의미 있는 유일한 생활방식은 이 세계에서의 능동성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남에게 주고 또한 동포를 사 랑하는 능동성이다. 슈바이처는 이 해답을 그의 저서를 통해, 그리고 몸소 실천함으로써 밝 혔다. 석가와 에크하르트와 마르크스, 그리고 슈바이처의 사상에는 현저하게 비슷한 점이 있다. 즉, 소유지향의 포기에 대한 극단적인 요구, 완전한 독립의 주장, 형이상학적인 회의론, 신이 없는 종교성, 그리고 동정과 인간적 유대감을 갖는 사회적 능동성의 요구 등이다. 그런데 이들 스승들은 때로 이러한 요구들을 의식하지 못했다. 예를 들면, 에크하르트는 그의 무신론을 의식하지 못했고, 마르크스는 그의 종교성의 의식하지 못했다. 특히 에크하르 트와 마르크스의 경우, 해석의 문제에 있어 그것이 워낙 복잡해서 사랑에 입각한 능동주의 의 무신론적 종교를 적절하게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그 종교가 바로 이들을 새로 운 '인간'의 필요성에 알맞는 새로운 종교성의 창시자로 만든 것이다. 이 책의 속편에서 나 는 이들 스승들의 사상을 분석해 보겠다. 우리 시대의 초개인적이고 기계론적인 태도를 완전히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급진적인 휴머니스트라고 부를 수 없는 학자들까지도(예를 들면, 로마 클럽의 위탁으로 두 가지의 보 고서를 쓴 학자들) 인간의 철저한 내적 변화만이 경제적 파국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 이라고 보고 있다. 메사로빅과 페스텔은 '새로운 세계의식... 천연자원의 사용에 있어서의 새 로운 윤리... 정복보다는 조화에 바탕을 둔 자연에 대한 새로운 태도... 미래 세대와의 동일화 된 의식'을 요구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이 지구상에서 살아온 이래 인간은 최초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억제하도록 요청받고 있으며, 인간의 경제적, 기술적 진보를 억제하든가, 또는 적어도 종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가도록 요청받고 있다. 또한 이 지구상의 모든 미래 세대들에 의해-자비심에서가 아니라 그 필요성에 의해서-자기의 부를 불행한 사람들 과 나누어 갖도록 요청받고 있다. 그리고 전세계적인 체제의 유기적인 성장에 힘을 모으도 록 요청받고 있다. 양심이 있다면 이를 거부할 수 있겠는가?'하고 말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 같은 근본적인 인간변혁이 없다면 '호모사피엔스의 운명은 다한 것이나 마찬가지다'라고 결론을 내렸다. 이 연구에는 몇 가지 결함이 있다. 내가 보기에 가장 현저한 결함은 어떤 변화를 방해하 는 정치적, 사회적, 심리적 요인을 고려하지 않은 점이다. 일반적으로 필요한 변화의 방향을 지적함에 있어 그러한 제안들을 방해하는 실제의 장애물을 고려하는 진지한 노력이 뒷받침 되지 않는 한 그 지적은 무의미하다(로마 클럽이 전반적인 목표를 성취하기 이한 전제 조건 인 그같은 사회적, 정치적 변혁의 문제들에 대해 파악해 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그러나 이 들 학자들은 처음으로 전세계의 경제적 요구와 자원문제를 보여주고자 노력했으며, 또 내가 서문에서 쓴 것처럼 이들은 처음으로 윤리적 신념의 결과로서가 아니라 경제적 분석의 합리 적인 결과로서 인간의 윤리적인 변화를 요구했다. 미국과 독일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엄청나게 많은 저서들이 이와 같은 요구를 했다. 즉, 첫째는 인간의 생존 그 자체를 위해서, 둘째는 우리의 안정과 복지를 위해서 경제를 인간의 요구에 종속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 저서의 저자들은 대부분 다음과 같은 점에 의견이 일치했다. 소비의 물질적인 증대는 반드시 복지의 증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성격적인 그리고 정신적인 변화는 필요한 사회적 변화와 나란히 진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만약 인간 이 천연자원의 낭비와 인간 생존에 필요한 생태학적 환경의 파괴를 멈추지 않는다면 백 년 안에 엄청난 파국이 예견된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 새로운 인도주의적 경제학을 대표 하는 사람들 중 뛰어난 몇몇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경제학자인 슈마커(E.F.Schmacher)는 '인간 부흥의 경제'라는 저서에서 실패는 우리의 성 공의 결과이며, 우리의 기술은 진정한 인간의 요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계속 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생활의 내용으로서의 경제는 치명적인 질병이 되어 버렸다. 왜냐하면, 무한한 성장은 이 유한한 세계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를 생활의 내용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는 것 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들에 의해 교시되어 왔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은 오늘날 명백 해졌다. 만약 그 치명적인 질병을 좀더 자세하게 설명하기를 원한다면, 그것은 알콜 중독이 나 마약중독처럼 일종의 중독현상이라고 보면된다. 그 중독이 좀더 이기적 형태인지 아니면 이타적인 형태인지, 또는 거친 물질적인 방법으로 만족을 취하는지, 아니면 예술적이고 문화 적이고 과학적인 세련된 방법으로 만족을 취하는지 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록 은박지로 포장을 했어도 독약은 독약이다... 만약 인간의 내부에 있는 정신적인 문화가 무시 된다면, 그때야말로 이기주의가 인간을 지배하는 힘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고, 또한 자본주 의와 마찬가지로 이기주의 체제는 이웃을 사랑하는 체제보다도 이같은 지향에 오히려 더 잘 어울리게 된다." 슈마커는 산업화하지 않는 나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소규모의 기구들을 고안해 냄으로써 그의 원칙들을 풀어나갔다. 그의 저서가 해마다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그것도 대대적인 광 고에 의해서가 아니라 독자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는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폴 에를리히(Paul Ehrlich)와 앤 에를리히(Anne Ehrlich)는 슈마커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미국의 학자이다. '인구, 자원, 환경-인간생태학의 문제점들'이란 저서에서 그들은 현세계 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1. 현대의 과학기술과 행동양식으로 미루어볼 때 이 지구는 인구과잉의 상태에 빠져 있다. 2. 엄청나게 많은 인구의 절대수와 높은 인구 증가율은 현재의 인간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주된 장애물이다. 3. 종래의 방법으로 식량을 생산해 내는 인간능력은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식량의 공급과 분배문제 때문에 이미 인류의 약 반수가 영양실조에 빠져있다. 매년 1천만 내지 2천만의 사 람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다. 4. 식량생산을 좀더 증대시키려는 노력은 환경파괴를 촉진시키고 그것은 결국 지구의 식 량생산 능력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환경파괴가 이미 본질적으로 치유될 수 없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는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지구의 능력이 영구적으로 손상되었을 가능성은 있다. 자동차, 살충제, 무기질소 비료와 같은 과학 기술의 '성공'은 환경파괴의 주된 원인이다. 5. 인구증가는 치명적인 역병의 세계적 만연과 핵전쟁의 가능성을 증가시킬 것이라고 믿 을 만한 근거가 있다. 그 두 가지는 어느 것이나 인구문제에 있어 바람직하지 못한 해결방 안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문명의 파괴와 심지어는 인류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잠재능력을 가지고 있다. 6. 환경오염의 감소, 통신수단 및 토지 비옥도 관리 등의 분야에 적절하게 적용된 과학기 술이 크게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구, 식량, 환경위기 등의 복잡다단한 문제들을 해결해 주는 만병통치약 같은 과학기술은 없다.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서는 인간태도의 극 적이고 급격한 변화가 요구된다.' 특히 이것은 재생산적 행동, 경제성장, 과학기술, 환경, 분쟁의 해결 등과 관련되어 있다. 에플러(E. Eppler)의 '종말이냐 변혁이냐'도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최근의 저서이다. 에플러의 사상은 그다지 급진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슈마커의 사상과 비슷하다. 에플러 의 입장은 특히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는 바덴뷔르템베르크 지방의 사회민주당 지도자이며, 신앙심 깊은 프로테스탄트이기 때문이다. 내가 쓴 두 권의 책 '건전한 사회'와 '희망의 혁명 '도 똑같은 사상적 바탕을 갖고 있다. 생산제한의 사상이 항상 금기시되어 왔던 소련 블록의 저자들 사이에서조차도 성장 없는 경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소리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서독 민주공화당 소속의 이단적인 마르크스주의자인 하리히(W.Harich)는 전세계적으로 정적인 경제 균형을 제안했다. 그 자체 만으로 평등성을 보장할 수 있으며, 생물계에 미치는 손상의 위협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1972년 소련의 가장 유명한 자연과학자, 경제학자, 지리학자들이 모여 '인간과 환경'에 대 해 토론했다. 그들의 의제 가운데는 로마 클럽의 연구 결과에 관한 토론도 있었다. 그들은 로마 클럽의 연구에 대해 동의하지는 않았지만, 그 연구의 많은 장점들을 지적하면서 존 경심을 갖고 그것을 고찰했다. 휴머니즘에 대한 가장 중요한 현대의 인류학적, 역사학적 표현은 멈포드(L.Mumford)의 '권력의 펜타건'이라는 책과 그가 앞서 쓴 저서 중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표현은 휴머니스트들의 사회 재건설을 위한 여러 가지 시도와 통하고 있다. 제 8 장 인간변혁의 조건과 새로운 인간의 특질 인간의 성격이 소유양식의 우위에서 존재양식의 우위로 근본적으로 변하는 것만이 우리를 심리적, 경제적 파국으로부터 구할 수 있다는 전제가 옳다고 가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 이 생긴다. 대규모의 성격학적인 변화가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어떤 방법으로 그와 같 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성격에 '변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우리는 고통받고 있으며, 그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다. 2. 우리는 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 3. 우리는 우리의 불행이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4. 우리는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일정한 생활규범을 따라야 하며, 현재의 생활습 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있다. 위의 네 가지 조건은 석가의 가르침의 바탕이 되는 '네 가지 진리'와 부합한다. 그러나 그 '네 가지 진리'는 특수한 개인적, 사회적 환경에 기인한 인간 불행의 사례들이 아닌 인간존 재의 일반적 조건을 다루고 있다. 석가의 가르침의 특성이 되고 있는 변혁의 원리는 또한 마르크스의 구제사상의 기초가 되 고 있다. 그것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즉, 마르크스 자신이 말한 것처럼 그에게 있어 공산주의는 최종 목표가 아니라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즉 인간을 물질과 기 계, 그리고 인간 자신의 탐욕의 노예로 만드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제조건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가는 역사 발전의 한 단계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첫 번째 단계는 그 시대의 가장 소외되고 비참한 노동자계급에게 그들 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었다. 그는 노동자 자신의 비참함을 알지 못하 게 하는 모든 환상을 파괴하고자 애썼다. 두 번째 단계는 이 고통의 '원인'을 밝히는 것이었 다. 그는 그 원인이 자본주의의 본질과 자본주의 체제가 낳은 탐욕과 허욕과 의존적 성격에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노동자들의 고통(그들'만의' 것은 아니지만)의 원인에 대한 이러한 분 석에서 마르크스 저작의 요체, 즉 자본주의 경제분석이 나왔다. 세 번째 단계는 이 고통을 낳는 조건이 제거되면 그 고통도 제거될 수 있다는 것을 입증 하는 것이었다. 네 번째 단계에서 그는 새로운 생활의 관습, 즉 낡은 체제가 필연적으로 만 들어내지 않을 수 없었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사회체제를 제시하였다. 본질적으로는 프로이트의 치유방법도 같은 것이었다. 환자들이 프로이트를 찾아와 진찰을 받은 것은 그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또 자기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대개 '무엇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몰랐 다. 정신분석학자들이 보통 처음 하는 일은 환자들이 자기들의 고통에 관해 갖고 있는 환상을 버리고 그들의 불행의 참다운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개인적 혹은 사 회적 불행의 원인에 대한 진단은 해석의 문제이며, 서로 다른 여러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 다. 그러나 불행의 원인에 관한 환자 자신의 상상은 대개는 진단을 내리는 데 있어서 믿을 만한 데이터가 되지 못한다. 정신분석과정의 본질은 환자가 자신의 불행의 '원인'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이다. 그 결과, 환자는 다음 단계, 즉 원인이 제거되면 그들의 불행은 치유될 수 있다는 통찰에 이를 수 있다. 프로이트의 견해로는, 그것은 어떤 유아기 사건의 억압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 미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정신분석가들은 내가 위에서 제시한 조건 중 네 번째 조건의 필요 성에는 본질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 같다. 많은 정신분석학자들은 환자가 억압받고 있는 것에 대한 통찰 그 자체가 치료효과를 갖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확실히 그런 경우는 흔 히 있다. 환자가 히스테리나 강박관념 등 한정적인 증상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을 때는 특히 그렇다. 그러나 일반적인 고통을 받고 있어서 성격의 변화가 필요한 사람들은 '그들이 달 성 하고자 하는 성격의 변화에 따라 생활의 습관을 바꾸지 않는 한' 어떤 지속적인 효과를 얻 을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예를 들면, 개인의 의존성에 관한 분석은 언제가지나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분석의 결과 얻어진 모처럼의 통찰도 그들이 그전에 생활해 오던 실제적 인 상황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한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간단한 예를 들어 보자. 어떤 여자의 고통이 아버지에 대한 의존성에 기인한다고 할 경우, 비록 그녀가 의존성의 깊은 원인에 통찰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그녀가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 는 한, 예를 들어 아버지와 떨어져서 산다든가, 아버지의 도움을 거절한다든가, 자립을 지향 하는 실제적 행동이 내포하는 위협과 고통을 무릅쓰는 등의 생활의 변화 없이는 사실상 아 무런 실제적인 효과를 거둘 수 없을 것이다. '실제와 동떨어진 통찰은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가 가진 기능을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촉진시키는 것인데, 새로운 인간이란 다음과 같은 성격구조적 특성을 지닌 존재를 가리킨다. 1. 완전하게 '존재하기' 위하여 모든 형태의 소유를 자진하여 포기할 것. 2. 안정감, 동일성의 감각, 확신을 가질 것. 이 확신은 자기 '존재'에 대한 신뢰, 자기 주위 의 세계에 대한 상호관련성, 관심, 사랑, 유대를 지향하는 요구를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 다. 세계를 소유하고, 지배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소유물의 노예가 되어 버리는 그러한 욕망 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3. 자기 이외의 어떤 인간이나 사물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과, 철저한 독 립성과 사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사랑과 공유에 헌신하는 가장 충족된 행동조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것. 4. 현재 있는 곳에 완전히 존재할 것. 5. 축재 또는 착취가 아니라, 주고, 나누어 갖는 데서 오는 기쁨을 가질 것. 6. 물건과 권력과 모든 죽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생명의 성장에 관련된 모든 것이 신성하다는 것을 알고 충분히 현현된 생명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가질 것. 7. 탐욕, 미움, 환상을 가능한 한 줄이도록 노력할 것. 8. 환상을 필요로 하지 않는 상태에 이름으로써 환상을 품지 않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 생활을 할 것. 9. 사랑할 수 있는 노력을 비판적이고 냉철한 사고능력과 함께 발전시킬 것. 10. 자기도취(나르시시즘)를 버리고 인간존재에 내재하는 비극적 한계를 인정할 것. 11. 자기 및 동포들의 충분한 성장을 삶의 지고한 목표로 삼을 것. 12. 이러한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양과 현실에 대한 존중이 필요함을 알 것. 13. 또한 어떤 성장도 그것이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한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 것. 또한 생명의 속성으로서의 구조와, 비생명, 즉 죽음의 속성으로서의 '질서'라는 구조 사이의 차이를 알 것. 14. 견딜 수 없는 환경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현실적 가능성에 대한 예견으로서 견딜 수 없는 환경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상상력을 개발할 것. 15. 다른 사람을 속이지 말 것. 그러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속임을 당하지도 말 것. 정직한 것은 괜찮겠지만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인정받아서는 안 된다. 16. 자기 자신을 알 것. 알고 있는 자아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이 모르는 자아까지도 알려 고 노력할 것. 자기가 모르는 자아에 대해서는 막연한 지식밖에 가질 수 없겠지만. 17. 자신과 모든 생명체가 하나임을 인식할 것. 그럼으로써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하고, 착 취하고, 약탈하고, 파괴하려는 목적을 포기하고 오히려 자연을 이해하고, 자연과 협력하도록 노력할 것. 18. 방종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으로서의 자유를 구할 것. 여기서 찾는 자기 는 탐욕의 덩어리가 아니라 성장이냐 파멸이냐, 삶이냐 죽음이냐의 양자택일에 직면한 순간 에도 미묘하게 균형을 유지할 수 있는 구조여야 한다. 19. 사악함 및 파괴성은 성장의 실패로 인한 필연적 결과임을 인식할 것. 20. 이러한 모든 품성의 완성에 도달한 사람은 몇 명 안 된다는 사실을 알 것. 그러나 반 드시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야망을 갖지 말 것. 그러한 야망은 탐욕과 소유의 또 다른 형태 임을 알 것. 21. 최종적으로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어디든 그것은 운명에 맡기고 끊임없이 성장하는 생동성의 과정에서 행복을 맛볼 것. 가능한 한 충족된 삶을 영위하도록 노력한다는 것은 자 기가 과연 무엇을 성취할 수 있을까 없을까 걱정할 필요가 거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것 이기 때문이다. 제 9 장 새로운 사회의 특징 1. 새로운 인간과학 새로운 사회의 창조 가능성을 생각할 때 우선 필요한 것은 그러한 시도가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거의 극복하기 힘든 어려움을 깨닫는 것이다. 아마 이 어려움에 관한 인식이 명확 하지 않다는 것이 필요한 변혁을 성취하기 위한 노력이 별로 기울여지지 않고 있는 이유 가 운데 하나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어째서 불가능한 일을 성취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는 가? 그러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나아가는 행로가 우리들의 지도가 가리키는 안전과 행복의 땅으 로 통하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자' 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 절망하면서도 낙관 주 의의 가면을 쓰고 있는 이런 사람들이 반드시 슬기로운 것은 아니다. 희망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냉철한 현실주의에 입각하여 모든 환상을 버리고 새로운 사회의 창조를 가로 막는 어려움을 충분히 인식하기만 한다면 성공할 수 있다. 이러한 냉철성이 바로 '깨어있는' 이상주의자와 '꿈꾸는' 이상주의자의 차이점인 것이다. 다음에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위해서 해결해야 할 난관 중 몇 가지만 들어 본다. 1. 전적인 집중화를 피하면서, 즉 낡은 형태의 파시즘이나 혹은 과학기술에 의한 '미소짓 는 파시즘'(이쪽이 더욱 가능성이 짙다)으로 전락하지 않고도 산업적 생산양식을 지속해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이다. 2. 이미 거의 허구가 되어 버린 '자유시장경제'를 버리고 전반적 계획을 고도의 분권화와 조화시켜야만 할 것이다. 3. 경제적 파국이라는 모험을 피해 끊임없는 성장이라는 목표를 선택적 성장이란 목표로 바꿔야 할 것이다. 4. 물질적인 이익이 아니라 정신적 만족이 효과적인 동기가 되는 사회풍조와 노동조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5. 과학적인 발전을 촉진함과 동시에 이 과학적 발전이 실제로 응용됨으로써 인류를 위험 에 빠뜨리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6. 사람들로 하여금 최대의 쾌락 충동의 만족이 아닌 복리와 기쁨을 맛볼 수 있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7. 각 개인에게 기본적 안정감을 주면서, 한편 그들이 그들을 먹여 살리는 관료체제에 의 존하지 않게 해야만 할 것이다. 8. 개개인이 노동에서보다는 삶에서 창의성을 발휘할 가능성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노동 에 있어서도 이제는 개인의 창의성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기줄의 발달과정에 있어서도 몇 가지 난관은 극복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였듯이 위해 열거 한 난관도 지금으로서는 극복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을 가로막았던 어려움은 결국 극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관찰의 원리와 자연에 대한 지식이 자연을 지배하기 위한 조건이라고 선언하는 새로운 과학이 확립되었기 때문이다. 17세기의 이 '새 로 운 과학'은 오늘날까지 산업화된 국가의 가장 뛰어난 두뇌들을 흡수해 왔으며, 그 결과 인 간 이 지성이 오랫동안 몽상해 온 기술의 유토피아를 실현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후 대략 3세기가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전혀 내용이 다른 새로운 과학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는 응용과학과 사회개조학의 기초로서 인본주의적 인간과학이라고 부를 만 한 것을 필요로 하고 있다. '기술적 유토피아'-이를테면, 비행 같은 것-는 새로운 자연과학 에 의해 이루어졌다. 메시아의 시대의 '인간적 유토피아'-경제적인 결정론, 전쟁, 계급투쟁 에 서 벗어나, 연대감과 평화 속에 사는 새로이 통합된 인류-도, 우리가 기술적 유토피아의 실 현을 위해 바쳐온 만큼의 정력과 지능과 열정을 쏟는다면 실현될 수 있다. 줄 베르느의 소 설을 읽었다고 잠수함을 만들 수는 없으며, 선지자의 예언서를 읽었다고 해서 인본주의적인 사회가 건설되는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자연과학 우위에서 새로운 사회과학으로 옮아가는 변화가 일어날지 어떨지는 아 무도 모른다. 만약 그런 변화가 일어난다면 우리에게는 아직 생존의 기회가 있지만, 그런 변 화가 일어나느냐 일어나지 않느냐 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요인에 달려 있다. 즉, 재능과 지식을 겸비하고 훈련된 많은 사람들이 인간정신에 대한 새로운 도전에 얼마나 매료 되느냐, 그리고 또 앞으로의 목표는 '자연에 대한 지배가 아니라 기술에 대한 지배, 그리고 전인류는 아니더라도 서구사회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비합리적인 사회세력과 제도에 대한 지배'라는 사실에 얼마나 매료되느냐 하는 점이다. 우리의 미래는, 현재의 위기에 대한 인식이 보편화됐다고 가정할 때, 뛰어난 사람들이 새 로운 휴머니즘적 인간과학에 얼마나 동원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 의 집중된 노력만이 위에서 든 문제에 대한 해결은 물론, 다음에 논할 목표를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수단의 사회화'와 같은 일반적인 목표에 대한 청사진은 사회주의의 부재를 감추기 위 한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빈말임이 판명되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니 '지적 엘리트 의 독재'니 하는 것도 '자유시장경제'라는 개념이나 마찬가지로 애매하고도 현혹적인 말이다. 그 점에서는 '자유'국가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다. 마르크스에서 레닌에 이르는 초기의 사회주의 자와 공산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사회나 공산주의 사회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지 못 했다. 이 점이 바로 사회주의의 가장 큰 약점이었다. 존재의 기초가 될 새로운 사회형태가 탄생하기 위해서는 많은 기획, 모델, 연구, 그리고 실험과 같은 '필요한 것과 가능한 것 사이의 간격을 메우기 시작하는' 일이 필요하다. 결국 대규모적인 장기계획과 첫 단계를 위한 단기 방안을 세워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일에 종 사하는 사람들의 의지와 인도주의적인 정신이다. 사람들이 미래의 비전을 갖게 되고 또 동 시에 그것을 성취하기 위한 구체적 방법으로서 어떠어떠한 일이 단계적으로 행해질 수 있다 는 것을 알게 되면 그들은 두려움 대신에 용기와 열정을 갖게 될 것이다. 사회의 정치적, 경제적 영역이 인간의 발전에 종속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새로운 사회 의 모델은 존재지향의 소외되지 않은 개인이라는 요건에 따라 결정되어야만 한다'. 그렇게 되 면 인류는 비인간적 빈곤-이것은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본적 문제이다-속에서 살지 않 게 되며, 또는 오늘날 산업화 사회의 유복한 계층들처럼 끊임없이 생산의 증대를 요구하며, 나아가 끊임없이 소비의 증대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생산법칙에 의하여 '소비적 인간'이 되 도 록 강요당하지도 않게 될 것이다. 인간이 자유로와지고, 병적인 소비로 산업을 비대하게 하 는 일을 그만두려면 경제체제의 철저한 변혁이 필요하다. 즉, 우리는 '인간을 병들게 함으로 써 비로소 건강한 경제가 가능한 현재의 상황을 종식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말하여 건 강한 사람을 위한 건강한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한 첫 번째 중요한 조치는 생산이 '건전한 소비'를 위하여 행해지도 록 이끄는 것이다.' "'이윤'을 위한 생산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생산" 이라는 전통적인 공식만으로는 충분 치 못하다. 왜냐하면, 이 공식은 어떤 종류의 사용을 가리키는 것인지, 다시 말하여 건전한 사 용인지 병적인 사용인지 분명히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가장 어려운 실제 적인 의문이 제기된다. 즉, 어떤 욕구가 건전하고 어떤 욕구가 병적인가를 누가 결정할 것인 가하는 의문이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즉, 국가가 최선의 것이라고 결정한 것을 시민이 소비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가령 그것이 최선의 것이라 할지라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 이다. 관료주의적 통제에 의해 소비를 강제적으로 방해한다면, 사람들은 더욱더 소비에 굶주 릴 것이다. 점점 늘어가는 소비자들이 그들의 소비 패턴과 생활태도를 바꾸고 '싶어'할 때에 만 건전한 소비는 가능해진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에게 습관화되어 온 것보다 더 매력적인 소비 패턴을 제시할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것은 또한 사람들에게 습관화되어 온 것보다 더 매력적인 소비 패턴을 제시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은 하룻밤 사이에, 또는 어떤 법령에 의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점진적인 교육과정이 필요한데, 이 점에서 정부가 중요 한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국가가 담당해야 할 기능은 병적이고 쓸데없는 소비에 반대되는 건전한 소비의 규범을 확 립하는 것이다. 원칙적으로 이러한 규범은 확립될 수 있다. 미국의 식품의약품협회(FDA)가 그 좋은 예이다. FDA는 여러 분야의 과학자들이 흔히 장기적 실험을 거쳐 제시한 전문적인 의견을 토대로 하여, 어느 식품 혹은 의약품이 인체에 해로운가를 결정한다. 같은 방법으로 심리학자, 인류학자, 사회학자, 철학자 및 여러 사회집단이나 소비자집단의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회에서 기타 일용품이나 상품의 가치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것이 삶을 증진시키고 어떤 것이 삶에 해를 주는가에 관한 조사는 FDA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때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심층적인 연구를 필요로 한다. 욕구의 본질 에 관한, 지금까지 거의 손을 댄 일이 없는 문제에 관한 기초 연구는 새로운 인간과학이 수 행해야 할 과제이다. 우리는 어떤 욕구가 우리의 유기조직에서 연유된 것이며, 어떤 욕구가 문화 발전의 결과인가, 어떤 것이 개체 성장의 표현이고 어떤 것이 산업사회가 개체에게 강 요한 합성된 욕구인가, 어떤 것이 '능동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수동적'인 것인가. 어떤 것 이 병적인 것이고 어떤 것이 정신적 건강에 뿌리박은 욕구인가를 결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이다. 이 새로운 인도주의적 전문가 집단의 결정은 지금의 FDA와는 대조적으로 강제성을 띠지 않고 다만 시민들의 토론을 위한 지침서 역할만을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건강에 유익한 식품과 건강에 해로운 식품의 문제에 대해서는 많이 알고 있다. 전문가들의 조사 결과는 다 른 모든 분야에서도 건전한 욕구와 병적인 욕구에 대한 사회의 인식도를 증진시키는 데 도 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대부분의 소비가 수동성을 조장한다는 것, 또한 소비 지상주의에 의해서 충족될 수 있을 뿐인 스피드와 새로움에 대한 욕구는 불안감, 즉 자기 자신으로 부터의 내적 도피를 반영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끊임없이 다음에 해야 할 일이나 사용해야 할 가장 새로운 도구를 찾는 행위는,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될 것이다. 바람직한 상품이나 일용품 생산으로 이윤을 남길 수 있을 때까지 정부가 조성금을 대줌으 로써 이러한 교육과정은 크게 단축될 수 있다. 건전한 소비를 위한 대규모의 교육적인 캠페 인이 이러한 노력과 하께 진행되어야만 할 것이다. '건전한 소비에 대한 욕구를 자극시키 는 단결된 노력만이 소비 패턴을 바꿀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업이 사 용 하고 있는 세뇌적인 광고수단을 쓰지 않더라도 (이것은 필수조건이다) 이러한 노력이 오늘 날 기업의 광고효과에 비해 별로 뒤지지 않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기대해도 무리는 아 닐 것 같다. '무엇이 복리를 증진시키는가?' 라는 원리에 따른 선택적인 소비(또는 생산)에 관한 전 반 적인 계획에 대해 흔히 제시되는 반론은, 자유시장경제하에서는 소비자가 그들이 바라는 바 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선택적'인 생산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소 비자가 그들에게 유익한 것만을 원한다는 가정을 기초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 가정은 누가 보든 분명히 잘못되어 있다(담배, 도는 마약에 대해서까지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은 아무 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명백히 무시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소비자의 욕구 는 생산자에 의하여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상품간의 경쟁은 있지만 광고가 낳는 전체적인 효과는 소비욕을 자극시키는 데 있다. 모든 회사가 그들의 광고를 통하여 이러한 기본적인 영향을 미치려는 점에 있어서는 상부상조하고 있다. 소비자는 서로 경쟁하는 몇 가지 상품 중에서 선택한다는 모호한 특권을 이차적으로 행사할 뿐이다. 소비자는 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포드 회사의 '엣셀(Edsel)'의 실패가 바로 그와 같은 사실을 입증하는 좋은 예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엣셀의 광고선전 역시 '자동차를 사도록 하기 위한 선전'이었다-엣셀 은 불운했지만, 그것에 의해서 다른 상표의 자동차들은 이익을 보았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다. 게다가 기업은 인간에게는 유익하지만 기업에는 이윤이 적은 상품은 생산하지 '않 음 '으로써 소비자의 기호를 좌우한다. '건전한 소비는 기업의 이익과 발전에만 근거하여 생산을 결정하는 대기업의 주주나 경영 자의 권리를 우리가 철저하게 제어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해진다.' 그러한 변혁은 서구 민 주주의의 조직을 바꾸지 않고도 법률에 의하여 성취할 수 있다(이미 공공복리를 위해 재산 권을 제한하는 많은 법률이 시행되고 있다). 문제는 자본의 소유권이 아니라 생산을 지시하 는 권력이다. 장기적으로 볼 때 광고의 암시적인 힘이 없어지기만 하면 소비자의 기호가 무엇을 생산해야 되는가를 결정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현존하는 기업은 그들의 시설을 새 로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바꾸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경우에는 정부가 소비 자가 필요로 하는 새로운 상품과 일용품 생산에 필요한 자본을 투자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모든 변혁은 시간을 두고, 그것도 대부분의 국민이 동의해야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경제체제를 만들어낼 것이다. 이 새로운 경제체제와 자본주의와의 차이는 오늘날 자본주의와 소련의 중앙집권적인 국가자본주의나 스웨덴의 전 반적인 복지관료주의간의 차이만큼은 될 것이다. 그러한 변혁에 저항하기 위해서 대기업들이 처음부터 그 거대한 힘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 는 점은 명백하다. 오로지 건전한 소비에 대한 시민들의 압도적인 욕망만이 대기업의 저항 을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시민들이 '소비자의 힘'을 보여줄 수 있는 효과적인 한 방법은 '불매동맹'의 위협을 무기 로 쓰는 전투적인 소비자운동을 조직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국의 자동차 소비 인구 중 20% 가 대중교통수단에 비하여 자가용은 낭비적이고, 생태학적으로 유독하며, 심리적으로 해를 끼치는 마약-즉, 어떤 인위적인 권력감각을 낳고, 질투심을 불러일으키고, 자기도피를 돕는 마약-이기 때문에 더 이상 자가용을 구입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했다고 하자. 그것이 자동차 산업-물론 석유회사까지 포함하여-에 얼마나 큰 경제적인 위협이 될 것인가는 경제학자만 이 분명히 가늠할 수 있겠지만, 자동차 생산을 중심으로 구축된 국가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물론 미국 경제가 중대한 위기에 빠지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 도 없다. 그러나 만약 그런 위협이 가능하다면, 예를 들어 한 달 동안 자동차를 사용하지 않 는다면 소비자는 모든 생산체제에 변혁을 일으킬 힘있는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불매동맹의 커다란 이점은 정부의 어떤 조처를 필요로 하지도 않으며, 이에 대한 기업측 의 투쟁은 어렵다는 점(정부가 소비자들이 원하지 않는 상품을 사도록 강요하지 않는 한), 그리고 강제조치를 취하기 위해 필요한 시민 과반수의 동의를 기다릴 필요도 없다는 점 등 이다. 단지 20%의 소수일지라도 변혁을 일으키는 데는 충분히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불매동 맹은 정치노선이나 정치적 구호의 장벽을 쉽게 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자유주의자와 보 수주의자, 그리고 '좌익' 휴머니스트들까지도 모두 참가할 수 있을 것이다. 건전하고 인간 적 인 소비에 대한 갈망이라는 하나의 동기가 모두를 하나로 만들기 때문이다. 불매동맹에 들 어가기 전 단계로서, 급진적이고 인도주의적인 소비자운동의 지도자들이 자기들이 요구하는 변혁을 놓고 대기업(또는 정부)고 교섭을 할 것이다. 그들의 방식은 근본적으로 노동자의 파 업의 전 단계로서 노동협상을 벌이는 것과 같다. 여기서 문제는 소비자로 하여금 1. 소비지상주의에 대한 그들의 반 무의식적인 반감과 2. 인도주의적인 정신을 가진 소비자가 일단 조직화되면 갖게 될 자기들의 잠재력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러한 소비자운동이야말로 지정한 민주주의의 발현이다. 즉, 개개인이 직접 자기의 의견을 나타낼 수 있으며, 능동적이고 소외되지 않은 형태로 사회발전의 방향을 바 꾸려고 할 것이다. 게다가 이런 모든 것은 정치적인 슬로건이 아니라 개인적인 경험이 그 바탕을 이루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효과적인 소비자운동이라도 대기업의 힘이 오늘날처럼 강대한 이상 충분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날이 강화되어 가는 대기업의 정부에 대한 지배 나, 세뇌에 의한 사상 통제를 수단으로 하는 대중에 대한 지배가 분쇄되지 않는다면, 아직은 존재하고 있는 민주주의의 잔재마저 기술주의적 파시즘이나 사고할 줄 모르는 살찐 로봇의 사회, 즉 우리가 두려워하는 '공산주의'라는 이름의 사회형태로 전락되어 버릴 운명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는 반 트러스트의 여러 법령에 나타나 있듯이 대기업의 힘을 통제해 온 전통이 있다. 강력한 대중의 감정만이 이런 법률의 정신을 오늘날의 초대기업에 적용케 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이들 초대기업들은 좀더 작은 단위로 분해될 것이다. '존재에 바탕을 둔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은 시민으로서, 또 그들의 경제 적 기능에 있어 능동적으로 참여하여야 한다. 따라서 생존의 소유양식으로부터의 해방은 산업 적, 정치적 참여 민주주의를 완전히 실현함으로써만 비로소 가능하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급진적 휴머니스트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산업민주주의'란 다음과 같은 것을 뜻한다. 대규모 산업조직 혹은 기타 조직의 각 구성원 은 그 조직내의 생활에서 능동적 역할을 한다. 각 구성원은 충분한 정보를 제공받고 자기의 작업과정, 건강, 안전조치 등의 단계에서부터(이것은 이미 스웨덴과 미국의 몇몇 기업에서 시도되어 성공을 거두고 있다)결국은 보다 높은 단계의 기업의 일반정책 결정에까지 참여해 야 한다. 노동조합의 간부가 아닌 고용자 개개인이 각각의 공동정책을 결정하는 기구에서 노동자를 대표해야 한다는 점이 특히 중요하다. 산업민주주의는 또한, 기업이 단순히 경제 적, 기술적 조직일 뿐만 아니라, 그 조직내 생활과 기능방법에 모든 구성원이 능동적이고, 따라서 참가의 정신을 가질 수 있는 사회조직이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정치적 민주주의'의 실현에도 마찬가지의 원리가 적용된다. 민주주의가 수동적인 '방관 민 주주의'에서 능동적인 '참여 민주주의'로 전환된다면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적 위협에 저항 할 수 있게 된다. 참여 민주주의하에서는 공동체의 일이 시민 각자에게 그들의 개인적인 일만 큼 친근하고 중요한 것이 되며, 더 나아가서는 공동체의 복리가 시민 각자의 관심사가 되는 것이다. 공동체에 참여함으로써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이 더욱 흥미있고 자극적인 것이 된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참된 정치적 민주주의는 그 속에서의 생활이 바로 이와 같이 '흥 미 로와야'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바로 그런 특성으로 인해 참여 민주주의는-'인민 민 주주의'나 '중앙집권적 민주주의'와는 대조적으로-비 관료주의적이며, 선동적인 정치가의 출 현을 사실상 배제하는 풍토를 형성한다. 참여 민주주의의 실천방법을 고안해 내는 일은 18세기에 민주주의적 헌법을 만들던 일보 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많은 유능한 사람들이 참여 민주주의의 건설을 위한 새로운 원 칙과 실천방법을 고안하기 위해 막대한 노력을 기울여야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제기된 많은 가능성의 하나로, 내가 20여 년 전에 저술한 '건전한 사회'에서 논급했 던 제안을 되풀이하고자 한다. 즉, 수십만의 면접집단(각 집단은 약 5백 명의 구성원으로 이 루어진다)을 만들어서 그것을 의사결정을 하는 상설기관으로 삼아 그들 스스로 경제, 외교, 보건, 교육, 복지 등의 분야의 기초적인 문제를 이들 집단에게는 합당한 정보(이 정보의 성 격에 관해서는 후에 기술하겠다)가 제공되어야 할 것이며, 그들은 이 정보를 가지고 어떤 외부의 영향도 받지 않고 토론을 하며, 문제점에 관해서는 투표를 행하도록 한다(오늘날의 기술적인 방법을 전제로 한다면 모든 집단의 투표는 하루 안에 집계될 것이다). 그러면 이 들 집단의 총체가 '하원'을 형성할 것이며, 그들의 결정은 다른 정치기관의 의사결정과 함께 입법면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어째서 이와 같이 골치 아픈 계획을 세워야 하는가? 여론조사로도 짧은 시간 안에 전체 국민의 의견을 알아낼 수 있을 텐데'하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론은 의사표시에 관 한 가장 문제점 있는 측면을 생각해 보도록 해 준다. 여론 조사의 기초가 되는 '의견'이라는 것 은 타당한 정보의 혜택이나 비판적인 심사숙고와 토론을 거치지 않은 개개인의 사적인 의견 에 지나지 않는다. 더욱이 여론조사에 응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의견'이 중요시되지도 않으 며, 따라서 효과도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러한 여론은 어떤 주어진 순간의 사람들 의 의식적인 생각을 나타내고 있을 뿐, 환경이 변하면 반대의견으로 될 수도 있는 잠재적인 경향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정치적인 선거에 있어서도 투표자들은 일단 후보자에게 투표를 하고 난 다음에는 자기들이 사건의 과정에 아무런 실제적인 영향력을 행 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인 선거가 여론조사보다 더욱 나쁘다. 왜냐하면, 선거는 반최면적인 방법을 써서 사고력을 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선거는 정치적 인 논점이 아닌 후보자의 소망과 포부가 드라마틱하게 전개되는 주간 연속방송극이 되어 버 렸다. 유권자는 자기가 좋아하는 후보자에게 투표를 함으로써 이 드라마에 참여할 수 있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내려고는 하지 않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투사가 아닌 정치가들이 투 기장에서 싸우고 있는 현대적인 로마식 구경거리에 열광한다. 진정한 신조의 형성에는 적어도 다음의 두 가지 요건이 필요하다. 즉, '타당한 정보와, 자 신의 결정이 영향력을 가진다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무력한 방관자에 의해 형 성 된 의견이란 그들의 신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담배의 상표를 고를 때 어떤 것을 더 좋 아하는가를 나타내는 것과 비슷한 하나의 게임이다. 이런 이유에서 여론조사나 선거에서 나 타난 의견은 판단력의 수준에서 볼 때 최선의 것이라기보다는 최악의 것이다. 이런 사실은 사람들이 최선의 판단을 내린다고 볼 수 있는 다음 두 가지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1. 그들의 사사로운 일(슘페터가 분명히 지적한 것처럼 특히 사업의 경우에)과 2. 그들이 배심 원이 되었을 때에는 '그들의 결정은 정치적인 결정을 내릴 때보다 훨씬 탁월하다'. 배심원을 보통 시민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가끔 복잡하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 결정을 내 려야 한다. 그러나 배심원들은 모든 적절한 정보를 제공받으며 광범위한 토론을 할 기회가 주어진다. 또한 그들은 그들의 판결이 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의 생명과 행복을 결정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의 결정은 대단한 통찰력과 객관적 타당성을 보여준다. 반 면에 정보가 결핍되고, 반최면상태의 힘없는 사람들은 진지한 신조를 표명할 수 없다. 정보 도 심사숙고도 없고, 또 자기의 결정을 실현시킬 힘이 없을 때는 민주적으로 표현된 의견이 라 해도 스포츠 경기에 보내지는 박수갈채와 별로 다를 바가 없다. '정치적 생활에 있어서의 능동적인 참여는 산업과 정치의 최대한의 분권화를 필요로 한 다.' 현재의 자본주의에 내재된 논리에 의해 기업과 정부는 점점 규모가 커져서 결국은 관료주 의적 기구를 통해 정점으로부터 중앙통제되는 거인이 되고 만다. 인도주의적인 사회가 되기 위한 요건 중의 하나는 이러한 중앙집권화의 과정이 중지되고 대규모적인 분권화가 이루어 져야 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만약 사회가 멈포드가 말한 바 '거 대한 기계'처럼 된다면(즉, 대중을 포함한 사회 전체가 중앙에서 통제되는 하나의 커다란 기 계같이 된다면), 결국은 파시즘이 불가피해진다. 왜냐하면, 1. 대중은 순한 양이 되어 비판적 인 사고능력을 잃어버리며, 무력하고 수동적이 되어, 필연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아는, 즉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는' 지도자를 동경하게 되고 2. 이 '거대한 기계'는 누 구든지 접근하여 필요한 단추만 누르면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거대한 기계는 자동차 와 마찬가지로 본래 자동적이다. 즉, 자동차의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은 필요한 단추를 누르 고, 핸들과 브레이크를 조정하며, 그밖에 몇 가지 비슷한 부속품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된다. 자동차나 기계에 많은 톱니바퀴가 있듯이 이 거대한 기계에는 여러 단계의 관료주의 적 행정이 있다. 평범한 지식과 능력의 소유자라도 일단 권좌에 앉기만 하면 쉽게 국가를 통치할 수 있게 된다. 국가의 통치기능은, 그 자체가 거대한 집합체인 각 주에 위임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 람들이 서로를 알고 서로를 판단할 수 있으며, 따라서 공동체의 행정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지역 자치단체에 위임되어야만 한다. 기업 내부의 분권화는 기 존 기업내의 소집단에 보다 큰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거인이 된 대기업을 소집단으로 분해할 것이다. '능동적이고 책임있는 참여를 위해서는 또한 인도주의적 행정이 관료주의적 행정을 대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