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 강의(상) 옮긴이: 임홍빈, 홍혜경 출판사; 열린책들 봉사자: 한양대 김소연, 박경호 vorlesungen zur einfuhrung in die psychoanalyse (1916∼1917[1915∼1917]) 이 책은 1915년 10월에서 1916년 3월, 1916년 10월에서 1917년 3월에 결쳐 빈 대학에서 강의한 내용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책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정신분석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프로이트의 정 신분석학에 대한 관점의 변화에 대한 실태 조사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프로이트 는 이 책에서 불안, 원초적 환상, 꿈-형성, 도착 등의 문제를 다루며, 일상 생활 에서 익숙해져 있는 실수 행위들과 꿈의 매커니즘에 대하여 광범위한 설명을 하 고 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강의'에서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 '꿈의 해석'등에서 다룬 내용을 다시 한번 정리하고 있으며 이후 그의 생각의 변화는 '새로운 정신 분석 강의'에 나타나 있다. 이 책은 1916년에서 1917년에 걸쳐 첫번째 독어판이 출간되었으며, 1940년 '전 집gesammelte werke' 제11권에 실렸다. 영어 번역본은 라는 제목으로 1920년 출간되었으며, 1963년에는 '표준판 전 집the standard edition of the complete works of sigmund frend' 제15권과 16 권에 실렸다. 제1부 실수 행위들 (1916[1915]) 첫 번째 강의 서론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들 각자가 강의를 듣거나 책에서 읽은 것 등을 통해 서 정신분석학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을 갖고 계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러나 내 강의의 제목을 <정신분석학 입문>이라고 정함으로써 여러분들 을 정신분석학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식이 없는, 그러므로 가장 기초적인 강의부 터 필요로 하는 사람들로 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여러분들이 정신분석이라는 것은 신경증이 있는 환자들을 의학 적으로 다투는 하나의 치료법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으리라고 전제하고, 이 분야 에서는 많은 것들이 의학 분야에서의 치료법과는 몹시 다르게, 심지어는 거꾸로 진행되기도 한다는 것을 여러분들에게 예를 들어 보여 드리고자 합니다. 환자에 게 어떤 새로운 기법을 적용해 보려고 할 때, 다른 때 같으면 그 사람의 고통을 대폭 경감시키고 치료의 성공과 관련해서 매우 희망적인 약속들을 하곤 했던 것 이 일반적입니다. 그것은 퍽 좋은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성공의 확률을 높일 수 있기에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경 증 환자에게 정신분석적인 치료 방법을 도입할 때는 그와는 다른 벙법을 취합니 다. 우리는 이 치료 방법의 여러 난점들과 그것에 걸리는 오랜 시간, 그에 따른 노력들과 희생들에 관해서 이야기해 줍니다. 성공과 관련해서는, 확실하게 그것 을 보장할 수는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환자 자신의 태도와 이해력, 치료 방식에 대한 그의 유연성과 적응력, 지구력 등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설명하곤 합니다. 이처럼 완전히 거꾸로인 것처럼 보이는 행동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물론 충분합니 다. 여러분도 나중에 언젠가는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일단 내가 여러분들을 이와 같은 신경증 환자들처럼 취급한다고 해도 화를 내 지 마십시오. 그이고 나의 강의를 또 한번 듣겠다고 이곳에 다시 나타나는 따위 의 일은 하지 마십시오. 이와 같은 의도에서 나는 정신분석 강의라는 것이 얼마 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 것인지, 그리고 자신만의 판단을 얻기까지 얼마나 많 은 난제들이 가로놓여 있는지를 강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제까지 받아 온 교육의 모든 경향이나 여러분들의 모든 사고 방식들은 불가피하게 여러분들 을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대자로 만들어 갈 것이며 이러한 본능적인 적대감을 극 복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 마음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이겨 내야만 하는 것인 가를 여러분들에게 주지시켜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의 강의를 듣고 여러 분들이 정신분석학에 대해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인가에 관해서는 나는 물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이와 같은 정신분석학 강의를 듣는 것만으로는 정신분석 연구에 착수하거 나 그러한 정신분석적 치료를 직접 수행할 수는 없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가 정신분석학에 대한 이와 같은 피상적인 지식에 만족하 지 못하고 정신분석과 지속적인 관계를 맺고자 원하는 사람이 있을 때, 나는 그 에게 그렇게 하지 말도록 충고하고 싶을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경고까지도 하 려고 합니다. 현재의 상태로 보아서는 그는 그러한 직업 선택을 통해 대학교에 자리를 얻게 될 가능성도 없고, 숙련된 의사로서 살아가고자 할 때 그의 노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미심쩍은, 적대적인 눈초리를 보내면서 자기들 속에서 웅크리 고 앉아서 기회를 엿보고 있던 모든 나쁜 악령들을 그에게 쏟아 부을 그런 사람 들 속에 자신이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유럽을 뒤흔들고 있는 전쟁의 여러 가지 상황들에서 여러분들은 그런 사람들의 수가 얼마나 많을 지를 가히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여러 가지 난관들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 가운데에는 새로운 것을 지식으로 받아들이고 또 그에 대한 흥미를 지속시킬 수 있는 사람들이 꽤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그러한 사람들이 있어서 나의 경고를 무시하고 다음 번에도 이 강의에 들어온다면 그 사람들은 환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내가 언급했던 정신분석의 어려움들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를 알아볼 권리가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정신분석을 가르치는 데 있어서 교수법과 강의법의 어려움이 문제 입니다. 여러분들은 의학 강의에서 보는 데에만 익숙해져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해부학 표본을 보거나 화학 반응에서 나타나는 침전물, 신경을 자극했을 때의 근육 수축 등과 같은 것을 관찰해 왔습니다. 또 조금 지나게 되면 여러분들에게 환자들을 보여주기도 하며 그의 고통의 증상들이나 병적 과정의 산물들, 또는 고립된 상태에 있는 병원균들을 보여 주는 경우도 수없이 많습니다. 또 외과학 분야에서는 여러분들은 수술의 참관인이 되기도 하며 그 수술을 직접 시도해 보 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정신의학 분야에서도 실연 수업이 행해져서, 환자의 변화된 표정의 움직임이나 말하는 태도, 또 행동들을 관찰할 수 있게 되는데 그 것들은 여러분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의학 분야에서 의 선생의 역할이란 주로, 박물관에 동행해서 여러분들이 사물들과 직접적인 관 계를 맺으면서 여러분 자신의 감각을 통해서 새로운 사실들의 존재를 확인하게 되는 동안 안내를 맡고 있는 안내자나 해설자의 역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사정이 정신분석학에서는 전혀 다릅니다. 정신분석적인 치료 에서는 피분석자와 의사 간에 대화의 교환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 습니다. 환자는 지나간 경험이나 현재의 인상들에 대해 의사에게 이야기하고, 자 신의 고통을 호소하기도 하며 자신의 소망이나 감정 충동gefuhlsregung들을 고 백합니다. 의사는 그 말을 경청하고 환자의 사고 과정들을 유도하거나 어떤 일 을 회상하게 하고 그의 주의력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려고 노력합니다. 그에게 설명을 해주거나 또 의사로서 환자에게 불러일으켰던 이해나 거부와 같은 반응 들을 관찰합니다. 우리 환자의 가족들 중에서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에게는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만이 깊은 인상을 주며, 그들은 감동 시키는 최상의 방법은 극장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직접적인 행동을 보여 주 는 것입니다)<말하는 것만을 가지고 어떻게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라고 의혹을 표시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근시안적이 고 일관성 없는 생각에 불과합니다. 그들이야말로 환자들이 자신들의 증세를 <그저 상상해 내고 있을 뿐이다>라고 확실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입 니다. 언어란 원래 마술이었으며 그것은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오래된 마술의 힘 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 게 만들 수도 있고 저주로 내몰 수도 있는 것이며, 언어를 통해서 선생은 자신 의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수할 수 있는 것이며 또 강연자는 모여든 청중들의 마 음을 사로잡을 수도 있고 그들의 판단과 결정을 좌우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언 어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며 사람들 사이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수 단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리 치료에 있어서의 언어 사용을 평가 절 하해서는 안 되고 분석가와 그의 환자 사이에 오고 가는 말들을 들을 수 있는 청취자가 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적인 치료 과정에 존재하는 대화들은 단 한 사람의 방청자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들에게 공개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정신의학 강의에서도 배우는 학생 들에게 신경쇠약증neurasthenie 환자나 히스테리hysterie 환자를 직접 소개할 수 도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고통과 증상들에 관해 호소하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은 말하지 않습니다. 분석 치료에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은 오로지 그가 의 사와 특별한 감정적 유대를 맺고 난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환자가 어떤 다른 사 람, 그와는 전혀 무관한 다른 사람을 발견하게 되는 즉시 그는 말을 멈추고 맙 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이야기들이란 환자의 정신 생활의 가장 내밀한 부분과 관련되기 때문이며, 그가 사회적으로 독립적인 개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남 들 앞에 감추어야만 하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고 나아가서는 통일적이고 조화 로운 인격체로서 자기 자신에게조차 고백하고 싶지 않은 그런 내용들과 관련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정신분석 치료에서 행해지는 이야기들은 함께 들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저 그러한 사례들에 관해 들을 수 있을 뿐이며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정신분석학은 남의 말을 들음으로써만 배울 수 있습니다. 이차 적인 중개에 의해 행해지는 이러한 수업을 통해서 여러분은 자신만의 판단을 내 리기에 별로 익숙하지 않은 조건 속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문제의 관 건은 상당 부분 여러분에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는 그 증인에게 여러분들이 얼마 만큼의 신뢰를 보내는가의 여부에 좌우됩니다. 여러분들이 정신의학 강의를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역사학 강의를 들으러 왔 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십시오. 교수는 여러분들에게 알렉산더 대왕의 생애와 전 쟁중의 위대한 행동들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대체 어떠한 동기로 그가 이야기하는 내용의 진실성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 니까? 처음 보기에는 그런 일을 설명해서 이해시킨다는 것은 정신분석학의 경우 에서보다 더 힘든 일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그 역사학 교수라는 사람도 여러 분들처럼 알렉산더 대왕의 전쟁에 참가해 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정신 분석가는 적어도 그 스스로가 참가해서 하나의 역할을 했던 그런 사태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곧 역사가의 말을 증명해 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듭니다. 그는 여러분들에게 옛날 저술가 들의 보고를 환기시킬 것입니다. 그 저술가들이란 스스로가 알렉산더 대왕과 동 시대인 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문제되는 사건에 시간적으로 아주 가까운 시대 에 살았던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디오도르diodor나 플루타르크 plutarch, 아리안arrian과 같은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역사학 교수는 또 발굴 되어 현재까지 보존되어 내려오는 동전이나 대왕의 조상 따위의 복사품을 제시 해 보일 수도 있고 잇소스 전쟁을 묘사하고 있는 폼페이 모자이크 사진을 여러 분들에게 회람시킬 수도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이러한 모든 기록들은 옛 시대의 사람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실제와 그의 행동의 사실성 등을 믿어 왔다는 것만을 증명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의 비판은 여기서 새로이 전개될 수 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알렉산더 대왕에 관한 모든 보고가 반드시 믿을 만한 것은 아니며 그 세세한 사실들 하나 하나는 확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실재 자체를 의심하 면서 그 강의실을 떠나게 될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판단은 주로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고려하고 나서 내려질 것입니다. 첫 번째로, 역사학을 강 의하는 그 교수가 그 자신도 사실로 믿지 않고 있는 것을 실제로 있었던 일처럼 여러분들 앞에 꾸밀 이유가 거의 없으리라는 것이고, 두 번째로, 구해 볼 수 있 는 모든 역사학 문헌들이 그 사건을 대략 비슷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 다. 여러분이 또 오래된 문헌들을 검증해 보려고 할 때도, 그렇게 증언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질 수 있을 만한 그럴듯한 동기와 그러한 증거들이 서로 일치하고 있는가 하는 두 가지 요소를 고려해 볼 것입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경우에는 그 검증의 결과가 아마도 믿을 만한 것이 되겠지만 모세나 님로드(바빌로니아 군신. 아시리아의 최초의 왕으로 알려져 있다.)와 같은 인물일 경우에는 매우 다른 결 과가 나올 것입니다. 정신분석을 강의하는 사람의 신뢰성에 대해 여러분들이 어 떤 의심을 품게 될 것인가는 나중에 적당한 계기에 가서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 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권리가 있습니다. <정신분석학 에 대한 객관적인 확인이라는 것도 없고 그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는 가능성도 없는 것이라면 정신분석학을 도대체 어떻게 배울 수 있으며 그 주장의 진실성을 어떻게 납득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배운다는 것은 실제로도 쉬운 일이 아닙 니다. 또한 정신분석학을 제대로 배운 사람도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리로 갈 수 있는 통로는 존재합니다. 처음에는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인격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정신분석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보통 자기 관찰selbstbeobachtung이라고 부르는 것과 완전히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적당한 표현이 없으므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부른다 해도 상관이 없습니다. 정 신적인 현상 중에는 매우 평범하고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현상들이 매우 많습니 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술을 몇 가지 습득하고 나면 그 현상들을 분석의 대상 으로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때 여러분들은 정신분석이 묘사하고 있는 그 과정 의 실제성과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견해가 옳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필요한 확 신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방법으로 달성하는 발전에는 한계 가 있습니다. 숙련된 분석가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한 분석의 효과를 스스로 체험하고 다른 사람이 정신분석 요법의 정교한 기술을 사용하여 다루는 것을 보 면서 많은 것을 배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단히 훌륭한 방법은 말할 것도 없이 소수의 개개인들에게만 가능하고 전체의 사람 모두에게 일시에 가능 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이 정신분석학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생기는 또 두 번째의 어려움은 더 이상 정신분석에만 돌릴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여러분이 적어도 의학 공부를 해왔다는 한에서 여러분 자신에게 그 책임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이제까지 받아 온 교육은 여러분의 사고 활동을 정신분석과는 거리가 먼 반향 으로 돌려 놓았습니다. 여러분은 신체 기능과 장애들을 해부학적으로 근거지우 고 화학적, 물리학적으로 설명하고 생물학적으로 파악하는 교육을 받아 왔습니 다. 그러나 여러분의 관심 중에서 어느 한 부분도 이처럼 놀랍도록 복잡한 신체 기능 발달의 정점에 놓여 있는 인간의 심리 활동으로 돌려진 적이 없습니다. 그 러므로 여러분에게는 심리학적 사고법은 낯설기만 하고 또 여러분은 그런 것을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나 사고 방식에 학문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을 거부하며 그것들을 문외한들이나 시인들, 자연 철 학자들(19세기 초반에는 쉘링의 범신론적 <자연 철학>의 추종자들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신비주의자들에게 내맡겨 버린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한계는 여러분의 의료적 활동의 관점에서 볼 때 확실히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 관계가 다 그러하듯이 환자는 여러분에게 처음에는 자신의 정신 과정 의 정면만을 내보이게 되며,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진 한계의 대가로 여러분이 이룩하고자 노력하는 치료적 영향의 일부를 여러분이 그렇게도 경멸해 마지않는 엉터리 의사나 자연 요법가, 또는 신비주의자들에게 내맡겨 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받아 왔던 교육의 이러한 결함에 대해서 어떤 변명을 늘어놓을지 나 는 확실하게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의학적 목적에 사용될 수 있 는 철학적 보조 학문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사변 철학도 기술 심리학도 또 감각 생리학과 연결된 이른바 실험 심리학이라는 것도 학교에서 교수되는 형태 그대 로는 여러분에게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것 사이의 관계에 대해 유용한 어떤 지식 을 제공하거나 심리적 기능의 있을 수 있는 장애들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를 주 지 못합니다. 의학 분야 애에서도 정신의학은 관찰된 정신 장애들을 기술하고 임상적인 질병 증상으로 종합하는 일을 하고 있지만 정신의학자 자신도 기술적 인 나열 그 자체만을 가지고 과학이라는 이름을 가질 자격이 있는지 의심하기도 합니다. 질병 증상들을 이루고 있는 징후들의 유래나 메커니즘, 그 안에서의 적 대적인 관련성 등에 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징후들은 또 정신 이 존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해부학적 기관의 증명 가능한 변화와도 일치하 지 않고 또 그러한 해부학적 변화를 가지고 그 징후들을 설명하는 것 역시 불가 능합니다. 이러한 정신적 장애들이 심리 치료적인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그 밖 의 어떤 신체적인 질환의 부작용으로서 밖으로 드러나게 될 때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신분석학이 메우려고 노력하고 있는 허점입니다. 정신분석은 정신의학이 결여하고 있는 심리학적 토대를 제공하려고 하며 육체적인 장애가 정신적인 장애와 함께 나타나는 이유를 밝힐 수 있는 공통의 근거를 발견하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목적으로 정신분석은 정신분석과는 친숙하지 않은 모든 해부학적 화학적 생리학적 성격을 띠고 있는 전체들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심리학적인 보조 개념만을 가지고 작업을 진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때문에 여러분에게 처음에는 정신분석이 생소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 설명할 어려움과 관련해서는 여러분이나 여러분이 지금까지 받은 교 육, 또는 여러분의 태도에 책임이 있다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정신분석은 그것이 표방하고 있는 두 가지의 원칙 때문에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주었고 그로 인해 그들의 반감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세상 사람들의 지적인 편견과 충돌하고 또 다른 하나는 심미적, 도덕적 편견과 어긋나는 것입니다. 이 러한 편견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그것들은 위력적인 것들로서 인간에게 유익하고도 필연적인 인류 발전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 것들은 정서적인 힘들에 의해서 고착되어진 것이고 그러므로 그것과의 싸움은 아주 힘든 싸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신분석이 내세우고 있는 이러한 반갑잖은 주장 중에서 가장 첫 번째로 제기 되는 것은 정신적 과정들은 그 자체가 무의식적이며, 의식bewubtsein적인 것은 정신 활동 전체 중에서 단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와는 달리 심리적인 것과 의식적인 것을 하나로 생각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의식이라는 것은 우리에게는 바로 그 심리적인 것을 결정하는 특성으로 여겨져 왔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 개를 동일한 것으로 여겼던 이와 같은 입장은 너무도 자명한 것으로 보였고 그러므로 그것에 반대한 다는 것은 명명백백한 망상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은 이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신분석은 의식과 정신의 동일성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무의식에 관하여'<프로이트 전집 13, 열린 책들>에서 프로이트는 이 문제에 관하여 길게 논하고 있다.)정신분석은 정신을 감정, 사고, 의지와 같은 과정으로 정의하며 무의식적인 사고나 무의식적인 의지 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이러한 입장 때문에 냉정한 과학성을 추구하는 모든 사 람들의 호감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정신분석은 어둠 속에서 집을 짓고 흐린 물 속에서 낚시를 하려 하는 공상적인 신비론일 뿐이라는 의심을 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그러나 내가 무슨 권리를 갖고 <정신적인 것은 의식적인 것이다>라는 추상적인 성격을 가진 명제를 편견으로 단정하는지 아직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 다. 또한 무의식이라는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어떤 발달 과정을 통해서 이러 한 무의식이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는지, 또 이렇게 무의식을 부정함으로써 어떠 한 이익이 발생하게 되는가에 대해서 여러분은 아무런 추측도 하지 못할 것입니 다. 정신적인 것을 의식과 동일시할 것인가, 아니면 의식은 그 너머까지로 확정 되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을 벌이는 것은 어쩌면 공허한 말장난처럼 들 릴 것입니다. 그러나 무의식적인 정신과정을 설정함으로써 이 세상과 학문의 세 계에 결정적으로 새로운 방향 정립이 확립되었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에게 확실 하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의 이러한 첫 번째의 대담성이 지금 언급하려고 하는 두 번째의 것과 얼마나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지 여러분은 역시 짐작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 신분석이 자기의 연구 결과의 하나로 공표하고 있는 또 하나의 명제는 좁은 의 미에서나 넓은 의미에서 성적인 것으로 지칭할 수 있는 본능 충동triebregung이 신경증이나 정신질환을 불러일으키는 데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역할을 하 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아니, 그 이상입니다. 이와 같은 성적인 충동은 또 인간 정신의 최고의 문화, 예술, 사회적인 창작 활동에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대한 공헌을 해왔습니다.(성적 충동에 대해서는 스무 번째 강의에서 구체적으로 논의 된다.) 나의 경험에 의하면 정신분석 연구의 이러한 결과에 대한 혐오감 이야말로 정 신분석이 부딪치고 있는 저항감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 리가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알고 싶으십니까? 문화란 생존을 위한 역 경이라는 추진력 밑에서 본능 충동을 희생함으로 해서 창조된 것이라고 믿습니 다. 그리고 그것은 인간 사회 속에 새로이 등장하게 되는 개개인들이 사회 전체 의 이익을 위해 본능 충족triebbefriedigung에 대한 희생을 되풀이함으로써 항상 새롭게 다시 창조되곤 합니다. 이렇게 문화의 창달을 위해 사용된 본능적 힘들 가운데에서 성충동sexualtrieb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성적 욕망 들은 그 과정 속에서 승화됩니다. 다시 말하면 본래의 성적인 목표에서 다른 방 향으로 돌려져서 더 이상 성적인 특성을 갖고 있지 않은, 사회적으로 더욱 고상 한 측면으로 항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조는 너무나도 불안정하고 성충동 은 그저 약하게 통제될 뿐입니다. 문화적인 활동에 참가하려고 하는 모든 개개 인들에게는 본능 충동을 이렇게 사용하기를 거부하려는 위험이 항상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회는 성적 충동이 해방되고 그것이 원래의 목표로 회귀하려는 경향 성이 강화될 때 빚어지는 위험을 자신의 문화에 대한 가장 무서운 위협으로 간 주합니다.(문명과 본능적 힘의 대립에 관해서는 프로이트의 '문명 속의 불만'<프 로이트 전집 15, 열린책들>을 참조하라.) 사회는 그러므로 사회의 근거를 이루고 있는 이러한 가장 예민한 부분이 건드려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회는 또 이 러한 성충동이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인정하고 개개인들에게 있어서의 성생활 sexualleben의 의미가 분명하게 정립되는 데 대해 조금도 관심을 갖고 있지 않 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교육적인 목적에서 이 부분에 대한 주의를 딴 곳으로 돌려 버리는 방법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는 정신분석학의 연구 결과 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것을 심미적 관점에서는 혐오스러운 것으로, 도덕적으 로는 비난받아 마땅한 것으로, 더 나아가 위험한 것으로 낙인찍어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론은 학문적 작업의 객관적인 결과를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정신분석학에 대한 반론이 더 확대되려면 지적인 용어로 번역되어야 만 합니다. 어떤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질 때는 그것을 옳지 않은 것으로 간주해 버리려 하는 것이 인간적 본성인 것 같습니다. 또 그것에 대해 반대하는 논거는 곧 찾을 수 있기 마련입니다. 사회는 그러므로 자기가 좋아하지 않는 것을 옳지 않은 것으로 공표하고 정신분석의 진실을 논리적이고 구체적인 논점으로 반박하 지만, 그것은 정서적인 근원에서 출발하는 것이고 그것을 논박하려는 모든 시도 에 맞서 편견에 불과한 이러한 이의를 고수하게 됩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편견에 대항하는 이러한 명제들을 주장함에 있어서 어떠한 경향성도 좇지 않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수고스러운 작업을 거쳐서 확인했다고 믿고 있는 그러한 사실을 단지 이 세상에 공표하려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현실적인 측면을 고려하도록 요구하는 그와 같은 경계심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를 직접 조사해 볼 필요를 느 끼지 않으며, 학문적으로 작업하는 과정에서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배려 하려는 모든 시도를 단호하게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이것들이 아마도 여러분이 정신분석을 연구할 때 마주치게 되는 어려움들 중 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은 어쩌면 시작으로서는 너무 과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그러한 인상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강의를 계속해 나가겠 습니다. 두 번째 강의 실수 행위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는 전제들에서 출발할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연구를 해봄으로써 시작하겠습니다. 우리 연구의 대상으로, 매우 흔히 일어나며 잘 알려 져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간과되어 왔고, 건강한 모든 사람에게서도 관찰될 수 있기 때문에 질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러한 현상을 택하기로 합시다. 그 것은 이른바 인간들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실수 행위fehlleistungen(<잘못된 행 위>, <잘못된 기능> 등을 말한다. 프로이트 이전에는 일반적인 개념이 없었다. 프로이트는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프로이트 전집 7, 열린책들>에서 이러한 실수 행위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라 일컬어지는 것들로서, 어떤 사람이 무 엇인가를 말하려고 했는데 그 대신에 다른 말이 튀어나오는 잘못 말하기 versprechen 같은 것이라든가, 그가 그것을 눈치챘든 채지 못했든 간에 그러한 일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것, 혹은 어떤 사람이 인쇄물로 된 것이나 문서에 씌어진 것을 읽을 때 거기에 쓰인 것과는 다르게 읽으면서 일어나는 잘 못 읽기verlesen 같은 것, 또는 그의 청각 기관에 어떤 기능적인 장애가 없음에 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이 말한 것을 틀리게 들을 때, 즉 잘못 듣기verhoren 같 은 행위들을 말합니다. 그러한 현상들의 또 다른 종류에는 망각vergessenheit이 그 근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속적인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현상일 뿐입니다. 예를 들어 그가 확실히 알고 있고 언제나 다시 알아보곤 했던 어떤 이름을 생각해 낼 수 없을 때나, 나중에는 기억해 낼 수 있었으나 어떤 계획을 실행했다가 잊어버릴 때, 즉 일정 시간 동안만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경우입니 다. 세 번째의 현상에는 <일시적으로만>이라는 조건이 빠져 버립니다. 예를 들 어 어떤 사람이 어떤 물건을 어딘가에 놓아 두었다가 찾지 못하는 경우인 잘못 놓기verlegen나 그와 유사한 경우인 잃어버리기verlieren가 여기에 속하는 사례 들입니다. 이러한 행위의 근저에는 망각이 가로놓여 있는데 이 경우에 사람들은 다른 망각의 경우에서처럼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행위로 간주하지 않고 스스로 그것에 대해 놀라거나 분개하는 등의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그 밖에도 <일시 성>이라는 요인이 전면에 나타나는 일련의 다른 착각irrtumer들이 있는데 그 경 우에 사람들은 그 전이나 그 후에는 달리 이해하고 있던 어떤 것을 잠시 동안 믿어 버리는 따위의 행동을 합니다. 이 밖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름들을 가진 비슷한 경우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모두 (우리말에서는 <잘못>이라는 뜻으로 옮길 수 있다.)라는 전철이 앞에 놓이면서 그것들 사이의 내적인 유사성이 표현되는 그러 한 경우들입니다. 그것들은 거의 모두 대단한 중요성이 있는 것들은 아니고 대 부분은 매우 피상적인 성격을 띠며 인간들의 생활에서 그다지 큰 의미를 갖고 있지 않은 것들입니다. 어쩌다 매우 드문 경우, 어떤 물건을 잃어버린다든지 하 는 몇 가지 경우에만 실제적인 중요성을 갖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 도 그다지 큰 관심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아주 미약한 감정적 동요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 이러한 현상에 대해 여러분들의 주의를 끌고자 합니다. 그 러나 여러분들은 나에게 불만스럽게 다음과 같이 항의할 지도 모릅니다. <정신 생활의 좁은 영역에 수많은 수수께끼들의 숨어 있는 것처럼 이 세상에는 대단히 엄청난 불가사의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정신 장애의 영역에도 해명을 요구하고 있고 또 그렇게 할 가치가 있는 수없이 많은 경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그 렇게 사소한 것들에다 우리의 정력과 관심을 바친다는 것은 정말 어이없는 일처 럼 생각됩니다. 건강한 눈과 귀를 가진 사람이 어찌해서 실제로 있지도 않은 것 들을 백주에 보거나 듣게 되는 것인지, 또 왜 어떤 사람은 이제까지 가장 사랑 하던 사람에게서 갑자기 추적을 받고 있다고 믿게 되는 것인지, 어떻게 해서 어 린아이들에게조차 말도 안 되는 일로 생각되는 망상이 가장 예리하고도 논리적 인 이유로 무장한 채 주장되는 것인지를 선생님께서 우리에게 납득할 수 있게 해 주신다면 우리도 정신분석을 높게 평가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분석이, 축하 파티를 하는 자리에서 축사를 하는 사람이 왜 자기가 의도하지 않았던 말 을 잘못 말하는 것인지, 가정 주부는 왜 자신의 열쇠를 잘못 놓아두고 찾지 못 하는지 등의 하찮은 것들만을 다루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면 우리도 우리의 시간과 관심을 더욱 중요한 다른 것에 바치고자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신사 숙녀 여러분, 기다리십시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 습니다. 내 생각은, 여러분들의 비판은 요점에서 빗나갔다는 것입니다. 정신분석 은 이와같이 사소한 문제들에 집착해 본 적이 없노라고 자신 있게 자랑할 수 없 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반대로, 그것의 관찰 재료를 이루는 것들은 일반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사건들, 다른 학문들에서 너무 사소한 문제로 치부되어 무시되 는 것들, 이른바 현상 세계의 쓰레기 같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이와 같은 비판을 하면서 문제가 방대하게 보인다는 것과 어떤 징조가 눈에 확 띈다 는 것 등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떤 조건과 상황에서는 아주 미약한 징 조만으로도 드러나게 되는 중요한 것들이 있는데도 여러분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전혀 배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 같은 상황들을 줄줄 이 제시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젊은 청년들을 대상으로 생각해 보더 라도, 여러분들은 대단히 작은 징조만을 가지고도 자신이 한 숙녀의 호감을 사 고 있다고 믿어 버리곤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사실을 확인하는데 질풍 과도 같은 포옹처럼 분명한 어떤 표현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십니까? 다른 사 람은 눈치채지도 못할 시선 하나, 스쳐 지나가는 듯한 몸짓하나, 혹은 단 1초 정 도 더 긴 듯한 악수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까? 또 여러분들이 범죄 수사관이 되어 어떤 살인 사건의 조사에 관여하고 있는 중이라고 가정할 때, 여러분들은 그 범인이 자기의 사진과 함께 주소 같은 것을 모두 그 현장에 남겨 놓기를 기 대하고 있지는 않으시겠지요? 아니면 어쩔 수 없이, 그 범인에 관한 아주 미약 하고 분명치 않은 흔적만으로도 만족하시는지요? 그러므로 그것에서 더 큰 단서 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나도 여러분들처럼 이 세상과 학문의 세계가 가 지고 있는 중대한 문제들이 우리의 일차적 관심을 끌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대단히 중요하게 보이는 이 문제, 혹은 저 문제 를 연구하겠다고 거창하게 계획을 세운다고 해도 별로 도움은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전혀 알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학문적 인 작업에서는 이미 연구할 어떤 방법이 마련되어 있는 자신의 바로 앞에 놓인 문제부터 붙잡고 보는 것이 훨씬 전망이 밝습니다. 아무런 기대도 가지지 않은 채, 아무런 전제도 없이 어떤 문제를 근본부터 철저히 연구할 때, 또 다행스럽게 도 운이 따라 준다면, 작은 것들이나 큰 것들이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지어져 있는 관련성에 따라 전혀 전망이 없을 것처럼 보였던 연구에도 더 큰 문제를 연 구할 수 있는 접근로가 생겨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는 얼핏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강한 사 람들의 실수 행위를 연구하는 일에 여러분들의 관심을 고정시켜 버리라고 권유 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제 정신분석이 뭔지도 모르는 어떤 사람을 붙들고 그 러한 실수 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인가고 물어 보고자 합니다. 그 사람은 틀림없이 처음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할 것입니다. <아, 그런 것은 대답할 가치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작은 실수에 불과한 것입니다>라 고. 무슨 생각에서 이 사람은 그런 말을 했을까요? 그는, 이 세상에 일어나는 일 련의 서로 연결된 사건들에서 떨어져 나와 그것들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소한 일들이 존재하며, 이런 사소한 사건들은 현재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존재하 지 않을 수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까? 그런 방식으로 어떤 사람이 자연의 어 느 한 부분에서 만이라도 인과율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릴 수 있다면, 그는 모 든 과학적 세계관을 팽개쳐 버린 것과 다름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신의 특별한 의지가 작용하지 않는 한 한 마리의 참새도 지붕에서 떨어질 수 없다고 확신에 차서 주장하는 종교적 세계관weltanschauung이 훨씬 더 일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냐고 따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자신이 제시한 첫 번째 답 변에서 그 어떤 수미 일관한 결론을 이끌어 내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그는 생각을 바꾸어서, 만약 자신이 이 사안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이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즉 여기서 문제의 관건 은 기능상의 일탈적 현상들이나, 심리적 능력상의 부정확성들, 그리고 이런 현상 의 조건들을 제시하는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평소에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실수할 수 있습니다. (1) 쉽게 기분이 나빠지거나 피로해지는 경우, (2) 흥분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 (3) 주의력이 다른 일들에 지나치게 쏠려 있는 경우 등입니다. 여기서 제시한 내용들을 입증하는 것은 용 이합니다. 실제로 사람이 몹시 피곤할 때나 두통에 시달리거나 편두통이 다가오 고 있음을 인지하기도 합니다.(이것은 프로이트의 개인적인 경험이다.) 사람들은 흥분하고 있을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거나, 사물들에 대한 분별력도 없어집니다. 사람들은 <엉뚱한 물건을 집거나>, 무슨 일을 자신이 하 려고 했는지도 잊어버립시다. 또 주의가 산만해 있을 때, 즉 원래 다른 것에 대 해서 주의를 집중하고 있을 때에도 일련의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이 눈에 띕니다. 주의가 산만한 경우의 전형적 사례로는 '플리겐데 블래터 fligende blatter'란 (풍자 만화)잡지에 나오는 한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음에 쓸 책에서 다룰 문제들에 골몰했기 때문에 우산을 잊어버리거나 자기 모자를 바꾸어 쓰기도 합니다. 무슨 일을 하려고 계획을 세우거나 약속을 했을 때도, 매우 신경을 써야 하는 다른 일이 그 사이에 끼여들게 되면 곧잘 이 전의 계획이나 약속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우리 모두가 직접 체험해서 알고 있습 니다. 위에 언급한 내용들은 너무나도 합리적이어서 어떤 반론을 들이댄다 해도 끄 떡없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만큼은 재미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실수 행위에 대한 이러한 설명 방식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 로 합시다.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원인으로 지적되는 조건들은 그 종류 에 있어서 다 같은 것들은 아닙니다. 불쾌감이나 순환기 계통 장애들은 정상적 인 기능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생리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 반면 흥분, 피로, 방심은 또 다른 종류의 계기들로서 정신생리적인 것으로 부를 수 있습니 다. 여기서 후자의 것들은 이론으로 쉽게 번역 될 수 있습니다. 피로함과 방심, 혹은 또 일반적인 흥분 상태는 주의력의 분산을 가져옵니다. 그 결과 마땅히 해 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정작 주의를 집중하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이 기능 은 그런 경우에 특히나 쉽게 방해를 받게 되며 매우 부정확하게 수행될 뿐입니 다. 경미한 병, 중앙 신경 중추의 혈류량의 변화 등도 가장 결정적인 계기인 주 의력의 분산에 비숫한 영향을 미침으로써 같은 작용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 러므로 모든 경우에 문제되는 것은 신체적인 원인에 의한 것이든 심리적인 원인 에 의한 것이든 주의력 장애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정신분석학의 관심을 끌기에는 모자란 것 같습니다. 이런 주제라면 그냥 내동댕이쳐 버리고 싶다는 유혹까지 느낄 정도입니다. 그러나 우 리가 조금 더 깊이 연구해 들어가게 되면 실수 행위가 모두 주의력 이론으로 설 명되지는 않는다는 것, 또 적어도 그것에서 자연스럽게 이끌어 낼 수는 없다는 것 등을 알게 됩니다. 그러한 실수 행위들이나 망각 등은 또, 피로하지도 않고 방심한 상태도 아니며 흥분되어 있지도 않은 사람들에게서도 일어나며 오히려 어느 면으로 보더라도 지극히 정상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서도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그런 실수를 한 사람 에게 나중에 가서 억지로 흥분 상태였다는 사실을 갖다 붙이려고 하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 사람은 자신이 흥분된 상태였다고 인정하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주의력을 높이면 어떤 능력이 확실히 보장되고 또 주의력을 낮추면 그 능력이 저하되는 것이라고 간단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순전히 기계적으로, 별로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도 처리할 수 있고 그러면서도 매우 확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기 자신도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알 고 있지 못하는 채로 산책하고 있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옳은 길로 찾아들고 지 나치는 법 없이 자신의 목적지에 제대로 멈추어 섭니다. 적어도 이런 일들은 늘 상 그렇게 이루어지곤 하는 일들입니다. 숙련된 피아니스트는 굳이 생각하지 않 고도 정확하게 건반을 두드립니다. 물론 그가 실수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동적인 연주가 잘못 칠 수 있는 위험을 증가시키는 것이라면 엄청난 연습을 통해서 연주하는 것이 거의 자동화되다시피 한 거장들은 이러한 위험에 가장 많 이 노출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특별 히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만 하는 경우에는 오히려 필요한 주의력을 집중하지 못 하며, 그럴 때에 실수가 더 잘 일어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흥분aufregung>의 영향이라고 사람들은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왜 흥분 상태가 특별한 관심을 갖고 목표로 하고 있는 것에 대한 주의력을 높여 주지 못하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중요한 연설이 나 토의에서 말이 헛나와 자신이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말을 하게 된다고 해 도 이것은 정신생리학psycho-physiolosie 이론이나 주의력 이론으로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실수에는 또 여러 가지 작은 부수적 현상들이 있는데 그것은 잘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이제까지의 많은 이론들로도 설명되지 않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어떤 이름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게 되면 그에 대해서 몹시 분노를 느 끼게 되며 그것을 어떻게는 기억해 내려 애쓰고, 그것 때문에 그 일에서 놓여 나지 못하게 되곤 합니다. 화가 난 사람에게는 그가 원하는 바대로 자신의 주의 를 그 어휘에 쏠리게끔 하는 것이 왜 그렇게도 힘든 일일까요? 그가 표현하듯이 그것은 마치도 <입 안에 맴돌고 있는 것> 같아서 누군가에 의해 그것이 언급되 기만 하명 그 즉시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또 어떤 때에는 실수들 이 복합적이 되고 서로 얽혀 들고 서로를 대신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처음에 는 약속 자체를 잊어버리기도 하고 그 다음에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잔잔히 마 음먹었는데도 실수로 다를 시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합 니다. 잊어버린 것을 생각해 내기 위해 우회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번에는 또 첫 번째 이름을 떠올리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그 두 번째의 이름마저도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또 그 두 번째의 이름을 기억해 내려 하지만 그때 에는 또 세 번째의 이름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와 똑같은 현상이 식자공의 실 수로 간주되는 인쇄상의 실수에도 곧잘 발생합니다. 그와 같은 지독한 인쇄 실 수가 한 번은 사회민주당 기관지에 발생했다고 합니다. 어떤 축제 행사에 관한 기사 중에 <참석자 중에는 kornprinz(황태자 전하)(이것은 kronprinz의 오기임.) 께서도 계셨습니다>라는 내용이 실렸던 것입니다. 다음 날짜의 신문에는 그에 대한 정정문이 실렸습니다. 신문은 정중하게 사과하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었 습니다. <당연하게도 그것은 knorprinz로 읽혀져야 합니다.>(그러나 여기서도 다 시 오식이 발생함.)(은 옥수수, 은 <돌출>이라는 뜻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흔히 오식 마귀에 씌였다거나 활자 상자의 요괴, 혹은 그와 비슷한 것의 장난이라고 말을 하는데 어쨌거나 그것은 인쇄 실수에 대한 정신생리학적 인 이론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잘못 말하기versprechen를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이른바 어떤 암시suggestion 를 줌으로써 그것은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도 알고 계시는지 모 르겠습니다. 이에 대한 일화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언젠가 신출내기 연기자가 연극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오를레앙의 처녀'라는 연 극에서 왕에게 라고 말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연 배우는 리허설 도중에 대본에 있는 대사 대신에 되풀이해서 이 자기의 말을 도로 보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장난을 쳤고 그는 자 기의 의도한 바를 그대로 이루어 냈습니다.(약간의 혼동이 있었던 것 같다. 여기 에서는 프랑스 군 원수의 변절을 알리는 것은 왕 자신이다.)실제 상연에서 이 불 쌍한 연기자는 그에 대해 수없이 주의를 들었음에도, 혹은 바로 그 때문에 정말 로 이렇게 바뀌어진 대사를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면서 첫 연극에 데뷔했던 것입 니다. 실수의 이러한 모든 작은 특징들은 주의력 박탈이라는 이론을 가지고는 설명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가지고 이 이론이 틀렸다고 말하기는 아직 이 릅니다. 거기에는 무언가가 결여되어 있는 듯 합니다. 그 이론을 아주 조금만 보 완해 주면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것이 되리라고 봅니다. 그러나 실수들 중의 많은 것들은 그 자체로서 또 다른 측면에서 관찰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의도에 가장 적당한 것으로서 여러 가지의 실수들 중 <잘못 말하기> 의 경우를 추적해 봅시다. 그러나 잘못 쓰기나 잘못 앍기를 선택하더라도 상관 이 없습니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브릴 a. a. brill의 '정신분석 : 그 이론과 실제 적 적용 psychoaanalysis : its theories and practical application'(1912)과 존스 e. jones의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 the psychopathology of everyday life'(1911)을 참조할 것. 우리는 지금까지는 언제, 어떤 조건에서 사람들이 잘못 말하게 되는가에 대한 문제에만 집착해 왔고 오직 그에 대한 해답만을 얻는 데 그쳤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른 방향으로도 관심을 기울이고, 사람들이 다른 식으로도 잘못 말할 수 있었을텐데도 왜 꼭 그러한 식 으로만 잘못 말하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잘못 말할 때 어떠한 일 이 일어나는지를 관찰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잘못 말하기의 작용을 설명하지 못하는 한은, 설사 그 생리적인 측면에서 그 현 상은 여전히 단지 하나의 우연적 현상으로만 남아 있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실 것입니다. 가령 내가 어떤 말 실수를 했다고 했을 때 나는 또 수도 없이 다른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잘못 말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단 하나의 바른 단 어에 대해서 수천 가지 다른 것들 중의 하나를 말하는 것이고 하나의 옳은 단어 에 대해 셀 수 없이 많은 왜곡entstellung 현상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경우에 나에게 여러 가지 잘못 말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방법 가 운데서 어떤 하나의 형태로만 그 현상이 일어난다고 할 때, 거기에는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은 단순한 우연이며 임의적인 현상에 불과한 것으로 서 이 문제에는 어떠한 이상적인 해명도 불가능한 것일까요? 1895년에 메링어r. meringer와 마이어c. mayer(한 사람은 언어학자이고 또 한 사람은 정신의학자)라는 두 명의 학자가 잘못 말하기의 문제를 바로 이러한 측 면에서 다루어 보려는 시도를 한 바 있습니다.(메링어와 마이어의 '잘못 말하기 와 잘못 읽기, 심리학적-언어학적 연구versprechen und verlesen, eine psychologisch-linguistische studie'(1985)참조.) 그들은 여러 가지 사례들을 수집 에서 처음에는 순전히 기술적인 관점에서 그것들을 기록했습니다. 그것으로서 아직 어떤 해명에 도달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적어도 하나의 해명으로 통하는 길을 찾게 하는 데에는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의도했던 말이 잘못 나오게 됨으로 빚어지는 왜곡 현상을 구별했는데, 그것은 혼동 vertauschungen, 선발음vorklange, 후발음nachklange, 혼합vermengungen (kontaminationen), 대치ersetzungen(substitution) 등입니다. 이제 이 두 학자들 이 분류한 이러한 주요 요목들에 대해 사례들을 들어 설명해 보겠습니다. <혼 동>은 다음 경우에 발생합니다. 어떤 사람이 밀로의 비너스라고 말하는 대신에 <비너스>의 <밀로>(단어 배열의 혼동)라고 하는 경우입니다. 선발음의 예는 라 고 말할 것을 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원래 라고 발음해야 함에도 뒤에 따라올 말인 의 영향을 받아 대신에 미리 발음됨. 이 경우 라는 감정이 앞섰기 때문으로 풀이됨.) 후발음의 경우는 저 유명한, 빗나간 축배사의 예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선생님의 행복을 위해 축배를 듭시다 anzustoben>라고 할 것을 <트림을 합시다aufzustoben>라고 잘못 발음한 것이 다. 이때 aufzustoben이라고 발음하게 된 것은 그 전에 라는 발음이 두 번 나왔기 때문에 이 발음이 뒤의 단어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 에 잘못 말하기의 예로 든 세 가지 형태의 잘못 말하기는 그렇게 흔하지는 않습 니다. 축약이나 혼합의 형태로 나타나는 잘못 말하기가 훨씬 더 빈번하다는 것 을 여러분들은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서 거리에서 어떤 신사가 한 숙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을 걸 때 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동행해도 될까요?>라고 말하려는 것을 라고 발음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혼합된 말('begleit-digen'에 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속에는 begleiten(동행, 수행하다)이라는 단어 외에도 beleidigen(모욕하다)라는 단어가 숨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 젊은 남자는 그 여자에게 결코 성공적으로 접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 대치의 경우, 메링어와 마이어는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 이 <부란 상자에 표본을 넣어 두겠습니다ich gebe die praparate in den kasten>라고 말하는 대신에 <우편함에in den kasten>라고 말하는 경우입니다. 이 두 명의 학자가 이와 같은 사례 수집에 근거해서 시도하고 있는 설명 방식 은 매우 불충분한 것입니다. 그들은 한 단어의 소리와 음절이 여러 가지 다른 가치를 갖고 있으며 더욱 높은 가치를 지닌 요소의 신경 자극이 그보다 낮은 가 치를 지닌 요소의 신경 자극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분명 히 그들의 주장은 그다지 흔하게 일어나지 않는 현상인 선발음이나 후발음의 경 우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못 말하기의 다른 현상들에서는 이러한 발음 선호 현상이 설사 그것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전혀 고려되지 않는 것입니다. 제일 흔한 현상은 사람들이 어떤 말 대신에 그것과 아주 흡사한 다른 말을 하게 되는 말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며, 이러한 유사성이야말로 많은 사람들이 잘못 말하기의 현상에 대한 설명으로서 충분하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 어 어떤 교수가 자신의 취임 인사에서 <본인은 존경해 마지않는 전임자의 공적 을 치하하는데 적당한 자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nicht geeignet>라고 말할 것을 <공적을 치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nicht 'geignet'>라고 말 하는 경우입니다. 혹은 또 다른 교수가 <여성의 성기에는 수많은 유혹 versuchungen에도 불구하고......, 죄송합니다. 실험 versuche에도 불구하고> 라고 말했을 경우입니다. 잘못 말하기의 형태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고 또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자신 이 말하려고 의도했던 것과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물론 음운 관계나 유사성 효과는 전연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그 대신에 그 반대 어구가 훨 씬 강한 개념적 유사성을 띠면서 심리적인 연상 작용 속에서 서로 특별히 가깝 게 놓여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등장합니다. 이런 종류로서는 다음과 같은 역 사적 사례가 있습니다. 우리 나라의 국회의장이 언젠가 개회사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서두를 꺼냈습니다. <여러분, 나는 의원 여러분들의 출석을 확인하면서...... 이 회의가 '폐회 geschlossen'되었음을 선언합니다.> 이러한 반대 관계만큼이나 똑같이 함정에 빠지기 쉽게 만드는 것은 자연스러 운 어떤 다른 연상이 떠오를 때입니다. 그러나 이는 경우에 따라서 매우 부적절 하게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헬름홀츠h. helmholtz 집안과 유명한 발명가이며 산업 재벌인 지멘스w. simens 집안의 자녀 가 결혼하는 자리에서 축사를 하게 된 유명한 생리학자인 듀 보아 레이몬드du bois-reymond는, 말할 나위 없이 훌륭한 자신의 축사를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 었습니다. <자, 이 새로운 회사의 탄생을 축하하며 건배합시다. '지멘스-할스 케'(<지멘스-헬름홀츠>라고 말했어야 했다. 지멘스와 할스케는 1847년 독일 최 초로 설립된 전기 공업 회사이다.) 만세!> 할스케란 말할 것도 없이 역사가 오래 된 유명한 회사의 이름이었습니다. 베를린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개의 이름을 같 이 부르는 것은 빈 사람들에게 <리델-보이텔>(<리델-보이텔>은 빈의 유명한 여행용품 회사이다.) 회사의 이름이 떠오르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매우 자연스러 운 현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운 관계와 언어 유사성에 언어 연상wortassoziation이라는 또 하나의 작용을 첨가해야만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 다. 바로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 혹은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함께 고려하기 전 에는 지금까지 관찰된 잘못 말하기 현상을 제대로 해명할 수 없을 것 같은 여러 가지 경우들이 있습니다. 비록 매우 밀접한 관계라고는 볼 수 없지만 그것은 메 링어가 그처럼 강조한 후발음의 경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백하자면 우리는 잘못 말하기라는 실수를 전보다 더 이해할 수 없게 된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됩 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방금 행한 연구 도중에 잘못 말하기의 사례들에 대한 하 나의 새로운 인상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조금 더 머물러 보는 것 또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잘못 말하기가 일어나게 되는 일반적인 조건을 연구하고 잘못 말하기에서 이러한 왜곡 형태를 결정해 주는 영향력들을 조사했습니다. 그러나 그 발생과는 관계 없이 잘못 말하기의 영향 그 자체에 대해서는 아직 주의해 보 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렇게 하고자 결심을 한다면 드디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만 하겠습니다. 즉, 몇 가지 사례에서는 잘못 말하기의 형태 로 불쑥 튀어나오게 된 현상 자체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미가 있 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잘못 말하기의 작용도 어쩌면 자기 자 신의 고유한 목표를 추구하는, 그 자체로서 완전히 유효한 심리적 행위로서 내 용과 의미를 지닌 행동 표현으로 파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인지도 모릅니 다. 우리는 이제까지 계속 실수들에 관하여 논의해 왔는데 이제는 그 실수들도 때로는 완전히 정상적인 행위인 것같이 생각됩니다. 그것들은 기대되거나 의도 했던 행위들을 대신해서 그 자리에 들어섰을 뿐입니다. 실수에 담겨 있는 이러한 고유한 의미는 어떤 경우 이해하기 쉽고 오인의 여 지없이 명백할 때도 있습니다. 국회의장이 국회를 개회한다고 선언하는 대신 폐 회한다고 선언했을 때, 우리는 이러한 잘못이 일어나게 된 그 상황을 알고 있으 므로 이 실수를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는 이 사회에서 그 어 떤 좋은 결과도 예상하고 있지 않았으므로 회의를 즉시 그만둘 수 있었으면 하 고 바랐던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의 해명, 즉 이렇게 말 실수를 해석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 문제도 안 됩니다. 어떤 여인이 상대방을 매우 높이 평가하는 듯 한 어조로 (이 멋있는 새 모자는 당신이 직접 뒤집어쓴 것입니까?>(사실은 이때 <직접 선택해서 쓴 것입니까selbst aufgeputzt>라고 말하려고 했다.)라고 물을 때 이러한 말의 실수에서 <이 모자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군요>라는 의미 를 끄집어 낸다고 해도 이 세상의 어떤 과학도 반박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하 나의 예는 다음과 같이 얘기할 때입니다. <우리 남편이 의사에게 자기가 어떤 식이 요법을 해야 하는지 물어 보았는데, 아무런 식이 요법도 할 필요가 없고 남편이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셔도 좋다고 하더라지 뭐예요.> 그러므로 이 말의 실수는 다른 한편으로는 일관된 자기 생각의 명백한 표현인 것입니다. 신사 수녀 여러분, 잘못 말하기나 실수들 중의 단지 몇몇 경우들만이 어떤 의 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대다수의 많은 경우들도 역시 그러하다면, 이제까지 다 루어 오지 않았던 실수의 이러한 의미는 불가피하게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가 될 것이며 다른 모든 관점들은 당연히 뒤편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모든 생리학적인, 혹은 정신생리학적인 요소들을 제거할 수 있게 되고 실수의 의미에 대한, 다시 말해 실수의 뜻, 즉 실수의 의도에 대한 순전히 심리 학적인 연구에 몰두 할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이러한 기대에 맞춰서 대단히 많은 관찰 자료에 대한 검토를 게을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계획을 수행하기 전에 나와 함께 다른 단서를 추적해 나가지 않으시겠습니까? 시인들이 시적 표현의 방법으로 잘못 말하거나 또 그 밖의 실수들을 사용해 온 것은 매우 흔한 일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자체만으 로도 그들이 그 실수들과 잘못 말하기를 무언가 의미 심장한 것으로 간주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인이 어쩌다가 잘못 쓴 것을 작품 속의 인물이 그대로 잘못 말하게 놔두었을 리는 없습니다. 잘못 말하기를 통해 서 작가는 우리로 하여금 무언가를 알게 하려한 것이며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 를, 그가 혹시 우리들에게 그 관련 인물이 정신이 없는 상태라거나 매우 피곤해 있다거나 혹은 그에게 편두통이 일어나려 한다는 것을 암시하려고 했던 것은 아 닌지 후에 가서 확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잘못 말하기가 작가에 의해서 의미 심장한 것으로 사용됐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물론 그것을 과대 평가할 생각 은 없습니다. 그것은 실제로는 의미 없는 것일 수도 있으며 심리적 우연에 지나 지 않거나 아니면 아주 드문 경우에만 함축적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 신의 목적에 사용하기 위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권리 는 시인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 말하기에 대해서는 언어학자나 정신 의학자들에게서보다는 시인들에게서 배울 것이 더 많다고 해도 놀랄 일이 못 되 는 것입니다. 잘못 말하기의 그러한 예는 '발렌슈타인wallenstein'(쉴러f. schiller의 3부작 비 극. <피콜로미니>는 제2부.) 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피콜로미니> 제1막 제 5장). 막스 피콜로미니는 앞선 장면에서 열성적으로 공작 편을 들었고 그러면서 그가 발렌슈타인 공작의 딸을 진지로 데려가는 여행중에 이루어진 평화의 은총 에 대해 열광했습니다. 그는 자기 아버지와 조정의 사신인 쿠베스텐베르크 공을 몹시 놀라게 해놓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제5장은 이렇게 계속됩니다. 쿠베스텐베르크 어쩌면 좋으냐! 어떻게 이렇게 되어 버렸지? 친구여, 우리는 그를 광기에 사로잡힌 채 가버리도록 내버려두었구려. 그를 다시 불러와야 할텐데, 당장에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어야 하는데. 옥타비오 (깊은 생각에서 깨어나며) 그가 이제 내 눈을 뜨게 해주었소. 나는 나를 기쁘게 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게 되었소. 쿠베스텐베르크 무엇이라고, 친구? 옥타비오 이 여행은 정말 지긋지긋해! 쿠베스텐베르크 왜? 무슨 일이야? 옥타비오 보시오(나는 즉시 그 불행한 징조를 추적하지 않으면 안되겠어. 내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겠어) 이리 오시오(그를 데리고 가려고 한다). 쿠베스텐베르크 뭔데? 어디로 가는 거야? 옥타비오 (밀면서) 그녀에게로! 쿠베스텐베르크 누구에게로? 옥타비오 (말을 고치면서) 공작한테로. 가, 갑시다. 옥타비오는 쿠베스텐베르크에게 <그에게>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그녀에게> 라고 말을 실수하는 바람에 적어도 우리에게, 그 젊은 전쟁 영웅이 무엇 때문에 평화에 대해서 그렇게도 열광하는지스스로 매우 명확하게 통찰하고 있음을 엿보 게 해 주었습니다. 오토 랑크o. rank는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이보다 더 인상 깊은 예를 발견했습 니다. 그것은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행운의 연인이 세 개의 상자 중의 하나 를 선택해야만 하는 그 유명한 장면을 읽어 주는 편이 가장 적절한 듯합니다. 프로이트가 '발렌슈타인 공'에서 인용한 바와 같이 시적으로 가장 섬세하게 의 도되고 기술적으로도 빛나게 사용되는 <잘못 말하기>는 작가가 이러한 잘못의 메커니즘과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며 청중들도 그것을 이해하리라는 것을 전제하 고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제3막 2 장)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아버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신랑을 제비뽑기로 결정 할 수밖에 없었던 포샤는 지금까지는 우연이 가져다 주는 행운 덕분에 맘에 안 드는 모든 구혼자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진정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바싸니오가 드디어 구혼자 중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 그녀는 그도 다 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뽑기를 잘못하게 될까 봐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녀는 그에게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그에 대한 그녀의 사랑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된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맹세 때문에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내면의 갈등을 안고 있는 그녀로 하여금 작가는 사랑하는 구혼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 게 하고 있다. <제발, 당신이 그것을 감행하기 전에 하루 이틀만 더 기다려 보세요. 당신이 뽑기를 잘못하는 날엔 당신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잖아요. 그러니까 용서하세요. 무엇인가 내게 말하고 있어요(<그렇지만 그것은 사랑은 아니에요>). 나는 당신을 잃고 싶지 않아요 (당신이 바르게 뽑을 수 있도록 제가 가르쳐 드릴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나의 맹세를 저버리는 것이 되지요. 그렇게는 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가만 있으면 당신은 나를 얻지 못하실테지요. 만일 그렇게 되면 차라리 내가 죄를 범할 것을 하고 바라게 될 거예요. 맹세쯤 깨트릴 것을 하고 말이에요. 오, 그 눈. 나를 내려다보고, 아를 반으로 갈라놓는! <반은 당신의 것, 다른 반쪽도 당신의 것 내 것이라고 말하려 했는데,> 내 것이라면 그것은 또 당신의 것이니까, 그러므로 모두 당신의 것이랍니다.> 그녀가 그저 작은 소리로 그에게 암시하려고 했던 것, 그러나 그에게는 결코 말해서는 안 되었던 것, 말하자면 뽑기를 하기 전에 이미 자신은 그의 것이라는 것, 또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을 작가는 놀랄 만한 심리적 미묘함 으로, 잘못 말하기라는 형식을 통해서 밖으로 튀어나오게 하면서 이러한 기교로 선택의 결과에 대한 사랑하는 사람들의 참을 수 없는 불안감과 그에 따른 청중 들의 거의 비슷한 긴장감을 가라앉힐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이다. 포샤가 잘못 말하기에 들어 있었던 그 두 개의 문장을 마지막에 얼마나 교묘 하게 연결시키는지를, 그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모순점을 어떻게 제거하고 결 국에 가서 잘못 말한 그 내용을 정당화시키는 지를 주목해 주십시오. 내것이라면 그것은 또 당신의 것이니까 그러므로 모두 장신의 것이랍니다. 의학 분야와는 거리가 먼 사상가 한 사람이 때때로 잘못에 담겨진 의미를 발 견해 내고 그것을 밝혀 내려는 우리의 노력을 선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은 모두 기지가 넘치는 풍자 작가인 리히텐베르크g. c. lichtenberg(1472∼1799) 를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괴테j. w. von goethe는 이렇게 말한 적 이 있습니다. <그가 농담을 할 때는 그 속에 문제가 항상 감추어져 있습니다.> 실제로 농담을 통해서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때가 종종 있는 것입니다. 리히 텐베르크는 '유머러스하고도 풍자적인 메모witzige und satirische einfalle' 속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그는 언제나 이라고 읽는 대신에 agamemnon(아가멤논)이라고 읽곤 했다. 그만큼 그는 호머의 책을 많이 읽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말로 잘못 읽기의 이론인 것입니다.(프로 이트는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프로이트 전집 8, 열린책들)에서 리히덴베르크의 풍자시들을 다룬다.) 다음 번에는 잘못에 대한 시인들의 이러한 견해와 우리의 견해가 정말 일치하 는지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세 번째 강의 실수 행위들(계속) 신사 숙녀 여러분, 지난 번의 강의에서 우리는 실수란 그것으로 인해 방해받 았으나, 원래 의도했던 일과 관련해서 볼 것이 아니라 그것 자체로서 바라보아 야 한다는 통찰에 도달했습니다. 또 그것들은 개개의 사례들에서 그 자체의 고 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인상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실수가 어떤 의미를 지닌다는 사실이 좀더 넓은 범주에서 확인된다면 실수가 발생하게 되는 그 상황에 대한 연구보다는 이러한 의미 자체가 더욱 흥미진진한 것이 되 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의미sinn>라는 개념을 우리가 어떠한 심리적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는지를 다시 한 번 정의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것은 그것이 쓰여지는 의도와 함께, 심 리적인 맥락 속에서 차지하는 위상 이외의 다른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우리 의 연구들 중의 많은 부분에서 <의미>라는 단어를 <의도absicht>나 <경향 tendenz>으로 바꾸어 써도 상관이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실수> 속에서 어 떤 의도를 발견해 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거나 실수를 시적으로 미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요? <잘못 말하기>라는 현상에만 충실하게 머물러서 그러한 종류의 매우 많은 관 찰 사례들을 조망해 보도록 합시다. 그러면 그 의도, 즉 잘못 말하기의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그러한 경우들의 전체 범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 보다도 정반대의 말이 의도한 말의 자리를 대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국회의장 이 개회사를 하면서 <국회가 폐회되었음을 선언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 니다. 그것의 의미는 너무도 또렷합니다. 그의 말 실수의 의미나 그가 그렇게 잘 못 말하게 된 의도는 그가 그 회의를 폐회시켜 버리고 싶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경우 ,그는 스스로에게만 그렇게 말했을 뿐이다.er sagt es ja selbst>라고 사 람들은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한 말 그 자체로만 판단할 뿐입 니다. 이런 일은 가능하지 않다, 그가 회의를 개회하려 했지 폐회하려 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지 않느냐, 그가 회의를 열려고 했다는 사실은 자기 자신의 의도를 가장 잘 판단할 수 있는 그 자신이 증명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라는 이의로 나를 곤란스럽게 만들지 말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실수를 우선 그 자체로서만 판단하는 데에 동의했던 사실을 망각하는 행위입니 다. 실수 때문에 방해받은 의도와 실수의 관계는 추후에 다시 또 연구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들은 논리적인 오류를 범하게 되며 그것은 영어 에서 (논점을 처음부터 옳은 것으로 가정해 놓고 교묘히 그 자체를 입증하지 않고 회피하는 행위.)이라고 일컫는 것처럼 논의되고 있는 문제를 요술처럼 사라져 버리게 만들 것입니다. 바로 정확하게 정반대의 말이 잘못 튀어나오지 않은 때에라도 그러한 말 실수 로 말미암아 반대되는 의미가 표출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전임자의 공적 을 치하하고 싶지 않습니다nicht geneigt>에서 <.....하고 싶다geneigt>라는 말은 <......하는 데 적당하다geeignet>라는 단어의 반대어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연설자가 연설해야만 하는 그 상황에 첨예하게 반대되는 그 마음의 공개적이 고도 심적인 고백인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들에서는 잘못 말하기가 그 의도하는 의미에 단순히 두 번째의 의미를 덧붙이기도 합니다. 그럴 때 그 문장은 마치도 여러 개의 문장들의 연결 이나 축약, 함축처럼 들립니다. 그러므로 그 활동적인 여인의 경우에서 <내 남 편은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거나 마실 ltn 있대요>라는 말은 마치 <그는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지요. 그런데 그가 도대체 무엇을 원하겠어요? 그 대신에 내가 그렇게 하면 되지요>라는 뜻으로 들립니다. 잘 못 말하기는 이와 같이 그러한 축약의 인상을 줍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해부 학 교수가 자신의 강의가 끝난 후 학생들에게 그들이 자신이 강의한 콧구멍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수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에서도 겨우 한 손 가락...... 미안합니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이니까요>라고 말했을 때 이와 같은 응축된 말은 그것 자체가 또 하나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사람이 있을 뿐이다>라는 것입니다. 실수가 그 의미를 스스로 드러내는 이와 같은 경우들과는 반대로 잘못 말하기 가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의미도 제공하지 않는, 즉 우리의 기대와는 모순되는 그런 경우들도 있습니다. 누군가가 말을 잘못하여 어떤 고유 명사를 뒤바꾸어 버린다든가 또는 사용되지 않는 음절 연결을 만들어 냈을 때, 모든 실수들이 어 떤 함축적인 의미를 지니는가 하는 질문은 방금 언급한 이와 같은 매우 빈번한 현상들로 말미암아 이미 부정되는 쪽으로 결판이 난 듯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런 경우들을 좀더 자세히 연구해 보면 왜곡 현상이 일어난 까닭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이렇게 모호한 경우들과 앞서 얘기했던 명확한 경우들 과의 차이가 그리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말의 건강 상태에 대해 질문을 받은 어떤 신사가 아 니 아직 한 달 정도는 더 계속될 것 같은데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가 원래 하려고 했던 말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은 그는 geschichte(그것은 정말 슬픈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라는 두 단어가 결합되어 그와 같은 라는 이상스러운 단 어를 만들어 냈다고 해명했다고 합니다.(메링어와 마이어의 '잘못 말하기와 잘못 읽기, 심리학적, 언어학적 연구' 참조, 원주.) 어떤 사람이 자기가 불평하고 있었던 어떤 사건에 대해 얘기하면서 말을 계속 하기를 gekommen(그러자 그 일은 <전잡한 일>로 드러나고 말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 일을 추잡한 일(글자 그대로는 돼지 같은 짓)로 규정 하려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라는 말들이 합쳐져서 그렇게도 이상스러운 이라는 말이 생겨났던 것입 니다.(메링어와 마이어의 '잘못 말하기와 잘못 읽기, 심리학적, 언어학적 연구'참 조, 원주.) 잘 모르는 여자를 begleitdigen하려고 했던 젊은 청년의 경우를 다시 기억해 봅시다. 우리는 마음대로 이 단어 합성을 begeiten과 beleidigen으로 쪼개었고 그 에 대한 확인을 요구한 적도 없이 이러한 해석을 당연한 것으로 확신한 바 있습 니다. 여러분들은 이 경우들을 통해 잘못 말하기의 이러한 불명확한 경우들도 충돌zusammentreffen, 즉 두 개의 다른 의도의 간섭interferenz으로 설명할 수 있음을 알게 되셨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잘못 말할 때 정반대의 말을 하는 경우 와 같이 한 번은 어느 하나의 의도가 다른 의도를 완전히 대리(대치)하지만 또 다른 한 번은 이를 단지 왜곡시키거나 수정하는 데 그쳐 그 자체로서 다소 의미 있게 보이는 뒤섞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 이외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잘못 말하기의 비밀을 많이 파악하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인식을 굳건히 지켜 나갈 경우 이제까지 수수께끼처럼 보였던 다른 사례 들도 이해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름의 왜곡 현상이 일어날 때, 거기에는 항상 두 개의 서로 비슷하긴 하지만 상이한 이름의 경합이 문제되는 것이라고 상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름의 왜곡은 잘못 말하기라는 범주 밖에서도 매우 자주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떤 이름이 좋지 않게 들리도록 하거나 어떤 하찮은 것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어 버리는 것 등은 매우 잘 알려진 경멸의 표현 입니다. 교육받은 사람들은 곧 그렇게 하는 것을 포기하는 법을 배우기는 하지 만 그것은 그래도 어쨌거나 쉽게 포기되지는 않는 법입니다. 그들은 그것을 <익 살>로 말했다고는 하지만 고상하지 못한 것은 분명합니다. 이러한 이름 왜곡 namensentstellung의 매우 거칠고 역겨운 경우를 하나 예를 들어 보자면 공화국 시대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돼지 갈비>라는 뜻이다.)로 바꾸어 불렀던 사례를 언급할 수 있겠습니다. 이와 같이 잘못 말하기의 경우에서도 이름 왜곡을 통해서 느낄 수 있는 어떤 욕 설의 의도를 상정해 볼 수 있습니다. 우스꽝스럽거나 괴상망측한 효과를 가져오 는 잘못 말하기의 경우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피력하는 데도 비슷한 해명이 떠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 선생님의 행복을 위하여 트림할 것을 제안 합니다.> 여 기서 식욕을 망가뜨리는 어떤 표상vorstellung을 떠오르게 하는 한마디의 말이 불쑥 튀어 나옴으로써 그 축제 분위기가 예기치 않게 엉망진창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욕설적이고 방어적인 언사의 전형으로, 추측하건데 이 말에는 표면적인 존경심을 정열적으로 거부하고 <이것이 나의 진심이 아니라는 것쯤은 여러분도 잘 아시겠죠. 저자는 정말 웃기는 작자가 아니겠소?>라거나 또 는 그와 비슷한 것을 말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밖에는 달리 어떻게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apropos(첨언)라고 말하려다가 apopos(a와 가 합성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라고 발음할 때, 또는 eiweibscheivchen(달걀 흰자 조각)을 eischeibweibchen(ei+scheib(똥)+weibchen(여자)으로 이루어진 단어.)으 로 잘못 말할 때와 같이 어떤 죄없는 단어를 점잖지 못하거나 외설스러운 단어 로 만들어 버리는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의도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메링어 와 마이어의 '잘못 말하기와 잘못 읽기, 심리학적, 언어학적 연구'참조, 원주) 농담을 하기 위하여 평범한 단어를 의도적으로 외설스러운 것으로 왜곡시켜 보려는 경향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재미 있게 들립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우리는 그러한 말을 한 그 사람에게 그가 그것을 <위트>로 의도적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아니면 말이 잘못 나와 그렇 게 되어 버렸을 뿐인지를 물어 보아야만 비로소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 이제 우리는 비교적 별로 힘들이지 않고 실수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우연적인 현상이 아니고 진지한 정신적 행위라는 것 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자신만의 의미를 갖고 있고 합동 작용(더 적절히 말하자 면)두 개의 서로 다른 의도의 길항 작용을 통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 작업의 이러한 첫 번째 결과에 대해 기뻐하기 전에 여러분들은 대답하고 해결되어야 할 수많은 질문들과 의문점들을 나에게 들이밀고 있고, 나 또한 그러한 여러분의 기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너무 이른 결론으로 몰아가지는 않겠습니다. 차근차근,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냉정하게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은 내게 무슨 질문을 하려는 겁니까? 내 주장은 이러한 설명이 잘못 말하기의 모든 경우에 들어맞는다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것은 그저 어떤 일부의 사례들에만 적용될 뿐이라고 말한 것일까요? 이러한 견해를 다른 모든 종류의 실수들, 이를 테면 잘못 읽기 , 잘못 쓰기, 잊어버리기, 잘못 잡기, 혹은 잘못 놓 기 등에도 확대시킬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피로나 흥분, 방심, 주의력 분산과 같은 요소들은 실수 행위의 심리적 성격과 관련하여 무슨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 까? 더 나아가서 두 개의 경합하는 실수의 경향 중 어떤 하나는 언제나 잘 알 수 있는데 다른 하나는 항상 그렇지는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면 이 후자를 알아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요? 또, 그것을 알아냈다고 믿는 다면 그것이 그저 그러할 것이다 정도가 아니고 단 하나의 유일하게 옳은 것이 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요? 그 밖에 더 물어 볼 것이 있습니까? 없 다면, 제가 다시 계속하겠습니다. 우리가 원래 실수에 그렇게 많은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씀드린 것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만 그것 의 연구를 퉁해 정신분석학에 유용한 어떤 것을 배울 수 있기를 기대했을 따름 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질문을 해 봅시다. 그런 식으로 다른 것을 방해할 수 있는 의도나 경향은 도대체 어떠한 관계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입니 다. 그러므로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이 나오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의 작업은 또다 시 새로이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모든 종류의 실수에 대한 해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잘못 말하기의 어떤 경우를 연구하더 라도 그러한 해명이 찾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메커니즘을 갖지 않는 잘못 말하기는 일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증명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쩌 면 우리에게는 이론적으로는 상관없는 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정신분석 입 문하는 범위 정도에서 필요로 하는 그 해명은 잘못 말하기의 극히 적은 사례들 에만 우리의 견해가 적용되는 경우에라도(절대로 그럴 리는 없지만) 여전히 유 효하기 때문입니다. 다음의 질문, 즉 잘못 말하기에서 얻은 결과를 다른 종류의 실수들에도 확대 적용시킬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나는 미리 그렇다고 대답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분들이 잘못 쓰기나 잘못 잡기 등과 같은 사례들 을 조사해 보면 곧 확신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나는 기술적인 이유에서 잘 못 말하기라는 현상 그 자체를 더욱 철저하게 연구한 이후로 이 작업을 연기하 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서술된 잘못 말하기의 메커니즘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순환기 적 장애나 피로ㅡ 흥분, 방심 상태처럼 학자들에 의해서 전면에 강조된 요소들 과 강조된 요소들과 주의력 장애 이론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물음 은 좀더 자세한 대답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요소들을 부정하지 않는 다는 사실은 여러분들도 잘 인지하고 계실 것입니다. 정신분석학이 다른 쪽에서 주장하고 있는 이론들을 반박하는 일은 좀처럼 발생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일반 적으로 단지 새로운 무언가를 추가할 뿐이며 지금까지는 이렇게 간과되었지만 이제 새로이 추가된 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바로 그것일 경우가 간혹 있는 것 입니다. 가벼운 불쾌감이나 순환기적 장애, 기력 탈진 상태 같은 것으로 나타나 는 생리적 소인의 영향은 잘못 말하기가 발생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고 인정됩니다. 매일 매일의, 개인적인 경험들로 인해 여러분들은 그것을 충분히 알 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란 얼마나 적은지요! 무엇 보다도 그것은 실수의 필수적인 조건은 아닙니다. 또한 완전히 건강한 상태나 정상적인 상태에서도 말이 잘못 나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요소는, 원 래 정신적 메커니즘인 잘못 말하기를 완화시키거나 조장하는 역할만을 담당할 뿐입니다. 나는 이러한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예전에 한 비유를 사용했는데, 이 제 그것을 다시 반복해 보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대체할 수 있는 더 좋 은 비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해 보십시오. 나는 어두운 한밤중에 어느 외딴 곳을 가고 있습니다. 거기서 어떤 부랑자의 습격을 받아서 시계와 지갑을 강탈당하고, 그 강도의 얼굴을 자세히 보지 못했으므로 가까운 경찰서에서 <외로움einsamkeit과 어두움dunkelheit이 바로 전에 나의 귀 중품을 빼앗아 갔습니다>라고 진술합니다. 그러면 경찰서의 형사는 내게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당신은 부당하게도 지극히 기계적인 생각을 신봉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건을 차라리 이렇게 표현해 보는 게 어떨까요? <어둠dunkelheit 의 보호 아래에서 아무도 없는 상황einsamkeit을 틈타 어떤 낯선 강도가 귀중품 을 강탈했다>라고 말이죠. 이와 같은 당신의 경우에서 가장 본질적인 일은 우리 가 그 강도를 잡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 강도로부터 빼앗긴 물건을 다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니까요.> 흥분이나 방심, 주의력 장애와 같은 정신생리학적인 요소들은 확실히 설명의 목적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저 상투어일 뿐이며 이상한 칸 막이 같은 것으로서 우리는 그 뒤에서 바라보는 것을 단념할 수가 없는 것입니 다. 그런데 여기서 오히려 문제되는 것은, 무엇이 그와 같은 흥분과 특별한 주의 력 분산을 일으켰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소리의 영향과 어휘의 유사성, 또 어떤 단어에서 생겨나는 관습적인 연상들도 또한 의미 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합니다. 그것들은 의미의 변화가 가능한 길을 가르쳐 줌으로 잘못 말하기를 부추기는 작 용을 합니다. 그러나 어떤 길이 내 앞에 놓여 있다고 해서 그것으로 내가 그 길 을 가리라는 것이 자명하게 결정됩니까? 내가 그 길을 가도록 결정하게 하는 데 는 어떤 동기가 필요합니다. 그 외에도 이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드는 힘이 필요 합니다. 이와 같이 소리와 어휘 관계도 육체적인 소인들과 마찬가지로 잘못 말 하기가 쉽게 이루어지도록 도와 줄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근본적으로 설명하지는 못합니다. 셀 수 없이 많은 대다수의 다른 경우에 나의 말은 내가 사용하고 있 는 말이 소리의 유사성으로 인해 다른 것을 기억나게 한다든가, 그것의 반대말 과 내적으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든가, 또는 습관적인 연상이 그로부터 생겨 나기 쉽다든가 하는 상황으로 인해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 니다. 철학자 분트w. wundt의 설명에 따르면 육체적인 피로간의 결과로 연상 작 용을 일으키는 경향이 그 밖의 다른 정상적인 언어 의도에 대해 우위를 점할 때 잘못 말하기가 생겨난다고 한 말을 참고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경우에서는 육 체적인 요인이, 또 다른 경우에서는 잘못 말하기를 조장하는 연상 작용이란 요 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경험적 증거만 아니라면, 즉 경험이 이 이론에 모순되 지 않는 한에서만 그 같은 설명이 매우 그럴듯하게 들릴 것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특별히 재미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다음 질문으로, 서로 함께 간섭 작용을 불러일으키며 나타나는 두 개의 경향을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여러분들은 아마 짐작 조차 못하실 것입니다. 그 두개의 경향 중에서 하나의 경향, 즉 방해받는 것은 언제나 의심의 여지가 없이 확실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실수를 범하는 사람 은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을 인정합니다. 의심과 궁금증의 실마리를 주는 것은 다른 경향, 원래의 의도를 방해하는 그것뿐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경우들에서 는 이 다른 경향도 방해받는 경향만큼이나 분명하다는 이야기를 이미 들은 바 있고 그 사실을 아직 잊지 않으셨을 줄 압니다. 그것은 잘못 말하기의 효과를 통해 암시되는데, 우리가 이러한 효과를 인정할 용기를 가지기만 하면 됩니다. 하려고 했던 말과 정반대의 말을 잘못 말하게 된 그 의장은, 그가 그 회의를 개 회하려고 했던 것은 확실합니다만 그에 못지 않게 회의를 끝내버리고 싶었던 것 이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방해하려는 경향이 원래의 것을 그저 왜곡시키기만 했 을 뿐이고 자기 자신을 표출시키지 않는 다른 경우에는 그러한 왜곡 현상에서 방해하는 경향을 어떻게 알아낼 수 있습니까? 첫 번째의 경우들에서 그것은 매우 간단하고 확실한 방법으로, 말하자면 방해 받은 경향을 확인하는 앞의 경우와 같은 방법으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것 은 말한 사람에게서 직접 확인됩니다. 실수한 후 그는 원래 의도했던 발음을 즉 시 그대로 발음할 수 있습니다. ....., nein, das dauert vielleicht noch einen monat.> 왜곡하려는 경향은 곧바로 말한 사람에 의해 발음될 수 있 습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은 왜 처음에 라고 발음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그는 <나는 <그것은 참 슬 픈traurige 일이에요>라고 말할 참이었지요>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또 이라고 잘못 말한 경우에도 그는 여러분에게 <그것은 추잡한 일 schweinerei이지요>라고 말하려고 했으나 곧 누그러뜨리고는 다른 말로 바꾸어 버렸노라고 확인해 줄 것입니다. 왜곡하려고 하는 경향을 확인하는 것은 이때 왜곡된 경향만큼이나 확실하게 성공적으로 이루어집니다. 나나 혹은 나의 다른 추종자들이 제시하고 해명하지 않은 그러한 사례들만을 내가 여기서 선택하고 있는 것은 아무런 의도 없이 그렇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의 경우에 해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모두 어떤 개입이 필요합니다. 말한 사람 에게 왜 그가 그렇게 잘못 말하게 되었는지, 잘못 말한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말해 줄 수 있는지 등을 물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는 그것을 해명해 주려고도 하지 않고 잘못을 그냥 지나쳐 갈 것입니다. 질문을 받 은 그는 자기에게 만 처음 떠오르는 생각을 가지고 그 설명을 해줄 것입니다. 자, 이제 이러한 작은 개입과 그것의 성공을 보십시오. 그것은 이미 정신분석입 니다. 그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다루려고 하는 모든 정신분석적인 연구의 전형이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이 여러분들 앞에 이렇게 처음 떠오른 바로 그 순간에 그에 대한 저 항감이 여러분들에게서 머리를 쳐들고 있다고 추측한다면 내가 너무 의심이 지 나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들은 이에게, 잘못 말한 그 사람에게서 나온 그 정보라는 것이 완전한 증거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항의를 할 생각 은 없습니까? 그는 물론 그 요구를 들어주고 잘못 말한 것을 설명하려는 노력을 했을 것이라고 여러분은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에게 맨 처음 떠오른 생 각이 그러한 해명으로서 쓸모 있다고 생각했을 때 그 생각을 말해 주는 것이지 만 잘못 말하기가 정말로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고 증명해 주는 것은 아니지 않 느냐, 그리고 물론 그 생각이 옳은 것일 수도 있지만 마찬가지로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며, 그 사람에게는 맨 처음에 떠오른 것만큼이나 그럴듯하게 생 각되고 어쩌면 더 잘 들어맞을 수도 있는 다른 생각이 떠오를 수도 있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근본적으로 심리적 사실에 대하여 이처럼 보잘것없는 존경심을 가 지고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물질을 화학적으로 분 석을 해서 그것의 어떤 성분이 몇 밀리그램이 나가는지 확인했다고 생각해 봅시 다. 사람들은 이러한 중량을 통해서 어떤 특별한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어떤 화학자가 이렇게 분리된 물질은 처음과 다른 중량을 가지 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의를 제기하면서 이 결론을 부정하려는 시도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모든 사람이 그것은 바로 이만큼의 중량이 나가며 다른 어떤 결과도 나올 수 없으리라는 사실 앞에 굴복하면서 그 토대 위에 자신들의 다른 결론을 확신을 갖고 구축해 나갈 것입니다. 사람들은 유독, 모종의 질문을 받은 사람에게 어떠한 생각이 떠올랐다는 심리적 사실이 문제가 될 때는, 그것 을 부정하면서 그에게 또다른 생각이 떠올랐을 수도 있다고 말을 합니다. 여러 분들은 아마도 심리적 자유라는 환상에 매달려 있으면서 그것을 포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내가 여러분과 첨예하게 대립하 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는 유감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항의를 멈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곳에서 다른 이의를 제기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여러분은 또 다음과 같이 계속 반론을 제기할 것입니다. <분석받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문제의 해답을 스스로 이끌어 내게 하는 것이 정신분석만의 특별한 치료법이라는 것은 이해합니다. 다른 예를 한 번 선택해 봅시다. 은사의 안녕을 위해서 <트림aufstoben>을 하자고 모인 사 람들에게 제안을 했던 그 축사자의 경우, 선생님께서는 그 사람의 방해하려는 의도를 존경심의 표현에 반대되는 조롱하고자 하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 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생님의 입장에서 본 단순한 해석에 지나지 않으 며 잘못 말하기의 범위 밖에aufberhalb있는 순전히 관찰에 의한 것입니다. 만일 선생님께서 잘못 말한 그 사람에게 직접 물어 보신다면 그는 자기에게 모욕의 의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해 주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격렬하 게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선생님께서는 어째서 이러한 분명한 이의에 대하여 선 생님의 해석을 철회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네, 이번에 여러분은 아주 강력한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하 는 그 축사자를 이렇게 상상해 봅니다. 그는 아마도 축하를 받는 그 선생님의 조수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벌써 전임 강사로서 앞길이 매우 창창한 젊은 사 람일 것입니다.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드러내도록 하는것에 대해 반하는 어떤 감정을 정말 느끼지 못했느냐고 내가 그에게 압박하듯 물어 보았다고 합시다. 나는 매우 집요하게 물어 봅니다. 그러면 그는 참지 못하고 나에게 화를 버럭 낼 것입니다. <제발 그 끈덕지게 물어 보는 짓 좀 그만 둘 수 없습니까? 매우 기분나쁜데요. 당신이 그렇게 의심을 하면 내 전체 경력이 망가져 버릴지도 모 릅니다. 나는 단순히 그 말이 나온 문장에서 그 전에 벌써 두 번이나 auf라는 발 음을 했기 때문에 anstoben이라고 말할 것을 aufstoben이라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메링어가 지적한 후발음의 현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고 더 이상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제 말 이해하시겠어요? 이제 그만하세요.> 네, 이것은 정말 놀라운 반응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단히 격렬한 부정입니다. 그 젊은이에 게 어떻게 달리 해볼 방법이 없군요. 그러나 나는 자신의 실수에는 어떤 뜻도 담겨 있지 않다고 하는 것에 그가 매우 강한 개인적 관심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순수한 이론적인 연구에 그가 그토록 거칠게 반응을 하는 것은 이상하다고 여러분도 생각하시겠지요. 그래도 여러분들은 그 자신이 무엇을 말 하려고 했는지, 또 무엇은 말하려고 하지 않았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으리라고 짐작할 것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것은 여전히 의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나를 송 안에 넣었다고 생각하시겠지요. <그것이 선생님의 기 술이로군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잘못 말한 그 삶이 선생 님의 생각에 들어맞는 것을 말하면 선생님은 그것을 마지막의 궁극적인 권위로 인정해 버리십니다. <그가 직접 그렇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것이 선생님의 구도에 들어맞지 않으면 선생님은 갑자기 그것 은 틀렸다. 그것은 믿을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여러분이 하는 말은 어쨌든 맞는 말이긴 합니다. 나는 그러나 여러분들에게 그처럼 터무니없는 비슷한 경우를 또 하나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만일 어떤 피 의자가 판사 앞에서 자신의 범죄 행위를 인정하면 판사는 그의 고백을 믿습니 다. 그러나 그가 그것을 부정하면 판사는 그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만약 상황이 달리 전개된다면, 사법 제도는 존속될 수 없습니다. 때때로 사법 제도는 과실을 범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이 제도가 그대로 존속되어야 할 정당성이 있다고 인정할 것입니다. <아니, 선생님이 그렇다면 재판관이십니까? 그리고 잘못 말한 그 사람은 선생 님 앞에 선 피의자입니까? 잘못 말하기가 무슨 죄라도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그러나 이 비교를 애써 부정할 필요도 없습니다. 겉보기에는 별로 문 제도 되지 않는 이러한 사소한 실수의 문제를 조금만 깊이 파들어가면 이렇게 심각한 차이점에 도달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았을 것입니다. 처 음에는 이 차이점들을 어떻게 비교를 근거로 잠정적인 타협책을 권하고 싶습니 다. 피분석자가 스스로 그렇게 인정했을 경우 실수의 의미에 대하여 어떠한 의 심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와 더불어 내가 여 러분들에게 고백하고 싶은 점은 피분석자가 그것을 거부할 경우 추측되는 의미 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피분석자가 우리에게 어떠한 정보도 제공해 줄 수 없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사법제도의 경우에서와 같이 간접 증거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 간접 증거는 어떤 때는 그 결정이 거의 맞는 듯이 보이기도 하고 또 어떤 때 는 잘 들어맞지 않는 듯이 보이기도 합니다. 법정에서는 현실적인 이유에서 간 접 증거에 의거해 유죄라고 판결할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강 제로 그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간접 증거를 사용하지 말 아야 할 이유 또한 없습니다. 학문이란 엄정하게 입증된 명제들로만 구성되어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오류이며 또 그렇게 요구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이러한 요구는 자신의 종교적인 교리를 다른 것으로 보충하려는(그것이 과학적인 것이 라 해도) 욕구를 가진 권위 편집증적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과학은 그 자체의 교의 속에 단지 아주 적은 양의 명징한 정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일정한 정도까지의 확률로 뒷받침된 주장들일 뿐입니다. 확실성에 대한 이러한 근사치만으로도 만족하고 마지막 확증의 결여에도 불구하고 건설적 인 작업을 계속해 나간다면 그것이야말로 과학적 사고 방식의 징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피분석자의 언명이 실수 행위의 의리를 스스로 밝혀 내지 못할 경 우, 우리는 우리 해석의 근거, 즉 우리 논증의 간접 증거를 어디서 찾아내야 합 니까?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예를 들어 실수로 이름 을 왜곡해서 부르는 경우는 고의적으로 이름을 곡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 은 욕설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할 때, 실수 행위를 제외한 현상들과의 유 추에 의해서 그 증거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합니다. 또, 그 밖의 다른 단서들은 실수가 일어나는 심리적 상황에서 얻어지거나, 실수를 저지르는 그 사람의 성격 과 실수를 하기 전에 당사자가 받은 인상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에서 얻어지는데, 아마도 그는 자신이 받은 인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반 응했을 것입니다. 진행되는 방법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인 기 본 원칙에 따라서 실수에 대한 해석을 위한 하나의 제안일 따름인데, 그리고나 서는 심리적 상황을 조사해서 그에 대해 확인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 리는 다가올 사건을 기다려야만 할 때도 있는데, 그것은 실수를 통해서 방금 예 고된 것으로서 우리의 추측을 유효한 것으로 만들어 주게 됩니다. 여기에도 몇몇 개의 좋은 예들이 있긴 하지만 내가 잘못 말하기의 영역으로만 문제를 국한시킬 경우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에 대한 증거들을 쉽게 보여 드릴 수가 없습니다. 숙녀를 begleitdigen하려고 했던 그 젊은 청년은 틀림없이 수줍 은 성격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또, 자신의 남편이 그녀sie가 원하는 것은 무엇 이든지 먹거나 마셔도 된다는 그 여인은, 내가 보기에는 집안에서 모든 것을 자 기 마음대로 이끌어 가는 괄괄한 부인들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다음과 같은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콘코르디아>(빈의 언론인 협회.)의 한 총회에서 어떤 젊은 회원이 매우 격렬한 반대 의견을 내세우고 있었는데 그 는 그의 연설 도중에 협회의 지휘부를 <mitglieder>(aussvhubmitglieder라고 했어야 한다. 여기서는 <위원 여러분>이라는 뜻임.)라고 지칭했습니다. 그 단어는 stand(의장)라는 단어 와 aus(위원회)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인 것 같았습니다. 우리는 반대 의 견을 말하는 그의 마음속에 그것을 방해하는 어떤 경향이 작용을 한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는데 그것은 vorschub(선불금)와 관계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습 니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의 증인에게서 그가 항상 돈 문제로 쪼들리고 있었다 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방해하는 의지를 실제로 다음과 같은 생각으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반대 의견을 말하는 것도 좀 적당히 하는 게 좋겠어. 저 사람들은 네가 바라는 선불금의 지불을 승인하게 될 바로 그 사 람들이야.> 다른 형태의 실수들을 포괄하는 광대한 영역으로까지 논의의 범위를 넓히면 이러한 간접 증거가 드러나는 수많은 사례들을 여러분들에게 제시해 보일 수 있 습니다. 어떤 사람이 원래는 자기에게 매우 친숙한 고유 명사를 잊어버릴 때, 혹은 아 무리 애를 써도 그것을 아주 힘들게만 기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이 이름 을 갖고 있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거부감을 느끼고 있어서 그것을 기꺼이 기억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라고 가정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실수가 드러나 있는 다음의 심리 상황을 관찰해 보십시오. 어떤 y라는 남자가 어느 여자에게 정신 없이 반해 있었는데 결국 그 여자와 관계를 맺는 데 성공하지 못하고 말았다. 바로 그 후에 그 여자는 x라는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y는 x를 오랫동안 알고 있었고 심지어 그와 사업상으로 거 래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언제나 그의 이름을 잊어버리고는 x와 연락을 취 해야 할 때는 몇 번이고 그의 이름을 다른 사람에게 물어 보곤 했다.(융c. g. jung의 저술에서 인용한 것이다, 원주. 융의 '조발성 치매증의 심리학에 대하여 uber die psychologie der dementia praecox'(1907) 참조.) y는 틀림없이 자신보다 행복한 라이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고 싶어하지 않았 던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해서는 안 돼.>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여자가 의사에게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어 떤 사람의 이름을 물어 보면서 그녀의 결혼하기 전의 성을 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가 결혼하면서 갖게 된 성을 잊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그녀가 고백하기를, 자기는 이 결혼에 대해 매우 반대했으며 이 여자 친구의 남편을 참 을 수 없이 싫어했다는 것이었습니다.>(브릴의 글에서 인용, 원주.) 이러한 이름 망각에 관해서는 다른 관점에서 더 많은 것을 얘기할 수 있지만 지금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주로 그러한 망각이 일어나게 되는 심리 상 황입니다. 어떤 일을 하기로 했던 계획을 잊어버리는 것은 일반적으로 그 계획을 실행하 지 못하게 하려는 그와 반대되는 어떤 생각의 흐름 때문으로 그 원인을 돌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정신분석을 하고 있는 우리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일상 생활 속에서는 모두 그것을 지지하고 있으면서도 처음에 이론적으로는 그것을 거부하 는 많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견해이기도 합니다. 피후견인의 부탁을 잊고 나서 자신의 피후견인에게 사과하는 후견인의 말은 통하지 않습니다. 피후견인은 즉 시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는 그런 부탁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었어. 그 가 그렇게 약속하기는 했지만 그는 처음부터 그것을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던 거 야.> 어떤 관계에서는 이처럼 약속을 잊어버리는 행위는 일상 생활 속에서 금지 된 것입니다. 이러한 실수 행위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지니고 있는 생각과 정신 분석학 쪽 견해와 차이는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하면서 손님 을 맞는 한 주부를 상상해 보십시오. <어머나, 오늘 오기로 하셨던가요? 오늘 오시라고 초대한 사실을 그만 깜박 잊었군요.> 아니면 지난번에 했던 약속을 지 키는 것을 완전히 잊었다고 애인에게 고백해야만 하는 젊은이의 경우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는 사실을 고백하기보다는 그 당시에 약속 장소에 가지 못하게 하 고 그에 대한 기별을 하는 것조차 불가능하게 만든 가장 있을 법하지 않은 사건 을 머릿속에서 즉흥적으로 생각해 낼 것입니다. 군사적인 직무에서는 무언가를 잊어버렸다는 변명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고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막아 주지 도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으며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합니 다. 어떤 실수는 매우 깊은 의미를 갖고 있으며 그것이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 지에 대해서 우리 모두는 처음으로 여기에서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이러한 통 찰을 다른 종류의 실수도 확대 적용시키고 그것에 완전히 동조하는 데 대해서 사람들은 왜 끝까지 일관적이지 못한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물론 하나의 대답이 있습니다. 어떤 계획을 잊어버리는 것의 의미가 이렇게 일반인들에게도 자명하다면 작가 들이 이러한 실수를 같은 의미로 사용한다고 해서 여러분들이 놀랄 일은 별로 없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버나드 쇼b. show의 '시저와 클레오 파트라'라는 희곡을 보거나 읽은 사람은 마지막의 시저가 떠나가는 장면에서 무 언가를 하려고 했는데 잊어버렸다는 생각에 줄기차게 괴롭힘을 당하는 시저의 모습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결국 밝혀지는데, 다름 아니 라 클레오파트라와 작별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 작은 사건의 의미는 위대한 시저가 갖고 있지 않았고 또 그것을 가지려고 노력 하지도 않았던 어떤 우월감을 그에게 부여하려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여러분들 은 역사적인 문헌들에서 시저가 암살 당했을 때 그녀는 어린 세자리온과 함께 거기에 살고 있었다는 것, 또 시저가 암살당한 후 그녀는 도망치듯 그 도시를 빠져 나갔다는 것 등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계획을 잊어버리는 경우는 일반적으로 이처럼 자명해서 실수의 의미를 찾아내 기 위해 심리적 상황에서 간접 증거를 이끌어 내려는 우리의 의도에 별다를 도 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애매하고 불투명한 실수 행위 라고 볼 수 있는 잃어버리기와 잘못 놓기의 경우에 관심을 돌려 봅시다. 당사자 에게 그토록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사건인 잃어버리기에는 우리 자신이 어떤 의 도를 자기고 그것에 관여되어 있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믿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해석이 가능한 관찰 사례들이 엄청 나게 많이 있습니다. 어떤 젊은 청년이 자기에게 매우 소중했던 크레용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일이 있기 바로 며칠 전에 자신의 처남에게서 한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는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었습니다. <나 는 얼마동안 너의 경박성과 게으름을 도와 줄 기분도 나지 않고 또 그럴 시간도 없다.>(다트너b. dattner의 글에서 인용, 원주.) 그 크레용는 사실은 바로 이 처 남의 선물이었습니다. 이러한 관련성이 없다면 물론 우리도 이 분실 행위에는 그 물건을 없애 버리고 싶은 의도가 작용했다고 주장할 수 없을 것입이다. 이와 비슷한 수없이 많은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 물건을 준 사람과 적대적이 되어서 그를 더 이상 마음에 아 들 때, 다른 더 좋은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 그것에 대 한 어떤 구실을 만들고 싶을 때, 우리는 그 물건을 잃어버리곤 하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그와 같은 의도가 빠뜨리거나 깨뜨리기, 떨어뜨려 부수기 등 의 행위에 작용합니다. 어떤 초등학교 아동이 바로 자기의 생일 전날에 자기가 쓰던 물건 , 예를 들어 자기의 책가방이나 주머니 시계를 잃어버리거나 망가뜨 리거나 깨뜨릴 때 그것을 단순히 우연으로 돌릴 수 있겠습니까? 자기 스스로 물건을 어디에 놔두고는 그것을 찾을 수 없었던 고통을 자주 느 꼈던 사람들은 잘못 놓기의 의도에 대해서 믿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어떤 물건 을 잘못 놓게 된 주변 상황을 보면 그 물건을 잠시 동안이나마, 혹은 오랫동안 없애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음을 암시하는 그러한 경우가 드물지 않게 있 습니다. 이러한 종류의 가장 적절한 예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젊은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결혼 생활을 하던 중 몇 년 전에 어떤 오해가 있었습니다. 나는 아내의 탁월한 품성을 인정하고 있었지 만 그럼에도 나의 아내가 너무 냉정하다고 느꼈습니다. 우리는 부드러운 애정 표현이 없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는 산책에서 돌아오면서 내게 틀림없이 흥미있는 책이 될 것이라면서 그녀가 산 책 하나를 내밀었습니 다. 아는 그녀의 이러한 관심의 표시에 고마워하면서 그것을 꼭 읽겠노라고 약 속을 하고 어디에 잘 두었는데 나중에 그것을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 는 때때로 그렇게 사라져 버린 책을 기억해 내고는 그것을 찾아보려고 애를 썼 지만 번번히 허사로 끝났고 그러는 사이에 몇 달이 흘렀습니다. 약 반 년 후에 우리와 떨어져서 살고 계시던 저의 어머니께서 병환이 나셨습니다. 나의 아내는 시어머니를 보살펴 드리기 위하여 그리로 갔습니다. 환자의 상태는 매우 심각해 져 갔고 그것은 나의 아내에게는 그녀의 가장 ㅈ은 면을 보여 줄 수 있는 기회 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나는 그녀가 한 일에 대하여 감동을 받고 그녀에 게 고마운 마음을 느끼면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나는 책상에 다가가서 특별한 의도도 없이 마치 무슨 몽유병자처럼 확신을 가지고 그 중의 어느 서랍을 열었 는데, 거기 바로 맨 위에 그렇게도 오랫동안 찾아내려고 했던 그 잃어버렸던 책 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대상에 대한 동기가 사라져 버림과 동시에 그 대상의 잘못 놓여진 상태 도 끝나게 된 것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와 비슷한 예를 들라면 나는 끝도 없이 그렇게 할 수 있 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나의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 실수의 연구에 관한 대단히 많은 해설적 예증들이 나와 있습니 다.(그 외에도 매더(프랑스), 브릴(영국), 존스(영국), 슈테르케(네덜란드)등이 수 집한 예들도 참조하라, 원주. 매더a. maeder의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기고contributions a la 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6), '일상 생 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새로운 기고nouvelles contributions a la 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8), 브릴의 '정신분석:그 이론과 실제 적 적용', 존스의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 슈테르케j. starcke의 '일상 생활에 대하여aus dem alltagsleben'(1916) 참조.) 이 모든 예증들은 한결같이 같은 사실 로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즉 이 책은 여러분들로 하여금 실수들은 모두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개연성 있는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하고, 그 주변 상황들에서 실수의 의미를 어떻게 알아내고 확인할 수 있을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 다. 오늘은 짧게 간추려서 말하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현상의 연구에서 정신분석을 준비하는 데 유익한 내용을 끌어내는 것으로 우리 목표를 한정시키 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기서 단지 두 가지 종류의 문제, 즉 반복적이고 결합된 실수 행위와 나중에 나타나는 사건을 통해서 우리 해석의 타당성을 검증 할 수 있는 문제만을 자세하게 다룰 예정입니다.(그 외에도 매더(프랑스), 브릴 (영국), 존스(영국), 슈테르케(네덜란드)등이 수집한 예들도 참조하라, 원주. 매더 a. maeder의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기고contributions a la 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6),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에 대한 새로운 기고nouvelles contributions a la psychopathologie de la vie quotidienne'(1908), 브릴의 '정신분석:그 이론과 실제적 적용', 존스의 '일상 생활 의 정신병리학', 슈테르케j. starcke의 '일상 생활에 대하여aus dem alltagsleben'(1916) 참조.) 반복적이고 복합적인 실수 행위는 확실히 실수의 종류들 중에서 가장 찬란한 꽃이라고 할 수있습니다. 실수 행위들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증명 하는 것만이 문제였다고 한다면 우리는 처음부터 그것에만 우리의 노력을 한정 시켰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실수에서는 아무리 둔한 사람일지라도 그 의 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실수 행위의 반복은 어떤 집요함을 드 러내 주는 것으로서 그 집요함이란 우연적인 일에는 결코 수반되는 법이 없으나 의도에는 잘 어울리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여러 개의 실수들이 차례차례 이어지 고 나서야 드디어 실수에서 무엇이 중요한 것이고 본질적인 것인가를 알게 됩니 다. 실수에 이용되는 그 형식이나 수단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 스스로 가 이용하는, 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도달되어야만 하는 그 의도가 문제인 것입 니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반복된 망각의 한 예를 설명해 보려 합니다. 존 스가 보고하기를 그는 언젠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동기에서 편지 한 통을 며칠 동안이나 책상 위에 놓아두었다고 합니다. 드디어 그는 그 편지를 부치기 로 작정을 했는데 얼마 후 <수취인 불명>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주소를 쓰는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겉봉에 주소를 쓰고 나서 우체 국으로 가져갔으나 이번에는 우표를 붙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 편지를 보내는 데 대한 거부감을 스스로에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경우에서는 착각이라는 실수가 잘못 놓기라는 실수와 결합됩니다. 어 느 부인이 매우 유명한 예술가인 자기 여동생의 남편과 로마로 여행을 떠났습니 다. 그 방문객들은 로마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고대 의 오래된 금메달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그 부인은 여동생 남편이 그 아름다운 물건을 그리 높게 평가하지 않는 것을 알고 몹시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여동생 이 도착했으므로 그녀와 헤어져서 자신의 집에 도착해 짐을 풀었을 때 그녀는 그 메달을(어떻게 그리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함께 가져온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그 즉시 편지를 써서 바로 그 다음날에 그 메달을 로마로 다시 부쳐 주 겠노라고 통지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그 메달은 감쪽같이 사라져서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구 부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부인은 자 신의 <부주의>가 무엇을 뜻하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말하자면 그것을 자신이 소유하고자 했던 것입니다.(라이틀러r. reitler가 보고한 내용이다, 원주) 나는 이전에도 한번 망각과 착오가 결합된 예를 들어 여러분들께 보고 드린 바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이 처음에는 약속 그 자체를 잊어버리고 그 다음에는 결단코 잊지 않겠다는 결심을 했음에도 약속한 시감과는 다른 시간에 약속 장소 에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내 친구 중 한 사람이 자기가 겪은 이와 아주 유사한 경우를 직접 얘기해 주었습니다. 그 친구는 과학적인 관심 이외에도 문학적인 데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나는 몇 년전에 어떤 문학 단체 위원회의 위원으로 위촉된 적이 있었네. 나는 그 학회가 언젠가는 나의 희곡을 공연하는 문제에 어느 정도 도움이 되어 줄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그다지 큰 관심은 없었지만 매주 금요일마다 열리는 그 위원회의 회의에 꼬박꼬박 참석을 했네. 그런데 바로 몇 달 전에 나는 f.시의 극장에서 그 희곡을 공연하게 되리라 는 확답을 받게 되었지. 그 뒤부터 나는 그 위원회의 회의를 매번 <잊어버리 고> 말았네. 내가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자네의 글을 읽고 나니 나의 망각 에 대해서 수치심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네. 내가 이 사람들을 더 이상 필요 로 하지 않게 되자 이제 그 회의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더 뻔뻔스러운 일이라고 다짐을 했지. 나는 이 계획을 계속적으로 기억해 내고 드디어는 실행 에 옮겨서 그 회의실 문 앞에 섰지.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문은 굳게 잠겨 있었네. 회의는 이미 지나가 버린 것이었다네. 나는 말하자면 날짜를 잘못 알고 있었는데, 그 날은 토요일이었다네!> 이와 비슷한 예들을 계속 수집해 본다면 아주 재미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 는 계속해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 해석의 타당성을 확인 받기 위해서는 다가 올 미래를 기다려야만 하는 그러한 경우들이 있음을 여러분들이 주목해 주기 바 랍니다. 이러한 경우들의 주요 조건들은 잘 알다시피 현재의 심리적 상황이 우리에게 는 미지의 것이거나 또는 우리의 조사가 미칠 수 없는 그런 것들입니다. 그때 우리의 해석은 단지 추측으로서의 가치만을 지니게 되므로 우리 자신도 거기에 그다지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당시의 우리 해 석이 이미 얼마나 정당한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나는 언젠가 갓 결혼한 신혼 부부의 집에 손님으로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그 젊은 부인이 웃으면서 자신의 최근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녀는 신혼 여행에서 돌아온 그 다음날 남편이 일하러 간 사이에 이전에 늘 그러곤 했 던 것처럼 쇼핑을 가기 위해 결혼하지 않은 자신의 여동생을 불러냈습니다. 길 을 걷던 중 갑자기 그녀에게는 맞은편 길을 걸어가는 어떤 신사의 모습이 눈에 띄었고 그녀는 여동생을 쿡 찌르면서 <저기 봐, 저기 그 l씨가 가고 있어>라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녀는 이 신사가 몇 주 전부터 자신의 남편이 되었다는 사실을 깜박 잊었던 것었습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전율을 느꼈지만 감히 거기에 대해 추론해 볼 용기는 나지 않았습니다. 몇 년 후에 이 결혼이 불 행하게 끝났다는 사실을 듣고서야 비로소 그 때 들었던 이 작은 이야기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매더는 결혼식 바로 전날에 신부 드레스를 가봉하는 것을 깜박 잊어서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재봉사에게 가는 바람에 재봉사를 당황케 했던 어떤 부인의 이야 기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 부인이 바로 얼마 후에 그녀의 남편과 이혼했 다는 사실과 이 망각 행위를 하나의 연관성 속에 넣고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또 실제로 이혼에 이르기 몇 년 전부터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서류에 빈 번하게 결혼하기 전의 처녀 때 성으로 서명을 했던, 지금은 작 남편과 이혼을 한 상태인 어떤 부인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또 신혼 여행 도중에 결혼 반 지를 잃어버린 한 부인을 알고 있는데, 그 결혼이 후에 전개된 모습은 이 우연 적인 사건에 의미를 부여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좀더 좋은 결과로 끝난 또 하나의 극명한 예도 있습니다. 결혼식 시간을 잊어버리고 교회로 가는 대신 에 실험실로 가버림으로써 자신의 결혼을 성사시키지 못한 어떤 유명한 독일의 화학자에 대한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그는 매우 영리했기 때문에 결혼을 다만 시도로서 그치게 하였고 그렇게 해서 고령의 나이로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들에서 여러분들에서 여러분들은 어쩌면 실수 행위가 옛날 사람들 이 말하는 어떤 전조나 징조 대신에 나타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리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전조의 어떤 부분들은 실수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발이 걸려 뒤뚱거리거나 넘어지는 따위 가 그것입니다. 그 외의 전조의 다른 부분들은 어쨌거나 주관적인 행위의 성격 이 아닌 객관적인 사건의 성격을 띠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한 사건의 경우에 그것이 이쪽에 속하는지 아니면 다른 쪽에 속하는지를 결정한다는 것이 때때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여러분들은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행위는 종종 수 동적인 체험의 형태로 변장하고 나타나는 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중 지나온 긴 인생 경험을 돌이켜 볼 수 있는 사람은 누구나, 사람들 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작은 실수들을 전조로 해석하고 실수들을 그 속에 숨겨 져 있는 의도의 징조로 평가할 수 있는 용기와 결단력만 갖고 있었더라면, 많은 실망들과 고통스러운 경악들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할 것입 니다. 사람들은 그러나 대개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그런 태도는 과학을 옆으로 우회해서 미신적인 생각을 품는 것과 같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모든 전조들이 다 들어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우리의 이 론을 통해 이해해야 할 것은, 모든 내용들이 그렇게 다 들어맞을 필요는 없다는 것입니다. 네 번째 강의 실수 행위들(결론) 신사 숙녀 여러분, 이제 실수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우리가 지금까지 연구한 결과로 평가하고 또 우리가 다음에 연구 할 작업의 토대로 받 아들여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한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사실 우리의 목표를 달 성하기 위해 주장 같은 것을 내세울 필요는 없지만) 모든 개개의 실수들에 의미 가 있다고 주장할 생각은 없습니다. 나 자신은 비록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의미를 실수의 여러 가지 형태들에서 비교적 빈번하게 증명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의미의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여러 가지 형태의 실수들은 무엇보다도 아주 다양한 관계를 보여 줍 니다. 잘못 말하기나 잘못 쓰기 등에서는 순전히 생리적인 이유를 갖는 실수들 도 자주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망각에 근거를 두고 있는 종류들(이름이나 계획을 잊어버리기, 잘못 놓아두기 같은 것들)은 그러한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전혀 의도가 없는 듯이 보이는 그러한 분실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오류들은 그러나 극히 일부분만이 우 리들의 관찰 대상에 포함됩니다. 우리가 계속해서 실수들이란 심리적인 행위이 며 두 개의 다른 의도들 사이의 간섭을 통해서 발생한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신분석학의 최초의 결과입니다. 그러한 간섭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과 그에 따라 실수와 같은 현상들이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서 심리학은 이제까지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심리적 현상계의 영역을 현저하게 넓게 확장시켰고 이전에는 심리학에 포함되지 않았던 현상들까지도 심 리학에 끌어들인 것입니다. 실수들이란 <실리적 행위들psychische akte>이라고 하는 주장에 잠시만 더 머물러 봅시다. 그것은 실수가 의미를 갖는다고 하는 우리의 그 전 언명보다 더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 려 더욱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해졌을 뿐입니다.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관찰할 수 있는 모든 문제되는 것은 개개의 정신적 현상이 직접적으로 육체적이고 유기체 적이며, 또 물질적인 작용에서 출발하는가 하는 점이고 어떤 경우에 그 연구가 심리학에 해당되지 않는가 입니다. 혹은 그것이 일단은 다른 정신적 과정들에서 비롯하지만, 사실 그 배후에 모종의 장소에서 일련의 유기체적인 작용들이 촉발 되는 것이 아닌가의 여부입니다. 마지막의 사태와 관련해서 우리가 잘 알고 있 는 어떤 현상을 정신적인 과정으로 지칭한다면 우리의 언명을 다음과 같은 형태 로 표현하는 것이 더욱 유익할 듯합니다. 즉, <그 현상은 의미 있는 것이다. 의 미를 갖고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의미>라고 하는 단어를 우리는 뜻, 의 도, 경향, 그리고 심적인 관련성 속에서 그 현상이 차지하는 어떤 위치 등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실수와 매우 비슷하게 보이지만 그러나 실수라는 이름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 는 다른 현상들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을 <우연 행위zufallshandlung> 또는 <증상 행위symptomhandlung>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실수 행위와 똑같이 그것들은 <무동기>, <무의미>, <중요치 않음>의 특성들을 갖고 있지만 그 외 에도 <불필요>라는 특성을 한결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위들 이 실수와 구별되는 것은 그 행위와 충돌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서 방해를 받는 제2의 의도가 그것에는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들은 또 다른 한편으로 우리가 정 서적 운동의 표현으로 분류하는 몸짓들과 운동들을 아무런 장애 없이 넘나듭니 다. 이러한 우연적 행위들에는 언뜻 보기에 아무런 목표도 없어 보이는 행동들, 마치도 놀면서 하는 듯한 행동이나 옷을 입을 때의 행위들, 우리 몸의 부분들이 서로 닿거나 우리 손에 미치는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는 행동들, 또는 그러한 행 동을 중단하는 행위, 나아가서는 우리가 흥얼거리는 멜로디 등 그 모든 것들이 속합니다. 나는 여러분들 앞에서 이러한 모든 현상들이 의미 있는 것이며 실수 행위들과 마찬가지 방법으로 연구해 보면 해석이 가능한 것이고, 더욱 중요한 다른 정신적 과정들의 아주 작은 징조이며 또한 완전히 유효한 심리적 행위라는 주장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나는 정신적 현상들의 영역이 이렇게 새롭게 확장 되고 있는 문제에 오래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없고 실수들의 문제에 다시 되돌 아가려 하는데, 바로 그것에서부터 정신분석에서 훨씬 더 중요한 문제를 매우 분명하게 풀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우연적 행위와 증상 행위에 대해서는 '일상 생활의 정신병리학'을 참조하라.) 실수에 있어서 우리가 제기하기만 해 놓고 아직까지도 대답하지 않은 가장 흥 미로운 문제는 아마도 다음과 같은 사실일 것입니다. 우리는 실수들이란 두 개 의 의도들, 그 중 하나는 방해받는 의도이고 다른 하나는 방해하는 의도로 불릴 수 있는 서로 다른 의도들의 간섭의 결과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방해받는 의도 는 계속되는 질문에 어떠한 단초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다른 또 하나의 의도에 대해서 우리는 첫째로 다른 것에 대한 방해물로 나타나는 이러한 의도에 대해서 우리는 첫째로 다른 것에 대한 방해물로 나타나는 이러한 의도란 도대체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연구하려고 하며, 두 번째로 이렇게 방해하는 의 도는 방해받는 의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알아내려고 합니다. 잘못 말하기를 다시금 이러한 종류의 모든 실수들의 대표격으로 취급하는 것 과 첫 번째 것보다는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먼저 대답하는 것을 허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잘못 말하기에 있어서 방해하려는 의도는 방해받는 의도와 내용적인 관계에 놓여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그것은 방해받는 의도에 대한 모순이며 그것에 대한 교정 혹은 보완의 성격을 띱니다. 혹은, 더욱 모호하고 흥미로운 경우는 방 해하는 의도가 방해받는 의도와 내용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입니다. 이러한 두 가지 관계 중에서 첫 번째 것에 대한 증거는 우리에게 이미 잘 알 려져 있는 비슷한 경우들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정반대의 말이 튀어 나오는 잘못 말하기의 거의 모든 경우에 방해하는 의도는 방해받는 의도의 반대 의향을 표출시키며 실수는 두 개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의도들 사이의 갈등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로써 회의의 개회를 선포하지만 차라리 그 것이 끝나 버렸으면 하고 바란다>라는 것이 의장이 발언한 잘못 말하기의 의미 인 것입니다. 뇌물 사건으로 고발된 정치적 신문은 <우리가 항상 최대한 공정 하게in uneigennutzigster weise 일반 대중의 안녕을 대변해 왔다는 것은 우리의 독자들이 증명해 줄 것입니다>라고 쓴 기사를 내보냄으로써 스스로를 변호하고 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론을 작성할 것을 위임받은 편집장은 <매우 이기 적으로in eigennutzigster weise>라고 쓰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비록 그 렇게 써야 하기는 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그것과 달라>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황제에게 무조건ruckhaltlos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려던 국 회의원은 자신의 용감성이 해가 될지도 모른다는 자기 내부의 목소리를 듣고는 ruckhaltlos(주저하지 않고)를 ruckgratlos(줏대없이)로 잘못 말하고 말았습니 다.(1908년 독일 제국 의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원주) 결합과 축약의 인상을 주며 여러분들에게도 잘 알려진 경우들에서는 그것으로 제2의 경향이 첫 번째의 경향과 함께 부각되는 정당화와 보충적 언급, 그리고 앞의 얘기를 계속하려는 동기들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모든 것이 드러 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내친김에 차라리 그것은 <추잡한 일>이었다고 말해 버 리지 뭐.> 그럼으로 해서 <모든 것이 vorschwein으로 밝혀졌습니다>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다섯 손가락> 안에 셀 수 있 을 정도입니다. 아니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오로지 <한 사람>밖에 없어. 그 러니까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습니다.> 혹은, <내 남편은 그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고 마실 수 있어요. 그렇지 만 당신도 아시다시피 그가 무언가를 원하는 것을 <내>가 도대체 어떻게 참아 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먹거나 마실 수 있지요.> 이러한 모든 경우들에서 그러므로 잘못 말하기는 방해받는 의도의 내용에서 발생하는 것이거나 그것에 연계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종류의 두 개의 간섭적인 의도간의 관계는 조금 낯설게 느껴집니다. 방해하는 의도가 방해받는 그것의 내용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때, 그렇다면 그 것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이며 바로 그 자리에 방해물로 나타나게 만드는 그 것은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일까요? 이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관찰의 결과는, 그 방해 작용이 해당되는 사람이 바로 그 전에 몰두했던 사고 과정에서 연유하며 이는 이미 그의 발언 중에 표현되었든지 아닌지에 상관없이 그런 식으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줍니다. 그것에는 그러므로 실제로 후속발음 nachklang이라는 명칭을 붙여 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꼭 튀어나온 말 의 후발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에도 방해받는 것과 방해하는 것 사이의 연상적 관련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내용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고 오 히려 인위적으로 때때로 몹시 강요된 연결 방법에서 연유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내가 실제로 관찰한 바 있는 아주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나는 언젠가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돌로미텐 지방을 여행하다가 관광객의 옷차림 을 한 빈에서 온 두 명의 부인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마간 동행하면 서 여행자로서 생활하는 데 있어서의 즐거움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며 또한 여행 중의 불편함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 중 한 부인은 하루를 보내는 이러한 방식에 여러 가지로 안락하지 못한 점이 꽤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사실 이에요. 햇볕 속에서 하루 종일 걷는다는 것은 정말 유쾌하지 못해요. 블라우스 와 속옷이 땀에 흠뻑 젖는다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하면서 그녀는 잠 시 동안 말이 막혀 버린 듯 뜸을 들였습니다. 그리고나서 말을 잇기를 <그렇지 만 바지hose(이때 haus라고 발하려던 것이 잘못 발음된 것이다. 즉, <집에 돌아 가서>라고 말하려고 한 것이다.)에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을 수 있게 되면......>. 우리는 이러한 말 실수를 분석해 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여러분들은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부인은 옷가지를 계속해 서 열거하려고 했던 것이며 <블라우스, 속옷, 그리고 팬티>라고 말하려던 참이 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점잖지 못하다는 인상을 줄까 봐 팬티라는 말을 빼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말에서, 내용적으로는 전혀 관련이 없는 문장 에서 밖으로 나오지 못한 그 단어가 <집에nach hause>라는 단어와의 연관성 속 에서 비슷한 발음의 변형으로 튀어나와 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지금까지 오랫동안 아껴 두었던 중요한 질문을 할 차례입니다. 그렇듯 이상한 방법으로 다른 것을 방해하면서 표출되어 나오는 이러한 의도란 도대체 어떠한 의도입니까? 말할 것도 없이 거기에는 매우 여러 가지의 의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중에서 공통점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잘못 말하기에 대한 수많은 경우들을 연구해 보면 그것들은 곧 세 개의 군으로 분류될 수 있습 니다. 제1군에 속하는 경우들은 말하는 사람에게 방해하려는 경향이 인지될 뿐 만 아니라 그 밖에도 잘못 말하기에 앞서서 그 의도가 본인에 인지되는 경우입 니다. 그러므로 이라는 잘못 말하기의 경우에 말하는 사람은 그 해당 사건에 대해 <추잡한 일>이라는 판단을 스스로 내렸을 뿐 아니라 그가 후 에 철회하기는 했지만 그 사건에 대해 분명히 언어적인 표현을 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2군의 경우, 말하는 사람은 방해하려는 경 향이 자신에 의해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 말하 기에 바로 앞서서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는 그의 잘못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받아들이지만 그럼에도 어느 정도는 그에 대해서 자기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행동의 경 우들은 잘못 말하기의 예에서보다는 다른 실수들 중에서 훨씬 더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제3군은 방해하려는 의도에 대한 해석이 화자에 의해서 격렬하게 부정되는 경우들이 해당됩니다. 그는 그러한 것이 잘못 말하기에 앞서서 자신의 내부에서 움직였다는 사실을 반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의도는 그에게 는 완전히 생소하기만 한 것이라고 주장할 것입니다. 앞에 예를 들었던 <트림을 하자aufstoben>의 경우를 상기해 보십시오. 내가 그 방해하려는 의도를 밝혀 내 었을 때 그 사람에게서 받게 되었던 그 불손한 항의를 여러분들은 기억하고 계 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경우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합의를 보지 못했던 것을 여러분을 또 알고 계실 것입니다. 나는 그 축사한 사람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내 의견을 바꾸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굳게 나의 해석을 고수할 것이지만 여러분들 은 아마도 그의 거친 항의에서 강한 인상을 받은 나머지 차라리 그러한 해석을 포기하고 그것을 분석적 방법에 선행하는 순전히 생리적인 행위로 놔두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나는 무엇이 여러분들을 움츠러들 게 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나의 해석은, 화자 자신은 전혀 알고 있지 못하지 만 간접 증거를 통해 추론해 낼 수 있는 어떤 의도가 화자에게서 표현되어 나올 수 있다는 가정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생경스럽기 그지없고 중대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를 가정 앞에서 여러분은 멈칫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여러분의 생각에 동의합니다. 그 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해둡시다. 그렇듯 여러 가지의 경우들에서 확인된 실수에 대한 견해를 일관되게 유지하려면 앞서 거론된 좀 생소한 듯한 가정에 대해서도 여러분은 결단을 내려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좀 처럼 얻기 힘들었던, 실수들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려는 생각을 다시금 포기해야 만 합니다. 이러한 세 가지 그룹을 하나로 통합시키는 것, 잘못 말하기의 세 개의 메커니 즘에서 공통적인 것은 무엇인가를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합시다. 그것은 다행스럽 게도 오인의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제1, 제2군에서는 화자에 의해서 그 방해하 려는 경향이 인정됩니다. 이러한 경향이 인지되는 것 이외에도 맨 첫 번째에서 는 그것이 잘못 말하기 바로 전의 시점에서 의식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경우들에서 <이 방해하는 경향은 억압됩니다. 화자는 그것을 말로 나타내 지 않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그때 그에게 잘못 말하기라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즉 그의 의지에 반하여 억압된 그 경향은 표현되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화자에 의해 허용된 의도의 표현을 수정하면서, 다시 말하면 그것이 그와 결합 되어 버리거나 아니면 바로 그 자리를 대신하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잘못 말하기의 메커니즘입니다.> 나는 내 입장에서 또, 실수의 제3군의 과정도 바로 지금 묘사된 메커니즘에 잘 들어맞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세 개의 유형들은 하나의 의도가 여러 가 지 다른 편차를 보이면서 얼마나 깊숙이 억압되었느냐에 따라 구별된다고 가정 하기만 하면 됩니다. 첫 번째에서는 그 의도가 분명히 전재하고 있고 화자가 발 언하기 전에 그에게 의식됩니다. 그리고 나서 의도는 억압되지만 대신에 잘못 말하기란 방식을 통해서 보상을 받습니다. 제2군에서는 그 거부는 더 멀리까지 도달합니다. 그 의도는 말하기 전 에 이미 더 이상 의식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해도 결 코 퇴치되지 못하고 잘못 말하기의 발생에 관여한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행위로 인해서 제3군의 과정을 해명하는 것은 조 금 더 쉬워졌습니다. 실수 행위에서는 오래 전에, 어쩌면 매우 오래 전부터 억압 되어서 더 이상 의식되지 않는, 그 때문에 화자에 의해 즉각적으로 거부될 가능 성이 있는 어떤 경향이 표출될 수 있다는 것은 나는 용감하게 가정해 보려고 합 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제3군의 문제를 아예 제쳐 놓으십시오. 여러분들은 다 른 경우들을 관찰한 것만을 가지고도 그것을 토대로,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하 는, 분명히 전재하는 의도를 억압하는 과정이 잘못 말하기를 촉발시키는 필수 불가결의 조건>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는, 실수 행위의 이해와 관련해서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해도 좋 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의미와 의도를 가진 정신적인 행위라는 것과 두 개 의 서로 다른 의도들의 간섭을 통해서 발생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 중 하나 의 의도는 다른 의도를 방해함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기 위하여 어느 정도 억압된 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말로 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방해하는 의도가 되기 전에 그보다 먼저 방해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라고 부르는 그러한 현상을 이로서 와전하게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계속되는 질문들 이 떠오르고 있는 것을 봅니다. 또, 더욱 깊은 이해에 도달하면 할수록 새로운 질문의 단초들이 그만큼 더 많이 생겨나리라는 것도 예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왜 사태가 좀더 단순하게 진행될 수는 없는지 반문할 수도 있습니 다. 어떤 경향을 표출시켜 주는 대신에 억압해야 하는 어떤 의도가 있다고 한다 면 이 억압이 완전히 성공해서 그것의 어떤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해야 할 것 입니다. 또 그것은 실패할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억압된 경향이 완전히 표출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실수들이란 그러나 타협의 산물입니다. 그것은 그 두 개의 의도에 있어서 모두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위험스 러운 의도는 완전히 억압된 것도 아니고 또 (개별적인 경우는 예외로 하고) 온 전히 자신을 관철시키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간섭 혹은 타협적 결과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대단히 특별한 조건들이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 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도대체 어떤 종류의 것인지를 우리는 예감해 볼 수조차 없습니다. 나는 또 우리가 실수에 관한 더욱 깊은 연구를 통해서 이러한 잘 알 려지지 않은 관계를 밝혀 낼 수 있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 전에 인간의 정신 활동의 더욱 어두운 다른 영역을 깊이 연구하는 것이 더 필요 할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만나게 되는 유추 관계들이야말로 비로소, 실 수들을 더욱 확실하게 밝혀 내기 위하여 요청되는 그러한 가정들을 세우는 데 필요한 용기를 우리에게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영역에서 끊임 없 이 씨름하게 되는 아주 작은 징조들을 이해하는 작업도 그 자체의 위험을 항상 갖고 있습니다. 정신 질환에는 그러한 작은 징조들의 평가가 무제한적으로 추구 되고 있는 복합적 편집증die kombinatorische paranoia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나 는 물론 이러한 토대 위에서 구축된 결론들이 대체로 옳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 니다. 그러한 위험에서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관찰을 더욱 넓은 부분까지 확대해 나가는 것입니다. 정신 활동의 여러 가지 다양한 영 역에서 비슷한 인상들을 계속적으로 확보해 나가는 것, 그것이 관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실수들의 분석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합시다. 한 가지 점만은 여러분들에게 확실하게 강조해 두고 싶은데, 그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러한 현상들을 다루어 왔던 그 방법을 모범적인 것으로 머릿속에 간직해 두시라는 것입니다. 우리 심 리학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여러분들은 이러한 예에서 간파할 수 있었을 것입니 다. 현상들을 단순히 묘사하거나 분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들을 영혼 속에 서 힘이 상호 작용하는 징조로 해석하고, 함께 혹은 서로 대립하는 방향으로 움 직이면서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경향들의 표현으로 이해하려는 것입니다. 우리 는 정신적 현상들의 <역동적인 해석>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견해 에 의하면, 이러한 경향성은 단지 우리가 가정하고 있을 뿐이기는 하지만 인지 되는 현상들에 비해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실수 행위 의 문제들에 더욱 깊이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의 넓은 부분들을 잠시 한 번 일별하고 거기에서 잘 알려진 것들을 재발견하고 몇 몇 새로운 것들을 추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이미 처음에 작성했던 잘못 말하기의 세 개의 군으로의 분류에 따라 잘못 쓰기와 잘못 읽기, 잘못 듣 기, 또 잊어버린 대상에 따른 소분류(고유 병사, 외래어, 계획, 인상들)가 포함된 잊기, 착각, 잘못 놓기, 분실 등을 다루어 보겠습니다. 우리의 관찰 영역에 들어 오는 오류들은 부분적으로는 잊어버리기와, 부분적으로는 착각과 연관이 있습니 다. 잘못 말하기에 대해서는 이미 매우 상세하게 다루어 왔지만 몇몇 개의 사항을 덧붙여야 하겠습니다. 전혀 흥미를 끌지 못한다고는 단정할 수 없는 작은 감정 적 현상들이 잘못 말하기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자청해서 기꺼이 잘못 말하려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 자신이 잘못 말한 것은 흘려 듣지만 다른 사람의 그것은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잘못 말하기도 어떤 의미에 있어서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잘못 말한 것을 들었을 때, 그것을 넘 어서서 스스로도 잘못 말하기라는 현상에 빠지지 않고 말을 계속 이어 나간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잘못 말하기의 아주 사소한 경우들, 즉 그 속 에 숨겨진 정신적 과정에 대해서 별다른 특별한 해명을 제공할 수 없는 것들과 관련해서 그것의 동기를 들여다보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 단어에 생겨난 방해로 인해서 어떤 사람이 장모음을 짧게 발음했을 때, 그는 그 뒤에 따라오는 단모음을 길게 늘여 발음하는 경우가 생기 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그 이전의 것을 보상하려 하면서 새로운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같은 예로, 그가 어떤 복합 모음을 이상하게 분명치 않게 발음했을 경 우, 즉 예를 들어 eu(오이), 혹은 oi(오이)를 ei(아이)로 발음했을 때 그는 뒤따라 오는 ei(아이)를 eu(오이)나 oi(오이)로 변환시킴으로써 처음의 잘못을 복구하려 고 시도할 것입니다. 그때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그 연사가 자신의 모국어 를 제멋대로 취급하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청중 에 대한 고려인 것 같습니다. 두 번째의, 보상적인 의미의 왜곡 현상은 청중들에 게 첫 번째의 것에 대해 주의를 돌리게 하고 그 자신에게도 또한 그러한 지신의 잘못이 간과되지 않았다는 것을 그들에게 확인시키고자 하는 바로 그러한 의도 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말하기의 가장 흔하고 단순하며 사소한 경우들은 별로 눈에 떼지 않는 내용에 나타나는 단축과 선발음들입니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좀 긴 듯한 문장에서, 의도하고 있는 말의 마지막 단어를 미리 발음함으로 써 말 실수를 하고는 합니다. 그것은 그 말을 성급히 마치고자 하는 듯한, 어느 정도 인내심이 결여된 듯한 인상을 주는데, 일반적으로 그 문장이 담고 있는 뜻 에 반대하는 어느 정도의 거부감이나 혹은 그 말 전체에 대한 거부감이 있음을 확인시켜 줍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잘못 말하기에 대한 정신분석학의 견해와 천박한 생리학의 견해 사이의 차이점들이 뒤섞여 버리는 경계상에 서 있는 경우 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경우들에서 말의 의도를 방해하는 경향이 존재한다고 가정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것의 존재만이 암시될 뿐, 그 스스로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는 가리켜 주지 못합니다. 그것이 일으키는 방해는 그 어떤 음운 현상이나 연상 작용에 뒤따른 것이며 무엇을 말하려는 의도에서 주의 력이 약간 빗나간 것으로 파악될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주의력 장애도, 연상 경향도 그 과정의 본질을 정확히 설명해 주고 있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다시금 말하려는 의도를 방해하는 어떤 의도의 존재에 대한 암시가 될 수 있을 뿐입니 다. 좀더 특징적인 다른 모든 잘못 말하기의 예에서는 그것의 본질을 추측해 내 는 것이 가능했지만 이번에는 그 작용에서 그것의 본질을 추측해 내는 것이 쉽 지가 않습니다. 이제 내가 다루려고 하는 잘못 쓰기veschreiben는 잘못 말하기와 너무도 일치 하기 때문에 어떠한 새로운 관점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저 하나의 작은 후 기 정도로만 파악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뒤에 오는 단어, 특히나 마지막 단어 쓰기에서의 작은 잘못, 단축, 생략 등은 다시금 글쓰기를 싫어하는 일반적인 경향성이나 그 일을 어서 끝내 버리고 싶은 인내심 의 부족 등을 나타낸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잘못 쓰기의 더 특징적인 효과들 을 살펴보면 방해하려는 경향성의 본질과 의도를 간파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 로 어떤 편지 글에서 잘못 쓴 것이 발견되었을 때는 그것을 쓴 사람의 상태가 완전히 정상은 아니었다고 짐작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를 움직인 것이 무 엇이었는지 항상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잘못 쓰기는 잘못 말하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쓴 그 사람에게는 잘 인식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다음의 관찰은 매우 눈 에 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쓴 모든 편지를 발송하기 전에 한 번 더 죽 읽어보는 습관을 가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면에 전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예외적으로 어쩌다 한 번 그렇게 하게 되면 그때마다 항상 눈에 띄는 잘못을 발견하고 고치게 되는 일이 빈번합니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치도 이 사람들이 편지를 작성 할 때 자기가 잘못 쓴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라도 한 것처럼 보입니 다. 우리는 정말 그렇다고 믿어도 될까요? 잘못 쓰기의 실제적인 의미에는 매우 흥미로운 문제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은 아마도 h. 라는 살인자의 예를 기억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는 박테리아 연구 자로 자처했는데 과학 실험실에서 매우 위험한 병원균의 배양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배양균을 자기와 가까운 사람 들을 그와 같은 최신식 방법으로 제거해 버리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이 사람은 언젠가 한 번 그 연구소의 소장에게 자기가 얻은 그 배양액이 효과가 별로 없다 고 불평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문장을 <생쥐와 마르모트에 대한 나의 실험 에 의하면bei meinen versuchenan mausen oder meerschweinchen>이라고 써야 할 것을 <사람들에 대한 나의 실험에 의하면 bei meinen versuchen an menschen>이라고 분명하게 잘 못 썼던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 쓰기는 그 연구 소의 의사들에게도 눈에 띄었지만 내가 알기로 그들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조치 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자, 여러분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 의사 들이 그 잘못 쓰기를 차라리 자백으로 받아들이고 수사를 하도록 조처를 취해서 그 살인자의 lgoddnl를 때맞추어 저지하도록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 경우에 는 실수에 대한 우리들의 학설을 몰랐던 것이 결국 실제적으로 중요한 실책의 원인이 된 것은 아닐까요? 그러한 잘못 쓰기가 나의 눈에 띄었다면 나는 그것은 틀림없이 매우 수상쩍은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를 자백으로 받아 들이고 이용하는 것에는 매우 중대한 문제가 가로놓여 있습니다. 잘못 쓰기는 틀림없이 하나의 간접 증거입니다. 그러나 그것 자체로서는 수사를 하게 하는 데 있어서 충분치가 않습니다. 그 사람이 사람들에게 그 약을 주사하겠다는 생 각에 몰두했다는 것을 그 잘못 쓰기는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 각이 명확하게 남을 해치려는 의도로서의 의미를 가진 것인지 아니면 실제적으 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않은 몽상에 불과한 것인지는 판단하기가 어렵습니 다. 그렇게 잘못 쓴 그 삶이 최상의 주관적인 정당성을 가지고 이러한 몽상을 부정하면서 그것을 자기와는 전혀 생소한 어떤 것으로 간주하고 부인해 버리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우리가 추후에 심리적인 실재와 물리적인 실재의 차 이점을 파악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이 가능성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어떤 실수에 그 후에 생각지도 못했던 의미가 첨 가되는 또 하나의 예가 되는 것입니다. 잘못 읽기에서는 잘못 말하거나 잘못 쓰기의 심리적 상황과는 뚜렷이 구별되 는 다른 상황과 만나게 됩니다. 두 개의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경향성 중의 하나 가 여기서는 감각적인 자극으로 대체되고 아마도 그래서 덜 저항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읽어야만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쓰려고 계획했던 것과 같은 그러한 자기 자신의 정신활동의 산물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경우에서 잘못 읽기는 완전히 대체 작용substitution만으로 끝나 버릴 때가 많습 니다. 사람들은 읽어야 할 단어를 다른 것으로 대체시키는데, 이때 원래의 문장 과 잘못 읽기로 인해서 생겨난 효과와는 내용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일반적으로 발음 유사성 때문에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리히텐베르 크의 경우처럼 angenommen(가정하면) 대신에 agamemnon으로 읽는 것이 이 잘못 읽기의 가장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잘못 읽기를 생성케 한 경 향성, 그 방해하는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잘못 읽혀진 텍스트를 완전히 무 시하고 다음 두 개의 질문을 통해서 분석적 연구를 도출하는 것이 바람직합니 다. 즉, 잘못 읽기의 효과로 바로 그때 어떤 연상이 떠오르느냐 하는 것과 어떠 한 상황에서 그러한 잘못 읽기가 생겨났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후자에 대한 지 식 자체만으로도 잘못 읽기를 충분히 규명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용변을 보 고 싶다고 느낀 어떤 사람이 낯선 도시를 헤매다가 1층에 붙어 있는 커다란 간 판에서 라는 단어를 읽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는 그 간 판이 왜 그렇게 높이 걸려 있는지 잠시 동안 의아해 하다가, 문득 거기에는 엄 밀하게 말해서 라는 명패가 씌어 있는 것을 발견 하게 됩니다. 원문과 상관없는 내용을 잘못 읽게 되는 다른 경우들에서는 매우 상세한 분석이 요구되는데, 그것은 정신분석학적인 기술의 훈련이나 그것에 대 한 신뢰감이 없이는 실행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잘못 읽기를 해명하는 것은 그 러나 대개의 경우보다 쉽습니다. 의 경우에 그렇게 대체된 단어는 그 방해가 어떠한 사고 속에서 연유된 것인지를 즉각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습니 다. 지금과 같은 전쟁시에는 예를 들어 도시의 이름이나 장군들의 이름, 사람들 주위에서 끊임없이 어디에서나 떠도는 군사적인 용어들을 도처에서 읽게 되는 것이 매우 흔한 일인데 그러므로 그와 비슷한 단어 영상이 마음속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낯설거나 조금 흥미없는 것 대신에 어떤 사람이 관심을 두고 있고 관여 하고 있는 내용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사고의 잔영들이 새로운 지각을 흐려 놓는 것입니다. 잘못 읽기에서는 또 다른 종류의 경우들도 빠지지 않는데, 그때는 방금 읽은 원문 자체가 방해하려는 경향을 환기시켜서 그 경향으로 인해 그것은 대부분 반 대어로 변질됩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원치 않는 것을 읽어야 할 때가 있는데 분 석을 해보면 그렇게 읽어야 할 것을 거부하는 강렬한 소원이 그것을 변형시키는 데 한몫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맨 처음에 언급했던 가장 흔한 잘못 읽기의 경우에는 실수의 메커니즘에서 중 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우리가 지목했던 두 가지 요소, 즉 두 개의 경향성들 이 서로 갈등하고 그 중 하나가 억압 (그것은 다음에 실수의 효과를 통해 이렇 게 억압당한 것을 보충하는데) 되는 현상이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습니다. 잘못 읽기에서는 이와 반대되는 어떤 것을 찾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고, 이러한 잘 못을 초래하는 사고 내용의 긴급성이 그 사고 내용이 이미 경험했을 억압보다 훨씬 눈에 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가지의 요소는 망각에 의한 실 수의 여러 가지 상황에서 가장 알기 쉽게 나타납니다. 계획했던 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문외한들에 의해서 도 논란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해석이 명백합니다. 계획을 방해하는 경향 성은 매번 그에 반대되는 의도로서 그렇게 하지 않고 싶어하는 의지이며, 그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단지, 그것이 왜 꼭 그렇게 은폐된 채로 표출되 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어쨌든 이러한 반대 의지gegenwille의 존재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때때로 이렇게 자신을 은폐해야 할 필요성이 있는 반 대 의지의 동기를 알아내는 데 성공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것은 실수를 통해서 숨겨진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는데, 만일 그것이 공개적인 반박으 로 나타났을 경우 부인됐을 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어떤 계획과 그것의 실행 사 이에 중요한 심적 상황의 변화가 발생했을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계획의 실행은 문제조차 되지 않으며 그럴 때 그 계획을 망각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실수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더 이상 의아해 하지 않으며 그 계획 을 기억해 내는 것은 불필요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깨닫습니다. 그 렇게 되면 그것은 계속적으로 혹은 잠정적으로 소멸되어 버립니다. 계획의 망각 은 그 같은 단절이 있었으리라고 믿을 수 없는 경우에만 실수 행위로 불릴 수 있습니다. 계획을 잊어버리는 따위의 이 같은 경우들은 일반적으로 너무도 단순하고 투 명하기 때문에 우리의 연구를 자극할 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의 연구를 통해서 두 가지 점에서 새로운 것을 배울 수가 있습니다. 망각, 그러니까 어떤 계획을 실행에 옮기지 않는 것은 그에 적대적인 어떤 반대 의지 를 시사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언명한 바 있습니다.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 의지는 우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두 가지 종류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직접적인 반대 의지이고 다른 하나는 간접적인 반대 의지입니 다. 후자, 즉 간접적 반대 의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한두 개의 예를 통해서도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후원자가 자기의 피후원자를 위한 추천서를 제 3 자에게 전달하는 것을 잊었다면, 이것은 그가 그 피후원자에 대해서 원래 아무 런 흥미를 못 느끼고 있었고 그러므로 그를 추천하는 일에 대해 별다른 의욕이 없었기 때문에 발생한 일일 것입니다. 피후원자는 어쨌든 후원자의 망각을 그러 한 의미로 해석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러나 더 복잡한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계 획을 수행하는 데 대한 반대 의지가 다른 쪽 방향에서 올 수도 있고 또 다른 지 점에서 그 일이 시작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피후원자와 아무런 관련이 없이 추천서를 건네 받아야 할 제3자에게로 향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의 해석을 실제적인 용도에 사용하는 데에 어떠한 문제가 수반될 수 있는지, 여러분들은 깨달았을 것입니다. 피후원자는 망각의 의미를 제대로 해석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미심쩍어 한 나머지 자신의 후원자에게 무례하게 굴 수도 있습니다. 다른 경우에, 어떤 사람이 자기가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또 사 실 지키려고 굳게 마음먹었던 만남을 잊어버렸다면 가장 개연성이 큰 이유로서 그 사람과의 만남을 싫어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 대 한 분석을 한 결과, 방해하려는 경향은 그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 만남이 이루어지게 되어 있는 그 장소를 향한 것이고 그 장소와 관련되어 있는 고통스 러운 기억으로 인해 그 장소를 피하려 했음이 입증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경우에 어떤 사람이 편지를 부치는 것을 잊었다면 그에 대한 반대 경향은 편지의 내용에서 연유한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또 다음과 같은 경우도 절대 로 배제할 수 없습니다. 즉, 그 편지 자체는 전혀 해롭지 않으나 그 편지의 내용 중의 어떤 것이 그 전에 언젠가 쓴 다른 편지를 상기시켰고, 바로 그것이 그 반 대 의지 에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을 가능성 말입니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반 대 의지는 예전의 편지에 의한 것이고 원래는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던 지금 의 편지로 전이 ubertragung된 것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우리의 정당한 해석을 평가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는 망설임과 신중함이 요구된 다는 것을 통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는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도 실제적 현실에서는 매우 애매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현상들은 여러분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될 것입니다. 여러분 들은 어쩌면 <간접적> 반대 의지가 그 과정을 이미 어떤 병리적인 것으로 특징 짓는다고 가정하고 싶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여러분들에게 확실하게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그러한 반대 의지가 규범적이고 건강한 현상 속에서도 나타난 다는 것입니다. 나의 말을 어쨌던 오해하지는 말아 주십시오. 우리의 분석적인 해석이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스스로 고백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계획 의 망각이라는 문제에서 논의된 모호성은, 그 경우를 분석적으로 연구해 보지 않고 단지 우리의 일반적인 전제들에 근거해서 해석했을 때만 발생합니다. 그 당사자를 분석해 보면 그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직접적인 반대 의지인지, 아니면 어딘가 다른 곳에서 연유하는 것인지 충분한 확신을 갖고 알아낼 수 있었던 것 입니다. 두 번째의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계획을 잊어버리는 것은 반대 의지 때문이라는 사실을 대다수의 경우에서 확인할 수 있다면, 우리가 추론해 낸 반대 의지를 피분석자가 인정하지 않고 부인해 버리는 그러한 경우들에까지 이러한 해석을 적용시켜 보겠다는 용기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 로서는 빌린 책을 돌려주는 일 따위 등과 같은 아주 빈번하게 발생하는 사례들 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당사자가 책을 아주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고자 했다거 나 돈을 갚지 않으려고 했다는 의심을 하며 그를 용감하게 비난할 수 있을 것입 니다. 당사자는 그러한 의도를 부정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행동에 대해 어떤 다 른 해명을 내놓을 수 없는 상태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그러한 의도를 갖 고 있었지만 단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 의도가 망각이라는 효 과를 통해 나타났으므로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그러나 계속해서 자신은 단지 잊어버렸을 뿐이라고 항의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서, 우리가 이미 그 전에 한 번 겪은 적이 있었던 그 상황이 다시 나타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도 여러 상황에 걸쳐 정당한 것으로 증명됐던 실수에 대한 우리의 해석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에게 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에게 작용되는 어떤 경향이 있다는 것을 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삶과 심리학을 지배하는 모든 견해들에 대하여 모순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고유 명사나 외래 명사, 그 밖의 외래어 단어들을 잊어버리는 것은 마찬가지 로 그에 대한 반대 의지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런 경향은 직접 혹은 간 접적으로 해당되는 이름에 대한 반감 때문입니다. 그러한 직접적인 거부감의 감 정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여러분들에게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한 바 있습니 다. 그러나 이 경우에는 망각 현상이 간접적인 원인에 의해 특히 더 빈번하게 발생하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대개는 매우 조심스러운 분석이 요구됩니 다. 예를 들어 현재와 같은 전쟁시에는 우리의 이전의 기호들을 포기해야만 하 는 강요된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고유 명사를 기억하는 일도 기묘한 연상으로 인해 몹시 손상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나는 모라비아 지방의 도시 비센츠 의 이름을 아무리해도 기억해 낼 수 없었는데, 분석해 본 결과, 그것은 그에 대 한 어떠한 직접적인 적개심 탓도 아니었고 단지 그 이름이 내가 그 전에 몇 번 이나 기분좋게 지냈던 적이 있는 오르비에토orviento의 비센지bisenzi 궁전과 발 음이 비슷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게 만드는 경향의 동기로서 여기에서 처음으로 하나의 원칙이 대치되어 나타나는데, 그것은 후에 신경증적인 증후의 원인으로서 매우 중대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밝혀질 것입니 다. 그것은 어떤 것을 떠올리는 기억에 대한 거부감으로서 유쾌하지 못한 느낌 과 관련되어 있어서 그것을 재생할 경우 이러한 불쾌감이 다시 되살아날 우려가 있는 것입니다. 기억에서, 혹은 다른 심리적 행위에서 발생하는 불쾌감을 피하려 는 이러한 의도는 불쾌감에서의 심리적 도피로서 이름 망각뿐 아니라 다른 많은 실수 행위, 즉 하던 일의 중단, 오류, 그 밖의 다른 것들에 작용하는 결정적인 동기로 인정해도 좋을 것입니다. 이름 망각은 정신생리적으로 특별히 마음을 가볍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그래 서 불쾌한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 그러한 경우들에까지 나타납니 다. 어떤 사람이 일단 한번 이름 망각의 경향성을 보일 때 그를 분석적으로 연 구해 보면 그가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그것이 그에게 어떤 좋 지 않은 것을 생각나게 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말고도 그와 같은 이름이 그와 어 떤 내적인 관계를 갖고 있는 다른 연상들의 집단에 속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그 에게 기억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 이름은 거기에 꼼짝 없이 묶 여서 그 순간에 활동하고 있는 다른 연상에 막혀서 거부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들이 기억법(기억력을 향상시키는 기술적인 방법의 하나.)이라는 기교를 생각해 보시면 다른 때에는 사람들이 망각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만들어 내 는 똑같은 연관들에 의해서 망각 현상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놀라움과 한께 확 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가장 극명한 예는 사람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경 우에서 나타나는데, 한 사람의 이름이 여러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여러 가 지의 심리적 가치를 갖고 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테오도르라는 이름의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여러분들 중의 어떤 사람에게는 이 이름은 특별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 이름은 자기 아버지나 남자 형제나, 남자 친구 혹은 자신의 이름이 될 수가 있습니다. 어떤 낯선 사람이 이 이름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전자의 사람들에게 는 그 이름이 잊혀질 위험이 별로 없지만,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자신과 내 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이름을 낯선 사람 앞에서 밝히지 않으려는 경향을 끊임 없이 보인다는 사실을 분석적인 경험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줄 것입니다. 이처 럼 연상에 의해서 기억하기를 꺼려하는 경향들이 불쾌 원칙unlustprinzip('꿈의 해석'(프로이트 전집 5, 6, 열린책들) 참조. 이후에 쾌락 원칙lustprinzip으로 일컬 어진다.)의 작용이나, 그 외에도 간접적인 메커니즘과 일치할 수도 있다고 가정 해 보십시오. 그렇게 되면 비로소 일시적으로 이름을 망각하는 원인의 복합적인 요인에 대해서 적절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안에 따른 치밀한 분석은 여러분들에게 이 모든 복합성을 남김 없이 밝혀 줄 것입니다. 어떤 것에 대한 인상이나 체험을 망각하는 따위의 현상은 불편한 것을 기억에 서 멀리하려는 경향이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이름 망각보다 더욱 극명하고도 온 전하게 보여 줍니다. 인상이나 체험한 내용을 이처럼 망각하는 현상은, 물론 그 모두가 다 실수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고 우리의 습관적인 경험의 척도에 비추 어서 메우 이상하고 부당하게 보일 때만 실수의 범주에 넣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너무나도 선명하고 중요한 인상과 관련되어 있거나, 그렇지 않으면 전체적 인 연관성 속에서 무리 없이 기억되는 것들 사이에서 그것이 빠짐으로 해서 기 억상의 괴리가 발생할 때, 이를 실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매우 확실 하게 깊은 인상을 남긴 체험들, 이를테면 우리의 첫 유년 시절의 사건들을 왜, 그리고 어째서 잊어버릴 수 있느냐 하는 것은 완전히 또 다른 문제로서 그때에 도 불쾌감을 자극하는 것에 대한 방어가 어떤 역할을 했으리라고는 짐작되나 그 것으로 모든 것이 해명되지는 않습니다.(유년기의 기억 상실에 대해서는 이후에 논의된다.) 편안치 않은 인상들은 쉽게 잊혀진다고 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 실입니다. 여러 심리학자들은 그 사실에 주목했고 저 위대한 다윈c. darwin도 이 사실에서 커다란 인상을 받은 나머지 자신의 이론과 배치되는 듯한 관찰 사례들 을 아주 세심하게 기록해 놓는 것을 <황금률>로 삼기까지 했습니다.(다윈의 자 서전을 참조하라. '찰스 다윈의 자서전1809∼1882the autobiography of charles darwin 1809∼1882'(1958)) 왜냐하면 바로 이러한 관찰 결과들이야말로 그의 기 억 속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망각을 수단으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방어한다는 원칙에 대해서 처음 듣 게 되는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자신은 오히려 고통스러운 기억이야말로 얼마 나 잊기 어려운 것인지 절실하게 체험한 적이 있노라고 말하면서, 이의를 제기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상처를 받은 기억이나 굴욕을 느꼈던 기억은 자신을 괴 롭히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끊임 없이 회상된다는 것입니다. 이 러한 사실도 맞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같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 니다. 정신 활동은 서로 적대하는 경향들이 서로 갈등하고 어루어지는 장소라는 것이며 (동력학적인 표현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모순들과 서로 적대적인 여 러 개의 쌍들도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적시에 고려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중요 합니다. 어떤 특정한 경향의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이 곧 그것과는 적대적인 다 른 것을 배제시킬 수 있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 두 가지 경향성들은 공존할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문제되는 것은 단지, 이러한 대립들이 어떤 관계에 놓 여 있는가 하는 것과 어떤 작용이 어느 관계에서 촉발되며, 또 다른 작용은 또 어떤 다른 괸계에서 나오는 것이냐 하는 점입니다. 분실과 잘못 놓기는 그것의 다의성, 다시 말해서 이러한 실수들을 일으키는 그 경향들의 복잡성으로 인해 우리에게 특히 흥미롭습니다. 이 모든 경우들에 공통적인 것은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싶어한다는 의지인데, 무슨 이유로, 무슨 목 적으로 그러한 것인지는 각각 다릅니다. 어떤 물건이 못 쓰게 되었을 때나 그것 을 좀더 나은 다른 것으로 바꾸고 싶을 때 사람들은 물건을 잃어버립니다. 또 그것이 더 이상 마음에 들지 않게 되어 버렸거나 지금은 관계가 나빠져 버린 어 떤 사람에게서 받은 것일 때, 또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갖게 된 물건일 때도 그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물건을 떨어뜨린다거나 못 쓰게 만들기, 깨뜨리기 등도 같은 목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억지로 낳게 된 아이나 사생아 들은 정상적으로 부모에게 받아들여진 아이들보다 훨씬 허약하다는 사실을 사회 생활의 경험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양육을 떠맡 은 보모가 그들을 충분히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는 사실조차도 필요치 않습니다. 양육하는 데 조심성이 약간만 부족해도 얼마든지 그런 결과가 나옵니다. 물건을 간수하는 것도 아이들을 다루는 것과 같아서 조금만 관심을 덜 쏟아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물건이 그 가치에는 손상을 입지 않았음에도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다른 송상을 막기 위해 어떤 희생을 치를 의도가 있을 때, 그 물건은 분실될 수밖에 없는 운명을 맞게 됩니다. 운명에 마법을 거는 것과 같은 그런 행위는 분석 작 업의 결과에 따르면 우리들 가운데에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며, 우리가 물건을 분실하게 되는 것과 같은 그러한 행위는 결국 자발적인 희생이라고 할 수 있습 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분실 역시 반항과 자기 징벌selbstbestrafung의 목적에 쓰일 수도 있습니다. 짧게 말해서 분실을 통해서 어떤 물건을 자기에게 없애 버 리는 것이 좀더 멀리서 작용하는 동기임은 간과될 수 없습니다. 착각도 다른 잘못들과 마찬가지로 거부당한 소원을 충족시키기 위해 종종 쓰 여집니다. 그 의도는 그때 행복한 우연이라는 가면을 쓰고 나타납니다. 내 친구 들 중의 한 사람이 경험했던 일로서,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하기 싫은 기분을 명확하게 느끼면서 도시 근교로 기차를 타고 가서 누군가를 방문해야 했을 때 기차를 잘못 바꿔 타게 되어 다시금 그 도시로 되돌아왔던 경우라든지, 혹은 어 떤 사람이 여행 도중에 중간 정거장에서 좀 오랫동안 머물고 싶었음에도 불구하 고 해야 할 어떤 일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으나 자신이 타야 할 기차를 잘못 보거나 놓친 나머지 할 수 없이 자기가 원했던 체류를 하게 될 경우 그것은 모 두 행복한 우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내 환자 중의 한 사람은 내가 그에게 애인과 전화 통화하는 것을 금지했음에도 <실수로>, <다른 것을 생각하다가> 틀린 번호를 말했기 때문에, 실은 나에게 전화를 하려 한 것이었지만 갑자기 자 기 애인과 연결되었던 일도 있었습니다. 직접적 실수의 매우 재미있고 실질적인 의미가 있는 사례는 어떤 엔지니어의 경험이 제공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물건 의 파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얼마 전에 나는 몇 명의 동료들과 대학의 실험실에서 복잡한 탄성 실험의 한 과정을 연구하고 있었는데, 그 연구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떠맡은 것이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시간을 끌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내가 나의 동료인 f와 다시 실험실에 갔을 때 그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는 것이 오늘따라 어쩌나 성가시게 생각되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는 집에서 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는 것 이외에 달리 할 말이 없었고 지난 주에 일어났던 사건을 빗대어서 반은 농담조로 <기 계가 다시 고장나서 작업을 중단하고 집에 일찍 갈 수 있었으면 좋겠어!>라고 말했습니다. 작업 분류에 따라 f는 압축기의 밸브를 조종하는 일을 떠맡았습니다. 그것은 집적기에서 밸브를 조심스럽게 열고는 압축기의 실린더에 천천히 압축 용액을 흘려 넣는 일이었습니다. 실험 지도인은 압력계 옆에 서서 지켜보고 있다가 일 정한 압력에 도달하게 되자 큰소리로 <그만>하고 외쳤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f 는 밸브를 붙잡고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왼쪽으로 돌렸습니다(모든 밸브는 그 러나 예외 없이 오른쪽으로 잠겨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그러자 갑자기 집적기 의 전 압력이 압축기에 작용하게 되었고 연결 장치는 그만한 압력에 견딜 수 있 을 만큼 만들어지지 않았음으로 그 즉시 파이프 관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그 것은 아주 사소한 기계 고장에 지나지 않았지만 어찌됐든 우리는 그날 일을 중 단하고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서 무엇보다 특이한 일은, 얼마 후에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서로 얘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나는 그 일을 그렇게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음에도 f는 그때 내가 한 말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의 집에서 하인들의 손이 집주인인 여러분들이 가장 아끼는 물건들을 손상시키는 경우, 그런 일들이 항상 그렇게 악의 없는 우연만은 아닐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스스로 다치게 하거나 자기 자신의 모든 존재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매번 우 연일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여기서 제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때 때로 관찰한 것을 분석하는 일을 통해서 그 가치를 검증해 볼 수 있는 좋은 자 극을 제공해 줍니다. 나의 친애하는 청중 여러분들, 이것들이 실수 행위에 관하여 말할 수 있는 전 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탐구하고 논의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습니다. 우리 가 지금까지 탐구한 성과를 통해서 여태까지 여러분들이 취하고 있던 입장에서 어느 만큼의 충격을 경험하게 되었거나 새로운 것에 대한 가설을 받아들일 준비 를 갖추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 외에는 아직도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실수 행위에 대한 연구만을 가지고 우리의 모든 명제 들을 증명해 보일 수도 없으며 이 자료에 대한 증명에만 의존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의 연구 목적에 따른 실수 행위의 가장 큰 가치는 그것이 매우 흔한 것으로 서 우리 자신에게서도 쉽게 발견될 수 있는 현상이며, 그것이 발생하는 데에 어 떠한 신체적인 질병이 꼭 전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아직까지 대답되지 않은, 여러분들이 제기해 올 단 하나의 질문에 대해서만 한 마디 덧붙이겠습니다. 우리가 수많은 사례에서 보아 왔듯이 사람들이 실수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게 되고 그것의 의미를 꿰뚫어 볼 수 있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 하면서도 그들이 같은 현상을 놓고 우연이다, 의미가 있다, 혹은 의미가 없다라 고 판단하면서 실수 행위에 대한 정신분석학적인 해명에 대해서 어떻게 그다지 도 격렬하게 반대할 수 있는지요? 여러분들 말이 맞습니다. 그것은 정말 신기한 일이고 꼭 해명되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그 해명을 직접 손에 쥐어 주지는 않겠습니다. 그 대신에 여러분들이 천천히 전체적인 관련성을 파악할 수 있게 하고 그러한 관련 성을 통해서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여러분들이 그에 관한 해명을 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제2부 꿈 (1916<1915∼1916>) 다섯 번째 강의 여러 가지 어려움들과 첫 번째 접근 신사 숙녀 여러분, 어느 날 사람들은 일정한 유형의 신경증 환자에게 나타나 는 병리학적 증상에는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1880∼1882년 브로이 어j. breuer에 의하여 발견됨. 1909년 미국에서 내가 강의한 <정신분석학에 대한 다섯 번의 강의>와 '정신분석 운동의 역사'(프로이트 전집 19, 열린책들) 참조, 원주. 프로이트의 <다섯 번의 강의>는 1910년 '정신분석학에 관하여uber psychoanalyse'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다.) 정신분석적인 치료 방법은 이러한 의미 발견에 근거해서 만들어 졌습니다. 환자를 정신분석적으로 치료하던 도중 환자 들이 그들의 증상을 설명하는 대신에 꿈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습니 다. 그것에서 이러한 꿈은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추측이 생겨난 것입니다.(꿈에 대해서는 '꿈의 해석'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우리는 그러나 이처럼 역사적으로 발전되어 나온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는 않 고 거꾸로 되짚어 나가여고 합니다. 신경증 연구를 위한 준비 단계로서 나는 우 선 꿈의 의미를 증명하려고 합니다. 꿈의 연구가 신경증 연구를 위한 가장 최선 의 준비 단계일 뿐만 아니라 꿈 그 자체가 신경증적 징후로서 모든 건강한 사람 들에게도 나타남으로 해서 우리에게는 셀 수 없는 이점을 제공해 주기 때문에 이렇게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매우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모 든 사람들이 건강하고 꿈만 꾸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꿈에서 우리는 신경 증 연구에 의해 얻은 거의 모든 점들에 대해서 통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꿈은 정신분석적인 연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꿈은 실수 행위처 럼 또 하나의 아주 평범하고 사소한 현상입니다. 그래서 실수 행위와 마찬가지 로 꿈은 건강한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며, 그 어떤 실제적인 가치조차도 갖고 있 지 않은 듯 합니다. 그 외에 이 현상을 둘러싼 조건들은 우리가 작업하게에 오 히려 더욱 불리한 것들입니다. 실수 행위란 단지 학문적인 영역에서만 소홀히 다루어졌던 것으로 사람들은 그에 대해서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 나 궁극적으로 그것을 연구한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보다 훨 씬 중요한 문제가 많기는 하지만 어쩌면 그것에서도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으리 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꿈을 다룬다고 하는 것은 비실용적이고 불 필요한 것일 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 과학적이라는 오명을 자초할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 신비주의에 경도되어 있다 는 의심을 받을 만하다는 것입니다. <정신 생활의 기관을 압박하는 종양이 사과 크기만큼이나 커진 것이라든지, 조직의 변화를 현미경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출 혈, 만성적 염증 등과 같은 신경병리학이나 심리 치료 분야에 훨씬 심각한 문제 가 널려 있는 판인데 의학자가 꿈과 같은 따위의 문제에 골몰하다니요! 안 됩니 다. 꿈은 너무도 사소한 것으로서 연구해 들어가기에는 너무 하찮은 대상일 뿐 입니다>라고 비난할 것입니다. 그 외에도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의 본질 자체가 정확한 연구의 무든 요구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꿈의 연구에서는 무엇을 대상으로 하 는 것인지의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일 어나는 망상은 매우 뚜렷하고 확실한 형태를 가진 것일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환자가 <나는 중국의 황제다>라고 큰소리로 외칠 때 그것은 명확한 형태를 가 집니다. 그런데 꿈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대개는 설명하기 힘든 것입니다. 누군 가가 자기의 꿈을 설명한다고 할 때, 그가 그것을 제대로 설명하고 있으며 얘기 도중에 오히려 그것을 변화시킨다거나 자신의 기억의 불확실성으로 인해서 어쩔 수 없이 어떤 것들을 새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라는 보장이 확실히 있습이까? 대부분의 꿈들은 거의 기억되지 않습니다. 작은 한 조각조차도 기억되지 않고 잊혀지고 맙니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들을 토대로 한 해석 위에 과학적인 심리 학이나 환자 치료의 방법이 구축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런 것들을 평가하는 데 아주 경미한 정도의 과잉도 우리를 의심에 빠져들게 만들 것입니다. 연구 대상으로서의 꿈에 대한 이러한 반론들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중요하지 않다는 반론과 관련해서 우리는 이미 실수의 문제에서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커다란 일의 의미도 아주 사소한 징조에 서 드러날 수 있다고 이미 말한 바 있습니다. 꿈의 애매모호함에 대해서 말해 보면, 그것은 다른 특성과 같은 하나의 특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물건 에 대해 그것의 특성을 미리 규명해 놓을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간에 명확하고 확실한 꿈도 있는 반면, 심리 치료 연구에서는 그와 같은 애매모호함의 특성으 로 인해서 이해하기 곤란한 다른 대상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존경할 만한 고 명한 심리 치료사들이 다루고 있는 많은 강박 관념zwangsvorstellung들이 그러 합니다.(불확실하고 막연한 강박신경증zwangsneurose의 경향에 대해서 프로이트 는 '쥐 인간, 강박증에 관하여'(프로이트 전집 11, 열린책들)에서 자세히 논하고 있다.) 내가 의사로서 진료를 하던 중에 만났던 최근의 가례를 생각해 보도록 합 시다. 한 여자 환자가 다음과 같은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내가 어떤 살 아 있는 존재를 (아기였던가?)그럴 리는 없고 (개였던것 같기도 한데) 다치게 했 거나 다치게 하려고 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아마도 어떤 다리 위에서 밀 쳐 머린 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또 다를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런 느낌이 듭 니다.> 꿈을 불확실하게 기억함으로 발생할 수 있는 이론적 손상은, 그가 무엇 을 잊어버렸는지, 혹은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변경시켰는지에 대해서 상관하지 않 고 꿈꾼 이가 말하는 바로 그 꿈을 그의 꿈으로 그냥 인정해 줌으로써 제거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은 <꿈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 그렇게 간단히 주장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떤 꿈 에서 깨어날 때에 느꼈던 기분이 하루 종일 계속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정 신병은 꿈에서부터 시작되고 이렇게 꿈에서 비롯된 망상에 집착하기도 하는 경 우가 있다는 사실이 의사들에 의해서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꿈에서 영감을 받아 중요한 일을 감행했다는 역사적인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에 관한 학계의 멸시가 도대체 어디에서부터 비롯된 것인지 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전 시대의 과대 평가에 대한 반발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과거 를 다시 재구성하는 것은 잘 알다시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 실하게 가정해 볼 수 있는데 (농담처럼 말하는 것을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3 천 년 전, 혹은 그전부터, 이미 우리의 선조들도 지금의 우리가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한 꿈을 꾸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아는 한 옛날 사람들은 모두 꿈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고 그것을 실제적으로 사용 가능한 것으로 간주해 왔습니 다. 그들은 그것들 속에서 미래를 위한 징조를 끄집어 내었고 그 속에 있는 전 조를 찾았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나 동양 사람들에게는 꿈 해몽가를 동반하지 않는 출정은 오늘날의 공군 정찰병이 없는 경우만큼이나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 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정복 전쟁을 감행했을 때 그의 수행원들 중에는 유 명한 꿈 해몽가들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아직 섬이었던 티루스라는 도시는 알렉산더 대왕은 섬을 정복하려던 생각을 포기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 느 날 밤에 그는 마치도 개선 행군 속에서 춤추는 듯한 사치루스의 꿈을 꾸었습 니다. 그리고 그가 이 꿈을 꿈 해몽가에게 들려주었을 때, 그것은 그 도시에 대 한 승리를 예고하는 것이라는 해몽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격을 명령했고 티루스를 점령했습니다.(이 꿈에 대한 설명은 열다섯 번째 강의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에트루리아 인들과 로마 인들에게는 미래를 알아보기 위해 다른 방법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꿈-해석traumdeutung은 헬레니즘-로마의 전시대에 걸 쳐 사용되었고 높게 평가되었습니다. 그런 것을 다루고 있는 문헌으로는 적어도 달디스의 아르테미도스의 책이 중요한 문헌으로 남아 있는데 그것은 아드리안 황제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입니다.('꿈의 해석'을 참조할 것.) 그로부터 어떻게 꿈-해석의 기술이 쇠퇴하고 꿈이 불신의 늪으로 빠져 들었는지에 대해서 는 잘 알지 못합니다. 계몽주의도 그에 대해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던 듯합 니다. 왜냐하면 암흑의 중세 시기는 고대의 꿈-해석보다 훨씬 더 불합리한 것들 을 아주 충실하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에 대한 관심은 점차 미신으로 내려앉았고 교육받지 않은 사람들에게서나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 그에 대한 진실입니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꿈-해석의 마지막 남용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복권 뽑기에서 나오게 될 숫자를 꿈속에서 찾아보려 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 에 반해 오늘날의 정밀 과학은 반복해서 꿈을 다루고는 있지만 언제나 자신의 생리학적인 이론을 그것에 적용시키기 위한 의도에서만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꿈은 의사들에게 있어서 당연히 심리적 행위가 아닌 것으로서, 정신 생활 중의 신체적 자극의 발현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1878년에 빈츠c. binz는 꿈을 설명 하면서 <꿈은 육체적인 과정이며 어떤 경우에도 유익하지 않은, 또 많은 경우에 있어서는 바로 병적이기까지 한 과정이다. 마치도 잡초들만 무성한 모래 벌판 위에 푸른빛의 정령들이 낮게 드리워 있는 것처럼 꿈 위에는 우주의 영혼과 불 멸성이 초연히 높이 떠 있다>고 말했습니다.(빈츠의 '꿈에 대하여uber den traum'(1878) 참조, 원주.) 모리l. f. a. maury는 그것을 정상인의 정연한 운동과 는 대조적으로 불규칙하게 제멋대로 움직이는 무도병에 걸린 사람들의 경련으로 비유한 바 있습니다.(모리의 '수면과 꿈le sommeil et les reves'(1878) 참조.) 또 다른 오래된 비유는 꿈-내용trauminhalt을, 음악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는 사 람의 열 손가락이 악기의 건반 위를 아무렇게나 두드릴 때 내는 소리도 묘사하 고 있습니다.(슈트륌펠l. strumpell의 '꿈의 본질과 기원die natur und entstehung der traume'(1877) 참조.) 해석한다는 것은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꿈의 작용 을 이러한 식으로 평가한다면 물론 언급할 내용이 없어질 것입니다. 분트w. wundt('생리학적 심리학의 본질grundzuge der physiologischen psychologie'(1874) 참조.)나 요틀f. jodl(요틀의 '심리학 편람lehrbuch der psychologie'(1866) 참조.), 또 그 밖의 최근에 등장한 철학자들의 꿈에 대한 서술 을 참고해 보십시오. 그것들은 한결 같이 깨어 있는 상태에서의 사고 활동과 꿈 -생활traumleben의 다른 점들을, 꿈을 과소 평가하기 위한 의도에서 열거하는 데에 만족하고 있습니다. 꿈-내용에서 나타나는 연상의 붕괴라든가 비판 능력의 차단, 모든 지식이 배제된다는 사실, 또 그 밖의 감소된 능력의 다른 특징들을 전면에 내세우는 데 열심인 것입니다. 꿈에 대한 지식 중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으로서 우리가 정밀 과학에 감사해야 할 것은, 수면 도중 작용하는 육체적인 자극이 꿈 내용에 미치는 영향과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최근에 작고한 노르 웨이의 작가인 모울리 폴트j. mourly vold가 쓴, 실험적 연구에 관한 두 권의 방 대한 저서(1910년과 1912년에 독일어로 번역됨)(폴트의 '꿈에 대하여uber den traum'(1910∼1912) 참조.)가 있는데 그것들은 거의가 다 팔다리의 위치를 변경 했을 때 그것들이 꿈속에서 어떠한 반응으로 나타나는가에 대한 결과만을 다루 고 있습니다. 그것들은 정밀한 꿈 연구의 모범으로서 찬양받을 만 합니다. 우리 가 꿈의 <의미>를 찾아가기 위한 실험을 한다고 하는 말을 그들이 듣게 되었을 때 정밀 과학이 그에 대해 뭐라고 할지 상상해 볼 수 있겠습니까? 어떠면, 그들 은 이미 그것을 말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 때문에 놀라지는 않 습니다. 실수 행위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라면 꿈도 역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실수 행위는 매우 많은 경우들에서 정밀 과학이 놓칠 수밖에 없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과 여러 민족들의 선입견을 조금만 인 정해 봅시다. 그러면 고대 꿈 해몽가들의 발자국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꿈의 영역을 개관할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의 과제를 설정 해 봅시다. 꿈이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이것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는 것은 어려 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어떤 정의를 시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 람들이 알고 있는 자료에 대한 암시로 끝나는 것에 만족합니다. 그러나 꿈의 본 질을 확실하게 짚어 보아야만 하겠습니다. 그것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그 테두리 안에서도 엄청나게 많은 다양성이 있습 니다. 여러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 다양성 말입니다. 그때 본질적인 것이란 우 리가 <이것은 모든 꿈들에 공통적인 성질이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바 로 그러한 성질입니다. 모든 꿈들에 공통적인 것으로서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그때 잠을 잔다는 것입니다. 꿈을 꾼다는 것은 분명히 수면 도중의 정신 생활로서 깨어 있 을 때의 정신 활동과 어느 정도의 유사점을 갖고는 있지만 또한 대단히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깨어 있을 때의 정신 활동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아 리스토텔레스가 내린 정의이기도 합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꿈에 대하여de somniis', '꿈의 예언de divinatione per somnum'.) 꿈과 수면 사이에는 어쩌면 더욱 깊은 관계가 성립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들은 꿈 때문에 깨어날 수 도 있고 자발적으로 깨어났을 때에나 또 예기치 않게 잠을 방해받았을 때에도 매우 빈번하게 꿈을 꾸었다는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꿈은 그러므로 수면과 각 성 상태의 중간 상태인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잠에 대한 암시 를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수면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직도 많은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생리학적이고도 생물학적 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아직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잠의 심리학적 특성들을 밝혀 내기 위한 시도를 해볼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이란, 그 속에 있을 때는 자아das ich가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아 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 외부에 대한 자아의 관심을 온전히 거두어들인 그러 한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아는 외부 세계에서 나 자신을 거두어들이고 외 부 세계의 자극들을 나에게서 떼어 내면서 잠 속으로 빠져 듭니다. 자아는 또 외부 세계에 의해서 피곤해졌을 때 잠이 들기도 합니다. 잠이 들면서 자아는 외 부 세계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조용히 내버려둬. 나는 잠을 자고 싶 어.> 아이들은 거꾸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아직 자러 가지 않을 거야. 나는 피곤하지 않아. 조금 더 뭔가를 하고 싶어.> 잠의 생물학적 목적은 그러므로 휴 식인 것 같습니다 또 그것의 심리학적 특성은 세상에 대한 관심을 꺼버리는 것 입니다.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 없이 어쩔 수 없이 태어나게 된 이 세상과 우리 의 관계는, 중간중간 끊어 내지 않고는 도저히 견뎌 낼 수 없을 것 같은 그런 관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 로, 즉 어머니 자궁 속의 존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궁 속에서 지냈던 것과 아주 비슷한 관계를 만들어 냅니다. 그것은 따뜻하고, 어둡고, 자극이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들 중의 어떤 사람들은 잠잘 때 꼭 어머니 뱃속에 들어 있었을 때와 같은 자세로 돌아가서 아주 작은 덩어리로 몸을 웅크리고는 새우잠을 자 는 모습을 취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이 세계가 우리 같은 성인들의 2/3 가량만을 소유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들 시간의 1/3 만큼의 시간 동안 우리는 아직 태 어나지 않은 것입니다. 매일 아침마다의 모든 깨어남은 그러므로 매일매일의 새 로운 탄생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잠에서 깨어난 상태에 대해서 <마치도 새로 태 어난 기분이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는 새로운 탄생의 일반 적 느낌에 대해서 매우 틀린 전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새로 태어난 아기 는 오히려 매우 불편하게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세상에 태어나는 것을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것이 만일 잠의 상태라면 꿈은 대체로 그것의 계획 속에는 들어 있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환영할 수 없는 부속물 같은 것처럼 보입 니다. 꿈 없는 잠이 최고의 잠이며 유일하게 제대로 된 잠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잠을 잘 때는 어떠한 정신 활동도 있어서는 안 되며 이것이 흔들릴 경우, <우리 에게 태내와 같은 평온 상태의 성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신적 활동의 찌꺼 기들이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신 활동의 잔류물들, 그것이 바로 꿈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말로, 꿈은 어떠한 의 미도 가질 필요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수 행위는 꿈의 경우와 달랐습니다. 그것은 깨어 있을 때의 활동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잠자고 있고 정신적 활동을 완전히 그쳤으며 단지 그것의 어떤 부분들만을 완전히 억누르지 못했을 뿐이라면, 이러한 남은 부분이 어떤 의미를 지닐 필요는 전혀 없는 것입 니다. 나에게는 이 의미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정신 활동의 다른 부 분은 잠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의 그것은 직접적인 신체적 자극에 수반되는 경련과도 같은 반응, 그저 그런 정도의 정신적 현상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꿈은 그러므로 작성 상태의 정신 활동 중에서 잠을 방해하는 찌꺼기들일 것이며 정신 분석에는 부적당한 주제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이런 주제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어도 무방할 것입니다. 꿈이 그처럼 잉여적인 것이라 해도, 그것이 존재하고 있음에는 틀림이 없는 이상 이러한 존재에 대하여 설명을 해보려는 시도는 가능할 것입니다. 정신 활 동은 왜 잠들지 않는 것입니까? 어쩌면 무엇인가가 영혼에게 안식을 주려 하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떤 자극이 영혼에 작용을 한다면, 그에 대해서 영 혼은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꿈은 수면 상태에서 영혼에 작용되는 자극에 대해서 영혼이 반응하는, 그러한 현상일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꿈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통로를 발견하게 됩니다. 잠을 방해하려는 자극이 있으며, 그 자극에 대하여 우리는 꿈으로 반응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제 여러 가지의 꿈들을 통해서 밝혀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모든 꿈들의 제일 첫 번째의 공통점을 추론해 낸 것입니다. 이 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까? 분명히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파악하고 설명하기에 훨씬 더 어렵습니다. 잠들어 있을 때의 정신 과정은 깨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특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꿈속에서 많은 것들을 체험하고 또 그것을 체험했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사실상은 아무것도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잠을 방해하는 어떤 자극만을 체험했을 뿐입니다. 꿈은 주로 시각 적인 그림으로 체험됩니다. 그러나 감정도 같이 느껴질 수 있으며 어떤 생각도 그 사이에 끼여들 수 있습니다. 또한 시각 이외의 다른 감각 체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된 것은 역시 그림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설명하는 데 어려운 점들 중 의 하나는 우리가 이러한 그림들을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꿈꾼 이는 종종, <그림으로 그리라면 그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을 어떻게 말 해야 할는지는 잘 모르겠어요>라고 말하곤 합니다. 본질적으로 그것은, <천재와 비교했을 때 지능이 떨어진 사람의 정신 활동과 같은 것, 그러므로 열등한 정신 활동이다>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꿈은 질적으로 그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어디에 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페히너g. th. fechner는 언젠가, 꿈이 (정신 속에서)활동하는 무대는 깨어 있는 표상 활동 vorstellungsleben의 무대와는 다른 어떤 것이리라는 추측을 제시한 바 있습니 다.(페히너의 '정신 몰리학의 여러 요소들elemente der psychophysik'(1889) 참조. 심리 치료자 페히너는 프로이트 이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의 이력서'(프로이 트 전집 20, 열린책들) 참조.) 우리는 그것을 이해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그것 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꿈들이 만 들어 내는 것과 같이 생경하다는 느낌은 확실히 존재합니다. 꿈의 활동을 음악 적 문외한의 손의 움직임과 비교하는 작업은 여기서 다시 벽에 부딪칩니다. 피 아노는 어쨌든 멜로디는 아닐지라도, 우연히 그것의 키를 두드리는 대로 정해진 소리들로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모든 꿈들의 두 번째 공통점을 제대 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대해 조심스럽게 주목할 필요는 있습니 다. 이외에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까? 나는 어떤 것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사방에서 차이점만을 볼 수 있을 뿐이며 그것도 모든 점에서 그렇습니다. 추측 되는 지속 시간과 그것의 명확성, 감정적 관여, 지속성 등의 그 모든 점에서 그 렇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어떤 자극에 대하여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경련성으로 반응하는 경우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들과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꿈의 차원들에 주목해 보더라도 한 개 혹은 몇 개의 그림에 불과한 아주 짧은 꿈도 있을 수 있고 하나의 단어만을 포함하고 있는, 한 가지 생각으 로만 된 것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들은 그 내용이 너무나도 풍부해서 하 나의 소설을 이룰 수 있을 만큼 방대한 것도 있고 매우 길게 계속되는 듯이 보 이는 것도 있습니다. 어떤 꿈들은 직접 겪은 경험처럼 너무도 생생해서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한참 동안이나 그것을 꿈으로 인식하기 힘든 경우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것들은 말할 수 없이 의미하고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몽롱한 것도 있 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의 똑같은 꿈속에서도 몹시도 강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부분과 거의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흐릿한 부분들이 서로서로 섞여서 나타날 수 도 있습니다. 꿈은 매우 의미 심장한 것일 수도 있고 적어도 꽤 일관성 있거나 심지어는 관념적으로도 풍부하고 환상적일 만큼 아름다울 수도 있습니다. 다른 꿈들은 그에 반해 모호하고 엉터리 같고 불합리하며 종종 몹시 황당할 수도 있 습니다. 우리를 매우 냉정하게 유지시켜 주는 꿈도 있고 모든 감정들이 매우 고 조되는 꿈들도 있습니다. 고통스러운 나머지 울게 만들기도 하고 두려움 때문에 꿈에서 깨어나고 놀라며 충격을 받게 하는 꿈들도 있습니다. 꿈들은 잠에서 깨 어나면 대개는 재빨리 잊혀지지만 어떤 것들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나지 않다 가 저녁이 되어 계속 희미해지면서 군데군데 연결이 안 된 상태에서 기억되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것들은 아주 잘 보존되기도 해서 예를 들어 어린 시절의 꿈들 둥의 어떤 것들은 30년이 지나서까지도 생생한 체험처럼 기억 속에 남아 있기도 합니다. 꿈이란 개개의 사람들처럼 단 한번 나타나서 다시는 결코 등장하지 않 기도 하지만 같은 사람에게 꿈들은 모습을 바꾸지 않고 똑같이 반복되거나 아니 면 약간씩 변화하면서 계속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략하게 말해서 이와 같은 밤 동안의 정신 활동은 매우 많은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본질적으로는 우 리의 정신이 낮동안에 수행하는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다른 어떤 것입니다. 사람들은 꿈의 이러한 다양성에 관하여 그것들을 수면과 각성 상태의 사이에 있는 여러 가지의 중간 단계, 즉 불완전한 수면의 여러 가지 단계로 가정하면서 그 본질을 설명해 보고자 시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꿈-활 동traumleistung의 가치나 내용, 명료성과 함께 <이것은 꿈이다>라고 하는 분명 함이 점점 증가하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꿈을 꾸고 있을 때의 정신이 각성 상태 에 점점 더 가까워지기 때문입니다. 또 매우 이성적인 꿈의 한 단편이 전개된 직후에 무의미하고 불명확한 꿈이 이어진다거나 또 그 다음에 다시 아주 본격적 인 꿈-작업traumarbeit이 활성화된다거나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정신이 란 스스로 수면에 빠져 드는 수준을 그렇게 빨리 마구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 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아무것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절대로 손쉬운 문제 가 아닙니다. 여기서 잠정적으로 꿈의 <의미>를 밝히는 일을 접어두고 그것을 좀더 잘 이 해하기 위한 길을 열기 위해 노력해 보기로 합니다. 꿈의 수면 상태에 대한 관 계에서, 우리는 꿈은 수면에 가해지는, 수면을 방해하는 자극에 대한 반응이라고 하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우리가 들은 대로 이것이야말로 정밀 실험 심리학이 우리를 도와 줄 수 있는 단 하나의 논점입니다. 실험 심리학은 수면 동안에 가 해진 자극이 꿈속에 나타난다는 것을 증명한 바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폴트(폴 트의 '꿈에 대하여')의 연구를 포함에서 그러한 수많은 실험 심리학 연구들이 이 루어졌습니다. 우리들 모두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이러한 결과 를 확인할 수 있는 기화가 있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소 오래된 몇 개의 실험을 선택해 보겠습니다. 모리는 자기 자신에게 그러한 실험 을 해 보았습니다.(모리의 '수면과 꿈' 참조.) 사람들은 그가 잠자는 동안 향수 종류 중 하나인 오 드 콜로뉴를 냄새맡게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카이로에 있 는 요한 마리아 파리나 가게 앞에 서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 꿈에 연달아서 계속 황홀한 모험들이 이어졌습니다. 또 잠자는 동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목 덜미를 꼬집게 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연고가 발라져 있는 반창고를 붙인 꿈을 꾸었으며 그의 유년 시절 동안 그를 진찰하곤 했던 한 의사의 꿈을 꾸었습 니다. 또 그의 이마 위에 물을 한 방울 떨어뜨리게 했습니다. 그는 이번에는 이 탈리아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오르비에토 백포도주를 마시는 꿈을 꾸었습니 다. 이와 같이 실험적으로 만들어 낸 꿈들에서 눈에 띄는 특징들을 우리는 자극에 서 기인하는 다른 꿈들에서 더욱 분명하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기지가 매우 풍 부한 관찰자 힐데브란트f. w. hildebrandt에 의해 보고된 3개의 꿈들이 있는데 그것은 모두 자명종 시계의 소음에 대한 반응으로인해 유발된 꿈들이었습니다. (힐데브란트의 '꿈과 삶을 위한 그 활용der traum und seine verwerthung fur's leben'(1875) 참조.) <나는 어느 봄날 아침에 산책을 하고 있었습니다. 푸른 초원 위를 어슬렁거리 면서 걷다가 이웃 마을에 이르게 되었지요. 나는 그 마을 사람들이 성장을 하고 찬송가 책을 옆구리에 끼고 교회를 향하여 걸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오 늘이 일요일이지! 아침 예배가 막 시작되려 하고 있군! 나는 이 예배에 함께 참 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그 전에 얼굴이 조금 달아오른 듯이 느껴졌으 므로 교회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묘지에서 가라앉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거 기서 수많은 묘비명을 읽고 있는 동안 나는 종지기가 탑을 올라가고 있는 것과 그 마지막 꼭대기 칸에 예배의 시작을 알려줄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 것을 보 았어요. 잠시 동안 그것은 꼼짝도 않고 거기에 매달려 있었지요. 다음 순간 그것 은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그 소리는 맑고 커다랗게 울려퍼졌어 요. 그 소리가 얼마나 크고 우렁찼던지 나의 잠은 그만 달아나 버리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 종소리는 바로 자명종의 벨소리였던 것입니다.> <두 번째의 경우는 이렇습니다. 그것은 아주 맑은 겨울날이었어요. 길거리는 온통 두꺼운 눈으로 덮여 있었지요. 나는 썰매를 타러 가기로 약속을 해 놓고 썰매가 문 앞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올 때까지 오랫동안 기다려야만 했지요. 그 리고는 썰매탈 준비를 했어요 (따뜻한 털 담요를 깔고 발 덮개를 가져오고). 드 디어 나는 썰매에 올라탔습니다. 그리고도 잠시 기다리고 있는 말들에게 출발 신호를 주는 고삐를 당길 때까지 출발이 지연되고 있었어요. 이제 고삐를 죄었 어요. 그러자 힘차게 흔들리는 종들에서 낯익은 터키 행진곡이 울려퍼졌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순식간에 꿈의 거미줄이 끊어지고 말았지요. 그런데 그것 은 또다시 자명종의 째지는 듯한 종소리였어요.> <세 번째의 예를 또 들어 보세요. 나는 하녀가 팔에 한아름의 접시를 안고는 식당으로 통하는 긴 복도를 따라서 걷고 있는 것을 보았어요. 그녀의 팔에 높이 쌓여 있는 그 접시들은 금방이라도 중심을 잃어버릴 듯이 위험하게 보였어요. <조심하거라. 접시들이 바닥에 몽땅 떨어지겠다.> 나는 그녀에게 주의를 주었어 요. 그러자 판에 박은 듯한 대꾸가 뒤따랐지요. <이런 일엔 아주 익숙해졌거든 요.> 그 동안에도 나는 계속해서 그렇게 걸어가는 하녀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지켜보았어요. 내 걱정이 들어맞았어요. 하녀는 문지방 턱에 걸리고 말았어요. 접시들이 떨어져 쨍그랑 거리는 소리를 냄과 동시에 산산조각으로 깨지면서 마 루 바닥에 나뒹굴었어요. 그런데 멈추지 않을 듯이 울리는 그 소리는, 그 후에 곧 알아 낸 바에 의하면 접시가 깨지는 소리가 아니었고 종소리였어요. 이 종소 리는 잠에서 깨어난 후에 보니 자명종의 소리였던 것이지요.> 이 꿈들은 아주 아름답고 내용이 풍부한 꿈들로서 일반적인 다른 꿈들처럼 전 혀 앞뒤가 맞지 않는 그런 종류의 꿈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든 비판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것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모든 상황들이 한결같이 하나의 소음에서 시작되었고 깨어나서 보면 자명종의 소리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꿈이 어떻게 하여 만들어지는 지를 알게 되며 그 밖에도 다른 것을 알게 됩니다. 꿈은 자명종을 인식하지 못 합니다. 자명종은 꿈속에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대신에 그것은 그 자명종 소리를 다른 것으로 대체시켜 놓습니다. 그것은 꿈을 방해하는 자극은 암시하고 있지만 그 자극을 매번 다른 방법으로 암시해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명쾌한 대답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의적인 것 같습니다. 꿈을 이 해한다는 것은 이런 경우, 다른 소리가 아니고 왜 꼭 그 소리가 자명종 소리 자 극을 암시하는 것으로서 선택되었는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일 것입니 다.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모리 실험에 대하여서도 이의를 제기할 수 있을 것입 니다. 즉, 꿈꾸는 가해진 자극이 꿈속에 나타난다는 것은 알 수 있는데 왜 꼭 그 러한 형태로 나타나는지 알아낼 수 없으며, 그것은 잠을 방해하는 자극의 성질 에서도 유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 모리 실험의 경우에서는 오 드콜로뉴의 꿈에서 멋진 모험들이 뒤따라 왔던 것처럼 수많은 다른 꿈-내용들이 연결되는데 그것들에 대해서도 어떤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잠을 깨게 만드는 그러한 꿈들이 수면을 방해하는 외부 자극 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게 해주는 최상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대해서 의 심을 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다른 경우들에서는 그러한 영향을 확인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꿈을 꾸던 도중 모든 꿈들에서 항상 깨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아침에 일어나서 밤 동안에 꾸었던 꿈을 기억해 낸다고 하여도 밤 사이에 혹시 작용했을지도 모르는 꿈을 방해했던 자극을 어떻게 확인 할 수 있겠습니까? 나도 옛날에 한 번 그러한 소리의 자극을 나중에 확인할 수 있었던 기화가 있었는데 그것은 물론 특별한 상황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입니다. 나는 티롤 지방의 산꼭대기 휴양지에서 어느 날 아침, 교황이 죽은 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면서 잠에서 깨어났습니다. 나는 그 꿈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나의 아내가 내게 물었습니다. <당신, 오늘 아침에 모든 교회와 성 당들에서 사정 없이 울려 댔던 그 요란스러운 종소리를 들으셨어요?><아니, 난 못 들었어. 깊이 잠들었나 봐.> 그런데 아내의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나는 비로 소 나의 꿈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잠자는 사람들에게 꿈을 꾸도록 작용했으 면서도 그것에 대해서 추후에라도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하는 채로 남게 되는 그러한 자극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어쩌면 매우 빈번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꿈에 영향을 미친 자극을 더 이상 확인할 수 없게 된다면 그 자극에 의해 꿈이 생겨났다고 하는 어떠한 확신도 있을 수 없습니다. 수면을 방해하는 외부 자극은 우리들에게 꿈의 한 단면을 설명해 줄 수 있을 뿐이고 꿈 의 전부를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수면을 방해하는 그러한 자극을 지나치게 중시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우리가 이 이론을 완전히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론 은 아직도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 여지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우리의 꿈이 방해를 받는 것인가, 또 무엇이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꿈을 꾸게 만드는가 하 는 것은 사실 중요치 않습니다. 문제되는 것이 언제나 항상 외부에서 오는 감각 자극이 아니라면, 내부적인 신체 기관에서 기인하는, 말하자면 신체 자극이 그 자리를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추측은 꿈-생성traumproduktion에 관한 통속적인 생각에 매우 가깝고 그와 비슷한 것입니다. <꿈은 오장에서부터 언 다>고 말하는 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감스러운 것은 밤 동안에 영향을 미친 그 신체 자극은 잠을 깨고 나면 더 이상 증명될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확인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리는 경우가 매우 흔하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체 자극의 꿈-생성 이론을 뒷받침하는 대단히 많 은 사례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될 수 없습니다. 내부적 신체 기관 상태가 꿈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확실합니다. 방광이 가득 찬 상태나 성 기의 자극 상태가 많은 꿈-내용들에 미치는 관계는 너무도 분명해서 더 이상 이 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투명한 경우들에서부터 시작하여 주어진 꿈-내용 속에서 적어도 이러한 자극이 가공되거나, 설명, 혹은 암시된 것을 찾아냄으로써 그러한 신체 자극이 영향을 미쳤다는 정당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다른 경우들 로 우리의 연구 대상을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꿈 연구가인 쉐르너k. a. scherner 는 신체 자극에서 꿈이 도출된다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면서 그에 대한 몇 개의 좋은 예들을 제시했습니다.(쉐르너의 '꿈의 생활das leben des traumes'(1861) 참 조, 원주.) 예를 들어 꿈속에서 그가 <금발머리와 뽀얀 얼굴을 한 귀여운 소년들 이 두 줄로 늘어서서 싸울 듯한 태세로 서로 마주보다가 서로에게 달려들어 부 둥켜 잡았다가는 다시 떨어져 나가서 그 전의 위치로 돌아갔다가 다시금 새로이 전과 똑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는> 정면을 보게 되었을 때, 소년들의 이러한 암시 는 치아에 해당되는 것이며 이러한 꿈 장면을 본 후에 실제로 <입 안에서 긴 치아를 뽑게> 되면 그 해석은 확실한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꿈속 에서의 <좁고 구불구불한 길>을 내장 기관 자극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정당 한 것으로 보이며, <꿈은 무엇보다도 자극을 보내는 신체 기관을 그것과 비슷한 대상을 통해서 묘사하려고 한다>는 쉐르너의 이론을 증명해 주고 있는 듯합니 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부적인 자극도 꿈속에서 외부 자극과 똑같은 역할을 수행 한다고 하는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도 이러한 입장은 외부 자극과 똑같은 반론에 부딪치게 됩니다. 대단히 많은 경 우에 있어서 신체 자극의 암시는 불확실하거나 증명하기 힘든 때가 많습니다. 모든 꿈들이 다 그러한 것은 아니고 단지 아주 적은 예의 꿈들만이 꿈-생성에 내적 신체 자극이 관여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하여 결국 외 부적인 감각 자극과 마찬가지로 내부적 신체 자극 역시, 꿈에 대하여 그 자극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 무엇인지를 밝혀 내는 것 외에 더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 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꿈의 그 밖의 다른 부분들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냐 하는 물음은 그러므로 여전히 어둠 속에 남습니다. 이러한 자극의 영향을 연구했을 때 나타나게 되는 꿈-생활의 고유성을 유념해 보도록 합시다. 꿈은 자극을 단순히 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가공하고 넌지시 암시해 주고, 어떤 관련성 속에 배치시키고 또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치 시키기도 합니다. 이것이 꿈-작업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가 그것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쩌면 그것이 꿈의 본질에 더욱 가까이 다가 갈 수 있게 해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자극에 의하여 무언가 를 시도한다고 할 때 그 자극은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가진 모든 본질을 소진시 켜 버릴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셰익스피어의 '멕베드'는 최초로 세 개의 왕국을 합병하고는 그 삼국의 왕관을 자신의 머리 하나에 합쳐서 쓰게 된 왕의 즉위를 기념하여 쓰여진 특별한 작품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역사적인 계기가 그 희곡 의 내용과 전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고 그것이 우리에게 그 극의 위대성과 그 수수께끼를 다 설명해 줄 수 있습니까? 잠자는 이에게 영향을 주는 외부적, 내 적 자극은 어쩌면 단지 꿈의 자극제에 그칠 뿐이고 꿈의 본질은 그것으로는 설 명되지 않습니다. 꿈의 다른 공통점, 그것의 심리적 특성은 한편으론 파악하기 어려운 것이고 또 다른 한편으론 그것을 계속적으로 추구할 수 있을 만한 어떠한 근거도 제공 해 주지 않습니다. 꿈속에서 대개 우리는 무언가를 시각적 형태로 체험하게 됩 니다. 이러한 시각적 체험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해진 자극들이 어떤 해명의 열 쇠를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체험하는 바로 그 자극인 것이 확실합니 까? 시각 자극이 꿈을 자극하는 것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일 뿐인데도 어째서 그 체험은 시각적으로 나타납니까? 우리가 말을 하는 꿈을 꿀 때, 수면 도중에 어 떤 대화나 혹은 그와 비슷한 어떤 소리가 우리의 귓속으로 침입해 들어왔다는 것이 증명될 수 있습니까? 나는 이러한 가능성을 단호하게 거부합니다. 꿈의 공통점에 관한 영구를 더 이상 계속해 나갈 수 없다면 혹시 그것들의 상 반된 점, 차이점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해 나갈 수는 없을까요? 꿈이란 대개는 무의미하고 몽롱하고 불합리합니다. 그러나 또한 매우 함축적이고 냉철하고 이 성적인 꿈들도 있습니다. 후자의 의미심장한 꿈들이 무의미한 꿈들에 대해서 어 떤 열쇠를 제공할 수 있을지 한 번 살펴봅시다. 이성적인 꿈에 대한 한 예로서, 내가 최근에 들은 바 있는 어느 젊은 남자의 꿈을 여러분들에게 설명해 보겠습 니다. <나는 케른트너 가(빈의 중요 상점가.)로 산책을 나갔습니다. 산책 도중에 거기서 x씨를 만났습니다. 그와 나는 한동안 얘기를 나누다가 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습니다. 두 명의 여자와 한 남자가 내가 앉은 식탁으로 와서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나는 처음에는 그 사실에 대해 화가 나서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 지요. 그리고 나서 얼마 후에 그들을 쳐다보았는데 그들이 사실은 매우 예의바 른 사람들이란 것을 알게 되었어요.> 꿈꾼 이는 꿈을 꾸기 바로 전날 저녁에 실 제로 그가 항상 다니던 길인 케른트너 가로 산책을 갔고 바로 거기서 x시를 만 났다는 사실을 후에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꿈의 다른 부분들은 직접적인 회상 은 아닙니다. 단지 오래 전의 어떤 체험과 약간의 유사점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떤 부인의 또 하나의 생생한 꿈 이야기를 들어봅시다. <남편이 <피아노를 조 율해야 하지 않을까?>라고 묻자 나는 <소용없어요. 새로 광을 내야 해요>라고 대답했어요.> 이 꿈은 그 꿈을 꾸기 전날에 그녀의 남편과 그녀 사이에 있었던 대화를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개의 꿈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꿈속에서 일상의 반복이나 그것과 연관된 내용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것들만을 가지고 꿈에 관한 일반적인 것을 정의할 수 있다면 꽤 괜찮은 수확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될 수는 없는 것이고 그것은 극소수의 예에만 해당될 뿐입니다. 대다수의 많은 꿈들에서는 그 전날과의 연결점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것에서 무의미하고 엉터리 같은 꿈들에 대한 어떠한 열쇠를 찾아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우리가 새로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는 꿈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조금 아까 의 예에서처럼 만일 그 꿈이 무언가를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는 것이라면 왜, 그 리고 무엇 때문에, 잘 알고 있으며 바로 전에 체험한 것이 꿈속에서 반복되고 있는 것인가를 알고자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행해 왔던 것과 같은 실험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서 여러분들 도 나와 마찬가지로 피곤하고 지루해 하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제, 해 결에 다다르는 통로를 열어 줄 길을 알지 못한다면 어떤 문제에 대한 단순한 관 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이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실험 심리학은 꿈에 영향을 미치는 자극제로서의 자극의 의미 에 대한 몇 가지 평가할 만한 자료를 제공해 준 것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제시 하지 못했습니다. 철학에서도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그들 은 또 다시 오만스럽게 우리가 씨름하고 있는 대상의 열등함에 대해 비난할 것 입니다. 신비학에서는 어떠한 것도 빌려 올 생각이 없습니다. 역사와 통속적인 민중의 견해들은 <꿈이란 의미가 풍부하고 함축적인 것이다. 그것은 미래를 내 다볼 줄 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 역시 긍정하기가 힘들고 증명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첫 번째 노력은 완전히 미로 속에서 어찌할 줄 모르는 상태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우리가 이제까지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곳에서 하나 의 암시가 다가옵니다.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래된 지식의 침전물이라고 할 수 있는 관용어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조심성 없이 아무렇게나 사용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언어는 특이하게도 <백일몽(tagtraum)>이 무엇을 뜻 하는 것인지를 확실히 알고 있는 듯합니다. 백일몽이란 공상(공상의 산물)으로서 매우 일반적인 현상이며 병든 사람에게서나 건강한 사람들에게서나 다 같이 발 견됩니다. 그것은 또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도 쉽게 연구해 볼 수 있습니다. 이러 한 공상적 산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그것이 꿈의 두 가지 공통점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백일몽>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수면 상 태와 연계되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그 일 부터가 벌써 모순됩니다. 또 두 번 째의 공통점에 관하여 보더라도 사람들이 그러한 백일몽 상태에 있을 때 단지 무언가를 상상할 뿐이지 무언가를 체험하거나 환각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습니 다. 공상하며 생각하는 것일 뿐 무언가를 보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백일몽은 사춘기 이전에 나타나는데 종종 유년기 후기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으며, 성년기까지 계속되지만 그 이후에는 사라져 버 리든지 아니면 인생의 후반기까지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공상의 내용은 매우 투명하게 들여다보이는 동기에 의해 지배됩니다. 그것들은 개개인의 이기 적인 공명심이나 권력욕, 혹은 에로틱한 욕구들이 충족되는 장면들이나 사건들 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젊은 남성들에게서는 공명심에 가득 찬 공상들이 주류를 이루고, 사랑의 성공에 많은 것을 걸고 있는 여성들에게서는 에로틱한 것들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러나 남성들에게도 에로틱한 욕구들이 그 배후에 있음을 자 주 발견하게 되는데 모든 영웅적 행위나 성공이라 할지라도 결국에는 여성들의 찬탄이나 호의를 얻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백일몽들은 그 밖에도 매우 다양하며, 여러 가지의 운명을 맞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짧은 시간이 지나면 사 라져 버리고 또 다른 새로운 것으로 대체 되거나 혹은 지속되어 기나긴 이야기 로 발전되기도 하며 생활 형편의 변화에 따라 바뀌기도 합니다. 그것은 말하자 면 시간과 함께 변화하며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그것으로부터 새로운 상황의 영 향을 말해 주는 <시간의 징표>를 받습니다. 그것들은 시적인 작업의 가공되지 않은 원료 그 자체입니다. 시인은 그의 백일몽을 적당히 변형하거나 변장시키고 혹은 삭제하여 자신의 단편 소설이나 장편 소설, 희곡에서 그리고 있는 상황들 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백일몽의 주인공은 그러나 항상 자기 자신으로서 직접 등장하거나 아니면 다른 사람과 명백하게 동일하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 기 자신의 경우도 있습니다.(프로이트의 환상과 예술적 창조의 관계에 대한 논의 는 주 편의 프로이트 초기 논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창조적인 작가와 몽상'(프 로이트 전집 18, 열린책들)과 '히스테리 성 환상과 양성성의 관계'(프로이트 전집 12, 열린책들) 참조.) 백일몽이 그와 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꿈과 현실의 관계 때문인지도 모릅 니다. 그 내용이 꿈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실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암시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름의 이러한 공통점은 또 어쩌면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알려 지지 않은, 우리가 찾고 있는 것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꿈의 심리적 특성에 기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관계의 동일성을 대단히 의미 있 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행위가 매우 부당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사실 또한 가능합 니다. 그러나 이 점은 어쨌든 나중에야 비로소 밝혀지게 될 것입니다. 여섯 번째 강의 꿈-해석의 전제들과 해석의 기술 신사 숙녀 여러분! 꿈에 대한 연구에서 조금 더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우리 는 새로운 길, 새로운 방법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가장 손 쉬운 방법을 제안해 보려 합니다. 앞으로의 모든 연구를 위한 전제로서 <꿈은 신체적인 현상이 아니라 심리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합시다. 그것이 무 엇을 의미하는지는 여러분들도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로 하여 금 이러한 가설을 세우도록 해주고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 게 함에 있어서 방해받을 이유도 없습니다. 상황은 이렇습니다. <꿈이 만일 신 체적인 현상이라고 한다면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심리 현상이 라는 전제에서만 우리는 꿈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실제로 심적 인 현상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작업하면서 그럴 때 어떤 결과가 나오는지를 알아 보기로 합시다. 우리 작업의 결과는 우리가 그 가정을 확고히 지켜도 좋은지, 또 그것을 우리의 연구 결과로 확실하게 내세워도 되는지를 결정지어 줄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는, 사람들이 학문의 세계에서 노력해 서 얻고자 하는 것, 즉 현상에 대한 이해, 현상들 간의 관련성을 도출해 내는 것, 그런 것들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궁극적으로는 가능한 한 이 현상들에 대한 우리들의 지배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꿈은 심리 현상이다>라고 하는 가정에서 우리의 작업을 계 속해 나가려고 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꿈은 꿈을 꾸는 이의 작품과 표현이 됩 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에게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그러한 작품과 표현인 것입니다. 당신들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가 하고 있을 때 여러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에게 물어 보시겠지요. 그렇지 않 습니까? 우리가 이와 똑같은 일, 즉 꿈꾼 이에게 <그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물어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이전에도 이미 이와 비슷한 상황에 처했던 적이 있다는 것을 여러분들 은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은 실수 행위의 연구중에 있었던, 잘못 말하기의 경우 에서였습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일은 vorschwein(vorschein(전조)과 schweinerei(추잡한 일)의 일부 철자가 합성된 엉 뚱한 표현.)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자 우리가 묻습니다. 아니, 다행스럽게도 우 리가 아닌 다른 사람, 정신분석학과는 관계 없는 사람이 그에게, 도대체 이렇게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는 즉시, <그것은 추잡한 일이었다>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다른 온건한 표현, 즉 <그 일은 이렇게 밝혀졌습니다>라는 말로 바꾸어 버린 것이라고 대답 합니다. 나는 그 전에도 이미 이러한 물음이야말로 정신분석적 탐구의 본보기라 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정신분석은 될 수 있는 한 수수께끼의 해답을 피험자 자신에 의해서 스스로 말하게 하는 그러한 기법을 추구한다는 것 을 이해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꿈을 꾼 사람도 자신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를 우리에게 말해 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잘 아시는 바와 같이 꿈의 경우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실수 행 위에서는 간단하게 해결되는 경우가 꽤 있었습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아무것 도 말하려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또 다른 경우에 마주치게 되는데, 심지어는 우 리가 그에게 제시한 해석마저도 질문 받은 사람에 의해서 결렬하게 부정되고 맙 니다. 꿈에서는 첫 번째의 경우와 같은 것은 완전히 배제됩니다. 꿈꾼 이는 항상 자기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말을 합니다. 그는 우리의 해석을 부정할 수가 없는 데 그것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해석도 제시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 로 우리는 다시 우리의 시도를 포기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그 자신이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고, 우리도 알 수 없고, 제삼자가 알 수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 고, 그러니 그것을 알 수 있는 어떠한 전망도 없어 보입니다. 네, 여러분이 원하 신다면 지금 이 시도를 포기해 버리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과는 다른 것 을 원하신다면 나와 함께 걸어온 이 길을 계속 전진해 나갑시다. 내가 여러분들 에게 말하고 싶은 것을, 꿈꾼 이가 자신의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해서 아 마도 잘 알고 있으리라는 것인데 그것은 전적으로 가능한 일입니다. 그는 다만,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를 뿐이고 자기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고 믿 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내가 지금 다시 또 하나의 가설을 세우려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서 주의를 환기시키려 할 것입니다. 얼마되지 않는 짧은 연관성 속에서 두 번째 의 가설을 세우면서 나의 방법론에 대한 신뢰성의 기대치를 엄청나게 낮추려 하 고 있다는 것이겠지요. <꿈은 하나의 정신 현상이다>라는 전제에서 또 하나의 전제, 즉 인간들의 마음속에는 자신이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도 실 제로는 알고 있는 정신적인 것이 있다는 전제를 세우려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저, 그러한 전제들에서 도출될 수 있는 결론들에는 관심을 두지 말고 이러한 두 개의 전제들의 내적인 불확실성에만 주목하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내가 여러분들에게 무엇인가를 위장하고 은폐 하기 위해서 여기까지 여러분들을 인도해 온 것은 아닙니다. <정신분석 입문을 위한 기초적 강의>라는 강의 제목을 내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그것으로써 (초보자를 위해) <적당히 서술함으로써usum delphini>(in usum delphini, 혹은 ad usum delphini는 프랑스의 루이 14세 시절 황태자였던 도팽dauphin을 교육하 는 과정에서, 보쉬에bossuet, 위에huet 등이 고대 그리스의 고전들에 살린 내용 들 중에서 도덕적이며 정치적인 견지에서 민감한 부분을 삭제하고 적당히 서술 했던 관행을 가리킨다.) 난감한 모든 문제들을 조심스럽게 감추거나, 틈새를 메 우고, 또 의심스러운 부분은 덧칠을 하는 등으로 매끄러운 상호 관련성 속에서 내용들을 제시하고, 이로써 여러분들이 <이제 나는 새로운 무언가를 배웠다>라 고 편안한 기분으로 믿게 만들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밝힙니다. 아닙 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초보자들이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있는 그대로의 우리의 학문이 모습을, 그것들의 매끄럽지 못함과 어려움, 여러 가지 전제 조건 들과 의문점들을 그대로 보여 드리려 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어떠한 학문 도 마찬가지라는 것, 또 특히나 어떤 학문의 초기 단계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는 것을 나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강의들에서는 배우는 이들에게 이러 한 어려운 문제들과 불완전성을 처음에는 어떻게든 숨기려 한다는 사실도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정신분석학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나는 실제 로 두 개의 가설을 세웠는데, 하나의 전제는 다른 하나의 전제에 포함되어 있습 니다. 이 모든 것이 너무도 힘들게 생각되거나 너무 불확실하게 느껴지는 사람, 또 더 높은 정도의 확실성과 우아한 연역 과정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은 계속 해서 나와 함께 이 길을 걸어갈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그러나 심리학적 문제 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관여하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에게 익숙 해져 있는 그 정확하고 안전한 길이 여기서는 전혀 걸을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무언가 사람들에게 제시할 수 있는 내용 을 가지고 있는 학문이라면 청중들과 추종자들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전 혀 불필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 학문의 성과가 승인을 받을 수 있도록 성과 를 내놓아야만 하는 것이며 그것이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을 때까지 기 다릴 뿐입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이 문제에 계속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려 하는 사람들에게 나 는 이러한 두 개의 가설이 절대로 동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습 니다. <꿈은 심적 현상이다>라고 하는 첫 번째의 가정은 우리 연구의 성공적 작업을 통하여 우리가 증명하고자 하는 바로 그 전제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미 다른 분야에서 증명이 되었으며 나는 다만 그곳에서부터 우리의 문제로 전용하 려고 그 전제를 끌어들이려고 할 뿐입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꿈꾼 이에게 대하여 가정하려고 하는, 그 자신은 자기가 알 고 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이러한 증명을 도대체 어디에서, 어떤 학문의 분 야에서 끌어다 댈 수 있습니까? 그것은 특이하고도 경탄할 만한, 정신 생활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변화시키는 그러한 사실로서 숨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더더구나 그것은 그 이름을 부르게 되면 이상하게 들리지만 현실적인 어떤 것이 존재함에 틀림이 없는, 자기 모순적인 표현contradictio in adjecto인 것입니다. 자, 그것은 숨길 필요가 없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거 나 충분히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 다. 이러한 모든 심리적 문제가 이 분야의 결정적인 관찰 사실들과 경험들을 멀 리했던 사람들에 의해 단죄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탓도 아니고 역시 그 문제 자체의 탓도 아닙니다. 그에 대한 증명은 최면 현상의 분야에서 마련되었습니다. 1889년에 낭시에서 있었던 리에보a. a. liebeault와 베른하임h. bernheim의 매우 인상 깊은 공개 실 습 시간에 함께 참석했을 때, 나는 다음과 같은 실험을 아주 생생하게 보게 되 었습니다. 어떤 사람을 몽유병자와 같은 상태에 빠지게 만든 후에 그와 같은 상 황에서 가능한 모든 체험을 하게 한 뒤 그를 깨웠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자신이 최면 상태에 빠졌던 동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습 니다. 그래서 베른하임은 최면 상태 동안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 고하도록 요구했습니다. 그는 자신은 아무것도 기억할 수가 없노라고 주장했습 니다. 그러나 베른하임은 그렇게 할 것을 계속 요구해 댔고 그가 그것을 틀림없 이 알고 있으며 기억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시켰습니다. 그러자 그는 망설이 더니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처음에는 그림자처럼 몽롱하 게 그에게 암시된 체험들 중의 하나를 기억해 냈습니다. 이어서 다른 부분들도 생각해 내는가 싶더니 그 기억들은 더욱 또렷해지기 시작했고, 점점 완전해 지 면서 드디어는 하나도 빠짐 없이 다 기억해 냈던 것입니다. 그가 최면 상태 이 후에 그것들을 생각해 내게 되었고 그 사이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도 아무것도 경험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가 이전에 이미 그 기억을 갖고 있었던 것이라는 결론은 그러므로 매우 정당한 것입니다. 그 기억들은 단지 그에게 접근 불가능 한 상태에 있었을 뿐이고 그는 자신이 그것들을 알고 있음을 몰랐을 뿐이며 자 신은 그것들을 알지 못한다고 믿었던 것뿐입니다. 우리가 꿈꾼 이들에게 가정하 려고 하는 사실들도 바로 이런 경우와 같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서 매우 놀라워하고 이렇게 묻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이 증거를 왜 좀더 일찍, 실수행위의 경우에서 제 시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남자가 말을 실수했을 때, 그 자신이 전혀 모르고 있 고 또 부정했던 어떤 의도가 거기 담겨져 있다는 사실을 다루었던 시점에 그 증 거를 제시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가 어떤 체험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체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한다고 믿고 있을 때는 자신의 내부에 있는 자신의 다른 정신적 과정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거는 우리에게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고 우리가 실수 행위를 이해하는 데에 매우 강한 인상을 주었을 것이고 우리가 실수 행위를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주었을텐데요.> 사실 나는 그때에 이미 그 증거를 제시할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더욱더 적절하게 필요한 다른 경우를 위해서 그것을 아껴 두었습니다. 실수 행위들은 한편으론 그 자체로서도 설명될 수 있었던 것이며 다른 한편으론 현상들의 관련성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그러한 정신적 과정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력히 요구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꿈을 연구하는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 는 다른 분야에서의 설명들을 끌어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밖에도 나는 여러 분들이 최면hypnose 분야에서의 전이ubertragung를 훨씬 더 용인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실수를 하게 되는 상황은 여러분들에게는 정 상적인 것으로 생각될 것이며 최면적 상황과는 아무런 유사점이 없습니다. 꿈꾸 는 행위의 조건이라고 할 수면 상태는 그와는 반대로 최면 상태와 아주 분명한 근친성을 갖고 있습니다. 최면은 인위적인 잠으로 불리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 리는 우리가 최면을 걸려고 하는 사람에게 <잠드시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그에게 부여하는 암시라고 하는 것도 자연적인 수면 상태의 꿈들과 비교됩니다. 이 두 가지의 경우에서의 심적 상황은 실제로 매우 비슷합니다. 자 연적인 수면 상태에서 우리는 외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관심을 완전히 거두어들 입니다. 최면 상태에서도 마찬가지로 외부 세계 전체에 대한 관심을 꺼버립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다면 그것은, 그때 우리와 래포rapport 관계(정신분석가와 환자 사이의 심리적 교감.)를 맺고 있는, 즉 우리를 최면에 빠져 들게 한 사람뿐 입니다. 가령 유모의 선잠ammenschlaf은 아기와 유모 사이에 일종의 관계가 형 성되어 있는, 오직 이 아기에 의해서만 그 유모는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때도 유모는 정상적인 잠을 취하면서도 최면 상태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최면 상태의 어떤 관계를 자연적인 수면에 적용하는 것은 그다지 대담한 모험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꿈을 꾼 사람도 이와 마찬가지 로 그에게는 단지 접근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그 자신도 그렇게 믿 지 못하는, 자신의 꿈에 대한 이와 같은 지식이 존재하고 있을 것이라는 가정은 단순히 무모한 주장이 아닙니다. 어쨌든, 바로 여기에서 꿈 연구를 위한 제3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유념해야 하겠습니다. 잠을 방해하는 자극을 통 해 꿈을 연구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백일몽이 두 번째의 방법이며, 이제는 또 최면 상태에서 암시된 꿈을 연구하는 것입니다. 자, 이제는 더욱 큰 확신을 갖고 우리의 과제로 돌아가 봅시다. 꿈을 꾼 사람 이 자신의 꿈에 대해서 알고 있으리라는 것은 이제 거의 확실해졌습니다. 관건 은 오직 그가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찾아 낼 수 있게 해주고 그 내용을 우리에 게 설명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가 자신의 꿈의 의미를 우리에게 즉각 말해 줄 것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을 꿀 수 있게 한 그 유래나 사고와 관심의 틀은 그가 스스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계시다시피 실수 행위의 경우에서는 그가 어떻게 하여 이라는 실수를 하게 되었는지를 본인에게 물어 볼 수 있었고 그가 그에게 바로 떠오른 연상 내용을 말해 주자 우리는 해답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꿈의 경우에 우리의 기술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서 이러한 예에서 모방한 것입니다. 우리는 다시금 그에게 그가 어떻게 하여 이러한 꿈을 꾸게 되었는지를 물어 보게 될 것 이며, 그의 머릿속에 첫 번째로 떠오른 연상은 다시금 이 물음에 대한 해답으로 인정받게 될 것입니다. 그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믿든지 안 믿든지 그것에 대 한 구별은 필요치 않고 우리는 이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동일한 것으로 취급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술은 확실히 매우 간단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여러분들의 강력 한 반대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 <다시 또 새로운 가정, 세 번째의 가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로군요! 그것도 그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없는 가정을요! 꿈을 꾼 사 람에게 자신이 꾼 꿈에 대해서 떠오르는 것이 무엇이냐, 라고 물었을 때 맨 먼 저 떠오르는 연상이 우리가 찾고 있는 해명이라니요? 그렇지만 아무런 연상도 떠오르지 않을 수도 있고 또 전혀 엉뚱한 것이 떠오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러한 기대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 욱 철저한 비판이 필요한 곳에서 한꺼번에 너무나 많은 믿음을 표시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외에도 꿈은 단 하나의 실언에 불과한 것이 아니고 여러 개의 요 소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연상을 붙들어야 하는 것 입니까?> 부차적인 면에 있어서는 여러분의 말이 맞습니다. 꿈은 많은 요소들도 구성되 어 있다는 점에 있어서도 잘못 말하기와 구별됩니다. 이 기술은 그런 점에 대한 것까지도 고려에 넣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들에게, 꿈을 여러 개의 요소로 나누고 각각의 요소에 대한 연구를 별도로 진행시킬 것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그렇게 되면 잘못 말하기와의 유추 관계가 다시 성립됩니다. 그때 각 각의 꿈-요소traumelement에 대하여 질문을 받은 사람이 아무런 연상도 떠오르 지 않는다고 대답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도 역시 여러분의 생각은 타당합니 다. 이러한 대답을 유효한 것으로 인정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고, 어떤 경우 가 그에 해당되는지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은 나중에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놀랍게도 우리들 자신에게 어떤 특정한 연상이 떠오르게 되는 그러한 경우를 말 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우들에서 우리는, 꿈꾼 이가 자신은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고 <틀림없이 무언가 있을 것 이다. 당신은 그것을 생각해 낼 수 있을 것이다>라는 확신을 심어 주면서 그에 게 강요하여 어떤 대답을 받아 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는 하나의 연상을 떠 올릴 것입니다. 어떤 것이 됐든지 그것은 우리에게는 상관 없습니다. 어떤 특별 한 정보들, 역사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을 그는 특히 쉽게 내놓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건 어쩐지 어저께 일어난 일 같 은데요.>(우리가 잘 알고 있는 그 두개의 <생생한> 꿈에서처럼) 혹은, <그것은 얼마 전에 일어났던 그 일을 생각나게 하는군요.> 이런 예들에서 볼 수 있는 것 처럼, 꿈이 바로 며칠 전의 인상들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는 우리가 처음에 생각 했던 것보다 훨씬 흔한 일이라는 것에 대해 주목하게 됩니다. 마침내 그는 그 꿈에서 시작하여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그 전에 있었던 일들, 결국에 가서는 아주 오랜 과거에 있었던 사건들까지도 기억해 내게 됩니다. 본질적인 점에 있어서 그러나 여러분들의 생각은 맞지 않습니다. <꿈꾼 이의 맨 첫 번째 연상이 바로 우리가 찾고 있던 해답을 가져다 줄 것이라거나 그리로 연결하는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도 자의적인 일이 아닌 지요? 그때의 연상은 오히려 매우 임의적인 것일 수도 있고 찾고 있는 해답과 전혀 동떨어진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기대하는 것은 다만 선생님의 과신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말한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틀린 생각 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전에도 한 번, 여러분의 입장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는 심리적 자유라든가 자의성에 대한 뿌리깊은 신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비과학적인 것이며 정신 생활을 지배하는 결정론의 요구들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포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질문을 받 은 사람에게 다른 것이 아닌, 바로 이런 연상이 떠올랐다고 한다면 그것을 그대 로의 사실로 존중해 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하나의 신념을 밀어내고 다른 신념만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질문을 받은 사람이 생각해 낸 그 연 상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고 불확실한 것도 아니며 우리가 찾고 있는 그것과 아 무런 관련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증명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내 가 최근에 들은 바로는 (내가 그것에 대단한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실험 심리학 쪽에서도 그러한 증명이 제시되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연구하고 있는 이 문제의 의미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 바랍니 다.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꿈의 어떤 요소에 대하여 어떠한 연상이 떠오르 는지를 말해 달라고 할 때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꿈의 단초가 되는 표상을 확 고하게 견지한 채로> 자유로운 연상에 마음을 내맡기라고 요구하곤 합니다. 이 것은 주의력에 대한 매우 특별한 처지를 요구하는 것으로서 심사숙고할 때와는 전혀 다른 상태이며 또한 심사숙고 그 자체를 철저히 배제하는 것이기도 합니 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상태에 쉽게 도달하는 경우도 있으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제대로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믿을 수 없을 정도 로 제대로 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이러한 출발점이 되는 표상을 배제하고 연상의 유형들만을 확정하려고 시도한다면, 이를테면 어떤 고 유 명사라든가 숫자 등은 자유로이 연상해도 좋다고 말할 때는 연상이 자유롭게 전개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상당히 넓어집니다. 이런 경우에 연상은 조금 전과 같은 방법을 사용했을 때와는 달리 훨씬 더 자의적이 되고 예측 불가능한 것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순간 작용되고 있는 중요한 내면적인 입장에 의해 매우 엄격하게 통제 받고 있음이 밝혀집니다. 그때에 작용되는 그 의 내면적인 경향에 대해서 우리가 모르고 있기는 실수 행위에 있어서의 방해하 는 경향성이나 우발적 행위를 일으키는 의향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 나 매한가지입니다. 나와 또 내 뒤의 후학들이나 모두, 아무런 실마리도 주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름이나 숫자를 자유로이 연상하게 하는 그러한 실험을 수없이 반복하였고 그 것들 중 몇몇 개는 출판되기도 했습니다.(이런 주제에 대한 몇 가지 예가 '일상 생활의 정신 병리학'에 실려 있다.) 그때의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단 한 번 떠오른 이름에 대하여 뒤따라오는 연상을 끊임 없이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그러 므로 그것도 더 이상 완전히 자유로운 연상이라고 할 수는 없고 어떤 꿈-요소에 대한 연상과 마찬가지로 일단 어딘가에 일단 어딘가에 속박되어 그에 대한 추진 력이 소진될 때까지 계속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나서 이와 같은 자유로운 이름 연상nameneinfall의 동기와 의미에 대하여 설명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실 험은 항상 동일한 결과를 나타나는데, 피험자의 보고는 종종 매우 풍부한 자료 들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또 그것들은 광범위한 연구를 필요로 합니다. 임의로 떠올려진 숫자에 대한 연상 작용이 아마도 가장 강력한 증거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데, 숨겨진 어떤 목표를 향해 믿을 수 없 을 정도의 확실성을 가지고 돌진해 나가기 때문에 정말 어처구니없이 보일 지경 입니다. 그러한 이름 분석nameanalyse의 한 가지 예를 이제 여러분들에게 보고 해 드리겠습니다. 그것은 다행스럽게도 아주 적은 재료만으로도 가능하기 때문 입니다. 어떤 젊은 남자를 치료하던 도중에 나는 어쩌다가 이 주제에 이르게 되었고, 외관상의 자의성과는 달리 그 피험자의 특성이나 순간적인 상황, 주변 상황과 밀접한 연관성이 없는 이름을 연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그 가 미심쩍어 했으므로 나는 그에게 즉시 그러한 실험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 을 했습니다. 나는 그가 여자들이나 소녀들과 어떤 종류이든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만일 그가 어떤 여자 이름을 떠올리게 된다면 특히나 선택의 여지가 많을 것이라는 말을 해주었습니다. 그는 그 말에 동의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자신에게도 틀림없 이 매우 놀랄 수밖에 없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가 나에게 자신이 사귀던 여자 이름들을 수도 없이 나열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잠시 동안 말없이 가 만 있더니 오직 하나의 이름, 알비네albine만이 떠오를 뿐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었습니다. <매우 이상한 일이로군요. 이 이름에 대해서 당신에게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은 알비네라는 이름을 가진 여성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 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상한 일은, 그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는 알비네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었고 이 이름에 대해서 그 외에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연상해 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이 분석은 실패한 것이라고 단정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미 끝난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연상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이상하 리만큼 흰 피부를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치료중의 대화 가운데 종종 그를 농담 조로 알비노albino(스페인 말로 흰둥이라는 뜻.)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우리는 그 때 그의 성격 구성 요소 중의 여성적인 부분에 대해서 확인하려고 애쓰고 있었 습니다. 그는 따라서 그 스스로가 이미 알비네였던 것이고 그것은 그 당시의 그 에게는 가장 관심을 끄는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문득 떠오르는 멜로디도, 자기 스스로는 깨닫고 있 지 못하지만 그 사람이 몰두할 만한 이유가 있는 어떤 사고의 흐름과 연관을 갖 고 있으며 그에 속하는 것이라는 사실이 중명되고 있습니다. 그 가사라든가 그 것이 생겨난 유래와 멜로디와의 연관성은 곧 쉽게 찾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러나 이러한 주장을 실제로 음악적인 사람들에게까지 적용하기 위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나는 우연하게도 이와 같은 사람들에 대한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멜로디의 음악적인 내용이나 형식이 이러한 연상을 떠올리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좀더 빈도가 많은 것은 첫 번째의 경우입니다. 한 청년이 오펜바흐의 '아름다운 헬레나'에 나오는 <파리스의 노래>의 매우 매혹적인 멜로디에서 한참 동안이나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경우가 있었는데 분석해 본 결과, 그것은 그의 관심 속에서 <이다>와 <헬레나>라는 두 여인이 끊임 없이 비교되면서 경쟁 관계에 있었던 것이 그 이유였다고 밝혀졌습니다.(한때 이다 산의 양치기였다가 헬레나와 도망 을 간 파리스는 경쟁하는 세 여인 사이의 심판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므로 자유로이 떠오른 듯이 보이는 연상이라 할지라도 이와 같이 조건지 워져 있거나 어떠한 관련성 속에 집어 넣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연상들이 어떤 단 한 개의 구속, 즉 출발점을 구성하는 표상에 의하여 반드시 규정되어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도 좋을 것입니다. 실제로 연구해 본 결과, 우리가 출 발점이 되는 표상으로 제시한 그 제약말고도 감정이 수반된 사고의 범위나 관심 권, 즉 콤플렉스komplex라는 제2의 의존성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때 이런 요 인들의 작용에 대해서는 그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는 말하자면 무의 식적인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약을 받고 있는 연상은 정신분석의 역사상 주목할 만한 역할을 한, 교육적으로 유익한 실험적 연구의 대상이었습니다. 분트 학파가 바로 이러한 연상 실험을 주도했습니다. 그 실험에서 피험자는 그에게 주어지는 자극어 reizwort에 대해서 가능한 한 빨리 임의로 떠오르는 반응어reaktion로 대답하라 는 지시를 받습니다. 그때 자극과 반응 사이에 놓여 있는 시간차나 반응으로 주 어진 대답의 성질, 똑같거나 비슷한 실험을 반복했을 때에 생겨나는 어떤 오차 등이 연구의 대상이 됩니다. 블로일러e. bleuler와 융c. g. jung 을 대표로 한 쮜 리히 학파는 연상 실험에서 나타나는 반응에 대한 해명을 제시했는데, 피험자가 내놓은 반응에 대하여 그것에 무언가 눈에 띄는 점이 있을 때 다음의 연상으로 그것을 스스로 해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것은, 이렇게 눈에 띄는 반응이란 피험자의 콤플렉스에 의해서 실험 심리학과 정신분석학 사이에 맨 처음으로 다리를 놓은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설명을 들은 여러분들은, 이지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제는 자유로운 연상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믿어 왔던 것과 같이 자의적인 것이 아니고 미리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겠습니다. 꿈-요소들에 대하여 떠오르는 연상 도 그러하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문제되는 것은 이것 이 아닙니다. 꿈-요소에 대하여 떠오르는 연상은 우리에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바로 그 요소의 어떤 심적 배경에 의해 규정된다고 당신은 주장하셨습니다. 이 점은 그런데 증명되지 않은 듯이 보입니다. 우리는 이미, 꿈-요소에 대한 연상은 꿈꾼 이의 콤플렉스들 중에서 하나에 의해 규정되어 있음을 예상할 수 있었습니 다. 그런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꿈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은 아닙니다. 단지 연상 실험과 마찬가지로 이른바 콤플렉스에 관 한 지식을 우리에게 주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꿈과 무슨 상관이 있다 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의 말이 맞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한 가지 요소를 간과하고 있습 니다. 그것도, 바로 그것 때문에 내가 이러한 설명을 위한 출발점으로 연상 실험 을 선택하지 않았던 그 요소를 말입니다. 이 실험에서는 반응의 결정 요소, 이른 바 자극어가 우리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선택됩니다. 반응은 그때 자극어와 바 로 그것에 의해 일깨어진 피험자의 콤플렉스 간의 매개자가 됩니다. 꿈에 있어 서는 그 자극어가 그 자신은 모르는, 꿈을 꾸는 사람의 정신 생활에서 유래하는 그 무엇인가로 대체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아주 간단히 <콤플렉스의 후예 komplexabkommling>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꿈-요소들에 연결된 계 속적인 연상들도 다른 그 어떤 큼플렉스에 의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요소 자체 의 큼플렉스에 의해 규정되며 이렇게 해서 그것을 밝혀 내는 열쇠가 되어 주리 라고 기대하는 것은 결코 헛된 공상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기대했던 것처럼 실제로도 바로 그러한 경우를 또 하나 제시해 보겠습 니다. 고유 명사를 잊어버리는 것은 원래 꿈-분석traumanalyse에도 이용할 수 있는 매우 훌륭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꿈을 해석하는 경우에서는 두 사 람에게 나누어진 관계가 이 망각의 경우에서는 단지 한 사람에게 모여 있다는 다를 뿐입니다. 내가 그 이름을 알고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확 신이 꿈-분석에서는 베른하임의 실험과 같은 우회로를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었 습니다. 잊혀진,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그 이름은 지금은 접근 불가능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생각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이 가르쳐 줍 니다. 나는 그러나 항상, 잊혀진 이름 대신에 하나의 다른 이름, 혹은 몇 개의 이름을 생각해 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이름이 자동적으로 생각날 때, 그때에야 비로소 이 상황은 꿈-분석의 상황과 명백하게 일치하는 것입니다. 꿈-요소는 그 러나 그 어떤 다른 것, 바로 그것을 내가 모르고 있기 때문에 꿈-분석을 통해서 찾아내려고 하는 원래의 것의 대용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두 가지의 경우의 차 이점은, 이름 망각namenverggessen의 경우에는 내가 그 대용물을 의심할 필요 도 없이 원래의 것이 아니라고 인식할 수 있음에 반하여 꿈-요소의 경우에는 이 러한 인식에 도달하는 것은 매우 힘든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름 망각의 경우에서는 대용물에서부터 잊어버린 원래의 것에 다다르기 위한 길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이 대체물로 나타난 이름에 주의를 집중시키면서 계속적으 로 다른 이름들이 연달아 떠올리게 되면 짧고 긴 어느 정도의 우회로를 지나 잊 혀진 이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때 깨닫게 되는 것은, 자동적으로 떠오른 이름 이나 억지로 환기시킨 이름이나 모두 잊혀진 이름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그 잊혀진 이름에 의해 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분석의 예를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어느 날 나는 리비에라 연안 에 있는, 그 수도가 몬테 크를로인 어떤 나라의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았습 니다. 그것은 몹시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어쩔 수사 없었습니다. 나는 이 나라를 둘러싼 나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생각에 빠져 들었습니다. 루시앙 가 출신인 알버트 공과 그의 결혼, 심해 연구에 대한 그의 열정과 그 밖에도 내가 끄집어 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할 수 없이 숙 고하기를 포기한 나는 그 대신에 어떤 대체 이름ersatznamen을 떠올리려 했습니 다. 곧 여러 개의 이름들이 생각났습니다. 몬테 카를로, 피에몽, 알바니아, 몬테 비데오, 콜리꼬 등등이었습니다. 알바니아 라는 이름이 그 중에서 제일 먼저 눈 에 띄었으나 그것은 다시 몬테네그로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었는데 아마도 흑과 백의 대립 때문이었을 것입니다.(는 <흰색>이라는 뜻의 라틴어, 는 스페인 어, 포르투갈어로 <검은색>이라는 뜻이다.)그러자 이러한 네 개의 이름들이 모두 <몬mon>이라는 동일한 음절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 순간 그 잊어버린 이름을 생각해 냈고 그 이름을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모나코monaco!> 그 대체 이름들은 실제로 잊혀진 이름에서 출발 한 것들로서 처음 4개의 것은 첫 음절인 <몬>에서 왔고, 마지막의 것은 음절 순서와 최종 절차인 <오o>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곁들여서 나는 내가 왜 그 이 름을 생각해 내지 못했던 것인지 그 이유도 알게 되었습니다. 모나코는 뮌헨 munchen의 이탈리아 식 이름으로 뮌헨이라는 그 이름이 방해 작용을 했던 것입 니다. 이 예는 매우 아름다운 것이기는 하지만 너무 단순한 것이 흠입니다. 다른 경 우들에는 첫 번째의 대체 이름에 대하여 대단히 많은 연상들을 떠올려야 하므로 꿈-분석과의 유추 관계는 더욱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나도 역시 그러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외국인이 자기와 함께 이탈리아 포도주를 마시자고 나 를 초대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그는 자신이 잘 마셨다고 기억하고 있었던 그 포도주를 주문하려고 했으나 그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잊어버린 그 이름 대신 여러 개의 다른 이름들을 연상하게 한 결과 나는 헤트비히hedwig라 는 이름의 여성에 대한 생각이 그에게서 그 포도주의 이름을 빼앗아 간 것이라 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가 그 포도주를 처음 맛본 것도 그 헤트비히 라는 여성과의 교제중에 있었던 일이라는 사실도 그에 의해서 확인되었고 이러 한 해명에 따라 잊어버렸던 그 와인의 이름도 생각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는 그 당시에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그 헤트비히하는 이름의 여성은 그 가 별로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는 과거에 속해 있었던 것입니다. 이름 망각의 경우에서 가능한 것은 꿈-해석에 있어서도 성공할 수 있을 것입 니다. 말하자면 대용물에서부터 시작하여 그에 따르는 연상을 통해 감추어진 본 래의 것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름 망각의 경우에 따라 꿈-요소의 연상 들에 관하여 가정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연상이 꿈-요소들에 의해서 뿐만 아 니라 무의식적으로 작용하는 그 요소의 본래 내용에 의해서도 규정된다는 것입 니다. 이렇게 하여 우리는 우리 기법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는 몇 가지의 사실 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곱 번째 강의 외현적 꿈-내용과 잠재적 꿈-사고 신사 숙녀 여러분, 여러분들이 보셨다시피 실수 행위의 연구는 쓸모 없는 일 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의 덕분으로 우리는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그 가정하에) 두 가지의 수확을 얻게 되었는데 그 하나는 꿈-요소에 대한 견해이고 다른 하나는 꿈-해석의 기술입니다. 꿈-요소에 대한 견해는 그것이 본래적인 것 이 아니고, 실수 행위 경우에서의 실수를 하게 만드는 경향성처럼 꿈꾸는 이에 게는 알려져 있지 않은 어떤 다른 것의 대체물, 꿈꾸는 이도 그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로서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다른 것의 대체물이라는 것입니 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를 그러한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는 모든 꿈 전체에 적용 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해 봅니다. 우리의 기술은 이러한 요소들에 대한 자 유 연상을 통해서 다른 대체물들이 형성되어 떠오르게 하는 것인데 그것을 통해 서 우리는 숨겨진 것을 추정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활동성을 높이기 위해서 우리의 전문 용어 체계를 수정할 것을 제안하 고 싶습니다. <숨겨진verborgen>, <접근 불가능한unzuganglich>, <비본래적인 uneigentlich>이라고 말하기보다는 좀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꿈꾸는 이의 의식에는 도달되지 않는dem bewubtsein des traumers unzuganglich>이라 거나 <무의식적인unbewubt>이라고 말하기로 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실수 행 위에서 잊혀진 말이나 방해하는 경향성에 대한 관계를 암시하려고 하는 것인데 즉, <그때에는 무의식적이었던>이라고 표현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함으 로써 이와는 반대로, 꿈-요소 그 자체나 연상을 통해 새로이 생겨난 대체 표상 ersatzorstellung들을 <의식적인bewubt>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 름을 붙인다고 해서 그 어떤 이론적인 구조가 형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의식 적인>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그것을 꼭 들어맞는 표현이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으로 생각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개개의 꿈-요소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꿈 전체에 확대시켜 보면, 꿈이 그 전 체에 있어서 무언가 다른 것, 무의식적인 것의 왜곡된 대체물이라는 사실이 드 러납니다. 그리하려 꿈-해석의 과제는 이러한 무의식적인 것을 찾아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가 꿈-해석의 작업에 임하는 동안 내내 지켜야 만 할 세 가지 중요한 규칙이 도출됩니다. (1) 꿈이 이해하기 쉬운 것이거나, 부조리한 것이거나, 선명한 것이거나, 모호 한 것이나 간에 외관상 갖고 있는 듯이 보이는 꿈의 의미에 대해 신경 쓸 필요 는 없다 왜냐하면 그 어떤 경우에도 그것은 우리가 찾고 있는 그 무의식적인 것 이 아니기 때문이다(이 규칙에 대한 명백한 제한이 곧 필요하게 된다.) (2) 각각의 모든 요소에 대하여 대체 표상이 떠올려지도록 하는 데에만 작업 을 한정시킨다. 그것이 적합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검사할 필요도 없고 곰 곰히 따져 볼 필요도 없다. 그것이 얼마나 꿈-요소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지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가 없다. (3) 이미 기술한 실험에서 모나코라는 잊혀진 단어를 찾아낼 때처럼 찾아내려 고 하는 숨겨진 무의식이 그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려야만 한다. 우리는 이제, 꿈을 얼마나 많이 기억해 내든지, 혹은 적게 기억해 내든지, 그 것이 얼마나 그 꿈에 부합되는지, 혹은 불확실한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 해하게 되었습니다. 기억해 낸 꿈은 결코 본래적인 꿈이 아니며, 다른 대체 표상 들을 환기하게 됨으로써 본래적인 것에 다가갈 수 있게 해주고 꿈의 무의식에 대해 알 수 있게 해주는, 본래 것의 왜곡된 대체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 리의 기억이 충실치 못한 것일 때, 그것은 단순히 이 대체물에 잇따른 왜곡을 가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때의 왜곡은 그러나 어떤 동기와도 무관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꿈에 대해서나 다른 사람의 꿈에 대해서 이러한 해석 작업을 해볼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꿈을 해석하면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 으며 그 과정은 더욱 강력한 논거를 제공한다는 결과가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자기 자신에 대해 실험을 해보면 무언가가 그 작업에 저항하고 있다는 것을 느 끼게 됩니다. 많은 연상들이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모든 것을 유효한 것 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그 연상들을 검토해 보고 선택하고자 하는 영향력 이 발휘됩니다. 어떤 하나의 연상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야, 그건 여기 에 맞지 않아. 여기에 속하는 것이 아니야.> 또 다른 것에 대해서는, <정말 어처 구니없군> 제3의 연상에 대해서는, <이건 너무 부차적인 문제야>라고 말하면서 제쳐놓기 일쑤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연상들이 미처 분명해지기도 전에 그러한 이의들을 추가함으로써 그것들을 질식하게 하고 드디어는 멀리 추방해 버리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는 출발의 표상, 즉 꿈-요소 그 자체에 너무 심하게 의존하고, 또 한편으로는 선택적 작업을 통하여 자유 연상의 결과 를 방해하는 것입니다. 꿈을 해석할 때 혼자가 아닌 경우,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꿈을 해석하게 하여보면, 이렇게 허락되지 않은 선택 작업을 하기 위하 여 사용하는 다른 동기가 무엇인지 선명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흔히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합니다. <아니야, 이 연상은 너무 불쾌해. 나는 그것 을 입 밖에서 내서 말하고 싶지도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어.> 이러한 반론적 이의들은 분명히 우리 작업의 성공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사람 들은 이러한 것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꿈을 해석 할 때는 그것들에 굴 복하지 않겠다는 굳은 결심을 함으로써 피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꿈의 경 우에는 떠오르는 연상이 앞서 말한 네 가지의 이의, 즉 그것은 너무나 중요치 않다거나, 터무니없다, 여기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혹은 얘기하기에는 너무 창 피하다는 등의 거부에 부닥치게 되더라도 그에게 떠오른 어떤 연상도 보고에서 제외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뜨릴 수 없는 원칙으로 정해 놓음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규칙을 지키겠노라고 약속을 합니다. 그러나 유사시에 는 그가 얼마나 엉터리로 이 규칙을 지키는가를 보면서 사람들은 때때로 몹시 분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는, 권위를 지니고 확신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 러한 자유 연상의 정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라고 설명할 것입니다. 어쩌면 또, 우선 그에게 책을 읽게 함으로써 이론적으로 납득하게 하거나 강의 에 참석하도록 해서 그가 자유 연상에 대한 우리의 견해를 지지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을 확실하게 납득하 고 있을 그 자신이 자기의 꿈을 해석할 때에 있어서조차 어떤 연상에 대해서 소 위 비판적인 이의가 떠오르기도 하면서 나중에 가서야, 다시 말해 두 번째의 검 토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이의를 배제시키곤 한다는 것을 유의해 보면 그러한 계 획은 전혀 쓸데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꿈을 꾸는 사람의 이러한 불복종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기보다는 그로부터 어 떤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이러한 경험을 사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그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중요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꿈- 해석의 작업은 그것에 대항하는 어떤 <저항widerstand>에 직면해서 수행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때 그 저항의 표현이란 다름 아닌 저 비판적인 반론들 인 것입니다. 이러한 저항은 꿈꾸는 이의 이론적인 확신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네, 우리는 이 이상의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한 비판적 반론들은 결코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그렇게도 억누르고 싶 어했던 이 연상은 예외 없이 가장 중요한 것이며 무의식의 발견에 가장 결정적 인 것이라는 사실이 판명됩니다. 어떤 연상이 그러한 반론들과 같이 동반하여 나타날 때는 그것이야말로 대단히 중대한 경우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저항은 아주 새로운 어떤 것으로서 그 전제에 포함되어 있지는 않지만 우리가 우리의 전제를 근거로 하여 찾아낸 현상입니다. 이 새로운 요인이 우리 의 연구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은 그리 기분 좋은 일은 아닙니다. 우리는 벌써 그것이 우리의 연구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주리라는 것을 예감할 수 있습 니다. 그것은 꿈을 둘러싼 우리의 모든 노력을 그대로 멈춰 서게 할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꿈처럼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문제에다 거기에 덧붙여서 매끄러운 기 술 대신 그런 어려움이라니!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어려움이야말로 우리 를 자극하고, 그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게 만듭니다. 꿈-요소를 의미하는 대체물에서 숨겨진 무의식으로 다가가려고 할 때마다 우리 는 저항에 부딪치곤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대체물 뒤에는 무언가 중요한 것이 숨겨져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무언가를 은폐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이 어려움이란 그렇지 않다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어떤 아이가 자기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모여 주지 않으려고 꼭 움켜 쥔 손을 펴려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그 아이가 무언가 옳지 않은 것, 그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저항이라는 역동적인 개념을 우리의 과제 속에 끌어 넣으려 하고 있는 이 순간, 우리는 이 계기가 양적 인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 습니다. 그러므로 더 큰, 혹은 더 작은 저항이 존재할 수 있으며 작업을 하는 도 중 이러한 차이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사태에 우리는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해서 꿈을 해석하는 작업중에 겪게 될 또 다른 경험과 이 저항의 개념을 일치시킬 수 있게 됩니다. 다른 때 같으면 수없이 많은 연사의 고리들이 필요하고 비관적 이의들을 여러 고비 넘겨야만 하는 것과는 달리 때로 는 단 한 개나 몇몇 개의 연상만을 가지고도 이러한 꿈-요소에서 그의 무의식에 도달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바로 저항의 여러 가지 크 기와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는데 아마도 이 견해는 맞는 얘기일 것입니다. 저항이 작을 때는 무의식에서 생겨난 대체물도 그곳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진 곳에 있지 않을 것이고, 반면에 꽤 커다란 저항이 가로놓여 있을 경우 무의식의 왜곡도 더 커질 것이며 그리하여 대체물에서 무의식으로 이르기까지의 거리도 길어집니다. 이제는 어떤 꿈이든지 하나를 선택해서 우리의 기법을 적용해 보고, 우리가 그것에 걸었던 기대가 충족되는지 아닌지 시험해 볼 때인 것 같습니다. 네, 그런 데 그렇게 하기 위하여 어떤 꿈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이러한 결정을 내 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여러분은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고 나는 또, 여러분들에게 어려움이 어디에 놓여 있는 것인가를 이해시킬 수도 없는 형 편입니다. 전체적으로 보아서 왜곡이 많지 않은 꿈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 러한 꿈을 가지고 시작하는 것이 가장 좋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이미 보고 해 드린 바와 같은 두 개의 이해하기 쉽고 혼란스럽지 않은 꿈이 그것일까요?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산입니다. 연구한 결과에 의하면 이 꿈들은 대단히 많이 왜곡된 꿈이라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내가 이러한 특별한 조건들을 무시하고 임의로 아무 꿈이나 고른다면 여러분들은 아마도 매우 실망하게 되실 것입니다. 각각의 꿈-요소에 대하여 떠오른 그 수많은 연상들을 일일이 관찰하 고 기록해야 한다면 꿈-해석 작업은 어떻게 전개될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 되 어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꿈을 기록해 놓고 또 그 꿈에 대해 생겨난 연상들 의 기록과 비교해 보면 원래 꿈-내용의 몇 배나 되는 분량이 나올 것입니다. 그 러므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은 우리에게 적어도 무엇인가를 말해 주고 있거나 확 인해 줄 수 있는 그러한 몇 개의 짧은 꿈을 분석용으로 선택하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별로 많이 왜곡되어 있지 않은 꿈을 어디에서 찾아내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우리의 경험으로도 알 수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이 방법을 선택하는 수밖에 는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우리의 앞 길에 놓여 있는, 또 하나의 다른 쉬운 방법을 알고 있 습니다. 꿈 전체의 해석을 시도하는 대신에 각각의 꿈-요소들에 한정하여 여러 개의 예를 비교하면서 우리의 기법을 적용시켜서 어떠한 해명이 나오게 되는지 를 추적해 보는 것입니다. (a) 어떤 여인은 자신이 어렸을 적에 <하느님이 종이로 된 고깔 모자를 머리 에 쓰고 있는> 꿈을 자주 꾸었노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꿈을 그 여자 의 도움 없이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정말로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꿈 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의 설명을 듣고 나면 그것은 더 이상 터무니없는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어린 시절에 그 여자가 식탁에 앉을 때면 어른들 은 그 여자의 머리 위에 항상 그러한 모양의 모자를 씌워 주곤 했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다른 형제 자매의 접시 위에 혹시나 더 많은 양의 음식이 있는 것이나 아닌지 흘끗흘끗 훔쳐보는 것을 억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 모자는 눈가리개의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의 역사적인 정보가 큰 어려움 없이 주어진 것입니다. 이 요소와 아울러 그 짧은 꿈 전체를 해석하 는 것은 그 여인의 다른 연상의 도움으로 쉽게 해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셔서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보신다고 들 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또 <그 꿈은 당연히 내가 하느님처럼 모 든 것을 알고 있고 모든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할 뿐이겠지요. 사람들이 아무리 그것을 방해한다 고하더라도 말이죠>라고 말했습니다. 이 실례는 어쩌면 너무 간단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b) 회의적인 성향의 어떤 환자가 긴 꿈을 꾸었는데 그 꿈속에서 그녀에게 어 떤 사람들이 <재치>에 관해 쓴 나의 책을 얘기해 주면서 그것을 매우 칭찬했다 고 합니다.('농담과 무의식의 관계'(프로이트 전집 8, 열린책들) 참조.)그리고나서 어떤 <운하>에 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운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는 다른 책인지도 모르겠군요. 아니면 또 운하에 관계된 것일지도 모르고요....... 어 쨌든 잘 모르겠어요....... 온통 흐릿할 뿐이에요.> 이제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운하kanal>라는 꿈-요소가 너무 불분명해서 해석 할 수 없다고 믿고 싶어 할 것입니다. 어려울 것이라는 추측과 관련해서 여러분 은 제대로 짚은 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해석하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다른 이유 때문에 그것이 불분명한 것입니다. 운 하라는 말에 대해서 그렇게 꿈을 꾼 환자는 아무것도 연상해 낼 수 없었습니다. 나도 물론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에, 실제로는 하 루가 지난 뒤에 <어쩌면> 운하와 관계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연상이 떠올랐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들은 적이 있다는 일종의 <기지>였습니다. 도버 해협에서 칼레로 가는 배 위에서 어떤 유명한 저술가가 한 영국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영국인이 무슨 말을 하던 도중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즉, <장엄함과 우스꽝스러움 사이에는 한 발자국 정도의 차이밖에 없 다du sublime au ridicule il n'y a qu'un pas>라는 말을 인용했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 저술가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칼레에서부터 겨우 한 발자 국이지요oui, le pas de calais.> 그는 이와 같은 말로 프랑스는 장엄하고 영국은 보잘것없다는 생각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는 실제로도 해협을 뜻하는 것으로서 말하자면 영불 해협armelkanal을 의미하고 프 랑스 어로는 의 뜻이 됩니다. 이러한 연상이 그 꿈과 상관이 있다는 것이냐고 여러분은 의아해 하시겠지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것은 정말 로 수수께끼 같은 그 꿈-요소에 대한 해답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 여러 분들은 이러한 기지가 꿈을 꾸기 이전에 이미 <해협>이라는 요소에 무의식으로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의심하려고 하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그것이 나중에 합류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 연상은 그녀가 어 쩔 수 없이 감탄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 배후에 숨기고 있는 회의를 확인시켜 주 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의 저항은 아마도 다음 두 가지에 대한 원인으로 작 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연상이 그녀에게 그처럼 주저하면서 떠올 랐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에 해당하는 꿈-요소가 그렇게 불확실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들은 꿈-요소와 그 무의식의 관계에 대해 주목해 보십시오. 꿈-요소는 이러한 무의식의 한 조각과 같은 것입니다. 마치도 그것의 암시와도 같습니다. 그것을 따로 분리해서 보았을 때는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변해 버립니다. (c) 어떤 환자가 꽤 길다고 할 수 있는 관련성 속에서 다음과 같은 꿈을 꾸었 습니다. <특별한 모양을 한 식탁tisch을 둘러싸고 우리 식구들이 여럿이 함께 앉 아 있었어요.>이 식탁에 대해서 그가 떠올린 연상은 언젠가 어떤 가정을 방문했 을 때 그가 이와 똑같은 가구를 본 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연 상을 이어 나갔습니다. <그 집에는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어떤 특별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지요.> 잠시 후 그는 또 덧붙였습니다. <실은 나와 나의 아버지 사이에도 그러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식탁이 그 꿈속에 등장하게 된 것은 그러니까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 식탁이 이 꿈속에 등장하게 된 것은 그 러니까 이러한 평행 관계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이 꿈을 꾼 사람은 꿈-해석의 여러 가지 필요 사항들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친숙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면 식탁의 형태와 같은 그렇게 사소 한 문제를 가지고 연구 대상으로 삼는 일에 대해서 불쾌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릅 니다. 우리는 꿈에 나타난 어떤 것도 우연적인 것이나 아무 상관 없는 것으로 보지 않으며 이렇게 하찮은 것, 별다른 동기도 없어 보이는 그렇게 작은 일에 대한 것까지도 설명할 수 있는 열쇠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우리 사이도 그들의 사이와 같다>라는 생각을 식탁이라는 물건을 선택함으로써 표현하고 있는 그러 한 꿈-작업에 대해서도 여러분들은 매우 놀라워하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 방문했던 그 가족의 성이 티쉴러 tischer(tischer는 원래 책상tisch을 만드는 사람을 뜻함.)였다는 사실을 듣게 되면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꿈꾼 사람은 자기의 가족들을 바로 이 식탁의 주위에 앉게 함으로써 그들도 역시 티 쉴러 가족들과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꿈-해석 을 보고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비밀이 밝혀진다는 사실도 주의해야 합니 다. 어떤 사례를 선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왜 그렇게 어려운 문제인지를 여러 분들은 비로소 깨닫게 되셨을 것입니다. 나는 이 사례를 다른 것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지켜지는 하나의 비밀은 그 대신에 다른 것을 희생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제는 이미 오래 전에 사용할 수도 있었던 두 개의 용어를 도입해야 할 시기 인 것 같습니다. 꿈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외현적 꿈-내용manifester trauminhalt이라고 부르고, 떠오른 연상을 추적하여 도달하게 되는, 그 안에 숨 겨져 있는 것을 잠재적 꿈-사고latenter traumgedanke로 부르기로 합시다. 외현 적 꿈-내용과 잠재적 꿈-사고 사이의 관계에 주목해서 그것들이 이러한 사례에 서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하는 것을 살피려고 합니다. 매우 다양한 여러 가지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a)와 (b)의 사례에 서 외현적 요소는 잠재적 사고 의 구성 요소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작은 조각에 불과합니다. 무의 식적인 꿈-사고 속에 있는 커다란 정신의 합성물에서 작은 조각 하나, 그것들의 한 단편, 또 어떤 경우에는 그것에 대한 암시, 암호 같은 것, 전보문에 씌어진 것과 같은 축약된 언어들이 외현적 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b)의 사례에서 훌 륭하게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해석 작업은 이러한 조각이나 암시들을 전체적인 형태로 완성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왜곡의 한 가지 방법은 (이렇게 하 는 것이 바로 꿈-작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조각이나 암시를 통해 그것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c)의 예에서는 그 외에도 또 다른 관계가 눈에 띄는데 그것은 다음의 사례들에서 더 깨끗하고 명료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d) 한 남자가 꿈속에서 <어떤(자신이 잘 아는) 여자를 침대 위에서 끌어내는 hervorziehen>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처음에 떠오른 연상으로 이 꿈-요소의 의 미를 알아챌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이 여자를 선호한다er gibt dieser dame vorzug는 의미였습니다.(에서 으로 의미가 발전되어 나간 것이다.) (e) 다른 한 남자는 <자신의 형이 상자 속에 들어 있는sein bruder stecke in einem kasten> 꿈을 꾸었습니다. 첫 번째의 연상은 이 상자를 장롱schrank과 대 치했습니다. 두 번째의 연상은 곧 그 의미를 알게 해주었습니다. 형은 <긴축 생 활schrankt sich ein>을 하고 있다는 의미였습니다.(kasten(상자), schank(장롱), sich ein schranken(긴축 생활하다) 등으로 의미가 발전되어 나감.) (f) 또 어떤 사람은 <산을 올랐는데 그곳에서 상당히 먼 곳까지의 경치 aussicht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꿈을 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은 아주 합리 적인 꿈으로 보이므로 해석이고 뭐고가 필요한 것 같지 않고 그저 그 꿈이 어떤 추억과 관련되어 있으며 어떤 동기에서 회상되었는가를 알아보면 될 것이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이 꿈은 다른 혼란스러운 꿈 과 마찬가지로 해석 작업이 꼭 필요한 꿈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사 람은 등산에 관한 연상을 하나도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단지 자신의 지기 중 한 사람이 지구 곳곳의 소식을 알리는 신문 '룬트샤우rundschau'를 발행하고 있 음을 생각해 냈습니다. 그러니까 잠재적 꿈-사고는 여기서 꿈꾼 이와 <전망자 rundschauer>를 동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여기서 외현적 꿈-요소와 잠재적인 꿈-요소 사이의 새로운 관계 유 형을 보게 됩니다. 전자는 후자의 왜곡이라기보다는 후자의 표현인 것이며 어원 관계에서 유래하여 발전되어 가는 조형적이고 구체적인 형상화라고 할 수 있습 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 때문에 또 다른 왜곡이 발생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그 단어를 보면서 그것이 어떤 구체적인 그림에서 유래된 것인지를 까마득히 잊고 그것이 다시 그림으로 대체되었을 때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외현적 꿈이 주로 시간적인 그림으로 구성되며 생각이나 말로 구성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종류의 관계가 꿈의 형상에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밖에도 또 알 수 있는 사실은 이러한 방식으로 수많은 추 상적 생각들이 외현적 꿈속에서 은폐의 목적으로 사용될 대체 형상을 갖게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림 수수께끼를 만들어 내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그런데 왜 특정한 형태로 나타나는 재담의 모습을 취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문 제는 여기서는 다룰 필요가 없는 것으로서 또 다른 문제입니다. 외현적 요소와 잠재적 요소 사이 관계의 네 번째 형태는 여러분들이 그 기술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될 때까지 아직은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이러한 관계의 여러 형태들을 모두 열거하지 않은 것이 될 테지만 우리의 목적 에는 이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꿈 전체의 해석을 감행해 볼 만한 용기를 갖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그 과제를 충분히 감당해 낼 준비가 되어 있는지 한 번 시험해 봅시다. 물론 매우 해석하기 힘든 경우는 제외하겠지만 그래도 꿈의 여러 가지 특성들을 잘 보여 주고 있는 것을 골라 봅시다. 젊지만 결혼한 지는 꽤 오래된 부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나는 남편과 함께 극장에 앉아 있었지요. 관람석의 한 편은 완전히 비어 있었어요. 남편이 내게 말 하기를 엘리제 l과 그녀의 약혼자도 함께 오고 싶어했지만 1플로린 50크로이체 로는 나쁜 좌석표 3장만을 살 수 있을 뿐이었고 그들은 그 좌석표를 살 수는 없 었다는 것이었어요. 나는 그건 그리 불행한 일은 아니라고 대답했어요.> 이 부인이 우리에게 들려준 첫 번째 이야기는 외현적 꿈-내용 속에 있는, 이 꿈을 꾸게 만든 동기가 바로 그와 똑같은 사건에서 출발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 다. 그녀의 남편은 실제로 그녀와 비슷한 동갑내기인 엘리제 l이 약혼을 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꿈은 이러한 보고에 대한 반응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전날의 어떤 사건이 그 꿈을 꾸게 만든 요인임을 증명할 수 있는 꿈들이 많다는 것과 또 그러한 사실을 꿈을 꾼 사람에게서 이끌어내는 것도 그리 어렵 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녀는 잠재적 꿈의 다른 요소들에 대한 그러한 종류 정보들을 그 밖에도 여러 개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관람석의 다른 한 편이 비어 있었다는 식의 사소한 이야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그것은 한 주 전의 실제 사건에 대한 암시였습니다. 그녀는 어떤 연극 공연을 보러 가기로 마 음먹고 <미리> 예매를 하러 갔는데 너무 일찍 갔기 때문에 예매 수수료를 물어 야 했습니다. 그녀가 극장에 가서 보니 그녀의 조바심이 얼마나 불필요한 것인 가를 알려 주듯이 <한쪽 편의 좌석이 거의 비어 있다시피 했습니다.> 그녀가 공연 당일날 직접 표를 샀더라도 충분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의 이러한 조바심을 마음껏 비웃어 댔습니다. 1플로린 50크로이체 어디에 연유한 것일까요? 그것은 그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전혀 다른 연관성 속에서, 그러 나 어쨌든 그 전날의 사건을 암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시누이가 그녀의 남편에게 선물로 150플로린을 받고는 그 즉시로 보석상으로 달려가서 어떤 보석 하나를 사는데 몽땅 써버렸던 것입니다. 또 3이란 숫자는? 그에 대해서 그녀는 아무것도 생각해 낼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 신부인 엘리제 l이 결혼한 지 10년 이나 돈 그녀보다 겨우 석 달 어리다는 사실을 유효한 연상으로 받아들일 수밖 에 없었습니다. 아니면 두 사람이 가기 위해서 3장의 표를 사려고 했다는 사실 을 고려해야 할까요? 그녀는 이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모 든 연상과 정보를 거부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녀는 얼마 되지 않는 연상 속에서도 많은 재료들을 제공했는데 그것만을 가 지고도 잠재적 꿈-사고를 추론해 낼 수 있었습니다. 꿈에 대한 그녀의 연상 가 운데 많은 곳에서 시간적 규정이 나타나는 것이 눈에 띄었는데 그것이 그녀가 준 재료 중의 여러 부분에서 공통점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극장에 들 어갈 표를 <너무 일찍>조달하고 <성급하게> 샀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시누이도 그와 비슷하게 마치도 <늦으면 큰일이나 난다는 듯이> 보석 하나를 손에 넣기 위해 보석상에게 돈을 건네주는 데 <서둘렀습니 다>. <너무 일찍>이라든가 <성급하게>라고 강조된 말들에다가 꿈을 꾸게 만든 요인인 소식, 즉 자기보다 겨우 석 달 정도 어린 자기 친구가 이제 아주 괜찮은 남자와 결혼하게 되리라는 것, 또 시누이에게 <그렇게 서두를 이유가 어디 있 어>라고 비난하듯 하는 태도가 겹쳐지면서 저절로 잠재적인 꿈-사고가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때 외현적 꿈은 몹시도 왜곡된 대체 물로 표현됩니다. <그렇게 결혼을 서둘렀던 것은 아무래도 바보 같은 짓이었어요. 엘리제를 보 니까 좀더 늦게 결혼을 해도 괜찮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군요>(성급함은 표 를 살 때의 그녀의 행동과 보석을 살 때의 그녀 시누이의 경우에서 잘 표현되어 있고 결혼은 그 대체물로서 극장에 가는 행위로 묘사되어 있음.) 이것이 바로 그 꿈속에 나타난 주요 생각일 것입니다. 이 생각을 계속적으로 진행시켜 나갈 수 는 있겠지만 그렇게 확실하지는 않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는 그 부인의 진술을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만한 돈이라면 그것보다 백 배나 더 좋은 것을 살 수 있을텐데>(150 플로린은 1플로린 50크로이체의 백 배 이다.)라는 말은, 만일 그 돈을 지참금으로 삼는다면 그 지참금으로 남편을 살 수도 있었다는 뜻이 됩니다. 여기서 그 보석과 나쁜 좌석표는 남편의 대체물입 니다. <3장의 표>라는 요소를 남편과 관계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면 더 좋겠지만 거기까지는 우리의 이해가 미치지 못합니다.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 꿈이 그녀가 자신의 남편을 <별 볼일 없게 평가하고 있다>는 것과 <그렇게 빨리 결혼해 버린 것>에 대한 후회를 표현하고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최초의 꿈-해석의 성과에 대해 만족스러워하기 보다는 오히려 더 놀라움과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현재 통제하기에는 한 꺼번에 너무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밀어닥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꿈-해석 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결코 끝이 없다는 것을 여러분들은 느끼셨을 것입니다. 확실히 새로운 통찰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그 가운데서 골라 봅시다. 첫째로, 잠재적 꿈-사고에서 주요 강조점이 성급함이라는 요소에 내려지고 있 는 반면 외현적 꿈에서는 그에 대한 어떤 것도 눈에 뛰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한 점입니다. 분석을 해보지 않았다면 이 요소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예 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중요점, 무의식적인 생각의 중심 내 용은 외현적 꿈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전체적인 꿈의 인상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둘째로, 꿈속에서는 1플로린 50크로이 체에 3장의 표와 같은 무의미해 보이는 결합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꿈-사고에서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그렇게 빨리 결혼하는 것은)>이라는 문장을 이끌어 냅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는 이 생각이 외현적 꿈에서는 불합리한 요소를 끌어 넣음으로써 표현된다는 점을 부정할 수 있을 까요? 셋째로, 그 둘 을 비교해 봄으로써 알게 되는 사실은, 잠재적인 꿈-요소와 외현적인 요소 간의 관계는 단순한 것이 결코 아니며 외현적 요소가 항상 잠재적 요소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양 진영 사이의 집단적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 다. 그 속에서 하나의 요소는 몇 개의 잠재적 요소에 의해 대체되거나 하나의 잠재적 요소는 몇 개의 외현적 요소에 의해 대체되는 것입니다. 그 꿈의 의미와 꿈을 꾼 부인의 꿈에 대한 관계를 생각해 보면 마찬가지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내린 해석에 대해 동의했지만 자신도 그것에 대해서 놀라워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을 그렇게 대단치 않게 평가하고 있 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며 왜 그렇게 보고 있는 것인지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했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우리 는 아직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욱 많은 지 도를 받고 많은 준비를 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덟 번째 강의 어린이-꿈 신사 숙녀 여러분, 우리는 지금 그 동안 너무 빨리 달려온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게 됩니다. 조금만 뒤로 너무 물러나 봅시다. 꿈-해석의 어려움 들을 우리가 개발해 낸 정신분석적인 기술로 제어하기 위한 마지막 실험을 시도하기 전에 우리는, 가능하다면 왜곡이 일어나지 않은 꿈, 혹은 왜곡이 일어났다 하더 라도 아주 조금밖에는 일어나지 않은 꿈을 대상으로 우회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되리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게 할 경우 다시금 우리는 우리 인식 의 발달사적 순서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꿈-해석의 기술을 철저하게 적용하고 왜곡된 꿈-분석을 완전히 마친 후 라야만 그러한 왜곡되지 않은 꿈의 존재를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찾고 있는 꿈은 어린이-꿈kindertraume에서 발견됩니다.('꿈의 해석'에 서 이러한 예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들은 짧고 명료하며 일관성이 있을 뿐 아니라 이해하기 쉬우며 애매모호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꿈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린이-꿈들이 모두 이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꿈-왜곡traumentstellung은 매우 이른 유년기에서부터 시작되며 다섯 살부터 여덟 살까지의 어린이-꿈이 이미 훗날의 꿈의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는 사실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정신적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시기를 4, 5 세까지로 한정시키면 유아적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는 특징을 보여주는 그러한 일련의 꿈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조금 더 나이를 먹은 어린이의 경우에서는 그 러한 꿈들은 아주 드문드문 나타납니다. 네, 성인들에게 있어서도 어떤 조건에서 는 전형적으로 유아적인 꿈이라고 할 만한 꿈들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린이-꿈들에서 우리는 매우 쉽고도 확실하게 꿈의 본질에 대한 열쇠 를 얻어낼 수 있는데 그것들이 결정적인 것이며 일반적으로도 유효한 것으로 밝 혀지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1) 이러한 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분석이나 어떠한 기술의 적용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에 대하여 이것 저것 물어 볼 필요조차 없습니다. 그러나 아이의 생활을 알 수 있는 어느 정도의 이야기는 주 어져야 합니다. 거기에는 언제나 우리에게 그 꿈을 설명해 주는 하루 전의 체험 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꿈은 낮 동안의 체험에 대한 수면 중의 정신 생활의 반 응입니다. 몇 가지의 예를 들어 보면서 더 발전된 결론을 이끌어 내 보도록 합시다. (a) 22개월된 사내아이가 축하 인사로 버찌가 가득 든 바구니를 선물해야 했 습니다. 어른들이 그에게 그 중에서 얼마만큼을 주겠노라는 약속을 해 주었음에 도 불구하고 그 아이는 그 일을 아주 마지못해 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아이는 <헤르만이 그 버찌를 다 먹어 버렸어>(he(r)mann은 헤르만이라는 이름 이외에 도 그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라며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b) 세 살 3개월된 여자아이가 난생 처음으로 호수 위에서 배를 타게 되었습 니다. 내릴 때가 되자 아이는 그 보트를 떠나지 않으려고 하면서 엉엉 울었습니 다. 아이의 생각으로는 배를 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난 지난 밤에 호수에서 배를 탔다>고 아이가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아이가 그 배에 탔던 시간이 어제보다 훨씬 길었으리라고 추측해도 좋을 것입니 다. (c) 다섯 살 3개월인 남자아이가 할슈타트 근처에 있는 에숴른탈로 소풍을 가 는데 따라갔습니다. 할슈타트가 다흐슈타인 산의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고 들은 적이 있는 아이는 이 산에 대해 매우 큰 관심을 나타냈습니다. 아우스제에 있는 집에서는 다흐슈타인이 잘 보였고 망원경으로는 그 산 정상 위에 있는 시모시 산장까지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여러 번 망원경으로 그 시모시 산장을 바 라보려는 시도를 반복했는데 실제로 그것을 볼 수 있었는지 어떤 지는 알 수 없 었습니다. 아이는 기대에 가득 차서 명랑한 기분으로 소풍길에 나섰습니다. 새로 운 산이 시야에 들어올 때마다 아이는 <저것이 바로 그 다흐슈타인 산이에요?> 라고 물었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을 연달아 듣게 되자 아이는 기분이 언짢아져서 나중에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폭포까지 올라가는 작은 등산도 싫다고 하며 따라나서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너무 지쳐 버 린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이 되자 아이는 아주 행복 한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밤에 시모니 산장에 가 있는 꿈을 꾸 었어요.> 그는 바로 이 기대감으로 소풍에 따라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자세한 것을 물어 보니 그 산에 가려면 6시간 동안이나 산을 올라가야 한다는 말을 예 전에 들은 적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 개의 꿈들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정보들을 제시해 줄 것입니다. (2) 이 어린이-꿈들은 무의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해하기 쉽고 근 거 있는 심리적 행위>인 것입니다. 예전에 내가 여러분들에게 소개한 적이 있는 꿈에 대한 의학적 판단이 기억나십니까? 음악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열 개 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과 같다고 한 비유말입니다. 지금 소개 된 어린이-꿈이 이러한 견해와 얼마나 날카롭게 모순되는지는 여러분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성인들이 잠들어 있을 때 그저 경련과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것과 비교하면 어린이들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완전한 정신적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특이하지 않습니까? 또한 어린이들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깊은 잠을 잔다는 사실은 근거가 충분한 이야기입니다. (3) 이 꿈들은 왜곡된 꿈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해석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는 외현적 꿈과 잠재적 꿈이 일치합니다. 꿈-왜곡은 그러므로 꿈의 본질 에 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을 듣고 가슴 위에 얹혀 있던 돌 덩 어리가 내려간 듯한 기분이 들 것입니다. 그렇지만 더욱 세밀히 관찰해 보면 이 꿈에도 어느 정도의 꿈-왜곡, 외현적 꿈과 잠재적 꿈과의 사이에 있는 약간의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4) 어린이 꿈은 아쉬움, 동경, 채워지지 않은 소망 등을 남겨 놓은 낮 동안의 체험에 대한 반응입니다. <꿈은 이러한 소원들을 직접적으로 숨김 없이 드러내 어 충족시켜 줍니다.> 꿈을 방해하고 자극하는 외적 내적 자극들의 역할에 대해 우리가 지난 번에 탐구했던 내용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에 대한 매우 완전한 사실들만을 알게 되었지만 그러한 방식으로는 겨우 몇몇 개의 꿈들만을 설명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앞서 예를 든 어린이-꿈에서는 그러한 육체적 자극 들의 영향을 암시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점에서 틀렸다 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꿈들은 너무나 이해하기 쉽고 파악하기 쉬운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꿈은 자극에서 유래한다>는 우리의 주장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신체적인 자극 외에도 정신적인 자극이 잠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왜 잊어버리게 됐는지 스스로에게 자문하면 됩 니다. 이러한 정신적인 자극이야말로 성인들의 수면 장애를 일으키는 가장 일반 적인 원인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그것은 외부에 대한 관심을 끊는 것과 같은 잠이 들려 할 때 필요한 정신 상태를 교란함으로써 수면 을 방해합니다. 성인은 일상 생활을 중단하고 싶어하지 않으며 하고 있던 일은 계속하고자 합 니다. 그래서 쉽게 잠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수면을 방해하는 그러한 자극, 심리 적 자극은 어린이에게는 충족되지 않은 소망으로서 아이는 그것에 대해 꿈으로 반응하게 됩니다. (5) 여기서 우리는 가장 빠른 지름길을 통하여 꿈-기능traumfunktion에 대한 해명을 얻게 됩니다. 심리적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의 꿈은 이러한 자극을 처 리하는 기능을 가지게 되며 그렇게 해서 자극은 제거되고 수면은 계속됩니다. 꿈을 통한 이러한 처리가 어떻게 역동적으로 이루어지는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 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흔히 그렇게 생각되는 것처럼 <꿈이 수면 방해자가 아 니라는 것, 수면의 수호자이며 수면 장애의 제거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습니 다. 꿈이 없다면 더 잘 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잘못 된 것입니다. 실제로는 꿈의 도움이 없다면 우리는 전혀 잠들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라도 푹 잘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덕분입니다. 꿈이 우 리에게 약간 방해가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은 소음을 냄으로써 우리 를 깨우려고 하는 안면 방해자를 쫓아 버리기 위해 야간 파수꾼이 어느 정도의 소음을 낼 수밖에 없는 것과 같습니다. (6) 소원이 꿈을 유발시키는 것이며 이러한 소원 성취가 꿈-내용을 구성한다 는 것이 꿈의 주요 성격입니다. 꿈의 또 다른 불변성은 꿈이 단순히 어떤 생각 을 표현해 낼 뿐만이 아니라 환각적 체험의 형태로 이러한 소원이 성취된 것으 로 표현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호수로 배를 타고 나가고 싶어>라는 것이 꿈을 불러일으킨 소원이고 그 꿈 자체는 <나는 호수로 배를 타고 나갔어>라는 내용 을 갖게 됩니다. 잠재적인 꿈과 외현적 꿈사이의 차이, 잠재적 꿈-사고의 왜곡은 이러한 단순한 어린이-꿈에서도 존재합니다. 다시 말해 <생각을 체험으로 바꾸 는 것>입니다. 꿈을 해석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이렇게 변화된 부분을 되돌리 는 것입니다. 만일 이것이 꿈의 일반적인 성격으로 판명되려면 이전에 보고된 꿈-내용 중 <나는 나의 형이 상자 안에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라는 것은 <나 의 형이 절약을 하고 있다>라고 번역되어서는 안 되고 <나는 나의 형이 절약하 기를 바란다. 나의 형은 절약해야 한다>가 되어야 합니다. 여기 제시된 두 개의 일반적인 꿈의 성격 중 두 번째의 것이 첫 번째 것보다 아무런 반론 없이 인정 받을 전망이 더 밝습니다. 광범위한 연구를 통해서 비로소 꿈의 자극제는 언제 나 소원이어야 한다는 것, 어떤 걱정이나 계획, 비난일 수는 없다는 것이 확인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의 또다른 특성, 즉 꿈이 이러한 자극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체험을 통해 그것을 폐기하고 제거하고 해 소한다는 것은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남습니다. (7) 꿈의 이러한 성격과 관련해서 우리는 또 다시 꿈과 실수 행위를 비교해 볼 수 있겠습니다. 후자와 관련해서 우리는 방해하는 경향성과 방해받는 경향을 구별했고 실수 행위는 그 두 타협의 산물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와 똑같은 도식 에 꿈도 역시 들어맞습니다. 그 경우에 방해받는 경향이란 다름 아닌 잠자고 싶 은 소망입니다. 방해하는 경향의 자리에는 심리적인 자극, 다시 말해서 끈질기게 해결해 줄 것을 강요하고 있는 소원을 집어 넣을 수 있겠는데, 그 이유는 우리 가 그 이외의 어떤 다른 자극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꿈은 그러므로 여기에 서도 타협의 산물입니다. 사람들은 잠을 자며 또한 동시에 소원이 처리되는 것 을 경험합니다. 소원이 충족되면서 그와 동시에 잠을 지속시키는 것입니다. 그 둘은 부분적으로는 목적을 달성하고 또 부분적으로는 포기됩니다. (8)우리에게도 쉽게 간파될 수 있는 어떤 공상 행위phantasiebidung들은 <백 일몽>으로 불려진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꿈 문제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통로 를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 적이 있었음을 상기해 봅시다. 이러한 백일몽 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야심적이고 에로틱한 소원들의 실제적인 소원 성취 wunscherfullung와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리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하더라도 상상에 의한 것이지 결코 환각적으로 체험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꿈이 갖고 있는 두 개의 중요 성격 중에서 이 백일몽에서는 좀더 불확 실한 특성이 확인되고 다른 또 하나의 특성은 수면 상태에 달려 있는 것이며 깨 어 있는 생활 속에서는 실현되지 않는 것으로서 완전히 누락되어 버립니다. 백 일몽이라는 단어에는 그러므로 소원 성취가 꿈의 주요 특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예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외에도, 꿈속에서의 체험이라는 것이 오직 수면 상태라는 조건을 통해서만 가능한 변형된 상상, 따라서 일종의 <밤 동안의 백일몽nachtliches tagtraumen이라고 한다면 꿈-형성traumbidung의 과정은 밤 동안의 자극을 제거하고 소원 성취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쉬게 이해됩 니다. 왜냐하면 백일몽도 역시 소원 성취와 연관된 행위이며 오직 그것 때문에 행해지곤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뿐 만이 아니고 또 다른 관용어도 그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 습니다. 유명한 속담 중에 <돼지는 도토리 꿈을 꾸고 거위는 옥수수 꿈을 꾼 다>라든가 <닭은 무슨 꿈을 꾸지? 그야 물론 좁쌀 꿈이지>와 같은 것들이 있 습니다. 이러한 속담은 어린이에서 동물들로 내려가서, 즉 우리들보다 훨씬 단계 를 낮춰서 꿈-내용은 욕구의 충족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꿈꾸듯이 아름답다>,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다>라든가 <그런 것은 꿈속에서조차 상상하 지 못했다>와 같이 그러한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듯한 표현들은 매우 많습니다. 그것들에는 관용어에 대한 우리의 견해와 같은 생각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 니다. 꿈들 중에는 걱정하는 꿈도 있고 고통스러운 내용이나 무심한 듯한 내용 을 가진 꿈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꿈들은 관용어를 만들어 내지는 못했습 니다. <악몽>이라는 말도 있기는 하지만 꿈이라는 그 순수하고도 단순한 의미 에서 볼 때 그것도 결국은 부드러운 소원 성취에 지나지 않습니다. 돼지나 거위 가 도살당하는 꿈을 꾼다는 것을 우리에게 확인시켜 줄 만한 관용어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입니다. 꿈의 소원 성취적인 성격이 꿈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눈에 띄지 않은 채로 지나갈 리는 물론 없습니다. 이 점에 관심을 둔 사람들의 경우는 매우 많았지만 그러나 그들 중의 누구도 이러한 성격을 일반적인 것으로 인정하고 꿈-해명 traumerklaung의 단초로 삼으려 했던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그렇게 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원인이 무엇이었을까는 잘 생각해 보면 추측할 수 있는 문제이며, 또 그것에 대해 더욱 자세히 다루어 보도록 합시다. 우리들이 어린-꿈에 관한 연구 성과에서 얼마나 힘들이지 않고 쉽게 꿈에 관 한 지식을 얻게 되었는지를 보십시오. 꿈-기능은 잠의 수호자라는 것, 두 개의 서로 경쟁하는 경향으로부터 꿈이 생성된다는 것, 그 중 하나는 언제나 똑같은 것으로서 잠의 욕구이고 다른 하나는 심리적인 자극을 만족시키려고 한다는 것, 꿈은 의미 심장한 심리적 행위라는 사실에 대한 증명, 꿈의 두 가지 주요 성격 은 소원 성취와 환각적인 체험이라는 것 등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 이에 우리가 정신분석을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습니다. 꿈을 실수행위와 연결시켜 본 것을 제외하고는 정신분석을 연구하는 우리가 특 별히 달리 한 일은 없습니다. 정신분석의 전제들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어 떠한 심리학자라도 어린이-꿈에 대한 이런 정도의 해명은 내놓을 수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런데 왜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요? 어린이-꿈과 같은 그런 꿈만이 있는 것이라면 그 문제는 해결된 것이나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의 관제는 완결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잇습니다. 꿈을 꾼 사람들 에게 이것 저것 물어 볼 필요도 없고 무의식을 끌어다 댈 필요도 없을뿐더러 자 유 연상이 필요하다고 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우리의 과 제가 계속됩니다. 일반적인 유효성을 가진 것으로 인정되었던 성격들이 단지 어 떤 종류의 한정된 수의 꿈들에게서만 확인된다는 것은 어린이-꿈들에서 추론된 일반적인 특성이 더욱 타당성이 있는 것인지, 또 그 특성이 뜻을 짐작할 수 없 는 꿈들, 그것의 외현적 내용이 잔류하고 있는 낮 동안의 소원과 아무런 관계도 갖고 있지 않는 듯이 보이는 그런 꿈들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것입 니다. 우리의 견해로는 이러한 다른 꿈들은 더욱 많은 오곡을 겪은 것들이고 그 러므로 처음에는 잘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왜곡들을 해명하기 위 해서는 어린이-꿈을 이해하는 데에는 없어도 가증했던 정신분석적인 기술이 필 요하리라는 것이 우리의 예감입니다. 어쨌든 왜곡되지도 않았고 어린이-꿈처럼 쉽게 소원 성취로 해석될 수 있는 꿈들이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들은 바로, 일생을 통해서 배고픔이나 갈 증, 성적 욕구와 같은 복종할 수밖에 없는 육체적 욕구에 의해 생겨나는 것들로 서, 다시 말해 내적 신체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서 소원 성취라고 볼 수 있는 것 들입니다. 나는 생후 19개월된 여자아이의 꿈을 메모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자 기의 이름 밑에 메뉴(안나 f., 딸기, 구즈베리, 반숙 계란, 밀가루죽)가 잇따라 나 오는 내용으로 구성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필시 소화 불량으로 인해 하루를 꼬박 굶을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반응으로, 그 때의 병은 꿈속에서 두 번 등 장한 과일이 원인이었던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와 똑같은 시기에 그 아이의 할머니도 (아이의 나이와 할머니의 나이를 합치면 정확하게 70이 되는데) 신장 하수증으로 하루 동안 금식을 해야 했습니다. 할머니는 그날 밤 손님으로 초대 받아 가서 맛있는 음식들이 가득 차려진 상을 받은 꿈을 꾸었습니다. 배고픔을 느끼는 죄수들이나 여행, 혹은 원정 등으로 결핍 상태를 견뎌 내야 하는 사람들 에 대한 관찰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에서는 계속적으로 이 욕구들의 충족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토 노르덴스퀼트 ottonordenskjold는 그의 책 '남극. 남극의 눈과 얼음 속에서 보낸 2년antarctic. zwei jahre in schnee und eis am sudpol'(1904)에서 그와 함께 추위와 싸웠던 대원들의 이야기를 보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내밀한 생각의 방향을 가리킨 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꿈들이었는데 우리가 그렇게도 많이, 그렇게 생생 하게 꿈을 꾼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우리 동료들 중에서 여느 때에는 거 의 꿈을 꾸지 않았던 사람조차도 매일 아침에 우리가 이러한 환상의 세계에 대 한 경험을 주고받고 있을 때에 자신의 긴 꿈 이야기를 하곤 했다. 모든 꿈들은 지금은 우리와 아득히 떨어진 곳에 있는 저쪽의 세계에 관한 것이었는데 종종 우리의 지금의 상황에 맞게 변형된 것도 있었다.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어쨌든 우리의 꿈들이 가장 자주 맴돌았던 중심 주제였다. 우리 중의 한 사람은 밤동 안의 그 일을 가장 탁월하게 수행했는데, 그는 꿈속에서 거창한 오찬회에 참석 하곤 했다. 그리고 매일 아침 <나는 세 코스나 되는 저녁 만찬을 먹었어>라고 행복한 모습으로 자랑하곤 했다. 또 어떤 사람은 담배의 꿈을, 그것도 산처럼 높 이 쌓여 있는 담배의 꿈을 꾸었고 또 다른 사람은 망망 대해에서 돛을 높이 올 리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 배의 꿈을 꾸었다. 또 하나의 다른 꿈은 이 자리에서 언급해 둘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우편 배달부가 편지를 가지고 와서는 길고 긴 설명을 하는 것이었는데, 편지가 그에게 전달되기까지 왜 그렇게 오래 걸려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말하는 것이었다. 그는 그것을 거꾸로 배달해서 다시 되 찾아 오기까지 엄청난 고생을 해야 했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 꿈들 중에는 매우 불가능하게 보이는 내용을 가진 것들도 있었다. 그러나 내가 꾼 꿈이나 내가 들 은 꿈들이거나를 막론하고 그러한 꿈들 모두에 특징적인 것은 환상의 결핍이었 다. 만일 이 모든 꿈들이 열거될 수 있다면 틀림없이 심리학적으로 매우 흥미를 끌 만한 것이 될 것이다. 우리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꿈을 열망했는지는 쉽게 이 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들 모두가 가장 열렬히 바라는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프렐c. du prel을 인용해 보겠습니다.(두 프렐의 '신비의 철학die philosophie der mystik'(1885) 참조.) <아프리카 여행중 에 갈증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던 뭉고 파크mungo park(영국의 탐험가.)는 끊임 없이 자기 고향의 수량이 풍부한 계곡들과 초원의 꿈을 꾸었다. 마그데부르크의 참호에서 배고픔에 시달리던 트렌크trenck(오스트리아 군의 스파이. 프랑스 혁명 때 처형됨.)는 산해진미에 둘러싸여 있는 꿈을 꾸었고 프랭클린john franklin(영 국의 탐험가.)의 제1 탐험대의 대원이었던 조지 백은 가공할 만한 식량 부족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을 때 끊임 없이 거의 매일 맛있는 식사를 하는 꿈을 꾸었다.> 저녁 식사 때 맵고 짠 음식을 먹고 밤에 갈증을 느끼는 사람은 물을 마시는 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배고픔이나 갈증이 너무 심할 경우에는 꿈으로 이러 한 욕구를 잠재우기가 불가능합니다. 그럴 때는 갈증을 느끼면서 꿈에서 깨어나 서 실제로 물을 마셔야만 합니다. 이럴 때의 꿈의 능력이란 실제적으로 아주 미 미한 것입니다. 그러나 깨어나서 실제적인 행동으로 옮겨 갈 것을 요구하고 있 는 자극에 대항해서 잠을 지켜 주기 위해서 꿈이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입니다. 이러한 욕구의 강도가 그토록 심한 것이 아닐 때는 욕구 충족적인 꿈만 으로도 해소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꿈은 성적 자극의 경우에도 욕구 충족befriediung을 경험하게 해주 는데, 그것은 또 언급할 만한 가치가 있는 특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굶주림이 나 갈증보다는 대상에 대한 의존도가 한 단계 낮은 성본능sexualtrieb의 특성에 따라 몽정을 하는 꿈에서 만족은 실제적인 것일 수가 있습니다. 후에 언급하게 될 대상과의 관계에서 예상되는 어려움 때문에 그때의 실제적인 만족은 명료치 않거나 왜곡된 내용과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자주 있습니다. 몽정하는 꿈의 이 러한 특성으로 인해 랑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그 꿈은 꿈-왜곡의 연구를 위한 가장 좋은 대상이 됩니다. 성인들의 모든 신체적 욕구 충족의 꿈은 이러한 만족 외에도 순수하게 심리적인 자극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서, 그것을 이해하기 위 해서는 꿈-해석을 필요로 하는 또 다른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이러한 유아형 성인의 소원 성취적인 꿈이 앞서 말한 절대적 욕구에 대한 반응으로서만 생겨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또 의심할 여지없이 심리적인 자극원에서 유래하고 있는 어떤 지배적인 상황의 영 향속에서 만들어진, 다음과 같은 종류의 짧고도 명료한 꿈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예를 들면 기다릴 수 없이 초조해서 꾸게 되는 성급한 꿈 ungeduldtraume들이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행이나 자기에게 있어 무척 중 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연극이나 강연, 방문을 위한 준비를 하고 이을 때에 꿈 속에서 자신의 기대가 일찍 성취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를테면 실제의 체험 을 하기 전날 밤에 자신의 목적지에 도착했다거나 극장에 있다거나 방문한 사람 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꿈을 꾸는 것입니다. 또 소위 편의-꿈 bequemlichkeitstraume이라고 불리워 지는 꿈들이 있는데 누군가가 잠을 더 자 고 싶어서 실제로는 계속 자고 있음에도 자기가 이미 일어나 있거나 세수를 하 고 있거나 학교에 있는 꿈을 꾸는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현실에서가 아니라 꿈속에서 깨어나서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꿈-형성에 거의 계속 관여하고 있 음을 알 수 있는 잠자고 싶어하는 소원은 이러한 꿈들에서는 매우 뚜렷해서 그 꿈속에서 꿈-형성자traumbildner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잠에 대한 욕구는 더욱 큰 다른 육체적인 욕구와 동등한 지위를 갖는 것입니다. 뮌헨의 샤크schack 갤러리에 있는 쉬빈트schwind의 그림 복사본을 여기에 보 여 드리겠습니다. 꿈은 꿈꾸는 이가 처한 지배적인 상황에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화가가 얼마나 사실적으로 포착하고 있는지를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그 것은 '죄수의 꿈'이라는 그림으로서 죄수가 자신의 탈출을 꿈꾸고 있는 내용입니 다. 그 탈출이 바로 창문을 통해서 한 줄기 빛이 들어오고 있고 그것은 사실은 죄수의 잠을 깨우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겹겹이 등에 올라타고 있는 난쟁이 들은 아마도 그가 창문의 높이까지 올라갈 때 취해야 하는 연속적인 자세를 표 현하고 있는 듯 합니다. 내 생각이 틀리지 않고 또 그 화가의 작의를 너무 과대 평가하지 않는다면 창살을 톱으로 자르고 가장 위에 있는 난쟁이는 그 죄수가 스스로 하고 싶어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행동을 나 타내고 있습니다. 어린이-꿈과 유아적 형태를 취하고 있는 그런 꿈들을 제외한 다른 모든 꿈들 에서는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꿈-왜곡이 이루어져서 우리의 작업을 가로막고 서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추측하고 있는 바대로 그것들도 역시 소원 성취의 꿈인지 아닌지 자신 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외현적 꿈-내용에서는 어떠한 심리 적 자극에서 그러한 꿈들이 이러한 자극을 몰아내고 처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 다는 것을 증명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유아의 꿈들에서 발견될 사항들이 모 든 꿈들에서 발견될 사항들이 모든 꿈들에도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한 어떤 판 단을 내리기 전에 그것들은 먼저 해석되고 번역되어져야만 하며 꿈속에서 이루 어진 왜곡은 원상태로 돌려지고 그것의 외현적 내용은 잠재적 꿈-사고로 대체되 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