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내 등을 긁어 다오. 나는 데 등을 타고 괴롭히겠다 집단 형성이 주는 이익 지금까지 여러 장에서 우리는 같은 종에 속하는 생존 기계 상호간의 부모 자식 관계, 성 적 및 공격적 상호 관계를 고찰해 왔다. 그러나 동물의 상호 관계 중에는 이들 표제 속에는 분명하게 포괄되지 않은 듯한 뚜렷한 영역이 있다. 이들 중 하나는 많은 동물이 보여 주는 집단 생활의 경향이다. 새와 곤충이 무리를 짓고 물고기와 고래도 떼지어 헤엄치며 초원에 서 생활하는 포유류들도 무리를 형성하거나 집단으로 사냥하거나 한다. 이들 집단은 보통은 같은 종의 개체만으로 구성되는데, 예외도 있다. 얼룩말은 종종 영양(gnus)와 무리를 짓고 여러 종의 새들도 혼합된 무리를 지을 때가 있다. 이기적 존재인 개체가 우리를 지어 생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익은 여러 가지이다. 목 록을 모두 소개할 계획은 없으나 그 중 몇 가지에 관해서만 언급하기로 한다. 이들은 논함 에 있어서 나는 제1장에서 소개했고 설명하기로 약속했던 외관상 이타적 행동의 여러 가지 남아 있는 예로 우선 돌아가려 한다. 그 다음 사회성 곤충에 대해 알아볼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 동물에 대한 이타주의의 설명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이 장의 마지막 부분에 서 나는 호혜적 이타주의라는 중요한 개념, 즉"내 등을 긁어 다오. 나는 네 등을 긁어 다오. 나는 네 등을 긁어 주겠다."라는 원리에 관해 언급하고 싶다. 만일 동물이 무리를 지어 함께 산다면 그들 유전자는 이 연합에 의해 그들이 지출한 것보 다 더 큰 이익을 얻고 있음에 틀림없다. 무리를 짓는 하이에나는 단독으로 먹이를 잡는 것 보다 훨씬 큰 먹이를 포획할 수 있다. 가령 먹이를 서로 나누어야 한다고 해도 떼지어 사냥 하는 것은 개개의 이기적 개체에게 유리하다. 어떤 종의 거미들이 협력하여 거대한 공동의 망을 치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황제펭귄은 서로 몸을 비벼 열을 보존한다. 혼자 있을 때보다 풍우에 내놓은 몸의 표면적이 적어지기 때문에 모든 개체가 이익을 얻는다. 다른 개 체의 뒤에서 비스듬히 헤엄치는 물고기는 앞의 개체가 만든 물결 덕분에 유체 역학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물고기가 떼지어 헤엄치는 이유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공기의 파동을 이용한 같은 요령이 경륜 선수에게 알려져 있고 새가 V자형의 편대로 비행하는 것 도 같은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더욱이 무리의 선두에 서는 것은 불리하므로 이것을 피하 려고 하는 경쟁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새들은 힘든 리더역을 교대로 떠맡고 있을 가능성 도 있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이 장의 말미에서 논의하는 지연성의 호혜적 이타주의의 한 형태라는 것이다. 집단 생활의 이점으로서 가장 많이 제안되는 것은 포식자에게 먹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라는 것이다. 해밀턴은 '이기적인 무리의 기하학'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이러한 이론에 대 하여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오해가 없도록 강조해 두지만 해밀턴이 말하는 '이기적인 무 리'란 '이기적 개체의 무리'를 뜻한다. 위험 영역의 최소화 다시 한번 단순한 '모델'에서부터 논의를 출발하자. 이것은 확실히 추상적이지만 현실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 가장 가까이 있는 피식자 개체를 공격하는 경향이 있는 포식자에게 잡히는 한 동물을 상상해 보자. 포식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에너지의 소모가 적게 들고도 성취될 것이기 때문에 당연한 전략이다. 피식자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 은 하나의 흥미로운 결과를 가져온다. 피식자 개체는 포식자에게 제일 가까운 위치에 있는 것을 피하려고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만약 피식자가 멀리서 포식자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 는 재빨리 도망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포식자가 높다란 숲에 숨어 있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모습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면 이 경우에도 개개의 피식자 개체는 포식자에게 가장 가까이 있게 될 확률을 최소화 하는 수단이 있다. 개개의 피식자는 말하자면 '위험 영 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둘러싸여 있다고 상정할 수 있다. 영역은 범위 내의 임의의 점부 터 그 개체까지의 거리가 그 점에서 다른 어떤 개체까지의 거리보다 짧은 영역으로 정의된 다. 예컨대 피식자 개체가 규칙적인 기하학적 대형을 짓고 행진하고 있다고 하면 개개의 개 체(변두리에 있는 개체는 별도로 하고)를 둘러싼 위험 영역은 대략 6각형을 나타낼 것이다. 만일 개체 A의 6각형 위험 영역 내에 포식자가 잠복하고 있으면 개체 A는 먹히기 쉽다. 무 리의 변두리에 있는 개체는 특히 위험이 크다. 그들의 경우 위험 영역은 상대적으로 작은 면적의 6각형이 아닌 무리의 바깥 방향에 넒은 범위를 가진 형태로 되기 때문이다. 자, 현명한 개체가 자기의 위험 영역을 최소한으로 좁히려고 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무 엇보다도 우선 피식자는 무리의 변두리에 위치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이다. 만일 자기가 변두리에 있는 것을 알아 차리면 피식자는 즉시 중심 방향으로 이동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누군가는 변두리에 위치할 수밖에 없는데, 개개의 개체에 관해서 말하면 누구도 그런 역할 은 맡기 싫어서 집단의 외곽에서 중심 방향으로 향하여 개체가 부단히 이동하는 것을 보게 된다. 만약 무리가 이전에 제멋대로 흩어져 있었다면 중심 방향으로의 개체 이동에 의해 즉 시 밀집된 덩어리가 되어 버릴 것이다. 모델의 조건으로서 피식 동물에 집합 경향을 가정하 지 않고, 또한 피식 동물이 처음에는 무작위적으로 분산하고 있다고 가정해도 개개의 개체 는 이기적 충동에 이끌려서 다른 개체의 중간에 위치를 차지하고 자기의 위험 영역을 좁히 려고 시도할 것이다. 그 결과 바로 집단이 형성되어 그것이 점점 밀집화될 것이다. 더욱이 현실에서의 밀집화 경향이 이것과 반대되는 압력에 의해 제한될 것이라는 점은 명 백하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모든 개체가 중첩되어 신체가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극히 단순한 몇 개의 전제만으로 집단 형성을 예측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의 모델은 흥미롭다. 이 모델보다 더 공들인 모델도 몇 개 제안되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모델이 현실 적이라고 하는 사실이 있다고 해서 동물의 집단 형성 문제를 생각하기에 도움이 되는 단순 한 해밀턴 모델의 가치가 감소할리는 없다. 경계음-집단의 이익 이깆거인 무리의 모델에 협력적인 상호 관계가 개입할 여지는 없다. 여기에는 이타주의가 없으며 개개의 개체가 다른 모든 개체를 이기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실 제의 생활에 있어서는 같은 집단 중의 동족을 포식자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개체가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바로 생각나는 것은 새의 경계음이다. 이것을 들은 새는 즉시 도피 행동을 취하므로 이 경계음은 확실히 경계 신호의 기능을 하고 있다. 그러 나 우는 놈이 '포식자의 공격으로부터 동족을 피하도록' 노력하는 기미는 없다. 그는 그저 포식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 줄 뿐이다. 그러나 경고음을 발하는 행위는 적어도 첫 인상으로 서는 이타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로 말미암아 우는 놈은 포식자의 주의를 자기에게 향하게 하는 '결과'가 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말러(P.R. Marler)가 지적한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우리는 이것을 간접적으로 추론할 수가 있다. 경계음은 발신 지점을 알아차리기 힘들도록 이상적인 물리적 특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포식자가 발신 지점에 근접하는 것을 어렵 게 하는 음을 음향 기술자에게 의뢰하여 만들었다고 하면, 그가 고안한 음은 많은 작은 새 들의 실제의 경계음과 아주 닮은 것이 될 것이다. 그러면 자연계에서 울음소리를 이와 같은 꼴로 만들어 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연 선택이었음에 틀림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 는지는 분명하다. 불완전한 경계음을 내기 때문에 죽은 개체가 많았다고 하는 것이다. 즉, 경계음을 내는 행위에는 위험이 수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경계음 을 내는 행위에 위의 위험을 상쇄시키는 설득적인 이점이 있다는 것을 지시해 보여야만 한 다. 이것은 실제로 그다지 곤란한 것은 아니다. 새의 경계음은 다윈 이론으로서는 '다루기 어 려운'현상이라고 빈번히 여겨졌으므로 그것에 대해 설명을 짜내는 것은 일종의 스포츠로 되 어 왔다. 덕분에 지금은 훌륭한 설명이 산더미처럼 있어서 그들 모든 논의의 논점을 생각해 내는 것은 어렵다. 우선 분명한 것은 무리가 가까운 인연의 혈연 개체를 포함하고 있을 경 우 경계음을 내도록 촉구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있다. 경계음에 의해 구조되는 개체 중에는 이 행위를 촉구하는 유전자를 체내에 갖고 있는 것이 있을 가능 성이 많기 때문이다. 포식자의 주의를 자기에게 집중시킴으로써 비록 발신자가 이 이타적 행위에 높은 대가를 지불할 지언정 경예음을 내도록 촉구하는 유전자는 성공할 가능성이 있 다. 집단 이타주의 만일 독자가 혈연 선택적인 사고에 만족하지 못하면 이외에도 재료로 내놓을 많은 이론이 있다. 동료에 대해 경고를 하므로 발신자 자신이 이기적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도 여 러 가지 있다. 예를 들면 트라이버스는 다섯 가지 좋은 생각을 제안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 서는 내가 생각해 낸 다음 두 가지의 이론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케이비 이론 챗번째 이론을 나는 '케이비(cave)'이론이라고 하는데, 케이비라는 것은 '조심하라'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온 말로 선생이 가까이 올 경우 학생들이 급우에게 알리는 데 쓰인다. 이 이론은 위험에 처했을 때에 덤불 속에 몸을 숨기는 습성을 가진 위장하는 새들에게 해당 된다. 이와 같은 새의 한 무리가 초원에서 먹이를 찾고 있다고 상상해 보자. 멀리서 매가 날 아가고 있다. 매는 아직 초원의 무리를 목격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의 예리한 눈이 무리를 발견하여 곧장 공격을 해 올 위험성이 있다. 이때 무리 속의 한 마리가 매를 발견했으나 다 른 새는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 눈이 좋은 이 개체는 즉시 덤불 속으로 숨 을 수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소용이 없다. 그의 동료들이 아직 주위에서 제멋대로 돌 아다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한 마리라도 매의 주의를 끌게 되면 무리 전체가 위험 에 처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이기적인 견지에서 보면 최초로 매를 발견한 개체의 최선의 방책은 동료에게 빨리 경고를 주어 그들을 침묵하게 하여 그들이 자기도 모른 s사이에 매를 불러들일 가능성을 될 수 있는 한 줄이는 것이다.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이론 소개하고 싶은 또 하나의 이론은 '대역을 이탈하지 마라' 이론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 이론은 포식자가 접근하면 숲속으로 숨어 버리는 새에게 적합하다. 다시 한번 먹이를 먹고 있던 무리 중의 한 마리가 포식자를 발견했을 때를 상상해 보자. 그는 어떻게 행동할까? 그 는 동료들에게는 경고하지 않고 혼자만 숨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는 한 마리 의 독립된 개체가 되어 버린다. 이미 무리의 익명직인 일원이 아니고 혼자 고립된다. 매는 실제로 무리를 이탈한 비둘기를 노린다고 알려져 있으나 만약 그러한 사태가 일어나지 않는 다고 가정해도 무리를 이탈하는 것이 자살 행위로 이어진다고 볼 수 있는 이론적 근거는 많 이 있다. 가령 후에 동료들이 그를 뒤따른다 해도 최초로 지상에서 날아 오르는 개체는 일 시적으로 자기의 위험 영역을 넓히는 것이 될 것이다. 해밀턴 이론의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무리 생활에는 어떤 중요한 이점이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새들은 일부러 무리를 짓지 않을 것이다. 그 이점이 무엇이든 최초로 무리를 이탈하는 개체는 비록 부분적이라도 그 이점을 상실하게 된다. 대열을 이탈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 매를 발견한 새는 도대체 어 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그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상시대로 행동을 계속하여 무리의 일원으로 있는 것이 그에게는 이익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에는 큰 위험이 따른 다. 그는 여전히 열린 장소에 머물러 공경을 받기 쉬운 처지에 있기 때문에 숲속에 숨는 것 이 그로서는 훨씬 안전할 것이다. 최선책은 확실히 날아올라서 숲속에 수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는 다른 동료들도 모두 따라서 같이 날도록 부추길 필요가 있다. 이렇게 되면 그는 무리를 이탈한 못난이가 되지도 않고, 또한 군집의 일부라는 이점을 상실하지 않고 아울러 숨을 수 있는 숲속으로 날아드는 이점을 얻게 될 것이다. 다시 한 번 경계음을 내는 행위는 순수한 이기적 이익을 가져올 것으로 간주된다. 차노프(E.L. Chamov)와 크랩스(J.R. Krebs) 도 같은 이론을 제안하고 있으나, 그 중에서 그들은 경계음을 내는 개체나 무리의 다른 개 체에 대해 취하는 행위를 '조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을 정도이다. 순수하고 공평한 이타 주의 같은 것은 아마 거리가 먼 이야기가 되고 말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들 이론은 경계음을 내는 개체가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견해에 모순 되는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순되지 않는다. 경계음을 내지 않으면 그는 더 큰 위험에 몸을 던지는 꼴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계음을 냈기 때문에 죽는 개체 도 확실히 있을 것이다. 발신 지점을 알아내기 쉬운 음을 낸 개체는 특히 죽기 쉬웠을 것이 다. 그러나 경계음을 내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개체는 더 많이 있었다. 그 이유는 여러 방법 으로 설명된다. '케이비' 이론과 '대열을 이탈하지 마라' 이론은 그 중 두 가지 예에 불과하 다. 피식자의 위험 극복 행동 제 1장에서 언급한 톰슨가젤의 높이 뛰기 위장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 아드리는 그 행 위가 명백히 자살적인 이타 행위로 보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룹 선택에 의 해서만 설명된다 고 단언할 정도이다. 이 예는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있어서 보다 힘든 난제이다. 새의 경 계음은 확실히 영향을 미치나 그것은 분명히 가능한 한 주의를 끌지 않고 신중히 하도록 계 획되어 있다. 영양의 높이뛰기는 이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분명한 도발이라고 해도 좋을 정 도로 허세를 부리는 짓이다. 영양들은 마치 고의로 포식자의 주의를 끌고 있는 것처럼 보인 다. 또한 포식자를 깔보고 있는 것 같이도 보인다. 이러한 관찰은 대담하고 매우 재미있는 하나의 이론을 이끌어 냈다. 이 이론은 원래 스미스(N. Smythe)에 의해 예시됐으나 그 논리 적인 귀결을 결집한 사람은 틀림없이 자하비였다. 자하비 이론은 다음과 같다. 그의 수평 사고의 결정적 생각은 높이 뛰기 위장이 다른 영 양에 대한 신호와는 전혀 관계없이 실제로 포식자를 향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있다. 다른 영양이 그것을 보고 행동을 달리하는 수는 있어도 그것을 부수적인 것이고, 어쨌든 그것은 포식자에 대한 신호로서 첫째로 선택된 것이다. 그것을 영어로 번역하면, "자! 나는 이처럼 높이 뛴다. 이렇게 활기차고 건강한 영양을 잡는다는 것은 네게는 무리다. 나만큼 높이 뛸 수 없는 것들을 쫓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바꿔 말하면 포식자는 쉽게 잡 힐 만한 먹이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높고 허세부리는 뛰기를 가능케 하는 유전자 는 포식자에게 쉽게 먹히지 않는다. 특히 많은 포식성 포유류는 늙은 개체와 건강치 못한 개체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높이 뛰는 개체는 그가 늙지도 않고, 또 건강하다는 사 실을 과장된 방법으로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하면 그 과시는 이타주의와는 관 계가 멀다. 어느쪽이냐 하면 이것은 이기적인 행위이다. 왜냐하면 포식자로 하여금 다른 개 체를 쫓도록 촉구하는 것이 그 과시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누가 제일 높이 뛰는 가를 확이낳는 경쟁이다. 이 경쟁의 패자는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기 희생적인 꿀벌 내가 말했던 또 하나의 예는 자기 희생적인 꿀벌의 경우이다. 그들은 꿀도둑을 침으로 쏘 고 그 싸움에서 거의 확실하게 죽게 된다. 꿀벌은 고도의 '사회성'을 가진 곤충의 한 예이다. 이외에도 장수말벌류, 개미류, 그리고 흰개미 등이 사회성 곤충으로 알려져 있다. 자살적인 행위를 가진 꿀벌의 예에 한정하지 않고 사회성 곤충 일반에 관해 논의하기로 하자. 사회성 곤충의 공적은 전설적이다. 그 중에서도 뛰어난 것은 그 놀랄 만한 협력 행동의 능력과 현 상적인 이타주의이다. 적을 찌르는 자살적인 행위는 그들이 가진 자기 포기의 경이적인 상 태를 상징하고 있다. 꿀단지개미에 있어서는 괴이하게 부풀고 꿀을 잔뜩 꾸려넣을 수 있는 배를 가진 일개미가 있다. 그들의 전생애에 있어 오직 하나의 일은 집의 천장에 붙어 부푼 전구처럼 축 늘어져 다른 일개미들의 먹이 저장소를 이용되는 것이다. 인간의 감각으로 말 하면 그들에게는 개체로서의 생활 같은 것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개체성은 분명 히 사회의 복리성에 종속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개미, 꿀벌이나 흰개미의 사회는 어느 것 도 더 높은 수준에서 한 종의 개체성을 달성하고 있다.. 먹이의 분배가 잘 진행되고 있어서 '공동의 위' 라고도 표현된다. 화학적 신호와 꿀벌에서 유명한 '춤' 등에 의해 정보도 극히 효율적으로 공유되어 있고, 하나의 사회는 마치 사람의 신경계와 감각기관을 가진 단위처럼 행동한다.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는 몸의 면역 반응계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정확도로 식별되 고 배제된다. 개개의 꿀벌은 '온혛' 동물이 아니지만 꿀벌의 집 내부는 꼭 인간의 체온만큼 의 비교적 높은 온도로 조절되어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유추가 번식에까지 미 치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성 곤충의 집단 내의 대부분의 개체는 불임의 일벌레이다. '생식 계열(germ line)'의 세포 -불사신의 유전자를 계속 전하는 세포 계열-는 극히 소수의 번식 능력을 가진 개체의 몸 속을 흐르고 있다. 번식 능력을 가진 소수의 개체는 정소나 난소 중 에 들어 있는 우리의 생식 세포와 유사하다. 불임의 일번레들은 우리의 간, 근육 그리고 신 경 세포에 해당된다. 일벌fp들은 불임이다 일벌레들이 행하는 자살적 행위와 다른 형태의 이타주의 및 상호 협력은 그들이 불임이라 는 것을 이해한다면 놀랄 일은 아닌다. 보통의 동물체는 유전자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하여 자식을 낳거나, 또는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는 다른 개체를 보호함으로써 조정된다. 이 경우, 다른 개체를 보호하기 위해 자살 행위를 하게 되면 장래 자기의 자식을 만드는 일은 못하게 된다. 자살적인 자기 희생이 거의 진화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벌은 전혀 자 기의 자식을 만들지 않는다. 일벌들은 자식이 아닌 근친자를 돌보는 데 전력을 쏟고 스스로 의 유전자를 보존하려고 한다. 한 마리의 불임의 일벌이 죽는 것은 자기의 유전자에게는 사 소한 것밖에 안 된다. 그것은 나무의 유전자에게 가을에 나뭇잎 하나가 떨어지는 것과 똑같 은 사소한 것이다. 사회성 곤충을 신비적인 품목으로 이끌려 하는 유혹이 있으나 실제로 그럴 필요는 전혀 없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이 사회성 곤충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해 조금 상세히 볼 가치 가 있다. 특히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이 일벌레의 불임성이라는 이례적인 현상의 진화적 기 원을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주목하자. 그 현상은 여러 가지 문제의 군원이 되기 때문이다. 사회성 곤충의 한 집단은 거대한 가족이고 모든 개체는 같은 모친에서 유래하는 것이 보 통이다. 일벌레는 스스로 번식을 하는 일이 거의 또는 전혀 없고, 종종 몇 개의 분명한 계급 으로 구별된다. 이들에게는 예컨대 작은 일벌레, 큰 일벌레, 병정, 그리고 꿀단지개미 같은 고도로 특수화된 계급도 있다. 번식 능력을 나타내는 암놈을 여왕이라고 부른다. 번식 능력 이 있는 수놈을 수벌(수개미) 또는 왕벌(왕개미)이라고 부른다. 고도로 발달된 사회적인 종 에서의 번식 개체는 자식 생산 이외의 일은 전혀 하지 않는다. 먹이와 보호는 일벌레에 의 해 성사되고 유충의 시중도 일벌레의 일이다. 그러나 유충 만들기에 관한 여왕의 능력은 놀 랄 만한 것이다. 개미와 흰개미의 몇몇 종에서 여왕은 토식토실하게 부풀어 오른 거대한 알 공장으로 된다. 몸의 크기는 일개미의 수백 배에 달하고 거의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이것이 곤충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여왕개미는 계속 일개미의 시중을 받고 있다. 일개미는 여왕의 몸을 돌보거나 먹이를 주기도 하고, 또한 여왕이 계속 출산하는 알을 공동 의 보육소로 운반하기도 한다. 이 거대한 여왕이 어떤 이유로 왕실에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될 때에는 고되게 일하는 많은 일개미의 등에 업혀서 운반된다. 분업 제7장에서 나는 애낳기와 애키우기의 구별을 소개하면서 애낳기와 애키우기를 결합시킨 혼합 전략이 진화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지적했다. 제5장에서는 혼합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 정하게 되는 경우에 두가지의 일반적인 형태가 제시된다고 했다. 하나의 형태에서는 개체군 중의 개개의 개체가 두 전략을 혼합한 생동을 한다. 이 경우 각 개체는 애낳기와 애키우기 가 잘 양립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또 하나의 형태에서는 개체군이 두 종류의 다른 형태 의 개체로 분할된다. 이것은 비둘기파와 매파 사이의 균형을 처음으로 예시했던 방법이었다. 애낳기와 애키우기에 관해서도 후자의 형태에 따라 진화적으로 안정된 균형을 달성하는 것 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애낳는 자와 애키우는 자로 개체군이 나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되기 위해서는 애키우는 개체가 양육받는 쪽의 개체와 아주 근 친이 아니면 안 된다. 양자는 적어도 부모와 자식 관계 정도의 근친 관계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진화가 이 방향으로 갈 가능성이 이론적으로는 있을지라도 그것이 실제로 일어난 것 은 사회성 곤충에서뿐인 것 같다. 사회성 곤충에서 개체는 애낳는 자와 애키우는 자의 두 주된 계급으로 나뉘어져 이다. 애 낳기를 담당하는 자는 번식력이 있는 암컷과 수컷이고 애키우기를 맡는 자는 일벌레들이다. 일벌레 중에서 흰개미류의 경우는 암수가 불임의 벌레인데 기타의 모든 사회성 곤충에서는 암놈이 불임이다. 애낳기와 애키우기의 어느 형태의 개체도 자기의 일에만 전념하기 때문에 그것에 관해서는 아주 효율적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도대체 누구의 입장에서 보아 효율 이 좋은가? 다윈 이론에 크게 반발하는 물음은 다음과 같다. "그런 짓을 해서 일벌레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일벌레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다."라고 답할 사람도 있다. 그들의 생각에 의하면, 여왕 은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일벌레에게 화학 물질에 의한 조작을 가하여 자신이 낳는 많 은 개끼의 시중을 들게 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이익은 모두 여왕이 차지하고 만다. 이것은 제8장에서 소개한 알렉산더의 '부모에 의한 조작' 이론의 한 형태이다. 그러나 이것과 정반 대의 사고에 의하면 일벌레는 번식충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키우고 있다.' 이를테면 양산업 의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일벌레들은 번식충에 조작을 가하여 번식충이 자기들의 몸 속에 있는 유전자의 복제물을 더 많이 증식하도록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개미 류, 꿀벌류, 장수말벌류에서의 일벌레는 여왕 자신보다 한배새끼와의 근친도가 실제로 높아 진다. 이 점을 훌륭하게 착안한 사람은 해밀턴이었다. 이를 기초로 해밀턴, 그리고 트라이버 스와 헤어(Hare)는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의 가장 볼 만한 개가를 올리고 있다. 이제 그들의 추리를 살펴보기로 하자. 벌목의 성 결정 시스템 개미류, 꿀벌류, 장수말벌류 등을 포함하는 그룹을 벌목(Hymenpatera)이라고 한다. 이 종 류의 곤충은 매우 특이한 성 결정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흰개미는 이 종류에 포함되지 않 으며, 또 이특이한 성결정 양식도 공유하지 않는다. 벌목의 전형적인 집에는 성숙한 여왕이 한 마리밖에 없다. 여왕은 젊어서 결혼 비행을 한 번 했고, 그때에 저장한 정자로 나머지 전 생애 -십 년 또는 그 이상- 동안 애낳기를 해낼 수 있다. 이 기간에 암놈은 정자를 일정량 씩 방출하여 수란관을 통과하는 알을 수정시킨다. 그러나 모든 알이 수정되는 것은 아니다. 미수정란이 발육하면 수놈으로 된다. 즉, 수놈에게는 아비가 없다. 수놈의 몸의 모든 세포 중에 는 우리들의 경우와 같이 두 세트의 염색체(한 조는 어미, 그리고 한 조는 아비로부터) 가 포함되는 것이 아니고 그저 한조의 염색체(모두 어미 혈통)밖에 포함되지 않는다. 제3장 에서의 비유를 쓰면 벌목의 수놈의 세포 속에는 보통은 두 개의 염색체가 포함되어 있는 것 에 반해 각각의 '권'의 한 사본(염색체)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에 벌목의 암놈은 보통의 동물과 다름이 없다. 암놈에게는 아비가 있고 암놈의 체세 포들 속에는 보통과 같이 두 세트의 염색체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어떤 암놈이 일벌레가 되느냐 여왕이 되느냐는 유전자가 아닌 어떻게 자랐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암 놈은 여왕을 만드는 유전자의 완전한 세트와 동시에 일벌레를 만드는 유전자의 완전한 세트 도 가지고 있다(후자에 대해서는 일벌레, 병정 등 개개의 특수화된 계급을 만들어 내는 유 전자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좋을지도 모른다). 어느 세트의 유전자에 '스위치가 켜질지'는 그 암놈이 어떻게 양육되느냐, 특히 어떤 먹이를 받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있을지라도 벌목의 성 결정 시스템의 본질적인 상태는 위와 같다. 어떻게 이와 같이 특이한 유성 생식 시스템이 진화되었는지는 아직 모르고 있다. 훌륭한 이 유가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나 문제는 그것을 벌목이 나타내는 하나의 기묘한 사실로서 다룰 수 밖에 없다. 이 특이한 시스템이 어떻게 유래했든 그 특이함 덕분에 제6장에서 소개한 근 친도의 간단한 계산법이 여기서는 심한 혼란을 일으키고 만다. 예를 들면, 인간의 경우라면 한 사람의 남자에게서 유래하는 정자는 모두 틀린 유전 조성을 가지고 있는데, 벌목의 시스 템에서 한 마리의 수놈이 만드는 정자는 모두 똑같은 정자로 되어 버린다. 벌목의 수놈의 몸 속 세포는 두 세트가 아니고 한 세트의 유전자밖에 없다. 그러므로 어느 정자도 세포 중 의 유전자 세트에서 50%의 샘플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100%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 서 동일한 수놈에서 유래하는 정자는 모두 같다. 그러면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 어미와 수놈 자식의 근친도를 계산해 보기로 하자. 우선 지금 한 수놈이 유전자 A를 소유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면 어미가 이것을 공유하는 확률은 어떨까? 수놈에게 아비는 없고 모든 유전자는 어미로부터 전수되었으므로 답은 100%가 된다. 그러나 이번에는 역으로 여왕이 유전자를 소유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수놈 자식은 여왕의 유전자의 절반밖에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 에 B 유전자를 공유하는 확률은 50%가 된다. 어딘가 모순된 것 같은 느낌일지 모르나 그렇 지는 않다. 수놈은 자기의 유전자를 '모두'어미로부터 받으나 어미는 자기 유전자의 '절반'밖 에 자식에게 주지 않는다. 이외견상의 패러독스를 푸는 해결은 수놈이 보통의 수의 절반밖 에는 유전자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있다. 근친도의 '정확한' 지표가 1/2인지 1인지에 대해 머리를 쓸 필요가 없다. 이 지표도 단순히 인공적인 척도이고 이것을 구체적인 사례에 써서 사태를 해결하기 어렵게 되면 그것을 포기하고 펏번째 원리로 되돌아가야 할지도 모른 다. 여왕의 몸 속에 있는 유전자 A의 입장에서 문제를 고찰해 보면 이 유전자가 수놈에게 전해지는 확률은 1/2로, 암놈에게 전해지는 확률과 같다. 그러므로 여왕의 입장에서 보면 자 기의 자식은 암수 관계없이 어느것이든 같은 정도의 혈연자가 된다. 이 혈연 관계의 정도는 인간의 아이가 그들의 모친에 대한 것과 같다. 자매 관계를 상대로 하면 사태는 다시 까다롭게 된다. 같은 부친으로부터 유래하는 자매 는 단순히 부친을 공유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녀들은 수정시킨 두 개의 정자는 모두 유 전자에게 완전히 같다. 즉, 부친 유래의 유전자에 관한 한 그녀들은 일란성 쌍생아와 같다. 만약 한 자매가 유전자 A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 이것은 부모 누구에겐가로부터 유래했을 것이다. 만약 그 유전자가 모친의 유전자라면 자매가 그것을 공유하는 확률은 50%이다. 그 러나 만일 그것이 부친으로부터 유래한다면 자매가 그것을 공유하는 확률은 100%이다. 따 라서 벌목에서는 같은 부모로부터 유래하는 자매간의 근친도는 보통의 유성 생식동물의 경 우 1/2이 아니라 3/4으로 된다. 이에 따르면 벌목의 암놈의 경우 부모를 공유하는 자매에 대한 어미의 혈연 정도는 자기 의 양쪽 성의 자식에 대한 어미의 혈연 정도보다 가깝다. 해밀턴이 밝힌 바대로 위의 사정 은 효율이 좋은 자매 생산이계로서 이용하기 위해 모친을 봉양한다는 경향을 암놈에게 발달 시키는 요인으로 될 가능성이 있다(더구나 해밀턴은 여기서 내가 말한 것과 똑같은 설명법 을 취하고 있지 않다). 이 경우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매를 만들게 하는 유전자는 직접 자식 을 만들게 한 유전자보다 급속히 증식한다. 일벌레의 불임성은 이렇게 해서 진화했다. 일벌 레의 불임성을 수반하는 '진실한 사회성'은 벌목에서는 '독립적으로' 적어도 11번 진화했고 나머지 동물계 전체에서는 단지 흰개미에서 한 번 진화했을 뿐이다. 이것은 아마도 우연히 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함정이 있다. 일벌레가 자매 생산 기계로서 어미를 봉양하기 위해서 성 공적이라면 자매와 동시에 같은 수의 형제를 일벌레에게 양육하도록 하는 어미의 당연한 경 향을 어떤 방법으로든 억제하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벌레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임의의 형제가 어미의 유전자의 특정한 1개를 공유하는 확률은 1/4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만일 번 식 능력을 가진 암수의 자식을 동수로 낳는 것을 여왕에게 허락했다면 일벌레의 입장에서 보면 한 여왕을 봉양하는 것은 아무런 이익도 없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허용한다면, 일벌 레는 자신들의 귀중한 유전자의 증식을 최대화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일벌레가 누이를 증식하는 방향으로 성비를 기울게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에 착안한 이는 트라이버스와 헤어였다. 그들은 최적 성비(앞장에서 취급한)에 피셔는 계산법을 응용하여 벌 목이라는 특수한 예에 관해 계산을 다시 고친 것이다. 그 결과 어미에 대한 최적 투자 비율 은 통상대로 1:1로 된다. 그러나 자매에 대한 최적 비율은 형제보다는 자매에 유리해서 3:1 이 된다. 만약 독자가 벌목의 암놈이라면 유전자를 증식하는 데 가장 유리한 방법은 스스 로 새끼를 낳는 것을 억제하고, 그 대신에 당신의 모친에게 번식 능력을 가진 누이와 아우 를 3:1의 비율로 낳아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돌자 자신이 자식을 낳아야만 하는 처지가 되면 번식 능력이 있는 자식을 동수 출산하는 것이 당신의 유전자에게도 가장 유리 한 길이다. 여왕과 일벌레의 차이 이미 말한 대로 영왕과 밀벌레의 차이는 유전적인 것이 아니다. 유전자에 주목하는 한 암 놈의 배(embryo)는 3:1의 성비를 '바라는' 일벌레가 되든지 아니면 1:1의 성비를 '바라는' 여 왕이 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바람'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 그것은 다음과 같다. 만약 한 유전자가 여왕의 몸에 들어 있다면 그 유전자는 번식 능력이 있는 아들과 딸에게 여왕의 몸이 1:1의 비로 투자를 실시할 때 최대의 효율로 증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유전자가 일벌의 몸에 들어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그 유전자는 일벌의 몸을 도와서 그 어미에게 작용하여 어미가 수놈보다 암놈을 많이 만들도록 영향을 줌으로써 자기의 증식을 최대화할 수 있다. 여기서 모순은 전혀 없다. 유전 자는 이용할 수 있는 여건의 동력레버를 최대한으로 활용해야 한다. 여왕으로 될 개체의 발 육을 좌우할 입장에 놓인다면 유전자는 이에 걸맞는 최적 전략을 강구하여 그 제어력을 자 기의 이익을 위해 활용하면 된다. 만약 일벌의 발육을 좌우할 수 있는 입장에 놓이게 된다 면 전자와는 별도의 최적 전략을 취하여 그 힘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이상의 사정은 사회성 벌목류의 집이라는 양식장 속에 이해 대립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 다. 여왕은 암수에게 동등한 투자를 행하려고 하고 있다. 일벌은 성비를 수컷 1에 암컷 3의 방향으로 이동시키려고 하고 있다. 일벌은 농부이고 여왕은 증식용의 암말이라고 하는 견해 가 옳다면 아마도 일벌들은 여왕이 바라는 3:1의 성비를 잘 달성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 의 견해가 틀렸다면, 즉 여왕이 실제로 그 이름에 걸맞게 행동을 취하고 있고, 일벌들은 여 왕의 노예이고 왕립 탁아소의 고분고분한 보육자라고 하면 성비는 여왕의 '바람대로' 1:1이 될 것이다. 이 특수한 형태의 세대간 투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도대체 어느 쪽일까? 이것은 검정 가능한 문제이고, 실제로 트라이버스와 헤어는 많은 종류의 개미를 가지고 그것을 테 스트했다. 문제의 성비는 수놈의 번식충과 암놈의 번식충의 비이다. 이들은 큰 날개를 가진 대형의 개체이고, 결혼 비행을 위해서 정기적으로 개미집에서 빠져 나온다. 이 결혼 비행 중, 벎은 여왕은 새 집단만들기에 착수한다. 위의 서이 추정치를 얻기 위해서는 이들 중 날개 달린 형을 헤아릴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많은 종에 있어서는 수놈과 암놈의 번식충의 크기에 커다 란 차이가 있고, 이것이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한다. 앞의 크기에 커다란 차이가 있고, 이것 이 문제를 매우 복잡하게 한다. 앞장에서 언급한 대로 피셔의 최적 성비의 계산법을 엄밀하 게 말하면 수놈 암놈의 '수'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암수 각각에 대한 '투자량'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 점을 배려하기 위해 트라이버스와 헤어는 번식충의 성비에 무게를 참조하였다. 그들은 20종류의 개미를 재료로 하여 암수의 번식충에 대한 투자량의 비로 나타내는 성비를 추정하였다. 그들은 일벌레가 자기들의 이익을 위하여 집을 차지하고 있다는 이론에서 예측 되는 암수의 비가 3:1이라는 것에 상당히 납득이 가도록 잘 일치됨을 발견하였다. 연구 대상이었던 위의 개미류에서는 일벌레가 이해 대립에서 '이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까지 놀랄 정도는 아니다. 일벌레의 몸은 보육장의 관리자로 근무하고 있으므로 여왕 의 몸보다 실제로 더 많은 힘을 가지고 있다. 여왕의 몸을 매개로 하여 세계를 조작하려는 유전자는 일벌레의 몸을 매개로 하여 세계를 조작하려고 하는 유전자에게 반역당하고 만다. 그러나 반대로 여왕편이 일벌레보다 실제로 힘을 가질 수 있는 상황은 없는지 그와 같은 특 수 사례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트라이버스와 헤어는 그들의 이론의 비판적 검 정에 사용할 만한 안성맞춤의 상황이 있음을 깨달았다. 노예 사역종 개미 무리 중에 노예를 사역하는 종이 있다는 사실이 이 일의 발단이다. 노예 사역종의 일개미는 통상의 일을 전혀 하지 않거나 하더라도 솜씨가 좀 나쁘다. 일개미들이 잘할 수 있는 것은 노예를 사냥하는 일이다. 대립하는 대군이 싸워서 상대방을 죽이는 진정한 의미 의 전쟁은 사람과 사회성 곤충에서만 볼 수 있다. 많은 개미류에서는 병정개미라고 하는 특 수한 일개미가 전투용의 거대한 턱을 가지고 집단을 위해 다른 개미 군대와 싸우는 일을 도 맡고 있다. 노예 사냥도 전투 행위의 특수한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노예 사역 개미는 다 른 종의 개미집을 공격해 집을 방위하고 있는 상대방의 일개미나 병정개미를 죽이고 우화전 의 유충을 빼앗아 간다. 유충은 포획자의 보금자리 안에서 우화되어 노예의 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신들의 신경계에 주입된 프로그램에 따라 일을 시작한다. 노예들은 자기와 같은 종의 보금자리에서 보통 행해야 할 모든 일을 해치운다. 노예 개미가 보금자리에 머물 러 청소, 먹이구하기, 새끼돌보기 등 개미집을 유지하기 위한 일상적인 작업에 정성을 쏟고 있는 사이에 노예 사역종의 일개미, 즉 병정개미는 다시 노예 사냥 원정을 계속한다. 물론 노예들은 자기들이 시중들고 있는 여왕이나 새끼가 남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 못한 다. 모르는 사이에 노예들은 노예 사역종의 새로운 대군을 돌보고 있다. 노예 사역종의 유전 자에 작용하는 자연 선택은 틀림없이 노예화에 대항하는 여러 적응을 촉진하는 방향으로 작 용할 것이다. 노예 사역의 현상은 광범위하게 볼 수 있으나 대항책이 큰 효과를 못 올릴 것 이 명백하다. 우리의 견해로 보아 관심을 끄는 노예 사역이라는 습성의 필연적 귀결은 다음과 같다. 즉, 노예 사역종의 여왕은 자신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성비를 기울게 할 수 있는 입장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적출의 자식들, 즉 노예 사냥꾼들은 이미 보육장의 실권을 잡고 있 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 힘을 쥐고 있는 놈은 노예들이다. 물론 노예 개미들은 자기의 동 포를 시중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보통 노예들은 자기와 같은 종의 보금 자리 안에서라면 3:1이라는 암놈을 바라는 성비를 달성하는 데 확실히 일역을 할 수 있는 각 노예 사역종의 여왕은 이들에 대한 저항 수단을 자 행사할 수 있다. 더욱이 노예 개미와 자신들이 돌보는 새끼는 남이기 때문에 위의 대항 수단을 무력하게 하는 선택이 노예들에게 작용할 여지는 없다. 예컨대 어떤 종류의 개미에서 여왕이 수컷이 될 알에 암놈과 같은 냄새가 나도록 위장을 '기도했다'고 생각해 보자. 자연 선택은 일개미가 나타내는 경향 중에서 이 위장을 '간파하는 데' 역할하는 모든 경향을 촉진시키는 것이 보통이다. 말하자면 여왕이 부단히 암호를 바꾸 고' 일개미는 그 '암호를 바꾸고' 일개미는 그 '암호를 해독한다'고 하는 어떤 종의 진화상의 다툼이 있다고 예상된다. 누구든지 번식충의 몸을 매개로 하여 다음 세대에 자기의 유전자 를 보다 많이 전달할 수 있는 자가 이 싸움의 승자가 된다. 이미 말한 대로 보통은 일개미 가 승자가 된다. 그러나 '노예 사육종'의 경우에는 여왕이 암호를 바꾸면 노예 개미에게 이 암호를 해독하는 능력이 진화할 가능성은 없다. 노예 개미 몸에 '암호 해독용'의 유전자가 존재해도 그 유전자는 그 보금자리에서 일어나는 어떤 번식충에게도 공유되지 않고 있기 때 문에 다음 세대에 전해질 리도 없다. 그 집에서 출생하는 번식충은 모두 이 노예 사역종에 속해 있기 때문에 여왕과는 혈연 관계가 있으나 노예 개미와는 혈연 관계가 없다. 노예 개 미의 유전자가 어떤 번식충에 공유된다고 하면 그 상대는 유괴당하기 전에 자신들이 소속하 고 있던 본래의 집에서 출생하는 번식충이다. 즉, 노예의 일개미들은 오히려 노예 사역종의 여왕이 쓰는 것과는 다른 암호를 해독하기에 바쁠 것이다. 노예 사역종의 여왕은 자신의 암 호를 해독해 버리는 유전자가 다음 세대에 전해지는 것을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여왕은 자유로이 암호를 바꿔 일개미의 대항책에 대처해 나갈 수 있다. 노예를 부리는 개미에게는 암수 번식충에 대한 투자 비율이 3:1이 아닌 오히려 1:1에 가 까운 값이 될 것이라는 것이 이상의 까다로운 논리의 결론이다. 이 경우에 한해서는 여왕의 바람대로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두 종류의 노예 사역 개미에 관해서이기는 하지만 트라이 버스와 헤어는 실제로 이와 같은 비율을 발견했다. 집단 분할 및 창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사태를 이상화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해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 현 실 생활은 그렇게까지 정연하게 들어맞지 않는다. 예컨대 사회성 곤충 중에서 가장 낯익은 꿀벌은 전혀 '기대 밖의' 것같이 보인다. 꿀벌의 경우 여왕에게 주어지는 분량보다 훨씬 많 은 투자가 수벌에 대해 일어나고 있고, 이것은 일벌이나 모친인 여왕벌 어느 입장에서 보아 도 계산이 맞을 것 같지 않다. 이 수수께끼에 대해 해밀턴은 가능성이 있는 해답 하나를 내 놓았다. 그는 분봉시에 여왕벌이 일벌의 큰 무리를 동반하고 떠나 이 일벌들이 새로운 집단 창설을 도와주는 것에 주목했다. 이들 일벌은 부모집으로부터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자신들 을 만들어 내는 데 필요한 대가는 번식의 대가의 일부로서 계산되어야만 한다. 집을 떠난 여왕벌마다 많은 여분의 일벌이 만들어져야 된다. 이들 여분의 일벌에게 투자된 부분은 번 식 능력이 있는 암벌을 만들기 위한 투자의 일부로 간주되어야 한다. 성비를 계산할 때 이 들 여분의 일벌은 수벌의 반대축의 천칭에 놓고 무게를 재야만 한다. 그래서 꿀벌의 예도 앞에서 기술한 이론으로서는 결국 그다지 심각한 난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밀턴 이론의 훌륭한 활약을 저지하는 더 귀찮은 방해물이 있다. 그것은 사회성 벌목 중에는 결혼 비행시에 젊은 여왕이 두 마리 이상의 수벌과 교미하는 종이 있는 사실이 다. 이와 같은 예에서는 그 여왕이 낳은 암컷끼리의 평균 근친도는 3/4 미만으로 되며 극단 적인 경우에는 1/4에 가까워진다. 너무 이론적이라고 할 수는 없으나, 여러 수벌과의 교미는 여왕이 일벌에게 가하는 교묘한 일격이라고 보이는 것도 흥미있다. 그렇다면 만일 이와 같 이 생각할 때 일벌은 여왕벌이 교미를 한 번 이상 못하도록 결혼 비행에 따라다녀야 할 것 이라는 이야기도 나옴직하다. 그러나 그런 짓을 해도 일벌은 자기의 유전자에 아무런 도움 도 되지는 못할 것이다. 그것에 의해 도움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은 다음 세대의 일벌의 유전자이다. 동일한 계급으로서의 일벌들 사이에는 노동 조합 정신 같은 것은 없다. 각각의 개체는 자기의 유전자에 대한 '배려'밖에 없다. 일벌은 가능하다면 자기 모친의 결혼 비행에 따라붙으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일벌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없었다. 그때에는 아직 수정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결혼 비행을 떠나려고 하는 젊은 여왕은 그 시점의 세대의 일벌과는 자매이지 어미는 아니다. 따라서 그 시점의 일벌은 자신들의 조카에 불과 한 다음 세대의 일벌과 한편이 아니고 젊은 여왕과 한편이다. 이제 슬슬 이 문제를 매듭지 을 때가 온 것 같다. 유전자 양식장 벌목 곤충의 일벌레가 그들의 어미에게 가하고 있는 작용을 여기서는 양식업으로 비유했 다. 이 양식장은 유전자의 양식장이다. 자기들의 유전자의 사본을 생산하기 위해 일벌레는 스스로 그 일을 하기보다 유전자 생산의 효율이 좋은 이유로 해서 어미를 그들의 유전자 사 본의 생산자로 이용하고 있다. 문제의 유전자는 번식충이라는 이름의 포장 속에서 일관 작 업으로 만들어진다. 그러나 사회성 곤충은 전혀 다른 의미로 양식된다고 할 수 있다. 위의 양식업의 비유를 이것과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렵과 채집 생활보다 정착해서 먹이를 양식하는 것이 훨씬 높은 효율을 올릴 수 있다. 사회성 곤충은 인간보다 훨씬 이전에 그것 을 발견했다. 예컨대 아메리카 대륙의 개미와는 달리 멀리 떨어진 아프리카의 흰개미들은 균원(fungus garden)을 만드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남미의 우산개미(parasol ant) 종 족이다. 이들은 매우 성공적이어서 한 집당 개미 수가 200만을 넘는 예도 있다. 그들의 집은 지하에 퍼지는 통로와 길다란 방의 거대한 복합체로서 그 깊이는 3미터 또는 그 이상에 다 하기 때문에 파내는 흙의 양은 40톤이나 된다. 지하의 방에는 균원이 있다. 식물의 잎을 세 분하여 특수한 퇴비 못자리를 만들고 개미들은 일부러 거기에 특수한 종류의 균류를 뿌린 다. 일개미는 즉시 먹이가 될 만한 것을 구하러 나가는 것이 아니고 퇴비를 만드는 데 필요 한 잎을 수집하러 나간다. 우산개미의 군집이 잎을 수집할 때의 식욕은 놀라워서 그들은 크나 큰 경제 피해를 주는 해충이라고도 한다. 수집된 잎은 그들 자신의 먹이가 아닌 그들이 키우는 균류의 먹이로 되 는 것이다. 얼마 후 그들은 그 균류를 수확하여 자신도 먹과 새끼들에게도 먹인다. 개미보다 균류가 높은 효율로 잎을 분해한다. 균원작이 개미에게 이익을 주는 것은 그 때문이다. 한편 균류쪽에서도 물론 수확을 뺏기는 손해도 있으나 위의 상호 관계에 의해 이익을 얻을 가능 성이 있다. 포자의 분산이라는 메커니즘보다 개미의 도움쪽이 효율적으로 균류를 증식시킬 것 같기 때문이다. 게다가 개미들은 균원의 '풀뜯기'까지 해 주고 다른 종의 균류가 침입 못 하도록 해 준다. 경쟁이 없어짐으로 해서 개미에게 재배되는 균류에게는 유리할지도 모른다. 개미와 균류 사이게는 일종의 상호 이타주의적인 관계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계통적으 로 서로 완전히 동떨어져 있는 각종의 흰개미들 사이에서 아주 잘 닮은 균류 재배 시스템이 독립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진딧물과 만나 개미류는 재배용의 식물뿐만 아니라 가축도 소유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진딧물이 그것이다. 진딧물류는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 위해 고도로 특수화된 곤충이다. 그들은 영양가를 조금만 흡수하고 나머지 액체는 분비한다. 설탕을 많이 포함한 '꿀방울'이 몸의 후단에서 대량으로 넘쳐 흘러 나온다. 자기 자신의 체중을 넘는 정도의 꿀방울을 매시간 분비할 때도 있을 정 도이다. 꿀방울은 비처럼 지상에 떨어진다. 하나님이 주신 양식으로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만나'는 실은 이 꿀방울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개미 중에는 그 꿀방울이 진 딧물의 몸에서 이탈하는 순간에 즉시 그것을 탈취해 버리는 종류가 있다. 그들은 더듬이와 다리로 진딧물의 궁둥이를 비벼서 '꿀을 짠다.' 진딧물도 개미에게 반응한다. 개미가 건드릴 때까지 작은 꿀방울을 내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예도 있고, 개미가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작은 꿀방울을 뱃속으로 되돌리고마는 예도 있다. 어던 종의 진딧물은 개미를 쉽게 유인하기 위해서 개미의 안면과 닮은 외관과 감촉을 가진 엉덩이가 진화됐다. 이 상화 관계로 진딧물이 얻는 것은 분명히 천적으로부터의 보호이다. 인간에게 사육되고 있는 소처 럼 그들도 보호받는 생활을 하고 있고 개미로부터 대폭적인 보살핌을 받고 있는 종류들은 자기 방어 메커니즘을 잃고 만다. 개미가 자기들의 지하 집 속에서 진딧물의 알을 돌봐 주 는 예도 있다. 이 경우, 개미는 진딧물의 유충에 먹이를 주어 그들이 성장하면 그들을 보호 가 될 수 있는 목장으로 친절히 운반한다. 상리 공생 다른 종의 개체에게 상호 이익을 주고 받는 관계를 '상리 공생'이라고 한다. 다른 종의 개 체는 서로 틀린 '기능'을 가지고 협력할 수가 있으므로 때로는 서로 큰 이익을 주고받을 수 도 있다. 이와 같은 기본적 비대칭성은 진화적으로 안정된 상호 협력 전략을 발생하게 하는 수가 있다. 진딧물은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에 적합한 구기를 가지고 있으나 그와 같은 흡입 용의 구기는 자기 방어에는 별로 적합하지 못하다. 한편 개미는 식물의 즙을 흡입하기에는 서툴지만 싸움에는 유리하다. 따라서 개미의 체내에는 진딧물을 보호하고 시중드는 유전자 가 개미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게 됐다. 그리고 진딧물의 체내에는 개미와 협력을 바라 는 유전자가 진딧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유리하게 됐다는 것이다. 상호 이익을 가져오는 상리 공생적 관계는 동식물계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예컨대 지의류 는 언뜻 하나의 식물처럼 보이나 실제로 그것은 균류와 녹조류가 밀접한 상리 공생적 결합 을 하고 있는 형태이다. 어느쪽도 다른 쪽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들의 결합이 좀더 밀 접했다면 지의류가 도저히 이중 생물이라고는 판별 못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고 하면 아 직도 우리들이 알지 못한 이중 생물 또는 다중 생물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 우리들 자신 도 그 하나일지도 모른다. 미토콘드리아와 바이러스 우리의 세포 하나하나 속에는 미토콘드리아라고 불리는 작은 몸체가 들어 있다. 미토콘드 리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의 대부분을 생산하는 화학 공장이다. 만일 미토콘드리아 를 잃으면 우리는 즉사하고 말 것이다. 이 미토콘드리아는 진화의 아주 초기 단계에서 우리 의 세포와 같은 형태에 억지로 밀어 넣어져 연합된 공생 박테리아가 지원이었다는 논의가 최근에 설득력 있게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제안은 우리의 세포 속에 있는 다른 미세한 구 조물에 관해서도 행해지고 있다. 혁명적인 사고란 익숙하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리게 마련인 데 위의 설도 이와 같은 생각 중의 하나이다. 다만 이 설에 관해서는 이제 인정될 때가 도 래했다. 사람이 실은 우리의 유전자 하나하나의 고생 단위체라고 하는 나의 생각이 언젠가 는 받아들여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공생적인 유전자들의 거대한 집합체인 것이 다. 이 생각을 지지하는 증거를 실제로 들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의 제1장에서 내가 전하 려고 했듯이 우리가 유성 생식 생물의 유전자 작용을 생각할 때의 바로 그 사고 방식 속에 이미 위의 생각이 실제로 내재하고 있다. 이 생각을 뒤집어 놓고 보면 바이러스는 우리의 몸과 같은 '유전자 집합체'에서 이탈된 유전자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바이러스는 순수한 DNA(또는 이와 유사한 다른 자기 복제분자인 RNA)로 되어 있고 주위에 단백질의 옷을 입 고 있다. 그것들은 예외없이 기생적 존재이다. 위의 견해에 따르면 이와 같은 바이러스는 도 망쳐 온 '반역' 유전자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이제는 정자와 난자라고 하는 통상의 운송 수단 에 매개됨이 없이 생물의 몸에서 몸으로 직접 공중을 여행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는 것이 다. 이 견해가 옳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이러스의 집합체로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 이 바이러스들의 일부는 상리 공생적 협력관계를 맺고 정자와 난자에 실려 몸에서 몸으로 이동 한다. 그들이 관례적인 '유전자'이다. 그 밖의 것은 기생적인 생활을 하고 가능한 각종의 방 법으로 몸에서 몸으로 이동한다. 이 기생적인 DNA가 만일에 정자와 난자에 실려 이동하면 아마도 그것은 제 3장에서 소개한 '역설적인' 여분의 DNA로 될 것이다. 만일 그것이 공중 경유 또는 다른 직접적 수단으로 이동한다면 통상적 의미의 '바이러스'라고 불려진다. 이상은 장래를 위한 가설이다. 당장은 생물체 내부의 문제를 벗어나서 다세포 생물 상호 간의 관계라는 높은 수준으로 상리 공생을 생각하기로 하자. 상리 공생이란 말은 이종 개체 간의 상호 관계에 적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종을 위한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진화를 보는 것을 삼가기로 한 이상, 이종 개체간의 교제를 동종 개체간의 교제와 특별히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는 논리적 근거는 없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교제하는 두 개체가 각각 투 입량 이상의 이익을 그 관계에서 얻을 수가 있다면 상호 이익적인 교제 관계가 진화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같은 무리 중의 하이에나 개체간에 대해 말할 경우 또는 개미와 진딧물, 꽃 피는 식물과 꿀벌 등의 서로가 동떨어진 별개의 생물 간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마찬가지이 다. 다만 진짜로 양쪽에 상호 이익을 가져오는 사례와 한편이 다른 편을 이기적으로 이용하 고 있는 사례를 실제로 판별하는 것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유전자는 이익을 예측할 수 있다 지의류를 구성하는 파트너들의 경우와 같이 양자가 이익을 동시에 주고받는다고 하면 상 호 이익적인 교제 관계의 진화를 상상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쉽다. 그러나 이익의 제공과 이 에 대한 갚음 사이에 시간적 차이가 개입할 때에는 문제가 생긴다. 왜냐하면 이익을 먼저 받은 개체는 상대를 속이고 자기가 갚을 차례가 와도 그것을 거부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 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결은 재미있기 때문에 자세히 논할 가치가 있다. 여기에서도 가설 적인 예를 내놓고 설명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쉬울 것이다. 어떤 종류의 새에게 해로운 병을 옮기는 매우 더러운 진드기가 기생한다고 가정하자. 이 진드기에게 붙들리면 가급적 빨리 그것을 제거하는 것이 그 새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보통 몸에 붙은 진드기는 깃털을 손질할 때 스스로 제거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의 부리로도 미 치지 못하는 곳이 있다. 즉, 머리 윗부분이다. 인간이라면 즉시 해결책을 강구한다. 자기 부 리로는 머리 윗부분에 미치지 못해도 친구가 대신 쪼아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않은가. 이 친절한 새는 후일에 자기에게 진드기가 옮았을 때에 전번에 베푼 친절에 대한 보답을 받을 지도 모른다. 사실 새와 포유류에서는 상호적인 털손질을 매우 흔하게 볼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직관적으로 납득되는 해결책이다. 선견지명을 가진 자라면 서로 상대의 등을 털손질해 주는 짝관계를 맺는 것이 현명한 해결책이 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지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것에 대해 우리는 '조심하라'라고 배웠다.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 다. 친절행위와 이에 대한 갚음 사이에 시간적 지연이 개재하는 조건하에서 유전자의 이기 성 이론은 상호적인 등긁기 관계, 즉 '호혜적 이타주의'의 진화를 설명할 수 있을까? 윌리엄 스는 내가 이미 언급한 1966년의 저서중에서 이 문제를 간단히 논하고 있다. 그는 다윈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즉, 지연성 호혜적 이타주의는 서로를 개체로서 식별하고 또 기억하 는 종에서 가능하다고 하는 것이다. 트라이버스는 1971년의 노문에서 이문제를 더 상세히 논하고 있다. 이 논문을 쓸 때에 메이나드-스미스의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ESS)의 개념 은 아직 그의 심중에 없었다. 나는 만일 이것이 이용되고 있었다면 그는 당연히 그것을 활 용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그의 이론을 표현하기에 꼭 맞는 방법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 이론의 유명한 수수께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으로 그 가 이미 메이나드-스미스와 비슥한 방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B라고 하는 개체가 머리 윗부분에 진드기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A라는 개체는 그것을 잡아 준다. 얼마 있다가 이제는 A의 머리에 진드기가 붙었다. 그는 당연히 B를 찾아간다. B 가 전날의 친절에 보답을 해 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B는 A을 까보고 사라져 버린 다. B는 사기꾼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기꾼이란 다른 개체의 이타적 행위의 이익을 방 아들이나, 상대에게 보답을 않는 개체 또는 불충분한 보답밖에 않는 개체를 말한다. 대가를 지불할 것 없이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기꾼은 상대를 가리지 않는 이타주의자보다 유리하다. 위험한 진드기를 없앤 이익에 비하면 다른 개체의 머리털을 손질해 주기 위한 대 가 같은 것은 분명히 사소한 것으로 생각되나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다. 어느 정도의 귀중 한 에너지와 시간이 쓰여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선심파와 사기꾼파 집단을 구성하는 개체가 두 개의 전략 중 어느쪽이든 한쪽을 채택한다고 하자. 메이나드- 스미스의 분석과 같이 여기서 사용되는 전략이라는 말은 의식적인 전략이 아닌 유전자가 규 정하는 무의식적인 행동 프로그램을 가리키고 있다. 이 두 전략을 '선심' 전략과 '사기꾼' 전 략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선심파'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상대라면 누구에게나 상관없이 털 손질을 해 준다. '사기꾼파'는 선심파의 이타 행동을 받아들이나 다른 개체에 대해서는 이체 털손질을 하지 않고 비록 상대가 이전에 자기를 도와주었던 개체일지라도 무시한다. 비둘기 파와 매파의 분석의 경우와 같이 여기서도 각각의 이득에 적당한 수치를 줄 때 털손질을 받 았을 경우의 이익 쪽이 털손질을 해 줄 경우의 대가보다 크다면 각각의 수치의 실제값은 어 떻게 정하든 좋다. 진드기의 기생률이 높을 경우, 선심파 집단 중 임의 개체에게 털손질을 해준 것과 같은 빈도로 자기도 털손질을 받을 것으로 기대된다. 따라서 선심파 집단중의 선 심파 개체의 평균 이득은 정의 값이 된다. 이때에 그들은 한 개체도 빠짐없이 실제로 잘해 내고 있기 때문에 선심파라는 호칭은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 사기꾼파 한 마 리가 집단 중에 출현하면 어떻게 될까? 사기꾼은 자기 한 마리뿐이기 때문에 다른 모든 개 체로부터 털손질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여 자기는 봉사를 일체 하지 않는다. 그의 평균 이득 은 선심파의 평균 이득 이상이 된다. 그러므로 사기꾼파의 유전자가 집단 중에 퍼지기 시작 하여 선심파의 유전자는 곧 절멸의 길로 몰리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집단 중의 구성비에 상관없이 사기꾼은 항상 선심파보다 높은 성적을 올리기 때문이다. 가령 사기꾼과 선심파가 50%씩인 경우를 생각해보자. 선심파의 평균 이득도, 사기꾼의 평균 이득도 선심파만으로 된 집단의 임의의 개체의 평균 이득에 비해 둘 다 낮은 값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조건하에서 도 아직 사기꾼은 선심파보다 높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사기꾼은 그 본성에 따라 누릴 수 있는 이익을 모두 자기 것으로 하면서 일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기꾼의 구성 비가 90%까지 달하면 집단 속의 어떤 개체의 평균 이득은 매우 낮은 값이 되고 말 것이다. 진드기가 옮기는 병 때문에 어떤 타입도 약간의 사암자를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도 사 기꾼은 선심파보다 높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비록 집단 전체가 절멸로 향해도 선심파가 사 기꾼보다 높은 성적을 올릴 기회는 전혀 없다. 즉, 이들 두 전략만으로 생각하는 한 선심파 의 절멸은 피할 수가 없고, 뿐만 아니라 집단 전체의 절멸 가능성도 매우 높다. 원한파 그렇다면 '원한파'라는 제 3의 전략을 생각해 보자. 원한파는 처음 대하는 상대와 이전에 그에게 털손질을 해 준 개체에 대해서는 자기도 털손질을 해 주고 그를 속인 일이 있는 상 대라면 그것을 잊지 않고 상대에게 한을 품는다. 즉, 그 후에는 그 개체의 털손질을 거부한 다. 원한파형과 선심파형의 개체로 구성된 집단 속에서의 양자의 구별은 불가능하다. 두 종 류 모두 다른 개체에게 이타적으로 행하고, 또한 두 종류 모두 같은 득점의 높은 성적을 올 리기 때문이다. 집단 속의 대부분의 개체가 사기꾼일 경우 고립된 원한파 개체는 별로 성적 을 올릴 수 없다. 집단 속의 모든 사기꾼에게 원한을 가지기까지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 다. 왜냐하면 그는 우연히 만난 거의 모든 개체의 털손질을 해 주게 되어 많은 에너지를 소 비할 처지에 빠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경우 보답으로 그에게 털손질을 해 줄 자는 하나 도 없다. 사기꾼에 비해 원하파가 드물 경에는 원한파의 유전자는 절멸하고 말 것이다. 그러 나 원한파의 수가 증가해서 집단 속에 차지하는 그들의 비율이 어떤 임계값에 도달하면 그 들끼리 만나는 확률이 충분히 높아져서 사기꾼을 돌봐 주기 위해 낭비되는 에너지를 상쇄할 수 있다. 이 임계값에 도달하면 원한파는 사기꾼보다 높은 평균 이득을 올리게 되어 그 이 후 사기꾼의 절멸은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기꾼이 절멸 직전까지 감소하면 그들의 감소율은 낮아지기 시작하며 매우 오랜 기간에 걸쳐 소수파로서 생존을 계속할 것이다. 소 수가 되면 사기꾼 개체가 동일한 원한파와 다시 우연히 만나는 확률은 극히 적어진다는 것 이 그 이유이다. 임의의 사기꾼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개체는 집단 속의 극히 일부에 한정 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경쟁의 결과 이상 세 가지 전략에 관해서 나는 마치 무엇이 일어날 것 같은 자명한 직관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자명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사전에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하여 그 직관이 옳다는 것을 확인해 놓았다. 원한파 전략은 선심파 전략이나 사기꾼 전략에 대해 실제로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을 취한다. 즉, 대부분이 원한파로 된 집단에는 사기꾼도, 선 심파도 침략을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기꾼파도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이다. 대부분이 사기꾼인 집단은 원한파나 선심파 양쪽 모두로부터 침략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집단은 이 두 가지의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의 어느 편에 안주하게 된다. 장기적으로 보면 한편에서 다른 편으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각각의 이득에 실제로 어떤 수치를 주느냐에 따라 이 들 두 개의 안정 상태의 어느 편이 큰 '유인권'을 갖는지를 결정하고, 따라서 어느쪽이 달성 되기 쉬운가가 결정된다(위의 컴퓨터 시뮬레이션에서도 이들의 값은 아주 자의적으로 가정 한 것이다). 아울러 좀 주의해 두고 싶다. 사기꾼 집단은 원한파의 집단보다 절멸의 가능성 이 클 것 같으나, 그렇다고 해서 사기꾼파가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은 전혀 아니다. 만일에 한 집단이 그 자체를 절멸로 이끄는 식으로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에 도달해 버리면 확실히 절멸해 버릴 것이다. 이것은 그저 운이 나쁘다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선심파형 개체, 임계빈도를 조금 넘을 정도의 원한파형 개체, 그리고 원한 파와 거의 동수의 소수파 사기꾼형 개체의 조합을 출발점으로 하고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하 여 그 진행을 보면 매우 재미있다. 우선 최초로 사기꾼의 무정한 착취 때문에 선심파 집단 이 심한 감소를 한다. 사기꾼 개체는 대단히 증가하여 최후의 선심파가 없어질 무렵에 그들 의 수는 장점에 이른다. 그러나 사기꾼은 아직 원한파를 상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심파형 의 급겹한 감소시에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오는 사기꾼의 공세를 받고 원한파의 수도 점점 감소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아직 겨우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후의 선심파가 죽고 이미 사기꾼이 지금처럼 쉽게 타임의 이기적 착취가 일어나지 않게 되면 이번에는 원한파가 사기 꾼을 희생으로 하여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개체수 증가는 차차로 기세가 높아 진다. 그리고 원한파가 크게 증가하여 사기꾼 집단은 절멸 직전까지 격감한다. 이후, 양자의 개체수는 평형을 이룬다. 소수가 된 덕분에 원한을 품을 위험이 좀 감소한다는 소수자 특권 을 사기꾼이 누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기꾼은 서서히 그리고 냉혹하게 말살되어 드 디어 원한파가 집단 전체를 제압한다. 언뜻 보아서 모순되는 것 같으나 선심파의 존재는 당 초 원하파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 그들의 존재는 사기꾼의 일시적 번영을 가능케 하기 때 문이다. 쥐와 청소어의 상리 공생 그런데 위의 가설적인 사례는 털손질을 받지 않으면 개체는 위험에 처한다고 가정한 것인 데 실제로 그러한 가능성은 많이 있다. 예컨대 쥐를 단독으로 키워 보면 스스로 닿지 못하 는 머리 부분에 불쾌한 종기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집단 사육된 쥐는 서 로 머리가 생기는 경향이 있다. 한 연구에 의하면 집단 사육된 주는 서로 머리를 핥아줌으 로 해서 종기의 고통에서 벗어난다고 한다. 호혜적 이타주의의 이론이 실험적으로 검증된다 면 흥미로울 것이다. 쥐는 그와 같은 연구에 적합한 재료가 될 것이다. 트라이버스는 청소어(cleaner-fish)의 대단한 상리 공생에 관해서도 논하고 있다. 대형 어 종의 체표면에 붙어 있는 기생충을 먹으면서 살고 있는 동물이 작은 어종과 새우류를 포함 해서 50종 가량 알려져 있다. 대형 어류는 대리 청소라는 분명한 이익을 얻고 있고 청소어 는 어느 정도의 먹이를 얻도록 되어 있다. 즉, 이 관계는 상리 공생적이다. 많은 경우, 대형 어는 입을 크게 벌리고 청소어가 입 속에 들어가 이를 쪼아 청소하면서 아가미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대형어는 충분히 깨끗해질 때까지 점잖게 기다렸다가 그 다음에 청소 어를 덥석 삼켜 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청소어는 아무런 위험 없이 지나쳐 가는 것이 보통이다. 이것은 현상적인 이타주의의 굉장한 장면이다. 왜냐하면 많은 예에서 청소어는 대형어의 통상 먹이와 비슷한 크니이기 때문이다. 청소어는 특별한 세로줄 무늬를 가지고 있고 또한 특별한 춤으로 과시 행동을 한다. 이것 들이 청소어라는 표지인 것이다. 대형어는 세로줄 무늬를 하고 그럴듯한 춤을 추면서 접근 하는 작은 물고기에 대해 초식을 억제하는 경향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작은 물고 기와 우연히 만나면 그들은 어떤 종류의 황홀한 경지에 빠져들어 청소어가 그들의 체표면과 입과 아가미 속에 자유로이 출입하는 것을 허락한다. 이기성이라는 유전자의 본성으로 말하 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냉혹하게 잡아먹으려고 하는 사기꾼이 있다는 것도 이상할 것은 없 다. 사실 대형어에게 안전하게 접근하기 위해 청소어와 똑같은 외양을 가지고 게다가 똑같 은 식의 춤을 추는 소형 어류가 있다. 이 사기꾼은 대형어가 청소를 기대하며 황홀한 경지 가 되면 그 지느러미에 붙어 살점을 뜯어 물고 줄행랑치곤 한다. 이런 사기꾼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청소어와 그 불청객들의 관계는 대체로 우호적이고 안정되어 있다. 청소꾼이란 직 업은 산호초의 생물 군락의 일상 생활 중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청소어는 각각 자 기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대형어들은 거기에 열을 지어 서서 마치 이발소의 손님처럼 자기 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이 사례로 지연성의 호혜적 이타주의의 진화를 가능케 한 것은 아마도 위와 같은 특정 지역으로의 고집이라는 성질일 것이다. 대형어에게 있어 줄곧 새로운 청소어를 찾는 대신에 같은 '이발소'에 계속해서 다님으로써 생기는 이익은 이 청소 어를 포식함으로써 생기는 대가보다 클 것이다. 청소어는 소형어이기 때문에 위의 추정은 충분히 믿을 수 있다. 청소어로 의태한 사기꾼의 존재는 정직한 청소꾼에게 간접적으로 위 험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전자의 존재에 의해 대형어로 하여금 그러한 사기꾼 물고기를 잡아먹도록 압력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세로줄 무늬의 댄서를 위험에 빠뜨린다. 한펀 진짜 청소어가 나타내는 특정 지역으로의 고집이란 성질은 손님들이 진짜 청소어를 발견하고 사 기꾼을 피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개체 식별 능력 인간에게는 오래도록 기억하는 능력과 개체 식별의 능력이 잘 발달되어 있다. 따라서 호 혜적 이타주의는 인간의 진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 예상된다. 트라이버스 는 다른 사람을 속이는 능력이나 사기를 알아차리는 능력, 사기꾼이라는 것을 간파하지 못 하도록 회피하는 능력 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작용한 자연 선택이 인간에게 갖추어진 각종 의 심리적 특성(질투, 죄책감, 감사하는 마음, 동정 등)을 형성했다고 주장해 왔다. 특히 재 미있는 것은 '교활한 사기꾼'이란 존재이다. 언뜻 보기에 그들은 보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항상 받은 분량보다 조금은 부족하게 갚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비대한 대 뇌와 수학적으로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 소질은 보다 연구된 사기 행위를 하고 동시에 타인 의 사기 행위를 보다 적절하게 간파하기 위한 메커니즘으로서 진화했을 가능성까지도 생각 된다. 이와 같은 견해로 보면 돈은 지연성의 호혜적 이타주의의 공식적 상징이다. 호혜적 이타주의의 개념을 우리 자신이 속하는 종에 적용할 때에 생기는 이러한 매력적인 사변에는 끝이 없다. 확실히 그것은 흥미 있는 문제이지만 이 같은 사변에 내가 특히 재능 을 가지고 있는 바도 아니고 해서 이후부터는 독자가 스스로 즐길 수 있도록 맡기고 싶다. 제11장 밈(Meme)-새로운 자기 복제자 인간의 특이성 지금까지 인간에 관해서는 특별히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일부러 인간을 제 외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내가 '생존 기계'라는 말을 써 온 이유는 '동물'이라고 하면 식물이 제외될 뿐만 아니라 일부 사람의 머리 속에서는 인간까지도 제외되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내가 전개해 온 논의는 언뜻 보기에는 진화의 모든 산물에 해당되는 것이다. 만약 어떤 종 을 예외로 해서 제외하려고 한다면 특별히 타당한 근거가 없으면 안 된다. 우리가 속하는 인간이라는 종을 특이한 존재로 보는 타당한 근거는 있는 것일까? 나는 그와 같은 근거가 확실히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문화, 문화적 돌연변이 인간에 관한 특이성은 대개 '문화'라고 하는 하나의 말로 요약된다. 물론 나는 이 말을 통 속적인 의미로서가 아닌 과학자가 쓸 때의 의이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보 수적이면서도 어떤 형태의 진화를 일으키게 할 수 있는 점에서 문화적 전달은 유전적 전달 과 유사하다. 초서(Geoffrey Chaucer)와 현대 영국인은 사슬같이 이어진 20세대정도의 시간 적 간격이 계속 연결되어 있지만 대화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세대의 사람들 이라면 자식이 아버지와 대화를 할 때처럼 서로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어는 비유전적 인 수단에 의해 '진화'하는 것으로 생각되며 게다가 속도는 유전적 진화보다 더 빠르다. 문화적 전달은 인간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 이외의 동물에 관해서 내가 알 고 있는 적합한 예는 뉴질랜드 앞바다 섬에서 사는 안장새의 울음소리에서 볼 수 잇는 에로 최근 젠킨스(P.F. Jenkins)에 의해 기록됐다. 그가 연구한 섬에서는 약 아홉 종류의 서로 다 른 새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각각의 수놈은 이들 소리 중에서 하나 또는 몇가지만 지저귄 다. 제킨스는 수놈들을 방언의 그룹으로 나눌 수가 있었다.. 예컨대 인접한 영역을 가진 8마 리의 수놈으로 이루어진 한 그룹은 'CC song'으로 불리는 측정한 노래를 했다. 다른 방언 그룹은 각각 다른 노래를 했다. 같은 방언 그룹에 속하는 개체가 둘 이상의 다른 노래법을 공유하는 예도 있었다고 한다. 제킨스는 아비와 수놈 새끼의 노래법을 비교함으로써 노래의 패턴이 유전적으로 아비에게서 수놈 새끼에게로 전해지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개개의 젊은 수놈은 근처에 영역을 갖는 다른 개체의 노래를 인간의 경우처럼 모방이라는 수단에 의해 자기 것으로 삼는 것 같다. 제킨스의 체류 기간 중 섬에서 들을 수 있는 노래의 수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그들이 소위 '노래 풀'을 형성하고 젊은 수놈들은 그로부터 소수의 노래법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제킨스는 운좋게도 젊은 수놈이 옛 노래법을 모방하다가 새로운 노래를 '발명' 는 장면에 몇번 부딪치게 됐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새로 운 노래는 음의 고저의 변화, 같은 음성의 추가, 음성의 탈락 또는 다른 노래법의 부분적 편 입 등 각종의 방법으로 탄생한다. 새로운 노래의 형식은 돌연히 출현하는데 그 후에는 몇 년에 걸쳐 극히 안정된 형으로 유지됐다. 다시 몇 개의 예에서 변이형의 노래가 그 새롱누 형식대로 어린 초보자에게 정확히 전달되어 그 결과 잘 닮은 가수들의 그룹이 새로이 다른 것과 식별될 정도로 됐다." 젠킨스는 새 노래의 출현을 '문화적 돌연변이(cultural mutation)' 라고 표현하고 있다. 안장새는 노래는 분명히 비유전적인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다. 또한 조류와 원숭이의 무리 에는 이외에도 문화적 진화의 예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어느것이나 별다르고 흥미 로운 특수한 예에 불과하다. 문화적 진화의 위력을 정말로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우리가 속 하는 인간이라는 종인 것이다. 언어는 그 많은 측면의 하나에 불과하다. 의복과 음식물의 양 식, 의식과 습관, 예술과 건축, 기술과 공예 등 이들 모두는 역사를 통하여 마치 극히 속도 빠른 유전적 진화와 같은 약식으로 진화하는데, 물론 실제로는 유전적 진화와는 전혀 관계 가 없다. 그러나 유전적 진화와 같이 문화적인 변화도 진보적일 수 있다. 현대 과학은 실제 로 고대 과학보다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우주에 관한 우리의 이해는 시대와 더불어 변 화하는 것뿐만 아니라 실제로 개선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우주의 이해에 관해 현재와 같은 폭발적 진보가 이루어지게 된 것은 확실히 오래 전 르네상스 이후의 일이다. 그네상스 이전 에는 음산한 정체기가 있었고 유럽의 과학 문화는 그리스가 달성한 수준에 동결되어 있었 다. 그러나 제5장에서 말한 대로 유전적 진화에도 닮은 현상이 보인다. 그것은 안정된 정체 기간에서 일련의 돌발적 변화를 나타내어 진행하는 것 같다.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의 유사성 문화적 진화와 유전적 진화의 유사성은 종종 지적되고 있다. 때로 그것은 단지 전혀 불필 요한 신비적 함축이 있는 문맥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학의 진보와 자연 선택에 의한 유 전적 진화의 유사성에 관해서는 특히 포퍼(Karl Popper) 경이 해명을 하고 있다. 포퍼 경을 시작으로 하여 유전학자 카발리 스포르자(L.L. Cavalli-Sforza), 인류학자 클록(F.T. Cloak), 그리고 동물 행동학자 컬렌(J.M. Cullen)등이 탐구하고 있는 방향을 더 끌고 나가고 싶은 것이 나의 목적이다. 열렬한 다윈주의자로서 나는 같은 열렬한 다윈주의자인 동료들이 인간 행동에 가하는 설 명에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인간의 문명이 나타내는 각종 특성의 '생물학적 유리 함'을 찾으려고 노력해 왔다. 예를 들면 부족 종교는 집단으로서의 dflcprka을 높이기 위한 나아ㅢ 메커니즘으로 간주되어 왔다 무리를 지어 수렵을 하는 동물의 경우 각 개체의 생존 은 크고 발빠른 먹이를 잡기 위한 협력에 의존하며, 상기의 메커니즘은 이와 같은 종에게는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종의 이론을 짜맞출 때 그 전제로 되어 있는 진화론적인 견해가 종종 은연중에 그룹 선택주의자적인 것이 되어 있는 수가 있은데, 그들은 정통적인 유전자 수준의 선태으로 바꾸어 말할 수가 있다. 확실히 인간은 과거 수백만 년의 태반을 소규모의 혈연 집단 단위의 생활로 지내 온 것 같다. 따라서 우리의 기본적인 심리적 특성이나 경향 은 대개 우리의 유전자에 대한 혈연 선택과 호혜적 이타주의를 촉진하는 선택이 작용한 결 과로서 만들어졌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생각도 그 자체로서는 훌륭한 것 같다. 그러나 문화나 문화적 진화, 더 나아가 세계의 인간 문화가 나타내는 끝없는 차이-턴빌 (Cilin Tumbill)이 기록한 우간다의 IK 족의 극한적인 이기성과 미드(Margaret Mead)가 보 고한 아라페시(Arapesh) 족의 온화한 이타주의가 그 양극이다-를 설명한다고 하는 망막한 난제는 아직 상기한 바와 같은 이론으로는 매우 대처하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나의 생각으 로는, 우리는 또 한번 다시 고쳐 첫 번째 윈리로 되돌아가 보지 않으면 안되겠다. 현대인의 진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진화를 생각할 때에 유전자만을 그 유일한 기초로 보는 입장을 버려야만 된다는 것이 내가 이제부터 전개하려는 논의이다. 만약 내가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와 같은 것을 말했더라면 놀랐을지도 모른다. 나는 확실히 열렬한 다윈주의자이다. 그러나 나는 유전자라는 좁은 문맥에 비해 다위니즘은 너무나 큰 이론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 이하의 나의 주장에서 유전자는 유추의 대상으로서만 등장할 것이다. 유전자의 특성-자기 복제자 도대체 유전자의 특성이란 무엇일까? 자기 복제자라는 것이 그 답이다. 물리학의 법칙은 도달될 수 있는 전 우주에 타장하다고 보아진다. 생물학에도 이에 해당하는 보편 타당성을 가지는 원리가 있는 것일까? 우주 비행사가 저 멀리 떨어진 행성에 도달하여 생물을 찾는다 면 우리는 상상도 못할 기묘하고 기괴한 생물을 우연히 만날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 살 고 있드, 어떤 화학적 기초를 가지고 살고 있든 모든 생물에 필히 타당한 그 무엇은 없을 까? 가령 탄소 대신에 규소를 혹은 물 대신에 암모니아를 이용하는 화학적 구조를 가진 생 물이 존재했다고 해도, 또는 가령 -100도에서 생존하는 생물이 발견된다면, 또한 가령 화학 반으에 일체 의존하지 않고 전자 방향 회로를 기초로 한 생물이 발견되었을 경우, 이들 모 든 생물에 타당한 일반 윈리는 없는 것인가? 물론 나는 그 답을 모른다. 그러나 만약 무언 가에 내기를 걸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면 나는 어떤 기본 원리에 내 돈을 걸 것이다. 모든 생물은 자기 복제를 하는 실체의 생존율의 차이에 의하여 진화한다는 것이 그 원리이다. 자 기 복제를 하는 실체로서 우리의 행성에 세력을 뻗친 것은 유전자, 즉 DNA 분자였다는 것 이다. 그러나 다른 것이 그 실체로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령 그와 같은 것이 존재하고 다 른 어떤 종의 여러 조건이 충족되면 그것이 어떤 종의 진화과정에 기초가 된다는 것은 거의 필연적일 것이다. 다른 종의 자기 복제자와 그 필연적 산물인 다른 종의 진화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아주 먼 세계로 나갈 필요가 있을까? 내 생각으로는 신종의 자기 복제자가 최근에 바로 이 행성에 등장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과 현재 코를 맞대고 있다. 그것은 아직 미발달한 상태에 있 고 전과 다름없이 원시 수프 속에 꼴사납게 떠 있다. 그러나 이미 그것은 헐떡거리며 멀리 뒤떨어진 옛 유전자를 버려 두고 일정한 속도로 진화적 변화를 이루어 나가고 있다. 인간의 수프-문화 새로이 등장한 수프는 인간의 문화라는 수프이다.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에게도 이름 이 필요하다.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을 함축하고 있는 명사여야 할 것이다. 모방에 알맞는 그리스어의 어근을 따면 'mimeme'라는 것인데 내가 바라는 것은 'gene(유전자)'이라는 말과 발음이 유사한 단음절의 단어이다. 그래서 상기한 그리스어의 어 근을 '밈(meme)'이라고 줄이기로 했다. 나의 친구인 고전학자들에게는 관용을 바라는 바이 다. 만약 위로가 된다면 밈이라는 단어는 '기억(memory)', 또는 이것에 상당하는 프랑스어 의 'meme'라는 단어에 맞추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또 이 단어는 '크림(cream)'과 같은 운 을 밟아서 발음해 주길 바란다. 곡조나 사상, 표어, 의복의 양식, 단지 만드는 범, 또는 아치 건조법 등은 모두 밈의 예이 다.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서 번식함에 있어서 정자나 난자를 운반체로 하여 몸에서 몸으 로 날아다니는 것과 같이 밈이 밈 풀 내에서 번식할 때에는 넓은 의미로 모방이라고 할 수 있는 과정을 매개로 하여 뇌에서 뇌로 건너다니는 것이다. 만약 과학자가 좋은 생각을 듣거 나 또는 읽어나 하면 그는 동료나 학생에게 그것을 전할 것이다. 그는 노문이나 강연 속에 서도 그것을 언급할 것이다. 그 생각이 평가를 받으면 뇌에서 뇌로 퍼져 자기 복제한다고 할 것이다. 나의 동료인 험프리(N.K. Humphrey)가 이 장의 초기 원고를 솜씨 좋게 요약하 여 지적해 주고 있듯이 "...밈은 비유로서가 아닌 엄밀한 의미에서 살아 있는 구조로 간주해 야 한다. 네가 내 머리에 번식력이 있는 밈을 심어 놓는다는 것은 문자대로 네가 내 뇌에 기생한다고 하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숙주 세포의 유전 기구에 기생하는 것과 유사한 방법 으로 나의 뇌는 그 밈의 번식용의 운반체로 되어 버린다. 이것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사 후에 생명이 있다는 믿음'이라는 밈은 신경계의 하나의 구조로서 막대한 횟수에 걸쳐 세계 속의 사람들 속에 육체적으로 실현되어 있지 않은가." 신과 ala의 생존가 신에 대한 생각을 고려해 보자. 그것이 어떻게 해서 밈 풀 속에서 발생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자칫하면 그것은 독립된 '돌연변이'에 의해서 몇 번이고 발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 자기 복제를 하는 것일까? 말하기에 따라 그리고 글쓰기에 따라서 위대 한 음악과 위대한 예숙이 도움을 주고 있다. 그러면 그 밈은 왜 이와 같이 놓은 생종가를 나타내는가. 여기서 말하는 '생존가'란 유전자 풀 속의 유전자로서의 값이 아닌 밈 풀 속의 밈으로서의 값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상기의 의문이 의미하는 것을 과장되게 표현 하면 다음과 같다. 문화 환경 속에서 신의 관념이 안정성과 침투력을 주는 것은 도대체 그 관념이 갖는 어떤 성질일까? 밈 풀 속에서 신의 밈이 나타내는 생존가는 그것이 갖는 강력 한 심리적 매력의 결과이다. 실존을 둘러싼 심원하고 마음을 괴롭히는 여러 의문에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해답을 주고 있다. 그것은 현세의 불공정이 내세에서 바로 고쳐진다 고 주장한다. 우리의 불완전함에 대해서는 '신의 팔'이 구원해 주신다고 한다. 의사가 쓰고 있는 위약과 같아서 이런 것으로도 공상적인 사람에게는 효력이 있는 것이다. 이들은 사람 의 뇌가 세대에서 세대로 용이하게 신의 관념을 복사해 가는 이유의 일부이다. 인간의 문화 가 만들어 내는 환경 속에서 신은 가령 높은 생존가 또는 감염력을 가진 밈이라는 형태로만 실재하는 것이다. 신의 밈의 생존가에 대한 상기와 같은 나의 설명은 논의의 관점의 중심을 피하고 잇는 것 이 아니냐고 지적해 주는 동료가 있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항상 정해 놓고 '생물학적 유리 함'에 되돌아오려고 한다. 그들은 신이 '갈력한 심리적 매력'이 있다라고 하는 것만으로는 불 만일 것이다. 그들은 왜 그것이 강력한 심리적 매력을 가지는가를 알고 싶어한다. 심리적 매 력이라는 것은 뇌에 대한 매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뇌란 유전자 풀 속의 유전자에 대해 자연 선택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상기와 같은 뇌를 가지는 것이 어떤 방도로 유전자의 생존 촉진에 연계되어 있지나 않나 하는 것을 그와 같은 방도로 밝혀내고 싶은 것이다. DNA-자기 복제자 나는 이러한 태도에는 크게 공감을 가지고 있고, 또 현재와 같은 뇌를 우리가 소유하고 있음으로 해서 유전적인 유리함이 있을 것이라는 견해에도 아무런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 러나 그 위에 더욱 나는, 만일 동료들이 그들 자신의 논의의 여러 전제를 그 근본에서 상세 히 검토한다면 그들 자신도 나와 똑같이 논의의 관점을 회피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적으로 생물학적 현상을 유전자의 이익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 이 좋은 방법이 되는 이유는 유전자가 자기 복제자이기 때문이다. 분자의 자기 복제를 가능 케 하는 조건이 윈시 수프 속에 갖추어지면 즉시 자기 복제자가 원시 수프에서 그 일을 떠 맡았다. 그리고 30억 년 전부터 이 지상에서 언급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자기 복제자는 DNA였다. 그러나 DNA가 영원히 그 전매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새로운 종류의 자기 복제자가 자기의 사본을 만들 조건이 생기기만 하면, 바로 그 새로이 나타난 자기 복제자가 세력을 잡고 그 자체의 새로운 종류의 진화를 개시하게 된다. 일단 새롭게 개시된 진화가 이미 낡은 타입이 된 진화에 따라야만 할 필연성은 없다. 유전자를 단위로 하는 낡은 진화는 뇌를 만들어 내는 것에 의해 최초의 밈이 등장하면 그들은 낡은 타입의 진화보다 훨씬 빠른 독자적 타입의 진화를 개시한다. 우리 생물학자는 유전자에 의한 진화 의 사고 방식에 완전히 숙달되어 있으므로 실은 그것이 가능한 여러 종류의 진화 중의 일례 에 불과하다는 것을 자칫하면 잊어 버리게 된다. 수명, 다산성, 복제의 정확함 넓은 의미에서 모방은 밈의 자기 복제를 가능케 하는 수단이다. 그러나 자기 복제가 가능 한 모든 유전자가 성공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처럼 어떤 밈은 밈 풀 속에서 다른 밈보다 성 공적일 수도 있다. 이것은 자연 선택과 흡사한 과정이다. 밈에 높은 생존가를 부여하는 등 의 특성에 관해서는 이미 몇 개의 특수한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일반화하여 생각하면 그 득 성은 제2장에서 자기 복제자에 관하여 논한 것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즉, 수명, 다산성 그 리고 복제의 정확함이 그것이다. 밈의 사본이 표시하는 수명은 유전자의 경웨 비하면 그다 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내 머리 속에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의 선율은 나의 수명이 있는 동안만 존재할 것이다. 내 수중에 있는 (스코틀랜드 학생 가곡집)에 인쇄 된 같은 선율의 사본도 상기한 사본에 비하여 그리 오래 사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같은 선 율의 사본은 종이에 인쇄되어 사람들의 머리 속에 남아 앞으로 수백년이라도 계속 존재할 것으로 여겨진다. 유전자의 경우와 같이 여기서도 특정한 사본의 수명보다 다산성인 것이 훨씬 중요하다. 문제의 밈이 과학적인 아이디어가 인용되는 수를 셈으로 해서 그 아이디어 의 대략적인 생존가를 측정할 수 있다. 가요곡이라는 밈의 경우, 밈 풀 속에서의 번식 정도 는 그곡을 휘파람으로 불면서 지나가는 사람의 수로 짐작할 수 있을지 모른다. 숙녀화의 스 타일이라는 밈이 문제라면 집단 밈 학자는 구둣방의 매상 통계를 이용할 수도 있겠다. 유전 자의 경우와 같이 밈 속에도 급격한 증식에 의해 아주 단기적인 성공을 달성하면서 밈 풀 속에 오랫동안 머물지 못하는 것도 이싸. 유행가나 필요 이상으로 뾰족한 스파이크힐 등이 그 예이다. 한편 유대교의 율법과 같이 수천 년에 걸쳐 자기 복제를 계속하는 것도 있다. 이 러한 밈은 기록된 언어가 가지고 있는 특출한 잠재적 영속성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이 보통 이다. 계속하여 자기 복제자가 성공하기 위한 세 번째의 일반적 성질, 즉 복제의 정확도에 문제 가 있다. 이 점에 관해 나의 논의의 토대가 좀 불확실함을 인정해야겠다. 언뜻 보아서는 밈 이라는 자기 복제자가 복제상의 고도의 정확도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과학자가 어떤 아이디어를 듣고 그것을 타인에게 전할 때 그는 그것을 어느 정도 변화시키게 된다. 나는 이 책의 내용이 트라이버스의 아이디어에 힘입고 있는 것을 숨기려 하지 않았으나, 나는 그의 아이디어를 그의 말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았다. 나는 강조하는 점 을 바꾸거나 내 자신의 또는 다른 연구자의 아이디어를 혼합해서 그의 아이디어를 나의 목 적에 맞게 바꾸어 놓았다. 본래의 밈은 변형되어 독자에게 전해지고 있다. 이것은 입자의 성 질같이 전부냐 아니냐 하는 성질을 가진 유전자 전달과는 전혀 닮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밈의 전달은 계속되는 돌연변이, 그리고 나아가서는 혼합에 처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일견 이 비입자적인 성질이 실은 착각일 수도 있고 유전자와의 유사성도 무너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신장이나 피부색과 같은 많은 유전형질의 유전을 보면 그것 들이 분할 불가능하고, 또한 혼합 불가능한 유전자의 손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흑인과 백인이 결혼하면 그들의 아이는 흑색도 백색도 아닌 그 중간의 피부색으로 나타난다. 그러 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해당 유전자가 입자적이 아님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피부 의 색에 관해서는 미약한 효과를 나타내는 유전자가 매우 많이 관여하고 있기 때문에 언뜻 보아 그것들이 혼합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밈이 하나의 단위로 구 성되어 있다는 것을 마치 확실한 것처럼 말해 왔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치 않다는 것은 분 명하다. 나는 하나의 곡조를 하나의 밈이라고 얘기했다. 그러면 하나의 교향곡은 어떻게 되 는가, 그것은 몇 개의 밈으로 되어 있는가, 각각의 악장이 밈에 해당하는가, 선율상으로 식 별되는 악구가 밈에 해당되는가, 각각의 코드가 밈인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제3장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말의 기교에 호소하기로 하자. 제3장에서 나는 '유전자의 복 합체'를 크고 작은 유전자 단위로 분할하고, 그것을 다시 더 작은 단위로 분할했다. 그리고 나는 '유전자'를 엄격히 전부냐 아니냐 식이 아닌 편의적 단위로서, 즉 자연 선택의 단위로 서 지속적으로 일하기에 만족할 만큼의 복제상의 정확도를 갖춘 염색체상의 부분으로 정의 해 놓았다. 자, 이제 베토벤의 제9교향곡 중에 충분히 뛰어나고 외우기 쉬운 한 악구가 있다 고 하자. 더욱이 그것은 화가날 정도로 밀어붙이는 유럽의 한 방송국이 시그널 뮤직으로 쓸 정도로 뛰어나게 외우기 쉬운 악구라고 하면 이 경우 그 악구는 상기 사정에 걸맞은 범위에 서 하나의 밈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아울러 말하거니와 이 밈 덕분에 원래의 심포니 를 즐기는 나의 능력은 크게 감퇴되고 말 것이다. 다윈 이론과 밈 이와 비슷한 예로서 가령 우리가 "오늘날 생물학자는 모두 다윈의 이론을 믿고 있다.:라고 했다 해도 모든 생물학자가 다윈의 말을 정확히 그대로 머리 속에 새겨 넣고 있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개개의 학자는 다윈의 이론에 과하여 독자적 해석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칫하면 다윈 자신의 저작에서부터 그것을 배운 것이 아니고 보다 최근의 저자의 것으로부 터 배웠을지도 모른다. 뿐만 아니라 다윈이 말한 것에는 자세히 말하면 다소의 잘못이 있다. 더욱이 나는 그가 나의 설명법에 대해서는 마음에 든다고 말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으나, 만약 다윈이 나의 이 책을 읽는다면 거기에서 그 자신의 본래 이론을 거의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모든 사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위니즘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 는 것은 이 이론을 이해하고 잇는 모든 사람들의 머리 속에 확실히 현존한다. 만약 그와 같 은 것이 있을 수 없다면 두 인간 사이에 서로 의견이 일치하는 것에 관한 모든 설명은 무의 미하게 되고 말 것이다. '아이디어의 밈'은 뇌와 뇌 사이에서 전달 가능한 실체로서 정의되 어야 할 것이다. 즉, 다윈 이론의 밈이란 이 이론을 이해하고 있는 모든 뇌가 공유하는 그 이론의 본질적 원칙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그 이론을 표현할 때의 수단상의 차이점은 정의에 의하면 다윈 이론의 밈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또한 만약 다윈의 이론이 A와 B의 두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 가령 어떤 사람은 A를 믿는데 B는 안 믿고, 다른 사람은 B를 믿고 A는 불신하는 상황이라면 A와 B는 다른 밈으로써 구별되어야 할 것 이다. 그러나 A를 믿는 사람은 대개 B도 믿는다. 유전학 용어, 즉 두 밈은 밀접하게 '연관' 되어 있다고 한다면 이 경우에는 양자를 합하여 하나의 밈으로 보는 것이 편리하다. 밈과 유전자의 유사점 밈과 유전자의 유사점을 더 조사해 보기로 하자. 이 책의 전체를 통하여 나는 유전자를 의식을 가진 목적 지향적인 존재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 왔다. 그러나 유전자는 맹 목적인 자연 선택의 작용에 의해 마치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존재인 양 만들어져 있다. 또한 목적 의식을 전제로 한 표현으로 유전자를 설명하는 편이 편리하다. 예컨데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가시의 사본 수를 늘리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표현할 경우 실제 의 의미는 "우리가 자연계에서 그 효과를 볼 수 있는 유전자는 장래의 유전자 풀 속에서 자 기의 수를 결과적으로 증가시킬 수가 있는 거동을 하는 유전자다."라고 하는 것이다. 자기의 생존을 위해 목적 지향적으로 일하는 능동적인 존재로서 유전자를 생각하는 것이 편리했던 것처럼 밈에 관해서도 같게 생각하면 편리하다는 것이다. 어느 경우에도 표현을 신비적으로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목적이란 생각은 어느 경우에서나 단순한 은유에 불과하다. 그러나 유 전자의 경웨 이 은유가 어떻게 유용했었는가는 이미 본 바대로이다. 우리는 그것이 단순한 은유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나서 유전자에 대해 '이기적인'이나 '잔인한'이라든가 하는 형용 사까지 쓸 정도이다. 이들 경우와 똑같은 심정으로 이기적인 밈이나 잔인한 밈을 물색할 수 가 있을까? 경쟁적인 유전자 여기서 경쟁의 성질을 가지고 문제를 하나 생각해 두자. 유성 생식의 경우, 개개의 유전자 는 대립 유전자, 즉 염색체상의 같은 장소를 점하려고 하는 대립 유전자와 경쟁하고 있다. ala에는 염색체에 상당하는 것이 없으며, 대립 유전자에 상당하는 것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극히 작은 의미에서라면 많은 생각에는 '대립하는 생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적으로 밈은 적절하게 짝을 이룬 다수의 염색체 형태로 존재하는 오늘날의 유전자와는 별로 닮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예 원시 수프 속을 무질서하게 제멋대로 떠 있던 초기의 자기 복 제 분자를 닮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의미에서 밈은 서로 경쟁하고 있는 것 인가? 대립하는 밈이 없는데로 밈이 '이기적' 이라거나 '잔인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아마도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 나의 답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서로 일종의 경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디지털 컴퓨터를 사용한 적이 있는 독자는 컴퓨터의 연산 시간과 기억 용량이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를 잘 알 것이다. 많은 대규모의 계산기 센터에서는 그것을 문자대로 요금에 환산하고 있거나, 사용자에게 초 단위의 사용 시간과 '문자'의 수로 표시된 기억 용량을 각 각 일정량 씩 할당하고 있다. 인간의 뇌는 밈이 살고 있는 컴퓨터이다. 거기서는 시간이 아 마도 저장 용량보다 중요한 제한 요인으로 되어 있고, 심한 경쟁의 대상으로 되어 있을 것 이다. 인간의 노와 그 제어하에 있는 몸이 동시에 하나 또는 몇 종류 이상의 일을 해치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한 밈이 한 인간의 노의 처리 요구를 독점하고 있다고 하면 '라이벌'의 밈이 희생되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밈이 경쟁의 대상으로 하는 필수품은 다른 것에도 있 다. 예컨대 라디오와 텔레비전의 방송 시간, 게시판의 공간, 신문 기사의 길이, 그리고 도서 관의 책장 공간 들이다. 상호 적응적 밈 유전자의 경우, 유전자 풀 속에 상호 적응하는 유전자의 복합체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을 제3장에서 이야기했다. 예컨대 나비의 의태에 관여하는 다수의 유전자는 동일 염색체상에 극히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것들 모두를 하나로 묶어 하나의 유전자로서 다룰 정도이 다. 제5장에서는 진화적으로 안정된 유전자 세트라는 더 복잡한 개념을 끄집어냈다. 예컨대 육식 동물의 유전자 풀에서는 서로 적합한 이, 발톱, 소화관, 그리고 감각 기관이 진화하는 한편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에서는 위와는 다른 모든 특성이 안정된 세트를 형성하고 있다. 밈 풀 에서도 닮은 일이 생길 것인가? 예컨대 신의 밈이 다른 특정 밈과 화합이 가능하고, 또 이 화합이 각각의 밈들의 생존에 도움을 줄수 있을까? 자칫하면 독특한 건축, 의식, 율 볍, 음악, 예술, 그리고 문자로 이루어진 전통을 가진 교회 조직 등은 서로 돕는 밈의 상호 적응적 안정 세트의 일례일지도 모른다. 종교와 믿음 하나의 특별한 예를 들어 보자. 사람에게 종교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 유효했던 교의의 하 나는 지옥불이라는 협박이다. 많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일부 어른들까지도 성직자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사후에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고 믿고 있다. 이것은 중세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겪게 하는 극히 음험한 설득 기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이 기술은 효과적이다. 또는 심층 심리학적인 교화 기술의 훈련을 받은 권모술수적인 성 직자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기술을 만들어 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성직자들이 그렇게까지 머리가 좋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자체는 의 식을 갖지 않는 밈이 성공하는 유전자가 나타내는 것과 같은 모조적 잔인성이라는 특성을 가진 덕분에 스스로의 생존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편이 당연하다는 기분이다. 지옥불이라는 관념은 아주 단순히 그 자체가 가지는 강렬한 심리적 충격력 때문에 자기를 영속화하고 있 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밈과 연관된 것은 양자가 서로 강하게 화합하여 밈 풀 속에서 서로 의 생존을 촉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하는 밈 복합체의 또 하나의 구성원에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증거가 없어 도 -증거를 무시하고라도- 맹신한다는 것이다. 불신의 '도마(Thomas)의 말은 도마로 하여 금 믿도록 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그와 비교 대조함으로써 우리가 다른 사도들을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이야기인 것이다. 도마는 증거를 요구했다. 어떤 종류의 밈에게는 증거를 찾는 경향만큼 치명적인 것은 없다. 다른 사도들은 아주 강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증 거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들이야말로 본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으로 지지받고 있는 것 이다. 맹신의 밈은 이성적인 물음을 꺾어 버리는 단순한 무의식적 수단을 행사함으로써 자 기의 영속을 확보하는 것이다. 맹신은 어떤 것도 정당화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다른 신을 믿고 있으면 아니, 만약 사람 이 같은 신을 믿는데 다른 의식을 쓴다면 다만 그것만으로도 맹신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 있다. 십자가에 매단다, 화형을 한다, 십자군의 검으로 찌른다. 베이루트 노상에서 사살한 다, 벨파스트의 술집에 있는 것을 폭탄으로 날린다,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이다. 맹신이라는 밈은 몸에 밴 잔인한 방법으로 번식해 가고 있다. 애국적, 정치적 맹신이든, 종교적 맹신이 든 상기의 성질은 똑같은 것이다. 독신주의 밈과 유전자는 종종 서로 강하게 화합하는데 때로는 서로 대립하는 수도 있다. 예컨대 독 신주의의 습관 같은 것은 유전에 의해 전해지는 것이 아니다. 사회성 곤충에서 볼 수 있는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면 독신주의를 발현시키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실패로 운 명지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신주의의 밈은 밈 풀 속에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예컨대 밈의 성공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얼마나 시간 을 T는가에 의해 결정적으로 좌우된다고 가정해야 한다. 그 밈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 이외 에 쓰인 모든 시간을 그 밈의 입장에서 보면 시간 낭비로 보일 것이다. 독신주의의 밈은 성 직자들로부터 아직 인생의 목표를 정하지 않은 소년들에게 전해진다. 전달의 매체가 되는 것은 각종의 인간적 영향력을 가지는 것, 예컨대 오가는 말, 쓰여지는 문자, 사람에 의한 모 범 등이다. 여기서 논의의 편의상 대중에 대한 성직자의 영향력이 결혼에 의해 약화된다고 하자. 이는 결혼이 그의 시간과 관심을 크게 차지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이것은 성직자에 게 독신 생활을 강요할 때에 공식적인 이유로서 제시되는 것이기도 하다. 만약 위와 같은 사태가 있을 수 있다면 독신주의의 밈은 결혼을 촉구하는 밈보다 높은 생존가를 나타 낼 수 있다. 물론 독신주의를 촉구하는 유전자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서는 독신주의의 밈과 는 완전히 역의 결과가 될 것이다. 승려를 밈의 생존 기계라고 한다면 독신주의라는 것도 그에게 짜 넣어지면 필요한 속성이 된다. 독신주의는 다수의 호조적인 종교적 밈이 만들어 내는 거대한 복합체의 작은 파트너인 것이다. 나는 상호 적응한 유전자 복합체의 진화와 같은 방식으로 상호 적응한 밈의 복합체가 진 화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선택은 자기의 이익을 위해 문화적 환경을 이용하는 밈에게 유리 하게 작용한다. 이 문화적 환경은 같은 식으로 선택을 받고 있는 밈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 라서 밈 풀이 진화적으로 안정된 세트로서의 특성을 나타내게 되어 새로운 밈은 쉽게 침입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밈의 밝은 면 지금까지는 밈의 어두운 면만을 이야기해 온 것 같다. 그러나 밈에도 밝은 면이 있다. 우 리가 사후에 남길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다. 즉, 유전자와 밈이다. 우리는 유전자를 전하기 위해 만들어진 유전자 기계이다. 그러나 유전자 기계로서의 우리는 3세대 정도 경과하면 잊 어버리고 말 것이다. 자식이나 또는 손자도 우리와 어딘가 닮은 점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얼굴의 모양새가 닮았을지 모른다. 음악적 재능이 닮았을지도 모른다. 또는 머리칼 색깔이 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세대가 지날 때마다 우리 유전자의 기여는 반감해 간 다. 그 기여도는 머지않아 무시할 정도로 될 것이다. 유전자 자체는 불사신일지 몰라도 특정 개인을 형성하는 유전자의 집합은 붕괴될 운명에 있다. 엘리자베스 2세는 윌리엄 1세의 직 계 자손이다. 그러나 그녀가 옛날의 대왕의 유전자를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할 가능성은 많 이 있다. 번식이라는 과정 속에서 불사를 희구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계 문화에 무언가 기여할 수가 있다면, 예컨대 좋은 의견을 내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발화식 플러그를 발명하거나, 시를 쓰거나 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유전자 가 공통의 유전자 풀 속에 용해되어 버린 후에도 변함없이 길이 생존해 나갈지도 모른다. 윌리엄스가 지적한 대로, 소크라테스의 유전자 중에서 금일 세계에 살아 남아 있는 것이 과 연 하나라도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고 있을 것인가. 소크라테스, 레오나르도 다빈치, 코페르니쿠스, 그리고 마르코니 등등의 밈 복합체는 아직도 건재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전재한 밈의 이론이 아무리 사변적이었다고 해도 여기서 또 한번 강조하고 싶은 중 요한 논의점이 하나 있다. 문화적 특성의 진화와 생존가를 문제삼을 때에는 누구의 생존을 문제삼는가를 분명히 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본대로 생물학자들은 유전자 수준에서의 유리함을 탐구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취미에 따라서는 개체, 집단 또는 종 의 수준에서 유리함을 탐구하고 싶어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단지 그 자신에게 유리하다 는 이유만으로 문화적 특성이 진화할 수 있는 그런 진화의 양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 해 우리는 지금까지 생각조차도 해 보지 않았다. 종교, 음악, 그리고 제식춤 등에는 생물학적인 생존가가 있는지 몰라도 그것에 관해 꼭 통 상의 생물학적 생존가를 찾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유전자가 그 생존 기계에 빠른 모방 능 력을 가진 뇌를 제공하게 되면 밈들은 필연적으로 득세한다. 모방에 유전적 유리함이 있다 면 확실히 도움이 되지만 그런 유리함의 존재를 가정할 필요는 없다. 유일하게 필요한 것은 뇌에 모방 능력이 없다면 안 된다는 것뿐이다. 이것만 충족된다면 그 능력을 충분하게 이용 하는 밈이 진화해 나갈 것이다. 선견 능력 새로이 등장한 자기 복제자의 화제는 이제 이 정도로 하고, 적당한 희망에 접하며 한 마 디의 말로 이장을 끝맺고 싶다. 그 진화가 밈에 의해 유래됐는지 어떤지 정해진 것은 아니 나, 인간에게는 의식적인 선견 능력이라는 하나의 독자적 특성이 있다. 이기적 존재인 유전 자는(그리고 독자가 이 장의 사변을 인정한다면 밈에게도) 선견 능력이 없다. 그들은 의식을 갖지 않는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인 것이다. 그들이 자기 복제한다는 사실과 어떤 종의 부가 적인 여러 조건과를 조합하여 생각하면 그들은 이기적(이 책에서 쓴 특수한 의미로)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성질을 불가피하게 진화시킨 것이다. 유전자이든 ala이든 무지한 자기 복 제라는 것은 눈앞의 이기적 이익을 포기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익이 되는 경우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예를 공격 행동을 다룬 장에서 보았다. 어느 개체이든 진화 적으로 안정된 전략보다는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를 취하는 것이 유리한데도 자연 선택은 필히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쪽으로 유리하게 작용해 나간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진짜 이타주의의 능력이 인간의 또 하나의 독자적 성질일 가능성도 있다. 꼭 그리됐으면 좋을 것이나 이 점에 관해 나는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논의할 생 각은 없고, 그것에 관한 밈적인 진화의 가능성을 이것저것 사변할 생각도 없다. 내가 여기서 강조해 두고 싶은 것은 다음의 한 가지 점이다. 우리가 비록 어두운 측면으로 눈을 돌려 개 개의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인 존재라고 가정한다고 해도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 능력, 즉 상상력을 구사하여 장래의 사태를 시뮬레이트 하는 능력에는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이 일으키는 최악의 이기적 폭거에서 우리를 구출하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단순한 눈앞의 이기적 이익보다 오히려 장기적인 이기적 이익을 촉진시킬 정도 의 지적 능력은 있다. 우리는 '비둘기파의 공동 행위'에 참가하는 것이 장기적 이익에 이어 짐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는 같은 경쟁자와 함께 앉아 그 공동 행위를 잘 실행하는 방법을 서로 말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고 만일 더 필요하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는 자 연계에 안주할 여기가 없고 세계의 전 역사를 통해 과거에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 는 그것을 계획적으로 육성하여 교육하는 방법을 논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 자 기계로서 조립되어 밈 기계로서 교화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들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상에는 유일하게 우리 인간만이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전제적 지배에 반역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