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유전자의 친족 관계 이기적 유전자 이기적인 유전자란 무엇일까? 그것은 다만 DNA의 물리적인 작은 조각만은 아니다. 원시 수프에서 그랬듯이 그것은 세계에 분포하고 있는 개개의 특별한 DNA 조각의 모든 복제이 다. 원할 때 언제든지 알맞은 용어로 고칠 수 있는 자신이 없다면 부정확함을 안 후에라도 유전자가 의식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양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개개의 이기적인 유전자의 목적은 무엇인가?" 유전자 풀 속게 다시금 수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라고 답할 수 있다. 그것은, 즉 개개의 유전자는 기본 적으로 그것이 생존하고 번식하는 장소인 몸을 프로그램하는 것을 도와줌으로써 이것을 행 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이 다수의 다른 개체 내에 동시에 존재한다. 분산된 존재라 고 하는 것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장에서 중요한 것은 유전자가 남의 몸에 있는 자 기 자신의 복제까지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개체의 이타주 의로 나타날 것이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유전자의 이기주의의 산물인 것이다. 알비노 유전자 인간의 알비노(albino;선천성 색소 결핍증)에 관한 유전자를 생각해 보자. 실제로 알비노를 일으키는 유전자는 여러 개가 있으나 여기에서는 그 중 하나에 대해서만 말하기로 하자. 이 유전자는 열성이다. 즉, 그 사람이 알비노가 되려면 이 유전자가 배수로 존재해야만 한다. 이것은 약 2만 명 중 한 사람의 비율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약 70명 중 한 명은 이 유전자 를 단 하나 가지고 있는데, 이들 개체는 알비노가 아니다. 알비노 유전자와 같은 유전자는 많은 개체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론상 자기가 머물고 있는 몸이 다른 알비노 개체에 대 해(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프로그램함으로 써 유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생존을 도울 수가 있다. 알비노 유전자가 들어 있는 몊 사람이 죽음으로써 같은 유전자를 가진 다른 몸의 생존을 도와주는 것이라면, 알비노 유전자는 만 약 그렇게 될지라도 매우 다행 한 일일 것이다. 만약 알비노 유전자가 그것을 가진 한 몸이 다른 몸의 10개의 알비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그 이타주의가 죽더라도 유전자가 풀 속 의 알비노 유전자의 수의 증가로 충분히 보상되는 것이다. 그러면 알비노 사람끼리는 특히 친절한 관계에 있다고 생각해도 좋을까? 아마도 실제로는 '아니다'라는 답일 거이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하여 일시적으로 유전자를 의식적 존재로 생각 했던 비유를 그만두어야만 하겠다. 이 문맥에서 그것은 분명히 오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다소 긴 이야기가 될지는 몰라도 진지한 말로 바꿔 옮겨야겠다. 알비노 유전자가 실제로 살 고 싶다든가 다른 알비노 유전자를 돕고 싶다든가 하는 생각을 할 리는 없다. 그러나 알비 노 유전자가 종종 그것을 지닌 몸이 다른 알비노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시켰다면 결과로서 싫더라도 자동적으로 유전자 풀 내에서 수가 불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그 유전자가 몸에 대해 두 개의 독립된 효과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심한 백색 피부라는 보통의 효과를 주는 것만은 아니다. 심한 백색 피부를 한 사람 에 대해 선택적으로 이타적 행동을 하는 경향까지도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은 이중 효과를 가진 유전자가 만일 존재한다면 그것은 개체군 내에서 대단히 성공할 수 있을 것이 다. 그래서 제 3장에서 강조한 대로 유전자에 다형질 발현 효과가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 백 색 피부이든 초록색 수영이든 그 밖의 유별한 특징이든 간에 겉으로 보이는 '표시'와 그 눈 에 잘 띄는 표시의 주인에게 특히 친절하게 하는 경향을 동시에 발현시키는 유전자가 생기 는 것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다. 단, 가능하다고는 하나, 가능성이 특별히 높을 리는 없다. 같 은 식으로 초록색 수염은 살을 파고들며 자라는 타입의 발톱이나 그 밖의 어떤 특징을 발달 시키는 경향과 결부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고, 초록색 수염에 대한 호기심은 프리지어의 냄 새를 맡는 능력이 없다는 것과 관련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같은 유전자가 있는 표시와 그 표시에 대한 정확한 이타주의와의 양쪽을 생기게 하는 가망성은 아마도 없을 것 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록색 수염 이타주의 효과'는 이론상 가능하다. 이타적 유전자는 번영한다 초록색 수염과 같은 임의의 표시는 유전자가 다른 개체 내에서 자기 복제를 '인지'하는 하 나의 수단이다. 다른 것에도 어떤 수단이 있을까? 직접 가능한 수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타적 유전자의 소유주는 단순히 이타적 행위를 한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가 있다. 어떤 유전자가 "몸아, A가 물에 빠진 자를 건지려다 도로 빠지면 뛰어들어 도와라."라고 하는 말 을 '했다'고 하면 이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번영할 것이 틀림없다. 이와 같은 유전자가 성공하는 이유는 A가 같은 생명 구조 이타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확률이 평균보다 높다 는 것이다. A가 다른 누군가를 도우려고 했다는 것은 초록색 수염과 같은 일종의 표시이다. 그것은 초록색 수염만큼 자의적인 것은 아니나 그러하도 해서 너무 최상의 것으로도 여겨지 지 않는다. 유전자가 다른 개체 내에서 자기의 사본을 '인지하는' 어떤 최상의 방법이 있을 까? 답은 '그렇다'이다. 근친자-혈연자(kin)-가 유전자를 나누는 확률이 평균보다 높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것이 어미가 새끼에 대한 이타주의가 많은 이유일 것이라는 것은 이전부 터 알고 있었다. 피셔(R.A. Fisher), 헐데인(J.B.S. haldane), 특히 해밀턴(W.D. Hamilton)이 분명히 한 것은 다른 근친자-형제 자매, 조카, 조카딸 그리고 사촌-이게도 같은 것을 적용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가령 열 사람의 근친자를 구원하기 위해 한 사람이 죽었을 경우 혈연 이타주의 유전자의 한 사본이 없어졌으나 같은 유전자보다 많은 사본이 구조되는 셈이 된 다. 그러나 '보다 많은 수'라는 것은 다소 애매하다. '근친자'라는 것도 그러하다. 해밀턴이 지 적한 대로 이것은 조금 더 분명히 할 수 있다. 1964년의 그의 두 논문은 지금까지 쓰여진 사회 동물 행동학의 문헌 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된다. 나는 이들 논문이 동물 행동 학 자들에게 왜 이렇게 무시되어 왔는지 이해가 안 된다(그의 이름은 1970년에 출간된(행동학) 2권의 중요한 교과서의 색인에조차 없다). 다행히 최근 그의 생각이 추대되기 시작한다. 해 밀턴의 논문은 다소 수학적인데 어느 정도 지나친 단순화라는 대가를 치르면 엄밀한 수학을 쓰지 않고도 직접적으로 기본 원리를 터득할 수 있다. 우선 계산하고 싶은 것은, 예컨대 자 매와 같은 두 개체가 특정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확률이다. 이제 유전자 풀 전체 중에서 수가 작은 즁전자에 대해 말하기로 하자. 배부분의 사람들은 서로 관련이 있든 없든 '알비노가 되지 않기 위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다. 이 유전자가 그 와 같이 많은 것은, 자연계에서는 알비노가 알비노가 아닌 것에 비해 생존이 어렵기 때문이 다. 예컨대 태양이 그들의 눈을 부시게 하여 접근하는 포식자를 발견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 이다. 알비노가 되지 않기 위한 유전자와 같이 분명히 '좋은'유전자 알비노 내에 널리 분포 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할 생각은 없다. 이타주의라는 특수한 작용의 결과로서 유전자가 유 전자 풀에 퍼지는 경우를 설명하고 싶다. 따라서 이 진화 과정의 최초 단계에서는 적어도 이들의 유전자 수가 적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개체군 전체에서도 수가 적은 유전자조차 가족 내에 서는 흔히 있는 유전자라고 하는 점이다. 나도 개체군 전체에서 수가 적은 유전자를 많이 가지고 있고 당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이 색다른 유전자를 공유할 확률은 실제로 극히 드물다. 그러나 나의 누이가 나와 같은 색다른 유전자 를 가지고 있는 확률은 다소 있으며, 당신의 누이가 당신과 공통의 색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확률은 다소 있으며, 당신의 누이가 당신과 공통의 색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확률 도 같은 정도이다. 이 경우 확률은 정확히 50%다. 그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유전 당신이 유전자 G의 사본 1개를 가지고 있다고 하자. 그것은 당신의 부친이나 모친 중 어 느편에서 받았음에 틀림없다(편의상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여러 가지의 가능성, 즉 G가 새로 운 돌연변이일 경우와 양친이 모두 그것을 가지고 있을 경우, 또는 양친 중 누군가가 그 사 본을 2개 가지고 있는 경우 등은 무시하기로 한다). 이 유전자를 당신에게 준 사람이 부친 이었다고 하자. 이 경우 부친의 체세포는 모두 G의 사본을 1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인간이 정자를 만들 때에 자기의 유전자를 절반씩 나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그러므로 당신의 누이를 만든 정자가 유전자 G를 받았을 확률은 50%이다. 한편 당신이 모 친으로부터 G를 받았다고 하면, 같은 이유로 난자의 반수가 G를 가지고 이썼을 것이먀, 누 이가 G를 가지고 있을 확률 또한 50%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100명의 형제 자매가 있다면, 그 중 약 50명이 당신과 같은 색다른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 된다. 또 당신이 100개 의 색다른 유전자를 갖고 있다면 그 중 약 50개는 어느 형제의 몸에도 있다는 말이 된다. 근친도 어느 정도의 친족 관계인 개체에 대해서도 같은 계산이 된다. 중요한 것은 양친과 자식과 의 관계이다. 당신이 유전자 H의 사본을 1개 가지고 있다면 당신 아이들은 어느 아이라도 그것을 가지는 확률이 50%이다. 왜냐하면 당신의 생식 세포의 반수가 H를 가지고 있고 어 느 아이도 그 생식 세포의 하나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당신이 유전자 J를 1개 가지고 있다면 당신이 부친의 J를 가지고 있었을 확률은 50%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신의 유전자의 절반을 부친으로주터, 나머지 절반은 모친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이다. 편의상 '근친도 (relatedness)'라는 지표를 쓰기로 하자. 이것은 2인의 친족이 1개의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는 확률을 나타내고 있다. 2인의 형제간의 경우,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전자의 절반이 다른 사람에게서도 보이므로 그 근친도는 1/2이다. 이것은 평균적 수치이다. 즉 특정 2인의 형제 에 대해서는 감수 분열의 운 여하에 따라 공유하는 유전자가 이보다 많았다 적었다 할 때가 있다. 부모와 자식 간의 근친도는 반드시 1/2이다. 매번 하나하나를 최초의 원칙에 따라 세세하게 계산하는 것은 다소 지겨운 일이다. 그래 서 A와 B가 두 개체일지라도 그 근친도를 산출할 수 있는 매우 빠른 규칙을 제시하자. 그 것은 유언장을 만들 때나 자기 가족의 외견상의 닮은 점을 밝히는 데 필요한 것이다. 이 규 칙은 단순한 예라면 무엇에든지 적용되지만 근친 교배가 일어날 때나 후술할 어떤 종의 곤 충에게는 해당될 수 없다. 우선 A와 B의 공통 조상을 모두 밝혀 보자. 가령 두 사촌끼리의 공통 조상은 그들 공통 의 조부와 조모이다. 공통 조상 중에서 한 사람이 밝혀지면 논리적으로 그의 조상의 조상은 물론 A와 B 모두에게 공통 조상이다. 그러나 가장 최근의 공통 조상 외에는 모두 무시하기 로 한다. 그러면 사촌끼리의 공통 조상은 그 사람뿐이다. 만일 B가 A의 직계 자손으로 가령 A의 증손이라면 A자신이 우리가 구하고 있는 '공통 조상'이다. 세대 간격 A와 B의 공통 조상이 발견되면 다음과 같은 세대 간격을 세어보자. 우선 A로부터 공통 조상에 이르기까지 가계도를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다시 B까지 내려간다. 가령 A가 B의 숙 부라면 세대 간격은 3이다. 그래서 공통 조상은 A의 아버지이자 B의 조부가 된다. A를 출 발하면 공통 조상에 부딪치기 때문에 1세대 거슬러 오른다. 거기서 B에 달하기 위해 다른 쪽에 2세대를 내려가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세대 간격은 1+2=3이다. 공통 조상을 경유한 AB간의 세대 간격을 알았으면 다음에 그 조상에 관계하는 AB간의 근친도를 계산하자. 거기에는 세대 간격의 각 단계마다 1/2을 곱하여 간다. 세대 간격이 3이 라면 1/2*1/2*1/2, 즉 (1/2)3이 된다. 특정 조상을 경유한 세대 간격이 g라면 근친도 부분은 (1/2)ㅎ이다. 그러나 이것은 AB간의 근친도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들에게 공통 조상이 2인 이상 있을 때는 각각의 조상에 관한 같은 식의 수치를 더해야 한다. 보통 두 개체의 공통 조상은 모두 세대 간격이 같다. 그러므로 조상의 어떤 한 사람에 대해 AB간의 근친도를 계산할 경우 다 음에 해야 할 것은 조상의 수를 곱하는 것이다. 가령 사촌에게는 공통 조상이 2인 있고, 그 각각을 경유하는 세대 간격은 4이다. 따라서 그들의 근친도는 2*(1/2)4=1/8이다. A가 b의 증 손이라면 세대 간격은 3이고 공통의 '조상'수는 1(B자신)이므로 근친도는 1*(1/2)3=1/8이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사촌은 증손과 같다. 이와 같이 당신은 조부(근친도 2*(1/2)3=1/4)와 같은 정도로 숙부(2*(1/2)3=1/4)와 '닮았다.' 조부 또는 숙모가 사촌끼리인 먼 친족 관계(2*(1/2)8=1/128)에 서는 A가 가지고 있는 특 정한 유전자를 개체군 속에서 임의로 선택한 개체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확률에 다가간 다. 이와 같이 근친자는 이타적 유전자에 관한 한 지나가는 행인과 같다고 해도 과언은 아 니다. 육촌끼리(근친도1/32)는 어느 정도 가까운 친족일 뿐이다. 사촌끼리는 이것보다는 조 금 가깝다(1/8). 친형제와 친자식은 아주 가깝다(1/2). 그리고 일란성 쌍생아는 자기 자신같 이 가깝다(근친도 1). 숙부와 숙모, 조카와 조카딸, 조부모와 손자, 배다른 형제 자매는 근친 도가 1/4이기 때문에 중간 정도로 가깝다. 혈연 이타주의 유전자 그러면 혈연 이타주의의 유전자에 대해 좀더 정확하게 이야기해 보도록 하자. 5인의 사촌 을 구조하기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유전자가 개체군 속에 증가하는 일은 없으나 5인의 형제나 10인의 사촌 때문에 생명을 버리는 유전자의 수는 불어날 것이다. 이타적 자살 유전 자가 성공하는 최소의 필요 조건은 그 유전자가 2인 이상의 형제(또는 자식이나 부모)나 4 인 이상의 배다른 형제(또는 숙부와 숙모, 조카와 조카딸, 조부모, 손자)또는 8인 이상의 사 촌 등을 구하고 죽는 것이다. 이미 이와 같은 유전자는 이타주의자에 의해 구조된 충분한 수의 개체의 체내에서 살아가며, 이타주의자 자신의 죽음에 의한 손실을 보상받는 셈이 된 다. 어떤 사람이 상대가 자기와 같은 일란성 쌍생아라는 것을 알면 누구든지 그 사람의 행복 을 자기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중요시할 것이다. 쌍생아 이타주의 같은 것이 있다면 그 유전 자는 어떤 것이나 쌍생아의 쌍방이 필히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 쪽이 다른 쪽을 살리고 영 웅적으로 죽어도 그 유전자는 살아 남는다. 9마리의 무리를 이루는 아르마딜로는 일란성의 4마리 새끼로 출생한다. 내가 아는 한에서 아르마딜로 새끼에 대한 어미의 영웅적인 자기 희생의 업적은 보고 되지 않고 있으나 어떤 종류에 강력한 이타주의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한다. 이것은 누구나 남아메리카에 가서 한 번 보고 올 가치가 있음직하다. 그러면 자식에 대한 부모의 수고는 혈연 이타주의의 특수한 예임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 로 말하면, 만약 갓난아기인 동생이 고아가 됐을 경우 형제들은 자기의 친자식처럼 어린 동 생을 열심히 돌보아 줄 것이다. 근친도가 똑같이 1/2이기 때문이다. 유전자 선택의 이론으로 말하면 큰누나의 이타적 행동의 유전자는 부모의 이타주의 유전자와 같은 정도로 개체군 속 에 퍼질 확률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후술하는 여러 이유에서 지나치게 단순화한 형태이다. 실제로 자연계에서 누나에 의한 수고는 부모의 수고만큼 많지는 않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부모 자식 관계가 형제 자매 관계에 비해 '유전적'으로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부모는 실제로 자식에게 유전자를 건네주는 데 반해 자매간에는 유전 자의 주고 받음이 없다고 하는 지적은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자매는 어느 쪽이나 같은 양 친으로부터 같은 유전자의 복제물을 받기 때문이다. 혈연 선택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형태의 자연 선택을 그룹 선택(그룹의 생존 차이)이나 개체 선택 (개체의 생존 차이)과 구별하여 혈연 선책(kin selection)이라고 한다. 혈연 선택이 가족 내 이타주의의 원인이라고 한다. 혈연이 진하면 진할수록 선택이 강하게 작용한다. 이 말이 틀 렸다고 할 수는 없으나, 안됐지만 최근 그것의 오용이 현저하기 때문에 사용을 금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앞으로 수년간 생물학자는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윌슨(E.O. Wilson)은 그 밖의 다른 점에서는 훌륭하다고 해도 좋은 그의 저서(사회 생물학)에서 혈연 선택을 통 상의 의미로, 즉 내가 제 1장에서 쓴 의미로 '개체 선택'과 '그룹 선택'과의 중간에 위치하 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을 분명히 가리키는 그림이 하나 그려져 있다. 그런데 그룹 선택은 윌슨 자신의 정의에서도 개체의 집단 생존에 차이가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확실히 어떤 의 미에서 가족은 특수한 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밀턴 설에서 중요한 것은, 가족과 비가족 간에는 수학적 확률의 문제 이외에는 뚜렷한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해밀턴 설은 동 물이 '가족 구성원' 전원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하고 다른 것에게는 이기적으로 행한다는 말 이 아니다. 가족과 비가족 간에 결정적인 하나의 선을 그을 수는 없다. 육촌을 가족에 넣을 것인지 아닌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 육촌 아들이나 형제에 비해 이타주의를 받을 가능성이 1/16이 된다는 예상이 있을 뿐이다. 혈연 선택은 절대로 그룹 선택의 특수한 예는 아니다. 그것은 유전자 선택의 특수한 결과인 것이다. 윌슨의 혈연 선택의 정의에는 더 중대한 결점이 있다. 그는 고의로 자식을 제외하고 있다. 자식은 혈연으로 포함시키지 않았다. 물론 그는 자식이 부모의 혈연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 으나, 자식에 대한 어버이의 이타적 수고를 설명하기 위해 혈연 선택설에 의뢰하기가 싫었 던 것이다. 말이야 어쨌든 자기 마음대로 정의할 자격이 그에게 있음은 물론이나 이것은 극 히 혼란을 초래하기 쉬운 정의이므로 나는 윌슨이 장래 영향력이 큰 책을 낼 때에 그것을 변경해 주기를 바란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부모의 수고와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는 완전히 같은 이치로 진화한다. 즉, 어느 경우든 수익자의 체내에 이타적 유전자가 존재 할 확률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자질구래한 혹평에 관해서는 일반 독자의 용서를 빌며 서둘러 주제로 돌아오자. 지금 까지 나는 어느 정도 단순화했다고 느끼며, 여기서 다소 수정을 해야만 하겠다. 지금까지는 유전자가 근친도를 확실히 알고 있는 특정 수의 근친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살한다는 초보적인 수법으로 이야기를 했다. 실제로 동물들이 자기가 구조하는 근친0자의 수를 정확 히 파악하고 있다는 것은 기대할 수 없고, 가령 그들이 누가 형제이고 누가 사촌인가를 알 수 있다고 해도 암산으로 해밀턴의 계산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확실한 자살과 완전한 생명 '구조'가 실생활에서는 자기 자신과 타인들의 '통계적 사망 위험률'로 치환되어 있다. 자기의 위험이 매우 적다면 육촌의 자식까지도 구할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편 자기가 구해 주려고 하는 근친자는 모두 언젠가는 죽을 운명에 있다. 모든 개체에는 보험 계리사가 일정 오차율로 산출하는 '평균 수명'이 있다. 수명이 짧은 늙은 근친자를 구하는 것은 이 노인과 근친도가 같으면서 전도가 긴 근친자를 구하는 것에 비해 장래의 유전자 풀에게 주는영향은 적다. 우리가 행한 완전히 대칭적인 근친도의 계산은 골치 아픈 보험 통계의 조작에 의해 수정 을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유전적으로 말하면 조부모와 손자가 서로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 하는 근거는 같다. 그들은 서로 유전자의 1/4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손자의 평균 수 명이 더 크다면 손자에 대한 조부모의 이타주의의 유전자 편이 조부모에 대한 손자의 이타 주의 유전자보다 선택상 유리하다. 연고가 먼 젊은이를 원조할 때의 순이익이 연고가 가까 운 노인을 원조할 때의 순이익보다 많다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덧붙여 말하면 물론 조부 모의 평균 여명이 손자보다 항상 적다고는 할 수 없다. 유아 사망률이 높은 종에서는 역이 맞을 수도 있다). 개체는 생명 보험업자이다 보험 통계적으로 가정해 볼 때 개체는 보험업자라고 생각된다. 어떤 개체는 다른 개체의 생명에 자기의 자산 일부를 투자한다. 또는 '돈내기 걸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 는 다른 개체와 자기와의 근친도를 고려하고, 또 보험업자 자신의 '평균 여명(life espectancy)'과 비교해 보아 그 개체가 '좋은 피보험자'인가 어떤가를 고려한다. 엄밀히 말하 면 평균 여명이라기보다는 '번식 기대치'라고 하는 것이 낫고 더 엄밀히는 '장래 자기의 유 전자에 필요한 일반적인 능력'이 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타적 행동이 진화기 위해서 는 이타주의자로서의 위험도가 근친도와 수익자로서의 순이익을 서로 합친 것보다 더 작지 않으면 안 된다. 위험도와 이익은 앞에서 개요를 말 한 복잡한 보험 통계 방법에 의해 계산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설픈 생존 기계가 급히 행하기에는 얼마나 복잡한 계산일까! 위대한 수 리 생리학자인 헐데인까지도(해밀턴보다 먼저 물에 빠진 근친자를 건지는 유전자가 퍼질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한 1955년의 논문 중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두 번이나 빠지려는 사 람을 물에서 건져 낸 적이 있다(내 자신의 위험은 적었으나). 그러나 그때 그런 계산을 할 여유 같은 건 없었다." 그러나 헐데인으로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다행히 생존 기계가 암산 하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복잡한 문제에 계산기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 로 동물은 복잡한 계산을 하고 있는 양 행동하도록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을지 모른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공을 공중에 던져 올렸다가 다시 잡을 때 사람은 공의 궤도를 예견하고 일련의 미분 방정식을 푸는 것같이 보인다. 모든 찬반과 예상할 수 있는 모든 결과를 고려하여 어려운 결정을 행할 때, 사람은 컴퓨터가 하고 있는 것과 기능적으로 같은 '가중 합계' 계산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생존 기계가 이타적으로 행하는지 어떤지를 결정하는 시뮬레이션을 하기 위하여 컴퓨터를 프로그램한다면 대개 다음과 같이 일을 추진하면 좋다. 우선 동물이 행하는 이타적 행동 전 부의 일람표를 만든 다음에 이들의 이타적 행동 패턴의 각각에 대해 가중 합계 계산을 프로 그램한다. 모든 이익에는 +기호를, 위험할 때는 -기호를 붙인다. 합계하기 전에 이익과 위험 의 양면에 적당한 근친도를 고려하여 '가중치'를 정한다. 이야기를 간단히 하기 위해 우선 연령과 건강과 같은 그 밖의 조건은 무시하기로 하자. 어떤 개체이든지 자신에 대한 '근친 도'는 1이기 때문에(즉, 그 개체는 자신의 유전자를 당연히 100퍼센트 가지고 있다) 자신에 대한 위험과 이익은 전혀 변동이 없다. 어쨌든 하나의 이타적 행동 패턴에 관한 총계는 아 래와 같다. 행동 패턴의 순이익=(자기 이익)-(자기 위험)+(형제의 이익1/2)-(형제의 위험 1/2)+(또 다른 형제의 이익1/2)-(또 다른 형제의 위험1/2)+(사촌의 이익1/8)-(사촌의 위험 1/8)+(자식의 이익 1/2)-(자식의 위험1/2)+등등... 유전자는 순이익을 지향한다 합계 결과는 행동 패턴의 '순이익 득점(net benefit score)'이라고 하는 수치이다. 다음에 그 모델 동물은 자기의 이타적 행동 패턴의 레퍼토리의 각각에 대해 같은 식으로 합계한다. 최후에 그것은 순이익이 최대로 되는 행동 패턴을 선택하여 실행한다. 가령 전체 득점이 마 이너스라고 해도 최고 득점의 행동을, 즉 가장 작은 불운을 택할 것이다. 어떠한 플러스 행 동에도 시간과 에너지의 소비가 있고, 그것들은 어떤 것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기 억하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순이익의 득점을 최고로 하는 '행동'이라면 모델 동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매우 단순화된 예를 들어보자. 이번에는 컴퓨터에 의한 시뮬레이션이 아닌 주관적 인 독백식으로 이야기하자. 내가 8개의 무더기 버섯을 발견한 동물이라고 하자. 나는 그 영 양가를 고려하여 그것들이 독이 있을지도 모를 근소한 위험에 대해 어느 정도를 감하고 그 것들이 각각 +6단위(이 단위는 앞 장과 같이 임의의 득점이다)라고 추측한다. 버섯이 크기 때문에 그 중 3개밖에 먹을 수 없다. 나는 "먹을 것이 있다."라고 소리쳐 나의 발견물을 그 밖의 누구에게 알려주어야 할 것인가? 들리는 범위에는 누가 있을까? 동생 B(나에 대한 근 친도 1/2)와 사촌 C(근친도 1/8), 그리고 D(특별한 관계는 없고 나에 대한 근친도는 매우 작 아 실제로 0으로 취급)가 있다. 나의 순이익 득점은 내가 발견물에 관해 가만히 있으면 내 가 먹을 수 있는 3개의 버섯에 관해 각각 +6을 더해 합계는 +18이다. 먹이가 있다고 알렸을 때의 나의 순이익 득점은 계산을 요한다. 8개의 버섯은 우리 4인에게 균등히 분배된다. 내 자신이 먹은 2개에서 얻은 득점은 각각 +6단위, 즉 합계 +12이다. 그러나 동생과 사촌이 2 개씩 먹었을 때 우리 3인은 공통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으므로 내게도 얼마의 득점이 가해진 다. 실제의 득점은 (1*12)+(1/2*12)+(1/8*12)+(0*12)=+19 1/2이 된다. 이기적 행위를 취했을 경우에 이에 상당하는 순이익은 +18이었다. 비슷하나 답은 분명하다. 나는 동료를 부를 것 이다. 나의 이타주의는 이 경우 나의 이기적인 유전자에 이익을 주는 것이 된다. 나는 설명을 간단히 하기 위해 개개의 동물이 자기의 유전자로서 무엇이 최선인가를 산출 한다고 가정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은 몸에 영향을 준다. 즉, 이와 같은 계산을 하고 있는 양 행동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채워지게 되는 것이다. 여하튼 이 계산은 이상적 상태로의 매우 예비적인 근사값에 불과하다. 그것은 관계 있는 개체의 연령 등 많은 것을 무시하고 있다. 또 내가 꼭 배불리 먹고 버섯 한 개가 들어갈 여 유밖에 없다면 동료를 부를 순이익은 굶고 있을 때보다 더 크다.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해 계산하면 계산의 정밀도는 한없이 오를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동물이 모든 면에서 최 선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동물이 최적의 결단을 내릴 때에 극단적으로 자 세한 것을 전부 고려하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금후, 야외 관찰과 실험을 통하여 동물이 실 제로 얼마나 엄밀히 이상적인 손득 분석을 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조사해 봐야겠 다. 손실과 이득의 예측 여기서 주관적인 예에 빠져들지 않았다는 것을 재확인하기 위해 잠깐 유전자 용어로 돌아 가자. 살아 있는 몸은 생존을 계속하고 있는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된 기계이다. 생존하고 있는 유전자는 과거에 '평균하여' 그 종의 환경을 특징지우는 경향이 있던 조건으로 생존해 왔다. 따라서 손득의 '예측'은 인간이 결단을 할 때와 같이 과거의 '경험'에 기인한다. 그러나 이때의 경험에는 유전자의 경험, 더 정확히 말하면 과거에 유전자의 생존 조건이란 특별한 의미가 있다(유전자는 생존 기계에게 학습 능력을 주고 있으므로 손득의 평가가 있는 것은 동시에 개체의 경험에 기초하여 행해진다고도 함). 조건이 터무니없이 변하지 않는 한 그 평가는 틀림없고 생존 기계는 평균적으로 빠른 결단을 내릴 것이다. 조건이 극변하면 생존 기계는 틀린 결단을 내릴 가능성이 높아져서 그 유전자는 벌금을 내게 될 것이다. 낡은 정 보에 따른 인간의 결단이 틀리기 쉬운 것과 같다. 근친도의 평가에도 역시 오류와 불확실함이 따르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매우 단순화된 계산에서는 마치 갱존 기계가 누가 자기의 친족이고 어느 정도 가까운 혈연인가를 알고 있는 양 말해 왔다. 균치로 추정하는 데 불과하다. 가령 A와 B가 양친이 같은 형제인 가 배다른 형제인가를 모를 때를 생각해 보자. 그들간의 근친도는 1/4이거나 1/2인데 양친 이 같은 형제인지 양친 중 아버지가 다른 형제인지 모르기 때문에 유효하게 쓰이는 수치는 평균하여 3/8이다. 그들의 모친이 같다는 것은 확실하나 부친이 같다는 확률이 1/10이라면 그들이 아버지가 다른 형제라는 것은 90% 확실하고 같은 양친을 가진 형제라는 것은 10% 확실하다. 이때 유효한 근친도는 (1/10)*(1/2)+(9/10)*(1/4)=0.275이다. 그러나 '그것'이 90% 확실하다고 말할 때 무엇에게 '그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 오 랜 야외 연구를 한 박물학자에게 90% 확실하다는 것인가 아니면 동물에게 90% 확실하다는 것인가? 다행히 이들 내용은 둘 다 거의 같다. 이것을 알려면 실제로 동물이 누가 자기의 근친인가를 어떻게 판단하려고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누가 친족인가를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으로부터 듣고, 이름이 있으며, 결혼이라는 형식, 사실의 기록과 뛰어난 기억력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회 인류학자는 자기가 연구하 고 있는 사회의 '친족 관계'에 몰두하고 있다. 그들은 진정한 유전적 혈연이 아닌 친족 관계 라는 주관적 문화 개념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관습이나 종족의 의식 은 친족 관계를 크게 강조하는 데 필요하다. 조상 숭배가 퍼지고 가족의 의무와 충성이 생 활의 대부분을 지배한다. 피로 갚는 복수나 씨족간의 싸움은 해밀턴의 유전학 이론에 따라 용이하게 설명된다. 근친 상간의 금기는 인간의 위대한 친족 의식을 증명하고 있다. 근친 상 간 금기의 유전적 이익은 이타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그것은 아마도 근친 상간에 의 해 나타나는 열성 유전자의 유해한 효과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몇 가지 이유에서 많은 인류 학자는 이 설명을 좋아하지 않지만). 야생 동물은 누가 친척인가를 어떻게 알 수가 있는 것일까? 바꾸어 말하면 어떤 행동 규 칙에 그들이 따랐기에 그들은 마치 혈연 관계를 알고 있는 양 행동할 수 있는 것일까? "친 척에게는 친절히 하다."라는 규칙은 실제로 친척이 어떤 방법으로 인지되는가라는 문제를 회피라고 있다. 동물은 자신의 유전자에 의해 활동을 위한 단순한 규칙을 부여받았다. 그 규 칙은 행동의 최종 목적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인식시켜 주지는 않으나 적어도 평균적인 조 건들 속에서 그에 상응하는 필요한 규칙을 받을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규칙에 익숙해 있다. 우리는 별로 그러한 느낌이 없어도, 자기와 그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 으면서도 규칙 그 자체에 순종할 정도로 규칙은 강력하다. 예를 들어 일부 정통파 유대 교 도와 회교도는 비록 굶을망정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규칙을 지킨다. 동물이 따르는 단 순하고 실제적인 규칙은 어떤 규칙일까? 그것은 정상 조건하에서는 그들의 친척에 이익을 준다는 간접적 효과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만일 동물이 육체적으로 자기와 닮은 개체에 대해 이타적으로 행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면 그들은 간접적으로 자기의 친족에게 어느 정도 좋은 일을 하는 셈이 될 것이다. 해당 종 이 나타내는 여러 특성이 크게 영향을 줄 것이다. 어쨌든 이 같은 규칙은 통계적 의미로 ' 빠른' 결단으로 이끌어 갈 뿐이다. 조건이 변하면, 예를 들어 한 종이 훨씬 큰 집단에서 생 활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잘못된 결단으로 이끌지 모른다. 자칫하면, 인종 차별이란 육체적으 로 자기를 닮은 개체를 인지하고 외견상 다른 개체를 싫어하는 성질이 혈연 선책에 의해 진 화하여 그것이 비이성적으로 일반화된 결과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숭이와 고래의 이타적 행위 구성원이 별로 돌아다니지 않는 종이나 구성원이 작은 그룹을 이루고 돌아다니는 종에서 는 자기가 종종 만나는 개체가 누구이든 자기와 친척일 공산이 크다. 이 경우 "자기 종의 구성원을 만나면 누구에게나 친절해라."라는 규칙은 유전자의 소유자를 이 규칙에 따르려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늘어난다는 의미로 '플러스 생존가(survival value)'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원숭이 무리와 고래 무리에서 이타적 행동이 자주 보고되는 이유일 것이다. 고 래와 돌고래는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다. 아기고래가 상처를 입어 수면까지 뜨지 못하면 동료 무리들이 도와서 수면으로 부상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래에게 누가 자기의 친척인가를 아는 수단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문제가 아니다. 무리가 종종 만나는 구성원이 친척일 공산이 매우 높으므로 이타주의가 손실을 맛보게 될 것이다. 덧붙여 말하 면 물에 빠진 사람이 돌고래에 의해 구출됐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적어도 그 하나는 확실 한 증거가 있다. 이것은 무리가 빠지고 있는 구성원의 정의는 다음과 같을 것이다. "수면 가 까이에서 숨을 못 쉬고 허우적대고 있는 기다란 물체"가 그것이다. 성숙한 수놈 비비 원숭이는 표범 같은 포식자로부터 무리 중 나머지 구성원을 목숨을 걸 고 지킨다고 한다. 보통 성숙한 수놈은 무리 중 다른 구성원 속에 연결되어 있는 한 다수의 유전자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 사실상 "신체야, 네가 성숙한 수놈이라면 표범으로부터 무리 를 지켜라."라고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서 그 수를 늘릴 것임에 틀림이 없다. 이처 럼 잘 인용되는 예를 마치기 전에 적어도 한 권위 있는 학자가 보고한 전혀 다른 사실을 이 야기하는 셈이 공평할 것 같다. 그녀에 의하면 성숙한 수놈 비비 원숭이는 표범이 출현하면 맨 먼저 지평선 저쪽으로 도망쳐 버린다는 것이다. 병아리의 이타적 행위 병아리는 가족 무리 속에서 모이를 쪼으며 모두 어미의 뒤를 따라 다닌다. 병아리에게는 주로 두 종류의 울음소리가 있다. 전술한 크고도 예리한 삐약삐약 소리와 먹는 중에 내는 짧은 노래와 같은 지저귐이 있다. 어미의 도움을 청하는 효과적인 삐약삐약 소리는 다른 병 아리에게 무시된다. 그러나 지저귀는 소리는 병아리에겐 매력적이다. 즉, 한 마리의 병아리 가 먹이를 찾으면 내는 지저귀는 소리가 다른 병아리를 먹이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다. 이전 의 가설적 예로 말하면 이 지저귐은 '먹이가 있다'라고 하는 소리이다. 이 경우와 같이 병아 리의 겉보기의 이타주의는 혈연 선택에 의해 용이하게 설명된다. 자연계에서 병아리들은 같 은 양친의 형제 자매이므로 지저귀는 병아리의 손실이 다른 병아리의 순이익의 1/2보다 적 으면 먹는 동안의 지저귐에 관한 유전자는 분포를 넓힐 것이다. 이익은 그룹 전체에 분포된 다. 그룹은 보통 둘 이상으로 구성되므로 이 조건이 성립되는 것은 상상하기 쉽다. 물론 가 끔 암탉이 자기 것이 아닌 알을 -칠면조나 오리알을- 품고 있을 경우, 이 규칙은 부당하다. 그러나 암탉과 병아리는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그들의 행동은 자연계에서 보통 볼 수 있는 조건 아래서 형성되는 것이고, 자연계에서는 보통 자기의 집 속에 낯선 것이 있는 일 은 없다. 그러나 이런 오류는 자연계에서 때때로 일어난다. 무리를 이루고 사는 종에서는 고아가 된 새끼가 다른 어미, 대개는 자기 자식을 잃은 어미의 양자가 되는 수가 있다. 원숭이 관찰 자는 때때로 양자를 가진 어미에게 '숙모'라는 말을 쓴다. 대개의 경우 그 어미가 실제로 숙 모라는 증거는 없고 어떤 친척이라는 증거마저 없다. 원숭이 관찰자가 유전자의 논리에 주 의했따면 '숙모'와 같은 중요한 말을 함부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체로 양자를 키우는 행동은 수고스럽게 보일지도 모르나 짜여진 규칙의 오용이라고 보아도 좋겠다. 관대한 어미 는 고아의 시중을 드는 것으로 인해 자기의 유전자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 다. 그녀는 자기의 친족, 특히 장래의 자기 아이들의 양육에 쓸 시간과 에너지를 허비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모성 본능이 잘 선택 되도록 하는 규칙 개정을 만들어 왔던 자연 선택 에서 절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오류이다. 말하자면 이와 같은 양자 결연은 거의 일어나지 않으며 대개 고아는 죽는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 단순한 오류가 아닌,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을 부정하는 증거라고 생각하고 싶은 극단적 오류의 예가 있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가 다른 어미로부터 새끼를 훔쳐서 그 시중을 들어준다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이것을 '이중 오류'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양모는 자기 의 시간을 낭비할 뿐만 아니라 경쟁자인 암놈이 새끼를 키우는 부담에서 벗어나게 해 주며, 또한 보다 빨리 다음 새끼를 낳도록 해 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철저하게 조사할 가치가 있 는 중대한 예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빈도로 일어나는가. 양모와 양자 사이의 평 균 근친도는 어느 정도인가. 자식을 잃은 진짜 어미의 태도는 어떠한가. 새끼를 양자로 뺏기 는 것은 결국에 가서는 진짜 어미의 이익이다. 어미들은 일부러 미숙한 젊은 암놈들을 속여 서 자기 새끼를 양육시키려고 할 것인가?(양모와 새끼 도둑이 중요한 양육 기술을 획득하는 것으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조류의 이기성 고의로 기도된 모성 본능의 오용의 예는 다른 새의 집에다 산란하는 뻐꾸기 같은 '탁란조' 에서 볼 수 있다. 뻐꾸기는 어미 새에게 인식된 "자기 둥지 속에 있는 새끼 모두에게 친절 하다."라는 규칙을 악용하고 있다. 뻐꾸기를 제외하면, 이 규칙은 본래 이타주의가 근친에 한한다는 바람직한 효과를 갖는 것이다. 그것은 종종 자기의 둥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자 기 새끼라고 할만큼 둥지와 둥지 사이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검은등 갈매 기의 어미는 자기의 알을 구별하지 못해 다른 갈매기의 알을 기꺼이 품으며, 인간이 실험용 나무 모형과 바꿔치기 하면 그 모형의 알을 품는다. 자연계의 갈매기에게 있어 알의 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알이 몇 미터 떨어진 옆집까지 굴러가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 나 갈매기는 자기 새끼를 인지한다. 알과는 달리 새끼는 걸어다니고, 결국은 옆집 가까이 까 지 가서 제 1장에서 말했듯이 종종 생명이 걸린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한편 바다오리는 자기 알을 표면의 반점 모양으로 구별하고, 알을 품고 있는 도중에는 그 것들을 더욱 조심스럽게 다룬다. 이것은 아마 그 새들이 평탄한 바위 위에 집을 짓기 때문 에 알이 굴러서 섞일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왜 일부러 자기 알만 구별하여 품을 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확실히 모든 어미가 덮어놓고 어떤 알이든 품는다면 각각의 어 미새가 자기 알을 품거나 다른 알을 품건 간에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그룹 선택주의 자의 논거이다. 지금 탁아 서클과 같은 집단이 조성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바다오리의 한 배의 알은 평균 한 개다. 이것은 공동 탁아 서클이 잘 되려면 모든 어미가 평균 한 개의 알을 품어야만 된다는 것이다. 이때에 누가 게으름을 피워 알품기를 포기했다 고 하자. 그 암놈은 부화에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에 산란할 수 있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의 아름다운 점은 더 이타적인 다른 어미새가 그 암놈을 위해 알을 돌보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집 옆에 흩어진 알을 발견하면 끌어당겨서 그것을 품어라."라 는 규칙에 충실히 복종해 나갈 것이다. 그러면 이 시스템을 잘 피하기 위한 유전자가 개체 군 속에 퍼져 아주 우호적인 탁아 서클은 붕괴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정직한 새가 유유낙낙함을 거부하고 보복하여 알을 단 한 개만 품는다고 결단하 면 어떻게 될까. 그러면 게으르고 못된 새의 뒤통수를 치는 꼴이 되는 것은 아닐까. 그들은 자기의 알이 누구에게도 품어지지 않고 바위 위에 나뒹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므로 그 들은 곧 협력하게 될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다. 이 경우 새끼를 돌보는 새들이 개개의 알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가정하고 있기 때문에 가령 정직한 새가 이 작전을 실행하여 게으름뱅이에게 대항했다고 해도 결국 소외된 알이 자기의 알인지 게으름뱅이의 알인지 몰라서 대항하지는 않을 것이다. 게으른 새는 그래도 이익을 받고 있다. 그들이 많은 알을 낳고 따라서 더 많은 새끼를 남기게 되기 때문이다. 성실한 바 다오리가 게으른 개체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적극적으로 자기의 알을 잘 보살피 는 것이다. 즉, 이타적인 것을 멈추고 자기의 이익을 지키는 것이다. 메이나드-스미스의 말을 빌면 이타적인 양자 키우기 '전략'은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이 전략은 정당한 할당보다 많은 알을 낳고 그것을 품는 것을 거부한다는 경쟁자의 이기적인 전략에 의해 개선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불안정하다. 이 후자의 전략도 역시 불안 정하다. 왜냐하면 이용하는 이타적 전략이 불안정하여 곧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바다오리 에게 진화적으로 안정된 유일한 전략은 자기의 알을 인지하고 전적으로 자기의 알만을 품는 것이며, 이것은 지금 실행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뻐꾸기 알을 대신 품는 명금류는 자기 알의 외관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종에 특유 한 모양이 있는 알을 본능적으로 잘 보살피는 것으로 맞서 왔다. 그들은 자기 종의 알을 품 을 염려는 없으므로 이 방법은 유효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뻐꾸기가 자기의 알의 색, 크기, 그리고 모양을 대리모의 알에 더욱더 비슷하게 만들어 이에 응했다. 이것은 거짓의 예이고, 종종 성공한다. 이 진화적 군비 경쟁의 결과, 뻐꾸기의 알에는 완벽한 의태가 생겼다. 뻐꾸 기의 알과 새끼는 어떤 비율로 '발견된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발견되지 않은 알과 새끼가 살아서 차세대의 뻐꾸기의 알을 낳는다. 이 때문에 보다 효과적으로 속이는 형질의 유전자 가 뻐꾸기의 유전자 풀 속에 퍼진다. 이와 같이 뻐꾸기 알의 의태에 어떤 근소한 불완전성 이 있어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눈을 가진 다른 종의 새는 동종의 유전자 풀에 크게 공헌하 는 개체이다. 그렇게 하여 의심 많고 예리한 눈이 다음 세대에 전해진다. 이것은 자연 선택 이 어떻게 해서 식별 능력을 키울 수가 있는가를 나타내는 예이다. 이 경우 식별 능력은 다 른 종을 염두에 둔 것으로 그 다른 종의 구성원이 식별하는 능력과 방법을 감추기 위하여 전력을 다하고 있다. 사자의 생식 습성 그러면 동물 자신에 의한 다른 그룹 구성원과의 근친 정도의 '추정'과 야외 연구 전문의 박물학자에 의한 같은 식의 추정을 비교해 보자. 버트람(Brian Bertram)은 세런게티 국립 공원에서 수년간 사자의 생태를 연구해 왔다. 그는 사자의 생식 습성을 기초 지식으로 하여 전형적인 사자 집단의 개체간의 평균적 근친도를 추정하고 있다. 그가 추정하는 데 사용한 사실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전형적인 집단은 암놈 일곱 마리와 수놈 두 마리로 되고, 암놈 은 보다 영구적인 구성원이고 수놈은 이동성이 있다. 암놈의 반수는 동시에 출산하여 동시 에 양육하므로 서로간에 새끼를 분별하기 곤란하다. 전형적인 한 배의 새끼 수는 세 마리이 다. 사자 무리의 성숙한 수놈 사이에서 한 새끼의 아비일 가능성은 같다. 젊은 암놈은 그 무 리에 있는 늙은 암놈이 죽어나 하면 그 후계자의 위치를 차지한다. 젊은 수놈은 청년기에 쫓겨난다. 이들은 성장하면 두 마리 내지 서너 마리의 혈연 집단을 이루어서 무리에서 무리 로 이동하는데 태어난 가족 무리로 되돌아오는 일은 거의 없다. 전형적인 사자 무리에 있어서 이런 저런 여러 가정을 이용하면 두 개체간의 평균 근친도 를 알 수 있다. 버트람은 무작위로 뽑은 수놈 두 마리에 대해서는 0.22, 암놈 두 마리에 대 해서는 0.15라는 수치를 산출했다. 즉, 무리 속에서 수놈끼리는 평균하여 한쪽 부모를 가진 형제보다는 좀 유연 관계가 멀고 암놈끼리는 사촌보다 조금 유연 관계가 가깝다. 물론 어떤 두 개체는 양친을 같이 하는 형제이기는 하나 버트람은 이 것을 알 방법이 없 었고 사자도 그것을 모를 가능성이 높다. 한편 버트람이 추정한 평균치는 어떤 의미에서는 사자 자신으로서도 이용이 가능하다. 이들 수치가 실제로 평균적인 사자 무리에 전형적인 것이라면 다른 수놈에 대해 마치 한쪽 어버이의 형제처럼 수놈을 행동하게 하는 유전자는 플러스 생존가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수놈의 이타적 경향을 과하게 하는 유전자, 가령 다른 수놈을 완전히 형제로 대하도록 행동 할 것을 지시하는 유전자는 다른 수놈에게 친밀감을 충분히 표하지 않는다. 예컨대 육촌을 대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밖에 생가하지 않는 유전자 와 같이 평균하여 벌을 받을 것이다. 사자의 생활이 실제로 버트람이 말하는 대로라면, 그리 고(중요한 것인데) 그들이 몇 세대에 걸쳐 그러했다면 자연 선택은 전형적인 사자 무리에 있어서 평균적 근친도에 맞는 정도의 이타주의에 유리하게 작용할 것이라고 예상된다. 이것 이 동물에 의한 근친도의 평가와 훌륭한 박물학자에 의한 평가가 대체로 같다고 말한 의미 이다. 이러한 이치로 이타주의 진화에 있어서는 '진짜' 근친도가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동물 이 어느 정도 근친도를 예견할 수 있는가 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 사실은 아마도 자연계에서 어미에 의한 보살핌이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에 비하여 왜 그렇게도 빈번하고 게다가 헌신적일까, 또 동물이 왜 자기 자신을 몇 명의 형제 이상으 로 높이 평가하는가라는 의문을 이해하는 열쇠인 것이다. 내가 말하려 하는 요점은 근친도 도에 더하여 '확실도 지수'라고 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자 관계는 유전적으로 형제 자매 관계 이상으로 가깝지는 않으나 확실도는 훨씬 높다. 보통은 누가 자기의 형제인 가라기보다는 누가 자기의 새끼인가라는 편이 훨씬 확실하다. 그리고 누가 자기 자신인가라 는 것에는 더욱더 확신이 가는 것이다. 앞에서 바다오리의 게으른 개체에 관해 고찰했지만, 다음 장에서는 사기꾼, 게으른 놈, 그 리고 착취자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다른 개체가 혈연 선택된 이타주의를 악용하여 자 기 목적을 수행하고자 부단히 기회를 엿보고 있는 세계에 있어 생존 기계는 자기가 누구를 신용할 수 있나, 누구에게 진짜 확신을 가질 수 있나를 고려해야 한다. 만일 B가 정말 나의 어린 동생이라면 나는 내 자신을 소중히 여기는 절반만큼 그를 위해 돌보아 줄 것이고, 내 자식을 돌봐 주는 만큼 그를 돌봐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내 자식을 확신하는 것처 럼 그를 확신할 수 있을까? 나는 그가 나의 동생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C와 내가 일란성 쌍생아라면 나는 내 자식보다 2배로 그를 돌봐 줄 것이며 확실히 나는 내 생명과 똑같이 그의 생명의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그가 그렇다는 것을 확 신할 수 있을까? 그의 용모는 그럴듯하게 나를 닮았으나 단지 얼굴의 특징에 관한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아니, 나는 그를 위해 내 생명을 내던질 일은 없다. 왜냐하 면 그가 나의 유전자를 100% 갖고 있을 가능성은 있으나, 나 또한 그의 유전자를 100% 가 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 이상의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이기적인 유전자 의 어느 것이든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개체이다. 이론상 개체의 이기주의 유전자는 적어도 일란성 쌍생아의 한쪽 자식이나 형제 둘 또는 손자 넷 등을 이타적으로 구하기 위한 유전자 에게 배제될 수 있는데, 개체의 이기주의 유전자는 개체의 정체성의 확실성이라는 점에서 훨씬 유리하다. 경쟁자의 혈연 이타주의의 유전자는 전혀 우연히 또는 게으른 개체나 기생 자에게 꼬임을 당하여 정체성을 착각하는 위험을 범한다. 따라서 자연계에서는 유전자 혈연 관계를 고려하여 예언했을 때보다 개체의 이기주의가 많다고 생각해야 한다. 부모와 자식의 친자 관계 많은 종에서 어미는 아비보다 자기 자식을 확신할 수 있다. 어미는 눈으로 보고 만져 볼 수 있는 알이나 새끼를 낳는다. 어미에게는 자기의 유전자의 지참자를 확실히 알 좋은 기회 가 있다. 불쌍한 아비는 속기 쉽다. 그래서 아비는 어미만큼 육아에 열중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이유가 있으나 그에 관해서는 암수간의 다툼의 장(제9장)에서 기술하기로 하 자. 이와 같이 외조모는 친조모에 비해 자기 손자에게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으므로 친조모 보다 강한 이타주의를 나타낸다고 생각된다. 이것은 조모가 딸의 아이에게는 확신이 가나 아들은 처에게 배신당하고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외조부는 친조모와 동등하게 손자에게 확신이 간다. 왜냐하면 양자 모두 확실한 1세대와 불확실한 1세대가 기대되기 때문이다. 같 은 식으로 외삼촌은 친삼촌에 비해 생질의 행복에 더욱 관심이 있어 일반적으로 숙모와 동 등하게 이타적일 것이다. 실제로 남편의 외도가 매우 흔한 사회에서는 외삼촌이 '부친'보다 이타적임에 틀림없다. 외삼촌 편이 그 아이와의 근친도에 대한 확신에 확실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아이의 모친이 적어도 자기의 아버지가 다른 자매라는 것을 알고 있다. '법률상의 부친'은 아무 것도 모른다. 나는 이들의 예언을 지지할 증거가 있는지 어떤지 알 수는 없으나 누군가가 증거를 찾기 시작할 것을 기대하여 여기에 기술해 보았다. 특히 사회 인류학자는 이 흥미 있는 사실을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이타주의가 형제간의 이타주의보다 더 흔하다는 사실로 이야기를 돌 리면 '동일성의 문제'에 의해 이것을 설명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것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이것은 부모 자식 관계의 기본적인 비대칭성을 설명하지 못한다. 부모 자식의 유전적 관계 는 대칭적이고 근친도의 확신은 어떤 입장에서 상대를 본 경우에도 똑같은데 부모는 자식이 부모에게 대하는 것보다 훨씬 자식의 시중을 잘 든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부모쪽이 나이도 많고 매사에 더 능숙해서 자식을 도울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가령 아기가 부 모에게 먹이를 주려고 해도 아기는 실제로 그렇게 할 능력이 없다. 친자 관계에는 형제 관계에는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비대칭성이 있다. 아이들은 항상 부 모보다 젊다. 이 사실이 항상 그렇다고는 할 수 없으나 대개의 경우 자식의 평균 여명이 크 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에서 강조한 대로 평균 여명은 동물이 이타적으로 행동할 것인가 아 닌가를 '결단할' 때에 가급적 정확히 '계산'에 넣어야만 할 중요한 변수이다. 자식이 부모보 다 평균 여명이 큰 종에서는 자식의 이타주의 유전자는 모두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 다. 그것은 이타주의 유전자는 모두 불리한 입장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타주의자 자신 보다 노쇠사에 가까운 개체의 이익을 위해 이타적 자기 희생을 치르려고 계획하고 있기 때 문이다. 한편 부모의 이타주의 유전자는 그 계산식의 평균 여명의 항에 관한 한 그것에 상 응하는 분량만큼 유리할 것이다. 흔히 혈연 선택은 학설로서는 더할 나위 없으나 그 실제 예는 거의 없다는 말을 듣는다. 이러한 비판은 혈연 선택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아이를 보호 하거나 부모에 의한 시중의 모든 예, 그리고 젖샘이나 캥거루의 주머니 등 그 육체적 기관 이 사실상 혈연 선택 원리가 실제로 기능하고 있는 예이다. 비판자들은 물론 부모의 시중이 널리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데 부모의 시중이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에 뒤지지 않는 혈연 선택의 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예를 들어 보라 할 때는 부모의 시중 이 외의 예를 제시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예가 적은 것은 사실이다. 그 이유는 이미 제 시했다. 형제 자매의 이타주의의 예를 들라고 하면 그것은 된다. 아주 적지만 있다. 그러나 나는 굳이 그러고 싶지 않다. 그것은 그렇게 하면 혈연 선택이 친자 관계 '이외'의 관계에 관한 것이라는 그릇된 생각(전술한 바와 같이 윌슨이 좋아하는)을 강화하는 것이 되기 때문 이다. 이 잘못이 커진 이유는 대체로 역사적인 것이다. 부모의 시중이 진화상 유리한 것은 너무 도 명백하고 해밀턴의 지적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것은 다윈 이래 이해되어 왔다. 친자 이외의 관계가 유전적으로 그것과 등가이며, 또 그것이 진화상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 다는 것을 제시함에 있어 해밀턴이 친자 이외의 관계를 강조해야만 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 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앞으로의 장에서 말하는 대로 자매 관계가 특히 중요한 개미 나 꿀벌 등 사회성 곤충의 예를 들것이다. 놀라운 것은 이 점을 오해하여 해밀턴의 이론이 사회성 곤충 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까지도 있을 정도이다. 부모의 돌봄이 혈연 선택의 작용의 작용의 예라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이들은 부모의 이 타주의만을 예언하고 다른 친족간의 이타주의를 예언하지 않는 자연 선택의 일반론을 정식 화해 보일 책임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제7장 가족 계획 애낳기와 애키우기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혈연 선택의 산물인 다른 이타적 행동과 별도로 취급하 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그 이유를 이해하는 것은 간단하다. 즉 자 식의 보호는 번식의 일환으로서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가령 생질을 수혜자로 한 이타 행동 등은 번식에 통합되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나도 이 양자간에는 실제로 중 대한 차이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앞서간 사람들은 그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잘못 이해 한 것이다. 그들은 번식과 부모가 자식을 보호하려는 행동을 하나로 묶어서 다른 이타적 행 동을 이것과 구별하고 있다. 그러나 나로서는 새로운 개체를 낳는 것과 현존 개체를 돌보는 것 사이에 바로 차이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싶다. 이 두 활동을 각각 애낳기와 애키우 기라고 부르기로 하자. 하나의 생존 기계인 개체는 애낳기와 애키우기라는 극히 이질적인 두 종류의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결단이란 말은 무의식적으로 행해 지는 전략적인 조처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애키우기의 결단은 다음과 같은 형식을 취할 것이다. "여기에 아기가 하나 있다. 이 아이 와 아이와의 근친도는 그저 그렇다. 만일 내가 이 아이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다면 이 아이 가 죽어버릴 확률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나는 이 아이에게 음식을 주어야 할 것인가?" 한편 애낳기의 결단 형식은 다음과 같다. "이 세계에 새로운 개체를 하나 낳기에 필요한 여 러 단계를 밟을 것인가, 즉 나는 애낳기에 뛰어들 것인가?" 애키우기와 애낳기는 개체가 이 용할 수 있는 시간 또는 다른 여러 자원을 둘러싸고 서로 어느 정도 경합하지 않을 수 없는 책임을 지고 있다. 즉, 개체는 다음과 같은 선택을 강요당할 수도 있다. "이 아이를 키울 것 인가, 아니면 따로 하나를 낳을 것인가?" 애낳기-안정된 전략 종에 관한 생태학적 여러 특성의 세부에 따라 키우기와 낳기 양 전략의 여러 가지 혼합 전략이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될 수 있다. 그것은 순수한 애키우기이다. 만일 모든 개체가 현 존하는 애키우기에 몰두하여 아이를 낳지 않는 상태로 되어 버리면 이 개체군은 애낳기를 전문으로 돌연변이한 여러 개체에 의해 곧 제거돼 버릴 것이다 애키우기는 혼합 전략의 일 부로서만 진화적으로 안정하게 될 수 있다. 즉, 적어도 누군가의 애낳기는 필히 실행되지 않 으면 안 된다. 우리들에게 가장 낯익은 동물들-포유류와 조류-은 애키우기의 경향을 많이 나타낸다. 여 기서는 애낳기 결단에 이어 낳은 아이를 키우는 결단을 볼 수 있는 것이 보통이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이 애낳기와 애키우기가 공존하고 있는 것으로 양자를 혼동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대로 유전자의 이기성의 관점에서 보면 당신이 어린 형제를 키우 는 것과 어린 자식을 키우는 것 사이에는 원리적인 차이가 전혀 없는 것이다. 어느 아이나 당신의 근친자이며, 당신과의 근친도는 어느 편이나 동일하다. 만일 당신이 양육 대상으로서 어느 한편의 아이를 선택해야 한다 해도 그것이 당신의 자식이어야만 된다는 이유는 유전학 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당신이 형제를 아기로서 낳는다는 것은 정 의로 보아 불가능하다. 당신이외의 누군가가 그를 낳아 줌으로써 당신은 형제를 양육할 수 가 있게 되는 것이다. 앞 장에서 나는 기존의 다른 개체에 대해 개개의 생존 기계가 이타적 으로 행동할 것인가 어떤가를 결정할 경우 이상적으로는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 았다. 이 장에서는 새로운 개체를 출산할 것인가 아닌가를 정할 경우에 생존 기계가 어떤 식으로 결정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로 하자. 개체수 조절과 인구 문제 제 1장에서 '그룹 선택'을 가지고 논쟁을 소개했는데, 그 논쟁은 주로 이 장에서 다룰 문 제를 무대로 하여 전개됐다. 원인은 그룹 선택의 견해를 유포시킨 제 1의 책임자인 윈-에드 워즈에게 있다. 그 견해를 선포함에 있어 그는 '개체수 조절'의 이론을 기초로 했기 때문이 다. 그는 개개의 동물이 집단 전체를 위해 의도적이고 이타적으로 스스로의 출생률을 감소 시킨다고 제안했다. 이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가설이다. 그것이 인간 개개인의 직무에 아주 잘 합치되기 때문 이다. 인류는 너무나 많은 아이들을 가지고 있다. 개체군의 크기는 출생수, 사망수, 이출 개 체수, 그리고 이입 개체수라는 네 가지 요인으로 결정된다. 세계 총 인구를 문제로 할 경우 이출과 이입은 있을 수 없다. 남는 것은 출생수와 사망수다. 한 부부당 아이의 평균수가 출 산 가능시까지 생존하는 아이의 수로 하여 2인보다 많으면 신생아의 수는 매년 누진적으로 증가해 갈 것이다. 어느 세대를 보아도 인구는 일정한 수로 가산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때 그때에 도달한 인구의 일정 비율로 증가해 간다. 각 시점에서의 인구 자체가 증가하기 때문에 이것에 대응해 인구 증가수도 증대하는 것이다. 만약 저지되지 않고 증가가 계속되 면 개체군은 잠깐 사이에 천문학적 규모에 달하고 말 것이다. 인구 조절 여기서 인구 문제를 우려하는 사람들까지도 때때로 보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사 람들이 아이를 몇이나 낳느냐뿐만 아니라 몇 살때에 출산하느냐에 의해서도 인구 증가가 좌 우된다는 것이다. 인구는 각 세대마다 그때의 전체수에 일정한 비율로 증가하는 경향을 나 타내므로, 만약 각 세대의 간격을 전보다 길게 하면 매년 증가하는 인구는 완만하게 될 것 이다. 즉, '부부당 아이는 2인까지'라는 표어 대신에 '아이를 낳는 것은 30세부터'라고 해도 거의 같은 효과를 기대할 수가 있다. 여하튼 인구의 가속적인 증가는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 게 된다. 이점을 분명하게 납득시킬 깜짝 놀랄 정도의 계산의 예를 아마도 우리는 모두 보아 왔을 것이다. 예를 들면 라틴아메리카의 현재 인구는 약 3억이다. 그리고 현재 이미 그 많은 사람 들은 부족한 영양 조건하에 놓여 있다. 그러나 만일 현재의 비율로 인구 증가가 계속되면 직립 자세의 인간이 빈틈없이 도열하여 전 대륙에 인간 양탄자를 깔아 버리는 상태에 도달 하는 데 50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뼈와 가죽만으로 되어 있다9이것은 결코 황당 무계한 상상이 아니다)라고 가정하여도 이 사태는 변치 않는다. 천년이 지나면 꽉 찬 인가 들의 어깨에 각각 100만이 넘는 인간이 겹쳐 쌓이게 된다. 이 커다란 인간더미는 드디어 우 주를 향해 광속으로 팽창하게 되어 2,000년 후에는 현재 알려져 있는 우주 저편에 도달해 버릴 것이다. 독자 여러분은 이것이 가정에 의한 계산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 로는 위와 같은 식으로 인구 증가가 진해되지는 않는다. 이것을 저지하는 극히 유력한 현실 적인 이유가 몇 가지 있기 때문이다. 즉, 기아, 전염병, 또는 만일 운이 좋으면 산아 제한 같 은 것이 그 이유의 일부이다. '녹색 혁명'이나 그 밖의 농학상의 진보에 의뢰해도 소용없다. 식량 증산은 인구 문제를 일시적으로 완화시킬는지는 모르나 그것이 장기적인 문제 해결이 될 수 없음은 수학적으로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실제 의학의 진보가 인구의 위기 촉진에 일 익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농학의 진보도 인구 증가 속도를 촉진시켜 오히려 인구 문제를 악화시킬지도 모른다. 매초 수백만 대의 비율로 로켓을 발사하여 우주로 대량 이민이라도 보내지 않는 한 무제한의 산아수는 필연적으로 사망률의 놀라운 증가를 초래할 것이다. 이 것은 단순한 논리적 진리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나 이 단순한 진리를 이해 목하고 효과적인 피임 수단을 강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신봉하는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은 인구를 '자연적인' 수단으로 제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그들이 직면해 난처하게 될 수단이란 바로 하 나의 자연적인 수단이다. 그것은 기아라고 하는 수단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 같은 먼 장래에 대한 계산에 의해 우리가 불안하게 되는 것 은 그 전제로서 인류라는 종 전체의 장래 행복에 대한 배려 때문이다. 인구 과인의 파괴적 귀결에 미리 주의를 주기 위한 의식적인 선견 능력을 인가(아니 일부 사람)은 서로 기다리 고 있다. 한편 생존 기계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유전자라는 이기적인 존재에 의해 지배되며, 게다가 이 유전자라는 존재는 장래를 선취하거나 종 전체의 행복을 걱정하는 것으로는 아마 도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전제이다. 윈-에드워즈가 정통적인 진화학의 이론 가들과 구분되는 것은 이 점에서이다. 그는 진정한 이타적 산아 제한이 진화할 수 있는 길 이 있다고 한다. 동물의 개체수 조절 윈-에드워즈의 저작이나 그의 견해를 통속화한 아드리의 책이 강조하고 있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논의의 대립없이 인정되고 있는 사실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야생 동물의 개체군이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천문학적 속도로 증가하지 않는 것은 명백하다. 때로는 출생 률과 사망률이 서로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야생 동물의 개체군이 어느 정도 일정하게 유지되 기도 한다. 또 유명한 나그네쥐의 경우와 같이 급격한 대번식과 급격한 개체수의 감소, 그리 고 절멸에 가까울 정도의 개체수의 저하가 교대로 일어나 개체군이 대폭적으로 변동하는 식 의 예도 많이 있다. 그 결과 가끔 적어도 국지적인 개체군이 완전히 절멸해 버리는 수도 있 다. 캐나다 스라소니의 예-이 예에서는 H회사가 판매한 모피수의 경년 변화에서 개체수가 추정됐다-와 같이 개체군이 주기적으로 진동하는 수도 있다. 동물 개체군이 할 수 없는 일 은 제한 없이 증식을 계속하는 일이다. 야생 동물은 노쇠하여 죽는 일이 거의 없다. 실제로 노화도 되기 훨씬 이전에 굶거나 병 들고 또는 포식자에게 먹혀 버리게 된다. 최근까지는 인간도 이 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 개의 동물은 어린 단계에서 죽고 알의 단계에서 생을 마치는 개체도 많이 있다. 기아와 그 밖의 사망 원인이 궁극적 이유로 작용해 개체군의 무제한 증가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에 인간이라는 종에 관해 검토한 것으로도 분명하듯이 사태가 이렇게 되어야 할 필연적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동물이 출생률을 조절하기만 하면 기아가 생길 필연성은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물들은 정확하게 이것을 실행하고 있다는 것이 윈-에드워즈의 저서를 읽고 상상할 정도로 큰 견해차는 존재하지 않는다. 동물이 출생률을 조절하고 있다는 견해 에는 유전자의 이기적 이론의 신봉자들도 즉시 동의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종을 취해도 한 둥지의 알 수(clutch-size) 또는 한배의 새끼 수(litter-size)는 어느 정도 일정한 수를 나 타내는 경향이 있다. 무제한의 새끼를 낳는 동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출생률이 조절되 는가, 바꿔 말하면 자연 선택 과정에 의해 가족 계획은 어떻게 진화했는가 하는 관점을 가 지고 의견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동물의 산아 제한은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실행되는 이타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번식을 하고 있는 개체의 이익 때문에 실행되는 이기적인 것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의견의 차이는 이 중의 어느 견해를 취하느냐에 있다. 이 두 이론 을 차례로 기술하기로 하자. 동물들은 집단 전체의 이익을 위해 가능한 한 출생률 이하의 새끼를 낳는다는 것이 윈- 에드워즈의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그는 보통의 자연 선택에서 종의 이타주의는 진화될 것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 평균 이하의 출생률이 자연 선택에서 선택된다는 것은 언뜻 생각하 면 표현으로서는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제1장에서 소개한 바대로 그룹 선택의 이 론에 도움을 구한 것이다. 그는 구성원인 개체가 자기의 출생률에 제한을 가하는 식의 집단 은 구성원의 증식이 빠르기 때문에 먹이 공급에 위태로움을 받게 되는 대항 집단에 비하면 절멸의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생각했다. 자기 규제적인 번식자로 구성되는 집단이 자연계에 파급되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한다. 윈-에드위즈가 생각하는 개체의 자기 규제는 광의로 하 면 산아 제한과 같은 것이나, 그가 의미하는 것은 실은 더 특수한 것이다. 그는 동물의 사회 생활 총체를 개체수의 조절 기구로 보려고 하는 하나의 웅대한 착상을 제안하고 있다. 예컨 대 제5장에서 이미 언급한 세력권제와 순위제는 많은 동물 종에 있어서 사회 생활의 두 중 요한 특징으로 되어 있다. 세력권 많은 동물들은 어떤 범위의 지역을 '방위하기' 위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쓰고 있는데, 박물학자들은 그 지역을 가리켜 '세력권'이라고 한다. 동물계에서 매우 흔한 현상이다. 이 현 상은 조류나 포유류, 어류뿐만 아니라 곤충이나 말미잘 등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세력권 은 울새의 경우처럼 넓은 임야일 수도 있다. 이 경우 그 지역은 새끼를 키우고 있는 새가 먹이를 취하는 주된 장소로 되어 있다. 또 세력권은 검은등갈매기의 경우처럼 적은 면적일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세력권 내에 먹이는 없으나 중앙에 집이 있다. 윈-에드워즈는 세력 권을 가지고 싸우는 동물들이 한 조각의 먹이와 같은 현실적인 목적물 대신에 특권을 보증 하는 표가 되는 대용 목적물을 가지고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대개의 경우 암놈 은 세력권이 없는 수놈과는 부부가 되려고 하지 않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귀던 수놈이 패 하고 다른 수놈이 그 세력권을 차지하면 암놈은 얼른 그 승자쪽으로 자리바꿈을 하는 일도 종종 있다. 성실히 일부일처제를 지키는 종의 경우에서도 암놈은 수놈과 개체적으로 결합된 다기보다는 오히려 수놈이 소유하는 세력권과 결혼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개체군이 너무 커지면 세력권을 못 가지는 개체가 생겨 그들은 번식 할 수 없게 될 것이 다. 윈-에드워즈에 의하면 세력권의 획득은 번식의 티켓 또는 허가증을 입수하는 것과 같 다. 성립될 수 있는 세력권 수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소위 번식 허가증 발행수가 한정되어 있는 것 같다. 이런 허가증을 누가 획득하는가를 가지고 개체는 서로 싸울 것이다. 그러나 개체군 전체가 낳을 수 있는 새끼의 총수는 성립 가능한 세력권 수에 의해 제한되고 만다. 홍뇌조의 경우와 같이 한 번 보아서 확실히 개체가 자기 규제를 실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 는 에도 몇 개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세력권을 획득 못한 개체는 단지 번식을 못 할 뿐더러 세력권의 획득을 향해 싸우는 것까지 포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들 은 마치 한 마리도 안 남고 아래와 같은 게임의 규칙을 받아들인 것과도 같다. 즉, 서로 경 합하는 계절이 끝날 때까지 만일 네가 아직 번식을 위한 공인된 티켓을 입수하지 못할 경우 에는 너는 스스로 번식을 중지해야 하며, 또 번식 기간에는 행운의 친구에게 방해를 주지 않도록 하며, 그들이 종의 번식을 계속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로운 순위제 원-에드워즈는 순위제에 관해서도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동물의 많은 집단에서 다음과 같은 것이 발견된다. 개체가 서로 개체로서의 특징을 배우고 다시 누구와 싸울 경우에는 이 길 수가 있고, 누구에게는 항상 패하는가를 학습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육 조건하의 동물 집 단에서 특히 잘 볼 수 있는 것인데 야생 상태의 동물 집단에도 그 예가 있다. 제 5장에서 언급한 대로 어쨌든 이길 자신이 없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그들은 싸우지 않 고 항복하는 경향이 있다. 여기서 박물학자는 순위제 또는 '세력순위(pexk order; 닭에서 최 초로 기재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를 다음과 같이 기재하게 된다. 순위제란 사회에 계 층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며 그 질서 밑에 있는 모든 개체는 자기의 지위를 분별하여 분수에 맞지 않는 일은 생각지도 않는다. 물론 때로는 치열한 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고, 또 때로는 어떤 개체가 바로 위의 지위에 있던 상급자를 이기고 승진하는 수도 있다. 그러나 제5장에 서도 언급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하위의 개체가 자동적으로 복종하기 때문에 실제로 싸움이 계속되는 일은 거의 없고, 심한 상처도 별로 입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막연한 그룹 선택론자적인 방법으로 이 사태를 '좋은 것'으로 생 가가혹 있다. 그러나 윈-에드워즈는 훨씬 대담한 해석을 이것에 더하고 있다. 순위가 높은 개체는 하위의 개체보다도 번식의 가능성이 크다. 암놈이 상위의 개체를 선택하거나, 또는 하위의 개체가 암놈에게 접근하는 것을 상위의 개체가 힘써 저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에 드워즈는 높은 사회 순위가 번식의 자격을 나타내는 또 하나의 티켓이라고 생각한다. 직접 암놈을 둘러싸고 싸우는 대신에 개체는 사회적인 지위를 걸고 싸워 만일 상위의 사회적인 지위에 도달하지 못할 경우에는 그들은 번식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자인한다는 것이다. 물 론 하위의 개체는 부단히 높은 사회적 지위를 향해 애쓸 것이니까-'간접적'으로는 암놈을 가지고 경쟁하고 있다-직접 암놈이 개입된 문제에 관해서는 자제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원- 에드워즈에 의하면 순위가 높은 수놈만이 번식할 수 있다는 규칙이 이와 같이 '감수' 되는 결과, 세력권 행동의 경우와 같이 개체수는 별로 증가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실제로 과잉한 수의 새끼를 낳아 놓고서는 그것이 잘못이 있음을 깨닫고 나서 괴로운 표정을 짓는 대신에 동물의 개체군은 순위와 세력권을 가지고 형식적인 다툼을 이용하여 실제로 기아에 의한 희 생자가 나올 수준보다 약간 적게 개체수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이다. 연시 행동 원-에드워즈의 착상 중에서 가장 놀랄 만한 것은 '현시(epideictic) 행동'이라는 사고 방식 일 것이다. 현시란 말은 그가 만든 말이다. 많은 동물은 자신의 생활의 많은 시간을 큰 무리 속에서 지내고 있다. 이 종의 무리짓기 행동이 자연 선택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것은 어째서 일까. 이에 관해서는 다소간 상식적인 각종의 이유가 시사되고 있고 몇 개에 관해서는 제 10장에서 말하고자 생각하고 있으나, 윈-에드워즈의 생각은 그것들과는 아주 먼 이야기이 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저녁 때에 찌르레기가 큰 무리를 이루거나 많은 모기가 문 기둥의 상공을 윙윙거리고 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자기 개체군의 밀도 조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주장은, 개체군 밀도가 높을 때는 출생률을 감소시킨다는 것이므로, 그들이 개체군의 밀도를 추정한 후에 어떤 수단을 강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치에 맞는 말이다. 이것은 항온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내부에 온도계를 반드시 배치해야만 하는 것과 꼭 같은 이유이다. 윈-에드워즈에게 있어 현시 행동이란 개체군 밀도의 추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는 동물이 의도적으로 모여 무리를 지어보는 것 외에는 별것이 아니 다. 그러나 그는 의식적인 개체수 추정이 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개체군 밀 도에 관하여 개체가 수용한 감각 자극을 생식 시스템에 결부시키는 자동적인 신경, 또는 호 흐몬 메커니즘을 생각하고 있다. 이상에서 간단하게나마 나는 윈-에드워즈의 이론을 올바르게 평가하려고 노력했다. 만약 내가 이것에 성공했다면 독자는 지금 그의 이론이 언뜻 보아서 그럴듯하게 납득된 기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론이 언뜻 보아 그럴듯하다고 해서 그 증거까지 유력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책의 여기까지를 읽은 독자는 의심하고 덤빌 준비가 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안 됐지만 증거는 별로 쓸모없다. 증거를 구성하는 다수의 사례는 확실히 그의 견해에 따라 해 석하는 것도 가능하겠으나, 같은 식으로 보다 정통적인 '유전자의 이기성'의 관점에서도 설 명이 잘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족 계획 이론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입각한 가족 계획 이론을 세운 제1인가는 위대한 생태학자 책 (David Lack)이었다. 더욱이 그는 그 이론을 유전자의 이기성에 입각했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의 연구는 주로 야생 조류의 한 둥지의 알 수에 관한 것이었지만, 그의 이론이나 결론은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어떤 종류의 새도 그종에게 특유 한 한 둥지의 알 수를 나타내는 경향이 있다. 가령 북양가마우지(gannet)와 바다오리 (guillemot)는 한 번에 한 개의 알을 품는데, 제비는 3개, 박새는 6개 또는 그 이상의 알을 품는다. 물론 이 한 둥지의 알 수에는 변이도 있다. 한 번에 알을 2개밖에 안 낳는 제비도 있고, 박새처럼 12개의 알을 낳는 수도 있다. 한 마리의 암놈이 산란하여 품는 알의 수는 다 른 특성과 같이 비록 부분적이기는 한 유전적지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해도 이상할 것이 없 을 것이다. 실제로 사태가 그 정도로 단순한 것은 있을 수 없음에 틀림없으나, 말하자면 알 을 2개 낳게 하는 유전자, 4개 낳게 하는 대립 유전자 등등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자! 이렇게 되면 유전자 풀 속에서 수를 늘려 가는 것은 이들 유전자 중 어떤 것일까. 유전 자의 이기적 이론으로는 이 문제가 크로즈업 된다. 표면적으로 보면 알을 2개 또는 3개 낳 게 하는 유전자에 비하면 알을 4개 낳게 하는 유전가 유리한 것은 뻔한 것으로 생각될지도 모르나 "많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식의 단순한 논의가 옳지 않다는 것은 조금만 생각해 보 면 분명하다. 만약 그 논의가 옳다면 4개의 알을 낳기보다는 5개가 더 좋고 또한 10개, 100 개가 좋고 나아가서 무한히 산란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 될 것이다. 바꿔 말하면 그 논의 는 논리적으로 부조리에 부딪치게 된다. 다수의 알을 낳으면 이익뿐만 아니라 대가를 치러 야 함은 분명하다. 애낳기의 증가는 아이에 대한 보호 효과의 감소를 지불해야 할 운명에 처한다. 임의의 환경 조건하에 있는 임의의 종에 관한 특정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가 존재 할 것이라고 하는 것이 랙 이론의 요점이다. 랙과 윈-에드워즈의 견해가 갈라지는 것은 "누 구의 입장에서 보아 최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는 방법에 있어서이다. 윈-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다. 모든 개체가 목표로 하는 최적 알 수는 집단 전체에 있어서의 최적 알 수라는 것이다. 한편 랙은 다음고 같이 주장한다. 각각의 이기적인 개체는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를 최대로 할 수 있는 한둥지의 알 수를 선택하는 것이다. 3개의 알 이라는 것이 제비로서 만일 한 둥지의 최적의 알 수라면 이것에 대한 랙의 해석은 다음과 같이 된다. 네 마리의 새끼를 키우려고 하는 개체가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수는 세 마리밖에 키우지 않으려고 하는 경쟁자가 키울 수 있는 새끼 수보다 결국 적어지게 되는 것 이다. 명백한 이유로서 생각되는 것은 네 마리의 새끼를 키운다면 각각의 새끼에게 분배되 는 먹이의 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성숙 단계에까지 자라 살아 남는 것이 거의 없게 된다는 결론일 것이다. 이것은 4개의 알에게 분배되는 난황의 양, 그리고 부화 후 새끼에게 주어지 는 먹이의 양, 둘 모두에 해당되는 것이다. 즉, 랙에 따르면 개체가 한 둥지의 알 수를 조절 하는 이유에는 이타적인 점 같은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산아 제한을 행하는 것 은 집단을 위한 자원을 과잉으로 이용 못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실제로 자기의 새끼 수를 최대화하기 위해 그들은 산아 제한을 실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우리들이 산아 제 한에 결부시키고 있는 이유와는 아주 정반대의 목표이다. 개끼 수 조절 새끼를 키우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선 알을 만들기 위해 어미 새는 대량의 먹이와 에 너지를 투자해야만 한다. 아마 배우자의 도움도 필요할 것이다. 어미 새는 알을 품고 알을 보호하기 위해 집을 만드는 데도 많은 노력을 한다. 다시 어버이 새는 수주간에 걸쳐 인내 로서 알 품기를 계속한다. 그리고 새끼가 부화하면 어버이 새들은 자기를 혹사하여 거의 쉬 는 일도 없이 새끼의 먹이를 나르고 있다. 이미 소개했거니와 박새의 경우 한 마리의 어미 새는 낮 동안 30초마다 평균 1회의 비율로 먹이를 둥지로 나른다. 우리 인간과 같은 포유류 의 경우 사정은 틀리다고는 하나, 특히 어미에게 있어 번식이 큰 일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 다. 만약 어미가 먹이와 양육을 위한 노력 등과 같은 한정된 자원을 새끼들에게 너무 많이 분산시키면 어미가 키울 수 있는 새끼의 수는 어미 새가 적당한 목표로 출발한 경우에 비해 적어지고 말 것이다. 어미 새는 애낳기와 애키우기 사이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한 마리의 어미 새 또는 한 쌍의 작이 구할 수 있는 먹이와 자원의 총량이 그들이 키 울 수 있는 새끼 수를 결정하는 제한 요인이 된다. 랙의 이론에 의하면 자연 선택은 이들 한정된 자원ㅇ들로부터 최대의 유리함을 유도하도록 산한시의 한 둥지의 알 수(또는 한배의 새끼 수)를 조정한다. 합리적 출산 새끼를 과다 출산하는 개체가 불리하게 되는 이유는 개체군 전체가 그 때문에 절멸해 버 리기 때문이 아닌 단적으로 그들의 새끼 중에 살아 남는 수가 적기 때문이다. 과잉 산란에 관한 유전자군은 이것들을 지닌 새끼들이 거의 성숙할 수 없으므로 다음 세대에 전달되는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인 사이에는 가족 구성원의 크기가 개개의 부모가 조 달할 수 있는 한정된 자원들에 의해서는 이미 제한받지 않는다는 현상이 생기고 있다. 어떤 부부가 자기들이 양육 가능한 이산의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구가, 즉 그 개체군 중 해당 부 부 이외의 부분이 개입하여 과잉분의 아이들을 건강하게 살아가도록 한다. 물질적 자원을 전혀 못 가지는 부부가 다수의 아이를 여성의 생리적 한계에 이르도록 낳아 기르려고 해도 실제로 이것을 저지하는 수단은 없다. 그러므로 복지 국가라는 것은 극히 부자연적인 실체 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키울 수 있는 수 이상의 아이를 가진 부모는 손자를 많이 가질 수 없고, 따라서 그들의 유전자가 장래의 세대에게 이어지는 일은 없다. 자연계에는 복지 국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출생률에 대해 이타적인 자제를 할 필요는 없다. 자제를 모르고 방종을 가져오는 모든 유전자는 즉시 벌을 받는다. 그 유전자를 보유한 아이들은 굶 주리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은 과도한 인원을 거느린 가족의 애들이 굶어 죽어도 그냥 두던 옛날의 이기적이 s방법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원치 않는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족을 경 제적인 자급 자족 단위로 하는 것을 폐지하고 그 대신에 국가를 경제 단위로 한 것이다. 그 러나 아이에 대한 생활 보장의 특권은 결코 남용되어서는 안 된다. 피임 피임은 종종 '부자연스럽다'고 비난된다. 그렇다. 극히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 곤란한 무 제는 복지 국가에서도 매한가지라는 점이다. 우리들의 대부분은 복지 국가를 극히 바람직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부자연스러운 복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들 또한 부자 연스러운 산아 제한을 실행해야만 g나다. 그렇지 않으면 자연 상태에 있는 것보다 더 비참 한 결과에 이를 것이다. 복지 국가란 지금까지 동물계에 나타난 이타적 시스템 중 아마도 가장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어떠한 이타적 시스템도 본래 불안정한 것이다. 그것 은 이용하려고 기다리고 있는 이기적이 개체에 남용당할 여지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 가 키울 수 있는 이상의 아이를 가지고 잇는 사람들은 대개의 경우 무지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고, 그들이 의식적으로 악용을 꾀한다고 비난할 이유는 못 된다. 다만 나는 그들이 다수 의 아이를 만들도록 의도적으로 선동하고 있는 지도자나 강력한 조직에 대해서는 그 혐의를 풀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세력전과 번식 허가증 야생 동물의 이야기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한 둥지의 알 수에 관한 랙의 논리는 윈-에드 워즈가 인용하는 기타 모든 사례, 예컨대 세력권 행동, 순위제 등에 일반화시킬 수 있다. 예 를 들면 윈-에드워즈와 그의 동료들이 연구 대상으로 하고 있는 홍뇌조를 택하기로 하자. 이 새는 히스속 식물을 먹이는데, 습원을 분할하여 소유자가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보다 다 량의 먹이를 포함하는 세력권을 만든다. 번식기 초기에 그들은 세력권을 두고 싸우는데 패 자는 자기의 패배를 인정하는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력권을 갖지 못하는 낙오 자가 되며, 그 계절이 끝날 즈음에는 대체로 아사해 버린다. 번식할 수 있는 놈은 세력권 소 유자일 뿐이다. 그런데 세력권을 갖지 못한 새들도 생리적으로는 번식이 가능하다는 것이 다음의 사실에서 밝혀져 있다. 세력권 소유자가 죽으면 낙오자 중의 한 마리가 즉시 그 후 계자 자리에 앉아서 번식을 시작한다. 이 극단적인 세력권 행동에 관한 윈-에드워즈의 해석 은 이미 알다시피 다음과 같은 것이다. 낙고자들은 번식을 위한 허가증 또는 티켓을 놓치게 된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번식 행위를 보류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으로 설명하는 것은 좀 귀찮은 일로 보인다. 낙오자들은 왜 사력을 다하여 한사코 세력권 소유자를 내쫓으려고 하지 않을까. 비록 지쳐서 쓰러질지라도 그들이 잃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조금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잃는 것이 엄연히 있는 것이 아닌지. 위에서 보았듯이 만일 세력권 소유자가 사 망하는 일이 있으면 낙오자에게 그 세력권을 입수하여 번식할 시회가 돌아온다. 만일 낙오 자가 이 방법으로 세력권을 입수하여 번식할 기회가 돌온다. 만일 낙오자가 이 방법으로 세 력권의 후계자로 정착할 가능성을 기다리는 편이 투쟁에 의해 세력권을 얻을 수 있는 가능 성보다 크다면 비록 적은 에너지라도 무익한 싸움으로 허비하기보다는 세력권 소유자 중에 서 누군가가 죽기를 기대하며 대기하는 편이 이지적 개체로서 그에게는 유리하다. 윈-에드 워즈의 입장에서 보면 집단의 번영을 꾀함에 있어서 낙오자들의 역할은 대역자와 같이 무대 옆에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집단의 번식을 위해 전시 무대 위에서 세력권 소유자 중 누군 가가 쓰러지면 즉시 그 놈을 대신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분명해진 것처럼 낙오자가 나타내는 행동은 순수하게 이기적인 개체로서 그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가장 좋은 전략일지도 모른다. 제 4장에서 말한 대로 우리는 동물을 도박사로 볼 수가 있다. 때때로 도 박사로서 가장 좋은 방책은 공격 작전이 아닌 관망이 작전일지도 모를 일이다. 같은 식으로 동물이 비번식자의 지위를 언뜻 보아서 수동적으로 '감수'하고 있는 듯이 보 이는 많은 다른 예도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에 의해 더 용이하게 설명할 수가 있다. 어떤 경 우에도 설명의 기본형은 같다. 즉, 그 동물의 가장 좋은 결정은 일단 자제하고 장래의 더 좋 은 기회에 희망을 거는 것이다. 하렘의 소유자들에게 새치기를 꾀하지도 않는 낙오된 바다 표범은 집단의 이익을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좋은 기회가 닥쳐오기를 기다리 고 있는 것이다. 비록 호기는 오지 않고 결국 그가 자손을 못보고 죽을망정 이 도박은 이길 지도 모를 도박이었다. 그 한 마리에 관해서는 결과적으로 이 도박이 패배할 것을 알았다고 해도 역시 그것은 이길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또 개체수의 급증으로 번식의 중신 지역에서 수백만의 큰 그룹을 이루고 쏟아져오는 나그네쥐들도 그들이 지나쳐 온 그 지역의 개체군 밀도를 감소시키기 위해서 그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더 밀도가 낮은 생활 장소를 찾아다니는 것이다. 이기적 존재인 그들 모두가 그러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장소를 계속 고 집하면 그들은 새로운 생활 장소를 발견 못하고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 가 나야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실도 다음의 가능성을 변명하는 것은 아니다. 즉, 원래 의 지역에 잔류하는 것은 더 좋지 못한 도박이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이다. 개체군 과밀-출생률 감소 초래 개체군의 과밀이 때로는 출생률의 감소를 초래케 된다는 것은 많은 자료로 잘 알려진 사 실이다. 이 사실이 윈-에드워즈의 이론뿐만 아니라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과도 합치하기 때 문이다. 예를 들면, 옥외의 울타리 안에 먹이를 충분히 공급하고 생쥐를 자유로이 번식시키 는 실험이 행해진 적이 있다. 이 개체군은 어느 수까지는 증가했는데 그 후에는 평형 상태 가 되었다. 개체수가 평형 상태로 된 것은 과밀 결과 암놈의 번식 능력이 감퇴되었기 때문 임을 알았다. 새끼 수가 줄어든 것이다. 이와 비슷한 효과는 이외에도 종종 보고되고 있다. 이 같은 종의 효과를 일으키는 직접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할 때가 많다. 더욱이 원인에 그 런 이름을 붙여 보는 것만으로는 설명을 어떻게 연관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개체군의 과밀 화에 따라 출생률을 감소시킨다는 성질을 가진 암놈에게 자연 선택이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 은 도대체 왜 그럴까!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출산 원-에드워즈의 답은 분명하다. 암놈이 개체군 밀도를 측정해 출생률을 조정하는 성질을 가진 덕택에 먹이의 과밀 이용을 일으키지 않고 사는 집단이 그룹 선택에 유리하기 때문이 라고 한다. 상기 실험의 경우 먹이가 결코 부족하지 않았는데 생쥐가 이 조건을 이해한다고 상정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들은 야생 생활에 적응하도록 프로그램되어 있다. 그리고 야외 조건하에서라면 과밀은 앞으로 최래될 기근을 나타내 주는 지표가 될 것이다.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의 견해는 어떠한가? 거의 같은 의견인데, 단 하나의 결정적인 의견 의 차이가 있다. 동물은 그들 자신의 이기적인 입장에서 보아 최적 수의 새끼를 갖는 경향 이 있다고 하는 랙의 견해를 상기해야 한다. 그들이 낳은 새끼의 수가 적거나 또는 과다하 든지 하면 그들이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새끼의 수는 만일 그들이 꼭 맞는 수의 개씨 를 낳아서 키울 때의 그 수보다 적어지고 말 것이다. 이 '꼭 맞는 수'라고 하는 것도 개체군 의 과밀한 해에는 개체군이 희박한 해에 비해 보다 작은 수가 될 것이다. 과밀이 기근의 전 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는 본래부터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만약 암놈이 기근을 예측하는 확실한 증거에 접할 경우 스스로 자기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는 것은 명백히 암놈의 이기적 이익에 걸맞은 것이다. 이 경고적인 징후에 이 방법으로 반응하지 않는 경쟁자들은 가령 그 암놈보다 많은 새끼를 낳았다고 해도 최종적으로 키워 낼 수 있는 새끼수는 그 암놈보다 적 어지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최종적으로 윈-에드워즈와 거의 똑같은 결론에 도달 하게 된다. 단 우리들은 그와는 전혀 다른 타입의 진화론적 추리를 거쳐 거기에 도달한다. 밀도 조사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현시 행동'의 문제도 쉽게 처리한다. 독자는 윈-에드줘즈의 다음 과 같은 가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즉, 동물들은 모든 개체가 개체군의 밀도 조사를 쉽 게 실행하여, 이에 따라서 자신의 출생률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큰 그 룹을 이루고 일제히 과시를 한다고 한다. 실제로 현시적인 집합이 있다고 하는 직접적 증거 는 없으나, 가령 그런 종의 증거가 있다고 하자. 그렇게 되면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당혹 할 것인가? 걱정할 것은 못 된다. 찌르레기는 매우 많은 수가 한데서 잠을 잔다. 지금 가령 단지 겨울 동안의 과밀 상태가 봄에 산란 능력을 감퇴시킨다는 것뿐만이 아니고 또한 서로의 울음소리를 듣는 것이 산란 능력 감퇴의 직접적 원인이 됨을 알았다고 상정해 보자. 이 점을 증명하려면 찌르레기의 요 란한 잠자리 음과 조용한 잠자리 음을 테이프에 녹음해 놓고 각각의 음을 들려준 찌르레기 를 상호 비교하는 실험을 통해 전자의 음에 내놓았던 개체 쪽이 산란수가 적음을 제시하면 좋을 것이다. 정의에 따르면 이로 인해 찌르레기의 울음소리는 현시적인 과시의 하나인 것 으로 나타난다. 그러면 유전자의 이기성 이론은 생쥐의 예를 든 것과 거의 같은 방법으로 이 현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은 미래를 예측한다. 유전자 풀 속에서 양육 능력 이상으로 가족을 확대시키는 유전자는 자동적으로 불리하게 되어 그 수가 감소한다는 가정하에서 논의를 시작하자. 따라서 허실없이 산란하려는 개체에 게 주어진 일은 이기적인 개체로서 어미의 입장에서 본 한 둥지의 최적 알 수가 다가오는 번식기에 있어도 도대체 몇 개로 되느냐를 예측하는 것이다. 예측이라는 말은 제4장에서 말 한 것 같은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데 독자는 그것을 상기했으면 한다. 암놈은 대관절 어떻게 해서 한 둥지의 최적 할 수를 예측하는 것일까? 어떤 변수가 어미의 예측에 영향을 줄까? 우선 대부분의 종은 해마다 변화하지 않는 고정적인 예측을 세우고 있는 것 같다. 예 컨대 북양가마우지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는 평균 한 개로 정해져 있다. 물론 고기가 특히 풍부한 해에는 일시적으로 두 개로 증가할 수 있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북양가마우지에 게 어떤 특정한 해가 어류가 많은 해로 되는지의 여부를 사전에 아는 방법이 없다고 하면 북양가마우지의 암놈들이 두 개의 산란으로 해서 가지고 있는 자원을 낭비하고 마는 위험을 취하는 것을 예상할 수 없다. 알 두 개를 낳게 되면 평균적인 해의 조건에서 그들의 번식 성적은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찌르레기를 포함하여 상기와 다른 조건하에 있는 종에서도 볼 수 있을 것 이다. 이들 종에 있어는 봄에 특정한 먹이 자원의 생산이 양호하게 될는지 어떤지를 겨울 동안에 예측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농촌 사람들 사이에는 예컨대 호랑가 시나무 열매의 많고 적음이 봄날씨를 예측하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는 것 등등 미래의 단서가 되는 많은 속담들이 있다. 어떤 특정한 늙은 아낙네의 이야기가 정확한지의 여부는 덮어놓고라도 논리적으로 존재 가능한 여지는 있다. 그렇다면 이름난 점쟁이가 자기의 이익 이 되도록 한 둥지의 알 수를 해마다 조정하는 것도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이다. 호랑가시 나무 열매가 과연 신뢰할 수 있는 예측 수단인지는 몰라도 생쥐의 경우와 같이 개체군 밀도 가 좋은 예측 수단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많이 있다고 생각된다. 새끼를 낳고 먹이를 줘야 하는 봄에 같은 종의 경쟁자들과 먹이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찌르레 기 암놈은 원칙적으로 알 수가 있다. 만약 겨울에 암놈이 같은 종 개체의 지역 밀도를 어떤 방법으로 추정할 수 있다면 이것은 봄이 되어 새끼를 위해 먹이를 확보하는 것이 얼마나 곤 란할지를 예측하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철에 개체 밀도가 현저히 높다는 것을 알게 되면 산란수를 조금 감소시킨다는 것이 암놈의 이기적 견지에 맞는 신중한 대응 책이 된다. 즉, 자기의 한 둥지의 최적 알 수에 대한 암놈의 추정치는 감소하게 된다. Beau Geste 효과 개체가 실제로 자기 손에 의해 개체군의 밀도 추정을 근거로 하여 한둥지의 알 수를 감소 신다는 성질을 나타내게 되면 즉시 다음과 같은 사태가 일어난다. 즉, 실제의 밀도가 어떻든 경쟁자에 대해서는 개체군이 굉장히 큰 것처럼 꾸미는 것이 개개의 이기적 개체에게는 유리 하게 도는 것이다. 예컨대 찌르레기의 예에서, 가령 겨울 잠자리의 소란정도가 개체군의 크 기를 추정하는 수단으로 되어 있다면 개개의 개체는 있는 힘을 다하여 소리를 크게 지는 것 이 유리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동물은 마치 동시에 몇 개의 개체가 거기에 있는 것처 럼 보이게 하는 일이 있지나 않은가 하는 견해는 크렙스(J..R. Krebs)가 별도의 문제를 다루 었을 때에 시사했던 것이다. 그는 프랑스 외인 부대의 일단이 이와 같은 전술을 쓰는 장면 이 나오는 소설을 참조해 거기에 'Beau Geste 효과'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찌르레기의 경 우 이 행위의 목적은 주위 동료들이 그것에 속아서 그들의 한 둥지의 알 수를 진짜 최적치 이하로 감소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찌르레기의 그것처럼 이 목적을 잘 달성 한다고 하면 그것은 당신의 이기적인 이익에 합당한다. 당신은 당신과 같은 유전자를 지니 지 않은 개체를 감소시키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나의 결론을 말하면 현시 행동이라는 윈-에드워즈의 착상은 실제로 우수한 고찰 방법일지 모른다. 아마도 그의 이 견 해는 그가 그것에 준 진화론적 설명이 오용된 점을 제외하면 시종 옳았을지도 모른다. 또 상기의 고찰에서 더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낸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그룹 선택 이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이는 어떠한 증거가 나타났다고 해도 랙의 가설은 그것을 유전자의 이기 성에 의해 설명해 보이는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장의 결론은 개개의 어미 동물이 가족 계획을 실행하는 데 있다. 그러나 그것은 공공 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의 출생률의 최적화인 것이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살아 남는 자기 새끼의 수를 최대화하려고 힘쓰고 있고, 이것을 위해서는 새끼의 수가 과다 든 과소든 상관이 없다. 개체에게 과도한 수의 새끼를 가지도록 하는 유전자는 유전자 풀 속에 거처할 수 없다. 그런 종류의 유전자를 체내에 가진 새끼들은 성체가 될 때까지 살아 남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가족 크기의 양적인 고찰은 이상으로 매듭짓기로 하자. 다음에 다룰 것은 가족 내부의 이 해 충돌 문제이다. 모친으로서 자기의 아이를 모두 공평히 대하는 것이 이익일까 손해일까. 자칫하면 모친은 특정한 아이를 편애하는 것은 아닌지. 가족과는 단일 협력 집단으로서 통 일되어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가족에게까지도 이기주의나 속임수가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 인지. 같은 가족 내의 전 구성원은 동일한 최적치의 달성을 향해 노력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간에는 무엇을 최적치로 할 것인가를 가지고 '의견의 불일치'가 있는 것일까. 다음 장에 서는 이들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 보자. 배우자간에 이해 충돌이 있나 없으나 하는 문제 도 이와 관련된 것인데, 그것에 관해서는 제9장으로 미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