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유전자 지은이: 리처드 도킨스 출판사: 을유문화사 봉사자: 김은정 역자의 말 1953년 4월 25일자 (네이처) 지에 윗슨과 크릭에 의해 DNA의 이중나선 구조가 밝혀진 이래 생명의 신비를 벗기는 주체가 되고 있는 것은 유전 정보를 담고 있는 DNA이다. 이를 근거로 해서 생명 현상을 분자 수준에서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이와 같은 접근은 진화 생물 학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즉, 진화를 유전자의 역사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책이 바로 동물의 사회적 행동의 진화를 유전자의 눈으로 살펴본 스릴 있고 환상적인 전문 과학 서적으로서 종래의 생물학을 뿌리째 뒤흔들며 세계의 주목을 끌고 있다. 그러나 전문 지식이 없이도 읽을 수 있도록 마치 공상 과학 소설처럼 씌어졌다. 이 책의 저자 리처드 도친스는 동물 행동학 연구 그룹의 리더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고 있 다. 이 책을 저술한 후, 그는 사회 생물학 논쟁이나 진화 논쟁에서 끈임없이 중심적인 위치 를 차지하며 선도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유머 있는 문장력과 논리적 구성력은 정평이 나 있으며 지금은 구미에서 가장 인기 있는 생물학자 중의 한 사람이다. 이 책에서 그는 유전자를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40억 년 전 스스로 사본을 만드는 힘을 가진 분자가 처음으로 원시대양에 나타났다. 이 고대 복제자의 운명은 어떠했던가? 그것들은 절멸하지 않았고 생존술의 명수가 됐다. 그러 나 그것들은 오래 전에 자유로이 뽐내고 다니는 것을 포기했다. 이제 그것들은 거대한 군체 속에 떼지어 있고, 거대하고 쿵쿵거리며 나아가는 로봇 안에 안전하게 있다. 그것들은 원격 조정으로 외계를 교묘하게 다루고 있다. 그것들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즉 그것들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 것들의 보존이 우리의 존재를 위한 유일한 이유이다. 그것들은 유 전자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이다. 즉,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를 보존하기 위해서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 기계라는 것이다. 이 유전자 기계의 세계는 비정한 경쟁, 끊임없는 이기적 이용, 그리고 허위로 가득 차 있 다. 이것은 경쟁자 사이의 공격에서뿐만 아니라 세대간, 그리고 암수간의 미묘한 싸움에서 보여진다. 유전자는 유전자자체의 유지 목적 때문에 원래 이기적이며, 생물의 몸을 빌려 현 재에 이르고 있다. 동물의 이기적 행동은 이 때문이며 이타적 행동을 보이는 것도 자신과 공통된 유전자를 남기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만은 특이한 존재가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는 다른 생물들이 갖고 있지 않은 문화를 갖고 있기 때문에 맹목적인 존재일수 없는 것이 아닐까? 자유 의지를 가진 인 간은 유전자의 전제적 지배에 반역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에서 이 같은 인간 행동에 대한 해답을 찾기 바란다. 유전자가 모든 생명 현상에 우선한다는 도킨스의 결정론적 생명관은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역자가 주저했던 것은 이처럼 논쟁적인 책을 혹시나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함으로써 왜곡된 결과가 생길까 하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기간을 걸려서 1989년도에 새롭게 출판된 제 2판을 번역하게 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 게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하여 독자들은 생물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끝으로 이 책의 출판을 도와주신 을유문화사의 정진숙 사장님, 고정기 주간님, 그리고 편 집과 교정에 수고를 아끼지 않으신 편집부 직원 여러분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1993년 10월 옮긴이 초판 서문 이 책은 거이 공상 과학 소설처럼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려고 의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공상 과학 소설이 아니고 과학이다. 사실 소설보다 기이하다 라는 것이 진부한 표현인지는 몰라도 그것은 내가 진실에 대해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를 정 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우리는 생존 기계이다. 즉, 이 로봇 운반자들은 유전자로 알려진 이기적인 분자들을 보존 하기 위해 맹목적으로 계획됐다. 이것이 아직도 나를 경악하게 하는 사실이다. 나는 이것을 수년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전혀 그것에 익숙해 있지 못했다. 나의 한 가지 바람은 내가 사 람들을 놀라게 하는 데는 어느 정도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걱정스럽게 관심을 기울였던 가상적인 세 부류의 독자로 생물학의 문외한이다. 그를 위해 나는 전문적인 특수 용어를 거의 완전히 피했고, 전문적 단 어를 사용해야만 했던 곳에서는 그것들에 대해 정의하였다. 나는 왜 우리가 학문적 잡지로 부터 대부분의 전문 용어를 검열하지 않는지 이제는 의아하게 생각한다. 나는 문외한이 특 별한 전문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가정했으나 그가 바보스럽다고 가정하지는 않았다. 누구든지 과학을 아주 단순화하면 과학을 대중화할 수 있다. 나는 과학의 본질을 상실하지 않고 비수학적 언어로 몇 가지 미묘하고 복잡한 생각들을 대중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이 책이 얼마나 성공할지 모르겠다. 아니면 이 책의 주제가 가치 있는 만큼 재미있고 흥미 를 끄는 책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나의 또 다른 야심도 얼마나 성공했는지 몰겠다. 생물학이 무엇인가라는 그 자체가 추리 소설이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나는 주제가 제시해야 하는 작 은 부분의 흥분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는 것은 감히 바라지 못했다. 나의 두 번째 가상적 독자는 전문가였다. 그는 몇 가지 나의 유추와 비유에 대해 날카롭 게 비판했다. 그가 좋아하는 문구는 "~은 예외로 하고","그러나 한편으로는","우(혐오, 경멸, 공포 따위를 나타냄)"이다. 나는 그의 비판을 주의 깊게 들었고 심지어는 그를 만족시키기 위해 한 장을 완전히 다시 썼다. 그러나 결국 나의 방식으로 만족해 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 직도 나의 가장 바라는 소망은 바로 그가 이 책에서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익숙한 생각들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일지도 모르며 그 자신의 새로운 생각 에 대한 자극일지도 모른다. 만약 기것이 나의 너무나 큰 열망이라면 적어도 나는 이 책이 기차 여행중 그를 즐겁게 해 줄 것을 바라고 싶다. 내가 생각했던 세 번째 독자는 문외한에서 전문가로 넘어가고 있는 학생이었다. 만약 그 사람이 아직도 어떤 전공을 택할지 결정하지 못 했다면 나의 전공 분야인 동물학을 권하고 싶다. 동물학을 공부하는 데는 동물학의 가능한 '유용성' 과 동물에 대한 일반적인 애호보다 는 더 좋은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우리 동물들이 우주에서 가장 복잡하고 완전하게 설계 된 기계라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것을 생각하면 사람들이 왜 다른 전공을 공부하는지 이해하 기가 힘들다. 이미 동물학에 전념하고 있는 학생들을 위해 나는 나의 책이 어느 정도 교육 적 가치를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그는 전공 논문과 나의 논법의 기초가 된 전문서적을 통 해서 공부해야만 한다. 만약 그가 원론을 소화해 내기 어렵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아마도 나 의 비수학적인 해설이 개론서와 참고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부류의 다른 독자들에게 흥미를 끌게 하는 데엔 확실히 위험이 따른다. 나는 다만 이 위험들에 대해 매우 의식해 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이러한 시도에 장점으로 작용하여 보 다 가치화된 것처럼 생각됐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동물 행동학자이고 이 책은 동물의 행동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을 통해 내가 교육을 받은 동물 행동학의 전통에 얼마나 빚을 지고 있는가 확실하게 될 것이다. 특별히 틴버겐 (Niko Tinbergen)은 내가 옥스퍼드에서 그의 지도 아래 연구했던 12년 동안에 나에게 끼친 영향이 어느 정도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생존 기계"라는 문구가 그로부터 실제로 유래 된 것이 아니더라도 그것이 그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동물 행동 학은 최근에 관례적으로 별 연관이 없다고 여겨지던 출처로부터 새로운 사고의 도입에 의해 활기를 띠게 됐다. 이 책은 이들 새로운 사고에 주로 기초를 두고 있다. 그들 창시자들은 이 책 속의 알맞은 곳에 참조되어 있다. 그들 중의 탁월한 인물은 윌리엄스(G.C. Williams), 메 이나드-스미스(J. Maynard Smith), 해밀턴(W.D. Hamilton) 그리고 트라이버스(R.L Trivers) 등이다. 여러 사람들이 이 책에 대한 제목을 제안했다. 나는 그것을 장의 제목으로 기꺼이 사용했 다. 그것은 불멸의 코일의 크렙스(John Krebs), 유전자 기계의 모리스(Desmond Morris), 유 전자의 친족관계의 클러턴-브록(Tim Clutton-Brock)과 J. 도킨스(Jean Dawkins) 들이며, 따 로 포터(Stephen Potter)에게는 특별히 사과를 드린다. 경건한 바람과 열망의 대상인 가상적인 독자들보다는 실제의 독자와 평론가들이 더 도움 이 되었다. 내가 교정에 몰두했을 때 M. 도킨스(Marian Dawkins)는 무수한 구상과 매쪽마 다 다시 초를 잡아 주었다. 그녀의 생물학 논문에 대한 상당한 지식과 이론적 문제점들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녀의 끊임없는 격려와 정신적 지지가 결정적으로 나에게 중요했다. 나 보다 이 주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는 크렙스가 처음부터 이 책의 전체를 읽었다. 그리고 그는 관대했고 나에게 충고와 제언을 아끼지 않았다. 톰슨(Glenys Thomson)과 보드머 (Walter Bodmer)는 내가 다룬 유전학적 문제점을 친절하고도 정확하게 비평했으나, 나는 나의 교정본이 그들에게 아직도 완전하게 만족스럽지 못할까 두렵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약간은 더 나아진 것을 발견하기 바란다. 나는 그들이 나에게 바쳤던 시간과 인내에 대해 그들에게 무엇보다도 감사한다. J. 도킨스는 오해하기 쉬운 표현을 예민하게 찾아내어 다른 명확한 표현을 위한 훌륭하고 건설적인 제안을 했다. 나는 스탬프(Mawell Stamp)만큼 이해 력이 뛰어난 문외한을 바랄 수 없었다. 초고에서 중요하고도 일반적인 표현의 결함에 대한 그의 통찰력 있는 발견은 마지막 파악에 많이 기여했다. 특정한 장에 대해 건설적으로 비평 했거나 그 밖에 전문적인 충고를 줬던 사람들은 메이나드-스미스, 모리스, 매쉴러(Tom Maschler), 존스(Nick Blutron Jones), 케틀웰(Sarah Kettlewell), 그래험(Christopher Graham), 파커(Geoff Parker)와 트라이버스(Robert Trivers)이다. 설(Pat Searle)과 버호벤 (Stephanie Verhoeven)은 능숙하게 타이핑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즐겁게 그 일을 도와줌으 로서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단지 원고에 참고가 되는 비평뿐만 아니라 이 책의 출판의 모든 문제에 정성을 들인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의 로저스(Michael Rodgers)에 게 감사드리고 싶다. 리처드 도친스 개정판 서문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가 출판된 지 12년 사이에 이 책의 중심 메시지는 교 과서의 정설이 되었다. 이것은 역설적이나 명백히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출판되었을 때 혁명적이라 비난받던 책이 아니다. 대신에 우리가 무엇에 관해 야단법석했던지 의심할 정도 로 천천히 정설로 바뀌어졌다. 전혀 반대이다. 처음부터 서평은 만족스럽게 호의적이었고 처 음에는 논쟁이 될 만한 책처럼 보이지 않았었다. 논쟁적인 책으로서의 이 책의 명성은 해가 갈수록 커져 지금까지 과격한 극단주의의 작품으로 널리 간주된다. 극단주의로서의 책의 명 성이 증가하는 동안 이 책의 실제 '내용'은 점차 덜 극단적인 것처럼 보였고, 점차 좀더 보 편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기적인 유전자 이론은 다윈의 이론으로 다윈이 적합성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는 방식 으로 표현되었다. 나는 그가 즉시 인식하고 기뻐할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정설 신다윈주의 의 논리적 성장은 사실이다. 그러나 새로운 이미지로 표현되었다. 개개의 생물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자연에 대한 유전자의 눈으로 본 견해를 택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관점이나 어려운 이론은 아니다. (연장된 표현형)의 첫머리에서 나는 이것을 넥커의 정육면제의 은유 를 이용해 설명했다. 이것은 종이 위에 잉크로 그린 이차원의 모형이지만 투명채로써 인지되는 삼차원의 정육 면체이다. 이것을 수초간 응시하면 표면이 다른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 계속 응시하라. 그러 면 다시 원래의 정육면체로 튕겨져 돌아올 것이다. 두 개의 정육면체는 동등하게 망막 위의 이차원 데이터에 모순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뇌에서는 즐겁게 그들이 엇갈린다. 어떤 것도 다른 것보다 정확하지는 않다. 내 요점은 바로 자연 선택을 보는 데에는 두 개의 견해, 즉 유전자의 관점과 개체의 관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이해한다면 한 가 지 진실에 두 가지 견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신은 한 견해에서 다른 견해로 옮겨 다닐 수 있고 이것은 여전히 신다윈주의일 것이다. 나는 이제 이러한 은유가 너무 조심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과학자에게 있어서 새로 운 이론을 제안하거나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내는 것보다도 더 중요한 사회적 공헌은 기존 의 이론이나 사실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는 방법을 발견하는 것이다. 넥커의 정육면체 모델 은 위의 두 가지 방법이 동등하게 타당하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것이다. 확실히 이 은유는 부분적으로는 옳다. 이론과 달리 '관점'은 실험을 통해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 다. 즉 우리에게 익숙한 증명과 반증이라는 판단 기준으로 재분류할 수 없다. 그러나 관점의 전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이론보다 약간 더 높은 정도에 불과하다. 넓게 보 면 관점의 전환이란 검증 가능하고 자극적인 많은 이론들이 탄생되는 지적 분위기라 할 수 있고, 여기에는 상상이 불가능한 사실들은 거의 포함되어 있지 않다. 넥커의 정육면체 은유 는 이 점에 대해선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그 은유는 관점을 뒤엎는다는 생각을 포착했으나, 그 가치를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는 실패했다. 우리는 이제 질적으로 동등한 가치를 가진 관 점들 사이의 전환이 아니라,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변용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전환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는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는 데에 내가 약간의 공헌을 했다는 점을 서두러 부인하려 한 다. 그렇지만, 이런 우의 이유 때문에 나는 과학과 과학의 대중화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문적인 문헌에만 나타나 있는 관념들을 설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기술이다. 여기에는 얽히고설킨 새 언어에 대한 통찰력과 은유를 파악하는 힘이 필요하다. 참신한 언어와 은유들을 끝까지 파고든다면 새로운 관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방금 언급한 것처럼 새로운 관점은 과학에 독창적인 공헌을 할 수 있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대중화론자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나는 가끔 그의 생생한 은유들이 단지 우리에게 도움 을 주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곤 한다. 이 은유들도 그의 창조적인 재능의 발휘가 아니었을까? 유전자의 눈으로 본 다윈주의적 관점은 피셔(R.A. Fisher)나 그 밖의 30년대 초의 위대한 신다윈주의 개척자들의 저작물 속에 암시되어 있으나, 이것이 명시적으로 표현된 것은 60년 대에 이르러서 해밀턴(W.D. Hamilton)과 윌리엄스(G.C. Williams)의 저작 속에서였다. 나로 서는 그들의 통찰력이 공상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들의 표현이 너무 간결하고 충분히 표출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을 이성적으로뿐만 아니 라 감정적으로도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는 확장되고 발전된 하나의 관점이 있음을 확인했 다. 나는 진화를 유전자의 관점에서 파악하는 것을 극찬하는 책을 쓰려고 했다. 여기에서는 대중적인 다윈주의에 침투되어 있는 무의식적인 그룹 선택론을 바로잡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하여 사회 행동의 예를 많이 들어야 했다. 나는 산업 쟁의로 정전이 되어 실험실의 연구가 중단되었던 1975년에 1년간의 안식 휴가를 얻을 때까지 글쓰기를 보류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 이 이론은 특히 메이나드-스미스(John Maunard Smith)와 트라이버스 (Robetrt Trivers)에 의해 점차 확장되었다. 지금 나는 그때가 새로운 사살들이 널리 전파되 었던 신비한 시기였따고 생각한다. 나는 흥분과 열광에 휩싸인 듯한 상태에서 (이기적 유전 자)를 썼다.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는 나에게 2판을 의뢰하면서, 통상적인 내용 전체에 대한 세부적 개 정은 불필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들의 생각으로는, 계속해서 개정되도록 운명지워진 책들 이 있기는 하지만 (이기적 유전자)는 그런 책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판은 씌어진 당시의 생 생함을 간직하고 있다. 그 무렵, 해외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고, 위즈위스의 더없이 행복한 서광이 비치고 있었다. 그러한 시대의 산물을 변화시켜 새로운 사실로 그것을 살찌우거나 복잡한 내용과 신중함으로 그것을 주름투성이로 만드는 것은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원 래의 본문의 결함도, 성차별적 대명사도 모두 그래도 놔 둔다. 책 뒤에 주를 달아 개정하나 반응 그리고 그 후의 전개를 거기에 포함시키려 했다. 그리고 각각 그 시대의 신기로움이 혁명적인 서광의 기분을 한층 북돋우는 사항에 대하여 아주 새로운 장을 덧붙이는 것이 좋 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12장과 13장이 그러한 것이다. 그 두 장은 지난 몇 년 동안 나를 가장 흥분시킨 두 권의 책에서 영감을 얻어 씌어졌다. 하나는 액셀로드(Robert Axelrod)의 (협력의 진화(The Evolution of Cooperation))로 우리의 미래에 대한 어떤 희망을 제공한다 고 보여졌다. 또 하나는 내가 쓴 (연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s))으로 그 동안 내가 열중한 문제이고, 또한 (그것이 사실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내가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가장 좋은 책이라고 생각된다. "마음씨 좋은 놈이 일등한다(Nice guys finish first)"라는 제목은 1985년에 내가 참여했던 비비시 허라이즌(BBC Horizon) 방송국의 프로그램에서 따온 것이다. 이것은 협력의 진화에 대한 게임-이론적 접근을 시도한 50분짜리 다큐멘터리로 테일러(Jeremy Tayolr)가 제작하 였다. 이 프로그램의 제작 과정과 그가 제작한 다른 프로그램인 (눈먼 시계제조인)은 그의 직업에 대한 새로운 존경을 나에게 주었다. 허라이즌(이 방송국의 프로그램들은 노바(Nova) 라는 이름으로 미국에서 방영되기도 한다)의 제작자들은 맡겨진 주제에 대해 스스로 고도의 학구적 전문가로 변신한다. 테일러를 비롯한 허라이즌(Horizon) 사람들과 함께 일하면서 나 는 12장에 대한 제목 이상의 것을 얻었으면, 여기에 대해 감사하고 있다. 나는 최근 납득할 수 없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서 책에 자기의 이름을 올려 놓는 지명도 있는 과학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어떤 노장 과학자들은 옆에서 돈 을 대주고, 인쇄하기 위한 원고를 편집한 것이 자기가 한 일의 전부인 글에 자신의 이름을 넣어 줄 것을 주장한다. 내가 아는 바로 학문적인 명성 전체는 학생과 동료들의 일로 얻어 진 것이다! 이러한 부정직과 싸우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학술지의 편집자가 서명한 각서를 받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본론은 아니다. 이 문제를 여기에 제기한 것은 이와 대조되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크로닌(Helena Cronin)은 이 글의 한 행마다, 한 단어마다 다듬기 위해 너무나 많은 일을 하였고, 그녀의 단호한 거절이 아니 었다면 이 책의 모든 새로운 부분의 공동 저자로 씌어졌을 것이다. 나는 그녀에게 깊이 감 사하고 있으며, 나의 감사의 말이 이렇게 제한된 데 대해 사과드린다. 또한 특정 부분에 대 해 조언과 건설적인 비판을 해 준 리들리(Mark Ridley)와 M. 도킨스(Marian Dawkins), 그 리고 그래펀(Alen Grafen)에게도 역시 감사드린다. 웹스터(Thomas Webster)와 맥글린 (Hilary McGlynn)을 비롯한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 여러분들은 나의 변덕과 게으름을 기꺼 이 견뎌 주었다. 리처드 드킨스 제1장 사람은 왜 존재하는가? 진화와 다위니즘 어떤 행성에서 지적 생물이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생물이 자기의 존재 이유를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이다. 만약 우주의 다른 곳으로부터 지적으로 뛰어난 생물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할 때, 그들이 우리의 문명도를 파악하기 위해 우선 묻는 것은 우리가 "이미 진 화를 발견했는가?"라는 문제일 것이다. 지구의 생물은 어느 한 사람이 진실을 이해하기 전 까지 30억 년 동안 자기가 왜 존재하는가를 모르고 살았다. 그 사람의 이름은 찰스 다윈이 었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도 어느 정도 진실을 느끼고는 있었지만 우리가 왜 존재하 는지에 대하여 일관성 있고 조리 있는 설명을 매듭지은 사람은 다윈이었다. 다윈은 이 장의 표제와 같은 질문을 하는 호기심 많은 어린아이에게 우리가 이치에 맞는 답을 가르쳐 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생명에는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나? 인간이란 무엇 인가? 등등 심오한 문제에 부딪힐지라도 우리는 이제 미신에 의지할 필요는 없다. 저명한 동물학자 심프슨(G.G. Simpson)은 이런 의문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 의문에 대하여 답하고자 하는 1859년 이전의 시도는 모두 가치 가 없으며 차라리 그것들을 완전히 무시하는 편이 나올 것이라는 점이다." 오늘날 진화론은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이론과 같이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다윈 혁명이 뜻하는 모든 것은 아직 널리 이해되지 않았다. 대학에서 동물학은 아직도 소수 의 연구 분야이며 동물학을 선택하는 사람들조차도 그 깊은 철학적 의미를 평가한 후에 그 와 같이 결심하는 것이 아닌 경우가 많다. 철학과 인문학 분야에서는 아직도 마치 다윈이 존재조차 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교육을 하고 있다. 이런 일이 언젠가는 고쳐질 것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어쨌든 이 책의 의도는 다위니즘의 일반적 옹호에 있는 것이 아 니다. 대신에 어떤 논쟁점에 대하여 진화론의 중요성을 추구함에 있다. 나의 목적은 이기주 의와 이타주의의 생물학을 연구하는 것이다. 동물은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 학문상의 흥미는 별문제로 하더라도 이 문제가 인간에게 중요함은 명백하다. 그것은 우리 의 사회 생활의 여러 면, 예를 들어 사랑과 미움, 싸움과 협력, 줌과 훔침, 탐욕과 관대에 관 한 것이다. 로렌츠(Lorenz)의 (공격에 대하여), 아드레(Ardey)의 (사회계약), 그리고 아이블- 아이베스펠트(Eibl-Eibesfeld)의 (사랑과 미움)도 이와 같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으나 이 책들의 어려운 점은 그 저자들이 전전체적으로, 또한 완전하게 틀렸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화의 과정을 오해했기 때문에 틀렸다. 그들은 진화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개체(또 는 유전자)의 이익이 아닌 종(또는 집단)의 이익이라고 잘못 된 가정을 하고 있다. 몬태규 (Ashley Montagu)가 로렌츠를 "19세기의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파 사상가의 직 계 자손이다"라고 비판한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진화에 관한 로렌츠의 견해를 내가 이해한 바로는, 그는 테니슨(Tennyson)의 이 유명한 어구가 의미하는 것을 배척한다는 점에서 몬 태규와 같다. 그 두 사람과는 달리 나는 '이빨도 발톱도 피범벅이 된 자연'이라고 하는 표현 이 자연 선택의 현대적 이해를 아주 잘 요약하고 있다고 본다. 나의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그것이 어떠한 성격의 논의이며, 어떠한 성격의 논의가 아닌 가를 간단히 설명해 보고자 한다. 만약 어떤 남자가 시카고의 갱간에서 오랫동안 순조롭게 살아왔다고 할 때,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일까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이 가능하다. 아 마도 그는 굉장히 빠른 총잡이이고 의리의 친구를 많이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의 사나이라고 생각된다. 이것은 절대로 확실한 추론은 아닐지라도 그가 생존했고, 성공해 온 조건에 관해 서 무엇인가를 알게 되면 그 사람의 성격에 관해서 약간은 추론을 할 수 있다. 이 책이 주 장하는 바는 사람과 기타 모든 동물이 유전자에 의해 창조된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성 공한 시카고의 갱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유전자는 경쟁이 격심한 세계를 때로는 몇 백만 년 이나 생을 계속하여 왔다. 이 사실은 우리의 유전자에 무엇인가의 특별한 성질이 있다는 것 을 말하고 있다. 내가 이제부터 말하는 것은, 성공한 유전자에게 기대되는 특질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정한 이기주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전자의 이기성은 이기적인 개체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펴볼 바와 같이 유전자가 동물 한 개체 수준 에서 한정된 이타주의를 육성함으로써 자신의 이기적 목표를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특별 한 경우들이 있다. 전자의 '한정된(limited)'과 '특별한(special)'이라고 하는 용어는 중요한 말이다. 우리가 믿고 싶다고 하더라도 보편적인 사랑이든가 종 전체의 번영이든가 하는 것 은 진화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개념에 지나지 않는다. 천성이냐 교육이냐 여기서 우선 나는 이 책의 성격이 아닌 첫번째 사항을 말하고자 한다. 나는 진화에 따른 도덕성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저 사물이 어떻게 진화되어 왔는가를 말할 따름이다. 나는 우리 인간이 도덕적으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말하려고 하지 않는다. 내 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어떠해야 한다는 주장과 어떠하다고 하는 진술을 구별 못하는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내 자신의 느낌으로, 단순히 그 리고 항상 비정한 이기주의라는 유전자의 법칙에 기초한 인간 사회는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매우 싫은 사회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안됐지만 우리가 어떤 것에 대해 탄식할지라도 그것 이 사실임에는 변함이 없다. 이 책은 주로 흥미롭게 읽도록 의도하였으나 이 책으로부터 도 덕을 이끌어 내려고 하는 사람은 이것을 경고로써 읽어 주기 바란다. 만약 당신이 나와 같 이 개개인이 공통의 이익을 향하여 관대히 비이기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사회를 이룩하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경고한다. 우리가 이기적으로 태어 난 이상, 우리는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칠 것을 시도해 보지 않겠는가. 우리 자신의 이기 적인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가를 이해하려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적어도 우리는 유 전자의 의도를 뒤집어 볼 기회를, 즉 다른 종이 결코 바라지 못했던 기회를 잡을지도 모르 기 때문이다. 교육에 관해서 이와 같은 의견을 말하는 것은 유전적으로 계승되는 특성이 고정되고 변경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잘못이기 때문이다(덧붙여 말하자면 이 오류는 아주 흔히 볼 수 있다). 우리의 유전자는 우리에게 이기적인 것같이 보이나 반드시 우리의 전 생애가 유전자에 따르도록 강제당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확실히 이타주의를 배우는 것은 유전 적으로 이타주의인 것같이 프로그램되어 있는 경우보다는 훨씬 어려울 것이다. 오로지 인간 만이 문화에 의하여 학습하고 전승되어온 영향에 의해서 지배된다. 어떤 사람은 문화야말로 중요하기 때문에 유전자가 이기적인든 아니든 간에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는 실제로 관 계가 없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그렇지만은 않다고 하는 사람도있다. 이것은 모두 인간의 속 성에 대한 결정 요인이 "천성이냐 교육이냐"라고 하는 논의에서 어느쪽의 입장을 취하느냐 에 달려 있다. 여기서 나는 이 책의 성격이 아닌 두 번째 사항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이 책은 "천성이냐 교육이냐" 논쟁에 있어서 어떤 입장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나는 이에 대하여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으나 그것을 푶명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마지막 장에서 제시할 문화에 대한 견해는 여기서 제외된다. 만약 유전자가 현대인의 행동 결정에 는 전혀 무관함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그리고 우리가 실제로 이 점에서 동물계에서 유일한 존재임을 알았다고 할지라도 극히 최근에 인간이 예외로 됐다는 그 규칙에 대하여 아는 것 은 여전히 흥미 있는 일이다. 그리고 만약 우리 종이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만큼 예외적이 아니라면 그 규칙을 배우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 이 책의 성격이 아닌 세 번째 사항은 인간의 행동이나 기타 동물의 상세한 행동을 기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들은 자세한 사실은 설명할 때 예로서 사용할 것이다. 나는 "원 숭이의 행동을 보며 그 행동이 이기적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의 행동도 이기적이라고 생각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의 '시카고 갱단론'의 논리는 전혀 다르다. 그것은 이 러한다. 인간도 비비(원숭이의 일종)도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왔다. 자연 선택의 과정 을 보면 자연 선택에 의해 진화되어 온 것은 무엇이든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비, 인간 그리고 기타 모든 생물의 행동을 보면 이 행동이 이기적 임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예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되면, 즉 인 간의 행동이 참으로 이타적이라고 관찰될 경우 우리는 곤혹스러운 사태와 설명을 필요로 하 는 사태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기에 앞서, 성의가 필요하다. 어떤 실재(예를 들어 한 마리의 비비)가 자기를 희 생하여 또 다른 같은 상태의 실재의 행복을 증진시키 위해 행동했다고 하면 그 실재는 이타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적 행동에는 이것과는 정반대의 효과가 있다. '행복'은 '생존의 기 회'로 정의된다. 가령 실제의 생사 가능성에 대한 효과가 극히 적고 무시할 수 있게 보여도 다윈 이론의 현대적 설명의 놀라운 결과의 하나는 생존의 가능성에 대한 사소한 작용이 진 화에 주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와 같은 작용에 영향을 끼치는 데 필요 한 시간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상술한 이타중의와 이기주의의 정의가 주관적인 것이 아닌 행동상의 것이라는 사실을 이 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여기서 행동의 동기에 대한 심리학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 이타 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정말로'숨은 혹은 무의식의 이기적인 동기로 그것을 하고 있나 아 닌가를 논의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든 아니든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알 수 없을 것이므로, 그것은 이 책이 관여할 일이 아니다. 다만이 행위의 결과가 이타행위자로 보여지 는 자의 생존 가능성을 갖추고 동시에 수익자로 보이는 자의 생존 가능성을 높여 주면 나는 이것을 이타 행위로 정의한다. 오랜 기간에 걸친 생존 가능성에 대한 행동의 효과를 설명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 다. 실제의 문제로서 실재하는 행동에 정의를 적용할 때는 '~과 같이 보인다.'라는 말을 보충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표면상 이타주의자의 죽을 가능성을 (비록 얼마나 적든 간에) 높이고 동시에 수익자의 장수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생각게 하는 행위이 다. 잘 조사해 보면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위는 실은 모양을 바꾼 이기주의인 경우가 많다. 다시 말해서 나는 근원적인 동기가 실은 이기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의 가 능성에 대한 행위의 실제 효과가 우리가 처음 생각한 것과는 반대라고 말하고 있다. 검은머리갈매기와 사마귀 이기적으로 보이는 행동과 이타적으로 보이는 행동의 예를 몇 가지 들어보자. 우리가 우 리 자신의 종을 취급할 때에는 주관적으로 생각하는 버릇을 억제하기 어려운 고로 다른 종 의 동물을 예로 들기로 하겠다. 우선 개체에 의한 이기적 행동의 여러 가지 예를 들어보자. 검은머리갈매기는 커다른 집단을 이루어 집짓기를 하는데 둥지와 둥지 사이는 불과 수십 cm밖에 안 된다. 갓 태어난 어린 새끼는 작고 무방비 상태여서 포식자에게 먹히기가 쉰다. 어떤 갈매기는 이웃 갈매기가 집을 떠나는 것을 기다렸다가 그 둥지를 습격하여 어린 새끼 를 삼켜 버리는 경우가 흔히 있다. 이렇게 하여 그 갈매기는 출어 시간을 줄이고 자기 둥지 를 지키면서도 풍부한 영양을 섭취할 수가 있다. 더 잘 알려진 예로 암놈 사마귀의 동족끼리 서로 잡아먹는 무서운 성질이 있다. 사마귀는 커다란 육식성 곤충이다. 그들은 보통 파리와 같은 작은 곤충을 먹는다, 움직이는 것은 무엇 이든 공격한다. 교미시 수놈은 주의 깊게 암놈에게 접근하여 위에 타고 교미한다. 암놈은 교 미가 끝난 후에 수컷을 잡아먹기 시작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머리가 없 다는 것이 수놈의 남은 몸통 부분의 성적 행위의 진행을 멈추게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실제 로 곤충의 머리는 억제 중추 신경의 자리이므로 암컷은 수컷의 머리를 먹음으로 인해 수컷 의 성행위를 활발하게 할 수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것은 이점을 높이는 결과가 된다. 물 론 첫째의 이점은 암컷이 좋은 먹이를 얻게 되는 것이다. 펭귄과 바다표범 이기적이라는 말은 공식성과 같은 극단적인 경우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 표현이 부드러울 지 모르겠으나 이와 같은 예는 우리의 정의에 잘 맞는다. 남극의 황제펭귄에서 보고된 비겁 한 행동에 관해서 라면 아마도 누구나 쉽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펭귄은 바다표범에 게 먹힐 위험이 있기 때문에 물가에 서서 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그 중 한 마리가 뛰어들기만 하면 나머지 펭귄은 바다표범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당연히 누구도 자기가 희생물이 되기는 싫기 때문에 전원이 그저 서서 기다리고 있다. 그리 고 때때로 서로 밀치다가 누군가를 수중에 떠밀어 버리려고까지 한다. 더 일반적으로는 이 기적인 행동이란 다만 먹이나 영역, 또는 교미의 상대 같은 가치가 있는 자원을 서로 나누 기를 거부하는 행위이다. 이타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몇 가지 예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일벌의 이타적 행동 일벌이 침으로 쏘는 행동은 꿀 도둑에 대한 아주 효과적인 방어 수단이다. 그러나 쏘는 벌은 육탄 특공대다. 쏘는 행위로 인해 생명의 유지를 위해 필요한 내장이 흔히 침과 함께 빠져 버리기 때문에 그 벌은 그후 곧 죽게 된다. 그 벌의 자살적 행위가 집단의 생존에 필 요한 먹이저장을 수호했을 지는 몰라도 그 벌 자신은 그 이익을 바지 못한다. 우리의 정의 로 이것은 이타적 행동이다. 의식적인 동기로 말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기억하라. 이 경우 에도 또 이기주의의 경우에도 의식적인 동기는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 리의 정의와 무관하다. 경계음 동무를 위해서 생명을 버리는 것은 이타적 행동임에 틀림없으나 동무를 위해 작은 위험을 당하는 것도 역시 이타적 행동이다. 대부분의 작은 새는 매와 같은 포식자가 떠 있는 것을 보면 특징적인 '경계음'을 내는데, 이에 의해 무리 전체가 적당한 도피 행동을 한다. 경계음 을 내는 새는 포식자의 주의를 자신에게 끌리게 하므로 특별히 몸을 위험에 처하게 한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있다. 그것은 남보다 위험이 좀더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나 역시 이것은 적어도 언뜻 보면 우리의 정의에 따른 이타적 행위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인다. 동물의 이타 적 행동 중에서 가장 흔히 그리고 뚜렷이 볼 수 있는 것은 양친, 특히 새끼에 대한 어미의 행동이다. 그들은 집 곳에서나 체내에서 알을 부화시킴으로써 많은 희생을 치르며, 새기에게 먹이를 주고 큰 위험에 몸을 던져 포와 같은 포식자가 접근할 때 소위 '혼란 과시'를 행한 다. 어미새는 한쪽 날개가 꺾인 양 몸 짓을 하며 여우를 집으로부터 먼 곳으로 유인한다. 포 식자는 잡기 쉬워 보이는 목적물에게 유인되며 새끼가 있는 집에서 멀어진다. 마침내 어미 새는 이 몸짓을 멈추고 공중으로 날아올라 감으로써 여우의 습격을 피한다. 이 어미새는 자 기 새끼의 생명을 구하였으나 이러한 행동으로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의 위험 속에 던졌다. 나는 지어낸 이야기로 어떤 점을 주장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적당히 선택된 예를 훌륭한 일반론의 정당한 증거로 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말은 단지 개체 수준의 이타적 행동과 이기적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예를 들었을 뿐이다. 이 책에 서 나는 유전자의 이기성과 나의 기본 지식에 의하여 개체의 이기주의와 개체의 이타주의가 어떻게 설명되는가를 표명하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전에 우선 이타주의에 관해서 틀린 설명을 지적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와 같은 말하는 것은 이와 같은 설명이 일반에게 알려 져 있고, 학교에서도 널리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이 설명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은 오해에 근거하고 있다. 즉, "생물은 '종의 이익을 위하여' 또는 '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행위를 하도록 진화한다."라고 하는 오해이다. 생물학에서 이 사고 방식이 어느 정도로 우세한지는 쉽게 볼 수 있다. 동물의 생활은 대부분을 번식에 이 바지하고 있고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이타적 자기 희생 행위는 어미가 새끼에게 하는 것이다. '종의 존속'이란 번식이라고 하는 것에 잘 사용되고 있는 완곡된 표현이다. 확 실히 그것이 번식의 결과임은 틀림없다. 논리를 조금 비약시켜 번식의 '기능'이 좋을 존속시 키는 '일'이라고 추론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사실로부터 동물이 일반적으로 종의 존 속에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한다고 결론짓기에는 약간의 잘못이 있으나 그 정도로 하고, 그 다음에는 같은 동족에 대한 이타주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그룹 선택설 동족에 대한 이타중의라는 사고 방식은 어쩐지 다위니즘적인 느낌을 준다. 진화는 자연 선 택에 의하여 진행되고 자연 선택은 '최적자'의 생존에 가담한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최적 자'란 최적 개체에 관한 것일까, 아니면 최적의 품종 또는 최적의 종에 관한 것일까? 이것은 목적에 따라서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이타주의에 대해서 말할 때에는 이것은 매 우 중대한 것이다. 다윈이 생존 경쟁이라고 말한데 있어서 경쟁하고 있는 것이 종이라고 하 면 개체는 장기 게임의 졸로 볼 수가 있다. 졸은 종 전체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면 희생 이 되는 것이다. 좀더 좋게 말하면 각 개체가 그 집단의 행복을 위하여 희생할 수 있는 종 내지는 종내 개체군과 같은 집단은 각 개체가 자기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우선으로 추구하 고 있는 다른 경쟁자 집단보다 아마도 절멸의 위험이 적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는 자기 희 생을 치르는 개체로 이루어진 집단에 의해 대부분 점령되게 된다. 이것이 '그룹선택설 (theory of group selection)'이다. 이 설은 윈-에드워즈(V.C. Wynne-Edwards)의 유명한 저 서를 통해 소개되었고, 아드리(Robert Ardrey)의 (사회계약(The Social Contract))이란 책에 의해 널리 알려졌다. 이는 진화론의 상세한 것을 모르는 생물학자에게 오랫동안 진실이라고 생각되어 온 설이다. 옛부터 지지받아 온 '개체 선택(individual selection)'이 라는 설도 있 다. 나로서는 '유전자 선택(gene selection)'이라고 하는 것이 더 좋은데... 반역자 이 그륩 선택설에 대한 '개체 선택론자'의 답은 간단히 말해서 다음과 같다. 이타주의자의 집단 중에는 어떤 희생도 거부하고 의견도 다른 소수파가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다른 이타 주의자를 이용하려고 하는 이기적인 반역자가 한 개체라도 있으면 -정의에 의하면,- 그 개 체는 아마도 다른 개체보다 생존의 기회도, 새끼를 낳는 기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 새 끼는 각각 이기적인 성질을 이어받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몇 세대의 자연 선택을 거친 후 이 '이타적 집단'에는 이기적인 개체가 만연해 이기적인 집단과 구별이 어렵게 될 것이다. 있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최초에 반역자가 전혀 없는 순수한 이타적 집단이 약간 있었다고 가정하자. 이 경우 이웃의 이기적 집단에서 이기적인 개체가 이주해 오는 것이나 이기적 개 체와의 교배에 의해서 이타적 집단의 순혈통이 오염되는 것을 막는 방법이 무엇인지를 알기 는 어렵다. 개체 선택론자는 집단이 실제로 멸망하는가 하지 않는가는 그 집단의 개체의 행동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인정함에 틀림없다. 또 어떤 집단의 개체들이 선견지명이 있다면 그들은 결국 이기적인 욕망을 억제하고 집단 전체의 붕괴를 방지하는 것이 자기들의 최대의 이익과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며, 이를 인정도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최근에 영국 의 노동자에게 수없이 말해 온 것이다. 어쨌든 집단의 멸망은 개체간의 가열된 경쟁에 비교 하면 매우 느린 과정이다. 집단이 느리게 그리고 확실히 쇠퇴하여 가는 사이에도 이기적인 개체는 이타주의자를 희생하여 단기간에 성공한다. 영국의 시민이 선견지명의 혜택을 받고 있든 않든 간에 진화는 미래에 대하여 맹목적이다. '그룹 선택설'은 이제 진화를 이해하고 있는 전문적인 생물학자들 사이에는 별로 지지받고 있지 못하나 이 설은 직관적으로 호소하는 면이 있다. 동물학을 전공하는 학생의 후속 세대 는 학교를 졸업한 후에 이것이 정통적인 견해가 아님을 알고 놀란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책망하는 것은 좀 심하다. 왜냐하면 영국의 수준 높은 생물학 교사를 위한 책인 (너필드 (Nuffield) 생물학 교사 지도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고등 동물에서는 종의 생존 확 보를 위해서 개체의 자살이라는 행동 형태를 취하는 수가 있다." 이 지도서의 무명의 저자 는 다행히도 논쟁거리가 되는 것을 논술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이 점에서 그는 노벨상 수상자에 해당된다. 로렌츠는 (공격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공격 행동의 '종 보 존' 기능의 하나는 최적 개체만이 번식이 허용되도록 보증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 은 순환 논법 가운데 일품이나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너필드 생물학 교사 지도서) 의 저자와 같이 분명히 로렌츠도 자기가 말하고 있는 것이 정통 다위니즘에 반하고 있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을 정도로 그룹 선택설은 뿌리가 깉다는 것이다. 요젠에 나는 오스트레일리아산 거미에 관한 BBC TV 프로에서 비슷하고 재미있는 예를 들었다. 출연한 '전문가'는 대부분의 거미 새끼가 다른 종의 먹이가 되는 것을 관찰하고 다 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이것이 그것들의 존재 이유일 것이다. 종의 유지를 위해서는 극 소수가 살아 남으면 그것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사회계약' 중에서 아드리는 일반적인 사회 질서 전반의 설명하는 데 그룹 선택설을 이용 했다. 명백히 그는 인간을 동물의 정도에서 벗어난 종이라고 보고 있다. 이로써 아드리는 적 어도 그의 숙제는 끝냈다. 권위 있는 설에 이의를 제기하려는 그의 결의는 명백히 의식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이론은 평가받을만 했다. 아마도 그룹 선택설이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은 첫째로, 그것이 대부분 우리가 갖고 있는 논리적 이상이나 정치적 이상과 조화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종종 이 기적으로 행동하나 이상적 측면으로는 타인의 행복을 위하는 사람을 존경하고 칭찬한다. 그 러나 우리가 '타인'이란 말을 어느 범위까지 설정해야 하는가에 관해서는 다소 혼란이 있다. 집단 내의 이타주의는 집단간의 이기주의를 동반할 때가 많다. 이것이 노동조합주의의 기본 원리이다. 또 다른 수준에서 국가는 이타적 자기 희생의 주요한 수익자이며 젊은이는 자기 나라 전체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그들은 타국인이라는 것 외에 는 아무것도 모르는 타인을 살상하도록 장려받는다(이상하게도 개개인에 대하여 자기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키는 속도를 좀 희생하라고 하는 평화시의 호소는 개인에게 자신의 생명 을 바치도록 격려하는 전시의 호소만큼 효과적이지 않은 것 같다. 종의 이익론 최근 인종 차별주의나 애국심에 반대하여 동지 의식의 대상을 인류의 종 전체로 대치하려 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타주의의 대상을 확장하는 인도주의자들은 흥미로운 자연적 결론을 낳는다. 즉, 그것은 역시 진화에 있어 '종의 이익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정치적 으로 자유주의적인 사람은 보통 종의 윤리를 가장 강하게 믿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은 이타 주의를 더욱 확산시켜서 다른 종까지도 포함시키려고 하는 사람을 매우 경멸한다. 만약 내 가 사람들의 주택 사정을 개선하는 일보다 대형 고래류의 살육 방지에 더 관심을 갖고 있다 면 몇몇 친구들은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기적인 종 동족의 일원이 다른 종의 일원과 비교하여 윤리상 특별한 배려를 받아야 당연하다는 감각 은 원래 강하다. 전쟁 이외의 상황에서 살인하는 것은 통상 범죄 중에서 가장 큰 죄로 생각 되어 왔다. 우리의 문화에서 이것보다 더 강하게 금지되고 있는 유일한 것은 깃인 행위이다 (비록 이미 죽은 자일지라도).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종의 일원을 기꺼이 먹는다. 우리들 대 부분은 극악스러운 범인에 대해서까지도 사형 집행을 꺼려하는 데 반해 별로 해로운 야수도 아닌 동물을 재판에도 부치지 않고 기꺼이 쏴 죽인다. 그뿐인가! 우리는 많은 무해한 동물 을 오락이나 놀이를 위해 죽이고 있다. 아메바만큼도 인간적 감정을 갖지 않는 태아는 장성 한 침팬지보다 월등히 경의와 법적 보호를 받고 있다. 그러나 최근의 실험적 근거에 의하면 침팬지는 풍부한 감정을 가지며 생각도 하고 어떤 인종의 말을 기억할 수도 있다. 태아는 우리의 종에 속하므로 특혜와 특권이 부여되는 것이다. 라이더(Richard Ryder)가 말하는 '종 차별주의' 윤리가 '인종 차별주의' 윤리보다 어느 정도라도 확실한 윤리적 입장에서 설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단지 내가 아는 것은 그것에는 진화 생물학적으로 엄밀한 근 거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수준에서의 이타주의가 바람직한가? 가족인가, 국가인가, 인종인가, 종인가 아니면 전체 생물일까라는 문제에 대한 인간의 윤리에 있어서의 혼란은 어느 수준에서의 이타주의 가 진화론적으로 보아 타당한가라는 생물학에 있어서의 문제와 같은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 그룹 선책주의자까지도 적대 집단의 일원끼리 서로 미워하고 옥신각신하는 것을 보아도 놀 라지는 않을 것이다. 즉, 그들은 노동조합주의자나 병사처럼 한정된 자원을 둘러싼 싸움에서 는 자기네 집단에 동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그룹 선택주의자가 어느 수준이 중요한가를 어떻게 해서 정했는가 하는 것은 물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만약 선택이 같은 종 내의 집단간이나 이종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더 큰 집단간에서는 일어나지 않는 것은 왜 그럴까. 종은 속으로 집단을 이루고 속은 목으로 되어 묶이고 목은 강에 속한다. 사자와 영양은 둘 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포유강의 일원이다. 그러면 '포유류의 이익을 위해'영양을 죽이지 말라고 사자에게 요구해야 할 것이다. 분명히 강의 절멸을 방지하기 위해서 사자는 영양 대신에 새나 파충류를 잡을 것이다. 그렇다면 척추 동물문 전체를 존속시키기 위해서 는 어떨게 하면 좋을까? 경계 도약 간접 증명법으로 논하고 그룹 선택설의 난점을 지적하는 것은 이만하고, 개체의 이타주의 의 겉보기상의 존재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아드리는 "톰슨가젤(영양의 일종)에서 '경계도약(stotting)'과 같은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그룹 선택뿐이다"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포식자 앞에서 행해지는 이 (사람의 눈을 끄는) 박력 있는 도약 행동은 새의 경계 음에 상당하는 것이다. 이 행동은 위험에 처해 있는 동지들에게 경고를 발하면서 한편으로 는 경계 도약을 하고 있는 개체 자신에게 포식자의 주의를 끈다. 우리에게는 톰슨가젤의 경 계 도약이나 기타 이와 같은 현상 모두를 설명할 책임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다음 장 에서 다루어 보려고 하는 문제이다. 우선 진화를 바라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장 낮은 수준에서 일어나는 선택의 관점에서부 터 보는 것이라고 하는 나의 신념에 관해서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신념에 관하여 나는 윌리엄스(G.C. Williams)의 명저 (적응과 선택(Adaptation and natural Selection)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내가 이 책에서 활용하는 중심적인 아이디어는 금세기 초, 유전자이전 시 대에 와이즈만(A.Weismann)이 예시하고 있었다. '생식질의 연속성(continuity of the germ-plasm)'이라는 그의 학설이 그것이다. 나는 자연 선택과 자기 이익의 기본 단위가 종 도, 집단도 엄밀하게는 개체도 아님을 논하려고 한다. 그것은 유전의 단위인 유전자이다. 일 부의 생물학자에게 있어 이것은 최초이며 극단적인 견해인 양 느껴질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어떠한 의미로 그러는지를 알면, 그들은 비록 그것이 낯선 방법으로 표현되어 있을지 라도 실제로 그것이 정통이라는 것에 동의해 줄 것으로 믿는다. 이 논의를 전개하기에는 시 간이 걸린다. 그리고 우리는 우선 '생명' 그 자체의 참된 기원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2장 자기 복제자 안정을 향하여 처음에는 단순하였다. 그 단순한 세계마저 어떨게 시작되었는가를 충분히 설명하기는 어 렵다. 하물며 복잡한 질서 -생명 내지는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의 돌연한 발생을 빈 틈없이 설명한다는 것이 더욱더 힘들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자연 선택에 의한 진화 라는 다윈의 학설에 납득이 가는 것은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변할 수 있는 방법을, 즉 무질서한 원자가 스스로 보다 복잡한 패턴을 이루고 나아가서는 인간을 만들어 낸 방법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다윈은 우리들의 존재에 관한 심원한 문제에 대한 해석을 제공해 준다. 그것은 지금까지 암시된 것들 중에서 유일한 가능성 있는 해석이다. 나는 진화 자체가 시작 되기 이전의 시기부터 시작하여 종래의 것보다 더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 위대한 학설을 설 명해 보려고 한다. 최적자 생존 다윈의 '최적자 생존'은 실은 '안정된 것의 생존'이라는 보다 더 일반적인 법칙의 특수한 예이다. 세계는 안정된 것에 의해 차지되어 있다. 안정된 것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을 정도 로 지속적이거나 보편적인 원자 집단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알프스의 마터호른(Matterhom) 산처럼 이름을 붙이기에 합당할 만큼 오래도록 이어지는 유일무이한 원자 집단일 경우도 있 을 것이다. 또는 빗방울과 같이 그 하나하나는 단명할지라도 집합적인 이름을 붙일 수 있을 만큼 고비율로 생기는 일단의 존재일 수도 있다.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설명을 요 하는 것으로 생각되는 것 -바위나 은하나 바다의 파도 등- 은 많든 적든 간에 원자의 안정 된 패턴이다. 비누의 거품은 구상으로 되는 성질이 있는데, 이것은 기체가 둘러싸인 얇은 막 속에서 구형은 안정된 모양이기 때문이다. 우주선 내에서는 물도 역시 작은 구형체로 안정 하나 지구에서는 중력이 있기 때문에 정지하고 있는 물의 안정된 표면은 평탄한 수평이다. 소금의 결정은 입방체를 이루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나트륨과 염소 이온을 같이 꾸려 넣을 때의 안정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태양에서는 모든 원자 중에서 가장 단순한 수소 원자가 융 합하여 헬륨 원자를 만들고 있다. 태양 조건하에서는 헬륨의 상태가 안정하기 때문이다. 그 밖에 보다 복잡한 원자는 우주의 여러 별에서 만들어지고 있고 또 널리 인정되어 온 설에 의하면 우주를 생성한 '대폭발' 과정에서도 형성됐다. 이것이 우리 세계에 있는 원소의 유래 이다. 원자와 분자 때때로 원자들은 서로 만나 화학 반응을 일으켜 결합하여 많든 적든 간에 안정된 분자를 형성한다. 이 같은 분자는 매우 클 수가 있다. 다이아몬드와 같은 결정은 단일 분자로 이 경 우에는 주지하는 바대로 안정된 분자라고 생각되나 그 내부의 원자 구조가 무한의 반복이기 때문에 아주 단순한 분자이기도 하다. 형재 생물은 극히 복잡한 큼 분자들로 구성되며 그 복잡성에는 몇 개의 단계가 있다. 우리의 혈액 중의 헤모글로빈은 전형적인 단백질 분자이 다. 그것은 아미노산이라는 더 작은 분자의 사슬로 되어 있고, 각 아미노산에는 정확한 패턴 으로 배역된 수십 개의 원자가 함유되어 있다. 헤모글로빈 분자에는 574개의 아미노산이 함 유되어 있다. 이들 아미노산이 4개의 사슬로 줄지어, 이 연결이 설로 물려 풀 수 없게 복잡 한 구형의 3차원 구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헤모글로빈 분자의 모형을 보면 마치 울창한 가 시나무 덤불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정한 가시나무 덤불과는 달리 불규칙하고 어설 픈 패턴이 아닌 일정 불변의 구조이다. 그것이 인체 내에서는 어느 부분에서나 똑같은 형태 의 헤모글로빈 분자로 평균 6*1021개나 존재한다. 같은 아미노산 배열의 단백질 두 개를 떼 어 내면 마치 두 개의 용수철처럼 똑같이 꼬여서 완전히 같은 3차 구조를 나타내고 안정하 게 된다. 헤모글로빈과 같은 단백질 분자의 가시덤불 형태가 세부적인 것싸지 일정한 것은 이 때문이다. 우리의 체내에서는 헤모글로빈의 가시덤불식 번성이 매초 4*1014개의 속도로 그 '선정된 '형태로 만들어지고, 다른 헤모글로빈이 같은 비율로 파괴되고 있는 것이다. 헤모글로빈은 오늘날 볼 수 있는 분자이고 원자가 안정된 패턴으로 낙착되는 경향이 있다 는 원칙을 설명하는 예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구상에 생물이 생기기 이전에 분자의 초 보적인 진화가 물리나 화학의 일반적인 과정에 의해서 일어날 수 있다는 점이다. 설계나 목 적이나 지시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에너지가 있는 곳에 일군의 원자가 안정된 패턴이 되면 그것은 그대로 머물려고 할 것이다. 최초 형태의 자연 선택은 단순히 안정된 것을 선택하고 불안전한 것을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그것은 정의대로 당연히 될 것이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과 같이 복잡한 존재를 완전히 같은 원리로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정확한 수의 원자를 취하여 약간의 외부 에너지와 같 이 혼합하여 그것들이 바른 패턴이 되는 것을 기다려도 안 된다. 그렇다면 아담은 출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 개의 원자로 된 분자라면 그와 같이 만들어졌는지 몰라도 인간은 1027 개 이상의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을 만들려면 우주의 전시대가 한 순간으로 생각될 정 도로 긴 시간 동안 생화학의 칵테일 셰이커를 흔들지 않으면 안 되겠으나 그래도 성공은 못 했을 것이다. 이즈음에서 다윈의 학설이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도움의 손을 뻗쳐 준다. 느린 분자 형성의 이야기가 끝날 무렵부터를 다윈의 학설이 떠맡게 되는 것이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생명의 기원은 아무래도 추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정의로 보아 이 에 관한 기원을 본 사람은 없으므로 대립되는 학설이 많이 있으나 그것들은 모두 어떤 공통 된 특징이 있다. 이제부터 시작할 단순화된 설명은 아마도 진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을 것이 다. 생명의 탄생 이전의 지구상에는 어떤 화학 원료가 풍부하게 있었는가? 확실한 것은 몰라 도 가능성이 높은 것은 물, CO2, 메탄, 암모니아 등 태양계의 적어도 몇 개의 행성에 있다고 알려진 단순한 화합물이다. 화학자들은 옛날의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재현해 보려고 많은 시도를 했다. 이들 단순한 물질을 플라스크에 넣고 자외선이나 전기 방전(원시 시대의 번개 를 인공적으로 모방한 것) 등의 에너지원을 가했더니 2~3주 지나서 보통은 플라스크 속에 흥미 있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 넣어 준 분자보다 복잡한 분자를 많이 포함한 연갈색의 액 체가 생기는 것이다. 특별히 그 속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됐다. 이것은 생물체를 구성하는 두 개의 대표적 물질의 하나로 단백질의 구성 요소이다. 이와 같은 실험이 행하여여지기 전만 하더라도 자연에 나타나는 아미노산은 생명이 존재하고 있는 증거라고 생각되어 왔다. 가령 화성에서 아미노산이 발견되면 그 행성에 생물이 있다는 것은 대개 틀림없다고 생각되었었 다. 그러나 지금은 만약 아미노산의 존재가 제시될지라도 공기 중에 단순한 기체가 얼마 정 도 있다는 것과 화산이나 햇빛이나 번개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최근에 는 생명 탄생 이전의 지구의 화학적 상태를 본딴 실내 실험에서 퓨린(purine)이라든가 피리 미딘(pytimidine)이라고 하는 유기물이 생성됐다. 이것들은 유전 물질 DNA자체의 구성 요 소이다. 생물학자나 화학자가 3~40억 년 전에 해양을 구성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원시 수프 (primeval soup)'에서도 이와 비슷한 과정이 일어났음에 틀림없다. 이들 유기물은 아마도 해 안 부근의 말라붙은 물거품이나 떠 있는 작은 물방울 속에서 국부적으로 농축되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다시 태양으로부터 자외선과 같은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화합하고 더한층 큰 분자로 되어 갔다. 오늘날에는 거대 유기 분자가 사람이 느낄 정도로 오랫동안 계속 존 재하지는 않는다. 거대 유기분자는 진한 수프 속을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표류하고 있었 다. 자기 복제자 때로는 우연히 특별한 분자가 생겼다. 이것을 자기 복제자라고 부르기로 하자. 그것은 반 드시 최대의 분자도 아니고 가장 복잡한 분자도 아니었건만 스스로의 복제물을 만든다는 놀 랄 만한 특성을 가졌다. 이것의 탄생은 전혀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일로 보일 수도 있다. 확 실히 그렀다. 그것은 도저히 생길 수 없는 것이었다.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는, 이와 같은 생 길 것 같지도 않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한 것으로 취급된다. 그것이 축구 시합에 돈을 걸어 서 결코 재미를 못 보는 이유이다. 그러나 생길 수 있는 것과 생길 수 없는 것을 판단할 때 우리는 수억 년이라는 세월을 취급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 있지 않다. 만약 수억 년간 매주 축구에 돈을 걸면 필히 몇 번이고 큰 현상금을 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스스로 복제를 하는 분자는 실로 처음 생각했던 것만틈 상상하기 어려운 것은 아 니다. 또한 그것은 단 한번만 생기면 족하다. 주형으로서의 자기 복제자를 생각해보기로 하 자. 그것은 여러 가지 종류의 구성 요소 분자의 복잡한 사슬로 된 하나의 큰 분자라고 한다. 이 자기 복제자를 둘러싼 수프 속에는 이들 작은 구성 요소가 부단히 떠다니고 있다. 이제 각 구성 요소는 자기와 같은 종류의 것에 대하여 친화성이 있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 수 프 속의 어떤 구성 요소는 이 자기 복제자의 일부분으로 자기가 친화성을 갖고 있는 부분과 만나게 되면 필히 들러붙으려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여 들러붙은 구성 요소는 필연적으 로 자기 복제자 자체의 순서에 따라 줄짓는 것이 된다. 이때에 그것들은 최초의 자기 복제 자가 된 때와 마찬가지로 점점 결합하여 안정된 사슬을 만든다고 생각해도 좋다. 이 과정은 순서에 따라 단계적으로 계속해 가다. 이것은 결정이 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한편 두 가닥의 사슬이 세로로 쪼개질 수도 있을 것이다.l 그러면 두 개의 자기 복제자가 되어 그 각각이 다 시 복제를 계속하게 된다. 더 복잡하게 생각해 보면, 각 구성 요소가 동종이 아닌 어떤 특정한 다른 종류와 상호 친 화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런 경우 자기 복제자는 동일한 복제 주형이 아닌 일종 의 '음각'의 주형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다음으로 '음각'이 본래의 '양각'의 정확한 복제를 만 드는 것이다. 원래의 자기 복제자의 현대판인 DNA 분자가 양-음형이었는지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안정성'이 돌연히 세상에 태어났다는 것이다. 수프 속에 이미 특정한 종류의 복잡한 분자가 많이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왜냐면 그와 같은 분 자는 각기 운좋게 특정한 안정된 형태로 되어 있는 구성 요소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일단 새로 생긴 자기 복제자의 복제물들이 해양 속에 널리 퍼졌음엔 틀림없다. 이 때문에 소형의 구성 요소 분자는 축적이 줄고 다른 대형 분자도 그 형성량이 점점 줄어갔다. 복제의 오류 그래서 같은 복제가 많이 만들어졌다고 생각된다. 여기에서는 어떠한 복제 과정에서도 수 반되는 중요한 특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그것은 이 과정이 완전하지 않다 는 것이다. 오류가 생길 수 있다. 나는 이 책에 오자가 없기를 원하나 주의 깊게 찾아보면 두셋은 발견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분히 문장의 의미를 심히 왜곡할 정도의 것은 아 닐 것이다. 왜냐면 그 오자가 '제1대'의 오류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쇄술 발명 이전에 복 음서 등의 책이 필사로 출판되던 시대를 생각해 보자. 필사자들은 누구나 다 주의 깊게 했 겠지만 틀림없이 몇 개의 오류를 범했음에 틀림없고 그 중에는 고의로 약간의 '개량'을 가하 기를 서슴지 않은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모두 하나의 원본에서 베꼈다면 내용이 심하 게 곡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본을 복사하고 그 사본을 복사하여 몇 번이고 이어 나가면 오류는 누적되어 심각한 것이 된다 우리는 잘못된 복사를 나쁜 것으로 생각하기 쉽 다. 확실히 인가의 문서인 경우에는 오류가 개선으로 이어진다는 예는 생각하기 어렵다. 나 는 그리스 어역 구약 성서를 만든 학자들이 '젊은 여성'이라는 히브리어를 '처녀'라는 그리스 어로 오역하여 "보라 처녀가 아들을 잉태하여..."라고 하는 예언을 덧붙였을 때 그들은 대단 한 것을 출발시켰다고 생각된다. 하여튼 후술한 바로 생물학적인 자기 복제자에게서 볼 수 있는 틀린 복제는 진정한 의미로 개량을 불러일으키고 , 어떤 오류가 생기는 것은 생명의 점진적 진화를 해서 필수적이었다. 최초의 자기 보제자가 실제로 어떻게 해서 자기의 복제 를 만들었는지는 모른다. 그것들의 자손인 움 분자는 인간의 가장 충실도가 높은 복사 기술 에 비해서도 놀랄 정도로 충실하기는 하나 그 움 분자까지도 때로는 오류를 범한다. 그리고 진화를 가능케하는 것은 결국 이와 같은 잘못인 것이다. 아마도 최초의 자기 복제자는 더더 욱 잘못이 많았을 것이다. 어쨌든 오류가 생겼음에 틀림없고, 이 같은 잘못이 누적되어 왔다 는 것도 틀림없다. 틀린 복제가 됐고 그것이 확대되면서 원시 수프는 모두가 같은 복제의 개체군이 아닌 '선 조'는 같으나 형태를 달리한 몇 개의 '변종 자기 복제자'로 채워졌다. 형태에 따라 수의 차이 가 있었을까? 물론 있었을 것이다. 어떤 형태는 본래 다른 종류보다 안정됐음에 틀림없다. 어떤 분자는 일단 만들어지면 다른 것보다 분해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는 수프 속에서 비교적 많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것은 '장수'의 직접적 결과일 뿐만이 아니라 이들 의 분자가 장기간에 걸쳐 스스로 사본을 만들 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장수한 자기 복제자는 다시 수를 늘리는 경향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조건이 같다고 할 때 분자의 개체군에는 한층 더 장수하는 '진화 경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복제의 속도와 정확도 그러나 아마도 다른 조건도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떤 자기 복제자에게는 개체군 내에 서 확대되어 가는 데 있어 보다 중요했던 하나의 특성이 있었다 그것은 복제의 속도, 즉 '다 산성'이다. 만약 A형의 자기 복제 분자가 평균 주 1회의 비율로 자기의 사본을 만들고 한편 B형의 자기 복제 분자가 1시간에 1회씩 만든다고 하면 A형 분자가 B형 분자보다 훨씬 '장 수'한다 할지라도 A형 분자는 수적으로 많이 뒤떨어지고 말 것이다. 따라서 수프 속의 분자 에는 적지않게 더욱 더 '다산성'으로 향하는 '진화경향'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선택 된 자기 복제자의 제 3의 특징은 복사의 정확도이다. 가령 X형 분자와 Y형 분자가 동일 시 간 존속하여 같은 속도로 사본을 만들 때에 X형 분자가 평균 10회에 1회 정도로 틀린 사본 을 만드는 데 비하여 Y형 분자가 100회에 1회밖에 틀리지 않는다면 분명히 Y형 분자편이 수적으로 많아진다. 이 개체군 내의 X형 분자단은 잘못된 '자식'그 자체를 잃어버릴 뿐만 아 니라 형재의 자손 또는 가능성이 있는 자손을 모두 잃게 된다. 우리가 진화에 관하여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다면 이 최후의 관점이 약간 역설적이라고 느끼게 될 것이다. 복제의 오류가 진화에 필요 불가결하다는 설과 자연 선택이 충실한 복제 에 유리하게 작용한다는 설은 과연 양립하는 것일까? 우리는 자기가 진화의 산물이기 때무 에 진화를 막연히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로 진화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 그 답이다. 진화란 자기 복제자(오늘날의 유전자)가 오류를 막기 위해 모든 노 력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생겨난 일이다. 모노(Jacques Monod)는 그의 스 펜서(Herbert Spencer) 강연에서 이 점을 잘 지적했는데, 그 전에 비꼬아 말하기를 "진화론 의 또 하나의 괴이한 점은 누구나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잇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원시 수프로 돌아가자. 수프는 여러 가지의 안정된 분자, 즉 개체의 분자가 장시간 존속하 거나 또는 복제 속도가 빠르거나 또는 복제의 정확도가 높은 안정된 분자에 의하여 점유되 게끔 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이들 세 종류의 안정성을 향하는 진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다 음과 같은 의미이다. 즉, 일정한 시기를 두고 수프에서 샘플을 취할 경우 두 번째 샘플에는 수명, 다산성, 복제의 정확성 등 세 가지 점에서 우수한 분자의 함유율이 보다 높아져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본질적으로는 생물학자가 생물에 관해 말할 때의 진화와 다름없다. 그 메커 니즘도 같은 것이다. 즉 자연 선택인 것이다. 그러면 이 최초의 자기 복제 분자는 '살아 있다'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아무려면 어떤가? 나는 "지금까지의 가장 위대한 인물은 다윈이다"라고 하고, 당신은 "아니 뉴턴이다"라고 할 지도 모르나 그런 논의를 언제까지나 계속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논의가 어떻게 귀착되든 본질적인 결과에는 영향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뉴턴이나 다윈을 '위대'하다고 하든 않든 간에 글의 생애와 업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마찬가지로 자기 복제자를 '살아 있다'라고 하든 않든 간에 그들 분자가 겪어 온 길은 아마도 내가 주장하는 것과 어느 정도 비슷한 것이었을 것이다. 말이라는 것은 우리가 자유로이 사용하는 도구에 지나지 않으며, 또 가령 '살아 있다'라는 말이 사전에 있다고 해서 그 말이 현실 세계에 있어서 무엇인가 명 확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인간의 고난은 이와 같은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아서 발생하고 있다. 초기의 자기 복제자를 '살아 있다'거 하든 않든 간 에 그들은 생명의 조상이며, 우리의 기초가 되는 선조였다. 생존 경쟁 이 논의에 있어서 다음으로 중요한 요소는 다윈 자신이 강조한 '경쟁'이다)특히 그는 동. 식물에 관하여 기술하고 있으며 분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원시 수프로서 무한의 자 기 복제자를 유지하여 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 이유의 하나는 지구의 크기가 한정되어 있 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외에도 중요한 잔정 요인이 존재하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우리의 상 상으로, 주형으로써 작용하는 자기 복제자는 복제를 하는 데 필요한 구성 요소의 소분자를 많이 포함한 수프 속에서 떠돌아 다니고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자기 복제가 늘어가면 구성 요소의 분자는 보통 속도로 사용되어지며 소수의 귀중한 자원이 되어갔음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자원을 통하여 자기 복제의 여러 가지 변종 내지는 계통이 경쟁을 전개했을 것이 다. 우리한 종류의 자기 복제자가 수를 증가시키는 데 필요했던 요인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 서 검토한 바 있다. 사실, 별로 유리하지 않은 종류는 경쟁에 의해 수가 줄었다. 결국은 그 계통의 많은 것이 사멸했음이 분명하다. 자기 복제자의 변종간에도 생존 경쟁이 있었다. 그들 자기 복제자는 스스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지도 않았다. 이 싸움은 아무런 악감정도 없이, 또한 아무런 감정도 품지 않고 행해졌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명히 싸우고 있 었다. 잘못된 복사나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감소시키는 등의 새로운 방법으로 생성된 새롭 고 보다 높은 수준의 안정성을 갖게 된 자기 복제자는 모두 자동적으로 보존되어 증가했다 고 하는 의미에서이다. 개량 과정은 누적적이었다. 안정성을 증가시켜 경쟁 상대의 안정성을 감소시키는 방법은 점점 교묘해지고 효과적으로 되어 갔다. 그 중에는 상대 변종의 분자를 화학적으로 파괴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그로 인해 방출된 구성 요소를 자기의 복사 제조에 이용하는 개체도 출현했을 것이다. 이들 원시 육식자는 먹이를 얻음과 동시에 경쟁 상수단 을 강구하든가 아니면 그들 자신 둘레에 단백질로 물리적 벽을 만들거나 하여 스스로를 방 어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이렇게 하여 최초의 살아 있는 세포가 나타나게 된 것이 아닐까. 자기 복제자는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 아니라 스스로의 용기, 즉 계속 존재하기 위한 장소까지도 만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살아 남은 자기 복제자는 자기가 사는 '생존기계(survival machine)'를 축조한 것들 이다. 최초의 생존 기계는 아마 보호용의 외피 정도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경쟁 상대가 더 우수하고 효과적인 생존 기계를 몸에 감추고 나타남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생존 기계는 더 커지고 더 정교해졌다. 그리고 이 과정은 누적적이며 점 진적인 것이었다. 자기 복제자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유지해 가는 데 사용한 기술이나 책략의 점진적 개량 때문에 언젠가는 종말이 다가오게 돼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개량을 위한 시간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장구한 세월은 도대체 어떠한 자기 보존의 기관을 만들어 내게 했을 것인 가? 40억 년이 지난 지금, 고대의 자기 복제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것들은 절멸되 지 않았다. 어쨌든 그것들은 과거에 생존 기술의 명수였다. 그래서 지금도 바닷속을 마음대 로 떠다니고 있다고 기대해서 그것들을 찾으려 해도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머 옛날에 기사 와 같은 자유를 포기하고 말았다. 오늘날 그것들은 외부로부터 차단된 거대하고 꼴사나운 로봇 속에 거대한 집단으로 떠지어 살면서 구부러진 간접적인 길을 통하여 외계와 연락을 갖고 리모트 컨트롤에 의하여 외계를 조절하고 있다. 그것들은 당신 속에도, 내 속에도 있 다. 그것들은 위의 몸과 마음을 창조했다. 그리고 그것들의 우지야말로 우리의 존재의 최종 적 논거이다. 그것들은 자기 복제자로서 기나긴 길을 걸어 왔다. 이제 그것들은 유전자라는 이름으로 걸음을 계속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제3장 불멸의 코일 생존 기계 우리는 생존 기계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란 인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동. 식물, 박테리아 그리고 바이러스가 포함되어 있다. 지구상의 생존 기계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 심지어 종의 총수마저도 알지 못하는 석이 현실이다. 곤충만을 취해 보아 도 현재 약 300만 종으로 추정되, 그 개체수로 말하면 1018까지 된다. 다양한 생존 기계 생존 기계는 종류에 따라 그 외형도, 체내 기관도 매우 다양하다. 문어는 생쥐와 유사한 듯하나 닮지 않았으며, 이 둘은 차나무와는 전혀 다르다. 반면에 기본적인 화학 조성은 오히 려 균일하다. 특히 그들이 갖고 있는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는 박테리아에서 코끼리에 이르 기까지 모두 기본적으로 동일한 종류의 생활 방법이 있고, 자기 복제자는 다종 다양한 기계 를 만들어 이용하고 있다.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다. 물고기는 물 속에서 유전자를 유지하는 기계이다. 심지어 독일의 맥주잔 받침(beer mat) 속에서 유전자 를 유지하고 있는 보잘것없는 작은 벌레도 있다. 이처럼 DNA는 매우 이상한 일을하고 이 TEk. 지금까지는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하여 DAN로부터 만들어진 현대의 유전자가 원시 수프 속의 최초의 자기 복제자와 꼭 같은 것이라고 가정하였다. 이것은 논의상 아무런 지장이 없 으나, 실제로는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초의 자기 복제자는 DNA와 유연 관계가 가까운 분자였을지 모르나 전혀 다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다른 것이었다면 그것들의 생존 기계는 나중에 DNA에 의해 탈취당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그랬다면 최초의 자기 복제 자는 완전히 파괴되어 버렸을 것이다. 오늘날의 생존 기계에는 그것들의 흔적이 없으므로 이것들은 덮어두기로 하자. 케언스-스미스(A.G. Cairns-Smith)는 우리들의 선조인 최초의 자기 복제자가 유기 분자가 아닌 금속이라든가 점토의 작은 조각 같은 무기 분자였지 않았 나 하는 흥미로운 추측을 하고 있다. 강탈자이건 아니건 오늘날 DNA는 생존 기계를 손아 귀에 빈틈없이 쥐고 있다. 내가 11장에서 시험적으로 시사함과 같이 현재 새로운 권력 쟁취 가 시작되고 있지 않다면... DNA의 구성 단위 DNA 분자는 뉴클레오티드(nucleotide)라고 부리는 소형 분자를 구성단위로 하는 긴 사슬 이다. 단백질 분자가 아미노산의 사슬인 것과 같이 DNA 분자도 뉴클레오티드의 사슬이다. DNA 분자는 작아서 볼수 없으나 그 정확한 형태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잘 파악되고 있다. 그것은 아름다운 나선형으로 맞물린 한 쌍의 뉴클레오티드의 사슬인 '이중 나선'으로 '불멸 의 코일'이라고 불리고 있다. 뉴클레오티드를 구성하는 단위는 단지 네 종류밖에 없다. 그 이름은 A, T, C 그리고 G라고 한다. 이것들은 여러 동.식물에서 동일하다. 단지 틀린 것은 그것들이 연겨되는 순서이다. 인간의 G구성 단위는 여러 점에서 달팽이의 G구성 단위와 같 다. 그렇데 한 인간의 이들 구성 단위의 서열과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사람 사이에서도(그 정도는 큰 것이 아니나) 다르다는 것이다(일란성 쌍생아라는 특수한 경우는 제외하고). 우리의 DNA는 우리의 몸 속에서 살고 있다. 그것은 몸의 한곳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 아 니고 각 세포에 분포해 있다. 한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세포 수는 평균 약 1015개이다. 무시할 정도의 예외는 있으나 그들 세포 모두에는 그 몸의 DNA의 완전한 사본(dopy)이 함 유되어있다. 이 DNA는 뉴클레오티드의 A, T, C, G 라는 알파벳으로 쓰인 몸을 만드는 법 에 관한 한 세트의 지령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빌딩의 하나하나의 방에 그 빌딩 전체의 설계도를 넣어 둔 '책장'이 있는 것과도 같다. 세포 내의 이 '책장'은 핵이라 고 불린다. 인간의 설계도는 46권이나 된다. 이 수는 종에 따라 다르다. 우리는 각 '권'을 염 색체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 보면 염색체는 기다란 실처럼 보인다. 유전자는 그 위에 질서 정연하게 줄지어 있다. 어떤 유전자가 어디에서 끝나고 다름 유전자가 어디에서부터 시작하 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으며, 실제로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닐지 모른다. 이 장에서 말하듯이, 다행히 이것도 우리의 목적과는 벼로 관계가 없다. 이제부터는 실물을 표시하는 용어와 비유를 적당히 섞어 가면서 건축가의 설계의 예를 들 어 기술하기로 하자. '권'과 '염색체'라는 말은 같은 것을 가리킨다고 생각하면 좋겠다 .또 유 전자간의 경계는 책의 페이지 사이의 경계만큼 분명치는 않으나 '페이지'는 유전자와 같은 의미로 사용하기로 한다. 이 비유는 앞으로 자주 사용될 것이다. 이것이 결국 파괴되면 또 다른 비유를 쓰기로 한다. 물론 '건축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DNA의 지령은 자연 선택에 의 해 조립되어 온 것이다. 복제 DNA 분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 그 하나는 복제이다. 즉, DNA 분자는 스 스로의 사본을 만든다. 이 작용은 생명의 탄생이래 쉬지 않고 계속되어 왔고, DNA 분자는 현재 실제로 이 점에서 아주 우수하다. 성장한 인간은 1015개의 세포로 되어 있는데, 처음으 로 태내에 자리를 잡을 때까지는 설계도의 원본 하나를 받은 단 한 개의 세포이다. 이 세포 는 각기 본래의 세포 설계도 사본을 받은 두 개의 세포 분열된다. 다시 분열이 계속되어 세 포 수는 4, 8, 16, 32...로 불어나 몇 조로 됐다. 분열 때마다 DNA의 설계도는 거의 틀림없이 충실히 복제되어 왔다. 이것이 DNA 복제라는 첫 번째 이야기이다. 그러나 만약 DNA가 실제로 몸을 만들기 위 한 한 세트의 설계도라고 하면 그 설계도는 어떻게 하여 실행되어 나갈까? 어떻게 몸의 구 조로 번역될 것인가? 여기서 DNA가 작용하는 두 번째의 중요한 문제를 보기로 하자. DNA 는 다른 종류의 분자인 단백질의 제조를 간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 앞 장에서 말한 헤모글 로빈은 많은 종류의 단백질 분자의 일례에 지나지 않는다. 4분자의 뉴클레오티즈 알파벳으 로 쓰인 암호화된 DNA의 메시지는 단순한 기계적 방법으로 별도의 알파벳으로 번역된다. 그것은 단백질 분자를 한자 한자 읽어 가는 아미노산의 알파벳이다. 단백질을 만드는 것은 몸을 만드는 것과는 아주 무관한 것처럼 생각이 되나 사실은 그 방 향으로의 작은 첫걸음인 것이다. 단백질은 몸의 물리적 구조를 구성하고 있을뿐더러 세포 내의 화학적 과정 전반에 예민한 제어를 하여 정확한 시간, 정확한 장소에서 화학적 과정의 스위치를 선택적으로 켰다 껐다 한다. 이것이 최종적으로 어떻게 유아의 발육에 연결되는가 하는 문제를 발생학자가 확실히 해결하는 데는 몇십 년, 아니 몇 백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행하여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유전자는 인체를 조작하며 간접적으로 지배 하고 있는데, 그 영향은 엄밀히 일방 통행이다. 즉, 획득 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 생애에 수 많은 지식과 지혜를 얻었더라도 유전적 수단으로는 그 중 한 가지도 자식에게 전해지지 않 는다. 새로운 세대는 각각 무에서 시작해야 한다. 몸은 유전자를 불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하 여 유전자가 이용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유전자가 배 발생을 제어하고 있다는 사실이 진화상에 갖는 중요성은 다음에 있다. 즉, 그 것은 유전자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장래의 자기 존재에 책임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유전자의 존재는 그 것들이 만들어 내서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몸의 효율에 의존하 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 자연 선택은 원시 수프 속에서 자유로이 떠다니는 자기 복제자의 살아 남는 방법의 차이에 의하여 성립되고 있었다. 반면에 지금의 자연 선택은 생존 기계를 잘 만드는 자기 복제자, 즉 배 발생의 제어 기술이 뛰어난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하여 자기 복제자는 전처럼 변함없이 의식적이거나 의도적이 아니다. 수 명의 길이, 다산성, 복제의 충실도에 의한 경쟁자 분자간의 자동적 선택이라는 낡은 과정은 아직도 먼 옛날과 같이 계속되고 있다. 유전자는 선견지명이 없다. 그것들은 미리 계획을 세 우지 않는다. 유전자는 그저 있을 뿐이다. 어떤 유전자는 다른 것보다 많이 있다. 그리고 다 만 많이 있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유전자의 수명의 길이와 다산성을 결정하는 능력은 옛날 처럼 단순하지는 않다. 훨씬 복잡한 것이다. 최근 6억 년 동안 자기 복제자는 근육, 심장, 눈(몇 번인가 독립적으로 진화하고 있다)과 같은 생존 기계 기술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전에 그것들은 자기 복제자로 서의 생활 양식의 근본적 특성을 철저히 변혁했다. 이에 관해서는 계속 논의하는 중에 자연 히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현대의 자기 복제자에 관하여 우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은 떠지어 사는 성질이 대단 히 강하다는 점이다. 하나의 생존 기계는 단 하나만이 아닌 수십만이나 되는 유전자를 가진 하나의 운반체(vehicle)이다. 몸을 구축한다는 것은 개개의 유전자의 분담을 구별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복잡한 협동 사업인 것이다. 하나의 유전자가 몸의 여러 부분에 대하 여 각각 다른 효과를 미치는 수도 있다. 또 신체의 어떤 부위는 여러 유전자의 영향을 받으 며, 어떤 한 유전자는 다른 많은 유전자들의 상호 작용에 의해 효과를 나타내는 수도 있다. 또 그 중에는 다른 유전자군의 작용을 제어하는 지배 유전자(master gene)의 작용을 하는 것도 있다. 이를테면 설계도의 각각의 페이지에는 건물의 각각 다른 부분에 관한 지시가 씌 어 있고, 각 페이지는 많은 다른 페이지의 앞뒤를 참조함으로써 의미를 갖는다. 유전자는 개체의 특성을 정한다 유전자는 어느 정도의 복잡한 상호 의존성을 갖는데도 도대체 왜 '유전자'라는 말을 쓰느 냐고 의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유전자 복합체'와 같은 집합 명사를 쓰지 않을까? 과연 그것은 많은 목적으로 보아 좋은 생각이다. 그러나 또 다른 견해로 보면 이 유전자 복합체 란 것이 불연속인 자기 복제자, 즉 유전자로 나뉘었다고 생각하기에는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성이라고 하는 현상 때문이다. 유성 생식에는 유전자를 섞어 붙이는 작용이 있 다. 이것은 개개의 몸이 모두 유전자의 단명한 조합을 위한 임시적 매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하나의 개체에 머물고 있는 유전자의 조합은 단명하지만 유전자 자체는 매우 오래 살아 남는 잠재력이 있다. 그것들이 밟는 길은 끊임없이 만나고 떨어지면서 세대 에서 세대로 이어져 간다. 한 개의 유전자는 몇 세대라도 개체의 몸을 통하여 살아가는 단 위라고 생각해도 좋겠다. 이것이 이 장에서 논하는 중심 과제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가 매우 존경하는 몇 사람의 동료가 완강히 동의를 거절하는 점이기도 하므로 나의 설명은 다소 지 겹게 생각될 것이나 용서하기 바란다. 우선 성의 실태를 간단히 설명해야 하겠다. 인간 설계도 나는 인간의 몸을 만들기 위한 설계도가 46권 속에 똑똑히 그려져 있다고 했다. 이 말은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있다. 사실은 다소 기묘하다. 46개의 염색체는 23쌍의 염색체로 이루어 져 있다. 즉, 모든 세포의 핵 속에 정리되어 있는 것은 23권의 설계도 두 세트라고 해도 좋 을 것이다. 이것들을 1a 권과 1b 권, 2a 권과 2b 권...23a 권과 23b 권으로 하자. 물론 어떤 원이나 어떤 페이지에 어느 번호를 매기는가는 전혀 임의적이다. 우리는 양친으로부터 각기 한 세트씩의 염색체를 받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양친의 정소 와 난소 안에서 조립된 것이다. 예컨대 1a 권, 2a 권, 3a 권...은 부친으로부터 받은 것이고 1b 원, 2b 권, 3b 권...은 모친으로부터 온 것이다. 실제로는 대단히 어려운 것이지만 논리상 으로는 어떤 세포의 46개의 염색체를 현미경으로 보아 부친에서 유래하는 23개와 모친에서 유래하는 23개를 분별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쌍으로 된 염색체는 서로 물리적으로 붙어서 전생애를 지낼 수도 없고 서로 가까이 지 낼 수도 없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짝지어진'것일까? 그것은 부친 기원의 각 권이 모친 기원의 특정한 권과 페이지를 바꿔 넣는 것이 가능하다는 의미로 '짝지어진' 상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가령 13a권의 6페이지와 13b권의 6페이지는 둘 모두 눈의 색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한편에는 '청색'이라고 씌어지고 또 한편에는 '갈색'이라고 씌어 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두 개의 바꿔치기가 가능한 페이지에 같은 것이 씌어져 있는 경우도 있으나 눈 색 깔의 예와 같이 틀릴 수도 있다. 그것들이 모순된 '추천'을 할 때 몸은 어떻게 할 것인가? 답은 다양하다. 어떤 경우에는 한쪽의 표시가 다른 쪽의 표시를 이긴다. 눈 색깔이이 그 예 이다. 실제로 갈색 눈을 가진 사람에게는 푸른 눈을 만들기 위한 지령이 무시되어 있는 것 이다(그러나 푸른 눈을 만드는 지령이 자손에게 전해지지 못하게 된 것은 아니다). 이와 같 이 무시되는 유전자를 '열성 유전자'라고 한다. 열성 유전자의 반대는 '우성 유전자'이다. 갈 색의 눈을 만드는 유전자는 청색 눈을 만드는 유전자에 대해 우세하다. 대응하는 페이지의 두 개의 사본이 일치하여 푸른 눈을 추천할 경우에만 푸른 눈이 되는 것이다. 더 일반적인 경우 상대하는 유전자가 동일하지 않을 때에 그 결과는 어떤 종류의 타협이 된다. 즉, 몸은 중간 형태의 설계가 되든가 또는 어떤 쪽과도 전혀 다른 것이 되는 것이다. 갈색 눈의 유전자와 푸른 눈의 유전자와 같이 두 개의 유전자가 염색체상의 동일 위치에 서 경쟁자일 경우 그것들을 서로의 '대립 유전자'라고 부른다.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대립 유전자라는 말을 경쟁자라는 말과 동의어라고 가정하자. 건축가의 설계도의 권을 루스 리프 (loose leaf)식 바인더로 여기고 페이지를 분리 교환할 수 있는 것으로 해서 생각해 보자. 매 13권에는 6페이지가 있는데 5페이지와 7페이지 사이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는 6페이지가 몇 종류 있다. 어떤 것은 '푸른 눈'을 표시하고 있고 어떤 것은 '갈색 눈'을 나타내고 있다. 또 개체군 전체에는 녹색 등 다른 색을 나타내는 것도 있을지 모른다. 아마도 개체군 전체에 흩어져 있는 13번째 염색체상의 6페이지에 위치하는 대립 유전자는 대여섯 개 정도가 있음 에 틀림없다. 어떤 사람이라도 13권의 염색체는 두 개 이상을 갖지 못한다. 따라서 한 사람 이 6페이지의 부위에 갖는 대립 유전자는 최대 2개이다. 즉, 푸른 눈의 사람처럼 같은 대립 유전자의 사본을 갖고 있든가, 또는 개체군 전체에 이용되고 있는 대여섯 개 중에서 뽑힌 어떤 것이든 두 개의 대립 유전자를 갖고 있다. 윤전자 풀 물론 개체군 전체로써 이용되는 유전자 풀(pool) 속을 스스로 나가서 유전자를 선택해 낼 수는 없다. 어떤 시점에서도 모든 유전자는 개개의 생존 기계 속에 포함되어 있다. 유전자는 수정시에 우리에게 나누어지는 것으로서 이에 관해서는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 지만 긴 안목으로 보면 개체군의 유전자는 일반적으로 유전자 풀로 생각되는 성격의 것이 다. 이 말은 유전학자가 사용하는 학술 용어이다. 유성 생식은 주의 깊게 조직된 방법에 따 르기는 하나 유전자를 서로 섞어 붙이기 때문에 유전자 풀이라는 것은 좋은 개념이다. 특히 페이지나 페이지의 뭉치를 루스 리프 바인더로부터 풀었다 바꾸어 넣었다 하는 것 같은 일 이 실제로 행하여지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곧 기술하겠다. 앞에서 말한 바대로 한 개의 세포가 두 개로 갈라지는 정상적인 세포 분열에 있어 그 각 각의 세포는 46개의 모든 염색체 사본을 전부 받는다. 이 정상적인 세포 분열을 '체세포 분 열'이라 한다. 그런데 이외에도 '감수 분열'이라고 하는 다른 형태의 세포 분열이 있다. 이것 은 생식 세포, 즉 난자와 정자를 만들 때에만 일어나는 세포 분열이다. 난자와 정자는 염색 체를 46개가 아니 23개밖에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우리의 세포 중에서 유일한 존재이다. 물론 이 수는 46개의 꼭 절반이며, 이것은 수정에 의하여 융합하여 새로운 개체를 만들기에 안성맞춤인 수이다. 감수 분열은 정소와 난소에서만 일어나는 특수한 형태의 세포 분열이다. 거기에서는 두 세트의 46개의 염색체를 갖는 1개 세포가 분열하여 한 세트에 23개의 염색체 를 갖는 생식 세포가 되는 것이다(설명에는 인간의 경우의 수를 쓰기로 한다). 정자-23개의 염색체 23개의 염색체를 가진 정자는 정소 내의 46개의 염색체를 갖는 보통의 세포가 감수 분열 하여 만들어진다. 한 정자 세포에 어떤 23개의 염색체가 들어갔을까? 매우 중요한 것은, 46 개 중에서 무조건 아무거나 23개를 받아들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즉, 13권의 사본이 둘 이 있어 17권의 사본이 하나도 없게 되는 상태로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론상은 어떤 개체가 그 정자 하나에, 이를테면 모친 기원의 염색체만을, 즉 1b 권, 2b 권, 3b 권, ...23b 권을 주는 것이 가능하다. 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경우, 자식은 그 유전자의 절반을 친할머니로부터 계승하여 친할아버지로부터는 아무것도 계승하지 않은 셈이 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와 같은 전체 염색체의 통일된 배분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실은 더 복잡하다. 권 (염색체)은 루스 리프 바인더라고 생각된다고 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고 싶다. 어떻게 되는 가 하면 정자형성 중에서 단일 페이지 또는 여러 페이지가 벗어나 짝이 되는 권의 그것에 맞는 페이지와 교환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정자는 1a 권의 처음 65 페이지와 1b 권의 66 페이지부터 끝까지를 취하여 제 1권을 만드는 수가 있다. 이 정자 세포의 다른 22권도 같은 식으로 만들어진다. 따라서 가령 어떤 개체의 모든 정자 세포가 같은 세트의 46개의 염색체 의 작은 조각에서 23개의 염색체를 모았다고 해도 그 정자 세포는 모두 유일한 것이다 난자 는 난소 내에서 같은 식으로 만들어지고 역시 어떤 것이든 유일하다. 교차 이 혼합 메커니즘은 어느 정도 잘 알려져 있다. 정자(또는 난자) 형성 중에 각 부친쪽의 일부 염색체는 물리적으로 떨어져서 모친쪽의 염색체에 있는해당되는 부분과 바뀐다(전술한 바대로, 여기서 부친쪽, 모친쪽 이라고 하는 것은 그 정자를 만드는개체의 양친에서 유래하 는 염색체라는 것이다). 염색체의 일부를 교환하는 이 과정을 '교차(crossing over)'라고 한 다. 이것은 이 책의 논의 전반에 걸쳐 매우 중요하다. 교차라는 것이 행해지는 이상, 당신이 현미경을 가지고 자기의 정자(당신이 여자라면 난자)의 염색체를 본다고 해도 당신의 부친 으로코더 온 염색체와 모친으로부터 온 염색체를 구별한다는 것은 시간 낭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이것은 보통의 체네포의 경우와는 현저한 대조를 이룬다). 한 개의 정자내에 있는 염 색체는 어떤 것이든 모친쪽의 유전자와 부친쪽의 유전자의 모자이크로 된 잡종인 것이다. 페이지와 유전자의 비유는 여기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루스 리프 바인더에서는 한 페이지 전체가 삽입되거나 삭제되거나 교환되거나 하지만 한 페이지의 일부분이 삭제되거나 교환되 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렇지만 유전자 복합체는 유클레오티드의 문자를 연결한 긴 실이며 페이지에 따로따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다. 확실히 '단백질 사슬메시지의 종결과 개 시'에는 단백질 메시지와 같은 4 분자의 알파벳으로 쓰인 특별한 심벌이 있다. 이들 2개의 구두점 사이에는 1개의 단백질을 만들기 위한 암호화된 지령이 있다. 원한다면 단일 유전자 란 개시와 종결의 심벌 사이에 1개의 단백질 사슬을 암호로 나타내고 있는 일련의 뉴클레오 티드 문자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시스트론(cistron)'이란 말은 이와 같이 정의되는 단위로 서 쓰여지고 있고, 일부의 사람들은 유전자라는 말과 시스트론이란 말을 같은 것으로 사용 하고 있다. 그러나 교차는 시스트론간의 간격을 지키지 않는다. 시스트론 사이와 마찬가지로 시스트론 내에서도 쪼개지는 수가 있다. 그것은 마치 설계도가 별개의 페이지에 씌어져 있 는 것이 아니고 46권의 두루마리 테이프에 씌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스트론의 길이 는 일정치 않다. 어떤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끈나고 다음의 시스트론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테이프상의 심벌을 읽고 '메시지의 새기와 종결'의 테이프상의 심벌 을 읽고 '메시지의 개시와 종결'의 심벌을 찾는 것이다. 교차는 상대하는 모친쪽의 테이프와 부친쪽의 테이프를 잡아 들고, 그것들에게 쓰이어진 것과는 무관하게 대응하는 부분을 잘라 서 서로 교환하는 것에 해당한다. 이 책의 제목에 쓴 유전자라는 말은 단일 시스트론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좀더 미묘한 무엇인가를 가리키고 있다. 나의 정의는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하며, 또한 유전자에 대 하여 모든 사람의 동의를 받을 수 있는 정의는 없다. 가령 있다손 치더라도 신성하여 범하 기 어려운 정의라는 것은 없다. 어떤 말을 뚜렷이 의심의 여지없이 정의한 다면 자기의 목 적에 맞추어 마음대로 정의할 수 있다. 내가 사용하고 싶어하는 것은 윌리엄스의 정의이다. 그에 의하면 유전자는 자연 선택의 단위로서 역할할 수 있을 만큼 긴 세대에 걸쳐 지속되는 염색체 물질의 일부로 정의된다. 앞 장에서 사용한 말로 표현하면 유전자는 복제 충실도가 뛰어난 자기 복제자라고 할 수 있다. 복제 충실도라는 것은 복제형의 수명을 나타내는 별도 의 표현이다. 나는 이것을 단순히 수명이라고 하기로 한다. 이 정의는 어느 정도 정당화될 수 있을 것이다. 유전 단위 어떤 정의에 있어서도 유전자가 염색체의 일부라는 것은 틀림없다. 문제는 어느 정도 크 기의 일부인가, 즉 테이프의 어느 정도의 부분인 가라는 것이다. 테이프상의 인접한 암호 문 자의 서열을 고려해 보자. 이 암호의 서열을 유전 단위라 부르기로 하자. 그것은 한 시스트 론 내의 겨우 10문자의 서열일지도 모르고, 8개의 시스트론의 서열일지도 모른다. 또는 시스 트론의 중간쯤에서 시작과 마무리를 하고 있을 수도 있겠다. 그것은 다른 유전 잔위와 중복 되는 수도 있을지 모른다. 작은 단위를 몇 개라도 함유할 수도 있을 것이고, 큰 단위의 일부 를 이룰 수도 있겠다. 현재의 논의에는 길이가 어떻든 상관없다. 이것이 우리가 유전 단위라 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염색체상의 일정한 구간의 일이고, 물리적으로 나머지 염색체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여기서 중요한 것에 착안한다. 유전 단위는 짧으면 짧을수록 몇 세대에 이르기까지도 장 생하는 것 같다. 특히 교차에 의하여 쪼개지는 일이 적다고 생각된다. 감수 분열에 의하여 정자나 난자가 만들어질 때마다 한 염색체에 대하여 평균 1회 교차가 일어나 그 교차가 염 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의 어디에서나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 보자. 염색체의 길이의 절반에 이르는 대단히 큰 유전 단위를 생각하면, 그 단위가 1회의 감수 분 에 이르는 대단히 큰 유전 단위를 생각하면, 그 단위가 1회의 감수 분열에서 쪼개지는 확률 은 50%이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유전 단위가 염색체 길이의 1%밖에 없으면 1회의 감수 분열에서 절단되는 확률이 1%밖에 없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것은 그 단위가 개체의 자손 중에 몇 세대를 걸쳐서라도 살아 남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단일 시스트론은 염색체 길이의 1%보다 휠씬 작은 것 같다. 인접한 몇 개의 시스트론까지도 교차에 의해 해체되기까지 몇 세대에 걸쳐 살아 나가는 것으로 생각된다. 유전자의 평균 수명 유전 단위의 평균 수명은 편의상 세대수로 나타낼 수 있고, 다시금 그것을 연수로 환산할 수가 있다. 만약 하나의 염색체 전체를 유전 단위라고 가정하면 그 생활사는 1세대밖에 이 어지지 않는다. 당신이 부친으로부터 이어받은 8a번 염색체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것은 당신이 수태되기 직전에 당신 부친의 정소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세계의 모든 역사를 통 하여 그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감수분열의 혼합 과정에 의해 생겼다. 즉, 당신의 부친쪽의 조부모로부터 온 염색체 절편이 함께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그것은 모두 특정의 정자 내에 배치되어 있고, 유일한 존재였다. 그 정자는 막대한 수에 달하는 아주 작 은 배의 대선단 중의 한 척이고 그들 배는 일제히 당신의 모친 속으로 노를 저어 들어갔다. 이 특별한 정자는(당신이 이란성 쌍생아가 아니면) 당신 모친의 난자 중 하나에 도달했으며, 선단 유일의 정자였다. 이것이 당신의 존재 이유이다. 우리가 고찰하고 있는 유전 단위, 즉 당신의 8a번 염색체는 나머지 모든 유전 물질과 같이 스스로 복제를 시작했다. 지금 그것은 짝을 갖춘 형태로 당신의 몸 속에 존재한다. 그러나 당신이 자식을 만드는 차례가 되면 이 염색체는 당신이 난자(또는 정자)를 만들 때에 파괴된다. 그 일부는 당신의 모친쪽의 8b번 염색체의 일부와 교환될 것이다. 모든 생식 세포에서 새로운 8번 염색체가 만들어진다. 그것 은 헌 염색체보다 '좋을'지도 모르고 '나쁠'지도 모르나, 매우 이루어지기 어려운 우연의 일 치가 없는 한 전혀 다르고 아주 유일한 것이다. 한 개의 염색체 수명은 한 세대인 것이다. 더욱 작은 유전 단위, 예컨대 당신의 8a번 염색체의 1/100의 길이의 유전 단위 수명은 어 떨까? 이 단위도 역시 당신의 부친으로부터 온 것인데 그것은 당신의 부친 속에서 비로소 모아진 것은 아니다. 전술한 추론에 의하면 당신의 부친의 조모로부터 온 것으로 하자. 조모 가 자신의 양친의 한 사람으로부터 그 단위를 전부 받아들일 확률도 역시 99%이다. 작은 유전 단위의 선조를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은 그 최초의 창조자를 만나게 될 것 이다. 그것은 어느 단계에서 당신의 조상의 한 사람의 정소 또는 난소 내에서 비로소 만들 어졌음에 틀림없다. 나는 '만들어진다'라는 말을 어느 정도 특수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을 거듭 말해 두게 TEk.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유전 단위를 구성하고 있는 더 작은 소단위는 훨씬 이전부터 존재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의 유전 단위가 어떤 시점에서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소 단위의 배치(이것에 의하여 단위가 규정된다)가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만들어진 시기는 예컨대 당신의 조부모의 세대 정도로 아주 최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극히 작은 단위를 생각하면 그것은 처음에 아주 먼 조상 중 아마도 원숭이와 닮은 유인원에서 조립되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도 당신 속의 작은 유전 단위는 먼 미래까지 살아나가 먼 자손에게 완전하게 전해질지도 모른다 어떤 개체의 자손은 하나의 계통을 밟는 것이 아니라 분지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당신 의 8a번 염색체의 그 짧은 일부분을 '만들어낸' 것이 당신의 어느 선조이든 그 사람에게는 다분히 당신 외에 많은 다른 자손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유전 단위의 하나는 당신의 6촌 형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게 있을지도 모르고 수상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이 키우는 개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옛날로 되돌아가 보면 우리는 다 같은 조상에 도달하기 때문에, 또 동일 한 작은 단위가 우연히 독립적으로 몇 번이고 긁어모아지는 수도 있을 것이다. 유전 단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것이 다른 개체에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즉, 사본의 형태로 이 세상에 몇 번이고 나타날 확률이 높다. 돌연변이 전부터 존재하던 소단위가 교차에 의해 모이는 기회는 새 유전 단위가 만들어지는 보통의 방법이다. 또 하나의 방법-그것은 수가 적으나 진화상 매우 중요하다-은 '점 돌연변이(point mutation)'라고 한다. 점 돌연변이는 어떤 책 속의 하나의 문자의 오식에 의한 잘못이다. 그 것은 드물지만 유전 단위가 길면 길수록 그 길이의 어디엔가 돌연변이에 의해 변할 가능성 이 크다. 또 다른 중요하고도 드문 종류의 과실 또는 돌연변이를 '역위'라고 한다. 염색체의 일부가 양단으로 잘려서 거꾸로 되어 역의 위치에서 다시 붙는 것이다. 앞에서의 비유로 말하면 이 경우 페이지를 다시 세어 볼 필요가 있게 된다. 때로는 염색체의 일부가 단순히 역으로 되 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염색체의 전혀 다른 부분에 붙은 경우도 있고 아주 다른 염색체에 붙는 경우도 있다. 이것은 어떤 권에서 다른 권으로 페이지의 다발을 옮기는 것이 된다. 보 통은 유해한 이런 종류의 과오가 중요한 것은 시시때때로 함께 작용하는 유전 물질 조각에 긴밀한 '연관'을 불러일으키는 수가 있다. 양쪽이 존재하는 때만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두 개 의 시스트론(이것들은 어떤 점에서 서로 돕고 있다)은 아마도 역위에 의하여 서로 가까워질 것이다. 이때에 자연 선택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새로운 '유전 단위'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경향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 경우 그 유전 단위는 미래의 개체군 내에 퍼질 것이다. 유전자 복함체는 세월이 지나는 사이에 이와 같이 큰 폭으로 재조립되어 '편집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비의 의태 가장 훌륭한 예의 하나는 '의태'로써 알려진 형상이다. 어떤 종류의 나비는 구역질 나는 맛이 있다. 그것들은 보통 선명하고 눈에 띄는 색깔을 하고 있어서 새들은 그 '경고색'을 기 억하여 그것을 피한다. 반면에 맛이 나쁘지 않은 타종의 나비는 쉽게 잡혀 먹힌다. 그래서 이것들은 나쁜 맛의 나비를 흉내낸다. 즉, 나쁜 맛의 나비를 닮은 색깔과 형태(맛은 닮지 않 은)를 가지고 태어난다. 박물학자들은 종종 그것들에게 속으며 새들도 역시 속는다. 정말 싫 은 맛의 나비를 한 번 맛본 새는 비슷하게 보이는 나비를 모두 피하는 경향이 있다. 그 중 에는 의태종도 포함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의태의 유전자는 자연 선택상 유리하게 된다. 이것 이 의태가 발달하는 이유이다. '나쁜 맛'의 나비에는 여러 종류가 있으며 그것들이 모두 닮은 것은 아니다. 의태종이 그 것들을 전부 닮을 수는 없다. 나쁜 맛을 내는 한 특정한 종류에 자신을 맡겨야만 한다. 일반 적으로 의태종은 각각 특정한 나쁜 맛을 내는 종으로 흉내낼 수 있는 전문가이다. 그러나 그 중에는 아주 묘한 짓을 하는 의태종이 있다. 그 의태종의 이부 개체는 어떤 하나의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며 다른 개체는 또 다른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고 있다. 중간 상태의 개체나 양쪽에 의태하려고 하는 개체는 즉시 먹혀 버리기가 십상이나 실은 이와 같 은 중간형은 안 생긴다. 한 개체가 암놈이거나 수놈이거나 양단간에 하나이어야 함과 같이 한 개체는 어떤 하나의 나쁜 맛을 내는 종에 의태하든지 양자 중에서 택일한다. 어떤 나비 는 A종에 의태하는 반면에 그 형제 나비는 B종에 의태한다. 그것은 마치 한 개의 유전자가 A종을 닮거나 B종을 닮거나를 결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 다. 그러나 단 한 개의 유전자가 의태의 다종다양한 면 -색깔, 형태, 점 모양, 비행의 리듬 까지-의 모든 것을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 아마도 한 시스트론의 의미의 유전자로는 그 것은 가당치 않다. 그러나 실은 역위와 그 밖의 우연한 재배열에 의하여 유전 물질에 무의 식으로 자동적인 '편집'이 행해진 결과 이전에는 마구 흩어져 있던 다수의 유전자가 염색체 상의 한 장소에 모여 긴밀한 연관 집단을 이룬 것이다. 이 집단 전체는 한 개의 유전자와 같이 행동하여- 실제로 우리의 정의로는 이것은 단일 유전자이다- 별도의 집단인 '대립 유 전자'를 가지고 있다. 어떤 집단에는 A종으로 의태하는 데 관여하는 시스트론이 함유되어 있다. 각 집단이 교차에 의해 분열되는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연계에서는 중간형의 나비 는 전혀 볼 수 없으나, 다수의 나비를 실험실에서 사육하면 극히 드물게 나타날 것임에 틀 림없다. 나는 유전자라는 말을 몇 세대까지도 계속되고 많은 사본의 형태로 배분될 정도로 작은 유전 단위라는 의미에서 쓰고 있다. 이것은 전부냐 또는 아니냐라는 엄밀한 정의는 아니고, '큰' 또는 '늙은' 등의 정의와 같이 이를테면 윤곽이 차차 흐려져 가는 정의이다. 염색체의 어떤 길이의 한 부분이 교차에 의해 분열되거나 여러 종류의 돌연변이에 의해 쉽게 변한다 면 내가 말하는 의미로써 유전자로 불릴 자격은 없다. 시스트론은 아마도 그러한 자격이 있 다고 생각되나 그보다는 더 색체상의 극히 가까이 있는 수가 있어, 이 경우 우리의 목적에 따라 그것은 단일의 장수하는 유전 단위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의태하는 나비의 집단은 좋은 예이다. 시스트론은 어떤 몸을 이탈하여 다음의 몸으로 들어갈 때, 즉 차세대로 여행하 기 위해 정자나 난자에 실릴 때 이전의 항해에서 서로 이웃하던 자들, 즉 먼 조상의 몸으로 부터 긴 방랑의 여행을 같이 해 온 옛 길동무와 한 조각배에 같이 타는 수가 많을 것이다. 같은 염색체상의 서로 이웃한 동지의 시스트론은 단단히 뭉친 길동무를 이루고 있고, 감수 분열 시기가 도래할지라도 한 배에 탑승하므로 손해볼 일은 절대로 없는 것이다. 엄밀히 말해서 이 책에는 '이기적인 시스트론'도 '이기적인 염색체'도 아닌 '어느 정도 이 기적인 염색체의 큰 도막과 더욱 이기적인 염색체의 작은 도막'이라는 제명을 붙여야 마땅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이것은 매혹적인 제명은 아니다. 거기서 나는 유전자를 몇 대를 계속할 가능성이 있는 염색체의 작은 도막이라고 정의하고 이 책에 "이기적 유전 자"라는 표제를 붙인 것이다. 여기서 1장의 마지막에 남긴 문제로 돌아가자. 1장에서는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라는 대 표적인 모든 단위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사람에 따라 종을 자연 선택 의 단위라고 여기는 사람, 종 내의 개체군 또는 집단을 단위로 여기는 사람, 개체를 단위로 여기는 사람도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로서 그리고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로써 유전자를 생각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나는 이제 나의 주장이 정당할 수밖에 없 게끔 유전자를 '정의'하려 한다. 자연 선택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말하면 자연 선택이란 각 단위의 생존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생 존하는 것이 있으면 죽는 것도 있는데, 이 선택적인 죽음이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치기 위 해서는 좀더 조건이 필요하다. 각 단위는 많은 사본형으로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단위의 적어도 일부는 진화상으로 의미 있는 기간(사본형으로) 동안 생존할 수 있는 능 력이 없으면 안 된다. 작은 유전 단위는 이들의 특성을 갖추고 있다. 개체, 그룹, 그리고 종 에는 그것이 없다. 유전 단위를 실제로 불가분의 독립한 입자로써 다룰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은 멘델(Gregor Mendel)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이 어느 정도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시스트론까지도 때로는 분할되는 수가 있고, 동일 염색체상의 두 개의 유전자는 둘 다 완전히 독립하여 있지 않다. 내가 행한 것은 불가분의 입자라는 이 상에 극도로 가까워지는 단위로서의 유전자를 정의하는 것이다. 유전자는 불가분은 아니나 좀처럼 분할되지 않는다. 확실히 그것은 어떤 개체의 체내에 존재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유전자는 조부모로부터 손자 손녀까지 다른 유전자와 섞이지 않고 그냥 그 대로 중간 세대를 통과하여 여행한다. 유전자가 끊임없이 혼합된다면 우리가 현재 이해하고 있는 자연 선택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다윈 시대에 증명된 것이다. 당시는 유전이 혼합 과정 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것은 다윈을 대단히 곤란하게 했다. 멘델의 발견은 이미 발표 되어 있었으므로 그것에 다윈을 도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다윈은 그것 을 몰랐다. 사람들이 그것을 읽은 것은 다윈과 멘텔이 죽고 난 후 몇 년이 지나서였다. 멘델 은 아마도 자신이 발견한 것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다 윈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유전자의 입자성의 또 하나의 측면은 그것이 노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유전자가 100만 년을 살았다고 해서 100년쯤 산 유전자보다 쉽게 죽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기의 목적에 맞추어 자기의 방법으로 다음에서 다음으로 몸을 조절하며, 죽을 운명에 있는 몸이 노쇠하 거나 죽음에 이르기 전에 차례를 따라 그들의 몸을 버리며, 세대를 거치면서 몸에서 몸으로 옮겨 간다. 유전자는 불사신이다. 아니 불사신에 가까운 유전 단위로서 정의된다. 세계에 존재하는 개 개의 생존 기계인 우리들 인간은 수십 년은 산다고 예측된다. 그런데 세계의 유전자의 예상 수명은 십년 단위가 아닌 1만 년 또는 100만 년 단위로서 재지 않으면 안된다. 유성 생식을 하는 종은 개체가 자연 선택의 중요한 단위로서 자격을 얻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허황된 유전 단위이다. 개체의 그룹은 더한층 큰 단위이다. 하늘의 구름이나 사막의 모 래 바람 같은 것이다. 그들은 일시적인 집합 내지는 연합이다. 진화적 시간의 척도로 보면 불안정하다. 개체군은 장기간 계속되나 다른 개체군과 끊임없이 배합되고 있고, 그로 인해 그 자체의 정체성을 잃어 간다. 개체군은 또 내부로부터 진화적 변화를 받는다. 그것은 자연 선택의 단위로 될 수 있을 만큼 독립된 존재는 아니다. 즉, 다른 개체군보다 좋은 것으로 '뽑힐' 정도로 안정하지도 않고 단일하지도 않다. 개체의 몸은 그것이 유지되고 있는 한은 충분히 독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것이 도대체 얼마나 계속될 것인가? 각 개체는 유일하다. 그러나 실체의 사본이 한 개씩밖 에 없을 때에는 그들 실체간에 선택이 작용하여 진화가 일어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유성 생식은 복제가 아니다. 개체군이 다른 개체군에 의해 오염되듯이 한 개체의 자손은 성적 파 트너에 의해 오염된다. 당신의 자식은 당신의 절반밖에 안 되고, 당신은 당신의 아주 작은 부분-몇 개의 유전자-을 가진 다수의 자손을 기대할 수 있을 뿐이다. 비록 그들이 당신의 성을 지녔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개체는 안정한 것이 아니다. 정처없이 떠도는 존재이다. 염색체도 또한 트럼프 놀이의 카 드장처럼 즉시 혼합되고 즉시 잊어버리게 된다. 그러나 카드 자체는 섞여져도 살아 남는다. 이 카드가 유전자이다. 유전자는 교차에 의해서도 파괴되지 않는다. 그저 파트너를 바꾸어 행진할 따름이다. 물론 그들은 계속 행진한다. 그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그들은 자기 복제자 이고 우리는 그들의 생존 기계인 것이다. 우리는 목적으로 쓰여진 후 버려진다. 그러나 유전 자는 지질학적 시간을 사는 거주자이다. 유전자는 영원하다. 유전자는 영원하다 유전자는 다이아몬드처럼 영원하나 다이아몬드와 똑같은 것은 아니다. 원자의 불변하는 패턴으로서 지속되는 것이 개개의 다이아몬드의 결정이다. DNA는 그와 같은 영구성을 가 지고 있지 않다. 자연의 DNA 분자는 어느 것이든 그 생명이 극히 짧다. 분명히 일생보다 길지는 않고 아마도 수십 개월일 것이다. 그러나 DNA 분자는 이론적으로는 자신의 사본 형태로 1억 년이라도 살아가는 것이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원시 수프 속의 고대의 자기 복 제자와 꼭 같은 특정 유전자의 사본이 세계 속에 널리 분포할 수도 있다. 단지 다른 점은, 오늘날의 복제자들은 모두 생존 기계인 몸 속에 완전하게 들어 있다는 점이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전자가 그 정의상 사본 형태로 거의 불멸이라는 것이다. 유 전자를 단일 시스트론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어떤 목적에는 적절하나 진화론을 논하려면 그 것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확대의 정도는 정의의 목적에 따라 결정된다. 우리는 자연 선택의 실제 단위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자연 선택에 성공하는 단위가 가져야 할 특성을 확인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앞 장에 의하면 그것은 장수, 다산성, 복제의 정확도이다. 그래서 '유전자'를 적어도 잠재적으로 이와 같은 특성을 갖고 있는 최대의 단위라고 간단히 정의하자. 유전자는 많은 사본 형태로 존재하는 장수의 자기 복제자이다. 그러나 무한 장수 는 아니다. 다이아몬드라 해도 문자대로 영원한 것은 아니고, 시스트론도 교차에 의해 둘로 갈리는 수가 있다. 유전자는 충분하게 존속할 수 있을 정도로 짧고, 자연 선택의 의미 있는 단위로서 일할 정도로는 '충분히 긴' 염색체의 한 조각으로 정의된다. '충분히 긴'이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어느 정도의 길이일까? 엄밀히 답할 수는 없다. 그 것은 자연 선택의 '압력'이 어느 정도로 강한가에 달렸다. 즉, '열세'로 생각되는 유전 단위가 '우세' 대립 유전자보다 얼마만큼 많이 소멸하는가에 달렸다. 이것은 양적 문제이며, 개개의 경우에 따라 다르다. 실제 자연 선택의 단위로서 최대인 유전자는 시스트론과 염색체 사이 의 중간 어디엔가에 위치하는 크기라는 것을 알 것이다. 유전자-이기주의의 기본 단위 유전자가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의 첫 번째 후보가 될 수 있는 것은 유전자가 잠재적으로 갖고 있는 불멸성 때문이다. 이제 '잠재적'이라는 말을 강조해야 할 때가 왔다. 어떤 유전자 는 100만 년을 살수가 있으나 많은 새로운 유전자는 최초의 세대조차 다 살지 못한다. 소수 의 유전자가 성공을 거두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는 운이 좋아서이지만, 대개는 그 유전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는 곧 그들의 유전자가 생존 기계를 만드는 데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의 유전자는 자기가 붙어살고 있는 각각의 몸의 배 발생에 영향하에 있을 때보다 조금 더 장수하고 더 많이 번식하도록 한다. 예컨대 '우세한' 유전자 는 자기가 붙어살고 있는 몸에 긴 다리를 주어 그 몸이 포식자로부터 도망하기 쉽게 하므로 자기의 생존을 확실하게 할 것이다. 이것은 개별적인 예이지 보편적인 예는 아니다. 즉, 긴 다리는 반드시 이점이라고 만은 할 수 없다. 두더지에게는 긴 다리가 핸디캡일 수밖에 없다. 개개의 세부적인 것에 치우치지 말고 모든 뛰어난(즉, 장수의) 유전자에 공통되는 어떤 보편 적인 특성을 생각할 수가 있을 것인가? 반대로 어떤 유전자를 '열세'의 단명한 유전자라고 간단히 구별할 수 있는 특성은 무엇일까? 이 같은 보편적인 특성이 몇 개 있을지도 몰라도, 이 책에 특히 관계 깊은 특성이 하나 있다. 즉, 유전자 수준에 있어 이타주의는 악이고 이기 주의는 선이다. 이기주의와 이타주의에 대한 유리의 정의로 보아, 이와 같이 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유전자는 생존 중에 그 대립 유전자 풀 내의 대립 유전자는 다음 세대의 염색체상 의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경쟁자이기 때문이다. 대립 유전자를 희생하여 유 전자 풀 속에서 자기의 생존 기회를 늘리도록 행동하는 유전자는 어느 것이든 그 정의로 보 아 장수하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는 이기주의의 기본 단위인 것이다. 유전자의 협동 사업 지금까지 말한 것이 이 장에서 주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몇 개의 복잡한 문 제와 가정을 숨긴 채 설명해 왔다. 복잡한 문제의 첫 번째 것은 이미 간단히 말한 것이다. 독립된 자유 유전자가 세대를 통해 여행을 하는데, 그것은 배 발생의 제어에 있어서는 별로 자유로운 인자도 독립된 인자도 아니다. 그것은 규칙도 없이 복잡한 방법으로 서로서로 그 리고 외부 환경과 협력하여 상호 작용을 하고 있다. '긴 다리의 유전자'라든가 '이타적 행동 의 유전자'라든가 하는 표현은 말을 알기 쉽게 하기 위한 비유일 뿐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의 미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다. 길든 짧든 다리를 혼자 힘으로 만드는 유전자는 없다. 다리를 만드는 일은 많은 유전자의 협동 사업이다. 외부 환경의 영향도 불가결하다. 즉, 다리는 실 은 먹이로부터 만들어진다. 그러나 다른 조건이 같다면 다른 대립 유전자의 영향하에 있는 것보다는 다리를 길게 하는 경향을 갖는 단일 유전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이와 비슷한 예로서 밀의 생장을 촉진하는 비료인 질산염의 영향을 생각해 보자. 질산염 이 없는 곳보다 있는 곳에서 밀이 잘 자란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러나 질산염 비료만으로 말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바보는 없다. 종자, 토양, 햇빛, 물 그리고 여러 가지 무기물도 모두 필요하다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지만 이들 다른 요인이 일정하게 유지 된다면 제한된 범위내에서는 다소 다를지라도질산염 비료의 시비로 밀은 더 크게 자랄 것이 다. 같은 식으로, 배 발생에 있어서 개개의 유전자에 대해서도 같다고 할 수 있다. 배 발생 은 매우 복잡하게 맞물린 짜임새에 의해 제어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그 일을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유전 인자든 환경 인자이든 간에 어린아이의 어떠한 부분 의 단일 '원인'으로 생각되는 것은 없다. 어린아이의 모든 부분에는 거의 무한의 선행하는 원인이 있다. 그러나 한 어린아이와 또 다른 어린아이 사이에 있는 하나의 '차이', 이를테면 다리 길이의 차이에는 환경이든 유전자이든 어디엔가 하나내지 두셋의 단순히 선행하는 원 인이 쉽게 발견될지도 모른다. 여하튼 살아 남기 위하여 다투고 싸우는 데 관계가 있는 것 은 개체간에서 볼 수 있는 '차이'이고, 진화에 관계 있는 것은 유전적으로 지배되는 차이인 것이다. 어떤 유전자에 관해 말하면, 그것의 대립 유전자는 생명이 걸린 경쟁 상태이나 다른 유전 자는 온도, 먹이, 포식자 또는 동지와 같은 환경의 일부에 불과하다. 어떤 유전자의 작용은 그 환경에 좌우되며, 그 환경에는 다른 유전자도 포함된다. 유전자의 작용은 그 환경에 좌우 되며, 그 환경에는 다른 유전자도 포함된다. 유전자는 다른 특정 유전자가 존재하면 또 전혀 다른 작용을 나타낼 수 있다. 몸 속의 유전자 세트 전부는 일종의 유전적 풍토나 배경을 이 루고 있고, 개개의 유전자의 작용을 변경하거나 그것에 영향을 주거나 한다. 여기서 우리는 역설에 빠져든 듯이 생각된다. 어린아이를 만드는 것이 이 정도로 복잡한 협동 사업이라면, 그리고 모든 유전자가 그 일을 달성하기 위해 수천의 동료의 유전자를 필 요로 하는 것이라면, 세대를 통하여 몸에서 몸으로 불사신의 샤모아(chamois)같이 도약해 가는 불가분의 유전자는 자유롭고 구속되지 않으며, 자기 추구적 생명의 인자라는 나의 도 식과 이 일은 어떻게 양립할 수 잇는 것일까? 그것은 모두 난센스였을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꾸민 문구에 의해 도취한 부분도 있었을지 모르나 결코 무의미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모순은 없다. 이것은 또 다른 비유로 설명할 수가 있다. 조정 선수의 예 한 사람의 조정 선수는 자기 혼자만으로 옥스퍼드 대 케임브리지의 조정 경기에서 이길 수 없다. 그에게는 8명의 동료가 필요하다. 각각의 선수는 항상 보트의 특정 부분에 앉는 전 문가이다. 즉, 뱃머리에서 노젓는 자든지 조정수든지 키잡이든지 그들은 각각 어떤 역할을 맡고 있다. 보트를 젓는 것은 협동 작업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중에는 다른 사람보다 팔심이 좋은 자가 있다. 코치는 뱃머리에서 노젓는 전문의 선수진, 키잡이 전문의 선수진 등 한 그룹의 후보 중에서 자기의 이상으로 하는 조정 팀(크루, Crew)을 뽑아야 한다. 그가 다 음과 같이 뽑았다고 하자. 그는 매일 각 위치의 후보자를 무작위로 조합하여 새로이 3조의 크루를 짜서 그 3조의 크루를 서로 경쟁시킨다. 이것을 몇주간 계속하면 이긴 보트에는 종 종 동일 인물이 타고 있는 경향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 인물은 우수 선수로서 기록된다. 또 그 중에는 항상 뒤지는 크루 속에 얼굴을 보이는 선수도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결국 제거된다. 그러나 특별히 팔심이 좋은 선수라도 때로는 뒤지는 크루에 들어 있는 수가 있다. 다른 멤버의 팔이 나빴던 탓이든지 운이 나빠서 -반대편에서 강풍이 불어 와서- 이 다. 가장 뛰어난 선수들이 이긴 보트에 있다는 경향은 그저 '평균'해서 그런 것이다. 이 선수들에 해당하는 것이 유전자이다. 보트의 각 위치에 관한 경쟁자는 염색체상의 동 일 위치를 점할 가능성이 있는 대립 유전자이다. 노를 빨리 젓는 것은 생존에 성공하는 몸 을 만드는 것과 같다. 바람은 외부 환경에 해당한다. 교체 요원의 집단이 유전자 풀이다. 하 나의 몸에 관하여 말하면 그 몸의 유전자 전부가 한 보트에 타고 있는 꼴이 된다. 좋은 유 전자가 나쁜 동료 속으로 들어가 치사 유전자와 한 몸 속에서 동거하는 수도 흔히 있다. 이 경우 치사 유전자가 그 몸을 어릴 때에 죽여 버리고 좋은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와 같이 파 괴된다. 그러나 이것이 유일한 몸은 아니다. 좋은 유전자와 같은 복제물이 치사 유전자를 갖 지 않는 다른 몸 속에서 살고 있다. 좋은 유전자의 많은 사본은 때로는 버릇 나쁜 유전자와 한 몸에 동거했기 때문에 그것에 이끌려서 멸망하는 수도 있고, 또 머물고 있는 몸이 벼락 을 맞는 등 불운한 일에 휩쓸려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의에 따르면 운, 불운은 무작위 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일관해서 손실되는 쪽에 있는 유전자가 불운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몹쓸 유전자인 것이다. 팀워크(teamwork) 훌륭한 조정 선수의 자질의 하나는 팀위크, 즉 크루의 나머지 멤버와 협조할 수 있는 능 령이다. 이것은 강한 근육만큼이나 중요하다. 나비의 예에서 말한 대로 자연 선택은 역위와 다른 염색체 일부의 대규모적 이동에 따라 무의식으로 하나의 유전자 복합체를 '편집'해 잘 협조하는 유전자를 모아서 긴밀하게 결합한 입단으로 만들어 낸다. 그러나 물리적으로는 전 혀 결부될 수 없는 유전자끼리 서로 양립하기 위하여 선택될 수도 있다. 다음 세대의 몸 속 에서 만나는 대개의 유전자, 즉 유전자 풀의 나머지 전부의 유전자와 잘 협조하는 유전자는 유리하게 되는 경향이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유능한 육식 동물의 몸에는 여러 가지 특성이 필요하다. 그 중에는 고기를 자르 는 이빨, 고기를 소화하기에 적합한 소화관, 그리고 그 밖의 여러 가지 특성이 있다. 한편 유능한 초식 동물은 풀을 씹기 위한 넓은 이빨과 특별한 소화 기구를 가진 아주 긴 창자를 필요로 한다. 초식 동물의 유전자 풀 속에서 육식용의 날카로운 이빨을 그 소유자에게 제공 하는 새로운 유전자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그 것은 일반적으로 육식이라는 착상이 나빠서가 아니다. 적합한 소화관과 기타 육식 생활에 필요한 모든 특성까지도 갖추고 있지 않으면 고기를 효율적으로 먹을 수 없기 때문이다. 육식용의 예리한 이빨에 관한 유전자가 본래 열등한 유전자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초식성을 위한 유전자가 우세한 유전자 풀 속에 있을 때에만 열등한 유전자이다. 이것은 미묘하고 복잡한 개념이다. 어떤 유전자의 '환경'이 대개 다른 유전자로 구성되어 있고, 다른 유전자의 각각이 다시금 또다른 유전자라는 환경과 협력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선택되어 가기 때문에 복잡한 것이다. 이 미묘한 점을 설명하기에 적합한 비유가 있는데 이 것은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게임 이론'과 유사하다. 게임 이론에 관해서는 개체간의 공격적인 경쟁에 관련하여 제 5장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그래서 이점에 관한 이 이상의 논의는 제 5장의 끝부분으로 미루고, 이 장의 중신 과제로 이야기를 돌리자. 즉, 자연 선택의 기본 단위로 생각하기에 가장 적합한 것은 종도 아니고 개체군도 아니고 개체조차도 아닌 유전 물질의 약간 작은 단위(이것을 유전자라고 부르면 편리하다)라는 것 이다. 이 논의의 기초가 되는 것은 전에도 언급했듯이 유전자가 잠재적으로 불사신인 데 대 하여 몸과 모든 다른 더 상위의 단위는 일시적인 것이라고 하는 가정이었다. 이 가저은 두 개의 사실, 즉 유성 생식과 교차라는 사실과 개체는 죽는다라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같은 것은 뚜렷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그것들이 왜 사실일까라는 물에 주저하지는 않는다. 왜 우리와 대부분의 다른 생존 기계가 유성생식을 하는 것일까? 우리의 염색체는 왜 교차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하는가? 노화 이론 '우리는 왜 늙어서 죽는가'하는 의문은 복잡한 문제이고 그 상세한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넘는 것이다. 특별한 이유에 덧붙여 보다 일반적인 이유가 몇 가지 제안되었다. 예를 들면 노쇠는 개체의 생애 동안에 일어나는 복제 과정의 유해한 잘못과 다른 유전자의 손상이 축 적된 것이라는 이론이 있다. 또 메다워(Peter Medawar) 경이 제창하는 또 하나의 이론은 유전자 선택에 의한 진화 사상의 좋은 예이다. 메다워는 우선 "늙은 개체는 그 종의 나머지 개체에 대한 이타적 행위로서 죽는다. 왜냐 하면 번식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늙어서 공연히 세계를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이다"라고 하 는 종래의 설을 버렸다. 메다워가 지적하고 있듯이 이것은 증명하려고 하는 것을, 즉 개체가 너무 늙어서 번식할 수 없음을 처음부터 가정하는 하나의 순환 논법이다. 그 부분은 더 훌 륭하게 바꿔 말할 수 있을지라도 이것은 역시 단순한 그룹 선택 내지는 종 선택과 같은 종 류의 설명이다. 메다워 자신의 이론은 훌륭한 논법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꾸밀 수가 있 다. 우수한 유전자와 치사 유전자 '우수한 유전자'의 가장 일반적인 특성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그리고 '이기성'이 그 하나임을 확인했다. 그러나 성공한 유전자가 가지는 또 하나의 일반적 특성은 자기의 생존 기계의 죽음을 적어도 생식 활동 뒤로 미루는 경향이다. 확실한 것은 당신의 사촌과 종조부 중에는 아이 적에 죽은 자가 있다고 해도 당신의 조상은 단 한 사람 도 아이 적에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젊어서 죽지 않은 자야말로 조상이다. 자신을 지니고 있는 개체를 죽게 하는 유전자를 '치사 유전자'라고 한다. 반치사 유전자는 어느 정도 개체를 쇠약하게 하는 효과를 가지고 있고, 다른 원인에 의해서 죽을 가능성을 높인다. 어떤 유전자도 생애의 한 특정 단계에서 몸에 최대의 효과를 나타내나 이점에서 치사 유전자와 반치사 유전자도 예외는 아니다. 대부분의 유전자는 태아기에 그 영향을 나 타내나 어떤 유전자는 유아기에, 어떤 유전자는 청년기에, 어떤 것은 중년기에, 그리고 어떤 것은 노년기에도 계속 영향을 끼친다(한 마리의 유충과 그것이 변태한 나비는 똑같은 유전 자 세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분명히 치사 유전자는 유전자 풀로부 터 제거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후기에 작용하는 유전자는 적어도 개체가 생식 활동을 할 때까지 그 치사 효과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유전자 풀 속에서 지금도 번창할 것이다. 이를테 면 늙은 몸에 암을 유발시키는 유전자는 암의 발현 전에 개체가 번식하기 때문에 다수의 자 손에게 전해진다. 한편 젊은 성인에게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벼로 많은 자손에게 전해지 지 않으며, 어린아이에게 치명적인 암을 일으키는 유전자는 자손에게 전혀 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노쇠는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와 반치사 유전자가 유전자 풀에 축적되는 현상의 부산물에 불과하다. 이들 치사 및 반치사 유전자는 단지 후기에 작용 한다는 이유만으로 자연 선택의 그물에 걸려들지 않게 허락되어 온 것이다. 메다워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점은 선택이 다른 치사 유전자의 작용을 늦춰 주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하고 좋은 유전자의 효과를 빠르게 하는 효과를 가진 유전자 에게도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진화의 많은 부분의 유전자 활동의 개시 시기를 유전적 으로 조절하여 변화시키므로써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 이 이론에서는 번식이 어떤 연령일 때에만 이루어진다는 것을 전제로 할 필요가 없다는 점에 주의하길 바란다. 모든 개체가 연령에 상관없이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첫째 가 정으로 해도 메다워 이론은 후기에 작용하는 유해한 유전자가 유전자 풀 내에 축적되는 것 을 즉시 예언한다. 그리고 그 다음 과정으로서 노년이 되면 번식하기 어렵게 되는 경향이 생긴다는 것은 틀림없다. 인간의 수명 의미는 좀 다르나 이 이론의 좋은 점의 하나는 이것으로부터 퍽 재미있는 추찰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고 싶으면 그렇게 할 수 있는 가능한 방 법이 두 가지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어떤 연령, 예컨대 40세 이전에는 번식을 금지하는 것이다. 그 수백 년 후에는 최저 연령 한계를 50세로 올리고 그 후에도 조금씩 올려간다. 이 방법으로 인간의 수명은 수백 세까지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누구도 이와 같은 방법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싶어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두 번째는 유전자를 '속여서'품고 있는 몸이 실제의 연령보다 젊도록 생각하게 하는 것이 다. 실제로 이것을 행하려면 나이가 들어가는 사이에 일어나는 몸 속의 화학 환경의 변화를 분명히 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들 변화의 어떤 것이 후기에 작용하는 치사 유전자의 '스위치 를 켜는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하면 젊은 몸의 표면적인 화학 특성을 흉내내는 것으 로 인해 후기에 작용하는 유해한 유전자의 'switch on'을 막을 수가 있는 것은 아닐까. 흥미 롭게도 노화의 화학신호는 통상의 어떤 의미로도 그 자체가 유해하지는 않다. 예를 들어 물 질 S는 젊은 개체보다 늙은 개체의 몸에 많이 농축되어 있다고 하자. S는 그 자체로는 전 혀 무해하며 먹이에 함유되어 있던 것이 나이를 먹음에 따라 점점 몸에 농축된 것일지도 모 른다. 그러나 종종 S의 존재하에서는 유해한 효과를 끼치는데 그렇지 않으면 좋은 효과를 끼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에서 자동적으로 확실히 선택되어 남아 있고, 그것이 사실상 '노 쇠사의 유전자'라는 것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 경우 그 치료법은 몸에서 S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 생각의 혁명적인 점은 S자체가 노령의 '표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S의 대량 축적이 죽음에 이어지는 경향이 있는 것에 주목한 의사는 아마도 S를 일종의 독으로 생각하고 S와 몸의 기능 부전과의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 관계를 발견하려고 고심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말한 가설과 같이 되어 있다면 그는 시간을 낭비할 뿐이다. 늙은 몸보다 젊은 몸에 많이 저장되어 있다는 의미로 젊음의 '표시'인 물질 Y가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역시 Y의 존재하에서는 좋은 효과가 있는데 Y가 없을 때에는 유해한 유 전자가 선택될지도 모른다. S와 Y -이와 같은 물질은 만이 있을 수 있다- 가 무엇인지 모 르더라도 단순히 늙은 몸으로 젊은 몸의 특성을 (그들의 특성이 아무리 표면적인 것으로 보일지라도)흉내낼 수가 있으면 그만큼 늙은 몸은 장수한다라고 하는 일반적인 예언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메다워 이론에 기초한, 완전히 추측에 지나지 않음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메다 워 이론이 논리적으로 어떤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는 의미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것이 노쇠의 어떤 실례에 대한 옳은 설명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의 중요성은 유전자 선 택 진화설이 개체가 늙어서 죽는 경향을 용이하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장에서 논 의의 중심인 개체가 죽어야 한다는 가정은 이 이론의 체계 내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내가 말한 다른 가정, 즉 유성 생식과 교창의 존재라는 가정은 증명하기가 더욱 어렵다. 교차는 필히 일어나지 않아도 좋다. 초파리 수놈에게서는 교차가 일어나지 않는다. 암놈도 교차를 억제하는 유전자가 있다. 만약 이 유전자가 널리 퍼져 있는 파리의 개체군을 사육하 려고 하면 유전자 풀이 아닌 '염색체 풀'내의 염색체가 자연 선택의 초소기본 단위로 됨은 틀림없다. 사실 우리의 정의의 논리적 결론에 따르면 한 개의 염색체 전체를 하나의 '유전 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성 구별의 이로움 한편, 유성 생식에 대신하는 것도 존재한다. 초록진드기의 암놈은 부친이 없는 살아 있는 암놈새끼를 낳을 수 있으며 그 암놈들은 모두 모친의 유전자를 깡그리 이어받고 있다(때로 는 모친의 '자궁'내의 배가 그 자궁 내의 더 작은 배를 기르고 있는 수가 있다. 이 경우 진 드기의 암놈은 딸과 손녀딸을 한꺼번에 낳는 꼴이 되어 깔과 손녀는 둘 다 모친의 일란성 쌍생아에 상당한다). 많은 식물은 흡착근을 뻗어서 무성적으로 번식한다. 이럴 경우에는 번 식이라기보다 '생장'이라고 하고 싶으나 생각해 보면 생장과 무성 생식은 단순히 체세포 분 열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어쨌든 이 양자간에는 거의 구별이 없다. 때로는 무성 생식에 의해 번식한 식물이 '부모'로부터 떨어지는 일도 있다. 또 어떤 경우에는 , 예컨대 느릅나무 에 있어서는 흡착근이 그대로 남아 이어져 있다. 실제로 느릅나무 사밈 전체를 한 개체로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초록진드기와 느릅나무는 그런 일을 하지 않는데 우리는 왜 아이 를 만들 때까지 자기의 유전자와 다른 누군가의 유전자를 겄어 붙여야 하는 귀찮은 짓을 하 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런 방법이 생기는 것은 기묘한 것처럼 생각된다. 단순 명쾌한 무성 생식대신에 성이라는 어쩌면 기묘하고 번거로운 방식을 취하게 된 것은 도대체 무엇 때문일 까? 성의 장점은 무엇일까? 이것은 진화론자가 답하기에 대단히 어려운 문제이다. 이 의문에 대해 신중한 답을 시도 한다면 대개 복잡한 수학적 추리가 따라야 한다. 그러나 나는 다음 한 가지 이야기만 하고, 복잡한 수학적 추리는 솔직하게 피하려고 한다. 그것은 이론가가 성의 진화를 설명하려고 하다 부딪치는 어려움의 일부는 그들이 관습적으로 개체란 살아 남는 유전자 수를 최대로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데 기인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 방식에 의하면 성은 역설적인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체가 자기의 유전자를 증식시키 기 위한 방법으로서는 '비능률적인'것이기 때문이다. 즉 각각의 새끼에는 개체의 유전자의 단 50%만이 주어지며 다른 50%는 배우자로부터 공급되기 때문이다. 만약 진드기와 같이 다만 무성 생식에 의해 자기의 정확한 사본인 새끼를 만드는 것이라면 모든 새끼의 몸을 토 해 차세대에게 자기의 유전자를 100% 전할 수가 있다. 이 뚜렷한 모순에서 일부의 이론가 들은 그룹 선택설로 빠져들었다. 성에 대한 그룹 수준의 이점은 비교적 생각하기 쉽기 때문 이다. 보드머(W.F.Bodmer)가 간결히 지적한 것처럼 성은 "다른 개체에서 따로따로 일어난 유리한 돌연변이를 개체에 모으는 역할을 한다." 유전자의 이기성 그러나 이 역설도 이 책의 논의에 따라서 개체를 영원한 유전자의 잠깐 동안의 연합에 의 해 만들어진 생존 기계라고 생각하면 그다지 역설 적인 것은 아닌 것 같다. 이 경우 개체 전체라는 관점에서의 "효율성'은 잘못 본 것 같다. 유성 생식 대 무성 생식은 푸른 눈 대 갈 색 눈과 똑같이 단일 유전자의 제어하에 있는 특성이라고 생각될 것이다. 유성 생식을 위한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 모두를 자기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조작한다. 교차의 유전자도 역시 그렇게 한다. 다른 유전자 복제의 오차율을 조작하는 유전자(돌연변이 유전자)까지 있다. 정 의에 따르면 복제 과정의 실수는 복제되는 유전자에게는 명백히 불리하다. 그러나 만약 이 일이 그것을 유발시킨 이기적인 돌연변이 유전자를 이롭게 한다면 그 돌연변이 유전자는 유 전자 풀 속에 분포를 넓힐 수가 있다. 같은 식으로 교차가 교차의 유전자를 이롭게 한다면 이 때문에 교차의 존재가 충분히 설명된다. 무성 생식에 대립하는 유성 생식이 유성 생식의 유전자를 유리하게 한다면 이것으로서 유성 생식의 존재는 충분히 설명된다. 그 유전자가 개체의 나머지 유전자 모두에게 필요한가 아닌가의 여부는 별로 관계가 없다. 유전자의 이 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국에 가서 성은 그다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이렇다면 논의가 순환 논법이 될 우려가 있다. 성의 존재는 유전자를 선택의 단위로 생각 하는 일련의 논의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이 순환성을 피할 방법이 있다고 보나 이 책 은 이 문제를 추구하는 입장은 아니다. 성은 존재한다. 이것은 사실이다. 작은 유전 단위, 즉 유전자를 진화의 기본적인 독립한 인자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성과 교 차가 있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이기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할 때에 역설이 풀리 게 되는 것은 성뿐만 이 아니다. 예컨대 생물체의 DNA 총량은 그 생물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것 같다. DNA의 많은 부분이 단백질로 번역되지 않는다. 개개의 생물체의 관점에서 고찰해 보면 이것은 역설적으로 생각된다. 만약 DNA의 '목적'이 몸을 만드는 과정을 지휘하는 것 이라면 그런 일을 하지 않는 DNA가 대량으로 발견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생물학자들은 이 여분으로 생각되는 DNA가 어떤 유익한 일을 하고 있나를 생각해 내려고 머리를 쓰고 있다. 그러나 유전자의 이기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모순은 업다. DNA의 진정한 '목적'은 생존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분의 DNA를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려면 그것을 기생자 또는 대체로 다른 DNA가 만든 생존 기계에 편승하고 있는 무해하고 무용한 길손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어떤 사람들은 지화를 지나치게 유전자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결국 실제로 살거나 죽거나 하는 것은 유전자 전부를 가진 개체 바로 그것이다. 이 점에 이견이 없는 것은 이장에서 충분히 기술한 탓이다. 경기에 이기로 지는 것은 보트 자 체인 것과 마찬가지로 살거나 죽거나 하는 것은 개체이고, 자연 선택이 직접 나타나는 것은 항상 개체 수준이다. 그러나 개체의 죽음과 번식의 성공이 아무렇게나 생기는 것은 안기 때 문에 오랜 동안에 유전자 풀내의 유전자 빈도가 변한다는 결과를 초래한다. 조건부이기는 하나 유전자 풀은 원시 수프가 옛날의 자기 복제자에 대해 하고 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현 대의 자기 복제자에 대해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성과 염색체의 교차에는 현대판 원시 수 프의 유동성을 유지시키는 효과가 있다. 성과 교차에 의해 유전자 풀은 잘 섞어지며 유전자 는 부분적으로 뒤섞여진다. 진화는 유전자 풀 속에서 어떤 유전자는 수를 늘리고, 어떤 유전 자는 수를 줄이는 과정이다. 이타적 행동 등과 같은 어떤 형질의 진화를 설명하려고 할 때 는 언제든지 단적으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좋다. "이 형질은 유전자 풀 속에 서 유전자의 빈도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때로는 유전자 용어가 다소 지루할 수가 있으므 로 간결히 생생하게 표현하기 위해서 비유를 쓰기로 한다. 비유에 대해서는 항상 의심을 품 어 오던 사람도 필요한 때에는 그것을 유전자 용어에 적용할 작정을 한다. 유전자의 측면에서 보면 유전자 풀은 새로운 형태의 수프, 즉 생활을 하고 있는 곳이다. 옛날과 달리 오늘날의 유전자는 죽을 운명에 있는 생존 기계를 하나하나 만들어 나가기 위 하여 유전자 풀로부터 계속 뽑아낸 동지들의 집단과 협력하여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 음 장에서는 생존 기계 자체에 주목하여 유전자가 어떤 의미로 그 행동을 제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눈을 돌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