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 프랑스 혁명과 마리 앙투아네트 저자명: 피에르 시프리오 역자명: 용경식 출판사명: 고려원 마리 앙투아네트 연표 1755년 11월 2일 마리 앙투아네트 출생 1770년 5월 16일 베르사유에서 결혼식 1774년 5월 10일 루이 15세 사망 1778년 12월 19일 왕녀가 탄생함 1780년 8월 1일 처음으로 트리아농에 등장 1781년 10월 22일 왕세자가 탄생함 1785년 3월 27일 둘째 왕자 탄생 1786년 7월 9일 둘째 공주 탄생 1789년 5월 1일 삼부회 소집 1789년 6월 3일 첫째 왕세자 사망 1789년 6월 17일 삼부회가 국민의회를 선언 1789년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서약 1789년 6월 23일 신분별 회의를 명령. 제3신분은 이를 거부 1789년 7월 13일 시민군 편성 1789년 7월 14일 바스티유 공격 1789년 10월 1일 근위대가 플랑드르 연대를 베르사유 궁 연회에 초대 1789년 10월 5일 파리 군중이 베르사유로 행진 1789년 10월 6일 국왕 파리에 도착, 튈르리 궁으로 들어감 1790년 11월 27일 의회가 모든 사제에게 사제의 시민헌법에 서약을 의무화 1791년 6월 20일 국왕 일가의 바렌으로 도주. 21일 바렌에서 체포 1791년 7월 17일 마르스 연병장의 학살 1791년 9월 30일 재헌의회 해산 1791년 10월 1일 임법회의 소집 1792년 4월 20일 국왕, 의회에 오스트리아에 대해 선전포고 1792년 8월 10일 8월 10일의 혁명 1792년 8월 13일 국왕의 권력 정지 1792년 8월 13일 국왕 일가의 탕플 이주 1792년 9월 21이 국민공회에 의한 왕정 폐지, 공화정 선언 1792년 12월 11일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시작 1793년 1월 21일 루이 16세 처형 1793년 3월 10일 혁명재판소 설치 1793년 7월 3일 왕세자가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와 격리됨 1793년 8월 21일 마리 앙투아네트 콩시에르즈리로 이송 1793년 10월 14일 마리 앙투아네트 재판 시작 1793년 10월 16일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1795년 6월 8일 독일에 망명중이던 루이 16세의 어린 아들 사망 머리말 마리 앙투아네트의 마지막 60일 '왕에게는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였다'라고 미라보는 말했다. 루이 16세가 자신의 이성과 믿음으로 스스로를 구하려 할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들과 그녀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꿋꿋한 성격과 군주제의 원칙에 기대를 걸었다. 1793년 8월 2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탕플 감옥에서 죽음의 대기실인 콩시에르즈리로 이송되어 9월 13일까지 간수 두 명과 함께 습기찬 방에서 지낸다. 그 후 그녀는 지하독방으로 옮겨졌다가 혁명재판을 받고 1793년 10월 16일에 처형된다. 8월 한 달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울 안에 갇힌 동물 신세였다. 파리 혁명 정부의 행정관들과 결탁한 수상한 사람들이 그녀의 감옥에 드나들었다. 그들 중에는 루즈빌, 즉 알렉상드르뒤마의 ≪메종 루즈의 기사≫도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담 루와이얄이 말했듯이 그의 매혹적인 탈주 계획에서, 루즈빌이 상상햇던 것들과 실현된 것들을 구별해 내기는 쉽지 않다. 왕비를 구하기 위한 악셀 드 페르젠의 다양한 시도들을 점점 더 구체화되엇지만 그 계획은 순진무구한 것이었다. 페르젠은 오스트리아의 정예 기마부대를 이끌고 콩시에르즈리까지 가서 왕비를 구해 올 것을 꿈꾸었다. 프랑스 혁명군에 대항해서 동맹을 맺은 전유럽의 전쟁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기 전에는 일어날 것 같지 않았다. 동맹군의 전투 목적은 왕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폴란드 분할에 이어 프랑스 분할에 있었기 때문이다. 8월 23일의 국민 총동원령은 권력 관계를 뒤바꾸어 놓았다. 과격공화파 장군들이 이끄는 혁명군은 숫자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해지자 곧이어 유럽에 대한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은 모든 면에서 프랑스 왕국에서부터 여자들을 제외시켰던 살리 족의 오랜 관습법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 전통에 따라서 왕비는 왕의 애첩들, 예를 들어 루이 14세의 애첩인 멩트농이나 루이 15세의 애첩인 풍파두르의 스캔들에 가리워진 채 아이들의 어머니로만 남아있어야 했다. 프랑스의 경우 국가를 통치하겠다고 감히 나서는 왕비는 당장에 메살린, 브뤼노, 프레데공드, 카트린 드메디시스와 같은 운명이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화국에 대항한 음모보다는 1770년 '프랑스 마지막 왕비가 된'이후 그녀가 국왕에게 끼친 영향력에 대해서 평가받게 될 것이다. 오스트리아 여제의 딸인 마리 앙투아네트는 열네살에 프랑스 왕세자비, 그리고 열아홉 살에 왕비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언제 어디서나 거만한 여인으로 통했다. 정치적 회의나 궁정 예식, 또는 오락이나 무도회, 그리고 트리아농의 축제에서 행사를 주관하는 것은 왕이 아니라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1780년 무렵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왕실에서 약간의 너그러움을 베푼 것도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그러나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절망하고 왕비를 미워했다. 혁명 기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최소한의 양보도 하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뜻은 곧 루이 16세의 뜻이고, 그것은 '자비'의 메시지였지만, 머지않아 1785년부터 두 군주는 이미 기울어진 왕권을 바로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치는 구두변론과 논쟁, 그리고 공포정치에 내맡겨졌다. 이런 무질서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편과 마찬가지로 간청과 더불어 온건과 선의라는 개인적 노력으로 대응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루이 16세는 8월 10일 비극의 날 직전에 쓴 편지에는 폴리냑 공작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비는 마음을 다스려 건강을 돌보고 있습니다." 가장 고약한 방법으로 배반당하고 모욕을 당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적들을 비난하거나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용서하려면 신 앞에-고결함 그 자체인 왕의 영혼 앞에-그리고 자신의 영혼 앞에 무릎을 꿇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보았고 들었지만, 다 잊어버렸다." 이것은 국왕과 의회가 베르사유를 떠나 파리의 튈르리 궁으로 간 뒤 1789년 10월 6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한 말이었다. 그보다 앞서 '로앙의 목걸이 사건'때는, "나는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선행을 해서 복수할 거야"라고 말했다. 체포와 죽음으로 이어진 왕과 왕비의 권위 실추는 '자비'에 의해서만 평가된다. '자비'의 눈으로 보는 가장 자연스러운 부분이 바로 그들 서로간의 사랑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가장 순수한 상태의 사랑으로 활기를 되찾는다. 재판 과정에서 보인 그녀의 오만한 태도는 그녀가 받은 모욕감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녀는 수레에 실려서 파리 시내를 가로질러 단두대에 오를 때에도, 그런 불명예스러운 죽음이 하나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경쾌하고 도도했다. 이 책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감금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왕세자비와 왕비로서의 삶을 각각 내면적 성찰을 통해서 돌아볼 수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일생에 대해 총괄적으로 조명해 보기 위해서는 앙드레 카스텔로가 쓴 전기를 참고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사소한 이야기까지도 상세히 소개하는 가장 충실하고 생생한 전기이다. 제1부·죽음의 대기실 콩시에르즈리로 1793년 8월 2일 한밤중, 탕플 감옥 근처에는 선술집에서 나온 행인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갑자기 말의 갈기와 머리에 이어 기마병과 말의 엉덩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한밤중에 국민병과 만나는 것을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기마부대가 경찰마차 한 대를 호위하고 지나갔다. 모두들 반짝반짝 윤이 났다 군화와 검들이 번쩍이고, 기마병들은 말위에 말뚝처럼 꼿꼿이 앉아 있었다. 파리 경찰대원의 검정색 제 복은 어둠 속에서 윤곽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들은 어디로 가는 거지?" "두고 보면 알겠지." "애국파들일까?" "저것 봐, 저게 전부야. 뭐가 뭔지 모르겠군." "도망치는 게 좋겠어." 며칠전부터 파리 혁명정부와 파리 지부는'세번째 자유의 종'을 예고했다. 그 종은 또 한 번 소용돌이를 일으킬 예고였다. 1973년 9월 7일 의 법에 따라서 헌병들은 사람들을 불시에 침실에서 끌어내 ,콩시에르즈리나 그밖의 다른 어떤 감옥으로든 데려갈 수 있었다. 끌려간 사람들은 '반혁명 용의자'로 지목되고, 언젠가는 혁명재판소를 거쳐 처형되었다. 혁명재판소는 그들에게 그들 자신은 알지도 못하고 예상치도 못했던 죄목을 뒤집어씌웠다. 순식간에 목숨과 재산을 빼앗긴 이 반혁명 용의자들은 각계 각층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었다. 파리 혁명정부는 그들의 성향과 거동을 면밀히 추적해 왔다. 시기 적절하게 프랑스를 떠날 수 없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남의 눈을 피하기는커녕 자신의 신분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귀족들. 근거 없는 불안을 조성하고 다니거나, 또는 전투에서 싸운 업적을 증명할 수 없었던 군인들이나 공무원들. 약탈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된 하층 계급의 무산자들. 혁명을 한몫 잡을 기회로 이용하며 물건들을 사재기하는 장사꾼들. 자유를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자유를 위해서 일한 적도 없는 사람들. 생각도 판단력도 있지만 결코 행동을 하지 않거나, 고민을 즐기지만 공화국의 희망을 전파시키는 일에는 조금도 기여하지 못하는 사람들. 그외에도 용의자들은 많았다. 변함없이 주인에게 충실한 하인들, 시민 헌법에 선서하지 않은 성직자들, 애국적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시민들. 시민병 복무를 거부하거나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국가를 위태롭게 한 모든 자들. 이 시대의 정치 철학은 단순했다. '공포정치'만이 이제 막 출범한 '공화국'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 프랑스는 외국의 독재정치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자체적인 독재를 시작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콩시에르즈리로 이송하기 위해서 탕플에 기마부대와 삯마차를 급파한 사람은 파리 시민군 장교인 프랑수아 앙리오이다. 앙리오는 상태르가 루이 16세의 처형때 맡았던 역할을 이어받았다. 상태르는 포부르 생 앙투안의 사업가였는데, 1789년 이후 혁명에 적극 가담, 왕의 가족들이 감금되어 있는 탕플 감옥의 간수로 임명되어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안내하는 영광을 누렸다. 그리고 파리 시민군 대장에 이어, 1793년 3월 17일에 방데 폭동 진압을 지휘했으나 진압에 실패하자 카름므 감옥에 투옥되었다. 그 후 10월 9일 , 로베스피에르 실각으로 석방되어 정계에서 은퇴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즉 카페 과부의 경우 앙리오가 단두대로 안내하는 역을 맡을 것이다. 낭테르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앙리오는 처음에는 공증인의 서기, 다음에는 파리 입시 세관원이 되었고 꿈에도 그리던 우두머리가 되기 위해 열심히 일했다. 그는 절대로 속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으며, 후작처럼 얼굴에 분을 바르고, 로베스피에르 파처럼 넥타이를 매고 조끼를 입고 다녔다. 1789년 7월 12일, 앙리오는 바리케이드에 불을 지르는 소요 사태를 목격하고 입시 세관의 서류들을 몽땅 불 속에 던져 버렸다. 이 왕가의 관리를 보며 눈이 휘둥그래진 시위대에 뛰어들어 앞장을 섰다. 앙리오는 방화죄로 체포되어 비세트르 감옥에 갇히지만,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마라가 그를 구해 준다. 앙리오는 1792년 8월 10일에 과격공화파의 우두머리가 되어 그해 9월의 학살사건에 참가했다. 그리고 1793년 6월, 파리 시민군의 임시 총사령관이 되어 국민의회에 반대하는 과격공화파와 자코벵 파 중에서도 극좌파인 에베르 파의 소요, 즉 지롱드 파 우두머리를 제거하도록 자극했던 소요를 지휘했다. 그가 의회에 과격공화파와 시민군의 대표로 나타나자, 적어도 과격혁명파 진영에서는 그를 온건공화파 지롱드 당의 음모에 대항한'조국의 구원자'로 간주했다. 에베르의 열렬한 지지자였던 그는 1794년 3월 에베르가 처혈될 때에는 무사히 살아남았다가 1794년 7월 28일,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당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앙리오의 개혁과 이미지에 걸맞게, 그날 밤 왕비를 깨우기 위해 탕플을 방문한 사람들은 버릇없거나 흥분한 사람이 아니라 타협적인 관리들이었다. 그들 중 한 사람인 장 밥티스트 마리노는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그는 여러 부서의 직원들을 웃길 줄 알았기 때문에 자칭 '직업적 익살꾼'이었다. 마리노는 감옥에서 부유한 죄수들의 너무 빈약한 식사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하는 공제 조합을 만듦으로써 그들을 살맛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둘은 음식점 주인인 장 밥티스트 미코니와 니콜라스 마리 앙드레 프루아뒤르였다. 이들 세 사람은 1794년 6월 17일에 반역죄인의 표시로 붉은색 셔츠를 입고 단두대에 오른다. 그들은 국가의 대표이자 국민의 '아버지'인 로베스피에르를 음해한 죄로 기소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탕플에서 콩시에르즈리로 이송하도록 명령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앙리오가 파리 혁명정부는 사회의 무질서와 만연한 부패로 탕플이 마치 면회를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드나드는 방앗간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7월 13일에 일어난 샤를로트 코르데이가 마라를 암살한 사건은 민중을 자극했다. 사형집행 조수는 군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면서 샤를로트 코르데이의 잘린 머리의 뺨을 갈겼다. 신문들도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마라의 추종자들은 모두 혁명일간지들의 우두머리로서 그를 추모하고 '오스트리아 여인'의 피를 마라의 제사에 발칠 것을 요구했다. 앙리오가 보낸 이들 세 명의 파리 혁명정부 관료들 앞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포에 질려 몸을 떨었다. 혹시 그녀를 암살하러 온 건 아닐까? 천만에! 일어나서 바른 자세를 유지해야 해. 누군가가 국민의회의 포고령을 읽었다. 단어 하나하나가 총알처럼 충격적이다. 국회가 카페 과부의 재판을 알리는 명령이었다. 루와이얄 부인과 엘리자베스 부인은 각기 그들의 어머니이며 올케인 마리 앙투아네트를 따라가길 원했지만, 그들에게 그런 호의는 베풀어지지 않았다. 간수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을 뒤져서 손거울, 금 머리핀, 두 개의 하트 모양과 이니셜이 새겨진 종이, 랑발 부인의 총상화, 그리고 그 외의 다른 두 부인의 초상화를 빼앗아 갔다. 간수들 몰래 마리 앙투아네트를 멧돼지 가죽으로 만든 작은 장갑 속에 아들 사진이 들어 있는 목걸이와 손수건과 심장이 약해질 때 슬 각성제 한 병을 숨겼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서른일곱 살에 생을 마감했다. 아직 긴 잿빛 머리는 너무도 아름다웠지만, 얼굴은 까칠하고 창백했으면 날시가 더운데도 불구하고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예전에는 그렇게 아름답던 눈에도 핏발이 섰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눈은 그녀의 말처럼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듯했다. 간수들은 그녀가 옷 갈아입는 것까지 지켜보았다. 그것이 또 그들의 의무이기도 했다. 그녀의 의견을 물을 필요조차 없다. 얼마 전부터 그녀는 탕플에서 자신의 왕비가 아니라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처럼 처신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죽음과 더불어 그날그날의 평범한 생활속에서 배운 또 한 가지 처세술이 있다면 그것은 자존심을 버리는 것이었다. 더구나 간수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진실한 모습을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들의 머리 속에는 비방문들 속에 그려진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풍자그림들로 가득했다. 탐욕스럽게 보이는 커다란 입, 냉혹한 눈, 화장을 너무 진하게 한 뺨, 삐죽 내민 입, 너무나 교활한 표정, 찡그린 얼굴, 추잡스럽게 노출시킨 앞가슴, 상반신을 뒤로 젖힌 거만한 자세, 허리춤에서 마치 대바구니처럼 흔들거리는 폭넓고 무거운 치마···. 마리 앙투아네트는 작별의 순간, 눈물도 흘리지 않았고 소동도 피우지 않았다. 그녀는 열다섯 살밖에 안 된 자신의 딸을 끌어안으면서 용기를 잃지 말고 고모인 엘리자베스 부인을 어머니로 여기면서 말 잘 듣고 잘 모시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버지의 목소리와 말을 회상했다. 죽음에 대해서, 영원한 삶에 대해서 아버지는 마치 에수인 것처럼 그녀에게 말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버지가 당부했던 모든 것을 정확히 이행했다. 항상 책을 읽고 기도하고, 타의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될 경우 적에게라도 선행하라. 성실하게 선행을 한다는 것은 곧 해야 할 일을 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에게 잘 한다는 것은 하늘에 대한 믿음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누이 엘리자베스 부인에게 자신의 어린 딸과 파리 혁명정부가 시몽이라는 제화공에게 맡겨 놓은 어린 왕 루이 샤를을 부탁햇다. 그러는 동안 딸인 루와이얄 부인은 이제 더 이상 어머니를 보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넋이 빠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급한 볼 일이 있는 사람처럼 자리를 떴다. 그녀는 자신을 끌어안고 놓아 주지 않을 손들을 피하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았다. 간수가 마리 앙투아네트의 서류를 뒤적이고 석방령에 싸인을 하는 동안, 그녀는 탑 아래에 멈춰 서서 기다렸다. 거긱에서 나올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쪽문의 디딤돌이 위로 높이 솟아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해 문턱에 이마를 부딪쳤다. "아프시지요?" "오! 아니에요. 지금 그런 건 문제도 안 되지요."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리 혁명정부의 관리들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투명하게 맑은 8월의 밤하늘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별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녀는 이것이 '지옥'에서 하는 마지막 말이라는 것을 알았을까? 그녀는 그 분위기에 도취됐다. 센 강 위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새벽 세시, 마차가 콩시에르즈리 안으로 들어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첫 번째 쪽문을 통과했다. 거기에서도 탕플에서철머 커다란 문 속에 작은 문이 박혀 있었다. 이 여죄수가 이번에는 고개를 숙였다. 구불구불한 복도로 접어들기에 앞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경비실에 앉아서 기다려야 했다. 그녀는 한동안 보살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태로 혼자 남아 있었다.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타인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녀는 몽상에 잠겼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믿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탕플 감옥에서 그녀를 탈옥시키려고 시도했던 미코니이다. 그날 저녁은 모든 일이 신속하고 용이하게 그리고 그녀가 놀랄 정도로 공손하게 진행되었다. 1793년 7월 3일에 일어났던 일과는 정반대의 분위기였다. 7월 3일 저녁, 국민의호로부터 또 하나의 체포령을 가지고 사람들이 황급히 도착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아들을 빼앗아 가기 위해 온 것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란스러움과 불빛에 질려서 떨고 있는 아이와 헌병들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소리쳤다. "날 죽이고 아이에게로 가시오." 헌병은 예의를 갖추어 명령문을 읽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다시 소리쳤다. "얘는 어린애예요. 그 애에게 필요한 것은 엄마예요. 얘는 아직 순진한 어린아이라구요."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 곁에서 사는 즐거움을 누릴 권리가 있다. 아이를 가족 없이 버려 둘 수는 없다.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한다고 비난할 수는 없다. 자기 아이의 존재와 아이에 대한 사랑만이 죽음을 눈앞에 둔 어머니를 진정시킬 수 있다. 그날 밤, 마리 앙투아네트는 숭고했다. 그녀는 흐느끼면서 아이의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그녀는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곧바로 헌병들은 아이의 침대로 달려들었다. 그들은 루와이얄 부인과 엘리자베스 부인을 위협하여 왕세자에게 옷을 입히라고 명령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발버둥치자 간수들의 큼직한 손이 그녀를 제지했다. 그녀는 아직 아들에게 말할 기운은 남아 있었다. "오, 내 사랑하는 아들, 우리는 헤어져야만 합니다. 제가 당신 곁에 없더라도 당신의 본분을 잊지 마십시오. 하느님을 잊지 마십시오. 당신을 사랑하는 이 에미도 잊지 마시고, 부디 착하고, 참을 줄 알고, 정직한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축복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아이는 탕플 감옥의 간수이자 제화공에서 카페 왕가 자녀의 가정교사로 승진한 시몽의 집에서 왕이 쓰던 방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는 3일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바닥에 누워 있었다. 한 달 동안 매일 왕비는 아이가 탑 위로 올라올 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 테라스 위쪽으로 차양이 빙 둘러쳐져 있었지만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의 윤곽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는 금발의 사내아이의 모습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좋다. 그녀는 아들이 놀러 나올지도 모르는 정원을 갈라진 벽 틈으로 내다보려고도 했다. 그것도 소용이 없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탕플 감옥에서는 열쇠 보관자들만이 음식을 공급해 주고 자물쇠를 확인하기 위해서 왕비의 방에 접근했다. 엘리자베스 부인과 루와이얄 부인이 잠자리를 돌보고 방 청소를 하고 왕비의 시중을 들었다. 하루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경찰이 찾아왔다. 그녀는 그에게 엄숙하게 법령을 상기시켰다. "국민의회는 항상 위대하고 정의로운 국가가 왕의 가족들을 보살피도록 규정짓지 않았나요." 궁지에 몰린 경찰은 기꺼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오스트리아는 당신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당신의 가족에게 돌려보내는 것이 올바른 정치입니다. 당신을 죽이거나 오래 감금하는 것은 공화국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공화국의 기초를 위태롭게 할 것입니다." "비엔나에서는 내가 튈르리 궁에 속해 있던 사람이라는 사실 외에는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오. 나의 가슴은 내 아이를 잃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소. 내가 영원히 아이들을 만날 수 없다면, 나의 마지막 소원은 왕과 다시 만나는 것뿐이오." 왕비는 또 베르트랑 바레르의 방문도 받았는데, 그는 공안위원회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제안을 하러 온 것이었다. 바레르는 그녀에게 그녀의 조카인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편지를 쓰게 할 생각이었다. 끼리끼리는 통하는 법이다. 공화국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공화국에 대항할 전쟁을 게획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를 떠나 보낼 여러 가지 구실을 찾아낼 것이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 쓰기를 거절했다. 바레르는 화를 냈다.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었소? 정말 거절하는 거요? 좋소, 안녕히 계시오." 콩시에르즈리에 날이 밝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전히 간수의 사무실에 이웃한 부속 건물 속에 있었다. 말하자면 하수구에 해당하는 이 장소는 곰팡내와 변소 냄새와 쥐오줌 냄새가 코를 찔렀다. 리샤르 부인이라는 여간수가 왕비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리샤르 부인이 큰 열쇠꾸러미를 쥐고 동굴 같은 감옥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쥐구멍 같은 독방이나 공동침실로 가지 않았던 아주 드문 예가 바로 퀴스틴 백작인 아담 필립 장군이었다. 그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한 후 준장으로 임명되었고 삼부회에서 귀족 대표로 뽑혀 1789년 혁명에 가담했다. 라인 지역 군대의 사령관으로 스피르, 워름스, 메이앙스, 프랑크푸르트에서 차례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뒤무리에의 배신과 패배로 퀴스틴의 군대는 브륀스비크 공작의 군대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났다. 1793년 5월 13일, 파리로 돌아온 퀴스틴은 북부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지만, 콩데가 항복하고 메이앙스를 빼앗긴 후, 반역죄로 기소되어서 8월 28일 단두대에 올랐다. 8월 4일, 퀴스틴은 방을 옮겼고 그가 있던 방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들어갔다. 예전에는 회의실이었던 그 방은 넓고 좋았다. 변호사들이 그곳에서 자신들의 변호할 피고인들을 접견하던 곳이었다. 8월 1일 오후에 인부들이 그 방의 문을 더 튼튼하게 고치기 위해 왔었다. 인부들은 완전히 썩어 버린 벽돌 바닥과 벽 위에 흐르는 습기를 걸레로 닦아냈다. 야전침대, 식탁, 의자 두 개가 그 방에 있는 가구의 전부였다. 아침 여섯 시 무렵 현병의 감시를 받으며 마리 앙투아네트는 문이라기보다는 녹으로 뒤덮인 커다란 고철 덩어리 문을 통과했다. 그녀 앞에는 사방으로 막혀 있는 복도가 있고 총을 멘 부동자세의 간수들이 서 있었다. 1789년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온통 간수들에 둘러싸여져 지냈다. 어떤 간수는 그녀를 격찬하는가 하면 어떤 간수들은 분노하면서 욕설을 내ㅃ었고 그녀의 죽음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복도에서 일종의 협곡 같은 구덩이 앞을 지나갔다. 바로 그곳, 지하 2미터 되는 곳에 미결수 대기실이 있었다. 그곳에는 격리된 사람들이 벽에 등을 기대고 웅크리고 있는 독방들이 있었다. 미결수 대기실에는 특히 쥐들이 많았다. '이곳 쥐들이 얼마나 물어뜯기를 좋아하는지 당신은 상상도 못할 거다.' 어떤 죄수가 이런 낙서를 해 놓았다. 허풍이 아닐까. 그녀는 바닥이 온통 가마니로 뒤덮인 감방들을 몰래 둘러보았다. 쥐들은 여러 겹 쌓인 채 납작해진 가마니들이 싫증이 났을 것이다. '죄수들의 배설통에서는 악취가 풍긴다.' 아침만 되면 간수들이 그것을 비워 주고, 죄수들을 밖으로 내보낸다. 감옥의 안마당은 지붕이 있는 어두운 복도로 되어 있기 때문에 대낮에도 불을 켜야 했다. 그곳의 유일한 빛은 우정이었다. 거기에 우정이 없다면 고독과 공포뿐일 것이다. 안마당의 한쪽 면과 위쪽에는 방들로 통하는 미로가 있다. 그곳에서 죄수들은 독방생활을 할 수 있다. 그들이 침대를 하나 쓰려면 한 달에 15내지 27리브르씩을 내야했다. 1794년에 콩시에르즈리는 '파리의 가구 딸린 1급 호텔'로 간주되었다. '귀부인'으로 정중한 대접을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안내받아 간 곳은 무척 어두웠지만, 급수대가 있어서 주변은 소란스럽고 사람들이 끊임없이 왕래하는 곳이었다. 후에 그곳은 의무실이 된다.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의무실에서 건강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가옥의 모든 병약자들은 이곳을 피했다. 의사들은 더러운 침대에 두세 명씩 포개져 있는 환자들을 실어 나를 말들을 위해 탕약이라도 지어야 할 판이었다. 시체를 치우는 것으로 충분하다. 산 자들은 악마가 알아서 돌볼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의무실 오른쪽으로 나 있는 네 개의 쪽문을 지나갔다. 왼쪽에 예배당이 있고 그 다음에 그녀의 방이 있다. 가운데가 뚫린 널빤지 칸막이로 막혀 있는 그방은 천장이 낮고 사방 약 5미터 정도의 넓이다. 한 쪽에는 총칼로 무장한 헌병들이 밤낮없이 감시하는 방이 있고, 반대편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이 있다. 그녀의 방 한 쪽 밑에 앞뜰로 향한 창문이 있고 그 초라한 방의 바닥에는 벽돌이 깔려 있었다. 왕비는 벽돌의 붉은 가루로 신발이 더러워질까봐 조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너무 지쳐서 이제는 온갖 피곤한 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이 감방이 더 이상 짜증나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장소에 익숙해졌다. 그녀는 삶과 죽음은 거울놀이라는 생각을 하자 삶에 대한 욕망조차도 생기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소파로 옮겨 앉았다. 한 달 동안, 간수들은 줄곧 같은 사람들이 왔다. 그들은 프랑수아 뒤프레슨과 장 질베르였다. 그들은 성실했다. 그곳에 줄곧 머물면서 여죄수를 감시했는데 잠시도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면서도 그녀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처신했다. 일년 전부터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활은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불행에 대해 감상적으로 떠벌리지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무기력과 모욕감, 심지어는 잔인함속에서 궁핍하게 사는 법을 배웠다. 그런 점에서 탕플에서의 루이 16세는 그녀에게 좋은 본보기였다. 그는 그녀에게 고통을 이기는 좋은 방법인 희생을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간수인 리샤르 부인은 '귀부인'을 안심시켰다. 벽에는 찢어지긴 했지만 프랑스 왕가의 가문인 백합으로 가장자리가 장식된 낡은 액자가 걸려 있었다. 리샤르 부인은 벽걸이도 걸어 주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돼서 붉은 별돌가루가 날리는 바닥은 그녀도 어쩔 수가 없었다. 1793년 8월의 무더운 어느날, 햇빛이라고는 전혀 들지않는 앞뜰에 한 줄기 노란 불빛이 번쩍였다. 이 앞뜰의 한가운데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돌 한 개를 발견했다. 거기에서 생 루이가 배급을 주고 있었고, 간수들은 음식과 꽃을 팔았다. 죄수들은 급수대 주변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작은 물컵을 내밀었는데, 그것은 물을 마시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뺨과 목덜미와 눈과 손을 적시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차례로 속옷을 적셔 곰팡이의 시큼한 냄새를 털어냈다. 마리 앙투아네트도 다른 죄수들과 함께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채광 환기구멍 근처에는 두 명의 남자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문팔이들의 외침을 들었다.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도록 누군가가 배려한 것이리라. 그리고 거기에는 이런 가혹한 시련에 그녀가 순응할 수 있게 해주는 무엇이 있었다. 혁명기의 신문기사에는 모두 추악한 냄새가 났다. 간수들이나 죄수들도 왕비가 이런 글을 쓴 사람들을 어떻게 참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기자들은 한편의 드라마를 조작해 내고 그녀의 재판과 죽음의 공포를 애견하는 글을 써댔다. 1793년 8월, 에베르가 발행하는 '페르 뒤쉐슨'의 영향력을 '르 루지프'나 '르 프랑크 앙 브데트'가 추월했다. '르 루지프'는 파 드 칼레의 국회의원인 아르망 브누아 구프로이가 설립한 것으로, 루지프는 구프로이의 철자 순서를 바꾸어서 만든 이름이었다. 구프로이는 매일 '콧수염 장군 퀴스틴'의 머리를 요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두대에서 '그를 숨바꼭질시키자'라고 말햇고, 방데에서 '맹수 사냥'을 하자고 했다. 그리고 과격 공화파인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잔인하고 질투심이 많은 여자로 묘사했다. '그녀는 평등의 목걸이를 써볼 때 더 평등해질 것이다. 그것은 로앙의 목걸이만큼 비싸지도 않다. 가난한 부인이 된 그녀는 카페 왕가의 사람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죽은 왕을 따라가고 싶어한다..... 처음부터, 카페 왕가는 콧대가 너무 높은 여자를 데려왔다. 자! 머리를 숙이시오. 머리를 낮추시오, 카페 왕가의 부인이시여. 당신의 찡그린 얼굴을 펴주고 당신의 우리를 더 이상 조롱하지 못하게 막아 주느 것은 단두대뿐이다.' '프랑스는 5백만 인구로 충분하다.' 구프로이의 글은 이런 식이었다. 그때 프랑스 실제 인구는 2천 5백만이었다. 10월 29일, 지롱드 당원들이 재판 때 베토벤의 오페라 '피델로'에서처럼-특히 다음날 아침에 호송차에 실려서 단두대로 가야 할 사람이 있을 경우-콩시에르즈리의 죄수들은 저녁에 노래를 부른다. 노래가 유일하게 허가된 합법적인 항변이었다. 사형 선고에 대한 반응도 가지각색이다. 어떤 사형수는 '내일이면 끝장이군'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가 하면 다른 사형수는 벌써 목이 달아난 것처럼 파랗게 질려 버리기도 했다. 또 어떤 사형수는 고약해진다. 눈에 독기를 뿜으면서 무언가를 물러뜯으려는 듯 입을 씰룩거렸다. 그러나 누군가가 노래를 시작하면 모두들 조금씩 일종의 최면상태로 빠져든다. 완전한 전복 현상이다. 유죄 선고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이 즉흥 합창곡이 당연히 밟아야 할 수속 절차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젊음과 운명 사이에, 그리고 자신들의 삶과 자신들에게 부과된 죄목 사이에는 별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을 느끼면서부터 위안을 받는다. 1793년 8월까지만 해도 콩시에르즈리는 도둑과 암살자들의 감옥이었으며, 그런 사람들은 기껏해야 4백 명 정도로 그들 사이에 우호관계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감금당한 왕비에 대해서 알기 위해 라퐁 도손은 시중드는 주변 사람들을 조사했다. 이들은 극도로 쇠약해진 마리 앙투아네트를 정상인처럼 대했다. 그들은 왕비에게 호의나 친절을 베푸는 것이 발각되었다가는 자신들도 당장에 감옥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을 돕기 위해서 간수인 리샤르 부부는 하녀들을 두었다. 어떤 하녀들은 왕정 복고와 7월 군주제하에서도 아직 살아 있었다. 연대기 작가들은 양로원에서 숨어서 지내는 이들을 종종 찾아가서 인터뷰했다. 그녀들 모두 왕비를 보살폈고 모두들 그 여죄수와 아주 잘 지냈다고 한다. 왕비는 하녀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말을 걸곤 했고 하녀들 역시 친절히 답했다. "그러나 간수들은 우리에게 좀더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주의를 주었지요. 우리가 쫓겨나면 그 자리에는 고약한 간수들이 올 것이라고 했어요." 8월 2일부터 9월 11일까지 왕비에게도 일반 죄수들과 같은 규칙이 적용되었다. 리샤르 부부의 친척이며 절도죄로 선고를 받아 복역한 적이 있는 장 피에르 바라셍이 연락병 노릇을 했다. 쥐잡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바라셍은 왕비와 표현 방법이 정확히 같을 수는 없었다. 그는 본의 아니게 실수를 했다. 콩시에르즈리에서 바라셍은 속된 말을 썼고 사람들은 그의 출현을 재미있어 하며 얼이 빠져서 구경했다. '꺼져'라고 하면 죄수는 자기 방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좋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노란 거 있어?'는 돈 가지고 있냐는 뜻이다. '부풀려 주지'는 바라셍이 구타하겠다고 위협하는 말이다. '네 지폐 가져가'는 다음날 아침을 위해서 고소장을 저녁에 가져가야 하는 죄수에게 작별 인사를 하는 방법이다. 바라셍은 기요틴을 일반 죄수들의 교수대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기요틴은 사형 집행인과 그 조수나 다름 없었다. 왜냐하면 불평도 하소연도 없이 그곳으로 걸어가야 하니까. 아침마다 바라셍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변기를 비우고 방청소를 하고 냄새를 없애기 위해서 노간주나무 열매를 태웠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바라셍 앞에서도 간수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그것이 그녀의 무기였다. 8월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식사 시중은 로잘리 라모를리에르의 도움을 받으며 리샤르 부인이 들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많이 먹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주는 대로 다 먹어야 했다. 그녀는 아이들을 빼앗기고 감금되어 있어 신경쇠약까지 걸렸지만, 단 한끼도 거를 수가 없었다. 국민의회가 그녀를 쇠약해지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혁명재판소 앞으로 불려 나가서 자기 변호를 해야 할 사람에게 악취가 풍기는 물과 유동식을 먹일 수는 없었다. 특히, 그녀가 단두대로 가기 전에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리샤르 부부는 카페 과부에게 이틀에 한 번씩 야채와 과일을 곁들인 닭고기 요리를 꽃장식을 곁들여서 대접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식사가 담겨 나오는 은박접시에 칼로 '그리스 문자'를 잔뜩 새겨 놓았다. 그녀로서는 그것이 글을 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녀에게는 펜도 연필도 금지되었다. 칼과 접시를 빼앗기자 그녀는 몰래 감추어 두었던 핀으로 벽에 글씨를 새겨 넣었다. 그녀는 뭐라고 썼을까? 그것은 시누이가 가르쳐 준 기도문들로, 저녁에 혼자 남았을 때 앞뜰의 보안등에서 나오는 희미한 불빛에 비춰 보며 다시 외워 보고 싶은 것들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또한 1789년 여름에 왕세자가 죽은 이후 자신의 온갖 비탄의 심정을 글로 썼다. 그녀는 남편이 그랬던 것처럼 불행 속에서 신의 자비를 구하고 싶었다.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면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왔다.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하느님이 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도 마지막 순간까지 참을 수 있는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했다.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큰 고민거리였다. 밤낮없이 바빠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악몽에 시달렸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벽걸이를 풀어서 생긴 굵은 실과 이쑤시개 두 개를 가지고 레이스를 떴다. 몇 주 후에 그녀는 딸을 위한 작은 작품을 하나 완성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또한 될 수 있는 대로 과부의 옷차림답게 옷에 조각을 대서 입었다. 옷의 가장자리를 꿰매고 검정색 원피스와 갈갈이 찢어진 새틴 망토를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는 친절한 하녀의 도움이 필요했다. 속옷 상태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는 큰 걱정거리였다. 그녀는 너무 빨아서 가장자리 올이 풀어지고 헤진 세 벌의 내의를 보관하기 위해서 종이 상자를 하나 부탁했다. 나쁜 징조였다. 하혈이 계속되었다. 그녀가 조금만 더 살았다가는 더 나올 피가 없을 것 같았다. 리샤르 부인과 로잘리는 그녀에게 속옷을 몇 개 더 가져다 주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간수들이 카드 놀이할 때, 페티코트 밑으로 몰래 갈아입었다. 간수들이 알았다면 그녀를 웃음거리로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할 일 없는 사람들은 하찮은 일에도 즐거워하는 법이니까. 저녁마다 할 일 없는 간수들은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그녀를 감시했다. 그녀는 간수들의 입장을 이해했다. 그들이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웃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여겼다. 그녀는 야간등의 희미한 불빛 아래 간수들이 카드 놀이에 열중하는 동안 잠옷을 갈아입었다. 감옥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흘러가는 세월이 변화시키는 것에 마침내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 채광 환기창에서 하루가 지는 것을 엿보고, 바깥에서 감시하는 간수들의 검은 그림자를 보았다. 그녀는 리샤르 부인이 가져다 준 작은 손거울로 채광창을 통해 들어오는 빛을 반사시키곤 했다. 그녀는 누워 있을 때가 많았지만, 그것을 게을러서가 아니라 불필요한 투쟁을 포기하고 신의 자비에 모든 것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걷고 싶었지만 다섯 발자국 이상은 걸을 수가 없었다. 계속 왕복을 하면 현기증이 났으므로 오히려 그냥 앉아있는 것보다 건강에 해로웠다.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리에 앉아 바닥에 있는 벽돌을 응시했다. 시간에 따라서, 이 벽돌들은 부드러운 빛을, 또는 눈부신 빛이나 불꽃 같은 붉은 빛을 발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보는 것은 단지 착시현상일 뿐이며, 그 본질은 폐쇄된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갑자기 깨달았다. 그녀는 트리아농을 머리 속에 떠올렸다. 곧게 뻗은 가로수 길, 붉은색 대리석으로 된 게단, 눈부신 작은 숲,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에 쏟아지는 깜빡이는 불빛.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질책'하는 것처럼 보였다. 공화국은 그녀의 활동을 금지시켰다. 그녀의 권위를 훼손하고 실추시키려는 의도였다. 그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옷을 입는 순간, 긴 머리를 손질하는 순간, '바람을 쏘이기 위해' 호흡하는 순간, 자신의 사랑했던 죽은 자와 산 자들을 -예를 들어, 그녀의 어머니, 아이들, 남편 그리고 브뤼셀에서 어떻게 하면 그녀를 구할지 골몰하는 페르젠-다시 보는 이런 순간이 더욱더 소중했다. 사실 두려움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연스런 감정상태였다. 자신의 운명을 예측키 어려운 상황에서 그 감정을 그녀는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만 이런 고통이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신의 은총에 자신을 맡겨 마음을 평온히 하는 것뿐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을 감시하거나 시중드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뇌를 절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 여자들은 모두 아이들을 가진 사람이거나 아이에 대해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 중에 아이가 있는 부인들은 항상 아이들 이야기로 말을 걸었다. 누군가가 남편 이야기를 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렇게 말했다. "내 남편은 절대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제 영원히 행복할 거예요." 그러나 아이들 이야기만 나오면 그녀는 온몸을 떨면서 실신해 몇 시간씩 깨어나지 못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따금 열흘 정도씩 하인들과 차츰 수다스러워지고 있는 관리인 미코니 외에는 아무와도 만나지 않고 지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갑자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갇혀 있는 다락방의 문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것은 분명 파리 경찰대원이 온다는 신호였다. 그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판사들 앞으로 데려갈 것이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판사들의 성급하고 무례한 질문에 답변하느라 진땀을 흘릴 것이다. 그러면서도 너무 말을 많이 해서 자신을 사랑하고 도와주었던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무능하고 무지하다고 믿을 만한 증거를 판사들에게 보여 주지 말아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자신이 비난받는 점들, 다시 말해서 종종 상식을 벗어난 중상 모략에 대해서 판사들은 자신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판사들은 벌써 20년 전부터 이 오스트리아 여인을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도로 비천하게 만들어 놓을 비방문을 작성해왔던 것이다. 그건 아무래도 좋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미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생의 종말에 이르렀다는 유일한 증거는 얼굴을 붉히지 않고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녀가 거만한 마음으로 그렇게 했다면 어딘가 뻔뻔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런 수치심 없이 담담히 자신과 대면했다. 그녀가 자기 자신의 이름으로 나쁜 짓을 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서 존재해 본 적이 없었다. 여제의 딸, 왕세자비, 왕비, 죄수로 살아온 그녀의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에 적응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막간의 여흥도 휴식도 없는 여배우에 불과했다. 예기치 않은 상황에 부딪힐 때도 기껏해야 어린아이 같은 반응을 보이거나 갓난아기처럼 놀라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일이 벌어지자 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그녀는 다시 태어나야 했다. 이제 감옥에서 그녀는 홀로 과거를 회상하며 신의 존재와 마주하고 있다. 자신의 개성은 무시된 채 지내야 했던 왕비로서의 운명을 생각해 보곤 했다. 때로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 건방진 태도로 비웃으면서 벗어나려고 애썼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자신에게 강요되는 의무를 따랐던가? 우선 그녀의 어머니 마리 테레즈 때문이었다. 마리 테레즈는 오스트리아의 여제이며 보헤미아와 헝가리 국왕의 왕비였다. 이 풍채 좋고 영향력 있는 부인은 오랫동안 왕실의 명령에 순종하는 모범을 보였고 넓은 방들을 금으로 장식하고, 추가 달린 화려한 괘종시계, 또 벽난로에서 꺼져가는 숯불, 팔걸이가 있는 큼직한 안락 의자들을 좋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멋부리는 법도 가르쳤다. 유행을 창조하는 것은 여제로서 대중을 깜짝 놀랄게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내 옷, 나의 머리를 보라, 그러면 너는 거기에서 가장 인기 있고 가장 선망의 대상이 되는 장신구, 심지어는 이 땅에서 내가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나타내는 상표까지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열다섯 명의 형제 자매와 함께하는 소란스런 환경에서 보냈다. 그녀는 그들 가운데 가장 어린 축에 들었기 때문에 귀여움을 독차지했고 인형놀이의 대상이었다. 이런 젊은 사람들 속에서는 자유롭게 지냈지만, 여제와 있을 때는 자제할 줄 알았다. 마리 테레즈는 일상 업무를 보는 두 명의 대신들이 있는 자리에서 딸을 접견하곤 했다. 여제만큼 마리 앙투아네트를 잘 구슬리는 사람도 없었다. '자신의 앙토니아'를 칭찬하고 나서 풍만한 가슴으로 딸을 꼭 끌어안아 주는 것은 마리 테레즈가 자신의 딸과의 접견을 효과적이고 신속하게 끝내는 한 방법이었다. 아이는 웃으며 다정하게 키스를 하고 다시 놀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도망치곤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게도 사춘기가 찾아오고 여성적인 몸매로 변화를 보이자, 마리 테레즈는 딸에게 여성의 본질과 품위 따위에 대해서 쉬지 않고 가르쳤다. "신이 네게 우아함과 부드러움과 온순함을 한껏 불어넣어 주신 것은 네가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축복을 내리신 거다." 열두세 살의 '앙토니아'는 자신의 세계를 기쁘게 받아들일 줄 알았고 공손하고 우아하게 말할 줄도 알았다. 누가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춤을 잘 출 수 있을까? 무용수 노베르가 일부러 그녀에게 춤을 가르치기 위해 파리에서 왔다. 그녀가 어린 시절에 배운 음악선생 클루크의 영향력과 힘을 그녀보다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 사람이 누구인가? 나중에 파리에서 그녀는 '이피제니'와 '오르페'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오스트리아 왕녀로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당연히 외국어를 배워야 했다. 이태리 시인으로 마리 테레즈의 후원을 받는 메타스타즈로부터 우선 이태리어를 배웠는데, 말 배우기 자체보다는 이태리 노래 배우기에 열중했다. 독일어와 불어의 경우, 여자 가정 교사인 브랑데이스 부인과 레르쉔펠트 백작부인이 최대한 재미있는 교수법으로 가르쳤다. 하지만 여선생들의 이런 지나친 배려는 불행하게도 마리 앙투아네트의 학습을 진전시키지 못하고 말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히려 그 교수법에 길들여져 게으름을 피웠다. 가정교사들이 연필로 텍스트를 쓰고 나면 마리 앙투아네트가 잉크로 그 위에 다시 썼다. 따라서 그녀는 문체와 철자법에 약했지만, 연극을 하면서 느끼는 즐거움과 낭독 연습 덕분에 풍부한 어휘와 언어의 정확성, 세련된 재치, 마법에 가까운 대화 기술을 배울 수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너무 능숙하게 대화와 논쟁을 이끌어 가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의 어머니는 신중하라고 주의를 주곤 했다. "너무 호기심을 갖지 마라. 나는 그것이 가장 염려스럽구나. 평민들과 너무 친하게 지내는 것도 피하고, 모든 사람에게 우아하고 품위 있게 그리고 상냥하게 대답해라. 네가 원하기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거절할 줄 알아야 한다." 프랑스 왕세자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에 앞서 이루어졌던 외교적 흥정에 대해서 앙투아네트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적절한 시기에 케사르의 대제국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부유하고 가장 인구가 많은 왕국 사이에 예정된 합의된 이 결혼은 그녀에게 일방적으로 통고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엔나를 떠나 온 1770년 4월 21일은 그녀가 만 14세 4개월 되던 때였다. 57대의 마차가 이 환상적인 여행 행렬을 뒤따랐다. 그 여행에는 또한 왕궁의 '프시케'를 모시고 가기 위한 옛날 옛적의 기사들과 왕비의 옷시중을 드는 부인들까지 최대한 동원되었다. 시골에서는 양치기들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도심에서 부르주아 게급의 화려함과 만나게 될 왕관 쓴 '비너스'를 위해서, 독일에서의 행렬은 왕세자비가 신 앞에 기도를 올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수도원에 종종 머물렀다. 프랑스에 도착하자 또 다른 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는 기쁨에 들떠서 은밀히 엄청난 행사를 계획하고 있었다. '인도식'이 5월 7일에 거행되었다. 그 행사는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위치한 섬에 있는 집에서 열렸다. 입구는 독일 쪽으로 나 있고 출구는 프랑스 쪽으로 나 있었다. 한 시간에 걸친 연설, 국경을 나타내기 위해 설치한 테이블 위에서의 계약서 서명식, 복잡한 의전 절차를 마치고 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영토에 들어서기 전에 두 개의 방을 통과했다. 때로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천진난만함이 돋보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수행원들을 떠나 두 명의 위원들 사이에서 근엄하게 말하고 있는 노아이유 백작의 마중을 받았다.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의장 시녀가 될 노아이유 백작부인의 품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안내하고 충고를 해 주며 모든 면에서 안내자와 기둥 역할을 해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람을 잘못 보았던 것이다. 노아이유 부인은 충동적인 것을 싫어하고 예절을 존중하는 사람이었다. 노아이유 부인은 곧바로 균형을 잡고 똑바로 섰다. 이번에는 약간 거리를 두고 서서 왕비의 옷 시중을 들 시녀들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소개했다. 이 오만한 부인들은 루이 15세의 죽은 왕비 마리 레슈친스카의 시중을 들었던 신분높은 미망인들이었다. 그 다음에 오스트리아의 '프시케'는 프랑스 왕실의 '님'을 만나기 위해서 스트라스부르에서 콩피에뉴로 여행을 계속했다. 왕세자비가 지나는 곳마다 군중들이 열렬한 환영을 보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시 눈을 의심했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같은 축제의 도시로 들어갔다. 온갖 아름다운 꽃들로 뒤덮인 개선문 아래를 통과했고, 밤에는 불꽃놀이로 대낮같이 밝았다. 교회마다 종을 울려 댔고, 깃발들이 펄럭였으며, 팡파레가 울려 퍼지고, 북소리도 요란했다. 오후에는 갖가지 전람회에서 온갖 형태, 온갖 상표의 집기들을 선보였다. 연설, 축시, 서약, 어마어마한 식사 등에 대한 묘사는 생략하기로 하자. 오랫동안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말을 사용하는 탓에-비엔나로부터 2만 킬로미터 이상 된다-행렬에서는 동물, 마구들, 바퀴기름, 달군 쇠 그리고 태운 뿔 냄새가 진동했다. 1770년 5월 14일 슈와젤 공자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성공적으로 콩피에뉴 숲가에서 왕세자비를 맞이할 첫 번째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것은 당연했다. 슈와젤은 비엔나와 베르사유 궁정에 이 결혼이 유럽을 구제하고 더 나아가서는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애쓴 사람이었다. 귀청이 터질 듯 요란하고 매력적인 찬가들을 트럼펫과 오보에로 연주하자 왕세자비가 탄 꽃장식의 황금마차가 멈췄다. 루이 15세는 이 매력적인 소녀가 나타나자마자 반해 버렸다. 수줍고 다소곳한 이 어린아이가 왕의 발치에 무릎을 꿇자, 왕은 소녀를 얼른 끌어안고 키스하고 쓰다듬어 주었다. 루이15세 곁에는 열다섯 살의 마르고 창백하고 뭔가 어색해 보이는 키 큰 소년이 서 있었다. 소년은 너무 눈을 내리깔고 있어서 장차 자신의 아내가 될 소녀를 보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루이 오귀스트는 못생긴 편은 아니었지만 눈길을 끌 만한 매력 또한 없었다. 더구나 그는 마치 거기에 서 있는 것이 큰 고역인 것 같은 태도였다. 사랑해야 할 사람에게 실망했을 때 그 어느 누구에게도 불평을 할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5월 16일, 이들 소년 소녀는 랭스의 대주교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호화찬란한 축제에 참석했지만, 정말로 거기에 참가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에게는 신기한 음식들이 베풀어졌지만, 왕세자와 왕세자비는 마치 참석하지 않을 수 없는 향연에 참석한 그리스의 현인들처럼 접시가 비워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침에는 그들의 옷시중을 드는 사람들이 왕세자와 왕세자비를 둘러싸고 세심한 손길로 치장해 주었다. 청결해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성기 주변의 털까지 뽑아 주었다. 이들 커플은 어린 아담과 이브 같아야 했던 것이다. 자정에는 왕세자에게 왕이 직접 속옷을 건네 주었다. 왕세자비에게는 샤르트르 공작부인이 잠옷을 입혀 주었다. 외설스럽게 보일 수도 있는 이 광경이 천사들에 의해 영감을 받은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대주교는 부부 침대에 축복을 내렸다. 부부가 잠자리에 들자 커튼이 쳐지고 수많은 참석자들은 무릎을 꿇었다. 왕세자비가 아이를 못가지는 것일까? 왕세자가 불능일까? 이런 추측도 무리가 아니었다. 왕세자비는 결혼하고 7년, 왕비가 된 지 3년 째인 1777년에 나이 스물한 살이 되었지만 여전히 처녀로 남아 있었다. 날이 가고 해가 갔다. 궁정에서는 루이와 앙투아네트가 그렇게 서로 다른데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의문이 제기되었다. 침대조차도 같이 쓰지 않는 이들 부부 사이에는 어떠한 관계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1770년에서 1774년까지 프랑스 왕정은 무서운 내전에 휘말렸다. 의회가 제시한 '건의'에 반대한 '폐하의 일격'으로 인한 싸움, 체포되어 지방으로 이송된 국회의원들과 봉인된 서류와의 싸움이었다. 왕세자의 권력을 향한 첫 발자국은 으레 그런 혼란 속에서 시작해야 하는 것처럼 프랑스 왕정은 말려들었다. 왕권은 기본적인 두 가지 권력인 법의 보존과 집행권을 행사하려는 싸움꾼들과, 영향력 있는 법률가들과 싸워야 했다. 사법권의 손길이 왕의 통치권을 부수려 했다. 이런 소동은 침묵 속에서 추방과 은밀한 음모로 확산되어 불안을 조성했다. 1770년 12월, 외무차관 슈와젤은 샹틀루의 영지로 유배보낸다는 칙서를 받았다. 그의 영국에 대한 보복정책과 해군 재건계획이 국왕을 불안하게 했기 때문이다. 슈와젤 실각하기 전에 왕세자와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 테레즈의 공주 마리 앙투아네트의 결혼을 성사시켜서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와의 친선정책을 강화했었다. 슈와젤의 파면은 부당한 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그는 가족과 함께 샹틀루에서 친구들의 후대 속에 편하게 지냈다. 슈와젤은 축출한 일당은 대법관 모푸와 뒤바리 부인이었다. 당시 고등법원은 특권이 부연된 세습제 법원으로 이들의 활동은 국가에 해독을 끼치고 있었으며 과세를 방해하고 편견에 가득찬 판결과 고문을 자행하고 있었다. 세습 법관들은 과거에 누리고 있던 특권을 그대로 보유할 수 있는 새로운 봉건제도를 수립했다. 준엄한 조치가 불가피했다. 1771년에 모푸는 고등법원을 폐지하고 관직의 매매제도를 취소했으며, 사람들이 모푸의 고등법원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재판소를 창설하고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무료로 재판을 할 수 있게 했다. 1769년부터 재정적 권한은 테레의 손에 달려 있었다. 테레는 무자비할 정도로 냉엄했으나 유능한 재정가였다. 그는 연체된 정부 공채를 정리하고 지불기일이 임박한 공채의 상환은 연기했다. 그리고 염세의 증액, 곡물거래의 통제, 은급제도의 개선, 자본 수익에 대한 5퍼센트 세와 부동산 세의 신설 등 과감한 조치를 단행했다. 이러한 모든 조치는 타당하고 현명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모푸의 고등법원은 멸시당했고 테레의 조세제도는 불가피한 조치였으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국왕이 베르사유의 축전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하고 물었을 때, 재무대신 테레는 지불할 돈이 없다고 대답했다. 테레 신부는 최초의 '평등주의자'였다. 그는 부자들이 돈을 지불하기를 원했다. 이 불쾌하기 짝이 없는 대신은 단지 수학자일 뿐이었다. 슈와젤은 2와 2를 더해서 5를 만들기도 하고 3을 만들기도 했지만, 테레에게는 2더하기 2는 4일 뿐이었다. 이 신부는 채무 이자를 낮추고, 지대를 줄이고, 세금 부담을 없애고, 연금을 줄였다. 그는 세금 재조정에 착수해서, '세금이 턱없이 불균형하게 배당된 사람들'에게 세금을 내도록 했다. 테레나 모푸와 함께 루이 15세는 군주제가 정당하게 살아 남도록 하기 위해서, 가난하지만 정직한 대중에게 봉사하기를 원했다. 몇 년 동안 프랑스는 봉건 군주제에서 전제주의 국가로 넘어갔다. 왕은 궁정과 고등법원, 그리고 재산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멸시당했다. 왕에게 헌신하고 왕을 위해 싸워야 할 귀족들이 오히려 왕을 심판하려고 했다. 군주에 대항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귀족 계급은 제 3신분에게 싸움을 심판할 기회를 주었다. 루이 15세는 1774년에 65세 생일을 맞은 지 며칠 되지 않아 왕의 절대 권력에 크게 만족하며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미 그 왕권도 개처럼 죽을 준비가 다 되어 있었다. 루이 16세가 물려받은 세상에는 철학자와 법학자들이 자유와 평등만을 이야기하고, 부르주아들이 서민에게 아첨하면서 자신들의 재산을 늘리기에만 급급했다. 그리고 귀족들은 프랑크 족 최초의 왕조인 메로빙 가의 신비한 왕권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들의 조상을 들춰 내고 있었다. 그때 왕은 궁중 회의에서만 존재하고 있었다. 1768년, 루앙의 고등법원이 '기아 협정의 고발'이라는 제모의 유인물을 배포한 이후, 국민들은 프랑스 국왕이 저장해 놓은 곡식 때문에 빵 값이 올라갔다고 믿었다. 왕은 가난한 백성들에게서 빼앗아 간 것들을 가지고 대향연을 베푼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루이 15세는 파르코세르에서 '창녀들'과 미친 듯이 방탕에 빠졌고, 루이 16세는 아내의 트리아농 성을 꾸미는데 국고를 탕진했다. 정의와 자비의 정신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혹독한 겨울이 지나면 거리에는 좀도둑질로 연명하거나 혹은 왕이나 교회가 조금씩 내놓는 직선으로 살아가는 부랑자들이 우글거렸다. 루이 16세는 삶의 조건이 너무나 불평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리모즈의 행정 감독관이었던 튀르고를 1774년에 재무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튀르고는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멀리 가버렸다. 그는 '조급증 환자'였다. 그는 프랑스를 입헌구주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튀르고 씨는 나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그가 나이기를 원치 않소." 루이 16세가 말했다. 그리고 왕은 이렇게 덧붙였다. "있는 것은 잘 보이지만, 존재하지 않은 것은 머리 속으로밖에 볼 수 없소. 끝장을 볼 생각이 아니라면 위험한 시도는 하지 말아야 하오." 튀르고는 1776년 5월 12일에 해고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일을 꾸몄을까? 그녀는 국사에 관여하는 일을 스스로 자제하기 때문에 튀르고를 가까이 할 기회가 없었지만, 마침내 눈뜨고 볼 수가 없어서 바스티유로 보냈을까? 그러나 왕비를 용서해야 한다. 살기 어려운 시기에 그녀는 즐겁고 생기발랄하고 삶을 경박하게 즐기기만을 원했다. 그녀의 어머니 마리 테레즈가 그녀에게 보낸 편지들을 보면 한결같이 그녀가 유치한 장난이나 무도회, 어리석은 잡담에 몰두하고 가까이에 있는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폐쇄적인 생활을 한다고 비난했다. 사실, 왕비는 기분전환을 위해서 어쩔 수가 없지 않았을까. 1777년 17세부터 마리 앙투아네트는 큰 근심거리들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그런 불평들을 늘어놓아 남편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덕분에 남편은 7년 동안이나 계속 숫총각으로 지냈다. 그때 베르사유와 파리에는 우스운 노래가 퍼졌다. 모두들 궁금해하지. 왕이 못하는 걸까? 그는 정말 할 수 없는 걸까? 슬픈 왕비는 절망하네. 랄랄라. 한사람이 말하기를, 그는 세울 수가 없대. 다른 사람 말, 그는 들어갈 수가 없대. 또 다른 사람 말, 그는 연주용 플루트래. 랄랄라. 문제는 그게 아니야. 말하자면 왕의 음핵 때문이야. 거기서는 맑은 물만 나온대. 랄랄라. 그들이 함께 보내는 밤은 아주 드물었지만, 마를리에서 동침할 때마다 왕은 세우기만 하면 고통스러웠다. 소위 말해서 그의 도구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반밖에는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아내에게 상처를 내지도 출혈을 일으키지도 못했다. 하녀들은 의문을 가졌다. 그녀들은 왕이 속옷에 남긴 흔적을 확인했던 것이다. 왕은 이런 상태에 익숙해졌다. 아내가 질문을 하면 그는 이런 식으로 회피했다. "내가 너무 실수를 많이 해서 당신에게 할 말이 없다는 거 당신도 잘 알지 않소." 마리 앙투아네트 역시 난처했다. 그녀는 부부에 관한 이야기라면 할 말이 전혀 없었을까? 열다섯 살이 채 안 되어서 결혼한 그녀는 처음에는 밤마다 부부생활의 의무를 수행하려고 애썼다. 그것은 희생이었다. 왕의 도구가 그녀에게 고통을 줄 것이라는 것을 아무도 그녀에게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다. 그녀에게 성교는 일종의 고문이었고 그녀의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인 황제 요제프 2세가 파리에 왔다. 오빠인 그가 왕비에게 남편에게 좋은 애인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아이 엄마는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러 온 것이다. 루이16세가 수술을 받도록 결심하게 한 것도 바로 요제프였다. 메스르 한 번만 살짝 대고 나면 왕은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또한 왕 부부는 공적인 생활로 돌아갔어야 했다. 왕비는 파리의 무도회와 트리아농 궁의 정원과 친구들을 너무 좋아했다. 한편 왕은 대장간만 너무 좋아했고 책이나 대신들을 멀리했다. 두 사람은 왕의 행정권과 궁정에서의 축제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은 유보상태였다. 왕은 독립적 입장을 고수했고, 왕비는 예의를 강요하고 사생활이 없는 궁정을 혐오하고 있었다. 왕비가 축제에 가겠다고 승낙한 경우는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대중 속에 파묻힌 채로 참석하겠다는 조건하에서였다. 즉 밤에 가거나 오래 머물지 않고 잠깐 들르는 정도로 끝낸다는 것이었다. 샤토브리앙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줄리의 꽃장식'에서 순결의 상징인 코르네이유의 오렌지 꽃처럼 '저는 타고난 화려함을 갖고 있답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왕비는 확실히 젊고 활기차고 적극적인 성격을 문제삼지 않는 소그룹 모임만 즐겼다. 그녀는 사소한 잡담을 즐기고 음악의 밤을 열고 연극을 좋아했다. 이렇게 선택된 사교집단은 궁정생활에서는 이방인들이었다. 그러나 모든 중요한 일들이 거기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아첨꾼들은 그 모임의 일원이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러나 사교모임 내에서 낯선 자의 침입은 관례와 예절을 무시한 행동으로 간주되었다. 아첨꾼들과 모임에서 제외된 중요인사들은 왕비의 사교모임과 경쟁이 될 만한 다른 사교 모임을 구성했다. 거기에서는 왕비의 모임에서와 정반대되는 생활 양식이 형성되었다. 그들은 왕이 왕비에게 속아넘어가는 것을 가만히 보고만 있지 못하고 비웃었다. 그들은 또한 왕비의 비밀을 폭로한다고 떠들고 다녔지만 사실 왕비는 비난받을 가지조차도 없었다. 1777년부터 베르사유는 더 이상 아무 의미도 없었고 왕은 루이 14세가 단지 몇몇 반대자들에 대해서 '그 자들은 내가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오'라고 말했던데 비해, 루이 16세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베르사유로 가기 위해서는 먼저 트리아농에서 중책을 맡거나 호출을 받아야 했다. 1777년 8월 19일, 결혼 7년 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침내 어머니에게 이렇게 고백했다. "왕은 그 어느 때보다도 열성적입니다..... 저는 아직 임신한 것 같지 않지만, 적어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은 갖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대사 메르시 아르장토 백작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이유 없이 온갖 변덕을 부리고 있지 않나 의심하다가 이제야 좀 마음을 놓았다. "바라옵건대 곧 임신하게 되리라는 희망이 왕비의 생활과 도덕 개념에도 좋은 방향의 변화를 가져오리라고 전망되는 바입니다." 왕은 수줍음 때문인지, 어리석음 때문인지, 아니면 신중함 때문인지-아마도 세 가지 요인이 다 작용했으리라-왕비의 쾌락적인 생활을 방해하지 않았고 제동을 걸지도 않았다. 혐의가 될 만한 것들을 찾지 못한 탓도 있으리라. 또 정치적 생활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나머지 생활을 모두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든 것도 사실이다. 왕은 왕비에게 무조건 동의했다. 그는 아버지가 된다는 희망을 품게 해 준 사랑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는 아내에게 다이아몬드와 루비로 사랑을 표시했다. 그것으로 충분했을까?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 쾌락을 파티로 풀어왔던 왕비가 굳은 표정으로 침묵하는 것을 본 왕은 12월에 왕비의 궁전에서 카니발을 열자고 제안했다. "맨 얼굴로요?" "아니, 가면을 쓰고." "좋아요. 단, 전하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면을 쓰지 않고 들어와야해요." 어느 날 저녁 왕비가 졸고 있을 때, 왕이 평상복을 입고 들어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대기실에서 병정들이 배를 잡고 웃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프로방스 지방의 춤인 파랑돌이 시작되었지만, 춤추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었다. 그 사람은 사라의 신 큐피드로 분장한 일흔여섯 살의 모르파 백작이었다. 그의 아내는 비너스로 분장을 하고 팽이처럼 돌았다. 바다의 신 넵투누스로 분장한 마흔 여덟 살의 해군성 지휘관 사르틴, 머리에 지구 모양을 이고 가슴에는 미국 지도를 그리고 등에는 영국 지도를 붙이고 나온 쉰일곱 살의 외무대신 베르젠도 왔다. 중국인으로 변장한 수비즈 왕자, 트리통으로 분장한 리슐리외 수상, 골의 드루이드 교 승려로 분장한 비롱 수상, 회교국 대신으로 분장한 코세 공작은 각자 부인들과 미뉴에트에 맞춰서 춤을 추었다. 곡에 맞춰 뒤로 물러서는 다리들과 다가서는 발자국은 위험스러운 모험이지만 과히 심각하지는 않았다. 이 지루한 궁정은 몇 년 전부터 마리 앙투아네트가 나쁜 모습만 보여준 곳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악몽을 믿었다. 7년 전만 해도 이 사람들은 감히 그녀에 반대해서 큰 일을 꾸밀 수는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그녀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비난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그녀가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았고 말을 만들어 냈다. 이 말들은 끝없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불손함과 점잖은 질책, 심지어는 비열한 야유를 담은 비방문들에 미끼를 제공해 왔다. 1793년, 콩시에르즈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몽사몽간에 이 가면들을 회상했다. 그녀는 그들은 문 밖으로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들은 그녀를 포위했다. 이 가면들은 멀리서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그녀는 거기에서 그녀를 내려다 보는 적들을 보았다. 그녀의 재판관들은 혁명재판소의 판사들만 아니라, 궁정과 왕국에 오래 전부터 적대적이었던 사람들이었다. 몇 초 동안 그녀는 숨이 막혀서 손으로 목을 감쌌다. 마치 이 유령들, 이 거짓 증인들이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정신이 들었다. 종종 갑자기 경찰이 나타날 때면 감옥이 소란스러워지곤 했다. 그들은 떠들썩하게 들어와서 수색을 시작했다. 가구들을 쓰러뜨리고 침대를 뒤집어 엎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속옷을 정리해 둔 종이상자의 내용물들까지 다 쏟아 내고, 그녀가 감췄을지도 모르는 돈을 찾아 내기 위해 옷을 뒤적였고 바닥의 벽독들까지 들춰 보았다. 이런 수색은 점차 강화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이아몬드 반지, 손목시계, 결혼반지까지 빼앗겼다. 이따금 파리 경찰들은 건축가들과 함께 왔다. 그들은 막중한 임무를 위해 파견된 사람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철창이 견고한지 확인했고 혹시 곡괭이로 구멍을 내놓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며 벽을 여기 저기 두드려 보았다. 그 방의 열쇠는 누가 가지고 있었나? 안전을 위해서 그들은 2,3일마다 자물쇠를 바꿨다. 경찰들은 마침내 우스갯소리를 했다. "나가실 때는 당신이 들어오신 입구를 이용할 생각은 마십시오." 검사관들이 꼼꼼한 사람들일 때, 방문 시간은 길어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상상하기조차 힘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많은 음모들도 다 알아 냈다. 콩시에르즈리는 믿을 만한 곳이 못 되었다. 거기에는 죄수가 너무 많았다. 그에 반해 콩시에르즈리를 지키는 군인들은 숫자가 너무 적고 무기도 빈약해서 위협받기가 쉬웠다. "생각해 보면, 앙투아네트는 탕플에서 더 좋은 대우를 받았어." "체! 그 여자는 여기에 오래 머물지 못할걸세." 공안위원회와 혁명정부는 이제 카페 과부와 손을 끊고 싶어했다. 1793년 8월의 파리에는 떠돌이 귀족들이 우글거렸다. 그들은 굶주림 속에 허덕였기 때문에 뭐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일류 무법자들이었다. 또한 추방령을 무시한 채 살고 있는 법관이나 대상인 같은 부르주아들도 있었다. 그들은 왕정 시절의 특권을 아쉬워했다. 파산한 사람들도 있었다. 시민으로서의 미덕을 갖추지 못한 몽상가들과 괴짜들도 있었다. 혼란한 시대는 흥미와 정열과 특히 일시적 행운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더 없이 좋은 기회였다. 국민의회, 공안 위원회는 백성의 70퍼센트가 가난 속에 허덕이고 있다는 사실을 걱정하고 있었다. 30퍼센트는 온종일 연명할 식량을 찾아 헤맸다. 겨울이 되면 그 불행한 사람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껴야 했다. 옷도 식량도 집도 없었다. 밤이면 그들은 폐가에 들어가 아무데서나 쓰러져 잤다. 콩시에르즈리는 사람들이 자주 드나드는 장소였다고 간수들은 말한다. 그들은 이따금 방문객들이 오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하러 오는 것일까? 더러운 감방에 갇혀 있는 전 왕비를 신기한 동물처럼 바라보기 위해서? 그러나 이 방문객들의 목적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따금 똑같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다시 왔다. 그들 중에서 습격을 준비하고 있는 내통자들을 왜 가려 내지 못했을까? 그들은 자신들의 계략을 더 잘 숨기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콩시에르즈리는 숨을 수 있는 지하통로가 뚫린 낡은 궁정이다. 그 지하통로는 정확한 나침반 역할을 한다. 동서남북 네 갈래 길이 있다. 어떤 음모자가 앙투아네트를 이 통로중 한 곳에서 구출한다면, 그녀는 기꺼이 도망치겠지만, 다시 잡히고 말 것이다. 건축가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에서 벽난로로 쓰는 돌을 들어내기만 하면 지하통로로 통했다. 콩시에르즈리 감옥의 간수인 질베르는 장 밥티스트 미코니가 감방에 자주 들르는 것을 보았다. 미코니는 그럴만한 명분이 있었다. 그는 혁명정부의 구성원이고 경찰 간부였기 때문에 감옥을 감시할 의무가 있었다. 전직이 음식점 주인이었던 미코니는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한동안 콩시에르즈리에서 있는 카페 과부를 방문할 때-질베르가 본 바에 의하면-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다른 방문객들과 함께 몰래 왔다. 이런 은밀한 만남에서 비밀 이야기가 오고 갔을 것이다. 미코니는 밤에 사람들 눈에 띄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을 교외에 있는 공원에서 만났다. 그런 곳에서 그는 쾌활하고 개방적인 정치 모임을 갖곤 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격의 없이 마음대로 먹고 여자들을 희롱했고, 한편에서는 다른 여자들이 춤추고 노래했다. 잡담도 즐겼다. 미코니는 말을 많이 했다. 특히 왕비에 대해서 그는 할 말이 많았다. 어느 날 저녁, 소란떨기 좋아하는 또 한 사람인 피에르 퐁텐느라는 목재상의 집에서 미코니는 루즈빌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다. 밤참은 즐거웠다. 루즈빌의 여자친구인 소피도 무척 사교적인 여자였다. 진짜 이름이 조제프 구스인 루즈빌은 곡물과 주류 판매로 큰 부자가 된 피카르디의 한 농부의 아들이다. 1781년, 조제프 구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참가하기 위해 배를 탔다. 그리고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루즈빌로 이름을 바꿨다.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고, 그는 프로방스 백작의 시종 숙소에 왕후의 여행을 위한 선발 숙박 담당자인 푸리에로 들어가서 손쉽게 루즈빌 후작이 되었다. 1790년, 그는 매우 폐쇄적인 궁정 모임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을 엄청난 승진으로 간주했다. 과격공화파들은 그런 궁정 모임의 참석자들은 '왕당파'라고 불렀고, 이들은 위험에 처한 왕권의 진정한 수호자들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신문 조서에서 그것을 인정했다. 1792년 6월 20일, 군중이 튈르리 궁에 침입했을 때 루즈빌은 비밀 계단을 통해서 왕비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는 정예병사 30명의 도움을 받아 공포에 떨고 있는 아이들에 둘러싸여 있는 왕비와 시위자들 사이에 커다란 테이블을 놓아 직접적인 충돌을 막았다. 루즈빌의 대담성에 군중들은 위축되었다. 그는 소요를 가까스로 억제시켰다.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소리쳐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8월 10일, 루즈빌은 튈르리 궁에 다시 나타났다. 그 사실에 대해서 1798년에 그는 이렇게 썼다. '나의 몸은 끊임없이 왕비의 몸의 방패가 되어 왔다.' 루즈빌은 미코니에게 자신의 공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단지 비참한 상황에 처한 옛 왕비를 보고 싶으니 감옥에 면회를 가자고만 제의했다. 1797년, 루즈빌은 망명하는 대신 감옥에 들어갔다. 그는 그곳에서 1793년 9월 3일에 미코니와 마리 앙투아네트와 간수 리샤르가 받았던 신문 조서를 기록보관소에서 빼낼 수 있었다. 예심 초기에 간수 질베르는 재판소 관할 헌병대의 육군 중령인 뒤 메닐에게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썼다. '미코니가 카페 과부를 찾아온 마지막에서 두 번째 방문시에는 어떤 사람과 함께 동행했었는데, 전 왕비는 그 동행자를 보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사람은 나에게 자신이 전에 생 루이 기병대 소속이었다고 보고했다.' 곧이어 안전위원회는 두 명의 국민의회 의원을 임명했다. 그르노블 고등법원의 변호사였으며 국민의회 의원인 장 밥티스트 아마르, 그리고 세베스트르가 조사에 착수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자백시키기 위해서는 끈기가 필요했다. 그렇다! 그녀는 미코니가 데리고 온 방문객들 중에서 아는 얼굴을 보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두 번이나 왔었다. 그는 카네이션 한 송이를 가져왔고 눈짓을 하면서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발 아래에 떨어뜨린 카네이션을 주우세요, 금요일에 다시 오겠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치마 주름 속에 쪽지를 감췄다. 나중에 몰래 읽어 보았지만 그녀에게 유용한 말은 한 마디도 없었다. 단지 그가 흥분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저를 아껴주신 당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항상 당신에게 저의 성의를 표시할 방법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당신 주변 사람들을 위해 3, 4백 루이가 필요하시다면 다음주 금요일에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어쨋든 그것이 아무리 미친 짓이라 하더라도 그녀에게는 놓칠 수 없는 한가닥 희망이었다. 3, 4백 루이는 분명히 간수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들이 그 정도 액수에 눈을 감아 줄 것인가? 마리 앙투아네트는 질베르에게 그 쪽지를 보여준 뒤에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간수는 관심 있는 표정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핀으로 구멍을 뚫어서 쓴 루즈빌에게 보낼 답장을 그에게 맡겼다. 질베르는 리샤르 부인이 반대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는지 리샤르 부인에게 그 답장을 넘겼다. 수사관으로부터 그 펴지를 해독하라는 명령을 받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나는 철저히 감시당하고 있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글도 쓸 수 없다'라고만 답했다. 따라서 카네이션 수수께끼는 미해결로 남아 있다. 루와이얄 부인은 '회상록'에서 '매력적인 계획이었지만, 조직화하는데 실패한 정열이오, 몽상이었다.'고 표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은 후, 루즈빌은 몽마르트르의 채석장으로 도망쳤다. 그리고 미코니는 비싼 대가를 치뤘다. 그는 1794년 6월 17일 단두대에 오른다. 리샤르 부부는 파면되고 마들로네트에 투옥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즈빌과 함께 잠시 정상적이고 예의 바르고 품위 있는 세상으로 다시 복귀하는 환상을 품었다. 몇 분간 루즈빌은 왕비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쳤다. 왕비는 수사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기분에 대해 말하자, 그 방문자는 나에게 '당신은 감정도 없습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래서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깊은 상처를 받은 것 뿐이라고 대답했지요." 신문 조서를 읽고 난 안전위원회는 카페 과부가 '음모자들의 정열을'자극할 만한 내통자를 갖고 있다고 결론지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독방에 감금되었고, 이제 재판을 기다릴 것도 없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했다. 몽조이에 따르면, 탈출 시도는 또 있었다. 이번에는 간수들을 죽여야 했다. 만약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더라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자 중에서도 특히 감수성이 풍부한 여성'이었으므로 '이중의 살인 행위'를 거부했을 것이다. 루와이얄 부인은 다시 한 번 성공할 뻔했던 탈출을 언급했다. 왕비는 자신을 자유로운 바깥 세상과 갈라 놓는 공간인 복도를 달려가는데 성공했지만, 한 간수가-물론 돈으로 매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그녀를 통과시켜 주지 않았다. 한 영국 여인 샬로트 아트킨스 부인의 모험은 보다 확실했다. 월폴에서 태어난 이 부인은 39세로 영국 왕립 극단의 스타였다. 1779년 그녀는 에두아르 아트킨스 경과의 결혼으로 무대를 떠나 케터링햄홀 성에서 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에 싫증이 난 이들 부부는 여행을 떠났다. 여행도중 베르사유가 그들을 사로잡았고 그들은 이곳에 정착했다. 아트킨스 부인은 폴리냑 부인을 통해서 어떤 살롱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폴리냑은 그녀를 왕비에게 소개했다. 왕비는 차츰 아트킨스 부인과 가까워졌다. 1789년 아트킨스 부인은 베르사유를 떠나 릴로 갔으며, '프랑스의 연금 생활자'밀러디 샬로티라는 이름으로 파리 혁명정부에 신고했다. 그녀는 1792년 남편과 사별했다. 밀러디 샬로트는 릴에서 루이 드 프로테라는 한 멋진 장교 출신 기병을 만났다. 그러나 왕의 일가가 바렌으로 도망갔을 때 프로테는 자신의 군대를 떠나 브뤼셀로 가서 콩데의 군대에 합류했고, 아트킨스 부인은 영국으로 돌아가서 샤토브리앙을 만났다. 그녀는 샤토브리앙에게 옛 템플 기사 단원들의 지하묘소를 통해서 탕플 감옥에 있는 왕의 가족을 구해 내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루이 16세가 죽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지리에 갇히자, 그녀의 친구들은 모두 왕의 가족들을 구해 내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아트킨스 부인을 만류했다. 그래도 이 영국 여인은 파리로 돌아와서 경비원이나 간수와 흥정을 했고,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나서... 아마도 자신과 옷을 바꿔입자고 간청했던 것 같다. "두렵습니다. 당신은 나 대신에 단두대로 가는 수레를 타려고 하시는군요. 나는 나이고 왕비이므로 더 이상 그런 생각은 마시라고 명령하겠습니다." 그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렇게 말했다. 9월 11일, 파리 경찰당국은 그녀를 다른 지하 감방으로 이송했다. 그 방 역시 안뜰에서 두 발자국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그 방을 쓰던 약사에게 서둘러 방을 비워야 하는 이유를 납득시켜야 했다. 건축가, 석수, 목공, 자물쇠 제조기술자 등이 자르고, 톱질하고, 대패질하고, 쇠를 벼리고, 조립해서 가능한 한 가장 밀폐되고 방음이 잘 되고 안전한 방을 꾸몄다. 단지 십자형 유리창 하나만이 앞뜰 쪽으로 나 있었다. 그나마도 함석 지붕 때문에 다섯 번째 창살까지만 시야에 들어왔다. 나머지는 침투가 전혀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오른쪽에는 간격이 아주 촘촘한 철망이 있었다. 가운데에는 의무실로 가는 문이 있는데 이중문이었다. 복도 쪽으로 열리는 십자형 유리창은 벽으로 막혀 있어, 들어가려면 두 개의 문을 통과해야 했다. 하나는 두꺼운 나무로 된 문으로 두 개의 빗장이 질러져 있고, 다른 하나는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도록 되어 있는 안전빗장으로 굳게 잠겨 있었다. 앞뜰의 창문 아래에는 두 명의 간수가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외부 사람들은 물론 간수들에게도 출입이 금지되었다. 단한 사람, 죄수에게 식사를 날라다 주는 경비원만이 두 간수의 감시하에 하루 두 번 그 방에 드나들 수 있었다. 그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동맹군의 진격과 그들의 놀라운 성공에 한가닥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파리를 동맹국에게 개방하도록 하는 전쟁 이외에는 성난 군중을 물러나게 할 방법이 없었다. 1793년 7월부터 10월까지, 악셀 드 페르젠은 아낌없이 노력했다. 그는 프랑스 군대의 처지가 절망적으로 보인 만큼 더 자신이 있었다. "오 전쟁! 오 혁혁한 공로!" 프랑스 국민에게 1793년은 영웅적인 해로 간주된다. 프랑스는 국민이 분발해야 하는 시기마다 그때를 회상하곤 한다. 예컨데 1870년 스당에서 패전한 이후'국토방 위대'를 조직하기 위해서 그리고1916년 페텡 장군이 독일군의 맹렬한 공격을 제압한 베르덩 전투 당시 ,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1793년 여름 ,프랑스 공화국은 사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은날인 10월 16일 이 되서는 비로서 와티니 ,숄레,그리고 가을과 겨울동안의 군사 활동과 더불어 분위기가 되살아났다. 1973년 7월 국토는 전면 개방되었고,유럽 전체에 대항한 전쟁인 만큼 위험 부담이 컸지만 프랑스 공화국은 '전제 군주를 지옥으로'보내고'백성에게 구원과 자유를 .주기 위해서 전재 원했다 프랑스는 ,'유럽 전체가 부바다 .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세계적인 하나의 공화국을 건설ㅎ고자했다.브리소는 1792년 러시아와 라틴 아메리카를 '시유화 '할 생각을 했다 당시 퀴스틴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 군대는 마옌에 입성은 했지만 곧바로 프러시아의 +브륀스빅 장군에게 밀려서 철수하고 ,프랑스 장교들은 앞으로 더 이상 라인강을 넘지 않을 것을 약속했다. 1792년 8월 10일______ 전날밤부터 파리 각 구의 대표들이 시청사에 모여 ,'봉기의 코뮌'을 결성하고 아침에 파리 민중과 연맹군이 튈르리 궁을 공격한다. 국민의회가 국왕의 권리 정지를 선언, 보통 선거에 의한 국민공회의 소집을 결정했다.그이후 라 파이에트, 세자르 드 라투르 모부르, 뷔포 드 퓌지, 알렉상드르 드 라메트는 작스 테쉔 공작에게 항복하고 만다. 라 파이예트는 파리 제압에 실패하고 국외로 도피했으나 오스트리아 군의 포로가 되었다. 1793년 3월, 라 파이예트는 감옥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보다 더 나을 것이 없는 생활을 했다. 그는 두 명의 보초가 지키고 있는 지하독방에서 지내면서 이쑤시개로 편지를 썼다. 제마프 전투의 승자이며, 1793년 3월 18일 니어링덴전투에서 패한 프랑스 장군 뒤무리에는 오스트리아인들과 타협했다. 요크 공작은 1793년 7월 28일 발랑시엔에 있으면서, 구제도를 재건한 임시 정부의 법률하에 캉브레지까지 점령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페르피냥을 위협하고 님에서는 봉기가 일어났다. 전 국경에 걸쳐 침공당한 공화국은 또한 내부의 적들로부터도 공격을 받았다. 전국 95개 도 중에서 60개 도가 왕당파나 지롱드 당의 폭도들 손에 들어갔다. 8월 29일, 왕당파들은 툴롱을 넘겨 주고, 카프토는 가까스로 마르세유를 되찾았다. 사르디니아 사람들은 리옹을 향해 전진했다. 그곳에는 시가 혁명 당시 망명 귀족이었던 왕당파 프레시를 국민병의 우두머리로 임명했다. 파리 혁명정부와 과격혁명파인 산악당은 자신들에게 반대하는 지방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이상 도의심에 신경쓸 것이 아니라 반격을 가해야 했다. 그러나 우선 전쟁을 치르기 보다 패배를 쉽게 받아들일 굶주린 백성에게 공포정치를 통해서라도 인기 없는 사상들을 주입시키는 것이 급했다. 위대한 혁명의 날들은 한번 더 파리 시민들에게 그들이 취해야 할 행동을 명령하고 똑바로 행진하도록 명령했다. 1793년 6월 2일, 이 날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공포에 사로잡혀 의사당 앞을 지나간 과격공화파의 행진과 함께 '애국파의'날이었다. 그러나 보르도와 툴루즈에서 반혁명 세력이 득세했다. 마침내 1793년 3월부터 방데는 모든 공격을 격퇴했고, 공화국 군대를 초토화 시킬 작전을 감행할 예정이었다. 8월 2일, 마리 앙투아네트가 콩시에르즈리로 이송되자 오스트리아와 영국 군대는 힘을 합해서 파리를 짓밟아 버리기로 결심했다. 스위스와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을 뺀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동맹을 맺었다. 반격을 가할 결심을 했던 동맹국들이 왜 갑자기 번복하게 되었는가? 여러 국가의 군대들은 우수했다. 페르젠은 야영 부대들을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면서 보병대의 활기찬 걸음과 기병대의 묘기를 칭찬했다. 이 무수히 많은 군대들은 의심할 바없이 프랑스 군대를 깨부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군대의 집합체에서는 군 수뇌부 사이에 암투가 생겨나기 마련이다. 누가 제일 화려한 열병식을 하는가에 대해 경쟁이 붙었고 이런 필요없이 화려한 열병식은 전투 의욕을 약화시켰다. 게다가 이런 군대들은 평야 지대의 전투보다는 위험 부담이 적으면서 적을 쉽게 포위할 수 있는 요새를 더 선호했다. 왜냐하면 평야에서의 전투에서는 희생자가 많이나고, 제복을 더럽히기 때문이다. 결국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을 분할하기로 결심한 군주들은 전쟁의 목적을 모호한 상태로 방치해 두었다. 영국 왕과 오스트리아 황제는 프랑스 북부와 동부를 정복하기 위해 싸웠는데, 그들은 플랑드르와 피카르디를 서로 어ㄷ게 나누어 가져야 할지를 몰랐다. 스페인 왕은 루이 14세의 직계 후손이었으므로 자신의 영토를 고스란히 지키면서 프랑스의 절대군주임을 자처하고 나섰다. 아무튼 콩시에르즈리에서 왕비는 외국 군대가 대거 집합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곧 구출되리라는 것을 의심치 않았다. 그러자 자신의 예절과 타고난 기품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그녀는 감옥에서 시중들던 하녀인 로잘리 라모를리에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로잘리, 내가 나가면, 너를 내 방의 전속 하녀로 데리고 갈게." 먼 후일 로잘리는 1836년에 불치병 환자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1793년 8월, 파리에서 프랑스 국민들은 자존심이 상하는 큰 상처를 받았다.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가 합세한 독일군의 물결에 프랑스 국민들은 겁을 먹은 것이다. 병합 초기에 그들은 '파리라는 도시에 사형을 집행해서 완전히 파괴해 버림으로써 영원히 기억에 남을 본보기로 삼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이다. 이 말은 프랑스 국민들에게 잊혀지지 않았다. 그 이후, 파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바렌에서 왕을 알아보았던 인물인 장 밥티스트 드루에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지금이 바로 죄수들이 피를 흘려야 할 때입니다. 유럽에서 우리의 평판이 어떻든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사방에서 우리를 극악무도한 자들, 날강도, 살인자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우리의 미덕, 자제심, 철학 사상 따위가 무슨 소용입니까? 우리 백성의 행복을 위해서 살인자가 됩시다." 그레구아르 신부는 위대한 일을 실현시키고자 했다. 미래를 찬양하고 국제 연맹의 이념을 세상에 내놓았다. "국민들은 유대를 위해서 보편적인 도덕을 가지고 있소. 한인간은 인가에게, 한 국민은 다른 국민에게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오. 따라서 프랑스 국민은 자신의 영토를 점령하고있는 적과는 결코 화해하지 않을것이오." "당신은 여전히 승리에 도취되어 있군. 당신은 승리와 무슨 협정이라도 맺었소?" 어떤 반대자가 소리쳤소. "우리는 죽음과 협정을 맺었소." 베르트랑 바레를가 응수했다. 이런 말들에 현혹되어 넋이 나간 군중들 앞에서 흥분한 바레르가 계속해서 말했다. "왕당파들은 피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내통자들인 브리소, 마리 앙투아네트 같은 자들의 피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더 이상 불법적인 복수가 아니다. 특별재판소가 그것을 집행할 것이다. 당신들은 우리가 하는 이야기에 놀라지도 않을 것이다. 당신들은 극악무도한 자들이 감옥 속에서도 여전히 음모를 꾸미고 있고 우리의 적들과 동맹을 맺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당신들은 산악당을 섬멸하고 싶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산악당은 당신들을 깨부술 것이다." "혁명정부는 전쟁중이기 때문에 예외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1793년 7월 27일, 공안위원회에 들어온 로베스피에르가 이렇게 말했다. 8월에 대대적인 군인 모집이 원칙상 가결되자 위원회는 공병대위 카르노를 그의 파견 임지인 북군으로부터 부랴부랴 소환하여 군작전 지휘관을 맡겼다. 또한 그의 친구이며 역시 공병장교인 프리외르 드 코트도르에게 군수공장의 지휘권을 맡겼다. 그리고 카르노와 프리외르는 8월 14일 위원회의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파리 사람은 누구나 전쟁에 동원된 느낌이었다. 어떤 이들은 노동자가 되고, 다른 이들은 군인이 되었다. 8월 23일, 국민의외가 프랑스 국민의 '국민총동원령'을 선포했다.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간다. 결혼한 남자들은 무기를 만들고 식량을 운반한다. 여자들은 천막을 만들고 병원에서 봉사한다. 어린이들은 낡은 속옷들을 잘게 찢어서 붕대 만드는 일을 돕는다. 노인들은 광장에 나와서 병사들의 용기를 복돋우고 왕에 대한 증오심과 공화국의 단결력을 고취시킨다. 공공건물들은 병영으로 전환한다. 중요한 무기들은 적군과 직접 싸우는 병사들에만 지급한다. 국내에서 싸우는 병사들에게는 사냥총과 창칼을 지급한다. 튈르리, 뤽상부르, 전 루와이얄 광장이나, 엥발리드, 그리고 마르스 연병장에서, 파리는 공격적이고 방어적인 하나의 거대한 갑옷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폭약 전문가들이 투렌에서 초석을 발견하자 어느 곳에서든지 초석이 스며 있는 땅이나 성벽에서 초석을 추출해 내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정제공장들이 파리에 세워졌고 주건물은 생 제르멩 데프레 수도원에 있었다. 화약공장들은 구르넬에 있었다. 병력수는 남자만 60만에서 100만으로 불어났다. 큰 전투는 과격공화파 장군들이 지휘했다. 로시놀, 즈르당, 피슈, 오슈, 클레베, 마르소. 그들은 하나같이 농부나 노동자나 석수의 아들들이며 1798년에 하사였던 사람들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은 날인 10월 16일, 주르당과 카르노는 와타니에서 코부르를 무찌르고, 그들의 군대는 모베주로 들어간다. 숄레에서, 클레베와 마르소는 방데의 군대를 쳐부쉈다. 1793년 9월 2일, 한밤중에 공안위원회는 동원령이 내려진 파리에서, 혁명정부 대표들과 한자리에 모였다. 출석자 전원은 가까운 시일 내에 프랑스 군대가 승리할 것을 믿었지만 그것을 애국심 고취의 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공포 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2만 2천 5백 명의 반혁명 용의자가 체포되거나 체포될 예정이었다. 그들은 샹티이와 릴 아당에서 집단 수용되었다가, 머지않아 소리 소문도 없이 전원 처형될 것이다. 빈정대기 잘하는 에베르는 '페르 뒤쉐슨'을 통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우리는 과히 나쁜 일을 하지는 않았다. 귀족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그 증거이다. 그들이 이겼다면, 당신은 이 소파에 앉아 있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시 나쁘게 돌아갈 수도 있다. 장작에 불을 지피고 지롱드 당원들과 앙투아네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 그러면 사람들은 창가로 나와서 박수를 치고 환호하며 만세를 외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상 퀼로트의 진정한 축제가 될 것이다.' 재정 책임자인 캉봉은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공화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돈이었다. 앙투아네트는 아주 좋은 해결책이었다. 그녀를 동맹국들을 상대로 경매에 부치면 좋은 수입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에로, 바레르, 장 봉생탕드레는 반대했다. 왜냐하면 파리 시민들의 머리 속에 혁명재판소와 국민의회를 동시에 심어주기 위해서는 앙투아네트의 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루이 16세의 죽음은 국민의회의 몫이었다. 과부 마리 앙투아네트의 죽음은 파리 시민과 혁명재판소와 군대의 몫이 될 것이다. 따라서 유럽은 프랑스가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누구도 예기치 않는 충격 용법을 구사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어날지도 모르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에베르는 자칭 시인이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는 혁명이 실패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탄압을 예견했다. "모든 사람들이 당신들을 배신했소. 라 파이예트, 뒤무리에, 라마를리에르, 퀴스틴, 킬메느, 가라, 나 역시 나의 목숨을 지켜줄 좋은 계약이 있었다면.... 그러나 우리는 모두 죽을 것이오. 오스트리아인들이 우리에게 대사면을 약속하더라도, 우리는 도망치기 전에 잡혀 죽을 것이오. 당신들은 폭도들에 의해서 목졸리거나 칼에 찔려 죽을 것이오. 그렇지 않으면 재판을 받고 시역자들로서 능지처참을 당할 것이오. 다미엥은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지만, 우리는 단두대를 설치했소. 우리는 카페를 죽일 용기가 있었소. 죽음을 냉정하게 바라볼 줄 알아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웃음거리가 된다면, 우리는 무엇으로 영광을 되찾을 수 있겠소?" "아니오! 솔직히 행동해야 하오. 무엇인들 우리를 죽음으로 몰아가지 않겠소? 자존심이 필요하오. 엄청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복수를 위해서만 살아야 하오. 프랑스에서의 파괴가 도를 지나쳐 백 년 이백 년이 지나도 기억에 남을 수 있게 내버려 둡시다. 상 퀼로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둡시다. 그들은 우리의 적을 향해서 마지막 탄약이 다 떨어질 때까지 총을 겨눌 것이오. 그러나 앙투아네트의 죽음과 귀족 계급의 재산 몰수를 통해서 그들의 분노를 계속 유지시킬 필요가 있소. 이것이 내가 알고 잇는 전부요, 이것이 당신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나는 나의 임무를 다 한것이오." 에베르는 참석자들을 향해 냉소적인 시선을 던진 뒤 단호하게 등을 돌리고 나가 버렸다. 위원회의 위원들은 그 훈계를 충분히 이해했다. "푸키에 텡빌에게 빨리 연라기해서 우리와 의논하러 오게 합시다." 텡빌은 심각한 국면으로 접어드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는 군사 보고식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안심하라, 나는 서류를 검토해 보았다. 기소장의 소인으로 보아서 그보다 더 재미있는 소송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소송 절차에 들어가기에 앞서 배심원들을 새로 구성해야 했다. 배심원단은 중대사를 다룰 때마다 실질적인 총살 집행반 역할을 한다. 또한 판사 클로드 에마뉘엘 돕상을 몰아내야 한다. 그는 앙투아네트의 재판을 불안해한다. 그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다. '발의 가시를 제거하기 위해서'카페 과부를 독살시키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8월 23일의 '국민총동원령'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지는 못했다. 파리의 60만 주민의 절망과 굶주림 속에 계속 방황했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그들에게 심어 주었던 환상, 즉 자유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행복을 누리며 사는 꿈을 포기했다. 열정을 되살리기 위해서 상 퀼로트들은 애국단의 행진과 더불어 어떤 중요한 일을 계획했다. 노래와 트럼펫과 북, 그리고 총성에 섞인 경종의 소리가 울려퍼졌다. 열성적인 애국당원들이 행진을 하자 군중이 모여들었고 프랑스 국민의회의 권위적인 태도에 분노를 폭발시켰다. 그것은 가장 난폭하고 강압적인 소요가 되었다. 9월 4일, 파리 시민들이 공회 주변에 모여들었다. 건축 노동자들이나 무기제조 노동자들은 빵을 요구했다. 그들은 또한 부자들, 국민의 이익에 적대적인 사람들-원료를 매점하는 자, 투기꾼들, 돈놀이하는 자들, 사회법에 항의하기 위해서 일을 중단한 사업주, 가게문을 닫아 버린 장사꾼등등-을 쳐부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파리 혁명정부의 검찰관인 쇼메트가 군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우리의 잠을 깨워 주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편이지만, 우리들에게만 호소해서는 안 됩니다. 9월 4일의 군중 모임처럼 대중이 시청을 겨냥해서 동원된 적은 없었습니다. 의회를 점령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최소한 의회를 견제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의회는 혁명 세력의 극단적인 힘을 밀고 나갈 생각이 없는 국민의원들을 모두 반역자로 제거해야 합니다. 나 역시 가난했던 사람이오. 그래서 가난이 어떤 것인지 잘 압니다. 이것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적대적인 부자들의 선전포고입니다. 그들은 우리를 짓밟아 버리고 싶어하는데 그들에게 알려 줘야 합니다. 우리 자신의 그들을 짓밟을 것이며 우리는 그럴 힘이 있다고." 이튿날인 9월 5일, 쇼메트는 그의 군대가 집합한 것을 보았다. 군대는 모든 구역으로부터 모여들어서 튈르리 궁으로 쳐들어갔다. 의회에는 시위자들의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 오고... 그들은 의사당 앞에 나타나서, 군중들은 밖에 있고, 각 부서의 대표단만이 넓은 홀 안으로 들어갔다. 쇼메트는 지롱드 당원들이나 마레에게는 말을 걸지 않았다. 지롱드 당원들은 여러 가지 사건에서 살아남은 자들이다. 산악당만이 용감했다. 산악당만이 엄청난 사건을 꾸며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쇼메트는 경건한 말투로 산악당에게 일장 연설을 했다. "당신들, 산악당원들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입니다. 프랑스인들의 시나이 반도가 되시오. 분노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귀족 계급이 몰고 온 뇌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백성의 정의와 의지라는 영원한 법령을 던지시오. 백성의 소리에 흥분하고 가슴 설레시오. 아주 오랫동안 공공복지에 대한 애정에 억눌린 불꽃이 당신들의 가슴속에서 타오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격렬하게 분출시킵시다. 건강한 산악당이여, 화산이 되십시오. 뜨거운 용암이 악당들의 희망을 영원히 파괴하고, 여전히 왕권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가슴을 태워 버리도록 하시오. 신부들이여! 더 넓은 구역에 더 많은 자비를! 우리가 그들을 앞지르지 않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들과 우리 사이의 영원한 장애물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그들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지방의 애국자들과 특히 파리의 시민들은 지금까지 참을 만큼 참아왔습니다. 기만당했습니다. 정의와 분노의 날이 드디어 왔습니다." 9월 5일부터 콩시에르즈리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옥의 앞뜰에서 들려 오는 어떤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는 감옥의 차폐막 위와 창살을 통해서 흘러들어왔다. 공안위원회의 새 위원이 된 비요바렌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를 요구했다. 9월 10일 에베르는 자코벵 당원들에게 감옥에서 그녀에게 지나친 친절을 베풀었던 리샤르 부부의 체포를 요구하며,'리샤르와 그의 부인은 왕비를 탈주시키려 했으므로 유죄이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10월 3일 목요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민의회가 혁명재판소 앞으로 자신을 소환할 것을 알았다. 바로 그날 파리 혁명정부에서는 쇼메트가 '반혁명 용의자 체포령'을 발표했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의 눈으로 보면, 용의자는 쉽게 가려진다. 혁명에 가담하지 않는 자, 자신이 소속된 지부에 자주 나오지 않는 자, 또는 나오기는 해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인간의 행복을 믿지 않는 자, 그런 이야기를 듣고 웃거나 웃지 말라고 하면 웃지 않는 자. 다음과 같은 자들은 반혁명 용의자들로 간주한다. 군주제나 연방제 편에 있음을 자처하는 자, 공민정신의 보증서들을 거부하는 자, 국민의회에 의해서 정직당하거나 파면된 공무원들, 옛날 귀족이거나 망명 귀족의 친척, 생활 수단과 공민의 의무이행을 정당화할 수 없는 자. 체포령 발표를 외설스러운 여담으로 끝마치기 위해서, 쇼메트는 카페가의 아들, 즉 여덟 살짜리 루이 샤를에게 실시한 신문 조서에 관해 보고했다. 의회 앞에서 쇼메트는 샤를을 측은해하는 척했다. "어린 카페, 이 여덟 살짜리 불행한 아이는 벌써 몹시 부끄러운 죄악에 물들어 있습니다. 앙투아네트와 아이의 고모인 엘리자베스는 아이에게 은밀하게 그것을 가르쳐 왔습니다." 근친상간에 관한 고발은 진작부터 있었다. 1792년 10월 25일, 예전의 트루아에서 구두수선공이었고 혁명 이후 탕플감옥의 간수가 된 앙투안 시몽의 고발이 그것이었다. 1793년 9월 30일, '왕세자의 가정교사이자 구두수선공 시몽'은 에베르에게 편지를 썼다. 건투를 비네 나의 친구여. 자네에게 할 이야기가 있으니 어서 탕플로 와주게. 자네를 빨리 보고 싶네. 오늘 꼭 와주게, 나는 여전히 정직하고 용감한 공화주의자라네. 이튿날 에베르는 혁명재판소의 대표들 앞에서 시몽의 증언을 요약해서 전했다.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아들 사이에는 근친상간 행위가 있었소." 10월 6일, 특별위원회가 열리고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나 정당한 사람, 모든 권리를 가진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거기에는 파리 시장인 장 니콜라 파쉬가 있었다. 그는 예전에 카스트리 원수의 자녀들을 가르쳤으며 왕실 관리인을 역임한 바 있다. 모모로가 창안해 낸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어를 모든 공공건물에 쓰도록 아이디어를 낸 것이 바로 파쉬였다. 다른 당국자들도 신문에 참석했다. 안전위원회의 구성원이자 화가인 다비드, 파리 혁명정부의 검찰관인 쇼메트, 그의 검사대리 에베르, 탕플의 경찰관들, 행정 경찰. 조서에서는 루이 샤를이 '아이의 건강에 해로운 추잡한 행동을 하다가'시몽과 그의 부인에게 들켰다고 되어 있었다. '아이의 그런 습관을 자신의 어머니와 고모에게서 배웠다고 자백했다. 그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자신들 앞에서 그런 행위를 아이에게 반복시키고 재미있어 했다.' 그 이튿날인 10월 7일, 관계자들은 탕플로 갔다. 그들은 루이 샤를 카페의 누나인 열다섯 살짜리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를 신문했다. 샤를 로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녀가 동생과 함께 놀 때, 동생이 그녀의 몸에서 손을 대지 말아야 할 곳을 손을 대지 않았는지, 이불 위에서 동생과 이상한 짓을 하지는 않았는지, 그리고 그녀의 어머니와 고모가 동생을 그녀들 사이에서 자게 하지는 않았는지를 물었다. 소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다음에는 '자신의 말을 고집하고 있는'동생을 불러왔다. 조서는 '그들의 말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두 아이 중 하나가 진실을 은폐하려고 함'이라고 결론지었다. 아이들의 고모인 엘리자베스가 소환되었다. 공주였던 그녀에게 루이 샤를의 자백을 읽어 주었는데, 그녀는 대답하기를 거부했다. 그런 추악스러움은 자신과 너무나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렇지만 엘리자베스는 아이가 오래 전부터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었음을 인정했다. 자신과 아이의 엄마가 아이에게 몇 차례나 그 일로 꾸지람을 했었다는 것을 상기시켜야 했다. 이번에는 루이 샤를을 불러서 스스로 진실을 말했음을 맹세하도록 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의 어머니와 고모를 끌어들였다. 엘리자베스는 이런 비난에 대해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의심 받는 것을 피해야 한다고 믿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형에 집행되던 날 새벽 4시 30분경에 쓴 엘리자베스에게 보내는 유언장에서, 사람들이 어린아이에게 영향력을 행사했으리라는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라고 '현명한 말'로 회상한다. 나는 이 아이가 당신을 얼마나 괴롭게 했는지를 잘 압니다. 그를 용서해 주세요 아이의 나이를 생각해 보세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말을 아이에게 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었겠지요. 이 외설스러운 이야기를 퍼뜨리면서 에베르와 시몽은 각기 다른 목적을 추구하고 있었다. 에베르는 한번 더 마리 앙투아네트가 냉혹하고 무절제한 여자임을 입증하려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군림하던 베르사유 궁은 소돔과 고모라였다. 신들리고 사악하며 변덕스럽고 교활한 그녀는 당연히 골고다의 언덕에 올라야 하고 그런 악마의 머리는 잘려져야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시몽은 좀더 속물스러운 뒷궁리를 했다. 그는 국회의원의 봉급과 맞먹는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좋은 자리에 몇 달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다. 어린 카페는 교육을 잘못 받은 것이다. 따라서 좋은 가정교사를 두어야 하는데 그 적임자는 제화공인 시몽뿐이다. 자위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아서, 이 아이는 벌써 지성의 세계와는 거리가 먼 지옥으로 건너간 것이다. 좋은 선생인 자신이 이성과 애국심을 심어 주지 않으면 아이는 영영 그 나쁜 세계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시몽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려고 애를 썼다 1793년 10월 26일. 그러니까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은 지 열흘 만에 시몽은 탕플의 의회에서 자신의 피후견인 즉 루이 샤를이 폭로한 사실을 이야기했다. 말하자면 왕자는 어머니 마리 앙투아네트가 파리 혁명정부의 한사람과 내통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해 12월 3일. 시몽은 루이 샤를 카페가 '공화국의 안녕을 위한 중대사실'을 발표했다고 말했다. 그의 누나와 고모가 장작광 근처의 어떤 지점을 파헤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도주를 준비하기 위한 돈을 숨기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시몽은 1794년 1월 5일에 해고된다. 시몽의 권리 이양일인 1월 19일부터 1794녀 7월 28일까지 탕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바라스는 로베스피에르의 몰락 이후 탕플의 첫 방문자였을 것이다. 루이 17세의 수수께끼같은 죽음은 그의 사망 증명서가 시청에 등기된 1795년 6월 12일 이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탕플에서 죽은 아이는 어쩌면 왕의 아들이 아닌지도 모른다. 다른아이가 왕자와 대체되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의문을 반혁명 왕당파 우두머리 퓌이제이는 1794년 10월부터 윌리암 피트에게 알렸다. 1793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아들인 루이 샤를은 그를 완전한 과격공화파로 길들이려고 하는 시몽만의 포로가 아니었다. 그는 특히 유명한 국민의회 의원들의 포로였다. 쇼메트, 에베르, 로베스피에르, 바라스, 푸세가 차례로, 진짜 왕자든 대체된 왕자든 간에 왕세자를 세워 입헌군주국을 만들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1793년 7월에, 파리 시장인 파슈는 에베르의 말에 깜짝 놀랐다. 에베르는 이렇게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자를 부를 때처럼 '네, 나의 어린 왕이시여, 나의 사랑스러운 사람이여.' 에베르는 그 아이에게 진심으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나는 감옥에서 그 어린아이를 보았다. 그는 무척 아름답고 관심을 끄는 아이다. 그는 왕의 역할을 멋지게 해낸다. 그는 그저께 나에게 국민들이 여전히 불행하냐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그는 '그것 참 안된 일이군요'라고 대답했다." 진짜 왕세자를 적절한 시기에 되살리면 혁명의 혼동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한 좋은 구실이 될 수 있었다. 끔찍한 공포, 굶주림, 전쟁, 공포정치, 단두대는 그들 나름대로 한계가 있다. 언젠가는 과격공화파와 손을 끊고 질서와 국시와 인간의 도덕심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유럽에는 인정받기 위해서 프랑스는 용감하게 행동해야 한다. 전투에서 승리한 후, 프랑스는 왕좌에 어린 왕을 앉힐 것이다. 임시변통으로 내세운 루이 17세는 외국 군주들 앞에서 그들을 아주 안심시킬 만한 말을 하게 될 것이다. 콩시에르즈리에 갇혀 있는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 어떤 군주제가 성립되든 별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가 더 궁금했다. 오랫동안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비엔나에서 구원의 손길이 올 것을 기다려 왔다. 황제는 자신의 고모가 선량한 여자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와 루이 16세가 잘못을 너무 많이 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1780년 이후 유럽의 역사에서 일어난 중요한 사건이 바로 '혁명'이라는 것, 유럽의 도처에서 구제도가 재검토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들은 통치 방법에 변화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백성이 '한 마리의 사자보다 2백 마리의 쥐에 의해서 통치되기를 더 원한다.'는 것, 그런 식으로 새로운 권력이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프랑스 군주제는 도표 위에서만, 그리고 특권에 집착하고 있는 귀족 계층에게만 살아 있었다. 루이 16세는 왕국의 부의 원천인 부르주아 계층이 스스로를 위해서도 합법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가지기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시대 정신을 제도화하고 유지할 수 있는 대리인을 찾아야만 했다. 1793년, 냉철한 이성을 가진 정치인 프랑수아 2세는 통치 일년 만에 프랑스의 무정부 상태에서 교훈을 얻었다. 그는 흑해에서 망슈에 걸친 자신의 제국도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게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루이 16세의 처형, 그리고 곧이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 충격을 받은 프랑수아 2세는 자신의 국가를 강력하게 통치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귀족 계급과 교회를 강화하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자코벵 당원들을 가차없이 색출해 냈으며 행정부와 경찰과 회계감사를 강화했다. 황제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독일인들이 적은 지방에는 계속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프랑수아 2세는 사자의 얼굴을 한 왕에 속했다. 그런 왕들은 후회도 불명예도 두려워하지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방식으로든 싸움에 이긴 승리자에게는 불명예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콩시에르즈리의 좁은 방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끔찍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는 군대들의 이런 움직임을 간파했다. 이 전쟁에서 무엇을 바랄 것인가? 그녀의 목숨, 그녀의 해방, 그녀가 아들 곁에서 섭정자로서 다시 왕좌에 복귀하는 것? 천만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영국, 스페인의 군대들이 프랑스를 약탈하고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소멸시켜서, 유럽이 폴란드를 분할 점령해버렸듯이 나누어 가지고 말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오, 놀라운 일이다! 이 끔찍한 세상, 버텨 나가기가 너무도 힘든 이 세상을 왜 지켜보아야 한단 말인가? 화려한 세상에서만 살았던 그녀가 살아온 방식대로 죽을 수 있을 것인가? 1775년부터 1785년까지 다정하고 잘 웃고 감수성이 풍부했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즐거운 오락과 휴식 속에서 지내왔다. 왕비의 세상은 폐쇄된 세계였다. 유혹적이고, 음악과 연극을 즐기고, 단순하고, 목가적이고, 우아하고, 습관화된 왕권에 대한 몽상만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1780년 왕비는 카스트리를 해군성대신으로 임명하는 데 영향력을 행사했고, 얼마 안 있어 그녀는 육군성의 몽바레이를 세귀르로 대체시켰다. 이것은 왕비가 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친구를 까다롭게 골랐기 때문에 민심을 얻지 못했다. 왕비라면'모든 이에게 전부'가 되어야 하는데 그녀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만 결탁하고 깊이 빠져들었다. 탁월한 사람은 친구가 없는 것이 명예가 될 수 있겠지만, 평범한 사람은 친구가 조금밖에 없다는 것이 명예로운 일이 아니다. 1785년 8월 15일 '로앙의 목걸이' 사건 이후, 왕비는 난폭하고 냉혹한 프랑스의 여론을 보고 백성 자신에 대해서 아주 무례하고 흥분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반면 사람들은 왕비가 나쁜 친구들에 둘러싸여 있다고 판단했다. 그녀가 최고의 책임을 맡기고 엄청난 연금을 주어 가며 최고의 명예를 부여해 주었던 친구들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1789년 7월부터 사태는 분명해졌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하늘빛 유리, 황금의 꽃다발, 트리아농의 은빛 강물, 그리고 사교계의 우정 따위에 속아 살았음을 깨달았다. 파리로부터 한줄기 바람이 불어 왔다. 백성들은 감히 왕에 대해서, 그리고 더 나아가 왕비에 대해서 지배권을 주장했다. 1789년 10월 5일과 6일 사이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왕비는 흥분한 군중들과 마주하기 위해 발코니에 혼자 모습을 나타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희생되리라는 것을 예감했다. 왕은 여전히 왕비를 사랑했지만 그녀를 싫어하는 군중들의 혐오감을 무마시킬 수가 없었다. 1793년 8월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정신 속에서 페즈젠은 절망 속에서도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끈이었다. 자신의 안전만 걱정하는 이기적인 귀족들은 왕이 파리로 이송되자 곧 모두들 망명하거나 도주하고 말았다. 정말 충성스런 사람들만 남았다. 그들은 모두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용감한 사람 중 첫째가는 사람이 자르자예 장군이었다. 그의 부인은 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녀로 일한 적이 있었다. 오로지 왕비를 도울 생각으로 그는 안전한 코브렌츠에서 돌아와 어떤 희생도 치를 각오가 되어 있다고 알려 왔다. 1793년 4월부터 자르자예 장군을 통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마지막 충성스런 기사 페즈젠에서 '모든 것이 나를 당신께로 인도합니다.'라는 글귀와 함께 날으는 비둘기가 새겨진 밀랍 도장을 보낼 수 있었다. 페르젠은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왕비의 생각은 나의 가문을 kdrl시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날치를 비둘기로 착각했다. 게다가 열기로 그 흔적을 지웠지만, 나는 그것을 짧은 편지의 복사본과 함께 나의 금고 안에 간직하고 있다. 1793년 8월에 바렌에서 왕의 일가를 체포하는 데 공을 세웠던 국회의원 드루에는 국민회의에 의해서 북부군으로 파병되었다가, 오스트리아 군에게 체포되었다. 페르젠은 감옥에 있는 드루에를 면회하러 갔다. 드루에는 불평을 털어 놓았다. 쇠사슬을 너무 단단히 조여 놓아서 그의 손과 다리는 마비되었고 살갗이 벗겨져으며 감방은 너무 좁고 습하다고 했다. 드루에는 페르젠에게 애원했다. 그는 완전히 자유러워지는 못할지라도 적어도 자신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구류 상태와 맞먹는 조건에 잇게 해줄 것을 왕비의 가장 친한 친구, 페르젠에게 부탁했다. 그는 공치사를 늘어놓았다. "내가 콩시에르즈리에서 왕비를 보았을 때, 그녀는 볼품없는 야전 침대를 쓰고 있었습니다.왕비는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그 이유를 물어 보니까, 방이 낮은 곳에 있어서 습기가 차기 때문이라고 하던군요. 나는 곧바로 높은 곳에 있는 방을 마련하라고 명령했지요. 그래서 그 방으로 왕비를 옮겨드리고 좋은 침대와 담요를 두 장 갖다드렸습니다." 페르젠은 분명히 쉽게 속아넘어갈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드루에의 이런 친절이 순전히 꾸며낸 이야기 이야기일 것이라고 직감했다. 그렇지만 그는 죄수의 절망적인 상태에 충격을 받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도 이와 똑같이 감옥살이를 하고 있을 것이므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신속히 왕비를 구해 내야 했다. 페르젠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하기 위해서는 어디라도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중지되고 실현되지 못한 채 남게 되었다. 1793년 8월, 페르젠은 그의 옛 주둔지였던 발렌시엔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지휘하는 코부르 왕자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리고 브뤼셀에서 아랑베르의 왕자 라 마르크 백작을 만났다. 이들 두 사람에게 페즈젠은 똑같은 명령을 내렸다. 즉 창기병, 용기병, 경기병, 말을 타는 모든 정예군인을 소집하고, 기병부대를 파리로 보낼 것. 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수도 파리는 무방비 상태고, 말들은 부족하지 않았다. 창고에는 사료가 가득했다. 1783년 페르젠이 아메리카에서 돌아왔을 때, 파리에서 메르시 아르장토 백작을 알게 되었다. 이 백작은 대영주 같은 생활을 누리고 있었다. 그는 리슐리외 가의 거대한 저택-가구도 호화로운-에서 손님을 맞았다. 여름에는 셴느비에르에 있는 시골풍의 성에서 지냈다. 이 두 장소에서 손님들은 최고급 요리와 맞좋은 포도주를 대접받았다. 저녁 시간은 대사의 정부이며 오페라 극장의 유명한 스타인 로잘리 르베자르가 끌어들인 아름다운 부인들 속에서 지냈다. 메르시 아르장토는 손님이 없는 저녁에는 파리로 화려한 외출을 했다. 그의 단골친구들은 뒤포르 후작부인과 은행가라보르드였다. 그는 지위가 높은 사람들을 열심히 찾아다녔고, 언론인들과 연극배우들이 한 재미있는 말들을 자신의 재치를 과시하기 위해 알려고 애썼다. 그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머니, 마리 테레즈와 직접 서신 교환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파리 대사로 임명되었었다. 그는 술책을 써서 여제와 요제프 2세로부터 인기와 명성을 얻었으며, 마리 앙투아네트 곁에서는 자신이 도덕적 규칙과 올바른 행동 지침의 마지막 수호자임을 자처했다. 페르젠이 생각해 낸 파리로의 기마 여행은 당시에 오스트리아의 네덜란드 통치자인 메르시 아르장토 백작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페르젠은 고집을 부렸다. 아르장토는 이 원정에서 예상되는 위험이 한두 가지 아니라고 생각했다. 파리는 무방비 상태가 아니다. 농민 출신의 장군들이 있고, 성문마다 장애물이 있다. 콩시에르즈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도심을 가로질러야 하는데 도심의 구불구불하고 좁은 길들은 손수레들로 바리케이드를 쳐서 막혀 있을지도 모르고, 거기에서 어물거리는 사이에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 것이다. 루이 16세는 정예부대를 위험한 시가전에서 내보낸 적이 없었다. 콩시에르즈리에 도착하더라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철통같이 감시당하고 있을 것이다. 운이 아주 좋아서 일단 감옥에 들어가는데 성공한다 할지라도, 왕비가 간수들의 칼에 노출되어 있으므로 왕비가 수감되어 있는 방까지 신속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메르시 아르장토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코부르 왕자에게 편지를 썼다. 만약 왕비가 이대로 죽는다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을 얼마나 후회하겠습니까? 그렇게 엄청난 왕비 시해 사건이 오스트리아와 영국의 패배를 모르는 군대로부터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일어났다는 것을 누가 믿겠습니까? 코부르는 하찮은 일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장군이었다. 그의 신중한 행동 덕택에 그는 매우 선견지명이 잇는 장군으로 여겨졌다. 그는 심사숙고 끝에 이 작전이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아픈 데를 찔린 메르시 아르장토는 고집을 부렸다. 코부르에게 이런 기병대를 출전시키는 것은 커다란 모험이었다. 그러나 황제라면 다를 것이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의 대사는 제국의 수상에게 편지를 썼다. 황제의 고모가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는데도 그녀를 사형 집행인으로부터 구해 오지 않고 자유롭게 할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황제 폐하의 위엄 때문인가요, 아니면 이해관계 때문인가요? 수상은 답변이 없었다. 그는 황제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것이다. 페르젠에게 자극을 받은 메르시 아르장토는 다른 방법을 시도했다. 이번에 그는 중립국가들의 힘에 호소함으로써 왕비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스웨덴, 덴마크, 스위스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외국의 자본으로 공안위원회의 위원들을매수하는 것을 의미했다. 은행가들은 비밀 외교와 우회적 방법의 대가로 통하는 당통에게 기대를 걸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자신이 약속을 지킬 수 있고 성공할 수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만 일에 착수했다. 1793년 9월에 당통의 지출은 갑자기 늘었다. 더군다나 그가 장관직 수행을 게을리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였다. 그는 모든 상퀼로트들에게 미움을 받았다. 당통은 9월 9일 갑자기 공안위원회를 사임했다. 사람들은 로베스피에르가 공안위원회에 들어오면서 콜로 데르부아와 비요 바렌을 채용한 사실이 당토이 사임한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로베스피에르가 채용한 그 두 사람은 폭도들이 모이는 지부들에서 인기가 높았다. 은행가 리브-그의 형이 파리에 살고 있었다.-는 당통의 비밀요원 중 한사람인 매튜와 협상에 들어갔다. 그러나 1793년 9월 6일. 매튜는 체포되고 다른 외국 은행가들고 마찬가지로 재산을 몰수당했다. 같은 시기에 위협을 느낀 당통은 파리를 떠났다. 그는 슈아지에 집을 한 채 세내 10월 12일, 공안위원회를 사임하고 아르시 쉬르 오브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피신했다가 11월 21일에야 되돌아온다. 혁명 체제가 계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이미 과격해질 대로 과격해졌고 무자비해져서 못하는 짓이 없을 정도였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페르젠은 혁명정부의 과격성을 무시했다. 왕비를 구하는 것,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돈을 얼마나 쓰느냐에 달렸다. 페르젠은 은행가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내기에 걸도록 강요하고 싶었다. 그들은 아마도 왕비를 구하는 데 쓴 비용을 프랑스 국고로부터 돌려받게 될 것이다. 페르젠은 10월에 브뤼셀의 변호사인 오브레에게 사건을 일임했고, 변호사는 20만 리브르를 요구했다. 예전에 궁정관리인이었던 브르퇴이 남작이 스위스와 함부르크에서 돈을 긁어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브르퇴이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러 은행들을 동원해서 2백만 리브르 이상을 모았다. 그러나 이 돈은 써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묵혀야 했다. 브르퇴이가 이 거액을 건네주던 날,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재판소 앞에 출두했기 때문이다. 제2부 ·혁명재판소 혁명재판소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8시, 간수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감방에서 끌어 냈다. 그녀는 호위를 받으면서 아주 좁고 불결한 통로를 지나 넓고 탁 트인 다른 통로로 다가갔다. 그녀는 둥근 지붕이 있는 계단을 올라갔다. 빗장이 채워진 한문에서 역시 빗장이 채워진 다른 문으로 가기 위해 긴 화랑을 따라갔다. 웅장한 건물의 버팀벽 아래에는 작은 문이 또 하나 있었다. 그 문은 십여 개의 나선형 계단으로 통해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곧바로 소위 '자유'의 방이며 과거에는 파리 고등법원의 대법정이었던 곳으로 들어갔다. 복도에서부터 피고인은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자신을 모욕하거나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군중이라고 추측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낡은 검정색 드레스를 입고 평범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차림새는 남루했지만, 그녀의 걸음걸이는 품위가 있었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우면서도 불행한 왕비였다. 어쩌면 파리에는 그녀의 남자친구들이 아직 많이 있을 것이고, 여자친구는 더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방에 모였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겁이 없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히 자신의 평판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제 자신이 가는 곳은 어디든 따라오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을 터였다. 피고인은 고결한 감정을 표현할 방법이 없는 법이다. 반대로 '애국파'들의 무례한 말과 야유만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귀에 들려왔다. 전 왕비가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소파에 앉았다. 앙투아네트의 정면으로 배심원들이 들어왔다. 배심원 중 하나였던 목수인 트렝샤를은 후에 자신의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나는 공화국의 대부분을 꿀떡 삼켜 버린 사나운 짐승-전 왕비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을 재판하는 배심원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네게 알려 주마. 이 목수는 대여섯 번 침을 뱉고 나서, 자신은 전 왕비를 볼 때마다 침을 뱉게 된다고 다른 배심원들에게 변명하면서 용서를 구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행동에 익숙해졌다. 그녀는 더 이상 왕비가 아니었고, 배심원들과 마주하고 있는 보잘것없고 평범한 여인이었다. 그녀를 재판하기 위해서, 텡빌은 혁명을 신봉하는 시민 중에서 비교적 성실한 사람을 배심원으로 골랐다. 전직 의원 앙토넬, 현악기 제조인르노뎅, 외과 의사 수베르비엘, 카페 주인 크레티엥, 전 경매인 베나르, 가발 제조업자 가네이, 인쇄공 니콜라, 음악가 뤼미에르, 나막신 제조인 데부아조, 모자 제조인 바롱 목수 드베즈, 직업이 없는 피에베라는 사람, 그리고 전 메이엔의 특별위원 검사 투멩. 피고인의 왼쪽에는 네 명의 판사가 단상 위에 자리잡았다. 검사인 텡빌은 법관드르이 단상 바로 아래에 있는 책상 앞에 있었다. 깃털 장식 모자 밑에 머리가 길게 내려와 있고 까맣고 깡마른 얼굴이 반질거렸다. 그에게 반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그는 사태를 나쁜 쪽으로 몰고 가서 피의자들을 무자비하게 비난하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공포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눈을 치켜 뜨면 미소짓는 입가의 주름조차도 날카롭게 보였다. 서기는 배심원들의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 조제프 파리, 그 이름은 위대한 '애국파' 르 펠르티에 드 생 파르조를 암살한 사람의 이름이기도 했기 때문에 파리는 파브리시우스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국선변호인 두 명도 거기에 있었다. 그들은 긴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재판장 에르망이 개정을 선언했다. 그의 역할은 중요했다. 재판장은 토론을 이끌고, 질서를 유지하며, 청중에게 제재를 가할 수 있었다. 피고인은 그의 허락 없이는 말할 수 없다. 앙투아네트는 증인을 지목하게 해 달라고 그에게 청구해야 했다. 이제 재판장은 배심원들의 서약에 앞서 공문을 읽어 주었다. "친애하는 배심원 여러분, 여러분은 앞서 지명한 피고인에 대한 발언할 때 아주 신중하게 검토할 것을 약속하고 맹세하십시오. 선서 이후 어느 누구와도 내통하지 말고, 증오나 두려움이나 애정에 따르지 말며, 변호의 책임과 수단에 따라, 그리고 한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공정하고 엄격하게 양심과 내면의 확신에 따라 결정하시기 바랍니다." 배심원들이 한 사람씩 차례로 손을 들어 '맹세합니다'라고 말했다. 피고인은 서약이 계속되는 동안 내내 서 있었다. 서약이 끝나자 모두들 앉았다. 앙투아네트는 성명, 나이, 직업, 출생지, 체포 당시 거주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마리 앙투아네트, 오스트리아의 로렌, 37세, 프랑스 국왕의 미망인" '로렌'이란 단어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 지명이 배심원들을 불안하게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배심원들은 한순간 과거에 있었던 다른 재판을 떠올렸을까? 악마로 간주했던 한 여걸, 말하자면 심장과 영혼만 가진 양치기 소녀, 잔 다르크를 재판한 판사들은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신의 이름으로 거짓 예언을 하는 여자 예언자'를 이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신의 이름으로'라는 것은 이제 한물 갔다. 종교는 죽었다. 왕도 무너졌다. 로렌 출신이라고 말하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침착하게 재판할 수 있을 것이다. 앙투아네트가 로렌 출신인 것은 그녀의 아버지 프랑수아 에티엔이 1708년 12월 8일 낭시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프랑수아 에티엔의 어머니는 엘리자베스 도를레앙으로, 루이 14세의 조카딸이었다. 엘리자베스 도를레앙의 고조모가 클로드 공주로, 앙리 2세 왕과 카트린 드 메디시스의 딸이다. 왕과 왕비가 서로서로 엇갈려 가며 혈통을 이어왔기 때문에 그들은 족보를 통해서 가문을 유지했고, 친척임을 입증해 주는 가문의 문장을 공공연히 과시했다. 프랑수아 에티엔은 철저히 프랑스 식으로 교육을 받았지만,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테레즈와 결혼한 1736년 2월 12일부터 오스트리아 사람이 되었다. 프랑스 왕 바살은 로렌지방을 루이 15세의 장인인 스타니슬라 레친스키에게 양도했다. 스타니슬라가 죽은 후, 로렌은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그 대가로 프랑수아 에티엔은 토스칸의 대공으로 임명되었고, 1745년에는 프랑수아 스테판이라는 이름으로 독일 황제가 되었다. 마리 테레즈는 열여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녀는 모든 명예와 권력을 자신에게 넘겨 준 남편을 열렬히 사랑했다. 장사꾼이자 도박꾼인 프랑수아 에티엔은 궁정의 관리인 겸 총괄징세 청부인과 물주 노릇을 했다. 1765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옛 로렌의 공작이었던 그는 막대한 재산과 절망에 빠진 미망인을 남겼다. 마리 테레즈는 남편이 죽던 날 이렇게 썼다. 나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26년 6개월 6일간 지속되었다. 내가 그에게 손을 준 잊을 수 없는 날을 일요일이었고, 그가 내 곁을 떠난 날도 일요일이다. 그렇게 되기까지 29년, 334개월, 1,540주, 10781일, 그리고 25만 8,744시간이 걸렸다. 우리 주님이시여, 죽은 자를 불러들이시고, 조국에 영광을 주소서. 그리고 무한한 은총을. 마리 앙투아네트가 잔 다르크처럼 로렌 출신이라는 것, 루이 15세와 똑같이 루이 13세와 필립 4세가 고조부였다는 사실도 배심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지는 못했다. 시력이 약해진 마리 앙투아네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재판관인 에르망을 쳐다보았다. 그는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이며 처음에는 생 폴, 그 다음에는 아라스에서 판사를 지냈다. 재판하는 동안 내내 에르망은 재판 절차상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해가면서 피고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34세인 미남 에르망은 교양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의 한 편은 타인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데 보냈지만, 나머지 시간은 모두 책을 읽거나 정원을 가꾸며 보냈다. 에르망은 인생의 전환점에 서 있었다. 그는 혼전에 임신시킨 자신의 하녀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그녀는 문맹이었다. 혁명재판에서는 나레이터가 있는데, 그것은 서기였다. 나레이터는 기소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급하게 작성되어 재판 이틀 전인 10월 12일에야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건네졌다. 기소장 낭독 후, 증인드링 불려 나올 것이다. 재판에서 피고에게 준비된 불명예에 대한 정확한 어휘 설명과 세부 항목들을 확인하기 위해 증인들은 질문을 받게 된다. 아마도 그들 중 일부는 세부 사항에 대해서 갈피를 못 잡고 횡설수설할 것이다. 아무래도 좋다! 결국 판결을 내릴 기소장을 재검토할 것이고, 거듭 말하자면 피고에 대한 일말의 동정심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텡빌은 기소장을 작성했다. 그는 어쩌다가 술자리에 참석하느라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밤낮없이 재판소에 틀어박혀서 지냈다. 그는 술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일단 술을 마시면 괴팍해졌다. 샤틀레에서 검사로 임명되었던 1774년부터, 텡빌은 '정당하지 못한 사건이라도 음흉함과 억지 트집으로 사건을 이끄는 기술'을 가진 사람이라는 평판을 얻게 되었다. 그는 1783년에 자신의 관직을 팔았는데, '성격에 맞지 않아서'라고 말했다. 적어도 건강이 나빠서라든가 아니면 나쁜 소문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좀더 나은 기회를 갖고 싶었던 것이다. 8월 10일 이후, 텡빌은 사촌인 카미유 데무렐의 도움으로 특별재판소의 배심원 대표로 임명되었다. 국가 대사를 논하는데 사사로운 보답은 있을 수 없었다. 1794년 4월 5일, 당통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고 텡빌은 당통, 데물렝, 그리고 그와 유사한 부류들을 심리에서 제외시켰다. 간수들에게 붙잡힌 피고인들은 당당함을 잃는다. 열다섯 명의 당통 파들은 형이 선고되는 순간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판사는 '말 많고 따지기 좋아하는 무리들을 무엇 때문에 법정에 다시 불러들이는가?'라고 말했다. 너무 많은 군중들이 공판을 재촉하기 때문에 텡빌은 자신이 이 재판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느낌을 갖지 못했다. 이런 군중 속에는 어쩌면 왕당파도, 착한 사람도, 감정이 풍부하고 소박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텡빌은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자칫 잘못하다가는 군주의 동정심을 유발해서 왕비를 무죄로 만들어 그녀를 검찰관의 권한 밖으로 몰아갈 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피고와 마주한 남자들은 냉정하지 못했다. 텡빌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바라보았다. 오만하게 보이게 하는 깃털 달린 모자, 키를 커보이게 하는 높은 구두, 허리를 날씬하게 하고 스커트를 넓게 퍼지게 하는 페티코트 없이 평범한 옷을 입은 마리 앙투아테네트는 '수다스럽고 품행이 나쁜 한 여인'에 불과했다. 푸키에 텡빌은 또한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한 여인이지만 시련 속에서도 옛날처럼 품위를 잃지 안는 여인의 불행에 군중은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다! 재판은 냉혹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재판정 안에 들어찬 백여 명의 선량한 사람들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겸손한 면을 보게 해서는 안 된다. 오직 그녀가 과거에 탐닉했던 쾌락에 대한 욕구만을 보게 해야 한다. 그런 점에 관해서라면 1775년부터 떠나니던 비방문들이 이미 모두 다 말해 버렸다. 그런 글들을 뒤적이면, 끓어오르는 멸시의 감정을 참기 어려웠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젊은이들만 사귀었다. 그 당시 그녀는 스무 살이었다. 사람들은 그 젊은이들을 왕비의 애인으로 간주했다. 브장발, 보드뢰이 백작, 아데마르 백작, 긴느 공작, 세이무르 경, 헤센 다름스타트의 조르즈 왕자, 스트라트폰 경, 도르세 공작. 자신의 부끄러움을 폭로하는 이 여인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이며, 동시에 아그리핀이고 메살린이다. 두 가지 짧은 증언이 이런 넘쳐 흐르는 치욕과 일치했다. 틸리의 증언이 이렇다. "저 여자는 젊은이들을 냉정하게 대하고 멀리해야 했지만,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리고 리뉴 왕자의 증언은 이랬다. "소위 그녀의 친절함이란 것은 특별한 한두 사람에게 보여 주는 깊은 우정일 뿐이다." 달리 말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 법도로서 지켜야 할 냉정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오직 우정에만 빠져 있었다는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메살린이나 브뤼노, 또는 이자보 드바비에르와 같은 여자로 만드는 것은 이미 계획된 일이었다. 텡빌은 검정색 드레스를 입은 이 가엾은 여인이 가슴이 패인 드레스에 비치는 베일을 쓰고 금색 휘장을 두른 의장마차를 탄 왕비였음을 능숙하게 설명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주변 친구들과 단체들에게 선심을 쓰기 위해서 항상 모른 척해 주는 남편의 주머니를 축냈던 것이다. 왕은 부인의 잘못으로 곤경에 빠졌다. 백성은 전제적이고 낭비가 심한 왕에 대항하여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왕의 자문위원들은 이 시대에 뒤진 사람에게 경고했다. 그러나 왕은 자문위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벌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그는 매사에 관대했다. 예를 들어 궁정생활이나 접견이나 놀이, 그리고 레이스 세공품-튈르리 궁과 트리아농 성에서 천여 개가 발견되었다.-따위에 대해서 지나치게 관대했다. 텡빌이 이런 연설을 하는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해야 하는가? 트리아농 성에 2백만 리브르가 들어갔다. 1788년에 칼론씨가 계산한 적자는 무려 1억 6천만 리브르라니, 잘 하는 짓이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인정한 액수는 2백만 리브르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나를 속인 것이오." 놀이? 마리 앙투아네트는 변명의 여지가 별로 없었다. 1777년 1월 한 달 동안에 그녀는 갚을 방법도 없으면서 481만 212리브르를 낭비했다. 왕이 대신 빚을 갚아야 했다. 그러나 국고를 축낼 생각이 없었던 루이 16세는 다달이 빚을 갚아가기 위해서 개인 금고에 저금을 했다. 몸치장에 대해서, 그녀는 자신이 비난받을 만하다는 것을 안다. 왕비의 의상비는 그녀가 베르사유에 오던 15년 전부터 오르지 않았다. 재단사들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거의 공짜로 옷을 만들어 주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왕비는 재단사 베르텡 양을 너무 좋아했다. 옷과 보석을 잘 조화시켜 주는 것으로 소문난 베르텡 양은 경솔하고 무분별한 부인들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주고 나중에 결제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구매 품목을 기록한 상세한 명세서도 없이 터무니없는 액수가 적힌 고지서를 받곤 했다. 왕비가 쓴 비용의 적자가 1776년에 벌써 2만 8천 리브르를 기록했고, 1780년에는 연간 왕실비 총액이 22만 6천리브르인데 비해서 왕비가 낸 적자는 10만 6천 리브르가 되었다. 베르사유에서는 의상비뿐만 아니라 생선과 고기 값에서도 부당하게 이득을 본 사라들이 있었다. 1780년은 특별한 한 해였다. 마침내 극장이 완성된 것이다. 왕비는 8월 1일에 그곳에서 공연했다. 무대 의상은 호화로웠다. 보석 역시. 독일인 보석상 뵈머가 재앙의 씨앗이었다. 그는 온갖 유혹을 다 했다. 1776년 뒤바리 부인을 위해서 만든 다이아몬드 귀고리는 60만 리브르짜리였다. 루이 16세는 거절했다. 뵈머는 그 귀고리에서 다이아몬드를 두 개 빼낸 대신 46만리브르로 깎아 주었다. 6개월 후 뵈머는 25만 리브르짜리 다이아몬드 팔지 한 쌍을 가지고 다시 나타났다. 왕비는 아직 다이아몬드 귀고리 값도 다 지불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왕에게 2천 루이를 빌려야 했다. 왕은 국사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에 급급한 왕비를 몹시 나무랐다. 마리 테레즈에게도 그 사실이 알려졌고, 그녀는 딸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팔지 이야기가 비엔나에까지 들려오는구나. 나는 할 말이 없다. 나는 그런 터무니없는 일로 나의 사랑하는 엄마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사치스러웠나? 그렇다, 궁정에서 그녀가 베푸는 어떤 혜택도 받지 못한 사람들이 볼 때는 그랬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돈을 마구 써대지는 않았다. 다만 주변에서 가난에 쪼들리는 사람이 눈에 띄면 도와 줬을 뿐이었다. 왕비의 금고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베푸는 자선으로 항상 적자를 면치 못했고, 루이 16세의 금고도 그런 왕비로 인해서 적자였다. 텡빌은 다음과 같이 적었고 서기는 그것을 되풀이해서 적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국민의 땀의 결실인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에 기소되었다.' 탕진하다니?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문했다. 국고는 이미 루이 16세가 즉위했을 때부터 바닥나 있었다는 것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가? 벌써 1세기 전부터 프랑스 군대가 승리하거나 패배했을 때 들어간 비용 그리고 귀족들에게 지불한 연금으로 바닥나 있었다. 탕진되었다면, 미국 독립전쟁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 전쟁이 2년간의 수입을 다 집어삼켜 국고가 바닥난 적이 있었다. 해군이 쓴 비용만 해도 1780년에 1억 8천만 리브르에 달했다. 사람들은 프랑스가 부자이기 때문에 지불 능력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프랑스 비옥한 땅이 있고, 번창하는 항구가 있으며, 파리 같은 화려한 도시가 있다. 그리고 마르세유나 보르도, 낭트, 리옹같은 산업 도시도 있는 부자 나라가 아닌가. 그러나 나라는 부자였지만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 누가 그것을 보충해 넣을 수 있을까? 특권층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고, 서민들은 서민들 대로 더 이상 뒷감당 하기를 원치 않았다. 1778년에는 네케르를 불러야만 했다. 분별력 있고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은행가 네케르는 많은 부유한 사람들이 살 만한 채권을 발행했다. 이자는 8내지 10퍼센트였다. 네케르는 서민들의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도 많은 돈을 벌어 들였다. 축제, 오락, 또는 미국 전쟁에 네케르는 변함없이 돈을 지불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기억으로는 네케르가 문제를 일으켰기 때문에 왕이 그를 파면했다. 그때 그는 감히'왕에게 바치는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그것은 최초의 예산안이었다. 이 예산안의 어떤 항목은 1781년 한 해 동안 국고로 들어오고 나간 비용들을 다루었다. 위대한 경제학자답게 네케르는 군주의 '너그러움'을 숫자로 보여준 것이다. 옛날에는 귀족들이 법정직이나 그 밖의 공직을 돈을 주고 샀는데, 이제는 공직이 봉급과 더불어 그냥 주어졌다. 갓 결혼한 귀족들은 궁정에 와서 지참금을 잔뜩 받아가지고 돌아갔다. 사람들은 격식을 차리지 않고 왕에게 달려와 자신들의 아들, 딸 교육을 위한 도움을 청했다. 누가 사업에 망했다고 슬퍼하겠는가? 왕이 지불해 주는데. 국고에서 모든 것을 조정하고, 모든 것을 해결하고, 모든 것을 수리해 준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연금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온갖 형태의 수익을 생각해 내기에 이르렀다. 농가와 공공단체, 돈을 끌어쓸 수 있는 많은 장소들, 시장, 그리고 자선기관의 구호품에 이르기까지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았다. 어떤 귀족은 국고와 자신의 저축을 혼동했다. 궁정에서는 애걸하는 사람들을 '자, 좋습니다, 어서 오세요'라고 말하면서 맞아들였다. 네케르는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제거해야 할 가장 큰 적은 바로 이런 종류의 무제한적인 자선의 습관이라고 생각합니다." 1783년과 1784년에, 매혹적인 재무대신 칼론은 네케르와 마찬가지로 채권을 이용해서 재정을 '순조롭게 잘'꾸려갔다. 그는 2억 2천 5백만 리브르를 빌려 썼고 그가 장관직을 물러날 때에는 총 6억 리브르의 적자가 났음을 고백해야 했다. 한 번 더 혁명재판소 앞에 선 마리 앙투아네트는 파산한 이유에 대한 어떤 변명이나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 전 왕비의 개입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하더라도 도덕적이지도 합법적이지도 않았다. 재판소는 최악의 경우를 예상하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고백할 것인가? 비록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 외에 달리 해명할 방법이 없지만. 서기는 기소장 낭독을 계속했다. 지금 그가 하는 모든 말은 의심스러운 점이 많았지만 몇 시간 후에는 배심원단에게 카페 과부가 기소된 모든 항목에서 유죄라는 선언을 유도할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공화국에 대항하는 전쟁을 지원하는 데 필요했거나 현재 필요한 수백만 리브르를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넘겨 준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라고 서기는 발표했다 실제로 1785년 퐁텐블로 조약에서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에게 4백 50만 리브르를 지불하는데 동의했다. 루이 16세는 그 대가로 유럽에서 프랑스의 중립을 얻었던 것이다. 이런 얽히고 설킨 오랜 역사 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족 전부 즉 자신의 남편, 친정 오빠, 친정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야만 했다. 1777년부터 오스트리아 황제 요제프 2세는 마스트리히트와 에스코 강 하구가 다시 개방되기를 기대해 왔다. 앙베르 암스테르담을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네덜란드는 전쟁을 준비했다. 루이 16세는 강자가 지배할 것이라고 믿었다. 영국과 프러시아와 동맹을 맺은 네덜란드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오스트리아를 이길 것이다. 따라서 루이 16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입장은 중립뿐이었다. 좀처럼 관여하지 않던 마리 앙투아네트도 이번만큼은 국가 대사에 끼여들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이런 교훈을 주었다. "훌륭한 독일인이 되어라. 그러면 훌륭한 프랑스인이 될 것이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친밀하게 결속되어야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외무대신 베르젠을 불렀다. "대신은 내가 오스트리아 황제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저는 왕비 전하가 오스트리아 황제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만, 전하가 프랑스 왕세자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둘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양보했다. 요제프 2세도 양보했다. 네덜란드를 포기한 대신 황제는 바비에르를 원했다. 그의 조정으로 프랑스는 뤽상부르와나무르를 얻었다. 베르젠은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그는 오스트리아가 차지하고 있는 벨기에 지방 전체를 원했지만 생각을 바꿨다. 프랑스도 오스트리아와 똑같은 이유로 네덜란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마침내 루이 16세는 '오스트리아와 불봉 가문 사이에 긴밀히 결합할 필요성'을 인식했다. 이 동맹은 '방어적 목적'으로 맺어졌고 네덜란드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몰아냈다. 프랑스는 평화 정책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문해 보았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 자신이 개입한 사실이 어떤 점에서 역사의 흐름을 변화시켰단 말인가? 기껏해야 1785년 12월 20일, 루이 16세가 요제프 황제에게 에스코 삼각주를 포기하도록 요구하는 편지를 닷새 지연시켰을 뿐이었다. 심각한 후유증이 예상되는 전쟁을 막기 위해서 요제프 2세는 보상만 받을 수 있다면 네덜란드와 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고 당장에 베르사유에 통보해 왔다. 보상에 관해서 네덜란드 사람들과 프랑스 사람들은 오랫동안 망설였다. 마침내 보상금은 1천만 플로린으로 합의를 보았고, 그중에 프랑스는 4백 50만 플로린을 지불하게 되었다. 1785년 11월 8일, 퐁텔블로 조약은 오스트리아 황제와 네덜란드 사이에 체결되었다. 얼마 전부터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을 공격하면서 때로는 모욕까지 하는 서기의 말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어느새 재판은 1789년 8월 4일 밤의 일로 넘어가 있었다. 그녀는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의회의 귀족들과 성직자들 모두는 토지와 결부된 권리를 살리려고 개인의 권리를 포기했다. 이런 대책은 어쩌면 프랑스 전역에 걸쳐 마을에서 마을로 번져가는 약탈행위에 대한 공포심을 진정시켰을지도 모른다. 떼거리들은 성을 약탈했고, 다음에는 대저택을 빼앗았다. 더 이상 약탈할 물건이 남아 있지 않자 정원을 파괴하고, 가축을 죽였다. 대공황. 그것을 경험한 사람은 그렇게 불렀다. 왜냐하면 그것을 한번 겪고 난 사람은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방법으로 진정시킬 것인가? 라 파이예트와 함께 미국 독립전쟁에 참전했던 노아이유 백작은 8월 4일 밤 국민의회에서 이 폭동이 일어난 단 한 가지 원인은 봉건적 특권을 고집하는 데 있으므로 폭동을 진압하는 유일한 방법은 특권의 포기에 있다고 단언했다. 왕비는 8월 4일 밤에 이루어진 성급한 왕의 비준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8월 30일과 31일부터 카미유 데물렝과 생 위뤼즈는 '시민의 의지'를 왕이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파리 지부의 위원들을 베르사유로 이끌고 가려 했다. 루이 16세와 왕비는 이런 혁명의 움직임을 믿지 않았다. 백성은 무엇을 원하는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왕이 8월 4일 제정한 법령을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왕과 의회를 파리에 둘 것 등이었다. 베르사유를 방어하기 위해서 왕은 플랑드르 연대를 불러 들였다. 그리고 그 연대를 근위병들과 친밀하게 지내도록 식사에 초대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서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1789년 10월 1일, 그 식사 모임은 대향연으로 변질되었고, 그것은 카페 과부가 바라던 바였다. 향연이 계속되는 동안 카페 과부의 앞잡이들은 회식자 대부분이 취한 틈을 타 혁명을 반대하는 계획을 완벽하게 지원하기 위해서 왕에 대한 전적인 충성과 백성에 대한 혐오감을 담은 노래를 부르도록 부추겼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의식중에 왕당파의 백색 모장을 보란 듯이 내세우게 하고 국민의 모장은 짓밟도록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모임에 참석한 자신을 따르는 부인들을 시켜서 회식자들에게 백색 모장을 나누어 줌으로써 이런 반혁명적 무도함을 정당화했다. 10월 4일 그녀는 이 향연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근위병들이 플랑드르 연대에 베푼 파티에 왕과 왕비는 왕세잘르 거느리고 참석했지만 대향연과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거기에서 그레트리의 오페라곡 중 한 곡이 불러졌다. 오 나의 리샤르, 오 나의 왕이시여, 세상이 당신을 버렸노라..... 그리고 '애국파'들에게 소리질러 야유를 보냈다 1788년 말부터 '애국파'라는 단어는 자유와 평등에 기초한 국민 민주주의 당원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이제 서기는 왕비가 1789년 10월 초부터 반혁명적 팜플렛을 출판했다고 비난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고르사스가 발행하는 유명한 신문'르 쿠리에'를 기억하고 있었다. 10월 3일, 그 신문을 통해서 이 사건이 파리에 보도되자 팔레 루와이얄은 격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또한 9월 12일부터 나오기 시작한 신문인 '인민의 벗'에서 10월 5일 마라가 쓴 호소문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선량한 시민은 모두 무기를 들고 모입시다. 에손의 화약을 탈취하기 위해서 많은 부대를 파견해야 합니다. 각 지부에서는 시청에서 대포를 끌어내야 합니다. 시민군은 자신들의 동지들과 갈라서는 무분별한 행동을 해서는 안됩니다. 장교들이 적대적 명령을 내릴 정도로 분별력을 잃었다면, 시민군은 장교들에게 복종할 것이 아니라 그 명령들을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마침내 위험이 다가온다면 그것은 우리 때문이며, 국민이 선동적으로 웅변가를 부르지 않았고 힘으로 무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카미유 데물렝은 베르사유에 마라가 있음을 확인했다. '마라는 베르사유로 날아갔다가 번개처럼 혼자서 돌아와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네 개의 트럼펫처럼 소란을 떨며 우리에게 이렇게 소리친다. 오, 죽은 자들이여, 일어나라!' 서기에 따르면 10월 5일, 혁명의 불에 기름을 부은 것은 마라도 데물렝도 루스탈로도 아니다. 그것은 의회와 정부를 수아송이나 콩피에뉴로 옮길 결심을 한 서른두 명의 귀족의 원들이다. 그때 왕비는 왕에게 구제도를 부활시키자고 부추기고 있었다. 서기는 프랑스 국민들에게 비방과 냉대를 받는 모습을 외국 권력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불리하게 묘사된 팜플렛을 일부러 만들게 했다고 오히려 뒤집어 씌웠다. 이제 왕비는 어떠한 말이라도 들을 마음의 자세가 되어 있었고, 무슨 일인가가 일어날 것이라고 짐작했다. 공상을 즐기는 마리 앙투아네트였지만 이번만큼은 그녀도 두려웠다. 그녀는 능욕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되는 대로 들어 보자... 서기는 왕비가 1789년 10월에 파리 시민을 굶겨 죽이려 했다고 단언했다. "상점들은 텅 비어 있었는데, 카페 과부와 그녀의 가족이 파리에 도착한 다음 날, 풍요로워졌다." 베르사유로부터 쫓겨난 반혁명파의 우두머리들은 다시 튈르리 궁으로 돌아갔다. "밤마다 그들은 국민들을 위한 권리나 이미 통과된 법령들을 무효화하는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다." 1791년 6월, 카페 과부는 '그녀의 총신 라 파이예트'와 공모하여, 전 왕의 도주를 부추겼지만 결국 바렌에서 체포되었다. 그러나 돌아와서도 라 파이예트는 공모자들만 몰래 출입할 수 있도록 튀르리 궁의 울타리와 출입문과 자물쇠, 쇠창살을 봉쇄했다. "이 가증스러운 장소에서 비밀 회의가 열리고, 1791년 7월 17일 마르스 연병장에서 벌어진 끔찍한 대학살이 결정되었다. 이 대량 학살은 '전제군주의 굴레에 프랑스 국민을 속박하기 위해서 계획된' 다른 많은 학살의 시초였다. 카페 과부는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에게 도움을 청했다. 공화국을 무효화시키기 위해서 그녀는 공화국 군대의 이동상황을 반대파들에게 알렸다. 그녀는 '프랑스 군대가 패배한 원흉'이다" 그 내용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옳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잘못 깨달았다. 1792년 1월 21일부터 오스트리아 대사가 그녀에게 '모든 프랑스 군대가 움직이는 계획들'을 오스트리아 군대에게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하기 전날 밤, 마리 앙투아네트는 비엔나로 편지를 썼다. 뒤무리에 씨는 사부아 공격을 시작으로 리에즈 지방도 공격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후자의 공격은 라 파이예트 군대가 맡습니다. 이것이 어제 튈르리 궁에서 열린 회의 결과입니다. 서기는 이어 말했다. "앙투아네트는 튈르리 궁을 지하통로까지 스위스 근위병들로 가득 채우고, 8월 9일 일요일 밤에는 그들을 술에 취하게 내버려 두었다. 10일 아침에 그녀는 이 근위병들이 국민에게 총을 쏠 것을 알았다." 앙투아네트는 이제 모든 것을 각오해야 했다. "카페 과부는 아들인 루이 샤를 카페의 고백대로, 생각만해도 그리고 말만 들어도 소름끼치는 추잡한 일에 빠져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런 비난은 다른 증언에 의해서 재검토 될 것이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나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탕플에서 시몽이 왕비, 공주들, 그리고 어린 루이 샤를 카페를 철저히 감시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그 여자들은 가끔 루이 샤를에게 옷을 벗으라고 말했다. 시몽은 공주들이 옷을 들어 올리 때 아이의 아주 아름다운 몸뚱이를 보았다. 그것은 아주 신선했다. 그러나 부인들은 아이의 아랫배와 성기 주위에 강제로 붕대를 감아 주었다. 시몽은 약삭빠른 사람이다. 부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아이에게 옷을 입히는 것과 상관없는 문제가 아닌가. 1793년 6월에 왕세자는 막대기 위에 올라타다가 성기를 약간 다쳤다. 감옥 전속 의사인 티에리 뒤 뷔시는 외과 의사 수페에게 진찰을 의뢰했고, 수페는 붕대를 감아 주라고 goaT다. 처음에는 궁정 의사 이폴리트 피플레가 왕세자를 간호했다. 그러나 혁명정부의 비난이 거세지자 피플레는 치료를 중단하는 수밖에 없었다. 왕비가 대신 치료를 맡게 되었다. 그녀는 아마도 왼쪽 고환의 출혈이 다른 쪽으로 전이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고 더 열심히 치료했다. 왕세자는 아마도 이런 치료를 즐겼는지도 모른다. 시몽은 그것을 어린아이의 '건강에 해로운 추잡한 일'로 해석한 것이다. 왕세자는 사람들이 반복하도록 시키면 무엇이든 되풀이하는 버릇이 있었다. 1793년 7월, 시몽과 단 둘이 남게 된 왕세자는 간수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했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죽기 10전인 1793년 10월 6일에 그를 신문하러 온 혁명정부회의 대표자들 앞에서 자신의 어머니와 고모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던 것이다. 시몽도, 에베르도, 의사 라니도, 시장 파슈도, 초콜릿 제조공인 외세도, 경찰서장도-이들은 모두 신문에 참석했다.-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아들이 진정한 한 남자이기만 바랐다는 사실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왕의 피는 신성하고, 그의 정액도 마찬가지로 신성하다. 왕비는 이런 식으로 왕세자를 치료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아마도 왕자의 정액이 2,3년 후 고환을 부풀게 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 전부였을 것이다. 에베르와 혁명정부의 공범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아들을 데리고 아그리핀이 네롱에게 했던 것처럼 근친상간을 했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다. 생식에 관해서 이 시대에는 모두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생명은 전적으로 정자 속에 들어 있다는 믿음이었다. 난자는 정자가 정착해서 출산할 때까지 성장하기 위한 터요, 비료로써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아들의 성기를 무척 소중하게 여겼다. 서기는 앉았다. 이제 그는 증언을 받아쓰기 위해서 깃털 달린 펜을 준비했다. 오만한 표정, 날카로운 콧날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증인들을 기다렸다. 그들은 사십여 명쯤 되었다. 구경꾼들은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팔꿈치로 서로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카페 과부를 모욕하는 소리는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에베르가 증인의 명단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증언의 한 문장 한 문장이 살인적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을 독침이며, 검이며, 날카로운 화살이다. 그 동안 내내 그녀는 기도할 것이다. "자비로운 예수님, 마리아님. 주의 어린 양은 그들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그들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마리아님, 당신은 그들을 믿을 수 없으시겠지요, 물론! 그들이 너무나 거짓말을 잘 하니까요! 저를 믿어주세요. 마리아님, 그들을 용서해 주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재판장은 증인들에게 앙투아네트가 말을 걸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 그녀는 재판장에게 간청해서 허락을 받았을 때에만 말할 수 있었다. 첫 번째 증인은 로랑 르 쿠엥트르였다. 옷감 장수의 아들인 그는 1742년 2월 1일 베르사유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알랑송에서 그리고 다음에는 리지외에서 사업을 하다가 그에게 물려주었고, 1784년에 그는 아버지의 가게 말고도 세브르에 큰 세탁소를 열었다. 1789년, 거만하고 말 잘하고 돈 많은 르 쿠엥트르는 육군중령 계급을 샀다. 이 남자는 베르사유에서 궁정생활에 항상 조금씩 관여했다. 파리에서 르 쿠엥트르는 풍요롭고 우아하게 살고 있었다. 그는 사소한 일 말고 보다 큰 일에 끼여들고 싶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8월 13일에 탕플로 이송될 때, 시중을 들어 줄 사람을 구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바로 그였다. 르 쿠엥트르는 베르사유와 고등법원의 시종들에게 친절했다. 그들을 취직시켜 주고 보호해 주고 보증을 서 주었기 때문에, 무척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는 시종들을 통해서 왕실과 마찬가지로 궁정 귀족들 집이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제 르 쿠엥트르는 트리아농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위해 혁명재판소에 증인으로 서 있다. 그는 트리아농을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녀의 저주스러운 궁정 난봉꾼들의 소굴'이라고 표현했다. 1793년에 나온 그 이야기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중으로 충격을 받았다. 트리아농은 그녀에게는 즐거운 장소일 뿐이었다. 아침에는 젖을 짜러 가고, 오후에는 여럿이 모여서 오락을 즐겼다. 저녁에는 이따금 불빛 밑에서 밤참을 먹으며 코메디 프랑세즈나 오페라 극장의 공연을 감상했다. 모인 사람들이 모두 노래를 했다. 이런 동화 나라 같은 작은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 앞에서 왕비는 마음껏 매력을 과시했다. 트리아농은 소집단 전용의 장소는 결코 아니었다. 2백명을 초대하면 6백 명이 모여들었다. 1793년에 트리아농은 베르사유와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었다. 사람들은 옷장이며 사무용 책상, 서랍장, 탁자, 장식장, 도자기, 유리제품들을 팔아 버렸다. 프랑스 국민의 재산이 영국이나 독일, 러시아로 흘러갔다. 그러고 나서 사람들은 자물쇠로 출입문을 잠그고 유리창을 막아 버렸다. 여름이면 환하게 불을 밝힌 작은 숲에서 파티를 벌이던 저택이 창고는 물론 지하실에서 다락방에 이르기까지 다 헐렸다. 르 쿠엥트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켰다. "현재 공화국의 비용으로 유지하고 있는 트리아농과 딸린 정원은 국민들을 위해 이용되어야 하고, 농업과 예술에 유용한 시설을 세워야 합니다." 르 쿠엥트르는 곧이어 대향연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호화스러운 식사, 화려한 침대, 그리고 사치스러운 다른 물건들을 나열했다. 베르사유에서는 1772년부터 1789년 초까지 맛있는 음식을 먹고 편하게 지냈다. 르 쿠엥트르의 말은 별 의미가 없었지만, 어쨌든 대답할 권리가 없는 왕비에게 진흙탕을 끼얹는 데는 성공했으므로 판사들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대향연'에 대한 언급은 빨리 넘어갔다. 예절이나 신중함, 고상함 따위는 이제 왕과 왕비의 사생활에서 더 이상 존중되지 않았다. 어쩌면 왕은 토할 정도로 먹어댔을 것이다. 그는 종종 아무데서나 잠깐씩 잠을 잤다. 그리고는 갑자기 잠을 깨서는 전혀 잔 적이 없었던 것처럼 멀쩡하게 있었다. 왕은 자기 부인 외에 다른 여자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그는 아내에 대해서 '가장 소중한 애인이 불러일으키는 열정'을 끊임없이 나타냈다. 왕비로서는 '대향연'에 대한 비난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다. 기껏해야 궁정의 엄숙한 예절과 충돌을 일으키는 자유로운 언행에 대해서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친구들을 좋아했다. 그녀의 마음에 들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면 남녀 가릴 것 없이 우정을 나눴다. 이 좁은 사교계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궁정과 분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그 사회에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았다. 노래하고, 하프를 연주하고, 연극을 하고, 또는 화가들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그러나 궁정은 왕비가 쾌락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국사에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녀의 모임 안에서 장관이 파면되고 선택되었으며, 직위가 남발했고, 질서나 체계보다 기분이 지배했다. 곧이어 귀족 계급이 왕비를 싫어한다는 것도 알려졌다. 결속되었다 해체되었다 하는 혼란상이 그 어떤 우선권이나 특권보다 먼저였다. 왕비는 '우두머리도 없고, 단도도 없으며, 독극물도 없고, 피흘림도 없지만'중상 모략으로 가득 찬 음모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궁정의 모든 찡그린 얼굴들과는 달리 소박한 천성대로 살아가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인으로 믿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정숙한 왕비였다. 그리고 그녀는 겉모습을 거만하게 꾸며 자신의 소심함을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여인이었고, 곧잘 감상에 빠졌다. 그녀가 실제로는 불안정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남자들은 그녀를 유혹하려 했다. 주변 친척들도 모두 함정을 파놓고 그녀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리뉴 왕자는 이런 술책들을 모두 눈여겨보았다. "바로 노아이유 가문이 원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작을 돌보았다. 혹은 슈와젤 도당이 그녀에게 공토 비롱 공작과 같은 운명을 결정지어 주었다.... 그러나 그 공작은 덕망이 있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왕비는 따분한 사람을 피했다. '그것이 그녀의 경솔한 행동 중의 하나이며 가장 큰 죄 중의 하나였다. 불로뉴 숲이나 베리에르로 사냥하거나 산책하는 일은 흥겨웠기 때문에 이 행사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부러움을 샀다. 베르사유 앞뜰에서 보낸 매력적이고 순수한 밤도 마찬가지였다.' 1783년 9월 21일, 젊은 페르젠 백작은 10만 리브르에 스웨덴 왕실 근위대의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당시 그는 아주 성숙하고 잘 생긴 남자였다. 그는 정열적이고 쾌활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다정다감하고 겸손하며 예의바른 남자였다. 그는 프랑스와 왕과 왕비를 사랑했고, 그들의 행복을 빌었다. 페르젠은 알게 된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자비였던 1774년 1월 30일 오페라 극장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했을 때였다. 페르젠은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왕세자비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했는데도 나는 그녀가 왕세자비라는 것을 몰랐다. 그녀가 마침내 사람들 눈에 띄자 모두들 우리 주변으로 모여들었고, 그녀는 어떤 방으로 물러났다. 1774년에 그들 두 사람은 열아홉 살 동갑이었다. 페르젠은 왕비의 애인이었을까? 마리 앙투아네트의 전기 작가들은 모두 이 문제를 거론했다. 그들은 관계를 관능적이고 조심스러운 사랑이었다고 결론짓는 작가들은 불행하게도 페르젠과 왕비가 연인이었다는 증거를 찾을 수가 없었다. 1783년에서 1789년 사이에 페르젠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냈다는 편지 일곱 통 가운데 한 통도 전해지지 않았다. 페르젠은 '일기'에서 정중하고 기사다운 면을 보여 준다. 혁명기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젠에게 보냈던 암호 편지들은 완전히 정치적인 내용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관심을 가졌던 것은 자기 가족의 운명과 도주 계획, 그리고 루이 16세와 왕비를 구해 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외국 군대의 움직임에 관한 것뿐이었다. 이 편지들은 암호로 씌어졌다. 그 어떤 곳에서도 사랑의 말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1791년 9월 11일자 편지만은 정말 다정한 내용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젠과 연락이 끊겼기 때문에 그 편지는 페르젠에게 쓴 것이 아니라, 중개 역할을 부탁한 발랑텡 에스테라지 백작에게 썼던 것이다. 나는 변변찮은 것이지만 당신에게 반지를 하나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이 반지는 틀림없이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릴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반지는 놀랍게도 3일 전부터 이곳에서 팔리고 있었으며, 그것을 찾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종이에 싼 것은 그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나를 위해 잘 간직하게 해주세요, 그것은 그가 알아서 하겠지요. 나는 반지를 포장하기에 앞서 이틀간 끼고 있었습니다. 내 소식을 그에게 전해주세요. 나는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고 소식도 알 수 없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고통입니다... 이 편지는 위험한 것이 아니었다. 분명히 페르젠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사랑한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는 자신을 도와 주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랑했다. 선물로 준 백합꽃 무늬가 새겨진 반지는 감사의 표시로서 일종의 장신구로 준 것일 수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정의 강도가 강해졌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페르젠의 우정에 얼마간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페르젠이 앙투아네트의 '아망'이라면, 생명의 아망이요 자유의 아망이다. 몽메르디로 탈출하는 계회글 준비했던 것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페르젠은 자신만이 왕비를 구할 수 있다고 믿었고 왕가를 구할 수 있는 힘과 영광을 누릴 생각에 골몰했다. 베르사유가 전성기를 이룰 몇 년 동안,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영국, 독일, 스웨덴의 멋진 장교들에 둘러싸여서 재냈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는 오랫동안 가벼운 말투가 습관화되어 왔기 때문에, 궁정 사람들 앞에서보다는 그들과 있는 것이 훨씬 더 편했다. 그녀는 자신이 발휘하는 조그만 영향력에 만족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까이 할 수 없는 기품이 아첨꾼들을 멀리하게 했다. 이 조심스러운 여인은 아이들을 낳은 뒤, 떠다니는 소문으로 자신의 명예가 더럽혀졌음을 알고 나서는 단호하게 정숙한 여자가 되었다. '나는 남편과 헤어진 부인들은 결코 만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녀는 모나코의 공주를 접견하지 않았다. 팜플렛에 인용되었거나 비밀을 퍼뜨려서 왕비가 이상한 행동을 한 것처럼 믿게 만드는 남자들은 모두 율리시스의 아내 페넬로페 옆에 죽치고 있던 아첨꾼들뿐이었다. 그들은 베르사유나 트리아농 성에서 산책을 하고, 진수성찬을 즐기며, 사교오락을 하고, 가면무도회를 여는, 말하자면'명예로운 애인'으로서 한가하게 삶을 누리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캉팡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이런 모든 사실을 시인했다. "물론 내게 애인들이 있다고 넘겨짚는 것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해서 그런 것이겠지만, 내게 그렇게 많은 애인이 필요하다거나 그들 모두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은 더 이상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시종이었던 에제크 백작은 이렇게 썼다. '적어도 왕비가 궁에 페르젠 백작이나 드 보드뢰이 그리고 드 쿠아니를 맞아들일 때에는 브장발 노인도 함께 불렀다. 10년 전부터 이런 종류의 온갖 중상 모략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사라졌고, 혁명 초기에 널리 퍼졌던 일화들도 확인된 것이 없다. 침묵이 철저하게 이런 외설스러운 소문을 매장시켰다. 나는 궁정과 왕비 가까이에서 지냈던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열심히 신중하게 귀기울였고, 의논해 보았지만, 그들의 말은 한결같이 그녀의 미덕에 대한 나의 존경심을 더 확고하게 해줄 뿐이었다.' 텡빌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 어떤 사건을 찾아낼 수만 있었다면, 그는 입이 가벼운 시종이나 시녀, 하녀, 하인, 시동 또는 간수를 증인으로 내세웠을 것이다. 1792년 2월 13일 밤, 우편 배달부로 변장한 페르젠이 튈르리 궁에 나타났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사랑을 나누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탈출 공작을 위한 밤이었다. 페르젠은 파리에 늦게 도착했고, 왕과 왕비와 함께 외교적 교섭을 준비하려고 성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면서 여자 친구의 집에 숨어 있었다. 증언 중에 르 쿠엥트르는 '라 폴리냑'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는 궁정을 발 아래 두고 있었다. 왕의 자녀들로부터 가장 신임받는 대신들, 그리고 물론 '그녀에게 대향연의 자리를 마련해 준'왕비까지도 그녀의 손아귀 안에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중상 비방을 한번도 심각하게 받아들인 적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일들에 대해서 자신의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사람들은 내가 애인들이 있다는 소문에 만족하지 않고, 동성애 소문까지 퍼뜨리고 있어요. 1783년에 왕실 자녀들의 가정교사로 임명된 폴리냑 부인은 모사꾼에 지나지 않았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고, 일찍이 궁정에 염증을 느낀 그녀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항상 욕심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런 평온함이 왕비를 안심시켰다. 따라서 왕비는 폴리냑 부인을 둘러싸고 있는 욕망의 소굴을 보지 못했다. 왕비는 왕의 방과 왕자의 방 사이에 있는 넓은 방을 폴리냑 부인에게 내주도록 명령했다. 그래서 왕비는 폴리냑 부인과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심지어 폴리냑 부인이 경비실을 거치지 않고 드나들 수 있도록 오몽 공작의 방 두 개를 회수하는 세심한 배려까지 했다. 혁명 전의 '대향연'에 관한 증언에 이어, 르 쿠엥트르는 근위병들의 향연에 대해서 말했다. 거기에도 역시 적대관계는 많았다. 국왕의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서 르 쿠엥트르는 베르사유에서 파리 국민군을 모델로 한 부르주아 국민군을 조직했다. 푸아의 왕자는 '가장 순리에 맞는 생각을 따른다고 고백하며'르 쿠엥트르를 내쫓고, 참모본부를 구성했다. 해군 대장이며 미국 독립 전쟁 참전 용사인 데스텡이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구베르네가 부사령관이 되었다. 이 베르사유 국민군의 명령에 따라서, 왕의 시종들은 물론 궁정악사들까지도 전부 1789년 7월부터 국민군 육군 중위나 대위의 복장을 입게 되었다. 왕은 그 사실이 몹시 불쾌했다 그는 차라리 하인들 없이 지내거나 아니면 '그런 격에 맞지 않는 복장'을 하고 나타나는 것을 금하도록 했다. 그러나 베르사유에서도 가장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장소에서 이들 병사들이 일부러 활보하고 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었다. 7월 어느 일요일, 성당에서 왕과 왕비는 이태리의 가수가 정예병사인 육군 대위 제복을 입고 성서 시편을 가사로 한 성악곡인 모텟을 노래하는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다. 7월 30일 밤 모든 프랑스 군인은 궁을 버리고 떠났다. 그들은 무기는 물론 안장 아래 까는 모포, 마의, 그리고 말들까지 가지고 가 버렸다. 근위병들만이 왕의 곁에 남았다. 버림받은 왕은 자신고 가족이 머지않아 이별하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것이 기적이었다. 그는 모욕을 당할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사실을 무심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런 평온함이 오히려 불길하기까지 했다. 아무리 온건한 사람들이라도 왕이 시대 상황의노리개가 되는 것을 보는 것은 짜증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1789년 여름 동안 왕가가 어떻게 아무런 보호도 없이 궁에 남아서 살 수 있었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9월 25일, 왕은 마침내 플라드르 연대에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했다. 이 군대는 '애국파' 시민군과 친해질 것인가 아니면 '왕당파'근위대와 가까워질 것인가? 르 쿠엥트르에 따르면, 9월 29일, 첫 향연에서 플랑드르 연대의 군인들은 베르사유의 '시민들'과 어울렸다. 그리고 자유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10월 1일, 르 쿠엥트르의 말에 의하면, 한번은 성 안의 공연장 가운데 가장 넓은 홀에서 향연이 베풀어졌다. 근위병들은 플랑드르 연대의 군인들과 장교들에게 왕을 위해 좀더 헌신하고 희생할 것을 요구했다. 여단으로 편성된 군인들은 오케스트라의 반주에 맞춰서 '오 나의 리샤르, 오 나의 왕이시여'라는 그레트리의 곡을 합창해야만 했다.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이 병사들은 왕비에게 용기를 주었다. 이들 군인들의 사기를 올려 주기 위해서 그녀는 귀빈석에 모습을 나타내고 싶었다. 처음에 그녀는 향연에 직접 개입하지 않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었다. 왕이 사냥에서 돌아왔다. 그 역시 그 자리에 참석할 것을 허락했다. 왕세자를 데리고 나온 왕비와 왕은 나란히 테이블사이를 걸어갔고, '참석자들은 기쁨과 사랑의 갈채를 보내면서 왕실 가족의 건강을 기원했다'라고 샹포르는 쓰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괴롭힐 수 있을까?'라는 오페라 '변절자'를 연주했다. 그곳에는 2백 40명의 회식자가 있었고, 객석은 약 3천명 정도의 구경꾼들로 꽉 찼다. 르 쿠엥트르는 모자마다 흰색 모장이 달려 있었다고 말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사실을 부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 식사에 초대된 베르사유의 몇몇 병사들은 아래가 하얀색으로 된 국민 모장을 뒤집어 놓았던 것이다.' 부인들에게는 머리에 꽂을 리본을 주었다. 밤이 깊어가자 술에 취한 군인들은 성의 앞뜰에서 춤을 추었다. 그들 중 두 명이 고함을 치며 사다리를 걸고 왕의 방 발코니로 기어올라갔다. "폐하, 저희가 이렇게 간청드리러 올라왔습니다. 저희는 당신 한 분만 모실 것을 맹세합니다." 루이 16세는 왕자의 방에 도착한 장 밥티스트 에벵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페르스발이 말했다. 증인으로 소환되었던 페르스발은 '그가 그날 저녁에 전 왕의 방 발코니까지 올라갔었다.'고 입증해 주었다. 이런 시위는 서툰 짓이었다. 소요가 은밀히 준비되고 있는 파리에서 궁정은 목소리를 높이고 싶었던 것 같다. 궁정은 지불할 돈도 없으면서 용병대를 소집함으로써 영향력을 과시했다. 데스텡 백작이 지휘하는 베르사유 국민군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합류했나? 기껏해야 천 명 정도. 8천 명의 파리 시민군과 왕의 안전을 보살핀다는 이 보잘것없는 플랑드르 연대는 비교가 안되었기 때문에 파리 시민군은 아무것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파리는 공화국 신문이 주장했던 '무시무시한 위협'에 떨고 있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파리의 지부들은 왕과 왕비를 붙잡아서 파리에 데려다 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소요를 일으켜 국회를 공포에 떨게하고, 파리 혁명정부 앞에서 그들의 왕권 포기를 준비시키자는 것이었다. 그 다음날 아직 베르사유에 본부를 두고 있는 의회에서는 엄청나게 소란한 가운데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샹포르에 따르면, 사람들은 왕이 잘못을 저지르기만을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선동적인 웅변가들은 근위병들의 '대향연'소식을 널리 퍼뜨리고 다녔다. 왕을 구하기 위해서 미라보는 왕비를 비방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은밀하게 말했다. "왕과 왕비가 죽으면 하층민들은 그들의 시체를 짓밟을 것이다" 근위병들의 파티가 파리 시민들이 자신들의 불행한 처지를 떠벌리도록 자극했다. 부인들은 시민군의 감시를 틈타 형편없는 빵을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라도 구해 보려는 희망으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기다렸다. 파산할 것이 두려워서 금융기관 앞에서 어음 할인을 하려는 시민들이 줄을 섰다. 여권을 발급받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고, 7월 14일부터 9월 10일까지 20만 명에게 여권이 발급되었다. 사치 산업도 사라졌다. 하인, 재단사, 가발 제조업자, 제화공, 양재사들이 고관 대작들과 부유한 부르주아들의 응접실에서 아침부터 분주했었는데 이제는 할 일이 없었다. 모두들 혁명정부로 모여들었고, 그 중에는 가족이 굶주리고 있는 주부들도 있었다. 시청에서는 실업자 구제를 위한 취로 사업장을 열어야만 했다. 가난으로 지나치게 격분한 60만 주민이 사는 파리에서, 신문만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신문들은 정보를 주었지만 왜곡된 정보가 대부분이었다. 카미유 데물렝, 고르사스, 보르도의 전 변호사 엘리제 루스탈로는 새로운 제국, 여론의 제국을 창조해 내고 있었다. 평온한 날이나 한가한 시간에조차도, 이런 신문들은 많이 얽히기 위해서 놀라운 소식을 세상에 내놓았고 '배신자들을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대중은 이런 신문을 믿었고 그들을 무기력증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신문사에게 감사하는 것 같았다. 대중은 어떤 형태로든 큰 파국이 일어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던 참이었다. 신문기자들은 새벽 4시에 그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겁없이 휘갈겨댔고, 그렇게 날조된 신문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광란하는 무리들을 선동하고 자극했다. 10월 5일, 7천 내지 8천 명의 시민들이 방위가 허술한 시청으로 밀고 들어가서 대포를 점령했다. 라 파이예트는 베르사유로 향하는 행렬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군중을 저지하려다가 스무 번이나 총에 맞을 뻔했다. 한 젊은이가 라 파이예트의 말 고삐를 잡고 말했다. "장군님, 지금까지 당신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당신이 우리를 따라오셔야겠습니다." "베르사유로!" 군중이 소리쳤다. 라 파이예트는 그를 의심하고 위협하는 그 자신의 군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군중을 뒤따랐다. 베르사유에는 왕이 사냥에서 돌아와 있었다. 사람들은 왕비도 불러댔는데, 그녀는 트리아농의 자신의 동굴 안에 있었다. 생 프리스트 배작이자 전 대사이며 내무대신이었던 프랑수아 에마뉘엘 기나르는 왕의 가족에게 일단 랑부이에로 서둘러 떠나라고 재촉했다. 생 프리스트는 라 뤼제른과 라 투르 뒤 펭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네케르는 반대했다. 그는 왕이 베르사유에 있는 한 아무런 위험이 없으며, 파리에 머문다면 '국민군의 보호 아래 있게 될 것'이므로 더욱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파리는 왕국이 절실히 필요로 하는 재정적 지원을 해 줄 것이다. 왕의 출발 계획에 대한 증언은 르 쿠엥트르가 했다. "10월 5일 낮에, 데스텡은 파리에서 일어나고 있는 움직임을 알리고 베르사유의 궁전으로 가서 우선 사냥중인-그래서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전 왕을 모셔오도록 허락을 얻어냈습니다. 왕은 잠잠해 지면 모시러 오겠다는 데스텡의 말만 믿고 사냥을 떠났습니다." 르 쿠엥트르의 모든 증언과 베르사유에서 10월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 반박할 기회가 주어졌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음과 같은 것을 인정했을 뿐이다. 첫째, 그녀는 베르사유의 국민군에게 흰색 깃발을 두 개 주었다는 것. 둘째, 그녀는 근위병들의 식사가 있던 날 테이블 주위를 돌아다녔다는 것. 그러고 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밖의 여러 가지 점에 대해서 신문을 받았다. 우선 왕의 형제들의 활동에 대해서 신문을 받았다. 먼저 1789년 7월 18일 이후에 망명한 프로방스 백작, 그리고 다음으로 아르투아 백작에 대해서. "당신은 아르투아 백작이 국민의회 의사당을 폭파시킬 계획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나?" "나는 시동생 아르투아가 당신이 말한 그런 계획을 갖고 있다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느 자진해서 여행을 떠났다." 의사당 습격 계획은 1789년 7월에 베르사유를 전율케했다. 왕은 그 일과 아무 관련도 없었다. 왕은 그 소문을 단 한 마디도 믿지 않으면서도 불안을 감추지 못했고 7월 14일 저녁에는 아내의 트리아농 궁으로 가서 다음과 같이 털어놓았다. "반역자들은 내가 삼부회 의사당을 폭파시키려 한다고 소문을 퍼뜨리고 있소." 바로 그날 저녁, 캉팡 부인은 당시 국회의원이던 베구앙씨와 함께 밤참을 들었다. 그는' 왕도 모르는 사이에 꾸며진 이 끔찍한 계획'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캉팡 부인은 왕에게 그 사실을 보고했고 왕은 깜짝 놀랐다. "뭐라구? 그런 잔인한 생각에 베구앙 씨처럼 덕망이 있는 사람이 격분하지 않다니? 내일 아침 새벽에 나는 의사당을 샅샅이 뒤지도록 명령하겠다." 7월 15일, 루이 16세는 직접 의사당에 모습을 나타내고 연설을 했다. "부당한 억측이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당신들의 대표들이 안전에 위협을 받고 있다는 소문을 겁없이 써대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렇다고 해서 이미 내 이름으로 부인한 바 있는 비난받아 마땅한 소문에 대해서 다시 당신들을 안심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7월 16일 저녁부터 왕비는 베르사유를 떠나고 싶어했다. 그녀는 보석상자에 보석들을 담았고, 엄청나게 많은 서류들을 불태워 버렸다. 그녀는 폴리냑 주변 인문들에게도 망명을 재촉했다. "나는 모든 것이 두렵습니다. 우정의 이름으로 떠나라고 부탁합니다! 아직은 나의 적들의 분노로부터 벗어날 시간적 여유가 있습니다. 당신을 공격할 때, 사람들이 나에게 하고 싶은 행동을 당신들에게 하는 것이라 여기세요." 그녀가 한 마디 더 했다면 이렇게 덧붙였을 것이다. '사람들은 왕을 괴롭히기 위해서 나를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게다가 왕도 폴리냑에게 이렇게 말했다. "왕비의 충고를 따르도록 하시오.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을 멀리해야 하는 것은 나로서도 큰 불행이오. 나는 방금 아르투아 백작에게 떠나라고 명령했소. 당신에게도 똑같은 명령을 하는 바이오. 나를 봐서라도 지체 말고 가족을 데리고 떠나시오. 날 믿으시오, 당신의 직책은 당신을 위해서 남겨 두겠소." 자정 무렵 왕비는 편지를 썼다. 안녕, 나의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이 얼마나 슬픈 말인가요! 그렇지만 필요한 말이군요, 안녕! 나에게는 작별이 키스를 할 힘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문은 재개되었다. "당신은 여러 명의 재무대신들이 준 그 많은 돈들을 언제 다 썼나?" "나는 그렇게 엄청난 돈을 받은 적이 없다. 내가 받은 돈은 전부 내가 부리는 사람들의 월급을 주는 데 썼다." "왜 당신은 폴리냑 가족과 그 밖의 다른 부인들에게 많은 돈을 주었나?" "그녀들은 궁정에 일했기 때문에 일한 대가를 준 것뿐이다." "근위병들의 회식은 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열릴 수 있었는데, 당신은 그 회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나?" "국민군과 그들의 결합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제 4사단을 대신해서 참모부관이었던 장 밥티스트 라피에르가 바렌으로의 도주에 대해서 증언했다. "나는 튈르리 궁에서 근무하던 1791년 6월 20일 밤에 많은 사람들이 성에서 안뜰로 그리고 안뜰에서 성으로 오고 가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1793년까지도 바렌으로의 도주는 아직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라 파이예트와의 공모 없이 어떻게 왕실 일가가 튈르리 궁을 떠날 수 있었는가? 수많은 경비병들이 통로마다 불침번을 서고 문마다 지키고 있는 튈르리 궁에서 감옥살이나 마찬가지로 갇혀 살던, 여섯 명이나 되는 얼굴이 잘 알려진 사람들이 들키지 않고 성을 빠져 나갔던 것이다. 튈르리 성의 경비 임무는 당시 파리 시민군 사령부 참모장이었던 장 밥티스트 구비옹에게 돌아갔다. 그의 정부였던 로쉬뢰이 부인은 왕비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녀는 '용무가마꾼'으로 실내용 의자식 변기를 담당하고 있었다. 5월 21일부터 로쉬뢰이 부인은 파리 시장 바이이에게 튈르리 궁에서 벌어지고 있는 도주 계획에 대한 보고서를 제출했다. 구비옹은 경비원의 수를 두 배로 늘렸다. 그는 왕이 도주했다는 보고를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불가능하다. 그 문 앞에 밤새도록 다섯 명의 장교들이 지키고 있었고 나 자신도 그곳에 갔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판에서 판사들은 특히 라 파이예트와 바이이 시장이 왕과 공모했다는 것을 밝히고 싶어했다. "당신이 밖으로 나갈 때, 걸어서 갔나 마차를 타고 갔나?" 판사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질문을 던졌다. "걸어서 갔다." "어디를 통해서 갔나?" "카루젤을 통해서다." "라 파이예트와 바이이는 당신들이 떠날 때 성에 있었나?" "그런 것 같지 않다." "당신은 궁에 거처하고 있는 친구들 방을 통해서 내려가지 않았단 말인가?" "내 방 아래에는 의상담당 부인의 방이 있을 뿐이다." "그 부인의 이름이 무엇인가?" "생각나지 않는다." "문을 연 것은 당신이 아니었나?" "나였다." "라 파이예트가 루이 카페의 방에 온 적이 없는가?" "오지 않았다." "당신은 몇 시에 떠났는가?" "11시 45분이다." "당신은 그날 성 안에서 바이이를 본 적이 있는가?" "없다." 탈출을 결정한 것은 바로 페르젠과 왕비였으며 페르젠은 봉디까지 마차를 몰고 가는 영광을 얻었다. 그렇지만 이 거사에 대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무에게도 비밀을 털어놓지 않았다. 심지어는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투르젤 공작부인에게조차도 말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 순간에 마차에 오르면서 알려 주었다. '왕은 이런 거사를 꾸민 나의 용기와 능력에 놀랄 것이 틀림없다'라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스페인 대사인 누네즈에게 말했다. 그 소식에 놀란 누네즈는 이렇게 썼다. 내 앞에는 지금 절망에 빠져 최후의 발악을 하는 부인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은 사실은 튈르리 궁에서 누구나 다 아는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1791년 초 내내 왕가는 말싸움이 벌어질까 봐 서로 말하기를 꺼렸다. 아주 상식적이고 간단한 이야기를 할 때조차도 혐오감을 드러냈다. 왕비는 왕을 기만하는 의회를 비난했다. 예의바른 왕조차도 의회에 왕정의 충실한 하인들이 있다고 감히 말했다. "그들의 제의를 받아들이십시오." 왕비가 그에게 말했다. "매우 조심해야 하는데...." "폐하의 그런 태도가 항상 화근이 되고 있습니다." 왕비는 위험할 때에도 머뭇거리며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남편을 비난했다. 엘리자베스가 끼여들었다. 망명 귀족과 황제를 생각해야 한다고 그녀는 말했다. 도처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그들만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라 파이예트는 이런 부부 싸움의 증인이었다. 라 파이예트는 스웨덴의 멋쟁이, 페르젠이 왕의 도주를 계획한다면, 왕이 마지막 순간에 왕비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심사숙고한 끝에 나는 남기로 했소, 당신만 떠나시오." 왕비의 출발은 당연히 왕과의 이혼을 의미할 것이다. 신하들로부터 버림받은 왕은 아주 간단히 어떤 법관에게 넘겨질 것이다. 그러면 라 파이예트 자신이 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을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말하자면 라 파이예트 1세가 되는 것이다. 또 다른 증인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고 라 파이예트의 공모를 밝혀 내려고 애썼다. 공증인 아브라함 실리는 1791년 6월 20일 밤에 튈르리 성에서 근무중이었는데, 피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날 저녁 6시경에 그에게 다가와서 아들과 산책을 나가겠노라고 말했다. 증인은 라로슈 씨에게 그녀를 따라가도록 했다. 얼마 후 밤중에 그는 라 파이예트가 구비옹의 집으로 대여섯 차례 드나드는 것을 보았다. 구비옹은 10시경에 전 왕자들의 방에서 앞뜰로 향한 문을 제외한 모든 문을 닫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구비옹은 그들의 방으로 들어와서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비비면서 말했다. 그들은 떠났다라고. "라 파이예트가 밤중에 성을 빠져 나간 것은 몇 시였나?" 재판장이 증인에게 물었다. "자정이 좀 안 되어서입니다." 증인이 대답했다. 재판장은 다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물었다. "당신은 몇 시에 나갔는가?" "이미 말했다시피, 11시 45분이다." "당신은 루이 카페와 함께 나갔는가?" "아니다. 그는 나보다 먼저 나갔다." "그는 어떻게 나갔는가?" "큰 문을 통해서 걸어나갔다." "그러면 당신의 아이들은?" "그들은 한 시간 전에 가정교사와 함께 나갔다. 그들은 카루젤 광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가정교사의 이름은?" "드 투르젤." "당신들과 함께 있었던 사람들은 뭐하는 사람들었나?" "세 명의 근위병이 우리와 함께 갔고 그들은 파리에 우리와 함께 되돌아왔다." "그들은 무슨 복장을 하고 있었나?" "그들이 돌아올 때 입었던 바로 그 복장이었다." "그러면 당신은 어떻게 입었었나?" "나 역시 돌아올 때 입었던 그 옷을 입고 갔다." "당신의 출발을 알았던 사람은 몇 명이나 있었나?" "파리에 있는 근위병 세 명뿐이었다. 그러나 가는 도중에, 부이예가 우리 일행을 보호하기 위해서 그의 군대를 배치해 주었다." "당신은 아이들이 당신보다 한 시간 전에 나갔고, 전 왕은 혼자 나갔다고 했는데, 그러면 당신은 누구와 함께 있었나?" "근위병 중 한 명과 있었다." "당신은 나가다가 라 파이예트를 만나지 못했는가?" "나는 나갈 때 그의 마차가 카루젤로 가는 것을 보았지만, 그에게 말을 거는 것을 자제했다." "당신이 가족과 함께 타고 떠났던 그 문제의 마차를 제공했거나 제공하도록 명령한 사람은 누구인가?" "그는 외국인이다." "국적은?" "스웨덴" "그것은 바로 파리의 바크 가에 머물고 있던 페르젠이 아닌가?" "그렇다." "당신은 왜 러시아 남작부인의 하녀 이름으로 여행을 했는가?" "그렇지 않으면 파리를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당신에게 여권을 주었는가?" "한 외국대신에게 부탁했다." "당신은 왜 파리를 떠났는가?" "왕이 떠나고 싶어했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터무니없는 거짓말하기를 좋아하는 고장에서 태어났다. 만일 그녀에게 바렌으로의 도주에 대해서 달리 물었더라면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역사는 그래서 신비로 가득 차게 된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무도회처럼 철저히 계획되었다. 경비병들을 속이기 위해서, 왕과 체격이 같은 한 사람이 며칠 전부터 튈르리 궁에서 배회했다. 월요일, 왕비는 아이들을 데리고 티볼리에 있는 부텡 씨의 정원으로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그녀는 다음날 외출을 위해서 보병 소령에게 명령을 내렸다. 왕비는 장 밥티스트 구비옹이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투르젤 부인에게 '혹시 그를 만난다면, 그가 폐하의 출발에 도움이 될 경우에 한해서'같이 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행을 위해서, 투르젤 부인은 코르프 부인의 이름으로 여권을 얻었다. 왕비는 그녀의 하녀인 로세 부인의 이름을 빌렸다. 왕은 자신의 시종인 뒤랑 씨가 되었고, 엘리자베스 부인은 로잘리가 되어서 아이들의 하녀가 되었다. 가장 힘든 것은 왕자에게 여장을 시키는 것이었다. 그에게 작은 원피스를 입히고 여자용 모자를 씌웠다. 왕자는 이제 전쟁터로 가서 한 연대를 지휘하게 될 것이며, 검과 군화도 지급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여장을 허락했다. 쪽문을 통과할 때, 왕은 왕비의 팔을 붙잡았다 왕은 버클 달린 구두를 신는 데 익숙하지 않았다. 그는 발이 불편해서 넘어질 뻔했다. 보초는 그가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면서 다친 데는 없는지 살펴보았다. 왕비는 그들의 탈출이 무산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들은 무사히 통과했다. 더 멀리 카루젤을 가로지르다가, 왕 부부는 횃불을 든 사람들을 앞세운 라 파이예트의 마차와 마주쳤다. 라 파이예트가 머리를 내밀더니.... 마차는 가던 길을 계속 갔다. 도주에 쓰인 베를린 형 대형 사륜 우편 마차는 웃음거리가 되었다. 마차는 노랑색과 초록색으로 페인트 칠이 되었고, 내부는 빌로드로 도배를 했으며 양철판으로 만든 두 개의 화덕, 여덟 개의 술병이 담긴 야전용 취사도구 상자, 가죽으로 만든 요강 두 개 등등을 실었다. 이 마차는 파리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마차가 파리 외곽 어딘가에서 도망자들을 기다렸다. 그렇다! 그러나 어떤 마차인가? 왕은 파리에서의 여정을 전혀 몰랐다. 왕실 일가를 잔뜩 태우고 튈르리 궁을 빠져 나온 전세 마차를 안내할 사람은 브리즈 후작이었다. 바꿔탈 대형 사륜 마차가 어디에 있는지는 후작도 왕과 마찬가지로 잘 알지 못했다. 그는 불빛에 끌려갔다. 그것은 결혼식 참석자들이었다. 마차에서 내려서 부부들처럼 처신해야 했다. 결혼은 참 좋은 구실이었다. 결혼식에 간다고 하자, 경비병에게 알릴 것도 없이 전세 마차는 성문을 통과할 수 있었다. 브리즈 후작은 다시 고삐를 잡았다. 그는 파리 주변 도로들의 교차점에서 그 베를린 형 마차가 있는 다른 성문으로 난 길을 찾았다. 교외의 길들을 우회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 무려 세 시간 이상이 지체되었다. 그래서 파리에서 샬롱까지 계획으로는 밤을 이용하기로 했는데, 낮에 가게 되었다. 모에 도착한 것이 6시였고, 몽미라이에 11시에 도착했다. 앞뒤로 기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하녀들이 탄 이륜 마차를 거느린 대형 마차가 지나가는 것을 본 농부들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샬롱을 지나서 마차가 저녁 6시에 도착한 퐁 드 솜 베즐에서, 부이예 장군은 슈와젤 공작이 지휘하는 40명의 경기병을 배치하기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경기 병들은 먼저 셍트메누, 다음에 클레르몽 마지막으로 바렌에 배치 했다. 샬롱에 정오에 도착한 슈와젤은 지쳤다. 군대는 호기심을 자극하게 마련이었다. 쇠스랑 곡쾡이 총따위를 들고 이 군인들에게 응수하기 위해 모여드는 농부들을 본 경비병들은 겁이 났다. 이렇게 해서 사전에 부이예 장군이 명령한 함구령이 위태롭게 됐다. 왕의 가족이탄 마차가 도착하기 두시간전 경기병들은 그곳에 떠났다. 슈와젤은 스그로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이런생각을 했다 "여행은 무산된 거야" 그런데 야반도주여행이 다음날 대낮으로 연기된 것뿐이라니. 살롱에서 경비병들이 왔다갔다 하는 것을 본 농부들은 〈저들이 기다리는 겄은 왕이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소문이 처음에는 허튼 소리 처럼나오더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마침내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누군가가 그 소문을 분명하게 입밖으로 냈고 시장에서 달려가서 보고했다 "말도안돼 " 시장은 그 소식을 발표하기를 거부했다 생트메누에서 말을바꾸고 마차가 다시 떠날 준비를 할대 우체국장인 장 밥티스트 드루에는 마을로 들어왔다 그의 나이 스물여섯 그는 1789년까지 용기 병으로 복무했다 전해오는 이야기 처럼, 그의 왕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 은화나 아시냐 지폐를 볼 필요도 없었다. 드루에는 사람들이 묘사하는 것과 달리 그렇게 결단성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이었다. 샬롱 중고등학교의 모범생이었고 만족할 만한 결혼을 했으며 자신의 토지를 개척해서 부유한 부르주아가 되었다. 따라서 그로서는 왕을 체포하는 것이 보통일은 아니었다. 드루에는 혁명정부의 광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망설였다. 신고해야 할것인가 ? 아무튼 루이 16세는 지나가 버렸고, 그것이 그에게는 좋른 구실이 되었다 왕이라는 존재가 주는 환상이 깨지는 순간이 었기 때문이었다 . 그러나 왕이 출말하고 몇시간이 지나자 생트메누의 시장과 보자관들은 흥분했다. 우체국장이 목격한 사람들의 정체가 뭣인가를 캐묻기 위해서 시청직원이 드루에의 집으로 들이닦쳤다 드루에는 자신이 중요한 여할을 하리라는 rjt을 에감했다. "맞아요! 방금 ,나는 의심스러운 시청에 알리려던 참이었소 …." 재빨리 말을 둘러대며 드루에는 왕을 체포하는 영웅적 인물이 될 것을 결심했다. 그는 위험을 각오하고 말에 올라탔다. 어디에서 왕의 군인들을 만날지 모르는 숲을 가로질러 갔다 그는 시기 적절하게 바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는 그가 원조를 받기 쉬웠다. 시청 직원들과 애국파 군중들은 전시 태세를 갖추었고, 왕의 군인들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동안 그들은 더욱더 분기 충천했다. 식료품과 양초를 파는 소매상인이자 시장인 소스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집에서 흥분된 밤을 지낸 후, 왕실 일가는 잠시 휴식을 취했다. 왕은 부이예의 군대가 규모가 크기 때문에 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의 도착을 애타게 기다렸다. 아침 6시에 왕 앞에 나타난 것은 부이예가 아니라 국민의외의 우체국장 드루에였다. "왕실 일가는 체포되었으니 파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루이 16세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랑스에는 이제 왕이 없다. 나의 왕국에 배신자와 불한당들이 들끓고 있는 것은 나도 잘 안다. 하지만 그들의 왕을 체포할 만큼 극악무도한 자들이 존재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왕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조는 척했다. 왕의 마차가 7시 30분에 다시 출발하려면 그를 재촉해야 했다. 두 시간 후, 부이예와 그의 군대가 마을로 들어왔다. 도주의 책임을 맡고서 이런 엄청난 실수를 함으로써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단두대로 보낸 것이 과연 누구인가? 혁명으로 기진맥진해진 루이 16세는 파리가 흥분으로 들끓고 있는 반면 지방은 고요하기만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왕은 바렌 시민들에게 말했듯이, '농부들에게 은신처를 찾기 위해서 왔다.' 그는 외국으로 도망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를 따라가자! 그가 정말 몽메디로 돌아가는지 두고보면 알 것이다. 사실 재판 과정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당신은 외국에 원조를 요청했나?'라는 질문을 했다면,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질문을 분명하게 대답할 시간과 솔직하게 설명할 의지만 있었다면, 그녀는 오스트리아가 전쟁을 선포하는 것도 영토를 침범하는 것도 원치 않았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단지 오빠인 황제가 우수한 연대의 열병식을 통해서 프랑스 정부에 겁을 줌으로써, 왕과 가족이 몽메디에서 안전하게 지낼 수 있기만을 희망했다. 파리는 전쟁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한 번의 열병식, 한번의 경고만으로도 타협할 것이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테느는 4월 이후 왕이 반혁명의 기수가 되도록 부추긴 것이 자신이라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91년 4월 20일부터 6월 10일까지 마리 앙투아네트와 비엔나 궁정 사이에 오고 간 편지들은 왕비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4월 22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메르시 아르장토를 통해서 황제에게 편지를 썼다. 행동을 개시하기 전에 -말하자면 파리를 떠나는 것-폐하께서 아를롱과 비르통에 1만 5천 명 정도의 사람을, 그리고 몽스에도 그 정도의 인원을 보내 주실 수 있는지 알고 싶습니다. 부이예 씨가 그것을 간전히 바라고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그가 몽메드에서 군대와 군수품을 동원할 수 있답니다. 5월 22일, 답장이 없었기 때문에 왕비는 오빠인 황제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우리는 몽메디로 갑니다. 부이에 씨가 그 장소로 군대와 군수품은 보낼 것입니다. 폐하께서 우리 요구대로 움직여 줄, 물론 우리가 안전할 경우에만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8천 내지 1만 명 정도의 1개 군단을 뤽상부르에 보내 주시기를 강력히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몽메디에 들어가는데 생길지도 모르는 혁명파의 방해를 막을 수 있을 만큼만 군대를 보내 주시면 그들을 위협하면서 우리의 요구 사항을 제시할 것입니다. 6월 1일, 마리 앙투아네트는 드디어 '우리의 요구대로 움직여 줄 8천 내지 1만 명의 사람들'을 오빠에게 요구했다. 이 요구는 받아들여졌지만, 왕비는 아르투아 백작과 망명 귀족들의 일치된 의견에 굴복했다. 안 됩니다! 그들은 군대라는 차페물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입을 모았다. 왕과 왕비를 구하기 위해서는 외국 군대의 직접적이고도 막강한 개입과 망명 귀족들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주장이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겁이 났다. 그녀는 루이 16세의 의견을 따랐다. 공격적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그렇게 되면 공화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고, 튈르리 궁에서 왕과 왕비를 죽이는 데 좋은 구실이 될 것이었다. 한편, '이 계획은 무력하게 만들 것이다.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왕은 힘과 용기를 가져야 하며 나의 이런 시도에 충격을 받아야 한다.'라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덧붙여 말했다. 1791년 6월 9일, 오스트리아 황제는 반대를 인정했다. 그래서 그는 메르시 아르장토에게 편지를 쓰게 했다. 왕의 도주 계획이 실행된다면, 우리는 경기병 몇 개 사단을 몽메디로 보내서'얼쩡거리게'할 수 있을 것이다. 심문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외과 의사이자 포병인 루시옹의 증언에 의하면, 그가 1792년 8월 10일 튈르리 궁의 피고의 방에 들어갔을 때는 피고가 떠난 지 몇 시간 지난 후였다. 그는 피고의 침대 밑에서 술병들을 발견했다. 어떤 것들은 비었고 어떤 것은 뚜껑도 따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있었는데, 스위스 장교들이나 궁전에 가득 차 있던 왕당파 기병들이 마시던 것이라고 생각했다. 증인은 피고가 프랑스의 여러 곳, 특히 낭시와 마르시 연병장에서 일어났던 대학살 사건의 선동자였으며, 또한 그녀의 병장의 오빠인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에게 막대한 자금을 대줌으로써 터키와의 전쟁을 지속하게 했고 더 나아가, 오빠로 하여금 그녀와 그녀의 남편과 가족을 먹여 살린 너그러운 국가 프랑스에 쳐들어오기 쉽게 도와 준 장본인이라고 비난하면서 증언을 끝맺었다. 증인은 한 선량한 애국시민 여인으로부터 그 사실을 알아냈다. 그녀는 혁명 이전에 베르사유에서 일했을 때 궁정에서 총애를 받던 한 남자가 그녀에게 속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말했다. 1775년부터 1785년까지 터키에 대항한 전쟁이 동유럽에서는 현실적인 일이었지만, 프랑스에서는 그저 떠도는 소문일 뿐이었다. 신문기자들은 대중들의 머리 속에 러시아 제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거만하고 약탈을 즐기는 국가라는 인상을 심어 주고자 했다. 두 국가가 터키 제국을 공격한 것은 자기 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고, 터키를 분할해서 우선 유럽으로 진출하는 기지로 만들고 다음에 아프리카로 뻗어가기 위한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오스트리아의 군자금은 프랑스가 대주고 있다는 얘기였다. 집단 최면은 오래 간다. 터키에 대항한 전투는 중세 시대에 '유럽 기독교 국가 전체'를 결집시켰던 십자군 개념의 재출현이었다. 그러나 중세 십자군 원정과 비교할 때 18세기에는 빈틈없는 상인들이 기사단을 대신했고, 요제프 2세를 위르벵 2세로, 루이 16세를 리샤르 쾨르드 리옹이나 필립 오귀스트로 간주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증인 루시옹은 신화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현실을 보자. 루이 16세가 통치하던 기간 내내, 카트린 2세와 마리 테레즈는 오스만터키 제국이 점령하고 있는 유럽이 분할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꿈꾸어 온 이 원대한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전제 조건은 '유럽의 균형'유지이다. 이런 균형이 영토의 병합에 선행한다. 러시아는 다시 현재의 루마니아를 점령할 수 있고,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보상으로 프랑스에는 무엇이 돌아가는가? 유럽의 터키 분할 점령에서 프랑스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프랑스는 아프리카에서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쉬운 것이 이집트가 될 것이다. 그곳 주민들은 저항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곤봉만으로도 쉽게 다스려질 것이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된다. 그렇다. 하지만 어떻게 가나? 바다로 가야 한다. 애석하게도 지중해는 평화의 안식처가 아니다. 그것은 끔찍한 일이다. 왜냐하면 동부 지중해에서 가장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영국 함대를 무찔러야 하기 때문이다. 터키 지방이 합병된다면 오스트리아는 불안해진다. 세르비아가 독일계이며 카톨릭 국가인 비엔나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슬라브 민족으로 채워진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또한 슬라브 족으로 채워질 것인데, 그들의 일부는 카톨릭 교도들이고 나머지는 이슬람 교도화되었다. 따라서 터키 지방의 합병은 내전과 종교전이 벌어지는 온상으로 오스트리아 군대에게는 함정이 된다. 요컨대 터키 군대는 존재한다. 그들과 싸우려면 대등한 군사력으로 맞서야 한다. 터키 군대는 5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있고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대포를 가지고 있다. 8천 대의 짐수레, 5천 마리의 낙타, 1만 마리의 황소가 군대의 대이동을 도와 준다. 오스트리아 대사인 메르시 아르장토 백작의 질문을 받은 베르젠은 문제의 핵심을 피했다. "프랑스는 정복할 필요가 없소." 베르젠은 프러시아와 영국이 터키에 대항한 전쟁을 반드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 결과는 대혼란이요 큰 재난이 될 것이며 터키는 오히려 이 전쟁을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괴기스러운 분할이 언젠가 실현된다면 유럽은 어떻게 되는 것이오?" 베르젠은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나는 그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죽고 싶소." 1788년 카트린 2세가 크리미아를 점령함과 동시에 시골에 전염병이 돌아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을 당했다. 을씨년스럽고 사기가 떨어진 오스트리아는 벨그라드를 점령했다.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 황제는 프랑스 군대에 도움을 청했다. 프랑스 외교관들은 상업적인 이유에서 터키의 비위를 맞추고 폴란드를 침공하고자 하는 프러시아를 두려워했다. 그들은 특히 중재자 역할을 맡고 나섰다. 베르사유에서 1789년 1월 27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은 터키에 평화를 제안했다. 프랑스 대표인 슈와젤 구피에가 이 조약을 체결했다. 어디에도 왕비를 재판할 때 루시옹이 말한 것처럼, 프랑스가 중립을 지키는 대가로 전쟁 보조금을 오스트리아에 지불해야 한다는 규정은 없었다. 유럽 정치, 외교, 이런 주제들은 방청석의 모든 사람들을 지루하게 했다. 재판장은 좀더 재미있는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튈르리 궁을 지키던 스위스 사라들은 8월 9일 밤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그녀는 그들이 잘 싸우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무엇을 주었나? 다시 에르망이 피고에게 질문했다. "당신은 스위스 병사들에게 술값을 주지 않았는가?" "주지 않았다." "당신은 밖으로 나오면서 어떤 스위스 장교에게 '실컷 마셔요, 내가 당신에게 보호를 부탁해도 될까요?'라고 말한 적이 없는가?" "그런 말은 한 적이 없다." "당신은 문제의 8월 9일 밤에 어디에 있었는가?" "나는 내 방에서 엘리자베스와 함께 밤을 보냈는데, 잠은 자지 않았다." "당신들은 왜 잠을 자지 않았는가?" "자정 무렵 우리는 사방에서 경종이 울리는 것을 들었고, 우리를 공격하러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모든 귀족들과 궁 안에 있는 스위스 장교들이 모였던 곳은 당신의 방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국민에게 발포할 것을 결정한 곳도 그곳이 아니었는가?" "내 방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밤에 당신은 전 왕을 보지 못했는가?" "나는 새벽 1시까지 그의 방에 있었다." "당신은 거기에서 왕당파 기병들 모두와 거기에 있던 스위스 군 참모장을 보았나?" "나는 거기에서 많은 사람들을 보았다." "전 왕의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를 쓰는 사람은 보지 못했는가?" "보지 못했다." "왕이 정원에서 점검할 때, 당신은 왕과 함께 있었는가?" "아니다." "그 동안 당신은 창가에 있지 않았는가?" "창가에 있지 않았다." "페티옹은 궁 안에서 로데레와 함께 있었는가?" "모른다." "당신은 스위스군 사령관인 아프리와 대화한 적이 없는가? 당신은 그에게 스위스군이 국민들을 향해 발포할 수 있는지 말해 달라고 독촉했고, 그가 거절하자, 당신은 아첨과 위협을 번갈아 가면서 사용하지 않았는가?" "나는 그날 아프리를 본 적이 없다." "당신은 언제부터 아프리를 보지 못했는가?" "지금 그것을 기억해 내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에게 스위스군이 국민에게 발포할 수 있는지를 물었는가?" "나는 절대로 그런 말을 그에게 한 적이 없다." "그러면 당신은 그를 협박했던 사실을 부인하는가?" "결단코 나는 그에게 협박 같은 것을 한 적이 없다." 8월 10일 사건 이후 아프리는 체포되어서 17일 법정에 소환되었는데, 그는 궁에서 계획한 모든 것에 참여하기를 거절하자 왕비가 자신을 협박했고, 따라서 멀리 달아나지 않을 수 없음을 증명했으므로 석방되었다는 사실을 검사가 지적한다. 뢰이와 쿠르브부아에서 야영을 하고 있던 스위스 군인들의 사령관인 육군대장 아프리는 8일 튈르리 궁으로 군인들을 소환했다. 그들은 9일에 도착했지만 아프리는 병이 나서 오지 않았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프리를 만날 수도 없었다. 아프리 대신에 육군 중령 마이아르도즈가 바흐만 소령과 지메르만 소령을 동반하고 나타났던 것이다. 그 당시 공화주의 신문들이 볼 때, 튈르리 궁은 군인들과 무기들로 넘쳐 흐르고 있었다. 파리조차도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도시를 폭파하기 위해서 몽마르트르에 대포가 설치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왕은 8천 명의 귀족들과 선서를 거부한 신부들, 유명한 왕당파들의 활약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들은 파리를 산책하고, 신과 왕에 대한 기원을 되풀이하며 외진 곳으로 숨어들었고, 불쑥 나타나 무기를 휘두르며 혁명파를 구타했고, 망명 귀족들을 위해 모금을 한다고 해서 비난을 받았다. 요컨대 그들은 반혁명 음모에 생활을 다 바쳤다. 왕당파들은 위험한 사람들이었다. 적어도 그렇게 보이려고 무척 고심했다. 그들은 웅변가들에게 연설문을 작성해 주고, 그들에게 야유를 보내는 군중들을 이용했다. 불행하게도 이들 왕당파는 약간 겁쟁이들 같았다. 그들은 결코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다. 항상 숨어서 지냈다. 그들은 만날까봐 두려워서 창을 앞세우고 다니는 혁명파들의 머리 속에서만 존재했다. 다른 증언도 들린다. 참석자들은 주의를 기울였다. 에베르의 증언이 예의범절을 따르지 않으리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는 예의범절을 '순진하고 고상한 것'이라고 비웃기 때문이다. 방청객들은 정의란 고결하고 조심스럽고 점잖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그리고 단순하게 폭력에 기초한 것이라는 에베르의 말이 옳다고 생각할 것이다. 혁명정부의 검사대리인 자크 르네 에베르는 증언한다. 8월 10일 혁명정부 위원의 자격으로, 에베르는 앙투아네트의 음모를 증명해 주는 중요한 몇 가지 임무를 맡았다. 어느 날 탕플에서 그는 성경책을 한 권 발견했다. 책 속에는 반혁명 표시인 불붙은 심장을 화살이 뚫고 지나가는 그림이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주여, 우리를 가엾이 여기소서.'라고 씌어 있었다. 또 한번은 그가 엘리자베스 공주의 방에서 모자 하나를 발견했는데, 그것은 루이 카페의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이었다. 이 모자는 그가 폭정을 감행할 정도로 타락했을 때에도 몇몇 동료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그는 툴랑이 어느 날 모자를 쓰고 탑으로 들어갔다가 모자를 쓰지 않은 채 나오면서 모자를 잃어버렸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한다. 에베르는 덧붙인다. 시몽이 그에게 보고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알려 왔기 때문에, 그는 시장과 혁명정부 검사를 동반하고 탕플로 갔다. 그들은 거기에서 어린 카페로부터 어떤 고백을 듣게 되었다. 그 고백으로 루이 카페가 바렌으로 도주할 때 라 파이예트가 도주를 도운 중요한 공로자 중 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얻었다. 라 파이예트는 탈출을 돕기 우해 그날 밤을 성에서 보냈던 것이다. 감금된 왕의 가족들은 탕플에 머무는 동안 계속해서 외부에서 일어나는 소식들을 다 알고 있었다. 누군가가 헌 옷이나 구두 속에 편지를 숨겨서 들여보냈던 것이다. 어린 카페는 열세 명의 이름을 댔다. 여러 사람이 내통하는 데 조금씩 협력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의 누나와 함께 작은 탑 속에 갇혔을 때, 누군가 그의 어머니와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당신에게 소식을 알릴 수 있는 수단을 마련하겠다, 매일 어떤 행상인을 보내서 탑 근처를 돌며 저녁 신문의 주요내용을 소리쳐 말하게 하겠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어린 카페는 나날이 육체가 쇠약해져 갔고 육체적 욕망으로 음탕하고 해로운 자위행위를 하다가 시몽에게 발각되었다. 시몽은 그런 나쁜 짓을 누가 가르쳐 줬느냐고 어린 카페에게 물었고 그런 해로운 습관을 갖게 한 책임은 자신의 어머니와 고모에게 있다고 그는 대답했다. 어린 카페가 파리 시장과 혁명정부 검사 앞에서 했던 증언은 잘 검토해 본 증인은 두 여자가 어린 카페를 자기들 사이에 재우는 일이 종종 있었구나 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그런 잠자리에서 최악의 타락상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서 어린 카페의 말을 듣고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 근친상간 행위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들었다. 이런 사악한 성적 유희는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어린 아이의 신체를 무기력하게 만들기 위한 정치적 음모에 의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아직도 그들은 자신들이 왕의 자리를 차지할 운명이라는 것을 믿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런 음모를 통해서 통치권을 더 확실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이 루이 카페를 못살게 굴어서 그는 탈장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에게 붕대를 감아 주어야 했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떨어지자 건강과 활기를 되찾았다. 재판장이 피고에게 묻는다. "당신은 이 증언에 뭐라고 답하겠는가?" "나는 에베르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른다. 나는 다만 그가 말하는 핵심내용을 누나가 동생 루이 카페에게 들려준 얘기하는 것만 알고 있다. 또한 그가 말하는 모자는 오빠인 왕이 살아 있을 때 여동생에게 준 선물이다." "행정관 미코니. 조베르 마리노. 그리고 미셸이 당신은 방문했을 때 그들이 데려온 사람이 없었나?" "있다. 그들은 혼자 온적이 없었다." "매번 몇 명 정도나 데리고 왔는가?" "보통 서너명 정도였다." "그 사람들은 행정관이 아니었나?" "모른다." "미코니와 다른 행정관들이 당신을 방문했을 때 그들은 망토를 걸치고 있었나?" "기억나지 않는다." 에베르가 말한다. "카페 가족은 탕플에 갇혀 사는 동안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그 가족은 매일 그곳에 와서 근무하는 시청 공무원들을 다 알고 있었지요. 그들 각각의 사생활도 그리고 그들의 각기 다른 직무의 성질까지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빠뜨렸군요. 그것은 배심원들의 심판을 받을 만 합니다. 그것으로 피고와 그녀의 시누이의 도덕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카페의 사망 이후 이 두여인은 어린 카페를 마치 왕인 것처럼 떠 받들였습니다. 그는 식사 때 그의 어머니나 고모 보다 우선권이 있었지요. 그에게 항상 제일 먼저 음식이 나왔고, 자리도 상석을 차지했습니다." "당신이 그것을 보았는가?" "보지는 못했지만 시청 직원들이 그것을 증명해 줄 것입니다." 재판장이 피고에게 물었다. "당신은 카네이션을 든 어떤 사람이 미코니와 함께 콩시에르즈리의 당신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기쁨으로 몸을 떤적이 있었나?" "나는 그곳에 갇혀 있는 열 세달 동안 아는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보는 순간 그가 나와 열류되어 끌려온 것이 아닌가 싶어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 사람은 당신의 끄나 풀 중 한 사람이 아니었나?" "아니다." "그는 6월 20일에 튈르리 궁에 있지 않았나?" "있었다." "그러면 혹시 8월 9일에서 10일사이에도 있었나?" "그를 본 기억이 없다." "당신은 카네이션을 들고 왔던 사람에 대해서 니코니와 대화를 나눈 적이 없었나?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 "그의 이름은 모른다." "당신은 미코니에게 그가 새 시의회에 재임용 되지 않을까봐 걱정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그런 점을 두려워 했는가?" "그는 모든 죄수들에게 인간적으로 대했기 때문이다." "같은 날 당신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나? 어쩌면 이것이 내가 당신을 보는 마지막일지도 몰라요라고." "그랬다." "당신은 그에게 왜 그런 말을 했나?" "그것은 죄수들에 대한 전반적인 호의 때문이었다." 한 배심원이 끼어들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에베르씨가 말했던 사실 즉 피고와 그녀의 아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피고는 대답을 하지 않았던 것을 유념해 주시기 바랍니다." "내가 대답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라면 본능적으로 그런 혐의에 대해서는 답변을 거부 할 것이다.(여기서 피고는 매우 격한 감정에 휩싸인 듯 보였다.)나는 여기에 있을 지도 모른 모든 어머니에게 호소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아주 시의 적절한 발언을 했던 것이다. 프랑스에 모든 어머니들은 그녀의 말에 공감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의 어머니들에게 호소하는 광경이 막심 드 라 로슈트리에 의해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에서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다 알려진 바와 같이 그 파렴치한 비난에 대해 질문을 받은 순간, 마리 앙투아네트는 방청석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모든 어머니에게 호소했다. 이 숭고한 외침 앞에, 방청객들은 감전된 듯했다. 대혁명에 가담한 서민층 여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감동해서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날카로운 비명소리와 함께 몇몇 여자들이 기절했고, 재판부는 질서 교란자들에게 협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침 8시에 시작된 토론은 오후 4시까지 계속되고, 5시에 다시 시작되어서 밤에 잠시 중단되었다가 10월 15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된다. 마지막 심문은 20시간 이상 계속된 셈이다. 1차 심문이 끝나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변호사 클로드 프랑수아 쇼보 라가르드와 함께 콩시에르즈리의 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녀의 변호사는 당대에 가장 유명하던 변호사였다. 서른 여섯 살에 쇼보 라가르드는 벌서 늙은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짊어져야 했던 정신적, 육체적 부담이 너무 컸기 때문이다. 마리 앙투아네트 전에 그는 샤를로트 코르데이를 변호했었다. 그리고 나서도 바이이, 롤랑부인, 브리소, 엘리자베스 부인의 사건을 맡아 심혈을 기울였지만 재판에 졌다. 그는 왕비를 지나치게 응호했다는 이유로 1794년 6월 10일에 체포되었지만,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이 그를 단두대에서 구해 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증인의 명단에서 피에르 루이 마뉘엘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는 8월 10일 당시 혁명정부의 검사였다. 그는 말을 아주 대답하게 했고, 스스로를 천재라고 믿는 열렬한 자코벵 당원이다. 그러나 그의 잔인한 말투를 행동으로 옮긴 이후부터 그는 인간적으로 변했다. 희생자들의 피흘리는 모습을 보아 오던 그는 갑자기 그 희생자 중 한 여자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자신이 보냈던 사형 집행인들 손에서 그녀를 구해 냈다. 1792년 9월에 마뉘엘은 특별 배심원단의 단장을 맡았는데, 그것은 그가 미워했던 보마르세, 투르젤 양과 그가 시청이나 파리 감옥에서 보호해 주었던 스타엘 부인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의회에서 마뉘엘은 다미엥을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서, 이 시역자의 흉상을 프랑스 위인들의 무덤이 있는 사원인 팡테옹에 화려하게 세우도록 명령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뉘엘이 '증언할 때 그의 양심에 어긋나는 말을 하지 않을까'걱정했다. 오히려 법정에서는 참회하는 마뉘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뉘엘은 왕의 죽음에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왕이 죽은 이후 샤르트르로 은퇴했다. 그는 '덕이 있는 자가 몸을 감쌀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외투밖에 없었다.'라는 의미있는 말을 했다. 마뉘엘은 피고를 알았지만, 혁명정부의 검사로 있던 시절 외에는 그녀나 카페 가족과는 아무런 관계를 가진 적이 없었다. 그는 범령을 시행하기 위해서 탕플에 몇 번 간적은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전 왕비와 개인적인 대화는 나눈 적이 없었다.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행정경찰이었나?" "그렇소." "그러면 당신은 직업상 궁정과 관계가 있지 않은가?" "궁정과 관계있는 것은 시장이요." "6월 20일 낮의 일에 대해서 당신은 몇 가지 구체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날 나는 내 자리를 거의 뜨지 않았소. 왜냐하면 국민은 그들의 제1의 위임자들중 한 사람이라도 자리를 비우면 불쾌하기 때문이오. 나는 궁에 정원으로 돌아가 거기에서 여러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었고, 경찰 대원으로써의 기능을 전혀 수행하지 않았소." "9일 밤 궁에서 있었던 일들을 아는대로 말해 보시오." "나는 국민이 내게 준 자리를 떠날 생각이 조금도 없었소. 따라서 나는 밤새도록 혁명정부에 검사실에 남아 있었소." "당신은 페시옹과 아주 가까운 사이이므로 그가 무슨 일을 꾸몄는지 당신에게 말해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 "나는 그와 직무상 친구이며 나는 그를 존경하오. 그런데 그가 국민을 속이고 궁과 협력하는데 앞장섰다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그를 더 이상 존경하지 않을 것이오. 사실 그는 나에게 궁에서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서 8월 10일을 특별한 날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소." "당신은 성의 주인들이 국민에게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을 알았는가?" "나는 궁정 관리인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소. 그는 선량한 공화국 시민으로서 나에게 와서 알려 주었소. 그 때 나는 혁명정부의 검사 자격으로 당장 군총사령관을 불러서 국민에 대한 발포를 금지하는 명령을 분명히 내렸소." "9일 밤에, 국민이 당신에게 주었던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다고 방금 말했던 당신이 그 이후 어떻게 국민의 신임으로 얻은 명예로운 국회의원직을 포기할 수 있었는가?" "국민의회 한복판에서 소동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은퇴하자고 결심했소. 그렇게 하는 것이 더 낫다고 믿었고, 공화주의의 정신적 지주였던 토마스 페인의 도덕률에 따랐을 뿐이오. 나는 그 사람처럼 확고하고 지속적인 기초위에 자유와 평등의 시대가 자리잡는 것을 보고 싶었소.내가 제안했던 방법들은 바뀌었을지는 몰라도.... 나의 의도는 순수한 것이었소." "평등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소위 훌륭한 공화주의자인 당신이 어떻게 페시옹에게 왕에 대한 예우와 동등한 명예를 주자고 제안했는가?" "내가 경의를 표하고 싶었던 사람은 단 보름 동안만 의장직을 수행한 페시옹이 아니라, 국민의회 의장이오. 나는 수위 한 명과 헌병 한 명이 먼저 들어오고 나서 그가 들어올 때 방청석의 시민들이 일어서서 경의를 표하기를 바랐소." "당신은 페시옹이 성에서 위험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들의 이름을 아는가?" "모르오. 아마도 입법의회를 예고했던 몇몇 국회의원들이었던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소." "당신은 왜 탕플 감옥에 혼자 들어가려고 했는가. 특히 왕비의 방에?" "나는 감히 혼자서 죄수들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한번도 없소. 그 반대로 나는 항상 거기에서 근무하고 있는 경찰들 몇 명을 동반하고서만 들어갔소." "당신은 왜 다른 죄수들보다 각별히 피고의 시종들에 대한 염려를 했는가?" "파리 감옥에서 투르젤 양은 자신의 어머니가 죽었다고 믿고 있었고, 어머니 역시 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오. 그래서 내가 그들을 만나게 해 준 것뿐이오." "당신은 엘리자베스 카페와 편지를 주고받은 적이 없는가?" "없소." "당신은 탕플에서 증인과 개인적으로 만난 일이 있는가?" 재판장이 피고에게 물었다. "없소." 이 증언이 있는 지 한 달이 좀 못 된 1793년 11월 12일, 마뉘엘은 혁명재판소로 호출됐다. 그는 공화국의 단결에 위배되고, 자유와 프랑스 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음모를 꾸민 죄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이렇게 항변했다. "8월 10일의 혁명정부 검사는 배반자가 아니다. 그 역사적인 날을 만든 거은 바로 나라고 묘비에 새겨 주기를 바란다." 9월 5일, 애국파들은 장 실뱅 바이이를 체포했다. 목성을 발견했고 '천문학사'를 쓴 바 있는 이 천문학자는 라플라스 후작이며 과학 아카데미의 동료인 피에르 시몽의 집에 숨어 있었다. 후작은 천체 역학 원칙의 발명가이며 태양계와 흑성들의 형태에 관한 이론서를 썼다. 바이이는 1789년에 한창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과학 아카데미, 비명문학 아카데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화원인 그는 파리의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혁명정부의 수석 자리를 차지하고, 이어서 제 3신분의 대표로 선출되었다. 6월 20일, 그는 테니스코트에서 선서를 주도했다. 1789년 7월 17일에 왕을 시청으로 맞아들이는 영예를 누렸던 바이이는 1790년 8월 2일에 파리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1789년 7월, 그 때는 아직 의전 절차가 지켜지던 시절이었다. 보보 원수, 빌르로이 공작, 빌키에 공작이 왕을 수행했다. 루이 16세는 자신의 마차에 군중들에게 인기 있는 두 사람, 데스텡 백작과 네슬 후작과 함께 있었다. 왕은 야유를 받거나 심지어는 죽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는 시청 앞 광장에 곡괭이로 무장한 수만 명의 군중이 모여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이이가 시청에서 그를 맞이하였고, 라 파이예트가 그에게 파리의 삼색 휘장을 넘겨 주었다. 그것을 받음으로써 왕은 자신의 권위가 실추되었음을 몸소 인정한 셈이었다. 왕이 베르사유에 숨지 않고, 백마를 탄 라 파이예트나 백발의 바이이와 나란히 서서 공화주의 귀족 계급과 학식 있는 부르주아의 단결을 과시했기 때문에, 왕관을 지킬 수 있었다. '국왕 만세!'라는 외침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왕은 어리둥절했다. 왕이 사람들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감사의 표정이었다. 루이 16세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국민의 외침을 필요로 하오." 그를 정직한 사람, 프랑스 국민의 아버지, 자유로운 백성의 왕으로 인정해 주는 백성. 그 시간에 왕비는 베르사유 궁에 혼자 남아 있었다. 그녀는 딸의 손을 잡고 왕자를 가슴에 꼭 끌어안고 텅 빈 방들을 오락가락 거닐고 있었다. 군인들은 각자의 구역에 틀여 박혀 있었다. 망명하지 못한 궁정 사람들은 베르사유에서 멀리 달아나 버렸고, 그들의 방은 자물쇠를 채워 놓았다. 왕비는 왕이 되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리의 시청 직원들이 그를 감금할 것이다. 잠시, 그녀는 떠날 생각을 했다. 그녀는 자신의 마차를 준비했다. 아니다! 그녀는 아들이 나라를 통치할 수 있도록 도망가지 않고 맞설 것이다. 그녀는 의회에 나가야만 한다. 홀로 있는 부인과 몇몇 하인들에 둘러싸인 그녀의 어린아이들을 누가 의심하거나 경계하겠는가? 그녀는 짧은 담화문을 써서 암기할 때까지 자꾸 읽었다. "친애하는 신사 여러분, 저는 당신들의 통치자의 가족과 배우자를 당신들게 드립니다. 하늘에서 맺어진 사람들을 지상에서 갈라 놓는 것을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장 실뱅 바이이가 증언했다. 그는 전 왕실 일가와 아무런 관계도 가진 적이 없음을 증명했다. 바이이는 1791년 6월에 왕이 가능하면 빨리 파리를 떠날 것이라는 소문이 끈질기게 떠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1791년 4월 18일, 루이 16세는 대혁명 때 선서하지 않은 비선서 사제에게 부활절 기간 동안 성체 배령을 받기 위해서 호화로운 사륜 포장마차를 타고 튈르리 궁을 떠나 생클루로 향했다. 그런데 시민군이 왕을 체포했다. 바이이와 라 파이예트는 루이 16에게 길을 열어 주기 위해 개입하려고 했다. "안 됩니다.!" 시민군의 용기에 자극을 받은 군중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륜마차는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라 파이예트는 감히 군중들과 맞서지 못했다. 왕은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자신의 가족들이 엄청난 비극을 당하지 않도록 튈르리 궁으로 되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왕이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이 날부터였다. 그의 신에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 허용된다면, 그는 자유로웠을까? 독실한 신자인 루이 16세는 스스로를 가장 자유롭지 못하고 가장 불행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머리 속이 항상 역사적 사건으로 가득 차 있는 루이 16세는 자신처럼 파리에 갇혀 있던 샤를 5세를 떠올렸다. 그는 적들이 승리하고 그에게 남아있는 몇 안되는 친구들이 감히 얼굴도 내밀지 못하는 도시를 빨리 떠났어야 했다. 샤를 5세는 독립을 회복하자 마자 지방으로부터는 인정을 받았는데 왕과 화해하려고 애썼던 파리 정부의 미움을 샀다. 재판장은 이제 1791년 7월 17일 마르스 연변장에서 있었던 총격전에 대해 바이이에게 물었다. 그날 20내지 50명이 사망하고 12명이 부상했다. 그 시위는 제헌국회가 루이 16세에게 허용한 '불가침권'에 항의하는 작코벵파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 법 덕택으로 면책특권이 부여된 왕은 처벌을 받지 않으며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필요도 없고 법 위에 서게 되었다. 7월 17일 사건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 대중단체들은 마르스의 연변장에 연단을 설치해서 왕의 불가침권에 반대하는 모든 탄원자들이 연단에 올라가서 서명하도록 했다. 아침 9시 첫 서명자들은 연단 아래에서 나는 발자국 소리와 도구들 소리 속삭임을 들었다. 공포 분위기가 감돌았다. 습격이니 시한 폭탄이니 하는 소리만 들려왔다. 용감한 사람들이 연단아래를 들여다 보았다. 연단 바닥에 구멍을 뚫고 있는 두 녀석이 보였다. 이 배신자들 이 태러범들은 서명하러 올 여자들의 아래도리에 관심이 있는 변태 성욕자들이었다. 변태 성욕자들 못지 않게 잔인한 상퀼로트들은 눈살을 찌푸리고 그들을 때려 눕혔다. 오후에 6000명의 탄원자들이 마리스의 연변장을 울타리 안으로 들어왔고 모두 명부에 서명했다. 시청에서는 공포에 사로잡혀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막으려 했다. 군중이 흩어지기 시작했는데 출구가 다섯 개 밖에 없기 때문에 분산되는 속도가 더디었다. 저녁 7시 무렵 바이이는 부하들과 포병들을 거느리고 광장에 도착했다. 소총 총권들을 본 군중이 출구로 한꺼번에 몰려서 대 혼란이 일어났다. 흥분한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위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적개심에 불타는 군중과 맞닥드린 국민군들은 위협을 느꼈다. 장교들은 부하들에게 대열을 정돈하고 무기를 준비하도록 명령했다. 첫 총성은 일제 사격을 알리는 신호였다. "악마같은 놈들에게 죽느니 차라리 그들을 죽이는 편이 낫다." 다음날, 장교 한사람이 그렇게 말했다. 바이이는 사격정지 명령의 의미로 계엄령의 상징인 붉은 깃발을 올렸다. 그러나 이미 무자비 해진 군인들을 막을 수는 없었다. 혁명재판소의 판사는 '대학살'후 18개월이 지난 1793년 1월 17일 그것을 명령한 사람이 왕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여러 차례의 군중 사건들로 미루어 혼란을 예상한 그녀는 공질서를 명분으로 국시를 내세워 라 파이예트와 바이이에게 군중을 향해 발포하도록 명령했으리라고 생각했다. 재판장은 바이이에게 물었다. "당신은 선량한 혁명 당원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앙투아네트로부터 받은 적이 있는가?" "없소. 나는 혁명정부 총회의 명령이 내려진 후에야 마르스 연변장에 갔소. 왕비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혁명당원들이 마르스 연병장에 모인 것은 시청의 허가를 받고서 였다. 그들은 재판소 서기과에 신고를 했고, 허가증도 발급받았다.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그 끔찍한 붉은 깃발을 휘두를 수 있었는가?" "회의에서 결정을 본 것은 그날 아침 두 사람이 마르스 연병장에서 학살되었다는 정보가 들어오고 나서였소. 뒤이은 보고들도 시시각각 불안감을 더해 주는 것들이었소. 잘못된 보고에 속아서 무기사용을 결정했던 것이오." "오히려 속은 것은 군중들이 아닌가? 선량한 혁명당원들을 참살하기 위해 지폐를 부축였던 것은 시청이 아니었던가?" "절대로 그렇지 않소." "그 곳에서 학살된 혁명당원들을 어떻게 했나?" "시청에서 조서를 작성한 뒤 그로카이유에 있는 국군 병원 앞뜰로 옮겨 놓았소. 그곳에 숫자가 가장 많았소." "그 숫자가 몇 명이었는가?" "그 숫자는 시청이 나중에 공표한 조서로 밝혀졌는데 12명 내지 13명이었소." 한 배심원이 끼어들었다. "나는 한가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건이 있던 날 나는 아버지와 함께 마르스 연병장에 있었습니다. 학살이 시작되기 바로 그 순간 나는 강가에서 남녀 앞에서 17명 내지 18명이 죽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우리는 물이 목까지 차는 강속으로 뛰어들었기 때문에 간신히 죽음을 면할 수 있었습니다." 증인은 침묵을 지켰다. 1793년 11월 12일 장실벵 바이이는 마차에 실려서 마르스 연병장으로 인도되어 '그가 혁명 당원들을 학살 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처형되었다. 백성들은 센강가로 단두대를 이동하는 것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단두대를 이동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우선 혁명광장에서 단두대를 분해해서 마르스 연병장에 기초를 세운 후 잘 조립해야 했다. 처형 되기 전에 한 동안 비를 맞으면서 바이이는 그가 세부 구조까지도 훤히 알고 있는 이 흉물스러운 기구를 바라보았을 것이다. 적당히 권위적인 태도를 유지하면서 증언했던 바이이에 이어서, 재판부는 몇몇 단역들을 끼워넣기에 신경을 썼다. 이번에는 근위병들을 위한 '대향연'의 밤에 왕의 방 발코니로 기어 올라갔던 페르스발이 그때 일을 설명했다. 다음은 베르사유에서 하녀로 일했던 아주 결단성 있는 여인, 렌느 밀로의 차레였다. 1788년, 그녀는 터키 영토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의 고난에 대해서 왕의 충실한 친구인 코그니 백작에게 감히 질문을 했다. 이 재판에서는 온갖 모욕과 복수에 찬 증언이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복수에 복수를 하고 첫 번 증언에서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증언을 되풀이했고 다시 강조했다. "오스트리아 황제는 언제까지 터키와 전쟁을 계속할까요?" 렌느 밀로가 코그니 백작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왕비가 그녀의 오빠에게 전쟁 경비로 넘겨 준 막대한 자금으로 볼 때 이 전쟁이 결국 프랑스를 파멸로 몰고가겠죠." "렌느, 당신 말이 틀리지 않을 거요. 이미 2억 프랑이 들어갔고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 렌느 밀로는 발동이 걸렸다. 그녀는 분명히 솔직하게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말할 것이다! "아시겠지만..... 피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를레앙 공작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알게 된 왕은 당장에 왕비를 조사하도록 명령했고, 그녀에게서 권총 두 자루를 찾아냈습니다. 그래서 왕은 아내를 보름간 방에 감금시키고 나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렌느 밀로는 재판부가 기대하던 바로 그런 부인이었다. 그녀 덕분에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다음으로, 재판부는 선원이자 군인인 샤를 앙리 테스텡의 증언을 들었다. 사실 데스텡 백작이란 칭호는 해군 중령으로 복무중이었던 1777년, 마흔 아홉 살 때 받은 것이었다. 1757년에 그는 인도에서 랠리 톨렝달과 싸우다가 마드라스에서 포로가 되었다. 가까스로 탈출한 그는 선원이 되어 인도양에서 영국상성과 싸웠다. 그는 프랑스로 돌아오다가 로리앙을 눈앞에 두고 다시 포로가 되었다. 그가 석방되자 왕은 그를 생 도멩그의 총독과 해군 제독으로 임명했다. 1780년, 그는 그루지아의 수도, 사반나의 영웅이 되었으며 도미니크와 그 밖의 다른 많은 전투의 영웅이 되었다. 그가 지휘하는 프랑스 함대는 필라델피아와 샌디 훅 앞에서 리차드 하우의 영국 함대와 싸웠다. 그러나 심한 태풍을 만난 프랑스 함대는 과감히 맞서 싸우기를 포기하고 보스턴으로 피신했다. 데스텡은 선박이 파손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무런 작전도 수행하지 못했다. 따라서 그는 '프랑스의 명예를 위한 왕의 의도와 미국민의 이익에 반하는 위법' 행위에 대해 미군 장교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데스텡은 1781년 5월 21일에 '항상 양식 있는 사람이며 현명한'군인이라는 평판을 잃지 않고 그라스 제독으로 대체되었다. 브로글리 백작이 데스텡을 비판하려고 했을 때, 왕은 말을 가로막고 나섰다. "그렇소. 결국 그는 내 배들과 나의 부하들을 온전한 상태로 내게 되가져 온 죄밖에 업소." 1789년 데스텡 백작은 베르사유의 국민군을 지휘했다. 재판장은 그에게 피고를 아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녀가 프랑스에 온 이후 줄곧 알고 지냈지만 그녀에게 불만이 많소. 그녀는 내가 자유의 땅, 미국에서 흘린 피와 봉사의 대가로 프랑스 군대의 원수가 되는 것을 방해했소. 나는 그녀를 싫어하오. 프랑스 국민들이여, 나는 당신들에게 내가 방금 한 말에 대해 용서를 빕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진실을 원했고, 나는 당신들게 진실을 말했습니다." "당신은 루이 카페와 그의 가족이 10월 5일 베르사유를 떠나려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는가?" "몰랐소." "말들이 몇 차례나 마차에 묶여진 채로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그것은 궁정이 충고를 받아들인 결과요. 그러나 나는 국민군이 출발을 눈감아 주었을 리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소." "당신 자신이 왕의 가족을 도주시키기 위해서 바로 그날 말들을 나가게 내버려두지 않았나?" "아니오." "당신은 오랑즈리 문에서 멈춘 마차들을 보았나?" "보았소." "그날 당신은 성에 있었나?" "그렇소." "당신은 그곳에서 피고를 보았는가?" "보았소." "성에서 무슨 말을 들었는가?" "나는 궁정 자문위원들이 피고에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소. 그들은 파리의 시민들이 그녀를 죽이러 올 것이므로 피해야 한다고 말했소. 그런 권유에 대해서 그녀는 단호하게 대답했소. 파리 시민들이 이곳에 온다면 그것은 내 남편의 발 아래 엎드리러 오는 것이므로 나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당신은 10월 5일 총사령관으로서 국민군을 지휘했는가?" "아니오, 나는 파리의 군중들 사이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떤 기병대 사이를 비집고 지나갔을 뿐이오. 나는 특히 홀에 모여 있는 시민들에게 말했고, 그들은 나를 알아보고 내 말에 귀를 귀울였으며 나를 난폭하게 대하지 않았소. 전 왕을 보았을 때 그는 이미 파리 시민군의 요구 사항에 서명할 각오가 되어 있었소. 피고는 발코니에 아들과 함께 모습을 나타내고서 왕과 가족이 파리를 향하여 출발할 것이라고 발표했소. 그래서 그들을 수행할 수 있게 해달라고 시청에 요구했소." 전에 구두 수선공이었고, 혁명 당시에는 루이 샤를 카페의 가정교사로 있던 앙투안 시몽이 도착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증언했듯이 시몽도 혁명정부의 관리들이 탕플에서 왕비와 음모를 꾸미고 어린 카페를 왕으로 대우하는 것을 보았다. 음모를 꾸민 혁명정부의 명사들 중 한 사람은 자크 프랑수아 르피트르 라는 가정교사인데, 그는 생트 펠라지 감옥에서 나왔다. 그는 탕플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았을까? "그렇소, 하지만 그녀와 개인적인 대화를 나눈 적은 절대로 없소." "당신은 그녀에게 이따금 정치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았는가?" "결코 한 적이 없소." "당신은 매일 탕플 감옥의 탑 근처에 행상인을 보냄으로써, 저녁 신문 내용을 외치도록 하여 그녀에게 새로운 소식을 전달하는 방법을 쓰지 않았는가?" "아니오." 재판장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묻는다. "당신은 증인의 말에 대해서 할 말이 없는가?" "나는 증인과 대화를 나눈 적이 없다. 그리고 나를 위해서 탑 주변으로 행상인들을 일부러 보낼 필요도 없었다. 행상인들이 매일 코르드리 가를 지나갈 때 외치는 소리만으로도 충분했다." 르피트르의 증언은 12분간 계속되었다. 이 증인은 재판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루이 16세의 배우자로서 보여준 당당한 권위! 그 차분함! 답변할 때 우아한 태도!' 그는 배심원들의 공격적인 시선을 확인했다. '그것은 확실했다.'그는 또한 법정에서 기다리고 있는 증인들의 행렬을 보았다. '증인의 무가치함을 감추기 위해서 숫자는 늘렸지만, 그 많은 증언 내용들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이었던가!' 재판 시작부터 증거품들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1793년 8월 2일, 탕플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에서 습득한 물건들을 만인에게 공개하는 시간이었다. 서기는 하나하나 나열했다. "여러 가지 색깔의 머리카락 뭉치." "그것들은 내 죽은 아이들과 살아 있는 아이들, 그리고 내 남편의 것들이다." "또 한 다발의 머리카락." "그것도 같은 사람들 것이다." "숫자가 적혀 있는 종이 한 장." "그것은 내 아들에게 숫자를 가르치기 위한 도표이다." 서기는 재산 목록을 계속 부른다. 수틀, 가위, 바늘, 비단, 실 따위를 넣는 작은 손지갑, 작은 손거울, 머리카락을 묶은 금고리,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는 기도', '성모마리아에게 하는 기도.라고 씌어 있는 종이 한 장, 부인의 초상화. 재판장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묻는다. "이 초상화는 누구의 것인가?" "랑발 부인의 것이다." 다른 두 개의 부인 초상화들에 대해서도 묻는다. "이 초상화들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들은 내가 비엔나에서 함께 지냈던 부인들의 것이다." "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메클랑부르와 헤스." 금화 25루이가 들어 있는 원통에 대해서 묻는다. "우리가 페이앙에 있는 동안 내가 빌린 것이다." 화살에 찔린 심장의 그림이 있는 한 조각의 천에 대해서 에베르에게 물었다. "당신은 이 심장 그림을 본 적이 있는가?" "그렇소, 모든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소. 그것은 신성한 사람, 피 흘리는 뚫린 심장이오. 그것은 왕권의 순교를 의미하오." 마리 앙투아네트의 재산 중에서, 양피와 종이로 만든 지갑이 있었는데, 그 위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재판장은 그 이름들을 열거한다. "살랑텡 부인?" "그녀는 내 의사담당이었다." "비옹 양은?" "내 어린 아이들을 돌보았다." "쇼메트 부인은?" "그녀는 비옹 양의 후임자였다." "여기 성씨만 씌어 있는 베르니에는 누구인가?" "내 아이들을 돌보던 의사다." 에베르는 살랑텡, 비옹 그리고 쇼메트 부인들은 탕플에서 죄수들의 시중르 들기 위해 고용된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초기에 그 여자들을 고용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다. 텡빌이 일어났다.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야 합니다. 나는 살랑텡, 비옹, 그리고 쇼메트 부인들에게 구인장을 발부할 것과 의사 베르니에를 증인으로 소환할 것을 요청합니다." 재판소는 과거에 프랑스 군인이었던 필립 프랑수아 가브리엘 라 투르 뒤 펭 구베르네를 법정에 소환했다. 라 투르 뒤 펭은 피고가 프랑스에 처음 도착했을 때부터 알았다고 증언하면서, 세심하고 신속하게 잘못된 사실을 지적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위해 대신 잡혀가고 싶지 않았다. "아니오, 나는 성에서 벌어진 축제에 참석하지 않았소." "아니오, 나는 고등법원에 자주 드나들지 않았소." "아니오, 나는 근위병들의 식사에 참석하지 않았소, 나는 그때 부르고뉴의 사령관이었소." "아니오, 나는 대신이 아니었소. 나는 절대로 대신을 한 적이 없으며, 당시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나에게 그 자리를 내준다고 했더라도 나는 대신이 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소." 이 증인은 그 일에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라 투르 뒤 펭 후작인 구베르네와 혼동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제일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혁명재판소 앞에 서서도 마치 궁정에나 온 것처럼 당당하게 처신한 사람이 바로 라 투르 뒤 펭 후작이었다. 이 전직 육군성 대신은 법정에 들어올 때 왕비에게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1789년 10월 1일에 대신이었는가?" "그렇다." "그 당시, 당신은 전 군위병들의 향연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는가?" "그렇다." "1789년 6월중에 군대가 베르사유에 도착했을 때, 당신은 장관이 아니었나?" "아니었다. 나는 그때 국회의원이었다." "궁정은 당신이 육군성 대신을 했던 것에 대해 당신에게 감사했던 것 같은데?" "나는 궁정이 나에게 감사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6월 23일, 전 왕이 국민의 대표들이 모인 곳으로 친히중죄를 다스리기 위해 왔을 때 당신은 어디에 있었나?" "나는 국민의회에서 내 자리인 의원 자리에 있었다." "당신은 왕이 의회에서 낭독한 선언문을 작성한 사람을 아는가?" "모른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기억하고 있다. 1789년 6월에 왕과 왕비는 그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궁정은 사막이나 다름없이 인적이 끊어졌다. 모습을 나타낼 수밖에 없는 몇몇 신하들도 '그들의 폐하'가 다가오면 벽 속으로 사라지고 싶어했다. 그들은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면서 애매한 답변을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1789년 6월 2일 밤에, 큰 왕세자가 죽었다. 뼈에 이상이 생기는 병으로, 골격핵인 듯한 병으로 왕세자는 몸이 오그라들고 뒤틀렸다. 그는 거의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는데, 일년 전부터 성 밖에서 살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의사들만이 왕세자를 만날 수 있었다. 아무리 좋다는 약도 효과가 없었고, 마침내는 유능한 의사들도 포기했다. 치료법은 그가 좋아하는 유일한 음식인 사탕과자를 금지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어떠한 음식도 먹지 않았기 때문에, 지하감옥에 갇힌 종신형 죄수처럼 얼굴을 창백해졌고 몸은 시들어갔다. 왕세자는 어머니가 그의 방으로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 위해 들어올 때만 생기가 돌았다. 왕비는 아들에게 곧 나을 수 있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불가피한 죽음'을 떠올렸다. 그녀는 얼굴을 가렸다. 저녁 식사에서 그녀는 빵보다 눈물을 더 많이 삼켰다. 1787년 6월 19일, 11개월된 딸 소피 베아트리스의 죽음에 이어 왕세자의 죽음까지 경험한, 마리 앙투아네트는 운명이 그녀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고상함도 우아함도 더 이상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모든 부인들과 마찬가지로 한 여자일 뿐이었다. 더구나 신은 그녀에게 왕국이 처한 혼란 상태에 대해 설명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 따라서 그녀는 어떤 여자들보다 더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왕 역시 침울했다. 그는 왜 그렇게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오." 평소 아주 정중하던 왕이 냉정하고 잔인하게 몽모랑시 뤽상부르 공작에게 일격을 가했다. 그는 프랑스의 기독교 남작으로는 처음으로 귀족 대표에 선출되었던 사람이다. "당신은 삼부회를 원했고, 요구했다. 자! 그것이 바로 여기 있다." "아닙니다, 폐하. 그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삼부회는.... 오히려 서로의 권력이 적당히 균형을 유지하면서 왕에게 통합되었더라면 삼부회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국을 통째로 삼부회에 맡긴 폐하는 의회의 중요성과 탁월성을 알지도 못하면서 의회를 더 좋아하고 계십니다." 왕은 대답 없이 어깨만 으쓱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대화가 초래할 잔인한 결과를 즉시 알아차렸는데.... 왕은 그에ㅔ 떠맡겨짐과 동시에 그에게서 빠져 달아난, 이 정부의 엄청나고 침통한 조소를 피해 달아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얼마 동안 마를리에 가서 지내자. 서둘러 떠나자." 왕은 깊은 숲속에서 사냥하기를 좋아했다. 나무가 우거진 언덕들 사이로 나있는 오솔길은 훌륭한 등산로였다. 마를리는 1789년 에는 어수선한 파리와는 전혀 다른 별천지였다. 루이16세는 이 인적이 없는 곳에서 자신의 슬픔을 음미하며 감상에 빠졌다. 동시에 왕은 마음속으로 즐기고 있었다. 왜냐하면 정부는 좋자않은 일이 생겼을 때 왕 없이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모르고 당황할 테니까 그의 사냥을 위한 이런 매일매일의 외출을 비난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6월 중순쯤 루이16세는 마를리로 더 이상 불안감을 털어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베르사유에서 제3신분 대표557명은 마치 프랑스가 영국이나 된것처럼 자신들을 '하원.이라고불렀다. 귀족 대표는 270명이었다 귀족들은 자신들을 표결에서 패배시킨 이 즉흥적인 의회를 거부했다.성직자계급에서 선출된 291명중 208명의주임사제들은 제3신분 출신의 172명 의 명사 변호사 그리고 검사들을 존경했다. 그들은 최고의 사회 게층이 지닐 수 있는 예의범절과 취미와 웅변술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구체제 하의 고등법원과 같은 자격을 요구하는 자치 시의회에서 갈 길을 모색하려 했다. 6월 10일부터 미라보는 시에스 신부가 중요한 의견을 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시민들은 성직자와 귀족에게 국민 대표로서의 권력을 증명하기 위해서 시청에 집결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협상이나 회의를 통해 화해를 시도했음에도 세 계급의 집회는 자신을 위태롭게 하기를 원치 않는 귀족들 때문에 좌절되었다. 귀족들은 왕이 없으면 자신들이 아무것도 아니며,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최고 권력으로부터 어떠한 힘도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국회의원이라는 직함은 루이 16세의 면전에서 확인했는데, 그 과정을 제3신분이 단독으로 주도하였다. 6월15일, 미라보는 자치시의 대표들에게 '프랑스 국회의원'이라는 직함을 사용하도록 제안했다. 6월 17일, 490대 90으로 가결되어서, 자치시들은 국회를 구성했다. 아직도 '국왕 만세'를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법이 더 이상 그의 편에 있지 않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법은 국민의 대표들 손에 넘어갔다. '아무것도 아니었던'제 3신분은 열흘 만에 '모든 것'이 되었다. 6월 19일의 격렬하게 토론한 끝에, 149대 137로 표결로, 성직자 계급은 제 3신분에 합류한다고 선언했다. 6월 19일부터 23일까지 급격한 움직임이 국회를 휘저어 놓았다. 6월 19일, 귀족은 왕에게 자신을 방어하는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했다. '공화주의자'귀족들은 제3신분과 융화하기를 원했고, 따라서 변절자 취급을 당했다. 국회는 흥분했고, 대표들은 경험이 부족했다. 그들은 방법도 정하지 않고, 더욱이나 조종간도 잡기 전인데도 국가를 이끌어 가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각자 자기 생각에 몰두했고 그 결과를 가늠해 볼 겨를도 없이 그것이 당장 실현 가능하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행동이 일관적이지도 지속적이지도 않았다. 하나의 움직임이 앞서의 움직임을 몰아내고, 불안에 떠는 사람이나 새로운 취향을 가진 다른 사람이 제의하는 새로운 계획에 매일매일 다시 착수했다. 그 어떤 계획이든지 국회를 점점 더 대담하고 무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게획은 그렇지 않아도 비난받고 있는 궁정에 대한 복수심을 가중시킬 뿐이었다. 6월 19일, 왕의 자문회의에서 네케르는 대처방안을 제시했고, 왕은 그것을 받아들였다. "제3신분의 비위를 맞춰야 합니다. 그들이 대담하게 나오는 것은 귀족들이 집요하게 정항하기 때문입니다." 왕은 이미 자신의 왕권이 더 이상 효력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느 다만 앞으로 무슨 이이 일어날 것인가에 강한 호기심을 보일 뿐이었다. 그는 진짜 자존심이란 자기를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떤 대신은 분개해서 제3신분을 비난하고 나섰다. 다시 우두머리를 내세우고 군대를 불러 모으자고 주장했다. 국고를 관리하고 있던 네케르는 잔인한 진실, 즉 국고가 비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야 했다. 7월에는 군인들에게 월급조차 주기 힘들었다. 수년 전부터 왕의 재정상태는 파산으로 치닫고 있었다. 왕실의 지출은 재정담당 공무원들의 동의 하에 가불에만 의존하고 있었다. 왕은 권력이 없기 때문에 모든 신용을 잃었고, 따라서 돈이 나올 곳이 없었다. 양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네케르가 제안했다. 1. 1인 1표 투표로 성직자, 귀족, 제3신분이라는 계급 사회를 없앨 것, 2. 평등한 징세 제도를 실시할 것. 3. 특권의 폐지와 함께 전국민에게 시민의 의무와 군복무의 의무를 지게 할 것. 4. 왕은 절대적 거부권으로 행정부를 보호할 것. 이런 조치는 루이 13세와 루이 14세가 정해 놓은 프랑스 군주제의 정신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폐지된 것은 비단 계급사회만이 아니었다. 시민은 단결과 불가분성의 확립으로 무조건 단호하게 왕권과 대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날, 마지막으로 결정적인 발언을 한 사람은 네케르가 아니라 옥새 관리인인 프랑수아 폴 드 바랑텡이었다. "소심하게 굴고 겁을 낼 것이 아니라, 성질을 부리고 포악하게 굴어야 합니다. 탄압을 하지 않으면 왕의 지위를 지킬 수 없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을 자신의 거처로 불러서 제3신분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설득했다. 바랑텡이 옳았다. 1770년 12월 7일에 루이 15세가 이루어 놓았던 '왕의 거부권'을 신속하게 개혁해야만 했다. '고등법원의 자리'는 국민의원들에게 자신들이 보좌 역할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임기가 끝나기 전에 결국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로 진실을 밝혀 내서 폭로하려고 할 것이다. 그 다음에는 왕이 그들의 비판을 현명하게 심사 숙고하고, 군주제의 한계를 알아차릴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는 자기 왕국을 버버의 심판대에 오르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긴 협의 끝에, 자문회의는 네케르의 자유주의와 바랑텡의 서전포고를 절충하기로 합의를보았다. 그것으로 왕권이 회복되기를 바랐지만, 그 절충안에는 조심성과 축소와 포기가 내포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왕권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1789년 6월 23일, 왕은 의회에서 더 이상 아무말도 하지 않기 위해서 말했다. 비바람이 들이치는 목조 회랑을 통해서 홀에 들어온 제3신분의 국회의원들은 귀족과 성직자 출신 국회의원들이 이미 편안하게 자라잡고 있음을 발겨했다. 그들 특권층들은 파리 대로변에 있는 커다란 출입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영광을 누렸던 것이다. 그때 왕이 했던 연설 중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느 다음과 같은 두 마디를 기억하고 있었다. "신사 여러분, 당신들의 어떠한 계획도, 어떠한 조치도 나의 특별승인 없이는 법적 효력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나는 두 개의 계급, 즉 성직자와 귀족 계급의 명예로운 특권과 유익한 권리를 유지시키기를 원합니다." 그러고 나서 왕은 다음과 같이 명령조로 한 마디 덧붙였다. "신사 여러분, 나는 당신들게 명령합니다. 당장 해산하고, 내일 아침에 각 계급에 배정되는 방에 각자 돌아가서 회의를 재개하시오. 나는 의전대신에서 방을 준비하도록 명령할 것이오." 왕이 나가고, 귀족이 나가고, 성직자들이 나가고, 제3신분만 남았다. "여기 모인 국민은 그 명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의장인 바이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미라보는 다음과 같이 소리쳤다. "우리는 국민의 의사에 따라 여기에 있으며 강제로 무력을 행사할 때만 우리 자리를 떠나겠다고 당신을 보낸 사람들에게서 가서 말하시오." 의전대신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왕에게 갔다. "뭐라고! 제기랄, 그들이 남아 있다고!" 왕은 오로지 자신의 왕국에 대한 무관심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행정관들에게 그런 식으로 쉽게 포기하는 모습을 보여 주곤 했다. 그 이후 아무도 왕뿐만 아니라 왕비 앞에서조차도, 왕정이 권력을 완전히 상실하는 계기가 된 이 의회에 대해서 감히 말하지 않았다. 그 후, 국회는 굽히지 않았다. 더 나아가 국회는 의원들의 면책특권을 선언했다. 국회의원을 괴롭히는 자는 누구나 '국가를 배반하는 비열한 놈이며 중대한 죄를 저지른 자'라는 선고를 받게 될 것이다. 왕의 머리는 이미 단두대 위에 올려진 셈이었다. 6월 21일, 성직자의 대부분이 국회에 돌아왔고, 비엔나의 대주교는 의장인 바이이 옆에 자리를 잡았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회상에 잠겼다. 7월에 왕은 점차 군대를 소집할 결심을 했다. 그는 군대가 국민을 공격하는 것은 원치 않으며, 감히 그런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말했지만, 큰 위기에 처할 경우 그는 그의 군인들과 함께 랑부이예나 메츠에 어떻게 어떤 통로로 가서 정착할 것인가를 염두에 두었다. 브로글리 원수가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베르사유 궁은 사령부가 되었고, 시종들은 숙소와 정원은 주둔지가 되어, 약2만 명의 군인을 수용했다. 왕의 접견실은 당번병과 부관들의 숙소가 되었다. 장교들은 지도를 가져오라고 했다. 파리와 베르사유에 경계 지점들이 정해졌다. 도처에서 술렁대는 분위기는 계속됐지만, 절대로 조직적인 소요는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사람들 머리 속에 있었다. 만일 폭동이 일어난다 해도, 군대가 당장에 끝장을 낼 것이다. 7월 12일, 왕은 저항하기로 결심하고, 브로글리를 원수로 임명했다. 동시에 네케르는 해임되어., 군인들의 호위를 받으며 브뤼셀로 떠났고, 브뤼셀을 경유하여 스위스로 갔다. 네케르는 재계인사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가 프랑스를 떠난다는 사실이 발표되자 신용이 무너졌고, 상인들은 더 이상 어음을 발행하지 않았으며 국채와 유가증권은 폭락했다. 파리는 벌써 폭동상태에 들어갔고, 국왕군들은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이 센 강을 통해서 도망치거나 몽마르트르의 하수도로 빠져 나와 배신자로 변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벌써 이런 단념을 승리로 간주했다.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네케르의 흉상과 오를레앙 공의 흉상을 들고 모여들었다. 파리의 부르주아들은 권한이 상당히 축소되어 버린 왕을 누르려고 했다. 따라서 부르주아 의용병이 구성되었고, 그 일부는 프랑스 근위병들로 채워졌다. 이들은 왕이 머지않아 그들에게 봉급을 주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자 부르주아 의용병으로 합류한 것이다. 파리 시는 7월 14일에 1만 2천 명을 소집할 수 있었고, 이들은 상이군인 병원인 엥발리드에서 무기를 빼앗고, 무기 판매 상점을 약탈했다. 파리에서는 브장발 남작이 국왕군을 지휘했다. 그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시가전을 치러 7천 명의 보병과 천 5백 명의 기병들을 위험에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브장발은 기껏해야 포위된 기병대를 구하기 위해서 루아이알 알망에서 튈르리 궁까지 돌격할 것을 명령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서 브장발은 그의 부하들을 다시 집결시켜서 마르스 연병장의 울타리 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7월 14일 저녁, 궁저에서는 바스티유 점령을 알고 있었다. 브장발이 그 사건에 연류된 것이 밝혀졌다. 그러나 그는 네케르와 마찬가지로 스위스인이며 더구나 왕비와 아주 가까운 엣친구였기 때문에 그를 추궁하기가 곤란했다. 브장발의 명령으로 파리에 집결한 군대들은 궁과 궁으로 가는 길을 보호하기 위해서 베르사유의 군대들과 합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곧이어 국회는 '외국인 무리에 의해 포위되었음'을 선언했다. 따라서 왕은 군대에게 베르사유에서 물러나라는 명령을 내렸다. 프랑스 군주제는 처벌만 면제받은 채 조용히 사라질 것이다. 1793년 10월 12일, 브장발 남작은 죽었고, 원수인 브로글리 공작은 망명했다. 판사 에르망은 1789년 7월 17일에 원수였던 라 투르 뒤 펭에게 왕이 외국 군대를 앞세우고 베르사유를 떠나려던 계획의 책임을 물었다. "궁정은 가야 할 곳은 랑부예라고 당신은 말했지만, 그것은 메츠가 아니었는가?" "아니오." "대신의 자격으로, 당신은 루이 카페의 출발을 보호하기 위해서 거리에 기동대를 배치하고 마차를 준비한 적이 있는가?" "없소." "그런데 메츠에서 카페 가족을 맞아들이기 위해서 모든 준비가 이루어졌던 것은 확실하다. 방에 가구까지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오." "당신은 앙투아네트의 명령에 따라서 당신의 아들을 낭시에 보내, 궁정의 미움을 샀던 용감한 혁명파 군인들을 학살했는가?" "내가 아들을 낭시에 보낸 것은 다만 그곳에서 국회의 법령을 시행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을 뿐이오. 내 행동은 궁정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었소. 그것은 국민이 원하는 바였소. 자코벵 파들조차도 열렬히 박수를 보내 왔소." 1789년 8월, 왕은 아무런 보조금도 받지 못했고, 군인들의 월급도 더 이상 줄 수가 없었다. 하급 군인들은 지휘관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랑스 도처에서 형성된 시민군 앞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8월 1일, 낭시에 주둔한 부대 일부와 샤토비외의 스위스 군대가 공개적으로 반란을 일으켰고, 요구 사항을 국회에 전달했다. 라 파이예트는 이 '위험한 반란자들'을 체포해서 군대에 불복종한 데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군인들의 단체 결성이나 요구사항을 어떤한 것이라도 금지되고 엄격하게 진압될 것이다. 곧바로 메츠에서 군대를 지휘하던 부이예 장군은 낭자를 다시 탈환하라는 라 파이예트의 명령을 받았다. 낭시에서는 사령관이 반항하는 스위스 근위병 두 명을 구타한 죄로 감금되어 있었다. 8월 31일, 부이예는 낭시를 탈환했지만 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3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33명의 스위스군이 처형되고 41명이 투옥되었다. 루이16세는 부이에에게 축전을 보냈다. 당신의 인기를 잃지 않도록 조심하시오. 그것은 나에게뿐만 아니라 왕국에도 유용할 것이오. 나는 그것을 군인의 무기로 간주하며 그것이 언젠가는 질서를 회복시켜 줄 것으로 기대하오. 1791년 6월 21일, 바렌으로 도주했을 때, 부이예는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서는, 루이 16세가 1789년 8월의 그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만 하면 될 것이다. 1789년 루이 16세가 부이예에게 보낸 편지는 신문에 공개되었다. 마라는 루이 16세가 나날이 자신의 입장을 악화시키고 있다고 주석을 달았다. '왕권을 차지할 자격이 없는 군주, 모국에 대한 믿을 수 없는 음모자, 자신의 국민들을 살해한 비열한 살인자. 내가 살아 있는 한, 낭시에서의 학살을 기어코 단죄하고 말 것이다.' 에르망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부이예가 혁명파 7천내지 8천 명을 낭시에서 학살하도록 지휘한 사실에 대해 찬양하는 편지를 쓴 적이 있는지를 물었다. "나는 절대로 그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 그리고 나서 재판장은 폭동이 일어난 1790년 프랑스 군대의 상황에 대해서 라 투르 뒤 펭에게 물었다. 라 투르 뒤 펭은 장교들이 너무 많이 망명을 떠나는 바람에 9천 명 중 3천 명만 남게 되었고, 부이예는 가상하게도 카트린 2세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누가 그 빈 자리들으 대신했는가?" "하사관이나 부르주아 계층의 지원병들이오. 군대에는 아직 남아 있지만 언젠가 떠날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귀족들과 군기를 무시하는 신병들 사이에서 충돌이 끊이지 않았소." "당신이 군대를 그런 상태로 방치해 둔 것도 앙투아네트의 명령에 의한 것인가?" "내가 장관지을 떠날 무렵에 프랑스 군대는 매우 존경받을 만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점에 대해서는 나 자신이 비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오." "당신은 조국을 수호하는 사람들을 겁주기 위해서 노란색 증명서를 발부하고, 그들이 애국적 충동과 자유 수호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하려는 목적으로 3만 명 이상의 애국파들을 해고한 것도 군대를 존경받는 집단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나?" "그것은 장곤직과는 상관없는 일이오. 군인의 해고는 장관이 관여할 일이 아니오. 그 일을 맡고 있는 것은 다른 단체의 책임자들이오." "그러나 당신은 장관으로서 군대의 우두머리들이 군인을 마구 해고하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할 만큼은 상황파악을 하고 있었을 텐데." "나는 어떤 군인도 나에 대해 불평할 처지를 놓여 있다고는 생각지 않소." "당신이 장관으로 있는 동안, 피고가 프랑스 군대의 정확한 상태를 알려 달라고 당신에게 부탁한 적이 있는가?" "그렇소." "그녀가 왜 그런 정보를 원하는지 당신에게 말한 적이 있는가?" "없소." 재판장은 피고에게 묻는다. "당신은 증인에게 군대의 상태에 대해 물었는데, 그것은 보헤미아와 헝가리의 왕에게 알려주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오빠에게 알려 줄 필요도 없었다. 신문기사로도 충분히 알수 있었다." "그러면 당신은 왜 그것을 물어 보았는가?" "국회가 군대에 변화를 주고자 한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에, 나는 없어져 버릴지도 모르는 군대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때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789년 6월 비밀 회담 후, 그녀는 미라보와 함께 한가지 협정을 통과시켰다. 그 훌륭한 웅변가는 왕비를 부추겼다. 그녀는 자신의 지능과 성격을 왕의 소심함과 나약함에 절충시켰다. '왕비는 궁정에 남아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도 정치적인 머리를 가진 사람은 아니다..라고 미라보가 말했다. 우선 루이 16세에게 보내는 어떤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저는 프랑스인들의 군주제에 대한 미신을 타파하고 존경심을 심어 주고 싶었습니다. 말하자면, 엄청난 파괴를위해 애쓸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미라보는 자신이 쓸모 있는 인물로 보이도록 하기 위해 잔인한 방법을 택했다. 그는 체제가 공격을 당하고 치명상을 입을지도 모르는 취약점들, 말하자면 군대, 세금, 파산, 겨울 따위에 대해 왕비에게 숨김없이 털어놓았다. 어떻게 파국을 피할 것인가? 우선 왕이 떠나야 했다. 왕은 퐁텐블로에 정착하기 위해서 주변에 군대를 둘 것이다. 그들은 왕을 위한 봉사를 명예롭게 여기고 명령도 하기전에 복종할 각오가 되어 있는 군인들 중에서 선발해야 한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간섭하고 나섰다. "왕가는 붕괴되었소." "준비중인 헌법은 왕에게 1천 2백 명의 보병과 6백 명의 기병을 주어야 합니다. 왕은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군대를 찾아내서 믿을 만한 사람들의 숫자를 두 배 혹은 세 배까지 불릴 수 있습니다." "당신은 왕에게 충성할 군대를 집합시킬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아시오?" "라 마르크 백작은 그 일을 아주 능란하게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는 군대에서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미라보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라 마르크는 이제 어느 누구라도 더 이상 왕의 이름으로 명령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왕은 항상 '누군가를 응호하는 음모'는 그것이 네케르든 라 파이예트든 아니면 미라보든 간에 반대해왔다. 그는 왕비에게 그것은 바로 자신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것이며, 왕위에 오른 이후 계속해서 저지른 잘못이라고 말했다. 미라보는 서민 계층에게 의지하면서 동시에 그들을 경멸했고, 귀족을 배반한 뒤에 귀족을 지지했기 때문에, 백성을 사랑하고 귀족을 응호하는 루이 16세의 마음에 들 수가 없었다. 밤이 되자 에르망 판사는 증인들의 증언을 서둘러 끝내려했다. 그가 좀 쉬려고 했다면 텡빌과 그는 법정에 따린 작은 방으로 돌아가고, 배심원들도 잠시 눈을 붙이기 위해서 주막으로 갔을 것이다. 법정에는 냉기가 감돌았고 어두웠다. 1785년 발명품인 원통형에 심지가 있는 켕케등이 짙운 어둠 한가운데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지만 증인들은 두 손으로 앞을 더듬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 했다. 각자 개인용 촛대까지 들고 다녀야 할 정도였다. 방청객들이 바뀌었다. 아침과 오후의 방청객은 법정이 왕당파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생각될만큼 왕비의 처지에 슬퍼했고 유순하고 점잖았다. 그러나 오후 4시경, 자코벵 당원들과 지부의 회원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그들은 앙투아네트의 몰락을 지켜보고 싶어 안달이었다. 사람들이 '그 여자가 저기에 있다! 일어서!'라고 그녀에게 소리치자 그녀는 일어났다. 그녀의 얼굴은 기적에 가까운 힘이 비치고 있었다. 그것은 마치 왕비로서 쌓아온 그녀의 인격이 어떤 것과도 대체될 수 없는 이미지 또는 신화로써 이미 세월이라는 사진첩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되도록 유지시켜 주는 것은 과거의 그녀였다. 그녀는 때때로 자신의 육신이 빠져 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약해지지 않기 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한순간, 변호사들이 달려와서 한 사람은 왼쪽에서 다른 한 사람은 오른쪽에서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몸을 추스려서 다시 선 다음 쇼보 라가르드 선생에게 나직하게 말했다. "약간 어지러웠어요. 하지만 이제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혼자 설 수 있어요." 변호사들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재판은 계속되었다. 다시 한 번 통증이 왔고 재판관들은 물러갔다. 다음 날인 10월 15일 아침 9시에 재판은 재개될 것이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감옥의 중아 복도에 있는 죄수들의 좁고 긴 방으로 되돌아갔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을 추구하지만 너무 서두르다 보면 행복을 놓치고 만다. 13세기에 사람들은 쾌락을 추구하기 위해서 시간을 붙잡아 두려는 생각과 '진보'에 대한 믿음으로 빨리 더 잘 행동하려는 생각 사이에서 망설였다. 행복은 차츰 이상향이 되었다. 사람들은 행복이 어디에나 있다고 생각했다. 행복은 인공적으로 장식한 왕궁의 밤 축제에서와 마찬가지로 농부들의 초가집에서도 찾을 수 있었다. 헛간의 지푸라기 위에서 자는 농부들보다는 트리아농에서 지내는 사람의 행복이 더 화려한 것은 당연했다. 10월 15일 아침 9시경, 다시 열린 재판에서 판사 에르망은 '적자 부인'을 신랄하게 비난하는데 열을 올릴참이었다. 그는 트리아농의 지출내역을 상세히 열거했다. "당신은 국고에서 돈을 끌어 쓰기 위해서, 남편에게 영향력을 남용한 적은 없는가?" "결코 없다." "그러면 당신이 파티를 열고 항상 여신처럼 군림하던 트리아농 성을 세우고 가구를 들여 놓는데 든 돈은 다 어디에서 났는가?" "그것은 그 목적으로 할당된 자금이었다." "트리아농에는 엄청난 자금이 들어갔는데, 그 자금의 논리적 필연성을 설명할 수 있는가?" "트리아농에 엄청난 돈이 들어갔을 수도 있다. 차츰 소비생활에 빠져들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원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썼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싶은 사람이다." 왕세자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자신만의 시골 별장'을 갖고 싶다는 소원을 말했다. 왕세자는 신사였다. "당신은 꽃을 사랑하시는군요. 제가 당신에게 바칠 꽃다발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트리아농입니다." 루이 16세는 할아버지가 죽고 나자 어떤 인색한 대신의 반대도 받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왕비에게 트리아농을 선물했다. 이런 결정은 재정을 총책임지고 있는 튀르고의 눈 밖에 나는 일임이 틀림없었다. 이 모범적인 대신은 할 수만 있으면 1774년 8월부터 그가 맡게 될 재무대신의 봉급을 반으로 줄일 것을 제안하지 않았을까? 그렇지만 다른 대신들은 특권이 부여되는 자리를 차지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들은 이것저것을 원했지만 결국은 궁에 정착하곤 했다. 아무렴, 이제는 그럴 수 없다! 더 이상, 대신들에게 할당되던 호화 주택은 없을 것이다. 튀르고와 함께 일하는 부하 직원들은 각자의 집에서 일함으로써 국고를 아껴야 할 것이다. 튀르고 재임 시절에 트리아농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다. 작은 집도, 뒤바리 백작부인이 고른 가구도. 트리아농성의 화려한 변신을 위한 공사는 튀르고가 재무대신을 그만 둔 1776년 5월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이 14세 사후 왕국의 많은 귀족 계급과 행저관리들이 삼켜 버린 괴물 같은 베르사유 궁에서 빠져 나가 기거할 집을 원한다고 말했다. 트리아농에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절친한 몇몇 친구들을 모아 놓고 연금을 가지고 우아하게 살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소규모 사회는 자연과 유행과 예술을, 그리고 특히 음악을 사랑했다. 그것은 튀르고가 지불할 수 있는 작은 사치였다. 그렇지만 1776년 5월 12일, 튀르고는 대신직을 떠나면서 이렇게 말했다. "쾌락과 고통에 예민한 짐승들처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행복에 몰입할 수 있다. 나머지 사람들은 기어 다니는 독사에 불과하다." 그 당시의 '독사'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적하는 말이 아니라 한가한 귀족들로, 그들은 튀르고를 경멸했고 튀르고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을 경멸하는 침묵으로 지켜보았다. 튀르고는 떠났고, 왕비는 계속 몽상을 즐겼다. 그녀는 영국식 정원에 관한 책들을 열심히 읽었다. 그녀는 친구들의 집을 방문했다. 많은 사람들이 정원을 왕비의 취향에 맞게 장식했다. 그들은 샘을 파서 개울을 만들고 호수를 만들었다. 심지어는 별장을 짓기도 했다. 트리아농의 공사 기간 (1776~1784)동안 베르사유의 부속실에서는 비밀 회의가 수없이 열렸다. 소작인들은 정원사를 만났고, 목동들과 경작인들이 만났으며, 원예가들은 조경사를 방문했고, 유명한 건축가는 위베르 로베르와 같은 위대한 화가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자, 보시오!" 거대한 가옥이 한 채 개축되고 있었다. 따라서 왕의 금고에서는 쉴새없이 자금이 흘러 나왔고, 트리아농 성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당시 왕실 건축물 책임자였던 앙쥐비에씨가 가까운 친구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할 정도였다. "6,838평방미터의 땅이 그렇게 많이 변하고 그렇게 엄청난 돈이 든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왕비 주변에서 비호와 칭찬을 받으며 지냈기 때문에,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주었다. 트리아농에 대한 모든 선택권을 가진 마리 앙투아네트는 항상 좀 더 싼 것을 택하기보다는 자신의 취향에 맞는 것을 골랐고, 비엔나의 바로크 양식처럼 호사스러워야 만족했다. 그러는 동안, 왕은 자신의 의상비를 절약하면서 트리아농에서 쟁기를 밀었고, 농기구들을 수리했다. 그는 이런 생활에 와전히 익숙해졌다. 축제가 있는 저녁이면, 그는 농부처럼 이리저리 어슬렁거렸다. 그리고 그는 너무도 즐거워하는 아내를 바라보며 흡족해했다. 1784년, 트리아농이 사방에 불을 밝혔을 때, 왕은 아내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살고 있다고 말할 정도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에게서 얻어 냈다. 파리에서도, 베르사유 궁에서도, 왕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의 소수 그룹에 들어오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잃고 있다는 것은 생각지 못했다. 소외된 사람들은 그룹 내부의 사람들보다 사태 파악을 더 잘 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왕비가 얼마나 방탕한 생활과 음모에 빠져 있는지, 그녀가 어떤 사람을 무시하는지, 어떤 사람이 그녀를 짜증나게 하는지,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구식으로 보이는지, 누가 머지않아 재산을 잃고 비통에 빠질지, 아니면 반대로 누가 다음에 요직을 차지하게 될지, 누가 그 호사스런 저녁 초대를 받을지, 누가 내일 그 환락의 장소에서 밀려날지... 왕비가 쾌락 속에 묻혀 지내는 동안, 소외된 귀족들은 신랄하고 재치가 넘치는 유창한 말재주로 이런 소문을 퍼뜨렸다. 리뉴 왕자는 그녀가 진정으로 행복한 날은 단 하루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녀는 예의상 즐거움을 생활 양식으로 삼았던 여자였다. 실제로 그녀는 매우 쾌활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 무척 소심하고 예민한 면이 있었다. 누군가가 그녀의 말투에서 트집을 잡으면 그녀는 가시 돋친 말로 자신을 방어하고 나서는 얼굴을 붉히며 모욕당한 사람을 더 친절히 대했다. 리뉴 왕자가 그녀의 사생활을 잘 알게 되었을 때, 그녀의 다음과 같은 말을 듣고 놀랐다. "나는 더 이상 왕비도, 오스트리아 황녀도, 어머니도, 황제의 누이동생도, 고모도, 마리 테레즈의 딸도 아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그것만이 점점 더 확실해진다." 왕비가 자신을 비하하고 희망을 잃어 주변에 냉담한 사람이나 중상 비방하는 사람의 숫자만 늘리고 있는 동안, 그녀의 적인 오를레앙 공이 에델라라는 점쟁이에게 자문을 구했다. 에텔라는 그에게 '왕권, 혁명, 왕실 일가, 악마.... 아마도 이런 것들이 그녀의 머리를 이상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다.'고 대답했다. 1793년 10월 15일 트리아농에 대한 증언이 판사들로서는 왕비의 사생활을 열쇠 구멍으로 들여다 볼 기회이며, 폴리냑 백작부인에 대해서 알아낼 기회이기도 했다. 장 밥티스트 올리비에 가르느렝이 증언했다. 그는 혁명정부와 국민의회가 튈르리 궁에 대한 서류를 작성할 때 국민 의회 의원인 발라제를 도와주었다. 가르느렝은 튈르리 궁을 점령했을 때 발견한 서류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나는 앙투아네트가 폴리냑을 위해서 서명한 약8만 리브르짜리 차용증을 보았습니다. 나는 또 피고가 프랑스 망명 귀족들에게 자금을 보내도록 하기 위해 자신의 다이아몬드를 팔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영수증도 보았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때를 회상했다. 1775년부터 그녀는 어머니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우리는 풍자 노래라는 전염병에 걸려 있습니다. 저라고 면제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동성애와 연인들에 대한 취미가 있다고들 말합니다. 여자들에 관한 문제는 모든 상황이 왕비에게 불리했다. 풍자문들을 읽었던 사람들은 누구나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왕비는 자신의 재단사인 베르텡 양, 기몽, 르낭 그리고 장털을 좋아했다. 그런데 이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왕비를 응호하기 위해서 왕비가 얼마나 소박하고 상냥하며 사랑스러운 여인인지를 감히 말하지 못 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첫 번째 단짝 여자친구는 그녀가 아직 왕세자비였던 시절의 친구인 랑발 공작부인이었다. 마리 테레즈 루이즈 사부아 카리낭이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루이 14세와 몽테스팡 부인의 손자인 팡티에브르 공작의 외아들과 1767년에 결혼했다. 그녀의 남편은 유명한 난봉꾼이었고 방탕한 생활로 인해서 죽었다. 남편이 죽자 랑발 부인은 수많은 극빈자들을 먹여살리는 데 재산을 쓰고 있던 시아버지의 일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녀를 '천사'라고 불렀다. 이 부인은 예쁘지도 않았지만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섬세하고 정이 많지만 몹시도 외롭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랑발 부인이 그녀에게 마음을 줄 수 있을 것으로 느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공작 부인을 위해서 34년 전에 없어졌던 왕비의 궁 관리인 자리를 부활시켜 그 자리에 앉혔다. 그 자리를 위해서 연간 15만 리브르가 들었다. 사람들이 돈을 요구하면 한번도 들어주지 않던 튀르고가 이번 만큼은 관심을 가지고 너그럽게 대했다. 공작부인이 남을 돌봐 주기 좋아하는 선량한 사람으로 평판이 나 있었기 때문이다. 벌써 궁에서는 왕비와 랑발 부인간의 지나친 우정에 대해 소문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이제는 두 번째로 총애받는 여자가 누구든 간에,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나치게 방탕하고 인성에 어긋나는 사람으로 몰아세우는 외설스러운 비방문에 좋은 구실이 될 뿐이었다. 왕에 대해서 사람들은 왕국의 모든 일이 자기 부인의 방에서 결정되는 불상한 사람들이라고들 쑤군거렸다. 왕비가 좌지우지하는 정부를 반대하는 맹렬한 비난의 소리가 베르사유 궁에서뿐만 아니라 파리에서도 터져 나왔다. 이런 소책자들은 귀족들과 왕국의 관리들 저명인사들에게 왕이 더 이상 참고 있으면 안 된다고 부추겼다. 왕은 자신의 부인을 경솔한 여자라고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부인의 변덕에 단 한 마디의 반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폴리냑 부인이 왕비의 생활에 개입되었을 때에는 이미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들 두 여자 사이에는 삶의 단순한 행복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여자들은 소위 말하는 '연예질, 시시한 일, 쾌락'을 즐기고 있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마침내 자신의 '취미'생활에 빠져들 수 있었다. '당신과 함께 있으면, 나는 더 이상 왕비가 아닙니다. 나는 나 자신일 뿐입니다.'라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부인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 '나 자신'은 하프를 연주하고, 노래하고, 카드놀이로 밤을 지새우고, 당구를 치고, 이 사람 저 사람에 대해 수다떨기를 무척 좋아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총애했던 포릴냑 부인과 그 무리들을 살펴보자. 카브리엘 욜랑드 마르틴 드 폴라스트롱은 17세에 쥴 드 폴리냑 백작과 결혼했다. 폴리냑 가문 사람들은 아카데미 플아세즈의 회원이자 생 에스프리 기사단의 기사 분단 장으로 임명된 오크 대쥬교를 그들의 혈통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인기 있던 시 '안티 루크레티우스'의 저자였다. 루이 15세는 폴리냑이 아직 젊은 사제일 때 그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다. "이 젊은이는 항상 나와 반대 입장에 있었지만 내 마음에 들었다." 폴리냑 백작부인은 25세까지 가족들 속에 파묻혀 살았고 그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이 없어서 행복했다. 그 백작의 여동생은 아르투아 백작부인의 집에 일자리를 얻었는데, 그것은 그녀와 남편에게 이따금 베르사유에 드나들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우아하게 춤을 추고, 더구나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으며, 재치 있고, 푸른 눈동자에 갈색 머리를 한 생기발랄한 미녀는 당장에 왕비의 눈길을 끌었다.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자신에 대해서는 비밀을 간진한 채, 너무도 예의바른 그녀는 친구들에게 강한 믿음을 주었고, 사람들은 이 부인에게 호의를 나타냈다. 왕비는 너무나 쓸쓸했기 때문에 타인들의 기쁨에 매력을 느꼈고, 적당히 쾌활한 이 여자친구를 사랑하게 되었다. 무사태평해 보이는 백작부인은 아첨 잘하고 남의 비위를 잘 맞출 줄 알았으며, 왕비의 환심을 사서 성공하고자 했다. 차츰, 왕비는 이 포릴냑 부인이 아이가 둘 있고 부유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왕비는 이 공작부인이 궁에서 그녀의 남편과 함께 살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왕비는 파산하지 않고 궁정생활을 계속해 나가도록 하기 위해 그녀에게 연금을 지급토록 했다. 어느 날 공작부인은 남편이 40만 리브르라는 엄청난 빚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왕비에게 고백했다. 왕비는 그가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빚을 대신 갚아 주었고, 자신이 지금가지 하고 있던 트리아농의 관리비 계산을 공장부인에게 맡길 결심을 했다. 이런 호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포릴냑 도당은 모든 것을 비밀리에 처리하였지만 그들이 기대 이상으로 성공을 거두는 것에 대해 비난을 면치 못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스트리아 친구들은 제일 먼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그런 식으로 선심을 쓰다가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이건 약탈이다. 국가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순수한 호의로 폴리냑 가문은 다른 이들에 비해 엄청난 액수인 연봉 50만 리브르를 받고 있다.'라고 메르시 아르장토는 쓰고 있다. 실제로는 70만 리브르였다. 포릴냑 일당, '그들은 사기꾼 집단이다.'라고 코니츠는 말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용서하지 않았다. 엘리자베스 부인의 집에서 일자리를 얻었던 시누이 디안 드 폴리냑과, 스위스 대사로 임명되었던 시아버지, 폴리냑 부인의 애인으로서 후에 왕실의 매사냥 관리인이 되었던 보드뢰이 (그는 왕실의 건물 관리인이 되어서 3만 리브르의 연금을 받고자 했다.)그리고 나중에 근위병 부대의 세습 직권자로 임명된 구슈 공작과 결혼하기 위해서 50만 리브르를 지참금으로 받은 백작부인의 딸도. 백작부인은 또한 자신의 남편이 궁정에 직위가 없다고 왕비에게 말했다. 그 뒤, 폴리냑은 세습 공작이 되었고 역참들과 종마 사육장의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폴리냑 일당은 일단 성공을 거두자 철저히 자기 방어에 나섰다. 그들은 자신들의 사업과 관계된 사람들을 멀리했다. 과대 망상증에 빠진 그들은 모든 것을 좌지우지하려 했고 목표 달성에 한층 더 눈이 멀었다. 궁정에서 허담할 줄 모르는 사람들조차도, 영리하고 우아하고 재주 많고 자비를 베풀고 싶어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유혹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왕비가 5년 동안이나 폴리냑 일당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토록 지속적으로 그들을 위해 생각하고 느끼고 음모까지 꾸미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목걸이 사건이 터짐으로써 비로소 두 여자의 우정이 깨진다. 폴리냑 공작부인은 왕비의 비위를 맞추지 않아 소외된 사람들을 계속해서 자신의 집에 끌어들였다. 이렇게 폴리냑 공작부인은 왕자와 공주의 가정교사가 되어서 적의 숫자를 늘려갔다. 오래된 귀족 가문에게만 주어지던 그 자리는 '벼락 출세자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공작부인은 그런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녀느 허약 체질이라서 게을렀고 무엇보다도 휴식을 즐겼다. 그녀는 왕비에 대한 '우정 때문에'희생 정신을 발휘하여 그 일을 수락했던 것이다. 트리아농 성과 폴리냑 가의 사람들에 대한 심문에 이어서, 에르망 판사는 목걸이 사건으로 넘어갔다. 1790년, 런던에서 돌아온 라 모트 부인은 오플레앙 공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1785년의 목걸이 사건은 어떤 아들에게는 추문이었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에피소드였지만, 아무튼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극성스럽고 위험한 모험임에는 틀림없었다. 그 사건은 왕이 '나의 사촌'이라고 불렀던 로앙가문의 한 사기꾼 같은 주교가 폭로했다. 중개 역할을 한 여자는 소위 백작부인이라고 하는 라 모트 발루아로, 그녀는 태형에 처해지고 도둑이라는 뜻으로 자 낙인이 찍혀 투옥되었으나 탈주에 성공했다. 백성들은 '로앙의 목걸이'를 통해서 궁정 생활을 알게 되었고, 그 이후 궁정은 더 이상 아무도 속일 수 없게 되었다. 궁정은 보석 세공인들과 향락을 추구하는 고위 성직자, 궁정의 작은 숲에서 밤마다 손쉽게 왕비로 둔갑했던 창녀따위를 받아들이고 배려하고 먹여 살려 주는 장소로 보였다. 먹고 살기가 어려운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써야 하는 시대에, 그런 스캔들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마리 앙ㅌ아네트는 목걸이 사건 이후 가망이 없는 여자가 되었다. 1790년, 루이 16세는 국민의회가 이 엄청난 스캔들을 다시 들추어 내지나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렇게 되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제헌의회 연사들의 폭언 외에도 신문들의 중상 모략을 감수해야 했다. 그녀는 스스로를 벌하기 위해 은신처로 들어가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동시에 왕도 자신의 아내에 대한 모욕을 참지 못하고 사임하게 될 것이다. 1793년 10월 15일, '로앙의 목걸이'에 대해서 애국파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사건에 가담했다고 확실했다. 로앙과 라 모트가 중개인으로서 루이 16세의 동의 없이, 왕비를 위해서 세상에서 제일 비싼 150만 리브르짜리 목걸이를 샀다. "당신은 라 모트 부인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트리아농성에서가 아닌가?" "나는 그녀를 한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는 목걸이 사건에서 당신의 희생양이 아닌가?" "내가 그녀를 알지 못하므로 그럴 수는 없다." "그러면 당신은 그녀를 안다는 사실을 계속 부인하는 것인가?" "부인하자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말하고자 하는 것뿐이다." 검사는 온갖 혐의를 다 끌어 냈다. 왕비가 자신의 쾌락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단짝 친구인 폴리냑 부인을 위해서 왕국으로부터 큰 이권을 끌어냈다면, 그것은 왕이 아내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최고의 멍청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런 식으로 국사에도 주도권을 휘둘러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이익만을 추구해 왔다. 따라서 텡빌은 모든 사람들이 고대하던 질문을 던졌다. "전 왕이 당신에게 복종했는가?" "조언을 하는 것과 직접 일을 처리하는 것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회상한다. 1780년대 초에 왕은 프랑스 군주제에서 문명의 위대함을 보았다. 인생의 멋, 행복 추구, 인간과 관습을 존중하는 태도는 프랑스와 프랑스를 본보기로 삼았던 나라들 사이에 이미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의 위대함은 또한 그 나라가 처해 있는 위험의 무게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풍습은 구제할 수 없게 타락했다. 베르사유 궁에서 왕비의 트리아농 성까지 도박이 성행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아르투아 백작, 엘리자베스 부인은 엄청나게 많은 돈을 잃었고 왕은 '놀음빚'장부에 싸인하느라 바빴다. 파리에서는 투기가 성행했다. 오를레앙 공의 거처였던 파리의 팔레 루와이얄은 팔레 마르샹, 즉 장사꾼의 성으로 변했다. 오를레앙 공 후에 필립 에갈리테 은 대상인 중에서 선출되는 파리 시장에 임명되었다. 풍자만화는 그를 헌옷을 주워모으는 넝마주이로 묘사했다. '나는 로크 아테르를 찾는다' 팔레 루와이얄의 남부 숲 회랑은 타타르 인의 소굴이라고 불리웠고 파리에서 가자 수상쩍은 장소였다. 매춘이 겉으로 노골화되었고 오를레앙 공작부인의 측근을 매수해서 믿을 만한 부인을 보내야 했다. 공작은 자녀들의 가정교사를 정부로 삼았고 몽소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나체 여인들을 제공하면서 저명인사들을 끌어들였다. 그 타락한 귀족은 두명의 유명한 건달인 탈레이랑과 부아즐렝을 중매인으로 삼았다. 정부와 기관들은 파리의 고등법원에 대해서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혐오감을 부추겼다. 고드법원의 구성원들은 마치 전 제군주처럼 현대적인 권리를 보장하는 법은 무조건 반대했다. 동시에 고등법원은 통치할 자격이 없는 궁정과 귀족들에게 억압받고 있는 백성의 보호자를 자처하며 국가 원로원 같은 태도를 취하려 했다. 군인들도 민간인들 못지않게 다루기가 쉽지 않았다. 도처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국영으로 변경해서 공무원들에게 운영을 맡길 것이라는 소문 때문에 유명한 '일반 농장'이란 곳도 조용하지 않았다. 돈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았고 궁정은 1789년에 국고 수입의 12분의 일에 해당하는 3924만 리브르를 썼다. 1786년 12월 20일에 재무대신 칼론은 왕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프랑스는 가까스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연간 1억의 적자에도 불구하고 조세 부담을 증가시켜서는 안 되고 오히려 감소시켜야 합니다." 1787년 2월 22일에 소집된 144명의 명사 회의에서 칼론은 왕국이 6억 4백만 리브르의 빚과 12억 5천만 리브르의 채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1797년가지 모든 '악습'을 폐지하고, 특권을 없애며, 어떤 예외나 차별 규정도 두지 않고 토지세를 지불하도록 했다. 명사들은 분개했다. "적자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 한마디 없었고, 더구나 세금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않고 그 적자를 메꾸려 하다니!" 왕은 1787년 4월 10일 칼론을 해임했다. 왕은 5월 25일 명사들을 돌려 보내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의 탁상공론은 무용지물이었다." 칼론을 대체하기 위해서 왕은 이제 '네케르 같은 인물도 신부들'도 원치 않았다. 그러나 왕비는 왕을 설득했다. 전환 정책을 씀으로써 파산을 피할 수 있다고. 전환이라, 좋아! 그러나 왕국은 아무튼 허수아비처럼 무너질 것이다 왕은 드디어 포기상태에 이르러서 아내의 의견에 동조하는수밖에 없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툴루즈의 주교이며 행정관인 로메니 드 브리엔을 임명하고 싶어했다. 그의 반대로 칼론의 계획이 좌절된 만큼, 그는 다른 비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루이 16세는 로메니 드 브리엔이 수다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당신은 그 주교를 원하고 있지만 후회하게 될 거요. 그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하고 야망이 큰 사람으로 알려져 있소." 왕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말했다. 1788년 9월, 새로운 위기가 닥쳐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다시 앞장서서 네케르에게 편지를 썼다. 내일 10시에 궁으로 오시오. 왕은 신하들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한테 네케르를 다시 불러들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않소." 마리 앙투아네트는 1788년 8월 19일에 메르시 아르장토에게 편지를 썼다. "네케르를 불러들여 사태를 막아야 합니다. 왕은 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무슨일이 일어날지 알 것 같습니다. 왕은 내게 동의하리라 믿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제대로 보았던 것이다. 그녀는 왕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지만, 그들은 아무튼 한 배를 탄 사람들이므로, 적어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그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네케르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별로 우수한 제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가 프랑스에 세우고자 했던 영국식 군주제에서 그녀를 우두머리에 앉힐 만하다고 생각했다. 네케르는 스스로를 절대 왕정의 대신 이상의 가치가 있는 인물임을 자처했다. 1793년 10월 15일, 밤늦게 텡빌은 음식점 주인 미코니를 법정으로 소환했다. 미코니는 피고를 안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녀를 탕플에서 콩시에르즈리로 안내했다. 그는 또한 몇몇 사람을 그녀에게 접근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경찰 공무원이었던 당신이 어떻게 규칙을 무시하고 낯선 사람들을 피고에게 안내할 수 있었는가?" "카페 과부를 보여 준 것은 그들이 요구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나 스스로가 그렇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당신이 허용한 방문객들 가운데에는 안전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 사람은 개인입니다." "마침, 우리는 그에 관해 특별히 조사를 했다. 당신은 그와 함께 몇 번이나 저녁 식사를 했는가?" "두 번입니다." "그 '개인'의 이름이 무엇인가?" "모릅니다." "그가 앙투아네트를 만나는 대가로 당신에게 얼마를 약속했는가, 아니면 얼마를 주었는가?" "나는 보수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가 피고의 방에 있는 동안, 당신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보지 못했는가?" "보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그 이후 그를 다시 본 적이 없는가?" "딱 한 번 다시 보았습니다." "그때 당신은 왜 그를 체포하지 않았는가?" "그 점이 내가 저지른 두 가지 잘못 중 하나라는 것을 나도 인정합니다." 미코니와 '그 개인'을 만나도록 해주었던 목재상 피에르 퐁텐이 법정의 경멸적인 시선을 받으며, 증언을 하러 나왔다. 재판장이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언제부터 미코니를 알고 있었는가?" "약 14년 전부터입니다." "그가 몇 번이나 당신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는가?" "세 번했습니다." "미코니와 함께 당신의 집으로 저녁 식사를 하러 왔던 그 사람의 이름은 무엇인가?" "루즈빌. 그의 태도나 말투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는 뒤 티이욀 부인으 안내로 왔었습니다." "당신은 티이욀 부인을 어디에서 알았는가?" "나는 어느날 저녁, 큰 거리에서 어떤 다른 부인과 함께 그녀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대화를 나누었고 함께 커피도 한 잔씩 마셨습니다. 그 이후 그녀는 가끔 제 집에 왔습니다." "그녀가 당신에게 마음속의 비밀을 털어놓은 적이 있는가?" "결코 없었습니다." "루즈빌과 미코니와 함께 있던 국회의원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국회의원은 한 명뿐이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무엇인가?" "소트로, 그리고 두 명은 니에브르의 기초의회에서 보낸 사람들로, 헌법의 승인장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보몽의 주임사제 발랑드로, 그리고 같은 도의 폴미에" 10월 12일의 예심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루즈빌로부터 카네이션 한 송이 속에 꽂아 놓은 종이 쪽지를 받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앙투아네트, 당신은 그 쪽지에 답장을 했는가?" "나는 핀으로 편지를 썼는데, 그것은 답장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방문객이 다시는 오지 말도록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재판장은 서기에게 핀으로 구멍을 낸 구멍투성이의 종이 쪽지를 배심원들에게 보여 주도록 부탁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예심 때 왕비가 낭독한 내용에 만족해야 할 것인가? "나는 감시를 받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다시 나타난다는 것은 너무나 위험한 일이며 나는 말을 할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녀가 말을 할 수도 없고 편지를 쓸 수도 없다는 것을 누가 의심하겠는가? 물론 루즈빌은 잘 알지 못했다. 국립 고문서 보관실에 보관되어 있는 이 잿빛 쪽지를 찾아낸 앙드레 카스텔로는 전문가인 펠렌스키의 도움으로 해독을 해냈다. 나는 감시받고 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당신을 믿는다. 나는 갈 것이다. 앙드레 카스텔로가 볼 때 '나는 당신을 믿는다. 나는 갈 것이다.'는 카네이션의 공모를 입증해 주는 말이다. 금화 4백 루이와 아시냐 지폐 1만 리브르를 가지고, 왕비는 '간수들을 매수'할 수 있었다. 특히 질베르와 뒤프레슨까지. 아마도 다른 심문에서도 루즈빌의 세 번째 방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그 왕당파가 30일에 '다른 옷을 입고'감옥에 다시 와서 왕비에게 금화 4백 루이와 아시냐 지폐 1만 리브르를 주었다는 주장은 사실임직해 보인다. '바로 이 알현을 끝내고 왕비가 극도로 쇠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9월 2일 밤에 왕비를 빼내기로 결정했다.'라고 루즈빌은 말했다. 그런데 누가 이 음모를 좌절시켰는가? 루즈빌에 따르면, 왕비는 9월 2일 밤에 자유의 몸이 되었어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 루즈빌은 1794년 3월 23일 메테르니히 왕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사건을 설명하고 있다. 그 당시, 루즈빌은 프랑스인들에 의해서 코부르의 스파이로 오인되어 브뤼셀에서 체포되어 감금된 상태였다. 합의된 대로 우리가 미토니를 동반하고 2일 밤에 감옥으로 갔을 때, 왕비는 도망갈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러 관문을 무사히 다 통과하고 거리로 나 있는 문 하나만 남겨 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두 명의 보초 중 한 사람이, 내가 그에게 금화 50루이를 준 적이 있는데도, 왕비의 외출을 결사적으로 반대했습니다. 10월 15일의 법정으로 다시 돌아가자. 텡빌은 루즈빌에 대해서 분통을 터뜨렸다. "왕비의 감옥에 들어간 그 남자는 틀림없이 왕당파의 한 사람이다. 왕당파의 동태는 우리 경찰도 잘 알고 있다. 왕당파는 언제든지 행동에 착수할 수 있도록 무기를 가지고 다닌다. 그들은 모두 애국파를 짐승처럼 학살하기로 결심했다. 그들이 하기로 맹세한 일들을 문자 그대로 이행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전 왕은 어느 날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이 음모자들에 대해서 내게 말해 주는 첫 번째 녀석의 배를 발로 걷어차 줄 것이다.'" 실제로 1790년, 수색위원회는 루즈빌 후작이라는 사람을 찾아 냈다. 그는 튈르리 궁에 있는 왕의 거처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생 루이 십자가를 걸고, 중간 키에, 항상 검정옷을 입고 있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그 보고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는 음모를 꾸미는 사람처럼 눈동자에 불안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몇 주일 동안, 사람들은 루즈빌이 튈르리 궁에서 아주 거만한 태도로 배회하는 것을 보았다. 어떤 하인이 그를 내쫓으려고 하자, 그는 역정을 내며 하인을 꾸짖었다. "나는 왕의 집에 있다. 나는 왕에게 소속된 사람이다. 따라서 왕만이 나의 출입을 금지할 권리가 있다." 한 경찰관이 그를 붙잡았을 때 그의 옷 소매에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틀림없이 단도 같은 것이었으리라. 그리고 주머니 속에는 권총 두 자루가 있었다. 루즈빌은 분명히 튈르리 궁에서 잠복중이었다. 그는 전왕을 납치함과 동시에 시민군에 대항하여 와당파들의 공격을 시작하려 했던 것이다. 차츰 텡빌은 언성을 높였다. 루즈빌이 파괴하고자 했던 것은 국민의회 의사당이었다. "루즈빌은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의사당에 나타났다." "당신은 그 보따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려 했는가?" "나는 우리 마을의 종을 녹여서 총알을 만들기 위한 납덩이를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것은 납덩이가 아니라 폭발물이었다. 그렇게 엄청난 양의 폭약이라면 국회 의사당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가루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텡빌은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 학살로 루즈빌은 애국파의 도약을 일시에 중단시키고자 했다. 이제 판사 에르망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할 차례였다. "당신은 루이 카페와 결혼할 때, 로렌 지방을 오스트리아에 합병시킨다는 계획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몰랐다." "당신은 이름에 그 두 가지를 합해서 쓰지 않았는가?" "그것은 내 아버지의 이름을 써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뿐이다." 본질적인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어린 루이 샤를 카페에 관한 것이었다. "당신은 혁명의 원칙에 따라서 자녀들을 교육시키기로 약속해 놓고서 자녀들에게 잘못된 것들을 주입시키지 않았는가? 예컨대, 당신은 아들이 언젠가는 그의 아버지인 전왕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으로 아들을 대하지 않았는가?" "그런 말을 해 주기에는 그가 너무 어렸다. 나는 식탁 앞에 앉혀놓고 그에게 필요한 것들을 내가 직접 가르쳤다." "당신은 공화국의 군대에 어떤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무엇보다도 원하는 것은 프랑스의 행복이다." "당신은 백성이 행복해지는 데 왕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한 개인이 그런 일을 결정할 수는 없다." "만약 백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깨닫고 왕좌를 부수어 버린다면, 당신의 아들이 오를 수 있었던 그 왕좌를 잃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나라가 행복해진다면 나는 아무것도 유감스럽게 여길 것이 없을 것이다." "당신의 변호를 위해 덧붙일 말은 없는가?" "나는 어제 나온 증인들을 알지 못한다. 그들의 증언 내용도 모르는 얘기들이었다. 물론! 아무도 나에 대해 긍정적인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루이 16세의 아내일 뿐이며 따라서 그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주장하고 싶다." 그러고 나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무시무시하고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운명의 노예가 되어버린 그녀에게만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를 존경하면서 아직 살아서 그녀를 보호해 주고 있는 사람들은 그녀가 왕비가 된 이후 줄곧 그녀를 수행했고, 그녀가 감금되었을 때, 그녀를 위해 눈물을 흘렸고, 그녀가 죽을 때까지도 그녀에게 충실할 것이다. 바로 그런 생각들 덕분에 그녀는 자신의 비밀을 하나도 알아 내지 못하고 그녀에 대한 왜곡된 이미지를 심어 주지도 못하는 판사들의 비난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그녀는 그런 이미지는 몇 시간 후면 파괴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세상을 인간의 형상대로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창조하신 신의 가호로 용서받게 되기를 희망했다. 심리가 끝났다. 텡빌은 아직도 더 할 말이 남아 있었다. 그는 또 한번 전 궁정의 사악한 행동을 폭로했다. 궁정의 비위를 거스르는 비위에 대해서 즉 궁정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파괴하고자 하는 자유에 대항한 끈질긴 흉계를 폭로했다. 예컨대 내전에 불을 붙이기 위한 궁정의 노력. 이 결과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꿔 놓기 위해서 마키아벨리의 격언인 '통치하기 위해서는 분할하라'는 말을 적용했다. 궁정은 프랑스 공화국이 선전 포고한 이웃 강대국들과 범죄적인 관계를 가졌다. 궁정에 헌신적이고 그들의 계획을 돕는 극악무도한 악당들과 내통해서 국민의회에 증오와 불화를 불러일으키고 파리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가능한 보든 수단을 동원하고, 파리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지방사람들을 무장시켰다. 또한 자유 수호의 모체인 이 도시의 선량한 주민들을 중상 모략하고, 이 부패한 궁정의 명령으로 프랑스의 주요 도시들, 특히 몽토방, 님므, 아를르, 낭시, 마르스 연병장에서 학살이 행해졌다. "나는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국민의 공공연한 적으로 간주한다. 그년는 4년 전부터 프랑스에서 일어난, 수천 명의 프랑스인을 희생시킨 소요 사태의 주모자들 중 한 사람이다." 텡빌의 논고가 끝나자, 사람들은 쥐죽은 듯이 조용히 쇼보 라가르드와 트롱송 뒤쿠드라이의 변론에 귀기울였다. 10월 14일, 변호인으로 임명된 두 사람은 온갖 장애에 부딪쳤다. 교묘하게 날조된 고소장은 우발적인 사건들을 모은 덩어리였고, 계속되는 삽입절로 자주 끊어져 내용이 모호했다. 거기에 답한다는 것은 함정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고 따라서 함정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증인들의 증언은 거의가 죽은 이들을 매장하는 인부들의 외침과 같았다. 이따금 재판 도중에 증거가 부족하면, 검사가 검찰측 증인으로 변신했다. 논리도 없고 순서도 없이, 부랴부랴 치러지는 재판의 전과정이 오로지 피고를 파멸시키기 위한 악의로 가득 찬 행위일 뿐이었다. 10월 15일, 즉석에서 변호를 위해 마련된 15분 동안, 쇼보 라가르드는 단 한 가지 사실, 즉 마리 앙투아네트는 '형식절차를 밟지 않고', 부당하게 선고를 받게 될 것이라는 것만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녀는 무엇 때문에 비난을 받는가? 이웃 강대국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동시에 망명 귀족들에게 돈을 대주어 국가 전복을 노리고 왕국을 재건하기 위한 음모에 앞장섰다는 것이다. 증거가 필요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군대를 벨기에에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고 증명할 수 있는가? 국민의회에서 자기 편이 한 사람도 없다고 판단한 뒤무리에는 단독으로 적과 손을 잡고 '왕국이 왕을 갖게 되는 날'파리를 짓밟아 버리기로 결심했다. 그 왕은 '루이'가 될 수도 있고 '자코뷔스'(자코벵 파를 암시)가 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를 체포하기 위해 온 국민의회 위원들을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넘긴 것은 바로 뒤무리에였다. "뒤무리에는 마리 앙투아네트의 협조로 오스트리아인들과 손을 잡았는가?" 마리 앙투아네트는 내통이 가능한 상황을 만들었는가? 선전 포고는 지롱드 당의 당수가 결정하는 일이었다. 그는 왕의 의지에 역행하고 각료 회의에서 정해진 결정에 따랐다. 반 혁명파를 돕느라고 국고를 낭비하고 런던과 함부르크에 막대한 투자를 했다는 비난은 소문뿐이었다. 이 비난은 회계 기록부를 구경도 못해 본 하녀들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무리가 있었다. 결론적으로, 쇼보 라가르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어쩌면 고소 내용을 증명할 수 없다 할지라도, 표면으로 없다는 명백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변호를 맡았던 것 같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변호사들은 법정을 심히 모욕했다는 죄목으로 당장에 체포될 것이다. 이제 재판장 에르망이 말할 차례였다. 얼굴이 수척하고, 말을 번지르르하게 잘하는 그도 이제는 감정은 진정시키고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끊임없이 상반되는 두 가지 얼굴 사이를 오락가락했다. 그는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사람인데 온화한 척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동정심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갑자기 에르망은 고개를 저으면서 코를 풀었다. 에르망은 대웅변가임을 보여 주기 위해서 사적인 감정에 호소해야 했다. 모든 혁명파들에게 혁명의 희생자들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죽이는것에는 속죄할 수 없는 책임이 따른다. 앙투아네트는 그녀가 희생시킨 사람들과 더 이상 불리될 수 없을 만큼 확실히 인간성을 상실했다. 이제 에르망은 대중들에게 말하기 위해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인간이 정열이 명령하는대로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다면, 우리는 국선 배심원단 앞에 낭시, 마르스 연병장, 국여, 방데, 마르세유, 리옹, 툴루즈에서 이 현대판 메디시스 여자가 꾸민 끔찍한 흉계에 의해서 침수당한 우리 형제들의 영혼을 불러왔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당신들 앞에 불행한 애국파들의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을 불러왔을 것입니다. 아니? 불행한 사람들이라니! 그들은 자유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조국에 충성을 다한 사람들입니다. 본능적으로 절망에 빠져서 애통해하는 이 가족들은 한결같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잃고 살아가게 한 앙투아네트를 비난할 것입니다." 에르망은 오스트리아 여인에 의한 희생자들이 이 최종 판결을 지켜 보기 위해서 떼지어 몰려와야 하며, 피고가 프랑스 마지막 왕에게 시집 온 이후, 피고의 정치생활 전체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고 환기시켰다. "국내에서는 파렴치한 대신들이나 믿을 수 없는 장군들 또는 불성실한 국회의원들과 내통하고 국외에서는 망명한 프랑스 왕자들이나 그들의 중개인들과 서신 왕래를 통해서 유럽의 전제군주들과 잔인한 동맹관계를 맺음으로써 이제 막 태어나는 자유를 파괴하려던 그녀의 끊임없는 책략을 당신들은 눈여겨 보아야 합니다. 그 동맹관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아무런 영향력도 갖지 못하고 웃음거리가 되었을 뿐입니다." 배심원들에게 네 가지 질문이 주어졌다. 첫째, 이웃 강대국들이나 공화국 외부의 다른 적들과 내통하거나 책략을 꾸민 것이 확실한가? 말하자면 그들에게 자금을 대주고 프랑스 영토로 들어오는 길을 열어 주고 그들의 군대가 진격하는 것을 도왔는가? 둘째, 카페 과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책략을 도왔고 내통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셋째, 공화국 내부에 내전에 부추기기 위한 음모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한가? 넷째, 카페 과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음모에 가담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새벽 3시에 배심원단은 물러갔다. 판사들은 '대법정'을 떠나지 않았다. 한 시간 가량 심사숙고한 끝에, 배심원들은 법정으로 돌아와서 그들에게 주어진 질문 모두에 긍정적인 답변을 했다. 새벽 4시, 재판관이 종을 울렸다. 국민의 심판의 소리를 들려 주기 전에, 재판장은 방청인들에게 어떠한 찬성의 표시도 해서는 안 된다고 금지시켰다. 앙투아네트는 불행한 인간일 뿐이었다. 피고는 다시 법정으로 불려나왔다. 대충대충 빨리 넘어가던 재판이 끝에 가서는 매우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런 더딘 진행은 재판의 신뢰도를 어느 정도 회복시켜 주었다. 텡빌은 사형을 구형했다. 재판장은 피고에게 검사의 법적용에 대해 이의가 있으면 말하라고 촉구했다. 앙투아네트는 없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변호인에게도 똑같은 발언권이 주어지자, 트롱송은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친애하는 재판장님, 그점에 관해서 배심원단의 의사 표시는 구체적이고 법은 명백하기 때문에 카페 과부를 위한 저의 임무는 끝났음을 선언합니다." 재판장은 동료 판사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다음과 같은 판결을 내렸다. "배심원들이 검사가 적용한 법에 따른 구형이 옳다는 데에 만장일치로 동의함에 따라서, 본 법정은 마리 앙투아네트, 다시 말해 오스트리아의 로렌, 카페 과부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작년 3월 10일의 법에 따라서 프랑스 영토 내에 있는 재산은 공화국을 위해서 압수 수용됨을 선언합니다. 검사의 청구에 의해서 본 판결을 혁명 광장에서 집행할 것과, 프랑스 전역에 활자화하여 방을 붙일 것을 명합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사람의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녀를 다시 콩시에르즈리의 유치장으로 끌고 갔다.'라고 프랑스 정부 간행물 '르 모니퇴르'는 기록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법정을 떠난 새벽 4시 30분 이후, 그녀의 행적에 관해서 우리가 알고 잇는 것은 전부 어떤 경건한 비망록에 근거한 것이다. 최초의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 작가들인 몽조이와 라퐁 도손의 저서에는 무엇보다도 왕비가 자신에게 접근했던 사라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노심초사한 흔적이 보인다. 법원 주재 헌병대 부관이며 왕실 친위대의 인기 있는 사교 모임의 회원인 드 뷔슨을 보라. 그는 '피고의 안내'를 맡아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면서도 그녀에게 너무 친절하지 않았나 걱정했다. 드 뷔슨은 거기에 대해서 혁명재판소가 아직 건재하고 있던 시절에 몇 마디 증언을 했다. 재판 도중, 드 뷔슨은 피고가 목이 마르다고 했을 때 피고에게 물을 주었다. 법정을 나오다가 피고가 복도에서 사람들에게 떠밀려 쓰러지려 할 때, 드 뷔슨은 그녀의 팔을 부축해서 층계를 내려가도록 도왔다. "내가 그런 조치를 취했던 것은 그녀가 넘어지는 것을 막으려던 것뿐입니다. 그녀가 층계에서 굴러떨어졌다면 사람들은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하거나 나를 규탄했을 것입니다. 헌병대는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자연의 법칙들, 나의 임무, 무서운 국가의 법들 때문에 앙투아네트가 재판을 끝낼 때까지 완전히 보호해야 했습니다." 콩시에르즈리에서 하녀로 일했던 로잘리 라모를리에르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마지막까지 가까이에서 지켜 본 사람이었다. 그녀는 1840년까지 살았다. 라퐁 도손은 그녀를 인터뷰할 수 있었고, 또한 1836년에 '19세기에 본 마리 앙투아네트'의 저자인 시몽 부에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시몽 부에와 로잘리 라모를리에르 사이에 오고 간 대화로 볼 때, 마리 앙투아네트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무척 은화했다는 인상을 준다. "당신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선고를 받은 뒤 그녀를 다시 보았습니까?" "나는 7시경에 르보의 명령을 받고 지하감방에 내려갔습니다. 거의 다 녹아내린 양초 두 개가 작은 탁자 위에서 타고 있었지요. 나는 그녀에게 밤새 촛불 켜는 것이 허락되었나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왕비는 옷을 입은채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나는 몸을 떨며 부인에게로 다가가서 부엌에서 방금 끓여 온 수프를 권했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평소와 다름없는 부드러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지으며, '고마워요, 아가씨. 난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자, 그녀는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나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랬는지, '로잘리, 수프를 이리 줘요'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당신이 가져간 수프를 먹었나요?" "한두 숟갈.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나에게 옷입는 것을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 군중들을 자극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그녀에게 상복을 벗으라는 명령이 내려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상복을 입으면 왕의 과부라는 입장을 떠올리게 되어 왕비에게 유리할까 봐 금지한 것 같았습니다. 왕비는 거기에 대해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흰색 평상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녀는 하혈을 많이 했지만, 사형장에 갈 땐 입기 위해서 속옷을 한 벌 아껴 두었습니다. 그녀는 재판받던 날에도 그랬듯이, 궁핍한 상태에서도 되도록 품위 있는 옷차림을 하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으려고 벽과 간이침대 사이의 좁은 틈으로 들어가서 장교의 눈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젊은 남자는 뻔뻔스럽게도 그녀를 보기 위해 베개에 팔꿈치를 괴고 상반신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왕비는 얼굴이 빨개졌지요. 그녀는 커다란 숄로 급히 몸을 가리고, 장교 쪽으로 몸을 돌리면서 애원하듯이 두 손을 모았습니다. '여보세요, 제발,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속옷을 갈아입게 해 주세요'라고 그녀는 소치쳤지요." "그 남자는 자신의 행동을 부끄러워했나요?" "그 반대였지요. 그는 냉혹하게 대답했습니다. 죄수에게서 잠시도 눈을 떼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았다면서. 왕비는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더니 아무 말없이 시선을 내게로 돌렸습니다. 나는 그녀의 눈만 봐도 속마음을 알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장교의 시선을 피할 수 있도록 내몸으로 그녀를 가려 주었습니다. 왕비는 침대 뒤에 쭈그리고 앉아 최대한 조심해서 어깨와 팔을 드러내지 않고 속옷을 갈아입었습니다. 옷을 다 입고 난 그녀는 무언가를 찾는 듯이 몹시 불안하게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나는 왜 그러는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왕비가 방금 벗은 피로 물든 속옷을 조심스럽게 접어서 똘똘 뭉친 다음, 방금 전에 발견한 종이 벽지 뒤에 있는 음푹한 곳에,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 옷뭉치를 밀어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헌병 드 뷔슨과 로잘리의 보살핌을 받는 동안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편지를 하나 썼는데, 그것은 무죄를 증명하기 위한 정치적이거나 정신적인 유언장이 아닌, 다만 시누이 엘리자베스 부인과 두 자녀에게 보내는 애정의 편지였다. 그 편지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는데 1816년 공개된 그 편지를 소유하고 있던 사람은 에드메 보나방튀를 쿠르투아로, 그는 라 뫼즈 도의 랑브뤼젱에 별장을 갖고 있는 성주였다. 오브 도의 대표로 국민의회 의원이자 당통의 친구였던 쿠르투아는 시역자였다. 나폴레옹의 백일 천하 이후, 그는 그의 출신 지역에서 자치시 시장을 지냈고, 그 후 브뤼셀로 망명했다. 그렇지만 쿠르투아는 한 가지 숨겨둔 카드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10월 9일,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고 체포된 1794년 7월 27일 이후, 쿠르투아가 조사위원회의 보고자로 임명되었을 때, 로베스피에르의 집에서 회수했던 서류들을 모두 폭로하면 루이 18세 정부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이 서류들 속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23년 전에 썼던 최후의 편지가 있다. 그것은 쿠르투아가 정부 고문인 베케이에게 제출한 것이다. 아가씨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입니다. 나는 지금 막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부끄러운 죽음이 아닙니다. 그것이 범죄자들에게는 부끄러운 일일지 모르지만, 나는 당신의 오빠를 만나러 가는 것입니다. 무고한 그가 그랬듯이 나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 같은 냉정함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양심에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도 마음이 편안합니다. 다만 나의 가엾은 아이들을 버리고 가야 한다는 것이 무척 가슴 아픕니다. 당신도 아다시피 나는 그 아이들과 나의 다정한 아가씨인 당신만을 위해서 살아 있었습니다 정이 많은 당신은 우리와 함께 있기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했는데, 나는 고작 당신을 이런 지경으로 몰아넣다니! 나는 재판중인 변론을 통해서 나의 딸이 당신과도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애석하게도, 나는 그 불쌍한 아이에게 편지조차 쓸 수가 없습니다 쓴다고 해도 그 아이는 내 편지를 받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이 편지가 당신에게 전해질지조차 알 수가 없습니다. 두아이들에게 신의 가호가 있기를 빕니다. 언젠가 그 아이들이 좀더 크면, 다시 당신과 함께 살면서 당신의 따뜻한 보살핌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가르쳐 온 것들. 즉 중요한 원칙들과 의무를 올바르게 이행하는 것이 인생의 기본이며, 오누이간의 우정과 믿음이 행복의 조건이라는 것을 그들이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동생보다 더 많이 경험한 내 딸은 그 경험과 애정으로 동생을 잘 이끌어 나갈 나이가 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도록 해주십시오. 내 아들은 누나를 사랑으로 대하고 누나의 말에 잘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결국 어디를 가든 둘뿐이라는 것을 명심하고, 둘이 단결하는 것만이 행복의 지름길이라고 일러 주세요. 그들이 우리를 본받았으면 합니다. 끔찍한 불행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함으로써 서로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던가요! 그리고 기쁨은 친구와 나누면 두 배가 됩니다. 자신의 가족보다 더 따뜻하고 마음이 잘 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내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마지막 말을 결코잊지 말도록 해 주세요. 내가 다시 한 번 반복해서 말해 두지요. 그가 우리의 죽음에 대해 복수할 생각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나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운 한 가지 사실에 대해 당신에게 말해야겠습니다. 나는 이 어린아이가 당신을 얼마나 괴롭혔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를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 그 아이의 나이를 생각해 보세요. 아이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고 말해 버렸을 거예요. 때가 되면 그가 그들 둘을 위한 당신의 염려와 애정을 더 잘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에게 털어놓아야 할 마지막 말이 아직 남아 있군요. 나는 처음 재판할 때부터 당신에게 편지로 쓰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아마 쓰려고 해도 그들이 쓰게 놔두지 않았을 것이고, 재판 진행이 너무 빨랐기 때문에 실제로 편지 쓸 시간조차 없었습니다. 나는 로마 교황의 카톨릭 종교 속에서 죽어갑니다. 그것은 나의 조상들의 종교였으며, 나는 그 가운데서 교육 받았고 항상 그 가르침대로 살아왔습니다. 거기에서 기대할 만한 정신적 위안이 아무것도 없다 하더라도, 이곳에 그 종교의 사제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몰라도, 그리고 그들이 일단 여기에 들어오면 나 때문에 큰 위험에 처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심으로 내가 태어난 이후 저지른 모든 잘못에 대해 신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이 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 주는 친절을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오래 전부터 그분의 자비와 은총 속에 내 마음이 전달되기를 빌었습니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본의 아니게 고통을 준 데 대해서 용서를 빌고 싶습니다. 특히 나의 아가씨인 당신에게. 나는 나에게 잘못을 저지른 모든 적들을 용서합니다. 나는 이제 나의 숙모들과 형제 자매들에게 작별 인사를 합니다. 나에게는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영원히 헤어진다는 생각과 그들이 가슴 아파할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적어도 내가 죽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들을 생각했다는 것을 알아 주기를 바랍니다. 안녕, 나의 착하고 다정한 아가씨. 이편지가 당신에게 전달되기를! 항상 나를 생각하세요. 진심으로 당신과 가엾고 소중한 나의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아, 그들과 영원히 헤어진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요! 안녕, 안녕, 나는 이제 종교적 의무에 몰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에게 사제를 불러다 주는 것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을 것이며 이방인으로 대할 것임을 밝혀 둡니다. 베케이에게 이 문서를 제출하면서 쿠르투아는 한 마디 덧붙였다. "다행스럽게도 내 수중은 들어온 이 소중한 편지 덕분에, 제가 시역자들의 명단에서 삭제될 것임을 으심치 않습니다. 정부 고문이신 당신은 그 가치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가치라! 그의 문서들의 값을 지불하라. 단, 일반적인 조치에 관해서는, 이미 정해진 법에 따라 예외가 있어서는 안 된다." 드카즈 장관은 대답했다 쿠르투아는 베케이와 서신 교환을 한 지 11개월만인 1816년 12월 6일, 브뤼셀에서 죽었다. '나는 선서 사제를 이방인으로 대할 것이다'라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에리자베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썼다. 공포정치는 특별한 경우에 한해서 과거의 '관습'에 따랐다. 선고를 받은 죄수에게 베풀어진 첫 번째 예의는 그가 원한다면 종교 속에서 죽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혁명재판소가 사형을 언도할 때마다, 텡빌은 파리의 서서주교인 고벨에게 피고들의 이름을 제출했다. 왕비를 단두대로 안내하는 주교로 선택되는 것은 사제로서 참으로 곤욕스러운 일일 것이다. 지라르 신부는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선택되었다. 신부는 왕비가 까다로운 상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종부 성사에 필수적인 고해를 거절할 것이다. 그러면 신부는 그녀와 함께 단두대로 가는 수레에 올라타야 할 것이다. 지라르는 흥분해서 웅성거리는 군중 속으로 천천히 행진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가를 알고 있었다. 왕비 때문에 이 선서 사제는 이중으로 치명적인 죄를 짓게 되었다 그는 공화국에 선서를 한 선서 주교로서 교황의 권위도 고인이 된 왕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지라르의 만남은 숭고한 장면이었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내 종교인 로마교회 외의 다른 신부의 목소리를 빌어서 신의 용서를 구하기를 거부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저는 대죄인이니까요. 저는 진짜 종부 성사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십시오, 순교자여." 어떤 글에서 말하듯이 그 사제가 다시 돌아왔을까? "하지만, 부인, 최후의 순간까지 당신이 종교의 구원을 거부했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신의 자비가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해 주세요" 그렇다면 신의 자비가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말인가? 8월이나 9월에, 미코니의 측근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왕비의 방에 쉽게 들어가곤 했는데, 그때 비선서 신부가 두 번 들어가서 왕비의 고해 성사를 듣고 성체 배령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이다. 10월에 마리 앙투아네트는 지하감옥에 있었다. 콩시에르즈리에서 매우 독실한 신자였던 푸세 양에게 특혜가 베풀어진 적이 있었다. 그녀는 그 특혜를 원하는 사형수들과함께 나누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종교는 곧 진정한 조국이며 집이었다. 푸세 양을 위해서 의식을 집행한 비선서 사제는 마넹 신부였다. 10월 11일 그 신부는 두명의 간수와 푸세 양 앞에서 미사를 올리기 위해서 왕비가 있는 지하감방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1825년, 마넹 신부는 생 제르멩 록세루아의 주임사제가 되어서 샤를 10세와 파리의 대주교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쓸 수 있었다. 종부 성사를 하기로 정해진 날, 간수가 약속 장소로 와서 우리를 데리고 감옥으로 갔습니다. 나는 왕비의 고해를 들었습니다. 푸세 양은 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고, 두 명의 간수도 참석해서 듯하지 않은 복된 분위기 속에서 진지하게 일체가 되고 싶다고 나에게 통보했습니다. 우리는 지체없이 작은 탁자 위에서 필요한 모든 것을 준비했습니다. 나는 미사를 올리고 왕비에게 성체 배령을 했으며 왕비는 신으로부터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온갖 고초를 불평 없이 참아낼 수 있는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때 푸세 양과 두 명의 간수도 이 성찬식 참석이 허용되었습니다. 지나친 열성 때문에 그리고 특히 설교의 형식 때문에 중단되었다고는 하지만, 이 증언의 진실성을 어떻게 의심하겠는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갈 때는 검사 앞에 나갈 때 입었던 검은 상복을 입은 것을 금지당했다. 눈에 띄는 상복이 민중을 흥분시킬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저항하지 않고 흰색 평상복을 입고, 아주 평범한 모자로 머리를 감쌌다. 모자에 상중이라는 표시로 검정색 리본을 둘렀다. 8시가 되자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형리가 아니라, 공화국에 선서한 신부로 파리 대주교가 보낸 지라르 신부였다. 왕비는 참회하는 것을 정중히 거절하고, 자기는 선서를 거절했던 신부들만을 하느님의 심부름꾼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마지막 가는 길을 동행해도 괜찮겠느냐는 신부의 질문에 그녀는 '마음대로 하세요'라고 냉담하게 대답했다. 아침 10시경, 세 명의 판사, 즉 에르망, 푸코, 동즈 베르퇴이가 감방으로 들어갔다. 서기가 선고 내용을 다시 한번 읽으려 했다. "낭독은 필요 없습니다. 난 그 판결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시 한 번 당신께 낭독해 드려야 합니다." 단두대로 가기 위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이 단두대로 갈 때 탔던 것과 같은 마차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녀는 다른 사형수들과 마찬가지로 수레를 타고 갈 것이다. 그녀는 머리에 쓸 베일을 요구했지만 그것도 거절당했다. 공화국은 단두대로 가는 길에서까지도 평등하기를 원했다. 왕비라고 해서 보통 시민보다 더 편하게 죽을 이유가 없었다. 루이 16세를 처형했던 사형 집행인의 아들인 앙리 상송이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독촉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았지만, 이 무뚝뚝한 남자를 보자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끈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이 난폭한 사람이 느닷없이 달려들어서 그녀의 손을 묶을 것인가? 사형 집행인은 아무 말없이 법이 명령한 대로 행동할 것이다. "손을 내놓으시오" "내 손을 묶을 것가요? 루이 16세의 손은 묶지 않았습니다." 자만, 자존심, 고뇌, 무엇이 문제인가? 고뇌가 재판 도중에 이따금 왕비를 사로잡았고, 그녀를 종종 인간적으로 만들었는데 특히 판사들에 대해서 그녀를 너무도 인간적으로 만들지 않았던가? "네 의무를 이행하라" 누군가가 말했다. "오 하느님!" 그렇다! 파리 전체가 얼어붙은 추운 날씨 속에 흰색 실내복만 입고 그 위에 숄을 걸친 그녀를 보게 될 것이다. 그녀는 끈으로 손이 묶인 채 죽음의 장소로 끌려갈 것이고, 너무 꽁꽁 묶인 손은 그 여행길이 끝날 때쯤 뼈 속까지 얼어 붙을 것이다. 뒤통수까지 잘려진 머리카락은 귀중한 유물로 남겨지기는커녕 복도에서 불태워질 것이다. 그녀는 왕처럼 마차에 타는 것이 아니라 수레에 실려 바닥도 고르지 못한 좁은 판자조각 위에 앉아 형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사형 집행인이 그녀를 뒤에 앉히고 말을 타고 모르는 척하고 가면, 그녀는 끌려가면서 최후까지 이런 모욕을 주는 데 대해 경악을 금치 못할 것이다. 자작 샤를 데제사르는 그녀가 감옥을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판자 위에 똑바로 앉아 있었다. 삼각모자를 쓴 사형 집행인은 굵은 밧줄을 단단히 잡고 수레의 난간에 기대고 있었다. 그의 조수는 땅바닥에 앉아 있었으며, 사제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마치 '날 좀 보시오'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선서 신부'의 머리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데제사르는 이렇게 적고 있다. '충혈된 눈, 미동도하지 않는 빳빳한 속눈썹, 광대뼈 주변이 약간 상기된 창백한 얼굴' 파리 전체가 '자, 시작합시다'라고 스스로 외치도록 하기 위해서, 혁명정부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모이는 신호로 북을 치고, 군인들을 두 줄로 배열시켰으며, 다리들과 사거리마다 대포를 배치하고, 군중을 선동해서 간헐적으로 입을 모아 '공화국 만세! 오스트리아 여자를 광장으로!'라고 외쳐대게 했다. 생 토노레 거리. 아마도 지금은 소방서와 함께 생 토노레 시장이 있는 자코벵 클럽 근처에서, 다비드는 그 유명한 스케치를 했다. 물론 자크 루이 다비드는 철물상의 아들이며 호가, 국회의원이고 시역자이다. 그는 1793년 10월 10일 축제의 조직위원이었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를 마치 백 번은 죽여야 하는. 아니 오랜 세월 두고 두고 죽여야 하는 여자로 묘사했다. 다비드가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는 합스부르크가의 로마인다운 냉혹한 얼굴을 하고 있다. 일자로 그려진 꼭 다문 얇은 두 입술, 날카로운 콧날, 초승달 모양의 눈썹, 흐리멍텅한 눈. 한 희생자를 묘사하는 것은 멋있는 일이다. 순식간에 그 그림은 완성되고 모델은 곧 처형될 것이다. 그렇지만 다비드가 되는 대로 그린 그림에서조차도, 그 인물은 고상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정오가 약간 지나자, 수레가 도착했다. 혁명광장은 인파로 북적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많은 구경꾼들이 자신의 고통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민첩하게 행동하기로 결심한 것일까?갑자기 그녀는 날쌔게 움직였다. '그녀는 두 손이 아직 묶인 상태인데도 아무것도 붙잡지 않고 재빨리 가볍게 내렸다. 그녀는 또 감옥에서 나올 때보다도 더 침착하고 조용하게 거의 도전적이라고 할 만한 태도로 단두대에 올라갔다.' 무심결에 그녀는 모자를 땅에 떨어뜨렸다. 그녀는 판자에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끝까지 대담하고 뻔뻔한'이라고 '페르 뒤쉐슨'은 쓰고 있다. 그런 부인을 처형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라고 사형 집행인은 생각했을 것이다. 사형 집행인은 이런 말을 했다. "그녀는 내 발을 살짝 밟고 나서 죄송해요, 신사양반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공포정치의 예식이 요구하는 대로 수행해야만 했다. 천천히 오랫동안 '사형 집행인의 조수'는 만져 보고 싶어하는 군중들에게 그 머리를 바칠 것이다. 사람들은 그것이 얼마나 당혹스러운 일인가를 깨달으며 한 없이 바라볼 것이다! 여기에 육신에서 떨어져 나온, 트리아농의 왕비의 머리라고 하늘 높이 들어올린 머리가 있다. 조롱당하는 머리, 공포를 주는 머리, 그것은 혈관이 끊기고, 생명의 끈이 잘려나간 머리였다. 이 여자와 루이 16세의 결혼은 로마제국 이후부터 그때까지 중에서 제일 큰제국의 기초가 되었다. 이 역사는 한 육신의 찢김으로 끝났다. '천국은 집세를 지불할 수 있는 사람의 것이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지하 공동묘지는 값이 싸다. 마들렌의 '일반 매장'에 관한 기록에 '카페 과부의 관, 7프랑'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역자후기: 아름다웠으나 결코 행복하지 못한 왕비 이 책은 1793년 8월 2일 한밤중, 탕플 감옥 근처에 나타난 어떤 예사롭지 않은 마차행렬에 대한 묘사로 시작된다. 프랑스 혁명기 민심의 표적이 되었던 마리 앙투아네트를 태운 그 마차는 기마병들의 호위를 받으며 콩시에르즈리로 향하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16일, 그녀가 단두대에 오르기까지 60여 일 동안을 현재시점으로 하여 과거와 미래를 넘나들며 대혁명의 주역들과 많은 사건들이 삽입된다. 오스트리아의 황녀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0년 15세 때 프랑스 왕세자에게 시집온다. 그 뒤 4년 만에 루이 15세의 죽음으로 남편인 루이 16세가 왕위에 오르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왕비가 된다. 그러나 애정도 없이 결혼한 남편과 부자연스러운 베르사유 궁을 멀리하고 자신만의 세계인 트리아농 궁에서 가까운 친구들 속에 파묻혀 지낸다. 그러는 동안 소외당한 무리들의 원한을 사게 되고, '로앙의 목걸이 사건'으로 그녀의 호화로운 사생활이 대중에게 노출되면서 민심을 잃는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공화국이 분노한 것은 그녀가 왕비로서 남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함으로써 국사에 관여했다는 점이었다.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은 혁명을 전후로 해서 쏟아져 나온 무수히 많은 그녀에 대한 비방문들이 만들어 놓은 왜곡된 이미지의 왕비를 시판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재판이 진행되는 도중에 간간이 앙투아네트 자신의 과거 회상을 삽입하면서 진실을 밝히려 애쓴다. 그녀는 죽기 하루 전날 밤 시누이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나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때 그렇듯이 마음이 아주 편안합니다.'라고 쓰고 있다. 프랑스 국민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시집왔던 푸른 눈을 가진 금발의 소녀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는 왜 이십여 년만에 온 국민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군중의 야유를 받으며 수레에 실려 단두대로 가야 했을까? 사치스럽고 변덕스럽고 정치적 야망이 큰 여자였기 때문일까? 이 책은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 준다. 역자는 처음에는 단순히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생활에 대한 호기심을 만족시켜 줄 책으로 생각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번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왕비에게 진정한 사생활이 있을 수 있을까? 그녀의 하루하루는 역사의 씨실과 날실로 엮어지는 것이었다. 본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보내면서 그녀 주변 얼굴들은 단편적으로 언급해나가기 때문에 프랑스 혁명을 전후한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기초 지식없이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역자는 프랑스 혁명 관련 서적들을 참고하면서 본문에 일부 내용을 보태거나 역주를 달아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노력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부록의 연대표가 본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믿는다. 용경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