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과학, 어떻게 오는가 지은이:아서 S. 그레고르 차례 제 1장 과학 이전의 시기 제 2장 고대의 과학 청동의 시대 어두운 비밀의 나라 마법과 과학 과학의 시대가 열리다 과학 정신의 탄생 원소에 대한 토론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을 찾아보게나 지구를 움직인 사람 하늘을 측량한 사람은 누구 지구의 둘레를 측량하다 책을 태워 목욕물을 데우다 제 3장 중세의 과학 동양과 서양은 어디에서 만났을까? 기사도와 흑마술 과거를 잊다 책을 밀수한 사람들 베이컨, 미래를 들여다보다 제 4장 16세기, 발견의 시대 과학의 영웅들 놀라움으로 가득한 세계 항상 바르게 판단하는 사람 지구를 회전시킨 사나이 천구, 혜성, 항성 원과 타원 마녀사냥과 과학자 진실인가? 제 5장 17세기, 법칙이 우주를 지배하다. 진실한 승자는 누구? 우주에는 휴식이 없다 밀랍으로 만든 공 갈릴레이의 망원경 하늘을 향한 최초의 관측 그래도 지구는 돈다 프리즘과 무지개 사과가 떨어지다 사자는 발톱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우주를 측량하는 척도 심장은 펌프다 알려지지 않은 학회 현미경을 들여다보다 낙숫물 안의 세계 제 6장 18세기, 에너지의 시대 다시 흙, 공기, 불, 물 소다수와 산소 불의 비밀 쥐와 양초와 황제 물은 다만 H2O일 뿐, 나무가 아니다 기계의 등장 인간이 증기를 동력화하다 잊혀진 사람 로켓 호와 영리한 난쟁이 호, 그리고 말 램포드 백작―행운의 군인 폭포수는 얼마나 따뜻할까? 위센부르크의 불가사의한 병 하늘에서 번개를 빼앗다 갈바니의 개구리 제 7장 19세기, 전기에서 방사능으로 전류의 마술 나침반, 자석, 그리고 마이클 패러데이 우유 짜는 여자 이야기 신 포도주와 누에 달팽이, 기린, 뱀 생존 경쟁 우주는 한가족 마지막 별 저편 시리우스 성과 그 동반성 웅웅거리는 별들 만물의 시작 빅뱅(대폭발) 이론 잔잔한 수면에 돌이 던져질 때 방사능의 신비 제 8장 20세기, 과학이 내일의 세계를 연다 연금술사의 꿈 에너지도 입자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 새로운 탄환 '중성자' 원자에 숨어 있는 공포 평화를 위한 핵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곰팡이 생물인가, 무생물인가? 빙산의 나머지 6분의 5 너 자신을 알라 인공 두뇌 하늘을 난 사람 로켓의 붉은 섬광 인류는 우주의 고독한 존재? 뉴턴에게 도전장을? 공간은 포장지? 빛이 휘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의 문제이다 통일된 우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계의 이모저모 제 9장 과학과 인간, 그 현재와 미래 인간과 기계의 관계 지구는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과학 기술로 가득 찬 상자 옮긴이의 말 과학의 역사, 사람들의 역사 과학의 위대함은 어떤 일에 대해서든, 언제까지나 영원히 승인해야 한다는 고정된 관점을 거부하는 데 있다. --본문 중에서 제 1장 과학 이전의 시기 과학 이전의 시기 과학의 역사는 우리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와 그것을 둘러싼 우주의 신비한 세계가 가진 비밀을 합리적으로 파헤치려는 노력의 기록이다. 인간은 지상에 출현한 때부터 스스로의 행복을 위해 자연을 이용하려 했다. 프랑스 남서부의 스페인 접경 지역인 도르도뉴 지방에 몽티냑이라는 마을이 있다. 1940년 9월 12일, 그 마을 근처에서 놀고 있던 두 소년은 우연히 어떤 동굴 벽에서 소박한 빛깔로 채색된 고대 벽화를 발견했다. 이것이 유명한 라스코 동굴 벽화이다. 동굴 주인의 생활은 혹독한 위험에 처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무기라고 해야 나무를 잘라낸 것이라든가, 동물의 뼈, 돌 정도였다. 또 그 후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것이 된 불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다른 동물들처럼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호기심과 필요성이 두려움을 극복했고, 결국 불을 피우는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원시인은 사냥에 나가서도 아무것도 잡지 못했을 때에는 굶어야만 했다. 밤이 되면 어둠이나 뱀, 추위나 맹수 등에 습격 당하지 않도록 불가에 모여들었다. 이렇게 그들의 생활은 거의 자연 상태 그대로였다. 이때의 사람들은 나무 열매를 채집하기도 하고 사냥하기도 하면서 이리저리 이동해 다니는 방랑자였다. 때로는 사냥감의 자취를 따라 거주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미지의 땅으로 가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사냥이 끝났을 때, 어떻게 해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태양을 의지하는 법을 깨닫고, 일출과 일몰을 관찰했다. 태양은 커다란 호수에서 떠올라 들소 모양의 산 뒤로 진다. 이렇게 해서 그들은 동쪽과 서쪽의 방향을 대충 어림잡았다. 그래서 동쪽으로 사냥을 갔을 때에는 들소 모양의 산을 향해서 가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울창한 숲속에서 밤을 맞았을 때는 별자리의 도움을 받았다. 국자 모양의 북두칠성을 발견하면 그 아래쪽으로 오늘날 베타 성(보통 별자리 중에서 두 번째로 밝은 별을 가리키나 예외도 있음)이라고 부르는 별과 알파 성(별자리 중에서 가장 밝은 별)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두 별을 이은 선분 길이를 5배 정도 연장한 지점에 북극성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북극성은 일 년 내내 거의 움직이지 않고 북쪽 방향을 가리키는 길잡이가 되었다. 물론 비가 오거나 구름이 덮였을 때는 이 방법을 사용할 수 없었다. 이렇게 방향을 알면 어느 곳에서나 일을 할 수도 있고, 또 태양이 지상에 떨구는 그림자로부터 하루의 대체적인 시각을 알 수도 있었다. 태양이 던지는 그림자는 이른 아침이면 길어지고 정오에 가장 짧아지며, 오후에는 다시 차츰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간단한 자연 현상을 익혀두고 편리하게 생활하며 안전하게 하루를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제 2장 고대의 과학 청동의 시대 어두운 비밀의 나라 마법과 과학 과학의 시대가 열리다 과학 정신의 탄생 원소에 대한 토론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을 찾아보게나 지구를 움직인 사람 하늘을 측량한 사람은 누구 지구의 둘레를 측량하다 책을 태워 목욕물을 데우다 청동의 시대 지금으로부터 약 1만년 전, 사람들은 방랑의 시대를 마감하고 커다란 강가에 군락을 이루어 정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농민이 되어 나일 강,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갠지스 강, 또 황하나 양자강 가에 정착했다. 그들의 주된 식사는 야생 동물이나 나무 열매가 아니라, 집에서 기른 가축이나 재배한 곡물이었다. 농민은 자연 현상에 대해 동굴 시대나 유목 시대의 사람들보다 더욱 많은 것을 알아야 했다. 더욱이 장래의 계획까지 세워야 했다. 예를 들어 씨를 뿌리거나 곡물을 수확하는 계절, 가축에 새끼를 배게 할 시기, 그리고 1년 중 커다란 강이 범람하는 시기가 언제인가 하는 것을 미리 알아두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시간의 흐름을 기록하는 일이었다. 때마다 달력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맨 처음 달력으로 이용된 것은 밤하늘의 달이었다. 맑은 밤에는 달이 하늘에 빛나는데, 그 모양은 매일 밤 변화한다. 가느다란 은빛 달이 매일 밤 조금씩 커지다가 결국 보름달이 되고, 보름달에서 다시 작아져간다. 그것은 누구의 눈에나 쉽게 뜨이는 일종의 시계였다. 초승달 밤에서 다음 초승달 밤까지 며칠이나 되는 걸까? 그리고 그 날수는 똑같은 걸까? 그래서 그 기간을 나무줄기에 새겨 세어보니 30일이었다(정확하게는 29일 12시간 44분 2.8초). 그 기간은 누가 어디에서 측정해보아도 똑같았다. 이렇게 달이 차고 기울기를 12번 계속하면 대충 어림잡아 계절의 변화와 맞아떨어졌다. 따라서 이 기간을 1년이라 정하고 이 태음력이 고대 각국에서 채용되었다. 그러나 점차 태음력의 부정확함이 드러나고(태음력에 의하면 1년은 354일이 된다), 제일을 맞추거나 경작하는데 지장을 초래하자 각국은 달력을 수정하는 작업에 힘을 기울였다. 많은 고대 국가는 이 태음력을 기초로 한 달력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개량했다. 하지만 이집트의 신관들은 매년 나일강이 범람하는 시기에, 시리우스성이 해 뜨기 직전에 출현한다는 것을 알고, 이듬해 그 시기에 다시 이 시리우스성이 출현할 때까지를 1년으로 잡았다. 이 1년은 일종의 태음력이며, 약 365일(정확한 1년은 365.25일)로 정확한 1년에 가까웠다. 어두운 비밀의 나라 고대 각국의 신관은 점차로 권력과 영향력을 증대시켜갔다. 그리고 더욱 새로운 정보 수단을 발명했다. 석기 시대라면 어떤 사람과 통신하고 싶을 때에는 석판 등에 그림을 그려서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 집(동굴)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자는 말을 전하고 싶을 때에는 그름으로는 표현하기가 어려웠으리라. 이집트인은 전하고 싶은 이야기를 일종의 상형 문자를 이용한 알파벳으로 전달했다. 그들은 처음으로 종이(종이의 원료는 나일강에 무성한 파피루스 "papyrus"풀로, 오늘날 영어의 페이퍼 "paper"는 이 라틴 어 파피루스에서 유래한다)에 그림이나 문자(상형 문자)를 썼던 최초의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사람들은 쉽게 서로의 생각이나 사물에 대한 생각과 의견을 교환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자신이 발견한 것에 대해서도 쉽게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 그 덕에 학문의 보고인 도서관도 만들게 되었다. 파피루스에 씌어진 어떤 숫자 공부책의 첫머리에서 아메스라는 저자는, "모든 사물의 신비와 미지의 것에 대해 알려 주는 책"이라 쓰고 있다. 그 책에는 농지의 면적이나 곡물의 양 등을 측량하는 응용 문제가 해법과 더불어 수십 가지나 실려 있다. 이집트 농민들에게는 농지의 측량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였다. 이 나라의 농지는 나일 강변에 좁고 긴 띠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강이 범람하게 되면 물이 농토로 넘쳐들었다. 그리고 다시 물이 빠지면 농토는 비옥해졌다. 그러나 홍수는 농지의 경계선까지 씻어가버린다. 때문에 농민 사이에 경계를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고, 그들은 분쟁의 해결을 현명한 신관에게 맡겼다. 따라서 신관들은 매년 경계선을 결정해달라고 부탁 받고 그들만이 알고 있는 특별한 측량법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했다. 이집트의 신관은 이처럼 훌륭한 측량사인 동시에 숙련된 기사이기도 했다. 그들은 놀라운 정도의 정확성과 기량으로 몇 개나 되는 피라미드를 건설했다. 카이로 남서쪽에 있는 도시, 기제에 있는 쿠푸 왕(기원전 2500년경)의 피라미드는 세계 최대로서 높이가 약 140m이상이나 되고, 정사각형인 밑변 한 변의 길이는 약 230m로,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해 있다. 또 이 피라미드를 만드는 데 사용된 바깥쪽의 석회암 돌덩어리 1개의 무게는 어림잡아서 약 2,300kg인데, 그런 돌덩어리가 230만 개나 조밀하게 쌓여 있다. 당시의 기술자들은 이 거대한 돌덩어리를 어떤 방법으로 이토록 많이 쌓을 수 있었던 것일까?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피라미드의 한 변에 완만한 경사로 커다란 둑을 쌓고, 그곳으로 커다란 돌덩어리를 실은 썰매를 그물과 롤러(당시 수레바퀴는 없었다)로 수많은 일꾼이 끌어당겨서 쌓았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이 거대한 피라미드가 이집트에서 이루어진 다른 커다란 공사와 마찬가지로 거의 인간의 노동만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면, 피라미드는 건축이나 토목 공사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주목받을 업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신관들은 피라미드를 건조하기 위해 필요한 과학 지식의 모두를 비밀로 하고 있었다. 일반 사람들이 이 비밀을 아는 것은 금기였다. 신전의 도서관에 있는 책도 신관만이 아는 일종의 암호로 적혀 있었다고 한다. 이집트의 과학은 비밀의 베일에 덮여 있는 것이다. 마법과 과학 서남아시아의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는 그 모양을 따서 '비옥한 초승달 모양의 지대'라고 이름 붙여진 광대한 지역이 펼쳐져 있다. 이집트가 번영을 누리고 있을 당시, 이곳에서 또 하나의 대하 문명인 바빌로니아가 탄생되었다. 이 지역 사람들의 가장 오래된 발명품으로는 수레바퀴를 들 수 있다. 원래 이들의 바퀴는 둘레가 원형으로 된 나무줄기를 잘라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 후에 이 바퀴에 바퀴살과 바퀴 중심의 차축이 통과할 바퀴통, 그리고 겉바퀴의 둘레를 이루는 고리 모양의 림이 채용되면서 더욱 가벼워지고 빨리 달릴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바빌로니아의 전차와 수레바퀴가 탄생했다. 도공은 점토의 모양을 만들기 위한 도르래로 수레바퀴를 사용했으며, 농민은 짐을 들기 위한 도르래로 수레바퀴를 사용했다. 바빌로니아 인은 이집트인에 비해 모험을 즐기는 성격이 있었으므로, 상인의 무리를 크게 모집해서 물물 교환을 위해 목재, 금, 동, 보석 같은 상품을 가지고 북방이나 동방, 그리고 서방을 향해 길을 나섰다. 그리고 아주 먼 인도양까지 진출해서 향료, 조미료, 염료, 모피를 갖고 돌아왔다. 그런데 상인은 계산을 잘 할 수 있어야 했다. 바빌로니아 시대까지는 상인조차 어린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을 사용해서 셈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단히 비싼 물건을 취급하는 상인들로서는 더욱 훌륭한 계산 방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바빌로니아 인도 이집트인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10을 기본 단위로 하는 10진법을 발명했다. 하지만 나아가 60을 기본 단위로 하는 60진법도 발명했다. 이 60진법은 오늘날에도 시간이나 각도를 나눌 때 사용되고 있다. 시계의 1시간과 각의 1도는 모두 60분이고 1분은 60초이다. 또 원을 한 바퀴 돈 각도는 60도의 6배이다. 60진법의 편리한 점은, 10진법의 기본 단위 10은 단지 2개의 수, 즉 2와 5로만 나눠떨어지지만, 60진법의 기본 단위 60은 모두 10개의 수로 나눠떨어진다는 점이다. 이 10개의 수는 2, 3, 4, 5, 6, 10, 12, 15, 20, 30이다. 따라서 물건을 분배할 경우에 60을 기준으로 해두는 쪽이 편리했다. 비옥한 초승달 모양의 지대(바빌로니아)에 사는 사람들은 훌륭한 상인이자 뛰어난 농민이었다. 그들은 주술이나 마법을 굳게 믿고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주술은 별을 읽을 수 있으며, 미래를 예언하고 질병을 치유하며,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일을 행하는 주술에 대해 어찌 감히 인간이 도전할 수 있을 것인가?" 바빌로니아 인에 있어서 의술은 주술의 일부분이었다. 질병은 악령에 들린 것으로 간주되었고, 의사는 죽은 양의 내장, 특히 간을 조사해서 병의 원인을 찾아냈다. 그리고 의사는 환자에게 통증이나 괴로움을 주는 악령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의사는 작은 악마상을 가볍게 두드리면서 "악마여, 물러가라!"고 외치거나 속으로 '악마여, 물러가라!'고 외우면서 그 상을 불 속에 던지기도 했다. 의사의 보수는 상당히 많았다. 물론 수술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경우였다. 하지만 수술이 성공하지 못하면 그 벌로 한 쪽 손을 잘라버렸다. 당시 의료에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 이렇게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고 살아가야 했다. 천문학도 의술과 마찬가지로 주술과 결합되어 있었다. 천문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연구하는 것은 지상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이다." 지금은 누구라도 천문학자들이 일식이나 월식을 어떤 방법으로 정확하게 예언하는지를 알고 있다. 바빌로니아의 과학자들은 일식이 언제 일어날 것인가를 최초로 계산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비밀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일의 비밀도 모두 알고 있을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별을 응시한 천문학자가 전쟁의 결과라든가 왕의 죽음, 전차 경주의 승리자를 예언할 때, 경외심과 신비감에 빠져 귀를 기울였다. 사람들은 무언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천문학자 못지 않게 인기 있는 점성술사와 상담하곤 했다. 점성술사들은 예언을 하기 위해서 하늘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점성술사들은 5개의 행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이었다. 사람들은 7일에다 이들 다섯 행성에 태양과 달을 합친 모두 일곱 천체의 이름을 붙여 일주일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일요일(태양), 월요일(달), 화요일(화성), 수요일(수성), 목요일(목성), 금요일(금성), 토요일(토성)이 정해진 것이다. 이 일주일은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바빌로니아 인은 우주의 넓이에 대해서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그들에 따르면 우주는 거대한 방과 같은 것이었다. 대지는 평평한 바닥으로 그 중앙에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천장이고 네 귀퉁이는 커다란 산이 받치고 있으며 산꼭대기의 평지에는 한 줄기 커다란 강이 대지의 주위로 흘러들고, 그 강에서는 태양신이 매일 작은 배를 타고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달이나 행성이나 다른 별에도 모두 신이 있었다. 바빌로니아 인은 대지와 하늘이 맞닿은 곳에서 신과 악마를 보았던 것이다. 과학은, 주술을 섬기는 바빌로니아 사람들에게는 그리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약 4000년 전에 강력한 부족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유럽으로 돌진해가게 된다. 과학의 시대가 열리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침입한 이들은 철기를 사용했던 민족이었다. 이들은 야생마를 잡아 기르는 한편으로 철로 무기를 만드는 방법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철로 만든 튼튼한 칼과 창으로 아직까지 청동기 시대에 머물러 있던 사람들을 정복하고, 지중해 동쪽의 섬과 그 주변 지역에 정착했다. 여기에서 그들은 이제껏 알려진 가장 위대한 문명을 이루었다. 그들이 바로 고대 그리스인이었다. 지중해의 섬에서 살던 그리스인은 바다와 친숙했고, 따라서 숙련된 수병과 상인이 되었다. 그들은 놀랍게도 작은 배를 탄 채 거의 전역이 육지로 둘러싸인 지중해로부터 아득히 먼 잉글랜드 섬까지 출범하곤 했다. 그들은 스스로 여행이나 탐험에 나서기도 했고, 능숙한 여행자라면 모두 습득하게 되는 뛰어난 공간 감각과 거리감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이 세계를 거대한 방이라거나, 이 땅덩어리가 평면이라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스의 작은 상선에서 망을 보는 파수꾼은 이렇게 말했다. "땅덩어리가 평평하다고? 아직 바다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애송이 뱃놈이라면 아무것도 모르고 그런 어리석은 소리를 할지도 모르지." 여기까지 말할 다음에 그는 한참 웃고 나서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자주 먼 곳으로 항해를 떠나는 배를 본다네. 그때 맨 처음에는 배의 선체가, 그리고 다음에는 돛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돛대가 조금씩 조금씩 물 속으로 잠겨간다네. 그리고 물에 가까이 다가갈 때 맨 처음 무엇이 눈에 들어올 것 같은가? 제일 처음에는 물론 가장 높은 산이 보이지. 그리고 다음에는 낮은 언덕이 보인다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돌이 이리저리 널려 있는 해안선이 보인다네. 어째서 먼 곳에 있을 때는 낮은 부분이 우리 눈 밖으로 숨어버리는 걸까? 그것은 땅덩어리가 둥글게 굽어 있기 때문이야!" 항해의 경험이 오래 축적된 그리스인은 세계를 널리 잘 알고 있었고, 여행하는 모든 곳에서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습득했다. 그리스인은 육지가 보이지 않는 곳을 항해할 때에는 방향을 알기 위해서 태양이나 달과 별의 위치에 의지했다. 행성이나 다른 별들은 건강이나 사업의 번창, 혹은 불행을 예언하는 대단한 신이 아니었다. 그저 지구처럼 우주를 떠도는 천체일 뿐이었다. 그것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면 여행객이나 귀중한 짐을 안전하게 항구로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천문학은 이렇게 그리스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주술적인 요소를 벗어버리고 과학으로 성립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스인은 즐겨 자연 현상을 자기 자신의 눈으로 관찰하고 자기 자신의 머리로 이해하려 했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당신이 말하는 것을 무조건 믿지는 않을 것이다. 당신이 하는 말을 내가 믿기 바란다면 우선 당신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라."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 인 사이에서 과학 지식은 비밀이었다. 그러나 그리스 인 사이에서 그들의 지식은 관찰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공동 소유하는 재산이었다. 이들은 어떤 신념을 두고 논의하거나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그것을 충분히 음미하기도 했다. 이런 일은 모두 각 개인의 개성이 존중되고 사상의 자유가 인정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야흐로 과학은 널리 공개되기에 이르렀다. 과학 정신의 탄생 기원전 585년, 그리스의 최초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였던 한 사람이 이렇게 예언했다. "올해 5월 22일에는 낮에 밤이 온다." 이는 일식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예언한 것이었다. 이렇게 예언한 학자는 지중해의 동쪽 소아시아 연안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 도시 밀레토스 출신의 탈레스였다. 탈레스가 예언한 그대로 일식이 일어났다. 그리고 당시 전쟁을 하고 있던 소아시아의 메디아와 라디아의 두 왕국은 대낮에 갑자기 밤이 찾아오자 너무도 놀라 공포에 사로잡힌 나머지 휴전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탈레스는 고대 동방의 천문학자처럼 일식이 초자연적이라거나 신비스러운 현상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감에 차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현상에는 모두 원인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만 하오. 이 일식은 전쟁을 하고 있는 두 나라에 대해 신의 분노가 내린 것이 아니라, 우연히 달이 태양과 지구 사이에 왔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오. 일식은 지상의 우리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소. 우주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뿐이오. 과학자로서 일식의 정체를 밝혀내는 것은 나의 가장 커다란 의무요." 탈레스 이전 사람들도 중요한 발견을 했다. 하지만 자연의 비밀을 푸는 열쇠는 신화나 주술이 아니라 자연 법칙이라고 주장한 것은 탈레스가 처음이었다. 그런 관점에서 그는 이 우주 전체의 근원 물질, 다시 말해서 원소가 무엇일까, 하고 생각한 끝에 그것을 '물'이라고 했다. 어째서 그가 물을 원소로 생각했는지는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물이 생물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물질이라는 점, 그리고 물은 보통 때는 액체 상태에 있지만 냉각되면 얼음(고체)이 되고, 가열되면 증기(기체)가 되기 때문에 쉽게 물질의 세 가지 상태를 모두 볼 수 있어서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되고 있다. 그도 다른 많은 학자들처럼 종종 실수를 저지르곤 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정원을 거닐면서 밤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있던 탈레스는, 그만 깜빡하고 발을 헛디뎌 구덩이에 빠졌다. 그러자 가까운 곳에서 심부름을 하던 시녀가 그의 손을 잡고 구덩이에서 끌어올리면서, "그렇게 하늘만 넋을 놓고 쳐다보고 발 밑에는 신경을 쓰지 않으시니 이런 일이 일어나지요." 하고 충고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탈레스보다 조금 늦게, 에게 해에 있는 사모스 섬 출신의 수학자이자 신비적 종교가인 피타고라스가 등장했다. 그는 동방의 여러 나라로 유학해서 수학과 종교를 공부했다. 수학에서는 주로 수와 도형을 연구했다. 그러나 그의 연구 성과는, 그가 결성한 엄격한 비밀 종교 결사의 방침에 따라 그 조직이 깨지기 전까지는 외부로 발표하지 못했다. 그는 수 자체에 대해, 그리고 수와 도형 사이의 연관성에 대해 수많은 연구를 했다. 우선 수 자체에 대한 것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어떤 수가 자기 자신을 제외한 모든 약수에 1을 더한 것과 같을 때, 그 수를 완전수라고 했다. 또 두 개의 수가 있을 때, 1과 그 각각의 수가 가진 인수의 합이 상대방 수가 될 때, 이 두 수를 우애수라고 했다. 하지만 그의 연구로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소위 '피타고라스 정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1개의 선을 3과 4와 5의 길이로 나누고 그 나눈 점을 꺾어서 삼각형을 만들었다. 그랬더니 그 삼각형은 직각 삼각형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삼각형의 각 변에 정사각형을 만들면, 이 정사각형의 면적은 3, 4, 5의 각각의 제곱인 9, 16, 25가 되었다. 그런데 언제나 그 중 둘(9와 16)의 합은 빗변에 해당하는 세 번째 변의 제곱과 같아지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여러 가지 직각삼각형을 만들어 시험해보았다. 그랬더니 언제나 똑같은 결과를 얻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일반적으로 직각을 만드는 두 변의 길이를 각각 제곱해서 합하면, 빗변의 길이의 제곱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여기에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뒤, 제자들과 이 정리를 순수하게 양적으로 조사하려 했을 때, 지금까지 생각도 못했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정사각형의 대각선, 즉 직각이등변삼각형의 빗변의 길이를 쟀을 때, 그 길이를 한 변의 길이를 사용해서 나타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우린 너무도 곤혹스러웠다. 참으로 곤란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숫자로 표현되지 않는 것이 나타났으니. 따라서 제자들과 상의한 끝에 이런 수를 '표현할 수 없는 양' 혹은 '이치에 맞지 않는 양'(알로고스 "alogos":무리수)이라고 하여, 이후로는 이 비밀을 우리의 결사 밖으로 누설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현재는 직각이등변삼각형의 빗변은 한 변의 길이의 루트 2배라는 것이 잘 알려져 있지만 당시로서는 무리수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피타고라스는 젊은 시절, 고향인 사모스 섬에서 수학 공부를 위한 공부방을 얻었다. 그러나 학생이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머리가 좋은 가난한 소년을 선발해서 이렇게 제안했다. "네게 수학 문제를 하나 가르쳐줄 때마다 100원을 줄 테니 수학 공부를 시작해보지 않겠느냐?" 그랬더니 소년은 돈을 받을 욕심으로 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소년은 100원을 받지 않고도 기꺼이 수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피타고라스는 다시 소년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가난하니 수학 따위를 공부할 게 아니라, 돈을 잘 벌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아닙니다. 이대로 공부를 계속하고 싶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이번에는 제 쪽에서 수학을 배울 때마다 100원씩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수학을 가르쳐 주십시오." 소년은 이렇게 말하고 열심히 수학 공부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한편 질병을 치료하는 방면에서는, 처음으로 그리스도 다른 고대 국가와 마찬가지로 질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별로 점을 치거나 동물의 내장을 살펴보고 주문으로 병을 일으킨 악마를 퇴치하려 했다. 그러나 질병에 대해서도 모든 사람이 납득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질병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별이나 운세를 점쳐볼 것이 아니라 환자를 접촉해봐야 한다. 어떤 병이라도 그 원인은 언제나 환자의 몸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사는 자연의 치유력에 의해서 모든 질병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히포크라테스이다. 질병의 참된 원인은 무엇인가? 히포크라테스는 바이러스나 세균에 대해서는 물론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당시에는 현미경도 없었다. 그는 병에 대한 설명으로 아주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우리는 모두 네 가지 체액을 갖고 있다. 이 네 가지는 혈액과 점액(코 등에서 나와 점막을 적시는 것), 노란 담즙(간에서 분비되는 쓴 즙), 검은 담즙(이자에서 나오는 것)으로, 한가지 체액이라도 너무 많아지거나 너무 적어지면 사람은 병에 걸린다."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들에게, 환자를 보고 병의 원인을 진찰하고 치료에 전념하라고 권유하고 있다. 그가 쓴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이런 구절이 들어 있다. '...환자한테서 보고 들은 일은 결코 발설치 않으리라. 나는 최선이라고 생각되는 치료만을 베풀 것이며, 환자에게 해가 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내가 환자의 집을 찾는 것은 병과 고통을 다스리기 위함일 뿐...' 이 서약은 오늘날에도 모든 의사의 규범이 되고 있다. 원소에 대한 토론 그리스인은 토론을 즐겼다. 그래서 이 세계를 만들어낸 만물의 근원, 즉 원소는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많은 그리스 학자가 여러 가지 학설을 내놓았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시대를 초월해서 함께 그 생각을 나누었다고 가정하고 발언의 요점을 나타내 보겠다. 장소는 아테네의 광장으로 정한다. 우선 탈레스가 발언에 나선다. "나는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만물의 근원이 되는 원소는 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물이 없으면 생물은 살아갈 수 없게 때문입니다. 또 물이 형태적으로 세 가지 상태를 모두 갖고 있다는 점도 시사해주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잠깐만!" 탈레스와 동향인 아낙시메네스가 이렇게 외치며 반론을 폈다. "나의 견해로는 원소는 공기임이 분명합니다. 공기는 양도 상당히 많은 데다가, 모든 것을 어머니처럼 품에 안고 있습니다. 게다가 적어도 동물은 공기가 없으면 잠시도 생명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그러자 아낙시메네스를 향해서 누군가가 외쳤다. "그건 잘못된 생각이오." 소아시아의 식민 도시 에페수스 출신의 헤라클레이토스였다. 그는 중대한 반론을 제기했다. "우주는 거대한 불덩어리이므로 그 원소는 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물은 불에서 시작하지요. 불이 물이 되기도 하고, 물이 흙이 되기도 합니다. 또 그 반대 방향으로도 변화하지요. 나는 '만물은 돌고 돈다'는 생각처럼 모든 것이 자유롭게 상통하는 것이 우주의 법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엠페도클레스가 일어서서 이렇게 말했다. "우주는 한 가지 원소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네 가지 원소, 즉 물과 공기와 불과 흙으로 되어 있는 것이지요. 이들을 적당한 비율로 혼합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계는 처음, 이 네 원소가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제일 먼저 공기가, 그리고 흙과 물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하늘은 주로 공기와 불과 태양으로 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에게 해의 북부 출신인 데도크리토스가 결론을 맺었다. "우주의 원소는 물이나 공기, 불, 흙이 아니라,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원자(아톰)입니다. 예를 들어 빵이나 철, 종이, 금 등 무엇이든 계속해서 잘게 나누고, 또 더 잘게 나누고 해 보십시오. 그러면 결국 더 이상 나눠지지 않는, 그리고 어떤 특정한 물질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이것이 원자입니다. 물질의 최소 단위지요. 우주는 이들 무수한 원자의 집합과, 원자가 활동할 여지를 주는 원자와 원자 사이의 공간에 해당하는 진공으로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새로 어떤 것이 생겨난다고 해도 그것은 원자의 배열이 변한 것일 뿐, 진정으로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데모크리토스는 지금으로부터 약 2500년 전의 사람이었으나 그의 생각은 놀라울 정도로 오늘날의 원자론에 부합된다. 위대한 발견은 이런 통찰에서 출발하여 확실한 사실로 증명되어 완성되는 것이다. 원자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아토모스(atomos)인데 '그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맑게 개인 밤하늘에 찬란하게 빛나는 별을 보고 있으면 우주의 신비에 문득 가슴이 설레인다. 이 광대한 우주는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우주는 어느 정도나 클까? 우주에는 끝이 있을까? 우리가 사는 것과 똑같은 다른 세계가 아득히 저 먼 곳에 많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세계에도 생물이 살아가고 있을까? 이런 의문이 샘솟듯 솟아난다. 이런 의문은 어느 시대의 누구라도 품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답을 발견하려 했거나 이 우주가 어떤 모습으로 되어 있는가를 여러 가지로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다. 먼 옛날 사람들은 땅덩어리는 평평하고 튼튼한 것으로, 움직이지 않는 기초 위에 정지한 채 서 있다고 생각했다. 하늘은 커다란 신전에 아치 모양의 천장처럼 튼튼한 것으로, 그 아래 수많은 별이 마치 오늘날의 전구처럼 고정되어 있다고 상상했다. 이 세계는 신들의 손에 의해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곳으로 특별히 지어졌고, 달과 태양은 각기 밤낮으로 사람들에게 빛을 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러다 탈레스의 시대, 그러니까 기원전 약 635년∼545년이 되면서 그리스인은 세계에 대해 다양한 모습을 그려내기 시작했다. 탈레스의 친구 밀레토스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확신한다. 대지는 평면이 아니다. 그러면 어떤 모양인가? 신전의 짧은 기둥과 유사한 원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이 기둥 모양은 하늘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똑바로 떠 있다. 그리고 하늘은 거대한 동굴 같은 구형으로 그 속에는 많은 별이 아로새겨져 있다. 태양은 하루에 한 번 대지의 주위를 도는데, 태양이 대지의 위에 있을 때는 낮이고 대지의 아래로 내려갈 때는 밤이다. 그리스 시대는 물론 압도적으로 천동설이 지지를 받고 있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생각은 얼마간 과학 소설처럼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그는 대지를 고정된 토대로부터 해방시켜 우주에 떠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과학자들은, 대지가 움직이지 않기는커녕 태양의 주위를 어마어마한 속도로 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설명을 지동설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천문학자가 아낙사고라스만이 근대의 우주관에 근접해 있었다. 그는 아테네 민주 정치의 완성자 페리클레스의 원조를 받아 오직 천문학의 연구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그는 달이 스스로 빛을 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월식이란 대지가 달과 태양 사이에 놓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고, 일식은 달이 대지와 태양 사이에 놓일 때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우주의 창조는 회전 운동에 의해 생겨났다고 주장했다. 이는 근대의 칸트 라플라스의 성운설을 연상시킨다. 아낙사고라스가 페리클레스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에서 추방된 것은, '태양은 그리스 정도의 크기를 가진 불타는 금속 덩어리에 불과하다' 고 주장한 것이 일반 대중의 종교 사상에 격렬한 반감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달은 신이 아니다' 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다른 행성에 또 다른 생명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어도 아무런 저항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를 여러 신의 가호 아래 있는 작은 방 같은 곳으로 생각하고 있던 일반적인 고대 그리스 인에게, 아낙사고라스의 생각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만일 아낙사고라스가 페리클레스의 보호 아래 있지 않았다면 죽임을 당했으리라. 아테네 인과 아낙사고라스와의 싸움은, 과학자들과 낡은 신앙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 사이에 벌어진, 과학과 종교의 투쟁의 시작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한 것을 찾아보게나 아테네는 페리클레스의 통치하에서 그리스 문명의 중심지가 되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유명한 교사는 사람들을 이끌고 아고라(그리스의 각 도시의 집합 장소나 시장에 있는 광장)를 이리저리 걸어다니면서 토론을 하기도 하고 학원에서 강의하기도 했다. 소포클레스나 에우리피데스는 스스로 만든 연극을 야외 극장에서 상연했다. 페이딜아스는 파르테논 신전을 위해 남신과 여신의 상을 조각했다. 그러나 그리스의 이 황금 시대는 기원전 449년에서 338년까지 단 1세기 정도 지속되었을 뿐이다. 아테네나 스파르타, 그 밖의 다른 그리스의 여러 독립된 도시들은 서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북방에서 새로운 세력이 탄생했을 때, 그 세력에 대항할 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스 북방의 이 새로운 세력은 산악 지대에 있던 마케도니아였다. 이곳의 국왕 필리포스 2세는 창과 방패로 무장한 병사를 밀집 부대로 편성하는 새로운 전술을 구사했다. 밀집 부대가 적의 전방에서 싸울 때 말을 탄 기병대가 양옆을 공략해서 적군을 패주시키는 전술이었다. 이런 전술로 필리포스는 그리스 도시를 하나하나 함락해갔고, 기원전 338년에는 아테네까지 정복했다. 필리포스의 사후에는 그의 젊은 아들 알렉산더(후에 대왕이 됨)가 세계 정복에 나섰다. 그는 마케도니아 제국을 지중해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확대시켰다. 알렉산더는 각지에서 전쟁 중에도 그리스의 교사나 과학자를 곁에 데리고 다녔다. 따라서 그리스에서 수천 킬로미터나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까지도 그리스 문명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알렉산더 자신도 그리스의 가장 위대한 학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 식물의 연구를 출발점으로 과학자가 되었다. 그는 어떤 동물을 연구하려면 그 동물의 겉보기 뿐만 아니라 내부까지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생물학자 중 하나는 고래가 물고기라는 데 조금도 의심을 품지 않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고래는 물고기 모양을 하고 있고 물고기처럼 바다에서 산다. 그러니 고래는 물고기다." 그러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반박했다. "그렇게 속단할 수는 없다. 겉보기만으로 판단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알을 낳는다. 그런데 고래는 소나 말처럼 새끼를 낳고, 그 새끼는 어미의 젖을 먹고 자라난다. 따라서 포유 동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 이외의 분야에서도 언제나 과학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머릿속에 생각하고 있는 게 부족해도 처음 떠오른 설명에 만족했다. 어떤 사람이 "연기는 왜 위로 올라가나요?" 하고 묻자, 그는 "연기가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돌은 왜 아래로 떨어지나요?"라는 질문에는, "아래로 떨어지고 싶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과학은 이런 식의 선문답이 아니라 근거가 충분한 대답을 요구한다. 탈레스나 아낙사고라스 같은 위대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사용하는 방법에서, 사물이 작용하는 참된 이유를 명백히 밝히기까지 결코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지 않았다. 과학은 언제나 발전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인물이 과학을 암흑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버리는 일도 일어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후 2000년 동안 그의 사상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뭔가 의문이 있는가? 그러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뒤져보라.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자네를 위해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부득불 스스로 생각하려 드는가?" 그러나 알렉산드리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지 믿는 풍조를 거부하는 과학자들도 있었다. 지구를 움직인 사람 알렉산더 대왕은 이렇게 선언했다. "짐은 지상의 많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게 된 이 승리를 기념하게 위해,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엄두를 내지 못한 놀라운 기념물을 세우려 한다. 그것은 거대한 도시이다. 그 도시에는 짐의 이름을 기리기 위해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 붙일 것이다. 그 도시를, 이집트 나일강의 물이 지중해에 흘러드는 지점에 건설하여 전세계 모든 나라의 수도로 삼으리라!" 그러나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3년에 자신의 야망을 못다 이룬 채, 32세의 나이에 병에 걸려 요절하고 말았다. 결국 이 위대한 기념물을 자기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도시는 알렉산더가 죽은 뒤 그의 부하였던 클레오메네스에 의해 완성되어 행정, 무역, 상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학과 도서관의 기능까지 함께 갖춘 장대한 무세이온(mouseion)이 대리석으로 건설되어 서방 과학 지식의 중심지가 되었다. 무세이온에서는 연구자나 각지에서 모여든 학생은 물론, 동물원과 식물원, 천문 관측소(물론 망원경은 아직 없었다), 생리 실험을 위한 해부실(이곳에도 아직 현미경은 없었다)등이 있었고, 무엇보다도 수십만 권의 장서를 갖춘 커다란 도서관이 있었다. 그리고 당대의 많은 과학자들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이 무세이온과 다소 관련을 맺고 있었다. 무세이온은 오늘날의 박물관이라는 뜻인 영어 뮤지엄(museum)의 어원으로, 학예의 여신 뮤즈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뮤즈의 아홉 여신을 제사지내는 장소로 이 중의 일곱 여신은 문예를, 두 여신은 각기 역사와 천문을 담당했다. 무세이온과 관련된 사람 중에는 어느 누구보다 유명한 과학자 아르키메데스를 들 수 있다. 그는 이탈리아 남단 시칠리아 섬의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의 헤론 왕과 친척지간이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 알렉산드리아에 유학했고, 이집트 체재 중에는 스크루를 개발하여, 그것으로 농경지에 강물을 끌어들이기도 했다. 아르키메데스가 고향 시라쿠사에 돌아가 있던 어느 날, 헤론 왕은 아름다운 금관을 들고 와서 이렇게 말했다. "짐은 어떤 금 세공사한테 금덩어리를 주고 그것으로 금관을 만들도록 했소. 그런데 이 왕관이 순금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은이 섞여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소.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그 진위를 가려 주오. 왕관은 상하지 않고 말이오." 왕관은 순금으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의 무게를 달아보았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감식법을 써 봤지만 진위는 가릴 수가 없었다. 이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아침, 아르키메데스는 물이 가득 들어 있는 목욕통에 들어갔다. 그의 몸이 완전히 잠기자 물은 자연 흘러 넘쳤고, 동시에 그는 몸의 무게도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그는 너무도 기쁜 나머지, 벌거벗은 채 거리로 뛰어나가 "찾았다! 찾았다!" 하고 커다란 소리로 외쳤다. 그는 발견의 경위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순금 왕관을 물이 가득 찬 통 속에 집어넣으면, 얼마만큼의 물이 흘러 넘친다. 그러나 같은 무게의 순은으로 된 왕관은 훨씬 크므로(비중이 다르기 때문에) 넘쳐흐르는 물의 양도 훨씬 많다. 나는 이런 성질을 응용해서 왕관에 금과 은이 포함되어 있는 비율을 알아냈다. 즉, 왕관에 해당하는 물의 양, 왕관과 같은 무게의 순금덩어리에 해당하는 물의 양, 왕관과 같은 무게의 순은덩어리에 해당하는 물의 양, 이 세 가지 물의 무게를 비교했던 것이다." 그 결과 왕관에는 은이 섞여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르키메데스는 여기서 자신의 연구를 그치지 않았다. 그는 훌륭한 과학자답게 이 왕관의 연구와 관련된 문제를 탐구해 나갔다. 그는 '부력이란 무엇인가?'라고 자문해 보았다. 그리고 그 비밀은, 물 속의 물체를 그 물체가 밀어내는 물의 무게와 같은 힘으로 밀어 올려진다는 데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렇게 물체를 위로 밀어 올리는 힘을 부력이라고 한다. 따라서 어떤 물체의 무게가 그것이 밀어내는 물의 무게보다 작을 때 그 물체는 떠오르고, 물체의 무게가 더 클 때에는 가라앉는다. 아르키메데스는 또 하나의 대발견을 했다. 그것은 바로 '지레'의 원리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어느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긴 막대의 어느 한 지점에서 긴 쪽 끝을 잡고 있는 아이는, 다른 쪽 끝에 놓여 있는, 어른조차 들어올릴 수 없는 무거운 물체도 쉽게 움직일 수 있다. 이렇게 사용하는 막대를 지레라고 하는데, 지레는 한쪽 끝의 작은 힘으로 다른 쪽 끝의 무거운 물체를 움직여서 일을 쉽게 해준다. 이때 지레의 긴 쪽을 길게 하면 할수록 훨씬 무거운 물체도 움직일 수 있다. 만일 아주 길고 튼튼한 지레만 준비될 수 있다면, 나는 이 거대한 지구도 움직여 보일 수 있다." 아르키메데스도 당시의 다른 많은 과학자들처럼 손재주가 많았다. 그는 지구와 태양과 달, 그리고 여러 행성을 모형으로 만든 플라네타륨을 조립하여, 이 모형으로 천체의 운행을 천동설의 입장에서 제자들에게 설명하고, 지구는 지축의 둘레를 천천히 회전하며 24시간마다 태양의 빛이 지구의 반쪽으로부터 다른 반쪽에 닿게 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아르키메데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연구 활동을 한 뒤, 고향인 사라쿠사에 돌아와 일생을 마쳤다. 그가 귀국한 시기는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에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__201년)이 발발해서 카르타고에 가세하고 있던 시라쿠사가 고전하고 있던 때였다. 때때로 로마의 군대가 배를 타고 시라쿠사를 공격해왔다. 아르키메데스는 고국의 방위를 위해 나섰다. 그는 거대한 돌을 던지기 위한 대형 투석기를 새로 발명하여 적선을 침몰시키기도 했고, 성벽으로부터 커다란 철제 갈고리 못을 날려서 적선을 뒤집기도 했다고 한다. 또 커다란 거울을 만들어 햇빛을 반사시켜서 적선을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자 로마의 병사들은 공포에 사로잡혀 성벽에 밧줄이 하나 늘어지는 것만 보고도, "봐라, 아르키메데스가 또 계략을 쓴다!"라고 말하며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로마 군의 지휘관은 아르키메데스의 재능에 감탄하여 시라쿠사를 함락할 때에도 그를 해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여졌다. 아르키메데스가 길가의 모래에 도형을 그리며 연구하고 있을 때, 한 로마 병사가 그 도형을 밟았다. "무슨 짓인가! 방해가 되니 저리 썩 비키게!" 도형을 보면서 아르키메데스가 소리치자 그 병사는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들어 이 위대한 과학자를 죽이고 말았다. 로마의 지휘관은 적이었으나 위대한 과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의 죽음을 슬퍼하여, 훌륭한 무덤을 만들고 그 한쪽에 그가 발견한 도형의 성질(체적은 그것과 외접하는 원기둥의 체적의 3분의 2에 해당한다)을 새겨 주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이전까지 과학은 추측의 학문이었다.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처럼 추측으로 펼쳐진 가설 중 몇 가지는 분명 진리에 놀라울 정도로 근접해 있었다. 하지만 아르키메데스는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실험되고 증명된 후에야 진리임을 승인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르키메데스는 갈릴레이, 뉴턴, 아인슈타인과 함께 위대한 과학자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하늘을 측량한 사람은 누구? 태양이나 달과 지구의 크기는 어느 정도일까? 고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렇게 말했다. "그런 것을 알고 싶다면 하늘을 자세히 살펴보기만 하면 되네. 태양과 달은 작은 공이야. 우리가 사는 지구가 가장 크지." 그러나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시기에 알랙산드리아에 살고 있던 아리스타르코스에게는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어떤 물체든 멀리 있을수록 실제보다 작게 보인다. 그러니 태양과 달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클 것이다. 그런데 태양과 달은 어느 쪽이 더 클까? 더 멀리 있는 것이 클 것이다. 만일 내가 태양이 달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다면, 태양이 달보다도 큰 것을 증명한 셈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그 거리를 측정해야 할까? 나는 우주로 날아갈 수는 없다. 지구상의 이곳에서 계산을 정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들은 모두 달은 태양의 빛을 반사해서 빛을 내고 있으며 달의 모양이 초승달에서 보름달, 다시 그믐달로 변하는 것은 달이 지구 둘레를 돌고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반달일 때, 지구와 태양과 달을 서로 연결하는 직선을 그어 보자. 그러면 M과 E와 S로 된 삼각형이 생긴다. 그런데 지금은 달이 우리에게 반달로 보이므로 각M은 분명 직각일 것이다. 또 지구(E)와 달(M)을 연결한 직선과 지구와 태양(S)을 연결한 직선을 이루는 각E는 거의 직각에 가까운 각도인 80도가 된다. 또 각S는 아주 작아진다. 이것은 모두 태양이 달보다 훨씬 멀리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리스타르코스의 친구는 크게 감탄을 했다. "정말 기발한 생각을 해냈군. 자네는 태양이 달보다 크다는 것을 밝혔네. 이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지구보다 크다는 것도 보일 수 있을 걸세." 그러자 아리스타르코스는 여기에서 발전하여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나와 함께 월식을 본다고 하세. 달의 표면을 가로지르는 그림자가 보일 걸세. 그것이 지구의 그림자라네. 내 계산에 의하면 지구의 크기는 달의 약 2배 정도일세(실제로 지구의 크기는 달의 약 4배이다)." 아리스타르코스는 계속했다. "자, 지구는 달의 2배이지만 태양은 그보다 훨씬 더 크다. 따라서..." "따라서 태양은 지구보다도 훨씬 크지." 친구가 대답했다. 아리스타르코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네!" 아리스타르코스는 세 천체, 즉 조그만 달과 작은 지구와 거대한 태양의 상대적인 크기를 알아낸 것만으로도 오늘날까지 커다란 존경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우주에 대한 이해에서 놀라운 도약을 이루었다. 그것은 그 후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이에 의해 이루어졌던 위대한 발견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태양이 지구보다 훨씬 크다면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회전한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는 것이 된다." 이는 지구를 비롯한 모든 행성이 태양의 둘레를 회전한다는 것으로 오늘날에는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설명이 아닌가! 이 선언과 함께 아리스타르코스는 지동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인간이 사는 곳인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꺼내어 무한한 우주 속에서 작은 입자처럼 떠다니게 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의 생각을 믿지 않았던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구를 어떻게 공간을 떠다니는 작은 조각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지구처럼 웅장하고도 튼튼한 것이 어떻게 움직인다는 말인가? 지구는 우주에서 최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는 그런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신께서 우리 인간이 살아갈 집으로 지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닌가?" 그러나 결국 인류는 아리스타르코스가 생각한 우주의 모습을 시인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기까지는 약 2000년이라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지구의 둘레를 측량하다 지구는 달보다는 크고, 태양보다는 훨씬 작다. 그렇다면 지구의 크기는 대체 어느 정도나 되는 것일까? 지구의 실제 크기를 '자'를 가지고 조금씩 잴 수 있을까? 알렉산드리아 무세이온의 도서관장인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의 둘레를 측량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남쪽, 이집트의 북회귀선상에 잇는 풍요로운 마을 시에네까지의 거리를 측정했다. 그 거리는 5,000스타디온(오늘날의 학자들은 이 거리를 793.4km로 계산하고 있다)이었다. 이 측량은 같은 보폭으로 걸어서 거리를 계산할 수 있도록 훈련된 측량사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는 하지의 정오에 시에네의 우물물에서 햇빛이 똑바로 반사되어 올라오는 것을 보았다(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땅에 해시계를 세우고 그 그림자가 없어지는 것을 보았다고도 한다). 그는 소리쳤다. "지금이다!" 이때 시에네 마을에서는 건물의 그림자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알렉산드리아에 있는 건물은 보두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때 햇빛은 수직선과 7도 12분의 각을 이루고 있었다. 어째서 이런 차이가 생긴 것일까?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에서 광선이 비치는 각도가 다른 것은 지구가 둥글기 때문이다. 지구는 구형이므로 전체적으로는 360도가 된다. 그런데 알렉산드리아와 시에네 사이는 7도 12분이므로 전체 원주의 50분의 1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구의 둘레를 계산하면 25만 200스타디온(약 39,670km)이 된다." 이것은 오늘날의 실측치 4만 75km(적도에서의 둘레)와 비교했을 때와 거의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확하다. 이 측정 방법은 기본적으로는 타당한 것이지만 정확히 말하면 두 가지 점에서 문제가 있었다. 우선 지구는 완전한 구형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 시에네가 정확하게 북회귀선상에 있지도 않고, 알렉산드리아와 동일한 경도선상에도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지구의 크기를 측량하겠다고 생각하고 그 생각을 실천에 옮긴 것은 참으로 훌륭한 것이었다. 책을 태워 목욕물을 데우다 로마 제국은 기원전 100년경에서 기원 후 약 400년까지의 500년간, 유럽 전역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일부를 지배했다. 로마인은 그리스인처럼 과학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은 하수 처리장이라든가 도로, 수도, 공공 건물을 건설하는 등의 실질적인 일에 더욱 관심을 보였다. 그들은 어떤 일의 이치를 밝힌다거나 손재주를 써서 새로운 것을 만드는 등의 과학에 관련된 일은 하찮은 일이라고 생각해서 모두 노예에게 맡겼다. 노예는 수공업이나 의료와 이발 등을 담당하고 있었다. 또 점쟁이들은 닭의 모래주머니를 갈라 보고 미래를 예언하고 있었다. 연금술사는 납이나 주석을 황금으로 변화시키는--혹은 그렇게 하려고 시도하는--오늘날의 눈으로는 마법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는 일에 종사했다. 이전의 그리스와 알렉산드리아의 위대한 과학자들이 이루었던 여러 가지 발견은 차츰차츰 잊혀져 갔으며, 과학의 기운은 쇠퇴해 갔다. 만일 천수백 년 뒤에 태어난 콜롬부스가, 에라토스테네스가 이미 지구의 크기를 측량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감히 서쪽을 향해 출범하지는 않았으리라. 콜롬부스는 기원 후 2세기경의 천문학자 K.프톨레마이오스의 생각을 믿었다. 그래서 '만일 세계가 프톨레마이오스가 말한 것과 같다면 단 며칠 내에 서쪽으로 항해해 인도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항해에 나섰던 것이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지구의 크기를 축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천문학의 낡은 사상을 부활시켰다. 그는 태양이 지구의 둘레를 회전하고 있다고 했고, 다른 행성과 항성도 모두 지구의 둘레를 회전하고 있다고 했다. 사람들은 또, 이런 천체를 조종하는 것은 천사이며, 이 우주의 운동을 지배하는 것은 신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4세기 초, 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누스 대왕은 기독교를 공인했다. 오래된 이교의 여러 신, 예를 들어 주피터, 주너, 비너스, 머큐리 등은 모두 버려졌다. 과학은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영혼이나 사후의 세계를 마음속에 그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천문학이나 화학, 수학의 연구는 그리 커다란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모든 사람들이 믿고 있었던 천문학자였다. 당시 로마 제국이 직면하고 있던 위기 상황에서 인류가 살고 있는 집(지구)이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다시 청동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이집트나 바빌로니아 시대의 낡은 생각을 끄집어냈다. 과학은 바야흐로 그 출발점에서 멈춰 버린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과 6세기에 걸쳐 저술된 수많은 장서가 있는 그 도서관은 중대한 위기에 직면했다. 알렉산드리아 거리에서는 이교의 신을 여전히 믿고 있던 과학자들이 사람들의 눈총을 받았다. 기원 후 390년 초, 기독교의 폭도들이 "도서관을 불살라라! 이교도를 잡아라! 학자를 죽여라!" 하고 소리치면서 알렉산드리아의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미쳐 날뛰던 폭도들은 당시 뛰어난 젊은 여성 과학자였던 휴바디아를 습격해서 그녀의 몸을 여덟 토막으로 잘라 죽였다. 그리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그곳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529년에, 850년간이나 지속된 무세이온은 로마의 유스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그로부터 100년 후 로마 제국은 붕괴했고, 아랍의 이슬람교도인 아물의 지휘를 받는 정복자들이 알렉산드리아의 성문에 들어섰다. 아물이 타다 만 도서관을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명령하자 도서관원은 그의 앞에서 간청했다. "아물 각하, 여기 있는 책들은 극히 소중한 것입니다. 각하께서는 이곳에서 고대 세계의 다양한 과학과 예술을 접하실 수 있습니다. 여기 있는 책은 일단 타버리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각하, 살펴주십시오. 이곳에는 바빌론의 천문학의 지혜가 있습니다. 이곳에는 히포크라테스의 지식이, 이곳에는 피타고라스의 수학이, 이곳에는 탈레스의 발견이, 이곳에는 아리스타르코스와 에라토스테네스의 측량이 있습니다!" 아물은 그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만일 여기 있는 책이"코란"에 씌어 있는 신의 말씀과 일치한다면 불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만일"코란"과 일치하지 않는다면 마땅히 불태워져야 할 것이다." 무세이온 도서관의 책은 이 정복자에 의해 연료로 사용되었다. 4,000개의 목욕통을 6개월이나 데울 수 있을 정도의 양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해서 고대 최대의, 모든 시대를 통한 최대의 보물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제 3장 중세의 과학 동양과 서양은 어디에서 만났을까? 기사도와 흑마술 과거를 잊다 책을 밀수한 사람들 베이컨, 미래를 들여다보다 동양과 서양은 어디에서 만났을까? 기원전 600년경, 마호메트(정식 명칭은 무하마드)라는 한 아라비아인이 어느 날 아침에 잠을 깨서는 그의 현숙한 부인에게 이상한 꿈을 꾸었다고 말했다. "꿈속에서 신의 모습을 보았소. 그리고 그분께서는, '나는 알라다. 오직 하나뿐인 신이다. 마호메트야, 너는 나의 예언자다. 가라, 그리고 나를 전하라'고 말씀하셨소." 그러나 마호메트가 알라의 명령을 실천하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은 그를 다른 흔해빠진 예언자들과 마찬가지로 생각하고 비웃으면 따돌렸다. 마호메트와 그의 부인은 수년간 아라비아 각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미디아라는 마을에 도달하게 된다. 여기에서 사람들은 알라의 말씀을 기쁨으로 듣고, 마호메트는 이슬람교(마호메트 교)를 창시한다. 마침내 마호메트는 사막에 사는 수십만의 사람들을 이끌고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섰다. 아라비아, 페르시아, 서인도,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그리고 스페인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 그의 깃발 아래 무릎을 꿇었다. 저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고 그곳의 대도서관을 불태운 아물도 마호메트 휘하 장군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원전 800년경에 이르러서는, 고대 로마 제국의 대부분 지역이 이슬람교도의 손에 넘어가 버렸다. 이라크의 티그리스 강변에 대도시 바그다드가 출현하고, 그곳에는 "아라비안 나이트"에서도 나오는 유명한 하룬 알라시드(Harun al-Rashid, 763__809)가 칼리프로서, 또 황제로서 군림했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과 마찬가지로 과학과 학문의 지배자가 되었다. 천문학자들은 높은 천문대에서 별과 행성을 연구했다. 학교에서는 교사들이 그리스 대과학자들의 저서를 번역했다. 중국의 포로로부터는 제지 기술을 전수 받았고, 이집트인들은 고국에서 화학(혹은 연금술)의 비밀을 가져왔다. 인도로부터 온 상인들은 숫자를 쓰는 새롭고 훌륭한 방법을 전해 왔다. 고대 로마에서 사용한 숫자(I, II, III 등)에서는 세 자릿수 이상의 숫자는 다루기가 어렵고 까다롭다. 그런데 이 새로운 숫자는 좋은 점을 많이 갖고 있었다. 그 좋은 점을 숫자의 모양이 아니라 숫자의 구조에 있었는데, 바로 0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숫자 체계에서는 모든 숫자가 그 위치에 따라 숫자의 값이 정해지도록 된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아라비아 숫자의 기원이다. 아득히 먼 곳에 있는 인도의 숫자가 바그다드에서 홀연 널리 퍼지면서, 스페인과 이탈리아까지 전해졌다.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전해져가면서 인도 숫자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숫자가 된 것이다. 티그리스 강변에 있는 전설적인 도시 바그다드에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양 세계의 학문이 만났다. 지금까지의 역사상 문명이 이처럼 단기간에 합류해서 발전해간 예는 없었다. 기사도와 흑마술 이슬람의 힘이 강력해지면서 로마 제국은 점점 더 쇠약해졌다. 야만족인 고트와 반달, 그리고 게르만이 유럽에 진출하여 고대의 문명을 파괴하고, 이제 남은 것은 서로 싸우는 무사들과 귀족이 지배하는 약소국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유럽의 중세가 시작되었다. 고대와 근대의 사이에 낀 중세는, 5세기부터 15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에 걸진 시대이다. 당시는 기사도와 전투의 시대였다. 기사들은 소설 속의 주인공인 동키호테처럼, 무거운 철제 무기의 무게에 헐떡이면서 장대한 군마에 올라타고는, 깃발을 휘날리며 창을 들고 가까운 동산의 꼭대기에 있는 성을 공격해 들어갔다. 그 다음에는 적의 복수에 대처하기 위해 자신들의 견고한 성벽으로 되돌아갔다. 기사들은 적의 성을 불태우거나 자기 성을 방어하지 않아도 좋을 때는 야외 연극이나 사냥, 그리고 곡예를 즐겼다. 그들은 노동으로 손을 흙투성이로 만드는 것은 가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런 일은 성 밑의 골짜기에서 땅을 경작하는 하층민이나 농노에게 맡겨버렸다. 기사들은 미신과 무지로 인해 대개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그들은 과학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던 대신, 점성술과 연금술, 그리고 흑마술(악신을 도움으로 하는 나쁜 마법)을 구분할 줄은 알고 있었다. 숲에는 기분 나쁜 바실리스크(이것이 내뿜는 숨을 쐬거나 쳐다보기만 하여도 죽게 된다는 괴물)라든가 일각수, 그리고 그 밖의 다른 공상적인 동물이나 괴물이 출몰하는가 하면, 하늘에는 병이나 죽음의 징조가 어른거리고 있었다. 별이 병에 '영향을 끼친다'(영어의 인플루언스)는 중세기의 생각은, 지금까지도 유행성 독감을 의미하고 있는 인플루엔자(influenza)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기사와 귀부인은 가지각색의 비단과 비로드를 몸에 걸치고 연금술사의 실험실에 모여서, 회춘이나 건강과 행복,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증해줄 영약을 얻으려고 하였다. 또 다른 연금술사들은 납, 주석, 구리, 철 등의 금속들을 순금으로 변화시켜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황금을 약속한 연금술사들에 대해서, 어떤 왕은 그들의 실험실을 폐쇄해 버리기도 했다. 왜냐하면 왕들은, 연금술사가 황금을 만들어 화폐 가치가 떨어질까 걱정이 되어 밤잠을 설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연금술사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황금을 만드는 비법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를 잊다 연금술이라는 마법은 그 후 수백 년이 지나 마침내 화학이라는 기적에 도달하게 된다. 사람들은 중세를 지나면서 그 이전에 알고 있었던 것을 잊어버렸다. 로마 제국이 몰락한 후에 그리스의 지혜는 유럽에서 잊혀졌고 수학, 천문학, 토목공학, 물리학, 생물학, 의학은 거의 소멸되었다. 산술조차 신비적인 것으로 되어버렸다. 아라비아 숫자를 잘 모르는 대다수 사람들은 아주 간단한 덧셈과 뺄셈조차 계산판이나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으면 할 수가 없었다. 5배 이상 되는 곱셈이나 나눗셈은 너무 어려운 것이어서 필산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의학의 상황도 산수와 마찬가지로 극히 열악했다. 히포크라테스가 제창한 건강에 대한 상식적인 규범은 잊혀졌다. 그 대신 병을 악령의 소행으로 생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채찍질을 하거나 성지를 순례해서 치료했고, 기도나 주문을 소리내어 외워서 치료했다. 정신병 환자는 돼지 가죽으로 만든 채찍으로 두들겨 맞았다. 그것이 치료법이었던 것이다. 몇몇 질병은 국왕이 직접 치료했다. 국왕의 주위를 맹인이나 신체적으로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둘러싸고는, "제발 살려주십시오! 제발 살려주십시오!" 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간간이 들려오곤 했다. 국왕이 환자의 얼굴이나 머리에 '손을 대면' 환자는 건강하게 된다고 생각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대수술을 받을 때면, 종종 의사가 아니라 마을의 이발사를 찾았다. 지금도 이발소 입구에서 돌고 있는, 적색과 백색이 교대로 꼬여 있는 광고판은, 이발사가 주된 치료법으로서 사혈(치료를 위해 환자의 정맥에서 혈액의 일부를 몸 밖으로 제거하는 것)을 이용하면서 비상근 의사의 역할을 했을 때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술할 때의 통증을 줄여주는 효과적인 마취제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을 치료할 때면 환자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맛보아야만 했다. 또 나환자는 건강한 사람과 구별하여 일반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옷을 입도록 했기 때문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약제를 사용하는 의사들은 그다지 평판이 좋았던 것 같지 않았다. 일반인에게 인기가 있었던 것은 지렁이 에끼스였다. 그 처방은 다음과 같았다. "살이 통통하게 오른 지렁이 6마리를 잡아, 조심해서 포도주로 닦는다. 그것을 이중 냄비에서 하루종일 약한 불로 잘 삶는다. 그곳에 전나무즙을 섞은 다음, 냄비에서 꺼내 차가워질 때까지 놓아둔다." 그리스인과 로마인은 매우 엄격한 규정을 정해 놓고 위생을 지켰다. 그러나 중세 사람들은 청결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인구가 밀집해 있는 불결한 마을에서 마치 들불처럼 퍼지는 전염병은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1350년, 흑사병이라고도 하는 페스트가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맹위를 떨쳤다. 그것이 가라앉았을 때 유럽의 인구는 크게 줄어 있었다. 그즈음 페스트 환자를 격리하는 병원이 이곳저곳에 세워졌다. 페스트의 원인은 무엇일까? 어떤 사람들은 '지진의 독기가 들어 있는 공기'라든가 '신의 노여움'이라는 이야기를 퍼뜨렸다. 그 밖에도 '악마의 짓'이라고 하여, 채찍을 손에 들고 악마를 쫓아내기 위해 자기 몸을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이 무서운 병의 원인이 적어도 어떤 작은 동물을 매개로 해서 생기는 전염병이라고 알고 있었다. 중세 사람들은 옛날의 이 모든 지식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책을 밀수한 사람들 그러나 유럽에서도 극소수의 사람들은 고대의 지식을 다시 소생시키려 하고 있었다. 항상 수도원에서 일하고 있던 수도사들은 과거의 학문을 최대한 보존해왔다. 그들은 극소수가 남아 있을 뿐인 귀중한 책을, 교양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침략자의 손에서 건져냈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발명되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어렵게 구해낸 책을 필사하곤 했다. 수도사들은 점차 그 필사본에 아름다운 금박이나 색채를 입힌 그림을 그려 넣었다. 때때로 수도사들이 책을 필사할 때 실수를 하는 적도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필사생들이 그 필사본을 베낄 때, 그 실수가 되풀이되어서 그 위에 그들의 실수가 얼마간 더 첨가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원저자들이 쓴 책과는 전혀 다른 책이 만들어지곤 했다. 필사생은 실수가 있을지도 모르니 점검해야겠다는 따위의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약 그 실수가 수도원 뜰에 있는 화초에 관한 부분이었다면, 수도원의 정원을 조금 걸어보기만 해도 정정할 필요를 금방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미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스스로 배우기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1000년경, 몇몇 수도사들은 유럽의 학문에 불만을 느꼈다. 그리고 그들의 귀를 유혹하는 풍문이 전해졌다. 스페인의 이슬람 문명에는, 로마 시대 이래 유럽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도시와 훌륭한 궁전과 병원, 그리고 학교가 있다는 것이었다. 한 수도사가 부러운 듯 말했다. "그 학교에서는 아주 훌륭한 천문학자와 수학자, 그리고 의사들이 강의를 하고 있다더군." 그러자 두 번째 수도사도 잘 안다는 듯한 얼굴로 맞장구를 쳤다. "믿기지 않겠지만, 그곳에서는 우리가 잃어버린 지 이미 500년이나 된 그리스 과학자들이 쓴 책을 사용하고 있다네." 그러자 세 번째 수도사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우리가 어떻게 스페인에 갈 수 있단 말인가? 피레네 산맥을 넘는 산길은 힘들고도 위험해. 이슬람교도는 우리 기독교인을 미개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테지. 그러니 우리를 보자마자 죽일 거야." 하지만 12세기에, 아델레이드라는 이름을 가진 영국의 대담한 젊은 수도사는 어떤 일이 있어도 스페인의 대학에서 연구하리라고 결심했다. 그는 아랍인으로 변장하고 스페인에 잠입해서 코르도바의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교수들이 하는 말을 모두 정성껏 적어 두었다. 그 후 스페인을 떠날 때, 그는 두 가지 보물을 안고 왔다. 하나는 그리스 수학자 유클리드(에우클레이디스, 기원전 290년경에 활약)의 유명한 기하학 책의 사본이었고, 다른 하나는 산수책으로서 그곳에는 아라비아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대담한 수도사 덕택에 아라비아 숫자는 유럽에 퍼지게 되었다. 다른 유럽의 연구자들도 아델레이드의 뒤를 좇아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마이오스, 아르키메데스의 저작을 몰래 들고 나오고, 또 이슬람 세계의 과학자들이 쓴 책도 갖고 돌아왔다. 그 책에 씌어 있는 원어인 아랍어가 영어로 번역될 원어 중에서 일부가, 예를 들어 커피(coffee), 캠퍼(camphor:장뇌), 제로(zero:영), 보락스(borax:붕사), 대수학을 의미하는 앨지브러(algebra) 등의 아랍어가 거의 그대로 남아 지금도 유럽 각국에서 통용되고 있다. 이렇게 해서 스페인의 이슬람 문명을 통하여 고대의 지혜가 유럽에 시냇물처럼 흘러들어 왔다. 베이컨, 미래를 들여다보다 그리스와 이슬람 권의 과학자들이 지은 책이 유럽에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다시 자연에 관한 학문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다. 그들은 논밭이나 숲에 나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알아보려고 했다. 그곳에서 직접 동,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과 하늘을 올려다보고 빛과 구름과 무지개에 경이로움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무지개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가?' 이 질문을 던진 사람은, 13세기 중엽에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로 있던 프란체스코 회의 수도사 R.베이컨이었다. 어느 늦은 오후, 태양을 등지고 있던 베이컨은, 큰 물보라를 일으키며 돌고 있는 물레방아를 보고 놀라며 멈춰 섰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무지개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고심을 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하늘의 무지개와 돌고 있는 물레방아 위에서 보았던 무지개는 서로 비슷하다. 하늘에 걸려 있는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은, 이른 아침이나 늦은 오후같이 태양이 등뒤에 있을 때이다. 그리고 엷은 구름이 끼여 있거나 안개가 있을 때이다... 무지개를 볼 수 있는 것은 햇빛이 구름 속에 있는 물방울에 반사되어, 그것이 사람의 눈에 비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정확히 같은 무지개를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1,000명의 병사를 일렬로 세운다면, 그 한 사람 한 사람은 조금씩 다른 무지개를 볼 것이다." 그런데 무지개에는 어째서 여러 가지 색깔이 나타나는 것일까? 베이컨은 그 질문까지 답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약 400년 후 뉴턴은, 무지개를 만드는 물방울이 태양의 광선을 여러 가지 색으로 분해하는 작은 프리즘 같은 작용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게 된다. 베이컨은 빛에 관한 실험을 더욱 진척시켜서 안경이 사람들의 시력을 보조한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고, 또 확대경과 어설픈 망원경을 처음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의 큰 취미는 폭약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화약을 만드는 처방을 비밀로 하기 위해 애너그램(anagram:어구의 철자 변경) 형식으로 전부 써두었다. 이 중 한 문장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초석(질산칼륨) 7, 개암나무 5, 유황 5의 비율로 혼합시켜 불 위에 두면 천둥과 번개를 낼 것이다." 이런 딱총 소리 정도를 천둥과 번개라고 한 것을 보면, 오늘날과 비교해서 그때가 상당히 유유자적한 시대였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베이컨은 당시 가장 인기 있던 교수였다. 그의 실험실에는 많은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베이컨의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싶어했고, 무엇보다도 폭약이 내는 천둥소리와 번개를 재미있어 했다. 결국 옥스퍼드 대학은 이런 재미있는 확대경과 망원경을 부숴 버리라고 명령했다. "우리 대학 학생들은 연구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이렇게 다른 교수들은 화를 냈다. 사실 교수들은 실험을 강의하던 베이컨을 곱지 않은 눈으로 보고 있었다. 이 시대의 정규 강의는 책만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베이컨의 공상은 더욱 넓게 나래를 펼쳐가고 있었다. "언젠가는 배가 돛이나 노 없이도 항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수레가 말도 없이 지상을 달릴 것이다. 또 사람들이 바다 밑을 안전하게 통행할 수 있는 작은 배가 건조될 것이다. 인공 날개를 단 기계가 하늘을 날 것이다. 사람들을 태우고 내리는 작은 차가 만들어질 것이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증기선, 자동차, 잠수함, 헬리콥터, 엘리베이터를 예언한 것이다. 교수들은 "실험은 백해무익하다!"며 씩씩거렸다. 그리고 이렇게 모함했다. "베이컨은 정말로 기이한 생각을 퍼뜨리고 있어! 장차 어떤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안다는 말인가? 그의 귓가에서는 악마가 소곤거리고 있다구!" 베이컨은 모든 범죄 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마법 사용'이라는 죄목으로 고문을 받고 화형을 당할 처지까지 되어버렸다. 그러나 다행히 극형은 모면했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아야만 했다. 중세 사람들은 진리에의 유일한 길은 이전 사람들이 써놓은 것을 읽는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베이컨은 지식은 관찰과 실험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 대담한 사람이었다. 만약 그가 정말로 미래를 예측할 수 있었다면,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을 일이 훗날 일어났다.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들을 가장 오싹하게 만든 베이컨의 생각은 땅덩어리가 둥글다는 것이었다. 이 생각은 200년이 지난 뒤 역사의 흐름을 뒤흔드는 놀라운 사건을 낳았다. 스페인의 페르난도 5세와 이사벨 왕비가 콜롬부스에게 세계가 둥글다는 것을 누구로부터 배웠냐고 물었을 때, 그는 "R.베이컨입니다."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제 4장 16세기, 발견의 시대 과학의 영웅들 놀라움으로 가득한 세계 항상 바르게 판단하는 사람 지구를 회전시킨 사나이 천구, 혜성, 항성 원과 타원 마녀사냥과 과학자 진실인가? 과학의 영웅들 15세기말인 1492년, 이탈리아의 콜롬부스라는 유명한 선장이 넓은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해서 신대륙을 발견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이 당시 유럽인들에게 준 영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이었다. 우주 여행가가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것에 필적할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삽시간에 사람들은 지금까지 생각하고 있던 이 세계의 모습을 변경시켜야만 했다. 신대륙에는 이제껏 어느 누구도 꿈꾸지 못한 새로운 땅과 바다와 인간과 물건이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친 세계 지리는 완전히 잘못되어 있었다. 아니 그것은 다른 세계였다. 사람들은 지금까지는 꿈도 꾸어 보지 못한 의문을 품게 되었다. '지구는 정말로 우주의 중심인가? 태양은 정말로 매일 우리의 주위를 돌고 있는 것일까? 혹시 이 모든 이야기가 서쪽으로 계속 항해해 가면 낭떠러지로 떨어진다던 이야기처럼 잘못된 생각은 아닐까?' 이 의문에 대해 어떻게 정답을 찾아내야 할까? 지금까지는 언제나 간단히 정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모든 것은 고대 그리스의 교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뒤져보면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태양 아래 있는 모든 것에 대해 놀라운 권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로서는 전혀 들어보지도 못한 신대륙의 인간과 동, 식물에 대해서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 것인가? 또 지구의 반대편에 멀찍이 떨어져 있는 이 대륙의 바람, 해류, 조수간만에 대해서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 것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새로운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훌륭한 안내자가 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이제부터 자신의 눈과 귀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콜롬부스의 아메리카 대륙발견이 있고 난 후에 스페인, 포르투갈, 프랑스, 영국은 아메리카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한 경쟁을 시작했다. 유럽의 모든 항구에서 용감한 선원과 튼튼한 배를 구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제 선장들은 바다의 괴물과 인어에 대한 장황한 이야기에는 흥미를 잃었고, 직선 수로를 잡는 기술과 정확한 위도를 찾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지중해처럼 거의 육지로 둘러싸인 해안을 따라 항해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이었다. 그러나 일단 배가 광대한 대서양을 가로질러 서쪽으로 가게 되면, 별을 관측하거나 바람과 조류를 측정하는 일에 숙련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안전하게 귀국하기 위해서는... 어떤 선장이 야간에 정박할 항구를 놓치고 말았다. 그가 잘못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수백 킬로미터나 서쪽으로 치우쳐 있었다. 그는 다시 되돌아왔다. 하지만 그는 다시 길을 지나쳐 버렸다. 그리고 선원들은 배가 항구에 도착하기도 전에 굶어 죽었다. 배가 수백 킬로미터나 진로를 벗어나 버렸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선장을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선장이 사용한 해도는 거의 무가치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해도 제작자는 지구가 평면인 것으로 묘사했다. 1569년 네덜란드의 G.메르카토르(G.Mercator, 1512__1594)는 최초로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고 원통 투영법을 사용해서 지도를 만들어 냈다. "우리에게 정확한 지도와 망원경과 시계, 그리고 컴퍼스를 달라." 선원과 탐험가들은 이렇게 외쳤다. 그들의 이런 소망에 자극된 과학자들은 16세기의 새로운 문제에 답하려고 나섰다. 그러나 이 시대에 이런 문제에 답을 구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다. 국왕이나 성직자와 교수들은 자기들이야말로 지금까지 누구나 필요로 하는 모든 해답들 갖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것은 전혀 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렇게 선언했다. "모든 답은 성서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고, 그것이 가장 올바른 것이다. 경고하노니, 너희는 지금 고대의 사상을 의심하는 불온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의 과학자들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명예로운 시민이었다. 그러나 16세기의 과학자들에게는 투옥이라든가 고문, 그리고 화형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따라다니고 있었다. 따라서 과학자들의 일부가 침묵을 지키고 있었던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코페르니쿠스, 조르다노 부르노, 갈릴레이 같은 사람들이 속속 대담한 내용을 발표했다. 그들은 말했다. "콜롬부스와 용감한 선원들은 옛날부터 내려온 지구의 크기와 모양에 의심을 품었기 때문에 신대륙 탐험에 생명을 걸었던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좋다. 우리는 한 발자국씩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한다. 우리는 이 우주에 대한 낡은 사상에 도전하겠다." 16세기의 위대한 영웅은 과학자들이었다. 놀라움으로 가득한 세계 과학적인 사고를 재건하는 데는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말고도 두 가지 사건이 더 있었다. 콜롬부스가 서쪽으로 출항하기 전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터키인에 의해 점령되었다. 겨우 목숨만 살아남아 도망쳐 나온 피난민들은 금은 보화보다 훨씬 귀중한 것, 바로 그리스의 위대한 학자들의 저서를 갖고 도망쳐 나왔다. 이렇게 해서 서유럽은, 처음으로 그리스어로 씌어진 히포크라테스와 아르키메데스 같은 과학자의 저서에 접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세계가 잊고 있었던 많은 사실들을 이 고대인들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렇게 반성했다. "어떻게 1000여 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인이 오늘날의 우리 교사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우리는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이들 고대의 명저가 유럽에 도착한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인쇄기가 발명되었다. 이 인쇄기는 순식간에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1454년 J.구텐베르크는 주조 활자를 사용하는 활판 인쇄를 완성했다. 그리고 최초로 독일에서 성서를 인쇄했다. 그리고 불과 25년 후에는 영국에서 캑스턴이 일반 서적을 인쇄한다. 캑스턴이 인쇄한 최초의 서적 중에는 "아더 왕과 원탁의 기사들"도 들어 있었다. 인쇄기를 이용하기까지의 책은 모두 수서 본으로서 상당히 고가품이었다. 부자들은 겨우 네댓 권밖에 안 되는 책을 가지고서도 자신의 도서실을 자랑했다. 대다수 사람들은 책을 읽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기보다는, 책과 접할 기회가 있어도 감히 그 비싼 책을 읽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신대륙에서 돌아온 탐험가들 대부분은 그 모험을 책으로 썼다. 이렇게 해서 낯선 대륙과 그곳의 풍습이나 주민에 관한 일이 유럽 전역의 작은 마을에까지 전해졌다. 중세의 사람들은 자신의 외부 세계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16세기가 되면서 그들의 시야는 아득히 먼 곳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무엇인가 새로운 일, 자극적인 사건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세계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경이와 모험이 가득한 신비로운 장소였다. 중세 사람들은 영혼만이 유일선이라고 믿었고 사후의 생활에만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지상의 생활에도 가치를 두는 사고 방식으로 전환되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정신은 사람들 속에서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항상 바르게 판단하는 사람 학문과 과학의 새로운 정신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인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그는 생애의 대부분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보냈다. 그는 아르키메데스처럼 군사 기술자였던 한편, 뛰어난 건축가, 천문학자, 지질학자, 생물학자, 예술가이기도 했던 팔방미인이었다. 그의 "모나리자"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이다. 그도 베이컨처럼 다가올 미래에 나타나게 될 많은 발명과 발견을 예측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공상에서 그친 베이컨과는 달리, 레오나르도는 자리에 눌러앉아 계획과 착상에 고심하면서 상상을 실현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는 수첩에 자신의 생각을 기록할 때 다른 사람이 읽지 못하게 하려고, 거울에 비춰야 제대로 나타나는 문자를 사용했다. 그의 수첩에는 로켓, 기관총, 낙하산, 날틀(비행기) 등에 관한 계획도가 있었고, 또 풍력계와 온도계와 속도계에 대한 설계도도 있었다. 이 기묘한 수첩의 어느 페이지를 넘기든, 다른 사람이라면 그 중의 단 한 가지만으로도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강렬한 호기심을 가진 사람으로 더욱 많은 것을 알려고 했다. 말은 어떻게 저토록 빨리 달릴 수 있을까? 그는 인간과 말의 뼈 구조와 근육을 주의 깊게 조사해서 비교했으며, 말발굽은 인간의 발가락과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말의 발은 뼈가 길게 연장되어 있어서 속도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새는 어떻게 하늘을 나는 걸까? 레오나르도는 다양한 종류의 새들을 사와 조롱에서 풀어놓고, 새의 날개와 몸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새들이 어떻게 방향을 바꾸는지, 또 어떻게 바람을 타고 헤쳐나가면서 날아가는지 스케치했다. 그는 날개와 꼬리의 깃털과 뼈를 주의 깊게 연구했다. 이어서 그는 '인간은 날 수 없는가?'라는 질문에 도전했다. 새의 비행을 연구한 일이 그를 최초의 헬리콥터를 설계하는 데에까지 이끈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장차 어떤 발명이 이루어질 것인가를 예측하는 불가사의한 힘을 갖고 있었다. 혈액은 순환하는 것이고, 물체는 떨어져내리면서 속도가 점차 증가할 것이라고 했다. 더욱이 지구가 태양이 둘레를 도는 행성의 하나라는 추측도 하고 있다. 초승달에서 나타나는 달의 없어져 버린 부분에 관한 시비를 해결한 것은 그의 가장 뛰어난 예측 중의 하나였다. 초승달이나 그믐달을 보면, 그 안에서 가끔씩 아주 가는 빛을 내는 보름달의 그림자가 보이기도 한다. 고대 사람들은 달이 이런 모습을 불행의 전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민요에는 늙은 선원이 선장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하는 구절이 있다. 어젯밤 이슥해서 우리가 본 초승달의 팔에서는 사라져 버린 달이 보였소 무섭소이다, 선장님. 선장은 이 늙은 선원의 말에 신경 쓰지 않았고, 결국 선원 모두는 배와 함께 물 속에 빠져 죽었다. 초승달만 있어야 할 때, 달의 다른 부분이 어렴풋이 보인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우리가 초승달에서 보는 빛은 태양에서 오고 있다. 그렇다면 동시에 달의 나머지 부분을 어슴푸레하게 보여주는 빛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레오나르도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어슴푸레한 빛에 대한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지구 역시 달처럼 빛을 반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지구에 도달하는 태양빛 중의 일부는 달에 반사됩니다. 그 빛 때문에 우리가 보통 때는 볼 수 없었던 달이 일부가 보이는 것입니다. 지구는 거대한 거울처럼 작용하고 지구의 반사 작용에 의해 달의 나머지 부분이 보이는 것입니다." 레오나르도는, '산꼭대기에 있는 바위에서, 바다에 있는 물고기나 조개가 원형 그대로 남아 발견되는 것은 어찌된 이유인가?' 하는 의문에도 도전했다. 사람들은 이 질문에 제각기 달리 답했다. "그거, 단지 우연일 뿐이야." "믿기지 않겠지만 그것은 산에 있는 바위에 바다 생물의 잔해를 끌어당기는 신비한 힘이 있기 때문이지."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이런 어처구니 없는 답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바다 생물의 흔적을 자세히 조사하고는, 이것들은 아주 오래 전에 살았던 바다 생물의 화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들이 바닷속 깊은 곳에서 높은 산꼭대기에까지 올라오게 된 것일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이 산꼭대기는 오랜 옛날에는 바닷속이었다." 그것은 맞는 말이었다. 아주 오랜 전 지구의 표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이곳 저곳에서 육지가 파도 밑으로 사라져 버리고, 또 다른 장소에서는 바다에 있었던 동, 식물의 유해가 해저부와 함께 지상으로 올라왔다. 그는 우수한 추리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몇 번이나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정확한 추리를 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다시 평생을 두고 계속 추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순한 추리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과학적인 계측 기기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가 해낸 일은 마치 마법처럼 생각된다. 우리들은 그가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에 흥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는 의문을 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언제나 끝까지 자신이 호기심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는 먼지투성이 고서에서 해답을 찾아내려고 하는 대신, 직접 자연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고대 그리스 이후, 그는 자기 자신의 관찰과 판단만으로 대답한 최초의 과학자였다. 1000년간 유럽은 과학의 회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는 낡은 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나누는 경계선상에 서 있었다. 거기서 과학이 현대로 향할 길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를 회전시킨 사나이 1519년(레오나르도가 죽은 해), 포르투갈의 탐험가 F.마젤란이 세계 일주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후에는, 지구를 평평하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대지가 평평한가 둥근가에 관계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그 주의를 행성과 별과 태양, 그리고 하늘까지 하루에 한 번씩 회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16세기의 천문학자에게 '우주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는가?'하고 물어 본다면, 그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답할 것이다. "그거야 간단히 설명할 수 있지요. 우주는 아주 거대하고 속이 텅 빈 구체입니다. 그 속에는 지구를 중심으로 지구 주위를 한 겹 한 겹 둘러싸고 있는, 모두 80개가 되는 천구(여기서 말하는 천구는 오늘날 우리가 천문학 용어로 사용하는 천구와 전혀 다른 것임)가 있지요. 천구는 여러 별과 행성과 태양의 운반해주는 것인데, 투명한 공 모양을 하고 있지요.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는 견고한 것이어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것을 알 수 있었습니까?" 이렇게 재차 다그친다면, 천문학자는 우리를 '별 미친 사람 다 보겠네'하는 눈으로 멀뚱히 쳐다보다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떻게 알 수 있었느냐니? 아니 아리스토텔레스가 바로 그대로 말하지 않았나요? 또한 가장 위대한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역시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한 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하늘을 올려다보세요. 어떻게 하늘을 별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대한 공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습니까? 태양은 지구 주위의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사라져 가고 있잖아요!" 바로 그런 때, 대담한 한 사람이 홀로 일어나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라는 권위자들이 움켜쥐고 있던 상식에 도전했다. 1543년 5월 24일이 일이다. 폴란드의 과학자 N.코페르니쿠스는 죽음의 순간을 맞고 있었다. 한 친구가 인쇄가 끝난 책을 들고 병상에 뛰어들어왔다. 어떤 책인지 환자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 바로 병상에 누운 환자 자신이 온 생애를 걸고 집필한 "천체 궤도의 회전에 대하여"라는 책이었기 때문이다. 환자의 떨리는 손이 책에 닿았다. 그는 제일 먼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는 젊었을 때, 폴란드 프라웬부르크 대성당의 성직자였다. 우연히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천문학자 아리스타르코스에 관한 책을 손에 넣게 되었다. 이 고대 천문학자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회전하는 게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위를 회전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이상하긴 하지만, 그럴 법하기도 해.' 코페르니쿠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이렇게 중얼거렸다. "만일 이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면, 천문학의 법칙을 완전히 다시 세울 수 있을 거야. 그러면 프톨레마이오스처럼 천구가 80개라는 식으로 복잡하게 우주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거야. 사람들은 누구나 태양이 하늘을 가로질러 돌고 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지. 하지만 정말로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일까? 혹 태양이 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들이 역마차를 타고 있다고 가정해보자. 가끔씩 창밖을 쳐다보며 마차를 타고 가다 보면 근처 교회의 뾰족탑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이 뾰족탑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지로 이 뾰족탑은 움직이지 않고 그냥 서 있을 뿐이지. 움직이는 것은 역마차야. 마찬가지로 실제로는 태양이 가만히 있고 지구가 움직이는 데도 태양이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도 몰라. 사실은 태양도 저 건너 교회의 뾰족탑처럼 움직이지 않고 있을지도 몰라. 그러고 보니 태양이 가만히 있고 지구가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천체의 운동이 아주 단순하게 정리될 수 있겠군. 그래, 움직이고 있는 것은 지구야, 틀림없어!"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운동에 대해 생각을 하면 할수록, 지구가 움직인다는 설명이 훨씬 이치에 합당한 것처럼 생각되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면 밤과 낮에 대한 설명이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다. 지구는 물레의 꼭대기처럼 하루에 한 번 회전하는데, 그 한쪽 면이 태양을 보다가, 다음 번에는 반대쪽 면이 태양을 보게 된다. 16세기에는 열정만 갖고 있다면, 이런 혁명적인 생각을 감히 입밖에 내서 주장을 펼칠 수도 있었다. 코페르니쿠스는 그렇게 했고, 천문학자들은 그에게 무섭게 따지고 들었다. "코페르니쿠스, 자네는 정말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를 하고 있군. 만일 지구가 자네가 말하는 것처럼 24시간에 한 번씩 회전한다면, 지구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돌고 있다는 말이네. 자네, 그런 무서운 회전 운동을 느낄 수 있는가? 또 한가지, 그렇게 빠른 속도로 지구가 회전한다면, 지구에는 끊임없이 무서운 바람이 휘몰아칠 것이네. 그렇다면 바람을 안고 쏜 화살은 사수한테 되돌아올 것이고, 새들은 자기 집에 돌아가지도 못할 걸세."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물론, 여러분도 저도 지구가 움직이는 것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공기가 지구를 껴안고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지요." 다시 천문학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구가 그렇게 빨리 움직인다면 지구는 금방 저 멀리 나가떨어질 거야." 코페르니쿠스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받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군요! 지구가 저 멀리 나가떨어지는 것만 걱정하시다니요! 그러나 여러분은, 태양이 지구 둘레를 24시간 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태양은 정말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지만 태양은 산산조각 나지 않습니다. 태양은 저 멀리 나가떨어져 산산조각 나지 않고 있는데, 어째서 지구만 저 멀리 날아가야 하는 건가요?" 코페르니쿠스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시 한 번 놀라운 주장을 펼쳤다. "세상은 나를 비웃고 있지요. 나를 가리켜 천문학자가 아니라 동화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구가 하나의 운동이 아니라 두 가지 운동을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구는, 그저 지축 주위를 회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태양 주위를 수백만 킬로미터나 날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는 원을 그리며 태양 주위를 1년에 한 번식 회전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타르코스의 이야기가 맞았던 것입니다! 지구는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 다른 행성과 똑같은 행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소." 천문학자들은 자신만만한 얼굴이 되었다. "만약 지구가 정말 수백만 킬로미터나 움직인다면, 별들은 1년 동안 우리에게 계속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요, 안 그렇소? 자, 그러면 이제 큰곰자리나 다른 별자리를 조사해 보시오. 그것들은 1년 동안 변화가 없잖소, 그렇지 않소?" 코페르니쿠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별이 우리 눈앞의 숲이나 건물처럼 지구와 가까운 곳에 있다면 별의 모습도 계속 변화할 거입니다. 그러나 별은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거의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도는 광대한 우주 공간과 비교한다며, 마치 태산의 모래 한 알과 같은 것입니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자들을 납득시키려고 한 것은 결국 실패로 끝났다. 그들은 스스로 가르쳐 왔고 믿어 왔던 여러 가지 사상과 반대되는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에 커다란 충격을 받고 동요했다. 그들의 눈에 코페르니쿠스의 도전은 과학과 건전한 상식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종교에 대해서까지 공격하는 것으로 보였다. 신교(프로테스탄티즘)의 창시자인 M.루터는 이렇게 비난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도전하려는가? 성서에서는 , 움직이고 있는 것은 태양이라고 말하고 있잖은가? 저 바보는 천문학 전체를 뒤엎으려 하고 있어!" 코페르니쿠스는 끝없는 비판과 조소로 낙담했다. 그는 결국 자기 자신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는 겸손한 성직자였다. 그는 현인들이 1000여 년 이상 고수해온 견해를 의심하는 것이 정말 올바른 일인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수년이 흘렀다. 그가 천체에 대해 제시한 새로운 이론을 책으로 출판하려고 한 일은 자꾸만 늦어지고 있었다. 1543년이 되어 마침내 출판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결국 그는 죽음에 임박해서, 일생에 거친 연구가 인쇄되어 책으로 나온 것을 보게 된 것이다. 루터가 신에 도전한다고 표현한 것은 참으로 정확한 것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마침내 고대로부터 천문학을 뒤엎어 버렸다.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그의 통찰은 우주 공간을 근대적으로 설계하려고 하는 천문학자들을 든든히 뒷받침해 주었다. 코페르니쿠스는 천문학의 체계를 파괴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낸 것이다. 그의 사상의 중요성은 기존의 낡은 생각을 철저히 파괴한 데 있다. 중세 사람들은 스스로를 우주의 중심에 있는 정통적인 부동의 왕자에 앉혀 놓고 있었다. 그들은 그 주의에 있는 행성들과 별, 그리고 든든한 태양까지 거느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을 존경하는 모든 것을 자기 앞에 꿇어 엎드리게 했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는 높이 우뚝 솟은 그 왕좌로부터 인간들을 끌어내렸던 것이다. 그는 인류 자신을, 측량할 수 없는 거대한 우주 안에서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먼지와 티끌 속으로 던져 넣었다. 이 방대하고 고독한 공간의 도표를 만드는 일은, 코페르니쿠스를 잇는 천문학자들의 일이 될 것이다. 천구, 혜성, 항성 코페르니쿠스가 해결하지 못한 하나의 의문이 있었다. '행성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프톨레마이오스는 그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대답하고 있다. "천구가 모든 행성을 움직이는 것이다. 천구들은 행성을 운반하면서 지구 주위를 영원히 돌고 있다." 당시에는 하늘의 별들이 밤사이에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모두, 회전하고 있는 둥근 공 모양의 수십 겹으로 된 천구의 작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들 천구가 천공을 채우고 있다고 하더라도, 각각의 천구 저편에 다시 별이 보이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일까? 여기에서 프톨레마이오스는 다시 간략하게 대답한다. "천구들은 유리처럼 투명한 것이다." 천구라는 관념을 영원히 파기한 사람은 덴마크의 티코 브라헤였다. 덴마크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외딴 섬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는 우라니볼리(우라니볼리는 지구를 담당하는 신인 에아의 남편으로 천공을 담당하는 '남신 우라노스의 성'이라는 의미)라고 불리는 장대한 천문대가 서 있었다. 그곳에서 티코는 제왕처럼 살고 있었다. 그의 왕국은 우주 공간이었고, 그의 신하는 별들이었다. 그는 언제나 천문대 지붕에 열린 구멍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독특한 개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인물로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결투로 코를 크게 다쳤기 때문에 금과 은으로 만든 인공코를 붙이고 있었다. 티코는 괴짜였지만 위대한 천문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천체 측량은 망원경이 아직 발명되지 않아 육안에만 의지한 것이었지만, 놀라울 정도로 정확했다. 그가 별과 혜성의 위치를 정하는 데 쓴 주된 기구는, 직경 약 10m의 울퉁불퉁한 사분의(원주의 4분의 1이 눈금이 있는 부채꼴의 천체 관측기)였다. 그는 단순한 관측에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고, 각 행성의 진로, 즉 궤도를 추적했다. 그는 여러 번에 걸쳐 측량하고 나서 착오를 없애기 위해 여러 관찰 결과의 평균치를 냈다. 티코도 그 시대 대부분의 천문학자와 마찬가지로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티코는 책상에 앉아 최근에 나타났던 혜성의 진로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그 작업을 중단했다. 혜성의 진로가 태양을 비껴 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러기 위해서, 혜성은 행성과 태양을 각각 운반하고 있는 투명한 여러 겹의 천구를 슬슬 거침없이 빠져나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다시 계산해 보았다.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의 도표에 의하면 혜성의 궤도는 틀림없이 모든 천구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혜성은 80개의 천구라는 장벽을 부술 수 있는 신비한 존재라고 단순히 믿어버리지 않는 한, 이제 남은 것은 단 하나의 결론, 바로 천구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결론밖에 없었다. 천구는 분명히 일각수나 인어와 같이 허황된 발명품에 불과한 것이다! 1577년에 있었던 커다란 혜성의 출현은, 브라헤의 뇌리에서 천구라는 허구적인 존재를 영원히 파괴해버린 것이다. 티코는 자신의 성, 우라니볼리에서의 관측 생활로 되돌아갔다. 밤이 되면 그는 가장 마음에 드는 행성인 수성을 응시했고, 1년간에 걸쳐 진로의 변화를 써두었던 천체도 그의 테이블에 산처럼 높이 쌓여 있었다. 그것은 고독한 작업이었고,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그는 중얼거렸다. "나는 정말로 정직해야 한다. 좋다. 천구가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폴란드 사람들이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코페르니쿠스의 속임수를 믿고 있다 해도, 나는 그런 어리석은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부동의 지구라는 설명이 아리스토텔리스와 프톨레마이오스에게 충분한 것이었다면, 이 노구의 티코 브라헤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후, 어느 맑게 갠 11월의 밤. 그가 고집하고 있던 고대 천문학의 신념을 뒤흔든 제2의 경험이 찾아왔다. 천공의 일부인 카시오페이아자리에서, 그는 갑자기 타오르는 불꽃을 본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의 별이 남아 있었다. 그곳은 단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칠흑의 빈 공간이 아니었던가! "불가능한 일이야. 믿을 수 없어! 그래, 나는 원래부터 이곳에 있던 별을 조금 전까지도 못 보고 있었던 거야." 그는 자신의 도표를 조사했다. 하지만 잘못은 없었다. 그 자리에는 어떤 별도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는 다시 중얼거렸다. "아니, 새로운 별이 나타난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야. 신께서는 영원히 존재하는 천공을 창조하셨다. 그것은 완전하고 불변하는 것이다. 모든 별, 그 마지막 하나의 별까지도 언제나 하늘에 있었다.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새로 태어나지도 않으며 죽을 수도 없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분명 새로운 별이 있었던 것이다. 티코는 자기 눈으로 본 것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는 망설이면서 이 신성을 그의 천체도에 써넣었다. 2년 동안 그는 이 별을 놀라움과 두려움을 안고 바라보았다. 때때로 그 별은 반짝반짝 빛을 내서 낮에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제2의 기적이 일어났다. 그 신성은 점차 어두워지면서 가물가물해지더니 이윽고 사라져 버렸다. 그 별은 다시 없었던 것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차가운 공허가 다시 찾아왔다. 티코의 시대 이래 천문학자들은, 이런 몇 개의 초신성(급속히 변하는 변광성)이나 신성을 발견해왔다. 이 별들은 칠흑의 하늘에서 갑자기 빛을 발하기 시작하다가 서서히 퇴색되어 사멸해 버린다. 당시의 천공은 고대의 천문학자가 주장하고 있었던 것처럼 완전하고 안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별들은 새롭게 태어날 수도, 그리고 죽을 수도 있었다. 티코는 그의 생애에서, 중세 천문학의 기본적인 두 가지 사고(천구의 존재와 천공의 불변)가 소멸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모든 생활을 별에 바친 숙련된 천문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티코는 만년에 천문학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는 일을 했다. 그는 죽기 1년 전인 1600년, 화성에 관한 무수한 천문도를 J.케플러라는 젊은 조수에게 넘겨주면서, 조용히 자신을 위로하듯이 중얼거렸다. "이것을 맡아 주게. 이것으로 자네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검토해 보게. 나는 일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아. 나는 이제 지쳤어. 내 생활은 우라니볼리에서 있었던 젊은 시절과는 달라져 버렸더. 그 시절에는 왕자와 같은 생활을 했고, 내가 있었던 천문대는 세계 제일이었지! 덴마크 왕은 나를 위해 그것을 세워주셨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변하고 있네. 나의 젊은 시절에는 사랑을 바칠 수 있는 친구가 있었고, 천공은 변함없이 완벽하고 아름다웠어. 자네는 내가 그때 어떤 입장에 있었는지 알고 있지. 당시 폴란드에는 코페르니쿠스라는 천문학자가 있었다네. 한데 그는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했지. 나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해 주었지. 그러나 참으로 다행인 것은, 그가 지동설을 발표한 것은 병상에서 임종을 맡고 있을 때였다는 거야."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다노 브루노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에 찬성했기 때문에, 로마 교회의 추궁을 피하려고 유럽 각지를 전전하면서 도망 다녔으나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6년간 지붕 밑 다락방에 감금되었고 마침내는 화형 당했다. 그는 처형되기 전에 종교 재판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재판 받는 나보다 재판하는 여러분들이 더 겁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티코는 다시 케플러에게 경고했다. "그런데 케플러, 코페르니쿠스나 풍문에 들리는 브루너처럼 새롭게 유행하는 사상에 물들면 안 되네. 그런 사상에 물들면, 자네도 그 때문에 마법에 걸린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이제 여기 많은 천체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여기에는 자네의 삶이 있는 거야." 원과 타원 젊은 케플러는 스승 티코 브라헤가 준 많은 천체도를 받았을 때, 이들 천체도가 언젠가는 자신을 마녀 사냥의 시련으로 몰고 갈 것임을 짐작조차 못 했다. 그러나 1601년, 과거의 낡은 사상(지구 중심설 혹은 천동설)은 이 젊은 천문학자의 마음으로부터 서서히 해체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우주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의 사고 방식에 대해서도 차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케플러는 브라헤가 죽은 후 얼마 동안은 브라헤와는 달리 천동설이나 지동설 중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할지 확실한 신념을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신중했다. "만일 어느 것이 옳고 그른지를 시험할 방법이 발견되기만 한다면, 그 중 어느 쪽이든 하나의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라고 판명될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멋진 착상이 케플러에게 떠올랐다. 그리고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그래 ,나는 존경하는 브라헤 선생님의 천체도를 사용하겠다! 코페르니쿠스는 모든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했어. 만일 코페르니쿠스의 생각이 옳다면 브라헤 선생님의 도표도 이런 화성의 궤도를 보여줄 거야." 케플러는 5년간이나 이 문제를 놓고 브라헤의 천체도와 씨름했다. 그리고 마침내 코페르니쿠스가 옳았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화성과 우리 지구를 포함하는 모든 행성들은 태양 주위를 돌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브라헤의 천체도가 완전히 정확하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존경해 마지않는 브라헤 선생이 실수를 한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브라헤 선생은 생애를 두고 단 하나의 실수도 없었다. 케플러는 몇 번이고 태양 주위의 화성의 궤도를 그렸다. "아, 만약 화성이 천공을 가로지를 때, 완전한 원을 그리지만 않는다면 브라헤 선생의 도표는 모두 완벽하게 들어맞는다. 모든 행성은 완전한 원운동을 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은 것일까?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두 완벽한 원 궤도를 이야기했다. 그렇지만 잠깐! 그들의 이야기를 믿어야만 하는 것일까? 프톨레마이오스도 아리스토텔레스도 틀렸을지 모른다. 아니, 그들은 분명 실수를 범했어! 화성은 원 궤도를 그리며 도는 것이 아니야." 케플러는 다시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태양 주위에 잇는 화성의 원 궤도를 그리고, 그 궤도의 위쪽과 아래쪽을 조금 늘려 봐야지. 그래, 이제 타원형이 만들어졌어. 자, 다시 한 번 브라헤 선생님의 계산으로 넘어가 보자. 그래, 선생님의 계산은 정확하다.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있어. 화성은 원운동이 아니라 타원 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야!" 화성의 궤도에 관한 코페르니쿠스의 계산과 브라헤의 계산에는 8분의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이 8분이 케플러에게 행성의 타원 궤도를 시사해 준 것이었다. "나는 5년간이나 잘못된 생각에 빠져 있었다. 출발점에서부터 나 자신의 판단과 관측에 의지할 생각은 않고, 증명되지도 않은 다른 사람의 말에만 기대어 주장해 왔기 때문이야. 이네 나는 과거의 선생들에게 무조건 굴복하지 않겠다. 내가 무릎을 꿇는 것은 진리 앞에서일 뿐.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겠다." 코페르니쿠스와 그보다 훨씬 옛날 사람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행성은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케플러는 행성이 어떤 궤도를 따라 운동하고 있는가를 계산해 낸 최초의 천문학자였다. 그의 행성 운동에 관한 최초의 법칙은 '모든 행성은 타원을 그리며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제1법칙)는 것이다. (1609년) 그러나 케플러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이라는 조각 그림 중의 어느 부분이 아직 제대로 맞춰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는 묘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는 불확신에 빠질 때면 늘 그러듯이, 티코 브라헤의 천체도로 다시 돌아가 보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행성이 일정한 속도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화성의 운동에 대해 계산한 것을 보면 새로운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화성은 같은 속도로 진행하고 있지 않았다. 때로는 더 빠른 속도를 냈고 때로는 속도를 늦추었다. 천체가 이런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대체 어느 누가 예상할 수 있었으랴? 케플러는 행성 운동에 관한 또 하나의 법칙을 완성했다. 그것은 어느 행성이 태양에 가까워지면 속도를 증가시킨다는 것이다. 그는 면적 속도를 정해서 '행성과 태양을 잇는 선분은 동일한 시간에 동일 면적을 그리면서 움직인다'(제2법칙)고 말했다. (1609년) 그는 이어서 1619년에, 행성이 태양 주위를 회전하는 시간과 태양으로부터의 거리와의 관계를 발견했는데, '각 행성의 공전 주기의 제곱은 태양으로부터 평균 거리의 세제곱과 비례한다.'(제3법칙)는 것이었다. "그런데 행성이 이 세 가지 운동 법칙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케플러도 이 질문에 대해서는 정확한 해답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 해답은, 케플러가 죽은 후 12년이 지난 뒤에 태어난 위대한 과학자 I.뉴턴의 짐으로 남겨졌다. 케플러는 천체 운동이 수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였다. 마침내 천문학자들은 100년이나 1000년 후의 행성 운행을 예측할 수 있게 되었다. 또 이들 법칙은 사람들에게 하늘까지 미칠 수 있는 힘을 주었다. 행성을 지배하는 이런 법칙은, 오늘날 과학자들이 우주 궤도에 인공위성을 쏘아 올리는 일에도 도움이 되고 있다. 케플러의 시대가 오기까지, 천문학은 과거의 생각과 연결되어 있었다. 위대한 코페르니쿠스조차, 행성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대로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러나 케플러는, 지상에 있으면서 마치 천상에서 이곳 저곳을 보고 있는 것처럼, 새로운 방법으로 자연을 관찰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는 또 자신의 법칙을 통하여 천문학을 신화와 공상의 천문학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런 케플러에게 불길한 사건이 닥쳐왔다. 그의 어머니가 당시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있었던 마녀 재판에 걸려든 것이다. 그리고 어머니를 고문과 화형으로부터 구해낸 사람은 케플러 오직 단 한 사람뿐이었다. 마녀 사냥과 과학자 케플러가 "꿈"이라는 과학 소설을 썼을 때, 골치 아픈 문제가 발생했다. 행성 운동의 세 가지 법칙은 그에게는 모두 명백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그것을 다른 사람들, 그의 어머니 카테리나가 살고 있었던 보헤미아의 레온벨크 지방의 주민들에게조차 분명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일까? 그는 마치 훌륭한 교육자처럼 자문해 보았다. '제일 먼저 사람들이 이해해야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 그것은 지구도 다른 행성과 마찬가지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는 것이야! 하지만 그들이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을 비난할 수는 없지. 지구는 확고부동하고 안정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니 말이야.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지? 그래 누구든 달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 그러면 우리가 달로 여행을 떠났다고 상상해 보자. 그것에서 지구를 보면, 아치 지구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일 거야. 이 이야기를 즐거운 동화처럼 꾸며봐야겠다. 그 이야기 속에 누가 읽어도 재미있고 유익한 과학 지식을 넣어 보자. 그 책에 "꿈"이라는 제목을 붙여야지. 동화 속에서 어머니가 아름다운 요정으로 나와,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거야.' 그러나 이 순간부터, 그의 순진한 어머니 카테리나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16,17세기는 마녀 사냥의 시대였다. 그것은 유럽에 유행병처럼 퍼진 일종의 광기였다. 그 광기는 유럽뿐 아니라 미국에까지 번져, 1697년까지도 매사추세츠의 셀렘에서는 사람들이 혹독한 고문을 당하기도 하고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마녀 사냥은 특히 무서운 돌림병이 돌거나 흉년으로 사람들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일 때, 그리고 전쟁과 같은 가혹한 시련의 시대에 성행했다.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마녀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노인, 그리고 병자들에게 재난을 불러왔다면서 죄 없는 여성을 비난했다. 어떤 농부가 기르고 있던 젖소가 우유를 만들어내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농부는 마구 소리를 질러댔다. "내 젖소는 마법에 걸린 거야. 누가 그런 짓을 했는지 난 다 알아. 분명 저 아래쪽에 살면서 언제나 가르랑거리고 투덜대기만 하는 저 과부 노파야." 그러면 그 노파는 아주 간단한 절차를 밟아 심리되고 판결을 받는다. 그리고 무서운 방법으로 처형되는 것이다. 그래도 젖소는 우유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러면 당황한 농부는 다시 다른 마녀를 조작해서 공격의 화살을 그 여자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마녀를 찾아내는 사람들은 종교 재판관이었다. 종교 재판관이 마을에 들어오면, 마을에서는 즉각 혐의가 있는 사람의 이름을 모두 조사해 올렸다. 만약 본인이 마녀라는 것을 부정하며, 어떤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매우 끔찍한 고문을 받는다. 이어서 보통은 화형 선고를 받고 살해되는 것이다. 로렌의 니콜라 루미라는 이름의 마녀 사냥꾼은 1년간 9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심리하여 사형에 처했다. 이보다 더 무서운 기록을 가진 종교 재판관도 있었다고 한다. 루미는 언젠가 타오르는 불길로부터 도망치는 몇몇 아이들을 놓치고는 이렇게 공포에 떨었다고 한다. "자네들이라면 새끼뱀이라고 해서 살려주겠나?" 종교 재판관은 자기들이 인류의 삶을 위해 아주 훌륭한 봉사를 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리는 인류를 악마의 손길로부터 구원하고 있다." 레온벨크에서는 마녀에 대한 두려움이 도처에 퍼져 있었다. 전에는 6명의 여자가 마녀로 몰려 1년 사이에 모두 화형 당하기도 했었다. 케플러의 새로운 책에 대한 소문이 금세 마을에 퍼졌다. 근거없는 험담이 이발소 같은 곳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이발사는 박식한 체하는 얼굴로 말했다. "당신들, 그 새로운 책에 대해 들어보았는지 모르겠어. 거기에는 말이야, 과학자들이 하늘과 땅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써 있다는구먼. 저 패거리들은 행성의 궤도를 예측할 수도 있다고 한다는 말씀이야. 게다가 이 케플러라는 남자는 자기가 달까지 날아갈 수도 있다고 했다더군. 그 남자가 어떻게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겠나? 그 사람 모친이 이길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이상한 노파 카테리나라더군." 어떤 교사가 말을 받았다. "아아, 그래. 이제야 내가 왜 우환을 당했는지 알겠군. 그 노파가 언젠가, 오래된 주석으로 만든 컵으로 물을 한 잔 따라준 적이 있었어. 그것 때문에 내 발이 이렇게 뒤틀려 버린 거야." 이렇듯 카테리나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푸줏간 집 부인은, 카테리나가 상점 앞을 지날 때 자기 남편이 어깨에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고 투덜거렸다. 카테리나에게 욕을 해댄 양복장이는, 자신의 두 아이가 죽은 일에 대해 의심을 품게 되었다. 카테리나가 집 안에 들어와서 그 두 아이가 죽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열 서너 살 먹은 아이들은 이 노파가 건물 벽을 뚫고 곧장 걸어나갔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마녀 사냥꾼에게는 더 이상 다른 증거가 필요 없었다. 1620년 8월 7일, 당시 74세였던 카테리나 케플러는 체포되어 결박을 당한 채 차가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멀리 떨어진 프라하에서 궁정 수학자로 일하던 케플러는, 이 무서운 소식을 듣고 곧 레온벨크로 날 듯이 달려갔다. 그가 도착해서 보니 마을에서 일반적인 상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 즉 시장과 시의원, 소매 상인이나 의사까지도 자신의 어머니가 유죄라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케플러의 가족 중에도 그녀가 마녀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다. 케플러의 어머니를 변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케플러를 제외하고는. 그는 두려움없이 목청을 돋워, 고대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권위에 대해서, 그리고 마녀 사냥에 대해 반대했다. 그는 서둘어 마치 과학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은 방법으로 그의 어머니에게 일어났다는 여러 사실들을 점검해 보았다. 물론 어머니의 혐의는 어처구니없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교사의 발은, 그 교사가 도랑을 뛰어넘으려다 잘못 디디는 바람에 불구가 된 것이었다. 푸줏간 주인이 느낀 어깨 통증은 소년 시절부터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양복집 아이들 역시 카테리나가 그 양복점을 찾아가기 이전부터 중병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케플러의 조사는 마녀 사냥꾼들을 납득시킬 수 없었다. 만약 케플러가 증거 수집을 계속한다면 피해자들이 가졌던 의심이 모두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녀 사냥꾼들은 서둘러 카테리나에게 자신이 마녀라는 것을 자백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그녀의 정신을 꺾을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굳건한 정신력을 지닌 노부인은 울부짖으며 자신이 마녀라는 이야기를 부인했다. 마침내 14개월 후, 마녀 사냥꾼들은 체념하고 말았다. 카테리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레온벨크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두 번 다시 고향을 찾지 않았다. 그 사건은 케플러에게는 가슴이 얼어붙을 정도로 무서운 경험이었다. 어머니를 석방시켜 안도감을 느꼈지만, 그때 경험한 두려움으로부터는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마녀 사냥꾼들의 손가락이 그를 직접 손가락질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과학과 미신의 투쟁에서 많은 과학자들이 생명을 빼앗기는 운명에 처해졌다. 진실인가? 케플러 같은 과학자들은 관측을 통해서 자연을 탐구했다. 그러나 실험을 통해 가치 있는 발견을 한 과학자들도 있었다. 어떤 과학자들은 실험을 할 때, 자기 실험실에 자연의 일부를 끌어들였다. 그들은 스스로 조작할 수 있는 사물을 다루었고, 따라서 실험이 이루어지는 조건을 관리할 수 있었다. 실험을 좋아한 S.스테빈이라는 네덜란드의 군사 기술자가 있었다. 1586년 어느날, 그는 납으로 만든 2개의 공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 하나는 다른 것에 비해서 10배 나 무거웠는데, 그는 건물의 높은 창에서 이 두 공을 떨어뜨리려고 했다. 친구인 J.콜네트가 물었다. "자네, 무슨 일을 하려는 건가?" "이 2개의 공을 동시에 높은 곳에서 떨어뜨리면 동시에 땅에 도달하게 될까?" 그러자 스테빈이 반문했다. "물론 그럴 리가 없지." 친구는 잠시 후 덧붙여 말했다. "무거운 쪽이 땅에 먼저 도달하게 된다네. 이 경우에는 10배 무거운 공이 10배 빨리 땅에 도달할 걸세." "어째서 그럴 거라고 생각하나?" 스테빈이 다시 묻자 콜네트가 대답했다. "물체는 무게가 무거울수록 더 빨리 떨어진다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우리 한 번 실험을 해보지 않겠나? 그리고 그 결과를 확인해 보세. 자, 땅바닥에 판자를 깔자구. 그러면 공이 바닥에 동시에 도착하는지 어떤지를 소리로 알아낼 수 있을 테니 말이야." 스테빈이 말했다. 스테빈은 "자, 간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2개의 공을 동시에 떨어뜨렸다. 판자를 울린 것은 쿵! 하는 단 한 번의 소리뿐이었다. "참, 모를 일이군. 가벼운 공은 무거운 공보다 바닥에 도달하는 시간이 길게 마련인데, 무거운 공과 동시에 판자에 떨어지다니. 그렇다면 내가 한 번 해보지." 콜네트가 말했다. 그러나 콜네트가 몇 번이고 실험을 해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공의 무게가 아무리 달라도 모든 공은 같은 속도로 떨어졌다. 사람들이 지금까지 틀림없는 사실로 믿고 있었던 것이 간단한 실험을 통해서 옳지 않았음이 증명된 것이다. 스테빈은 단순히 '이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고의 본성을 파헤치는 특기를 갖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네. 좁은 우물 바닥에서 받는 압력과 거대한 호수의 같은 깊이에서 받는 압력의 크기가 똑같을까?"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그거야 뻔하지 않은가? 호수에 있는 그 많은 물의 양과 우물 안에 있는 얼마 안 되는 물의 양을 생각한다면 답은 간단히 나오지 않나? 당연히 호수 쪽의 압력이 크지." "과연 그럴까? 해답을 확인해서 의심을 풀어보지 않으려나?" "호수 밑바닥이나 우물 밑바닥의 수압을 어떻게 측량한다는 말인가?" 스테빈이 말했다. "자네가 말한 그대로야. 나도 호수 밑바닥과 우물 밑바닥의 수압을 실제로 측정할 수는 없다네. 하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의문을 풀어 줄 수 있는 실험이 내 실험실 안에서는 가능하다네." 그렇게 말하고 실험 기구로 눈길을 돌렸다. "자, 여기를 보게. 이 유리병에는 물을 가득 채우겠네. 그리고 눈금이 있는 천칭을 사용해서, 바닥에서 한 장의 원판을 들어올리는 데 필요한 힘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조사해 보겠네. 그리고 다음 번에는 다른 병에도 물을 채우자구. 이 조금 이상한 모양의 병 높이는 앞의 병과 정확하게 같아. 하지만 병 속에 들어 있는 물의 양은 앞의 병에 들어 있는 것보다 분명히 적지. 그렇지 않은가? 자, 이제 우리는 호수와 우물 바닥의 수압이 같을까 다를까 하는 것을, 이 두 병의 바닥에서 원판을 들어올릴 때 드는 힘이 서로 같은가 다른가를 보고 정확히 판단할 수 있을 걸세. 결과가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지 정말 궁금하군." 그러자 친구가 말했다. "실험해보고 말고 할 것도 없네. 하지만 자네가 정 그러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보세. 하지만 결과는 분명 다르게 나타날 걸세. 이상한 모양의 병 쪽이 훨씬 작은 힘으로 원판을 들어올릴 수 있을 거야. 두 번째 병에 들어 있는 물의 양이 훨씬 더 적지 않나?" "좋아, 그럼 확인해보세." 스테빈을 실험을 해보았다. 그의 친구는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양쪽의 병은 들어올리는 데 정확히 똑같은 힘이 필요했던 것이다! 두 번째 병의 물은 첫 번째 병의 물과 똑같은 무게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스테빈은 이 실험을 통해서, 액체가 용기 밑바닥에 가하는 압력은 단순히 액체의 높이에만 비례하며 액체의 총량에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유리병에서도, 우물에서도, 넓은 호수에서도 물의 압력은 항상 물의 깊이와 비례하는 것이다. 스테빈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이 실험을 직접 해보기 전에는 당연히 물의 총량이 바닥의 압력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러나 과학자는 당연히 이럴 것이다, 하는 사고 방식을 버려야만 해. 과학자에게는 정확한 실험이 요구되지. 정밀한 실험을 통해서, 진실이라고 믿고 있는 것도 사실은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는 것이야." 스테빈이 병에 있는 소량의 물로 했던 실험은, 과학자들이 깊은 바닷물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후, 갈릴레이와 뉴턴의 실험실에서의 실험은 아득히 먼 곳에 떨어져 있는 별에 대한 몇몇 가지 법칙을 발견하도록 인도했던 것이다. 제 5장 17세기, 법칙이 우주를 지배하다. 진실한 승자는 누구? 우주에는 휴식이 없다 밀랍으로 만든 공 갈릴레이의 망원경 하늘을 향한 최초의 관측 그래도 지구는 돈다 프리즘과 무지개 사과가 떨어지다 사자는 발톱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우주를 측량하는 척도 심장은 펌프다 알려지지 않은 학회 현미경을 들여다보다 낙숫물 안의 세계 진실한 승자는 누구? 17세기는 가슴아픈 사건으로 막이 올랐다. 1600년 2월 17일, 어떤 사나이가 감옥으로부터 로마의 광장으로 끌려나와 사형대의 기둥에 묶인 뒤 화형을 당했다. 그는 이탈리아의 베네치아 근처에서 태어난 하급 성직자, 조르다노 브루노였다. 어떤 죄를 저질러 이토록 비참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일까? 놀랍게도 그의 죄는 코페르니쿠스의 세계관(지동설)을 믿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주는 무한하다. 우리의 태양과 비슷한 많은 숫자의 항성이 있고, 우리 지구와 같은 다른 행성들이 수많은 항성의 주위를 돌고 있다. 우주에는 중심이 없다. 우리 지구는 다른 모든 행성과 마찬가지로 이미 우주의 중심이 아니다." 브루노의 견해를 들어보면 그보다 2000년 전에 살았단 그리스의 아낙사고라스의 견해가 생각난다. 이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가 품었던 생각이 16, 17세기의 과학자의 사상과 놀랄 만큼 일치하는 것이다. 브루노는 7년간 투옥된 후 심리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종교 재판소는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제 너를 처벌하노니, 단 너의 피는 한 방울도 흘리지 않을 것이다." 이는 화형에 처한다는 뜻이다. 발 밑에서 불길이 피어오르기 시작하자 브루노는 고발자들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벌을 내리는 그대들이 형벌을 당하는 나보다도 더욱 두려움에 떨고 있을 것이다." 브루노의 표현은 정확했다. 권력자들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섬뜩해졌다. 그들은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성장해서, 마침내 중세의 사상을 파괴시킬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브루노의 죽음을 통해 권력자들은 유럽의 과학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하려 했던 것이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에서 끌어내려는 무리들에게 충고하노라. 이단자 조르다노 브루노의 최후를 생각하라!" 그러나 그들은 전혀 승산 없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새로운 세기가 열리면서 시계를 거꾸로 돌리기에는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브루노가 죽은 바로 그 해,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시의인 윌리엄 길버트는 한 권의 책을 썼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브루노의 말을 다시 반복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 한 사람으로 꼽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같은 우주에 대한 지식의 기초를 열심히 구축하고 있었다. 우주에는 휴식이 없다 갈릴레이는 1564년에 이탈리아의 피사에서 태어났다.(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가 태어난 해였다.) 그는 의학 연구를 위해 피사의 대학에 입학하였지만, 자신의 수업에는 출석하지 않고 그 시간을 수학 강의실 문 뒤에서 보냈다. 어느 날 기하학에 대한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된 그는 자신의 일생을 과학에 바치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스물 다섯 살에 이미 대학의 수학 교수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피사의 대성당에서 설교를 듣고 있던 그는 천장에 매달려 있던 샹들리에가 창 밖에서 불어온 바람 때문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바람이 약해지자 그 흔들림은 점차 잦아졌다. 그는 샹들리에가 흔들리는 폭과 흔들리는 데 걸리는 시간과의 관계를 알아보고 싶어졌다. 그는 시계 대신 손목이 맥박으로 샹들리에가 움직이는 시간을 재보았다. 그가 예상했던 대로 흔들리는데 걸리는 시간은 동일했다. 갈릴레이는 이렇게 해서 흔들이(진자)의 법칙을 발견했다. 그 뒤, 그는 실험실에서의 실험을 통해 다른 법칙도 알아냈다. 그것은 흔들이 끝에 매달려 있는 추의 무게는, 흔들이의 길이가 일정하다면 흔들리는 시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대포 탄환의 무게를 가진 것이나 마스켓 총의 작은 총알 정도의 무게를 가진 것이나, 흔들이의 길이만 같다면 모두 똑같은 속도로 흔들린다는 것이다. 갈릴레이는 생각을 진전시켜 나갔다. "무게가 다른 흔들이가 같은 속도로 흔들린다면, 낙하할 때도 같은 속도로 떨어질까?" 갈릴레이는 스테빈의 낙하 실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대학의 동료 교수들도 또한 모르고 있었다. "아니, 갈릴레오. 자네도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미 이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무게가 다르면 떨어지는 속도도 분명 다르다네." 갈릴레이는 불만이라는 듯이 말했다. "여러분은 아리스토텔레스라는 영험 있는 이름 하나로 모든 것을 해결하시는군요.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달걀을 투석기에 걸고 빙빙 돌리면 삶은 달걀을 만들 수 있다고 가르친다면, 여러분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렇게 말했다는 이유 하나로 그것을 믿으시렵니까? 아니면 실험을 통해 그런 구식 요리법이 맞는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저는 진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눈과 귀에 의지해야 한다고 가슴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훌륭한 실험 하나는 수천 명의 아리스토텔레스를 당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빠른 소리를 하다가 언젠가는 파멸의 구렁텅이에 빠지고 말 걸세." 동료 교수들은 중얼거렸다. 그때 갈릴레이는 피사의 대성당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유명한 피사의 사탑 꼭대기에 올라가, 거대한 대포알과 작은 마스켓 총의 총알을 떨어뜨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결과는 그가 기대했던 대로 두 물체가 동시에 지상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것을 본 교수들은 놀라고 말았다. 그들은 자신이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어떤 속임수가 있었을 거야.' 이렇게 생각한 그들은 도서관으로 다시 돌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씩씩거렸다. "그래, 우리가 맞아.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고 말했어. 그러니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불만스러운 얼굴로 이렇게 덧붙였다. "그래, 탄환이 너무 빨리 낙하해서 제대로 보기도 전에 상황이 끝나 버렸던 거야." 그 이야기를 들은 갈릴레이는 다시 물었다. "만일 제가 탄환을 천천히 떨어뜨린다면 여러분께서는 두 눈으로 본 것을 믿으시렵니까?" "탄환을 천천히 떨어뜨리다니! 자네, 미쳤군!" 교수들은 소리를 질러댔다. 갈릴레이는 사탑의 실험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만족하지 않고 있었다. 실험에서 무게나 길이를 정확하게 잴 수 없는 한 결코 만족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매우 중요한 의문이 그의 마음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다. 피사의 사탑에서의 실험은 그 의문에 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의문이란 바로 '낙하하는 물체의 속도는 낙하하는 도중 언제나 같은 속도일까, 아니면 속도가 점차로 빨라지는 것일까?' 라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속도를 어떻게 측정할 것인가? 정확하고 정밀한 시계 같은 것은 아직 이 세상에 없다. 따라서 갈릴레이 스스로 제일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시간 측정기를 발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물이 들어 있는 보통 양동이의 바닥에 작은 구멍을 뚫어서 아주 가는 실날 같은 물이 흘러나오도록 했습니다. 흘러나온 물을 컵 안에 들어가게 하고, 거기에 고인 물을 가끔씩 측량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해서 물시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놋쇠로 만든 공을 천천히 떨어지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을 경사지고 매끈매끈한 판 위에서 굴리면 될 것입니다. 나는 길이 약 10m의 나무판에 매끈매끈한 홈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끝을 지상에서 30cm정도 올렸습니다. 이 경사진 판의 홈에 먼저 무거운 청동구를 굴리고, 이어서 가벼운 청동구를 굴려보았습니다. 이 2개의 공이 구른 시간을 물시계로 재어보니 정확히 같았습니다. 공의 무게는 낙하 속도에 아무런 영양을 주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다음, 공 하나를 판에 있는 홈의 4분의 1만을 구르고 멈추게 해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시간은 끝까지 구르는 시간의 2분의 1이나 되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낙하 속도는 더욱 빨라졌던 것입니다.(낙하 시간이 1 대 2일 때 거리는 1 대 4로, 거리는 시간의 제곱에 비례한다) 나는 판의 한쪽 끝을 지상으로부터 차츰 높이 세워가다가 마지막에는 지상에 수직이 되도록 세워서 실험을 반복해보았습니다. 몇 번이고 반복해도 마치 어떤 법칙이라도 되는 듯, 결과는 전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낙하하는 물체는 낙하 거리가 길면 길수록 속도가 빨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갈릴레이는 이 실험을 통해 그의 최대의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 어떤 물체든 그것이 낙하하는 속도는 그 물체의 모양, 크기, 색깔, 재료, 그리고 무게와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속도는 오직 한 가지, 낙하하는 시간의 길이에 대해서만 관계가 있었다. 이것은 만약 공기의 저항을 제거한다면, 깃털이나 100kg의 철구나 동시에 같은 속도로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진공 상태에서는 모든 물체가 동시에 낙하한다는 의미이다. 갈릴레이는 위의 실험에서, 우리들이 대부분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도 유심히 생각해 보았다. 공은 판 아래를 지나 바닥에 떨어져도 얼마간은 구르기를 멈추지 않다가 서서히 정지했던 것이다. '어째서 곧바로 정지하지 않는 것일까?' 갈릴레이는 자문해 보았다. '그리고 어째서 결국은 멈추고 마는 것일까?' 통로에 벽이나 의자가 있고, 깔린 물건이 있고 공기 저항과 같은 것이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통로에 아무것도 없다고 가정해보자. 여기에서 갈릴레이는 기이하지만 훌륭한 결론을 내렸다. 통로에 공기를 비롯해서 아무것도 없다면 공은 영원히 계속 굴러갈 것이다! 갈릴레이 시대의 사람들은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없으면 어떤 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여전히 굳게 믿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짐 싣는 마차는 그것을 잡아당기는 말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고, 행성은 그것을 안고 돌려주는 천구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갈릴레이의 이야기를 듣고 당황했다. 그리고 화를 냈다. 이 기묘한 대학 교수는 세상을 뒤바꾸려 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움직이고 있는 물체는 자발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방해물이 없다면 그 물체는 영원히 움직인다고 주장한다. 갈릴레이의 움직이는 물체에 관한 실험은 과학사의 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 실험들은 자연에 관해 총체적으로 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정지하고 있는 세계, 움직이고 있는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에 의하면, 천계와 지상의 모든 것은 도중에 무엇인가가 개입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직선 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그의 실험은 별, 혜성, 행성, 그리고 우리 지구의 변함없는 운동을 설명해 주었다. 오늘날에는 지구의 영향권으로부터 벗어나 똑같은 실험이 행해지고 있다. 이것은 인공 위성이 언제나 지구 주의를 돌고 있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갈릴레이 이전에 소수의 과학자는 우주의 엄청난 크기에 새로이 눈을 뜨고 있었다. 그리고 갈릴레이는 그 우주에 휴식이 없다는 것에 최초로 주목한 사람이었다. 밀랍으로 만든 공 갈릴레이는 지금까지 공기 중에 있는 물체의 운동을 연구해 왔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호기심은 수중에 있는 물체의 운동으로 향하게 되었다. 어째서, 어떤 물체는 물에 뜨고 어떤 물체는 가라앉는 것일까? 갈릴레이보다 약 2000년 전, 아르키메데스는 왕관은 사용한 실험에서, 물체는 그 무게가 물보다 가벼울 때는 뜨고, 그 반대의 경우에는 가라앉는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르키메데스가 증명한 것은 잊어버리고 그 대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것을 믿고 있었다. "어떤 것이 뜨고 가라앉는 것은 그것의 모양에 달려 있을 뿐이다." 피사의 교수들은 갈릴레이에게 말했다. "자네는 이것을 보면 아리스토텔레스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네. 나뭇잎은 뜨지만 공은 가라앉지. 자네는 어째서 그런지 알고 싶겠지. 답은 간단하네. 나뭇잎은 잎의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고 공은 공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이야." 갈릴레이는 물었다. "좋습니다, 그러면 이 밀랍으로 만든 공은 어떻게 될까요? 뜰 거라고 생각되시나요, 아니면 이것 역시 가라앉을 거라고 생각되시나요?" 그들은 대답했다. "별것도 아닌 것을 갖고 웬 호들갑인가? 구형이니까 분명히 가라앉은 걸세." "좋습니다, 그러면 시험을 해보겠습니다." 갈릴레이는 이렇게 말하고는 밀랍으로 만든 공을 물동이 안에 떨어뜨렸다. 공은 아래쪽으로 가라앉았다. "그것 보게! 아리스토텔레스는 언제나 정확한 사실만을 얘기했네. 구형으로 생긴 것은 가라앉게 마련이야." 동료 교수들은 의기양양해서 말했다. "글쎄, 그럴까요?" 갈릴레이는 날카롭게 내쏘고는 소금을 얼마간 집어 넣었다. 그리고는 소금이 녹아 가는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자, 이제 잘들 보십시오." 공은 천천히 아래쪽에서 위로 떠올라 왔다. 그리고 마침내 수면까지 떠올랐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어떻습니까? 어디, 잘못된 부분이라도 있나요? 여러분은 이제 구형인데도 가라앉지 않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아셨을 것입니다." 교수들은 허둥지둥거렸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군.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그렇게 말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제발 이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잊어버리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머리를 쓰려고 노력하시라구요! 제가 물에 넣은 밀랍이 가라앉은 것은 밀랍의 밀도가 물의 밀도보다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 물 속에 소금을 집어넣었습니다. 그러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물의 밀도가 커지겠지요? 따라서 밀랍의 밀도가 물(소금물)의 밀도보다 작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밀랍으로 만든 공이 수면에 떠오르게 된 것이지요." 갈릴레이의 실험은 멋진 것이었지만 다른 실험처럼 교수들은 납득시키지는 못했다. 단지 그들을 속태우게 했을 뿐이었다. 젊은 갈릴레이가 그들의 일에 참견하는 것도 물론 좋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들이 숭앙하는 권위자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도전한 것은 무엇보다도 잘못된 것이었다. 교수들은 갈릴레이가 토론하기 좋아한다고 하여 그에게 '논쟁꾼'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는 결국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피사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탈리아 북부의 파도바 대학으로 옮겨서 가르치게 되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 1604년, 하늘에 신성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 진기한 사건에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놀랐다. 교수들은 이런 사간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하지만 그들이 논쟁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신성은 창공에서 빛나고 있었다. 신성은 특히 교수들에게 있어서 커다란 화젯거리였고 당연히 갈릴레이의 관심을 끌었다. 천공의 탐사는, 다시 그의 적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기회가 될 것 같았다. 이 무렵 그는 네덜란드의 안경 기술자 H. 리펠스하이가 만들었다는 망원경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리펠스하이는 우연히 2개의 렌즈를 일렬로 배열하고, 그것을 통해 앞을 쳐다보게 되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1.5Km나 떨어진 교회의 뾰족탑이 자기 집이 창 옆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갈릴레이는 외쳤다. "그래 바로 그거야! 내가 기다리던 망원경이다!" 그가 제작한 최초의 망원경은 물체가 9배로 보였지만, 2년 후에 그는 1,000배나 크게 보이는 망원경을 발명했다. 갈릴레이는 자랑스럽게 베네치아의 총독에게 시범을 보였다. 이 도시에서 제일 높은 탑의 지붕 위에서, 총독은 아무리 눈이 좋은 사람이라도 잘 볼 수 없는 배를 똑똑히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땅이나 바다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들고 나와서 사람들을 시끄럽게 만들지는 않았다. 그는 즉시 자기의 망원경을 훨씬 장대하고 신비한 하늘을 향해 돌려놓았다.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서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는 발견, 조르다노 브루노의 전철(화형)을 밟을 수밖에 없는 발견을 연이어 하게 된다. 하늘을 향한 최초의 관측 기적이 기다리고 있다는 흥분과 경이로움에 몸을 떨면서 갈릴레이는 망원경에 눈을 갖다 댔다. 그러자 갑자기 넓은 하늘이 그의 눈앞에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인간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하늘의 무한한 광활함을 그는 경이로움에 들떠 꼼짝도 않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플레아디스 성단에 있는 7개의 별은 36개였다. 오리온 성좌의 9개의 별은 80개였다. 은하수의 가루처럼 흩뿌려져 있는 강물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모여 두꺼운 무리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변했다. 어느 곳을 보든, 새로운 별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그는 손으로 만든 작은 기계로 세계를 거대하게 부풀렸다. 아리스토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스꽝스러운 천구와 이 광대한 우주는 얼마나 다른 것인가! 브루노는 정확했던 것이다. 우주에는 경계도 제약도 없었다. 그는 이제 잠을 잘 수 없었다. 밤이면 밤마다 그는 하늘로 향한 망원경에 매달려 있었다. 우선 그는 달을 보았다. 망원경으로 본 달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상상했던 것처럼 완전히 매끈매끈한 공 모양이 아니었다. 주름이 있고, 골짜기가 있고, 움푹 패인 곳이 있기도 한, 우리 지구처럼 불규칙한 세계였다. 그 골짜기에는 깊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태양을 향한 부분에 있는 산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달은 우리의 지구와 마찬가지로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1610년 1월 7일의 밤, 갈릴레이의 눈은 행성 중의 하나인 목성 부근에서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해뜰 무렵에, 목성 주의에 전에는 못 보던 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거기에는 3개의 별이, 작지만 목성 주위에서 멋지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불가사의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일직선상에 나란히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중의 2개는 목성의 동쪽에, 그리고 하나는 서쪽에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날 밤, 나는 저항할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린 것처럼 다시금 목성을 향해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에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져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전날 밤과 마찬가지로 3개의 별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목성의 서쪽에서 똑같은 거리를 두고 일직선상에 나란히 배열되어 있었습니다. 갖가지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목성은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2개의 별을 서쪽으로, 그리고 다음날에는 3개의 별을 모두 동쪽으로 이동시킬 수 있었을까? 움직이면서 회전하는 것은 목성이 아니라 이 별들인 것인가? 나는 꾹 참고 다음날 밤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은 구름이 가득 끼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습니다. 1월 10일에는 날씨가 맑아서 목성 주위의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때 본 별은 2개뿐이었습니다. 세 번째의 별은 내 계산에 의하면, 목성의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1월12일, 나는 다시 세 번째 별을 볼 수 있었습니다. 마침내 나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내가 본 것은 별이 아니라 목성의 달(위성)이라고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밤, 나는 네 번째 달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목성은 우리 지구를 도는 달과 같은 4개의 달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까지 갈릴레이가 발견한 것 중에서, 목성의 작은 위성들만큼 그의 피를 끓게 만든 것은 없었다. 그곳에는 거대한 물체 주위를 회전하는 위성이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바로 코페르니쿠스가 행성과 태양에 대해 암시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여러분이 실제로 볼 수 있는 작은 태양계인 것이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 체계가 진실이라는 것을 이제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교수들도 부정할 수 없는 보다 극적인 증거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망원경을 목성에서 금성으로 돌렸다. 금성은 지구보다 태양에 가깝다. 만약 금성이 코페르니쿠스가 주장한 것처럼 행성으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면, 금성에도 우리의 다로가 같은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때로는 4분의 1만 보이는 금성을, 때로는 반쪽만의 금성을, 그리고 어떤 때는 금성 전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갈릴레이에 대해 교수들은 이렇게 말했다. "자네 자신을 위해 금성을 조사해보게. 금성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금성은 태양 주위를 회전하지 않는 것이라네. 코페르니쿠스가 틀린 것일세. 그러면 증명 끝(Q.E.D)인 것이지." 매일 밤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밤하늘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는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을 보았다. 그가 망원경을 확대해서 금성을 주시하고 있던 여러 날 밤에 금성은 초승달처럼, 그리고는 반달처럼, 그리고 보름달처럼 보였다. 금성이 변형되어 가는 모습은 금성이 태양 주위를 돌고 잇다는 것을 완벽하게 증명해 주었다. 코페르니쿠스가 역시 옳았던 것이다. 그는 감격해서 외쳤다. "나는 놀라움 속에 빠져 있다. 이런 경이를 발견하도록 허락하신 신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렇게 해서 1610년 1월의 멋진 한 달이 가고 있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육안으로 별이 빛나는 밤하늘을 보면, 하늘은 불과 수 킬로미터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자칫하면 지구는 만물의 중심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망원경으로, 낮은 배율의 망원경으로라도 밤하늘을 올려다보라. 그러면 하늘은 수억 킬로미터나 먼 곳으로 질주해간다. 여러분은 지구라는 우리 인간의 집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알게 될 것이다. 갈릴레이는 생각했다. '만일 내 망원경을 통해 하늘은 볼 수만 있다면, 파도바의 다른 교수들도 코페르니쿠스가 옳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거야.' 갈릴레이는 외쳤다. "여러분! 어서 오십시오. 직접 여러분의 눈으로 보십시오. 이곳에는 목성의 위성이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금성이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눈으로 진실을 확인하지 않으시렵니까?" 그러나 신심 깊은 교수들은 백발의 머리를 흔들며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을 보였다. 그리고 내심 이렇게 생각했다. '이 갈릴레이란 자는 정말 기분 나쁜 녀석이군. 그러니 피사에서 추방된 것도 당연하지. 이런 실없는 소리를 계속하도록 내버려두었다가는 얼마 안 가 종교 재판관이 그의 집을 방문하게 될 거야.' 하지만 갈릴레이가 태양의 흑점에 대한 조사를 주장하지만 않았더라도 종교 재판에까지 걸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갈릴레이에 의하면, 태양 흑점의 이동은 태양도 지구와 마찬가지로 축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흥미로운 과학적 사실이었다. 실제로 이것보다 더 흥분되는 일이 있을까? 그러나 교수들에게는 그가 태양의 흑점을 발견했다는 것만큼 모욕적인 일은 없었다. 이 무례한 동료 갈릴레이는, 신께서 창조하신 태양이 모든 점에서 완전무결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가? 흑점이라니,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가? 신의 창조 계획을 엉망진창으로 만들려는 것인가? 갈릴레이는 도가 지나쳤다. 종교 재판소는 이제 그가 말한 것을 못 들은 체하고만 있을 수 없게 되었다. 갈릴레이라는 공상가를 화형에 처한다 해도 이 인물을 침묵시키는 데는 충분치 못하리라. 1616년 2월 25일, 갈릴레이는 심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문 앞에 종교 재판관이 서서 말했다. "네게는 아리스토텔레스에 거역하는 어떤 견해도 입 밖에 내지 말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순순히 이 명령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경고만으로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갈릴레이는 꼼짝도 않고 타협하지 않았다. 내가 이 두 눈으로 본 새로운 우주의 경이를 얼마만큼이라도 주장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2대 체계 대화"라는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 책에서 그는 다시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격하고, 코페르니쿠스를 변호했다. 교수들은 그의 말은 전혀 들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이 책을 일반인들에게 읽힐 생각으로 대학의 학문 용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누구나 다 사용하는 이탈리아 어로 썼다. 그의 문체는 솔직하고 간명했기 때문에 종교 재판관을 포함해서 어느 누구라고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권력자들에 대한 명쾌하고 솔직한 도전이었다. 여기에서 사태는 마지막 순간에 다다랐다. 결국 이 책의 판매는 금지되었고 갈릴레이는 로마는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는 3개월간 감금되어 매일 고문을 받았다. 드디어 1633년 6월에 그는 종교 재판소의 법정에 끌려나와 판결을 받았다. "파도바 대학의 수학 교수 갈릴레오 갈릴레이!" 종교 재판장이 불렀다. "너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 것도 아니고 우주의 중심에 존재하는 것도 아니라고 썼다. 우리는 너의 의견이 어리석기 짝이 없고, 성서에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모순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우리는 네게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것을 신성으로 명령하며, 더불어 금후 어떠한 경우라도 그것을 믿지 말 것을 명령한다." 갈릴레이는 이제 건강도 정신도 쇠잔해 버린 68세의 노인이었다. 그는 조르다노 브루노의 죽음 이래 끊임없이 공포의 그림자를 떨면서 생활해왔다. 그는 오직 혼자서 세론과 그를 반대하는 동료 교수들의 중압과 싸워왔다. 그러나 그는 감히 실험에 도전하고, 또 사람들이 1000여 년이나 굳게 믿어온 것을 타파해왔다. 그는 자기 정신과 판단을 종교 재판관들의 판결과 대결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인간이 그 이상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이렇게 해서 세계 최대의 과학자는 결국 항복한다. 그는 무릎을 꿇고서 자신의 죄를 고백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것을 믿으며, 차후로도 계속 믿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태양이 지구 주위를 운행한다는 것을 믿으며, 차후로도 계속 믿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지구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믿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믿겠습니다." 그러나 말 끝에 그는 희미하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갈릴레이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사료는 없다. 금세기의 영국 철학자 B.러셀은, 이 말을 토로한 것은 진정 갈릴레이가 아니라 '세계'였다고 했다. 갈릴레이는 태양에 관한 연구를 계속한 결과 눈이 멀었다고 한다. 1642년, 그가 죽기 전에 영국의 대시인 존 밀턴은 그를 방문한다. 종교 재판소는 갈릴레이를 이겼지만, 그가 대담하게 싸워왔던 지동설 그 자체를 이긴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가 죽은 바로 그해 영국에서 태어난 뉴턴은 갈릴레이의 업적에 빛나는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프리즘과 무지개 아이작 뉴턴은 1642년의 크리스마스에 영국의 울스소프에서 태어났다. 그는 열 달도 채우지 못하고 태어나 작은 병 속에 넣어졌다고 한다. 약을 구하러 갔던 두 하인이 돌아와 아기가 아직 살아 잇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병약한 뉴턴은 학교 성적이 좋지 않은 학생이었지만, 연을 날리고 물시계와 해시계를 만든다거나 핸들로 운전하는 수레 만들기에 열중했다.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어머니는 그가 밖에서 빗속을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것을 보고 놀라서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고 있는 거니?" 그가 대답했다. "응, 바람을 타고 뛸 때와 바람을 맞고 뛸 때, 얼마나 높이 뛸 수 있는지 시험해 보는 거야." 그러나 어머니는 뉴턴의 소박한 과학적 실험을 호의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야단쳤다. "그런 일을 하면서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돼. 학교에 갈 필요도 없다. 지금부터 엄마와 함께 농삿일이나 하자." 그러나 소년은 공부와 마찬가지로 농삿일도 잘하지 못했다. 마침내 어머니는 그를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쫓아보냈다.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단념했어. 대학에 계신 교수님들은 저애에게 지혜와 분별을 가르쳐 주시겠지." 그러나 대학의 교수들도 어머니의 희망대로 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뉴턴은 여전히 자신의 취미, 그 중에서도 특히 망원경 만들기를 계속 즐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오후, 케임브리지 부근의 유리 세공으로 유명한 스툴브리지를 걷고 있던 뉴턴에게 진열장에 놓인 프리즘이 눈에 들어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프리즘이 보통의 장난감이었지만, 뉴턴에게는 망원경 때문에 생긴 어떤 문제를 풀어줄 수도 있는 실험 도구로 보였다. 그는 망원경으로 볼 때마다 언제나 구석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 결점이 자기 렌즈에만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몇 백 개나 되는 새 렌즈로 갈아 보았지만 흐릿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때,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렌즈에 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빛의 성질에 있는 것이라는. 망원경을 개량하기 전에 빛 자체에 대해 보다 많은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느꼈다. 뉴턴은 프리즘을 사서 집에 갖고 왔다. 그리고 방안을 어둡게 하고, 차광용 덧문에 작은 구멍을 뚫어 가는 태양빛이 들어오게 만들었다. 그리고는 광선을 프리즘에 비춰보았다. 그러자 반대편 벽에 여러 색, 즉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띠가 나타났다. 마치 마법처럼 백색광이 여러 가지 색의 가는 조각으로 되어버린 것이었다. 뉴턴은, 자기가 프리즘을 바르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리저리 방안을 바꿔보았다. 그러나 벽에 비치는 색의 띠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중얼거렸다. "이런 색은 프리즘 유리에 금이 갔기 때문일 거야." 훨씬 더 투명한 유리를 반들반들하게 갈아서 만든 다른 몇 개의 프리즘을 사용해 보았다. 그러나 색동 띠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는, '그렇다면 이런 색이 나타나는 것은 유리 자체의 성질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번에는 빛을 물 속의 프리즘에 통과시켜 보았다. 그러나 색동 띠는 여전히 벽에 비쳐졌다. 뉴턴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본 후에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진 프리즘에 결점은 없다. 색동 띠의 비밀은 빛 자체에 숨겨져 있는 것이야. 백색광은 몇 가지 색이 혼합된 것인데, 프리즘이 태양 광선을 여러 가지 색으로 분해한 것이라구. 이제 이것이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들 색을 모아 보자. 그러면 원래의 백색광을 얻을 수 있을 거야." 뉴턴은 제 2의 프리즘을 첫 번째 프리즘과 벽 사이에 놓았다. 그러자 색동 띠가 제 2의 프리즘을 통과하면서 원래의 백색광이 되었다. 그는 빛의 이러한 성질을 발견하면서 동시에 무지개의 신비도 해명했다. "하늘의 무지개는 벽에 만들어졌던 색띠와 매우 비슷한 스펙트럼이다. 구름 안에 빗방울이 백색광을 분해하는 프리즘처럼, 숨어 있던 몇 개의 빛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언제나 무지개의 장려함과 아름다움에 경탄해왔다. 뉴턴은 빛의 실험을 통해 하늘과 지구 모두가 자연의 법칙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사과가 떨어지다. 1665년,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이었을 때, 페스트가 영국을 휩쓸어 대학은 임시 휴교를 하게 되었다. 뉴턴도 고향인 올스소프로 돌아갔다. 어느 날 오후, 뉴턴은 농장의 사과나무 그늘에서 친구들과 함께 차를 마시고 있었다... 뉴턴이 의자에 걸터앉아 사색에 빠져 있을 때 나무에서 사과가 수직으로 떨어졌다. 과일이 익으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뉴턴은 이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뉴턴이 살던 시대에는 만물은 전 우주의 중심에 있는 지구를 향해 움직인다는 것으로 낙하를 설명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그것이 태어난 근원이 되는 고향으로 가능한 한 빨리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것이 자연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말했다. "돌은 지구를 원한다. 아이들이 어머니의 품을 원하는 것처럼." 뉴턴은 혼자서 중얼거렸다. "만물은 중력 때문에 지구를 향해 떨어지는 것이다. 중력은 아주 깊은 광산 밑에까지도 작용한다. 중력은 땅의 표면에도 작용하고, 아주 높은 산꼭대기에도 작용한다. 그렇다면 중력은 이 지구상에서 정지하는 것일까? 아니, 중력은 지구를 넘어서 달에까지 도달하는 것이 분명해. 만약 그렇다면, 사과가 땅에 떨어지는 것처럼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심하던 뉴턴은, 결국 갈릴레이가 공을 굴려서 했던 실험을 생각해냈다. 뉴턴은 눈앞이 밝아오는 것을 느꼈다. '그래, 바로 그거야!' 달이 지구로 떨어지지 않도록 지탱해주는 다른 힘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힘은 갈릴레이의 운동의 법칙에 정리되어 있었다. '물체는 그것에 어떤 다른 힘이 가해지지 않는다면 영원히 움직인다.' 뉴턴은 이렇게 말했다. "달은 두 힘이 서로 잡아끄는 틈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다. 중력은 달을 지구로 잡아당기려 하지만, 동시에 반대로 또 다른 힘이 달을 우주 쪽으로 되돌려 놓으려 하고 있다. 달은 지구를 행해 날아가지도 못하고, 지구로부터 멀리 떠나 버릴 수도 없다. 따라서 지구 주위를 활처럼 굽은 통로(궤도)를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가지에 달린 사과를 지구로 떨어뜨리는 힘은, 지구가 달을 잡아당기면서 붙들고 있는 힘과 같다." 만일 중력에 의해 달의 곡선(타원)궤도가 설명된다면 묘든 천체의 곡선 궤도도 설명된다면 모든 천체의 곡선 궤도도 설명될 수 있지 않은가? 그 후 뉴턴은 지구가 달을 거느리고 있는 것처럼, 태양 역시 지구와 다른 행성과 혜성을 그 중력 범위에서 거느리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그리고 다른 모든 항성도 행성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이다. 뉴턴의 발견은 전 우주적인 것이었다. 중력은 지구만의 독점물이 아니었다. 모든 물체는 중력의 잡아당기는 힘을 작용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뉴턴은 운동의 기본 3법칙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1) 모든 물체는 그 상태를 변화시키도록 작용하는 힘에 의해 강제되지 않는 한, 정지 혹은 등속 직선 운동의 상태를 계속한다. 2) 운동량의 변화는 힘의 작용에 비례하고, 이 힘이 작용하는 것과 같은 직선 방향으로 이루어진다. 3) 작용은 항상 반작용과 같다. 즉, 두 물체의 작용은 항상 그 크기가 같고, 방향이 반대이다(손가락으로 돌을 누르면 돌의 방향으로부터 힘을 받아 손가락이 눌려진다). 바로 이곳에 '만유인력의 법칙'이 있다.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제2법칙도 이제야 해명되었다. '태양에 근접함에 따라 행성의 속도가 더욱 빨라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뉴턴에 의하며, 태양에 물체가 접근함에 따라 태양의 인력이 증가해 갔기 때문이었다. 갈릴레이와 뉴턴이 있기 전에는, 천공은 천공 자체의 규정과 법칙이 있는 어떤 별개의 왕국처럼 생각되고 있었다. 뉴턴에 의하면, '지상의 운동을 설명하는 힘은 우주 도처의 운동까지도 설명한다. 지구에서 진실인 것은 아주 멀리 떨어진 별에 대해서도 진실이다. 사과와 달과 둥근 포탄, 그리고 유성, 이모든 것은 우주의 동일한 법칙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겨우, 천체가 혼잡스럽게 우주 공간을 우왕좌왕하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연계에는 질서가 있었다. 그 주역은 중력이었고, 그것의 발견자는 아이작 뉴턴이다. 사자는 발톱만 보고도 알 수 있다. 중력은 일방통행의 도로는 아니다. 지구는 달을 끌어당기지만, 달도 지구를 끌어당기고 있다. 달의 중력이 잡아당기는 힘은 지구상의 바닷물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을 정도의 세기를 갖고 있다. 어떤 것도 중력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다. 우주 속에 있는 작은 물질도 그보다 훨씬 작은 물질을 끌어당기고 있다. 태양은 행성을 끌어당기지만, 행성들도 서로 잡아 당겨 각각 서로의 운동을 방해하고 있다. 하나의 새로운 과학적 법칙을 검증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그것이 여러분들에게 장래에 대해 무엇을 말해줄 수 있는지 살펴보는 일일 것이다. 만약 뉴턴의 법칙이 정확한 것이라면 천문학자들은 자신들이 직접 눈으로 보기 이전이라도, 항성이나 행성의 존재를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천왕성(우라노스)은 천문학자들이 뉴턴의 법칙을 시험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를 제공했다. 무엇인가가 이 행성의 운행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 말고는 이 행성에 대해 의심스러운 점은 없었다. 태양 주위를 돌고 있는 이 행성의 궤도를 완전하게 산출하려는 노력은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우주의 어딘가에서 미지의 물체가 천왕성이라는 행성을 잡아당기고 있고, 그것이 천왕성을 고유의 궤도로부터 이탈하게 하고 있을 것이다. 물론 뉴턴이 옳다면... 19세기에 케임브리지 대학의 학생이었던 J.C. 아담스가 영국의 그리니치 천문대장에게 한 통의 도전장을 보내왔다.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었다. '분명히 어떤 미지의 행성이 천왕성의 궤도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이 미지의 행성은 지금까지 발견된 어느 행성보다도 태양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이 새로운 행성의 무게, 크기, 위치에 대한 보고가 동봉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든 작업은 뉴턴의 중력의 법칙의 도움을 받아 해냈습니다. 부디 가장 성능이 좋은 망원경이 제가 가리킨 부분을 향하도록 해주십시오' 하지만 천문대장은 이 편지를 하찮게 생각했다. "장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학생이,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고 있다니!" 천문대장은 이렇게 말하면서 편지를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아담스는 이렇게 불운했지만, 프랑스의 천문학자 U.J.J. 르베리에는 운이 좋았다. 그는 아담스보다 몇 달 늦게, 역시 뉴턴의 법칙을 사용해서 미지에 있는 물체의 위치를 계산했다. 그는 계산 결과를 베를린의 천문대에 보냈다. 1864년 9월, 어느 천문학자는 르베리에가 지적한 장소로 망원경을 돌렸다. 그곳에는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본적이 없던 해왕성(넵투누스)이 있었다! 파리에 있는 르베리에의 조상 비문에는 '연필 끝으로 행성을 발견한 사람에게'라고 새겨져 있다. 해왕성의 발견은 과학적 예언에서의 뉴턴의 위력을 보여 주는 훌륭한 증거였다. 뉴턴의 발견은 수학의 도움 없이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그는 중력의 법칙을 완성시키기 위해 수학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미적분을 발명했다. 그의 능력은 정말 놀랄 만한 거이었다. 1689년, 뉴턴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스위스의 유명한 수학자 J. 베르누이는 세계의 과학자들에게 1년의 기간을 주고 두 가지 수학 문제에 대한 해답을 내보라고 한 일이 있었다. 뉴턴은 문제를 받고는 정확히 24시간 만에 그 문제에 대한 해답을 작성해서 베르누이에게 보냈다. 그때 뉴턴은 답안지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베르누이는 그 문제를 이토록 완벽하게 풀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베르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사자는 발톱만 보고도 알 수 있다." 그러나 뉴턴 자신은 겸손했다. 그는 세계에서, 어쩌면 모든 시대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과학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모르지만, 나 자신은 내가 파도치는 바닷가에서 보통보다 조금 매끄러운 조약돌이나 예쁜 조가비를 발견해서 가지고 노는 어린아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눈앞에는 진리의 대해가 비밀에 싸인 채 펼쳐져 있는데..." 우주를 측량하는 척도 뉴턴과 갈릴레이가 발견한 새로운 대우주는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별들이 반짝이는 우주의 광대한 영역을 조사할 수 있는 충분한 정확도를 가진 잣대는 존재하는가? 우주를 재는 척도는 빛의 속도여야 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그러나 빛을 척도로 사용하기 전에 우선 빛 자체를 측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중세에는 빛이 한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데 전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어느 산꼭대기에서 피운 횃불은 그 반대편 산꼭대기에서도 금방 보인다. 그러나 갈릴레이는 빛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진행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증명하지는 못했다. 그는 목성의 위성을 발견했을 때 빛의 속도를 증명하기 일보 직전까지 갔었다. 그는 위성들이 목성 주위를 회전할 때, 가끔씩 없어지는 것에 주목하고 있었다. 지구가 태양과 달 사이에 왔을 때 월식이 일어나는 것처럼 목성도 그 위성들과 식을 일으키는 것이다. 갈릴레이가 이 식이 일어나는 시간을 계산할 수만 있었다면 아마 그는 빛의 속도를 잰 최초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빛의 속도를 측정한 것은 갈릴레이가 아니라 덴마크의 Q. 뢰메르였다. 그는 목성에서 가장 가까운 위성의 식이 42시간 30분마다 일어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6개월 후에 다시 일어나는 시간을 재어보니 42시간 30분보다도 1,000초가 느렸다 뢰메르는 이 1,000초의 차이가 왜 일어나는지를 자문해보았다. 그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자연계에는 우발적인 사건이란 없었다. 그 신비를 해결할 수 있는 어떤 단순한 사실을 건과하고 있었던 것일까? 뢰메르는 생각했다. '처음에는 지구가 목성에 가장 가까워지는 때인 6월에 식이 일어나는 시간을 쟀다. 하지만 다음 번에 내가 식을 잰 것은 12월이다. 그러니 지구는 전의 궤도와 반대쪽에 있었다. 태양 주위를 도는 지구의 궤도는 직경이 약 3억km이다. 이것은 지구가 6월보다 12월에 목성으로부터 훨씬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그 1,000초는? 3억km는 아주 먼 거리이다. 목성으로부터 온 빛은, 직경 약 3억km의 거리를 지나 지구에 도달하기 위해 일정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빛의 속도에 대한 간단한 계산이 나온다. 만약 빛이 약 3억km를 1,000초 안에 진행한다면 빛은 1초에 약 30만km의 속도로 진행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사람들이 빛의 진행에는 시간이 필요없다고 믿고 있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광선은 엄청난 속도로 진행하며, 3초 안에 달을 왕복할 수 있을 정도이다. 빛의 속도를 알고 난 후, 과학자들은 빛을 외계의 광대한 공간을 측정하기 위한 편리한 척도로 삼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들은 빛이 1년간 진행하는 거리를 1광년(약 9조 4,670억km)이라고 부른다. 우주에서 지구에 가장 가까운 1등성이며, 항성 사이의 거리를 최초로 계산할 수 있게 해준 항성 알파 켄타우리까지의 거리는 4.3광년이었다. 빛의 속도는 우주의 크기를 재는 데 무엇보다도 우수하고 유용한 비교의 표준이다. 그것은 또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이기도 하다. 빛의 속도는 과학자들에게 원자 에너지의 제어라는 중요한 발견으로 이끈 가장 소중한 실마리를 제공했다. 아인슈타인은 유명한 공식에서 물질은 에너지로 변환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여기에서 E는 에너지, M은 물질의 질량, C는 빛의 속도를 나타낸다. 심장은 펌프다 17세기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천상이나 지상이나 모두 자연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인간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포탄이나 사과, 그리고 별들과 혜성을 지배하는 법칙이 인간에게도 적용되는 것일까? 사람들은 자신의 몸에 대해, 중세부터 나타난 여러 기묘한 사고 방식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혈관은 공기를 운반하고 있다든가, 뇌는 그곳을 통과하는 혈액을 냉각시키는 일종의 냉장고와 같은 장치라거나, 심장은 사랑과 호의의 중심이라는 식이었다. 이렇듯 인체는 17세기까지만 해도 아직 미지의 세게였다. 갈릴레이가 가르치고 있었던 파도바 대학의 학생 중에는 젊은 영국인 의사 W. 하비가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심장과 혈액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과학적인 방법을 이용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들이 써놓은 것을 읽으면서 갈릴레이 교수처럼 스스로 실험하고 관찰하고 싶다." 하비는 독서를 시작하자마자 금방 몇 개의 실마리를 찾았다. 레오나르도는 심장의 근육도 육체의 다른 근육과 같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16세기의 스페인 과학자이며 의사인 M. 셀베투스는, 실제로 심장부터 폐까지 혈액의 통로를 더듬고 있었다. 셀베투스는 의학의 선구자로서 고귀한 대가를 지불했다. 인체를 해부한 범죄자로서 화형을 당한 것이다. 하비는 독서를 끝마친 후, 자신의 실험실로 돌아왔다. 우선 그는 모든 종류의 생물--곤충, 게, 작은 새우, 개구리, 달팽이, 물고기, 뱀, 도마뱀, 온혈 동물 등--의 심장을 조사해 보았다. 그리고 이들의 심장이 서로 비슷한 점과 틀린 점을 자세히 관찰했다. 또 그는 각 동물의 심장이 생활 방식에 어떻게 적응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마침내 그는 인체의 탐구로 나아갔다. 그는 즉시 정맥과 동맥이 있는 것에 주목했다. 정맥은 혈액을 심장의 우측으로 나르고 있고, 동맥은 심장의 좌측에서 혈액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동맥이 어디로 가는지 살펴보자! 하비는 동맥의 진로를 뇌수와 팔과 다리로부터 신체의 모든 부위에 이르기까지 더듬어갔다. 마침내 동맥의 끝부분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는 바로 옆에 정맥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정맥은 혈액을 심장의 우측으로 보낸다. 여기에서 하비는, 혈액의 심장의 우측(우심실)에서 폐로 흐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혈액은 정맥에서 동맥으로 옮겨간다. 그리고 혈액이 심장의 좌측으로 돌아와 다시 전신을 순회한다. 혈액은 연결된 2개의 통로 사이를 나아간다. 하나는 심장에서 폐로 혈액을 보내고, 다른 하나는 신체의 나머지 부분에 혈액을 보낸다. 이 왕복 여행을 위해 혈액은 심장을 두 번 지나지 않으면 안 된다. 혈액이 조수의 간만과 같이 빠졌다가는 다시 차오른다는 기존 의사들의 주장이 완전한 오해였다는 것은, 하비가 혈관에는 판막이나 문짝 같은 것이 있어 일방통행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나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혈액은 한쪽 방향만으로 밖에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심장이란 무엇일까? 심장은 어떻게 이런 구조를 갖게 된 것일까? 심장에 신비적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장은 수축하여 혈액을 동맥으로 집어넣은 근육이다. 여러분의 심장은 여러분의 주먹 정도의 크기이다. 그러나 그 작은 심장은 하루에 10만 번이나 고동칠 정도로 튼튼하며,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혈관에 혈액을 운반할 정도로 강력하다. 이제야 혈액의 순환설을 발표할 준비가 갖춰진 것이다. 혈액은 신체를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었다. 그래도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심장이, 예를 들어 1분간에 그저 두 번 정도만 수축하면서 60ml 정도의 혈액을 퍼올린다고 해도 약 1.5시간이면, 심장은 아무리 많은 혈액을 갖고 있는 사람의 혈액이라 해도 다 퍼올려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혈액은 항상 심장을 통과합니다. 그렇다면 혈액은 어디서 계속 생겨나는 것일까요? 답은, 혈액은 신체를 순환하고 심장으로 다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628년에 하비가 혈액이 순환한다는 것을 발표했을 때, 세계는 그를 비웃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말했다. "저 사람은 미치광이야. 이제 저 사람에게 진찰 받는 사람은 없을 거야." 그러나 프랑스의 대과학자 르네 데카르트만은, '이것은 의학사상 최대의 발견'이라고 하면서 대담하게도 칭찬을 했다. 다른 과학자들은 하비가 혈액의 순환을 완전히 입증하고 있지 못하다는 식으로 머뭇거리고 있었다. 하비는 실제로 혈액이 심장에서 동맥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고 있었고, 그 혈액이 정맥으로 들어가는 것도 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혈액은 어떻게 동맥에서 정맥으로 들어가는 것일까? 하비는 그것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하비가 죽은 지 4년 후,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M. 말피기는 하비가 놓쳤던 것을 발견했다. 즉 그것은 동맥과 정맥을 연결하는 모세혈관에 작용하는 모세관 형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하비를 비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말피기는 하비가 알지 못했던 과학 기구, 현미경의 덕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말피기는 현미경의 도움으로, 개구리의 폐를 조사하거나 혈액이 동맥에서 모세혈관을 통해 정맥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혈액의 순환설이 완성된 것이다. 혈액 순환에 대한 지식이 기초가 되어 생물체의 활동을 물리적으로 해석하려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혈액은 무엇을 운반하는가? 무슨 이유로 그것을 운반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어디에서 그 짐을 받아들이고 어디서 그 짐을 내리는가? 이런 여러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것이 그 후의 생리학의 중요한 과제가 되게 되었다. 알려지지 않은 학회 하비와 뉴턴, 갈릴레이가 이룩한 일은 인류를 과거의 미신으로부터 조금씩 해방시켜 나갔다. 사람들은 비로소 이렇게 말하게 되었다. "책은 읽는 것만으로 세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무래도 잘못이었던 것 같다. 누군가가 말한 내용을 안다고 해서 자연을 다루는 방식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세계라는 시계가 재깍재깍 돌아가는 시각을 이해하려고 한다면, 거기에서 이끌어낸 것을 자세하게 조사하는 편이 더 좋을 것이다. 자연에 대한 동화의 시대는 이제 끝나고 있다." 이제서야 과학자들은 신변의 위협을 받지 않고도 연구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거울에 비춰야 볼 수 있는 문자로 암호화하거나 비밀 암호를 만들어 숨기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들은 거리낌없이 책을 출판하기도 하고 자신의 연구를 널리 알리기 위해 대중과 공개적으로 만나기도 했다. 1645년, 영구에서는 몇몇 과학자들이 혜성과 망원경, 공기의 무게, 혈액의 순환, 그리고 코페르니쿠스의 이론 등에 대해 서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모여들었다. 그들은 이 만남을 "알려지지 않은 학회"라고 칭했다. 자기들이 일반인들로부터 비웃음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가 J. 스위프트는 "걸리버 여행기"라는 그의 소설에서 이 학회를 빗대어 말하기를, 오이로부터 햇빛을 만들고 그것을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병에 넣어둔다든가. 얼음으로 화약을 만들려고 하거나, 지붕을 먼저 만들고 마지막에 토대를 조립하는 건물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나지 않아 과학이 널리 보급되고, 마침내 이 학회는 영국의 국왕 찰스 2세의 보호를 받아 "로열 소사이어티"로 공인 받게 되었다(1662년). "로열 소사이어티"의 정식 명칭은 "런던 왕립 자연과학 학회"로서 보통 "영국 학사원"이나 "왕립 협회"로 지칭되고 있다. 이 단체의 목표는 '자연과학의 진흥과 지식 보급'으로, 중심 되는 활동은 강연이 아니라 실험과 증명을 하는 데 있었다. 이 "영국 학사원"에 참가한 순수 과학자 중에는 화학자 R. 보일, 실험가 R. 후크, 건축가인 Ch. 렌 등이 있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회장을 맡았던 대과학자 뉴턴이 있었다. 오랫동안 과학을 덮고 있던 암운이 비로소 걷히기 시작했던 것이다. 현미경을 들여다보다 "영국 학사원"은 유럽 각지로부터 매우 귀중한 발명이나 발견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들부터 수많은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편지의 대부분은 무가치한 것이어서 즉시 불속으로 던져졌다. 그러나 1673년에 도착한 한 통의 편지는 그것을 처음 읽은 사람들에게 기묘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결국 과학사에 있어서 획기적인 대사건의 출발점이 되었다. 편지는 네덜란드 어로 씌어져 있었고 초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삼가 아룁니다. "영국 학사원" 여러분, 저는 안톤 레벤후크라고 하는 사람으로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고향인 델프트의 시청에서 보안관 대리로 관리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렇게 편지를 드린 것은 다름이 아니라. 제가 여러분 모두 관심을 가지실 것이 분명한 취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일 몇 시간씩 시청에서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밖에도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을 확인해 보려고 짬이 날 때마다 렌즈를 개량하며 보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 247개의 현미경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이 현미경을 가지고 머리카락이나 벌침을 관찰했고, 파리나 모기의 뇌수 같은 것도 살펴 보았습니다. 여러분, 저는 지금까지 누구도 보지 못했던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영국 학사원"에서는 이 편지를 불속으로 던져 넣는 대신 곧바로 회신을 보내, 이 편지를 읽고 놀랐다는 것과 좀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델프트 시청의 하급 직원은 런던의 학식 있는 고매한 신사들로부터 답장을 받은 일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이웃들과는 달리 그들은 자신이 매일 밤잠도 자지 않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것을 미치광이 짓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서둘러 언제나 선명하게 보이도록 렌즈를 쉴새 없이 닦았다. 그는 모든 것을 이 렌즈를 통해 들여다보았다. 치즈에 들끓는 진드기나 곡식 낟알에 들끓는 구더기, 그리고 그 구더기 알에 이르기까지 주의해서 살펴보았다. 17세기의 사람들은, 몇몇 종류의 동물은 자연 발생(조상이 없는 무생물에서 생명이 생긴다는 뜻)한다고 믿고 있었다. 쥐는 눅눅한 땅이나 매연에서 생기고, 곤충은 부패한 고기나 치즈에서 생긴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가 벼룩에 기생하는 벌레를 발견한 일에 대해 풍자 작가 J. 스위프트는, '벼룩에 꾀어드는 벼룩이 있었다. 벼룩의 벼룩에 꾀어드는 벼룩도 있었다. 벼룩의 벼룩에 꾀어드는 벼룩도 있었다. 이렇게 끝없이 계속된다.'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레벤후크는 현미경을 들여다보고, 고기나 치즈 안에서 곤충의 알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도 정확히 접근해서 볼 수 있었다. 여러분들이 새알을 발견할 때처럼. 그는 자연의 기본적인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무생물에서 생물이 탄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명은 생명에서만 생겨나는 것이다.' 레벤후크는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에 어떤 것이라도, 자신의 혈액조차도 렌즈 아래에 놓고 관찰을 했다. 놀랍게도 혈액은 아주 작은 입자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입자 100개가 모여도 모래알 크기가 될까말까 했다. 그는 적혈구를 발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속속 다른 발견이 잇달았다. 어느 날, "영국 학사원"은 한 통의 깜짝 놀랄 만한 편지를 받았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저는 우연히 올챙이의 꼬리를 살펴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투명해서 여러분들도 틀림없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그것을 조심해서 지켜보니, 혈액이 매우 가는 관을 통해 꼬리 끝부분까지 운반되고, 이어서 심장 쪽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 두 눈으로 하비박사께서 말씀하신 혈액의 순환을 본 것입니다.' 레벤후크는 말피기의 이미 모세혈관을 보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는 레벤후크가 정확한 관찰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영국 학사원" 사람들에게 입증해 주었다. 낙수물 안의 세계 뒤이어 있었던 레벤후크의 최대의 발견은 빗방울 안에서였다. 처음에 그는 자기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딸의 이름을 큰소리로 부르면서 어서 이쪽으로 오라고 소리질렀다. 그리고 자신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깜짝 놀랄 만한 것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그의 현미경 렌즈 아래에는 물방울 속에 들어 있는 자그마한 생물들이 빙빙 돌기도 하고, 비틀기도 하며 튀어 오르기도 하고 있었다. 어떤 것은 작은 털에 매달려 헤엄을 치고 있고, 어떤 것은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으며 또 어떤 것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움직이면서 그 모습을 바꾸고 있었다. 물방울은 수천이나 되는 미생물과 함께 생동하고 있었다. 레벤후크는 미생물(세균)의 세계를 대하고 어쩔 줄을 몰랐다. 바로 이곳에는 인간이 꿈도 꿀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가 있었던 것이다. 100만이나 되는 미생물의 극미 세계였다. 그리고 이곳에는 오랜 옛날부터 인류를 괴롭혔던 수많은 병의 원인(레벤후크 자신은 그것을 알지 못했지만)이 있었다. 그는 양심적인 과학자였기 때문에 자신의 발견에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의문에 의문이 계속 꼬리를 물었다. 이렇게 작은 생물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공중에서 떨어진 것일까? 어떻게 해야 알 수 있을까? 그는 새로운 문제가 생길 때면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실험을 했다. 그는 현미경에 사용하는 작은 접시를 반짝반짝 빛날 정도로 잘 닦았다. 그리고 물방울을 그 접시에 담았다. 그리고 나서 현미경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이때는 생물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여러 번 실험을 반복했다. 그래도 그 흔적은 없었다. 그렇다면 그것들은 공중에서 온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는 접시를 며칠간 방치해 두었다. 그러자 다시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아하, 그것들은 그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이야. 생명을 가득 담고 진흙이나 먼지 안에서 생동하고 있었던 거야.' 레벤후크는 탐정처럼 그 생물들을 추적했다. 그는 델프트 시청의 옥상이나 흙탕물 구덩이, 그리고 나무통, 우물, 도랑 같은 곳에 있는 물을 검사했다. 그러자 모래 먼지나 진흙의 어느 부분에서 역시 그 작은 생물들이 발견되었다. 그는 이때 묘한 생각을 해냈다. '왜 이것들은 발견하기 위해 밖으로만 나가야 하나? 이것들을 내 집안으로 오게 할 수는 없는 것일까?' 그는 소량의 후추를 물에 넣어보았다. 며칠이 지난 후 그가 본 것은 그를 미칠 듯이 흥분시키고 "영국 학사원"에 급히 편지를 쓰게 만들었다. 후추가 들어간 물은 네덜란드의 인구만큼이나 많은 작은 생물들과 함께 생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레벤후크는 여기서 새로운 실험 방법 한 가지를 발견한 것이다. 미생물 배양하는 방법을! "말도 안 되는 소리!" 1680년 레벤후크의 편지가 "영국 학사원"에 도착했을 때, 일부 회원들은 비웃어 버렸다. 그러나 위대한 실험가였던 R. 후크는 자기의 눈으로 혈액의 순환을 본 사람을 그렇게 비웃을 수 없었다. R. 후크는 강력한 새 현미경을 만들고 레벤후크와 마찬가지로 후추를 물에 풀어 넣었다. 그리고 그는 현미경에서 놀라운 것을 발견하고 급히 "영국 학사원"으로 달려가 회원들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네덜란드인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었소. 이리 와서 보시오" 과학자들이 교수들이 R. 후크의 현미경 주위에 모여들었다. 레벤후크가 말한 대로 물 속에는 미생물들이 우글거리고 있었다. "영국 학사원"으로부터 답장이 도착하던 날은 레벤후크에게 있어서는 생애 최대의 날이었다. 왜냐하면 답장에는 아름다운 은제 상자에 들어 있는 멋진 상장이 함께 동봉되어 왔기 때문이다. 델프트 시청의 하급 직원이 이제 "영국 학사원"의 명예회원이 된 것이다. 1723년 그가 죽을 때, 그는 가장 귀중한 26개의 현미경을 "영국 학사원"에 기증하는 것으로 미약하나마 학사원의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 레벤후크는 현미경을 통해 보는 세계의 생물학, 다시 말해서 미생물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그의 현미경 속 세계에 대한 기술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것이어서, 훨씬 강력한 오늘날의 현미경을 사용해도 우리는 그가 볼 수 있었던 모든 것에 대해 경탄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미생물의 실물 크기를 나타냈고, 그 형태를 막대형과 나선형과 구형으로 묘사한 최초의 사람이었다. 마치 갈릴레이의 망원경이 인류에게 광대한 우주를 해방 시켜준 것과 같이, 레벤후크의 현미경은 미소한 신비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제 6장 18세기, 에너지의 시대 다시 흙, 공기, 불, 물 소다수와 산소 불의 비밀 쥐와 양초와 황제 물은 다만 H2O일 뿐, 나무가 아니다 기계의 등장 인간이 증기를 동력화하다 잊혀진 사람 로켓 호와 영리한 난쟁이 호, 그리고 말 램포드 백작--행운의 군인 폭포수는 얼마나 따뜻할까? 위센부르크의 불가사의한 병 하늘에서 번개를 빼앗다 갈바니의 개구리 다시 흙, 공기, 불, 물 17세기는 인류에게 자연 법칙에 의해 지배되는 우주를 제공했다. 별, 행성, 인체, 떨어지는 사과와 무지개, 그리고 태양광선, 이 모든 것은 과학의 원리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많은 신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를 들면, 이 광대한 우주에 있는 것은 모두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수천 년 동안 인간은 이 문제와 씨름을 해왔다. 그러나 그들은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18세기 초에 이르기까지는 이 문제에 대한 해답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중세에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따른 해답만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만물은 흙과 공기와 불, 그리고 물이라는 4개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18세기 과학자들은 이 4원소가 진정 우주를 구성하는 소재인지 밝혀내는 일에 몰두했다. 그들은 공기에 대한 연구에서 시작했는데, 공기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많은 기체가 결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내기도 했다. 1775년에 있었던 J. 프리스틀리의 산소의 발견은 우리들이 호흡하는 공기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소다수와 산소 1770년경, 영국의 리즈 시에 있는 양조장 근처에서, 급진적인 비성공회파 목사인 J. 프리스틀리 박사가 나무 조각에 불을 붙여서 발효하고 있는 맥주통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이것을 본 시민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물었다. "선생님! 무엇을 하시려는 건가요?" "증명이지!" 불은 계속 꺼졌다. 리즈의 시민은 프리스틀리의 관심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프리스틀리는 맥주통에서 얻은 기체에 흥분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불을 끌 수 있는 신기한 증기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집에서 이 기체를 시험삼아 제조한 다음, 투명한 물에 통과시켜 보았다. 그랬더니 재미있게도 거품이 일었다. 그는 맛을 보았다.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이 만든 이 새로운 음료수를 '소다수'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것을 런던에 가지고 가서 "영국 학사원"에 제출했다. 과학자들은 이 거품이 이는 물을 먹어 보고는, 이것이 선원들을 괴롭히는 괴혈병의 치료제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잠깐 사이에 이 소다수는 영국 해군의 배에서 사용되어, 승무원들은 프리스틀리 목사가 만든 소다수를 즐기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요즘의 탄산음료 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려도 좋으리라. 그러나 소다수는 괴혈병에도, 그 외의 어떤 병에도 결코 아무런 약효를 발휘하지는 못했다. 프리스틀리는 이산화탄소를 발견한 공로로 "영국 학사원"으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 그는 이 성공에 용기를 얻어서, 이번에는 또 다른 새로운 기체를 발견하고자 마음먹었다. 실험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욱 길어졌다. 그는 태양광선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직경 30cm 정도의 집광성 렌즈를 사용해서 유리병 안의 여러 화학 약품을 가열해 보았다. 어느 날 그는 빨간 분말을 가열한 다음, 여기에서 발생한 기체를 유리병 안에 모았다. 그는 화학 사상 가장 유명한 실험 중의 하나를 시행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그는 이 기체를 모아 놓은 병 안에 불을 붙인 양초를 집어넣고는 불이 꺼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양초의 불은 확 타올랐다. 그래서 그는 시험삼아 타고 있는 목탄 조각을 그 병에 넣어 보았다. 그러자 목탄은 불타면서 튀어 올랐다. 다음에는 벌겋게 달아오른 철사를 넣어 보았더니 그 철사도 빛을 내면서 타올랐다. 이 새로운 기체는 소다수와는 달리 불을 꺼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을 세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산소를 발견한 것이다! 18세기 초에는 산소가 공기 속이 아니라 다른 물질, 예를 들어 프리스틀리가 연소시켰던 빨간 분말은 산화 제2수은으로 수은과 산소의 화합물이었다. 프리스틀리는 실험으로 수은에서 산소를 분리한 것이다. 이어서 그는 양식 있는 과학자답게 자기가 발견한 이 새로운 기체의 성질에 대한 조사에 착수했다. 이미 그는 이 기체가 물질을 쉽게 연소시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생명체에 대해서도 효과가 있는 것인지 의심하고 있었다. 그날 밤, 그는 부엌에 덫을 설치하고는 다음날 아침에 뛰어 돌아 다니는 두 마리의 쥐를 붙잡았다. 한 마리는 뚜껑을 덮은 유리병에 넣고, 다른 한 마리는 새로운 기체를 가득 채운 병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는 시간을 때우기 위해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피리를 불면서도 그는 두 마리의 쥐를 빈틈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보통의 공기를 넣은 병 속에 있는 쥐가 지친 것처럼 보였다. 프리스틀리는 회중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15분이 경과하고 있었다. 그는 그 병뚜껑을 열어 보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쥐는 이미 죽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쪽 병을 바라보았다. 이쪽 쥐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뛰어다니고 있었다. 첫 번째 쥐는 어째서 죽은 것일까? 그것은 보통의 공기 중에 포함되어 있던 이 새로운 기체를 쥐가 다 사용해 버렸기 때문이다. 두 번째 쥐는, 처음부터 병 안에 새로운 기체가 많이 있었기 때문에 아직 살아 있었던 것이다. 프리스틀리가 이 기체가 생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무엇이라고 확신했다. 쥐의 생명은 그렇다 하고, 인간의 생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그는 대담한 실험을 시도했다. 그는 스스로 이 새로운 기체를 약간 흡입하여 두 번째 쥐를 대신해 보았다. 그러자 곧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잠시 동안은 호흡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는 기분이 좋아져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 기체는 몸이 매우 쇠약하거나 아프거나 할 때 흡입하면 좋겠어." 훗날 이 기체(산소)가 병원이나 광산에서 구조용으로, 또 높은 산에 등반할 때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프리스틀리가 알았다면 얼마나 기뻐했을까? 또 다른 의문의 그의 마음에 싹트기 시작했다. 동물과 인간인 살기 위해 이 산소를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식물은? 그는 공기가 통하지 않는 밀폐된 병 속에 식물을 넣고 분명 시들어 버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그 식물은 마치 밖에서 재배하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동물은 밀폐된 공간에서 죽어버리는데, 식물은 살아간다! 혹시 병 안에 산소가 있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는 즉시 이 생각을 실험에 옮겼다. 병 안에 불을 붙인 양초를 집어넣었다. 그러자 양초는 밟게 빛나며 타올랐다. 그리고 생쥐를 넣자 기분 좋게 돌아다녔다.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식물에는 무언가 신비로운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기에 산소를 회복시키는 어떤 종류의 힘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프리스틀리는, 뚜껑을 닫은 병 안에서 불빛이 사그라질 때까지 양초를 태워 산소를 없앤 후, 그 병 안에 작은 박하 가지를 넣었다. 이 작은 식물은 시들어 버릴 것인가? 그러나 10일이 경과할 때까지 박하 가지는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이 작은 가지는 단순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병 안에 타고 있는 양초를 집어넣자 양초의 불길이 확 타오르게 만들었다. 산소가 없어져 버린 병에, 10일이 지나면서 이제 산소가 가득 차게 된 것이다. 산소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것은 식물에서만 나오는 것일까? 프리스틀리는 우리들이 오늘날 광합성이라고 부르고 있는 식물의 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빛이 존재할 때, 식물에 있는 녹색의 물질은 설탕이나 탄수화물을 만들기 위해 공기 중에 있는 이산화탄소와 물을 사용한다. 그 과정에서 산소가 발생하는 것이다. 불의 비밀 프리스틀리는 화학의 위대한 개척자였다. 그는 공기가 사람들이 상상하고 있던 것과 같은 단일한 원소가 아니라 좀더 많은 산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는 산소 외에도 초산, 염산, 암모니아, 그리고 일산화탄소도 발견했다. 그러나 그도 잘못된 편견에 빠져 있는 부분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18세기의 커다란 의문 중 하나였던 '무엇이 물질을 연소시키는가?'라는 문제에 대해서였다. 그의 산소에 대한 훌륭한 실험에는 그것에 정확히 대답할 수 있는 열쇠가 숨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해결에 가까이 가지 못했다. 때때로 거짓이 인류를 휘어잡고, 우수한 과학자들도 그것에 휘들리는 일이 있다. 예를 들어, 16세기에는 천동설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어서 대천문학자 티코 브라헤조차 죽을 때까지 천동설을 믿고 있었다. 18세기에는, 뛰어난 과학자인 프리스틀리가 불에 대한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된 후에도 완강히 고집하고 있었다.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사고 방식을 버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인류는 항상 불의 정체에 대해 고민해왔다. 불은 원소의 하나라고 오랜 옛날부터 믿고 있었다. 물질이 타는 것은 불과 같은 프로기스톤이라는 신비적인 물질이 발산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구도 프로기스톤을 보거나, 만지거나, 냄새를 맡아보거나, 무게를 달아보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기묘하게도 프로기스톤의 존재를 믿고 있었다. 그런데, 만약 프로기스톤이 존재하고 있어서 물질이 탈 때에 그 물질이 프로기스톤을 발산한다면, 그 물질은 타고 나면 그 이전보다도 가볍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물질 이 타고 난 후 무게가 가볍게 되지 않고 오히려 무겁게 된다고 생각해보자. 그렇게 되면 인류의 다른 많은 오류와 함께 프로기스톤 역시 역사의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 지고 말 것이다. 이 프로기스톤 설을 최종적으로 폐기한 사람은 프랑스의 젊은 법률가 A.L. 라부아지에였다. 그는 다른 많은 젊은 법률가들처럼 사건 의뢰인들이 별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심심풀이로 파리 대학의 화학 강의에 출석하고 있었다. 교수는 둔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조수 G. 르엘이 나타나면 강의실 전체가 활력을 찾곤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르엘은 화학에의 열정으로 학생들을 몰입하게 만들고, 흥분한 나머지 조끼와 넥타이, 그리고 머리에 쓴 가발까지도 벗어던져 버리곤 했다. 한 번은 실험 중에 화상을 입기도 했다. 이러한 르엘의 정열은 라부아지에게 법률을 단념하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라부아지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화학자가 되었다. 1772년에 그는 프로기스톤 신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연소하는 물질은 무게를 잃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련의 능숙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는 일정한 양의 주석을 넣은 다음 밀폐한 용기의 무게를 쟀다. 주석을 태운 후, 그는 다시 그 용기와 내용물의 무게를 쟀다. 무게는 정확히 똑같았다. 용기를 열자 그 안으로 공기가 쉭 하고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연소한 주석을 옮겨서 그것을 천칭에 걸었다. 연소한 주석은 처음의 주석보다 무거워져 있었다. 이번에는 인, 유황, 납 등 다른 물질에 대해서 똑같은 실험을 해보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나 무게가 늘어나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분명한 사실이야. 물질은 연소할 때 프로기스톤이나 다른 어떤 것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엇인가를 획득하고 있어." 프로기스톤 설은 이제야 프톨레마이오스의 투명한 천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완전무결한 태양처럼 사멸해 버리게 된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오랫동안 감추어져 있던 비밀을 드러내 보였다. 이제 새로운 진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는 스스로 품게 된 의문에 답하고 결국 연소의 신비를 해결하게 된다. '연소된 물질은 왜 그 이전보다 더 무거워지는 거일까?' 갑자기 용기 안으로 밀려들어가던 공기가 생겨났다. '아, 바로 그거야! 공기가 처음의 주석에 무게를 더해 준거야. 금속은 새로운 물질을 만들기 위해 공기의 일부와 결합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공기 중의 어느 것과 결합한 것일까?' 알 수가 없었다. 마침 프리스틀리의 업적에 대해 듣고 있던 그는, 자신이 명확하게 알지 못했던 부분이 조각 그림의 한 조각 한 조각이 완전히 맞춰지듯 해명되는 것을 느꼈다. 주석과 결합한 것은 프리스틀리가 말한 기체였다. 라부아지에는 이미 이 새로운 기체의 이름을 생각하고 있었다. '산소', 이것이 그가 붙인 이름이었다. 그는 프리스틀리에게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자신이 불의 비밀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연소는 임의의 물질에 그것이 나무나 종이나 주석, 그 밖의 다른 어떤 것이든 간에 산소가 화학적으로 첨가되는 것이다." 라부아지에의 이 대발견은 프리스틀리의 선구적인 작업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라부아지에는 모든 명예를 혼자서 독차지한다. 프리스틀리는 어처구니없게도 프로기스톤이라는 궁지에 빠져서 연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승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쥐와 양초와 황제 병 안에 불이 붙은 양초를 넣고 뚜껑을 덮으면 불은 꺼져 버린다. 쥐를 집어넣은 용기에 뚜껑을 덮으면 쥐는 죽고 만다. 양초가 꺼지는 것과 쥐가 죽는 것은 같은 이유일까? 라부아지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습니다. 양쪽 모두 산소를 다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양쪽 모두 같은 방법으로 산소를 사용하고 있다. 산소는 양초의 밀랍과 결합하는 것처럼, 동물이 먹는 음식물과도 결합한다. 이 경우에는 모두 열이 발산된다. 산소와의 결합은 단순히 연소할 때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물체의 체내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라부아지에는, 생명은 불과 마찬가지로 화학 반응에 의지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라부아지에는 공기에 대해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직 공기의 성분을 알지는 못했다. 산소는 공기의 일부일 뿐, 공기의 모든 것은 아니라고 그는 확신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는 것일까? 공기의 구조를 알기 위해, 그는 보통의 공기가 50세제곱인치만큼 들어간 S자형의 레토르트(retort:화학 실험 기구)에서 수은을 태워 보았다. 12일이 지난 후, 그는 불을 끄고 레토르트를 냉각시켰다. 그는 다시 공기의 부피를 재보았다. 체적은 불과 42세제곱인치로 줄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 기체는 분명히 산소가 아니었다. 그 기체가 들어 있는 용기에 들어간 동물은 금방 죽어 버렸고 양초의 불은 꺼졌다. 이 기체는 오늘날 질소라고 부르는 기체였다. 8세제곱인치의 공기가 사라져 버렸다.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라부아지에는 없어진 기체는 산소이며, 그것은 수은의 산화물을 만들기 위해 불탄 수은에 의해 흡수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어떻게 이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까? "그것은 수은의 산화물에서 원래의 산소를 되찾으면 될 것이다." 그는 수은의 산화물에 기체를 추출해서 정확하게 산소 8세제곱인치를 얻어냈다. 그것은 분명 산소였다. 그것이 들어 있는 용기에 들어간 쥐가 이리저리 뛰어다녔고 양초가 환하게 불탔기 대문이다. 라부아지에는 이 실험을 완성하기 위해 산소와 질소를 혼합시켰다. 그러자 그가 실험을 시작했을 때와 같은 50세제곱인치의 공기가 만들어졌다. 이 유명한 실험에서 라부아지에는 공기가 두 가지의 주요한 기체인 질소와 산소가 5대 1의 비율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제 그는 열역학에서 가장 중요한 원리의 하나인 '물질 불멸의 법칙'(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표할 준비가 되었다. 이 법칙은 '화학 변화에 관계한 물질 전체의 무게는, 설령 어떤 일이 잇다 해도, 변화가 일어나기 이전이나 이후나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라부아지에는 주석을 이용한 실험에서, 용기 안에 집어넣은 주석은 그 주석을 가열하기 전이나 그 후나 전체 용량의 무게는 동일했다. 공기의 합성에 관한 실험에서, 산소와 질소의 총량은 그 실험을 시작했을 때의 공기의 양과 동일했다. 우리들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창조할 수는 없으며 또 존재하는 것을 무(無)로 돌려버릴 수도 없다. 유럽에서는, 적어도 자신만큼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을 무로 돌릴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란시스 1세(1708__1765년)였다. 그는 과학에 관심을 갖고 있었고, "영국 학사원"의 창립에 도움을 준 찰스 2세처럼 타고난 과학자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물질을 소멸시킬 수 있다. 실제로 나는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단단한 다이아몬드를 사라지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의 가장 귀중한 다이아몬드를 항아리에 던져 넣고 뜨겁게 가열했다. 그것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 짐이 말한 대로다." 황제는 자신 있게 소리쳤다. 그러나 황제가 죽고 수년이 지난 후, 라부아지에는 직접 실험을 해보았다. 우선 그는 공기가 없는 장소에서 다이아몬드를 태워 보았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타지 않았다. 이제 그는 필요한 실마리를 잡은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밀폐된 용기에 산소를 가득 채우고 다이아몬드를 불태웠다.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다이아몬드는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황제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무엇인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이산화탄소였다. 라부아지에는 냉정하게 설명했다. "다이아몬드는 목탄과 비슷합니다. 불이 붙으면 공기 중에서 산소와 함께 이산화탄소가 됩니다. 황제는 훌륭한 지배자셨는지는 모르지만 훌륭한 과학자는 아니었습니다. 황제는 다이아몬드 역시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없어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다만 변화될 수 있을 뿐입니다. 황제께 특별히 그것을 말씀드리지 않아도, 질량 보존의 법칙에 대한 증명을 말씀드리면 훨씬 잘 이해가 될 것입니다." 물은 다만 H2O일 뿐, 나무가 아니다 라부아지에는 불과 공기의 성질을 분명히 밝혀냈다. 그렇다면 물은 어떤 것일까? 물은 고대인들이 말한 것과 같은 '원소'가 아닌가? 17세기의 화학자들에 의하면, 물은 몇 가지 매우 신비한 성질을 갖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의사였던 J. 판 헬몬트는, 물이 나무로 변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실험을 했다. 그는 무게 5파운드(2.27kg)의 어린 버드나무를 200파운드(90.8kg)의 흙 안에 심었다. 그는 참을성이 많아 해마다 이 작은 나무가 서서히 자라는 것을 지켜보았다. 이 나무에 물만 준 지 5년이 지났다. 그는 흙의 무게를 재어 보았다. 무시해도 좋을 양만 줄어들어 있었다. 그러나 성장한 나무의 무게는 170파운드(77.18kg)에 달했다. 그렇다면 늘어난 165파운드(74.91kg)는 대체 어디서 유래한 것일까? 판 헬몬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나무에 물만 주었다. 그러니 물이 나무로 변한 게 분명하다." 이 실험은 조심스럽게 행해진 것으로서 화학 사상 가장 장시간에 걸친 실험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아무리 주의 깊게 실험을 한다고 해도, 모든 사실을 종합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틀린 결론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판 헬몬드는 5년간에 걸쳐 버드나무가 이산화탄소라는 또 다른 물질을 흡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녹색의 풀처럼 나무가 공기 중에서 이산화탄소를 섭취해서 성장한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 그루의 나무는 이산화탄소를 사용해서 영양분을 만들어내는 화학 공장이다. 물에 대한 또 다른 통속적인 신화의 하나는, 물이 흙으로 변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도 실험에 마찬가지로 실험에 의해 지지 받았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물이 끓어서 없어지고 나면 그 용기 아래나 옆쪽으로 무엇인가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약간의 흙이 아닌가! 자, 이것으로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것이야. 이는 물이 흙으로 변했다는 명백한 증거가 아닌가?" 라부아지에는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물이 흙으로 된다는 생각에 반론을 가했다. 그는 주의 깊게 어떤 양의 물의 무게를 재고, 그 물을 플라스크에 넣었다. 그리고 물을 끓이고 그 수증기를 제2의 플라스크에 통과시켰다. 그 플라스크에서 수증기는 냉각되고 다시금 물이 된다. 그런데 첫 번째 플라스크의 옆면에 소량의 흙 찌꺼기가 붙어 있어서 그 흙의 무게를 쟀다. 그러고 나서 제 2의 플라스크에 있는 물의 양을 재보았다. 그 무게는 최초의 물의 무게보다 약간 감소해 있었다. 어느 정도냐? 흙찌꺼기의 무게와 정확히 일치했다. 물은 흙으로 변한 것이 아니다. 흙 찌꺼기는 처음부터 물 속에 용해되어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이었다. 이제 물에 대한 몇몇 미신이 타파되었지만 아직도 중요한 문제가 한 가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물은 원소인가?'라는 것이었다. 1784년, 영국의 화학자로 수소를 발견한 H. 캐번디시가 "영국 학사원"에 다음과 같은 기묘한 경험을 보고해왔다. '공기와 수소의 혼합물 안에 전기 불꽃을 넣었습니다. 그러자 폭발이 일어나고 용기 안이 이슬로 덮였습니다. 그것을 맛보니 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용기에 남아 있던 공기의 양을 재보니 최초의 공기보다 약 5분의 1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물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인지 불가사의하게 생각되었습니다만, 그것을 알아낼 수는 없었습니다.' 캐빈디시는 자신이 답을 찾을 수 있는 실마리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다시 라부아지에는 다른 사람의 연구에서 힌트를 얻어 그것을 일보 전진시킬 수 있었다. 라부아지에는 이렇게 말했다. "캐번디시의 실험에서 없어져 버린 5분의 1의 공기는 산소였습니다. 그것은 수소와 화합해서 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없어져 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물을 만드는 것이 수소와 산소라는 두 가지 기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물을 분석해서 무엇이 나오는지 알아보아야겠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을 증기로 만들어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 위로 통과시켰다. 그러자 수증기는 없어지고 그 대신 수소와 산소를 얻을 수 있었다. 물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두 가지의 원소가 화합한 것이었던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과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단순히 사물의 구조에 대한 오래된 신화를 허물어 버렸을 뿐만 아니라 화학을 건전한 과학적 기초 위에 올려놓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실험할 때는 무게와 부피를 주의 깊게 확인하십시오." 그는 현대 화학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지만, 그 중 몇 가지의 발견은 프리스틀리나 캐번디시와 같은 과학자들의 선구적인 업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도 뉴턴처럼, '만약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멀리 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다른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가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라부아지에의 업적은 분명 '화학 혁명'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화학 혁명이 일어난 바로 그해에 실험실의 바깥에서 또 하나의 혁명,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죄도 없이 징세 청부인이라는 직함 때문에, 1794년에 길로틴에 목을 올려놓아야만 했다. 프랑스의 대수학자 J.L.라그랑주는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한 순간에 라부아지에의 목을 날려 버렸지만, 그런 머리를 만드는 데는 한 세기가 걸려도 충분치 않을 것이다." 기계의 등장 과학자들이 실험실에서 흙과 공기, 그리고 불과 물의 비밀을 파헤치려고 연구하고 있던 한편에서, 다른 사람들은 일터나 광산에서 매우 실용적인 문제들을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증기를 사용해서 엔진을 움직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옷을 값싸게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광산에 괴어 있는 물을 퍼낼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말 없이도 움직이는 것을 만들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은 증기 기관과 기관차, 방적 기계, 그리고 다른 여러 기계를 만들어서 인류의 생활 양식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발명가와 기술자들이었다. 18세기에 사람들의 생활과 노동 방식에 일어난 대변화는 '산업 혁명'이라고 불리고 있다. 18세기 이전의 사람들은 대부분 작은 촌락에서 살았고, 가재 도구는 가정에서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들이 만든 것 중에서 사용하지 않은 물품은 모두 지방의 시장에 가져갔다.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오두막집에서 자신의 일을 했다. 동물을 제외하고 그들이 이용할 수 있었던 동력원은 풍차와 수차뿐이었다. 증기 기관의 등장과 함께, 가정보다도 공장에서 상품을 만드는 쪽이 훨씬 값싸게 되었다. 손님들은 이미 수공업자들의 오두막집으로 가지 않고 고장이라든가 제작소로부터 상품을 사게 되었다. 오두막집에 사는 사람들은 할 수 없이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거기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한 처마에서 공동으로 일했다. 그들은 고향을 떠나 더럽고 연기 자욱한 도회지로 이주해 와서, 근처에 모여 살면서 새로운 일을 했다. 새로운 기계의 시대 이전에는, 신발을 만들거나 옷을 짓는 것과 같은 일은 수년간에 걸친 훈련이 없으면 안 되는 숙련 노동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에 의한 노동의 대부분은 숙련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만큼 임금은 매우 맞아서, 가족을 기아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전가족이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여섯 살 정도의 어린아이들도 광산안 방앗간에 고용되어, 때로는 아침 7시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만 했다. 인구의 급격한 증가는 한 나라가 산업화될 때면 늘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날 전 세계는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직면해 있는데, 이것은 18세기의 산업 혁명으로부터 이어받아온 것이다. R.베이컨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 같은 과학자들은 기계의 발명이 인류에게 보다 나은 생활을 가져다 줄 날을 꿈꾸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있어서 기계의 등장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훨씬 재미있고 편안하게 만들었지만, 반면 더욱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에게 큰 고통도 가져다주었다. 그때 이후, 우리들은 과학만으로는 사람들을 건강하게도 행복하게도 만들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것은 우리들이 과학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가에 달여 있는 것이다. 인간이 증기를 동력화하다. 아주 먼 옛날, 알렉산드리아의 헤론이라고 하는 재주 많고 유능한 기술자는 증기의 강력한 힘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서운 에너지를 인간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려면 어떻게 다루어야만 할까? 1712년 에 영국의 Th.뉴커먼은, 증기로 움직이는 최초의 실용적인 엔진이자 최초로 실용화된 피스톤 기관인 대기압 양수기관을 만들었다. 그것은 갱의 물을 퍼올리기 위한 장치였다. 뉴커먼은 엔진의 실린더에 증기를 지나게 하는 방식을 고안했다. 증기는 그곳에서 냉각된다. 증기는 냉각됨에 따라 압축되어 물로 된다. 물은 증기보다도 훨씬 작은 공간을 점하기 때문에 실린더에서는 압력이 떨어져 피스톤이 내려간다. 피스톤의 상하 운동은 갱에 괴어 있던 물을 퍼내는 펌프를 작동시킨다. 그런데 뉴커먼 기관의 불편한 점의 하나는 증기병을 열고 닫고 할 때 언제나 누군가가 옆에 서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어떤 똑똑한 증기병 담당 소년이 병전체를 하나로 잇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래서 전체 병을 한 사람이 개폐 할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최초의 오토메이션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 소년은 기계 스스로 일을 알아서 함 수 있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나 광산 주인은 소년의 일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년에게, "넌 게으름 피우고 싶어서 그런 장치를 발명했을 거야"라고 말하며 해고해 버렸다. 뉴커먼 기관은 영국의 주석과 석탄 광산에서 50년 이상 사용되었다. 석탄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 소시를 들으면서. 1770년의 어느 일요일 오후 J.와트에게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 대학에 근무하는 기계공이었는데, 뉴커먼의 증기 기관 모형을 수선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이 뉴커먼 기관은 굉장히 많은 열을 소비한다. 실린더를 가열하고, 다음에는 냉각하고, 또 가열한 다음 다시 냉각한다. 이런 식으로 가열과 냉각을 몇 번이고 반복하는데, 이래서는 증기가 낭비되어 효율이 나쁘다. 어째서 증기 기관에는 두 가지 용기, 항상 고온을 유지하는 실린더와 냉각 상태를 유지하는 증기 응축기가 없는 것일까?' 이 착상에 따라서 와트는, 뉴커먼이 필요로 했던 연료의 4분의 1만으로도 충분히 작동하는 증기 기관을 제작했다. 이 새로운 증기기관은 즉시 이전의 증기 기관을 광산에서 몰아냈다. 더구나 와트가 이 새로운 증기 기관을 다른 분야에서 적용하는 데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적용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된 부분은 공장에서 직기를 움직이는 일이었다. 와트가 장치를 사용하면 그 목적은 곧 달성될 수 있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 장치에는 안전 특허권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고안한 '태양 행성 전도 장치'로 알려진, 몇 개의 바퀴를 부착해서 피스톤 운동을 회전 운동으로 변환시키는 방법을 썼다. 증기 기관은 이제는 아주 무거운 기계까지도 운전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장은 급속히 증가했다. 영국에서는 증기력을 이용한 직기가 20년도 지나지 않아서 2,500대에서 10만 대로 비약적인 증가를 했다. 잊혀진 사람 와트가 증기 기관을 만든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증기 기관은 광산에서 물을 푸는 데 이용되고, 제본소나 공장에서도 사용된다. 그렇다면 철도 위에서 차를 잡아당겨 달리게 하지는 못할까?" 철도 위에서 동물이 차를 끄는 방식은 18세기에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았다. 미국에서 최초의 철도 가운데 하나는 중력식 도로라고 불렸다. 그것은 탄갱에서 퍼낸 석탄을 실은 짐차가, 강의 거룻배까지 궤도를 따라 미끄러져 떨어지게 되어 있는 것이었다. 다음에 돌아올 때는, 몇 마리의 말이 빈 짐차를 광산까지 끌어올렸다. '짐차에 말을 태우면 어떻게 될까?' 어느 발명가가 생각해 냈다. 그 말은 발판을 밟아 수레바퀴를 돌렸다. 이 기발한 생각으로 20명의 승객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그래도 말을 승객으로 환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으리라. 또 한 사람의 발명가는 차의 마스트 위에 올라가 풍력을 이용했다.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해서 차가 속력을 내고,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반대 방향에서 돌풍이 불어오기라도 하면, 차도 승객도 화물도 마스트도 모두 뒤집혀져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 실제로 증기를 이용해 달린 최초의 기차는, 1769년에 프랑스에서 N.J. 퀴뇨에 의해 건설되었다. 이 기차가 가진 단 하나의 결점은, 기차가 한숨 돌리기 위해 2,3분씩 자주 정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기차의 속도는 발이 불편한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도 빠르지 않았다. 바다를 건너 영국에서는 R.트레비식이 여러 궁리를 한 끝에 1808년에 증기 기관차가 승용차를 끄는 실험에 성공했다. 이 무렵, 다른 발명가들은 증기의 힘을 이용하는 소형 선박을 건조하는 꿈을 꾸고 있었다. 미국 독립전쟁 중에, 미국의 발명가 J.휘치는 소형 증기선의 건조에 성공했다. 그는 이 소형선의 양측에 6개씩 노를 달았다. 증기 기관이 움직이면 그 힘으로 노가 수면에서 물 속을 휘저으면서 회전하여 증기선을 움직이게 한다. 노를 젓는 손이 없이, 바퀴가 12개의 노를 돌려 배를 움직여가는 것은 놀라운 광경이었음에 틀림없다. 더구나 이 기묘한 소형선은 정지하지 않고 약 65km나 항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증기 기관의 도움으로 수상 수송이 가능하다는 것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휘치의 연락선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휘치는 자신의 발명을 프랑스에 팔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프랑스는 혁명으로 어수선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망한 휘치는 그 계획서를 미국 영사 R.리빙스톤에게 맡겼다. 영사는 그 계획서를 당시 프랑스에서 공부하고 있던 젊은 예술가에게 빌려주었다. 이 예술가의 이름은 로버트 풀턴이었다. 그는 미국에 귀국해서 몇 년 지나지 않아 증기선 클래몬트 호를 건조하고, 뉴욕에서 허드슨 강을 거슬러 올라가 올바니에 이르는 240km의 처녀 항해를 시도했다. 1807년 8월의 처녀 항해이래 계속 인기를 누려 왔던 이 증기선은, 곧 미국과 유럽의 이곳 저곳에 있는 강을 오르내리게 되었고 그것을 타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오늘날, 증기선을 최초로 발명한 사람이 J.휘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R.풀턴이 증기선의 발명자로 명성을 날리는 한편 휘치는 잊혀져 버렸다. 과학 기술사에서는 한 사람만이 발명, 발견의 명예를 누리지만, 사실 그 명예는 그 한 사람만이 누려야 할 것이 아니며 많은 부분이, 아니 거의 전부가 다른 사람들이 이루어 놓은 업적의 도움이 없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명예인 것이다. 과학 기술의 업적은 과거의 업적을 기초로 해서(비판도 포함해서)튼튼하게 구축되어 온 것이다. 로켓 호와 영리한 난쟁이 호, 그리고 말 증기선이 미국과 유럽의 강과 호수에서 사람들과 화물을 운반하고 있을 때, 양대륙의 발명가들은 계속해서 실용적인 기관차를 제작하려 하고 있었다. 영국의 탄갱 기관부의 아들인 G.스티븐슨은 나무랄 데 없는 최초의 기관차를 수공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기관차는 많은 석탄을 사용했기 때문에 기관차보다도 말을 사용하는 편이 비용이 덜 들었다. 게다가 그 기관차의 속도는 1시간에 4.5km밖에 되지 않았다. 그러나 1830년에 그는 최초로 성공한 기관차 '로켓호'를 만들었다. 그것은 1시간에 약 58km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그해 9월15일에는 정규 철도 노선이 리버플과 맨체스터 사이에 개통되었다. 비슷한 무렵, 미국에서는 P.쿠퍼가 '영리한 난쟁이 호'라고 이름을 붙인 기관차를 제조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발명가들은 필요한 도구나 재료를 쉽게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자기 주위에 있는 것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리한 난쟁이 호 역시 잡동사니를 긁어모아 만들어졌다. 엔진은 2개의 구식 마스켓 총을 보일러에 붙인 것이었다. 그 보일러의 높이는 약 1.5m이고 폭은 50cm 였다. 임시방편이었던 것이다. 영리한 난쟁이 호는 36명의 승객이 탄 차를 끌 정도의 힘이 있었다. 역마차 주인들은 철도 때문에 실업자가 되지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그들은 역마차가 증기 기관차보다도 빠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P.쿠퍼에게 그의 영리한 난쟁이호와 큰 말 한 마리가 끄는 역마차를 경주시켜 보지 않겠냐고 도전해 왔다. 그 경주는, 상당한 구간은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했지만, 결승 지점에 가까이 가서 영리한 난쟁이호가 고장이 나버려 마차가 승리하게 되었다. 역마차의 주인들과 그 친구들은 승리를 외치며 박수를 쳐 댔다. 증기가 물을 퍼 올리고, 옷감을 짜고, 작은 배를 운행하는 것과 같은 것은 괜찮은 일이다. 그러나 어떻게 증기와 말이 경주할 수 있단 말인가? 더구나 증기의 힘으로 차가 땅 위를 달리다니!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쿠퍼도 힘을 되찾게 되었다. 왜냐하면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모호크--허드슨 철도가 올버니 시와 스케넥터디 시 사이를 운행했기 때문이다. 미국에 철도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0년 사이에 미국의 동부와 서부에 있는 도시들이 철도로 연결되었다. 바다와 육지에서 공장과 광산에서, 주전자의 주둥이에서 흘러나오는 증기의 물결이 세계인의 생활과 노동 방법을 크게 변화시켜 가고 있었다. 증기가 가져온 변화를 주구나 다 축복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 후에 여러 번 나타나는 것처럼, 새로운 발명이 많은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렸기 때문이다. 역마차나 운하용 배, 그리고 짐마차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직업을 잃어버렸고, 많은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큰 바퀴를 단 포장마차의 마부들은, 전에는 씩씩한 모습으로 번쩍거리는 리본을 한 말에게 채찍을 휘두르며 미국의 수송품의 대부분을 날랐지만, 이제 그들은 슬픈 듯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 옛날에는 우리들도 말을 거느리고 돈벌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기차가 보든 것을 레일 위에서 나르고 있다. 악마여, 기차를 발명한 사람을 모두 잡아가라. 나와 불쌍한 짐차, 그리고 친구들을 버려 놓았으니..." 램포드 백작--행운의 군인 증기력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과학자들은 에너지에 대한 연구로 돌아섰다. 와트의 엔진을 움직이게 한 증기를 만든 것은 대체 무엇일까? 분명 열이다. 그러면 열이란 무엇인가? 18세기의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도 소박한 것이었다. '열이란 칼로라 부르는 유체이다. 뜨거운 것과 차가운 것의 차이는, 뜨거운 것이 칼로리를 갖고 있다는 점에 있다. 이 신비한 유체가 뜨거운 물체에서 스며 나와 차가워진다.' '바보 같은 생각이군' 이런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B.톰슨 말고는 모든 사람이 그렇게 믿고 있었다. 톰슨은 개성이 강한 과학자였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 전에 매사추세츠 주의 자은 마을에서 가난한 부모 밑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교사로 일했지만 오래 계속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준수한 용모와 큰 키에 조숙했던 그는 멋진 옷을 사 입고 펜싱과 춤을 배워서, 열 아홉 살에 부호의 미망인과 결혼을 했다. 독립 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즉각 애국자 인양 영국 정부측 왕당파의 장교가 되었다. 더구나 영국 측과 접촉이 금방 어울러져서 영국의 스파이와 비밀 대리인으로서 활동했다. 미국 전선은 그에게 좋지 않은 사태로 진전되어 갔기 때문에, 그는 영국으로 도망가서 영국 왕의 명령으로 영국군의 물자 구입을 맡게 되었다. 톰슨은 자기 돈지갑을 볼록하게 만들 기회를 놓칠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그가 받은 뇌물은 수십만 달러에 달했다. 전쟁 말기에 그는 뇌물이 아닌 다른 무제 때문에 중대한 곤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영국에 고용되어 있던 기간 내내 다른 한편으로 프랑스의 스파이로서도 일하고 있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었다. 그는 도망가려고 했지만 영국은 그를 체포하여 독일의 바이에른 공의 궁정에 스파이로 잠입할 것을 약속할 때까지는 풀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출발하기 직전에 오해가 풀렸고, 조지 국왕은 그에게 기사의 칭호를 부여했다. 톰슨은 의기양양하게 바이에른에 도착해서는, 자기가 고귀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미국에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 그의 딸이 바리에른 공의 일가 중 한 사람으로부터 청혼을 받자 그는 성을 내고 거절했다. 그 이유는 군인인 그 청년의 계급이 별로 높지 않다는 것이었다. 바이에른 공은 자신의 궁정에 이런 유명인이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그를 백작으로 칭하고 군부 대신으로 임명했다. 그때부터 톰슨은 자신을 램포드 백작이라고 불렀다. 미국이 변절자로서 영국의 스파이였던 그는, 이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의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톰슨은 단 4년만에 상당히 많은 적을 만들었다. 그래서 다시 바이에른을 떠나 영국으로 돌아와, 거기에서 남은 여생을 보냈다. 이런 인생을 산 사람이 과학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긴 주인공이라고는 어느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톰슨은 동시에 훌륭한 과학자이기도 했다. 과학자도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다. 그러므로 과학자는 갈릴레이처럼 위대한 영웅이기도 하며, 또 때로는 톰슨처럼 재산을 탐하는 욕심쟁이 변절자 군인이기도 했다. 톰슨은 돈과 직위에 대해 강한 욕망을 갖고 있으면서도, 가정용 증기 난방이나 커피포트 그리고 무연 난방 시설을 발명하기 위해 시간을 쪼갰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열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었다. 톰슨은 바이에른의 군부 대신으로서 대포의 제작을 담당하고 있었다. 1798년의 어느 날, 그는 병기고에서 대포에 구멍 뚫는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구멍 뚫는 기계가 대포를 파 들어감에 따라 엄청난 양의 열이 발산되었다. '도대체 이 열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는 자문했다. 칼로리 설에 의하면 열은 대포에서 유출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대포 안에 있는 열은 점점 더 적어지고 결국에는 대포도 차갑게 될 것이다. 그러나 대포는 차갑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뜨겁게 되었다. 그러니 어떤 방법으로든 열이 밖으로부터 체포 안으로 역류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톰슨은 물이 들어 있는 상자 속에 대포를 넣어 다른 것으로부터 차단시켰다. 그리고 대포 안에 다시 구멍 뚫는 기계를 넣었다. 1시간이 지났다. 톰슨은 물 속에 온도계를 넣었다. 온도는 화씨 107도였다. 1시간 20분 후에는 200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10분 후에는 물이 끓었다. 그 열은 모두 외부와는 아무 관계도 없이 일어난 것이었다. 아니, 이게 웬일인가! 톰슨은 이렇게 말했다. "대포에 구멍 뚫는 기계에서 나오는 열량은 끝이 없다. 구멍 뚫는 기계를 영구히 회전시키면 열은 영원히 계속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끝이 없다는 것은 유체처럼 실체적인 물질에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열은 물질이 아니다. 그렇다면 열은 대체 무엇인가? 나는 열이 운동의 한 형태라고 믿는다. 구멍 뚫는 기계를 회전시키는 에너지가 우리들이 열로 느끼는 에너지로 변환되는 것이다." 톰슨의 실험은 물질의 핵심에까지 정확하게 들어갔다. 그 실험들은 칼로리가 고대 프톨레마이오스의 천구와 마찬가지로 상상의 산물이고, 열은 운동에서 생기는 에너지의 한 형식이라는 것은 나타내 주었다. 폭포수는 얼마나 따뜻할까? "폭포수는 얼마나 따뜻할까?"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어디 있어?"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고요한 강물보다 따뜻하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지." 그러나 19세기 영국의 과학자 J.P.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과학자는 언제나 상식을 승인하지는 않는다. 톰슨의 열과 운동과의 관계에 대한 발견은 줄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만일 톰슨이 말한 것처럼 운동이 열이라면, 움직이고 있는 것은 모두 온도의 변화를 수반할 것이다. 흐르는 물은 정지하고 잇는 물보다 온도가 높아지겠지. 그 흐름이 빠른 만큼 물도 따뜻하게 될 거야. 폭포 아래 있는 물은 정상에 있는 물보다 분명히 따뜻 할거야." 줄은 이 가설을 시험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온도계를 들고 폭포의 온도를 몇 번이고 재 보았다. 그런데 그 온도계는 폭포의 상부와 가운데 그리고 하부에 넣어 봐도 언제나 같은 온도를 나타내었다. 그렇다면 폭포 전체의 온도가 같다는 뜻일까? 줄은 중얼거렸다 "아니, 그렇지는 않을 거야. 단지 내가 사용하고 있는 온도계로는 그 차이를 발견할 수 없을 뿐이지. 정확한 실험도 측정기기가 정밀하지 못하다면 조잡한 실험이 되어버리는거야" 줄의 생각은 정확했다. 요즘처럼 감도가 좋은 온도계를 사용한다면 폭포수의 온도차를 측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만일 운동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든 열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 만약 물질 속에 있는 모든 분자의 움직임이 멈춘다면 그 온도는 절대 영도가 될 것이다. 물론 절대 영도의 상태는 이 우주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줄은 어떤 종류의 에너지가 다른 에너지로 변하는 것에 흥미를 느꼈다. 석탄을 가열시키면 열에너지가 방출된다. 그리고 그 열은 기차와 선박을 움직이는 기계적 에너지가 된다. 오늘날, 줄이 말한 폭포의 수력 에너지는 터빈을 돌려 전기 에너지로 변환되고 있다. 그리고 그 전기는 수백, 수천의 가정에 열과 빛의 형태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줄은 모든 에너지는 다른 것으로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마법에서처럼, 에너지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를 갖지만 모두 동일한 에너지인 것이다. 에너지는 소멸될 수도 창조될 수도 있다. 먹이에게 전기 충격을 줘서 잡아먹는 전기뱀장어조차 그 에너지를 창조할 수는 없는 것이다. 독일의 물리학자 H.L.F.V.헬름홀츠는 줄의 이론을 생각해 보고 에너지와 물질 사이의 관계를 알아내고자 했다. 어느 쪽으로든 그 형태를 바꿀 수는 있지만, 창조할 수도 소멸시킬 수도 없었다. 1847년, 헬름홀츠는 라부아지에의 질량 보존의 법칙에 또 다른 법칙을 추가했다. 그것은 열역학 제 1법칙으로 '자연계의 전체 에너지의 양은 일정하며 불멸한다'는 것이었다. 헬름홀츠가 살았던 시대의 과학자들에게, 질량 보존의 법칙과 열역학 제 1법칙은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것들은 자연의 모든 신비를 해결해 줄 한 쌍의 열쇠였다. 그들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인류가 훗날 원자핵 에너지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 에너지와 질량이 보존된다는 법칙에 엄청난 변화가 올 것임을. 뮈센부르크의 불가사의한 병 만일 당신이 18세기로 날아가, 당시의 과학자에게 전기는 빛을 내는 힘과 열을 내는 힘, 그리고 기계를 움직이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깜짝 놀랄 것이다. "그래, 전기는 정말 신기하지."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덧붙일 것이다. "유리 막대를 문지르면 정말 재미있는 일이 생기거든. 먼지나 새털, 그리고 머리카락을 끌어올릴 수 있으니까 말이야. 또 친구를 속여 뮈센부르크의 신기한 병에 손을 대게 해서 쇼크를 주거나 하면 참 재미있지. 하지만 전기가 엄청난 힘을 낸다니...그건 말도 안 돼! 여보게, 그런 일은 미래를 약속해 주는 증기가 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과학자가 이런 말을 한다고 해서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18세기의 전기는 단지 과학적 호기심을 자아내는 일밖에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전류에 감추어진 엄청난 에너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었다. 16세기의 물리학자로서 G.브루노의 사상을 영국에 소개한 W.길버트는 전기를 연구한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인의 실험을 생각해 내서, 호박 조각을 비단에 문지르면 종이가 그 호박에 찰싹 달라붙는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구리나 은 같은 것은 비단에 문질러도 잡아당기는 힘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버트는 두 종류의 물질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하나는 호박이나 유리처럼 전기를 전달하지 않는 절연체이고, 다른 하나는 전기를 쉽게 전달하는 구리와 은 같은 전도체이다. 17세기에 공기 펌프를 발명한 독일의 O.V.게리케는, 마찰을 기계적으로 일으켜서 전기를 발생시키는 기구를 만들었다. 그것은 유황으로 만든 공의 중심에 철재로 만든 축을 통과시키고, 축이 회전함에 따라 같이 회전하는 유황공에 건조한 털을 접촉시켜 전기가 발생하도록 한 것이었다. 마찰한 공에 종이나 새털처럼 가벼운 물체를 가까이 가져가면 통통 튀어 오르거나 달라붙곤 하였다. 또 마찰한 공에 손가락을 가까이 대면 불꽃이 튀고 작은 소리도 들렸다. 다시 말해서, 그는 전기 현상을 최초로 연구한 사람 중 하나로, 전기를 상업적으로 생산한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전기로 충격을 주는 장난이 유럽에서는 인기 있는 일종의 실내 오락이 되었다. 사람들은 손을 잡고 길게 사슬처럼 연결하여, 전기 충격이 어디까지 전파되는지 시험해 보려고도 했다. 그들은 이 장난감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지 못하고 있었다. 18세기 중반에 P.V.뮈션부르크는, 네덜란드의 고향 마을 라이덴의 이름을 딴 라이덴 병을 발명했다. 그것은 물은 넣은 병이었는데, 그 안에는 게리케의 기전기에서 끌어온 전기선이 들어 있었다. 그 병에 접촉하면 충격을 받았다. 그런데 병 주위에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기전기와 병의 접속을 끊고 병을 어느 정도 멀찍이 떼어놓아도, 쇼크를 주는 힘이 여전히 지속된다는 것이었다. 라이덴 병은 최초의 축전기였다. 뮈센부르크는 또한 굉장한 전기력을 체험한 최초의 실험자이기도 했다. 어느 날 한쪽 손으로 라이덴 병을, 또 다른 손으로 철봉을 쥔 그는 갑자기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쇼크를 받았다. 길버트와 폰 게기케, 그리고 뮈센부르크의 발명은, 18세기에 있었던 B.프랭클린의 유명한 연날리기 실험에 이르기까지, 전기에 대한 모든 지식을 대표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늘에서 번개를 빼앗다. 어느 날 오후, 필라데피아의 시민은 아주 유명한 사람이 연을 겨드랑이에 살짝 끼고, 마을을 바쁜 듯 종종걸음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그는 바로 누구나 잘 알고 있는 B.프랭클린이었다. 그는 최초의 공공 도서관을 열고, 미국 최초의 소방서를 설립한 사람이었으며, 유명한 금언이 담긴 "가난한 리처드의 달력"을 출판한 사람으로서 G.워싱톤과 토머스 제퍼슨의 친구이기도 했다. 또한 그는 발명가이기도 해서, 원시 근시를 위한 안경을 발명했고, 방 전체를 훈훈하게 만들면서도 연료를 절약할 수 있는 프랭클린 식 스토브를 조립하기도 했다. 또 높은 책꽂이네 있는 책을 집은 수 있도록 특별한 장치가 붙어 있는 막대도 발명했다. 그러니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공사 다망한 사람이 이런 대낮에, 그것도 하늘에서는 폭풍우를 몰고 올 구름이 질주하고 있는 지독히 나쁜 날씨에, 아이들이 갖고 노는 연을 들고 무슨 일을 하려는 걸까? 많은 사람들은 프랭클린이 전기학에 진지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는 이 연으로 자기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시험해 보려고 한 것이었다. 고대인들은, 번개란 주피터가 천둥을 칠 때 나오는 빛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18세기까지도 사람들은, 번개를 신의 노여움을 알리는 징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프랭클린은 실험을 보려고 따라온 아들에게 말했다. "번개가 전기 불꽃에 불과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거든." 그러자 아들이 물었다.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래, 그렇단다. 아빠는 번개 때문에 건물이 파괴되는 것을 막아 보려는 계획을 갖고 있지. 이것이 최초의 실험이야." 오랫동안 연이 컴컴한 하늘에서 춤추고 있었다. 아들은 참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잖아요?"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비가 내리면 된다. 이 건조한 구름이 절연체로 작용해서 구름 안에서 충전된 전기가 번개로 되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것이란다." 갑자기 비가 내렸다. 연의 삼베로 만든 끈은 흠뻑 젖었다. 끈의 섬유는 전기가 통하면 보풀이 일었다. 프랭클린이 끈 끝에 연결해 붙인 열쇠에 가까이 다가가자 바지직 바지직 하는 소리가 나면서 충격이 전해졌다. 감전사하지 않았던 것은 신기할 정도의 행운이었다. 프랭클린이 라이덴 병 안에 하나를 넣자, 이 병은 게리케의 기전기에 접촉한 것처럼 충전되었다. 프랭클린은 하늘의 번개를 집어넣은 것이다. 이 실험은 지금까지 실시된 가장 유명한 실험 중의 하나이다. 그 이후로 이런 실험은 다시는 행해지지 않았다. 프랭클린의 실험으로 사람들은 번개의 본질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어느 누구도 번개는 주피터가 쏘아 보내는 것도, 신의 노여움의 징표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번개는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방전 현상이었다. 프랭클린은 자연의 가장 오묘한 신비 중의 하나를 해명한 것이다. 그는 매우 현실적인 과학자였다. 그러므로 발견이 인간의 일상 생활을 개선시키는 데 응용될 수 있기까지는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이제 그는 아들에게 말했던 것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실험을 통해, 글이 뾰족한 물체는 끝이 무딘 물체보다도 전기를 쉽게 끌어당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건물 지붕에 끝이 뾰족한 철봉을 고정시켰다. 그는 몇 전의 실험을 통해서 전기는 항상 지면으로 가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철봉에 땅 속으로 통하는 철사를 연결시켰다. 그러자 번개는 건물을 덮치는 대신 철봉에 이끌려 철사를 통해 땅속으로 흘러가 버렸다. 피뢰침은 프랭클린의 가장 유용한 발명 중의 하나였다. 갈바니의 개구리 만약 당신 손안에 있는 죽은 개구리가 움직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 것인가? 1780년의 어느 날, 이탈리아의 생물학자 J.갈바니가 실험실 테이블에서 죽은 개구리를 해부하고 있을 때 였다. 그의 손안에 있던 개구리가 문득 심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매우 놀랐다. 그리고, 잠시 후, 이 이상한 경련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 생각해 보았다. 그는 이 경련이 전기로 인해 생기는 것이 틀림없다고 추정했다. 그렇다면 그 전기는 어디서 온 것일까? 그의 실험실에는 라이덴 병도 기전기도 없었다. 그는 죽은 동물이나 살아 있는 동물이나 모두 특별한 동물 전기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개구리의 신경에 닿았을 때 그 전기가 방전된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A.볼타는 이것이 동물 전기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갈바니에게 말했다. "우리들이 이미 알고 있는 전기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다면, 새삼스럽게 새로운 종류의 새로운 종류의 동물 전기를 상상할 필요는 없을 것이오." 그리고 계속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동물이 없어도 실험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금속으로 만든 동전 2개와 내 혀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동전 하나를 혓바닥 위에, 다른 하나는 혓바닥 밑에 놓고, 그 2개를 철사로 연결하면 찌르르한 감각을 느낄 것입니다." 이는 가벼운 방전의 결과이다. 볼타는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당신은 그 감각이 동물 전기의 증거라고 말하겠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몸밖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자, 봅시다! 2개의 동전을 철사로 연결하고 혓바닥 대신 소금물에 적신 마분지를 사용해 봅시다. 그러면 다시 전기적 효과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는 실험을 해 보였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갈바니의 펄쩍 뛴 개구리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 것인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갈바니 씨의 칼은 금속제입니다. 또 개구리가 들어 있는 용기는 또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죽은 개구리는 마분지처럼 전류가 공급되게 해주는 역할을 한 것입니다. 2개의 서로 다른 금속이 접촉해서 개구리의 발을 경련 시킨 것입니다." 여기에서 볼타는 두 종류의 금속과 한 장의 종이가 작은 전기를 발생시킬 수 있다면, 그다지 많은 금속이나 종이가 없어도 충분히 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시사를 받았다. 그가 최초로 만든 전지는, 아연판과 동판 사이에 물에 적신 종이나 헝겊을 끼운 것을 몇 번 겹쳐 놓은 것이었다. 그리고 밑의 아연판과 위쪽의 동판을 연결하자 전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최초의 전지였다. 그 이래로 과학자들은 전신기, 전화기, 라디오, 텔레비전 등과 같이 전기에 의존하고 있는 근대의 기계를 속속 만들어 냈다. 1800년, 볼타가 최초의 전지를 만든 바로 그해에, 영국의 두 화학자 W.니콜슨과 A.칼라일은 주목할 말한 전지의 용도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연속적으로 전류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물을 전기 분해해서 수소와 사소를 분리, 추출하였다. 이것은 캐번디시가 산소와 수소를 합성해서 물을 만들었던 것과 좋은 대조가 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전지에서 따온 2개의 전선을 소금물로 채워진 병에 서서히 집어넣었다. 놀랍게도 물이 줄어들기 시작하면서 한쪽 전선에서는 산소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고, 다른 쪽 전선에서는 수소가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물은 전류에 의해 두 가지 원소로 나누어진 것이다. 라부아지에는 물을 분석하기 위해 뜨겁게 달아오른 철판을 이용했다. 그러나 이제 원소를 분리하는 데에는 약간의 전류만 있으면 충분하게 되었다. '전기 분해'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방법으로, 화학은 강력한 탐구에 새롭게 도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18세기의 과학자들은 열의 성질과 화학 변화, 그리고 전기를 연구했다. 이제 다음 100년간, 세계는 그것들에 감추어진 풍부한 힘이 해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제 7장 19세기, 전기에서 방사능으로 전류의 마술 나침반, 자석, 그리고 마이클 패러데이 우유 짜는 여자 이야기 신 포도주와 누에 달팽이, 기린, 뱀 생존 경쟁 우주는 한가족 마지막 별 저편 시리우스 성과 그 동반성 웅웅거리는 별들 만물의 시작 빅뱅(대폭발) 이론 잔잔한 수면에 돌이 던져질 때 방사능의 신비 전류의 마술 19세기가 되면서 과학 지식은 급속히 발전했다. 이미 한 사람의 과학자가 자신의 전문 분야 이외의 것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전문 분야, 즉 천문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의학 등의 어느 한 부문을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제 그들은 제한된 분야에만 전념하는 전문가인 것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B.프랭클린 같은 만능의 연구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은 그 연구 분야가 무엇이든, 모든 형식의 에너지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에 대해 진지한 흥미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W.니콜슨과 A.칼라일이 전기에 의해 화학 반응이 일어난다고 주장한 것에 자극 받았다. 광산용 안전등을 발명한 H.데이비는, "전류는 물 안에 숨겨져 있는 원소를 모두 드러나게 합니다. 아마 이것은 알려지지 않은 몇몇 원소를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1807년에, 그는 나무를 태운 재에서 나온 포타슘을 통해 전류를 흘러 보내려 했다. 그러자 갑자기 심하게 거품이 일었다. 그리고 수은처럼 보이는 작은 금속 덩어리가 표면에 떠올라 와서 화하게 불타더니 마침내는 폭발해 버렸다. 반응이 가라앉자, 병 안에는 포타슘이 아닌 타고남은 새로운 원소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칼륨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데이비는 재빨리 다른 물질에 덤벼들었다. 그리고 매우 활동적인 새로운 원소를 발견하고 그것을 전기적인 마술로 처리했다. 그는 포타슘 외에도 나트륨, 마그네슘, 바륨, 스트론튬을 발견했다. 지금은 세계 도처에서 전기 분해를 이용하여 알류미늄과 구리를 비롯한 여러 가지 가치 있는 금속을 생산하고 있다. 전기 분해를 이용해서 새로운 원소를 발견한 데이비의 눈부신 성과를 보고 과학자들은 경탄을 금치 못했다. 분명 데이비는 전기와 화학 변화를 밀접하게 연결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전기를 다른 형태의 에너지, 예를 들어 자력 등과 같은데 연결시키는 것도 가능할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은 모터, 발전기, 전신기, 전화 그리고 그 밖의 많은 장치들을 발명하는 길을 열어 주었다. 18세기는 증기의 시대였다. 그리고 19세기는 전기의 시대가 된 것이다. 나침반, 자석, 그리고 마이클 패러데이 전기와 자기는 어떤 관계에 있는 것일까? 이 의문에 대답한 과학자 M.패러데이는, 런던 근처의 시골 마을에서 가난한 대장장이의 10명이나 되는 아이들 중 하나로 자라났다. 마이클은 학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열세 살의 나이로 제본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제본소 주인을 친절한 사람이어서, 소년이 과학에 흥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영국 학사원"의 H.데이비의 강의에 출석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데이비는 곧 이 제자의 우수한 재능을 알아차리고 그를 자기 조수로 삼았다. 패러데이는 그로부터 불과 수년 안에 영국의 과학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패러데이가 전기력과 자기력에 대해 강한 흥미를 갖게 된 것은, 네덜란드의 과학자 H.외르스테드의 실험에 대해 듣고 난 후부터였다. 전기와 자기가 어떤 관련이 있으리라는 것은, 외르스테드를 필두로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이전부터 감지되고 있었다. 오르스테드는 코펜하겐 대학에서 강의하던 중에, 이 두 힘의 관계를 아주 간단한 실험으로 멋지게 보여주었다. 그는 철사에 전류를 흐르게 하고, 그것을 회전축에 장치해서 회전하는 자침 위에 놓았다. 그러자 자침은 그때까지의 위치에서 어느 한쪽으로 흔들렸다. 다음에 철사에 흐르는 전류를 반대 방향으로 흐르게 하자 자침은 다시 반대쪽 방향으로 흔들렸다. 이것은 전선 주위에 자장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성공은, 지금까지의 실험과는 달리 철사를 자침과 평행으로 놓았다는 점에 있었다. '외르스테드의 실험에서는 전류가 자기를 발생시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기도 전류를 발생시킬 수 있지 않을까?' 패러데이는 자석을 들어서 보통의 전선 코일 안에 삽입시켰다. 그가 자석을 넣거나 뺄 때마다 전류는 코일을 통해서 직접 흘렀다. 전류를 발생시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선 코일과 움직이는 자석이 있으면 충분했던 것이다. 패러데이는 전자기 유도, 득 자기에 의해 전류가 발생한 다는 것을 발견하여 근대 과학의 위대한 발견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같은 무렵, 미국에서도 또 한 사람의 위대한 개척자 J.헨리가 비슷한 발견을 하고 있었다. 헨리는 철로 된 막대에 절연시킨 전선을 몇 겹으로 감았다. 그러고 나서 전지에 그 전선을 연결시켰다. 전류가 흐르는 순간, 철 막대는 강력한 자석으로 되었다. 그 자석은 어느 정도의 무게를 들어올릴 수 있었을까? 헨리가 만든 전자석 중 하나는 약 340kg정도의 물건을, 그리고 또 다른 한 자석은 약 900kg의 무게를 갖는 물건을 들어 올렸다. 이렇게 해서 무거운 금속이나 기계를 움직일 수 있는 강력한 전자석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어서 헨리는 전자기를 또 다른 용도에 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만약 길이 2km정도의 철사를 준비한 다음, 그 한쪽 끝에 전지를 연결했다고 해보자. 단추를 누르면 전류가 철사에 흐르게 된다. 전선의 다른 한쪽 끝을 건드려 보면 전자석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전신기의 원리이다. 그러나 헨리는 그 모형만 만들었을 뿐, 전신기의 발명자가 되지는 못했다. 그는 자신의 발명에 특허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과학의 발명으로 생긴 이익은 모든 인류가 향유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헨리의 공적을 그리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헨리의 전자석을 이용해서 S.F.B.모스는 전신기를, A.G.벨은 전화기를 발명했다. 1830년에, 헨리는 다시 전자석을 또 다른 방식으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만약 전자석이 금속 조각을 움직이게 한다면, 바퀴를 회전시키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헨리는 이 착상을 이용해서 전기 모터를 만들었다. 그것은 냉동기, 재봉틀, 가정용 믹서 등 근대 생활을 쾌적하게 만든 많은 생활 용품의 핵심이 되었다. 전동기는 전기에너지를 기계가 움직이는 데 필요한 운동 에너지로 변환시켰다. 그러나 전기는 어디에서 얻을 수 있단 말인가? 분명히 볼타의 전지나 게리케의 유황 공으로 만든 기전기는 필요로 하는 만큼의 힘을 주지는 못했다. 발전기를 발명해서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바로 패러데이였다. 그는 자석의 양극 사이에 금속으로 만든 바퀴를 설치했다. 그러자 바퀴는 회전하면서 지속적으로 전류를 만들었다. 발전기의 바퀴를 움직이게 한 것은 무엇일까? 발전기의 바퀴를 돌려 커다란 전력을 만들어 낸 것은 폭포의 수력이나 증기의 화력이었다. 패러데이는 다량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길을 열었고, 헨리는 그것을 가정이나 공장에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보여주었다. 우리들의 생활과 노동하는 방식은, 모두 이 두 사람의 위대한 개척자에 의해 변화된 것이다. 우유 짜는 여자 이야기 19세기 이전 유럽과 아시아, 아니 전세계에서 가장 무서운 병은 천연두였다. 이 전염병으로 수천,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죽어 갔다. 프랑스의 루이 15세도 천연두로 죽었으며, G.워싱턴 대통령도 얼굴에 천연두 자국을 갖고 있었다. 이 병의 치료법, 혹은 예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이 병에 대해서 한 가지는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 병에 걸려도 일단 치료만 되면 다시는 앓지 않도록 면역성이 생긴다는 것이다. 영국의 의사 E.제너는 이 면역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 이렇게 생각했다. '병에 걸리지 않고 이 병으로부터 면역이 되게 하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영국의 대사 부인 M.몬터규가 터키에서 귀국했을 때, 제너는 그녀로부터 이 명의 면역에 대한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에 의하면, 터키 인 중에는 가벼운 천연두에 걸린 사람으로부터 일부러 전염되거나 환자의 발진에 있는 병균을 묻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 대부분은 가볍게 않고 끝난다는 것이었다. 몬터규 부인은 예방 접종을 해야만 된다는 생각을 확고히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이런 접종을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터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제너는 고향 글로스터셔에서 전해 내려오는 어떤 이야기가 생각났다. 이 이야기에 의하면, 소젖을 짜는 여자는 천연두에 결코 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사해 보니 이 이야기는 사실인 것 같았다.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 중에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있는 여자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사실 그녀들은 예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여자들은, 우유를 짜는 암소에서 옮아 우두라는 병이 걸렸다. 우두는 그렇게 큰 병이 아니어서 양손에 작은 발진이 생기는 정도이고, 그나마도 곧 사라져 버린다. 제너는 '우두에 접촉했던 사람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매우 위험한 실험을 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796년 그는 큰 결심을 하고, 우두에 걸린 채 젖을 짜던 여자의 손에서 분비액을 추출하여 J.휩스라는 소년의 팔을 발랐다. 2개월 후, 실험의 중대한 국면이 다가왔다. 그는 소년에게 재차 예방 접종을 시행했다. 그러나 진짜 천연두를 접종한 제너는 걱정하면서 그 결과를 기다렸다. 소년은 병에 걸리지 않았다. 소년은 면역이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너는 다른 환자들에게도 같은 실험을 반복해 보았다. 그들도 역시 면역이 되었다! 오늘날 천연두는 제너의 덕택으로 멸종했다. 이것은 하나의 병을 멸종시키는 이상의 일을 한 것이었다. 그것은 의사들에게, 많은 무서운 병에 대한 면역성을 만드는 데 인체의 방어 기능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이다. 제너의 공적을 깨달은 런던 대학에서는 그를 의학부의 교수로 초빙하려고 했다. 그러나 고대 의학자에 대한 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안 되다는 것을 알고, 제너는 깨끗이 교수직을 사퇴했다. 천연두에 대한 종두는 결핵이나 장티푸스, 황열, 소아마비 같은 병에 대한 백신 요법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신 포도주와 누에 제너는 천연두를 예방하는 방법을 발견했지만 천연두를 일으키는 원인은 발견하지 못했다. 19세기 초기의 사람들에게는, 질병 대부분의 정체가 아직 잘 이해되지 않고 있었다. 만약 누군가가 레벤후크가 발견했던 미생물이 모든 병을 설명해 준다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와 하고 웃어 버릴 것이다. 왜 그랬을까? 당시에는 누구나 미아즈마가 병의 원인이라고 알고 있었다. 늪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은 말라리아에 걸리고, 병실을 방문한 사람들이 종종 병에 걸린다는 것은 정말일까? 누구든 무엇인가 좀더 확실한 것을 알고 싶어했다. 몇몇 호기심 많은 의학자들은 환자의 혈액 안에서 미생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미생물 같은 것은 병의 결과일 뿐 병의 원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미생물과 병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환자에 대해서가 아니라 신 포도주를 해명하는 것과 함께 시작되었다. 1857년, 프랑스의 포도주 공장 상황은 매우 나빠졌다. 포도주가 놀랄 정도로 시어진 것이다. 포도원 주인들은 젊은 화학자 L.파스퇴르에게 그 원인을 밝혀 달라고 부탁했다. 파스퇴르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의 포도주는 미생물의 증식으로 오염되어 있습니다. 포도주를 화씨 120도 까지 가열하십시오. 그러면 더 시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열이 미생물을 죽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은 이 위력 있는 방법을, 파스퇴르를 기리기 위해 파스퇴르 살균법, 즉 저온 살균법이라고 부르고 있고, 지금도 우유를 순수하게 보존하는 데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로부터 수년 후, 남프랑스에서 누에를 사육하고 있던 사람들이 파스퇴르를 방문해서 누에가 죽는 이유를 해명해 달라고 했다. 그는 누에가 먹는 뽕잎에서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작은 기생충을 발견했다. 그는, "오염시키는 벌레를 다 죽이고, 병을 퍼뜨리는 잎을 불살라 버리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들이 하시는 일이 제대로 될 것입니다."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재차 물었다. "만약 포도주나 누에가 미생물로 오염된다면, 동물이나 사람들도 그럴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프랑스에서 소와 양을 죽이고 있는 탄저병이라는 유행병이 세균 때문에 발생한 것일 수도 있는 일 아닙니까?" 과학자들은 이미 이 치명적인 병으로 죽은 동물의 혈액 안에서 병원균을 발견하고 있었다. 이 병원균이 병을 일으킨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그들은 병에 걸려 병원균을 갖고 있는 양의 피를 뽑아 토끼에게 주사했다. 그 토끼는 곧 죽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보여 드리는 증거입니다." 과학자들이 말했다. "그게 아니오." 세균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반론을 폈다. "당신들은 토끼를 죽인 것이 혈액 안에 있는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세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이오?" 젊은 독일 의사 R.코흐 박사가 이 도전을 받아들였다. "이 탄저병균을 병에 걸린 동물의 혈액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배양할 수 있을지 알아보지요." 그는 레벤후크가 후춧물에서 작은 생물을 배양했던 것처럼 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탄저 병균은 후춧물에서는 배양되지 않았다. 코흐는 탄저균이 특히 죽은 암소의 눈에서 제일 잘 배양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만든 병원균 배양체는 병에 걸린 동물의 피처럼 죽어 가고 있었다. 탄저병이 세균에 의해 발병된다는 것은 이제 의심할 수 없었다. 이 지식은 매우 유용했다. 그러나 이 코흐의 발견은 파스퇴르의 해답이 나오기까지는 거의 널리 알려지지 않았었다. 1881년, 파스퇴르는 극적인 실험을 하게 되었다. 25마리의 토끼에게는 약화시킨 탄저균을 접종하고, 다른 25마리의 토끼에게는 이 균을 접종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나고 나서 파스퇴르는 모든 토끼에게 강력한 탄저균을 접종했다. 그러나 미리 약화시킨 탄저균을 접종한 토끼들은 한 마리도 병에 걸리지 않았지만, 전혀 접종을 안 했던 토끼들은 전부 죽어 버렸다. 그는 이 방법을 광견병이나 닭 콜레라에도 적용해서 성공했다. 영국의 외과 의사 J.리스터는 파스퇴르의 업적에 큰 업적에 흥미를 느끼고 그것을 사람에게 적용해 보기로 했다. 그의 환자는 수술 후에 죽는 경우가 많았다. 파스퇴르가 말한 세균이 범인인 것이 아닐까? 1860년, 리스터는 자기가 사용하는 의료 기구와 옷을 소독하고 자기 손과 환자의 피부를 깨끗하게 해보았다. 결과는 놀라울 정도여서, 병원의 사망률은 격감했다. 병의 세균설은 이미 이론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것은 단순히 많은 병의 원인을 지적하고 있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병의 예방과 치료를 목표로 하는 의학의 이정표가 되었던 것이다. 파스퇴르와 다른 세균학자에 의해 보잘것없는 미생물이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발견돼 것은, 일찍이 의학이 이루어 온 최대의 진보였다. 과거의 의사들은 환자를 치료할 때 미신과 일반적인 상식에 의지하고 있었다. 이제 의사들은 병실 안에 과학적인 실험 방법을 갖고 들어올 수 있게 되었다. 달팽이, 기린, 뱀 이 지구에 있는 산, 평야, 바다,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은 대체 어떻게 해서 나타나게 된 것일까? 옛날 사람들은 이것에 대해 매우 간단한 해답을 갖고 있었다. '세계와 만물은 약 6000년 전에 6일 동안에 걸쳐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19세기의 과학자들은 이 답이 사실인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 해답에 머리를 흔들고 아니라고 대답한 최초의 사람들은 지리학자들이었다. 그들은 이렇게 단언했다. "지구는 수천 년보다는 훨씬 오래 전에 탄생했음이 틀림없다... 대빙하기 북쪽에서 남하해서 사라졌다. 과거에 건조했던 땅이 지금은 바다가 되었었다. 열대의 정글은 사막이 되었다. 수많은 세월 동안 계속된 풍화가 바위를 부수고, 지구 표면에 이판암과 점토와 사암을 침전시켰다." 이 변화의 과정은 겨우 6일 만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며,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이 지나서 이루어진 것이다. 자연의 진행에 의해 오늘날과 같은 지구가 만들어져 온 것이다. 다음에는 생물학자들이 머리를 저었다. "이 지구라는 행성에 겨우 6000년 동안 생명이 존재해 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우리들은 수십만 년이나 된 암석에 묻혀 있는 옛날 동물의 화석을 발견했다... 우리들은 지구상에 있는 모든 종류의 동물이 동시에 창조되었다고는 믿을 수 없다. 오히려 동물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화해 온 것 같다." 19세기의 과학자 중에, 동물이 어떻게 변화해 왔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진화론을 최초로 제안한 사람은 프랑스의 박물학자 J.B.de M.라마크였다. 라마르크는 열 여섯 살에 군인이 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이 일어날 즈음에 맞춰 프랑스군에 입대했다. 이 전쟁은 피비린내 나는 격전이었다. 그가 속한 중대의 장교 모두가 전사하고 프랑스군은 패배했지만, 젊은 라마르크는 장교에 임명되었다. 그뒤 병 때문에 전역한 그는, 쉰 살이 되어 가까스로 파리의 자연사 박물관의 생물학 부문 담당자가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지금까지 흥미를 갖고 있었던, 식물학에서 동물학에 이르는 분야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하게 된다. 라마르크는 세계의 수없이 많은 여러 종의 동물을 연구했다. 그는 그 동물 중에서 서로 비슷한 것, 예를 들어 개와 이리, 고양이와 호랑이 등에 주목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서로 비슷하게 생긴 것은 분명 특별한 관련성이 있습니다. 공통의 조사에서 진화해 온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의 공통의 조상을 오늘날 지상에 있는 동물로 변화시킨 것은 무엇일까요? 나는 그것들이 변화한 것은 그것들에게 변화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뱀은 땅속의 좁은 길을 빠져나갈 필요가 있었으므로 길고 가는 몸이 된 것이고, 기린은 나무 끝에 있는 입이 닿아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목이 길어진 것입니다. 이런 일은 모두 하룻밤 사이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한 마리의 동물에 조그만 변화가 있으면 그 새끼들에게도 면화가 일어나고, 다음에 또 그 새끼의 새끼들에게도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새끼들은 부모의 획득 형질을 계승합니다. 이렇게 해서 공통의 조상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종을 산출하는 것입니다." 동물은 어떻게 해서 변화하는 것인가에 대한 라마르크의 학설은 획득 형질의 유전이라는 사고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는 진화가 이 방법으로는 일어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니 라마르크는, 현재 지구상의 동물이 과거에 있었던 생명의 단순한 형태에서 생겼다는 것을 지적한 최초의 생물학자였다. 코페르니쿠스가 별에 대해 몇 가지 실수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이 개척자를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진화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이해하는 데 실패했다고 하여 라마르크를 비난할 수는 없다. 라마르크 이후에 많은 우수한 과학자들이 이 문제와 씨름했지만, 여전히 모든 것이 분명히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는 확신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생존 경쟁 1859년에 전생물학계를 통해 인류에게 다른 어느 저작보다도 큰 영향을 미친 책이 출판되기까지는, 세계의 어느 누구도 진화에 대한 지식에 주목하고 있지 않았다. 이 책은 "종의 기원"이라는 제목을 단것으로서, 미국의 16대 대통령 A.링컨과 같은 날에 태어난 영국의 생물학자 찰스 다윈이 쓴 책이다. 젊은 다윈은 해군의 측량선 비글 호에 탑승해 5년간 세계를 항해하면서, 진화에 관한 이론을 발견시키기 시작했다. 그는 태평양의 갈라파고스 군도에서 육지에 사는 25종의 새로운 새를 발견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약 1,000km정도 떨어진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었던 새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다윈은 이렇게 생각했다. '나는 대륙에서 약 1,000km나 떨어진 화산섬에 있다. 그런데 여전히 남아메리카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다. 여기 동물들은 대류의 동물들과 아주 비슷하다. 왜 그럴까? 단지 아주 오래 전에 남아메리카 대륙에 있는 새들이 여기에 도착했을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다. 수천 년이 지나 새들은 지금 여기서 보는 것과 같은 종류로 변화한 것이다. 갈라파고스 군도에 있는 새와 남아메리카 대륙에 잇는 새의 차이점은 진화 때문에 생긴 것이 분명하다.' 측량선 비글호가 호주에 갔을 때, 다윈은 캥거루 같은 기묘한 동물이 어째서 이곳에만 있는지에 대해서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다윈에 의하면 그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지금은 하나의 거대한 대륙인 호주는 옛날에는 아시아의 일부였다. 그 당시는 아시아의 동물과 호주의 동물 사이에 어떤 차이도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두 대륙 사이에 대양이 형성되면서 아무것도 오갈 수 없게 되자, 각 제 나름대로 발달하고 변화한 것이다. 그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종으로 진화한 것이다." 긴 항해를 마치고 영국에 돌아왔을 때 다윈은 동물이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해 왔다는 것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커다란 의문을 품게 되었다. '우리들이 진화라고 부르는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 그 해답은 경제학자인 Th.R.맬서스의 저서 "인구론"을 읽었을 때 문득 떠올랐다. '동물이 지구에 넘칠 정도로까지 무한정 증가하지 않는 이유는, 먹고 살 식량의 공급에 제약이 있기 때문이다.' 다윈은 외쳤다. "바로 이곳에 진화를 해결할 열쇠가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진화를 설명했다. "동물의 세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투쟁의 연속이다. 많은 동물이 태어나지만, 그들 모두를 먹여 살릴 식량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어떤 먹이든 손에 넣기 위해서 서로 투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떤 동물이 이기고 살아 남는 것일까? 당연히 강하고 빠르며 잘 숨는 특성이 있는 동물들이다. 이런 동물들만이 새끼를 낳게 되고, 그 새끼는 자기 부모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을 것이다. 생존 경쟁에서는 가장 적합한 자만이 살아남게 된다.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사멸해 버릴 것이다." 라마르크도 다윈도 전화를 믿고는 이었지만, 진화가 일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라마르크도 다윈도 진화를 믿고는 있었지만, 진화가 일어나는 방법에 대해서는 서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라마르크에 의하면, 기린의 목이 긴 것은 높은 나무의 잎을 먹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윈에 의하면, '어느 그룹의 기린 중에서 몇 마리는 다른 기린보다도 우연히 키가 컸다. 만약 먹이가 자기 키보다도 높은 곳에 있다면, 키가 작은 기린은 서서히 사멸해 가게 될 것이다. 그러나 키가 큰 기린은 성장해서 자손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점차 그 자손은 키가 커질 것이다. 그리고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신종의 동물이 진화해 간다. 진화는 부분적으로 자연 도태를 거치면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다윈이 "종의 기원"의 출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멀리 떨어진 보르네오에서도 A.R.윌리스가 진화의 문제를 연구하고 있었다. 영국에 있었던 다윈은 보르네오에서 온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놀랍게도 그 편지의 내용은 마치 다윈 자신이 집필한 것과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오늘날 윌리스는 다윈과 함께 생물 진화론의 발견자로 인정받고 있다. 과학은 진화에 관한 다윈의 이론이 진실이라고 확인시켜 줄 수 있을까? 우리들은 진화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자연 도태가 진화를 일으키는 유일한 길이라고는 확신하지 않는다. 생물은 단순한 형체에서 시작하여 오랜 시대를 거쳐 변화한다. 지금 지구상의 다종다양한 모든 생명, 즉 식물, 온혈 동물, 물고기, 파충류, 곤충 등은 아주 오랜 옛날에 현미경으로나 볼 수 있는 생물로부터 시작되었다. 진화는 우리들에게 동, 식물의 발전에 관한 흔적을 더듬어 가는 수단이 된다. 생명은 단세포 동, 식물로부터 시작되는 한 종류의 계보로서, 오늘날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생명 형태로 가지를 치고 있는 것이다. 뉴턴과 다윈 두 사람은, 인간의 정신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친 과학자이다. 뉴턴은 전 우주를 지배하는 자연의 법칙을 파헤쳤다. 다윈은 자연 법칙이 진화와 변화를 통해 생명 자체에 작용한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알려 주었다. 진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빙하가 움직이고, 지구도 오르내리고 있다. 하천도 그 진흙과 침전물을 바다로 흘려 보내고 있고, 생명도 진화하고 있다. 미래의 지구와 지상에 존재할 모든 것은 지금 존재하는 것과는 다를 것이다. 변화는 결코 완료된 것이 아니다. 우주는 한가족 천체와 지구는 얼마나 비슷할까? 우리들은 그것들이 똑같은 법칙에 따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력은 사과와 달을 지배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포탄과 행성도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천체와 지구는 똑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는 것일까? 항성과 행성에 있는 원소는 지구에 있는 원소와 똑같은 것일까? 아득히 먼 저쪽 세계를 여행하지 않고서도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알 수 있을까? 과학이 우주의 모습을 발견하기 위해 공간의 장벽을 어떻게 넘어갔는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뉴턴이 스톨브리지에서 샀던 장난감 프리즘에 대한 이야기로 잠시 돌아가야만 한다. 뉴턴은 장난감 프리즘을 이용해서 빛은 여러 가지 광파가 혼합된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것은, 실험실에서 프리즘을 이용하여 햇빛을 색의 파장으로 나누자 벽에 스펙트럼이라고 불리는 색동 띠가 나타났기 때문에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색동 띠가 태양의 구조에 대한 중요한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을 알지는 못했다. 1854년, 독일의 하이델베르크에서 G.T. 키프히호프와 R.W.분젠이라는 두 명의 화학자가 매혹적인 사실을 발견했다. 그들이 연소시킨 모든 원소는 스펙트럼 상에서 구분할 수 있는 빛을 발산했다. 예를 들어 나트륨은 2개의 황색 선으로, 그리고 리튬은 하나의 붉은 선으로 나타난다. 모든 원소는 색띠상에 그 내용에 대한 흔적을 남긴 것이었다. 두 화학자는 조성으로 알 수 없는 물질을 가열하고, 이어서 스펙트럼 빛으로 분석했다. 이 방법으로 그들은 루비듐과 세슘, 그리고 다른 여러 희유 원소(옛날에 지구상에 조금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되었던 원소)를 발견했다. 키르히호프가 말했다. "그런데 추리 실험실에서 원소들이 내는 빛이 분석된다면, 태양이나 별이 내는 빛도 분석될 수 있지 않을까?" 키르히호프는 프리즘과 망원경을 결합한 분광기를 사용해서 수소, 철, 크롬, 니켈, 아연 구리, 바륨, 나트륨, 칼슘이 태양에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태양은 지구에 있는 원소와 아주 똑같은 원소를 포함하고 있었다. 이어서 하나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태양 스펙트럼에, 이 지구상에 알려져 있는 원소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선이 나타났다. 그 선은 태양에서만 관찰될 수 있었기 때문에, '태양'을 의미하는 그리스 어인 헬리오스라는 말에서 헬륨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로부터 수년 후, 주 번째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다. 헬륨이 지구상에서, 미국의 텍사스 주와 캔자스주의 유전에 있는 흙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 후에 항성들이 하나씩 차례로 분광기로 조사되었다. 분광기를 하늘로 향하자, 어디에서나 우리의 작은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를 만나 볼 수 있었다. 태양과 항성은 지구에서 우리들이 알고 있는 물질로 불타며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화학적으로 이 우주는 한가족인 것이다.! 분광기로 항성을 조사해 보면, 항성은 대개 80%의 수소와 15%의 헬륨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머지는 이 지구상에 있는 다른 모든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분광기는 항성의 본질 이상의 것까지 알려주었다. 그것은 크기와 방향과 속도, 그리고 나이까지도 알려주었던 것이다. '도플러 효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1842년에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J.Ch도플러는 소리가 관측자를 향해 가까이 따라올 때면 높은 음으로 들리고, 멀어질 때면 낮은 음으로 들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음조의 변화에 의해 어떤 음향을 내는 물체의 속도를 산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도플러 효과는 음에서뿐만 아니라 빛에서도 적용된다. 어느 항성이 지구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항성에서 나오는 초당 광파수는 가까워질수록 점차 증가한다. 항성이 멀어지면 광파수는 감소하게 된다. 광파수의 증감은 항성의 스펙트럼 선을 변화시킨다. 만약 그 선이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있는 보라색 쪽으로 이동해 간다면, 천문학자는 그 항성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스펙트럼 선이 붉은색 쪽으로 이동해 간다면 항성을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요즘의 분광기는 상당히 정확해서, 어느 항성의 좌우 양끝의 스펙트럼 모양을 비교하면 그 항성의 스핀, 즉 회전을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스핀의 속도까지도 측정할 수 있다. 분광기는 우리들을 격리시키고 있는 아득한 우주와의 거리를 단축시켜 주었다. 그것은 우주를 실험실의 책상 위에 올려놓은 것과 같았다. 마지막 별 저편 갈릴레이는 인류에게 우주가 끝없이 광대하다는 생각을 깨우쳐 주었다. 19세기가 시작되면서, 분광기와 대형 망원경의 발달로 사람들은 우주가 실제로 얼마나 거대한가를 인식 할 수 있었다. 별들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담하게 도전한 사람은 독일의 천문학자 F.W.허셜이었다. 1838년, 그는 지구와 백조자리 61번 별과의 거리를 측정하는 데 도전했다. 이 항성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모든 항성 중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 중의 하나였다. 백조자리는 초가을 밤에 머리 위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인데, 밝은 별들이 대부분 십자형으로 나열해서 백조가 머리를 길게 내밀고 날아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어떤 방법으로 측량에 도전했을까? 그는 고대 이집트의 측량사가 홍수로 불어난 나일강을 가로질러 삼각형을 그었던 것과 아주 흡사한 작업을 했다. 그는 하늘에 삼각형을 그렸다. 그렇게 하기 전에 그는 우선 두 가지 사항을 알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가 만든 삼각형의 밑변의 길이와 두 각의 크기이다. 밑변의 크기를 알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그것은 우주 공간에서 1월의 지구 위치와 7월의 지구 위치를 잇는 거리를 계산하면 된다. 그 거리는 약 3억km가 된다. 이 거대한 삼각형의 각도를 계산해 내는 데는 어느 정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만약 지구에서 1월에 어떤 항성까지의 선을 관측한 다음, 6개월 후에 같은 항성까지의 선을 관측한다면, 그 항성 뒤에 있는 우주의 모습이 변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팔을 쭉 편 채로 손끝에 연필을 쥐고 있을 때, 먼저 한쪽 눈만으로 그것을 보고 다음에 다른 쪽 눈으로 보면 연필이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항성도 위치를 변화시킨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이 차이로부터 허셜은 삼각형의 각도를 계산하였다. 백조자리의 61번 별까지의 거리는 겨우 966,000억km정도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광속도를 내는 우주선이라면, 빛의 속도가 1초에 약 30만km이므로, 10년 3개월 안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다. 이 백조자리 61번별은 우리들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항성인데, 만약 이별까지 가려고 한다면, 그곳까지의 여행은 600년 이상이 걸리 것이다. 그래서 당신의 광속 우주선이 마침내 넓게 금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별 중의 하나에 도착하게 된다면, 당신, 혹은 당신의 손자들은 그 아득히 먼 저쪽에도 여전히 수천억이나 되는 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아직도 우리의 거대한 별의 집단 속에 있는 것이다. 당신이 무한히 퍼져 있는 우주의 끝에까지 왔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 저편에는 과연 무엇이 있을까? 그 의문에 제일 처음 대답한 사람은 위대한 천문학자 허셜이었다. 허셜은 18세기말에 독일에서 영국으로 건너왔다. 그는 천문학에 강한 흥미를 갖고 있는 가난한 음악가였다. 그는 누이동생 캐롤라인의 도움으로 낮에는 음악 수업을 하고, 밤에는 가가 애용하는 망원경 렌즈를 닦았다. 뒤에 그가 왕립 천문 대장이 되었을 때, 그는 거대한 망원경을 만들어 천왕성과 그 위성들을 발견했다. 허셜은 그 거대한 망원경을 '하늘의 강'이라고 부르는 은하계로 돌렸다. 그러자 어렴풋이 희미하게 빛나던 빛이 천공을 가로질러 흩뿌려져 있는 수많은 별로 바뀌었다. 그는 우리 태양을 포함하는 이 별들 모두가 하나의 계로서 은하계에 속해 있다는 것, 즉 공간의 광대무변 속에 수많은 태양이 떠 있는 하나의 섬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들의 태양은 이미 우주의 중심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들이 은하계라고 부르고 있는 거대한 별의 집단 속에 있는 작은 집단의 하나에 불과한 것이었다. 허셀은 우리 별의 집단을 훨씬 넘어서, 희미하게 보이는 빛의 단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을 조사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들은 별의 집단이었다. 그것들은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계와 같은 성운이었다. 각각의 성운은 공허한 공간을 두고 다른 성운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의 집단이었다. 허셜은 이런 은하계를 2,000개나 셀 수 있었다. 요즘의 망원경으로는 100만 개 이상의 은하계를 볼 수 있으며, 그 은하계는 각각 1천억 개 이상의 항성을 포함하고 있다. 그런데 당신의 우주 여행이 우리 은하계라는 섬에 있는 마지막별에 도착했다고 해보다 . 그 저쪽에는 100만 광년이라는 광대한 공간이 넓게 펼쳐져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저쪽에는 우리의 섬과 비슷한 섬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보다 좀더 저쪽에는 다시 우리의 섬과 비슷한 섬이 또 있을 것이다. 그 저쪽에는 또 하나의 섬이 있고, 또 저쪽에는 좀 더 다른 섬이 있고... 자꾸만 나아가면 대체 얼마나 먼 곳까지 갈 수 있을까? 캘리포니아의 팔로마 산에 있는 거대한 망원경은 40억 광년이나 떨어진 곳에까지 관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먼 곳은 어떨까? 추측에 의하면 전체 우주는 직경이 100억 광년이라고 한다. 이런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거대한 공간 안에서, 우리들의 지구보다도 1000만 배나 큰 별을 거느린, 10억이 넘는 은하가 현기증이 날 정도의 속도로 돌고 있다니! 우리의 우주상은, 고대 이집트인이나 바빌로니아 인이 우주를 큰방이라고 생각하고 그 중심에 대지를 놓은 다음, 주위에 고정된 몇 개의 천구로 태양과 별들을 회전시키고 있었던 시대로부터 놀랄 수밖에 없는 변화를 겪어 왔다. 그때 이래로 인간은, 은하라는 삼류 성운 안의 보잘것없는 삼류 별 주위를 덮어놓고 돌진하고 있는 행성을, 자신들의 집으로 삼아 온 것이다. 시리우스 성과 그 동반성 갈릴레이가 말했던 것처럼, 우주 공간에서는 몇 개의 별이 서로 2개씩 짝지어 있다. 허셜은 이런 쌍성(또는 연성이라고도 함. 항성이 서로 공통의 언, 점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별)은 공통의 점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허셜은. '어떤 힘이 두 별을 이렇게 움직이게 하는 것일까?'라는 물음에 '인력'이라고 답했다. 그는 백조자리 61번 별에 대한 측량을 끝낸 다음 하늘에서 가장 밝은 시리우스 성이 보통 별과는 달리 규칙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시리우스 성은 고장난 괘종시계처럼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리게 움직였다. 이 사실에서 허셜은, "시리우스 성은 쌍성의 중력에서 생기는 서로 잡아당기는 힘 때문에 비틀거리는 것이 틀림없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또 하나의 별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허셜은 나주 면밀하게 동반성(역주:연성에서 질량이 작은 쪽의 별)이 있을 만한 곳을 조사해 보았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나는 왜, 모든 별이 지상에서 충분히 볼 수 있을 정도로 밝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시리우스 성의 동반성은 암흑의 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시리우스 성의 불규칙한 움직임에서 그 동반성의 위치를 산정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허셜은 1842년 이 신비한 별을 보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가 죽고 난 후 20년이 지나, 렌즈 만드는 데 뛰어난 사람이었던 미국의 A.클라크가 위스콘신의 야크스 천문대의 망원경을 들여다보고 시리우스 성을 발견했다. 그 별은 매우 어두워서 태양 밝기의 50분의 1 정도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시리우스 성의 동반성은 허셜이 예측했던 바로 그 장소에 있었다! 시리우스 성이 큰개별이라고 불린다면, 이 새로운 별은 작은개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웅웅거리는 별들 1931년, 스물에 살 난 미국의 청년 K.잔스키는 단파 방송을 방해하는 이상한 잡음을 점검하고 있었다. 이 잡음의 대부분은 아침 일찍 시작해서 해질녘에 끝났기 때문에, 그는 태양이 지 잡음의 원인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었다. 잔스키는 고감도 라디오 수신기와 광각 안테나를 결합한 최초의 전파 망원경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기기를 사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방송에 불필요한 잡음을 보내고 있는 것이 정말로 태양이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러나 소음 모두가 태양으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시끄럽고, 또 가장 지속적인 잡음은 수소 원자의 파장인 21.1cm의 파장이었다. 별은 주로 수소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얼마간 소음을 내는 것이 분명하다. 방송되는 것 중 일부는 확인할 수 없는 별들로부터 오고 있었다. 전파를 내는 이런 별들은 아주 강력한 망원경으로도 보이지는 않지만 그 소리를 들을 수는 있었다. 이어서 천문학자들이 어떤 별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구역에서, 다시 말해 검은 허공만이 있다고 믿고 있었던 구역에서 새로운 소리, 파장 21.1cm의 잡음이 들려왔다. 수소 원자의 희박한 집단이 공허 속에서 떠다니며 이 지구상으로 아주 작은 발신음을 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이 전부터 매우 고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우주의 저쪽 공간은, 독특하고도 기묘한 음악을 연주하면서 생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만물의 시작 우주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근대 초기의 천문학자들인 코페르니쿠스와 티코 브라헤, 그리고 케플러는, 이런 의문에 대해 과학적인 해답을 내려보려는 생각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육안으로 하늘을 탐사하고 별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어느 정도 감지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16세기 이래, 지식의 증가와 저 멀리 확대된 동간을 내다볼 수 있는 새로운 기구의 출현과 함께, 천문학자들은 점차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만물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라는 의문은 이미 공상에서나 물을 수 있는 질문이 아니라고 생각되었고, 그 추정은 사실에 기초하였으며, 그 해답은 점점 이치에 맞는 것이 되어 갔다. 천문학자들은 우선 우리와 가장 가까운 것, 태양과 행성으로 이루어진 우리 태양계를 설명하기로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대과학자인 라플라스는 성운설을 제안했다. 훌륭한 이론은 확실한 사실에 기초하여 나오는 것으로, 라플라스는 태양계에 대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던 것에서부터 출발시켰다. 1) 지구를 포함한 모든 행성은 서로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2) 모든 행성은 태양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다. 그리고 행성은 모두 같은 방향으로, 그리고 거의 같은 평면상에서 움직이고 있다. 3) 모든 위성은 행성과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4) 태양과 행성, 그리고 위성, 즉 태양계의 전가족은 각각의 축에 거의 수직으로 회전하고 있다. 라플라스의 관측에는 물론 예외가 있었다. 우라누스(천왕성)는 다른 행성처럼 수직으로 회전하지 않고 한쪽으로 치우쳐서 회전한다. 그리고 몇몇 위성(목성이 거느린 4개의 위성)은 그 행성 주위를 반대 방향으로 회전한다. 라플라스는 세계의 형성에 대한 의문에 대해 어떻게 답했을까? 라플라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태양의 배치는 우연이라든가 어떤 단순한 사건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원래 이곳에는 현재 태양계가 있는 부분을 덮고 있는 광대한 양의 가스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 광대한 양의 가스, 즉 성운은 서서히 회전했습니다. 그리고 성운은 점차 차가워지면서 그에 따라 수축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작아진 성운은 점점 더 빨리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그 표면의 속도가 커져서 전체를 지탱하고 있는 인력을 이길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 중에서 작열하고 있던 어떤 부분의 물질이 떨어져 나가, 큰 접시처럼 공간 속을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최초의 행성이고 나머지 행성이 그것에 이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운설이라고 불리는 이 체계는, 같은 무렵에 독일의 철학자 I.칸트에 의해서도 주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이유로 이 성운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간주되고 있다. 그것은 첫째, 현재의 관측 기록으로 보아 전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둘째, 토성의 고리처럼 일부 남아 있는 가스 고리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는다. 셋째, 태양계에서의 각 운동량의 배분에 대한 난점이 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성운설은 좋은 시도였지만, 지식에 도달하는 길에는 새로운 발견에 의해 부정된 학설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18세기의 프랑스 박물학자 G.L.뷔퐁의 또 다른 이론에 따르면, 아주 먼 옛날 어떤 별이 우리 태양 근처를 떠돌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태양의 가스 조류가 교란되었다고 한다. 이 이론은, 그 떠돌이별의 인력이 가스를 공간 속으로 끌어당겼고, 이 가스가 냉각되어 마침내 오늘날 우리들이 말고 있는 여러 행성이 만들어진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들은, 별이 태양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장대한 거리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 별과 그 위성의 기원에 대한 신비는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은하계에 있는 별들, 그리고 다른 모든 은하계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우주는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 빅뱅(대폭발) 이론 우주의 기원에 관한 현재의 이론은 모두 팔로마 산의 천문대장이었던 E.P.허블의 주목할 만한 관측에 기초하고 있다.1929년, 그는 아주 멀리 떨어진 은하계에서 오는 빛을 분광기로 조사하고 있었다. 그때 그것이 적색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도플러 효과에 의하면, 그것은 이 은하계가 지구로부터 멀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허블은 또 이 우주에 있는 섬(우리 은하계를 필두로 모든 성운이 우주에 산재해 있는 모습을 바다에 떠 있는 섬에 비유하여 이렇게 말함) 하나하나는, 우리로부터 멀어져가면 갈수록 점점 더 빨리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쓰고 있다. 은하계는 점점 속도를 가속하면서 역주하는 달리기 선수와 같다. 지구에서 가장 먼 은하계는 광속에 가까운 속도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실로부터 벨기에의 천문학자 G.르메트르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 '빅뱅 이론'이라고 불리는 이론을 제안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은하는 움직이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것들은 중력 때문에 우주 중심을 향하여 움직일 수도 있고, 중력을 이길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추진되어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멀어져갈 수도 있습니다." 르메트르가 시사한 바에 의하면, 전우주는 50억 내지 80억 년 전에 현재 우리 태양계 정도의 크기를 갖는 매우 뜨거운 상태의 가스 덩어리에서 출발했다. 이 덩어리에서 출발했다. 이 덩어리는 수백만도의 온도에 도달하면서 폭발해 산산이 흩어져 버렸다. 그것들은 중력이 잡아당기는 힘을 이기고 공간으로 날아갔고 , 이 조각들은 계속 속력을 증가시키면서 달려가는 은하계가 된 것이다. 우주는 르메트르가 생각한 것처럼 빅뱅과 함께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은하계가 계속 속도를 증가시키면서 우리로부터 급속하게 멀어져 간다면, 우주는 지금보다도 더욱 비어 있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상황은 지금부터 수십억 년 후에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영국 천문학자인 F.호일과 T.골드와 H.본디, 이 세 사람은 미래에 대해 이런 식의 불안한 예측을 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빅뱅 대신 연속적으로 창조되는 우주라는 정상 우주론을 제기했다. 그들은 우주는 팽창하며, 은하계는 멀어져서 사라진다는 르메트르의 견해에 찬성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보는 은하계의 대부분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사라져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로부터 사라져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로부터 사라져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들로부터 살아져가는 은하계 대신, 또 다른 은하계가 교대해서 다시 계속 탄생되고 있다고 믿습니다. 공간이 비어감에 따라 새로운 물질이 그 뒤를 메우고 있는 것입니다. 1000억 년 정도 지나면 하늘에는 거의 같은 숫자의 은하계가 보일 것입니다!" 르메트르와 달리, 영국의 이 천문학자들은 우주에 출발점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들에 의하면 우주는 언제나 여기에 있는 것이다. 시작한 시간이 없다면 끝나는 시간도 없다. 매일, 매순간 얼마의 우주는 소멸해가고 있고, 또 매일, 매순간 얼마의 우주는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창조는 연속적인 것이며 우주는 견고함과 균형 잡힌 상태로 건재한 것이다. 잔잔한 수면에 돌이 던져질 때 빛이란 무엇인가? 이것을 연구하던 뉴턴은, 한때 빛이란 단단한 입자로서 태양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것이라 믿고 있었다. 고대인은 우리 주위의 세계가 우리의 눈에 영상을 불어넣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세기의 과학자들은 빛을 공간에 있는 일련의 파동이라고 상상하기 시작했다. 잔잔한 수면에 돌을 던지면 여러분은 사방으로 퍼져가는 잔물결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빛은 태양 혹은 다른 광원으로부터 퍼져나가는 파동이라고 생각되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파동일까? M.패러데이와 자석에 대한 그의 실험을 반복해보자. 패러데이는 철을 줄질해서 나온 가루를 종이 위에 올려놓고, 그 종이 밑에 자석을 갖다 놓았다. 철가루는 저절로 규칙적인 모양으로 배열되었다. 그는 이 보양을 역장이라고 부르고, 그 모양을 이루는 선을 역선이라고 불렀다. 페러데이는 돌메이가 물을 뒤흔들어 작은 물결을 일으키는 것처럼, 자석도 그 주위 공간을 교란시켜 역선을 만든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그는 가장 주목할 만한 추정을 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태양광선도 역시 태양으로부터 우리 눈에 도달한 역선입니다. 빛은 자기와 전기처럼 전자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864년, 스코틀랜드 출신의 물리학자 J.C.맥스웰은 패러데이의 추정이 옳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빛은 전자파의 한 종류에 불과하다. 적외선과 자외선 역시 같은 종류이다." 전자파의 가족은 계속 수를 불려 갔다. 몇 년이 지난 후 H.헤르츠는 전기 불꽃으로, 전파라고 부르는 또 하나의 전자파를 만들어냈다. 그 발견은 G.마르코니의 무선의 발명을, 다음에는 라디오의 출현을 이끌었다.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X선이나 라듐과 우라늄 같은 방사성 원소를 포함한 여러 가지 발견이 이루어졌다. 모든 전자파는 같은 종류이므로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예를 들어, 그것들은 모두 1초에 약 30만 km의 속도로 진행한다. 그러나 그것들은 파장(파동의 이웃하는 산의 정점에서 정점까지의 거리)이 다르다. 예를 들어 전파, 가시광선, X선, 우주선 등은 서로 다른 파장을 갖고 있다. 20세기가 가까워 오면서 과학자들은 점점 더 패러데이의 전자기 관계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들은 마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몇 가지 발견을 하도록 미지의 힘으로부터 유혹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방사능의 신비 19세기 후반에 진공관에서 음극선이라는 전자가 튀어나온다는 것이 발견된 후, 많은 과학자들이 음극선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과학자 W.K.뢴트겐도 이 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다. 그는 음극선을 진공관 밖에까지 갖고 나와, 자유롭게 여러 가지 실험을 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선, 진공관을 검은 종이로 싼 후 전압을 걸고, 그 바깥에 형광을 내는 물질을 두어 보겠습니다. 그러면 예상대로 빛을 낼 것입니다. 이것을 실마리로 해서, 나는 하나의 장치를 고안했습니다. 유리관을 진공으로 만들면, 금속제의 음극으로부터 무엇인가가 나옵니다(이것은 음극선으로, 뒤에는 전자라고 불렸다). 그것이 백금으로 만들어진 양극에 가서 부딪치면 양극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이 나와, 유리관 밖으로 빠져나갑니다. 그 부분에 손을 대변 살을 통과하여 뼈가 보이게 됩니다. 지갑을 갖다 대면 그 안에 있는 은화나 지갑의 쇠로 만든 장식이 보입니다." 이렇게 해서 X선이 발견(1859년)되었다. 처음에는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수에서 미지수를 나타내는 X를 본따서 X선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 광선의 발견은 세간에 대소동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이 발견을 계기로 해서 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빛'을 내는 물질에 대한 연구가 성행하게 되었다. 나아가 그것과 관련하여, 빛에 쪼이지 않아도 사진을 찍은 것같이 결정의 형태를 건판에 감광하는 물질이 있다는 것이 알려졌다. 프랑스의 과학자 A.H.베크렐은 놀라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사진 건판 위에 우라늄 화합물을 얹어 놓은 채, 공교롭게도 흐린 날씨 때문에 그것을 서랍 안에 넣고 며칠 동안 그대로 놔두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초조해서 서랍에서 실험재료를 꺼내 건판을 현상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어떻게 된 일인지 빛을 발산하지 않은 결정으로부터 방사선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까?" 이 방사선은 우라늄 선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그 힘은 X선보다 훨씬 약했다. 그런데 폴란드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독학으로 공부하고 있던 마리 퀴리와 프랑스 과학자 피에르 퀴리는 우라늄과 트리튬보다도 4배나 강한 방사능을 가진 원소가, 피치블렌드라는 우라늄의 원료 광석 안에 극소량 함유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발견한, 이 훨씬 강한 방사능을 가진 새로운 원소를 퀴리 부인은 '라듐'이라고 이름 붙였다(1898년). 퀴리 부부는 이 미지의 원소를 대량의 피치블렌드로부터 추출하기 위하여, 학교 한쪽 구석에 잇는 창고를 빌려 단 한 명의 조수도 없이 더구나 어린 딸을 데리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힘든 노동과 연구를 4년간이나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순수한 라듐 0.1g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1902년). 방사선을 방출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방사능(radio-activite)이라는 말은 뒤에 퀴리 부인이 이름 붙인 것이다. 퀴리 부인은 당시의 고통과 환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멋지고 가장 행복했던 시절, 그리고 가장 일에 열중했던 시절은 이 초라하고 낡은 창고 안에서 지나갔습니다. 중요한 실험을 중단하지 않기 위해 나는 종종 그곳에서 식사 준비를 하고, 때로는 하루종일 내 키만한 철봉으로 펄펄 끓어오르는 곤죽같이 용해된 광석을 휘젓기도 했습니다. 저녁때가 되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곤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즐겨 밤에도 작업장을 찾았습니다. 그곳에는 우리들이 만든 소금을 넣은 유리병이나 대롱의 실루엣이 떠올라 있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도 멋진, 몇 번이고 보고 또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 광경이었습니다. 빛나는 대롱은 요정의 등불과 같았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고 동시에 고통스러운 4년이었던가! 퀴리 부인은 이 연구를 기초로 1903년 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방사성 동위 원소에 대한 연구는 원자폭탄의 연구로 발달하게 되었지만, 동시에 암을 시작으로 많은 종류의 병을 치료하는 데나 농업 방면에서도 활발히 응용되게 되었다. 제 8장 20세기, 과학이 내일의 세계를 연다 연금술사의 꿈 에너지도 입자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 새로운 탄환 '중성자' 원자에 숨어 있는 공포 평화를 위한 핵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곰팡이 생물인가, 무생물인가? 빙산의 나머지 6분의 5 너 자신을 알라 인공 두뇌 하늘을 난 사람 로켓의 붉은 섬광 인류는 우주의 고독한 존재? 뉴턴에게 도전장을? 공간은 포장지? 빛이 휘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의 문제이다 통일된 우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계의 이모저모 연금술사의 꿈 20세기가 시작되면서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새롭고 흥분되는 낭떠러지 끝에 서 있다는 것을 자인했다. 고대 그리스 시대 이래로, 과학자들은 우주를 건축하고 있는 기본적인 재료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중세에 걸쳐 주장되었던 물, 공기, 불, 흙도 아니었고, 연금술에서 중시한 수은, 유황, 소금도 아니었다. 또 그것은 19세기의 92개 원소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 기본적 재료가 원자라는 것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게 되었다. 그들은 원자를 분해해서 원자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베크렐과 퀴리 부인에 의하면, 우라늄과 라듐에는 원래 방사능이 있어서 스스로 핵분열을 일으킨다고 한다. 과학은 자연을 모방할 수 있을 것인가? 영국의 물리학자 E.러더퍼드는 그것을 시험해 보겠다고 결심했다. 1919년, 그는 헬륨의 원자핵인 알파 입자를 질소 가스가 채워진 통 속에 고속으로 쏘아보내는 실험을 했다. 그래서 수소가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알파 입자가 질소의 원자핵에 충돌해서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가 생겨난다는 세계 최초의 '원자핵 반응' 이었다. 질소가 산소로 변환되었던 것이다! 근대 과학은 중세의 연금술의 꿈을 이룬 것이다. 즉 어떤 원소를 다른 원소로 전환, 혹은 변화시킨 것이다. 원자는 어떤 것이었는가? 그것은 아무리 강력한 현미경을 사용해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것이어서 그 구조를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러더퍼드나 다른 물리학자들이 사용한 방법으로 그 구조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원자는 데모크리토스나 뉴턴이 상상했던 것과 같이 단단하고 둥근 탄환 같은 물질이 아니라, 미소한 태양계와 같은 것이었다. 그 중심에는 원자핵이라고 불리는 중심부가 있고, 원자핵의 둘레에서는 마치 태양의 둘레를 행성이 도는 것처럼 전지가 엄청난 속도로 돌고 있었다. 그런데 러더퍼드의 이 최초의 인공 원자핵 반응은 물질과 에너지가 보존된다는 법칙과는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19세기의 위대한 과학자들은 물질이란 파괴할 수도 없고 새로운 에너지로 만들어질 수도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헬름흘츠나 라부아지에의 법칙은 이제 방사능이라는 사실 앞에 길을 비켜야만 했다. 과학에서는 어떤 법칙이나 발견도 신성 불가침이 아니다.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전에 발견된 것이 변경될 수도 있다. 그러나 과학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유일한 원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복종하라는 것이다! 에너지도 입자다 뉴턴 시대의 고전 역학은 거시 세계의 물리적 법칙성을 탐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초에 독일의 물리학자 M.프랑크는 미시 세계를 구명하는 이론으로서 금세기 최대의 수확으로 일컬어지는 양자론(라틴어로는 '엄청나게 많은 것'을 뜻하는quantum에서 유래됨)을 제창했다. 이 이론에서, 진동 에너지에는 양자라고 하는 가장 작은 단위가 있어서 진동수가 높아질수록 에너지는 커진다고 한다. 이 이론은 물질의 원자론을 에너지에 적용시켰다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지금까지의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물질 복사선의 모든 작용에 대해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이론의 기본적인 사고들은 에너지의 변화는 연속적인 것이 아니라 입자에 의한 불연속적인 것이라는 점이다. 에너지의 변화가 연속적이라는 종래의 생각과 모순되는 것은, 이제까지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물질의 양이 일정 정도 이상으로 컸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지구와 태양 사이의 역학 관계는 그곳에 다소 전자기적인 작용이 있더라도, 만유인력에 비하면 무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만유인력으로 거의 모든 사실은 설명되었다. 그러나 전자기적 작용이 상대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양일 때는 문제가 다르다. 양자론을 완성하는 데에는 유럽 각국의 훌륭한 물리학자들(아인슈타인을 포함해서)이 커다란 기여를 했다. 극히 미소한 먼지가 공중에 떠 있는 경우에, 그것에 대한 중력의 작용보다는 불규칙한 브라운 운동(꽃가루를 물에 띄웠을 때, 바람이 불지 않아도 수면을 불규칙하게 돌아다니는 것과 같은 현상)의 영향이 수천 배나 커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자나 빛도 일종의 입자, 즉 양자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 이론으로부터 '불확정성 원리'가 탄생하여, 원소를 인공적으로 다른 원소로 변화시키는 방법과 원자론의 입장에서 연구하거나 화학 반응을 연구하는 데에도 많은 성과를 낳았다. 프랑크는 노벨상 수상 연설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설령 일시의 실패로 길을 찾을 수 없더라도, 그 목표는 언제나 과학자의 가야 할 길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생애의 가장 긴장된 순간이었던 수주일이 지나고 비로소 암흑 천지에 광명이 찾아왔으며,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희망이 어렴풋이 밝아왔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식 러더퍼드의 발견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독일계 유태인인 젊은 과학자 A.아인슈타인은 14년 전 이미 물질이 파괴되어 새로운 에너지가 창조되는 것을 설명하는 공식을 메모하고 있었다. 그 공식은 E=MC²이었다. 이 공식의 의미를 간단히 이야기하면, 질량을 파괴하면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질량(물체가 갖고 있는 물질의 양으로 무게와는 구별되는 것)은 에너지로 변할 수 있으며, 에너지 역시 질량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자의 내부에 숨겨져 있는 에너지의 양은, 그 원자가 가진 질량의 약 10억 배의 10억 배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이다. 아인슈타인이 원자에 숨겨져 있는 힘을 계산한 것은,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최초로 원자폭탄이 터지기 40년 전의 일이었다. 만일 여러분이 한 숟가락의 설탕에 들어 있는 에너지를 모두 방출시킬 수 있다면, 여러분은 대도시가 소비하는 모든 빛과 열을 24시간 이상이나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E=MC2의 E는 에너지를 의미하며, M은 질량, 그리고 C는 빛의 속도를 나타낸다. 여러분이 질량을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경우, 그 에너지의 양은 질량에 빛의 속도의 제곱을 곱한 것과 같다. 아주 적은 양의 물질을 파괴해서 얻어지는 에너지의 양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에너지는 매초 약 30만km라는 빛의 속도를 가지며, 그 한쪽에서 물질은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다. 만일 100g의 물질이 에너지로 변한다면, 우리 나라가 약 4개월간 필요로 하는 전력을 공급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과 에너지는 변환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한 숟가락의 설탕과 열이나 빛에 어떤 공통된 점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에 의하면, 그들은 변환될 수 있다. 그는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서로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설탕 입자 하나를 원자로 분해해서, 다시 그 원자에 분열을 일으켜 봅시다. 분열이 계속되면 원자는 마침내 방사선 혹은 에너지의 파장이 됩니다. 여러분이 최초로 갖고 있었던 물질은 완전히 변화한 것입니다. 질량은 에너지이고, 에너지는 질량인 것입니다. 새로운 과학은 사물의 본성을 에너지와 질량이라는 2개의 서로 다른 관점에서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주는 '오직 하나'의 물질입니다. 질량은 에너지이기 때문입니다." 3000년간, 인간은 호기심을 무기로 해서 우주의 기초적인 건축재의 탐구에 힘써왔다. 인간은 여기서 최후의 해답을 찾아낸 것일까? 새로운 탄환 '중성자' 정말로, 원자 속에 이런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아인슈타인이 과학 이야기를 꾸며내서, 그것을 수학의 공식으로 치장한 것일까? 과학자들은 모두 의심했다. 아인슈타인이 에너지에 대해 이토록 확신을 갖고 이야기한 것에 대해 그들은 거의 믿지 않았다. 러더퍼드의 알파 입자와 질소 기체의 충돌에서도 놀라울 정도의 에너지는 생겨나지 않았다. 그 점에 대해 다시 한 번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귀기울여 보자. "그 문제가 발생한 것은 효과가 없는 탄약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질소 원자에 알파 입자를 쏘아대는 물리학자는 사냥터에서 아주 조금밖에 없는 새를 잡으려 드는 사냥꾼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많은 원자를 때리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양의 에너지를 얻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이번에는 더욱 효과적인 원자의 탄환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결국은 원자의 중심부인 원자핵 속에서 그것을 찾아냈다. 그것은 중성자(뉴트론)라고 불리는 입자였다. 이탈리아의 대물리학자 E.페르미는 이렇게 외쳤다. "여기 우리의 탄약이 있다." 그의 생각은 옳았다. 1939년, 중성자로 우라늄을 때리는 실험이 시행되었다. 결과는 아주 놀라웠다. 우라늄 원자가 분열되면서 대량의 열이 방출되었던 것이다. 중성자가 원자와 충돌하여 원자를 깨뜨렸을 때는, 알파 입자를 사용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분쇄된 원자는 스스로 중성자를 내버리고, 이렇게 내버려진 중성자들은 다시 자유로운 중성자가 되어 다른 원자에 충돌한다. 바꾸어 말해 그 과정은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리고 매번 원자가 분열되어 더욱 많은 에너지가 방출된다. 이것이 최초의 '연쇄 반응'이었다. 연쇄 반응은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발견되었다. 어느 나라의 과학자들이나 원자폭탄의 제조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만일 연쇄 반응이 제어될 수 있다면, 우라늄의 거의 모든 원자가 그 즉시 분열되어 대도시를 파괴할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폭탄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최초로 원자폭탄을 만든 국가는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1945년에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에 최초로 원자폭탄을 투하했을 때, 미국은 전쟁이라는 경쟁에서 승리했다. 1939년과 1945년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원자에 숨어 있는 공포 1939년 여름에 A.히틀러로부터 도망친 유럽의 물리학자들은 미국 측에 독일이 원자폭탄을 제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아인슈타인의 지도를 받던 미국과 외국의 과학자 그룹은 루스벨트 대통령 앞으로 한 통의 편지를 썼다. '우리가 원자폭탄을 연구하고 제조를 시작하지 않으면, 독일이 그것을 제조해서 미국을 필두로 세계 각국을 폭격하는 무서운 위기가 닥쳐올 것입니다.' 그들이 이렇게 탄원한 결과 원자폭탄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름하여 원자력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원자폭탄의 제조에 종사했던 개척자들은 연쇄 반응에 의해 폭발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신했다. 관건은 '연쇄 반응을 자동적으로 진행시키면서 동시에 그것을 제어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원자로(파일)를 건설하는 것이 필요했다. 1942년, E.페르미의 지도하에 최초의 원자로가 시카고 대학의 운동장 한쪽 구석에 비밀 실험실의 간판을 달고 건설되었다. 원자로는 우라늄과 흑연의 층을 서로 중첩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이 원자로 속에 카드뮴 막대를 놓아, 분열하는 원자가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제어했다. 이렇게 해서 연쇄 반응은 인위적으로 자유롭게 조작되었고, 인간은 핵분열을 마음대로 조작해서 원자핵 내부의 에너지를 방출시키거나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 최초의 원자폭탄 실험이 준비되기까지, 3년 이상이 소요되었다. 운명의 순간이 다가왔다. 1945년 7월 17일, 뉴멕시코의 로스앨러모스에서였다. 그날 아침 5시 30분, 사막을 비추는 가장 밝은 햇빛보다 더욱 밝은 섬광이 발생했다. 5km나 떨어져 있는 산맥의 윤곽이 그대로 드러났다. 폭발 30초 후에는, 무서운 폭풍이 수킬로미터 밖에 서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그것에 바로 뒤이어, 길고 기괴한 굉음이 들렸다. 그리고 거대하고 다채로운 버섯 모양의 구름이 피어나서 12km이상의 높이까지 올라가 그 부근의 구름을 산산이 흩어버렸다. 폭탄 발사탑이 건설되어 있던 곳은 단지 경사진 분화구만으로 남았을 뿐이다. 그리고 발사탑은 완전히 증발해 버렸다. 주변의 사막은 유리처럼 녹아 있었다. 과학은 이렇게 원자의 무시무시한 힘을 풀어놓고 말았다. 인간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독일과의 전쟁은 끝났으나 일본과는 아직 전쟁중이었다. 그 답은 뉴멕시코의 실험으로부터 한 달도 못 되어 나왔다.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에 투하했고, 사흘 후 8월 9일에는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원자폭탄은 인명과 재산에 끔찍한 손실을 가져왔다. 그로부터 이틀 뒤 일본은 항복했다. 아인슈타인은 원래 원자폭탄을 제조하는 일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에 기선을 제압 당할지도 모른다는 헝가리계의 미국 물리학자 L.시라이드의 설득에, 마지못해 찬성한다고 서명했다. 그리고 그 뒤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의 상공에서 작렬했을 때, 그는 입도 열지 못하고 슬픔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원자폭탄이 이 두 도시에 떨어졌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다. "맙소사! 과학이 이보다 더한 공포를 줄 수는 없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말은 틀린 것이었다. 그로부터 수년 뒤, 중성자 폭탄보다 더 무서운 무기, 수소폭탄이 발명되었기 때문이다. 원자폭탄의 위력은 원자의 핵분열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수소폭탄은 핵융합에 의해 힘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이 핵융합에서는 헬륨 1원자를 형성하기 위해 수소 4원자가 결합한다. 우리의 태양을 비롯한 모든 항성은 에너지를 핵융합에 의해 만들어내고 있다. 태양의 원자들은 2천만 도 이상의 온도에서 녹아 헬륨이 된다. 이 과정에서 원자들은 1억, 4,490km 이상 떨어진 이 지구상으로 우리가 늘 느끼고 있는 빛과 열을 발산한다. 단 1발의 수소폭탄으로도 지구의 어떤 도시든 파괴할 수 있다. 수소폭탄 공격이 개시되는 첫날, 4천만에서 8천만 명의 사망자가 나온다고 한다. 이런 전쟁에서라면 승자도 패자도 없다. 남아 있을 것은 오직, 우리 모두를 몰아치는 무서운 파멸뿐이다. 지구상의 어느 누구도, 이 두려운 기계가 있는 한 안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날, 인류는 두 가지 문제를 앞에 놓고 있다. 첫째, 세계의 모든 국민이 어떻게 이런 무기의 사용을 방지할 것인가? 둘째, 어떻게 하면 원자력을 평화적인 일에만 사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해 있는 전쟁욕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질문에 정답이 내려질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평화를 위한 핵 '원소는 몇 개인가?' 이 질문에 19세기의 과학자들은 '92개가 있다'고 답했으리라. 그러나 20세기의 과학자들은 자연계에 있는 원소를 발견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 스스로 원소를 만들어냈다. 그들은 원자핵에 충격을 주어 10개 이상의 새로운 원소를 만들었다. 플루토늄, 넵투늄, 칼리포르늄, 퀴륨, 아인시타이늄 등이다. 이 마지막 두 원소의 이름은 마리 퀴리와 아인슈타인을 기리기 위해 그렇게 붙여졌다. 마찬가지로, 자연계에서 발견되는 여러 원소의 방사성 동위원소도 생산되었다. 1930년대에 퀴리 부인의 사위인 졸리오 퀴리는 알루미늄에 알파선을 쏘아, 인의 방사성 동위원소를 만들었다. 그 뒤 코발트, 철, 탄소, 요오드의 방사성 동위원소가 생산되었다. 이들 동위원소(아이소토프)는 쉽게 찾아낼 수 있기 때문에 표지원자로 불리고 있다. 여러분은 그것을 가이거 계수기나 사진 촬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A.H.베크렐이 우라늄에 대해 했던 것처럼 필름에 대해 감광성이 있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이 표지원자의 존재를 확실히 밝혀낸 후, 그것들은 농업이나 의료에 대단한 역할을 하고 있다. 식물이 어떻게 비료를 흡수하는가를 알고 싶을 경우, 검사할 비료에 동위원소를 섞어 넣으면 토양을 통해서 식물의 몸으로, 나아가 그 식물을 먹는 농장의 동물에게까지 이동되어 가는 과정을 샅샅이 추적할 수 있다. 의학 방면에서는 라듐은 전부터 암이나 종양의 치료에 이용되어 왔으며, 제 2차 세계 대전 후에도 방사성 동위원소를 응용해서 점을 없앤다든가, 갑상선 질병을 발견하고 치료하는 일에 이용되고 있다. 또 세균에 방사성 원소를 도입해서 그것들이 흙, 풀, 암소로 이동하는 것을 추적할 수도 있게 되었다. 공업 방면에서도, 불량품 통조림을 자동적으로 선별하는 장치나 강철의 표면 마무리 검사에도 이용되고 있다. 방사성 동위원소의 응용 범위는 앞으로도 더욱더 확대될 것이다. 핵의 해방은 인류에게 커다란 이익(특히 의학 분야에서)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반면, 이미 그 제일보가 기록된 핵전쟁의 위험은 아직까지도 무서운 암운을 전지구상에 드리우고 있다.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곰팡이 20세기의 의학은 놀라운 진보를 보였다. 의사들은 새로운 방사성 동위원소(라디오 아이소토프)를 사용해서 몸 속의 질병이 진행하는 것을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상당히 효과적인 새로운 의약품이 개발되면서 전세계의 사망률은 격감했다. 이들 약품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아마 항생 물질일 것이다. 우스운 일은, 이들 항생 물질 중에서 가장 처음 발견된 페니실린이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사실이다. 1929년 봄 어느 맑게 개인 날, A.플레밍 박사는 런던의 세인트 메리 병원 실험실의 창을 열어둔 채, 포도상구균 배양기를 뚜껑도 닫지 않고 며칠간이나 내버려두고 있었다. "실험을 망치고 말았군. 창도 열려 있었으니 무엇인가가 분명히 뚜껑이 열린 용기로 침입했을 거야. 다시 한 번 해봐야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그 배양기를 용기째 버리려 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배양기에 곰팡이의 반점이 여기저기 생겨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 반점 주위에는 포도상구균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곳에서는 세균이 죽어 있었고, 새로운 세균에 의해서도 침입을 받지 않았던 것이다. L.파스퇴르나 R.코흐의 시대 이래, 의사들은 세균을 죽이는 화학 약품을 애타게 찾고 있었다. 독일의 세균학자 P.애를리히 박사는, 1910년에 매독균을 죽이는 약품(살바르산)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다양한 질병을 광범위하게 치료하는 데 사용할 약품도 발견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플레밍 박사가 1920년에 열심히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엉망이 된 배양균을 다시 한 번 보고 그것을 하수구에 던져 버리려고 했다. 외부로부터 온 불순물이 침전되어 있던 이 하수구는 세균이 우글우글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결한 용기를 보고 어깨를 움찔하고는, '가끔 일어나는 작은 사고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휙 하니 그 더러운 하수구에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플레밍 박사는 세균이 침범해 있지 않은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것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자세히 조사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조각 솜털 모양의 물질을 확인했다. 그는 그것이 페니실린(학명은 페니실륨)임을 알았다. 이 곰팡이가 세균을 죽일 수 있는 것일까? 그는 가능한 한 많은 양의 페니실린 액을 생산했다. 그리고 그 액을 가지고 수도 없이 실험을 해 보았다. 이 액은 마치 마술처럼 세균을 죽였다. 플레밍 박사는 이렇게 해서 금세기의 위대한 의학적 발견을 이룩한 것이다. 그는 자신이 발견한 것을 널리 사람들에게 알렸다. 그는 소리를 높여, 그리고 우려를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여기 의심의 여지가 없는 강력한 항생 믈질이 있습니다. 만일 그것이 세균을 죽인다면 사람도 죽일 수 있을지 모릅니다. 최근 50년간 많은 항생 물질이 발견되었습니다만 그것들은 모두 유독했습니다. 인간에 유해한 것과, 세균을 죽이는 것을 분리할 수 있다면 그 일은 내가 아니라 화학자가 해야 할 것입니다." 플레밍은 어떤 의학 잡지에 자신의 발견에 대한 논문을 우송했다. 그러나 그의 논문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는 자기가 속한 학회에서 잡지에 발표할 논문을 읽었다. 하지만 회원들은 그저 묵묵히 듣고 있을 뿐, 질문하는 회원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로부터 5년 후인 1935년, 두 사람의 과학자가 플레밍이 시작한 일을 완성하기 위해 옥스퍼드 대학에서 작업에 착수했다. 그 두 사람은 호주 출신의 병리학자 H.W.프롤리 박사와 나치 독일에서 영국으로 도망쳐 온 화학자 E.B.체인 박사였다. 그들은 당시 막 발견된 설파제보다도 강력한 항균제를 찾고 있었다. 우연히 도서관에서 플레밍 박사의 논문을 읽은 두 사람은 플레밍의 발견에 현실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래서 한 그룹이 두 사람을 중심으로 연구에 전념한 결과, 페니실린의 수용액을 갈색의 분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 분말은 동물 실험 결과 아주 강력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당시 세계는 제 2차 대전을 치르고 있었는데, 패혈증 환자, 중상자, 폐결핵 환자를 비롯한 세균성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이 분말이 사용되어 상당한 효과를 거두었다. 뒤이어 미국의 미생물학자 S.A.왁스먼에 의해 스트렙토마이신이 발견되었고(1944년), 다른 항생 물질이 속속 발견되었다. 이렇게 해서 항생 물질은 세계적으로 수백만 명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항생 물질을 너무 많이 사용하면, 세균 중에 저항력 있는 내성균이 생겨나 그 효과가 사라져 버린다. 생물인가, 무생물인가? 어떤 사람이 식물과 돌이 다르다든가 동물과 철봉이 다르다, 아기와 시험관이 다르다고 이야기할 때는, 그 차이가 너무도 확실하기 때문에 그것에 이유를 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자는 모두 생물이고 후자는 모두 무생물이다. 자연과학에서도 생물의 세계와 무생물의 세계라는 두 세계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레벤후크나 그 밖의 다른 초기 세균학자들은 미생물을 보자마자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그들을 생물계에 포함시켰다. 그것은 그것들이 다른 생물처럼 움직이기도 하고 먹기도 하고 번식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러시아의 세균학자 D.I.이바노프스키가 상당히 기묘한 실험을 했을 때, 생물과 무생물의 구별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92년, 그는 모자이크병에 걸려 있는 담배 줄기에서 얻은 액을 거르기 위해, 자기로 만든 여과기를 사용했다. 그 자기로 만든 여과기는 구멍이 워낙 작아 어떤 세균도 통과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런 다음, 그는 건강한 담뱃잎 위에 여과기를 통과한 액체를 뿌려 보았다. 며칠이 지나자 건강한 담뱃잎에 모자이크병이 발생했다. 병을 일으키는 무엇인가가 여과기를 통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것은 어떤 세균보다도 작은 게 분명했다. 이렇게 자기로 만든 여과기를 통과할 수 있으면서 질병을 일으키는 물질을 바이러스라고 불렀다. 1901년, 미국의 W.리드는 황열이 바이러스에 의해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뒤, 바이러스는 소아마비, 천연두, 홍역, 유행성 이하선염, 광견병, 그리고 대부분의 독감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최근 세계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있는 에이즈도 바이러스가 원인이다. 바이러스는 얼마나 작은 것일까? 그것은 너무도 작기 때문에 보통의 광학 현미경으로는 볼 수가 없다. 그것을 보기 위해서는 전자 현미경을 사용해서 20만 배로 확대해서 보아야만 한다. 바이러스는 너무도 작기 때문에 100만 개의 바이러스를 단 한 개의 세균 세포 속에 집어넣을 수도 있다. 바이러스에는 그 크기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작다는 것 말고도, 이상한 점이 또 하나 있다. 묘한 행동을 보인다는 것이다. 바이러스가 살아 있는가, 살아 있지 않은가는 그것이 어디 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1936년에 미국의 W.M. 스탠리가 담배의 모자이크병의 원인이 되는 특수한 바이러스를 발견했을 때, 그는 바이러스는 모두 생명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 바이러스는 한 웅큼의 소금처럼 생명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이러스를 식물에 접촉시키자 갑자기 살아났다. 바이러스를 얼리고 건조시키고 분쇄했을 때는 분명 죽어 있었다. 그러나 다시 그 바이러스를 동물에 주입시켜 보면 바이러스는 위험한 세균이 갖고 있는 온갖 성질을 다 보였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동물이나 식물의 세포에 침입했을 때만 살아나는 것이었다. 바이러스는 세포 속에 들어가면 놀라운 속도로 수를 불린다. 바이러스는 마치 세포에게 자기와 같은 무리가 되라고 유혹하는 것 같다. 그러면 세포는 침입자 편에 가담해서, 더욱 많은 바이러스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세포는 침입자(바이러스)와 한편이 되어 세포 자신의 적이 된다. 어떤 암에서는 바이러스가 몸의 세포를 암세포로 만드는 자극제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는 약품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어떤 암에서는 바이러스가 몸의 세포를 암세포로 만드는 자극제로 작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바이러스에 효과가 있는 약품은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바이러스는 살아 있는 것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이러스가 생명 현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얼마간 나타내고 있다는 것뿐이다. 어쩌면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두 세계를 연결해 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빙산의 나머지 6분의 5 20세기의 의학은 항생 물질의 발견과 바이러스의 발견에 의해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정신병에 대해 이해하고 처방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리라. 19세기까지, 정신병에 걸린 사람에게는 악마나 사악한 귀신이 들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들은 매를 맞기도 하고, 감금되기도 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는 그들에게 보다 인도적인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선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정신적으로 불안한 원인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X선의 발견으로 의사들이 살아 있는 사람의 몸 속을 조사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오스트리아의 젊은 의학자 S.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조사하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의 방법은 약품도 기구도 사용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저 대화, 다시 말해서 의사와 환자 사이에 말을 주고받는 것이 전부였다. 환자는 자신이 매일 경험한 것과 걱정거리를 털어놓는다. 그러면 의사는 그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환자의 행동을 관찰하고 이따금 설명을 한다. 프로이트는 자신의 치료법을 정신의 연구, 즉 정신 분석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신비를 꿰뚫어 보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는 누구나 외계에는 우리를 통제하고 지배하는 자연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인력이라든가, 조수 간만, 바람, 태양에서 오는 빛과 열,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힘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힘들이 우리를 위해 사용되도록 하려 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우리의 내면에도 강력한 여러 가지 힘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부의 힘과 달리 이 힘은 은폐되어 있다. 우리는 이 힘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그것들은 표면적으로는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사상이요 감정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는지도 모른다. "잠깐만, 나는 언제나 나 스스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을 '알고'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 프로이트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과거에 생각했거나 느꼈던 것 중의 극히 적은 일부분만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나머지를 우리는 한쪽으로 밀어내기도 하고 잊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남아 있는 기억은 소실되지 않고 우리 정신의 무의식 부분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무의식은, 예를 들면 바다의 수면 밑에 숨어 있어 수면 위로는 나타나지 않는 빙산의 6분의 5에 필적한 정도로 큰 부분입니다.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수면 위로 떠올라 있는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무의식은 또 빙산의 숨어 있는 부분처럼 위험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 공포와 걱정과 충동을 던져주고 정신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질환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때로는 육체적인 질병까지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생깁니다. 우리의 육체와 정신은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둘 사이에 분명한 경계선이란 없습니다. 온갖 종류의 신경성 질환은 실은 감정적인 문제에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자, 만일 환자가 무의식 속에 축적된 사상이나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면, 그는 그것들을 이해하고 제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첫걸음으로 우선 환자는 자기 자신의 마음속에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를 알아차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 자신을 알라 프로이트 박사가 무의식이라는 것을 손에 쥐기 위해 발견한 수단은 자유로운 연상이었다. 프로이트는 환자를 향해 말했다. "이제 당신의 마음에 무엇이 떠오르는가를 말해보시오. 생각이 분명하게 떠오르든 그렇지 않든 신경 쓰지 말고, 무엇이나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십시오." 이렇게 마구 쏟아 놓은 발언으로부터 프로이트는 환자가 잊고 있었던 기억이나, 결코 승인하고 싶지 않았던 감정을 포착하여 환자를 돕는다. 또 하나의 방법은 환자에게 자신이 본 꿈에 대해 이야기하게 하는 것이었다. 환자는, "꿈이라니요? 저는 꿈을 하나도 꾸지 않아요"라든가, "꿈을 모두 잊어버렸는데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혹은 "대체 무슨 이유로 제가 꾼 꿈을 알려고 하는 거죠? 제 꿈은 뒤죽박죽이어서 아무런 뜻도 없어요."하고 반발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면 프로이트는 부드럽게 이렇게 대꾸할 것이다. "어쨌든 그 꿈을 이야기해 보세요." 프로이트에 의하면 꿈이란 무의식으로부터 전해지는 메시지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은 낮에는 무의식적인 생각을 자기 스스로에게도 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밤에 잠을 잘 때에는 무의식을 받아들입니다. 꿈은 우리가 항상 스스로도 회피하고 있던 것을 직시할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직접적인 방식이 아니라 암호의 형태로밖에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암호를 잘 포착해서 이해하는 것이 정신 분석 학자의 일입니다. 환자가 무의식중에 폭로한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승인할 각오가 되어 있으면, 그 환자는 쉽게 회복될 수 있습니다. 정신 분석학의 제 1법칙은 고대 그리스인이 말한 바대로 '너 자신을 알라'입니다. 뉴턴이 행성의 운동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는 일에 몰입했던 것처럼,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지배하는 본질을 발견하는 일에 종사했다. 의학에 있어서 프로이트의 커다란 공헌은, 무의식이 사람들의 생활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드러내 보였다는 것과 정신적, 감정적인 질환에 과학적인 기초를 닦았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인공 두뇌 어떤 사람의 머리로도, 원자를 연구해서 그것에 정통할 때 필요로 되는 복잡한 계산을 모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학은 원자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부문에서도,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끝까지 해낼 엄두도 낼 수 없는 막대한 숫자의 바다 속에 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영국의 어느 수학 애호가는 원주율의 수치가 무리수여서 소수점 이하로 무한히 내려간다는 것을 모르고, 자신의 일생을 원주율을 계산하는 데 소모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런데 1989년 6월 일본에서는, 슈퍼 컴퓨터를 사용하여 67시간 13분에 걸쳐 원주율의 소수점 이하를 5억 3,687만 자리까지 계산한 일이 있었다. 실제로 20세기 중반의 가장 놀라운 발명의 하나는 인공 두뇌, 즉 컴퓨터(전자 계산기)라 할 수 있다. 이 발명의 동기는 항공기의 설계나 탄환의 복잡한 탄도를 더욱 신속하고도 간단하게 계산하려는 것이었다. 계산기는 정보를 집어넣어 기억시키며, 문제를 계산해서 해답을 내고, 무엇보다도 초인적인 속도로 정확한 해답을 내는 기계로서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만일 서울의 어느 항공 회사 직원이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항공 회사의 컴퓨터에, 미국 대륙 횡단 비행에 오를 승객의 좌석이 비어 있는가를 물으면,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좌석 유무가 태평양을 횡단해서 응답해 올 것이다. 컴퓨터는 또 일기 예보처럼 상황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분야에서 상당히 귀중하게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만일 여러분이 내일이나 주말의 일기를 미리 알고 싶다면 기압, 온도, 바람의 속도와 방향, 그리고 산맥이나 바다 혹은 강으로부터의 거리를 모두 고려해야만 한다. 그때 여러분은 산더미처럼 쌓여 잇는 많은 자료나 도면과의 악전고투를 치르지 않고도, 정확한 답을 내놓아 주는 기계에 자료를 입력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기계는 정확한 결과를 알려줄 것이다. 컴퓨터는 또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철도의 선로상에 잇는 스위치나 신호를 관리하기도 하고, 고속 도로의 운송량을 감시하기도 한다. 1948년에는 컴퓨터의 심장부에 해당하는 진공관을 대신해서, 훨씬 소형이면서 성능도 더욱 뛰어나고 사용도 편리한 트랜지스터가 출현해서 컴퓨터가 상당히 소형화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기구나 기계도 모두 가벼워지고 소형화되는 경향이 생겼다. 최초의 계산 장치는 수판이었다. 수판은 중국에서 발명되어 12, 3세기(송, 원조)부터 보급되었다. 최초의 덧셈 기계는 1842년, 프랑스의 B.파스칼이 열 아홉 살 나이에 만들어 냈다. 그것은 첫 번째 톱니가 1회전하면 두 번째 톱니가 1/100회전하고, 두 번째 톱니가 다시 1회전하면 세 번째 톱니가 1/100회전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현재 수도나 가스 미터, 자동차의 속도계, 금전 등록기 등에 응용되고 잇다. 당시의 공작 기술로는 정밀하게 회전할 수 있는 톱니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이 계산기는 정확하지 않았다. 오늘날에는 흔히 PC라고 불리는 상당히 소형화된 개인용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어 사용되고 있다. 하늘을 난 사람 오늘날에 고속 컴퓨터를 사용하는 주된 목적 중의 하나는 지구로부터 쏘아 올린 인공 위성을 감시하는 것이다. 인간은 언제나 하늘을 날고 싶다는 유혹을 받아 왔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다이달로스가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날개를 만들어 하늘을 날았다. 그런데 아들 이카로스는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태양에 너무 가까이 날아갔다. 이들을 본 태양신은 모두 언젠가 죽을 운명에 놓인 인간이 하늘에 날아오르는 것을 허락할 수 없다면서, 밀랍으로 만든 그 날개를 녹여 버렸다. 결국 이카로스는 바다에 떨어져 죽었다. 중세에는 R.베이컨이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는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나는 비행기를 생각했다. 그 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새의 날개를 연구하여 사람의 힘으로 날개를 움직이는 비행기를 고안했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금세기가 되면서 인간은 비로소 공기보다 무거운 기계를 타고 하늘 높이 나는 방법을 배웠다. 미국의 라이트 형제가 1903년 12월 17일에 노스캐롤라이나 주 키디호크의 사막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른 뒤, 두 사람은 비행기 발명가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비행기의 발명가는 아니었다. 최초로 공비보다 무거운 기계를 날린 사람은 S.P. 랑그리였다. 무게는 4kg 정도로 증기 기관을 동력으로 쓰는 비행기였다. 그것은 1896년 5월 6일에 포토맥 강 위로 약 800m정도 날았다. 그 무인 비행은 랑그리의 친구이자 전화의 발명가인 A.G. 벨이 촬영했다. 라이트 형제가 처음 비행기를 만들기 이전에, 비행기의 모든 부품, 즉 프로펠러, 날개, 모터, 방향 조종타가 이미 알려져 있었다. 비행에 대한 라이트 형제의 공헌은, 비행기가 제어되고 조종될 수 있는 것임을 증명했다는 점에 있다. 다음의 커다란 발전은 제트 엔진이었다. 라이트 형제는 비행기의 프로펠레를 돌려 1시간에 50km 가까이 날았다. 1948년에 라이트 형제 중 아우인 O.라이트가 사망했을 때에는 이미 제트 비행기가 음속의 장벽을 넘어 날고 있었다. 시속 1,200km인 음속보다도 빨리 날았던 것이다. 그 후 실험적이 제트기가 음속의 2배, 그리고 다시 3배로 날았다. 그러나 지구의 인력을 벗어나 대기권 밖으로 상승하려는 꿈은 더욱 새로운 기구, 바로 로켓 엔진에 의해 실현되었다. 로켓의 붉은 섬광 중국인은 이미 13세기에 병기로서 로켓을 발명했다. 그것은 원형의 통에 화약 등의 폭발물을 집어넣고 불을 붙어 폭약을 폭발시키면 통의 한쪽으로 폭발 가스가 분출되어, 그 반동으로 통이 날아가도록 만든 장치였다. 그것은 또 불꽃이나 신호용으로도 이용되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용되는 로켓의 원리이다. 초기의 로켓은 화약에 의해 추진되었으나, 1926년에는 액체 연료가 사용되었다. 그해 클라크 대학의 물리학 교수인 R.고다드는 메사추세츠 주에서 액체 연료를 사용한 로켓 발사에 처음으로 성공했다. 이 미국 최초의 로켓은 길이가 겨우 1.2m에 불과했다. 이 로켓은 1시간에 약 100km 이상을 날 수 있었다. 최초의 시험에서는 60m 이상 높이 날지 못했다. 그러나 그 비행은 22년 전 키디호크에서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타고 날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사건이었다. 고다드는 로켓에 기구를 설치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그 최초의 로켓 중 하나에 온도계와 기압계, 그리고 이들 기구의 표시 도수를 읽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진기를 달았다. 그리고 그는 1939년까지 1.5km이상이나 높이 올라가고 1시간에 약 880km로 상승하는 로켓을 건조했다. 오늘날, 지구의 궤도에 올라 대기권 밖을 철저하게 조사하는 로켓은 고다드의 초기 착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 2차 세계 대전중 로켓은 무서운 무기가 되었다. 독일군이 런던에 발사한 로켓 V2는 음속보다 빠른 속도로 비행했고, 런던 시민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방어도 할 수 없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세계 각국은 제각기 인공 위성을 쏘아 올리기 위해 로켓을 사용했고 우주를 탐사하기 시작했다. 1957년 10월 4일, 소련은 인공 위성(스푸트니크 1호)의 발사에 처음으로 성공을 거뒀다. 이 인공 위성은 95분마다 세계를 한 바퀴 돌았고, 궤도에 정착하여 3개월간 아마추어 무선통신 애호가들과 끊임없이 교신했다. 이 이래로, 주로 소련과 미국 양국이 지구를 공전하는 많은 인공 위성을 쏘아 올렸다. 지구를 도는 인공 위성의 궤도에 최초로 몸을 실었던 사람은 소련의 Y.가가린이었다. 1961년 4월 12일, 그의 보스토크 1호는 고도 약 240km에서 1시간 23분간 지구를 도는 작은 우주 여행을 했다. 그는 지상에서 "지구가 어떻게 보이는가?" 하고 묻자, 우주 상공에서 "신비로운 청색으로...너무나 아름답다" 라고 대답했다. 우주 여행을 한 최초의 미국인은 J.H.글렌으로, 1962년 2월 20일, 5시간 동안 지구의 궤도를 세 번 돌았다. 그는 여행 중의 느낌을 이렇게 표현했다. "하루에 네 번 일몰을 보았던 경험을 아무리 자세히 설명해도 여러분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인공 위성은 지구의 인력을 정복하고 달아나 태양 주위의 궤도에 진입했다. 그 후 미, 소의 우주 경쟁의 영향으로 천체 관측, 기상, 통신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진 인공 위성과 사람이 탄 대형 우주 왕복선이 많이 쏘아 올려졌다. 그리고 이제 우주선의 발사는 태양계의 다른 행성을 향해 추진되고 있다. 로켓은 어떻게 지구의 인력을 벗어나는 것일까? 여러분도 최소한 몇 초 동안은 인력을 무시할 수 있다. 여러분이 공을 세게 차면, 공은 지면에 떨어뜨리려고 하는 지구 인력의 작용을 무시하고 저 멀리 날아갈 것이다. 이제 여러분이 세상 어느 누구보다도 막강한 야구 투수라고 가정하고, 시속 약 25,700km의 속도로 공을 던진다고 해 보자. 여러분이 던진 공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 공은 지구의 인력을 받아 낙하하기도 전에 이미 태평양을 쉽게 횡단해 가고 있을 것이다. 공의 속도를 조금 더 키워 시속 27,000km로 던진다고 해 보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공은 물론 태평양을 건너 계속해서 날아갈 것이다. 그리고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여러분이 최초로 공을 던진 마운드의 아득히 높은 상공을 계속해서 날아갈 것이다. 그것은 지구에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상공을 진행하고 있을 것이다. 그곳은 공기가 희박하다. 따라서 공은 시속 27,000km라는 최초의 속도보다 약간 감속된 채 계속 창공을 날게 될 것이다. 이렇게 인공 위성이라는 공이 지구의 주위를 수도 없이 돌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은 운동하고 있는 물체는, 어떤 힘이 그 운동을 멈추게 할 때까지 계속 움직이려는 성질이 있다고 한 갈릴레이의 이야기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던진 야구공의 진로를 막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공은 지구 주위 궤도를 영원히 돌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의 로켓과 그것에 부속된 인공 위성을 지구 주위 궤도에 붙박아둘 수 있다. 그러나 지구를 돌고 잇는 로켓은 인력에 의해 우리와 연결되어 잇다. 우리가 달이나 태양, 혹은 행성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한 초속 16.7km 이상의 속도를 낼 수 있는 강력한 로켓이 있어야만 한다. 이 속도는 제 3우주 속도라고 하는데, 이 속도를 가진 발사체는 태양의 인력까지 이길 수 있다. 우주 공간의 대부분은 아직도 신비로 가득 차 있다. 망원경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해도 모든 천체를 확실하게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공기로 이루어진 바다에서 1,000km 들어간 바닥에 살고 잇다. 따라서 우리가 하늘을 올려다볼 때는 언제나 공기의 바다를 통해서 보아야 하기 때문에 선명한 모습을 볼 수가 없다. 별이 반짝이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실은 지구의 대기 때문인 것이다. 인공 위성에 망원경이나 TV를 장치하면 우리는 공기의 바다 위에 떠오를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우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게 된다. 또 전파 망원경을 사용하면, 우주 전파나 태양 전파를 수신할 수 있다. 인공 위성은 아득히 멀리 떨어진 은하로부터의 우주선(우주 공간에 존재하는 고 에너지 방사선의 총칭)이나, 결코 우리 지구의 기단(수평 방향으로 거의 일정한 성질을 가진 대기의 광대한 덩어리)을 뚫고 침투해 올 수 없는 태양으로부터의 방사선을 알려주고 있다. 그것들은 지구를 에워싼 자장이나 전기장을 생각나게 한다. 인공 위성은 또 위성 텔레비전 중계나 일기 예보에도 사용된다. 바야흐로 우리는 우주선을 타고 날아올라 달이나 행성까지 여행할 수 있는 우주 시대의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인류는 우주의 고독한 존재? 우리는 우주의 고독한 존재인가? 다른 행성에는 지적인 생물이 없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얼마 전까지는 과학 소설에서나 다루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전파와 우주선의 발달로 우리는 하나의 해답에 접근해 가고 있다. 우리는 지성을 가진 것은 이 지구상에서 사는 두 발로 걷는 인간뿐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전우주를 통틀어 고도의 지능지수(IQ)를 가진 주인은 우리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코페르니쿠스 이전의 시대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 생각에 의하면 우리 인간은 우주의 심장부에 살고 있으며, 나아가 그 심장부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 인간은 수천억 개의 또 다른 태양(항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중의 어느 것은 분명히 이 태양계에 있는 것과 비슷한 행성을 갖고 있다. 이들 행성에는 우리 행성(지구)과 마찬가지로 산소나 물, 유기 분자가 있다. 생명은 우리가 살고 잇는 이 작은 지구에 한정될 필요가 없다. 이 지구에서 생명을 탄생시킨 조건은 다른 세계에도 있을 것이다. 다른 태양계에 속하는 어느 행성에, 인간보다 우수한 두 다리나 세 다리, 네 다리, 다섯 다리, 혹은 여섯 다리를 가진 생물이 살고 있어서 이 우주를 자세히 탐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1960년에 미국 버지니아 서부의 그린베이에 있는 국립 전파 천문대에서는, 천문학자들이 오즈마 계획 팀을 조직해서 전파 망원경으로 먼 곳의 행성계에서 오는 신호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들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신호를 포착하고도 낙담하지 않았다. 그 메시지가 그들 천문학자가 있는 곳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1000년 이상의 세월이 걸렸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메시지를 보낸 행성에서 살고 있는 몇 개인가의 다리를 가진 생물들은 언젠가 우리 행성 쪽을 조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이미 생명의 조짐을 발견할 수 있는 제 2의 장소로 이 지구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이 순간 우리와 통신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신호를 보내고 우리의 대답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뉴턴에게 도전장을? 과학은 계속 발전해왔다. 모든 시대를 통해 낡은 법칙은 새로운 발견의 공격 앞에 붕괴되어 갔다. 그 경향은 20세기에 이른 후에도 지속되어, 그 가장 유명한 법칙, 뉴턴의 만유 인력의 원리에도 감히 의문을 품게 되었다. 뉴턴에 도전한다! 요즘은 어린아이들까지도 사과가 어떤 이유로 땅에 떨어지는지를 알고 있다. 어느 누구나 지구가 어떻게 달을 끌어당기고, 태양이 멀리 던져 놓은 행성이 모두 어떻게 궤도를 유지하며 돌고 있는지를 알고 있다. 인력은 이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힘이었다. 그러나 A.아인슈타인은 놀랍게도 뉴턴이 발견한 인력의 개념에 도전했다. 1916년, 모든 사람들이 중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던 것을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보도록 했던 것이다. 여러분이 광대 무변한 우주 공간에 떠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우주선 안에 있다고 가정하자. 여러분은 모든 항성이나 행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력의 영향을 느끼지 않는다. 거기서 여러분은 바닥에 사과를 떨어뜨린다는 극히 간단한 실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그 실험에서 사과는 떨어지지 않고 공기 속을 자유로이 떠다니고 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이 곳에 중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우주선에 시동이 걸리고 우주선이 앞으로 움직인다. 우주선 안에 있는 여러분과 사과, 그리고 그 밖의 다른 모든 것들이 뒤쪽의 벽에 던져진다. 우주선은 속력을 차츰 증가시켜 간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여러분은 가속 운동에 익숙하게 된다. 그래서 조금 어질어질하지만 우선 한쪽 무릎을 세우고 다음에는 다른 쪽 무릎을 세워 똑바로 선다. 이렇게 하면 여러분은 마치 바닥 위를 걷는 것처럼 벽 위를 걸을 수 있게 된다. 이제 반대편 벽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하늘과 같다. 여러분은 가구를 바로 세우고 그림을 벽에 거는데, 그림을 거는 곳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닥이었던 곳이다. 만일 여러분의 우주선이 가속하는 정도가 지구의 중력 가속도와 맞먹는다면, 여러분은 지구의 내 집에서처럼 쾌적함을 느낄 것이다. 거기서 다시 하나의 실험을 해보자. 그것은 무게가 다른 2개의 공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이 실험을 한 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공을 떨어뜨린 순간, 2개의 공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려 정확히 동시에 발 밑에 닿았습니다. 나는 이 실험이, 내가 지구의 중력장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2개의 공은 중력 때문에 발 밑으로 떨어져 내린 것입니다." 그러나 외부에서 여러분이 하는 실험을 볼 수 있었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이 정신나간 과학자는 우주선의 뒷벽에 마치 파리처럼 붙어 있습니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2개의 공을 놓았습니다. 이제 2개의 공을 우주선과 같은 속도로 전진하도록 강제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공은 뒤쪽의 벽과 충돌합니다. 만일 당신이 내게 어떻게 뒤쪽 벽에 공이 가 닿았느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것은 우주선이 공보다 빨리 전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가?" 이런 물음에 아인슈타인은 "양쪽 모두 옳다"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할 것이다. "이렇게 서로 다른 대답이 나온 것은 관찰자가 서 있는 장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우주선 속에 있다면 중력이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우주선 밖에 있다면 우주선이 공보다 빨리 나아가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때에는 공의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중력을 개입시킬 필요가 없습니다. 우주선의 운동만으로도 충분한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다시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뉴턴의 법칙을 언급하지 않고도 우주선 속에서 진행되는 일을 설명할 수 있다면, 중력을 개입시키지 않고 천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 생각으로는 천체는 우주의 모양 때문에 지금과 같은 식으로 우주 공간을 움직여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2층 창에서 아래쪽을 내려다보다가 보도 위를 저절로 굴러가는 유리 구슬을 보았다면, 유리 구슬이 어떤 신비한 힘에 이끌려 굴러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겠지요. 그러나 계단을 내려와 보도를 잘 조사해 보십시오. 그러면 그 보도에 굴곡이 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유리 구슬은 보도의 굴곡이나 울퉁불퉁한 모양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간은 이런 보도처럼 불규칙합니다. 별이나 행성은 공간이 휘어 있는 통로를 따라 길을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공간은 포장지? 사람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공간이 휘어 있다니? 그게 무슨 말인가! 아인슈타인은 훌륭한 물리학지이다. 그러나 이제 그도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어떻게 공간이 똑바로 뻗어 있지 않다는 말인가? 만일 아인슈타인이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절대로 직선을 그을 수 없을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다시 이야기한다. "좋습니다. 여러분은 정말로 직선을 그을 수 있습니까? '물론 그릴 수 있지!' 이렇게 대답하기 전에 우선 잠시 실험을 해 보지요. 똑바른 책상 위에 종이를 한 장 올려놓고 직선을 그어 보십시오. 그리고 상상을 통해 그 직선의 연장선을 책상을 지나 늘려 보세요. 그 직선의 연장선은 방을 지나고 창을 통과하고, 거리를 지나고 마을을 지나 계속 똑바르게 연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렇게 여러분이 직선을 긋는다고 해도 그 직선은 지구가 둥글게 굽어 있기 때문에 결국은 휘어져 버릴 것입니다. 결국, 여러분이 그은 직선은 최초의 출발점(책상 위의 종이)으로 되돌아오고 말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여기까지 말한 후 잠시 쉬었다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모든 선은 굽어 있습니다. 우리가 직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휜 것이 보이지 않는 아주 짧은 선인 것입니다. 우리는 직선을 두 점 사이의 최단 거리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뉴욕과 서울을 최대한 짧은 선으로 이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그 선이 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두 도시를 최대한 직선으로 연결하고 지구상에 있는 제 3의 장소를 택해 그곳도 마찬가지로 이어 보십시오. 이상하게도 이렇게 만들어진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가 넘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어느 천문학자가 직선으로 3개의 별이나 행성을 이어 본다면, 그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이상이 되어 버릴 것입니다. 마치 지구의 표면이 휘어 있는 것처럼, 그 바깥쪽의 공간도 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에게 다시 이렇게 물을 것이다. "지구의 표면이 휘어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외부의 우주 공간이 휘어 있다는 것도 증명할 수 있을까요?"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답한다. "증명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태양의 주위를 도는 수성의 운동에서 나타나는 불규칙성의 신비도 해명하고자 합니다." 오랫동안 천문학자들은 수성이 보여주는 공전 궤도의 불규칙성으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것은 해왕성을 발견한 프랑스의 천문학자 U.J.J.르베리에에 의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르베리에 이래로, 천문학자들은 뉴턴의 인력의 법칙으로 그 불규칙성을 계산하려고 해보았으나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은 그 사실을 이렇게 설명했다. "수성은 태양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태양의 거대한 질량은 그 부근의 공간을 왜곡시켜 휘게 합니다. 공간은 소포를 아무렇게나 싼 포장지처럼 굽어져 있습니다. 수성은 마치 유리 구슬이 보도의 울퉁불퉁한 곳을 굴러 다니는 것처럼 휜 공간을 따라 편안히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수성의 궤도가 나타내는 불규칙성에 대해 이렇게 공간이 휘었다는 이론을 적용시켰다. 그것은 딱 들어맞는 설명이었다. 수성 궤도의 불규칙성의 수수께끼는 마침내 매듭이 지어진 것이다. 빛이 휘다 수성의 궤도에 대한 어려운 문제가 풀린 것은 아인슈타인의 커다란 승리였다. 그러나 아직 많은 과학자는 그의 '휜 공간'이라는 이론을 승인하려 하지 않았다. 아인슈타인은 논쟁을 벌이는 대신 공손하게 또 하나의 실험을 제안했다. 그의 제안은 이랬다. "공간이 휘어져 있다면 행성의 궤도뿐만 아니라 빛도 따라서 휘어야 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멀리 떨어진 별에서 나온 빛이 태양 근처를 지나는 것을 볼 수 있다면, 그 빛이 휜 진로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반론을 폈다. "어떻게 태양 근처를 지나는 별빛을 볼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당신은 태양 광선이 그 근처의 별빛을 모두 잡아먹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답했다. "1919년 3월 29일에는 일식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 일식은 남아메리카와 대서양에서 아주 확실히 보일 것입니다. 그 일식 중에 여러분은 태양 뒤편 우주 공간에 있는 어떤 별을 촬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일식 때 찍은 사진과 6개월 후에 다시 똑같은 장소를 찍은 사진을 비교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스스로 발견한 것을 보고 놀랄 것입니다." "영국 학사원"은 아인슈타인의 이 도전을 받아들여, 1919년 초 브라질과 아프리카의 케냐로 탐사대를 파견했다. 달이 지구와 태양 사이에 들어오고 어두워진 하늘에 별이 돋아나기 시작하자, 탐사대는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6개월 후에 태양이 없을 때 같은 부분을 찍은 사진과 비교되었다. 탐사대가 그 사진을 갖고 영국으로 돌아올 때까지는 아인슈타인이 맞다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과학자들은 빛은 직진하는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탐사대가 찍은 사진에는 빛이 태양처럼 거대한 물체 부근을 통과할 때에는 휘어진다는 증거가 있었다. 그런데 그 곡선은 아인슈타인이 예언한 그대로는 아니었다. 그 점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했다. "내 계산에는 착오가 없습니다. 그 사진을 촬영한 사진사들은 더욱 정확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몇 년 뒤, 아주 훌륭한 카메라가 발명되어 새롭게 촬영된 사진은 아인슈타인이 예언한 그대로의 빛의 곡선을 보여주었다. 과학계는 실험 결과에 경악했다. 이제 어느 과학자든,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중력의 원리로만은 설명할 수 없는 우주의 많은 의문에 답해 주는 것임을 의심치 않게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세계 최대의 과학자라고 칭송되고 있다. 그리고 런던의 "영국 학사원"에는 그의 초상화가 아이작 뉴턴의 초상화 근처에 걸려 있다. 그것은 시간과 장소의 문제이다. 아인슈타인의 핵심 이론은 상대성 이론이다. 그것은 과연 어떤 이론인가? 여러분이 지금 막 역을 출발하려는 열차에 타고 있다고 하자. 그리고 읽고 있던 책으로부터 눈을 떼어 인접한 선로에 있는 또 하나의 열차를 본다고 하자. 갑자기 그 열차가 움직이면 여러분에게는 자신이 탄 열차가 천천히 뒤로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플랫폼에 서 있는 여러분의 친구는 전혀 다르다.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친구의 열차는 그대로 정지하고 있지만 옆의 열차는 앞쪽으로 출발했다." 여러분의 운동 감각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에 의해서 생겨난 것이다. 운동은 상대적이다. 만일 지구 하나만이 완전히 텅 빈 우주 속에 있고 현재의 속도로 운동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지구의 운동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고 지구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항성이나 행성을 다시 살려내면 여러분은 다시 지구의 운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지구의 운동을 다른 천체의 운동과 관련짓고 있는 것이다. 운동은 관련되어 있는 무엇인가가 없을 때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운동은 이렇게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방향이 있다. 한 사람은 북극에, 또 한 사람은 남극에 있다고 했을 때, 이 두 사람에게 어디가 위쪽이냐는 질문을 던져보라. 그들은 서로 반대되는 방향을 가리킬 것이다. 방향이란 여러분이 있는 장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모든 별이나 행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한적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우주 여행자는 마치 방향이 없는 세계에 존재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방향이란 그것에 관련된 무엇인가가 존재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운동은 상대적이다. 방향도 상대적이다. 그리고 시간 역시 상대적이다. 어떤 미국인이 점심 식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시계가 없어서 시간을 알려고 단파 라디오를 켰다. 그러자 "오전 10시를 알려 드립니다."라는 시카고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그럴 리가 없는데" 하면서 주파수를 다시 맞췄다. 이번에는 서해안에 있는 방송국에서 발사되는 전파가 잡혔다. "오전 8시입니다. 음악을 들려 드리겠습니다."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가 다시 한 번 다이얼을 돌리자 유럽으로부터 "오후 4시입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역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마지막으로 다이얼을 돌려 겨우 자기가 살고 잇는 도시의 방송국에서 "정오를 알려 드립니다"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때서야 '맞아, 점심 식사를 해야겠어'하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대체 정확한 시각은 몇 시인 것일까? 실제로 유일한 시각은 없는 것이다. 시각은 여러분이 현재 서 있는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시각은 이렇게 상대적이다. 여러분은 동시에 온갖 종류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별들을 볼 때, 하늘에서 반짝이고 있는 그 어느 별도 여러분이 지금 그것을 보고 있는 장소에는 이미 존재하고 있지 않다. 여러분이 하늘에서 보고 잇는 별은 이미 사라져 버렸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떨어져 있는 거리에 따라, 별빛이 여러분의 눈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5년이나 50년, 혹은 5000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여러분은 그것이 수년 전에 있던 자리, 혹은 수세기 전에 있던 자리, 혹은 더 오래 전에 있던 자리의 별빛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하늘은 우주의 아주 오래된 역사를 그려 보이고 있다. 여러분은 어느 날 밤 놀라운 행운을 잡아, 하늘을 올려 보다가 동시에 2개의 새로운 별이 탄생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적어도 그 탄생은 동시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2개의 별이 정말로 탄생한 시기는 수만 년이나 서로 격차가 있을 수도 있다. 보다 가까운 별은 30년 전에, 보다 멀리 있는 별은 3만 년 전에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지구상에 있는 여러분에게는 모두 '바로 지금' 탄생한 것이다. 우리가 아득히 먼 은하계의 지성이 있는 생물로부터 무선 신호를 받았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는 곧 메시지를 작성해 보내고 그것에 응답이 오기를 기다린다. 그러나 아무리 응답을 애타게 기다려도 응답은 금방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보낸 메시지가 은하에 전해지는 데에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 유일한 시간이란 없다. 시간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에 달려 있다. 만일 여러분이 이 순간 어느 먼 곳의 별에 있고, 여러분이 가진 망원경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현재의 지구가 아니라 뉴턴이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던 때라든가 R.베이컨이 감옥에 갇힐 때, 혹은 탈레스가 일식을 예언하던 때의 지구를 보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현재라고 생각하는 시간은 이 지구상의 우리에게는 먼 과거의 일인 것이다. 시간뿐만 아니라 '사간의 진행 상태' 역시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 다시 아인슈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시간은 어느 곳에서나 동일한 속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시간은 높은 장소보다 낮은 장소 쪽에서 천천히 진행된다." 정확하게 똑같은 2개의 시계를 생각해보자. 그 중 하나는 길가에 수평으로 놓아두고 또 하나는 고층 빌딩의 가장 높은 층에 놓아둔다. 그러면 이론적으로 길가에 놓인 시계 쪽이 천천히 돈다. 이 시간의 감속은 수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들어맞는다. 만일 두 쌍둥이 중에서 한 사람은 계곡에 살고 다른 사람은 산꼭대기에서 산다고 했을 때, 다른 모든 조건이 똑같다면 계곡에 사는 사람이 더 오래 살 것이다. 그렇지만 깊은 계곡에 들어가거나 지하에 땅을 파고 살 필요는 없다. 오래 산다고 해봤자 그 차이는 일생을 두고 1초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이상한 일을 어떻게 하면 증명할 수 있을까? 시간의 흐름의 극히 미소한 차이까지 기록할 수 있을 정도로 정확한 시계는 이전에는 없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지극히 짧은 시간을 측정하기 위해 방사선의 일종인 감마선이 이용될 수 있다. 아인슈타인은 시간이란 질량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점을 시사했다. 낮은 장소에 있는 시계는 천천히 진행된다. 그것은 그 시계가 지구의 질량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있기 때문이다. 질량이 크면 클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따라서, 예를 들어 거대한 태양 위에 놓인 시계 바늘은 태양에 비해 훨씬 작은 지구상에 있는 시계 바늘보다 천천히 간다. 그러나 어떻게 태양 위에 시계를 놓을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태양에는 이미 시계가 있습니다. 그것은 전자의 움직임입니다. 그것들은 지구의 전자보다 천천히 움직일 것입니다. 태양의 빛을 분광기를 통해 조사해 보십시오. 만일 내가 옳다면 햇빛은 서서히 스펙트럼의 적색 쪽으로 움직여갈 것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말한 바대로 이 이동은 태양빛 속에서, 그리고 뒤에는 다른 별에서 오는 빛 속에서도 발견되었다. 별의 질량이 커지면 스펙트럼의 적색 이동도 더욱 커진다. 시간이 모든 장소에서 똑같이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밝혀졌다. 어떤 장소에서는 시간이 흐르는 속도가 커지고, 다른 장소에서는 작아진다. 시간의 흐름은 여러분이 있는 장소에 따라 상대적이다. 공간 역시 상대적이다. 그런데 공간은 변화할 수 없는 것일까? 공간은 언제나 똑같은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다시 말한다. "아닙니다. 공간은 일정하지 않습니다." 공간은 무엇에 의존하고 있는 것일까? 공간은 마치 포장지의 모양이 그 속에 들어 있는 물건에 의해 모양이 잡히듯, 공간 속에 있는 것에 의해 결정된다. 태양 주변의 공간은 지구의 주위 공간과는 전혀 다르다. 시간이 장소에 따라 다른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빛은 공간을 빠져나간다. 강이 흐르는 모양을 통해 지형을 알 수 있듯이, 빛의 진로가 공간의 모양을 알려준다. 이미 말했듯이 태양과 같은 거대한 질량은 주변 공간을 왜곡한다. 그곳을 통과하는 빛은 공간의 휨에 따라 구부러질 것이다. 여러분이 화성과 금성으로부터 지구에까지 오는 빛의 진로를 산출한다고 하자. 그것들로 만들어진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은 다른 보통 삼각형의 내각의 합보다 큰 것으로 측정될 것이다.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가는 빛은 태양의 질량에 의해 왜곡된 공간을 통과하게 된다. 공간은 상대적이다. 공간은 그 곳에 있는 질량에 의해 좌우된다. 통일된 우주 아인슈타인이 이야기한 것 중의 많은 부분은 마치 과학 소설의 내용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터무니없다고 여겨지는 이야기를 처음 들으면 그 생각을 거부하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사실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갈릴레이는 말했다. 움직이고 있는 것은 태양이 아니라 지구라고. 갈릴레이가 그 말을 했을 때도, W.하비가 혈액의 순환을 발견했을 때도, 또 레벤후크가 가까운 사람들에게 현미경에게 포착한 미생물을 보여주겠다고 했을 때도, 사람들의 반응은 부정적이었다. 우리에게 있어서 자연계에 대한 기존의 사고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보통 우리는 사물을 따로따로 개별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편이 간단하고 편리하다고 느낀다. 공간은 공간, 물질은 물질, 에너지는 에너지인 것이다. 우리는 이들 사물 사이에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를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아인슈타인은 자연에 관한 통일된 그림을 제공했다. 상대성 이론은 우주의 모든 것에 있는 '관련성'을 지적했다. 운동, 방향, 시간, 공간, 질량, 에너지는 하나하나 따로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다른 것이 있다는 전제로 존재하는 것이므로 모두가 서로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질량 역시 상대적이다. 질량도 운동에 의해 변화한다. 운동하는 물체는 정지하고 있는 물체보다도 무겁다. 빠른 속도로 날고 있는 비행기는 공중에 그대로 멈춰 있는 비행기보다 무겁다. 질량은 빨리 날면 날수록 증가되어 간다. 빛의 속도에서 그 질량은 측정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진다. 20세기는 아인슈타인의 시대이다. 그의 이론은 우리가 우주를 조망하려 할 때 상당히 효과적인 자료가 된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이전에는 깊은 신비에 묻혀져 있던 자연의 온갖 현상을 설명해 주었다. 그의 유명한 공식 E=MC2(E는 물질이 가진 에너지, M은 물질의 질량, C는 빛의 속도)은 우리의 생활에 심대한 영향을 끼쳐 주었고, 언젠가는 인간이 대자연을 완전히 관리하는 데까지 기여할 것이다. 각각의 과학자가 자기 분야의 지식이 남에게 뒤질까 봐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 전문화의 시대에,, 아인슈타인은 많은 측면에서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는 원자의 비밀을 간파하고, 다시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법칙을 발견하려고 별과 별 사이의 공간을 응시했다. 그는 뉴턴처럼 다방면에 걸쳐 천재성을 발휘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뉴턴의 이론의 일부분을 뛰어넘은 것처럼, 언젠가는 아인슈타인의 이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학의 위대함은 어떤 일에 대해서든, 언제까지나 영원히 승인해야 한다는 고정된 관점을 거부하는 데 있다. 과학은 새로운 상황이나 지식을 만나면, 진보하고 변화하는 것이다. 과학의 법칙은 우리가 자연계의 작용을 어떻게 보는가를 진술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그때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기초로 한 관찰이다. 우리는 한층 더 많은 것을 배우면서 과학의 법칙을 변화시켜 나간다. 하지만 자연 자체가 법칙에 따라 변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단지 이전보다 자연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다. 과학의 법칙 또한 상대적이다. 이들 법칙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나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다. 과학의 법칙은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시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기구, 나아가 우리가 모두 체험한 사실에 의존하고 있다. 새로운 지식은 새로운 법칙과 새로운 이해, 새로운 문제의 발견을 낳는다. 진리의 탐구는 결코 끝나지 않으리라. 제 2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계의 이모저모 원자폭탄이 작렬하고 제 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20세기 후반에도 아인슈타인만큼 위대한 과학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훌륭한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개인적으로 혹은 국가나 기업의 원조를 받아 다채로운 활약을 보여 좋고 나쁜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만을 간추려 연대기식으로 기술하기로 한다. 1947년 진공관을 대신할 반도체가 발견되어 순식간에 진공간을 몰아낸다. 1953년 미국의 J.D.웝슨과 F.H.C.크릭이 유전자의 본질이 DNA(이중 나선을 이루고 잇는 데옥시리보핵산)에 의해 해명된다는 것을 제창, 분자 생물학의 시대가 도래한다. 1954년 핵무기와 쌍둥이라 할 수 있는 원자력 발전소가 소련에서 건설된다. 그 후 영국과 미국을 비롯해 우리나라에서도 원자력 발전소가 건설되었다. 1956년 일본의 구마모토 현 미나마타 시에서는 화학공장에서 배출하는 유기 수은이 들어 있는 폐수에 의해 미나마타 병이 발생했다. 유기 수은 중독에 의한 만성 신경질환으로 많은 사람이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1960년 타운스 등의 이론을 기초로 미국에서 레이저가 발명되었다. 1969년 미국의 아폴로 계획으로 인간이 비로소 달에 착륙한다. 그 뒤에는 우주로 다양한 목적(천체 탐사, 방송, 기상, 군사용 등)을 가진 무인, 유인의 크고 작은 수많은 우주선이 발사된다. 1973년 유전자의 본질인 DNA의 특정한 부분에 다른 DNA의 단편을 집어넣어 부분적으로 성질을 바꾸는, 유전 공학의 새로운 조작 기술이 실시된다. 1975년 미국의 아실로마 회의에서 '유전자 조작'과 '세포 융합'이 몰고 올 결과에 대해 토론되었으나, 결국 이들 연구가 해금된다. 1976년 발암성과 기형 인간을 낳는 다이옥신이, 이탈리아 밀라노의 한 공장에서 유출된다. 인체에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의 심각한 피해를 준 이 사건은 '화학의 히로시마', '유럽의 미타마타'라고 일컬어진다. 1977년 초 LSI가 일본의 기술진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것은 6mm의 규소 단결정 속에 일본 문자 8,000자를 담을 수 있을 정도의 기억 용량을 갖고 있다. 1978년 영국에서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다. 1979년 미국의 드리마일 섬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발생, 방사능이 누출되어 주민들이 공포에 떨었다. 1981년 최초의 우주 왕복선(콜럼비아 호)이 '우주의 실험실'로 발사되었다. 1985년 핼리 혜성 탐사. 이 탐사를 위해 미국, 소련, 일본 등이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과학 기술을 위한 긴밀한 국제 협력이 실현되었다. 1986년 마이너스 180도의 온도에서 초전도 현상을 일으키는 반도체가 잇달아 개발되어 실용화를 위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소련의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에서 사고가 일어나 방사능에 의한 피해가 유럽에까지 미쳤다. 따라서 이전의 미국 드리마일 섬 원전 사고와 함께, 원전의 안전성을 부르짖는 일부 사람들의 주장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미국이 SDI(전략 방위 구상)를 제안하여 우주의 군사 기지화가 우려되었다. 제 9장 과학과 인간, 그 현재와 미래 인간과 기계의 관계 지구는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과학 기술로 가득 찬 상자 인간과 기계의 관계 우리의 과학 여행은 약 2만여 년 전의 라스코 동굴 벽화를 그린 사람들로부터 긴 도정을 지나왔다. 라스코 주민들은 지상에 살고 있는 나약한 생물로서 자연을 불안과 공포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들은 주변 지역을 돌아다니고 수렵에 나서기도 했지만, 가까운 강의 유역이나 언덕밖에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밖의 모든 세상은 그들의 눈에 신비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불을 사용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간단한 도구를 만들의 정도의 지식은 있었다. 이제 인간은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생물이 되었다. 우리는 자연의 신비를 밝히고, 우리 자신을 위해 다양한 힘을 이용하고 있다. 또 이 지구라는 행성의 모든 대륙과 대양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나아가 우주 공간에로의 거대한 첫 발자국을 내디뎠다. 우리는 강력하기는 하나, 역사상 어느 시대에도 경험한 적이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 현대의 우리가 가진 문제 중의 하나가 과학 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기계이다. 18세기의 산업 혁명이 낳은 증기 기관을 필두로 다양한 기계류가 지극히 효율적으로 이용되면서, 인간의 중노동은 물론 손으로 하는 작업도 차츰 감소하여, 실업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어 왔다. 뉴커먼 기관의 증기병을 열고 닫는 일을 담당하던 소년이 개폐를 자동으로 하는 방법을 발견했다는 이유로, 주인으로부터 해고된 이야기는 실업 문제에 관한 지극히 상징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새로운 자동 기계와 그것을 명령하는 컴퓨터가 공장에 채용되었을 때 수많은 노동자들이 직장을 잃었으며, 자동 엘리베이터가 사무실 빌딩에서 사용되고 새로운 자동 공정이 자동차 공장 등에서 채택되면서 역시 실업자가 발생했다. 한 대의 석탄 채굴기는 수백 명이나 되는 광부의 일을 혼자서 담당했다. 그리고 석탄의 채굴에서 반출까지의 일이 모두 외부에서 단추를 누르는 2, 3명에 의해 간단히 처리되게 되었다. 결국 우리 주변에는 항공기, 자동차, 세탁기, 텔레비전, 퍼스컴 등 거대하고 정밀한 기계를 제작하는 다양한 생산 공장이 계속 증가해 왔고, 이들 공장에서는 단순한 일만을 담당하는 소수의 노동자와 몇몇 관리자가 필요할 뿐이다. 자동 조작(오토메이션)의 발전은 많은 노동자를 계속 고용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고에서 도출된 것이다. 이렇게 기계의 다채로운 출현이나 발전과 함께 실업 문제의 해결에는 질적인 변모가 나타났다. 이는 오늘날의 정교한 기계는 사람보다도 훨씬 간단하고 치밀하며 다면적이고 생산적으로 일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노동자들은 몇 시간만 일하고도 연구와 교양을 위한 시간을 많이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실업 문제의 해결을 국가적 혹은 국제적 문제로 취급하여, 모든 사람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일이 꼭 필요한 것이다. 지구는 모든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의학과 관련된 몇몇 발견은 새로운 문제를 낳았다. 의사들이 항생 물질을 사용한 뒤, 전세계적으로 사망률이 격감했다. 새로운 강력 살충제 DDT는 모기를 매개로 해서 일어나는 아주 무서운 질병 말라리아를 예방하게 되었다. 다양한 백신의 대량 판매는 질병을 격감시켰다. 그러나 항생 물질이나 DDT는 사용량을 증가시키면 유해한 결과를 초래한다고 판명되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세계 인구는 10억에서 20억으로 증가했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50억을 넘어섰고 2000년에는 60억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때까지 지상에 커다란 재난이 닥쳐오지 않는다면... 식량 생산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다채롭고 풍부하게 되어 사람들의 수명이 연장되었으나, 한편 미개발 지역에서는 아직도 굶어 죽는 사람이 많이 있다. 또 식량의 편재(소수의 포식 인구와 다수의 기아 인구의 서글픈 공존)도 현저해졌다. 지금 당신이 이 책을 읽고 잇는 동안에도 지구상 어디에선가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기아로 고통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무모한 남획이나 개발은 후손을 위해 신중을 기해야만 한다. 과학 기술이 발명한 오늘날의 무기는 대량 살인이 가능하게 되었고, 지상의 모든 것을 삽시간에 산산조각 내버릴 정도의 위력을 갖게 되었다. 과거의 전쟁(특히 제 2차 세계 대전)은 어린아이들의 전쟁놀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전쟁은 대규모의 사상자와 물자의 파괴를 낳았다. 그럼에도 다음 전쟁을 위한 준비가 공공연히는 아니지만 교묘히 은폐되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살상하는 도구는 처음에는 활, 그리고는 권총, 다음에는 기관총, 그리고 대포, 중포, 원자폭탄에서 수소폭탄,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에 이르기까지 변화되어 왔다. 제 2차 세계 대전까지의 전쟁에서는 한쪽이 다른 쪽을 이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전쟁에 승자란 없다! 양쪽 모두 패자로 남을 뿐이다. 세계의 도시나 마을에 떨어진 폭탄, 포화, 방사능의 비... 우리는 어디에서도 숨을 곳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어느 편에 있든 모든 사람은 똑같이 무서운 운명을 만날 것이다. 인간은 역사상 최초로 전쟁 없이 살아야만 할 절대적인 필요에 직면하고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는 어느 생명도 살아 남을 수 없을 것이다. 전쟁은 이미 세계가 감당할 수 없는 '사치'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과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지구의 주인공이 아닌가? 그들은 바람을 정복하고 바다를 정복하고 공기를 지배하고, 나아가 인간에 반항한 모든 생물을 사멸시킬 수 있지 않은가? 인간도 멸종할 수 있다. 일찍이 공룡은 지구상의 주인공이었다. 그들은 적이 되는 것과 싸우고 그들에 대항하는 것은 모두 없애 버렸다. 그리고 이제 그들 중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라곤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화석 유골뿐이다. 공룡은 왜 절멸한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사는 방법을 변화시키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공룡처럼 멸종한 종이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최소한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일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코앞에 닥친 위험이 얼마나 큰지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또 세계의 모든 국민은 공동의 안전을 위해 서로 신뢰하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칠 것 하나 없는 고속 도로 상에서 자기 혼자 차를 모는 사람은 마음대로 운전해도 될 것이다. 일반 도로의 운전 규칙 같은 것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사람들과 차량으로 가득한 대도시의 도로에서는 모든 교통 법규를 지켜야만 한다. 다른 모든 사람의 안전을 위해 자기 마음대로 하고 싶은 생각을 어느 정도 단념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국민은 공존해갈 것이다. 아마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서로 기쁘게 손을 맞잡을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오늘, 어느 한 나라의 국민이 원자폭탄으로 무장한다면 세계 여러 나라 국민의 생명은 위험에 빠져 버린다. 지금까지 모든 국민은 자신에게 가해질지도 모르는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무기를 비축해 왔다. 그러나 수소폭탄의 비축은 우리를 커다란 안전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무서운 위기로 이끈다. 인류가 지구상에 살아남으려면 최초의 원자폭탄이 히로시마에 투하되기 이전과 같은 행위나 판단(전쟁 수행의 의욕)을 절대로 계속해서는 안 된다. 핵전쟁의 위협은 우리 인간에게 전혀 새로운 출발점에 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 과학 기술로 가득 찬 상자 현대의 위기에 대한 중대한 책임은 과학 기술자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 경제, 생산의 관련자에게도, 아니 일반 국민 모두에게 냉엄한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결국 평화의 책임은 전세계 모든 사람의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은 과학 기술에 대해 더욱 많이 알아야만 한다. 과학 기술 그 자체에는 현명한 판단력이 있을 수 없다. 과학 기술이란 인간이 발견한 단순한 보편적 법칙이나 기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을 좋은 목적을 위해서, 혹은 나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인간뿐이다. 과학 기술이 우리를 소아마비로부터 구해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리석음을 치료할 수는 없다. 우리는 사소한 행복을 커다란 피해와 맞바꾸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과학 기술상의 발견이나 발명을, 문명을 끝장내기 위해, 다시 말해서 전쟁에 사용한다고 해도 그것은 그런 발견을 해온 뛰어난 과학자나 기술자만이 져야 할 책임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져야 할 책임이다. 이렇게 우리의 앞길에는 이제까지 어느 시대에도 없었던 다난한 요소가 많이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아름다운 이상과 선량한 지성이 있다. 우리는 이 힘을 최대한으로 발휘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 평화와 행복을 광대한 우주에 있는 극히 작은 별, 이 지구에 튼튼히 뿌리박게 해야만 할 것이다. 옮긴이의 말 과학의 역사, 사람들의 역사 최근 많은 사람들이 과학과 기술의 중요성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다. 특히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의 몰락으로 오랫동안 위세를 떨치던 냉전 시대가 끝나고 이데올로기보다는 경제적인 부가 더 중요시되기 시작하면서 모든 나라들은 무한 경쟁이라는 기치를 내세우고 기술력을 높이기 위해 저마다 안간힘을 쓰고 있다. 21세기를 불과 몇 년 앞둔 오늘날 과학은 더 이상 해당 분야의 관계자들이나 이과계 학생들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알아야 하는 상식이 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한편으로는 매우 반가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과학이나 기술을 상품 개발이나 경제 발전을 위한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경향이다. 더군다나 이런 흐름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필요로 하는 단편적인 과학 지식만을 얻게 된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은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장구한 세월 동안 무수한 사람들의 노력을 통해 서서히 진전되어 왔다. 우리들이 무심코 이용하는 숱한 문명의 이기들 뒤편에는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우리는 흔히 과학과 기술의 역사를 기름 냄새 풍기는 기계의 역사쯤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정작 과학의 역사는 '왜'라는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 자연의 신비와 그 원리를 파헤친 사람들의 역사이다. 따라서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사람들의 창조적인 탐구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이 책은 아서 S.그레고르의 "A Short History of Science"를 번역한 것이다. 저자인 그레고르는 1923년 미국에서 태어나 브루클린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가르치면서 자연을 개척한 사람들의 역사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코넬 대학에서 과학사와 과학론을 강의하고 뉴욕 시의 여러 학교들이 맨해튼에서 매년 개최하는 과학 박람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레고르는 과학 저널리스트로도 활약해서, 이 책 이외에 "Time Out for Youth" 등의 저서를 집필해 주로 청소년층을 대상으로 과학의 폭넓은 의미와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이 책이 발간되었을 때 "뉴욕 타임스"를 비롯한 많은 신문과 과학 잡지들이 서펑을 통해 극찬하기도 했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과학이라는 크나큰 세계를 일구어 온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과학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996년 3월 과학 세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