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는 모험을 불신하다 1903년 초, 과학협회는 소식이 끊긴 노르덴시욀드를 걱정했다. 하지만 이 같은 과학적 임무에는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다. 아무리 그가 부자라 할지라도 특정 개인은 재정지원을 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후 무관심과 공권력의 인색함에 대항하는 오랜 싸움이 전개되었다. 공화국 대통령 루베는 과학 아카데미와 자연사 박물관, 지리학회에 대한 후원을 승인했다. 경도국은 소신을 갖고 충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해군은 석탄 100톤과 몇 가지 장비의 사용을 허가해 주었다. 그러나 문교부의 파견단은 어떤 종류의 기부금이든지 단호히 거절했다. 친척들의 도움과 자신의 명성 덕분으로 샤르코는 정확히 2만 프랑의 기부금을 모을 수 있었다. 프랑스 중산층이 과학적 사고방식을 지녔다 할지라도 이런 식의 모험은 불신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진취적인 신문 《르마탱》은 프랑세호라 이름붙인 잠수함을 건조하기 위해 국민 모금운동을 시작한 참이었다. 그 신문의 발행인 브뤼노 바리야는 샤르코에게 탐험준비를 할 수 있도록 150만 프랑을 제공했다. 흔치 않았지만 감동을 주던 호의적인 후원자들도 있었다. 이중에는 카랑탕의 한 제조업자는 탐험에 감격하여 저장해 놓은 우유와 버터, 사과 브랜디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재정의 부족은 여전히 큰 부담이었다. "내가 얼마 전 보낸 12개월보다 더 이상 고통스러울 수는 없으리라."고 샤르코는 적고 있다... 탐험대는 해양학, 기상학, 동물학, 고대생물학, 지리학 연구를 목적으로 파타고니아 남쪽에 위치한 남극 대륙 일부와 그레이엄 랜드와 알랙산드르 1세 섬에 자리잡았다. 1838년 뒤몽 뒤르빌이 짧은 기간 탐험을 한 이래로 이곳에 발을 디딘 프랑스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의 일행은 두 명의 해군장교를 포함해 모두 19명이었다. ...배는 견고했지만 허술한 기계 때문에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탐험대는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한 후, 1903년 12월 23일 그곳에서 불의 땅을 향해 재출발했다. 1904년 1월, 샤르코는 그레이엄 랜드를 목표로 남쪽을 향해 돌진했다. 그 배에는 모든 종류의 물건과 - 그중에는 조립식 집도 있었다 - 긴 겨울을 나기 위한 식량이 비축되어 있었다. ...일행은 각자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다. 석탄은 이곳저곳에 쌓여 있었다. ... 예상보다 훨씬 빨리 곤경에 맞닥뜨렸다. 정확한 지도도 없었고, 수로측량표도 없는 해역에서, 간단한 도구에 의지해 알 수 없는 해류를 헤쳐 가며 어려운 항해를 해냈던 그의 선배들의 경험을 떠올렸다. 끊임없이 경계를 했건만 항해자들은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 암초나 비스듬하거나 자리잡은 빙산에 걸려들곤 했다. 1904년 2월 2일, 프랑세호는 사우스셰틀랜드 남서쪽에 도착해 섬과 곶을 보았다. 그 지역은 한번도 측정된 적이 없었는데, 고래나 바다표범을 잡는 어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곳을 왕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과학적 관심이 있을 리 없었다. 얼음절벽 위에서 처음으로 보일러가 파손되었음에도-파손된 곳은 그 외에도 많을 것이다.-측정작업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얼음이 비교적 얇은 지점에서 수로를 찾으면서 조심스럽게 전진했다. 어떤 때에는 강한 배의 추진력으로 얼음을 쳐내거나, 두껍고 평평한 덩어리를 밀어내거나 뒤엎었다. 또 어떤 때에는 배의 무게로 밀어붙여 구불구불한 틈을 만들어 갔는데, 장애물이 두 조각으로 분리되면서 그 틈새를 통해 수로가 열렸다. '진실로 열정적인' 이 항해를 계속 수행하기 위해 샤르코는 돛대 위로 기어올랐다. 활대 위에 자리잡은 그는 배가 얼음에 잘 저항하고 있으며 순탄히 항해하고 있음을 만족스러워했다. ... 조심스럽게 해안선을 따라가면서, 밤을 보내거나 기계를 수리하기 위한 피난처로 굴곡이 가장 덜한 곳을 찾던 프랑세호는 환상적인 풍경이 펼쳐진 빙산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게 있었다. "그것은 찬란한 장식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투명하고도 눈부신 그 장관을 맘껏 즐길 수 있었다. 도처에 높고 거대한 산맥들이 있고, 빛나는 백색광은 황량한 절벽들 중에서 몇몇 바위를 또렷이 부각시켰다. 빙하와 빙산들은 아주 연한 하늘색에서 감청색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푸른 색조를 띤 채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유리 반죽으로 이 섬세한 건축물은 바다의 거대하고 투명한 푸른빛과 대조를 이루기도 하고 한데 뒤섞이기도 했다." 2월 8일, 부빙군 위에 최초로 하선했다. 부빙군에 완벽한 야영지를 설치하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임시로 텐트를 세워야 했다. 그곳에서 해군 중위 레이는 극지 관찰을 시도했다. 사람들이 바쁘게 보일러 가스가 새는 곳을 수리하는 동안, 해군 대위 마타는 자동기록식 검조기를 설치했고, 자연과학자인 튀르케는 새를 박제했으며, 지질학자 구르동은 암석표본을 모았다. 다른 사람들은 탐험용 개에게 먹이기 위해 바다표범과 펭귄을 사냥했다. 극지의 동물군 오늘날 우리는 샤르코의 저서를 통해 이 시기 이후의 해상 동물의 퇴화를 측정할 수 있다. 2월 6일, 50여 마리의 바다표범들이 마치 배에 충돌하려는 듯이 배 주위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고래가 한 마리 나타나 바다표범을 쫓아 버렸다. 고래와 바다표범들은 차가운 물 속 저쪽에서 갑자기 몰려들었다. 아마추어 환경생태학자 샤르코는 자연을 보호하려고 애썼으며 마주치는 동물에게도 동정심을 가졌다. 그는 아델리와 파푸아뉴기니의 마을과 관습, 혈통을 유지하며 번식하는 두 종류의 펭귄을 익살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샤르코는 그들을 해치려드는 개들로부터 펭귄을 보호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르코는 바다표범과 펭귄을 희생시켜야만 했다. 당시에는 얼음을 녹여서 보일러나 다른 장비를 가동시키는 데 필요한 연수로 썼는데, 동물의 지방이 얼음을 녹이는 데 사용할 수 있는 훌륭한 연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펭귄들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조치했다. 1904년 3월 초, 탐험대는 겨울을 보내기 위해 원델섬의 어떤 만에 정착했다. 남위 65도 5분 지점에서 탐험대는 '어떤 정기적인 관찰도 지속된 바 없었던' 지역에 도달하게 되었다. 탐험대는 노르덴시욀드가 도달했던 남쪽 지점을 1도 지나쳐 버렸던 것이다. 언덕 정상은 과학적 관측을 하기에 알맞은 장소로서 이곳에 설치된 야영지에 기구들이 배치되었다. 잘 정박시킨 프랑세호는 임시변통의 방어막 덕분에 얼음으로부터 보호되었다. 석면으로 채워진 나무 판지와 골함석 지붕으로 조립식 집을 얼음 위에 만들어 세웠고, 구리 못으로 박은 나무 선실은 극지점 관찰을 위한 실험실로 사용되었다. '빅토르 위고 거리'라고 명명된 벼랑 끝의 길은 썰매와 개들이 쉽게 지나다닐 수 있도록 잘 닦여졌으며, 식량과 물자가 저장되어 있는 헛간으로 통해 있었다. 훌륭한 장비 겨울을 지내는 동안, 기온은 영하 39℃까지 내려갔으며 과학적 연구는 순조롭게 진행되어 나갔다. 샤르코는 그가 제작한 기구들을 이용하여 세균학에 관한 연구를 진행시켰고, 이를 통해 세균배양 증대되었다... 날씨는 혹독했지만 선상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견딜 수 없을 만큼 열악한 환경을 갖춘 소우주 안에 갇힌 사람들은 다행히 존경할 만한 훌륭한 성품의 소유자들이었다. "탐험대가 모든 일에 적응할 수 있고 기꺼이 모든 요구에 따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훌륭한 장비 덕분이었다." 당시는 정치, 종교적인 싸움이 활발하게 진행되던 시기였다. 특히 1904년에는 정부가 주도한 콩비즘(combisme)과 반교권주의 투쟁이 횡행했으며, 드레퓌스(Dreyfus)는 2년 후에 복권되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탐험대의 화합을 깨뜨리지못했다... 해상근무의 오랜 전통을 이어 온 샤르코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탐험가들이 서로의 경험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1904년 5월, 선원들을 위해 학교가 문을 열었다. 마타는 원양항해선 성장 시험을 치르려는 두 지원자를 위해 강의했으며, 샤르코와 지질학자 구르동, 그리고 다재다능한 플레노는, 사람들의 다양한 욕구에 부응하기 위해 3단계로 준비된 교육과정을 실시했다. 선원들 중 한 사람은 글자를 깨치기를 바랐으며, 또 다른 사람은 철자법, 정수론, 역사, 지리학에 숙달되기를 원했고, 세 번째 사람은 사령관에게서 셰익스피어의 언어 구사를 배우고 싶어했다. 선상은 풍부한 자료를 갖춘 도서관으로 기능했는데, 선상 도서관에는 호머, 위고, 미슐레의 저서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1904년 8월, 영하 25℃의 날씨에 그들은 포경선을 타고 오늘날 우리 눈에는 매우 형편없어 보이기까지 하는 장비를 갖춘 채 해안 탐험을 시도했다. 전대원들의 건강상태는 만족스러웠지만, 성능 좋은 보호안경이 없던 탓에 안질이 발발해서 매우 고통을 받았다. 그러나 대원들의 육체적 저항력은 뛰어났다. 극지방의 매력 9월, 남극에 봄이 시작되면서 공중전기, 해류, 해안 수로 측량, 모든 종류의 동물들-특히 가마우지, 제비갈매기, 갈매기, 메갈리스트리스 같은 새들-에 대한 관찰 따위 여러 분야에 걸친 과학적 탐구가 새롭게 시작되었다. 12월에는 출발을 고려해야 했지만, 우선 얼음 속에 갇힌 프랑세호가 전진할 수 있도록 얼음을 제거하는 일이 무엇보다 급한 일이었다. 얼음덩어리를 부수기 위해서 전임자들이 사용했던 강력한 폭약인 멜리나이트를 사용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그래서 부병군을 자르기 전에 두터운 층위 눈부터 제거했다. 이와 같은 방법을 동원한 결과 크리스마스에 출범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계가 자주 말썽을 부렸고, 석탄이 부족했기 때문에 돛을 달고 항진해야 했다. 시기적으로 불리하기는 했지만 그레이엄 랜드를 향해 샤르코는 곶의 끝까지 전진했다. 1905년 1월 15일, 배는 수면에 나타날 듯 말 듯한 암초에 부딪혔는데-선원들은 "용골이 해저에 닿는다."고 표현한다-이로써 프랑세호는 이동이 곤란한 지점에서 결정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다. 물을 퍼낼 수 있도록 아예 펌프를 선체의 갈라진 곳에 가져다 놓아야 할 지경이었다. 사태가 심각했지만 탐험대는 때때로 배를 멈추고 수로 측량을 계속했다. 프랑세호는 2월 15일에 남극을 떠나 3월 29일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했다. 아르헨티나 정부가 그 배를 구입해서 수리를 맡았다. 순양함 뒤플렉스에 인도된 샤르코와 대원들은 대형 여객선 알제리호에 승선해 프랑스로 출행했다. 탐험은 중요한 결과를 가져왔다. 해군 장관 가스통 통송과 과학계는 탐험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샤르코는 보고서를 출판하는 데 전념하고 있었지만, 선원이라면 으레 그랬듯이, 그를 매혹시키는 극지방을 향해 다시 출발할 생각에 잔뜩 사로잡혀 있었다. "그곳에서 돌아온 다음에도 정신적, 육체적 피로는 까맣게 잊은 채 되돌아갈 생각만 품게 만드는, 그처럼 강렬하고 끈질긴 극지방의 신비스런 매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황량하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 지역의 매력은 무엇인가?" 미지의 세계를 밟는 기쁨, 고통과 맞서 싸우는 용기, 난관 극복에 따르는 정복자의 긍지, '종교적 열망'과도 같은 이러한 요인들이 극지의 매력이 아닐까? 샤르코 또한 치유될 수 없을 만큼 이 욕망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린란드의 푸르쿠와-파?호 이번 탐험에는 여러 단체에서 지원금을 보조해 주었다. 1905년 하원 의원장으로 선출된 폴 두메가 정부로부터 60만 프랑의 보조금을 얻어냈고, 해양학에 심취했던 모나코 왕자는 탐험에 필요한 기구들을 준비해 주었으며, 개인적으로 지원금을 제공하겠다는 사람들도 줄을 지어 늘어섰다. 샤르코는 새로운 배를 건조시킬 수 있었다. 마침내 1908년 5월 18일 유명한 푸르쿠와 - 파?호가 생말로를 출발했다. 보조기관을 장착한 445톤 급 세대박이 범선은 선체를 단단히 보강했으며, 넓고 안락한 선실을 갖추고 세 개의 실험실과 2,000권의 책을 보관한 두 개의 도서실을 마련하고 있었다. 1908년 8월 15일, 22명의 대원을 태운 푸르쿠와 -파?호는 르아브르 항구를 떠나 남극으로 향했다. 과학조사단은 네 명의 학자들과 세명의 해군 장교로 구성되었다... 탐험대는 그레이엄 랜드 탐험을 추진했고, 1831년에 발견된 아델리 랜드를 향해 계속 항해했다. 아델리 랜드의 규모와 지형을 자세히 조사한 뒤 탐사대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알렉산드르 1세 섬으로 향했다. 1909년 11월 말, 푸르쿠와 - 파?호는 남서쪽으로 다시 출발하기 앞서, 사우스셰틀랜드 제도에서 물자를 보급받았다. 얼음 때문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남위 70도, 서경 75도 부근의 새로운 육지에 도달하기 위해서였다. 샤르코는 벨링스하우젠이 표트르 대제라고 명명했던 섬을 발견했다. 1820년 벨링스하우젠이 이곳을 지나간 이후 어느 누구도 이 지역에 대한 탐험을 시도하지 않았다. 인간을 도무지 반길 것 같지 않은 적대적인 험악한 해역에서 감히 모험을 시도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샤르코는 남위 70도를 통과해 인간의 손길이 아직 닿지 않은 처녀지로 남아 있던 약 2,000km에 달하는 해안을 탐사했다. 1910년 6월, 푸르쿠와 - 파?호는 루앙으로 귀환했다. 소르본 대학의 강의실에 운집한 학계인사들은 남극에서 가장 위험한 불모지를 탐험한 대원들에게 경의를 포하며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다. 이번 탐사에서는 과학적인 성과도 눈부신 것이었다. 루시만은 기상학과 해양학, 공중전기에 관련된 연구서를 세 권이나 간행했다. 고등실업학교의 수상 실험실에 된 푸르쿠와 - 파?호는 1911년 망슈에서 해양 학술조사 항해를 실시했다. 그후 샤르코는 유지비를 감당할 수 없어 푸르쿠와 - 파?호를 상선단에 팔았다. 이 배는 원양항해를 수행할 함장을 위한 실습선으로 바뀌어 아이슬란드와 장메이앙섬 해역을 통행하게 되었다. 1914년에 입대한 샤르코는 다음해에 보조함대의 대위로 임명받아 프랑스와 영국의 선원들이 탄 포경선을 지휘했다. 이들의 임무는 독일 잠수함의 기지가 있으리라고 추측되는 페로에 제도 주변을 감시하는 것이었다. 그때 샤르코는 반잠수함 투쟁을 목적으로 Q보트를 구상했고 해군은 이를 채택했다. Q보트 메그호 함장직을 수락한 샤르코는 1차 세계대전이 종료될 때까지 정찰임무를 수행했다. 1920년 해군 소령으로 진급한 샤르코는 해군이 군함으로 개조해 놓은 푸르쿠와 - 파?호에 복귀했다. 그후 해군 수로측량부가 과학탐사를 권고했고, 그는 순양함을 이끌고 1925년에 그린란드로 출항했다. 그는 그린란드의 동쪽 해안을 항해한 최초의 프랑스인으로서 이곳을 탐험하는 데 전념을 기울였다. 1926년 과학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된 샤르코는 같은 해에 알베르 드 모나코 상을 받았다. 1929년에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인 해앙 아카데미와 경도국, 그리고 과학 아카데미의 협조를 받아. 1930년부터 샤르코는 국제 지구관측년 행사를 준비했다. 상원 의장을 밭은 폴 두메는 준비했다. 상원 의장을 맡은 폴 두메는 하원으로부터 처음에 거부당했던 신임을 얻어낼 수 있도록 샤르코를 도왔다. 이제 샤르코는 에스키모 거주지 인근에 있는 스코스비선드에 과학기지 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다. 1933년, 푸르쿠와 - 파?호는 리요와즈호와 함께 1833년에 실종된 젊은 프랑스인 항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블로스빌이라 불리는 해안을 탐험했다. 또한 샤르코는 세르밀리괴드에 위치한 안마살리크에서 1년 간 체류중인 폴 에밀 빅토르가 주도하는 미족지학 조사단을 그린란드에 정착시켰다. 이듬해 샤르코는 조사단을 다시 찾아와서 아직까지 매우 불확실한 이 지역의 지도 제작을 추진해 나갔다. 1936년 7월 14일, 샤르코는 마지막으로 생세르방을 따났다. 그해에는 그린란드 동부 지역의 부빙군이 부분적이지만 크게 줄어들어 푸르쿠와 - 파?호 평상시에 접근할 수 없었던 지역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여름 내내 태풍이 기승을 부렸다. 1936년 9월 16일, 유난히도 격렬하게 휘몰아치는 폭풍우와 파도 속에서 푸르쿠와 - 파?호는 아이슬란드의 아프타네스 앞바다에 보이는 암초에 난파되었다. 바다는 샤르코도 삼켜 버렸다. 40여 명 중 생존자는 단 한 명 조타장, 르 고니덱이었다. 그후 프랑스 파견대는 푸르쿠와 - 파?호의 잔해를 회수할 수 있었다. 에티엔 타이유미트 《역사》, 1986년 12월 펭귄나라의 여행 황제 펭귄들은 겨울 동안 알을 낳는다. 따라서 펭귄의 배태 형성을 연구할 시기로는 겨울이 적격이다. 1951년 아델리 랜드 탐험대는 두 번의 탐험을 시도했다. 어둠과 추위, 폭풍설이 늘 그들을 뒤따랐으며 빙하 위를 이동할 때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8월 말 바다의 얼음 위로 급습하듯 겨울이 닥쳐왔고, 그 위력 앞에서 우리는 한 순간도 벗어날 길이 없었다. 황제펭귄이 부화하는 과정과 새끼때의 생활을 연구하기 위해서 기지에서 서쪽으로 150km 떨어진 푸앙트제올로지로 돌아가야 했다. 6월에 탐험을 할 때에는 웬만큼 어려움을 감수하면서 무한궤도차 웨젤(Weasels)을 사용하여 층층이 쌓여 고립된 바다의 얼음을 반 정도는 녹일 수 있다. 8월의 날씨는 끔찍했다. 8월 7일부터 월말까지 시속 80에서 160km의 강풍이 불어왔고, 심한 폭풍설이 14일 동안이나 계속되었으며, 5일 간 발생한 눈사태도 끔찍한 것이었다. 9월 2일, 새벽 날씨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고요했다. 그렇다고 날씨가 좋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회색빛 하늘은 위협적이었고 때때로 바람은 허리까지 닿는 눈보라를 일으키기도 했다. 대원들은 눈도 바람도 없이 태양이 빛나는 좋은 날씨를 잊은 지 오래였으며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여행자들은 서둘러 장비를 갖추고 썰매에 짐을 싣는 일을 마치고 출발하기 앞서 든든하게 아침식사를 했다. 내방에서 나는 초조해 발을 동동 굴렀다. 사람들이 출발하는 모습을 빨리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악천후를 이겨내야 한다면 차라리 바다 얼음 위에 있는 것보다 기지에 있는 것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에 웨젤에 올라탄 동료들은 먼 바다와 베르트섬을 향해 길을 떠났다. 정오쯤 그들이 페놀라 빙하의 전면을 돌오가기 위해 출발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 왔다. 기지까지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폭풍설이 강했고, 시야가 흐렸으며, 바람의 속도는 현기증이 날 정도로 빨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눈보라에 휩싸여 꼼짝달싹할 수 없게 되었다. 운 나쁘게도 그들은 최악의 코스 중 한 곳에 있게 된 것이었다. 우리는 연속적으로 폭음을 내는 듯한 폭풍설이 몰아치는 가운데 무전기의 마이크에서 나는 소리를 겨우 들을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이 서 있는 곳의 표면상태가 어떤지 물어 보았다. 나는 그들로부터 얼음이 완전히 녹았고 눈 밑에는 물로 보이는 20cm 가량의 액체로 된 눈찌꺼기가 쌓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밤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다. 그동안 열쇠를 두 번 돌려 닫은 웨젤 안에서 탐험대의 동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들을 받치고 있는 수백 미터 깊이의 염수를 염려하고 있었다. 폭풍설로 점점 더 큰 눈더미가 운반차에 쌓이자 베르트랑은 누더미의 무게에 눌려 웨젤이 구멍이 뚫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매시간 모터들이 가동되었고 웨젤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20m 정도 전진했다. 그러나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시야가 완전히 가려진 상태에서 그들은 전혀 전진방향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강이나 빙산과 마주칠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에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우리는 일시적으로나마 날씨가 개기를 기대했다. 재교신이 이루어지자 나는 베르트랑에게 의견을 물어 보았다. 그는 얼음의 표면상태에 대해서 단호한 입장을 취했다. "얼음이 녹았지만 계속해서 전진하는 것은 매우 위험합니다." 그는 나에게 이떻게 해야 할지 물어 보았다. 나는 기상학자 프뤼돔의 의견을 듣고 싶어서 그에게 몸을 돌렸다. 그는 폭풍설이 약화되리라고 예상하면서도, 위험한 날씨를 장담하지는 않았다. 오늘밤 나는 불안해서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으므로 주저하지 말고 돌아오라고 베르트랑에게 충고했다. 동료들은 11시에 웨젤을 타고 여전히 위협적으로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 하늘 아래서 반쯤 선회하여 기지로 귀환했다. 나흘 후 베르트랑은 다시 출발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성공적으로 통과했다. 미셸 바레 에스키모인과의 만남 기나긴 북극의 겨울, 선상생활은 따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때 에스키모의 방문은 승무원에게 떠들썩한 흥밋거리였다. 1818년,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북극 지방으로 떠난 존 로스는 탐험일기에 부시아 반도의 에스키모인과의 만남을 이렇게 기록해 두었다. 8월 10일 아침 10시경, 우리는 원주민들이 끄는 여덟 대의 눈썰매를 보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지점을 향해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오고 있었다. 우리에게서 약 1,600km 떨어진 지점에 정지해 썰매에서 내린 그들은 주위를 정찰하려는 듯 작은 빙산에 올라갔다. 그 위에서 30분 정도 서로 의논을 나누는 듯하더니 그들 중 네 사람이 내려왔다. 그들은 돛대 쪽으로 접근했지만 감히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못했다. 그동안 우리는 모든 배 위의 커다란 돛대에 백기를 올렸고 존 사쇠즈를 전령으로 파견했다. 그는 원주민과 협상이 이루어졌을 때 드르에게 줄 선물과 백기를 지니고 떠났다. 사쇠즈는 아무도 동반하지 않고 무기도 없이 기꺼이 그곳에 가기를 자청했다. 이러한 그의 제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원주민과 만나기로 선정된 장소가 이사벨라호에서 800m 떨어진 지점이었기 때문이다. 약속장소를 그곳으로 정한 것은 원주민들에게도 이로운 일이었는데, 수로,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꺼운 널빤지 없이 건널 수 없는 얼음 속의 작은 틈이 서로를 갈라놓았던 것이며, 그들이 생각하기에 화살을 제외하면 어떠한 공격도 가능하지 않은 지점이었던 것이다. 전령의 역할을 맡은 사쇠즈는 용기와 재치를 한껏 발휘했다. 그는 원주민에게 접근하기 위한 우호적 표시로써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준비한 깃발을 내려놓았고 앞으로 걸어가면서 모자를 벗어 정중하게 인사했다. 원주민 중 몇몇은 결심을 굳힌 듯 300m 정도 거리를 두고 서 있다가 썰매를 타고 내려왔다. 그들은 사쇠즈를 향해 우렁차게 소리질렀다. 사쇠즈도 그대로 흉내내어 답했다.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금 더 가까이 오려고 시도했다. 손에 개를 이끌 때 사용하는 채찍말고는 아무것도 든 게 없었다. 수로를 쉽게 건널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 그들 중 한 사람은 경계를 늦추는 듯했다. 양쪽이 어느 정도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는 것 같았지만 처음 얼마 동안은 별다른 소득 없이 서로의 외침, 말, 몸짓으로 의사를 교환했다. 원주민들 평소보다 휠씬 느리게 말을 했는데, 마침내 사쇠즈는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휴무케(Humooke) 방언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사쇠즈가 가져간 선물을 흔들면서 원주민들의 방언으로 "Kahkeite(이리 오시오)!"라고 소리치자 그들은 "Naakrie, naakrieaiplaite(싫소, 떠나시오)."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다른 말도 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님을 그들이 희망한다는 뜻이었다. 그들 중 가장 용감한 사람이 수로까지 다가와서 장화에서 칼을 빼 들고 반복해서 소리쳤다. "떠나시오, 나는 당신을 죽일 수 있소." 어떠한 위협도 개의치 않은 사쇠즈는 운하 너머로 목걸이와 체크 무늬 셔츠를 던지면서, "나는 당신들과 같은 사람이며 당신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오."라고 말했다. 그럼에서 그들은 의혹에 찬 걱정스러운 눈길로 그 물건을 바라보면서 계속해서 "떠나시오, 우리를 죽이지 마시오."라고 외쳤다. 이때 사쇠즈는 그들에게 영국제 칼을 던지며 "이것을 가지시오."라고 말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칼을 집어 들고 소리지르기 시작했고 코를 잡아당겼다. 이에 사쇠즈도 답례의 행동으로 "Heigh, yaw(Hey, You)!"라고 고함치면서 그들처럼 코를 잡아당겼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셔츠를 가리키면서 집요하게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다. 그것이 일종의 의복이라는 사실을 알고서 이번에는 어떤 가죽으로 만들었는지 알고자 했다. 사쇠즈는 그들이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동물의 털로 만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매우 놀라워하며 셔츠를 집어 들었다. 그때 그들은 자신들과 사쇠즈가 말하는 언어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기에 충분한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많은 질문을 퍼부었다. 우선 그들은 배를 가리키면서 "저기 있는 위대한 창조물은 무엇이오?", "당신들은 태양에서 왔소, 달에서 왔소?" "당신들은 우리에게 밤이나 낮에 빛을 주는 것이오?"라고 쉴새없이 질문했다. 사쇠즈는 자신은 사람일 뿐이며, 그들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고 말하고 나서 남쪽을 가리키면서 이 방향에 있는 먼 나라로부터 왔다고 말했다. 이 말에 대해 그들은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저쪽에는 얼음만 있소."라고 대답했다. 그들은 배를 가리키면서 "저 창조물은 무엇이오?"라고 다시 질문했다. 사쇠즈는 "그것은 나무로 만들어진 집이오."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답변에 대해 믿기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하며 "아니오. 그것은 살아 있는 것이고, 우리는 그것이 날개를 움직이는 것을 보았소."라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사쇠즈가 그들에게 질문할 차례였다. 사쇠즈는 그들이 누구인가 물었다. 원주민들은 북쪽을 가리키면서 자신들은 사람이며 이 방향에서 살고 있고, 그곳에는 많은 물이 있으며 그들은 일각고래를 잡으러 이곳에 왔노라고 대답했다. 사쇠즈는 수로를 건너 그들에게 가까이 갈 수 있음을 확신한 후, 원주민과 나눈 대화의 내용을 보고하고 수로를 건널 때 사용할 두꺼운 널빤지를 요청하기 위해 배로 되돌아왔다.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나는 망원경을 사용하여 그들의 움직임을 관찰하는데 열중했다. 첫 번째 사람이 두려움과 경멸을 표하며 사쇠즈에게 접근했으며, 자주 그의 두 동료를 향해 몸을 돌리며 도움을 청할 것처럼 물러서곤 했다. 그들은 가끔씩 뒤로 물러섰다가는 곧 이어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걸음으로 다시 앞으로 다가섰다. 존 로스 《북서항로를 찾아 떠난 두 번째 여행기》 에스키모의 장례식 탐험가들의 모함담을 통해 북극 원주민 문화의 다양한 모습이 유럽에 알려졌다. 그린란드 여인의 손자 크누트 라스무센은 에스키모 연구를 하나의 과학으로 정립했다. 시체를 매장하는 데 지명되어 참가했던 사람들은 닷새 동안 그들의 집과 텐트 안에서 침묵을 지켜야 한다. 이 기간중에 그들은 식사를 준비해서도 안 되며 익힌 고기를 자르지도 말아야 한다. 또한 밤중에 옷을 벗어서도 안 되며 모피두건도 벗지 말아야 한다. 닷새가 지나면 몸에 밴 죽음의 불순한 기운을 털어 내기 위해, 손과 몸을 정성스럽게 씻어야 한다. 에스키모인은 이러한 의식을 지키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리는 질병과 다른 재해들을 통해 인간을 매장시키는 거대한 악의 힘을 두려워한다. 죽음의 힘은 끝이 없고, 죽음의 혈기는 왕성하므로 사람들은 속죄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지배할 수 없는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를 파멸시키기 위해 거대한 돌사태가 시작되고, 우리를 없애기 위해 엄청난 눈보라가 일어나며, 우리가 우리의 카약(Kayak:에스키모인이 사용하는 가죽배)을 타고 높이 솟은 바다에 있을 때 대양은 거대한 파도로 부풀어 오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믿는다. 그러나 우리는 일생 동안 더욱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위험에 맞서 저향력을 키울 수 있다. 또한 부적과 주문을 사용하면 우연히 발생한 모든 일에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부적은 위험에 처했을 때 보호해 주고 부적을 소지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특성을 부여한다. 어떤 상황에서 부적은 부적의 소지자를 부적이 유래된 내용의 동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인간들 손으로 공격당한 적이 없는 곰의 부적은 부적의 소지자를 부적이 유래된 내용의 동물로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인간들 손으로 공격당한 적이 없는 곰의 부적은 상처를 보호해 주며, 매의 부적은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승리를 확신시켜 주고, 까마귀의 부적은 작은 것에도 만족감을 주고, 여우의 부적은 꾀를 준다. 에스키모인은 화로에서 생기는 포고(Porok)이 부보다 강한 저항력을 지니고 있다고 믿고 이 돌을 가져가기도 했다. 또한 그들은 젊은이에게 노인의 생명력을 옮기기 위해서 노인의 침을 어린이의 입술에 바르거나, 어린이의 머리 위에 몇 마리의 이를 놓는다. 옛말에 따르면, "주문은 인간의 정기가 굳건했으며 언어(방언)가 강했던 고대의 유산이다." 또한 주문은 노인들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말이나 의미 없이 연결된 말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주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각 개인은 이를 죽음이 다가오기 전에는 밝혀서는 안 될 대단히 귀중한 보물로 여긴다. 주문을 해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극지 에스키모인의 종교적인 전통에 관해서 한 가지 사실을 덧붙인다면, 그들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 그리고 이름으로 구분된다고 믿는다는 사실이다. 불멸의 영혼은 인간의 외부에 존재하며 어둠이 태양을 따라가듯 인간을 따라간다. 엄밀히 말해 인간의 정신이 인간의 몸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인간이 죽으면 영혼은 하늘로 올라가거나 바닷속으로 빠지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영혼은 선조들의 영혼과 연결된다. 그 두 지점에 머무르는 것이 적합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머무는 곳이 바로 육체이다. 이러한 육체는 온갖 불행과 질병으로 마침내는 사멸되어 버린다. 인간이 죽을 때 모든 악한 것은 육체 속에 남아 있게 되는데, 그 때문에 에스키모는 시신을 떠맡을 때 특별한 규칙을 준수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름은 생명력과 재능의 저장고에 부여되는 정신이다. 따라서 고인의 이름을 지어 준 사람은 고인의 자질을 상속받는 것이다. 크누트 라스무센 《극해의 그리란드 멜빌만에서 모리스 제섭곶에 이르는 북극지방 탐험이야기》 툴레 최후 왕들의 동료 1951년 봄, 프랑스 지리학자 장 말로리는 시오라팔룩의 이누이트 마을을 떠나 그린란드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는 2개월 동안 개썰매를 타고 탐험했고, 잉글필드 랜드의 지형학을 연구하면서 11개월을 보냈다. 에스키모인은 '자신들의 개'와 한 쌍을 이룬다. 개를 수레에 매는 작업이라 할 '멍에씌우기'는 지도자 개를 중심으로 개들이 에스키모와 짝을 지어 서로 협조한다는 뜻이다. 에스키모인은 개가 없이는 그들 자신도 없는 것과 같다. 개가 없는 그들은 힘과 능력과 생활의 기쁨을 잃어버린 홀아비와 다름없다... 여름에는 사흘마다 겨울에는 날마다 개들에게 영양보충을 시켜야 하는데, 보통 한 마리당 1kg의 고기를 먹인다. 한곳에 묶어 놓은 개들은 칼이나 도끼로 자른 20∼30개 정도 되는 고깃덩어리를 향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고기를 줄 때에는 반드시 한 마리 한 마리에게 던져 주어야 한다. 삼각형 모양을 한 팽팽한 작은 귀, 바짝 선 잔등의 털, 당신 손의 미세한 움직임에 시선을 고정시키는 갈색 눈, 개들은 사람을 뚫어져라 쳐다볼 것이다. 조각을 던지기가 무섭게 개들은 와락 달려들어 그것을 낚아챈다. 빨리 삼키는 탓에 이빨이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 몇 파운드의 고기를 씹지도 않고 삼켜 버린 다음 개는 뒷다리를 포개고 앉아 다음 먹이를 기다린다. 고기가 땅에 떨어지면 계약은 파기된다. 주는 사람의 몸짓에 개성이 부여된 고기는 땅에 떨어지면서 독특한 분위기를 잃고 만다. 소란스럽게 싸우면서 개들은 서로를 할퀴는데, 가장 힘센 개는 사람 앞에서 그의 권위를 세워야 한다. 대열의 선두에 서는 개 나라가크는 따로 떨어져 기다리고 있다. 지도자인 이 개는 평온하나 위압적인 시선으로 광경을 주시한다. 사냥개 무리가 그를 지나치게 재촉하면 이빨 부딪치는 소리를 내는데 이것은 "Kranoqmin ivdlit(그만 좀 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당신의 명령에 복종하느냐 그렇지 않는냐의 관건은 먹이의 품질, 고기를 자르는 법.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뽐내듯이 개들에게 먹이를 할당하는 방식 등에 달려 있다. 붉고 까칠까칠한 혀를 늘어뜨리고 있던 개들은 갑자기 차가운 눈을 핥는다. 왜 그들은 그처럼 활기차게 썰매를 끄는 것일까? 분명코 냉혹한 에스키모인은 그들을 굶주리게 했기 때문일 것이다. 개들은 여행이 끝날 때야 음식이 제공될 것이란 헛된 희망에 사로잡혀 여행을 단축시키려고 애쓰는 것이다. 개들은 줄에 묶여 있다. 줄은 팽팽하지 않고 늘어져 있는가? 썰매를 끄는 사람이 긴 채찍 끝으로 개의 민감한 부분인 발, 귀끝, 옆구리, 입 등을 때릴 때면 털뭉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뽑힌다. 개는 고통스러운 듯 신음소리를 내지른다. 매맞은 개는 더 강하게 썰매를 끌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에는 매맞을 것을 지레 짐작하고 겁에 질려 앞으로 세차게 내닫기도 한다. 헐떡거리며 개는 서리 낀 입언저리를 이리저리로 돌리고, 비스듬히 검은 두 눈을 찡그리는 듯하다. 개는 에스키모인이 칭찬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언제나 같은 편이 아니었니?" 한마디 말이나 눈길을 통해 욕구를 충족시킨 개는 눈꺼풀을 깜박거리며 흥겹게 다시 출발한다. 쫑긋 귀를 세우면서 암컷에게 몸을 비비다가 끈이 느슨해지면 재빨리 암컷에게 달려든다. 개는 제자리로 잽싸게 달려온 다음 인간에게 공모해 준 사실에 감사드린다는 듯 줄에 힘을 준다. 에스키모인의 개들은 썰매를 잘 끈다고 귀여움을 받는다. 개들에게 씌운 멍에는 사람을 배반하지 못하게 만드는 도구이다. 그것을 잊는다는 것은 생명을 방치하는 것과 같다. 에스키모인은 개들을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처럼 다룬다. 깊이 연구할수록, 나는 그들의 사회학을 그들 멍에에 대한 사회학으로 접근시킬 수 있었다. 즉, 사람들도 살고 서로 경쟁하다가 죽는다. 만약 먹을것이 없다면 자거나 기다린다. 애정관계는 한때이다. 늘 불행이 도사리고 있으며 이 사실을 망각하는 것은 그에게 불행의 실마리를 주는 것과 같다. 물론 희망은 있지만 미지수이다. 결정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장 말로리 《툴레 최후의 왕들》 에스키모 민담 시베리아 북동쪽 끝에는 구전으로 잘 알려진 에스키모 부락들이 모여 있다. 1940년, 구소련의 국민학교 여교사가 에스키모인의 민담을 수집했다. 여교사는 에스키모의 일상과 사냥, 기록 사회조직에 얽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수집할 수 있었으며, 그중에는 고아를 주제로 삼은 이야기도 등장한다. 진흙으로 만든 사람 그것은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마을 사람들과 함께 어린 소년과 그의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여동생이 이웃사람들에게 구걸해 얻어 온 음식으로 두 남매는 그럭저럭 끼니를 이어나갔다. 한번은 모든 마을사람들이 순록을 기르는 츄크체스 집으로 가고, 고아 남매만이 마을에 남게 되었다. 소년은 그의 쿠클장카(kukhljanka)에 흙탕물이 튀긴 것을 보고 칼로 쿠클장카에 묻은 진흙을 긁어 냈다. 소년은 진흙을 모아 그것으로 사람을 만들고 활과 화살도 만들었다. 소년은 활과 화살을 진흙으로 만든 사람(lqangiqxaqx)에게 쥐어 주고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지 이곳을 지나가면 그를 죽여라." 소년은 해변에 그를 놓아둔 채 야랑가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소년은 여동생과 식사를 했고 그런 후에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소년은 바닷가로 갔다. 바닷가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진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투덜대며 말했다. "너는 내 말을 도대체 듣질 않는군, 어제 내가 이곳을 지나가는 것은 무엇이든 죽이라고 말했을 텐데..." 진흙으로 만든 사람이 대답했다 "저기 있는 것이 보이나요?" 소년이 진흙으로 만든 사람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니 토끼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소년이 그것을 갖고 야랑가로 가자 여동생은 토끼를 자른 다음 그것을 불에 익혔다. 불에 다 익힌 후에 그들은 구운 토끼를 먹었다. 또다시 소년은 해변으로 갔다. 소년이 그곳에 도착했을 때 소년은 순록이 한 마리 죽어 있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순록을 집으로 가져갔다. 소년이 그것을 여동생에게 전해 주자 여동생은 이번에도 순록을 잘라서 그것을 불에 익혔다. 그들은 구운 고기를 먹었다. 배불리 먹고 나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소년은 다시 바닷가로 나갔다. 소년이 도착했을 때 이번에도 진흙으로 마든 사람이 죽인 순록을 볼 수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다. 진흙으로 만든 사람이 죽인 순록을 볼 수 있었다. 소년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다. 진흙으로 만든 사람은 날마다 순록을 죽였고, 고아들은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다. 전에 순록 사육사의 집에 갔던 마을사람들이 다시 마을로 되돌아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새 옷을 입고 있던 고아 남매는 해변으로 갔다. 순록 사육사 츄크체스 집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해변에 정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아 남매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집으로 가서 그들 자신이 야랑가를 만들었다. 그 같은 일이 있은 후에 고아 남매는 자신들이 직접 순록을 사냥했으며, 그들은 잘 살게 되었다. 이것이 모든 트파이(Tfai)다. 《아시아 에스키모의 민담과 이야기》 국립과학연구소 편, 파리, 1987년 탐험가 샤토브리앙 프랑스 대혁명을 목격한 뒤, 샤토브리앙은 자신에게 잠재되어 있던 탐험가의 자질을 깨달았다. 샤토브리앙은 유명한 북서항로를 발견하고 '자연인'을 만날 결심으로 아메리카로 떠났다. 1822년 4월부터 9월까지 런던에 머물면서 나는 탐험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으로 몹시 초조해하고 있었다. 내가 이곳에서 보고자 했던 것은 미국 사람들이 아니라 내가 알고 지낸 사람들과 다른 어떤 것, 평소 내 생각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을 빨리 실행하고 싶어서 마음만 태웠을 뿐, 정작 상상력과 용기 외에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북서항로를 발견할 계획을 나름대로 세웠을 당시만 해도 나는 북아메리카가 북극에 잇닿아 펼쳐져 그린란드와 만나는지, 혹은 허드슨만과 벨링 해협에 인접한 바다 때문에 막혀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1772년에 에른이 북위 71도15분, 서경 119도 15분에 위치한 민드퀴브르강 하구에서 시작되는 바다를 발견했다. 태평양 연안에 기울였던 쿡 선장과 그뒤를 이른 항해자들의 노력은 많은 의문점을 남겨 놓았다. 1787년 배 한 척이 북아메리카 근해에 들어갔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 배 선장 이야기에 따르며, 캘리포니아 북부에서 연속적인 해안이라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주 조밀한 열도였다는 것이다. 영국 해군 대장은 이 진술이 거짓임을 입증하기 위해 밴쿠버를 그곳에 파견했다. 밴쿠버의 탐험 이후 두 번째 탐험은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고 있다. 1791년 미국에서는 매켄지의 항해로가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그는 몽타뉴 호수 상류 치프원 항국에서 1789년 6월 3일에 출발해서 강을 따라 북극해로 내려왔던 것이다. 그뒤부터 그 강은 매켄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 같은 발견으로, 나는 처음에 세웠던 계획을 수정해야만 했다. 곧장 북쪽 길로 접어들어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나와 말레세브르 경이 함께 정했던 계획을 변경한다는 사실이 무척 꺼림칙했다. 그래서 나는 캘리포니아만 북쪽에서 북서 해안을 따라서 북서쪽으로 항해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그러면 항해중에 항상 대양을 관찰하면서 베링 해협까지 진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 최북단에 있는 마지막 곶을 돌아갈 작정이었다. 그런 후 북극해를 따라 동쪽으로 내려가서 허드슨만과 래브라도해와 캐나다를 통해 미국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했다.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투자될 이번 탐험을 어떻게 실현시킬 것인가? 가능성은 없다. 대다수 프랑스 탐험가들은 외롭고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정부나 기업이 그들을 고용하거나 지원해 주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반면, 영국, 미국, 독일, 스페인, 포르투갈에서는 국익을 위한 경쟁 때문에 탐험에 대한 지원이 활발하다. 매켄지와 가의 뒤를 이은 몇몇 탐험가들이 미국과 대영제국을 위해 광활한 아메리카를 정복했던 일은 조국의 영토를 넓히기 위해 바로 내가 소망했던 바였다. 만약 성공한다면 미지의 지역에 프랑스 이름이 붙을 것이고, 태평양에 프랑스 식민지를 건설할 수 있는 영광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쟁 강대국을 제치고 모피무역을 독점해 부를 축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프랑스가 인도로 가는 최단의 길을 차지함으로써 다른 경쟁국가가 이 길을 개척하는 것을 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1796년 런던에서 출판한 《역사론》에서 이 계획을 제안한 적이 있는데, 이 계획은 1791년에 내가 여행기 초고를 쓸 때 이미 착안했던 생각이다. 이 날짜는 최근에 등장한 북극 빙하 탐험가들보다 훨씬 앞서 있었음을 증명해 준다. 나는 필라델피아에서 전혀 용기를 얻을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첫 여행의 목적이 좌절될 가능성이 크고, 이번 행보가 두 번째, 또는 그 이후 여행의 서막일 뿐임을 예감했다. 샤토브리앙 《무덤 저편에서의 회상》 특별한 이야기 1831년 북극, 16세기에 메르카토르가 경험했던 것처럼 에드가 포는 믿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다. 바닷물이 소용돌이치면서 돌진하더니 땅속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주위를 살펴보면서 나는 난생 처음으로 공포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우리를 지금까지 쫓아다니던 태풍 때문에 내가 두려움에 떨지언정, 속된 말로 바람과 대양의 이런 전투 앞에서 공포를 느껴서는 안 되리라. 회오리바람과 열풍이 아무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만든 것일까? 배는 문자 그대로 영원한 밤의 어둠 속으로, 이제는 거품조차 일지 않는 물의 혼돈 속으로 묻혀 버렸다. 하지만 어는 정도 거리를 두고 사방에서 우주의 벽과 같은 거대한 얼음 성벽이 황량한 하늘을 향해 솟아오른 모습이 간헐적이고 흐릿하게나마 다가서고 있었다. 내가 이러한 생각을 했을 때 배는 해류 - 얼음의 틈 사이로 노호하듯 으르렁거리며 밀려드는 조수를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 -를 따라 흐르고 있었고,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내는 소리만큼이나 큰 벼락치는 소리가 남쪽에서 들렸다. 내가 무엇인가를 두려워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곳의 신비를 파헤치려는 호기심이 절망 속에서 불쑥 일어났으며 이런 생각만으로도 나는 가장 참혹한 죽음의 양상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당연히 우리는 단번에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광경을 서둘러 쫓아갔다. 사람들은 죽음과 직결된 이러한 비밀을 서로에게 발설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 듯했다. 급류에 밀려 우리는 남극에 이르게 될 것이다. 얼핏 보기에 황당무계한 이 같은 추측이 실제 일어날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밝혀 두어야겠다. 일행은 떨리고 불안정한 발걸음으로 다리 위를 걸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절망에 빠진 무기력보다는 희망에 가득 찬 열정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 뒤에서는 여전히 바람은 불어왔고 우리가 모든 돛을 펼쳤을 때는 이따금씩 배가 바다 위로 높이 솟구쳤다. 오! 계속되는 이 공포! 갑작스레 얼음이 양쪽으로 갈라지더니 우리는 거대한 동심원을 이루며, 거대한 원형경기장의 가장자리를 따라 빠르게 회전하게 되었다. 광막한 공간과 어둠 속에서 원형경기장의 벽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내게는 운명을 꿈꿀 만큼 충분한 시간이 남아 있지 않았다! 원은 점점 빠른 속도로 좁아졌고 우리는 가중되는 혼란 속으로 미친 듯 빠져들었다. 그리고 대양과 태풍의 으르렁대는 소리로 배가 흔들렸다. "오 하느님!" 배는 쓰러지고...마침내 배는 침몰하고 말았다. 에드가 포 《병 속에서 발견된 원고》 최초의 북극 정복자 쥘 베른 1958년, 미국의 노틸러스호가 북극점 밑을 통과했다. 남극점을 정복한 베른은 1889년에 북극을 녹일 계획을 세웠다. 네모 선장이 예견했던 것처럼 우리는 부빙군이 요동치는 표면 아래 약 300m 지점에서 떠다녔다. 그러나 노틸러스호는 더욱 밑으로 잠수해서 800m깊이까지 내려갔다. 표면온도가 12℃였던 수온은 11℃를 넘지 않았다. 이미 2℃는 번 셈이었다. 열기구의 힘으로 온도를 상승시킨 노틸러스호는 상당히 높은 온도를 유지했다. 모든 조종이 아주 정밀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조수가 내게 말했다. "사람이 지나갈 것입니다. 선생께서는 그 점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으실 테지요." "그 점은 충분히 예상하고 있습니다." 나는 결연한 어조로 대답했다. 해빙된 바다 아래에서 노틸러스호는 52번째 자오선을 벗어나지 않고 곧장 북극으로 가는 길을 택했다. 67도 30분에서 90도까지, 위도상으로는 22도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2,000km를 더 가야만 했다. 노틸러스호는 급행열차가 달리는 속도로, 평균 시속 40km를 유지했다. 노틸러스호가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북극점까지 40시간이면 충분할 것이다. 밤에 조수와 선실 창문 너머로 바라본 바깥 세상에는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현등이 발하는 불빛 아래서 바다가 빛나고 있었지만 황량하기만 했다. 물고기는 흐르지 않는 물 속에서는 살지 않는다. 남극해에서 극점의 해빙된 바다로 가는 길목에서만 물고기를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빠르게 나갔다. 철로 된 긴 선체가 전율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새벽 2시경 나는 몇 시간 휴식을 취했고 조수가 내 일을 대신했다. 통로를 지난 때 네모 산정을 만나지 못했는데 나는 선장이 조타실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3월 19일 오전 5시, 내 위치로 돌아왔다. 전기 속력 측정기에 나타난 노틸러스호의 속도는 적당했다. 그때 잠수함은 천천히 조심스럽게 표면으로 떠올랐다. 내 가슴은 뛰었다. 우리가 무사히 떠올라서 북극점의 자유로운 대기를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러나 실패였다. 둔탁한 소리가 들린 것으로 보아 노틸러스호가 매우 두터운 부빙군에 부딪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몹시 놀랐다. 우리는 깊이 300m 지점에서 '가벼운 충돌'을 일으켰던 셈이다. 실제로 우리 위를 600m 두께의 얼음이 가로막고 있었다. 부빙군의 300m는 물위로 솟아올라 있었다. 부빙군은 우리가 그것의 가장자리에서 측정한 것보다 훨씬 두터웠다. 전혀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루 종일 노틸러스호는 몇 번이나 동일한 상황에 처했다. 번번이 우리 위의 두터운 빙벽에 부딪히고 마는 것이었다. 한동안은 수면까지 거리가 900m인 순간도 있었다. 이것은 얼음의 두께가 1,200m이고 그중에서 300m는 바다 표면 위로 솟아올라 있음을 뜻했다. 노틸러스호가 해저에 가장 깊게 들어갔을 때 높이의 두 배에 달했다. 주의 깊게 여러 곳의 깊이를 기록했고 그 결과 해저에 펼쳐져 있는 해저산맥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알 수 있었다. 저녁이 되었지만 우리가 있는 곳에는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항상 400m에서 500m 깊이에 얼음이 있었다. 점차로 거리가 줄어들고 있었지만 수면까지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8시가 되었다. 평소의 항해일정에 따르면 벌써 네 시간 전에 노틸러스호 내부의 공기가 교체되어야 했지만, 네모 선장이 창고에 산소 공급을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나는 그리 고통스럽지 않았다. 오늘밤 나의 잠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희망과 두려움이 차례로 엄습했다. 나는 계속해서 스스로를 독려했다. 노틸러스호는 계속해서 천천히 전진했다. 새벽 3시경, 부빙군 아래쪽 표명이 겨우 50m쯤 되는 깊이임을 확인했다. 그때 우리는 정확히 수면에서 45.72m 떨어져 있었다. 부빙군은 점차로 병원을 재형성하고 있었고 산은 다시 평원을 이루었다. 우리는 전기 불빛 아래에서 대각선 방향으로 반짝이는 표면을 따라서 거슬러 올라갔다. 부빙군은 길게 펼쳐진 비탈을 따라 상하 모두 얇아졌다. 2km씩 앞으로 나아갈수록 더욱더 얇아졌다. 결코 잊을 수 없는 3월 19일 오전 6시, 선실 문이 열리고 네모 선장이 나타났다. "드디어 해빙된 바다에 도착했네."라고 그가 말했다. 쥘 베른 《해저 2만리》 그가 달을 탐험한 지 20년 후, 군 클럽 탐험대는 간단하게 북극의 얼음을 녹일 계획을 세웠다. 이것은 거대한 대포를 후퇴시켜 세계 축의 방향을 바꾸면서 풍부한 지하자원을 개발하기 위한 시도였다. "결국 아무리 노력하고 용기가 있다 해도 84번 위선을 통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더욱이 부빙군까지 배로 간다거나 얼음 평원을 뗏목으로 건넌다거나 하는 지금까지의 방법으로는 결코 그 일을 해낼 수 없으리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이 그런 위험을 무릅쓰거나, 그처럼 낮은 기온을 참아 낸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북극 정복을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청중이 동요하는 것으로 보아, 이 말 속에 핵심이 있고 모든 사람들이 열망하는 비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당신은 그곳에 가실 생각입니까?" 영국 대표가 물었다. "도넬랑 사령관심, 이제 10분만 지나면 모든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바르비칸 위원장이 대답했다. 뒤를 이어 내가 후원자들에게 호소하다시피 덧붙였다. "우리를 믿으십시오, 이번 일을 추진한 사람들은 바로 첨단 원통형 로켓에 탄 사람들입니다." 틴 투드링크가 소려쳤다. "그들은 감히 달까지 가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곳에서 돌아올 수 있을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도넬랑 사령관의 비서가 한마디 덧붙였는데, 이 신중하지 못한 의견은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쥘 베른 《뒤범벅이 되어》 오늘날의 남극 1959년 이후 남극의 지위는 국제조약에 다라 정의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여러 국가의 다양한 요구가 중단되었고, 서명국들은 긴밀한 협조체계 아래 국제 지구관측년의 조사연구를 추진했다. 남극조약 아르헨티나,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칠레, 프랑스, 일본, 뉴질랜드, 노르웨이, 남아프리카공화국, 러시아, 영국, 북아일랜드와 미국. 전인류의 이익을 위해 남극은 평화적인 목적에 따라 항구적으로 이용되어야 하며, 국제분쟁의 현장이나 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남극에서 국제적 협력 아래 과학적 연구를 통한 과학분야의 진보를 증대해야 함은 인정한다. 국제 지구관측년 동안 실시되었던 것처럼 남극에서 자유롭게 과학적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는 사실에 기초해서 건실한 조직을 세워 협력을 추구하고 진전시킬 수 있다면 바로 이것이 과학적 관심과 인류 발전에 공헌하는 일이라고 확신한다. 남극이 오로지 평화적인 목적에만 이용되고 국제적인 화합의 장소로 존속되어야 한다는 조약은 UN헌장의 의도와 원칙에 의거하는 것임을 확신한다. 다음과 같이 동의한다. 제1조 1. 남극에서는 오직 평화적인 행위만이 허용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기지 설립, 요새 건설, 군사행동, 모든 종류의 무기 실험과 같은 군사적 성격을 갖는 모든 조치는 금지한다. 2. 본조약은 과학적 연구나 평화적 목적을 위해, 군대의 인적, 물적 자원을 이용하는 것에는 반대하지 않는다. 제2조 남극에서 과학적 연구의 자유와 연구의 목적에 협조하는 일이 국제 지구관측년 동안 실행되었던 것처럼 과학적 연구는 본조약의 규정에 따라 앞으로 계속 추진될 것이다. 제3조 1. 남극에서의 과학적 연구에 관한 국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본조약 제2조에서 정해진 것과 같이 조약 당사국들은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 다음의 일을 진행시키는 데 동의해야 한다. a. 방법상의 효과와 활동의 능률을 최대화하기 위해 남극에서의 과학적 연구 계획에 관한 정보 교환 b. 탐험대와 이 지역에 위치한 기지 사이의 과학인력의 교환 c. 자유롭게 활동하게 될 남극에서의 연구과정에서 획득된 과학적 결과와 의견의 교환 2. 본규정을 시행할 때, UN의 특별기구나 남극에 대해 과학적, 기술적 이익을 제공하는 다른 국제기구들과 업무관계에서 협조하는 일은 모든 면에서 장려될 것이다. 제4조 1. 본조약의 어떤 규정도 다음과 같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a. 어떤 조약 당사국 측에서도 남극에서 이전에 확보했던 영토주권이나 영토요구권에 대한 포기를 결정할 권한을 갖고 있다. b. 어떤 조약 당사국 측에서도 자국의 독자적인 행동이나, 남극에 있는 자국민의 행동, 그리고 다른 모든 이유의 행동의 결과 발생할 남극에서의 영토주권의 기본적 요구를 부분적, 전면적으로 포기할 수 있다. c. 남극에서 주권이나 다른 모든 국가의 요구나 주권의 기본적 요구에 대한 당사국의 인정이나 거부가 있을 때 이는 조약 당사국 각자의 지위를 침해하는 것이다. 2. 본조약이 지속되는 동안 발생하는 어떤 행위나 활동도 남극에서 양토주권의 요구를 평가하게 만들거나 지지하거나 부인하는 근거가 되지 않을 것이고, 이 지역에서 주권을 새롭게 만들지 않을 것이다. 어떤 새로운 요구나 전에 확실시되었던 영토주권 요구의 확장도 본조약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거론되지 않을 것이다. 제5조 1. 남극에서 모든 핵실험을 금지한다. 아울러 이 지역에 방사성 폐기물을 매립하는 행위도 금한다. 2. 모든 조약 당사국이 참여할 국제조약이 체결될 경우, 대표국은 핵에너지의 사용, 핵실험, 방사성 폐기물의 매립에 관한 제9조에서 정한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부여받는데, 남극에서는 이러한 조약을 통해 체결되는 규약이 적용될 것이다. 제6조 본조약의 규정은 빙붕을 포함한 남위 60도 이남에 위치한 지역에 적용된다. 그러나 본조약의 어떤 규정도 한정된 지역에 있는 공해에 대해서 국제권을 통해 모든 나라에 인정된 권리나 권리의 시행에 어떤식으로든 침해하거나 피해를 입혀서는 안 된다. (이후 7개 조항은 조약의 실행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제 14조 영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로 작성된 본조약의 각 번역본은 공히 인정된 후 미합중국 기록보관소에 보관될 것이고, 이곳에서 인준된 사본은 서명국 도는 회원국 정부에 송달될 것이다. 위의 사실에 의거해서 아래 서명할 권한을 정식으로 부여받은 전권사절들이 본조약에 서명했다. 1959년 12월 1일에 워싱턴에서 체결됨. 오늘날(1991년 6월) 39개국이 이 조약에 서명했다. 오늘날의 남극 연구 조직 이 모든 사업을 실행하기 위해 1,000여 명의 사람들이 남극대륙에서 겨울을 보낸다. 대개 이곳의 인구는 하절기에 급격히 늘어난다. 더욱이 독일, 폴란드, 인도, 중국 같은 새로운 가맹국들이 다른 나라의 기지 근처에 연구기지를 세웠다. 셰틀랜드의 킹조지섬에는 7개국이 세운 7개의 기지가 있다. 국제 지구관측년 정신과 효율성을 고려하여, 국제위원회 SCAR(Scientific Committee for Antarctic Research, 남극 연구 과학위원회)는 이러한 계획들을 조화롭게 조정해야 한다. 이 기구는 가장 최근에 회원으로 가입한 중국과 인도를 포함해 현재 18개국 대표로 구성되어 있다. 남극 연구 과학위원회는 결정권은 없지만, 과학적 연구 이외에도 남극과 관련된 다양한 영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프랑스인은 위원회에서는 두 번이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58년부터 1963년까지는 국립 지리연구소장을 역임한 조르주 라클라베르가, 1986년 6월에는 빙하학자인 클로드 로리위스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미국은 국제 지구관측년(1957∼1958)동안 방대한 극지 탐사 계획을 수행했다. NSF(National Science Foundation, 국립 과학재단)에서 극지 개발과 관련된 사업을 담당하는데, 현재는 남반구의 파머 기지, 남극의 아문센 - 스콧 기지, 맥머도 기지를 포함해 세 개의 남극기지를 운영중이다. 이중에서 맥머도 기지는 하절기가 되면 거주인구가 800명에 이르게 된다. 쇄빙선이 해상운송을 담당하는 화물선과 유조선을 1년 낸 호송한다. 사람들과 일부 장비는 크라이스트처치의 비행기로 뉴질랜드에 도착한다. 남쪽에 봄이 시작될 무렵, 미국인은 바퀴 달린 커다란 화물 비행기인 C141과 스키를 갖춘 비행기 허쿨레스를 타고 로스 빙붕 위에 있는 맥머도 활주로와 바다 얼음 위의 활주로에 착륙한다. 11월 말이면 얼음상태가 악화되어 바퀴 달린 비행기의 이 착륙이 금지되므로, 2월 말까지는 허큘레스만을 볼 수 있다. 러시아에서는 레닌그라드의 남북극학회가 일곱 개의 기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주요 기지인 몰로데즈나야에는 한파를 피해 15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러시아 팀은 유조선 두 척과 탐사선 두 척, 화물선 다섯 척을 보유하고 있는데, 모든 선박은 얼음을 헤치고 항해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인원과 장비를 수송하기 위해서, 러시아는 몇 년 전부터 아덴을 경유해 레닌그라드와 몰로데즈나야로 가는 항로와 모잠비크의 마푸토를 왕래하는 항공로를 개설했다. 1992년 1월, 프랑스 정부는 프랑스 극지탐험대와 프랑스 남반구, 남극대륙 연구소의 권한을 계승, 확대한 극지연구소를 창설했다. 이 연구소는 남극대륙에서처럼 북극에서도 과학적 연구를 수행할 임무를 갖고 있다. 그 결과 연구소는 어류학회의 극지 항해 선박 아스트로라브호, 뒤몽 뒤르빌 기지, 앞으로 완공될 비행기 활주로 등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와 몇 가지 과학장비를 갖추게 되었다. 현재 연구소는 아델리 랜드 서쪽 3,000m 고지에 연구기지를 설립할 준비를 하고 있다. 유럽식으로 건설될 이 기지는 1995년에 이르러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국제적으로 명망 있는 빙하학자 클로드 로리위사가 극지연구소의 초대 소장으로 선임되었다. 현재 항공 운송수단은 없지만, 미국의 병참학 정보에 의존하지 않고도 호바트에서 사람을 운송하고 유럽 대륙 내부의 계획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또한 1993년 말에는 1,100m의 비행기 활주로가 뒤몽 뒤르빌 기지 근처에 만들어질 것이다. 미국 파견대는 스키 장비를 갖춘 커다란 허큘레스 화물 비행기로 극점에서 20km 정도 떨어진 만년설 위에 착륙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모든 조건, 특히 폭풍설로 발생할 수 있는 고장에서 안전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려면 바퀴나 스키를 장착하지 않고 이착륙할 수 있는 STOL(단거리 이착륙기)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영국에서는 영국 남극조사단이 1967년부터 FIDS(Falkand Islands Dependencies Survey)로 바뀌었다. 이 기구는 환경성의 후원을 받아 과학적 연구와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영국인은 남극대륙에 지구물리학 관측소 세 곳, 남극 섬들에 생물학 기지 세 곳과 기상학 기지 한 곳을 운영하고 있다. 영국의 기지들은 브랜스필드와 존 비스코라는 두 척의 극지용 선박과 쌍발기 오터를 세 대 갖추고 있다. 독일은 남극대륙 연구에 새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연구기술부는 1980년 브레머샤벤에 북극과 남극을 연구하기 위해 알프레트 베게너 연구소를 창설했다. 1년 후 연구소는 웨들해 동쪽 입구에 게오르크 폰 노이마이어 기지를 개설했다. 그리고 나서 1982년 독일은 2만 마력의 모터로 추진되는 1만 1,000톤 급 극지용 선박 폴라스테른호를 취항시켰다. 이 배에는 100여 명의 연구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선실과 실험실이 있다. 해양학에 관한 중요 연구가 헴펠 교수의 지도로 웨들해에서 현재 외국 연구자들과 공동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는 여러 나라의 사람들로 구성된 독일 조사단은 웨들해 안쪽 필히너 빙붕을 대상으로 삼아 빙하학을 연구하고 있는데, 로스 빙붕처럼 이곳의 얼음 면적은 거의 프랑스 넓이만큼 되고, 두께는 수백 미터에 이른다. 이 연구는 남극 서쪽의 모든 내륙 대빙원이 계속 존재할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사라질 것인가를 결정짓는 중대한 역할을 할 것이다. 일본은 국제 지구관측년에 몰로데즈나야에서 서쪽으로 210km 떨어진 지점에 쇼와 기지를 건설하면서 남극으로의 진출에 박차를 가해 몇 년이 지난 후 2,230m고지에 미주호 기지를 건설했다. 일본은 1965년에 접근하기 어려운 지역에 위치한 그들의 기지에 물품을 보급하고 해양학 연구를 수행할 수 있는 5,000톤 급 극지용 선박 후지호를 취항시켰다. 1982년 일본은 후지호를 현재 운항되는 미국의 쇄빙선만큼 강력한 배인 시라세호로 교체했다. 시라세호는 배수량이 1만 2,000톤이며, 3만 마력의 모터를 갖추고 있다. 1968∼1969년 사이 일본은 쇼와 기지에서 남극점을 왕복하는 어려운 탐험에 성공했다. 탐험로는 해발 3,700m에 이르는 남극대륙의 오지였는데, 왕복거리는 5,200km에 이르렀다. 이 탐험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일본은 특수 엔진이 장착된 무한궤도차를 고안, 제작했다. 141일 간이나 지속된 탐험 기간 동안 지구물리학자들과 빙하학자들은 차 안에서 생활하며 연구를 병행했다. 결국 1991년까지 17개국에 의해 49개의 기지를 건설되었다(여기에 그린피스가 관리하는 기지를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가끔 유감스러운 점이 드러난다. 이것은 혼곶 남쪽 킹조지섬에 6개국이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각국의 기지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정부 차원에서 진행하는 과학적 탐사활동 이외에 산업활동은 전면 금지 되고 있다. 단 하나의 예외를 들자면 크릴새우잡이가 활발히 벌어지고 있고, 고래잡이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무책임하게 남획한 결과 제한적으로 허용되고 있다. 남극조약에 따라 남극대륙과 남극해의 동물, 식물은 철저히 보존되고 있다. 오염과 쓰레기 처리 문제 또한 심각한 현안이다. 얼음 속에 묻어 놓은 쓰레기는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며, 빙하 위에 방치된 쓰레기는 바람에 날려 광범위한 지역으로 흩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가맹국들은 분뇨나 음식물 찌꺼기 따위 각종 쓰레기를 다른 곳으로 운송해 처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1991년에 제기된 가장 중요한 논제는 향후 최소 50년 간 석유 따위 천연자원의 개발을 금지하자는 것이다. 마침내 39개 가맹국 전체의 찬성으로 천연자원 개발 금지안이 받아들여졌다. 베르트랑 앵베르 스콧 극지연구소와 영국 남극조사단 자료에서 발췌 남극의 얼음 1955년까지도 남극의 빙원에 관련된 정보가 거의 없었다. 그후 얼음 부피가 약 3,000만㎦이며, 이것이 지구에 존재하는 민물의 70%를 차지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국간의 협력 아래 빙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깊은 곳에서 채취한 얼음과 얼음에 함유된 불순물을 분석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대기환경의 변화를 추적할 수 있게 되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쌓인 얼음층에서 우리는 화산이 분출했던 흔적과 우주에서 일어난 사건의 열쇠와 핵폭발에서 발생한 방사성 낙진을 발견할 수 있다. 얼음 속에 보존되어 있는 산업화시대 이전의 대기 성분을 조사해 보면, 인간의 활동으로 야기된 환경오염의 전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 더 깊은 곳을 시굴해 보면 우리는 다양한 기후변화의 단계를 규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약 1만 년 전부터 지구가 경험했던 더운 기후와 비교해 볼 때, 1만 8,000년쯤 전에 절정에 달했던 빙하기 동안의 기온은 명백히 낮았음을 알 수 있다. 현대 기후의 특징은 우리 환경에 매우 위험스러운 변화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다시 설명하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함유량이 크게 증가했고, 연무질 증가 또한 눈에 띌 정도로 빨라졌다는 것이다. 그와 비교해서 해빙기 동안 빙원은 상대적으로 안정을 유지했다. 얼음의 역학 중력의 작용으로 빙원 위에 연속적으로 쌓인 눈은 해안으로 이동하면서 점점 얇아지며 얼음으로 변한다. 이로써 눈은 서서히 바다로 배출됨을 알 수 있다. 국제 지구관측년(1957∼1958) 동안, 빙하 돌출부를 기준점으로 삼아 대륙 연안 빙하의 움직임을 측량할 수 있었다. 측지위성의 발사 이후에는 남극대륙 안에서 이루어지는 빙하의 이동속도도 도플러 효과를 이용해서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연간 약 1m), 연안으로 갈수록 점차 빨라져 바다로 떨어져 나갈 무렵에는 연평균 100m 정도로 이동한다. 가장 활발히 움직이는 빙하와 빙붕은 연간 1.6∼3.2km 전진한다. 기본적으로 빙산의 형태로 대륙에서 배출되는 얼음의 양은 연간 약 2,300㎦ 정도에 달하며, 이 얼음의 거의 절반은 아메리 빙붕, 필히너 빙붕, 로스 빙붕 세 곳에서 나온다. 남극대륙 빙원이 증가하고 감소하는 양이 균형을 이루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할 만한 충분한 자료는 없다. 그러나 대륙 표면의 등고선이 측정되고, 빙원 밑의 바위층에 대한 정보가 정리되고, 내륙 대빙원에서 떨어져 나오는 얼음의 양을 추론해 볼 만한 모델을 구성하게 도와 줄 적설량이 정확히 측정된다면, 이러한 사실도 이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대기환경의 연구 보고 국제 지구관측년 때부터 빙원을 굴착하여 깊숙한 곳에 있는 얼음견본을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굴착기술의 발전과 연구실에서의 시료 분석기술이 진보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얼음견본은 눈이 입상빙설이 되는 과정과 입상빙설이 얼음(대륙 중심부 수백 미터 깊이에서 채취된 얼음 중에는 밀도가 0.82라고 보고된 것도 있다)이 되는 과정을 파악하는 데 사용되는 한편, 이 물질들의 가소성에 관한 연구에도 이용된다. 얼음의 성분과 그 속에 포함된 불순물-오랜 세월 동안 쌓여 온-에 관한 연구는 지구 기후 변호의 '연대표'를 제공하며, 인간의 활동이 대기의 성분에 어떤 영향을 미쳐 왔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해준다. 지난 170만 년 간 지구의 기온은 빙하기(이 기간은 북반구의 대륙에서 거대한 빙원이 형성되고 바다의 수위가 약 100m 정도 낮아졌다는 점에 있다)와 그보다 짧은 동안 지속된 따뜻한 시기-오늘날의 인류가 살고 있는 시기처럼-사이에서 불규칙적으로 변화했다. 오늘날 대기의 성분은 심각한 변화를 겪고 있는데, 그것은 특히 인간활동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방출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눈을 크게 뜨고 대기상태를 감시하고 있다. 그러나 관측자료는 기껏해야 20년 정도 분량이 쌓여 있을 뿐이다. 오직 빙하에 담겨 있는 기록만이 유용한 전망을 가능하게 해주고, 대기변화의 주요 요소와 메커니즘을 보여 주어, 대기의 기상학적 요소와 화학적 요소를 재구성할 수 있게 도와 줄 것이다. 마지막 빙하기에 관련된 자료이든 얼음 속에 숨어 있는 귀중한 정보는 앞으로의 예측을 가능하게 해주어 기후 모델을 구성할 수 있게 해줄 것이다. 견본 추출기법 최근 몇 십 년 동안 쌓인 얼음층에서 견본을 추출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10m 정도 파 내려가면 견본을 얻을 수 있다). 더 깊은 곳을 굴착하기 위해서는 더욱 정교한 굴착기가 동원되어야 한다. 100m까지(지난 1,000년 동안의 변화를 알려 주는) 굴착하면서 날이 달린 회전식 드릴이나 끝에 얼음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저항선을 설치한 관으로 견본을 추출한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표본 채취는 더욱 어려워진다. 추출물이나 아웃워시(outwash, 빙하에서 흘러내린 퇴적물)의 회수가 힘들 뿐만 아니라, 얼음의 형태가 변해 구멍이 막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굴착이 불가능해지며, 깊이 1,000m(약 2만 년 전, 최종 빙하기에 쌓인 얼음이 이 지점에서 발견되었다)에 이르면 더욱 정밀한 굴착기가 동원되어야 함은 물론, 굴착용 유액을 흘려 넣어야 한다. 미국의 버드 기지, 러시아의 보스토크의 기지, 프랑스의 돔C조사단의 경우처럼, 이런 종류의 굴착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수십 톤에 달하는 장비가 투입되어야 한다. 클로드 로리위스 ≪발견의 왕국지≫ 1984년 8월호 북해상로 북서항로(Northwest Passage)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밤면, 소련이 북해상로(Northern Sea Route)라고 새로 이름붙인 북동항로(Northeast Passage)는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현재는 경제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1932년은 주목할 만한 해이다. 구소련의 시비리아코프호가 두 달에 걸쳐 북해상로를 항해했다. 이를 치하한 스탈린은 그로부터 3개월 후 다음과 같은 법안을 통과시켰다. 1. 이민위원회 내부에 북해상로 중앙관리부(GUSMP)를 조직한다. 이 부서는 백해에서 베링 해협에 이르는 항로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는다. 중앙관리부는 부대시설과 그것의 유지, 안전한 항해를 보장하는 데 필요한 필수품 조달도 관리한다. 2. 북극 해안과 섬에 있는 모든 무선기지와 기상대는 북해상로 중앙관리부의 관할 아래에 놓인다. 최근에 시비리아크포호를 타고 횡단에 성공한 오토 슈미트가 이 부서의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이후 슈미트의 권한은 북극지역 항구 관리, 지질학 연구와 광산 개발에까지 확대되었다. 해상교통은 서쪽 카라해에서는 오브강과 예니세이강, 동쪽 구역에서는 레나강과 콜리마강부터 베링 해협까지 개방되었다. 1940년에는 연간 운송량이 100톤에서 30만 톤에 이르던 것이 오늘날에는 4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산되었다. 1977년 8월, 구소련은 아르크티카호가 북극점에 도착했다고 발표하여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배는 최초로 바다에 뜬 채 북극점에 도달했는데, 평균 11.5노트 속도로 왕복항해에 성공했던 것이다. 쇄빙선 시비르호는 노바야젬랴와 뉴시베리아 섬들의 북쪽을 지나가는 화물선을 호위했다. 이 강력한 핵쇄빙선은 어떤 지역이라도 항해할 수 있다. 많은 배들 특히 화물선들이 얼음의 압력 때문에 곤경-지금도 부빙의 상태를 정확히 예측하기가 어렵다-에 처했던 지역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시즌이 끝날 무렵 1983년 10월, 51척의 배가 베링 해협 서쪽에서 890km 떨어진 페베크 북쪽의 부빙군에 강히게 되었다. 이때 세 척의 핵쇄빙선이 이 지역에 급파되었고 한 달 동안 작업을 해서 떠내려간 한 척의 배를 제외하고는 모두 구조했다. 그러나 그중 30척의 배는 파손되고 말았다. 보다 강력한 배를 건조하겠다는 계획이 현재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언젠가는 해안을 따라가는 항로보다 훨씬 짧은 1,130km에 달하는 직선항로를 통해 북극점을 횡단하며 운항할 수 있을 것이다. 테렌스 암스트롱의 글에서 쇄빙선 오늘날에는 쇄빙선과 극지용 화물선이 북극해와 북극지역 강에서 화물 운송을 돕는 주요 수단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북극선단을 보유한 러시아는 쇄빙선 18척과 극지용 화물선 300여 척을 소유하고 있다. 두 번째로 큰 북극선단을 보유한 국가는 미국과 캐나다이다. 북극해 북극해는 두께 3∼4m의 해빙으로 덮여 있다. 해빙은 바람과 조수와 해류의 영향을 받아 천천히 떠밀려 간다. 여름에는 해빙의 표면이 녹아서 일시적으로 여러 곳에 수로가 형성된다. 그런데 오존층 파괴에 따른 온실효과가 계속되어 지구의 평균기온이 5℃∼8℃ 정도 현저하게 상승한다면, 일년 내내 북극해를 항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북극지방의 동물 하늘 위에도 얼음 위에도 물 속에도 툰드라 지대에도, 곰, 바다표범, 일각돌고래, 사향소나 여우, 매, 올빼미, 뇌조 따위 온갖 종류의 동물들이 서식하고 있다. 남극의 거주자들 생존에 적합한 환경이 아님에도 거의 60종에 이르는 동물들이 남극에서 서식하고 있다. 이중 가장 기이하고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펭귄이다. 이 새는 날지는 못하지만 시속 50km의 속도로 헤엄칠 수 있고 그중 몇 명은 90cm나 도약할 수 있다. 극지방 광고 탐험에 소요되는 비용은 민간기업의 지원으로 충당된다. 그중 한 가지 방법이 광고인데, 극지방에서도 자기 회사의 상품이 효과적으로 소비된다는 내용의 광고는 따뜻한 지역에 사는 많은 소비자에게 깊은 인상을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극지방 탐사 눈과 얼음의 나라,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는 혹한의 세계, 극지방, 그러나 한국에게 그곳은 더 이상 '미지의 땅'이 아니다. 지금까지 한국은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극지방에 도전장을 던져 남극점에 한 번, 북극점에 두 번 그 발차취를 남겼다. 한국이 처음 극권에 탐사대를 떠나 보낸 것은 지난 1978년. 그후 북극점은 13년 만에, 남극점은 16년 만에 한국인의 굳은 기상 앞에 무릎을 끓은 것이다. 또한 이 지구촌 최후의 오지는 최근 한국북극해도보횡단원정대의 성공으로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왔다. 북극점 원정사 1978년, 중앙일보원정대가 펼친 그린란드 탐사의 목적은 북극점 공격이 아니라, 북극권 탐사에 있었다. 원정대는 북위 81∼82도권에서 그린란드와 베링 해협 일대의 자연과 문화를 조사했다. 그러나 스노 모빌과 개썰매가 동원된 탐사에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의욕과 모험이 따랐을 뿐만 아니라 한국 극지방 원정사에 획기적인 시도로 기록되었다. 이 탐사는 이후 1989년부터 1991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한국인의 북극 러시(rush)에 '참조의 틀'이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는 디딤돌이었던 것이다. 세계 등산사상 세 번째로 겨울철 에베레스트 등정에 성공(1987년), 단번에 지구촌 최고의 알피니스트로 떠오른 허영호는 에베레스트 등반 이후 높이 대신 넓이로 자신의 탐험영역을 확장하고 싶어했다. 고산 대신 극지, 그중에서도 북극점에 도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사전단계로 북극점보다 쉽고 안전한 자북극점부터 공격하기로 했다. 자북극점이란 지구자기의 중심이 되는 지점으로 보통 북극점이라고 부르는 지리적 북극점과 구분된다. 자북극점은 북위 75도 부근에 위치한 배서스트섬에 있으며, 지구의 꼭대기인 지리적 북극점에서 약 1,600km 가량 남쪽에 있다. 1989년, 허영호를 비롯한 한국자북극점원정대(대장 이봉훈)는 예상대로 20여 일에 걸친 도보행군으로 자북극점을 밟았다. 북극점이 정상이라면 자북극점은 베이스 캠프 격이다. 자북극점 도달로 자신감을 얻은 한국 탐험대는 이듬해인 1990년 오로라북극점탐험대(1차, 대장 고정남)을 출정시켰다. 그러나 북극점은 역시 완강했다. 캐나다 최북단 엘스미어섬 워드헌터곶에서 출발한 탐험대는 2개월에 걸친 600km 앞둔 북위 88도 지점에서 북극권 특유의 리드(Lead. 빙원 중의 물길로 개수면이라고도 함)에 가로막혀 발길을 돌려야 했다. 좌절을 거울삼아 오로라북극점탐험대(2차, 대장 고정남)가 1991년 3월 8일 다시 같은 코스로 출정했다. 5월 9일, 워드헌터곶을 떠난 지 72일 만에 최종열 대원이 마침내 북극점에 태극기를 세웠다. 800km의 도보행군 도중 4월 14일에는 허영호와 최종인 대원이, 24일에는 정재환 대원이 발목 부상으로 후송되는 값진 희생을 치른 대가였다. 1995년 5월 17일 또다시 북극점에 태극기가 꽂혔다. 이번에는 허영호 대장을 비롯 중앙일보 95 한국북극해횡단원정대 다섯 명이 동시에 북극점을 정복했다. 1995년 3월 12일, 러시아 땅끝 마을인 콤소몰레츠섬 아크티체스키곶을 출발한 이들은 북극점 도달에 만족하지 않고 내친걸음에 서쪽으로 발길을 재촉, 마침내 6월 20일에 캐나다 워드헌터곶에 도착했다. 동력장비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1,800km의 얼음바다를 한걸음씩 걸어서 건넌 것이다. 북극해 도보횡단은 세계 탐험사상 두 번째 대기록이었다. 또한 오로라북극점탐험대 1차 원정 때는 리드에 걸려, 2차 원정 때는 부상으로 행군을 포기해야 했던 허영호는 자북극점 원정 이래 6년 만에 북극점을 내딛는 감격을 맛봄으로써 오랜 숙원을 풀었다. 이로써 그는 에베레스트와 남극(1994년), 북극 등 지구상 3대 극지를 모두 직접 밟은 사상 두 번째 탐험가가 되기도 했다. 남극점 원정사 북극점 원정이 우여곡절을 겪은 데 비해 남극점은 단 한 차례 공격으로 정복할 수 있었다. 한국일보 94 한국남극점탐험대(대장 고인경)는 1993년 11월 29일 남극 전진기지인 페트리어트힐에서 출발, 44일에 걸친 1,400km의 장정을 도보횡군한 끝에 1994년 1월 11일 남극점에 도착했다. 공격대장 허영호를 비롯한 4인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이제 한국은 영국, 이탈리아, 일본에 이어 남극점 도보탐험에 성공한 네 번째 나라로 기록되었다. 남, 북극 원정의 어려움과 차이점 남극과 북극 모두 빠를 경우 초속 30m이상의 강풍이 불어 닥치며, 기온도 영하 40℃ 이상 내려가는 일이 많아 자칫 동상에 걸리기 쉽다. 그러나 단순 비교를 하자면 남극보다 북극 도전의 조건이 더 열악하다 할 수 있다. 남극은 땅 위에 만년설이 쌓인 설원인 반면, 북극은 수심 3,000∼4,000m의 북극해가 얼어 형성된 얼음바다이기 때문이다. 또 남극은 약간의 경사진 곳을 제외하면 비교적 평평하다고 할 수 있지만, 북극은 삐죽삐죽한 얼음야산이 솟은 난빙대(Press Ridge)가 수백킬로미터씩 펼쳐지는가 하면, 얼음과 얼음 틈새에 검푸른 북극해가 삐져 나와 넘실대는 리드가 발목을 잡기도 한다. 리드나 난빙대는 모두 북극해의 조류 움직임과 간만의 차이 때문에 생긴다. 주류에 떠밀리는 얼음덩어리들이 부딪치며 집채만한 난빙대를 이루고, 서로 반대편으로 갈라지면서 얼음 사이로 바닷물이 넘쳐 나오는 리드를 형성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 같은 현상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진행된다. 멀쩡한 얼음판 위에 생긴 5cm 정도의 작은 틈새가 불과 5분도 안 되어 10m짜리 해협으로 돌변하는가 하면 거대한 얼음덩어리들이 원정대를 압사시킬 듯 양쪽에서 굉음을 내며 밀려들어오기도 한다. 여기에다 잦은 북극곰의 출현도 까다로운 조건으로 들 수 있다. 한국 원정팀의 성과와 전망 각국 탐험대는 스노 모빌과 모터사이클, 경비행기와 초경량 비행기, 잠수함, 쇄빙선, 개썰매, 비행선 등을 동원하여 속도경쟁을 벌여 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원정의 질이 중요시되고 있다. 가장 고전적이며 '진짜 탐험'으로 인식되는 원정방법은 도보원정이다. 지금까지 네 차례에 걸친 한국팀의 남, 북극 원정이 모두 도보에 집중된 것은 원정의 질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도전의식과 기개 때문이다. 걸어서 남, 북극점 도달과 북극해 횡단에 성공한 만큼 앞으로는 '더 빨리'라는 속도경쟁과 함께, 될 수 있으면 보급수를 줄이려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아울러 여럿보다는 소수, 혹은 단독으로 원정에 나서서 극지방을 향한 도전의 강도를 높여 가야 한다. 《중앙일보》 임용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