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지방을 향한 대도전 지은이 : 베르트랑 앵베르 출판사 : 시공사 봉사자 : 전영광 제1장 세계의 끝 고대인은 지구의 끝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고대문명세계의 중심은 지중해였다. 동양과의 교류도 있었지만, 다른 세계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단지 철학자뿐이었다. 그리스인은 남반구에 대해 궁금해했는데, 플라톤과 피타고라스는 균형을 잡아 세계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을 막아 주는 대륙이 그들의 세계 반대편에 있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곳을 안티크톤(Antichthon)이라 불렀다. 안티크톤에는 개척지 사람들(Antipodes, 본뜻은 허공을 걷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그곳은 열탕처럼 들끓는 바다로 이루어진 무더운 열대지역으로 둘러싸여 있다고, 게다가 사나운 괴물들이 지키고 있다고 그리스 사람들은 생각했다. 15세기의 인문주의자들은 미지의 대륙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품게 되었다 1475년, 프톨레마이오스의《지리학》이 인쇄되었다. 이 알렉산드리아 출신 그리스인은 2세기에 땅과 하늘의 지도를 작성했다. 이 지도는 남위 20도 부근에서 '미지의 땅(terra incognita)'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인도양을 보여 준다. 지도는 16세기 말까지 수차례 판을 거듭해서 인쇄되었고, 그의 견해는 르네상스 시대 지식인에게 폭넓게 받아들여졌다(아래 그림은 이 지도의 복제품이다). 그런데 이 시기는 지리상의 발견 시대와 일치한다. 1497년에 희망봉을 거쳐서 인도까지 항해해 갔던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양이 내해가 아님을 입증했다. 다 가마보다 앞서 정화가 지휘하는 적어도 62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중국 탐험대도 이 사실을 증명한 적이 있다. 1520년, 마젤란은 서쪽 항로를 찾기 위해 남아메리카 해안선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남위 52도 지역에서 그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잇는 지금의 마젤란 해협을 발견했다. 그는 남극대륙의 북단을 발견했다고 확신하고, 이곳을 '불의 땅(Tierra del Fuego)'이라 이름붙였다. 최초의 현대적 지도가 탄생된 것은 15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네덜란드 지리학자 오르텔리우스가 이러한 지리상의 발견 성과를 종합한 것이지만, 남반구의 땅들은 여전히 모호하게 묘사되어 있다. 오늘날 우리가 불의 땅으로 알고 있는 곳과,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극대륙이 하나의 거대 대륙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이다. 17세기 네덜란드 항해가들은 거대한 남극대륙의 신화를 벗겨 냈다 1616년, 르메르와 슈텐은 희망봉을 항해했고, 불의 땅이 섬이란 사실을 밝혀 냈다. 25년 후 아벨 타스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스트레일리아를 일주하여 태즈메이니아와 그가 남극대륙의 극단이라고 판단한 뉴질랜드 서쪽 해안을 연속해서 발견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이 황무지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서구는 풍요로운 아시아 시장에 더 많은 관심을 집중시켰고, 따라서 남쪽으로의 탐험은 당분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북쪽으로 진출을 시도한 항해가도 있다 북쪽으로 돌아서 중국대륙에 이르는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것은 유럽 군주들의 오랜 숙원이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첫 번째는 북아메리카 해안을 우회해서 북서쪽으로 가는 길이고, 두 번째는 시베리아 해안을 따라서 북동쪽으로 가는 길이다. 탐험가들은 두 개의 항로 개척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였다. 북서항로를 찾은 프랑스인과 영국인 프랑수아 1세는 피렌체 출신 항해가 조반니 다 베라차노를 북쪽 바다로 파견했다. 베라차노의 임무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도달한 지역을 지나 중국으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는 것이었다. 1524년, 베라차노는 어떤 만에 정박하고는 중국항로의 입구를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곳은 허드슨강의 하구로서 장차 뉴욕이 들어설 장소였다. 10년 후, 자크 카르티에는 세인트로렌스강 어귀를 발견했고, 이듬해 1535년에는 1,000km나 강을 거슬러 올라가 인디언 마을에 도달했다. 그는 이곳을 몽레알(오늘날의 몬트리올)이라 이름붙였다. 엘라자베스 1세의 격려를 받은 영국 항해가는 더 북쪽으로의 진출을 꾀했다. 1576년에서 1578년 사이 마틴 프로비셔는 장차 허드슨 해협(캐나다)이라 부를 곳을 따라 북위 60도 부근까지 나아갔다. 1585년, 엑서터와 런던의 상인들은 중국으로 항해하는 새 탐험대에 재정지원을 했다. 탐험대의 대장 존 데이비스는 탁월한 항해가이자 수로측량사로 위도를 정확히 측정해 주는 4분의(6분의의 전신)의 발명자이기도 하다. 세 번에 걸친 탐험에서 데이비스는 그린란드 서쪽 해안과 캐나다 군도 사이 거대한 해협을 북위 72도까지 지도에 기록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는 6월 말에 이 지점에 도착했는데, 이 지역을 통과하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였다. 부빙군(ice pack, 물 위에 떠 있는 얼음의 무리)에 막혀 북쪽으로도 서쪽으로도 전진할 수가 없었다. 영국인 헨리 허드슨의 항해로 네덜란드인의 지원을 받은 헨리 허드슨은 1609년 암스테르담을 출항하여 베라차노의 항로를 따라갔다. 그는 오늘날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허드슨강과 그 주변 지역을 탐험했다. 허드슨이 탐사한 지역 중 맨해튼섬은 네덜란드인이 인디언에게 이 땅을 구입한 뒤 뉴암스테르담이라고 불린다. 1610년, 허드슨은 이번에는 영국인의 지원을 받아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다시 항해를 떠났다. 그의 배에는 22명의 선원이 승선했으며, 그중에는 열일곱 살 된 허드슨의 아들 존도 있었다. 여행의 목적은 데이비스가 발견했던 해협을 항해하는 것이다. 그는 8월 초 그곳에 도달했고, 오늘날 허드슨만으로 불리는 거대한 내포를 통과했다. 디스커버리호는 남쪽으로 선수를 돌려 약 1,100km를 나아갔지만, 너무 지체했던 탓에 빙해 한가운데서 겨울을 나야 했다. 이듬해 봄 폭동이 터지고 말았다. 폭동을 일으킨 선원들은 허드슨의 아들과 여전히 허드슨을 따르는 일곱 명의 승무원을 그와 함께 작은 보트에 하선시킨 후 디스커버리호를 타고 영국으로 되돌아왔다. 반란 주동자들이 귀환중에 죽었기 때문에 영국 법정은 생존자들을 기소하지 않았다. 윌리엄 배핀은 북서항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당대 최고 항해가들 중 하나였던 윌리엄 배핀은 1615년과 1616년 사이에 두 차례의 탐험을 시도했다. 첫 번째 탐험에서는 그린란드 북쪽 해안 북위 78도까지 진출했고, 두 번째 북서항로가 입구인 랭카스터 해협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하나의 만에 불과할 것이라고 판단한 그는 더 이상 전진할 것을 포기했다.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북서항로가 존재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언했다. 결국 캐나다와 미국 식민지 개발에 몰두해 있던 프랑스와 영국은 차츰 북서항로에 관심을 잃어 갔고, 북서항로 개척은 2세기 후에야 재개되었다. 또 다른 항해로, 시베리아 해안을 따라서 백해와 베링해협을 연결하라 북동항로는 북해의 거대한 두 해양국가 영국과 네덜란드에게 큰 주목을 받고 있었다. 그들 국가는 공공연한 싸움 없이 스페인, 포르투갈이 인도 항로보다 두 배나 더 짧았는데, 따라서 이 항로의 개척은 그만큼 매력을 지녔다. 메르카토르 같은 지도제작자들이 만든 지도에는 시베리아가 휠씬 작게 그려져 있으며, 타이미르 반도를 지나 남동쪽으로 굴곡을 그리다가 갑자기 남쪽으로 꺾이져 내려간다. 엄밀히 말해 이것은 실제 중국으로 가는 길을 반으로 줄인 셈이다. 또한 빙해와 싸우며 항해해야 하는 어려움조차 과소평가되어 많은 탐험가들이 앞다투어 북동항로 개척에 나서게 되었다. 영국과 러시아의 관계 증진, 북동항로 개척은 뒷전으로 밀려나다 1553년 휴 윌러비 경은 세 척의 탐험선을 지휘하여 북동쪽으로 떠났다. 배들은 스칸디나비아 북부연안 바르도섬 부근에서 만날 예정이었다. 두 척의 배인 보나 에스페란자와 보나 콘피덴티아는 그곳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 배들은 항로를 이탈하여 콜라 반도 북쪽 해안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선원들이 모두 죽었던 것이다. 선원들의 사인은 난방기구에서 방출된 일산화탄소 중독이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세 번째 배인 에드워드 보나벤처는 합류지점에서 오랫동안 기다린 후 우여곡절 끝에 콜마그로(지금의 아르항겔스크)에 도착했다. 선장 챈슬러는 그곳에서 남쪽으로 900km 떨어진 모스크바로 여행을 시도해 러시아 황제 폭군 이반을 만났다. 챈슬러와 황제는 영국 선박의 자유무역과 러시아 상사 창설을 약속하는 상무조약을 채결했다. 이 조약은 양국간의 교역확대에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북동항로 개척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덜란드 탐험가 빌렘 바렌츠, 노바야젬랴 동쪽을 항해한 최초의 유럽인 미델부르크, 엔큐이젠, 암스테르담 같은 도시들에게 지원을 받은 바렌츠는, 1594년 6월 몇 척의 배를 이끌고 첫 번째 탐험을 떠났다. 메신저호에 탄 바렌츠가 노바야젬랴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 동안 스완호와 머쿠리호는 남쪽의 바이가쉬섬 부근으로 나아갔고, 타라해를 지나 오브강 하구까지 진출했다. 바렌츠는 노바야젬랴 북동쪽 끝에 도착한 다음 타빈곶(첼류스킨곶)으로 접근했다. 양쪽 선단은 바이가쉬에서 다시 만나 항로를 찾았다고 확신하면서 네덜란드로 돌아왔다. 이듬해 바렌츠는 과감하게 재출항했다. 하지만 중국과 교역할 상품을 실은 일곱 척의 배는 카라해 어귀(노바야젬랴의 동쪽)에서 빙해에 막히고 말았다-부빙의 상태가 해마다 어떻게 전개될지 파악하는 것은 지금도 불가능하다. 1596년 5월, 지난번보다 더 북쪽에 있는 항로를 발견하려고 시도한 3차 탐험에서 바렌츠는 스피츠베르겐(노르웨이)을 발견하고 네덜란드 영토임을 선언했다. 7월 말 그는 다시 노바야젬랴 북쪽 해안을 따라 항해했다. 이때 동쪽 바다가 얼지 않았음을 발견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빙해에 갇혀 버렸다. 티가 부러져 나가고 얼음의 압력으로 선체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선원들이 지은 우두막에서 겨울을 지낸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6월, 일행은 배와 피난처를 버리고 급히 마련한 보트 두 척을 이용해 러시아 해안으로 탈출할 것을 시도했다. 탈진해서인지 괴혈병 때문인지 바렌츠는 6월 20일 죽음을 맞았다. 생존자들은 계속해서 남쪽으로 항해하던 중 러시아 선박을 만나 구조되었다. 이것이 유럽인이 북위 76도에서 겨울을 보낸 최초의 사건이었다. 300년 후 노르웨이인 카를센이 바렌츠가 겨울을 보냈던 노바야젬랴 북동 해안의 어느 항구에 정박했다. 카를센은 페허가 된 오두막에서 바렌츠의 유물 몇 점이 얼음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해상로-북동항로나 북서항로-발견에 대한 관심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점차 감퇴되기 시작했다. 그후 희망봉을 거치면서 시도된 인도, 동인도, 중국과의 교역에서 공공연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17세기, 유럽 제국은 북동항로 개척이라는 야심 찬 계획을 포기했다. 이때 러시아인이 시베리아의 북극권으로 진출한다 16세기 초부터 러시아 항해가들은 해마다 카라해를 지나 오브강과 예니세이강 어귀로 항해하곤 했다. 최근 이루어진 발굴작업을 통해 16세기에 건설된 시베리아 항구, 망가제야가 발견되었다. 러시아인은 중국 항로의 개척보다 시베리아와의 교역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들은 빙해가 가져올 수 있는 위험에도 시베리아와 백해 사이에 수천 톤에 달하는 해상무역이 성행했음을 입증해 준다. 러시아가 북쪽의 해상항로를 활발하게 이용하던 이 시기, 영국인과 네덜란드인이 북동항로 개척에 실패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구소련의 북극지방 전문 역사학자인 미하일I. 벨로프는 이런 사실을 지적해 준다. 바렌츠와 챈슬러가 사용했던 선박은 너무 크고 무거워 조종하기가 어려웠던 반면, 러시아인은 빙해에도 충분히 견뎌 낼 수 있더록 설계된 소형선박 '코치(kochi)'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이것은 1556년 북극해를 항해했던 영국인 항해가 스티븐 버로의 보고내용이다. 동시베리아의 야쿠츠카야에 정착한 러시아 수렵꾼과 코사크족은 17세기에 북극 연안을 따라 레나강 어귀에서 콜리마강과 인디기르카강 어귀까지 코치를 타고 다녔다. 1648년 코사크족 데즈네프는 코치에 사냥꾼 60명을 태우고 콜리마강 어귀부터 아나디르강에 이르는 2,000km의 대항해를 시도했다. 모피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여행중 그는 무심결에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을 가르는 베링 해협을 지났다. 알래스카 건너편에 있는 데즈네프곶은 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북동항로 개척에 적극성을 보이는 러시아 라이프니츠의 사상과 파리 과학 아카데미의 영향을 받은 표트르 대제는 사망하기 몇 달 전인 1724년에 아메리카 대륙으로 가는 방법을 찾고자 캄차카에서 북쪽 바다로 탐험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덴마트인 비투스 베리에게 임무가 맡겨졌다. 현지에서 건조된 배를 타고 캄타카를 떠난 베링은 1728년 9월 말 데즈네프곶에 도착했다. 현지 부족 추크치족의 잔인함에 놀란 베링은, 아메리카 대륙 쪽 해안은 구경도 못했지만, 해협이 존재함을 확신하며 서둘러 귀항했다.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 사이에 해협이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캐터린 1세는 시베리아 해안을 따라가는 해상로를 찾으라고 명령했다. 안나 여제는 대북방탐험대를 조직하고 베링에게 지휘를 맡겼다. 5,000km에 달하는 해안을 다섯 개 구역으로 나누고, 총 1,00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다섯팀으로 나누어 실시한 이번 탐험은 1733년부터 1742년까지 계속되었다. 코치가 사용되었지만 빙해를 건너는 데 문제가 없지는 않았다. 특히 시즌보다 너무 일찍 출발했을 경우에는 더욱 어려웠다. 1741년 베링은 알래tm카 연안을 확인했고, 4일 동안 연안을 따라 항해했다. 해군 장교 랍테프 형제의 활약도 주목할 만하다. 카리톤 랍테프는 1739년 레나강 어귀에서 서쪽으로 진출해 예니세이강 어귀까지 해안을 탐험했다. 타이미르 반도 북단에서 얼음에 갇혔을 때는 개썰매를 타고 주변을 조사하기도 했다. 한편, 카리톤의 부관 첼류스킨은 육로를 통해 오늘날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아시아 대륙 최북단 지점에 도달했다. 디미트리 랍테프는 레나강 어귀에서 베린 해협이 있는 동쪽으로 탐험을 떠났다. 얼음에 갇힌 그는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1,300km에 이르는 해안을 탐사한 후 콜리마강에서 겨울을 보냈다. 이러한 발견에 고무된 러시아 상인들은 아메리카 - 러시아 상사를 창설해, 1867년 미국에 팔 때까지 알래스카를 경영했다. 어떤 항해가도 아직 확인하지 못했지만 모든 사람이 최초의 발견자가 되기를 원했던 '남쪽 대륙'. 18세기 사람들은 노동의 고통을 지지 않은 사람들이 사는 에덴 동산, 열대기후의 비옥한 땅이 그곳에 전개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철학자들은 이 미지의 대륙이 자신들의 이론에 마땅한 근거를 제공해 주리라고 믿으며, 이를 입증해 졸 고귀한 야만인을 만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제2장 항해, 남쪽 끝으로 "유럽 최고 지식인과 대화하기보다는 '미지의 남쪽 대륙(terra australis incognita)'에 사는 원주민과 한 시간만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것은 프랑스의 수학자이자 프러시아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친구인 피에르 루이 모로 드모페르튀스의 생각이다. 제임스 쿡의 항해, 유토피아를 찾아 남쪽으로 천문학자인 알렉산더 달림플의 권유를 받은 제임스 쿡은 1768년 출발했다. 행해는 1771년까지 계속되었다. 85명의 선원이 승선한 엔데버호는 혼곶, 타히티, 뉴질랜드를 거쳐서 항해했다. 쿡의 비밀임무는 타히티 너머에 있을지 모르는 남쪽 대륙을 찾아내는 일이었다. 귀환하여 쿡은 이렇게 확언했다. "이번 탐험으로 남위 40도 북쪽에 남쪽 대륙이 존재할 것이라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일축할 수 있었다." 탐험의 결과에도 달림플이 고집을 굽히지 않자 해군본부는 2차 탐험을 명령했다. 레졸루션호와 어드벤처호가 떠나기로 했다. 남쪽 대륙의 존재에 대한 모든 의문을 종결시티려는 목적을 지닌 이번 탐험은 1772년에 시작되어 1775년에 끝났다. 1773년 1월 17일, 쿡은 다음과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나는 남반구를 일주했으며 그 바다에는 더 이상 어떠한 대륙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러나 얼음 때문에 접근할 수 없는 더 남쪽에는 또 다른 대륙이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들의 생각이 변화해야 할 순간이었다. 광대한 남쪽 대륙과 교역을 벌여 돈벌이를 하겠다거나, 철학자들처럼 이상적인 새로운 인간사회를 발견하겠다거나 하는 몽상가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대신 남극해의 풍요로움에 관한 쿡의 보고서에 자극을 받은 영국과 미국의 많은 포경선들이 혼곶 남쪽으로 모여들었다. 사우스조지아섬(포클랜드 제도 동쪽 1,300km)에 기지를 둔 포경선들은 수년에 걸쳐 바다표범과 펭귄을 마구잡이로 잡아들였다. 그들은 사냥터를 비밀로 간직하려 했고, 더욱이 정확한 지도를 제작할 수 있는 전문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지리학적 지식 발전에는 아무런 기여도 하지 못했다. 1819년,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는 벨링스하우젠이 지휘하는 남극탐험대를 파견했다 벨링스하우젠은 2차 남극 일주 여행에서 남위 69도 25분 해안 48km 내로 접근할 수 있었다. 1820년 2월 초, 그는 남극대륙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그는 쿡이 발견하지 못한 지역을 지나 극권 동쪽과 남쪽으로 항해를 계속하여 4월에 시드니에 도착한 후 11월에 다시 출발했다. 그는 두 곳의 새로운 땅을 발견했는데, 표트르 대제와 알렉산드르 1세를 기념하여 그곳을 표트르 대제 섬과 알렉산드르 1세 섬이라 이름지었다. 1821년 8월, 그는 2년 간의 항해 뒤에 크론슈타트(러시아)로 돌아왔다. 포경회사의 위대한 발견 포경업에 종사하던 엔더비 형제는 경쟁자들고 달리 지리학적 발견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하여 존 비스코와 존 발레니 선장의 활동에 힘입어 명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 엔더비 가문에 대한 이야기는 허먼 멜빌의 소설《미비 딕》에도 등장한다. 존 비스토는 1830년 남쪽으로 출항하여 1831년 1월 아프리카 남단에서 그가 엔더비 랜드라 부를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 호바트항에 정박한 뒤, 태평양을 가로지른 비스코는 혼곶 남쪽에서 애들레이드섬과 그레이엄 랜드를 발견했다. 한편, 엘리자 스콧호와 사브리나호를 지휘하던 존 발레니는, 1839년 2월 9일, 아델리 랜드 동쪽 880km에 위치한 군도를 찾아 자신의 이름을 붙였다. 3월에는 서쪽의 시브리나 해안도 발견되었다. 1838년부터 1843년까지 프랑스, 미국, 영국의 탐험대는 자남극점을 향한 탐험을 시작했다. 이때 각 탐험대는 남극대륙의 해안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스에서 밀로의 비너스를 되찾아와 유명해진 프랑스의 해군 장교 뒤몽 뒤르빌은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세계 일주 항해를 수행한 적이 있었다. 1837년, 그는 루이 필리프 황제의 해군 대신에게 새로운 태평양 탐험을 제안했다. 이미 미국인과 영국인이 남극 가까이 이슬아슬하게 접근했다는 사실이 발표된 뒤였다. 웨들의 경우는 남위 74도 15분에 도달했던 것이다. 남극해를 더불어 조사하라는 프랑스 왕의 조건이 따랐고, 뒤르빌은 탐험 허가를 받아 낼 수 있었다. 남위 75도 지점에 도달할 경우 100프랑, 1도씩 더 나아갈 때마다 20프랑의 보너스가 추가로 지급될 것이라는 약속도 얻어냈다. 아스트로라브호와 젤레호는 웨들의 항로를 따라갔자만 남위 63도 23분에서 멈추어야 했다. 그동안 뒤르빌은 몇 개의 섬들과 남극반도상의 그레이엄 랜드 북쪽 해안을 지도에 그려 넣을 수 있었다. 1839년 12월 두 척의 선박은 호바트항(오스트레일리아 태즈메이니아)에 정박했다. "당초 호바트항을 지나는 자오선을 따라 남쪽으로 진출하려는 나의 계획은 선배들의 성과를 사실상 나의 의무가 되었다. 현재 시드니에 있는 미국 탐험대와 이곳에 곧 도착할 제임스 로스의 탐험대도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 1840년 1월 19일, 뒤르빌은 남극대륙의 해안선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아내 아델의 이름을 따서 새로 발견한 지역을 아델리 랜드라 이름붙였다. 이틀 후 장교 몇 명이 작은 섬에 상륙했다. 아스트로라브호와 젤레호는 부빙군을 정찰하며 서쪽으로 항진을 계속했다. 1월 29일, 그들은 함대를 재빠르게 따라붙는 배를 한 척 발견했다. 그 배는 미국인 찰스 윌크스가 지휘하는 탐험대에 소속된 소형 범선 포퍼스호였다. 뒤르빌은 범선을 맞이하려고 돛을 올렸지만, 포퍼스호를 지휘하던 젊은 중위는 이를 도망가려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였다. 그것은 오해였다. 모욕받았다고 생각한 양쪽 지휘관들은 발끈하여 각자 다른 길로 떠났다. 윌리크스 탐험대는 미국 포경산업과 관련된 상업적 목적도 수행하고 있었다. 1836년 워싱턴, 의회와 해군 당국은 남극 탐험에 원칙적으로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대통령 존 퀸시 애덤스와 당시 매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포경회사들의 압력에 의회는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마침내 의회는 남극 탐험을 승인하고 말았다. 1838년 8월, 장교 82명, 민간인 과학자 9명, 승무원 342명으로 구성된 여섯 척의 함대가 해군 대위 찰스 윌크스의 지휘하에 출항했다. 그레이엄 랜드 부근으로의 최초의 탐험은 실패로 끝났다. 탐험 수행 능력을 갖추지 못한 두 척의 배는 본국으로 송환되었고, 나머지 배들은 태평양을 횡단하여 시드니에 정박했다. 1839년 12월 26일, 윌크스는 뒤르빌보다 5일 먼저 남극해로 출발했다. 그러나 뒤르빌이 아델리 랜드를 발견한 1840년 1윌 19일, 윌크스는 그곳에서 890km 동쪽 지점에 이었다. 윌크스는 아델리 랜드 서쪽으로 항해를 계속했고, 12일 동안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해안선을 따라 탐사작업을 수행했다. 제임스 클라크 로스 경의 탐험은 19세기의 남극 탐험사에서 가장 눈부신 업적으로 손꼽힌다. 로스 탐험대의 본래 목적은 지구자장을 연구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독일의 물리학자이자 천문학자 카를 프리드리히 가우스가 지구 전지역의 자장을 계산하는 공식을 발표했고, 독일의 지리학자 알렉산더 폰 훔볼트는 이 사실을 실험해 보자고 제의했다. 탐험대 대장 로즈는 이미 자북극점의 위치를 밝혀 낸 적이 있었다. 그의 재량에 맡겨져 있는 두 척의 배 에레버스호와 테러호는 세 개의 돛을 갖추었으며 빙하를 뚫고 항해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강화되었다. 탐험대에 소속된 유일한 민간인 조지프 후커는 남극대륙에 분포하는 지의류를 연구하려는 임무를 지닌 21세 젊은 자연과학자였다. 1840년, 남반구에서 가을을 맞은 로스 탐험대는 호바트항에 정박해 있었다. 로스는 현지 총독이자 위대한 북극 탐험가인 존 윌크스의 항로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러한 정보에 영향을 받아 그는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이 발견한 지역을 피해 탐험을 수행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동경 170도 선을 택해 남쪽으로 항해하여 가능하면 자남극점에 도달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 계획에 따라 로스는 19세기 탐험사상 가장 괄목할 만한 발견을 이루었다. 1840년 11월, 로스는 에레버스호와 테러호를 이끌고 호바트를 떠났다. 1월 초, 나흘 동안 부빙군과 악전고투한 로스 일행은 얼어붙지 않은 바다에 도달했고, 남위 71도 부근에서 아데어곶을 발견했다. 탐험대는 빅토리아 랜드의 거대한 산맥을 따라 남쪽으로 계속 전진하여 남위 74도 15분이라는 웨들의 기록을 깨뜨렸다. 흥분한 승무원들은 남위 80도에서 두 척의 배가 만날 수 있을 거라며 내기를 걸었다. 하지만 1월 말 남위 77도 10분, 맥머도만(로스가 이름붙임)에서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맥머도만은 높이 3,785m인 에레버스 화산의 기슭에 있다. 맥머도만(오늘날 미국 남극기지 중 중추기지)을 떠나올 때 에레버스호와 테러호는 800km에 걸쳐 펼쳐진 50m 높이의 거대한 빙벽을 발견했다. 귀환길에 로스는 겨울을 이곳에서 보낼 계획을 검토해 보았지만, 안전한 장소를 찾을 수가 없었다. 1841년 4월 6일, 에레버스호와 테러호는 호바트항으로 출발했다. 이번 탐험의 성공에 고무된 로스 탐험대는 다음 원정을 준비했다. 다음 탐험의 목적지는 로스 빙붕이라 부르는 거대한 빙벽이었다. 3년 간의 식량을 포함해 준비를 단단히 갖추었지만, 기상조건이 전년보다 좋지 않았다. 탐험대는 로스 빙붕에 도착하지 못하고 기수를 돌려 포클랜드로 향했다. 겨울이 왔던 것이다. 로스는 웨들의 항로를 따라 3차 탐험에 나섰지만, 1843년 3월 초 71도 30분에서 멈춰서야 했다. 금방이라도 겨울이 닥칠 듯했다. 에레버스호와 테러호는 4년 동안의 탐험을 끝마치고 1843년 9월 영국으로 돌아왔다. 나폴레옹 전쟁(1803∼1815) 직후 대영제국 해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잃었다. 14만의 병력이 고작 1만 9,000명 수준으로 줄었다. 대영제국 해군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과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존 배로가 지휘하던 영국 해군본부는 극지방 탐험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행할 것을 결정했다. 제3장 북극에서의 경쟁 1871년, 포경선 선장 윌리엄 스코스비에게 북극해에서는 빙산에 따른 고통이 덜 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배로는 2회에 걸쳐 탐험대를 파견했다-오늘날에도 부빙군의 상황을 거의 예측할 수가 없는데 말이다. 한편, 의회는 북극권에서 서경 110도를 최초로 지나는 배에 상금 5,000파운드(선장 급여의 열 배 이상)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1818년, 이사벨라호와 알렉산더호를 이끌고 존 로스가 북서항로를 발견하기 위해 떠났다. 이번 탐험은 실패했지만, 로스의 부관 에드워드 패리는 북서항로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었고, 귀환하자마자 패배를 인정하기 싫어하는 배로의 지지를 얻어냈다. 해양 탐험뿐 아니라 육로탐험도 진행되었다 배로는 패리에게 헤클라호와 그리퍼호의 지휘권을 부여했다. 또한 배로는 트라필가 해전에 참전했던 존 프랭클린에게 허드슨만에서부터 육로를 통해 해안을 답사하라는 임무를 맡겼다. 1819년 5월에 출발한 패리는 9월에 서경 110도 지역을 가로질러 메릴섬에 도착했고, 이로써 5,000파운드의 상금을 획득할 수 있었다. 패리는 1,000km에 달하는 해안지대를 지도로 제작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정보를 가지고 귀항했다. 1819년에서 1822년까지 프랭클린은 8,800km를 답파했는데, 그중에서 850km에 달하는 해안은 북극에 인접해 있다. 1825년, 그는 다시 출발하여 동쪽을 향해 서경 110도 지점을 통과했다. 패리와 프랭클린의 발견성과와 함께 허드슨 회사가 부시아 반도까지 실시한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예상 북서항로가 확정되었다. 북서항로를 최초로 발견하겠다고 마음먹은 프랭클린은 1845년 에레버스호와 테러호에 129명의 승무원을 태우고 항로 개척에 나섰다. 하지만 항해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수색을 포기하려 했지만, 제인 프랭클린만은 남편을 찾으려는 노력을 그만둘 수 없었다. 그녀는 끈질긴 설득으로 영국 해군본부와 미대통령, 러시아 황제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계속되는 수색 속에 몇 년이 지났지만 배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직 수색의 손질이 미치지 않은 곳은 랭카스터 해협과 그 남쪽 아메리카 대륙 사이 수역이었다. 1854년, 아직 탐험하지 않은 지역인 그레이트피시강 어귀(케나다 북서부의 노스웨스트주)에서 백인의 시체를 보았다는 에스키모의 증언으로 탐험이 재개되었다. 제인은 영국 전역에 호소하며 기부금을 모아 폭스호를 출항시켰다. 길이 30m의 증기 요트 폭스호는 세 차례나 극지방 탐험에 참가했던 베테랑 매클린톡 선장이 지휘했다. 1859년 봄, 마침내 매클린톡은 킹윌리엄섬에 세워진 돌무덤(caim)에서 프랭클린 탐험대 대원들의 기록이 담김 양철통을 발견했다. 장교들이 쓴 이 기록은 1845년에서 1848년까지의 에레버스호와 테러호의 항적과 선원들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의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었다. 존 프랭클린 경은 1847년 6월 11일 죽었고, 배들은 1848년 4월 22일 버려졌으며, 생존자 105명은 남쪽의 그래이트피시강 어귀로 걸어갔던 것이다. 그들의 유골은 뒤에 발견되었지만 두 배의 흔적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오늘날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가면 북서항로를 찾던 도중 존 프랭클린과 함께 서거한 사람들에게 바치는 기념물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쓰라린 영광이었다. 그뒤 50년 동안 영국 정부와 일반 여론은 그의 업적에 거의 관심을 기울여 주지 않았던 것이다. 1905년, 단독으로 탐험을 감행한 노르웨이인이 마침내 북서항로를 발견했다. 낡은 어선 그조아호에 3년 간 먹을 식량을 가득 싣고 로알드 아문센이 비치섬에 도착했다. 아문센과 그의 동료 여섯 명은 킹윌리엄섬 남서쪽에 위치한 에스키모족의 거주지 근처에서 2년을 지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자북극점의 위치를 결정할 수 있었고, 에스키모인의 생활풍습과 추위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생존방법을 연구했다. 1905년 8월 13일 서쪽으로 항로를 잡은 그조아호는 그달 말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온 미국 범선을 만날 수 있었다. 많은 희생이 따른 뒤 마침내 북서항로가 발견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북서항로는 별로 이용되지 않았다. 베가호는 스웨덴의 예테보리에서 일본 요코하마까지 항해하여 마침내 북동항로를 개척했다. 1878년 7월 4일, 닐스 노르덴시욀드는 두 척의 배 베가호와 레나호를 이끌고 예테보리를 출항했다. 그는 그린란드와 스피츠베르겐, 그리고 카라해에서 탐험을 수행한 적이 있었고, 여행에서 무엇을 기대해야 할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탐험은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을 한꺼번에 성취해야 할 것이다. 스웨덴 국왕과 두 명의 사업가, 즉 스웨덴인 오스카 딕슨, 러시아인 시비리아코프가 탐험을 지원해 주었으므로 노르덴시욀드는 더욱 든든했다. 8월 19일, 베가호와 레나호는 유럽인이 동방항해에서 세운 기록이었던 북위 77도 34분, 첼류스킨곶을 지날 수 있었다. 그들 앞에 펼쳐진 바다는 말할 수 없이 평온했고, 평탄한 육지는 지의류와 이끼가 끝간 데 없이 펼쳐져 있었다. 레나강 어귀에 도착한 레나호는 강을 거슬러 1,500km 올라가서 야쿠츠크에 도착했다. 그동안 베가호는 부빙군을 뚫고 동쪽으로 계속 항진해서 9월 초에는 경도 180도에 위치한 셀라그스키곶에 도착했다. 그러나 바다가 얼어붙기 시작했다. 3해리 밖에 얼지 않은 바다가 있었고 하루만 항해하면 베링 해협에도 도달할 수 있었지만, 노르덴시욀드는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곳에서 겨울을 넘겨야 한다는 것은 그곳 원주민인 추크치족과 물물교환이나 하면서 바람과 얼음에 에워싸여 9개월 동안을 꼼짝없이 견뎌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노르크비스트 대위는 긴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이 지역 토착언어를 정리한 사전과 문법책을 만들었고, 추크치족 추장에게 노르덴시욀드의 부인과 스웨덴 국왕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추장이 쓴 편지는 다섯 달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듬해 7월 18일, 얼음에서 풀려난 베가호는 다시 항해를 계속했고, 마침내 9월 2일 요코하마에 도착했다. 일본에서는 그들을 열렬히 환영했다. 노르덴시욀드는 일본 천황을 알현할 수 있었고, 천황에게서 북동항로 개척의 공적을 기리는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아시아 대륙 남쪽을 경유하여 돌아오는 여행중에는 기착하는 항구마다 성대한 축하와 환영을 베풀었다. 그리고 파리에서는 프랑스 대통령과 빅토르 위고에게 접대를 받았다. 4월 24일, 베가호가 스톡홀름에 도착했을 때 스웨덴 국왕은 이날을 국경일로 선포했다. 이 세상 끝에는 무엇이 있는가? 해양인가 대륙인가? 리빙스턴을 찾기 위해 스탠리를 파견하여 명성을 얻은 《뉴욕 해럴드》지의 소유주 제임스 고든 베넷은 독자의 흥미를 사로잡을 새로운 기삿거를 찾고 있었다. 1879년, 북극의 신비를 파헤치겠다고 마음먹은 베넷은 소형 증기선 자넷호를 베링 해협 북쪽 빙해로 파견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1881년 6월 자넷호는 북위 77도 15분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러시아 선박의 도움으로 단지 몇 명의 생존자만이 미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3년이 지난 1884년 노르웨이의 청년 탐험가 프리초프 난센은 자넷호의 난파지점으로부터 2,900해리 떨어진 그린란드 남서 해안에서 에스키모들이 자넷호의 잔해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것은 자넷호의 잔해가 빙하에 실려 하루에 2∼3헤리씩 북극해를 표류했음을 알려 준다. 이때 난센은 얼음의 압력에 견딜 수 있도록 고안된 배를 이용하여 자넷호의 잔해가 표류한 길을 따라 항해해 보며 어떨까 하는 의문을 가졌다. 잔해가 2,900해리나 떠밀려왔다는 사실은, 극지방에서는 얼음에 갇혀 있다고 해도 사실상 이동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에게도 탐험을 실현할 시기가 다가왔다. 1890년 29세가 된 난센은 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방금 스키를 이용하여 그린란드를 동서로 횡단하는 데 성공한 그는 힘든 극지방 탐험으로 수행하기에 끄덕없을 최상의 신체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여러 학회에서 지신의 생각을 발표했다. 북극이 바다인가 아니면 육지인가 하는 그의 이론은 스웨덴에서는 열광적으로, 영국에서는 담담하게, 그리고 미국에서는 극히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다른 이들의 생각이 어떻든 난센은 모험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노르웨이 사람들이 마련해 준 2만 5,000파운드를 가지고 스코틀랜드 건축가인 콜린 아처와 함께 배를 설계, 건조하여 프람호라 이름붙였다. 프람호의 둥근 선체는 얼음의 압력이 가해지는 경우 선체가 위로 들려지도록 의도되었다. 1893년 6월 24일, 프람호는 12명의 승무원과 30마리의 개를 태우고 베르겐항을 출항했다 난센은 시베리아 해안을 따라 북동항로를 항해했다. 그리고 계획대로 9월 말 러시아의 동쪽 북위 77도 14분 지점인 레나강 어귀 부빙군의 가장자리에 이르렀다. 9월 24일 난센의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아침 나절 짙은 안개가 사방을 덮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안개가 걷혔고, 우리는 두꺼운 얼음에 둘러싸여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바닷물 속에 물개 한 마리, 그리고 졸고 있는 듯이 보이는 부빙 위의 곰 한 마리말고는 아무것도 없다." 선상에서 겨울을 보내기 위한 여러 가지 조처를 취했다. 키도 들어올려 특수한 기둥에 단단히 묶어 두었다. "오후가 되어 한가히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을 때,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큰소리가 나더니 배 전체가 뒤흔들렸다.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얼음압력이었다. 모두들 갑판 위로 뛰어올라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주시했다. 프람호는 내가 기대했던 대로 완벽하게 반응했다." 그래도 처음 6주 동안은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프람호는 12월까지 원래 목적지와 정반대인 남동쪽에서 표류했고, 표류방향이 반대로 바뀌었을 대는 두 달 전에 얼음에 묶여 있던 위치와 같은 위도로 돌아가고 있었다. 이제 북극 횡단을 시작해야 할 순간이었다. 이따금 곰이 출현하여 호기심을 돋우는 것말고는 단조롭기 그지없는 항해가 1년 간 계속되었다. 그동안 프람호는 560km를 항해하여 북극에 접근하고 있었지만, 표류하는 데로 내맡겨 놓았다가는 북위 85도를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프람호로 북극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난센은 포기하지 않았다 썰매 세 대, 카약 두 척, 27마리의 개를 이끌고 난센은 프레데릭 요한센과 함께 북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북극점 도달 후에는 그곳에서 1,852km 떨어진 프란츠 요제프 랜드로 향하겠다는 작전이었다. 북극의 봄이 4∼5개월 지속될 것이라 예상했다. 난센과 요한센은 100일분의 식량을 준비했다. 북극의 냉엄한 법칙에 따라 만약의 경우에는 개를 죽여 다른 개를 먹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들이 북극을 667km 남겨 놓고 출발한 것은 1895년 3월 14일이었다. 4월 8일, 북위 86도 3분, 난센은 3주 동안 200km밖에 전진하지 못했다. 빙구가 전진을 지연시켰던 것이다. 두 사람은 남남서 640km 지점에 있는 프란츠 요제프 랜드를 향해 방향을 돌려야 했다. 봄이 되자 곳곳에 얼음이 녹기 시작했고, 그때마다 카약에 개와 식량을 싣고 건너가야 했다. 7월 24일 수요일 난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육지, 육지가 보인다. 2년의 세월, 끝없는 백색 지평선 너머로 무엇인가 보인다." 육지는 프란츠 요제프 랜드의 북동쪽 끝이었다. 난센은 그곳에서 섬을 하나 발견하여 부인 이름을 따서 에바라 이름붙였다. 이때는 두 마리의 개만 살아 남았지만, 다행히 바다표범과 곰을 사냥할 수 있었다. 8월 7일, 빙붕과 최초로 발견된 섬 사이의 얼음이 녹았다. 그들은 두 척의 카약을 묶어서 남서쪽을 향해 출발했고, 3주 만에 160km를 항해했다. 그리고 겨울이 왔다. 두 사람은 가까운 섬에 내려 겨울에 대비했다. 곰가죽을 벗겨 방한복을 만들었고, 돌오두막을 짓고, 해마기름으로 불을 밝혔다. 에스키모의 겨울나기였다. 1896년 5월 19일, 난센과 요한센은 다시 항해를 시작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스피츠베르겐이었다. 그곳에 가면 본국으로 데려다 줄 바다표범잡이 어선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재 위치조차 정확히 파악할 수 없었고, 눈보라가 자주 휘몰아쳐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3주 만에 얼지 않은 수역에 도달한 그들은 다시 카약을 연결시켜 뗏목을 만든 후 프란츠 요제프랜드 해안인 듯한 곳을 따라갔다. 6월 17일, 육지를 정찰하던 난센은 개 짖는 소리와 사람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구일까...? 나는 모자를 들어올려 인사했고 악수를 청했다. 그는 영국식 셔츠와 고무장화, 깔끔히 면도한 얼굴을 지는 문명세계의 영국인으로 보이기도 했고, 긴 머리와 텁수룩한 수염, 더러운 누더기, 기름기와 그을음으로 까맣게 된 얼굴을 지닌 원주민 같기도 했다. '난센 씨 아니십니까? 당신을 만나게 되어 기쁘군요.'" 그는 잭슨이었다. 그들은 영국기지 믈로라곶으로 안내되었다. 8월 7일, 잭슨 탐험대의 공급선 윈드워드호에 승선한 난센은 8일 후 노르웨이 바르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열기구로 북극 탐험을 시도한 최초의 사나이 북극에 도달하겠다는 열정에 과학적 동기만이 따랐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모험심과 명예욕 때문에 새로운 시도를 감행했던 것이다. 스웨덴의 기술자 살로몬 안드레는 풍선기구를 이용하면 조류와 빙구의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1896년 열기구가 사용되기 시작한 지 100년 이상 되었던 때이고 머지않아 비행선이 출현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아직 비행기는 기술자들의 꿈일 뿐이었다. 안드레는 스웨덴 국왕과 다아너마이크 발명가 알프레드 노벨을 쉽게 설득하여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는 풍선기구를 파리에서 제작했고, 오르넨이란 불렀다. 그러나 북극에서 3,000km 떨어진 출발지 스피츠베르겐에는 역풍이 불고 있었다. 안드레는 비행을 포기하고 풍선의 바람을 뺐다. 이듬해 7월 11일, 안드레는 사진사 스트린드베르크와 기술자 프랜켈과 함께 출발했다. 그러나 그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33년이 지난 뒤, 노르웨이 바다표범잡이 어선이 그들의 마지막 숙영지를 화이트섬에서 발견했고, 기록, 사진, 마지막 편지 등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탈리아의 젊은 왕자, 루이스 아마데우스가 경쟁에 참여했다 1899년, 왕자는 스텔라 폴라레호를 타고 프란츠 요제프 랜드 푸돌프섬의 최북단 끝 북위 81도 50분에 위치한 플리젤리곶에 도착했다. 겨울을 지내는 동안 손가락에 동상이 걸려 왕자는 북극 도전에 나설 수 없었다. 1900년 3월 13일, 왕자의 장교들 중 하나인 카그니가 13대의 썰매를 끌고 북극점으로 따났다. 그러나 하루 평균 전진속도가 10km에도 못 미칠 만큼 상황이 나빴다. 게다가 세 명의 대원을 잃었다. 4월 24일 카그니는 북위 86도 34분에 이르렀다. 난센의 기록은 다소 갱신되었지만 북극점은 여전히 저 멀리서 정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피어리와 쿡의 치열한 경쟁. 좋은 소식인가 아니면 나쁜 소식인가? 비슷한 시기 미해군 토목기사 로버트 피어리 또한 극지방을 정복하려는 야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미국인 기업가들의 모임인 피어리 북극 클럽의 지원을 받은 그는 1886년에서 1908년 사이에 여덟 차례의 탐험을 실시했다. 특히, 캐나다 군도와 그린란드 북쪽에서 이루어진 첫 시도에서 그는 풍부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이때 익힌 에스키모식 생존방식은 1908년에서 1909년 사이에 수행된 북극 탐험에서 유용하게 이용되었다. 1908년 8월, 루스벨트호를 지휘해 그린란드 북동쪽 해안에 기착한 피어리는 몇 세대의 에스키모 가족과 246마리의 개를 태웠다. 그는 치밀한 탐험준비를 갖추면서 셰리든곶에서 겨울을 보냈다. 대원들은 백곰, 순록, 사향소 등을 사냥하여 훈제고기를 만들어 저장했고, 난방과 조명을 위해 기름을 비축했으며, 개썰매와 썰매장비도 만들었다. 여자 에스키모를 동원하여 옷과 장화를 준비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1909년 3월 1일, 피어리는 17명의 에스키모인 과 19대의 썰매, 133마리의 개, 그의 조수이며 동료인 매튜 헨슨, 그리고 다른 사람들 다섯 명을 동반하고 엘스미어섬 컬럼비아곶을 떠났다. 한 달 후에는 바틀렛이 지휘하는 마지막 지원대가 북위 87도 47분에서 본부로 되돌아갔고, 피어리는 헨슨과 함께 계속 북으로 전진했다. 4월 6일, 북극점에 도달했다고 확신한 피어리는, 4월 27일에 루스벨트호로 귀환했다. 9월 5일, 인디언 하버에 도착하자마자 피어리는 아내에게 전보를 보냈다. "마침내 승리를 거두었음, 북극을 정복했음, 나는 건강함." 그러나 이것은 맹렬한 논쟁의 시작이었다. 위대한 북극 탐험에 관련한 기사라면 언제나 앞장서서 보도하는 《뉴욕 해럴드》지로 9월 1일 한 통의 전보가 날아들었다. 전보의 발신자 프레더릭 쿡은 자신이 1908년 4월 21일에 이미 북극점에 도달했고 따라서 자신이야말로 새로운 대륙의 발견자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쿡은 피어리와 함께 그린란드 북단에서 탐사활동을 벌인 적이 있었고, 1897년부터 1899년 사이에는 제를라슈 남작이 지휘하던 벨기에 남극 탐험대를 구출했던 사람이다. 미국의 부호 존 브래들리의 지원을 받아 떠났던 1907년∼1908년의 탐험에서 쿡은 컬럼비아곶 남쪽, 북극점에서 1,300km 떨어진 에스키모 마을 아누탁에서 겨울을 지냈다. 1908년 2월 19일, 그는 11명의 에스키모인, 11대의 썰매, 103마리의 개와 함께 그곳을 떠나 4월 21일에 북극점에 도착했다. 그러나 데본섬 북쪽, 스파르보곶의 동굴에서 겨울을 보내야 했기 때문에 1909년 4월 15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기지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것이 쿡의 주장이었다. 1909년 9월 8일, 쿡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은 피어리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쿨은 1908년 4월 21일이든 다른 어떤 날이든 북극점에 가 본 적이 없다. 그는 대중을 속이고 있을 뿐이다." 이 발언으로 한때 동료였던 두 사람은 적으로 갈라서고 말았다. 늘 그렇듯이 신문들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다.《뉴욕 헤럴드》는 쿡을 지지했고 《뉴욕 타임즈》는 가장 영향력 있던 국립 지리학회의 지지를 받고 있는 피어리를 후원했다. 사건의 불똥은 의회에까지 옮겨 붙었다. 의회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고, 마침내 표대결이 벌어졌다. 결과는 135표 대 34표, 피어리의 승리였고, 해군 소장이란 직함까지 수여되었다. 그렇지만 논쟁에 종지부가 찍힌 것은 아니다. 피어리가 진정한 승리자라고 할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납득할 만한 충분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이 난센, 카그니, 피어리 자신도 예전에는 하루에 15km밖에 전진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하루 평균 70km나 전진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은 의문으로 남는다. 마찬가지로 쿡의 북극 탐험의 경우, 시간에 관련한 정보와 천문학적 측정법의 미비, 썰매의 중량에 관한 내용-얼어붙은 극지방에서 현지조달하여 1년을 벼텼다는 점은 놀라운 업적임이 분명하지만-등은 여전히 궁금함 무엇으로 남아 있다. 북서항로를 처음으로 항해했고, 최초로 남극에 도달했던 52세의 아문센이 이번에는 북극 비행을 결심한다 1924년 가을 뉴욕, 월도프 아스토리아 호텔 그의 방에 전화벨이 울렸을 때 아문센은 미국에서 순회강연을 하던 중이었다. 극지방 탐험에 관심이 많은 기술자이자 백만장자 링컨 엘스워스에게 걸려 온 전화였다. 그는 아문센의 다음 탐험을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그후 엘스워스는 아문센의 충실한 친구이자 동료가 되었다. 그 무렵 아문센이 은밀히 품고 있던 계획은 스피츠베르겐과 북극점 사이를 항공기를 이용해 탐사하겠다는 것이었다. 노르웨이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준비작업을 시작했다. 그와 해군항공대의 젊은 장교 리세르 라르센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수상비행기 도니어 월스 두 대를 선택했다. 극점에 도착한 뒤에 한 대에 남은 연료를 뽑아 나머지 한 대에 채운 후 연료가 없는 한 대는 버리고 미지의 지역 위를 날아 알래스카에 이르겠다는 구상이다. 1925년 5월 21일, 아문센과 엘스워스, 조종사 라르센과 디트리히센 그리고 두 명의 기관사 등 여섯 명이 출발했다. 강한 북동풍에 맞서야 했던 그들은 비행 여덟 시간 만에 이미 연료의 반을 소모했다. 그들은 북극점에서 250km 떨어진 북위 87도 44분 지점의 얼음이 녹은 수로에 상륙했다. 수상비행기 중 한 대는 파손되었고, 떠다니는 얼음이 앞을 가로막아 이륙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륙을 위해 3주 동안 대부빙 위에 500m의 임시 활주로를 만들어야 했다. 6월 14일, 마침내 수상비행기는 이륙할 수 있었고 여덟 시간 후에는 노루웨이곶 부근에 착륙했다. 7월 5일, 오슬로에 돌아왔을 때, 그곳에서는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는 열렬한 환영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항구에 있는 모든 배들이 기적을 울려 수상비행기에 환호했고, 왕과 왕비 또한 아문센과 엘스워스를 축하해 주었다. 또 다른 최초의 정복, 비행선 노르제호는 북극에 도착했다 당시의 비행기들은 긴 극거리를 지나가기에 충분한 항속거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항공탐험은 여전히 불안전했다. 그러나 비행선은 비교적 행동반경이 넓었고 날씨만 좋다면 어느 곳이든지 착륙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에서 리세르 라르센은 후에 노르제라고 부릴 반견식 비행선을 제작한 기술자 움베르토 노빌레를 만났다. 노르제호는 1926년 4월 10일 로마를 떠나 5월 7일 스피츠베르겐의 킹스만에 착륙했다. 리처드 버드가 이끄는 미국 탐험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다음날, 버드와 비행사 플로이드 베넷은 삼발식 포커 비행기를 타고 북극으로 떠났다. 그들이 북극에 갔다 스피츠베르겐으로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은 15시간 30분이었는데, 기상상황이나 비행기의 속도를 고려할 때 불가능한 일이었으므로 많은 발론을 불러일으켰다. 노르제호는 5월 11일 오전 8시 50분에 이룩해 16시간 40분만에 극점에 도달했고, 고도 200m 저점까지 하강하여 탐험에 참가한 노르웨이, 미국, 이탈리아의 국기를 극점으로 투하했다. 수로측량 기사 해리스가 북극과 알래스카 사이에 대륙이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지만, 느르제호의 승무원들이 볼 수 있었던 것은 앞으로 북극해라 불릴 곳을 온통 뒤덮고 있는 부빙군뿐이었다. 5월 14일, 노르제호는 72시간을 비행한 후 알래스카에 있는 작은 마을 텔러에 착륙했다. 무솔리니는 노빌레에게 말했다. "운명을 두 번씩이나 시험하지 말았어야 했어." 노빌레의 성공으로 아탈리아는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비행선은 미래의 운송수단이 될 것처럼 보였으며 로마와 리오데자네이로 간에 노선을 개설하자는 의견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노빌레는 북극에 관련한 과학적 탐사에만 비행선을 사용하겠다고 고집했다. 무솔리니의 만류에도 노빌레는 1928년 4월 15일 노르제호와 한 쌍인 비행선 이탈리아호를 타고 밀라노를 출발했다. 5월 6일에 킹스만에 도착한 노빌레는 지원함정 시타 디밀라노를 출발했다. 5월 6일에 킹스만에 도착한 노빌레는 지원함정 시타 디밀라노호와 접촉했다. 그곳에서 그는 시베리아의 섬들을 향해 여러 차례 비행을 시도했다. 5월 23일, 이탈리아호는 북극점 상공에 도달해 극점에 이탈리아 국기와 참나무 십자가를 투하했다. 스피츠베르겐으로 돌아오던 길에 비행선은 안개, 서리, 20∼25노트에 달하는 역풍을 만났다. 북극을 떠난 지 서른 시간 후 눈보라가 불어닥쳤다. 5월 25일 오후 7시 30분, 비행선은 얼음에 심하게 부딪혔다 노빌레와 동료 여덟 명은 부빙 위로 추락하고 말았다. 비행선 조종실의 잔해 속에서 45일분의 식량, 텐트, 권총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승무원 중 한 사람이 충돌 순간 기적적으로 움켜잡았던 무전기가 있었다. 폭풍은 일곱 명의 승무원과 이탈리아호를 빼앗아 버렸다. 생존자들은 노스이스트 랜드 북쪽 100km 지점에 있었는데, 노빌레와 정비사는 부상을 당해 이동이 불가능했다. 노빌레는 규칙적으로 무전기를 통해 조난신호를 보냈다. 시타 디밀라노호는 비상조치를 취하고 잔뜩 긴장했지만, 조난신호를 들을 수 없었다. 이탈리아호의 실종이 보도된 후,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파수를 맞추고 있던 유럽의 모든 무선기도 구조요청을 듣지 못했다. 답신이 없자 차피, 마리아노, 맘그렌 세 사람이 도움을 청하러 떠나기로 결정했다. 6월 1일이었다. 5일 후, 구소련 아마추어 무선사가 조난신호를 청취했고, 마침내 시타 디밀라노와 연결이 이루어졌다. 6개국에서 선박 18척과 비행기 22대와 구조대원 1,500명을 파견했다. 구소련은 융커기를 탑재한 쇄빙선 말리귄호와 크라신호를 보냈다. 아문센은 오슬로에서 열린 연회 도중에 이 소식을 들었다. 구조활동에 참가할 생각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즉시 떠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이 말로 그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스웨덴과 노르웨이 정부에 도움을 요청한 바 있었지만, 모솔리니는 아문센의 제의를 거절했다. 아문센이 노르제호 탐험에서 노빌레와 의견차이를 가졌다는 이유로 그를 이탈리아의 적으로 규정했던 것이다. 따라서 라르센이 노르웨이 구조대를 인솔하게 되었다. 흥분한 아문센은, 다른 방법을 찾던 도중, 극지방 비행에 적합하지 않은 라탕 47기를 제공한 프랑스 정부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6월 18일, 기장 기보가 조종하는 비행기에 다른 네 명의 동료와 함께 탑승한 아문센은 트롬쇠를 이륙했다. 그후 사람들은 그들을 다시 볼 수 없었다. 사고가 난 지 30일 후 구조대가 도착한다 6월 24일, 이탈리아호의 생존자가 있는 붉은 텐트 근처에 성공적으로 착륙한 스웨덴 단발기는 한 사람만을 태우고 다시 출발했다. 그것은 노빌레였는데, 그는 동료들의 요청으로 구조대를 구성하기 위해 먼저 떠났던 것이다. 스웨덴 단발기 조종사 룬트보리는 남아 있는 조난자들을 찾으러 돌아갔지만 불시착하여 야영지의 생존자들과 합류했다. 노빌레는 일행을 남겨 놓고 먼저 떠나왔다고 비난을 받았지만, 부상의 고통을 이겨내고 구소련 구조대를 안내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7월 10일, 쇄빙선 크라신호에서 이륙한 융커기가 신호를 보내고 있는 두 사람을 발견했다. 그들은 구조 요청을 하러 한 달 먼저 일행을 떠났던 차피와 마리아노였다. 발에 동상이 걸린 맘그렌은 동료에게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크라신호 구조팀은 3일 후 그들을 구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차피는 따뜻하게 옷을 입고 몸도 좋아 보였던 반면, 마리아노는 얇은 옷을 걸치고 있었고 몸도매우 쇠약해 있었다.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차피는 식인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다. 같은 날 저녁, 크라신호는 붉은 텐트에 있던 최후의 조난자 다섯 명을 구조했다. "남극 탐험은 세기말 전에 시도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지리학적 과업이다." 1895년 런던에서 열린 제6차 국제 지리학 회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었던 남극 탐험을 다시 추진하자고 결의했다. 제4장 남극의 중심에서 벨기에 해군 장교 제를라슈 남작이 시대적 요구에 따랐다 1897년 8월 이드리앙 제를라수 남작은 벨지카호를 타고 앤트워프를 떠났다. 그의 배에는 로버트 피어리와 함께 그린란드 북부 지역을 탐험한 의사 프레드릭 쿡과 로알드 아문센이 타고 있었다. 여름 동안(1898년 1월 2월) 그레이엄 랜드 일부 지역을 탐험하고 벨링스하우젠해를 가로질러 동쪽으로 전진했지만 그만 얼음에 갇히고 말았다. 해안에서 270km 떨어진 수역에서 바람 부는 대로 표류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승무원들이 괴혈병과 빈혈로 시달렸으나, 쿡은 바다표범과 펭귄고기를 이용한 식이요법을 처방하여 그들을 구했다. 벨지카호는 끔찍한 악천후 덕분에 기상상황에 관련된 많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는데, 이 정보는 나중에 이곳을 탐험할 사람들에게 유용한 자료로 쓰였다. 20세기 초에 들어서면, 스웨덴, 프랑스, 영국, 노르웨이, 독일 등 9개국이 위대한 과학적 탐사의 전통을 이어 남극 탐험에 나선다. 북동항로를 발견한 닐스 노르덴시욀드의 조카 오토 노르덴시욀드는 웨들해로 출항했다. 오토가 그레이엄 랜드 동쪽 해안에서 겨울을 나는 동안, 그의 배 남극호는 북쪽으로 흘러가 빙해에 갇혔고, 얼음에 압력에 깨져 침몰하고 말았다. 예전에는 극지방에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독일인도 프람호의 성공에서 자극을 받아 가우스호를 건조했다. 에릭 폰 드리갈스키는 가우스호를 운항해 빌헬름 2세 랜드로 가 겨울을 보내면서 지자기에 관한 연구를 수행했다. 영국 왕립 지리학회는 제임스 클라크 로스 경의 업적을 계승할 텀험대를 조직하기 위해 애썼다 1899년, 왕립 지리학회 회장인 클레멘츠 마컴 경은 기업가 르웰린 롱스태프와 언론계의 거물이며 《데일리 메일》에게 탐험에 필요한 기부금을 받았다. 독일의 탐험계획에 자극받은 정부가 모자라는 자금을 제공했다. 이 자금을 이용해 마컴은 디스커버리호를 건조하는 한편, 대원을 모집했다. 해군본부는 특수임무를 담당하게 될 다수의 장교와 마컴의 요구에 잘 들어맞는 탐험대장을 파견해 주었다. 탐험대장인 32세의 해군 소령 로버트 팰콘 스콧은 극지방 탐험에 신출내기였다. 그는 후에 영웅이 되지만 동시에 불운한 희생자로 남는다. 탐험대에는 과학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중 박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은 죽기 전까지 스콧 곁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두 명의 상선 장교도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잭슨 탐험대에 참가했던 아미티지와 나중에 위대한 극지방 탐험가가 될 스물여섯 살 먹은 어니스트 섀틀턴이 그들이다. 난센이 개썰매를 사용하는 편이 좋겠다고 충고했지만, 불행히도 스콧이나 (나중에는) 섀클턴 모두 이 충고에 귀기울이지 않았다. 1902년, 티스커버리호는 에레버스산 기슭의 맥머도만에서 겨울을 보냈다. 11월 초, 스콧, 윌슨, 섀클턴 등은 스스로 썰매를 끌면서 남극점으로 떠났다. 12월 말, 세 사람은 허기에 지쳐 돌아왔다. 게다가 섀클턴은 괴혈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1903년 1월 말, 디스커버리호는 여전히 얼음에 묶여 꼼짝할 수 없었지만, 다행히 구조선 모닝호가 16km 떨어진 지점에 정박해 있었다. 섀클턴과 다른 대원 몇을 돌려보내고, 스콧은 마컴의 비밀지시에 따라 그곳에 남아 두 번째 겨울을 보냈다. 해군본부가 항의하고 나섰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다음해 작전권을 이양받는 데 만족해야 했다. 1년이라는 세월이 단조롭게 흘렀고, 해군본부가 보낸 두 척의 배가 탐험가들을 구조하러 왔다. 2월 15일까지 디스커버리호를 포기하라는 명령이 내렸으나, 천만다행 15일에 불어닥친 남동풍이 부빙을 흩뜨려 놓았고 디스커버리호는 뉴질랜드에 향해 기수를 돌릴 수 있었다. 샤르코의 탐험, 프랑세호에서 푸르쿠아-파?호까지 유명한 신경과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의 아들 장 밥티스트 샤르코는 의사가 되기 위한 수련을 받았지만, 탐험가로서의 천부적 재능도 지니고 있었다. 1903년 8월 31일, 샤르코는 세대박이 범선 프랑세호를 타고 브레스트를 떠났고, 원들섬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해안900km에 걸쳐 수로 측량을 실시했다. 1905년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그를 열렬히 환영했고, 정부는 그의 새로운 배 푸르쿠아-파?호에 대한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1908년 8월 15일, 샤르코는 르아브르항을 출발하여 남양으로 향했다. 애들레이드섬을 정찰하고 포르섬의 여울에서 난파를 모면하고, 알렉산드르 1세 섬에 접근했다. 그곳은 아일랜드 크기 만한 섬으로, 1938년 존 리밀이 등장하기 전까지 아무도 탐험하지 못했던 지역이다. 알렉산드르 1세 섬 북쪽에 위치한 작은 섬은 피터만에서 겨울을 보낸 샤르코는 서경 120도까지 부빙을 따라 항해했다. 이것이 샤르코의 마지막 남양 여행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샤르코는 그린란드해 탐험에 몰두했다. 푸르쿠아-파?호는 1936년 9월 16일 아이슬란드 해안에서 폭풍을 만나 샤르코가 익사하기 전까지 여러 해 동안 북극해를 항해했다. 남극점을 향한 섀클턴의 도전 1903년 강제로 송환되었던 셰클턴은 다시 떠나기를 열망했다. 스콧을 능가할 수 있다고 확신한 그는 지리학적 남극점 탐험을 시도하기 위해 런던 재계의 후원을 받고자 했다. 마침내 1907년 2월 금요일, 기업가 버드모어가 지원을 약속했다. 다음 월요일 섀클턴은 왕립 지리학회 비서실로 들어섰다. 유명한 탐험가들이 그곳으로 모일 예정이었다. 북서항로 개척에 대한 강연하기로 한 아문센과 주영 노르웨이 대사가 된 난센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다음날 《타임즈》지는 아문센의 강연과 남극 정복을 위해 새로 파견되는 영국 탐험대에 관한 기사를 보도했다. 출발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소형 바다표범선님로드호가 준비되었고, 16명으로 원정대가 조직되었는데, 토머스 데이비드, 더글러스 모슨, 레이몬드 프리슬리 등은 지질학자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맥머도만이었다. 그때 스콧이 개입했다. 맥머도만은 자신에게 우선권이 있으므로, 그의 옛 부관은 다른 지역을 기지로 이용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것이다. 님로드호는 로스 빙붕 아래의 만입 부분인 웨일수만을 향해 떠나 1908년 1월 말에 그곳에 도착했지만 진입부가 얼음으로 막혀 있었다. 서쪽에 있는 에드워드 7세 랜드에 다시 정박을 시도했는데, 부빙이 밀집해 있어 이번 시도도 여의치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섀클턴은 맥머도만을 기지로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스콧은 이것을 결코 용서하지 않았다. 남극점 공격, 미지의 지역에서 도보로 2,800km를 주파하다 장비 운송 방법, 식량 조달, 공격조 구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개를 이용하라는 난센의 충고가 있었지만 섀클턴은 만주산 조랑말을 구입했다. 그러나 열 마리 중에서 여섯 마리가 출발하기도 전에 죽었고, 사람들이 직접 썰매를 끌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식량은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다. 영양부족에서 발병하는 괴혈병으로 죽을 뻔했던 섀틀턴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음식 배급 계획을 세웠다. 예를 들어 겨울에는 바다표범 고기를 지급하고, 행군시에는 페미컨(말린 쇠고기에 과일, 지방을 섞어 굳힌 휴대용 식량)과 비스킷(하루에 1인당 900g)을 나누어 준다는 내용이다. 11월 말 새클턴은 스콧의 기록을 경신했고, 이어서 버드모어 빙하를 발견했다. 200km의 기록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고도 2,000m에 달하는 이 빙하는 곧바로 남극고원으로 그들을 이끌어 줄 것만 같았다. 죽은 사자보다 산 당나귀가 더 좋지 않겠소 이 한마디로써 섀틀턴은 남극을 눈앞에 두고서 되돌아서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심정을 아내, 에밀에게 설명했다. 1909년 1월 9일, 160km 앞에서 남극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들은 심하게 지쳤고 식량도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곳까지 오는 데 70일이 소요되었고, 맥머도만으로 돌아오는 대는 50일이 걸렸다. 그러나 님로드호는 이미 출항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님로드호는 맥머도만 북쪽 32km 해상에 떠 있었고, 섀클턴 공격조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승무원은 한 사람도 없었다. 시체라도 찾아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곳에서 겨울을 나겠다는 지원자가 속출했다. 그때 한 줄기 연기가 솟아올랐다. 섀클턴이 자신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오두막집을 태웠던 것이다. 이번 탐험에는 또 다른 성과가 따랐다. 빅토리아 랜드를 조사한 데이비드, 모슨, 매케이가 자남극점에 도달했다는 사실이다. 스콧 대 아문센, 남극을 향한 경쟁 1909년 6월 14일, 영국으로 돌아온 섀클턴은 군중과 언론에게 영웅으로서 대접받았다. 또한 그는 36세의 나이로 에드워드 7세가 주는 기사작위를 받았다. 섀클턴의 성공을 시기하던 스콧은 새로운 탐험을 결심했다. 그러나 주변상황은 그에게 불리하기만 했다. 유럽에 전쟁이 일어나리란 소문이 나돌았고, 해군본부는 전쟁무기를 마련하는 데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었다. 여느 때 같으면 재정이 넉넉했을 과학단체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재정후원자 찾기가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만큼 어려웠던 것이다. 대중의 여론만이 모험가들 편이 되어 주었다. 도박판에 끼여든 심정으로 스콧은 그의 계획을 《타임즈》지에 기고했다. 곧 반향이 일어났다. 전국민적 모금운동이 전개되었고 정부 보조로 잔액이 충당되었다. 이제 다시 한번 도전할 차례였다. 그러나 긴축재정을 감수해야 한다. 스콧은 출항했고, 아문센 역시 출항을 준비했다 스코트랜드 옛 포경선 테라 노바호가 출항준비를 마쳤다. 승무원 65명(그중 50명은 해군에서 파견), 조랑말 17마리, 개 30마리가 승선하여 대기중이었다. 포타레 산맥에서 샤르코가 시험했던 세 대의 모터 썰매도 준비되었다. 준비작업은 거의 1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번 탐험은 두 가지 목적을 지녔다. 과학적인 연구 수행과 남극점 정복이 그것이었다. 남극에서 스콧은 막강한 경쟁자 아문센을 만난다. 난센의 지원을 받은 아문센은 프람호로 북극에서의 또 다른 표류탐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베링 해협에서 출발하여 북극점을 횡단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1909년 9월 쿡과 피어리가 북극을 정복했다는 경쟁적 발표가 따르고, 재정후원자 중 몇 명이 발뺌을 하고 나서자, 아문센은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물론 북극에서의 표류탐험을 착수할 생각이었지만, 우선 1년 정도 남극에서 보내고 싶었다. 이러한 계획수정에 의아해할 이유가 없다. 그때까지만 해도 파나마 운하가 건설되지 않았으므로 유럽에서 베링해로 가려면 혼곶을 지나야 하지 않는가? 아문센은 최초로 남극에 도달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자신이 스콧과 경쟁관계에 놓여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당시 영국과 노르웨이 간의 복잡한 정치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일단 아무것도 밝히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1910년 6월에 출항하는 프람호는 베링 해협을 향하는 듯이 보였다. 프람호가 남극으로 전진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마데이라에서 보낸 아문센의 전보가 스콧에게 도착했다. 그는 또한 노르웨이 왕과 난센에게도 자신들의 탐험계획이 변경되었음을 알리는 편지를 보냈다. 스콧은 이에 격분했다. 아문센이 남극에 상륙한 것은 1911년 1월 14일이었다. 아문센은 로스 빙붕 웨일스만에 프람하임 기지를 건설하고, 여덟 명의 동료, 116마리의 개와 함께 월동준비를 했다. 1주일 전 스콧은 맥머도만에 테라 노바호를 정박시켰다. 스콧은, 과학자팀으로 하여금 여러 가지 조사활동을 벌이게 하고, 최정예 공격조를 구성해 남극점을 정복하고, 캠벨이 지휘하는 세 번째 팀을 남겨 두어 에드워드 7세 랜드에서 겨울을 나도록 한다는 야심 찬 계획을 품고 있었다. 항해 도중 테라 노바호는 프람호와 아문센을 마주쳤다. 영국인과 노르웨이인은 자신들의 계획에 대해 정보를 교환하고 서로의 배를 비교해 보았다. 그리고 나서 영국인은 아데어곶에 캠벨팀을 내려놓기 위해서 맥머도만을 향하여 다시 출발했다. 행군, 남극으로! 봄이 되자 남극까지 그와 동행할 네 명의 동료가 선발되었다. 이미 아문센과 북서항로를 탐험했던 노련한 장교이며 개 전문가인 헬머 한센, 썰매 조정을 맡은 세관원 스베르 하셀, 스키 챔피언 올라브 비아랜드, 포경선 포사수 오스카 위스팅이 그들이었다. 그해 가을에 아문센은 남위 80도, 81도, 82도 세 곳에 창고를 설치해 식량을 보관해 두었다. 1911년 10월 20일, 각각의 썰매를 개 12마리가 끌게 하여 일행은 프람하임 기지를 떠났다. 11월 17일, 그들은 남위 85도 지점의 산맥 기슭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잠시도 쉬지 않고 매일 24km를 행군한 셈이었다. 남극점까지 갔다가 돌아오려면 아직도 1,100km가 남아 있었다. 도처에 크레바스가 널려 있는 액슬하이버그 빙하의 무시무시한 오르막길을 기어올랐다. 빙하 정상에서 아문센은 세 대의 썰매를 끄는 데 필요한 18마리의 개들만 남겨 두고 나머지 개들은 죽이라고 명령했다. 12월 10일, 남극점 전방 110km 지점에 도달했다. 고도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12월 14일, 아문센과 동료들은 드디어 90도 지점에 도착했다. 그들은 3일 동안 육분의로 태양의 고도를 측정했다. 피어리와 쿡이 이러한 측정을 하지 않아 얼마나 곤욕을 치렀던가! 떠나기 전에 아문센은 스콧에게 편지를 남겼다. 1912년 1월 25일, 아문센 공격조는 96일 만에 프람하임으로 돌아왔다. 그동안 스콧은 대원들을 이끌고 서서히 앞으로 나아갔다 1911년 12월 10일, 버드모어 빙하에 도착했다. 눈보라에 고통받은 조랑말은 얼어붙은 땀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스콧은 조랑말을 죽이라고 명령했다. 짐은 세 대으 썰매에 나누어 싣고, 썰매 한 대당 네 명이 끌며 등반을 시작했다. 남극점까지 770km를 남겨 두고 있었다. 빙하 등반에 11일이 소요되었다. 스콧은 마지막 지원팀을 돌려보내고, 윌슨, 오츠, 바우어스, 에번스 등 네명으로 공격조를 구성했다. 1912년 1울 9일, 섀클턴이 3년 전에 뒤돌아섰던 남위 88도 23분 5초에 도달했다. 그들은 계속 전진했다. 1주일 후, 바우어는 썰매 활주부에 매인 검은 깃발을 보았다. 최악의 상황 1912년 1월 16일 스콧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다. 노르웨이인이 이미 우리를 앞질러 최초로 극점에 도달했다. ...내일 우리는 극점을 정복할 것이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기지로 돌아가야 하리라." 귀환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남풍이 불어 썰매 위에 돛을 세울 수 있었고, 따라서 전진이 쉬웠지만, 대원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에번스는 탈진했고 오츠의 발은 얼어붙었다. 2월 17일, 에번스가 추락사했다. 3월 16일, 오츠는 온몸에 회저병이 퍼졌음을 알았고, 폭풍설이 휘몰아치는 밖으로 나가서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은 그의 32회째 생일이었다. 3월 19일, 스콧, 윌슨, 바우어스는 원톤 저장고에서 18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지만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울부짖는 듯한 폭풍 때문에 벌써 나흘째 꼼짝못하고 텐트 안에 처박혀 있다." 11월이 되어서야 수색대는 세 사람의 시신과 스콧의 서류, 일기 따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모슨 탐험대의 남극 도전 1882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생한 더글러스 모슨은 1910년 스콧 탐험대에 가담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스콧도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그러나 모슨은 오스트레일리아 기업가의 지원을 받아 자신의 탐험대를 결성하겠다는 포부를 지니고 있었다. 1911년 12월 2일, 호바트항을 떠난 모슨의 오로라호는 부빙을 따라 항진했다. 이윽고 아델리 랜드 약간 못 미쳐 데니슨곶에 닻을 내린 오로라호는 18명의 대원들을 얼음벌판에 내려놓았다, 데니슨곶은 1년 평균 285일 정도 강풍과 폭풍설이 휘몰아치는 곳이다. 모슨을 남겨 두고 오로라호는 서쪽을 향해 항해했다. 프랭크 와일드가 지휘하는 2차 탐험대는 해안 460km에 달하는 지역을 지도로 작성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생물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한 황제펭귄의 대규모 서식지를 하스웰섬 근처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봄이 되자 여러 팀이 출발했다. 한 팀은 자남극점을 찾아 떠났고, 두 번째 팀은 아델리 랜드를 횡단해 서쪽으로 떠났지만, 황량한 얼음벌판을 만났을 뿐이었다. 모슨, 스키 챔피언, 새비어 머츠, 영국 장교 베스 니니스로 구성된 또 다른 팀은 동쪽으로 향했다. 빙하에서의 전진은 매우 느렸다. 12월 12일, 머츠와 모슨은 크레바스를 간신히 통과했다. 그러나 니니스와 그의 썰매, 개, 그리고 그들의 텐트와 대부분의 식량이 크레바스에 발려 들어가고 말았다. 모슨과 머츠는 절규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기지에서 500km 떨어진 지점에 이르렀을 때, 두 사람에게 남은 식량은 열흘분이 고작이었다. 개에게 먹일 만한 것은 전혀 없었다. 결국 그들은 개를 차례로 잡아먹었고, 머츠는 결국 극도로 쇠약하져 죽고 말았다. 홀로 남은 모슨은 반쯤 떨어져 나간 썰매에 몸을 의지해 계속 전진했다. 그의 몸무게에 견디지 못한 눈이 갑자기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썰매가 그의 몸을 단단히 지탱해 주었고, 모슨은 온 힘을 다해서 지면 위로 기어오를 수 있었다. 그것은 기적이었다. 2월 1일, 모슨은 마침내 기지에 도착했다. 오로라호는 그의 명령에 따라 얼마 전에 떠나고 없었지만, 여섯 사람이 남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오로라호에 돌아오라는 무선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폭풍설이 기승을 부렸고, 오로라호는 발이 묶이고 말았다. 모슨과 동료들은 그곳에서 겨울 한철을 꼬박 갇혀 있어야 했다. 1913년 12월이 되어서야 오로라호는 그들을 구출할 수 있었다. 섀클턴의 2차 탐험, 엔듀어런스호의 서사시 1912년 초,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스콧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11월이 되어서야 그의 비극적 최후가 알려졌다. 스콧의 옛 경쟁자였던 섀클턴의 영국 탐험대를 재조직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계획은 웨들해를 출발해 남극점을 거쳐 로스해까지 가는 남극대륙 횡단으로 총 3,300km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아문센이나 스콧의 시도보다 더 어려운 이 원정에 섀클턴은 120일이 걸릴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다섯 명의 동료와 54마리의 개를 이끌고 출발했다. 1914년 8월, 엔듀어런스호가 출항준비를 하고 있을 때 유럽에서 막 전쟁이 발발했다. 섀클턴은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해군장관이던 윈스턴 처칠이 그에게 출발할 것을 명령했다. 11월 초, 사우스조지아에 도착한 섀클턴은 재출발할 때까지 한 달을 기다려야 했다. 부빙군이 북쪽으로 매우 광범위하게 퍼져있었기 때문이다. 12월 5일,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5주일 동안 해안과 얼음벌판 사이에서 부동수로를 찾아 헤맸다. 1월 10일, 엔듀어런스호는 웨들해 연안 코츠 핸드에 도착했으나, 그곳은 20m 높이의 빙벽이었기 때문에 상륙이 불가능했다. 강풍과 폭풍설이 쉬지 않고 휘몰아쳤다. "배가 얼음에 포위되고 말았음을 알았다. 돛대 꼭대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지평선 저 끝까지 두텁고 단단한 얼음만이 펼쳐져 있었다." 남극의 한여름, 그러나 엔듀어런스호는 얼음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다. 부동수로를 찾기 위한 9개월 간의 표류 1915년 1월 20일부터 10월 27일까지 무려 9개월 간 엔듀어런스호는 하루 평균 10km씩 부빙군을 따라 표류했다. 28명의 승무원들은 바다표범과 펭귄을 사냥했고 범고래와 사냥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펭귄을 사냥했고 범고래와 사냥감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경합을 벌였다. 정보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전쟁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가 오고갔다. 비교적 편안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서 얼음이 녹자 문제가 발생했다. 얼음이 녹으면서 압력이 높아져 배가 산산조각 날 지경이었다. 10월 27일, 섀클턴은 배를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탐험대는 부빙군을 가로질러 북북서 570km 지점에 있는 폴렛섬으로 향했다. 깊이 쌓인 눈을 뚫고 가야 했기 때문에 1주일에 18km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섀클턴은 행군을 포기하고 크고 단단한 부빙을 타고 표류하기로 결정했다. 시련은 1915년 11월부터 다음해 4월까지 계속되었다. 탐험대 사진사인 프랭크 헐리는 1916년 4월 8일 당시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오전 6시 보초가 비상사태를 알렸다. 부빙이 쪼개지고 있었다. 캠프가 서 있는 지점도 금방 무너져 내릴 듯했다. 더 위험한 상황이 버티고 있다 해도 우리는 부빙에서 탈출해야 했다." 섀클턴은 세 척의 보트에 대원들을 나누어 태웠다. 자신과 프랭크 와일드 그리고 11명의 승무원들은 그중 큰 포경정인 제임스 케어드호에, 프랭크 위슬리와 아홉 명의 승무원은 그보다 작은 포경정에, 크린과 세 명의 승무원은 구명 보트에 승선했다. 돛과 노를 사용했지만 사실 해류에 운명을 맡긴 셈이었다. 4월 13일, 그들은 엘레판트섬 부근의 얼지 않은 바다에 도달해 마침내 상륙할 수 있었다. 20개월 만에 처음으로 밟아 보는 단단한 땅이었다. "누가 우리를 찾을 것인가? 바다표범이나 펭권을 잡아먹으면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섀클턴은 구조대를 찾아 나서는 편이 나을 것이라 판단했다. 폭풍 치는 바다, 제임스 케어드호의 오랜 여정 엔듀어런스호의 부함장 워슬리, 일등항해사 크린, 목수 맥니시, 수병 맥 캐시와 빈센트 등을 이끌고 섀클턴은 동북동 1,400km지점의 사우스조지아로 향했다. 6.6m 길이의 포경정은 돛을 잔뜩 펼치고 목적지로 향했다. 포경기지가 있는 사우스조지아 북쪽 해안으로 가야 즉각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폭풍이 거세게 몰아부쳐 일행은 사우스조지아 남쪽 해안으로 떠밀렸다. "5월 9일 오후 6시가 방금 지났고 땅거미가 밀려든다. 바위투성이 해안에 부딪혔다 되돌아 나오는 거센 파도가 물거품을 뿜어대며 배를 흔든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한다.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가느다란 분기점, 그리고 명백한 재앙과 한숨 놓아도 될 법한 안전을 갈라 놓는 급작스런 전환점에 경외감을 품어 오지 않았던가!" 섀클턴은 이렇게 적어 두었다. 웅장한 산봉우리와 빙하와 얼어붙은 호수, 사우스조지아는 대서양과 옮겨다 놓은 알프스 산맥의 일부이다. 5월 19일, 섀클턴은 3일분의 식량과 밧줄 한 묶음을 지니고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출발했다. 날씨는 쾌청했으며 보름달이 떠 있었다. 세 사람은 빙하와 크레바스를 헤치고 36시간 동아 쉬지 않고 걸었다. 5월 20일 토요일 아침, 그들은 스트롬네스 포경기지의 사이렌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섀클턴이 포경기지의 노르웨이인 책임자에게 다가갔다. "섀클턴입니다." "어서 들어오시오!" 대장은 그에게 손을 내미었다. "전쟁은 끝났습니까?" "끝나지 않았습니다. 수백만 명이 죽었습니다. 유럽과 세계는 온통 광기에 휘말려들었습니다." 6명은 구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22명이 남았다 워슬리는 지체 없이 남쪽 해안에 남겨 두고 온 세 명의 승무원을 구조하러 떠났다. 그동안 섀클턴은 엘레판트섬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포경정을 정비했다. 화요일 아침, 서던 스카이로 선수를 잡았으나, 부빙이 가로막아 철수해야 했다. 섀클턴은 포기할 수 없었다. 우루과이 정부로부터 트롤 어선 한 척을 빌려 재시도했지만 이번에도 실패였다. 칠레의 푼타 아레나스에 도착한 후 영국 거류민에 도움을 청하여 스쿠너 범선 한 척을 세냈다. 그러나 또다시 부빙군의 방해를 받아 포클랜드로 귀환했다. 1916년 7월 말 한겨울, 영국 구조선 디스커버리호가 9월 중순까지 도착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섀클턴은 더 기다릴 수 없었다. 마침내 8월 25일, 칠레 선적의 소형 증기선을 몰고 가서 전대원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40년이 지난 1956년, 아문센과 만나기 전에 스콧, 섀클턴과 함께 남극에서 겨울을 지낸 경험이 있는 지질학자 레이몬드 프리슬 리가 세 탐험가의 장점을 비교했다. 결론적을 그는 세 사람의 장점을 종합해야 극지방 탐험의 진정한 지도자가 될 것이고 평가했다. "과학탐사대의 지도자로는 스콧이 적격일 것이며, 신속하고 유능한 극점 공격에는 아문센이 필요할 것입니다. 구원의 손길이 보이지 않는 역경에 직면할 때라면 무릎을 끓고 섀클턴을 보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남극 비행 비행선과 비행기를 이용한 북극점 상공 비행에는 성공했지만 남극점에 대한 항공탐험은 아직까지 시도되지 못하고 있었다. 해발 4,000m에 달하는 남극에는 끊임없이 강풍이 휘몰아치고 비행장이나 유인기지가 없을 분만 아니라, 남극과 가장 가까운 보급지점이라 해도 너무 멀었다. 1928년 허버트 윌킨스라는 오스트레일리아인이 최초로 비행을 시도했다. 그는 디셉션섬을 출발하여 2,100km의 거리를 왕복했다. 그는 되돌아와서 그레이엄 랜드가 몇 개의 해협을 사이에 두고 남극대륙에서 떨어져 있다고 알렸으나, 후일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같은 해인 1928년, 미국 해군 소령 리처드 E. 버드가 비공식적 탐험을 감행하여 로스 빙붕 웨일스만에서 겨울을 지내고 자신의 기지를 리틀 아메리카라 명명했다. 1929년에서 1956년에 이르기까지 다섯 팀의 미국 탐험대가 이곳을 출발기지로 이용했다. 아문센의 노선을 따른 1929년에 이름을 붙인 록펠러 산맥을 발견하고 연구했다. 1934년에 남극을 다시 찾은 버드는 그때까지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로스 빙붕 동쪽 해안을 체계적으로 탐험했다. 아문센과 북극점 상공을 비행했던 링컨 엘스워스가 1933년부터 1936년 사이 최초의 남극 횡단 비행에 성공했다. 그레이엄 랜드에서 리틀 아메리카를 연결하는 비행거리는 3,700km에 이르렀다. 목숨을 건 탐험이 성공을 거두자 과학적 연구가 뒤따랐다. 지난 50년 동안 이루어진 과학적 성과와 기술적 진보, 그리고 유전 개발, 대양 수송, 환경문제, 방위문제 등 새로운 요소에 영향을 받아 극지방 개발은 괄목할 만한 발전을 거둘 수 있었다. 또한 북극과 남극 지역에서 다양한 다국적 연구활동이 벌어지고 있다. 제5장 극지방 탐험의 성과와 미래 그린란드 탐험 그린란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200만㎢에 달하는 내륙 대빙원에서의 과학적 탐사는 1930년부터 시작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 난센과 피어리가 스키를 사용하여 그린란드 횡단에 성공했고, 민족학자 크누트 라스무센은 개썰매로 그린란드 북동부 해안을 탐험했으며, 또한 1912년에는 스위스의 빙하학자 드 케르벵이 최초로 온도와 적설량을 측정했다. 1930년에는 코스트와 벨론트가 최초의 파리∼뉴욕 논스톱 비행에 성공했다. 이로써 대서양을 횡단하는 최단의 항공로는 그린란드 상공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따라서 안전한 비행을 위해서는 그린란드의 기상조건을 충분히 연구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 노선을 개설하기 위해 독일은 과학탐사대를 조직했는데, 탐사대 지휘자는 지구물리학자이자 기상학자인 알프레트 베게너였다. 그는 대륙이동설의 창시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독일 탐사대의 목적은 해안에서 400km 떨어진 해발 3,000m지점에 빙하학과 기상학 연구를 위한 아이스미테 기지를 건설하는 데 있었다. 아이스미테 기지는 동쪽과 서쪽 해안에 설치되는 측후소의 지원을 받도록 되어 있었다. 1930년 4월, 베게너는 100톤의 장비를 갖추고 디스코섬 북쪽에 있는 서쪽 해안에 상륙했다. 요하네스 게오르기와 에르네스트 조르게가 여름 내내 아이스미테에 머무는 동안 베게너의 대원들은 에스키모의 도움을 받아 서쪽 해안에서 아이스미테로 물자를 보급했다. 매우 늦은 시즌인 10월 말, 베게너는 괴베, 에스키모 라스무스와 함께 기지로 여행을 시도했다. 기온이 이미 걸려 고생했는데, 회저병까지 번지고 있었다. 다리 절단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수술기구가 부족했지만 게오르기는 그의 동료를 수술하기로 결정했다. 뢰베는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여행을 계속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아이스미테에서 겨울을 지내야 했다. 입이 하나 는다해도 식량은 충분했다. 베게너와 라스무스는 17마리의 개들과 서쪽 해안으로 떠났다. 이것이 베게너의 최후였다. 이듬해 봄, 해안에서 189km 떨어진 곳에서 베게너의 시신이 묻힌 장소가 발견되었다. 라스무스의 소식은 아무도 듣지 못했다. 프랑스 극지 탐험대 아이스미테를 중심으로 하여 펼치고자 했던 베게너의 계획은 풀 에밀 빅토르가 지휘하는 프랑스 탐험대에 의해 실행되었다. 이전에 사용되었던 조랑말과 개썰매는 웨젤스식 무한궤도 소형차 같은 현대적 장비들로 대체되었고, 사람대신 비행기들이 저공비행을 펼치며 기지로 식량과 연료를 실어 날랐다. 1950년과 1951년 사이에 로베르 기야르와 폴 에밀 보게가 이끄는 두 탐험대가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여름 동안에는 지구물리학자들이 16km 간격으로 총 400회에 걸쳐 인공지진 발파(인공으로 지진파를 발생해 지하구조를 규명하는 방법)를 시도했다. 1952년, 빅토르는 툴레 기지에서 출발하여 그린란드 최북단에 이르는 2,000km 남북종단 탐험을 수행하는 데 툴레에 위치한 미군기지를 사용해도 좋다는 내용의 조약을 미국과 체결했다. 그는 기야르에게 탐험의 책임을 맡겼으며, 탐험대는 피어리와 라스무센의 여행로를 따라갔다. 영국 탐험대 영국 해군은 금세기 초 극지방 탐험에서 이룩한 영광을 재현하고 싶어했다. 그들은 그린란드 북쪽에서 북극으로 진출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엘리자베스 2세와 윈스턴 처칠은 해군 소령 심슨이 지휘하는 영국 탐험대의 적극적인 후원자였다. 심슨 탐험대의 목적지는 여름에도 얼음으로 막혀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그들은 해안에서 400km 떨어진 브리테니아 호숫가에 노스아이스 기지를 세웠고, 선더랜드 비행정이 남쪽에서 보급품을 실어 날랐다. 1952년에서 1954년 사이에 영국 탐험대는 노스아이스 기지에서 겨울을 났고, 여름철에는 툴레까지 탐사를 벌였다. 인공지진 발파, 중량측정, 고도측정 따위 여러 가지 과학적 연구도 병행되었다. 1959년에서 1974년까지 15년 동안 국제 빙하탐험대가 그린란드에서 연구를 심화시킨다 그린란드에서 5개국 합동연구가 시작되었다. 그린란드의 내륙 대빙원이 안정을 유지하고 있는지 혹은 줄어들거나 늘어나고 있는지를 조사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는데, 이 연구에는 여러 해에 걸친 반복적인 측정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다국간의 긴밀한 공조체계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프랑스 극지 탐험대가 조직에 대한 전반적 책임을 맡았고, 덴마트, 스위스,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 등이 참여했다. 두 척의 선박, 두 대의 비행기, 두 대의 헬리콥터, 그리고 다수의 무한궤도차가 동원되었고, 각국 과학자들은 대빙원의 감소와 증가를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정립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대빙원의 감소는 고도 1,500m 이하의 해안지역에서 나타나는 빙하 상단의 입상 빙설(neve)이 녹을 경우나 빙하에서 빙산이 떨어져 나갈 경우에 나타난다. 한편, 대빙원의 증가는 그린란드 중부 지방에 해마다 내리는 눈 때문에 발생한다. 그린란드 대빙원의 빙하가 정확히 얼마만큼 증가하고 감소하는지 파악하는 일은 기술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다만 그린란드의 대빙원이 모두 녹아 버린다면 해수면이 거의 7m 가량 상승할 것임은 추측할 수 있다. 인류학적, 민족학적 관심, 이누이트 문명을 연구하여 세상에 널리 알리다 에스키모에게 처음으로 관심을 보인 사람은 덴마크의 탐험가 크누트 라스무센이었다. 그는 친구인 페터 프로이텐과 함께 1910년 이누이트족(북미 그린란드의 에스키모인)의 중심지인 우페르나빅 마을에 민간은행을 세우고 툴레라는 신화적 이름을 붙였다. 라스무센의 목적은 포경선과 몇몇 탐험대에 의해 진행된 무분별한 개발의 위험에서 에스키모를 보호하고, 모피무역을 통제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누이트족의 역사와 풍습을 연구하기 위한 탐사팀을 조직했고, 에스키모인의 사냥법과 물자 수송방법, 개와 썰매의 사용법 따위를 면밀히 관찰했다. 그가 조직한 탐사팀 중 가장 유명한 툴레 5팀(1923∼1924)과 함께, 툴레와 알래스카 사이에 거주하는 에스키모 부족들을 관찰하기 위해 북서항로를 횡단하기도 했다. 그의 열성과 연구성과는 다른 학자들에게 계승되었는데, 특히 프랑스의 장 말로리는 《툴레 최후의 왕들》이란 저서를 통해 전세계에 이누이트족을 널리 알렸다. 북극해 탐험 1895년에 난센이 경험한 장기간의 표류탐험은 북극해 연구의 시작으로 기록될 수 있다. 구소련인은 신기술로 무장하고 그의 연구를 계승했다. 비행기를 부빙군 위에 착륙시켜 얼음 위에 탐사팀을 내려 놓고 그곳에서 바람, 해류, 조수에 따라 이동하는 표류기지를 세웠던 것이다. 이제 예전처럼 선박과 탐험대가 얼음 속에 갇혀 있을 이유가 없었다. 1937년 5월, 구소련 비행기 네 대가 프란츠 요제프 랜드 루돌프섬에서 이륙하여 극점 부근 부빙에 착륙한 뒤, 그곳에 기지를 설치할 임무를 띤 네 사람을 남겨 놓았다. 책임자인 이반 파파닌, 해양학자 이반 쉬르초프, 지구물리학자 구에니 페도로프, 무전기사 에르네스트 크렌켈이 그들이었다. 9개월 동안 기지는 하루에 수킬로미터씩 남쪽으로 이동했다. 1938년 2월 말, 그린란드 동쪽 해안으로 귀환한 그들은 수심 측정 자료와 해양학, 기상학에 관련한 귀중한 정보를 가져왔다. SP2팀, SP3팀을 지휘한 미하일 소모프, A, F. 트레슈니코프는 1950년과 1951년에 이동관측소의 원리를 이용했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8년 동안 임무를 수행하면서 연인원 1,550명을 동원한 기지가 최장수 운영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소련과 미국은 자동화기지를 세우기 시작했다. 핵잠수함·인공위성·쇄빙선, 극지 탐험의 효율성을 높인 새로운 수단 1958년 9월, 북극해를 99시간에 횡단한 미국의 노틸러스호가 북극 탐험의 새로운 시대를 개척했다. 6개월 후, 역시 미국의 스케이트호가 북극점 수면 위로 부상했다. 1962년에는 구소련 레닌스키 콤소몰레트호가 북극점에 도달했고, 1971년에는 영국의 드레드노트호가 북극해 횡단에 성공했다. 이러한 잠수함 탐사에 따른 연구성과는 거의 보고되지 않았다-수심 따위 몇 가지 정보는 공표되었다. 실제로 북극의 두터운 빙하는 위성에게 탐지되는 것을 막아 주며, 계속되는 빙하의 충돌에서 발생하는 소음이 잠수함 탐지작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이 지역은 군사상의 비밀작전을 수행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미젝스(MIzex, 빙해지역 경계실험 Marginal Ice Zone Experiment의 약자)라는 다국간 협동 연구가 진행되기도 했다. 미젝스는 그린란드 해역을 중심으로 빙하, 대기, 해양 사이의 상호 작용을 밝히려고 애썼다. 1977년에 선박이 최초로 북극점에 도달했다. 이 배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핵 쇄빙선인 아르크티가호였다. 이듬해 아르크티카호의 자매선인 시비르호가 화물선을 호송하면서 시베리아 섬들을 연결하는 북쪽 항로를 개척했다. 이제 새로운 해상로의 이용이 가능하게 된 셈이었다. 금세기 초엽의 탐험가들 영국인 월리 허버트는 세명의 동료와 개썰매로 북극해 횡단을 결심했다. 허버트는 모험과 과학적 발견,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했다. 알래스카 최북단 배로곶에서 북극을 경유하여 스피츠베르겐까지 이르는 횡단은 1968년 2월에서 1969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이 여정은 직선 최단거리로 3,500km라고 계산되었으나, 우회해야 하는 빙구를 감안한다면 그들이 주파한 실제 거리는 6,000km였을 것이다. 여름에는 이동하는 부빙 때문에, 겨울에는 혹한과 어둠 때문에 탐험대는 16개월의 절반 가량은 전진할 수 없었다. 그동안 부빙은 실질적인 표류기지가 되어 주었고, 네 사람은 대기, 물, 얼음에 관한 다양한 연구와 관찰을 진행할 수 있었다. 북극점에 대한 계속되는 공격 바다나 산처럼, 극지방은 모함을 즐기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들이 몰려들어 극지 도전은 더욱더 활기를 띠게 되었다. 이제는 비행기가 보급품을 공급해 주었고, 위급한 경우에는 구조대의 역할도 맡았다. 1978년, 일본의 등반가 나오메 우에무라가 17마리의 개들이 끄는 썰매를 타고 단독으로 북극 탐험을 시도했다. 그를 도와 준 것은 5회에 걸쳐 물자를 보급해 준 오터 쌍발기 한 대뿐이었다. 그는 3월 6일에 컬럼비아곶을 출발해서 4월 29일 북극점에 도달했다. 지도상의 거리로 770km인 이번 탐험에 우에무라는 58일을 소요했다. 곳곳에 산재한 빙구들을 우회해야 했으므로 예상보다 훨씬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이듬해, 구소련 탐험대가 더욱 어려운 탐험을 시도했다. 목적지는 마찬가지로 북극점이었지만 이번에는 뉴시베리아 군도 북동부에 위치한 헨리에타섬을 출발하는 1,500km의 대장정이었다. 디미티리 스차로가 지휘하는 여섯 명의 대원들은 개와 썰매의 도움 없이 45km 나가는 배낭을 각자 등에 짊어졌다. 1979년 3월 16일에 스키를 타고 출발한 그들은 76일 만에 도달했다. 5월 말, 곳곳에 얼음이 녹아 어려움이 많이 따르는 계절이었다. 1986년, 두 탐험대가 북극점을 향해 컬럼비아곶에서 출발했다. 미국인 윌 tm테거는 도중에 보급품을 지급받지 않고 피어리의 여행로를 되밟아갈 작정이었다. 남자대원 다섯 명과 여자대원 한 명으로 구성된 tm테거 탐험대는 개썰매를 끌고 3월 8일 출발하여 5월 1일 극점에 도달했다. 피어리가 주장했던 36일보다 20일 더 많은 56일에 걸친 대장정이었다. 프랑스 사람 장 루이 에티엔은 3월 9일 극점으로 혼자 출발했다. 그는 스키로 50km에 이르는 썰매를 끌면서 2주에 한 번씩 비행기로 보급품을 받았다. 중간에 스테거 탐험대와 마주치기도 했지만, 그는 계속 행군했고 마침내 5월 11일 북극점에 도달했다. 미국과 러시아 양대국의 수중에 놓인 북극, 전략적 기지 그리고 경제적 요충지 미국과 러시아는 한편으로는 베링해, 다른 편으로는 프람해와 발네츠해 등의 해협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그 지역의 광대한 천연자원을 개발했는데, 알래스카 북부 해안인 프루도만의 유전과 극권에 근접한 우렌고예의 시베리아산 천연가스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오늘날에는 북서항로보다 북동항로가 더 광법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쇄빙선을 확보하고 있는 러시아가 단독으로 처리하는 화물량만 해도 연간 400만 톤에 달하며 이로써 시베리아 지방은 경제적, 전략적으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개발은 환경과 북극 주민들의 생활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무엇보다 남극에서 행한 것과 마찬가지로, 러시아와 서방국가들의 긴밀한 협조 아래 북극에 대한 공동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 탈냉전 시대가 도래했으므로, 효율적인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공동연구가 수행될 수 있는 토대가 충분히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해군은 남극에서 항공사진을 촬영한다 1946년, 노련한 극지 탐험가 버드 제독이 하이점프(Highjump)작전에 착수했다. 여섯 대의 특수 항공기를 탑재한 항공모함 한 척과 여러 척의 쇄빙선, 그리고 수많은 보조선박들과 4,000명의 인원이 동원된 남극 탐험사상 가장 큰 규모의 탐험대가 투입되었다. 많은 사진이 촬영되었지만 지상의 표준점이 불명확했기 때문에 지도 제작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 1947년부터 1948년 사이에 하이점프 작전의 일환으로 개시도니 윈드밀(Windmill) 작전으로 남극에 대한 최초의 지도들이 완성되었다. 지도에는 아델리 랜드 서해안의 일부 지역도 포함되어 있다. 10년 후에 소련은 이곳에 미르니 기지를 건설했다. 프랑스 최초의 기지, 아델리 랜드 1947년, 폴 에밀 빅토르가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그린란드로 출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이브 발레트, 로베르 포미에, 자크 앙드레 마르탱 등 세명의 젊은 탐험가들이 빅토르에게 아델리 랜드를 탐험하자고 제의해 왔다. 그들의 계획에 매료된 빅토르는 여러 경로로 노력을 기울여 추가지원금을 보조받을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프랑스 극지 탐험대가 탄생했다. 극지 탐험에는 무엇보다 마땅한 선박이 필요하다. 빅토르는 캘리포니아에서 탐험에 적합한 배를 발견하고, 배의 이름을 함장 샤르코라고 명명했다. 프랑스 해군의 감독하에 생말로에서 출항준비를 갖춘 함장 샤르코호의 선장으로느 막스 두케가 임명되었다. 1949년 12월 말, 함장 샤르코호의 선장으로는 마스 두케가 임명되었다. 1949년 12월 말, 함장 샤르코호는 호바트에서 남쪽을 향해 선수를 잡았다. 항해 1주일 뒤, 수평선 저쪽으로 강렬한 백광으로 번쩍이는 물체가 보였다. 부빙이었다. 2주일 동안 얼음과 악전고투 끝에 함장 샤르코호는 데쿠베르트곶 가까운 곳에 닻을 내릴 수 있었고, 앙드레 루아타르가 지휘하는 11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탐험대를 상륙시켰다. 탐험대는 포르마르탱 기지-이 기지는 남극을 횡단하다가 목숨을 잃은 자크 앙드레 마르탱을 기념하여 이름붙였다-를 새우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탐험대는 아델리 랜드의 지도를 작성하는 일에 착수했는데, 봄에는 황제펭귄의 중요 서식지로 알려진 푸앙트제올로지를 발견하기도 했다. 1950년, 함장 샤르코호는 2차 탐험대를 포르마르탱에 내려놓았다. 해군 소령 미셸 바레가 지휘하는 탐험대는 17명의 대원으로 구성되었는데, 이들은 지구물리학 등에 관련한 자연과학적 연구를 심화시키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탐험대에는 베게너와 함께 그린란드에서 과학적 탐사활동을 벌였던 뢰베, 국제 지구관측년 행사를 주관할 베르트랑 앵베르 등이 참가했다. 이번 탐사에서 피에르 마요는 자남극점의 위치를 결정했다. 1951년 겨울은 포르마르탱 기지에서 보낸 마지막 겨울이었다. 이듬해 1월 23일에 발생한 화제로 기지가 삽시에 소실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후 프랑스 기지들은 포르마르탱 서쪽에 위치한 푸앙트제올로지에 들어섰다. 마리오 마레가 지휘한 1952년의 3차 탐험에서 장 리볼리에 박사와 조류학자 장 프레보는 황제펭귄에 관한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다. 노르웨이, 스웨덴, 영국, 오스트레일리아도 남극기지 건설에 참여하다 노르웨이, 스웨덴, 영국의 과학자들로 구성된 다국적 탐험대는 아델리 랜드에서 4,500km 떨어진 남극대륙 대서양 연안에 위치한 모드하임에서 두 차례 겨울을 보냈다. 존 제버의 지휘하에 탐험대는 기상학, 지질학, 빙하학, 인공지진 발파에 관한 다양한 연구를 수행했다. 이 다국적 탐험대의 연구성과는 훗날 학자들의 참고자료로 자주 이용되었다. 1954년, 오스트레일리아인은 더글러스 모슨 경의 극지방 탐험 전통을 새롭게 계승하기로 결의하고, 필립 로를 대장으로 오스트레일리아 국립 남극 조사탐험대(ANARE)를 창설했다. 남극 조사탐험대는 길이 700km, 너비 300km에 달하는 램버트 빙하 부근의 맥 로버트슨 랜드에 기지를 건설하고 모슨을 기념하여 기지의 이름을 모슨이라고 불렀다. 국제 지구관측년을 맞이하여 12개국은 각국의 관찰기록을 종합했다 국제 지구관측년(International Geophysical Year, 1957∼1958)을 통해 극지방 탐사에 참여한 여러 나라에서 수집한 다양한 정보를 체계적으로 수집할 수 있었다. 더 이상 과학자들은 혼자 고립되어 문제를 안고 씨름하지 않아도 되었다. 빙하학, 기상학 등 여러 분야에서 정보교환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것이다. 전리층 연구를 위한 위원회 결성에 이어, 시드니 채프먼과 마르셀 니콜레와 같은 지구물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국제 과학 연합위원회(ICSU)가 구성되었다. 이 기구는 1957년 7월부터 1958년 12월까지 1년 반 동안 국제적인 공동연구를 주도했다. 이 시기는 태양의 흑점활동이 기장 활발했던 기간이다. 국제 지구관측년 기간에 최초로 인공위성(1957년 10월의 스푸트니크호와 1958년 1월의 익스플로러 1호)이 발사되었다. 그러나 세계 각국의 관심은 남극에 솔려 있었다. 12개 국가가 48개의 기지를 건설했으며, 특히, 프랑스를 포함한 4개국은 살인적인 추위와 위험이 도사리는 내륙지역으로 진출했다. 1956년에서 1959년까지 60명의 연구자들과 기술자들이 참여하여 아델리 랜드에 두 곳의 현대식 실험실을 개설했다 프랑스 과학협회는 국제 지구관측년의 사업을 위해 피에르 르제이, 장 쿨롱, 앙드레 당종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국가위원회를 창설했다. 특히, 베르트랑 앵베르가 책임을 맡은 '남극계획'은 프랑스 극지방 탐험대를 지원할 수 있는 재원 마련에 부심했다. 이리하여 모드하임 탐험에도 이용된 적이 있는, 구토른 야콥슨을 함장으로 하는 노르셀호는 극지방에 인력과 보급품을 원활히 운송해 주었음은 물론, 해양학 연구에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3차에 걸쳐 탐험대가 조직되었다. 그린란드 탐험을 경험했던 로베르 기야르가 지휘한 1차 탐험대의 임무는 두 개의 기지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1956년 봄 남극대륙에서 보낸 석 달 동안 그는 남극점 남쪽 317km, 고도 2,400m 지점에 샤르코 기지를 세웠다. 2,500km 떨어진 곳으로부터 크레바스와 사스트루기(sastrugi, 바람으로 형성된 파도치듯 울퉁불퉁한 설원)를 뚫고 달려온 트랙터가 보급품과 장비를 전달해 주었다. 베르트랑 앵베르가 지휘한 2차 탐험대는 1957년 12월에 출발하여 샤르코 기지 개관식을 거행했다. 자크 뒤부와, 클로드 로리위스, 롤랑 슐리히 등이 2월부터 11월까지 그곳에서 9개월을 보냈다. 르네 가르시아, 기 리쿠, 알리 라르지예르가 참여하고 그린란드 탐험을 지휘했던 가스통 루이용이 이끈 3차 탐험도 1,2차 탐험과 유사하게 조직되었다. 겨울이 끝나 갈 무렵, 폭풍설에 실종된 기상학자 앙드레 프뤼돔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탐험대는 슬픔에 잠겼다. 국제 지구관측년인 1958년 3월, 미국 인공위성이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익스플로러 3호가 보내 온 정보를 분석한 물리학자 제임스 반 알렌은, 고도 6만km에 이르는 지구자기장 안에 갇혀 있는 고에너지 미립자의 띠가 지구를 둘러싸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편, 오로라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역에 위치한 뒤몽 뒤르빌 같은 지상기지에서는 자기 폭풍을 면밀히 분석하고 관찰했다. 과학자들은 인공위성에서 송신해 온 자료를 이용해 지구자기장이 세력을 미치는 공간이라 할 수 있는 자기권의 지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1956년, 남극점을 제외한 남극대륙의 다른 지역은 아직도 미탐험 지역이었다 아델리 랜드에 주둔하는 프랑스 탐험대가 얼음 두께가 3,000m에 달하는 남극에서 남북으로 500km에 걸쳐 75회의 인공지진 발파를 시도했다. 같은 시기에 비비언 푹스 경과 에베레스트산을 정복한 에드먼드 힐러리가 이끄는 영국 탐험대가 웨들해에서 맥머도만까지 대륙 전역을 횡단하면서 특히 얼음 두께가 2,800m인 극지점에서 연속 인공지진 발파를 시도했으며 미국인, 구소련인, 일본인도 동일한 작업을 행했다. 60년대에 미국인 애머리 H. 웨이트는 얼음의 두께를 측정하기 위해 비행기 고도계를 응용했다. 비행탐사대가 남극대륙을 샅샅이 누비고 다녔다. 고든 로빈이 지휘하는 영국 탐사대는 동쪽, 미국 탐사대는 서쪽과 로스 빙붕, 서독 탐험대는 웨들해 긑에 위치한 필히너 빙붕과 론 빙붕으로 향했다. 케임브리지에 있는 스콧 극지연구소는 이 측량의 결과를 가지고 1983년 최초의 빙하지도를 완성했다. 남극의 열음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민물 총량의 70%를 차지한다 1,400만㎢의 표면과 2,160m의 평균 두께를 가진 남극의 얼음이 녹는다면 바다의 수위는 70m가 올라갈 것이다. 빗물이 지면에 스며들어 강에 합류하는 온대지역과 달리 극지방에서는 지난 수천 년 동안 눈이 빙원 위에 쌓여 왔다. 이 거대한 얼음덩어리는 1년에 10m라는 매우 느린 속도로 해안을 향하여 흘러간다. 극지의 빙원은 지구의 기후를 이해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이용된다. 실험실에서 얼음견본을 분석해 보면, 강설시의 기온과 대기가스량을 계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음 견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보스토크 지하 244m에서 채취한 것으로 로리위스와 코틀랴코프가 지휘한 프랑스 - 구소련 합동 연구팀은 이 자료를 여러 해 동안 연구했다. 이 견본은 20만 년 전의 지구 기후에 대한 정보도 간직하고 있었다. 수천 년 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던 빙원, 오늘날 남극에는 1,000명의 사람이 거주한다 오늘날 남극에는 17개국에서 49개의 기지를 운영하고 있는데, 여름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릴 정도가 되었다. 균형 있는 남극 탐사를 유도하기 위한 조정기관으로 남극탐험 과학위원회(SCAR)가 1959년 발족되었다. 영국의 R. M. 로스 박사가 1990년부터 1994년까지 남극탐험 과학위원회의 대표로 활동했다. 끊이지 않는 도전, 극지방에 대한 단독 탐험이 계속적으로 시도되었다 최근 두 탐험대가 스콧과 아문센의 발자취를 따라 남극 도전을 시도했다. 세 영국인의 도전은 1985년 11월 3일에 시작되었고 1986년 1월 11일, 그들은 아문센 - 스콧 기지의 미국인에게 환영을 받았다. 1986년에는 아문센의 탐험로를 좇아 두 명의 빙하학자가 남극점에 도전했다. 극지방의 미래 우리의 지구는 병들었는가? 수십년 동안 이루어진 산업의 급격한 발달로 이산화탄소, 메탄, 프레온 가스 등이 마구 방출되었고, 온실효과로 지구 기후에 커다란 변화가 발생하고 있다. 사실상 지구 기온이 몇도 상승하느냐에 따라 농업 생산에 중대한 변화가 따를 수 있고, 해수면 상승이 가속되어 해안지역이 물 속에 잠겨 버릴 수 도 있다. 또한 오존층 파괴가 계속될 경우 생태계의 유기적 균형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빙의 점진적인 축소를 감시하고 남극과 그린란드의 만년설이 증가하는지 혹은 감소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제는 남극에서 국제적 협력을 증진하고 그것을 북극으로 확대해야 할 때이다. 기록과 증언 극지방, 그 얼어붙은 불모지에 도전한 위대한 탐험가들의 체험담. 극지방 탐험사를 통해 살펴보는 극지방의 어제와 오늘. 남극권 통과 1840년 1월 18일, 아스트로라브호와 젤레호는 64번째 위선에 도달했다. 배는 빙산에 둘러싸여 있었지만, 바람은 잤고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했다. 두 척의 소군함이 막 극권을 통과했는데, 늦은 시간이었지만 하늘에 높게 걸려 있는 태양은 멀리 있는 육지를 분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선상에서는 색다른 축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18일, 우리 선원들은 남극권 통과를 기념하기 위해서 선원들이 적도를 통과할 때 습관적으로 치르던 것과 유사한 축제를 생각해 냈다. 저녁에, 적도시조의의 형제 남극시조가 함장 뒤르빌에게 한 통의 편지를 띄웠다. 남극권을 통과하는 다음날 자신이 도착함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적도제를 흉내내 치른 남극권 통과행사는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체배령이었다. 남극시조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뒤몽 뒤르빌 함장에게 남극 14대 후손의 이름으로 경의와 우정을 보냅니다. 아스트로라브호는 남극 제국 입구에 서 있는 두 번째 배라오. 나는 당신의 대담성과 끈기에 뜨거운 경의를 표하며, 당신과 협상하는 것이 곧 나의 의무라고 믿으오, 나의 항복에 부여되는 어떤 이름도 나에게는 여전히 영광스러울 것이기 때문이오. 2년 전, 당신이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비밀들을 밝혀 내고자 했을 때. 나는 형제인 적도시조에게 전갈을 받았는데 그것은 당신이 그의 제국에 대해 상세히 알게 된다는 사실을 질투하여 내게 당신의 운명을 방해하라는 간청이었소. 그래서 나는 당신을 멈추게 했는데, 당신은 그 일의 전말을 잘 알고 있으리라 믿고 있소. 어쨌든 당신에 대한 기억을 간직하고자, 나는 당신 배의 뱃머리 모양을 본떠 얼음조각을 만들었다오. 지금 그 얼음조각은 펭귀노플리스에 있는 내 고물 캐비닛 속에 잘 보관되어 있소. 올 겨울은 그다지 혹독하지 않았고 그 결과 빙하 위로 이동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으며 당신이 내 나라로 들어오는 것을 방해할 방해물은 깨끗이 사라졌소. 우리 국경 근처에 두껍게 쌓여 있는 얼음조각을 두려워하지 마시오. 얼음조각들은 내가 당신에게 보내는 자그마한 격려의 표시일 따름이며, 내가 사람들에게 공공연히 내보여 나의 힘을 과시하는 증거일 뿐이라오. 나의 제국 안으로 당신이 입성하는 것을 당연히 환영하지만, 또한 당신은 우리 법률이 정한 규약에 따라야 함을 깊이 명심하시오. 내 형제, 적도시조가 당신에게 세례를 주었으니, 당신은 이미 나와 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소. 또한 당신은 적도 세례를 주었으니, 당신은 이미 나와 일체가 되었다고 할 수 있소, 또한 당신은 적도 세례를 통해 당신을 정화시켰고, 내 나라에 들어오기 위해서, 빵과 포도주를 나누어 성체배령을 치렀으므로, 나와 일체가 될 것이 분명하오. 그리고 당신에게 미리 알려 두고 싶은 사실이 있소. 술저장고에 재고가 별로 넉넉하지가 않다는 사실이오. 당신을 위해 축하주를 미리미리 비축해 두었건만, 거의 고갈되었기 때문에 아껴 써야 할 것 같소. 어쨌든 내일 월요일에 신하들을 거느리고 제국 국경선으로 나가 당신을 접대하겠소. 회교연도 1893년, 지월 19일 일요일 오늘은, 위도 90도 00분 00초, 경도 00도 00분 00초에 있는 펭귀노폴리스에서 우리 제국을 창건한 날이라오. 남극에서 남극시조 원문과 다름없음 페트로포필 1대 공사, 뒤몽 뒤르빌《일기》 쥘 베른과 존 프랭클린 10년 동안 북극은 비밀을 간직했다. 불굴의 탐험가 존 프랭클린의 비극적인 종말은 1859년 2월이 되어서야 알려졌다. 쥘 베른은 해터러스 선장의 모험을 그린 소설《북극점에 선 영국인》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존 프랭클린 제독의 참사 포워드호를 이용해 제임스 로스 해협을 횡단하는 일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얼음을 돌파하기 위해 종종 톱과 폭약이 사용되기도 했다. 탐험대는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추위는 그런대로 견딜만 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임스 로스가 경험했던 기온보다 30도 정도 더 높았던 것이다. 토요일, 포워드호는 북극 바다에 떠 있는 여러 섬들 중 하나인 킹윌리엄섬 북극단 펠릭스곶을 끼고 돌았다. 그때 일행은 매우 강렬하고 고통스러운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해안을 따라가면서 이 섬에 대해 호기심 어린 듯한 슬픈 시선을 던졌다. 킹윌리엄섬, 근대에 들어 가장 엄청난 비극이 일어났던 바로 그 현장이 그들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그곳에서 서쪽으로 몇 킬로미터 덜어진 곳에서 엘레버스호와 테러호가 영원히 실종되고 말았다. 포워드호의 선원들은 프랭클린 제독과 그의 탐험대를 구축하고 그 위대한 항해를 추적하기 위해 사람들이 벌였던 시도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가슴 아픈 참사의 자세한 내막은 알고 있지 못했다. 박사가 지도를 펼쳐 놓고 항로를 연구하는 동안 벨, 볼턴, 심프슨 같은 몇몇 선원들이 그에게 다가왔고, 그들 사이에 대화가 시작되었다. 뒤이어 다른 선원들도 색다른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그들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동안 두 대박이 소형 범선 포워드호는 매우 빠른 속도로 전진했고, 킹윌리엄섬의 해안풍경은 마치 거대한 파노라마처럼 선원들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해터러스가 큰 걸음으로 갑판 위에 올라섰다. 많은 선원들이 갑판 위에 박사는 선원들이 품고 있는 킹윌리엄섬에서 일어났던 비극에 관한 긍금증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존슨이 시작했던 대화를 이어나갔다. "여러분, 프랭클린의 시작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쿡과 넬슨처럼 소년선원 생활을 겪었고 해양탐험에다 그의 젊음을 바쳤습니다. 그러던 그가 1845년 북서항로를 찾기 위해 출항했습니다. 1840년 동료인 제임스 로스가 남극 탐험에 사용했던 에레버스호와 테러호를 이끌고 말입니다. 프랭클린이 승선한 에레버스호에는 70명의 일행들이 타고 있었고, 테러호에는 크로지어 선장을 위시해 모두 60여 명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레버스호와 테러호의 승무원들은 냉혹한 운명을 맞이했고 끝내 그들의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러 만과 곶, 해협과 운하, 그리고 섬에서 탐험에 참여했던 사람들의 위대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138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프랭클린이 디스코섬에서 마지막으로 쓴 편지는 1845년 7월 12일자로 되어 있습니다. '오늘밤 우리는 랭카스터 해협을 향해 출범하려 한다.'고 그는 적어 놓았습니다. 디스코섬에서 출발한 후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포경선 프린스 오브 웨일스호와 엔터프라이즈호의 선장들이 멜빌만에서 두 선박을 보았는데 그것이 그들의 최후였습니다. 그날 이후 그들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서쪽을 향해 간다면 프랭클린 탐험대의 항로를 따라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는 랭카스터 해협과 배로곶을 지나 비치섬에 도착했고 1845년에서 1846년의 겨울을 그곳에서 보냈던 것입니다." "프랭클린 탐험대에 관한 상세한 사항은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었습니까?" 목수 벨이 물었다. "1850년에 활동을 벌였던 오스틴 수색대 덕분입니다. 오스틴 수색대는 킹윌리엄섬에서 세 기의 돌무덤을 발견했는데, 그 무덤들에는 프랭클린의 탐험대원 중 세 명이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그후 폭스호의 해군 대령 홉슨이 발견한 1848년 4월 25일자 기록에서도 이 같은 사실이 확인되었습니다. 자료를 검토해 보면, 겨울이 끝날 무렵 에레버스호와 테러호 웰링턴 해협 77도선까지 거슬러 울라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통행이 불가능했던 북쪽 항로로 계속 항해하는 대신 남쪽으로 돌아갔던 것이 아닌가 생각드는군요."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군! 북쪽으로 갔으면 구조되었을 텐데." 누군가 심각한 어조로 말했다. 모두 돌아보았다. 선장이었다. 갑판 난간에 기대고 섰던 해터러스가 정곡을 찔렀던 것이다. 박사가 말을 이었다. "프랭클린은 아메리카 대륙 해안에 도달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폭풍우가 이 불길한 항로에서 그를 덮쳤고, 1846년 9월 12일, 두 선박은 여기서 수마일 떨어진 펠릭스곶 북서족에서 빙하에 갇히고 맙니다. 그후 배들은 북북서를 향해 빅토리곶 끝까지 계속 밀려갔습니다. 1848년 4월 22일, 탐험대는 마침내 배를 포기했습니다. 그러면 지난 19개월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그 불행한 사람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아마도 그들은 주위를 경계하면서 구조요청을 보내기 위해 가능한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했을 것입니다. 프랭클린 함장은 정열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가령 그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승무원들이 프랭클린을 배반했기 때문이 아닐까?" 선장의 공허한 목소리가 다시 끼여들었다. 이 말에 선원들은 시선을 들지 못했다. "기록은 프랭클린 함장이 1847년 6월 11일 과로로 쓰러졌음을 알려 줍니다. 그를 추모합시다!" 이렇게 말하고 박사는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했다. 선원들도 말없이 박사를 따랐다. "지휘관을 잃은 이 불행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가요? 그들은 열 달 동안 배 위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미 33명이나 죽은 것입니다. 크로지어 함장과 피트제임스 함장은 빅토리곶 끝에 돌무덤을 하나 남겨 놓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곶의 끝을 막 통과했습니다! 여러분 잘 보십시오. 아직도 돌무덤의 잔해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레버스만에서는 썰매 위에 놓인 탐험선 파편으로 만든 범선 한 척이 발견되었습니다. 은수저, 풍부한 양식, 초콜릿, 차, 종교서적 등도 그곳에 함께 있었습니다. 105명의 생존자들은 크로지어 함장의 지도 아래 그레이티피시강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허드슨만에 성공적으로 도달했을까요? 그들 중 몇 명이 살아 남았을까요? 이후에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내가 알려 주겠소!" "그렇소. 그들은 허드슨만으로 향했고 몇 팀으로 나뉘었소. 물론 목적지는 남쪽이었소. 1854년에 작성된 래 박사의 편지는, 1850년에 에스키모들이 킹윌리엄에서 40명의 백인을 목격했음을 들려주고 있소. 피로와 고통으로 야위고 창백해진 그들은 기진맥진한 채 배를 글고 있었소. 그후 그곳에서 30구의 시체가 발견되었소. 인근 섬에서도 다섯 구의 시체가 발견되었는데, 어떤 시체는 반쯤 매장되어 있었지만, 다른 시체들은 묘지도 없이 버려진 채였소. 또한 전복된 배 밑이나 텐트의 잔해 밑에서도 시체들이 발견되었소. 이 정보를 입수한 해군본부는 허드슨만 상사에게 가장 적합한 경험자를 보내 달라고 간청했소. 파견자들은 백강 하구까지, 몬트리올섬, 메코노치의 섬들, 오글레곶을 샅샅이 뒤졌소,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이오. 저 불행한 사람들은 동료의 시체를 먹으며 자신들의 삶을 연장시키다가 차례로 죽어 갔소. 그들의 남쪽 행로는 찢어진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는 고행의 길일 따름이오. 당신들은 아직도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가길 원합니까?" 해터러스의 떨리는 목소리와 열정적인 몸짓은 선원들을 감동시켰다. 그리하여 이 불길한 땅을 눈앞에 두고 감정이 극도로 격앙된 일행은 모두 한목소리가 되어 크게 외쳤다. "북쪽으로! 북쪽으로! 자 북쪽으로! 구원과 영광이 그곳에 있기를! 북쪽으로! 하늘은 우리를 위해 열린다. 바람은 방향을 바꾼다. 길이 뚫려 있다. 선회를 준비하라!" 선상은 정위치를 잡기 위한 선원들의 바쁜 동작으로 한동안 분주했다. 빙해가 차츰 트이고 있었다. 포워드호는 빠르게 선회하며 매클린톡 해협을 향해 전진했다. 쥘 베른 《북극점에 선 영국인》 스콧의 마지막 편지 남극의 에번스 기지에는 커다란 나무십자가가 꽂혀 있다. 그리고 지구 반대편 런던의 대영박물관에는 로버트 팰콘 스콧의 일기가 진열되어 있다. 그의 일기는 1912년 3월 영웅적 생애를 마감하기 전에 영국 국민에게 쓴 스콧의 마지막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재앙의 원인은 탐험대 조직의 미숙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우리를 끈질기게 괴롭혔던 불운에 있다. 1. 1911년 3월, 식량과 장비를 운반할 조랑말의 일부를 잃었다. 결국 예정보다 출발이 늦을 수밖에 없었고, 게다가 보급품의 운송량도 줄여야 했다. 2. 여행 내내, 특히 위도 83도 지점에는 우리가 견뎌야 했던 지긋지긋한 폭풍우는 전진을 더디게 했다 3. 빙하 저지대에 깔린 부드러운 눈도 전진속도를 늦추었다. 우리는 이 운사나운 역경에 맞서 굳은 의지로 투쟁했고, 마침내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식량의 초과지출이 문제였다. 남극점까지 1,300km의 여정 위에서처럼 고지대에서도 음식물과 의류, 그리고 연속된 창고들을 마련하면서 우리는 모든 점에서 완전한 만족을 느꼈다. 우리 팀은 좋은 상태에서 여유분의 식량을 갖고, 우리들 중에서 가장 강인하다고 믿었던 에번스의 놀랄 만한 확신 덕분에 버드모어 빙하에 다시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좋은 날씨에 버드모어 빙하로 가는 일은 비교적 순탄했다. 그러나 우리가 돌아올 무렵에는 단 하루도 날씨가 좋은 적이 없었고, 우리 동료 중 아픈 사람이 발생했으므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말았다. 내가 지난번에 말했듯이, 우리는 매우 기복이 심함 빙하지역에서 추락했는데, 에드가 에번스가 뇌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자연사했으며 그의 죽음에 겹쳐 겨울이 예상보다 빨리 왔으므로 우리는 더욱 처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배리어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우리의 확실한 후퇴를 위해 취해진 일련의 조치들이 적절했고 연중 이 시기에는 우리가 마주친 기온과 눈의 상태를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는 점을 나는 새삼 확신했다. 위도 85도와 86도 사이 고지대의 기온은 영하 28℃, 밤에는 영하 44℃를 기록했다. 특히, 우리가 행군하는 낮에는 계속해서 맞바람이 불었다. 어떻게 보면 이 상황들은 갑작스럽게 일어났으며, 우리가 조난된 것은 그 원인을 규명하기가 불가능한 이 같은 예상치 못한 악천후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사람도 이 마지막 달 동안 우리가 겪은 끔찍한 고통만큼 처절한 아픔을 체험한 적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의 동료 오츠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연료가 부족하지 않았더라면, 끝으로 우리가 보급품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희망하고 있던 보급창고에서 20km 떨어진 지점에서 우리의 말복을 붙잡았던 폭풍우가 아니었더라면, 이 혹독한 기상조건을 극복해 내고 무사히 귀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불운도 이 마지막 고통보다 더 괴롭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틀분의 식량과 한 끼의 식사를 준비할 수 있을 만한 연료를 가진 채 원톤 저장고에서 20km 떨어진 지점에 도착했다. 4일 전부터 폭풍이 극성을 부렸기 때문에 우리는 텐트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약해졌다. 글쓰기도 무척 힘이 든다. 그러나 나는 이번 탐험을 결코 후회하진 않는다. 이 탐험으로 영국인이 끈기와 연대정신을 지니고 있으며, 그들이 옛날만큼이나 오늘날에도 용기를 가지고 죽음을 직시할 줄 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위험을 극복했으면,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사태가 우리에게 불리하게 전개되더라도 우리는 불평하지 않고 신의 섭리에 경의를 표할 것이며, 끝까지 최선을 다할 것이다. 우리가 살아 남을 수 있다면, 나는 내 동료들의 용기와 불굴의 의지와 인내심을 자랑스레 전할 것이다. 로버트 펠콘 스콧 섀클턴의 승리담 어니스트 섀클턴은 남극 탐험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업가 단체에게 막대한 돈을 융자받았다. 엔듀어런스호가 난파당했을 때, 사진 원판이 바닷물 속에 잠기고 말았는데, 탐험대와 동행한 사진사, 프랭크 헐 리가 위험을 무릅쓰고 잠수해 원판을 구해 냈다. 사진의 인세수입을 담보로 해서 융자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이 사진들은 영국 케임브리지에 보관되어 있다. 영웅들의 기록 1915년 10월 "이것이 엔듀어런스호의 끝이라니! 이제 배를 포기해야 해." 섀클턴이 말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선미가 깨어져 나가 그곳으로 폭포마냥 바닷물이 흘러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프랭크 위슬리 《엔듀어런스호》 1916년 4월 24일 서로를 격려하며 우리는 자갈이 깔린 해변으로 제임스케어드호를 밀고 나갔다. 그러고는 파도를 뚫고 배를 발진시켰다. 섀클턴과 다른 용맹한 동료들이 세상에서 가장 험한 바다를 헤치고 1,200km의 대항해를 떠나려는 순간이었다. 프랭크 헐리 《섀클턴 탐험대》 어떤 지점으로 선수를 잡을 것인지 토의가 계속되었다. 섀클턴이 입을 열었다. "혼곶이 어떻겠습니까? 그곳이 가장 가깝습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입니다. 서풍이 끊임없이 우리를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운이 좋다면 포클랜드에나 도달할 수 있겠지요." 내가 대답했다. "당신의 생각대로 사우스조지아로 선수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가장 먼 곳이지요. 그렇지만 바람도 그쪽으로 불고 있습니다." 그리고 섀클턴은 빠른 말로 이렇게 덧붙였다. "이제까지 우리는 위대한 모험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여행은 가장 위대한 모험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동화책에서 말하듯 우리는 성공하건 아니면 죽을 것입니다." 프랭크 워슬리 《엔듀어런스호》 마지막 남은 기름통을 뜯어 외투와 장갑과 양말이 뿌렸다. 그러고는 펭귄 언덕으로 달려가 불을 붙였다. 갑자기 배(칠레 선적의 엘초호)가 멈춰 서더니 소형 보트가 내려졌다.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보트로 내려서는 어니스트 섀클턴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프랭크 헐리 《섀클턴 탐험대》 샤르코의 여행 장 밥티스트 샤르코는 인류의 손이 닿지 않은 극지방을 개척하기 위해 오랜 세월 투쟁했다. 1936년 아이슬란드 근해의 얼음바다는 샤르코와 푸르쿠와 - 파?호의 선원들을 삼켜 버렸다. 장 밥티스트 샤르코는 1867년 7월 15일. 뇌이쉬르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장 마르탱 샤르코는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교수이자 신경병리학의 창시자였다. 당대의 관습에 비춰 볼 때 아들의 장래는 이미 결정된 상태였다. 그는 의사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샤르코는 늘 항해만을 꿈꾸었다. 알사스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의 공책은 온통 배를 그린 낙서투성이였다. 그는 뇌이 정원에서 극지탐험놀이를 즐기곤 했고, 방학이 되면 노르망디 해안 위스트레앙에서 낚시꾼에게 해상생활을 배우기도 했다. 탐험에 대한 열정을 잠시 접어 두고 샤르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통근조수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 군대에서 알프스 엽보병으로 근무한 그는, 복무를 마친 후 1891년 인턴으로 채용되어 살페트리에르에서 아버지와 함께 근무했다. 그리고 1895년에는 논문이 통과되었다. 부친 샤르코 교수가 죽은 다음, 샤르코는 생물학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파스퇴르 연구소에 들어가 암을 연구했다. 그러나 항해를 떠나고 싶은 마음에 늘 좌불안석이었다. 그 무렵 해군성 장관 에두아르 록로이의 의붓딸인 잔 빅토르 위고와 결혼하고, 장인의 도움으로 함대의 보조의사로 근무하게 되었다. 파리의 사교계로 진출한 이후에도 이럭저럭 살아 나갈 수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탐험을 향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세상에 이름을 떨치고 싶었다. 그는 항상 바다에서 여름철을 보냈다. 지신의 요트 쿠르리스에서 여름을 보내던 샤르코는 1893년 처음으로 길이 19.5m의 15톤 쾌속선인 푸르쿠와 - 파?호에서 지냈다. 이 배는 영국과 아일랜드를 항해하려는 그의 계획에 따라 건조되었다. 1901년 샤르코는 페로에 제도를 조사하기 위해 떠났는데, 이 항해는 그에게 이 제도를 항해하는 훈련의 기회가 되었으며 그곳에 관한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는 계시가 되었다. 그의 여행보고가 프랑스 요트 클럽에서 출간하는 《가이드지》에 실렸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의사이자 항해자인 샤르코는 《모든 사람들 가까이에있는 항해》를 써서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이 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선원을 양성하는 데 좋은 지침서로 인정받았다. 1902년, 그는 해군성 장관으로부터 첫 공식임무를 받았다. 당시 남극에서 포경선이 자주 드나들던 노르웨이 소유지인 장메이앙섬의 어장을 연구하는 임무였다. 철 스쿠너선(두 개에서 네 개의 돛대를 가진 세로로 돛을 장치한 서양식 범선:역주)인 로즈 마린호를 타고 출항한 그는 화산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과학적 현상에까지 조사범위를 확대했고, 조랑말을 타고 아이슬란드를 답파했다. 그러나 그에게 이런 식의 여행은 기분풀이 정도였다. 그는 다른 나라들이 1840년경부터 극지에서 다양한 과학탐사를 실시하는 데 비해 프랑스만이 극지 연구를 소홀히 한다고 애석해했다. 1897에서 1899년까지 벨지카호를 지휘한 아드리앙 드 제를라슈는 남극에서 최초로 겨울을 보내는 데 성공했다. 1899년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 지리학 회의에서는 신비스러운 남극대륙을 체계적으로 탐험하자는 주장이 대두했고, 그 호소는 널리 공감을 얻었다. 1902년에는 4개국 탐험대가 이들 지역에서 작업에 착수할 준비를 마쳤다. 이들은 영국 디스커버리호의 스콧, 독일 가우스호의 에리히 폰 드리갈스키, 스웨던과 노르웨이 안타르티카호의 오토 노르덴시욀드, 그리고 스코틀랜드 스코티아호의 W.S. 브루스였다. 처음 북극에 매력을 느꼈던 샤르코는 프랑스가 다른 나라들 같은 계획이 전혀 없다는 획연한 사실 때문에 모험에 투신할 결심을 했다. 생말로에서 그는 자신의 자산을 투자해 극지 탐험을 위한 배를 한 척 건조하도록 했다. 프랑세호라고 이름붙인 이 배는 빙해에서 항해할 수 있도록 견고하게 만들어졌으며, 떡갈나무 선체와 세 개의 돛, 그리고 125마력의 보조기관을 갖추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