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친 요시모토 바나나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장소를 말한다면, 그곳은 부엌이다. 어느 곳, 어떤 곳이든, 그곳이 부엌이고 음식을 만들 수 있는 곳이라면 나는 좋다. 가능하면 편리하고 기능적인 곳이면 더욱 좋겠다. 청결한 마른 행주가 몇 장이고 준비 되어 있고, 하얀 타일들이 반짝반짝 빛나는 곳. 지독하게 더러운 부엌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부엌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견딜 수 없을 만큼 좋다. 바닥에는 야채 부스러기들이 널려 있고, 슬리퍼 바닥이 새카맣게 더러워진다 하더라 도 이상하게 부엌은 넓을수록 좋다. 겨울 한철쯤 가볍게 넘길 수 있을 만큼 식료품이 가득 들어찬 거대한 냉장고가 떡 버티고 있고, 그 은빛 문에 내가 기대선다. 기름이 여기저기 튄 가스 레인지나 녹이 슨 식칼에서 문득 고개를 들면 창 밖으로는 쓸쓸히 별이 빛난다. 나와 부엌만이 남는다.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나은 느낌이다. 정말 완전히 녹초가 되어버렸을 때, 나는 혼자서 황홀한 생각에 잠긴다. 언젠가 죽 을 때가 오면 부엌에서 숨을 거두고 싶다. 홀로 추운 곳에서 죽든 누군가가 있는 따뜻 한 곳에서 죽든 두려워하지 않고 모든 것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싶다. 부엌에서라면 괜 찮을 것이다. 나, 즉 사쿠라이 미카게의 양친은 두 분 다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래서 할 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나를 길러주셨다. 중학교에 올라갈 무렵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그래서 할머니랑 둘이서 이제까지 살아온 것이다. 얼마 전, 그만 할머니마저 돌아가시고 말았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가족이라는, 분명히 함께 해야 할 존재들이 세월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줄어가 더니 이제 나 혼자 여기 남겨졌다는 생각이 들 때는 눈앞에 있는 것들이 전부 거짓말 처럼 느껴진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방에서 이렇게 주욱 시간이 흘러 이젠 나 혼자 남 았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마치 공상과학 같다. 우주 속의 어둠 같다. 장례식을 마치고 사흘 동안은 멍청해져 있었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는 슬픔의 포화상태에서 아슴아슴한 졸음에 몸을 맡긴 채, 볕이 잘 드는 적막한 부엌에 이불을 깔았다. 담요를 몸에 둘둘 감고 죽은 듯이 잠만 잤다. 냉장고의 위잉하는 소리가 적막감으로부터 나를 지켜주었다. 그곳에서는 그런대로 긴 밤들이 편안하게 지나갔고 아침이 찾아와주었다. 그저 별 아래서 잠들고 싶었다. 창틈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을 받으며 잠에서 깨고 싶었다.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다 그저 담담하게 지나갔다. 하지만 마냥 그렇게 지낼 수만은 없었다. 현실은 각박하니까. 할머니가 착실하게 어느 만큼의 돈을 남겨두었다고는 하지만, 혼자서 살기에는 이 집이 너무 크고, 벅차 달리 내가 살 집을 찾아보아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아파트 정보≫를 사가지고 와 들춰보았지만 빼곡히 들어찬 고만고만 한 방들을 보고 있자니 눈앞이 빙글빙글 돌 지경이었다. 나로서는 역부족이었다. 이사 는 능력 있는 사람이나 하지, 내게는 무리다. 밤낮으로 부엌에서 잠만 잤더니 뼈 마디마디가 아프고 기운이 없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골치 아픈 머리를 더 골치 아프게 만들어 집을 보러 다니고, 짐을 나르고, 다 시 그 짐을 풀고……! 얼마든지 늘어놓을 수 있는 번거로움을 떠올리며 절말하면서 뒹굴뒹굴 누워만 있었 다. 자다가 횡재를 한다더니, 그러던 중에 나에게 기적 같은 일이 찾아온 그날 오후의 일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딩동딩동 하고 갑자기 초인종이 울렸다. 구름이 낮게 깔린 봄날의 오후였다. ≪아파트 정보≫를 가끔씩 들여다보는 일에 완 전히 지쳐 있었지만, 어차피 이사는 하게 될 것 같아서 끈으로 잡지들을 묶고 있던 중 이었다. 거의 잠옷 바람으로 허둥지둥 달려나가 아무 생가가도 없이 문을 열었다. 강 도가 아니어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문 앞에는 다나베 유이치가 서 있었다. "지난번에는 고마웠어요." 내가 먼저 말을 건넸다. 장례식 때 많은 도움을 주었던 한 살 아래의 좋은 청년이었 다. 듣자니 나와 같은 대학에 다닌다고 한다. 지금 나는 휴학 중이다. "천만에요, 살 곳을 정했나요?" 그가 말했다. "아뇨, 아직……." 하며 난 영문 모를 웃음을 지어보였다. "역시 그렇군요." "들어와서 차라도 한 잔 할래요?" "아뇨. 지금 막 나가는 길이라 시간이 없어요." 하며 그가 웃었다. "잠깐 전할 말이 있어서 왔어요. 어머니와 상의해봤는데요,얼마 동안 우리 집에 와 있지 않을래요?" "네?" 내가 되물었다. "여하튼 오늘 저녁 7시경에 우리 집에 한번 들러주세요. 이건 약도예요." "네에." 나는 멍한 상태로 그의 메모를 받아들었다. "자아, 그만 갈께요. 어머니나 저나 미카게 양이 와주시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가 웃었다. 그 웃음이 너무도 맑아서 현관에 서 있는 그 사람의 눈동자가 훨씬 가 까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져 눈잉 떨어지지 않았다. 갑작스레 그가 내 이름을 불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한번 갈께요." 나쁘게 말하면 무엇에 씌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아주 담담했기 때문 에 그의 말이 진심임을 믿을 수가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암담한 어둠 속에서----무엇 에 홀린 듯이----한 줄기 빛이 보였다. 그 빛이 너무나 환하고 밝아 나는 그렇게 대답 했다. 그러자 그는 <그럼, 이따가> 하더니 웃음을 남기고 가버렸다. 나는 할머니의 장례 때까지도 그를 알지 못했다. 장례식 날 돌연 다나베 유이치가 찾아왔을 때는 그가 할머니의 애인이 아닐까 생각했었다. 왜냐하면 그는 눈물로 부어 오른 눈을 뜨지도 못한 채 떨리는 손으로 분향을 하고는, 할머니의 유해를 보자 또다 시 눈물을 뚝뚝 떨구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갖고 있는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그 사람보다 적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가이 들었었다. 그 정도로 그는 슬퍼했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찍어누르며 말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그 후 그에게서 여러 가지의 도움을 받았다. 다나베 유이치. 그 이름을 할머니한테서 언제 들었는지 생각해 내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다른 사람과 혼동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할머니가 단골로 가는 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사람이었다. 〈좋은 학생이 있는데, 다나베 군이 말이다. 오늘도 말이지…….〉하는 말들을 할먼 에게서 몇 번 들었더 기억이 났다. 꽃꽂이를 좋아했던 할머니는 언제나 부엌에 꽃을 꽂아두었으므로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꽃집에 들르곤 했다. 그러고 보니 한 번인가는 그가 커다란 화분을 안고 할머니의 뒤를 따라 집에 왔던 적도 있는 것 같다. 그는 긴 팔다리를 가진 잘생긴 청년이었다. 그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지 만, 꽃집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느 모습을 오가다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아주 조금 알게 된 뒤에도 그의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인상은 그리 달라지지 않았 다. 행동이나 말씨가 아무리 부드러워도 그는 혼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인 듯한 느낌 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는 그 정도의 안면이 있을 뿐인 사람이었다.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촉촉하고 포근한 봄비가 거리를 감싸는 그런 밤에 약도를 들 고 걸었다. 다나베는 중앙공원을 사이에 두고 우리 집 건너편에 있는 맨션에 살고 있었다. 공원 을 빠져나가자 밤숲에서 나는 나무 냄새로 숨이 막힐 듯했다. 비에 젖어 반짝이는 도 로에 무지개빛이 반사된 길을 자박자박 걸어갔다. 사실 나는 그가 나를 불렀기 떄문에 그 집으로 가고 있는 것뿐이었다. 특별히 어떤 생각이 드는 건 아니었다. 봎이 솟은 맨션을 올려다보니 그의 방이 있는 10층은 더욱 높아서 틀림없이 야경이 아름답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울리는 내 발소리를 느끼며 초인종을 눌렀다. 유이치가 얼른 문을 열었다. "들어오세요." "실례합니다." 내가 들어선 곳은 참으로 묘한 방이었다. 부엌으로 이어지는 거실에 놓인 중후한 소파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 넓은 식기 선반을 뒤로 하고, 테이블을 놓지도, 카페트를 깔지도 않은 채 그 소파가 놓여져 있었다. 소파는 베이지 색 천으로 감싸여 있었는데 마치 TV광고에나 나올 듯한, 가족 들이 모두 둘러앉아 TV를 보는 옆에 외국에서나 기를 수 있는 커다란 개가 앉아 있을 듯한, 정말로 멋지고 훌륭한 소파였다. 베란다가 보이는 커다란 창 앞에는 마치 정글을 연상케 하는 많은 식물들이 화분에 심겨져 줄지어 있었고, 집안도 온통 꽃두성이였다. 곳곳에 놓인 병에는 각양각색의 계 절의 꽃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어머니는 지금, 가게에서 잠깐 빠져나오겠다고 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괜찮다면 집안을 둘러봐도 좋아요. 안내할까요? 무엇으로 판단하는 타입이죠?" 차를 분비하면서 유이치가 말했다. "뭘요?" 내가 그 푹신한 소파에 앉아 물었다. "집과 그 집주인의 취향! 왜, 화장실을 보면 알 수 있다든가 하는 그런 말들 하잖아 요." 그는 담담하게 웃으며 차분하게 말하는 사람이었다. "부엌." 내가 대답하자, "자아, 여기에요. 얼마든지 보세요." 그가 말했다. 나는 그가 차를 분비하고 있는 뒤쪽으로 돌아가서 찬찬히 부엌을 구경했다. 나무로 된 바닥에 깔린 느낌이 좋은 매트, 유이치가 신고 있는 고급스런 실내화, 최 소한의 필요한 것들만을 쓰게 좋게 배열한 주방용품들……. 실버스톤 프라이팬과 독일 제 껍질제거용 칼은 집에도 있던 것들이다. 요령꾼인 할머니가 손쉽게 술술 껍질이 벗 겨진다며 좋아하던 것이었다. 작은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조용히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그릇들, 반짝이는 유리잔. 얼핏보면 모두 제각각이지만 전부가 기품 있는 것들뿐이었다. 특별한 요리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 대단힌 큰 접시들도 눈에 띄었다. 또 뚜껑이 달린 생맥주 조끼가 놓여 있 는 것도 왠지 마음에 들었다. 유이치가 괜찮다고 하기에 작은 냉장고도 열아보았더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오래 전에 넣어 둔 것 같은 음식들은 보이지 않았다. 음음, 고개를 끄덕이며 둘러보았다. 좋은 부엌이었다. 나는 이 부엌을 첫눈에 매우 사랑하게 되었다. 소파로 돌아와 앉자 유이치가 뜨거운 차를 날라왔다. 처음 온 집에 이제까지 별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과 마주앉아 있자니, 왠지 말할 수 없이 고적한 기분이 들었다. 비에 젖은 야경이 비춰 들어오는 커다란 유리창, 그곳에 비친 나와 눈이 마주쳤다. 이 세상에서 나와 가까운 핏줄은 이제 하나도 없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든 자유 라는 것은 아주 유쾌한 느낌이었다. 세상은 이렇게 엄청나게 넓고, 어둠은 이렇게도 적막하고……. 그 끝간 데 없는 즐 거움과 쓸쓸함을 나는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이 손과 이 눈으로 느낀 것이다. 지금 까지 한쪽 눈을 감고 세상을 보아왔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왜 나를 부른 거지요?" 내가 질문했다. "좀 곤란한 상태일 거라고 생각했어요." 친밀하게 눈가에 웃음을 띠우며 그가 말을 이었다. "미카게의 할머니한테서 굉장히 귀여움을 받았어요. 그리고 보다시피 우리 집에는 사용하지 않는 공간이 많으니까요. 그 집에서 이제 나와야겠지요?" "네에, 지금은 집주인의 호의로 날짜를 조금 늦추었어요." "그러면 여기를 사용하면 되겠네요." 그는 다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그러한 태도가 결코 지나치게 호의적이거나 사무적이지 않은 것이 내 마음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었다. 웬일인지 눈물이 날 만큼 마음속에 닿아오는 것이 있었다. 그런 차에 달그락거리며 문이 열리더니 굉장한 미인이 숨을 헐떡이며 들어온 것은 바 로 그때였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이 동그래졌다. 나이는 어느 정도 든 것 같았으나, 정말로 아름다 운 여인이었다. 좀처럼 볼 수 없는 화려한 옷차림과 짙은 화장에서 그녀의 직장이 밤 업소임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쿠라이 미카게 양이에요," 유이치가 나를 소개했다. 그녀는 헉헉 숨을 몰아쉬며 다소 허스키한 음성으로 웃어 보였다. "안녕하세요? 유이치의 엄마예요. 에리코라고 해요." 이 사람이 어머니? 나는 놀라움으로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깨까지 찰 랑이는 머리칼, 치켜진 눈동자의 깊은 반짝임, 모양 좋은 입술, 상큼한 콧날----그리 고 온몸에서 풍겨나오는 생명력의 출렁임 같은 선명한 광채----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무례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미소를 되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내일부터 잘 부탁해요." 하며 그녀는 상냥하게 말하더니 이어 유이치를 바라보았다. "미안, 유이치. 도저히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 화장실 간다고 하고 도망쳐나온 거 야, 지금. 아침에는 시간이 날 테니까, 미카게 양은 여기서 쉬게 하고 네가 좀 잘 해 줘." 그녀는 급히 말하고는 빨간 드레스 자락을 손에 쥐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럼 내가 차로 바래다 줄께요." 하고 유이치가 말했다. "죄송해요, 저 때문에."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니, 설마 가게가 이렇게 바쁠 줄은 생각도 못했어요. 내가 오히려 미안해요. 그 럼, 아침에 봐요!" 높은 하이힐을 신고 그녀가 달려나가자 유이치가 〈TV라도 보고 있어요!〉하며 그 뒤를 따라나갔다. 나는 멍하니 혼자 남겨졌다. 찬찬히 보면 분명 그 나이만한 주름살이나 조금 불안정한 치열이 인간다운 느낌을 주었다. 그렇더라도 그녀의 미모는 가히 압도적이었다.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느 낌을 갖게 했다. 내 마음속에는 그녀에 대한 훈훈한 느낌이 잔상으로 남아 조용히 빛 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매력이라는 거로구나 하는 느낌이 와 닿았다. 처음으로 〈 물〉이란 것을 알게 된 헬렌 켈러처럼, 그녀의 말들이 생생한 느낌으로 되살아났다. 과장이 아니라 그만큼 놀라운 만남이었던 것이다. 자동차 키를 짤랑거리며 유이치가 돌아왔다. "10분도 못 있을 거라면 차라리 전화를 하는 편이 나았을 텐데." 입구에서 구두를 벗으며 그가 말했다. 나는 소파에 앉은 채 대꾸했다. "네에." "미키게 양, 우리 엄마 보고 놀랐어요?" 그가 물었다. "네, 그렇게 놀라운 미인은 처음이에요." 나는 정직하게 표현했다. "하지만"하며 유이치가 웃음을 머금은 채로 올라와 마룻바박에 주저앉으며 말했다. "성형한 거예요." "네에." 나는 태연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어쩐지 얼굴 모습이 전혀 잚지 않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다가……. 알았어요?" 정말로 우스워 못 견디겠다는 얼굴로 그가 말을 이었 다. "남자라구요." 이번만은 태연할 수가 없었다. 눈을 휘둥그렇게 뜬 채 아무 말도 못하고 그를 쳐다 보고만 있었다. 그가 얼른 농담이었다고 말해 주길 기다렸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 말 씨, 몸짓들이?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려보며 마른 침을 삼키고 기다렸지만 그는 마냥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어요?" 나는 겨우 말문을 열었다. "그럼, 그쪽이라면 그런 상태에서 아버지라고 부르겠어요?" 그가 침착하게 그렇게 말했다. 그건 정말 그랬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대답이었다. "에리코라는 이름은?" "그게, 본래는 유시라는 이름이었대요." 나는 정말이지 눈앞이 아득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겨우 사태를 수습할 마음 이 생겨 물어보았다. "그럼 그쪽을 나은 사람은 누구예요?" "옛날에는 그 분도 남자였어요." 그가 말을 이었다. "아주 젊었을 때 말예요. 그리고 결혼도 했었어요. 그 상대 여자가 내 진짜 엄마였 지요." "어떤 분이셨을까……."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아 내가 말했다. "나도 잘 기억이 안 나요.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니까. 사진이 있는데 볼래요?" "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자신의 가방을 앉은 채고 끌어당기더니 지갑 속에 든 낡 은 사진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뭐라고 표현하기 힘든 얼굴이었다. 짧은 머리카락, 조그마한 눈과 코. 기묘한 인상 의 전혀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여자였다. 나는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굉장히 이상한 인상이지요?" 그의 말에 나는 난처해져 웃어버렸다. "에리코는 무슨 사정이 있어서 어릴 적부터 이 사진의 엄마 집에 맡겨졌었나봐요. 그래서 줄곧 여자들에게 굉장히 인기가 있었는데, 왠지 엄마에게 홀딱 반해서 은혜를 저버리고 둘이서 도망을 쳤다는군요." 그는 미소 띠운 얼굴로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엄마가 죽은 뒤에 에리코는 일도 그만두고, 아직 어린 나를 안고 무얼 할까 생 각하다가 여자가 되기로 결심했대요. 더이상 아무도 좋아하게 될 것 같지가 않아서. 여자가 되기 전에는 괸장히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나봐요. 어중간한 건 싫어하는 사람 이니까 얼굴이고 뭐고 전부 수술하고, 나머지 돈으로 초밥집을 하나 만들어서 나를 기 른 거예요. 〈여자 홀몸으로〉라고 하던가요?" 그가 웃었다. "파란만장한 일생이네요." "아직 살고 있는 중이에요." 유이치가 말했다. 다 믿어야 하는 건지, 아직 뭔가가 숨겨져 있는 건지, 이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들으면 들을수록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나는 부엌을 믿었다. 게다가 닮지 않은 이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웃는 얼굴이 부처님처럼 빛이 났다. 나는 그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내일 아침엔 내가 없으니까 있는 건 무엇이든 사용해도 좋아요. 졸린 듯한 유이치가 담요와 잠옷을 안은 채 샤워기 사용법이랑 타월이 있는 곳 등을 가르쳐주었다. 신상에 관한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뒤에도 나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하 고 유이치와 비디오를 보면서, 꽃집 이야기랑 할머니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어느새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새벽 1시였다. 소파는 아주 느낌이 좋았다. 한 번 앉으면 두 번 다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푹신하고 넓었다. "이 소파……." 하고 내가 말을 꺼냈다. "어머니가 가구점에서 여기에 살ㅉ까 앉아봤다가 너무나 갖고 싶어 당장 사들인 거 아니에요?" "맞아요. 어머니는 어떤 생각이 나면 당장 그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에요. 그걸 실행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만." "맞군요?" 내가 맞장구를 쳤다. "그 소파는 당분간 그쪽 것이에요. 침대로 써요. 쓸 데가 생겨서 정말 다행이에요." "나…… 나, 정말 여기서 자도 괜찮아요?" 나는 조그만 소리로 물어보았다. "그럼요." 그가 힘주어 말했다. "……고마워요." 그는 대강 설명해 주고는 〈잘 자요〉 하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버렸다. 졸음이 몰려왔다. 남의 집 샤워기를 사용하면서 피곤을 쓸어내리는 뜨거운 탕 속에 앉아 나는 지금 무 엇을 하고 있는 걸까.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빌린 잠옷으로 갈아입고 조용한 거실로 나왔다. 척척한 맨발로 다시 한번 부엌을 보 러 갔다. 역시 좋은 부엌이었다. 그리고 오늘밤 나의 침대가 된 소파로 다가가 전등을 껐다. 창가에서는 희미한 불빛에 떠오른 식물들이 10층에서 내려다보이는 화려한 야경을 감상하며 조용히 숨쉬고 있었다. 야경----이미 비가 그쳐 습기를 머금은 투명한 대기 가 빛을 발하며 아름답게 창에 비치고 있었다. 나는 담요로 몸을 감싸며 오늘 밤도 부엌 옆에서 자는구나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고독하지는 않았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제까지의 일 들도 또 앞으로의 일들도 잠시 동안이나마 잊게 해주는 잠자리를 오랫동안 기다려왔는 지도 모른다. 바로 곁에 사람이 있으면 쓸쓸함이 더해져 좋지 않다. 하지만 부엌이 있 고, 식물들이 있고, 같은 지붕 아래 사람도 있고, 조용하고…… 최고였다. 이곳은 최 상이었다. 나는 안심하고 잠 속에 빠져들었다. 잠을 깨운 것은 물소리였다. 눈부신 아침이 찾아와 있었다. 부시시 일어나 앉으니 부엌에서 일하는 에리코 아줌 마의 뒷모습이 눈에 들아왔다. 어제에 비해 차분한 옷차림이었다. "잘 잤어요?" 돌아서는 그 얼굴이 어제보다 더 화사해서 잠이 확 달아나는 것 같았다. "안녕히 주무셨어요?" 내가 일어서려니까 그녀는 냉장고를 열고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보통 땐 자고 있을 시간인데, 오늘은 어쩐지 배가 고파서……. 근데, 집에 아무것 도 없네. 전화해서 좀 갖다 달래야겠어요. 뭐가 먹고 싶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뭘 좀 만들까요?" "정말? 아직 잠이 덜 깼는데 마질 수 있겠어요?" 그녀가 불안스러운 듯이 웃으며 말했다. "문제없어요." 방 안에 아침 햇살이 가득 들어와 있었다. 부드러운 푸른 하늘이 끝없이 펼쳐져 있 어 눈부셨다. 마음에 드는 부엌에서 서 있을 수 있는 기쁨으로 정신이 맑어져 오자 문득 그녀가 남자라는 사실이 떠오랐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쳐다보았다. 환한 아침 햇살 아래서 먼지투성이 마룻바닥에 배를 깔고 누어 TV를 보고 있는 그녀 가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향기로운 나무 냄새가 그녀 주위를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만든 달걀죽과 오이 샐러드를 그녀는 맛있게 먹어주었다. 한낮, 봄다운 포근한 날씨였고 밖에서는 풀밭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려왔 다. 창가의 초목들은 부드러운 햇살에 감싸여 선명한 초록색으로 빛나고 아득히 멀어 보 이는 하늘에는 엷은 구름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다사롭고 나른한 오후.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낯선 사람과의 늦은 아침 식사에 대해 나는 아주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식탁이 없기 때문에 바닥에 그릇들을 죽 늘어놓고 먹었다. 컵에 햇빛이 비쳐들어 차 가운 녹차의 초록 빛깔이 바닥에 곱게 흔들렸다. "유이치가 말이지." 갑자기 에리코 아줌마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며 말했다. "엣날에 기르던 논 짱과 네가 아주 닮았다고 했었거든. 정말로 둘이 닮았어요." "논 짱이라면?" "강아지야." "어머 강아지?" "그 눈매하구, 털을 만질 때의 느낌이……. 어제 처음 봤을 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어요. 정말이야." "그랬어요?" 대답은 했지만 세인트 버나드 같은 개는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논 짱이 죽었을 때, 유이치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어쩌면 미카게 양 을 논 짱처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라. 남녀의 사랑이 어떤 건지는 장담하지 못하겠지 만……." 에리코가 깔깔대며 웃었다. "고맙게 생각해요." 어깨를 들썩여 보이며 내가 말했다. "할머니가 유이치를 귀여워해 주셨다면서요?" "네에. 유이치 군을 아주 좋아했었어요." "그 아이는 내가 잘 돌보지 못해서 여러 가지로 모자란 데가 많아요." "모란 데요?" 내가 웃어 보였다. 어머니다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정서도 엉망인데다, 사람 사귀는 것도 묘하게 차가운 구석이 있어. 여러 가지로 부 족한 점이 많지만…… 착한 아이로 키우려고 굉장히 노력했어요. 그 아인 착한 아이 야." "저도 알아요." "미카게도 착한 아이인가봐." 〈그〉라고 표현해야 할 그녀가 상냥하게 웃었다. 텔레비젼에서 자주 보는 유욕 동 성연애자들의 그 맥없는 웃음과 닮은 데는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해 버리기에는 그 녀는 분명 강한 사람이었다. 너무나 깊은 매력이 반짝이고 있었기에 본인조차도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는 그런 면과 함께 어딘지 쓸쓸한 분위기 가 스며나오고 있었다. 그녀가 오이를 아작아작 씹으며 말했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속으로는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있고 싶은 만큼 여 기에 있어줘요. 네가 유이치를 좋은 아이라고 믿어주니까 내 마음도 정말 기뻐. 갈 데 가 없다는 건 상처받았을 때는 더욱 견디기 힘든 일이지. 어때요, 안심하고 우리집에 있을 수 있겠지요?" 그녀는 나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려고 애썼다. "……방세는 꼬박꼬박 내겠어요." 왠지 목이 메어와 겨우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다. "다음에 살 집을 찾을 때까지 여기서 자게 해 주세요." "그래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말고. 그보다, 가끔씩 죽을 만들어줘요. 유이치가 만 든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그녀는 밝은 웃음을 보였다. 노인과 둘이서 생활한다는 것은 매우 불안한 일이었다. 할머니가 건강하면 할수록 더 그랬다. 실제로 할머니와 살 때는 그런 것을 별로 실 감하지 못하고 편안하게 지냈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하니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언제나 〈할머니가 죽는다는 것〉이 무서웠다. 내가 집에 돌아오면 할머니는 TV가 있는 거실에서 나오며 〈어서 오너라〉하고 반겨 주었다. 늦을 때는 언제나 케이크를 사가지고 들어갔다. 외박이든 무엇이든 미리 말만 하면 화내지 않고 다 들어주는 너그러운 할머니였다. 때로는 커피, 때로는 녹차와 함 께 케이크를 먹으면서 TV를 보며 자기 전의 한때를 보냈었다. 어렸을 때부터 변한 것이 없는 할머니의 방에서 허물없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 고, 연예인들 얘기도 하고, 그날 하루 중에 있었던 일들을 이것저것 이야기했었다. 유 이치에 대한 이야기도 이때 들었던 것 같다.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을 때에도, 아무리 술을 많이 마시고 기분 좋게 취해 있을 때 에도, 나는 마음속으로 항상 단 한 명의 가족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방 안 구석에서 숨쉬고 있다가 어느 한순간에 달려드는 움찔한 적막감……. 아이와 노인이 아무리 밝게 지내고 있더라도 메울 수 없는 공간이 있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 할 수 없었지만,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유이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어둡고 쓸쓸한 이 산행과도 같은 인생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길임을 깨달은 것은 몇 살 때였을까? 사랑받으며 자랐지만 언제나 쓸쓸했다. 언젠가는 모두가 시간의 암흑 속으로 뿔뿔이 사라져가 버리고 만다. 나는 언제나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긴 채 걸어왔다. 그런 나에게 유이치가 나타난 것 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식객 생활을 시작했다. 나는 5월이 올 때까지는 빈둥거리느 것을 자신에게 허락했다. 그렇게 극락처럼 즐거 운 매일매일이 지나갔다. 아르바이트는 꼬박꼬박 나갔지만 그 나머지는 청소를 하거나 TV를 보고, 케이크를 만들기도 하며 주부처럼 지냈다. 조금씩 마음속으로 빛과 바람이 스며드는 것이 매우 기뻤다. 유이치는 학교와 아르바이트, 에리코 아줌마는 여전히 밤업소에 나갔기 때문에 모두 가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거의 드물었다. 나는 한동안 그 개방된 생활공간에서 자야 하는 것에 익숙해지지 않았고, 짐을 정리 하기 위해 옛날 집과 다나베 집을 왔다갔다 하는 일이 피곤했지만 곧 익숙해졌다. 그 부엌과 마찬가지로 나는 다나베 집의 소파를 사랑했다. 그곳에서는 잠자는 것을 음미할 수 있었다. 화초들의 숨소리를 듣기도 하고 커텐 너머의 야경을 바라보며 편안 하게 잠들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행복한 것은 어느것에도 압박받지 않고 아주 편안하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언제나 그랬다. 급한 상황에 몰리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았다. 이번만 해도 그 랬다. 마지막 순간까지 미루고 있다가 이렇게 포근한 침대가 주어진 것을 진심으로 감 사하고 있다. 어느 날, 아직 남아 있는 짐들을 정리하기 위해 나는 옛날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여는 순간, 나는 움찔 서버리고 말았다. 사람이 살지 않고부터 이곳은 적현 낯 선 곳이 되어 있었다. 어둡고 적막했으며, 어느 것도 살아 숨쉬는 것이 없었다. 늘 보아왔던 많은 것들이 모두 모르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다녀왔습니다〉 대신 〈실례하겠 습니다〉하고는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이 집의 시간들도 함께 죽었다. 정말로 그런 느낌이 절실했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뛰쳐나가버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문득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라는 노래가 떠올라 흥얼거리면 서 나는 냉자고를 닦기 시작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드니 슈타로였다. 그는 옛날의 애인이다. 할머니의 병이 깊어질 무렵 헤어진 그 남자. "여보세요, 미카게니?" 울고 싶을 만큼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운차게 내가 말했다. 이건 이미 수줍음이나 허영심을 넘어 병 에 가까운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학교에서 안 보이길래 어떻게 된 건가 하고 알아봤더니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 잖아. 깜짝 놀랐어. ……힘들었겠구나." "으응, 그래서 좀 바빴어." "지금 나올 수 있니?" "응." 약속을 하면서 문득 올려다본 창 밖은 낮게 가라앉은 회색빛이었다. 바람결에 구름 떼들이 마구 밀려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 세상에는 분명, 슬픈 일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음이 틀림없다. 슈타로는 공원을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나무가 있는 탁 트인 경치의 야외라면 그는 무조건 좋아했다. 학교에서도 그는 늘 잔디밭이나 운동장 옆 벤치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도 그가 보이지 않으면 나무 그늘부 터 찾아다니는 것이 상식이 되어 있었다. 그는 앞으로 식물에 관계된 일을 하고 싶어 했다. 아무래도 나는 식물하고 관계 있는 남성과 인연이 있나보다. 밝고 부드러운 그는 평화로웠던 무렵의 나와 잘 어울리는 캠퍼스 커플이었다. 그의 그러한 취향 때문에 한겨울에도 늘 우리는 공원에서 만나곤 했는데, 내가 너무 지각을 자주 했기 때문에 공원 바로 옆에 있는 큰 카페에서 약속을 하곤 했다. 오늘도 슈타로는 그 넓은 공원의 카페에서 창가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창 밖으로는 온통 흐린 하늘 아래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들이 내다보였다. 오가는 웨 이트리스들 사이를 헤치고 그에게로 다가갔더니 금방 알아차리고 미소를 보냈다. "비가 오려나 봐." 자리에 앉으며 말을 건넸다. "아니, 개어 가고 있는 거 아니야?" 하고 슈타로가 말했다. "우리 오랜만에 만나서 날씨 이야기만 하고 있구나." 그의 웃는 얼굴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정말 마음이 놓이는 상대와 마시는 오후의 차는 좋은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의 잠버릇이 아주 고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커피에는 설탕과 프림을 아주 많이 넣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또 한쪽 으로 뻗치는 머리칼을 고치기 위해 매일 한참씩 드라이어를 대고 있는 그의 바보스런 얼굴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와 정말 친했을 때라면, 지금처럼 냉장고를 닦다가 벗겨 진 오른손의 메니큐어가 마음에 걸려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너, 지금 다나베 집에 있다면서?" 문득 생각이 난 듯슈타로가 물었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 눈만 휘둥그래진 채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손에 들고 있던 홍차 잔이 기울어져 접시에 줄줄 흐르는 것도 모를 정도였다. "온 학교에 소문이 파다해. 못 들었니?" 겸연쩍은 미소를 지으며 슈타로가 말했다. "네가 안다는 것도 몰랐었어. 무슨 소문?" "다나베의 애인이, 아니 옛날 애인이라고 해아 하나? 하여튼 그 아이가 학교 식당에 서 다나베의 따귀를 때렸대." "뭐? 나 때문에?" "아마 그런가 봐. 그런데 지금 너희 잘 돼 가고 있는 거 아니아? 난 그렇게 들었는 데." "뭐? 처음 듣는 소리야." 내가 대답했다. "아무튼 둘이서 살고 있잖아?" "다나베의 어머니도 함께 살고 있어." "뭐! 거짓말이겠지?" 슈타로는 큰소리로 말했다. 그의 이런 솔직하고 직선적인 성격을 나는 정말로 사랑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끄럽고 창피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나베라는 녀석, 좀 괴짜라던데?" "잘 모르겠어. 별로 자주 볼 기회도 없고…… 얘기도 특별히 안 하니까. 나는 강아 지처럼 그 집에 거두어진 것뿐이야. 별로 환영받고 있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그 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멍청하게도 그런 소문이 있는 줄도 전혀 알아채지 못했었어." 빠른 속도로 내가 말했다. "하지만 네가 좋아한다거나 사랑하는 것도 나는 잘 몰랐으니까……."슈타로가 말했 다."여하튼, 잘된 일이야. 언제까지 그 집에 있을 생각이지?" "모르겠어." "잘 생각해서 해."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나의 대답이었다. 돌아오는 길에는 주욱 공원 안으로 해서 걸었다. 나무들 사이로 다나베 집의 맨션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야." 내가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공원 바로 옆이잖아, 좋겠다. 나 같으면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산책하겠다." 슈타로가 웃었다. 굉장히 키가 크기 때문에 늘 올려다봐야 했다. 이 아이였다면 분 명히……나는 그의 옆 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분명 이리저리 나를 끌고다니면서 새 아파트를 보러 다니고, 학교로 불러냈을 것이다. 그래, 나는 그의 그런 건강함이 좋았고, 늘 부러웠고, 거기에 도저히 따라갈 수 없 는 자신이 싫어지기보차 했었다. 옛날에는. 대가족의 장남인 그가 집에서 묻혀나오는 밝은 문위기가 나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주 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다나베의 집의 묘한 편안함과 밝음이었으 며, 그것을 그에게 설명할 필요도 없었지만. 그를 만나면 언제나 그랬었다. 내가 나라 는 사실이 어쩐지 슬프게 느껴졌던 것이다. 나의 눈동자를 통해서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어떤 뜨거운 혼이 그에게 선명한 질문을 했다. <아직 나에게 마음이 남아 있니?> "씩씩하게 살아라." 미소를 짓는 그 눈동자에 바로 그 대답이 깃들어 있었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런 기분은 이대로 어딘지 끝없이 먼곳으로 사라져갈 것임 을 느꼈다. "이제 와요?" "워드 프로세스를 샀어요." 유이치가 기쁜 듯이 말했다. 최근에 깨달은 일이지만 이 집안 사람들은 물건 사는 것을 병적으로 좋아했다. 그것도 커다란 물건들, 주로 전자 제품들로. "좋겠어요." 내가 말했다. "뭔가 치고 싶은 것 있어요?" "글쎄……." 노랫말이라도 쳐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유이치가 말했다. "그렇지, 이사했다는 인사장을 만들지 않겠어요?" "그게 뭐예요?" "이 대도시에서 주소도 없고 전화번호도 없이 살아갈 작정이에요?" "하지만 다시 이사할 때 또 알려야 하잖아요. 번거로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쳇." 그가 실망하는 빛을 보였기 때문에 나는 얼른 말했다. "그럼 만들어 줘요." 문득 낮의 일이 머리에 떠올라 그에게 물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겠어요?" "뭐가요?" 그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내가 그의 여자 친구였다면 틀림없 이 한 대 갈겨주었을 것이다. 나는 자신의 처지는 잠시 잊고 순간적으로 그에게 반감 을 느꼈다. 그 정도로 그는 이 전의 일에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저는 이번에 아래의 장소로 이사했습니다. 편지나 전화는 이쪽을 이용해 주십시오. 도쿄 X X 구 X - 3 - 21 - 1 X X 맨션 1002호 전화번호:X X X - X X X X 번 사쿠라이 미카게 유이치가 그렇게 엽서에 쳐준 것을 얼른 복사해서----아니나 다를까, 이집에는 복사 기도 갖춰두고 있었다----했다, 유이치도 거들어주었다. 그는 오늘 저녁 한가한 것 같았다. 이것도 새로 알게 된 사 실이지만 그는 한가한 것을 아주 싫어하는 모양이다. 고즈넉하고 투명한 시간이 사각대는 만년필 소리와 함께 한방울 한방울 떨어져간다. 밖에는 봄을 시샘하는 바람이 윙윙 소리를 내며 불고 있다. 야경도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애틋한 마음이 되어 친구들의 이름을 적어나갔다. 슈타로의 이름은 나도 모르게 리스트에서 제쳐놓고 말았다. 바람이 세차졌다. 나무와 전깃즐이 흔들리 는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눈을 감고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조그만 책상에 턱을 괴 고 앉아 거리의 집들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방에 이런 앉은뱅이 책상이 있 는 걸까. 자기가 마음먹은 것은 실천에 옮겨야만 직성이 풀린다는 이 앉은뱅이 책상을 산 그녀는 오늘 밤도 가게에 나가 있었다. "자지 말아요." "안 자요. 이사 엽서 쓰는 것, 사실은 나도 굉장히 좋아해요." "어? 나도 그래요. 여행 가서 엽서 보내는 것도 아주 좋아해요." "하지만, 말이죠……." 마음을 굳게 먹고 나는 다시 시도해 보았다. "혹시 이 엽서, 파문을 일으켜서 학교 식당에서 여자애한테 얻어맞거나 하지는 않을 까요?" "아까부터 그 얘기 하고 있었던 거군요."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 담담한 얼굴이 오히려 나를 당황하게 했다. "그러니까 솔직하게 말해도 상관없어요. 난, 여기 있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 니까." "그런 바보 같은 말이 어디 있어요." 그가 말했다. "그럼 우리는 지금 엽서 놀이를 하고 있나요?" "엽서 놀이가 뭔데요?" "나도 잘 모르겠어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그로 인해 또 뭔가 이야기가 빗나갔다. 그 어떤 지나친 부자연 스러움으로 인해 둔감한 나도 겨우 그것을 알아차렸다. 그것도 그의 눈을 한참 들여다 보고 나서야 알았던 것이다. 그는 굉장히 외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까 슈타로가 말했었다. 다나베의 여자 친구는 1년 동안 다나베와 사귀었지만 그에 대해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두 사람 사이가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 다나베의 여자 친구는 그가 만년필을 좋아하는 그런 정도밖에는 사람을 좋아하지 못하는 아이라 고 말했다고 한다. 나는 유이치를 사랑하지 않고 있기에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그의 만년필과 그녀에 게 있어서의 만년필의 의미는 질과 무게가 전혀 달랐던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만년필을 죽도록 사랑할 수 있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 사실이 매우 슬프게 느껴졌다. 사랑 하지 않으면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유이치는 나의 침묵이 마음에 걸렸는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전혀 그쪽 탓은 아니에요." "……고마워요." 웬일인지 나는 고맙다는 말이 나왔다. "천만에 말씀." 그가 웃었다. 나는 이제서야 그와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달 가까이 같은 집에 살고 있었지 만 처음으로 그를 만난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언젠가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사랑하게 되면 적극적으로 달려드는 것이 내 방식이긴 하지만, 이렇게 흐린 하늘 사이로 힐끗힐끗 보이는 별처럼 가끔씩이나마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 이에 조금씩 좋아질지도 모른다. 하지만……나는 손을 움직이면서 생각했다. 그래도 이 곳을 나가야 한다. 내가 이곳에 있음으로 해서 그들이 헤어진 것은 명백하지 않은가! 내 자신이 얼마나 강한 아이인지, 지금 당장 혼자 지내는 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을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역시 빠른 시일 내에 이곳을 떠나야 한다. 이사 엽서를 쓰고 있으 면서도 이런 생각들을 하다니……. 나가야 한다. 그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현관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쇼핑 백을 안고 에리코 아줌마가 들어와 깜짝 놀랐다. "어떻게 된 거에요, 가게는?" 되돌아보며 유이치가 말했다. "응, 지금 가봐야 돼. 이게 뭔지 아니? 주서기 샀어!" 쇼핑백에서 커다란 상자를 꺼내며 에리코 아줌마가 기쁜 듯이 말했다. "그래서 갖다 놓으려고 온 거야. 먼저 사용해 봐도 괜찮아." "전화오면 내가 가지러 갔을 텐데." 유이치가 가위로 끈을 자르며 말했다. "괜찮아, 이 정도는." 재빨리 풀어 헤쳐진 상자에서는 무엇이라도 주스로 만들어버릴 듯한 멋진 주서가 나 왔다. "야채 주스 좀 먹고 예뻐지려고." 에리코 아줌마가 즐검고 기쁘다는 듯이 말했다. "이젠 늙어서 다 헛수고예요." 유이치가 설명서를 보면서 말했다.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보통 모자간의 대화를 나누고 있어서 내 가 어지러울 정도였다. 〈아줌마들은 마녀〉라더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좀 남다르다 할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저렇게 명랑하다니. "어머, 미카게가 이사 엽서를 쓰고 있네. 마침 잘 됐어, 이사 축하선물 하나 줄께 요." 에리코 아줌마가 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리고는 종이로 둘둘 말린 또 하나의 꾸러미를 내밀었다. 끌러보니 바나나가 그려 진 예쁜 컵이었다. "그걸로 주스 마시면 되겠다." 에리코 아줌마가 말했다. "바나나 주를 마시면 좋을지도 몰라." 유치기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예쁘네요." 나는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내가 비록 이 집을 떠나더라도 이걸 가져갈 것이고, 떠나고 나서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와서 죽을 만들어 드리겠어요. 입 밖에는 내지 않 았으나 그렇게 생각했다. 소중하고 소중한 나의 컵. 이튿날은 옛날 집을 정식으로 비워주는 날이었다. 겨우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주 맑은 오후로 바람도 없고 구름도 없었다. 부드러운 햇살이 오랜 동안 나의 보 금자리였던 방을 비춰주고 있었다. 미뤄진 이사에 대해 인사라도 드리려고 집주인 아저씨를 방문했다. 어릴 적에 자주 들어갔던 관리실에서 아저씨가 끓여준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그 도 이제 나이를 먹었구나 하는 느낌이 새삼스러웠다. 그렇다면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것도 당연하다. 할머니가 자주 이 조그만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던 때와 같이 지금은 내가 이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며 날씨며 이 마을의 치안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것이 이상스러웠다. 얼른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느 결엔가 그만 이제까지의 모든 일들이 무서운 속력으로 질주해와 내 앞을 스쳐 지나가 버렸다. 외톨이로 혼자 남겨진 나는 느릿느릿 대처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말하는 것인데, 질주해온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대로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이 진심으로 슬프게 느껴졌다. 모든 것이 말끔히 정리된 나의 방에 햇살이 드었다. 그곳에서는 이전에 내가 살았 던, 그때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부엌의 창문, 친구의 웃는 얼굴, 슈타로의 옆 얼굴 너머로 보이는 대학 캠퍼스의 선 명한 초록빛, 밤늦게 건 전화에서 들려오는 할머니의 목소리, 추운 아침의 이부자리, 복도를 을리던 할머니의 슬리퍼 끄는 소리, 커텐 색깔, 다다미, 벽시계……. 그 모든 것. 이제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수 없게 된 그 모든 것들. 밖으로 나오자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엷은 황혼이 퍼지고 바람이 불어 다소 서늘했다. 얇은 코트 자락을 펄럭이며 나는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 정류장 앞의 큰길 건너편에는 높은 빌딩들이 죽 늘어서 있어, 하나 둘씩 파르 스름한 불빛들이 켜지는 것이 보였다.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으르락내리락하는 엘 리베이터들이 모두 어스름 속으로 녹아드는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 짐들이 내 양쪽 다리 옆에 놓여 있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정말 홀홀단신이 된 듯한 자신을 내려다보며,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는 어쩐지 멍멍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버스가 모퉁이를 돌아와 정류장에 천천히 멈춰서고, 사람들이 줄지어 차에 올랐다. 버스 안은 몹시 붐볐다. 저녁 햇살이 멀리 빌딩 뒤로 사라져가는 것을 손잡이에 매달 려 바라보았다. 아직은 희미한 달이 살그머니 하늘을 건너가려는 것이 눈에 들어왔을 때 버스가 출 발했다. 덜컹하고 차가 설 때마다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은 느낌은 내가 피곤해 있다는 증거 였다. 계속 속이 울렁거려서 밖을 내다보니 하늘 저편으로 비행선이 떠가는 모습이 보 였다. 바람을 타고 천천히 이동해 가고 있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이 들어 한참 동안이나 바라다보았다. 비행선은 작은 라이트를 깜박이며 엷은 달그림자처럼 하늘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내 앞쪽에 앉아 있는 조그만 소녀에게 바로 뒷좌석에 앉은 할머니가 작은 목소 리로 말을 걸었다. "어머! 유키 짱 비행선이 떴네. 저기 봐! 정말 예쁘구나." 얼굴이 꼭 닮은 손녀인 듯한 소녀는 길도 막히고 차도 몹시 붐며 화가 났는지 몸을 비틀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몰라, 저거 비행선 아니야." "그렇구나." 할머니는 전혀 상관치 않고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멀었어? 졸립다 말이야." 유키 짱은 계속 떼를 썼다. 저런 몹쓸 계집애! 나 역시 지쳐 있었으므로 자신도 모르게 마음속으로 험한 말을 내뱉고 말았다. 할머니에게 그렇게 굴면 못 써. "이제 다 왔어. 어머나, 저기 봐라. 엄마는 벌써 잠들어 버렸네. 유키 짱, 우리 엄 마 깨울까?" "어, 정말!" 멀찌감치 뒷좌석에 앉은 엄마를 돌아보고는 유키 짱이 겨우 웃음을 보였다. 나도 미소가 떠올랐다. 할머니의 말씨가 너무 상냥했고, 웃음을 띤 소녀가 갑자기 너무나 귀여워 그들이 부 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두번 다시 오지 않을……. 나는 두번 다시라는 말이 갖는 감상적인 어감과 뭔가를 한정하는 듯한 느낌을 좋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 느껴지는 〈두번 다시〉라는 말의 무게는 저항하기 힘들 만큼의 위력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나는 이러한 일들을 그저 멍한 상태에서 담담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버스에 흘들리며 하늘 저 멀리로 조그맣게 사라져가는 비행선을 눈으로 좇으면서. 그러다 퍼득 정신을 차려보니 턱 끝으로 눈물 방울이 툭툭 떨어지고 있는 게 아닌 가. 당황스러웠다. 어딘가 몸에 고장이 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심하게 취해 있을 때처럼 자제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넘치고 있는 것이다. 부끄러운 생각이 드어 얼굴이 새빨개졌다. 자신에게도 그것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버스가 멈춰서자 허둥지둥 버스에서 뛰어내렸다. 사라져가는 버스 꽁무니를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어느 어두컴컴한 골목으로 뛰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짐들 사리에 웅크리고 앉아 엉엉 소리를 내며 울음을 터트렸다. 이렇 게 울어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치지 않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한번도 제대로 울어보지 못했다는 생각을 했다. 딱히 무엇이 슬픈 것이 아니라 그저 이런저런 일들을 눈물로 쏟아내고 싶었던 것이 다. 문득 고개를 드니 머리 위로 보이는 밝은 창으로부터 하얀 증기가 새어나오고 있었 다. 안에서는 사람들이 활기차게 일하는 소리와 달그락거리는 냄비소리, 그릇 소리들 이 들려왔다. 주방이다. 나는 갑자기 가슴속이 후련해진 듯한 느낌과 함께 왠지 쑥스러워져 팔로 머리를 감 싸고 잠시 웃어보았다. 그리고는 일어나 치마를 털고, 다나베의 집으로 발길을 옮겼 다. 하느님, 제게 살아갈 힘을 주세요. 졸려요 라고만 말하고 나는 다나베의 집으로 돌아온 즉시 잠자리에 파고들었다. 지독하게 피곤한 하루였다. 하지만 실컷 운 탓인지 기분 좋은 잠이 몰려왔다. "우와! 벌싸 자는군." 부엌에서 차를 끓이는 유이치의 목소리를 얼핏 들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꿈을 꾸었다. 오늘 마지막 짐을 가져온 옛날의 집의 부엌 개수대를 청소하러 갔었다. 무언가가 그 리운 느낌이 들어서……. 살고 있을 때는 아주 싫어했던 마룻바닥의 그 초록빛깔이 막 상 떠나오고 나니까 몹시도 그리웠다. 이사 준비를 마치고 나니 찬장 위랑 선반 위가 아무것도 없이 휑뎅그렁하게 비워졌 다. 실제로 그런 것들은 오래 전에 다 정리해 두었었지만. 뒤를 돌아보니 유이치가 걸레를 들고 마룻바닥을 닦고 있었다. 유이치가 청소를 해 주어서 내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좀 쉬었다 해요. 차 마실까요?" 집안이 텅 비어 있어서 말소리들이 웅웅 울려퍼졌다. 방이 아주 넓게 느껴졌다. "그래요." 하며 유이치가 고개를 들었다. 남의 집을, 그것도 이사 가는 집을 저렇게 땀이 나도록 닦지 않아도 될 텐데……하 고 생각했다. 그다운 행동이었다. "여기가 그쪽의 부엌이군요." 바닥에 주저앉아 내가 가져온 차를----이미 찻잔을 짐 속에 넣어버려 물컵에 담아서- ---마시면서 유이치가 말했다. "좋은 부엌이군요." "네, 그래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찻잔 대신 밥공기를 양손으로 감싸쥐고 차를 마셨다. 유리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처럼 고요했다. 올려다본 벽에는 시계를 걸었던 자국만 이 남아 있었다. "지금 몇 시?" "한밤중이겠죠." 유이치가 대답했다. "어째서요?" "밖이 캄캄하고 조용하니까." "그럼 나는 야반도주하는 거로군요." 내가 말했다. "아까 하던 얘긴데……. 이제 우리 집에서도 나갈 생각이죠? 제발 나가지 말아요." 아까 하던 이야기가 아니었으므로 나는 퍼뜩 놀라며 유이치를 보았다. "나도 우리 어머니처럼 즉흥적으로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쪽을 우리 집에 부른 건 충분히 생각하고 결정한 거예요. 할머니는 언제나 그쪽 걱정만 하셨고, 그쪽 의 기분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이제 아무래도 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건강을 되찾 기만 한다면 우리가 더 있으라고 잡아도 나갈 거라는 걸 잘 알아요. 하지만 지금은 우 리에요. 우리 엄마가 버는 쓸데없는 돋들은 다 이런 때를 위해서 있는 거예요. 주서를 사기 위해서 있는 것만이 아니고." 그가 웃어 보였다. "초조해하지 말고 더 있어봐요." 마치 살인범에게 자수를 권하는 사람처럼 그는 똑바로 내 눈을 들여다보며 간곡하 게, 그러면서도 담담하게 한 마디 한 마디를 이어나갔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바닥 청소를 시작합시다." 하고 그가 말했다. 나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컵을 씻고 있으려니까 물소리에 섞여 유이치의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밝은 달 그림자를 흐트리지 않으려고 등대 그늘에 배를 묶었네. "어머, 그 노래 알고 있어요? 그게 누구의 노래였더라?" "으음, 기꾸찌 모모꼬, 굉장히 귀가 밝군요." 유이치가 미소를 보냈다. "그래요." 나는 컵을 씻고 유이치는 마루를 닦으며 함께 노래를 불렀다. 고요한 한밤중, 그것 도 적막한 부엌에서 웅웅 울리는 소리로 함께 노래하는 것이 매우 즐거웠다. "이 대목이 특히 좋아요." 하며 나는 2절의 첫머리를 불렀다. 멀고 먼 등대의 깜박이는 불빛이 둘만의 밤에는 나뭇잎 새로 비치는 햇살 같아 우리는 신이 나서 큰소리로 함께 불렀다. 멀고 먼 등대의 깜박이는 불빛이 둘만의 밤에는 나뭇잎 새로 비치는 햇살 같아 그러다가 나도 모르게 문득 이렇게 말해 버렸다. "아이쿠, 너무 큰소리로 부르면 옆방에서 자고 있는 할머니가 깨겠어요." 말하고 나서야 아차 싶었다. 유이치도 난감했는지 뒤돌아 앉은 채로 걸레질하던 손을 딱 멈추어버렸다. 그리고 돌아다보더니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에리코 아줌마가 착한 아이로 기른 아들은 이런 때 순식간에 왕자님이 되었다. 그가 말했다. "여기 정리 다 끝나면 집게 가다가 공원 포장마차에서 라면 사먹어요." 잠이 깨버렸다. 한밤중에 다나베의 집 소파에서…… 그렇게 일찍 잠이 들다니 평소에 안 하던 일을 하는 게 아닌데. 이상한 꿈이라고 생각하며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갔다. 왠지 가슴이 쿵쿵 뛰었다. 아줌마는 아직 돌아와 있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였다. 아직도 꿈결에서 느낀 기분들이 생생했다. 씽크대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 으며 꿈에서처럼 개수대나 청소할까 하고 멍청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하늘은, 별이 움직여가는 소리가 귀에 들려올 만큼 고요하고 적막한 밤이었다. 바싹 졸아붙은 마음에 한 컵 가득 담겼던 물이 속속들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슬리퍼를 신 지 않은 맨발이 저려올 만큼 추운 날씨였다. "안녕!" 유이치의 목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랐다. "어, 웬일이에요?" "잠기 깼는데, 배가 좀 고파서 라면이라도 먹을까 하고……." 꿈속과는 아주 딴판으로 현실의 유이치는 잠이 덜 깬 부시시한 얼굴로 더듬더듬 그 렇게 말했다. 나 역시 울어서 부수수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끓여줄 테니까 앉아 있어요, 내 소파에." "오오, 그쪽 소파에?" 그렇게 말하고 유이치는 휘청거리며 소파에 가서 앉았다. 어둠 속에 떠오른 이 조그만 방의 불빛 아래서 냉장고를 열었다. 야채를 썬다. 내가 좋아하는 이 부엌에서----문득 라면은 묘한 우연이로구나 하고 생각한 나는 등을 돌린 채 유이치에게 말을 건넸다. "꿈속에서도 라면 이야기를 하던데……."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자고 있나 하고 뒤를 돌아다보니 유이치는 놀란 얼굴로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뜷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서, 설마……." 하고 내가 더듬었다. 유이치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전에 살전 집 마룻바닥이 초록색인가요? 아, 이건 수수께끼는 아니야." "아까는 청소해 주어서 고마워요." 너무도 이상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나만은 그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여자 쪽이 빨랐다. "잠이 확 달아나네." 하고 그가 말하다가 한 발 늦은 것이 분한지, "차를 따라줘요." 하며 웃었다. "직접 끓여두세요." 내가 말했다. "아, 그래. 주서로 주스 만들어야지! 같이 마실래요?" "네." 유이치는 냉장고에서 오렌지를 꺼내고 즐거운 듯 주서를 꺼냈다. 나는 한밤주에 2인분의 주스를 만들기 위해 요란한 소리를 내는 주서기의 소리를 들 으며 부엌에서 라면을 끓였다. 굉장한 일인 것처럼도 느껴졌고, 너무나 당연한 일이라고도 느껴졌다. 어쨌든 말로 이야기하고 나면 사라져버리고 말 것 같은 이 엷은 감동을 나는 가슴에 담아두기로 했다. 시간은 길다. 거듭되고 거듭되는 낮과 밤 속에서 언젠가는 또 지금 의 한때가 꿈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자가 되는 것도 쉬은 일이 아니야." 어느 날 저녁 불쑥 에리코 아줌마가 그렇게 말했다. 읽고 있던 잡지에서 고개를 들며 나는 "네?"하고 되물었다. 아름다운 아줌마는 출근 전의 한때를 창가의 식물들에게 물을 주며 보내고 있었다. "미카게는 앞으로 잘할 것 같으니까 문득 이런 말이 나오네. 나도 유이치를 안고 키 우는 동안에 그걸 알게 된 거예요. 괴로운 일도 참 많았었지. 정말로 혼자서 꿋꿋이 서고 싶은 사람은 뭔가를 길러 보는 게 좋아. 아이라든가, 식물이라도 말이에요. 그러 면 자신의 한계를 알 수가 있어요. 거기서부터가 시작이에요." 노래하는 듯한 어조로 그녀는 자신의 인생 철학을 이야기했다. "여러 가지로 힘드셨을 거예요." 감동해서 내가 말했다. "글쎄. 하지만 인생은 한번 절망해 보지 않으면, 또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지 못하면, 정말로 좋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이에 커버리고 말지. 나는 다행이에요."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에리코 아줌마의 어깨에 닿은 머리칼이 찰랑거리고 있었다. 원하지 않는 일들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눈을 감아버리고 싶을 만큼 험하게 느껴지 는 날들은 얼마나 많은가. 사랑조차 모든 것을 구원해 주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황혼 무렵의 석양에 감싸여 그녀는 가느다란 손으로 나무에 물을 주고 있다. 투명하게 떨어 지는 물줄기 속의 무지개의 윤곽이 떠오를 듯이 밝게 빛나는 달콤한 햇살 속에서. "알 것 같은 느낌이에요." 내가 말했다. "미카게의 순수한 마음씨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미카게를 길러주신 할머니는 분명 히 좋은 분이셨을 거야." 에리코 아줌마가 말했다. "언제나 자랑스럽게 생각했던 할머니였어요." 하며 나는 웃어 보였다. "부러워요." 아줌마가 등 뒤에서 웃었다. 이곳에도 이제 언제까지나 있을 수는 없다----나는 잡지로 눈을 돌리면서 생각했다. 가슴이 쓰리겠지만 그것은 분명하다. 언젠가 다른 곳에서 이곳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면 또다시 이 부엌에 설 수 있는 날이 와줄 것인가?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강인한 어머니와 그 착한 눈빛을 한 남자 아이와 내가 같은 곳에 있다. 그것이 전부다. 좀더 많이 자라고 여러 가지 일들을 겪으면서 몇 번이고 바닥까지 가라앉게 될 것이 다. 하지만 아무리 괴로움을 당하더라도 다시 일어설 것이다. 절대로 지지 않을 것이 다. 지치지 않고 일어설 것이다. 꿈의 부엌----. 나는 몇 개나 그것을 가질 것이다. 마음속에서 혹은 실제로, 여행길에서. 혼자서, 여럿이서, 둘만이서, 내가 살아 가는 모든 곳에서 틀림없이 나는 많은 부엌을 가질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