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요시모토 바나나, 나선1 나는 그날 심한 숙취로 오후 내내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문장을 써서 살아간다. 실은 그날도 어떤 사진 작가가 찍은 풍경 사진에 걸맞는 문장을 서둘러서 써야 했지만 머리가 아파서 도저히 그 거친 파도가 이는 바다를 담은 사진의 세계에 빠져들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는 작업이란 묘하다. 특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만드는 사람과의 작업은, 어쩐지 항상 자신의 머릿속을 엿보인 듯한 느낌이 든다. 미리 그 사람과 약속이 되어 있었던 듯한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래 전부터의 약속. 하지만 여하튼 그날은 침대에서 계속 뒹굴며 가을 하늘의 투명함을 보고 있었다. 정말로 끝없이 투명해서 어쩐지 뭔가에 속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옆집 아이가 연습하고 있는 서투르기 짝이 없는 바이 올린 소리가 나를 감동시켰다. 마음속에 비친 파란 하늘 가득히 마치 스며들기라도 할 듯이 음색이 흘러갔다. 서투르면 서투를수록, 어설프면 어설플수록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선명한 파랑과 어울렸다. 눈을 감고 듣고 있으려니 그 파란 하늘의 영상과 겹쳐서 잘 아는 어떤 여성의 속눈썹도 떠올랐다. 그 사람은 말이 막히면 <결국...> 이랄지 <저기...> 라고 말하며 반드시 일단 눈을 감는데, 그렇게 하면 하얀 눈꺼풀 주위의 속눈 썹이 갑자기 뚜렷해져서, 약간 찡그린 눈썹에 대범함과 신경질적인 면이 뒤섞인 그녀의 인격을 전부 알 것 같은 독특한 느낌이 든다. 알게 되는 순간은 항상 두렵다.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아진다. 지금까지 알아버려서 잘 된 일이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더구나 왠지 나는 그녀가 그렇게 잠시 눈을 감는 것이 유달리 두렵다.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으면 이윽고 (그렇다고 해도 아주 잠간이지만) 그녀는 눈을 번쩍 뜨고, 느닷없이 명쾌한 인격으로 바뀌어, 예를 들면 <안다는 것은 멋진 일이야> 라는 식의 말을 한다. <단순한 사람이로군> 하고 생각하지만 미워할 수 없다. <그 단순함이 미덕이 되기도 하는구나> 하고 분석을 하는 자신의 부덕함을 부끄럽게 여긴다. 그녀하고는 오늘 밤 만나기로 되어 있었지만 조금 귀찮 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그녀는 항상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하기 때문이다. <밤 9시에 항상 만나는 가게에서> 라고 했지만 그 가게는 8시에 문을 닫으니까 그런 점도 아무래도 수상하게 여겨 졌다. 거절하려고 전화를 걸었지만 자동응답기의 달콤한 목소리 가 부재중임을 되풀이할 뿐이었다. 일하러 나가지 않을 때 그녀가 요즘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나는 전혀 몰랐다. 어쩔 도리가 없어서 나가기로 했다. 어두운 거리에는 사람이 없다. 가을 바람이 제일의 주역 이다. 모퉁이를 돌고 돌아도 똑같은 달빛이 비추는 쓸쓸한 밤이다. 투명한 공기 속에서 시간이 묘하게 정체되어 있다. 갈 곳 없이 떠도는 상념을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간다. 그러고는 빌딩들 사이로 음침하게 가라앉아 어둠을 만든다. 가게는 역시 닫혀 있었다. 가게 앞에 그녀는 없었다. 그 가게는 수입잡화를 파는 곳인데 앞쪽은 통유리를 낀 카페로 되어 있다. 그런 식으로 이것과 저것의 경계가 사라진 듯한 것을 좋아 한다. 밤과 낮, 그릇 위의 소스, 카페에까지 흘러 들어온 잡화들. 그건 그녀를 사랑한 탓에 받은 영향이다. 그녀는 초저녁 달과 닮았다. 옅은 파랑의 점차적인 변화에 이제라도 곧 사라질 듯한 그 흰 빛. 가까이 다가가서 가게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을 들여다 보아 도 그녀는 없었다. 그때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 웅얼 거리는 듯한 이상한 울림이었다. 마치 천국의 구름 위에서 지상에 있는 나에게 말을 건 듯한 느낌이었다. 올려다보니 그리 대단한 건 아니고 칠흑같이 어두운 가게 안에서 어렴풋이 윤곽을 드러낸 하얀 의자랑 테이블을 배경 으로 그녀가 유리 너머로 말을 걸었던 것이다. 그녀는 웃으면서 손짓으로 부르며 무거운 유리문을 안에서 열어주었다. 「어떻게 들어왔지?」 나는 물었다. 「지배인에게 부탁해서 열쇠를 빌렸어」 그녀는 말했다. 들어가니 어두운 가게 안에는 물건이 박물 관처럼 늘어서 있고, 구두소리도 목소리도 유달리 크게 울려 항상 만나곤 하던 바로 그 가게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낮의 혼잡함의 망령처럼 마주 보고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가게의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싱크대에 엎어 놓은 컵에 따랐다. 「그렇게 맘대로 해도 되니?」 하고 물으니, 「괜찮아. 괜찮다고 했는걸」 하고 카운터 너머에서 대답했다. 「불은 켜면 안될까?」 너무 어두워서 안정이 되지 않아 나는 물었다. 「안돼, 다른 손님이 들어오게 돼」 「그럼, 어두운 채로 여기에 있는 거야?」 「어쩐지 재미있어서 좋잖아?」 하고 말하고 웨이트리스처럼 주스가 든 컵을 쟁반에 얹어 왔다. 「맥주는 없을까?」 「숙취라고 했잖아?」 「어떻게 알았지?」 나는 깜짝 놀라서 말했다. 「내가 말했던가?」 「응답기에 녹음되어 있었잖아」 그녀는 킥킥거리고 나는 안심했다. 「이제 밤이니까 괜찮아」 「그럼」 하고 말하고 그녀는 냉장고로 거어가 맥주를 꺼내주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갔다. 그녀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싱글벙글 웃고 구두 소리는 멀어져 가듯이 크게 울렸다.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더구나 어둠 속에서 마시는 맥주는 그다지 맛이 없었다. 어쩐지 싸늘하게 금빛으로 빛나 북극에서 마시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체내에 남아 있는 알코올과 달세계와도 같은 어슴푸레한 빛 때문에 바로 취기가 돌았다. 「나 말이야, 다음주부터 어떤 강좌에 참가할 거야」 그녀가 말했다. 「뭐지, 그게?」 나는 말했다. 「친구 중에 여러모로 무척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아이가 있어서, 그 친구가 발견한 건데 말이야, 약간 과격한 강좌 니까 같이 가달라고 부탁해서」 「과격?」 「확실히는 모르겠는데 머릿속을 말끔히 씻어버린대. 흔히 말하는 능력개발이랄지 명상같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제로 로 되돌려버린대. 그래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거야. 어쩌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바로 그 잊어버린 것은 자신 에게 필요없는 것이래. 재미있지?」 「재미없어. 그것이 필요한 것인지 아닌지는 누가 결정하는 거지?」 「그게 도박인 거야. 틀림없이. 뭔가 자신에게 중요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한다고 해」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이라는 의미?」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 이건 그냥 느낌인데 그녀 는 이혼의 충격으로 노이로제에 걸려 그것을 잊고 싶어서 가는 걸 거야. 하지만 나는 그녀가 그걸 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관두지 그래, 가는 거」 나는 말했다. 「하지만 혼자서 가게 할 수는 없어. 상담에 응하기도 했고 말이야」 그녀는 말했다. 「게다가 흥미가 있어. 가보지 않으면 좋은 곳인지 어떤지 모르잖아」 「나쁘지, 그런 곳은. 전부 잊어버린다는 것이 좋을 리가 없잖아?」 「잊으면 안돼? 싫은 일도?」 「스스로 결정해 갈 일이야, 그건」 「괜찮아, 결국...」 그녀는 눈을 감고 적당한 표현을 찾았다. 그리고 눈을 뜨고 말했다. 「그래 그래, 적어도 너와의 일을 잊지는 않을 테니까」 「어떻게 알지?」 「알아, 걱정 마」 생글생글거리며 그녀는 말했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 속에 있는 또 하나의 그녀의 불안을 잘 알고 있었다. 들려오는 듯했다. 「너와의 일을 전부 잊어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잊고 싶어」 그런 그녀가 안스러워서 더이상 설득하지 않았다. 「우리 둘의 지금까지의 일을 전부 잊어버릴 지도 몰라」 나는 웃었다. 「천 년 동안의 일을 전부?」 그녀도 웃었다. 그녀가 그런 말을 하자 그 밝고 깊은 목소리의 울림때문에 순간적으로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랬던가, 천 년이나 되었던가 하고. 「처음으로 여행 갔었을 때의 일도?」 「아직 19살이 었지?」 「그래, 여관에 묵었을 때 그곳에서 일하는 심술궂은 아주머니에게 <무척 젊은 부인이시군요> 라는 말을 들었었지」 「우린 나이가 똑같은데도 말이야」 「네가 나이들어 보였던 거야... 방이 너무 넓고 천장 이 어두워서 무서웠어」 「하지만 한밤중에 뜰에 나갔을 때 별이 대단했지」 「여름이었고 풀 냄새가 났었어」 「넌 머리가 짧았었지」 「그러고 나서 이불을 나란히 깔고 잤었어」 「그래」 「네가 무서운 이야기를 해서 혼자서 온천에도 못 갔 었지」 「둘이서 갔었지」 「노천탕에서 포옹을 했었지?」 「응, 정글에 있는 것 같았지」 「별이 아름다웠어. ... 그 때가 그리워」 「그게 말이야, 죽는 것과 비슷한 걸까」 「뭐가?」 「잊어버린다는 것 말이야」 「관둬. 슬퍼지잖아」 「그게 말이야,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 나오 는 것 같은 걸까?」 「로보토미(Lobotomi: 대뇌의 전두엽을 절개하는 수술- 옮긴이) 말이야? 아니라고 생각해」 눈을 감았다. 「분명히 필요없는 것만을 잊어버리는 거야」 「나에 관한 것을?」 「... 아니, 하지만 필요없는 것이 뭔지 나는 모르겠어」 「... 나갈까? 너무 조용해서 심각한 기분이 되어버리 는군」 「목소리가 흡수되면 무슨 이야기를 해도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껴지네. 있잖아, 물건 좀 구경 해도 돼?」 우리는 가게 안을 한 바퀴 빙 돌았다. 여러 개의 선반에 수많은 외국 물건들이 차분히 진열되어 있었다. 포개져 있어서 프리즘처럼 빛나는 컵 하나 하나가 낮과는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가게를 나올 때 마치 자신들의 방을 나오듯이 열쇠로 문 을 잠그고 밖으로 한 걸음 내딛으니, 불어오는 밤바람과 함께 갑자기 시간도 흐르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금 더 마시고 가자」 「좋지」 갑자기 기분도 가벼워졌다. 「나는 틀림없이 그 어떤 것에서든 너에 관한 것을 발견 해서 반드시 기억해 낼 거야」 걸으면서 문득 그녀가 말했다. 「비록 잊어버린다 할지라도」 「그 어떤 것이라니?」 「함께 많은 걸 보았고 많은 걸 먹었잖아. 그러니 이 세상 의 그 어떤 풍경에도 네 자취가 담겨 있을 거야. 우연히 지나친 갓 태어난 아기. 복어회 밑으로 비치는 접시의 선 명한 무늬. 여름 하늘의 불꽃놀이. 저녁 무렵 바다에서 달 이 구름에 가려질 때. 테이블 밑에서 누군가와 발이 부딪쳐 서 미안하다고 말할 때. 누군가 친절하게 물건을 주워주어서 고맙다고 말할 때. 곧 죽을 것 같은 할아버지가 비틀비틀 걸어가는 것을 볼 때. 길거리의 개나 고양이. 높은 곳에서 본 경치.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서 미적지근한 바람을 얼굴에 느낄 때. 한밤중에 전화가 울릴 때. 다른 그 누군가를 좋아 하게 될 때, 그 사람의 눈썹 선에서도 반드시」 「그렇다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이라는 뜻?」 「글쎄...」 그녀는 또 눈을 감고, 그러고 나서 그 유리 같은 눈동자를 똑바로 이쪽으로 향하고 말했다. 「아니야, 내 마음의 풍경이라는 뜻이야」 「그래? 그게 너의 사랑이로군」 나는 다소 놀라서 말했다. 그때였다.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다. 마치 번개가 치듯이 빛과 소리가 약간의 위화감을 자아내며 엇갈린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맞은편 모퉁이에 보이는 빌딩 위가 밝아지며 갑자기 불길이 일면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슬로모션으로 어둠 속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불과 몇 초 후에 잠들어 있던 거리 구석구석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나와서 갑자기 소란해지고, 먼 곳에서부터 경찰 차랑 소방차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폭파다!」 나는 흥분해서 말했다. 「우리만 봤어! ... 부상자는 없는 걸까?」 「없어. 저 건물은 어두웠고 지나가는 사람도 없었는걸. 단순한 장난이겠지」 「그렇다면 다행이야. ... 참 아름다웠어. 방정맞은 소리 지만. 꼭 불꽃놀이 같았어」 「대단했어」 「정말로!」 그녀는 아직도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 옆얼굴을 보면서 생각했다. 내 사랑은 네 사랑과 조금 달라. 예를 들면 네가 눈을 감았을 때 바로 그 순간에 우주의 중심이 너에게 집중하지. 그러면 네 모습은 한없이 작아지고 뒤에 끝없이 펼쳐지는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지. 너를 중심으로 해서, 그것은 엄청 난 가속으로 점점 퍼져가지. 내 과거의 모든 것, 내가 태어 나기 전의 일, 내가 쓴 모든 글, 지금까지 내가 보아왔던 모든 경치, 별자리, 아련히 푸른 지구가 보이는 암흑의 우주 공간까지. 대단해 대단해 하고 나는 내심 미칠 듯이 기뻐하고, 그리고 네가 눈을 뜬 순간 그것은 전부 사라져버리지. 다시 한 번 생각해 주었으면, 하고 나는 생각하지. 둘의 생각은 이처럼 전혀 다르지만 우리는 태고의 남녀야. 아담과 이브의 연정의 모델이지. 사랑하는 사이인 남녀 중의 모든 여자에게는 그와 비슷한 종류의 여러가지 버릇이, 모든 남자에게는 응시의 순간이 있어. 상대방을 서로 따라하며 영원 히 이어지는 나선이지. DNA처럼, 이 대우주처럼. 그 때 신기하게도 그녀가 내 쪽을 보고 웃으며, 대답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했다. 「아, 정말로 아름다웠어. 난 정말 평생 잊지 않을 거야」 출처 http://myhome.shinbiro.com/~ppom/frame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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