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구조로 알아보는 여성 심리 껴안는 여자, 안기는 여자   와타나베 준이치 저   김욱 역   본 전자책은 저작권법에 보호받고 있습니다. 무단으로 복제,배포하는 행위는 저작권법에 의해 처벌 받습니다.   * 이 전자책의 데이터는 (주)코테크 문자인식에서 제작하였습니다.    ON-LINE PC도서관 GO YEIN   전자책 제작/예인정보기획회사   "우리문화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생각하는   뉴미디어 전문회사"   예인정보기획회사 저자 서문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단순한 경험론이 아니며서 그렇다고 순수하게 의학적인 것도 아닌, 그러면서 어느 정도는 이론적 뒷받침이 되어 있는 여성론을 써보고 싶었다. 그러나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복잡 다양한 여성을 하나의 이론 속에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결론을 짓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책이 그런 목적을 수행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자못 의심스럽다. 어쩌면 항상 유동적인 상태인 여성을 하나의 이론 속에 체계화한다는 것 자체가 무리한 일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앞으로도 여성론을 썼으면 썼지 남성론을 쓰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이는 내가 여성드에게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여성의 심리만큼 복잡하고 화려한 심리는 없기 때문이다. 여성에 비하면 남성은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해서 흥미를 끌지 못한다. 이유야 어떻든 나는 나에게 이런 여성론을 쓰게 한 여성이라는 존재에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와타나베 준이치 옮긴이 말 이 책의 저자는 외과 의사 출신의 저명한 작가이다. 외과 의사중에서도 그는 산부인과 전문의였다. 그가 이 책에서 해부해 보인 여성은 '거짓말쟁이 여성','레스비언 여성','불감의 여성','갱년기의 여성'과 같은, 말하자면 여성으로서 어떤 결함을 지니고 있는 여성들이다. 그는 이런 여성들에게 여성의 신체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의사이지 인간의 심리를 꿰뚫어보고 있는 작가로서 임상 진단을 내린 후 결함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조언을 시도하고 있다. 이 조언에는 오랜 세월 동안 환자를 접하면서 그들을 심도 있게 관찰해 온 그의 체험이 담겨져 있다. 이 책은 대부분의 유형적인 여성론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痢??이 책을 읽으면서 남녀의 성차이, 즉 각각의 성(性)이 갖는 특성에 우리가 얼마나 무지했는지, 또 그런 무지함을 바탕으로 한 인생론이나 행복론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사춘기에 다다른 여성은 물론이고 갱년기를 맞은 여성에 이르기까지 이 책을 읽고 위로와 격려를 받지 못하는 여성을 없을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사랑하는 여성을 곁에 두고 있는 남성이라면 이 책을 꼭 한 번 읽어 보기를 바란다. 역자는 이 책이 단지 여성론에 국한되기보다는 인간론, 인생론, 행복론, 나아가서는 현대 문명에 대한 비판론이 될 수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1994.1 김 욱 영원한 수수께끼 남성에게 여성은 영원한 수수께끼이다. 여성은 이상한 존재여서 종잡을 수가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남성들은 "여자란 알다가도 모를 동물이다."라고 한탄하다가 결국에는 "그저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 버린다. 그렇다면 이렇게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알 수 없는 동물이라고 이야기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생김새도 비슷하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또 모르는 점이 있으면 서로 물어 보곤 하는 관계이다. 그런데도 "모르겠다"고 말하게 된다는 데에는 변화가 없다. 아니,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오히려 상대를 더 모르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녀와 나는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라는 한탄으로 결론이 나 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방향을 약간 바꿔서 우리네 인간들과 개나 원숭이의 관계를 생각해 보자. 그러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개나 원숭이의 행동을 보고 "정말 모를 짓들을 한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개가 살점이 붙은 뼈다귀를 먹으려고 흙더미 속을 파헤치고 있든 원숭이가 사람들 앞에서 자위를 하든 묘한 짓을 하는 놈들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짐승 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할 뿐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고는 하지 않는다. 당연한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는 개나 원숭이는 인간들과는 전혀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개는 인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후각이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흙 속에서 뼈다귀를 찾아낼 수 있고, 원숭이는 짐승이기 때문에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위 행위를 하면서도 창피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들이 하는 행동을 보고 "모르겠다"는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 점은 다른 동물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에 대해서 "모르겠다"라고 말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자기와 똑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게다가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너무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모르는 점이 더 많아지게 된다. 요컨대 우리들 남녀는 서로를 자기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바탕 위에서 바라보고 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는다. 상대는 나와 똑같은 존재이므로 같은 입장에서 서로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고 방식이 남녀가 서로를 잘못 알게 되는 시발점이 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와같이 서로를 착각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서로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될까. "나와 그녀는 전혀 다른 종족이다. 나는 남성이라는 족속이고 그녀는 여성이라는 족속이다." 남성과 여성이 이렇게 서로를 전혀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개나 원숭이를 볼 때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냉철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할 수 있게 된다. 억지로 자기의 생각만을 밀어붙이려고 조바심 내는 일도 없어지게 될 것이다. 더욱이 종족이 다르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도 다르다고 인식하게 되면 쓸데없는 오해나 증오심도 갖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기는 쉬워도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 그러기에는 우리 남녀는 서로 닮은 데가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양다리와 양팔을 가지고 있고,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며 은밀한 부분에 털을 가지고 있다. 또 똑같이 말을 하고 웃으며 눈물도 흘리고 잘 때는 눕는다. 이래서야 남성과 여성이 서로 다른 종족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없다. 오히려 서로 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물론 남성과 여성이 외관상 약간은 다르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골격과 목의 기관, 생식기는 전혀 다르다.그러나 이것으로 완전히 다른 종족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정도의 차이가 너무 적다. 또한 생식기야말로 가장 큰 차이를 보이는 것이지만 그것이 남성과 여성으로서의 차이점일 뿐 이른바 종족의 차이 평가와는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되기도 한다. 그런데 밖으로 드러나는 이러한 차이들은 사실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좀더 근본적인 차이는 체내에 숨겨져 있다. 그리고 이 실체를 파헤치지 않는 한 올바른 의미에서 남성이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숨겨져 있는 신체가 외형상의 모습과는 크게 다르다. 그 내면은 더욱 알기 어렵다. 따라서 숨겨진 이 실체를 아는 일이야말로 여성론을 펼치기 전에 먼저 해결해야 할 기초 공사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채 여성론을 다룬다면 그것은 토대 없이 집을 짓는 것이나 같다. 내가 제1장의 제목을 여성의 숨겨진 진실이라고 내세운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여성의 숨겨진 진실 나는 현재 작가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 전까지 약 10여 년 동안 모 대학 병원 외과 의사로 있었다. 그 병원에서 나는 많은 남녀 환자에게 수술을 해주고 경과를 지켜보았다. 대부분은 완치되었지만 그 중에는 생명을 잃은 환자도 있었다. 수술을 하면서 내가 느낀 점은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을 잘 견딘다는 것이다. 우리는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아픔이나 고통에 약하다는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 아마도 여성의 몸이 남성의 몸보다 가냘픈 데다가 여성들이 작은 통증에도 잘 견디지 못하고 울어 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여성은 약한 통증에는 남성보다 큰 반응을 보인다.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거나 아우성을 치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대수술을 하게 되면 오히려 침착해지거나 고통을 잘 감수한다. 반면에 남성은 작은 고통은 눈물을 머금으며 참아 내다가 그 고통이 커지면 도무지 견디지를 못한다. 인내력이 여성보다 훨씬 뒤떨어지는 것이다. 결국 작은 통증에는 견딜 만하면서도 예민한 반응을 보이는 여성의 태도가 여유 있게 과장된 반응인 반면 남성의 반응은 여유라기보다는 아픔을 곧이곧대로 나타내는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픔의 정도가 심해지면 남성은 여성보다 더 큰 비명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인체 중에서 아픔을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부위는 뼈를 감싸고 있는 골막과 피부이다. 아픔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국소 마취로 수술을 할 때는 이 두 군데에 대량의 마취제를 주입하게 된다. 나는 전에 수술을 할 때 이 국소 마취량을 남성과 여성에게 약간씩 가감해서 실험해 본 적이 있다(이런 짓을 상습적으로 한다면 인체 실험이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되겠지만 내 경우는 일시적인 것으로서 아무런 해를 주지 않았다). 그 결과 남성과 여성의 태도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먼저 여성의 경우에는 시험 삼아 마취약의 양을 약간 줄여도 거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간혹 통증을 호소해 올 때 "걱정할 것 없어요"라고 말하면 곧 조용해진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남성은 마취약의 미세한 양의 차이를 재빨리 알아차리고는 "아프다"고 호소한다. "걱정할 것 없어요" 정도의 대사 가지고는 속지 않는다. 아프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더라도 얼굴을 찡그리면서 땀까지 흘리며 참느라고 애를 쓰는 것이다. 여성은 아프지 않으니 걱정 말라고 안심을 시키는 것만으로도 웬만한 아픔 정도는 참아 낸다. 그러므로 여성이 암시 요법이라든가 최면술에 걸리기 쉽다는 것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보다 고통을 잘 참는다는 사실은 출산을 생각해 보면 더 잘 알 수 있다. 출산은 여성만이 짊어진 숙명이지만 이것이 여성이 아픔에 강하기 때문에 주어진 것인지 아니면 출산이라는 과정이 있기 때문에 필요진화론(必要進。論)에 따라 여성의 몸이 강하게 단련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나는 사실 후자 쪽일 거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상당히 합목적적이라고 생각된다. 만일 출산을 남성이 해야 했다면 30대 남성 가운데 과반수는 그 아픔을 이겨 내지 못하고 실신하거나 사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증거를 하나 들어 보자. 담낭에 돌이 생기는 담석(膽石)이라는 병이 있는데, 담낭에 생긴 돌이 담도(擔道)를 빠져나오는 메커니즘은 출산과 비슷하다. 그런데 담력이 있는 남성이 아픔을 참지 못하고 쩔쩔 매는 모습은 정말 대단한 광경이어서 안쓰럽기 그지없다. 고통을 이겨 내지 못하고 마구 뒹구는 모습이란……. 그런데 그렇게 요동을 치다가 나온 것이란 겨우 새끼손톱만한 크기의 돌인 것이다. 이에 비해 출산의 고통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우선 고통의 시간이 길다. 무려 10시간에 걸친 진통을 겪은 후 3000g 이 넘는 아이를 낳는 것이다. 남성으로서는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작업이 아닐 수 없다. 10개월 간의 임신 기간, 10시간 이상의 진통, 젖을 먹여야 하는 수유 기간 등등 갖은 고통과 번잡스러움을 마다 않고 여성은 출산을 감행한다. 그뿐인가. 여성은 아이를 하나 더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기가 막힌 일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여성은 남성과는 분명히 다른 족속임에 틀림없다. 죽음에서 소생한 여성 앞에서 설명한 류의 차이는 근원적인 생명력이라는 면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사람의 체중 가운데 13분의 1은 혈액량이며, 그 중 3분의 1 정도의 혈액을 잃게 되면 사망한다는 것은 의학생이라면 누구나 아는 기초 상식이다. 예를 들어 체중이 52kg인 사람이 있을 때 그는 자신의 체중의 13분의 1, 즉 4kg의 혈액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 3분의 1, 즉 1.3kg(1300cc)을 출혈할 경우 사망하게 된다. 그런데 여성은 자궁 외 임신이라든가 자궁 파열 등 대량 출혈을 유발하는 질병을 앓기가 쉽다. 내가 지금 예로 들려고 하는 여성 환자를 검진했을 때 그 그녀의 뱃속도 자궁 파열로 피바다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체중이 45kg밖에 되지 않았는데 이미 2000cc가 넘는 피를 흘려서 간신히 심장만 뛸 뿐 살아 있다고 할 수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앞에서 말한 기초 상식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에게 "절망적이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라고 말한 후 수혈을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한 20분쯤 지나자 희미하게 맥이 뛰는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그리고 30분 뒤에는 창백했던 얼굴에 붉으레한 기운이 돌더니 한 시간쯤 지났을 때는 신음 소리를 내며 "아프다"고 호소했고, 마침내 한 시간 반 만에 혈압이 130으로 회복되었다. 그녀는 마치 땅 속에서 기어나오듯 죽음 속에서 살아 나온 것이다. 이 사건은 내가 의사가 된 바로 그 해에 겪은 일로서 그 뒤 나의 여성관을 완전히 바꿔 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나의 졸[모태 유전]이라는 소설은 당시의 체험을 다룬 작품이다. 어쨌든 이 사건은 앞에서 설명한 절대적인 기초 상식을 부정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의학서가 터무니없는 거짓을 썼다고 볼 수는 없다. 확실히 전혈액량 중 3분의 1을 쏟아 내면 죽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바로 남성들이다. 따라서 실혈사(失血死) 항목은 이렇게 고쳐 써야 옳다. "남성은 전혈액량 중 3분의 1을 잃었을 때 사망하고, 여성은 2분의 1을 초과했을 때 사망한다." 여성의 강한 생명력 몇 해 전에 여성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실감나게 하는 사건이 있었다. 각 신문에 실린 기사 내용을 요약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북알프스에 갔던 여자 두 명이 눈이 쌓인 산중에서 길을 잃어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눈굴 속에서 초콜릿 두 개로 굶주림을 견뎌 내어 결국 2주일 만에 무사히 구조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를 다룬 신문이나 잡지의 논조들은 하나같이 "가냘픈 여성의 몸으로 추위와 굶주림을 용케 견뎌 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은 과연 옳은가. 여성의 육체는 언뜻 보기에는 남성의 육체에 비해 연약하고 미덥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아무리 마른 여성이라 해도 피하 지방은 남성보다 많다. 이 말은 마른 듯해 보이는 여성이라도 보통 체격의 남성보다 훨씬 많은 지방을 몸에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살찐 여성이야 말할 나위 있겠는가. 이처럼 여성은 체내에 천연의 망토를 두르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 남성보다 추위에 강한 것은 당연하다. 또 이 지방은 굶주렸을 때 칼로리원(源)으로 전용시킬 수 있다. 일부러 굶어서 피하 지방을 줄이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굳이 초콜릿을 먹지 않더라도 여성이라면 대개 2주일이나 3주일 정도는 피하 지방에서 충분히 칼로리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 문제는 물인데, 그들은 눈굴 속에서 지냈다고 하니 눈을 녹여서 먹으면 되었을 것이다. 물론 공복감을 느꼈을 테지만 그런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다. 이 사건에서 두 여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로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고독을 이겨 내는 여성의 인내력에 관해서이다. 두 여성은 눈굴 속에서 2주일 동안 날씨가 개기를 꾸준히 참고 기다렸다. 조바심하지 않으면서 쓸데없는 체력 소모를 피했다. 사실 이것은 여간해서는 실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더욱이 남성에게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구(舊)소련과 미국의 우주선 제1호에는 각각 암컷의 개와 원숭이가 태워졌다. 왜 꼭 암컷이어야 했는가. 거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암컷이 수컷에 비해 고독을 잘 견디고 인내력도 강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물생물학 분야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사실인 동시에 인류에게도 해당되는 진리이다. 나는 학위 논문을 쓰기 위해 쥐와 토끼로 실험을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수컷은 인내력이 약하기 때문에 그만큼 반항하는 힘도 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실험 가운데 쥐의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한 후 다른 한쪽 다리는 그대로 두어 이때 암컷과 수컷의 근육과 뼈에 어떤 상태 변화가 일어나는가를 비교하는 실험이 있었다. 수컷은 깁스를 하자마자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깁스한 곳을 갉으며 어떻게든 속박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야말로 필사적인 저항이었다. 그러나 암컷은 수컷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깁스를 할 때 저항한 것은 암컷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단 깁스를 하게 되자 오히려 그런 상태를 감내하려는 듯 조용히 웅크리고 있었다. 마치 주어진 운명에 그대로 따르겠다는 자세였다. 그러다가 모든 것을 단념하고는 깁스한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먹이를 먹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인간과 원숭이, 개, 쥐 등 어떤 종족에 관계없이 모든 암컷이 갖는 특성이다. 인류의 역사에서도 비슷한 예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결혼을 예로 들어 보자. "저런 남자는 싫다"고 말하면서도 그 남자와 결혼한 후 일년쯤 지나면 제법 즐겁게 사는 여성이 많다. 물론 좋아하는 남성과 사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지만 차선의 남성을 선택해서도 그런 대로 살 만한 모양이다.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겠지만 여성은 대체로 남성보다 체념이 빠르다. 한번 체념하면 그것으로 끝이다. 이 점에서 볼 때 남성은 융통성이 없다. 싫은 여성과 결혼해서 살면 시간이 흘러도 상황은 좋아지지 않는다. 싫은 건 여전히 싫은 것이다. 이야기가 잠시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는데, 만일 앞서의 우주선에 수컷을 태웠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독에 약한 수컷은 아마도 자기 주위에 있는 계기(計器)를 만지작거리면서 어떻게든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인 노력을 감행했을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면 우주 실험은 실패하고 말았을 것이다. 눈굴에 갇혀서 날씨가 갤 때까지 기다린 심정도 우주선에 실린 암컷과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참고 기다리면 날씨가 갤 것이고, 그러면 구조대가 나타날 것이다. 지금은 견디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남성은 그렇지가 못하다. 눈굴 속에서 구조대가 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은 수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용감한 체 눈굴에서 뛰쳐나가 헤매다가 결국 대부분이 얼어 죽고 만다. 스포츠에 비유하자면 남성은 씨름꾼, 여성은 마라톤 선수감인 것이다. 남성은 여성을 완력으로 때려 눕힐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순간의 일일 뿐 여성은 쓰러져서 기회를 엿보다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남성은 다시 때려 눕힌다. 그러나 이런 일이 반복되는 사이에 남성은 결국 지쳐서 쓰러지고 만다. 결국 승리는 여성의 것이 된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남성은 자신이 먼저 지쳐서 쓰러지리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때리는지도 모른다. 반대로 여성은 결국은 자신의 승리로 끝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맞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여성은 얼마나 무서운 족속인가. 여기서 지나치게 어수룩한 남성의 일면을 한번 살펴보자. 내구력이 없으면서도 등산을 할 때는 여성의 배낭을 대신 짊어진다. 눈굴에 들어가면 "춥지?" 하면서 지방이 많은 여성에게 자기의 겉옷을 벗어서 입혀 준다. 그러고는 자기가 먼저 얼어 죽는다. 입으로는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어리석은 종족이라고 여성은 내심으로 웃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성의 생명력이 강하다는 사실은 남녀의 평균 수명 차이에서 명쾌하게 드러난다. 현재 여성의 평균 수명은 남성의 수명보다 6∼7년 정도 길다. 문명의 발달은 모두 여성에게만 유리할 뿐 남성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한다. 전기 세탁기, 청소기, 전기 밥솥, 전자 레인지, 인스턴트 식품 등은 여성의 가사 노동을 단축시키고 있다. 반면에 남성은 문명 발달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다. 각종 자동기기들은 남성의 업무 내용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을 뿐 업무 부담을 줄여 주지 못한다. 기업의 합리화라는 미명하에 업무량만 늘어났을 뿐이다. 본래가 생명력이 강한 여성들이 이러한 사회 상황에 힘입어 남성과의 평균 수명 차이를 벌려 놓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차이는 앞으로 더 벌어질 것이다. 머지않아 양로원은 할머니들로 넘치고 거리도 할머니들과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이 점거하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지구인이 멸망해 가는 과정에 대해 하나의 예감을 가지고 있다. 먼저 감수성이 풍부한 남성 그룹이 사멸하고, 다음으로 비교적 감성이 풍부한 여성이 멸종할 것이다. 그 뒤를 이어 일반 여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신경이 가장 둔한 여성 한 명이 살아남을 것이다. 이것은 나만의 환상일까. 게을러진 유방 그런데 이것은 단순한 망상이 아니다. 나의 이러한 예감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여성이 강인한 생명력과 아울러 뛰어난 환경 적응력을 갖추고 있다는 데 기인한다. 이 적응력에 대해서는 앞에서 간단히 언급한 바 있는 실험과 결혼의 예로도 알 수 있지만, 더욱 놀라운 사실은 여성이 "나는 이러이러한 여자가 되고 싶다"고 바라면 소원대로 상황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20여 년 전부터 줄어들기 시작한 여성의 모유 이야기이다. 최근 들어 아이를 모유만으로 기르는 어머니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특히 도시에 살고 있는 부인의 경우 열이면 열 모두 인공 영양으로 아이를 기르고 있다. 이 때문에 "만일 지구에서 소가 없어지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장된 말도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모유가 잘 나오지 않게 된 이유는 참으로 알 수가 없다. 대체로 모유는 영양 상태가 나쁠 때 잘 나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여성들은 영양을 잘 섭취하고 있는데 왜 모유는 줄어드는 것일까. 그렇다면 적어도 영양 불량이 원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유다운 이유가 있다. 수십 년 전부터 오랫동안 젖을 먹이면 여성의 유방은 보기 흉하게 변하게 되고, 미용에도 좋지 않다는 생각이 일반에게 널리 인식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이는 의학적으로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어쨌든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여성들은 일제히 이 의견에 따랐다. 나이보다 일찍 늙어 보이는 것도 수유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의견이 실제 이상으로 선전된 결과 여성들은 아이에게 젖 물리는 일을 마다하게 되었다. 그러나 젖을 먹이지 않게 되었다고 해도 젖이 나오고 안 나오고는 자기 뜻대로 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음식을 소화시키거나 땀을 흘리는 일 등과 마찬가지로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여성들의 뜻대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젖이 지나치게 많이 나와 여분의 젖을 매일밤 짜내야 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모유가 나오지 않게 되거나 어머니로서의 기본적인 수유 작업을 한두 달 만에 중단시키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늘어지곤 하던 유방이 아이를 낳은 후에도 탄력 있는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여성들의 욕구에 영합이라도 하듯 각종 인공 영양제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게을러진 유방'은 안심하고 더 태만해졌다. 풍만한 유방이라고 해도 젖이 괴어 있는 유방이 아니다. 텅빈 탱크일 뿐이다. 아이를 위한 유방이 아니라 남성에게 과시하기 위해 풍만한 유방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유방은 이제 귀걸이나 브로치 같은 장신구로 변해 버렸다. "얼굴은 조그맣게, 키는 늘씬하게 자라도록 해주세요." 라고 여성이 소원하면 실제로 그렇게 된다. 이것은 과장이 아니다. 연애를 하고 있는 여성의 살결에는 윤기가 흐른다. 성에 숙달해 있는 여성의 표정은 온화해 보이고 피부는 촉촉이 젖어 있다. 그러나 남성은 그렇지가 못하다. 연애를 하고 있는 남성은 왠지 침착해 보이지 않고 성생활을 하고 있는 남성은 초라해 보인다. 말하자면 여성은 자기 머리로 생각하는 것을 몸으로 구현할 수가 있다. 그렇다고 손이 하나 더 필요하다든가 다리가 더 길어졌으면 좋겠다든가 하는 터무니없는 요구는 무리이다. 그러나 호르몬 계통에 관계된 변혁은 마음속으로 그것을 바라면 쉽게 이루어진다. 이 방면의 작용은 뇌 중심부에 있는 뇌하수체라는 관제 센터에서 담당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자기 뜻대로 호르몬의 분비를 조절할 수 있다. 여성은 이런 생리적 경로가 남성보다 뛰어나다. 얼마 전에 [스타의 요즘]이라는 글이 E 신문에 실린 것을 읽었는데, 그 글은 유명한 탤런트가 쓴 것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정말 이상한 일도 다 있다. 가령 악독한 여주인공 역할을 오랫동안 맡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고약한 여자로 변해 있는 것만 같다. 또 뚱뚱보 여자 역할을 하면 진짜로 몸이 뚱뚱해지면서 마음이 너그러운 여자로 변해 버린다.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성의 변혁을 단적으로 말해 주는 좋은 예라 하겠다. 한 군데밖에 없는 여성의 약점 지금까지 설명한 대부분의 변화는 여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단은 바람직한 변화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능력은 상황이 나쁠 때 더욱 그 가치를 발휘하게 된다. 소음이든 스모크이든 좋지 않은 환경 속으로 몰릴 때 여성은 더욱 강하다. 이런 경우에도 나쁜 상황으로 빠지기 전까지는 완강하게 저항하다가 부득이 그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깨끗이 체념하고는 오히려 그런 상황과 친숙해지려고 한다. 남성처럼 미련하게 발버둥치거나 항의하거나 하는 일이 없다. 이는 여성이 "캐 세라 세라(될 대로 되라)"라는 식의 체념, 즉 단념이 빠르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된다. 어쨌든 여성은 견디는 힘이 강하다. 전자 계산기의 기록 카드에 구멍을 뚫는 키펀치 등의 단순 작업은 여성의 직종으로 옛날부터 정해져 있다. 그런 단순 작업을 남성에게 시키면 길게 잡을 것도 없이 한 달이면 미쳐 버리거나 도망을 치게 될 것이다. 지금 대기업에서 톱니바퀴 정도의 가치밖에 없는 남성들 가운데는 미치기 일보 직전에 있는 젊은이들이 많다. 그러나 여성은 오늘도 유유히 키펀치를 두드리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강한 여성에게도 딱 한 군데 약점이 있다. 여성의 강점 자체가 한편으로는 여성의 약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여성은 호르몬으로 신체의 변혁까지 일으킬 수 있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 호르몬 계열을 흔들어 놓으면 여성에게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여성들의 행동은 순식간에 지리 멸렬해진다. 예를 들어 성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여성에게 성을 멀리하게 하고, 성의 즐거움을 알기 시작한 여성에게 성의 즐거움을 어른거리게 할 뿐 직접적인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한다. 한편 성을 모르는 여성에게는 반대로 심한 성충격을 준다. 이런 상황을 겪게 될 때 여성은 그 즉시 변조(變調)를 보인다. 현재 병원을 찾는 여성들 가운데는 어깨걸림, 신경통, 일어설 때 느끼는 현기증, 초조함, 불면, 식욕 부진과 같은 이른바 부정 수소(否定愁訴), 즉 특정한 장기(臟器) 또는 질환과 관계없이 막연하게 병적 증세를 호소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중 80% 는 이런 종류의 실조(失調)에 원인이 있다. 일단 원인을 알고 나면 치료법은 간단하다. 원인을 제거해 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현의학계에는 이런 증상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그 여성과 접촉하고 있는 남성이 치료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남성은 그런 임무를 수행할 때에 비로소 자신의 존재 가치를 그나마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정리 및 결론 이 장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본질적인 생명력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강하다는 점이다. 남성이 여성보다 강한 것은 순간적인 체력뿐으로 이는 지속적인 생명력과는 관계가 없다. 이처럼 여성이 강한 이유는 첫째 여성은 아픔에 둔하다는 것과 둘째 출혈에 강하다는 것, 셋째 환경에 대한 순응력이 뛰어나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내가 말하고 싶었던 점은 바로 이런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살펴보고 싶어하는 독자들을 위해 참고로 몇 마디 덧붙인다면 이런 말을 할 수 있겠다. 해부학적으로 보았을 때 남녀의 신경 분포는 같으므로(생식기는 다르다) 아픔에 강하다는 것은 신경의 감수성이 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때 신경은 동물계에서 가장 고차원적인 기관이므로 이의 발달 여하에 따라 그 동물의 진화 정도를 결정할 수 있다. 환경 순응력에 대해서 말하자면 이것이 가장 발달해 있는 것은 균의 일종으로 포자(胞子)를 뒤집어 쓰고 있는 균류(菌類)이다. 이 균류들은 주위 환경이 나빠지면 포자라는 옷으로 외벽을 덮고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또 몸을 변혁시킬 수 있는 생물로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아메바이다. 변혁은 재생 능력이라는 말과 같은 것이다. 예를 들어 불가사리나 지렁이를 토막 내서 잘라 버리면 다시 한 마디씩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메바나 불가사리, 지렁이가 동물의 분류상 그다지 좋은 위치에 있지 않다는 것은 국민학교 어린이들도 잘 알 정도지만 어쨌든 강한 동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위의 암시적인 설명을 통해서 독자가 어떤 생각을 갖게 되든지 그것은 독자의 자유이다. 다만 나는 여성을 위대한 능력을 가진 인간으로 존경하고 동경하며, 또 두려워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우먼 리브 한때 신문과 잡지 등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우먼 리브 운동이 최근 들어 다소 수그러진 듯한 기미를 보이고 있다. 이 우먼 리브 운동, 즉 여성 해방 운동을 별볼일 없는, 분수를 모르는 여성들의 경망스러운 행동쯤으로 본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우먼 리브는 모든 여성이 한번쯤은 참여해 보고 싶어하는 운동이며 이 운동이 어떤 여성에게는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계승될 운동이 될 것이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문명의 발달로 인한 가사 시간의 단축에 의해 이에 대한 관심은 악으로 더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운동이 지금 다소 위축된 듯 보인다 해도 큰 폭발을 일으킬 화산이 연기를 뿜으며 폭발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먼 리브를 외치는 여성들은 도대체 어떤 유형의 여성이며 왜 그런 여성이 나타나는 것일까, 또 그런 여성들은 하나의 단결된 힘으로 현대 사회에 부리를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이 장에서는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해부학적으로 규명해 보기로 한다. 우먼 리브의 결점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우먼 리브는 한때 저널리즘이 크게 보도했던 것과는 달리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한 채 수그러들고 있는 듯하다. 그 이유로는 저널리즘이 너무 과장되게 보도했다는 점을 우선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운동의 목적이 지나치게 다양해서 확실한 목표를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는 점, 또 일상적인 불만들을 갑자기 남녀간의 성문제로 비약시켰다는 점, 거기에 참여자들의 의식 차이가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났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큰 이유는 우먼 리브를 추진했던 여성들 사이에 분열이 생겨 단합된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적을 공격하기 전에 아군에 분열이 생겼다면 그 전쟁에서 이길 승산은 이미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문제는 플래카드를 높이 쳐들고 "우리 여성들을 위해 하나로 뭉쳐......."라고 필사적으로 외치는 여성들 옆에 "어리석인 짓이야." 하고 코웃음 치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여성들의 냉소가 남성들의 냉소보다 훨씬 냉담하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또 이렇게 냉소적인 여성의 숫자도 만만치 않다. 이래서야 어디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겠는가. 여성 해방을 아무리 외친다 해도 결국 싸움에서 지고 멀리 도망쳐서 짖어 대는 개의 형국이 되고 마는 것이다. 어느 보고에 따르면 우먼 리브 운동에 가담했거나 찬성하고 있는 여성의 연령 구성을 살펴보면 20대 전반의 여대생과 직장 여성이 단연 압도적이고, 그 다음이 30대 중반에서 40대에 이르는 가정주부 순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지 모르지만 여기에서 우먼 리브의 연령 구성상의 문제를 엿볼 수 있다. 우먼 리브 운동을 하고 있는 여성들은 모두 여성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모든 여성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연대적인 단층이 있는 것이다. 고교생 이하의 여성과 노년층이 빠져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치더라도 20대 후반에서 30대 전반의 여성, 즉 여성으로서 가장 성숙미를 풍기는 연령대의 여성이 빠져 있다는 사실은 기이하기까지하다. 그녀들은 우먼, 즉 여성 가운데서도 남성과 가장 가깝게 접촉하고 있는 연령대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잠시 돌려서 해보자. 과거에는 어떠했든 요즘에는 우먼 리브라 하면 성의 근본적인 개혁 주장 등 어마어마한 운동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 이 운동은 여성들이 일상 생활에서 느낀 조그만 불만들을 사회에 호소하는 데서 출발했다. 그 불만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그 중 하나는 직장에서의 문제로서 남녀를 차별하여 지급하는 급료, 단조로운 작업의 일방적인 강요, 개인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여성으로만 다루려는 관리자의 편견, 특히 여성을 직장의 꽃 정도로 보는 태도 등에 대한 불만이다. 이런 불만을 가진 여성은 대개 20대 직장 여성들로 날마다 현실 사회에서 부딪치는 문제인 만큼 구체적이고도 절박한 불만이라 할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여성이라고 해서 언제까지나 가정에만 묶여 있을 수는 없다는 불만이다. 아내는 남편을 위해 언제까지나 봉사해야만 하는 남편의 예속물이 아니므로 주부들에게도 직장을 개방해야 하며, 이를 위해 탁아소를 증설해야 한다는 주장인 것이다. 불만의 내용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런 불만을 가진 연령층은 대개가 30대에서 40대에 걸친 주부들이다. 이 연령대의 주부들은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 기르다가 이제 아이에게 손길이 덜 가게 된, 말하자면 육아 에서 해방된 여성들이다. "더 이상 잔손이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아이들이 성장했을 때에서야 안심하고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내 앞에는 지루한 시간만 남아 있는 거예요. 할 일이 없어진 거죠." 어느 주부의 이런 고백은 이 연령대의 여성이라면 거의 누구나가 겪는 상실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정력도 다 사그라들고 신선함도 사라진 남편만을 위해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한단 말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러다가 "이렇게 살다가는 남편과 아이, 그리고 이 사회에서 동떨어져 나만 혼자 외롭게 되는 것은 아닐까." 라고 조바심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같이 우먼 리브 운동은 20대 직장 여성과 30대 중반 이상 주부들의 불만이 합성되어 하나의 힘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먼 리브의 슬로건에서는 이러한 일상적 불만들은 찾아보기가 힘들다. 예를 들어 다음은 오래 전에 우먼 리브 운동을 하는 여성들이 들었던 플래카드의 문구이다. 여성들이여, 뭉치자! 정부는 피임 교육을 철저히 실시하라! 임신 중절 비용은 국고 부담으로 하라! 성희롱을 분쇄하자! 중절 금지 반대! 이러한 항목에는 앞서 설명했던 현실적·구체적인 불만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여성이라는 존재를 광의의 입장에서 파악하려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매우 급진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그렇다면 운동의 방향이 이렇게 설정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우먼 리브를 지지하는 여성의 연령대가 앞서 말한 두 그룹이라고는 하나 이 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고 움직여 나가는 활동층이 20대의 젊은 여성들이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슬로건이 필연적으로 급진적이거나 실생활과는 동떨어진 방향에서 설정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당연히 그 세대 여성들이 선호하는 피상적 주장이 펼쳐질 뿐 일상적이고 자질구레한 항목들은 모두 제외되는 것이다. 물론 입장이 다른 여성들의 요구를 종합해서 하나의 의견으로 만드는 일이 쉽지 않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의 적이다"라는 공통 항목을 만들어 놓고 덤벼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여성 해방 운동에는 찬성하지만 그 방법이 지나치게 과격한 것 같다."고 말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주부들도 많다. 또 젊은 직장 여성들 중에서도 이와 비슷한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렇게 운동을 지지하는 여성간에도 미묘한 입장 차이가 있는 한편 우먼 리브 운동을 반대하는 입장의 여성들에게서는 그 의견 차이가 더욱 심하게 나타난다. 그렇다면 지지하는 입장에 있는 여성들과 반대하는 입장에 있는 여성들의 의견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자. 껴안는 여자냐, 안기는 여자냐 '남성에게 예속된 여성의 해방'이라는 우먼 리브 운동의 최종 목표는 이 운동이 미국에서 처음 전개될 당시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이 목표를 쉽게 이야기하자면 '안기는 여자에서 껴안는 여자'로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변혁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물음이다. 왜냐하면 이것의 성공 여부가 우먼 리브 운동의 성공을 좌우하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앞에서 이야기했던 슬로건 따위는 하찮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피임 교육을 철저히 시키기 위해서는 학교나 가정에서 성교육을 하게 만들면 될 것이다. 임신 중절 비용의 국고 부담 문제는 정부가 마음만 먹는다면 쉽게 해결될 것이다. 아무리 낙태가 흔하다고 해도 그 비용이 국고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성희롱을 분쇄하자고 외치고 있으니 이것이 실현되면 낙태 사례는 더욱 줄어들 것이다. 한편 중절 금지 반대 문제는 새삼스럽게 강조하지 않아도 이미 잘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앞의 플래카드에 나타난 주장들은 모두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다. 하물며 일상의 구체적인 불만들은 더욱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녀의 급료 차별을 없애는 동시에 각자의 능력을 평등하게 인정해 달라는 문제는 남성에게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성에게도 완벽한 업무 수행을 요구하면 될 일이다. 여성에게 차 심부름을 시키지 말라든지 탁아소를 증설하라는 요구는 더 간단한 문제이다. 자, 여성들의 요구대로 모든 것을 바꾸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여성은 해방되는 것인가. 남성에게 종속된 처지에서 탈피할 수 있는 것인가. 그에 대한 대답은 "노우(No)"이다. 여성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다 해도 여성은 남성과 평등해질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이 독립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적 조건이 충족되더라도 성적으로 남성에게서 독립되지 않는 한 여성은 진정한 의미의 리브를 획득할 수 없다. 앞에서 설명했던 것처럼 우먼 리브 운동의 급진적 세력은 20대 전반의 독신 여성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이 마음속에서 찬동하는 지지 세력인 30대에서 40대에 이르는 주부들이었다. 또 가장 무관심하고도 냉담한 태도를 보인 층이 20대 후반에서 30대 전반의 여성, 즉 결혼 후 남편에 대한 봉사와 육아에 전념하고 있는 여성들이다. 물론 이 분류는 개략적인 데다가 다소 무리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20대 전반에 우먼 리브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30대 전후에도 찬성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반대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상황이므로 이를 찬성자와 똑같은 정도로 생각하게 되면 소수점 이하의 두 자리수를 소수점 이하 다섯 자리수로 처리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통계학적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이 점은 찬성자만의 연령대 분류로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어쨌든 이상과 같은 사항을 염두에 두고 보면, 1. 20대 전반 2. 20대 후반에서 30대 전후 3. 30대 후반에서 40대 하는 식으로 각 연령층에 따라 우먼 리브에 대한 반응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가운데 첫번째 그룹은 미혼 여성으로 성의 실태를 진정한 의미에서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성에 관한 한 풋내기인 것이다. 이에 비해 두 번째 그룹은 이미 성에 눈을 뜬 데다가 나날이 그 재미를 알아 가고 있는 그룹이다. 바꾸어 말하면 섹스의 쾌감을 알면서 알찬 생활을 하고 있는 시기라 할 것이다. 세 번째 그룹은 성에 관해서는 두 번째 그룹보다 더 욕망이 강한 반면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 그룹이다. 욕구 불만이 만성화되어 어쩔 수 없이 그 불만을 다른 행동으로 해소하고 있는 시기인 것이다. 성적으로 충족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는 첫번째나 세 번째 그룹이 동일하다. 그러나 양자간의 큰 차이점으로 세 번째 그룹은 일시적으로 불만을 느낀다고는 하나 이미 성의 충족감을 맛본 적이 있는데 반해 첫번째 그룹은 이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성의 충족감이라는 측면에서 여성 해방 운동을 외치는 여성을 살펴보면 우먼 리브, 즉 여성 해방을 외치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여성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성의 충족감을 모르는 여성들이다. 이와 마찬가지 논리로 우먼 리브에 관심을 보이면서 심정적으로 지지하는 여성은 성의 기쁨을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충족되지 않는 부류이고, 반대하거나 무관심한 여성은 성이 충족되고 있는 부류이다. 바기나 감각과 클리토리스 감각 그렇다면 여성에게 진정한 의미의 성 충족감이란 어떤 것인가. 여성이라는 성이 워낙 복잡하고 미묘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파악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충족감에는 정신적인 충족감과 육체적인 충족감이 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어쨌든 둘 사이의 우열을 말한다면 처녀나 젊은 시절에는 정신적 충족감이 우위를 차지하고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육체적 충족감이 우위를 차지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젊은 여성으로서 성관계가 없었는데 우먼 리브에 냉담한 여성은 정신적으로 충족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뭇 남성들에게 부추김을 받고 있는 젊은 여성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정신적 충족이란 단지 일시적,종속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여성에게 육체적 충족이 우선한다는 것은 여성의 역사나 문학을 통해서도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든가 로렌스의 [차타레 부인의 사랑]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여성이 성숙해진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성장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성장은 여성이 남성과 관계하여 성을 알게 된다는 것, 즉 바기나(질) 감각에 눈떴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여성의 기본적 성감에는 바기나 감각과 클리토리스(음핵) 감각이 있다. 그 외에 입술과 귀 등에도 성감이 있으나 이는 성의 중심 역할을 담당하는 생식기가 아니므로 생략한다. 이 두 감각 중 클리토리스 감각은 제2차 성징(性徵) 이후 급속히 발달, 눈뜨게 된다. 그러므로 처녀가 느끼는 성감이라면 이 클리토리스 감각이다. 사실 이 클리토리스 감각은 소녀 시절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이며 그 개발에 남성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독립된 하나의 쾌감이라는 말이다. 이와는 달리 바기나 감각은 처녀 시절에는 잠들어 있는 감각이다. 클리토리스 감각이 아무리 발달되어 있더라도, 또 음탕한 상념에 잠기는 일이 아무리 많더라도 바기나 감각은 남성이 거들어 주지(발기->삽입) 않는 한 느낄 수 없다. 여성이 성숙하여 성에 눈뜨게 되는 것은 남성과의 성관계로 이루어지는 만큼 성숙이 곧 바기나 감각의 개발 그 자체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 바기나 감각이 클리토리스 감각을 따르지 못한다. 잠들어 있는 상태, 아니 오히려 고통에 더 가깝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감각은 남성의 성기를 받아들이게 됨에 따라 급속히 눈떠지면서 클리토리스 감각을 능가하게 된다. 바기나 감각은 남성의 성기를 수용하고, 포괄하고, 완수한다는 심리적 충족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는 바기나 감각이 클리토리스 감각보다 더 복잡하기 때문에 다분히 정신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같이 바기나 감각이 클리토리스 감각보다 우위에 있기 때문에 생식(生殖)이 있고 인류는 종족을 보존할 수 있었다. 내가 앞에서 '이상하게도'라는 말을 쓴 것은 이와 같은 자연의 오묘한 섭리에 놀라움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성은 바기나 감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페니스(음경)뿐이다. 발생학적으로 보면 이 페니스는 클리토리스와 같은 것이다. 아마도 클리토리스의 신경 분포 등은 페니스가 퇴화한 형태인 듯하다. 페니스와 클리토리스가 발생학적으로도 같고 신경 분포와 점막 구성 등도 거의 같은 까닭에 남성은 여성의 클리토리스 쾌감을 상상할 수 있다. 그 쾌감은 페니스의 쾌감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따라서 남성이 페니스에 손을 가져가 자위 행위를 함으로써 쾌감을 느끼듯 여성도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여 같은 방법으로 쾌감을 느낄 수 있다. 처녀의 자위 행위는 모두 이러한 형태, 즉 클리토리스 주도형이라고 보면 된다. 클리토리스 쾌감으로 만족할 수 있는 한 여성이든 남성이든 타인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 성적으로 독립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성감은 남성과 여성에게 모두 평등하다. 그런데 탐욕스럽다고 할까, 아니면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고 할까. 여성에게는 클리토리스 감각 외에도 바기나 감각이라는 것이 있다. 게다가 이 바기나 감각은 클리토리스 감각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성적인 쾌감이라는 측면에서만 본다면 자연의 섭리는 남녀 평등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훨씬 우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대신 자연은 여성에게 한 가지 요구 사항을 부여하고 있다. 쾌감면에서는 더 우대해 주되, 그 쾌감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남성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성을 방치해 둘 경우 너무 독주할 것을 우려해 붙여 둔 단서라고나 할까. 사실 이런 단서가 붙지 않는다면 남성은 너무나 처참해진다. 그런데 여성에게는 이 단서가 커다란 기쁨인 동시에 슬픔이기도 하다. 먼저 기쁨이란 클리토리스 감각과 아울러 그보다 더 큰 쾌감을 주는 바기나 감각을 얻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쾌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남성의 시중이 필요하다. 남성이라는 조종자가 없으면 움직이지 않는 기계와 같은 것이다.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젊은 여성은 자기 체내에 그런 훌륭한 바기나 감각이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클리토리스 감각만으로 만족하며 그 이상 빠져들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때든 남성에 의해 바기나 감각을 알게 되면 이미 클리토리스 감각은 대낮의 전등처럼 의미를 잃게 된다. 결국 바기나와 클리토리스 감각에 모두 욕심을 부리는 이른바 '호색녀'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클리토리스 감각만을 알았을 때는 독립할 수 있었던 여성도 바기나 감각을 알게 됨으로써 어느새 남성에게 종속되고 만다. 생각만 해도 눈앞이 아찔해질 듯한 바기나 감각 _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남성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육체의 내적 요구로 취하게 되는 이러한 여성의 행동은 표면상으로는 여성의 헌신으로 보인다. 헌신 또는 열애하는 것이라 해도 정서가 없는, 즉 육체의 원형만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성욕 본능을 충족시키는 행위에 불과하다. 이와같이 여성이 바기나 감각을 좇는 한 여성은 남성에게서 영원히 독립할 수 없다. 오로지 집을 지키고 남편의 뜻을 받드는 일로 평생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여성의 비극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자연은 여성에게 바기나 감각과 클리토리스 감각을 동시에 주었으므로 두 가지 감각 중 어느 것을 사용하는가는 여성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지 않으면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다. 처녀는 언제까지나 바기나 감각을 모르는 채 살아간다. 하나의 쾌감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 이들 중에는 바라는 남성이 나타나지 않아 클리토리스 감각만으로 만족하고 사는 여성도 있고, 결심한 바가 있어 바기나 감각과 절연한 사람도 있다. 사랑의 허망함을 깨닫고 절로 들어가 삭발을 하는 사람은 후자에 해당한다. 경위야 어떻든 바기나 감각을 포기하게 되면 그 여성은 남성의 뜻을 떠받들 필요가 없다. 남편이 바람을 피우든 그 외에 어떤 짓을 하든 화를 내거나 슬퍼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해서 그녀는 완전히 독립된 자기 생활을 지배할 수 있다. 그 대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소리를 내며 도취하게 되는 쾌감은 이제 더 이상 그녀의 것이 아니다. 물론 어느 쪽을 택하든 그것은 여성 각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선택 과정에 남성은 전혀 개입할 수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여성은 쾌감 쪽을 선택한다. 남성에게 지배당하는 굴욕을 알면서도 쾌감을 취하는 것이다. 바기나 감각은 클리토리스 감각처럼 남성이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쾌감이 아니다. 이 감각과 비슷한 감각으로 아누스(항문) 감각이 있기는 하지만 점막이나 기관의 적응성 또는 체위로 보아 바기나 감각과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아누스 감각을 통해 쾌감을 느껴 본 남성은 페니스 감각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된다. 물론 여성 가운데 바기나 감각보다 아누스 감각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바기나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 쾌감인가에 대해서는 이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여성의 약점 남녀 평등을 논하기 위해서는 우선 앞에서 설명했던 성의 원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가정에 틀어박혀 지내는 것이 견디기 어렵다고 해도 그것은 일시적으로 따분한 감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여성은 본래 생리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성(性) 구조를 갖고 있다. 그에 대한 보상이기라도 하듯 여성에게는 바기나라는 감각을 통해 뛰어난 충족감이 주어진다. 집안에서 음식을 만들고 아이 낳는 것이 싫다고 말하면서도 좋아하는 남성을 만나 바기나 감각을 알게 되면 그 쾌감을 주는 남성을 위해 아무렇지도 않게 이런 일들을 한대서야 여성의 독립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우먼 리브를 강력히 외치며 남성을 격렬히 공격하던 여성이 영원히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리라고는 장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그 여성들 중 대부분이 독신인 데다가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외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그녀들이 남성에게서 바기나 감각을 경험할 기회를 가졌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부드럽고 황홀한 성의 쾌감을 알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런 지옥(극락이라고 해도 좋다. 사실 극락 상황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을 경험해 보지 않고 우먼 리브를 외친다면 미처 사물의 진실을 모르면서 무턱대고 그것을 싫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바기나 감각을 알고 있는 여성은 이러한 극락 상황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독립보다는 남성에게 종속되는 쪽을 택한다. 그 쾌감을 알고 있기 때문에 쾌감을 잃는 일은 아예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남성에게 사랑을 받으면서 바기나 감각을 충족시키고 있는 여성은 우먼 리브 운동을 골치 아픈 운동이라고 생각하여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현재는 충족 상태가 아니더라도 일찍이 충족된 경험을 갖고 있다든지 충족될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 놓여 있는 여성은 일시적으로 자신을 방치해 놓은 남성들에 대한 분풀이로 우먼 리브의 파도를 거세게 일으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기나 감각을 버리려고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좀더 쉽게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생겨 남성을 편하게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열리기를 남몰래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바기나 감각을 알게 된 후의 우먼 리브는 본질적인 우먼 리브와는 다른 의미가 된다. 결국 순수한 의미의 우먼 리브 운동은 바기나 감각을 알지 못하는, 이른바 미성숙한 여성들에 의해서만 전개된다. 그런데 비록 잠들어 있다고는 하나 그녀들에게도 누구나 바기나 감각이 잠재되어 있다. 한번 바기나 감각을 알게 되면 이를 버리기란 쉽지 않다. 따라서 30대 후반에서 40대에 이르는 그룹처럼 바기나 감각을 인정하는 조건부 우먼 리브가 된다. 남성은 여성을 의식적으로 구속하거나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예속되는 것은 여성들 스스로가 그 길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보니 그렇게 되어 버렸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의식이라든지 사고처럼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고차원적인 문제, 즉 대뇌피질 상부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다. 좀더 평범한 차원, 말하자면 성의 원형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난 모습인 것이다. 이는 잘못되어 있다든지, 옳다든지 하는 이성(理性)의 차원에서 논의할 문제가 아니다. 순수하게 육체적인 조건에서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먼 리브의 절대적 조건은 "여성은 육체적 조건을 바꿀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여성의 독립 '껴안는다'라는 말은 단순히 두 손으로 부둥켜 안는다는 뜻이 아니다. 주체성을 가지고 남성을 사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안기는 여자에서 껴안는 여자로'라는 말은 슬로건으로서는 이해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전혀 실행 가능성이 없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이 사랑의 과정에서 아무리 주도권을 가지고 남성처럼 행동한다고 해도 사랑의 행위를 할 때는 안기게 된다. 남성의 삽입으로 완성되는 셈이다. 예를 들어 남성이 삽입을 의식적으로 5분만 늦추더라도 여성의 사랑은 충족되지 않는다. 여성은 안달을 하며 남성에게 어서 삽입해 주기를 애원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때 주체성은 이미 남성에게로 옮겨진다. 남성은 이런 방법을 이용하여 얼마든지 주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 처음에는 싫다고 하던 여성을 철저하게 성적으로 교육시켜 호색녀로 만드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이다. 남성도 그렇지만 여성은 남성 이상으로 육체가 정신을 앞서는 경향이 있다. 그런 짓은 싫다고 할지 모르지만 인간이라는 동물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결국 모든 문제의 발단은 여성이 남성보다 성감이 지나치게 뛰어나다는 데 있다. 여성은 바기나 감각이라는 뛰어난 감각을 버리지 않는 한 남성과 동등해질 수 없다. 바기나 감각과 성의 주체성을 동시에 가지려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심이다. 자연의 창조주는 그런 욕심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쾌감을 버리고 성의 독립을 도모하든가 쾌감을 위해 남성에게 예속되는 길을 택하든가 하는 방법밖에 없다. 여성 해방을 외치는 여성은 바기나 감각이 얼마나 황홀한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손쉽게 그것을 버린다. 그러나 이를 알게 되면 버리지 않을 것이다. 경험이 많은 남성들은 본능적으로 이를 알고 있기 때문에 우먼 리브에 놀라거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바기나 감각이 있는 한 여성은 어차피 남성에게 예속되게 마련이라며 우먼 리브 운동을 하는 여성을 얕잡아 본다. 그러면서 그런 여성들을 바기나 감각을 모르는 가엾은 존재로 생각한다. 여성에게 바기나 감각이 있는 한 남성은 자신의 쾌감을 희생시켜 여성을 종속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결국 남녀의 성이 평등해져 우먼 리브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여성이 바기나라는 기관을 없애야 한다. 바기나가 없어지면 여성은 남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는 한 21세기에도 여성의 신체에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고 해서 남성이 무조건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기나는 그대로 둔 채 클리토리스 감각만을 단련시키는 여성이 출현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클리토리스 감각만 발달하고 바기나 감각은 퇴화한 여성이다. 최근 남편의 불능 상태로 인해 부득이하다는 이유로 이런 종류의 여성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다. 이 정도가 심해지면 아내들은 성적으로 만족하고 싶을 때 스스로 자유롭게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경우는 남편이 불능이라는 동정할 만한 이유로 바기나 감각이 퇴화하게 되는 것으로서 의학적으로는 일종의 폐용성 퇴화이다. 이런 퇴화가 젊은 시절부터 일반적인 경향으로 확산되면 2, 3대 후에는 바기나가 완전히 위축되어 새끼 손가락 하나가 간신히 들어갈 정도의 작은 구멍만 우묵하게 패어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 대신에 클리토리스가 비대해지면서 페니스와 비슷하게 되고, 임신은 모두 시험관을 통해 이루어지며, 아기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키우게 된다....... 이런 시대가 머지않아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남녀의 성은 독립되고 우먼 리브도 종결되면서 남성은 가사에 쫓기는 몸이 되고 말 것이다. 정리 및 결론 1. 우먼 리브를 외치는 여성들 가운데는 육체적으로는 성숙되지 못한, 또 바기나 감각을 모르는 여성들이 많은 것 같다. 따라서 그녀들은 성적으로 보면 일종의 불만족자인 셈이다. 이는 성적인 만족을 알게 되면 그런 주장을 철회할 가능성이 항상 존재한다는 뜻이 된다. 2. 성의 독립이 선행되지 않는 한 진정한 의미의 여성 해방은 불가능하다. 그런 의미에서 바기나 감각을 버리고 클리토리스 감각만으로 만족하려는 각오를 하는 것만이 해방을 위한 근본 조건이 된다. 3. 앞으로 바기나가 퇴화하고 클리토리스가 비대해지는 여성의 육체적 변환이 일어난다면 우먼 리브는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이런 현상이 실제로 일어날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겠지만 전혀 가능성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히스테리 히스테리의 원인 히스테리는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그리스 시대부터 변함이 없는 것 같다. 그리스인들이 히스테리를 자궁 근처에서 변조(變調)가 일어나 생기는 현상으로 이해했다는 이야기는 그럴 듯하게 들린다. 아닌게 아니라 히스테리는 여성에게 많고 또 여성이 여성다움을 보여 주는 부분은 자궁, 즉 그리스어로 우테르스이다.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원인, 즉 유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들 수 있는 원인은 놀라움, 분노, 흥분 등의 정신적인 감동이다. 이는 또 추락, 화상, 충돌 또는 강한 전류에 의해 급격히 주어지는 자극을 받았을 때도 일어나게 되는데, 이때 원인이 되는 것은 신체의 외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때문에 생긴 정신적 충격이다. 어쨌든 정신적 감동이라든가 격동이 주된 원인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한편 이러한 원인에 부딪치게 되었을 때의 반응에 따라 사람의 유형을 구분해 볼 수 있다. 즉 쉽게 반응을 보이며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타입과 여간해서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 타입이다. 이 가운데 히스테리를 잘 일으키는 타입의 사람에게는 히스테리 소질 또는 히스테리 체질이라고 할 수 있는 특성이 나타난다. 이는 유전적인 것이어서 가족 중에 여러 명의 히스테리 환자가 생기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히스테리는 선천적인 요소를 가진 체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히스테리 체질이 모두 선천성에 의해서만 생기는 것은 아니다. 생활 환경이 히스테리 발생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가족 중에는 히스테리 기질을 보이는 사람이 전혀 없는데 복잡한 가정으로 출가를 하는 바람에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예도 있다. 이때는 선천적인 기질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인 주변 조건이 히스테리를 일으키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소아기의 교육이 정신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어렸을 때부터 제멋대로 구는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두거나 헛된 공상이나 망상에 빠져 있는 아이를 자극하여 정신을 과로하게 만들 때, 또 너무 일찍 과중한 교육을 시킬 때 아이의 신경 계통은 저항력이 약해진다. 이러한 일들이 성장 후에도 히스테리의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정신 의학자들에 의해서 이미 증명된 바 있다. 히스테리 병(사실 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신 긴장 상태라고 부르는 것이 합당하지만 여기에서는 편의상 병으로 부르기로 한다)은 선천적 기질에 후천적 기질이 겹쳤을 때 더 분명히 나타난다. 현재 히스테리에 대해서는 통계가 그리 많지 않고 또 각 국가나 인종, 연령층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고 있지만 보편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이 7 ~ 8배 정도 많은 편이다. 이 말은 히스테리 환자 10명 중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모든 환자가 여성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런데 이 숫자는 분명한 히스테리 환자로서 병원에 수용되어 정신 치료를 받을 필요가 있는 환자의 통계이다. 실제로 우리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히스테리, 즉 히스테리 환자 예비조는 20 대 1 정도로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거의 모든 여성이 히스테리 환자가 될 가능성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다음으로 발병 연령층을 살펴보면 15~25세의 사춘기에 가장 많이 나타난다. 그것은 이 시기가 정신적으로 동요가 심하고 충격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많은 연령층이 갱년기의 여성과 30∼40대의 중년 여성순이다. 또 10세 정도의 어린이에게서도 증상이 나타난다. 특히 1~3세 유아에게서 간혹 나타나는 히스테리 증상을 소아 히스테리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신경질적인 일부 어린이도 포함된다. 인종면에서 보면 독일인보다는 프랑스인에게서 더 많이 나타나고 특히 유태인에게서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스테리 증상은 한때 여성의 성기에서 반사적으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성기에 아무런 질환을 앓고 있지 않은 여성과 남성, 유아에게서도 히스테리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이 주장은 잘못임에 틀림없다. 물론 히스테리가 성기에 이상이 있는 여성에게서 가장 흔히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성기의 병이 여성에게 정신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인 듯하다. 병 자체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나중에 다시 설명하겠지만 바로 이 같은 의미에서 월경, 임신, 산욕, 금욕 등이 히스테리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프로이트 등이 히스테리는 모두 성에 대한 정신적 원인 때문에 일어난다고 말할 정도로 히스테리의 원인으로 성을 중요시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현재 히스테리가 정신적 요인에 기인한다는 데는 많은 학자들이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나 모든 것을 완전히 성 문제에 기인한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시각에는 이견을 보이고 있다. 프로이트의 시각에 반대하는 학자들이 내세우는 주장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유소아기에 나타나는 히스테리와 남성의 히스테리가 반드시 성과 관련이 있다고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한두 살 먹은 유아에게 성적 욕망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어른의 입장에서 유아의 생각을 추론해 본 데에 지나지 않는다. 유아의 진짜 심리가 무엇인가는 유아만이 확실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시기에 벌써 그들의 의식 속에 성과 관련된 욕구나 불만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또 하나 프로이트설에 대한 반증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성인 남성들이 군대에서 흔히 일으키는 전쟁 공포증과 같은 히스테리이다. 이런 종류의 히스테리는 성보다는 전쟁을 기피하려는 욕구가 앞서서 발생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랜 기간의 군대 복무로 인한 금욕 생활 때문에 발병의 후천적 요소가 나타났다면 성적 요인을 부정할 수만도 없는 일이다. 여하튼 모든 요인을 성적인 것으로 보는 프로이트의 학설에는 나로서도 찬동하기 어렵다. 히스테리의 여러 증상 히스테리의 증상은 참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의학적으로는 지각성(知覺性), 감각성, 운동성, 정신성 등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우선 지각 장애는 히스테리 증상 가운데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으로서 피부의 지각 과민과 지각 마비라는 정반대의 두 유형으로 나타난다. 이 가운데 가장 흔한 증상인 지각 마비는 갑자기 또는 서서히 일어난다. 마비는 전신의 각 부분에 얼룩진 모양으로 번지는데 때로는 좌반신 전체에 광범위하게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그와 동시에 촉각(觸覺), 통각(統覺), 온각(溫覺), 냉각(冷覺)과 같은 피부 감각과 목구멍, 항문, 질(膣)의 감각도 상실되어 불감증에 걸리거나 대소변을 무의식중에 배설하는 경우도 생긴다. 지각 손실 부위는 때때로 특별한 이유도 없이 옮겨지거나 형태가 달라지거나 한다. 또 경련이나 발작 직전에는 그 범위가 축소되거나 확대되기도 하는데, 발작이 일어나면 지각이 되돌아온다. 그와 동시에 발작 부위에 땀의 분비 이상이 생겨 땀을 몹시 흘리거나 반대로 발한(發汗) 불능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증상의 변동에서 흥미로운 것은 최면술의 암시로 증상이 간단히 이동한다는 사실이다. 최면술로 오른쪽 유방 주변에 있던 지각 마비를 왼쪽 허벅지 쪽으로 이동시킬 수도 있다. 피부 지각 과민 증상은 제멋대로 생기는데, 대체로 심장과 척추 또는 좌우 난소의 중앙 부위에서 나타나기 쉽다. 이 부분을 의학적으로 히스테리 존(Hystery zone)이라고 하며, 심한 경우에는 그 부분을 누르기만 해도 발작을 일으킨다. 히스테리성 마비는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후에 나타나며 수족, 특히 다리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보통 하반신이 마비되면 무릎을 움직일 수도, 발목을 구부릴 수도 없다. 그런데 히스테리성일 경우에는 팔을 움직일 수는 있으나 글씨를 못 쓴다거나 두 다리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데 설 수 없는 등 마치 마비 자체를 과시라도 하는 것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또 이러한 증상은 암시나 마취로 간단히 소실되거나 이동하는 것이 특징이다. 분비 배설 작용의 이상도 나타난다. 이를테면 소변이 나오지 않거나 땀을 많이 흘리거나 침을 많이 흘리기도 하는 것이다. 발작이 수그러지기 직전에 주로 나타나는 이러한 증상들은 모두 자율 신경의 일종인 교감 신경의 실조에 따른 증상이다. 소화 불량, 위통, 변비, 설사와 같은 위장 장애도 마찬가지로 자율 신경의 실조로 인해 일어나는 증상이다. 히스테리 환자 중에는 자주 구토를 일으키는가 하면 한 번 먹은 음식을 다시 입 밖으로 내놓았다가 다시 먹는 반추를 반복하는 사람도 있다. 또는 공기를 위 속으로 깊이 들여마시는 통에 배가 불러져서 다른 사람들이 복막염이나 임신으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부른 배는 클로로포름 마취제를 사용하면 금방 가라앉기 때문에 경험이 많은 정신과 의사라면 즉시 알아차릴 수 있다. 히스테리성 발작은 크게 대발작과 소발작으로 나눌 수 있다. 소발작의 경우에는 가슴의 압박감과 불안, 현기증 등을 호소하면서 시작하여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져서는 눈을 감은 채 말을 하지 못하게 된다. 동시에 호흡과 심장 고동이 빨라지고 안색이 빨갛게 변하거나 창백해지면서 온몸에 경련을 일으킨다. 여성이 이런 증상을 나타낼 경우 남성은 즉시 얼굴이나 등에 냉수를 끼얹어 주면서 그녀가 히스테리를 일으킨 원인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만일 짐작이 갈 때는 즉시 암시를 주도록 한다. 예를 들어 바람을 피우는 광경을 목격해서 발작을 일으킨 것으로 보일 때는 "사실 난 그런 여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신이 백 번 낫다구. 남들도 모두 당신이 훨씬 더 예쁘다고 해.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라고 추어올린 다음 정열적으로 키스라도 한번 해주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런 증상에는 약보다 암시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대담하게 애정 표시를 할 필요가 있다. 대발작은 글자 그대로 소발작보다 훨씬 심한 발작이다. 이 방면의 연구자로 유명한 프랑스의 샬코에 따르면 대발작은 3기로 나뉜다. 1기에는 환자가 간질과 같은 경련을 일으키며 자리에 쓰러져 거의 의식을 잃는다. 2기에는 환자가 배를 내밀면서 몸을 활처럼 뒤로 젖히고는 땅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른다. 그러다가 가끔씩 일어난다. 3기에는 환자가 개성적인 자세를 취하면서 어떤 종류의 감동을 나타내려 한다. 하늘을 향해 턱을 내밀고는 절망적인 자세를 취한다든가 한쪽 손을 이마에, 다른 한 손을 가슴에 대고 슬픔에 잠긴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과정이 히스테리의 풀코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환자를 만나 보면 3기가 반드시 정형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각 기의 증상들이 서로 뒤엉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육체적 경련 발작과 함께 정신적인 경련, 정신의 병적 흥분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발작 증상을 볼 수가 있다. 이 발작에는 에코라지아(언어 모방) 등이 있는데 듣기에 낯뜨거운 욕설을 퍼붓거나 상대방이 말한 것을 구관조처럼 되풀이하기도 한다. 증상의 특이성 이상으로 여러 가지 증상을 살펴보았는데 이들 증상을 기준으로 하여 히스테리 환자를 크게 나누면 다음 세 가지 형태가 된다. 1. 히스테리의 특유한 신경 증상으로는 흥분하기 쉽다는 것, 또 암시에 걸리기 쉬운 성격이지만 평소에는 정상인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일단 정신적인 자극을 받으면 이런 성격이 강하게 표출되는 동시에 두통, 심계 항진(心悸亢進 : 심계가 빨라지고 세어지는 것), 식욕 부진, 호흡 곤란 등을 호소하게 된다. 2. 평소에는 정상인과 다름이 없지만 한번 자극을 받게 되면 마비, 경련 발작, 수족 떨림, 지각 이상 등을 나타낸다. 이런 증상들은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 계속되기도 하는데,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소실되기도 한다. 또 일부는 다른 질환으로 이행한다. 3. 중증 히스테리로서 대발작 외에 앞에 예를 들었던 각 증상을 나타낸다. 여기서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이러한 병상(病傷)의 기본을 형성하는 정신적 장애이다. 히스테리 환자에게는 모두 정신적 장애가 나타나며 그 형태도 정해져 있다. 즉 갖가지 영향에 자극되어 감정적으로 흐르게 되기 쉽고, 극단에서 극단으로 치닫는가 하면 희노애락에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기도 하는 것이다. 이들은 사물을 과장하고 특히 자신의 증상을 과장해서 표현하고 동정해 줄 것을 호소한다. 또 이들은 이기적 감정이 강하고 대체로 영리하고 민첩한 면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굼뜨고 미련한 면도 보인다. 한편 히스테리 환자의 육체적 특징을 살펴보면 히스테리는 대개 약하고 여윈 사람에게 많으나 때때로 비만한 소심자에게서도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상에서 히스테리 환자의 정신적,육체적 특징을 알아보았지만 사실 히스테리 환자들이 나타내는 모습 중 가장 재미있는 모습은 쓰러질 때의 모습이다. 히스테리 여성이 쓰러지는 것은 어디가 아프다거나 고통스럽다거나 하는 육체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어떤 정신적 자극이 원인이 되어 흥분한 끝에 쓰러지는 것이다. 현기증이 난다거나 구역질이 난다고 해도 의식을 잃지는 않는다. 그녀는 "나는 지금 왜 쓰러졌는가"라는 목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쓰러지는 모습이 무척 합리적이다. 그녀는 상대방이 방금 전에 그녀에게 준 자극으로 자신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가를 과시하면서 상대방에게 주목을 받으려 한다. 그런 다음 상대방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존재 가치를 더 높이고 싶은 것이다.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쓰러지면서 다친다는 것은 손해를 보는 짓이다. 절대로 다치는 일 없게....... 자기 중심적이고 위장적인 성격이 이처럼 쓰러지는 방법에서 잘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위장된 동작을 잘 아는 사람이라면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상대방이 "이왕 쓰러졌으니 천천히 잠이나 주무시지." 하고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기색이면 그녀는 더 큰 소리를 내면서 손발을 파닥거리다가 끝내 아우성을 치고 만다. 그녀는 어떤 식으로든 주위의 시선을 끌려고 한다. 마치 어른에게 이길 가망성이 없을 때 아이들이 발악을 하며 몸부림을 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어떻게 보면 밉살스럽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귀여운 면도 있는 행동이다. 분명한 것은 열심히 자신을 주장한다는 점이다. 선악에 앞서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행위인 것이다. 애를 태우게 하지만 그녀의 행동에는 본질적으로 악의가 없다. "그래, 그래. 내가 잘못했어." 하고 다정한 말을 건네면서 정말 당황한 것처럼 보이게 동작을 취하면 그녀는 자신이 한 행동이 효과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서서히 얼굴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나서 슬그머니 일어선다. 마치 엄마에게 매를 맞은 아이가 소리 내어 울다가 엄마가 때린 곳을 어루만지며 다독거리면 울음을 뚝 그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히스테리 여성의 특질을 잘 모르는 사람은 정말 당황하여 이웃사람을 부르러 간다든가 의사를 부르는 등 소란을 피우게 된다. 주위 사람들도 덩달아서 심장이 멎은 건 아니냐, 맥이 뛰지 않는 건 아니냐며 겁을 먹는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의식을 완전히 잃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살며시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소동을 일으키면서 히스테리 여성은 일종의 자기 만족을 느낀다.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이나 된 듯한 착각 속에 빠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슬픔이나 분노처럼 어떤 순수하고 정신적인 격동으로 인해 발작이 폭발한다. 그러나 발작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히스테리 여성 자신이 정신적 충격으로 얼마나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상대방에게 알리는 데 있다. 그런 상황에 타인을 끌어들임으로써 자신을 알아 주게 만들려는 것이다. 히스테리 발작의 제1막은 자기 암시에 걸린 여성이 주연하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스타는 오로지 히스테리 여성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관객에 지나지 않는다. 관객이 많으면 많을수록 연기자는 보람을 느낀다. 말하자면 혼자서 연기하는 일종의 일인극이지만 처음에는 상대방(예를 들어 바람을 피워 그녀에게 정신적 자극을 준 남성)도 그녀가 꾸민 무대의 필연성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연자라 할 수 있다. 히어로(Hero)가 있기 때문에 헤로인(Heroine)이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헤로인이 탄생하여 사랑의 고통과 슬픔을 호소하다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발작을 일으키고 나면 그 뒤는 그녀의 독무대가 된다. 조연자는 쩔쩔매면서 영문을 몰라 관객석과 무대 뒤를 이리저리 돌아다닌다. 여기서 관객은 급히 연락을 받고 몰려온 사람들이 된다. 관객이 주연 여배우의 연기에 몰입하여 정말 불쌍하다고 생각하게 되면 연기의 목적은 일단 어느 정도 달성된 셈이다. 상대방 남성이 크게 뉘우쳐 주연 여배우에게 사과하게 되면 대단원이 가까워졌다는 신호가 된다. 비극의 여주인공은 여기서 마지막으로 목놓아 소리 높여 운다. 기승전결의 전에 해당되는 상황이다. 그러나 큰 격동이 지난 뒤인 만큼 여기서 연기를 끝낸다면 너무 싱거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염없이 울다가 때로 몽롱한 눈으로 관객석을 바라보기도 한다. 마치 "내가 호소하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예요."라고 말하듯 어떤 상징적 포즈를 취해 보이는 것이다. 히스테리의 증상을 다루면서 설명한 바 있는 이 개성적이고 정동적(情動的)인 자세는 이제 무대가 대단원의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때쯤이면 관객들은 주연 여배우가 무엇을 호소하려 했었는지를 알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인다. 딱한 여성이니 잘 대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관객의 마음 한편에는 상대 남성에 대한 비난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막이 내린다. 주연 여배우는 하늘을 우러러보거나 땅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등 상징적 포즈로 막을 마무리한다. 그리고 이때 히스테리 여성에게 연기를 하게 만든 남성이나 주위 사람들이 그 원인을 제거해 주면 그녀는 당분간 무대에 서지 않는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히스테리 여성의 피암시성(被暗示性)은 특별 발작(特別發作)을 일으켰을 때 가장 심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단 발작이 시작되면 이 망상은 깨끗이 잊게 된다. 피최면자의 상태, 즉 최면 상태는 이런 의미에서 히스테리 발작과 같다. 즉 최면술은 인공적으로 발생시킨 히스테리 상태인 것이다. 히스테리는 어떤 사소한 사건에 암시가 걸려 눈사람처럼 커지게 되어 발생하는 것이므로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이 암시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바람을 피운 것이 원인이라면 우선 "내가 바람을 피우다니, 난 당신밖에 없어. 난 당신이 제일 좋단 말이야."라는 말을 수천 번이라도 해야만 한다. 말하자면 그녀에게 오로지 그녀만을 사랑하고 있다는 암시를 거는 것이다. 이때 입으로만 하는 것보다는 값싼 물건이라도 선물을 한다든가 바람 피운 상대 여성이 준 편지 같은 것을 그녀가 보는 앞에서 찢는다든가 하면 더 효과적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가장 효과가 있는 방법은 섹스이다. 여성의 히스테리는 대부분, 아니 거의 모두 성 문제 때문에 발생한다. 성 문제 중에서도 성의 불만족이나 불일치가 가장 큰 요인이다. 그러므로 성적인 만족을 주는 것이 히스테리에 대처하는 가장 신속하고 효과적인 방법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대가 발작을 일으키면 일단 견뎌 내도록 한다. 발작은 기껏해야 30분에서 한 시간이면 끝나기 때문이다. 발작을 했을 때는 물건을 내던져 깨뜨리거나 부수면 곤란하므로 위험한 물건은 미리 치워 두도록 한다. 사실 완전히 의식을 잃은 것은 아니므로 그녀가 소중하게 생각되는 물건을 부수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녀가 부수거나 깨뜨리는 것은 상대편 남성이 좋아하는 수집품이라든가 화분 등이거나 떨어질 때 요란한 소리를 내는 유리 기구 같은 것들뿐이다. 어쨌든 그녀가 발작을 하다가 지쳐서 멈추려는 기색을 보이면 그 순간을 놓치지 말고 그녀에게 달려들어 꼭 끌어안아야 한다. 그녀는 더럽다고 외치면서 밀어낼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녀가 마지막으로 보여 주는 연기이다. 그러므로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계속 반항하면서 뺨을 두서너 대 때려 대면 억지로라도 끌어안으며 키스를 하면 된다. 이상의 의학적,경험적 고찰을 통해서 우리는 히스테리 여성의 심층 심리를 살펴볼 수 있다. 그녀들은 이미지(image, 心象)가 풍부하고 피암시성이 뛰어난 나르시스트이다. 나르시스트적인 자기 중심주의는 외적으로는 자기 현시가 되고 내적으로는 내공적(內功的)이어서 외로움을 잘 탄다. 히스테리 여성의 정신 활동, 정동 반응의 원점은 모두 이와 같은 심층 심리에서 출발되는 것이며 이것으로 그녀들이 보이는 모든 행동을 설명할 수 있다. 히스테리 여성과 사는 남성 이 세상에는 진력이 나지도 않는지 히스테리 여성과 용케 살아가는 남성이 있다. 남들은 왜 그런 여자와 사느냐며 차라리 헤어지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사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히스테리 여성과 사는 일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나르시스트에다가 감정적이고 이기적이며, 의심을 잘 하고 거짓을 잘 꾸며 대는 연기파인 히스테리 여성은 따지고 들면 좋은 점이라고는 거의 없다. 굳이 괜찮은 점을 예로 들자면 비교적 영리하고 상상력이 풍부하다는 것이다. 앞에서 예를 든 결점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러한 표현들은 모두 남성의 입장에서 히스테리 여성을 보았을 때 나온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특성이 이 말 속에 고스란히 망라되어 있다. 확실히 그녀는 여성 중의 여성인 것이다. 아무리 골칫거리이고 악녀라도 남성은 여성이라는 객체를 통해서 여성의 본질을 찾고 있다. 플러스와 마이너스가 서로 끌어당기듯이 자기에게는 없는 것에 마음이 끌리게 된다. 히스테리 여성이 본연의 여성다움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조건이 된다면 그런 여성과 함께 사는 남성에게도 여성다운 여성을 수중에 넣었다는 조건이 충족되는 셈이다. 바람을 피웠다고 울며불며 난리를 치는가 하면 자신의 외출복이 이웃집 여자 것만 못한 것이 분해서 새옷을 사내라고 조른다. 또 약간 피곤해서 섹스를 게을리하면 자신과 회사 중 어느 쪽이 중요하냐고 추궁한다. 이런 유형의 여성이 남성에게 부담이 되고 견디기 힘든 면이 많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적어도 타인들이 보기에는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만일 히스테리 여성과 정반대의 태도를 보이는 여성이라면 어떻겠는가. 남편이 바람을 피워도 한마디 말이 없고 이웃집 여인보다 좋은 옷이 없어도 짜증을 내지 않으며, 섹스를 하지 않아도 원망할 줄 모르는 여성을 상상해 보라. 과연 그런 여성이 좋을까. 후자는 일종의 현부인이다. 물론 이런 여성은 남성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다. 편하다. 그러나 남성이 진정한 의미에서 이런 유형의 여성에게 끌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남성은 호색가이고 엽색가이며 체면치레를 잘 하는 동물이다. 정말 두통거리다. 못났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자신을 숨김 없이 드러내는 여성을 좋아하는 측면이 많다. 히스테리 여성과 지냄으로써 남성은 일종의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지성이라는 억제력을 지니고 있는 남성일수록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히스테리 여성에게 강하게 끌린다. 그것은 히스테리 여성을 통해 자기 자신은 할 수 없는 일, 즉 감정을 곧이곧대로 표현해 내는 데 대한 동경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히스테리 여성의 흡인 요소가 그런 심리적인 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하나의 생각에 몰입하는 힘이나 피암시성이 강하다. 그리고 주변 상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는 파렴치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경험이 있는 남성 독자라면 이미 알고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이런 유형의 여성이 섹스 면에서는 매우 탁월하다. 모든 것을 잊고 한 가지에 열중하기 때문에 본능에 충실한 히스테리 여성들은 섹스를 할 때도 탁월한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들은 나르시스트이기 때문에 한번 고삐를 잘못 잡으면 독주를 하여 남성을 따돌린다. 어설픈 풋내기들은 감당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유형의 여성을 길들여보고 싶다고 말하는 남성도 있다. 어쨌든 히스테리 여성과 헤어지지 못하는 남성의 심리 저변에는 히스테리 발작 뒤의 멋진 섹스를 잊지 못한다는 것도 하나의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다. 같은 히스테리라고 해도 그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적당히 구슬리며 지낼 수 있는 정도라면 모르되 극단은 곤란하다. 어쨌든 가벼운 히스테리를 보이는 여성이 남성들에게는 하나의 이상상(理想像)이 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리 및 결론 1. 히스테리 여성은 피암시성이 뛰어난 나르시스트이다. 나르시스트적인 자기 중심주의는 외부에 대해서는 자기 현시로 나타나고 내면적으로는 외로움으로 나타난다. 히스테리 여성은 피암시성으로 인해 감정이 격하고 망상이 많으며 거짓을 잘 꾸미는 연기파가 된다. 2. 이상과 같은 성격에는 선천적 원인 외에 후천적 원인도 작용한다. 후천적 원인 가운데 중요시되는 것은 성문제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이런 유형의 여성은 계속 늘어날 것이다. 3. 히스테리 여성은 여성의 원형을 숨김 없이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여성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여성다운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4. 이런 유형의 여성은 일반적으로는 악녀이다. 그러나 제대로 통제를 할 수만 있으면 남성에게 심리적인 우월감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성감이 뛰어나 섹스의 묘미를 알게 해줄 가능성이 높은 여성이다. 교회에서의 맹세 교회에서 예식을 올릴 때 신랑은 목사에게서 "신부를 아내로 맞아 영원히 사랑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 신부도 마찬가지 질문을 받는다. 이때 남성과 여성은 똑같이 "예!"라고 대답하면서 영원히 한 이성을 사랑할 것을 다짐한다. 서로 사랑하고 있는 그들은 그 순간 황홀감에 빠지면서 자기 옆에 서서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성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그들의 맹세가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하객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혹시 아직 미혼인 경우라면 또 모르지만 결혼 경험이 있거나 인생이라는 단맛 쓴맛을 다 본 사람이라면 그리스도 앞에서 맹세했다고 해서 사랑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간단히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부모들만 해도 "이제 하나님 앞에서 맹세했으니 언제까지나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말은 하겠지만 두 사람의 앞날이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 짓。고 질투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세상 물정 모르는 한 쌍이 또 쓸데없는 약속들을 하는군." 하고 마음속으로 동정 섞인 야유를 보낼 것이다.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는 이런 류의 사람들은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가장 심술。은 이는 사실 그런 맹세를 하게 만든 그리스도 그 분인지도 모른다. 그리스도는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인 사랑이라든가 식욕에 대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하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 이를테면 "보라, 배가 고플 때는 음식을 영원히 먹도록 하라."라든가 "성에 굶주렸을 때는 가까운 이웃을 범하도록 하라."라는 맹세를 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단 한 가지 결혼에 대해서만은 "한 사람만을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교회에서 예식이 올려졌다고 해서 새삼스럽게 그런 맹세를 하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무래도 연출이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남녀의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것을 가장 믿지 않았던 이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리스도는 하나의 사랑이 그렇게 오랫동안 지속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두 남녀에게 맹세를 하게 함으로써 사랑의 붕괴를 사전에 막아 보려 했을지도 모른다. 굶주리고 있을 때 음식을 먹으라든지 성욕을 느낄 때 이성을 구하라든지 하는 행위는 새삼스럽게 맹세를 하지 않아도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는 행위들이다. 그러나 한 쌍의 남녀가 서로 영원히 사랑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는지도 모른다. 도덕이나 윤리처럼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게 만든 인위적 계율인지도 모른다. 서로 사랑하는 젊은 남녀들은 사랑이 영원히 유지되는 것을 매우 자연스럽고 이치에 합당한 것으로 믿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다. 바로 그 순간 두 남녀는 붉은 망토를 향해 돌진하는 소가 된다. 두 남녀에게는 붉은 천만 보인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냉정하게 모든 것을 바라 보고 있을 것이다. '맹세'라는 것은 본래 자연스러운 모습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연스러운 마음의 흐름을 다른 방향으로 무리하게 비틀어서 가게 할 때 성립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운동 선수들은 개회식에서 큰 소리로 "우리는 정정 당당하게 싸울 것을 다짐합니다."라고 외친다. 만일 진정한 운동 선수라면 그런 맹세 따위는 애초부터 필요가 없다. 그런데도 그런 맹세를 하는 것은 자칫하면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 비겁한 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순간 선수들은 "그렇다, 정정 당당하게 싸워야 한다."라고 생각하며 당당하게 싸울 것을 다짐하게 된다. 자기 암시에 걸려 마음속에 있던 자연스러운 흐름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려 놓는 것이다. 결혼식 때 하는 맹세에도 이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인간에게 가장 약점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소리 내어 맹세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서로 사랑하고 있는 젊은 두 남녀에 대한 심술은 망언이라고 해야 할까. 결론은 이 장의 내용을 모두 읽은 다음 각자가 신중하게 내려 주었으면 한다. 결혼애에 대하여 두 남녀의 사랑이 영원하리라고 순직하게 믿고 있는 사람을 비율로 따지자면 여성쪽이 압도적으로 많다. 꿈 많은 소녀는 물론이고 노처녀에서 유부녀, 갱년기의 여성까지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들은 늙은이나 젊은이나 모두 사랑의 영속성을 믿고 있다. 드물기는 하지만 그 중에도 사랑은 불꽃 같은 것이어서 그렇게 오래가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여성들도 있지만 이런 여성들은 불감증인 경우가 많다. 그 까닭은 뒤에서 설명하게 될 것이다. 어쨌든 여성은 사랑의 영속성을 믿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자라는 성(性)은 어쩌면 행복하고도 부러운 성이다. 이와는 달리 남성은 사랑의 영속성을 믿지 않는다. 여성을 안 지 적어도 일년 이상 된 남성이라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망정 한 이성과의 사랑이 그렇게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며 언젠가는 무너지거나 변질되리라는 것을 막연하게나마 느끼게 된다. 하기는 아직 궁둥이가 퍼런 고교생이라든가 발육이 늦은 대학생 또는 어떤 여성에게 완전히 빠져 있는 남성이라면 여성과 마찬가지 상황일 수도 있다. 요컨대 인생 경험이 없이 정열만을 내세우는 남성들의 경우라 할 수 있다. 이런 유형의 남성들이 사랑을 보는 관점은 여성의 시각과 별로 차이가 없다. 그러나 남성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랑의 영속성을 믿는 착각 속에서 점차 눈을 떠가는 데 반해 여성은 여전히 그런 착각 속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데에서 바로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차이는 지능이라든가 감수성 때문이 아니라 생리적인 이유 때문에 발생한다. 그런데 이런 차이점을 다루기 전에 먼저 사랑이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다룰 필요가 있다. 사전에는 사랑을 귀여워하는 것, 연애, 중히 여기는 일, 애호 등으로 정의하고 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 이미지를 구체적으로 기술하면 이처럼 싱거운 풀이가 나오지만 이를 포괄적으로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사랑이란 '이성에 대한 일종의 긴장 상태'라고도 할 수 있다. 그 사람을 생각하면 가슴이 조여드는 것만 같은, 한시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상태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기로 했을 때 여성은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마음에 한껏 치장을 한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사랑하고 싶어한다. 남성도 마찬가지여서 거울을 보고 양복을 좋은 것으로 골라 입는 등 신경을 쓴다. 말씨는 물론 태도에서도 상대방의 호감을 사기 위해 애쓰는 것이 역력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계산된 것이다. 난폭하게 굴거나 아무 데서나 방뇨를 하는 등의 촌스러운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평소에는 쾌활하고 장난도 잘 치던 남성이 어느 여성 앞에서는 갑자기 의젓해진다면 그녀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남성이든 여성이든 모두 정신이 긴장되어 동작도 부자연스러워진다. 이러한 정신적 긴장은 신체에도 영향을 미친다. 정신적인 긴장은 교감 신경의 긴장 상태라고 볼 수 있는데, 이때 맥은 빨라지고 감각은 예민해진다. 상대방의 사소한 행위도 즉시 전달된다. 이는 성적으로도 영향을 미친다. 남성의 발기, 여성의 분비 등은 정신 작용이 대뇌피질에 전달되어 그곳에서 말초 신경에 전달한 명령의 결과이다. 결국 긴장이 없으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사랑이라는 상황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정신적인 긴장 상태는 차차 무뎌진다. 마치 활을 당긴 상태가 언제까지나 지속되지 않는 것처럼 언젠가는 긴장이 풀려 느슨해지는 시기가 닥친다. 전에는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던 것이 결혼이라는 상태에 돌입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한 지붕 밑에서 살기 때문에 만나고 싶을 땐 언제나 만날 수 있다. 이야기하고 싶을 땐 언제나 이야기할 수 있다. 상사나 부모도 이젠 전혀 간섭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지난날 두 사람 사이에 존재했던 팽팽한 정신의 긴장은 사라진다.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했던 만남의 가치는 줄어들고 함께 지낼 때 느끼던 기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만다. 충족된 조건이 오히려 사랑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결국 이완된 생활만 남게 되는 것이다. 주위의 거센 반대를 무릅쓰고 정열을 불태우며 결혼했지만 막상 함께 되고 보니 의외로 싱거운, 평범하기 그지없는 상황이 기다리고 있어서 실망을 하고 마는 것이다. 이 상황은 인간을 생기 있게 만드는 정신적 긴장이라는 조건을 결혼을 통해 잃게 됨으로써 발생한다. 정신적 긴장으로 인해 이루어졌을 사랑의 일부분이 소멸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결혼은 분명히 사랑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불륜 속에서만 성립된다"는 말은 이런 의미에서 맞는 말이다. 특히 용납될 수 없는 불륜에서 남성과 여성의 순수한 사랑을 찾을 수 있다. 어쩌면 불합리해 보이는 듯한 이 말은 사실은 이치에 맞는 말이다. 본처는 사회적으로 허용된 결혼이라는 상태에 들어가면 안정을 얻지만 그 대신에 진실한 사랑은 잃게 된다. 불타는 사랑의 기쁨을 희생시키고 아내라는 안정된 자리를 얻는 셈이다. 이와는 달리 불륜적인 사랑을 하면서 애를 태우는 여성은 본처와는 달리 애인이라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면서도 남성의 진실한 사랑을 받고 있다. 터놓고 이야기할 수 없는, 즉 사회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사이이기 때문에 남성은 상대방에게 더 정열을 불태운다. 그리고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여성에 대한 일종의 보상 심리에서 더욱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이처럼 어떤 이유로 인해 사랑이 더 깊어지고 정신이 긴장되는 상태에 있을 때 두 사람의 사랑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더욱 더 불타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관계에도 역시 한계가 있다. 불륜이라는 상황이 사랑을 고양시킨다고는 해도 그런 상태가 언제까지나 계속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런 불륜 관계도 심드렁해진다. 또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실은 육체적으로도 늙어 간다는 점이다. 어쨌든 간에 긴장의 시대는 사라진다. 그것은 사랑이라는 긴장 상태가 시작될 때부터 이미 정해져 있던 수순이다. 정신의 긴장이라는 비장의 카드가 사라졌을 때 영원을 맹세한 사랑은 어떻게 되는가. 결혼애는 바로 이 비장의 카드를 상실하고 만 불리한 조건에서의 사랑이다. 그런데도 그리스도는 결혼하는 두 남녀에게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게 하고, 또 두 남녀는 그 명령에 기꺼이 따르려 한다. 그것이 얼마나 가혹한 부담인 줄도 모르는 채 ....... 결혼애의 실태 결혼식 때 했던 맹세가 가혹한 요구였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게 되는 쪽은 남편이다. 깨닫는 속도나 형식은 사람마다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어쨌든 남편 쪽이 먼저 깨닫는다. 이렇게 말하면 "아니예요, 우리들도 정작 같이 살아 보니 결혼에 대해 환멸을 느낄 때가 있다구요." 하고 말할 여성도 있을 것이다. 실망은 남성의 전용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실망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성의 경우에는 함께 살다 보니 뜻밖에도 남편의 봉급이 너무 적었다든가, 제멋대로 구는 사람이었다든가,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너무 심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매우 현실적인 불만을 갖는다. 이러한 불만은 매우 구체적이기 때문에 개선의 여지가 있다. 남편이 제멋대로 구는 태도를 삼가고, 봉급이 오르고, 분가를 하게 되면 해소될 수 있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남성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남성의 실망은 보다 더 추상적이다. 다시 말해서 정신적인 측면에서의 실망이다. 이는 상대방 여성이 사치스러움을 고친다거나 수다스러움을 고친다고 해서 회복될 수 있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다. 언뜻 보기에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불만도 아내가 수다스럽다든가, 깔끔하지 못하다든가 하는 구체적인 불만에서 연유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더 깊숙이 들어가 보면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나는 과연 이 여자를 영원히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막연한 불안에서 비롯된다. 이 불안에는 무엇을 어떻게 하면 사랑을 지속시킬 수 있다든지 하는 구체적인 대응책이 없다. 막연하게 표류하는 것 같은 감각이다. 처치 곤란한 이러한 감정은 남성의 마음을 야금야금 잠식해 가고 있다. 남성의 실망이 정신적 추상적이라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남성 쪽에서 이처럼 급속하게 또 근본적으로 결혼애라는 것에 실망하고 자신을 잃어 가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이와는 달리 구체적인 불만들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성들이 실망하지 않고 결혼에 의한 영원한 사랑을 믿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우리는 결혼애의 실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녀의 성애(性愛) 차이 성적 경험면에서 보면 결혼하는 남녀의 유형에는 여러 형태가 있을 것이다. 성적 경험을 많이 쌓은 플레이보이와 처녀의 경우도 있을 것이고, 성적 경험이 풍부한 여성과 동정에 가까운 남성의 경우도 있을 것이다. 성의 해방이라는 말이 통용되고 있는 현대에서는 이처럼 남녀간의 결합이 다종 다양하며 일정하지가 않다. 그러나 특별한 예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성적 경험을 가진 남성이 처녀 또는 약간의 성적 경험이 있는 여성과 결혼하는 경우가 가장 많을 것이다. 특히 여성이 성적 경험을 가지고 있더라도 결혼할 상대와 약혼 시절에 처음으로 관계한 것이라면 이 경우는 처녀 상태에서 맺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 중에서 상식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결합은 어느 정도 경험이 있는 남성과 처녀인 여성이 결합하는 경우이다(이 생각이 낡은 발상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남성이 결혼할 때 처녀를 구하고 싶어하는 것은 현대에도 여전히 남아 있는 남성의 기본적 희망 사항이다). 이런 일반적인 남녀의 결합 형태에서 결혼애의 추이를 고려할 때 남성과 여성 사이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일반적으로 사랑에는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이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 양자가 일치될 때 완전한 사랑이 성립된다고 한다.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결합되었을 때는 정신적인 사랑이 우선권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경우는 어느 쪽이 열정적이고 어느 쪽이 냉담한지 등을 따지려고 한다면 끝이 없다. 따라서 서로 동등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전제 아래 설명해 보기로 한다. 문제가 되는 것은 육체적 사랑, 즉 성애(性愛)이다. 앞서 대체로 일반적인 결합 형태라고 말한, 즉 약간 경험이 있는 남성과 처녀 또는 그에 가까운 여성의 경우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이 경우 양자의 육체적 사랑은 행인지 불행인지 정신적인 사랑의 경우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차이가 있다. 즉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성교가 황홀해질 만큼의 쾌감을 주는 행위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섭다거나 불안을 느끼게 할 정도는 아니다. 이와는 달리 여성에게 성교는 아직은 쾌감도, 즐거움도 아닌 그 이전의 것, 즉 분명히 고통일 뿐이다. 남성에게는 쾌감인데 여성에게는 고통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불균형을 초월해서 두 사람이 하나로 뭉칠 수 있는 이유는 거기에 정신적인 사랑이라는 지주(支柱)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여성은 고통을 동반하는 남성의 침입을 수용하면서 어떤 희열을 찾아내려 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결혼(약혼 시절에 첫관계가 있었다면 약혼)초 남성과 여성의 이러한 차이는 행복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일이며 여성에게는 잔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창조주는 이윽고 이런 차이를 없애는 방향으로 남녀 양성을 인도해 준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또 상대방 남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은 여성이라면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차차 성감에 눈을 뜨게 된다. 그 속도는 개인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감이 발달하게 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처음에 느꼈던 고통스러움이 서서히 누그러지면서 마침내 쾌감이 싹트게 된다. 이 같은 쾌감의 상승은 때로 정지하는 경우도 있지만 하강하는 경우는 없다. 하강하기는커녕 출산이라든가 심리적인 여유 등으로 인해 스스로도 놀랄 만큼 비약하기도 한다. 이에 비해 남성의 성감은 어떤가. 남성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남성은 처음부터 쾌감을 느낄 수 있다. 물론 동정을 잃을 때는 뭐가 뭔지 잘 모르는 사이에 끝났다는 경우도 있다. 그렇다고는 하나 최소한 고통은 아니다. 하물며 두 번째는 분명히 쾌감으로 느낀다. 따라서 성감에 관해서는 남성이 여성보다 앞서서 개발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있다는 것이 반드시 뛰어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남성은 처음부터 성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성을 육체적인 상대로 보기 쉽다. 그런데 행인지 불행인지 그 성감은 언제나 일정한 선을 유지할 뿐 여성의 경우처럼 세월과 함께 착실히 상승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하강하기도 한다. 이처럼 여성은 첫경험에 고통이 따르고 출발 지점이 낮지만 출발하기 시작하면 꾸준히 성감을 높여가는 데 반해 남성은 거의 일정한 선을 유지하거나 약간 하강한다. 그러므로 올라가는 선과 어느 지점에서인가 교차하게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시기는 어느 때쯤인가. 개인의 특성이나 환경, 정신애 등의 정도에 따라 각각 차이가 있을 테지만 일반적으로 결혼 후 일년 정도가 되면 교차하는 것으로 보면 틀림없다. 어쨌든 몇 년만에 교차하는가의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문제는 여성의 성감이 남성의 성감을 곧 따라잡고는 끝내 역전해서 남녀간의 성감 차이가 크게 벌어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남성의 성감은 발전성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남성의 성감은 묘미가 없고 보잘것없는 것이라고 하겠다. 적어도 성감만을 가지고 볼 때 남성의 성감은 그다지 두드러지지도 않고 기계적이며 단순하고 획일적이다. 결국 남성의 입장에서 보면 성교나 자위가 쾌감면에서 별다른 차이가 없다. 오히려 자위 쪽이 자유로운 상상 속에 빠질 수 있어 좋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성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소녀기의 자위가 소년기의 자위처럼 일반적인 것도 아닌 데다가 자위 행위로 쾌감을 알았다 하더라도 남성과 성교를 하게 되면 그쪽으로 옮겨간다. 이른바 클리토리스 쾌감보다 훨씬 더 큰 쾌감을 주는 바기나 쾌감 쪽으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한번 그것을 알면 자위 따위는 시시해서 멀리하게 된다. 쾌감은 계속 높아지고 남편이 요구하면 얼마든지 응하고 싶어진다. 따라서 아내의 자위는 남편이 부재중이거나 제대로 충족시켜 주지 못할 때 할 수 없이 하게 되는 대리 행위이다. 그러나 남편의 자위 행위는 충족시켜 주는 아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호해서 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한 발 앞선 성감을 자랑하던 남성이 결혼 후 몇 해가 지나면 역전을 당해, 오히려 고조된 성감으로 압도해 오는 여성에게 감탄하면서 때로는 두려움마저 느끼게 된다. 이렇게 육체적인 사랑면에서 여성이 단연코 위에 서고 남성이 그 아래를 차지하게 되면서 사랑의 균형은 무너진다. 결혼한 남녀의 성애 차이 결혼 초기에 남성의 성감이 여성의 성감을 웃돌고 있을 때 그 차이를 메워 준 것은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정신적인 사랑이었다. 이것이 여성의 성감이 높아질 때까지 그 부족한 부분을 보충해 주었다. 마찬가지로 결혼 후 수년이 지나 반대로 여성의 성감이 상위에 올라 있을 때 그 차이를 메워 주는 것도 역시 정신적인 사랑밖에 없다. 물론 이번에는 남성에게서 여성 쪽으로 향하는 사랑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경우에는 시기가 다소 좋지 않다. 악서 설명한 대로 두 사람의 사랑이 세상에서 인정받았거나 또는 간신히 인정받아 정신적으로 긴장하고 있을 때의 사랑이라면 덮어 나갈 수 있다. 그러나 결혼한 지 5~10년이 지나 이미 정신적 긴장이 해이해진 안일한 상태에서 정신적인 사랑을 높이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실 남성의 성의 기쁨은 육체적인 쾌감으로 보자면 매우 미미한 것이었다. 그런데 남성들도 애초에 자신들의 성감이 여성의 성감보다 강하고 그 때문에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처구니없는 되갚음(?)을 받게 된다. 결혼 후 몇 년이 지나면 어느 남성이든 자신보다 아내 쪽이 성욕도, 성감도 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따라서 순수한 청년 시절에 품었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러고는 황급히 과거의 잘못을 정정하려 한다. 그러나 여성은 그렇게 간단히 상황의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자신을 그토록 뜨겁게 사랑해 주던 남편이 왜 이처럼 무참하게 식어 버렸을까 하고 수상하게 생각한다. 생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급기야는 화를 낸다. 남성은 변명하려 하지만 변명할 만한 자료가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남성의 성감은 여성의 성감보다 약하고, 그런 면에서는 가련한 성이라는 엄연한 생리적 사실이 있지만 남성들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억울하고 수치스러운 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일이 바빠서라느니 피로해서라느니 하는 이유를 내세워 속이려 한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쾌감이 증진되고 호색이 되어 가는 여성에게 그런 변명은 도무지 설득력이 없다. 여성이 남성이 아니고 여성인 이상 이를 이해시키기란 거의 절망적이다. 참으로 남성은 성애에 있어서는 여성과는 너무나도 다른 성이다. 남성은 성행위라는 육체적 사실보다도 오히려 성행위를 둘러싼 정신적 상황 속에서 성의 즐거움을 훨씬 더 크게 느낀다. 남성에게 성감이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성교에 이르는 과정, 즉 미지의 것을 알아 가는 탐험심이라든가 정복욕 같은 것이 훨씬 더 크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들은 성행위 당시의 성감보다도 그때 그녀는 어떻게 거부하고 어떻게 응했는가 하는 당시의 상황들을 더 잘 기억한다. 요컨대 남성에게 성행위는 자신의 행위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효과적이었고, 어떤 영향력을 보여 주었는가를 확인하는 작업일 뿐이다. 따라서 그 기쁨은 자신의 행위가 상대방 여성에게 매우 효과적이었다는 것을 알았을 때만 느낄 수 있게 된다. 이와는 달리 여성은 순직하게 성감 자체의 기쁨 속에 몰입할 수 있다. 상대가 좋아하고 있는가 어떤가 등은 별로 상관이 없다. 자신이 좋으면 그것으로 만족이다. 이런 차이는 성행위를 할 때 남성은 눈을 뜨고 여성은 눈을 감는 것에서도 상징적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나 자신이 한 여성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는 데서 기쁨을 찾던 남성도 행위가 거듭됨에 따라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면 차차 흥미를 잃게 된다. 성행위가 아무리 자기 중심적으로 이루어지고 또 상대가 그에 응하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상대 여성의 미지의 부분에 대한 호기심을 잃게 되고, 그렇게 되면 남성의 정신은 긴장하지 않는다. 이때 성행위는 한낱 몸에 밴 작업일 뿐이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면 남성이 여성보다 까다로운 족속임을 알 수 있다. 아무리 성행위를 하더라도 그에 따라 성감이 증진되는 것은 아니므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부부간에는 성감의 증진에 필수적 요소라 할 정신적 긴장이 없으므로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그러고 보면 여성은 참으로 큰 혜택을 받고 있다. 가정에 안주하여 정신적인 긴장을 잃고, 정신적인 사랑을 잃더라도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성감이 이러한 부분을 꾸준하게 메워 준다. 정신적으로 애써 노력할 필요도 없이 생리 자체가 남편을 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편하다. 생리가 시키는 대로 따르면 즉 사랑하고 있는 셈이 된다. 이것을 음식을 먹는 일에 비교한다면 여성은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는 것인데 남성은 배는 고프지 않지만 영양분이 있기 때문에 먹는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이 "이렇게 맛있는 빵이 있는데 왜 안 먹는 거죠?"라고 물어도 남성은 별로 식욕을 느끼지 않는다. 여성은 먹지 않는 남성을 이상한 사람도 다 있다고 생각할 뿐 이해할 수 없다. 여성의 성감은 어느 정도는 한 남성에 고착되어 성장해 간다. 여성은 처녀에서 아내로 성감이 개발되어 가며 자신에게 쾌감을 가르쳐 준 남성을 대할 때는 더욱 성감이 증강된다. 어느 여성에게도 약하기만 한 남성처럼 한심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쾌감을 느끼게한 그 사람에게 더 뛰어난 성감을 느낀다. 따라서 여러 남성과 성행위를 했다고 해서 여성의 쾌감이 더 강해지는 것은 아니다. 이와는 달리 남성의 성감은 처음부터 보잘것없는 것이어서 그 여성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는 유대가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미지의 것, 새로운 것을 범하는 정신적 긴장감이 고조될 때 흥분하기 쉽고 또 쾌감을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여성의 경우에는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따르면 이것이 곧 남편에 대한 사랑이 되고, 남성은 본능이 시키는 대로 따르면 이것이 곧 아내에 대한 배신이 된다. 남성은 이러한 핸디캡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남녀 중 어느 쪽이 부정을 더 많이 저지르게 되는가를 따진다면 남성에겐 영원히 이길 승산이 없다. 그리스도만 해도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히 이 여성(또는 남성)을 사랑하라"라고 두 남녀에게 평등하게 맹세를 시키는 척하면서 남성에게 책임을 지웠는지도 모른다. 영원한 사랑을 믿는 여성 이제 영원한 사랑을 믿는 여성의 실상이 파악되었다. 영원한 사랑이란 생리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여성에게만 가능한 행위이다. 때문에 이런 식의 말은 여성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이는 여성이 낭만적이고 정숙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생리적으로 그렇게 되고 있음을 희미하게나마 느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남성들 중에도 영원한 사랑이 있다고 일시적으로나마 착각하는 덜렁이도 있지만, 대부분의 남성에게 영원한 사랑이라는 말은 아무래도 미심쩍다. 과연 지킬 수 있는가라고 의심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입 밖에 내기를 꺼려하게 된다. 영원한 사랑이란 어디까지나 여성만이 다할 수 있는 매우 생리적인 사랑이다. 따라서 영원한 사랑 속에 살 수 있는 여성이란 성감이 순조롭게 개발되어 한 남성에게만 고착되어 지낼 수 있는 행복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불행하게도 정신적으로 사랑한 남성에게서 성감이 개발되지 못했거나 개발되어 가는 도중에 애인을 잃었거나 이상한 체험으로 인해 처음부터 발육되지 못한 여성은 자신의 성감을 좀더 잘 개발해 줄 남성을 찾아 바람기를 부리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성의 마음과 몸은 항상 충족되지 않는다. 성감을 눈뜨게 해주는 동시에 존경의 대상이 되는 남성을 만나게만 된다면 바람기를 낸 여성도 그 시점에서 영원한 사랑을 할 수 있는 여성으로 변모한다. 여성은 한결같이 영원한 사랑을 바라면서 이를 꿈꾸는데, 그런 사랑이 성취된 여성은 생리적으로 충족된 본능을 누리며 살 수 있는 행복한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본능대로 산다는 것이 새삼 칭찬할 만한 일이 못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는 사실이다. 정리 및 결론 1. 영원한 사랑을 믿으면서 스스로 거기에 몰입하려는 쪽은 언제나 여성이다. 남성은 일부 미성숙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것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는 일임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러나 이처럼 미숙한 남성도 세월이 지나면 이를 깨닫게 된다. 2. 사랑은 일종의 정신적 긴장 상태로서 영속되지 않으며, 결혼과 같은 안정된 상태를 얻게 되면 그와 동시에 차차 퇴색한다. 3. 여성의 성욕은 처음에는 매우 낮지만 서서히 눈뜨게 되면서 증강되는 상승선이다. 이와는 달리 남성의 성감은 항상 일정한 평행선이다. 그러므로 이 양자는 이윽고 만나게 되며, 여성이 남성 위로 역전하게 되면서 차이는 더욱 크게 벌어진다. 4. 이 같은 성감의 상승으로 인해 여성은 정신적 긴장을 잃게 되더라도 한 남성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성감이 평행선을 그리는 남성의 경우 정신적 긴장이 누그러지면 한 사람만을 사랑하기가 어렵다. 5. 영원한 사랑을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 여성이란 본능을 그대로 간직하며 사는 생리적인 여성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랑이란 생리적인 본능에 따르는 여성에게만 가능하고 남성에게는 무리한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결혼식에서 두 남녀에게 사랑의 영속을 맹세케 한 것 같다. 여성의 바람기는 부정한 내통인가 '바람기' 또는 '바람을 피운다'는 말은 지난날에는 남성이 아내 아닌 여성과 놀아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었다. 여성에게는 바람기라는 말이 해당되지 않았다. 여성은 한 남성만을 생각하고 결혼한 다음에는 한 남성을 위해 몸을 바치고 가정을 지켜야 되는 것으로 가르침을 받아 왔다. 또 여성이라는 성은 바람기를 보여서는 안 되며 바람을 피울 능력도 없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도덕과 멸시가 여성을 칭칭 얽어매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에게는 부정한 정교(情交)는 있었어도 바람기를 내지는 못했다. 여성의 바람기란 제정신으로 바람을 피우는 일이다. 여성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은 '바람에 날리는 갈대처럼 항상 변하는 여자의 마음'이라고 소리 높여 노래하더라도 누구 한 사람 놀라거나 하지는 않는다. 남녀 모두가 대체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제 바람기는 남성만의 독점물이 아니다.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는 말이 전혀 이상하게 들리지 않고 있다. 이상한 일이기는커녕 '바람기 있는 남성'과 대등한 말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변했다고 해도 남성은 여전히 보수적인 족속이다. 외국차를 몰고 다니고 컴퓨터를 구사하는 신세대라 할지라도 "아내는 남편의 시중을 들어야 하며 바람기를 보이는 것은 부정한 내통을 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그들이 하는 일이 아무리 새로운 일이라도 남성은 의외로 낡은 사고 방식을 가진 족속이다. "내 아내만은...", 내 애인만은..." 그렇지 않다는 자만심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제1장 앞부분에서 설명했지만 여성은 환경 순응력이 남성보다 훨씬 뛰어나서 어떤 변혁에 부딪치더라도 쉽게 따라갈 수 있다. 이 점에서 남성은 여성을 따르지 못한다. 남성은 정신 구조가 고정되어 있어서 변용에 대한 수용력이 매우 약하다. 그래서 세상에 완고한 할아버지라는 말은 있어도 완고한 할머니라는 말은 없다. 시대가 급속히 변하고,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는 말이 정착되어 그 내용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런 실태를 강 건너 불 구경하듯 하는 남성은 아직도 많다. 바람기 있는 여성이란 바람기 있는 여성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어느 대사전에는 바람기란 마음이 들떠 있으면서 변하기 쉬운 성(性), 남녀의 애정이 변하기 쉬운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물론 여기에서 다루는 바람기는 두 번째 설명, 즉 남성에 대한 여성의 애정이 변하기 쉽다는 점을 가리키고 있다. 그런데 이 애정이라는 말은 알 듯하면서도 알기 어려운 말이다. 특히 이것이 정신적인 면일 경우와 육체 관계를 수반한 측면일 경우와는 크게 다르다. 이전에는 몰라도 최근에는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고 하면 단순히 마음이 변하기 쉬운 여성이라는 느낌을 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이제 그 말 속에는 정해진 남성 이외의 남성과 성적 관계를 갖는, 즉 육체적으로 바람을 피우는 것도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런데 남편이 있는 몸으로서 다른 남성을 생각한다든가 마음이 끌리는 것뿐이라면 그런 심정이 표면에 드러나지 않는 한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는 것을 아무도 모를 것이고, 그런 일로 세상의 눈총을 받을 리도 없다. 그리고 이 정도의 여성을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의 현대 여성은 바람기 있는 여성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바람기 있는 여성이란 정해진 남성 이외의 남성과 육체 관계를 맺거나, 또는 그런 일은 없더라도 애정을 보이고 있고 그러한 사실이 제3자에게 알려져 있는 여성을 의미하게 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바람기 있는 여성과 음탕한 여성은 다르다는 점이다. 음탕한 여성을 바람기 있는 여성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바람기 있는 여성이란 이미 설명한 대로 이른바 애정이 옮겨지기 쉬운 여성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여성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없다. 이에 비해 음탕한 여성이란 육체적 욕망이 매우 강하여 이러한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심신 모두 정상을 유지하지 못하는 여성을 말한다. 이런 종류의 여성이 새 남성을 찾을 때 거기에는 연정이라든가 사모 같은 정신적 발동보다는 육체적 요구가 우선하고 있다. 요컨대 음탕한 여성은 육체적인 이상 체질로서 일종의 병이다. 따라서 음탕한 여성이란 대부분의 경우 선천적으로 그런 소질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어떤 남성에 의해 후천적으로 더욱 촉구된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음탕한 여성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정상이 아니므로 이 장에서는 논하지 않고 다른 장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바람기의 정의 가운데 '정해진 남성 이외의...'에서 정해진 남성의 내용에 따라 바람기 있는 여성상은 여러 가지로 달라진다. 우선 정해진 남성의 일반적인 경우는 그 남성이 남편인 경우이다. 남편이 있으면서 다른 남성과 바람을 피우는 그룹을 제1그룹으로 가정한다. 둘째로 정해진 남성이 연인인 경우이다. 물론 연인이라 하더라도 다양한 의미의 연인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연인이란 호적상의 부부는 아니더라도 연인이라든가, 정부라든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든가, 연모하고 있다든가 하는 식으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경우를 의미한다.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뿐 아니라 육체 관계가 있다 해도 무방하다. 남녀 관계면에서는 제1그룹의 아내 상태보다는 불안정하지만 사랑의 상태로서는 전자보다 더 긴장된 관계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셋째로는 특별히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그룹이다. 홀가분한 기분이겠지만 그만큼 마음은 공허롭다. 이 세 그룹 중 원칙적으로 바람기라는 말을 적용시킬 수 있는 그룹은 첫번째, 두 번째 그룹이다. 제 1 그룹은 남편, 제 2 그룹은 연인이라는 의지할 상대가 있다. 그런데도 만일 마음이 이동한다면 그것이 바람기이다. 그러나 제3의 그룹에게는 정해진 대상이 없다. 의지할 원점이 없는 곳에 진정한 의미의 바람기는 있을 수 없다. 바람기의 조건 앞의 항목에서 바람기 있는 여성에 대한 정의는 일단 내려졌다. 그러나 그런 정의만으로 바람기 있는 여성의 실태를 파악하기에는 아직 불충분한 점이 많다. 왜냐하면 이 정의에는 어느 정도로 열정적으로, 그리고 어느 정도로 자주 마음이 변하는가에 대한 바람기의 질과 양의 문제가 논의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열정으로 얼마나 바람을 피우면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답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단 한 번이라도 다른 남성에게 애정을 느낀 적이 있는 여성을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고 볼지도 모르며, 어떤 사람은 세 번 정도쯤은 보통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이는 받아들이는 사람의 성격이나 도덕 윤리관, 그리고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남편이 있는 여성의 경우는 한 번이라도 마음이 다른 곳으로 옮겨지면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연인의 경우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지만, 세 번 이상 마음이 옮겨지면 같은 낙인이 찍혀질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고려해야 할 점은 여성이 처해 있는 주위의 정황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여성의 성격 이상으로 중요한 요소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A와 B 두 사람의 여성이 있다고 하자. 두 사람 모두 22세로 각기 연인이 있고, 여고를 졸업한 후 어느 회사에서 여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런데 A는 길을 걷다 보면 많은 남성들이 뒤돌아볼 정도의 미모와 분위기를 지니고 있으나 B는 얼굴이 못생기고 뚱뚱하며 분위기도 없다. 그 뒤 일년이 지났다. B는 여전히 일년 전의 연인 한 남성만을 지키고 있다. 지키고 있다기보다도 연인은 이젠 B의 곁에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간혹 만나더라도 한두 마디 주고받은 후 곧 가버린다. 그래도 B는 그 남성 한 사람에게만 지성을 다하며 수절하고 있다. 이와는 달리 A는 두 남성을 바꿔 치운 후 현재는 세 번째 남성과 사귀고 있다. 동료 여사원들 사이에서 그녀는 바람난 여자로 소문이 나게 되었고 남성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쪽이 바람기 있는 여성인가를 판정할 때 A라는 판정은 표면적으로는 맞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깊이 생각해 볼 때 이 대답은 몹시 독단적이다. 왜냐하면 A는 매일 여러 남성들에게 둘러싸여 많은 데이트 신청을 받고 있다. 이에 비해 B는 단 한번도 그런 신청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이래서야 A와 B가 같은 씨름판 위에서 씨름을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기에는 B에게 핸디캡이 너무나도 많다. A의 조건을 고려하면 그 정도로 유혹이 많은 환경 속에서 용케 세 남성으로 그칠 수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반대로 B는 달리 유혹하는 남성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정숙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될 수 있다. B가 A가 되고 A가 B의 조건에 놓이게 된다면 B는 A보다 더 바람기를 보였을지도 모르고 A는 B보다 더 정숙했을지도 모른다. 개인을 둘러싼 이런 환경은 사랑에 수동적인 여성에게는 특히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 스스로는 아무 일도 만들어 내지 않고 타인에게서 유발되어야 행위를 하게 되는 여성이라는 성을 결과만 가지고 논했다가는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된다. 어쨌든 바람기 있는 여성이 되려면 정해진 남성 외에 달리 또 유혹해 주는 남성이 적어도 두 명 이상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람기를 보통 이상으로 내는 여성이라면 우선 이보다도 더 많은 남성에게 둘러싸여질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일반적인 여성이 바람기 있는 여성이 되기는 불가능하며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바람기 있는 여성은 반드시 본인의 성격에 의해서만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여건도 영향을 미친다. 바람기 있는 여성은 본래 바람기 있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여건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바람기의 과정 앞의 항목의 결론은 "여성은 남성에 의해 만들어진다"라는 비교적 잘 알려진 경구를 뒷받침하게 된다. 이 말은 약간 독단적이면서도 진실이고 남성의 자존심을 만족시켜 주는 말이기도 하다. 여성이라는 하나의 인격이 자신의 영향을 받아 변해 가는 것을 본다는 것은 남성의 커다란 쾌감이다. 젊고 순박한 여성을 찾는 남성의 심리 이면에는 이처럼 여성을 자신이 좋아하는 여성으로 바꿔 놓고 싶어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권리 뒤에는 의무가 있듯이 이 말 속에는 만드는 남성측에서 완성된 여성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남성은 여성을 선량하게 만들 뿐 아니라 나쁘게도 만든다. 여성의 바람기도 예외는 아니다. 대체로 여성이라는 성은 본래 남성이라는 성만큼 바람기를 보이는 성이 아니다. 이는 환경이라든가 지성 정도와 같은 후천적 측면에서보다는 본질적(오히려 동물적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인 면에서 그렇다. 이러한 차이는 양성의 생식기 차이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성이라는 성의 생식기에 대해 말하자면 한마디로 받침 접시에 비유할 수 있다. 그곳이 충족되고 그곳에 방출된 것을 저장함으로써 성립되는 성이다. 그것은 응축(凝縮)의 과정이며 내공적(內功的)이고 집약적이다. 이와는 달리 막대에 비유할 수 있는 남성이라는 성은 삽입하고 방출하고 유리(遊離)하는 것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는 성이다. 그것은 방출의 과정이며 외공적(外功的)이고 확산적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사랑의 바탕을 이루는 성애에서는 남성과 여성간에 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성감에 관한 한 남성은 본래 무르익는 일이 없다. 여성처럼 고통이 쾌감이 되어 절정에 이르는 진보의 과정이 없다. 남성에게는 동정을 잃었을 때나 청년기, 노년기에도 성감 자체에 그다지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는다. 성의 교섭에서 남성이 바라는 것은 여성의 숨겨진 미래의 부분이며, 성행위 그 자체보다는 거기에 도달하는 절차라든가 행위시 또는 행위 전후의 여성의 반응을 살피는 일에 주목한다. 그러나 여성은 이와 다르다. 여성은 상대방 남성이 성행위 순간에 어떻게 흐트러지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은 채 오직 쾌감 속으로만 잠기려 한다. 남녀의 첫결합이 남성에겐 성감의 정점에 이르게 되는 것인 데 반해 여성의 경우는 성감의 시발점이 된다. 그 뒤 남성의 쾌감은 상승되는 일 없이 오직 여성의 정신적인 부분에만 흥미를 보이게 되지만 여성은 꾸준히 성감 그 자체를 심화시켜 나간다. 결혼 후 남성이 일찌감치 성적인 도취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은 이처럼 여성의 육체적인 미지의 부분을 간단히 알게 됨으로써 빚어진 결과이다. 반면에 여성이 늦게 깨어나게 되는 것은 성감이라는 멋진 언덕을 발견해서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숙련된 남성이 여성에게 이런 훌륭한 언덕을 가르쳐 주면서 올라가게 한다면 여성은 그 언덕을 계속 올라간다. 그렇게 올라가면서 여성은 "나는 이 사람 때문에 이 언덕을 올라갈 수 있게 되는 거야."라고 생각하고 마침내는 그 남성이 아니면 그 언덕을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자기 암시에 걸리게 된다. 그리하여 한 남성에게서 오랜 기간에 걸쳐 성의 희열을 알게 된 여성은 그 남성의 방식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게 되며, 정신 이전에 육체가 먼저 순응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탐욕스러운 육체에 정신적인 충족감까지 느끼게 되면 그야말로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이나 진배없다. 아마도 여성은 그 남성에게서 결코 떨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은 남성 마음대로 변화하고 또 남성에게 헌신하게 된 여성의 정숙함은 여기에서 확립된다. 그렇다면 여성의 바람기란 무엇인가. 여성이 바람을 피운다는 것은 정해진 그 남성에게서 정신적·육체적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채워지고 있더라도 불충분할 경우가 많다. 이렇듯 제대로 충족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마음이 움직인다. 또는 덜 채워지고 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마음이 이끌린다. 어쩐지 덜 채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좀더 멋지게 충족될 수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다른 남성이라면 혹시나 채워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한 사람의 남성이 앞에 나타나면 불만으로 가득 차 있던 여성의 마음은 분명히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여성은 도덕이나 윤리를 좋아한다. 아내의 몸으로 다른 남성을 생각하면 안 된다고 반성한다. 또 연인이 있는 몸인데 다른 남성에게 한눈을 팔면 안 된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화살이 쏘아지면 이미 흔들림이 생기고 있던 마음은 더욱 심하게 흔들린다. 그런 여성의 마음을 노려 숙련된 남성은 재차 강력한 화살을 쏜다. 대체로 아내를 빼앗긴 남성보다는 빼앗은 남성 쪽이 여성에 대해서는 베테랑일 경우가 많다. 육체적인 강약은 어쨌든 간에 설득과 기교는 월등하고 게다가 여성의 마음에 들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인다. 아내를 뺴앗긴 남성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단조롭고 둔한 경우가 많다.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하는 여성일수록 이런 둔함보다는 다채롭고 교묘하고 또한 경쾌한 남성을 원한다. 여성이라는 성이 원래 그렇기 때문에 이는 어쩔 도리가 없다. "난 그 남자가 정말 싫었지만 강제로 덤벼들었기 때문에 그만 어쩔 수 없이......" 라든가 "내가 좋아서 그렇게 된 건 아녜요. 그 남자가 내 몸을......", 혹은 "난 죽기 살기로 저항했어요. 하지만 힘에 눌려......", "난 그 남자에게 속은 거예요......" 등등 구실은 있게 마련이다. 교묘한 돈 후안은 이런 핑계를 이용해 여성을 손아귀에 넣는다. 한편 이런 여성은 남편이나 연인에 대해서는 "...그이가 불친절하고 쌀쌀맞았기 때문에....."라든가 "그이가 나를 꽉 잡아 주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남편이 바람을 피웠기 때문에 나도 그만 홧김에......" 하는 식으로 생각하려 한다. 이러한 변명들은 여성이 이른바 그녀들의 도덕관에서 빠져 나가기 위해 필요한 절차가 된다. 여성은 남성 하기에 달렸다는 논법이 따른다면 여성을 다른 남성에게 달려가게 한 데에는 남성의 책임이 확실히 크다고 하겠다. 바람기 있는 여성의 본질 지금까지 살펴본 것으로 미루어 바람기 있는 여성의 실태는 명백해졌다. 즉 바람기 있는 여성이란 일종의 냉감증(冷感症) 여성이다. 냉감증이란 의학적으로는 성욕은 있으나 만족감(오르가슴이라고 할 수만은 없다)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을 말한다. 한 남성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면 그것은 그녀가 음탕하기 때문이 아니라 냉감증이기 때문이다. 한 남성에게서 충분히 쾌감을 얻지 못하고 있으므로 항상 욕구 불만이다. 때문에 늘 굶주려 있다. 성숙한 여성이라면 육체적인 욕구의 비중이 강해지고 아직 무르익지 않은 여성이라면 정신적인 측면이 강해진다. 어쨌든 이들 모두에게는 남편이나 연인과의 사이에 충족되지 않은 적막한 감정이 남겨져 있다. 말하자면 외풍이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람기가 매우 심한 여성은 중증의 냉감증이며 치료를 받아야 할 상태에 있다고 하겠다. 그녀들은 아직도 충족된 사랑을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이 남성에게서 저 남성에게로 움직인다. 어느 남성이든 결정적일 만큼 강한 힘으로 막아 주지 못한다. 처음에는 우연히 마음이 흔들려 다른 남성을 생각하게 된 것인데 어느 사이엔가 그것이 버릇이 되면서 바람기의 증상이 커진다. 그와 동시에 바람기 있는 여성이라는 소문이 퍼져 상대방 남성도 탐험하는 흥미만으로 다가올 뿐 충족시켜 주려는 노력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미모이기 때문에 접근해 오는 남성은 얼마든지 있다. 관심을 기울이는 남성이 없어서 애를 태울 일이 없는 상황이 한편으로는 충족시키려는 노력을 방해한다. 그리하여 톱니바퀴는 나쁜 쪽으로만 굴러가게 된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과거에 충족된 경험이 있는 여성이 바람기를 내는 예도 있다. 이 경우는 제대로 잘 보살펴 주지 않은 남편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약간 과장된 표현으로 말하자면 일부 일처제의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종류의 바람기는 당하는 남성측에서는 안심이 되기도 해서 매우 합리적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바람기는 극히 현실적인 이유에서 나타나게 된 것이고 본질적으로 바람기 있는 여성의 유형과는 크게 다르다. 앞에서 설명한 바 있는 제1그룹의 바람기는 대부분 이런 종류이다. 발생이 단순한 것이어서 연구 대상으로서의 매력도 별로 없다. 이야기를 다시 되돌려보자. 바람기 있는 여성의 본질로서 빼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특성은 그녀들 대부분이 성급한 이상주의자라는 점이다. "사랑은 서로 용서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어떤 사랑에도 상처는 있다. 서로 인내하고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싫어했던 남편의 버릇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마음에 들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바람기가 있는 여성들은 오랫동안 견디려고 하지 않는다. "이럴 수가 없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라고 잡지나 남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 버린다. 지나치게 꿈을 꾼다. 이는 물론 일부 잡지라든가 저널리즘의 책임이다. 오르가슴(성교시의 절정)이 두세 번의 교섭으로 도달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면 바람을 피우지 않으면 버스를 놓쳐 버린 듯한 착각 속에 빠져들기도 한다. 하긴 리드하는 힘이 약하거나 일찌감치 충족시켜 주지 못한 남성도 나쁘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해도 역시 여성 자신의 욕구가 너무 여성이 느낄 수 있는 성의 쾌감은 나를 잃는 상태, 즉 노예가 됨으로써 충족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희생을 치름으로써 남성 이상의 쾌감이 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인은 이런 자세 변환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듯하다. 미인인 자기를 설득하기 위해 애를 쓰던 남성들의 헌신이 성행위의 순간에도, 그리고 그 뒤에도 계속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 순간에는 입장이 바뀌지 않으면 사랑의 극치를 경험할 수 없는데도 그저 멍하니 주어지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여자 알고보니까 재미없는 여자로군."이라는 핀잔과 함께 버림을 받게 된다. 버림을 받더라도 미인은 추녀처럼 한탄하거나 슬퍼하지는 않는다. 정념에 내공(內功)하는 법이 없다. "남자는 얼마든지 있는 거야. 그 남자가 나를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만나 준 것뿐이야."라고 자기 자신에게 타이른다. 이런 오만이 성의 충족에서 멀어지는 원인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들은 자기 중심적인 사고에 집착하여 남성에게 예속되는 것을 싫어하는 자신 만만한 성격의 소유자들이다. 예능계에는 이런 종류의 바람기 있는 여성들이 많다. 화려한 스캔들이라고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 여성의 빈약한 성과 충족되지 않은 정신의 공허로움이 숨겨져 있다. 노예가 되기 위한 자세 변환의 시기를 놓치고는 성의 충족을 찾아 집시처럼 영원히 방황하는 냉감증의 여자, 이것이 바람기 있는 여성의 실태이다. 그런 여성은 동정의 대상일지언정 동경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여성들이다. 조물주는 아름다움을 주신 대신 성의 불모를 주신 것이다. 이는 얼마나 멋지고 짖궂은 조화인가. 그렇다면 이런 종류의 여성을 정상적인 여성으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 하나는 개성이 강한 베테랑 남성이 철저하게 여성을 쓰러뜨려 자기 자신을 버리게 한 후 굴욕의 밑바닥에서부터 사랑을 배우게 하는 것이다. 그런 방법이 아니라면 나이 들어 늙기를 기다린다. 이 두 가지 외에 즉효약은 없다. 정리 및 결론 1. 바람기 있는 여성이란, 최소한 두 사람 이상의 남성과 육체 관계를 맺거나 또는 애정을 옮기다가 그런 사실이 제 3 자에게 알려진 여성이다. 이는 여성으로서 대단한 매력을 갖추고 있으며 그런 매력이 남성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2. 심하게 바람기를 내는 여성은 미모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와는 상대적으로 정신적으로는 충족됨이 없고 육체적으로는 냉감증이며, 한편으로 만족할 줄을 모르는 이상주의자로서 남성에게 무릎을 꿇지 않는 자신 만만한 여성이다. 3. 이런 종류의 여성은 미모와 성의 빈약을 함께 갖추고 있으며 이 남성에서 저 남성에게로 영원히 방황한다. 이런 여성의 심신을 모두 충족시키려면 매우 강인한 남성이 그 여성을 굴복 시키거나 아니면 늙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일생에 세 번은 바람기를 보인다 "아무리 정숙한 여성이라도 일생에 세 번은 바람기를 보인다."고 한다. "설마......." 하며 걱정하는 남편들을 위해 설명하기로 한다. 첫번째의 사랑은 소녀기에서 사춘기에 걸친 동성에 대한 사랑이다. 여학교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뮵'관계에서부터 완전한 레스비언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폭넓지만 여성 대 여성의 사랑임에는 변함이 없다. 두 번째 사랑은 사춘기 이후에 나타나는 이성에 대한 사랑이다. 이는 새삼 설명할 것도 없는 극히 자연스러운 사랑이다. 세 번째는 성숙한 여성이 자식, 특히 아들에게 쏟는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이성애와 병행해서 생기는데 어느 정도 세월을 거친 부부 사이에서는 아내의 사랑이 남편보다 아들에게로 기울어지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물론 이 세 번째 사랑은 자식이 없는 여성에게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어쨌든 친구, 남편, 아들에 대한 세 가지 사랑의 변천을 거쳐 여성은 사랑의 완성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 첫번째의 사랑, 즉 동성에 대한 사랑이 그 후의 사랑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레스비언이란 에게 해(海) 동쪽 연안에 레스보스라는 면적 1만 Kmt의 작은 섬이 있다. 이 섬은 본래 그리스령인데 터키와 가깝다는 이유로 흔히 터키서 속도(屬島)처럼 불리기도 했다. 기원 전 6세기경 사포라는 여류 시인이 이 섬의 서해안인 에레스즈에서 태어나 명성을 떨쳤다. 그런데 시인으로서의 그녀의 명성을 시기한 여성들은 여러 형태로 그녀를 비방했다. 그 중에서도 그녀와 여자 친구, 여자 제자와의 밀접한 관계를 두고 그 관계를 오해한 나머지 사포는 묘한 사랑을 하고 있는 여자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를 여성간에 생기는 동성애의 원형으로 보게 된 데서 여성의 동성애를 그녀의 이름을 따서 '사포의 사랑' 또는 '레스보스의 사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레스비언은 이 '레스보스의 사랑'을 인정하는 '레스보스(Lesbianism)'의 실행자를 가리키는 말로서 생겨나게 된 셈이다. 사실 사포 자신은 레스비언과는 별로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고, 그녀의 시에도 아프로디테(그리스 신화의 미와 사랑의 여신)에게 바치는 찬가처럼 남성을 연모한 시가 있다. 어쨌든 묘한 일로 해서 레스비언의 대표자로 받들어진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성들과 친하게 지내면서 또 남성과도 연애를 했었다는 사포의 일생은 얄궂게도 양성(兩性)에 흔들리는 레스비언의 특질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해서 오히려 적절한 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역사적 배경 현재는 레스비언이라든가 호모(남성간의 동성애)가 이단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나 고대 그리스 등에서는 동성애에 대해 관대해서 처벌되거나 경멸당하는 일이 없었다. 고대 로마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마찬가지여서 동성애는 특별히 은폐되는 일 없이 비교적 공공연하게 확산되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성애를 긍정하게 된 사고의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명이 있으나, 그 가운데서 가장 유명한 것은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의 설이다. 그에 따르면 제우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신)는 그의 지배에 반항한 거인족 티탄과의 싸움에서 거인족을 항복시킨 후 전사한 거인의 몸을 둘로 잘라 제우스의 힘을 영원히 세우려 했다. 인간은 이 거인에게서 생겨났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자신이 따로 분리되기 전의 원형을 찾아 되돌아가려는 충동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시적인 신화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고대 그리스인은 성충동을 긍정하여 충동의 방향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는 것도 잘린 파편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처럼 동성애를 관용적으로 받아들인 시대가 사라진 것은 그리스도교의 지배가 시작되면서부터이다. 이에 따라 여성의 동성애는 자손의 유지와 번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다만 관능적인 욕망만을 추구하는 행위로서 죄악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성간의 동성애도 죄악의 낙인이 찍혀 교회의 형벌 대상이 되면서 법의 엄한 처벌을 받게 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우리의 비판적인 시각에 이 같은 교회적 발상이 짙게 남아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따라서 여성의 동성애에 대한 터부시는 고대의 것이 아니라 중세 이후 인위적으로 형성된 것이며, 인간의 본연적인 행위 양식이 아니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여성의 동성애를 이상한 행위로 본다는 것은 일방적이고도 관념적인 시각이라는 비판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정상인가 하면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 그것은 고대 레스비언의 긍정론에 인용된 플라톤의 거인설이 참으로 시정(詩情) 넘치는 발상이기는 하지만 터무니없는 환상이라는 점으로도 명백한 일이다. 우선은 현대인을 납득시킬 수 있는 논리성이 결여되어 있다. 수적으로 많은 것을 정상으로 보고 적은 것을 이상으로 보는 위대하고도 단순한 이론을 적용한다면 레스비언이 이상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정상과 이상(異常)의 기준은 그때그때의 경향에 따라 달라지지만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서 숫자상으로는 레스비언 쪽이 적다. 그러나 여성만의 학교, 가극단, 여자 기숙사 등에서는 이 같은 수적 관계는 역전될지도 모른다. 어떤 곳에서는 정상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정상이 아닌 셈이다. 그러나 정상이 아닌 그 이상의 정도에 대한 기준이 서서히 완화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세 번 바람기를 보인다는 설의 배경 플라톤의 설이 매우 공상적인 데 비해 "여성은 일생 동안 세 번 바람기를 보인다."는 말은 현실적이고도 설득력이 있다. 이는 많은 남성이 그렇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 이면에 여성 생리의 본질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성의 인생은 소녀기에서 사춘기에 이르는 미혼 시기와 결혼해서 남편의 사랑을 받는 기혼 시기, 그리고 임신해서 출산, 양육을 하는 어머니의 시기 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세 시기가 각기 다르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물론 이 경우 미혼기란 호적상의 문제가 아니다. 남성과 동거하고 있으면 기혼이고, 또 적(籍)이 없더라도 아이를 낳으면 어머니의 시기로 본다. 이 세 시기에 걸쳐 여성의 생리가 크게 변한다는 것은 의학적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체질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천식 등이 소녀기에는 잘 고쳐지지 않다가 남성을 알게 된 후 고쳐졌다거나, 어떤 종류의 고질 궤양이 출산한 후에 어느 순간 완치되었다는 일 등은 드문 예가 아니다. 처녀이냐, 비처녀이냐, 경산부(經産婦 : 아이를 낳은 경험이 있는 부인)이냐에 따라 피부에서 유방, 체형까지 달라진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외관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체내에서는 더욱 큰 호르몬의 변동이 있으며 그에 따라 여성의 생리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생리에 의한 변천은 그야말로 돌변이라 할 만한 변화인데, 실제로 그런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에 여성으로서의 기능을 다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여성의 생리 변화에 따라 여성의 사고도 변한다는 사실이다(일부 여성들은 이런 말을 싫어하지만, 행인지 불행인지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혹시 변치 않는다고 믿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일으킬 만한 사건을 겪지 못하고 있는 것뿐이다). 세 번에 걸친 바람기란 바로 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일찍이 여학생 시절에 연인처럼 언제나 함께 지내던 친구간에도 일단 사랑하는 남성을 만나 가정에 안주하게 되면 전에 사귀었던 친구 같은 것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남편만을 알게 된다. 여학교 동창회에 가더라도 한때는 레스비언이었던 이들이 옛날 일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남편과의 정사 이야기만 늘어놓곤 하는 일들도 많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여서 아이를 낳고 그 자식이 성장하면 그쪽으로 애정이 옮겨져서 이번에는 남편 따위는 잊어버리게 되기 십상이다. 흔히 수험 기간 중인 아이에게 남편보다 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면서 밤늦게까지 아이 곁을 떠나지 않는 어머니가 있는데, 그것은 시험을 치르게 되어 있는 아이에 대한 걱정 때문만은 아니다. 좀더 근본적으로 생각해 보면 남편에게서 자식 쪽으로 애정의 대상을 바꾼 이른바 세 번째의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이런 식의 사랑의 변동이 없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 변화가 여성만큼 명확하지는 않다. 남성은 언제나 미련을 남겨 둔 채 깨끗하거나 떳떳하지가 못하다. 게다가 사랑이 움직이는 범위도 한정되어 있다. 적어도 결혼을 했다고 해서 그 전까지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우정을 휴지처럼 버리거나 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처럼 갑작스럽게 사랑의 대상이 바뀌는 것이 이상하기만 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의 몸속에서 숨쉬고 있는 생리의 메커니즘으로 볼 때 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성의 신체는 밖에서 보아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거대한 호르몬의 이동을 일으키고 있으며 그에 따라 사고도 변용되는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이 내면의 변동을 생각지 않고 표면에 나타난 행동만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생리의 변동과 함께 여성의 행위가 변화하는 것을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여성의 행동은 부분 생리에 충실한 결과이다. 사춘기 동안에는 그토록 격렬했던 동성애적 경향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는 것은 그 여성 속에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새로운 생리가 움텄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떤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동성애 쪽으로 되돌아가게 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남성 쪽으로 변심했음을 원망하면서 버림받은 쪽의 여성 또한 다른 남성에게로 마음을 옮겨 간다. 이때 지금까지 서로 사랑해 온 상대방 여성보다 새로 사귀게 된 남성 쪽이 더 다정하다든가 멋지다든가 하는 이유는 별로 타당성이 없다. 적어도 여성이 영원히 추구하는 표면상의 다정함으로 말하자면 남성 쪽보다는 여성 쪽이 훨씬 더 다정하고 친절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이를 부리치고 남성에게로 사랑을 옮겨 간다. 이 변천에는 정신이라든가 사고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녀는 다만 본능적인 사랑의 욕구가 시키는 대로 남성에게로 옮겨 간다. 그리고 거기 고정되면 전에 서로 사랑했던 여성에 관해서는 잊어버린다. 레스비언의 두 가지 유형 여기서 레스비언을 두 가지 형태로 분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즉 일시적인 레스비언과 진정한 의미의 레스비언이다. 이 말은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말이므로 여기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일시적인 레스비언이란 소녀기에서 사춘기에 걸쳐 동성에 호의를 가지고 접근, 살결을 맞대는 정도의 관계를 가졌더라도 이윽고 남성을 알게 되면 동성에 흥미를 잃고 동성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여성이다. 결국 이는 남성을 알기까지의 일정 시기에 존재한 레스비언에 불과하다. 그런데 소녀기 혹은 사춘기의 동성에 대한 접근은 많은 여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일반적인 경향으로서 특별히 레스비언 운운할 만한 일은 못 된다. 대체로 젊은 여성은 모두 레스비언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그 중에서 집요하게 한 여성에게만 집착해 살결을 맞댄다든가 또는 그와 비슷한 행위를 한 여성을 일시적 레스비언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일시적인 것이므로 사춘기가 지나 남성을 알게 되면 그 즉시 이탈한다는 것이 전제가 된다. 이에 비해서 진정한 의미의 레스비언은 성인이 되어 남성이 접근해 와도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또 설사 남성과 관계를 하더라도 한두 번에 그치고는 다시 여성에게로 되돌아가 버린다. 결혼하기 전까지 놀이 삼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이 출현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레스비언인 것이다. 분명하게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우나 요컨대 한두 번의 남성 경험을 가지고는 흔들리지 않는 레스비언이다. 그러나 이런 유형의 레스비언이라 하더라도 실제로는 어떤 문제로 인해 어느 날 갑자기 여성에게 흥미를 잃고는 남성에게만 마음을 기울이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다. 이 경우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설명하기로 한다. 또 쌍칼잡이라는 것도 많다. 말하자면 남성과 여성 양쪽을 똑같이 좋아하는 유형이다. 이 경우는 마음이 더욱 끌리는 쪽에 따라 진짜냐, 일시적이냐를 결정해야 한다. 이때 "아무래도 여성 쪽이 좋은 걸요." 하고 말한다면 틀림없이 진정한 의미의 레스비언이다. 그러나 양자 선택을 하라고 하면 대부분의 쌍칼잡이는 단연코 남성 쪽을 택한다. 이번에는 위의 형태 분류에 대해 앞에서 설명한 여성의 세 가지 변천을 적용시켜 생각해 보기로 한다. 동성애적 취향에서 이성애(異性愛), 그리고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의 변화는 처녀에서 결혼, 그리고 임신 출산과 같은 여성의 신체적 성숙 과정과 표리 일체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비교로 명백해진 사실은 동성애적 상태가 여성의 발전 단계에서 보자면 매우 초보적이고 미숙한 상태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여성은 소녀기에서 사춘기에 걸쳐 동성애 세례를 받았다가 마침내는 거기서 이탈하게 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첫단계인 사춘기적 동성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여성은 비유를 들자면 그룹 사운드에 열광하고 있는 여성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저 여잔 레스비언이라구요."라는 말을 듣고 남성들이 무심코 조소와 연민의 정이 섞인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은 이런 철없음(미숙함)을 연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남성역과 여성역 레스비언에는 호모와 마찬가지로 남성역을 맡는 여성과 여성역을 맡는 여성이 있다. 여기서 레스비언 여성들에게 어느 쪽이 되고 싶은가를 물으면 남성역을 희망하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 여성역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레스비언의 경험이 아직 짧은 여성들인데, 그런 여성들도 동성애에 익숙해져 대담해지면 남성역을 좋아하게 된다. 이 같은 사실은 호모 가운데는 여성역을 하려는 남성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과는 대조가 된다. 레스비언의 남성역은 상대방 여성을 능동적으로 애무하고 흥분시키면서 쾌락으로 몰고 가는 역할을 맡는다. 이때 여성역을 하는 여성도 남성역을 하는 여성에게 어느 정도의 답례는 하지만 그런 쾌락은 남성역 여성의 봉사로 얻게 되는 쾌락에는 미치지 못한다. 쾌락면에서 말하자면 남성역은 제공자이고 여성역은 수급자이다. 이런 상태는 남성과 여성의 성의 형태와 흡사하다. 이같은 사실은 또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즉 레스비언은 심리적으로 남성이 되기를 원한다는 사실이다. 레스비언이라고 하면 일반인들은 두 여성이 서로 알몸이 되어 새롱거리는 장면을 연상하기 쉽다. 서로 키스도 나누면서 임신의 염려가 없기 때문에 격렬하게 농탕 치는 것으로 간단히 생각하려고 한다. 그러나 레스비언이라고 해서 그렇게 통제 없는 유희를 멋대로 하는 것은 아니다. 남성역과 여성역을 확실히 구별한 다음 한쪽이 사랑하고 한쪽은 사랑받는 형태로 진행한다. 또 일시적으로 여성역을 한다고 해도 가능하면 남성역을 맡고 싶어한다. 레스비언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소망은 남성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다. "그야 남성역을 하면서 여성을 절정으로 몰고 가는 게 더 재미있지요. 상대방이 흥분하는 걸 보면 이쪽까지도 흥분하게 되는 걸요. 하지만 너무 심하게 몸부림을 치는 걸 보면 흥이 깨지기도 합니다." 이는 레스비언으로서는 정도가 심한, 남성역을 맡고 있는 여성의 고백인데, 성행위를 하고 난 후 남성들이 하는 말과 너무나도 흡사하다. 이런 남성역의 행위에는 본질적으로 육체의 쾌락은 없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상대방이 흥분하며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는 것과 리드해 가는 쾌락이다. 이런 종류의 쾌감은 그야말로 남성적이며 정신적인 쾌감이다. 상대방의 상태를 보고 쾌락의 날개를 펴서 쾌감을 느끼는 작업은 본래 여성의 몫이 아니다. 많은 여성은 단순히 육체적 쾌락에만 몰두할 뿐 남성처럼 눈을 뜨고 상대방을 보거나 목소리를 듣고 흥분하는 일은 없다. 그러나 레스비언은 여성이면서도 남성이 얻는 쾌락을 얻으려 한다. 육체적 쾌락보다는 정신적 쾌락을 구한다. 현실적으로 느끼려 하기보다는 상상으로 흥분하려 한다. 남성이 본질적으로 여성보다 낭만적인 이유는 행위에서 상상력을 발산하는 성이기 때문이다. 정신이 동원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는 골치 아픈 성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레스비언 여성에게도 마찬가지로 해당되는 말이다. 즉 레스비언은 여성 중에서 보기 드문 낭만주의자들인 것이다. 어느 레스비언의 실태 여기서 한 여성을 예로 들어 보기로 한다. 그 여성은 현재 22세인데 16세부터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의 꾐에 빠져 레스비언의 길로 들어섰다. 그 뒤 21세가 되기까지 오로지 레스비언으로서 남성은 모르는 채 지냈다. 그러다가 일년 전에 어떤 남성의 끈질긴 설득에 굴복되어 첫경험을 했다. 거의 강제였지만 그녀 자신도 이성간의 성교에 대해서는 약간의 흥미를 보이고 있던 터였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못했다. 그 남성과는 한 차례로 끝났다. 그 뒤 다른 남성과 관계했다. 그때도 반강제로 설득당했지만 첫번째 때 겪었던 것 같은 두려움은 느끼지 않았다. 결과는 역시 시시한 것이었다. 그 남성과는 세 차례 관계했지만 관계할 때마다 싫다는 생각만 들었다. 이유는 남성이 너무 강해 성행위가 길어졌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남성과 헤어진 지 3개월 후 이번에는 그녀 쪽이 어느 한 남성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여성에게만 관심을 보였던 그녀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녀는 이 남성의 요구를 들어 주어 관계를 가졌다. 남성은 행위 자체는 약했으나 행위 전후의 애무가 부드러워 언제나 포근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행위는 별로 없었고 둘이 노래 같은 것을 부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런 것들은 모두 그녀의 취향에 맞았다. 현재 그녀는 이 남성에게 홀딱 반해 있으므로 레스비언 따위에는 흥미가 없다. 이 여성은 앞서의 분류에서 언급한 바 있는 경우에 해당된다. 이런 표면적인 사건만으로 보자면 그녀는 남성을 알게 됨으로써 레스비언을 버린 것이 되므로 일시적인 레스비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마음속에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것은 여전히 레스비언적인 심정이며 육체보다 정신을 중시하고 있다. 그녀가 호의를 보이는 오직 한 사람의 남성도 여성적인 남성이다. 남성에게 반했다고는 하지만 레스비언으로서의 본질은 버리지 않고 있는 셈이다. 이 여성이 동성애를 하게 된 것은 여자 학교에서 뮵'가 고조에 달하면서였지만, 그 뒤 어느 극단에 들어가 남성역을 맡게 된 것이 그녀를 더욱 레스비언으로 몰아가게 했다고 한다. 그 뒤 호스테스가 되어 좋아하는 여성과 동거하게 됨으로써 동성애는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성장한 배경을 조사해 보니 그녀는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양아버지 사이에서 성장했는데, 양아버지는 다정한 분이었지만 여자 버릇이 나빠서 아무에게나 지분거렸다. 그 때문에 늘 고민하고 계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자란 그녀는 만일 자기가 남성이라면 여성에게 이러이러하게 해주리라는 이상적인 남성상을 그리고 있었다. 게다가 우연하게도 그녀의 주위에는 여성들이 많아 레스비언이 되기 쉬운 환경이었다. 물론 그런 환경 속에 있는 여성이 모두 레스비언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레스비언이 된 배경에는 이처럼 유혹당한 것과는 달리 자신이 그리던 남성상을 구체화하려는, 어렸을 때부터의 잠재 심리가 크게 작용했다는 것을 빼놓을 수 없다. 예를 하나밖에 들지 못했지만, 이 여성이 사는 방식은 레스비언의 실태를 매우 선명하게 비추어 주고 있다. 다른 레스비언들도 조사해 보면 각기 이상적인 남성상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그런 남성상을 주위에 있는 이성에게서 발견하게 되면 애정을 찾아 나서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레스비언은 이러한 바꿔치기 작업을 하지 않고 스스로 그런 남성상을 연출하려 한다. 만일 도중에 남성에게로 기울어진다 하더라도 자신의 남성 원망(男性願望)을 지속시킬 수 있는 상대를 택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의 레스비언은 육체적 쾌락에는 언제까지나 도달하기 어렵겠지만 정신적 쾌락으로 이를 보완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만일 어떤 남성이 이런 여성을 배우자로 선택하게 된다면 성적 쾌락이 적어 문제가 되기도 하겠지만 생리와는 무관하게 정신적인 면에서 온몸을 바친다는 점에서 상당한 장점을 갖는다고도 할 수 있다. 정리 및 결론 1. 레스비언은 일시적인 레스비언과 진정한 의미의 레스비언으로 대별된다. 전자는 남성을 알게 되기까지의 일시적인 레스비언이며, 후자는 남성을 알더라도 동성애를 계속하는 레스비언이다. 2. 레스비언은 성적으로 미숙한, 즉 이성과의 쾌락에 아직 눈뜨지 못한 여성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3. 진정한 의미의 레스비언에는 남성역을 하는 여성이 단연코 많으며 그녀들은 남성역을 함으로써 유아 시절부터 간직해 온 남성화에 대한 소망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4. 레스비언은 상상력이 풍부한 낭만주의자이며, 육체보다 정신이 앞선 비여성적 여성이다. 천차만별한 불감 드디어 가장 큰 난관인 불감증의 여성 문제를 다루게 되었다. 이 문제가 어렵게 생각되는 가장 큰 이유는 불감의 원인이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하기 때문에 분류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게다가 남녀간의 성교 관계이기 때문에 이의 실태에 대한 증언이 적고, 간혹 있더라도 가장되어 표현되기 쉽다. 이런 일만으로도 문제가 복잡한데, 게다가 한두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유가 중복되어 원인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그것이 시간적 경과에 따라 변동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여성이 자신이 불능임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남성 또한 자신이 불능임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는 등 어려운 조건을 들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넋두리만 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불감증은 하나의 막막한 어둠 속에 묻혀져 있을 뿐 이에 관해 서술한 책이라고는 한두 가지 책에 불과한 데다가 그나마도 개인의 예를 소개했을 뿐 그 실태를 총괄하고 분류하고 또 이론화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여기서 한 가지 전제해 둘 것이 있다. 이 장을 불감증의 여성이라고 하지 않고 불감의 여성이라고 한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불감증' 하는 식으로 증자를 붙이면 증상, 증후, 병증(病症), 악증(惡症)과 같이 병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진다. '증'에 해당하는 영어의 Symptom은 병의 증상이라든가 성질을 말하는 것으로서 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즐감증을 하나의 병이라든가 질병으로 보는 것은 다소 지나친 일이며 이는 오히려 하나의 경향, 또는 편향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몸의 병이 아니기 때문에 불감증의 사람들이 일반인들이 사는 틈바구니에 끼이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여기서는 증자를 빼고 불감이라는 말로 사용하기로 한다. 이 차이는 고혈압에 대한 고혈압증, 불임에 대한 불임증 등에서 느껴지는 어감의 차이를 고려하면 이해되리라 본다. 어쨌든 전자는 하나의 경향이라든가 상태를 나타내고 후자는 병명으로서 성립되는 질병이다. 요컨대 증자를 뺌으로써 불감을 특이한 하나의 병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떤 상태로서 폭넓게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그러나 이하의 글에서는 불감증이라든가 냉감증이라는 말도 사용하려고 한다. 이는 증자를 붙이는 편이 아직은 일반적이고 독자들도 이해하기 쉬우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성 잡지 또는 주간지 등에서도 이 말을 자주 쓰기는 하지만 본래 A砧자를 빼고 사용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쨌든 여기서 사용하는 불감증이라는 말은 불감의 뜻으로서 다만 불감증 쪽이 우리에게 익숙해진 말이기 때문에 편의상 그렇게 사용했다는 점을 이해하기 바란다. 불감증이란 흔히 불감증과 냉감증은 다르다는 것이 문제로 제기되곤 한다. 현실적으로 이 양자는 확실히 혼동되곤 하는데, 어떤 사전을 보면 불감증 -> 냉감증이라는 식의 설명으로 적당히 얼버무리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이 두 말은 매우 비슷한 데가 있어서 표현으로서는 같은 뜻이라 해도 크게 잘못은 아니지만 형성 원인이나 내용은 크게 다르다. 우선 불감증(Dysparennia)이란 성교에 의한 쾌감, 즉 오르가슴(Orgasme)이 결여되어 있는 경우를 말한다. 이에 대해 냉감증이라는 말은 전문 용어로서는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이와 유사한 용어로서 Frigiditat(영어의 Frigidity)라는 말이 있다. 이 단어가 한랭(寒冷), 냉담이라는 의미이므로 냉감증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Frigiditat를 전문적으로 올바르게 번역하면 성무욕증(性無慾症)이 된다. 이 정의는 성욕(Libido)이 없어서 성교를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냉감증이라는 말은 언어의 느낌을 중시한 번역이고, 성무욕증은 그 실태를 나타낸 번역이 되는 셈이다. 어쨌든 냉감증은 성욕이 애초부터 없는 상태이고, 불감증은 성욕은 있으나 쾌감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통해 불감증이란 "성교에 의한 쾌감이 결여된 상태"로 정의하기로 한다. 그러나 문제는 또 있다. 쾌감이 결여된'이라는 말 가운데 쾌감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를 절정감으로 보느냐 아니면 어느 정도의 쾌감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일 절정감을 기준으로 한다면 어느 정도 쾌감을 느끼는 건강한 부인까지 불감증이 되어 버릴 수 있다. 요즘 성에 관한 책을 너무 많이 읽은 부인들 가운데는 이 절정감을 불감의 기준으로 삼은 나머지 "혹시 나도 불감증이 아닐까?"라면서 고민하는 예가 많은 듯하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남성에게는 쾌감을 느끼는데 다른 남성에게는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경우, 또는 특정 남성이더라도 어떤 상태에서는 느끼지만 그 밖의 다른 상태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여기서 이런 상태를 불감증이라고 단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한 남성과 어느 특정 상태에서만 쾌감을 느끼게 된다 하더라도 느끼는 것이 있다면 그 여성은 이미 불감증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같은 경향은 바꿔 말한다면 여성의 쾌감이 어느 일정한 조건(남성 또는 환경)에 고착되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것이 여성의 정조 관념에 대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이 정도로 그치기로 한다. 어쨌든 어느 특정인과 특정 조건하에서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아무리 좁은 범위에서 이루어진다 해도 그 사람은 이미 불감증이 아니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그 특정인이 사회적으로 인정된 남편이 아닌 경우이다. 이 경우는 단순히 "당신은 다른 남성과 행위를 할 때이기는 하지만 쾌감을 느끼는 것이므로 불감증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이 경우는 참다운 의미의 불감증과는 다른 것으로 이른바 사회 제도상의 불감증이라 할 만한 것인데, 이런 종류의 불감증에 대해서도 뒤에 설명하기로 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쾌감이 결여된'이라는 문제를 알아보기로 하자. 한 가지 예로서 첫날밤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 대부분의 여성은 이른바 쾌감을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고통 아니면 혐오감마저 느낀다. 앞에 설명한 불감증의 정의, 즉 쾌감이 결여된'이라는 정의에서 본다면 이런 경우도 불감증의 범주 속에 포함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상태를 두고 불감증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따라서 이 경우는 "성적 경험이 없거나 적은 경우는 예외"라는 항목이 필요하게 된다. 그런데 쾌감의 정의를 단순히 육체적인 즐거움뿐 아니라 정신적 충족감에까지 확대해서 생각해 보면 첫경험이 비록 육체적으로는 동통(疼痛)이었다 하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바쳤다고 하는 충족감이 있으므로 굳이 예외를 만들 필요가 없게 된다. 실제로 첫경험에서 이런 종류의 정신적 충족감을 느꼈을 경우는 거의 예외없이 순조롭게 쾌감에 눈떠 가게 되므로 쾌감의 정의를 여기까지 확대시켜도 무방할 듯하다. 또 다른 문제 가운데 창녀의 불감은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가 있다. 대부분의 창녀는 쾌감에 몰입하지 않는다. 아니, 그보다는 쾌감으로 끌려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것은 절정에 이르게 됨으로써 육체가 소모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육체적인 연계로 자칫 한 남성에게 열중하게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러나 어쨌든 의식적으로 태세를 갖춘 불감증은 본질적인 불감증과는 다르다. 잘못 방심했을 때 느끼게 되는 불감증일 경우는 엄밀한 의미에서 불감증이라고 할 수 없다. 하긴 창녀 중에는 어느 누구와도, 또 어떤 상태에서도 쾌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의식적으로 쾌감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느끼지 않는 것이다. 말하자면 선천적인 창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일반 여성과 마찬가지로 분명히 불감증이며 그 때문에 창녀가 되었거나 또는 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같은 인과 관계도 불감증 여성을 생각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항이다. 어쨌든 불감증의 정의는 먼저 쾌감의 정의가 확립되어야만 비로소 규정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쾌감을 규정함에 있어서는 각각의 개인차와 주위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는 핑계가 아무래도 무난할 듯하다. 그렇더라도 기준을 너무 높은 절정감에 두지 말고 되도록 낮은 쪽에 두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기준에 맞는 쾌감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용어가 정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굳이 표현한다면 육체적으로는 기분이 좋은 것', 정신적으로는 어떤 충족감'이라 할 것이며 성교시에 이 양자 또는 그 중 하나라도 느낄 수가 있다면 불감증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된다. 이를 거꾸로 말하면 어느 특정 남성과 특정 조건하에서 성교를 하더라도 육체적인 쾌감도, 정신적인 충족감도 느끼지 못한 채 몸이 냉랭해지기만 한다면 그 사람을 불감증 여성이라 부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불감증의 분류 앞서 잠깐 언급한 바와 같이 불감증의 원인은 여러 가지여서 정리하기가 쉽지 않다. 이 방면의 제1인자인 슈테켈도 예외는 아니어서 도해적(圖解的)인 분류가 서툰 독일학파라는 점을 감안한다 해도 흥미 본위로(그만큼 실제적이기는 하지만) 흐르고 있어서 파악하기에 어려운 점이 많다. 여기서는 불감증의 원인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반드시 실제적인 내용은 아니더라도 여러 학자의 분류를 참고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이 분류에는 순수한 불감증 외에 일부 성무욕증의 원인으로 생각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그 원인은 우선 육체적 원인과 정신적 원인 등 두 가지로 나뉜다. 가. 육체적 원인 A : 생식기의 질환 또는 남녀 생식기가 적합치 않아 성교시 동통을 느끼는 경우 B : 생식기의 발육 부전 또는 기형 C : 생식기의 위축, 거세 D : 유착성 자궁후굴증(癒着性 子宮後屈症), 난소 하수 등 E : 질경련 나. 정신적 원인 A: 히스테리 B: 성교에 대한 혐오, 공포 C : 남성의 조기 사정 D: 성교 기교의 졸렬 및 성적 무지 E: 자위 탐닉 F: 정신적 알력 a. 첫 월경시 수치심을 느낌. b. 결혼 첫날밤의 정신적 타격 c. 남편 이외의 애인에 대한 잠재적 애착 및 기타 G: 혼거 생활에 의한 주위에의 배려 H: 오르가슴에 대한 지나친 기대로 현재 오르가슴에 필적하는 쾌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오르가슴은 더 큰 쾌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 I: 성교 중절(피임법), 콘돔 성교 등을 계속한 데서 오는 정신 신경 쇠약 J: 근친 결혼으로 이성적 감정을 가질 수 없는 경우 K: 남편을 경외하는 경우 또는 반대로 멸시하는 경우 L: 성감을 열등시하는 경우 M: 그 밖의 여러 가지 정신적,감정적 조건 이들 가운데 대부분의 신체적 원인은 특수한 것이며, 그 자체가 질병으로서 일반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불감증과는 의미가 다르다. 치료면에서는 부인과 또는 외과적인 조치가 필요하며 이 장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E의 질경련만은 정신적 원인에 의해 일어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단지 그 정신적 원인이 육체적으로 나타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다음은 정신적 원인인데,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인이 다양하고 범위 또한 광범해서 어려운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원인이 각기 독립된 것이 아니라 서로 관련되고 중복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더 어렵다. 이를테면 A의 히스테리는 B, F, M 등 각 항목에서도 볼 수 있는 성격으로, 이 원인들이 중복되어 불감증을 형성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M 등은 여러 가지 정신적·감정적인 조건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밖의'라는 의미는 I 항목까지의 이유 외의 모든 정신적 스트레스가 불감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내포하는 말로서 그 범위가 매우 광범하다. 그 중에서 비교적 이유가 단순해서 해결 방법도 간단할 것으로 생각되는 것은 C의 조기 사정과 D의 성교 기교 졸렬 및 성적 무지, G의 혼거 생활, I의 성교 중절, 콘돔 성교 등에 의한 신경 쇠약 등이다. 이런 문제들은 남성이 여성에게 협력, 조건을 바꾸면 치유된다고는 하지만 시기를 놓치면 불감증이 고정화됨으로써 몸과 정신이 그런 상태로 추종하게 된다. 그러므로 조건을 일신시켜도 이미 때가 늦은 경우가 생길 수도 있다. 불감증은 항상 당사자에게 정신적,육체적 열등감을 갖게 하고 또 그 같은 열등감이 재차 불감증을 치유하기 어려운 상태로 만들어 간다. 그러므로 이른바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 나쁜 쪽으로 톱니바퀴가 굴러가게 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밖에 J의 근친 결혼에 의한 이성적 감정의 결여 등은 특수한 경우이기는 하지만 결혼이라는 사회적 체제 속에 들어간 것인만큼 해결이 용이하지 않다. 이런 경우에는 남편 이외의 애인에 대한 잠재적 애착과 마찬가지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한 불감증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 밖의 원인에 관해서 설명하자면 그 같은 사실이 여성의 심리에 끼친 상처가 깊기 때문에 설사 그런 원인을 제거했다 하더라도 상처가 쉽게 아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중요하다. 이는 또한 개개인의 환경과 감수성에 의해 달라진다. 그러나 원인이 분명하다면 사실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많은 불감증 여성들이 원인 불명인 채로 불만족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특히 정신적 원인이 강하다 앞서 분류한 원인 중 특히 정신적인 요소가 강한 원인에 대해 좀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먼저 A의 히스테리인데 이 유형의 여성들은 피암시성(被暗示性)이 뛰어난 나르시스트이며 대체로 악녀이지만, 리드만 잘 하면 성감이 훌륭한 묘미 있는 여성이 될 수 있다는 점은 앞서 설명한 바 있다. 이 대목을 읽고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은 불감증 원인이 납득되지 않는다는 독자도 있을지 모르지만 사실 이는 별로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감이 뛰어난'이라는 말은 어느 특정 남성이 멋지게 리드를 할 경우 성감이 뛰어나게 된다는 뜻이지 모든 경우가 다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나르시스트와 개성이 강한 여성은 자신과 잘 어울리는 남성을 만나면 본래의 뛰어난 소질을 발휘할 수 있다. 그러나 잘 어울릴 범위가 보통 여성보다 극히 한정되어 있다. '성감이 풍부한'이라는 말은 이처럼 잘 들어맞은, 즉 적합(適合)한 플러스의 경우에만 해당한다. 반대로 불감증의 경우는 이것이 마이너스가 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요컨대 감정의 진폭이 큰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남성에게 적응하는 범위가 좁게 나타나는 경향은 불감증 여성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하나의 경향이며, 그런 의미에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불감증에도 어느 정도 그렇게 되기 쉬운 선천적인 유형이 있다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 같은 히스테리 성격이 직접적으로 불감증의 원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한다. 즉 그렇게 되는 경향은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는 할 수 없다. 이는 히스테리 기질의 여성이 모두 발작을 일으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과도 통한다. B의 성교에 대한 혐오, 공포, 불결시 등은 현재에도 불감증의 주요 원인으로서 빼놓지 않고 지적되는 사항들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성교를 불결한 행위로 보는 경향이 원인으로 작용할 경우가 많다. 이는 선천성이라기보다는 후천적인 것으로 가정에서의 예의 범절이라든가 도덕, 윤리관 등에 영향을 받는다. 슈테켈도 예의 범절이 엄한 상류 가정에서 자라난 여성들에게서 이런 종류의 편견이 많이 나타난다고 여러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현대에도 유아기에 성을 불결시하도록 가르치고 있는 것이 예의 범절면에서보다도 도덕, 윤리관으로서 작용하고 있다. 물론 성장함에 따라 이런 관념이 차차 사라지기는 하겠지만, 어머니와 단 둘이 사는 환경에 처해 있다든가 딸을 지나치게 보호하는 부모를 가진 여성, 그리고 교제 범위가 한정되어 있는 여성의 경우에는 성에 대해 편견을 가진 불감증 여성이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도 연령에 따른 성교육은 반드시 필요하다. 한편 성교에 대한 혐오증, 공포증의 경우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이러한 경우에도 물론 성에 대한 불결한 느낌, 죄악감이 바탕에 깔려 있기는 하지만 이에 덧붙여 어떤 정신적인 외상(外傷)이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소녀기에 갑자기 거대한 페니스를 보게 되었다든가 양친의 성교 장면을 우연히 목격하게 되었다든가 원치 않는 사람에게 강제로 입맞춤을 당했다든가 하는 등의 외적 사실이 겹쳐지면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성에 대한 불결감이라든가 혐오감은 소녀기에는 누구나 겪는 일로 그것 자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사춘기와 함께 그것이 사랑으로 승화되어 가는 시기에 이런 정신적 외상 때문에 혐오와 공포가 가미된 상태에 그대로 머물게 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이 머릿속에서 고정화되면 남성이 아무리 노력을 해도 불감이라는 문은 열려지지 않는다. 이런 사태야말로 남성에게 고착되기 이전에 전체 남성에게 실망하게 된 여성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C의 남자의 조기 사정에 의한 불감증은 그렇게 많은 사례로는 생각되지 않는 항목이다. 물론 조루는 확실히 여성의 성적 만족을 충족시켜 주지 못하는 동시에 여성에게 불안과 초조감을 갖게 하는 원인이다. 뿐만 아니라 여성에게 남성에 대한 불신과 멸시, 그리고 채워지지 않는 자기 성욕에 대한 혐오까지 느끼게 만든다. 그러나 조기 사정은 현재 나름의 치료법이 개발되고 있으며, 치료하지 않더라도 시간이 흐르면 어느 정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이다. 또 여성이 상대방 남성을 정신적으로 사랑하고 있으면 여성은 상대가 사정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으며 그에 적합한 행위를 취할 수도 있다. 물론 여성이 상대방 남성을 별로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경우, 또는 성욕이 강한데도 내공적 성격이기 때문에 그것을 남편에게 암시할 수 없는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그러나 이는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정신적인 측면이라기보다도 기술적인 측면에 가까운 문제이므로 그다지 문제될 것은 없다. D의 성교 기교의 졸렬함 및 성적 무지는 양쪽이 협력만 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한두 차례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랜 기간 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온 사례가 많다. 이때 처음에는 기술적인 문제였던 것이 어느 사이엔가 정신적 불신으로까지 발달했다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렇게 되면 해결은 더욱 어려워진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불감은 남녀가 어느 정도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라면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불감증의 주요 원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E의 자위 탐닉은 불감증의 원인 가운데 비교적 많은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런 자위 탐닉만이 원인이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여기에는 여성을 리드하는 남성의 태도가 연관되어 있다. 요컨대 자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적절한 시기를 놓친 셈이다. 여성의 자위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을 테지만 우선은 클리토리스 쾌감으로 대표된다. 그리고 이에 대해 정당한 성교에 의한 쾌감은 바기나 감각을 가리킨다. 클리토리스 쾌감과 바기나 쾌감 중 어느쪽이 뛰어난가 하는 비교는 차치하고, 자위를 중지하기 위해서는 남성에게 안겨 삽입되는 성교의 즐거움 쪽이 자위 행위의 즐거움보다 뛰어나다는 실감을 갖게 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바기나 감각이 움트는 것과 동시에 "나는 이 사람이 좋다"라고 하는 정신적인 면에서의 지원도 필요하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형태로 바기나 감각이 발달, 클리토리스 감각을 능가하게 되면서 자위 행위를 중지하게 되는 경로를 밟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그러나 클리토리스 감각에서 바기나 감각으로 옮겨지려 할 때 어떤 장애, 이를테면 남성의 불친절, 배신 등으로 정신적 지원이 결여된 채 혐오감만 남게 되면 바기나 감각은 느낄 수 없다. 오히려 냉랭해지면서 남성의 모든 행위를 거부하려 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경우 그대로 불감증이 되는데, 성적 욕망이 강한 여성이나 일찍이 자위로 만족하고 있던 여성은 자위의 쾌감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바기나 감각을 경험해 보고 싶었으나 실망한채 다시 클리토리스 감각으로 되돌아가게 된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극단적인 나르시스트와 자위 상습자를 제외하고 자위 탐닉은 불감증의 단순한 원인이라기보다 그 결과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 다음으로 F의 정신적 알력에는 세 가지 항목이 있는데, 이 정신적 알력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 먼저 육체적인 수치인데, 이는 여성이면 누구나 경험하는 사항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건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은 불감증이 되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은 여성을 둘러싼 주위 환경의 차이 때문인 듯하다. 생리 때 어쩌다가 남학생에게 들켜 심한 모욕을 당했다든가, 피는 불결한 것이라는 관념이 강하게 심어졌을 때는 그것이 자기 성에 대한 실망으로 시작해서 성 자체에 대한 혐오감으로 발전한다. 그렇게 됨으로써 결국 불감증 속에 틀어박히게 되는 것이다. 하긴 이러한 사례는 성이 개방되어 가고 있는 현대에서는 거의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보다는 b 항목인 결혼 첫날밤의 정신적 타격이 그 빈도로 보아 가장 많으며, B와 함께 불감증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간단한 예를 한두 가지 들어 보자. 첫날밤에 남편이 아내의 다리를 보고 "다리가 굉장히 굵군." 하고 핀잔을 준 것이 머릿속에 남아 그 뒤 남편과의 행위에서 쾌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여성도 있다. 또 "남자의 거긴 좋지 않은 거야."라는 말을 듣고는 불감증이 되어 버린 여성도 있다. 이런 종류의 사례는 무수히 많다. 어쨌든 이 사례들은 첫날밤의 성체험이 여성에게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알 수 있게 한다. 여성에게 첫날밤은 성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과 기대가 현실화하는 때이고, 클리토리스 감각에서 바기나 감각으로 출발하게 되는 때이며, 동시에 한 사람의 성에서 두 사람의 성으로 출발하는 지점이다. 이때 한꺼번에 밀려드는 미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오직 하나, 상대방 남성에 대한 애정과 신뢰로써만 극복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 순간 이런 공포나 불안을 대신할 수 있는 것들이 없다면 여성은 장차 도래할 두 사람의 성에 실망한 채 자기 세계 속에 틀어박히는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불감은 여성에게 주어진 자연의 섭리이다. 최근에 여성들 사이에서 불감증이 늘어나게 된 것은 성에 졸렬한 젊은 남성들이 증가하면서 첫날밤을 너무나도 멋적게 보내게 된 여성이 많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어쨌든 첫날밤이 그 뒤의 여성의 성생활에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과거나 현재나 변함이 없다. c의 남편 이외의 애인에 대한 잠재적 애착에 의한 불감증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엄밀한 의미에서 불감증이라고 할 수 없다. 즉 남편 이외의 애인을 마음속에 그리고 있기 때문에 성행위 도중 남편에게 열중할 수 없어 불감증이 된다는 것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남편을 중심으로 해서 말할 때에만 해당되는 것이다. 남편에게는 불감이 되지만 좋아하는 애인과 행위를 할 때는 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앞의 불감증의 정의에 어긋난다. 그러나 최근 들어서는 이처럼 남편이 싫거나 이혼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본 적이 없는데도 남편과의 성교에서는 쾌감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는 주부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사실이다. 이는 남편과의 사이에서는 긴장감을 높일 수 없어 성감이 높아지지 않는다는 뜻이거나 여성의 성이 자주성에 눈떠 가고 있는하나의 증거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남편과의 행위시에는 불감이지만 다른 남성과의 행위시에는 쾌감을 느낀다 해도 이는 불감증이나 다름없는 것인데 만일 이런 여성이 아무래도 치료를 받아야겠다는 말을 남편에게 한다면 심각한 사태가 아닐 수 없다. G의 혼거 생활은 도시 생활을 하는 부부에게는 매우 절실한 문제이다. 행위를 누구에게 들키거나 누가 엿듣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불안은 확실히 불감증의 원인이 된다. 그러나 이는 원인과 치료가 모두 간단하며 경제적으로 해결되는 문제이다. 따라서 이런 문제는 이 장에서는 일단 제외시킨다. H의 오르가슴에 대한 지나친 기대 사례는 현재 오르가슴에 필적할 만한 쾌감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오르가슴은 더 멋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경우이다. 한 마디로 욕심꾸러기형으로서 묘한 책을 너무 많이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런 책을 읽고 자신이 혹시 불감증일지도 모른다면서 급히 병원을 찾는 사람치고 불감증은 없다고 한다. 어쨌든 성감의 과대 표현이 반대로 불감증 여성을 만든다는 사실은 짓。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다음으로 I의 성교 중절(피임법), 콘돔 성교 등을 계속한 탓으로 빚어진 신경 쇠약의 경우를 살펴보자. 사실 두 사람 사이에 고무 등의 이화감을 느끼게 하는 물건이 끼여들 경우 성감을 높이는 데는 방해가 된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그대로 접촉했다가는 임신될 우려가 있다는 점 때문에 성감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실제로는 피임구를 장착했다는 사실보다는 임신을 피하려 하는 남성의 태도, 또는 임신될 위험을 무릅쓰고 일방적으로 성을 즐기려는 태도 등에 대한 불신이 바탕에 깔려 더욱 문제가 되는 듯하다. J의 근친 결혼에 의한 이성적 감정의 결여는 절대적인 불감증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너무 가까운 친척간이어서 성감이 충족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일반적인 불감증 부부와는 달리 성감 이전에 친척간이라고 하는 양성의 감정이 있다. 따라서 이는 적대적인 불감과는 다르다. K의 남편을 경외하는 경우는 자신을 비하한 나머지 부자유스러워지면서 성감의 고조를 방해하게 되는 상황이다. 반대로 남편을 멸시하는 경우에도 여성은 남성에게 정신적·육체적으로 복종할 수 없게 된다. 여성의 오르가슴이 자신을 잊고 깊이 몰입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상태임을 고려할 때 이런 종류의 불감증은 충분히 이해가 되리라고 본다. L의 성감을 열등시하는 경우는 B에서 설명한 성교에 대한 혐오, 공포, 불결시와 연관된다. 성의 쾌감을 죄악시한 종교와 도덕은 수없이 많다. 그리고 그에 대한 희생자로서 불감증 여성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성애에 지나치게 빠져 있는 어머니나 언니를 보고 혐오감을 느껴 자신도 그렇게 되는 게 아닌가 극도로 조심한 나머지 불감증이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끝으로 M의 정신적,감정적 조건인데 여기에는 여러 가지가 포함된다. 남성에 대한 애정의 소실, 불신, 배신으로 인해 갖게 된 이상 성욕, 변태, 유아 체험, 이상 체험 등 예를 들자면 한이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모두 정신적인 상처, 이르바 정신 외상(精神外傷)으로 작용하게 되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불감이 되기 쉬운 사람 육체적으로 정상인 여성이라면 누구나 성행위에서 쾌감을 느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또한 누구나 불감이 될 소지를 갖추고 있다. 요컨대 불감은 오르가슴과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육체라는 창을 통해 보여 주는 두 개의 얼굴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이면 누구나 불감증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불감에는 개인차가 있어서 비교적 불감이 되기 쉬운 유형과 불감이 되기 어려운 유형이 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여성이 불감증이 되기 쉬운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이에 대해서는 병의 원인을 알아낸 후 치료법을 강구해야 하듯이, 불감증의 성인(成因)을 알아낸 다음에 불감증이 되기 쉬운 여성의 유형을 가려 내는 방법이 가장 적절한 방법일 듯하다. 다음으로는 불감증의 원인인데, 이에 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지만 여기서 다시 총괄적으로 말하자면 육체적인 원인과 정신적인 원인 등 두 가지로 나뉘어지고 있다. 현재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대부분의 불감증은 육체적인 원인보다는 정신적인 원인에 의해 발생되는 증세이다. 즉 첫경험 때의 불안, 혐오, 남편의 무관심, 임신에 대한 염려, 남편에 대한 불신 등이 여성에게 마음의 상처로서 미묘하게 남아 불감의 원인으로 작용한다. 이를 일괄해서 의학적으로는 정신 외상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성교시, 특히 첫경험 때의 여성의 심리만큼 순진하고 예민한 것도 없으므로 그만큼 상대방 남성이라든가 주위 환경에 영향받을 확률도 매우 높다. 그 중에서도 더욱 순진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다. 상처받기 쉬운 사람과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 성격의 사람이다. 이 가운데 전자, 즉 순진하며 상처받기 쉬운 유형이란 한마디로 신경질적인 여성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옆방에서 누군가가 혹시라도 이쪽의 행위를 엿듣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두려움으로 숨소리를 죽인다(도시의 협소한 주택 사정으로 보아 비교적 이런 종류의 사례가 많다). 이때 남편이 그런 건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하지만 그래도 계속 마음에 걸리는 성격의 여성과, 처음에는 신경이 쓰였지만 상관하지 않게 되는 성격의 여성 등이 있다. 물론 신경을 쓰는 전자가 불감증에 빠지게 되기 쉽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경우 불감증에 빠진 여성을 일반적으로 신경질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마음속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선 옆방에 있는 시어머니에게(예를 들자면) 자신들이 그런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 수치심을 갖고 있다. 또 자신은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자존심과도 통하며, 누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덤벼드는 남편에 대한 반발과 경멸, 그리고 또 그렇게까지 하면서 행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성행위 자체에 대한 혐오 등 여러 가지 심리가 뒤섞여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성교는 수치스러운 짓이므로 하물며 소리를 내거나 그런 소리를 남들이 듣게 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는 정신적 계율, 즉 성장기의 가정 교육에서 영향받은 부분도 빼놓을 수 없는 점이다. (흔히 남들이 엿듣거나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것이 자극이 되어 더욱 불탄다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성적으로 상당히 숙련된 남녀의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지 첫경험이거나 경험이 별로 없는 남녀의 경우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콘돔 성교를 지나치게 일상화할 경우 등 정신 신경 쇠약에 의한 불감증을 고려할 때 아무리 콘돔 성교를 지속해 왔다 하더라도 불감증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 더 많다. 아마도 대부분의 현대 여성들은 콘돔 성교 때문에 불감증에 빠지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불감이 되는 여성의 심리에는 나름대로 납득할 수 있는 점이 있다. 자기와 상대방 남성이 서로 사랑하면서 단단히 묶여져 있다는 믿음으로 애정을 높이려 하고 있는 여성에게 성교시 두 사람 사이를 인공적인 고무 막이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또 이런 일이 마음에 걸리면 여간해서 만족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이런 여성은 상대방 남성이 아무리 불타더라도 그것은 막을 통한 꾸며진 행위이며 진실된 애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또 남편과의 행위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성과의 행위시에 상대방이 솝씨 있게 콘돔으로 무장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 행위를 그 남성이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증거라고 생각하게 되거나 단순히 자기 육체만 탐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는 자기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의심을 하게 되는 일도 있을 것이다. 콘돔으로 무장하고 있다는 하나의 사실 때문에 신경질적인 여성은 이런 망상 저런 망상 끝에 결국 흥이 깨어져 버리게 된다. 이와는 달리 일반적인 여성은 그다지 깊이 생각하려 하지 않고 고분고분 남성에게 몸을 맡겨 행위 자체에 몰입하려 한다. 그러나 불감증의 특이한 점은 이와는 정반대되는 행위를 하더라도 그것이 또한 불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즉 한편에서는 콘돔의 사용으로 불감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불감이 되는 것이다. 이는 임신을 두려워하는 여성에게서 볼 수 있는 일로서 상대가 피임법을 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불안해서 행위에 열중할 수 없다는, 특히 콘돔같이 정확한 피임법이 아닐 경우에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심리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애인 관계에서뿐 아니라 부부간에도 흔히 있는 일로서 완전한 피임법이 사용되고 있는가를 확인하지 않고는 행위하지 않는 조심성 있는 여성도 있다. 또 그것을 확인하고 싶지만 창피스러워서 직접 확인해 보지 못하고 불안한 채로 행위를 함으로써 결국 행위에 몰입하지 못해 마침내 불감이 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이처럼 콘돔을 장착하는 경우와 장착하지 않는 경우가 모두 불감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치료법이 되기도 한다. 이 같은 사실은 방사선이 암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치료 방법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과 마찬가지로 매우 모순에 찬, 동시에 그만큼 쉽지 않은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신경증적 유아성 신경질적인 여성이 불감증이 되기 쉽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그렇다면 이 신경질이란 무엇을 말하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신경질' 이라는 말은 의학적으로는 체질성 신경 쇠약증을 가 리키며 때때로 강박 신경증도 이 속에 포함된다. 정신 증상으로는 감정 자극성, 주의 집중 곤란, 기억력 감퇴, 심기성 염려, 불안 발작 등 여러 가지가 나타난다. 그리고 신체 증상으로는 자율 신 경 기능의 불안정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실태가 다채롭고 다양하 다는 점이 신경질적인 사람의 특징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특히 중요하며, 또 반드시 존재하는 증상은 내성적이고도 모든 일에 열등감을 갖기 쉬운 '자기불확실(自己不 確實)'과 모든 일에 높은 이상을 가지고 인생에 대한 욕망이 강하 며 완전을 추구하는 '완적벽(完全癖)' 등 언뜻 보기에는 모순된 두 가지 성격이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신경질적인 사람'이라고 할 때는 위에서 명 시한 정의처럼 엄격한 의미보다는 단순히 까다로운 사람이라든가 경험이 적기 때문에 상처받기 쉬운 사람이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들의 근본에는 이처럼 자기 불확실과 완전벽이라는 두 가지 성격이 존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내성적이고도 열등감을 갖기 쉬운 자기 불확실 성격 은 성행위에서 상처받기가 쉽고 일단 상처를 받으면 더욱 깊어질 뿐 치료하기가 어렵다. 처음으로 자기 육체를 보이게 되었을 때 남성으로부터 신체의 어느 부분에 대해 모욕적인 이야기를 들었다거나 첫날밤에 남편에 게서 "야무지지가 못하군."이라는 말을 농담으로라도 듣고 난 후 이 불확실 성격이 더욱 안으로 빠져들면서 열등감으로 작용하여 결국 불감에 빠지게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또 완전벽은 매우 골치 아픈 성격으로서 이상이 높고 욕망이 강 하기 때문에 무엇이든 완전한 것을 바라며, 항상 주위에 불만을 품고 있는 성격이다. 이는 여성의 경우에는 한 발 물러서는 성격 표현의 특성 때문에 잘 드러나지 않으나 남성의 경우는 공격적인 성격 표현의 특성상 우리들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이를테면 스탠드 바에 가기만 하면 곁에 다가서는 호스테스들에 게 한마디씩 싫은 소리를 해대서(내공성과 열등감에서 오는 불확 실성) 결국 어느 호스테스와도 친하게 지내지 못한 채 늘 불만을 품고 있는 유형의 남성이 있다. 이런 종류의 사람은 일반적으로는 편벽한 사람으로 불리며 여성에게 가장 인기가 없는 남성이다. 어쨌든 완전한 것을 바라는 이 완전벽에 의해 여성이면 여성, 남성이면 남성에 대한 어떤 하나의 이미지가 고착되어 버려 더 이 상 발전할 가능성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이미지의 고착은 엄마를 대하는 어린이의 태도와도 같은 것으로서 일종의 유아성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고착에서 벗어날 수 있을 때 비로소 정신적으로 성장하게 된다. 소위 이상화된 혁명이라는 고착된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일부 운동권 학생 등은 바로 이 같은 유아적 완전벽에 사로 잡힌 신경질 병자(神經質病者)의 전형적인 유형이라고 할 수 있 다. 어쨌든 이 완전벽을 가진 사람에게는 적응할 수 있는 범위가 좁 다. 즉 자신에게 알맞은 사회 환경은 물론 친구도 거의 없고 그 때문에 항상 주위에서 마찰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 아 더욱 완전벽 속으로 몰리게 되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다. 불감증에서 이런 신경증적 유아성을 지닌 여성만큼 치료가 어려 운 유형도 없다. 이런 여성은 단순히 성미가 까다롭고 자기 중심 적인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유아기에 배웠고 또 체험한 바를 성장해 가면서 주위 척도에 맞추어 적절히 수정하고 정정해 나가는 적응성이 없으므로 언제까지나 그 시점에 머무른 채 지난 날의 가치 기준을 신봉한다. 그리고 자기 척도에 맞지 않는 모든 것을 일체 거절한다. 말하자면 '어른 아이'가 되는 셈이다. 유아기에 얻은 가치 판단은 유아가 아직 인간적으로 제구실을 하지 못할 때 심어진 것이므로 대부분이 어른에게서 물려받은 기 성의 가치 판단이다. 뿐만 아니라 이때 어른들이 유아에게 가르쳐 주는 가치 판단은 현실적으로 적용되는 가치 판단이 아니라 이상 화된, 매우 비인간적인 판단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라는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면 아이는 이에 대한 독자적인 가치 판단 능력을 갖고 있지 않은 탓에 절대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그렇게 가르친 당사자인 어 른이 현실 사회에서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 다. 오히려 현실 사회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살아가기 어렵 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런 잘못된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유아에 대한 어른의 교육은 항상 이상상(理想像)을 가르치는 것 으로서 시작된다. 게다가 이러한 이상은 상대가 어리면 어릴수록 단계적으로 확대되어 간다. 이상을 가르침으로써 이러이러하게 되 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망을 어린아이에게 주입시킨다. 자신들의 이상을 가르침으로써 부모들은 올바른 가치 판단을 가르쳤다고 만 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도 지키기 어려운 이상을 지키라고 가르침을 받은 아이야말로 입장이 난처해진다. 결국 성장함에 따라 아이들은 "아 무리 생각해도 부모에게서 교육받은 것은 무리인 것만 같다. 그건 이상일 뿐 현실은 그렇지 않다. 부모가 가르쳐 준 교육은 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는 말씀인 듯하다."라고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성장이란 자신을 차차 비소화시켜 사회 속에 파 묻어 가게 하는 과정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어린이들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성인으로 변모해 간다. 이 파도를 헤쳐 나감으로써 이상과 현실을 알게 되는 동시에 다양 한 현실 상황에 적응해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변모를 단호히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리고 또 그 사람이 굉장히 자기 멋대로인 데다가 성미가 까다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결국 그의 주위에는 항상 풍파가 일 게 되고 그는 머지않아 주위 사람들에게서 따돌림을 당하게 된다. 이런 사례는 사회 생활 구석구석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 다. 이것은 인간 정의(人間正義)만을 일방적으로 교육받다가 정신 적으로 자립하기 전에 성인이 된 데서 비롯된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 생활의 적응 능력 문제는 아직 간단한 문제이 다. 왜냐 하면 자기 척도를 고수하면서 그런 자기 척도에 고착되 어 있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되갚음을 받게 됨과 동시에 여러 사 람에게서 비난과 조소를 받게 되고 또 때로는 벌을 받는 결과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을 겪음으로써 자기 생각이 몹시 편협하고 소아적인 것 이었음을 깨닫고는 태도를 고치려 한다. 설사 고치려 하지 않 는다 해도 그 동안의 자신의 가치 척도가 일반적인 가치 척도가 아니었다는 점만은 깨닫게 된다. 그러나 성문제일 경우에는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이 나지 않는 다. 여기 한 소녀가 있다고 하자. 이 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성은 수 치스러운 것, 성의 쾌락 속에 빠지는 것은 죄많은 인간이 하는 짓 이라는 교육을 받았다고 하자. 이런 교육은 예의 범절이 엄한 가 정이라든가 엄격한 카톨릭 교도 가정에서는 지금까지도 이루어지 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 경우 부모들은 성행위를 즐기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에게는 성 문제에 대해 엄하게 가르쳐야 된다는 안이한 생각에서 체면 치레 의 비현실적인 교육을 시켰다고 가정하자. 그런 가르침을 받은 소 녀는 성의 실태를 전혀 모르기 때문에 부모의 말을 그대로 믿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성장함에 따라 부모에게서 가르침받은 성 에 대한 관념은 더욱 굳어지게 된다. 그런데 마음과 몸은 정직한 것이므로 멋대로 성숙하여 마침내 이성을 받아들일 태세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부모에게서 받은 가 르침과 여러 해 동안에 걸쳐 축적된 성에 대한 기피증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기는커녕 온 몸에 피가 끓어오름을 느끼 고는 더욱 강하게 자신을 결박한다. 성을 동경하면서도 성을 불결 하게 생각하는 마음은 여전히 살아남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결혼하게 될 경우 남편의 애무가 아무리 부드럽 고 신중한 것이라 해도 그녀의 성은 쉽사리 열려지지 않는다. 열 려지려 하다가도 성은 창피스러운 일, 죄많은 인간의 짓이라는 관 념이 고개를 들어 스스로 닫아 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너무나도 엄격한 도덕적 교육이 성의 결실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 대체로 남성이 끈기 있게 노력하면 그녀의 머릿속에 틀어박혀 있는 성에 대한 거부감이 차차 스러져가면서 육체의 기 쁨이 서서히 느껴지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 하고 완력으로 여성을 탈취하려는 남성이 나타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되면 문제는 도리어 더 복잡하게 된다. 자기 규제 가 엄한 여성에게는 그만큼 신중하고 끈기 있는 애무가 필요하며, 이런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비로소 육체의 기쁨이 정신의 터부(금 기)를 이겨 내게 되는 것이다. 만일 도중에 남성이 이런 노력을 게을리하거나 주위 환경이 나쁘면 그녀는 성의 개화를 이루지 못 한 채 인생을 마치게 된다. 이렇게 머리가 유아적인 개념으로 고착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어 려움이 많으므로 여기에 불확실성이라든가 완전함을 추구하는 완 전벽이 가세될 경우에는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이런 유형의 여 성은 적응 영역이 좁다. 그러므로 그 초점을 발견했다 하더라도 완전한 즐거움의 경지로 끌어내기 위해서는 남성의 인내심 있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처럼 성에 미숙한 젊은이들이 많은 상황에서는 이런 여성을 이끌 만한 인내력과 능력을 지니고 있는 남성을 찾아보기 힘들다. 따라서 이 여성들에게 현대는 그만큼 불행한 시대라 할 것이다. 쾌감에 필요한 조건 우먼 리브를 외치는 여성들은 분개할지도 모르지만 여성의 쾌감은 우선 남성을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경우 클리토리스 감각과 바기나 감각 중 어느 쪽이 강한가라든가, 클리토리스 감각에서 바기나 감각으로의 이행 등 논의해야 할 문제들이 많지만 이것에 관해서는 이미 '우먼 리브를 외치는 여성'이라는 장에서 논했으므로 생략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오르가슴이 바기나 감각에 의해 완성된다는 결론에 대해서만 설명하기로 한다. 실제로 불감이라는 것은 남성을 대하는 경우에만 해당되는 말이므로 예를 들어 자위에 의한 클리토리스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른바 불감과는 다른 문제이다. 따라서 이 경우 클리토리스 감각과 바기나 감각 중 어느 쪽이 강한가 하는 등의 문제는 처음부터 중요한 논점이 아니다. 문제는 성행위인데, 이는 어디까지나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성기에 삽입됨으로써 성립된다. 남성의 성기를 여성이 수용하는 형태, 바꾸어 말해서 여성은 수동적이고 남성은 능동적인 형태라는 점이다. 물론 여성 쪽이 더 적극적으로 원했다든가 남성 쪽이 소극적이었다든가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행위 자체로 보면 남성이 능동적이고 여성은 수동적인 형태라는 것이 분명하다. 이 능동과 수동은 서로 하나가 되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 양자간에는 하늘과 땅만한 차이가 있다. 이를테면 남성은 행위하기를 바라고 있는데 여성은 그럴 마음이 없다고 하자. 이 경우는 행위를 할 수 있다. 여성은 원치 않을 때도 남성을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남성은 원치 않는데 여성이 원할 경우에는 행위가 성립되지 않는다. 아내가 아무리 원하더라도 불능인 남편을 상대로 한다면 행위는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와는 달리 여성이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남성이 원하면 강간이라는 형태를 통해서라도 행위는 성립된다. 여기서 우리는 성행위의 원형이 매우 남성 주도적임을 깨닫게 된다. 현대의 남녀 관계에서 이렇게 차별이 지어지는 행위는 쉽게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성행위의 원형이 이처럼 남성 우위로 되어 있는 데는 나름대로의 까닭이 있다. 이는 양성의 육체적인 조건이 다른 데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순발력은 있지만 지속력이 떨어지는 남성의 몸과, 순발력은 없지만 지속력이 뛰어난 여성의 몸의 근본적인 차이에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결과인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앞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생략한다. 어쨌든 성행위 자체는 완전히 남성의 주도권 아래 있으며 행위는 남성의 뜻대로 시작되고 또 끝난다. 이는 여성측에서 보면 남성의 의사대로 시작되고 또 남성의 의사대로 끝나게 되는 셈이므로 그 발단과 경과, 종말에 자주성으로 불릴 만한 행위는 별로 없다. 행위 도중 여성의 의지라는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 같은 행위에서의 @未昑소실(自己消失)', 다시 말해서 3 버리는 것'이야말로 여성의 성행위상의 특징이며 남성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다. 성행위는 이미 그 원형에서 행인지 불행인지 여성에게 먼저 자기를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것이 쾌감을 얻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임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서 과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같이 가혹한 조건을 감수할 수 있을까. 물론 이는 반드시 가혹한 것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남편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또 믿고 있는 아내라면 이는 오히려 자신이 바라는 조건일 수도 있다. 또 그다지 존경하지도, 믿고 있지도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호의만 가지고 있다면 별 저항 없이도 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일부 여성에게 이는 아무래도 가혹한 조건이다. 좋아하지 않는 남성에게 몸을 맡길 때, 또는 과거에는 사랑했으나 현재는 그렇지 않은 남성과 관계할 때 3 버리고 상대방의 의사에 따라야' 한다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설명한 불감증의 원인 중 남편을 멸시하는 경우, 남편 이외의 애인에 대한 잠재적 애착 등의 예는 이처럼 나를 버려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결과 생긴 불감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든 간에 성의 원형은 여성에게 어디까지나 자신을 버릴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렇지 않는 한 쾌감은 전혀 주어지지 않는다. 이 경우에도 신경질적이거나 상대방에게 완벽성을 요구하는 여성은 매우 불리하다. 이런 유형의 여성에게 자신을 포기해도 괜찮다고 생각될 만한 상대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게다가 만일 그런 상대가 있다 하더라도 그 남성이 반드시 그녀 같은 여성을 찾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적용 범위가 좁아 그만큼 고민하게 되는 셈이다. 이와는 달리 자기를 버리기 쉬운 여성은 행복한 여성이다. 물론 이런 유형의 여성에게도 이상은 있다. 그러나 신경질적인 여성처럼 가당찮은 이상 따위에 집착하지는 않는다. 상황에 따라 적절히 이상을 바꾸어 주위에 있는 남성을 이상적인 남성으로 만들어 낸 다음 그에게 자기를 맡긴다. 주위 사람들에게서는 "이상을 덤핑으로 팔았다"느니 "그런 남자에게 가다니......." 하는 조소를 받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여성이 의외로 성의 기쁨을 맛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유형의 여성도 현실적으로는 꿈 같은, 이야기 속에나 나올 왕자님 같은 남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자기 이웃이나 자기 곁을 지나치는 남성 가운데서 왕자님을 볼 수 있는 성격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질적인 여성보다는 오히려 그녀들이 어떤 면에서는 공상력이 뛰어난 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랑은 착각이다"라는 격언이 있는데 그녀들은 바로 이런 격언을 몸으로 실천해 보이고 있다. 손쉽게 착각을 하고, 그 때문에 자기를 버리고는 결과적으로 상처를 받으면서도 금세 바로 곁에 있는 남성에게서 왕자님을 발견하고는 자기를 또 버린다. 상처 입은 여성과 상처 입지 않은 여성 가운데 어떤 여성이 행복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와 같은 성의 내면까지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간단히 판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불감증의 실태 이제 우리는 다시 '불감증이란 무엇인가'라는 첫번째 명제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용어에 대한 단순한 정의만이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그 실태에 관해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불감증 여성이란 신경질적인 유아 기질을 나타내는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을 버리는 것'을 거부하고 있는 여성이다. 바꿔 말해서 성적인 측면에서도 자주성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다. 이는 에로스에 대한 지성의 지상권(至上權)을 바라는 셈이 되며, 관점을 달리해서 말한다면 남성을 지배하려는 여성의 욕구라고도 할 수 있다. 또 여성의 진화 과정에서 본다면 여성의 비여성화를 도모하려는 하나의 단계로 볼 수도 있다(하긴 비여성화가 여성의 진화인지 퇴화인지는 문제가 다르지만......). 어쨌든 그녀들이 이런 상태에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녀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 사회 전체가 짊어져야 할 문제이다. 예를 들어 신경질적인 성격은 바로 정보화 시대의 산물이며,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여성의 배출은 지성 있는 여성을 만들어 낸 근대 교육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또 이들의 불감을 해결해 주어야 할 당사자인 젊은 남성들이 과거와는 달리 성이 개방되어 있는데도 성에 관해서는 나체나 성지식만 알 뿐 실태에 어둡고 성급하기만 하다는 점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지나치게 많이 쏟아지는 자극적인 정보, 여성 교육의 진보, 청년의 퇴영화, 성행위의 경시 등은 불감 여성을 증가시키고 있으며, 이러한 경향은 앞으로도 더욱 심해질 것임에 틀림없다. 정리 및 결론 1. 불감은 신경질적인 유아성 여성에게 가장 많다. 2. 여성의 쾌감은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리는 데서 시작된다. 불감의 여성은 바로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있거나 또는 버려도 좋을 만한 가치가 있는 남성을 만나지 못하고 있는 불행한 여성들이다. 3. 불감이란 여성의 자기 주장이며 여성의 비여성화 중 한 과정 또는 남성 지배를 위한 하나의 형태라고도 할 수 있다. 4. 불감 여성 문제는 앞으로도 해소되기 어려우며 문명의 발달과 함께 오히려 늘어나리라고 본다. 거짓말의 실체 여성의 노우는 예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이면에는 예스는 노우라는 반대되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여하튼 여성과 거짓말은 자동차와 타이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남성도 물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거짓말에는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여성을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남성은 이런 사실을 실감하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또 속는다. 속은 다음에서야 남성에게 당한 것과는 전혀 딴판으로 당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똑같이 속은 것이더라도 얼굴을 얻어 맞은 것과 손바닥을 맞은 정도의 차이가 있다. 도대체 이런 차이는 어디서 오는 것인가. 여성의 거짓말의 특성은 무엇인가. 그리고 이런 여성의 거짓말에 대해 남성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상대방의 거짓말의 실체를 알면 대책은 자연히 생기게 된다. 유아기의 거짓말 유아기의 거짓말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1. 환상적인 거짓말 2. 사회적 승인을 바라는 거짓말 3. 자위상(自衛上)의 거짓말 환상적인 거짓말이란 텔리비전이나 만화에서 본 장면을 현실적으로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고 하는 거짓말이다. "난 말이지, 빗자루 타고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단다." 하는 식의 거짓말이다. 거짓말치고는 가장 저급하며 주로 3, 4세 어린이들이 이런 거짓말을 많이 하는데 어이없는 거짓말이기는 하지만 그만큼 꿈이 담겨 있다. 두 번째의 사회적 승인을 바라는 거짓말이란 자기 자신이나 자기 가족을 상대방에게 인정시키려는 초조한 마음에서 하게 되는 거짓말이다. "난 백 미터나 헤엄쳐 갈 수 있어."라든가 "우리 아빤 회사에서 제일 높은 사장이야."라는 식의 거짓말이다. 거짓말의 수준으로서는 전자보다 약간 높아 5세쯤에서부터 국민학교 저학년에서 볼 수 있다. 세 번째에 해당하는 자위상의 거짓말은 자신이 실수를 했거나 불리한 상황에 몰렸을 때 그 책임이나 난처한 입장에서 벗어나려고 꾸미는 거짓말이다. 이는 5, 6세에서 어른에 이르기까지 범위가 넓으며 나이가 들수록 필연적으로 이런 거짓말의 신세를 져야 할 상황에 많이 처하게 된다. 이 거짓말은 앞의 제 1, 2의 거짓말과는 달리 매우 지적인 조작이 필요해진다. 어느 정도 지혜가 따르지 않으면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할 수 없고, 상대방을 속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으면 함부로 거짓말을 할 수도 없다. 그런데 어린이가 이들 제 1, 2, 3에 해당되는 거짓말을 할 경우 남녀 성별에 따른 차이는 없는 것일까. 이 점에 관한 정확한 자료는 아직 없다. 그것은 이 점에 관한 연구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각 개인의 생활 환경, 특히 어머니와 가정, 성격과 같은 변수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일원적으로 결론을 내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의 확실한 점은 유아기의 거짓말은 남녀의 성별에 따른 차이보다는 오히려 그 어린이의 생활 환경에 의한 차이가 더 크다는 점이다. 이는 유아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일치된 의견이다. 이 같은 경향은 국민학교 저학년에서도 거의 마찬가지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면 국민학교 5, 6학년, 즉 고학년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 국민학교 선생 10여 명을 직접 만나 들어 본 결과 모든 선생들이 이구 동성으로 남녀간의 거짓말이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즉 이 연령이 되면 그때는 이미 제 1에 해당하는 환상적인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의 사회적 승인을 바라는 거짓말도 크게 줄어든다. 간혹 있더라도 여아에게 많다. 그리고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세 번째의 자위상의 거짓말은 남자 아이에게 단연코 많고 반대로 여자 아이에게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미루어 남녀간에 어느 쪽이 더 거짓말을 많이 하는가를 숫자상으로 본다면 제 1, 2에 해당하는 거짓말은 양성 모두 줄어들고 있으며, 제 3에 해당하는 거짓말은 남자 아이 쪽이 훨씬 더 많이 하고 있는 셈이므로 총체적으로 보면 남성 쪽이 거짓말을 잘 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러나 이처럼 표면에 나타난 거짓말의 숫자만으로 선악을 논하는 것은 경솔한 태도이다. 남자 아이에게 제 3의, 즉 자위상의 거짓말이 많다는 것은 정상을 참작할 만한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남성은 여성보다 난폭한 데다가 장난이 심하며 그 때문에 거짓말로 자기 방위를 하지 않으면 안 될 필요성이 있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한다면 남자 아이가 장난을 하는 것은 그만큼 못된 꾀가 있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해되기 어려울지 모르나, 이에 대한 소극적인 거짓말을 생각한다면 적극적인 거짓말의 뜻이 명쾌해진다. 이 소극적인 거짓말을 제 4의 거짓말이라고 하자. 이는 바꾸어 말하면 묵비의 거짓말이다. 이를테면 어떤 친구를 학교 계단에서 밀어 그 친구가 크게 다쳤는데도 집에 돌아와서 야단을 맞았을 때 천연덕스럽게 "나 오늘 학교 앞 육교를 걸어가다가 A하고 몸이 부딪쳤는데 그때 A가 괜히 넘어지면서 무릎을 깼지 뭐야."라고 거짓말을 꾸며서 모면할 수 있는 재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짓。은 장난을 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남녀간에 어느 쪽이 더 거짓말을 많이 하는가를 숫자만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이 위험하다는 까닭은 여기서 말하는 거짓말은 꾸며져서 표현된, 이른바 적극적인 거짓말에 대해서만 한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거짓말이란 마치 A가 실수해서 다친 것처럼 꾸며서 말하는 거짓말이다. 그리고 이에 대해서 집에 돌아와서도 육교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소극적인 거짓말이다. 자위상의 거짓말, 이른바 적극적인 거짓말이 남자 아이에게 압도적으로 많은 데 비해 소극적인 거짓말이 여자 아이에게 많다는 것은 일선 교사들이 한결같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꾸며 낸 거짓말을 하는 남자 아이 쪽이 더 정직하고 양성적이며, 묵비의 거짓말을 하는 여자 아이 쪽이 교활하고 음성적이라는 생각을 해볼 수도 있다. 어쨌든 국민학교 고학년생 중 교묘하게 꾸며진 자위상의 거짓말을 많이 하는 쪽은 남자 아이 쪽이다. 한편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여자 아이에게는 잘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연령대의 여자 아이에게서는 그만큼 좁은 의미의 정의감이라든가 상식이 이미 생성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인의 거짓말 성인의 경우에는 남성과 여성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거짓말을 많이 할까. 이 경우에는 환경 차이라든가 성격에 의한 변수 등은 제외한다. 거짓말의 경중(이 말은 정확하지 않으나 우선은 영향력이 큰 거짓말, 영향력이 작은 거짓말 정도로 이해하기 바란다)도 제외한다. 단순히 거짓말을 하는 빈도만을 따진다면 여성 쪽이 압도적으로 많은 듯하다. "여성의 노우는 예스"라는 냉소적인 말이 뜻하는 바와 같이 여성이 거짓말을 잘 한다는 것은 세계적으로 공통된 사항인 것 같다. 그러나 개개인에게 물어 보면 남성은 백이면 백 모두가 "여성이 더 거짓말을 잘 한다."라고 대답하고, 여성 또한 마찬가지 반응을 보인다. 도대체 어느 쪽 말이 옳은 것일까. 양쪽 모두 같다고는 할 수 없으므로 아무래도 어느 한쪽이 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거나, 아니면 거짓말의 정의에 대해 남녀간에 의견 차이를 보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남성과 여성이라는 대립 감정에서 벗어나서 솔직하게 대답해 달라고 말해도 역시 백이면 백 모든 남녀가 상대편 남성(또는 여성)이 더 거짓말쟁이라고 주장하는 것이고 보면 이는 역시 평행선이다. 그렇다면 우선 남녀 양성간에 거짓말의 정의에 대해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다음에는 성인의 거짓말에 관한 실태인데, 이는 당연한 일이지만 국민학교 아동기 후반의 거짓말보다 훨씬 진전되어 있고 변화되어있다. 우선 남성에게 특징적이었던 자위상의 거짓말인데, 성인에게서는 상대방을 함정에 빠뜨리는 공격적인 거짓말이 새롭게 더해지게 된다. 따라서 이 거짓말은 그만큼 더 지적이고 이론적이다. 어음 사기라든가 계획 도산, 익명 비판 등이 이 종류에 포함된다.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머리가 좋지 않거나 용기가 없는 사람은 꾸며 낼 수 없다. 또 이런 종류의 거짓말은 압도적으로 남성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여성의 거짓말 _ 사례 1 여성의 거짓말은 참으로 다종 다양하다. 제 2 차 성징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게 된 소극적 거짓말은 생리와 더욱 밀착된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유형인가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예를 들어 알아보기로 한다. 첫 번째 예는 신문 소설로서 평판이 높았던 『빙벽』이라는 작품에서 들어 보기로 한다. A는 어느 고급 주택가에서 살고 있는 미모의 유부녀다. 회사 사장인 남편과는 나이 차이가 많은데 이들에겐 아이가 없다. 그러나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 A는 등산가인 B에게 마음이 끌리는데, 그 이전에 같은 등산가로서 B의 친구이기도 한 C를 알고 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A는 우연한 기회에 그 청년 C에게 몸을 허락하고 만다. 그것은 C가 강제로 요구했다기보다도 오히려 그녀 A쪽에서 먼저 유혹한 것이라고 해도 좋을 형태로 맺어졌다. 전부터 A를 좋아했던 C청년은 그녀가 스스로 자신에게 몸을 맡기자 더욱 불타올라서 A를 진지하게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A는 행위 뒤 자신이 몹시 불결한 여성으로만 생각되어 그날 하룻밤을 고비로 더 이상 C를 만나려 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A의 애정이 식어졌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물러날 C청년이 아니다. 어느 날 그는 A의 집으로 찾아가 그녀에게 진의를 캐묻는다. "그날 밤 분명히 A여사 입으로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의 말에 A는 이렇게 대답한다. "이런 말 하긴 좀 뭐하지만 그날 밤엔 정말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지금은......." "애정이 없어졌다는 말씀인가요?" "네." 이런 대화가 계속된 후 C는 이렇게 말한다. "A여사가 날 사랑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난 그 말을 그대로 믿은 겁니다. 설마 하니 A여사의 감정이 그때뿐인 감정이었다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난 A여사가 방금 하신 말씀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얼마 전까지 마음속에 타올랐던 불꽃이 그렇게 쉽게 흔적도 없이 사그라질 수 있는 일일까요?" A는 C가 무슨 말을 하든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날 밤 그녀의 몸과 마음은 분명히 C를 갈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애정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렴풋이 안개가 흐르는 밤, 이슥한 포도 위에 서 있을 때는 이미 사라져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소설에서 A의 감정은 이렇게 설명되고 있다. 장편 소설 중 극히 일부를 요약한 내용이어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으리라 생각되지만, 위에서 인용한 부분에는 남성과 여성의 거짓말에 대한 엇갈림이 잘 나타나 있다. 즉 C는 A가 자기를 사랑한다며 몸을 허락했으면서도 시간이 지나자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말한다는 것은 배신 행위이며 거짓말을 한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책망하고 있다. 그의 말은 논리적이며 무리가 없다. 당연한 비난이다. 그러나 입장을 바꾸어 A의 처지에서 생각한다면 이 또한 무리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는 점이 있다. A는 그날 밤엔 확실히 C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그를 원했노라고 말하고 있다. 그때 그녀의 심정은 사실 그랬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니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이 또한 거짓이 아니다. 결국 A의 논법으로 말하면 모두가 진실이며 거짓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C청년으로서는 도저히 그녀의 논법을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도대체 이 양자의 어긋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첫째는 남성인 C는 상대방이 이야기한 말의 의미를 계속되는 시간 속에서 받아들이고 있고, 여성인 A는 분리된 순간으로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점은 A라는 여성이 그때는 분명히 자신의 육체가 C의 육체를 갈구했으나 지금은 바라지 않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남성은 "대장부는 두 말이 없다"는 식으로 말 한마디에 의미를 담는다. 일단 입에서 나온 말에 책임을 진다. 만일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한다면 거짓말을 한 셈이 된다. 거짓말이란 상대방에게 한 말을 변경하는 일이며 그것이 자신에게 정직했던 것이냐 아니냐는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보다도 자신이 한 말이 상대방에게 거짓말이 된 셈이냐 아니냐에 따라 판단한다. 어디까지나 정신적, 외향적이다. 이와는 달리 여성의 거짓말은 자신에게 정직했느냐의 여부에 따라 정해진다. A의 경우 그날 밤 그녀의 몸이 청년을 요구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말하기에 앞서 육체의 실감이 있다. 그리고 그때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디까지나 내향적이며 자기 중심적이다. 때문에 C가 추궁해도 "미안해요"라고 한마디 했을 뿐 크게 가책을 느끼지는 않는다. "나는 근본적으로 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말하고 있는 것은 입이지만 실제로 주체가 되는 것은 육체이다. 말하자면 입이 육체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체적인 상황이 바뀌면 말하는 내용도 간단히 바뀐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정직한 일이었을 때는 거짓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남성들은 여성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입이 머리를 대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입으로 이야기하는 말이 몸의 상태에 따라 바뀐다고는 생각지 못하고 있다. 그런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한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서로 착각을 하게 되고 오해도 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의 거짓말 _ 사례 2 다음의 예는 어떤 상해 사건으로 경찰에 구속된 사람의 경우이다. Y는 A와 내연 관계를 맺고 있었다. A는 일정한 직업도 없이 빈둥빈둥 놀고 있었다. 때로는 완력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성적으로는 Y를 만족시켜 주었다. 그런데 Y는 어느 스탠드 바에서 일하다가 단골 손님인 B와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다. B는 돈도 있고 상냥하며 난폭한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다. Y는 B의 상냥한 성격과 안정된 생활을 동경하여 A에게서 도망쳐나와 B에게로 갔다. 생활은 안정되었으나 막상 함께 있다 보니 Y는 B에게서 성적 충족감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처음 두 달 동안은 견뎌 냈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나면서부터 도저히 견뎌낼 수 없게 되자 A에게 연락, A를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A에게 다시 전처럼 끌리게 되자 이번에는 B에게서 도망쳐 나왔다. 그러나 A와 석 달쯤 지내다 보니 A는 또다시 횡포를 부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경제적으로 궁핍한 데 정나미가 떨어져 결국 반 년 후에는 또다시 B에게로 도망쳐 갔다. 이를 알게 된 A는 B의 집으로 쳐들어가서는 Y를 강제로 끌고 나왔다. 끌고 나올 때 기물 몇 가지를 파손시켜 A는 기물 파손죄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그 뒤 A는 석방되었고, Y는 현재 A와 사이좋게 살고 있다. 그러나 언제 또 B에게로 도망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같은 Y의 일련의 행동은 모순에 차 있다. A 곁에서는 그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말하고, 다시는 그의 곁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B가 손짓을 하자 흔들흔들 B에게로 갔다. 그러고는 사실은 B를 더 사랑하고 있다면서 A의 얼굴은 보기도 싫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석 달 후에는 자기가 먼저 A를 불러 내어 A가 더 좋다고 말하고 있다. A와 B 사이를 탁구공처럼 왔다갔다 하는 Y는 A가 보거나 B가 보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본인은 전혀 거짓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녀의 그런 말을 단순히 핑계라든가 교활한 수작이라고 비난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Y는 그 순간 순간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A에게 안기고 있을 때는 계속 A 곁에 있겠다고 마음 먹었고 B에게로 도망칠 때는 이젠 B 곁에서 떠나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때그때 온몸으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결심을 입으로 표현했다. 오직 그뿐인 것이다. 거기에는 확실히 거짓이 없다. 이런 종류의 엇갈림은 약간이나마 여성 경험이 있는 남성이라면 느끼고 있는 점이다. 여성이 정신적인 면보다도 육체적인 면에 충실하다는 것은 가까이 지내다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폭력단이 여성에게 어떤 종류의 요구를 할 때는 흔히 여성의 육체를 통해 요구를 들어 주게 만드는 방법을 쓴다. 이는 여성이 몸으로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생활과 지식의 수준에 관계없이 여성들이 일반적으로 머리보다 온몸으로 느끼는 감정(feeling) 쪽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에 비해 남성은 주로 머리로 생각한 이론만을 내세워 공격한다. 그러므로 여성의 변절이라든가 변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해 보면 남녀 어느 쪽이 거짓말을 더 잘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남녀가 서로 엇갈린 대답을 하는 이유가 명백해진다. 즉 남성은 여성이 그때그때의 감정 상황에 따라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남성 특유의 자로 재기 때문에 모두 거짓말이라고 판정해 버린다. 게다가 이런 거짓말은 남성의 거짓말처럼 머리를 써서 논리적으로 구축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간단히 남발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결과 여성은 필연적으로 거짓말을 많이 하게 된다. 때문에 남성은 여성 쪽이 거짓말을 더 잘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여성은 자신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말을 그때그때의 상황에서만 생각한다. 하나의 발언을 오랫동안 책임져야 된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 순간에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논리이다. 이런 논법으로 자신들이 거짓말을 한 횟수는 계산에 넣지 않는다. 그러고는 머리로 의식적으로 꾸며 낸 거짓말만을 거짓말로 간주한다. 이렇게 되면 남성 쪽이 거짓말쟁이라는 여성들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한 주장이 되는 셈이다. 거짓말쟁이 여성 이상으로 유아기에서 성인까지의 남녀의 거짓말에 대한 차이점을 설명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개관에 지나지 않는다. 이들 중 특히 거짓말을 잘하는 여성, 또 그런 버릇이 있는 여성이란 어떤 여성인가를 명확히 하면 이 장의 목적도 달성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시 앞에서 예로 들었던 A여사의 경우로 돌아가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그녀는 어느 날 밤 C청년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곤 몸을 맡기기는 했지만 며칠 후 그런 사랑은 이미 온데간데 없어져 버렸다. "사랑이 그렇게 간단히 변할 수는 없다"는 추궁을 당했을 때 그녀는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이유는 있다. 그녀는 그 까닭을 그날 밤의 어두운 밤안개 탓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일련의 행위를 논리적으로 추궁하는 것은 어리석은 태도이다. 때문에 소설의 이 부분에서 여주인공의 심리는 독자에게 저항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이론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인데도 읽어 보면 있을 수 있는 일로 생각된다. 여주인공이 생생하게 다가온다. 말하자면 현실감이 있는 셈이다. 이는 작가의 눈이 여성의 내면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이 항상 정서적인 면과 정신보다는 육체와 깊이 관련된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보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상으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을 이해하게 되었으리라 본다. 1. 여성의 말이나 행동은 감정이나 몸과 밀착되어 있다. 2. 남성의 입장에서 볼 때 거짓말쟁이 여성이란 말이 항상 달라지는 여성이다. 이 두 가지 공리(公理)를 결부시키면 거짓말쟁이 여성의 정의가 명백해지면서 그 전모가 밝혀져 다음과 같이 규정할 수 있다. "거짓말을 잘 하는 여성이란 감정과 몸의 상태가 항상 변동하는, 육체적으로 불안정한 여성이다." 그렇다면, '불안정한 여성'이란 어떤 여성을 가리키는가. 물론 성인이므로 손이 길어지거나 발이 짧아지거나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인 여성에게 육체적 불안정이란 호르몬 분비의 불균형을 가리키는 말이다. 호르몬이란 생체내의 내분비선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통틀어 말하는데, 이는 핏속에 분비되어 각기 특정 기능을 발휘한다. 그 가운데 여성에게 가장 변동이 많은 것은 성호르몬이다. 이 성호르몬의 많고 적음에 따라 여성의 신체는 여러 가지 변화를 일으킨다. 유방이 커지거나 생리가 있게 되는 것 등은 이 성호르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앞에서 설명한 변화 외에 자궁 점막이 두터워진다거나 배란과 같이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는 변화도 일으킨다. 이 성호르몬 분비의 최고 사령부는 뇌하수체 전엽에 있으며 여기서 난소 자극 호르몬, 항체 생성 호르몬의 중개를 거쳐 난소 호르몬, 황체 호르몬 등의 분비를 제어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물론 여성에게도 개개인에 따라 이 성호르몬의 변동폭이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20층 짜리 빌딩의 엘리베이터에 태워지고, 어떤 사람은 80층 짜리 빌딩의 엘리베이터에 태워질지도 모른다. 이때 여성의 개체적 특성과 함께 연령적·환경적 영향도 관련이 있다. 이에 따라 안정도도 달라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가장 안정된 사람은 성호르몬의 분비가 거의 없는 유아기의 소녀나 폐경 후의 여성이다. 두 번째로 안정된 사람은 성적으로도 충족되어 비교적 불만이 없는 기혼 여성이다. 사춘기의 여성, 독신의 고령 부인 등 제 3의 그룹은 불안정하다. 제 4의 그룹, 즉 실생활에 여러 가지 불만을 가지고 있고 또 성적으로도 불만 상태에 있는 여성들은 더욱 불안정하다. 거짓말을 많이 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남성을 초조하게 만드는 여성은 이 제 3, 4 그룹의 여성들이다. 정리 및 결론 이 글에서는 여성의 거짓말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점을 고찰해 보았다. 1. 유아기에는 남녀의 거짓말에 성차(性差)가 별로 없다. 2. 거짓말을 할 때 남녀간에 차이가 나타나게 되는 것은 국민학교 고학년, 즉 여자 아이가 첫 생리를 맞아 사춘기에 들어섰을 때부터이다. 3. 성인 여성의 언동은 감정에 밀착되며 몸의 변동, 즉 성호르몬의 변조에 따라 변하는 경우가 많다. 이 변화를 남성들은 거짓말이라고 하는 데 반해 여성들은 잘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일축한다. 4. 거짓말은 성호르몬의 변조가 심한 여성에게서 가장 많이 나타난다. 5. 거짓말쟁이 여성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게 하는 최선의 길은 그 여성이 알고 있는 불안이나 불만을 제거해 주는 한편, 심신 모두를 충족된 상태에 놓일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이 장은 여기서 끝내기로 한다. 남성들은 앞으로 여성이 거짓말을 할 때는 “아, 요즘 성호르몬 변조를 일으키고 있는 모양이죠.” 라고 여유 있게 말하고 그녀의 내적인 난소와 자궁을 상상하면서 참고 견디도록 해야 한다. 갱년기라는 말의 유래 갱년기를 가리키는 Climacterium은 그리스어로서, 사다리의 횡목(橫木 : 가로질러 놓은 나무)이라는 뜻을 가진 말에서 유래되었다. 사다리의 종목(縱木 : 세로로 길게 뻗은 나무)이 인생의 성장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무럭무럭 자라 온 일생에서 잠깐 쉬었다 가도록 한 것이 횡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 시대의 점성사들은 인생의 액년, 즉 운수가 사나운 해가 7년마다 나타난다고 믿고 있었다. 7년에 해당되는 간격으로 놓여진 횡목을 디디면서 사다리를 올라가는 과정 같은 것이 인생이며, 그 횡목에 해당되는 7년마다 인간은 생명의 위험을 맞게 된다고 풀이했던 것이다. 조그마한 봉오리를 맺는 사춘기에서 눈부시게 피는 꽃의 계절을 맞고, 그 뒤 반짝이며 빛나는 햇빛이 내리쬐는 여름이 되고, 그러다가 마침내는 수확의 계절인 가을을 맞을 때가 온다. 인생을 사계절로 나눈다면 이 가을의 끝에 해당하는 시기가 갱년기이다. 하루의 시간에 비유한다면 타는 듯한 대낮 뒤에 찾아드는 고요한 황혼이라고나 할까. 사람들이 횡목에 매달려 그곳에서 조용히 휴식을 취하면서 초로에 대처하기 위해 심신 양면의 전환을 꾀하는 시기가 바로 갱년기인 것이다. 갱년기의 육체적 특징 여성의 갱년기는 먼저 난소 기능이 저하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명심해야 할 점은 모든 갱년기를 통해 자궁이 퇴화하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점이다. 흔히 여성들 중에(남성들 가운데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자궁은 여성에게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므로 이를 잃으면 곧 여성을 잃게 된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잘못이다. 여성을 여성답게 보여 주는 가장 큰 원동력은 난소이며 이를 잃었을 때만 여성은 여성적 매력을 잃게 된다. 이에 비해 자궁은 임신했을 때 태아가 착상(着床), 성장하는 자루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상의 호르몬 분비라든가 몸의 제어 기능 같은 고도의 활동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한편 조직학적으로 볼 때 자궁은 재생력이 강한, 따라서 그만큼 미분화된, 다시 말해 강하고도 등급이 낮은 기관으로서 굳이 분류하자면 난소보다 훨씬 아래의 하등급 기관이다. 물론 자궁이 없으면 태아가 성장할 장소가 없으므로 임신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자궁의 역할이란 단지 그것뿐이며 이를 잃었다고 해서 여성다움이라든가 성감을 잃게 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흔히 자궁을 수술해서 들어냈기 때문에 이제 성교는 할 수 없게 되었다고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성교는 질로 하는 행위이지 자궁으로 하는 행위가 아니라는 상식 정도는 알아 둘 필요가 있다. 또한 자궁 적출(子宮摘出)을 했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 자궁 경부(子宮經部)는 남아 있으므로 아무 상관이 없다. 자궁이 없으니까 당신하곤 관계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남편이 있다면 그런 남성은 상당히 무식하거나 못된 사람이다. 여성이 갱년기에 들어가 난소의 활동이 약해지면 제어 기구이기도 한 뇌하수체에서 성선 자극(性腺刺戟) 호르몬이라는 것이 분비된다. 뇌하수체를 본점, 난소를 지점으로 본다면 지점의 업적 저하에 대해 본점에서 성선 자극 호르몬이라는 감독을 파견하는 셈이다. 이 성선 자극 호르몬은 본래 10대 중반에서부터 활발하게 분비되며 20대에는 양이 더욱 늘어나는데, 갱년기에는 이 시기의 5~6배가 되는 양이 분비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소의 기능(여성다운 아름다움을 높여 주는 작용)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아 지점의 업적은 상승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번 기울어진 건물은 아무리 다시 고치려 해도 원상 회복이 어려운 것처럼 아무리 채찍질을 해도 10대, 20대처럼 달릴 수는 없다. 그런데 이 성선 자극 호르몬에는 난포 자극(卵胞刺戟) 호르몬과 황체 자극(黃體刺戟) 호르몬이 있어 각기 난포 호르몬, 황체 호르몬을 산출한다. 이 두 호르몬 가운데 전자는 생리 전에, 후자는 생리 후에 주역을 맡아 그 사이에 일어나는 배란을 순조롭게 한다. 그러나 갱년기에 접어들면 성선 자극 호르몬이 더욱 많이 분비되는 반면 기대하고 있는 난포 호르몬은 매우 적어지는 데다가 배란이 잘 되지 않으므로 황체 호르몬도 결핍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호르몬의 불균형을 보완하기 위해 자율 신경계, 그 중에서도 특히 교감 신경이 과민해진다. 이런 상태가 이른바 갱년기 장애인데, 이는 호르몬이라든가 자율 신경계 등의 실조에 의해 나타나는 증상이다. 갱년기의 신경학적 특징 신경에는 크게 나누어 자기 의사대로 몸을 움직이고(수의 운동隨意運動이라고 한다) 동물성 기능을 지배하는 신경 계통과 식물성 기능, 즉 위장 등의 소화기, 심장과 혈관계, 한선(汗腺 : 땀샘)과 타액선(唾液腺), 각종 내분비선과 생식기 등 생체의 생활에 필요한 기능을 촉진시키거나 억제하는 조절을 맡은 신경 계통이 있다. 이러한 신경 계통에는 뇌의 지배를 받지 않고 자동적으로 활동한다는 데서 자율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한마디로 자율 신경 계통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자율 신경은 또한 교감 신경과 부교감 신경으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적으로 작용하면서 전진 기능(前進機能)을 조절한다. 예를 들어 교감 신경이 자극되면 심장 박동수는 증가되지만 위장 운동은 억제되거나(식욕 감퇴 등) 맥박이 증가하고, 혈관은 수축되고, 손발은 차가워지면서 뇌는 빈혈이 된다. 또 혈압이 올라가 동공이 열리며 각 감각기가 예민해진다. 이 상태는 아드레날린(부신 호르몬)이라는 주사를 맞았을 때와 같은 상태이다. 이에 대해 부교감 신경은 교감 신경에 억제적으로 작용하여 교감 신경이 독주하는 것을 막는 제어 기능을 하고 있다. 갱년기의 여성이 마음이 변하기 쉽고 우울해 보이는가 하면 자주 흥분하거나 기억력 저하와 현기증, 평소보다 심한 심장 고동, 귀울림, 취한(取汗), 얼굴의 화끈거림 등 여러 증상(의학적으로는 이를 부정 수소否定愁訴라고 한다)을 자주 호소하게 되는 것은 이 자율신경, 그 중에서도 교감 신경이 과민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증상들은 갱년기 여성들이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기 위해 의식적으로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호르몬 실조, 자율 신경의 과민과 같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어 일어나게 되는 생리적인 증상이다. 따라서 여성의 갱년기란 표면적으로는 이런 증상들이 나타난 시기를 말하며 내면적으로는 난소 기능의 저하, 성선 자극 호르몬의 분비가 대량으로 많아지는 시기를 가리킨다. 다시 말해 이 시기는 생리 폐지(生理閉止)가 다가온 시기, 또는 생리가 있던 시절에서 없는 시절로의 교량 역할을 하는 기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폐경 연령은 인종 또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나 동양에서는 40∼55세, 평균 47세로 알려지고 있다. 그 전의 4, 5년을 갱년기라고 하는 셈인데, 42세의 횡목은 그야말로 여체의 액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여성이라는 장에서도 설명한 바 있지만, 갱년기 여성의 증상은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여성의 증상과 일치한다. 히스테리 증상은 매우 다양하지만 이의 생리적인 증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땀의 분비 이상이 일어나 땀을 많이 흘리거나 반대로 취한(取汗) 불능이 되거나 한다. 2. 타액의 분비 이상이 생긴다. 3. 소변이 나오지 않는 등 배설 작용의 이상이 나타난다. 4. 소화 불량, 위통, 변비, 설사와 같은 위장 장애를 자주 일으키며 식욕 부진을 호소하게 된다. 5. 두통, 심장의 심한 고동, 호흡 곤란을 호소한다. 6. 현기증, 가슴의 압박감 등을 느끼고 안색은 홍조를 띠거나 창백해지며 온몸이 떨리기도 한다. 이처럼 현기증, 가슴의 울렁거림, 그리고 흥분을 잘 하는 등의 증상은 히스테리 여성에게서도 흔히 보이는 증상이다. 그리고 이같이 갱년기여성과 히스테리 여성이 비슷한 증상을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로서 모두 자율 신경의 실조에 따른 증상이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은 히스테리가 개인의 성격이나 정신적 원인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 데 반해 갱년기 장애는 어디까지나 생리적·육체적 원인에 의해 나타난다는 점이다. 따라서 갱년기 장애는 어느 시기에 집중해서 나타나며 병상(病狀)의 개인차가 별로 없다. 물론 이 갱년기 장애는 히스테리에 비해 병상이 자율 신경 실조라는 매우 유동적이고도 다채로운 것인 만큼 그 증세가 일반 질병처럼 명쾌하게 고정되지는 않는다. 어쨌든 40대 전반에서 후반에 걸쳐 여성이 이런 종류의 병상을 나타내는 것은 매우 생리적인 현상이다. 다시 말해서 이런 증상을 나타내는 것이 정상이고 나타내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이 연령대가 되면 여성의 경우에는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갱년기 장애라는 파도를 뒤집어써야 한다. 그것은 여성으로 태어난 이상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므로 이 파도를 깨끗이 없애 버리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여성의 생리마저도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파도가 들이닥치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생리의 기본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파도로 만들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럼에도 그 파도를 보통 이상으로 크게 혹은 거칠게 만드는 것은 각 개인의 환경이나 성격과 같은 또 하나의 조건이다. 때문에 이 시기의 여성이 처해 있는 정신적,육체적 환경이 중요하다. 남편된 이는 아내가 갱년기라는 파도의 여파에 영향을 받는 것이 부득이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 파도를 최소한으로 막을 수단을 강구해야 한다. 이는 남성들의 행복과도 연관된 일이기 때문이다. 갱년기 장애와 외적 요인 빈부의 차이와 관계없이 여성이면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는 의미에서 갱년기만큼 민주적인 특성은 없다. 본래 생리적인 상태는 신분, 빈부, 지위 등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평등하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데, 갱년기의 고뇌는 바로 이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사람들은 이 갱년기를 맞을 때 제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어떤 사람은 고분고분하게 인정하고 그에 순종하려 한다. 물론 늙어 간다는 사실을 순직한 마음으로 따르려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가능하면 아직 갱년기가 아니라고 믿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심리적인 저항은 일시적인 것이며 그 뒤로는 곧 어쩔 수 없는 숙명이라고 체념한다. 이런 순종파들은 제 1 그룹으로 가정한다. 이와는 달리 어느 정도는 저항하고 반발하면서 번민하는 유형도 있다. 하지만 저항해도 소용없다는 것은 알고 있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쉽게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때문에 젊게 차려 입고 화려한 화장도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무슨 방법이든 써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런 일이 한때의 반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곧 알게 된다. 저항하는 동안에 착실하게 노년이 다가와 이제 다시는 꽃피움을 자랑하는 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들 일시적인 저항파를 제 2 그룹으로 가정한다. 제 3의 그룹은 결사적인 저항파이다. 이미 갱년기에 들어섰으며 노년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것을 절대로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짐말에 채찍질을 하고 있으면서 자기는 아직 우수한 경마용 말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그룹이다. 물론 이 착각을 조장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 기울인다. 최고급 화장품을 사들이는가 하면 미용에 좋다는 것은 무슨 짓이든 다해 본다. 철저한 항전파이다. 그러나 그녀들 역시 언젠가는 노년 앞에 항복하고 만다. 그날은 어느 날 갑자기 조용히 찾아든다. 폐경, 그 순간부터 그녀는 아무리 발버둥쳐도 꽃피는 여성의 생명이 끝났음을 알게 된다. 생리는 참으로 잔혹하다. 어떤 위대한 기대도, 진지한 소원도 냉정한 사실로써 부리친다. 거기에는 티끌만큼의 동정도 없다. 그제서야 여성들은 자신들이 갱년기는커녕 이미 초로에 접어들었음을 알게 된다. 이 세 그룹 중 어느 그룹에 속할 것인지는 각자의 성격과 환경에 따라 다르다. 대체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젊었을 때 미모로 떠받들어졌거나 스스로 그런 아름다움을 자랑해 온 여성일수록 제 3 그룹의 철저한 항전파가 된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미련 때문에 늙는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자신의 용모에 처음부터 자신이 없었거나 또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던 사람일수록 제 1 의 순종파가 된다. 버릴 게 적기 때문에 버리기 쉬운 셈이다. 그리고 중간적인 유형의 사람은 제 2의 일시적 저항파가 된다. 이를 사회적 지위, 특히 남편의 지위에 의한 빈부 차이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일수록 항전파이며 사회적 지위가 낮고 가난한 여성일수록 순종파이다. 또 여성 자신의 지적 등급 차이에서 볼 때 지적으로 상위에 있는 여성일수록 항전파이고 지적으로 하위에 있는 여성일수록 순종파가 되는 경향이 있다. 요약하면 미모, 사회적 지위, 부, 지적 차이 등에서 우위에 있는 여성일수록 자신의 갱년기에 부정적이고 반발을 보인다는 설명이된다. 이상은 갱년기를 맞은 일반 여성의 외부적 요인에 의한 차이인데 그 외에 다음과 같은 내부적 요인도 고려해야 한다. 첫째는 성격이다. 운명을 감수하는 순진한 유형의 여성인 경우 당연히 갱년기를 맞는 자세도 순진하다. 갱년기를 피할 수 없는 일로 수용한다. 이에 비해 자존심이 강한 여성, 특히 나르시스트는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심리적으로 완강히 거부한다. 갱년기를 인정한다는 것은 자랑스런 긍지로 뭉친 그녀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굴욕이기 때문이다. 모든 갱년기 장애가 호르몬의 불균형에서 비롯된 자율 신경의 실조에 따른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그러나 이 자율 신경 실조 증상은 심리적인 이유로도 큰 영향을 받는다. 즉 심한 심장의 고동과 현기증, 취한, 얼굴의 홍조 등과 같은 교감 신경 자극 증상은 정신적인 불안과 긴장감으로 인해 일어난다. 따라서 갱년기에 나타나는 증상은 심리적인 스트레스에 의해 나타나는 증상과 거의 같다. 그리고 이 두 가지가 겹치면 양자의 상승 작용으로 증상은 더욱 심해진다. 이제 여기에서 하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게 된다. 즉 갱년기 증상은 심리적 저항이 강한 철저한 항전파에게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며 순종파에게는 미미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미모에 지적이고 자존심이 강한 상류 사회 여성일수록 갱년기 장애 증상은 크고 강하게 나타난다. 남성의 갱년기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여성의 갱년기에 관해서만 이야기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남성의 갱년기에 관해 다루지 않는다면 공평하지 못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 또 이 글은 여성론이므로 남성에 관해 다룰 필요는 없다고도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남성의 갱년기를 다루는 것이 이 장의 이해에 도움이 될 듯하여 잠시 설명하기로 한다. 우선 여성의 갱년기에 해당하는 증상이 남성에게도 있느냐는 데 의문을 갖는 독자들이 있을 줄 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예스이다. 남성에게도 당연히 갱년기라는 것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여성에 비한다면 짧고 미미한 증상이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갱년기라는 것은 자율 신경 실조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40대 중반이 되어서 현기증이나 심장의 심한 고동, 초조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고 해서 갱년기 장애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단순한 소음에 의한 공해라든가 직장에서의 스트레스로도 이와 똑같은 자율 신경 실조증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갱년기 장애로 판단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건은 난소 기능의 저하와 그에 따른 성선 자극 호르몬의 분비량 증가와 같은 생리적 현상이다. 그러나 이는 판정이 번거로운 데다가 이 시기의 여성에게는 다른 이유로 인한 실조증이 나타나는 일이 흔치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 연대에 자율 신경 증상이 뚜렷할 경우 일단은 갱년기 장애로 진단하고 있다. 이에 비해 남성에게서는 이런 종류의 자율 신경 실조증이 40대뿐 아니라 각 연령대에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다. 이는 남성이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하는 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실조증만으로 갱년기라고 속단할 수는 없다. 여기서도 역시 남성의 갱년기를 진단하는 요건으로는 여성의 난소에 해당하는 고환(남성의 생식샘)의 기능을 조사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성의 난소가 갱년기에 들어가면 대체로 30세 무렵의 절반 정도로 줄어드는 데 반해 남성의 고환은 40세 무렵에 가장 무거워지고 70세가 되더라도 겨우 10% 정도밖에 줄어들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듯 여성의 경우에는 갱년기에 뇌하수체에서 성선 자극 호르몬이 5~6배로 증가되는 데 비해 남성은 약간 증가하는 데 불과하다. 중년의 신사들은 일단 안심해도 좋다. 그들의 고환은 중년인 40세 때 최고조에 이르러 70세까지는 거의 변하지 않는 것이다. 고환에는 안드로겐이라는 남성 호르몬이 있는데 이것이 남성을 발정시키고, 정자를 생산하며 한편으로는 수염을 짙게 하고, 또 남성다움을 갖게 하는 작용을 한다. 이처럼 중요한 호르몬을 분비하는 고환이 40세에 가장 중량이 많이 나가게 되는 셈이다. 따라서 여성이 20세이고 남성이 50세라 하더라도 난소와 고환에 관한 한 균형이 잡히게 되는 것이다. 20대 청년이 중년의 남성보다도 가벼운 고환을 가지고 있는 셈이니 겁낼 필요가 없다고 중년에게 격려하고 싶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남성다움을 연출하는 장기(臟器)로서의 문제이다. 스피드, 스태미나와 같은 육체적인 강점과는 또 다른 문제인 것이다. 어쨌든 이처럼 남성에게서는 나이가 든다고 해서 고환의 위축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일이 없으며 성선 자극 호르몬도 그다지 증가하지 않는다. 따라서 갱년기가 시작되는 시기는 물론 증상도 분명하지가 않다. 이에 비해 여성의 갱년기는 훨씬 명확하고 선명하다. 이는 달리 말하면 청년기와 노년기의 높낮이 차가 심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봄에서 여름에 걸쳐 눈부신 커다란 꽃송이를 가슴에 달았던 여성은 갱년기가 되자 애처로울 만큼 시들어 가는 계절을 맞는다. 지난날이 너무나도 아름다웠기에 그녀의 쇠퇴는 더욱 눈에 띠게 된다. 이런 변화는 봄에서 여름, 그리고 가을로 서서히 변해 가는 남성의 입장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격심하다. 그러나 여성이여, 꽃다운 시절이 지났다고 해서 한탄할 필요는 없다. 꽃의 계절 뒤에는 틀림없이 결실의 가을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꽃송이가 앞으로 다가올 결실을 위한 전주곡이었다면 기쁨은 오히려 이 가을에 찾아드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갱년기를 극복하려면 갱년기는 확실히 잔혹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결실의 가을에서 겨울로 옮겨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결실의 계절이 있음으로 인해 갱년기의 잔혹함은 스러져 간다. 그러나 인간에게 결실이란 무엇인가. 여성이 갱년기에 이르는 40대 중반에 아이들은 20대가 된다. 사내 아이라면 대학에 가고 여자 아이라면 결혼 적령기를 맞는다. 좀더 일찍 태어난 아이들은 제각기 독립하여 부모의 손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결실을 바라보면서 여성은 갱년기를 의식한다. 짓。게도 사람이 자기 자식의 성장과 독립을 바란다는 것은 바로 자신이 늙기를 바라는 것과도 같다. 부모는 아이가 어서 성장하기를 바란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늙고 싶지 않다. 이런 이율 배반으로 사람들은 고민한다. 그러나 노년은 언젠가는 맞아야 한다. 또 기왕 맞을 바에야 의미있는 노년이기를 바란다. 때문에 무슨 일에나 이유 대기를 좋아하는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한 가지 변명거리를 생각해 낸다. "이 아이를 기르는 게 내 소망이었던 거죠." 이런 변명으로 여성은 비로소 자신의 갱년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마지못해서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마음속으로는 아이가 이렇게 컸으니 자신이 늙은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여성은 갱년기의 슬픔을 얼버무릴 궁리를 한다. 그러나 자식이 없는 경우, 그래서 거둬들일 결실이 없는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여성에게 갱년기는 한마디로 혹독할 뿐이다. 결실을 보게 됨으로써 용인되는 갱년기에 결실이 없다면 받아들이기가 더 어려워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가 없는 여성의 갱년기는 허망한 것이기만 하다. 이들에게서는 앞에서 설명한 심리적 저항이 더욱 거칠게 나타나고 또 당연히 갱년기 장애도 심해진다. 아이를 갖는 일이야말로 다가올 갱년기의 우울함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여성이 아이를 갖고자 하는 까닭 가운데는 미래에 대한 준비를 위해서라는 이런 의미도 담겨져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갱년기 장애는 아이를 갖는 것만으로 극복될 수 있는 단순한 장애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자식이 있는 여성은 갱년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자식의 유무는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암시로서 안심을 시키는 정도에 불과하다. 모든 갱년기 여성에게 공통되는 불안은 "나는 이제 갱년기에 접어들었으니 여자라고는 할 수 없게 된 게 아닐까."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불안과 이를 받아들이는 상대에 대한 불안이 중복되어 있다. 그러나 겁낼 필요는 없다. 사실 갱년기에 들어서는 동시에 생리는 부정기적이 되고 임신 가능성도 없어지며 초조감과 심장의 고동이 심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증상이 갱년기 여성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부정하는 징후는 아니다. 생리 불순이 되든 임신 가능성이 없어지든 한 사람의 여성임에는 변함이 없다. 특히 성적 욕망은 전혀 저하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교감 신경 과민이라는 불안 상태로 인해 욕망은 더 증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곤란한 문제는 이때 여성들이 다음과 같은 하나의 자기 암시에 걸린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제 갱년기니까 여성이 아니다. 그러니 욕망은 삼가야 한다." 이 같은 자기 규제는 미묘하게 남성들에게도 전달되어 남편들도 같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다만 난소가 위축되고 자극 호르몬의 분비가 증가된다는 이유만으로 여성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첫 경도는 여성의 시작이고 폐경은 여성의 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잘못이다. 이 말은 "첫 경도는 여성이 임신할 수 있는 몸이 되었음을 가리키는 것이고 폐경은 임신 가능성이 없어졌음을 말한다."라고 고쳐야 한다. 생리가 있어도 임신하지 못하는 여성은 많다. 그러므로 폐경이 되었다고 해서 놀랄 필요는 없다.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면 그뿐 여성임에는 변함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웬만해서는 여성을 잃었다는 생각에서 빠져 나오기 어렵다. 여성이 아니라고 보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눈 - 갱년기 여성은 이 이중의 속박으로 고뇌한다. 갱년기 증상이 촉진되는 가장 큰 원인은 이 같은 심리적 초조감에 있다. 이런 속박을 풀어 주기만 한다면 여성들이 얼마나 날아갈 듯이 안심하겠는가. 여기까지 논하다 보니 갱년기 증상의 해결책은 자명해진다. 즉 남성들(남편)이 아내가 여전히 성감이 뛰어난 여성임을 잊지 말고 심신을 충족시켜 주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개중에는 "갱년기가 된 여자인데 이제 와서......." 하는 남성들이 있을지도 모르나 남편이 노력하면 "이런 나를 버려 두지도 않고......."라는 의미에서 아내는 새로운 헌신을 다짐할 것이다. 또한 그것이 새로운 자극이 되기도 한다. 어쨌든 갱년기에 이르러 피임과 같은 귀찮은 순서도 없어진 풍부한 성을 폐경이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방치한다는 것은 아까운 일이다. 난소와 고환이라는 호르몬 기관으로 말하면 고환 쪽의 생명이 더 길다. 그러나 페니스와 질이라는 생식기면에서 보면 여성 쪽의 생명이 더 길다. 그렇다면 남성이라고 해서 너무 뽐낼 일도 아니다. 자연의 섭리는 참으로 정교하고도 짓。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정리 및 결론 1. 여성의 갱년기란 내부적으로 난소의 기능이 저하되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뇌하수체에서 성선 자극 호르몬이 대량으로 분비되는 상태를 말한다. 외부적으로는 이 호르몬의 불균형으로 인한 자율 신경 실조 증상으로서 나타난다. 2. 갱년기의 여성은 노년에 대처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하여 순종파, 일시적 저항파, 철저한 항전파 등 세 그룹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항전파는 미모를 갖추고 자존심이 강한 여성에게 많은데, 이들은 심리적인 저항이 강하기 때문에 갱년기 증상을 가장 심하게 나타낸다. 3. 갱년기 증상을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자신의 늙음이 자식을 기른 결과라고 하는 자기 암시가 필요하다. 동시에 갱년기가 오더라도 여성은 영원히 여성이라고 하는 사실은 아내와 남편이 유념해야 할 사항이다. 4. 남성에게도 갱년기는 있으나 고환의 중량 변화로 알 수 있듯이 느리고 분명치 않은 형태로만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