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하는 문명 지은이:와타히키 히로시 출판사:자작나무 옮긴이의 글 문명의 순환과 교체로 보는 인간의 역사 유사 이래 모든 역사와 남아 있는 유물, 유적들에는 보다 나은 생활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 이 살아 있다. 그리고 그것은 전체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키곤 했다. 그렇다면 과연 문명은 어떻 게 시작되어 어디로 발전해 가는 것일까. 와타히키 히로시는 이 책 '질투하는 문명' 속에서 끊임없이 이러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는 기왕에 알려진 모든 역사적 사건과 문명의 발전과정을 일상생활 속에서 찾아내어, 인류의 역사란 모순의 역사이며 약육강식의 역사임을 보여준다. 이른바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의 황하에서 시작된 문명 은 그리스를 거쳐 로마로 계승되었고 거기서 다시 영국, 포르투갈, 네덜란드, 스페인 등지로 뻗 어나가면서 유럽 문명을 이루었다. 영국을 선두로 한 유럽 문명은 다시 미국으로 일본으로 진출 하면서 서로 다른 문명들이 마치 질투하고 시샘하는 것처럼 상호 경쟁하고 보완하는 관계로 발전 하여 오늘날의 문명을 만들어왔는데 특히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철이나 커피, 소금 그리고 철도 와 운하 같은 갖가지 사물이 이러한 문명의 발전에 커다란 요소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콜럼버스의 대항해는 금과 향신료를 찾아 떠났던 탐험여행이었다. 그 결과 지금의 아메리카 대 륙이 발견되었고, 금맥을 찾아 헤매던 인간들의 탐욕은 신대륙과 검은 대륙에서 골드 러시라는 굵직한 사건과 함께 세계의 역사지도를 크게 바꿔놓기도 했다. 더욱이 아스텍, 마야 문명의 주인공들인 인디오들은 유럽에서 온 이방인들에게 감자며 고구마, 옥수수, 담배, 고무 등을 선물했다. 그러나 그 대가로 돌아온 것이라곤 그들 자신의 문명의 파괴 와 가혹한 노예노동뿐이었다. 또한 보이느니 모래뿐인 사막의 땅에서 유전이 발견되고 인간이 그 효용과 사용법을 발견한 뒤 로 그 땅은 열강들의 각축장이 되어버렸다. 영원한 사랑의 상징이라는 다이아몬드가 영국과 네덜 란드 간의 전쟁(보어 전쟁)을 낳았으며 지금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긴장과 불안 속으로 몰아넣 은 아파르트헤이트(인종차별정책)의 출발점이라면 역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오늘날 종이의 소비량은 한 나라의 문화적 수준을 재는 바로미터라고 하지만 이 종이 1톤을 만 들기 위해서는 20그루의 거목이 잘려 나가야 한다. 결과적으로 세계의 삼림은 무서운 속도로 파 괴되어가면서 환경보호가 인류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로 대두했다. 이처럼 1차 천연자원들을 고 갈시킨 대가로 얻어진 경제적 성장이나 물질적 풍요가 결과적으로 문명 그 자체의 위기를 몰고 오는 위험성을 안고 있음이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와타히키 히로시는 이 책에서 문화니 문명이니 하는 큰 이름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요소(사물) 들을 각 항목별로 나누어 마치 한편 한편의 세밀화를 그려내듯 매우 색다른 역사를 보여주고 있 다. 금과은, 청동과 구리에서 바나나, 참깨, 마약, 커피와 종이, 고무, 도자기, 시멘트와 콘크리 트, 비단과 철도, 운하, 대포와 건전지, 우편과 신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285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역사란 우리의 밥상이요 의복이며, 집의 발전사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인도하는 무수한 오솔길과 사잇길을 걷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문명 의 궤적들과 만나게 된다. 현대 인류가 누리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문명은 나름대로 독특한 기원과 발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여기에 이르기까지에는, 현대문명이 누리는 물질적 풍요와 과학주의 로 이어진 기술혁신의 성취 이면에 인간이 기울인 각고의 노고와 가혹한 희생이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미래의 역사는 더 이상 힘없는 누군가의 희생을 수반해서도, 진보의 그늘에 숨은 반문명 의 파괴성을 도외시해서도 안 될 것이다. 이 책이 독자들에게 단순한 지적 호기심과 재미의 차원 을 넘어 역사와 문명이 가진 다양한 얼굴을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계기가 되 기를 바라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1995년 10월 윤길순. 지은이의 글 사소한 것들의 역사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세계사이다. 현재 우리는 점점 황폐해져가는 지 구환경과 빈번한 민족분쟁, 풍요 속의 빈곤, 기아, 에이즈 등 커다란 문제에 직면해 있다. 또 주 택, 자녀 교육, 건강, 삶의 보람 등 일상생활의 문제들로 고민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골치 아픈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있다. 과거의 모든 인류는 그 시대마다 발생한 어려움과 과제를 해결하느라 악전고투해왔다. 이러한 선인들의 피와 땀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 세계가 가능했으며, 세계사는 전인류의 지혜와 노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보고이다. 따라서 이러한 보고를 파헤치는 데는 여러 가지 접근방식이 가능 할 것이다. 정통 역사학에서는 정치사, 경제사, 문화사, 법제사의 측면에서 연구를 진행하였다. 그러나 근 래 들어 프랑스의 아날 학파나 문화 인류학의 자극을 받아, 사회사 및 민중의 일상생활을 통해 역사를 파악하려는 '새로운 역사학'이 태두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움직임에 이끌려 우리가 늘 접하며, 먹고 쓰고 이용하는 갖가지 사물들에 담겨 있는 역사, 선인들이 애쓴 흔적, 그리고 그것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들을 탐구하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늘상 사용하는 물건에도 선인들의 끊임없는 노력과 지혜가 축적되어 있으 며, 그 시대의 생생한 모습이 새겨져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의 존재방식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 가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풍부한 세계사라는 보고에 접근하는 방식의 하나일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통하여 세계 사가 그토록 신변 가까이에 있으며, 얼마나 다양하고 흥미진진한 것인가를 독자 여러분이 실감할 수 있다면, 또 세계의 역사에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풍부한 세계사의 보고는 여러분 앞에 문을 활짝 열어놓고 있다. 독자들이 주제나 관심, 문제의 식을 가지고 세계사라는 광맥을 탐색하는 데 이 책이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이 또한 기 대하지 못한 즐거움이 될 것이다. 1994년 3월 와타히키 히로시. 제 1 장 문명이 질병을 만들고, 질병이 문명을 만든다 페스트는 봉건제도를 붕괴시켰다 암이나 기관지 천식, 에이즈, 날로 늘어나는 교통상해 등은 사실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문명병 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계 역사에서 발생했던 큰 질병도 대개 전쟁중에 만연하곤 했듯이, 질병 을 퍼뜨리는 광범위한 사회적 조건이 존재하기에 크게 유행하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병은 단지 병원균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의 사회와 문명이 병을 만들어왔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페스트와 같은 질병의 대유행은 그 시대의 사회를 뿌리째 뒤흔들고 문명을 변화시켜 새로 운 사회와 문명을 낳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어느 시대에나 건강하게 산다는 것은 인간의 최대의 바람이다. 하지만 인간은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는 죽음에 의해 모든 것을 잃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질병과의 전쟁의 역사 라고도 할 수 있다. 그리스 문명을 쇠퇴로 이끈 병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던 고대 그리스를 결정적으로 쇠퇴하게 한 것은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 권다툼이었던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이 전쟁중에 아테네에서 발생한 질병은 순식간에 아테네 인구의 4분의 1인 10만 명의 생명을 앗아갔다. 아테네 군은 거의 힘을 쓸 수 없었고, 이는 패배 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엄밀한 사료 비판을 통해 정확한 사실만으로 이 전쟁의 역사를 기술한 당시의 역사가 투키디데 스(기원전 484-425년)는 이 질병의 참상과 그것이 초래한 아테네의 '유례없는 무질서'를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점차 숨이 끊기고 있는 사람들의 몸이 시체 위에 겹겹이 쌓였으며, 길가에도 여기저기 굴 러다녔다. 그리고 모든 우물가에는 물을 찾는 빈사자들이 구더기처럼 몰려있었고, 모든 신전은 그곳에서 숨이 끊어진 자들의 시체로 순식간에 가득 찼다. 곧이어 이 질병은 폴리스의 생활 전면에 유례없는 무질서를 확산시킨 최초의 계기가 되었다.사 람들은 이목이 두려운 행위들을 공공연하게 저지르고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자라도 순식간에 죽으니 죽은 사람이 지녔던 물건을 빼앗은 사람이 어제와는 달리 완전히 돌변하여 아주 거만하게 굴었다. 이러한 격심한 성쇠의 변화가 일상화되어질 거라면 일찌감치 없애자며 향락에 빠져도 된 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신앙심도 사회적인 규율도 인간을 전혀 구속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신 을 공경하든 공경하지 않든 어차피 똑같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테니.....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이 병으로 쓰러진 페리클레스는 이 전쟁에서 죽은 전몰자를 위한 추모사 에서 "우리의 정체는 소수의 독점을 배격하고 다수의 공평을 지키는 것을 제일로 삼으므로 민주 정치라 부른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뛰어난 아테네의 정치와 사회도 아테네를 습격한 질병으로 붕괴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일어난 그리스의 혼란은 거의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그 사이에 많은 폴리스에서 선동정치가 데마고그가 등장하였으며, 민주정치는 부패하여 우민정치로 치달았다. 또 한 화폐의 침투와 함께 대토지 소유자와 일반시민 사이의 빈부격차도 아주 심해졌다. 곧이어 그 리스는 북방의 마케도니아 왕국에게 정복되었다. 페스트의 대유행과 봉건제도의 붕괴 유럽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시작된지 10년후인 1348년을 역사상 최악의 해로 기억 하고 있다. 이 해에 흑사병이라 부르는 페스트가 유럽 전투를 습격하여 수년 동안 유럽 인구의 3 분의 1을 앗아갔다. 흑사병은 환자들에게 무수한 검은 농포가 생겨 지어진 이름이다. '꽃의 도시'라는 이름의 피렌체는 향기로운 예술이 활짝 핀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도시였 다. 그런데 이 피렌체도 페스트의 습격은 피할 수 없었다. 르네상스의 3대 문인 중 한 사람으로 피렌체에 살았던 보카치오는 '데카메론'의 앞머리에서 페 스트가 가져온 참상을 극명하게 그리고 있다. '흑사병의 공포' 신의 아들이 태어난 지 1348년째가 될 무렵, 이탈리아의 도시 가운데 가장 아 름답기로 유명한 피렌체의 거리에 무시무시한 괴질이 퍼지고 말았다. 그것이 천체의 영향에서 기 인한 것인지, 우리가 저지른 악행 때문에 신의 당연한 분노가 인간에게 벌로서 떨어졌는지 모르 겠지만, 어쨌든 수년 전 동방 여러 나라에서 시작되어 무수한 생병을 앗아간 뒤 쉬지 않고 차례 차례 만연해 재난을 몰고 서방에도 전염되어온 것이다. 수많은 시체가 시시각각 경쟁이나 하듯이 실려와, 옛날부터 내려온 관습에 따라 따로따로 안치 소에 모시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묘지에다 매장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어디든 묘지는 대만원이어서, 비상수단으로 커다란 구덩이를 파서 한 번에 수백 구씩 시체들을 몰아넣고 뱃짐처 럼 몇 층씩 겹겹이 쌓았다. 그리고 각 층마다 흙을 조금씩 끼얹었다. 그러다 나중에는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어버렸다. 갑자기 밀어닥친 이 질병에 대해 과학적인 지식이 없었던 당시 사람들은 '신의 분노가 인간에 게 벌로 떨어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부 사람들은 '십자교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신의 분노 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속죄 행동을 했다. 그들은 알몸이나 반쯤 벗은 채 못을 박은 채찍으로 자 신의 몸을 때리면서 일사분란하게 행진하였다. 그것은 집단 히스테리 같은 광신적인 행위였다. 또한 "유태인이 우물에 독을 집어넣었기 때문"이라는 유언비어가 떠돌아 많은 사람들이 곳곳에서 유태인을 대량학살하기도 했다. 이 페스트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잃은 것으로 추측된다. 노동인구가 급격히 줄자 영주 는 노동력을 확보하려고 얼핏 모순돼 보이는 두 가지 대응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노를 우대하여 자신의 영유지에 머물게하거나, 농노에게서 이동의 자유를 빼앗아 지배를 강화하는 것 이었다. 나중의 방법은 농노의 반항을 불러일으켜 1358년 프랑스의 자크리 난이나 1381년 영국의 와트 타일러의 난과 같은 대규모의 농노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진압했지만, 이에 놀란 영주는 어쩔 수 없이 비교적 가벼운 해방금을 받고 농노를 해방 시켜주었다. 그 결과 농노는 영주에게 지대를 지불하는 자영농민이 되었으며, 영주는 지주로 변 했다. 이렇게 장원제가 붕괴하면서 장원제에 기반을 두었던 유럽의 봉건제도도 무너져버렸다. 매독에 걸린 콜럼버스 일행 1492년 콜럼버스가 첫 번째 항해에서 도착한 에스파뇰라 섬(아이티)에서 일행은 그곳의 풍토병 인 매독에 걸렸다. 다음해 귀국한 콜럼버스가 바르셀로나에서 이사벨라 여왕에게 항해 보고를 하 는 동안 이 병은 바르셀로나 시 전체에 퍼졌다. 1494년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결정적으로 쇠퇴시킨 이탈리아 전쟁이 일어났다. 네 차례에 걸 친 이 전쟁은 프랑스 찰스 8세가 이탈리아에 원정군을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3만의 프랑스 군 이 순식간에 밀라노, 피렌체, 로마를 점령하고 계속 남하하여 나폴리를 포위했다. 소국으로 분립 할거하고 있던 당시의 이탈리아 전체가 정복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런데 나폴리를 포위한 프랑스 군에 갑자기 매독이 퍼져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는 바람에, 찰 스 8세는 나폴리 공략을 단념하고 알프스를 넘어 간신히 프랑스로 도망쳤다. 당시 프랑스 군은 각국에서 온 용병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스페인 병사들이 옮아온 매독이 군 대에 딸린 매춘부를 통하여 순식간에 군에 퍼진 것이다. 각국의 용병들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 매 독을 퍼뜨렸기 때문에 이 질병은 곧 전 유럽으로 퍼졌다. 이 때문에 프랑스에서는 매독을 나폴리 병이라고 부르며, 다른 나라에서는 프랑스 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매독은 바스코 다 가마에 의해 인도의 칼리카트에 상류했고, 대항해의 선원들을 통해 동남아시 아와 중국, 일본 등에 전해졌다. 이것은 콜럼버스가 첫 번째 항해를 한 지 약 20년 뒤의 일이다. 매독은 20년 만에 전세계로 퍼졌던 것이다. 백색 페스트와 산업혁명 산업혁명으로 생산력이 크게 높아졌다면 인간의 생활은 더욱 풍요로워져야 한다. 그러나 현실 적으로 기계나 시설 등을 소유한 사람은 자본가이고 노동자는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제공하여 임 금을 얻지 않으면 생활할 수가 없었다. 종획운동과 수공업의 몰락으로 당시 영국에는 많은 노동 력이 남아돌아, 자본가는 마음대로 저임금과 장시간노동을 강제할 수 있었다. 또한 기계의 사용 은 여자와 어린이들이 값싼 임금으로 비참하게 혹사당하는 상황을 낳았다. 또한 산업혁명에 의한 자본주의의 발전은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게 했을 뿐 아니라, 공장에서 뿜어내는 매연이나 산업폐기물로 도시, 특히 노동자 거주지역의 생활환경은 급속히 나빠졌다. '평균수명이 겨우 15세' 맨체스처와 리버풀에서 발생한 전염병은 농촌지역보다 3배의 사망자를 냈으며, 도시의 신경계통 질병은 5배나 되고, 위장병은 2배 이상이며, 또한 도시의 폐병으로 인 한 사망자와 농촌의 사망자 수는 약 2.5 대 1의 비율이다. 도시에서 천연두, 홍진백일해 및 성홍 열로 숨진 어린이 수는 농촌의 4배이고, 폐수종으로 숨진 사람은 3배, 경련에 의한 사망자는 10 배에 이른다..... 리버풀에서 1840년 상류계급(신사계급, 자유직 종사자 등)의 평균수명은 35세, 상인과 상층 수 공업자는 22세, 노동자, 일용노동자 및 비천한 계급의 평균 수명은 약 15세에 지나지 않았다.(엥 겔스,'영국 노동자계급의 상태','마르크스, 엥겔스 전집') 15세라는 평균수명은 현재보다 매우 높았던 유아사망률 탓이 크지만, 도시의 생활환경과 노동 조건이 얼마나 처참했는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산업혁명은 면방적업에서 시작하여, 방적업은 모든 산업의 중심 존재로 부상했다. 거기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습격한 것이 폐결핵이다. 엥겔 스는 방적업과 폐결핵의 인과관계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방적과 결핵' 면이나 아나 방적공장에는 실 보푸라기 먼지가 여기저기 날리고 잇다. 그리고 그것은..... 흉부질환을 일으킨다. 체질에 따라 그 병에 걸릴 수도 있고 걸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노동자는 선택할 수 없다. 폐가 튼튼하든 약하든 그는 일을 하기 위해 작업장에 들어가야 한다. 들이마신 먼지 때문에 생기는 아주 일반적인 결과는 각혈, 호흡곤란, 가슴통증, 천식, 불 면증 등이며 최악의 경우에는 폐렴이 되어버린다. (엥겔스, 앞의 책) 결핵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알려진 질병으로, 고대 이집트의 미라(기원전 1000년경)에서 척추 카리에스에 걸린 듯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의 모델이 된 피렌체의 미녀 시모네타 베스푸치도 결핵으로 16세에 죽었는데, 이 그림에서도 폐결핵의 징후가 엿보인다 고 한다. 문화인 중에서도 데카르트, 볼테르, 루소, 몰리에르, 실러, 로크, 칸트, 발자크, 디킨스, 스티 븐슨, 체홉, 쇼팽이 결핵으로 목숨을 잃었다. 결핵은 어느 시대에나 사람들을 괴롭히는 무서운 병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결핵이 급증하여 백색 페스트라고 불릴 정도로 맹위를 떨친 때는 산업 혁명기로, 영국뿐만이 아니라 프랑스, 독일, 미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쟁과 질병 그리스의 뒤를 이은 대제국 로마가 쇠망한 원인 중의 하나는 페스트와 천연두라고 한다. 또한 십자군 원정 때 괴혈병과 이질 때문에 전군이 궤멸한 적도 있었다. 30년전쟁(1618-1648), 7년전 쟁(1756-1763), 나폴레옹 전쟁(1812-1814), 크림 전쟁(1853-1856) 때 발진티푸스가 맹위를 떨친 것도 잊을 수 없다.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 참가했던 프랑스 군의 3분의 2는 발진티푸스와 이질로 쓰러졌다. 제 1차 세계대전의 서부전선에서 발생한 인플루엔자는 삽시간에 전세계로 퍼져,1918년부터 1919년까 지 2,500만에서 5,00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쟁이라는 이상 사회현상이 전사자보다 훨씬 많은 질병의 희생자를 낳은 것이다. 이제까지 몇 가지 질병을 예로 들어 '문병이 질병을 낳고 질병이 문명을 낳아온' 역사를 더듬 어 보았다. 현재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암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암 이상으로 무섭다는 에이즈 가 1980년대에 들어 갑자기 전세계로 확산되고 있다. 현대의 질병은 현대 세계의 사회상황과 어떻게 관련되어 이처럼 만연하고 있는가? 과연 에이즈 에 의해 현대문명은 크게 변화될 것인가? 질병의 세계사에 입각하여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 다. 대영제국을 지탱한 것은 아편이었다 1519년 11월 스페인 군의 지휘관 페르난드 코르테스는 약 3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아스텍 제국 의 수도 티노체테트란에 침입했다. 이때의 장면을 종군 성직자가 상세히 기록했다. 스페인 군과 아스텍 군은 아주 치열하게 싸웠다. 그들은 집요한 게릴라 전 혹은 육탄공격으로 떼지어 공격해왔다. 양쪽 병사들은 무참하게 살육하고 서로 잔학한 행동을 저질렀다. 북소리와 피리소리, 나팔소리, 호각소리 등 온갖 단조로운 소리들이 시끄럽게 울려 퍼지고 있 었다. 그 소리는 큰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들려왔다. 거기에는 완전히 발가벗은 스페인 군 포로가 악마의 신상 앞에 끌려나와 붙어 있는 것이라곤 머리를 장식한 깃털과 손에 든 부채뿐인 채 기묘 한 춤을 추고 있었다. 아스텍인들은 얼큰하게 취하여 마치 꿈속을 헤매듯 몽롱하게 춤을 추었다. 춤이 끝나자 그들은 돌로 만든 희생대에 포로를 누이고 돌칼로 가슴을 내리그었다. 그리고는 실 룩실룩 뛰고 있는 심장을 끄집어내어 향불을 피운 제단에 바쳤다. 그들은 피투성이가 된 주검을 발로 차서 백수십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뜨렸다. 그것을 기다리고 있던 인디오들은 마구 달려들어 마치 도살된 마소처럼 팔과 다리를 자르고 머리가죽을 벗긴 다음 피가 뚝뚝 떨어지는 머리를 잘라버렸다. 이 종군 성직자는 또한 아스텍인의 희생물이 자못 행복한 듯 갑자기 죽는 모습에 놀라, 악마의 식물인 '테오나나카트루'와 '페요테'를 복용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였다. 이것들은 각각 독버섯 과 선인장의 일종인데, 복용하면 찬란한 색채 환각을 일으키는 마약이다. 잉카 제국과 코카인 문화 코카인은 아스텍 제국과 나란히 번영하고 있던 잉카 제국에서 사용했다. 코카인은 코카의 나뭇잎에서 추출하는 마약으로, 잉카 제국에서는 수술용 마취 외에도 국민들 에게 매일 일정한 시간에 복용하도록 허락했다고 한다. 코카의 잎을 씹으면 배고픔을 잊고 원기 를 회복한다는 것이었다. 잉카 제국에서는 전쟁중에 머리를 다친 병사가 많았는지 뇌 외과수술까지 하였으며 마취에 코 카인을 사용했다. 잉카 제국에서는 산악지대에 훌륭한 계단식 화전을 만들고 관개수로망도 갖추었으며, 옥수수를 주로 생산했다. 그럼에도 식량이 모자라 국민들은 코카인으로 허기를 달랠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코카인은 국소마취용으로 수술에 쓰이고 있다. 이것을 복용하면 행복감이나 성욕 항진 등을 느끼기 때문에 근래 마약으로서 미국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다. 축구 선수 마라도나, 프로권투 세계 챔피언인 레너드도 상용해 화젯거리가 되었다. 미국에서는 코카인 의 사용자가 급증하고 있어 '마약전쟁'이라고 할 만큼 큰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마약의 왕 아편 제우스의 딸 헬렌은 새로운 생각이 떠올랐다. 곧바로 모두가 마시는 술에 약을 넣었다. 그 약 은 모든 고통과 노여움, 슬픔을 잊게 했다. 잘 흔들어서 조금만 마셔도 누구든지 그날은 예컨대 아버지나 어머니가 죽어도, 사랑하는 형제나 자식이 눈앞에서 죽어가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 는다. 이것은 기원전 8세기에 그리스의 호메로스(호머)가 쓴 유명한 서사시 '오디세이'에 나오는 구 절이다. 호메로스의 또다른 시 '일리아드'에도 "봄비에 무겁게 늘어뜨린, 꽃이 만발한 양귀비처 럼 머리를 늘어뜨린다" "고개를 흡사 양귀비 열매처럼 높이 들어올린다"는 문구가 있다. 여기에서 헬렌이 술에 넣은 약이란 아편으로 여겨진다. 이렇듯 마약의 기원은 오래되었다. 현 재에는 인공적으로 합성한 마약도 있지만, 역사에서 나타나는 마약은 천연식물에서 채취한 것으 로, 양귀비와 코카인, 대마초가 있다. 그 가운데 양귀비는 아편, 모르핀, 헤로인, 코데인 등을 만들어, 마약의 왕으로 불린다. 헤로인은 양귀비에서 추출한 아편에 함유되어 있는 모르핀을 가공하여 만든다. 헤로인은 아스 피린을 만들어 유명해진 독일의 바이에른 사가 1897년 중추신경을 마비시키는 약으로 개발했다. 그 효과가 아주 뛰어나 독일어의 '헤로이쉬'(영웅적)라는 단어에서 헤로인(Heroin)이라는 이름을 따왔다. 대영제국을 지탱한 것은 아편이었다 아편은 아랍어의 '아피윤'에서 온 말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는 아편을 진통제 등으로 사용하였 으며, 아라비아 상인을 통해 널리 팔려나갔다. 인도 무굴 제국 시대의 독일에서는 양귀비의 재배 를 장려하였으며, 무굴 제국의 3대 황제인 악바르는 아편의 이익에 눈을 돌려 나라에서 전매하였 다. 1757년의 플래시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인도 벵골의 징세권을 장악했는데, 이 때 이 지역의 양귀비 재배 독점권도 얻어냈다. 동인도회사의 지배지역이 넓어짐에 따라 아편의 전매수입도 크게 늘어났다. 1775-1781년의 미국 독립전쟁에서 패배한 뒤 영국의 재정은 몹시 궁 핍해져 자국이 보유한 은도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이 무렵부터 시작된 산업혁명으로 자본의 축적을 부르짖으면서 은의 국외 유출을 비난하는 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동인도회사는 중국무역에서 수입이 초과되는 현상을 타개하기 위해 1781년부터 중국에 인 도 아편을 수출하기 시작했다. 인도로부터의 아편 수입은 급증해 연평균 100만 파운드에 달했으 며, 동인도회사 총수입의 20%를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인도가 대영제국에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1899년부터 1905년까지 인도 총독으로 근무한 영국의 정치가 커즌 경의 말에서 알 수 있다. '인도에서의 영국' 인도가 없었다면 비콘스필드 백작은 수에즈 운하 주식을 살 수 없었을 것 이고, 수에즈 운하가 없었다면 우리는 오늘날 이집트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인도를 잃 는 것은 영국에게는 자국 공업제품의 3분의 1을 팔 수 있는 시장을 잃는 것이고 나아가 아시아에 대한 영향력 상실을 의미할 것이다. .....인도에서 값싼 원료와 식료품을 들여올 수 없다면, 영 국 산업은 공황을 겪을 것이고 영국에서 계급대립은 격화될 것이다. 영국은 그 결과 삼류 나라의 대열로 떨어질 것이다. 영국이 인도에서 얻은 수입의 20%가 아편에서 나왔다면 '대영제국을 지탱해준 것은 아편이었 다'고 해도 과장은 아니리라. 말레이 반도의 식민지화와 아편 통조림을 발명하고 통조림 산업도 발전시킨 영국은 통조림용 깡통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주석 을 세계에서 찾았다. 말레이 반도는 옛날부터 주석의 산지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영국 자본은 주석을 찾아 이곳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산은 네덜란드 통치 하에 개발되었는데, 화교 중소상인들이 그 개발을 담당하고 있었다. 1824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협정으로 말레이 반도가 영국의 세력권으로 들어가 자 영국 자본은 차차 화교 자본의 광산을 흡수, 병합하기 시작했다. 중국인들은 말레이 반도의 중국계 광산에 대량으로 유입되었다. 그후 영국의 광산도 중국인을 고용했기 때문에 그 수는 계속 증가했다. 이국에서의 힘든 노동을 달래기 위해 아편을 피우는 중 국 노동자들이 늘어났는데, 광산 경영자는 그들에게 아편을 팔아 이중으로 이익을 얻었다. 영국 동인도회사가 인도산 아편을 중국으로 들여와 아편전쟁이 일어났음은 잘 알려져 있다. 아 편을 가득 실은 영국 선박은 말라카 해협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레이 반도 일대에도 들어가 아 편을 팔아 폭리를 탐했다. 그리고 많은 중국 노동자를 착취하여 그들의 육신은 병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유입된 중국인의 자손이 현재 말레이시아의 중국계 주민이며, 그들은 말레이 반도 의 맨 끝에 있는 섬 싱가포르에도 흘러들어가 현재 싱가포르의 중국계 비율을 높였다. 제 1차 대전으로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열강이 중국에서 후퇴한 틈에 일본은 중국에 '21개조의 요구'를 하고 강력하게 중국으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은 영국을 대신하여 아편을 중국에 밀 수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가지고 들어간 것은 생아편을 정제하여 만든 진통제 모르핀과 헤로 인, 코카인이었다. 밀수된 양은 1916년부터 5년 동안 모르핀이 6,400킬로그램, 헤로인이 6,600킬 로그램, 코카인이 6,700킬로그램이었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강화되면서, 일본군의 점령 아래 공공연하게 아편과 헤로인 이 제조, 판매되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국가정책으로 이를 추진하여 막대 한 이익을 거둬들였다. 콜럼버스와 다시 온 '불결한 시대' 기독교에서는 중요한 신앙의식으로 세례가 있다. 이것은 '신약성서'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 스도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한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너희들은 행하여 모든 국민을 제자로 삼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바티스마 를 베풀고 너희들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전하라." 바티스마란 세례이며, 어원은 그리스어의 '물에 담그다'라는 바프티스모이다. 인도의 힌두 교도는 성스러운 갠지스 강에 들어가 목욕을 한다. 이슬람 교도는 하루 다섯 번의 예배를 절대 거르는 법이 없는데, 그 전에는 물에 손과 발, 얼굴을 씻고, 입을 가신다. 그렇기 때문에 보통 이슬람 사원에는 연못과 분수가 설치되어 있다. 목욕은 보통 따뜻한 물로 몸을 씻는 것을 말하지만, 구미에서 목욕을 뜻하는 배스(bath)나 배 싱(bathing)은 하천이나 바다에서 멱감기, 온수욕, 사우나를 모두 포함한다. 인간은 여러 가지 이유로 목욕을 했겠지만, 옛날부터 목욕의 한 형태로 이러한 종교적인 행위 가 있었다. 지금도 문화수준이 높은 문명인은 늘 몸을 깨끗이 유지하고, 야만인은 불결하다고 생각하지만, 아주 오래 전에 문명을 이룩한 고대 이집트 왕국의 사람들이 이미 그런 생각을 했다니 놀라운 일 이다. 그리스의 역사가이며 역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이집트인은 결벽증이랄 만큼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사제들뿐만 아니라 서민들도 청결하지 않 은 신체를 불명예스러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웃 나라 아시리아인들이 꾀죄죄하고 불결하 며 고약한 냄새를 풍기면서 알록달록한 색의 겉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경멸했다. 또한 헤로도토스는 이집트인이 돼지를 부정한 동물로 취급했다고 쓰고 있다. 이슬람 교도도 같 은 생각을 했으며, 지금도 돼지고기를 절대 먹지 않는다. 이러한 이슬람 교도의 사고방식, 곧 마 호메트의 가르침은 고대 이집트인의 사고방식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로마의 황제들이 장려한 공공목욕탕 그리스인은 자연과 사회를 합리적으로 탐구하는 정신을 존중하여, 목욕이 질병을 치료해준다고 여겼다. 온수욕은 환자들이나 하는 것이었지만 냉수욕도 병 치료에 좋다고 생각했다. 피타고라스 도 냉수욕은 통증, 암, 황달,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기원전 4세기경부터 고 대 그리스에는 공공목욕탕도 출현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한 로마는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지중 해 세계를 대부분 제압했다. 카르타고가 멸망한 기원전 146년은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여 병합 한 해이기도 하다. "로마인은 정치적으로 정복한 그리스인에게 문화적으로 정복당했다"는 말처 럼, 로마는 지배한 그리스인에게서 그들이 이룩해놓은 문화를 흡수하려고 노력했다. 특히 그리스 인의 건축가, 토목기술자를 로마로 데려와 거대한 건축물, 도로, 수도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벌 이도록 했다. 약 반 세기 만에 로마 시에는 산과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3개의 수도가 완성되고, 전체 길이는 거의 400킬로미터에 달했다, 산에는 터널을 뚫고 계곡에는 다리를 놓아 설치한 수도관은 지금도 곳곳에 유적으로 남아 있다. 사실 로마 시민이 물을 마시거나 세탁하는 데 이 정도의 수도시설은 필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왜 이런 대공사를 했을까? 그것은 목욕용이었다. 로마인은 원래 강이나 바다에서 목욕했는데, 공공목욕탕에서 따뜻한 물로 목욕하는 것은 그리 스인에게서 배웠다. 로마인들은 온욕하는 맛에 흠뻑 취해 너도나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기 시 작했다. 위정자들도 국민의 지지를 얻으려고 대규모의 공공목욕탕을 짓기 시작했다. 로마의 수돗물은 대부분 공공목욕탕과 귀족의 저택에 있는 욕탕에서 사용되었다. 로마 시민은 한 사람당 하루 평군 1,300리터의 물을 썼는데, 현재 런던에서는 평균 230리터를 쓴다고 한다. 로마의 황제들은 다투어 장려한 공공목욕탕을 건설했다. 네오,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카라 칼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등이 지은 목욕탕은 규모가 거대하기로 유명하다. 카라칼라 황제 때 의 욕탕은 26,500평방미터로 한 번에 1,600명이 목욕할 수 있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지은 것은 37,500평방미터로 3,000명이 목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현대의 어떤 헬스 센터 도 따르지 못하는 규모이다. 대욕탕은 이집트에서 가져온 화강암과 북아프리카의 누이비아 지방에서 출토되는 값비싼 녹색 대리석으로 만들었으며, 주둥이가 넓은 은제 수도꼭지로 물을 가득 채었다. 목욕탕에 들어가는 데는 어떤 제한도 없었으며, 목욕료는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낼 수 있을 정도로 저렴했다. 게다 가 어린이는 무료였다. 황제에 따라서 오후 1시부터는 먼저 환자들부터 목욕하도록 했으며, 일반 사람들은 오후 2시부터 목욕을 하도록 했다. 사회복지정책 면에서 오늘날의 어떤 나라에도 뒤지 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공공목욕탕이 번창한 배경에는 로마인의 넉넉한 생활이 있었다. 오드리 햅번이 주연한 '로마의 휴일'이라는 영화가 있는데, 고대 로마 시민은 1년에 며칠 동안 쉬었을까? 로마에서는 공식적으로 정해진 휴일이 1세기경에는 159일, 3세기경에는 200일이나 되었다. 완전한 주휴 2일제를 실시하더라도 120-130일인 것을 생각하면, 로마의 휴일이 얼마나 많았는 가는 가히 짐작할 수 있다. 로마 시민은 이 여가를 대목욕탕에서 보내거나 콜로세움과 대 경기장 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데 썼다. 물론 로마 시민의 이런 풍족한 생활은 수많은 노예들의 노동으로 가능했다. 중세 유럽의 목욕탕은 죄악의 온상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그 뒤에 들어선 중세 유럽 사회는 '신앙의 시 대'라고 할 만큼 기독교 만능 시대였다. 기독교는 원래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로 출발했기 때문에 금욕주의적이었다. 특히 6세기에 베네딕토가 창설한 수도원에서는 복종, 청빈, 청결을 맹세하였 으며, 그것이 유럽 수도원의 모범이 되었다. 로말 말기의 퇴폐상은 공공목욕탕에서도 나타나 남녀 혼욕이 일반화되고 풍기도 문란해졌다. 이전부터 교회는 이것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로마 교황은 745년에 공공목욕탕을 '죄악의 온상' 이라고 금지하고 땀과 때로 더러워진 몸은 신앙의 깊이를 증명한다고 설교했다. 그리하여 중세 유럽에서는 공공목욕탕이 모습을 감추고 사람들도 목욕을 전혀 하지 않았다. 세 례 때 향유를 한 번 바른 뒤 18년간 한 번도 세수를 하지 않은 여성이 칭송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청결한 로마 시대에서 완전히 바뀌어 불결한 시대가 도래했다. 이 유럽에 목욕하는 습관을 부활시킨 것은 십자군이었다. 십자군을 통하여 이슬람 문화가 유럽 에 들어왔는데, 그 가운데 이슬람 세계가 로마에서 배운 목욕하는 풍습이 있었다. 당시 이슬람에 서는 증기욕을 즐겼기 때문에, 유럽에서도 한증탕이 출현하였다. 1292년 파리에서는 26채의 한증 탕이 있었음이 과세대장에 기록되어 있다. 14세기 프랑스에서는 도시에 목욕탕과 한증탕이 개업 하여, 탕 가운데 널빤지를 놓고 남녀가 마주 보고 술이나 요리를 먹는 것이 유행하였다. 이러한 남녀 혼욕이 풍기 문란을 일으키자,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는 1538년에 혼욕을 금지하 는 법령을 발표했다. 베르사유 궁전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첫 번째 항해에서 도착한 에스파뇰라 섬에서 일행 중 몇 사람이 이곳의 풍 토병이었던 매독에 걸렸다. 이 병은 놀라운 속도로 퍼졌으며, 약 20년 만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 다. 유럽에서는 매독이 공공목욕탕에서 전염되었기 때문에, 공공목욕탕은 급속히 쇠퇴해갔다. 사실 당시 공공목욕탕은 풍기가 문란하고 남녀의 사교장이었으며, 때론 매춘도 행해지고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매독뿐만 아니라 페스트나 문둥병도 목욕탕에서 옮는다고 생각하여, 공공목용탕을 점차 기피했고, 목욕하는 습관도 사라져갔다. 가정에 목욕탕을 설치할 여유가 없는 서민들뿐만 아니라 태양왕 루이 14세조차 1년에 한 번 몸 을 씻었을 뿐 세수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제나 이투성이로 고민했다고 한다. 불결하기로 말하면, 당시 가정에는 화장실도 없었다. 집집마다 병에 오물을 모아 아침이 되면 창에서 도로에 내다버렸다고 한다.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지 살피지도 않고 버릴 때에 "물 조심!" 이라는 말조차 하지 않았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시의 관리가 이것을 치우기는 했지만, 당시 도 시에는 이상한 악취가 가득했다. 한때 베르사유 궁전에 화장실이 없었다는 말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다. 17세기 중엽부터 상 류계급의 침실에는 대소변을 담는 병과 목욕용 통을 두엇다. 지금도 호텔 등에서 욕조와 변기가 나란히 있는 구조는 여기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유럽의 '불결한 시대'는 19세기 중엽 국민보건을 위해 목욕을 권장하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마라의 암살과 샤워의 기원 목욕과 관련한 세계 역사상의 사건과 샤워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자. 프랑스 혁명 지도자로 혁명의 추진에 커다란 역할을 했으며, 신문 '인민의 벗'의 주필로서 민 중들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받은 자코뱅 파의 마라가 1793년 7월 암살되었다. 범인은 지롱드 파의 음모를 알려주겠다고 찾아온 25세의 샤를로트 코르디였다. 코르디가 면회를 청했을 때 마라는 사 보라는 목욕통(부츠 또는 슬리퍼 목욕통이라고 한다) 안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많 이 사용하던 욕조로 상반신은 밖으로 나오고 사용한 목욕물은 발가락으로 버리도록 되어 있었다. 이때 마라는 피부병을 치료하려고 사보에 들어가 있었다.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뛰어난 지도자를 잃었다. 이것은 쟈코뱅 파 정부, 아니 프랑스 혁명 자 체에 커다란 손실이었을 뿐 아니라 반혁명 테러에 놀란 자코뱅 파가 반대파를 탄압하는 '공포정 치'를 가져온 계기가 되었다. 샤워는 라틴어의 '수도관'을 의미하는 말에서 왔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샤워는 그리스 시대부 터 있었는데, 중세에 쇠퇴하고 말았다. 독일의 슐레지아 지방(폴란드)의 플리스니츠라는 소년이 말에 치여 가슴을 다쳤는데 '비 샤워'로 치료했다. 그 경험을 살려 1829년 요양소를 개설하여, 냉수와 온수 샤워로 치료를 하면서부터 샤워가 널리 유행했다. 그후 뉴욕의 사이먼 바크라는 의사가 독일의 '비 샤워'를 배워 1891년 의학협회예 이 효능을 설명하면서 샤워가 건강법으로 보급되었다고 한다. 장 발장이 잠입한 파리의 하수도 우리들 가정에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된 지는 이삼십년이 채 안 되는데, 놀랍게도 4,000년 전의 가정에도 수세식 화장실이 있었다. 인더스 문명이 기원전 1500년경 인더스 강 중하류 유역에 발생하였으며, 이 지역에 모헨조다로 나 하라파 등 많은 도시가 세워졌다. 모헨조다로의 유적을 보면 이들 도시는 질서 정연하고 계획 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포장된 도로의 양쪽에는 집들이 두 줄로 나란히 있고, 완비된 배수설비 외에 공공목욕탕이나 시장도 있으며, 도시 전체가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모헨조다로에서는 각지에서판 우물에서 물을 끌어와 썼다. 그리고 주로 주택의 1층에 부엌, 화 장실, 욕실이 있고, 화장실과 욕실이 2층에 설치된 집도 있었다. 화장실은 항상 준비해둔 병의 물을 흘려보내든가 욕실에서 사용한 물을 끌어와 흐르게 했다. 하숫물은 벽돌벽 사이에 묻은 토관이나 집에서 뚫은 하수관을 통해 흘러나갔다. 하수구는 돌이 나 벽돌로 덮고 곳곳에 오수조를 설치하여 거기에서 지하로 스며들게 하든가 아니면 웃물을 흘러 가게하고 오수조에 쌓인 오물은 퍼내어 버렸다. 근대의 하수도가 무색할 정도로 훌륭한 시설이 다. 2단계의 배수와 쓰레기를 버리는 쓰레기통까지 있었다니 놀랍기만하다. 인더스 문명의 도시는 인더스 강 유역의 저습지대에 건설되어 배수는 도시의 사활이 걸린 문제 였기 때문에, 이만큼의 설비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또한 도시에는 거대한 공공목욕탕이 있었는 데, 종교 의식을 위한 목욕 장소로 이용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오랜 옛날과는 어울리지 않는 듯한 수세식 화장실이나 하수도의 발달은 인더스 문명 사 람들의 '정(깨끗함)과 부정(더러움)'의 의식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 의식 은 그후 인도의 힌두교 교리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로마의 뛰어난 상하수도 오리엔트에서는 아시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바빌로니아에서 각 가정과 연결된 하수관이 매 설되어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기원전 7세기). 그러나 유럽에서 본격적으로 하수관을 건설한 나라 는 로마였다. 아치를 이용하기도 한 대규모 토목건축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던 로마인은 개선 문이나 원형경기장 콜로세움, 공공목욕탕 등 장려한 건축물을 후세에 남겼다. 특히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하는 두텁고 견고한 포장도로와 수십킬로미터에 달하는, 도시에 물을 끌어오는 상수도나 강에 걸쳐 있는 수도다리는 놀라울 정도다. 로마인은 도시를 건설할 때 물을 가장 먼저 확보했다. 로마인은 목욕을 즐겨 공공목욕탕이나 귀족의 저택 안에 있는 목욕탕에서 많은 물을 썼다. 그렇게 많은 양의 물을 어떻게 끌어왔을까? 그것은 상수도와 달리 지하 시설물이었기 때문에 전모가 좀체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1849년 청년 이탈리아(당)의 마치니가 로마 공화국을 세웠는데, 교황 비오 9세의 요청으로 루 이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이 이를 진압했다. 프랑스 군은 1870년까지 로마에 주둔하면서, 현재의 포로 로마노라고 총칭되는 고대 로마의 유적을 발굴했다. 프랑스 군이 이를 진압했다. 프랑스 군 이 철수한 뒤 통일 이탈리아 정부가 바통을 이어받아 백 년이 넘게 발굴하고 있다. 이 발굴의 큰 성과는, 포로 로마노의 밑으로 티베르 강까지 흘러가는, 고대 로마 제국의 대간선 하수도 크로아 카마키시마의 발견이다. 로마의 중심부는 7개의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빗물이 이 저지대에 모이기 때문에, 배수는 로마 시의 건설에 필수불가결했다. 이 때문에 일찍이 기원전 615년에 중심부 포룸 계곡의 물을 티베르 강으로 내보내는 하수도가 만들어졌다. 이때 로마는 로마 서북쪽에 사는 에트루리아인의 지배를 받는 작은 도시국가였다. 그러나 로마가 발전하면서 각 가정의 배수구와 연결된 하수시설 을 설치하였다. 로마에는 풍부한 상수도의 물을 사용하는 수세식 화장실이 보급되어 있었다. 분 뇨를 그대로 방류한 셈인데, 로마 시민은 쾌적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 로마 제국이 지배한 곳곳의 대도시에서도 규모는 작지만 같은 모양의 상하수도 시설이 만들어 졌다. 중세 유럽 하수도의 암흑시대 중세 유럽을 암흑시대라고 일컫는 것은 르네상스를 이끈 인문주의자들이 훌륭한 그리스 로마 시대의 문화를 재생, 부활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중세 유럽을 낮추어 보는 점에서 오해의 소지가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그렇게 볼 수밖에 없었던 측면도 있다. 기독교 만 능시대였기 때문에 자연과학의 발달과 합리적으로 사물을 바라보는 사고방식이 억눌렸다. 화장실 과 하수도만 보더라도 확실히 유럽의 중세는 암흑시대였다.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 성립합 봉건사회는 장원을 중심으로 한 농촌사회였으며, 로마 제국 시대에 왕성했던 상공업이나 도시는 붕괴되었다. 중세 유럽에 도시가 발달한 것은 11-13세기의 십자군 원정부터이다. 이후 로마 시대에 도시가 있었던 곳이나 교통의 요충지, 국왕이나 제후의 성 주변에 상공업자 들이 모여 도시가 생겼는데, 머지 않아 상공업자들은 국왕, 제후들에게서 자치권을 획득하여 자 치도시(자유도시)를 건설했다. 상공업자들은 외적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도시를 성벽으로 에워쌌다. 성벽을 부르그(burg), 도시의 시민을 부르주아(burgeoi)라고 부르게 되었다. 장원의 농노들도 도시로 도망쳐 1년 하고 하루만 지나면 영주의 지배에서 벗어나 신분의 자유를 얻었기 때문에 도시로 흘러드는 사람이 많아져 좁은 성 안은 항상 북적거렸다. 도시에는 하수도는 없고 몇 군데에 공동화장실과 분뇨를 모아두는 곳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시민들은 밤중에 공동화장실까지 가지 않고 자기 집에서 변기에 대소변을 보고 다음날 아침 그것 을 분뇨를 모아둔 곳으로 가져갔다. 그런데 그 일마저도 귀찮아진 시민들은 제멋대로 길에 버리 기 시작했다. 파리에서는 날이 저물면 "가르디로!"(물조심!)라고 크게 세 번 소리친 다음 변기의 오물을 길 에 내던지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다. 물론 시 당국이 이렇게 하지 못하도록 벌금형이나 태형을 내 렸지만, 효과가 없었을뿐더러 급기야는 이 관행이 다른 도시나 외국에까지 퍼졌다. 런던에서도 시민들은 프랑스어로 "가르디 로!" 또는 영어로 "가디 루!"라고 소리지르면서 분뇨를 길에 버렸 다. 영국의 유명한 풍자화가 W.호가스의 '밤'에는 이층에서 버린 분뇨가 길을 지나가던 노파의 머 리 위에 떨어지는 광경이 그려져 있다. G.M.트리벨리언은 '영국사회사'에서 18세기 초 에딘버러의 새벽 풍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저 멀리 머리 위에서 5층, 6층 혹은 10층의 창이 열리고 에딘버러의 시민들은 지난 24시간 동 안 모아둔 분뇨를 길에 버린다. 위층에서 버리는 사람은 미리 "가디 로!"라고 외치는 것이 예의 다. 아침에 돌아오는 취객은 "하우드 야 팡!"(잠깐 기다려!)하고 크게 외치면서 몸을 구부리고 피해간다. 오물을 맞으면 뒤로 길게 늘어뜨린 비싼 가발이 엉망이 되기 십상이었다. 길에 버려진 분뇨는 넓은 대로변이나 깊은 우물 같은 곳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밤이 되면 악취가 진동하는데, 다음날 새벽 시의 관리가 대충 치우고 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더구나 안식일 아침에는 손도 대지 않기 때문에 하루종일 방치되어 있어 스코틀랜드의 수도는 신앙의 향기로 가득차는 것이었 다. 파리의 악취가 프랑스 혁명의 원인이었다? 길가에 버린 분뇨는 당국이 고용한 분뇨청소부들이 대충 치우기는 했지만, 낮은 급료로 일하는 그들은 때때로 분뇨를 정해진 장소까지 가져가지 않고 도중에 버린다든지 오래된 우물에 집어넣 는 등 부정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안식일을 중시하는 기독교 사회에서는 청소부도 일요일에는 일을 하지 않아 일요일의 악취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공동변소가 적은 파리에서는 사람들이 아무 데서나 용변을 보았으며, 광장이나 나무숲이 있는 궁전은 용변을 보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짐은 곧 국가"라고 말한 태양왕 루이 14세도 파리의 악취에 견딜 수 없어 1661년에 파리 교외 에 베르사유 궁전을 짓도록 명령했다. 왕명을 받은 당시의 대건축가 보는 온 정력을 기울여 대공 사를 추진했다. 보가 죽자 만사르가 이것을 이어받았다. 착공한지 20년이 지난 1682년 아직 완성 되지는 않았지만, 루이 14세는 왕궁과 정부를 이곳으로 옮겼다. 이후 베르사유 궁전에는 프랑스 의 대귀족들이 모두 거주하면서 국왕과 화려한 궁전생활을 보냈다. 왕궁과 정부기관이 파리에 있었더라면 왕과 정부는 파리시의 운영에 상당한 경비와 노력을 들 였겠지만, 파리만이 아니라 베르사유의 건설과 유지에 많은 경비가 들어 파리시의 재정은 여러모 로 악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수도 공사도 거의 진척되자 않았으며 꽃이 만발한 파리는 악취가 나는 파리로 변해갔고, 그 상황은 조금도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파리 시민들은 국왕이 파리로 돌아오기를 바라게 되었다. 이러한 파리 시민의 감정에 불을 지른 것은 1780년대 후반에 프랑스를 습격한 이상저온과 기근 이었다. 국왕이 파리에 있지 않아 굶주린다고 생각한 파리의 부녀자들은 바스티유 감옥의 습격으 로 시작된 혁명의 진전 속에서 1789년 10월 5일 베르사유로 행진하여 루이 16세와 그 일가를 파 리로 끌고왔다. 이쯤 되면, 파리의 악취를 싫어하여 국왕이 베르사유로 옮겨간 것이 프랑스 혁명의 간접적인 원인이었다고 할 만하지 않을까? 장 발장이 잠입한 파리의 하수도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에는 주인공 장 발장이 1830년 7월혁명으로 탄생한 루이 필 리프의 7월 왕정에 반대하는 공화파의 반란에 가담하여 부상을 당한다. 그리고 양녀 코제트의 약 혼자가 마리우스를 구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파리에는 이미 서서 걸어다닐 만한 하수도가 있었 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파리에 석조 하수도가 출현한 때는 영프전쟁이 가장 고조된 1370년이다. 폐수는 이 하수도를 통하여 센 강의 지류인 메니르몬탄 강으로 흘러갔다. 이 하수구에 분뇨를 버리지 못 하도록 금지했기 때문에 청소부는 오물을 메니르몬탄 강에 버렸다. 그 때문에 이 지류가 점점 막 혀 18세기에는 하수구의 물을 이 지류에 흘려보낼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루이 15세는 이 지류와 나란히 땅 속에 석조 하수도를 조성하는 계획을 허락하여, 1740년 센 강과 곧바로 연결되는 암거 하수도가 완성되었다. 이것이 점차 연장되어 1800년에는 파리 하수도 의 전체 길이가 20킬로미터, 1824년에는 37킬로미터에 달했다. 장 발장이 도망쳐 들어간 하수도 는 이 무렵의 것이다. 콜레라의 대유행이 근대적인 상하수도를 낳았다 1348년 전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페스트(흑사병)의 균은 주로 쥐가 옮겼다. 중세 유럽의 도시에 얼마나 쥐가 들끓었는가는 유명한 전설 '하멜른의 피리소 리'를 떠올리기만 해도 충분하다. 시가 쥐를 소탕해준 업자에게 약속한 돈을 주지 않자 화가 난 업자는 피리를 불면서 수많은 아이들을 꾀어가 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1284년 하멜른 시에 서 130명의 아이들이 갑자기 실종된 사실을 토대로 지어진 전설이다. 페스트는 그후에도 몇 차례나 유럽을 강타했는데, 유럽의 도시들이 얼마나 불결하고 위생상태 가 나빴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1720년의 유행을 마지막으로 유럽은 흑사병의 공포에서 해방되 었다. 연구자들에 의하면, 그것은 이 무렵 쥐의 벼룩 종류가 인간에게도 꾀는 벼룩에서 쥐에게만 꾀 는 벼룩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흑사병에서 해방된 유럽에 이번에는 콜레라가 맹위를 떨치기 시작했다. 1832년 유럽의 도시들 이 콜레라의 습격을 받아, 글래스고에서는 3,200명, 런던은 5,300명, 파리에서는 18,000명이 사 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에도 콜레라는 균을 밝혀내지 못했기 때문에, 콜레라 환자의 설사똥으로 오염된 물을 마시 는 것이 원인이라는 설과 설사똥으로 오염된 토양이 나쁘다는 설이 제기되었는데, 전자는 상수도 의 정비가, 후자는 하수도의 정비가 필요함을 말해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시 당국은 할 수 없이 상하수도의 정비에 힘을 쏟게 되었다. 런던에서는 1852년에 '수도수도법'이 제정되어 템스 강 상류로부터 물을 끌어오는 상수도를 설 치하고 지하수가 아닌 물은 반드시 여과해 쓰도록 정하였다. 하수공사는 좀 지연되었지만, 1855 년에 '수도토목청'이 하수도 공사를 시작해, 1865년 거의 완성하였다. 이 하수도의 완성을 계기 로 '하수이용법'이 재정되어 수세식 화장실이 의무사항이 되었다. 파리에서는 나폴레옹 3세의 제 2제정기에 상하수도 시설이 근대화되었다. 무력으로 정권을 탈 취한 나폴레옹 3세는 허약한 지지기반을 국민들의 인기로 메우려고 수도 파리의 대개조를 중점사 업으로 정했다. 그리고 센 주지사에 오스만을 발탁하여 파리의 근대화 업무를 담당하도록 했다. 오스만은 파리에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샘에서 깨끗한 물을 파리로 끌어오는 샘물 수도의 건 설에 착수했다. 1865년, 1874년, 1893년에 완성된 세 개의 상수도로 끌어온 샘물은 앞서 소개한 파리가 자랑하는 대하수도의 천장에 설치한 수도관으로 각 가정에 보내는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이 새로운 상수도의 완성으로, 이전의 상수도(나폴레옹 1세가 1811년에 완성시킨 103킬로미터 의 우르크 운하에서 취수한 물이 여러 차례 오염되어 파리에 콜레라가 유행했다)로는 화장실 등 에서 쓰는 허드렛물을 각 가정에 보냈다. 이리하여 파리의 수돗물은 마실 물과 허드렛물로 나뉘 어 배달되었다. 전차경기장에서 일어난 민중반란 인간은 먼 옛날부터 살아남기 위하여 수렵과 어로, 채집을 하고 외적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싸워왔다. 그러기 위해서 활쏘기, 창던지기, 격투 등의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것들 은 모두 스포츠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사활을 건 행위였다. 현재 우리가 즐기는 스포츠는 그 기 원을 옛날의 냉혹한 생존경쟁이나 투쟁에서 찾을 수 있다. 올림픽 경기 종목인 창던지기, 포환던지기, 양궁, 사격, 바이애슬론(20킬로미터 스키 경주와 라이플 사격을 합친 경기), 권투, 레슬링 등은 사실 수렵과 전쟁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3000년경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권투를, 기원전 2000년경에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서 레슬링을 했다는 것은 당시의 점토판이나 분묘의 벽화 등에서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는 '아곤'이 '경기'를 뜻했다. 당시의 경기가 모두 필사적으로 하는 너무나 고통 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어 '아곤'에서 영어의 애거나이즈(agonize:몹시 괴로워하다, 필 사적으로 노력하다), 애거니(agony:격심한 통증, 죽음의 고통)라는 말이 생겼다. 사실 당시 경기 에서 죽는 사람도 허다했다. '추모경기'에서 스포츠로 요즘의 운동회, 경기대회를 바로 장례식 때 치렀다고 하면 누구나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기원 전 8세기 후반의 트로이 전쟁을 주제로 한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에는 '파트로크로스의 추모와 경기'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용장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갑옷을 입고 싸우다가 전사한 친구 파트로크로스의 죽음을 슬퍼하다 가 화형을 한 후에, 추모경기대회를 열어 전차경주, 권투, 레슬링, 달리기, 창던지기, 철괴던지 기, 활쏘기 시합을 벌였다고 한다. 유명한 올림피아 경기는 그리스의 신 가운데 주신이었던 제우 스를 모시는 제전경기였다. 이렇듯 고대 그리스의 경기는 제전경기나 추모경기였다. 당시 장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묘지에 참배한 후 집으로 돌아올 때 맨 뒤에 오는 사람에게 사자의 영혼이 씌워진다는 미신 때문에 모든 사람이 필사적으로 달렸다고 한다. 장례식은 죽은 이를 그리워하고 슬퍼하면서 치르는 것이 보통인데, 경기까지 벌인 까닭은 무엇 일까? 아킬레우스는 모든 경기에서 뛰어났던 파트로크로스를 그리면서 경기대회를 열었는데, 그 럼으로써 친구를 잃은 슬픔을 조금이나마 덜어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땀을 흘리면서 운동을 하면 상쾌해지는 스포츠의 효과를 바라고 경기대회를 개최한 것은 아닐까? 스포츠(soprt)의 어원은 라틴어 포르타레(portare:물건을 운반하다)이며, 거기에 접두어 데 (de), 데스(des)가 붙어 데포르타레(deportare:슬픈 정신상태를 없애다)가 되었다. 거기에서 고 대 영어의 디스포트(disport:흥겹게 놀다)가 나왔고 그 생략형이 스포츠(sport)이다. 전쟁, 싸움에서 유래한 각종 경기를 평화를 위한 경기로 바꾸어, 경기를 함으로써 '슬픈 정신 상태를 없애버리고' 서로 상쾌한 기분이 되어 우정을 돈독히 하고 평화를 구축하는 스포츠를 반 들어냈다는 것은 인간의 지혜가 이룩한 업적이다. 맨몸으로 하는 경기, 우승자에게 수여하는 월계관, 경기 중의 휴전 등으로 상징되는 고대 그리 스의 올림피아 경기는 잘 알고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언급하지 않고 로마 시대로 넘어가겠다. 현 재는 '하는 스포츠'보다 '보는 스포츠'가 더 활발한데, 고대 로마에서는 국가가 나서서 대대적인 경기를 '구경거리'로 제공했다. 거대한 경기장 콜로세움은 80년경에 완성되었는데, 그 이전에는 이곳에 티베르 강의 물을 끌어 들여 만든 거대한 인공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군선경쟁이나 검투사 시합이 열렸으며, 검노와 맹수의 싸움이나 기독교도를 맹수가 습격하도록 하는 등 피비린내나는 구경거리가 대관중 들 앞에서 행해졌다. 로마의 지배자는 노예노동의 보급으로 몰락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의 불만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무료로 빵을 주면서 구경거리를 제공하였다. 검투사의 시합은 노예를 훈련시켜 한쪽이 죽을 때까지 싸우게 한 것이었기 때문에, 눈앞에서 사람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는 관중들은 극도로 흥 분했다고 한다. 지금도 프로권투나 레슬링 시합에서 피를 흘리는 선수를 보고 관객이 광분하는 것을 보면 인간 에게는 잔혹한 일면이 잠재되어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로마에서 열린 검투사의 시합을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검투사였던 스파르타쿠스는 노 예해방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되었다.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민족해방을 지향하는 노동자의 체육제에 '스파르타키아다'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것은 자유를 추구했던 스파르타쿠스에게서 참된 스포츠 정신을 느꼈기 때문 일 것이다. 3만 명의 희생자를 낳은 니카의 반란 로마 시대에 검투사의 시합과 함께 사람들을 광분하게한 것은 전차경기였다. 전차경기장이 제 국 곳곳에 만들어졌는데, 로마의 파라티누스 언덕의 대경기장은 로마 시민의 오락장이었으며, 키 르쿠스(라틴어로 circus)라고 불렸다. 이것이 뒷날의 영어 서커스의 어원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다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면서 강국으로 부상한 나라가 비잔틴 제국 이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전 영토에서 가혹한 징세와 징병으로 강대한 재력과 군사력을 확보 하여 각지에서 정복전쟁을 일으켰다. 그의 이러한 정치는 민중의 원한을 사게 되어, 즉위 5년 후 인 532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은 전차경기가 열리던 수도의 경기장 에서 시작되었다. 이 경기는 이두 내지 사두 마차로 경기장을 일곱 바퀴 돌아 속도를 다투는 경 기로 번번히 관중을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532년 1월 경기가 끝난 직후에 군중이 저마다 "니카!"(때려부숴라!)라고 외치면서 반란에 나섰 다. 군중은 자신들의 새로운 황제를 세우고 경기장 밖으로 나와 때리고 부수고 불지르고 도망쳤 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소아시아나 이탈리아로 도망치려고 했다가. 부인 테오들러와 측근의 설 득으로 철저히 탄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반란에 참가했던 민중을 가차없이 학살하여 진 압에 성공했다. 이 반란으로 희생된 사람은 3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프롤레타리아의 불만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빵과 구경거리를 제공했던 황제도 반란은 이처 럼 가혹하게 진압하였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경기는 로마 시대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나 392년 로마 제국이 기독교 를 국교로 정하면서 그리스 신의 제전에서 유래한 올림피아 경기는 이교도의 축제라는 이유로 다 음해인 393년을 마지막으로 금지되고 말았다. 기독교는 스포츠가 육체를 더럽히는 육욕을 일으킨 다고 경멸하여, 스포츠에도 암흑시대가 도래했다. 그서을 구제한 것이 봉건제도가 만들어낸 기사 도였다. 기사가 되기 위해서는 소년 시절부터 위부인 밑에서 예의범절을 배우고, 12세 무렵부터는 기사 밑에서 검술(펜싱), 창술, 마술 등을 배워 수렵이나 마상시합 훈련을 쌓은 다음 15세경에 기사 작위를 받는다. 이때는 왕 앞에서 "조국을 사랑하고 용감하게 행동하며 신의를 중시하고 타인에 게는 관용을 베풀며 정의를 지킨다"고 서약한다. 올림픽 대회의 선수 선서는 이 기사의 서약을 본딴 것이다. 기사의 경기에는 일 대 일로 돌진하여 스치듯 지나치면서 상대를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는 마상 창시합과 여려 명의 기사들이 싸우는 토너먼트가 있었다. 아주 격렬하게 시합하여, 경기대회를 한 번 치르면 60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나오기도 했다. 한편 서민들도 마을축제나 주일에 공을 차거나 달리거나 수영하면서 놀았다. 네덜란드의 화가 브뤼겔의 '수확'에도 서민들이 레크리에이션을 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프랑스 혁명은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서 시작되었다 12세기경부터 프랑스에서는 폼이라 불리는 경기가 성행하였다. 폼이란 손바닥으로 작은 공을 쳐내는 경기로 처음에는 손바닥으로, 15세기경에는 라켓으로 공격했다. 이것은 1360년 영국에 전 해져 테니스로 불리게 되었다. 백년전쟁 후 프랑스 절대왕정의 첫발을 내딛은 루이 11세는 폼에 열중하여 1480년에는 폼 볼에 "좋은 가죽과 끈을 사용하라"는 훈령을 내릴 정도였다. 이 무렵 파리에는 250개도 넘는 코트가 있었다. 상류계급은 교회, 수도원, 궁정 안에 설치된 코트에서, 일반 서민들은 야외 코트에서 시합을 즐겼다. 부르봉 왕조를 세운 앙리 4세도 아주 열렬한 폼 광으로 볼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고 한다. 1789년 실로 175년 만에 소집된 삼부회는 처음부터 결의 방식을 둘러싸고 성직자 및 귀족과 평 민측이 대립했다. 거기에서 평민대표는 '제 3신분이란 무엇인가'를 쓴 세이에스의 제안으로 그들 의 부회를 국민회의라고 불렀다. 이에 놀란 루이 16세가 귀족들을 움직여 의회장을 폐쇄하자, 격 노한 제 3신분의 의원들이 6월 20일 베르사유의 실내 구장에 모여 집회를 열고 헌법을 제정할 때 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것이 '테니스 코트의 서약'이다. 이 국민회의를 무력으로 해산시키려는 움직임을 알아챈 시민들이 7월 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여 프랑스 혁명이 일어 난 것이다. 빈체제와 독일의 체육운동 '빈 체제의 아버지'라 불리는 프리드리히 얀은 1811년 베를린 교외에 야외체조장을 열었다. 당 시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지배 아래 있었다. 얀은 프로이센을 나폴레옹의 지배로부터 해방하고 봉건지배를 무너뜨려 독일의 통일을 실현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체조를 독 일의 해방과 통일을 위한 수단으로 자리매기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패하자, 얀은 프로이센 의용군의 대대장으로서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 에 참가하여 나폴레옹을 격파했다. 나폴레옹의 지배에서 유럽을 해방시킨 이 전투는 '국민해방전 쟁'이라고도 불린다. 귀국한 얀은 '독일 체조술'이라는 책을 출판하여 국민 체육운동을 벌였다. 얀은 체육운동을 자 유롭고 민주적인 독일을 짊어질 인간을 육성하기 위한 운동으로 내세우고 4F, 즉 프리슈(frisch: 신선하게), 프뢸리히(frohlich:즐겁게), 프롬(fromm:겸허하게), 프라이(frei:자유롭게)라는 표어 를 제창했다. 현재 독일을 체육연맹은 이 4F를 조합한 마크를 사용하고 있다. 나폴레옹의 지배에서는 벗어났지만, 그후의 빈 조약으로 독일에는 35개의 군주국과 자유도시로 이루어진 독일연방이 수립되어 자유와 통일은 실현되지 못했다. 보수와 반동의 국제질서인 빈 체 제를 확립한 메테르니히는 1819년 칼스버트의 결의를 채택하여 언론, 출판을 가혹하게 통제하고 자유주의와 국민주의 운동을 탄압했다. 같은 해 메테르니히가 프로이센 정부에게 "독일의 체조지 도자를 경계하라"고 요청하여, 정부는 얀을 체포하고 체육운동을 금지했다. 얀은 6년간이나 투옥 되었다가 석방된 후에도 오랫동안 자유를 제한당하였다. 그러나 얀의 운동과 이론, 정신은 근대 스포츠 정신의 기초를 이루었다. 영국의 시민사회가 많은 스포츠를 만들어냈다 축구, 럭비, 보트 경주, 테니스, 배드민턴, 탁구, 하기, 장애물 경기, 경마 등 현재에도 세계 에서 널리 즐기고 있는 스포츠 종목은 모두 영국에서 탄생하여 게임규칙이 정해지고 세계에 보급 되었다. 그런데 왜 대다수 근대 스포츠의 발상지가 영국일까? 그 해답은 영국이 가장 앞서서 시 민혁명과 산업혁명을 달성하고 근대적인 시민사회를 구축했으며, 세계 곳곳에서 많은 식민지를 획득하여 7개의 바다를 지배한 대영제국을 수립했다는 데 있다. 원래 왕후, 귀족들의 놀이였더 스포츠는 젠트리라고 불리는 신흥 지주 및 부르주아라 일컬어지 는 상공업자와 산업자본가의 태두와 함께 그들 사이에 보급되었다. 그리고 이들 스포츠가 대영제 국이 발전함에 따라 전세게로 퍼진 것이다. 영국에서는 스포츠를 '젠틀맨, 아마추어'에게만 제한한다는 아마추어 규칙을 정하였다. 여기에 서 아마추어는 '비전문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회화나 음악을 즐기는 상류계급 사람들을 지칭한 다. 노동자계급의 참가를 인정하지 않는 차별 규정인데, 스포츠를 하려면 그럴 만한 재정과 시간 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에도 돈과 시간이 없으면 스포츠를 오랫동안 계속할 수 없다. 영국은 앞서서 그러한 여유 를 가진 부르주아 층을 만들어냈기 때문에, 각종 스포츠도 그러한 토양에서 자리잡을 수 있었다. 1894년부터 시작된 근대 올림픽 대회의 창설자인 프랑스의 피에르 쿠베르탱은 청년 시절 영국 에 유학하면서 그곳의 스포츠 교육에 감동받아 올림픽을 부활시킬 꿈을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유럽 이외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도 여러 가지 스포츠를 육성해왔다. 근래 태권도나 야 구가 올림픽 종목으로 채택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원래는 특정 나라나 민족이 만들어 즐긴 스포츠가 널리 전세계 사람들에게도 친숙해지고 있다. 생명보험은 장례비의 필요에서 생겼다 오늘날은 보험의 시대이다. 특히 생명보험은 보험 가운데서도 가장 널리 보급되어 있다. 사회 보장제도를 잘 갖추지 못한 나라에서는 노후생활이나 사망시의 장례비용, 또는 유족의 생활을 국 가나 지방공공단체에 의존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생명보험에 가입하거나 저축을 하여 스스 로를 지킬 수밖에 없다. 이렇게 현대인의 생활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생명보험은 과연 언제 등장했을까? 제정시대 의 로마가 그 근원지로, 도시의 하층민들이 조직한 장의조합이 가장 오래된 생명보험이다. 인간 의 생명이 언제 끊어질지는 신만이 알기 때문에 장례비용이나 유적의 생활비를 평소에 준비해둘 수 없었던 하층민들의 죽음에 대한 불안은 컸다. 그러므로 세계최초의 생명보험이 왜 하충민들 사이에서 출현하였는가는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유럽에서는 상공업의 발달과 함께 도시 상공업자들이 길드(조합)를 조직하였다. 상인들은 상인 길드를, 수공업자들은 장인 길드를 조직하여, 상호부조를 꾀하였다. 길드에서는 병이나 사 업 실패로 생활이 어려워진 사람들을 돕기도 하고, 조합원이 사망했을 때에는 장례비와 유족들의 최소한의 생활비를 책임져주었다. 세계 역사상 최초의 생명보험은 17세기말에 영국에서 탄생했다고 하는데, 런던 세인트 폴 성당 의 '부의금 선불조합'이다. 당시 교회 성직자들은 지위는 높았지만 생활은 어려웠기 때문에, 사후에 가족들에게 남겨지는 것은 '성서와 사제복 뿐'아리고 할 정도였다. 따라서 자신이 죽은 후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에 대 한 불안이 늘 도사리고 있었다. 성직자들은 '부의금 선불조합'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그것은 세인트 폴 성당의 성직자들이 매달 일정한 금액을 출자하여 조합에 모아두었다가 조합원이 사망했을 때 내주는 것이었다. 이것이 현대적 의미를 지닌 최초의 생명보험이다. 그러 나 이 조합도 젊은 성직자들 사이에서 수십년 동안이나 계속 돈을 내기만 해야 한다는 데 불만을 품고 탈퇴하는 사람이 속출하여 10년 만에 해체되고 말았다. 조합원 모두에게 평등한 부담을 지 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다. 이렇게 생명보험은 애초에 장례비용을 염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불안한 상공업자들 사이에서 만들어진 생명보험 잠깐 역사적으로 생명보험이 출현하게 된 배경을 보도록 하자. 원시시대에 인류는 수렵과 채집 을 하면서, 혈연으로 맺어진 강한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집단은 냉혹한 자연에 맞서기 위해서라도 단단한 공동체 의식으로 뭉쳤고, 따라서 그 무리 속에 있는 것 자체가 생활을 보장해 주었다. 장례비용이나 남은 가족들의 생활도 공동체가 해결해주었기 때문에 조금도 걱정할 필요 가 없었다. 농경과 목축은 인류를 자연의 속박으로부터 크게 해방하고 문명을 이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 해주었다. 농경이 발달해 생산력이 증대하면서, 가족과 사유재산이 출현하였다. 농경 시대에는 가족이 힘을 합해 일해야 했으므로, 강고한 가족제도가 출현했다. 그들은 땅만 있으면 지주한테 빌린 것이든 아니든 생활이 보장되었다. 남은 가족들은 그 토지를 경작하여 어떻게든 생계를 꾸 려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수렵과 채취 시대나 농경시대에는 생명보험이 탄생할 필 요가 전혀 없었다고 말할 수 있다. 농경사회가 발전하여 생산력도 높아지고 잉여농산물을 시장에 내다팔면서 상공업이 발달하였 다. 또한 이에 따라 도시가 생기고 화폐경제도 침투하였다. 많은 농민들이 농촌을 떠났다. 토지 를 떠나 도시에서 종사한 일(주로 상공업)은 경기에 따라 좌우되기 쉬울뿐더러, 돈은 토지와 달 리 줄어들 수도 있기 때문에 항상 불안이 떠나지 않았다. 장례비를 염출하려던 로마 하층민의 장 의조합도, 중세 길드의 상호부조도 이렇듯 불안한 처지의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생명보험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핼리의 사망표와 생명보험업 '부의금 선불조합'이 해체될 무렵, 런던에서 '고아와 미망인의 생활을 보장하는 조합'이 만들 어졌다. 이것은 동종업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지역주민들이 상호부조를 위해 조직한 조합이다. 이 조합에서는 입회비말고도 가입자가 사망했을 때 각각 5실링씩 모아 유족에게 일시금으로 지불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조합도 사망자가 생길 때마다 탈퇴자가 늘어 10년도 채 안 되어 해산 되었다. 그후 런던에서 매년 일정한 금액의 부금을 적립했다가 그해의 사망자에게 공평하게 나눠 주는 '친목회'(Amicable society)라는 조합이 생겼다. 그러나 이것도 사망자가 많은 해에는 금액 이 적어졌기 때문에 가입자들의 불만이 커져 해산되고 말았다. 1693년, 핼리 해성을 발견해 유명해진 영국의 천문학자 에드먼드 핼리가 '사망표에 관한 논문' 을 발표했다. 핼리는 1660년에 설립된 영국왕립협회(자연에 관한 지식을 개선하기 위한 런던 왕 립협회)가 제기한, '인간의 생명과 수명에 대한 과학적 연구'에 답하기 위해 연구하고 있었다. 핼리는 독일의 브레슬라우 시에 남아 있던 시민들의 상세한 출생과 사망 기록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인간의 사망률은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확실히 또 급속히 상승곡선을 그린다는 것, 따 라서 결국 수학의 확률론에서 말하는 '대수의 법칙'이 인간의 수명에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다시 '친목회'로 돌아가, 1756년 런던의 한 시민 제임스 도드슨은 자신이 체력이 쇠약해지는 것을 느끼고 '친목회'에 가입을 신청했다가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는 당시 46세였는데, 조합은 45세까지라는 가입제한을 두었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도드슨은 정말 보험이 필요한 노인도 가입할 수 있는 조합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를 궁리하다가 '핼리의 사망 표'를 알게 되었다. 그는 먼저 '핼리의 사망표'를 토대로 연령별 보험료를 산출했다. 이것을 보험업계에서는 '자연 보험료'라고 하는데, 나이가 많을수록 보험료가 높았기 때문에 고령자는 가입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고심하던 끝에 1년마다 내는 보험료의 총액을 20년 혹은 30년씩 장기간으로 분할 지불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것이 보험업계에서 말하는 '평준보험료'이며 현재까지도 적용 되고 있다. 1762년 도드슨이 사망한 지 5년 후에 런던에서 그의 생각에 따라 만든 '공평한 조합'이라는 생 명보험조합이 탄생했다. 오랜 시행착오를 거친 합리적인 보험제도였기 때문에, 이 생명보험조합 은 23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영업하고 있다. 미국의 생명보험 영국에서 시작된 생명보험회사는 1788년에는 프랑스, 1822년에는 이탈리아, 1827년에는 독일에 도 설립되면서 곧 전 유럽에 퍼졌다. 미국에서는 1794년에 최초로 생명보험회사가 세워졌다. 이 민자들이 대부분이 미국에서는 믿을 것이라곤 가족들밖에 없어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려는 마음이 강하고 자신의 생활은 자신이 지킨다는 자유와 독립의 정신도 강하여, 생명보험제도는 급속히 보 급되었다. 오늘날도 '미국 사람들은 보험광'이다. 간단히 생명보험제도의 역사를 훑어보았다. 생명보험제도는 유럽에서 자유와 자주 정신을 토대 로 생겨나 그 밖의 지역에도 자유로운 시민사회의 발전과 함께 보급되었다. 가입방식과 보험료를 가입자가 마음대로 정하는 생명보험제도의 존재방식 자체가 그러한 시민사회에 적합했기 때문이 기도 했다. 그러나 극심한 자유경쟁을 전제로 한 시민사회는 또한 빈부의 차도 만들어, 부자가 훨씬 많은 보험금을 보장받는 제도라는 것도 사실이다. 이 모순을 보완하려는 것이 국가나 공공단체의 사회 보장(복지)정책이며, 또한 국가가 일부비용을 부담하는 사회보험제도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적인 면에 충실을 기하고 그것을 보완하는 생명보험제도를 갖춘 사회가 바람직할 것이다. 제 2 장 금은 자본주의의 세계 제패를 가져왔다 나일 강의 삼각주는 금의 채굴로 만들어졌다 바닷가의 모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금이 햇볕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렇듯 금은 아주 적은 양이기도 하지만 지구상의 거의 모든 암석, 모래, 바닷물 속에 들어 있으 며, 공기나 물 속에서 변하지 않고 아름다운 빛을 낸다. 그 때문에 옛날부터 인간은 금을 채굴하 여 이용하려고 궁리해왔다. 고대인들도 처음에는 사금에서 금을 채취했다. 소쿠리에 물과 모래를 퍼 담은 뒤 금을 걸러냈 다. 그러나 얼마 안되는 금을 채취하기 위해 수천 배나 되는 모래를 씻어내야 했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대량으로 금을 채굴한 사람들은 이집트이다. 유명한 투탕카멘 왕의 무덤에 황금 마스크, 황금 사자, 침구, 장신구 등 4천여 점이 넘는 황금 부장품들이 고스란히 매장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놀라운 것은 투탕카멘 왕의 미라가 안치된 삼중 관이 모두 금으로 만들어졌 으며 무게가 110킬로그램이나 된다는 사실이다. 이 무덤이 상징하듯 고대 이집트인들은 엄청나게 많은 금을 사용했다. 그 많은 금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그것은 나일강 중류와 상류에 걸친 누비아 지방의 사금 광상 에서 캐낸 것이었다. 전문가들은 이곳의 금 채굴로 대략 250평방미터의 땅이 2미터 깊이로 파였을 것이라고 추정한 다. 나일 강의 삼각주는 이 막대한 잔토로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기원전 2000년경 누비아의 금이 바닥나자 더 상류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광맥이라는 비샬리 금광이 개발되어 금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왕국과 로마 제국의 권력자들은 비샬리에서 계속 금을 캐냈다.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해 로마 귀부인들이 몸 치장에 쓴 금은 모두 이곳에서 나왔다. 대제국은 또한 황금제국이었다 고대 오리엔트에서 인도, 중앙아시아를 통일하여 대제국을 건설한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은 당연히 고대 세계의 금 생산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막대한 양의 금이 페르시 아로 모여들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왕이 금으로 만든 판에 써넣은 선언문도 발굴되었 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세계에서 최초로 주조화폐(금화)를 만든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이 신 전을 황금으로 꾸며 놓았다고 기술했는데, 페르시아 제국에 멸망당하면서 이들 황금도 빼앗겼다. 지중해 세계를 통일한 로마 제국도 이집트의 비샬리를 지배하면서 많은 황금을 캐내어 화폐로 도 유통시켰다. 오늘날 남인도에서도 로마 금화가 많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로마의 교역활동이 매우 광범위했음을 알 수 있다. 눈을 아시아로 돌려보자, 로마 제국과 비단길(실크 로드)을 통하여 교역하고 있던 한제국에서 도 같은 상황이었다. 한제국은 정복한 주변지역을 군현제를 통해 직접 지배하는 한편, 한에 복속 된 여러 민족의 수장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하면서 왕이나 후와 같은 작위나 장군 등의 관직을 부여하여 수장의 권위를 높여주고, 외적으로부터의 보호와 지속적인 통상관계를 보장했다. 이것 을 책봉체제라고 한다. 한제국은 뛰어난 솜씨로 만든 금인을 이곳저곳에 두루 하사하여 대제국의 권위를 높이는 데 이 용하였다. 이렇듯 한의 황실에는 금이 많았으며, 황제가 죽으면 주검에 네 귀퉁이를 금실로 꿰맨 '금루옥의'를 입혀 매장하였다. 유럽에서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금의 생산이 쇠퇴했는데, 자급자족 체제인 봉건사회에서 통 상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이 무렵 금은 통상활동을 장려했던 이슬람 제 국으로 모였다. 금 생산이 줄고 상업활동도 정체되어 금을 얻기가 쉽지 않자 유럽에서는 연금술 이 성행하게 되었다. 또한 유럽 사람들의 금에 대한 갈망은 미지의 세계에 있는 황금향(엘 도라 도)을 찾으려는 충동을 강하게 불러일으켜 대항해를 추진한 원동력이 되었다. 대항해 시대와 함께 출현한 유럽의 강국, 절대주의 국가들은 중상주의 정책을 표방하고 금과 은을 국가의 부로서 축적하려 혈안이 됐다. 각국은 앞다퉈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였으며, 수출은 장려하고 수입은 제한해 그 차액을 금과 은으로 확보하는 무역차액주의 정책도 폈다. 그후에도 19세기에는 대영제국이, 20세기에는 미국 등이 세계의 금을 대부분 손에 넣었다. 이처럼 세계 역 사에서 '대제국은 곧 황금제국이었다.' 대항해의 원동력은 황금에 대한 갈망이었다 콜럼버스는 대항해에 나서기 전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분록'을 열심히 읽고, 그 가운데 황금 의 나라 일본을 기술한 부분에는 그 위치를 적어두었다. 1503년에 콜럼버스가 스페인 국왕에게 보낸 보고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금은 가장 가치 있으며, 금이야말로 보석이옵니다. 이것을 가진 자는 이 세상에 있는 무엇이 든 가질 수 있으며, 이것만 있다면 영혼을 천국에라도 보낼 수 있는 지위에 이를 것이옵니다." 콜럼버스는 에스파뇰라 섬(아이티)에서 금과 향료를 찾으려 했지만, 실패하고 수익을 얻는 데 는 노예무역밖에는 없다고 생각하고 인디오의 포획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있던 스페인 왕은 권력의 기초인 관료 및 상비군을 유지할 재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콜럼버스를 지원한 것처럼 부(황금)를 찾는 대항해를 추진했다. 스페인은 아스텍 제국과 잉카 제국을 정복함으로써 콜럼버스에게는 군에 그쳤던 많은 금을 획 득할 수 있었다. 1533년 피사로는 불과 186명의 병사와 화승총 13자루로 잉카 제국을 침입해, 간 계를 써서 아타왈파 왕을 붙잡아 어두운 동굴 속에 가뒀다. 아타왈파 왕은 금과 은을 줄 테니 풀 어달라고 사정했다. 이리하여 잉카 제국 곳곳에서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황금제품들이 실려왔 다. 스페인 침입자들은 그것들을 모두 두들겨 막대기로 만들었다. 약속한 양이 거의 쌓이자 피사 로는 아타왈파 왕에게 기독교로 개종하면 화형은 하지 않고,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제의했다. 잉 카 제국에서는 화형을 당하면 혼이 영원히 사멸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아타왈파 왕은 기독교로 개 종한 뒤 교수형으로 죽었다. 이렇게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의 멕시코와 페루 등에서 엄청난 금과 은을 채굴했다. 이 광산 과 대농장에서 인디오들이 혹사당해 급격히 줄어들자, 아프리카 흑인들까지 실어와 부려야 했다. 스페인은 페루 고원의 포토시 은산(현재 볼리비아)에서 1545년부터 1550년까지 4억 달러어치의 은을 캐와 번영을 누렸는데, 이 번영의 밑바탕에는 인디오와 아프리카 흑인들의 비참한 노동이 있었다. 이렇게 획득한 양질의 풍부한 금과 은은 스페인의 '은선대'가 유럽으로 실어갔다. 1521년부터 1660년까지 스페인에 유입된 양은 공식적인 것만 해도 금 200톤, 은 18,000톤이나 되었다. 이 금과 은이 화폐와 귀금속으로 쓰이자, 유럽에서는 화폐가치가 3분의 1로 떨어져 물가 가 폭등하는 가격혁명이 일어났다. 가격혁명은 상공업의 발전을 크게 자극하고 지대를 상대적으 로 떨어뜨려 농민의 지위를 향상시키는(농노해방)등 유럽의 정치, 경제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금은 자본주의의 세계 제패를 가져왔다 18세기 중엽 러시아의 우랄 산맥에서 우량의 광산이 발견되었다. 이때부터 시베리아 지방에서 는 사금을 비로한 금이 활발히 생산되어, 19세기 중엽까지는 러시아가 세계 제일의 금 생산국이 었다. 1848년에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금맥이 발견되어 순식간에 골드 러시가 시작되었다. 일확천금 을 꿈꾸는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처음에 발견된 것은 새크라멘트 강의 사금이었는데, 상류의 산맥에서 금광맥을 찾아 채굴 중심지가 바뀌었다. 이 광맥은 좁은 곳은 너비 30미터, 넓 은 곳은 5킬로미터도 넘는 큰 것이었다. 1851넌에는 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 주에서 사금 광상이 발견되어 이곳도 골드 러시로 들끓었다. 1848년은 유럽에서는 '혁명과 광란의 해' 또는 '유럽의 봄'으로 일컫는 해이다. 프랑스 2월혁 명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국민주의 활동이 고양되어 빈 체제가 무너졌다. 노동자계급의 대두 에 공포를 느낀 부르주아는 봉건세력과 손잡고 혁명이 더 이상 진전되는 것을 방해했기 때문에 혁명은 대부분 패배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 혁명을 거치면서 유럽의 주요 나라들은 산업 자본가가 정권을 장악하는 자본주의 나 라가 되었다. 또한 미국도 멕시코를 침탈하여 캘리포니아를 비롯해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는 광대 한 국토를 손에 넣는다. 그리고 여기에서 금이 쏟아져 나왔다. 태동하고 있던 당시의 자본주의 경제에 커다란 걸림돌은 세계통화이기도 한 금의 부족이었다. 금 부족은 국내 통화의 발행량을 억제하고 국가간의 무역활동에도 억제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 에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금 발견은 중요했다. 이들 나라의 금은 국내 및 국제 통화량의 비 약적인 증대를 가져왔으며, 이로써 자본주의 경제가 발전하여 세계에 군림할 수 있었다. '골드 러시가 자본주의의 세계 제패를 가져온 것이다.' 남아프리카의 금광 발견이 금본위제를 낳았다 1886년 남아프리카 요하네스버그 근교의 농장에서 금광맥의 노두(지표에 튀어나온 부분)가 발 견되었다. 그 전에는 킴벌리에서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구슬이 다이아몬드 원석임이 밝혀져 양질 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되었다. 영국은 이 부의 획득을 노리고 남아프리카 전쟁(보어 전쟁)을 일으켜 남아프리카 전 영토를 지배하였다. 가장 앞서서 산업혁명을 달성한 영국은 1816년에 금본 위제로 이행했다. 세계 주요 나라에서 금본위제를 채택한 까닭은, 19세기 후반 남아프리카를 시 작으로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 잇따라 금광이 발견되어 금이 많이 나돌게 되고, '세계의 공장'이며 세계무역의 중심국인 영국이 금본위제를 택하여 여기에 맞추는 쪽이 상거래를 원활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금은 각 시대마다 경제대국에 모였다. 무역흑자국이 외화로서 금을 챙기는 구도가 짜인 것이다. 19세기에는 영국이 최대의 금대국이었으며, 20세기에는 미국이 전세계 금의 3분의 2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세계의 자본주의 경제는 금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는 안정된 통화체제 를 바탕으로 번영을 지속하였다. 남아프리카에서는 인구의 82%나 되는 흑인(비백인)을 전국토의 13%, 그것도 불모의 황무지로 내쫓고,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이 낮은 임금으로 금이나 다이아몬드 광산에서 일할 수밖에 없 는 인종차별 정책(아파르트헤이트)을 폈다. 이 금본위제는 1929년에 시작된 세계 대공황으로 무너진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뒤에도 국 제 통화로서 금본위제는 존속하였다. 강력한 미국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달러화가 국제통화 구실 을 하였으며, 1달러당 35온스의 금으로 교환되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에서 고통스러운 퇴조를 거듭하던 미국은 1971년 금과 달러의 교환정지를 단행했다(오일 쇼크). 이후 현재까지 세계무역 은 금과는 관련이 없는 변동상장제에 의해 각국 통화(주로 달러를 기준으로 하지만)로 이루어지 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달러와 엔화 환율의 어지러운 오르내림이 계속되고 있고, 채무국의 증가 등으 로 인한 국제금융의 불안 및 보호무역주의의 태두 등으로 새로운 국제통화 체제의 확립이 커다란 과제가 되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금본위제 이전에도 금과 은의 혼합본위제나, 본위제는 아니지만 화폐가치 를 금이나 은의 가치 등과 결부시켜 보증하는 금,은과 화폐 간의 연계가 이루어져왔다. 왜냐하면 인류가 광범위한 경제활동을 시작한 이래 금과 화폐 사이의 관련이 완전히 단절된 것은 겨우 20 여년 전 일이기 때문이다. 이후 만들어질 새로운 통화체제에서 금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을 것인가? 현재 각국이 보유 하고 있는 금을 방출하지 않는 것을 보면, 금이 국제통화로서 부활하는 것도 충분히 예상해볼 수 있다. 아름답고 불변의 찬란한 빛을 발하며 가공하기도 쉬운 금은 훌륭한 금공예품으로 만들어져, 오 늘날에도 수많은 문화유산으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금은 컴퓨터를 비롯하여 각종 계측기기, 가전제품등으로 쓰이며, 현대의 과학, 공학기술 에서는 아주 중요한 소재이기도 하다. 미국의 우주왕복선 콜럼비아 호에도 약 40킬로그램의 금이 사용되었으며, 일본의 우주개발사업단이 개발한 H.1로켓의 주엔진에도 약 5킬로그램의 금이 쓰였 다. 현재 세계에서 산출되는 금의 70%는 장식보석류고, 나머지는 공업용으로 쓰이며, 공업용의 약 7할을 일본과 미국이 주로 전자공학용 금으로 소비하고 있다. 인류는 오늘날까지 약 10만 톤의 금을 캐왔고, 지구에는 아직도 10만 톤의 채굴 가능한 금이 묻혀 있다. 은이 유럽의 세계 제패를 가져왔다 '귀금속'이라는 말이 있듯이, 인류는 옛날부터 금을 값비싼 것 중 최고로 쳤다. 고대 이집트나 인도에서는 은이 금보다 더 비쌌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금제품에 은을 씌웠으 며, 인도에서 최초의 통일왕조인 마우리아 왕조 때에는 금화보다도 은화가 더 가치가 높았다. 이 당시 은이 더 비쌌던 이유는, 천연상태의 은이 자연 금보다 적었으며, 은제련법이 덜 발달 해 은이 금보다도 귀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기원전 7세기에 소아시아의 리디아 왕국에서 최초로 화폐가 출현했는데, 금과 은을 합금해 만들었다. 이후 아테네 남쪽에 있는 아이기나 섬에서 은화가 만들어진 계기로 다른 그리 스의 도시들도 화폐를 발행했다. 이렇게 화폐와 각종 은기(신전의 제가, 장식품, 식기 등) 생산으로 은이 더 많이 필요해져, 은 광이 활발히 개발되었다. 아테네는 기원전 5세기에 영내의 라울리온에서 우수한 품질의 은광석을 발견해, 국가가 시민에게 채굴권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개발했다. 채굴권을 얻은 부유한 시민은 노예를 부려 은을 캐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중 아테네의 지도자로서 기원전 421년 스파르타와의 평화협약인 '니키아스 협약'을 성립시킨 니키아스는 라울리온 은광을 경영한 부유한 시민으로, 1,000명이 넘는 노예를 소유했으며, 그 일부는 다른 채굴자들에게 임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스 사상 최대의 내란이며, 그리스의 2대 세력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쟁탈전이었던 펠 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아테네가 패배한 요인 중의 하나는 전쟁비용 때문에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 했던 라울리온 은광의 노예들이 무더기로 도망치는 바람에 은의 채굴이 격감하여 아테네의 재정 이 궁핍해진 데 있었다. 로마 시대에는 귀족들이 은제 식기를 애용하여 귀족들의 연회에는 절대 빠지는 법이 없었다. 은으로 거부가 된 후거 가문 중세 유럽에서는 비잔틴 제국이 최초로 금화를 널리 유통시켰다. 모직물업으로 번영했던 피렌 체(플로렌스)에서 1252년에 본격적인 통화로서 플로린 금화를 발행하여 외국과의 교역, 특히 지 중해 무역에 사용했다. 그러나 이전에는 금보다도 귀했던 은이 제련법의 발달로 제법 안정적으로 생산되었기 때문에, 유럽 대륙에서는 금 생산이 줄고 은이 화폐의 주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은화 는 금화의 가치를 기준으로 하여 교환비율이 정해졌기 때문에 금화와 함께 당시의 국제통화 구실 을 했다. 십자군 원정을 계기로 유럽의 도시, 특히 북이탈리아의 항구도시는 활동범위를 원격지로까지 넓혔다. 동방에서는 후추를 비롯하여 각종 향료, 비단, 보석류를 가져왔다. 유럽측은 모직물 이 외에는 별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대가로 많은 은(은화)을 지불했다. 이렇게 중세 유럽에서 많은 은이 필요해지자, 유럽의 은산지인 남독일에서는 은 생산이 더욱 활발해졌다. 은광산의 배수법과, 수평갱 채굴 기술이 향상되어 은 생산은 해마나 늘어나 15세기 말에는 최고조에 달했다. 여기에 눈을 돌린 이가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향료나 비단, 양피 제품만을 취급하던 후거 가의 야곱 2세였다. 야곱은 1487년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티롤 지방 의 봉건영주 지그문트 대공에게 약 23,000길더의 금을 빌려주고 그 대금을 모두 갚을 때까지 대 공이 소유한 슈바르츠 지방의 은광산 경영권을 담보로 얻었다. 후거 가는 향료, 비단, 양모에서 광산물(은)로 전환하여 당시 급격하게 발전하고 있던 화폐경 제에도 부응하여 막대한 이익을 얻었다. 이리하여 후거 가는 유럽 최대의 부호, 금융산업자본으 로 성장하였다. 야곱 2세는 발칸의 은광산도 지배해 더욱더 부를 쌓았다. 후거 가는 그 자금으로 봉건영주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마 교황을 상대로 고리대금업을 하였다. 르네상스 종교개혁과 은 신성 로마 제국 마인츠의 알브레히트 대주교는 교황이 자신의 지위를 보증해주는 대가로 교황 에게 3만 길더를 지불했는데, 그중 2만 길더는 후거 가에서 빌렸다. 그리고 그것을 갚기 위해 교 황 레오 10세에게 간청하여 속죄장(면죄부)의 판매권을 얻었다. 교황 레오 10세는 장대한 성 페 트르 성당의 건립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속죄장 판매수익의 절반을 교황청에 납입하는 조건으로 판매권을 알브레히트에게 주었다. 이리하여 설교사 테첼이 후거 가의 대리인을 동반하여 각지에서 속죄장을 팔았으며, 매출액의 절반은 후거 가에 보냈다. 테첼은 "금이 상자 속에서 찰랑 소리를 내면 영혼은 연옥의 불길 속에 서 날아오른다"고 하면서 속죄장을 팔러 다녔다. 이에 마르틴 루터가 1517년 '95개조의 반박문' 이라는 공개장으로 반론을 폈고, 이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그 직후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선거에 얽힌 오직사건이 발생했다. 황제 선거는 1356년의 금 인칙서(황금문서)에 따라 7명의 선제후가 투표하도록 되어 있어 대대로 그렇게 실시되어왔다. 1519년의 선거에서는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상이에 격렬한 접전이 벌 어졌다. 카를로스 1세는 85만 길더라는 막대한 자금으로 선제후들을 매수해 선거전에서 승리하여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이 85만 길더 가운데 60만 길더는 후거 가에서 높은 이자로 빌린 것이었 다. 사실 '카를로스 1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취임은 후거 가의 화폐의 힘으로 이루어졌다.' 루터는 이러한 부패선거도 격렬히 비난했다. 카를로스 1세는 교황과 결탁하여 1521년 보름스 국회를 열어 루터에게 설교를 중단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루터가 이를 거부하자 교황은 그를 파 문하였다. 이렇듯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이면에는 유럽의 부호였던 후거 가의 재력이 꿈틀거리고 있었으 며, 후거 가의 재력은 은이 낳은 부였다. 은이 유럽의 세계 제패를 가져왔다 대항해 시대에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한 스페인은 당시 번영했던 아스텍, 잉카 두 제국을 정복 하고 그 땅을 차지했다. 1519년 600명의 병사와 14문의 대포를 가지고 멕시코에 침입한 코르테스 는 1521년에는 아스텍 제국을 멸망시키고 수많은 재보를 약탈했다. 이어 피사로는 채 180명도 안 되는 병사들을 이끌고 페루에 침입하여 1533년 잉카 제국을 정복했다. 이리하여 스페인은 포르투갈 령인 브라질을 제외한 중남미의 광대한 땅을 차지하고, 멕시코, 페루 등지의 원주민인 인디오를 혹사하여 대량의 금과 은은 앗아갔다. 이 때문에 인디오의 사망 률이 급력하게 높아져 16세기 중엽 쿠바 섬과 자메이카 섬의 인디오는 거의 전멸하고, 다른 지역 에서도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스페인은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아프리카 흑인들을 대량으로 실어와 가혹하게 마구 부렸다. 포토시 은광은 1545년부터 50년간 4억 달러의 은을 생산하여 번영을 구가 했다. 이렇게 획득한 풍부한 은과 금은 스페인으로 실려갔다. 공식적인 것만 해도 은이 18,000톤, 금 이 200톤에 달했다. 금보다도 은이 훨씬 많아 이것을 운반한 선박을 '은선대'라고 불렀다. 영국 의 엘리지베스 1세가 프랜시스 드레이크나 호킨즈가 이끄는 해적에게 은선대를 습격하여 재물을 탈취하도록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금과 은이 엄청나게 유입되자 유럽의 화폐가치는 3분의 1까지 하락하여 물가가 치솟았다. 이른 바 가격혁명이다. 이 인플레 효과로 유럽의 상공업은 활황을 누렸으며, 인플레로 지대가 낮아져 농민의 지위가 향상되는 등, 유럽의 경제, 사회는 크게 변동하였다. 안정적으로 유입된 은으로 유럽의 은광산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으며, 그때까지 은광산으로 번 창했던 남독일의 여러 도시들은 몰라하였다. 후거 가가 경영했던 슈바르츠 광산의 은 생산액도 격감했으며, 이로써 후거 가가 번영했던 시대도 종말을 고하게 된다. 안정적인 가격의 은과 금으로 유럽은 부유해졌다. 콜럼버스도 "가난한 스페인이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고 말하였다. 스페인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그 덕에 풍요로워졌다. 또한 이때부터 시작된 노예무역은 그후 수백 년 동안 지속되어 유럽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 이렇게 축적된 부 위에 유럽의 산업자본주의가 확립되었으며, 그들에 의한 세계 제패가 추진되 어 현재의 진보한 유럽과 낙후된 아시아, 아프리카라는 근현대 세계사의 구조가 만들어졌다. 사 실 은이 유럽의 세계 제패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멕시코 은과 일조편법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세계를 일주한 마젤란 일행이 필리핀의 세부 섬에 도착한 것은 1521년으 로, 마젤란은 이곳에서 원주민들에게 살해되었다. 그후 1542년 빌라로보스가 이끄는 스페인 선대 가 멕시코를 출발하여 그 다음해 민다나오 섬에 이어 사코를 섬에 도착했다. 빌라로보스는 이곳 을 스페인의 황태자(펠리페 2세)의 이름을 따서 필리핀이라 이름지었다. 1570년 레가스피가 이끄 는 스페인 함대가 루손 섬을 점령하여 마닐라를 필리핀의 중심지로 정했다. 이어 마닐라는 스페 인의 유일한 동양무역 거점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마닐라 무역의 중심은 생사, 비단, 도자기를 가지고 온 중국 상인과 스페 인 사람들 사이의 거래였다. 스페인 선박은 멕시코의 아카풀코와 페루 고원의 포토시 은광 등에 서 생산된 은을 선적하고 마닐라에 내항해서 중국 선박이 가져온 물품들과 교환하였다. 당시 중국의 명조는 조공무역 및 허가무역 등 특허무역 외의 외국무역을 금지했는데, 16세기에 포르투갈인이나 스페인인 등이 내항하여 명에 통상을 요구했을 때에도 처음에는 이를 금지했다. 그러나 밀무역과 왜구의 활동으로 골치를 썩은 뒤 무역을 허가했다. 그후 마닐라에서 이루어지는 무역을 중심으로 스페인과의 교역이 활발해졌으며, 멕시코의 은이 대량으로 중국에 흘러들었다. 이로 인해 명나라에서는 그때까지 사용하던 동화 대신 은화를 유통시켰으며, 이는 농촌에까지 널 리 퍼져 당대, 송대를 이어 발전하고 있던 화폐경제를 한층 발달시켰다. 명나라는 번잡하던 각종 세금을 한 가지로 통합하여 은으로 납부하는 일조편법을 시행했다. 이 것은 당대의 양세법 이래 세제의 대개혁이었으며, 이로써 세금은 간소화하고 부역은 모두 없어졌 다. 명을 무너뜨린 청나라는 처음에는 일조편법을 그대로 유지했으나 4대인 강희제 때 성세자생인 정이라는 조치를 내렸다(1711). 이것은 중국의 안정과 경제발전으로 세금수입이 증대하자 그해의 호적 인구 2,462만 명을 정은(인두세)을 내는 인구로 고정해버리고 정은을 부과한 것이었다. 이어 옹정제 때 정은의 부담을 모든 지은 안에 포함시켜 은으로 내도록 하는 지정은제를 실시 했다. 이에 따라 오랜 세월 동안 중국 세원이었던 인두세가 폐지되고 민중의 세 부담은 줄었다. 이 시기의 청나라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으로 인구가 늘어나고 있었는데, 지정은제의 실 시로 인두세를 내지 않음에 따라 성인남자의 과소신고가 없어진 것도 호적 인구를 급증하게 한 큰 요인이었다. 당시 세계 제일의 은생산국은 멕시코였다. 멕시코 다음으로 생산액을 자랑한 곳은 일본이다. 에도 막부가 행한 동남아시아와의 슈인선 무역(1604년부터 35년간 353척이 운항했다)으로 일본 수출품의 중심은 은이었으며, 일본은 이 교역으로 연간 15만킬로그램의 은을 쓴 것으로 추정된 다. 이것은 당시 세계의 은 총생산액인 40만킬로그램의 3분의 1이 넘는 양이었다. 실패로 끝난 루스벨트의 은정책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실시한 뉴딜 정책에 은정책이 있다. 루스벨트는 은을 기초로 통화를 대량 발행하여 공황으로 급락하고 있던 모든 물가를 올림으로써 경기 회복을 꾀하였다. 또한 계속 하 락하고 있던 은화의 가치를 높여 당시 세계 최대의 은본위국인 중국의 구매력을 증진시킴으로써 미국의 수출을 촉진하여 경기를 회복시키려고 했다. 미국 정부는 1934년에 은수매법과 은국유령 을 발표하고 국내외에서 은을 많이 사들였다. 이 정책의 배경에는 미국 은업자들의 이익을 대변 하는 '은 블록 의원'의 압력이 작용하고 있었다. 미국이 은을 부지런히 사들여 세계시장에서 은 가격이 급등하였다. 이에 중국의 은이 엄청나게 미국으로 유출되자 중국의 화폐제도는 혼란에 빠지고 심각한 은 공황이 일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공황으로 고통받고 있던 중국 경제의 위기는 한충 심각해졌다. 결국 루스벨트의 은 정책은 애초 의도를 실현하지 못하고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의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의 1927년 제 1차 국공합작이 결렬된 이래 '10년의 내전'이라 불리는 격심한 전쟁이 전개되고 있는데다 중소 군벌간의 싸움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국민당의 장제스(장개석)는 심각한 은 공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5년 12월 영국과 미국의 원조를 받아들 여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이것은 종래의 은본위제를 폐지하고 정부 계열의 은행이 발행하는 '법 폐'를 전체 중국의 통화로서 유통시키는 것으로, 중국의 경제적 통일을 촉진하고 장제스 정권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일반민중은 보유하고 있던 은을 법폐와 교환해야 했기 때문에, 장제스는 일거에 막대한 은을 국민들로부터 거둬들일 수 있었다. 게다가 1937년의 만주사변을 계기로 국민정부는 법폐를 남발하는 인플레 정책을 취했다. 통화발행량은 1937년을 100으로 했을 때 1944년에는 1,318,559로, 1,3000배나 늘어났다. 이 대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은을 대체한 법폐의 가치는 한낮 종잇조각에 지나지 않을 만큼 하락했다. 이것은 제 2차 세계대저 후 국인당이 급속히 민중의 지 지를 잃는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영국의 재정담당자 리스 로스는 장제스와 원조문제를 상의하러 중국으로 가기 전 일본에 들러 일본 정부에 중국을 함께 원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일본은 "중국에 차관을 제공할 여력이 없으며, 리스 로스의 계획에 참가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당시 일본에는 중국에 차관을 제공할 여유가 없었다. 한편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은 일 본과는 대조적으로 엄청난 액수의 차관으로 중국에 대한 경제적 진출을 꾀하였다. 일본은 제 1차 세계대전의 전후 공황과 뒤이은 관동대지진(1923)으로 입은 타격에서 벗어나지 도 못한 상태에서 1927년에는 금융공황을 맞았다. 게다가 세계공황의 영향으로 국민들이 워낙 낮 은 생활수준으로 억눌려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국내시장이 협소한 일본 자본주의는 심각한 위 기에 부닥쳤다. 이리하여 일본의 자본가들은 일본 자본주의의 허약함을 군사력으로 보충하여 무 력행사로써 중국에 진출할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 정부는 중국의 화폐개혁에 대해 즉시 강력한 반대성명을 내고 북인도차이나 분리공작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북인도차이나 분리공작이란 화북을 국민당의 지배에서 분리시켜 그곳에 일본의 괴뢰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며, 1935년 11월 25일과 같은 달 30일에 두 개의 괴뢰정권을 만 들어냈다. 이 해는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공산국이 대장정에 나선 해이고, 공산당은 그 도중에 "전국민이 일치하여 항일구국에 나서자"라고 부르짖은 '8.1선언'을 발표했다. 화폐개혁을 계기로 나타난 일 본의 노골적인 중국침략에 대해 중국에서는 내전 종식과 항일민족통일전선의 결성을 외치는 여론 이 한층 높아졌다. 일본은 중국 내의 항일단결에 두려움을 느끼고 단숨에 중국을 굴복시키려는 의도로 1937년 7월 루거우차오(노구교) 사건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전면 침공, 곧 중일전쟁을 개 시하였다.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금속 금속을 뜻하는 영어 메탈(metal)은 그리스어 메탈라오(metallao)를 어원으로 하며, '찾는다'라 는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도구를 만드는 동물'이라고 인간을 정의했다. 여기에 서 인간은 '호모 파베르'(homo faber), 즉 사물을 만드는 인간이다. 인간은 자연계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사물로 도구를 만들어왔다. 처음에는 나무, 동물의 뼈, 흙, 돌을 가공했는데 나중에는 자연계에 산재해 있는 천연금, 천연은, 천연구리 등을 '찾아내 어', 가공하였다. 한자에서 금이라는 글자는 지하에 묻혀 있는 천연금을 뜻밖에 발견하여 그것이 빛나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는 상형문자라고 한다. 인류 최초로 금속을 정련한 곳은 원료광석이 풍부하고 또한 연료로 쓸 만한 나무가 많은 메소 포타미아 북부의 아나톨리아 고원이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서 기원전 4000년경에 천연 구리를 가공하여 도구를 만들었으며, 이어 구리 를 함유한 광석에서 구리를 추출해내는 방법을 발견하였다. 이집트에서도 구리광석에서 구리를 추출해내게 되었는데, 우연한 계기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나 추측된다. '이집트 여성들은 기원전 4000년경부터 화장 겸 약으로 구리를 함유한 공작석을 눈가장자리에 붙였다. 우연히 어떤 부인이 공작석을 목탄 화로에 떨어뜨렸는데 그 광석이 환원되어 구리 덩어 리가 생겼다고 한다.' 이렇게 우연한 발견에서 출발했지만 구리 생산을 제대로 실용화하는 데는 구리를 녹일 수 있는 1,083도 이상의 고온을 내는 용광로와 용해된 구리를 정련하는 기술이 먼저 필요했다. 구리 제품 은 석기에 비해 잘 부서지지 않고 변질도 되지 않아 오랫동안 쓸 수 있었다. 망가지더라도 녹여 몇 번이고 다시 만들어 쓸 수가 있었다. 내구성과 가역성이 풍부하고 재생이 가능한 금속의 특성을 알게 되면서, 인류는 생활과 문화 수준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인류 최초의 인공금속 청동 인류가 찾아낸 최초의 금속인 구리는 이렇듯 우수한 성질을 지녔지만, 너무 유연해 석기보다 약한 것이 흠이었다. 고대의 대장간에서는 용해된 구리에 다른 광석이나 여러 가지 물질을 섞어 보다가 마침내 주석을 혼합하면 훨씬 강도가 높아져 도구나 무기에 적합한 금속이 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게 아닐까? 이리하여 최초의 인공 금속(합금)인 청동이 탄생하였다. 현재는 구리에 주석을 10% 섞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한다. 청동기 시대의 제품을 분석해보면, 주석의 비율이 3%에서 33%까지 다양하 다. 그리고 경험이 쌓이면서 점차 10% 안팎의 것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이 청동기는 기원전 4000-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으며, 주석이 전혀 나지 않는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2000년 무렵에 출현하였다. 인도에서는 인더스 문명기(기원전 2500년 부터)에, 중국에서는 은나라 시대(기원전 1600년부터)에 청동기가 출현하였다. 중국 진나라 때의 고전인 '여씨춘추'의 유별편에 "구리도 유연하고 주석 또한 유연하지만, 이 부드러운 두 금속을 섞으면 강한 금속이 된다"는 구절이 있다. 중국인들이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 청동이라는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리하여 세계 곳곳에서 철기 시대가 그 자리를 대신할 때까지 무기나 제기, 공예품 등을 청동 으로 만들어 쓰는 다양한 청동기문화를 창출하였다. 그러나 주석의 산지는 한정되어 값이 비싼 청동 제품은 주로 지배층만이 사용했고, 일반 서민들은 여전히 나무나 돌로 만든 농기구나 도구 를 썼다. 그렇기 때문에 대중적 금속인 철기가 출현하기까지는 인류사회에 역사적인 대변혁을 일 으키지는 못했다. 구리의 남북문제 현재 세계의 구리 생산은 미국의 5개 사, 영국의 2개 사, 캐나다의 2개 사, 벨기에의 한 회사 가 장악하고 있다. 구리는 미국, 캐나다 이외에 칠레, 잠비아, 콩고, 멕시코 등 주로 남쪽에 있 는 나라들에 매장되어 있지만, 거의 모두 10개 회사를 중심으로 한 외국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 다. 이 회사 들이 전세계 구리 생산의 74%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칠레는 구리만을 생산하고 있으며, 미국 자본인 아나콘다와 케네콧 사가 장악하고 있다. 1970 년 칠레에서 '국내외 독점자보, 대토지 소유자의 지배를 종식한다'는 방침을 세운 인민연합이 총 선거에서 승리해 사회당의 아옌데 대통령 정부가 출범하고, 아나콘다와 케네콧 사를 국유화했다. 이에 미국은 즉각 칠레에 경제 원조를 중단하고 구리 가격을 조작했다. 이 때문에 구리의 국제 가격은 1970년말 1파운드당 64.1센트였던 것이 1971년말에는 49.3센트로 하락했다. 그리고 1973 년 9월 11일,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 아옌데 대통령은 대통령관저에서 군의 총탄에 목숨을 잃었 다. 쿠데타로 탄생한 피노체트 정권은 인민연합 세력을 가혹하게 탄압하는 한편, 아옌데 정부가 실 시한 농지개혁으로 접수한 토지를 원래의 지주에게 되돌려주고 국유화했던 기업도 민간경영으로 이행하는 정책을 폈다. 1974년 9월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서 키신저 국무장관은 CIA가 아옌데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개입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구리 생산국인 칠레의 이러한 동향만을 보더라도, 현제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남북문제, 즉 자 본을 가진 부유한 북쪽 나라와 자원은 있지만 북의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있는 가난한 남쪽 나라라는 심각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철이 세계사의 기축시대를 만들어냈다 고대 오리엔트에서는 이집트어로 '하늘에서 온 검은 구리', 수메르어로 '하늘의 금속'이라고 기록된 금속이 있었는데, 모두 '운철'을 말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또한 수메르인의 우르 유 적에서 기원전 3000년경의 철조각이 발견되었는데, 그것도 운철이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인류는 운석에서 철을 처음 만났다고 생각된다. 이 불가사의한 금속에 인간들은 경외심을 느꼈을 것이다. 소아시아나 그리스에는 지금도 운석 을 성스러운 돌로 모시는 풍습이 남아 있다. 현재에도 이슬람 교도들이 숭배하여 몰려드는 메카 의 카바 성전에 있는 것은 돌도 거대한 운석으로 추정된다. 이윽고 인류는 철 광석을 정련하여 철을 얻게 되는데, 어쩌면 금이나 구리 등을 정련하다가 철 이 만들어지면서, 그 정련법을 배운 게 아닌가 추측된다. 이집트의 누비아 금정련소 유적에서는 순수한 자철광이 발견되었다. 철이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분열하여 항쟁을 되풀이하고 있던 오리엔트 세계는 인도유럽어족이 이동해 오자 커다란 자극을 받게 되었다. 인도유럽어족의 이동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접촉과 교류를 활발히 하 여 마침내 서로 통일되었다. 그중에서도 인도유럽어족에 속한 히타이트인은 기원전 2000년경 소 아시아의 보가즈쾨이를 수도로 정하고 세력을 떨쳐 바빌론 제 1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의 새 왕조와도 싸워 영역을 크게 넓혔다. 히타이트인은 아르케니아 지방에서 개발된 것으로 보이는 제철기술을 계승하여 국가의 보호 아 래 제철업을 운영하면서 주변 여러 나라의 왕들에게 철검을 선물하였다. 히타이트가 강해질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그 우수한 철제 무기에 있었다. 히타이트인은 철기를 오리엔트에 전하면서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의 문화를 에게 해나 그리스에 전하기도 했다. 셈어족인 아시리아인은 바빌론 제 1왕조 무렵에는 이미 아수르를 중심으로 상업활동을 하고 있 었다. 그후에 인도 유럽어족인 미탄니 왕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그 동안에 히타이트나 미탄니에 서 철기 다루는 법과 기마 기술을 배워 차츰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기원전 9세기부터 아시리아 는 철제 무기와 강력한 기마대를 바탕으로 주변을 침략하여 영토를 넓히기 시작했으며, 기원전 671년에는 이집트를 정복하여 최초로 오리엔트를 통일했다. 사르곤 2세(기원전 721-705년 재위)는 아시리아 왕국이 대제국으로 발전하는 발판을 구축하였 는데, 코르사바드에 있는 그의 궁전터에서 거의 150톤에 달하는 철기가 발굴된 것을 보더라도 오 리엔트를 통일했던 원동력의 하나가 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철은 고대의 도시국가를 낳았다 그리스 땅에서 태어난 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은 청동기시대에 속하며, 아직 철기가 전해지 지 않았다. 그러나 머지 않아 기원전 1200-1000년 무렵에 철기를 가진 도리아인(인도유럽어족에 속한 그리스인의 한 부류)이 남하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들어와 먼저 살고 있던 그리스인을 정복하고 미케네 문명을 파괴했다. 크레타 문명은 이미 미케네 문명의 세력에 멸망당한 상태였 다. 이주해온 이오니아인과 도리아인은 씨족공동사회를 이루었다. 토지는 공동체의 성원들에게 공평하게 분할되었으며, 왕의 권력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동등자 중의 일인자'였다.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는 토지를 갖고 있는 전체 자유민이 참가하는 민회에서 결정하였다. 이 그리스인 사회도 철기를 쓰면서 생산력이 높아감에 따라 붕괴되었는데, 힘 있는 자들은 토 지와 재산을 축적하고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귀족(전사계급)을 구성했다. 이에 대해 농민이나 상공업자는 평민으로서 귀족에게 종속되었다. 그러나 머지 않아 귀족은 외적의 공격이나 평민과 노예의 반란에 대비해 방위에 적합한 그 지 역의 중심부로 이주하고, 그 주변에 평민들이 살게 했다. 이것을 집주(시노이키스모스)라고 한 다. 이리하여 그리스에는 기원전 9세기에서 8세기경까지 폴리스, 즉 도시국가가 세워졌다. 헤시오도스의 시 '노동과 하루'는 폴리스가 형성된 이 시대의 사회를 알 수 있는 유일한 역사 자료이다. 그 가운데 '철의 시대가 만들어낸 고통'을 노래한 구절이 있다. 그 이후에는 다섯 번째 사람들 사이에 있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보다 앞서 죽든가 나중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것을. 완전히 지금 있는 것은 철의 족속들뿐, 낮은 괴로운 노동과 비통으로 끝나고, 밤은 파멸을 피 할 수 없나니. 신들이 심로를 끼쳤지.....완력이 정의가 되고 타인이 타인의 폴리스를 약탈할 테 지. 성실한 사람에게도 정의로운 사람에게도 은혜는 베풀어지지 않고, 선인들도 또한, 오히려 악행 을 한 사람과 오만을, 사람들은 칭찬할 테지. 여기서 '다섯번째 사람들'이란 철기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다. 헤시오도스는 인류의 역사를 금의 시대, 은의 시대, 동의 시대, 영웅의 시대, 철의 시대로 구분하였다. 헤시오도스가 살았던 시대는 철의 시대로, 그는 가장 타락한 최악의 시대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평등하고 평화로웠 던 공동체 사회가 철기의 출현으로 서로 다투고, 힘있는 자가 악행을 저지르고 제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는 암흑의 시대가 된 것이다. 헤시오도스는 철기의 출현이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폴리스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통찰하고 철의 시대를 이렇게 표현했으리라. 진의 통일은 철로써 이루어졌다 은나라와 주나라 시대의 중국은 기본적으로 도시국가(읍)의 느슨한 연합국가 시대였다. 주대 말엽에 나타난 춘추전국시대는 전란과 혼란의 와중에도 통일국가의 형성을 준비하는 시대이기도 했다. 춘추시대인 기원전 6-5세기경부터 철기가 사용되어 황토지대까지도 개간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때까지 물이 없는 황토지대는 황무지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비가 내린 직후에 철기 농구로 땅을 깊게 갈아 흙에 수분이 남도록 할 수 있었다. 이 건지농법과 소가 쟁기를 끄는 우경법이 보 급되어 농업생산력이 크게 증대했다. 이러한 농업생산력의 증대로 오래된 공동체적 농업은 크게 영향을 받아 가족의 토지 사유도 시 작되었다. 황토지대에 개간한 농지는 대규모의 제방과 운하를 이용한 관개를 바탕으로 유지되었 다. 전국시대의 제후들은 제방과 운하를 만들어 농지와 농민을 관리하고 권력을 증대시켰다. 치 수,관재 등 대규모 사업은 강력한 권력자들 아래서 비로소 가능해졌으며, 지방의 소도시 국가와 농민은 중앙의 강력한 힘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군현제가 이루어졌다. 여기서 현은 '지방의 중앙에 의지한다'는 말에서 쓰였다. 이로 써 중국은 중앙집권적인 통일국가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기 시작했다.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의 와중에서 진나라가 중국 최초로 통일을 이룬다. 진나라는 대량의 철제 공구를 이용한 수 많은 치수관개사업을 벌여 농업생산력을 높였으며, 그 국력으로 나머지 여섯 나라를 압도했다. 진나라가 정국에게 웨이수이 분지에 만들게 했던 정국량이나 청두 민장의 분수제 등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사용하고 있을 정도이다. 더구나 중국의 철은 탄소 함유량이 가장 높고 융점이 가장 낮은 주철이었다. 이것은 유럽에서 그후 2,000년이 지나도록 만들지 못한 것이다. 진의 뒤를 이은 한대에도 철 생산이 활발하여 철 상인은 소금 상인과 나란히 막대한 이익을 챙 겼다. 전한의 무제는 거듭되는 외국 정복으로 재정 위기를 맞자, 소금과 철, 술을 국가가 전매해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소금과 철, 술의 전매는 민중들의 생활에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다음 소 제 때는 각지의 식자들을 모아놓고 전매의 시비에 대해 토론하도록 했다. 그때의 논쟁점이 '염철 론'(전 10권)으로 남아 있다. 20세기에 와서야 풀린 인도 강철의 비밀 인도는 오래 전부터 질이 좋은 철을 생산하기로 유명했다. 알렉산더 대왕이 카이바르 고개를 넘어 인도에 들어왔을 때, 인도 왕이 알레산더 대왕에게 14킬로그램의 철괴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강철은 탄소 함유율이 0.04-1.7%로, 불로 달구면 달굴수록 더욱 단단해졌다. 인도를 방문하면 누구나 꼭 들르는 옛도시 텔리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쿠트브 미나르와 크와트 르 이슬람 모스크가 있다. 이것들은 힌두 세력을 무너뜨리고 1206년에 노예 왕조를 창설한 아이 바크가 세운 미나르(탑)와 이슬람 사원이다. 아이바크는 이 지역에 있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사원들을 모조리 파괴하고 여기서 나온 석재를 모아 이 모스크를 건설하였다.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이 이슬람 사원 안에 높이 7미터의 철기둥이 세워져 있다. 이것도 아이 바크가 파괴한 사원에 있던 것들로 만들었는데, 4세기 찬드라굽타 2세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 정된다. 과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전통적인 토법 제철법으로 생산할 수많은 작은 동철(탄소 함유율이 0.2-0.02%인 연철) 덩어리들을 단접(금속의 접합할 부분을 달구어 망치로 때리거나 압력으로 붙 이는 방법)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철의 순도가 100%에 가깝고 천수백 년 동안 비바람 속에서도 녹이 슬지 않았다니, 당시 제철기술이 얼마나 뛰어났는가 놀라울 따름이다. 이 철기둥은 힌디어로 델리(불안정하다는 뜻)라고 하는데, 수도 델리의 이름이 되었다. 델리는 그후 무굴 제국 이래 지금까지 인도의 수도이다. 인도가 그리스로부터 독립한 뒤에는 교외에 뉴 델리를 조성하여 수도로 삼았다. 십자군 원정에 참가한 유럽의 기사들이 이슬람 군이 사용한 검의 우수성에 매료되어 그것을 유 럽에 가지고 돌아갔는데, 아무리 해도 그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 수 없었다고 한다. 이들 검은 시 리아의 다마스크스에서 만들어졌다고 해서 다마스쿠스 검이라고 불리었다. 다마스쿠스의 도검 대장간에서는 인도에서 수입한 강철로 훌륭한 검을 만들었다. 이 인도의 강 철은 탄소 함유율이 평균 1.6%인 초고탄소 강철로, 다마스쿠스 검에는 은하수와 같은 잔잔한 물 결 무늬가 떠오른다. 이 우츠 강철의 비밀은 20세기에 와서야 비로소 풀 수 있었다. 1976년에 비 국 스탠포드 대학의 연구진이 우츠 강철과 똑같은 초고탄소 강을 개발했는데, 이 기술을 고대 인 도의 대장장이들은 이미 오래 전부터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야스퍼스는 기원전 200년까지는 중국에서 그리스까지 상호 연락이나 교류가 없 었는데도 인생과 사회에 대해 깊이 사색한 위대한 사람들이 몇이나 나왔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 시대르 세계사(인류사)의 '기축시대'라고 불렀다. 그리스에서는 이오니아의 밀레투스를 중심으로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피타고라스 등이 자연 의 근원을 탐구하는 자연철학을 일으켰다. 이어 탐구의 대상을 인간사회로 돌려, 소크라테스, 플 라톤, 아리스토텔레스의 그리스 철학이 탄생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유대교가. 이란 교와 석가모니의 불교가 탄생했다. 중국에서는 공자, 맹자, 노자, 장자 순자 등의 제자백가가 이 루어져, 유꾜와 불교의 기초를 세웠다. '기축시대'에 생겨난 종교나 사상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 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 시대에 각지에서 위대한 사상가들이 출현하였을까? 그리 간단한 대답은 아니지 만, 그 하나는 이들이 활동했던 시대 속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대는 그리스에서는 마케 도니아가 통일하기 전 시대, 인도에서는 마우리아 왕조가 통일을 이루기 전, 중국에서는 진나라 가 통일을 이루기 전인 춘추전국시대이다. 어는 곳에서 통일국가라는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편성 이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때는 철기의 출현과 보급이 커다란 원동력이 되어 사회가 변화하 기 시작한 시대이기도 하다. 그때까지는 신화나 전설이 사람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신관이나 왕들이 정신생활을 규제하고 있었지만, '기축시대'에 이르면 자연의 위력이나 인간의 무력함, 악이나 죄에 대하여 깊이 생각 하고 해탈이나 구제를 염원하게 되었으며, '인간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인간은 어쨌든 살 가 치가 있는 것인가?'를 놓고 깊이 사색하고 탐구했으리라. 이렇듯 이 시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사회와 자신의 생활 방식을 추구하였으며, 사회 전체가 활 기와 고뇌로 충만해 있었다. 이리하여 이 시대에 서로 교류는 없었지만 동서 각지에서 위대한 사 상가들이 출현한 것이다. 철이 한반도를 통일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세 나라로 나뉘어 있던 한반도에서 6세기경부터 신라가 급속하게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먼저 신라는 6세기 중반 한반도 남부에 있던 가야국들을 병합하고, 7세기 전반에 는 백제를 무너뜨렸으며 663년 백제를 도우러 온 일본군을 당나라와 연합해 백마강 전투에서 대 파하고 이어 고구려를 무찔러 한반도를 통일했다. 왜 신라가 그처럼 급속하게 힘을 얻게 되었을까? 지금까지 역사학에서는 명확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1990년 9월 한국의 '황성동 유적조사단'이 고도 신라의 왕도였던 경주시에서 제 철 공정을 완벽하게 갖춘 공장 유적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는데, 이로써 신라가 급속히 강대해진 원인은 철이었다는 견해가 유력시되기 시작했다. 이 유적에서는 4-7세기 중엽에 쓰인 광석을 용 해하는 정련로, 주물을 만드는 용해로, 대장간, 소규모 화로 등 20여 기가 발견되었다. 아시아에서 제철의 전체 과정이 구비된 공장 유적이 발견된 것은 이곳뿐이라고 한다. 한병삼 한국국립중앙박물관장의 말을 인용해본다. 이 시대에 철을 만들었다는 것이 패권을 쥐고 동아시아를 움직이게 했다. 신라가 그토록 급속 하게 강국이 된 데는 필시 풍부한 황금과 철의 높은 생산기술이 그 원동력이 되었음을 이 유적은 훌륭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조선일보'. 1990년 9월 6일자)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이 일어났는데, 그 발단은 면직물업이었다. 직물의 두 공정인 방적(실을 뽑아내는 것)과 방직(천을 짜는 것)이 개량되고 발전하면서 서로 자극을 주어 면직물 업의 기계화가 급속히 추진되었다. 이 면직물업의 기계화는 다른 산업의 기계화를 자극하면서 동 시에 증기기관의 개량에 의한 동력혁명을 불러왔다. 그것과 함께 제철업, 석탄산업, 기계공업이 발달하여 생산구조도 급속하게 변화하였다. 산업혁명 시대는 철과 석탄의 시대라고도 한다. 제철 연료로는 오랫동안 목탄을 사용하였다. 일찍이 로빈 후드의 셔우드 숲과 같은 울창한 삼림을 자랑했던 영국에서도 12-13세기경에는 농지 개간과 연료, 건축, 조선용 목재 등을 위해 나무를 마구 베어, 삼림은 급속히 훼손되었다. 그리 고 산업혁명으로 철이 더욱 필요해지면서 연료인 목탄이 부족하여, 목탄을 대체하는 석탄과 코크 스(석탄을 고열로 처리해 연기가 나지 않고 화력도 세다)의 이용이 시험되었다. 1828년 글래스고의 가스공장 관리인 J.닐슨은 용광로 안으로 집어넣은 공기를 가열해 그 안의 온도를 높이는 방법을 고안하여 특허를 받았다. 이로써 철의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하였다. 19세기 후반 철도의 발달과 고층건물의 증가, 무기 개량 등으로 철이 더욱 많이 필요해졌다. 그와 함께 제철기술도 개량되었는데, 특히 1856년에 영국인 베서머가 발명한 전로는 10톤 내지 20톤의 철을 15분 만에 용해할 수 있는 놀라운 것이었다. 베서머가 전로를 개발한 것은 대형포탄 의 발사에도 견딜 수 있는 포신용 주강을 만들어달라는 군의 요청 때문이었다. 이로써 근대 제강 법의 기본이 확립되었다. 그후 거듭 개량되어 오늘날에는 컴퓨터를 구사한 제철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이상 철의 역사를 고대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사실 지금도 철은 금속의 왕이라고 할 만 큼 인류에게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20세기도 얼마 남지 않은 요즘, 새로운 성질을 가진 합금 류가 잇따라 만들어지면서 예전에는 철을 사용하던 분야에도 진출하고 있다. 또한 플라스틱이나 폴리우레탄 등 신소재들이 더욱 가벼워지고 내구성이 높아지면서 점차 철을 대체하고 있다. 거의 대부분 철로 만들었던 자동차도 요즘은 철의 비중이 많이 낮아졌기 때문에, 폐차했을 때 재활용 할 만한 것들이 줄어들어 폐차처분업자들을 울상짓게 하고 있다. 과연 철의 시대는 언제까지 지 속될까? 그리고 21세기의 세계는 어떤 금속군이 이끌어갈 것인가? 로마 제국은 납중독으로 쇠망했다 로마제국이 쇠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국내의 노예를 노동력으로 삼았던 대농장 경영의 쇠퇴, 사 병을 모집하는 대지주의 대두, 게르만인과 사산 왕조의 페르시아 침입을 주로 꼽는다. 그러나 그 만한 대제국이 쇠퇴한 데는 그 밖의 여러 원인이 뒤얽혀 있었을 것이다.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그들의 노동 덕분에 나날이 나태한 생활을 보내고 있던 시민들의 윤리의 식은 문란해질 대로 문란해져 퇴폐의 극에 달했다. 형제자매의 근친상간이나 모자의 상간도 희한 한 일이 아니었다. 이 부패한 로마 시민들이 북방의 혹심한 자연환경에 맞서 살아오며 단련된 게 르만인의 침입을 도저히 막을 수는 없었다. 요사이 지구환경이 납에 오염되고 있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지만, 과거 역사에서도 고대 로마 제국이 멸망하는데 납중독이 한 요인이었다는 설이 제기되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로마 제국은 훌륭한 상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고 한다. 수십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로 마 시를 비롯한 각 도시에 수돗물을 보내는 상수도 관이 만들어졌는데, 이들 유적은 아직도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일부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이 물은 대목욕탕이나 도로 끝에 설치되어 있는 공공용수장은 물론이고 각 가정에도 배달되었 다. 각 가정으로 연결된 배수관은 납으로 만들어져, 마시는 물에는 항상 납이 녹아 있었다. 또한 로마 시대에는 납으로 만든 화로나 식기도 이용되고 있었다. 유명한 로마 유리잔도 있어 값싸고 쉽게 구입할 수 있었지만, 로마에서 유리는 병이나 음료용 컵으로만 주로 썼고 포도주나 시럽도 납 용기에 저장된 것이 많았다. 최근 미국에서도 도자기에 함유된 납이 건간에 해롭다고 하여 캘리포니아 주의 검찰당국이 세 계의 10대 도자기회사를 납규제법 위반으로 제소하여 화제가 되었다. 현재 생산되는 도자기는 제조과정에서 쓰이는 물감과 광택을 내기 위한 유약에 미량의 납이 들 어 있어, 그것이 녹아 나와 먹게 되면 위험하다고 한다. 대량의 납을 섭취했을 고대 로마인들은 무기력과 가벼운 정신장애를 일으키는 납중독에 걸려 있었을 것이며, 그것이 또한 로마인의 자유 방탕한 생활과 퇴폐를 불러와 로마의 쇠망을 앞당겼 을 것이다. 반란 진압용으로 위세를 떨치던 덤덤탄 납이 세계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경우로 구텐베르크가 발명한 활판인쇄술이 있다. 라인 강변 에 있는 마인츠 시의 금은세공사 구텐베르크는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 인쇄하는 연구에 착수했 다. 그는 여러 가지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어 시험해보다가 마침내 납에 주석을 조금 섞은 다음 안티몬을 섞은 합금이 단단하고 잉크의 친화력도 좋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삼원합금'이 라고 하며, 활자의 재료로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는 대단한 발명이었다. '땜납'으로 익히 알 수 있듯이, 납은 327.4도의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녹는 성질을 지녀 고형 물의 접착제로 사용되어왔다. 중세 유럽의 교회 창문을 장식했던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스는 많 은 유리 조각을 납으로 이어붙여 만들었다. 당시 유리 제조기술로는 큰 유리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커다란 교회 창은 유리를 이어 붙였다. 그리고 보기 흉한 접착선에는 색유리를 붙이고 아 름다운 그림을 그려 넣는 스테인드글라스가 탄생하였다. 한편 대포, 소총이 발명되면서 납은 탄환으로도 이용되었다. 미국 독립전쟁 때 식민지가 조직 했던 민병 미니트맨이 지붕의 연판(연판 지붕과 슬레이트를 납으로 붙인 지붕이 많았다)을 벗겨 내어 각자의 총에 맞게 총탄을 주조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미니트맨이란 보통 때는 일 하다가 유사시에는 1분만에 병사로 재빨리 탈바꿈하는 '1분간 병사'를 말한다. 납 탄환 가운데 영국이 1857년 세포이 반란을 진압할 때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 덤덤탄을 빼놓 을 수 없다. 덤덤탄은 탄알 머리부분에 구멍을 내어 인체에 명중되면 산산이 부서져 상처를 크게 입히도록 고안된 것으로, 인도의 덤덤공장에서 제조되었다. 납이 해로워 덤덤탄에 맞으면 거의 회복되지 않아 인도주의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1907년 제 2차 헤이그 평화회담에 서 덤덤탄의 사용을 금지했다. 그러나 식민지 민족운동의 진압에 애를 먹고 있던 영국과 미국은 이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덤덤탄뿐 아니라 볼 폭탄이라는 인체 살상용 폭탄을 대량으로 사용했 다. 볼 폭탄은 폭발하면서 수백만 개의 작은 납덩어리가 수백미터까지 날아가 인체에 무수하게 박히는 무시무시한 폭탄이다. 납은 전인류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19세기말에 실용화된 자동차가 지금처럼 대중적인 교통수단이 되기 시작한 것은 제 1차 세계대 전 후 미국에서였다. 미국은 세계대전 후의 전후공황을 극복하고 1923년경부터 호황국면으로 전 환하여 자동차, 화학, 전기공업 등 새로운 산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날로 발전하면서 산업의 합리 화도 동시에 이뤄졌다. 헨리 포드는 '포드 시스템'이라는 작업방식을 고안해내어 자동차의 대량 생산에 성공했다. 가격도 매우 낮아져, 자동차는 서민들의 교통수단이 되었다. 미국이 호황으로 전환한 1923년, 가솔린의 옥탄가를 높임으로써 자동차의 속도를 높이는 시험이 성공해 가솔린에 유기연이 첨가되었다. 이 유연 가솔린은 얼마 전까지도 널리 쓰여, 자동차의 보급과 함께 대량의 납을 대기중에 방출하여왔다. 자동차의 배기가스에 포함되어 있는 납은 대기와 땅 속, 바닷속으로 흘러 들어가 축적되었다. 어패류, 특히 홍합 등 조개 류의 납 농도가 계속 상승하자, 미국 캘리포니아 주 중부의 태평양 연안에는 "위험한 조개는 먹지 마시오"라는 경고판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스웨덴 스톡홀름 시의 중심에 있는 공원에서 말라죽은 수령 150년 된 꾸지나무에 해마다 쌓인 납의 양이 측정되었다. 19세기에는 1-2피피엠이었던 것이 1960년경부터 급상승하기 시작하여 1975년 이후에는 20피피엠 이 넘었다. 그린랜드 빙설층의 납도 1950년대부터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지금도 화산 폭발 등으로 연평균 6,000툔이 넘는 납이 대기중에 방출되고 있는데, 사람들은 해 마다 200만 톤의 납을 계속해서 내뿜어대고 있는 셈이다. 성인들에 비해 훨씬 일찍부터 납을 흡수하기 시작한 아이들 중에는 가벼운 납중독 증세를 일으 켜 치료를 요하는 경우가 미국에만도 수십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로마를 멸망시킨 납이 이제는 전인류를, 아니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위협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통조림과 말레이 반도의 식민지화 올림픽 메달에도 쓰이는 금, 은, 구리는 지구 곳곳에 분포되어 있고 지표면에 드러난 광산에서 비교적 쉽사리 캐낼 수 있기 때문에, 인류가 일찍부터 이용한 금속이다. 그 가운데 구리는 석기 의 대용물로 사용하려고 했지만, 너무 유연하여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대의 대장간에서 는 갖가지 광석을 섞어보는 등 시험하다가 주석을 섞으면 단단한 금속, 즉 청동이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페니키아인은 지중해의 각지에서 주석 광산을 발견하여 이를 교역하고 있었는데, 영국의 콘월 지방에서 품질이 좋은 주석 광산이 개발되면서 영국은 오랫동안 유럽의 주석 공급지가 되었다. 그러나 곧 철기가 보급되면서 청동은 미술품 등 극히 일부분만 쓰여 주석의 수요도 격감하였다. 그러나 주석은 19세기 초에 영국에서 통조림이 발명되어 실용화되면서 다시 각광을 받게 된다. 1810년 영국의 피터 듀란트는 즐겨 마시던 홍차를 넣어두는 차통에서 힌트를 얻어 세계 최초로 통조림을 만들었다. 이 차통은 일본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것이다. 유럽에서는 17세기 초에 차를 마시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네덜란드인은 일본과 무역하면서 일본인들이 즐기는 차와 차 문화를 접하고 이것을 본국에 전했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네덜란드에서 프랑스, 독일, 영국으로 전해졌 다. 17세기의 영국에서는 차를 '티'(tea)라고 하지 않고 '차'(cha)라고 표기했다. 곧 통조림의 제조법도 발달하여 대량생산되면서, 통을 만드는 양철의 수요도 늘어났다. 양철을 영어로는 틴 플레이트(tin plate)라고 하는데, 틴은 주석을 말한다. '세계의 공장' 영국은 발명 도 했지만 통조림 산업에서도 세계 제일의 생산량을 과시했다. 그러나 머지 않아 영국의 주석 광 산은 모두 바닥을 보였다. 영국은 깡통을 제조하는 데 필요한 주석을 다른 나라에서 찾았다. 말레이 반도는 옛날부터 주석의 산지로 알려졌기 때문에, 영국의 자본은 이곳에 진출했다. 그 때까지 말레이 반도의 주석 광상은 네덜란드 통치 아래 화교 중소상인들이 개발하고 있었다. 1924년 영국과 네덜란드의 협정으로 말레이 반도가 영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영국 자본은 차츰 화 교 자본의 주석 광산을 흡수, 합병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주석을 노려, 당시 말레이 반도에 할거하고 있던 토호국들에 압력을 넣으면서 토호국들 사이의 분쟁을 이용하여 점차 토호국을 병합하고 식민지 지배를 확립하였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다이아몬드 왕 세실 로즈 다이아몬드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 가운데 경도 10으로 가장 단단하며, 가장 값비싼 보석이 다. 다이아몬드(Diamond)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이겨내기 어렵다'는 아다마스(adamas)에서 왔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는 지금도 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보석이다. 왜냐하면 다른 물질의 생성은 어느 정도 해명되었지만, 다이아몬드만은 어떻게 생성되었는지 밝혀지지 않아 여러 가지 설이 분 분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미국, 영국의 과학자와 일본에서 '지구심층 이단계설'이라는 새로운 학설을 제기하여 관심을 모으고 있기에 소개한다. 다이아몬드에는 극소량의 헬륨, 네온, 아르곤이 들어 있으며, 그 함유수치는 어떤 암석보다도 높다고 한다. 지구의 생성에는 운석이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생각되는데, 다이아몬드에 함유된 희가스가 운석보다도 많다. 그렇다면 다이아몬드는 지구 생성기의 희가스를 담고 있는 것으로 생 각할 수 있다. 희가스란 아르곤, 라돈, 헬륨, 네온, 크립톤, 크세논의 여섯 가지 기체 원소를 말 하며, 이들은 어떤 기체와도 화합하지 않는 비활성 기체이다. 또한 다이아몬드에는 정육면체의 중심에 팔면체의 핵이 있음이 밝혀져 "핵과 바깥쪽의 결정은 각각 다른 장소에서 생성되었다"는 설을 미국과 영국의 학자들이 1987년에 발표한 바 있다. 지구심층 이단계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즉 지구의 지각 하부를 구성하는 층인 맨틀이 부 분 용융(고체가 열에 녹아 액체가 되는 것)하면 맨틀을 구성하는 광물의 결정에서 아르곤과 같은 희가스가 나온다. 정육면체의 다이아몬드 바깥쪽 부분의 결정이 커가면서 농축된 희가스 헬륨, 네온, 아르곤을 흡수한다. 따라서 보통의 팔면체 다이아몬드는 하부 맨틀에서 성장했고, 바깥쪽의 정육면체는 맨틀이 부 분적으로 용해한 상부 맨틀에서 성장했다고 추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지구의 심층부에서 만들어진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지구 표면까지 올라오게 되었을까? 이것에 대해서도 정설은 없지만, 지구의 핵에서 발생하는 '핫 플륨'이라는 뜨거운 물질에 섞여 올라왔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이렇게 지구 표면으로 올라와 굳은 암석이 청색의 단단한 암석, 즉 킴벌라이트이며, 현재 지구 상에서 산출되는 다이아몬드는 모두 이 암석이나 아니면 그것이 수백 년 동안 비바람에 깎이고 강변이나 해안으로 떠내려와 퇴적된 표사 광상에서 산출된다는 것이다. 킴벌라이트란 남아프리카 의 킴벌리에서 처음 발견되어 붙여진 이름이다. 독수리가 날라온 다이아몬드 다이아몬드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구약성서에 있다. 가장 오래된 것은 '출애굽기'에 나오는데, '예레미야서' 제 17장에는 "유다의 죄는 철필, 금강석의 뾰족한 끝으로 그들 마음의 비석과 제단 의 귀퉁이에 조각한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다이아몬드(금강석)가 아주 단단한 물질로 제단 에 문자를 새겨넣는 데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밖의 기록은 다이아몬드가 장식용 보석으로 쓰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로마의 위대한 박물학자 플리니우스는 자신의 37권에 달하는 '박물기'에서 다이아몬드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다. 다이아몬드는 동양에 단 하나뿐이며, 인간이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깊은 골짜기의 낮은 곳에서만 나온다. 원주민들도 그 골짜기의 깊은 곳까지 내려갈 수 없기 때문에, 산 위에서 그 골 짜기로 썩은 고깃덩어리를 떨어뜨린다. 그러면 고깃덩어리에 다이아몬드 조각이 달라붙는다. 그 리고 이 고깃덩어리를 향해 독수리가 날아간다. 독수리가 고깃덩어리를 둥지까지 날라오면, 그것 에 달라붙은 다이아몬드도 산 위까지 운반되어온다. 이리하여 독수리 둥지 주변에는 다이아몬드 가 흩어져 있고, 원주민들은 산 정상까지 올라가 둥지 주변에 흩어져 있는 다이아몬드를 주워 모 은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야기일 것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신드바드의 모험'에 나오는 이 야기와 너무나도 똑같다. 이슬람 문학의 최대 걸작인 '아라비안 나이트'는 이란, 인도, 그리스, 로마 등에서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을 모아놓은 것임을 이 다이아몬드 이야기로도 실감할 수 잇 다. 로마에서는 다이아몬드는 인도에서, 비단은 중국에서 수입하여 상류계급 귀부인들이 몸치장 을 하였다. 앞에서 말한 '동양에 단 하나뿐인 곳'이란 인도다. 18세기에 브라질에서 다이아몬드 광상이 발 견될 때까지 수천년간 인도는 유일한 다이아몬드 산지이며 수출국이었다. 무굴 제국 시대에 인도 를 방문한 프랑스의 보석수집가 다 베르니에는, 벵골 만으로 흐르는 크리스티나 강 유역 골콘다 지방의 코로 광산에는 6만 명도 넘는 노동자가 다이아몬드를 캐내고 있었다고 한다. 인도는 지금도 많은 보석을 생산하며, 무굴 제국 시대의 왕궁이나 타지마할 등의 사원은 벽면 에까지 루비나 마노 등으로 꾸며져 있다. 인도의 다이아몬드 산지는 모두 표사 광상이며, 골콘다의 광산은 커다란 다이아몬드가 많이 나 기로 유명하다. 현재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소유하고 있는 '코이넬'이라는 거대한 다이아몬 드는 발견 당시 800캐럿도 넘어다고 한다. 무굴 제국을 창건했던 초대 황제 바부르는 정복한 인 도의 왕자에게서 이것을 손에 넣었다. 이 무렵부터 이 다이아몬드를 소유한 사람은 세계를 정복한다는 말이 생겨났다. 무굴 제국이 쇠퇴해가던 1739년 페르시아 왕이 침입하여 수도 델리를 점령하고 이 다이아몬드를 빼앗았다. 페 르시아 왕은 빛나는 이 다이아몬드를 보고 "오오, 너무도 흘륭한 빛의 산이여!"라고 부르짖었다. 이후로 이 다이아몬드는 '빛의 산'이라고 불리었다. 무굴 제국을 사실상 정복한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이 다이아몬드를 입수하여 1850년 영국의 빅 토리아 여왕에게 헌상했다. 그리고 전설대로 빅토리아 여왕은 대영제국의 왕으로서 세계에 군림 했다. 부적에서 왕족의 전유물로 중세 유럽은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이민족의 침입과 봉건제후들간의 분재, 페스트 등 전염병이 되풀이되는 암흑의 시대였다. 이렇듯 어지러운 사회 분위기에서, 결코 부서지지 않는 다이아몬드 를 몸에 지니면 적이나 전염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 다이아몬드를 부적처럼 검이나 갑옷 등에 붙이고 다녔다. 그후 봉건제후가 몰락하고 왕권이 강화되면서, 다이아몬드는 귀족이나 왕후의 손에 모이기 시 작했다. 그리고 14세기 후반에 다이아몬드를 팔면체나 십이면체로 연마하는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이아몬드는 부적이 아닌 보석으로 취급되었다. 절대왕정의 강화와 봉건체후의 귀족화가 진행되면서 영국, 프랑스, 스페인 등에서 "보석은 왕 후와 귀족들만 착용할 수 있다"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루이 14세의 초상화를 보면, 다이아몬드를 비롯한 보석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 17세기말 베네치아의 보석상 페르지는 다이아몬드를 58면체로 깎으면 무지개 빛깔이 오묘하고 아름다운 광채를 내뿜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것이 브릴리언트 컷으로 귀부인들은 다투어 이렇 게 깎은 다이아몬드를 몸에 달게 되었다. 나중에는 98면체까지 나타났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목걸이 사건 프랑스 혁명이 시작된 1789년 10월, 굶주림에 허덕이던 파리의 부녀자들이 빵을 요구하면서 루 이 16세가 살고 있는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갔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가 "빵이 없으면 고 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국민의 생활이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 고 오로지 화장이나 머리 모양, 장신구 등에만 몰두하여 사교로 나날을 보내던 그녀는 많은 다이 아몬드로 몸치장을 했다. 그녀의 평판을 후락시킨 목걸이 사건이 있다. 루이 15세는 스물두 개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연결한 값비싼 목걸이를 보석상에 주문했는데, 그것이 완성되기 전에 죽고 말았다. 루이 16세나 앙투아네트는 이것을 주문한 적이 없으므로 목 걸이의 인수를 거부했다. 이때 사기꾼 마담 라모트가 등장해, 마리 앙투아네트가 그 목걸이를 갖 고 싶어한다고 거짓말하여 보석상에게서 목걸이를 받은 뒤 영국으로 도먕쳐 팔아먹고 말았다. 당 연히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 목걸이 값의 지불을 거부했는데, 이 사건은 보석에 눈이 먼 왕비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심어주어 나중에 그녀의 처형에도 나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남아프리카에서 한 보어인 소년이 오렌지 강 연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다운 돌을 발견했 다. 이 돌을 얻은 행상인이 감정을 의뢰해보니 21캐럿이나 되는 다이아몬드였다. 1866년의 일로, 이 소문이 삽시간에 퍼져 수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오렌지 강 유역으로 몰려들었다. 이러한 다이아몬드 러시 속에서 많은 다이아몬드 광맥이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특히 킴벌리 광 산에서는 청색의 단단한 킴벌라이트 속에서 대량의 다이아몬드가 나와, 수많은 투기꾼들이 달려 들었다. 그들은 다이아몬드를 찾아 땅을 깊이 파헤치고 단단한 암석에 구멍을 팠다. 그리하여 1914년에 광산이 폐쇄될 때까지 약 반세기 동안 2,000톤의 흙이 파헤쳐져 지금이 500미터, 깊이 365미터나 되는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지금은 구멍 안에 지하수가 괴어 마치 호수 같다. 이 구멍은 "사람들이 파낸 세계 최대의 구멍"이라고 일컬어지며, 인간의 무서운 욕망을 상징한다. 1870년 결핵에 걸린 17세의 세실 로즈가 형을 찾아 남아프리카에 왔다. 그는 드비어스라는 보 어인의 다이아몬드 광구에서 일했다. 다이아몬드 찾기에 지친 로즈는 지하수 때문에 고민하고 있 던 광산소유자에게 증기 펌프를 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이 생각이 잘 맞아떨어져 큰 이익을 보았다. 로즈는 그 돈으로 다이아몬드 광구를 사들여 10년만에 킴벌리 초대의 다이아몬드 광산 주인이 되었다. 로즈는 1880년 런던의 유태인 재벌 로스차일드의 융자를 얻어 드비어스 광업사를 설립했다. 그 리고 이 재력을 배경으로 그는 노골적인 침략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영유지에 자신의 이름을 붙여 로디지아라고 불렀다. '아프리카의 나폴레옹'이라고도 불린 그는 49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평 생 독신으로 살았던 로즈는 전재산을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에 기증하였다.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이나 금광산은 주고 영국계 자본이 장악하고 있다. 보어 전쟁에 서 패배한 보어인은 영국인과 함께 원주민 흑인을 가혹하게 착취해 풍족한 생활을 유지하려고 악 명 높은 인종차별 정책을 폈다. 가격을 높이려고 조작해낸 다이아몬드 신화 세실 로즈가 설립한 드비어스 사는 현재 세계 다이아몬드의 30%를 생산하고 있다. 1929년에 드 비어스 사의 사장이 된 독일계 오펜하이머는 로스차일드 재벌의 지원을 맏아 남아프리카뿐만 아 니라 세계의 금, 비철금속, 우라늄, 귀금속 생산을 지배하는 거대한 다국적기업 오펜하이머 재벌 을 설립했다. 오펜하이너 재벌은 런던의 '다이아몬드 신디게이트'를 통하여 세계 다이아몬드의 80-90%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오펜하이머 재벌은 먼저 미국에서 젊은이들에게 '결혼기념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한다'는 사고방식을 심기 위하여 1930년부터 대대적인 광고를 하여 성공했다. 다음에 이 재벌은 1960년대 의 일본 젊은이들에게 똑같은 광고작전을 펼쳤다. 세계적인 광고회사 J.올더 돕슨 사가 맡은 이 광고는 물론 크게 성공해, 결혼 기념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한 젊은이가 5%도 채 안 되던 것이 지금은 70%로 높아졌다. 이리하여 드비어스사, 즉 오펜하이머 재벌은 세계 다이아몬드의 높은 가격을 유지하여 커다란 이윤을 얻었다. 물론 가격은 그 물건의 희소가치, 생산비용 등에 좌우된다. 하지만 다이아몬드는 낮은 임금으로 장시간 일하는 아프리카 흑인들이 생산해 원가가 그리 높지 않으므로, 턱없이 비 싼 가격은 드비어스 사가 만들어낸 다이아몬드 신화에 현혹돼 다이아몬드를 구입하는 사람이 많 아진 데 기인할 것이다. 제 3장 소금은 인도 민중운동의 발단이었다 미개한 지역 사람들이 만들어낸 씨없는 바나나 농경문화의 기원지는 밀과 보리를 중심으로한 지중해, 바나나와 타로토란 등을 중심으로 한 동 남아시아, 고무와 호리병박 등을 생산하는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 옥수수와 감자를 중심으로 한 신대륙의 네 곳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들은 낟알 하나에서 삼사백 개의 낟알을 만들며, 많은 양을 보존, 비축할 수 있는 곡물류 를 생산하면서 오리엔트 고대문명을 쌓아올린 지중해 농경문화는 중시하고 다른 것들은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바나나 하나만 보더라도, 그것에는 오랜 세월 동안 인간의 지혜와 노력이 담겨왔다.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바나나의 품종 개량 바나나의 품종 개량은 모든 과일 가운데 가장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열대에서도 1년 내내 수확할 수 있고 씨 없는 과일로 말하면 포도나 귤보다도, 더구나 사과나 복숭아와는 비교할 수 없는 큰 발달이었다. 바나나에서 단위결과성이라는 유전적 돌연변이체를 찾아내어 그것을 토대로 삼배체를 주력으로 하는 씨 없는 과일을 만들었다. 바나나만큼 배수성을 훌륭하게 이용한 과일은 없다. 그 개량은 오늘날 민족명조차 알 수 없는 미개발 지역 사람들이 이루어낸 성과였다. 우리는 바나나를 중요한 과일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렇지만 바나나는 가장 많이 생산되며, 껍질을 벗겨 그대로 먹기도 하지만 삶거나 굽거나 찌거나 기름에 튀겨 먹기도 하고, 떡처럼 만들 기도 하고, 가루로 만들거나, 술로도 담그는 등 다양하게 조리해서 먹을 수 있다. 바나나는 말레이 반도가 중심이라고 생각되는 동남아시아에서 서인도와 아프리카로, 동쪽으로 는 태평양 제도에서 중남미로 전파되었다. 바나나는 산스크리트어으 바라나 부샤(varana busha)에서 이름이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는 인 도와 동남아시아가 고대 인도 문화권에 속했고 바나나의 원산지가 이 주변인 것을 반영하고 있 다. 영양이 풍부하고 소화가 잘 되는 바나나가 이 지역 사람들의 식생활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바나나 회사와 과테말라의 민중운동 바나나는 중앙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에서 재배되어, 차츰 미국이나 유럽으로 전해졌다. 매사추 세츠의 어선 선장이었던 베이커는 1871년 자메이카에서 보스턴으로 바나나를 싣고 와 큰돈을 벌 었다. 여기에 맛을 들인 베이커는 1885년 보스턴의 과일상인 플레스톤과 함께 보스턴 과일회사를 설립하고 대량의 바나나를 미국에서 팔아 거액을 벌어들였다. 보스턴 과일회사는 1889년 중앙아 메리카의 철도왕 오스가 경영하는 열대무역수송회사를 병합하여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를 창설했 다.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는 바나나와 철도에서 쌓은 경험을 살려 미국과 중앙아메리카의 무역회사 와 바나나 농장과 항구를 연결하는 철도를 차례차례 매수하여, 1910년경에는 중앙아메리카의 '푸 른 제국' 또는 '바나나 제국'이라고도 불리는 거대한 독점 바나나 회사로 성장했다. 이 회사는 코스타리카 바나나의 99%, 파나마의 93%, 과테말라의 75%를 지배하고, 코스타리카의 모든 철도, 주요 항구 등을 지배하고 있다.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는 과테말라의 거의 모든 바나나농장, 철도, 항구를 지배하고 있고, 이 나라의 바나나 수출을 독점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력, 수도, 경찰, 학교, 병원도 사실상 지배하 고 있다. 과테말라 민중은 이 회사와 친미 정권에 맞서서 저항운동을 전개하여 1950년에 민족주의적인 알벤스 정권을 수립했다. 알벤스 정권은 1952년 70만 에이커의 국유지와 유나이티드 후르츠사가 소유한 유휴지 등 50만 에이커의 토지를 사들여 약 6만 명의 농민들에게 분배하기 시작했다. 이 에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는 돈을 투자하여 반혁명군을 지원했다. 1954년 반혁명군은 인접한 온두 라스, 니카라과에서 미국인이 조종하는 폭격기의 지원을 받아 과테말라에 침입하여 알벤스 정권 을 무너뜨렸다. 일개 회사가 한 나라를 무너뜨릴 정도의 힘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1963년 일본 정부는 바나나의 수입제한을 폐지하고 자유화했다. 일본 시장이 유망하다고 확신 한 유나이티드 후르츠 사와 캐슬 앤 쿨츠 사가 1964년 필리핀의 민다나오에 진출했다. 이어 미국 의 델몬트 사와 일본의 스토모 상사가 진출하여, 이 네 회사가 현재 필리핀의 수출용 바나나의 90%를 독점하고 있다. 이들 외국 자본은 대지주에게서 토지를 사들인 다음 불도저를 동원해 이 땅에서 일했던 소작농 이나 가끔씩 일하던 자작농들을 내쫓았다. 그들이 받은 것은 담배 한 갑 정도의 보상금뿐이라고 한다. 농민들은 다바오 시 등의 슬럼가로 흘러들든가 깊은 정글 속으로 들어갔는데, 외국 자본의 바나나 농장에서는 일하지 않았다. 바나나 농장에서는 노동력이 남아돌아 저임금인데다가 열악한 숙소의 생활도 감내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은 공중에서 뿌리는 농약을 뒤집어쓰는 바람에 병들어가고, 바나나를 약물로 씻는 여자노동자들도 마찬가지로 고통받고 있다. 값싼 바나나를 언제든지 먹을 수 있는 것은 필 리핀을 비롯한 바나나 생산국 노동자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사람들이 바나나에 물려 더 고급스런 열대산 과일을 찾고 있어, 바나나의 수요는 계 속 줄고 있다. 바나나 농장 노동자들은 이제는 실업 때문에도 위협받기 시작했다. 흑인노예와 함께 아메리카로 건너온 참깨 참깨는 '만능식품' 혹은 '먹는 환약'이라고 할 만큼 양질의 리놀산을 많이 함유하고 있고 단백 질, 미네랄, 비타민도 풍부하여 영양가가 높은 건강식품이다. '아라비안 나이트'의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 이야기에서 도둑들이 보물을 감추어둔 동굴 앞 에서 '열려라 참깨'라고 주문을 외는데, 이것은 참깨가 익으면 깍지가 열려 깨알이 쏟아지는 모 습에서 나왔으리라. 세계 4대 문명 발상지의 하나인 인더스 문명은 기원전 2500년경에 번영하였다. 모헨조다로와 하라파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수많은 참깨 종자가 출토되었다. 정연하게 뻗어있는 모헨조다로의 도로변에 가로 등을 설치한 유적도 발견되고 있다. 어쩌면 참기름으로 불을 밝혔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고대 문명기부터 있었기 때문에 근래까지 인도가 참깨의 원산지라고 생각해왔다. 그러 나 참깨의 원산지는 열대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대이다. 사바나 식생지대는 야생 참깨의 종류가 많고 그 변종도 풍부하다. 참깨는 여기에서 내륙 교역로나 해상 교역로를 통해 전세계로 퍼진 것 이다. 참깨는 인더스 강 유역에서 서역 지방을 통하여 중국으로 전해졌으며 이것이 다시 조선을 거쳐 일본에 전해졌다. 북송의 심괄이 저술한 '몽계필담'에 중국 참깨는 한나라의 장건이 서역에 파견 되었을 때 대원국(중앙아시아의 페르가나 지방)에서 가지고 들어왔다고 쓰여 있어, 오랫동안 정 설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근래 저장성의 우싱 전산양 유적(기원전 3000년경)에서 탄화한 검은 참깨가 많이 출토 되었고 또한 '사기'에도 장건이 참깨를 가지고 들어왔다는 기록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장건설은 오류임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이 루트는 고대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를 잇는 교역로였으며, 중국에서는 비단이 건 너갔고 서방에서는 불교문화와 함께 많은 물산이 중국으로 들어온 길이다. 중국에서 호자가 붙은 것은 대부분 서역 물산이거나 서역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온 것이다. 음식물만 들어도 호두, 오이 (호과), 후추(호초)가 있다. '닫혀라 참깨'와 새서미 스트리트 참깨가 아프리카에서 인도,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해진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인데, 아메리카 대륙에는 16세기에 전해졌다. 육지가 서로 연결된 유라시아 대륙의 조건 때문에 인도양, 동남아 시아 지역은 옛날부터 해외교역이 활발했던 데 반해, 아프리카와 신대륙, 신대륙과 유럽 사이에 는 대항해 시대까지 이렇다 할 교역로가 없었다. 대항해와 이것이 낳은 노예무역이 최초의 본격 적인 대서양 교역이었다. 이리하여 참깨는 아프리카의 노예해안 같은 곳에서 노예와 함께 먼저 카리브 해 지역으로 건너갔으며, 거기에서 중남미로 전해졌다. 이어 이 노예무역으로 아프리카에서 신대륙으로 건너간 식물로는 수수, 수박이 있으면, 신대륙 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간 것으로는 옥수수, 사탕수수, 땅콩이 있다. 미국에는 17세기 후반 남부의 면화와 연초 플랜테이션 대농장으로 끌려간 아프리카 흑인노예를 통해서 참깨가 전해졌다. 그러나 미국에서는 참깨와 면화의 수확기가 일치해졌다. 그러나 미국에 서는 참깨와 면화의 수확기가 일치해, 수확시기를 놓친 참깨 깍지가 저절로 터져 깨가 땅에 쏟아 져도 노동자들은 면화를 수확하느라 참깨에는 손도 댈수 없었다. 그리하여 참깨는 널리 재배되지 못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인 1946년에 다 익었는데도 '깍지가 터지지 않는 참깨'가 한 포기 발견되었 다. 이로부터 품종개량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닫혀라 참깨'라는 우수한 품종을 만들어냈다. 이 참깨에 눈을 돌린 이들이 텍사스 주 댈러스에서 남쪽으로 100마일쯤 떨어진 팰리스 시의 제 임스와 로이 앤더슨 형제였다. 1952년 앤더슨 형제는 '참깨 산업회사'를 창설하고 참깨 칩, 참깨 크래커, 마가린, 참깨를 넣은 햄버거 등을 만들어 팔아 성공을 거뒀다. 형제는 참깨의 대량생산 을 위해 팰리스 시 외곽에 대농장과 노동자 주거지를 만들고 흑인, 멕시코인, 푸에르토리코인들 을 불러모았으며, 이 주거지의 중심가는 '새서미 스트리트'라고 불렀다. 앤더슨 형제는 참깨농장 노동자 자녀들의 교육에도 관심을 쏟았다. 형제는 학교를 세워, 흑인, 멕시코인, 푸에르토리코인을 차별하지 않고 교육했다. 그 성과로 여기에서는 어떤 인종차별도 없 었다고 한다. 1969년 미국의 한 텔레비전 방송사가 이 형제들의 실천을 봉제 인형을 이용한 유아교육 프로그 램으로 제작, 방영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아일랜드인은 감자만 먹고 일한다 인류가 재배한 식물 가운데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온 우수한 것들로는 옥수수, 호박, 토마토, 고추, 땅콩, 파인애플, 초콜릿, 코코아, 고구마, 감자가 있다. 특히 감자는 저온에서 잘 자라고 짧은 기간 안에 많이 수확할 수 있어, 유럽에 들어오자마자 빠른 속도로 보급되었으며, 대항해와 함께 전세계로 널리 퍼졌다. 감자에는 탄수화물뿐 아니라 비타민C도 많아, 오랜 항해에도 감자를 많이 먹으면 괴혈병에 걸 리지 않는다. 비타민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당시 항해자들은 오랜 경험으로 이것을 알았던 것 이다. 중세 기근의 구세주였던 감자 중세 유럽의 역사는 '굶주림의 역사'라고도 한다. 영국의 기록에 의하면, 11-15세기에는 세기 마다 평균 14년 동안 내내 기근이 덮쳤으며, 한 번 기근이 오면 몇 년씩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 래서 이 기근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유럽 문명을 이룩했다고도 한다. 이 기근 속에서 구세주는 감 자였다. 한랭한 곳에서도 빨리 자라고 어린 감자도 먹을 수 있어서 아주 좋은 구황식품이었다. 감자는 점차 유럽인의 주식이 되었으며, 정치적인 압력에 의해 강제로 감자를 주식으로 만든 나라도 있었다. 청교도 혁명을 수행한 크롬웰은 곧바로 아일랜드를 침략했다. 그리고 1652년 아 일랜드 식민법을 제정하여 토지를 수탈하기 시작했다. 아일랜드 전체 경지의 3분의 2가 영국인의 손에 들어갔으며, 몰락한 아일랜드인은 영국인 지주 밑에서 소작인으로 일하든가 아메리카 대륙 이나 영국으로 이주해갔다. 소작인의 생활은 아주 비참했으며, '백인노예'라고 불릴 정도였다. 아일랜드 인구는 1641년에 150만 명이던 것이 1652년에는 85만 명으로 절반이나 줄었다. 영국은 아일랜드를 식량공급지로 삼았다. 아일랜드에서는 밀을 거의 수출하였기 때문에, 17세기 초에는 감자가 아일랜드인의 주식 이 되었다. 1845년부터 아일랜드에서는 감자가 병충해를 입어 대기근이 발생하였다. 해마다 수천 명이 굶 어 죽었으며, 이때 160만 명 이상이 해외로 이주했다(1845-1847년 통계). 암살된 케네디 미국 대 통령의 할아버지도 이때 아메리카로 건너갔다고 한다. 이처럼 대 기근으로 인한 참사가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 다른 한편에서는 매년 50만 톤의 밀을 영국으로 보내고 있었다. 이것은 아일랜드의 전체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이었다. 영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은 낮은 임금으로 일하였다. 영국인은 아일랜드 노동자를 "아일랜 드 사람은 감자만 먹고 일한다"고 깔보았지만, 이들은 '세계의 공장'이라 불리던 산업혁명 이후 의 영국 경제를 음지에서 떠받치고 있었던 것이다. 감자전쟁 식량을 둘러싸고 일어난 전쟁도 많았지만, 식량 때문에 끝난 전쟁도 있다. 1756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싸운 7년전쟁은 '감자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여러 해 동안 냉해가 덥쳐 흉년으로 고통받고 있던 프로이센에서는 프리드리히 대왕이 강제로 농가에 감자를 심도록하고, 솔선하여 감자를 먹고 장려하여 프로이센의 부흥에 노력하였다. 7년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은 식량부족과 오스트리아 군의 우세 때문에 결전을 피하고 지구 전으로 들어갔다. 전세는 프로이센 군에게 불리하였다. 대왕은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으나, 러시아의 정변을 계기로 '기적의 역전'을 이루며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실 제로는 대치하고 있던 오스트리아 군이 바이에른 지방의 감자를 몽땅 먹어버려 더 이상 버틸 수 가 없었던 사정이 있었다. 7년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싸운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의 딸 마리 앙투아네 트는 프랑스의 루이 16세에게 시집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화려한 생활을 했다. 프랑스 궁전에서는 감자를 '빈민을 위한 빵'이라고 하여 먹지 않았다고 한다. 그 대신 연보라색의 감자꽃을 가슴이 나 머리에 달고 연회나 무도회에 나갔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파리의 부녀자들이 베르사유 궁전으로 몰려가 빵을 달라고 호소하자 마 리 앙투아네트는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혹독 한 앙시앵 레짐(구제도) 아래서 왕실과 일반 민중이 얼마나 유리되어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빈민의 빵이라 천대받은 감자 고흐의 초기 걸작 중에 '감자를 먹는 사람들'이라는 그림이 있다. 고흐는 이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남포등 아래서 감자를 먹고 있는 사람들이 피로 물든 이 똑같은 손으로 흙을 파는 것이다. 그 들이 자기 음식을 얼마나 성실하게 먹고 있는가를 좀더 명확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다." 고흐의 그림처럼, 감자만을 먹는 저녁식사는 19세기까지 유럽 서민의 흔한 광경이었다. 지금은 감자만 먹지는 않지만, 아직도 독일, 폴란드, 러시아에서는 감자가 검은빵과 함께 주식이다. 이렇게 인류의 생존에 크게 기여해온 감자는 사랑을 받았으며, 프랑스에서는 감자를 봄 드 테 르(땅 속의 사과)라는 예쁜 이름으로 부르고 있다. 감자의 품종 개량도 계속되었다. 메이 퀸이라 는 품종이 있는데, 메이는 번식과 성장의 여신 마이아(Maia)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했다. 즉 마이 아의 달(Month of Maia)이라는 의미이다. 빨리 자라고 많이 수확해 5월에는 주렁주렁 매달리는 감자에 붙여진 이름이다. 하얀 감자가 아름다운 여인의 피부를 연상시킨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15세기 프랑스에서 광대한 영지를 가진 영주들의 화려한 식단을 살펴보자. 사슴이나 멧돼지 통구이, 소고기, 양고기, 돼지고기에 빵, 치즈, 고기파이, 야채, 과일, 꿀, 포도주, 맥주 등등. 이렇게 푸짐한 고기요리를 차리려면 동물이 살찌는 가을에 잡아 다음해 봄까 지 보존해야 했다. 이 저장육은 후추와 향료를 듬뿍 쓰지 않으면 코도 혀도 견딜 수가 없었다. 이것이 동양의 향신료를 얻으려는 무역을 성행하게 했으며, 십자군 원정에서 대항해에 이르는 역 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이었다. 한편 영주들 밎에서 일하던 농노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그들의 식단을 보자. 아침:빵과 한 잔의 맥주나 사과주(물을 탄 경우가 많았다) 점심:치즈와 빵, 양파 한두 개와 맥주 한 잔 저녁:걸쭉한 수프, 빵과 치즈, 때로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 이렇게 조촐한 식사도 평온무사할 때의 것이고, 기근이라도 닥치면 얼마나 참담하였는지는 족 히 상상할 수 있다. 유럽의 이러한 기근을 구제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이 대항해 시대에 신대륙 에서 가져온 먹을 거리들이었다. 유럽 사람들은 아스텍과 잉카 제국을 잔인하게 멸망시켰지만, 이곳에서 문명을 쌓아올린 인디 오가 오랜 세월 동안 길러온 것들은 유럽 사람들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멕시코에서 전해진 고구마 고구마는 멕시코, 콜롬비아 등 아메리카 대륙의 더운 지역이 원산지이며, 마야, 아스텍, 잉카 제국 사람들이 재배하고 품종도 개량했다. 유럽에는 콜럼버스가 네 번째 탐험 때 가지고 왔다고 한다. 대항해 시대의 파도를 타고 고구마는 각지로 전파되었다. 스페인 왕의 원조를 받아 세계일주에 나선 포르투갈인 마젤란은 1521년 필리핀의 세부 섬에 도 착하여 그곳 사람들과 싸우게 되었느데, 그 맞은편 섬의 수장 라프라프에게 패하여 목숨을 잃었 다. 필리핀이란 명칭은 1542년에 이곳 섬들을 원정했던 스페인 탐험가 빌라로보스가 왕자 펠리페 (펠리페 2세)의 이름을 붙여 라스 펠리피나스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 한편 라프라프는 필리핀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후 스페인의 레가스피가 1571년에 타갈로그 족의 수도 마이닐라(마닐라)를 탈취하여 이곳을 스페인 령 멕시코와 중국을 연결하는 교역의 근거지로 삼았다. 고구마는 멕시코와의 교역을 통하 여 필리핀에 전해졌다. 마닐라 시에는 중국인 거류지도 생겨 중국과의 교역도 활발하였다. 1594년 중국 푸젠 성의 지 지룡이라는 상인이 고구마를 마닐라 시에 있는 필리핀 최대의 섬 루손에서 베이징으로 가지고 갔 다. 요즘도 중국의 남부, 대만, 필리핀에서 고구마를 주식으로 하는 지역이 있다. 필리핀에서는 고 구마를 카모테라고 하며, "카모테로 살아가다"라는 말을 극빈생활을 뜻한다. 현재 세계의 고구마 재배면적은 아시아에서 70% 이상(이 가운데 중국이 60%), 아프리카에서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고구마 원산지인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약 1-2%를 점하여, 유럽이나 오세아니아에서는 거의 재배하지 않는다. 유럽은 위도가 높고 한랭하여 추위에 약한 고구마보다 는 감자가 더 잘 자란다. 현재 세계의 '고구마 지대'는 아시아, 아프리카이다. 어쨌든 고구마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는 만큼, 생산지는 대부분 세계의 극빈지대이며, 그곳의 주민들은 '고구마로 살아간다'고 할 만한 처지에 있다. 소금과 인도의 민중운동 소금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하다. 인체에는 약 0.7%의 소금 (염화나트륨)이 들어 있으며, 땀이나 오줌에 섞여 배출되기 때문에, 성인은 하루에 10-15그램의 소금을 섭취하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여기에 지구 생명의 탄생이라는 비밀을 푸는 열 쇠가 숨겨져 있다. 지구상의 생물은 사실 어머니인 바다에서 탄생했던 것이다.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에서도 내륙에서는 소금을 얻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이렇듯 육지에서 소 금 얻기가 만만찮은 일이었다면, 중국이나 아프리카, 아메리카와 같은 넓은 대륙에서는 어떻게 소금을 구했을까? 그러나 신은 이러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도 버리지 않았다. 대륙 곳곳에 암염이 땅속에 묻혀 있 어 사람들은 그것을 채굴하거나 광맥에 물을 집어넣고 소금물을 뽑아내는 기술을 일찍부터 터득 하고 있었다. 소금은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는 힘도 지녀, 옛날부터 소금을 청정의 상징으로 신성시해왔다. 소금이 음식물을 보존해준다는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소금의 수요가 증대하여, 암염, 염전이 있는 지역과 내륙, 산간을 잇는 소금의 교역로, 즉 소금길이 옛날부터 세계 각지에 만들어졌다. 화폐를 대신한 소금 귀중한 소금은 교역을 할 때 화폐로도 쓰였다. 고대 로마인의 주식은 거칠게 빻은 밀가루에 밀 기울이나 기장을 섞어 만든 빵이었다. 로마인은 이 빵에 소금을 조금 넣어 먹었다. 힘든 노동을 하면 소금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로마인은 소금을 아주 귀하게 여겼으며, 소금을 담아두는 그릇은 목숨을 지키는 것으로서 대대로 전해졌다. 일꾼이나 군인은 급료를 소금으로 받았다. 제정시대에 가서야 소금 대신에 화폐를 지불했다. 급료를 뜻하는 영어의 샐러리(salary)는 소금값을 의미하는 살라리움(라틴어로 salarium)에서 유 래했다.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 티베트에서는 소금을 화폐로 사용하고 있었다고 썼다. 소금은 인간에게 필수품이기 때문에, 옛날부터 지배자는 이것을 이용하여 민중을 통제하고 착 취해왔다. 한나라 무제는 소금, 철, 술 등을 나라에서 전매해 그 이익을 독점했다(술은 도중에 폐지되었다). 중국에서는 이후 명나라 말기까지 소금을 전매하였다. 나라의 값비싼 소금으로 고 통 받던 민중은 소금 밀매상인한테서 값싼 소금을 사서 먹었다. 당의 멸망을 재촉한 대규모 농민 반란인 황소의 난(875-884)의 지도자 황소와 왕선지는 소금 밀매상인이었다. 민중의 곤궁함을 절 실하게 느끼고 있던 황소의 무리들은 빈농과 유민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한때 장안을 점령하고 귀족과 관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인도를 식민지로 만든 영국은 1930년 제염 금지를 발표하고, 인도 사람들에게 영국제 소금을 사라고 강요했다. 이에 반대한 간디는 혼자서 해안까지 360킬로미터를 걸어가 소금을 만들기 위 한 행진을 시작했다. 이 행진에는 많은 민중들이 가세하였다. 그들은 단디 해안에 도착하여 가마 에 바닷물을 넣고 끓였다. 이 '소금행진'은 그때까지 침체되어 있던 인도의 민중운동을 부추겨 그 뒤 잇따른 대대적인 반영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1954년 3월 뉴욕의 그랑디 극장에서 하버드 비버만 감독의 영화 '땅의 소금'이 방영되어 커다 란 반향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1951년부터 15개월 동안이나 파업을 벌인 뉴욕 주의 아연광산 노 동자(대부분은 멕시코계 미국인이었다)의 임금인상 투쟁과 백인의 차별대우에 항의하는 투쟁을 그린 것이었다. 비버만 감독은 냉전시대에 미국을 휩쓴 빨갱이 사냥 매카시 선풍에 희생되어 투 옥된 10명의 영화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정부의 방해, 우익폭력단의 촬영장 습격 등으로 고 통을 당하면서도 이 영화를 제작하여 간신히 상영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 아카데미가 '1955년도의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했을 만큼 영화사에 남 을 걸작으로 손꼽힌다. 제목인 '땅의 소금'은 예수 그리스도가 유명한 '산상수훈'에서 정의와 진 리를 구하였다가 그것 때문에 박해받은 사람들을 이렇게 부른 데서 따온 것이다. '땅의 소금'이 란 사회의 맨 밑바닥에서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사람들과 사회에 빛을 비추는 사람들을 가리 킨다. 현재 소금은 식용, 식육저장용 이외에 공업용으로도 폭넓게 쓰이고 있다. 공업용으로는 염료, 합성고무, 비누, 화학약품 등의 화학공업용이나 피혁공업(가죽의 무두질), 요업(기와, 도기 등의 유약), 광업(은, 구리 등의 제련), 제강(철강의 담금질) 등에 널리 쓰인다. 특히 소다 공업의 각 종 제품은 화학공업의 기초원료이며, 소금을 전기분해하면 수산화나트륨과 염소가 만들어지고, 또한 소금에 암모니아와 탄산가스를 집어넣어 소다회나 유안(황산암모늄)비료를 만든다. 일상생 활에 없어서는 안 되는 화학섬유, 유리, 종이, 비누, 세제, 염화비닐, 기타 석유화확 제품이나 글루타민산 등의 조미료는 모두 소금을 원료로 한 소다염소로 만든 것들이다. 소금이 없다면, 인 간은 물론 세계경제도 유지될 수 없을 것이다. 해적과 손잡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설탕 설탕은 식물의 즙, 과일, 꽃, 씨, 뿌리, 게다가 잎에까지 들어 있다. 인류가 이들 식물에서 설 탕을 추출하는 기술을 몰랐을 때는 감미료로 꿀을 사용했다. 즉 꿀벌이 식물에서 설탕을 뽑아내 주었던 것이다. 6-7세기 무렵에야 인간은 설탕을 함유한 식물에서 설탕을 추출하게 된다. 감자당(사탕수수로 만든 설탕), 첨채당(사탕무로 만든 설탕), 야자당(야자로 만든 설탕), 단풍나무당, 옥수수당 등 이 있는데, 사탕수수나 사탕무(비트)로 만든 설탕이 가장 많이 생산되고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역 할을 해왔다. 알렉산더 대왕은 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킨 뒤, 카이마르 계곡을 넘어 인도 로 들어갔다. 알렉산더 군대의 한 병사가 인더스 강의 계곡에서 자라던 사탕수수를 인도인이 베 어 먹고 있는 것을 보고 사탕수수를 대왕에게 바쳤다. 대왕은 사탕수수를 먹어보고는 "꿀벌 없이 도 꿀을 얻을 수 있는 맛"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인도에서는 사탕수수로 설탕을 만들지는 않았다. 사탕수수의 원산지는 인도 동쪽의 벵골 지방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인도인은 6-7세기께 사탕수 수에서 짜낸 당즙을 끓여서 굳히는 데 성공하여, 그것을 지중해 여러 나라와 동만아시아, 중국에 팔았다. 그리고 이와 함께 사탕수수 재배법도 페르시아에서 아라비아, 북아프리카로 전해졌다. 설탕 생산에 열올린 콜럼버스 십자군 병사들은 사탕수수 재배법을 북아프리카에서 유럽, 특히 재배하기에 기후가 적합한 스 페인으로 전했다. 1492년 스페인 국왕의 지원을 받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도착했다. 그는 황금을 찾아 일본으로 가다가 도착한 지역을 인도의 일부라고 믿어 그곳을 서인도제도라고 이름 붙였다. 그곳에서 콜럼 버스는 향료, 금, 은을 찾아 돌아다녔지만 발견할 수 없었다. 콜럼버스는 다음해 17척이나 되는 배에 1,500명의 선원을 태운 대선단을 이끌고 두 번째 탐험을 떠났다. 에스파뇰라 섬(아이티)에 도착한 콜럼버스는 섬 전체를 정복하고, 원주민에게 사탕무와 면화를 공납하게 하는 한편 간신히 발견한 금광에서 강제부역을 시켰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원주민들을 얼마나 가혹하게 정복하고 지배했는가는 그가 에스파뇰라 섬에 머문 4년 동안 3백만-4백만 명으로 추정되는 섬 원주민의 3분의 2가 목숨을 잃은 사실로 잘 알 수 있다. 콜럼버스는 이때 5백 명의 인디오를 노예로 본국에 실어왔다. 콜럼버스는 이 두 번 째 항해 때 스페인에서 사탕수수 묘목을 가져와 에스파뇰라 섬에서 설탕 생산을 시작했다. 향료 도 금, 은도 기대만큼 찾지 못한 콜럼버스는 이후 노예무역과 설탕 생산으로 이윤을 올리는 데 광분하게 되었다. 따뜻한 기후와 풍부한 강우량으로 카리브 해는 사탕무가 잘 자라고 당시 유럽에서 설탕은 금, 은, 진주 못지않게 비쌌기 때문에, 에스파뇰라 섬의 설탕 생산은 날로 늘어나 16세기에는 200개 의 제당공장에서 매년 1,600톤이나 되는 설탕을 만들어냈다. 이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력은 어떻 게 확보했을까? 콜럼버스와 그후 스페인의 가혹한 정복과 지배로 인디오는 사실상 절멸해버렸기 때문에, 아프 리카에서 대량의 노예를 실어왔다. 유럽에서는 17세기경부터 홍차, 커피, 초콜릿이 유행하여 설 탕 수요도 함께 늘어났다. 그 때문에 설탕 생산지는 카리브 해 전역에 퍼졌으며, 하얀 화물인 설 탕과 검은 화물인 노예의 교역은 날로 확대되었다. 해적과 손잡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설탕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에 영국의 해적은 카리브 해역에 자주 출몰하여,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돌아가는 '은선대'를 습격했다. 유명한 프랜시스 드레이크 등의 해적은 엘리지베스 여왕의 지원 을 받고 있었다. 1588년 엘리지베스 여왕은 이들 해적을 중심으로 조직한 해군으로 스페인이 자 랑하는 무적함대를 쳐부수고 카리브 해와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스페인을 대신하여 영국이 카리브 해에서 설탕 생산과 노예무역에 적극 나서게 되었다. 홍차가 널리 유행하면서, 설탕은 영국의 최대 수입품이 되었다. 영국 농장주들은 자메이카 섬을 중심으로 한 설탕농장에서 매년 35%나 되는 이윤을 올리며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오늘날 영국의 귀족, 명문가 가운데 당시의 설탕농장주가 많다. 그들은 농장경영은 관리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런던 등의 넓은 저택에서 살았으며, 의원이 되어 '서인도제도파'라는 정치압력단체를 형성하여 정부와 의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총이나 화약, 술을 가득 실은 영국 배는 리버풀을 떠나 서아프리카로 가 수많은 흑인노예를 서 인도제도로 실어날랐다. 그리고 거기에서 설탕을 가득 싣고 리버풀로 돌아오는, 이른바 하얀 화 물과 검은 화물을 취급하는 삼각무역이 19세기 중엽까지 계속되었다. 영국 산업혁명의 자본은 이 렇게 얻어졌다. 1806년 나폴레옹은 영국을 경제적으로 괴롭히려고 베를린 칙령을 내려 대륙을 봉쇄했다. 이로 써 서인도제도에서 만든 감자당의 유럽 수입이 중단되고, 유럽 나라들은 설탕의 부족과 가격폭등 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때는 프로이센의 화학자가 1801년 사탕무에서 설탕을 추출하는 데 성공 해, 정부의 장려 아래 첨채당이 제조되고 있었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 정권이 붕괴한 뒤에도 수 입설탕에 높은 관세를 물려 자국의 첨채당을 보호했다. 품종도 개량되어 6% 정도였던 당분 함유 율이 1890년경에는 14%로 향상되었으며, 이로써 감자당과 겨룰 만해졌다. 유럽은 지금도 설탕의 주요 생산지로서,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에서 전세계 설탕의 3분의 1을 생산하고 있다. 쿠바 혁명 주도한 사탕수수 농장주의 아들 카스트로 1492년 콜럼버스는 첫 번째 항해에서 쿠바 섬에 다다랐을 때 "인류가 보아온 것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섬이다"라고 감탄했다. 그후 스페인은 쿠바를 멕시코 만의 탐험과 정복을 위한 전진기 지로 삼고, 원주민 인디오를 혹독하게 부려 먹었다. 그리하여 1570년에는 열몇 개의 인디오 빈촌 을 헤아릴 정도로 인디오들은 절멸하고 말았다. 현재의 쿠바인은 대부분이 스페인인과 아프리카 흑인이거나 양자의 혼혈이다. 16세기말부터 제당산업이, 17세기부터는 담배가 중요산업으로 발전 하여 아프리카 흑인이 노동력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세계의 설탕지대'라는 쿠바는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생산량의 4분의 3을 미국으로 수출하고 일상생활품의 태반을 미국에서 수입했다. 미국의 설탕자본가는 정부에 쿠바 간섭을 요구했다. 1898년 4월, 미국 전함 메인 호가 아바나 항구에서 폭발하여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이 사건을 스페인의 짓이라고 단정하고 전쟁을 선언했다. 당시 존 헤이 국무장관이 "멋진 소규모 전쟁"이었다고 한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은 가볍게 승리하여, 필리핀, 푸에르토리코, 괌 섬 을 영유하고 쿠바를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미국의 플래트 상원의원이 초안한 '플래트 수정법'이 쿠바헌법의 부속서가 되었다. 그 제 3조 에는 "쿠바 정부는 미국의 간섭권을 인정한다"고 되어 있다. 미국은 그후 이 조항에 따라 미국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내정간섭을 했다. 이리하여 쿠바는 사실상 미국의 식민 지가 되었다. 미국은 쿠바뿐만 아니라 중남미 모든 나라의 내정을 간섭했다. 세계공황으로 쿠바의 설탕값이 폭락하자 미국은 쿠바 설탕의 수입할당량을 줄여, 미국 자본의 거대공장은 살아남았지만, 쿠바인 이 경영하는 다수의 설탕공장은 파산하였다. 이리하여 쿠바 경제는 더욱더 미국에 종속되었다. 미국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려는 운동이 발전하는 가운데, 1959년 사탕수수 농장주의 아들인 카 스트로의 지도 아래 쿠바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정부는 토지개혁과 농업의 다각화, 외국 자본의 국유화 등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봉쇄 등으로 인해 지금도 설탕 중심의 산업구조는 바뀌지 못하고 있다. 아키노 전 대통령과 설탕 국제연합의 통계에 의하면, 세계의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 즉 10억인이 영양실조 상태에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의 기아는 잘 알려져 있지만, 필리핀 네그로스 섬의 주민이 만성적인 기아 로 고통받고 있는 사실은 잘 모른다. 네그로스 섬은 설탕섬이라고 하듯이 인구 210만 명 중 75% 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다. 그 농장은 소수의 대지주가 경영하고 있다. 1986년 필리핀 혁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민중운동이 일어나 독재자 마르코스가 추방되고, 암 살된 베니그노 아키노 의원의 부인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러나 아키노 대통령의 코판코 집안은 네그로스 섬에 6천 헥타르의 사탕수수 농장을 가지고 있는 대지주이다. 새 정권 아래서도 토지개 혁 등 근본적인 개혁은 실행되지 않았다. 이것은 아키노 대통령 자신이 대지주집안 출신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요사이 세계적으로 설탕을 꺼리는 경향과 생산량의 증대로 설탕의 국제 가격은 20여 년 동안 오르지 않고 있다. 이것은 설탕 소비국에게는 '물가의 우등생'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지만, 사탕 수수 농장 노동자들에게는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게다가 설탕산업은 계절산업이어서, 사탕수수 를 베는 계절인 서너 달 동안에만 일이 집중되고 나머지 기간에는 전혀 일이 없어 노동자들을 더 욱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 제 4 장 노벨상은 비누 제조에서 만들어졌다 파피루스는 종이가 아니다 종이는 주변에 흔하므로 새삼스레 따져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겠지만, 종이의 역사를 말할 때 는 먼저 정의를 내려야 한다. 사전은 "주로 식물성 섬유에 수산화나트륨이나 석탄을 첨가하여 펄 펄 끓인 다음 빻아 부드럽게 하고, 수지 또는 풀 등을 섞어 걸러 만든 얇은 물건"이라고 정의하 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식물섬유를 잘게 부숴 물 속에서 불려 풀어헤친 뒤 물을 따라내고 얇고 평평하게 얽히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영어의 페이퍼, 프랑스어로는 파피에의 어원이자, 고대 이집트에서 발명된 파피루스는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파피루스는 나일강에 자생하고 있는 갈대이다. 파피루스를 베어 줄기의 길이를 가지런히 하여 세로로 얇게 잘라 나란히 편 다음, 나일 강의 진흙물을 부어 무거운 돌로 눌렀다가 말리면 파피 루스 종이가 만들어진다. 이것은 섬유를 잘게 잘라 물 속에 푼 다음 걸러낸 것이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정의로는 종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고대 이집트에서 그리스, 로마로 전수되어, 이탈리아에서는 12세기경까지 사용 되었다. 아메리카 대륙의 마야 문명에서도 식물섬유를 두들겨 펴서 잇댄 아마테라고 하는 나무껍 질 천이 종이로 사용되었는데, 파피루스 종이와 같은 것이다. 유럽에 중국의 제지법이 전해지기 전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양피지는 염소, 양, 송아지 등의 가죽을 말려 매끄러운 돌로 문질러 광 택을 낸 것으로, 종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종이는 중국의 4대 발명품 중 하나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4대 발명품이란 제지법, 인쇄술, 화약, 나침반으로, 모두 세계의 문화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종이가 출현하기 전에 중국에서는 비단이나 죽간, 목간에 문자를 기록 했다. 죽간, 목간은 보통 너비 3센티미터, 길이 30센티미터 크기의 관편, 목편 줄기 하나에 글자 한 자씩 써서 끈으로 이어 묶은 다음 말아서 보존했다. 책을 일 책, 이 책 혹은 한 권, 두 권하 며 세는 것은 죽간, 목간 시대의 명칭이었다. 중국의 종이는 후한의 명제, 화제 시대의 관리였던 채륜이 발명했다고 한다. 남쪽 지방 송 왕 조의 범화가 쓴 '후한서'를 보도록 하자. 채륜의 자는 중계이며 구이양 사람이다. .....옛날부터 문서는 대체로 죽간을 엮거나 비단을 이용하였으며, 이것을 종이라고 한다. 비단은 귀하고 대나무는 무거워 모두 사람들이 쓰기에 편 리하지 않다. 그리하여 륜(채륜)은 연구햐여 나무껍질, 마두 내지 헝겊, 어망을 이용하여 종이를 만들었다. 원흥 원년(105년)에 이것을 황제에게 헌상하니, 황제는 그의 노고를 치하하고, 그후 많이 이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천하는 모두들 채후지라고 불렀다. 여기에 자세하게 종이제조법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전한시대에 이미 마 등의 식물섬유을 잘 게 잘라 물에 녹였다가 걸러서 물건을 포장하는 종이를 만들었기 때문에, 채륜도 종이를 개량해 서화용 종이로 만들었으리라 생각된다. 이 중국의 제지법이 한반도를 거쳐 5-6세기경에 일본으로 전해졌다. 일본인은 여기에 독특한 '흘려서 거르는' 공법을 가미하여 아름답고 튼튼한 화지를 만들었으며, 메이지 때 서양식 제지법 이 들어오기 전까지 널리 사용하였다. 제지법이 서방으로 전해지게 된 계기는 751년 이슬람 군과 당나라군이 치른 탈라스 강 전투이 다. 당 현종 시대, 서역에 석국(타슈켄트 지방)이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정치정세에 따라 어떤 때 는 당나라에 조공을 바쳤다가 어떤 때는 사라센 국에 조공을 바쳤다. 그런데 현종의 천보 9년 (750년)에 고선지 장군이 석국을 토벌하고 몹시 잔학한 행위를 하였다. 그러자 석국은 사라센 국 에 원군을 청하고 복수를 노렸다.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린 신흥 아바스 왕가의 심복 압 마슬림 은 석국의 요청에 응하여 천보 10년 여름에 부장 잣드 이븐 사리를 보내 탈라스 강 부근에서 고 선지와 싸워 크게 무찔렀다. 사라센 국의 관습대로 포로는 노예로 만들었는데, 이때 많은 포로 가운데 제지공이 있어 사마르칸트에 제지공장을 만들어 이들에게 종이를 만들도록 시켰다. 이곳 은 아마나 대마가 무성하고 물도 쓰기 편한 제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우수한 종이를 만들 게 되었다. 757년에 세워진 사마르칸트의 제지공장에서 생산된 종이는 질이 좋아, 옥스퍼드 대학의 도서관 에 있는 아랍어 문법서(978년 판)를 조사한 연구자는 오늘날의 책보다도 지질이 더 우수하다고 지적하였다. 여기에 자극받은 이슬람 제국 아바스 왕조의 하룬 알 라시드 왕은 795년에 수도 바그다드에 멀 리 중국에서 제지공을 불러와 제지공장을 세웠다. 이 사마르칸트 종이나 바그다드 종이는 아바스 왕조 이슬람 제국의 중요한 수출품으로서 유럽에까지 수출되었다. 제지공장은 960년에는 이집트에, 1040년에는 리비아에 설립되었으며, 1150년에는 스페인의 하 티바, 트레드, 발렌시아에도 세워졌다. 유럽은 이 스페인에서 고도의 이슬람 문화와, 이슬람 문 화를 통하여 그리스 고전문화도 배울 수 있었다. 제지법도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 전해졌다. 1189년 프랑스의 에로에 스페인의 도움으로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이 공장에서 생산하는 종이는 품질이 우수하여 공장이 확장되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도 많은 공장이 세워져, 프랑스는 유럽 최대의 제지국이 되었다.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활판인쇄술을 발명하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라는 시대적 요청이 어우 러져 출판물의 수요가 급증하였다. 여기에 발맞추어 제지공장은 전 유럽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산업혁명기까지는 인쇄술이 거의 발전하지 않아 책의 출판량도 그렇게 늘지 않았다. 그 것은 인쇄물의 보급으로 새로운 혁신적 사상이 퍼지는 것을 두려워한 교회와 왕권이 이를 억제하 려고 노력했고 또한 인쇄업자가 길드를 조직하여 동업자의 증대를 막았기 때문이다. 제지 기술의 진보 나폴레옹이 총재정부를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한 1799년은 제지기술 면에서도 획기 적인 발명이 이루어진 해였다. 이 해 에로 제지공장의 제지공인 루이 로베르가 종이를 거르는 기 계를 발명했다. 프랑스 혁명으로 계속되는 정치불안에 거부감을 느낀 로베르는 공장주와 함께 영 국으로 건너가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영국의 최신기술을 배워 장망식 종이 뜨는 기계를 완성했다. 이것은 현재의 종이 뜨는 기계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져, 로베르는 '근대 제지법의 아버지'라 불 리고 있다. 이 제지기술의 진보와 산업혁명에 의한 활발한 경제활동 및 중산계급의 태두로, 신문과 잡지의 발행부수도 크게 늘어났으며, 이에 따라 종이의 수요도 급증했다. 그런데 원료인 식물섬유는 수 확철에 좌우되고 안정적으로 공급되지 않아 새로운 원료가 요구되었다. 1840년에 목재 섬유가 유용하다는 사실이 밝혀져, 독일인 F.게라가 목재를 잘게 부수는 기계를 발명했다. 1851년에는 영국에서 목재 섬유를 소다로 녹이는 소다 펄프법이, 1867년에는 미국에서 아황산으로 목재 펄프를 만드는 아황산법이 발명되었다. 특히 아황산법으로 아름다운 미백지를 만들어내, 비로소 근대제지업이 확립되었다. 신문, 잡지, 책의 보급과 함께 종이의 사용량도 증대했기 때문에, 종이의 소비량은 그 나라의 문화수준을 보여주는 잣대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근래 경제의 고도성장으로 판지나 마분지 등 산 업용지의 수요도 크게 늘어나, 종이 소비량의 증대는 산업활동의 잣대도 되고 있다. 종이 1톤을 만들려면 약 20그루의 거목이 잘려나가야 한다. 그 결과 지구의 삼림은 무서운 속 도로 파괴되고 있다. 물론 삼림 파괴의 원인이 종이 때문만은 아니다. 연료용이나 건축용 목재도 대량으로 벌목하고 있으며, 공업지대에서 불어오는 매연과 산성비로 삼림은 더욱 죽어가고 있다. 과학, 기술의 진보와 생활수준 향상이 지구, 아니 문명 자체를 위기로 몰고가는 위험성은 종이 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종이를 낭비하지 말고, 종이의 재생률을 높이는 노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고무의 종자를 빼앗아라 대항해 시대에 유럽인에게 '발견'되어 무참하게 멸망당한 신대륙의 아스텍, 잉카 문명을 세운 인디오는 정복자인 유럽인과 세계 인류에게 아주 귀중한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이들이 오랜 세 월 동안 길러온 감자 등 재배식물과 담배, 고무 등이었다. 콜럼버스는 1493년의 두 번째 항해에서 "인디오들은 어떤 나무의 껍질을 도끼로 베어서 거기서 나오는 하얀 액체를 공처럼 만들어 가지고 놀았다"는 기록을 남겼다. 인디오들은 이 고무로 장갑이나 구두, 컵, 시트 등을 만들었으며, 고무의 부드럽고 질긴 성질 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1755년 포르투갈 왕이 밑창에 고무액을 바른 신발을 신고 우쭐했 다는 기록도 있다. 이 무렵 라텍스를 불에 말려 딱딱하게 굳힌 생고무가 소나무에서 추출한 테레 핀유에 녹는다는 사실이 알려져, 유럽인들도 고무제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1772년 영국인 과학자 조셉 프리스틀리가 '지우개'를 발명했다. 고무를 러버(rubber)라고 부르 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금도 인디오가 준 선물이라는 의미에서 탄성고무를 인디아 러버라고도 부른다. 고무를 산업으로 발전시킨 철물업자 굿이어 유럽인들에게 소개된 고무는 그때까지는 얻을 수 없었던 좋은 성질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고 무제품 수요는 갈수록 많아졌다. 그러나 원료인 생고무는 날씨가 더워지면 녹아서 끈적끈적해지 고 추워지면 굳어버리는 성질이 있어, 고무산업의 발전을 방해했다. 이 문제는 우연히, 여러 사람들이 동시에 해결했다. 토머스 핸콕은 영국의 마차 제조업자였다. 그는 마차의 쿠션에 고무를 이용하면서 일찍부터 고 무의 제조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24년에 생고무를 기계의 롤러 사이를 따뜻하게 하면 서 통과시켜 서로 잇대는 '소련법'을 고안했으며, 이어 생고무에 유황을 섞어 무겁게 누르는 '가 류법'도 발명하였다. 가류법은 거의 같은 때 미국의 헤이우드도 고안해내어 특허를 받았다. 헤이우드의 친구인 필라델피아의 철물업자 찰스 굿이어는 전문가 못지않게 고무의 품질개량에 힘썼으며, 헤이우드에게서 가류법의 특허를 사들여 거듭 개량한 끝에 1844년에 새로운 특허를 얻 어냈다. 생고무에 유황을 섞으면 생고무가 온도 변화에 따라 성질이 변하지도 않고 안정될 뿐 아니라 강도도 높아진다. 굿이어는 생고무에 넣는 유황의 양을 가감해보고 압력이나 열도 가하여, 마침 내 안정된 고무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고무제품을 하나의 산업으로까지 발전시킨 최대 의 공로자였다. 그러나 굿이어는 이 발명으로 거의 득을 보지 못했을 뿐더러 특허를 둘러싸고 재판이 벌어져 소송에서 지는 바람에, 오히려 20만 달러나 되는 빚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는 1638 년에 뉴헤이븐의 식민지를 개척한 스테판 굿이어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고무의 품질 개량에 평생 을 바쳤다. 그의 아들 찰스는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고무회사를 경영했다. 1898년 프랑크 세이버링은 찰스의 회사를 토대로 오하이오 주에 대규모 고무제품 제조회사를 설립해, 굿이어 타이어 앤드 러버 산업이라고 이름지었다. 이 회사는 처음에는 자전거 타이어를 생산했다. 이 회사가 설립되기 전해에 스코틀랜드의 수의사였던 던롭은 아들이 자전거를 편안하게 탈 수 있도록 압축공기를 넣은 고무제 튜브를 고안했다. 당시의 자전거 붐을 타고 이 회사의 판매실적은 날로 올라갔고, 자동차 타이어로 전환하여 제 조 판매에 전념했다. 굿이어 사는 1916년에는 미국 최대의 타이어 회사로 성장했으며, 제 2차 대 전중에도 항공기나 벨트, 호스 등의 분야까지 진출해 세계 최대의 고무제품 제조회사로 발돋움하 였다. 자전거용 튜브를 고안한 던롭도 1899년 던롭 뉴마티크 타이어 회사를 설립하고, 곧이어 자동차 용 타이어의 제조에 착수했다. 물론 고무는 타이어뿐만 아니라 공업화의 진전과 함께 철도 차량의 완충장치 재료나 전기절연 제 등으로 쓰임새가 다양해지면서 수요도 날로 높아졌다. 고무를 얻으려고 천만 명의 콩고인을 학살한 레오폴드 왕 자전거, 자동차의 보급으로 고무의 수요가 급증하자 세계적인 고무 붐이 일어났다. 고무나무에 서 채취한 흰 수액 라텍스는 쉬 검게 변해 사람들은 '검은 금'이라고 불렀으며, 이것을 얻기 위 해 광분했다. 고무나무는 브라질이나 아프리카 정글에서만 자라고 있었다. '검은 금'을 찾아 유럽의 자본에 게 고용된 이민자들이 아마존 강 유역에 파견되어 열악한 기후와 노동조건 속에서 일하였으며, 전염병과 각기병 등으로 많은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광대한 아프리카의 심장부에 있는 콩고에서는 고무를 채취하기 위한 끔찍한 사태가 벌어졌다. 아프리카를 탐험해 유명해진 스탠리는 1878년 자신의 탐험을 원조해온 벨기에 왕 레오폴드 2세 에게 콩고 지방(현재는 자이르 공화국)을 양보했다. 레오폴드 왕은 벨기에 왕국의 78배나 되는, 유럽대륙이 몽땅 들어가버릴 정도로 광대한 콩고를 소유했다. 그는 자신의 소유물은 마음대로 다 룰 수 있다면서 많은 비난을 무시하고 콩고인을 철저하게 착취했다. 때마침 세계에는 고무 붐이 일었다. 레오폴드 2세는 '검은 금'으로 한 밑천 잡으려고 콩고인에 게 고무를 모아오라고 시켰다. 만일 정해준 양을 가져오지 못한 사람은 그 자리에서 학살했다. 이 사실을 안 미국의 유명한 작가 마크 트웨인은 '레오폴드 왕의 독백'에서 그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영국 선교사의 여행기(1903년 여름)' 그렇다면 놀라겠지만, 백인 병사들은 그 자리에서 몇 명 의 원주민을 총으로 사살했다. 그리고 원주민을 총으로 후려갈기며 "고무를 더 가져와! 그러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는 것이었다. 공포에 질려버린 원주민들은 가지고 갈 식량을 마 련하기 시작했다. 고무나무 숲으로 가려면 왕복 2주일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집앞에 자리잡고 부지런히 출발 준비를 하고 있는데, 병사들이 왔다. 그리고 성난 목소 리로 "뭐야 너희들은? 아직도 출발하지 않았어?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거야?"하면서 갑자기 총성을 울렸다. 그리고 몇몇 원주민이 처자식 앞에서 사살되었다. 처자들은 울부짖으면서 사체를 땅에 묻으려고 했지만, 그것마저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곧바로 고무를 찾아나서는 것이다. "음식 을 갖고 있지 않은데요?"하고 그들이 물었다. 그러자 병사들은 "그렇다면 그냥 가!"하고 호통을 쳤다. 그러자 불쌍한 원주민들은 모닥불을 피우는 부싯돌 하나 없이 맨손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 다. 정글로 가는 사이에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밤의 추위로 죽어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총살을 당했다..... "고무의 채취가 시작된 이래"하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병사들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사살했기 때문에 우리는 시체를 치울 엄두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매장도 허락해주지 않았 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시체를 풀밭까지 질질 끌고 와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주변을 조사해보면, 아마도 수백 개가 넘는 해골이 발견될 것입니다.".....원주민들은 기가 질린 듯 부 들부들 떨고 있었다. 가공할 폭행과 노예의 고역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재 눈으로 똑똑 히 확인할 수 있었다.(영국 선교사 A.E.스크리워너의 여행보고서) 레오폴드 왕의 지배를 받던 20년 동안에 콩고 인구는 2,500만에서 1,500만으로 격감했다. 이렇 게 쌓은 부로 레오폴드 왕이 세계의 미녀들을 낚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고무의 수요는 1850년에 1,500톤이었던 것이 1911년에는 4,500톤으로 급격히 증대했지만 생산 지가 한정되어 공급이 이를 따르지 못했다. 영국은 브라질 사람들이 헤베아라고 부르는 고무나무 의 종자를 다른 식민지에서 재배하여 거대한 이익을 챙기고자 했다. 그리하여 1876년 아마존 강 유역에 있는 고무농장 주인의 도움으로 7만개의 종자를 숨겨 영국에 가지고 오는 데 성공했다. 브라질 정부는 종자를 가지고 나가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했다. 영국에서는 큐 왕립식물원에서 싹을 틔워, 그 묘목을 상가포르, 자바, 실론에 보냈다. 7만 개 의 씨에서 싹이 튼 것은 3,000그루였다. 이 가운데 싱가포르에 보낸 22그루가 자라 오늘날 동남 아시아 고무농장의 기초를 이루었다. 큐 왕립식물원의 식물학자 H.N.린들리는 1889년 헤베아를 철저하게 연구한 결과 헤베아에 매일 홈을 파면 훨씬 효율적으로 라텍스를 채집할 수 있는 연속 타핑 법을 개발했다. 이리하여 고무농장은 동남아시아, 특히 말레이 반도로 확대되어갔다. 1910년에 런던과 뉴욕 시 장에서 고무 가격이 치솟자 말레이 반도의 고무 재배는 더욱더 늘어났다. 1910년부터 몇 년 동안 매년 1,200평방킬로미터 이상의 정글이 불타고 그 자리에 고무농장이 출현했다. 1922년에는 전세 계 고무의 93%가 이곳에서 생산되었다. 영국의 경영자는 런던에서 자금을 모아 대규모 고무 플랜테이션을 경영했는데, 노동자는 열대 우림의 악조건 속에서 일해야 했기에 노동력이 늘 부족했다. 영국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지배 하에 있던 인도인을 대량 수송해올 것을 생각했다. 주로 인도 남부의 가난한 농민들(타밀인이 많 았다)을 고무농장에 보냈다. 초기의 이들 사망률은 20%나 되었다고 한다. 또한 중국인 쿨리들도 유입되었다. 말레이 반도에는 품질이 좋은 주석 광산이 있기 때문에, 영국은 주석 광산의 노동력으로도 인 도인, 중국인을 들여왔다. 이것이 오늘날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안에 사는 인도인, 중국인의 원 조이다. 이리하여 영국은 말레이 반도의 2대 산물, 즉 고무와 주석의 생산과 수출로 막대한 이익 을 거둬들였으며, 이곳은 인도, 중국, 아프리카의 영국 식민지와 함께 대영제국의 번영을 지탱해 준 중요한 기둥이 되었다.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만든 합성고무 앞에서 말한 굿이어 사는 주로 라틴 아메리카에 많은 고무농장을 가지고 있었고, 던롭 사는 필 리핀에 대규모 고무농장을 경영하면서 원료를 확보하였다. 제 1차 대전을 계기로 자동차가 급속 히 보급되기 시작하고, 미국에서는 포드가 T형 대중차를 생산하여 팔면서 자동차의 대중화가 진 척되었다. 그리하여 고무는 더더욱 부족해져 일찍부터 합성고무에 대한 연구가 활발했다. 제 1차 대전에서 영국의 해상봉쇄로 천연고무의 공급이 중단된 독일은 바이에른 사의 연구원 호프만이 1910년에 합성한 고무형상 물질(부타디엔, 이소프렌, 디메틸부타디엔을 합성한 것)의 개량을 서둘러 주로 디메틸부타디엔으로 합성고무의 공업생산을 시작했다. 바이에른 사는 대전중 에 자동차와 항공기 타이어용으로 2,350톤의 합성고무를 제조했는데, 품질이 나쁘고 자동차 타이 어는 펑크도 잘 나 평균 200킬로미터 정도를 주행하면 갈아끼워야 했다. 제 1차 세계대전으로 모든 해외 식민지를 잃은 독일은 전략물자인 고무의 생산지가 없었기 때 문에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합성고무의 연구를 서둘러야 했다.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 한 다음해인 19343년에는 11만 7,613톤에 달하는 합성고무를 생산했다. 이것이 나치스의 자동차, 장갑차, 항공기용 타이어에 쓰여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세계 제일의 고무공업국 미국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동남아시아의 고무 재배지역을 모두 일본 군에게 빼앗기자 연구에 박차를 가하여 단기간에 합성고무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스탠더드 석 유회사가 1943년에 이소프로필렌과 소량의 이소프렌을 저온에서 합성하여 열과 기름에 잘 견디는 '부틸 고무'를 개발해 생산하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 후에도 연구가 계속되어, 1955년에는 미국에서 천연고무와 거의 구조가 같은 시스 1,4-폴리이소프렌을 합성했다. 그후에도 계속 개량되어 근래에는 실리콘 고무와 같은 특수고무도 개발되었고, 천연고무제품보 다는 품질이 떨어지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천연고무보다 훨씬 우수한 합성고무가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그 생산량도 1960년대에는 천연고무를 뛰어넘어 그 차는 점점 더 벌어지고 있다. 또한 합성고무의 원료로서 석유의 정련과정에서 생기는 분해가스의 성분을 이용하는 길을 연 것이 제 2차 대전 후 오늘에 이르는 석유화학공업의 기초를 만들었다. 오줌에 세금을 물린 로마 황제 로마 제국에도 세탁소가 있어, 사람의 오줌을 세제로 썼다. 오줌에는 알칼리를 유리시키는 성 분이 있어, 기름 얼룩 등은 깨끗이 지웠고 그 효과는 천연 탄산소다수와 똑같았다고 한다. 1세기 경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제국은 세탁소가 모은 오줌에 세금을 물렸다는 기록이 있다. 영국에서 는 19세기까지 오줌이 모직물의 세탁에 이용되었다고 한다. 로마 제국에서는 목욕이 성행했는데, 카라칼라 욕장 등 거대한 공중목욕탕이 영업을 하고 있었 다. 로마인은 잿물이나 천연소다, 알칼리염 등으로 몸을 씻었고 비누는 사용하지 않았다. 로마의 박물학자 프릴리우스는 '박물지'에서 염소 기름과 재로 만든 비누를 기술하고 있는데, 그것은 모발을 붉게 물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료는 비누와 똑같았다. 이것을 라 틴어로 사포라고 하며, 그것이 프랑스어의 사봉, 영어의 사페, 후에 소프가 되었다. 백색 비누와 카스텔라를 만든 카스티야 왕국 북유럽에서는 동물이나 물고기의 지방을 원료로 하여 검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비누를 만들어 썼는데, 오늘날과 같은 하얀 비누는 이베리아 반도의 카스티야 왕국에서 만들었다. 이슬람 세력의 지배에서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하려는 기독교도의 국토회복운동의 중심은 카스 티야(Castille) 왕국이었다. 이 국명은 성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왔다고 한다. 이슬람 세력과 격 렬한 항쟁을 되풀이했기 때문에, 양쪽은 많은 성을 쌓고 대치하였다. 전선이 이동함에 따라 새로 운 성이 많이 만들어져 성의 나라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카스텔라 빵도 카스티야 왕국에서 만 들었다. 이렇게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이슬람 세력과 대항하면서 점차 국력과 왕권을 강화하여, 1479년 아라곤 왕국과 함께 스페인 왕국을 세우고, 곧이어 빛나는 대항해에 나서게 된다. 카스티야 왕국 은 새로운 기운과 에너지가 충만한 나라였다.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올리브를 많이 재배했는데, 양질의 올리브유와 식물의 재로 품질이 뛰어난 하얀 비누를 만들었다. 지금도 유럽에서는 하얀 비누를 카스티야 비누라고 부른다. 머지 않아 비누 생산의 중심은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옮겨갔으며, 14세기에는 베네치아가 최대 의 산지가 되었다. 베네치아는 원래 이름난 유리 산지로, 유리 원료인 소다회를 동방에서 많이 수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가까운 지역에서 양질의 올리브유가 생산된 것이 베네치아를 비누의 주 요 산지로 성장하게 했다. 이들 비누는 주로 세탁용으로 쓰였으며, 몸을 씻는 데는 사용하지 않 았다. 유럽 사람들은 중세부터 근래까지 목욕을 하지 않았다. 그 까닭은 기독교 교회가 로마 시대에 지은 공공목욕탕을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악의 온상이라고 하여 금지했고(745년 성 보니파스가 금지령을 내렸다) 유럽에서는 향수가 발달하여 목욕을 하지 않아도 악취를 제거할 수 있었기 때 문이라고 한다. 비누를 몸에 바르면 피부병이 낫는다고 하여 약으로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후 19세기 전반에 유럽 각지에서 발생한 티푸스가 불결한 의복과 신체 때문이라는 인 식이 확산되어 공공세탁장과 공공목욕탕을 만드는 움직임이 일어나 비누를 많이 쓰게 되었다. 또 한 산업혁명의 진전으로 일한 뒤 기름투성이가 된 노동자들이 비누로 몸을 씻으면서 비누의 수요 는 급증하였다. 1790년 프랑스의 화학자 르블랑은 소금에서 인공적으로 알칼리의 원료인 소다를 만드는 방법을 완성하고, 그때까지 순도가 낮고 돈도 많이 드는 해조류의 회소다보다 순도가 98-99%로 훨씬 높 은 인공소다를 만들어냈다. 이어 같은 프랑스의 화학자 셀브르가 비누의 유지를 분석하여 지방산 과 글리세린의 결합물임을 밝혀냈다. 글리세린은 셀브르가 붙인 이름이다. 이리하여 비누의 화학적 연구가 진전되어, 그때까지는 그냥 버렸던 비누제조 과정에서 생기는 액체에서 글리세린을 회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글리세린에서 니트로글리세린을 추출하여 다 이너마이트를 만든 것이 스웨덴의 화학자 노벨이다. 그는 1867년에 발명한 다이너마이트와 1875년에 개발한 무연화약으로 거부가 되었다. 그의 유 언에 따라 920만 달러의 기금으로 설립한 노벨 재단이 제정한 것이 노벨상이다. 노벨상은 비누의 제조에서 생겼다고 하면 어떨까? 값싼 인공소다는 확보했지만, 유지는 변함없이 올리브유가 주원료여서 늘 부족하였다. 19세기 후반에 비누의 수요가 급증하면서 유지 부족은 더욱 심각해졌다. 소기름이나 양기름도 동원되었 지만, 그것으로도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열대산 야자유, 즉 팜유였다. 럭스, 티모테와 아프리카의 식민지화 풍부한 아프리카의 팜유에 관심을 가진 이가 영국의 비누 판매업자 윌리엄 리버였다. 그는 1894년에 리버 브라더스 사를 창설하고 영국 최대의 비누회사로 키웠다. 또한 리버는 미국, 캐나 다,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등에 비누공장을 세우고 매수하기도 하여 리버 브라더스 사 를 다국적기업으로 성장시켰다. 리버 브라더스 사는 벨기에 령 콩고에 품질 좋은 팜야자나무의 원생림이 있는 것을 알고 벨기에 식민지 당국의 협력을 얻어 야생 팜야자를 채집하게 되었다. 벨기에 면적의 78배인 콩고에서 벨기에는 중세식 식민지 약탈을 저지르고 있었다. 처음에 약탈 대상은 천연고무와 상아였는데, 고무나 상아를 가져오지 못한 원주민은 그 자리에서 총살하는 등 잔학한 수탈을 자행하여 국제적인 거센 비난을 받았다. 1908년 벨기에 정부는 정식으로 이곳을 벨기에 령 콩고로 병합한 다음, 1911년부터 리버 브라더스 사와 제휴하여 팜야자를 채집했다. 평화로웠던 마을에 벨기에인이 들어왔다. 벨기에 군이 마을 사람들을 모아놓고 무기로 위협하 며 팜야자의 채집을 명령했다. 옛날부터 이곳의 정글에는 팜야자나무의 원생림이 곳곳에 많이 있 었다. 그때까지 아프리카인은 필요한 만큼만 팜야자를 땄지만, 벨기에 병사는 매일 일정량의 야 자를 모아오도록 명령했다. 이 병사들은 리버 브라더스 사의 용병이었다. 마을 사람들이 채집해 야 할 양은 너무 많았고 하루종일 정글을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녀도 다 채울 수가 없을 정도였 다.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은 본보기로 죽였으며, 정해진 양의 야자를 가져오지 못한 사람에게 는 태형을 가하였다. 정글에서 채집한 팜야자는 리버 브라더스 사의 고용인이 사들였다. 하루종 일 이리저리 뛰어다닌 노동의 대가는 벨기에 제 담배 열 갑 값도 안 될 만큼 아주 적었다. 이 회사는 콩고의 다섯 곳에 광대한 팜야자 플랜테이션을 더 조성하고, 용병을 고용하여 강제 로 끌어모은 아프리카인을 노예처럼 부렸다. 그 때문에 자급자족을 유지해왔던 농업도 파괴되어 콩고인들은 늘 굶주렸다. 이러허게 리버 브라더스 사는 값싼 유지를 확보하고 비누를 제조하여 거액의 부를 쌓았다. 그리고 이 비누로 유럽인들은 점점 깨끗해졌다. 리버 브라더스 사는 그후 1929년에 네덜란드의 마가린 회사 안톤 융겔스 사와 병합하여 뉴리버 사가 되었다. 뉴리버 사는 아프리카의 값싼 땅콩 기름으로 마가린을 대량 생산하여 500개나 되는 자회사를 거느린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큰 다국적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회사는 근래 '라마'(마 가린, '티모테'(샴푸), '럭스'(비누), '파파'(유연제), 'ABC 포테이토'(냉동감자) 등을 팔고 있 으며, 급속히 세계시장을 점유해나가고 있다. 여기에서는 뉴리버 사가 아프리카에서 어떻게 땅콩 강제 재배를 했는지 언급하지 않았지만, 팜 유와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청결을 중시하여 아침에 세수하는 것은 물론이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하고 목욕하며, 샴푸와 비누를 듬뿍듬뿍 쓴다. 이렇게 우리가 애용하는 빛깔 고운 비누나 샴푸가 어떻 게 만들어질까? 유지의 지방산 알칼리염, 즉 비누 이외의 세정제를 합성세제라고 한다. 합성세제는 여러 종류 가 있지만, 제 2차 대전후 등장한 석유계 합성세제가 성능과 가격면에서 우수하여 급속하게 보급 되었다. 현재 세탁용 세제, 부엌용 세제, 샴푸 등은 대개 석유계 합성세제이다. 그런데 이들 합 성세제는 화학적으로 지나치게 안정되어 자연계에서 생물학적으로 분해되지 않기 때문에 하천, 바닷물, 지하수를 오염시켜 문제가 되고 있다. 권력자가 독점한 유리 제조법의 비밀 만약 우리에게 유리가 없다고 가정하면 어떨까? 유리창이 없는 주택은 낮에도 어둡고 창 너머 로 정원을 바라볼 수도 없을 것이다. 자동차도 창문이 없어 비라도 오는 날에는 달릴 수조차 없 는 등 무척 답답할 것이다. 일반 주택에 유리창을 처음으로 보급한 나라는 일찍부터 산업혁명을 달성한 영국이다. 유리 생산에는 많은 연료가 필요하기 때문에 산업혁명에 따른 석탄업의 발전으로 비로소 유리 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으며, 영국의 주택은 태양빛을 받아 한층 밝아질 수 있었다. 유리는 인류가 만들어낸 최초의 인공소재라고도 한다. 현재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리기구는 고 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아카드 왕조(기원전 2350-2150년) 시대의 것이다. 당시 유리는 보석이나 귀금속에 가까웠기에, 제조법은 비밀에 부쳐 권력자가 독점하고 있었다. 바빌로니아 왕국이나 아 시리아 왕국에서 유리의 제조법을 암호로 기록한 설형문자의 점토판이 발견된 것도 이러한 사정 을 보여준다. 유리 제조법은 오리엔트를 통일한 아시리아가 이집트에도 전해주었다.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나 기 전 5세기에 아케메네스 왕조의 도시 페르세폴리스를 방문한 영국의 사절은 유리그릇으로 술을 마시는 페르시아인의 모습을 기술해 놓았다. 유리 제조법의 일대 혁명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페니키아 지방에서 기원전 1세기경 페니키아인이 철로 만든 관 끝에 녹인 유리 덩어리를 붙이고 다른 끝으로 숨을 불어넣는 '유리 제조법'을 고안해냈다. 숨을 불어넣으면 1,200도 가까운 유리 주머니가 부풀어올라 공기에 닿는 면이 차가워지면서 여 러 형태의 용기가 만들어진다. '입으로 부는 유리 제조법'은 경험이 쌓이면서 뜨거운 안쪽에 '인두'로 모양을 새기거나 유리 의 끝을 휘감거나 색을 넣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발전했다. 또한 한 번 굳은 용기를 다시 녹 이는 등 견고한 유리를 만들어내는 방법도 고안해냈다. 이 유리 제조기술은 지금도 이어져오고 있으며, '입으로 부는 유리 제조법'은 유리 생산의 일대 혁명이었다. 로마의 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스트라본은 '지리지'에서 "로마에서는 유리의 발생이나 능률 적인 작업으로 여러 가지 발명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유리병이나 유리컵을 동전 한 닢이면 살 수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리하여 로마 제국 시대에 유리공장이 갈리아 지방에서 라인강 유역, 나아가 브리튼(영국)에 까지 세워졌으며, 각지에서 생산된 값싸고 품질 좋은 로만 글라스는 로마의 중요한 무역품으로서 널리 중근동, 인도, 중국에까지 팔려나갔다. 베네치아 유리의 발달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유리 제조기술은 사산조의 페르시아에서 이슬람 세계로 계승되었다. 또 한 비잔틴 제국이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도 로마 유리의 제조기술이 전승되었다. 유리는 5-6세기경 가정집의 창에도 사용되기 시작했으며, 교회의 창은 아름다운 스테인드 글라 스로 꾸몄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특히 베네치아는 십자군 병사들의 운송을 도맡으면서 큰 이익을 남겼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이슬람 상인들과 통상하면서 여러 가지 이슬람 문화를 받아들 였다. 그 가운데 유리 제조기술도 있었음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2-13세기에 베 네치아에서 순수한 규산소다를 사용해 품질 좋고 아름다운 유리를 대량생산하여 베네치아 유리로 서 유럽에 알려지게 된 것에서 단적으로 알 수 있다. 이후 셀주크 투르크 제국, 티무르 제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 등 이슬람 세력이 중근동, 동지중 해 쪽에 침입했다. 그리하여 시리아, 비잔틴 제국에 살던 기독교도 유리 직인들이 직업을 찾아 베네치아로 도망가는 경우가 잇따르면서, 그들이 가져온 크리스탈 유리나 에나멜을 칠한 유리 그 릇의 제조법 등으로 베네치아의 유리공업은 한층 수준을 높일 수 있었다. 베네치아 상인들도 개 량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16세기에는 은을 도금한 유리를 발명하였으며, 이들 베네치아 유리 제 품은 유럽에 독점가격으로 팔려나가 베네치아의 번영을 이끌었다. 베네치아 정부는 유리의 제조비법이 새나가 베네치아의 독점이 무너질 것을 우려해 유리 직인 들을 모두 시 교외에 있는 무라노 섬에 모아놓고 다른 지방으로 이사하면 사형에 처하는 등 엄하 게 단속하였다. 그 대신 그들을 귀족에 가까운 높은 급료로 우대했다. 그러나 이런 엄격한 감시 에도 불구하고 도망친 사람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유리 제조비법을 알고 싶어한 유럽 각국에 서 높은 급료와 갖가지 은전을 약속하고 직인들을 빼돌렸기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 있던 루이 14세 때의 재상 콜베르가 베네치아 주재 프랑스 영사에게 궁전의 방에 설치할 거울의 제조법을 훔쳐오도록 명령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프랑스 영사는 고심한 끝에 한 직인을 무라노 섬에서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여 프랑스로 보냈 다. 이 직인이 가져온 기술로 베르사유 궁의 '거울의 방'이 만들어진 것이다. 대항해 시대의 도래와 프랑스의 거듭되는 침입(이탈리아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몰락 하기 시작했다. 유리 제조기술을 계속 독점할 수 없었던 베네치아는 유리산업이 점점 기울면서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도 급속하게 떨어져갔다. 베네치아 유리를 대신하여 유럽에서 인기가 높아진 것은 보헤미아 유리다. 보헤미아의 유리 직 인들은 보헤미아의 석탄을 이용해 훨씬 더 투명한 유리를 만들어냈다. 이곳의 목탄은 칼륨 성분 이 많아 당시 사용하던 소다회보다 더 투명하고 곡절률도 높은 유리를 만들 수 있었다. 보헤미아 는 현재의 체코인데, 당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의 지배 아래 있었다. 합스부르크 가가 보 헤미아 유리의 제조를 크게 보호, 장려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유럽의 오래된 교회 안에 들어서면 은은한 빛을 발하는 형형색색의 스테인드 글라스에 넋을 빼 앗기고 만다. 기독교도들은 스테인드 글라스 아래서 그리스도상이나 성자 또는 성서 이야기를 담 은 그림을 보면서 신의 은총을 느꼈으리라. 색칠한 유리를 납으로 이어 붙여 그림으로 형상화하 는 방법은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있었다. 그것은 모자이크 그림에서 힌트를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보면 스테인드 글라스는 당시 유리 제조기술의 미숙함 탓이다. 그때는 대형 유리 를 만들 수 없었기에 작은 유리 조각들을 납으로 이어 붙였다. 이어 붙인 납선은 지저분하고 보 기 흉해, 유리에 색칠을 하고 이음선에도 그림을 그려넣어 멋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어낸 것이다. 작은 창유리는 로마 제국이 멸망한 5세기경에 출현했으며, 비교적 큰 판유리는 17세기에 프랑 스에서 비로소 가능해졌다. 애초부터 커다랗고 견고한 판유리를 만들 수 있었다면 스테인드 글라스라는 훌륭한 예술은 탄 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교회 건축은 흔히 로마네스크식에서 고딕 양식으로 발전하는데, 고딕식은 스테인드 글라스를 끼우기 위해 천장을 높이고, 공간을 넓히며, 창을 크게 만들어 건축기술을 향 상시켰다. 미숙한 유리 제조기술이 이렇듯 훌륭한 예술을 만들고 또한 건축기술을 향상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세라믹 로드의 번영 점토나 도토는 물에 개어 형태를 만들고 그것을 고온에서 구우면 굳는 성질이 있어, 사람들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이 흙으로 각종 도구를 만들어왔다. 처음에는 굽는 온도가 낮고 유약도 칠하 지 않은 토기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800-1,000도의 고온에서 유약을 칠한 점토를 구울 수 있게 되면서 도기(질그릇)가 만들어졌다. 나아가 도석(자석=석영조면암)을 깨뜨려 부순 것을 원료로 하여 1,300도에서 구운 자기(사기그릇)도 발명되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세계 각지에서 토기가 만들어졌다. 중국의 채도, 흑도, 메소포타미아의 수메 르 토기(채도) 등의 토기는 각 곳의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실용도구이며 훌륭한 예술품이기도 하다. 도기도 널리 만들어졌는데, 중국의 당삼채와 그리스의 도기만 살펴보겠다. 당삼채란 녹색, 갈색, 백색 세 가지 물감으로 인물, 동식물 등을 그려 낮은 온도에서 구운 것 이다. 굽는 온도가 낮아 착색기술의 응용범위가 넓고 갖가지 방법이 활용되어 우수한 예술작품이 많이 만들어졌다. 고대 그리스 도기는 흑회수, 적회수라 부르는 독특한 채화수법이 특색이다. 흑회수란 적갈색 흙에 검은 색의 그림을 그려넣은 것이고, 적회수란 그와 반대로 모양을 내는 부분은 적갈색의 맨 흙을 쓰고 바탕은 검은 색으로 칠하는 방법이다. 후기에 출현한 적회수는 아름다워 장식성이 높 다. 1,300도나 되는 고온에서 굽는 자기는 도기보다 더 발달된 기술이 필요했다. 중국에서는 일찍 이 한대였던 1세기경에 청자를, 6세기경에는 백자를 구워냈다. 그 제조법은 비밀로 하여 관영 도 공들이 대대로 전승하였다. 이후 이 제조법이 한반도에 전해져 고려 시대에는 독특한 상감을 한 훌륭한 고려청자가 탄생했다. 상감이란 금속, 도자기 등의 표면에 무늬를 파내고 그 속에 금이나 은을 채워넣은 것을 말한다. 중국 도자기의 전성기 송대는 중국 도자기의 황금시대였다. 도자기 만드는 기술이나 예술성에서 속대의 도자기는 오 늘날에도 세계에서 으뜸이라고 한다. 현대의 최첨단 도자기 기술로도 따를 수 없는 명기인 것이 다. 송대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여 많은 상업도시가 생겨 번영했으며 서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았다. 장강 삼각주 등이 개간되고 농업생산력도 증대하였으며 인구도 많아져 여러 가지 상품에 대한 수 요도 늘어났다. 또한 남해무역도 활발하여 중국 도자기가 많이 수출되었다. 중국 최대의 요업지 인 장시성의 징더전이 발달하기 시작한 때도 송대이다. 차이나(China)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기'(porcelain), 도자기, 도기를 뜻한다. 이것은 중국 의 도자기가 얼마나 우수하며 세계 각지에서 구입하였는가를 보여준다. 또한 도토를 영어로 카올 린(Kaoline)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중국의 징더전 동북부에서 나는 양질의 고령토를 말한다. 차 이나와 카올린이 도자기와 원료인 흙을 가리키는 국제적인 일반명사가 되었을 만큼 징더전은 오 랫동안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자기 생산지였다. 이 지역에서는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도자기가 생산되었는데, 송대에 생산이 더욱 활발해졌다. 이 지역은 북송의 3대 황제인 진종의 경덕(1004-1007) 때 진(현에 속한 소도시에 붙인 명칭)이 도어 징더전(경덕진)이라 불리게 되었다. 정부는 이곳에 관영공장인 어기창을 세우고 황실에서 쓰는 도자기를 생산하도록 했다. 명대에 이르러 징더전의 명성은 "천하의 도자기가 다 모여 있 다"고 할 정도였다. 세계 역사상 동서교역로는 세 곳이 있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스탭 지대를 통하는 초원길(스탭 로드)과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 도시를 잇는 비단길(실크 로드), 그리고 남해의 바닷길(마 린 로드)이다. 독일의 지질학자 리히트호펜이 명명한 실크 로드는 널리 알려져 가장 중요한 길이었다고 생각 하기 쉽지만, 실크 로드가 주요 도로가 된 것은 한대와 당대이며, 당 말기인 8-9세기 이후는 남 해의 해상교통로가 중심이었다. 당대에는 강남의 쌀 생산이 증대함에 따라 강남에서 화남지방에 걸친 지역의 인구도 증가하고 상공업 활동도 활발했다. 이에 따라 남해무역도 발전하여 광저우, 양저우, 항저우 등 항구도시에 는 이슬람 상인 등의 외국인 거류지가 설치되어 광저우의 외국인 수는 거의 10만 명이나 되었다. 이에 당은 시박사를 두어 외국무역을 관리했다. 이 남해무역에서 중국의 주요 수출품은 도자기였 다. 낙타를 타고 이동하는 실크 로드는 가벼운 비단의 운반에는 좋았지만, 무거운 도자기는 배로 실어나를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당대 도자기의 대표격인 당삼채가 동남아시아, 인도에서 멀리는 페르시아, 이집트까 지 팔려나갔다. 중국 도자기의 우수함을 안 페르시아, 이집트에서는 재빨리 당삼채를 모방한 페 르시아 삼채(다채채문토기와 다채각선문토기)나 이집트 삼채(다채채문도기)를 만들었다. 중국의 도자기가 얼마나 멀리까지 전해졌는지 와 그것의 문화적 영향에 대한 다음의 글을 소개한다. '세계에 전해진 중국의 도자기' 중국의 도자기는 가까운 한국, 일본, 인도차이나 반도의 여러 나라를 비롯하여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시아의 섬들에서도 엄청나게 발견된다. 그중에서 도 중국에서 멀리 떨어진 인도, 실론은 물론이고 그 서쪽의 서아시아 전역에까지 이른다. 그뿐 아니라 아프리카의 동해안에서도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 근처에서도 중세의 중국 도자기가 엄청나게 발견되어 그 우수성과 함께 세계의 연구자들을 놀라 게 했다. 어떻게 하여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까지 전해졌는지 생각조차 못할 정도이다. .....이 도자기들 가운데는 중국 도자기뿐 아니라 타이나 베트남의 도자기도 있다. .....이들 중 국 도자기를 추적해보면 중국과 아시아 여러 지역 및 지중해 세계와의 무역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를 알 수 있다. 동서교역의 중요한 일면이다. 여기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중국 도자기를 맏아들인 나라들에게 중국이 주었던 공예기술상의 자극이나 예술상의 영향이다. 이것은 이른바 동서문화의 교류라는 문제와 관계가 있다. 중국 도자기를 수출하는 남해무역은 중국 도자기의 황금시대인 송대부터 그 다음 시대까지 활 발하게 이루어졌다. 중국에서는 나침반까지 갖춘 수백 명에서 수천 명까지 타는 대형선박도 건조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명나라의 영락제가 파견한 일곱 차례에 걸친 정화의 대항해로 말미암아 "천하의 도자기가 다 모여 있다"는 징더전은 해외에서도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정화의 배는 징더전의 명기를 대량 선적하고 멀리 동남아시아, 인도, 페르시아, 아프리카 동해 안까지 전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남해무역은 한층 발달하였으며, 중국 도자기의 수출도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특히 160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설립되어 네덜란드가 동양무역의 실권을 장악한 뒤부터는 유럽의 왕후, 귀족들 사이에 중국취미가 일어나 궁전과 귀족의 저택마다 화려한 도자기 전시실이 만들어졌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베를린 교외의 포츠담에 지은 성 스시 궁전에도 '차이니즈 티 하우스'가 만들어졌다. 프랑스의 계몽사상가 볼테르도 이곳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중국 자기로 중국차를 즐겨 마셨다고 한다. 조선 도공의 손에서 유럽으로 퍼져나간 도자기 중국이 도자기를 대량 생산하여 수출하던 시대는 그다지 오래가지 못했다. 명은 북쪽에서 몽골 인의 침입으로, 남쪽에서는 왜구에게 시달렸다. 16세기말에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을 침략하자 조선에 원군을 보내는 등으로 재정이 악화되었으며,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농민들 의 반란이 끊이지 않다가 이자성의 난에 의해 1644년 멸망했다. 명을 쓰러뜨리고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서자 청의 지배에 항거하는 저항이 곳곳에서 일어났으 며, 명의 신하였던 정지용과 정성공 부자는 대만을 거점으로 중국 연안을 습격했다. 이 때문에 청은 1656년에 해금령을 내려 중국인이 해상에 나가는 것을 금했다. 게다가 1661년에는 천계령을 발표하여 장쑤, 저장, 푸젠, 광둥 해안에 살고 있는 주민을 해안에서 30리 떨어진 내륙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대담한 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로써 중국의 대외무역은 전멸하고 중국 도자기의 수출 도 중단되었으며, 징더전을 비롯한 도자기 생산지도 큰 타격을 입었다. 중국 도자기를 수입할 수 없게 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도 큰 타격을 입고, 급히 중국 도자기 를 대신할 도자기를 찾았다. 동인도회사가 눈을 돌린 곳은 네덜란드가 나가사키를 통하여 무역의 독점권을 갖고 있던 일본의 도자기였다.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도자기를 생산하게 된 계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이었다. 도 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일명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조선의 우수한 도자기를 동경 하던 일본의 다이묘(무사)들은 다투어 조선의 도공을 강제로 끌고와 일본 각지에서 도자기 공장 을 차렸다. 이대 끌려온 조선의 도공 이삼평은 유전에서 양질의 고령토를 발견하고 일본에서는 최초로 백자를 만들었다. 이후 이곳은 일본의 대표적인 요업지로서 크게 발달하였다.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나가사키에서 가까운 유전요에 눈을 돌리고 1650년부터 이만리 항을 통하여 수출을 시작했다. 동인도회사는 네덜란드에서 그림이나 나무 견본으로 주문을 받아 유전 의 도공들이 만들도록 했다. 이리하여 유전의 도자기 생산은 크게 발달하여 중국 도자기 대신 유 럽 시장을 장악했다. 앞에서 말한 유럽의 도자기 전시실에 중국 도자기와 함께 일본 도자기가 진 열되어 있는 것은 이런 사정 때문이다. 홍차와 함께 중국과 일본 도자기도 인기가 높았다. 유럽에서는 아무리 해도 이 도자기들을 따 를 만한 것을 만들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는 한나라에서 육조 시대에 걸쳐 만들기 시작한 도자기 를 유럽에서는 약 8세기경부터 처음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독일의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는 '다슈타르케'(강력한 왕)라고 불렸는데, 동 전을 손가락으로 구부리는가 하면 자식이 200명이나 되는 것으로도 유명한 전제군주였다. 그는 대단한 도자기 애호가로 츠빙거 궁전에 중국과 일본의 도자기를 엄청나게 모아들였다. 중국과 일본 도자기에 반한 그는 연금술사인 프리드리히 베드거에게 그것들을 만들라고 명령했 다. 베드거는 고심한 끝에 1709년에 백자를 구워내는 데 성공했다. 슈타르케 왕은 마이센의 알브 레히부르크 성에 가마를 설치하였다. 이것이 마이센 요이다. 초기에 마이센 자기는 중국의 오채도기와 일본의 이만리 자기를 충실하게 모방했다. 시멘트와 콘크리트의 제국 로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시멘트는 이집트 피라미드의 석재를 쌓는 데 이용되었는데, 구운 돌멩이 와 점토를 섞은 것이라고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목재와 석재가 부족했기 때문에 햇 볕에 말린 벽돌이나 가마에서 구운 벽돌로 거대한 신전 지구라트나 왕궁, 성벽 등을 만들었다. 방수와 접착을 위하여 벽돌과 벽돌 사이는 시멘트가 아니라 아스팔트로 메웠다. 고대 그리스 키 프로 섬의 신전 초석에는 석회와 모래, 물을 혼합한 석회 모르타르를 썼다. 시멘트(cement)는 라틴어의 자갈, 깨진 돌을 의미하는 카에멘툼(caementum)에서 나온 말이다. 앞에서 말한 이집트나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한 시멘트는 공기중에서 굳어버리는 시멘트로, 접착 력도 약하고 물 속에서는 부서져 건축재로는 흠이 많았다. 로마인은 이런 문제를 해결한 천연 시 멘트를 개발했는데, 응회암의 분해물과 석회를 섞어 물에 개어 썼다. 기원전 1세기의 로마 건축 가 비트루비우스는 10권으로 된 저서 '건축론'에서, 베수비어스 화산의 화산재(응회암의 분해물) 에 석회를 섞으면 내수성이 좋은 시멘트를 만들 수 있다고 기술했다. 로마인은 이 로마 시멘트로 콘크리트를 만들어 카라칼라 욕탕, 판테온 신전 등 거대한 건축물과 도로, 항구 등을 건설했다. 로마 건축물은 대부분 바깥쪽은 돌이나 벽돌로, 안쪽은 돌멩이, 벽돌 부스러기와 로마 시멘트 로 만든 콘크리트로 지어 매우 튼튼하였다. 사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처 럼, 로마는 차분하고 견고한 '시멘트와 콘크리트의 제국'이었다. 로마 시에 남아 있는 판테온 신전은 균형미와 아름다움으로 고대 로마 건축물을 대표한다. 판 테온이란 다신교위 신들을 한 곳에서 모시는 신전이다. 판테온 신전은 기원전 27년에 세워졌으 며, 현존하는 것은 2세기에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재건한 것이다. 원형 신전에는 아래쪽 벽에 움 푹들어간 곳이 일곱 군데 있는데, 거기에서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그 위에 지금 43.4미 터의 돔이 설치되어 있고 돔의 천장에는 빛이 들어오도록 둥근 창을 뚫었다. 벽면은 모두 콘크리 트로 발랐으며, 아래쪽 벽의 두께는 6.2미터, 꼭대기는 1.2미터였다. 표면은 옻칠을 하였다. 그 리고 돔은 벽돌 아치로 보강하였다. 퍈테온 신전은 일부에 대리석 등도 사용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신전과 같이 석조건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전체가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좋은 건물이다. 로마의 콘 크리트가 얼마나 뛰어난지 이 건물이 1850년이나 지난 오늘에도 거의 완전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 다. 현대의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수명은 보통 50년에서 60년, 특별히 신경을 쓴 건물은 200년이라 고 한다. 철근을 넣어서 콘크리트 강도는 높아졌지만 철은 부식되고 만다. 원래 콘크리트는 알칼 리성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철이 부식하는 것을 막을 수 있지만, 오래지 않아 풍화되거나 팔라지 면서 부식되고, 부식은 철을 팽창시키므로 안에서부터 콘크리트를 약화시켜버린다. 로마의 콘크리트는 철근이 없기 때문에 대담하게 돌출 부분을 만들 수는 없지만, 현재의 철근 콘크리트보다 훨씬 견고했다. 이렇게 우수한 로마 콘크리트는 이후 2,000년간 유럽에서 계속 사용되었다. 중세 유럽이나 르 네상스기, 근대 유럽의 토목건축은 로마 시멘트로 만든 콘크리트를 빼고는 생각할 수 없다. 석조 등대와 시멘트의 개량 1755년 도버 해협을 마주한 영국 블리머스 항에서 서남쪽으로 14킬로미터 떨어진 에디스턴 암 초의 등대가 불타버렸다. 해운의 요충지였던 이 등대는 빨리 재건해야 했으므로, 당국은 당시의 우수한 토목학자 존 스미턴에게 건축을 맡겼다. 등대가 화제로 소실되는 것을 막으려면 돌로 지 어야했기 때문에 시멘트가 많이 필요했다. 바닷물과 비바람에 견딜 수 있는 시멘트를 만들려고 스미턴은 많은 석회 견본을 모아 실험을 되풀이했다. 그 결과 점토를 조금 넣은 석회석을 구운 것이 가장 좋았다. 1759년 등대는 훌륭하 게 완성되었다. 돌을 이어 붙이는 기술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강력한 접착력을 가진 시멘트로 고정시켰기 때문에, 튼튼하고 아름다운 등대가 만들어졌다. 이 방법은 금세 세계 각지로 퍼졌다. 이로써 스미턴은 '등대의 아버지'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후 스미턴이 토목공사의 근대화에 공헌한 바는 등대건축 쪽보다도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인 공 시멘트의 발명 쪽이 훨씬 컸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토목건축계에서는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 우스가 '건축론'에서 서술했듯이 시멘트는 하얗고 단단하고 아주 순수한 석회석이 가장 좋다는 견해가 아무런 의심 없이 그대로 통용되었기 때문이다. 스미턴은 그것에 이의를 제기하고 더 우 수한 시멘트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후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대량의 원료와 제품, 석탄과 철광석을 운반할 도로와 운하가 활발히 건설되었다. 증기기관차가 실용화되어 철도와 함께 많은 철교를 놓아야 했다. 그리하여 강력한 시멘트가 더더욱 필요해졌다. 1824년 영국 리즈 시의 벽돌공 조셉 애스프딘은 '인조석 제조법의 개량'이라는 제목의 특허를 출원하였다. 그것은 석회석을 잘게 부순 가루를 불에 구워 석회를 만들고 거기에 점토와 물을 섞 어 건조시킨 뒤, 고온에서 굽고 여기서 생기는 덩어리를 잘게 부수면 강력한 시멘트가 만들어진 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 시멘트가 도버 해협을 바라보는 포틀랜드 섬에서 산출되는 포틀랜드 석 과 빛깔이 비슷해 포틀랜드 시멘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곧이어 이 시멘트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826년부터 런던의 템스 강 밑바닥에 터널을 뚫었는데, 1828년 터널을 지탱하고 있던 로마 시멘트 벽이 무너져 강 밑바닥이 내려앉았 다. 그리하여 급작스럽게 애스프딘이 개발한 포틀랜드 시멘트를 사용하여 터널은 무사히 완성도 었다. 이후 인공 포틀랜드 시멘트가 완전히 천연 시멘트를 대체하게 되었다. 포틀랜드 시멘트는 그후에도 품질의 결점을 없애고 훨씬 강한 콘크리트로 개량되었다. 1885년 영국인 랜섬이 회전 가마로 시멘트를 연속해 구워내는 방법을 고안하여 특허를 받았다. 이로써 시멘트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철근 콘크리트의 발명 파리에서 정원사로 일하던 조셉 모니에는 깨지지 않는 화분을 만들려고 여러 가지 공부를 했 다. 그러다가 화분 모양으로 짠 철망에 시멘트를 발랐더니 아주 튼튼한 화분이 만들어졌다. 그는 이것을 강한 콘크리트 제조에 이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고 1867년에 재빨리 특허를 얻어, 철근 을 넣은 수조나 철도의 침목 따위를 만들어 팔았다. 이 철근 콘크리트의 장래성에 주목한 독일 회사가 모니에의 특허를 사들여 독일에서 연구와 개량을 했다. 철근 콘크리트는 압축력은 강하지만 인장력(잡아당기는 힘)은 약한 콘크리트와 인장력이 강한 철근을 조합하여 만들었다. 압축력과 인장력이 모두 강한 철근 콘크리트의 발명이야말로 거대 토 목사업과 고층건물 건축을 가능하게 하여, 이제는 '철근 콘크리트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본격적인 철근 콘크리트 건축이 출현했다. 파리의 프랑클린 가에 현존하는 9층 아파트는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가 1903년에 전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지어 겉면을 타일로 꾸 민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제 5 장 담배도 영국 혁명의 원인이었다 커피 하우스와 시민혁명 커피의 기원을 설명하는 제법 그럴듯한 얘기가 있다. 아라비아 반도 예멘 근처의 유목민이 기 르고 있는 양이 어떤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잠을 잘 자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나무 열매로 여 러 가지 시험을 해보았다. 그리하여 쓴맛이 나는 검은 액체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이슬람의 의학자이자 철학자로 유명한 이븐 시나는 커피 원두를 잘게 부수어 끓여낸 것을 마시 면 위 또는 머리를 맑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책에 기술해놓았다. 그후 원두를 불에 볶아 가루 로 끓여 마시는 커피는 이슬람 세계에 급속하게 퍼졌다. 커피 열매가 열리는 나무는 카파라고 하고 그 열매에서 뽑아낸 액체는 카페라고 하였으며, 메 디나, 메카, 카이로 등 이슬람 도시에는 커피점도 나타났다.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 퍼지게 된 배경은 몇 가지가 있다. 그 하나로 이슬람교에서는 마호메트 의 교시에 따라 술을 마실 수 없으므로 술 대신 대중적으로 마실 수 있는 음료가 요구되었다. 또 한 다른 요인으로, 이슬람 교도는 코란의 교리를 충실히 따르며 생활하고 날마다 다섯 차례씩 꼭 예배를 드린다. 특히 이슬람 법학자들은 명상에 잠긴다든가 심야 기도를 많이 하는데, 커피에 들 어 있는 카페인의 각성효과는 아주 잘 맞았다. 이것은 좌선을 중시하는 불교의 승려들이 차에서 얻는 효과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 세계에서 '커피 금지법'이 제정되기도 했다. 1511년 메카의 카이르 베이 지사는 커피를 마시지 못하게 하고 커피점을 폐쇄하며 위반자는 추방한다는 법을 제정했다. 그 까닭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커피점에 모인 시인들이 정치 및 베이 지사를 비판하는 시를 지어 불렀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커피 애호가 카이로의 술탄은 커피 금 지령을 해제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메카 시민들은 크게 기뻐하였으며, 베이 지사르 체포하여 처 형해버렸다고 한다. 악마의 음료라 불린 커피 1517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셀림 1세는 카이로를 점령하고 이집트를 병합했는데, 이 원정에 서 커피가 투르크에 전해졌다고 한다. 1554년 콘스탄티노플에는 화려하게 꾸민 카페 카네스가 문 을 열어, 왕후와 귀족들이 정장을 하고 드나들었다고 한다. 투르크는 기독교도(그리스 정교가 중심이었지만)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발칸 반도를 차례차례 정복하여 1529년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 빈을 포위했다. 투르크는 정복지의 이슬람화를 꾀하 였는데, 이때 주민들에게 포도주를 금지하고 커피를 마시도록 장려했다. 투르크의 시인 베리기는 발칸 반도의 정복과 그곳의 이슬람화를 '커피의 승리'라고 표현했다. 커피는 오스만 투르크에서 유럽으로 전해졌다. 술레이만 대제가 1529년에 빈을 포위했다가 실 패했지만, 그때 투르크 군이 철수한 뒤 커피 원두가 남아 있었다든가 콘수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 로 선적되어 전해졌을 것이라고 한다. 이슬람교 나라인 투르크에서 전래된 커피에 대하여 일부 열성적인 기독교도들은 적의를 품고 '악마가 마시는 것'이라며 교황에게 커피 금지를 촉구했다. 그러나 교황 클레멘스 8세는 한번 마 셔보고는 홀딱 반해버려 "이 악마의 음료는 매우 맛이 좋다. 그러므로 악마만 독점하게 하기에는 아깝다. 세례를 받고 악마를 조롱해주면 되지 않는가"라면서 인정하였다고 한다. 근대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독일의 작곡가 바흐는 1732년에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다. 아 버지가 딸에게 "커피를 끊지 않으면 결혼시킬 수 없다"고 말하자, 딸이 "커피를 그만 마시겠어 요"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아버지는 딸의 신랑감을 물색한다. 그러나 딸은 '결혼한 뒤 아버지를 설득하여 커피를 마시도록 해야지'라고 생각한다. 이를 보아도 커피가 당시 독일에 얼마나 깊이 침투해 있었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바흐와 친했던 프리드리히 대왕은 누구보다도 커피를 좋아했지만, 국민들이 커피를 마심으로써 외화를 많이 소비하자 1777년에 '맥주 커피 령'을 발표했다. 그리고 "독일인은 국산 맥주를 마시 고 커피는 마시지 말라!"고 호소했다. 그러나 도저히 커피를 금지할 수가 없자, 1781년 대왕은 방침을 바꿔 커피를 정부가 전매하고 세금을 거둬들이기로 했다. 커피 하우스와 시민혁명 청교도 혁명이 성공하고 크롬웰의 공화정치가 시작된 런던에서는 1652년 세인트 미카엘 교회 옆에 천막 커피점이 문을 연 것을 시초로 잇따라 커피 하우스가 생겨났다. 여기에는 의원, 병사 등 청교도 혁명을 반영하여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출입했으며, 정치와 종교 문제 등도 자유롭게 토론하였다. 1660년 망명지인 프랑스에서 돌아와 왕정복고를 이룬 찰스 2세는 커피 하우스의 혁명적인 분위 기에 두려움을 느끼고 '반란의 온상'이라며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민중들의 빗발치는 비난에 왕은 개업을 허가제로 하여 커피 하우스를 인가했다. 이후 커피 하우스는 점점 늘어나 18 세기 초두에는 런던 시에만 3,000곳을 헤아렸다. 커피 하우스에는 '걸리버 여행기'로 유명한 스 위프트 등의 문인들이 많이 모였으며, 여기에서 많은 작품들이 탄생했기 때문에 당시의 문학을 '커피점 문학'이라고도 하다. 프랑스 파리에도 많은 커피점이 출현했다. 그 가운데서도 1686년 코메디 프랑세즈 가까이에 문 을 연 '카페 프로코프'는 유명하다. 자코뱅당 좌파의 지도자였던 에베르는 여기에서 클럽을 주재 했다. 카페 프로코프는 30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하며, 실내에는 이곳을 다녀간 고객들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 가운데는 라퐁텐, 볼테르 등 백과전서파 사람들과 당통, 로베스피에르, 발자크, 빅토르 위고, 베를렌 등이 있다. 설탕과 우유를 넣은 커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사치품이었지만, 이곳에 모인 학자와 일반 서민들은 서로 교류하여 학문과 정치의 대중화가 이루어졌다. 어떤 역 사가는 "커피점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치제도"였다고 말했다. 전세계적으로 커피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커피 원두는 거대한 이익을 낳는 국제무역상품이 되었다. 자본주의 여러 나라들은 다투어 커피 원두의 생산과 판매에 나섰다. 구미 자본주의 열강 은 지배하는 식민지, 종속국에 거대한 커피 농장을 만들도록 장려했다. 구미 자본과 생산지의 대 지주들은 더 많은 이윤을 노려 커피 농장을 늘려갔다. 그리하여 커피 생산국에서는 커피만을 경 작하게 되었다. 1962년 통계로는 수출에서 커피가 차지하는 비율이 엘살바도르, 과테말라가 72%, 콜롬비아가 66%, 아이티가 63%, 브라질이 59%, 에티오피아가 56%, 우간다가 44%, 아라곤이 41%로 나타났다. 이렇게 커피를 주로 생산하는 나라들은 세계 경제의 동향에 따라 심각한 영향을 받는다. 1929 년의 세계 대공황 때는 커피 소비가 줄어들자 브라질에서는 1933년까지 2,200만 자루의 커피를 기관차의 연료나 도로공사에 쓰거나 바다에 던져버리기까지 했다. 이 정도는 아니어도 커피 가격 은 늘 변동한다. 지금도 생산지가 선진공업국의 시장이자 원료공급지인 경제구조는 변하지 않았 다.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이 커피가 어디에서 어떤 사람들이 재배하고 있는지도 생각해보고 커 피의 문화사도 되새겨본다면, 의미있는 일이 아닐까? 조선에 차 마시는 풍습이 없는 것은 왜일까 홍차 하면 먼저 영국이 떠오른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하여 중국에서 대량으로 차를 수입하 였다. 중국에서 배에 실은 녹차는 덥고 습윤한 인도양과 아프리카 남부를 돌아오는 긴 항해로 많 이 변질되었다. 그래서 영국에 도착할 즈음에는 녹차가 홍차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다. 유럽에서 차를 마시는 습관은 17세기 초의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 네덜란드는 일본과 무역 하면서 일본인이 즐겨 마시는 차를 접하고 그것을 네덜란드로 가져왔다. 그리고 이 차는 프랑스, 독일, 영국으로도 전해졌다. 그래서 17세기 영국에서는 티(tea)가 아 니라 차(cha)라고 불렀다. 풍습은 일본에서 전해졌지만, 실제 차는 영국 동인도회사가 당시 청이 유일하게 개항했던 항구 광둥에서 가져왔다. 그리하여 광둥어의 '티'가 차를 표현하는 말이 되었 다. 명예혁명과 홍차 처음에는 차를 약으로 마셨다. 1641년에 출판된 네덜란드의 의학서에는 "차를 마시면 결석, 담 석, 두통, 풍치, 안염, 감기, 천식, 위장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쓰여있다. 수입량도 적고 값이 비싸 서민들은 손쉽게 구할 수 없었고, 왕후, 귀족, 대상인 등 상류계층이 주로 마셨다. 1688년 영국 의회는 제임스 2세의 전제정치에 종지부를 찍고, 제임스의 장녀 메리와 그녀의 남 편 윌리엄에게 네덜란드 군을 이끌고 영국으로 오도록 요구했다. 이에 제임스 2세는 프랑스로 도 망가고, 윌리엄과 메리가 공동으로 영국왕을 계승했다. 이것이 명예혁명이다. 새 여왕 메리 2세는 네덜란드에서 차 마시는 풍습을 가지고 왔다. 영국 왕실에서는 이미 홍차 를 마시고 있었지만, '차의 여왕'이라 불리던 메리의 영향은 대단하였다. 차는 급속하게 귀부인 들 사이에 보급되어 차츰 일반에까지 퍼졌다. 당시 영국에는 독일의 맥주, 프랑스의 포도주에 필적하는 국민 음료가 없었다. 커피, 코코아, 우유를 마시고 있었지만 우유말고는 값이 비싸서 서민들이 부담없이 즐길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홍차는 점차 서민들 사이에도 보급되었다. 산업혁명과 홍차 홍차를 마시는 풍습이 국민들 사이에 급속하게 퍼진 때는 산업혁명기이다. 산업혁명으로 말미 암아 영국의 인구는 급증하였다. 통계에 의하면 1750년의 약 650만 명에서 1831년에는 약 1,460 만 명으로 늘어났다(잉글랜드와 웨일스). 산업혁명은 또한 인구의 도시집중을 초래했다. 일자리 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농어촌에서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인구의 급증으로 우유의 공급이 달 리자 그 대용품으로서 홍차를 마시게 되었다.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으로 고통받던 노동자들은 하루의 피로를 진이나 알코올로 풀었기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도 점차 늘어났다. 산업자본가는 술을 마시지 않는 근면한 노동자가 필요해지자 정 부와 함께 알코올을 대체하는 음료로서 홍차를 장려했다. 정부는 홍차세를 폐지하여 값을 떨어뜨 려 홍차의 대중음료화를 꾀하였다. 차의 가격은 계속 하락해, 1680년에는 1파운드에 30실링 하던 것이 1740년에는 약 8분의 1인 4실링으로 내렸다. 영국인은 홍차에 설탕과 우유를 넣거나 우유를 듬뿍 넣어 마신다. 목축을 많이 하는 영국에서 는 양젖, 소젖 모두 풍부했지만, 설탕은 전량을 수입하고 있었다. 영국은 사탕수수 재배에 적합 한 서인도제도의 식민지 바르바도스 섬이나 자메이카 섬 등에 대단히 넓은 플랜테이션 농장을 조 성하였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사탕수수 밭에서 일할 아프리카 흑인노예들이 플랜테이션 농장에 실려 왔다. 영국은 노예무역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왕립 아프리카 회사를 설립하여 스페인에서 아프리 카 대륙에 이르는 독점적인 노예 공급권을 얻어 대규모 노예무역을 하였다. 영국의 자본가는 설 탕과 노예무역으로 거액의 자본을 축적하여 영국의 자본주의를 한층 발전시켰다. 중국 차에서 인도, 실론 차로 영국은 북아메리카 동부에 세운 13개 식민지에 혹독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쳤다. 본국과 경쟁관 계에 있는 식민지 산업을 제한하는 각종 조례를 강요하고, 세금을 무겁게 물려 성장하고 있는 식 민지의 상공업을 억압했다. 이들 식민지는 서인도제도에서 설탕을 수입하여 럼주를 제조했는데, 영국은 1733년 당밀조례를 제정하여 식민지에 보내는 설탕에 높은 관세를 물렸다. 1763년에는 악명 높은 인지조례를 발표하였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혀 철회했지만, 1767년에는 식민지에서 수입하는 납, 종이, 유리, 차에 수입세를 부과하는 타운센드 조례를 제정하였다. 이 것도 불매동맹에 의해 폐지할 수밖에 없었던 영국은 동인도회사에 차의 독점판매를 허가하는 차 조례를 제정하고 파산 위기에 놓인 동인도회사를 구제하려고 했다. 1773년 12월 16일 밤, 보스턴 항구에서 급진파 '자유의 아들'에 속한 무리가 인디언으로 가장 하고 차를 선적한 동이도회사의 배에 올라갔다. 그리고는 "보스턴 항구를 차항구로 하라!"고 외 치면서, 342상자의 차를 바닷속에 던져버렸다. 이 보스턴 차 사건은 식민지와 본국의 대립을 적 나라하게 드러내면서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차 불매운동이 확산되면서 식민지 사람들은 차 대신에 커피를 더 많이 마시게 되었다. 미국인 가운데 커피광이 많은 것은 이 전통이 지금도 살아 있기 때문이다. 아메리카 커피는 홍차보다 담 백하고 설탕을 넣지 않고 몇 잔씩 마시는데, 설탕을 넣지 않는 것도 당밀조례에 대한 반발에서 기인한 습관으로 보인다. 조선에 차 마시는 풍습이 없는 것은 왜일까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였던 미국의 독립으로 영국과 동인도회사는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중국 에서 수입하는 차값을 치를 은이 점점 부족해지자 고심하던 동인도회사는 벵골 지방의 농민들에 게 강제로 양귀비를 재배하게 했다. 그리고 이 양귀비로 아편을 만들어 중국에 팔아, 결국은 아 편전쟁을 부르게 된다. 이 무렵 영국은 인도 토후의 저항도 거의 제압하여 전인도를 지배하였다. 영국은 중국보다 가 까운 인도에서 중국의 차나무를 가져다 여러 차례 차 재배를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매번 성공하 지 못했다. 그러다 아삼 주에서 야생 차나무가 발견되었고, 인도에서도 차를 재배하기 시작해 북 인도에까지 차 농장이 늘어났다. 남쪽지방에서도 실론이 차 산지로 자리를 잡아 영국은 대영제국 안에서 차를 자급하는 데 성공했다. 실론 차 농장의 노동력 부족으로 고심하던 영국은 인도 타밀 인을 강제로 끌어와 일을 시켰다. 현재 스리랑카(실론 섬)에서 서로 다투고 있는 신하리인과 타 밀인의 대립은 이 영국의 정책이 발단이 된 것이다. 조선에서는 '차'로는 인삼차 등을 마시며, 식후에는 끓인 물이나 숭늉을 마셨다고 한다. 그리 고 차 대신에 과일이나 꿀물이 발전했다고 한다. 왜 차를 마시지 않았을까? 그것은 조선 왕조의 불교배척과 관계가 있다. 조선은 구세력을 타파하기 위하여 고려 왕조에서 많은 토지를 가지고 있던 옛 관료나 대사찰의 토지를 몰수하여 새 관료에게 나눠주었고, 많은 사찰을 없앴다. 왕도를 한양으로 옮긴 것도 막강한 불교세력에 둘러싸여 있는 개성을 꺼렸기 때문이다. 불교의 배척과 함께 차도 멀어졌다. 다도예술은 불교문화의 하나로 발달했으며, 조선에서는 사 찰이 차를 재배하거나 제조하는 경우가 많았고, 사찰의 중요한 재원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때까 지 널리 퍼져 있던 차 마시는 풍습도 급속히 쇠퇴했다. 최근 한국에서는 수입해오는 커피가 아닌 녹차를 마시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또한 조선이 불교를 억누르고 주자학을 채용한 것은 조선의 도자기에도 변화를 주었다. 검소함 과 청결함을 소중히 여기는 주자학은 도자기에도 영향을 미쳐, 청초하고 힘찬 것이 요구되었다. 그래서 고려 시대의 청자 대신에 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음식문화를 포함한 문화에는 당시의 정치, 사회의 동향이 예민하게 반영된다. 수도원은 맥주공장이기도 했다 '눈에는 눈'으로 잘 알려진 함무라비 법전에는 다음과 같은 맥주조항이 있다. 제 108조 : 만일 맥주집 주인여자가 맥주값을 곡물로 받지않고 은으로 받거나 곡물의 양 보다 맥주를 적게 줄 경우에는, 그 여자를 벌하여 물 속에 빠뜨린다. 제 109조 : 만약 수배중인 범인이 맥주집에 들어왔는데도 이를 숨기고 당국에 연락하지 않는 술집 여자는 사형에 처한다. 제 110조 : 만일 여사제가 맥주집을 연다든지 맥주를 마시러 맥주집에 들어가는 경우에는 화형에 처한다. 제 111조 : 맥주집 주인여자가 60크아의 맥주를 외상으로 팔면 돈을 받을 때 반드시 50크 아의 곡물을 받아야 한다. 여성 독자들이 이 내용이 너무 편파적이고 가혹하다고 분노할 것이다. 당시 메소포타미아 에서는 여성의 지위가 낮았지만, 맥주집은 거의 여성이 경영하였고 대부분 집에서 만든 맥 주를 판 듯하다. "맥주는 농업만큼 아주 오래되었다"고 하듯이, 맥주의 기원은 인류가 밀을 재배하기 시작 한 무렵까지 거슬러올라간다. 함무라비 법전에 있는 것처럼 함무라비 왕(기원저 1728-1686년 재위) 시대의 바빌로니아 에서는 한 달에 40만킬로그램의 보리와 밀의 맥아를 가공하는 대규모 양조장이 지어졌으며, 바빌론은 맥주의 도시이기도 했다. 거의 호프를 이용했는데, 흑맥주, 적맥주 등 종류도 다 양하였다. 맥주로 고주망태가 된 이집트 학생들 이집트에서는 농업과 저승의 신으로 유명한 오시리스 신이 맥주의 신으로서도 숭앙받았 다. 기워전 2500년경 제 5왕조 시대에 제작된 부조에 맥주의 양조공정이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2000년경의 이집트 문자 기록에 맥주를 마신 학생들에 대한 교사의 말이 남아 있다. 학생들은 책 읽기를 잊고 쾌락에 심취하여 이 술집에서 저 술집으로 돌아다닌다. 매일 밤 맥주 냄새를 찾는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맥주 냄새와 술은 그들의 영혼을 타락시키고 그들 의 예술은 부서진 노처럼 정처없이 방황하고 있다. 또한 대영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파피루스 문서에 의하면,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300년 에 벌써 전문적인 기사의 지도 아래 대규모로 맥주를 제조하였다고 한다. 맥주 생산은 국가 의 관리 아래 훌륭한 산업으로서 고도로 발전하였으며, 생산된 맥주는 바닷길을 통해 활발 하게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수출되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도 맥주를 많이 소비했는데,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술의 책'에 서 맥주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맥주 천재는 게르만인 이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에서 게르 만인의 맥주 양조를 언급하고 있다. 게르만 왕국, 프랑크 왕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카를 대제는 원정시에는 반드시 맥주기술자를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중세 유럽 역사에서 수도원이 한 역할은 매우 컸다. 비옥한 농경지는 대부분 수도원이 개 간했으며, 낙농, 농경기술, 각종 학문도 수도원이 계승, 발전시켰다. 프랑스의 수도원은 포 도주, 독일의 수도원은 맥주이 양조기술을 보존, 발전시켰다. 820년경 독일의 세인트 갈렌 수도원의 설계도에 따르면, 세 곳에 거대한 양조장과 원료저장실, 맥아건조실, 냉각실, 발 효실, 통공장까지 갖춘 어엿한 맥주공장이 있었다. 중세 유럽의 도시에서는 맥주 양조업자들이 길드를 조직하여 시 참사회의 감독을 받았다. 호프를 많이 써 쓴맛이 조금 나는 독일 맥주는 외국에서도 인기가 높아 브레멘이나 함부르 크, 단치히(폴란드의 그단스크) 등 한자동맹 도시들은 맥주 수출로 번영했다. 함부르크에서 는 17만 통의 맥주를 만들었으며, 이중 10만 통은 수출하였다. 1376년 이 도시의 직인 1,150명 중 457명이 맥주 양조 직인이었고, 이 도시의 수출 총액의 3분의 1을 맥주가 차지 하고 있었다. 분열된 독일에서는 각국 왕실에도 궁중 양조장을 설치하여 맛있는 맥주 제조에 노력했으 며, 여러 도시의 맥주 직인이 제각기 솜씨를 발휘해 지역마다 맛이 다른 맥주가 속속 탄생 하였다. 그러나 그후 독일의 역사를 1세기나 되돌렸다는 30년전쟁(1618-1648)으로 독일은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졌다. 땅은 척박해지고 맥주 원료도 부족하고 품질도 매우 나빠져 맥 주산업은 위기에 봉착했다. 이리하여 맛이 없는 맥주보다는 홍차나 커피를 더 찾게 되었다. 1777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맥주, 커피 령'을 발포해, 독일인의 건강과 강한 민족성은 국산 맥주에서 길러졌다면서 커피를 마시지 말고 맥주를 많이 마시도록 장려했다. 이것으로 커피 소비는 줄지 않았지만, 독일의 맥주산업은 부흥했다. 19세기에는 국가가 맥 주의 양조권을 장악하고 법령으로 맥주의 순도, 원료 및 효모의 규칙적인 배양, 냉각발효법 을 규정해 맥주의 품질 향상을 꾀하였다. 이리하여 뮌헨 맥주로 대표되는 우수한 맥주가 만 들어진 것이다. 메이플라워 호와 맥주 1620년 영국 등지에서 종교 박해를 피해 102명의 청교도가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플리머 스에 상륙했다. 그들은 배안에서 사회계약에 의한 자유로운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내용의 메 이플라워 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낯선 땅의 생활환경은 너무나 혹독하여, 첫 번째 겨울을 나는 동안 반수의 사람들이 추위와 굶주림, 병으로 죽었다. 그때의 기록에 "우리는 이제 오 지로 가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식량은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특히 맥주가.." 라는 구절이 있다. 냉혹한 자연과 싸우는 그들에게 맥주는 가장 중요한 식량이었다. 먹을 것이 부족한 사람들은 맥주로 영양분을 보충했다. 물론 메이플라워 호가 싣고 간 맥주가 아메리카에 건너간 최초의 맥주는 아니다. 뉴욕에 서는 메이플라워 호가 도착한 지 3년 후인 1623년에 최초의 맥주공장이 세워졌다. 그리고 17세기 중엽에는 뉴욕에 있는 상점 네 곳 가운데 한 곳은 술집 아니면 담뱃가게, 맥주집이 었다고 한다. 미국의 발전과 함께 맥주의 수요도 높아져 19세기 후반에는 독일을 제치고 세 계 최대의 맥주 소비국으로 올라섰다. 세계 제일의 맥주 소비국으로 성장한 미국에서 갑자기 맥주를 비롯한 모든 술의 제조와 판매가 14년 동안이나 금지되었다. 이미 알코올 중독 등이 사회문제가 되었고, 1826년에는 미국금주촉진협회가 창설되어 활발한 금주운동을 펼치고 있었다. 그러나 금주 문제가 갑자 기 여론화되어 1919년 연방의회에서 금주법이 가결되고 다음해에 제정된 데는 다음과 같은 배경이 있다. 베 1차 세계대전중에 독일의 U보트가 영국의 루시타니아 호를 침몰시켜 그 배에 타고 있 던 114명의 미국인이 희생되었다. 이것이 미국의 참전 구실이 되고, 서부전선에서 독일군과 교전하기에 이르자, 갑자기 미국 내에 반독일 분위기가 높아졌다. 그리고 맥주 양조업자의 대부분이 독일계 시민이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반감도 일시에 높아졌다. 거기에 전쟁 돌 입과 함께 식량확보가 우선과제였기 때문에, 밀로 맥주를 만들기에는 아깝다는 주장도 순순 히 받아들여졌다. 이리하여 세계 최대의 맥주 소비국이 1933년 12월까지 금주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 법률 이 완전히 지켜지지는 않아, 갱단은 술의 밀조와 판매로 막대한 이익을 올리고 FBI는 이들 을 적발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연방의회에서는 1933년 금주법의 폐지를 결정했지만, 지방분권이 발달한 미국에서는 주 밑에 있는 카운티라는 행정구에서 지금도 금주법을 존속시키는 곳도 있고 또는 새로 제정하 기도 한다. 그것을 드라이 카운티(dry county)라고 하는데, 미국 여행중에는 드라이 카운티 때문에 덜컥 겁을 내고 숙소에서 가볍게 한 잔 마시는 것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 다. 끽연자는 보는 대로 처형! 1492년 10월 13일 콜럼버스 일행이 신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최초의 상륙지 산살바도르 섬 에서 원주민들에게 콜럼버스가 선물한 유리구슬, 거울 등에 대한 답례로, 원주민은 신선한 야채와 강한 향기가 나는 잎사귀를 가져왔다. 이 잎사귀야말로 나중에 구세계의 사람들을 매료시킨 담배였다. 인디오는 이 잎사귀를 타바코(tabaco)라고 불렀다. 콜럼버스 일행은 각지에서 인디오들이 이 잎사귀에 불을 붙여 뿜어대는 연기를 온몸에 뒤집어썼다. 이것은 손님을 환대하는 인디 오의 관습이었다. 인디오는 담배를 신성한 의식뿐만 아니라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쓰고 있었다. 인디오들은 담배를 외상, 기침, 치통, 매독, 류머티스, 기생충, 발열, 딸꾹질, 천식, 가벼운 동상, 편 도선염, 위장병, 두통, 코감기 등을 치료하는 약으로 이용했다. 의학적으로도 담배에 들어 있는 니코틴에 진정 및 자극 효과가 있으며 질병의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담배의 기원은 마야 문명(13-14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마야인들은 태양신을 숭배하 였는데, 태양은 곧 불의 왕이라는 연상에서 불이나 연기를 신성시했다. 그리고 향기가 나 고, 들이마시면 기분이 좋아지는 담배 연기에 불의 신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 매우 소중히 여겼다. 왕비의 약초 담배는 신대륙으로 대항해를 떠난 선원들이 스페인, 포르투갈로 들여왔다. 특히 포르투갈 의 수도인 항구도시 리스본에서 끽연 풍습이 유행했고, 여기에 모인 사람들에 의해 담배는 유럽 곳곳에 퍼졌다. 리스본에 머물고 있던 로마 교황의 사절 산타 크로체가 1561년에 로마 교황에게 담배의 종자를 헌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은 천식에 효과가 있는 약초로서 헌상되었으며, 성직자들 사이에서도 끽연이 널리 유행했다. 교황 우르바누스 8세는 성직자의 끽연은 신을 모독한다 하여 금지하는 교서를 내렸으나 효과가 없었다. 1627년에 이탈리아의 만트바 공국이 담배를 전매하여 그 수익을 국가 재정에 보탰는데, 이것이 최초의 담배 전매제도이다. 1559년 리스본 주재 프랑스 대사인 장 니코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2세와 모후 카트리네 데 메티치에게 의약용으로 담배를 헌상했다. 카트리네는 이것을 가루담배로 만들어 두통약 으로 애용했다. 이 일로 담배는 '왕비의 약초'라고 불렀다. 그러다 후에 프랑스에 담배를 들여온 장 니코를 기념하여 니코티아누(니코틴)라 불렀으며, 이것은 담배의 학명이 되었다. 니코가 담배를 헌상한 지 3년 후에는 프랑스 전토를 휩쓴 종교분쟁인 위그노 전쟁이 발발 하였다. 열성적인 카톨릭신자였던 카트리네는 1572년에 수만 명의 위그노(신교도)를 학살했 다. 유명한 성 바르테르미 학살의 주역이 된 것이다. 악명 높은 카트리네였지만, 프랑스에 맛있는 빵 제조법을 전하기도 했다. 카트리네는 이 탈리아 르네상스 때 문인, 예술가를 보호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에서 태어났다. 르네상스 기 의 이탈리아는 예술뿐만 아니라 경제도 발전하였으며, 빵의 품질도 매우 좋아졌다. 메디치 가는 실력 있는 빵 직인을 많이 거느리고 있었다. 대학살의 막후인물이었던 카트리네는 한 편으로는 예술을 사랑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였다. 후에 프랑스 혁명으로 유명해진 파리 의 튀일리 궁은 그녀의 예술감각을 반영하여 꾸민 궁전이다. 영국에 담배를 전한 사람은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쳐부순 프랜시스 드레이크와 월터 롤리 다. 롤리가 자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것을 불이 난 줄로 착각한 하인이 롤리의 머리에 한 동이에 물을 끼얹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롤리는 미국의 버지니아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영국에 담배와 감자를 전한 인물로 전해지 고 있다. 롤리는 독신이었던 엘리자베스 1세의 애인이었는데, 엘리자베스 여왕이 죽고 스코 틀랜드 스튜어드 가의 제임스 1세가 즉위하자, 충성을 의심받아 관직을 박탈당했으며, 여러 차례 런던 탑에 투옥되다가 1617년에 처형당하였다. 제임스 1세가 롤리를 박해한 데는 그가 담배를 아주 싫어한 원인도 있었다. 그는 왕권신 수설의 주창자로, 직접 '자유로운 군주국의 참된 법'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진정한 군주는 신이 창조하는 것이며, 오직 신만이 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고 국민은 군주에게 절대 복 종할 의무가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제임스 1세는 영국왕에 즉위한 다음해인 1604년에 '담배에 대한 도전'이라는 글을 발표하 여, 끽연은 야만인의 나쁜 풍습이라고 비난했다. 이것을 계기로 영국에서는 끽연을 둘러싼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졌다. 1605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제임스 1세의 임석 하에 담배 대토론회가 열렸다. 왕은 이 자리에서 담배 금지파가 다수를 차지해 금지령이 나오기를 기대했으나 찬성론도 많아 금지 령은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그는 담배의 수입에 높은 관세를 물리는 한편 담배를 나라에서 전매하도록 하였다. 제임스 1세의 뒤를 이은 찰스 1세도 의회를 무시한 전제정치를 펴는 한편 담배의 전매를 강화하고 여러 차례 끽연을 단속했다. 이리하여 국왕과 의회 및 의회를 지지하는 국민들 사 이의 대립은 점점 첨예해져, 1649년의 청교도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이 혁명의 성공으로 끽 연은 자유로워져 금세 국민들 사이에 널리 퍼졌다. 1665년에는 영국에서 질병이 돌았는데, 그 무렵 프랑스에서 전해진 코로 들이마시는 담배가 질병을 예방한다고 하여 크게 유행했 다. 이 무렵 영국에서 유행하고 있던 커피와 함께 담배는 영국 시민의 사교에서 필수품이 되었다. 시민혁명을 성공시켜 권력을 장악한 영국의 부르주아는 미국의 버지니아에서 담배를 수입 하여 유럽 각지에 팔아 넘겨 큰 재미를 보았으며, 동시에 끽연을 세계 각지에 널리 전파하 게 되었다. 파이프 등 끽연도구가 영국에서 발달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미국 버지니아 의 담배농장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끌려온 흑인노예가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렸다. 나폴레옹은 영국을 괴롭히려고 1806년 대륙봉쇄령을 내려 유럽 나라들과 영국 간의 통상 을 금지했다. 그 결과 유럽으로 담배의 유입이 중단되어 담배 가격이 치솟았다. 나폴레옹은 이것에 눈을 돌려 1810년 담배의 전매제를 부활시켰다.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전매제였다. 로마노프 왕조가 전제정치를 펴고 있던 러시아에서는 끽연을 엄하게 금지하였다. 끽연자 는 시베리아 유형, 재산몰수, 코베기 형 등을 받았다. 러시아에서 끽연이 자유로워진 것은 유럽 각지를 둘러본 뒤 애연가가 된 표트르 1세때부터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도 끽연이 화제의 원인이 된다는 점과 종교적 이유에서 엄하게 금 지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제 17대 술탄이며, 이웃 나라인 사파비 왕조의 페르시아에게서 바그다드를 되찾고 투르크 제국의 강대화에 힘썼던 무라트 4세는 철저한 끽연 탄압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서민처럼 변장하고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가 끽연자를 보면 당 장 그 자리에서 목을 쳤는데, 그 수가 2만-3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당연히 국민 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그가 죽은 지 8년 뒤인 1648년 담배 금지령이 풀렸다. 많은 나라에서 담배는 전매제를 통해 국가의 세금 수입을 늘리는 데 기여했으나, 현실적 으로 담배는 국가의 수입보다 더한 경제적 손실을 가져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담배 때문에 사망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들과 그 가족이 겪는 고통과 비참함은 어떤 보상으로도 치유할 수 없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들의 피해와 환경에 미치는 영향도 무시할 수 없 을 정도이다. 인류는 담배를 피운 이래 예술적인 끽연도구를 수없이 만들어왔으며, 담배에 얽힌 신화, 전설, 풍속을 낳는 등 '담배문화'를 발전시켜왔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의 문화를 한 층 풍부하게 한 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담배의 역사를 더듬어보면, 담배가 유럽에 전 해진 이래 항상 담배를 둘러싼 시비가 있었고, 이제는 담배유해론이 힘을 얻고 있는 듯하 다. 맺는 글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사회의 정세나 잇따라 발생하는 세계의 대변혁을 바라보노라 면, 그러한 문제의 원인과 역사적인 배경은 무엇인지 알고 싶어진다. 현재의 세계는 하나가 되었다. 따라서 모든 나라는 세계와 유기적인 연관을 맺으며 고립 해서는 존재할 수가 없다. 이러한 시대에 광범위한 세계의 역사를 이해하고 현재의 세계와 과학, 기술, 문화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공부해야 한다는 중요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 지가 없을 것이다.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가르친 지 벌써 30년이 되었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미숙하 기만 했던 나는 항상 수업에 만족할 수가 없었고, 조금이라도 알찬 수업을 해보려는 바람으 로 수업준비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본 내용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습도 늘상 똑같은 것의 반복일 뿐 아무런 진보가 없었다. 이러한 반성에서 출발하여 예습 대상을 넓히고, 여러 각도에서 세계사를 공부해 수업에서 살리려고 시도했다. 그 가운데 우 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을 통하여 세계사를 공부하는 방법은 매우 바람직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목욕), 빵과 설탕을 넣은 커피와 감자와, 소금을 친 달걀 프라이를 먹는다. 식사 후에 아버지는 자동차를 타고 출근하고, 나는 역까지 도로를 자전거 를 타고 가 철도로 통학한다"고 말하듯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이 걸어온 역사를 공부함으 로써, 과거 시대가 생생하게 눈앞에 전개되는 데 매력을 느끼고 그것들을 수업시간에 학생 들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것이 학생들의 호평을 얻었으며, 무미건조한 암기 방법으로는 친숙해지지 않던 세계사에 관심을 갖는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세계사를 재미있게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쓰 게 되었다. 나는 이 기회에 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장인이나 주부들을 비롯한 푹 넓은 독자층 의 지적 요구에도 부응하고자 여러 가지 새로운 테마들도 많이 소개했다. 이 책은 '사물'들에 대해 전문적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은 피하고 고등학교에서 배운 세계 사의 범위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집필하려고 했다. 이 책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혀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풍부한 세계의 역사를 공부하는 즐거움, 희열을 느끼 는 계기가 된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