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개의 병원을 가진 남자 지은이: 도쿠다 도라오 출판사: 열린 사회 분노와 슬픔에 사로잡혀 응급의료 제도에 대한 불만 나는 호고 현 타카스나에서 태어나 가고시마 현의 도쿠노시마에서 자랐다. 그 곳은 한적하고 소박한 섬으로 내가 어렸을 때 세 살 난 남동생이 죽었다. 동생 은 한밤중에 병이 났다. 엄마는 내게 비교적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의사 선생 님한테 왕진을 부탁 드리러 갔다 오라고 말했다. 나는 순간 겁이 났다. 달도 뜨 지 않은 어둡고 캄캄한 산길을 갔다 온다는 것이 너무도 무서웠고, 도깨비가 나 타나 날잡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옴짝달싹 못했다. 하지만 어린 내가 보기에도 동생의 얼굴은 밀가루를 뿌려 놓은 것처럼 창백했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파르르 몸을 떨어대는 동생의 모습을 머리 속에 되새 기며 나는 달도 뜨지 않은 캄캄한 밤길을 단숨에 뛰어갔다. 그리고는 의사 선생 님한테 간곡하게 왕진을 요청했다. 하지만 의사는 나의 울음 섞인 부탁에도 아 랑곳하지 않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오지 않았다. 다음날 다른 의사를 찾아갔고, 그가 왔을 때 동생은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단 한번의 진료조차 못 받아 보고 죽은 동생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구석이 아려온다. 허망하게 죽은 동생의 시신 앞에서, 나는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의사는 환 자를 치료해야 하는 것이 의사의 기본 자세이다. 그럼에도 오늘날의 일본엔 의 료에 대한 불안고 불신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있다. '의료의 황폐화' 또는 '의료 의 사막지대' 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있는 병인데도 불구하고, 야간이나 휴일, 연휴로 쉬는 명 절에 발병했다는 이유로 제때에 치료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는 경우도 있다. 1978년 9월 11일 오전 8시에 개설한 오사카 야오 시의 야오 도쿠슈카이 병원에 의식 불명의 청년이 구급차고 실려 왔다. 응급실로 옮겨진 천년은 오른쪽 폐장 이 파열돼 있었다. 그리고 제3,4 경추가 골절을 입은 데다 심장의 위치가 틀어져 빈사 상태의 중상이었다. 청년의 부모에게 물으니, 전날 밤 10시쯤에 교통사고를 당했고 그 당시 이미 의 식을 잃었지만,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처음에 옮긴 병 원에서는 환자의 이마에 차가운 찜질을 하고 산소호흡기만 대줄 뿐, 더이상의 응급처치는 해주지 않았다.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해 부모는 간호사에게 응급 처치를 해줄 것을 몇 번인가 요구했지만, 병원측에서는 "아무튼 검사는 내일 아 침 9시에나 할 수 있다" 며 한마디로 잘라 거절하고는 간호사실을 잠가 버렸다. 그렇게 아픔으로 신음하던 환자가 동이 틀 무렵인 새벽 5시쯤 되자, 갑자기 움 직이지 않았다. 부모는 간호사한테 아들이 몸을 움직이지 않는다며 울면서 호소 했지만 병실로 온 간호사는 아까보다 많이 진정돼서 그럽니다" 라는 말만 남기 고 나가 버렸다. 사고 직후부터 7시간이 경과했지만 환자는 적절한 응급처치도 못 받고 방치된 채 알량한 검사를 위해 더 기다려야 했다. 불안해진 부모는 알고 지내던 시의원 에게 전화를 걸어 아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시의원은 도쿠슈카이 병원이 24시간 진료한다는 사실을 알려준 뒤, 환자를 옮길 것을 권하고 구급차를 수배해 두었 다. 병원에 구급차가 도착하자, 또 다른 문제가 발생했다. 원장이 9시에 출근하는데 원장의 허락 없이는 절대로 퇴원시킬수 없다며 간호사가 환자의 이송을 거절한 것이다. 빈사 상태의 아들을 방치한 채 제멋대로 구는 병원의 태도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부모는 "어 이상 내 아들을 이대로 둘 수 없다" 면서 아들을 구급차에 태우 고 도쿠슈카 병원으로 갔다. 청년은 중환자실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지 열흘 만 에 의식을 회복했다. 만일 그 청년을 그대로 방치했다면 그는 몇 시간 뒤에 죽 었을지도 모른다. 아직도 이 같은 일이 일본의 여러 병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다. 병원에 입원하고서도 죽는 일이 아직도 비일비재하다. 심야나 휴일에도 구급차는 응급 환자를 수송하지만 병원 업부 시간이 끝났다는 이유로 문전박대 당하는 실정이 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어떤 유명한 탤런트의 한 살 난 아들이 갑자기 토하 면서 복통을 일으켰다. 곧바로 병원으로 옮겼지만 마침 그날이 일요일이라서 입 원만 한 채 아무런 처치도 받지 못했다. 그런데 토하던 아이의 배가 잠차 불러왔다. 아들의 상태가 너무도 심각해지자 걱정이 된 아버지는 아들을 업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정신없이 헤매고 돌아다니 면서 발을 동동 굴렀다. 몇 군데를 돌아다닌 끝에 겨우 한 병원에서 진료를 받 고 늦게나마 장중적중(장의 일부가 밑에 달린 장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장폐색 증의 하나)임을 발견하고 수술을 받았지만 결국 아이는 죽고 말았다. 현대 의학에서 장중적중으로 죽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제때에 처치만 받으면 고 압 관장만으로 해결이 가능해 수술할 필요도 없다. 단지 일요일에 발병했기 때 문에, 입원을 하고도 검사와 치료를 제때 못 받거나 시기를 놓쳤기에 살 수 있 는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이다. 그 당시 여덟 번째 도쿠슈카이 병원을 건설 중인 가나가와 현의 치가사키 시에 서도 시 공무원인 간부 직원이 위천공에 걸려 구급차로 시외에 있는 병원으로 후송했지만 너무 늦게 처치를 받는 바람에 복막염을 일으키고 죽었다는 이야기 를 들은 적이 있다. 위천공은 이미 20년 전에 치료법을 발견한 병으로 수술도 간단하고, 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으며, 실패할 확률도 없는 100%완치가 가능한 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환자는 죽고 말았다. 그 이유는 치가사키 시의 응급의료 체제가 최악의 상태였기 때문이다. 야간 응 급환자의 대부분은 시외의 병원으로 후송된다. 그러나 그곳에도 환자를 받아들 일 여유가 별로 없다. 구급대원의 이야기로는 환자를 받아 주는 병원을 찾는 데 만도 장장 2시간이 걸리며 32번이나 전화를 건 적도 있다고 한다. 구급차가 사고 현장에 도착하면, 주위에 모인 시민들은 "무얼 꾸물거리는 거야, 왜 빨리 운반하지 않나" 며 다그치듯이 말한다. 그들은 마치 조금도 빨리 달리지 않고, 어둠 속에서 구급차를 멈춘 채 받아 줄 병원을 정하기까지 가만히 기다렸 다는 투로 말한다. 환자를 받아 줄 병원을 찾아 헤매는 사이에 환자의 상태는 악화되고, 결국에는 아무런 도움도 돼주지 못하고 만다. 일반적으로 건강할 때는 위급한 상황에서 병원을 찾아 헤매거나 제때에 응급처 치를 못 받은 사람의 애기를 듣게 돼도 관심조차 없다. 막상 자신의 가족이나 친척, 아는 사람이 갑자기 발병하거나 사고를 당해 현재의 응급체계가 전무한 상태임을 생생하게 체험하고는 아연해 한다. 의료의 본분을 포기한 의료보험 메이지 이래 정치와 경제는 혁명적인 변화를 이룩했고, 국민 생활도 서구의 선진국에 비해 손색이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의료 분야는 미국에 비해 한참 뒤떨어져 있다. 의학은 진보한다고 하지만 의학 교육은 메이지 이래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의료업계 종사자의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태도는 오히려 후퇴하고 있는 실정이다. 메이지, 다이쇼, 쇼와의 초기, 전후 20년까지는 갑자기 병이 났을 때 왕진을 부 탁하거나 응급처치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을 때 거절하는 병원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국민의료보험제도가 실시되고 나서부터 환자가 늘어난 탓도 있지 만, 왕진을 부탁하면 거절하는 의사가 많아졌고, 자리를 비우는 의사도 늘어났 다. 1950년대는 응급 병원의 전성기였다. 그런데 노인 의료가 무료화되면서부터 입 원의 팔요 없는 노인까지 입원함으로써 많은 병원이 웅급지정을 반납해 일반 병 원은 마치 양로원으로 변해 버렸다. 오늘날 공립병원을 비롯한 개인병원까지 90% 이상의 병원이 응급환자를 받지 않는 실정이다. 국민을 위한 제도로 만들어진 국민의료보험과 노인 의료의 무상 실시가 당연히 받아야 될 의료 행위로부터 응급환자를 멀어지게 했으며, 의료의 본분을 포기하도록 했다. 지금도 시대는 변하고 있다, 옛날에는 국민의 교육 수준의 높지 않아 대학을 나 온 의사는 환자의 존경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날은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져 냉철하고 비판적인 눈으로 의사와 의료 실태를 파악하고 있다. 또 요즈음 옛날에 비해 의식주가 어느 정도 만족되면서 국민 대다수가 무엇보다 건강의 중요성을 실감하고 있다. 시대가 이렇게 변했는데도 의료계만은 시대의 흐름에 역행, 아직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 안이한 의료를 실시하고 있으며, 타산 적인 의사가 늘어나는 실정이다, 세간에서는 "병은 자신이 고치고, 돈은 의사가 번다"거나. "생명을 빼앗고 돈을 빼앗고 선물도 받고 나서는 다른 얼굴을 하는 게 의사이다"라는 말이 공공연하 게 돌고 있다, 아무리 떠도는 말일지라도 그런 말까지 듣고서, 의사인 우리가 이 대고 있을 수 있겠는가. 연중무휴, 24시간 진료는 의료의 기본 1980년 4월 27일, 가나가와 현의 치가사키 시에서 거행되었던 치가사키 도쿠 슈카이 병원의 개원식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개원 인사를 했다. "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 치료비 걱정 없이 안심하고 최선의 의료를 받을 수 있 는 사회'를 만드는 게 우리 병원의 이상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나,'는 부자이든, 서민이든, 대도시든, 농촌이든, 외딴 섬이든, 개도국이든 그 전부를 내포합니다." 복지의 기본은 의료에 있다, 의료의 기본은 응급의료에 있다. 만성병의 진료화 치료는 의사의 상황에 따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르는 응급환자에 대한 의료를 소홀히 하면서 제대로 된 의료를 한다고 할 수는 없다. 의사 중심이 아닌 환자 중심의 입장에 서는 일의 기본은 무엇보다 먼저 응급의 료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중무휴, 24시간 진료가 최우선적으로 실시되어야 한다. 의료는 우선 응급의료, 반성의료, 예방의료 순으로 생각하 수 있다. 나는 일본에 서 의료시설이 부족한 지역을 없애겠다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 환자 의 입장에서 병원을 만들어야 한다고 결심했다. 병원을 세우게 한 원동력, '분노의 슬픔' 1973년, 두쿠다 병원을 처음으로 개원하고 나서 6년 동안 5개의 병원을 개설 했고, 그 후3개의 병원을 건설 중이었다. 치가사키 도쿠슈카이 병원을 계기로 나 는 수도권과 각 도를 비롯한 시나 읍까지의 전국 각 지역에 참다운 의료를 실천 하는 환자 중심의 병원을 건설할 계획을 추진 중에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계획에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는 의사도 있다. '연중 무휴, 24시간 진료'나 환자가 주는 선물을 일체 받지 않습니다'는 우리 의사들의 행동 이념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 당연함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진다 면 국민의료에 대한 불신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이루자 는 것이고, 또 전국적으로 확대하자는 것이다. 내가 지금처럼 열심히 병원을 만들게 된 동기는 현재의 의료 실태와 그 속의 모 순에 대한 '분노와 슬픔' 때문이다. 나의 분노와 슬픔의 밑바닥에는 재가 태어나서 자란 도쿠노시마가 있다. 도쿠노 시마가 아닌 다른 지역이었다면 동생과 아버지는 ㅈ지 않고 아직 생존해 있을지 도 모른다. 나에게 도쿠노시마는 적국의 의료 소외 지역, 농촌과 외딴 섬, 개도 국의 상징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도쿠노시마를 떠올리면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소외돈 사람들을 위해 전력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력을 다해 노력해 왔다. 인생은 한번밖에 없다. 누구나 언제 가는 죽게 마련이다. 의사인 나는 참다운 의료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 면 안된다. 죄책감이 들거나 마음에 꺼림 직한 일을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망치 는 것이며 죽는다 할지라도 편할 수가 없다, 현재 나는 107개의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진정한 의료를 실천하는 병원을 결국 에 만들겠다는 구상은 나를 포함한 도쿠슈카인만의 노력으로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협력자가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나의 계획에 많은 사람을 불러들이고 싶다. "현재 당신이 살고 있는 곳의 의료 시설이 만족스러운지, 어떤 지를 재고하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의료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우리 모두 힘을 합쳐 노력하면 어떻겠습니까?" 우리 도쿠슈카이는 이상적인 의료를 위해 모두 협력하기를 바랄 뿐이다. 의료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 의료를 국민의 것으로 하기 위해 일대 사회운동을 일으켜애 한다는 것, 이것이 곧 나의 목표이자 소원이다, 우리를 가르친 어머니의 생활태도 나는 어려서부터 어머니가 한시라도 일손을 놓고 쉬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또한 어머니가 주무시는 모습을 본 적도 없다. 어머니는 잠을 자지 않고 쉬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하시는 분이었다. 매일 아침, 새벽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불을 지피고, 장작으로 큰 냅비 가득히 고구마를 삶았다. 우리 가족이 먹을 고구마와 돼지에게 줄 고구마를 일일이 나누어, 돼지에게 먹 이를 주시고는 식구들의 아침밥을 차려 준 뒤 뒷정리도 못하시고 일찌감치 밭으 로 나가셨다. 한시도 쉬지 않고 저녁때까지 하루종일 일하고, 해가 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돼지에게 먹이를 주고, 저녁준비를 하면서 아침상을 치우셨다. 우리 가족은 저녁 밥을 언제나 8시쯤 먹었다. 그리고 저녁상을 치우신 후 밤에는 빨래와 바느질을 하셨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공부하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단 한마디의 꾸중이나 잔소리도 하지 않고 오로지 일만 하시면서 할아버지와 아버 지, 우리 형제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은 나뿐만이 아니라 형제들을 모두가 그러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가 공부하고 있으면, 어머니는 언제나 공부가 끝날 때까지 내 뒤에 함께 앉아 서 바느질을 하셨다. 어머니가 잠자리에 드시는 건 11시 반에서 12시 사이로 야 간의 차이는 있지만 1년 내내 똑같은 일과를 보내셨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오사카로 전학하기 위해 섬을 떠날 때까지 내기 본 어머니 의 모습은 하루도 변함없이 없으셨다. 그런 어머니를 보고 있으려면 영화를 보 거나 친구와 만나도 마음이 편하지 않고 신경이 쓰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밭에 가서 일하거나 어머니의 일을 돕는 게 마음이 편했다. 철이 들면서부터 떠오르는 모습으로는 밭일을 하시던 어머니와 어머니를 돕던 내 모습이 많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의 일과는 날마다 똑같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을 먹고 학교 갔다 와서는 가방을 놓고, 곧장 어머니가 일하는 밭에 가서 저녁때까 지 와서는 가방을 놓고, 곧장 어머니가 일하는 밭에 가서 저녁때까지 어머니와 함께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돼지를 돌보고 집안일 을 거들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밭에서 돌아오면 곧장 손발을 씨고 영어를 배우러 가고, 그런 다음에 저녁밥을 먹고 공부했다. 그때는 어머니가 내 뒤에서 바느질을 하 셨기 때문에 도저히 어머니보다 먼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나의 라이벌은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나는 노력의 천재, 인내의 천재, 절약의 천재였다. '어머니에게 질 것인가, 이길 것인가!' 나는 오사카에서 혼자 시험 공부할 때도 항상 열심히 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면 단 하루도 방심하고 마음을 늦출 수가 없었다. 마음이 해이해질 때면 어느새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게으름을 피워도 야단치지 않으셨다. 나는 지금까지 어머니 의 야단이나 잔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우리형제들에겐 항상 온화하셨고, 오히 려 자식들이 불평할 정도로 열심히 일만 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어머니, 소한테 꼴을 먹이고 올게요'나'숙제가 있어 서요'라며 책상에 앉아서 시간을 소중하게 보낼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것만 해라." 언제나 이같이 말씀하시는 어머니의 행동에는 눈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하루 종 일 리듬이 있었다. 농사보다 공부가 즐겁다 축농증 수술 때문에 오사카에 갔다가 오사카 의대 부속병원에 반해 오사카 대 학 의과대학에 들어가기로 결심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섬을 떠나 이마미야 고 등학교로 전학했다. 한 달에 6천엔 정도 드는 나의 생활비를 부모님은 3천 엔밖 에 송금해 줄 여유가 없었다. 장남의 공부를 위해 아버지는 습관처럼 매일 드시 던 저녁 반주를 줄여 돈을 절약하셨고, 대대로 내려오던 밭 또한 팔았다. 오사카로 처음 전학했을 때는 친구들과 실력이 너무 차이가 나서 놀라움과 함께 전학을 잘못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이러다 의과대학에 못 가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으로 절망에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고생하시 는 모습을 떠올리곤 우리 집안의 운명이 내게 달려 있다는 책임감이 솟구쳤고, 한없이 일만 하시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열심히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4년 동안 단 한 번도 도쿠노시마에 돌아가지 않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도, '빨리 먹고 빨리 일해 빨리 가난에서 벗어나자'면서 하루에 16시간씩 하루도 쉬지 않 고 1년 내내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오로지 어머니의 노력과 인내와 절약이 피부 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내 기억 속의 어머니는 오로지 묵묵히 괭이를 들고 땀을 흘리거나 돼지한테 먹 이를 주거나 가끔씩 고구마를 캐면서, "조산부학교에 가고 싶었는데, 집안이 너 무 가난해서 못 갔다."고 말씀하시는 모습뿐이다. 어머니는 "시간은 돈이다"라거나,"맛있는 걸 먹어도 목으로 넘어가면 그만이다" 라는 등 절약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곤 했다. 나는 의과대학 재학 중에 항상 가정교사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어야만 했다. 또 방학중에는 여행을 가거나 귀성한 친구들을 대신해 가정교사를 했고, 낮에는 일 당으로 막노동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어머니의 모 습을 생각하면 '나는 하기 싫으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지만, 어머니는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쉬지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 정도는 시작에 불과 하다'는 생각으로 어떤 일이라도 열심히 할 수 있었다. 농사 짓는 일은 단조로울 뿐만 아니라 1년 내내 쉴새없이 너무 힘들다. 이에 비 해 공부는 훨씬 쉽고 즐겁다. 농사에서 도망치기 위해서라도 공부해야겠다는 생 각이 들 정도로 농사는 힘들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인내심이 강하다. 병원을 만들 때 적당한 대지를 찾고, 자금을 구하고, 간호사와 의사를 채용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뙤약볕에서 농사를 짓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런 건 고통 축에 끼지도 못한다고 나 자신을 타일렀다. 내가 선거에 나갔을 때도 어머니는 만성간염에 걸려 있었고, 관절염으로 무릎에 물이 찼었지만 아마미 군도 전체의 집들을 방문했다. 물론 20대 청년들이 따라 다니긴 했지만, 그런 어머니의 강인하고 근면한 태도에 이틀째 되던 날부터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에 대한 칭찬이 자자했다. 어머니는 반시뱀이 나올 정도로 험한 산길을 오르내리고,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환하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농사보다 훨씬 즐거워요. 덕분에 이렇게 매일 즐겁게 여행하잖아요." 의사인 내가 이런 말을 하기엔 좀 우습지만, 어머니는 날마다 열심히 걸어다닌 덕분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만성간염이 치료되고, 무릎에 물이 고이는 증상도 없어졌다. 동생인 도모스케(교토 대학 의과대학 졸업)는 이런 말도 했다. "형님은 비록 선거에는 떨어졌지만 어머니한테만큼은 효도했어요." "어째서 그렇지?"하고 내가 물었다. "어머니가 저렇게 건강해지셨잖아요." 동생의 이런 말에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아마미 군도 전체 집들을 전부 걸어서 방문한 사람은 어머니 한 사람밖에 없었 다. 나는 오토바이로 다녔다. 이때도 나는 어머니에게 졌던 것이다. 어머니는 무엇을 위해 그토록 열심이셨을까? 당신의 즐거움이나 이상을 위해서 가 아니었다. 단지 당신의 아들을 위해, 아들의 목표를 위해 '해야 할 일을 하셨 던'것이다. 어머니는 '소금 한 되'를 이루셨다. 이 말은 아마미 말로 '매일 소금 한 되를 사 용할 정도의 집안의 번영'을 의미한다. 어머니는 작고하신 할아버지께 항상 감사 드렸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어머니에게 이 말을 유언처럼 남기셨다고 한 다. "내가 만든 길에서 너희들이 소금 한 되를 사용하도록 해라." 그것이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그 때문에 어머니가 흘린 몇천 되나 되는 분량의 땀으로 밴 소금을 말하고 싶다. 우리가 어머니에게 갚은 '소금'은 그런 존경하는 땀의 몇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 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자식은 어머니가 만든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그 자식이 자 라 나라와 사회와 세계를 만든다. 바꾸어 말하면 여성이 그 사회의 장래를 만 드는 것이다. 어머니가 열심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면 자식들은 그것을 따라 배운다. 물론 여성들만 신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남자들한테도 당연히 그 길 은 있다. 바로 가족, 사회, 세계를 위해 온 힘을 다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의사 로서 정치에 관여하는 마음은 단지 그 같은 일념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어머 니가 평생을 하신 고생을 생각하면 나 자신이 부끄러워질뿐더러, 힘들고 고통스 러울 때는 스스로를 격려하는 힘이 된다. '그런 마음가짐과 일념을 갖고 약한 사 람을 위해, 일본의 의료와 세계의 의료를 위해 전력투구하자'고 결심한다. 사람은 자기자신을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서는 왜 열심히 할 수 없을까. 어머니는 가장 가까운 남인 나와 우리 형제들을 위해 평생 모든 것을 바치셨다. 그래서 나는 가장 가까운 남인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었고, 고향을 위해, 의료를 위해 ,세계를 위해서라는 목표가 있기에 더욱 열심히 하고 있다. 지금 일본은 고령화 사회를 맞이하고 있다. 세 명 중 한 명은 노인이다. 노인을 소중히 여가고 그들이 보람있는 인생을 보낼 수 있도록 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도와야 할까를 생각하는 한편, 그들이 어떤 방해꾼처럼 취급당하고 있다는 느낌 또한 들기도 한다. 우리 어머니 시대의 대부분의 여성들은 부모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하고, 남성 우 위의 사회에서 많은 불이익을 당하고, 온갖 고생을 하면서 오늘날의 일본을 만 들어 왔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어머니 시대의 여성들의 보람있는 인생을 보냈다는 행복 감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동시에 우리 젊은이들은 어머니 시대를 되돌아보 면서 어머니의 존재에 대해 재인식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고 령화 사회를 위해 열심히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아직도 세께 곳곳에는 빈곤, 질병, 굶주림과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 어머니 시대의 고통과 똑같거나, 아니 더욱 비참한 일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 다. 어머니 시대를 알기 위해서 나는 감히 우리 어머니가 살아오신 삶에 대해 말하 고자 한다. 빈농의 아들로 의사가 되다 1. 빈농의 아들로 의사가 되다 동생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의사가 되기를 결심하다 나는 왜 의사가 되었으며, 왜 병원을 만드는 데 나의 모든 인생을 바쳤는가. 그것은 결코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내가 꼭 의사가 되고 싶고, 돼야 한다고 다짐했던 계기가 된 잊을 수 없는 사건 이 하나 있다. 초등하교에 다닐 대 세 살 난 남동생이 갑작스럽게 죽고 말았다. 나는 도쿠노시마의 가난한 농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우리는 형제가 여덟 명인 데, 누나, 여동생, 남동생 세 명이 죽고 현재는 누나 한 명과 세 명의 동생이 있 다. 죽은 누나와 여동생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남동생의 죽음은 평생 동안 나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띠로 이은 지붕에서 비가 새는 가운데 동생은 심한 설사로 고통스러워했고, 결 렬한 구토를 계속했다. 홀로 동생을 간병하고 있던 어머니는 한방중이 지난 새벽3시쯤 돼서야 잠자고 있던 나를 흔들어 깨워 의사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셨다. 집에서 의사가 있는 마을까지는 2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고, 사탕수수밭과 산길 로 이어진 그곳까지의 길은 어린 나에게는 무척이나 무서웠다. 나는 혼자서 밤 길을 간다는 것이 너무도 무서워 어떻게든 가지 않으려고 동생의 상태를 좀더 지켜보자고 엄마에게 말했다. 그런데 동생은 눈이 하얘지면서 의식을 잃고 말았 다. 그런 동생의 모습을 보자 의사에게 가고 싶지 않다거나 산길이 무섭다는 생 각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머리 속이 터질 것 같아 아무 것도 생각할 겨를 없이 집을 뛰쳐나와 정신없이 뛰었다. 회중전등도 없는 캄캄한 산길을 뛰어가다 보니 돌과 나무 뿌리에 걸려 몇 번이 나 넘어졌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도 의사가 왕진만 온다면 아픈 동생이 금방 나 을 거라는 희망 섞인 기대로 온힘을 대해 계속 달렸다. 그래서 집으로 오는 길 에는 의사의 말 엉덩이에 함께 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의사가 무척 고맙고 친절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먼길을 힘들게 뛰어가 겨우 병원 현관에 도착해 왕진을 부탁했지만, 의사는 왕 진을 갈 생각이 없는지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어린 나는 순진하게 무슨 사정이 있겠지, 하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시간 이 흐를수록 동생의 고통은 점차 심해졌다. 다음날 아침이 되자마자 다른 의사 에게 달려가 왕진을 부탁했다. 의사는 동생의 상태를 물었고, 나는 동생의 눈이 하얘졌다고 대답했다. 그 의사는 점심때가 지난 오후1시 반쯤에 우리 집에 왔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동생이 숨을 거둔 상태였다. 어쩌면 의사가 조금 더 일찍 왔다고 해도 동생에겐 도움이 안되었을지도 모른 다. 그러나 동생이 의사의 진찰 한 번 못 받아 보고 죽은 게 나에겐 너무나 가 슴 아프고 아쉬움이 남는 일이었다. 그때부터 내 마음속에는 하나의 다짐이 자리잡았다. '의사가 되자, 의사가 안되면 안 된다.' 그때부터 나는 확고하게 결심했다. 의사는 응급환자를 진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의사는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존재하며, 어떤 상태의 환자이든 돕는 것이 바로 의사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의사가 되면 가능한 한 어려운 사람을 돕겠다 고 어린 마음에도 굳게 결심했다 그날 밤, 나는 동생이 살아 돌아오는 꿈을 꾸었다. 날아가서 동생이 있는 곳으로 가보니, 역시 동생은 죽은 채 창백한 얼굴로 자고 있었다. 다음날, 장례식이 끝난 뒤 나는 또 동생의 꿈을 꾸었다. 누군가와 내가 동생 손 을 한쪽씩 잡고 서로 잡아당기고 있었다. 죽음의 연못에 빠져 있는 동생을 잡아 당겨 내 쪽으로 오게 하려고 나는 동생의 손을 힘껏 잡아당기고 있었다. 그러자 동생의 손이 몸에서 빠져버렸다. 아아, 가엽게도. 어차피 저쪽으로 가야 한다면 손을 원래 상태대로 붙여서 보내고 싶었다. 이제 그만 잡아당기자. 그렇게 생각 하는 순간 때마침 눈을 떴다. 되돌릴 수 없는 동생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소년의 마음을 흔든 강렬한 인상은 지금도 마음속에 선명하게 살아 있다. '어려운 사람을 위하는 참다운 의사가 되고 싶다.'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체념할 수 없는 동생의 죽음은 나로 하여금 죽을힘을 다 해 병원을 만들게 한 원동력이다. 차별 받는 섬, 도쿠노시마 나의 가슴속에는 동생의 죽음과 동시에 고향 도쿠노시마가 있다. 고난의 역사 를 지닌 가난하고 학대받은 섬이면서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도쿠노시마를 생각 할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리고 피가 끓어올랐다. 그런 그 섬에 대한 애정이 나 로 하여금 앞만 보고 여기까지 달려오게 했다. 옛날에 류큐왕조로, 사츠마반(현재 가소시마 현 서부의 옛 지명)으로, 다시 전후 에는 미군의 신탁통치 아래서 아마미오시마와 도쿠노시마는 끊임없이 지배자의 압정에 시달려 왔다. 일찍이 섬의 농민들의 뼈를 깎는 듯한 노력으로 고생해서 만든 사탕수수는 한 줄기도 남김없이 공물로 진상되었다. 농가의 아이들이 사탕수수를 갉아먹기만 해도 일가는 끔찍한 몽둥이 찜질형을 받았고, 밀매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메에지 시대가 되자 이전과 같은 압정은 없어졌지만 본토로부터의 차별은 사라 지지 않았다. 미군이 아아미오시마와 도쿠노시마를 신탁통치 하게 된 이유도 오 키나와에 기지를 만드는데 필요한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서였다. 도쿠노시마 사람들은 이 굴욕의 역사를 결코 잊을 수 없다. 섬사람들의 마음속 에는 열등감과 차별에 대한 분노가 가슴 깊이 묻혀 있다. 사츠마반 시대에 도쿠 노시마에서는 역사에 남을 정도로 몇 번의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농민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왕골로 만든 기를 흔들면서 봉기를 일으켰다. 어쩌면 이러한 섬사람들의 분노와 슬픔이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진정한 의료를 베풀겠다는 나의 결심과 상통했는지도 모른다. 빈농의 8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집안 일을 거들었다. 초등학교3학년 때부터 나는 아침 일찍 멀리 떨어진 밭에 있는 소 외양간으로 가 서 소를 데려오는 일을 했다. 아침저녁으로 두 번, 소의 먹이가 되는 꼴 베기도 일과 중 하나였다. 심한 태풍이 오지 않는 한 나는 한시도 쉴 수 없었다. 왼쪽 손목과 손가락에는 그때 입은 상처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전부 낫으로 베 인 상흔이다. 나는 의과대학 입사를 위해 시험공부 할 때와 병원을 지을 때 너 무 힘들면 그 상처들을 만져 보면서, '도쿠노시마의 분노와 슬픔을 잊자 말자. 더욱 노력하자'며 스스로를 격려하고 북돋웠다. 나는 어려서부터 승부근성이 강했다. 다섯 살 나던 해의 기억이 하나 있다. 군마라는, 사탕수수를 짜는 원시적인 기계가 있었다. 군마를 끌고 다니는 소와 함께 나도 묵묵히 원주 위를 빙빙 돌아다녔다. 내가 소의 엉덩이 때리기를 그만두자 소는 갑자기 멈춰서고 말았다. 군마를 끌 기 위해서는 한시도 쉬지 않고 소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뒤쫓지 않으면 안 된다. 사탕수수는 겨울에 수확하는데, 도쿠노시마에서는 2월부터 군마를 움직이기 시 작한다. 연간 평균 온도가 21도인 여름 날씨이지만 도쿠노시마의 겨울은 매섭도 록 춥다. 그날은 비가 내리는 2월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비를 맞으며 군마를 끄는 소를 따라 다니는 나를 보고,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감기에 걸리니까 오두막집으로 들어가라." 그러나 나는 아버지 말씀에도 그만두지 않았다. 소는 아침부터 하루 종일 무거 운 군마를 끌었고, 나는 단지 뒤에서 소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걷기만 했는데 내 가 만약 쉰다면 나는 소한테 지는 것이다. 도중에 그만두자니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듯했고 나 자신이 쓸모 없다는 기분이 들어 도저히 그만둘 수 가 없었다. "빨리 들어오라니까!" 아버지가 오두막 속에서 몇 번이나 소리쳤지만 그 소리를 듣고도 묵묵히 소 뒤 를 따라다녔다. 비에 흠뻑 젖은 채 해가 질 때까지 소와 함께 계속 걸었던 것이 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는 해가 져야만 밭에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밭에서 하 루 종일 일하는 사람들과 함께 올 때도 많았다. 어머니와 동년배인 동네 아주머 니와 더 나이 든 사람들이 고구마를 가능한 많이 등에 지고, 손에도 무거운 짐 을 든 모습을 보면, 나는 반드시 다가가서 손에 든 짐을 대신 들고 왔다. 그래서 지금도 그 아주머니들은 나를 보면, "밭에서 돌아올 때 도라오가 짐을 들어 줬 다."며 기쁜 목소리로 말하곤 한다. 그 당시 나의 심정은 그들에 대한 친철함이나 상냥함이 아니라, 나보다 무거운 짐을 들고 힘들어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는 나를 용납할 수 없는 기분이 었다. 짐을 들어주지 않으면 마음속의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군마를 끄는 소에게 지지 않겠다는 오기 비슷한 것이었다. 승부근성에 관한 또 다른 기억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 때 반에서 10등 안에 들었지만, 5학년 때는 10등 안에 들지 못했 다. 5학년 때의 담임은 편애가 심한 선생이었는데, 나는 편애가 제일 싫었고 참 을 수 없었다. 그런 종류의 사람한테는 철저하게 반항해야 했고.......... . 그래서 담임 선생님 또한 나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고, 언젠가는 4시간 동안 계속해서 맞은 적도 있었다. 그렇게 맞으면서 평소 같았으면 울었겠지만 그때는 울지 않았다. 반대로 담임 선생님을 노려봤다. 입에서 피가 터져나오자 꾹 다물고 입안으로 삼켰다. 내가 계속 그를 노려보자 선생님은 점점 더 난폭해졌다. 계속 때리기만 한 게 아니라 군화로 발길질도 하고, 유도 자세로 교실 바닥에 내동댕이치기까지 했다. 그래도 울음소리를 내지 않고 계속해서 그를 노려봤다. 내 생각에도 윗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좋게 볼 수 없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 러나 나는 정말로 편애가 제일 싫었기 때문에 요즈음에도 선물을 받아야만 환자 에게 잘 대해 주는 의사들한테 화가 날 분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불쌍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동생의 죽음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시절 나보다 한 학년 아래였던 한 아이의 죽 음 또한 평생 잊을 수 없다. 그 아이는 눈에 외상을 입었는데, 섬에 안과가 없었기 때문에 치료를 받지 못했 다. 아이의 집은 너무 가난해서 배를 타고 육지로 치료하러 가는 건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아이는 외상이 눈에서부터 얼굴 전체로 펴져 험상궂은 도깨비와 같은 얼굴이 되고 말았다. 가엽게도 그 아이의 집은 병을 치료할 돈이 없을 정도로 가난했으나, 자존심과 체면을 중시하는 도쿠노시마 사람들은 동정 받는 걸 싫어했다. 따라서 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문을 걸어 잠그고 집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못나가게 했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아이는 마치 호박처럼 퉁퉁 부운 얼굴을 한 채, 누구의 도움도 받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죽고 말았다. 병이 무섭다. 섬사람들의 마음 한 구석에는 병에 대한 불안이 항상 자리잡고 있 었다. '토파' 라 불리던 용기 있는 부모 내가 태어났을 때쯤 부모님이 읽었던 잡지에 도라오라는 의학박사가 있었는 데, 부모님은 그 이름을 따서 내 이름을 '도라오'라고 지었다고 했다. 그러나 하 급노동자로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부모님은 내가 커서 정말로 의사가 되리라고 는 꿈도 꾸지 못했다. 부모님이 없었다면 병원을 짓는 데 그토록 열성적인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었 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많은 것을 물려받았는데, 아버지에 게서는 도쿠노시마 사람들 특유의 강인한 승부근성과 약한 사람에 대한 배려, 어머니한테서는 묵묵히 일하는 근면함과 끈기와 인내심이 그것이다. 도쿠노시마의 사투리 중에 '토파'라는 말이 있다. 허풍선이같이 시끌벅적하다는 뜻인데, 앞뒤를 가리지 않고 용기만으로 행동하거나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행 동을 하거나 엉뚱한 발상을 자주 한다는 의미에서 아버지는 바로 토파였다. 또 한 아버지는 인간성이 좋았다. 당신이 충분하게 먹을 양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가난한 사람들한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셨다. 우리 마을에서 멀리 떨 어진 곳에 장남이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집에 쌀을 갖다 주거나 당신도 먹기 어려운 우동을 갖다 주시곤 했다. 시골 사람은 그렇게 남을 돕고 싶어도 왠지 겸연쩍거나 부끄러움이 앞서서 좀처 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태연 자약하게 행동하셨다. 생전에 아버지와 가깝게 지내던 친지들은 아버지를 "법 없이도 살 분" 이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도쿠노시마와는 어울리지 않는 그릇이 큰 양반이셨다. 그런 아버지의 행동과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는데, 나 역시 도쿠노시마에 서 갇혀 살았다면 그들과 같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역시 아버지의 아들 이다. 그런 아버지의 성격과 섬 생활이 맞을 리 없었다. 아비지는 젊었을 때 섬을 떠 나 막노동자로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셨다. 그러다가 전시 중에 섬으로 돌아와 농민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전후의 미군 신탁통치 아래서 자급자족하는 섬이었 지만, 농민들 모두는 극도로 가난했다. 아버지는 뼈에 사무친 가난을 뿌리치기 위해 '밀무역'을 선택했다. 말이 밀무역 이지, 섬에서 싸게 나오는 사탕수수로 만든 설탕을 가고시마에 가지고 가서 팔 고 그 돈으로 돌아올 때 돼지를 사서 싣고 오는 것이었다. 가고시마에서는 설탕 이 도쿠노시마보다 서너 배 비싼 값에 팔려서 궁핍한 생활에 시달리는 섬 사람 들은 섬 밖으로 설탕을 갖고 나가는 것이 위법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만둘 수 없 었다. 그것말고는 달리 살길이 없었던 것이다. 또 밀무역은 아버지만 하는 게 아니었다. 당국의 단속이 심해 밀무역을 하다 잡혀서 몰수당하는 경우도 많았다. 돼지를 싣고 돌아오다가 경비선과 마주치게 될 경우 그들한테 잡혀서 돼지를 몰수당하 느니 차라리 돼지를 바다에 버리고 고기 잡는 척하면서 도망쳐 오는 적도 있었 다. 돼지를 바다에 버리는 것이 아깝긴 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몰수당하는 것 보다 나았다. 때때로 이렇게 바다에 던져진 돼지가 섬으로 흘러 들어오면, 사정을 모르는 섬 사람들은 한바탕 난리를 피우며 좋아했다. 아버지도 경찰에 몰수당하는 것보다 는 낫다고 생각했는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또 밀무역에 성공했을 때는 집 마당이 돼지로 벅적거렸다. 그러나 해적 행위도 횡횅했다. 아버지의 동료 한 사 람이 해적의 총에 맞아 죽은 사건도 있었다. 목숨을 걸고 하는 밀무역은 몰수당할 적도 많았지만 토파인 아버지는 성공한 경 우에만 무용담을 들려 주었다. 그래서 마을색 한 번 없이 그들의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렇지만 운이 나빠서 몰수당한 동네 사람들의 물건을 보상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그런 일이 한 번씩 있을 때마다 집안 살림은 갈수록 어려워져만 갔다. 나는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와 섬 사람들이 걸탕을 밀무역할 수 밖에 없는 사정 을 이해했다. 오랜 압정에 반역을 계속해 온 도쿠노시마 사람들의 봉기할 수밖 에 없었던 심정이 나에게도 자연스럽게 심어졌는지. 어렸을 때 밀무역으로 경찰 에 쫓겨 밭으로 도망 다니는 아버지를 보고도 나는 아버지가 나쁜 짓을 한다고 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단순히 도망만 다닌 게 아니라 경찰들한테 '몰수 도둑놈' 이라고 욕을 퍼부으며 저항했다. 한 번은 섬의 젊은이들이 아버지와 합세해서 파출소에 돌을 던진 사건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사건의 주모자로 몰렸다. 결국 아버지 혼자 서 그 사건을 전부 책임져야만 했다. 섬 사람들 중에는 밀무역을 고발하는 밀고자도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고발한 가람의 집으로 가서 매우 화를 냈다. "너는 미국놈 앞잡이가 돼서 고자질을 하니 도둑놈보다 더 나쁘다. 도둑놈은 살 금살금 몇 개의 물건만 훔치지만 너희들은 총을 둘이대고 몽땅 도둑질하는 거나 같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자 밀무역으로 체포된 아버지는 집행유에도 아닌 아홉달의 실형을 선고 받고 아마미오시마의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바로 그 무렵에 동생이 죽은 사건이 일어났다. 어린 내가 의사를 부르러 간 것도 아버지가 형무소에 있 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만삭이 상태였다. 동생이 죽은 한 달 뒤 두 번 째 동생이 태어났다. 따라서 초등학생인 내가 소 치는 일을 도맡아야만 했다. 도쿠노시마의 우리 마을에서 형무소에 들어간 사람은 전무후무하게 아버지 단 한 분뿐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아버지가 나쁜 짓을 해서 형무소에 들어 갔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도 그 일을 부끄럽게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혼자서 투계에 내기를 건 아버지 불 같은 아버지의 성격이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 두가지 있다. 하나는 투 우와 함께 도쿠노시마에서 크게 유행하던 닭싸움에 관한 것이다. 어렸을 때 나 는 닭싸움이 매우 재미있었고 샤모(군계: 투계용이 몸집이 크고 성질이 사나운 닭)가 몹시 갖고 싶었다. 그러나 싸움에 이기는 강한 샤모을 살 경제적인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는 아들의 심정을 헤아렸는지, 투계장에서 싸움을 하다가 주둥이 가 빠진 폐계 직전의 샤모 한 마리를 싼 값에 사다 주셨다. 나는 원하던 샤모를 갖게 되자 무척 기뻤다. 남들은 주둥이가 없는 샤모를 보고 비웃었지만 그 샤모는 마치 내 분신 같았다. 나는 그 샤모를 '여봐라'는 기분으 로 소중하게 키웠다. 도마뱀의 꼬리와는 달리 한 번 부러진 주둥이가 다시 날 리 없었다. 그러나 시 간이 흐르자 샤모의 주둥이가 제법 조금씩 자라더니 주둥이다운 모습을 갖추었 다. 그래서 나는 그 샤모를 훌륭한 싸움닭으로 키웠다. 그 새모는 비록 몸집은 작았지만 챔피언 경럭이 있었던지라. 주둥이만 있으면 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었다. 그래서 1년 후, 투계장에 나의 샤모를 데리고 나 갔다. 그런데 나의 샤모에는 아부도 돈을 걸지 않았다. 그때, 나의 샤모의 상대 닭은 커다란 돈을 걸었다. 주둥이가 빠진 작은 몸집의 샤모에게는 아부도 관심토차 갖지 않았다. 누구나 이 싸움은 승부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단 한 사람, 아버지가 내 샤모에 돈을 걸었다 아버지는 내 편을 들어 주며, "괜찮 냐" 고 걱정스러운 듯이 물었다. 나는 얼굴 표정을 무섭게 지어 보이면서 말 없 이 고개를 끄덕였다. 60분 동안의 한 판 숭부. 상대의 목 정도밖에 안되는 외소한 몸집의 내 샤모는 필사적으로 상대의 목 주위의 부드러운 곳을 물어뜯더니. 불과 27분 만에 챔피 언을 스러뜨렸다. 승부는 커다란 체구도 주둥이도 아닌 끈질긴 투지로 결정났다. 그런 승리를 예감 했는지. 아니면 기를 북돋워주기 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나 는 아버지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을 느꼈다. 그런 아버지의 믿음 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초등학생이 집안 살림을 떠맡다. 또 하나 아버지에 대해 잊을 수 없는 추억은 괘종시계에 관한 일화이다. 가난 한 살림이라 가구라고 해야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의 이야기다. 아버지는 사탕수 수 대금이 들어오자, 그 돈을 작은 손수건에 사서 낡은 괘종시계 위에 올려 놓 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나는 아부도 없는 틈에 손수건 안에 들어 있는 지폐 한 장을 꺼냈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마음에 걸리리라고는 생각 도 못햇다. 다음날 학교에 가서도 신경이 쓰여 공부가 머리 속에 들어오지 않았 다. 도저히 부담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어 아버지가 없는 사이에 여러 번 접어 꼬깃꼬깃해진 돈을 다시 펴서 원래 있던 자리에 도로 갖다 놓았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좀도둑같은 짓은 두 번 다시 안하겠 다고 결심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나를 부르셨다. "너는 우리 집안의 장남이다. 네가 끄고 싶은 데 써라"라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는 아버지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질었 는지 알고 계셨다. 그런 나의 행동을 꾸짖지도 않고, "이제부터 우리 집의 재산을 장남인 네게 맡기겠다. 전부 알아서 하거라"라고 말 씀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잘못된 행동을 야단치지 않고 반대로 아들을 사랑과 신뢰로 감 싸안는 행동을 보이셨다. 그 같은 아버지의 깊은 애정 표현은 나를 더욱 강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 일로 나는 장남으로서의 책임감에 눈뜨게 되었다. 그날부터 오사카의 고등학교로 전학해서 장남으로서의 책임을 동생한데 물려주 기까지 내가 집안 살림을 관리하게 되었고 또 열심히 했다. 동생들의 옷을 한 벌 사도 빠듯한 수입을 쪼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나는 초등학교 시절부 터 가계를 꾸려가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일은 나에 게 귀중한 체험이었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그 사람을 강하게 만들고, 크 게 하는지 알았다. 지금도 나는 아랫사람에 대해서 아버지가 나에게 했던 것처 럼 신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마음에 걸리거나 꺼림칙한 행동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아들이 공부하는 동안 바느질 하시던 어머니 성격이 격렬한 아버지 그늘에 계셨던 어머니는 완고하고 인내심이 무척 강한 분이었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일만 하셨다. 두부 만드는 일을 할 때는 아침 4시 에 일어나 두부를 만들고, 아이들이 전부 학교에 가면 해가 질 때까지는 사탕수 수밭과 논에서 농사일을 도맡아 하다시피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밤늦 도록 밀린 집안일과 바느질을 했다. 햇볕이 따가워 농사일을 하면 금세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입고 있던 옷을 손으로 짜면 물이 뚝뚝 떨어졌다. 어머니는 미리 준비해 간 다른 옷으로 갈아입 었고, 또 새 옷이 젖으면 다시 아까 벗어 말리던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두 벌의 작업복을 번갈아 입으면서 일하는 사이에 옷은 모두 땀으로 하얀 소금가루 가 묻어날 정도였다. 특히 가메토쿠 시골에서 일이라면 남자들 중에도 어머니를 당해낼 사람이 없었 다. 그 정도로 농사일이든, 밭일이든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셨다. 어머니는 초등학교 5학년 때 1년 쉬고 6학년으로 월반했다. 옛날에는 성적이 좋 으면 월반할 수 있는 특전이 있었다. 졸업 후에는 1년 쉬고 고등학교 1학년에 다녔다. 집이 가난해서 명주 짜는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일만하는 어머니는 밤늦도록 우리가 입을 옷을 지었다. 내가 숙제를 하는 동안 어머니는 아무리 늦더라도 바느질을 하면서 옆에 앉아 계셨다. 그러 나 어머니는 단 한 번도 '공부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옆에 앉아 바느질을 했던 게 나를 감시했던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같은 어머니의 행동은 나로 하여금 경쟁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를 쳐다보면 어머니는 그때까지도 열심히 바느질을 하고 계셨다. 그러면 '먼저 자겠다'는 말이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침마다 나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일한다는 생각을 하면 졸음이 단번에 싹 가 셨다. 어머니는 나를 11t 반까지 공부시키겠다고 마음 먹으면 11시20분경까지 옆에 앉 아 바느질을 하셨다. 내게 승부근성이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11시 20분쯤 되면 "나는 먼저 잔다"고 말씀하신 뒤 잠자리에 누우셨다. 나는 10분 정도 후에 야 공부를 마치고 잤다. 요즘 자식 교육에 열성인 부모들 중에 자기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자식한테만 공 부해라, 공부해라, 하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건 잘못된 교육 방법이다. 우리 어머니처럼 자신들이 열심히 일하는 모습으로 모범을 보이면서 자식과 진지하게 승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원해 말이 없는 분이셨다. 열심히 일하고 참는 에는 천재 같은 분으로,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랄 수 있었 던 것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기로 결심 조금 높은 언덕에 있는 사탕수수밭에서는 바다가 잘 보인다. 도쿠노시마의 바 다는 아름답다. 산호초 잔해가 계절마다, 날마다, 시간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고 짙은 감색, 청색, 녹색, 에메랄드 그런....... 색색으로 바다가 갖고 있는 갖가지 얼 굴을 보여 준다. 아침 해와 저녁놀이 있을 때 바다는 잔잔한 금색으로 물들고, 둔치는 하얀 모래까지 꼭두서니 빛으로 물든다. 그러나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사는 섬 사람들에게 바다는 섬을 폐쇄하는 장벽이었다. 면적 약 250만 제곱킬로 미터, 인구 약 35만 8천 명.결코 작은 섬이 아닐지는 모르나 갇혀 있다는 생각만 은 강렬했다. 중학교 2학년 때, 동급생 여자애가 도쿄로 전학가기 위해 섬을 떠났다. 산바 시 에서 시끄럽게 흐르는 음악이 '영광의 빛'이라는 걸 알리자, 배가 부두에서 멀어 져 갔다. 나는 그 애가 떠나는 날 가능성이 무한한 세께로 나갈 수 있다는 부러움과 아 쉬움으로 배가 수평선에서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부둣가에 서 있었다. 내가 도쿠노시마 밖의 육지를 처음 밟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축농증에 걸려 수술하려면 섬을 떠나야 했다. 당시 미군의 신탁통치 아래 있었던 도쿠노 시마는 1953년 12월 25일에 본토로 복귀되면서 자유롭게 어디든지 도항할 수 있 었다. 그래서 나는 이제 막 시집 산 누나한테 부탁해서 오사카에 가게 되었다. 난생 처음으로 섬을 떠났다. 게다가 혼자서 하는 여행이라 그 당시 느껴졌던 불안감 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당시 가고시마까지 배로 25시간 걸리고, 가고시마에서 오사카ㄲ지는 기차로 20 시간이 걸리는 긴 여행이었다. 섬에서 자랐지만 농민의 아들인 나는 배에 익숙 하지 않았다. 벳멀미로 너무도 고생해서, 나중에는 답즙까지 토해내는 고통을 겪 은 끝에 간신히 가고시마에 도착했다. 그리고 수돗물로만 배를 채우고 다시 기 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너무 배가 고파 죽을 지경이었고 너무 목이 말랐지만, 기차가 역에 닿아도 도시락을 살 용기가 도저히 나지 않았다. 처음으로 본토에 간 나는 남 앞에서 입도 벙긋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남 앞에서 도시락을 먹는다는 건 부끄 러워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도시 사람들은 무섭고 인정이 없어 눈 감으면 코를 베어간다는 생각 때문에 그 물로 된 짐칸에서 떨어질 수도 없었다. 또 플랫폼에 잠시 내린 동안에 기차가 떠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도 있었다. 결국 오사카에 도착할 때까지 이틀 낮밤 동안 먹은 것이라곤 고작 가고시마에세 먹은 물이 전부였고,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그 긴 여행을 참아야만 했다. 누나는 나를 데리고 오사카 대학 부속병원에 갔다. 처음 본 대학병원과 그곳에 서 일하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의 모습이 그때 내 마음을 강렬하게 사로잡았 다. 동생이 죽었을 때 '의사가 되겠다.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맹세했던 결 의와 사명감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가 자!'고 굳은 다짐을 했다. 나는 내가 단세포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대학과 비교할 것도 없이, 자신의 실력도 모르는 주제에 눈앞에 보이는 오사카 대학 부속병원에서 일하는 하얀 가 운을 입은 의사들의 모습이 좋아보여 의사가 되려면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 어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오사카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당시 도쿠노시 마의 교육 수준은 매우 낮았다. 내가 다니던 도쿠노시마의 고등학교에서는 개교 이래 국립대학의 의과대학에 진학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사카 대학 의 과대학을 목표로 한 이상, 오사카 고등학교로 전학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축농증 치료를 받으면서 두세 군데 편입 상담을 해보니, 모두 8월에 편 입한 시험이 이었다. 축농증 치료가 끝난 9월쯤 두쿠노시마로 돌아온 나는 부모님에게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진학하겠다는 결심을 밝히고 오사카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하면 좋 겠다고 말씀드렸다. 당시 우리 집의 경제적인 능력은 내가 오사카에 있는 고등학교로 갈 형편이 아 니었다. 그렇게 하려면 그 당시 물가로 매월 7,8천 엔 정도의 돈을 송금 받아야 하는데, 한 달치 생활비를 빼고 나면 약 3,4천 엔의 돈밖에 남지 않았고, 저금한 돈도 없었기 때문에 밭을 팔아야 한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내가 생각한 대로해라" 하시면서 "내가 돈을 보낼 수 없는지, 네가 오사카 대학의과대학에 들어갈 수 없는 없는지 한 번 내기를 걸어 보자구나" 라는 덧붙이며 나의 편 입학을 허락하셨다. 아무 말씀도 없이 묵묵히 앉아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에는 아들에 대한 깊은 신 뢰가 담겨 있었다. 다음날, 담임 선생님을 뵙고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가기 위해 오사카 고둥학 교로 전학하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선생님은 무척이나 놀라시는 표정 을 지었다. 그 표정에는 '네가 과연 해낼 수 있겠니? 아마 불가능할 걸' 하는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렇게 모였다. 성적이 뛰어난 것도 아 니고 무엇 하나 두드러지지도 않는 학생이 국립대학에 들어가겠다니. 가소로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움츠러들거나 기죽지 않고 '어떤 일이 있어도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가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가려고 한다 는 소문은 내가 다니는 고등학교는 물론 섬 전체에 퍼졌다. 나는 부모님께는 경제적으로 무리한 부담을 드리고, 선생님한테서는 조소를 당 하고, 마을 사람들한테까지 소문이 나자, '내가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 이 엄습했다. 내가 만약 국립대학에 들어가지 못하게 될 경우, 나는 도쿠노시마 에서 '거짓말을 했다.'는 소문이 날 것이며, 이는 곧 인격을 부정당하는 것과 똑 같았다. 그후 나는 전학에 필요한 준비를 착실하게 실행에 옮겼다. 토요일, 일요일, 축제, 정월 연휴는 물론 그해 가을 고둥학교 운동회에도 참가하지 않고 공부에만 매달 렸다. 1956년 3월 10일, 오사카 고등학교로 전학하기 위해 다시 도쿠노시마를 뒤로 하 고 섬을 떠났다. 배의 출항을 알리는 음악 소리가 울리는 산바 시 부두에서 아 버지는 엄숙한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성공할 때까지는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죽고 싶다면 철도도 있고 바다도 있 다!" 오사카에 도착한 나는 명문으로 알려진 키타노 고등학교에 편입 원서를 냈는데, 교장 선생님은 아마미오시마에서 성적이 아무리 좋아도 지금까지 편입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며 다른 학교에 시험 치기를 권했다. 나는 머리를 흔들었으나 할 수 없이 이마미야 고등학교에 편입시험 수속을 밟았 다. 3학년 편입이 안되므로 2학년을 1년 더 다녀야 했다. 이마미야 고등학교의 오사카 의과대학 진학률은 450명중 1명이 있을까말까 한 데, 평균 3년에 2명정도 나왔다고 한다. 즉 1등으로 졸업해도 오사카 대학 의과 대학에 붙을지는 미지수 였다. 1학기가 시작되고 5월에 모의고사가 있었다. 그 결과 161 등을 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렸지만 다음 시험에서도 역시 150등이었다. 나는 너무도 괴로운 심정으로 매일 매일 책상 앞에 앉아 책과 씨름했지만, 그 다음 시험에서도 1등부터 10등까지는 항상 같은 학생들로 등수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 다. '과연 저들의 머리 속은 어떻게 되어 있기에.....' 그때는 열등감으로 고통스럽기까지 했다. 우등생들은 대부분 안경을 끼고 똑똑해 보였다. 게다가 체격도 좋았다. 나는 도 쿠노시마에서는 비교적 키가 큰 편에 속했지만 오사카에 와보니 보통도 못되는 작은 축이었다. 더욱이 책을 읽는 속도는 치명적으로 커다란 차이가 났다. 그들은 잡지와 만화 를 읽던 습관이 있지만. 도코노시마에서는 그런 읽을거리가 적은데다 살 돈마저 없었기에 거의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게다가 계산력 또한 남들보다 훨씬 뒤쳐졌다. 몸집도 작고, 머리는 나쁘고, 읽기와 계산도 늦다. 사람들은 이마미야 고들학교 를 2류 학교라고 했지만, 그 동급생에 비해 나는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었다. '도저히 안되겠다......' 나는 한없이 절망했다. 전학 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전학하지 말았어야 했다. 오 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가겠다고 장담하지 말았어야 햇다. 그러나 지금은 달 리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을 단념하면 거짓말 쟁이라는 말을 듣게 될 것이고, 다시 도쿠노시마로 돌아갈 수도 없다. 어떻게든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가는 길밖에 없다. 부모님, 섬 사람들, 동생의 줄음 을 생각하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거짓말쟁이가 되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았다. 나는 너무 힘들고 괴로웠지만, 도달할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때 나의 공책 표지에는 '죽느냐 사느냐!'란 단 한마디가 씌어 있었다. 빨리 먹고, 빨리 볼일 보고, 발 흔들기. '죽느냐 사느냐'란 글을 눈앞에 두고 골똘히 생각했다. 2류 학교의 동급생들한 테 이기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평등한 것은 분명 있었다. 하루는 24시간, 1년은 365일, 시간은 평등하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물리적인 시간만 평등할 뿐이다. 나는 머리가 나쁘다. 실력 이 낮다. 책을 읽는 속도도 늦다. 그들이 하루 10시간이면 할 수 있는 공부를 나 는 16시간이나 해야 했다. 어떻게 하면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우선 잠자는 시간을 6시간으로 정했다. 남는 것은 하루에 18시간. 이것을 최대한 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먼저 식사 시간을 쪼겠다. 식사는 3분, 화장실도 3분으로 정했다. 소변은 걸어가면서 바지 단추를 열고 3미터 앞에서는 볼일을 보기로 정 했다. 목욕은 열흘에 한 번으로 정했다. 이렇게 일상적인 시간을 극도로 잘라 하루에 16시간 이상 책상에 붙어 있기로 했다. 그렇게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을 만들었지만 도쿠노시마에서 아침이나 방과 후 에 밭일을 하느라 오랜 시간 동안 공부하는 습관이 몸에 베어 있지 않아 밤 12 시를 넘길 쯤이면, 책상에 머리를 박고 꾸벅꾸벅 졸 때가 많았다. 이렇게 해서는 아무리 빨리 먹고 빨리 볼일을 보고 시간을 쪼개 아껴 써도 소용 이 없었다. 어떻게든 잠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방과 후에는 나카노시 마 도서관에 가서 공부했는데, 10명중 3명은 자고 있었다. 어떻게든 잠을 줄이는 방법을 강구 해야 했다. 그런데 발을 흔드는 사람중에는 고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거다!' 나는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사람처럼 무릎을 쳤다. 자는 사람은 발 또한 자는 것이다. 발이 깨어 있는 한 잘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발을 흔드는 연습을 했 다. 리드미컬하게 발 흔들기를 하려면, 의자에 폭 파묻혀 앉으면 안된다. 허리를 살짝 걸쳐 앉고 들을 곧게 쭉 편다. 그렇게 앉아서 발을 흔든다. 처음에는 발을 흔드는 데만 정신이 팔려 공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잠자는 것 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어 계속했더니 한 달쯤 지나자 별로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됐다. 뿐안 아니라, 공부 속도가 발 흔들기의 리듬에 맞춰져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진전을 보였다. 또한 발 흔들기는 운동이 부족한 수험생에게 좋은 운동이 된다. 달리기와 똑같 은 운동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나의 경우 하루에 16시간의 발 흔들기가 적절한 운동이 되었는지 수험생활 4년 동안 딱 한 번 감기에 걸린 것 빼고는 병다운 병 을 앓아 본적이 없다. 나는 발 흔들기를 통해 잠을 극복하고 운동 부족을 해소하고 공부의 능률을 올 리는 1석3조의 효과를 경험했다. 일요일, 휴일, 명절 연휴에도 16시간씩 매일 곰부 그렇지만 이 정도로는 공부 시간이 아직도 부족했다. 하루에 16시간 이상 꼬 박 공부해도 겨우 남을 쫓아가는 정도였다. 한 걸음이라도 남을 앞서는 방법을 강구해 보았지만 없는 걱 같았다. 그런데 토요일, 일요일, 휴일, 명절 연휴가 있 었다.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는 수험생이라도 '오늘은 휴일이다'는 생각에 정신이 해이해져 조금은 사간을 낭비하기 마련이다. 이때가 바로 나에겐 기회라고 생각 했다. 예를 들면 신정 3일 연휴 동안,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는 수험생이라도 하루에 기껏해야 10시간이다. 그런데 내가 16시간 이상 공부하면 3일 동안 20시간 이상 차이가 생긴다. 남보다 앞서 간다는 자각은 마음에 여유와 자신감을 심어 주었 다. '그들이 방심할 때가 바로 따라잡을 기회이다!' 토요일, 일요일, 신정 연휴에는 온 힘을 공부에 쏟았다. 이렇게 1년 365일을 하 루에 16시 이상 빡빡하게 채우고 양에서 질로 공부 내용을 바꾸니까 무엇인가 달라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정도로 노력해도 남을 이기기란 쉽지 않았다. 동급생 모두가 필사적 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이마미야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40등 전후가 가장 우 수한 성적이었다.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은 사다리를 놓고 천국에 오르는 것어려 웠다. 이마미야 고등학교 시절 가장 존경하던 선생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너는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못 들어간다. 3수를 하지 않으면 무리니까, 일찌 감치 단념하는 게 좋겠다." 선생님은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회의를 갖고 진심으로 걱정스럽게 말했을 것 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고도 역시 단념할 수 없었던 것은 뿌리 깊은 도쿠노시 마의 근성 때문이다. "선생님, 3수를 하지 않으면 무리라는 말씀은 3수하면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까?" "그렇지. 기슴 자네의 노력으로 2년 더 공부한다면 어쩌면 갈 수 있을지도 모른 다네." 나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재수를 각오하고 노력해 보겠습니다. 꼭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갈 수 있 도록 해주십시오." 하루에 두 끼밖에 못 먹는 도쿄의 재수생들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 입학시험을 쳤는데 아무리 생 각해도 자신이 없어, 발표도 보러 가지 않고 그 날로 당장 도쿄로 갔다. 실력 있 는 도쿄의 재수학원을 2년 정도 다니지 않으면 안된다는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 을 1년 안에 들어가는 기적을 만들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기차가 아타미를 지났을 때 반짝이는 바다가 더 넓게 다가왔다. 오키메이에는 희미한 범선이 떠 있었다. 섬에 있었을 때는 매일 보던 바다였는데 최근 2년 동안은 바다를 본 적이 없었다. 잊고 있던 바다를 보니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섬의 정경, 섬에서의 생활, "돈을 보내는지,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지 아버지와 승부를 걸 자"며 오사카로 전학을 허락해준 부모, 배가 떠나던 산바 시에" 성공할 때까지 살아서 돌아오지 마라. 죽으려면 철도도 있고, 바다도 있다."며 엄숫한 표정으로 나를 전송하시던 아버지, 밭을 팔아서 돈을 보내 주신 어머니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도쿠노시마에는 옛날부터 '양키치시키반'이라는 슬프지만 존경하는 마음이 담긴 말이 있다. '양'은 집, '키치'는 천장의 대들보,'시키'는 맷돌로 갈다, '반'은 밥을 말한다. 쌀로 만든 미음이 물처럼 묽기 때문에 천장 안의 대들보가 비친다는 뜻 이다. 그 정도로 가난하게 살아도 어떻게든 자식을 공부시킨다는 의미이다. 우리 집이 바로 그 말에 꼭 들어맞는 상황이었다. 이미 밭까지 다 팔았던 것이다. 도쿄에 도착한 나는 도쿠노시마 고등학교 시절의 동급생이었던 친구의 하숙에 잠시 머물렀다. 간다에 있는 유명한 대입전문학원에 시험을 쳤지만 떨어졌고 요요기에 있는 대 입전문학원에 겨우 들어갔다. 에바스에 하숙을 구해 매일 학원에 다녔다. 맨 처 음 모이고사 성적은 좋지 않았지만, 수학만큼은 100점을 받아 학원 게시판의 맨 앞에 붙어졌다. 그래인서지 공부할 의욕이 생겼으며, 매일 아침 수학 등수를 보 고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도쿄의 여름은 지내기가 좋치만, 겨울의 매서운 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내가 갖고 있던 이불은 따듯한 도쿠노시마에서 쓰던 것이라서 도쿄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기에는 한참 모자랐다. 담요라도 사고 싶었지만 밭을 팔아서까지 나를 뒷받침하는 부모님께 돈을 더 보 내달라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서 송금해 주는 돈으로 식비를 충당하기에도 모자랄 정도여서 하루에 세 끼 를 다 먹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공복감이 들었는데, 그렇다고 아침을 꼬박꼬박 챙겨 먹으면 점심과 저녁이 부족했다. 오전10시 반까지 학원 수업을 받고 쉬는 시간이 되면 매점에서 쿠페 빵(고구마 모양으로 바닥이 납작한 빵)에 마가린을 발라 서서 먹으면서 아침을 때웠다. 저녁은 오후7시 반쯤, 근처의 밥집 에서 사 먹었다. 이것으로 밤 늦게까지 견뎌야만 했다. 그러나 배고픔을 견디기란 무척 괴로웠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학원으로 가는 도 중, 집집마다 아침을 준비하는 된장국 냄새가 솔솔 풍겨 온다. 배가 고픈 탓에 된장국 냄새에 이끌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발길을 멈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 다. 나는 춥고 힘들지만 하루에 16시간 이상 공부한다는 철칙을 지키면서 열심히 노 력에 노력을 거듭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바로 학원에 가서, 맨 앞자리에 앉 아 수업을 들었다. 그리고 수업 이외의 시간에는 학원 도서관에서 공부했는데, 이것이 도쿄에서의 일과였다. 밤9시면 도서관이 문을 닫는다. 그때부터 하숙집으로 돌아와 1시까지 공부했다. 그러나 당시의 집들은 대부분 얇은 베니어 합판으로 되어 있었다. 내가 시간과 의 전쟁 중이라는 걸 모르는 옆방의 대학생이 스테레오 라디오를 쾅쾅거리게 크 게 틀어놓거나 소리를 질러 도저히 집중해 공부할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그래 서 공부하기에 가장 좋은 학원 도서관을 밤 12까지 개방해 달라고 친구 몇몇과 학원 원장 선생님한테 건의했다. 학원선생님은 우리의 열의에 감동했는지 쉽게 허락해 주었다. 이후 10명 정도의 공부 친구들을 매일 밤 12까지 서로 격려하고 협조하면서 공 부할 수 있었다. 치열한 공부와의 씨름 속에서도 즐거운 추억은 많이 있다. 밤 9 시가 되면 몇몇 친구들이 "기분전환 하러 가자"고 큰소리로 외친다.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근처 공원까지 달린다. 바람을 가르는 상쾌함도 좋지 만, 자전거 전조등 불빛에 비치는 광경이 재미있다. 공원도 좋지만, 자전거 전조 등 불빛에 비치는 광경이 재미있다. 공원에는 아베크족이 1미터 간격으로 늘어 서 있다. 전조등 불빛에 놀라 당황하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어 베를 움켜쥐고 웃기도 ㅎ다. 우리의 행동이 나쁘다는 생각도 들지만 재수생인 우리에게 주어지 는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해가 바뀌어 2월 초가 되자, 추위가 한결 더 심해졌다. 입시가 다가옴에 따라 입 시 준비로 마음이 조급했지만, 배고픔과 추위를 도저히 견딜 수 없이 오사카로 돌아갔다. '오사카에는 누나 집이 있다. 누나 집에 가면 도쿄보다 따듯할 것이다. 가난하지 만 식사도 하루 세 끼 다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으로 괴롭고 힘들었던 도쿄를 뒤로 했다. 두 번째 시험에 실패하고 배수진을 친 나 두 번째 시험에 도전했다. 1년 동안 공부한 한 번의 재수는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 선생님으로부터 3수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반발심과 더 이상 부모님께 부담을 드릴 수 없다는 마음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이번 시험에는 꼭 합격하겠다고 굳게 결심했었다.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 시험이 끝난 날, 이로써 끝났다는 해방감은 없었다. 대학 에 들어가서도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시험 다음 날인 3월 6일부터 수험생활처럼 하루에 16시간 이상 영어 공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합격자 발표 게시판에는 내 수험번호가 없었다. 역시 그 선생님의 말이 맞았다. 결코 기적은 일어나지 않 았다. 실력이 없는 사람이 합격하고 싶어하는 것은 사기를 치는 것과 똑같다고 스스로 를 타이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아무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공부 할 마음도 내키지 않아 3류 극장을 두 군데 돌아다니면서 시간을 죽이다 밤이 늦어서야 누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한밤중인 1시쯤, 막국수를 사라고 외치는 소리에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어느새 요드가와의 제방을 어슬렁 거리며 걷고 있었다. 순간 강속으로 빠져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렇 게 강으로 뛰어들면 자살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편이 오히려 나을지도...........' 그 순간 퍼뜩 정신이 들었다. 자살이 지금 나에게 허용되는가. 내가 자살하면 어떻게 될까? 너무도 고생하시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선조부터 대대로 물려받는 밭을 팔면서까지 학비를 대주시다 보니 나머지 가족들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여기서 내가 죽으면 부모님과 형 제들이 모두 굶어 죽는다. 3년 전, 도쿠노시마를 떠나올 때만 해도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남아 있었다. 오사카대학 의과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면 죽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 러나 지금 나는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기로에 서 있다. 죽는 것 또한 허용되지 않았고, 그야말로 옴짝달싹도 못하는 입장에 놓여 있었다. '살아서 갈 수밖에 없다. 노력하고 분발하는 길밖에 없다.' 이때부터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이때 어머니와 도코노시마 고등학교 시절의 공부 친구였던 지금의 집사람에게서 편지가 왔다. 어쨌든 내년에는 오사카 대학의과대학을 단념하고 낮은 대학에 시 험을 치르는 것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누나가 보낸 편지를 통해 내가 고생하는 것을 아셨거나 땅을 팔기 시작한 후 생 활이 너무 힘드셔서 그렇게 써 보낸 것 같았다. 그 편지를 읽는 순간 너무 안타 깝고 괴로웠다. 그러한 어머니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내 안에 들어 있는 무엇인 가 중요한 것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앞으로는 편지를 보내지 마세요'라고 답장을 써 보냈다. 편지를 받으신 어머니가 많이 서운했을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나는 도망칠 퇴로를 완 전히 차단하는 배수진을 쳤던 것이다. 시간으로이기고, 양으로 이기고, 질로 이긴다. 재수에 이은 3수 생활.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단단히 각오했다. 오기를 갖 고 도전했지만 불안과 초조감이 내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실력은 붙을지 몰라 도 시험은 단 한 번의 기회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출제된 문제에 따라서 운이 따를 수도, 불운이 따를 수도 있다. 그 같은 불안감을 없애기 위해 나는 대중 목 욕탕에 갈 때마다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고, '내년 이맘 는 오사 카 대학 의과대학 학생의 얼굴을 하고 있어야지'라고 스스로한테 다짐을 하고, 씩씩하게 의기 충천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마음을 다 잡았다. 3수 생활에 들어가자마자, 한 대입 전문학원에서 치른 모의고사에서 고등학교를 40등 전후로 졸업한 나와 항상 5등 안에 들었던 동급생의 성적이 완전히 뒤바뀌 었다는 걸 알았다. '그 친구도 열심히 했는데, 이렇게 차이가 나다니........, 병이라도 난 게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그 친구를 만났을 때 나는 그 동안 아팠냐고 물었다. "아니,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는 걸." 그러면서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단 1년만에 고교시절에 나 와 전혀 다른 뛰어난 두뇌를 갖고 있다며 열등감을 느꼈던 동급생을 앞지르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동안의 노력의 차이가 그와나 사이에 역전을 가능하게 했 다. 그때서야 비로소 1년 동안의 소중함을 진정으로 알게 되었다. 1년 동안 무엇 이든지 철저하게 끈기를 갖고 노력하면 기대 이상의 큰 결과를 얻는다는 신념이 생겼다. 1년, 1년 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최대한 노력한다면 무엇인가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그때부터의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마쳤다. 고교2학년에 편입했을 때부터2년간의 시간과 재수해서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합격할 때까지의 2년 동안, 모두 합쳐 4년간의 수험생활은 내 일생 중에서 가장 험난하고 고된 시기였다. 지금도 가끔 병원을 세울 때나 운영의 어려움에 직면하면 힘들다는 생각을 하기 도 하지만, 그 4년 동안의 괴로움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평생을 통해 내 인생에서 괴로움의 90%정도는 수험생활을 했던 4년 동안에 모두 겪었다는 느낌 이다. 그리고 또한 그4년 동안에, '어떤 것이든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스스 로 체득했다. 돈도 필요 없다. 성적이 나빠도 좋다. 그 대신 목표를 향해서 철저 히 파고든다. 하루에 16시간 이상, 일요일도 쉬는 날도 하루도 빠짐없이 1년 365 일을 하루같이 열심히 매달린다면 거의 모든 것을 실현할 수 있다. 가령 하루에 8시간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일요일, 휴일, 명절을 다 쉬면, 1년 동안에 265일, 2120시간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하루에 16시간 이상 365일 공부했기 때문에, 5,860시간이 넘는다. 1 년 동안에 3,740시간 이상의 차이가 난다. 승패는 불을 보듯 당연하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아니, 쓸데없이 시간을 들이는 건 능력이 아니다. 문제는 질이다." 하지만, 시간으로 승부하고, 양으로 승부하고, 질로 승부 한다면 가능하다. 시간 으로이기고, 양에서이기고, 질로 이긴다. 나보다 능력이 뛰어난 남을 쫓아갈 때 는 이 세 가지 전부 이기는 길밖에 없다. 이 4년 동안 나는 그 사실을 확실하게 배웠다. 결국, 그것은 도쿠노시마에 있을 때 사탕수수밭에서 소를 끌던 나 같은 농민이 대도시에서 중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만 한 사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 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약혼식을 하다 1960년 3월 18일,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의 합격자 발표 명단 속에 내 이름이 씌어 있는 걸 발견했다. 고통스럽고 힘든 공부 끝에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합격 이었다. 합격 사실이 너무 기쁜 나머지, '드디어 해냈다!'는 생각에 뜨거운 피가 가슴 한가운데로부터 끊어 오르고 기슴이 벅차 올랐다. 의과대학 합격 사실을 부모님에게 알리자, 전보가 왔다. '빨리 섬으로 돌아 오라' 는 내용이었다. 나는 4년만에 귀향했다. 귀향 길은 한없이 즐겁고 기쁘고 설레었다. 이 4년 동 안, 도쿠노시마에 돌아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몰라, 목숨을 걸고 열심히 앞만 보 고 노력했던 것이다. 저 멀리 섬 자락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 나는 흐르는 눈물 을 멈출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동생들과의 만남은 아무 말도 없이 이루어졌다. 다만 아버지는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셨다. 동생들은 4년 동안 못 만난 탓 인지, 나를 보자'이 사람이 진짜 형인가' 싶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머니는 내가 뱃멀미에 약하다는 걸 알고, 서둘러 미음을 끊여 주셨다. 그 뒤, 아버지와 난 단 둘이서 목욕탕에 갔다. 내가 귀향해서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었던 것은 단지 말없이 가만히 잇는 것뿐 이었다. 4년 동안 질질 끌었던 부자지간의 싸움은 막바지로 치달으며 힘겹게 막 을 내리고 있었다. 논밭을 팔아 학비를 대주신 부모님을 더 이상, 내가 아르바이 트를 하지 않고 공부만 하도록 뒷바라지를 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지금까지의 수험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싫은 공부를 더 할 만큼의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 다. 나는 이번 귀향에 한 가지 은근히 기대를 걸고 있었다. 1년 전부터 편지를 끊었 던 지금의 집사람과의 재회이다. 그녀는 나의 고등학교1학년 후배였다. 나는 그 녀를 초등학교 때부터 의식해 왔었다. 등교할 때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 그녀를 뒤에서부터 추월하는 것이 그녀를 좋아하는 나의 유일한 의사 표시였다. 추월하 며 뛰어가는 것만으로도 내 마음을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매일 아침마다 학교 가는 길이 무척 즐거웠다. 그런 그녀와 말을 나누고 지낸 게 언제부터인지 또렷이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 내가 고등학교 1학년, 그녀가 중학교 3학년 때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녀한테 교 과서를 빌려주거나 받으면서 공부를 함께 하기도 했다. 그러나 공부한다며 둘이 책상을 향해 마주보고 앉으면 공부는 뒷전이고 학교나 이런저런 이야기만 나누 어서, 진도는 별로 나가지도 못했다.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을 목표로 했던 내가 오사카의 이마미야고교로 전학하게 된 이유 중 몇 페센트는 그녀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와 함께 있는 게 시 간을 낭비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에서 벗어나고 싶은 심정도 있었기 때문이 다. 전학을 위해 섬에서 출항하던 날, 아버지로부터는 "성공할 때까지는 살아서 오지 마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녀와는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악수만 하고 헤어졌다. 그날로부터 꼭 4년만의 재회였다. 특히 마지막 1년간은 편지도 끊었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녀가 가고시마 은행의 도쿠노시마 지점에 근무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은행이 있는 가메츠로 갔다. 은행 문 앞 에서 안을 들여다보자, 창구에서 사무를 보고있는 그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 다. '앗!' 놀란 표정을 한 그녀는 용수철이 튕기듯이 벌떡 일어나서 단숨에 밖으로 뛰어나 왔다. 오랜만에 만남 그녀는 맨 처음 이렇게 말했다. "나도 오사카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 그녀는 도쿠노시마 고등학교에서 성적도 좋아 대학 진학을 희망했지만, 집안 형 편이 여의치 못해 대학 진학을 단념했다. 당시 2년간의 은행 근무로 매너리즘에 빠져 잇던 그녀에게 있어서는 역경을 딛고, 새롭게 펼쳐질 희망에 부풀어 있던 내 모습이 신선하기 비쳤을 것이다. 그녀가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그 한마디 말 에 대답처럼 말했다. "돈이 없어도,2년 동안 공백 기간이 있어도, 목숨을 걸고 노력하면 불가능한 것 은 없어." 지금가지도 나의 나쁜 버릇 중 하나는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를 막론하고 적극적으로 후원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녀와 나는 연인 사이 였으니까 그녀를 돕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강렬했다. "서로에게 공통점이 있는 동안은 연애도 이루어지지만, 어느 한쪽이 너무 성장해 서 둘 사이에 공통점이 없어지면 뜨거웠던 연애 감정도 사라진다." 나는 그 당시 그녀에게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갈림길에 서서 무척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공 부를 하지 않았던 2년 동안의 공백과 대학을 진학하기에는 어려운 경제적인 사 정도 있었다. 또 주위에서는 직장 상사와 가족들이 극구 만류하고 있었다. 여름방학 때 귀성해 보니, 그녀는 이미 결심을 굳히고 은행에 사표를 제출해 수 리가 된 상태였다. 그녀는 열심히 대학 입학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힘껏 노력 해 보고 싶어." 그녀는 자신의 심정을 그렇게 표현했다. 여름방학도 끝나 가는 어느 저넉 무렵, 집으로 돌아가 보니, 홍백의 떡을 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라고 어머니에게 묻자, "아무리 공부하기 위해서 라고 는 하지만 딸을 오사카에 데려가면서, 상대방 부 모님의 마음을 생각하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수 없어서........." 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그녀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어느새 약혼식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에 앉거라" 라는 말을 듣고 자리에 앉았더니 약혼식을 시작했다. 그때까지 는 아직 애들처럼 얘기를 나누던 처지였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는 갑자기 어른 이 된 듯한 기분으로 머뭇머뭇 거렸다. 학생 부부의 아르바이트 생활 이렇게 해서 우리 두 사람은 오사카로 왔다. 가고시마에서 오사카로 가는 배 안에서 황혼이 지는 태평양을 보면서,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단 한 번밖에 없다. 언젠가는 죽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기능성을 최 대한으로 살리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후회를 남겨서도 안 된다. 이것은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오사카에 도착한 우리는 미노오 시에 집을 빌려 반 년 정도 함께 생활했다. 그 러나 그녀는 다음해 대학 입시에서 떨어졌다. 이렇게 둘이 함께 상아서는 서러 가 공부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데 생각이 이르자 어떤 결단이 필요 했다. 그래서 그녀를 아저씨 댁에 하숙시키고, 나는 오시카 코우노이케 기숙사 에 들어갔다. 대학 공부는 대입 수험공부에 비하면 마치 놀고먹는 것 같았다. 특히 교양과정 이 많은 1,2년은 더 했다.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에 전념했다. 가 정교사도 하고, 여름방학 때에는 하루 종일 카마가사키로 막노동을 하러 나갔다. 당시 학생 아르바이트는 하루에 500엔 정도였는데, 카마가사키에서는 1천 엔에 서 1,200엔을 받았다. 주로 도로공사의 아스팔트를 갈거나, 빌딩 공사용 철골을 운반하는 등 힘든 막노동이었다. 밤에는 가정교사를 해야 했으므로 정신적으로 는 물론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힘들었지만 도쿠노시마의 농사일에 비하면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1961년 4월, 그녀는 힘겨운 수험 생활 끝에 드디어 긴키 대학약대에 합격했다. 대학에 입학해서는 그녀도 은행에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사무직과 가정교사 등 아르바이트를 했기에 우리는 방학 때도 귀향은 꿈도 꾸지 못했다. 다음해 10월 말경에, 나는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혹시나 싶어 서둘러 귀향했으나 귀향 중인 배 안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전보를 받았다. 장남인 나는 앞으로 집안 살림을 어떻게 꾸려나가야 할지 걱정 이 앞섰고 어머니와 형제들을 돌봐야 했으므로,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조 차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의 시신 가슴에 손을 대보니 이미 싸늘해져있었다. 조문하 러 온 사람들에게 인사하면서도 앞으로 한 집안을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몸 과 마음을 짓눌렀다. 바로 아래 동생은 교토 대학 의과대학를 목표로 재수하고 있었고, 둘째가 중학생, 셋째가 초등학생이었다. 나는 아래 두 동생의 대학 진학 을 위해서는 집안이 모두 오사카로 가는 편이 좋다고 판단하고, 오사카로 이사 할 것을 결심했다. 식구들한테 오사카로 이사갈 것을 제안하자, 모두가 섬을 떠나는 데 동의했다. 어머니는 항상 나를 믿었고, 또 밭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데다 농사를 계속 지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기초에서 임상 진학을 위한 시험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는 예정보다 빨리 상 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흘 뒤에 마지막으로 묘에 들렀 다. 아버지의 부음을 들었을 때부터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만을 생각해서인 지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혼자서 아버지께 아무런 효도도 못했 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무너져 내리고 눈물이 샘솟듯 솟구 쳤다. 돌이켜보면 내 가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간 것만이 아버지께 유일한 기쁨이었고, 아버지 의 노고에 대한 유일한 보답이었다. 차남은 3수, 3남은 7수, 4남은 7년 늦게 의사의 길로 그로부터 넉 달 후에 우리 집 식구는 오사카에서 합류했다. 막상 오사카로 오 긴 했지만 한집에 모여서 제대로 살 형편이 아니었다. 당시 형편상 야오에 있는 문화주택을 빌리는 것이 고작이었다. 방이 두 칸인 비좁은 집이었기에, 어머니와 두 동생이 한방을 쓰고, 집사람이 나 머지 방을 쓰도록 했다. 나는 좁은 집에서 함께 사는 게 오히려 공부에 지장이 있다고 판단해, 대학 졸업 때까지는 학생 기숙사에서 생활하기로 결정했다. 잠깐 여동생에 대해 한마디 언급하면, 여동생은 집안 살림을 위해 돈을 벌어야 했으므로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했다. 당시 집안 사정으로는 도저히 진학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나는 지금도 그 여동생을 생각하면 고등학교에도 진학시키 지 못한 게 항상 마음에 걸리고 안타까울 따름이다. 차남인 도모스케는 승부근성이 제일 강한 성격으로, 도쿠노시마의 작은 마을에 서도 초등학교 때는 37등을 하는 등 88명 중 에서 10등 안에도 들지 못할 정도 로 공부를 못했는데, '형이 오사카에 가면 나는 교토대에 간다'.며 3수 끝에 교토 대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졸업 후 연수를 받을 때도 나보다 더 힘들고 어 려운 근무를 무사히 잘 치뤄 냈다. 비록 동생이지만, 병에 대해서나 환자를 대하 는 태도 등 배울 점이 많다. 그는 체구도 작은데다 성적도 별로 좋은 편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 학 때 개학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동생을 방학숙제를 해놓지도 않고 놀기만 했다. 나는 동생에게 "남은 일주일 동안 잠도 자지 말고 숙제를 다해놔라"라고 엄하게 말했었다. 형의 말을 들은 동생은 방학숙제를 하다가 졸리면 책상에 엎드려 잤 다. 숙제를 끝내지 않고서는 누워 자는 걸 허락할 수 없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숙제를 전부 다해 간 학생은 동생 하나 뿐이었다. 성적이 별 로 좋지 않은 동생이 방학숙제를 전부 다해 온걸 보고 선생은 몹시 놀랐던 것 같다. 동생은 그때 처음으로 칭찬 받았다. 그 사건이 동생한테는 커다란 격려가 되었던 모양이다. 그때부터 공부를 시작한 동생은 초등학교 5, 6학년이 되자 성 적도 많이 올라갔고, 중학교 3학년 때에는 1등으로 졸업했다. 동생은 그때 방학숙제 사건을 통해서, 사람에게 있어 어떤 계기가 얼마나 중요 한지, 그 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아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던 것이다. 3남인 타카노리는 초등학교 시절에는 성적이 좋았는데 장난꾸러기로 아무 계획 이 없는 소년이었다. 결국 7수 만 에 국립 미야자키 대학 의과대학에 들어갔다. 4남인 치요키치 역시 성적이 매우 좋았다. 3남인 타카노리가 몇 년 동안 의과대 학을 입학하기 위해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의사가 되고 싶지만 자기가 형보다 먼저 의과대학에 들어 갈 수는 없다면서 직장을 다녔다. 밤에는 중국 집 에서 접시 닦는 일을 하면서도 틈틈이 입학 시험을 준비해서 가끔씩 의과대학에 시험을 치는 것 같았다. 두 동생이 의과대학에 겨우 합격하자, 셋째 동생도 본격적으로 입학시험에 매달 리기 시작해 동급생들보다 7년 늦게 나라 현립 대학 의과대학에 합격하는 성과 를 거두었다. 나의 가족은 아이들이 일곱 명으로 집사람을 포함해 모두 아홉 명이다. 집사람 은 대학을 다니면서 두 명의 아이를 낳아, 2년의 휴학 기간을 합쳐 6년 만 에 졸업했다 왜 병원을 많이 만들어야 하나 왜 병원을 많이 만들어야 하나 그토록 꿈꾸었던 오사카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을 때 느낀 의문점들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 학부 생활에서의 교양 과목은 재수 시절에 하던 공부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낮에는 카마가사키에 서 막노동을 하고, 밤에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이중으로 돈 버는 일을 계속했다. 전문 과정에 들어가면서 해부학 등 새로운 과목이 많아지고, 재수하던 공부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 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했다는 실감이 확연해졌다. 반면, 기초 의학 과목을 공부할 때는 아무래도 공부 내용이 부족한 감도 들었다. 교수님들의 강의를 듣다 보면 일본 의학이 세계적인 수중에 도달했고, 자랑할 만한 점 또한 많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가까운 동남아시아의 현실은 지금도 많은 사람이 결핵으로 죽어 가고 있 었다. 정말로 일본 의학이 세계적인 수준에 달해 있다면, 동남아시아나 개발도상 국의 의료를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일본 의료 종사자들의 사 명이 아닐까. 의과대학 학생들 또한 학과 공부하는 것에 만족 해 하는데, 이대로 있어도 좋은 가 하는 의문이 생겼다. 강의가 끝나고 친구가 함께 기숙사로 돌아오는 전철 속에서, 나는 공부 만으론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회에 좀더 도움이 될 만한 것이 없을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우리는 '동남아시아 의학 연구회'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처음 시작은 단 두 사람뿐이었던 멤버가 6명으로 늘어나고, 지속적으로 활발한 연구 활동을 벌이는 사이 일본 의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 는 의구심이 들었다. 바로 그 무렵에 응급환자가 응급처치를 받기 위해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다난 다는 사실 등 비상시 매우 중요한 응급의료 체제가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1962년 1월에 도쿠노시마에서 아버지가 급성신부전증으로 돌아가셨다. 도쿠노시 마가 아니었다면, 또 의료시설이 충분했다면 아버지가 그렇게 쉽사리 돌아가시 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나는 도쿠노시마의 의료, 더 나아가 일본의 의료 체제가 마비한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기 초의학 공부가 끝나고 대학 병원으로 실습을 나가면서, 일본 의료계에 대한 많 은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깊어져 갔다. 대학병원에서는 의료의 기본인 응급의료조차 취급하지 않는다. 또 대부분의 공 립병원에서는 경영상 적자를 면치 못했기에, 병원 내부에서는 종종 응급의료를 하지 말자는 의견이 거론되기도 했다. 게다가 대학의 공중위생교실 그룹이 공립병원이 왜 적자인지를 조사하기 위해 '병원 진단'이라는 연구 조사를 실시했는데, 나도 그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마침 '병원 진단' 조사를 통해, 일본의 의료 체계가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이며 그 왜곡이 심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많은 공립병원은 적자를 면치 못함에도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곤 아무 것도 없었다. 대부분의 공립병원은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경비 절감이라는 명목 하에 응급 병원이라는 지정 타이틀을 반납하고, 의료의 기본인 응급의료를 방치하고 있었 다. 그렇다면, 병원은 다소 적자를 줄일 수 있겠지만 시민들은 사고를 당하거나 갑자기 병이 낫을 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이 같은 응급의료의 거부는 병원 측과 의료업계의 일방적인 입장만을 고려한 것 일 뿐이며, 현대 의학으로 고칠 수 있고, 죽지 않아도 되는 병에 걸린 환자가 심 야나 휴일 등 병원의 진료 시간대가 아니라는 이유로 죽어도 된다는 말과 같았 다. 공립병원은 시민들의 세금으로 운영되므로 의사와 직원들은 기본적인 생활을 보 장 받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시민의 건강과 생명은 아무렇게나 돼도 괜찮다 는 것인가. 나는 의료의 기본은 응급의료라고 생각한다. 다음에 만상의료, 그리고 예방의료 라고 생각한다. 만성의료와 예방의료는 의료 종사자들의 여건이 허락할 때, 다시 말해 병원의 운영 시간안에 진료할 수 있다. 그러나 응급의료는 병이 났을 때, 그 즉시 환자의 위급함에 맞춰 치료하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응급의료를 실시 한다는 것은 의료 종사자에게는 몇 배의 노력과 인내를 요한다. 따라서 병원이 만성의료와 예방의료는 실시하면서 응급의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의료 종사자 의 방만한 태도인 동시에 태만이라 할 수 있겠다 쥐꼬리를 휘두르면서 의학박사라니! 시기적으로 의료의 황폐화 현상은 내가 의과대학을 다니던 후반 이후부터 두 드러지게 심화되었다. 그 무렵, 마침 대학가에서는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이 격렬 했으며, 특히 의과대학에서는 의과대학 투쟁이 일어나, '인턴 폐지 운동'과 '대학 병원 보이콧 운동'이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내가 일본의 의료에 대해 진지하게 심사숙고하고 있을 때, 마침 학생운동에 부 딪쳤다. 나 자신은 결코 섹트(당파, 학파, 종파)활동기는 아니었지만, 이대로 보 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으로 의료계의 모순과 학생운동을 연결해서 생각해 보았다. 우연히 당시 나는 학생회의 집행위원이었기 때문에 학생운동을 추진하 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었다.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일본 의료에 도움이 될지, 학생인 우리가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우선 우리자신을 납득시킬 수 있는 운동에 대해 생각했다. 도쿄 대학 의과 대학과 쿄토 대학 의과 대학원에서도 박사학위 를 보이콧 할 것인지, 아니면 먼저 외부에 대한 압력을 반대할 것인지 등 방법 에 대한 논쟁도 있었다. 예를 들면 직접 박사학위 칭호 보이콧 운동을 하면 좋 지 않을까 하는 의견들을 내놓았다. 도쿄 대학과 쿄토 대학에서 하는 대로 무턱 대고 E라한다는 것도 성격상 맞지 않아서, 우리는 '의학박사 칭호 보이콧 운동' 을 하기로 결정했다. '의학박사 칭호 보이콧'을 왜 할 수밖에 없는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국민의료의 입장에서 의학박사 칭호 자체가 국민을 끊임 없이 수단으로 이용하고 의료를 왜곡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메이지 이후, 일본에서는 '결국엔 의사가 대신인가' 또는 '의학박사에게 진맥을 받아 보면 죽어도 후회가 없겠다.'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었다. 의사들이 이 같은 풍조에 힘업어 병원을 개업해서 돈을 벌겠다고 마음먹으면, 의학박사가 되는 것 이 훨씬 유리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치 박사라는 칭호가 개업의 면허 증처럼 되어 있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젊은 의사들은 병원에 나가 환자들을 진료하는 임상 연수를 하기보다 시험관이나 가지고 실험하거나, 실험실에서 쥐꼬리를 휘두르거나, 도서 관에 가서 의학 역사를 연구해서 논문을 쓰는 데 온 정력을 쏟아 부었다. 의학박사가 되어서 환자를 진찰한다고 반드시 실력 있는 의사는 아니다. 진심으 로 환자를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과는 전혀 관계없는 칭호일 뿐이다. 의학박사 칭호가 의사의 명예와 돈벌이를 위해, 끊임없이 환자를 하나의 수단으로 이용한 다고 할 수 있었다. '의학박사 칭호 보이콧' 운동의 두 번째 이유는 졸업 교육을 위한 의국, 교실은 본래 의학, 의료기술, 인간성을 공부하는 장소이므로 사제지간에 도제제도가 되 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박사 칭호가 개입함으로써 노예제도로 그 성격이 변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의과대학 졸업생의 목표는 가능한 빨리 의학박사 칭호를 받는 것이다. 따라서 연구 주제도 박사 논문을 취득하기 쉬운 것으로 택하고, 논문을 다 쓰고 나서는 하루라도 빨리 학위를 받고자 한다. 결국 누구에게 먼저 박사 학위를 줄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교수의 마음에 달려 잇는 것이다. 그 결과 의국 내부에서는 누구 봐도 한심스럽고 지나칠 정도로 극심한 아첨 경 쟁이 일어난다. 대학을 졸업해서 의사가 되는 면허증을 얻기 위해 매일 아침마 다 교수 차를 세차 하기도 한다. 더욱이 아첨 경쟁을 통해 박사칭호를 받을 단계가 되면, 이번에는 교수에게 어 느 정도로 인사를 해야 하는지 돈의 액수를 정하는, 이른바 시세까지 정해지는 실정이다. 결국은 돈으로 박사를 사고 파는 풍조가 만연해 진 것이다. 한 번은 박사 칭호 매매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했던 적도 있었다. 어떤 개업의가 어느 날 갑자기 의학박사라는 이름을 내걸고 성대에게 축하연을 베풀었다. '웃기지도 않나. 저 의사는 아무 연구도 안 했는데........' 축하연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 속마음은 그랬지만, 그것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대학의 의국에 기부금을 많이 내면 다른 사람이 쓴 논문을 돈을 주고 산 사람의 이름으로 서명해 준다. 실제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있었다. 이 같은 비윤리적이고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박사 칭호를 받고자 하는 이유는, 옛날부터 우리 국민들 사이에 '의학 박사는 훌륭하다.'는 인식이 박혀있 고, 그런 국민들의 심리를 이용해 개업하면 돈벌이가 수월했기 때문이다. 또 학벌이나 박사 칭호를 따기 위해 의국으로 모여든 젊은 의사를 의국이 관여 하고 있는 병원으로 출장 보내는 일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교통이 불편한 시내의 변두리나 지방 등 의사들이 가기를 꺼리는 지역에 있는 병원은 의국에 어떻게 해서든지 잘 보이려고 아부하고 매일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드리 는 상태였다. 일반인들에게 공개하기에는 너무도 부끄럽고 창피한 이야기지만, 박사 칭호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노예제도나 아첨 경쟁이 일본의 의료를 얼마나 왜곡하고 황 폐화시키고 있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의학박사 칭호 보이콧'을 하면 졸업 후 의사가 박사 칭호를 목 표로 하는 대신 임상 연수에 힘쓰게 되어 좋은 의사가 많아지고, 국민의료에 도 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의사에게 있어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 5, 6년간의 시간은 선배 의사들로부터 의 료 기술을 배우고, 실제로 환자를 진료하면서 임상 공부를 하는데 최고로 중요 한 시기인 것이다. 그런데 박사 칭호 제도 때문에 의사는 그렇게 중요한 시간을 환자를 진료하는 의료 기술을 배우는 것과는 거리가 먼, 박사 학위만을 따기 위해 연구실에서 실 험 등으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래서 임상 연수를 위한 귀중한 시기를 놓치고, 의사로서의 자질을 크게 떨어 뜨리고 후퇴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물론 의학을 연구하는 학자나 연구자도 필요하다. 하지만 의과대학을 졸업한 100명 모두가 '박사'칭호를 받기 위해 연구에만 몰두할 이유가 없다. 의사의 자 질로서 중요한 것은 어디까지나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임상일 것이다. 이를 테면 나는 100명이 의과대학을 졸업한다면 7, 80명은 환자를 치료하는 훌륭한 임상의가 되고, 나머지 2, 30명은 정말 열심히 의학 연구에 몰두하는 학자가 되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령 건축가가 건축사 이론만을 연구한다면 집을 지을 수 없다. 그보다는 한 칸 이라도 더 많은 집을 지어 보고, 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해서 훨씬 편리하고 쾌적한 환경의 집을 지으면서, 경험을 축적하고 노하우를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일본 의료를 황폐화시키는 원인 중 하나가 박사 칭호 보이콧 운동을 벌 이지 않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이 운동을 전개했다.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40년 졸업생 전원이 '의학박사 칭호 보이콧'을 결의하고, 서명 운동을 전개했다. 당시 '의학박사 칭호 보이콧' 결의는 일본에서는 처음 잇 는 일이었다. 우리가 펼친 이 운동이 의학계의 체질과 제도를 완벽하게 개선하지는 못했지만, 개혁에 다소 영향을 미치는 계기로는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간장은 알아도 심장을 모르는 의국 시스템 1965년, 3월, 나는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오사카 대학 부 속병원에서 인턴 과정을 마치고, 1966년 5월에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했다. 나는 전공으로 외과를 택했다. 어딜 가도 통용될 수 있는 의사, 예를 들어 무의 촌, 동남아시아 등 어디에서나 혼자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의사가 되려면 외과 가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과 의사는 책을 보면서 수술하기는 곤란하지만 외과 의사는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책을 보면서 내과 치료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병이든지 통용되는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다 양한 훈련을 요하는 외과 의사가 되는 게 좋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나는 제2 외과국에 들어갔다. 나는 재수 시절 2년 동안 중요한 것을 깨달았다고 앞서 말했듯이, 그것이 바탕 이 되어 매년 하나의 목표를 정하고 평소 목표를 향해 전력투구하는 일관된 자 세로 생활해 왔다. 의사로서 새롭게 출발하면서도 나는 먼저 목표를 세웠다. 대부분의 의과대학 졸 업생들의 첫 번째 목표가 의학박사 칭호를 얻는 것이지만, '의학박사 칭호 보이 콧 결의'를 주장했던 내가 졸업했다고 해서 박사 학위를 목표로 정할 수는 없었 다. 무엇보다 국민 의료의 입장에서 대학 졸업 후에는 임상 연수가 가장 우선되 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므로, 나의 기본 목표는 당연히 임상 연수에서의 경쟁이었 다. 즉, 나의 첫 번째 목표가 실력 있는 외과 의사인 이상 많은 경험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어떤 종류의 수술이든지 완벽하게 할 수 있도록 노하우를 쌓는 것이 었다. 그러나 일본의 경우, 졸업 후 임상 연수는 대부분 의국(병원에서 의무를 취급하 는 부서)에 들어가는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의국에 들어가게 되면 의료 전반에 걸쳐 진료할 수 있는 의사가 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의국은 외과. 내과. 소아과. 등의 각 과로 크게 나뉘고, 내과는 소화기계. 순환기계. 내분비계 등으로 다시 나뉜다. 거기서 소화기계는 위 그룹. 간장 그룹으로 더 세분화된다. 외과 역시 마찬가지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의국에 들어가면 자가가 담당하는 부서 외의 다른 질병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일반적으로 간장에 대해서는 알아도 심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지 나치는 교육이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나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는 동료가 부러웠다. 미국에서는 의사가 되는 과정 중에 인턴. 레지던트로 한 달에 20일간 병원에 머 물면서 엄격한 연수를 받기 때문에 이 과정을 마치고 나면 본인도 놀랄 정도로 실력이 부쩍 늘어난다. 그러나 그때 나는 미국으로 공부하러 갈 형편이 아니었다. 처와 자식이 둘이나 있는 데다 셋째 동생마저 돌봐야 하는 형편에 있었다. 또 의학박사 칭호 보이콧 운동에 몰두해 있었기에, 미국 유학 시험을 볼 기회마저도 놓치고 말았다. 생활과 공부를 위해 광적으로 수술을 경험 나는 국내의 동료들은 물론 미국으로 유학간 동급생한테도 절대 뒤질 수 없다 는 굳은 의지를 갖고 임상 연수에 몰두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대학병원 및 출장 병원에서 열심히 임상 연수를 받았는데, 휴일이나 연휴에도 쉬지 않고 임상 연수에 몰입하면서 일주일에 5일 동안은 어 느 병원에서든지 숙직하며 당직의를 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 이유 중 하나는, 가능한 한 많은 환자를 진찰해서 다양한 질병들의 증상 경 험을 늘리기 위해서였다. 공립병원이든 사립병원이든 대학을 졸업한 젊은 의사 가 아르바아트로 당직의를 하는 사례가 많지 않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보다 당직 의를 휠씬 많이 자처했다. 내 부서에서 입상 연수를 받는 것도 중요했지만, 당직 의를 하면서 여러 의사와 환자를 접함으로써 각종 질병의 사례를 접하는 것이 당직의를 하지 않는 동료들보다 휠씬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게 했다. 또 이 무렵에는 좋은 의미에서 의국의 선후배 사이에서는, 예를 들어 야간이나 휴일에 진료해야 할 환자가 많은 경우 그 병원에 근무하는 선배와 대학병원에서 당직하는 선배가 부르면 바로 달려가 수술 방법을 제대로 배울 수 있는 분위기 가 형성되어 있었다. 수술실에 들어가서 수술을 지켜보는 정도가 아니라 후배라 도 실력이 있으면 선배의 적절한 지도를 받으면서 집도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 졌다. 당직을 많이 한 또 다른 이유는, 당직료를 받기 때문이었다. 도쿠노시마에서 농 사를 짓던 때의 수입과 막노동 아르바이트 밖에 몰랐던 나에게 당직으로 받는 당직의로 받는 당직료 수입은 굉장히 큰 액수 였다. 보통 일반 임금의 3-5배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게다가 그 당시는 생활비와 동새의 학비 때문에라도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하는 처지였다. 특히 연말연시에는 28일부터 새해 정월 3일까지는 가방에 갈아입을 옷을 넣고 가서, 일주일 동안 병원에서 계속 먹고 자면서 당직을 했다, 이같은 생활은 너무 고되서 체력 면에서 매우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론 내가 각종 질병의 다양한 증 상을 경험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이렇게 나는 광적으로 여러 질병의 증상 경험을 늘려 갔다. 그와 동시에 1년째 는 외과으로서 구체적인 목표를 외과의 기본인 맹장 수술에 중점을 두었다. 처 음 1년 동안 출장 나간 병원에서는 외과의 부원장이라는 평판을 들을 정도였으 며 환자가 쇄도했었다. 그 병원에서 외과의는 부원장과 나 두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우리 둘이서 적을 때는 70병상을 , 많을 때는 100병상이나 관리해야 할 때도 있었다. 도전 중에는 교대로 외래 진료를 회진하고,, 오후부터는 매일 둘이서 수술만 했다, 선배의 말 에 따르면 부원장은 외과 수술의 명수로 젊은 외과의한테는 수술을 잘 집도시키 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나 그 부원장은 유독 나에게만은 수술을 많이 시켰고, 여 러 방면에서 세심하게 지도해 주었다. 내 수첩에도 최초의 1년 동안 근무했던 병원과 당직 병원에서의 수술 사례가 깨 알같이 빽빽하게 기록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1년동안 나는 294건의 맹장수술 을 했다. 그 덕에 제 2외과국의 동료들은 나를 '맹장수술광'이라 불렀으며, "맹장은 도쿠다 에게 물어보라"며 칭찬도 비웃음도 아닌 말을 던지곤 했다. 이렇게 외과 일반을 공부하면서 외과의 기본인 맹장 수술에 중점을 두었던 1년 이 지나가고, 다시 2년째에는 위 절제, 마취 순으로 차례대로 목표를 세워 놓았 었다. 그렇게 계획을 세움으로써 게으름을 피우고 싶어도 마음을 다잡을 수 이 었고 또한 긴장이 연속되는 나날을 보낼 수 이었다. 나는 병원을 설립하기까지 8년 동안 오사카 대학 부속병원을 중심으로 다른 네 군데 공립병원으로 출장을 다녔다. 어떤 병원이든 온갖 종류의 임상 사례를 경 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주어졌다. 병실이 남아도 예약되었다며 거절하는 공립병원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병원에서 일한 8년 동안, 일본 의료계는 질은 물론 양 적인 측면에서도 뒤쳐져 있으며, 의료진들의 의식 부족으로 전체적인 분위기가 황폐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나는 '의료만큼은 돈벌이의 수단이 되어서 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주로 공립병원에서 근무했다. 공립병원에는 유능한 의사 도 있고 간호사의 질도 우수한 편이었다. 병원의 규모 또한 크고 최신 의료기기 도 잘 갖추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료 접수를 오전 9시부터 11시까지, 오후 2시부터 오후 3시밖에 받지 않는다. 그 이외의 시간은 접수를 받지 않는다. 갑자기 병이 난 응급환자의 경우에도 평일 접수 시간에는 접수를 받지만 야간과 휴일에는 접수를 일체 받지 않는다. 일요일에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면 바로 코 앞에 대규모 시설을 갖춘 병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 돌아 다니다가 겨우겨우 멀리 떨어져 있는 작은 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 도저히 있 을 수 없는 일임에도 이런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시민병원이나 국 립병원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음에도 응급환자인 시민을 위해서는 어떠한 도움도 주지 않는다. 만약 근처에 큰 병원이 없어서 멀리 있는 작은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다면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집 근처에 큰 병원이 있는데도, 단지 근무 시간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이 병원 저 병원을 찾아 헤매야 한다. 그 사이에 환자가 죽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규모가 작은 병원인데도 응급환자를 받아 응급의료를 실시하는 곳이 있다. 그런 데 우수한 의사와 간호사가 많고, 시설이나 규모 면에서 앞서가는 공립병원에서 응급의료를 실시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이 되이 않는다. '왜 응급의료를 실시하지 않는 걸까.' 기본적인 시민을 위한 의료, 국민을 위한 의료라는 기본적인 인식이 결여되었기 때문이다. 의료 행위의 본직은 환자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병원과 의사 및 의료 종사자들이 의료의 본문을 망각하고 있다. 의료계의 종사자들이 자신들의 입장 과 권리를 주장할 기회는 있었지만, 반대로 환자의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 는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들의 가족이 병이 났을 때는 야간과 휴일이라도 비합법적으로 병원에 입원시켜 치료 와 수술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그들이 다른 응급환자의 애타는 마음을 알 리 없 다. 또 의료계를 움직이는 정치가 등의 사람들 여시 아플 때는 접수 시간이 아니더 라도 언제든지 시설 좋은 큰 병원에 입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그래서 일반 인들이 업무 시간이 아닐 때 아팠을 경우 얼마나 답답하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초초하게 뛰어다니는지, 병원으로부터 얼마나 참기 어려움 냉대를 받는지 등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또 구태여 이 사실을 알려고도 하니 않으며, 설 령 안다고 해도 응급환자를 위해 어떠한 조취도 취하지 않는다. 한 번은 이런 경우도 있었다. 한 외과 응급환자가 병원에 전화를 걸자 간호사는 이렇게 거절한다. "오늘 당직 선생님은 내과의니까 다른 병원으로 가세요" 이번에는 내과 환자가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당직 선생님이 외과의니까....." 걸려오는 모든 전화를 대부분 이렇게 거절한다. 이런 일은 일상에서 다반사로 일어난다. 이런 병원에 내가 당직의로 가면 간호사들은 노골적으로 싫은 내색을 보인곤 한 다. 내가 당직의일 때는 심야든 휴일이든 상관없이 응급 전화가 걸려오면 내과 든 외과든 모든 환자를 접수하도록 지시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진료 결과 "이 환자는 입원이 필요하다"면서 간호사들에게 침대 정리나 링겔을 시키는 등 잡일이 늘어나므로, 어떤 간호사는 침대가 비어 있는데도, "빈 침대가 없습니다" 라고 말한다.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조금 전에 옆방에 빈 침대가 있지 않았나"라고 내가 물으 면, "그것은 예약인데요"라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그러면 나는 "예약이라도 상관없으니까. 응급환자부터 입윈시키세요"라고 말하고 종종 입원시키기도 했다. 의료 종사자로서의 의무와 자부심과 사명감이 결여된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사 실에 대해 의사인 나조차 견딜 수 없이 화가 난다. 만일 환자 가족들이 이 사실 을 그들은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병원을 때려부술지도 모른다. 실패하면 오히려 돈을 버는 장사 너무 세분화된 전문적인 교육만을 받고, 임상 연수가 불충분한 채 의사가 되 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의료 기술이 저하되는 것도 문제다. 그러나 의료계는 기술이 떨어져서 실패해도 의사는 결코 경제적인 손해를 입지 않는다. 의료계가 실패하는 쪽이 오히려 의사에게는 돈벌이가 잘되는 이상한 세 계가 바로 이곳이다. 일반 사회에서는 자신의 실수로 실패하면 자기가 손해보는 '자업자득'의 구조로 되어 있지만, 의료계는 소위 '자업타손'의 구조로 되어 있다. 때문에 열성적이고 진지하게 기술을 연마하지 않는 의사도 많다, 또 의료업계 종사자 및 일반인들의 윤리의식 저하도 커다란 문제가 되고 있다. 본래 건강보험 제도의 취지는 바람직하지만 자신의 경제적인 부담이 적기 때문 에 환자가 보험제도를 안이하게 악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 의사나 병원은 그런 환자들한테 필요 없는 약을 주거나, 필요 없는 검사를 하게 하거나, 필요 없는 사람을 입원시켜서 돈벌이를 하는 사례도 많다. 그럴 경우 꼭 입원을 해야 하는 환자가 있어도 병상이 꽉 차서 입원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가 발생 하게 된다. 대도시와 대도시 인근 지역은 산업의 성장과 함께 인구가 급증했다. 그러나 인구 증가에 비해 의료 시설, 특히 병원의 증설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응금의료 체제의 모순이 심각한 폐해를 낳고 있으며, 나아가 사회 문제화되고 있다. 만성의료와 예방의료에서도 많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예를 들면 입원을 신청 해도 병상이 부족하기 때문에 2,3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대학 병원의 안과에서는 보통 반 년에서 1년 정도를 기다려야 한다. 또 어떤 큰 병원 에서는 운좋게 조기에 위암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서도 외과에 수술을 의뢰한후 3,4개월 동안 암은 빠르게 진행됐을 것임에 틀림없다. 모처럼 입원했더라도 업무시간 외에나 휴일이라서 용태가 급한 경우에도 검사를 받지 못하거나 충분한 처지를 받지 못해 상태가 위독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환자를 위해 병원을 세우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일본의 의료가 황폐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3시간 기다려도 진료는 단 3분'이거나 접수 창구에서의 불친절로 불쾌한 감정에 휩싸 이게 된다. 이러한 의료체제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불만은 점차 확대되고 있다. 나는 의사로 병원 생활을 시작한 후 8년 동안 근무의와 당직의 체험을 통해 사 회문제로까지 되어 버린 의료의 황폐화 현상을 확연하게 실감했다. 일본의 의료 는 어딘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의료계 종사자들은 환자가 주인이 되는 환자 중심의 참다운 의료 정신을 정말로 잊어버린 것일까. 현재 의료계의 종사자들 중에는 국민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의료인의 의무감. 사명감. 자부심을 마치 휴지조각처럼 내던진 사람이 너무 많다. '이래서는 안되겠다. 무엇인가 개선하지 않으면 안된다. 휴일과 야간에도 응급환 자를 위해 진료하는 응급의료 체제를 하루빨리 마련하고 시행하지 않으면 큰일 이다....' 나는 응급의료가 황폐화되어 있는 현실 속에서 동생의 죽음이 떠올랐다. '환자 중심의, 환자를 위한 의료를 실시하는 병원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병 원을 만들어야 한다는 강한 의지로 분출되자 도저히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진정한 의료가 무엇인지를 나 하나만이라도 보여주자. 그러면 어떤 고발보다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리고 황폐화된 일본의 의료계를 바꾸는 것이다. '좋아, 내가 병원을 세우자!' 나는 어려서부터 오랫동안 마음속에 품어 왔던 다짐 을 이번 기회에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결심했다. 분노와 슬픔의 진흙탕속에서 내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직접 병원을 세우는 방법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깨 달았다. 무자본으로 병원을 세우다 1971년에 들어서자, 나는 본격적으로 병원을 짓는 구상에 들어갔다. 내 나이 32살 때였다. 구체적으로 어떤 병원을 만즐지 전체적인 규모는 막연했지만, 전문 외과를 중심 으로 내과를 두고, 24시간 진료하는 응급의료 체제를 실시하는 것을 기본 골격 으로 짰다. 그러려면 의료 기기등 설비 시설과 스텝진이 어느 정도 규모를 갖춘 병원이 아니면 안되었다.] 내 수중에 있는 자금이라곤 한푼도 없었다. 대가족을 이끌고 공립병원에 근무하 면서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당직의를 하는 내게 여유 자금이 있을 리 없었다. 또 한 억대가 넘는 자금이 소요되는 병원 건설에 몇 푼의 자본금은 있으나마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자금 출저로는 은행과 의료금융금고가 있다. 비록 내 자본금은 없지만 병원을 지은 후 확실하게 운영해서 흑자 경영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완벽 한 계산으로 문서화하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말로는 참다운 의료를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병원 운영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의 이상도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제일 먼저 장소를 물색하기 위해 돌아다녔다. 당시 나는 오사카에서 생 활하고 있었으므로,오사카에서 병원이 많지 않아 시민들이 가장 곤란을 겪는 지 역이 어디인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인구에 대한 병원의 수, 병상 부족률, 구급차 의 시외운반율, 환자가 병원을 돌아다니다 입원하는 실정... 등을 통계적인 숫자 뿐만 아니라 실제로 살고 있는 주민들ㄹ 이야기도 참고해 철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오사카 부 이래서 마츠바라 시와 다이토 시의 두 곳이 최악의 의료 부 족 지역임을 찾아냈다. 그중 어느 쪽을 병원 부지로 택할 것인지 많이 고민했지 만, 병원을 세우고 난 뒤에는 무조건 성공해야만 했다. 그래서 교통이 좋다는 것 은 환자가 찾아오기 쉬울 뿐만 아니라 직원을 모집하는 데도 중요한 조건이 된 다. 나는 바쁜 시간을 내어 마츠바라 시에 가서 적당한 병원 부지를 찾으러 부 지런히 돌아다녔다. 그해의 5월 이었다. 마츠바라 시를 돌아다니던 나는 카와치아마미 역 앞에 있는 적합한 땅을 발견했다. 철로 옆에 있어 역에서도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 었다. 그러나 그곳은 나재지가 아니라 양배추가 심어진 밭이었다. "이 땅 주인이 누굽니까?"하고 동네 사람들한테 묻자, "누군지 모르겠지만, 매일 아침 6시면 양배추를 거두러 온다"고 대답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가보니, 땅 주인이 와 있었다. 나는 먼저 말을 꺼낼 용기가 나 지 않아 잠시 밭 주위를 서성거렸는데, 땅 주인이이 먼저, "오늘도 좋은 났지요" 라며 말을 건냈다. 그러자 나는, "이곳의 지반은 약합니까, 든든합니까. 큰 빌딩 같은 거 지을 수 있습니까?"라고 슬쩍 속을 떠보았다. "당신, 무얼 하려는데 그 러시는거요?"라며 그가 되물어 왔다. "실은 병원을 짓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래요 .... 이 땅은 선조 대대로 물려받은 땅이라 지금까지도 팔 마음은 없지만, 병원을 짓는다면 팔아도 좋겠소." 땅 주인의 대답에 용기를 얻은 나는 서둘러 자금 만들기에 착수했다. 1972년에 세운 병원의 계획 자금은 토지. 건물. 설비. 의료 기기 등을 포함해 총 1억 6천만 엔이었다. 그때 나는 주위사람들로부터 이런 말도 많이 들었다. "무일푼인 주제에 혼자서 그런 큰 병원을 잘도 짓겠다." 하지만 실제로는 80병상의 규모에 불과했다. 정말로 이상적인 의료를 실시하고, 환자를 위한 병원을 만들려면, 병상 규모가 300개 이상은 되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내 능력으로는 80병상이 최대 한계였다. 또 그 이하로 규모를 축소하면 병원 관리와 운영 측면에서 매우 불리하고 응급 시설을 운영하기가 곤란했다. "의학박사 칭호 보이콧 등으로 시끄럽게 굴더니 결국은 남들처럼 병원을 개원해 돈벌이를 하려는 것 아냐!" 그렇게 될 경우 결국에는 그런 소리밖에 들을 수 없 었다. 그래서 황폐해진 의료에 도전하기 위해서는 어쨌든 최소한의 의료가 가능 한 규모의 병원을 만들어야만 했다. 무담보 무보증인으로 1,800만 엔을 빌리다, 이제 자금을 구해야 할 때가 왔다. 자금 마련은 대단히 힘든 일이었다. 은행이 든 누구든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돈을 빌려주지만,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결코 돈을 빌려주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병원 같은 확실한 업종이라서 돈을 쉽게 빌 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나만의 달콤한 기대에 불과했다. 담보도 보증인도 없 는 나를 기다리는 건 어떤 은행에서건 문전박대뿐이었다. 모처럼 양배추 밭의 주인이 호의를 베풀었음에도 자금 조달은 막막할 뿐이었다. 그런데 8월이 되자 운이 따랐는지, 금융 사정이 의외로 내게 유리한 방향으로 풀리기 시작했다. 소위 ‘닉슨 쇼크’였다. 설비과잉의 대기업은 은행에서 대출 이 금지되는 정책이 실시되었다. 오히려 각 은행은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융자에 열을 올렸다. 더불어 의사에게도 대출이 가능하다는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나는 다시 은행으로 인사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무도 해야 했기 때문 에 대부분은 집사람이 융자 받는 일을 알아보았다.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아 이를 등에 업고 별 뾰족한 대안도 없이 은행을 찾아다녔으니, 집사람으로서도 대단히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어떤 은행의 야오 지점에서 융자가 가능할 것 같다는 집사람의 얘기 를 듣고 이번에는 내가 직접 은행으로 갔다. 나는 그 동안 융자에 필요한, 1억 6천만 엔 규모의 병원 건설에 대한 상세한 수 지계획서를 만들었었다. 계획서에는 인구 비례에 필요한 병원의 병상 수, 기존 병상 수, 부족한 병상 수, 외래와 입원 환자 수, 보험청구 단가, 설비, 매각, 수지 에서부터 현지 주민들의 생활 실태까지, 병원 건설 및 운영에 필요한 모든 자료 가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아직도 조사할 게 더 있습니까?” 나는 은행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은행에서는 이 이상은 조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보고서를 읽고 놀란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은행에서 필요로 하는 자료의 120%에 달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던 것이다. 이 보고서가 은행측에서 인정을 받았는지, 융자 교섭이 진행되었다. 은행측에서 는 이런 대규모의 병원을 세우겠다고 하는 내가 무일푼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 지 않았던 모양이다. 적어도 내 수중에 5천만 엔 정도의 자금은 있을 거라 생각 하는 듯했다. 나는 정직하게 무일푼임을 강조했지만, 은행에서는 오히려 그런 말 을 하는 나의 태도를 겸손하다고 생각했었는지 더욱 신용하는 결과로 작용했다. 어쨌든 이번 대출 건은 쉽게 진행되었다. 대출 금액은 토지 구입자금인 1,800만 엔. 원칙대로 하자면 토지를 제1저당으로 잡혀야 하지만, 토지를 담보로 하면 의 료금융금고에서 건축자금을 빌릴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은행에는 담보 없이 토 지 권력증과 위임장만 맡기고 융자를 받기로 했다. 1,800만 엔밖에 없는데 1,800만 엔의 변제를 재촉받다 그런데 토지 주인에게는 아직까지 계약금도 가지 않은 상태였다. 당장 200만 엔의 계약금을 걸지 않으면 토지매입 건은 무효가 된다. 나는 정신없이 여기저 기서 돈을 끌어모았다. 그렇게 모은 돈이 겨우 100만 엔, 나머지 100만 엔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그러나 빨리 대책을 마련하지 않으면 은행의 신용도 잃게 된다. 나는 100만 엔만 갖고 땅 주인을 찾아갔다. 땅 주인에게는 계약금이 준비 될 때까지 반 년 동안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은 처지였다. 계약금을 마련하지 않고서는 염치가 없어서 도저히 찾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반 년이 지 났으니 땅 주인은 나와의 구두계약이 물 건너간 것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 런데 갑자기 내가 계약금을 들고 찾아가니 땅 주인도 당혹스러워하는 한편 무척 놀라는 눈치였다. “그때는 얼떨결에 팔겠다고 말했지만, 그 후 여러 가지로 사정이 변해서…….” 그렇게 말하는 땅 주인의 얼굴에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로부터 나는 병원 근무 중에라도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땅 주인을 찾아가 사정을 거듭했다. 나는 일곱 번을 찾아가서야 겨우 땅을 팔겠다는 승낙을 받아 냈다. “말씀드리기 죄송하지만, 계약금을 반밖에 갖고 오지 못했는데요…….” 나는 100만 엔을 내밀면서 말끝을 흐렸다. “일단 선수금으로 받아두지. 그럼 나머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일주일 안에 반드시 마련하겠습니다.” 무슨 배짱으로 그런 터무니없는 약속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렇게 약속을 하고 도망치듯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토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만일 그때 땅 주인이 계약해 주지 않았더라면 병원건설의 꿈은 틀림없이 물거품으로 사라졌을 것이다. ‘아, 이제 무엇인가 되는 것 같다.’ 땅을 계약하자 비로소 실감이 났다. 나로서는 운명의 갈림길에 서 있었던 것이 다. 결국 나머지 100만 엔도 필사적으로 끌어모아 계약금을 지불하자 정식 매매 계약서가 작성되었다. 은행에서 1,800만 엔을 융자받아 토지 대금을 전액 지불했 던 때가 그해 12월 20일이었다. 겨우 토지가 내 명의가 된 후 열흘이 지났는데 은행으로부터 전혀 예기치 못한 소식이 전해져 왔다. “실은 지난번에 대출한 1,00만 엔을 갚아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말씀드리기 곤란하지만, 내부 사정이 있어서 그렇게 됐습니다.” 단 한마디뿐이었다. 나는 순간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은행에서 내가 무일푼이라는 사실을 알고 내부에서 문제가 된 것 같았다. 그러나 1,800만 엔밖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도저히 갚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죽어도 남한 테 아쉬운 말은 하기 싫었다. “알았습니다. 그러나 지금 당장 갚는다는 것은 무리니까, 대신 융자받을 은행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세요.” 이렇게 말하는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큰일은 이제부터구나, 하는 한숨과 걱정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매년 섣달 그믐날부터 정월 3일까지 나는 당직의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시간을 내서 여기저기 은행에 찾아가 교섭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머리 속이 복잡했 다. 먼저 병원 건설 예정지에서 제일 가까운 은행부터 차근차근 돌기로 했다. 또 한 새로 개설된 지점이라면 혹시 창설 의지를 갖고 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를 하면서 신설 지점의 목록부터 만들었다. 먼저 1월 4일 아침, 병원 예정지에서 가장 가까운 은행을 찾아갔다. “새해 들어 은행 문을 열자마자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은 당신이 처음입니다.” 은행 직원은 웃으면서 상대조차 해주지 않았다. 이 은행을 필두로 은행이란 은 행은 모두 돌아다녔다. 융자를 새로 받기 위해 나는 필사적으로 돌아다녔다. 막 개설된 은행도 여섯 군데나 있었지만, 어느 은행이건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도 않고 문전박대했다. 그런데 단 한 군데, 어떤 은행의 후지이데라 지점이 내 계획에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 은행에 틈나는 대로 들락거렸다. 그리고 2개월 후인 2월 26일이 돼서야 1,800만 엔을 되갚을 수 있었다. 자살하면 받게 되는 생명보험을 담보로 융자받다 결국에는 그런 나의 열의가 통했다. 나는 기쁨보다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무담 보에 보증인 한 명 없이 받은 융자였다. “부인이 보증을 서면 어떻겠습니까.” 은행에서는 이런 제안을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집사람 또한 엄격하게 따지면 남입니다. 그녀와 헤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죠. 남 한테 피해를 끼치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마지막까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나는 나의 결심을 밝힌 뒤, 생명보험을 담보로 하기로 했다. 보장성 생명보험을 가입하고 1년 이상 지나면 자살을 한다 해도 보험금이 지급 되었다. 보험 수취인을 은행으로 하고, 위임장을 담보로 융자를 받았다. 현재 내가 가진 것이라고 생명밖에 없었다. 남에게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따라서 계획에 차질이 생기거나 문제가 생기면 병원 옥상에서 뛰어내릴 각오를 했던 것이다. 보험금도 병원 융자에 맞춰서 사고시 1억 7,700만 엔을 받을 수 있 도록 생명보험을 네 군데 보험사에 들었다. “착공에서 완공까지 1년 정도 걸린다지요. 가입 후 1년만 지나면 자살해도 보 험금이 나오니까, 만일 갚지 못하면, 옥상에서 뛰어내리세요.” 은행 지점장은 진심으로 말하는 듯했다. 그러나 은행에서는 처음부터 ‘자살’ 을 담보로 해서 돈을 빌려줄 수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나 역시 생명보험의 수취인을 은행으로 하고, 위임장을 맡긴다는 발상은 은행에 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 우러난 ‘성의’였다. 은행도 틀림없이 그런 나의 굳은 결의를 인정했기에 융자를 해주었을 것이다. 은행에서는 틀림없이 병 원이 건설되고 운영이 잘될 거라고 믿었다. 병원이 완공되어 개원할 때 지점장은 이런 말로 축하 연설을 했다. “나는 도쿠다 원장이 돈을 빌리러 왔을 때, 처음에는 말도 안되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상담을 하는 동안 이 사람이라면 해낼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만 본점에 가서 이 융자 건에 대해 설명할 때 사람 됨됨이 외에 는 달리 설득할 만한 근거가 없어, 난처한 입장에 빠지기도 했지요…….” 나는 은행에서 상담이 있는 날에는 반드시 15분 전에 미리 가서 기다리곤 했다 연락을 할 때도 늦거나 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미리미리 조사와 준비를 철저하게 했고, 물샐틈없이 완벽한 계획서를 만들어두었다. 게다가 가능한 한 상 대방한테는 피해를 주지 않겠다는 심정이었다. 이런 나의 태도와 자세로 인해 지점장은 자신의 책임하에 대담하게 융자를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병원 설립은 새로운 고민의 시작 자금이 마련되었다. 병원의 설계도가 완성되고 양배추 밭에서는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공사가 착수되기 전까지는 연일 의료금융금고에서의 건축비 융자, 설계, 건설회사의 결정 등 정신없이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병원을 짓는 일 외 의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공사에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공 사가 시작되자 몰두할 것이 없어진 느낌이었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병원이 세 워진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지 모르지만, 나는 반대로 겁이 나기 시작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병원을 세우는가!’ 나는 원점으로 돌아가 고민을 다시 시작했다. 왜냐하면 꺼림칙하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의료를 돈벌이 수단 으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누가 봐도 당연한 의료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 하고 병원을 짓기 시작했는데, 생활의 안정을 꾀하고 싶다는 사념이 마음 한구 석에 자리잡는 것 같았다. 병원 건물이 1, 2, 3층으로 한 층씩 올라갈 때마다 뭔가 개운치 않은 느낌이 커 지는 기분이었다. ‘왜 도쿠다가 병원을 세우는가. 도쿠다가 만드는 병원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 ’ 이런 근본적인 질문에 나 자신이 대답하지 않으면 안되는 기분에 쫓기고 있었 다. 게다가 이런 의문까지 겹쳤다. ‘도쿠노시마 출신의 도쿠다가 왜 오사카에 병원을 세우는가?’ 나는 어려서부터 ‘꺼림칙하고, 마음에 걸리는 짓은 하지 말라’는 방식으로 살 아왔다. 재수 시절에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던 내가 아 니던가. 그런 내가 뭔가 마음에 내키지 않는 것을 덮어두고 병원을 지을 수는 없었다. 공사 현장에서는 하루하루 철골이 높이 올라가고 있었다. 병원에 세워지는 모습 을 보면서 나는 변명이라도 좋으니 나 자신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를 찾아야 했 다. 나는 골똘히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생각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 가지고 고민한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로서는 단 1%라도 마음 에 걸리고 꺼림칙한 것이 남아있는 한 다음 행동으로 옮길 수 없었다. 결국 이런 결론을 내기에 이르렀다. 나, 도쿠다가 만드는 병원은 다른 많은 병원 과는 다르다. 사람들이 안심하고 자신의 생명을 맡길 수 있는 병원이며, 건강과 생활을 지키는 병원이어야 한다고. ‘생명을 안심하고 맡기는 병원.’ ‘건강과 생활을 지키는 병원.’ 도쿠다가 왜 병원을 세워야만 하는지에 대한 확실한 명분이 생겼다. 고향에 남겨둔 것은 똥만이 아니다 이런 위로 섞인 명분만으로는 ‘왜 도쿠노시마가 아닌 오사카에 병원을 짓는 가’에 대한 석연찮은 감정을 전부 다 해소할 수 없었다. 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의사가 되겠다, 의사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으니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만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어린 시절부터 성장기를 도쿠노 시마에서 보냈고, 도쿠노시마에서 인생을 키워왔던 내가 그곳에서 나는 고구마 와 쌀밥을 먹고서 도쿠노시마에는 똥만 남겨두고 온 것은 아닌가. 그런데 오사 카에서 의사가 되었으니 이 도시에서 일하고 세금을 내고, 도시 사람을 위해 병 원을 세운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먼저 도쿠노시마 출신인 나는 도쿠노시마 사람들에게 도움되는 일을 해야 마땅하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에서 일을 할 수는 없지만, 또 어디서 일을 하든 상관없지만, 가능하다면 고향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도쿠노시마에서 밥만 먹고 도망친 인간은 아닌가. 오랫동안 마음속에서 이같은 꺼림칙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결국 궁여지책으로 나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만일 지금 내가 도쿠노시마로 돌아 가 개업하면 외과밖에 할 수 없다. 게다가 개인병원을 만들고 죽게 되면 과연 누가 병원을 지킬 것인가. 도쿠노시마를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해서 병원을 만들 고 그곳 사람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싶다면,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의료가 실시되 어야 한다. 그러나 내가 꿈꾸는 그런 규모의 병원이려면 적어도 5∼10명의 의사 가 필요한데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외딴 섬에 누가 자원하겠는가. 하지만 오사카에 병원을 세우고, 여기서 3년 동안 근무한 뒤 반 년이나 1년 동 안 도쿠노시마에서의 근무를 부탁한다면 아마 거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병원이 하나로 부족하다면 다섯 개든, 여섯 개든 많이 세우면 된다. 이렇게 해서 한 병 원에서 한 명씩만 도쿠노시마에 가도 내가 원하는 병원을 만들 수 있다! 나는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비로소 병원 만들기에 전력투구할 수 있 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실제로 병원을 짓는 일은 대단한 인내를 필요로 했다. 아무리 변명이라도 도쿠노시마 사람들 앞에서 오사카에 병원을 짓는 명분을 설 명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겨야 했기에, 항상 나 스스로가 긴장되고 무언가 쫓기 는 입장이 되었다. 직원이 제약회사로부터 뒷돈을 받다니! 내 나이 34살인 1973년 1월 15일에 철근으로 된 80병상 규모의 5층짜리 도쿠 다 병원이 최초로 개원했다. 병원 개원식이 있기 전부터 걱정이 앞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환자가 찾아오지 않 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과 우려였다. 내가 근무의로 일했던 병원의 상사 는 농담조로 웃으면서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 “보통은 환자가 안 올까봐 걱정하는 병원이 대부분이지. 자네는 환자가 너무 많이 올까봐 걱정하지만 말이야.” 당시 나는 환자가 너무 많이 올 걸 걱정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철저한 조사를 통해 의료시설이 부족한 지역을 설정했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 병원을 지어서인 지 진료를 볼 만반의 준비를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환자들의 줄이 이어졌다. 이 렇게 예상 외로 환자가 몰려들자 이번에는 환자에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또 다른 걱정으로 밤잠을 설쳤다. 개업 첫날 53명의 환자가 찾아왔다. 걱정했던 사태가 현실로 눈앞에 펼쳐졌다. 아직은 의사와 간호사들 모두 만족스러울 만큼의 팀워크가 짜여진 상태가 아니 었기에 우왕좌왕하기 일쑤였다. 접수를 받고, 병력을 묻고, 진찰을 하고, 수납을 하고, 약을 조제한다. 직원 모두가 병원 업무에 익숙한 사람이 없어 마치 초보자 들의 집단 같았다. 그런데 더 커다란 문제는 의료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이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 다는 것이었다. 개중에는 밥그릇 싸움과 사보타지를 하는 사람, 게다가 제약회사 로부터 뒷돈을 받아 챙기는 사람까지 있었다. 다른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그 문 제만큼은 나의 가치관과 신념으로는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여기서 타협하면 나는 끝이다’라는 생각이 들자, 그 직원을 즉각 해고했다. 또 자신의 일에 열의가 없는 직원에게도 사표를 받았다. 이렇게 출발한 도쿠다 병원은 한 달 사이에 스텝진이 계속 줄어들었다. 이미 많 은 환자가 입원해 있었고, 외래 환자는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구급차도 쉴새없이 돌아다니며 병원을 들락거렸다. 그러나 위기에 몰리면 몰릴수록 머리 속에서는 승부근성이 나를 더욱 강인하게 했다. 나 혼자서라도 환자를 진찰할 수 있다는 오기 같은 자신감이 마음속 깊이 자리잡았다. 이렇게 고생하는 나의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평소 알고 지내던 의사와 간호사, 기사, 일반 사무직원 등이 병원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고 고마웠다. 그들은 의료에 대한 열정과 사명감에 불타올랐고, 내 생각과 이념에 찬성해 1인 3역을 마다하지 않았다. 보험 관계 업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 마감 때는 업무 직원은 물론 간호사 와 레지던트, 기사까지 총동원되어 그날 있었던 일들을 얘기하며 밤 12시까지 일한 적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 협조하면서 일하는 동안 병원은 자연스럽게 가 족적인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며, 개업 당시에 비해 전체적인 분위기가 휠씬 안정 을 되찾았다. 병원에서 일하는 모두의 도움으로 개업 초기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1년 365일을 병원에서 지내다 병원의 원장이 되었지만 업무는 예전과 변함없이 힘들고 고달펐다. 병원을 개 원한 후 3년 동안은 피를 말리는 기간이라는 말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들어왔기 에 나는 처음부터 단단히 각오하고 있었다. 진료는 쉴 틈이 전혀 없었고, 환자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적어도 1년간은 병원에서 숙식하면서 온 힘을 다해 일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병원에서의 숙박은 작년 12월 16일의 개원식 때부터 연말연시와 정원 연휴에도 계속되었다. 아침 7시 30분부터 입원 환자를 회진한다. 서둘러 아침밥을 먹고, 9시부터 정오 까지 외래 환자를 진찰한다. 오후에는 수술을 했다. 틈틈이 약 구입이나 원장 고 유의 업무를 수행했다. 그리고 오후 5시부터 8시까지 야간 외래 진료를 한다. 그 사이에 응급환자가 들어오면 심야든 새벽이든 시간을 불문하고 언제든지 진찰을 실시했다. 1년 365일을 하루도 쉬지 않고 이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식사는 아침, 점심, 저 녁 모두 병원에서 해결했다. 밖에 나가는 것은 옥상에 올라가는 정도가 고작이 었다. 그것도 겨우 서너 달에 한 번 있을까말까 했다. 이렇게 아무 데도 나가지 않고 갇혀 있으면 구금 노이로제에 걸린다. 병원의 벽도 사람의 얼굴도 보기 싫 어지고, 옥상에 올라가려고 밖에 나가기만 해도 햇볕 때문에 눈이 따갑고 어지 러워 쓰러질 것 같다. 또 병원 안에서 진찰만 하고 있으면 운동량도 부족하다. 그래서 볼일이 있을 때마다 5층에 있는 원장실에서 양손에 콘크리트 벽돌을 들 고 계단을 오르내리면서 부족한 운동량을 해소했다. 가족과는 거의 단절된 상태였다. 업무 이외의 일로 가족들이 병원을 출입하는 것이 직원들한테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 병원 출입을 금지시켰다. 그러나 집사람은 물론 아이들과 단절된 상태로 계속 지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씩 토요일과 일요일 밤에는 되도록 사람들 눈에 띄지 않도록 주위를 시 켜서 병원에서 밥을 먹고 가도록 했다. 이것이 병원을 만들고 1년 동안 내가 가 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뼈를 깎는 고통의 자금 만들기를 다시 시작 목숨을 걸고 노력한 끝에 도쿠다 병원의 수지는 석 달만에 벌써 전망이 섰고, 융자금 반환 계획도 윤곽이 잡혀갔다. 다소 안정을 찾아가자 어려움 속에서도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러자 다시 '도 쿠노시마에 지으려던 병원은 어떻게 되었지?' 하는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그렇다,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세우기로 한 결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 도쿠노시마 에 병원을 짓기 위해 오사카에 많은 병원을 만들겠다던 변명은 어떻게 되었나 하는 고민이 날마다 나를 괴롭혔다. 1년 동안의 병원 숙식 생활을 지나고, 병원 운영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면서 전망이 서기 시작했을 때였다. 병원에서 숙식할 필요가 없어지고, 명분을 실행에 옮겨야 할 단계에 이르자, 오사카 부의 의료 상황을 조사한 결과 다이토 시가 제일 낙후되었다고 판명되었다. 다이토 시에도 시립병원은 있지만, 응급환자도 받지 않고 진료시간 외에는 진료 를 하지 않아 주민들이 매우 불편을 겪고 있었다. "시유지 불하에 적극 협력할 테니 이곳에 종합병원을 만들지 않겠습니까?" 디이토 시의 한 관계자와 상담할 때 그는 이런 제안을 해왔다. 나는 도쿠다 병원 일만으로도 심신이 녹초가 된 생태였으므로 잠깐이라도 쉬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나 도쿠다 병원은 규모가 작은데다 항상 환자들로 병상이 꽉 차 있어서 응급의료를 실시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았다. 그래서 규모 가 어느 정도 갖추어진 큰 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응급의료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의료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결의와, 오사카에 병원을 만든 다음 도쿠노시 마에 의사를 파견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마련하겠다고 했던 변명들을 먼저 실행에 옮겨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강력한 요청에 본심과는 전혀 다르게 "하겠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당초 타이토 시와의 합의에서는 시유지를 500평정도 불하해 주겠다는 뉘앙스로 이해되었으나 당국과 일부 시의원, 의사회 등과 의견 차이가 발생했다. "그 토지를 1,500평으로 정리하지 않으면 불하할 수 없습니다. 그것도 경쟁 입찰 입니다." 땅값도 입찰 후에나 알 수 있는 데다, 현시가로 구입한 때부터 이자를 포함한 값으로 원가보다 1억 2천만 엔이나 비싼 약2억7천만 엔 정도로 상당히 비싼 편 이었다. 시와 합의하는 과정에서 시간이 지나면 좀더 싼값으로 매입 학 수 있을 거란 생 각이 들었다. 나의 이런 생각이 호의를 보여준 사람들한테 피해를 줄 수도 있고 내가 약속한 말에 대한 책임도 있으니 어떻게든 병원 설립을 단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의회나 관계자 중에는 반대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응급병원이 필요하다는 주 민들의 요구는 갈수록 높아져 이미 되돌 이 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나는 맨 처음 도쿠다 병원을 만들 때처럼 뼈를 깎는 듯한 자금 만들기의 고통을 다시 한 번 겪어야 했다. 그러나 이번 병원 설립 건에는 고맙게도 도움을 주겠다는 협력자가 있었다. 마 츠바라 시의 양배추 밭 주인이 이번에 농협에 자신의 땅을 담보로 제공하고 1천 만 엔의 자금을 빌려주었다. 다이토 시에서도 시의원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자금을 모으러 분주하게 다닌 덕에 가까스로 병원을 설립할 수 있었다. 최종적 으로 내게 책임지는 생명보험은 지난번 것까지 포함해서 총 8억 엔으로 늘어났 다. 구급차의 운영으로 병원은 초만원 1975년 10월, 노자키간논 근처에 총 공사비 6억 8천만 엔, 철근 콘크리트 5층 짜리로 병상이 200여 개인 노자키 병원의 기초 공사가 시작되었다. 노자키 병원도 도쿠타 병원 이상으로 정신없이 바쁜 가운데 진료가 시작되었다. 도쿠다 병원은 규모가 작아서 응급의료가 충분치 못했지만, 노자키 병원은 병상 수도 200여 개이고 시설 면에서도 현대적인 의료기구를 훨씬 더 많이 갖출 수 있었다. 게다가 오사카 대학 의과대학의 1년 선배로 응급의료의 전문가인 다나 카가 원장직을 맡아 주었다. 노자키 병원은 도쿠다 병원보다 한층 더 충실해진 응급의료 체제를 갖추었다. 개원하자마자 일주일 동안에 많은 응급환자가 몰려들었다. 교통이 편리하기 때 문에 가까운 나라 현 까지 구급차를 운영할 수 있었다. 구급대원이 멀리서 온 응급환자들한테 물었다. "이렇게 멀리서 왔습니까. 그럼 지금까지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응급환자들은 대부분 생명이 위독한 중환자들이었는데 그들은 질문에 이렇게 대 답했다. "환자를 받아 주는 병원을 쉽게 찾았으니 대향이지 운이 나쁘면 죽기도 하지요." 하지만 노자키 병원 역시 응급환자를 전부 수용하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의사 와 간호사도 부족하고 아직까지 일에 익숙하지 못한 간호사와 사무직원도 많았 다. 한 달, 두 달, 석 달이 지나자 환자 수도 증가했고 병원 업무는 감당하기 벅 찰 정도로 많아 졌다. 우연이랄까, 그해 말에는 유행성 감창이 도시를 휩쓸었다. 다른 병원이 문을 닫을 때는 하루에 400여 명의 환자가 몰려 들었다. 병원 대기 실에는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서서 기다리는 환자가 늘어나 마치 만원인 전차를 방불케 했다. 개중에는 기다리다 지친 환자들이 접수 창구에 대고 소리를 지르 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이봐, 아직도 더 기다려야 하는 거야." "이 병원은 명절 연휴에도 문을 여는 병원이야. 다른 병원이 쉬니까 혼잡한 게 아닌가. 그런 불평을 하려거든 다른 병원으로 가보게." 역시 진료를 기다리던 환자가 병원 측의 입장을 대신 거들기도 했다. 환자도 큰일이지만 병원도 큰일이었다. 환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더 빨리 진료하려고 필사적으로 진료에 매달렸지만, 환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그런데다 구급차는 끊임없이 환자를 싣고 왔다. 구급차 문을 열면 한 명, 두 명........ 다섯 명 등 환자들이 줄줄이 내린다. 구급차도 부족해서 한 대의 구급차 가 여러 명의 환자를 싣고 왔는데, 바로 '승합 구급차'였다. 그 중에는 중환자도 있었다. 접수 창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환자들 사이에서 이 런 불만이 터져 나왔다. "아니 순서를 기다리지 않으면 어쩌자는 거야." "우리 병원은 생명이 위독한 중환자를 우선 치료합니다." 의사와 환자 사이의 이런 말싸움이 흔한 일이었다. 그런데다 간호사는, "의사 선생님, 위층의 입원 환자 용태가 위급해졌습니다."라고 알린다. 할 수없이 그 장소를 빠져 나올 수밖에 없고 응급처치 하는 사이에 다시 아래층 은 환자들로 금세 붐볐다. 한 번은 완벽하게 준비했다고 예상했던 치료약이 정월 초하루에 바닥이 나고 말 았다. 혹시나 싶어 도쿠다 병원에 전화를 걸어 보니, 그곳 역시 약이 부족한 상 황이었다. 이틀째도 아침부터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그렇게 해서 5일까지는 도매상을 통해 약을 사는 북새통을 치르며 정신없이 보냈다. 나와 함께 쉬지도 못하고 분투하던 원장이, "도쿠타, 난 너무 지쳤네. 이런 건 난 생 처음이네"라며 응급환자의 전문가답지 않게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진찰 대에서 잠깐 눈을 붙이는 야전병원 이런 상태로 아침, 점심, 저녁을 정신없이 보내고 한숨 돌리는 시간은 언제나 밤 10시가 지나서였다. 그렇지만 그후에도 응급환자는 계속 들어왔다. 2층에 가서 한숨 자고 싶었지만 겉을 기운조차 없고 잠잘 겨를도 없었다. 딱딱 한 진찰대 위에서 선잠을 자다 보면 침대와 달리 너무 좁기 때문에 곧잘 아래로 떨어지곤 했다. "어, 여기가 병원이었나! " 잠에서 깨어 주위를 둘러보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또 진찰대로 올라 잤다. "선생님! 응급환자인데요." 얼마 자지 못하고 나는 간호사가 깨우는 소리에 눈을 떠야만 했다. 구급차로부 터 피투성이가 된 체격 좋은 남자가 운반되고, 뒤따라 배에 칼이 꽃 혀 피범벅 이 된 여자가 운반되어 왔다. 부부싸움을 하다 부인한데서 칼로 심장을 찔린 남 자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아, 죽고 싶다. 치료고 뭐고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 피로가 극에 달했다. 부인을 보니 그녀는 자신의 배를 찌른 것이었다. "부인을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어. 빨리 수술 준비하도록!" 부인은 칼을 빼면 출혈이 심해 죽을 수도 있으므로, 칼을 꽃은 채 수술실로 옮 겨졌다. 칼은 간장, 신장, 12지장을 지나 후 복막까지 들어간 상태였다. 환자가 죽을지도 모르는 대단히 위험한 수술이었다. 그 사이 응급환자가 또 들어왔다. 나는 피투성이의 장갑을 벗으면서 간호사가 있는 곳으로 가서, 환자의 상태가 위독하지 않은 것을 보고서는, "잠시만 기다리도록!" 하고 말하고 다시 수술실로 돌아왔다. 이건 전시 중의 야전병원이나 다름없었다. 복잡함과 혼잡 속에서도 간호사, 기 사, 사무직원들은 각자 자신이 맡은 업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했다. 한 번 은 이런 일도 있었다. 매일 귀가 시간이 늦는 어느 간호사의 어머니가 딸한테 걱정스런 목소리로 안부 를 묻는 전화를 걸어왔다. "바빠서 전화를 못했어요. 집에 들어갈 형편이 못되었거든요." 그녀는 용건만 간단히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살기 넘치는 전쟁터 같은 분위기 가 송수화기를 통해 상대방한테까지 전해졌는지, 그 간호사의 어머니는 병원의 상황을 짐작하고 아무 말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또 환자를 위해 애쓰는 딸과 직원들이 함께 먹으라고 김밥을 싸서 병원으로 가져오기도 했다. 직원들은 물론 직원들은 물론 직원들 가족들조차 서로를 격려하는 분위기가 자연스럽게 형성되 었다. 한 번은 퇴원한 환자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모든 분들이 애쓰시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정원에 심은 나무가 말라서 시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물을 주어야겠지요. 올 봄에는 꼭 아름다 운 꽃을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환자의 편지를 받은 후에 비로소 알게 된 사실이었다. 굉장한 마력을 지닌 하얀 가운 노자키 병원의 운영이 궤도에 오를 즈음에 오사카 부의 응급 의료 정보센터로 인사를 하러 갔다. "여러분들의 도움 덕분에 노자키 병원도 운영이 안정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희도 노자키 병원이 응급환자를 받아 주어서 여려 모로 많은 도 움이 됩니다." 나는 칭찬의 말을 듣자 기분이 좋았다. "200병상의 노자키 병원도 앞으로는 응급의료에 불충분할지 모르겠습니다. 이번 에 만들 때는 아무래도 300병상 이상 되는 병원을 만들지 않으면 이상적인 응급 의료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내가 이렇게 말을 건네자, 맞은편에 있던 사람이 나의 말을 받았다. "실은 센슈 지역도 응급의료 시설이 부족했는데, 이번에는 센슈에 병원을 세우면 도움이 되겠습니다만.........." 나도 센슈가 의료 시설이 형편없이 부족한 지역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당 시 센슈 지역은 인구가 75만 명으로 공립병원이 모두 7개 있었는데 응급의료를 실시하는 병원은 한 곳도 없었다. 나는 " 이번에 만들 때는........"라는 말에 나 자신도 무척 놀랐다. '도쿠다가 또 병원을 세운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나를 이렇게 인정해 주니 한편으론 기뻤다. 내가 하는 일이 사람들로부터 인정 받는다고 생각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 번째 병원을 세워야 한다는 결심이 섰다. 그러나 센슈는 넓은 지역으로 과연 어디에 부지를 마련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조사 결과, 기시와다 시의 응급 상황이 제일 열악했다. 게다가 그곳의 시장과 구 장도 병원 설립에 매우 적극적이었고 현지 의사회도 이해를 표명했다. 나는 또 다시 자금 만들기에 동분서주했으며, 지금까지 소요된 자금의 두 배도 더 되는 27억 3천만 엔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다. 기사와다 병원의 공사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병원의 완공이 얼마 남지 않 았는데도 의사와 간호사 등 직원이 결정되지 않았다. 개원까지는 석 달밖에 남 지 않았는데도 의사라고는 원장 말고는 한 명도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의사를 구하는 일이 예상외로 힘들었다. 노자키 병원에서 하얀 가운을 입고 있으면 무 슨 일이든지 하고 싶은 의욕이 생기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하얀 가운 속으로 도 망치고도 싶었다. 하지만 이제는 하얀 가운을 벗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가 하얀 가운을 벗지 않으면 의사를 구할 수가 없다는 판단이 서자 나는 가운을 벗기로 결정했다. 가운을 벗자,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분위기에 쫓겨 의사를 찾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가운을 벗은 뒤에야 비로소 나는 하얀 가운이 어떤 마력을 지녔음을 실감했다. 진료를 할 때는 물론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실례합니다만"하고 환자들이 먼저 고개를 숙인다. 그러면 왠지 우월감이 느껴지고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일단 가 운을 벗자 어디를 가도, 심지어 병원의 접수 담당 직원한테도 내가 먼저 "실례합 니다만......."이라며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그것도 당연한 일이다. 나는 가운을 벗은 뒤에야 처음으로 이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가운을 입은 의사들로 하여금 환자를 위하는 마음가짐을 잊지 말 고 항상 겸손하게 행동하도록 지도했다. 8년간 8개의 병원을 설립 1977년, 5월, 미국의 하버드 대학에서 엄격한 트레이딩을 받고 귀국한 마야모 토 원장을 중심으로 한 가시와다 도쿠다 병원이 개원했다. 총 공사비 14억 1천만 엔, 철근 콘크리트 6층으로, 부지 면적 약 1,100평, 총 건 평 약2,150평, 380병상의 규모이다. 진료 과목은 내과, 외과, 소아과, 정형외과, 뇌 신경과, 산부인과, 방사선과, 이비 인후과, 안과, 이학진료과(理學診療科) 등으로, 의사가 확보됨에 따라 점차 종합병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도쿠다 병원, 노자키 병원, 기시와다 병원에 대해 도식적으로 말하면 100병상, 200병상, 300병상 규모를 생명보험을 담보로 나는 실현했다. 모든 병원의 운영이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그러나 응급환자들한테 충분한 의료를 시행하는 데 있어서는 100이나 200병상의 규모로는 시설이나 의사, 간호사 등의 운영에 다소 무리가 따랐다. 또한 앞으로 많은 환자들을 위한 만족스러운 의료를 시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병원이든지 최 저 300병상의 규모를 갖추었다. 은행에서도 3개 병원의 운영 실적을 보고 적극적으로 융자를 해주었다. 더 이상 은 생명보험을 담보로 할 필요가 없었다. 나는 또다시 1978년 7월에 오사카 주변의 의료 소의 지역인 야오 시에 도쿠다 병원을 개원했다. 이 네 번째 병원을 마지막으로 오사카 지역에 병원을 짓는 계 획은 일단락 되었다. 황폐화된 일본 의료에 나의 이상이 담긴 의료를 실천하고자 병원을 만들겠다고 결심한 지 꼭8년이 지났다. 나는 의료 개혁을 목표로, 도쿠다 병원을 시작으로 노자키, 기시와다, 야오에 계속해서 병원을 지었다. 다시 1979년 6월에 오키나와 에 도쿠슈카이 병원을 개설했고, 도쿄 부 우지 시, 후쿠오카 현 카스가 시, 가나 가와 현에도 병원을 건설했다. 정치의 폐해에 대항해서 이렇게 병원을 짓고 항상 이상으로 생각하던 의료를 실천하는 사이에 고향 아 마미에서 '아마미에도 병원을 세워달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도쿠노시마에 병원 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현청 소재지인 가고시마 시내에 병원을 세워야 한다고 생 각한다. 지금까지 한시도 쉬지 못하고 정신없이 뛰면서 가고시마 병원을 세우기 위해 필 사적으로 노력했는데, 정치적인 방해로 좀처럼 실현할 수 없었다. 농촌과 외딴 섬에 병원을 세우려면 어떤 정치적인 힘이 필요했다. 즉 주민의 요 청과 경제적 수담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내가 국회의원이 목적이었다면 오사카에서 입후보했을 것이다. 그러나 도 쿠노시마와 가케로마시마, 오키에로우부시마, 키카이시마, 유론시마, 아마미오시 마, 야쿠시마, 다네카시마 등에 병원을 지으려면 국회의원이 되지 않고서는 불가 능에 가까웠다. 나는 아마미에서 중의원 의원에 입후보하기로 결정했다. 이 선택 은 옳았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할 정도로 대단한 세력을 갖고 있던 당시의 다나카 군 단과의 싸움은 만만치 않았다. 시장, 읍장, 면장, 의사회, 건설업자, 폭력단, 현 지 사, 현 의회 의장 등 모든 정치 세력과 경제인 등의 유력 인사를 상대로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뒤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이기기 어려운 선거에서 나는 두 번째에는 근소한 차이로 낙선했고, 세 번째에야 비로소 당선 되었다. 선거를 치르는 8년 동안 전국 각지로부터 우리 지역에도 병원을 지어달라는 요 청이 쇄도해 병원 수가 30개에 이르렀다. 나는 점차 연중무휴 24시간 진료를 실 시하는 병원이 늘어날 것이라고 예상한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우는 것이다. 더욱이 나는 온 세계에도 이 같은 바람을 일으켜, 세계 각지에 나의 이상적인 의료를 실현할 것이다. 나의 이상은 아직도 더 먼 미래를 내다보고 있다. 3. 도쿠슈카이의 이념과 실행 당연한 이념 우리가 만든 의료법인 도쿠슈카이는 국민의료의 입장에 서서 진실한 의료를 시행하기 위해 두 가지의 ‘이념’과 여섯 가지의 ‘실행 방법’을 목표로 한 다. 도큐슈카이의 이념. ‘생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병원’ ‘건강과 생활을 지키는 병원’ 이념의 실행 방법은, 1. 연중무휴, 24시간 진료한다. 2. 입원보증금, 병실의 요금차액, 냉난방비 등의 제반비용을 무료로 한다. 3. 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건강보험의 30% 부담금도 면제한다. 4. 생활자금을 빌려준다. 5. 환자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는다. 6. 의료기술과 진료환경의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우리는 매일 아침 실시하는 조례 시간 때 ‘이념’과 ‘실행 방법’을 제창한 다. 또 명함 뒤에도 이념과 실행 방법을 인쇄해 만나는 사람들에게 건네주면서 병원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전달하며 홍보하고 있다. “연중무휴, 24시간 진료는 어느 병원이나 해야 하는 당연한 처사가 아닙니까. 그런 걸 광고한다는 게 우습군요.” 이걸 보고 냉소적인 말투로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가끔 있다. 물론 그 말은 맞다. 우리가 내세우는 이념은 의사나 병원으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오 늘날 그 당연함이 당연한 것으로 행해지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 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의료계의 종사자로서 당연한 것을 굳이 내세 울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것이 행해지지 않는 일본의 황폐화된 의료에 대한 분노와 슬픔이 나로 하여금 병원을 세우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 결심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아침 ‘이념’과 ‘실행 방법’을 제창한다. ‘생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병원’은 생명을 지킨다는 사명감에 대한 자부 심만 있으면 우리의 노력으로 충분히 달성할 수 있다. 그러나‘건강과 생활을 지키는 병원’은 의료종사자들의 노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생활을 파괴하는 요소로‘질병’을 꼽는다. 예를 들어 질병을 치료 하기 위해 수술이나 입원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병을 치료하는 데 돈을 쓰다 보면 생활에 곤란과 어려움이 생기고, 실제로 그런 궁핍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 마저 생긴다. 따라서 의료인은 ‘건강과 생활을 지키는 병원’이라는 목표를 갖 고 의료계에 종사해야 할 것이다. 사회가 경제적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의료제도도 완비되어 ‘언제, 어디서, 누구나가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고 최선의 의료를 받을 수 있는 사회’가 되고, 또 사회복지 제도의 향상으로 노인이 되어서도 아무런 걱정이 없다면 우리는 구 태여 ‘건강과 생활을 지키는 병원’이라는 목표를 내세울 필요가 없다. 어려울 때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함 이전에 기본 우리가 내세우는 이념의 실행 방법은 환자가 중심이 되는 의료를 위해서는 당 연한 것들로, 각 항목에 대해 덧붙여 설명하자면 이렇다. ‘연중무휴, 24시간 진료’는 병원이라는 의료기관이라면 당연히 실시해야 한다. 만약 미국에서 응급환자가 입원을 거절당한다면 병원이 고소 당할 것이다. 하지 만 일본에서는 휴일이나 심야에 입원과 치료를 거절당한다 해도 울면서 돌아서 야 한다. 이런 잘못된 관행은 하루라도 빨리 고쳐져야 할 것이다. 다음은 입원보증금, 병실의 요금 차이, 냉난방비 등의 제반 비용의 무료항목으 로, 입원 보증금에 대해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전국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입 원보증금을5만 엔부터 10만 엔까지 받고 있다. 환자가 퇴원하거나 사망했을 경 우, 가끔 병원비를 지불하지 않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게 입원보증금 제도이다. 그러나 환자 가족의 입장에서는 처음 온 병원 입원 절차의 수속과 환자의 상태 가 걱정되어 따라다녀야 하는데도, 입원보증금을 준비하기 위해 별도로 여기저 기 뛰어다녀야 하므로 이중삼중으로 고생하는 결과를 빚는다. 특히 갑작스런 사고로 구급차에 실려 병원으로 갈 때는 대개 늦은 심야일 경우 가 많은데 미리 입원보증금을 준비했을 리도 만무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 고 속만 태우기 일쑤다. 어떤 병원에서는 응급환자도 입원보증금을 낼 때까지 복도에서 이동식 침대 위 에 눕혀놓고 기다리는 경우마저 있다, 보호자가 필사적으로 돈을 끌어 모아 입 원보증금을 내야 비로소 응급환자는 병실에 들어간다. 나 역시 의료종사자의 한 사람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렇듯 환자와 가족들한테 부담을 안겨주는 입원보증금 제도가 병원의 입장에서 정말 필요한 것일까. 통계상으로 입원비를 지불하지 않고 퇴원하는 환자는 전체의 1%도 안된다. 그런 데도 나머지 99%이상의 환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입원보증금을 내야 한다. 환 자의 보호자들을 동분서주하게 할뿐, 아무 의미가 없는 이런 제도의 시행에 의 사인 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다. 병실의 병실비 차액과 냉난방비 등 제반 시설 이용의 무료는 갑자기 입원한 환 자가 얼마만큼의 병원비가 들지 모르는 불안한 마음에 쫓기지 않도록 환자에게 는 보험 이외의 부담을 주지 말자는 것이다. 세 번째로‘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건강보험의 30% 부담금도 면제한다’는 항목은 도쿠다 병원의 경영이 안정권에 접어들면서 여유가 생겼기에 실시 가능 한 항목이었다. 나는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세우기 위해 우선 오사카에 병원을 지었다고 명분 아닌 명분을 내세웠었다.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세우지 못하고 죽게 되면 어떻게 하나.’ 도쿠다가 허풍만 떨고 큰소리만 치다가 저 세상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실속은 없이 명분만 지키다 끝나고 마는 것은 아닐까. 살아 있는 동안에 고향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뭔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고 생각 한 끝에 도쿠노시마에 종합병원을 설립할 때까지는 우리병원에 온 노쿠노시마와 아마미오시마 사람에게는 30%의 부담금만이라도 면제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실행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고향을 위해 조금이나마 도움을 준다는 생각으로 나 자 신이 위안삼을 수 있었고, 마음 한구석에 자리한 묵직한 짐을 다소 덜 수 있었 다. 그러나 이런 제도는 형평성에도 어긋나고 모순이 느껴졌다. ‘도쿠다 병원 근처에 사는 사람도 일단 병이 나면 타격을 받으니 30% 입원부 담금은 개방해도 되지 않을까.’ 도쿠노시마와 아마미오시마 사람에게 30% 부담금을 면제함으로써 경제적인 부 담을 가볍게 했지만 우리병원주위에 살고있는 사람들에 대해 왠지 미안한 마음 이 가시지 않았다. ‘이웃 사촌’이란 말도 있다. 가까이 사는 이웃이 멀리 사는 친척보다 가깝다 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러면, 먼 친척과 가까운 이웃 모두에게 면제를 해주자 고 결심했지만, 그로 인해 병원 운영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게 되었다. 그래서 어떤 기준을 설정해 결국‘생활이 어려운 사람에게는 건강보험의 30% 부담금도 면제한다’는 제도로 정착되었다. 그 후, 법적인 문제로 도쿠노시마로 돌아갔을 때, 더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아 마미오시마와 도쿠노시마에서 오사카로 나올 수 있는 비교적 여유 있는 사람들 과 도쿠다병원 주위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도움이 된다. 하지만 도쿠노시마에 살 면서 교통비가 없어 오사카로 나올 수 없는 사람들은 치료를 받을 수 없을 뿐더 러 30%의 부담금도 면제받을 수 없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 하루 빨리 도쿠노 시마에 병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의가 한층 더 강해졌다. ‘생활자금을 먼저 빌려준다’는 항목은 다음과 같은 의도로 시작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가족의 가장이 쓰러져, 생활비가 끊긴 경우를 생각해 보자. 약간 저금해 두었던 생활비는 금방 바닥이 날 것이고, 부상 치료비가 보험에서 바로 지불되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국민건강보험(지역의료보험)에 가입해 있는 농민과 어민, 중소기업의 노동자는 부상치료비 혜택 또한 받지 못한다. 병원의 치료비는 어떻게 하든지 마련하겠지만, 가족들은 생계비가 없어 곤란을 겪게 된다. 병이 치료된다 할지라도 생활이 너무 궁핍해 자살하고 싶을 정도라 면 과연 무엇을 위해 의료행위를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래서 병에 걸려서 생활이 곤란해진 사람들을 위해 마련한 조치가 바로 생활비 를 먼저 빌려주는 제도다. 전에 이바라시로 현에서 도쿠슈카이 병원을 견학하러 온 어느 산부인과 의사는 이 항목만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한밤중에 자궁외 임신으로 입원해서 수술 받은 환자가 생활비도 넉넉지 않은 데 조금 갖고 있던 돈마저 입원비로 다 썼다고 합시다. 그후 그 환자가 생활이 너무 힘들어서 고민하다가 퇴원한 다음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하려 한다면 선생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렇게 딱한 처지라면 내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돈을 빌려줘야겠지요.” 그 산부인과 의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딱한 처지에 있는 환자가 생활비가 없어 힘들어 하다가 빚에 쪼들려 자살하는 경우도 종종 보아왔습니다. 그런 사람들한테는‘돈’이 제일 효험 있는 약이 아닙니까. 이 때문에 30%의 부담금을 면제하고 생활자금을 먼저 빌려 주고 나중에 받는다는 처방전을 내린 겁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의사라면 누구나 해야 할 당연한 일이지요. 사회복지 제도 가 마련될 때까지 그렇게 해야겠지요.” 자신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이 병은 고쳤지만 치료비 때문에 퇴원한 후 생활에 쫓겨 자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환자의병을 치료했다고 할 수 없 다. 정치와 사회가 그런 사람의 생활을 책임져 줄 때까지는 우리는 그들을 도울 수 있는 한 도와야 할 것이다. 그래서 생활자금을 먼저 빌려주고 나중에 받으므 로 질병 때문에 생활이 곤란해진 사람을 돕겠다는 것이다. 환자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는 떳떳함 다섯 번째의 실행 방법으로‘환자로부터 선물을 받지 않는다’에 대해 말하자 면, 오래 전에 의사는 치료비를 낼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환자한테는 치료비를 받지 않았었다. 예를 들어 의사가 어부를 치료해 주었다면 어부는 치료비 대신 자신의 병을 고쳐준 대가나 인사로 커다란 물고기를 잡았다며 의사한테 가지고 가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의사도 그런 환자의 마음을 받아들여, 환자가 갖는 부담스런 마음을 가볍게 한 다는 의미로 선물을 받았다. 이런 의도의 선물이라면 오히려 받아야 마땅하다. 그렇지만 오늘날에는 치료비는 보험으로 받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선물까지 받 고서는 당연한 얼굴을 한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현실이다. 나는 의과대학 재학 중에 다음과 같은 경험을 했다. 여름방학 때 연수를 받으러 간 병원에서, 선배인 외과의가 어떤 환자가 보낸 감 사의 인사장을 읽고 있었다. 퇴원한 환자가 고맙다는 인사를 써 보낸 편지임에 틀림없었다. 그런데 그는 편지를 대충 읽고는 봉투바닥을 들여다 본 후 편지를 북북 찢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아니 편지뿐이잖아.” 또 다른 사례로, 환자로부터 선물 받기를 매우 좋아하는 의사가 있었다. 이 의사 는 외래 진료를 하는 책상 위에 환자에게서 받은 과자 상자 등의 선물 꾸러미를 그대로 올려놓았다. 진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들은 그것을 보고, ‘아, 다음에는 나도 선물을 갖고 와야겠구나’하고 생각했다. 그의 책상 위에는 항상 선물이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일본의료계가 황폐화된 원인 중의 하나는 환자로부터 선물을 받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풍조이다. 환자와 가족들이 선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신경을 쓰는지, 치료비만도 어려운 상황에서 어떤 생각으로 돈을 준비해서 선물을 하는지 의사라면 모를 리 없다. 언젠가 나는 몇 개월에 한 번 노령연금을 받는 할머니가, 병상에서 일어나 의사 에게는 얼마의 돈을, 간호사한테는 천 엔짜리와 500엔짜리를 일일이 나누어 봉 투에 넣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은 불쌍해 보인다기보다 차라리 참혹 했다. 게다가 의사와 간호사들이 어떤 선물을 받았느냐의 여부에 따라 환자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더해진다. 봉투를 건네지 않았다는 이유 로 입원 순서와 검사에서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가 전혀 없다고 누가 장담하겠는 가. 선물은 병원 운영에도 커다란 폐해를 끼친다. 예를 들면 어떤 환자가 담당의사에게 5만 엔을 선물했다고 하자. 간호가사 한 병동에 20명 정도 있다면 500엔 상당의 스타킹이나 먹을 걸 선물해도, 환자는 1 만 엔의 부담을 안게 된다. 사무실과 약제실과 접수처에 선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의사 5만 엔, 간호사 1인당 500엔, 기타 제로. 이런 불평등이 존재 하는데 어떻게 병원의 팀워크가 조화롭게 유지될 것인가. 하지만 정직하게 말해, 나도 처음에는 환자들로부터 선물을 받았었다. 근무의 시절에는 물론 도쿠다 병 원을 개설했을 당시에도 선물을 받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잠깐 동안 그 습관 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원장한테 보내는 선물은 특별히 더 많다. “이렇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받는다. 그러나 받아도 항상 꺼림칙함이 따라다녔다. 그래서 원 장실 한구석에 받은 선물을 그대로 쌓아두는 일이 많았다. 나 혼자서 독점하는 게 마음에 걸려서, 망년회 때 모아진 선물을 번호를 붙여 제비뽑기로 전직원한테 나눠주면서, 전직원을‘공범자’로 만들었다. 평소 선물과 인연이 없는 연배의 사무직원이 고급 위스키를 받고 기뻐하는 모습 을 보고, 가난한 동네에서 이렇게 비싼 선물을 해야 하는 환자들의 어려움을 떠 올리며 마음 아파했다. 해가 바뀌면서 선물에 대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어떤 결론에 도달했 다. “올해부터는 절대로 선물을 받지 말자.” 우리는 근처의 술집, 과일가게, 과자점 등을 방문하면서“우리병원에서는 앞으로 어떠한 선물도 받지 않습니다”라고 홍보하러 다녔다. 그 결과, 환자가 술집 등에 가서, “원장님한테 맥주를 갖다 주세요”라고 부탁하면 술집 주인은, “요즘 그곳 원 장은 선물 받지 않는 캠페인을 전개 중이라서 아무 것도 받지 않아요”라고 알 려준다. 이 말을 들은 환자들은,“그렇습니까, 그거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리군요”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그 캠페인을 전개하고 난 뒤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병원 직원들의 얼굴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역시 이것 을 실천하기를 매우 잘했다고 확신했다. 그래서 이념의 실행 방법 중의 하나로 ‘환자에게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를 집어넣었다. 마지막으로 ‘의료 기술과 진료 환경의 향상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는 병 원 직원의 제안이었다.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즉각 여섯 번째 항목으로 채택했 다. 이때부터 직원과 환자들로부터 좋은 제안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실 천 방법으로 삼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생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병원’, ‘건강과 생활을 지 키는 병원’이라는 이념과 그 실행방법을 생각해내게 되었다. 이것들을 열심히 실천한다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꺼림칙함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환자의 고통을 모르는 슬픔 이념과 실행 방법은 의료종사자가 이루어야 할 목표이며, 목표를 향해 노력함 으로써 우리는 환자의 입장에 서 있다는 나름대로의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하 지만 그 자부심은 어느 한순간에 밑바닥에서부터 뒤집어졌다. 이무라라는 젊은 의사가 그 장본인이었다. 일본의학부를 졸업하고 오키나와의 현립 오키나와 중부병원에서 연수를 끝낸 이 무라가 기시와다 도쿠슈카이병원에 들어온 것은 병원을 개업한 지 얼마 안된 1978년의 일이었다. 아직 29살의 젊은이였지만 그의 의료태도는 매우 진지했고 또 무엇보다 환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아는 사려 깊은 의사였다. “의사가 질병을 치료하면, 그 병에 대해 전문가가 된다.” 나는 이런 말을 자주 했는데, 이것은 병을 치료하려면 환자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무라는 학생시절에 프로네오제(nephrosis)에 걸 려 2년 동안 휴학하고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게다가 복학해서 1년도 되지 않아 그때까지 자기를 간병해 준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픔도 경험했다. 그는 그러한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한 것만으로도 환자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이 해했다. 그래 7월, 이무라 선생한테 첫아이가 태어났다. 조회시간 때 직원 모임에서 축하 의 꽃다발을 증정했다. 기뻐하며 꽃다발을 받은 그가 오른발을 접질렸을 때만 해도 누구도 불길한 예감을 갖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넉 달 후, 그는 오른쪽 무릎에 악성 골육종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11월에 고향 후지 현의 다카오카 시민병원에 입원한 그는 다시 도쿠슈카이 병원 에 복직해서 열심히 환자의 진료를 시작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다시 석 달 후에 악성종양이 폐로 전이되었다. 악성종양은 한쪽 폐뿐만 아니라 양쪽 으로 전부 번져 있었다. 이 사실을 본인의 입을 통해 직접들은 것은 원장과 사 무장, 그리고 이사장인 나 이렇게 셋뿐이었다. 그는 이 사실을 다른 직원들은 물 론 부인한테도 모르게 해다라고 부탁했다. 우리는 일을 그만두고 쉬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지만, “나는 환자를 진료하기 위해 의사가 되었습니다. 내 목숨이 다할 때까지 환자 를 진료하고 싶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말대로 했다. 그가 한쪽 다리를 절단하고 양쪽 폐에 악성종양 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의료에 임하는 모습은 존경스러움을 뛰 어넘어 신과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러나 10월말쯤 되자 그의 부인도 남편의 병을 알게 되었다. 어떤 예감이 들었 던 것일까. 이 무렵 그의 부인은 무서운 꿈을 꾸었다고 했다. 가족들과 함께 꽃 놀이를 가서 벚꽃을 구경하다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니 아이만 있고 남편의 모습 이 보이지 않더라는 것이었다. “당신은 그 사실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나요. 숨긴다고 언제까지 모를 수는 없잖아요.” 부인은 남편의 행동을 심하게 책망했다. 11월이 되자 그의 병은 더욱 악화되어, 기침이 심해지고 혈담이 나오고 더 이상 은 진료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병원에서는 휴직 처리되었고, 마지막 아 침조례시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나는 의사로서 슬픈 것이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병을 고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슬픔이 고, 둘째는 돈이 없는 환자로부터 돈을 받지 않으면 안되는 슬픔이고, 셋째는 아 무리 내 자신이 환자의 고통을 아는 것 같아도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그 사람 의 마음은 역시 아무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을 비로소 지금에야 겨우 이 것을 알았습니다.” 그날 조회에 참석한 직원 모두가 울고 말았다. 그 뒤에도 평소처럼 이념과 실행 방법을 제창했지만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졌는 지 모른다. 그때까지는 이념은 우리가 환자한테 하지 않으면 안되는 목표였지만 이무라 선생이 환자를 대했던 자세 앞에서는 우리의 자부심은 너무나 하찮은 것 이었다. 의료계에 종사하는 이상 이념과 실행 방법을 실천하는 것은 너무 당연 하다. 오히려 의료종사자가 환자에게 해야 할 최소한의 기본이다. 의료종사자에게 있어 진실은,‘이념과 실행 방법’이라는 말로만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 깊숙히 자리한 어떤 것이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평생 동안 추구해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그를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이무라 선생이 후지 현의 본가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은 병원을 휴직하고 떠나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그가 혈담을 토하면서 남긴 세 가지 슬픔은 아직도 유언 으로 우리의 마음속 깊이 소중하게 살아있다. 환자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으로 여기며 싸우고, 환자의 고통을 생각하면서 죽어간 이무라 선생을 결코 잊을 수 없다. 그의 신념과 행동이 참다운 의료를 지향하는 나를 한층 더 북돋워주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이상과 거리가 먼 8개의 병원 나는 도쿠다, 노자키, 기시와다, 야오에 병원을 개설한 데 이어 1980년 6월에 오키나와 현 고란다 마을에 다섯 번째 도쿠슈카이 병원을 개설했다. 그리고 후쿠오카 현 카스가시, 교토 부의 우지 시, 가나가나와 현 치가사키 시에 병원을 건설하고자 했다. 도쿠다, 노자키, 기시와다 병원까지 3개 병원은 생명보험을 담보로 자금을 빌려 세웠다. 그 후에는 이 3개 병원의 실적을 신용으로 은행에서 자금을 빌려 야오, 오키나와, 후쿠오카, 우지, 치가사키에 5개의 병원 설립을 진행시켜 왔다. 그러나 일본의료계의 분위기를 개선하겠다는 목표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은행 에서 신용만으로 빌린 융자금만을 가지고 병원을 세우는 방법으로는 한계가 있 다. 그래서 우리는 생명보험의 단계, 신용 단계에 이어 제3단계로 새로운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우리병원에 대해 일부에서는‘슈퍼 병원’이라는 등 비아냥거리기도 한다. 우리 병원의 시스템을 잘 모르는 사람한테 병원의 체인화란 생소한 한편, 강한 인상 을 주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국민의료의 입장에서 정직한 의료 를 지향하고 노력한다는 사실이 일반인들한테 널리 알려지자 도쿠슈카이는 환자 중심의 최선을 다하는 병원이라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오 사카에서는 의료 110번(우리 나라의 응급환자 119번과 같은 제도)을 실시하고 있는 간사이소비자연합회로부터 감사장을 받기도 했다. 우리병원에 대해서 살펴보면, 최초의 도쿠다 병원은 불과 80개의 병상으로 한정 된 몇몇 과목의 부분적인 의료만이 가능하다. 두 번째 노자키 병원도 나름대로 응급병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긴 하지만, 모든 과목에서 충분한 의료가 가능 한 병원은 아니다. 세 번째, 네 번째의 기시와다와 야오 병원은 다른 병원과 비교하면 비교적 질 좋은 의료를 펴고 있지만 아직도 우기 이상으로 생각하는 병원까지는 거리가 멀 었다. 백점 만점을 기준으로 한다면 55점이나 60점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다음에 개설한 오키나와, 후쿠오카, 우지, 치가사키의 각 병원은 470 개의 병상에서 600개의 병상 규모를 갖춘 병원으로 비로소 우리가 도달하고자 하는 의료에 근접했지만 역시 75점 정도에 불과했다.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가 우선돼야 우리병원들은 환자 중심의 의료를 펴고 있으며 비교적 운영도 제대로 이루어지 는 편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아무 생각 없이 병원을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다. 병 원을 설립, 제대로 된 운영을 하려면 거기에 맞는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 나는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요건으로, 첫째 당연한 이념, 둘째 적절한 장소, 셋째 우수한 인재, 넷째 최신 의료기기의 네 가지 요소를 들고 있다. 병원을 설립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환자를 치료하는 당연한 이념이 없다면 아 무리 장소가 좋고, 우수한 인재가 있고, 최신 의료기기가 있다 해도 진정한 의미 의 의료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먼저 이념이 필요하다. 병원을 설립할 때는 의료 혜택이 부족한 지역으로 환자가 통원하기 쉬운 장소의 선정이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일단 병원이 세워지고 개원하며 환자의 입장에 선 실력 있고 우수한 의사의 확보도 중요하다. 병원의 설립 운영요건으로 무엇 때문에 이념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말하자면, 병원뿐만 아니라 어떤 조직과 단체 라 할지라도‘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라는 목적의식이 있어야 한다. 즉 무 엇을 하든지 간에 목적을 확실하게 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먼저 돈벌이를 목 적으로 할 것인지, 진정한 의료를 할 것인지 등 목적에 맞는 이념을 정할 필요 가 있다. 만일 이념이라는 공통의 목표가 없으면 어디서, 어떤 병원을 만들고, 어떻게 운 영할 것인가, 거기서 일하는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갖고, 어떤 자세로 의료에 임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에 대해 모든 것이 구심점을 잃고 방향이 흔들린다. 이념이 필요하다고 해서 아무 이념이나 마구 거론해서도 안된다. 이념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어야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의 협력을 구할 수 있도록 누 구나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으로, 적어도 진실에 가까워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환자를 위해 의료를 실시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것을 이념으로 삼 았다. 그것이 바로‘생명을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병원’,‘건강과 생활을 지키 는 병원’이라는 그 두 가지이다.‘환자를 위하여’라는 이념에는 이런 의미도 있다. 예를 들면, 환자한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이유에서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의사가 5만 엔을 받고, 간호사가 500엔 상당의 물품을 받고, 사무 직원은 아무 것도 받지 못하는 불공평함이 사라짐으로써 직원들간에 신뢰가 쌓이고 팀워크가 강해져 운영도 잘된다. 또 이념이라는 공통의 목적의식이 있으면, 모두 협력해서 환자를 위하는 참다운 의료 행위를 펴겠다고 사명감도 생기고 자부심과 의무감도 싹트고, 의욕적으로 자신의 업무에 몰두하게 된다. 이념, 장소, 인재가 갖춰지면 병원 운영이 순조롭다.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먼저‘적당한 장소’의 물색이 우선 돼야 한다. 의 료 시설 부족 지역이고, 환자가 통원하기 쉽고, 직원의 출퇴근 등 교통이 편리한 곳에 병원을 세워야 한다. 예를 들면, 치가사키 도쿠슈카이 병원은 국철 치가사키 역 남쪽 입구에서 걸어 서 5분 정도에 있고, 또, 역에서 먼 야오 도쿠슈카이 병원도 걸어서 10분 정도인 신흥 주택가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다. 대중 교통을 이용하기 편리하고 큰 도로 등이 확보되어 있으면 환자가 이용하기 쉽고 직원의 교통비 지급도 줄어든다(일 본은 직원의 교통비를 회사에서 부담한다). 이같이 여러 모로 편리할 뿐만 아니 라 경비 절감을 할 수 있는 강점이 있다. ‘적정한 장소’를 찾기 위해 우리는 기획, 조사 프로젝트 팀을 만들고, 의료 소 외 지역과 교통이 편리한 곳에 건설용 부지를 찾기 위해 철저하게 의료 상황 실 태를 조사한다. 교통 시설도 없고 인적이 드문 밭 한가운데 병원을 세워 봐야 적자가 날 게 뻔한데 그곳에 왜 병원을 세우겠는가. 우리는 우선 의료 소외 지역을 세밀하고 철저하게 조사한다. 인구비례시 필요한 병상 수, 병상 부족 수 및 부족률을 확인해 본다. 그 다음에 구급차를 이용하는 응급 환자의 운반 건수와 시내에 있는 병원에서 처리되는 응급 건수와 비율, 응 급 환자가 시외의 병원으로 운반되는 건수와 비율, 휴일과 야간 진료의 실태 등 을 자세하고 엄밀하게 조사한다. 이 같은 조사 결과, 치가사키 도쿠슈카이 병원 의 경우는 가나가와 현의 전체 병상 수 부족률52.6%에 비해서 치가사키시를 포 함한 쇼난 지역이 64.5%, 치가사키 보건소 관내는 80.8%로, 치가사키 시와 그 주변이 가나가와 현에서도 최악의 의료 부족 지역이라는 걸 파악하고, 치가사키 시에 병원을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최초의 두쿠다 병원을 마츠바라 시에 세운 것도, 오사카에서는 마츠바라 시와 다이토 시가 최악의 의료 소외 지역으로, 환자가 통원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직 원도 모집하기 쉽다는 지리적 이점을 고려해서 교통이 편한 마츠바라 시로 정했 던 것이다. 다음에는 다이토 시에 노자키 병원을 설립했다. 병원 부지가 결정되고 공사가 완공되어 운영할 단계가 되면,‘우수한 인재의 모 집’이 중요한 관건이 된다. 역시 도쿠슈카이에서도 우수한 인재를 끌어 모으는 것이 제일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특히 도쿠슈카이 병원은 젊고 의욕이 넘치 는 우수한 인재를 원한다. 우수한 인재란 무엇보다 의료에 대해서 순수함과 열정과 사명감을 갖고 있어야 하며, 의료 종사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원장의 적임자는 나보다도 의료에 철저하게 매달리는 사람으로, 그런 열정적인 의사를 찾아 원장으로 모신 다. 사무장은 나보다 운영 능력이 뛰어나고 환자와 직원에 대한 대인 관계가 원 활하고 사교적인 사람을 고른다. 경리부장은 나보다 계산에 밝고 꼼꼼하고 수지 감각이 뛰어나야 한다. 그런데 개인병원을 비롯한 일반 병원에서는 부인이 경리부장을 하고, 정년 퇴직 한 지인이나 친척을 사무장으로 하는 가내수공업적인 이사 형태를 취한다. 그 사람이 맡은 업무에 능력이 있는지 없는 지에는 관계없이 친인척이라면 무조건 믿고 맡긴다. 그런 병원이라고 해서 늘 적자가 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운영에 무 리가 따르기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우수한 인재가 모이고, 환자를 위한 의료를 실시하고, 전 직원이 사명감을 갖고 있는 한 병원의 운영은 잘될 수밖에 없다. 운영이 잘되는 네 번째 요건은‘최신 의료기기’의 구비로, 환자나 의사에게 있 어 최신 의료기기의 필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도쿠슈카이는 머리나 전신을 뢴트겐 단층 촬영을 하고 모니터 화면에서 입체적으로 비춰 보고, 진단하는 CT 스캔 등 항상 최신 설비를 갖추고자 노력한다. 최신 의료기기를 갖추었을 때 파생되는 장점은 오진을 없애고 정확한 판단이 가 능하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 우수한 의사 및 의료 종사자가 모이게 된다. 결 국 의사가 진료하기 쉬워지고, 따라서 간호사 및 패러메디컬(paramedical:간호사, 엑스선 기사 등 준의료 종사자)도 열심히 일하게 된다. 그 결과 환자에게 책임 있는 의료를 마음껏 제공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이념이 좋으면 훌륭한 인재가 모이고, 팀워크가 잘 이루어지면 서로 협력적인 관계로 진정한 의료를 시행할 수 있다. 또 입지 조건이 좋으면 훌륭한 인재들이 모이기 수월하다. 게다가 최신 의료기기를 갖추면 유능한 의사와 실력 있는 의료계 종사자들이 모여 서로 상승 효과를 기대할 수 있고, 병원 운영이 용이하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아무리 최신 의료기기를 갖추었다 하 더라도 이를 다루는 사람이 필요할 때 제대로 쓰지 않으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 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갖추어 졌을 때 비로소 완벽한 의료가 가능하다. 이념, 장소, 인재, 좋은 의료기기-이 네 가지 조건이 갖추어지면 병원의 운영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진료와 경영의 분리로 병원 문제를 해결 도쿠슈카이 병원은 새로운 의료를 개척하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뭔가를 시도 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의료와 경영의 분리이다. 도쿠슈카이 병원에는 원장과 사무장이 있는데, 원장은 의료를, 사무장은 운영을 총괄한다. 다른 병원처럼 원장이 운영의 전반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나 자신도 원장으로서의 경험이 있지만, 원장이 환자를 진료 하는데다 각종 제 약회사 영업 사원의 이야기까지도 들어줘야 한다. 의사와 간호사를 채용할 때도 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적임자를 찾아야 하고 병원의 운영 상태도 파악해야 한 다. 원장 한 사람이 병원의 전반적인 업무를 관여할 경우 이도 저도 아닌 더 나 쁜 상황을 가져올 수도 있다. 몇몇 의사들이 병원을 돈벌이를 위해 운영하기 때문에 일본 의료가 황폐해졌다 는 말을 듣곤 한다. 그 원인 중 하나가 진료소나 병원에서 원장이 운영 업무까 지 총괄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원장이 의료를 실시하면서 동시에 경영에도 관여한다면, 환자를 진찰 할 때 경제적인 이득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즉 병을 진단하면서 어떤 약을 쓰고, 어떤 검사를 하면 얼마의 수입이 들어올까? 하는 병원의 경제적인 이익을 생각하게 되고, 당연히 올바른 의료를 할 수 없게 된다. 원장은 환자의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에 중점을 두고 의료 행위에만 열중해야 한 다. 진료를 하면서 경영에 대한 운영까지 생각이 미치게 되면 치료방법에 방해 를 받거나 잡념이 들어갈 여지가 생긴다. 우리는 이런 폐해를 없애기 위해 의료와 경영을 분리했다. 그리고 본부에서 이 두 가지를 통괄하는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각 병원은 각 독립적으로 운영되지 만 본부의 지휘 아래 유기적으로 협력하는 구조로 운영된다. 본부는 직원의 채용과 운영에 대해 여러 가지 업무를 관리하므로 각 병원이 이 같이 똑같은 업무를 각각 기획하면서 생기는 쓸데없는 낭비를 줄이도록 함으로 써 각 병원이 서로 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현재 미국의 몇몇 병원의 원장은 병원 관리학을 전공한 전문가로 의사가 아니 다. 한 사람의 부원장이 원장과 같은 관리 전문가로 운영을 통괄하다. 다른 한 사람의 부원장은 의사로 병원 전체의 의료를 책임짐으로써 의료에 관한 전반적인 업무를 관리한다. 도쿠슈카이 병원은 이 방식을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채택해서 응용했다. 도쿠 슈카이 병원의 원장은 미국 방식에 따르면 의료책임자인 부원장에 가깝다. 게다 가 본부가 원장의 역할, 즉 의료와 운영 전반을 담당하고 종합 통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병원을 많이 세워 협력적인 경쟁 관계를 만든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앞으로 더 많은 병원을 운영할 계획인데, 이에 대해서 어 떤 학자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병원이 늘어나면 그만큼 병원의 질이 떨어지는 건 아닙니까? 초밥 집이나 빵 집의 경우도 점포가 많아지면서 질이 높아지는 사례는 드물지요. 많은 병원을 세우고서도 질이 떨어지지 않게 하면서 처음에 가졌던 이념을 지킬 수 있겠습니 까?” “병원이 많아지면 스케일 메리트(scale merit)가 생깁니다. 제가 주장하는 협력 적 경쟁 관계가 그것인데,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실 그대로다. 의료는‘의료 기술+인간학’일 것이다. 의료 기술은 열심히 연구하지 않으면 전 문가가 되기 어렵다. 그렇게 열심히 연구하지 않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어떤 병원에서 아무리 좋은 의료를 실시한다고 해도 한 곳에 너무 오래 있게 되면 시 간이 지날수록 의욕을 잃게 된다. 한 사람이 같은 장소에서 오래 근무하다 보면 능률과 질이 떨어지는 게 사회의 보편적인 현상 중의 하나이다. 내가 맨 처음에 병원을 설립했을 때는 너무도 힘들었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병 원을 세우면서 병원이 하나씩 늘 때마다 스케일 메리트가 생겼다. 각 병원의 협 력적 경쟁 관계가 생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언젠가 구급의료학회에서 노자키 병원이 두 가지 주제를 가지고 발표하자, 기시와다 병원과 야오 병원에서 우리 도 학회에 나가 학술 발표를 하겠다고 했다. 여러 개의 병원이 만들어짐에 따라 학문적으로나 의료행위의 실시 차원에서나 협력적 경쟁을 하면서 질이 높아지는 상승 효과를 낳고 있다. 또한 일본인의 특징 중 하나는 큰 것이 좋다는 심리가 있다. 병원이 늘어나고 조직이 커지면 흡인력이 늘어난다. 오사카에 맨 처음 병원을 세웠을 당시는 직 원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데 여러 곳에 병원을 짓고 운영 이념이 화제 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흥미를 갖고 관심을 보였다. 결국 의사를 비롯하여 사무 직을 모집하기도 수월해졌다. 직원을 채용할 경우에도 한 군데서 모집해서 각 병원으로 배치하기 때문에 인사 담당자는 병원이 하나일 때와 똑같은 과정으로 간단하게 끝낼 수 있다. 또한 직 원의 희망에 따라 현재의 근무처에서 다른 지역으로 파견하는 부수적인 효과도 거두고 있다. 도쿠슈카이에서는 병원의 의료와 실시 방법을 모두 원장에게 일임하므로 병원마 다 의료실사방법을 각각 다르게 취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재들이 모이고, 학문 적 경쟁과 환자에 대한 서비스 경쟁이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일본의 병원은 각기 독립적으로 이루어졌고 교류가 전무한 상황이었지 만, 우리 병원에서는 각 병원과 교류함으로써 서로에게 자극도 주고 동료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한다. 따라서 직원모두가 활기차게 일한다. 서로가 다른 병원의 장 점을 본받아 배우려 하기 때문이다. 나는 많은 병원을 세우는 편이 협력적 경쟁에 의해서 의료의 질을 높일 수 있 고, 상대적으로 내용도 충실해진다는 이론을 주장한다. 협력적 경쟁 없이 발전은 있을 수 없다. 지금까지 일본의 의사들은 협력적 경쟁을 하지 않았기에 진보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도쿠슈카이가 찾는 인재란, 인생은 단 한 번밖에 없으므로 보람있는 삶을 중시 하고 꿈을 찾아 끊임없이 실행하는 사람이다. 자신감을 갖고 자기 자신의 가능 성을 최대한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그런 의지와 기개가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좋다. 병원을 재미있는 곳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일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누구든지 병원에서 일할 수 있다. 병 원 내에는 여러 직종이 있으므로 누구나 일거리를 가질 수 있다. 사무직, 검사 직, 약국 등이 있고 고충처리 담당자도 있으며, 인사 관리, 서무, 회계도 있다. 뿐 만 아니라 본부에 오면 조사, 기획, 설계와 약품 구입, 식품 구입 등 사회의 전 반적인 업무가 있어 의사나 간호사가 아니더라도 열의만 있다면 누구나 병원 근 무가 가능하다. 자기의 가능성을 발휘하고 싶다면 의료에 관심이 없어도 좋다. 게다가 사람은 환경에 따라 변한다. 의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다 보면 일에 열중할 수 있 게 된다. 앞서 말했던 대로 도쿠슈카이가 주장하는 이념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당연한 의료를 당연하게 실시하자는 것뿐이다. 내가 하기 어려운 무리한 요구를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자신의 가능 성을 살리고 싶다면 열심히 노력하면 된다. 평범한 게 좋다는 사람은 그 나름대 로의 직장에 대해서 8시간이면 8시간 동안만 열심히 근무하면 그것으로 충분하 다. 그런 사람은 그렇게 하면 된다. 일을 끝내면 골프를 치러 가거나 술을 마시러 가거나 그런 것들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요컨대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일을 하는 동안만큼은 자신의 일에 전력 투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병원 건설비는 일반 병원의 1/4 수준 도쿠슈카이의 운영 노하우는 토지매입과 병원 공사비, 의료기기 구입 등 초기 투자비용에서 철저한 합리화를 통해 경비를 절감한 데에 있다. 예를 들면 1957년 1월에 세워진 사이다마 현의 고시가야 시민 병원과 야오 도쿠 슈카이 병원의 건설비를 비교해 보자. 고시가야 시민병원의 경우 건축 연면적 1만 6400제곱미터에 한 68억 9천만 엔을 들여 300여 병상 규모의 병원을 건립했다. 한 병상당 약 2,300만 엔이 든 셈이 다. 그런데 야오 도쿠슈카이 병원의 경우는 330개 병상의 병원을 약 반 이하인 6,700제곱미터의 건축 면적에 17억 2천만 엔으로 건설했다. 한 병상당 약 540만 엔이 소요됐으니 고시가야 시민병원에 비하면 4분의 1정도의 비용밖에 들지 않 았다. 이렇게 된 이유는 병원의 건설 규모가 다르기 때문이다. 한 병상당 평수가 매우 작기 때문이다. 고시가야 시민병원의 경우 원장실이 상당히 넓고 원장 비서실, 부원장실, 각 과 의 부장실 등을 비롯해 의사협회실까지 만들었다. 환자를 위한 편의 시설이 아 니라 직원들, 특히 관리직을 맡는 의사를 위한 공간이 많이 차지했고, 관리직 사 무실에는 두꺼운 카펫까지 깔았으니 당연히 평당 단가가 높을 수밖에 없다. 병원 직원들을 위해 방을 만들거나 돈을 쓴다면 환자가 아닌 직원을 위한 병원 일 것이다. 우리 병원은 어디까지나 환자를 위한 병원이다. 환자를 위한 공간은 있지만 원장실은 물론 이사장실, 부원장실, 각 과의 부장실 등은 별도로 만들지 않았다. 응접실도 사무실 하 구석에 의자를 몇 개 놓거나 회의실을 대용해서 사 용한다. 때문에 건물 면적이 작아도 비교적 환자를 위한 공간이 충분하고 카펫을 깐 방 이 전혀 없으므로 평당 단가도 내려가며 건설비도 적게 들었다. 고시가야 시민병원의 외관은 마감재를 타일을 붙여서 완성했다. 타일을 붙이기 위해서는 콘크리트를 펴 바르고 그라인더로 간 후에 모르타르를 발라야 하는 등 까다로운 공정을 여러 번 거쳐야 한다. 그에 비해 야오 도쿠슈카이 병원은 외벽 을 분무 타일을 이용해 완성했다. 뿐만 아니라 고시가야 시민병원과 야오 도쿠슈카이 병원의 51억 7천만 엔이라는 건설비의 차이는 거기서만 그치지 않는다. 그 차액만큼 빌린 이자만 해도 엄청 난 차이가 난다. 또 약 5천평의 냉·난방비에 두 달 동안 500만 엔이 든다고 하 면 약 2천평의 도쿠슈카이 병원은 200만 엔밖에 들지 않는다. 이같이 운영비에 서 생기는 차액을 서비스 차원에서 냉난방비를 무료로 실시하고 있다. 제약업체로부터 받는 뒷돈은 의료비의 횡령 우리 병원은 의료기기 또한 다른 병원에 비하면 훨씬 싸게 구입한다. 언제나 업자와 철저하게 협상을 벌여 단돈 1엔이라도 최대한 저렴하게 구입하기 때문이 다. 또한 여러 병원에서 사용하는 기기를 한꺼번에 일괄 구입하는 데서 얻어지 는 스케일 메리트도 있다. 그밖에 다른 이유는, 많은 병원을 짓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우리의 목표를 아 는 의료기기업자들이 가능한 한 최저 가격으로 제고아기도 했다. 약품 구입도 기기 구입과 마찬가지로 도쿠슈카이 병원에서는 1천만 엔 단위로 일괄 구입한 다. 그러므로 당연히 구입 단가가 내려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다른 병원에서는 의사가 제약회사의 초청으로 골프를 치러가거나 학회에 갈 때 제약회사가 제공하는 호텔에서 숙박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약품구입 담당자까지 여기저기서 술을 마시거나 일정한 사례금을 받기도 한다. 그런 비용 이 물품 구입비의 상승 원인이 되어 결국 병원으로 손해가 되어 돌아온다. 우리 병원에서는 자사 약품에 대해 설명하러 온 영업사원의 병원 출입이 금지되 어 있다. 일단 제약회사 직원이 병원에 출입하게 되면 그 회사의 약은 절대로 구입하지 않는다. 만일 업자로부터 얼마간의 뒷돈을 받은 직원이 있고, 그 사실 이 들통나면 그 자리에서 사표가 수리되며, 영업사원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가도 마찬가지이다. 부득이하게 영업사원과 식사를 할 경우에는 그가 우리 병원에 도 움을 주는 것으로 간주해 우리가 돈을 낸다. 요컨대 우리는 모든 면에서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노력하며 또한 대량 구입을 통해서 코스트 다운을 꾀하고 있다. 제약회사도 이런 우리의 방침에 대해 긍정 적인 반응을 보이며 매우 호의적이다. “덕분에 떳떳하게 정면으로 입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러 가거나 골프를 치러 갈 필요도 없고, 그런 데에 따로 신경 쓸 필요가 없어서 정말 좋습 니다. 장사를 이렇게 즐겁게 하기는 처음입니다.” 당연한 일들이 왜 당연하게 지켜지지 않았던 것일까. 업자로부터 뒷돈을 받는 것은 의료비의 횡령에 속한다. 그만큼 돈이 남는다면 의료에 도움이 되는 곳에 사용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도쿠슈카이에서는 비용 절감으로 생기는 차액을 환 자들한테 환원하려고 노력한다. 환자를 위한 병원을 만들겠다는 이념이 카운터의 칸막이 유리를 없애고 호텔 프 론트처럼 오픈된 카운터를 만들게 했다. 접수 창구의 직원이 대기실에 있는 환 자의 상태를 한눈에 파악하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병원의 엘리베이터도 환자들 전용이다. 병원 관계자는 되도록 엘리베이터를 사 용하지 않도록 노력한다. 의사와 간호사가 복도한가운데를 걸어 다니는 것도 허 용하지 않는다. 환자들만이 복도 한가운데를 걸어다닌다. 어젠가 어떤 국립병원 복도에서 간호사와 마주쳤을 때 그 간호사가 너무도 당당 하게 복도 한가운데를 걸어가기에 무의식적으로 복도의 한끝으로 피한 적이 있 었다. 하얀 옷을 입은 의사와 간호사가 당당하게 복도 한가운데를 걷고 있으면 환자가 비실비실 거리며 복도의 가장자리로 피하는 것이다. 환자를 위해 존재하는 병원 으로서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환자를 위해, 물론 부득이한 경 우를 제외하고, 복도 가장자리로 걷는 것이 당연하다. 의료종합대학을 설립하고 싶다 도쿠슈카이에 대해 병원의 설립 속도에 맞춰 의사의 확보가 가능하냐는 의문을 제가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앞으로는 의사가 남아돌고 사회도 양질의 우수한 의료를 요구함에 따라 전반적인 사회의 흐름이 우리에게 더 유리한 쪽으 로 작용한다는 견해를 피력하고 싶다. 우리가 의과대학을 졸업할 때는 약 3천여 명 정도였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많고 앞으로는 몇 배나 더 많이 늘어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5년 또는 10년 앞을 내다보면 이사의 수가 엄청나게 늘어나 지금처럼 일해서는 밥을 먹기 힘든 시대 가 올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학벌이나 연공서열이나 아첨 따위는 생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다. 자신이 노력해서 실력을 키우지 않는 한 의료세계에서 도태 당할 수밖에 없 기 때문이다. 이미 훗카이도 대학, 교토 대학, 오사카 대학, 큐슈 대학 등 전국의 의과대학에 서 우리 병원에 오고 싶다는 지원자가 쇄도하는데, 대부분의 지원자들은 도쿠슈 카이 병원에 들어가면 실력을 키울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첫 번 째로 꼽았다고 한다. 이것은 조만간 냉혹한 실력 시대가 온다는 것을 암시하는 증거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언젠가 도쿠슈카이가 미국의 더 뉴잉글랜드 저널 오브 매디신 (The New England of Medicine)이라는 의학 잡지에 구인 광고를 냈을 때 전국 에서 204명의 지원자가 응모해 왔다. 그 중에는 미국에서 공부중인 일본인이 18 명, 미국인이 144명이었다. 인재 확보 면에서 볼 때 우리 또한 상당히 놀랄 정도의 반응이었다. 미국에서 엄격한 연수 제도를 거친 의사가 앞으로 도쿠슈카이 병원에서 의료를 실천해 준 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일본 의료 기술 전체의 향상으로 연결될 것이다. 이처럼 의사의 공급 문제는 어려움 속에서도 낙관적으로 전망할 수 있다. 오히 려 앞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간호사, 검사기사 등 패러메디컬 분양의 공급이다. 우리는 패러메디컬의 양성을 위해 병원 관리학, 리허빌리테이션(rehabilitation; 사회복귀치료) 등의 각 부분을 세분화한 의료종합대학의 설립을 한시라도 빨리 이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각 분야에 걸쳐 전문적이고 철저한 간부 교육을 시행 중이며, 또 현장 직원들 또한 재교육을 실시한다. 특히 해외의 개발도상국으로부터 연수생도 받 고 있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우리의 병원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받고 후생성, 문부성, 대장성, 외무성 등 각 기관에서도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가능하다 면 빠른 시일 내에 의료종합대학을 설립하고자 한다. 나이 많은 의사가 유능하다는 오해 도쿠슈카이 병원에 근무하는 의사들의 평균 연령은 30세 중반이다. 따라서 일 부 환자들은 치료하기 힘든 질병을 진료할 때‘의사의 나이가 어려서 괜찮냐’ 는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나는 오히려 기술적으로 학교를 졸업한 지 10년 전후 인 때가 의사로서 최고로 의욕적이고 왕성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의료 기술은 보통 5년 동안에 익혀진다. 그리고 다시 5년의 경험을 쌓으면 가장 우수한, 다시 말해 좋은 의미에서 자신의 몫을 담당하게 된다. 이런 나의 견해는 어디까지나 학벌과 연공서열이 없는 실력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레지던트로 한 달에 20일 동안을 병원에서 숙박하면서 철저하게 연수를 받는 미국식 교육을 전제로 한 것이다. 하루에 8시간 근무하는 일반적인 연수의 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우리 병원의 근무의만큼은 젊지만 모두 그런 엄격한 훈련을 거쳐 나이 이상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 젊은 의사일수록 컴퓨터로 처리되는 최신 의료기기도 자유 롭게 활용할 수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의사의 나이가 젊다는 것이 걱정되는가. 실제로, 당신이 사고 를 당해 긴급하게 수술을 받아야 할 경우를 생각해 보자. 체력 면에서 떨어지는 노의사를 밤 2시나 3시에 깨워 수술을 받는 쪽과 사명감을 갖고 냉혹한 수련을 축적해 온 젊은 의사한테 수술을 받는 쪽 중 어느 쪽을 선택하겠는가. 만약 나 라면 주저 없이 후자를 선택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인생의 연륜을 무시하거나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기술 을 과신하고 젊다는 것을 방만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젊음과 기술 외에 인생 경험이 풍부한 선배 의사들의 지도하에 인간학을 습득하고 우리가 실천하 고자 하는 참다운 의료에 한층 가깝게 가자는 것이다. 의사 선생님이란 말만 듣고 아는 척한다 우리 병원에서 열심히 일하는, 미국에서 교육받은 의사를 보거나 실제로 거기 에 갔을 때 관계자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미국은 의료 면에서 일본 보다 앞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의학 교육의 현실과 의과대학 졸업 후 임상 연수 등에서는 배워야 할 점이 많다. 의학 교육에 대해서 살펴보면, 일본대학은 6년인데 비해 미국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년간이다. 먼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4년 동안 이과 계통의 학부에 들어간다. 하나의 학사를 취득한 뒤, 적어도 3명 이상의 교수 추천이 있어야만 비로소 의 과대학에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여기에 의사로서 모나지 않은 인간성을 지니고 있다는 추천장도 필요한 것이다. 의과대학에 들어가서 다시 4년, 이렇게 모두 8년으로 일본보다 2년이 더 많다. 마지막 2년 동안 은 실습을 위주로 한다. 여름 방학과 봄방학은 병원에서 숙식 하면서 엄격한 실습을 받는다. 예를 들면 실습 중에 분만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의과대학을 졸업하면 3,4년은 병원에서 숙식하면서 근무한다. 이 같은 레지던트 제도는 대단히 힘들고 고통스럽다. 대개 36시간 근무하고 12시간 쉰다. 즉 한 달 에 20일은 숙식하는 셈이다. 당직 중에도 호출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식사할 때 에도 화장실에 있을 때에도 삐, 하는 소리가 울리면 그 즉시 환자한테 달려간다. 미국은 학벌이나 연공서열이 없는 실력 사회이므로 스스로가 이 같은 하드 트레 이닝을 견디지 않고서는 한사람의 의사로 당당하게 자립할 수 없다. 또 하나, 미국에는 패밀리 플라그티스(가정의)라는 제도가 있어서 인턴 1년 동안 과 레지던트 2년 동안에 전문의 시험을 치르는데, 그 시험은 5, 6년에 한 번 정 도 있고 전문의 시험을 보지 않으면 자격을 박탈당한다. 일본에서는 젊은 의사를 교육한 사람이 교육 받은 사람을 채점하지만 미국에서 는 교육하는 사람이 교육 받은 사람을 채점하는 동시에 교육 받는 사람 또한 교 육하는 사람에 대해점수를 매기게 된다. 그 과정에서 교육자로서 적합하지 않 은 사람은 물러날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매우 합리적이다. 이는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 같은 엄격한 연수 제도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연수 제도가 엄격 한 이유 중의 하나는 미국이 서로가 잘못을 했을 경우, 당장 소송을 당하는 사 회라는 것을 반영한다. 오진이나 잘못 처치했을 경우 미국에서는 환자로부터 당 장 소송을 당하게 된다. 한편 일본은 어떤가. 학교를 졸업해서 병원에 들어가자마자 선생님이라 불리운 다. 임상경험이 전혀 없는 신참 의사가 쉰 살이 넘은 병원 관리자한테서도 선생 님이라는 호칭으로 불리운다. 그러면 아무 것도 모르면서도 주위의 부추김으로 아는 척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자세는 물론 겸손 함마저도 전부 잃어버리고 만다. 더 심각한 사례를 들자면, 신설된 의과대학의 경우, 상당한 액수의 기부금을 주 고 입학한 학생이 여러 번의 추가시험을 통해 겨우 졸업한 후에도 역시 ‘의사 선생님’이 된다. 또 국가시험제도가 쉬워서 합격할 때까지 몇 번이라도 재응시할 수 있다. 미국 에는 국가시험이 기초, 임상, 종합의 3단계로 나뉘어져 있으며, 세 번 떨어지게 되면 시험 볼 자격을 박탈당해 의사가 되기를 포기해야 한다. 독일은 두 번 떨 어지면 시험 볼 자격을 상실 당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의사가 된 후 여기저기 아첨하면서 연구를 한답시고 임상 연 구를 하면서 몇 년 때우고 나면 의학박사가 된다. 지금까지 의학박사는 대단한 직함이었다. 그러나 오히려 의학박사라는 칭호 때문에 의과대학 졸업 후 임상 연구에 소홀해 진다. 결국 이는 일본의 의료를 왜곡시키고 후퇴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해 왔다. 하이 퀼리티 로우 코스트+도쿠노시마의 마음 미국의 의학 교육제도와 의료계의 상황에 대해서는 확실히 메워야 할 점이 많 다. 그렇지만 우리 일본에서 그대로 운영하는 데에는 부작용이 따른다. 나라마다 정서의 차이가 있으므로 부정적인 측면 또한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하이 퀼리티 하이 코스트(High Quality High Cost)’의 의료를 실 시하고 있지만, 도쿠노시마의 가난한 생활을 기본으로 의료를 실시한다는 이념 을 가진 나로서는 의료에 관해서는 하이 퀼리티를 주장하지만 운용에 관해서는 로우 코스트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가 없다. 미국에는 예전부터 자원봉사자가 많지만 병원에 경영 전문가를 투입하지 않고 경영함으로써 의료수가가 매년 15% 이상 인상되지 않으면 경영이 어려우므로 하이 퀼리티 하이 코스트의 의료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호스피탈 코퍼레 이션 오브 아메리카. 아메리카 메디컬 인터내셔널이라는 병원 경영 회사에서는 운영 그룹 속에 비즈니스 프로페셔널을 넣어 열심히 운영함으로써 연간 의료비 인상을 8%로 억제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하이 퀼리티 하이 코스트의 의료가 조금 이나마 로우 코스트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각지에 끊임없이 계열 병원을 만 들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병원을 만들려면 하이 퀼리티 로우 코스트가 아니면 안된다. 일본에는 보건제도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영국이나 사우디아라비아에 병원을 만들었다. 영국에서의 상류 계급과 사우디아라비아의 오일 달러를 목표 로 만든 병원이다. 그러나 일본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의 의료에서는 미국식 의료 코스트는 통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개발도상국의 의료를 어떻게 개선하면 좋을까 하는 문제에 대해 다각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여기에는 도쿠노시마적인 발상이 필요 하다. 의료는 하이 퀼리티이지만 비용은 도쿠노시마의 사람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로우 코스트가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연구했다. 미국은 복합민족이므로 단일민족에 대한 관념이 희박하다. 그래서 살벌하다. 일 본도 점차 고도성장에 수반되어 단일민족이라는 관념이 희박해지고 있지만 아직 도 도쿠노시마에는 단일민족이라는 의식이 시골 사람의 마음에 강하게 남아 있 다. 그러한 단일민족이라는 마음과 시골 사람이라는 마음이 도쿄 같은 대도시의 의료에도 필요하다. 개발도상국의 의료를 개선하는 방법을 생각해 보면 개발도상국은 단일민족이 많 기 때문에 도쿠노시마적인 발상에 일본적인 단일민족의 의식이 필요하다고 본 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국의 합리적인 하이 퀼리티 의료+도쿠슈카이의 철저한 로우 코스트 운영, 그리고 도쿠노시마의 소박한 마음을 전부 합쳐서, 일본 의료 와 개발도상국의 의료를 실시해야 할 것이다. 필사적으로 일본 의료계를 개선하다 4. 필사적으로 일본 의료계를 개선하다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 자신의 능력을 150% 발휘시킨다 도쿠노시마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보잘것없었던 도쿠다 도라오가 거 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마침내 의사가 되었다. 그러나 의료에 대한 이상은 있지만 이상적인 의료는 실시할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마 음에 내키지 않는 꺼림직한 일은 하지 말자고 노력해 왔다. 그래서 명분을 내세 우면서 허풍을 떨었다. 또 허풍에 쫓겨 앞만 보고 열심히 달린 결과 허풍을 현 실화 시켰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미친 듯이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의 목 표를 달성했고, 게다가 아직은 모르지만 좀더 규모가 큰 목표를 구상 중에 있다. 이것이 바로 도쿠다 도라오의 거짓 없는 속마음이다. 이 속마음을 이념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치시키기 위해 나는 온 힘을 다해 달 려 왔다. 일본의 의료를 바꾸고, 세계 의료를 바꾸고, 누구나 이상으로 생각하는 진정한 의료를 실천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 너무도 많다. 왜냐하면 의료에는 사람의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료를 실시하는 나도 목숨을 걸지 않으면 안된다. ‘목숨을 걸다.’ 말로는 정말 간단하다. 하지만 죽을 각오를 하고 실천으로 옮긴다는 것은 목숨 을 걸 정도로 고통스럽다. 목숨을 건다는 것은 온 신경을 집중해 주의를 기울이 면서 사심을 버리고 철저하게 하나에만 매달린다는 것이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하루에 8시간 노동한다면 나는 하루 16시간 이상 일한다. 한 사람이 평균 1년에 265일 일할 때 나는 365일 일한다. 다른 사람이 100%를 이룰 때 나는 150%의 부담을 스스로에게 부과해 왔다. ‘죽느냐, 사느냐.’ 이 아슬아슬한 싸움이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한다. 불가능을 가능으 로 바꾼다. 이런 것들이 바로 내가 상상해 왔던 의미 있는 것을 실현시킨다고 굳게 믿고 있다. 나는‘인생은 한 번밖에 없다’는 말을 자주 한다. 젊은 직원을 격려할 때는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하는 것 자체가 정말 대단한 일 이다”라고 말한다. 마음에 내키지 않고 꺼림칙한 일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너무 대단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번밖에 없는 인생을 의미 있고 보람차고 후회없이 살아야 하는 것, 그 것이 인생의 전부이다. 자신의 머리에 반비례해서 노력하라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먼저 머리로‘그건 불가능해요’ 또는‘도저히 할 수 없어요’라고 판단해 버리고 어떠한 일을 결정한다. 무엇이 든 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다. 나는 도저히 내 힘으로는 불가능할 것 같은 것을 대상으로 목표를 정한다. ‘일본의 의료를 개혁하겠다!’ 황폐해진 일본 의료를 개혁하고 참다운 의료를 실천하기 위해 나 자신의 가능성 을 최대한 발휘시켜 이루겠다고 결심했다. 목숨을 걸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 앞 만 보고 돌진하고, 전력투구하는 내게 점차 가능성도 조금씩 넓어졌다. 주위 사람들은 나를‘열정적인 인간’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나 자신을 맹렬한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나의 삶 을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농민과 비교해 보면, 내가 그다지 열심 히 산다고 볼 수는 없다. 내가 일주일에 한 번밖에 집에 들어가지 않아 대단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도 나 에 대해 잘 모르고 하는 이야기이다. 원양어업을 나갔거나, 시골에서 도쿄로 돈 벌러 온 경우나, 도쿠노시마에서 본토로 돈을 벌러 온 사람들은 모두 일주일에 한 번도 집에 못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나의 일에 대한 열정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일반 기업에서 근무하는 근로자에 비할 때 대 단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의료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사람의 생명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우리의 피곤하다 와 피곤하지 않다의 차이는 환자에게 있어 죽느냐, 사느냐의 차이와 같다. 죽느 냐, 사느냐 하는, 아픔과 고통으로 사경을 헤매는 사람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피곤하다는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의사가 되기로 결정하고 의사가 된 이후부터 우리는 피곤하다는 말을 자신의 머리 속에서부터 지워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나처럼 이 이일에 대해 보람을 찾고자 한다면 먼저 자신의 얼굴을 보라, 가계의 혈통과 자기의 지능이나 기본적인 수준을 생각해 보라. 그것에 반비례해서 노력 하라, 보람과 원하는 것의 크기에 비교해서 노력해야 한다. 단조로움과 사소한 일을 중요하게 생각해야만 대성한다 나는 단조로움을 참고 견디는 사람이 아니라면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고 생 각한다. 단순하고 당연한 것을 날마다 열심히 계속하기는 매우 어렵다. 오히려 다양함과 변화가 있다면 누구라도 즐겁게 그 일에 몰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전쟁놀이를 할 때, 공격하는 쪽이나 방어하는 쪽이 결정타가 없이 막 상막하일 경우에는 성을 지키는 쪽이 성 안에서 6개월 정도 갇혀 있어야 하므로 단조로운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이런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성 밖으 로 나오는 순간, 승부가 결정난다. 나는 학창 시절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한 가지에만 매 달리고 있다. 그래서 매일매일 일요일과 공휴일에도 쉬지 않고 오로지 병원의 발전과 좋은 의료를 펴고 싶다는 염원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어떨 때는 딱 하루만 쉬고도 싶지만 그렇게 하면 나 스스로한테 지게 된다. 요컨대 인내심이 강해야 할 것이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인내심이 없 는 사람은 결코 대성할 수 없다. ‘단조로움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단조로움을 이겨내 는 사람만이 역사를 만든다.’ 나는 이렇게 확신한다. 또 하나 짚고 넘어갈 것은, 사소한 일을 정확하게 하지 않는 사람도 큰 일을 이 룰 수 없다. 보통의 이해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내 한 말이 무얼 의미하는 말인 지를 알 것이다. 이 말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과 똑같다는 것이다. 이 일은 중요하기 때문에 열심히 하고, 이 일은 사소하니까 조금 방심해도 된다 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큰일은 작은 일이 쌓여서 만들어진다. 작은 일에 방심 해서 실수를 연거푸 저지르는 사람은 막상 큰일을 떠맡았을 때 최선을 다하겠다 고 결심해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따라서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전력투구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나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양치질도 면도도 화장실에서의 볼일도 식사도 모두 전력투구하는 심정으로 한다. 일의 크기나 중요성에 관계없이 무슨 일에든 결코 방심하지 않 는다. 나는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적극적인 자세로 최선을 다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 도 이루지 못합니다.” 나는 인생에 있어 커다란 열매를 맺는 열쇠를, 단조로움을 견디고 작은 일을 소 중하게 여겨 전력투구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일과 취미가 일치하는 행복 나는 사람들로부터 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한다. “일입니다. 환자를 돌보고 병원 일을 하는 것이 취미이고 보람입니다.” 일과 취미가 다른 사람은 자신이 몰두할 만한 취미거리를 찾지만 나의 경우에는 일과 취미가 일치하므로 굳이 골프나 낚시 등에 흥미를 느끼지 않을뿐더러, 또 그럴 마음도 전혀 없다. 나는 모든 시간을 어떻게 하면 의료를 잘할 수 있을까, 하는 한 가지 문제에만 몰두하므로 일과 취미가 없으니 여러 가지를 생각할 필요가 없어 양적으로나 질 적으로 만족스러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한 가지 일에 정통하면 전체적인 질이 높아진다.” 나는 도쿠노시마 출신의 가난한 농민의 아들이지만 하나에만 매달렸기 때문에 도쿄와 오사카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겨룰 수 있고, 이 사회에서 나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었다. 지금까지 나는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의무감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투구해 왔다. 만일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짓겠다는 사명감이 없었다면 어떤 병원의 근무의나 개업의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루에 8시간 일하고 취미 생활도 하고, 여행도 다니는 평범한 생활이 좋은지, 나처럼 1년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가족을 일주일이나 열흘에 한 번밖에 못 만 나면서도 열심히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행복한지 결론을 내리기는 힘들지만, 어 떤 삶이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를 판단해 보면 후자가 아닌가 싶다.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세우겠다는 사명감이 내게 물욕과 돈에 대한 욕망을 버리 게 했다. 애정이나 인정, 은혜, 인간성을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남자로 변화시 켰다. 물론 내가 욕심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은 욕심을 부렸다 면, 아마도 나는 더 이상 병원을 세우는 일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평소의 나의 생각과 행동은 모두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세우겠다는 사명감에서 출발했다. 나는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과 마음의 안식처를 잊지 않고 매순간을 열심히 살아간다고 믿고 있다. 내가 한 말에 책임지기 위해 목숨을 걸다 나는 현재 거의 매일 같이 비행기를 타고 도쿄, 오사카, 큐슈, 오키나와를 돌 아다닌다. 사람들을 만나 회의와 협상을 진행하고, 다음 계획을 구상하고 실행하 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생활을 되풀이하고 있다. 나는 내가 한 말에 대해 책임지기 위해서라도 실행한다. 불언불실행, 유언불실 행, 불언실행, 유연실행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나는‘유언실행’을 주장한다. 나만의 목표를 널리 다른 사람들한테 공언함으로써 목표를 실행하지 않을 수 없 도록 나를 몰아붙인다. 예를 들면, 10킬로미터를 달리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자. 아무 말도 않고 달리는 경우에는 5킬로미터만에 힘들다고 그만두어도‘반이나 왔으니까’라고 자신을 변명할 수도 있고, 다른 사람 또한‘잘 달렸다’고 치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유언실행이라면, 예를 들어 10킬로미터를 달리겠다고 해놓고 10킬로미터 지점에 도달하지 않는다면‘저 사람은 허풍쟁이야. 할 수도 없으면서 큰소리만 치거든’이라는 말만 듣게 된다. 누구나 일단 허풍쟁이라는 낙인이 찍히면 그것 으로 끝이다. 도쿠노시마 출신의 도쿠다가 하지도 못할 일을 가지고 큰소리만 쳤을 경우 도쿠노시마에서는 바로 그 사람의 인격 전체가 부정 당하는 것을 의 미한다. 즉 그것은 죽음과도 같다. 그러므로 나의 유언실행에는 생명이 달려 있다. 나는 허풍을 떨지만 그 허풍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다해 전력 질주한다. 그래서 그 허풍이 현실로 눈앞에 펼쳐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간절하게 바라는 것이 있어 그것을 정말로 이루겠다고 결심한다면 인간에게는 불가능이란 없다. 특히 내 경우에 그것이 진정한 의료를 달성하는 길이라고 한 다면 나는 어떠한 일이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다. 물론 인간으로서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지만 그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야기되지 않는 한 나는 어떠한 방법과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그 목적을 달성하고 야 말 것이다. 나의 그런 행동력의 원천은 당연히 받아야 할 혜택을 받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 의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슬픔에서 비롯되었다. 가령 의료혜택을 받지 못해 죽지 않아도 될 병으로 죽거나, 현대 의학으로 해결할 수 있는 병인데도 일요일이라든가 한밤중에 병이 났기 때문에 죽어야 한다는 말도 안되는 현실, 또한 무의촌이나 멀리 떨어진 작은 섬에서 병이 나거나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죽 게 되는 경우가 그렇다. 자신이 열심히 일하면 아이들한테 공부하라고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 집에는 일곱 명의 아이들이 있다. 나는 일 때문에 각지를 돌아다니므로 집에는 일주일이라 열흘에 한두 번밖에 들어가지 못한다. 나에게는 토요일이나 일요일도 없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를 가족과 함께 하는 것은 3, 4개월이나 반 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이다. 나는 그 동안 아이들의 성적표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나는 세상의 모든 자식 들이 부모들과는 자라온 환경도, 능력도 다르기 때문에 부모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잔소리나 간섭을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각자의 능력에 맞춰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그것으로 족하다. 부모나 자식이나 모두 각자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남에게 폐가 되지 않는 범위 에서 열심히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는 주변에서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부모를 본다. 나는 감동 스럽게 보여져 왔던 부모의 그러한 헌신이 결국 아이들한테 어떤 잘못을 범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떠 부모들이 자기가 이루지 못했던 꿈을 자식을 통해 이루려고 하거나 위탁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경우도 마찬가지다. 처해진 환경과 조건 등을 고려하지 않고 부모의 꿈을 강요하는 것은 아이들에게 폐를 끼치는 일이다. 나는 부모는 부모로서 자신의 이상에 다라 열심히 살고 자식은 자식으로서 그렇게 열심히 산다면 학교 성적이야 좋든, 나쁘든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나도 가능하다면 아이들과 함께 있고 싶다. 언젠가 딸아이가 어렸을 적 걱정스 런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빠! 오늘 운동회에 올 수 있어요?” “글세, 아빠도 운동회에 가서 손이나 다리를 다친 아이들을 치료해 주고 싶지 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병원 일을 그만두고 운동회에 갈 수는 없지 않겠니?” 나의 말에 아이는 기분 좋게 말했다. “아빠, 병원에 다녀오세요.” 부모가 얼마만큼을 아이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기분은 없다. 가족들끼리 그 기 준을 만들면 좋다, 아빠가 매일 저녁 일찍 집에 들어와서 누워 잠만 자거나 텔 레비전을 보면서 아이한테만 공부하란다고 자녀들이 공부할 리 없다. 그런 부모라면 오히려 집에 돌아오지 않는 편이 좋다. 부모가 아이들한테 열심 히 하라고 말할 때에는 부모 자신이 집에서든, 밖에서든 열심히 일하는 것을 전 제로 한다.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애정의 질이 문제이지 결코 시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둘째 아들이 언젠가 자랑스럽게‘아빠는 일본에서 제일 열 심히 일하는 사람이야’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렇게 부모가 열심히 사는 모 습을 보여준다면 아이들한테 굳이 ‘공부해라’하는 잔소리를 하지 않아도 아이 역시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다만 나는 아이들한테 반드시 지키려는 규칙이 하나 있다. 나는 가족이란 서로 얼굴을 맞대고 무엇인가를 공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집에 들어갈 때는 한밤중이라서 가족 모두가 모일 기회는 없지만, 다음날 아침에 내가 일어나 세 수하고 나올 때에는 모두들 거실에 바르게 앉아서 안‘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한 다. 그때 나는 아이들과 한 명씩 악수를 나눈다. 또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출근하니 까 밖으로 전송하러 나온 아이들마다 힘주어 손을 잡아 준다 집에 일찍 들어가도 텔레비전을 보면서 스포츠신문을 읽을 뿐 아이들과 별로 대 화를 나누지 않는 부모가 많다. 그런 부모에 비하면 나의 스킨십과 공동체의식 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 훨씬 더 강하고 친밀감을 준다. 상대방에 대한 애정은 함께 공유하는 시간의 양이 문제가 아니다. 열심히 일하 는 사람은 1분이든 5분이든 충분히 애정표현을 할 수 있다. 나는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처리해야 하므로 시간에서 이기고, 양에서 이기고 질에서 이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 밖에서는 오로지 일 에만 몰두하지만, 집에 있을 동안에는 가족들한테 최선을 다하므로 훨씬 효과적 이다. 경제는 돈을, 정치는 당선을 목표로 하지만 사회운동은 목숨을 건다 내가 지향하는 것은 진정한 의료이고 더 나아가서는 우리 국민의 복지 향상이 다. 나는 사회운동을 하고 있다, 사회운동은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지만 경제 활동은 돈이 있으면 할 수 있다. 100엔에 플러스 알파를 붙여서 110엔 내지 150엔을 만들면 목적이 달성되는 것 이다. 정치 활동은 표를 얻으면 된다. 50%에서 한 표라도 더 얻게 되면 당선한다. 자 신이 선거에 당선하면 실천하겠다는 슬로건을 실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선된 후에는 선거 공약을 휴지조각처럼 내동댕이치는 사람도 많다. 그러면서도 그들 은 뻔뻔스런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지낸다. 하지만 사회운동은 다수결로 되는 것이 아니다. 90%가 달성되어도 부족할 때가 있다. 99.9%, 가능하면 1005의 지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병원을 세울 때도 일단 만들겠다고 결정하면 많은 사람의 협조를 받거나 반대로 어떤 어려움과 장애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병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병원을 세우지 못한다면 우리의 운동은 그 시점에서 좌절된다. 또 병원을 세워도 환자의 입장에서 바람직한 운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병원 을 세우지 않은 것만 못하다. 그 병원이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면 살인 공장이 되기 십상이다. 예를 들면 100명 중 99명의 목숨을 살렸다고 해도 1명을 죽인다면‘살인’이라 는 말을 듣게 될뿐더러 병원의 가치 또한 없어진다. 병원을 운영함에 있어 100% 환자의 입장에 서는 것이 운영의 필수적인 요건이다. 적어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때에는 목숨을 걸고 방향을 바로 잡아야 한다. 경제 활동은 돈을, 정치활 동은 당선을 목표로 하지만 사회운동은 목숨을 걸지 않으면 할 수 없다. 의료법인화는 개인병원으로부터의 탈피 맨 처음 도쿠다 병원을 설립한 뒤 두 번째 노자키 병원을 설립하기 위해 공 사를 착수하면서 개인병원을 만들면 안되겠다는 생각에 사회적 재단법인을 설립 하게 되었다. 그러나 재단법인의 설립은 인가를 받기도 어렵고 재산이 없는 경 우에는 더욱 설립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공익법인으로 인가받기 쉬운 의료법 인을 1976년 1월에 설립했다. 두쿠슈카이란 두쿠다란 이름과 관계가 있습니까? 나는 이런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러나 나의 이름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카이는 섬이고 도쿠슈란 도쿠노시마를 나타내는 말로 도쿠노시마 고등학교의 교 과에도 도쿠슈 고등학교라는 가사가 들어 있다. 어감상으로 도쿠노시마라는 말 보다는 도쿠슈라는 말이 좀더 장대한 느낌을 준다. 도쿠노시마 출신들 사이의 사친회를 도쿠슈카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간토 도쿠노시마카이나 간사이 도쿠노시마카이라는 어감보다는 간토 도쿠슈카이 나 간사이 도쿠슈카이라는 말이 느낌상 딱 어울린다. 이 같은 취지에서 요론도 섬 출신 사람들은 요론도카이라고 말하고, 오키노에라부 섬 출신자들의 모임은 오키슈카이라고 부른다. 나는 의료법인을 창립할 때 이 이름을 사용했다. 맨 처음 도쿠다 병원을 만들었 을 때는, 왜 오사카에 병원을 만듭니까 라는 질문을 받았는데, 고민에 고민을 한 끝에 내 린 대답이 바로 이것이다. 도쿠다는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만드는 것이다. 도쿠슈카이는 이 사실을 잊지 않고 자신을 원점으로 되돌리고, 초지일관하는 자 세를 잃지 않기 위한 이름이었다. 그 원점에는 의사의 진료를 받아 보지 못하고 죽은 남동생의 죽음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치료가 충분히 가능한 병인데도 낙 후된 의료 시설 때문에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의 무의미한 죽음이 있다. 고향 도쿠노시마로 가는 길 나는 맨 처음 도쿠다 병원을 세웠을 때 도쿠다 병원은 도쿠노시마에 종합병원 을 만들기 위한 첫 번째 병원이다라고 생각했다. 오사카와 오사카 주변 몇 곳에 병원을 만들어서 유능한 의료진과 의료계에 종사할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의 협조를 받아서 교대 근무를 통해 도쿠노시마로 파견할 작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나의 생각은 계획에 불과했다. 아직도 오사카와 그 주변에서 유능하고 실력있는 의사와 의료계 종사자를 확보하는 것은 쉽지 않을뿐더러, 더 구나 그들을 도쿠노시마로 보낸다는 것은 꿈 같은 바람이다. 그래서 나는 도쿠노시마에서 가까운 가고시마에 병원을 짓기로 작정했다. 그래 서 병원 설립에 필요한 각종 조사와 통계를 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발견했 다. 가고시마 현에는 가고시마 현 병원이 있기만 가고시마 시내가 아니라 변두리에 있다. 그래서 의사를 구하기가 어렵다. 한편 가고시마 시립병원은 시내에 있어 필요한 의사를 골라서 채용할만큼 지원자가 쇄도한다. 만일 설립하고자 하는 병 원이 시내에 있다면 의사와 의료 종사자를 마음대로 채용할 수가 있고, 군도에 있는 현립병원으로 단기 출장과 전근이 가능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 같은 실정을 안 이상, 가고시마 시내에 병원을 세우는 것이 의미가 있었다. 나는 즉시 가고시마 시내에 도쿠슈카이 병원을 만들 계획을 세웠지만 곧바로 현 지 의사회에서 병원 설립을 반대하는 조짐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들의 반 대를 밀어붙이고 강행할까도 생각해 봤지만 오히려 나의 의도와는 달리 고향 근 처에서 소란만 피우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을 수없이 하게 됐다. 그 순간 나는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느낌이었다. 하지만 끊임없이 어떻게 하면 도쿠노시마에 종합병원을 만들까 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그러던 중에 뜻 하지 않았던 소식이 날아들었다. 오키나와 남부의 사탕수수밭 한가운데 병원을 짓다 오키나와에는 현립 오키나와 중부병원이라는 두 개의 병원이 있다. 연중무휴 24시간 진료로 미국식 연수 제도를 채택하고 있어 우리도 몇 번이나 견학을 갔 었고, 기시와다 도쿠슈카이 병원을 개설할 때는 부원장을 비롯한 의사 두 명을 소개받기도 했다. 오키나와 현립병원의 원장인 아라가키 죠지 선생을 1978년 가 을에 만났을 때 그는 나의 속마음을 떠보았다. 도쿠다 군은 오사카처럼 인구가 밀집된 지역의 역 근처에만 병원을 세우는데, 무의촌인 고친다손에 병원을 세우는 건 무리겠지요. 1978년 가을은 기시와다 도쿠슈카이 병원의 설립 작업이 마무리되고 있었지만, 야오 도쿠슈카이병원을 막 건설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매우 힘들고 어려웠지만 나는 아라가키 선생의 시험으로부터 벗어날 생각이 없었다. 한번 조사해 보겠습니다. 그후 조사를 하러 현지에 가보니 그곳은 사탕수수밭이었다. 나는 곧바로 현청 위생부, 보건소, 의료 관계자의 협조를 얻어 그곳의 의료부족 실태를 조사했다. 오키나와 현 전체의 병상 부족률은 60%, 고친다손이 있는 남부지역의 병상 부족 률은 79%, 의료 종사자들, 특히 의사와 간호사의 수는 전국 평균의 20-3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틀 간의 조사를 실시한 결과, 나는 고친다손에 종합병원을 세우기로 결심하고 아라가키 선생에게 그 사실을 말씀드렸다. 곧바로 고친다손의 면장을 만나러 갔 는데, 면장은 마을 의원들과 함께 도쿄로 출장을 가 부재중이었다. 결국 그를 만나지 못하고 전화를 통해 고친다손의 면장과 마을 의원들이 오사카 에 있는 도쿠슈카이 병원을 시찰하기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고친다손 의 면장도 도쿠슈카이 병원 유치에 적극 가담했고, 오키나와 남부의 10개 도시 마을 면장회도 도쿠슈카이 병원을 유치하기로 결정했으며, 고친다손을 비롯한 이웃마을 주민들도 이 사실을 환영했다. 또 아라가키 선생의 소개로 오키나와 남부 의사회에 인사하러 가서 현 의사회장 도 만났다. 회장이 운영하는 병원의 사무장은 오사카에 있는 도쿠슈카이 병원을 시찰한 후 우리가 병원을 짓겠다는 것에 흔쾌히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러 한 현지의 협력을 얻어서 600여 개 병상 규모의 오키나와 남부 도쿠슈카이 병원 을 건설하기에 적당한 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무의촌 외딴 섬에 파견할 의사를 양성하는 병원을 구상 오키나와 병원의 건설을 계획할 때 머리속으로 오키나와가 도쿠노시마와 가깝 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라가키 선생이 원장으로 있는 현립 오키나와 중부병원 에서는 미아꼬와 야에야마 등 외딴 섬에 의료 스텝진을 파견하고 있었다. 한창 건설 중이던 우리 오키나와 남부 도쿠슈카이 병원에서도 구메지마 등 몇 군데의 외딴 섬에 의료 스텝진의 파견이 필요해졌다. 이 로테이션 방법에서 착안하여 도쿠노시마에 의료 스텝진을 파견하는 작업이 훨씬 구체화되었다. 가고시마에서 막다른 골목에 부딪혔던, 무의촌과 외딴 섬에 파견할 의사를 양성 하는 병원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보였다. 나는 가고시마에서는 도쿠슈카이 병원의 건설을 강행하지 않았지만 규슈에는 병 원을 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심을 굳히고 실행에 옮겼다. 이 지역은 의료 부 족 지역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나는 규슈 전지역에서 첫 번째 거점인 후쿠오카 에 관심을 갖고 병상 부죡률이 매우 높은 후쿠오카 현 카스가 시에 후쿠오카 도 쿠슈카이 병원을 짓기로 했다. 물론 여기서도 현지 의사회의 반대가 거셌지만 주민들의 요구와 병원설립에 대 한 열기가 그 이상으로 컸기에 병원 건설은 진행되었다. 이처럼 길게 우회하지 않으면 안되었지만 도쿠슈카이의 무의촌과 외딴 섬 파견 의사 양성 병원은 점점 늘어나 오키나와와 후쿠오카와 교토, 치가사키 등지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진의가 알려지면 더욱 많은 병원을 세 울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우리의 이 기나긴 우회 방법은 점차 의료 소외 지역을 하나하나 해소해 나갔다. 그와 더불어 우리의 발걸음이 도쿠노시마에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병원이 설립될수록 환자가 없는 도쿠노시마 대체로 도쿠노시마 사람들은 성격이 매우 급하다, 나 역시 그렇지만 섬 사람 들은 금방 병원이 세워질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우회적인 방법을 통해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만들겠다는 나의 생각은 성급한 기대부응하기 위해서 라도 조급하게 쫓기지 않을 수 없었다. 병원을 만들어도 의사와 간호사가 없다는 것이 문제로 대두됐지만 이는 오키나 와와 규슈와 그밖에 다른 지역에 병원을 세우면 해결될 문제로 판단되었다. 하 지만 또 하나의 커다란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환자가 없다는 점이었다 도쿠노시마의 사람들은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등 모든 시설과 스텝을 갖춘 종합병원을 세워 운영하려면 적어도 10만 명 내지 20만 명의 인구를 대상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런데 도쿠노시마의 총 인구는 겨우 3만 7천 명으로, 환자가 없어 도쿠노시마 사람들이 서로 맥주병으로 머리를 때리면서 걸어다녀도 환자의 총수는 3만 7천 명밖에 안되었다. 이래서는 종합병원을 만들어도 제대로 운영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 인생 철학이 그랬던 것처럼 궁하면 통한다고 길 이 열렸다. 도쿠노시마는 장수하는 마을로, 이즈미시게치오씨의 경우는 100세가 훨씬 넘었 다. 그 외에도 도쿠노시마에는 100살을 넘긴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 사람의 혈 관은 젊었을 때는 생고무와 같지만 나이가 들면서 감기에 걸린 고무와 같이 변 한다. 쉽게 말해 그것을 동맥경화라고 한다. 동맥경화는 추위에 약하고 겨울에 뇌졸중이 많으며, 나이가 들어서 일어나는 자연사도 다른 계절에 비해 겨울에 비교적 많이 발생한다. 하지만 도쿠노시마는 아열대의 온난한 기후로 장수의 섬이 될 수밖에 없는 천혜 의 조건을 갖추었다. 장수의 섬으로 전국각지에서 환자를 오도록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면 뇌졸중의 후유증이 염려되거나 천식 등의 만성병 환자가 도쿠노시마로 와서 요양을 하는 것이다. 햇볕이 따스하고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산호초에 둘러싸여 천연 공원이랄 수 있 는 도쿠노시마에 병원을 세워 요양과 치료를 겸한다면 치료도 효과적일 뿐만 아 니라 풀과 나무를 심고 오리나 닭 등의 가축을 키우면서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 면서 요양을 한다. 도쿠노시마 출신의 사람이 병에 걸리면 도쿠노시마로 돌아가기를 권한다. 정년 퇴직한 사람들 역시 노후를 도쿠노시마에서 보낼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 을 것이다. 예를 들면 65세인 사람이 도쿠노시마에 와서 115세까지 산다면 50년 은 더 살 수 있다. 이처럼 도쿠노시마를 전국민을 의한 오아시스, 복지의 섬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 각은 생각으로 머물지 않고 더 발전했다. 건강한 사람은 쉬는 날이 있고 휴가를 받아서 각지로 여행을 떠 날 수도 있다. 하지만 병에 걸린 환자나 건강이 나쁜 사람은 일요일이나 휴일에 관계없이 아무데도 못 가고 병원에만 머물러야 한다. 이것은 너무 불평등하다. 건강한 사람은 무리한 일을 해도 된다. 그렇지만 환자 야말로 여행과 요양이 필요하다. 몸이 약한 사람, 보양이 필요한 사람, 기분 전 환이 필요한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여행을 권하고 싶다. 예를 들면 어떤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가 있다고 하자. 추운 겨울에는 도쿠노시마나 오키나와의 병원에서 생활하고, 더운 계절에는 훗카이도나 동북이 나 또는 가리자와와 아타미의 도쿠슈카이 병원 등에서 요양 겸 치료를 받으면 좋을 것이다. 꿈같은 이야기지만 일본 각지에 도쿠슈카이 병원을 만들고, 이를 환영하는 병원과도 상호교류를 취하고 협조적인 관계를 확립하고자 한다. 우리 읍과 면에 병원을 연결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는 의료 부족 지역을 없애기 위해 병원을 만드는 데 열심히 노력해 왔다. 최신 의료기기와 완벽한 시설과 규모를 갖춘 병원으로 계속 발전시켜 나가고 있 으며, 새로운 시도를 통해 운영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 결과, 우리는 환자를 위한 이상적인 의료를 실시할 수 있다는 전망이 섰다. 게다가 후쿠오카 현, 교토 현, 가나가와 현에도 도쿠슈카이 병원을 건설했으며, 더 나아가 일본 전역에 걸쳐 환자 중심으로 의료를 실시하는 병원이 하나라도 더 많아지고, 하루라도 더 빨리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이같이 우리는 급속도로 병원을 세웠지만, 그래도 사람들로부터 병원 설립을 재 촉하는 소리를 듣곤 했다. 우리 읍과 면에는 언제 병원을 만들 겁니까 또 내 마음에는 구급차 안에서 병원을 찾다가 죽어간 사람들의 무념의 외침 소 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아직도 병원을 짓지 못했는가. 언제까지 그렇게 늦출 셈인가 그때마다 나는 일본에 100개든 200개든 병원을 세워야 한다고 굳은 결심을 한 다. 황폐해진 일본 의료의 현실, 특히 갑자기 병이 났을 때, 응급 의료체제가 전무한 농촌과 외딴 섬 등 의료 소외 지역에서 발생하는 많은 슬픈 일들을 생각하면 가 슴 한구석이 아려오고 아프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든지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 고 최선의 의료혜택을 받을 수 있는 복지 사회를 만들겠다는 굳은 의지로 오늘 도 쉬지 않고 일한다. 이 염원의 실현을 위해, 나 자신은 물론, 도쿠슈카이 스텝진 모두가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우리들만으로는 이상적인 의료를 실현하기 힘들다. 지금까지의 계획 대로 병원을 계속 건설할 수 있었던 것도, 지역 의료가 전무한 것에 고통을 당 해왔던 지역 주민의 열의와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는 일본의 의료 개혁을 이룰 수 없다. 전국 각지의 의료를 개혁하는 데는 반드시 광범위한 지역 주민의 협력이 필요하고, 우리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힘을 합쳐 노력할 때에만 비로소 환자 중심의 의료를 실현할 수 있 다. 일반적으로 의료행위를 어려운 것으로 인식한다. 병원의 설립과 운영을 매우 특 별하다고 인식한다. 물론 간단하지는 않지만 우리 모두 노력하고 힘을 합쳐 우 리들의 손으로 지역 의료를 만들겠다는 열의가 있으면 반드시 실현할 수 있다. 고향과 의료를 개선시키는 모임의 설립 내가 구상했던 계획은, 전국을 몇 개의 단위로 나누어 각 단위마다 거점이 도 리 도쿠슈카이 병원을 만들고, 다음에는 각 도, 도, 부, 현으로 각각 병원의 수를 넓혀 가는 것이다. 동시에 모두 지역의 힘을 모아서 병원을 만들고, 그 운영을 감시하는 주민 조직, 즉 고향과 의료를 개선시키는 모임을 설립해 전국적인 연결망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오사카, 후투오카, 교토, 가나가와 등 대도시에서 가까운 곳에 병원을 설립 했다.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먼저 농민과 어민, 중소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 등 비교적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세울 것이다. 현재 우리 나라의 의료 실태는 잘사는 사람과 일반 서민, 도시와 농촌 같은 소 외 지역 등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격차가 심하다. 도시에 사는 대기업의 근로자 들은 병에 걸려도 자신의 부담이 적은데다 가족의 305부담금도 건강보험조합으 로부터 환급받게 된다. 한편, 국민보건보험을 적용받는 사람들, 특히 농촌과 섬 등지에 사는 사람들은 70% 급부밖에 받지 못하고, 30%는 자신이 부담하고 있다. 게다가 부상수당금 등도 전혀 받지 못한다. 의료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의료비를 더 많이 부담해야 하는 지 나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다. 누구나 병에 걸렸을 때 치료비를 걱정하지 않고 최선의 의료혜택을 받아야 한 다. 또 노인이 되어서는 사회보장제도 아래 사회로부터 보살핌을 받아야 한다. 나는 그런 사회를 실현하고 싶다. 도쿠노시마의 빈농의 집에서 태어나 남동생의 죽음을 계기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나는 대도시 주변의 의료 소외 지역과 농촌 및 외딴 섬에 사는 사람들이 각종 질병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사회가 되지 않는 한, 이대로 죽을 수 는 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따라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모두 열심히 협력하고 노력 해서 지역 의료를 활성화시키고 개선하고자 힘주어 강조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가 사는 곳의 의료제도가 제대로 시행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 문제점이 있는가에 대해 철저하게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 다. 의료제도에 문제점이 발견되면, 어떻게 개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모두의 힘을 모아 협력한다면, 농촌이나 외딴 섬이나 도시 주변의 의료 소외 지역이 필요로 하는 참다운 의료를 실시할 수 있을뿐더러 열성적인 의료 종사자도 모을 수 있으며, 이렇게 될 때 운영도 잘된다. 우리는 참다운 의료를 실시하기 의해 지역주민들이 직접 병원을 세우는 데 협조 하고 행동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한편 우리는 지역 주민들에 의해 설 립된 병원의 운영에 협조할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의료가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 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직접 참가하고 협력함으로써 지역 의료, 더 나아가 일본 의 의료를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이다. 수입의 1%를 부담해 전원 참가 내가 구상했던 고향과 의료를 개선시키는 모임은 전국 각 지역의 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해 주민들이 스스로가 참여해서 만드는 조직이다. 고향과 의료를 개선시키는 모임은 각 시, 읍, 면을 단위로 하며, 그밖에도 각 도, 도, 부, 현의 단위로 모임을 만들고, 그것들을 통괄하는 본부와 지부를 결성한다. 예를 들면, 도쿠노시마 사람이 고향과 의료를 개선시키는 모임을 만든다. 다음에 도쿠노시마 출신의 간사이에 사는 사람과 간토에 사는 사람도 똑같이 이 모임을 만든다. 그러면 그 모임들은 간사이 지부, 간토 지부가 된다. 또 각각의 시, 읍, 면 단위뿐만 아니라 시, 읍, 면 단위를 합쳐서 하나의 더 큰 규모의 모임을 만들 어도 좋다. 따라서 누구나 자신이 현재 살고 있는 곳과 고향에서 각각 그 모임의 회원이 된 다. 회원이 된 사람은 모임을 위해 월수입의 1%정도의 회비를 거둔다. 이 회비 는 이 모임에 자주성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가한다는 의미가 있다. 자신들의 건 강한 생활을 스스로 지킨다는 자주적인 단체이므로 좋은 의견도 모으고 돈도 모 은다. 이렇게 함으로써 지역 의료에 책임을 갖고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참가한 다는 의식이 생긴다. 이 회비는 단순히 고향의 의료에 참가하는 것을 보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모 임에서 모인 돈을 시, 읍, 면에 기부함으로써 시, 읍, 면의 병원을 설립하기 위한 예산으로 편성해서 사회 운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이 모임에서 모은 1억 엔의 회비를 도쿠노시마라면 도쿠노시마 관청 에 기부해서 병원을 건설할 것을 요구하면, 관청장은 예산을 편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쿠노시마가 병원을 세운다는 말이 나오면, 이에 가고시마 현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을 것이며, 정부도 다소나마 원조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지역 주민과 각 시, 읍, 면과 현과 정부가 힘을 합쳐 병원을 건 설할 수 있다. 그렇게 해서 각 시, 읍, 면에 초현대적인 병원이 설립되면, 그 지역 출신의 의사 를 비롯한 의료종사자들의 협력을 받아 고향과 의료를 개선시키는 모임이 병원 을 운영하면 된다. 우리 도쿠슈카이는 의사를 재교육시킬 수 있는 실력을 갖춘 우수한 의사를 채용하고자 노력했으며, 또 미국에서 의료 전문 강사진을 초청해 젊은 의사들의 연수 제도 등의 계획도 세웠다. 또 운영에 대해서도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미국 등의 의료 선진국의 병원 운영 방식을 비교, 검토하는 등 연구 활동도 펴고 있으므로 병원 운영에 대해서 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고향과 의료를 개선시키는 모임과 협력해서 공동으로 병원을 운영하는 것도 좋 은 방법일 것이며, 그것이 어렵다면 도쿠슈카이가 운영을 맡아 해도 좋다. 그 후 운영이 정상적이 궤도에 오르게 되면 이 모임에서 병원을 다시 맡아 운영하면 될 것이다. 아무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역 의료를 개선시키기 위해 지역 주민 들의 적극적인 협력이 필요하다. 하루빨리 전국의 의료를 개선시키기 위한 노 력이 절실하다. 고향 출신의 의사에게 귀향을 권한다 그 고향 출신의 의사를 다시 고향으로 불러모으는 데도 방안이 있다. 그 지방 출신의 의사 목록을 뽑아, 고향의 병원에 근무할 것을 권하거나 편지를 쓰거나 직접 방문하는 등 다각도로 접근을 시도한다. 또 사정상 고향으로 돌아올 수 없 는 의사한테는 고향의 의료에 도움이 되는 방법들을 모색한다. 이를테면 기부금 을 받는 등 자신의 상황이 허락하는 만큼의 협력을 구한다. 예를 들면 오키나와에는 의사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현의 국 비유학생 70여 명이 본토에서 개업했거나 오키나와가 아닌 다른 지역의 병원에 서 근무했던 것이다. 농촌과 지방의 가난한 세금으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와서 의사가 된 후, 도시에서 일하고 돈을 벌어 자기 한 사람만 편하게 생활하면 그만이라는 발 상은 용서할 수가 없다. 과거에 자신이 받았던 고향에서의 여러 가지 혜택을 변 제하라고 요청하는 운동이라도 벌여야 하겠다. 물론 자신의 고향에 병원이 없거나, 있어도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만한 시설을 갖춘 병원이 없어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 이다. 대도시의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진 병원에서 의료 활동을 펼 수도 있는데, 굳이 고향으로 돌아가 시설도 낙후된 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좋아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고향과 의료를 개선시키는 모임은 어디까지나 주민 자신에 의한 주민을 위한 지 역 의료를 만드는 모임이다. 그러므로 병원이 세워지고 의사가 모이고 실제로 의료활동이 시작되면 그 병원의 운영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고 감시해야 할 것 이다. 또 이 모임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병원뿐만 아니라, 지역 전체의 의료 체제를 감 독하는 기능도 겸할 수 있다. 예를 들면, 병원에 대해 건의할 사항이 있으면 이 모임에 가서 의견을 제시한다. 현재는 어디에 가서 자신의 의견을 내놓아야 할지 마땅한 기구가 없다. 병원에 가서 아무리 의견을 제시해도 별 관심 없이 지나가는 소리로 들을 뿐이다. 이 모임은 이처럼 환자에게 불친절한 병원의 행동을 철저하게 감시하고 지도하는 역할 또한 맡게 될 것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 의료에 도전 앞서 말했듯이 지역 의료의 확립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 인 참여와 행동이다. 정치가와 정부와 의사들한테만 맡겨놓아서는 안된다. 이렇 게 함으로써, 지역 의료가 개선되고 더욱 활성화될 것이다. 그 후에 지역 주민이 중심이 되어 정치가나 행정 당국과 의사들에게 지역 의료 를 개선시킬 수 있도록 협력을 요청하는 동시에 그 지역의 의료상황을 조사하고 관리 및 감시를 지속적으로 해야 할 것이다. 이런 활동들을 통할 때 지역 의료를 더 한층 발전시킬 수 있으며 주민을 위한 의료를 시행할 수 있다. 의료의 주민 참가 운영 참가 더 나아가 의료의 주민 관 리 국민 관리 등 그런 일련의 행동이 지역 의료를 개선시키고 더 나아가 일본 의료 또한 바꿀 수 있다. 고향 도쿠노시마의 이센 마을에서는 주민의 열의가 높아 고향과 이센 마을의 의 료를 개선시키는 모임이 결성되었다. 또 오사카 주재의 도쿠노시마 출신자 사이 에서도 같은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나는 이 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널리 알려지기를 바란다. 자신들의 건강한 생활을 지키려는 순수한 바람에서 생겨난 조직은 일본 의료계의 분위기를 바꾸 는 거대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나는 일본의 의료 개혁이라는 목표가 달성도리 전망이 보이면 한 걸음 더 나아 가 일본의 의료 부족 지역의 병원 설립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언젠가는 국제의료협회 센터를 만들고 동남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개도국의 의료 향상에도 협력하고 싶다. 그에 앞서 아프리카와 유럽에 도쿠슈카 이 병원을 만들 계획도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해외 협력의 포석이 되는 동시에 아프리카와 유럽에서 펼치는 의료 실적이 개발 도상국에 신뢰감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친구들의 모임 나는 아마미에 사는 주거민의 평균 나이가 갈수록 고령화되는 상황을 보고, 전국 각지에 건강한 친구들의 모임 비슷한 조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점차 고령화 사회를 맞이함에 따라 노인 혼자서 사는 1인 독립 가구가 늘어가고 있 다. 또한 도쿠슈카이가 응급환자를 위해 연중무휴로 24시간 진료한다 해도 심근 경색이나 뇌졸중 등 갑자기 쓰러지는 질병으로 응급의료가 가장 필요할 때에 움 직이지 못하거나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못하는 상황에 처한 사람이 점점 증가하 고 있다. 혼자서 사는 고령자를 위해서는 병원을 중심으로 하는 같은 지역에 사는 동료들 의 상부상조가 필요하다. 친구의 모임에 속한 연배들은 친구의 모임에서 만든 깃발을 하나씩 나눠 받는 다. 그리고 아침마다 그 기를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대문이나 창문에 단다. 그 리고 저녁에는 기를 거두어들인다. 만약 아침에 걸려 있어야 할 기가 없으면 이 모임의 동료들이 상대방의 집을 방문하는 등 상황을 즉시 파악한다. 대개 24시 간 이내에 쓰러진 사람을 발견할 수 있으면 치료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물론 더 빨리 안다면 좋겠지만 한밤중에 일어나는 발작 등을 간단하게 체크하는 방법 또한 연구할 필요가 있겠다. 이렇게 기를 이용한 신호만으로도 쓰러진 환자가 며칠 동안 아무도 모른 채 방 치되는 사고는 미연에 예방할 수 있다. 핵가족화가 진행됨에 따라 젊은 사람들이 고령자를 돌보는 기회가 점점 줄고 있 다. 그래서 같은 지역의 고령자들끼리 서로의 건강을 지키면서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는 상호 협조적인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이다. 물로 s지역 병원에서도 고령 자들을 배려하는 제도를 개설하거나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하겠다. 고령자들은 도시로 멀리 나가 사는 자식보다는 같은 동네에 사는 이웃들끼리 더 친밀한 유대 관계를 맺을 수 있다 현대 사회는 기존의 가족 구성원에 많은 변화 가 일어났으며 이런 경향은 앞으로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멀리 있는 친척보다 가까운 이웃이 낫다는 말이 우리의 현실로 한층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나는 오 늘날의 고령자들이 일본의 경제발전을 위해 쉬지도 않고 한평생을 열심히 일해 온 장본인이라고 생각한다. 이들 혼자 사는 1인 독립가구를 위해 언제 어느 때 찾아올지 모르는 사고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 또한 사회의 책임으로 간주할 수 있다. 나는 도쿠슈카이 병원이 있는 곳에서만이라도 이 운동을 계속 전개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각 지역의 병원을 돌 때마다 젊은 직원들한테 그곳 사람들을 자신의 가족처럼 여기고 진심으로 환자들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는 한편 함께 노력하자고 훈시한다. 나는 직원들한테 모든 환자를 대할 때 내 일이라고 생각 하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행동할 것을 당부한다. 실제로 의료 활동을 펴다보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사고가 일어나기도 한다. 그럴 경우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는데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난 불의의 사고라면 미안한 마음에서 사과할 수 있다. 하지만 방만한 자세와 무관심 속에서 일어난 사고라면 그 배경에는 도쿠다 도라오의 책임도 있겠지만 희생자의 입장에서는 화가 날 것이다. 한편 그들은 그 이후에는 우리 의료진에 대해 불신할 것이다. 의사 및 의료 종사자들은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는 자세로 의료에 임해야 한다. 우리 도쿠슈카이 직원들은 항상 이런 마음자세로 환자를 대한다. 물론 전직원이 그렇게 할 수는 없겠지만 여러분들이 우리 도쿠슈카이 병원에 왔을 때는 직원들 이 환자를 대하는 태도를 주의깊게 지켜봐 줄 것을 진심으로 당부한다. 만약 조 금이라도 직원들이 나태하고 거만한 태도를 보인다면 즉각 건의해 줄 것을 부탁 드린다. 의료를 타인에게 맡겨서는 안된다고 거듭 호소하다 전국 각지에 병원을 세우고 환자 중심의 병원을 설립한다는 이념을 실행에 옮 기고자 노력하는 우리 도쿠슈카이 병원은 곳곳에서 파문을 일으켰다. 후쿠오카 현 카스가 시와 쿄토 부 우지 시 및 그 밖의 지방에서도 우리 병원의 영향을 받아 평일의 야간 진료와 휴일 진료를 실시하는 곳이 늘어났다. 환자로 부터 선물을 받지 않습니다 라는 공고문을 게시했다는 병원도 있다고 들었다. 일본에 신뢰할 수 있는 의료를 뿌리내리겠다는 우리의 염원이 결실을 거두었지 만 우리의 노력은 아직 걸음마 단계일 뿐이다. 우리가 목표로 가야 할 길은 아 직도 멀며 그 길로 가기 위해서는 갖가지 시련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한테 거듭 당부하고 싶다. 일본 의료계를 바꿀 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들과 여러분 자신뿐이라고. 생명을 담보로 하는 의료를 정치가나 정부 의 공무원이나 의사들한테 맡겨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 의료의 질을 개선시키고자 한다면 남에게, 정부 당국에, 의사들에게만 맡겨서는 곤란하다. 의료는 국민이 감시하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항상 노력해야겠다. 가족과 믿음과 가능성 5. 가족과 믿음과 가능성 자녀 교육 나는 2남 5녀로 일곱 명의 자식을 두었다. 다섯 명이 의사가 되었으며 다섯째 인 넷째 딸은 대학에서 성악을 전공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 명은 비서로 활동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의 교육에 관한 모든 문제를 집사람한테 일임했었다. 상의가 필요한 때만 나의 의견을 내고 관여할 뿐이다.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동안 운동회나 학부모가 참관하는 등의 행사에 한번도 참석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일곱 명의 학교 성적표를 본 적이 한번도 없다. 나는 아이들한테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 서 하라고 믿고 맡기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집을 얻을 때 는 차가 다니지 않는 곳으로 정하거나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도록 목욕탕에 물을 넣어두지 않는 등 건강과 불의의 사고를 방지하려고 신경쓰는 편이다. 이 밖에도 화상을 입지 않도록 난로를 사용할 때 주의를 기울이는 등 생활 전반에 걸쳐 노출된 위험에는 최선을 다해 조심한다. 자녀를 교육함에 있어 각자 자신이 구체적인 목표를 가질 수 있도록 옆에서 도 와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우리 부모님은 어떤 의사의 이름인 도라오를 따서 네 이름으로 지었다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다. 이런 부모님의 태도가 나의 잠재의식 속에 의사가 되기를 바라는 그분들의 마음을 자연스럽게 심어 주었고 그런 방향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었다. 사람이 원대하고 확실한 목표를 갖고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면 시간이 걸려도 언젠가는 반드시 실현할 수 있다. 우리 집안의 형제들이 의과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준비했는가.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도 똑같이 해주 었다. 한편 아이들한테 자립정신을 심어 주는 것도 중요하다. 나는 병원을 특정의료법 인화해서 자식들에게 상속할 수 없도록 했다. 또 집도 전셋집으로 내 소유의 집 은 없다. 그렇다고 예금한 돈이나 특별한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는 개 인 소유의 재산이나 부동산 따위는 전혀 없다. 명예도 돈도 지위도 필요없다거나 자손한테 기름진 논을 남기지 말라는 옛말이 있는데 나는 입버릇처럼 가족들에게 이 말처럼 훌륭한 명언은 없다고 늘 강조한 다.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이 말을 듣고 자랐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이들한테 부모인 내가 그들한테 재산을 남겨주지 않을 거라는 의식을 심어 주었고, 자신 들 스스로가 독립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 그리고 의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사회에 도움이 되는지 가족들에게 누누이 말해 왔다. 그래서 아이들 또한 의사가 되어 고통에 처한 많은 사람을 돕고 싶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독립하기 위해서라도 자 연스럽게 의사를 목표로 정하게 되었고 다섯 명의 의과대학에 진학해 의사가 되 는 결과를 낳았다. 또 하나 자신이 머리로 결정한 목표는 노력하면 실행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런 믿음을 가족들과의 대화 중에 자주 자연스럽게 말하므로 아이들의 잠재의 식 속에 자신감을 심어 주는 계기가 되었으니 부모 자신도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나뿐만 아니라 집사람 역시 성적표를 보고 화를 내는 일은 거의 없다. 집사람은 성적이 좋은 과목은 칭찬해 주고 떨어지는 과목은 잘하라는 격려만 했다. 아이들은 모두 제각기 반드시 걱정거리를 갖고 있다 사람의 일생은 그렇게 간단 하지만은 않다. 자식을 키우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 렇지만 아무튼 목적의식을 확실하게 갖는다면 자신의 생명에 내재하는 힘을 최 대한으로 끌어낼 수 있으며, 그렇게 하다보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그런 과정 이 바로 자녀 교육이다. 둘째 딸은 자기보다 머리가 좋고 성적이 뛰어난 큰딸이 국립의과대학에 낙방하 는 것을 보고 일찌감치 의과대학을 단념하고 진로를 문과로 경정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마음을 바꿔 이과로 옮겼다. 그런데 약대의 추천 시험에서 떨어지자 집에 돌아와 울음을 터뜨리면서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나는 웃으면서 그 아이한테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시험에 낙방한 슬픔을 극복하는 것이 인생에서 뒤지지 않는 것이다. 너는 진심 으로 약대에 가고 싶었니? 아니에요. 실은 의과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실력이 모자라 약대 시험을 치른 거 예요. 그렇다면 남에게 뒤지는 것이다. 어째서요? 딸은 의아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의과대학에 가고 싶었는데 어렵다고 약대를 쳤으니 떨어졌지. 그게 무슨 말이죠? 네가 하고 싶은 의과대학 시험공부를 하면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될게다. 앞으로 본고사까지는 두 달 남았다. 그 시간만이라도 다시 한번 도전해 보렴. 그럼, 어느 대학교의의과대학을 가면 될까요? 어떤 대학이라도 괜찮아, 국가시험만 붙으면. 네 실력에 맞는 의과대학을 찾아보 는 게 어떻겠니? 입학해서 6년 동안 열심히 공부하면 국가시험에 붙을 수 있을 테니 해보고 싶으면 한 번 해봐라. 딸아이는 나의 말에 고무되었는지 입시를 남겨둔 두 달 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그 결과 의과대학에 합격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 아이는 국가시험에도 당당하게 붙어 도쿠슈카이 오키에라 부 병원에서 근무 중이다. 다섯째와 넷째도 진로를 결정함에 있어 자신들이 의과대학에 갈 만한 실력이 못 된다는 것을 알았고, 딸아이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다. 우리 부부는 남의 집 애가 학교를 그만둔다고 하는 것처럼 무관심하게 지켜보았 다. 그 아이는 학교애 가지 않고 자원봉사자 모임에 들어가 열심히 활동을 하는 등 가족들의 걱정을 샀지만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고 내버려두니까 자신이 생각해 도 안되겠던지 나에게 의논을 해왔다. 나는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할까 하고 고민하다가 집에 들어 가서 넷째 딸한테 말했다. 자 오늘은 프랑스 요리를 먹으러 갈까? 걱정에 싸여 있던 넷째 딸은 이 말에 흔쾌히 따라 나섰다. 집사람과 넷째 딸과 셋이서 오사카에 있는 한 호텔의 프랑스 요리 전문점에 갔다. 나는 음식을 먹으 면서 말을 건넸다. 지금까지 병원 일과 선거 대문에 너무 바빠서 가족들과 한가하게 식사도 한번 제대로 못했지. 이제 선거에도 당선됐으니 1년에 두 번 정도는 세 사람이서 프 랑스 요리를 먹도록 하자꾸나. 당신은 말뿐이지 언제나 바쁘잖아요. 집사람은 나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만이라도 하는 것이 하지 않는 것보다 기분이 좋잖아. 그건 그렇지만. 이런 얘기를 주고받는데 넷째 딸이 말했다. 나는 프랑스 요리를 자주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이 식당 안을 둘러봐라. 여기 있는 사람들 중 고등학교만 졸업한 얼굴을 한 사람이 있는지. 아빠 모두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처럼 여유로워 보여요. 딸아이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대학은 안 가도 좋으니까 고등학교만이라도 졸업하면 아빠가 좋은 사람을 소개 해 줄 테고 그러면 프랑스 요리 정도야 못 먹겠니. 네가 형제들 중에서 제일 공 부를 못해 의과대학에 못 간다고 생각하니? 나는 딸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 물었다. 네. 사람은 성적으로 행복해지는 게 아니야. 마음이야. 네가 엄마랑 다른 사람들을 제일 많이 도와주는 마음씨가 착한 아이란 걸 아빠는 진작부터 알았다. 그래서 아빠는 형제들 중에서 네가 제일 행복하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아이의 마음에 어떤 믿음 같은 암시를 주었다. 아빠 정말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럼 언제 아빠가 거짓말을 한 적이 있었니? 나는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다. 우리 세 사람은 맛있는 식사를 끝내고 케이크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만큼은 넷째 딸의 문제로 어두웠던 집안 분위기가 밝아졌다. 다음날부터 그 아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건강한 모습으 로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 애가 고등학교 3학년 봄방학 때 내게 다시 의논을 해왔다. 아빠 음대 성악과도 괜찮을까요? 그게 무슨 말이니? 내가 되묻자 딸아이는 선생님이 너는 목소리가 좋으니까 음대 성악과에 가는 게 어떻겠냐고 말했다면서 눈을 반짝였다. 물론 음대도 좋지. 넷째 딸은 1년 동안 열심히 공부해서 바로 대학에 들어갔다. 프랑스 요리를 먹 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열심히 분발할 수 있었다. 의사가 되고 싶다거나 프랑스 요리를 먹고 싶다는 등 자신이 원하는 목표가 있으면 된다. 그 목표를 향해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넷째 딸아이가 음대에 입학한 뒤 음악회와 발레 공연티켓이 들어와 아이들에게 주면 대부분 공부 때문에 바빠서 못간다고 하므로 자연히 그 아이가 독차지하곤 했다. 그 애는 의과대학이 아니라서 좋아 보였고 매우 행복해 보였다. 자식이 일곱이나 있으면 고민도 그만큼 많아진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말처럼 우리 집은 다른 집에서 하는 모든 고민을 다 갖추었다고 해도 과 언이 아니다. 그러나 집사람과 아이들끼리 잘 처리하고 해결하는 모양이다. 가끔 아버지인 나에게 의논해 와서 큰 무리 없이 재수를 하지 않고 대학에 들어 간 두 명의 경우를 자주 얘기하지만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이 대 학에 입학하기 위해 재수한 기간을 합치면 13년이 된다. 또 대학에 입학해서도 낙제한 아이가 한 명 더 있어 이 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15년이나 늦어진 셈이 다. 한편 내가 3년 재수하고 중의원 선거에 8년이나 늦었다. 집사람이 4년 재수한데 다 아이를 낳아 2년 동안 휴학을 했다. 우리 가족 전부가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20년 재수, 낙제가 2년 휴학이 2년, 선거 8년을 합치면 실로 32년이나 늦은 게 된다. 모두 건강에 신경을 써서 늦은 만큼 32년이나 장수하면 늦은 걸 보상받지 않을 까 생각한다. 가족이 32년 늦어 고생한 만큼 번 셈이다. 어머니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입버릇처럼 자주 말씀하셨다. 또 젊음은 즐거움의 근원, 즐거움은 젊음의 근원이란 말씀도 자주 하셨다. 천국에 가면 그 만큼 즐거울 거라고 생각하면 즐겁지 않은가. 언젠가 유명한 국회의원 한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집 딸이 또 재수를 하는데, 도쿠다 씨네 아이들이 다니는 대학에 시험을 쳤는데 떨어져서 큰일이에요. 우리 집 아들은 3년이나 재수를 했는데, 저는 아들한테 10년은 재수해도 좋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의 말에 그 의원은 설마하는 표정으로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 집 형제는 네 명으로 3+2+6+7=18년의 재수 기간을 거쳤고, 낙제 2년과 선 거에서 떨어진 8년을 합치면 28년이나 늦었다. 한편,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와 집 사람과 아이들 모두 합치면 32년이나 늦었다. 내가 언젠가 차남한테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재수를 하지 말라는 말이 도저히 입 에서 안 떨어져서 10년 이상 재수해도 좋다고 말했던 것이다. 나의 말에 그 애 는 도저히 그럴 수 없다고 했는데 재수 생활을 끝내고 싶다는 심리를 자극한 모 양이었다. 언젠가 미국의 국회의원에게 이 말을 했더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편적으로 2,3년 간 재수를 하면 자식에게 더 이상은 안된다는 결정을 내리거 나 아이를 야단치는 모양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재수 기간은 목표를 향해 최 선을 다해 노력하는 기간으로 본인한테는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기간이기도 하 다. 자신의 마음속에 품은 목표가 있다면 반드시 노력하기 때문이다. 또한 부모는 자식을 믿고 자식이 선택한 것을 믿고 맡겨야 한다. 자녀들의 마음에 본인이 원 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 준다면 더 이상의 시시콜콜한 잔소리는 필요 없다. 자녀들의 입장에서도 부모가 자신을 믿는다는 걸 알고 다소 시간이 걸리 더라도 이룰 수 있다면 좋겠다. 어머니의 경우도 아이들과 함께 잇는 동안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한 층 서로간에 신뢰감을 두텁게 할 것이다. 비록 우리 부부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 했지만. 아이들이 수험 기간이었을 무렵 선거 때문에 우리 부부는 집을 비우는 날이 많 았다. 당시 여러 모로 현명한 가정부의 도움을 받아 별 탈 없이 잘 지냈지만 큰 딸을 중심으로 자기들끼리 잘해나가는 모양이었다. 결국 나는 자식을 신뢰하는 것 이상이 없다는 생각을 한층 더 확신하게 되었다. 또 방임해도 부모가 성실한 목적을 향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면 자식들이 그걸 알아준다는 것을 확신했다. 다만 적어도 허술함을 보여서는 안될 것이다. 이 정도면 되겠지 하고 속단하면 아이들도 이 정도면 되겠지 하는 구실을 갖고 본인의 능력만큼도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때 집사람은 아이 들의 상황에 신경이 쓰였는데도 불구하고 선거도 우리 부부의 입장에서 중요했 으므로 계속해서 선거운동에 따라 다녔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매우 힘들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엄마의 입장을 잘 헤아리고 이해하는 것 같았다. 결 과적으로 우리 어머니가 우리 형제들의 모범이 되었듯이 우리 부부가 열심히 사 는 모습을 본 아이들은 각자가 성실하게 노력했다고 생각한다. 믿음이 생명을 지켰다 부부나, 부모자식이나, 우정이나 같은 그룹에 속하는 사람끼리나 누구와든 무 슨 일을 하든 믿음이 제일 중요하다. 나는 나와 직원 사이에도 믿음의 끈이 연 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들을 믿고 그들은 나를 믿는다. 1985년 8월 20일 저녁 승객 524명을 태운 니코 점보기가 오스타카야마에 추락했 다. 당시 상황으로 야간 구조는 2차 조난을 초래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되어 야 간 구조가 진행되지 않았다. 신문과 텔레비전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절망적으로 보여진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남의 집에서 이 뉴스를 들은 나는 생존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라도 당장 구조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존자 구조의 연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 각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8시 모임에서 직원들에게 말했다. 내가 총리대신이라면 자위대를 동원해서라도 밤새워 구조했을 것입니다 탑승객 들의 생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결코 체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전력 투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날 아침의 구조작업으로 네 명의 생존자가 확인되었다. 그 후 생존자의 이야 기를 통해 추락 후 아침까지 생존해 있던 사람이 네 명말고도 더 있었다는 걸 알았다. 밤중에라도 전력을 다해 구조활동을 했더라면 생명을 구한 사람이 더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나서 2,3일 후의 일이다. 아마미 군도에 태풍이 불고 있는데 우리 직원들은 홍보 전단을 뿌리고 있었다. 바다가 거칠어지고 있었으므로 빠듯하게 시간을 재면서 그들은 아마미 본섬으로 돌아왔다. 그 네 명 중에 서핑을 광적으 로 좋아하는 서퍼가 있었다. 그는 자동차에 서핑기구를 항상 갖고 다녔으므로 그날도 가토쿠 근처에서 서핑 을 하기 시작했다. 그날의 바다는 너무 거칠고 파도가 셌기 때문에 나머지 세 사람은 걱정스런 눈 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서핑을 하던 동료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 라진 것이었다. 동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다만 높이 치솟는 파도만이 보일 뿐이었다. 너무 당황한 그들은 현지인의 도움을 받아 동료를 수색하기에 나섰다. 현지인의 말로는 이같이 파도가 센 날에는 배도 뜨지 않는다고 했다. 동료가 떠밀려갔을 거라고 추측되는 지점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사람의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는 중 에 날은 저물고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기 시작했다. 오후 6시가 지나서 응급구 원을 요청했고 나는 그 소식을 도쿄에서 들었다. 아무튼 모을 수 있는 직원을 전부 불러들여 현지로 가라. 가서 무엇이든지 돕도 록 하라. 나는 이런 지시를 내렸다. 현지에 도착한 경찰도 배는 태풍으로 위험하므로 밤이 지나 태풍이 걷히고 나서 부터 수색한다고 방침을 정했다. 경찰과 현지인은 모두 돌아가 버렸다. 그 보고를 받은 나는 도쿠슈카이 직원들만이라도 밤을 새워 수색하도록 그는 도 움을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반시뱀에 물린다고 죽지는 않는다라면서 다급하 지만 그가 살아 있다는 신념을 갖고 지시를 내렸다. 직원들은 바다에 인접해 있는 낭떠러지를 더듬으면 곶으로 가는 길을 찾았다 모 두들 캄캄한 밤에 낭떠러지의 위험 속으로 동료를 찾기에 열중이었다. 이렇게 해서 자정이 넘었을 무렵 낭떠러지를 헤매던 한 사람이 라이트를 크게 비치면서 아사노 아사노라고 외쳤다. 더욱 거세진 바람소리에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금방 지워져 버렸다. 겨우겨우 사람의 목소리라는 것만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다시 몸을 내밀고 아래를 비치자 바위에 하얀 서핑 보드가 보였다. 여기에 있어요하는 아사노의 외침이 들렸다. 그는 파도와 바람에 밀려 낭떠러지에 도착해서 그곳에서 강풍과 파도를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새벽 2시 가까스로 로프로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태풍은 그때부터 더욱 거세지 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그 후 나는 이런 메모를 받았다. 아사노는 살아 있습니다. 구출되었습니다. 점보기 사고 때에 이사장이 말씀하신 내가 총리대신 이라면 한밤중에도 구조했을 것이라는 말을 생각하고 참고 기다 리면 도와주러 올 것이라고 믿고 도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직원들은 응급환자가 나왔을 때나 인명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내가 필사적으 로 행동하는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 위기에 처해서도 동료를 믿었 던 것이다. 그가 나를 믿고 체념하지 않고 낭떠러지에 달라붙어 기다려 주었던 것이 기뻤다. 믿는 것, 서로 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돕는 쪽이나 도움을 받는 쪽 이나 서로의 의지대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 어느 한쪽이 믿음을 잃어버리면 이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또 이같이 서로 믿을 수 있다면 운동이든 일이든 교육이든 부부든 가족이든 모두 잘돼 나 갈 것이다. 가능성을 키우기 위한 몸가짐과 마음가짐 사람은 공부를 하든 일을 하든 가정을 운영하든 회사나 병원을 경영하든 환경 과 분위기가 중요하다. 제대로 정리된 환경에서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정리정돈 을 하고 동료와 함께 대열을 짜고 함으로써 더 좋아질 수 있다. 게다가 무엇을 한다는 공통점과 확실한 목표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루 하겠지만 공부를 해도 씨름을 해도 또 권투를 하기 위해서도 몸가짐이 가장 중 요하다. 그리고 마음가짐은 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