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 찬란한 바다 지은이: 스즈키 코지 출판사: 씨엔씨미디어 제 1장 거울 속 진찰실 창가에서 뒤꿈치를 들자 표주박 모양의 호수가 내다보였다. 이 호수에 빠진 사람 은 바닥에 고인 진훍탕에 발이 휘감겨 더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 두 번 다시 떠오르지 않 는다...옛날부터 그런 말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는, 바닥 없는 늪으로 된 호수 다. 그러나 모치즈키 토시다카는 아직 이 호수에 사람이 빠져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철이 든 후에도 지방 신문에 그런 기사가 실린적은 없었다. 바닥 없는 늪이란 말에서 모치 즈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을 상상했다. 어렸을 때 호숫가에서 물놀이를 하다가 발이 빠져 허우적거리는 꿈보다, 괴물한테 쫓기는 꿈보다, 캄캄한 암흑세계로 한없이 질질 끌려 들어가는 꿈이 모치즈키는 훨씬 더 무서웠다. 모치즈키는 초등학교 시절에 바로 이 호숫가 에서 가재를 잡았다. 하지만 호수 주변 풍경은 몇 년 사이에 토지 개발로 인해 몰라볼 정도 로 변했다. 여기저기 갈대 숲이 무성하고 바닥 없는 늪이란 이름만큼이나 스산했던 분위기 는 꼬리를 감추고, 대신 호숫가를 빙 둘러싸고 세련된 저택 단지가 자리를 잡아 마치 인공 호수처럼 말끔하게 새 옷을 입었다. 따라서 예전의 그 신비감은 이미 다 사라졌다. 여기가 그 바닥 없는 늪이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모치즈키에게 호숫가는 40년 이상 이나 보아온 눈에 익은 풍경이다. 어릴 적에는 그 물가에서 놀았고, 하마마쓰 의대에서 수련 의 시절을 거쳐 정신신경과 전문병원인 마쓰이 병원의 부원장이 된 지금도 늪이 내려다보이 는 언덕에 있다. 도쿄에 있는 모교에 남을걸 하고 후회한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자신의 결정에 만족하고 있다. 마흔이란 나이게 얻은 부원장이란 지위도 무시할 수 없거니와, 3년 전에 구입한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수면이 옛날과는 달리 평온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인 딸이 하나 있고 중매로 결혼한 아내와도 그만저만하게 지내고 있다. 모든 것이 뜻한 대로 이루어졌고, 지금 당장 이렇다 하게 바라는 것도 없다. 아주 순 조로운 인생이었다. 막 정신과 의사가 되었을 당시의 정열은 다소 희박해졌지만 나이에 걸 맞게 정열이 사그라드는 것도 그렇게 나쁜 일은 아니다. 모치즈키는 환자의 정신을 그 늪 에 비유하곤 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은 곳에 어둠을 간직하고 있다. 어둠에서 냄 새가 피어오르면 주위 사람들은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되고 환자는 정신병원을 찾아온다. 이 때 의사의 역할은 늪을 메우는 것이 아니라 그 바닥모를 늪을 세련된 주택으로 에워싸고 역 겨운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로 바꾸어주는 정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비에 찬 그 늪을 저택으로 에워싸는 일이 곧 환자의 행복과 직결되는냐 하면, 그런 또 별개의 문제인 듯했다. 7월 하순의 오후, 찌는 듯한 더위 탓에 에어컨의 실외기가 '웅웅'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에어컨을 켜놓았기는 했지만 창가에서 직사광선을 쬐고 있으면 땀이 난다. 모치즈 키는 안경을 벗고 손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닦은 후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책상위에 놓은 한 장의 보고서를 손에 들었다. 거기에 또 하나의 바닥 모를 늪이 있었다. 가족력, 병력은 물론이고 주소, 성명, 연령 등 아무것도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녀에 대해 알 수 있는 실 마리라고는 응급처치를 하고 종합병원으로 옮겨진 후, 그곳의 담당의사였던 내과 의사한테 들은 상황이 전부였다. 친구인 담당의사는 이런 진단을 내렸다. 일회성 전체 건망증으로 사료됨. 단 그 전단계로 분열증 등의 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도 있음. 여드레 전 밤 10시, 20대 중반쯤의 매력적인 여성이 거친 파도가 일렁이는 나카다 섬 해안에서 자살을 기도했 다가 구조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신분을 밝혀줄 만한 어떤 소지품도 갖고 있지 않았다. 게 다가 정신을 차린후에도 자신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신원을 모른 채 병원비를 시장이 부담하는 형식으로 마쓰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누가 보아도 기억에 장애가 있 다는 것은 분명했지만, 단순히 병 때문에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 자 신의 의지로 말을 안하는것인지 아직 판단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바로 그 여성 환자가 이제 곧 모치즈키 앞에 나타나 진찰을 받기로 되어있다. 내과 의사가 작성한 보고서에는, 환자가 임신 5개월의 몸이라고 적혀 있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모치스키의 뇌리에는 통속적 인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아이를 밴 여자가 결국 남자한테 버림받았다. 그렇다고 5개월이나 된 아이를 뗄 수도 없어 고민고민하다가 끝내 노이로제에 걸렸고, 발작적으로, 아니면 남자 에 대한 복수심으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상대방 남자는 어쩌면 처자식이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또는... 모치즈키는 다른 스토리를 생각하려다 씁쓸히 웃었다. 최근 주간지 가십 기 사에 그 비슷한 내용이 실린 적이 있어서, 왠지 시덥잖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남녀간의 문제 때문에 정신의 이상을 초래하는 경우는 흔히 있다. 그러니까 반대로 진심으 로 사랑해주는 사람이 가까이 있으면 거의 정신 질환에 걸리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 모 치즈키는 정신의학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한 날부터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 정신 과 의사가 환자와 일대일로 마주하여 병을 완치시킬 만한 애정을 쏟느냐 하면, 20년 가까운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그건 불가능한 일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어디에 있 는지는 분명하다.환자의 수에 비해 정신과 의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 한 명이 50명의 환자를 담당하는 꼴이다. 이는 전국적인 평균치다. 결핵 요양소 같으면 이런 수치로도 치료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정신병에 관한 한 환자와 의사가 직접 마주하 는 시간의 길이에 따라 치료가 좌우되는데 의사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러니 결국은 약 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치즈키는 약의 효용을 맹목적으로 믿고 있지는 않았다. 희박해진 정열, 이 일을 하는데 있어 가장 큰 딜레마는 바로 그것이다. 약을 투여하는 이상 으로 환자 한명 한명과 마음의 교류를 나누어야 할 텐데 그럴 여유가 없다. 그렇다고 의사 의 수를 두 배로 늘리자니 재정상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가능한 한 정성껏 환자를 돌보는 데 주력하여 딜레마를 극복하는 길밖에 없었다. 모치즈키는 이 제 슬슬 올 시간이다 싶어 문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몸의 움직임을 따라 의자가 빙글 회 전하면서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냈다. 기억을 잃은 여자란 말이지. 턱을 괴고 문을 쳐다보 면서 모치즈키는 두 달 전쯤에 진료한 남자 환자를 떠올렸다. 그 역시 이 병원에 들어왔을 때 신원 불명이었지만, 어이없게도 사흘 만에 모치즈키의 곁을 떠났다. 급성 알코올 중독에 의한 건망증으로 입원한 예순세 살의 남자는 가족이 실종 신고를 하여 금방 신원이 밝혀졌 다. 일시적인 건망증인 경우 무슨 사소한 계기만 있어도 꼬여 있던 기억이 술술 풀려나온다. 그는 정상으로 돌아가는 데 사흘밖에 거리지 않았다. 모치즈키는 이번 환자도 그럴 수 있 기를 바랐다. 20대 중반의 젊은 여성이니 반드시 보호자가 있을 것이다. 그들이 실종 신고 를 했다면 경찰에 조회를 하여 신원을 알아낼 수 있고, 그러면 이 병원을 떠나 가족의 품으 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다. 문이 열렸는데도 여자는 좀처럼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자, 들어가세요." 그녀를 데리고 온 간호사가 가볍게 등 을 밀자 여자는 간신히 어색한 몸짓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여자 는 그대로 대여섯 걸음 걸어 의자에 손이 닿자 팔을 뻗어 등받이를 집으면서 의자에 앉았 다. 몸매가 가녀리고 균형이 잡혀 있는 데 반해 얼굴은 비교적 동그스름했다. 모치즈키는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텔레비젼에서 종종 보는 탤런트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 안으로 들어오기 전이나 후,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여자는 의자에 앉은 채 모치즈 키가 손에 쥐고 있는 볼펜에 퀭한 시선을 떨구었다. 모치즈키는 인사를 하고 여자에게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었다. 여자는 아무 대꾸가 없었다. 이어 이름, 주소, 간단한 덧셈 뺄셈 을 물어 보았다. 여자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요?" 모치즈 키는 여자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적의가 없는 온화한 눈빛이었다. 눈꼬리가 약간 처진 매력적인 쌍꺼풀, 지금은 초췌한 모습이지만 화장을 하면 깜짝 놀랄 미인으로 돌변할 것이 다. 모치즈키는 애써 시선을 맞추고 있는데 여자는 눈길을 돌리려고 한지 않았다. 정도를 알 순 없지만, 의식이 둔화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군. 여자는 메모지에 뭔가 끄적거리는 모치즈키의 손으로 눈길을 옮기면서 눈을 깜박거렸다. "당신의 이름을 말해보세요." 모치 즈키는 방금 전에 한 똑같은 질문을 천천히 되풀이했다. 자기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지, 그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이 치료의 첫걸음이다. 기억은 대충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직접 기 억, 근접 기억, 원격 기억. 직접기억이란 바로 직전의 기억을 말하는 것으로, 예를 들면 숫 자가 쓰여 있는 카드를 보여주고 환자에게 방금 본 카드의 숫자를 말하게 하여 기억에 장애 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한다. 근접기억이란 한 시간 전쯤의 기억이고 원격 기억은 몇 주, 몇 달, 몇 년 전의 기억을 말한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물어보면 원격 기억에 장애가 있는지 없 는지 확인할 수 있다. 텔레비전의 서스펜스 드라마에서는 흔히 이름을 잊어버린 기억상실 자가 범죄에 휘말리곤 하는데, 그런 경우는 실제로 거의 존재할 수 없다. 자신의 이름이나 일반 상식 같은 기억은 과잉 학습에 의해 뇌의 여러 장소에 저장되므로, 기억의 흔적이 완 전히 소멸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자가 자기 이름을 말하지 않자 모치즈 키는 또 '일회성 전체 건망증'이란 병명을 떠올렸다. 갑자기 바다에 뛰어들면 이런 증상을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여자를 구해낸 두 젊은이의 증언으로 보아, 충격으로 인한 증상이라고 간주해도 무방할 것 같았다. '일회성 전체 건망증'은 그리 위험한 병은 아니다. 질풍처럼 느 닷없이 찾아왔다가 몇 시간내지 하루 이틀이 지나면 자연히 낫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바 다에 빠졌다가 살아난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에도 이 여자의 기억은 여전히 암흑에 싸여 있 다. 모치즈키는 그 밖의 가능성을 생각해보았다. 소위 '실어증'. 자신의 생각을 언어로 표현 하지 못하는 경우. 이 두 가지 경우는 뇌의 각기 다른 부위의 장애로 발생하므로 동시에 양 쪽 기능이 고장났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운동성 실어증인지 감각성 실어증인지를 판단하 기 위해서는 환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이다. 모치즈키는 여자의 마음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해 자기 얘기를 할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진찰실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환자와의 대화가 성립되지 않을 때면 그는 버릇처럼 자기 가족들 얘기 며 취미 같은 것을 농담을 섞어가며 간단하게 말한다. 환자의 프라이버시에 관계되는 일들 을 시시콜콜 물어놓고 정작 자기 속내는 하나도 내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 각하기 때문이다. "안심하세요, 난 당신 편입니다. 그러니까 사양 말고 진실을 말해 주세요. 그러면 가족들에게로 돌아갈 수 있어요." 여자의 표정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모치즈키는 창가로 가서 밖을 보았다. 정원에 환자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이 병원에 수용되어 있 는 환자들은 거의 모두 집으로 돌아가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극소수이긴 하지만 집으 로 돌아가기를 꺼려하는 환자도 있고, 환자가 퇴원할까봐 걱정하는 가족도 있다. 이 여자는 과연 어느 쪽일까, 혹시 일가친척이 한 명도 없는 것은 아닐까, 그럴 수도 있다. 모치즈키 는 여자의 옆얼굴을 흘끗 보고는 화제를 바꾸었다. "당신은 여드레 전, 바다에서 헤엄을 치 려고 했던 게 아니죠?" 모치즈키는 여자 옆에 앉아 고개 숙인 여자의 얼굴을 아래쪽에서 올려다보았다. 여자는 병원에서 지급한 하얀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엔슈탄의 거친 파 도에 몸을 맡겼을 때 여자는 데님 점퍼 스커트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풍성한 점펴 스커트 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한 배를 감추기에 적당했던 것이리라. 모치즈키는 상상 속에서 이 여자 환자에게, 자살을 r시도한 날 밤의 옷을 입혀보았다. 데님이라고 했으니 색깔은 아마 파랑이었을 것이다, 그 안에 빨간 티셔츠, 발에는 하얀 운동화, 액세서리는 했을까, 그리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은 어떤 식으로 묶었을까, 아기를 밴 다소 어린애 같은 귀여운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표정은 그때도 저렇게 어두웠을까, 아니면 지금과 전혀 다르게 눈 에 광채를 띠고 있었을까. 모치즈키는 지금까지 몇 번이나 나카다지마의 모래 언덕을 본 적이 있다. 모래 언덕은 파도 소리만 들리지 않는다면 사막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모래사장 의 기복이 완만하다. 여드레 전 밤이었다면 날씨는 아주 좋았고 8시면 썰물이 시작되는 시 간이었다. 여자는 모래 언덕을 몇 개나 넘어, 파도에 젖은 모래사장에 한동안 서 있었다. 그때 모래 언덕 위에서 불꽃놀이를 하고 있던 네 명의 젊은 남녀가 그녀를 보았다. 여자는 자살하려는 사람 특유의 분위기를 띠고 있어, 멀리서도 금방 눈에 띄었던 모양이다. 여자는 해변에서 운동화를 벗고 치맛자락을 약간 들어올리며 모래를 밟고 있었다. 그 여자를 제외 하면 주위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여자는 두 사람분의 무게로 바닷물을 헤치면서 무 릎이 잠실 정도로 바다에 들어갔다. 그때 모래 언덕 위에서 젊은 남녀들이 여자의 행동을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 한 명은 공중 전화로 달려가고, 수영에 자신이 있는 두 명 이 해안을 향해 모래 언덕을 뛰어내려갔다. 높은 파도가 여자의 머리 위로 부서졌고, 파도가 밀려간 다음 여자의 모습은 거기에 없었다고 한다. 신나게 불꽃놀이를 하고 있던 그 네 명 의 젊은이만 아니었다면 여자는 바라던 대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결국 신속한 구조 활동 으로 여자는 죽지 못했고, 그녀는 목숨뿐만 아니라 뱃속의 아이도 살아남게 되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갖고 있지 않았는지 아니면 파도에 쓸려 쓸려갔는지, 부근에서 가방은 물론이고 이름과 주소를 알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모치즈키의 뇌리에선 밤바다에 서 일어난 사건이 생생하게 재현되었다. 나카다지마의 모래 언덕이라는 배경을 훤히 알고 있는 만큼, 상상은 바닷물에 축 처진 여자의 치마 무게를 손으로 느낄 수 있을 것처럼 생생 했다. 달려온 구급대원의 응급 조치, 바닷물을 토해내며 이 여자가 올려다보았을 밤 하늘에 서 쏟아지는 별빛. 그런데 이 여자는 아이를 낳고 싶어하는 걸까. 느닷없이 이런 의문이 생겼다. 어떻게든 아이를 낳겠다는 여자라면 임신중에 자살을 기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 론 대화가 이루어지면 여자의 의지가 어떻든 간에 아이는 낳을 수 있다. 개방 병동에 입원 시키고 때가 되면 의대 부속 병원의 산부인과로 옮겨 출산 시킬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엄마의 의식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태어난 아이는 일단 영아원에서 맡아 기 르게 된다. 더구나 가족, 특히 아버지의 존재가 분명하지 않을 경우 아이는 내내 영아원에서 성장해야 한다. 모치즈키는 자기도 모르게 불룩한 여자의 복부를 쳐다보았다. 밤바다의 정 경이 뱃속에서 자라고 있는 아이의 암울한 장래를 예감케 하였다. 여자는 빤히 쳐다보는 모 치즈키의 눈길을 아랑곳하지 않고 양손을 무릎 위에 얌전히 올려놓고 있었다. 그러다 여자 가 무심코 손바닥을 위로 향했을 때 모치즈키는 확실하게 보았다. 살집이 튀어나온 일자의 갈색 흉터가 왼쪽 손목에 남아 있었다. 모치즈키는 여자의 왼손을 들어올렸다. 손을 잡아도 여자는 저항하지 않았다. 아직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흉터였다. 약 서너 달, 길어봐야 반 연도 채 지나지 않았을 만큼 흉터는 아직까지 자리를 온전히 잡고 있지 않 았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극심한 출혈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자살 기도가 이번이 처 음이 아니었던 것이다. 장난이 아니었다. 이 흉터로 신원을 알아낼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 이 들었다. 최근 반년 동안 손목을 그어 병원으로 옮겨진 자살 미수자를 조사해보면 된다. 조사 대상을 하마마쓰 지역으로 한정하면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모치즈키는 선 입관에 사로 잡혀 있었다. 바다에 들어가지 직전, 여자는 하얀 운동화에 점퍼 스커트 차림이 었다. 더구나 핸드백이나 지갑을 갖고 있지 않았으니 이 부근에 사는 사람일 것이라고만 여 긴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잊고 있었다. 사흘 전, 마쓰이 병원을 빠져나간 후 도쿄에서 발견된 분열증 환자도 발견 당시 가방이면 지갑은 커녕 아무것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 더구나 환자는 하마마쓰에서 300킬로미터나 떨어진 도쿄에서 발견되었다. 그가 어떤 교통 수단을 사용하여 도쿄까지 갔는지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30분이 면담시간 동안 여자가 한마디도 하지 않아 모치즈키는 환자의 병명을 확정지을 수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두 번은 자살을 시도했었다는 것을 안 이상 개방 병동에 수용할 수는 없다. 여자는 감시체 제가 완벽한 폐쇄 병동의 보호실로 옮겨져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2 여자는 그날 밤을 보호실에서 지내고 개방 병동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2주일이 지난 지금 도 여전히 혼미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모치즈키는 과거 몇 번인가 이런 상태에 빠진 환 자를 진료한 적이 있다. 그러나 과거의 예에 비하면, 여자는 의식이 확실하여 결코 증세가 심하다고는 할 수 없다. 2년 전에 발병하여 현재까지 입원중인 나카노 도모코 같은 경우, 말을 걸어도 전혀 대답 하지 않을뿐더러 얼굴에는 감정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표정이 전혀 없다. 혼자 서는 화장실에 가지도 못하고 음식조차 먹지 못한다. 모든 감정을 잃어버린 채 그저 소극적 인 방법으로 삶을 거부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입원 당시에는 살집도 제법 좋았었는데 지금 은 야윌 대로 야위어 뼈와 가죽만 남았다. 2년 동안 회복의 가능성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그 결과 할머니처럼 늙어버리고 말았다. 이제 그녀에겐 죽음을 기다리는 일밖에 남지 않았다. 기저귀를 차고 소화되기 쉬운 부드 러운 음식을 입으로 받아먹고, 유아로 퇴행하여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은 참으로 아이러니컬 하다. 도모코한테는 어린 딸이 하나 있었다. 이제 겨우 기저귀를 떼고 밥도 제 손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는데 도모코의 부주의로 딸이 그만 익사하고 말았다. 집 근처에 있는 조그만 저수지에서였다. 도모코는 비통하게 울부짖으며 자신을 질책했고, 내면에서 발버둥치는 악몽에 뇌는 정상 적인 기능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붕괴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냄새를 그리워하듯 딸이 차 던 기저귀를, 자신이 차는 신세가 되었다. 말을 하지 않고 웃지도... 울지도... 화를 내는 일도 없다. 그녀는 욕망이나 애정을 비롯한 모든 정신 활동을 중지하지 않고서는 그 슬픔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듯 나약한 정신의 소유자에게 모치즈키는 아무런 도움의 손길도 줄 수 없었다. 약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저 답답한 심경으로 가능한 한 정신의 쇠약 증세를 지연시키는 도리밖에 없었다. 만약 그녀의 증세가 호전되었다 해도 이미 그녀는 의 지할 만한 살붙이 하나 없었다. 입원과 동시에 이혼 서류를 들고 남편은 벌써 다른 여자와 결혼하여 자식까지 낳았다. 2주일 전에 입원한 젊은 여자가 그와 유사한 길을 걷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모 치즈키는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그녀의 경우는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희로애락을 표현하 지 않는 점에서는 도모코와 마찬가지지만, 화장실에도 혼자 가고 식욕도 있고 산책을 한기 도 한다. 그런 상태니까 어떤 계기만 있으면 호전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는 셈이다.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는 때, 개방 병동과 폐쇄 병동을 연결하는 복도를 걷고 있든 모치즈키는 입원 환자인 스나코 다케시가 흥분한 목소리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스나코 다케시는 열흘 전 자살 미수 사건으로 이 병원에 들어온 환자다. 차트에는 신경증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스물네 살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에 있는 전자 제품 회사에 취직 을 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불면과 식욕 부진으로 하마마쓰의 자기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 던 차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케시는 한 시간 전쯤부터 복도 벽에 기대어, 병동과 복도로 둘러싸인 병원 마당에서 게 이트 볼을 하고 있는 환자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부리고 있던 등을 펴고 얼굴에 송송 맺힌 땀을 닦는 환자들의 모습이 여기저기 보였다. 운동을 싫어하는 다케시는 땀을 흘 리는 환자들에게 혐오감을 느꼈다. 그러니 게임에 끼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8 월 중순의 뜨거운 햇살을 피해 복도 지붕 아래로 기어들어, 열흘 전의 일을 막연하게 떠올 리면서 정말 자기한테 자살할 의지가 있었는지 생각하곤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낯선 타인 의 손이 자신을 죽음의 심연으로 이끌었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의지와 무관한 손의 감 촉에는 리얼리티가 있었지만 스스로 죽음을 바랐다는 자각은 없었다. 그러나 자살이란 원래 그런 경향이 있으니 딱히 자신의 경우가 특별하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는 다른 환자들과 별로 말도 하지 않았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도 없었다. 막 입원했을 때는 시간이 천천히 흘렀지만 지금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취침 시간이 되었을 만큼 시간이 ㅃ라리 지나갔다. 취침 시간이 이른 탓도 있지만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생각하기엔 의외 로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거이다. 그는 열흘 전 이른 아침에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려 하였다. 그때 자신을 사로 잡았던 자 살 충동을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날이 채 밝기 전에 아버지의 차를 몰고 집을 나 서 무작정 동쪽으로 향했다. 어디로 가려 했는지 모른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다케시는 고 개를 젓는다. 그 아파트가 내가 가려 했던 곳일 리가 절대 없다. 그 방이 나를 궁지에 몰아 넣었다. 그렇다면 어딜 가려 했던 것인가. 그때 다케시의 머릿속은 뿌옇게 흐려 있었다. 새 벽 4시가 지나 동족 하늘이 밝아오는 것을 보고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껐다. 그건 기억난다. 스몰 라이트까지 껐는지는 모르겠지만, 떠오르는 아침해 라이트를 비추면 실례가 될 것 같 아 라이트를 끈 것은 기억하고 있다. 이 세계는 네가 있을 장소가 아니다.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액셀레이터를 밟자 앞쪽의 희뿌연 어둠이 뒤쪽으로 밀 려났다. 비스듬한 경사의 커브길이었다. 오르막을 다 오르자, 도메 고속도로를 달리는 헤드 라이트의 물결이 보였다. 세계가 자신에게 부과한 테마는 '무'. 네가 앉을 의자는 없었다. 또 중얼거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자기도 모르는 사이 도로변 가드 레일에 좌측 면이 충돌해 있 었다. 차는 격렬하게 흔들리고 다케시는 그 요동에 맞추어 소리를 질렀다. 오래도록 비명을 지른 것은 같은데, 옆쪽의 진동이 세게 몸을 짓눌러 끄으윽 끅, 개구리 같은 소리밖에 나오 지 않았다. 앞쪽은 오른쪽으로 길이 굽어 있어 회전이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일단 가드레 일에서 떨어진 차가 다시 한 번 부딪치기 직전 다케시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차는 가드레일을 부딪고 튕겨나가 맞은편 차선을 가로지르고 반대편 가드 레일에 푹 처박 혀 멈췄다. 보닛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폭삭 자부라든 차체가 사고의 심각함을 말해주었다. 새벽녘이라 도로를 달리는 차는 거이 없었다. 다케시는 한참이나 핸들에 얼굴을 대고 정신 을르 잃고 있었다. 누가 불렀는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안면을 세게 부딪쳤는지 코에서 흘러나온 피가 청바지를 적시고 있었다. 그러나 기분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그는 등받이를 눕히고 잠을 자려 했지만, 빠르게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 때문에 잘 수가 없었다. 경찰에서 사고 원인을 묻는 질문에 다케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속삭이는 소리는 들렸습니다. 누군가가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어요. 목소리가 하라는 대 로, 나는 핸들을 꺾고......" "조수석에 누가 타고 있었나요?" "아니오, 나 혼자였습니다." 부모님의 동의하에 그날로 입원 수속을 밟았다. 다행히 사고로 인한 상처는 대단치 않았 다. 문제가 있다면 정신 쪽이었다. 모두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사고 당 일 밤, 다케시는 아직도 자살할 우려가 있다는 의사의 진단으로 남자 폐쇄 병동의 보호실에 서 자야 했다. 이렇게 뜨거운 햇볕 속에서 멍하니 게임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는 입원 첫날 밤의 절망감을 떠올리는 일이 많았다. 첫날밤에 그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 다. 보호실은 좁았고 딱딱한 침대가 하나, 그리고 변기가 바닥에 튀어나와 있었다. 유치장인 줄 알았다. 창도 철창이었다. 다케시는 양손으로 철창을 움직여 보려 하였다. 꿈쩍도 하지 않았다. 갑자기 슬퍼졌다.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적막감에...... 아니, 적막감이라기보다 후회였 다. 다케시는 그렇게 울면서 첫날밤을 지냈다. 그런데 정체를 알수 없는 슬픔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폐쇄 병동의 문 이 열리고 마당으로 나와 대지를 밟았을 때도 자기도 모르게 굵은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졌 다. 다케시는 잡초가 무성한 땅에 양 손과 양 무릎을 대었다. 자신이 비참해서 견딜 수가 없 었다. 스물네 살에 인생을 끝내려 한 그 어리석었던 충동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 의 인생이 무위미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행위가 아닌가. 다케시는 주먹을 꽉 쥐고 땅을 쳤다. 잡초의 향기는 신선하고 바로 눈앞으로 개미가 무수하게 기어다니고 있었다. 눈물이 달았다 면 냄새를 맡은 개미들이 훨씬 더 많이 모여들었을 것이다. 열흘 전의밤과 아핌, 보호실 철창을 잡고 흘린 눈물과 그 다음날 아침 마당에서 땅을 치 며 흘렸던 눈물을 다케시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글 슬 픔과 분노의 회한이 마구 뒤섞인 감정은 내 몸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인가. 자살 을 시도하기 이전부터 잠재해 있던 것인지 아니면 갑자기 생겨난 것인지 알수 없어 답답했 다.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묶여 있다. 퇴원을 해도 정말 제대로 잘 살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담당 의사인 모치즈키는 자상하고 포용력 있는 훌륭한 의사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죽음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 만큼 희망을 주었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알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태어나서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것, 단 한번 이라고 한 여성과 진정한 사랑을 하고 싶다는 바람. 마침 그때 다케시의 귀에 예쁜 허밍 소리가 흘러들었다. 다케시는 얼굴을 돌리고 흥얼거 리는 사람을 찾았다. 과거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는 멜로디였다. 기억에 남아 있던 멜로디 와 그 허밍 소리가 부드럽게 겹쳐졌다. 다케시는 이 곡을 어디에서 들었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음악에 얽힌 기억은 마음에 깊이 남아 있는 법이다. 소리가 단서가 되자 6년 전의 전경이 별 무리 없이 머릿속 에 다시 떠올랐다. 그 곳을 라디오에서 처음 들은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7월이 끝날 무렵, 여름 방학이 막 시작되었을 때다. 다케시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이 노래 를 들었다. 시간은 아마 저녁때였을 것이다. 프로그램의 이름은 잊었지만 갓 데뷔한 가수의 노래를 소개하는 '금주의 노래'코너였다. 그래서 일 주일 동안 똑같은 노래가 똑같은 시간대에 흘러 나왔다. 남녀간의 변함없는 사랑 을 노래한 곡이었다. 그 당시 다케시의 상황에 딱 맞아 인상에 남았던 노래였다. 그때 그는 주말에 첫사랑의 자 친구와 만나기로 되어 있었다. 사랑 노래를 들으면서 그녀와의 즐거운 한때를 상상했다. 일 주일 내내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감미로웠다. 첫 데이트에서 무슨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그는 공원을 미리 답사하기까지 하였다. 여기서 차를 마시고, 이 잔디밭 이 의자에 앉아 이런 농담으로 그녀를 웃기고, 그리고 넌지시 다음 데이트 약속을 한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춰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면서 그는 데이트의 청사 진을 세세하게 그렸었다. 인생에 대한 기대와 사랑에 대한 동경으로 충만했고 행복했던 일 주일, 그 상징이었던 노래. 결과적으로 그녀와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대에 어긋난 결말이기는 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황홀했던 기분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금 마당에서 듣고 있는 멜로디는 6년 전에 비하면 템포도 느리고 정열적인 분위기는 소 멸해 있다. 그러나 같은 노래임이 분명하다. 지금 그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여성도 노래에 얽힌 사연을 갖고 있다면 그걸 실마리로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크게 히트한 곡은 아니었 다. 민방 라디오의 '금주의 노래' 시간에 딱 일주일 동안 들었을 뿐 다른 프로그램에서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는 라디오에서 딱 일주일 동안 흘러나왔던 그 노래를 허밍하는 여자 환자가 굉장히 반가웠다. 6년전, 세상을 바라보며 그렸던 색깔이 지금보다 훨씬 밝았던 그 시절. 저 여자 또한 어떤 장소에서 같은 프로그램을 들었고, 노래에 얽힌 당시의 사건과 마음의 움직임을 기억의 밑 바닥에 새겨놓은 것이리라. 같은 시간과 같은 노래를 공유했다는 반가움에 다케시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머금었다. 다케시는 두세 걸음 복도를 걷다가 서서 좌우를 살폈다. 느릿느릿한 몸짓으로 게임에 열 중하고 있는 환자들이 그저 묵묵히 볼의 움직임에 따르고 있었다. 그 너머로 벤치가 두 개 있고 환자 세명이 나란히 앉아 얘기를 나누고 있다. 좀더 걷자 제1병동의 화단이 보였다. 그리고 화단을 둘러싼 잔디밭에서 허밍 소리가 바람 을 타고 흘러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다케시 와 비슷한 나이에 살결이 하얀 여자가 고를 옆으로 조금 숙이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여자는 잔디밭에 앉아 양 무릎을 껴안고 손가락으로 땅에다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러 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이따금 얼굴을 들어 햇볕을 받으면 눈을 감았다. 다케시는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낯선 여자한테 말을 걸다니, 그로서는 쉬운 일이 아니다. 최소한 이름이라도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냥 곁에 서서 눈을 내리깔고 허밍을 계속하는 그녀 의 모습을 내려다보기만 할뿐, 어떻게 해야 좋을 지 몰랐다. 그러다 그는 얼떨결에 자기도 같은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되었다. 여자가 다케시를 올려다보았다. 여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면서 그는 충격을 받았다. 몸이 얼어붙는 듯한 충격, 한눈에 가슴 깊이 들어오는 사랑의 발걸음이 들리는 듯했다. 여자는 같 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다케시를 보고도 별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몇번이나 똑같은 노래를 흥얼거리는 다케시에게 마음을 열 듯 살며시 미소지었다. 다케시도 따라 웃 었지만 어쩐지 어색했다. 그러나 몸 속에서 솟아오르는 무언가가 있어, 열흘 전의 눈물을 잠 시 잊었다. "선생님." 두 번이나 연거푸 부르는 소리에 모치즈키는 그 자리에 섰다. 입원한 이래 한 번도 본적 이 없는 활기찬 표정으로 스나코 다케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더구나 놀랍게도 노래까지 흥 얼거리면서. "선생님, 이 노래 아세요?" 다케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노래?" 다케시가 한 소절을 다시 흥얼거렸다. 대중적인 곡은 아니었다. "잘 모르겠는데." 모치즈키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저기요, 저기 잔디밭에 젊은 여자 앉아 있잖아요." 다케시는 여자가 보이는 위치로 모치즈키를 이끌면서 또 물었다. " 저 여자 이름 뭔가요?" 모치즈키는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다케시가 상기한 얼굴로 사정을 설명하자, 아주 흥미롭다는 듯 '휴게실에 가서 얘기하지'라며 휴게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병동 한가운데 있는 휴게실은 피어오르는 보랏빛 담배 연기로 자욱했다. 환자들은 남자나 여자나 대개 담배를 피운다. 모치즈키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다케시에게 한 개비를 권했다. 다케시는 손을 흔들어 사양했다. 모치즈키는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서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다케시는 평소보다 가슴을 쫙 펴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랑 무슨 얘기라도 나누었다?" "아니오, 얘기는 못 나누었습니다." 다케시는 정중한 표현을 사용했다. 말투에서 그의 성격의 단면을 알 수 있다. 다케시가 처음 이 병원에 들어온 날 밤, 때마침 모치즈키는 간호사실에서 모니터로 보호 실 상황을 보고 있었다. 보호실에 수용된 환자는 자살 방지를 위해 천장에 설치되어 있는 카메라로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한다. 다케시는 자기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입원 첫날에는 자신이 정신병원에 들어왔다는 것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환자가 많다. 다케시는 좁은 방을 휘 돌아보고는 철창을 양 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그때야 비로소 여기 가 어디인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는 심하게 오열하였다. 텔레비전 카메라는 그이 바들바들 떨리는 등을 포착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모치즈키는 다케시가 울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정신병원에 들어왔다는 슬픔보다 자신의 생 자체에 대한 안타까움이 눈물의 원 인인 듯했다. 그 순간, 모치즈키의 가슴으로 다케시의 24년간의 삶이 한꺼번에 흘러들어왔 다. 야위고 작은 몸집으로 쇠창살을 흔드는 그의 등에서 인생의 무게는 거의 느껴지지 않았 다. 그런데도 그의 고뇌나 절망이 순간적으로 이해되었다. 자살을 기도한 명확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융통성은 하나도 없이 책임감만 유난 히 강하고, 사소한 일에도 일일이 신경을 쓰는 성격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다. 조금만 무디면 편하게 살 수 있을 텐데 호방하게 처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가 산 24년은 별탈 없는 그저 그런 평탄하 세월이었다. 애인도 없이, 여자한테 진정한 사랑 한번 받아본 일 없을 것이고, 무슨 모험을 해본 것도 아니고,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길을 과감하게 걸었던 일도 없을 것 이다. 어머니가 결정한 진로, 어쩌다 보니 선택하게 된 전공, 코미디 같은 면접을 몇 번이나 치르고 들어간 전자 제품회사, 그리고 영업부로 발령이 떨어지자마자 찾아든 불면과 식용 부진, 그러다 보니 출근도 하지 않고 방 안에 처박히는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모치즈키는 다케시의 부모님으로부터 그의 생활상에 대한 설명을 이미 들은 상태였다. "얘기를 나눈 것은 아니란 말이지." 모치즈키는 실망감에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허밍을 했다는 것만도 수확이었다. 기억 은 잊어버려도 언어는 잊지 않는 것처럼, 과거에 몇 번 흥얼거렸거나 들은 곡은 잊지 않는 다. 또 실어증이어도 음악에 대한 감각은 그대로 살아 있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그 정보는 귀중한 것이었다. "다시 한 번 불러보지." 모치즈키가 부탁하자 다케시는 등을 쭉 펴고 진지한 표정으로 멜로디를 허밍했다. 모치즈키 는 고개를 갸웃했다. 처음 듣는 곡이었다. "그거 누가 부른 노래지?" 모치즈키가 그렇게 묻자 다케시는 노래를 중단하지 않고 한 소절을 마무리지은 다음 대답 했다. "실은 제목도 누가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멜로디만 기억하고 있단 말이로군." "네에, 그래요." 다케시는 자기가 왜 이 멜로디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했다. "으음, 그래......" 고개를 끄덕이면서 모치즈키는 뭔가 석연치 않아 했다. 6년 전 라디오에서 잠시 방송했던 노래에 아주 인상 깊은 추억이 얽혀 있지 않다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다. 다케 시의 경우는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여자는, 우연치고는 너무 절묘하다 싶은 생각이 들었 다. "저, 선생님, 누굽니까.? 가르쳐주세요, 그 여자 이름." "아아, 그런데 말이지......" "이름 정도는 상관없잖아요." "이름뿐 아니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있어." 다케시는 턱을 쭉 내밀고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모르다니, 그렇다면?" 모치즈키는 그녀의 상태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했다. 입원한지 2주일이 지났지만 아직 신 원이 밝혀지지 않았고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실종 신고도 안 되어 있나요?" "경찰에서 아무 말도 없는 걸 보면, 신고가 안 되어 있을 가능성도 있지." "그래요" 다케시는 한숨을 쉬었다. 자기에 비해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다케시 한테는 잔소리가 심하고 과잉 보호라고 할만큼 하룻밤만 외박을 해도 경찰에 신고를 할 어 머니가 있다. "선생님, 만약 그녀 이름을 알게 되면, 저한테도 가르쳐주세요." 다케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치즈키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 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이성에 대한 관심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 다. 이성에 대한 관심은 정신의 건강 상태를 증명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알았어, 치료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안에서라면." "무리한 부탁을 해서 죄송합니다." 다케시는 45도로 허리를 굽히고, '그럼,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서는 다시 '혹시 환자 들 중에 이런 일에 관계된 사람 없을까요?'라고 태도를 바꾸어 어리광을 피우듯 물었다. "이런 일이라니?" "가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 말입니다.." 환자들 중에 다양한 특기와 지식을 가진 사람이 많아 감탄하는 일이 종종 있는데 다케시 또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글세, 개방 병동에 있는 도미다 씨가 비교적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다 굉장한 음악광이라고 하던데." "제가 물어봐도 괜찮을까요?" 다케시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뭘?" "그, 멜로디는 기억나는데, 곡명도 가수 이름도 몰라서야...... 생각하면 자꾸 신경이 쓰여서 요. 그 사람이 혹시 가르쳐줄지도 모르니까." 모치즈키는 웃었다. "알게 되면 나한테도 꼭 가르쳐줘. 정보 교환하는 셈치고." 다케시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한 번 '실례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자리 를 떴다. 예의바른 청년이었다. 거의 마음의 건강을 되찾은 듯이 보인다. 모치즈키는 퇴원에 관해 2∼3일 후에 부모님이나 본인과 의논해볼까 하고 생각했다. 피우다 만 담배를 알루미늄 재 떨이에 비벼 끄고 일어나려다가 문득 의심을 품었다. -그런데 다케시 군이 그 여자가 임신중이라는 것을 눈치채지 못 한건가. 3 도미다는 저녁밥을 먹을 때에도 헤드폰을 벗지 않았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맞 춰 콧노래를 부르느라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여 항상 주방 사람들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다케시는 슬쩍 도미다 옆자리에 앉아 말을 걸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분 좋게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방해를 하면 폐가 되지 않을까 하고 그는 불필요한 걱정을 했다. 도미다는 쉰 살 전후의 둥그스름한 얼굴에 몸집이 땅딸막한 남자로, 다케시는 그가 무슨 병으로 입원 해 있는지 몰랐다. 적어도 우울증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혹시 알코올 중독자일지도 모르 겠다고 추측해본다. :저, 라디오 듣고 계시는데 굉장히 죄송하지만......" 다케시는 역시 정중하게 말을 걸었다. 도미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얼굴을 옆으로 돌 리고 다케시를 위아래로 쫙 흝어본 후, 아무 표정 변화없이 다시 얼굴을 앞으로 돌리고 흥 얼거리던 노래를 머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답답한 심정에 다케시의 몸이 굳었갔다. 이 남자 한테 무슨 정보를 얻어내기는 다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깨끗이 물러나면 좋을 것을 다케시는 움직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물러나든 말을 걸든 반응이 있 어야 진전이 있다. 다케시는 점점 긴장했다. "무슨 볼일?" 갑자기 도미다가 헤드폰을 벗었다. 다케시는 자세를 가다듬고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을 감았다. "대수로운 일은 아닙니다. 그냥 모치즈키 선생님이 도미다씨가 가요에 조예가 깊다고 하 셔서......" "그래서?" "실은 멜로디는 알고 있는데, 노래 제목도 모르고 가스 이름도 몰라서......" "불러봐." 다케시는 주변을 돌아보고 노래했다. 식당에 있는 다른 환자들의 눈길이 유난히 신경쓰 여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작아지고 말았다. "모르겠는데." 도미다는 토하듯 말했다. "정말 그런 노래가 있는 거야?" 아니면 자네가 음치라서 내가 알아 듣지 못하는 건가?" "아, 네, 모르시면 됐습니다." 다케시는 빨리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성미도 급하긴, 내가 좋은 거 하나 가르쳐주지." 도미다가 안심이라도 베풀 듯 그렇게 말하고는 다케시의 귀에다 입을 바싹 갖다대고. '저 기 저 선반에서 메모 용지 가져와.'라고 명령조로 속삭였다. "메모 요지 말입니까?" "그래, 메모 용지하고 연필" 다케시는 기분이 영 좋지 않았지만 그의 말대로 메모 요지와 연필을 가지고 와 도미다에 게 건넸다. "그 노래를 어디서 들었지?" "6년 전, 라디오에서. '금주의 노래'라는 코너였습니다. "그럼, 종이에다 라디오에서 그 노래를 들은 날짜를 써봐." "확실하게 기억나지 않는데요." "대충 기억나는 대로 쓰면 돼." 다케시는 6년전 7월 하순의 일주일이라고 말했다. "가사는 단편적으로 기어나지 않았다. ......거울...... 당신의 등.....돌아보지 말아요...... 훨씬 더 밝은 빛이 있다면......어디에 있나요......너무하군요' 그 정도였다. "이 정도면 됐습니까?" 도미다는 메모 용지에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핥듯이 글자를 읽었다. 지독한 근시인 모양 이다. "좀 더 기억해봐." 도미다가 뱉어내는 숨이 코에 닿았다. 다케시는 그 역한 냄새에 얼굴을 찡그리고 숨을 멈 첬다. "죄송합니다." 도미다는 메모 용지를 팔락팔락 흔들며, '일단 부딪쳐보지'라고 중얼거렸다. "부딪쳐보다니, 뭘요?" "우체통에 넣는거야." 다케시는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역시 시간 낭비다 싶었다. "서둘러야 되는 일이야?" "네?" "네가 뭐야? 노래 제목하고 가수 이름 빨리 알아야 되는냐구?" "네, 저, 그러니까, 뭐......" "그럼, 지금부터 시작할 테니까." "시작하다니 뭘?" "메모 용지에 쓴 내용을 엽서에 옮겨 쓰고 우체통에 넣는 거야." 다케시는 갑자기 시덥잖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미다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알고 싶은 내용을 엽서에 써서 전용 우체통에 넣으면 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할게 뻔했다. 요컨대 그의 머리속에서만 성립하는 편리한 시스템이 있 고, 그것은 그에게는 신 같은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다. 타인의 망상속의 신에 매달리는 모 습을 그리는 순간, 다케시는 이 시시껄렁한 코미디에 울고 싶을 정도로 혐오감을 느끼고 어 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모르는 채 침묵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 노래하고 무슨 관계가 있나?" "아뇨, 별로." 키가 작은 도미다의 두 다리가 의자 밑에서 덜렁거리다가 다케시의 정강이를 찼다. "별로라니, 자네?" "아, 저,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 어쨌다는 거야? 노래에 얽힌 사연을 가능한 한 드라마틱하게 쓰라구. 그러 는 편이 상대방도 좋아할 테니까." 이렇게 된 이상 마음을 다지고 마지막까지 응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가수의 나이는 열일고여덟 정도 였을 것이라고 대충 어림짐작으로 덧붙여 썼다. "좀더 다른 뭐가 있을 텐데." 도미다는 좀처럼 다케시를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다 는 것과 두 번째 싱글판을 내놓고 연예계에서 사라진 듯하다는 등의 내용을 덧붙였다. 다 쓴 메모 용지를 보고, '뭐 대충 이 정도면 되겠지. 그 다음은 내가 처리할 테니까'라 면 서 도미다는 다케시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리고 그는 메모 용지를 한 장 뜯어 거기에다 '1629'라는 네 자리 숫자를 정확하게 기입했다. "오늘밤 6시, AM 라디오의 주파수를 이 숫자에 맞춰놓고 들어봐." 도미다는 그런 말을 남기고 헤드폰을 귀에 쓰고는 다시는 다케시를 쳐다보지 않았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케시는 방으로 돌아갔다. 도미다가 건네준 메모 용지는 주머니에 들어 있다. 쓰여진 숫자는 틀림없는 라디오 주파수 같았다. 다케시 자신과 노래의 만남도 같 은 라디오 프로그램이었으니 단순한 장난이라고 무시할 수도 없었다. 6시가 되자 시험삼아 주파수를 맞추어보았다. 듣는 동안 프로그램 중에 '추억의 노래'라는 코너가 있는 것을 알았 다. 청취자가 보낸 엽서를 추려 노래에 얽힌 사연이나 추억을 소개하는 코너로, 노래의 제 목이나 가수 이름을 모를 경우에는 방송국의 스태프가 엽서에 적혀 있는 내용을 실마리로 레코드를 찾아낸다. 물론 탐정 활동의 뒷이야기도 재미있게 소개되고, 노래를 소개하는 것보 다는 오히려 그쪽이 프로그램의 주된 내용이었다. 놀랍게도 도미다는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노래의 제목이나 가수 이름을 찾아내는 방 법을 제대로 가르쳐준 셈이었다. 다케시는 그의 망상이라고 속단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다음날 다케시는 엽서를 한꺼번에 서른 장이나 사서 한 장 한 장에 서로 다른 에피소드를 적고 날짜는 시간차를 두어 적어놓았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오는 날짜의 엽서를 시작으로 우체통에 집어넣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간격을 두는 편이 소개될 가능성이 놓을 듯해서였다. 그 후로 사흘간 다케시는 늘 여자를 지켜보았다. 멀리서 쳐다보기만 하는 적도 있었고 용 기를 내어 그녀 옆에 앉는 일도 있었다. 퇴원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여자로 하여금 미소 짓 게 하려는 다케시의 눈물겨운 노력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끝내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곡을 흥얼거려보아도 간신히 얼굴 근육이 풀어지기만 할 뿐 미소에 이르지는 못했다. 할 수 없이 다케시는 그녀 옆에 앉아 자기 얘기를 하였다. 고교 시절, 도쿄에서 대학을 다 니던 시절, 졸업하고 전자 제품 회사에 취직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접대를 해야 하는 공포 때문에 점차 출근하기가 싫어지게 된 일 등. 여자는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았다. 얘기는 당연 히 일방통행이었다. 내용이 과거에서 현재로 가까워지자 다케시는 답답함을 느겼다. 어디서부터였던가? 어떤 계기로 자신의 인생이 이렇듯 암울해졌는가? 고교 시절은 그나마 좋았다. 입시를 앞두고 있었지만 장래에 대한 불안감은 별로 없었다. 친구들과 노는 것도 재미있었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지 일년도 되지 않아 이상해지기 시 작했다. 어디가 어떻게 변했는지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껍질 속에 틀어박히는 시간이 많 아졌다. 가끔씩 생각났다는 듯 허밍하는 여자를 곁눈질하면서 다케시는 자기와 여자를 비교하고 있었다. 이 여자한테도 정신병에 걸리게 된 계기가 있을 것이다. 가능하다면 그것을 알고 싶었다. 매일 저녁6시가 되면 다케시는 라디오를 켰다. 혹시 자기가 신청한 곡을 틀어줄지 모른다 는 기대감에 부푼 가슴으로, 6년 전에 어떤 계기로 그 노래를 그녀와 공유했는지 어떻게든 알고 싶었다. 하지만 멜로디와 단편적이 가사만 알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막연하다. 노래 제 목을 알면 레코드를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노래를 완전히 내것으로 한다...... 그것은 6년 전 그래도 빛났었던 자신을 되찾는 일이기도 하고 잃어버린 자신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했 다. 그는 매달리는 기분으로 매일 같은 시간에 라디오를 들었다. 다케시는 입원한 지 꼭 2주일 만에 퇴원하게 되었다. 모치즈카가 투여한 약 덕분에 증세 가 호전되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6년 만에 싹튼 이성에 대한 관심이 삶의 에너지를 되 찾는 계기사 되었던 것이다. 모치즈키는 '언제든 또 돌아오라'는 농담을 던지고 웃음으로 그 를 배웅하였다. 다케시는 그날부터 고등학교 때 사용했던 방에서 느긋한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머니는 외 아들에게 다시 일을 시키기가 안쓰러워 다케시를 놓아주지 않았다. 회사의 상사는 '마음 푹 놓고 쉬다가 건강한 몸으로 다시 돌아와야 해. 자네 자리는 그대로 비워둘 테니까'라고 했 지 만, 어머니로서는 자기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 아들을 보내기가 영 내키지 않았다. 가능하면 하마마쓰에서 취직 자리를 구했으면 했다. 그러나 다케시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결 정하지 못한 상태로, 태어나서 처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리고는 저녁 6시가 되면 하루도 빠짐없이 라디오를 켰다. 입원중에 보낸 엽서가지 포함 하면 신청곡 엽서가 벌써 백장을 넘었다. 노래에 얽힌 사연은 나날이 드라마틱하게 변모했 고, 문체도 읽는 이의 관심을 불러일으킬수 있도록 다양하게 변화했다. 마침내 그 보람이 있 었는지, 뜻밖에도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날이 찾아왔다. 8월이 다 끝나가는 주의 화요일, 진행자가 '하마마쓰의 스나코 다케시씨'라고 그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다케시는 잔뜩 긴장 한 몸으로 라디오에 귀를 기울였다. 진행자는 노래에 얽힌 다케시의 사연을 읽어 내려갔다. 다른 사람이 줄줄 읽어대니 어째 남의 일처럼 느껴졌다. 6년 전 7월, 모 라디오 방송국의 '금주의 노래'코너에서 들은 노래라는 것과, 가사의 단편으로 간신히 곡명과 가수를 찾아낸 스태프의 고생을 자랑스럽게 말한 다음, 간단하게 가수를 소개하였다. -싱어 송 라이터, 아사카와 사유리는 당시 열아홉살, 데뷔곡 '거울 속'과 두 번째 곡인 ' 러 브 캣'을 발표하고 연예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다케시는 서둘러 노트를 잡아당겨 가수의 이름과 노래 제목, 레코드 회사등을 받아 적었 다. 그리고 라디오에서 그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사카와 사유리 자신이 직접 작사 작곡한 ' 거 울 속'. 정겨운 곡이었다. 그러나 열여덟 살의 싱그러운 목소리는 기억에 남아 있는 목소리 와 그 질이 미묘하게 달랐다. 다케시는 일절이 끝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귀기울였다. 흔히 있는 사랑 노래였다. 함께 아침을 맞이한 애인이 겨울 앞에 서서 이를 닦고 있다 '나'는 살며시 옆으로 다가가 그이 등을 쳐다보고 있는데, 내 등뒤로 비치는 형광등 불빛에 내 그림자가 남자의 등에 어려 있다. 그때 뒤를 돌아보려는 남자에게, '나'는 '돌아보지 마' 라 고 소리친다. 일절은 그런 스토리였다. 금방이라도 산산조각날 것 같은 젊은 남녀의 사랑을 필사적으로 지키려는 병적일 정도의 애틋함이 넘쳐흐른다. 뭐 어떻게 되겠지 하는 자포자기한 태도가 아니라, 두 사람의 위태로운 관계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한데다 아주 사소한 우연을 징크스 로 받아들여 사랑을 지키는 방향으로 키를 잡으려 한다. '나'는 그날 아침 우연히 자신의 그 림자가 남자의 등에 겹쳐진 것을, 장래에 두 사람이 맺어질 징조라 보고 절대로 깨뜨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다케시는 아사카와 사유리라는 싱어 송 라이터가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그이 아내 에 우리디케 이야기에서 이 노래의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상상했다.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를 찾기 위해 명부로 내려가 자신의 특기인 음악으로 신들의 마음 을 매료시킨다. 신들은 지상으로 무사히 돌아갈 때까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 으로 아내와 오르페우스를 지상으로 돌려보낸다. 하지만 지상을 눈앞에 두고 오르페우스는 아내의 얼굴을 확인하고픈 나머지 뒤를 돌아보고 만다. 아내는 다시 명부로 돌아오게 된다. 노래 속의 '나'는 돌아봄으로써 사랑하는 아내와 영원히 만날 수 없게 된 오르페우스가 탄 식 하는 광경을 순간적으로 떠올리고, 남자에게 '돌아보지 마'라고 외친다. 다케시가 그런 추리를 하고 있는 동안 노래가 끝났다. 테마 멜로디를 허밍하면서 사라지 듯 끝났는데, 그 점차 작아지며 사라져가는 허밍을 듣다가 자케시는 잔뜩 구부리고 있던 몸 을 벌떡 일으켰다. 마쓰이 병원에 입원해 있는 여자의 허밍 소리와 아사카와 사유리의 목소 리가 너무 닮았기 때문이다. 곡은 완전히 끝나고 아나운서는 다음 코너를 진행했다. 다케시 는 서둘러 라디오를 껐다. 여운 속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목소리의 질을 확인해보았다. 역시 비슷하다. 생각해보 니, 잠시 뇌리에 머물다 지나간 그 음악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 둘, 병원이라는 좁은 공간 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추측보다 그 여자 환자가 아사카와 사유리일 것이고 추측하는 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케시의 확신은 점차 굳어갔다. 망상과는 달리, 어디선가 앞뒤가 딱 맞는 소리가 난다. 내일이라도 당장 마쓰이 병원에 가서 모치즈키와 의논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녀가 아사카와 사유리라면, 맑은 목소리로 사랑을 노래한 열아홉 살의 소녀가 6년 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 어쩌다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키고, 신원도 알 수 없고 보호자도 없 는 상황으로 몰리게 되었을까. 다케시는 그 6년 동안의 가혹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촉망받던 가수에서 기억상실증 환자로 엄청나게 변해버렸는지 납득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다케시는 일시적인 충동으로 자살을 기도한 자신의 나약함이 다시 한 번 부끄러웠다. 동시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꼭 알아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4 다음날 오전 10시, 다케시는 마쓰이 병원애 가서 모치즈키를 만났다. 약을 받는 길에 어젯 밤의 일을 보고하기 위해서였다. 점심 시간까지 기다려서야 겨우 모치즈키와 식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병원 식당이 아니라 걸어서 2분 정도 거리에 있는 세련된 카페였다. 카페 안 은 그 동네의 이런저런 사무실에서 쏟아져 나온 사람들로 북적북적 시끌시끌했다. 식사가 끝나고 커피를 마실 즈음에 다케시는 근황을 보고하면서 천천히 화제를 여자 쪽으로 옮겼 다. "그녀의 병에 대해서, 뭐 새로운 거라도 있었습니까?" 모치즈키는 다케시와 대화를 할 때마다 답답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오늘만 해도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 불러냈으면 미적거리지 말고 본론을 꺼내면 될텐데, 무슨 대단한 얘기라도 되는 듯 뜸을 들여 짜증스러 웠다. 또 모치즈키는 혼미한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는 환자의 증상을 묻는 것도 싫었 다. 요 며칠 사이 검사 결과로 두부 외상에 의한 의식 장애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졌다. 현 저하게 뇌파가 이상한 것도 없고, 히스테리 같은 정신신경증, 긴장형 분열증, 우울증으로 단 정짓기도 힘들었다. 모치즈키 자신은 심인성의 가벼운 의식 혼탁으로 혼미라기보다 혼몽이 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은 판단이었다. 자살 기도를 하기 이전부터 정신분열증 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고, 환자의 병력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유효한 치료 방법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그녀의 신원을 아직도 모른다. 다케시가 병세를 묻는다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다. 비관적인 의견을 털어놓아야 할 때면 모치즈키는 항 상 기분이 묘하다. 병명조차 확정할 수 없으니 의사로서 자존심이 상할 지경이다. 모치즈키는 얼굴을 찡그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다케시는 모치즈키의 표정이 변화한 것을 눈치채고는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먼저 사과의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뭐가 죄 송하다는 거지?" 강하지는 않았지만 힐난조의 말투였다. "쓸데없는 질문을 해서." 모치즈 키는 대꾸하지 않고 손목 시계를 보았다. "저......실은......" 모치즈키의 몸짓에 다케시는 말 문을 열었다. 어젯밤 아사카와 사유리라는 싱어 송 라이터의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었는데, 그 목소리가 입원중인 그녀의 목소리와 상당히 닮았다는 얘기를 단숨에 털어놓았다. 다케시 는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억측을 모치즈키 선생이 제대로 들어줄까 하고 염려했는데, 말을 하는 사이 그런 걱정은 사라졌다. 모치즈키가 테이블 너머로 몸을 쭉 내밀고 들을 정도로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모치즈키는 다케시의 말을 들면서 혼미한 상태로 침대에 누워있 는 나카노 도모코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도모코는 증세가 훨씬 심하여 거의 침대에 누 운 채 식사나 용변을 간호사의 손을 빌려야하는 상태지만, 이불 밖으로 나와 있는 그녀의 손가락이 리드미컬하게 하얀 시트를 두드리는 광경을 몇 번인가 본 일이 있다. 그게 무슨 행동인지 모츠즈키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네 살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도모코는 음 악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낳을때까지 8년 동안 동네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 쳤던 것이다. 지금 도모코는 탁한 의식 속에서 죽은 딸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리 라...... 모치즈키는 힘없이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정상적 인 상태에서 매일 반복되던 행동이나 습관이 의식이 혼탁해진 다음에 불현 듯 나타나는 것 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여자가 환자가 허밍을 잊지 않고 있다면, 그 노래에는 어지간한 사연이 얽혀 있다는 뜻이 된다. 우선은 과거의 한때 그 노래를 부르는 습관이 있 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만약 가수였다면, 더구나 그 허밍이 마음에 남아 있는 데뷔곡이었다 면 앞뒤가 맞는다. 기억을 상실한 사람이 언어나 운전 등을 잊지 않는 것처럼 노래가 의식 의 특별한 부분에 각인돼 있어 문득문득 얼굴을 내미는 것이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모치즈키는 6년 전, 열아홉 살에 데뷔한 아사카와 사유리와 개방 병동에 입원해 있는 여자 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가늠해보았다. 지금은 야위고 초췌한 모습이지만 과거 아이돌 가 수였다고 해도 위화감이 없을 정도의 수려한 미모를 갖고 있었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다케시는 앞으로 내밀고 있던 몸을 일으켜 등받이에 뒷머리를 대고 천장을 올려가보고 있는 모치즈키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모치즈키는 '어어'라고 웅얼거렸을 뿐이었다. 모치즈 키 는 경찰과 온 하마마쓰의 병원에 조회를 해서도 파악할 수 없었던 여자의 신원을 뜻하지 않 은 방법으로 밝혀낼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아무 생각 없 이 흥얼거린 허밍, 라디오 방송국에 엽서를 보내라는 엉뚱한 아이디어를 제공해준 개방 병 동의 도미다, 손발이 척척 맞으면 이렇듯 귀중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인가..... "그렇지만 확인할 길이 없군. 본인한테 물어보고 싶지만, 그런 상태라니......" 모치즈키는 간 신히 그렇게 대답했다. "저......" 다케시는 또 울거렸다. "뭐지?" "선생님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도쿄에 가서 사유리씨에 관해 조사해보고 싶은데요" "자네가?" 모치즈키로서는 별다 른 근거도 없이 다케시에게 도쿄까지 가서 그녀의 신상에 대해 조사를 시킬 만한 이우가 없 었다. 그러나 그녀가 아사카와 사유리라는 확실한 증거만 발견되면 도쿄에 가서 조사를 하 는 고생도 마다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한 사람의 환자에게 매달리는 경우, 어 느 정도의 효과가 있을지 실험해보고 싶은 기분이 들 만큼 그 여자 환자의 상태는 안개 속 을 헤매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니오. 다른볼일도 좀 있고 해서요.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도쿄에 있는 제 아파트, 아직 그대로잖아요. 정리를 하든 집을 빼주든 하지 않으면 곤란하거 든요. 이전부터 신경이 쓰였는데, 그러니까 도쿄에 가는 길에 그녀에 대해 조사하는 정도는 문제 없어요." 다케시는 도쿄에 가는 길에 조사를 하는 것이라고, 그게 상경하는 목적은 아 니라고 열심히 설명하였다. "조사를 한다지만, 뭘 단서로?" "데뷔곡을 낸 레코드 회사를 메모해두었습니다." 레코드 회사를 방문해보면 아사카와 사우리를 기억하는 사람이 한 두 명뜸 있을 것이다. 단서란 그야말로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 을 텢데."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이 남아 돌아가니까." 다케시처럼 재주 없는 사람이 복 잡한 인간 관계 속으로 뛰어들려하니 그 용길 칭찬해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탐정 같은 모험 이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건 별 문제가 안 된다. 물론 운좋게 그녀에 관한 정보를 얻 을 수 있다면 치료에도 상당한 도움이 된다. 가족 관계나 병력, 생활상 등 모든 것이 백지인 지금 상태로는 병명조차 확정할 수 없다. 다만 그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그녀를 도우려는 다케시의 정열이며, 그 점을 성실하게 지켜보고 응원해주는 것이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한번 해봐." 모치즈키는 다케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다케시는 수줍어 하면서 '네'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알아낸 것이 있으면 내게도 연락을 해주면 고맙겠 는 데." 모치즈키는 자택과 병원의 팩스 번호가 인쇄되어 있는 명함을 건넸다. "알겠습니다." 다케시는 허둥지둥 일어나려 했다. 이대로 당장 역으로 달려갈 기세였다. "아, 잠깐......" 모치즈키는 여성에 대한 사랑이 다케시 부채질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그리고 만약 그녀가 아사카와 사유리 본인이라면 조사를 해나가는 사이에 그녀의 남자 관계도 드러 날 것이 분명하다. -충격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미리 얘기해줘야겠지. "자네, 아 직 모르는 모양인데, 실은 그 여자 임신중이야." 모티즈키는 다케시의 얼굴에 떠오를 실망 의 표정을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숙이고 식은 커피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내리깔아 다케시의 허리 아래쪽을 보았다. 다케시가 일어나려고 엉덩이를 드는 동작이 유난히 느리게만 느껴졌다. 테이블에 손을 대고 의자 옆으로 나가려는 동작도 어색 했다. 다케시는 양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의자 옆에 서자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는 카페 에서 나갔다. 평소 등이 굽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유난히 목을 움츠리고 있어 더 굽은 듯이 보였다. 다케시가 손가락으로 안경테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모치즈키는 왠지 모를 피로가 느껴졌다. 5 8월도 어느새 오늘을 포함해 나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도 오후 2시 도쿄의 기온은 3 0℃를 웃돌고 있다. 하마마쓰도 늦더위가 한창이었지만 도쿄는 습기가 많아 후텁지근하고 불쾌감이 한층 더하다. 다케시는 시부야 역에서 내려 국도 246호선을 가로지르고 선로를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레코드 회사에서 알아낸 주소와 전신주에 표시되어 있는 주소를 누 을 크게 뜨고 번갈아 살펴보았다. '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라고 레코드 회사의 남자는 말 했지만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 프로덕션의 사무실은 선로를 따라 서 있는 6층 건물에 있었다. 어제 모치즈키와 헤어진 뒤 곧장 도쿄로 올라와, 오늘 오전에 레코드 회사를 찾아갔 다. 다케시는 거기서 아사카와 사유리가 소속해 있었던 프로덕션의 주소와 담당 매니저의 이름을 알아냈다. "걔 일이라면, 케 프로의 미야카와 씨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남 자는 그렇게 말하고 미야카와라는 매니저의 이름을 가르쳐 주었다. 다케시로서는 상당히 신속하게 움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레코드회사의 문을 들어설때도, 지금 이렇게 프로덕션 이 있는 건물 계단을 오르고 있으면서도 그는 필요 이상 긴장하고 있다. 그러나 평소처럼 볼썽사납게 주저하는 일은 없었다. 레코드 회사의 중견 사원엑 입원중인 여자의 사진을 보 이자 거의 아사카와 사유리 본인이 틀림없을 거라는 반응이었고, 생각했던 대로 일이 술술 풀려나가는 것에 대해 기분이 좋아진 다케시는 꽤나 대담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는 빨리 그 다음이 알고 싶었다. 주저하면 그만큼 늦어진다. 한시라도 빨리 사실을 알아낸 다음 모치 즈키에게 보고하고 싶었다. 때문에 그는 땀을 흘리면서 3층까지 단숨에 계단을 뛰어올라갔 다. 사무실 안은 어수선했다. "실례합니다." 다케시가 그렇게 말을 걸자 여직원이 '무슨 일이죠?'라며 고개를 들었다. "콜롬비아 레코드에 계시는 마루야마 씨가 소개해주셔서 왔 는 데요, 매니저인 미야카와 씨, 여기에 계시나요?" 다케시는 그렇게 말하면서 그만 자기 명함 을 내밀고 말았다. 거기에는 한 달 전까지 다녔던 전자 제품 회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내밀 때마다 손과 목소리를 떨리게 했던 그 작은 종이 조각. "네에......" 여자는 명함을 받아들고 전자 제품 회사와 프로덕션이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이리저리 생각하 면서, '미야카와 씨는 지금 니시에후쿠의 스튜디오에 계시는데......'라고 말했다. "언제 돌 아 오시죠?" "글쎄요, 어젯밤에도 철야를 했으니 언제 돌아올지는......" "그래요." 다케시는 한숨을 쉬었다. "저, 그 스튜디오로 제가 찾아가면 안 될까요?" 상당히 조심스러운 말투였 다. 다케시는 음악의 세계를 잘 모르는 터라, 스튜디오에서 모두들 프라이팬에 콩 볶듯이 바 삐 움직일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여자는 '괜찮겠죠, 별 상관없을 거예요.'라면서 대수 롭지 않게 말했다. "준의 레코딩이 미적미적 시간을 끌어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니까 미야 카와 씨도 아마 따분하실 거예요." "그래요, 그럼 죄송하지만, 그 스튜디오가 있는 곳을......" 대담하게 대처하면 의외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법이다. 다케시는 메모 용지에 지 도를 그리는 여자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면서 한 가지 교훈을 터득했다. 마케시는 메모 용지 에 지도를 그리는 여자의 머리통을 내려다보면서 한 가지 교훈을 터득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수도 없이 충고 받았던 일, '구질구질 고민하지 말고 일단 말을 꺼내 실행하라. 사람들은 네가 생각하는 만큼 너에게 신경을 쓰고 있지 않다.' 과연 맞는 말이다. 니시에후 쿠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미야카와는 로비 소파에 기대어 끄덕끄덕 자고 있었다. 안내에 있 는 여자가 그가 미야카와라고 가르쳐주었다. 다케시는 조심조심 소파로 다가가 코고는 소리 까지 내며 자고 있는, 머리가 반쯤 벗겨진 대머리 남자 앞에 셨다. 다케시는 잠시 직립부동 의 자세로 미야카와를 내려다보았다. '어젯밤에도 철야를 했으니까' 라고 했던 프로덕션의 여직원의 말이 되살아났다. 어젯밤도 철야였다면, 그저께도 철야였을지 모른다. 아니 그 전 날도 그 전날도...... 다케시는 끝없이 이어지는 철야와 미야카와의 몸에 축적되어 있을 피로 를 상상하고, 억지로 깨우면 인상을 찌푸릴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그 정도로 끝나지 않을지 도 모른다. 화를 낼지도 모른다. 어쩌면 주먹을 날릴지도......사소한 우려들이 그의 머릿속에 서 점점 고조되어 이내 공포로 확대된다. 늘 반복되는 고질병이다. 다케시는 말을 걸까 어 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그냥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이런 경우 미야카와가 자연스럽게 눈을 뜨기를 기다리는 거이 최선의 방법이다. 그는 조금 전에 레코드 회사에서 터득한 교훈을 그 새 잊어버린 자신의 소심함에 어이없어했다. 로비는 너무 냉방이 잘 되어 있어 시원하다 못해 추웠다. 다케시는 손에 들고 있던 재킷을 걸쳤다. 별 생각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자 마 쓰이 병원에서 찍은 아사카와 사유리의 사진이 만져졌다. 여섯 장의 사진을 꺼내 바라보았 다. 퇴원한 후 몇 번이나 이렇게 바라보았던가. 모두 병원 마당에서 찍은 것인데 포즈는 각 기 다르다. 그러나 표저은 한결같이 쓸쓸해 보였다. 병원의 하얀 벽에 기대 있는 사진도 있 고, 잔디밭에서 다리를 뻗고 있는 사진도 있다. 맥없이 쭉 뻗은 다리. 사유리의 눈은 늘 초 점이 없다. 현실 이외의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눈길...... 그런 인상이다. 만약 그렇다 면 다케시는 그녀가 보고 있는 세계를,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그 세계를 알고 싶었다. 사 유리가 사는 세계를 찾아가 보고 싶었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사유리를 구하는 길이라고 그 는 믿고 있었다. 짝사랑이라는 것은 알지만, 다케시는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 풋내나는 첫사랑 이후에도 몇 번이나 여자를 좋아했다. 그러나 빈번이 차이기만 했다. 첫 데이트는 고등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동급생에 비하면 꽤나 늦은 편이었다. 딱히 예쁘게 생긴 것도 아니고 아주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타입의 소녀였다. 잔뜩 용기를 내어 신청한 데이트는 비참한 결과로 끝났다. 데이트를 하는 동안 그녀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고, 다케시는 이 유도 모른 채 사과만 했다. 어색하게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온 다케시는 곧장 그녀에게 전화 를 걸었다. 그녀는 '여보세요'란 한마디만 하고는 제대로 대꾸도 하지 않았다. 다케시는 또 용서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관계를 회복하려면 사과하는 길밖에 없다는 식으로 "난 굉장히 피곤해져, 다케시 너랑 있으면." 잔뜩 마음을 졸이게 해놓고 그녀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내뱉고는 전화를 끊었다. 다케시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데이트를 하는 동안 나름대 로 충분히 신경을 썼다. 오히려 내가 피곤해질 만큼. 그에 비하면 상대는 조금도 신경을 쓰 는 표정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굉장히 피곤해진다' 고 비난한다. -피곤한 건 오히려 나 다. 다케시는 거울을 보면서, 왜일까 하고 생각했다. 거울에 비친 길쭉한 얼굴에는 이렇다 할 특 징이 없었다. 내 얼굴이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타입인가 싶어 눈을 크게 뜨고 머리 스타일 을 조금 바꿔보았다. 그렇게 한참 바라보는 동안 혐오감이 일고, 자신의 몸의 일부를 보는 행위가 고통그러워졌다. 야위고 맥없는 어깨선은 예민하기보다는 나약한 인상을 준다. 보면 볼수록 살아갈 힘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때 처음으로 다케시는 거울 속의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보았다. -네가 사는 의미는 대체 뭐지? "이거, 사유리 씨 아냐?" 어디선가 남자의 목 소리가 들리고 다케시의 코앞으로 대머리가 불쑥 나타났다. "역시 사유리 씨야, 이건." 언 제 눈을 떴는지, 미야카와가 게슴츠레한 시선을 다케시가 들고 있는 사진에 떨구고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깨워서." 그렇게 말하고 나서 다케시는 무엇 때문에 사과했는지 자신을 책망했다. 억지로 깨운 것이 아니다. 그냥 자기가 일어난 것이다. "저, 그 사진에 있는 여자 아사카와 사유리 씨 아닙니까?" 다케시는 미야카와에게 사진을 건넸다. 자기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생략되어 다행이었다. 미야카와는 여섯 장의 사진을 다 흝어 보고는, 먼 옛날 일이라는 듯 아련한 시선을 들어올렸다가 다시 또 꼼꼼하게 사진을 하나하 나 들여보았다. "야, 이거 놀랍군요, 이런 데서 사유리씨를 만나다니." 미야카와는 아쉽다 는 듯이 사진을 다케시에게 돌려주었다. 다케시는 명함을 내밀고 간단하게 자기를 소개했 다. 그리고 사유리는 지금 기억상실증으로 하마마쓰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있으며, 레코드 회사에 있는 사람한테 매니저의 이름과 있는 장소를 무렁 이렇게 찾아오게 되었다고 설명하 였다. 그녀의 증세를 알기 쉽게 기억상실증이라고 한 것은 일일이 설명해야 할 구차한 상황 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또 그로서는 자세하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기억상실? 머리 라도 다쳤나?" 미야카와는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오, 자세한 것은 저도 잘 모릅니 다." "그래요? 야, 그건 그렇고 참 오랜만입니다. 이렇게 사유리 씨 얘기를 듣다니. 그런데, 지금 몇 살이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금방 데뷔했으니까 현재는 다케시보다 한 살 위일 것이다. "스물 다섯 살 일겁니다." 미야카와는 중얼거리면서 암산을 하였다. "그렇다면 벌써 6년이나 지났네. 참 나도 나이를 많이 먹었군." 미야카와는 이마에 손을 대었다. 사유 리의 매니저로 활동했던 시절에는 머리카락도 아마 풍성했을 것이다. "그런데......말이죠." 다케시는 용건을 꺼내려 했다. "아, 그렇지 그렇지, 그래서?" "그러니까 병원으로서는 , 사 유리 씨의 보호자가 없으면 곤란하니까, 만약 알고 계시면 가족분들이 어디에 사시는지 가 르쳐주시면 해서요." 미야카와는 다케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서 일부러 하마 마쓰에서 왔단 말이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다른 볼일도 있고 해서, 오늘 김에." "그래 요." 미야카와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참, 실은 말이지 사유리 씨의 부모는 안 계세요." "돌아가셨나요?" "네에" 다케시는 간신히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유리는 천애고아의 몸으로, 행방불명이 되어도 실종 신고를 할 가족이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데뷔하고 얼마 안 되서지 아마." "병이었나요, 아니면 사고로?" "으음, 글쎄 뭐라고 하면 좋을지......" 미야카와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네 그게, 아무래도 자살을 한 모 양입디다." "모양이라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단 말입니까?" "아니, 그건 아니에요" 이번 에는 단호하게 미야카와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자살입니다. 자살, 사고가 아니에요. 하 지만 죽은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유서도 없었던 모양이고......" 다케시는 수첩을 꺼내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마치 잡지사 기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괜찮으시다면,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은데요." 환자의 가족 상황이나 병력에 대해서 알 수만 있다면...... 모치즈키는 몇번 이나 그렇게 탄식했었다. 아버지가 자살을 한 것 같다는 사실이 상당히 중요한 정신병의 요인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미야카와는 아사카와 사유리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얘기했고, 다케시는 들은 내용을 빠짐없이 수첩에 적었다. 내용을 정리하여 곧바 로 팩스로 보낼 작정이었다. 환자의 신원을 밝혀낸 데다 그 가족 상황과 병력까지 밝혀낸 공훈을 하루 빨리 모치즈키에게 알려주고 싶어 다케시는 온몸이 근질근질했다. 6 레인지에 데워 간단하게 저녁 식사를 끝내고 모치즈키는 텔레비전을 껐다. 텔레비전 소리 가 사라지자 아무도 없는 아파트에 갑자기 적막함감이 더해졌다. 아내와 딸은 이나사와 시 에 있는 외가에 가서 집에 없었다. 딸이 여름 방학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외할머니를 보 고 싶다고 졸라대자. 아내 나오미는 엊그제 불쑥 이나사와 시에 가겠다는 말을 꺼냈다. 모 치즈키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고, 대를 이어 시내에서 내과의원을 경영하고 있는 형한테는 자식이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사촌 형제가 세 명이나 있고 외할머니가 계신 이나사와의 외가는 형제가 없는 딸에게는 즐거운 장소였다. 딸이 가고 싶다고 졸라대면 모치즈키나 나 오미는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모치즈키는 다케시가 보낸 팩스용지를 손에 들고 문득 얼굴을 들었다. 현관 너머 복도 저쪽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기 때문 이다. 귀를 기울였다. 이어 마땅히 들려야 할 하이힐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괜한 신경을 쓰 는 것인가. 그는 소파로 다리를 뻗었다. 아까부터 왠지 마음이 차분하지 않았다. 노노야마 아키코의 본심을 알 수 없어 목욕탕에 들어가소도 느긋하게 물에 잠겨 있을 수 없었다. 그 렇다고 그녀의 집에 전화를 걸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괜스레 마음만 싱숭생숭하여 텔 레비전을 껐다 켰다. 방안을 서성거리기도 하고, 팩스를 흝어보기도 했다. 팩스 겸용 전화기 가 마음에 걸리고, 문득 정신을 차리면 전화벨이 울리기를 기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취하 기는 했지만 모치즈키는 어젯밤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분명하게 말했다. -내일 밤, 전화할게요. 그리하여 오늘, 병원에서 노노야마 아키코와 몇 번이나 얼굴을 마주했는데 도 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어젯밤 일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모치즈키 또한 어제 일을 확인할 용기도 없고 또 본심을 캐묻는 것도 어리석게 느껴져 그냥 모른 척하고 있었 다. 그러나 막상 시간이 되고 보니 가슴이 조여들었다. 이런 기분을 느껴보기는 거의 20년 만이었다. 두 달 전, 하마마쓰 의대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고 있던 노노야마 아키코가 자청 하여 마쓰이 병원으로 옮겨왔다. 나이는 서른세 살. 4년 전에 결혼했는데 아이는 아직 없다. 웃으면 보조개가 생기는 아키코의 곱상한 얼굴은 표면적으로는 현모양처 같다. 하지만 모치 즈키는 그녀가 가정에 안주할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심리치료를 하 는 도중, 아키코는 별다른 이유도 없이 발작적으로 화를 내는 일이 있었다. 그런 때 그녀는 뜻대로 되지 않는 환자 앞에서는 입을 다물어버리고 만다. 긴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고, 짜증 스러운 눈길로 환자를 외면하는 그 뒤틀린 표정에서 냉정할 때의 아키코 이상으로 성적 매 력이 풍겼다. 임상심리에 대한 지식도 만만치 않고 환자에게 적합한 요법을 순간적으로 선 택하는 직감력도 대단하다. 그러나 심리 치료사가 적성에 좀 덜 맞는 것이 아닐까..... 모치즈 키는 종종 그런 의수심을 품고 아키코를 바라보았다. 모치즈키는 자신이 노노야마 아키코에 게 매력을 느끼고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전적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 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쳐다볼 때면 모치즈키는 그 눈 속에 빨려 들어갈 듯한 기분이었다. 그러면 그는 그녀의 보고도 듣는 둥, 마는 둥, 바로 눈앞에 하얀 가운을 입고 서 있는 몸에 마음을 빼앗겼다. 귀는 모든 언어를 차단하고 가슴은 살 냄새에 터질 것 같아진다. 그녀가 마쓰이 병원으로 옮겨왔을 때부터 모치즈키는 왠지 신경이 쓰이면서 뭔가 희미한 예감이 있 었다. 지금까지 모치즈키의 가정은 풍파 한 번 없이 평온했는데, 아키코는 그런 가정에 바람 을 일으킬 만큼 매력적이었다. 만난 순간부터 그는 그녀의 주술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봥어 본능을 작도시켰다. 그런데 바로 그녀와 어젯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말았다. 군무 부서가 같은 여자 조사관(역주:일본의 정신병원에는 case worker라는 생활환경 조사관이 배치되어 있다.)과 셋이서 저녁 식사를 한 다음 술을 마시자는 얘기가 나왔고, 번화가에 있는 미국식 퍼브 레스토랑의 카운터 테이블에 모치즈키, 조사관, 아키코가 차례로 앉았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하다가 여자들끼리 말에 가시가 섞이기 시작했다. 환자한테 아키코가 무슨 심한 말을 했는데 그걸 비난한 조사관한테 아키코가 '위선자로구나, 너.'라고 대꾸한 것이 화근이었다. 격앙된 감정을 자제하지 못하여 주위의 시선을 끌 정도로 시끄러운 말싸움으로 번지고 말았 다. 특히 조사관이 모치즈키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애를 썼지만 모치즈키는 이러지들 말라고 두 사람을 달래면서 어느 쪽도 아닌 애매모호 한 태도로 두 사람의 말다툼을 관망했 다. 아키코는 '꼴도 보기 싫으니까 빨리 없어져' 라고 조사관을 몰아붙였다. 같은 여자에 대 한 적의 비슷한 감정을 모치즈키는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고 싶 지 않으면 자기가 가버리면 될 텐데, 왜 그러지 않는 걸까? 그러나 조사관도 기가 드세서 가고싶으면 네가 가면 되잖아' 라며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모치즈키는 두 사람 의 말다툼을 지켜보면서 은밀하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모치즈키에게도 수 사람 사이에 앉 아 있는 조사관이 거추장스러웠다. 성실한 것은 좋지만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까지 일 얘기 를 꺼내며 환자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는 것은 피곤했다. 아키코가 퍼붓는 욕설에 기분 이 상한 조사관이 집으로 가버리면 아키코와 단둘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공격적인 아키코 와 단둘이 남으면 방어할 방법이 없어 나사가 풀려버릴 우려도 있었지만, 그는 아무 말 없 이 이 불합리한 싸움을 건 아키코를 은근히 응원하였다. 말싸움의 발단은 환자에 대한 윤리 관의 차이였다. 평소 모치즈키의 언동으로봐서는 조사관을 두둔해야 마땅했다. 그녀가 모치 즈키에게 도움을 구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그런데 모치즈키는 침묵을 지켰다. 잠시 후 조 사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에 갔다. 그러자 아키코가 그 뒤를 따라갔다가 조사관보다 머저 돌아왔다. 그 시간으로 보아 그녀가 용변을 보고 온 것이 아님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뭐하러 일부러 화장실까지 걸음을 하였던가. 모치즈키 앞에서는 말할 수 없는, 타인이 들으 면 그 인격을 의심 당할 결정적인 한마디를 조사관에게 던지고 마지막 쐐기를 박았을 것이 라고 생각했다. 과연 안색이 변하여 자리로 돌아온 조사관은 가방을 어깨에 메고 몸을 떨 면서 몇 초간 가만히 생각하다가, '나, 먼저 가야겠어요.' 라고 툭 말을 내뱉고는 몸을 돌렸 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격한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쫓고 있던 아키코가 고개를 돌려 모치즈 키를 들여다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머리카락을 위로 올리고 아래쪽에서 올려다보듯 쳐 다보고 있는 그 커다란 눈동자에는 천진함이 담뿍 어려 어려있었다. -멋지게 쫓아보냈지. 그녀는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모치즈키는 아키코의 변화 무쌍한 표정에 놀라며서 저렇게 매력적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겼다. 이어 목소리를 죽이고 '화장실에서 그녀 한 테 무슨 소리를 했지?' 라고 은근하게 물어보았다. 아키코는 '비밀' 이라며 후후 웃었다. 그 도 그럴 것이다. 남이 들으면 안 되겠기에 일부러 화장실까지 따라간 것일 테니까. 내용을 밝혀버리면 그 걸음이 헛수고가 되지 않겠는가. 결국 조사관을 쫓아버린 방법을 그 자리에 서는 들을 수 없었다. 아키코는 조사관이 앉아 있던 자리로 옮겨 앉아, 다리가 긴 의자를 달 그락달그락 옮겨 모치즈키 쪽으로 다가갔다. 그렇게 어깨와 어깨가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 에서 술집이 문을 닫을 때까지 이런저런 얘기꽃을 피웠다. 12시가 다 되어, '이제 슬슬 돌아 갈까' 라면서 일어나려는 모치즈키의 손을 꽉 잡으며 아키코가 속삭였다. "우리 언제 또 만 날 수 있죠?" 여느 때처럼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빨아들일 듯한 정열로 ...... 모치즈키는 순 간 '내일 밤에는 아무도 없어' 라고 재빨리 대답했다. 덫에 걸리까봐 경계를 했음에도 불구 하고 그렇게 쉽사리 그는 첫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다. 아키코는 '알았어요. 내일 밤, 전화 하 죠' 라고 대답하며 잡고 있던 손에서 힘을 뺐다. 현관 밖의 소리 때문에 딴 생각을 하던 모 티즈키는 손에 쥐고 있던 팩스 용지로 시선을 떨구었다. 조금 전에 다케시가 보낸, 아사카와 사유리에 관한 리포트였다. 노노야마 아키코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조금도 의식을 집중 할 수 없었다. -거절하면 된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아마 전화를 걸어서, 지금 어디서 만나자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간단하다. 적당한 이유를 둘러대고 거절하면 된다. 그러나 어 젯밤 조사관을 궁지에 몰아넣은 집요한 정열을 생각하면 어쩐지 자신이 없어진다. 모치즈키 는 볼펜을 깨물면서 리포트를 읽어나갔다. 불과 하룻동안 조사했는데 감탄할 만큼의 내용이 었다. 정신적인 나약함을 극복할 수만 있다면 다케시는 사회에 복귀하여 충분히 성공할 능 력을 갖추고 있다. 아무튼 다케시는 그녀의 신원을 밝혀내는 데 성공한 것이다. 모치즈키는 첫 장을 한 번 쫙 흝었다. 두 번째 장은 간략한 연보인데 그 대부분이 공백이었다. 앞으로 계속 조사하여 공백을 메워나갈 작정이리라. 아사카와 사유리는 25년 전 11월, 도쿄의 오타 구에서 태어났다. 외동딸이다. 어려서 어머니와 사별했고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콜롬비아 레코드 소속 가수로 데뷔, 7월에는 두 번째 싱글을 발표, 전국을 돌며 서머 캠페인을 벌였는 데 그 무렵부터 말수가 적어졌다. 호텔에 틀어박힌 채 밥도 제대로 먹지 않는 상태가 계속 되었다. 매니저인 미야카와는 그렇게 증언했다. 그리고 9월 4일 아버지가 자살, 사유리는 캠페인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충격 때문에 그후 가수 활동을 재개하지 못했다. 미 야카와도 아버지가 자살한 이유를 잘 모르고, '그 점에 관해서는 사유리 아버지 회사의 공 동 경영자였던 나가다한테 자세하게 물어볼 필요 있음'이라는 다케시의 코멘트가 덧붙여 있었 다. 아버지의 자살...... 그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사유리의 닫힌 마음을 열 수 있는 한 가닥 중요한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모치즈키는 그 부분에 밑줄을 그었다. 현재 사유리가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이 아버지의 자살에서 기인한 걸까? 의문의 꼬리가 이어 진다. 모치즈키 역시 다케시처럼 한시라도 빨리 그 다음이 알고 싶었다. 하지만 6년 전에 죽은 아버지의 사인을 제대로 밝혀낼 수 있을지...... 갓 데뷔한 병아리 가수는 이 세상에 얼 마든지 널려 있다. 그 아버지가 자살했다고 해서 매스컴이 소란을 피울 리는 없다. 고작해야 신문이 3면 기사에 조그맣게 실렸든가 아니면 실리지 조차 않았을 것이다. 어떤 방법으로 조사할지는 모르겠지만 다케시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영역까지 건드려 돌이킬 수 없는 상 처를 받는 일이 없으면 좋겠는데, 하고 모치즈키는 문득 생각했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모치즈키는 펴뜩 몸을 숙여 수화기 쪽을 보았다. 역시 지금 울린 것은 현관 벨인가. 현관 쪽 으로 고개를 돌렸다. 문 밖에 누가 서 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전화를 걸겠다고 해놓고 서 불시에 방문한 것이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지 없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찾아온 아키코의 대담함에 모치즈키는 화가 났다. 갑작스런 방문을 비난할 작정으로 문을 열자, 생각했던 대 로 복도의 어두컴컴한 조명 라래 노노야카 아키코가 서 있었다. 모치즈키의 눈은 먼저 그 녀의 머리카락에 쏠렸다. -머리카락에 뱀을 얹었다. 그런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키코 는 긴 머리를 땋아 머리에다 빙빙 감은 스타일이었다. 핀을 빼면 반짝반짝 빛나는 뱀이 꿈 틀거릴듯한 느낌이었다. 모치즈키는 하려던 말을 잊고 반쯤 연 문을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전화하지 않고 그냥 왔어요." 눈을 치켜뜨고 생긋 웃으면서 아키코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삼십대 여자답지 않게 천진한 표정에 모치즈키는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곤 비난할 작정으로 문을 열던 감정과는 반대로 아키코를 집안에 들여놓고 말았다. 7 다 쓴 보고서를 팩스로 모치즈키에게 보내고 나서 다케시는 백화점 서점에 갔다. 그는 미 야카와가 가르쳐준 책을 찾았다. '도쿄 소극단 지도' 이름 그대로,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 하 는 소극단의 프로필, 에피소드, 간판스타를 소개하는 책으로, 다케시는 잡지 매장에서 그 책 을 발견하자 주저하지 않고 샀다. 6년 전 여름부터 사유리는 정신병을 앓고 있었고, 가수로 서의 활동을 견디지 못하는 상태였다. 미야카와는 당시 사유리의 모습을 말하면서 정말 괴 로운 표정이었다. 그녀의 신상에 동정을 해서라기보다 오랜만에 발굴한 황금알이 금 가고 깨지는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만 있기가 안타카웠기 때문이리라. 사유리는 일단 가 수의 길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미야카와는 마음이 안정되면 언제든 다시 돌아오라고 말했지만 사유리는 두 번 다시 프로덕션으로 돌아 오지 않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반 년이나 지나 그녀가 느닷없이 소극단 무대에 선 것이다. 미야카와는 씁쓸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 다. "한 푼도 생기지 않는 무대에 서다니 그런 바보가 어딨어. 남자라도 생긴거 아냐." 마 음의 상처가 치유되어서 소극단 무대에 선 것인가, 아니면 연극이라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 하여 마음의 병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인가. 이렇게 하여 프로덕션과 관계가 끊긴 이상 그 이후의 사유리의 발자취를 좇으려면 그녀가 소속해 있었던 극단을 조사하는 길밖에 없었다. '극단 바람' 사유리가 가수 역으로 출연한 극단의 이름이다. 그러나 사유리가 소속되어 있 었던 '극단 바람'은 이마 존재하지 않았다. 작가, 연출가의 퇴단으로 극단이 둘로 나누어졌 는 데, 사유리가 어는 쪽에 속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다케시는 양쪽 다 조사해볼 필요가 있 었다. 그는 백화점에서 나오 전화 부스로 들어가 '극단 바람'의 전화 번호를 눌렀다. 젊은 여 자가 전화를 받았다. "저, 죄송합니다만...... 그 극단에 아사카와 사유리라는 여자가 소속돼 있었던 적 있습니까?" 여자는, '뭐라구요?'라고 퉁명스럽게 소리지르고는, '그런 분 안 계 세 요'라고 대답했다. 다케시는 당장 사과하고 수화기를 내려놓고 싶었지만, '5년 전쯤에 가 수 역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요'라고 말을 이었다. "아, 전 올해 입단해서, 그 렇게 옛날 일은 잘 몰라요." -모르면 아는 사람을 바꿔주면 되잖아. 다케시는 젊은 여자의 답답한 대꾸에 짜증이 났다. "극단의 책임자를 바꿔주실 수 있습니까>" "지금 연습중이라 서 여기 안 계세요. 만약 급한 일이면, 0442에 22-3500. 기치조지의 스페이스 텐으로 연락해 보세요." 전화가 걸려 오며 이렇게 하라고 선배한테 빠짐없이 배운 듯한 말투였다. 다케시 는 전화 번호를 확인하고 메모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으려는 데 여자가 까칠한 목소 리로 다시 말했다. "아 참, 그러고 보니, 혹시 콜롬비아 레코드에서 데뷔한 아이돌 가수 말 하는 거예요?" "알고 계신가요?" "역시 그렇군요. 소문은 들었는데, 우리처럼 조그만 극단 에 진짜 가수가 출연했다는 말을 믿을 수가 없어서, 난 거짓말인 줄 알고 웃어버렸는데, 뭐 였죠, 이름이?" "아사카와 사유리"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지." "책임자는 그녀에 관해 알 고 계시겠죠?" "알고 있겠죠, 이 극단에 있은 지 오래되는까." "연습은 몇 시에 끝나죠?" "10시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다케시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시부야에서 기치조 지까지는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연습을 방해하면 좋지 않겠다. 싶어 그는 우선 저녁을 먹기 로 했다. 연습장에 얼굴을 내밀기가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소극단의 연습장이란 말을 들었을 뿐인데, 종잡을 수 없는 이상한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란 선입견이 있었다. 자기와는 감 각도 다르고 사고 방식도 전혀 다른 개성적인 젊은이들이 사람들 앞에서 태연하게 러브 신 을 연기하고 알몸이 되기도 하는...... 아무리 상상력을 발휘해도 다케시로서는 이해할 수 없 었다.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감각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부러운 반면 공포 의 대상이기도 했다. 시간적으로 봐서 오늘밤 다음 방문지를 찾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정 신적으로 피로하여, '극단 바람'의 연습장을 찾아가보는 것이 고작이겠다 싶었다. 이처럼 그 는 영업직에는 적합하지 않은 성격이다. 그러나 다케시는 대학을 졸업할 때, 그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어떤 직종이 적성에 맞는지 생각해 본 일조차 없었다. 끄적끄적 공부하여 삼류대학에 들어간 것만 해도 그로서는 과분한 결과라고 만족하고 있었다. 노력하면 대부 분의 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전자 제품 회사의 영업부로 발령 났을 때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고 그저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몇몇 사람과 만나 자사 제품을 파는 동안, 의식보다 먼저 육체가 거부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몸이 나른하고 식욕이 없어졌다. 그러더니, 아침에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봄에서 여름으로 바뀌는 계절 탓일 거라고 생각하고, 처음 한 동안은 무리를 했다. 그러다 불과 석 달만에 그이 몸은 방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게 되었 고, 연락도 없이 무단 결근하는 신세가 되었다. 요컨대 다케시한테는 영업이란일이 적성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그는 아사카와 사유리 의 과거를 더듬으면서 자신의 장래를 모색하고 있었다. 식당가의 한 음식점에서 주문한 음 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다케시는 사유리를 생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미래에 대해 생각했 다. 왜 지금에야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갖게 되었을까. 다케시는 자신의 몸이 간지럽도록 사 랑스럽게 느껴졌다. -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은 자신에게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 무슨 격언 같은 말이 뇌리에 떠올랐다. 8 노노야마 아키코는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꼬고, 파란색 타이트 스커트 자락을 약간 잡아당 겼다. 위는 반소매 블라우스의 심플한 차림이었다. 그녀는 몸에 딱 맞게 입기만 하면 무슨 옷이든 매력을 발산한다. 스스로도 그렇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 일부러 화려한 패션을 피하 고 있는 듯이 보인다. "뭐, 마시겠소?" 모치즈키가 물었다. "맥주 마시고 싶어요." 아키코 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바깥이 후텁지근한지 목덜미에 땀이 송송 돋아 있었다. 그리 고 그 위 귓볼에는 하얀 진주 귀걸이가 조그맣게 빛나고 있었다. 모티즈키가 맥주를 가지 고 오는 동안 아카코는 테이블에 놓인 팩스를 멋대로 읽기 시작했다. "어머, 이게 뭐예요? 사모님한테 온 러브레터?" 아무리 테이블 위에 그냥 놓여 있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 앞 으로 온 팩스를 아무 말 없이 읽는 무례함에 모치즈키는 어이가 없었다. 그는 질문하는 투 로 '전화하기로 했잖소?'라고 물었다. "난 벌써 서른셋이예요. 시간이 없다구요." 모치즈키 는 할 말을 잃었다. '서른셋'이란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 이 다. 마침내 그 숫자가 그녀의 나이라는 것을 깨달었지만, 나이가 전화를 걸지 않은 것과 무 슨 관계가 있는지,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말을 얼버무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서른셋 이란 나이와 전화도 하지 않고 모츠즈키의 집을 직접 찾아온 것이 아키코의 머릿속에서는 전혀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모치즈키가 그런 것을 알 리가 없으니, 아키코는 손에 든 팩 스로 화제를 바꾸었다. "혼몽 상태에 있는 환자의 신원이 드디오 밝혀진 모양이오." "싱어 송 라이터? 어머, 걔, 가수 였어요?" "그런 모양이오." "이거 대체 누가 조사한 거죠?" "당 신도 알고 있을 텐데, 열흘 전쯤에 퇴원한 스나코 다케시라는 환자 있었잖소." 아키코는 잠 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 그 죽지 못한....." 그녀의 말투가 거칠다는 것은 모치즈키도 이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젯밤 조사관과 말싸움을 할 때도 말투가 화근이었다. 하얀 가운을 벗 으면 돌연 환자를 바보 취급하는 말을 줄줄이 뱉어놓는다. 무슨 욕구 불만이라도 있는가 하 고 모치즈키는 심리 요법을 사용하여 이 여자의 마음속을 파헤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 다. 그 욕망은 옷을 벗기는 행위보다 한층 음란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였다. "말조심 좀 해야겠소." 모치즈키는 부드럽게 말했다. "뭐, 어때요. 여기는 병원도 아니고 당신 집인데, 솔직해지고 싶어요." 아키코는 반성하는 기색이 없다. 꼰 다리를 흔들흔들 흔들면서, '잘 마 실게요'라며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모치즈키는 아키코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힐책하기보다 는 어떻게 하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지, 적의 약점을 탐색하는 식으로......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야요. 양심파 부원장님." 양심파 정신과 의사, 아키코는 이 말을 마쓰이 병 원에 관한 책자에서 보았다. 도쿄에 본사가 있는 이름있는 신문사의 기자가 쓴 '현대 정 신 의료'란 제목의 책은 이름 그대로, 현대 정신 의료의 실태를 파헤친 것이었다. 필자에 의하 면 정신 병원의 좋고 나쁨은 원장을 비롯한 스태프의 인간성에 크게 좌우된다고 한다. 간호 사가 환자를 린치하여 죽인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정신 의료의 실태가 사회적인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그렇게 문제성이 많은 병원을 다루는 한편 양심에 입각하여 치료행위를 하는 병원을 소개하는 데도 7쪽을 할애하였다. 마쓰이 병원은 두 번째 양심 병원으로 크게 다루어졌다. 하마마쓰 의대를 퇴직하고 병원을 개업한 원장 마쓰이와 부원장인 모치즈키는 사진까지 소개되었고, 아키코는 그 사진을 2-3년 전에 보았다. 그래서 아키코는 마쓰이 벼 원에 오기 훨씬 이전부터 모치즈키의 이름과 얼굴을 알고 있었다. 사진이 실물보다 훨씬 잘 찍혀, 이상에 불타는 젊은 의사는 매력이 철철 넘치고 있었다. 더구나 일류 신문사가 발행하 는 책에 사진까지 실렸다는 사실은 하마마쓰라는 조그만 시에서 태어난 아키코에게 멋진 환 상을 품게 하기에 충분했다. 아키코는 총명하기는 해도 동시에 유치한 면도 있어, 명성이나 권력에는 금방 현혹되는 구석이 있었다. 남편이 있는 몸이면서 아키코는 남 몰래 모치즈키 를 흠모하였고, 마쓰이 병원에서 일할 날이 오기를 고대하였다. 그리하여 두 달 전, 그녀의 오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이다. 물론 모치즈키가 이런 아키코의 속셈을 알 리가 없으니, 오 늘밤의 갑작스런 방문이 실은 2년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되어 있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 해다. 알고 있었다면 그는 이해했을 것이다. 처음 노노야마 아키코를 만났을 때, 마치 노리 던 짐승에게 달려드는 듯한 강렬한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았다는 것을, 지금 생각하면 그 순간에 승부는 이미 결정 나 있었다. 정열을 품은 매력적인 눈으로 그렇게 쳐다본다면 누구 든 당해내지 못한다. 노골적으로 자기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그런데다 상대가 미인이라면 대부분의 남자는 여자가 놓은 덫에 걸려들고 만다. 분별 있는 남자들은 마음이 있는 듯한 몸짓을 보이지 않고 깊이 관계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나 모치즈키는 자극적인 그녀의 시선 에 온몸을 굳었고, 증가하는 심장박동수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지금 은 그 시선이 다소 누그러져 있다. 아키코는 천천히 팩스에 떨구었던 시선을 들었다. "참 자세히도 조사했네요. 이런 어려운 일을." "아, 대단하지." "아무렴." "앉으세요." 소파 옆 에 서 있는 모치즈키는 아키코는 앉으라고 권했다. 주객전도라더니 그야말로 그 꼴이다. 두 달 전, 모치즈키는 자신도 은근히 이런 때가 오기를 마음속으로 바랐던 것이리라. 하늘에 운 을 맡기고 모치즈키는 소파에 앉았다. 소파가 L자형이라 아키코의 붉게 달아오른 오른쪽 빰 이 보였다. "다음에는 당신 남편을 소개받고 싶은데......" 모치즈키는 아키코가 아내로서의 입장을 상기하도록 일부러 남편이야기를 꺼냈다. 아키코는 맥주가 담신 차가운 잔을 뺨에 댄 채 말했다. "싫어요, 창피하게스리." 그리고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한테 소개할 만한 사람이 못 돼요." 마치 어울리지 않는 실내 인테리어에 빗대 는 말투였다. 매력이 넘치는 아내가 있으면서도 남편은 틀림없이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지 않으리란 짐작이 간다. "그런데 선생님, 아사카와 사유리라는 여자, 속이고 있다는 생 각은 안 들어요? 우리들 모두를." "무슨 뜻이지?" "그 여자, 자기 의지로 입 다물고 있는 거라구요." "그렇게 생각하나?" "그렇게 보여요, 나한테는." 그저 의지로 자신을 둘려싼 현실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인가. "무엇 때문에?" "달리 갈 데 가 없으니까." 팩스에선 천애고아라는 단어를 보고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안 그래요? 마쓰이 병원 있기 좋잖아요. 그러니까 환자들이 눌러 있는 거라구요. 선생님도 원장 선생님도 모두 사람이 좋으니까요." 물론 사유리가 마냥 저 상태라면 병원측으로서는 나 몰라라 하고 내쫓을 수는 없다. 어느 틈에 풀었는지, 아키코는 블라우스를 가슴이 훤히 보이 도록 열어젖히고 몸을 옆으로 비스듬히 누이고 모치즈키의 무릎에 손을 올려놓고 있었다. 그런데도 모치즈키는 집요하게 화제를 일 쪽으로 몰고 가려 했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 기를 지켜내기가 어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미 딱딱하게 발기해 있었다. 지 금까지 아내 외에는 딱 한 여자밖에 경험하지 않았다. 아내를 알기 전, 의대생이었을 무렵의 일이다. 석 달 동안의 짧은 연애였다. "선생님 얼굴, 책에서 봤어요." 아키코는 그렇게 말 하고 모치즈키의 목덜미에 얼굴을 갖다대고 '현대 정신 의료'라는 책이 꽂혀 있는 정면의 책 장으로 시선을 보냈다. 모치즈키는 당황했다. 저자는 책에서 우수한 정신과 의사인 모치즈키 의 인간성을 실제 이상으로 평가해놓았다. 모치즈키는 책에 묘사된 자신의 모습에 위반되지 않도록 등을 쭉 폈다. 지금 그의 발기한 페니스는 지퍼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과 유 리된 윤리 의식, 자신에 대한 사회의 과대한 평가, 그런 갑옷에 심한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 그럼에도 발기는 계속되었고, 무릎을 어루만지는 아키코의 손길에 자칫하면 선을 넘어설 뻔 하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팽팽하던 공기가 쭉 빠져나간다. 모치즈키는 몸을 비틀어 수화 기로 손을 뻗었다. "여보세요......" 목이 칼칼하게 말라, 모치즈키는 일단 침을 삼켰다. "선생 님, 접니다. 팩스 보셨나요?" 공중 전화인지, 차들이 달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케시의 목소 리였다. "아, 음, 물론 고맙네......잘 봤어." "선생님, 주무시고 계셨나요?" "아, 아니야, 벌 써 잘 리가 있나." "죄송합니다. 밤늦게, 내일 걸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가능한 한 빨리 알 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요. 내일 아침에 다시 걸까요?" 모치즈키는 시계를 보았다. 겨유 10시가 좀 넘은 시각이었다. "아니야, 괜찮아, 신경 쓸 거 없어." "그럼, 보내드린 팩스에 무슨 의문점 없었습니까?" 모치즈키는 팩스를 들었다. 그러자 옆에 있는 아키코도 얼굴을 바짝 들이밀고 모치즈키와 거의 같은 시점에서 리포트를 바라보았다. 볼과 볼이 거의 스칠 듯하였다. 때문에 모치즈키의 사고는 토막토막 연결되지 않았다. "음.......6년 전 9월4일에 아버지가 자살했다. 그 두세 달 전부터 아사카와 사유리의 정신 상태가 이상해졌다고 하는 데, 그 반대가 아닐까? 아버지의 자살 때문에 사유리가 우울증에 빠진 게 아닐까 싶은 데......" "아닙니다. 미야카와 씨한테 확인해봤는데, 역시 사유리 씨는 7월 하순 서머 캠페인 때부터 우울해했다고 합니다." "우울해하다니,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했다는 거지?" "호 텔 방에 틀어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밥도 전혀 안 먹었다고 합니다." "그밖에는?" 잠시 아 무 대꾸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거기까지밖에 듣지 못했어요. 다음에 미야카와 씨를 만나 면 자세하게 물어보겠습니다." "그러지, 가능하다면. 아아, 그리고 그 미야카와라는 사람의 주관이 섞여서는 안 돼, 절대로, 알겠나? 자네가 들어야 할 내용은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사 실뿐이야." 모티즈키가 직접 우울해하는 사유리의 모습을 보았다 해도 증세를 판단하기 어 렵다. 하물며 두 사람을 매개로 한 보고이니, 대단한 결과는 그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궁금하십니까?" "뭐가?" "사유리 씨의 아버지가 왜 자살했는 지?" "그야 물론이지, 하지만 지금 단계에선 아직 자세히 모르고 있는거 아닌가?" "네, 지 금은 아버지 슈이치로가 사무실의 발코니에 로프를 묶고 목매달아 죽었다는 것뿐입니다." 다케시는 내일 아침 일찍, 요쓰야에 있는 무대 조명회사 스테이지 루프를 찾아갈 생각이었 다. 슈이로치는 생전에 이 회사를 나가다라는 친구와 함께 경영하였다. 스테이지 루프가 있 는 곳은 미야카와사 가르쳐주었다. -슈이치로의 자살에 관해 알고 싶으면 나가다와 접촉해 보는게 제일 빠른 방법이지. 미야카와는 다케시에게 그렇게 충고했다. "더 조사할 생각인 가?" "네, 내일이요. 선생님, 그 비밀을 알게 되면 사유리 씨를 치료하느데 도움이 될까 요?" "으음...... 글쎄, 다케시 군, 미리 말해두는 편이 좋을 것 같은데. 사람의 정신이란 그 렇게 간단히 치료되는게 아니야. 다만 가족의 역사를 알게 됨으로써 사유리라는 여자의 일 부를 알 수 있을 것이고 병의 원인을 찾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고, 뭐 그 정도겠지." "알겠 습니다." "무리는 하지 마." "그리고 이건 지금 막 들은 건데......메모하실 수 있나요?" "아, 그래." "05357-8-06XX,마키 요이치. 주소는 아직 모릅니다." 모치즈키는 팩스 용지 위쪽에 전화 번호와 이름을 적어넣었다. "5년 전 4월, 아사카와 사유리는 '국단 바람'의 무 대 에 선 적이 있습니다. 7월에 그 극단의 전속 배우인 마키 요이치와 동거 생활에 들어갔고, 그리고 3년 후 가을, 둘은 동시에 극단을 탈퇴,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고 하는데요. 지금 불 러드린 번호는 마키 요이치의 고향집 전화 번호입니다. 극단의 책임자가 우연찮게 주소록에 다 그 전화 번호를 적어두어서......" "05357...... 아니, 이건 고사이 시의 지역 번호잖나." "그렇습니다." 고사이시는 하마마쓰의 바로 서쪽, 하마나 호 주변에 있는 도시이다. "그렇 다면..... 아사카와 사유리는 마키 요이치를 찾아 도쿄에서 여기까지 왔을 가능성이 높은데." "그렇습니다, 선생님. 아참, 그리고 사유리 씨가 병원에서 허밍한 곡 말인데요...... 그건 사유 리 씨와 아키 요이치의 추억이 담긴 노래더군요. 두 사람이 처음 함께 공연했을 때, 사유리 씨가 자기 노래를 마키 요이치와 듀엣으로 노래하면서 가르쳐주었고, 그때부터 두 사람의 사이가 깊어졌다고...... 극단의 책임자가 그러더군요." 모치즈키는 마음이 아팠다. 다케시가 사유리에게 호감을 품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 사랑하는 사람이 과거 애인과의 추 억에 잠겨 허밍을 했다니, 설령 함께 허밍을 한다해도 다케시로서는 사유리의 기억 세계에 파고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아키 요이치의 고향집에는 전화를 해보았나?" "네, 지금 막." "그래서 어떻게 됐지?" "아키 요이치 씨의 어머님이 받으셨습니다." "마키 요이치 본인 은?" "없었어요." "그때 집에 없었다는 뜻인가?" "......지금 어디 있을 것 같습니까, 마키 요이치란 사람?" 다케시는 도리어 모치즈키에게 물었다. "먼 곳인가?" "네, 뭐." 전화카드 가 다 떨어지는, 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배를 타고 있답니다. 제7와카시오마루라는 참치 잡이배를 타고 지금쯤 뉴질랜드 근해에 있을 거라는데요." 다케시 재빨리 그렇게만 말했다. "참치잡이배?" "죄송합니다. 카드가 다 되어서......" 거기서 전화는 끊어졌다. 하마마쓰 근 교가 집이라는 마키 요이치라는 남자를 발견한 것은 큰 수확이었다. 사유리의 자살 미수와 마키 요이치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사유리의 뱃속에 있는 아이 의 아버지가 마키 요이치일 가능성이 높다. 앞으로 넉 달 후면 애를 낳을 텐데, 남자는 바다 에 있다니...... "길기도 하네요."" 수화기 바깥쪽에 귀를 대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키코가 말했다. "무지하게 열심히로군요. 어머 이것 좀 봐, 흐물흐물해져버렸어." 아키코 는 말하면서 모치즈키의 바지 지퍼 위를 더듬었다. 모치즈키는 순간 눈을 감았다. 여자 문제 때문에 신경증에 걸려 통원하고 있는 환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담 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들이마시고 재떨이에 내려놓고는 팩스를 보는 척했다. 그러나 아키 코는 재떨이 쪽은 보지도 않고 벌레라도 비틀어 죽이는듯한 손놀림으로 담뱃불을 비벼 껐 다. "선생님 같은 남자가 담배 피면 안돼요." 모치즈키는 분노에 앞서 압박감을 느끼고 그 말을 기억에 새겼다. 정면에 있는 선반에는, '현대 정신 치료' 옆에 하아이 여행 때 찍은 가 족 사진 액자가 놓여 있다. 숯불처럼 따뜻한 아버지와 엄마와 딸의 초상에 꺼진 담뱃재가 겹쳐졌다. 아키코라면 할지도 모른다. 주저 없이 짓밟아 삼각형의 한 변을 강탈할지도 모른 다. 모치즈키의 가슴 한구석에서 경종이 울렸다. 더 늦기 전에...... 언제 머리를 풀어내렸는지 모치즈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땋아서 틀어 올렸던 아키코의 머리가 지금은 풍만한 가슴 을 가릴 정도로 길게 늘어져 있다. 모치즈키는 한 마리 뱀이 무수한 뱀으로 증식한 듯한 착 가에 사로 잡혔다. 엉킨 머리카락에 빗 대신 손가락을 집어넣고 아키코는 열심히 뱀을 쓰다 듬고 있다. 그 다음 어떻게 될지 그 광경이 모치즈키의 눈앞에 또렷하게 떠 오른다. 현관 벨 이 울리고 문 밖에서 아키코의 모습을 보았을 때부터 몇 번이나 뇌리에 명멸하였고, 그때마 다 육체를 팽창시켰던 광경...... 어떻게든 떨쳐버리려고 평온한 가족의 초상을 떠올렸지만 그 것도 방파제가 되지는 못했다. 모치즈키는 마침내 왼손을 아키코의 허리에 감고 몸을 바싹 잡아 당겼다. 아키코는 그 움직임을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들이민다. 그리하여 입과 입이 겹 쳐지고 혀가 휘감기는 순간, 모치즈키의 이성은 무수한 뱀에 뒤엉켜 작동을 멈추고 말았다. 수평선 1 마키 요이치는 뉴질랜드 근해, 동경 180도선의 해상, 379톤급 원양 어선 제7와카시오마루의 브 리지에 있었다. 이 해역은 날짜 변경선이 동쪽으로 약간 치우쳐 있는 탓에 아직 일본과 같은 날 이었다. 그러나 이제 조금만 동쪽으로 가면 두 번째 오늘을 맞이하게 된다. 일본과의 시차는 세 시간, 밤 11시 반이 약간 넘은 시각이다. 잔잔한 바다는 검은 거울의 표면과 같다. 네 시간 동안 당직을 서야 하는 요이치는 졸음과 싸우면서 조타실 바닥으로 눈길을 떨구고 있다. 빈 알루미늄 컵이 항해 기구가 즐비한 선반 앞에 놓여 있다. 커피를 끓이려 해도 몸이 말을 듣 지 않는다. 유리로 둘러싸인 좁은 조타실 안은 깊은 정적에 싸여 있다. 배를 탄 후 처음 경험하 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잔잔한 바다가 두렵기만 하다. 피로는 거의 한계에 도달해 있었다. 선실도 조용했지만 요이치의 귀에는 얼마 전까지 시끌시끌 했던 소리가 남아 있어, 무슨 계기만 있으면 되살아나 은빛 비늘이 반짝이며 참치가 튀어오르는 장면이 뇌리에 떠오른다. 몇 시간 전까지 작업 갑판은 전쟁터를 방불했다. 잇달아 끌어올려지는 전장 2미터가 넘는 참치에 선원들의 눈에서는 불꽃이 튀었다. 낚싯줄의 거의 끄트머리에 잇달아 참치가 7마리나 걸려든 것이다. "영차, 영차." 외치는 소리와 함께 숙련된 어부들이 갑판을 뛰어다니며 서로 고함을 질러댔다. 요이치는 오늘 낮의 빛과 소음으로 가득했던 장면을 토막토막 떠올리면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 다. 그러다 앞으로 푹 고꾸라진 얼굴을 오른손으로 받친 순간 응고된 피에 닿아 오른쪽 뺨이 아 팠다. 그리고 상처에 손이 닿자 선배 선원 미야자키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상처는 끌어올려 진 상어와 몸싸움을 하다가 미야자키한테 얻어맞아서 생긴 것이었다. 잘못해서 상어가 걸려들어 갑판으로 끌어올려지면 신참 선원이 나서서 상어를 잡아야 한다. 사 어의 등에 올라타 T자형의 거대한 못을 급소에 박고 숨통을 끊은 뒤 지느러미를 잘라내고 바다 에 버리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이렇게 얻은 지느러미는 갑판에 널리 말려서, 일본에 돌아가면 전문 업자한테 넘긴다. 지느러미 를 판 돈은 선원들끼리 균등하게 분배하도록 되어있다. 중화요리의 원료가 되는 상어 지느러미는 선원들의 쏠쏠한 부수입이었다. 본업이 참치잡이라면 부업은 상어 지느러미다. 참치를 잡아들여 버는 수입은 선장, 조업장, 기관장 등 그 계급이나 일에 양에 따라 배분된다. 조업장은 보통 선원 의 두세 배쯤 되는 돈을 거머쥔다. 그러나 상어 지느러미로 번 돈은 신참이나 고참이나 상관없이 고르게 분배되기 때문에 그 일이 신참 선원들 담당으로 정착되고 만 것이다. 제7와카시오마루에는 신참 선원이 두 명 타고 있다. 말할 필요도 없지만, 신참이란 말 그대로 참치잡이배를 처음 탄 선원을 말한다. 스물네 살에 일찌감치 샐러리맨을 때려치운 미즈코시와 소 극단의 배우였던 별종, 스물아홉 살의 마키 요이치가 이번 항해의 신참이었다. 가혹한 노동 현장인 참치잡이배는 항상 일손이 부족하여 원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배를 탈 수 있다. 수산 고등학교를 졸업한 사람한테는 어느 정도 정해진 코스이고 재학중에 실습으로 이미 경험한 세계지만, 사립 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하여 지방 도시의 시청에서 근무했던 미즈코시나 역 시 사립 대학 문학부를 졸업하여 무대 배우의 꿈을 추구했던 요이치에게는 종전의 뜨뜻미지근한 생활과는 천지 차이가 나는 세계였다. 오늘 오후, 갑판으로 끌어올려진 상어의 등에 올라탄 요이치는 T자형 못으로 급소를 찌르려다 실패했고, 상어는 몸을 비틀며 난동을 부렸다. 바로 옆에서 부표를 끌어올리고 있던 미야자키가 피할 틈도 없이 오른쪽 뺨을 상어 꼬리에 세게 맞고 말았다. 미야자키는 순간적인 뇌진탕을 일으 켰지만 다행히 바다로 굴러떨어지지는 않았다. 얼굴을 들어 자신을 덮친 것의 정체를 간파하자마 자, '야 이 새끼야, 그런 것도 한 방에 못 해치워'라고 요이치한테 고함을 지르고 힘껏 한대 내갈 겼다. 상어 꼬리가 미야자키의 얼굴을 친 것도 모르고 상어와 결투를 벌이고 있던 요이치는 자기를 겨냥한 주먹에 균형을 잃고 갑판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올려다보니 '쳇' 하며 피 섞인 침을 내뱉 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고참 선원 미야자키의 모습이 보였다. 그제야 간신히 상어 꼬리가 미야 자키를 쳤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때릴 것까지야 없지 않나 하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러 나 바다가 아니면 도망칠 곳이 없는 배 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체력도 어획량에 대한 감도 아 니고, 선원들간의 협조라는 것을 슬슬 깨달아가고 있던 요이치였다. 분노를 억제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냈다가는 언젠가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진다. 이 배에는 열아홉 명의 남자밖에 없다. 요이치는 '빌어먹을'이라고 중얼거리며 일어나 검붉은 색으로 탄 미야자키의 목덜미를 쏘아보면 서 분노의 손길로 상어의 급소에 못을 박았다. 그리고 반응이 오자 빙글빙글 돌려 이번에야말로 숨통을 끊어놓았다. 상어의 급소를 찾아내기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선배들은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신참에게 시 키고 실패하면 고래고래 고함을 지른다. 미야자키도 그렇게 배운 것이다. 선원들은 사소한 일에도 서로 욕지거리를 한다. 그것이 이 세계의 관습이다. 그러나 분노의 꼬리를 오래 끌지 않는 것도 이 세계의 관습이다. 미야자키는 툭하면 선원 생활은 대학을 졸업한 책상물림들이 버틸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며 신 참인 요이치와 미즈코시를 물고 늘어졌다. 앞으로 반 년 이상이나 남아 있는 항해 기간 동안, 미 야자키와 편하게 지낼 수 있을지 요이치는 자신이 없었다. 상처를 더듬는 동안 다시 잠이 쏟아졌다. 위성을 이용한 자동 조타 장치가 작동하고 있는 이상 조타륜을 만질 필요도 없이 배는 정확한 뱃길을 따라 목적지의 어장으로 향한다. 모든 것을 기계 에 맡기고 별다른 임무 없이 진행 방향을 주시하면서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야 하는 요이치로 서는 오히려 졸음과의 싸움이 임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참 후 요이치는 푸시시 몸을 떨었다. 꿈 특유의 추락감도 아니고 배 전체가 흔들린 것도 아 니다. 몸 속 저 깊은 곳에서 조그만 파동을 인지한 듯한 느낌이었다. 심장의 고동이 공기를 압박 하여 소밀파가 되어 자기 쪽 가슴으로 전달된 듯한....... 그는 자기도 모르게 흥얼거리고 있었다. 과거에 수도 없이 불렀던 그리운 노래. 동시에 어디선 가 그녀의 향기가 코를 자극했다. 그녀와의 파국이 없었다면 참치잡이배는 타지 않았을 것이다. 처음 만났을 때의 충격도 잊을 수 없고, 처음으로 몸을 섞은 밤의 광경도 강렬하게 남아 있다. 5년 전 장마가 막 걷혀가는 밤바다에서였다. 국도 134번에 흐르는 헤드 라이트와 마치 지하 공 간에서 울려오는 듯한 자동차 소리를 배경 음악으로 요이치는 여자를 안았다. 바지와 속옷이 바 닷물에 젖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을 만큼 욕망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어두운 바위 뒤였다. 젖어 미끌거리는 바위 표면을 등지고 그는 행복감을 만끽하였다. 머리 바로 위 어둠 속으로 긴 장화를 신은 낚시꾼이 걸어갔지만 그는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바다 위에서도 요이치는 그 때의 충동을 가끔 생각한다. 요이치는 사타구니로 눈길을 떨구어 발기한 그것을 보았다. 얇은 트레이너 팬티 아래로 기억에 서 환기된 욕망이 뭉글뭉글 고개를 쳐들었다. 항해를 시작한 지 넉 달, 요이치는 지금까지 마스터 베이션은 물론 몽정도 하지 않았다. 거짓말 같지만 바다 생활에 몸이 지쳐 여자에 대한 그리움 따위는 발휘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뭍에서 애욕에 찬, 끈적끈적한 남녀 관계에 젖어 있었던 나 날을 생각하면, 자신의 신체를 지배하는 본능까지 변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식욕과 수면욕, 배 설욕에 비하면 성욕은 저 아래 위치하는 모양이다. 성욕의 정도는 일반적으로 문명의 성숙과 함 께 커진다. 육체를 혹사하고 항상 자연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참치잡이배는 하이테크놀로지 기 기로 에워싸여 있다고는 하나 여전히 중세 이전의 원시적인 노동의 장이나 다름없다. 요이치는 일어나 신단을 향하여 무사 항해를 빌고, 방향을 확인하며 저 먼 북쪽에 있는 일본을 생각했다. 그 나라에는 버려두고 온 여자가 있다. 물론 둘의 관계는 선혈로 남김없이 씻겨내려가 면서 말 그대로 끝났다. 여자와의 첫 만남의 광경은 요이치의 욕망을 자극했지만 파국의 광경은 반대로 그를 위축시켰다. 요이치는 눈을 떨구고 의미 없이 혼자 웃었다. 항해가 시작된 지 이제 겨우 넉 달이 지났을 뿐 앞으로 1년 가까이 바다위에서 생활하지 않으 면 안 된다. 요이치는 그 생각만 하면 눈앞이 캄캄했다. 바다는 불가사의한 존재였다. 왜 발작적 으로 참치잡이배에 타고 말았는가, 현실에서 도망가기 위해서인가? 뭍에서 일어난 많은 사건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면 바다가 아니면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의 경우는 특히 더 그랬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고 엉킨 실타래를 풀어주는....... 바다는 그에게 보이지 않았던 것을 뚜렷하 게 느끼게 해주는 존재였다. 휘청휘청 일어나 항해 일지에 현재 위치를 적어넣으려고 할 때, 갑자기 조타실 문이 열렸다. 그 러나 선실에서 이쪽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요이치는 누가 문을 열었는지 금방 알아챘다. 미야자키 아키미쓰, 낮에 요이치를 때린 장본인이다. 그는 항상 맨발이었다. 선실을 걸을 때 미야자키는 어째서인지 신발을 신지 않는다. 작업 갑판 에서 일을 할 때는 긴 장화를 신지만 그외에는 늘 맨발이다. 그래서 미야자키의 발걸음은 소리가 나지 않아 동료들은 그를 유령이라고 불렀다. 오늘밤 미야자키는 당번이 아니다. 다른 선원들은 코를 드르렁거리면서 잠에 빠져 있는데 '자식, 무슨 일로 조타실에 나타난 거야' 요이치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요이치가 당직을 설 때 조타실에 나타난 것이 벌써 세 번째다. 항해 일찌를 제대로 적었는지 조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졸고 있는지 망을 보러 오는 것도 아니다. 미야자키는 들어오면 항상 무슨 소린지도 모를 말을 중얼중얼거리다가 선실로 돌아가곤 했다. 미야자키는 요이치를 쳐다보지도 않고 조타실을 가로질러, 앞쪽 파도막이 갑판 언저리를 뚫어 지게 쳐다보았다. 낮에 요이치의 뺨을 갈긴 일 따윈 완전히 잊어버린 투였다. 배 안에서 치고받고 싸우는 것이 일상적인 일이니 일일이 기억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미야자키를 따라 요이치도 같은 방향을 쳐다보았다. 갑판에서 뱃머리에 이르는 계단에 사람 그 림자가 어른거렸다. 그림자는 계단 끝까지 올라가 뱃머리 중앙 돛대에 기댄 채로 움직임을 멈췄 다. 조타실의 형광등 빛이 유리에 반사되어 잘 보이지 않았다. 요이치는 손바닥으로 빛을 가리고 눈을 찡그렸다. 키가 작고 탄탄한 뒷모습으로 보아, 그가 조업장 다카기 시게요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저 할배, 또 빌고 있군." 미야자키가 그렇게 말하고는 그제야 요이치를 돌아보며, '어이, 자네, 저 할배가 어디에다 빌고 있는지 알아?' 라고 물었다. 요이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돛대에 왼손을 대고 있는 시게요시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미사키 항에서 요이치가 제일 처음 말을 나눈 것이 시게요시였다. 3월 말이었다. 요이치는 부두 에 오토바이를 세우고 정박해 있는 어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자주 바다에 관 한 꿈을 꾸었다. 선장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도시에서의 생활에 지칠 대 로 지친 그가 동경에 찬 눈길로 제7와카시오마루란 이름의 배를 올려다보고 있을 때, 트랩에서 체구가 탄탄한 남자가 내려왔다. 그가 다카기 시게요시였다. 요이치는 내려온 시게요시에게, '이 배 참치잡이뱁니까?' 라고 물었고, 그렇다고 대답하는 시게 요시에게 요이치는 '몇 톤 짜리죠?' 라고 잇달아 물었다. "379톤." 시게요시는 퉁명스럽게 그렇게 말하고는 곧, '일손이 모자라서, 다음 주에 출항해야 하는데 어 떻게 될지......' 라고 혼자 중얼거렸다. 요이치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요이치에게는 마치 무슨 신의 계시처럼 들렸다. 그 당시의 심경은 그랬다. 요이치에게 그 소리는 '별 할 일 없으면, 자네 한번 타보지 않겠는가'라는 권유처럼 들렸던 것이다. "저 같은 사람도 참치잡이배를 탈 수 있나요?" "물론이지." 시게요시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요이치의 몸을 한 차례 훑어보고는 그 늠름한 체격에, '타고 싶으면 언제든지 대환영이야'라고 덧붙였다. 요이치는 다카기 시게요시가 바로 제7와카시오마루의 조업장이라는 것을 몇 분 후에 알았다. 와카시오 수산 사무실에서 정말 배를 탈 마음이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의지를 명확히 하자 그는 자신의 이름과 지위를 밝혔다. 조업장이라고 알려주긴 했지만 참치잡이배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 혀 없던 요이치로서는 그저 얼떨떨할 뿐이었다. 거룻배의 사공 정도밖에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참치잡이배에서 조업장은 선장보다 지위가 높고 이번 항해에서 시게요시는 선장을 겸하 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배 위에서는 절대 권력자였다. 시게요시는 키는 작지만 유난히 어깨가 넓다. 검은 장화를 신고 수건을 목에 둘렀고 얼굴은 주 름투성이였다. 요이치는 그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그런 시게요시가 뱃머리에서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더구나 모두가 잠든 후에....... 놀라웠다. 잠 들어 있어야 할 사람이 이런 밤늦은 시각에 둘이나 눈을 뜨고 있다. 한 사람은 소리도 없이 조타 실에 나타나고 또 한 사람은 뱃머리에 우뚝 서 있다. "어이, 내가 하는 소리 안 들려. 저 할배가 어디에다 기도하는지 너 알고 있느냐구." 미야자키는 요이치의 어깨를 툭툭 쳤다. 어두워서 잘은 알 수 없지만 저게 기도하는 자세일까, 하고 요이치는 의심스러웠다. 시게요시가 기도를 하고 있다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기도를 한달 말이에요. 조업장이?" "그럼, 달리 뭘 한단 말이야?" 미야자키는 충혈된 눈으로 요이치를 보았다. 요이치는 미야자키가 싫기도 하지만 대하기도 어 려웠다. 그가 가까이서 벌건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면 가슴속까지 들여다보는 듯하여 숨이 막힐 것 같다. 미야자키와 상대하고 있으면 균형을 잃어버릴 듯한 느낌이 든다. 요이치는 미야자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뚫어질 듯 쳐다보는 시선 을 집요하게 요이치의 눈에 맞추고 절대로 먼저 눈길을 돌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요이치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뱃머리에 있는 시게요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게요시는 여전히 같은 자세였다. 합장을 하고 있는것은 아니다. 다만 기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그런 것 같은 분위기가 확실하게 느껴지기는 한다. "처음 보았는데요." 실제로 말 그대로였다. 요이치는 넉 달에 달하는 항해 기간중 몇 번이나 당직을 했지만 뱃머리 에서 아무 일도 없이 서 있는 시게요시를 보기는 처음이었다. "늘 저런데." 미야자키는 경멸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조업장이 왜 기도하는지 알아요?" "알지." 그렇게 말하면서 씩 웃고 미야자키는 주먹으로 유리를 톡톡 쳤다. "저 인간이 성경책을 읽고 있는 걸, 난 봤다구." 조업장 주제에 성경책 따위 읽어서 무엇에 쓰겠냐는 식으로, 미야자키는 유리를 두드리는 주먹 에 힘을 넣었다. "더구나 저 인간, 오늘 오후에 이 근처에서 참치를 일곱 마리나 잡았는데도, 어장을 바꾸겠다고 얼빠진 소리를 하잖아." 어장을 바꾸는 것과 성경책을 읽는 것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요이치는 미야자키 가 어떤 맥락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요이치는 얼른 미야자키가 꺼져주었으면 싶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선원의 평균 연령이 서른일곱 살인 이 배에서 미야자키만 요이치와 같은 스물아홉 살이었다. 그러나 요이치는 미야자 키에게 뱃사람으로서의 선배 대접을 해주려고 꼬박꼬박 말을 높여주었다. 하지만 미야자키는 당 연하다는 듯 아랫사람 대하듯이 함부로 말을 뱉었다. 요이치는 이 남자가 도무지 같은 나이로 보이지 않았다. 머리는 위쪽이 절반이나 훌러덩 벗겨 졌고 귀 옆에서 머리 뒤쪽으로 가늘고 헤실헤실한 머리칼이 꾀죄죄하게 늘어져 있다. 머리만 보 면 예순이라고 해도 별로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얼굴은 주름 하나 없고 피부는 까무잡잡 하게 타서 광택이 났다. 몸은 등이 약간 구부러졌지만 손발이 길고 어깨에서 두 팔로 이어지는 근육은 우람하게 발달해 있었다. 요이치도 완력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미야자키에게 팔씨름으로 이길 자신은 없었다. 한번은 우 연히 배의 난간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는 미야자키를 본 일이 있다. 횟수를 세다가 서른까지 세고 서 요이치는 자기 선실로 돌아갔다. 그 후에도 미야자키는 묵묵히 계속해서 턱걸이를 했다. 그는 평소 맨발에 뒤꿈치를 들고 걷는 버릇이 있는데 '발바닥이 뜨거워서 그래'라며 그 이유를 공공연하게 떠벌렸다. 실제로 그는 밤에 잘 때에도 항상 맨발을 담요 밖으로 내놓았고 날씨가 나빠져 기온이 내려가 도 절대로 발을 담요 속으로 집어넣지 않았다. 미야자키와 같은 방을 쓰는 선원이 한밤에 그의 발을 만져보았더니, 정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뜨거웠다고 한다. -열을 내보내야 하거든. 열이 가득 차면 몸에 안 좋단 말이야. 미야자키가 주장하는 이유란 그런 것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참치잡이배 선원답지 않은 미야자키가 이 제7와카시오마루를 상징하고 있다....... 요이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균형이 안 잡혀 있고 어딘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상태. 더구나 미야자키의 말처럼, 배의 최고 책임자인 시게요시가 매일 밤 뱃머리에서 기도를 올린다고 하니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아닐 수 없다. 실은 다카기 시게요시는 핀치 히터였다. 원래 제7와카시오마루의 조업장은 미사키 항의 전설적 인 조업장 기무라 코타였는데 출항을 코앞에 두고 지주막 출혈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런 그의 특 별 추천으로 다카기 시게요시가 후임 자리를 맡게 된 것이다. 주로 무로토의 선주 아래서 조업장 노릇을 했던 시게요시의 경력을 지금 배를 타고 있는 대부 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 정말 조업장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그 기량을 의심하는 목소 리도 적지 않다. 후임자로 그를 강력하게 추천한 기무라조차 병 때문에 많은 말을 하지 못했다. 선원들은 그저 기무라 같은 유명한 조업장이 추천했으니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차에, 오늘 저녁 단시간에 7마리나 참치를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시게요시는 어장을 이동 하겠다는 방침을 세웠다. 말은 안 하지만 선원들의 마음속에 의문이 생긴 것은 확실하다. 귀항하여 뭍으로 올라갔을 때 어느 정도의 돈을 손에 쥐는가, 풍어인가 흉어인가, 그 모든 것은 조업장의 기량에 달려 있다. 조업장은 풍부한 경험과 통찰력으로 어장을 탐지하여 배를 그곳으로 인도하고 선원들에게 보물을 선사한다. 그 공적으로 뱃사람들의 존경과 신뢰를 얻는 한편, 선상에 서 발생하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해야 하는 책임도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재 시게요시한테서는 리더로서의 자질을 감지할 수 없었다. 미야자키가 그가 없는 곳 에서 그를 '할배'라고 부르는 데는 아마 그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요이치는 짐작하고 있었다. 선원들은 보통 조업장을 친밀하게 '대장'이라고 부른다. 요이치는 항해 일지를 펼치고 배의 위치를 적어넣었다. 앞으로 두시간만 지나면 당직이 교체된 다. 이때 미야자키는 진지한 표정으로 뱃머리에 있는 다카기 시게요시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쏘아보 면서, '아니면 저 할배, 목숨이라도 구걸하고 있는 건가'라고 말을 툭 뱉었다. 쌀이 담겨 있는 접 시가 또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요이치는 무슨 말을 하려다 말을 삼켰다. 그는 말수가 적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야자키와 단둘이 있으면 전혀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나오려던 말도 왠지 타이밍을 잃고 만다. -얼른 꺼져....... 마음속으로 그는 절실하게 바랐다. 미야자키는 회전 의자에 앉아 있는 요이치의 어깨에 손을 얹고 귀밑에다 입을 바짝 갖다대고 속삭였다. "너, 여자 때문에 복잡한 일이 생겨서, 도망치려고 이 배 탔다면서......." 그 말만 하고 미야자키는 조타실 문을 열고 나가 자기 선실로 돌아갔다. 올 때는 소리 없이, 그 러나 이번에는 들릴락말락하는 발소리를 내면서. 요이치는 미야자키가 열고 나간 문을 한참이나 무표정하게 쳐다보고 있다가 선실로 내려가는 타박타박하는 발소리가 충분히 멀어지기를 기다려, '어떻게 저 자식이 내가 배를 탄 이유를 알고 있는 거지?'라고 중얼거렸다. 2 어장을 이동할 때면 선원들은 평화로운 휴일을 즐긴다. 그 다음날 잔잔한 바다는 피곤한 육체 를 어루만지기에 더할 나위 없는 적당한 흔들림을 제공해주었다. 배 위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어 구를 손질하고 고장난 라인 호러를 수리하는 정도여서, 당직을 제외한 선원들은 대부분이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어젯밤 당직이 끝나고 잠을 충분히 잔 덕분인지 요이치는 평소보다 기분이 한결 좋았다. 날씨 가 좋으면 바다는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여느 때처럼 고리가 잘려나가고 내장과 지느러 미가 제거된 참치가 나뒹굴며 갑판은 조촐한 술자리로 변하고 있었다. 술을 마시면 싸움질이 벌어지는 경우도 많아 한 달에 마실 수 있는 알코올의 양을 제한하는 배 도 적지 않지만 제7와카시오마루에는 그런 제한이 없다. 선원들은 오후가 되자 마음이 맞는 사람 들끼리 삼삼오오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요이치는 그런 술자리에 끼지 않고 어젯밤 시게요시가 서 있었던 뱃머리에 서서, 깊은 밤 이런 데서 생각하려면 어떤 내용이 어울릴까 상상하고 있었다. 그는 옛날에 하던 버릇대로 다카기 시 게요시란 인물을 형상화하는 데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쏟아지는 태양빛을 등으로 가리고 같은 장소에 서서, 같은 시선으로 밤바다를 향해 토해낼 말을 생각했다. 등 뒤에서 술취한 남자들의 웃 음소리가 터져나와 생각이 일단 끊어졌다. 옛날 항해를 하다가 외지의 항구에 기항했을 때 우연 히 똑같은 창녀를 안았다는 두 남자의 우스갯소리였다. "아, 그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이놈과 구멍동서가 되었다니까, 글쎄." 벌써 몇 번이나 들은 이야기였다. 요이치가 가능하면 술자리에 끼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로서는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은 이야기를 다시 들으면서 재미있는 척할 여유가 없었다. 배 위 에서 이 세상의 좁음을 새삼 깨닫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바로 왼쪽 아래에서 금속과 금속이 부딪치는 탁한 소리가 들렸다. 라인 호러를 다 수리한 시게 요시가 계단에서 몸을 반쯤 바다 쪽으로 내밀고 가이드 롤러를 점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게 요시는 그대로 계단을 올라와 위 갑판에 있는 요이치의 모습을 발견하자 구명 보트의 킬을 타고 앉았다. "여어, 뭘 하고 있는 거지?" 어젯밤의 다카기 시게요시를 흉내내고 있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요이치는 애매하게 대답하고는 불쑥 본심을 털어놓고 싶은 마음에, '조업장님이 어젯밤 여기서......'라고 조심조심 말을 꺼내다가 브리지의 유리창을 올려다보았다. 조타실 유리창 너머로 미야자키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 저놈이 당직을 서는 시간인가. 요이치는 시선을 돌리고 시치미뗀 표정을 지었지만 시게요시는 표정의 변 화를 놓치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젯밤 자네가 당직이었나?" "네에." "그럼 보았겠군." 시게요시는 킬에서 일어나 요이치 쪽으로 걸어오더니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억세고 살집이 두꺼운 손이었다. 미사키 항의 와키시오 수산 사무실에서 시게요시는 '자네 정말 참치잡이배를 탈 생각인가?' 라고 물었고 요이치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덧붙여 이렇게 물었다. "만약 선상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인간이 있으면, 자네 어떻게 하겠나? 싸움이라도 걸 건 가?" 요이치가 상대방의 진의를 캐듯 '물론, 참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시게요시는 그 두툼한 손을 꼭 지금처럼 어깨에 올려놓았다. "싸움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녀석은 내 배에 태울 수 없어." 요이치는 그때 유독 진지했던 시게요시의 표정과 어깨에 얹혀진 손의 무게를 잊지 않고 있었 다. 동시에 만만치 않은 일일 거라는 각오를 단단히 했다. "제일 나쁜 것은 앙심을 품는 일이야. 그때그때 바로 발산하고 앙금을 남기지 말아야지. 더러 쌈박질을 해도 나로서는 묵묵히 지켜보는 길밖에 없지만." 그렇다면 지금 요이치의 심경은 어떠한가? 미야자키에 대한 증오가 조금씩 깊어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아니, 증오와는 조금 다르다. 그 감정은 뭐라 말로 적당하게 표현할 수가 없다. 다루기 힘든 상대, 가능하면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대였다. 시게요시는 목에 두른 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까칠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젯밤 내가 뭘 했을 것 같나?" 요이치야말로 도리어 묻고 싶었다. -어젯밤의 행위가 사람들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 거라고 생각합니까? 시커먼 바다의 표면을 마냥 들여다보는 행위에서 어떤 의미를 찾으라는 말인가. 미야자키는 기 도하는 포즈로 받아들인 모양인데, 그밖에 적당한 해답은 없을 듯했다. "기도하고 있었나요?" 말을 꺼내놓고도 묘하게 부끄러워 요이치는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 시게요시는 놀란 얼굴을 들 고 조타실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미야자키가 그러던가?" "어젯밤에 당직을 서고 있는데 미야자키 씨가 조타실에 왔었습니다." "그래서, 녀석이 그런 말을 한 모양이군." "네......." "그밖에 다른 말은 하지 않던가?" "아니오." -아니면 저 할배, 목숨이라도 구걸하고 있는 건가. 미야자키는 그런 말을 툭 내뱉긴 했지만 요이치는 그 말은 입에 담기가 거북했다. "그랬어." 시게요시는 눈이 부시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저 멀리 앞쪽에 떠 있는 섬을 바라보았다. 눈 을 가늘게 뜨면 시게요시의 눈은 눈꼬리가 아래로 처져 애교띤 표정이 된다. 좀처럼 웃지 않는 사나인데, 미소를 지어도 똑같은 얼굴이 된다. 왼쪽으로 케르마데크 제도에 속하는 아열대의 작은 섬들이 보였다. 갑자기 입을 꾹 다물고 먼 곳을 바라보는 시게요시의 눈은 마음속에 담긴 과거의 기억을 향하고 있었다. "조업장님은 기독교인인가요?" 요이치는 듬직한 상반신에 비해 다리가 가느다란 이 남자가 불안한 걸음걸이로 교회에 다니는 모습을 상상해보았다. 어울리지 않았다. 상반신과 하반신의 균형이 맞지 않는 것처럼 교회에서 성 경책을 펼치는 시게요시의 모습에서 위화감이 느껴진다. "25년 전에 성당에 잠시 다닌 적은 있지." "지금도요?" 시게요시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 세례도 받지 않았는걸." "하지만 기도는 빼놓지 않고......." "누가 기도를 한다는 거야, 내가?" "아닙니까?" "미야자키 그놈이 그렇게 말했을 뿐이잖나." "그럼, 뭘......." "그야 말할 필요도 없잖은가. 새 어장을 찾기 위한 거지." 시게요시의 진의를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바다에 대해서 문외한이라고 하지만 밤바다에 그저 멍하니 서 있는 것으로 새 어장이 발견되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옛날 같으면 동물적인 감으로 바다 밑의 물고기떼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에는 어군 탐지기와 소녀 같은 기계류를 사 용하여 새 어장을 발견하는 것이 상식이다. 요이치는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고 눈을 돌렸다. 어느 사인가 섬 그림자가 사라지고 대 신 바다제비가 하늘을 가로질렀다. "하늘을 나는 새의 움직임으로도 어장을 찾을 수 있다면서요?" 요이치는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실제로도 물고기떼의 움직임과 새들의 움직임에 상관 관계가 있는 경우가 많다. "난 코로 고기떼 냄새를 맡는데, 밤에 후각이 더 예민해지거든." 참치가 사는 세계의 법칙은 지식만이 아니라 오감으로 파악해야 한다는 시게요시의 말이 그리 과장은 아니다. 베테랑 조업장쯤 되면 바다 색의 미묘한 변화나 조류, 바람의 촉감, 배의 엔진과 파도 소리와의 앙상블, 햇살의 강도, 하늘을 나는 새들의 울음소리....... 미각을 제외한 모든 감각 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바다 밑 어군을 찾아낸다. 그런 때는 아마도 바다 밑의 물고기떼의 움직 임에 신체의 일부가 동조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나 밤에는 가장 중요한 감각 기관인 시각이 차 단된다. 그런만큼 후각이 기능을 더한다는 말인가. 떠들썩한 어부들의 목소리가 잦아든 것도 아닌데 시게요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요이치는 '네?' 하고 다시 물었다. -갓난아이가 어쨌다고? 왜 갑자기 아기 얘기가 나온 거지? 참치의 산란을 말하는 건가? "자네 아이 있느냐고 물었어." "설마, 있을 리가 없잖아요, 마누라도 없는데." 다 알고 있는 일인데도 부정하는 데 유난히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뭐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말이야." 요이치는 어젯밤 미야자키가 조타실을 나가면서 남긴 말을 떠올렸다. -너, 여자 때문에 복잡한 일이 생겨서, 도망치려고 이 배 탔다면서. "미야자키한테 말했나요?" "뭐를?" "나에 대해서." "너의 무엇을?" "아니 그러니까......." "난 자네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다구." "하지만 미야자키가 그러던걸요. 여자 때문에 복잡한 일이 생기지 않았느냐고." "이런 얼간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네 얼굴만 보면 금방 알 수 있었어. 얼굴에 쓰여 있는걸. 가끔 있지, 도망치기 위해서 배를 타는 치들이....... 자네 경우는 그게 여자였단 말이야." 그리고 잠시 짬을 두고 시게요시는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 말이지, 막 배에 탔을 때는 불어터진 익사체 같은 얼굴이었다구." 그러고 보니 배에서 요이치는 좀처럼 자신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사유리의 맨션에서 거울을 보면서 열심히 극중 인물을 연기했던 때를 생각하면 깨끗하게 과거의 습관을 버린 셈이다. 그는 여자한테서 도망친 남자의 얼굴을 한 번은 보고 싶었다. 지금까지 몇 번씩이나 여자를 버리는 역 을 연기했지만 연기가 만족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지금은 어떤데요?" "굉장히 변했어." "어떤 식으로?" "들이마셨던 물을 다 뱉어내고 되살아났다고나 할까." 그러나 요이치 자신은 아직 그런 자각이 없다. 나날의 육체 노동에 정신이 없어, 앞으로 해야 할 일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배에서 먹고 자고 일어나 일하는 단순 노동으로 활기를 되찾고 있다면 답은 간단했다. 그러나 변화하고 있다는 시게요시의 지적은 정말 기뻤다. 오감으로 새 어 장을 찾아내는 시게요시 정도라면 겉모습만 보아도 심경의 변화를 간파하는 것쯤 대수롭지 않은 일이리라. -나도 그 무언가를 찾아낼 수 있을까. 그는 변화하는 자신을 실감하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의 눈으로 가슴속을 들여다보고 본래의 생 활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싶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다. 스물아홉이란 결코 때늦은 나이가 아니 다. 그때 시게요시의 눈빛이 흐려졌다. 시게요시는 레이더 마스트를 우러르듯 올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밑에 있는 조타실에서 위아래로 움직이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요이치와 시게요시가 서 있는 뱃머리보다 조타실이 더 높은 위치에 있다. 게다가 조타실 앞에는 항해용 기 기가 가슴 높이까지 쌓여 있어, 뱃머리에서 보면 가슴 아래 하반신은 보이지 않는다. 싸움에 지고 도망치는 무사 같은 옆 머리통만이 보였다. 미야자키의 눈빛이 퀭했다. 어젯밤과 정반대 상황이다. 어젯밤 요이치와 미야자키는 조타실에서 뱃머리에 서 있는 시게요시를 내려다 보았다. 그러나 지금은 요이치와 시게요시가 조타실에 있는 미야자키를 올려다보고 있다. 한 사람이 아니었다. 조타륜 옆으로 거뭇거뭇한 머리칼이 약간 드러 나 보였다. 좁은 조타실 안에 미야자키가 아닌 다른 사람이 있다. 미야자키가 입을 움직였다. 그 모양으로 봐서 뭐라고 고함을 지르는 것 같았다. 미야자키의 쭉 뻗은 손이 남자의 머리 위에 올라갔다. 미야자키는 힘주어 그 손을 아래로 내리눌렀다. 남자의 머 리가 밑으로 가라앉았다. 유리창을 통해서 미야자키의 윗몸과 떠올랐다 가라앉는 남자의 머리칼 이 보였다. "미야자키 저 자식,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마치 오락실의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위로 올라오려는 남자의 머리를 미야자키는 가차없이 내 려눌렀다. 요이치는 그때 체벌을 주는 선생님의 모습을 연상하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 숙제를 잊 고 해오지 않은 학생이 책상 위에 정좌하고 앉아 벌을 선 일이 있다. 다리가 너무 아파 견디지 못하고 허리를 들려는 학생의 머리를 선생님이 꼭 지금처럼 내리눌렀다. 요이치는 갑판에서 술잔을 주고받는 남자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배에서 열아홉 명밖에 타고 있지 않다. 역으로 이곳에 없는 사람을 헤아리면 미야자키가 머리통을 짓누르고 있는 사람이 누 구인지 짐작 할 수 있다. 기관장과 통신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계급으로 보아 그들일 리는 없다. 그렇다면 미즈코시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요이치처럼 신참 선원인 미즈코시, 지방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다 그만두고 배를 탄 허약한 남자. 그는 허약함을 육체 노동으로 극복하려고 배 를 탔지만 도리어 노이로제로 고통받고 있다. "혹시 미즈코시 아니야." 시게요시도 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아마, 그렇겠죠." 요이치의 뇌리에 갑자기 어젯밤의 광경이 떠올랐다. 등이 가려우니 긁어달라고 등을 내밀었던 미야자키, 거절하자 신단 모퉁이에 등을 대고 다리를 오르내리며 긁었던 그의 얼굴. -그 인간이 단순히 등을 긁어주기만 바랐을까? 의문과 동시에 화가 치밀었다. 미즈코시는 틀림없이 미야자키 앞에서 정좌를 하고 있든가 무릎 을 꿇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어나려는 그를 미야자키가 억지로 내리누르는 것이리라. "조업장, 어떻게 좀 해보세요." 요이치는 화가 난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그러나 시게요시는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저 자식은 미야자키가 죽여도 싼 인간이야." 말의 뜻을 생각하기 전에, 죽여도 싼 인간이 만약 있다면, 과연 나에게 그 상대는 누구일까 하 고 요이치는 자문해 보았다. 물을 필요도 없이 답은 알고 있었다. 다만 확인하고 싶었다. 언젠가 단호하게 자신의 목숨을 어떤 여자 앞에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때 묘하게도 행복한 기분이었다.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안도감이 느껴지는 듯한 기분. 역시 도망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다. 그 직후, 의지와는 달리 용솟음친 힘이 자신의 몸뿐만 아니라 여자도 쓰 러뜨리고 말았다. 그렇다, 왜 발작적으로 배를 탔단 말인가....... 요이치는 그때의 힘의 원천을 한 층 강화하기 위한 충동이었다는 생각에 도달했다. 바다라는 자연과의 싸움으로 길러지는 힘이있 다. 선실의 문이 열리고 기관장인 우에다가 기름범벅이 된 얼굴을 내밀었다. 왜 선원이 되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타입의 마흔세살 난 남자다. 동작은 둔하지만 자상한 성격 때문에 모두들 그를 따랐다. 모두들 그에게 어울리는 장소는 배가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그 자 신도 그의 가족도 친구들도 몰랐다. 끝내 알지 못한 채 우에다는 남은 인생을 바다에 바치리라. "누구 나 좀 도와주지 않겠어." 우에다가 느긋하게 말했다. "무슨 일이야?" 바로 근처에 있던 두세 명이 술이 찰랑찰랑한 잔을 입으로 가져가려다 돌아보며 말했다. "미즈코시가 계단 아래 쓰러져 있어. 움직이지 못하는 모양이야. 좀 도와줘야겠는데." 우에다가 말하면 왠지 긴박감이 줄어들고 그 탓에 주위 사람들의 움직임마저 느긋해진다. 폭풍 이 몰아칠 때도 이런 식이라 오히려 믿음직하게 보이는 일도 있었다. "으샤." 동시에 세 남자가 일어났다. 미즈코시 그 녀석, 계단에서 구른 모양이지, 모두들 그런 정도로밖 에 생각하지 않았다. "대장, 좀 와봐요." 우에다는 뱃머리에 있는 시게요시에게 손짓했다. 뱃머리에서 선실로 가려면 일단 중앙 갑판으 로 내려와야 한다. 아까부터 조타실의 상황을 살피고 있던 요이치는 우에다가 시게요시를 부르는 것을 보니 사태가 예사롭지 않은 모양이라 여겨져 시게요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우에다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동요하지 않는다. 그는 긴급한 일이 아니면 조합장을 부르지 않는다. 미즈코시는 조타실에서 선실로 내려가는 계단 아래 어둠 속에서 거의 실신한 상태로 앉아 있었 다. 하반신은 힘을 제대로 쓰지 못했고, 연두색 면바지의 사타구니는 누렇게 얼룩져 있었다. "싸질렀잖아." 뒤쪽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말을 하지 않아도 좁은 공간에 가득한 냄새로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세 남자 사이를 헤치고 시게요시가 앞으로 나와 미즈코시의 허리에서 아래쪽, 다리에 손 을 대보았다. 뼈나 근육의 이상은 없었다. 얼굴 표정이나 앉아 있는 자세로 보아 계단에서 구른 것 같지는 않았다. "이봐, 어떻게 된거야?" 시게요시는 똑바로 미즈코시의 눈을 쏘아보았다. 그 눈빛이 평소 같지 않았다. "아, 아무 일도 아닙니다." 미즈코시는 무너져내릴 듯 어깨를 흔들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 일도 아니라니, 이런 꼴로." "아, 아니 그냥 좀." 미즈코시는 일어나려고 복도 벽을 손으로 짚었다. 손을 잡아주려는 우에다를 제지하고 시게요 시는 미즈코시의 움직임을 바로 옆에서 지켜보았다. 미즈코시는 정좌한 자세에서 무릎을 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 이상은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어이, 못 일어나?" 시게요시는 어처구니 없고 안됐다는 뜻으로 물었다. 미즈코시가 난감한 표정을 짓는다. 자신의 몸에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일어날 수 있을 텐데, 일어나지 못한다. 허리쯤 에서 몸을 비틀고 벽을 짚은 양 손의 떨림에서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답답함이 배어나온다. "저기서 굴러떨어졌나?" 우에다가 턱으로 천천히 계단 위를 가리켰다. 그러나 미즈코시는 일어나려고 애를 쓸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끝내 미즈코시는 힘이 다하여 복도에 주저앉으면서 얼굴을 찌그러뜨리고 눈 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남자가 우는 꼴이라니 그렇게 비참한 것도 없었다. "참내....... 대장, 이 자식 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뼈라도 부러진 것 아닙니까?" "하지만 다친 데는 한 군데도 없잖아." 젊은 선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미즈코시의 몸에 손을 대지 않으려고 양 팔을 벌리고 있 던 시게요시가 그 손을 미즈코시의 어깨에 얹었다. "일어날 수 있겠나?" 미즈코시는 울음소리를 터뜨렸다. 그 울음소리는 하반신을 움직일 수 없다고 호소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요이치는 미즈코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지 대충 짐작이 갔다. 그는 화가 치밀어 계단을 돌아보며 모두에게 들리는 확실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미야자키, 너 이 자식, 미즈코시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요이치의 고함소리가 신호라도 된 듯 조타실 문이 열렸다. 미야자키의 몸이 역광 속에서 부상 했다. 조타실 유리창에는 늦은 오후의 햇살이 쏟아졌고 그 빛을 등으로 받고 있어서 표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미야자키는 '다들 모여 뭐하고 있는 겁니까?' 라고 천역던 스럽게 말하고는 반쯤 열린 바지 지 퍼를 올렸다. "어이, 다들 미즈코시를 침대로 좀 옮겨야겠어." 미야자키의 얼굴을 보면서 시게요시는 눈길을 돌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지시했다. "갈아입을 옷도 챙기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에서 미즈코시가 정신적인 충격으로 서지 못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사 람은 고작 요이치와 시게요시뿐이었다. 그들만이 조타실 유리창 너머로 보인 미야자키의 옆얼굴 과 그 바로 옆에서 위아래로 오르내리던 미즈코시의 머리를 분명하게 보았던 것이다. 노련한 선원인 시게요시는 미즈코시와 유사한 증상을 몇 번이나 보았다. 전형적인 심인성 반응 이며 따라서 외상은 없다. 그의 경우 일어나려는 의지는 있는데 육체가 말을 듣지 않는다. 누운 채 일어나지 못하는 선원을 몇 명이나 보았다. 드문 예로는 목구멍에 경련이 일어나 한 마디도 말을 못 하는 남자도 있었다. 대부분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서'란 이유로 처리된다. 배는 폐쇄적인 세계이기 때문에 심인성 반응을 일으켜도 쉽게 환경을 바꿀 수가 없다. 지방 공 무원의 일상에 염증이 나서 바다에서 활로를 찾으려 한 미즈코시이지만 자연은 그의 육체를 거절 한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직접적인 원인은 미야자키의 악의에 찬 폭력이겠지만 바다가 미즈코시가 살 곳이 아님은 분명했다. 아마도 육지의 문명 사회로 돌아가면 그의 병은 나을 것이다. 물을 떠나 반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일손이 줄어드는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시게요시 는 '쳇' 하고 혀를 찼다. 이대로 배에 태운 채 미즈코시가 회복되기를 기다릴 수는 없다. 일정을 앞당겨 해상치료 보급선으로 미즈코시를 옮기고 거기서 치료를 받으면서 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게요시는 인력 손실을 메우기 위하여 인원을 보충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아무리 일거리 가 적은 신참 선원이라지만 배에서의 평형을 생각하면 미즈코시는 필요한 존재였다. 미즈코시가 빠지면 요이치의 어깨가 두 배로 무거워진다.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요이치마저 쓰러질 위험이 있다. 시게요시는 요이치가 마음에 걸려 좁은 복도에서 뒤돌아보았다. 앞쪽 미즈코시의 선실 앞에서는 남자들이 미즈코시를 옆으로 안고 옮기는 중이었다. 그리고 뒤 쪽에는 아가와 똑같은 자세로, 계단 위 조타실 입구에 서 있는 미야자키를 쏘아보고 있는 요이치 가 있다. 시게요시는 복도를 걷다가 요이치의 어깨를 밀고 갑판 위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왜 이러느 냐는 표정의 요이치를 갑판 끝에 있는 라인 호러 근처에 앉게 하였다. "싸움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은 우리 배에 태울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한 것은 당신 아닙니까?" 풀썩 앉자 요이치는 발끈하여 말했다. "이런 얼간이, 미야자키는 상대하지 마." "왜죠?" "이유는 없어. 그놈은 특별해." "미야자키는 불쾌한 놈입니다." "물론 그렇겠지." "앞으로 더 이상 그놈이 제멋대로 날뛰어서 배 안의 질서를 어지럽히면, 조업장으로서 무슨 수 를 써야 합니다." "쫓아내라는 말인가?" "딱히 그런 뜻은 아닙니다." "요이치 자네, 미야자키는 그냥 놔두는 수밖에 없어. 그놈을 제지하려 하면 배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까." 그러곤 시게요시는 일어나 주위를 돌아보고 사람이 없는 장소를 찾았다. 그리고 '이리로 좀 와 봐'라면서 요이치를 데리고 배꼬리 쪽 갑판으로 가 캡스턴 위에 앉았다. "자네한테는 말해두는 편이 좋겠지." 그리고 시게요시는 아주 먼 옛날, 무려 25년 전의 일을 털어놓았다. 오른쪽 저 멀리서 섬이 하나 천천히 흘러갔다. 그 섬은 아니었지만 시게요시의 체험담은 남방 의 외딴 섬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더듬더듬 말하는 사이, 시게요시의 뇌리에는 다시금 타오르는 불길이 되살아났다. 동시에 살을 태우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쇄골아래 동맥을 절단한 감촉이 손끝에서 가슴으로 기어올랐다. 피로 젖은 입, 부러진 이, 앞뒤가 뒤죽박죽인 단편적인 영상. 그러나 요이치를 이해시키기 위해 서는 순서대로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사건 직후의 영상이 너무 선명한 탓인지 시게요시는 발단이 무엇이었는지 잊어가고 있었다. 사 건 이후의 일은 꽤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왜 그 남자가 싸움을 걸어왔는지, 자신에게 잘못이 있었는지, 아니면 늘 그런 것처럼 실 습생에게 생트집을 잡은 것인지, 정말 그 남자가 말한 대로 내가 기분나쁘게 비죽비죽 웃었는지, 지금도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 차례 스콜을 뿌린 구름 사이로 카롤린 제도의 섬들이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당 시 항해사 실습생으로 135톤급 참치잡이배 제2카이호마루에 탄 스무 살 난 시게요시는 시시각각 으로 변해가는 하늘의 모양을 느긋하게 바라볼 여유가 없었다. 마지막으로 끌어올리는 낚시줄에 2미터나 되는 눈다랭이가 잇달아 올라왔다. 시뻘겋게 충혈된 어부들의 눈과 고함 소리 속에서 누군가 자기 이름을 부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영문도 모르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시게요시는 갑판에 쓰러졌다. 사건의 발단은 바로 그것이었다. 뿌옇게 흐려지 는 시야로 느닷없이 한 남자가 들어오는가 싶더니 다음 순간에는 하늘과 갑판이 빙그르르 돌고 있었다. "야, 이 새끼야, 뭘 비죽비죽 웃고 있는 거야!" 그 소리만 귓속에 남아 있다. 자신이 웃고 있었다는 자각도 없고 얻어맞았다는 것을 아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이 조업이 끝나면 미끼가 없어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도저히 풍어라고는 할 수 없는 상황 이었지만 미끼가 바닥이 난 이상 일본으로 돌아가는 도리밖에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귀항을 눈앞에 둔 어부들의 눈에 기쁨과 기대감이 감돌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번은 다르다. 그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당시 만선이 되면 어부들은 뭍에서 일한 것보다 몇 배나 되는 수입이 생겼다. 그런데 이번 출어에서 챙길 수 있는 액수는 뻔했다. 정월 전에 귀항하면 웬만한 수입을 챙길 수 있을 정도로 어획량이 많지만 여름은 그렇지 못하 다. 특히 가족이 달린 선원들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따라서 마지막 낚싯줄을 잡아당기는 시끌벅적함 속에는 돌파구를 찾지 못한 불만이 충만해 있 었다. 하지만 항해사 실습생으로 배에 탄 시게요시로서는 수입에 대한 불만이 있을 리도 없고 석 달 만에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기쁘기만 했다. 하루에 고작 세시간밖에 자지 못하는 이 지옥에서 하루빨리 벗어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던 것이다. 그 남자의 말을 믿는다면, 시게요시는 부표를 잡아당기려다 손을 멈추고 본의 아니게 미소를 지은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애인의 얼굴이 떠올라 혼자 미소지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아내와 어린 자식이 있는 그 남자는 시게요시의 웃는 얼굴이 몹시 신경에 거슬렸던 것 이다. 다음 항해 때는 벌써 항해사라는 지위에 올라 있을 수산 강습소의 학생이 풋내기 꼬마처럼 여겨져 견딜 수가 없었다. 장차 선장이 되어 자칫하면 자기가 그 밑에서 일하는 신세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런 애숭이 밑에서 일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면 부아가 치밀고 한심하기도 하다. 무슨 일 이 있을 때마다 혼을 내주었는데 아직도 히죽히죽 웃을 여유가 남아 있다니 복장이 뒤집힌다. 얻어맞고 쓰러진 후 뱃머리 오른쪽 뱃전을 때린 파도에 배가 기우뚱 기울었다. 시게요시의 몸은 하늘을 향한 채 갑판을 주르륵 미끄러져 뱃전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뒤집어진 개구리 같은 볼썽사나운 꼴이었다. 눈 밑이 간지러워 손으로 문지르자 끈적끈적한 피 가 묻어나왔다. 상처가 튀어오른 물방울에 젖어 욱신욱신 아팠다. 남자는 때린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듯 물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시게요시의 사타구니를 걷어차려 하였다. 그때까지는 그럭저럭 정상을 유지하던 시게요시의 이성이 순간 균형을 잃었다. 그는 허리를 비 틀어 몸을 뒤집더니 벌떡 일어나, '이 개자식!' 하며 달려들 기세였다. 이제 조금만 참으면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안온한 기분이 순간적으로 투쟁적인 본능으로 바뀌었다. 시게요시는 항해하는 동안 내내 이 남자의 못마땅한 짓거리를 참고 있었다. 남자는 열 살이나 연상이 노련한 선원이었고 행동거지 또한 어부로서 경지에 도달해 있었다. 다만 특이한 성격과 성급함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 늘 고립되어 있었다. 특히 조업장은 무슨 일이든 반항적인 태도로 나오는 그 남자를 아주 싫어했다. 시게요시가 남자의 도전을 받아들일 기세를 취한데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 막상 일이 벌어지면 동료들이 자기 편이 되어 줄 것이라는 낙관. 선상에서의 그런 역학 관계를 가늠하는 안목은 '이 개 자식!'이란 욕설을 내뱉음과 동시에 생긴 것이지 미리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맞서려는 시게요시를 보고 남자는 잠시 주춤하더니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시게요시에게 달려 들었다. 구형 빙장선 제2카이호마루에 탄 24명의 남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깔 있는 무뢰한들이었다. 문신을 한 자도 있고 보란 듯 갑판에서 칼을 가는 자도 있다. 선장 몰래 반입한 권총을 자랑스럽 게 동료들에게 보이는 자도 있었다. 그들 빈 속에 소주를 부어넣으면서 화투를 치고, 이기고 지는 게 공평치 않거나 술을 너무 마 시면 예사롭게 싸움질을 했다. 일단 싸움이 벌어지면 주위 남자들은 당장은 싸움을 말리지 않는 다. 실컷 맞붙어 싸우게 해놓고 승패가 갈릴 즈음에야 '자! 이제 그만들 하지'라며 뜯어말린다. 타 이밍을 놓쳐 한쪽이 죽는 일도 있다. 단 아무리 싫은 싸움 상대라도 바다에 처넣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바다 사나이들끼리의 무언의 약속이었다. 칼로 서로 찌르고 죽이고 하는 것은 상관없지 만 바다에 내던져져서는 안 된다는 터부, 참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그런 암묵의 규율도 없이 방 치한다면 파벌로 나뉘어 싸움이 벌어졌을 경우, 우스갯소리가 아니라 배에서 일할 사람이 한 명 도 남지 않을 것이다. 한창 싸움을 하다가도 상대가 바다로 떨어질 것 같으면 일단 손을 뻗어 끌 어올려놓고 다시 싸우면 된다. 시게요시와 그 남자의 싸움도 처음에는 다들 묵묵히 지켜만 보았다. 아니 지켜볼 만한 시간도 없었다. "싸울 시간 있으면 자기 할 일이나 해!" 어디선가 조업장의 고함소리가 들린 것이다. 눈다랭이가 걸린 갈고리를 들고 '싸움이다!'란 소리 에 돌아보는 바람에 눈다랭이를 놓친 어부가 조업장한테 신나게 머리통을 얻어맞고 있었다. 라인 호러가 좌르륵좌르륵 풀린 낚싯줄을 감아올리는 옆에서, 눈다랭이의 아가미와 내장을 제 거하는 등 각자 자기 자리에서 작업을 계속하는데 시게요시와 그 남자만 자기 자리를 떠나 엉거 붙었다. 불과 한두 대 서로 얼굴과 머리를 치고 박자 두 사람은 바로 엉겨 붙어 갑판을 굴렀다. 상대방 의 콧등에 박치기를 하고 무릎으로 배를 올려차고, 상대방에게 올라타 얼굴을 때리고, 아픔을 느 낄 사이도 없이 시게요시의 눈은 어둠에 싸여 있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살의가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였다. 죽이느냐 죽느냐의 싸움에 두려움보다 알수 없는 흥분이 끓어올랐다. 갑자기 허벅지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상대방의 오른손에서 칼이 번쩍 이는 것으로 보아 장화 속에 감추어두었던 칼에 찔린 모양이었다. 시게요시는 칼을 쥔 상대의 오른쪽 손목을 양 손으로 잡았다. 힘이 빠지면 그대로 자신이 목숨 을 잃게 된다. 그리고 간신히 상대방의 손목을 뒤로 꺾었을 때 옆에서 덮친 파도 때문에 배가 다 시 기우뚱거렸다. 귓전에서 비명소리가 울렸다. 시게요시의 귀와 어깨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졌다. 손목을 잡힌 채 배가 기울어 균형을 잃은 남자가 시게요시 위로 쓰러지면서 칼로 자신의 왼쪽 어깨를 찌른 것 이다. 그때야 바닷물에 젖은 장화 특유의 발소리가 사방팔방에서 다가와 시게요시와 남자를 떼어놓았 다. 남자의 몸이 눈앞에서 없어지자 시게요시는 마치 오래간만이라는 듯 태양빛을 받으며 벌렁 쓰려져 숨을 헐떡거렸다. 시간 감각이 마비되어 있었다. 아마도 1-2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그 이상으로 길게 느껴졌다. 동료 선원들은 시게요시보다 상대방 남자를 걱정스럽게 내려다 보면서, '큰일났는데, 이거......'라 며 저마다 주절거리고 있었다. 칼에 어깨를 찔린 정도 가지고 뭘 저렇게 소란을 피우는가 싶어 상반신을 일으켜 옆으로 보니, 남자의 어깨에서 피가 콸콸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게다가 그를 에워싸고 내려다보고 있는 선원 들의 얼굴은 한결같이 단념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칼 끝이 왼쪽 어깨 쇄골 밑에 있는 동맥을 자른 모양이었다. 어떻게 손쓸 방법도 없이 그저 선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남자는 숨을 거두었다. 눈다랭이의 아가미와 내장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갑판에서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죽음이었다. 조업은 일단 중지되었다. 조업장, 선장, 기관장을 비롯한 전 선원이 갑판에 모였다. 물론 시체를 어떻게 처리하느냐를 의논하기 위해서였다. 냉동 설비를 갖춘 새 배라면 이야기는 간단하다. 시체 를 냉동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면 끝나는 일이다. 그러나 구형 빙장선으로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항로와 열대에서 아열대로 바뀔 기후를 생각하면 시체를 배 안에 놔둘 수가 없는 것이다. 선원이 배에서 죽을 경우 조업장 의 권한으로 수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제2카이호마루의 조업장은 주저하였다. 이전 항해 때, 역시 사고로 죽은 선원을 수장했 다가 죽은 남자의 가족들한테 원성을 사 한바탕 시끄러웠던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제2카이호마루 옆으로 카롤린 제도의 무인도가 보였다. 타오를 듯 따가운 햇볕에 드 러난 그 섬을 보고 조업장은 결정을 내렸다. 보트에다 시체를 실어 저 섬에서 화장을 시키고, 유 골은 일본으로 가지고 돌아간다. 그런데 이 일을 누구한테 시킬 것인가. 당연히 이 사건의 장본인인 시게요시에게 징벌의 의미 를 담아 수행하게 해야 마땅할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제2카이호마루는 닻을 내라고 보트를 내렸다. 시체와 함께 보트에 탄 시게요 시는 천천히 멀어져 가는 뱃전을 올려다보면서 왠지 불안했다. 아니, 불안 정도가 아니었다. 바다 까지 으스스한 색을 띠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품에는 며칠 전까지 멸치조림을 넘어두었던 유 리병을 껴안고 있고, 주머니에는 오일 라이터가 들어 있다. '나무를 쌓아올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남자의 시체를 태우고 유골을 이 유리병에 담아 온 다......' 거기까지가 시게요시에게 주어진 임무였다. 화장터에서 딱 한 번 타죽은 시체를 본 일이 있다. 열 살도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는 언뜻 보기에 사람 같지도 않았다. 피부색이나 얼굴 생김이 없어진 그 저 검은 덩어리였다. 그 탓에 생생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눈'이 없어지면 두려움은 어느 정도 없어진다. 그런데 지금 남자의 시체는 노를 젓는 시게요시 다리 밑에 누워 있고, 아무리 얼굴을 돌리고 보지 않으려 해도 그 시선을 느끼게 된다. 자기로 인 해 끊긴 목숨이었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자 보는 각도에 따라 창백한 볼이 때로 살아 있는 것 처럼 빛나 보였다. 마침내 시게요시가 탄 보트가 해안에 닿았다. 배에서 보았던 대로 섬에는 사람 그림자 하나 없었다. 섬 반대편에나 밀림 속에 마을이 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해안의 모습으로 보아 사람이 사는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시게요시는 구부 러진 야자나무에 로프를 묶은 후 보트를 모래 사장으로 끌어올렸다. 그리고 간혹 밀림을 헤치고 그 속을 살피면서 보트에서 시체와 경유가 든 깡통을 내렸다. 태양은 점점 더 높이 떠오르고 바람은 잔잔했다. 저 먼 바다에서 정박해 있는 제2카이호마루는 섬에서 똑바로 동쪽에 있었다. 갑판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새카맣게 보였다. 죽은 지 15 시간이 지난 시체는 더위 때문에 썩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시게요시는 인간을 어떻게 태워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태우는 정도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유리병에 담을 수 있을 정도로 살을 태워 재에 가까운 유골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된다. 시 게요시는 아무튼 장작이 될 나무를 주우려고 숲속을 헤치고 들어갔다. 불을 일으키려는 의지와 반대로 식물은 모두 푸릇푸릇 싱그럽다. 부겐빌레아인가, 타오르는 듯 한 빨강으로 초록에 악센트를 주고 있는 것을 보고 시게요시는 문득 선배 선원들의 모험담을 떠 올렸다. 풍어로 귀로에 오른 남태평양에서의 일. 배를 정박시키고 섬에서 놀고 가자는 얘기가 나와 남 자들은 헤어 젤이 든 작은 병을 끈에 묶어 목에 걸고 각자 헤엄쳐 섬으로 갔다. 그러고는 기다리 고 있던 섬 아가씨들의 온몸에 헤어 젤을 잔뜩 발라 갈색 피부를 매끄럽게 해놓고 진탕 놀았다. 젊은 시게요시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와, 굉장하네'를 연발했었다. 남자들이 섬을 떠날 때 아가씨들의 머리에 꽂아주었다는 부겐빌레아 꽃이 여기에도 불꽃처럼 새빨갛게 피어 있다. 시게요시는 나뭇가지를 모아, 아마 이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방법으로 망대를 쌓았다. 그리고 버 들가지처럼 가느다란 남쪽 나라 특유의 소나무 가지를 모아 나무와 나무 사이에 깔았다. 소나무 잎만 다소 누런 색을 띠고 있어 잘 탈 것 같았다. 그 위에 경유를 뿌리자 신호초를 기반으로 하는 딱딱한 모래밭에 즉석 화장터가 만들어졌다. 시게요시는 시체를 그 위에 올려놓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균형을 가늠해 보았다. 오일 라이터 를 쥐고 사방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불을 붙이지 않았다. 불을 붙이면 시체는 탈 것이다. 시게요시는 자기 손으로 죽인 인간을 새삼스럽게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았다. 이대로 두면 태양 의 힘으로 시체는 검게 말라 쭈그러들 것이다. 경유 냄새는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았다. 시게요시는 다시 밀림을 헤치고 들어가 부겐빌레아 꽃을 꺾어 시체의 가슴 위에 놓았다. 죄의식은 없었고 후회스럽지도 않았다. 또한 일본으로 돌아가면 자신에게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생각하지 않았다. 선명한 야 자나무 숲을 배경으로 새빨간 꽃에 싸여 누워 있는 남자의 시체. 코를 찌르는 경유 냄새. 열대의 섬에 느닷없이 생겨난 이 절대적인 부조화 앞에 시게요시는 두려움을 느꼈다. 핏기가 가셔 새하얘진 남자의 얼굴은 신의 모습이라 할 만큼 성스러웠다. 시게요시는 손에 쥔 나뭇가지에 불을 붙여 제단에 던졌다.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타오르는 불길이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죽은 인간에게 생명을 불어넣었 다.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고개를 젖혔다. 아래로 짓눌려진 머리와 다리는 그것을 받치고 있는 나 뭇가지를 흔들어 꺾었다. 입은 약간 벌어져 마치 무슨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발치에 있던 시게요시는 머리 쪽으로 돌아가 남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했다. 남자는 입을 뾰 족 내밀고 우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머리칼을 곧추세우고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바람이 불어와 연기와 냄새가 한 방향으로 흐르자 시게요시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멀리 지평 선에서 구름이 움직이고 있었다. 애써 불을 지폈는데 스콜이 내리기라도 하면 골치가 아프다. 빨 리 타라고 막대기로 쿡쿡 쑤시자 불에 딱딱해진 피부를 찢고 내장이 터져나왔다. 거기에는 또 다른 생물이 있었다. 내장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새로운 불길에 색을 바꾸고 형태 를 바꾸어갔다. 인간의 육체가 타들어가는 과정을 일일이 보고 있는 사이, 그 색과 냄새와 모든 것이 뇌리에 새겨졌다. 시게요시의 내부에서도 활활 타오르는 것이 있었다. 세포의 연소. 불길이 사그라들면 시게요시 는 그 부분에 경유를 또 뿌렸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발끝만 유난히 타는 속도가 더뎠다. 검 은 막대기로 변한 뼈끝에 아직 남아 있는 발가락과 발톱이 보였다. 시게요시는 몇 번이나 그곳에 경유를 뿌렸다. 불길이 센 쪽으로 밀어놓아도 발톱은 좀처럼 타 들어가지 않았다. 두 발끈만 마지막까지 저항하며 타지 않았다. 그렇게 하여 약 여덟 시간에 걸쳐 시체는 검은 뼈로 변했다. 유골을 유리병에 담아 제2카이호 마루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서쪽 바다가 빨갛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남자의 육체는 검게 변했지 만 시게요시의 머리칼은 하얗게 변해 있었다. 불과 살을 태우는 냄새가 몸과 마음을 한 나절 만 에 늙게 했음을, 시게요시는 동료들이 말해주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3 "자네, 내가 몇 살쯤으로 보이나?" 시게요시가 그렇게 묻자 요이치는 시게요시의 목덜미에서 턱으로 이어지는 곳에 깊이 파인 주 름을 빤히 쳐다보았다. 바닷바람과 태양에 그을려 여기저기 반점이 나 있다. 목 위를 보면 일흔을 넘긴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 겉보기보단 훨씬 젊을 것이다. "이래봬도, 나 마흔다섯이야." 시게요시가 말했다. "젊군요." "그 사건으로 이렇게 팍 늙어버리고 말았지." 시체를 무인도에서 화장하고 배로 돌아가자, '어이, 어떻게 된 거야, 너?' 라며 선원들이 힐금힐 금 쳐다보았다. 조심조심 거울 앞에 서자, 거기에는 열 살은 더 늙어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있었 다. 변한 것은 겉모양뿐이 아니었다. 시게요시는 그날부터 일본으로 돌아갈 때까지 거의 말을 하 지 않았다. 살인이란 행위보다, 절해 고도에서 혼자 시체를 화장했다는 행위가 심신에 변화를 초 래한 것이다. "유골은 어떻게 했는데요?" 요이치가 물었다. "물론 가족한테 전했지. 마누라하고 어린 아이가 있었어......." 귀항하자마자 시게요시는 그 남자의 집을 찾아갔다. 어두컴컴한 다다미 방에서 그는 유리병이 아니라 제대로 된 뼈 항아리에 넣은 유골을 무표정한 여자 앞에 내밀었다. 여자는 암울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정을 설명해도, '네에'라면 서 힘없이 고개만 끄덕일 뿐이어서 시게요시는 허탈함을 느꼈다. 차라리 증오하고 욕이라도 퍼부 어주었으면 싶은 심정이었다. 아내이기는 하지만 항상 바다에 나가 있는 남편에게 애정을 못 느꼈던 것일까. 아니, 그 남자의 행동을 생각하면 여자를 소중하게 다루었을 리가 없다. 여자는 오히려 남자의 폭력에서 헤어나 안도한 듯이 보였다. 다만 앞으로 어린 자식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암담한 표정으로 열심히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고 혹은 정당방위일 수도 있지만 시게요시는 죄값을 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요이치 는 오히려 다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선원들끼리 입을 맞추어 낙수사고로 처리하였다고 하지만, 시게요시에게 반감을 품고 있는 사람이 혹 진실을 불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그 이상으 로 걸리는 일이 또 있었다. 그 이야기와 미야자키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요이치는 어머니 옆에 앉아 있었을 아이의 모습을 상상했다.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어린 아이가 남자 아이였습니까?" "으음, 그랬지." 요이치는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졌다. "그 남자 아이가 미야자키란 말이군요." "그래. 그놈도 내가 죽인 아버지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형편없는 놈이야, 하지만 나한텐 책임이 란 게 있어." 아버지와 아들이 어찌도 그리 닮았는지, 시게요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시게요시는 미야자키 가 늘 발이 뜨겁다고 떠들고 다니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번은 미야자키가 두 다리를 담요 밖으 로 내놓고 잔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 눈으로 확인한 적도 있었다. 깊은 밤에 그의 선실 문을 살짝 열어보니 소문대로 발만 밖으로 쑥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갈색 담요가 불길처럼 보여 시게요시 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후각의 기억까지 되살아나 시게요시의 코는 살이 타는 냄새를 재현하고 있었다. 유독 타지 않는 발끝에 뿌렸던 경유 냄새, 쌓인 나무 틈으로 쑥 빠져나와 있던 발끝이 아 직까지 기억에 생생했다. 불길에 휩싸인 발의 열이 원한과 함께 아들이 핏속에 전해진 것이다. 시 게요시는 이성을 잃고 공포에 질려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가 죽인 남자의 아들에게 시게요시는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가. 또 그 책임을 평생 져야 하 는가. 그것은 개인 문제일 것이라고 요이치는 생각한다. 시게요시는 자신의 책임 범위를 넘어서고 있다. 법의 형별을 받지 않은 대신 남은 유전자에게 책임을 진다. 아마 그의 성격으로 보아 평생 그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요이치는 대꾸하지 않았다. 소극단이란 집단을 통해, 집단에 그런 힘이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성질이 다른 것을 배제하는 시스템은 폐쇄된 좁은 세계일수록 견고하게 구성되 어 있다. 배는 바다에 떠 있는 폐쇄 병동 같은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면......." "체념하는 거야." "체념?" "으응." "하지만......." 시게요시는 웃었다. "미야자키는 상대하지 마. 그놈이랑 붙으면 한쪽이 죽게 되어 있어. 어느 쪽이 죽을지...... 아마 자네 쪽이겠지." 과장이 아니었다. 시게요시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말의 여운에 요이치의 몸이 희미하게 떨렸 다. 미야자키 같은 남자와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인다고 생각하자 소름이 쫙 끼쳤다. 그야말로 개 죽음이다. 구사일생으로 제7와카시오마루에 탔다. 그런데 기껏 얻은 새 목숨을 그런 무모한 짓으로 잃을 수는 없다.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하여. 미 지의 영역인 참치잡이배의 세계로 뛰어든 것이다. 죽을 장소를 찾았던 것이 아니다. 요이치는 그 렇게 스스로 다짐했다. 4 10월에 들어서자 제7와카시오마루는 남태평양 해역을 취항하는 4,000톤급 해양 진료 보급선 제 2호요마루에서 연료, 식료품, 미끼 등을 보급받았다. 참치잡이배는 외지에 기항하여 필요한 물자 를 보급 받을 수도 있지만 정해진 항로를 취항하는 보급선에서도 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다. 정기 적으로 이용하면 한 번도 기항하지 않고 항해를 계속할 수도 있다. 그러나 때로는 육지로 올라가 선원들에게 활력을 불어 넣을 필요도 있으니, 해상에서의 보급은 가능한 한 최소로 줄이고 있었 다. 일본에 있는 가족한테서 온 편지나 소포 등이 있으면 각자 찾아가고, 건강 상태가 좋지 못한 사람들은 의사의 진찰을 받았다. 그렇게 보급받는 것뿐만 아니라 반대로 건네는 것도 있었다. 선 원들이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 그리고 미야자키의 악질적인 장난으로 꿈쩍 못 하게 된 미즈코시. 의사의 진찰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무의식중에 배에서의 가혹한 생활에서 도피 하려고 몸을 움직일 수 없게 된 모양이었다. 오클랜드 근처의 항구에 기항하여 거기서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마음의 상처는 치유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요이치는 미즈코시 의 증상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다는 말을 듣고 그나마 안심했다. 서로 격려해주던 전우의 이탈이 아쉬웠지만 일본으로 돌아가면 또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고 미즈코시를 배웅했다. 가족이 있는 선원들은 거의 빠짐없이 보급선이 가지고 온 편지나 소포를 받았다. 요이치는 아 무 기대로 하지 않았다. 그에게 가족이라고는 늙은 어머니와 히로시마에 부임해 있는 샐러리맨 형 한 명뿐이다. 어머니한테는 미사키 항에서 출항하기 전날. 참치잡이배를 탄다는 것과 배의 이 름만 전화를 알렸을 뿐이다. 무슨 말을 하려는 어머니를 가로막고 수화기를 놓으려다 요이치는 어머니의 비통한 외침 소리를 들었다. "기다려라, 이......."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은 수화기 속에서 어머니의 꾸짖음이 흘러나오고 끝없는 여운을 남겼다. 어머니는 '이 불효자식'이란 말을 하려한 것이리라. 아무튼 너무도 일방적인 항해 통지였다. 속이 뒤집혀서 화를 낼 틈을 주지 않으려는 작전이었지만 수화기를 놓기 직전 어머니는 폭발적으로 화 가 난 모양이었다. 출항 전의 사건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화를 내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걱정만 끼치는 불효자 식에게 어머니가 소포를 보낼 리 없으니, 소포를 받아든 선원들이 기뻐하는 모습을 흘끔거리며 요이치는 쓸쓸하게 수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런 요이치도 뜻하지 않은 소포를 받아들게 되었다. 받는 사람은 틀림없는 마키 요이 치였다. 그러나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전혀 기억에 없었다. "스나코 다케시." 요이치는 소리내어 그 이름을 세 번쯤 읽으며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기억 틈바구니에서 잊혀 져 있는 것일까 싶어 초중고 시절까지 거슬러올라가 친구들의 이름과 얼굴을 떠올리기도 했다. 혹시 양자로 들어가 성이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므로 성과 이름을 분리시켜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가 하마마쓰로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고교 시절까지 알고 지내던 사람일지도 모른다. 요이치는 열아홉살에 대학에 입학하기 위하여 고사이 시에서 상경했다. 갑판을 걸으면서 요이치는 소포를 뜯었다. 안에는 비디오 테이프 한 개와 편지가 들어 있었다. 선원들은 가족들이 보내는 비디오 테이프를 심심찮게 받는다. 일본을 떠난 지 한 1년쯤 되면, 젖먹이 갓난아기가 걸음마를 하게된다. 어린애의 성장을 영상으 로 보고서 건장한 선원들이 오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따라서 테이프 자체는 그리 신기할 게 없지만,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서 받은 테이프는 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선실로 돌아가자 요이치는 방에 설치된 비디오 테크에 테이프를 집어넣고 14 인치 브라운관에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영상이 흐르기를 기다렸다. 화면이 잠시 흔들리다 병원인 듯한 건물의 하얀 벽을 비췄다. 배경을 이루는 숲속에서 매미 소 리가 쏟아지고 있다. 여름의 끝을 알리는 매앰매앰 하는 소리. 일본다운 풍경과 분위기에 요이치 는 잠시 고향을 향한 그리움에 잠겼는데. 그런 감상적인 기분을 일순간에 싹 날려보내듯 한 젊은 여자의 모습이 화면 중앙에 가로질렀 다. 느린 걸음걸이...... 이전보다 야위었다. 머리도 길어졌다. 화장기 없는 얼굴. 안색도 별로 좋지 않고, 긴 속눈썹에 가려진 눈동자는 약간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사유리......." 요이치는 이름을 부르면서 목이 콱 메었다. 영상은 일단 끊어졌다가 다음 장면으로 이어졌다. 벤치에 앉아 있는 사유리의 모습이었다. 비디 오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이 태양을 등지고 있어 그 그림자가 사유리의 발치까지 뻗어 있다.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바로 가까이에서 들렸다. -사유리 씨, 웃어요. - 그래요, 그렇게 정면을 보고. - 이쪽이야, 이쪽. 이쪽. 어린애를 다루는 듯한 말투다. 그런데 들리는 것은 남자의 목소리뿐, 사유리는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는다. 얼굴이 화면 가득 확대되자, 요이치는 사유리의 눈빛이 둔탁해진 것을 알 수 있었 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은 과거의 사유리가 아니다. -여긴 어디지? 요이치는 다시 한 번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보았다. "스나코 다케시." -카메라를 들고 있는 저 사람이 스나코 다케신가. 카메라는 사유리의 몸을 옆에서 보여주었고, 잠시 배에다 초점을 맞추었다가 천천히 위로 올라 가 옆얼굴을 비추었다. 벤치 너머로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가 두 명 나란히 걷고 있다. -틀림없어, 사유리가 있는 곳은 병원이다. 어떻게 된 거야? 아직 퇴원하지 않았단 말인가? 벌써 반 년이나 지났는데. 요이치는 그 영상의 의미를 생각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가? 의도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왠지 화가 치밀었다. 이미 버렸다고 생각한 것, 도피해온 현실이 이런 식으로 바다를 건너 쫓아오다니. 그러나 동시에 그립고 애처롭다. 그의 마음은 양극으로 흔들렸다. 의식은 거부하지만 육체는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오열과 함께 눈물이 넘쳐흐른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않은 반응이었다. 육지를 떠나서도 그녀를 종종 생각했다. 그러나 이게 영상의 힘인가 싶을 정도로 하염없이 솟구치는 눈물을 도저히 억제할 수 없었다. 사유리는 아무 말 없이 벤치에 앉아 퀭한 시선으로 카메라를 항하고 있다. 이전에는 광채를 발 하던 눈동자가 빚을 잃었다. 초점이 일정치 않은 두 시선에서는 거의 감정이란 것을 읽을 수 없 었다. 요이치는 소맷자락으로 눈을 꾹꾹 누르면서 화면에서 눈길을 돌렸다. '후회'란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는 목소리. 고발, 그리고 자기 변호. 그는 벌떡 몸을 일 으켜 정신을 차리고 봉투를 뜯었다. 마키 요이치 씨 갑작스런 편지에 많이 놀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동봉한 비디오 테이프는 보셨는지요, 물론 잘 알고 계시겠지만 테이프에 담긴 여성은 아사카와 사유리입니다. 그녀는 현재, 하마마쓰 시 교외에 있는 정신신경과 마쓰이 병원에 입원중입니다. 7월 23일 밤, 나카다지마 해안에서 자살을 기도하 였고 그 충격으로 기억, 언어, 감정 등 모든 면에서 장애 현상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저는 얼마 전까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사유리 씨를 알게 되었습니다만 질병엔 문외한이 라서 자세한 증세를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실은 의사선생님조차 정확한 진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 황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대화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신에 대한 것 은 그녀 입에서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 '극단 바람'의 단장인 우가미 씨한테서 들었습니다. 실례 라고 생각은 하지만, 우가미 씨한테서 그 사건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물론 치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지 타인의 프라이버시에 관여할 의도는 전혀 없습니다. 사유리 씨의 담 당 정신과 의사(모치즈키라고 아주 훌륭한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한테서 들은 이야기로는, 지금 까지의 병력이나 가족력 등이 치료에 상당히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일가친척 하 나 없는 사유리 씨한테서 그런 정보를 얻을 수 없어서 치료는 조금도 진전이 없는 상태입니다. 어쩌면 외부와 의사 소통을 하지 못하고 평생을 지금처럼 지내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부탁드립니다만, 그녀에 관한 어떤 내용이라도 상관없으니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당신 이상으로 사유리 씨와 깊이 사귄 사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 염치 없는 부탁인 줄은 알고 있으나, 그녀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 꼭 협력해주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반드시 알려야 할 일이 있습니다. 비디오를 보시고 이미 아셨는지 모르겠으 나, 사유리 씨는 임신중입니다. 현재 임신 6개월로 추정됩니다. 이 점에 관해서도 잘 부탁드립니 다. 9월 2일 스나코 다케시 다 읽고 나자 요이치는 마지막 글귀가 마음에 걸렸다. -이 점에 관해서도 잘 부탁드린다고? 대체 나한테 어쩌라는 거야? 사유리를 임신시킨 인간이 나인지 아닌지 알고 싶다는 건가? 아니면 태어날 아이를 생각한다면 한시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 아와 모자를 책임지라는, 그런 속셈인가. 그 어느 쪽이든 참견도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다. 요이치는 들고 있던 편지를 구깃구깃 구겨버 린다. 그러나 사유리가 임신했다는 사실은 가슴을 저며왔다. 9월 2일 현재 임신 6개월, 그는 세월을 거슬러올라갔다. 어떻게 계산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다. 가능성이 없지는 않다. -아마도 내 아이일 것이다. 직감이 와닿았다. 동시에 자살을 기도한 이유도 이해할 수 있었다. 임신한 사실을 알고 사유리 는 아이의 아버지를 찾았다. 그리하여 고사이 시에 있는 요이치의 집을 찾아갔고, 요이치가 참치 잡이배를 타고 남태평양으로 떠났다는 사실과 그의 도망을 알았을 것이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배에 있다니 쫓아갈 수도 없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는 점점 자란다. 노이로 제 증세를 보이다가 끝내 밤바다에 뛰어 들었다. 태평양에 면한 나카다지마의 해안, 도망친 남자 와 바닷속에서나마 연이 닿는 곳을 죽음의 장소로 선택한 것이다. 편지를 읽는 동안, 바로 옆에 있는 비디오는 켜진 채였다. 소리가 나지 않아 영상이 흐르고 있 다는 것을 잠시 잊었다. 요이치는 다시 화면을 보았다. 여전히 똑같은 자세로 사유리가 병원 마당의 벤치에 앉아 있었다.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표 정 또한 여전하다. 팔꿈치가 닿아 있는 배 부분을 유심히 본다. 약간 불러 있는 것 같다. 쳐다보는 사이 심장의 고동이 빨라졌다.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고 싶다는 생각이 북받쳐올라 그는 이젝트 버튼을 눌러 테이프를 꺼내고 편지와 함께 움켜쥐고 갑판으로 뛰어나갔다. 그리고 힘껏 바다에 내던졌다. 편지는 뱃전에 부딪쳐 수면으로 멀어졌지만, 테이프는 빙그르르 돌다가, 조그만 물방울을 튀기며 바다에 삼켜져버렸다. 요이치가 바라던 바였다. 지워버리는 것....... 지금까지의 생활을 깨끗하게 버리고 새로운 생활을 찾기 위하여 배를 탔다. 그런데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그 따위 비디오테이프를 받아야 하나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 는 두 번 다시 생각나지 않도록 영상을 내던졌다. -사유리는 이미 나의 인생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설령 그녀가 잉태한 생명이 내 아이라 해 도....... 저편에서 그 반대 소리도 들린다. 요이치는 귀를 막았다. 하지만 결심과는 달리 스나코 다케시 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사유리와의 관계가 잇달아 되살아난다. 이미 답장을 쓸 수도 없다. 보내는 사람의 주소도 테이프와 함께 바다에 던졌다. 다만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자문자답할 수 는 있다. 사유리와의 만남...... 그게 언제였더라. 5년 전 여름이다. 학교 생활 마지막 해. 졸업을 앞두고도 취직할 결심이 서지 않았다. 샐러리맨말고는 할 일이 없을까 하고 자신의 삶을 모색하고 있던 중 이었다. 끝난 것은 반 년 전, 선혈과 함께 사유리와의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직도 잊지 못하 고 있지만....... 5 나뭇가지에 달라붙어 있던 매매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요이치는 깜짝 놀라 얼굴을 들고 안개 처럼 사라지는 매미의 날갯짓 소리를 눈으로 좇으면서 상반신을 일으켰다. 바로 옆에 있는 도서 관의 빨간 벽돌색이 따스하게 느껴지고, 오가는 학생들의 시끌시끌한 소리가 점차 커진다. 매미 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대학 게시판에서 취업 안내를 보고 기분이 우울해졌다. 그래서 캠퍼스를 어슬렁어슬렁 배회하다가 교문이 내려다보이는 도서관 앞 벤치에 누워 잠시 잠이 들었다. 잠이 깨는 순간에 꾼 매미 꿈이 너무도 생생하여 요이치는 눈을 비비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꿈이 깬 후에도 매미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러나 매미가 울기에는 아직 이른 계절이다. 꿈이 괜스레 그립게 느껴졌다.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몰라도,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계절의 변화를 꿈속에서 잠시 경험하 고 그립다 느끼는 것은 어딘가 부자연스럽다. 아직 6월. 그런데도 학생들이 여기저기 모여 있다. 친구들은 거의 취직 얘기들만 했고 정보를 주고받느라 분주했다. 요이치는 그들을 피하여 혼자 있는 때가 많았다. 그는 일어나 교문으로 나 가는 언덕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도의 가로수 뒤에 세워둔 오토바이 옆에 머리카락이 긴 젊은 여자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여자는 400cc 단기통 오토바이의 속도계를 들여다보기도 하고 가솔린 탱크의 매끄러운 선을 쓰다 듬기도 하면서, 아주 특별한 감정을 오토바이에 쏟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젊은 여자가 자기 오토 바이에 관심을 쏟는 것을 보고 요이치는 마치 자기 몸을 애무하는 것처럼 몸 속 깊이 짜릿함을 느꼈다. 여자는 엷은 핑크색 블라우스에 풍성한 초록색 치마 차림이었다. 차림새만 보면 오토바이 와는 전혀 인연이 없을 것 같다. 문을 등지고 있어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긴 머리카락이 갈리진 사이로 하얀 목덜미가 보일 뿐이다. 가까이 다가가는 요이치의 발소리도 듣지 못하고 여자는 양손으로 껴안듯이 오토바이를 쓰다듬 고 가볍게 액셀러레이터를 쥐고 열어 보기도 하고 닫아보기도 하고, 그런 동작을 되풀이하였다. 요이치는 옆에 바짝 다가가서, 주머니에서 키 홀더를 꺼냈다. "잠깐, 실례." 키를 손가락에 걸어 빙빙 돌리는 몸짓으로 오토바이의 주인이 자기라는 것을 넌지시 알렸다. 여자는, '네?'하면서 뒤돌아보았다. "아. 오토바이 주인이세요?" "음, 그런데." 요이치는 이그니션에 키를 꽂고 핸들 록을 해제하면서 새삼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웃는 얼굴이 뒤틀려 있다....... 그러나 그 미소가 사그라들면서 계란형의 단정한 모습이 드러난다. "미안해요." 여자는 액셀러레이터에 대고 있던 손을 슬며시 뒤로 뺐다. "아니, 괜찮아." "이거, 빨라요?" 여자는 다시 한 번 오토바이 쪽으로 눈을 돌린다. "느려." 요이치는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400cc 단기통 오토바이가 빠를 리가 없다. "그래요? 하지만 빠르게 보이는걸." "하긴 솜씨에 달렸겠지만." "나도 면허 딸까 하는데요." "네가?" "이상해요?" "아니, 이상할 거 없지." "오토바이가 있으면 편리할 거야, 어디든 갈 수 있고." 요이치는 헬멧 홀더에서 헬멧을 꺼내려다 주저했다. 이대로 엔진을 걸고 사라지기가 왠지 망설 여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그것도 여자쪽에서 리드하는 식으로 대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요이치와 같은 대학교 학생이 아니라 '극단 바람'이란 소극단에 소속된 풋내기 여배우라 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 달 후로 다가온 공연의 포스터를 캠퍼스 안의 게시판에 붙이기 위해 왔다고 했다. 지금 손 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무사히 임무를 끝낸 모양이었다. 게시판이란 말을 듣자 또 취직 일이 머리에 떠올랐지만, 그 바로 옆에 이 여자가 출연하는 연 극 포스터가 붙어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누그러졌다. 소극단이 어떤 활동을 하는지 그 실태 는 모르지만 응원해주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태워줘요!" 동경에 찬 눈으로 여자가 그렇게 말했다. 말뿐만이 아니라 눈과 얼굴, 몸,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여자는 오토바이에 태워달라고 호소하고 있었다. 다소 당돌한 부탁이었다. "안 돼, 헬멧이 없잖아." 그러나 요이치의 대답은 사무적이었다. 미국 영화나 뭐 그런 데서는 주저없이 헬멧도 쓰지 않 고 프리웨이를 질주할 테지만, 일본의 도시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에 붙잡히고 만다. "안 돼요?" 여자가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안 돼, 난 앞으로 2점만 더 먹으면 면허 정지란 말이야." "그래요." 여자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오토바이 탱크를 탁탁 두드렸다. 거기서 둘의 대화는 끊어졌다. 어느 쪽이든 '그럼'이라고 말하면 그대로 끝나버릴 듯한 위태로운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스쳤다. 흔히 있는 껄렁한 남자로 보이고 싶지 않아 요이치는 차라도 같이 마시자고 말하고 싶은 것도 참고 있 었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자신이 가볍게 여겨질 것만 같았다.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싶은 마음 을 자기가 특별한 인간이라고 간주하는 자존심이 방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가 갑자기 표정을 바꾸더니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럼, 대신 점심 사줄래요?"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별할 수 없어 요이치는 여자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았다. "부탁이에요. 뭐 좀 먹게 해줘요, 나 지금 배고파 죽을 지경이라구요." 요이치는 이그니션에서 키를 빼냈다. "진담으로 하는 소리야?" "응." 지금 막 알게 된 남자에게 점심을 사달라는 대담함이 요이치한테는 신선하게 느껴졌다. 왠지 이전부터 친하게 지낸 사이처럼 느껴진다. 예를 들면 처음 듣는 곡인데도 이전에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듯한 곡을 요이치는 반드시 좋아하게 된다. 자기 감성의 틀에 맞는 것이 원래부터 정해 져 있는 것이리라. 요이치는 키를 주머니에 넣고 '따라와'라고 말하고는 단골 커피숍으로 여자를 안내했다. 이것이 요이치와 사유리의 첫만남이었다. 그 후 둘은 가볍게 점심을 먹고 이름과 전화번호를 서로에게 가르쳐주었다. 사유리가 아이돌 가수였다는 말을 듣고 요이치는 한층 매력을 느꼈다. 많 은 젊은이들이 이 여자에게 동경을 품었으리라는 환상...... 그리고 그런 여자와 지금 일대일로 마 주하고 있는 행운. 거의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가수였지만 왠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에 요이치의 자존심은 한없는 충족감을 느꼈다. 다음날 요이치는 여자를 위해서 헬멧을 샀고, 사흘 후에는 사유리를 뒷자리에 태우고 미우라 반도까지 드라이브를 하였으며 밤바다에서 헤엄을 쳤다. 한 달 후 '극단 바람'의 공연을 돕느라 요이치는 동분서주했고, 술기운과 동료들의 강력한 권유 에 뒤풀이 자리에서 입단을 결심했다. 인생의 여러 갈래 길에 배우로서 사는 길을 추가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요이치의 취직에 대한 고민은 사라졌다. 그는 샐러리맨에 대하여 뭐라 말할 수 없는 답답함과 불만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고 다른 삶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사유리 와의 만남과 입단이 각오를 다지게 한 것이다. 요이치는 후련하다는 듯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 면서 사유리와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같이 살면서도 한동안 요이치는 사유리의 그늘을 깨닫지 못했다. 노래를 잘하는 유별난 여자라 는 첫인상은 둘이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점차 변해갔다. 마음속 깊은 곳에 보일 듯 말 듯 가려 있는 불안정한 성격이 원래 타고난 것인지 아니면 그녀 가 살아온 경험에 의해 형성된 것인지, 아직 판단하지 못했다. 그러나 오히려 그 점이 그녀의 매 력 중 하나였다. 같은 세대의 여자들한테는 개성이 부족했는데 사유리의 그런 종잡을 수 없는 성 격은 오히려 신비한 빛을 발했다. 사유리는 방 두 개짜리 아담한 아파트를 갖고 있었다. 지난 해에 죽은 아버지한테서 상속받은 것이다. 어머니도 사유리가 태어난 지 2년도 지나지 않아 죽었다고 했다. 요이치는 자세한 것을 물으려 하지 않았다. 사유리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인, 그 진상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아 하 는 표정이 역력하여 묻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가끔씩 뵈이는 사유리의 이상한 행동을 부모를 일찍 여의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이 해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너무도 일반적인 해석이라 사유리의 유별난 성격을 설명하기에는 모 자란 듯 했다. 요이치는 사유리의 마음속에는 무언가 좀더 다른 것이 있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고독이 아닌, 그 이상의 무언가가....... "도와줘." 어느 날 밤, 둘이서 구모다니에 있는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사유리는 그렇게 말하고 카펫 위 에 쓰려졌다. 저녁에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시부야에서 극단 동료들과 술을 마시고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연 것까지는 좋았는데, 방에 들어서자 걸음을 옮길 때마다 얼굴색이 변하더니 끝내 쓰 러지고 만 것이다. "도와줘." 사유리가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였다.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면 좋은지 설명도 하지 않고 그저 도와달라고, 도와달라고, 중얼거리다 이번에는 '나 쫓기고 있어'라는 한마디....... 연극 연습중에 재 잘거리는 말투로는 전혀 상상도 할 수 없는 침울한 목소리였다. 카펫에 눈길을 떨구고 아직 늦더 위가 한창인데 이따금 어깨를 부르르 떨기도 하였다. 그런데 '누구한테 쫓기고 있단 말야?' 라는 요이치의 물음에는 입을 꼭 다물고 사유리는 허밍을 시작했다. 그리고 가사를 붙여, '어때, 이 노래?'라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은 밝은 표 정을 하고 다시 기운을 차렸다는 듯 즉흥적으로 노래를 만들었다. 이렇게 매순간 어지럽게 변하 는 감정과 표정을 요이치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어느 것이 진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 다. 요이치는 그 후로는 한 번도 사유리의 입에서 '도와줘'란 말을 듣지 못했다. 그렇다고 감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고 절박한 심경은 그때 그때에 따라 표현을 바꾸어 사유리의 눈이나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이런 일도 있었다. 동거를 시작한 지 1년이 다 돼가는 초여름날의 아침, 아직 자고 있는 요이치 옆에서 사유리는 트럼프로 점을 치느라 정신이 없었다. 무얼 점치고 있는지, 요이치는 비몽사몽간에 사유리의 혼잣말을 듣고 있었다. "어머, 지겨워." "방해하지 말라니까." "연애의 요령은 나누기라니까." 스무 살 여자다운 철딱서니없는 말을 중얼거리면서 카드를 뒤집으며 자신의 미래를 점치고 있 다가, 불현듯 기가 팍 죽어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역시, 너까지 그렇게 말하는구나. 2분의 1이라고......." 사유리는 카드를 너라고 말하고 있었다. 요이치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뭘 점치고 있는 거야?" "아니......." "뭐가 2분의 1이라는 거지?" "어머, 듣고 있었어? 치!"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있어야지." 요이치는 딱히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나하고 요이치가 행복하게 될 확률." "그게 반반이란 말이야?" "응." 요이치는 그보다 앞에 한 '역시, 너까지 그렇게 말하는구나'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대학을 졸업 하고 취직도 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연극을 시작한 요이치는 대사를 읊는 인간의 마음의 움직임에 관심이 있었다. '역시, 너까지 그렇게 말하는구나'라고 했으니, 사유리는 이전에도 똑같은 말을 들 었어야 한다. 2분의 1. 자기가 행복해질 확률이 2분의 1이라는 말을 누군가 했다는 뜻이다. "전에도 그런 말 들은 적 있어?" "응?" "그러니까...... 반반이란 말 말이야." 사유리는 형용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요이치를 보았다. 그 표정이 연극이라면 무슨 대사가 튀어 나올지 전혀 예상조차 할 수 없다. 농후한 러브 신으로 옮겨지기 전의 표정 같기도 하고, 죽을 각오를 할 때의 얼굴 같기도 하다. 어떻게든 해석할 수 있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사유리는 곧장 표정을 누그러뜨리고, 펼쳐놓았던 카드를 케이스에 집어넣더니, '우윽, 오 줌, 오줌' 하면서 화장실로 뛰어갔다. 그리고 요이치의 머리에 생긴 사소한 의문을 깨끗이 씻어내 리듯 시원스런 방뇨 소리가 들렸다. 사유리는 늘 이런 식으로 피했다. 문제의 핵심을 건드릴 듯하면 돌연 말꼬리를 돌리고 태도를 바꾸었다. 그러면서도 요이치에게 항상 무언가를 호소하고 싶어했다. 둘이 나란히 아르바이트를 쉬고 극장에 간 일도 있었다. 그날은 프랑스 영화 감독이 찍은 영화 를 보았다. 특별히 드라마틱한 스토리가 있는 것도아니고, 프랑스의 시골을 배경으로 두 가족의 일상이 담담하게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서 사유리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요이치는 그만 어이가 없었다. 더구나 주위에 다른 손님이 있는데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같은 톤으로 주절거렸다. "아니야, 난 그렇지 않아." 손톱을 깨물면서 사유리가 그렇게 말하자 반응을 보인 것은 요이치만이 아니었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남자 손님의 항의의 뜻을 담아, 정면을 향하고 있던 얼굴을 돌려 두 사람 쪽을 힐끔 보았다가 다시 앞으로 향했다. 사유리는 주위 사람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참, 그건 너무......'라면서 생각에 잠겼다가, '아- 아'라 고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잠시후에는 '자기, 저 여자가 왜 울고 있는 거야?'라며 영화의 내용을 요이치한테 물었다. 그제야 요이치는 사유리의 중얼거림이 영화의 스토리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것을 알았다. 감정 이입의 결과, 등장인물한테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건 것이 아니라 화면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그녀 의 머릿속에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다른 데다 정신을 파는 일은 종종 있다. 또 영화를 보면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굳이 말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잠자코 보다보면 알게 돼." 요이치는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심술." 그렇게 말하고 사유리는 얼굴을 앞쪽으로 돌렸지만 의식은 여전히 다른 공간을 떠다니고 있는 지 혼잣말을 그치지 않았다. 바로 앞에 앉은 남자는 몇 번이나 얼굴을 돌리고 무언의 항의를 계 속하였다. 사유리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요이치는 마음에 걸려 견딜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니 평소 생활하는 중에도 이와 유사한 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요이치와 얘기를 하는 동안에도 사유리는 느닷없이 화제를 바꾸는 일이 있는데,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그렇다면 얘기를 하거나 영화를 보면서 그녀의 의식이 향하는 장소는 늘 똑같은 곳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둘은 극단의 다른 극단원보다 경제적인 부담은 훨씬 덜했다. 사유리한테는 아버지에게서 상속 받은 아파트가 있었고 생명보험금도 무시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대도시에 살면서 주거 걱정이 없으면 넉넉한 생활을 즐길 수 있다. 그러나 1년 3회 공연되는 극단의 정기 공연 틈틈이 둘은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했다. 빌붙어 사 는 신세인 요이치는 자기 몫의 집세를 꼭꼭 지불했고 사유리 역시 상속받은 재산이 줄어드는 것 을 꺼려하여 오히려 저축액이 늘어났을 정도였다. '결혼'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요이치였다. 사유리가 없는 생활은 생각할 수 없었다. 일 년 내내 싸움을 했지만 사흘만 지나면 잊어버리고 고양이처럼 뒤엉켰다. 그리고 행위 후에도 언제까지나 상대방의 몸을 마지고 싶었다. 실로 충만된 기분으로 사유리의 두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요 이치는 배우로 성공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곤 했다. 설사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사유리와 함께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평범한 생활을 상상하기도 했다. 사유리만 있어 주면 삶이 어떤 식으로 변하든 상관없었다. 사유리가 스물세 살이고 요이치가 스물일곱 살이던 해, 둘은 소속해 있던 '극단 바람'을 그만두 었다. 이전부터 단장 겸 연출가와 원수처럼 지냈던 요이치의 인내가 한계에 도달했다. 연기에 관 한 언쟁이 발단이었다. 연출가는 하라는 대로 연기하지 않으면 사유리 상대역을 맡길 수 없다고 위협하였다. "그렇다면 그만두지, 사유리도 당연히 데리고." 요이치가 그렇게 폭언을 하자 연출가는 당황했다. 요이치가 그만두는 것은 상관없지만 사유리 마저 그만두면 큰일이었다. 그런 속셈이 태도에 들어나자 요이치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당한 듯한 느낌에 화가 치밀었다. "지금까지 뭣 때문에 배우 노릇 한 줄 알아. 당신의 그 별볼일 없는 희곡을 조금이라도 좋아 보이게 하려던 거였다." 그 말에 싸움이 벌어졌다. 치고받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도록 엉겨붙어 있는데 동료들 이 끼여들어 말렸고, 정신을 차려보니 연출가는 코피를 흘리며 벌렁 누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요 이치는 어깨 관절이 몹시 아팠다. 극단원 몇 명이 절망적인 얼굴로 지켜보는 가운데 요이치는 사 유리의 손을 잡고 연습장을 나왔다. 공연이 임박했는데 이 시점에서 퇴단이라니 치명적이었다. 공연을 준비하기 위해 고생하는 동 료들을 생각하면 요이치도 가슴이 아팠다. 동료들한테는 아무 잘못도 없다. 자기와 연출가 사이의 싸움 때문에 공연을 망치게 되는 건 정말 안된 일이지만 그는 마음을 다지고 퇴단을 하기로 했 다. "사유리, 너 이렇게 돼도 상관없는 거야?" 시부야 공원 거리를 걸으면서 요이치는 사유리에게 물었다. '극단 바람'은 착실하게 관객 동원 수를 늘려가고 있었는데, 그런 극단의 간판 여배우 자리에서 엉뚱한 이유로 물러나게 되었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괜찮아." 사유리는 요이치 편을 들었다. "그 대신 요이치, 절대로 나를 버리면 안 돼." 절박한 말투였다. 그러나 요이치는 그 말의 울림을 깨닫지 못했다. 머릿속이 자신의 앞날로 꽉 차 사유리의 목소 리에까지 주의를 기울일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버릴 리가 있어?" 사유리가 아직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듯, 요이치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상업 극단의 오디션을 받아볼까 하는데." "잘 되면 좋겠는데." 정나미 떨어지는 말투였다. 마음속으로 잘 될 리가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듯한 말투였다. "나를 믿지 못하겠다는 거야?" 사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해봐, 잘 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사유리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요이치는 사유리의 손을 뿌리치고 앞서 걸었다. 극단을 그만 둔 일은 후회스럽지 않았지만 왠지 짜증이 났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도쿄에만 해도 소극단이 몇 천은 된다. 그 몇 배의 사람들이 배우를 지망하고 있는 가운데 배 우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극단 바람'을 메이저 극단으로 성장시켜 그와 동시에 자신을 발전시키는 길밖에 없다고 모든 단원들은 생각하고 있었다. 그 점은 요이치도 마찬가지였다. 그 길을 스스로 뿌리친 것이다. 이런 때 사랑하는 여자가 강한 신뢰감을 보여준다면 마음도 어 느 정도 안정을 찾는다. 요이치는 인생을 자기 손으로 개척하고 싶었다. 연출가가 싹싹 빌면서 사 과하면 요이치는 언제든 사유리를 데리고 극단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다른 극단에서 처음부터 다 시 시작하기에는 나이가 많아서 힘겹다. 가능하면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가 먼저 사과 하기는 싫었다. 그런 경우에는 이유를 대고 퇴단하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체면을 살리면서 극단 으로 돌아가는 방법이 있다면 요이치는 아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요이치!" 사유리는 몇 걸음 뒤에서 요이치를 불렀다. 돌아보니 울고 있었다. 요이치는 걸음을 멈추고 그 녀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요이치, 실은 나 말이지, 아이 낳을 수 없는 몸이야." 이런 때 고백하는 내용치고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왜 지금, 이런데서 그 말을 꺼내는지, 그 이 유를 알 수 없었다. 요이치는 별로 놀라지도 않고 사유리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뭐?" 태연하게 말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괜찮아?" "아이, 당분간 필요없어." "당분간이 아니고, 영원히." "마찬가지야." "다행이네." 사유리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 손을 잡고 걸었다. 그러나 요이치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이를 못 낳는다고? 이상하잖아, 그렇다면 늘 실수하지 않으려고 세심하게 주의하는 것은 뭣 때문이지? 요이치의 뇌리에 떠오른 의문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사유리는 잡은 손을 철없이 흔들었다. -대체 무슨 뜻이지? '나 말이지, 아이 낳을 수 없는 몸이야.'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의사 표시라고 해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일 아침 기초체온을 재고 있으면서, 내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사유리는 매일 아침 기초체온을 몰래 재어 살짝 표에 기록하고는 배란일이 다가오면 절대로 요 이치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요이치도 배란 주기를 알게 되어 요구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면 기초체온을 재는 의미가 없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 속 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1년쯤 지나 생리가 15일 정도 늦어지자 사유리는 보기에도 안타까울 정도로 안절부절못했다. '설마'라면서 입술을 깨물고, 웃을 일이 있어도 웃지도 못하고 안정감 없이 눈동 자를 굴렸다. 난감한 일이 생기면 나타나는 그녀의 버릇이다. 요이치는 각오가 되어 있었다. 물론 임신을 했다면 낳으라고 할 작정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호 적에 올린다. 사유리와의 생활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병원에 다녀와." 요이치는 애써 상냥하게 말했다. 목소리에 꼭 낳아달라는 바람을 담았다. "으응." 그러나 사유리는 눈을 치켜뜬 채 머리를 숙이고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연극을 그만둔 지 1년 이 지나던 때였다. -이 녀석 연기력이 형편없어졌는걸. 표정으로 보아 그녀가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두려워서 거짓말을 한 것이다.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다. -문제는 무얼 두려워하는가이다. 요이치는 그 의문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사유리의 머리를 톡톡 치면서 말했다. "얼른 병원에 다녀오라니까." 생각 외로 말을 잘 들어주었다. 사유리는 의료보험증을 가방에 넣고, '알았어'라면서 밖으로 나 갔다. 그런데 다녀온 곳은 산부인과가 아니었다. 병원에서 돌아오기를 기다려 요이치가 '뭐래?'라고 묻자 사유리는 엉뚱한 대답만 되풀이하였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에 요이치는 그만 인내의 한계를 넘고 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생긴 거야, 안 생긴 거야?" 어쩔 줄 모르는 얼굴에다 대고 요이치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를 내면서 요이치는 사유리의 가방을 빼앗아 거꾸로 뒤집었다. 안에서 흘러나온 것은 산부인과 진찰권이 아니었다. 진찰권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정신신경과 나이토 클리닉' 더구나 날짜는 틀림없는 오늘이었다. "너, 산부인과에 다녀온 거 아니야?" 요이치는 어이가 없었다.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사유리가 상상치도 못할 일을 숨기고 있 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이가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 병원에 가서 확인해보고 오라는 말을 듣고 정신과에 가는 사람이 어디 있단 말인가? 기가 차서 더 이상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무슨 짓이야, 이 심술.'이라고 말하면서 사유리는 카펫 위를 기듯 가방에서 쏟아져나온 내용물 을 줍고 있었다. 요이치는 사유리가 웬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의 어깨가 약하게 떨리 고 있어서 였는지도 모른다. "내가 싫어졌으면 버리면 되잖아." 사유리는 그런 말도 했다. 요이치는 당황하여 그녀를 위로했다. 함께 살고 싶다, 아이가 생겼다 면 낳아 기르고 싶다, 그러니까 호적에 올리가, 결혼하자.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사유리는 얼굴을 무릎에 푹 파묻고 대답하지 않았다. 결혼 신청을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곤 란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 어느 쪽이야?" 상냥하게 물었다고 생각하는데 역시 대답이 없었다. 결국 그날 하루, 사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 사유리가 심산 갈등에 시달리는 모양이라고 판단한 요이치는 진상을 듣기 위해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다. 섣불리 다그치면 더욱더 굳게 입을 다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밤이 새도록 사유리는 양자택일 에 몰려 있는 사람 특유의 한숨을 내쉬며 몇번이나 몸을 뒤척였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요이 치까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요이치는 사유리에게 물었다. "왜 산부인과에 가지 않고 정신과에 다녀온 거야?" 그러나 사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물음에 대답한다는 것은 갈등에 결론을 짓는다는 뜻이다. 요이치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유리가 다녀온 나이토 클리닉에 가서 사유리가 진찰받은 이유를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겠지만, 정신신경과 의사가 환자의 비밀을 가볍게 떠벌릴 리가 없으니 그 방법은 현실적이 못 되었다. 그때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요이치를 알기 1년 전에 아버지가 죽었는데, 아무래도 자살인 듯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딱히 염두에 두지 않았는데 혹시 그 일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 닐까? -아버지의 자살? 화제삼기가 껄끄러워 직접 사유리한테 물어 확인하지는 않았다. 어딘가 뿌리 깊은 곳에서, 본인 뿐만 아니라 아버지까지 연루된 형태로 사유리의 비밀이 또아리져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요이치가 노지마 케코와 재회한 것은 그런 때였다. 인생에는 반드시 함정이 있다. 건강한 상태 에서는 쉽사리 함정에 빠져들지 않는다. 그러나 저항력이 약한 육체나 바이러스가 번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저항력이 약한 정신은 뜻하지 않은 함정에 빠지기 쉽다. 그것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훌륭한 함정이었다. 노지마 케코가 악녀라는 뜻은 아니고 그녀를 둘러싼 상황이 요이치한테는 전 형적인 함정이었던 것이다. 그 무렵 요이치는 오디션만 받았다 하면 낙방이었다. 낙관적인 경우도 몇 번 있었는데, 마지막 단계에서 늘 밀려나고 말았다. 허들을 넘으려면 연줄이나 뭐 그런 게 필요하다는 당연한 사실을 깨달았을 때, 요이치는 노지마 케코의 아버지가 중역으로 있는 모 재벌 기업이 어느 뮤지컬 공연 의 스폰서라는 것을 알았다. 요이치와 케코는 과거 소극단 무대에서 함께 공연한 일이 한 번 있 었다. 케코는 연극에 임하는 자세나 연기력에 있어서는 학예회 수준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좋은 배경 을 암암리에 드러내는 타입의 천진난만하고 귀여운 여자였다. 요이치는 무의식중에 사유리와 비 교하였다.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달랐기 때문이다. 닛쇼 극장 로비에서 케코와 재회했을 때, 요이치는 그녀의 밝은 성격을 재삼 확인했다. 못 만난 지 벌써 2년이 지났는데도 케코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사유리의 배후에서 언뜻언뜻 고개를 내 미는 암울함을 감당하기 어려워진 요이치에게 케코의 막힘 없는 명랑함은 구원이었다. 여자로서 의 매력은 사유리가 월등하지만 그 종잡을 수 없는 성격에는 때로 지치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 였다. 그러나 케코는 반대였다. 철저한 낙관주의가 요이치의 피로를 달래주었다. 케코는 뒤에서 요이치의 어깨를 탁 치면서, '어머 요이치 씨잖아. 오랜만이네'라며 소리를 꽥 질 렀다. 돌아보니 구김 없이 웃는 얼굴이 있었다. 커다란 눈동자는 천진하게 빛나고 통통한 볼도, 풍만한 가슴도, 발산하는 모든 것이 건강한 빛을 띠고 있었다. 요이치는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였 다. 여성이 지닌 부드러움과 따스함이 응집되어 있었다. 당연한 일이듯 두 사람은 차를 마시면서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게 되었다. 요이치는 '상업 극단'의 오디션에 도전했다가 실패만 거듭한 이야기를 했고, 케코는 자신에게 재능이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닫고 지금은 연극 제작 쪽에서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케코 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이치는 얼굴도 잘생겼고, 재능이 있잖아. 열심히 해야지." "여전히 낙관론자로군. 열심히 해서 뭐가 어떻게 되는 것 같으면 벌써 열심히 했겠지." 요이치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까, 이마다 사무실 프로듀스 공연에서 배우를 몇 명 모집하고 있는데, 요이치 씨 한번 해볼래요?" 요이치는 웃음을 거두었다. "정말이야?" "응. 우리 아빠 회사가 스폰서이고, 프로듀서하고도 아는 사이거든" "무슨 수 있어?" "일단은 오디션 받아봐. 그 다음에 어떻게 손을 써볼 테니까." 요이치는 춤이라도 추고 싶은 기분이었다. 관심이 있는 공연인데다, 마지막 허들을 이렇게 간단 히 넘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꼭 좀 부탁할게."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요이치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까지 숙이고 있었다. "응, 하지만 괜찮을까, 별로 좋은 역도 아닌데. 요이치 씨가 아까울 정도로." "농담 아니야. 출연만 할 수 있으면 어떤 역이라도 상관없다니까." 고생 모르고 자란 케코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 무렵 요이치는 시체 역이라도 좋으니까 무대에 오르고 싶었다. 역을 고르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었다. 요이치는 그 점을 몇 번이나 강조하였다. "어떤 역이라도 좋아. 그냥 거리를 지나가는 역이라도 말이야." "알았어. 아빠한테 말해볼게." 요이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후 두 사람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요즘 어떻게 지내?" 케코는 스트로로 아이스 커피를 빨아올리면서 요이치 쪽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요이치가 이 전부터 사유리와 사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지금도 그 관계가 계속되고 있는지 넌지시 살피려는 눈치였다. 그런데 요이치는 숨겼다. 아니, 사유리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2년 전 케코가 요이치에게 마음이 있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요이치 의 흑심이 희미하게 고개를 든 것이다. 사유리를 버리자고 생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회를 줄지도 모르는 케코에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고 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희망 찬 꿈을 품게 하고, 더구나 자신의 장래를 열어줄 힘을 지닌 케코로 애인을 바꿔치우고 싶은 바 람이 없었다고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요이치는 숨겼다. 케코에게 사유리에 대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유리한테도 케코 를 만나 역을 맡을 가능성이 생겼다는 것을 숨겼다. "오늘 반가운 녀석을 만났어." 평소의 요이치답게 그날이 지나기 전에 사유리에게 말을 했더라면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 을 것이다. 요이치는 사유리 몰래 그 후에도 몇 번이나 케코와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라고 해봐야 찻집에서 같이 차를 마시는 정도였지만 뒤가 켕겨 행동이 자연스럽지 못했다. 결국 요이치는 이마다 사무실의 뮤지컬에서 역을 얻어, 사유리에게 그 소식을 알렸다. 사유리는 요이치가 예상한 이상으로 기뻐했다. 물론 뒤를 봐준 이가 케코라는 것도 모르고, 단순히 요이치 가 재능을 인정받았다고만 여겼다. 사유리는 자기 일처럼 조잘거리며 기뻐했다. 사유리의 그런 모 습을 보자 요이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게 대단한 역 아니야." 요이치는 사유리에게 그만 흥분하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유리는 '드디어 해냈어'라고 소리를 지 르면서 온 방 안을 뛰어다녔다. "그만 하라니까." 요이치는 사유리의 가냘픈 몸을 꽉 잡고 양 손으로 입을 막았다. "시끄럽다잖아!" 점차 거칠어지는 목소리에 얼굴까지 찡그리는 요이치를 보고 사유리는 간신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이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왜 그래, 대체......." "왜 그러긴, 시끄러우니까 그만두라는 거지." 위협적인 말투였다. 요이치의 두 팔 안에서 사유리는 몸을 떨다가 점차 파랗게 질려갔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야, 내가 싫어진 거야?" 사유리의 목소리가 점점 가늘어졌다. "이상해. 요즘 요이치, 뭔가 이상해." "이상한 건 너잖아." "설마, 다른 여자가 생긴 거 아니야......." 그런 말을 하다가 사유리는 아래쪽에서 가만히 요이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요이치는 사유리 가 쳐다보는 것을 알면서도 얼굴을 돌리고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거울을 앞에 놓고 자신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생애 최대의 연기, 알리고 싶지 않다 는 감정을 전면으로 드러내면서 실은 상대방에게 사실을 알리고자 하는 미묘한 표정, 요이치는 순간의 표정으로 동시에 여러 가지를 사유리에게 전했다. 마음속으로는 밝혀지기를 바라고 있었 던 것이다. 사유리는 금방 알아챘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파트너다운 직감으로 요이치의 연기가 무슨 뜻 인지를 이해했다. 사유리는 가슴을 들썩거리며 하아하아 숨을 크게 들이쉬는가 싶더니 비명을 질 렀다. "싫어!" 비통한 외침과 함께 요이치의 몸을 밀치고 늘 그러듯 눈알을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누가야?" 달려들 듯한 자세를 유지하면서, 그러나 사유리는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노지마 케코. 너도 알고 있잖아." 그렇게 말을 뱉고서야 요이치는 냉정함을 되찾아, 케코라는 이름을 입에 담은 걸 후회했다. "노지마 케코......." 사유리가 중얼거렸다. "아니, 아니야. 그런 게 아니고, 노지마 케코와는 아무 관계도 없어." 요이치는 몇 초전의 대사를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관계없다고? 지금 이름을 말했잖아, 노지마 케코라고." "아니라니까, 믿어줘. 그렇지 않아." "지금 말했잖아, 이름을." "그러니까, 노지마 케코하고 나하고는 아무 관계도 없다니까." "같이 안 잤다는 뜻이야?" 요이치는 고개를 끄떡였다. "좋아하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몇 번 만났을 뿐이라고" "그럼 왜 그래,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거야? 정말 모르겠네, 나는." 사유리는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요이치는 점점 더 화가 치밀었다. 이 얼굴에 속박당하고 있다. 지금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평생 묶여 살게 된다. "자기가 무슨 마누라라도 되는 줄 알아? 우린 부부가 아니라고 내가 누구랑 사귀든, 네가 무슨 상관이야." 사유리는 뱃속에서 목소리를 쥐어짜내듯 신음했다. "으음, 아니야. 그렇지 않아. 우리는 그런 관계여서는 안 돼." 요이치는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그런 관계라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사유리는 말을 잃었다. 그리고 쏟아져나오려는 말을 억제하고 싱크대로 달려가 토악질을 해댔 다. 말을 토해내지 않는 대신 위 속의 내용물을 토해낸 것이다. -틀림없어, 입덧이다. 역시 임신했어. 토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 요이치는 갑자기 사유리가 불쌍해져 등을 쓰다듬어주었다. 아까부터 감정을 10초 간격으로 어지럽게 변화하고 있었다. 화가 치미는가 하면 갑자기 상냥해지고, 짜증이 나고 불쌍해지기도 하고... .... "그 여자를 이용해서 배역을 얻었을 뿐이야." 그런 식으로 요이치는 케코와의 만남을 대충 설명하였다. 물론 순간적이나마 케코에게 마음이 기울었다는 사실은 집요하게 숨겼다. 사유리는 잠자코 요이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납득이 간다 는 건지, 아니면 아직 의심스럽다는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다만 아무리 부정하고 강조해도 사 유리의 마음을 원래 상태로 되돌리기는 불가능했다. 노지마 케코 얘기를 듣고 사유리가 속이 울렁거렸던 것은 입덧 때문이 아니었다. 강렬한 질투 가 몸 속에서 부글부글 끓어올라 위벽을 자극한 것이다. 다음날 보통때보다 훨씬 늦게 찾아온 생리를 보고, 사유리는 넌지시 요이치에게 알렸다. 요이치 는 전혀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안심하는 것도 아니고 아쉬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요컨대 사유리 가 임신할 수 있는 몸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을 뿐, 임신이란 사태로 야기될 문제가 미래로 지연된 것에 불과했다. 요치이와 사유리 사이에는 어색한 분위기가 흘렀다. 애써 화제를 만들어도 대화는 오래 계속되 지 않았고, 사유리는 요이치가 얻었다는 뮤지컬의 배역 얘기만 듣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에 대해 얘기하다보면 두 사람의 뇌리에 동시에 노지마 케코가 떠올라 자연 소멸하듯 대화가 끊기고 입을 다물어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아는만큼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한층 어색해졌다. 따라서 둘이 같은 방에 서 지내는 시간이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요이치는 케코를 만났다. 연극에 관한 의논이란 명목으로 이미 만날 약속이 되 어 있었던 것이다. 찻집에서 만나 저녁을 함께 먹고, 평소 같으면 그대로 헤어졌을 텐데 요이치가 먼저 술을 마시고 싶다고 말했다. 케코는 두말 하지 않고 요이치의 말을 따랐다. 침울한 기분을 떨쳐 버리려는 듯 요이치는 난폭 하게 술을 마셨고 그 기세로 케코를 호텔로 데리고 갔다. 지난 2주일 동안 사유리와는 몸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술기운도 거들어 욕망이 부글부글 끓어올 랐던 것이다. 이런 경우 흔히 생겨나는 남자의 본능... 요이치는 그 이상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았 다. 케코의 몸은 딱딱했고, 살을 섞음으로 하여 얻어지는 애정의 깊이를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그 저 침대에 누워 소리를 내지르고, 옛날부터 사모했던 남자의 품에 안긴 환희를 노골적으로 드러 내면서 눈물까지 머금어 요이치를 시큰둥하게 만들었다. 그는 사유리가 몹시 그리웠다. 사유리의 몸은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기쁨을 만끽할 수 있었다. 요이치는 정신적인 면에서나 육체적인 면에서나 사유리와 깊이 맺어져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 았다. 요이치는 케코를 안으면서 사유리 생각만 했고 케코와의 관계는 이 한 번으로 끝내리라 마 음먹었다. 그리고 사유리에겐 좀더 솔직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서로 팽팽하게 맞서봐야 관계가 악화될 뿐이다. 자기가 먼저 용서를 빌고 상냥하게 대하면 의 외로 간단하게 풀릴지도 모른다. 이렇게 사유리와의 관계에 다시 한 번 새바람을 불어넣으리라 마음먹고 요이치는 마지막 전철 을 타고 아파트로 돌아왔다. 사유리는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는 이부자리가 펴져 있었다. 공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침대를 놓지 않고 둘은 이부자리를 펴고 개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요이치는 그 며칠간의 무언의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미소를 지었 다. 다른 여자와 자고 왔다는 껄끄러움도 없었고, 오히려 고민거리를 해결한 만족스런 기분으로 이 부자리에 파고들었다. 2월 하순의 추운 밤이었다. 술기운에 요이치는 금방 잠이 들었다. 봄의 도래를 알리는 세찬 바 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잠이 들었는데 하복부를 쓰다듬는 감촉이 느껴져 문득 눈을 뜨고 얼굴을 들었다. 배꼽 바로 위에 사유리의 머리가 있고 머리칼이 몇 가닥 요이치의 맨살로 늘어져 있고, 그 아 랫부분에 사유리의 입술이 닿아 있었다. 다리 쪽을 향하고 있어 사유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배 위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왜 이런 밤에'라고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요이치는 사유리의 손길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그러 다 불현듯 생각되는 게 있어 몸이 굳어졌다. 아까 호텔에서 케코와 두 번에 걸쳐 몸을 섞었는데, 첫 번째가 끝나고는 분명히 샤워를 했다. 그런데 두 번째는...... 샤워를 한 기억이 없었다. 요이치는 행위의 진의를 깨달았다. 사유리는 지금 혀끝으로 다른 여자의 냄새를 맡고 흔적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치워!" 그렇게 소리치자 사유리가 얼굴을 들고 요이치의 귀밑까지 기어올라왔다. "자고 왔지, 노지마 케코하고......." 물론 거짓말을 할 여유도 부정할 기력도 없었다. 요이치는 잠옷과 팬티가 무릎까지 끌어내려진 볼썽사나운 꼴로 누워, 요염하게 빛나는 사유리의 시선을 피하려 눈길을 천장으로 돌리는 길밖에 없었다. 그 이후 사유리가 보인 질투의 불길은 상식을 넘어섰다. 한동안 헤어져 사는 편이 좋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그러나 요이치 쪽에서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사유리 안에서 파도치는 비장한 생각이, 헤어지자는 말을 꺼내는 순간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 날 듯하여 불안했다. 한밤이면 사유리는 종종 히스테리를 일으켰다. 느닷없이 고함 소리가 들리고 가슴이 답답하여 일어나면 사유리가 요이치 위에 엎드려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그 손이 요이 치의 목을 조르고 있는 적도 있었다. "무슨 짓이야!" 소리를 지르면서 손을 뿌리치면 사유리는 몸을 떨며 오열하였다. 소름이 끼치도록 처절한 울음 이었다. 두 번 다시 케코를 만나지 않겠다고 몇 번이나 약속했지만 사유리는 납득하지 않았다. 납득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는 이해하지만 몸 속 깊은 곳이 거절하는 것 이었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면 거기에는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다. 무언가 가 한 번 뒤틀리면 사태는 나쁜 쪽으로만 굴러간다. 그토록 사랑했던 사유리를 증오하는 순간이 수도 없이 찾아왔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 또한 깊어졌다. 요이치의 마음속에서 사랑과 증오의 감정이 번갈아 교차되며 줄무늬를 만들었다. 그만큼 정신 없이 변하는 자신의 감정을 제어할 수 없었다. 그런 마음의 상태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대체 어디서부터 이상해진 것인지, 그 원인을 찾아 치료하고 싶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둘 사이에 생긴 균열의 원인은 아무리 세월을 거슬러올라 가봐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분명 문제는 만나기 이전부터 있었다. 사유리의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어떤 부부 사이에서 어떤 기대를 안고 태어나, 어떤 식으로 자랐는지 요이치는 하나도 아는 게 없었다. 사유 리를 이해하려면 그녀가 태어난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둘이 만나기 전의 일은 공백 상태로 뻥 뚫려 있다. 요이치도 굳이 물으려고 하지 않았고 사유리도 딱히 말하 려 하지 않았다. 그 무렵 사유리는 음악에서도 연극에서도 완전히 멀어져 있었다. 가끔 생각났다는 듯 데뷔곡인 [거울 속]을 흥얼거리는 일은 있었지만 신곡을 만들려는 정열은 몸 속 어디에도 없는 상태였다. 무기력하게 정신신경과 나이토 클리닉에서 처방받은 정신안정제를 복용하고, 명상 센터에 가서 자기 마음속을 응시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다 명산 센터에서 알게 된 사람한테 갓 태어난 검은 고양이를 얻어와 기르게 되었다. 요이치는 사유리가 새끼고양이를 '메메'라 부르는 소리를 듣고 '여여'란 한자를 떠올렸다. 나약 한 자신의 모습을 새끼고양이한테 투영하여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이리라. 3월이 되어도 요이치와 사유리의 긴장 관계는 조금도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고 조될 따름이었다. 어느 날 저녁, 요이치는 막 건네받은 연극 대본을 들고 드러누워, 화장대 앞에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사유리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공연 연습이 시작되자 요이치는 출연자들의 수준이 예상 외로 높은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다소 자신감을 잃은 상태였다. 발성과 동작을 비롯, 기초부터 단단히 교육받은 배우가 많았다. 소극단에서 독자적인 지도밖에 받지 않은 요이치는 압도되어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노력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틈만 나면 대본을 펼치고 자신의 배역을 소화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그날 저녁 대본을 펼쳐든 요이치의 의식은 사유리의 등에 집중되었다. 어디 나갈 데도 없는데 저녁 나절에 화장을 하다니,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요이치는 거울에 반사되는 사유리의 시선을 느꼈다. 처음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런데 그렇 게 거울을 통하여 쳐다보는 시간의 길이와 시선의 강렬함에 오싹하여 대본을 옆으로 비끼고 상황 을 살피자, 사유리는 립스틱을 꺼내 자신의 입술에 대었다. 그러나 입술에 대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사유리는 거울에 비친 요이치의 몸만 바라보고 있었 다. 요이치는 대본에 열중하는 척했다. 마침내 탁탁 거울 표면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입술에 대고 있었던 립스틱이 거울 표면을 탁탁 치고 있었다. 부러진 립스틱이 나뒹굴고 립스틱의 몸체 부분이 유리 위를 달리면서 끼익 끼익 금속성의 기분 나쁜 소리를 내었다. 그때 요이치는 거울 표면에서 살의를 느꼈다. 이미 의식을 집중하기도 어려워 대본을 다다미 위로 휙 내던지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정처없이 어슬렁어슬렁 걸으면서, 한동안 헤어져 사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함께 있다가는 무슨 엄청난 일이 생길지 모르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오늘밤, 냉정하게 얘기를 나누자. 따로 아파트를 빌려 한동안 헤어져 지내자. 요이치는 그런 말을 꺼낼 작정이었다. 밤 9시가 지나 집으로 돌아와 그 말을 꺼내자 사유리는 아까와는 다른 사람 같은 얌전한 표정 으로 '응'이라며 순순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무릎 위에서 몸을 웅크리고 갓난아기처럼 우는 고양이 메메에게 허탈한 목소리로 말하 기 시작했다. "짐이 너무 무거운 거야, 그렇지. 좋아, 헤어져주지 뭐. 메메랑 같이 살면 되니까. 나...... 하지만 지금 요이치는 연극 연습하느라 힘드니까, 내 쪽에서 나가야지. 응 메메, 그렇게 하자." 그런 식으로 말하면서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두 개 꺼내왔다. 소름이 좍 끼칠 만큼 비통한 목소 리를 들은 후라 캔맥주가 구세주처럼 느껴졌다. "그 대신, 이거 먹어." 라면서 사유리는 방바닥에 던져두었던 핸드백을 잡아당겨 안에서 정신안정제를 꺼내 입에 머금고 맥주를 흘려넣었다. "응, 요이치도 이거 먹어봐." "왜, 내가......." "응, 부탁이야. 내 말 들어줘." 사유리의 절박한 심정이 전해졌다. 한동안 따로 살자고 말한 오늘밤을 특별한 의식으로 장식하 고 싶다면, 그렇게 해주지....... 요이치는 가능한 한 부드러운 말투로 물었다. "어떻게 해주길 바라는데?" 사유리의 무릎에서 재롱을 피우던 메메가 소리도 없이 쓰윽 떠나갔다. "그냥, 이거 먹기만 하면 돼." 사유리는 정제를 몇 알 올려놓은 손바닥을 내민다. 설마 정신안정제를 먹고 죽을 리는 없겠지 하고 요이치는 주저없이 한 알을 입에 넣었다. "더, 더 먹어." "왜 내가 이런 약을?" "이거 먹고 하면, 기분이 굉장히 좋아." "한 적 있어?" 사유리는 '응'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랑?" "당연하잖아, 난 요이치가 아니면 하고 싶지 않은걸." 요이치는 또 한 알을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사유리는 요이치가 삼키는 척하면서 뱉어내지 않 도록, 알약이 요이치의 목구멍을 지나 위 속으로 들어가기까지 좌우 크기가 조금 다른 눈으로 가 만히 주시했다. 요이치로서는 사유리가 하라는 대로 약을 삼키는 것이 사랑의 표현이었다. 이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그대로, 이유에 관계없이 들어준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더, 더 먹어." 사유리는 또 애원했다. 요이치는 또 한 알을 입안에 넣고, 이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는 던져버렸다. 머리를 세게 흔들어보았다. 무언가가 머리로 밀려온다....... 그런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실제로는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다다미에 누워 또다시 머리 를 흔들었다. 막지 않으면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갈 듯했다. 정신안정제를 과용한 경우의 증상인가, 아니면 무슨 다른 약인가, 요이치는 그것을 물어보려 고 개를 들었다. 덮쳐오는 졸음과 싸우면서 두 눈을 억지로 떴다. 의문이 고개를 쳐들었다. -나한테 이런 걸 먹여놓고 어쩌자는 거야? 사유리는 일어나 가슴속으로 의문을 되풀이하는 요이치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옷을 벗 고 알몸이 되었다. -이봐, 이런 상태로는 서지 않는다구. 요이치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소리가 나온다 해도 혀가 말 려 발음이 명료하지 못하다. 지금껏 힘으로 넘실거리던 육체에서 모든 기능을 박탈당하였다. 사유리는 요이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그의 몸에서 옷을 한겹 한겹 벗겼다. 그리고 마치 엄 마가 갓난아기에게 애정을 보이듯 정성껏 애무하기 시작했다. 저항도 하지 못하고 사유리의 손길에 그저 몸을 맡기고, 둔해지는 사고, 지리멸렬해지는 의식 속에서, 아아, 이것이야말로 사유리가 바라던 일이었구나, 하는 인식이 들기도 했다. -사유리는 내 마음, 내 몸 그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나한테 약을 먹이고 내 몸에서 저항력을 빼앗은 것이다. 요이치는 불현듯 앞일을 생각했다. 당연한 귀결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두려운 마음은 없 었다. 그정도로 의식이 몽롱해져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날카로운 경고의 목소리가 울리고 있었 다. -정신 차려! 절대로 잠들면 안 돼! 잠들면 끝이다! 사유리는 요이치의 두 다리를 껴안고 리노륨 바닥 위로 질질 끌어 유니트식 목욕탕으로 옮겼 다. 요이치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이고 세면대 곡면에 등을 대는 모습으로 앉혀졌다. 양변기가 팔걸 이를 대신하였다. 세면기에 넘치는 물이 뚝뚝 떨어져 머리를 적시고 있다. 바로 앞 욕조 가장자리 에 사유리가 앉았다. -어쩔 생각이야? 잠들어 버리고 싶은 욕망과 살고 싶은 욕망이 서로 치열하게 싸웠다. 잠들면 편해진다. 유혹이 었다. 잠겼다간 다시 떠지곤 하는 요이치의 눈꺼풀은 욕조에 걸터앉은 사유리의 배 바로 앞에서 음모 깊은 곳에서 흘러나와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흐르는 정액을 무심하게 보고 있었다. 요이치는 방금 전 사유리와 나눈 섹스를 전혀 기억할 수 없었다. 의식은 몽롱한데 발기를 하고 사정까지 했다는 것이 우스꽝스러웠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사실은 요이치에게 일종의 자신감을 주었다. 잃어버린 힘의 일부 를 되찾은 듯한 기분이었다. 사정할 정도의 힘이 있다면 때가 닥치면 남은 힘을 결집하는 것도 가능하리란 자신감. 그때 갑자기 요이치의 눈앞에 스테인리스 칼날이 번쩍 빛나고 다음 순간 선혈이 뿜어나왔다. 사유리의 왼쪽 손목이 쫙 갈라지고 절단된 동맥에서 간헐적으로 피가 솟구쳤다. 소리는 없었지만 요이치는 사유리의 심장의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피를 뿜어내는 리듬에 맞 추어 심장이 신축을 반복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어떻게든 손을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몸 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마지막 힘이 움직이기 시작 했다. 사유리는 왼손을 욕조 위에 올려놓은 채 요이치의 귀에다 입을 갖다댔다. "요이치하고 나의 피로 이 욕조를 가득 채우는 거야. 그래서 물을 잘 저어서 피와 세포 하나하 나가 섞이면 그때 요이치와 내가 정말 하나가 되는 거야. 응, 그렇지?" 그런 식으로 들렸다. 귀로 들었다기보다 직접 가슴속에다 호소하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런 허황된 말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중요한 것은 쫙 갈라진 사유리의 상처를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것. 이대로 그냥 놔둘 수는 없었다. 자신의 몸을 위해서가 아니다. 사랑 하는 사람의 꺼져가는 목숨이 본능을 자극한 것이다. "응, 괜찮지?" 사유리는 요이치에게 속삭이고 있었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았다. 사유리의 피로 요이치의 전 신은 젖어 있었고, 스테인리스 칼날 끝이 몇 번이나 요이치의 손목에 닿아, 그어댔다. 피로 데워져 무뎌진 칼날의 감촉이 묘한 리얼리티를 띠고 있었다. 죽음이 곧 눈앞에 있음을 실 감케 할 만큼 생생했다. 그러나 요이치는 남은 힘을 쥐어짜내 최후의 저항을 시도했다. 먼저 사유리의 상처를 막았다. 그것이 행동의 원동력이었다. 가냘픈 메메의 움을소리가 목욕탕 밖에서 들려왔다. 우윳빛 유리창 너머로 조그만 그림자가 아까부터 몇 번이나 오가며 닫힌 문을 손톱으로 긁어대 고 있었다. 그 그림자를 향하여 요이치는 주먹을 휘두르며 안쪽에서 문을 밀어 열었다. 거기까지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요이치는 정신없이 바닥을 기었다. 마지막 요이치의 힘이 사유 리의 힘을 이겨 간신히 물리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토막난 기억밖에 없다. 수화기를 쥔 감촉.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혀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상황을 전달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아무튼 요이치는 가라앉는 의식 속에서 구급차의 사 이렌 소리를 들었다.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 속에서 사유리의 목숨이 구해지기를 바라면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6 사유리의 영상을 담은 비디오 테이프가 파도 사이로 가라앉고, 스나코 다케시의 편지도 잠시 수면 위를 떠다니다 바닷물을 머금고 곧 가라앉았다. 요이치의 뇌리에 그날의 마지막 장면이 붉은색의 강렬한 색채를 동반하며 떠오른다. 눈앞에 펼 쳐지는 바다 색을 밀어내고 선혈로 물든 좁은 목욕탕의 벽이 섬광처럼 번뜩인다. -생겼다면 아마, 그땔 거다. 요이치는 갑판에서 서서 수면을 지그시 바라보면서 신의 장난을 원망했다. 죽음 직전에 섹스를 하면서 피임을 하는 여자는 없다. 사유리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한 그 순간, 그 태내에서 새로 운 생명이 싹튼 것이다. 요이치는 사유리의 사타구니 사이로 흘러내리던 자신의 정액을 분명히 보았다. 그 다음 곧바로 사유리는 구급차로 병원에 운반되어, 절대 안정을 취한 채 아침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날이나 그 다음날 수정이 완성된 셈이다. 그리고 죽음을 바란 모태 속에서 살아남 기 위해 몸부림친 그 생명은, 편지가 도착하는 데 걸린 한 달을 가산하면 이미 7개월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이대로 순조롭게 발육한다면 요이치의 아이는 틀림없이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이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이야. 요이치는 거부하고 싶었다. 결국 사유리는 2주일간 입원하게 되었지만 그 동안 요이치는 한번도 병문안을 가지 않았다. 정 신안정제를 과용한 탓인지, 아니면 단순히 정신적인 이유 때문인지, 허탈 상태에서 2-3일을 몽롱 하게 지냈고, 그럭저럭 정신을 차리자 이번에는 몸 속 깊은 곳에서 배어나오는 공포감에 몸을 떨 었다. 쫙 갈라진 손목과 망막을 뒤덮은 선혈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 그를 몰아붙였다. 죽음의 길동무로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생명의 무게에 새삼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더구나 그 동안 경찰의 사건 취조에 진이 다 빠지는 바람에 연극 연습에 일 주일이나 빠져 동 료들한테 소외당했고, 끝없는 침몰이었다. 식욕도 없고 술을 마시면 횡포를 부릴 것 같아 술도 마시지 못하고, 왼쪽 손목에 생긴 성처 딱 지를 갈작갈작 긁으면서 방 안에서 멍하게 지냈다. 아무리 정든 집이지만 아파트의 소유자는 엄연히 사유리고, 그것을 생각하면 그 방에 눌러 있 기도 고통스러웠다. 꼭 일 주일째 아침, 몇 번이고 울리는 전화벨 소리를 무시하고 오토바이라도 탈까 싶어 주차장 으로 내려가는 참에 케코를 만났다. "참내, 요이치 씨, 몇 번이나 전화했는 줄 알아." 사유리가 자살 미수로 입원한 것을 알고, 안심하고 그 틈에 뻔뻔스럽게 찾아왔다고 생각하니 화가 왈칵 치밀었다.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대꾸를 하자 케코도 끝내 화를 냈다. "괴로운 건 알지만, 연습도 안하고 언제까지 그렇게 멍하게 지낼꺼야?" 마치 입시를 앞둔 아들을 대하는 말투에 은혜라도 베푸는 듯한 충고였다. "요이치한테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땐지 알기는 하는 거야?" 불현듯 요이치는 자신이 개척하려는 장래가 남의 손에 쥐어져 있다는 현실에 강한 혐오감이 일 었다. 사유리는 죽이려 했고 케코는 보호자가 되려 한다. 그런 모든 관계가 싫어졌다. 올해로 스물아홉이 되었고, 내년이면 서른이다. 그렇다고 적당히 인생을 살아온 것도 아닌데, 서른을 앞두고 지금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간 신히 얻은 상업 극단의 단역 따윈 물거품으로 돌아가도 상관없다, 무일푼이 되어도 상관없다, 살 곳을 잃어도 상관없다, 좌우지간 지금까지의 나 자신을 버리고 싶었다. 배우로 성공하길 바란 자신의 꿈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육체를 혹사하는 직장에서 아무 생각 없이 일사불란하게 일하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그러면 피와 땀에 섞여 몸에 쌓인 오물을 빠져나올 것이고, 이전의 나와는 다른 나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순간의 생각이 절실한 소망으로 바뀌고, '비켜'라면서 케코의 어깨를 밀고 오토바이에 올라탈 때까지는 설마 참치잡이배를 타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런데 사유리와 곧잘 오토바이를 타고 왔던 미우라 반도의 해변을 달리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에 미사키 항에 도착하여, 거기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니 귀항한 참치잡이배가 눈에 띄었던 것 이다. 갑판에 남자 몇 명이 서 있었다. 너무 멀어서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콩알처럼 작게 보이는 몸에서 귀항의 기쁨이 넘치고 있었다. 일을 끝낸 만족감과 가족을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갑판 위는 시끌벅적하고 생기가 넘 쳐 흘렀다. 요이치는 바다에서 전해져오는 생명력이 이끄는 대로 부두로 향했고, 정박해 있는 참치잡이배 를 올려다보고 있다가 다카기 시게요시를 만나 그 자리에서 배를 타기로 결심했다. 일단 아파트로 돌아가 메메를 친구한테 맡기고, 짐을 꾸려 부두로 돌아온 다음에는 출항 준비 로 땀을 흘렸다. 결심이 흔들릴까 두려워 끝내 사유리는 만나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요이치의 눈앞에 바다가 펼쳐져 있다. 미사키 항에서 바라본 바다와는 전혀 종류 가 다른 세계. 가혹하다고 하면 이처럼 가혹한 노동의 장이 없을 것이다. 일 자체도 힘들지만 폭풍 속에서 조업을 할 때는 목숨이 위태롭다. 그런데 과연 난 다시 태어 날 수 있었던가....... 요이치는 아직 뭐라 말할 수 없었다. 결과는 좀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만 배에서의 생활이 길어지면서 사유리와의 마지막 장면이 점차 머리에서 사라진 것만은 분 명하다. 몸집도 식성도 바뀌었다. 성욕을 처리하는 방법, 다른 선원들을 대하는 방법, 모든 것이 육지와 달랐다. 그런데 이런 곳까지 따라와서 사유리는 나의 변화하는 육체를 물거품으로 만들려 하고 있다. 요이치의 마음은 또다시 흔들렸다. 필요한 물자를 다 공급하자 해상 보급선이 떠나려 한다. 기적이 울렸다. 어장에서 어장으로 이 동하는 도중의 짧은 휴식이 끝나고 내일이면 다시 가혹한 조업이 시작된다. 요이치는 소리를 지 르면서 배꼬리로 달려가 물자를 나르는 동료들 속에 섰다. 식료품 창고로 내려가는 트랩에서 그 는 기도했다. 새 어장에는 미처 다 낚을 수 없을 만큼 참치가 떼지어 있기를, 그래서 주저와 고뇌 와 그 모든 것을 깡그리 잊을 만큼 가혹한 노동의 나날이 계속되기를. 제3장 월 푸르츠 1 10월에 들어서자 날씨가 갑자기 싸늘해졌다. 요이치가 있는 남태평양은 봄으로 계절이 바뀌지 만 일본은 가을색이 완연해졌다. 모치즈키가 사는 맨션의 16층은 창문을 열어두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여름에도 에어컨을 켤 필요가 없다. 저녁 식사 후의 단란한 시간, 모치즈키는 조용히 석간을 읽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불어들어 오는 서늘한 바람에 신경이 쓰였다. 가끔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쳐다본다. 바지 뒷주머 니에서 지갑을 꺼내 스포츠 센터의 회원증이 들어있는지 확인했다. 스포츠 센터의 회원이 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모치즈키는 실제로 운동으로 땀을 흘린 적은 없 었다. 하지만 아내 나오미는 모치즈키가 일 주일에 한 번씩 꼬박꼬박 스포츠 센터에 다니고 있다 고 믿고 있었다. 비누 냄새를 솔솔 풍기며 집으로 돌아와도 스포츠 센터에 들렀다 왔다고 설명하 면 의심받을 걱정이 없다. 노노야마 아키코와의 약속 시간은 8시였다. 30분 전이 되자 모치즈키는 마음이 술렁거려서 신 문을 읽어도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차를 타고 바로 10분 거리에 있는 공원에서 만나, 그 공원의 어느 한쪽에 차를 한 대 세워두고 다른 한 대로 목적지로 향한다. 오늘로 세 번째 사 용하는 방법이다. "나, 스포츠 센터에 다녀올게." 모치즈키는 펼친 신문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평소 남편의 운동 부족을 지적했 던 나오미는 남편이 스포츠 센터에 다니겠다는 말을 듣고 대찬성이었고, 늘 기분 좋게 배웅해주 었다. "속옷하고 타월, 준비할까요?" 그릇을 다 씻고 젖은 손을 수건에 닦으면서 나오미가 침실로 들어오려 했다. "아냐, 됐어. 내가 하지 뭐." 모치즈키는 단호하게 거절하고 일어났다. 아내에게 거들게 할 수는 없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배웅하는 아내에게 속옷까지 준비하게 할 만큼 무심하지는 않았다. 왠지 씁쓸한 기분으로 모치즈키는 한 번도 땀으로 젖은 적이 없는 트레이닝 웨어, 슈즈, 타월 등을 재빨리 운동 가방에 접어넣구, 구두를 신으려고 현관 끝에 앉았다. "오늘은 좀 늦을 거야. 한 10시나 지나야 올 꺼니까." 일어서서 돌아보자, 바로 코앞에 아내의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언제 왔는지 딸인 카나에까지 그 옆에 서 있었다. 둘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모치즈키는 점차 침착함을 잃었다. 발끝에서부터 제 어할 수 없을 정도로 부르르 떨려오는 감각이 느껴졌다. -오늘밤으로 끝내자. 몇 번이나 같은 말을 속으로 중얼 거렸다. "아빠, 힘내서 다이어트, 다이어트." 손가락 두 개로 V자를 만들며 환하게 미소짓는 딸, 모치즈키는 눈을 꽉 감아 아내와 딸의 초상 을 지우며 몸을 돌려 문 밖으로 나갔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더 이상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자칫 신경쇠약증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만약을 위해서 신뢰할 수 있는 정 신과 의사를 한 명 봐두는 것도 좋겠군. 그런 농담으로 마음을 달래고 싶었지만 농담이 아닐 정 도로 심장은 오래도록 안정을 찾지 못했다. 차에 올라타 룸 미러의 각도를 조정하고 있는데, 한 달 전쯤에 진찰한 여환자의 얼굴이 떠올랐 다. 겉으로만 얼핏 봐도 상당한 문제를 껴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신경쇠약증이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 또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에 대한 사랑이 문제의 원인이었다. 그 환자는 아무 부족함 없이 생활하는 마흔두 살의 주부였다. 남편은 대기업의 중역. 그런데 그 렇게 이상적인 입장에 있는 여자가 아들의 가정교사로 채용한, 지위도 명예도 돈도 없는 데다 처 자식까지 딸려 있는 남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가정교사가 오는 날이면 애간장을 태우며 기다리는, 순수하고 플라노틱한 사랑이었 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가정교사가 오는 날이면 정성껏 화장을 하는 아내를 이상히 여긴 남편이 그 이유를 물었다. 남편은 아내의 불륜을 의심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아내가 여대생처럼 가정교사한테 연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안 남편은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늙어 별볼일 없어진 그녀의 용모를 비웃었다고 한다. 아내는 정신적으로 심한 상처를 입 었고, 이후 극도의 식욕부진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이런 예는 흔히 있다. 갑작스런 파혼과 뒤엉킨 삼각관계, 불륜 끝에......살인으로 발전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지금까지 모치즈키는 마음 한 구석으로 이런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모 르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속을 상상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거니와, 어떻게 하면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지 식이 풍부하면 사람들 살아가면서 빠지기 쉬운 함정에는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모치즈키가 향하려는 장소는 그야말로 함정이었다. 아내한테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설 때 쿵쾅거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가 그것을 대신 말해주고 있다. 만나자는 유혹을 거절하기 만 하면 되는데 그것이 안 된다. 왜 못 하는가. 육체가 바라는 것을 이성의 힘으로 억제하지 못하 기 때문이다. 이제 곧 애인을 만날 텐데도 그의 가슴은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8시 몇 분 전, 모치즈키는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아키코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듯 다른 차는 보이지 않았다. 라이트를 끄고 미등만 켜놓고 시동은 걸어둔 채다. 카세트 데크에 테이프를 밀어넣고 핸들에 양 손을 올려놓고 아키코를 기다리자니, 사랑 싸움으로 신경증에 걸린 환자들의 얼굴이 모치즈키의 뇌리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오늘밤으로 끝내자. 같은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야 속이 시원할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 말을 몇 번째인가 우 물거리고 있을 때 헤드 라이트 불빛이 저 뒤에서부터 달려왔다. 빛의 방향으로 얼굴을 돌리자 주 차장 입구로 돌아 들어오는 소형 쿠페가 눈에 들어왔다. 차 안의 디지털 시계는 정확하게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차에서 내려선 아키코는 베이지색 원피스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아스팔트 위로 하이 힐 소리를 울리며 다가오는 아키코의 모습을 모치즈키는 룸 미러를 통해 지켜보았다. 창문을 세 번 톡톡톡 두드리고 조수석 문을 열고, 무릎을 가지런히 모으며 좌석으로 미끄러져 들어오자마자 아키코는 모치즈키의 목을 두 손으로 감싸고 키스를 했다. 향수를 한 방울도 뿌리지 않은 살냄새 가 눈 깜짝할 사이에 부드럽게 모치즈키를 감싸더니 마침내 그의 관능에 불을 붙였다. 그러곤 결 국 주문처럼 외웠던 결심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시트로 하반신을 가리고, 깍지낀 두 손을 머리 밑에 받치고, 아키코는 상반신을 비틀어 풍만한 가슴을 내밀었다. 그리고는 두 다리를 들어 침대가에 앉자, 지금 막 생각났다는 듯 사이드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 봉투에서 과일을 한 개 꺼냈다. 과일은 얇은 종이에 싸인 서양배였다. "이 과일, 뭔지 알아요?" 아키코는 서양배를 가슴 높이로 들어올렸다. "서양배잖아. 왜 그런 걸 가지고 온 거지?" 모치즈키가 몸을 일으키고 묻자 아키코는 까르륵 웃었다. "내가 나오려는데, 그이가 줬어요." "당신 남편이?" "레이코네 집에 놀러간다고 했더니, 그럼 이거라도 가지고 가라면서 주더라구요." 아키코는 레이코라는 친구 집에 놀러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나온것이다. 그러나 모치즈키는 그 녀의 남편이 정말 아내의 거짓말을 그대로 믿었을지 의심스러웠다. 모치즈키의 불안한 표정을 읽었는지, 아키코가 말한다. "괜찮아요. 레이코네 집에 전화를 걸어서 확인을 하거나 그럴 사람은 아니니까. 지금쯤 아마 목 욕하고 잠들어 있을걸요." "자다니, 아직 10시도 안 되었는데." "그 사람 아침에 일찍 나가니까......." "일 때문에?" 남편의 일 얘기로 화제를 확대되려 하자 아키코는 손에 들고 있던 서양배를 공처럼 가볍게 던 져 올리기 시작했다. 남편에 관해서는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지 어느 새 화제를 돌리려 한다. 모치즈키는 아키코의 남편이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아직 듣지 못했다. "서양배, 월 푸르츠의 일종이라는 거, 알아요?" "월 푸르츠? 월이라면 벽이라는 뜻이야?" "응. 이 과일은 벽에 기대게 해서 보호해주지 않으면 열매가 잘 열리지 않거든요, 추위나 바람 에 약해서." 파티에서 말상대가 없어 혼자 덩그라니 있는 사람을 '월 플라워'라고 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월 푸르츠'란 말은 처음 듣는 것이다. 아키코는 서양배를 모치즈키에게 건네면서, '먹어봐요'라고 권한다. 모치즈키는 잠시 서양배를 쏘아보았다. 추위와 비바람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벽에 기대게 해야 한다는 과일, 요컨대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않는다. 입원한 환자들의 얼굴이 한명 한명 연상되었다. 마쓰이 병원에 있는 환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모두 이 과일 같았다. 모치즈키가 우물쭈물거리고 있자 아키코는 재빨리 빼앗아 한 입 깨물고는 '우와, 맛있네'라면서 입을 손등으로 닦는다. 둥그런 곡선을 그리고 있는 노란 서양배는 그 일부를 아키코의 타액으로 적시고, 핑크빛 실내 조명을 받고 있었다. 보름날 밤 바닷물 속에 있는 해삼 같았다. "나머지는 선생님한테 줄 테니까, 드세요." '뭐?'라고 놀라면서 모치즈키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손을 뻗지 못했다. 입원 환자들의 이미지와 중첩돼 식욕이 일지 않았다. "먹고 싶지 않아." "받으라니까요." "됐어." 아키코는, '어, 그래요?'라면서 심술맞게 포기하고는, 먹다 만 서양배를 주저없이 쓰레기통에 던 져버렸다. 쓰레기 바닥에 쌓인 모치즈키와 아키코의 흔적으로 얼룩진 화장지 더미 위로 서양배가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그 대신......." 아키코는 모치즈키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애무하면서 말했다. "그 대신......나. 선생님의......줘요." "......무엇을?" 대충 짐작이 갔지만 모치즈키는 되물었다. "그러니까, 선생님의......." 아키코는 모치즈키의 하반신으로 손을 뻗으면서 얼굴을 귀 밑으로 바싹 갖다댔다. "선생님의 아기 말이에요." 대답하기가 망설여진 것도 아니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침묵으로 대답했다. 이런 경우 취할 수 있는 방법, 모든 것을 침묵으로 전하는 수밖에 없었다. 남자와 여자 가 수렁에 빠져드는, 그 정해진 코스를 가고 있다는 것이 아직 실감나지 않았다. 그러나 모치즈키 는 문득 자신의 미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괜찮아요, 안심해요. 절대로 들키지 않도록 할 테니까. 선생님한테는 절대로 폐 안 끼칠 테니 까." 모치즈키는 계속 침묵했다. "서른세 살에 아이 하나쯤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구요. 남편의 아이는 낳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선생님 아이 아니면 나 안 낳을 거야." "......." "인정해 달라고, 절대로 그러지 않을게요." 모치즈키는 담배를 꺼내 라이터로 불을 붙이고 연기를 깊이 들이 마셨다. 그런데 한 모금 피웠 을 뿐인데 아키코의 손이 그 불을 비벼 끄고 말았다. "선생님 혈액형 A형이죠? 나도 A형. 남편은 O형. 그러니까 아이는 A형 아니면 O형밖에 나오 지 않을 거야. 그 점에서도 아무 문제 없어. 얼굴은 조금 닮지 않아도 수상히 여기지 않는 법이 고. 남편은 특히 둔하니까." 모치즈키는 팔꿈치를 대고 상반신을 절반쯤 일으켰다. "남편한테는 절대 들키지 않아요. 불륜 상대의 아이를 갖는 것쯤 간단한 일이니까! 나는 100% 확실하게 할 수 있어요. 매일 아침 기초체온까지 재고 있다니까요." 부인 체온계로 매일 아침 빠뜨리지 않고 체온을 재 그래프를 만들면 배란일을 아는 정도는 별 문제가 아니다. 그 며칠 후에 남편과 형식적으로 섹스를 해서 얼버무리면, 아무 의심받지 않고 다 른 남자의 아이를 가질 수 있다. 아키코는 대답이 없는 모치즈키에게 실망하는 눈치도 보이지 않고 그대로 목욕탕으로 사라졌 다. 그리고 몇 분 후, 느긋하게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는지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모치즈키는 침 대에 벌렁 누워 얼굴을 약간 들고 목욕탕 쪽에 귀를 기울였다. 핑크빛 조명이 바로 머리 위에서 빛나고 있는데, 그 화려한 색상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방이 조용하다. 일부러 소리를 내지 않아 모치즈키의 신경이 자기한테 쏠리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부조화스런 정적에서 모치즈키는 어 떤 의미를 찾으려했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아키코의 마음이 거짓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어 도 남편의 아이는 갖고 싶지 않다는 말은 본심일 것이다. -그녀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남편에게는 물론이고, 나한테마저 비밀로 하고 나의 아이 를 낳을 수도 있다. 모치즈키의 가슴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지금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는다. 아무한테도 폐를 끼치지 않는다면 갖게 해도 좋지 않을까 하고 허락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장래에 가족에게 재앙 이 덮칠것은 뻔한 일이다. 허밍 소리가 나지막하게 목욕탕의 문틈으로 흘러나왔다. 두 눈을 꼭 감은 아키코가 목덜미까지 물에 푹 잠겨 기분 좋게 노래하는 모습이 떠올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 졌다. 기분 전환삼아 허밍이나 하나 보다 했더니 곧장 어떤 멜로디가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런데 제 목이 생각나지 않는다. 몇 번이나 되풀이 하면서 기억을 자극하자 아사카와 사유리의 데뷔곡 [거 울 속]임을 알 수 있었다. 진찰을 하는 중에도 사유리는 곧잘 이 곡을 흥얼거렸다. 그래서 모치즈 키도 알게 모르게 기억하고 만 것이다. 아사카와 사유리의 증상은 별 변화가 없었지만 몸은 나날이 변해갔다. 벌써 임신 8개월이다. 둥 그런 배를 껴안고 정원을 산책하는 사유리의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우스꽝스러웠다. 스나코 다케 시가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뱃속의 아이는 마키 요이치의 자식이 틀림없는 것 같았다. 사유리를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 그의 손 안에 있다....... 모치즈키는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 런데 그런 그가 참치잡이배를 타고 뉴질랜드 근해에 있다니, 앞날이 캄캄하다. 여자를 버리고 도 망쳤다고 해석하는 길밖에 없다. 모치즈키는 머릿속으로 아사카와 사유리에 관한 정보를 다시 한번 정리해보았다. 정신과 차트 에는 환자 당사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이 살아온 인생까지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그 자 료의 양이 방대하다. 그런데 일가친척 한 명 없는 사유리는 정확한 차트조차 작성하지 못하고 있 다. 그런데 다케시가 찾아낸 정보 덕분에 막연하기는 해도 사유리를 둘러싼 가족의 문제가 서서 히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장 큰 의문은 아버지 슈이치로가 자살한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것이다. 다케시가 슈이치로의 동업자였던 나가다를 만나 들은 얘기로 추정하자면 그의 죽음은 명백한 자살이었다. 하지만 유서 도 없고 동기도 불투명한 부분이 많다. 다만 모치즈키는 자살하기 직전 슈이치로가 정신과 의사 의 진찰을 받았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나가다의 말에 의하면 자살하기 석 달 전쯤부터 슈이치로의 상태가 이상했다고 한다. 우선은 건망증이 심해졌다. 일 때문에 의논을 할 때도, 바로 어제 계약한 건까지 잊어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어 나가다를 어이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더구나 나가다가 그 점을 지적하면 슈이치로는 오히려 화를 벌컥벌컥 내면서 감당할 수 없는 상태에 빠졌다. 딱히 이렇게 할 원인도 없이 발작처럼 화 를 내기도 해 주위 사람들을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곤 했던 모양이다. 일을 하면서도 실수가 잦고, 그 전의 생동감은 조금도 느낄 수 없었다. 얼굴 표정에서 걸음걸이 까지, 왠지 예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모두들 좀 이상해진 거 아니냐고 수군덕 거렸고, 암암리에 정신과 의사한테 진찰을 받아보라고 권했다. 그래서 슈이치로는 마침내 정신과 에 갔다. 다케시는 슈이치로가 진찰을 받는 병원의 이름까지 알아냈다. 정신신경과 나이토 클리 닉. 같은 정신과 의사로서 모치즈키가 신경을 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슈이치로가 정신병을 앓고 있었는지, 만약 그렇다면 병명이 무엇인지, 화를 잘 내고 건망증이 심해졌다....... 갑작스런 인격의 변화. 원인은? 신경쇠약증 때문인가, 아니면 정신분열증 때문인가, 혹은 알코올, 마약, 각성제 중 독으로 인한 인격의 변화인가... 모치즈키는 여러 가지 병명을 떠올리면서 증상을 비교해보았다. 그런데 그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또 하나의 키 워드, 슈이치로의 딸 사유리도 최근 두 번 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 사실. 6년 전 사유리는 가수로 데뷔했는데 서머 캠페인을 하는 도중에 신경의 균형을 잃었고, 더구나 그 두 달 후에 아버지가 자살했다. 충격으로 재기하지 못하고 가수로서의 자신의 미래를 물거품 으로 만들고 말았다. 이듬해 마키 요이치를 알게 되었고 5년 가까이 동거 생활을 했다. 그 후 올 봄에 자살 미수, 그리고 불과 두 달 전 임신 5개월의 몸으로 나카다지마 해안에서 다시 자살을 기도했다. 모치즈키는 혹시 슈이치로의 병에 유전적 요소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억측하였다. 아버지와 딸이란 인연, 핏줄....... -설마. 어떤 의혹이 떠올랐다. 발병율이 50만 명에 한 명꼴이라는 끔찍한 정신 질환. 모치즈키는 도쿄 에 가서 정신신경과 나이토 클리닉을 찾아가, 아사카와 슈이치로의 차트를 보고 싶은 욕구에 사 로잡혔다. 진료 차트에 기록된 병명에 힌트가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현재 사유리의 증상, 그녀의 몸을 짓누르고 있는 숙명의 무게가 차트의 가족란에 기록되어 있지 않을까. 일에 집중하고 있던 의식이 목욕탕에서 나온 아키코의 젖은 몸에 의해 어이없이 흩어지고 말았 다. 빨갛게 물든 피부, 허리에서 가슴, 목덜미가 송송 솟은 땀방울로 덮여 있었다. 타월로 닦아도 땀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다. 아키코는 그대로 속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리고 원피스 지퍼를 올 리고 모치즈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함정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남자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빠져들게 하는, 늘어진 머리카락 사이에서 한층 광채를 더하는 야성적인 눈동자, 어린애 같은 천 진함과 요염함을 동시에 지녀 원하는 대로 변하는 눈동자가 자신의 바람을 이루려고 남자를 유혹 하기 시작했다. 2 도쿄에서 열린 일본 정신의학회에 참석한 후 모치즈키는 오타 구에 있는 정신신경과 나이토 클 리닉으로 향했다. 정신과 의사의 세계는 그리 넓지 않아, 연줄연줄 더듬어보니 모치즈키의 스승이 기도 한 아마마쓰 의대의 다쓰나미 교수와 나이토가 친밀한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미리 전화를 걸어 자기 소개를 해두었다. -치료에 필요하다면 아사카와 슈이치로의 차트를 정리하여 우편으로 보낼까요? 나이토는 친절하게도 그런 제안을 했지만 모치즈키는 거절했다. 대신 학회에 참석하는 길에 직 접 찾아가도 좋으냐고 방문의 뜻을 비추어 날짜를 정했다. 환자의 태생에서 친형제의 병력까지 자세하게 기록된 차트가 한 권의 파일로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가능하면 직접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었다. 손목 시계를 보니 저녁 7시간 넘었다. 7시가 넘으면 집으로 찾아가기로 약속했다. 주소와 전화 번호는 수첩에 메모되어 있다. 모치즈키는 다시 한 번 주소를 확인하고 역에서 5분 거리를 걸었 다. 나이토는 클리닉 근처에서 연립주택을 빌려 혼자 살고 있었다. 2층짜리 목조 연립으로, 개업의 가 사는 주거지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만큼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것인가, 아니면 아내도 없는 독신 생활이니 그저 검소하게 살고 있을 뿐인가. 모치즈키는 쓸데없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나이토는 야윈 몸에 허리가 약간 굽어 있고 백발이 성성하였다. 하긴 다쓰나미 교수와 같은 나 이라고 하니, 올해 꼭 예순 살일 것이다. 현관에서 모치즈키의 얼굴을 보자 나이토는 '여어, 어서 오십시오'라며 곰살스럽게 말을 걸었다. 별 할 일도 없이 적적하게 지내는 밤, 같은 계통의 일을 하는 방문객이 반가운 표정이었다. 집은 방이 두 개 있고 겉만 보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다. 바람도 잘 통하 고, 바로 앞이 공원이라 더할 나위 없이 조용했다. -알 만하군. 이 연립에 사는 이유가 바로 이런 건가. 모치즈키는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문이 열려 있는 방 안으로 서적들이 꽉 들어찬 책꽂이가 보였다. 구석구석 깨끗하게 잘 정돈되어 있다. "아주 좋은 곳이군요. 꽤 오래 사신 모양입니다." "20년씩이나 살다보니 이제 영 이사할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나이토는 다다미가 깔린 일본식 방으로 모치즈키를 안내했다. 두 사람과 공통의 인연을 지닌 인물, 다쓰나미 교수의 근황에 대해 한 차례 이야기를 나눈 후, 모치즈키가 천천히 이번 방문의 의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사카와 사유리라는 젊은 여성이 지 금 자신이 부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마쓰이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것, 그녀의 과거를 조사하는 중에 아버지 아사카와 슈이치로의 병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그의 차트를 꼭 보고 싶어 이렇게 방문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상황만을 근거로 추측한 병명이 지금 모치즈키의 뇌리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진료차트를 보면 진상이 밝혀진다. "선생님은 아사카와 슈이치로란 환자를 기억하고 계십니까?" 모치즈키는 그 점을 먼저 확인했다. 나이토는 천천히 고개를 끄떡였다. "물론 기억하고 있습니다. 아마, 6년 전의 일이지요." "물론이라면?" "아하, 그것은......." 나이토는 거기서 말을 끊고 일어섰다. "우선 이것 좀 보시죠. 선생님한테 전화를 받고 확인해두었습니다." 그는 준비한 차트를 모치즈키에게 내밀었다. 신비스런 물건이라도 만지듯 모치즈키는 몸가짐을 바로 하고, 어떤 내용이든 놀라지 않으리라 고 각오했다. 그리고 한장 한장 챠트를 넘겼다. 첫 페이지였다. 영어로 기록된 병명이 모치즈키의 눈으로 날아들어,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핸틴튼 무도병." -추측했던 대로다, 핸틴튼 무도병! 모치즈키는 얼굴을 들고 잠시 나이토와 시선을 마주하였다. 추측이 맞았던 것이다. 조심스럽지 못한 행동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모치즈키는 끓어오르는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6년 전, 나이토가 아사카와 슈이치로를 진찰했을 때도 같은 느낌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된 지 30년이 넘습니다만, 이 병에 걸린 환자를 보기는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 입니다." 나이토는 아사카와 슈이치로와의 만남을 차분하게 술회하였다.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몇 번인가 진찰을 거듭하면서 불수의운동(불수의운동:몸이 자기 의사대 로 움직여지지 않는 것)을 조사하고, 슈이치로의 한평생의 병력뿐만 아니라 그 조부모의 병력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는 병명을 확신하였다. 슈이치로의 어머니는 마흔 살에 사고로 죽었기 때문에 진단할 길이 없었지만, 조부는 원인 불 명의 정신 질환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더구나 마흔세 살에 죽은 큰어머니는 죽기 직전 명백한 치 매 현상을 보였다. 그런 사실들과 신체 표면에 나타난 불수의운동과 인격의 변화, 기억의 결함, 사고의 혼란 등으로 보아 병명은 틀림없었다. -핸틴튼 무도병. 그러나 병명을 들은 슈이치로는 놀라움에 되물을 뿐이었다. 정신과 의사가 아니면 이 병의 증 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본인의 경우, 이 병에 걸릴 확률이 50만 명에 한 명 꼴일 정도로 극히 드문 병이다. 나이토는 슈이치로에게 앞으로 발생할 증상을 간단히 설명하였다. 그 설명을 들으면서 슈이치 로의 표정은 굳어졌고 그에 반해 두 눈을 움직임이 바빠졌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나이토는 금방 알수 있었다. 외동딸이다. 딸까지 자신과 똑같은 운명을 짊어져야 할 것을 생각하면,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다....... 슈이치로는 분하고 억울한 심정에 이를 갈았을 것이다. "슈이치로 씨는 그 딸한테 병에 관해 이야기를 했습니까?" 모치즈키가 물었다. "딸의 인생에 관한 문제니까요, 얘기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 점은 몇 번이나 확인해 두었습니 다." "그런데 실제로는 어땠습니까?" "물론 딸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병 때문에 상당히 괴로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병원 에 왔을 때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었죠. 그 후에도 가끔씩 병원에 왔어요. 그때마다 발병하기 전에 진단할 수 있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말투로 봐서 좋아하는 남자가 생긴 모양이었습니 다....... 잔인한 일이죠." 가수로 데뷔하여 서머 캠페인 때문에 전국을 돌아다닐 때다. 사유리는 이유도 없이 자주 침울 해져, 스스로 가수 생명을 단축하고 말았다. 그 원인이 이제 분명해졌다. 자신의 운명을 알고 강 한 충격을 받은 것이다. 더구나 그 두 달 후에 아버지는 자살했다. 그런 비극 속에서 재기하는 데 반 년 이상이나 소요되었다. 다케시가 작성한 아사카와 가족의 연보에 의하면 이듬해 6월경 사유 리는 마키 요이치를 만나게 되는데, 그와 연애를 하면서 마음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것 같 았지만 보다 큰 딜레마를 안게 되었던 것 같았다. 모치즈키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차트를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 사유리의 어머니 유코에 관한 항목에 눈길이 멈췄다. 어머니는 사유리가 철이 들기도 전에 죽었다고 들었는데, 차트에 적힌 내 용은 그와 달랐다. -슈이치로 28세 때 아내 유코(27세)와 이혼. 이 점에 관해 확인하자, 나이토는 기록에 바탕하여 아사카와 가의 과거를 줄줄 풀어놓았다. "무대 조명 일을 하고 있던 슈이치로 씨는 풋내기 여배우였던 아내를 알게 되어 바로 결혼을 했고, 딸을 얻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2년쯤 후에 아내가 거의 줄행랑이나 다름없이 가출을 했다고 합니다." "줄행랑?" "남자가 생겼던 겁니다." "아내한테 말입니까?" "네에, 그 후에 보내진 이혼장에 슈이치로 씨는 도장을 찍고 정식으로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만, 당시 18개월이었던 사유리는 아버지가 맡기로 했죠. 잘못은 아내에게 있다면서 슈이치로는 절 대로 딸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지금 사유리 씨의 어머니가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글쎄요...... 그런 것까지야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모치즈키는 재빨리 암산을 했다. 이혼 당시 스물일곱 살이었다면 현재 유코는 쉰 살에 가깝다. "아 참, 지금 사유리 씨는 임신 8개월입니다." 모치즈키는 왜 유코가 어디에 사는지를 궁금해하는지, 그 이유를 넌지시 나이토에게 알렸다. "아, 그랬군요." 나이토는 모치즈키의 의도를 이해했다. 출산 후 사유리의 증상에 별다른 변화가 없는 데다 남자 쪽이 계속 책임을 거부한다면 갓난아 기는 유아원에 맡겨지게 된다. 그러나 사유리의 어머니가 살아 있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유코는 태어날 아이한테는 할머니가 된다. 아이를 맡든 맡지 않든 유코한테 이런 상황을 알릴 필요가 있 었다. 만에 하나 사유리가 회복하여 퇴원하게 되는 날에는, 그녀를 보호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유코이기 때문이다. "알 수 없을까요, 유코 씨가 현재 어디에 사는지?" 모치즈키의 한숨에 나이토도 한숨으로 답하는 길밖에 없었다. "조사관과 의논해보면 어떨까요? 이런 경우라면 찾아주지 않을까요?" 물론 하마마쓰로 돌아가면 곧장 시의 복지 사무소에 연락하여 절차를 밟을 작정이었다. 사정만 허락된다면 모치즈키는 이 조사를 다시 한 번 다케시에게 맡기고 싶었다. 단기간에 사유리에 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여 연보까지 작성한 솜씨는 전문 조사관 뺨칠 정도였다. 탐정 놀이가 적성에 맞는지 본인도 꽤 재미있어했다. 현재 다케시는 도쿄의 회사를 정 식으로 퇴사하고 별 하는 일 없이 집에서 지내고 있다. 다케시도 앞으로의 진로를 생각하지 않으 면 안 된다. 의외로 조사관 일이 그의 적성에 맞을지도 모른다. 때를 봐서 그런 조언을 해볼까 하 고 모치즈키는 생각했다. 밤 8시 반이었다. 가게들이 문을 닫을 시간이다. 택시를 타면 30분도 걸리지 않는다는 나이토의 말을 믿고 모치즈키는 상점가를 천천히 걸으면서 버번 작은 걸 한 병 사고 택시를 잡아 도쿄 역 으로 향했다. 9시 25분발 히카리 호 시간에 맞춰 가기만 하면 되니까 그리 서두를 일은 없다. 술이 그리 센 편은 아니지만 오늘밤 모치즈키는 왠지 술이 마시고 싶었다. 학회에서는 거의 수 확이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핸틴튼 무도병'이라는 병명이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슈이치로의 피를 이어받은 사유리는 2분의 1 확률로 같은 병에 걸릴 운명을 짊어지고 있다. 현 재의 정신 상태가 핸틴튼 무도병에 의한 것이라면 이미 대책은 없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 유리의 어머니 유코를 찾아내, 태어날 아이를 건네주는 정도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태어날 아이마저 그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모치즈키는 정신과 의사로서 무력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3 병원 근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먹으면서 어제 도쿄의 나이토 클리닉을 방문하여 슈이치로의 병명을 확인하기까지의 경위를 설명하자, 다케시는 왜 사유리 아버지의 병명이 문제가 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찌푸렸다. "핸틴튼 무도병?" 잠시 침묵한 후에 다케시가 되물었다. 난생 처음 듣는 병명이니 되묻는 도리밖에 어떻게 반응 할 길이 없었다.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넣고 다케시는 얘기를 들을 자세를 갖추었다. 모치즈키는 핸틴튼 무도병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였다. "1872년 미국의 조지 핸틴튼에 의해 기재된 희귀한 병으로, 숙명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병이지. 정신 질환이란 거의 환경에 좌우되고, 유전적 요인도 복잡하게 얽히는 법인데, 핸틴튼 무 도병은 전적으로 유전자에 의해 발생하는 병이지. 즉 병의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은 간 단해. DNA에 포함된 유전 프로그램의 이상. 그밖의 원인은 있을 수 없어." 모치즈키는 유리테이블에 노트를 펼쳐놓고 연필로 까맣게 색칠한 동그라미와 하얀 동그라미 한 쌍과, 하얀 동그라미와 하얀 동그라미를 한 쌍 그렸다. 사람의 세포핵에는 쌍을 이루는 염색체가 있고, 자식은 부모로부터 각각 하나씩 염색체를 물려받게 된다. 모치즈키는 유전의 법칙을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염색체 쌍을 흑백 동그라미와 백백 동그라미로 예를 들었다. "멘델의 법칙이라고, 아나?" "이름 정도는....... 하지만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을 뿐, 내용은 잊어버렸습니다." 모치즈키는 의미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핸틴튼 무도병은 우성 유전자야." "우성 유전자......." "유전에는 우성 유전과 열성 유전이 있는데, 사람들은 대개 부모에게 우수한 유전자를 물려받 는 것이 우성 유전이고, 단점을 물려받으면 열성 유전이라고 잘못 알고 있는데, 실은 그렇지가 않 거든. 유전자가 우성이란 것은, 즉 전하는 형질을 지닌 한 쌍의 유전자가 다른쪽을 누르고 우성으 로 나타난다는 뜻이지. 핸틴튼 무도병에 걸린 사람은 이 병을 발병시키는 우성 유전자를 갖고 있 어서, 만약 그 아이가 이 병의 유전자를 전달하는 염색체를 물려받게 되면, 그 아이 역시 발병하 게 되는 거지." 다케시는 당황하여 손을 내저었다. "선생님,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해주실 수 없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지......." 그렇게 말하고 모치즈키는 노트에 그린 흑백 동그라미 쌍과 백백 동그라미 쌍을 선으로 묶어, 네 개의 패턴을 그려나갔다. 흑과 백의 염색체를 가진 아버지와, 백백 염색체를 가진 어머니 사이 에서 아이가 태어날 경우, 아이가 물려받는 염색체는 흑백, 흑백, 백백, 백백의 네 가지 패턴이다. "잘 들어봐. 검은 동그라미가 핸틴튼 무도병의 유전자이고, 하얀 동그라미가 정상적인 유전자라 고 하자고. 그러면 검은 동그라미와 하얀 동그라미 쌍이 두 개 생기지. 우성 유전이란, 이 경우 간단하게 말해서 검은 성질이 하얀 성질을 누르고 발현한다는 뜻이야. 즉 한쪽 부모가 핸틴튼 무 도병에 걸려 있을 경우, 그 자식이 발병할 확률은 50퍼센트가 되는 거야." "만약 그 병이 열성 유전자라면요?" "비정상적인 유전자가 정상적인 유전자한테 눌려서, 흑백 쌍이라도 보인자가 될 뿐 발병은 하 지 않지." "그럼, 양쪽 부모가 모두 그 병이라면요?" "아주 드문 병이라서 그런 예는 있을 수 없겠지만, 있다고 치고 그 확률이 어느 정도일 것 같 나?" 다케시는 대답하려다 말을 삼키고, 자신없는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100%입니까?" "아니, 그렇지 않아." 모치즈키는 검정과 하얀 동그라미를 두 쌍 그리고 서로 선으로 교차시켜 설명을 덧붙였다. 네 가지 패턴이 생겼다. 흑흑, 흑백, 백흑, 백백. 정상적인 유전자 쌍은 하나 생긴다. "알겠나, 양쪽 부모가 모두 이 병일 때, 흑흑이 한 쌍, 백과 흑이 두쌍, 그러니까 이 세 쌍이 발 병하고 나머지 백백 한 쌍만 발병하지 않아. 즉 발병할 확률은 75%가 되지." "네에......." 다케시는 간신히 이해했다. 그렇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다. "알겠습니다. 아니, 아직 좀 석연치 않은 부분도 있지만......." 모치즈키는 잠시 숨을 돌리며 커피를 마셨다. "하지만 이 병이 무섭다고 하는 것은 그래서가 아니야." 커피로 목을 적신 모치즈키가 말했다. 그 심각한 표정에 다케시는 자기도 모르게 몸가짐을 바 로 했다. "같은 우성 유전병이라도 그 대부분은 신체 각 부위의 이상으로 나타나니까 태어나면 금방 알 수 있지. 그런데 핸틴튼 무도병은 달라." "어떻게 다르다는 말이죠?" "통산 30대 후반이 돼서 병세가 나타날 때까지, 자신이 이 병의 유전자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어." "30대 후반?" "물론 개인차는 있지만 평균적으로 대충 그렇지." "그렇다면......." 다케시는 머리를 움직였다. 내용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적용시켜 생각해보는 것이 가 장 빠르다. "지금 저의 부모 어느 쪽에게 핸틴튼 무도병이라는 진단이 내려졌다고 하면, 제가 스물네 살이 니까 30대 후반이 될 때까지 약 10년간 발병의 공포에 떨면서 살아야 한다는, 그런 말입니까?" "그렇지." "그럼, 러시안 룰렛하고 마찬가지군요. 더구나 확률은 반반." 다케시는 상상 속에서 6연발 리볼버에 탄환을 세 발 장진하고 자기 머리에 총구를 갖다대고 격 철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그 상태로 10년을 지낸다고 생각하였다. 상상만으로도 관자놀이의 혈관 이 욱신욱신거렸다. "모른단 말입니까, 정말로? 자기가 발병할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 "현재로서는 알 방법이 없어. 최근 유전자 이상이 제4염색체에 존재한다는 것이 명백해져서 PET(포지트론 이미션 토모그래피)로 미상핵(미상핵)의 위축, 또는 포도당 대사의 저하 등을 조사 하여 발병 전의 진단에 가능성이 비치고는 있지만 말이야." "좀 끈질긴 것 같지만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사유리 씨의 아버지가 핸틴튼 무도병이었고, 지 금 사유리 씨가 이 병의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아닌지 모른다는 뜻입니까?" "으음, 그래." "그렇다면 사유리 씨의 뱃속에 있는 아이한테 그 유전자가 전달될 확률은, 지금으로서는 4분의 1." "그렇지. 하지만 사유리 씨가 발병하는 순간 그 확률은 2분의 1로 뛰는 거야." 다케시는 바로 앞에 있는 모치즈키한테서 눈길을 돌려 창 밖에 펼쳐진 완만한 언덕의 비탈면을 내려다보았다. 비탈면 아래서 빛나는 늪가에는 나무들이 가을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평화롭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그는 다시 눈길을 정면으로 돌렸다. "선생님, 그런데 그거 어떤 병입니까?" "불수의운동하고 정신 증상 양쪽으로 나타나는데....... 아, 그러니까 '불수의운동'이란 몸이 자기 의사대로 움직이지 않는 거야. 손발, 또는 얼굴, 혀, 입 등에서 나타나고, 걸음도 제대로 걸을 수 없어서 춤을 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무도병이란 병명은 거기서 온 거야. 게다가 언어도 또렷하 지 못하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정신 증상 쪽은 어떤가요?" "기억력 저하, 집중력 저하, 그리고 화를 잘 내고, 조울증, 망상 등이 나타나지. 한마디로 인격이 완전히 변한다고 생각하면 돼. 자살도 드물지 않고......." "자살...... 병을 비관해서요?" "아니, 정신 이상 증상의 하나로 종종 자살을 한다는 뜻이야." "그럼 사유리 씨의 아버지는?" "아마, 그랬을 거라고 생각되는군." 다케시는 잠시 간격을 두고 안경테를 위로 올렸다. "그럼 그 병을 고칠 수 있나요?" 모치즈키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을 수 있는 희망이 전혀 없다는 것은 모치즈키의 표정만 보아도 분명했다. "그렇다면 증상은 어떻게 진전되나요?" "말기가 되면 일어나거나 앉지도 못해. 물론 걸을 수도 없지. 그러니까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하 게 되고......." 다케시의 안색이 변했다. 빨라지는 심장의 고동을 느낄 수 있었다. 더 이상 묻고 싶지 않았지만 모르고 지날 수는 없었다. "인격은요?" "파괴되지. 이미 그 사람이었다는 흔적조차 없어져 버리지." -사유리 씨가 망가진다고?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다음에는? "그래서 그 다음은요?" "치매로 진행되고...... 끝내는 죽게 되지." 다케시는 멍하게 모치즈키의 눈을 쳐다보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아까부터 의미도 없는 말이 가슴속에서 울리고 있다. -이 세상이 미쳤다! 어떻게 된 거야! 핸틴튼 무도병이란 인위적인 재앙이 아니다. 다케시는 자연계의 한 구석에 이토록 숙명적인 병 이 존재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오랜 진화의 과정에서 우발적으로 탄생한 핸틴튼 무도병의 유전자는 사악한 의지력으로 살아남 으려 작용한다. 어릴 적부터 병에 대한 인식이 있다면 아이를 갖는 것도 어느 정도 방어할 수 있 겠지만, 발병 시기가 출산 적령기가 지나서라면 그것도 불가능하다. 이 얼마나 짓궃은 신의 장난 인가. 다케시는 눈을 감고 마음을 비우고, 자신에게 정직해지려고 애썼다. 운명을 미리 알고 있는 사 람은 없다. 모든 것이 다 불확실하다. 이 레스토랑에서 나가자마자 차에 치어 죽을지도 모르고, 머지않아 뜻하지 않게 암으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2분의 1이란 확실한 확률이 끔찍한 현실 로 다가와 다케시의 가슴을 짓눌렀다. 다케시는 어떤 각오를 다지고 눈을 떴다. 사유리가 흥얼거리던 멜로디가 휙 뇌리를 스쳤다. 그 렇게 모치즈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모치즈키는 아직 그 몸짓의 의 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혹시 사유리 씨는 이미 핸틴튼 무도병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닐까요?" 다케시는 조심조심 물었다. "아니,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하지만 그 증세는......." "임상적인 증세는 전혀 달라. 핸틴튼 무도병 특유의 불수의운동도 보이지 않고, 정신적인 증상 도 전혀 다르거든. 대학병원에서 CT 촬영을 하여 미상핵의 위축을 확인하지 않고서는 뭐라고 판 단할 수 없는 상태야." 현재 사유리가 빠져 있는 혼동 상태가 핸틴튼 무도병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미상핵의 위축이 인정되면 더 이상 부정 할 수 없지만, 아주 드문 병이기 때문에 임상 경험도 부 족한 터라 모치즈키는 아직 자신있게 진단을 내릴 수 없는 상태였다. 아사카와 사유리는 현재 스물다섯 살. 20세 미만의 발병률이 전체 핸틴튼 무도병의 5%에서 10%를 차지하므로, 연령적으로는 발병했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미 의학계에는 전혀 반응이 없고, 지능을 판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한 환자에 관한 임상 보고도 있으니 사유리의 증세와 유사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모치즈키는 사유리가 아주 미미하게나마 좋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엄마로서 의 본능이 작용하는 것인지, 배가 점점 불러옴에 따라 얼굴이 생기를 띠는 듯 느껴지는 것이다. 간단한 질문에 대해서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 등 대답이 가능하고, 어느 틈인가 허밍에는 가사가 붙었다.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낳으려는 의지가 고개를 쳐들어 출산 준비를 갖추어나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핸틴튼 무도병은 치유가 불가능하므로, 모치즈키는 사유리의 병의 원인이 다른 곳 에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런데......." 모치즈키는 슬며시 화제를 바꾸어, 사유리의 어머니 유코가 23년전에 남자와 도망친 이후 소식 불명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살아 있습니까?" 다케시는 유코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이 이상한 듯, 양미간을 모으고 되물었다. "이제 겨우 쉰 살이니까, 사고나 병으로 죽지만 않았다면 당연히 살아 있겠지." 다케시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사유리의 어머니가 이미 죽은 줄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는지 다시 한 번 기억을 환기시켰다. 제3자를 통해서 들은 이야기였다. '아마, 죽었을 겁니다'란 애매한 표현이 다케시의 머릿속에서, 그러기를 바라는 소망과 연결되어 사실로 정착된 것이다. "그래요......." 모치즈키는 다케시가 수집한 정보에 오류가 있었다는 것을 책망할 뜻은 조금도 없었다. 그런데 다케시는 무슨 책임의식을 느끼는지 숙인 고개를 들지 못했다. "선생님......." 다케시가 얼굴을 들었다. "뭐지?" "만약, 사유리 씨의 어머니가 계신 곳이 밝혀지면......." "물론 바로 연락을 취해서 이쪽으로 오시게 해야지." "그리고 그 다음에는......." "보호자가 되어, 앞으로 사유리 씨의 증상이 호전되면 퇴원하는 그런 일도 있을 수 있겠지." 다케시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또 입을 꾹 다물었다. 모치즈키는 알고 있었다. 다케시는 보호자가 나타나 사유리를 데리고 갈까봐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사유리를 데리고 갈 가능성이 있는 사람 이 어머니인 유코 외에도 한 명 더 있다. 뉴질랜드 근해에서 조업을 하고 있는 참치잡이배의 선 원인 마키 요이치다. 지금은 바다 위에 있다지만, 마음이 변한 그가 일본으로 훌쩍 돌아와 사유리 와 아이를 데리고 가지말란 법도 없다. 한동안 계속된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것은 다케시였다. "그런데 마키 요이치 씨는 사유리 씨가 핸틴튼 무도병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까요?" "글쎄, 그건 뭐라고 말할 수 없지." "알고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래서 도망친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 워요." 요이치가 사유리 아버지의 병을 알고 있었을지, 그 점은 다케시나 모치즈키가 판단할 길이 없 었다. 다케시한테는 자신의 추측을 보다 확실하게 만들 수단이 있었다. 간단하다. 만약 모르고 있 다면 알려 주면 되는 것이다. 와카시오 수산 사무실에다 비디오 테이프와 편지를 맡긴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핸틴튼 무도병 에 관한 자료를 보내는 것이다. 보급선하고 연락이 잘 되면 한 달 안에 물건이 마키 요이치의 손 에 들어간다. 먼저 보낸 테이프에서는 사유리가 임신중이라는 사실을 알렸다. 이번 편지에는 사유 리의 아버지가 핸틴튼 무도병 환자였다는 것을 알린다. 애인의 발병 가능성과, 그 운명이 아이에 게 이어질 수도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암시하면, 요이치라는 남자는 훨씬 더 멀리 도망칠 것이다. 다케시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4 "선생님, 잠깐만요." 노노야마 아키코의 목소리에 모치즈키는 반사적으로 일어나려 했다. 아키코는 방 입구에 선 채 들어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평소 같으면 책상 있는 곳까지 불러들일 텐데, 모치즈키는 자기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젊은 의사와 간호사 두 명이 부원장실에 있었다. 아키코가 흘리 는 부주의한 말을 듣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젊은 간호사들은 스캔들을 좋아한다. 모치즈키는 그 녀들의 표적이 되지 않도록 병원 안에서는 세심하게 주의하고 있었다. 복도로 나와 문을 닫자 모치즈키는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아마도 오늘밤 약속에 관한 일이겠지. 약속 시간을 바꾸자는 건가, 아니면 사정이 바뀌어서 만 날 수 없다는 얘기겠지, 하고 모치즈키는 뚱한 표정으로 아키코를 보았다. 그는 일 주일에 한 번 의 밀회를 기다리는 몸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정사를 연기하려는 변명에 경계심을 품고 있었다. 지난 주에는 결국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오늘밤에도 또 만날 수 없다면, 그도 강경한 태도를 취 하지 않을 수 없다. 모치즈키의 표정에서 그런 심리를 읽었는지 아키코는 왼쪽 뺨에 보조개를 만들며 웃었다.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거야?" 그러고는 모치즈키의 왼손을 들어올려, 집게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 사이를 새끼손가락 끝으로 꼭꼭 찌르면서 속삭였다. "오늘밤은 걱정 말아요." 후, 숨을 내쉬고 아키코의 손을 풀어내려는 모치즈키에게, '잠깐 와보실래요?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라고 업무적인 말투로 싹바꿔 말하고는 제2병동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안내한 곳은 나카노 도모코의 개인 병실이었다. 마쓰이 병원에서 현재 혼몽 상태로 입 원해 있는 환자는 나카노 도모코와 아사카와 사유리 두 명뿐이다. 도모코는 세 살짜리 딸을 잃은 충격으로 식사도 배설도 혼자서 못 하는, 생활 전반에 걸쳐 보호자가 필요한 상태였다. 증상이 사 유리보다 훨씬 심각하다. 아키코는 일단 노크를 하고 도모코의 병실로 들어갔다. 여환자 병동인 제2병동은 무수한 교성 으로 가득했다. 여자의 요염한 목소리뿐만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요란한 웃음, 답답한 언어의 나열, 이유없는 분노, 오열....... 사람의 몸에서 뿜어나오는 온갖 소리가 무의미하게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소음에 익숙한 모치즈키로서는 오히려 고요한 도모코의 병실이 소름끼친다. 도모코는 침대 에 누워 똑바로 천장을 향한 자세로 꼼짝도 하지 않는다. 모치즈키는 위쪽에서 들여다보면서 두 눈이 희미하게 뜨여 있는 것을 확인한다. 시선에 힘이 없고, 바로 눈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어도 표 정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 망막이 포착한 시각 정보는 신경 세포를 통하여 뇌로 전달될 것이다. 그런데도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도모코에게 세계는 언제나 똑같은 것이었다. 모치즈키는 그 완벽한 무관심에 늘 공포를 느낀다. 강박적인 정적이란 옷을 걸치고 도모코의 의 식은 대체 어디를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일까. 모치즈키는 아키코에게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 다. "이거 좀 보세요." 아키코는 모치즈키의 왼쪽 소매를 잡아당겼다. 바로 옆에 조그만 세면대가 있고 그 위에는 쇠 창살이 끼워진 유리창이 있다. 모치즈키는 금방 알았다. 유리 표면에 손바닥만한 크기의 하얀 덩 어리가 두개 붙어 있었고, 또 창살 아래쪽에 두 개 걸려 있었다. 모치즈키는 떨어져 있는 덩어리를 하나 손에 들고 관찰해보았다. 가볍고, 만지작거리가 부슬부 슬 떨어져나갔다. 부드러운 종이를 물에 적셔 납작하게 다져서 유리창에 붙였는데, 마르면서 떨어 진 모양이었다. 지질로 보아 화장지인 듯했다. 화장지는 방에 준비되어 있으므로 언제든 쓸 수 있 다. "어제 오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아키코가 설명했다. 그 설명대로라면 어젯밤에서 오늘 아침 사이에 도모코가 이런 기묘한 행동 을 했다는 셈이 된다. 그녀 이외의 다른 환자가 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어떻게 된 거지?" 모치즈키는 화장지 덩어리를 약간 비벼보았다. 적어도 도모코는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 것이다. 입원한 이후 그녀는 처음으로 행동을 했다. 모치즈키는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고 싶었다. 치 료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식사나 배변 등 모든 생존 수단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도모코가 왜 이런 행동을 해야 했을까? 모치즈키는 바로 옆에 아키코가 있는 것도 잊고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끔씩 누워 있는 도모코 를 바라보면서 상상 속에서 그녀를 세면대 앞에 세워보았다. 화장지 덩어리는 전부 네 개였다. 두 개는 유리창에 아직 붙어 있다. 만져보니 아직 젖어 있었 다. 나머지 두 개는 물기가 완전히 말라 있었다. 서로 다른 시간에 붙였다는 이야기다. 어제부터 오늘에 걸쳐 도모코는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을 두고 네 번이나 세면대 앞에 서서 화장지를 물에 적셨다. 네 개를 동시에 만든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양의 물로 적셔야 같은 크기의 덩어리 가 만들어질까? 모치즈키는 선반에서 화장지를 한 두루마리 꺼내 실제로 물에 적셔보았다. 물에 젖자 화장지가 줄어들어 같은 크기의 덩어리를 만드는 데 2, 3미터 길이가 필요했다. 모치즈키는 도모코를 다시 한 번 바라보면서 그녀와 같은 심리상태가 되도록 애썼다. 깊은밤, 눈을 뜨고 화장 지를 씻는다. -씻는다? 모치즈키는 별 생각 없이 씻는다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화 장지를 씻는 사람은 없다. -이건 장난이 아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입원한 지 2년이 지나서 처음으로 도모코가 무의식적으로 취한 행동. 입원 이 전에 습관적으로 반복한 행위일 것이다. 모치즈키는 물에 적신 화장지를 두 손으로 쥐어짰다. 그 리고 바로 앞에 있는 유리창에 딱 붙였다. 물론 말리기 위하여....... 도모코는 세 살짜리 딸을 저 수지에서 잃었다. 정확하게 두 살 7개월이다. 막 기저귀를 떼었을 무렵이다. 모치즈키는 유리창에서 손을 떼었다. "아키코, 나카노 도모코가 딸아이한테 헝겊 기저귀를 사용했을까?" 아키코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글쎄, 그건 잘......." "담당이 시라이시였지. 좀 불러주겠나." 아키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모치즈키는 담당인 시라이시가 현재 도요하시 시에 있는 병 원에 출장중이라는 것을 간신히 깨달았다. 때문에 아키코가 일부러 부원장에게 보고한 것이다. "시라이시 씨는 지금 없는데." 아키코는 그렇게 말하고 모치즈키의 두 팔을 왼손으로 부드럽게 감쌌다. "아, 알고 있어. 깜박 했군." "이 환자는 이전에 딸아이한테 헝겊 기저귀를 사용했다. 3년이나 매일 밤 기저귀를 빨았다. 그 습관이 어떤 계기로 얼굴을 내밀어 화장지를 헝겊 기저귀라 여기고, 빨아서 말렸다. 선생님, 그렇 게 해석한 거죠?" 모치즈키는 '으음'이라고 건성 대답을 하고, 한편으로 자신의 딸 카나에가 두세 살이었을 때를 떠올렸다. 모치즈키는 한 번도 기저귀를 빤 적이 없다. 그뿐인가, 갈아준 적도 없다. 감촉도 모르 거니와 냄새도 모른다. 다만 그 길쭉한 천 조각이 젖먹이를 상징하리란 상상은 가능했다. 마른 기저귀를 접으면서 아내 나오미는 촉감과 냄새를 즐기는 몸짓을 보인 적이 있다. 그러나 도모코의 느닷없는 자발적 행동에서 치유의 가능성을 속단 하기는 어려웠다. 사람은 누 구든 친밀한 사람이 죽으면 그 슬픔을 오랜 시간에 걸쳐 극복해간다. 그러나 극소수는 그 슬픔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들 대부분은 뒤를 따라 자살하거나 혹은 나카노 도모코처럼 정신 활동을 중지하기도 한다. 죽은 아이가 되살아나는 것 외에는 구원의 손길이 없다. 그리고 그것이 실현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는 스스로 저편 세계에 몸을 던진다. 도모코 의 경우, 육체는 여기에 있지만 마음은 저편을 헤매고 있었다. 그 저편에서 여전히 딸의 기저귀를 빨고 있는 것이다. 뇌의 메커니즘에는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왜 갑자기 화장지를 빨기 시작했는지 모 치즈키는 설명할 수 없었다. 찰칵, 스위치를 켠 것처럼 신경 세포가 작용하여 몸이 움직였을 텐 데, 무엇이 행동을 촉발하였는지 그 정체를 확정하기는 쉽지 않다. 병동에서 보는 사유리의 부른 배가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고, 휠체어를 타고 산책하는 도중 쓰레기장에 버려진 인형을 보고 착각을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무엇이 어떻게 작용했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었다. 사유리만 해도 어떤 계기로 정신의 수레바퀴가 다시 움직일 가능성은 있다. 그 열쇠를 쥐고 있 는 것은 마키 요이치뿐이라고, 모치즈키는 점차 확신을 굳혀갔다. 5 부원장실의 열린 창문으로 10월의 맑은 공기에 실린 운동회의 소음이 흘러들어왔다. 마쓰이 병 원은 약간 언덕에 위치하고 있고, 늪으로 내려가는 중간쯤에 신설 중학교가 있다. 소리는 그 운동 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왔다. 잠자코 듣고 있다 보면 귀에 익은 행진곡이 두 세 곡 들렸을지도 모른다. 아주 맑게 갠, 운동회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날씨였다. 병원 마당으로 눈길을 돌리자 벤치에 앉아 있는 다케시의 모습이 보였다. -병원이 자기네 집 앞마당인 줄 아는 모양이지. 모치즈키는 씁쓸히 웃었다. 요즘 병원에 근무하는 직원보다 다케시의 얼굴을 더 자주 본 듯한 기분이다. 일 주일에 적어도 두 번은 사유리를 보러 온다. 모치즈키는 늘 그러듯 벤치에 앉아 일방적으로 말을 거는 다케시를 넌지시 관찰하고 있었다. 아마 과자류일 것이다. 네모난 봉투를 주머니에서 꺼내 뜯고, 안에 든 것을 사유리에게 내밀고 있 다. 면회 때면 다케시는 항상 무언가를 들고 왔다. 그러나 사유리는 기뻐하지도 않고 손을 대는 법 도 없다. 식욕은 입원 초기와 별로 변함이 없어, 뱃속의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주기를 바라는 다케 시의 호의가 무시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의대 부속병원의 산부인과에서 태아가 순조롭게 성장하고 있다 는 보고를 들었다. 앞으로 두 달 후면 사유리는 산부인과로 옮겨, 거기서 출산을 맞게 된다. 모치즈키의 뇌리엔 어제 죽은 나카노 도모코의 얼굴이 떠올랐다. 태어나는 생명이 있는가 하면 사라져가는 생명도 있다. 기관지염이 생겨 나흘 전에 부속병원으로 옮겨진 도모코는 병세가 악화 되어, 어젯밤 끝내 임종을 맞았다. 서른아홉 살이었다. 화장지를 씻기 시작한 날 이후, 도모코의 정신 활동은 조금씩 회복되어 사 흘 후에는 혼자서 화장실에 가기도 했다. 작동을 재개한 스위치가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 것인지 모치즈키가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도모코는 혼자서 식사를 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보호자가 없어도 생활할 수 있을 만큼 호전 되었다. 그런데 기관지염이 그녀를 덮쳤고, 저항력이 없어진 육체에서 생명을 뺏어갔다. 죽음을 예감하고 정신 활동이 마지막 꽃을 피웠을까. 임종을 맞이한 침대에서 도모코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풍요로웠고, 평온한 마음을 반영하고 있 었다. 죽음을 확인한 모치즈키는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지금쯤 딸을 안고 있을 어머니의 영혼에 기도를 올렸다. 모치즈키는 가을 공기를 쐬고 싶어 계단을 내려가 마당으로 나갔다. 외래 진료를 막 끝낸 참이 라 점심 시간까지는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벤치 옆으로 지나가며 모치즈키는 다케시에게 말을 걸었다. 점심 식사 시간임을 알리러 온 간호사가 막 사유리를 데리고 서쪽 병동으로 간 후였다. 아쉽다 는 듯 사유리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다케시가 모치즈키 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정중하게 말했 다. "선생님......." 모치즈키는 조금 전가지 사유리가 앉아 있었던 자리에 앉아, '요즘, 별다른 변화 없나?' 라고 넌 지시 물었다. "네에, 뭐 별로......." 다케시는 애매모호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말을 하려다 망설이는 다케시의 태도를 보고 모 치즈키는 다케시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가, 일부러 벤치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뭐지?" "잠시 시간 있습니까?" 모치즈키는 다시 벤치에 앉아 다케시 쪽으로 몸을 틀었다. "무슨 일 있어?" "실은 의논드리고 싶은 일이......." 조금이라도 엄한 표정을 지으면 당장 하려던 말을 삼켜버릴 듯 다케시는 불안하게 보였다. 말 을 할까 말까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말을 유도하려고 모치즈키는 애써 상냥하게 웃었다. "저, 여러 가지로 조사해봤는데, 제가, 사유리 씨의, 보호자가 될 수는 없을까 하고......." "자네가?" 다케시는 까딱 고개를 숙였다. 모치즈키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으로는 언젠가 다케시가 이런 말을 꺼내지 않을까 예측하고 있었다. "그건 현실적인 문제인데, 가정 재판소가 자네를 보호자로 인정하면 가능하지." 정신 위생법에서는 보호자를 후견인, 배우자, 친권자 순으로 규정하고 있는데 해당하는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거주지 또는 현재 있는 곳의 시장이나 군수가 그 임무를 맡게 된다. 따라서 현재 사유리의 보호자는 하마마쓰 시의 시장이다. 입원 비용도 시에서 지불하는데 그 몇 할은 국고에 서 부담한다. 그러나 가정 재판소는 후견인으로 스나코 다케시를 인정할 수도 있다. 그 경우 다케시가 의무 를 제대로 수행하는지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모치즈키는 다케시가 사유리와 결혼하고 싶어한 다고 직감했다. 배우자가 되어 정당하게 보호자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러는 편이, 그녀를 위해서도......." 모치즈키는 다케시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녀의 입장이 아니라 문제는 자네 쪽이겠지. 한마디로 보호자라지만, 굉장히 힘들 텐데......." "하지만 저는......." "결혼하고 싶다는 말인가?" 다케시가 얼굴을 들었다. "네에, 그렇습니다. 안 되나요?" "안 될 거야 없지. 하지만......." 물론 안 될 거야 없다. 혼자서 고독하게 정신병을 앓고 있는 사유리, 다른 남자의 아이를 배고 있는, 더구나 핸틴튼 무도병이 발병할지도 모르는 여성을 반려자로 맞이한다는 것은, 남보기에는 인간미 넘치는 행위로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모치즈키는 석연치 않았다. 아니 왠지 부아가 났다. "선생님, 왜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거죠?" 다케시는 모치즈키의 변화한 표정을 보고 침착함을 잃었다. 조금 불안해진 것이다. 자기가 하고 자 하는 일이 무슨 잘못이라도 되는가 싶어서. "자네는, 자네 자신을 비하하고 있어." 모치즈키는 몸을 앞으로 구부린 채 쥐어짜듯 말했다. "네? 비하? 비하한다구요?" "혹시 자네, 사유리 씨하고 결혼하는 게 칭찬받을 일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거 아닌가?" 다케시는 맥이 빠졌다. 모치즈키한테 이런 비난을 받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사랑하고 있어요. 그 기분에 충실하고 싶은 것이 무슨 죕니까?" "사랑하고 있다고? 사유리 씨를?" "네." "마주하고 둘이서 무슨 말이라도 제대로 나눈 적 있나?" "아니오, 그런 적은......." "대화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대랑 어떻게 애정을 교환할 수 있다는 말이지? 상대방의 기분을 어 떻게 확인할 수 있냐구?" "......." "어리석은 소리 그만 해."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린 다케시는 모치즈키는 손으로 제지하며 계속했다. "자네는, 자네가 탈 시소에 어울리는 상대는, 핸디캡을 많이 안고 있는 사유리 씨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아닌가?" 모치즈키는 다케시의 내면에 있는 나약함, 자신없음, 소극적인 삶의 자세, 그 모든 것이 절망스 러웠다. 그는 시소 한쪽에 자신이 타고, 다른 한쪽에 사유리를 태워 균형을 맞추려 한다. 사유리 한테는 여러가지 핸디캡이 있다. 정도도 심각하다. 그만한 중량을 사유리한테서 빼기 위해서는 다케시도 같은 분량의 마이너스 요소를 준비하지 않으면 균형이 맞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다케시한테 필요한 것은 그 마이너스를 플러스로 전환하는 힘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이너스 상태의 삶을 계속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마이너스에 적당한 상대를 찾아내 균형을 맞추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라고 모치즈키는 생각되었다. 다케시는 휴머니즘 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라고....... 다케시는 모치즈키가 한 말의 의미를 음미하였다. 천천히 여러 각도에서 생각하는 사이, 알 것 같기도 하고 모를 것 같기도 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까지 여자와 대등하게 사귄 적이 없었고 앞 으로도 있을 수 없으리라 믿고 있었다. 멋진 여성을 만나도 자기한테는 과분하다고 기분을 억제 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 자신에게 핸디캡을 부과하고, 상처입기가 두려워 싸움을 피해왔다....... 그렇게 생각하니 왜 사유리한테 이끌리는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었다. 지금의 사유리는 절대로 사람한테 상처를 입힐 수 없으니까. 그러나 그렇다고 좋아하면 안 되는 것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이는 어쩔 거야?" 다시 온화한 말투로 모치즈키가 물었다. "물론 기를 겁니다, 제가요." 모치즈키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연기 같은 몸짓이었다. "자네 아이가 아니야." "알고 있어요." "기른다, 말은 그렇게 간단하게 하지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생각해본 적이라도 있나? 장 난이 아니라구. 더구나 사유리 씨가 발병이라도 할 경우, 그 아이도......." 모치즈키는 거기서 말을 끊었다. -내가 남한테 설교할 수 있는 입장이야? 내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맞는 말이다. 모치즈키는 자신의 행위를 돌아보았다. 노노야마 아키 코가 자신의 아이를 갖고 싶다고 했는데도 모치즈키는 이렇다 할 대답을 아직 하지 않았다. 아키 코가 이일에 대하여 말하면 그는 우유부단하고 비겁하게 입을 꾹 다무는 수단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케시한테 아이를 기르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설교를 늘어놓으려 하고 있다. 타인의 결점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막상 자기 일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그런데 다케시한테 아이를 기르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설교를 늘어놓으려 하고 있다. 타인의 결점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막상 자기 일에는 눈을 감아버린다. 식은땀을 닦으면서 모치즈키는 양 무릎에 팔꿈치를 대고 깍지낀 손 위에 턱을 올려놓고는 바로 앞의 땅을 내려다보았다. 무력감에 빠져 왠지 더 이상 다케시를 힐난할 기분이 나지 않았다. "선생님, 보호자가 있으면 사유리 씨는 지금 퇴원할 수 있는 상태인가요?" 모치즈키의 귀에는 다케시의 목소리가 어디 먼 데서 들리는 것 같았다. "어...... 글쎄, 뭐......." "퇴원할 수도 있는 거로군요." 퇴원을 허가하기 위한 객관적인 기준은 없었다. 자살 혹은 타인에게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경 우에는 퇴원이 보류된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우려'라는 불분명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 다. 자살의 우려가 없다고 판단하여 퇴원시킨 환자가 바로 다음날 백화점 옥상에서 투신 자살하 는 예도 없지 않다. 모치즈키는 때로 후회하기도 했다. 정신 의학같이 유난히 애매모호한 분야를 선택한 것이 옳았 는가 하고, 암세포를 외과적인 수술로 잘라내어, 그 결과 환자가 목숨을 건지게 되면 의사는 한없 는 기쁨을 얻을 수 있다. 모치즈키는 확실하고도 정확한 그 치료법이 때론 부럽게 느껴졌다. 하지 만 정신 질환 치료에서는 객관적인 효과를 거의 기대할 수 없다. 아사카와 사유리라는 환자를 구할 수 있는 것은 약이나 치료가 아니라, 열쇠를 쥐고 있는 한 사람 오직 마키 요이치밖에 없다는 것을 모치즈키는 알고 있었다. 의사란 대리인에 불과하다. 딱 한 명이라도 좋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지고지순한 사랑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만 있다면, 이미 환자의 병은 병이 아니다. 따라서 병원에 있는 의미도 없어진다. "사유리 씨도 언제까지 이렇게 병원에 있을 수는 없잖아요." 다케시는 갑자기 말수가 적어진 모치즈키를 오히려 부드럽게 설득했다. "하지만 말이야, 아직 친어머니인 유코 씨와도, 그리고...... 마키 요이치라는 사람하고도 연락을 취하지 않았잖나." 마키 요이치라는 이름이 나오자 다케시는 모치즈키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그럼, 마키 요이치라면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거야, 뭐라 말할 수 없지만......." "제가 사유리 씨를 맡는 것은 안 되고, 마키 요이치라면 괜찮다는, 그런 말씀이군요." "마키 요이치와 사유리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두 사람은 몇 년이나 같 이 산 역사를 공유하고 있어. 정이 깊다고 판단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닌가." "하지만 그 자식은 도망쳤습니다." 다케시는 노골적으로 요이치에 대한 적의를 드러냈다. "그는 지금 참치잡이배를 타고 있다니까 만나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누가 뭐래도 사유리 씨 뱃속에 있는 아이의 아버지야." 다케시의 얼굴에는 격렬한 모멸감이 떠올랐다. "도망쳤는데도 말입니까?" "그렇다고 속단할 수는 없지." "놈은 도망친 겁니다. 겁이 나서요, 핸틴튼 무도병의 운명에. 비겁한 놈이에요." "모르고 있을지도 모르지." "사유리 씨 아버지의 병을요?" "아무리 애인이라 해도 그렇게 쉽사리 털어놓을 수 있는 병이 아니잖아. 사실, 이 병은 숨기는 경우가 많고."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이미 손을 써두었으니까." 딱히 모치즈키한테 하는 말은 아니었다. 모치즈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손을 썼다? 모치즈키는 마음속으로 그 말을 되새기면서 되물었다. "뭐, 손을 써두었다고?" "아니 뭐,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말해주지 않겠나." "그냥 마키 요이치한테 편지를 두 번 보냈을 뿐이에요." "편지? 어떻게?" "간단합니다. 그가 타고 있는 배의 선주, 와카시오 수산 사무실에 편지를 보내면, 남태평양에 있는 제7와카시오마루에 보내주게 돼 있으니까요." 다케시는 첫 편지에는 배가 부른 사유리를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보냈고, 그 다음에는 사유리 의 아버지가 핸틴튼 무도병이었다는 사실과 의학 사전에서 핸틴튼 무도병이 어떤 병인지 설명해 놓은 항목을 복사하여 보냈다고 고백하였다. 왜 지금까지 그런 행동을 감추고 있었는지 모치즈키는 다케시의 심리를 추측해보았다. 마음 한 구석으로 죄책감을 느꼈던 것이리라. 연적에게 여자의 핸디캡을 모조리 적어 보내놓고, 포기하라고 협박한 것이나 다름없는 행위다. 도망칠 여건을 마련해주고 적의 도주를 기다리는, 그 또한 마이너스에 마이너스를 덧칠하는 작 업이었다. "치료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모치즈키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다케시가 그런 식으로 변명하였다. 모치즈키는 화가 나기보다 암담한 기분으로, 사유리 아버지의 병명을 다케시한테 가르쳐주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후회했다. 다케시와는 의사와 환자라는 관계를 넘어서는 신뢰감이 있었다고 판단했기에 굳이 숨기지 않았던 것이다. 일이 잘못되어도 환자에게 불이익을 끼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만일 요이치가 사유리를 데리러 온다면 모치즈키는 아버지의 병에 관해서 정직하게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결과적으로는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모치즈키의 역할이지 다케시가 왈가왈부 할 성질의 일이 아니다. 양미간을 찡그리고 모치즈키가 물었다. "언제쯤 배에 도착하지?" "처음 보낸 것은 벌써 도착했을 겁니다. 그 다음은...... 글쎄요, 앞으로 한두 달이면 도착하지 않 을까요." 그쯤이면 사유리가 마침 출산할 무렵이다. 아이가 태어나려 할 때쯤, 아버지는 아이 외할아버지 의 숙명적인 병을 알게 된다. 벌써 점심 시간이 지난 지 오랜데 모치즈키는 식욕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다케시의 무릎을 두 번 가볍게 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튼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봐. 자네한테도 잘 어울리는 여성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는 데......." 모치즈키는 그런 말을 남기고 병동 쪽으로 걸어갔다. 다케시는 복잡한 심경으로 한참 동안이나 그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손톱을 깨물었다. 다케시는 자신이 취한 행동을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사유리한테 덮칠지도 모르는 정신 질환을 요이치에게 알려, 그 어누 누구의 손길도 닿지 않는 고독의 세계에 그녀를 가둬두려 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것은 모치즈키의 신뢰감을 배반하는 행위였다. 다케시는 자신에게 실망한 모치즈키에 게 기대지 말고 살아가자고 결의를 다졌다. 물어뜯은 손톱을 뱉어내고 일어나 화단이 있는 병원 정문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발걸음이 무겁 다.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아직도 변병거리를 찾고 있다.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는데도 자신의 행위를 해명하고 싶었다. 점심 시간인지 청백 양군을 응원하던 음악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현듯 찾아온 정적 속에서 다케시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보았다. -바다의 생활은 대체 어떤 것일까. 어찌된 일인지 바다의 정경이 하늘에 펼쳐지고, 다른 세계에 대한 동경이 느껴졌다. -바다는 인간의 삶을 바꾸는 힘을 지니고 있을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런 생각에 사로잡힌 다케시는 바다 한가운데 있는 요이치에게 심한 질투를 느 꼈다. 이어 자신을 바꿔야겠다는 다짐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어떻게 바꿀 것인가. 아무튼 언제까지 이 렇게 빈둥빈둥 놀고만 있을 수는 없다. 새 직업을 찾는 것이 선결 문제다. 이전에 모치즈키가 이런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다. -자네, 의외로 조사관 자질이 있는지도 모르겠어. 다케시 또한 사유리에 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조사관이란 직업이 적성에 맞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 참이었다. 그래서 더 모치즈키의 말이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일단 부딪쳐볼까. 마음을 다지고 다케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동시에 높아진 운동회의 소음이 바람을 타고 날 아왔다. 제4장 해후 1 12월 중순이 되면 일본의 거리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짙어진다. 이제 여름을 맞게 되는 남태 평양에 떠 있는 제7와카시오마루라는 조그만 세계에도 그 편린을 느끼게 하는 물건들이 속속 도 착하였다. 일주일 전 예정대로 오클랜드에 기항하여 미끼, 연료, 식료품, 식수 등을 보급받을 때 각 선원들도 여러 가지 소포를 받아들었다. 거의 모든 소포들이 11월 초순에 보낸 것이었는데 그 중에 딱 하나 요이치가 받은 두툼한 편지만은 10월 초순에 보낸 것이었다. 보낸 사람의 이름은 또 스나코 다케시였다. 크리스마스 선물치고는 내용이 너무 심각했다. 요이치는 이번에는 편지를 바다에 버리지 않고 일 주일 동안 몇 번이나 꼼꼼하게 읽고 내용을 파악했다. 사유리의 아버지 슈이치로가 핸틴튼 무도병이라는 희귀한 병에 걸렸었다는 사실을 기술한 편지 가 두 장, 그리고 그 병이 어떤 병인지를 알려주는 자료가 23장 동봉되어 있었다. 자료 중 세 장 은 핸틴튼 무도병 환자의 임상을 보고한 예였고, 그 중의 한 장은 16밀리 연속사진으로 촬영한 환자의 보행 행태였다. 걷기 위해 일어나는 환자가 양 손을 바닥에 대고 천천히 일어난다. 걸으려 다가는 양 손을 다시 바닥에 대고....... 그 병 특유의 불수의운동이 28장의 연속 사진으로 극명하 게 묘사되어 있었다. 아마 전문 의학 잡지나 뭐 그런 데 게재된 것을 복사한 모양이었다. 요이치는 그 용의주도함이 왠지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무슨 속셈으로 이렇게 주도면밀하게 편지를 보낸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병 자체의 사악함이 소포를 보낸 사람한테까지 어려 있는 듯하여 요이치는 혐오감이 일었다. 그러나 그 자료를 전부 읽고 핸틴튼 무도병의 전모가 밝혀지자 다케시의 저의 따윈 완전히 그 힘을 잃고 말았다. 대신 사유리가 있던 풍경이 뇌리에 선명하게 전재되었다. 임신한 건지도 모르 겠다면서 진찰받으러 간 정신신경과 클리닉, 트럼프 점을 치면서 '행복해질 확률이 2분의 1'이라 고 중얼거리던 사유리의 옆얼굴, 가끔씩 보였던 절박한 표정, 격렬한 질투심, 자살 미수, 당시에는 그런 행동들의 의미를 몰랐다. 그러나 지금 아버지가 핸틴튼 무도병이었고 사유리 역시 그 인자 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모든 수수께끼가 깨끗하게 풀린다. 요이치는 편지를 받은 후 일 주일 내내 고민했다. 당시의 사유리를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행위의 이면에 있는 동기를 이해하면 거의 모든 사람이 관대해진다. 그리고 관대해진 만큼 고뇌 는 더 깊어졌다. 그러나 그의 고뇌는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고 정지했다. 이해하고 고스란히 껴안 기에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다. 더구나 앞으로 10일 정도 지나면 자신의 아이가 태어난다. 핸틴튼 무도병의 유전자는 후계자를 남기는 데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운명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벗어나고 싶다...... 그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동반 자살이 미 수에 그친 직후, 참치잡이배를 타길 잘했다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일본으로 돌아가면 다시 다른 배를 타고 더 먼 곳으로 도망치고 싶은 유혹이 일 주일 내내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흔들리는 마음을 반영하듯 날씨가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오클랜드를 떠난 지 꼭 일 주일 후, 새 어장을 향하여 북동쪽으로 항로를 잡고, 해저 깊이 1만 47미터로 세계에서 가장 깊은 케르마 테크 해구 옆을 지나고 있는데, 팩스로 들어온 일기 예보와는 달리 기업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 다. 2 12월 15일 밤, 제7와카시오마루는 통과하는 저기압 속에 놓였다. 이미 조업 예정지에 도착했기 때문에 시게요시는 배를 그 자리에 표박시키기로 하였다. 풍력 6에서 7의 어마어마한 태풍이었다. 풍랑을 바로 옆에서 맞으면 배가 전복할 위험도 있었다. 바람의 방향과 나란히 배를 돌리기 위해 시게요시는 직접 키를 잡았다. 그리고는 기관을 언제든 정지시킬 수 있는 상태로 유지하면서 느 린 속도로 뱃머리를 돌리고 저기압이 통과하기를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미야자키는 요동하는 선실에 누워 단편적인 꿈을 꾸고 있었다. 노련한 선원인 미야자키도 태풍 속에서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가능한한 체력을 소모하지 않도록 누워 끄덕끄덕 조는 게 고작이 었다. 배바닥이 심한 충격을 받아 몸의 위치가 위아래로 바뀌는 일도 있었다. 구토인지 뭔지, 가슴속 에 울렁거리는 감정이 고여 있다. 풍랑 때문이 아니라 새빨간 색채를 동반한 꿈 때문이다. 그 새 빨간 색체는 틀림없는 불길인데, 열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이나 똑같은 꿈에서 눈을 뜨 면 온몸이 식은땀투성이였다. 미야자키는 불길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다. 미야자키는 아버지가 배에서 싸움을 하다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엄마는 아버지가 일하는 도중에 사고로 죽었다고 했지만, 참치잡이배 기지에서 자란 그의 귀에 아버지는 싸우다 죽었다는 소문이 흘러들어온 것이다. 같은 배에 탔던 선원이 술기운 에 당시의 비밀을 떠벌리고 만 것이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미야자키는 네 살이었다. 그러니까 아버지의 모습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 지 않다. 다만 딱 한 가지 광경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감촉까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땀으 로 범벅이 된 아버지의 끈적끈적한 몸...... 아버지의 굵은 팔에 꽉 안겨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을 달리던 때의 열기....... 출항 직전이었다. 미야자키 일가가 사는 단층짜리 집의 광에서 불이 나 눈 깜짝할 사이에 전체 로 불길이 번졌는데, 지붕이 무너져내리기 직전 안방에서 자고 있던 아버지는 어린 미야자키의 몸을 어깨에 둘러메고 엄마의 손을 잡아 밖으로 몸을 굴렸다. 뇌리에 또렷하게 남아 있는 것은 불길에 반사되어 불그죽죽하게 빛나던 아버지의 등이었다. 바로 코앞에서 등은 헉헉거리는 숨으 로 흔들렸고, 솟아나오는 땀에는 술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러나 우물가에 쭈그리고 앉아 지하수를 전신에 뒤집어쓰고 무너져내리는 집을 돌아보았을 때, 햇볕에 탄 아버지의 얼굴은 어둠에 녹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불길의 색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는데 그 빛에 반사된 아버지의 얼굴이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 1년 중 거의 대부분을 바다에서 지내기 때문에 집에 있는 일이 드문 아버지였다. 그래서 얼굴 윤곽이 애매모호하다. 집에 잇는 아주 짧은 기간, 아버지는 공포 그 자체였다. 나중에 어머니한테 들은 얘기로는 술버 릇이 고약한 데다 싸움질과 도박으로 날을 지샜다고 한다. 특히 어머니는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 면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끊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이야기나 다른 사람들한테서 들은 이야기나 내용은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판단하면 아버지는 전형적인 인격 파탄자인 셈이 데, 그렇게 형성된 아버지의 이미지와 미야자키의 가슴에 새겨져 잇는 아버지의 이미지는 미묘하 게 달랐다. 그가 품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이상적이고 남성적이며 늠름함 그 자체였다. 그 아버지가 배에서 싸움을 하다가 살해당했다는 소리를 듣고 미야자키는 처음에 자기 귀를 의 심했다. 조업중에 사고로 죽었다면 몰라도 싸움에서는 절대로 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 근거 없이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다 소문의 진상을 알아보는 사이에, 아버지의 육체가 수장된 것이 아니라 무인도로 옮겨져 화장되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미야자키는 유골이 들어 있는 뼈항아리를 본 기억이 있었다. 무기력하게 고개를 떨군 어머니 앞으로 내민 뼈항아리가, 소 문이 단순히 소문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그 이후 미야자키는 불길에 휩싸이는 꿈을 번번이 꾸었다. 꿈속에서 산 채로 불태워지는 남자 가 점차 몸을 구부리고 꽉 쥔 두 주먹을 앞으로 내밀어, 권투 선수 같은 자세가 된다. 그리고 마 지막에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온몸의 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것이다. 꿈속에 태워지는 남자는 아 버지도 아니고 미야자키 자신도 아니었다. 미야자키는 영화 스크린이라도 바라보듯 객관적이고 싸늘한 시선으로 불길을 바라보는데, 잠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파도에 들어올려진 선체가 수면으로 다시 내동댕이쳐져, 미야자키는 불과 몇십 초 동안의 꿈에 서 깨어났다. 역시 땀으로 푹 젖어 있었다. 숨이 가쁘고 가슴 언저리가 답답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머리가 천장에 닿지 않도록 몸을 구부리고 떨리는 몸을 견뎠다. 이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 다. 숨이 가쁘고 몸이 으스스 떨리는 증상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분명하다. 어머니의 재혼 상대에 대한 증오, 그밖에는 생각할 수 없다. 소 년과 어머니가 함께 사는 집으로 굴러들어온 양아버지는 참치 중개상이었다. 네 살 적 기억에 남 아 있는 아버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비굴한 남자에다, 어머니한테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았지만 종일 술을 마시고 술이 떨어지면 낮이건 밤이건 사오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미야자키는 항상 이 남자를 경멸어린 눈길로 쳐다보았다. 상대방에게도 그런 미야자키의 속내 가 전달된 듯 양아버지도 미야자키에 대한 증오를 감추지 않았다. 하지만 체력으로 당할 수 없다 는 것을 알고는 쳐들었던 주먹에 서서히 힘을 빼며 귀 뒤를 긁적거리곤 했다. 그런 행위에 미야 자키는 도리어 부아가 치밀어 맞붙을 가치도 없는 남자라고 못 본 척하기로 했다. 하지만 사라져 없어지면 좋겠다는 바람은 내내 지니고 있었다. 지금이 없앨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그런 충동이 매일 끓어오르고 유혹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야자키가 굳이 손을 쓸 필요도 없이 양아버지는 술취한 상태로 목욕탕에 들어갔다가 끝내 심장마비로 죽고 말았다. 뒤따라 들어가려고 옷을 벗은 미야자키는 욕조 속에 가라앉은 양 아버지의 듬성듬성한 머리칼이 여울물에 흔들리는 물풀처럼 천천히 움직이는 것을 보고, 사람도 부르지 않고 가까이 다가가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몸 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쾌 감이 솟구치며 증오와 답답함이 깨끗하게 씻겨내리는 감각을 느꼈다. 그때의 그 상쾌함을 미야자 키는 결코 잊지 못한다. 3년 전에도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과 악몽으로 밤마다 식은땀을 흘렸다. 아이즈의 참치잡이배 를 타고 인도양을 항해중이었다. 미야자키는 식은땀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양아버지가 가라앉아 있었던 욕조의 광경을 떠올리려 했지만, 상상력을 이용한 치유에는 한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나중에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맨발로 어정어정 조타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날 밤 당직은 수 산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신참이었다. 아직 어리고 호리호리한 몸이 맨발 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 다보았을 때 미야자키는 그의 얼굴에 어려 있는 공포를 놓치지 않았다. 처음부터 겁을 주려는 속 셈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데 가녀린 어깨선이며 공포로 뒤틀린 입이 미야자키를 자극했던 것이 다. 신참은 곧바로 공포의 표정을 지우고 대신 의미도 없는 욕설을 늘어놓았다. 미야자키는 건성 으로 교묘한 대꾸를 하면서 신참을 갑판으로 데리고 나왔다. 밤바다는 아주 잔잔했다. 잔잔한 바다를 거울에 비유하는데, 그야말로 거울처럼 검게 반짝이는 수면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갑판 난간에 나란히 서서 두세 마디 나눈 후, 미야자키는 의식보다 육체의 충동에 행동을 저질렀다. 갑자기 등 뒤에서 신참의 사타구니에 오른 손을 푹 쑤셔넣고, 고 환을 꽉 쥐면서 번쩍 들어올렸다. 신참은 공중에서 반 바퀴를 빙 돌다 머리부터 바닷속으로 사라 졌다. 한참 후에 일단 수면으로 고개를 내밀었지만 소리를 지르려다가는 물을 마시고, 다시 가라앉았 다가 양 손을 들어 헤엄치면서 간신히 소리를 질렀지만 다들 잠든 선실까지 그 목소리를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 어린 몸은 배꼬리 뒤편 어둠에 삼켜 사라지고 말았다. 미야자키는 한동 안 신참을 삼킨 바다를 응시하면서, 정기 항로에서 상당히 벗어난 절해에 홀로 남겨진 감각을 음 미했다. 그리고 그의 몸을 감싼 냉기는 악몽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다시금 그때의 충동이 고개를 쳐들려 하고 있다. 같은 방법을 쓸 수는 없었다. 한밤에 당직이 없어졌다고 해도, 증거가 없으면 해상보안청도 속수무책이다. 그러나 미야자키가 탄 배에서 두 번 이나 잇달아 사람이 없어지면 의심받을 가능성이 있다. 3년 전에는 아이즈의 배, 현재 타고 있는 제7와카시오마루는 미사키에 속한다. 하지만 뱃사람들 의 좁은 세계에서는 소문이란 눈 깜짝 할 사이에 번진다. 미야자키는 의심받지 않고 사람을 바다 에 처넣을 방법을 궁리하였다. 지금 통과하고 있는 저기압이 묘안을 마련하고 있었다. 저기압이 통과하고 태풍이 좀 잠잠해지 면 내일 아침에는 분명 주낙을 내릴 것이다. 틀림없이 기회가 있을 것이다. 미야자키는 식은땀을 닦았다. 그런데 누구를 처치하지....... 역시 없어져도 다시 보충할 수 있는 신참을 노리는 게 최고 다. 학대 끝에 일본으로 돌려보낸 미즈코시를 제외하면 이 배에 남아 있는 신참은 딱 한 명, 마키 요이치뿐이다. 공상 속에서 미야자키는 몇 번이나 요이치의 머리를 바닷물에 처넣으며 격앙된 기분을 다스렸 다. 구명복을 입고 있지 않을 때를 노려야 하는데, 뭐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태풍이 몰아 칠 때의 바다는 한번 삼킨 것을 절대로 뱉어내지 않는다. 구명복의 부력 따윈 아무 소용도 없는 것이다. 3 다음날 아침이 되자 태풍도 잠잠해지고 저기압도 통과한 듯이 보였다. 그런데도 시게요시는 어두운 수면을 꼼짝 않고 지켜보면서 주낙을 내려야 할지 고심했다. 팩스 로 받은 일기 예보에 의하면 날씨는 서서히 회복될 전망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다에서 오랜 세월을 산 남자의 직관이 하늘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하고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 다. 꽤 오래 전 일인데, 저기압이 통과한 줄만 알고 주낙을 바다에 풀었다가 급격하게 발달한 두 개의 저기압 사이에 끼여 주낙을 버리고 위기를 모면한 경험이 있다. 주낙은 일단 던져넣으면 그 리 쉽사리 끌어올릴 수 없다. 사태가 주낙 정도에서 그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태풍 속에서 조업 을 계속하다보면 뱃전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전락 사고도 일어날 수 있다. 시게요시는 조타실에서 바다와 하늘을 주시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대장, 빨랑빨랑 일 시작하자구요." 옆에 서 있는 미야자키가 애를 끓이며 말했다. "기달려." 시게요시는 팔짱을 끼고 있던 팔을 풀어내리고 신단을 흘끗 쳐다보았다. "이런 정도로 일을 쉬면, 어떻게 장사해먹어!" 화가 치민 미야자키의 목소리가 좁은 조타실에 울린다. 시게요시도 초조했다. 기항지인 오클랜드를 떠난 지 열흘 남짓, 신선한 미끼와 어구를 보급받았 는데도 날씨가 시원치 않아 아직 한 번도 조업을 하지 못했다. 미야자키의 말대로 이런 정도의 날씨에 조업을 보류한다면 바다 사나이라고 할 수 없다. 선원들 모두가 하루 빨리 냉동고를 참치 로 채워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시게요시는 천천히 결의를 굳히고 잠자코 조타실에서 나와 주낙을 준비하라고 명령했다. 주낙은 기둥 밧줄과 줄기, 그리고 부표로 이루어져 있다. 부표와 부표 사이는 약 300미터이고, 한 발(발)이라는 단위를 사용한다. 부표에는 다섯 개 정도의 줄기가 늘어져 있고, 그 끝에는 낚싯 바늘이 달려 있다. 부표는 묶여 있고 깃발이 꽂혀 있다. 요컨대 수천 개의 낚싯바늘이 매달린 기 둥 밧줄을 100킬로미터에서 150킬로미터 길이로 바다 위에 참치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라인호러로 주낙을 감아올리고 낚인 참치를 갑판에서 처리하는 것이 참치잡이의 기본이 다. 주낙을 던지는 데만 약 5시간, 참치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시간이 약 3시간, 주낙을 끌어올리 는 데 약 7시간, 그러니 한번 조업을 시작하면 작업 시간이 15시간을 넘는다. 따라서 주낙은 이른 아침 동이 트면서 바로 바다에 투척하는 것이 관례다.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뿌연 회색빛을 띠기 시작하는 이른 아침, 요이치를 포함한 다섯 명의 남자들은 자동 투척기에서 풀려나오는 기둥 밧줄에 줄기를 붙이고 그 끝에 달린 낚싯바늘에 재빨 리 미끼를 끼는 작업을 계속하였다. 그 후에 기둥 밧줄은 바다로 바다로 뻗는다. 휴식 없이 계속 되는 이 작업을 하면서 남자들은 거의 아무 생각도 할 여유가 없고, 또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단조로운 손동작의 반복에 익숙해지자 요이치의 뇌리에서는 지난 열흘 동안 계속된 딜 레마가 고개를 쳐들었다. 이대로 사유리한테서 멀리 도망칠 것인가, 아니면 받아들여야 하는가. 두 마음은 피로한 육체에서 분리되어 두 개의 자기로 분열하였고 격렬한 말다툼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동시에 자연도 모순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점점 멀어져가면서 급속하 게 약해졌던 바람이 다시 북풍으로 바뀌며 풍랑이 조금씩 거세진 것이다. 구름도 빠르게 움직이 고 회색층이 두껍게 퍼지기 시작했다. 제7와카시오마루는 북북동 방향으로 10노트 속도를 유지하 면서 항해를 계속하였다. 오전 10시가 조금 지나 주낙을 던지는 작업이 끝났다. 다섯 명의 남자는 식당으로 달려가 이른 점심을 먹고 각자 선실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했다. 참치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면서 휴식을 취 하는데, 요이치는 왠지 배의 요동이 점점 심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파심이 아니었다. 정말 부근의 기압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침에는 풍력이 4 정도였던 바람이 정오에는 6에서 7로 세졌고, 수면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머리의 범위가 점점 더 넓어졌다. 끄덕끄덕 잠이 들 무렵, 허둥허둥 요이치를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일어나! 주낙을 끌어올린다!" 요이치는 노골적으로 짜증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엣, 벌써요?" 기다리는 시간이 예정보다 훨씬 짧다. 충분히 휴식을 취할 짬도 없었다. 그러나 이 예사롭지 않 은 요동으로 보아 사태는 명백하다. 되물을 필요도 없이 요이치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본격적인 태풍이야. 제기랄, 빨리 끌어올리지 않으면 끝장이라구. 서둘러!" 조업장은 그 말만 남기고 요이치의 선실에서 휙 나갔다. 항해 당직을 제외한 전원이 주낙을 올리는 작업에 매달렸다. 갑판이 전쟁터가 되는 때다. 요이 치는 비옷 위로 구명복을 입고 함성이 난무하는 작업 갑판 위를 동분서주하였다. 옆에서 몰아치 는 빗발이 아직 굵지는 않았지만 소금이 섞여 있어 입술을 핥으니 찝찔하다. 이렇게 되면 바닷물 의 구별이 어렵다. 파도가 부서지고 하얀 포말이 띠를 이루며 바람에 날렸다. 참치 운운할 때가 아니었다. 한시라도 빨리 주낙을 끌어올리지 않으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선원 들의 충혈된 눈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신참인 요이치도 사태의 중대함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비바람 소리에 잘 들리지는 않았지만, 요이치의 귀에 시게요시의 굵은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작업 중지!" 선원들이 몇 명 기울어진 갑판에서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밧줄을 잡고 있었다. 그들 의 입에서 입으로 조업장의 명령을 전달했다. "작업 중지!" "주낙을 포기한다!" 오후 3시, 3, 4미터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대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요이치는 명령을 내리 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알 수 없었다. 어떤 목소리를 따라야 하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상황이었 다. 호흡은 거칠고 가슴은 방망이질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이치에게 이 흥분은 도취이기도 했다. 모든 상념을 바람에 날려보내고 육체의 목소리, 또는 압도적 강자의 지시에 몸을 맡기고 행동하 는 것이 오히려 마음편했다. 적어도 요이치는 지금 사유리를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갑판 아래에서 말싸움을 하고 있는 듯한 고함 소리가 들렸다. 단편적으로 들려오는 말들은 제 대로 뜻을 알아들을 수 없었고, 쩌렁쩌렁한 목소리와 굵은 목소리...... 시게요시와 미야자키가 말 다툼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주낙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중지시킨 시게요시한테 미야자키가 대 들고 있든가, 아마 그럴 것이다. "요이치!"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요이치는 한 걸음 두 걸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었다. "요이치!" 다시 한 번...... 미야자키의 목소리였다. "무슨 일입니까?" "도구 창고...... 라디오부표......가져......." 비바람 소리에 말이 지워져 요이치의 귀에는 몇 마디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되물을 필요 는 없었다. 뒤 갑판에 있는 도구 창고에서 라디오부표를 가져오라는 뜻일 것이다. 요이치는 선실 벽에 등을 대고 천천히 옆으로 걸어 뒤 갑판으로 향했다. 이 비바람 속에서 바 다로 떨어지면 살아날 가망이 없다. 세심하게 주의하면서 그는 간신히 도구 창고에 도착했다. 그 런데 해치를 열려다 그는 갑자기 싸늘한 한기를 느끼고 번뜩 정신을 차렸다. 굉음 속에서 순간 정적이 흐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시선을 옆으로 돌리자 바로 옆에 검은 사 람 그림자가 있었다. 딱 한 사람, 그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이치는 해치를 쥔 채 시선을 위로 올렸다. 불과 1미터 앞에 검은 모자 달린 비옷을 입은 미야자키의 길쭉한 얼굴이 있었다. 그는 늘 신출귀몰한다. 갑판 반대쪽으로 돌아왔다고밖에 생각 할 수 없다. -대체 뭣 때문에 여기에 온 거지. 요이치는 동작을 멈추고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미야자키는 야비한 미소를 띠고 충혈된 두 눈 을 번뜩이고 있었다. -뭘 히죽거리고 있는 거야! 요이치는 마음속으로 욕지거릴 퍼부었다. 미야자키의 눈에 담긴 악의 때문에 한기가 들었던 것 이다. 악의, 그러나 미야자키가 구체적으로 무슨 획책을 꾸미고 있는지는 알 길이 없으니, 요이치 는 천천히 공포심을 억누르고 라디오부표를 운반해야 하니까 거들러 온 모양이라고 생각을 바꾸 고 정면을 바라보았다. 미야자키의 오른손이 요이치의 등으로 뻗은 것과 거의 동시에 배가 오른쪽으로 기우뚱 기울었 다. 그때 풍력은 이미 10을 넘어섰고 파도의 높이는 8미터나 되었다. 파도와 파도가 겹치기라도 하면 파고는 4배에 달한다. 이때 제7와카시오마루를 덮친 파도는 20미터가 족히 넘었다. 일단 공 중에 정지하는 감각을 남기고 배는 굉음과 함께 파도 사이로 떨어져 다음 순간에는 회색의 거대 한 벽으로 변한 파도가 배 위를 덮치고 있었다. 어둠이 요이치의 시계를 가로막았다. 해치 쪽으로 밀려갔다가 그직후 반작용으로 몸이 해치에 서 뜯겨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뻗은 손에는 바닷물만 잡힐 뿐 요이치는 순식간에 바닷물에 휩쓸려 갔다. 오른쪽 뒤편에서 거대한 파도가 갑판을 질러 휙 빠져나가자 시게요시는 파도에 떠밀려 내려간 사람이 없는지 확인하였다. 뒤 갑판 쪽이 훨씬 피해가 큰 듯했다. 시게요시는 미야자키가 요이치 한테 라디오부표를 가지고 오라고 명령한 일이 생각났다. 라디오부표는 뒤 갑판 도구 창고에 있 다. 시게요시는 갑판 계단을 올라가면서,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받쳐!"라고 고함을 지르고 그대로 요이치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 갑판으로 달려갔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자 시게요시는 바로 하얀 해면으로 시선을 떨궜다. 그러자 파도 사이로 두 팔이 쑥 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큰일이다!" 시게요시는 곧바로 팽창식 구명 보트를 바다에 던졌다. 바다로 떨어지자 구명 보트는 오렌지 색 꽃을 피우고 넘실거리는 파도 위를 떠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요이치가 구명복을 입고 있었는 지 기억을 더듬었다. 태풍 속에서 조업을 할 때는 반드시 구명복을 입으라고 주의시키는데, 개중에는 미야자키처럼 성가시다고 구명복을 입지 않는 사람도 있다. 시게요시는 조타실로 가려다 눈을 비볐다. 아까와는 다른 장소에 또 다른 팔이 하나 보였기 때문이다. -둘, 둘이나 떠내려갔단 말인가! 오랜 조업장 생활에서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동시에 두 명이나 전락, 그것도 태풍 속에서.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바다의 생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남자인만큼, 이런 상황에서 요행 따위에 기대를 걸 수는 없 었다. 그는 부하를 둘이나 잃은 절망감을 껴안은 채 간신히 몸을 일으켜 조타실로 달려갔다. 그리 고 키를 오른쪽으로 바짝 돌리라고 지시하고 이어 주낙을 절단하라고 명령한 후, 마지막으로 통 신사에게 상황을 연락했다. 연락을 받은 통신사는 당장 부근을 항해하는 선박에 타전하여 해난 사고 발생을 알렸고, 수사에 협력해달라고 의뢰하였다. 같은 시각 같은 해역을 항해하고 있던 제 2, 제4호요마루, 제2쇼에마루, 제8와카시오마루 네 척의 참치잡이배의 통신사는 타전을 받고 조난 지점을 확인하였다. 남위 24도 07분, 서경 175도 58분. 요이치와 미야자키가 전락한 지점이다. 네 척의 배는 곧바로 키를 왼쪽으로 바짝 돌려 남남서로 뱃머리를 돌리고 조난 현장으로 향했다. 아직 오후 4시밖에 되지 않았는데 거무칙칙한 하늘은 짙은 수묵화의 세계를 연상케 하였다. 이 명이 들리고 파도 소리가 차단되자 시게요시는 현기증이 일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흑과 백인 세계, 구명 보트만 화려한 오렌지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큰 파도에 가려 보이지 않곤 한다. 두 사람의 모습은 완전히 시야를 벗어나 있었다. 만에 하나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면, 그들 이 자력으로 구명 보트까지 헤엄쳐 가는 것이다. 구명 보트에는 조난 발신기가 실려 있다. 오른쪽으로 키를 바짝 돌렸는데도 배의 움직임은 마 음 같지 않고, 물 속에 빠진 사람을 발견하여 끌어올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조난 신 호가 발신되지 않는 한 위치도 알 수 없으니 구조는 거의 절망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비 바람은 그칠 줄을 모르고 시간은 점점 밤으로 가고 있다. 악조건뿐이다. 구조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시게요시는 요이치가 구명 보트를 발견하기만을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또 한 명, 그게 누구지? 그제야 시게요시는 요이치와 뒤엉키듯 바다로 떨어진 또 한 명의 남자가 누군지 확인하지 않았 다는 것을 알았다. 근거도 없이 미야자키의 얼굴이 떠올랐다. 추락 사고가 발생한 지 2분도 지나 지 않았는데 허둥지둥 선내를 뛰어다니면서 몇몇 부하들의 얼굴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배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어야 할 미야자키의 얼굴이 아직 보이지 않았다. "미야자키, 자넨가?" 시게요시는 바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그놈이 어쩌자고 그런 데 있었던 거지. 추락한 사람이 미야자키라 치고, 왜 볼일도 없이 요이치를 따라 뒤 갑판으로 갔는지, 시게요시 는 의문스러웠다. 4 당장은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판단할 수 없었다. 소리도 압박감도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꿈속 에서 몸부림치고 뒤집어지고, 마침내 숨이 갑갑해지면서 바닷물을 마시고, 어느 쪽이 위인지도 모 를 상태가 요이치의 감각으로는 한 1분 이상이나 계속된 듯하였다. 부력에 몸을 맡기고 얼굴을 수면 위로 내미는 순간, 부서지는 파도가 머리 위를 지나가고 대량의 바닷물이 입과 코로 흘러들 었다. 서서 헤엄을 치면서 몸을 360도 돌리자 바로 앞쪽에 제7와카시오마루의 우현 뒤쪽이 보였다. 자신이 방금 전가지 있었던 뒤 갑판에서 바닷물이 폭포처럼 쏟아져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요이치 는 간신히 자기가 파도에 떠밀려 바다로 추락했다는 현실을 깨달았다. 배 쪽으로 헤엄을 치려다 그는 파도머리와 골 사이로 빠지고 앞뒤 물의 벽에 가로막히고 말았 다. 숨을 쉬려고 고개를 쳐들자 길쪽한 하늘이 보였다. 파도의 골에서 올려다보는 그 협소함이 소 름끼칠 만큼 압박감을 준다. 그 직후 머리가 파도머리에 밀려올라가고 한층 더 높은 곳에 정지했 을 때 배가 바로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다시 쿵 하고 골로 떨어지자 배는 사라졌다. 다시 밀려올라갔을 때 배는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공포감이 전신을 휩쌌다. 몸 속 깊은 곳에서 의식을 목조르듯 솟구쳐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태를 파악하자 뇌혈관이 터질 것처럼 부풀 어올랐다. -침착하라! 요이치는 필사적으로 정신의 공황을 극복하려 했다. 굴복하는 순간에 목숨을 잃는다. 자신과의 싸움이다. 육체의 대혼란을 억누르면서 정신을 한 방향으로 모은다. 그는 몸을 비틀었다. 그러자 다시 배의 모습이 보였다. "침착해야 돼!" 그는 소리내어 자신에게 말했다. 헤엄을 쳐서 가지 못할 거리는 아니었다. 단 거대한 파도가 방 해하고 있다. 파도가 머리 위를 지나기 직전, 크게 숨을 들이쉬고 호흡을 정지했다. 그리고 파도 가 지나가기를 기다려 얼굴을 수면 위로 내밀었을 때 그는 방향조차 알 수 없었다. 배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제어할 수 없는 공포에 그는 미칠것만 같았다. 부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바랐을 때 그는 자신이 구명복을 입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았다. 사용 방법은 시게요시 가 가르쳐주어 알고 있다. 구명복 아래 달려 있는 끈 두 개를 잡아당기면 그만이다. 물 속에서 더 듬어 끈이 손에 닿자 그는 힘껏 잡아당겼다. 탄산 가스가 충전되면서 구명복이 부풀었다. 순간 그 의 육체는 부력의 힘으로 물 위로 부상하였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도 저절로 얼굴이 수면 밖으로 튀어나와 다소 안심이 되었다. 이제 숨을 쉬기 위하여 턱이 아프도록 입을 벌릴 필요는 없다. -침착해! 그렇지, 침착해야 해. 이를 계기로 이 공포를 이겨낼 수만 있다면 최초의 난관은 돌파할 수 있을 듯했다. 사지를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배를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요이치는 배 주변으로 떨어 지는 오렌지 색 덩어리를 보았다. 구명보트를 떨어뜨린 것이다. 수면으로 떨어지자 원형으로 팽창 한 보트는 파도머리를 타고 오를 때만 간신히 시야에 들어왔다. 일단은 분명한 목적이 생겼다. 배 와 자기 사이에 떠 있는 구명 보트로 헤엄쳐 가는 것이다. 그때 돌연 파도가 아닌 힘이 요이치의 몸을 반대 방향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부력을 얻어 안 정을 유지하고 있는 몸을 수면 아래로 끌어내려 대량의 소금물이 위 속으로 흘러들었다. 무언가 가 잡아당기고 있다. 누군가의 두 팔이 옆구리를 더듬거리고 후두부에 거친 숨이 느껴졌다. 요이 치는 놀라 공포에 떨면서 매달린 그 물체를 정신없이 떠밀어냈다. 뒤엉켜 우왕좌왕하는 사이 요 이치는 몇 센티미터 거리에서 미야자키의 충혈된 눈을 볼 수 있었다. -이 개자식, 내 구명복을 뺏으려고! 금방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미야자키는 떠 있는 것에 급급하여 매달리려 했을 뿐 굳이 구명복을 빼앗으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시 공포에 휩싸인 요이치에게 미야자키란 존재는 곧 죽음을 의미했다. 구명복 한 벌로 두 사람의 체중을 버티긴 어림도 없었다. 본능적으로 요이치 는 거세게 저항했다. 거대한 파도에 이리저리 떠밀리면서 두 사람은 필사적으로 구명복을 차지하려 싸움을 벌였다. 구명 보트로 헤엄쳐 가려 했던 요이치의 목적은 뜻하지 않은 방해물에 저지되고 귀중한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미야자키가 움직임을 중단했다. 동시에 요이치도 움직임을 멈추고 물 속에서 사 지를 뻗었다. 숨은 거칠고 몸 마디마디가 쑤셔왔다. 요이치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은 채 미야자키 는 360도로 시선을 옮겨가며 사방을 살폈다. 쿨럭쿨럭 입으로 바닷물을 토해내면서 뭐라 중얼거 리는 듯했지만 요이치는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를 따라 두 번 정도 몸을 회전시킨 후에야 미야 자키가 뭐라고 말했는지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이미 제7와카시오마루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다. 파도에 가려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파도에 떠내려가 멀어지고 만 것이다. 요이치는 분노와 절망으로 소리를 질렀다. 시 간 감각이 마비되어 미야자키와 격투하는 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 렇지 않아도 열악한 조건인데, 배를 놓치면 발견될 가능성은 제로가 된다. 위가 팽창되는 게 느껴 지자 동시에 요이치는 '죽음'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미야자키를 등에 업은 꼴로 잠시 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구명복이 부력을 되찾아 요이치의 머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미야자키가 두 손을 놓은 것이다. 미야자키는 서서 헤엄치면서 요이치 바로 앞으로 돌아와 번뜩이는 눈동자로 요이치를 쳐다보았다. 요이치는 그 눈동자에서 광 기를 보았다. 경험 많은 선원인 미야자키는 상황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 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생명을 포기했는지, 그는 불과 몇 센티미터 거리에 있는 요이치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조롱하듯 히죽 웃고는 양 팔을 들어올리고 그대로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사방으로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예리한 칼날로 깍아낸 것처럼 신경이 날카로워지면서 울 렁거리는 속을 요이치는 간신히 참아냈다. 위 속에 들어 있는 것을 토해내면 그만큼 공복감이 커 지고 체력이 소모된다. 그는 자신에게 말했다. 가능한 한 체력을 유지하고 끝까지 살아날 수 있다 는 믿음을 잃지 말라고. 그러나 한편 요이치는 물로 빠져들기 직전에 미야자키가 남기고 간 그 표정이 마음에 걸렸다. -무슨 뜻이지, 그 웃음은? 부질없는 몸부림을 비웃을 것인가. 구명복의 도움으로 다소 생명을 연장할 수는 있다. 그러나 반대로 고통의 시간이 길어질 뿐이라고, 그런 말을 웃음으로 남기고 스스로 물 속에 몸을 묻은 것인가. 회색 하늘이 서서히 칠흑 같은 어둠에 싸여간다. 검은색에 검은색을 덧칠한 듯한 암흑의 세 계...... 게다가 인간성을 부정하고 우롱하는 바다에 어깨까지 잠겨, 쉴새없이 온몸에 가해지는 고 문을 통해서 요이치는 미야자키의 웃음이 그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앞으로 몇 분만 이 상황이 지속되면 나는 아마도 미칠 것이다. 그는 육체보다 먼저 정신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감했다. 5 한밤이 되자 저기압이 지나가고 비바람이 멎었다. 그토록 미쳐 날뛰던 바다도 아주 잔잔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오늘이 며칠이지? 요이치는 오늘 날짜를 생각했다. 12월 17일. 제7와카시오마루에서 추락한 지 12시간, 그러나 그 는 오늘밤처럼 길게 느껴지는 밤이 없었다. 이제 곧 미쳐버릴 것 같다고 몇 번이나 정신이 오락 가락했을까? 1분 1초마다 각오를 다지고, 그리하여 간신히 밝아오는 새로운날....... 지금껏 제정신 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이른 아침 공기가 바다와 하늘을 보라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그 빛으로 오늘 하루의 날씨를 예상할 수 있었다. 태풍이 지나간 후의 소름끼치도록 잔잔한 바다, 그 변덕스러움은 도대체 어디 서 오는 걸까? 요이치는 상반신을 뒤로 젖혀 가끔씩 뒤통수를 바닷물에 적시면서 태양이 떠오르 는 방향으로 시선을 맞추었다. 시선이 수평선에 닿을 듯 말 듯한 낮은 위치에서는 파장이 긴 빛 밖에 볼 수 없으므로 온통 보라색만이 눈에 들어왔다. -빛이 있다면.......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이 구조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었다. 시야가 트이면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 제7와카시오마루를 비롯하여 이 근해를 항해하는 다른 배들도 조난자 수색 작업에 나섰을 것이 다. 태풍이 휘몰아치는 밤바다에서는 힘들지 몰라도 날씨가 좋아지면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추락 한 위치는 정확하게 기록되었을 것이고, 조류의 움직임을 파악하면 표류 지역도 대충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요이치는 낙관적으로 마음먹으려 애썼다. 비관은 절망을 낳고 절망은 발광으로 이어지고, 끝내 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에 이른다....... 세계의 역사에는 조난을 당하고 표류한 예가 얼마든지 있 다. 통계에 따르면 그 90%가 사흘 내에 미쳐 자살한다고 한다. 갈증과 허기로 죽는 것이 아니다. 가혹한 상황에 놓인 육체에 정신이 망가지고 망가진 정신에 육체가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항해를 결심한 후 요이치는 바다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많은 책을 읽었다. 그 중에는 해 난 사고를 다룬 내용도 물론 있었다. 그때 읽었던 생존 테크닉을 기억나는 대로 떠올렸다. 생존을 위한 필수 조건은 무엇인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갈증이다. 아직 갈증은 그다지 심하지 않았지 만 태양이 높이 떠오르고 햇볕이 따가워지면 점차 심해질 것이다. 바닷물을 마시는 데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바닷물을 절대로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것.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도를 넘지 않는 정도라면 마시는 편이 좋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방침을 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마셔야 하나, 아니면 눈 앞에 펼쳐진 바닷물의 유 혹을 마냥 견뎌야만 하나. 유혹에 지고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끝없이 양을 늘려야 할 것이다. 그 렇게 되면 죽음은 더욱 빨리 찾아온다. 문제는 거기에 있었다. 하루에 1l를 넘지 않으면 전혀 마 시지 않는 것보다 오래 연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양을 정확하게 지킨다는 것은 불가능 에 가깝다. 요이치는 맹세했다. -바닷물은 절대로 마시지 않는다. 비록 개인차는 있지만 사람은 물 없이도 여드레에서 열흘은 살 수 있다고 한다. 최소한 사흘을 싸워보자고 요이치는 결심했다. 순간적으로 목숨을 포기한 미야자키의 얼굴이 뇌리에 남아 있는 만큼, 그 작자와 똑같은 꼴이 되지 않겠다는 투쟁심이 끓어올랐다. 생명에 대한 조소를 금할 것. 다행히 12월의 남회귀선 바로 아래인 이곳은 수온이 26℃를 넘으니 사흘 동안은 살아 있을 수 있 다. 만약 수온이 20℃이하라면 이미 목숨은 사라졌을 것이다. 가족의 얼굴도, 사유리의 얼굴도, 이 때만은 떠오르지 않았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혼신의 힘으로 육체를 지탱하고 있을 뿐이었다. 해가 떠오르자 파장이 짧은 빛이 바다의 원래 모습을 되찾아주었다. 일사병으로 우려하여 요이 치는 비옷 모자를 머리에 푹 덮어쓰고 햇살을 피했다. 비옷과 장화는 참치잡이배의 선원한테는 아주 일반적인 복장이다. 고무 제품의 적당한 두께가 안전감을 준다. 다리와 허리께로 물고기가 다가와 콕콕 입질을 하기도 하는데 만약 맨몸이었다면 불안했을 것이다. 아니, 불안한 정도가 아 니다. 피부가 찢겨나가고 흘러나온 피 냄새를 맡고 상어가 몰려올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상어를 연상하는 순간 요이치는 구명복의 부력이 떨어지고 있음을 느꼈다. 착각이 아니라 과연 수면의 위치가 아까보다 얼굴에 가까워졌다. 설마 구명복에 구멍이 뚫린 것은 아닐까 싶은 불길 한 예감이 들어, 그는 양 손으로 구명복을 여기저기 더듬어보았다. 공기가 새는 것 같지는 않았 다. -너무 예민한 건가. 가슴께에 매달려 있는 긴 튜브를 생각해냈다. 구명복은 공기를 공급하지 않으면 일정한 부력을 유지할 수 없다. 요이치는 튜브 끝의 마우스피스를 입에 물고 공기를 불어넣었다. 구명복이 부풀 며 부력을 되찾자 몸이 조금씩 위로 떠올랐다. 하늘 높이 제트 여객기가 날고 있었다. 표류를 시작한 이래 처음 보는, 인간이 탄 물체였다. 무 턱대고 발을 허우적거리며 소리를 질렀지만 제트기는 모른 척하고 사라지고 말았다. 알아달라는 편이 억지다. 화려한 색채의 구명 보트를 타고 발연통을 터뜨려도 해상 위의 표류자는 발견되기 가 어렵다. 하물며 제트기의 파일럿이 겨우 얼굴만 내밀고 바다에 떠 있는 사람을 알아볼 리 없 다. 무모한 운동은 육체를 피폐하게 만든다. 요이치는 자책했다. -가능성이 없는데 몸부림쳐봐야 체력만 소모될 뿐이다. 우선 해면에서 파닥파닥 버둥거리면 먹이인 줄 알고 상어가 몰려올 위험이 있다. 아까부터 요 이치의 모든 생각은 상어의 예리한 이빨과 관련된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지만 사고는 금 방 그쪽으로 연결되었다. 남태평양의 깊은 바다이므로 상어가 없을 리 없지만 영화를 많이 본 영 향으로 상어에 대한 공포심이 커졌다. 상어만 생각하면 자기도 모르게 두 다리를 움츠러든다. -다른 생각을 하자. 요이치는 헤엄치는 상어의 모습을 억지로 지우고, 바다에 표류했다가 구조된 사람의 체험담을 생각나는 대로 머릿속에 열거해보았다. 죽음과 삶을 나누는 경계는 무엇이고 발견되기 위한 방법 은 무엇인가, 그러자 요이치의 뇌리에는 또다시 절망이란 두 글자가 떠오른다. 책에 거론되어 있는 표류자들은 대개 구명 보트를 타고 있었다. 구명 보트에는 비록 양은 적지 만 음료수와 비상 식량이 준비되어 있다. 햇볕을 가릴 텐트와 조난 신호 발신 장치도 설비되어 있다. 더구나 그 재질은 상어의 공격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준다. 오직 구명복 한 벌에 몸을 의지하 고 바다에 떠 있다가 구조된 예는 없었다. 발견될 가능성이 과연 있을지 의문이다. 숨이 콱콱 막히는 공포, 그리고 고독이 온몸을 덮쳤다. 하루 밤낮을 바다에 잠겨 있는 탓인가, 피부는 불었고 손톱은 하얗게 변색되었다. 온몸은 자기 몸 같지 않고, 육체는 감각이 분리된 듯한 느낌이었다. 목덜미에 심한 통증이 느껴져 앞으로 고개를 숙이자 투명한 바닷물 속으로 자신의 검은 장화가 또렷하게 비쳤다. 태풍 때문에 회색으로 물들었던 어제와는 달리 바다는 한없이 투 명했다. 장화를 벗어 던지면, 장화가 바닷속으로 잠기는 모습이 긴 시간 생생하게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장화가 가라앉은 바닥에는 빛이 닿지 않을 것이다. 남북으로 약 2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통가 케르마데크 해구는 가장 깊은 곳이 1만 47미터라고 기록돼 있다. 지금 요이치가 떠 있는 곳이 바로 그 위였다. 발 아래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엄청 난 수압을 받으면서 암흑 세계가 잠들어 있다. 그 암흑을 상상하자 요이치는 마치 심연으로 끌려 들어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 배가 벌써 세 척이다. 정기 항로로 들어선 것인지 항해하는 배의 수가 늘어난 듯하다. 그러나 그 배들은 요이치를 발견하기는 커녕 돛대 끝을 보이기만 할 뿐 더 이상 요이치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내가 여기에 있는데, 왜 그냥 가버리는 거야! 배가 그냥 지나갈 때마다 요이치는 분노에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를 질렀다. 혹시 이대로 버려 진 것이 아닌가, 수색 작업을 포기한 것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간헐적으로 그를 괴롭혔다. 죽었 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고향의 어머니한테도 벌써 부고를 전했을지 모른다. 아직 살아 있는데 장 례식이 치러져, 히로시마에 사는 형이 고사이시로 돌아오고, 어머니와 함께 눈물을 쏟는 모습이 뇌리에 떠오른다. 공상은 이성을 무시하고 발전하여 멈출 줄을 모른다. "나는 아직 살아 있단 말이다!" 그러나 암만 목청을 돋우어 소리질러도, 고독이 지배하는 360도 사방에는 배의 그림자조차 없 었다. 요이치는 사고의 시점을 바꾸어 혼자 힘으로 살아날 방법이 없을까 하고 생각했다. 만약 섬이 있으면 헤엄쳐 갈 자신이 있었다. 수영은 그의 주특기이기도 하고 체력도 남 못지않다. 그는 침착 하게 그 주변의 조류를 머리속으로 그려보았다. 남적도 해류가 뉴질랜드 바로 북쪽에서 서쪽으로 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류를 타고 표 류하면 케르마데크 제도의 어느 한 섬에 표착할 가능성이 있다. 섬과 섬 사이를 그냥 빠져나갔다 면 다음으로 표착할 가능성이 있는 곳은 오스트레일리아의 동쪽 해안이다. 거리로 보면 약 2천 킬로미터, 1년도 더 걸려야 갈 수 있는 거리다. 당연히 육체는 그 흔적조차 남기지 못할 것이다. 검은 비옷과 구명복을 걸친 백골이 현지인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 요이치는 소리내어 웃었다. 발광 직전의 경련 같은 웃음이었다. -모자 달린 검정 비옷을 입은 해골? 그야말로 만화에 등장하는 죽음의 신이로군. 그런데 수평선 위로 나타난 한 척의 배로 인하여 그 웃음은 중단되었다. 네 번째로 보는 그 배 는 멀리서 뱃머리를 요이치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뱃머리가 이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은 즉 서서 히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다. 요이치는 입을 쫙 벌린 채 점점 거대해지는 배를 넋을 잃고 한참 동 안 바라보면서 몇 번이고 눈을 비벼 환각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했 다. -천천히 기다리자. 지금 소리질러봐야 들릴 리가 없다. 배는 정면을 똑바로 요이치 쪽으로 향하고 전진하고 있었다. 화물선으로 배수량은 1만 톤 전후 로 짐작되었다. -너무 크다! 배가 크면 당연히 갑판의 높이가 높으므로 해상에 떠 있는 사람 따위는 눈에 띄지 않는다. 요 이치는 문득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지만 필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우현 쪽 앞에 돌아 갑판이 보 이는 곳에서 손을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잘못해서 스크류에 말려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불과 몇십 미터 앞에서 거대한 철 덩어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요이치는 신에게 기도하는 심정 으로 갑판을 올려다보고 사람을 찾았다. 조타실 유리창 너머로 움직이는 사람의 머리가 보였다. 아무래도 일본 사람은 아닌 듯했다. 우현 앞쪽에 쓰여진 영어를 봐도 외국 선적의 화물선이 틀림 없었다. "어이! 여기야! 헬프! 헬프!" "날 좀 보라구, 내가 여기 있단 말이야!" 그러나 조타실 안쪽에서 보였다가 사라지곤 하는 사람은 요이치 쪽으로 시선을 고정하지 않는 다. "어이, 뭐하는 거야! 여기 사람이 다 죽어가는데!" 여전히 소리를 질러대는 요이치 앞을 화물선이 유유하게 가로질렀다. 이미 조타실은 저 멀리 지나가, 발견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해졌다. 언뜻언뜻 보이던 사람의 머리는 이제 완전히 시야 밖 으로 벗어났고, 배가 남긴 파도에 휘말려 몸이 흔들릴 때까지 요이치는 계속 소리를 질렀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1만 톤급 화물선의 조타실에 서 있는 당직이 해상 에 떠 있는 사람을 발견할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음에도 요이치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자기가 조타실 위치에 섰을 때, 해상을 주시하는 데 어느 정도나 시간을 투 자했는지....... 거의 제로에 가깝다. 커피를 마시며 잡지나 책을 읽는 게 전부였다. 그러니 화물선 이 요이치를 발견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요이치는 멀어지는 배꼬리를 쳐다보면서 발작처럼 화를 내었다. 화물선의 당직한테는 그 태만을 화내고, 일단은 희망을 보여주었다가 절망케 하는 신의 장난에는 원망을 늘어놓았다. 그리하여 탈진한 몸을 떨며 눈물을 흘렸다. -버려졌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어째서, 왜 나만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가? 불합리한 현실을 자문해 보았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는 거야? 한동안 그의 머리를 차지하고 있던 분노는 사고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서서히 화가 가라앉자 각 질문에 대한 답이 떠올랐다. 바다에 표류한 사람들은 대부분 현재의 가혹한 상황을 과거의 잘못과 연관시키는 경향이 있다. 그때 그런 짓을 했기 때문에 신의 벌을 받는 것이라고, 그런 해석을 내리는 것이다. 표류한 지 하루가 지날 무렵에야 요이치는 비로소 사유리를 생각했다. 화물선은 완전히 시야에 서 사라지고 기분도 가라앉았다.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은 사유리와의 인과 관계에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바로 눈앞으로 지나가면서도 바다에 떠 있는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 화물선, 요 이치는 그 화물선을 자신에 비유해보았다. 그리고 사유리가 표류자라고 생각해보았다. -똑같지 않은가. 구원의 손길 한번 내밀지 않고 그냥 지나친 자신의 모습이 객관적으로 들여다보였다. -하지만 사유리의 아버지가 핸틴튼 무도병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만약 알고 있었다면 손을 내밀었을까. -아니, 그 반대다. 도망쳤을 것이다. 더 빨리. 문득 떠오른 대답에 요이치는 아연하였다. 스나코 다케시가 보낸 복사물을 읽고 요이치는 그 병의 사악한 성질을 알고 있었다. 부모 한쪽 이 핸틴튼 무도병일 경우 자신한테 유전될 확률은 2분의 1. -이것도 똑같지 않은가. 지금 내가 놓은 상황과 똑같다. 수면 위로 얼굴만 간신히 내밀고 언제가 될지 모르는 구원의 순간을 기다린다. -똑같다. 다리 한쪽을 관 속에 집어넣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이치는 분명하게 깨달았다. 자신이 왜 이런 궁지에 몰리지 않으면 안 되었는지. 사유리에게 한 짓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해석에 도달하자 요이치의 몸은 생명력을 되찾았다. 사유리의 운명이 요이치에게 반영되 고 있다면, 요이치의 운명 또한 사유리에게 반영되고 있다는 뜻이다. 요이치가 구출되면 기적이 일어나 사유리의 재생 또한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둘이서 노래한 멜로디가 뇌리를 스치자, 요이치는 소리내어 노래를 불렀다. 이후로 요이치는 사고의 대부분을 사유리와의 추억에 할애하였다. 2분의 1확률로 핸틴튼 무도 병에 걸릴지도 모르는 숙명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그녀는 데뷔 직후 아버지 의 병을 알고 운명을 자각한 것이다. -마침 그 무렵이다, 사유리를 만난 것이. 요이치는 만약 내가 사유리의 입장이라면, 하고 가정해본다.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 다. 6년이란 세월을 2분의 1이란 확률에 시달리다 보면 미치는 것도 당연하다. 바다에서 단 하루 를 지낸 나조차 거의 미칠 지경이다. 그런데 6년이나! 왜 지금 사유리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 는가. 두 번이나 자살을 기도하고, 요이치에게 심한 질투심을 보였던 것은 어째서인가, 아이가 생 겼을지도 모르겠다면서 신경정신과를 찾은 것은 또 왜, 트럼프로 점을 치면서 중얼거린 말, '너도 그렇게 말하는구나, 내가 행복해질 확률이 2분의 1이라고' 또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누군가 쫓아온다고 절박한 표정으로 도와 달라고 호소한 것은. 그 수많은 의문을 자신의 죽음을 앞에 두 고서야 알게 되다니. 요이치는 사유리가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그립기도 했다. 화물선이 무심히 지나갔을 때 흘렸던 눈물과는 다른 눈물이 두 뺨을 적셨다. 환각인지, 갓난아기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오늘이 12월 17일이지. 스나코 다케시한테서 온 편지에 사유리의 출산 예정일이 12월 말이라고 쓰여 있었다. -슬슬 태어날 때로군. 아니 어쩌면 벌써 태어났을지도 모르지. 내 생명이 여기서 다한다 해도 자신의 유전자는 남게 된다. 설사 그 아이가 핸틴튼 무도병의 인자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이미 대단한 문제가 아니다. -역시, 소리가 들린다. 요이치는 귀를 기울였다. 건강한 아이의 울음소리가 어디선가 나지막이 그의 귀로 날아들었다. 6 12월 17일. 일본 시간 오후 1시. 점심 식사를 하고 막 자기 방으로 돌아온 모치즈키는 계속 울리고 있는 수화기를 들어 귀에 갖 다대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의대 부속병원의 스기야마였다. 산부인과 의사인 스기야마는 모치즈키의 2년 후배로 레지던트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다. "지금 막 태어났습니다. 여자 아이에요. 모녀 모두 이상 없습니다." 어젯밤 늦게 진통이 시작된 사유리는 의대 부속병원으로 옮겨져 분만대 위에서 하룻밤을 지냈 다. 그리하여 지금, 파도 같은 리듬의 진통에서 벗어나 무사히 출산을 끝낸 것이다. 모녀 모두 건강 하다는 말에 모치즈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이거 수고가 많았군. 그런데 그쪽에서 얼마나 있을 수 있지?" 모치즈키는 사유리의 입원 기간을 물었다. "글쎄요, 대충 일 주일이라고 보면 되겠죠." "그래...... 그럼 잘 부탁하네." 모치즈키는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일 주일이라. 그것이 모녀가 함께 있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입원 기간이 끝나면 갓난아기는 유아원으로, 엄마는 다시 정신병원으로 떨어져 지내야 한다. 모녀가 함께 생활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사유리의 어머니인 유코가 두 사람의 보호자임 을 승낙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유리는 방랑 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 -과연 유코 씨가 뭐라고 할지.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까칠한 목소리를 듣고 모치즈키는 유코에 대해 그리 좋은 인상을 품지 못했다. 놀라기는커녕 감동도 하지 않은데다 오히려 경계심만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응답에 모치즈키는 실망하여 큰 기대를 걸지 말자고 다짐 하고 있었다. 복지 사무소에서 조사를 하여, 일 주일 전에 유코의 소재가 밝혀졌다. 23년 전, 가와이 에지라 는 삼류 배우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인 유코는 오카야마까지 가서 '시즈카'라는 술집을 경영하 게 되었다. 부부는 순조롭게 술집을 경영했는데 3년 전에 남편이 암으로 죽자 유코는 장사에 대 한 정열을 완전히 잃고 말았다. 남편을 상당히 사랑했던 모양이다. 결국 유코는 술집을 팔아치우고 어마어마한 돈이 손에 들어 오자 방랑의 여행길에 올랐다. 목적도 없이 시골 온천 마을을 돌며 옛 친구를 찾아다니는 나날. 그런데 옛날 친구 중에 초등 학교 때부터 절친하게 지내는 한 친구에게만은 한 달에 한 번씩 꼭 연락을 했다. 복지 사무소의 조사관은 이 친구의 소재를 파악하여 전화를 했고 그 연락을 받은 유코가 하마 마쓰 복지 사무소로 전화를 한 것이 일 주일 전. 그리고 그 다음다음날이 되어서야 모치즈키는 직접 유코와 통화를 할 수 있었다. 현재 마쓰에에 있는 유코는 하마마쓰에 오는 것을 꺼려했다. 친딸이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데 면회를 거부하는 심정을 이해할 수 없어 모치즈키는 강한 어조로 설득하고 말았다. 그러자 뜻밖 에도 유코는 "그럼 가죠. 하마마쓰는 아직 한 번도 가본 일이 없기도 하니까......." 라면서 방문을 승낙했다. 약속 날짜는 내일 오전 10시. 모치즈키는 그녀에게 마쓰이 병원의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유코는 이 부원장실로 직접 찾아오게 되어 있다. -이것 참 난처하게 되었군. 내일 오전, 유코가 마쓰이 병원으로 온다 해도 사유리는 여기에 없다. 손녀의 탄생과 사유리가 입원중인 대학병원의 이름을 알려주려해도 이쪽에서는 연락할 방법이 없다. 모치즈키의 뇌리에 갓 태어난 아이의 울음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의 울음소리였다. -벌써 몇 년 전 일이지, 카나에의 첫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 모치즈키는 출산 체험이 사유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를 바랐다. 육체만 건강하면 산 모는 출산을 경험하면서 더욱 강해질 확률이 높다. -출산이 정신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통계가 있었던가. 모치즈키는 책꽂이에서 의학 잡지류를 꺼내 뒤적거려보았지만 그런 통계는 찾을 수 없었다. 7 표류가 시작된 지 30시간이 되어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정적속에서 별들의 미미한 빛만 비치고 있다. 환상의 세계, 어젯밤에는 두꺼운 구름에 뒤덮여 칠흑처럼 어두웠는데, 오늘밤은 착각을 불 러일으킬 만큼 빛나고 있다. 요이치는 가끔씩 황홀감에 빠졌다. 자율 신경을 유지하기 위한 틀이 있다면, 그 틀이 좍 풀린 느낌이었다. 남반구를 수놓은 별밤, 무수한 추억이 맥락도 없이 전개되었다. 어디를 헤매고 있는 지...... 눈을 감았다 떠도 풍경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다. 자고 있는 것인지 깨어있는 것인지 분명 하지 않다. 깨어 있는 어느 부분에서, 이제 끝장이란 소리가 들린다. 고등학교 시절에 죽은 아버 지의 얼굴이 떠오르고 집 냄새가 그립다. -집. 돌아가고 싶다, 절실하게. 요이치는 황홀감을 물리치고 의식을 일깨웠다. -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내 소원은 그뿐이다. 나의 집, 사유리와 내 자식이 기다리는 집. 더 이상 고독을 참을 수 없다. 이제 그만 놓아달라. 그리고 그는 찰랑찰랑하게 물이 부어진 잔과 아이스크림을 연상하다 다른 한쪽의 자신에게 '지 금 얻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짓은 그만둬'라고 질책을 받는다. 자아는 두 개로 분열되었고 사고 는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다. 죽음을 바라는 마음이 싹트고 있었다. 이대로 환각 속에서 죽고 싶다는 욕망이 암울하게 몸 안 을 굴러다니며 눈덩이처럼 서서히 성장하고 있었다. 별빛 찬란한 밤하늘 아래서 목숨이 사라지면 혼은 아름답게 저 하늘로 올라갈 것이다. 유혹이 었다. 적어도 거대한 파도에 휩싸여 죽기보다는 그쪽이 훨씬 나았다. 한밤이 되자 짙은 안개가 퍼져 시야를 가로막았다. 요이치는 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세계를 떠다니던 요이치는 지금까지와 다른 감촉에 불현듯 몸을 떨었다. 두 눈을 크게 뜨고 의식을 집중하였다. 환각이 아니었다. 착각도 아니었다. 분명히 지금 느꼈다. 새벽녘의 바다,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지만 어스름하게 밝아오는 대기가 눈에 들어올 무렵이었 다. -상어인가! 긴장한 나머지 몸이 경직된다. 틀림없이 지금, 머리 뒤쪽에 무언가가 닿았다. 미미한 충격도 아 직도 뒷머리에 남아 있다. 뒷머리에 닿은 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를 확인하기가 두려워 돌아보지 도 못하고, 두 팔을 목뒤로 돌려 더듬는다. -아무것도 없다. 그때 요이치는 아까와 똑같은 감촉을 오른쪽 귀 위로 느꼈다. 꿀꺽 침을 삼키고, 상어라면 이 정도 충격으로 지나지 않을 텐데, 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얼굴을 천천히 돌렸다.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일단 두 눈을 꾹 감으며 이게 꿈이 아니기를 기도하고 다시 떴다. 분명히 떠 있었다. 밝아오는 아침 공기 속에 오렌지 색 물체가 후광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너무도 기쁜 나머지 요이치는 거의 기절할 뻔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구명 보트를 잡고 몸 에 힘이 주어질 때까지 그 상태를 유지했다. 그렇게 기력이 충실해지기를 기다려 풀쩍 뛰어오르 듯 구명 보트안으로 몸을 날렸다. 몸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기적이다! 보트 안에 타고 있으면서도 요이치는 이 천운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7와카시오마루에서 추락 한 뒤, 팽창식 구명 보트가 투하되는 것을 보기는 했다. 그러나 태풍 속에서 그 자취를 잃고 말았다. 설마 38시간이나 지난 후에 이렇게 만나게 되다니, 꿈도 꾸지 않은 일이었다. 같은 조류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요이치와 구명 보트가 같은 조류를 타고, 엇갈리듯 표류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오히려 지금까지 구명 보트를 보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다. 요이치는 곧장 음료수를 찾았다. 1l짜리 병이 세 개, 뚜껑을 열고 천천히 마셨다. 물은 이전에 마셔본 적이 없을 만큼 맛있었다. 식도를 따라 위에 도달한 물이 몸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그러나 이 구명 보트를 타고 앞으로 얼마나 표류해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일. 요이치는 소량의 물로 갈증을 풀고 비상 식량을 입에 넣었다. 직경 150센티미터의 조그만 세계, 그러나 구명복만 입고 바다에 떠 있었을 때의 불안에 비교하 면 그 평온함은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여기에는 양은 적지만 물과 식료품이 있다. 뜨거운 햇볕을 차단할 차양도 있다. 무엇보다 피부가 물에 불어터지는 걸 막아줄 수 있다. -그리고....... 요이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보트 안의 비상 품목을 하나하나 점검했다. 팽창식 구명 보트는 비상 장비를 장착하도록 법적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난 신호 발신기는 다른 장비와 함께 튼튼한 방수천에 싸여 바닥 구 석에 놓여 있었다. 처음 취급해보는 것이다. 그러나 요이치는 우선 부속품의 조난 신호 설명서를 읽고 조작 방법을 알았다. 밀봉된 건전지를 세트하고 스위치를 켜면 작동할 것이다. 요이치는 바 닷물에 젖은 원형 바닥에 앉아 조난 신호 발신 장치를 오른손으로 높이 들어올리고 스위치를 켰 다. 빨간 파일럿 램프가 반짝이면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요이치가 현재 어디에 있는지를 알리는 전파가 미약하나마 사방 200킬로미터에 걸쳐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 해역에서 수색중인 배가 신호를 포착한다면, 틀림없이 그의 애타는 목소리 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발견해줘, 나 여기에 있다구! 12월 18일 오전 6시 46분, 표류를 시작한 지 39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8 12월 18일, 오전 10시 10분.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전혀 화장기 없는 여인이 모치즈키와 마주 하고 있었다. 유코는 마쓰이 병원의 부원장실에 놓인 소파에 지친 몸을 기댔다. 마쓰에에서 야간 열차를 타고 하마마쓰에 오 늘 아침 막 도착하였다.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어젯밤에는 샤워도 하지 못했을 테지만 푸석푸석한 머리칼이 평소 머리 스타일을 알려주고 있었다. 딱히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리라. 거 친 일상의 냄새가 온몸 여기저기서 풍기고 있었다. 유코는 가방을 뒤적거려 담배 케이스에서 담배를 한 개비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시선을 피하듯 피어오르는 보라색 연기에만 눈길을 주는 유코가 모치즈키는 왠지 꺼림칙했다.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성의없는 말투였다. 유코는 맥없이 두 눈을 감았다가 다시 게슴츠레 뜨고는 입으로 연기를 뱉 었다. 여전히 모치즈키와는 시선을 마주치려 하지 않는다. 손녀를 맡아 기를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유코는 자조적으로 피식 웃으며 얼굴을 돌린 채 아직 대답을 하지 않는다. 무거운 짐을 지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것은 표정만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자유롭게 떠돌아다 니는 지금의 생활을 바꾸고 싶지 않은 것 이리라. 모치즈키는 자기보다 나이가 열 살이나 많은 여자한테 설교할 마음은 없었다. 나이 많은 입원 자들 중에는 가족한테 버림받고 수용된 환자도 많다. 양로원에 보내는 것보다 값이 싸다 하여 가 족들한테 쫓겨나 병원을 집으로 삼게 된 환자들...... 그런 가족들에게도 모치즈키는 부모를 소중히 여기라는 등의 설득은 하지 않는다. '좀더 배려하 라'는 말로 타인을 훈계하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 짓이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는 정신적 불행이 거의 대부분 가족을 비롯한 인간 관계에서 기인한다. 아무 대 가도 바라지 않고 사랑해주는 사람이 한명만 곁에 있어도 많은 환자들이 정신병원 신세를 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모치즈키는 지금까지 그런 환자를 수없이 보아왔다. 배려나 애정은 타인이 지 도하여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다. 그 때문에 정신병에 걸리면 치료가 곤란한 것이다. 모치즈키는 사람에게 절망을 느끼면서도 사람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이란 쉽게 구원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살아 있는 몸을 부딪치는 과정에서 병든 마음이 치유되는 것이다. 사유리는 그야말로 모치즈키가 선택한 타깃이었다. 그녀의 치료에 모치즈키는 다른 환자의 두 배로 정열을 쏟고 있다. 불공평하다는 것은 알지만 모치즈키는 일종의 실험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개인 대 개인으로 마주하여 많은 시간을 들였을 경우, 어느 정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지. 약 만 투여하는 치료에 비해 어느 정도의 효과를 올릴 수 있는지.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노력해봐도 아사카와 사유리의 핸틴튼 무도병 인자가 발병하는 순간 그 치료는 허사가 되고 만다. "지금 새삼스럽게 그런 말을 들으니......." 그렇게 말하고 유코는 입술 끝으로 천천히 연기를 내뿜었다. 담배연기를 증오하는 노노야마 아 키코 앞에서 지난 한 달 남짓 금연하고 있는 모치즈키는 담배를 피우는 유코의 모습이 실로 천박 하게 느껴졌다. 담배를 좀 끊으라는 아내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던 모치즈키도 애인의 충고 에는 깨끗이 승복, 끽연자를 혐오스런 눈길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모치즈키는 문득 아키코를 연상하였다. 왜 아키코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일까....... 아마도 어딘 가 모르게 그 표정이 유사하기 때문일 것이다. 전체적으로 풍만한 아키코와 길쭉한 얼굴에 빈약 해 보이는 유코는 기본적으로 얼굴 생김이 다르다. 그러나 때로 똑같은 표정을 짓곤 한다. "걔, 좋아질 수 있나요?" 사유리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것이 마치 모치즈키 탓이라도 되는 듯한 말투로 유코는 화제 를 돌렸다. 유코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딸이 사랑온 25년이 어떤 세월이었는지 상상해본 일도 없으니,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이유를 이해할 수도 없다. 생후 1년 6개월인 사유리를 남겨두고 애인과 함 께 도망간 유코가 슈이치로의 병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슈이치로조차 자신의 병명을 자살하기 직전에 알았으니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6년 전 일이다. "그 일 말입니다만......." 핸틴튼 무도병이 발병하는 경우, 사유리의 딸에게 병이 유전될 가능성이 2분의 1이라는 점을 분명히 말해둘 필요가 있었다. 지금은 아직 갓난아기지만 언젠가는 성장하여 출산 적령기를 맞는 다. 사실을 알고서 자손을 남길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해야 한다. "실은, 아사카와 슈이치로 씨의 병 말인데요......." 모치즈키는 입에서 슈이치로란 이름이 나오자 유코는 순간적으로 눈썹을 찡그리며 경계의 빛을 띠고 몸가짐을 바로 했다. "슈이치로의...... 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슈이치로란 이름에 유코는 혼란스러워했다. 3년 반에 이르는 슈이치로와 의 결혼 생활에 무언가 건드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네, 핸틴튼 무도병, 알고 계시죠?" 유코는 담배를 끄고 오른쪽 위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곰곰이 하는 듯했다. "핸틴튼 무도병?" 유코 역시 그렇게 되물었다. 모치즈키는 천천히 알기 쉽게 그 병에 대해 설명했다. 우성 유전한다는 것, 현재 사유리가 발병 할 가능성은 반반이라는 것, 만약 발병하지 않고 사유리가 일생을 마친다면 딸에게 유전될 가능 성은 제로가 된다는 것, 그리고 핸틴튼 무도병이 어떤 병이라는 것 등, 요점만 정리하여 말했다. 그러나 유코의 반응은 모치즈키가 상상했던 것과는 너무도 달랐다. 핸틴튼 무도병이 보이는 증 상과 환자를 돌보는 데 있어 주의해야 할 사항 등을 설명할 때부터 유코는 눈동자를 바삐 굴리고 무슨 말인가 입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얘기의 진전을 방해했다. "그런데 사유리는 그 병에 걸려 있는 건가요?"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를 듣고 있었나 싶어 모치즈키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러니까 아직 모른다잖습니까. 아까 말씀드린 대로 지금 발병할 확률은 반반입니다." "글세, 뭐라고 말하면 좋을지...... 그러니까 유전 이외의 원인으로 그 병에 걸리는 일도 있나 요?"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냐는 뜻입니까? 그런 일은 없습니다." 물론 인류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병이 발생한 것은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돌연변이가 지금도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는가 하면 통계상 '그렇지 않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럼...... 그...... 즉" 유코는 열심히 다른 생각을 하려 하는데 모치즈키는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핸틴튼 무도병의 특이한 증세를 열거하려는데, 모치즈키는 유코의 입끝으로 엷은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고 말을 삼켰다. 언젠가 딸의 몸을 덮칠지도 모르는 불치병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는데 미소를 짓다니, 모 치즈키는 그 무심함에 등골이 오싹하여 더 이상 설명을 이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유코는 갑자기 말을 중단한 모치즈키를 왜 그러냐는 듯 바라본다. 모치즈키는 압박감과 함께 목덜미에 뻐근한 통증을 느꼈다. "어머, 선생님, 왜 그러세요?" 어딘지 모르게 태평한 말투였다. 모치즈키가 말하고 있는 내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천연덕 스러운 울림. "아니 뭐...... 아까부터 유코 씨께서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 모치즈키는 억측하였다. 그러자 유코는 몸을 구부리고 쿡쿡거렸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우는 것 같기도 하다. "참 우습군요." 이번에는 절실한 말투였다. "뭐가 우습다는 말씀이죠?" 모치즈키가 그렇게 묻자 먼 기억을 더듬고 있는 유코가 그 기억을 씁쓸하게 마음에 품은 채 두 눈을 감았다. "선생님, 사유리가 그 핸틴튼 무도병인지 뭔지 하는 병에 걸릴 일은 없을 겁니다." 모치즈키는 몇 번을 설명해야 알아들을 것인가 싶어 성가셔졌다. 슈이치로의 차트로 보아 사유 리의 운명을 점칠 수 있는 것은 신밖에 없다. 유코가 단언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죠, 슈이치로 씨의 병명은 확실한 것이고......." 그렇게 말하면서 얼굴을 든 모치즈키는 확신에 찬 유코의 눈동자와 마주치게 되었다. -아! 순간 짐작가는 것이 있었다. -이 무슨 해괴한 일이냐! 유코는 분명 알고 있다. 아사카와 사유리가 핸틴튼 무도병에 걸릴 확률이 제로라는 것을. 이 세 상에서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것은 오로지 유코뿐이다. 단 한 가지 이유, 슈이치로가 사유리의 아버지가 아니라는 이유. 유코가 이렇듯 단호하게 부정 하는 것을 보면 그 이유밖에 생각할 수 없다. 유코는 삼류 배우와 도망치기 이전에도 다른 남자 와 몸을 섞었고, 슈이치로 모르게 아이를 가졌고 출산하였다. 그 아이가 사유리라면....... 동시에 모치즈키의 뇌에 노노야마 아키코의 몸이 떠올랐다. 왜 아까부터 아키코를 연상했는지, 그 원인이 분명해졌다. 지금 눈앞에 있는 유코와 아키코는 같은 종류의 여자다. 그녀가 발산하는 냄새가 모치즈키의 피부를 자극하여 온몸에 베어 있는 아키코의 체취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대체 아내한테 속아 자신의 핏줄이 아닌 아이를 기르고 있는 남편이 얼마나 될까. 모치즈키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참 우습다'는 유코의 말을 이해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유코 는 남편 모르게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 그런데 그 아이를 남편한테 남겨두고 도망친 일로 평생을 죄의식 속에 살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의도적이든 단순한 실수였든, 유코는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하여 고뇌하였다. 그런데 우습게도 25년이 지난 지금, 그 죄가 오히려 행운으로 바뀐 것이다. 교묘하게 함정을 파놓고 자손을 남기는 데 성공한 듯이 보였던 핸틴튼 무도병의 유전자가 뜻하지 않게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이다. "그럼, 사유리 씨의 아버지는 슈이치로 씨가 아니군요." 모치즈키는 확인삼아 그렇게 물어보았다. 중요한 일이니 애매하게 지나칠 수 없었다. "네에." 유코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죠?" 역시 유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사유리의 아버지가 누구든 상관이 없었다. 슈이치로의 피를 잇고 있지 않다면 이제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친아버지는 함께 도망친 삼류 배우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삼자일 수도 있다. 사유리에 대한 애정이 희박한 것을 보면 함께 도망가 생활을 했던 삼류 배우의 아이라고 생각하 기는 어렵다. 6년에 걸쳐 병에 대한 공포는 사유리의 정신을 공격하고 파먹었다. 핸틴튼 무도병이 발병할 가 능성이 제로라면 현재의 정신 상태는 병에 대한 공포와 마키 요이치에 대한 사라이 뒤얽혀 초래 된 것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마음을 백지 상태로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치료될 가능성은 있 다. 모치즈키는 마키 요이치를 만나고 싶었다. 직접 만나서 전하는 것이다. 저 바닥이 없는 늪으로 된 호수에서 이제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9 12월 18일, 오후 6시 23분. 표류 이래 세 번째 밤을 맞이하고 있다. 오늘 아침 기적적으로 구명 보트와 조우하여 소량의 음료수와 식량을 얻은 요이치는 이제 살았다고 기뻐했다. 그러나 조난 신호 발신기를 작동시켰을 때의 그 환희와 안도감은 고무 튜브에서 서서히 공기가 빠져나가듯 요이치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있었다. 희망 후의 낙담만큼 살 힘을 잃게 하는 것도 없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12시간이나 계속해서 조난 신호를 보내고 있는데 왜 구조선이 나타나 지 않는 것인지. 설마 반경 200킬로미터 해역에 수색중인 배가 한 척도 없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 다. 그는 몇 번이나 조난 신호기의 설명서를 고쳐 읽으면서 조작이 잘못되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건전지의 방향을 바꾸기도 하고 예비 건전지로 바꿔 끼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수평선 위로 뱃머리를 보이는 배는 없었다. 밤이 되면 수색은 일 단 중단될 것이다. 이미 살아나지 못할 운명인지도 모르겠다. 요이치는 1만 미터의 심해에서 피어 오르는 악의에 몸서리를 쳤다. 아침 나절에는 온화하게 보였던 잔물결이 다시 사악한 빛을 띠기 시작한 것이다. -바다는 희망과 절망을 번갈아 가져다주면서 나를 괴롭혀, 끝내 숨통을 끊어놓을 작정이다. 듣기에 따라선 파도 소리가 심해에서 손짓하는 유혹 같기도 하다. -간단하지 않은가, 편해지는 방법은 간단한다. 의식은 몽롱하고, 긴장을 푸는 순간 어두워진 바다로 모든 고통의 원흉인 육체를 던져버릴 것 만 같다. 죽음의 일보 직전이었다. 물과 비상 식량으로 체력은 회복되었지만 정신이 뒷받침해주지 않았다. 조난 신호 발신기가 작동하는 것은 고작 사흘이다. 아직 3분의 1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요 이치는 거의 발광 직전이었다. 밤에는 스위치를 끄고 발견될 가능성이 높은 낮에만 켜두어야 할것인가. 그러나 잠자는 동안 근처로 배가 지나가지 말란 법도 없다. 그런 딜레마에 요이치는 혼자 화를 벌컥벌컥 냈다. 두 주 먹으로 머리를 치고, '침착하라!'는 분열된 자기의 목소리를 듣기도 하고, 또 다른 자기는 고사이 시에 있는 어머니와 히로시마로 부임한 형을 떠올리기도 했다. 바다로 뛰어들어 물귀신이 되는 것만은 참자고 요이치는 결심했다. 시신이 떠오르지 않으면 가 족에게 폐가 된다. 몇 번이나 가슴으로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명령하였다. 충동적으로 죽음을 선 택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방어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의 추억이 단편적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제7와카시오마루에서 보낸 시간조차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하물며 도시에서 보낸 생활, 배우를 지망하면서 사유리와 함께 지낸 시절의 모습은 왠 지 다른 배우가 연기하고 있는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졌다. 왜 그 생활을 버렸던가, 지금도 확실한 대답은 없다. 믿을 수 없는 심정이다. 뭐가 불만스러워 그 생활을 내동댕이쳤나. 권태, 그리고 인 간 관계에 넌더리가 나서....... 그 모두가 별 대수로운 이유가 아니다. 인생을 헛되이 보냈다. 요이 치는 자신이 한없이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죽고 싶지는 않았다. 가능하다면 처음부 터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다시 한 번 기회를, 요이치는 그렇게 기도하였다.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기억속으로 허밍이 흐르고 가사가 덧붙여졌다. 노래하고 있는 사람은 사유리였다. 뇌로 밀고 들어온 사유리의 노래는 떨쳐버리려 해도 단단하게 머리 주름 사이에 들 어붙어 떠나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요이치는 함께 노래했다. 노래를 되풀이 할 때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살려는 의지도 선명해졌다. 바다는 구름의 움직임을 극명하게 투영한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 무렵 두꺼운 구름 산맥을 형 성하기 시작했다. 등 뒤로 지는 햇살을 받는 요이치의 몸이 빨간색으로 물들어 그 그림자를 잔잔 하게 바다에 드리우고 있다. 요이치는 튜브 끝에 두 팔을 걸치고 보트 밖으로 몸을 내밀어 바다 의 변화를 관찰했다. 어젯밤에는 비록 한순간이지만 자신이 표류하고 있다는 것도 잊고 아름다운 밤하늘에 황홀함을 느끼기도 했다. 태풍이 몰아쳤던 엊그제 밤의 지옥 같은 바다와는 전혀 다른, 별빛 잔잔한 어젯밤 같은 밤이 다시금 찾아오고 있었다. 그때 요이치는 빨갛게 물든 수평선 너머로, 바다나 구름과는 다른 금속성의 빛을 보았다. 그 빛 은 점점 크게 시야 안으로 들어왔다. 요이치는 환각이 아님을 확인하고 즉시 행동을 취했다. 이런 경우에 대비하여 이미지 트레이닝을 몇 번이나 했었다. 구명 보트에는 낙하산이 붙어 있는 화염 신호탄이 모두 여섯 개 있다. 허사가 되지 않도록 조심조심 사용해야 한다. 하나를 꺼내 다가오는 배를 두 눈으로 쏘아보며 초점을 정확하게 고정한다. 꿈이 아니었다. 뱃머리 부분이 똑바로 이쪽 으로 향하고 있었다. 흘수선이 얕아 배 아랫부분에 칠해진 연두색 페인트까지 보였다. 제7와카시 오마루와 같은 모양의 참치잡이배였다. 틀림없다. 조난 신호를 포착한 것이다. 요이치는 터져나오 는 오열에 몸을 떨면서 화염탄을 높이 높이 들어올리고 핀을 잡아당겼다. 폭죽 같은 소리를 내면 서 하늘 높이 올라간 화염탄은 섬광을 번쩍이며 파열하였다. 바다의 색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아 직 배의 이름까지는 읽을 수 없지만, 배의 좌현에 드리워진 닻의 모양도 알아볼 수 있었다. 요이 치는 화염탄을 또 하나 집어들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점점 다가오는 참치잡이배가 구명 보트를 발견한 것이 분명하다. 넘쳐흐 르는 눈물과 짙어지는 어둠 때문에 시야가 아물거리지만, 저녁 하늘은 오히려 화염탄 때문에 강 렬하게 빛났다. 지금 막, 갑판으로 사람이 어른거린 것 같다. "어-이! 어-이!" 요이치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 과거 그 어느 때에도 이처럼 기뻤던 적은 없었다. 이런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다시금 표류를 한다 해도 사양치 않으리. -축복하라! 바다는 완전히 그 사악한 빛을 감추고 만면에 웃음을 띠고 있었다. 요이치는 다가오는 참치잡 이배를 양 팔을 좍 벌려 껴안듯 가슴으로 맞이하였다. -일본으로 돌아간다면. 무사히 돌아간다면,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기다리고 있다. 우선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데리 러 간다. 49시간에 달하는 표류 체험을 발판으로 삼으면 사유리가 껴안고 있는 숙명과도 대결할 수 있고 갓난아기가 이을지도 모르는 숙명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사유리에게 판결을 내린 신의 목소리가 요이치의 귀에도 울리고 있었다. 인생이란 가혹한 것임 을 요이치는 절실하게 깨달았다. 사는 장소를 바꾼다고 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가혹함을 외 면하고 부정하고 환상을 좇아 이상향만 그리다보면, 언젠가는 혼이 썩고 만다. 화염탄을 손에 들고 핀을 잡아당기자 요이치의 머리 위로 세 번째 섬광이 번쩍였다. 10 모치즈키는 참치잡이배를 타기 이전의 요이치를 모른다. 또 그가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 추락 한 지 사흘 만에, 구명복에 의지하여 38시간, 그리고 우연히 만난 구명 보트를 타고 11시간, 합계 49시간의 표류 끝에 구조된 사람이라는 것도 모른다. 만약 알았다면 생사의 갈림길에서 구조된 체험이 그를 얼마나 많이 바꾸어 놓았는지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정신과 의사에게는 한 인간이 가혹한 시련을 바탕으로 성장하는 과정이 연구 자료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만약 무엇이 인간을 변모케 하는지 그 정체가 밝혀지면 정신과 의사는 그 노하우 를 치료에 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눈앞에 있는 요이치는 원래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검사 때문에 이틀간 오클랜드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엊그제 나리타 공항을 통해 입국, 그리고 오늘 이렇게 마쓰이 병원의 부원장실에 서 모치즈키와 마주하고 있다. 모치즈키는 아까부터 위압적인 박력을 느끼고 있었다. 과묵한 청년의 온몸에서 안정감을 동반 한 진짜 사나이다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나리타 공항에서 건 전화를 받았을 때도 모치즈키는 같은 인상을 받았다. 목소리의 감촉이 어 른스러웠다. 침착한 말투로 내일 모레 찾아가겠다고 말하고, 사유리의 치료에 모치즈키가 얼마나 열의를 보이고 있는지 알고 있기라도 하듯 깊은 감사의 뜻을 짧은 말에 응집하여 말한 후 요이치 는 전화를 끊었다. 모치즈키는 자기도 모르게 다케시와 비교하였다. 모치즈키의 충고를 받아들여 조사관 자격증을 따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다케시는, 이전 에 비하면 다소 미래 지향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여전히 타고난 나약함을 완전히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요이치는 다케시가 평생 노력해도 얻지 못할 소중한 것을 몸 속 깊은 곳 에, 세포 하나하나에 지니고 있었다. 모치즈키는 방금 아사카와 사유리가 핸틴튼 무도병에 걸릴 가능성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요이치 한테 알려주었다. 그러나 요이치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초연한 태도로 '그렇습니까'라고 대꾸했을 뿐이다. 그 는 이 세상에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장소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었다. 인간은 항상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힘에 우롱당하고 있다. 밝아오는 바다, 우연히 뒷머리를 툭 건드린 구명 보트가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물고기밥으로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구조된 것이 오히려 기적이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헤맨 자들이 늘 그러하듯, 그는 운명론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새벽녘의 해 후, 그 기적적인 만남처럼 지금은 사유리를 기다리고 있다. "늦는군." 모치즈키는 손목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노노야마 아키코에게 데리고 오라고 지시한 지 벌써 10 분이나 지났다. "서두를 것 없습니다." 너무도 침착한 요이치의 태도에 모치즈키는 오히려 맥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요이치가 훨씬 더 기뻐하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결혼할 겁니까?" 모치즈키의 질문에 요이치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곧바로 호적에 올리고 태어난 아이의 아버지가 될 겁니다." 한 가족 세 명의 생활...... 아직 직장은 구하지 못했지만 일단 요이치는 8개월간의 항해로 300만 엔 정도의 현금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항해 도중 본의 아니게 제7와카시오마루에서 내렸지만 다카기 시게요시가 손을 써서 일한 만큼 배당분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득 다카기 시게요시의 얼굴이 그리워졌다. 살아 돌아온 요이치를 갑판 위에서 힘차게 껴안으 며 바다의 사나이답지 않게 눈물을 흘린 시게요시는 요이치한테 이상적인 아버지상이었다. "여자애라고 하더군요." 모치즈키는 마냥 기다리는 무료함에 태어난 요이치의 아이를 화제로 삼았다. "네에." "저도 딸아이가 있습니다만, 딸이란 참 귀엽습니다." "그렇습니까?"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요이치는 기다리고 있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사유리가 나타나기를 이제나저네 나....... 사유리는 요이치가 나리타 공항에 도착한 날 대학병원에서 마쓰이 병원으로 옮겨왔고, 아 직 이름도 없는 갓난아기는 유아원에 수용되었다. 그는 일초라도 빨리 두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노크 소리가 들리자 요이치는 흠칫 몸을 떨면서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오세요." 모치즈키가 그렇게 말하기 전에 문이 열렸다. 파란색 트레이닝 셔츠를 입은 사유리가 서 있었다. 바로 곁에서 정성스럽게 화장한 노노야마 아키코가 부축하고 있었다. 화장기 없는 자그마한 몸집의 사유리와 인상적인 대비를 이루고 있었 다. 키가 큰 요이치는 한참 동안 침묵하고 사유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그의 얼굴이 부자연스럽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애써 가장한 평정이 무너져내린다. 북받쳐오르는 감정이 그의 얼굴을 비틀고 있는 것이다. 사유리는 천천히 시선을 들어 요이치의 얼굴을 발견하자, 일단 두 눈을 꼭 감았다가 조심조심 다시 떴다....... 그리고 부릅뜬 그 큰 눈동자로, 혼탁한 의식의 밑바닥에서 희미하게 밝혀지고 있는 등불의 빛 이 전해졌다. 사유리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되지 않아, '아아, 아아' 라고 신음하듯 소리 지르며 요이치 쪽으로 달려갔다. 요이치는 사유리의 손을 잡고 가볍게 껴안으며 젖먹이에게 트림 을 시키듯 등을 토닥토닥 두드리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렸다. 사유리의 그 가냘픈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보아 그토록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난 게 틀림없었 다. 요이치의 품에 안겨 그 격정을 눈물로 떨구어냈다. 격정의 순간이 지나면 잔잔한 감정으로 되 돌아와 그들은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이것이 꿈은 아닌지 다시 한 번 확인하려 할 것이다. "죄송합니다만, 둘이 있고 싶은데요." 눈물을 보이며 그렇게 말하는 요이치, 모치즈키는 비로소 안심이 되는 기분이었다. "계단을 내려가서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정원입니다." 모치즈키가 그렇게 설명하자 요이치는 고개를 숙이고 사유리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그 두 사람과 스치듯 방 안으로 들어온 아키코는 문을 닫고, '눈물이 나는군요. 감격적인 재회 라......'라며 가운 주머니에서 화장지를 꺼내 코를 풀었다. 모치즈키는 창가로 다가가 정원을 내려다보았다. 아키코도 그 옆에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내 려다보았다. 모치즈키는 사유리의 회복을 믿고 싶었다. 출산과 마키 요이치와의 재회를 계기로 마음의 스위치가 전환되어 사유리의 병세에 큰 변화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요이치라면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6년에 걸쳐 쌓아온 핸틴튼 무도 병에 대한 공포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사유리의 마음에서 한겹 두겹 벗겨 질 것 같았다. 11 두 사람은 서로의 손을 깍지 낀 채 아무 말 없이 정원의 잔디를 밟으며 걸었다. 요이치는 이렇 게 사유리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남태평양에서의 표류 기간 동안 그 시련을 겪으면서 확실하게 느낀 것이 하나 있다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삶은 지금 현재 살아 있다 하더라도 그건 이미 내 삶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내 삶의 한 부분을 관 속에 넣고 다니는 그 심정. 내가 사유리의 그 절박함을 조금만 더 일찍 체험할 수 있었더라면 지금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사유리의 깊게 구멍 뚫린 듯한 눈동자를 보자 다시 한 번 요이치의 마음속엔 예리한 유리 조각이 긋고 지나가는 듯한 통증이 느 껴졌다. "사유리, 너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있어. 이 세상에 아무도 볼 수 없는 그런 광경이야. 꼭 네가 보지 않아도 좋아. 지금 내가 말하는 것만으로도 넌 충분히 이해할 테니까." 그러면서 요이치는 사유리에게 자신이 겪었던 그 바다의 발광에 대해서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모든 것을 다 품을 듯 넓은 가슴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바다의 그 변화무쌍한 모습 과 미쳐 날뛰던 바다가 보여주었던 쥐죽은 듯한 고요... 적막... 적막에 뒤이은 섬뜩함.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사유리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밤바다에서 올려다보았던 무수한 별무리들이 었다. 별빛 쏟아지는 밤하늘을 바라보며 끝도 닿지 않을 이 바다의 바닥 밑으로 끌려들어 가느니 차라리 저 총총한 밤하늘로 올라가 죽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아주 구체적인 유혹이었다. 내 혼을 저 차가운 바닷속에 잠재우고 싶지 않다는....... 이건 별빛 찬란한 밤바다가 요이치에게 던져준 새로운 희망이었다. 이렇게 찬란한 밤하늘을 두 고 저 암흑의 세계에 몸 담그고 싶지 않다는 너무나 절실하고 인간적인 바람. 그리고 그 희망은 이제 이렇게 현실이 되어 나타났고, 삶에의 강한 의지는 그 어떤 것도 두려울게 없는 늠름한 남 자로 요이치를 탈바꿈시킨 것이다. "사유리, 남태평양에서 날 지켜주었던 그 별처럼 내가 널 지켜줄게. 이제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 넌 무자비한 공포에 짓눌려 삶의 한 부분을 죽음의 그늘로 몰아넣어야 했던 그 사유리가 아니란 말야. 우린 다시 너의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어." 이어 요이치는 너무나 익숙한 그 멜로디를 나지막한 목소리로 허밍했다. "음-음......." 요이치의 낮은 톤 허밍은 듣는 이를 아주 기분 좋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때까지 요이치의 이야기를 듣는지 안 듣는지 손가락으로 파란색 셔츠를 만지작거리다가 결국엔 손가락에 셔츠를 감아 빙빙 돌려대던 사유리는 동작을 멈추고 요이치의 입술을 쳐다보았다. 허밍을 하면서 입술이 조금 벌어질 듯 말 듯 달싹거리는 요이치의 입술을 한참이나 쳐다보던 사유리의 입술도 마침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요이치와 사유리의 허밍은 끝날 줄을 몰랐다. 그때였다. 항상 사유리가 산책할 때면 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사유리의 모습을 담느라 정신없던 스나코 다케시가 두 남녀를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기력이 쇠잔해 있을 사유리에게 먹일 과일과 음식 봉지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스나코 다케시는 두 남녀의 허밍을 바람결에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입이 달싹이는 것을 느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추면 이제 일어나 거울 앞으로 가요 거울 앞에 선 당신 모습은 언제 봐도 내 맘을 설레게 해 살며시 당신 옆으로 다가가자 내 그림자가 당신 등에 어렸지... 난 속삭였어 뒤돌아보지 마세요' 스나코 다케시는 짧은 기간 동안 자신에게 사랑을 허락한 사유리의 노래에 가사를 붙여 속삭였 다. 그는 뺨에 흐르는 눈물을 굳이 훔치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리곤 스스로에게 두 남녀가 행복하 게 등을 토닥이고 있을 그 광경을 결코 뒤돌아보지 말자고 맹세했다. 창으로 요이치와 사유리의 광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모치즈키의 어깨에 아키코가 가볍게 손을 얹고 속삭이듯 이렇게 말했다. "일 주일이나 안 나오고 있어요." 순간 모치즈키는 숨을 삼켰다. 겨울치고는 따스한 햇살 속에서, 요이치와 사유리는 손을 잡고 벤치에 앉아 있다. 모치즈키가 서 있는 위치에서는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는지 까지는 보이지 않는다. 왠지, 이렇 게 줄곧 귀를 막고 소음을 거부하면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바로 귀 밑에서 또 속삭이는 소리. "듣고 있어요?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그 말 하고 있는 거란 말이에요." 어깨에 올려놓았던 손을 천천히 내려 아키코는 모치즈키의 팔꿈치를 부드럽게 잡았다. 그런데 도 모치즈키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자기가 뜻한 대로 인생을 살기란 쉽지 않다. 한 걸음 한걸음이 애매한 확률에 지배되는 세계로 향하는 것이다 다름없다. 요이치와 사유리는 벤치에서 일어나 분수가 있는 잔디밭 쪽으로 걷고 있었다. 사유리는 머지않아 퇴원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첫 걸음은 유아원에 있는 딸을 찾으러 가는 데서 시작될 것이다. 사유리의 병이 치유되지 않는 한 생활은 결코 편하지 않을 테지만 낙 원을 꿈꾸는 삶이란 환상일 뿐임을 두 남녀도 곧 알게 될 것이다. 모치즈키는 시선을 조금 위로 올렸다. 표주박 모양의 호수는 계절에 따라 다양하게 그 색을 바 꾸는데, 지금 보이는 색은 무엇이라고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이제야 비로소 어렴풋하게 깨달 았다. 자신에게 부족한 것은, 애매한 세계와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한 각오가 아닐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