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 ...(9) 4 참 오랜 만의 변신이었다. 레일즈가 수인화한 거쉰들에게 놀랐을 때 그의 눈앞에서 변신하고 나서 처음인 것 같았다. 네 발로 대지를 차고 바람을 가르며 달렸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상쾌함에 마리스는 몸을 떨었다. 자신이 은발의 존재라는 사실에 중압감을 견디기 어려웠을 때 마 리스는 은빛늑대의 모습으로 변해 숲을 헤치고 다니곤 했다. 그렇게 하면 마음에 쌓인 억압으로부터 해방되는 듯해서 기분이 상쾌해졌기 때문이다. 마리스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사이아를 데려간 세 사나이 를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을 추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 다. 낙엽을 밟고 지나가면서 남긴 자취가 지면에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과의 거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좁혀져갔다. 동틀 녘이 가까워지자 사내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늑대의 감각이 그것을 가르쳐주었다. 은빛늑대로 변신한 마리스는 능력을 써서 은빛늑대 한 마리를 소 환했다. 싸지를 잃고 나서 다시는 이 능력을 쓰지 않겠노라고 결심했 었지만 지금은 그런 맹세에 머뭇거릴 상황이 아니었다. 둘이서 공격하면 세 사람이 상당한 실력을 갖고 있다 해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은빛늑대 페네스가 부여한 능력을 마리스는 전력 을 다해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배고픈 늑대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지능 있는 행동을 했다간 인간이 변신한 것으로 의심받을지도 모른다. 다낭의 기사 노르바는 이곳 세계의 인간들이 짐승으로 변신할 수 있는 것을 모른다고 했다. 세 사람도 그렇겠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야 하는 법이다. 두런두런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세 사람은 야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은 망을 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쉬고 있었다. 사이아 도 잠들어 있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불시에 쳐들어갈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단번에 끝내고 싶었다. 마 리스는 소환한 은빛늑대를 좇아 사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숲이 조금 열린 곳에서 야영을 하고 있었다. 불은 피우지 않고 있었 다. 추격을 의식해서였으리라. 그러나 밤눈이 어두운 사람은 이 어둠 속에서 만족스럽게 싸울 수가 없는 법이다. 오히려 좋은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었다. 망을 보고 있는 전사는 접 근해가는 두 마리의 늑대를 눈치채지 못했다. 열 걸음 정도까지 다가 갔을 때 마리스는 최대한 몸을 수그렸다. 뒤따라오는 은빛늑대도 그 렇게 했다. '서 있는 자를 노려라.' 소환한 은빛늑대에게 마리스는 마음으로 명령했다. 신수 페네스의 수인과 켄족끼리는 마음의 대화가 가능했다. 마리스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도약했다. 무의식적으로 포효하고 있었다. "야, 다들 일어나!" 망보던 사내가 외쳤다. 그러나 그자에게는 소환한 은빛늑대가 이미 공격을 시작한 상태였다. 늑대의 울부짖음과 사내의 비명이 교차했 다. 그 동안에 마리스는 경고 소리에 일어나려 하는 마술사의 목을 향 해 공격해 들어갔다. 눈을 뜬 사이아가 그것을 보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굶주린 늑대 가 습격해 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차라리 그러는 편이 사나이들에 게 의심받지 않을 수 있었다. 치명상이었는지 마술사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리스는 목표 를 바꿔 또 한 사람의 전사에게 달려들었다. 마술사를 습격하는 동안에 그 전사는 이미 무기를 거머쥐고 있었 다. 두 손으로 장검을 부여잡고 위협하는 소리를 질렀다. 마리스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사나이에게 뛰어들었다. 그러다 그 사내가 휘두른 검에 왼쪽 어깨를 맞고 말았다. 격렬한 통증이 일었 지만 망설이지 않았다. 다소간의 상처는 처음부터 각오하고 있었다. 재생(리제너레이션)의 능력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치명상만 입지 않 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공격해 오는 마리스의 기세에 눌려선지 사내가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무방비의 목을 노려 마리스는 이빨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전사는 온 몸에 쇠사슬 옷을 입고 있어 이빨로 물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 다. 전사도 만만치 않았다. 재빨리 검을 버리고 허리에서 단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 나서 나머지 팔로 자기 목을 방어했다. 과연 뛰어난 전사였다. 마리스는 앞발로 상대의 얼굴을 걷어차서 어떻게든 공격할 틈을 만들어보려고 했다. 목을 물지 못하면 치명상 을 줄 방법이 없었다. "어디 당해 봐라!" 전사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마리스를 오른손으로 감싸안으려고 했다. 마리스는 몸을 비틀어 두세 걸음 옆으로 이동하고 나서 엎어진 자 리에서 일어나려 하는 전사를 향해 다시 뛰어들었다. 사내가 휘두르는 단검이 이번에는 마리스의 머리를 얕게 베었다. 마리스는 상대의 가슴을 공격해 다시 땅바닥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때엔 이미 상대도 목을 지키고 있었다. 도리 없이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는 얼굴을 노리며 마리스는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공격하는 이빨이 스쳐 지나가며 코와 뺨을 얕게 긁어놓는 정도로밖엔 소득이 없었다. "내가 네 따위한테 당할 것 같아!" 전사는 욕을 해대며 마리스의 몸통으로 손을 뻗어왔다. 마리스는 떨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상대는 마리스의 뒷다리를 자기의 두 발로 꼭 조이고는 놓아주지 않았다. 전사는 마리스의 몸을 꼭 껴안고는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 조이려 들었다.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앞발로 상대방을 밀어내려고 발길질 을 해보았지만 상대는 만만하게 떨어져 나가지 않았다. 전사는 단검을 왼손으로 바꿔들고는 마리스의 등을 사정 없이 찔 렀다. 그때마다 격렬한 통증이 일어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것을 느 꼈다. '여기서 당해선 안 돼.' 마리스는 필사적으로 사내의 공격에서 벗어나려 했지만 상대는 그 걸 허락하지 않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과 싸우면서 몸을 비틀어 몇 번을 굴렀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전사는 떨어지지 않았다. 손과 발을 써서 마리스의 몸통을 꽉 잡고 있었다. 다시 단검을 휘둘러왔다. 이번에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내장이 단 검에 찔린 것 같았다.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너 어디 죽어봐라!" 승리를 확신했는지 사내는 한껏 단검을 치켜들었다. 그때였다. 사내의 얼굴을 향해 한 줄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사내는 곧장 고통스런 외마디 소리를 내질렀다. 그러곤 마리스를 껴안았던 팔에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노려 마리스는 사내의 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동시에 사내의 몸에 다시 빛화살이 꽂혔다. 마리스는 빛이 날아온 방향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기에는 사이아가 서 있었다. 마술사의 지팡이를 오른손에 들고 다시 주문을 외우려는 찰나였다. 주문이 완성되자 마법의 빛이 또다시 사내의 몸을 파고들었다. 이윽고 사나이는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얼굴을 손으로 감싸쥐고 이리저리 굴러다닐 뿐이었다. 마리스는 최후의 힘을 짜내 다시 공격해 들어갔다. 상대는 자기 목 을 방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번이 마지막 공격이 되었다. 망을 보던 사내는 소환한 은빛늑대가 이미 쓰러뜨렸다. 마리스가 최초의 표적으로 삼았던 마술사도 그때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사이아는 마술사의 지팡이를 꽉 쥔 채 두 마리의 은빛늑대를 번갈 아 바라보았다. "마리스……?" 하프엘프 소녀는 떨리는 소리로 물었다. 마리스가 머리를 끄덕이더 니 곧 변신을 풀었다. "어디 다친 데 없어?" 마리스는 사이아에게 다정히 말을 걸며 다가왔다. "난 괜찮아. 그런데 마리스는 잔뜩 다쳤잖아……." 마리스의 온 몸에는 여기저기 칼자국과 함께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재생의 능력을 쓸 수 있기 때문에 상처는 금방 나을 거야." 그 말대로 사이아가 지켜보고 있는 동안 마리스가 입은 상처가 천 천히 아물어갔다. 이윽고 아름다운 나체에는 핏자국만이 남았다. 사이아는 망토를 벗어서 마리스에게 건네주었다. "고마워." 마리스는 미소 지으며 그 망토를 몸에 걸쳤다. "고맙다고 할 사람은 나잖아. 위기에 빠진 나를 구해줬으니까." 사이아는 마리스를 향해 깊이 머리 숙였다. "사이아도 내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구해줬잖아. 네 마법의 도움이 없었으면 나는 벌써 죽었을 거야." "미안해. 얼이 빠져 있었는지 마리스가 변신해서 도와주러 왔다고 는 생각하지 못했어. 결국 마리스를 잔뜩 다치게 만들었잖아. 레일즈 에게도 정말 미안해……." 마리스는 얼굴을 붉히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레일즈는 마리스가 안 다쳤는지 걱정하고 있을 거야. 마리스가 다 친 것을 알면 큰 일이야. 그렇게 만든 사람이 나니까……." "레일즈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아. 그리고 사이아 때문에 정 말 많이 걱정하고 있어." 사이아는 얼굴을 들어 마리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마리스의 녹색 눈동자가 빛났다. 은빛늑대 페네스의 능력을 쓰고 있기 때문이 었다. "마리스는 레일즈에 대해선 뭐든지 알고 있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니?" 사이아의 질문에 마리스는 당황스러웠다. "꼭 하나 알고 싶은 게 있어." "뭔데?" "어째서 마리스는 레일즈를 좋아하게 됐어? 레일즈의 뭐가 마음에 들었어?" 너무나 갑작스런 질문에 마리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몰랐다. 얼굴로 피가 몰려 뺨이 뜨거워졌다. "어째서라고 말할 만한 것이……." 마리스는 사이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가까운 나무로 눈길을 돌 렸다. "부탁이야, 가르쳐줘. 그렇지 않으면 나……." 사이아는 그 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눈에 눈물이 가득해 져 눈앞에 앉은 마리스의 모습이 일그러졌다. "좋아하고 있구나, 너도 레일즈님을." 마리스는 손으로 얼굴을 덮은 사이아를 바라보며 속삭이듯 말했다. 사이아는 어깨를 들썩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난 정말 이상해. 레일즈님은 말도 다르고 민족도 다른, 잃어버린 대지에서 왔어. 그 사람을 내가 좋아하게 된 것이……." 마리스는 조용히 말을 꺼냈다. 그 말투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이야 기하는 것 같았다. "그때 나는 절망에 빠져 있었어. 신왕과의 전쟁은 너무나 비관적이 었어. 그때 우리 신수왕은 무력하기만 했고, 나는 은발을 갖고 태어나 부족을 이끌어갈 사명을 띠고 있었지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 랐어." "그때 레일즈가 나타난 거구나……." "그래, 맞아. 그리고 그분은 행동으로 보여주었어. 아무런 인연도 부락을 지키기 위해 선두에 서서 싸우고, 맹호부족의 영웅 그레일에게도 전혀 겁내지 않고 도전했어. 그때 비록 그레일에게 패 하긴 했지만……." 마리스는 잠시 말을 멈추고 숨을 내쉬었다. "그분을 보고 있으면 불가능한 것도 가능해 보여. 나는 레일즈님에 게 정말 많은 것을 배웠어." 마리스가 레일즈에게 호의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대부락 시레네에서 돌아왔을 때였다. 레일즈가 웃는 얼굴로 맞이해 주었을 때 마리스는 힘껏 달려가 그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게 처음이라서 내 기분을 제대로 표현할 수가 없어. 그냥 함께 있기만 해도 마음이 편안해지고 잠시라도 떨어져 있 으면 그렇게 허전할 수가 없어. 내 몸이 공기를 찾는 것처럼 그냥 레 일즈님의 모습을 찾게 되고 말아." "……레일즈는 어렸을 때부터 언제나 내 곁에 있었어. 나는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지. 레일즈가 왕도로 가서 기사가 되겠다고 말 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가 내 앞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크리스타니아로 오르는 길이 열리자 레일즈가 함께 올라 와 주었어. 나셀을 찾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레일즈와 떨어지지 않고 지내는 것이 난 기뻤어. 레일즈는 강하고 상냥해. 난 그런 성격이 언 제나 나하고 비인을 위해 존재한다고 느꼈거든. 너를 만나고 신수의 어금니에서 지내게 되면서 레일즈하고 네가 서로를 깊이 좋아하고 있 다는 것을 알았어. 그렇지만 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었어. 사실 난 레 일즈한테 언제나 걸림돌만 됐거든. 이번 일만 해도 그렇잖아. 그렇지 만 너는 레일즈와 나란히 걸어갈 수가 있어. 너를 위해 레일즈는 신왕 과 싸우겠다고 결심하기도 했잖아. 목숨을 버려도 아깝지 않다고 생 각하는 게 틀림없어. 나를 위해서가 아니고……." "사이아……." 마리스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그 상냥함이 사이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슬펐다. "레일즈의 마음이 너한테 향하고 나서야 내가 레일즈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정말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하크 마을에 살 때 레일즈의 마음을 꼭 붙잡아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정말 그렇게 했 더라면 좋았을 텐데……." 사이아의 눈에선 끝도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지난 밤 실컷 울었을 터인데도 눈물이 조금도 마를 줄 몰랐다. 마리스의 눈에도 눈물이 어렸다. 눈앞의 사이아가 가슴속에 그런 괴로움을 품고 있으리라고는 지금 껏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만약 레일즈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어져 있었다면 아마 틀림없이 자기도 사이아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 이다. 마리스는 사이아를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레일즈가 좋으면 정말 좋으면, 꼭 행복해지길 바라겠어. 신왕과 싸 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마리스나 레일즈 둘 다 강인하니까, 신 왕이 이 세계를 지배한다 해도 틀림없이 괜찮을 거야. 목숨을 헛되이 버리지 말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아, 응." 사이아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리스에게 매달렸다. 마리스는 자신이 동요되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은발의 인간으로서, 은빛늑대 페네 스에게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자신의 일보다도 언제나 부족의 미래를 먼저 생각하며 살아왔다. 레일즈와 만나 그를 좋아하게 되고 나서도 레일즈와 행복하게 살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레일즈에게 안겨 보통 사람처럼 많은 아이들을 낳는다. 레일즈는 가족을 위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나는 아이들을 키운다.' 마리스는 그런 일상적인 행복이야말로 자신과는 인연이 멀다고 생 각하고 있었다. 신수들의 눈앞에서 신왕과 싸우다 죽어가는 것이야말 로 당연한 자신의 사명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때 레일즈가 함께 한 다는 사실옜 안도한 적은 있을지언정 슬프다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보 지 않았다. 그런데 이대로 레일즈와 둘이서 어딘가로 달아나 부족에 대해서건 크리스타니아에 대해서건 잊어버리고 살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는 할 수 없어……." 마리스가 사이아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어. 거기서 도망칠 수는 없어. 자신 의 행복만 생각한다면 부족 따위는 필요 없지. 인간이 부락을 형성하 는 것은 서로 돕고 살기 위해서야. 은빛늑대 사람들은 더불어 사는 사 람들을 위해 목숨을 걸어. 많은 전사들이 신왕과의 전쟁에서 죽어갔 지.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서는 은빛늑대 이외의 사람들도 숱하게 죽 었어……. 그들도 행복하게 살 권리는 있었어. 그렇지만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이루기 위해 모두 목숨을 던졌던 거야. 나 혼자서만 거기서 등을 돌리고 도망칠 수는 없어. 레일즈님도 아마 그렇게 생각하고 있 을 거야." "사명이라는 게 도대체 뭐야! 자기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게 도대체 뭐가 나쁘다는 거야. 제발 부탁이야, 마리스. 레일즈하고 행복하게 살 아.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고마워, 사이아." 마리스는 사이아를 꼭 끌어안았다. 뜨거운 눈물이 뺨으로 흘러내 렸다. "이제 돌아가자. 모두 다 너를 걱정하고 있어." 마리스는 사이아의 등으로 뻗은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동료들이 기 다리는 곳으로 가자는 뜻을 전했다. 그 뜻을 거스르지 않고 사이아가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 음 또 한 걸음 나아가는 동안에 발놀림이 점점 민첩해졌다. '너야말로 행복하게 되렴.' 마리스는 마음속으로 사이아에게 그렇게 말했다. 레일즈와 자신이 운명을 거는 것은 사이아 같은 사람들에게 행복한 생활을 꾸려나갈 수 있도록 해주기 위해서였다……. 크리스타니아의 하늘이 어느 틈엔가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제4권...(10) 5 마리스가 사이아를 데리고 돌아왔을 때, 태양은 이미 하늘 높이 솟 아 있었다. 레일즈 일행 자지 못했다. 서로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짓눌린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그러나 마리스와 사이아가 나란히 돌아오는 모습이 보이자 그런 공기는 씻은 듯이 사라졌다. 기쁨의 환성을 올리며 모두 두 사람에게 달려나갔다. 괜히 계면쩍은 생각에 사이아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 는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걱정 끼쳐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너한테 무서운 경험을 하게 했구나……." 나셀은 사이아의 어깨를 잡고 지식의 신 라다에게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10년 전의 동료 중에서 지식신을 섬기던 여성 사제가 문득 머릿속 에 떠올랐다. '너의 불행을 간신히 반복하지 않았구나.'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이아!" 나셀을 물리치듯 하며 레일즈가 사이아의 정면에 섰다. 그녀의 뺨 에 손을 대 그녀가 실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몇 번씩이나 확인했다. "다행이야……." 그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리 힘이 쭉 빠져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무릎 사이로 얼굴을 묻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피 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자, 잘 된 거야. 이대로 저녁 때까지 쉬자." 레일즈는 얼굴을 들고 모두에게 말했다. "이제야 제가 지은 죄가 씻겨나가는 기분입니다. 아무쪼록 제가 망 을 설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근위기사 노르바가 그렇게 청하고 나섰다. 인질극이 벌어지자 그대 로 가버릴 수도 없었던 노르바는 레일즈 일행과 함께 남아 있었던 것 이다. 만약 인질로 잡힌 사이아나, 사이아를 구하겠다고 길을 나선 마리 스가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제 노르바 자신의 인생도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모두 무사히 돌아왔다. 아마도 두 사람의 무사 귀환에 가장 안도감을 느낀 사람은 노르바였을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결국 그 세 사람은 모두 재상 과 아버지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으니까요." 레일즈가 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바보 같은 놈들……." 밧소가 땅바닥에 침을 퉤 뱉더니 그 침을 발로 짓밟았다. 샤일론은 침통한 표정으로 끌끌거리더니 행운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죄송합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어요." 마리스가 가볍게 머리를 숙이며 두 사람에게 사죄했다. "죽어 마땅한 놈들이었는걸, 뭐. 인간으로 태어나 해선 안 될 짓을 놈들이 한 거 아냐. 사실은 우리가 죽였어야 하는데. 마리스한테 그런 험한 일을 시켜 정말 미안해." 밧소는 샘으로 걸어가더니 맑은 물을 손으로 떠 얼굴을 씻었다. 레일즈는 밧소의 눈물을 보았다. 망은 밧소와 샤일론과 레일즈가 교대로 섰다. 근위기사 노르바는 결국 저녁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고 스스로 망을 섰다. 마지막으로 망 을 보게 된 레일즈가 명령조로 권하고 나서야 해질녘까지 잠깐 쉬었 다. 그 무렵에는 마리스와 사이아와 비인도 일어나서 한 무리를 이뤄 저녁 거리를 찾아나섰다. 이번 여행 동안에는 물고기나 사냥감을 잡는 일이 그렇게 수월할 수가 없었다. 지금 같으면 어느 곳에 간다고 해도 살아남을 자신이 있 었다. 해가 지고 나서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저녁 식사를 하기 시작 했다. 노르바와 나셀 두 사람이 늘어났기 때문에 식사량이 평상시보 다 좀 줄어들었다. 다른 음식은 다 충분했지만 술만큼은 조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서 마셨던 술이 떠오를 때마다 샘물을 떠다 마 시곤 했다.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는데……." 저녁 식사가 끝날 무렵에 레일즈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말을 꺼냈 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결정을 해야만 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이스칼리아의 삼림지대를 통과하게 돼. 그 앞에 있는 것은 두얼굴부족이 지배하는 초원지대야. 짐작은 하고 있 겠지만 그렇게 되면 베르디아군과 맞닥뜨릴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질 거야." "아마 그럴 겁니다." 마리스가 동의했다. "여기서 더 남쪽으로 우회해 가면 산악지대가 나옵니다. 북쪽은 밋 밋하지만 남쪽으로 갈수록 급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쪽 일대는 베르디아군의 점령하에 있지만 남쪽은 고고부족이라 불리는 신수 포르티노의 종자들이 계속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협력을 받으면 수월하리라 생각합니다만……." "협력을 받는다고?" 레일즈가 물었다. "고고부족은 크리스타니아 질서의 감시자입니다. 주기의 파괴자 베르디아군을 무엇보다 증오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협력해 줄 것입니 다." "그렇게 빙 둘러 가면 제 시간에 갈 수 있을까? 회합의 때가 다 된 거 아닌가." 밧소가 머리 뒤로 손 깍지를 끼며 말했다. "그 말도 맞아요. 몇 달씩 걸려서 가게 되면 회합의 때는 끝나버리 고 말지요. 그렇지만 초원지대를 가로질러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 다." 마리스의 말에 레일즈는 깊이 동조했다. "어디를 거쳐가든 지금부터 많은 숫자가 함께 움직이는 건 위험해. 그러니까 지금부터는 마리스와 나, 둘이서 움직였으면 하는데……." 마치 무슨 선고를 내리는 듯한 말투로 레일즈가 말했다. "여기까지 같이 와선 우리를 떼놓고 간단 말야!" 밧소가 안색을 바꾸며 항의했다. "그게 잘못된 생각이었어. 사이아가 그런 일을 당하고 나서 뼛속 깊이 느꼈어. 양날검 공작 또한 우리에 대한 복수를 포기하지 않고 있 어. 저번에는 그레일이 그냥 달아났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을 거라 구." "그건 그렇지만……." "내 부탁을 들어줘. 사이아는 나셀의 마법을 써서 다낭으로 돌아갔 으면 좋겠어. 비인도 함께 데려가 주길 바래." "우리들은 다낭으로 돌아갈 수가 없어. 이런 곳에 내버려지면 베르 디아군에게 개죽음당하기 십상이지, 뭐." "회합의 땅에서 돌아올 때는 결국 두 사람만 남게 돼. 여기서 물러 서는 편이 훨씬 위험이 덜할 거야."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말라구. 우리도 너와 행동을 함께 할 생각 이야. 신왕도 독 바른 단검에는 현기증을 낼걸." 밧소는 득의양양하게 웃으며 허리에 매단 단검을 뽑아들었다. 화톳 불에 비친 단검의 날이 빨갛게 물들었다. 지금 막 누군가를 암살이라 도 한 것처럼 보였다. "신왕한테 독이 듣기나 하겠어?" 레일즈가 끌끌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럼, 네가 휘두르는 검은 신왕에게 통하겠어?" "해보기 전엔 모르잖아!" "그건 내 단검도 마찬가지 아냐!" 밧소의 반론에 레일즈는 대답이 궁색해졌다. "지금 신왕이 어떻다고 말하는 겁니까?"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며 일행의 대화를 바라보고만 있던 나셀이 갑자기 끼여들었다. "예, 그랬습니다." "지금 레일즈는 신왕과 싸울 생각입니까?" 레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들의 회합 자리에서죠. 신수들의 면전에서 우리들은 신왕에게 도전합니다. 그렇게 해서 신수들의 결심을 촉구하는 것이 목적입니 다." "그렇게 해서 죽임을 당할 생각입니까?" "죽을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생 각합니다." 레일즈의 대답을 듣고 나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만두십시오." 제자를 나무라는 투로 나셀이 레일즈에게 말했다. "그만두라구요?" 레일즈는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예, 그렇게 말했습니다. 영웅 흉내를 내는 것은 좋지만 어리석은 짓에 불과합니다." "어떤 뜻이지요?" 살기 등등한 목소리였다. 주위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레일즈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려 하지 않았다. 신왕 과 싸우기로 결심한 것은 보통 각오가 아니었다. 신왕의 기적에 의해 신수의 어금니 성채가 무너지고 산처럼 쌓인 동료들의 시체를 보았을 때, 자신의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레일에게 심한 상처를 입고 나서 레일즈는 극단적으로 죽음을 두려 워하게 되었다. 그 공포를 필사적인 의지의 힘으로 간신히 억누르고 것이다. 그것을 바보짓이라고 단정하다니, 그 이상 가는 모욕은 없었다. "목숨을 버려 무슨 일인가를 해야 할 때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달리 방법이 없을 때입니다. 레일즈가 죽음으로써 신수들이 생각을 바꾼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고의 존재입니다. 인간의 삶과 죽음 따위는 수도 없이 보아왔을 겁니다. 레일즈가 생각한 대로 실행 한다 해도 신수들은 그 행위를 바보짓으로 바라볼 뿐입니다. 바꿔 말 해 지금 레일즈는 개죽음당하게 될 뿐입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따위 의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은 버리는 게 좋습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생각 이 아니라 레일즈 당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위해 살아남아야 합니다. 아니, 살아남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말로는 뭐든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미래를 알 수 있는 사람이라 면, 그 말에 따르지요. 신수의 마음을 알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말에 따르지요. 그렇지 않다면 쓸데없는 말을 입 밖에 내선 안 됩니다! 신 왕을 쓰러뜨리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우리들 말고 또 있습니까? 신왕 을 쓰러뜨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아닙니까? 분명히 우리가 하려 하는 일은 바보짓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레일즈는 세차게 공격하는 자세로 말했다. 그러나 나셀은 그 말을 태연히 받아넘기며 거꾸로 위압하는 표정으로 레일즈를 바라보았다. "그만두십시오……." 나셀은 한 호흡 건너고는 조용히 말했다. "신왕을 쓰러뜨리려 하는 사람은 우리 말고도 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시도는 지금 성공을 거두고 있습니다. 나는 그들이 성공하리 라고 확신합니다." 나셀의 어조가 너무나 담담해서 레일즈는 그 말이 품고 있는 의미 를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신왕을 쓰러뜨리려 하고 있다니……. 게다가 그 시도가 성공을 거 두려 하고 있다고?" 숨가쁜 느낌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레일즈의 말에 나셀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의 동료들이 지금 그걸 위해 다른 세계에 가 있습니다. 나도 얼 마 전까지만 해도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동료들이라니? 그 사람들이 누굽니까? 함께 크리스타니아에 올라 온 다낭의 사람들입니까?" "신수민족이 두 사람, 그리고 베르디아의 백성이 한 사람입니다. 베 르디아의 백성은 인간이 아니라 다크엘프입니다만……." "다크엘프!" 레일즈는 거의 말을 잊을 지경이었다. 다크엘프라 하면 사악한 요정이다. 그런 요정이 어째서 신왕을 쓰 러뜨리기 위해 움직인단 말인가! "믿어야 합니다. 은발의 소녀가 사이아를 구하러 갔을 때를 생각해 봅시다. 믿는 것은 괴로운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뢰는 힘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레일즈는 주먹을 꽉 쥐며 눈을 감았다. 그러곤 마술사가 한 말을 마음속에서 계속 되뇌었다. "……신왕은 쓰러질까요?" 누구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임을 잘 알면서도 지금 레일즈는 그 말 을 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말에 대답이 돌아왔다. "당연하다마다." 대답한 사람은 그림자부족의 이살리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늘 듣던 이살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마치 노파의 목소리처럼 까칠했다. 이살리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 하고 어딘가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미래를 예지했는가?" 두려운 마음으로 레일즈가 물었다. 그림자부족은 고지자란 별명을 가진 신수 아르케나의 종자들이어 서 한정된 미래 예지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 한 말이 한정된 예언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운명의 고리는 닫혔도다. 신왕은 잠들리라……. 깊고 깊은 잠 속으 로……." "그게 정말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레일즈가 물었다. 그러자 이살리가 갑자기 풀썩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곁에 있던 밧소가 놀라서 몸을 떠받쳤다. "이 친구, 정신을 잃었구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밧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이살리의 몸을 바닥에 누이고 등짐 하나를 베개 대신에 이 살리 머리 밑으로 넣었다. 레일즈는 망연한 눈빛으로 나셀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지금의 예언은……." "나도 모르겠어. 아마 이살리도 기억하지 못할 거야." "혹시 신수 아르케나가 이살리의 입을 빌려……." 마리스가 말했다. "신왕은 쓰러진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쓰러뜨린단 말인가? 나 셀의 동료? 아니면……." 모두가 말을 잃고 서로의 얼굴을 둘러볼 뿐이었다. 긴 침묵이 이어 졌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떡하지?" 침묵을 깨뜨린 사람은 사이아였다. "예정은 변하지 않았어. 마리스는 신수왕 페네스에게 선택받아 신 들의 회합에 임석할 예정이니까. 나는 마리스를 호위해서 회합의 땅 까지 갈 거야." "그렇다면, 나도 따라갈 거야!" "사이아!" 레일즈가 놀라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다낭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잖아! 네가 혹시나 잘못되면 집에 계신 아버지는 어떡해." "그래, 알아." 사이아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굳은 결심을 담고 있었다. "그때 난 잠깐 생각을 잘못 하고 있었어. 레일즈한테는 내가 필요 없다고 생각해 버렸던 거지.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는 레 일즈와 함께 가고 싶어. 어쩌면 또다시 내가 걸림돌로 작용할지도 모 르겠어. 그렇지만 부탁이야. 나를 데리고 가줘. 레일즈한테 도움이 되 고 싶어. 조금이라도, 정말 아주 조금이라도." 팔짱을 낀 레일즈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그래. 어쨌거나 간신히 여기까지 함께 왔잖아. 마지막까지 함께 행 동하도록 하자. 신들의 회합이 어떻게 될지 알고 싶어서가 아냐. 앞으 로 크리스타니아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걸 모르면 앞으로 우 리들이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아무도 모르는 거 아냐!" 비인의 필사적인 말이 레일즈의 귀를 헤집고 들어왔다. "……알았어." 레일즈는 팔짱을 풀고 일행을 돌아보았다. "가자! 회합의 땅으로, 신수들의 성지로!" 그렇게 결정을 내리자 마음이 순식간에 가벼워졌다. 일행이 함께 행동하는 것을 짐스럽게 여긴 자신이 나빴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 아나 다른 사람들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너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함께 하면 그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안겨준다. 나셀이 말 하는 대로 그것은 힘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신왕을 쓰러뜨리는 힘이 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레일즈는 일어섰다. "출발하자. 초원지대를 횡단해서 곧바로 회합의 땅으로 향하자!" 레일즈가 외치는 힘찬 선언에 모두 소리 높여 화답했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11) 제3장 회합의 때 1 큰까마귀의 울음 소리가 하늘 높이 울려퍼졌다. 검은 깃털로 뒤덮 인 그 새는 천천히 지면을 향해 다가와서는 가까이 있는 바위 너머로 내려앉더니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림자부족의 주술사 이살리였다. 가는 길의 안전을 위해 하늘 위 에서의 정찰을 마치고 지금 막 돌아온 것이었다. 이스칼리아의 삼림지대에서 사이아가 유괴당한 사건이 있은 지 벌 써 보름이나 지났다. 현재는 이스칼리아 서부의 초원지대를 지나 서 남부의 산악지대에 다다라 있었다. 이 일대는 베르디아군과 신수 포 르티노를 섬기는 고고부족이 싸우는 최전선이어서 하루하루가 그 어 느 곳보다도 긴장감이 높았다. 초원지대를 지나는 동안에도 베르디아군의 병사들이나 신수 스매 쉬의 종자인 두얼굴부족 사람들과 마주치곤 했다. 물론 베르디아군과는 매번 싸움을 벌여 격퇴시켜야만 했다. 그러나 두얼굴부족 사람들은 레일즈 일행과 싸울 일이 없었다. 오히려 그들 은 갖고 있던 식량을 나눠주기도 하고 길안내를 해주기도 하는 등 더 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이살리의 이야기에 따르면 두얼굴부족이 신수민족과 벌이는 싸움 은 본심이 아니며 오로지 안정과 평화를 바랄 뿐이라고 했다. 그들은 신왕의 힘으로 크리스타니아가 통일되면 다시 평화롭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사실 신왕 편에 가담했던 덕분에 두얼굴부족의 영토는 전쟁터로 화하는 일을 면했다. 그것만도 두얼굴부족에게는 더없이 다행스런 일 이었다. 배신은 비열한 행위였지만 그들의 사정도 생각하기에 따라선 얼마 든지 이해가 갔다. 베르디아군이 열세에 놓이면 두얼굴부족은 다시 신수민족의 편으로 돌아서게 될 것이다. 다만 신수민족이 그것을 받 아들일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레일즈 일행은 지금 9명으로 늘어났다. 다낭에서부터 함께 여행을 시작한 4명 외에 은발의 마리스, 그림자부족의 주술사 이살리, 근위 기사 노르바, 그리고 사이아의 오빠 나셀 등이 보태졌기 때문이다. 노르바가 지금껏 함께 행동하는 것은 레일즈에게도 뜻밖이었다. 다 낭에서 데리고 온 세 사람의 모험자를 잃고 사실 돌아갈래야 돌아갈 수 없는지도 모른다. 재상을 배반할 생각은 없었지만 혼자 돌아갔다 가는 의혹의 눈길을 도저히 피할 도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밧소와 샤일론은 하크 마을에서 사로잡혔을 때 노르바에게 심한 고문을 받은 원한이 남아 있어 처음에는 노골적으로 경계의 눈길을 보냈다. 그러나 이제 와선 조금 어색하게 대할 정도가 되었다. 노르바 혼자 서 여덟 사람을 상대하기란 애당초 불가능했다. 이런 상황이 바뀌지 않는 한 위험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세계를 본 사람이라고 자칭하는 나셀은 사이아와의 약속을 지켜, 한 차례 하크 마을에 있는 브라이언 노인의 거처까지 순간이동(텔레 포트)의 마법을 써서 다녀왔다. 물론 그때 사이아도 동행했다. 재회한 세 사람은 아마도 여러 가지 이야기로 밤을 샜을 것이다. 다시 순간이동 주문으로 레일즈 일행이 있는 곳으로 되돌아왔을 땐 나셀이나 사이아 모두 아주 홀가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이아는 양아버지이자 스승이기도 한 브라이언 노인에게서 정식 으로 지팡이와 주문을 얻어왔다.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귀중한 마법 의 보물도 몇 가지 가지고 왔다. 무한히 많은 물건을 집어넣을 수 있 는 주머니와, 마법의 말로 커지라고 명령하면 그 말을 따르는 마법의 목마 같은 것이었다. 이 보물들의 마력에 의해 레일즈 일행의 행로는 아주 수월해졌다. 이제는 목적지까지 얼마 남지 않아 길고 긴 여행도 점차 끝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레일즈의 마음은 결코 밝지만은 않았다. 신왕과 싸우기 위 해 이 여행을 시작했음에도, 시간이 갈수록 그 목적을 잃어가고 있었 기 때문이다. 자신 말고도 신왕을 쓰러뜨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이 지 금 목적을 거의 다 이루려고 하는 참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뒷 받침하듯 이살리가 갑자기 예언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신왕 바르바스가 오랜 잠에 빠져들리라…….' 그 말을 한 후 의식을 잃어버린 이살리는 자기가 말한 내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레일즈 일행에게서 상황에 대해 설명을 듣고 난 뒤 이살리는 신수 아르케나의 의식이 자기 육체에 강림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예언이 확정된 미래를 고지하는 것 같다는 말도 보탰다. 고지자란 별명을 가진 신수 아르케나의 예언이고 보니 신빙성이 아주 높았다. 신왕이 오랜 잠에 빠져들 운명이라면 레일즈 일행이 일부러 목숨 을 걸 필요까진 없었다. 은빛늑대부족의 대표자로서 신수들의 회합에 임하는 마리스를 회합의 땅까지만 호위하면 그만이었다. 신수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인지는 레일즈가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한 사실들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납득할 수는 없었다. 필사적으로 넘어서려 했던 벽이 갑자기 눈앞에서 자취도 없 이 사라져버린 기분이었다. 어느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할지 전혀 감 이 잡히지 않았다. 결국 자신은 레이든이나 나셀 같은 사람들의 뒤를 좇고 있는 것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자신이 대단히 어리석은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 다. 신들의 회합이 끝난 뒤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짐작조 차 가지 않았다. 이런 어정쩡한 기분으로는 양날검 공작 그레일과의 싸움에서조차 승리를 거두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레일과의 싸움에서 절대로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 신왕 과 대결해야 한다는 목적 의식 때문이었다. 그런 목적 의식이 사라지 고 난 지금은 도저히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게다가 양날검 공작은 변함 없이 레일즈 일행의 뒤를 바짝 붙어 추 적을 해오고 있어 이쪽 사정을 손바닥보듯 훤하게 알고 있을 터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레일이 기습해올 생각이 없다는 점만큼은 이제 거의 확신할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쫓기는 입장이 되고 나니 쫓는 사람의 마음을 어느 정 도는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솜씨가 좋은 사냥꾼은 사냥감과 마 음이 통한다는 말이 있다. 사냥하려고 하는 동물이 어떤 감정을 품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려고 할 것인지, 설령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레일 또한 레일즈의 그런 생각을 읽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습을 가하거나 비열한 수단을 동원하지 않고 오직 기회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리라. 그들 맹호부족에게 신 성한 행위인 복수를 거행하기 위해……. 바위 위에 잘 접어두었던 옷을 몸에 걸치고 나서 그림자부족의 이 살리는 레일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림자부족들은 보석이나 장 식품 따위를 즐겨 착용했다. 이살리도 그런 습관에선지 목걸이와 팔 지 같은 장식품을 걸고 있었다. "어떻던가?" 레일즈는 이살리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는 바로 조사 결과를 물었다. "생각했던 대로야. 이 길을 따라 쭉 가면 베르디아군의 성채가 나 와. 규모는 작지만 가도를 꽉 막아서고 있더군. 그 앞으로 나 있는 산 길은 아주 험했는데 그 험한 산 속에 고고부족의 부락이 들어서 있어. 이들 부락도 만만치 않은 요새 같더라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던가?" 레일즈가 물었다. "글쎄, 그렇지 않을지도 모르겠어. 베르디아 성채 놈들은 전쟁 준비 에 바쁜 것 같았어." 그 말에 레일즈는 깜짝 놀랐다. "벌써 우리를 발견한 건가?" "아냐, 그런 것 같지는 않아. 우리를 목표로 하는 것치고는 준비가 너무 시끌벅적해. 모르긴 해도 고고부족의 부락을 습격할 생각일 거 야." "고고부족의 부락을……." 레일즈는 신음 소리를 내며 펑퍼짐한 돌 하나를 골라 그 위로 걸터 앉았다. 어떻게 할지에 대한 결정이 필요했다. 베르디아군이 출격하기를 기다리면 성채 부근의 경비가 느슨해질 것이다. 그 틈을 이용하면 고고부족이 지배하는 산악지대 깊숙이 들 어가기에 어려움을 겪지는 않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그러나 고고부족의 부락이 습격당하는 것을 그대로 간과해 버리기 는 싫었다. 용병단 신수의 어금니에는 많은 고고부족의 전사들이 용 병으로 참가하고 있는 데다가 두터운 형제애 비 슷한 의식이 있었다. 깊이 생각해 보면 여기서 그들을 도와주면 앞으 로 더욱더 원활하게 그들 부족으로부터 협력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 른다. "고고부족을 도와주고 싶은데 너희들 생각은 어때?" 레일즈는 동료들의 의견을 물었다. 지금까진 혼자서 생각하고 혼자 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의식적으로 동료들 에게 의견을 묻곤 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들어선 혼란의 싹을 아직 다 잘라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남을 믿으라는 나셀의 말 을 실천해 보려는 마음 때문이기도 했다. "침묵하고 그냥 넘어가선 안 돼." 비인이 발끈 해서 말했다. "그렇게 하면 전쟁에 휩싸이게 돼. 위험을 피할 길이 없고." 레일즈는 비인을 바라보며 질문하듯 말했다. 뚫어보는 레일즈의 시 선에 비인이 움찔했다. "그, 그래도." "위험하다는 걸 잘 알고 있다면 좋아." 레일즈는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알고 있어. 나도 싸우겠어." 약간 뜸을 들이고서 하는 말이긴 했지만 비인의 생각은 확고해 보 였다.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은?" 다시 한 번 물어보았지만 아무도 다른 의견을 내놓지 않았다. "싸우는 거야 상관없지만 우리만으론 정면에서 맞붙기 힘들지 않 을까?" 노르바가 염려스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후방을 치면 비록 우리 인원이 적긴 하지만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다만 적의 퇴로를 완전히 막 아 버리면 죽음의 길에 내몰린 미친 적들을 상대하는 셈이 되긴 하겠 지만." 레일즈의 말에 노르바는 그 정도까지 셈을 하고 있다면 문제 없다 는 표정을 지었다. "베르디아군의 수는?" 레일즈는 이살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대충 4, 5백 명 정도였어." "우린 열 명이 안 되지만 우수한 마법사와 정령사까지 있어. 적을 혼란시키는 정도의 목표라면 충분히 달성할 수 있을 거야." 레일즈가 자신감을 보이며 말했다. 특별히 적을 전멸시킬 필요는 없었다. 부락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게만 만들면 될 뿐이다. "적이 출격하기를 기다렸다가 그때 성채를 우회해서 나간다. 같은 편끼리 치고 받으면 안 되니까 고고부족 전사들에게 미리 통지해 두 었으면 해. 감시자 포르티노 부족인 만큼 기습에 당할 사람들이라고 는 생각지 않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게 낫겠지." 레일즈는 실행 순서를 짚어가며 말했다. "빼먹었다든지 잘못 계산한 건 없을까요?" 나셀을 뒤돌아보며 레일즈가 물었다. 마술사들은 누구나 박학다식 하고 개중에는 전술에 관해 특히 깊은 지식을 갖춘 사람도 있었다. "다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전략 전술을 연구한 적이 있나보죠?" "근위기사가 될 생각이었기 때문에 나셀의 아버지에게서 책을 빌 려다가 공부한 적이 있어요. 거기에다 지난 1년 동안 수도 없이 전투 를 치른 경험도 보탬이 됐고." 레일즈는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전략 전술의 전문가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있던 용병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정면으로 싸우는 것밖에 모르는 전사들이어서 레일즈는 그만 큼 더 많은 생각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면 나는 한 번 더 날아갔다 오면 되는 건가?" 이살리가 귀찮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탁해!" 레일즈가 이살리를 보며 싱긋 웃었다. 고고부족의 부락에 가서 레 일즈 일행의 의견을 전달해 줄 사람으로 하늘을 날을 수 있는 이살리 보다 더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이것 참, 심부름꾼 노릇이 귀찮기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단 말야!" 이살리는 중얼거리면서 다시 바위 그늘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사이아가 염려스러운 듯 말했다. "혹시 이살리는…… 고고부족에 도착해서도 발가벗고 있는 거 아 냐? 만약 그렇다면 그런 모습으로 우리가 보낸 사자 노릇을 제대로 해낼 수 있을까?" 사이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말했다. "저쪽에 가서는 마법을 써서 옷을 가져다 입을 수 있어." 바위 건너에서 이살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가, 이송(어포트)의 주문으로……." 사이아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두 뺨을 손으로 가린다. "걱정해 줘서 정말 고마워." 이살리의 목소리는 그 말을 끝으로 곧 큰까마귀 소리로 바뀌었다. 큰까마귀는 천천히 날개짓을 하면서 옅은 구름이 널린 하늘을 높 이 날아올랐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12) 2 이살리가 돌아온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고고부족과의 교섭은 잘 진행되었다. 그들은 레일즈 일행의 협력에 깊이 감사한다는 대답을 보내왔다. 그러나 베르디아군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파수꾼이라 불리 는 고고부족의 수인이 이미 알고 있었노라고 했다. 레일즈 일행은 계속해서 성채의 동태를 살피며 가도에서 조금 비 켜난 골짜기에서 야영을 했다. 목적은 하나, 베르디아군이 출격하기 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기다리는 동안에 무기와 방패 따위를 정성스럽게 손질해 두었다. 레일즈가 지금 쓰고 있는 검은 마리스에게서 빌린 은제검이었고 갑옷 도 신수의 어금니에서 용병들이 입던 것으로 가죽을 푹 삶아서 튼튼 하게 만든 가죽 갑옷이었다. 무게에 비해 아주 단단했고 몸을 움직일 때 약간 거북하긴 했지만 금속 갑옷(플레이트 메일)처럼 시끄러운 소 리는 내지 않았다. 신수민족 사이에서는 표준적인 갑옷으로 그들과 행동을 함께 하면서 애용하게 된 것이다. 다낭에서 가지고 온 것들은 거의 지니고 있지 않았다. 동안 다낭 사람이라기보다는 크리스타니아 사람이 돼 버린 느낌이었 다. 신수의 어금니 동료들이 대백조 형제라고 불러도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다낭 지방을 지배하는 신수 후지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베르디아군이 움직인 것은 다음날 아침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움직 임이었다. 어쨌든 회합의 땅에 서둘러 가고 싶었던 레일즈 일행에게 는 그러는 편이 더 좋았다. 성채에 들어가 있던 전사들 대부분이 출격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성채에는 아마도 수십 명밖에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레일즈 일행은 성채에서 사각지대를 이루고 있는 급경사면을 올라 가 출격한 베르디아군의 군세를 살펴보았다. 이살리의 보고에 따르면 고고부족의 부락에는 2백 명 남짓한 전사들이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했다. 수로만 본다면 베르디아군의 절반이 안 되는 전력이었다. 그러나 요새화한 부락을 근거로 싸우는 것이기 때문에 크게 불리한 싸움이라 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레일즈에게는 오히려 베르디아군이 이런 도박성 짙은 싸움을 거는 것이 이상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쩌면 신들의 회합과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회합의 땅 바로 밑 에서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둬들임으로써 신왕 바르바스의 위치를 더 욱 높이려는 것인지도……. 레일즈는 그런 속셈이 얼마나 얄팍한 생각이었는지를 단단히 알려 줄 작정이었다. 레일즈 일행이 베르디아군의 후방을 교란시킴과 동시에 고고부족 의 전사들이 부락에서 베르디아군을 공격하기로 약속이 이루어져 있 었다. 그렇게 되면 베르디아군은 양쪽에서 협공을 받는 셈이므로 틀 림없이 대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수가 적은 약점을 메우기 위해 나셀과 이살리와 사이아 세 사람이 나무 오크나 돌시종(스톤 서번트)와 같은 마법인형(퍼핏)들을 만들어 냈다. 마법인형은 등급이 낮은 요마 정도의 능력밖에 없지만 제대로 활용만 잘하면 적들을 동요시키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맹호부족의 전사들이 고고부족 부락에 도착한 것은 정오 조금 전 이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휴식도 취하지 않은 채 곧바로 고고부 족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무수한 불화살이 부락 쪽으로 날아갔다. 목제 건물이 불길에 휩싸 였고 부락 주민들은 불길을 잡고자 동분서주했다. 레일즈 일행은 그런 전투 상황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작은 언덕 위 에 서 있었다. 소형 투석기와 파괴용 철퇴까지 갖춘 걸 보면 부락을 완전히 함락 시킬 생각으로 출격했음이 분명했다. "지금 도와주러 나서야 하지 않을까?" 부락 여기저기서 건물이 불타오르는 것을 보고 비인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레일즈를 돌아보았다. "아직 아냐. 베르디아군이 좀더 깊숙이 공격해 들어간 뒤에 행동에 나서야 돼." 전황을 계속 살펴가며 레일즈는 인내심을 갖고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갈수록 긴박감이 더해갔다. 레일즈는 위가 옥죄어 드는 듯한 불쾌감을 느꼈다. 이것만큼은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고쳐 지지 않았다. "자, 지금이다!" 베르디아의 전사들이 부락의 입구까지 공격해 들어갔을 때 레일즈 가 외쳤다. 마치 어금니부족의 전사들처럼 힘찬 소리를 내지르며 경사면을 내 려갔다. 그에 맞춰 마술사 나셀이 환각의 주문을 써서 열 명 정도의 전사 부대를 만들어냈다. 적들은, 마법인형들과 합쳐 수십 명의 전사들이 공격해 들어오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다. 복병으로서는 충분한 숫자였다. 이 기습으로 베르디아군은 순식간에 얼이 빠졌다. 저마다 도망가려 는 기색이 역력했다. 마술사 세 사람, 정령사 비인, 사제 샤일론이 마법을 써서 그 혼란 을 더욱 부채질했다. 레일즈는 마법인형들에게 육박전을 맡기고 마술사들을 향해 공격 해 들어오는 적병들만 골라내 하나하나 처치했다. 그때 부락의 문이 열리며 고고부족의 전사들이 몰려나왔다. 그들 가운데에는 등에 날개를 달고 상공에서 화살로 공격하는 사람도 있었 다. 신수 포르티노가 창조한 아인(亞人, 인간과 짐승의 중간 동물) 조 인족(버드맨)의 모습도 보였다. 전투는 얼마 되지 않아 싱겁게 결말이 나고 말았다. 여기저기 베르디아군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레일즈가 예상했 던 것보다 적의 피해는 훨씬 커보였다. 고고부족의 전사들이 무자비 한 공격을 가했기 때문이다. 베르디아군에 대한 그들의 분노가 얼마 나 큰지를 잘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당분간은 이 부락을 다시 공격해 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투가 끝난 뒤 레일즈 일행은 고고부족의 수장격인 남자를 만나 부 락의 장로가 있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장로라고는 하지만 서른 살 전후의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아마도 뛰어난 수인이리라. "덕분에 힘들이지 않고 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장로는 레일즈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다.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이십니까? 이스칼리아 성채는 전멸당하고 말았을 텐데……." "우리들은 거기서 살아남았습니다." 그 물음에 대답한 사람은 마리스였다. 고고부족 사람들은 레일즈와 노르바 그리고 나셀 같은 인물들에게 경계심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교섭에 관해서는 모두 마리스가 맡기로 해 둔 바 있었다. 레일즈 의 모양새는 그렇지 않지만, 다낭의 갑옷을 입고 있는 노르바나 현자 학원의 로브를 입고 있는 나셀은 아무리 봐도 신수민족으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로는 그런 사정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신수의 어금니가 다양한 사람들의 집단이었음을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수 의 어금니 용병들 가운데에는 베르디아 출신들도 있었다. "은발인 분이 이런 변경에까지 오셨으니 당신께선 아마도 주기의 신수왕 부족을 대표하는 사람이겠군요." 장로가 하는 말에 마리스는 긍정하는 뜻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바람의 봉우리를 통과해 회합의 땅으로 가야만 합니다." "그렇게 하셔야겠지요. 그 봉우리는 회합의 땅에 이르는 유일한 길 입니다. 그리고 그 땅을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은 신수들에게 선택받은 사람이어야만 합니다." "신수에게 선택받은 사람이어야만 한다는 건 무슨 뜻이죠?" 장로가 하는 말에 레일즈가 물었다. "그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사항입니다. 신들의 회합은 이곳 크리스 타니아에서 가장 신성한 의식입니다. 신수들이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임석시킬 까닭이 없지요." 장로의 말과 태도에서 레일즈에 대한 차가운 감정이 전해져왔다. "그것이 이곳 세계가 형성되었을 때부터의 변함 없는 법칙입니다. 신성불가침한 질서인 셈이지요." "그건 그렇겠지만……." 레일즈는 반론하려 했지만 그녀에게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다는 생 각이 들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입술을 깨물며 마리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주기도, 질서도 이제 이곳 크리스타니아에서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게 됐습니다." 레일즈의 시선을 느끼며 마리스는 장로에게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기와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해 우 리들은 지금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은빛늑대 페네 스에게 선택받은 마리스님!" "당신은 진정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잃어버린 질서를 " "물론입니다." 장로는 가슴을 펴며 말했다. "그것이 부족 사람들 모두의 일치된 의견입니까?" 곁에 있는 레일즈가 걱정될 정도로 마리스의 말은 신랄했다. "우리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리스님, 당신께선 다르다 는 말씀입니까?" "예, 다릅니다." 마리스는 딱 잘라 말했다. "주기의 회복이 당신들 부족의 사명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겁니 까?" 고고부족 장로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그것은 부족의 사명입니다. 은빛늑대부족의 많은 사람들이 그렇 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다릅니다. 그리고 부 족 사람들 가운데 얼마인가는 이 사명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입 밖으로 꺼내진 않지만 마음속에 생겨난 의혹을 부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나는 당신들 부족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만……." "우리들은 감시자 포르티노의 종자들입니다. 질서가 흐트러지는 것을 감시하고 그걸 제대로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 사명입니다. 우리 는 크리스타니아의 세계율을 어떤 일이 있어도 지켜나갈 생각입니 다." "꼭 그렇다고만 단정할 순 없겠지요." 마리스와 족장의 대화에 갑자기 나셀이 끼여들었다. 이 마술사는 언제나 갑자기 말을 꺼내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어 레일즈는 속으로 슬며시 웃었다. "나는 제노바라는 이름의 여성을 알고 있습니다. 당신 부족의 뛰어 난 수인이지요. 그녀는 고고부족의 삶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있었습 니다. 세계를 위해 질서가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거기에 사는 사 람들을 위해 질서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말입니다." 나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했다. 유창한 크리스타니아 말이 어서 도저히 다낭에서 태어났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레일즈가 떠듬떠듬 하는 크리스타니아 말과는 도대체 비교가 되지 않았다. 질서는 세계를 위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사는 인간을 위해서 존재 한다. 제노바라는 여성의 말은 레일즈가 이곳 크리스타니아에 와서 줄곧 느끼고 있던 의문이기도 했다. 크리스타니아를 유지시키기 위해 이곳 세계의 모든 것이 자기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주민들뿐만 아니 라 신수들 자신도.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만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아간다면 그것은 암흑신 패라리스가 주창하는 완 전한 자유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세계가 평화롭다고는 생각 할 수 없다. "제노바를 알고 계십니까?" 장로는 약간 놀라는 듯했다. "그녀는 제 친구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행동을 함께 했지요." "제노바는 무사합니까?"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무사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나셀의 말에서 제노바라는 여성이 신왕을 쓰러뜨리려고 분투하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장로는 자기 마음을 정리하는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번 회합이 어떻게 될지 저로선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베르디아 군의 침략이 오늘 이것만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부락을 다스리는 사람으로서의 고뇌가 장로의 얼굴에 깊이 배어 있었다. 마리스를 처음 만났을 때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때의 마리스도 저 런 얼굴이었다.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부족의 원칙 이나 생활 방식은 계속 싸워나가는 디딤돌이 됩니다. 그것을 잃어버 리면 우리들은 베르디아군의 침략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 다. 지금까지 수많은 부락들이 그래왔던 것처럼……." 지금 하는 말은 거짓 없는 그녀의 진심이라고 여겨졌다.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은 곧 힘이 되는 법이다. 그러나 잘못하다간 맹신하는 결과를 낳기 쉽다. 어디까 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맹신인가. 그 경계를 그을 수 있는 인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고고부족의 장로는 설령 그것이 맹신이라 할지라도 그 힘을 빌려 베르디아군과 계속 싸울 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했던 것이다. 비장한 결의, 바로 그것이었다. 레일즈는 도저히 그 결의를 부정할 수 없었다. 수천, 수만 명이 싸 우는 커다란 전투가 있는가 하면, 이런 부락을 둘러싼 공방전처럼 수 십에서 수백 명이 치르는 전투도 있었다. 틀림없는 사실 한 가지는 신 왕이 쓰러지지 않는 한 이런 전란이 계속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신왕 을 쓰러뜨리지 못하는 한 베르디아군도 전쟁에서 해방될 수 없다. 바르바스의 지배 법칙은 유일무이한 것이므로 그에 위배되는 모든 종족들을 완전히 거꾸러뜨리지 못하는 한 그 전쟁에 종결은 있을 수 없었다. "바람의 봉우리까지 길안내는 해드리겠습니다. 다만 거기서부터는 선택받은 사람만 통과하도록 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성지로 가는 길을 지키는 '살아 있는 바람'이나 포르티노가 만든 환수인 독수리머 리사자 그리핀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마리스가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저는 신수 포르티노에 선택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은빛늑 대 페네스에게 선택받아 신들의 회합에 임하게 됩니다. 그 점을 언제 까지나 소중히 여기십시오." 장로는 쓸쓸한 미소를 띤 채 조용히 자리를 떴다. "오늘밤은 조촐하나마 연회를 베풀도록 하겠습니다. 신수의 어금 니 전사들의 용기와 지혜, 그리고 오늘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13) 3 양날검 공작. 맹호부족의 전사들은 존경과 외경심을 담아 자신을 그렇게 불렀다. 양날검 공작 그레일이라고.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 대단히 우스꽝스럽게 여겨졌다. 공작이라는 칭호는 암흑민족 사이에서는 왕 다음 가는 자 리로 여겨졌다. 신왕이 부활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맹호부족의 예비 족장이 된 자신을 누군가가 그렇게 불렀고, 신왕에 다음 가는 사람으 로서 자신을 떠받드는 것 같아서 그 호칭 자체가 무척이나 자랑스럽 게 느껴졌다. 암흑민족이 베르디아에 도착했을 때 지배의 신수왕 바르바스는 사 브르 타이거의 육체로부터 표류왕의 육체로 혼의 그릇을 바꾸려고 했 다. 그러나 바르바스의 혼은 표류왕의 육체로 들어간 채 잠에서 깨어 나질 못했다. 3백 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쳐 맹호부족을 이끌고 수호해야 할 존 재가 없었다. 그런 까닭에 실질적으로 암흑민족에게 종속돼 있는 시 대가 계속되었다. 맹호부족에게는 이런 사실을 굴욕으로 여기는 일파가 있어서 표류 왕의 육체에 들어간 채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바르바스의 혼을 각성 시키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 왔다. 그와 똑같은 움직임이 아마도 암흑 민족 사이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잠들어 있는 표류왕이자 신왕의 육체는 베르디아 지방의 상징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표류왕과 신왕 쌍방의 유훈이라고도 할 크리스타니 아의 정복을 노리고 전쟁을 계속해 온 것은 그런 까닭에서였다. 그러나 크리스타니아에 대한 침공은 신수 스매쉬의 종자인 두얼굴 부족이 조직한 용병단, 신수의 어금니에게 저지당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은 결계의 신수왕 루미스의 결계로 새 겨진 세 가닥의 길에 견고한 성채를 세워놓고 그 경사면을 올라온 베 르디아군을 격퇴하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이다. 수백 년이 지나가는 동안 몇 차례인가는 성채를 함락시킨 적도 있 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결계의 부족이나 은빛늑대부족 같은 신수민족 가운데 유력한 부족들이 전사단을 파견하여 성채를 다시 탈환했다. 베르디아군은 그때마다 결계의 바깥으로 철수해 뱀비늘 같은 바위 표 면을 가진 절벽을 처참한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신왕의 유훈을 진심으로 실현하고자 생각한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르디아라는 밀림지대에 쿡 박혀 지내야 하 는 것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다. 베르디아의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염 원했을 것이다. 절벽 저 너머로 왕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을. 10년 전에 신왕이 갑자기 부활을 이뤄 베르디아는 강력한 왕국으 로 다시 태어났다. 신왕의 기적을 배경으로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깨 뜨리고 두얼굴부족을 베르디아 편으로 끌어들였다. 맹호부족의 예비 족장 가르디, 암흑기사단의 기사대장 브레스트, 두얼굴부족의 주술사 햄 같은 인물들이 신왕 부활과 그 후의 대침공 시에 대활약을 했다. 그러나 신왕 바르바스는 완전히 각성하기 전에 혼을 담은 그릇이 상처를 입어, 그릇의 상처를 고치기 위해 수년 동안 다시 혼의 잠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가르디 등은 죽음을 당하거나 실각 당했다. 신왕 바르바스가 혼의 잠에서 깨어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었다. 하지만 잠에서 깨어났다고 해도 완전히 각성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신왕이 휘두르는 기적의 힘을 보면 각성이 가까이 와 있음 을 알 수 있었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붕괴시킨 기적은 멀리서 바라 본 그레일조차 몸의 털이 곤두설 정도로 지독했다. 방어전을 치르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무력감을 느끼게 만드는 전투 는 없었을 것이다. 주술 정도가 아니다. 더욱 거대한 마력에 의해 완 전히 산산조각 나고 말았기 때문이다. 기적이 성사되기 전날까지의 싸움에서 맹호부족의 예비 족장 바디 오가 죽은 것도 그레일은 알고 있었다. 바디오는 용감한 젊은이였고 뛰어난 전사였다. 자기 대신에 맹호부족을 통솔할 만한 역량을 지니고 있었다. 아쉬 운 것이라면 아직 젊기 때문에 물러나야 할 때를 몰랐다는 사실이었 다. 아마도 그레일의 오명을 설욕하겠다고 무리한 공격을 가하다가 그리 되었을 것이다. 바디오의 뒤를 이어 부족을 다스릴 만한 실력을 가진 사람이 그레 일의 마음속엔 떠오르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임을 나타내는 것인지 바디오가 죽은 뒤 맹호부족과 암흑기사를 통솔하는 사람은 암흑기사단장 딜란트였다. 그가 신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맹호부족 사 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왕은 딜란트를 베르디아의 우두머리로 삼았다. '힘 있는 자는 지배하고 힘 없는 자는 종속을 강요당한다.' 그것이 지배의 법칙이었다. 그 법칙에 따르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맹호부족 사람들은 동요하고 있을 것이다. 신왕이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되면 당연히 맹호부족은 특권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 했다. 신왕 바르바스를 수천 년 전부터 섬겨왔기 때문에 그건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왕은 역시 신이었다. 인간의 염원을 풀어주는 일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잔혹할 정도로 초월적인 존재인 것이다. 힘 없는 자는 맹호부족 사람이든 신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 든 상관없이 버려졌다. 지금의 그레일 자신이 그런 것처럼. 그레일은 신왕 바르바스에게 쓸모 없는 인간으로 낙인찍히고 족장 의 지위를 박탈당했다. 그는 버림받은 자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기 고 복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레일즈라는 이름의 신출내기 전사와 은빛늑대의 우두머리가 될 은 발의 소녀에게. 복수는 인간에게 가장 격렬한 감정이며 의지의 발현이다. 복수를 위해서라면 인간은 모든 것을, 그것이 사랑이건 명예이건 다 내던질 수 있다. 그리고 간혹 자신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힘을 발휘하는 것 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곳까지 여행해 오는 동안 그레일은 한 가지 사실만큼은 뼈에 사무치도록 느꼈다. 그것은 복수와 지배의 법칙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만일 자 신이 진다면 그것은 그 한계의 증명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져서는 안 될 복수전이었다. 믿어왔던 것이 옳았음을 입증하기 위해 신왕 바르바스야말로 지고 의 신이며 그 가르침이 절대적임을 나타내야 한다……. 대결의 시간은 뚜벅뚜벅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은 머지 않아 이곳 으로 찾아올 것이다. 회합의 땅으로 이어지는 유일한 입구인 이곳 바 람의 봉우리로. 결말은 여기서 내기로 했다. 그들이 회합의 땅으로 향한다는 사실 을 알고 나서 그렇게 마음을 정했다. 두 사람을 죽이고 그레일은 맹호부족의 대표자로서 피가 뚝뚝 흐 르는 머리를 매달고 바람의 봉우리를 지나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신들의 회합에까지 가야만 했다. 지배의 법칙이 유일무이한 세계율임을 모든 신들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신왕 바르바스야말로 신 수왕의 우두머리이며 단 하나뿐인 초월신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그때에는 다시 양날검 공작이라는 호칭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 게 되리라. 신왕 다음 가는 사람은 맹호부족에서 나와야 한다. 지배의 법칙을 믿고 바르바스를 섬겨온 부족이어야 한다. 그 누구에게도 그 자리를 뺏겨서는 안 된다. 신왕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14) 4 험난한 산길이 끝없이 이어졌다. 베르디아군에게 습격받았던 고고 부족의 부락에서 빌린 모피 외투를 입고 있었지만, 아침 저녁으로 불 어오는 바람은 쌀쌀하기 그지없었다. 고고부족의 사냥꾼이 레일즈 일행의 길안내를 해주었다. 가는 곳은 바람의 봉우리, 그리고 회합의 땅이었다. 그러나 회합의 땅에 임하는 자격을 가진 사람은 마리스 하나뿐이 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바람의 봉우리 입구에서 그녀가 돌아올 때까 지 기다려야 했다. 걱정되는 것은 양날검 공작 그레일이었다. 혹시 그가 신수들의 면 전에서 결말을 보겠다고 생각한다면 레일즈는 그때 마리스를 도와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마리스도 전사로서의 훈련을 받긴 했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그레일 보다 강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분명히 뛰어난 지도자가 될 것 이다. 총명하고 생각한 것을 뚝심 있게 실 있다. 하지만 그건 뛰어난 전사가 되는 것과는 전혀 별개였다. 국왕이 뛰어난 무사여야 하는 것은 전란 시대에나 들어맞는 말이 고, 평화로운 시대에는 오히려 현명한 인물이 국왕으로서 환영받는 법이다. 그러나 지금의 크리스타니아는 전란의 시대였고 그런 의미에서는 마리스보다는 또 하나의 은발인 타닐이 지도자로서 더 적합할지도 모 른다. 수많은 고초를 이겨내고 이곳까지 여행을 왔음에도, 신들의 회합 때 그 장소에 갈 수 없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분하기 짝이 없었 다. 자신이 선택받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에 불쑥불쑥 화가 나곤 했 다. 회합의 땅에 갈 수 없다면 신왕에게 도전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신왕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의사를 피력함으로써 신수들이 들고 일어 나도록 촉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셀의 말에 따르면 그것은 어리석은 행위에 불과했다. 그 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레일즈는 수도 없이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그 대답은 아직 찾지 못했다. 자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은 그렇게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신수의 어금니를 재건해야 할까? 그렇지 않으면 은빛늑대부족의 대부락 시레네를 베르디아군의 침 공으로부터 지켜내야 할까? 신왕을 쓰러뜨리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면, 그 일 또한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을 무리하게 찾으려 들지 말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착실하게 해내는 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예를 들면 사랑하는 여성과 함께 가족을 이룬다든가……. 자기가 싸우지 않아도 신왕이 멸망당한다면 그것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레일즈는 마리스의 옆모습을 살짝 바라보았다. 생각해 본 적도 없 는 일이지만 이곳 세계에 남아 은빛늑대부족으로서 그녀와 함께 살아 가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심한 구역질이 날 때까지 싸울 필요 없이 하루하루의 평온한 생활 에 몸을 맡긴다. 그것은 평화로운 세상에서는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 이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겁쟁이라고 지탄받는 일도 없을 것이다. 사 실 이런 전란 시대에도 전쟁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사실 수많은 신수민족 가운데 직업적으로 전사의 생활을 하는 사 람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족의 운명이 걸린 전투 가 기껏해야 수천 아니면 수만 명 정도의 규모로 치러지는 것이다. 그 정도 규모의 전투라면 이런 넓은 대륙이 아니라 북녘 바다에 떠 있는 고향의 섬에서도 여러 차례 있었다. 물론 마리스는 그런 편안한 생활에 만족하고 지낼 여성이 아니었 다. 은빛늑대부족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늠름하게 백성들을 거느려나갈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선택받은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한다 해도 태어난 혈통부터 다른 레일즈가 대신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레일즈가 할 수 있는 것이란 전력을 기울여 그녀를 도와주는 것뿐 이었다. 레일즈 일행이 가는 길을 구름 위로 높이 올라선 봉우리가 우뚝 막 아섰다. 길안내를 해주는 고고부족 젊은이의 말로는 그 꼭대기에 회 합의 땅이 있다고 했다. 그 꼭대기까지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의 산등성이가 이어지고 있었 다. 그곳이 회합의 땅으로 들어가는 바람의 봉우리였다. 살아 있는 바 람과 환수들이 자격 없는 자의 침입을 거절하는 길! 레일즈의 여행은 머지 않아 끝날 것이다. 그 뒤의 목적도 찾아내지 못한 채…….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15) 5 "기다리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레일즈는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 었다. 바람의 봉우리 입구. 크고 작은 돌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긴 했지만 비교적 널따 란 장소였다. 그 앞으로는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산길이 뻗어 있었고 좌우로는 경사가 급한 절벽이었다. 골짜기 밑에까지 거리가 얼마나 될지 짐작도 되지 않았다. 분명한 건 거기서 굴러떨어지면 뼈도 못 추 릴 것이란 사실이었다. 살아 있는 바람이라는 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런 장소에 서 거센 바람에 휘말리면 얼마나 위험할 것인지는 분명하게 알 수 있 었다. 멀리서 새 같은 것이 날고 있었다. 그것은 어쩌면 환수일지도 모른 다. 레일즈는 동료들을 물러서게 한 뒤 마리스와 함께 앞으로 나섰다. 정면의 바위 위에 거인처럼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양날검 공작 그레일이었다. 레일즈가 멀게 한 눈도, 절단한 팔도 완 전히 재생시켜 놓았다. 어쩐지 전보다 생각이 깊어졌다는 느낌이 드 는 그의 표정을 보고 레일즈는 그가 얼마나 단단히 각오하고 있는지 를 알 수 있었다. 그레일의 그런 각오를 느끼자 이상하게도 그때까지 레일즈 마음속 에 끼여들어 있던 혼란스러움이 사라졌다. 다행이었다. 강적과 싸울 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는 절대 이길 수 없다. 레일즈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가다듬고 검의 손잡이로 천천히 손을 옮겼다. 마리스에게 받은 은검 손잡이가 레일즈의 오른손에 익숙하게 잡혔다. 왠지 자신감이 느껴졌다. "같이 싸우자." 뒤에서 이살리가 말을 걸었다. "우리가 예지한 미래 속에 그레일에게 죽임을 당하는 광경은 없었 잖아." 그림자부족의 주술사 이살리를 처음 만난 것도 그레일을 공격하기 위해 거쉰 등의 백인대장과 동행했을 때였다. 그때도 아마 그레일에게 살해당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하고 동행했 을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그레일과 만난 일이 없었고 그랬기 때문에 그에게 살해당할 까닭도 없었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이살리가 그레일과 싸울 일은 없었다. "저 사나이는 내가 꺾겠어." 레일즈가 말했다. "도움은 필요 없어." 동료들이 나서려는 것을 레일즈가 손으로 막았다. "지금부터 내가 어떻게 살아가든 그레일과 결말을 지어야 해. 여기 서 나중에 후회할 행동을 하고 싶진 않아. 놈이 마음만 먹었다면 맹호 부족의 전사들을 끌어들여 사냥하듯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었어. 하 지만 놈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나도 그렇게 하지 않겠어." 여기 모인 동료들이 모두 함께 나서 싸운다면 틀림없이 그레일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우리 쪽에도 희생자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것도 한두 사람이 아닐 것이다. 그레일에게는 도약 의 능력이 있었기 때문에 거의 방비책이 없는 마술사들의 뒤쪽으로 돌아와 공격해 오면 단칼에 도륙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레일즈는 내가 해치우겠다고 선언하듯 말했던 것이다. "약속했잖아요. 이건 나의 하다고." 마리스가 원망스러운 듯 말했다. "마리스는 내가 지고 나서 싸워도 돼." "아직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인가요?" 정말 화가 난 목소리였다. "믿고 있어. 지금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마리스뿐이잖아. 내가 혼 자서 싸우는 것은 바로 그렇기 때문이야. 마리스는 절대로 그레일을 이길 수 없어. 그러니까 내가 이겨야만 돼. 그건 너를 지키기 위해서 야." 그렇게 말한 뒤 레일즈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나셀을 바라보았다. 이 마술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가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나셀은 레일즈를 바라보고는 있었지만 그 표정은 평상시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레일즈를 지지해 주는 것만은 분명했다. "나는 놈을 이길 수 있어." 레일즈는 마리스를 바라보며 힘차게 말했다. 숱한 생각이 그녀의 가슴속에서 오가고 있을 것이다. 마리스는 레일즈를 똑바로 바라보며 잠시 말문을 닫았다. "……레일즈님을 믿어요." 마리스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았는지 조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레일 즈를 꼭 껴안으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니까 절대 죽어선 안 돼요." "당연하지." 레일즈는 그녀를 뜨겁게 껴안으며 말했다. "시시한 연극은 이제 끝냈나?" 그레일의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레일즈가 뒤돌아섰다. "시시하다고? 너한테는 그럴지도 모르지. 그렇지만 복수하겠다고 떠돌아다니는 네가 훨씬 더 시시하지 않아?" 레일즈는 검을 든 자세를 제대로 취하지 않고 뚜벅뚜벅 그레일 쪽 으로 걸어갔다. 그레일도 바위에서 뛰어내려 다가왔다. 손에는 양손으로 쓰는 곡도 가 들려 있었다. 한 걸음 두 걸음 거리가 좁혀졌다. 다섯 걸음 정도까지 다가섰을 때 레일즈는 검을 눈 위로 똑바로 치켜들고 제대로 자세를 취했다. "간다!" 자세를 취함과 동시에 레일즈는 기합 소리를 질렀다. "오라!" 정정당당하게 맞붙는 1대1의 승부였다. 둘 다 기사는 아니었지만 사나이로서 그렇게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레일도 같은 기분인지 모른다. 레일즈는 검을 상단으로 크게 휘두르며 정면으로 내리치려 했다. 그레일은 그 공격을 대도로 가볍게 막았다. 칼날과 칼날이 부딪쳤다. 동시에 딱딱하게 담금질된 칼날이 부서지 며 조그마한 파편이 튀어올랐다. 그 중 하나가 레일즈의 턱 언저리를 파고들었다. 그레일의 뺨에도 붉은 줄이 그어졌다. 역시 파편이 튄 것이다. 레일즈는 그레일의 대도를 위에서 누르려고 했지만 그레일은 그 공격을 간단히 물리쳤다. '역시 힘으로는 안 되겠는데…….'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 여유가 있다는 것이 스스로도 믿 어지지 않았다. 마리스를 위해 싸운다는 생각은 곧 사라졌다.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계속 혼란스러웠던 생각들이 마치 거짓 말처럼 이 싸움에 집중되었다. 그렇지만 더욱 열심히 몸단련을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상대와 싸우든 그에 뒤지지 않는 힘이 필 요했다. 검술에서 완력이 차지하는 비율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 씬 큰 법이다. 레일즈는 훌쩍 뒤로 물러서서 다시 거리를 쟀다. "이번엔 내가 간다!" 그레일은 두 손에 든 곡도를 세차게 휘두르면서 레일즈에게 다가 섰다. 그 바람만으로도 뺨이 찢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빠르고 강한 공격이었다. 레일즈는 그레일의 곡도 다루는 솜씨를 끝까지 살 펴보며 오로지 반격의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그레일의 공격을 잠깐 잘못 판단한 순간 그의 칼끝이 레일 즈의 이마를 조금 갈라놓았다.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살이 갈라 지는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져 왔다. 부상을 당하고 나니 오히려 냉정해졌다. 반사적으로 반격 자세를 취해 그레일의 오른팔에 상처를 입혔다. 강인한 근육질에 검이 튀어 깊은 상처는 입히지 못했지만 상대의 움직임이 잠깐 멈추었다. 레일즈는 한 차례 견제를 위해 가볍게 검을 내밀었다가 드디어 상 대의 심장을 노리며 공격해 들어갔다. 그레일은 그 돌격을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앞가슴 왼쪽 끝으로 검 이 파고들었다. 그레일의 신음 소리가 들렸다. 적지 않은 상처가 났으리라. 그레일의 움직임이 이제부터 둔해지리 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로는 자신이 그레일보다 한 수 위라고 보았다. 얕은 상처라도 좋으니까 많은 상처를 입혀 그레일의 몸과 마음이 모두 소모되기를 기다렸다가 승부를 내야겠다고 결심했다. 레일즈는 그레일의 가슴에서 검을 빼고 다시 거리를 쟀다. 그때였다. 이마에서 흘러내린 무언가가 레일즈의 눈으로 들어갔다. 조금 전에 입었던 상처에서 흘러내린 레일즈 자신의 피였다. 왼쪽 눈에 격렬한 통증이 흘러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남은 오른쪽 눈을 한껏 치켜뜨고 그레일의 모습을 살피려 했다. 양 날검 공작은 마침 자세를 바로잡고 곡도를 휘두르며 달려들어 오던 참이었다. '피할 수 없어.' 레일즈는 순간적으로 판단했다. 눈 하나로는 원근감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찬찬히 상대의 공격을 살피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옆으로 구르면 상대의 공격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자세가 무너지게 되고 결국 일방적으로 공격당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레일 정도의 전사가 반격 의 기회를 내주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래, 여기서 승부를 내야 해.' 레일즈는 각오했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러고는 거의 무의식중 에 레일즈는 행동을 옮기고 있었다. 그레일이 지르는 승리의 포효가 멀리에서 들려왔다. 사이아의 비명 소리도 들렸다. "레일즈!" 그렇게 외친 사람은 마리스였다. 시간이 무척이나 천천히 흘러간 것처럼 느껴졌다. 새빨갛게 달궈진 쇠에 대인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왼쪽 팔과 어깨 로 밀려왔다. 그 고통을 참아낼 길이 없어 레일즈는 외쳤다. 외칠 수 있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증거임이 그때서야 느껴졌다. 그레일이 휘두른 검을 방패도 없이 왼손으로 막아내기 위해 최후 의 한 순간에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왼팔을 들어올렸던 것이다. 왼팔은 간단히 절단되었다. 여세를 몰아 그레일의 검은 왼쪽 어깻 죽지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예전에 그레일에게 입었던 상처에서 약간 옆으로 비 물론 그 깊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얕았다. 중상임에 틀림없었다. 그대로 내버려두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은 살아 있었다. 가까스로 통증을 참으며 레일즈는 자기 오른손으로 눈을 돌렸다. 오른팔은 똑바로 뻗어 있었다. 검도 확실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그 리고 그 은검은 눈앞에 보이는 사나이의 가슴을 완전히 관통하고 있 었다. 양날검 공작……. "이게 목적이었나?" 그레일은 눈을 치켜 떴다. 입에서 피가 넘치고 거친 숨이 쏟아져나 왔다. "글쎄. 피가 눈에 들어온 것은 나에겐 불운한 우연이었다. 공격해 오는 널 보고 승리가 멀어졌음을 알았다. 그러나 난 질 수 없었다. 그 래서……." "해서, 무승부를 노렸단 말인가……." 그 말과 함께 그레일은 땅바닥에 뻗어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일었다. 레일즈도 무너지듯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레일의 곡도는 아직도 레일즈의 왼쪽 어깨에 파묻혀 있었다. 그리고 레일즈의 검도 그레일의 가슴에 파고든 그대로였다. 마리스와 샤일론이 뛰어왔다. "치료해야 됩니다." 마리스의 소리가 들렸다. 레일즈는 그레일을 내려다보는 자세를 취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무승부는 진 것이나 마찬가지지……." 그레일은 눈을 뜬 채로 괴로워하며 말했다. "그렇지도 않아. 나에게는 생명이 두 개 있었기 때문에 그 중 하나 를 너한테 준다 해도 괜찮다고 생각했지……." 샤일론은 절단된 왼손을 팔에 붙여주면서 완치의 주문을 외웠다. "또 하나는 은발의 소녀 것인가?" 그레일의 비꼬는 듯한 물음에 레일즈는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그레일은 멍한 눈빛으로 레일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무승부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은 최후의 순간에 나도 알아챘 지. 검을 휘두르는 맵시가 날카롭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래 서 너는 살아남고 나는 죽는다."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보통이라면 즉사하 고 말았을 텐데." 레일즈의 검은 틀림없이 그레일의 급소를 관통했다. "이제 죽고 있는지도 몰라. 눈앞이 새까매지고 있어. 온 몸이 추워 지는군……." "양날검 공작……." 레일즈는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눈앞에서 죽어 가는 사나이에게 슬퍼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만 그때까지 잠들 어 있던 감정이 갑자기 눈을 떠서 그 감정에 북받쳐 흘러내리는 눈물 이었다. "왜 우리는 싸워야 했지?" "그건 운명이지. 우린 적이었기 때문에……." 그레일은 웃으려고 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입가로 나온 것은 선혈뿐이었다. 그레일의 최후가 가까워졌음이 레일즈에게도 확연히 느껴졌다. "이 사나이도 치유해 줄까?" 샤일론이 말을 걸어왔다. "아마 늦었을 거야. 게다가 이 사나이는 그런 걸 원하지 않아." 레일즈의 온 몸에서 고통이 사라졌다. 샤일론이 행해준 완치의 마 법은 레일즈가 입은 온 몸의 상처를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 중 에는 그레일에게서 최초로 입었던 상처도 포함돼 있었다. "안녕, 양날검 공작……." 레일즈는 그레일에게 말을 걸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레일의 가슴 은 아직 희미하게나마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대답할 만한 힘은 이 제 남아 있지 않았다. ―너는 졌다. 멀리 의식 저편에서 어떤 소리가 울려왔다. 그것이 신왕 바르바스 의 소리임을 그레일은 잠시 동안 알아채지 못했다. 빨리 쉬고 싶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인한 자신의 생명력이 오히려 한스러울 지경이었다. 이제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느끼는 것은 언제까지 이럴지 알 수 없는 추위뿐이었다. 온 몸의 피가 빠지고 찬물이 대신 흐르고 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이번 주기에서도 너는 이기지 못했다. 신의 음성은 계속 이어졌다. '그게 어쨌다는 말입니까?' 그레일은 마음속으로 말했다. '분명히 저는 졌습니다. 당신의 가르침을 지키며…….' ―내 가르침은 절대의 진리, 진 것은 너에게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음 주기에는 저 아닌 다른 사나이를 택하소서.' ―너는 뛰어난 전사이며 은발 소녀보다도 분명 강하다. 그럼에도 너는 패했다. 무슨 까닭인가. 너의 마음에 내 가르침에 대한 미혹이 끼여들었기 때문인가? '미혹?' 그레일은 자문해 보았다. 그런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려고 했을 때 떠오른 것이 있었다. '미혹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단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사옵니다.' ―무엇인가, 말해 보라. '복수는 타인과 공유할 수 없습니다. 목숨을 버린 사나이에게는 지 배의 법칙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 인간은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수 없을지라 도…….' 그 마음의 말에 신왕은 응답하지 않았다. 신왕의 의식은 멀리 사라 진 모양이었다. 그레일은 깊은 해방감에 젖어 있었다. 크리스타니아 창세 때부터 계속돼 온 영원한 윤회로부터, 지배의 신수왕인 바르바스의 가르침이 라는 유일무이한 속박으로부터……. '이제 주기 따위는 없어도 좋아.' 그레일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기원했다. 암흑신 패라리스의 사 제가 말하고 있었다. 죽음은 최후의, 그리고 궁극의 자유라고……. 그레일은 수없이 찾아들었던 인생을 통해 이제서야 비로소 자유를 얻었던 것이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16) 6 끝났다. 레일즈는 눈앞에 쓰러져 있는 그레일의 시체를 멍한 눈길로 내려 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정령사 비인이 대지의 정령 노옴에게 명령을 내려 땅을 파게 했다. 그레일의 시체를 매장하기 . 무언가가 끝났음에는 틀림없었다. 그러나 끝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무슨 일이 시작될 것인 지는 레일즈도 알 수 없었다. 이제부터 마리스는 회합의 땅을 향해서 가야 했다. 레일즈는 그녀 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려야 한다. 며칠을 기다리면 될까? 아니, 몇 달이 걸릴까? 그건 알 수 없었다. 물론 그 기다림이 설령 몇 년이 걸린다 할지라도 레일즈는 계속 기 다릴 작정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녀를 목적지까지 확실히 데려다준 뒤 은빛늑대부족 의 대부락 시레네로 갈 것이다. 그레일은 죽었지만 신왕 바르바스가 쓰러진 것은 아니었다. 신수의 어금니는 베르디아군에 커다란 피해를 입혔지만 그 군사력은 아직도 강했다. 크리스타니아의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므로 전사로서 살아가는 한 나아갈 길은 분명했다. 나는 은빛늑대의 백성이 될 수 있을까? 갑자기 그런 의문이 뇌리를 스쳤다. 은빛늑대부족은 나를 받아들여 줄까? 마리스와 함께 살도록 허락 하고 함께 싸우는 것을 허락해 줄까? 은발의 타닐이라면 인정해 줄 것이다. 그러나 정말 자신이 그것을 원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분명하지 않 았다. '나는 어디서 태어났지? 어디서 자랐지?' 그렇게 질문해 보았다. 레일즈는 신수민족이 아니었다. 다낭 왕국의 인간, 즉 신민족인 것 이다. 고향이나 가족을 버리는 일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정 말 좋단 말인가? 마리스는 은빛늑대부족을 버릴 수 있을까? 대답은 틀림없이 '아니오'였다. 은발의 사람이 지고 가야 할 숙명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을 것이다. 마리스가 레일즈에게 호의를 보였던 것은 레일즈 가 은발의 백성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닐까. 레일즈와 함께 있을 때 그 녀는 은발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은빛늑대부족을 버리지 않았다. 아니, 버릴 수 없었 다. 그러나 부족이라는 틀에 얽매여 지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총명 한 마리스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자신을 맹신하면 이기적인 인간이 된다. 부족을 맹신하면 다른 부족 사람들을 배척하게 되고 만다. 국가 를 맹신하면 이웃 국가를 두려워하거나 경멸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다. 레일즈는 주위 사람들이 자기를 걱정스런 눈길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억지로나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샤일론, 고마워. 기적의 힘은 정말 위대해. 절단된 팔이 이렇게 움 직이다니." 그렇게 말하면서 레일즈는 왼팔을 굽혔다 폈다 해 보였다. "기적의 힘을 제대로 쓴 거지. 그걸 파괴하는 힘으로 쓰는 게 바로 사신이지." 샤일론은 밧소와 나란히 레일즈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발 아 래 누워 있는 그레일의 시체를 두 사람이 들어올렸다. "정중하게 묻어줘……." 레일즈는 샤일론에게 머리를 숙였다. "적이긴 했지만 훌륭한 용사였어. 행운신의 가호를 입지 못해 시체 가 되고 말았지만 그 혼은 틀림없이 전쟁신 마일리가 구해 주실 거 야." "아니, 전쟁신의 종자가 바뀌었나?" 밧소의 얼굴에 어느 틈엔가 히죽거리는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 잘 생각해 보니 밧소는 상당히 오랫동안 저 표정을 짓지 않았다. "내 신앙심은 부동이지. 다만 참된 용사가 있으면 도와주고 싶다는 전쟁신의 가르침이 더욱 왕성해지는 거야. 원래 드워프족은 술의 신, 대장장이의 신, 전쟁신에 대한 신앙이 독실한 부족이거든." "네가 원래 괴짜였던가?" 밧소가 크게 웃었다. 레일즈도 함께 웃으며 두 사람과 함께 마리스 등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레일즈를 보고 마리스도 앞으로 나섰다. 그러나 무언가 생각 난 것처럼 뒤를 돌아보며 사이아를 손짓으로 불렀다. 사이아는 순간 얼굴을 숙였지만 이내 얼굴을 들고는 걸음을 내디 뎠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어갔다. 레일즈는 우선 사이아를 껴안고 이마 에 가볍게 입맞추었다. "다행이야. 난 레일즈가 당했다고만 생각했어. 주문을 걸려고 지팡 이를 막 휘둘렀는데……." 사이아의 눈에선 콩알만한 눈물이 뚝뚝 흘렸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툭하면 눈물만 흘리고." 사이아는 그렇게 말하고 등을 돌려 뛰어갔다. 나셀이 그녀를 부드 럽게 멈춰 세웠다. 그리고 레일즈는 마리스의 등뒤로 손을 돌려 그녀를 꼭 껴안았다. 마리스의 턱에 손을 대고 가볍게 얼굴을 들게 했다. 그러곤 무엇보다 도 맑고 깨끗한 마리스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마리스의 손이 레일즈의 몸을 감았다. 말은 필요 없었다. 이대로 시 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이 맴돌았다. 그러나 이 세계에 시간은 없었다. 존재하는 것은 무너져 내린 주기 뿐이었다. 시간을 멈추기 위해서는 우선 시간을 움직이게 해야 했다. "회합의 땅으로 가야 해요." 마리스는 조용히 말했다. "사실은 함께 가고 싶지만 이번에는 내가 마리스를 믿고 기다릴 차 례야." "괴롭겠지요." 마리스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성녀의 미소가 아닌 장난꾸러기의 미소였다. 그때였다. ―기다릴 것 없어요. 갑자기 어떤 음성이 들렸다. 헛소리를 들은 것 같아 놀랐지만 누군 가가 레일즈의 마음에 말을 걸어왔다는 것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신지?' 레일즈는 목소리의 주인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레일즈의 변화를 눈치채고 마리스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도 말을 잃었다. 눈동자가 한껏 열렸다. 그 눈동자 가운데 순백색의 무언가가 비치 고 있었다. 레일즈는 뒤를 올려다보았다. 처음에 그것은 한 조각 구름처럼 보 였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알 수 있었다. 새였다. 그것도 보통 새가 아닌 대백조였다. "대백조?" 모두가 침을 꿀꺽 삼키며 그 아름다운 새를 바라보았다. "혹시 저건……." 나셀이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 말았다. 대백조는 원을 그리며 천천히 내려오더니 널따란 바위 위에 아무 런 소리를 내지 않고 착지했다. 그러고는 말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은 후지. 순백의 존재, 영혼의 인도자, 그리고 다낭의 대지 를 수호하는……." 이번에 하는 말은 마음이 아니라 귀로 들렸다. "어떻게 당신께서 이런 곳에?" 레일즈는 지금까지 신수를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었다. 신수 후지의 자태는 다낭에 사는 대백조와 다를 바가 없었다. 크기 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온 몸에서 은은한 빛이 비치고 환각의 마법으로 만들어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 빛을 쏘이면 신비로운 감정에 사로잡혀 마음이 꽉 차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여러분과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수호하는 대지의 백성, 레일즈여. 회합의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는 신들의 회합에 참석하기 위해 시작의 땅을 향해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왜 제게 말을 거셨는지요?" "아니에요, 말을 건 쪽은 당신입니다. 당신이 내놓은 마음의 소리가 내게로 도달한 것입니다. 당신의 소중한 은빛늑대 소녀와 함께 회합 의 땅에 가고 싶다고……." "제가 그런 생각을?" 마음속으로 그런 생각은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수에게 들릴 정도 로 강렬했는지는……. "난, 아니 저는 당신의 종자가 아닙니다." 레일즈는 어리둥절해 하며 말했다. 하나의 신을 믿으려고 생각했던 적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다. 별 다른 이유는 없었다. 계율이라든지 금기 따위에 속박당하ㅊ것이 싫 었기 때문이었다. "잘 알고 있어요. 나는 종자로 삼은 부족이 없어요. 다낭 왕가의 정 통이 끊어져 있는 지금으로서는……. 그렇지만 그건 슬퍼하기만 할 일은 아니지요. 나의 대지에는 왕국이 번성하고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어요.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나는 당신이 태어 난 것도 또 자라는 과정도 보았어요. 그리고 루미스의 결계가 열린 길 을 통해 이곳 크리스타니아로 올라가는 것도 보았지요. 그리고 이곳 땅에서 수많은 곤란과 싸우며 마침내 이겨왔던 것까지도." "그러니까 데리고 가준다는 말입니까?" "단지 그것만은 아닙니다." '그것만은 아니라고?' 레일즈가 마음으로 하는 말에 백조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레일즈가 물었다. "당신을 데리고 가는 것이 나에게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제가 필요하다구요?" 레일즈는 격렬하게 머리를 흔들며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 나 신수 후지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당신이라는 존재, 당신의 생각이야말로 아주 오랜 옛날 내가 찾아 냈던 답이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다낭을 크리스타니아에서 떼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우리 백성들은 멸망하는 운명 을 맞았지요. 그건 정말 슬프기 짝이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내린 결론이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그 해답의 하나로서 내가 찾아냈던 것이 옳았다는 것을 다른 신수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요. 그러기 위해서 당신이 필요하답니다." 대백조의 눈동자가 조용히 레일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일즈는 도움을 구하듯 마리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은발의 소녀 는 미소 짓다가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함께 가시지요." 그 말에 레일즈는 결심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것은 진실로 자신이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한 가지 점만은 분명히 해두고 싶었다. "당신은 저를 죽 살펴왔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단지 바라보기만 했 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제 삶이 당신의 손바닥 안에서 춤춰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당신의 날개 밑에서 보살핌을 입어 지내 왔다는 말은 아닙니까?" "이렇게 말하면 당신의 기분이 나빠질지도 모르는데……." "알려주십시오." "나는 그저 지켜보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대백조의 대답에 레일즈는 마음이 놓였다. 크리스타니아에 올라오 고 이곳에서 온갖 경험을 한 것이 만일 신수에게 이끌리고 보살핌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까지의 자신의 행동에 무엇 하나 자부심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부탁드립니다. 나를, 아니 저를 회합의 땅으로 데려가 주십시오." 레일즈는 정중히 머리를 숙였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17) 7 바람의 봉우리를 올라와 레일즈와 마리스가 회합의 땅에 도착한 것은 그레일과 싸운 지 사흘이 지난 아침 나절이었다. 회합의 땅에는 먼저 온 손님 수십 명이 모여 있었다. 크리스타니아 각지에서 보내온 먹을거리가 많이 준비되어 있어 누 구나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가 있었다. 그리고 돌로 지은 작은 집이 죽 늘어서 있어 거기서 얼마든지 잠자리를 마련할 수 있었다. 신수들도 모여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누구 하나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다. 신수들이 모이는 장소는 회합의 때까지 결계로 둘러쳐져 있었고, 인간들은 그 안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약속이 되어 있는 듯 했다. 대백조의 백성으로서 레일즈는 회합의 땅에 참가하고 있었다. 그러 나 대백조 신수의 의사를 대변할 생각은 없었다. 신수 후지는 레일즈의 존재야말로 자신의 의사이며 의견이라고 말 했다. 그 말의 의미에 대해 레일즈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봤지만 잘 알 수가 없었다. 말하고 싶은 것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정리 해서 명쾌한 의견을 낼 수는 없었다. 성지에서 보내는 나날은 꿈결처럼 지나갔다. 회합의 땅은 모든 의 미에서 인간의 세계가 아니었다. 지고신 패리스의 사제가 말하는 천 국에 가까운 장소였다. 굶주리는 일도 없고 목 마를 일도 없었다. 더위는 말할 것도 없고 추위도 없었다. 신수들의 힘이 자연이 내는 정령의 힘을 완전히 조화 시키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곁에는 언제나 마리스가 있었다. 마리스와 레일즈는 같은 건물에서 자고 일어났다. 사이아 일행은 바람의 봉우리 입구에 가장 가까운 고고부족의 부 락에서 집을 빌려 레일즈 일행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사이아 일행처럼 선택받은 사람을 호위해 온 각 부족의 전사들도 몇몇 부락 으로 흩어져 체류하고 있었다. 아래의 인간 세상에서는 추위가 아주 극심할 것이다. 이 부근 일대 에는 눈은 내리지 않을 것으로 보이지만 그만큼 뼛속까지 스며드는 추위가 밀려들 것이다. 회합의 때가 언제 시작될지는 이곳 성지에서 대기하는 사람들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하루 하루 지나면서 성지로 찾아드는 선택받은 사람의 수 가 늘어났다. 모두 신수 부족의 대표자로서 복장이나 장식품 등이 저 마다 달랐다. 마리스가 알고 있는 얼굴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결계부족의 족장이나 고고부족의 예비 족장 등 이름이라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몇 되었다. 마찬가지로 마리스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사람들은 그녀의 머리카락 색을 보고는 그녀가 어떤 부족에 속하는지 즉시 알 아채곤 했다. 몇몇 부족의 대표자가 마리스에게 면회를 요청해, 주기의 신수왕 부족의 의사에 대해 물어왔다. 마리스는 그때마다 애매하게만 말할 뿐,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 또한 은빛늑대부족의 총의를 받아들여 이곳에 온 것이 아니 었기 때문에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레일즈가 마리스 곁에 서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부족의 대 표자도 있었다. 어디서 왔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땐, 대백조부족이라 고 답하고 적지를 여행하기 위해 행동을 함께 했을 뿐이라고 설명해 두었다. 이곳 크리스타니아 최대의 제전에서 레일즈야말로 극히 이색적인 존재였다. 그러나 그런 사람이 자기 혼자만이 아님을 레일즈는 그곳 에 온 지 열흘째 되는 날 확실히 깨달았다. 그 인물은 마리스에게가 아니라 레일즈에게 면회를 원했다. 아무리 낮춰보려 해도 그는 기품이 넘치는 얼굴의 사나이였다. 나이는 서른 살 전후로 보였다. "대백조부족의 대표자란 사람이 자넨가?" 사나이는 갑자기 그렇게 물었다.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나이의 태 도에 레일즈는 화가 났다. "그렇다. 그런데 당신은 어떤 부족의 사람인가?" "실례했네. 너무나 젊어 보여 그만 놀라고 말았네. 하긴 뭐, 나도 거 만하게 굴 나이는 아니지만 말일세." 사나이는 자신이 무례했음을 사과하고 레일즈와 마주하듯 자리에 앉았다. "나는 진홍부족을 대표하는 사람이라네. 이름은 레이든.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레일즈는 막 목으로 삼킨 과일즙을 하마터면 토할 뻔했다. "당신이, 레이든이라고요?" 레일즈는 놀란 눈으로 바로 앞의 사나이를 쳐다보았다. 기품이 있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왕가의 직할령인 하크 마을 영주 의 아들이며 다낭 왕국 선왕의 배다른 동생인 하벤 공의 외아들이었 다. 왕위 계승권으로 말하자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였다. 이곳에 와서 레이든을 만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나 조 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만나는 것도 당연했다. 레이든은 진홍부족의 황제였다. 순위로 볼 때 이곳에 오는 것이 당 연한 응菅걋ㅍ것이다. "난 이름을 이미 말했네만." 레이든이 레일즈에게 이름을 말해 달라는 표시를 했다. 이번에는 레일즈가 무례를 사과할 차례였다. "제 이름은 레일즈입니다. 기억하지 못하실지도 모르지만……." 레이든은 잠깐 침묵하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 레일즈 말인가? 랏셀의 아들?" 레일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든의 표정으로 볼 때 레일 즈에 대한 증오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과거를 그리워하는 듯 한 분위기였다. "그런가, 그때 그 어렸던 사내아이가 이렇게 컸단 말인가. 기억하다 마다 레일즈. 자네는 자주 나셀네 집으로 놀러 왔었잖나. 그의 여동생 과 잘 어울려 놀았지. 장난을 치다가 브라이언 노인에게 혼난 적도 있 고……." 어느새 레이든은 다낭 말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이야기는 그만두시지요." 레일즈는 당황해 하며 레이든의 말허리를 잘랐다. 레일즈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는 사람과는 흔히 이런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되 기 때문에 말을 나누기가 힘들었다. 개구리로 변했을 때의 그 처참한 기분은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랏셀! 자네 아버지는 다낭의 왕이라도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으 면 제시스 공주와 자네가 결혼이라도 했는가? 그렇지 않다면 대백조 후지가 종자로 인정해 주지 않았을 텐데." 레이든의 표정이 갑자기 싸늘해졌다. "다 아닙니다. 제 입장은 당신과 마찬가지입니다. 다낭으로부터 크 리스타니아로 오르는 길이 열려 동료들과 함께 올라왔습니다. 이곳에 서 여러 사건들과 부딪치며 지내오다 신수 후지가 마지막에 데려와 준 것입니다. 나는 신들의 회합에 참석하고 싶었습니다. 신왕 바르바 스에 대해 신수들이 어떤 판단을 내릴지 알고 싶었기 때문에……." "자네는 이곳 세계에 대해 여러모로 잘 알고 있는 모양이군." "어느 정도는요. 레이든님에 대해서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 다. 대백조 백성이라고 스스로를 밝히는 사람이 진홍부족의 황제가 되어 신왕과 싸우려 하고 있다고 말입니다. 저는 레이든님이 개척해 놓은 길을 통해 여기까지 간신히 온 것에 불과합니다." 레일즈는 이곳 세계에 오기까지의 경위와 오고 나서의 사건들을 간단히 정리해서 레이든에게 이야기했다. 레이든은 레일즈의 이야기를 조용히 끝까지 들어주었다. 그 이야기 를 다 듣고 나더니 레이든은 자신의 오른손을 내밀었다. 레일즈는 잠시 동안 레이든이 자기에게 악수를 청하고 있음을 깨 닫지 못하고 있었다. 레일즈 곁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마리스가 살짝 꼬집어 주자 비로소 눈치채고 레이든의 손을 잡았다. "누군가가 내 뒤를 이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 사람이 자네가 되 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네. 다낭에 남아 있었더라면 상급 기사의 아 들로서 부와 권력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을 텐데." 레일즈는 반론을 펴지 않았다. 크리스타니아로 오르는 길이 열리기 바로 전까지만 해도 레일즈는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신의 성벽이 열린 것을 눈앞에서 보았을 때 레이든이 지적 했던 부와 권세 따위는 레일즈에게 이미 빛바랜 것들이었다. 그리하 여 미련 없이 이곳 세계로 찾아들었던 것이다. "저희 부친을 미워하지 않으십니까? 말리드 재상을 쓰러뜨리고 싶 지 않으십니까? 제시스 공주는 유폐된 채로 있고 다낭 왕국의 실권은 재상 일파가 완전히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랏셀도 말리드도 아버님의 원수들이지. 밉지 않을 리가 없 다네. 기회가 있다면 쳐부수러 가고 싶네. 그러나 복수를 위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다낭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고 그걸 위해 처단해야 된다면 당연하다고 보네만." "다낭을 변화시킬 필요가……." 레이든은 무심하게 그 말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일즈는 그 의 말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레이든님은 다낭을 바꿀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모르겠네. 다낭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모르고 있으니까. 게다가 지금 나는 해야 할 일이 있네. 진홍부 거느리고 이 혼란한 시대를 타고 넘어야 한단 말일세. 그들을 조직해서 베르디아군에 대항해야 하고. 신왕이 쓰러진다고 해도 베르디아군이 건재하면 결국 똑같은 혼란이 계속될 걸세." 신왕을 쓰러뜨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레이든은 알고 있 었다. 그리고 그들을 믿었다. 물론 그들이 실패했을 때는 자신의 힘으 로 신왕과 대결할 생각이었다. 레이든과 함께 행동한 여섯 젊은이는 서로 다른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져 갔다. 그러나 흩어진 서로서로에 대해 진정한 믿음을 갖고 있 었다. "레이든님은 스스로 나아가야 할 길을 찾으셨군요." 깊은 존경심이 담긴 레일즈의 말이었다. 레이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게 모든 사람에게 올바른 길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내가 만일 틀렸다면 누군가가 나에게 이견을 내고 나를 멈춰 세우겠 지." 레일즈는 대답하지 않았다. 레이든이 지금 하는 말은 레일즈가 보 기엔 결국 자기 자신에게 던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일즈는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언가를 성취하려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걸 저지하려 드는 사람과 부딪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 게 지지받는 일이란 존재할 수가 없다. "언젠가 자네와 싸우게 될지도 모르겠군."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도 나아갈 길이 있으니까요." 레일즈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자신을 생각하며 겨우 물어물어 제자리를 찾아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회합의 때가 이젠 얼마 안 남았겠지. 짧은 휴식이나마 서로 즐겁 게 지내도록 하지 않겠나? 회합이 끝나면 쉴 짬이 없어질 테니까 말 일세." "물론이지요." 레일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된 음료 가운데에는 술도 있었을 것이다. 선배격인 레이든과 술 한잔 나누는 것도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옛날 이야기는 하지 않도록 하죠." 레일즈의 말에 레이든이 즐거운 낯빛으로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18) 8 회합의 때가 찾아왔다. 그때까지 절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갑자기 레일즈 일행이 머물던 장소보다 훨씬 넓은 공터로 변했다. 결계가 풀렸음에 틀림없었다. 다낭 왕성의 안마당을 열 개 정도 모아 놓은 규모의 광장이었다. 지면은 모두 똑같은 재질의 돌로 이어붙여져 있었는데 그 이음매가 전혀 보이질 않았다. 이 성지를 만들기 위해 신수들은 바위산의 꼭대기를 잘라낸 것이 아닐까? 레일즈는 그런 상상에 사로잡혔다. 광장에는 거대한 석상이 무수히 늘어서 있었다. 왕성의 망루 정도 의 높이로 아주 우아하게 보였다. 석상은 짐승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신수들 본래의 모습입니다." 망연히 석상을 올려다보는 레일즈에게 마리스가 가르쳐주었다. "신이었던 무렵의 신수들인가?" 레일즈가 신음 소리를 뱉어내듯 말했다. "신들이 버린 육체가 그대로 석상이 되었다고 하지요." "원래대로 돌아갈 순 없는가?" "만일 돌아갈 수 있었다면 신왕이 인간의 그릇을 찾으러 다니는 일 은 생기지 않았겠지요." "그건 그렇군."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코흘리개 애들도 알 만한 이치였다. 신상의 거대함과 장엄함에 압도되어, 사고능력이 마비되었는지도 모른다. "신수입니다." 마리스가 주의를 주는 바람에 레일즈는 정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석상이 서 있는 광장 안쪽으로부터 짐승의 모습을 한 신들이 천천 히 밖으로 나왔다. 말의 신수가 있었다. 사자의 신수도 보였다. 까마귀의 신수도 있었다. 하늘을 헤엄치는 고래의 신수까지 모습을 나타냈다. 세상의 모든 짐승의 육체를 신수들이 저마다 그릇으로 삼았던 것 이다. 다낭 사람들이 보았다면 필시 마물들의 행진으로밖에 여기지 않았 을 것이다. 그러나 수인들은 대백조 후지와 마찬가지로 은은한 빛에 감싸여 있었다. 빛으로 빚은 엷은 의복을 걸친 듯한 모습은 그들이 인 간을 초월하는 존재임을 실감나게 해주었다. 레일즈는 자연스럽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리스도 그렇게 했다. 이어서 각 부족을 대표해서 모여 있던 사람들 모두가 차례대로 엎드 려 절했다. "한 차례의 주기는 이미 맴돌아……." 육중한 신의 음성이 울려퍼졌다. 은빛 모피를 덮어쓴 늑대의 신수였다. 주기의 신수왕, 신수왕의 우 두머리인 삼림의 은빛늑대 페네스였다. 곁에서 다소곳하게 자리잡은 마리스가 침을 꿀꺽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새로운 주기가 시작되는도다." 나머지 신이 그 소리에 응했다. "다음번 주기는 어떻게 정하여야 하는가?" "바라는 바 있다면 이야기하라." "나, 그것을 인정하리라." "아무쪼록 안다면." "나, 그걸 조정하리라." "잠자는 기초의 사자에게 감사를!" "몽환의 샘 파수꾼에게 위로를!" "밖에서 벌어지는 혼돈을 배제하고!" "안에서 벌어지는 사악을 멸하고……." 신수들의 노래는 계속 이어졌다. 제전의 시작다운 의식이었다. 그러나 그 노래의 허무함을 신수들도 느끼고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의식이 끝나자 신수들의 육체를 덮고 있던 휘황함이 저마다 마음먹은 방향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한 줄기씩 석상으로 들어갔다. 휘황함이 쏟아져들어간 석상은 선명한 색으로 바뀌더니 동시에 은 은한 빛을 내뿜었다. "바르바스는 어디에 있지?" 레일즈는 이리저리 바르바스를 찾았다. 남겨진 그릇에 인간의 모습 이 있을 터였다. 그러나 발견되지 않았다. 바르바스는 이 회합에 나오지 않을 생각이었나? "나의 종자들이여…….!" 신수왕 페네스의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신이었을 무렵의 모습을 보니 생각했던 도 중성적인 인상을 받았다. 페네스는 밤의 빛, 곧 달을 섬기는 신이었을 것이다. 태양신이기도 한 지고신 패리스와 암흑신 패라리스와는 형제간이 며 신격의 높이로 볼 때도 이 두 신과 필적했다. 신수가 돼 있지 않았더라면 다낭이나 고향의 섬에서도 거대한 교 단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대들의 생각을 우리에게 고하도록 하라. 우리는 그대들의 생각 을 존중하리라. 그대들 종자를 위해 우리는 이 세계를 창조했느니… …." 페네스의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순서에 따라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아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말로 해야 한다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레일즈는 미 리 말을 꾸며 놓느라고 머리를 굴렸다. 그 순간 머릿속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그대는 대백조의 종자인가?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물었다. '그렇다.' 대답하려고 했을 때 머릿속이 흐리멍덩해졌다. 무언가가 머릿속을 마구 휘저어놓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을 때의 감 각과 비슷했다. 자기 의사가 자기 것이 아니고 다른 장소에서 자기 의 사를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신수들이 레일즈의 마음 구석구석까지를 검사하고 있는 것 이리라. 신수들은 인간이 쓰는 말처럼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을 살핌 으로써 종자들의 의사를 완전히 이해하려고 했다. ―이것이 그대의 생각인가……. 말을 걸고 있는 상대가 어느 신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생각을 읽어들였는가? 나는 모르겠다. 그러나 아마도 그럴 것이다.' ―너는 주기를 부정하고 있다. ―너는 질서를 부정하고 있다. ―너는 혼돈을 부정하고 있다. ―너는 지배를 부정하고 있다. ―너는 결계를 부정하고 있다. ―너는 전쟁을 부정하고 있다. 서로 다른 신들의 음성이 차례차례 머릿속에 울렸다. "그만둬." 레일즈는 절규했다. 머리가 터질 듯이 아팠다. ―너는 암흑신 패라리스를 부정하고 있다. "나는 결심했다. 암흑신이 말하는 자유는 무질서다. 스스로를 경계 하는 마음을 버리고서는 혼돈과 사악만이 횡행하게 된다." ―너는 신을 부정하고 있다. 한 신이 단정하듯 말했다. 그 음성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건 바 로 대백조의 신, 곧 후지의 목소리였다. "그렇……습니까?" ―그대가 긍정하는 것은 인간뿐. 후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에게서 선택받은 자, 그러면서도 나의 종자가 아닌 자. 그 생각 이야말로 내가 증거하는 답이다. "그러나 신은 필요합니다.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것은 마리스가 신 수 페네스의 능력을 사용해 준 덕분입니다. 왼팔이 움직이는 것은 행운신의 치유의 마법 덕분입니다. 신앙을 선한 일에 쓰는 사람도 많고……."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반론을 펴고 있었다. 대백조의 신수가 지 적했던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다. 신들의 눈앞에서 이보다 더 불손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대에게서 신들은 인간에게 봉사하는 존재. 정령이나 마력과 다 를 바가 없구나. 세계의 주인이 인간이라면 그 말도 당연하리라. 그리 고 우리는 이 물질계를 창조했을 때, 너희들 인간을 이곳 세계의 주인 으로 삼았다. 그러나 우리는 미완의 세계를 그대들에게 맡겨두고 싶 지는 않았다. 그런 까닭에 이곳 크리스타니아에서 완전한 세계를 창 조하고자 했노라. 그러나……. 거기서 신수 후지의 의사는 잠깐 끊어졌다. "계속해 주십시오!" 레일즈가 당황해 하며 외쳤다. ―그대들 인간은 미완의 세계에서도 살아갈 수 있었다. 크리스타니 아로부터 떨어져 세계 전체를 내려다보았을 때, 거기에 펼쳐진 것이 불모의 황야는 아니었다. 수많은 인간들이 살고, 또 그보다 훨씬 많은 동식물이 생명체를 이루고 있었다. 그대들은 홀로서기에 성공해 있었 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후지!" ―그대들의 생각은 남김 없이 받아들이겠다. 이 뒤로는 우리들이 결정하는 것……. 그 말을 끝으로 신수 후지의 의사는 사라졌다. 레일즈는 전신의 힘이 빠져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갑자기 주위를 보니 마리스가 땅바닥에 누워 있었다. "마리스!" 불안에 빠져 레일즈는 그녀의 몸을 흔들어보았다. 그 눈에 눈물이 어려 있었다. "무서웠어요……." 마리스가 말했다. 레일즈도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가 두려웠던 것이 아니었다. 두려 웠던 것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었다. "인간은 마음 깊숙한 곳에 혼돈을 품고 있지. 사악한 의사를 숨기 고. 대개는 그것을 살피지 못할 뿐. 아니, 살피려 하지 않을 뿐이겠 지." 갑작스런 말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레이든이 어슬렁거리는 발걸음 으로 가까이에 다가와 있었다. 그 말은 진실이라고 레일즈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하늘을 올려보았다. 석상은 빛을 잃고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신수들의 혼은 회합의 땅 하늘 높이 함께 모여 오만 가지의 영롱한 색으로 떠 있으면 서 마치 태양처럼 빛을 뿌렸다. "신수들은 어떤 결론을 내렸을까?" 레일즈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결론이 날 수 있을까. 그들도 인정해야 하겠지. 인간의 마음 깊숙 이에 혼돈과 사악이 둥지를 틀고 있는 것처럼 세계의 바닥에도 같은 것이 잠들어 있겠지. 그것을 억누를 수는 없지. 완전한 세계는 그러니 까 존재할 수 없는 거겠지. 완전한 것이 있다면 세계의 시작 무렵에 있었다는 태초의 거인뿐이겠지. 그것이 부서져 이 세계가 탄생했으므 로 이 세계는 완전할 수 없는 것이지." 레일즈는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창세 신화를 알고 있으면 분명하게 그 이치를 납득할 수 있었다. 태초의 거인 '위대한 하나'는 완전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것이 죽 어 신들과 용, 고대수 등의 태고 종족이 태어났으므로 만능의 신들이 라 할지라도 완전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더욱이 그 모든 논란 자체가 쓸데없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완전한 세계여야 할 크리스타니아의 질서가 무너지 사실이 곧 신들의 불완전함을 나타내고 있지 않은가? "완전하지 않아도 좋지 않은가……." 레일즈는 중얼거렸다. 그 말에 놀랐는지 마리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그래도 좋을까요?" 레일즈는 그녀의 어깨를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좋아." 레일즈가 웃는 얼굴로 답했다. "작은 완전보다도 위대한 불완전을 우리는 소중히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레일즈는 다시 머리를 들어 신들의 회합을 바라보았다. 신들의 의 사가 모인 빛의 덩어리는 아직 방향을 잡지 못한 듯 깜빡이고 있었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끝) 에필로그 신들의 회합은 끝났다. 신왕이 회합의 땅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된 것은 신들의 회 합이 있은 지 훨씬 뒤의 일이었다. 신왕은 잠들어 있었다. 고지자 아르케나의 예언대로였다. 세계를 본 현자 나셀이 믿었던 대로이기도 했다. 신들의 회합은 레이든이 예상하던 대로였다. 다음 주기를 어떻게 할지 신수들 가운데 어느 하나가 정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결정은 종자인 인간들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신수왕 페네스는 주기의 포기를 선언하고 크리스타니아 대지는 바 다 높이까지 내려앉았다. 루미스의 결계 곧 신들의 성벽이 완전히 열리게 되었다. 신수들은 각자의 종자에게 세계가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를 증거하 라는 신탁을 주고 신들 상호간에 인간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맹 약을 나누었다. 신수민족은 낭패감을 느꼈을 것이다. 지금처럼 정해진 생활 방식을 보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스스 로 결정해야만 했다. 레일즈는 회합의 땅에서 진홍의 황제 레이든과 헤어졌다. 세계를 본 현자 나셀은 레이든과 동행해서 러브래들 지협지대 쪽 으로 견문을 넓히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근위기사 노르바는 다낭으로 돌아갔다. 이곳 세계에서 벌어진 일들을 말리드 재상과 근위기사단장에게 보 고하기 위해서였다. 노르바는 또한 레일즈가 아버지 랏셀에게 보내는 편지도 함께 가지고 갔다. 그 편지에 쓰여 있는 내용을 알았다면 노르 바는 등골이 오싹했을 것이다. 그림자부족의 주술사 이살리는 노르바와 함께 다낭으로 향했다. 다 낭 왕국의 동향을 지켜봄으로써 신수 아르케나의 미래 예지를 보다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레일즈는 사이아, 비인, 샤일론, 밧소 등 네 명과 함께 은빛 늑대의 대부락 시레네로 향했다. 은발의 마리스를 잘 데려다 주기 위해서였다. 그 뒤에 어떻게 할 것인지는 다시 한 번 의논을 해서 결정하기로 했다. 부드러운 피부가 레일즈의 가슴속에 있었다. 창문을 통해 비치는 달빛이 쏟아져 레일즈의 눈앞에는 은빛 바다 가 은은히 빛나고 있었다. 수천, 수만의 빛살이 마치 빛의 거품처럼 넘실거렸다. 레일즈는 그 바다의 물을 손으로 떠 올렸다. 너무나 부드러운 그것 은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져 내려가 은빛 폭포를 이루며 흘렀다. "마리스……." 레일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건네었다. 잠들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내는 숨소리가 너무 나 조용했고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가슴은 천천히 위 아래로 움직 이고 있었다. 그 가슴의 움직임이 레일즈의 뺨에 그대로 느껴졌다. "왜요?" 대답을 해오리라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레일즈는 잠깐 당황했다. 마리스의 머리가 움직였다. 그녀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이 리라. "이제 날이 밝으면 제 곁에 안 계시겠군요……." 레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스의 목소리에 슬픈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다. 마리스와는 정말 여러 날에 걸쳐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거기서 나온 결론이었던 것이다. 서로간에 충분히 납득했다. 마리스는 족장으로부터 부족의 예비 족장을 맡으라는 요구를 받았 고, 그렇게 하기로 했다. 또 한 사람의 은발전사 타닐도 함께 하기로 했다. 족장은 은퇴하고 메일렌의 탈리오가 족장이 되었다. 새로운 체제 아래 은빛늑대부족은 단결하여 부족의 토지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개시하는 것이다. "다낭 왕국과 은빛늑대부족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은 참을 수 없어. 나에게 다낭은 고향이야. 그리고 나는 은빛늑대부족의 예비 족장을 사랑하고 있다." 나라를 위해, 부족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다 만 레일즈 혼자서 마리스와 맺어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은빛늑대부족이건, 다낭의 백성이건, 또 다른 부족이건, 어떤 민족 이건 좋다. 사랑하는 남녀가 있다면 그 누구도 배척당하지 않고 인연 을 맺을 수 있고 모든 사람의 축복 속에 한 가정을 이루는 것. 이곳 크리스타니아가 그런 세계가 되기를 지금 레일즈는 간절히 바랐다. 그걸 바라는 사람이 레일즈 한 사람뿐이라면 그 소원을 이루기 위 해 달려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주기가 끝나고 나면 어떤 세계가 올까요……." 마리스가 속삭였다. "나도 모르겠어. 그렇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있어. 그건 이 곳 크리스타니아가 이미 배를 띄웠다는 사실이야. 그리고 표류하고 있어. 어디로 갈지를 결정하는 것은 물결도 바람도 아니야. 배에 타고 있는 우리들 자신이지." 레일즈의 손에는 표류하는 배의 키가 잡혀 있다. 신천지에 닿을 때까지 그 키를 놓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저기 목표로 삼은 대지가 보인다. 레일즈의 팔 속에서 용기와 따뜻함을 전해주는 은발의 소녀. 이제 더 이상 방황하는 일은 없으리라. <표류전설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