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 ...(6) 제2장 저마다의 재회 1 양날검 공작이 추적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해졌다. 저녁 식사를 위 해 과일이나 산나물을 따러 간 사이아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는 그 레일의 모습을 발견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거리는 대여섯 걸음 정도 로 그레일 쪽에서 사이아를 눈치채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 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천천히 저녁을 즐겼다는 것이다. 아직 한쪽 팔과 한쪽 눈을 재생하지 않은 상태라서 왼손만을 사용해서 통째로 익힌 고기를 먹고 있었다고 했다. 사이아는 순간 경직되었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는 레일즈가 있는 곳을 향해 뛰어왔다. 그녀의 말을 듣고 레일즈 일행이 현장으로 달려왔을 땐 이미 그레 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짐승 뼈다귀 같은 찌꺼기들만이 여 기저기 흩어져 있을 뿐이었다. "왜, 그레일은……." 레일즈는 답을 구하듯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양날검 공작의 기묘한 행동을 설명할 수가 없었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요." 마리스가 의견을 냈다. 그러나 그녀도 자신 있게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놈은 복수를 맹세하고 있어. 우리한테 틈이 엿보였다면 덤벼들었 어야 하잖아." 레일즈는 시계추처럼 같은 장소를 여러 번 왔다갔다했다. 그레일은 신수들의 눈앞에서 끝장을 내려는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쪽이 마음 푹 놓고 있을 때 기습해 올지도 모르는 일이 었다. "어쨌든 사이아를 그대로 보내준 것에 대해서는 그레일에게 고마 워해야겠는걸. 우리들을 곤란에 빠뜨리고 싶었다면 사이아를 잡아다 가 못살게 굴거나 죽이려고 들었을 거야. 인질로 삼는 것도 가능하지. 그레일이 정정당당한 싸움을 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레일즈의 말에 사이아가 새삼스럽게 창백한 얼굴이 되었다. "부자유스럽겠지만 가급적 모두 함께 행동하는 수밖에 없어. 먹을 거리를 마련하는 데 힘이 더 들겠는걸. 회합의 때까지 아직 여유가 있 지?" "그럴 거예요." 레일즈의 물음에 마리스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마리스는 은빛늑대부족의 대표자로 선택된 사람이야. 만일 늦을 것 같으면 신수 페네스가 가르쳐주지 않겠어?" 레일즈가 농담 삼아 한 마디했다. 그러나 응하는 사람은 없었다. 앞 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웃을 기분이 나질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열흘만 더 가면 숲을 벗어나 초원지대로 들어서게 될 것이 다. 초원으로 가게 되면 모습을 숨길 장소가 없기 때문에 적에게 발견 될 위험이 그만큼 높아진다. 게다가 이스칼리아 숲의 서쪽 끝에는 타 닐이 일찍이 예비 족장으로 있던 이슬로라는 부락이 있는데, 지금 그 곳에는 베르디아군의 성채가 들어서서 주변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부근의 숲에는 베르디아군의 순회 부대가 나다니고 있을 것이다. 베르디아군 모두가 암흑기사단장 딜란트처럼 호의를 갖고 있지는 않 았다. 게다가 베르디아군에게는 잔인한 요마군단도 있었으므로 그들 에게 발각되면 전투를 치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는 낮에는 쉬고 밤에 행동하도록 하자." 레일즈는 결론을 내렸다. 무슨 일이 있어도 회합의 땅까지는 가야 한다. 허망하게 죽임을 당한다면 지난날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신 수의 어금니 동료들을 만날 면목이 없어진다. 물론 신수민족과 다낭 의 백성이 저 세상 같은 곳에서 만날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들었다. 설령 함께 죽는다 해 도 마리스와 같은 곳으로 떠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레일즈는 그런 부질없는 생각들을 머리에서 털어버렸다. 죽은 다음의 일에 대 해서는 닥쳤을 때 생각하면 그만인 것이다. "내일 해가 지고 나서 출발하기로 하고 그때까지는 아까 그곳에서 야영하도록 하자." 레일즈는 그렇게 말하고 야영 준비를 하던 장소로 돌아가기 시작 했다. 해가 떨어지고 있어선지 숲 속은 이미 어슴푸레한 기색이 감돌 았다. 하늘을 보니 옅은 구름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머지 않아 날씨 가 나빠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바람의 계절이 끝나가고 있었다. 달이 차고 기울기를 한 차례만 더 반복하면 다낭에서 겨울이라고 부르는 얼음의 계절이 찾아들 것이다. 그런데 비까지 오면 더욱 견디기 힘들 게 분명했다. "어?" 야영 장소가 가까워졌을 때 비인이 깜짝 놀라서 소리 질렀다. "왜 그러는데?" 레일즈가 여드름 자국이 듬성듬성 나 있는 소년을 돌아보았다. 샤 일론이 행한 치유의 마법으로도 얼굴에 난 여드름은 고쳐지지 않았 다. 비인은 그것이 대단히 불만이었다. "불길이 오르고 있어. 불을 피운 기억이 없는데……." "그렇다면……." 레일즈 일행이 화톳불 준비를 하는 동안 사이아가 뛰어와서 그레 일을 보았다고 외쳤던 것이다. 그 순간 레일즈는 곁에 두었던 검을 집 어들고 재빨리 뛰어갔다. "그레일이 그래 놨는지도 모르지. 모두 여기서 기다려." 레일즈는 검을 뽑아들고 허리를 낮춘 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나무 그늘에서 나무 그늘로 이동하며 레일즈는 야영 장소로 접근해갔 다. 장작불이 타오르는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그리고 붉은 불꽃 너 머로 어슴푸레한 그림자가 보였다. "누군가 있다……." 레일즈는 혼잣말을 했을 뿐이었는데 문득 뒤에서 하는 말이 들려 왔다. "그레일이에요?" 깜짝 놀라 뒤를 보니 은발의 마리스가 거기에 있었다. "기다리라고 했잖아." 레일즈는 마리스에게 책망하는 눈길을 보냈다. "그레일과 싸울 때는 함께 있겠어요. 양날검 공작이 복수하겠다고 노리는 상대는 레일즈님 하나만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레일즈는 말꼬리를 흐렸다. 그녀가 마음 써주는 것은 기뻤지만 양 날검 공작과는 가급적 1대1로 결말을 내고 싶었다. 그것은 전사로서 의 순수한 생각이었다. 정정당당하게 대결을 벌여 누가 실력이 나은 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그 전사에게서 입은 상처는 지금도 레일즈의 몸 깊숙이 남아 있었 다. 샤일론이 주문을 외워 주면 곧 사라져 버리겠지만, 스스로 경계하 는 마음을 가지기 위해 그 상처만은 남겨두기로 했던 것이다. 레일즈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인지 마리스가 앞으로 나서더니 잽싸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금도 낭비가 없는 발놀림이라 서 마치 마른풀이라도 밟고 지나가는 것처럼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 다. 능력을 쓰고 있기 때문이리라. 은빛늑대부족의 수인은 늑대와 똑 같은 걸음걸이가 가능했다. 물론 레일즈는 도저히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없었다. 조용한 숲 속이 다 보니 레일즈의 발소리가 지나치게 크게 들렸다. 불꽃 너머에 있는 사람이 그레일이라면 돌바닥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소리처럼 확실하 게 레일즈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불꽃이 타오르는 곳에서 약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까지 다가섰다. 거기서부터는 몸을 숨길 장소가 없었다. 마음을 가다듬고 레일즈는 불길 앞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곁에 마리스가 나란히 섰다. "어디에 갔다 온 거지?" 불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은 소리였다. 그러나 그 레일의 음성은 아니었다. 뱃속에서 울리는 저음이 아니라 약간 쉰 듯 한 느낌을 주는 높은 음이었다. 그 목소리가 누구 것인지를 기억해 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설마!" 그 순간 레일즈는 외쳤다. 레일즈의 외침 소리에 응하듯 불길 너머에서 그림자가 나왔다. 불 꽃에 비쳐 그 모습이 뚜렷하게 보였다. "그림자부족의 이살리!" 그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대백조 형제, 오랜 만이야." 그림자부족의 주술사는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 고 있었다. "그 아수라장의 성채에서 잘도 살아나왔군." "전투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어?" "그것 또한 우리 부족의 사명이니까." 그렇게 대답하면서 이살리는 약간 고개를 숙였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일 거라고 레일즈는 생각했다. 마음속에 풀리지 않은 감정의 앙 금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살리를 책망한다고 죽어버린 전사들이 다 시 살아날 것도 아니었다. "결국 네가 예언한 대로 돼 버리고 말았어." "입에 발린 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너희들은 정말 잘 싸웠어. 베르디아군은 그 전투에서 너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피해 를 입었지." "피해의 많고 적음으로 전쟁의 승패가 결정 나진 않아. 한 사람의 희생자도 없이 전쟁의 승패를 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지만 어디 그럴 수가 있겠어. 인간이란 존재는 자기들의 생명 을 대가로 내걸지 않으면 무엇 하나 이룰 수가 없지." "그건 그렇겠지만,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해." "나도 동감이야. 만일 부정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줘. 언제든지 환 영할 테니까." 레일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난 전혀 그렇지가 못해. 결국 나도 전사니까. 타인의 생명을 빼앗아 문제를 해결하고 있지."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그렇게 할 때가 있 다는 말을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덧붙였다. "그건 그렇고 넌 어쩌다 여기 와 있는 거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그렇지 않다면 너희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질 않았겠지." 그렇게 말하더니 이살리는 화톳불 곁에 앉았다. 그러고는 레일즈와 마리스에게도 앉으라고 눈으로 권했다. 레일즈는 그와 정면으로 앉았다. 그 곁에 마리스가 자리를 잡았다. "마리스도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이살리는 마리스에게 인사말을 건네고는 다시 레일즈에게로 눈길 을 옮겼다. 그러고는 쓴웃음이 담긴 한숨을 쉬었다. "너란 친구는 정말이지……." 말을 하다 말고 이살리는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어째서?" "미래를 변동시키는 요인이라는 거지." 무슨 뜻인지를 몰라 레일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왕이 세계를 지배하는 미래라면 어떻게든 바꿔놓고 싶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자 신이 미래를 변화시키는 원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곧 여기에 노르바라는 이름을 가진 기사가 올 거야. 그 사람 도 잃어버린 대지에서 왔다더군." "다낭의 기사?" 신수민족이 잃어버린 대지라고 부르는 다낭은 레일즈의 고향이었 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머나먼 남의 나라인 것처럼 느껴졌다. 하긴 크리스타니아로 통하는 길이 열리고 나서 벌써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다낭에서 조사단을 파견한다고 해도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 었다. "노르바라고 했나?" 레일즈가 묻자 이살리는 두세 차례 가볍게 고개 숙여 답했다. 그러 고 보니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샤일론과 밧소 두 사람을 체포하기 위 해 왕도에서 파견되어 온 근위대의 기사였다. "노르바라는 기사는 다섯 사람을 데리고 있어. 세 사람은 다낭에서 데리고 온 종자들이지. 그 중 둘은 기사고 다른 한 사람은 주술사야. 그리고 또 한 사람도 다낭 출신의 주술사인데 여기서 산 지 오래된 것 같았어. 그리고 또 한 사람은 바로 나야." "그건 그렇고. 미래를 변동시키는 요인을 정말로 알고 있는 거야?" "신수 아르케나의 신탁으로 볼 때는 그래. 그래서 너를 다시 만나 게 된 것이지." "인연이 아주 짓궂군." 레일즈는 싱겁게 웃었다. 노르바 일행이 레일즈를 쫓아 이런 곳까지 찾아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와 동행하고 있다는 인물에 대해서는 우 연치고는 아주 놀랄 만한 우연이었다. "혹시 이곳 세계에서 오래 산 것 같다는 사람의 이름을 아나?" 그 조건에 해당하는 인간을 레일즈는 한 사람밖에 알지 못했다. "그 사나이도 네가 아는 사람 같더라구. 아마 나셀이라고 했지." "역시 그랬군……." 레일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다 침이 목에 걸려 목이 메였다. 이 운명 또한 우연이란 말인가? 눈앞의 사나이 혼자서 시간의 실을 풀어서 짜올린 현실 같게만 느껴졌다. 그렇지 않다면 그가 신봉하는 신수 아르케나의 기적이란 말인가? 레일즈는 등뒤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에는 레일즈와 마리스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하프 엘프 소녀 사이아만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브라이언 노인의 외아 들 나셀을 찾기 위해 크리스타니아로 올라왔다. 그 목적이 지금 달성 되려는 것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 전개에 레일즈는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다낭의 기사들이 조금 있으면 이리 올 거야. 그 전에 너에게 알려 둬야겠다고 생각해서 내가 온 거지. 그 사람들이 너와 같은 편인지는 알 수 없으니까." "……어느 쪽이냐 하면 오히려 적에 가까울 거야." 레일즈는 잠깐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 말했다. "그러나 싸울 생각은 없어. 가급적이면 대화로 결말을 내야겠지." "나셀인가 하는 사나이도 그렇게 말하던데. 덧붙이자면 나도 그 래." "다수결로 결정할 건 아니겠지만 어쩌면 싸움은 피할 수 있을 것 같군. 지금은 같은 나라 사람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신왕과 싸우기 위해 힘을 결집해야만 하니까……." 그러나 재상 말리드는 과연 신왕과의 전쟁에 나서줄 것인가? 레일 즈는 그렇게 자문해 보았다. 소문으로 판단해 보는 한 그는 그런 위험을 무릅쓸 인물이 아니었 다. 어쩌면 스스로 나서서 신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 제국 속에서 권력을 도모하려고 획책할 가능성도 있었다. 말리드에게서 힘이란 정 치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그는 바르바스의 제국에서도 높은 지 위를 얻을 것이다. 동시에 레일즈는 한 가지 깨달은 점이 있었다. 그것은 신왕이 쓰러 졌을 때의 일이었다. 진짜 신왕을 쓰러뜨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 았지만 신수들이 들고 일어서서 신왕과 싸움을 벌인다면 이야기가 달 라질 수 있었다. 당연히 신수들도 무사하지는 못할 것이다. 몇몇 신수들은 혼의 그 릇 노릇을 하는 짐승들의 육체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어쨌든 크리 스타니아는 대혼란에 빠지고 말 것이다. 그 대전 뒤, 혼란에 빠진 크리스타니아를 침략하는 것은 생각보다 쉬울 것이다. 자신들이 행한 일은 말리드 재상의 야심을 채우는 결과 로 끝날지도 모른다. 그때는 결계의 신수왕 루미스와 그 종자들의 분투가 기대주로 떠 오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승리하면 다낭은 다시금 결계로 갇 혀버리게 된다. 그런 결론조차도 레일즈의 속을 긁어놓았다. 어떤 쪽으로 진행된다 고 해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세계가 실현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 이다. 다낭의 백성과 신수민족이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상호간에 긴밀히 교류하는 것이 레일즈의 바람이었다. 곁에 앉은 마리스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모습은 고상하면서 도 매우 상냥해 보였다. "나는 다낭에서 온 기사들한테로 돌아가 있겠어." 레일즈가 침묵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이살리가 말했다. "조금 있다 다시 만나게 될 거야." 레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려줘서 고마워. 갑자기 그들을 만났더라면 나도 냉정하게 생각 해 보질 못했을 거야." 레일즈는 일어서서 가볍게 고개 숙여 전송했다. "그런 말은 그만둬.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부족을 위해 하는 거니 까." 말을 마치고 이살리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그러더니 마치 달 아나듯 숲 속으로 사라졌다. 레일즈는 그가 얼마나 고독한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다른 사람이 보여주는 호의를 잘 소화해내지 못했다. 아예 냉혹한 인간이 면 좋았을 텐데하는 생각이 들었다. 크리스타니아라는 세계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개성을 부정했다. 신 수와 인간 모두가 세계를 위해 주어진 역할만을 수행하도록 요청받는 것이다. 레일즈는 그것이 진실로 평화로운 세계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 늘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생각이 하나로 모여 내일이 태어나 는 세계야말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까. "생각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군요." 이살리와 대화하는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을 지키던 마리스가 말을 걸어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이 계속 벌어지는군. 어쨌든 동료들을 불러 와줘. 사정을 알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해야겠어." "그래야겠지요." 마리스는 천천히 일어나 조금 전에 왔던 길로 향했다. 나머지 동료 들을 불러올 생각이었다. "부탁해." 레일즈는 은빛 머릿결이 흘러내린 그녀의 등을 향해 말했다. 마리 스는 아무런 대답 없이 얼굴을 돌려 살짝 미소 지었다. 그러고는 가볍 게 걷기 시작했다. 어둠에 싸여 있는 숲에 녹아들어간 마리스의 모습 은 이내 사라져 버렸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 ...(7) 2 "내 판단이 옳았을까?" 노르바는 그렇게 자문하고 있었다. 정찰에 나선 이살리가 돌아와 레일즈 일행이 야영하는 곳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야영 장소는 조 그마한 샘물 근처였다. 그리고 지금 노르바 일행은 그 샘물이 있는 곳을 향해 신중한 발걸 음으로 숲을 헤치며 나아가고 있었다. 해가 완전히 서쪽으로 넘어가 주위는 어둠에 잠겼다. 그러나 불을 밝힐 수는 없었다. 접근해 오는 불빛을 보고 레일즈 일행이 맹호부족이 추격해 오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갑 자기 들이닥치면 상대방이 놀랄지도 모르지만 한시라도 빨리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할 것인가? 레일즈와 두 모험자와의 관계가 마음에 걸렸다. 일 년 가까이나 함 께 행동했다는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아마도 동료 의식이 깊어졌을 것 이다. 노르바 입장에서야 드워프족 신관과 도적을 한꺼번에 붙잡아 레일 즈와 함께 다낭으로 데려가는 것이 가장 좋은 결론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레일즈가 그것 을 납득할 리가 없었다. 강제적인 수단으로 그렇게 해볼까 하는 생각 이 들었지만 자기한테 신뢰할 만한 동료는 한 사람도 없었다. 차선책은 모험자들은 도망가게 한 뒤 레일즈만 데리고 다낭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신왕이라는 초월자와 베르디아군의 정보를 가지 고 돌아가면 도망한 모험자 따위의 사소한 문제를 걸고 넘어갈 리가 없다. 하지만 레일즈가 돌아갈 의사가 없는 경우에는 아버지 앞으로 편 지 한 장을 써달라고 요구할 작정이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살 아남는 것이었다. 그것이 가능할지 어떨지…….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긴장감이 높아갔다. 갑자기 어렸을 적에 문 닫을 시간을 넘겨서 집에 도착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하급 무사였던 아버지는 엄격한 인물이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기 사의 자질이라고 생각했는지 세세한 가훈을 정해두고는 그걸 어기면 용서 없이 체벌을 가했다. 채찍질을 하기도 했고 어떤 때는 매운 바람 속에 냉수를 끼얹는 벌을 주기고 하셨다. 또 어떤 때는 문 밖에서 실 컷 두들겨맞은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왕국에 대해서도 충실하게 일했다. 그러나 높이 평가받지 는 못했는지 평생을 하급 기사로 보내셨다. 아무리 검술에 뛰어나고 군사 지식이 탁월하다고 해도 상급 기사 가 되는 것은 명문가에 태어난 사람뿐이었다. 지금 아무리 고귀한 혈 통이라고 할지라도 고대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노예였거나 오랑 캐라고 멸시받았던 사람들도 많았다. 가문이라느니, 혈통이라느니 하 지만 결국은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그러나 성공한 사람은 자기 자식 에게도 그 성공을 나누어주고 싶어했다. 부모로서 그것은 자연스런 생각이었다.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가문과 혈통을 떠받들게 하는 것이다. 그 러나 아무리 능력이 있고 노력한다 해도 출세의 길이 열려 있지 않다 면 진정으로 열심히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재상이 실권을 잡고 난 후 기본적으로는 실력으로 등용이 이루어 지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자신도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그저 하급 기사로 평생 고생하고 있었을 것이다. 살아서 다낭으로 돌아가 면 근위기사로서 권력의 핵심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것을 포기한다 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쉬웠다. 레일즈와의 이야기가 잘 풀리기 를 노르바는 원하고 또 원했다. 그때 레일즈 일행이 피워놓은 불길이 눈에 잡혔다. 드디어 때가 왔다! 노르바는 주먹을 굳게 쥐었다. "레일즈님." 숲 속에서 자기를 부르는 소리를 들었을 때 레일즈는 최대한 놀라 는 것처럼 행동했다. 자칫하다가는 이살리의 입장이 곤란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래 변동의 요인을 감시하고 있으므로 그는 앞으로 도 노르바 일행과 행동을 함께 할 것이 틀림없었다. "누구냐!" 레일즈는 검을 움켜쥐었다. 뒤에서 밧소가 쿡쿡 거리며 웃는 소리 가 났다. "오랜 만이군요, 레일즈님. 절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근위기사 노 르바입니다." 노르바의 말투는 마치 왕족을 대하듯 은근했다. 그의 말투가 싫어서 레일즈는 온 몸이 근질근질했다. 자기도 모르 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떻게 이런 곳에?" 레일즈는 형식적인 질문을 던져놓고 덧붙였다. "저는 기사님보다 나이가 한참은 어립니다. 말씀을 낮추시지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노르바의 말투에는 걱정을 한시름 놓았다는 느낌이 담겨 있었다. 그러더니 어둠 속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노르바 뒤로는 전사와 마술 사 차림의 사나이들, 그리고 이살리가 서 있었는데 저마다 묘한 표정 이었다. "리만!" 종자들을 보고 밧소가 놀라서 소리 쳤다. 아까 레일즈처럼 연극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얼마나 경악했는지가 얼굴 전체에 역력히 드러나 있었다. "아는 사이야?" 레일즈 또한 의외였다. 이살리에게 호위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 만 밧소가 아는 사람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아마 이살리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의 표정에서도 살짝 동요 하는 기색이 엿보였다. "우리들의 옛날 모험자 동료였지. 함께 여왕 폐하를 구하러 가기까 지 했던……." 밧소의 얼굴에서 늘 보이던 웃음기가 사라졌다. 사이아의 이야기에 따르면 진지한 표정의 밧소는 아주 반듯한 얼굴이라고 했다. "옛날 동료……." 왜 그런 사람을 노르바가 데리고 왔을까, 레일즈는 혼란스러웠다. "우리들을 배신하고 이번에는 근위기사의 개가 됐나?" 밧소의 목소리는 적의로 넘쳐흘렀다. "밧소!" 레일즈는 침착하라고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밧소는 제 성질을 이 기지 못하면서도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노골적으로 싫다는 표정을 내 보이며 고개를 돌렸다. 드워프족 신관 샤일론도 여느 때와 다르게 굳은 표정이었다. "뭣 때문에 이런 곳까지?" 레일즈는 혼자서 노르바 쪽으로 걸어갔다. 노르바가 다가온 레일즈 를 향해 손을 내밀자 레일즈는 그에 응했다. "무사하셔서 무엇보다도 다행입니다. 대활약을 하고 계신다고 들 었습니다만……." 노르바의 말투는 전혀 바뀌지 않았지만 그걸 일일이 지적하는 것 도 귀찮아서 레일즈는 그가 하는 대로 내버려뒀다.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나요?" 노르바가 자기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이 이상해서 레일즈가 물었다. "많이 변하셨군요……."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 얼굴이나 체격이 바뀐 것은 아니었다. 몸 에 감도는 분위기랄까, 하크 마을에서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성인이 되었다고 말하면 간단했다. 그러나 그런 판에 박힌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크리스타니아에 올라오고 나서 이 친구가 도대체 어떤 경험을 하면서 산 건지 노르바의 머릿속 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당신이 나셀이군요." 레일즈는 흑발의 마술사 쪽으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그래요. 기억하나요? 어렸을 적 우리 집에 자주 놀러왔지요. 그때 모습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군요." "어렸을 적 이야기는 그만두기로 하지요."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어쨌든 브라이언 노인에 게 레일즈는 아주 심하게 놀림을 당했다. 마법의 실험대가 되기도 하 고 장난을 좀 쳤다고 개구리로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생각도 하기 싫 은 과거가 그 집 안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레일즈는 그 무렵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나셀에 대한 기 억은 있었지만 모습까지는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 억 나는 것은 하크 마을 영주의 아들 레이든과 언제나 함께 돌아다녔 다는 정도였다. 지금 레이든은 러브래들이라는 지협지대에서 진홍부족의 황제가 되어 있었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서 함께 지냈던 개미인간족 길리 엄을 비롯한 몇몇 진홍부족의 용병들이 바로 레이든의 명령으로 이스 칼리아에 파견되었던 것이다. 레이든을 포함한 '신에게 선택받은 젊은이들'이 이곳 세계에서 어 떤 고난을 경험했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들 여섯 명이 이곳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거쉰과 올겐 스가 레일즈 일행에게 호의적이었던 것도 그런 요인이 작용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들이 협력의 손길을 뻗쳐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레일즈는 없었 을 것이다. 하지만 얄궂게도 레이든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은 레일즈의 아버지 랏셀이었다. 그것을 알게 되면 레이든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될까? "나셀……." 그때 뒤쪽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프엘프 사이아가 비틀 거리듯 앞으로 나섰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나셀이 온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뿐만이 아니었다. 눈의 깜박임도 심장의 박동도 모두 멈춘 채 그저 떨고만 있었다. 숨을 진정시켜 간신히 제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눈에 눈물만 그렁그렁 맺혀 있을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사이아?" 나셀도 앞으로 나섰다. 노르바와 레일즈는 마치 입을 맞춘 듯 동시에 길을 비켜주며 오누 이가 서둘러 재회할 수 있도록 했다. 사이아는 감격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나셀의 가슴으로 파고들었 다. 나셀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사이아를 팔로 감싸안았다. 사이아 는 흐느껴 울면서 나셀의 넓은 가슴속에서 나셀의 이름을 수없이 반 복해 불렀다. 오누이의 재회에 레일즈 또한 뜨거운 감격을 느꼈다. 형제가 없는 레일즈는 두 사람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축하해, 사이아." 비인의 축복해 주는 소리가 들렸다. "부탁이야, 오빠. 아버지가 계신 곳으로 돌아가줘. 겉으로는 아무 말씀 안 하시지만 오빠 일을 얼마나 걱정하고 계신지 몰라. 전보다 훨 씬 더 외로워하시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한테는 언제나 죄송하다는 생각뿐이었지……." 나셀의 얼굴에 고뇌하는 표정이 어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나를 이해해 주시리라고 생각해. 늙으신 아버지 를 돌보지 않는 나는 정말 큰 불효자지. 하지만 무한히 뻗쳐가는 세계 가 기다리고 있는데 아버지 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아." "나셀 오빠……." 눈에 가득한 눈물을 떨구며 사이아는 어린애처럼 수도 없이 머리 를 흔들었다. "부탁이야. 난 안 돼. 피가 다르단 말야. 난 아버지의 슬픔을 씻어드 릴 수가 없어." 그러면서 팔을 한껏 벌려 나셀의 몸을 꼭 껴안았다. 그대로 나셀이 어디론가 가버리는 것을 막기라도 하려는 것 같았다. "사이아, 그건 달라." 나셀은 사이아의 좁은 어깨에 손을 얹고 그녀의 눈을 부드럽게 바 라보았다. "부모 자식의 끈은 꼭 피가 같아야 되는 게 아냐. 아버지가 왜 좀처 럼 사이아에게 마술을 가르치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알아? 내가 생각 할 때 사이아는 우수한 제자가 될 수 있었어. 아버지가 작정을 하고 가르쳤다면 아마 지금쯤 지팡이 따위가 없어도 주문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돼 있을 거야." "그 정도면 거의 도사급이잖아?" 눈을 크게 뜨고 나셀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물었다. "그래. 그러면 네가 어딘가로 여행길에 나서리라고 생각하신 게지. 왕도에 있는 현자 학원이나 궁정마술사로 초대되어서 말야. 그러니까 아버지는 사이아에게 마술 공부를 그다지 시키고 싶지 않으셨던 거 야. 사이아가 어딘가 다른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하시려고 말이야." 나셀은 말을 끊고 잠깐 한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사이아는 여기로 왔어." "그래, 여기 왔어. 하지만 그건 나셀 오빠를 찾으려고……." "그것뿐일까?" 나셀의 말은 어디까지나 조용했지만 상대방의 마음속으로 파고드 는 깊이가 있었다.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몰라. 난 잘 모르겠어. 하지만." "아무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멋대로 조종할 순 없어. 특히 꿈을 좇 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포기하지 않는 한 꿈은 반드시 이루어져. 꿈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으로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일 거야." "오빠다운 말이야……." 사이아는 마침내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나셀은 높은 이상을 가슴에 품고 그것을 향해 전진하는 태도를 버린 적이 없었다. 그렇지 만 이루어지지 않는 꿈도 있는 법이다. 설령 아무리 간절히 바란다 해 도……. 사이아는 다른 젊은이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런 말을 하면 어쩔지 모르겠지만 사이아가 아버지 곁에 머물렀 으면 좋겠어. 네가 멋진 솜씨를 발휘해서 아버지께 요리를 해드려야 그걸 드시고 건강하게 지내시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나셀은 사이아의 어깨 위에 올려놓았던 손 을 거두었다. "나셀 오빠는 안 돌아갈 거야? 정말 아버지한테 안 갈 거야?" "글쎄, 신의 성벽은 계속 열려 있겠지. 그렇다면 돌아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가능하지 않겠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 집까지 가는 데는 잠깐이면 돼." "아, 그렇구나, 순간이동 주문……." 순간이동 주문은 주문 중에서도 거의 최상급에 속했다. 나셀은 그 런 어려운 주문도 간단하게 외울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아버지 일이라면 사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인간은 누구에게도 속박받을 이유가 없어. 자기 스스로 자신을 책임져야 할 뿐이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말이야?" "그럼, 그렇고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야. 다만 자각과 책임을 분명하게 느끼면서 해야겠지." 나셀의 말은 신비스럽게도 깊은 설득력이 있었다. 아마도 자기 자 신에게 주어진 그런 질문에 깊게 고민하고 갈등하면서 얻은 답이기 때문이리라. "오빠, 정말 부탁이니까 딱 한 번이라도 아버지한테 들르면 안 될 까? 그러면 나도 안심일 텐데……." 사이아가 애원하듯 말했다. "약속할게." 나셀은 사이아를 안심시키기 위해 보통 때보다 크게 고개를 끄덕 여 약속했다. "너만 좋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그렇게 하자. 원한다면 너도 함께 다낭까지 갔다 와도 되고." 그 말을 듣고서야 사이아는 마음을 놓았다. 그러고는 의견을 묻듯 이 레일즈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곧 어깨가 축 늘어지 고 슬픈 표정에 잠겼다. "……그렇네. 그렇게 하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어." 사이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기 때문에 레일즈는 한순간 마음이 동요됨을 느꼈다. 사이아와는 어려서 부터 친구인 데다가 크리스타니아로 오고 나서도 잠시도 떨어지지 않 고 함께 행동해 왔기 때문이다. 갑자기 사이아가 사라진다니. 그런 상황은 상상도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이아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사지를 향해 가는 여행길에 마지막까지 함께 갈 필 요는 없었다. 물론 신수들의 회합에는 마리스와 레일즈 두 사람만이 동행할 계획이었다. 오누이의 재회는 일단 매듭 지어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레 일즈는 노르바와 다시 눈으로 신호를 보낸 뒤 처음 악수를 나눈 장소 로 돌아왔다. 나셀은 뒤로 물러섰고 사이아도 자기 오빠 곁으로 가 자리를 잡았 다. 아주 자연스럽게 레일즈는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신수의 어금 니 성채에서는 의자가 별로 없었다. 단장 올겐스가 위엄을 지키기 위 해 의자에 앉았을 뿐, 나머지 백인대장들은 작전회의 때도 선 채로 하 던가 빙 둘러앉아 바닥에 그림을 그려가며 이야기를 진행시켰던 것이 다. "남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시지요." 레일즈는 노르바에게 말을 건넸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 ...(8) 3 마음을 가다듬고 나서 노르바는 레일즈를 똑바로 보고 앉았다. 노 르바는 레일즈보다 10년은 연상이었지만 어쩐지 대할 때마다 기가 눌 리는 기분이 들곤 했다. 레일즈의 부친인 근위기사단장 랏셀과 마주 할 때와 똑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레일즈가 띠고 있는 분위기는 단 장과 전혀 달랐다. 솟구치는 듯한 랏셀의 위압감에 비해 눈앞에 있는 레일즈는 맑은 샘물처럼 투명해서 마주한 사람의 깊은 마음속까지 비쳐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어떻게 꺼내야 하나 망설이다가 노르바는 나름대로 가장 옳은 방 법을 택했다. 서툰 궤변이 통할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에 숨기거나 거 짓말을 둘러대는 대신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낭으로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앞서 오누이들 이야기를 빗대어 하는 말 같지만 아버님께서 크게 심려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 심려하시다니요?"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그런 일은 있을 리가 없습니다. 아버지는 나와 어머니를 하크 마 을에 남겨둔 채 10년 가까이나 왕도에서 생활하셨습니다. 겨우 1년 정도 떠나 있다고 해서 염려할 분이 아닙니다." 레일즈는 전사로서의 아버지는 매우 존경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 하면 부친으로서는 절대 훌륭하다고 할 수 없었다. 남편으로서는 말 할 것도 없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왕도에 있는 동안 여성과 인연을 끊고 살지는 않았으리라. 분명히 한두 명 정도의 첩을 거느리고 있을 것이다. "하크 마을과 이곳 미지의 대륙은 위험 정도가 다릅니다." "머지 않아 같아질 겁니다." "그렇게 돼서는 곤란하지요." 노르바의 이마에 땀이 솟았다. "솔직히 말해 랏셀 경의 생각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분은 분 명하게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저를 파 견한 것은 레일즈님의 안전을 걱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확신하고 있습 니다." 타인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자기가 먼저 자기 말을 믿어야 한다. 노 르바는 그 점에서는 비교적 탁월했다. 말을 해나가는 동안에 자기 말 이 반드시 옳다고 확신을 갖게 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하긴 아들인 나도 잘 모르긴 마찬가지니까.' 레일즈가 마음속으로 대답한 뒤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쪽에서도 결론부터 말하지요. 저는 다낭으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아니, 돌아갈 수 없다고 해야겠지요." "그건 왜 그렇습니까? 이곳에서 꼭 해야 될 일이 있는 겁니까?" "있습니다." 레일즈는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을 향한 길이 라는 점에 대해선 물론 말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하게 되면 노르바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다낭으로 데리고 돌아가려 할 것임에 틀림 없었다. "아무래도 돌아가실 수가 없습니까? 예를 들면 나셀의 마법을 이용 해서 귀향을 하시게 한다 해도……."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에 대해 노르바는 묻지 않았다. 레일즈 의 말에서 강한 의지를 읽었기 때문이다. "안 됩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주어가며 레일즈가 말했다. "만일 레일즈님께서 함께 돌아가주신다면 랏셀 경께서 저를 어여 삐 봐주실 것입니다만." 노르바는 진심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밧소와 샤일론을 데리고 간다면 더욱 큰 포상을 받게 되 겠군요." 레일즈는 뒤를 돌아보며 두 사람의 모습을 살폈다. 밧소와 샤일론 은 평소와는 다르게 진지한 표정으로 노르바와 레일즈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리고 때때로 지난날 동료였던 마술사들에게 날카 로운 시선을 던지곤 했다. 그 오가는 눈길에는 과거의 동료들과 재회 했다는 기쁨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한없이 깊은 균열만 이 엿보였다. "물론입니다. 그것이 본래의 사명이니까요. 하지만 레일즈님은 그 걸 용납하지 않으시겠지요." "미안하지만 그렇습니다." 레일즈는 잠시의 짬도 두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원래대로라면 실력에 의해서라도 그들을 잡아가야겠습니다만 포 기했습니다. 지금의 레일즈님과 싸워 이길 자신이 없습니다." "저도 질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레일즈도 솔직히 말했다. 그 말은 노르바를 모욕하는 말도, 화를 돋구려는 말도 아니었다. 레 일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하크 마을에서 만났던 무렵이라면 아마도 실력 차가 그다지 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사선을 건너온 지금, 전투 기술에 관한 한 그 무렵과 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성장했다. 당시의 자신과 싸운다면 백전백 승할 자신이 있었다. 검의 기술은 사람의 생명으로 닦여진다는 말은 다낭 기사단에 전 하는 속담으로, 레일즈를 보아도 그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타인 의 생명을 빼앗고 스스로도 피를 흘림으로써 실전에서도 통용되는 진 정한 검술을 익힐 수 있는 것이다. 그게 슬픈 현실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겠지요." 노르바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그러니까 레일즈님에게 돌아가주십사 부탁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적을 붙잡아 가지 못하는 대신 무언가가 필요했기 때문에……." "근위기사 노릇도 보통일이 아니군요." 레일즈는 남의 이야기하듯 말했다. 보통일이 아닌 것은 단장이 다 름 아닌 레일즈의 아버지 랏셀이기 때문이 아닌가! 노르바는 자신에 게는 지지 않을 것 같다는 레일즈의 말에는 아무런 감정도 솟아나지 않았지만 이번 말에는 불쑥 화가 치밀었다. "그럼 차라리 단장님께 보내는 편지를 한 통 써주실 수 있겠습니 까? 레일즈님이 무사하고 다낭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의지 라는 것을 납득시켜 드리지 못하면 저는 랏셀 경에게 목이 달아날지 도 모릅니다." "아무리 아버지라고 해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을 이곳에 파견한 최대의 목적은 크리스타니아를 조사하는 것일 겁니다. 그것만 제대로 수행해 내면 아버님도 저에 대한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입니다." 레일즈가 말하자 신기하게도 그 말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만큼 이런저런 공상에 잠겨 고뇌했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그렇게 명령을 내렸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여기까지 오는 동 안에 맹호부족의 추격을 받게 돼, 수 차례 궁지에 몰리곤 했습니다. 목숨을 잃고 나면 보고고 뭐고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나는 아버지가 아니라서……." 멋쩍게 미소 지으며 대답하긴 했지만 노르바의 고뇌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이 목표였던 어렸을 적의 레일즈도 그랬다. 아버지 랏셀은 무엇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에 대해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꾸짖을 때는 왜 꾸지람을 받는지, 무언가를 명령 내릴 때는 어떻게 해야 명령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지부터 생각해야 했다. 생각하는 노력을 하면 아버지는 그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좋은 평 가를 받는 것은 늘 올바른 답을 찾아냈을 때뿐이었다.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고 또 생각하겠다고 결심한 정도일 때에는 상대도 해주지 않 았다. 아버지의 기준으로는 그것은 무능하다는 증거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편지는 쓰도록 하지요.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도 있 으니까요." "그렇게 하면 제가 면목이 서겠습니다." 정말로 마음을 놓았던지 노르바의 얼굴에 환한 빛이 감돌았다. 그때였다. "안 돼!" 갑자기 밧소가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한밤의 어둠을 가르 듯 새된 비명이 울려퍼졌다. 레일즈는 놀라서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끔찍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한 전사가 사이아의 목에 단 검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사이아의 목에선 벌써 새빨간 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흐르는 피의 양으로 볼 때 가볍게 피부가 갈라져 있는 정도였다. 그러나 사이아의 얼굴은 체내의 모든 피를 잃은 것처럼 새하ㅇ다. "명령 위반이요, 근위기사님." 밧소의 옛날 동료 마술사가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두 사람의 적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잡아가야 하오. 그것이 우리가 근위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이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리만!" 노르바가 얼굴이 새빨갛게 되어 소리 질렀다. "아아, 무슨 말을. 근위기사라는 사람이 그렇게 물러터진 인간이라 고는 생각지 않았지. 근위기사는 잔인하고 냉혹하다는 것이 세상의 평판이 아니겠소." "연극을 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살기 등등한 목소리로 레일즈는 노르바에게 물었다. "나는 기사입니다. 이런 치사한 수단은 쓰지 않습니다!" 노르바의 말엔 거짓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데리고 온 종자들 이 노르바가 모르는 밀약을 하고 있었다는 판단이 섰다. 사이아의 곁에 있던 나셀은 무얼 하고 있었나 싶어 레일즈는 분노 가 일었다. 그는 지금 굳은 표정으로 마술사의 지팡이를 거머쥐고 주 문을 외울 태세였다. "모두 허튼 짓 하지 마시길. 이 엘프 소녀의 목숨이 아깝다면." 마술사가 모든 사람의 거동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말했다. "사이아를 인질로 삼아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레일즈가 앞으로 나서며 세 사람의 모험자들을 노려보았다. "우리들의 요구는 한 가지뿐이다. 밧소와 샤일론을 우리에게 넘길 것. 그것만 따라준다면 이 소녀는 곧장 돌려준다. 상처 하나 남기지 않고." "그건 랏셀 경의 명령인가?" 노르바가 분노에 찬 음성으로 물었다. "당연하지. 그리고 말리드 재상의 명령이기도 하지." 리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마술사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리만?" 이 질문을 한 사람은 샤일론이었다. "무엇이 너를, 너희들을 바꿔놓고 말았는가. 너희들이 모험자의 생 활에 혐오감을 갖게 된 것은 잘 알고 있다. 생활은 괴로웠고 명예도 없었다. 사실 너희들이 바라던 출세도 꽉 막혀버렸다. 고대 왕국의 유 적도 없고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지는 다낭에 고향의 섬처럼 모험을 찾는다는 것이 틀린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았는가. 자기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끌 어안고 우리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감사야말로 우리 에게 무엇보다 큰 보상이 아니었는가? 그럼에도 동료들을 배반하고 죄 없는 소녀를 인질로 삼고 있다니, 어찌하여 그렇게까지 타락했는 가. 마신에게 사로잡히기라도 했는가, 아니면 사신에게 혼을 팔아 넘 겼는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였지만 한 마디 한 마디에 샤일론의 고양된 감 정이 배어 있었다. "네가 말한 대로다. 모험자 생활에서 부도 명예도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현자 학원은 문을 닫고 궁정마술사로 와달라는 소리도 없었 다. 여왕을 구출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우리는 드디어 운이 우리 를 찾아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거기에 있는 것 은 더욱 추한 현실뿐이었다." 레일즈는 사이아를 구출할 틈을 노렸지만 사이아를 잡고 있는 전 사에게선 조그마한 방심도 포착할 수 없었다. "의뢰인으로부터 속았다는 말인가?" 밧소가 말했다. "속았다? 겨우 그 정도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함정에 빠져 있었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덫에 빠진 늑대처럼 되고 말았 다." 리만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말했다. "성내의 위병은 네가 침입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의뢰인 이 정말 바라던 것은 네가 여왕의 방 앞에서 사로잡히는 것이었다. 그 리고 밖에서 기다리는 우리들을 일망타진하는 것이었지." "그것과 사이아를 인질로 삼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밧소가 격앙된 소리로 말했다. "의뢰인에게 우리는 재상의 권위에 상처를 입히기 위한 도구에 지 나지 않았다.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우리들은 근위기사들에게 쫓김을 당했지. 나는 절망감을 느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릴까 하는 생각 을 한 적도 있지.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우리를 그런 상황에 빠뜨 린 자에게 복수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근위기사에게 접 근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걸 거래라고 해도 괜찮을 거야. 위험성 이 높은 도박이었지만 나는 이겼다. 말리드 재상은 나의 제안이 가치 가 있다고 인정해 주었거든." "재상 반대파의 귀족들을 실각시킨, 그 가짜 편지 말인가?" 노르바가 리만에게 물었다. "그렇다. 재상이 실각시킬 기회를 노리고 있던 귀족과 기사들이 여 왕의 유괴에 가담했다고 몰아붙이기 위해 거짓 편지를 만들었지. 그 리고 우리들이 나서서 그게 진실이라고 법정에서 증언을 했다……." "진실을 아는 너희들을 어떻게라도 없애버려야 할 상황이 된 거지. 그 뒤 우리들은 이름을 바꾸어 근위기사가 됐다. 리만은 궁정마술사 의 한 사람으로 올라섰지. 지금부터는 우리가 타인을 도구로 사용할 차례다." 리만의 대답을 이어받아 사이아를 붙잡고 있는 전사가 말했다. "어리석은 놈들……." 레일즈는 뱉어내듯 말했다. "근위기사야말로 재상의 개나 마찬가지다. 결국은 한 번 쓰고 버림 당할 도구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다." "젖비린내 나는 놈이 어디서 까불고……." "인질이나 잡고 그렇게 으스댈 것 없어. 젖비린내 난다고 큰소리 칠 양이면 나하고 당당하게 맞붙어 보시지 그래. 몇 놈이든 한꺼번에 상대해 주마." "코랄!" 마술사 리만이 흥분하는 전사를 다독거렸다. "이야기가 쓸데없이 많았다. 우리는 이 소녀를 데리고 다낭으로 돌 아간다. 너희들은 사흘 늦게 여기를 출발해야 한다. 샤일론과 밧소를 끈에 묶어서. 두 사람을 데리고 오지 않는다면 이 소녀의 생명은 끝장 난다고 생각해라. 그리고 너희들이 우리 앞에 나타나도 끝장이라고 보면 된다." 그 말을 하더니 리만은 두 사람의 전사에게 신호를 보내 천천히 뒤 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레일즈는 아무런 수단도 취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감을 깊이 느끼 고 있었다. 사이아의 안전을 생각하면 함부로 행동해선 안 된다. 그러나 상대 의 요구대로 샤일론과 밧소를 넘겨줄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레일즈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 결론을 내기 전에 세 사나 이는 사이아를 인질로 삼은 채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추고 말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놈들이 차마 저런 행동을 할 줄이야……." 노르바가 깊이 머리 숙여 레일즈에게 용서를 구했다. "사과받는다고 상황이 바뀔 리가 없잖습니까?" 어떻게 해 볼 길 없는 분노에 사로잡혀 레일즈는 온 몸이 찢겨나가 는 것만 같았다. "어쨌든 무언가 수단을 강구해야 해! 그대로 뒀다간 사이아에게 무 슨 일이 생길지도 몰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끙끙거리는 비인이 외쳤다. 정령사 소년은 곁에 있는 밧소의 옷을 붙잡고 재촉하듯 흔들어댔다. "내 생각도 마찬가지야." 밧소는 비인에게 대답했다. "간단한 거 아냐! 우리가 놈들의 요구를 따르면 되잖아." "안 돼, 그건……." 비인이 눈물을 흘리며 반대했다. "달리 무슨 방법이 있겠어?" 밧소는 그렇게 말하고 머리를 감싸안았다. "내 불찰이야. 내가 곁에 있었으면서……." 마술사 나셀이 레일즈 곁으로 다가왔다. "그건 맞아." 레일즈는 차가운 눈길을 마술사에게 보냈다. 책임을 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고위 마술사라고는 하지만 인질로 잡혀 간 상황에서 는 어찌 해볼 도리가 없었다. 주문을 외우기에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 에 그 동안에 사이아의 목숨을 빼앗아 버릴 수도 있었다. "샤일론. 놈들은 사이아를 죽일 생각일까? 인질을 죽이면 그 뒤 자 신들도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 있을 텐데." "지금 저놈들 같은 상태라면 그러고도 남을 거야. 리만은 밀약에 모든 것을 걸고 있는 것 같아. 실패하면 어차피 목숨을 버릴 각오가 돼 있으니까 말이야." "이것 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 레일즈는 밤하늘을 올려보며 신음 소리를 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때 늠름한 목소리가 들렸다. 레일즈는 목소리의 주인공에게로 눈 길을 돌렸다.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마리스가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레일즈는 물었다. "인질을 세워놓고 말한 조건은 모두 인간에 대해서만입니다. 짐승 에게 습격받는 경우에는 인질을 죽이지 않을 겁니다." "은빛늑대로 변신한단 말인가?" 레일즈가 묻자 마리스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것도 위험해. 상대는 뛰어난 솜씨를 가진 모험자가 세 사람이나 되는데." "그래도 해봐야 되지 않겠어요? 달리 수단이 없잖아요. 사지에 빠 진 사이아를 포기할 수도 없고 밧소와 샤일론을 놈들에게 넘겨 줄 수 도 없잖아요." 그것은 마리스의 말이 옳았다. 그러나 마리스가 위험하다는 사실도 분명했다. "나도 갈게! 마리스가 놈들의 주의를 흩트린 틈을 노리면……." 마리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를 믿으세요. 레일즈님을 발견하면 그놈들은 틀림없이 사이아 를 죽이고 말 거예요." 그 말이 옳았다. 상대방에게 들키지 않도록 행동할 자신이 없었다. 만약 접근하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상대는 용서 없이 사이아의 목에 칼질을 할 위인들이었다. "그저 믿고만 있어야 한단 말인가……." 레일즈는 처참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정말 괴롭군. 난 언제나 선두에 서서 모든 일을 해왔어. 다른 사람 들에게 무언가 일을 맡긴 적은 없었다고……." "모든 것을 혼자서 할 수는 없는 거예요." 마리스는 레일즈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듯 아주 명랑하게 말했다. "지금은 저를 믿고 기다려 주시길 바래요." 마리스의 말이 옳다는 걸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레 일즈는 자기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사이아를 부탁해." 레일즈는 마리스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맡겨주세요." 마리스의 대답에 굳센 의지가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