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 ...(4) 4 "또 새로운 놈들인가!" 노르바는 피가 물든 검을 쥔 채 입을 닦았다. 오른쪽에서 크리스타니아 말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던 것 이다. 몇 시간 전부터 뒤를 쫓아오던 놈들이 환성을 올리듯 화답했다. 저희들끼리 불러대는 소리가 숲 속에 퍼졌다. 노르바는 완전히 갇 혀버렸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아무리 베어도 추격자들은 사냥개 처럼 따라붙었다. 사냥이라면 전쟁 훈련을 겸해 자주 해보았지만 먹 이의 입장이 되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베르디아군의 주둔지에서 암흑기사단장 딜란트와 회담을 하고 나 서 사흘이 지났다. 회합의 땅으로 가는 랏셀의 아들을 뒤쫓는 여행이 었다. 그런데 어제 함락시킨 성채의 잔당을 붙잡기 위해 수색하던 맹 호부족의 전사들과 마주치고 만 것이다. 전투를 벌이고 싶진 않았지만 맹호부족은 말이 필요 없다는 듯 무 조건 치고 들어왔다. 노르바는 할 수 없이 맞받아 싸웠다. 상대는 4명으로 상당히 다듬 어진 솜씨이긴 했지만 노르바 일행의 적수가 되긴 어려웠다. 동행하 던 모험자 출신의 세 사람은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고 있었다. 마술사 리만은 도사급의 실력이었고 코랄과 테딘이라는 두 전사도 근위기사 가 되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솜씨가 좋았다. 이살리라는 이름의 크리 스타니아 주민도 뛰어난 마술사였다. 한 사람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 면 화근을 남겨놓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의 수령인 듯한 사내는 우열이 가려지자 갑자기 마법을 써서 모습을 감췄다. 억세고 덩치가 큰 사내였기 때문에 그가 마법전사(워리어 위저드) 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맹호부족 전사들 중 뛰어난 사람은 신왕 바르바스가 부여해 준 도 약이라는 순간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살리에게 들은 것 은 그 직후였다. 그에게 왜 처음부터 경고하지 않았느냐고 책망했지만 소용없는 일 이었다. 그때부터 적들의 집요한 추격이 시작되었다. 노르바 일행은 몇 차 례나 전투를 벌여 맹호부족의 추격을 격퇴했다. 그러나 그 부근에 있 는 맹호부족이 남김 없이 모여들었다는 의심이 들 정도로 새로운 추 격대가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맹호부족 전사들은 노르바 일행보다 훨씬 발이 빨랐기 때문에 한 번 눈에 띄면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도리 없이 검을 들고 맞 싸우게 되는데, 자신들이 불리하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달아나 응 원군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공격해 들어오곤 했다. 지금 노르바 일행을 추격하고 있는 적의 숫자는 20여 명 정도였다. "싸울 수밖에 없을까……." 노르바는 각오했다. 추격자의 수는 많지만 꼭 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대로 계속 도망가다 보면 만족스럽게 싸워보지도 못한 채 피곤에 젖을 뿐이었다. 자칫하다가 완전히 힘이 빠져 낭패스러운 일을 당할 수도 있었으므로 가급적 그렇게 되기 전에 어떻게든 결말을 내야 했 다. 그러나 싸울 장소만큼은 노르바에게 유리한 곳을 고를 필요가 있 었다. 주위를 꽉 막아놓고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압도적으로 불리하게 된다. 절벽 같은 장소를 찾아 바위벽을 등지고 싸우는 것이 이상적이 었다. "조금만 더 가면 강이 나온다. 거기로 가면 절벽도 있고 동굴도 있 다." 그렇게 말하는 이살리의 말을 믿고 노르바 일행은 달렸다. 모험자 출신의 세 사람은 생각보다 냉정했다. 아마도 이 정도의 위험은 수도 없이 겪었기 때문이리라. 사실 그들은 근위기사단의 엄중한 추격을 받으면서도 수개월에 걸쳐 도망을 다닌 경험이 있었다. 그들이 범한 죄는 다낭 왕성에 침입해 유폐되어 있는 여왕을 탈출 시키려 했던 것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여왕의 유괴를 꾀한 무법자로 되어 있었다. 그들의 머리에는 엄청난 상금이 붙어 있어 근위기사뿐만 아니라 모험자들과 일반 백성들까지도 생포를 노리는 처지였다. 그런데 도망 생활에 염증을 느낀 그들은 거래를 제안했다. 여왕 구출의 임무를 맡긴 왕당파 귀족들의 명부와 맞바꾸어 그들 의 죄를 불문에 부친다는 조건이었다. 근위기사단장 랏셀은 이 거래 에 응했다. 다만 도망을 계속하는 그들의 동료 드워프족 신관 전사와 도적을 붙잡는 것을 조건으로 덧붙였다. 신관 전사와 도적은 하크 마을에서 붙잡혔다. 그러나 그 둘을 붙잡 은 것은 옛 동료였던 모험자들이 아니었다. 근위기사단장 랏셀의 아 들 레일즈였다. 그러나 그때 마침 대지진이 발생해 두 모험자는 감옥에서 도망쳤 다. 그리고 신의 성벽에 생겨난 틈을 따라 크리스타니아로 올라갔다. 그들과 함께 랏셀의 아들도 크리스타니아로 갔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노르바는 이 사실을 랏셀에게 몰래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렸다. 피 보라 기사라는 별명을 가진 근위기사단장에게 무언가 도움을 얻어보 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그건 너무나 안이한 생각이었다. 랏셀은 노르바에게 크리스타니아에 올라가 도망간 드워프족과 도 적을 잡아오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 외에도 크리스타니아에 대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오라고 했다. 이때 부하로 붙여 준 사람들이 도 망자들의 과거 동료였던 모험자 출신의 세 사람이었다. 이들은 한 번 배반을 결행했던 자들이었으므로 언제든지 다시 배 반할 소지가 있었다. 아들의 불상사를 안 자를 처치하기 위해 랏셀이 자기를 크리스타 니아로 파견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그렇다면 랏셀의 목적은 적중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또 새로운 추격자가 나타 나면 도저히 막아낼 자신이 서지 않았다. 랏셀에게 원망의 말이라도 한바탕 하고 싶었지만 지금 여기에 랏 셀은 없었다. 아마도 지금쯤은 왕도로 돌아가 신의 성벽이 열린 것에 대해 재상 말리드와 마땅한 대책을 찾기 위해 협의를 벌이고 있을 것 이다. 자신이 정보를 가지고 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이 결론을 내리 지 못할 까닭은 없었다. 아직도 멀었느냐고 투덜거리려 할 때 전방에 강물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다지 큰 강은 아니었지만 계곡은 상당히 깊어 보였다. 이 정도면 활용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낭떠러지를 등지기 위해서는 강가로 뛰어내려야만 했다. "낙하제어(폴링 컨트롤)의 주문을 쓸 수 있나?" 노르바는 마술사 리만에게 말했다. "초급 주문이니까." 불만스런 목소리였다. "절벽을 뛰어내릴 때 모두에게 걸어줘." "그럴 생각이었어." 리만은 대답하고 마술사의 지팡이를 두 손으로 고쳐 잡았다. 낭떠러지 끝까지 왔을 때 마침 맹호부족의 추격대도 모습을 드러 냈다. 그 숫자는 열 명 남짓. 그들 말고도 더 따라붙어 오는지 후방을 향 해 뭐라고 소리 치는 게 들렸다. 크리스타니아 말을 쓰고 있어서 그 내용은 알 수 없었다. 낭떠러지는 생각보다 높아서 뛰어내리기 위해서는 적잖은 용기가 필요했다. 만일 리만이 낙하제어의 주문을 걸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도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맹호부족이 바로 뒤에까지 쫓아왔기 때문이다. "뛰어내린다!" 노르바가 외쳤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높이 뛰어올랐다. 리만이 주문을 짧게 외웠다. 그러자 강가로 떨어지던 몸이 한 순간 공중에 정지했다가 천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세 사람의 모험자도 낙하제어의 주문을 걸고 뛰어내렸다. 그러나 이살리는 순간이동 능력을 사용해 절벽 아래로 가볍게 몸을 옮겼다. 낭떠러지 위를 바라보니 맹호부족의 추격자들이 분한 표정을 짓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이동 능력을 써서 쫓아오지 않을까 했 지만 아무도 그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강가로 내려갈 수 있는 곳을 찾아 어딘가로 물러났다. 덕분에 여유가 생겼다. 노르바 일행은 거친 숨을 가다듬으면서 적 이 오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치워 버리겠어. 이런 기분 나쁜 세계에서 목 숨을 잃고 싶진 않아." 노르바는 자기 자신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놈들은 순간이동 능력 외에 또 어떤 능력을 사용하지?" 노르바가 이살리에게 물었다. "수인화나 수변화하는 것은 알고 있지. 그 밖에는 포효라는 능력이 있어. 엄청나게 큰 소리를 내 상대방의 전의를 상실하게 만드는 거지. 간혹 뛰어난 수인들 가운데 무적(인벌너러빌리티)의 능력을 사용하는 자도 있어. 이 능력을 사용하면 은이나 마법의 무기가 아니면 상처 하 나 입힐 수 없게 되지." "거 참 성가신 자들이구만." 이곳 세계 주민들과 싸울 때는 마법의 원호가 없으면 안 될 것 같 았다. 다낭으로 돌아가면 마법사들을 조직화하라고 건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살아 돌아갈 수 있는 경우에 나 가능하겠지……. 나쁜 예감을 털어내려고 노르바는 주위로 시선을 옮겼다. 낭떠러지는 바위가 아니라 흙이어서 여기저기에 무너진 자취가 있 었다. 스무 걸음 정도 되는 곳에 휑하니 동굴이 뚫려 있는 것이 보였 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인상을 주는 동굴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동굴 이 만들어질 장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건 물사람들이 파놓은 동굴이야." 노르바가 동굴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는 것을 보고 이살리가 말을 걸었다. "물사람?" "크리스타니아 사람들 가운데도 신수 섬기기를 거부하는 이들이 있지. 자신들끼리 집단을 이루고 사는데 그들을 물사람이라고 불러. 보통은 강에 배를 띄워놓고 살아. 저 동굴은 강물이 늘어났을 때 배를 피난시키기 위해 파놓은 것이고." "사람이 파놓았다는 말이지?" 그렇다면 납득이 갔다. "동굴 속에 숨을까? 싸우기도 쉬울 것 같은데." 노르바가 팔짱을 끼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만둬. 내가 쫓는 입장이라면 도망자들이 동굴에서 도망 치지 못 하도록 지키고 있다가 충분한 지원군이 오면 공격할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는 노르바가 빙긋 웃었다. "그렇지만 동굴을 뒤에 두고 싸우는 것은 문제가 없어. 상황이 어 려워지면 일단 동굴 속으로 피신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 노르바는 세 사람의 모험자와 이살리에게 동굴 앞으로 이동하라고 말했다. 동굴은 생각보다 넓었다. 또 안쪽으로도 상당히 깊숙했다. 해는 서 쪽 하늘로 계속 기울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동굴 입구 부근까지 환 한 햇살을 뿌렸다. 그러나 그 안쪽으로는 완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 조사해 볼까?" 모험자 출신 전사 가운데 코랄이 말했다. 쓸데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노르바는 허락했다. 만에 하나 동굴 속에 적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일이 있을 리 없겠 지만……. 그러나 코랄이 동굴 속으로 한 걸음 내딛자 안쪽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누구냐?" 다낭의 말이었다. 이곳 세계에서는 흔히들 베르디아 말로 통했다. 베르디아 지방에 표류해 온 암흑민족이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신수민족 가운데도 이 말을 쓰는 사람이 있었다. 코랄은 동굴 입구까지 재빨리 물러나 옆으로 비켜섰다. 화살이 날 아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그쪽이야말로 누구냐!" 코랄은 잔뜩 경계한 채 모습을 보이지 않는 상대를 향해 외쳤다. "맹호부족 같지는 않다만 혹시 신수의 어금니 출신 전사냐?"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코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불빛의 주문을 써서 동굴 속을 비춰봐." 노르바는 가까이 있던 이살리를 불러서 명령했다. "먼저 싸움을 걸 생각이야?" "상대의 정체를 알지 못하면 협상을 해볼 수가 없어!" 노르바의 말을 납득한 건 아니지만 어쨌거나 마법의 주문을 외우 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 동굴 안에서 사람을 닮은 그림자가 밖으로 걸어나오 는 것이 보였다. 이살리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주문 외우기를 그쳤다. "베르디아의 졸개들이 아니군. 설마 했는데 다낭에서 온 사람들인 가?" 그렇게 말하며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로브를 걸친 사나이였다. 그 는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마술사의 지팡이를 오른손에 쥐고 있었다. 왕도 스파이아에 있는 '현자 학원'에 가면 이 같은 복장을 한 사람 들을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었다. "뭐하는 사람이냐?" 노르바가 동굴 입구까지 다가가서 물었다. 검은 칼집에 꽂아두었지 만 상대가 엉뚱한 움직임을 보이면 언제든지 뽑아서 베어버릴 생각이 었다. "그 문장…… 근위기사단에 속해 있나?" "우선 이쪽 질문에 대답해라!"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내 이름? 아니면 고향?" "둘 다. 그리고 왜 여기에 있는지도 말하라!" 그 질문에 마술사처럼 생긴 사나이는 가볍게 웃었다. 상황으로 보 아서 웬만큼 대담한 사람이 아니면 그러기 어려웠다. 그는 노르바 무 리를 하나씩 번갈아 보고 나서 말을 이었다. "나는 너희들과 고향이 같은 사람이다. 이름은 나셀이라고 한다." 로브를 입은 사나이는 거기에서 일단 말을 끊고 이쪽의 반응을 살 폈다. "다낭에서 온 사람이라고? 그런데 왜 이런 곳에 있지? 크리스타니 아로 올라오는 길은 근위기사단의 감시 아래 있을 텐데……." "그게 언제적 이야기지?" 나셀이라고 이름을 밝힌 마술사의 말투에는 서두르는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눈동자엔 놀라는 기색이 스쳤다. 노르바로 서도 상대의 질문은 예상 밖이었다. 언제적이냐고 물어오리라고는 생 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정보를 교환할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겠군." 대답하기 어려워하는 노르바를 보고 로브의 마술사가 말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없을 것 같은데……." 그 말에 노르바는 다시 자신들이 원래 놓였던 처지로 돌아갔다. 마 술사의 시선을 따라 강물 윗줄기를 바라보니 멀리서 달려오는 맹호부 족의 전사들이 보였다. "너도 마술사지. 함께 싸우자!" 검을 뽑아들면서 노르바는 나셀에게 말을 걸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하지. 그렇지만 저렇게 많은 숫자를 상대로 싸 우는 것은 좋은 전략이 아닐 것 같은데. 너희들이 원한다면 장소를 바 꾸는 게 좋겠는데……." "그렇다면 순간이동의 주문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마술사 리만이 놀라서 물었다. "너희들에게 주문을 받아들일 마음이 있다면." 나셀은 태평하게 대답했다. 노르바 정도의 지식으로도 순간이동이 아주 상급의 마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 주문을 사용할 수 있다 면 이 수수께끼 같은 사나이는 대단히 뛰어난 마술사임에 틀림없다. 아마도 리만보다 실력이 한 단계 위일 것이다. "죽든 살든 싸워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만둬선 안 되겠지. 그러나 난 싸우고 싶진 않은걸." "알았다. 너를 믿고 주문을 받아들이기로 하겠다. 우리들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줘. 그렇지만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면 용서치 않을 테 다!" 태도로는 그럭저럭 강경함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론 좋아서 어쩔 줄 모를 지경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압도적으로 불리한 싸움을 회피할 수 있게 된다. 세 사람의 모험자들도 그리고 이살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눈앞 에 몰려오는 확실한 위험보다도 일단은 이 사나이의 말을 믿는 편이 위험이 적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 의외의 방향으 로 상황이 전개되어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바로 몇 분전까지만 해도 비장한 각오로 수많은 추격대를 상대로 싸울 결 의를 가다듬고 있지 않았는가! "만물의 근원, 만능의 힘이시여……." 마술사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노르바는 정신의 긴장을 풀고 주문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했다. 순간 이동 같은 주문을 받아들이는 경험은 물론 처음이었다. 나셀이 소리 높여 주문의 마지막 말을 외우며 지팡이를 휘둘렀을 때 눈앞이 갑자기 새하얀 빛으로 뒤덮였다. 너무나 눈이 부셔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눈을 가렸다. 그리고 손을 눈에서 떼어냈을 땐 다른 곳에 서 있었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 ...(5) 5 조그마한 숲 속에 있는 광장이었다. 나무들을 원형으로 잘라서 마 치 의자처럼 늘어놓았다. 이스칼리아의 숲 중앙으로부터 서쪽에 가까운 장소로 일찍이 신수 의 어금니 성채가 이 근처에 있었을 때, 주위를 순회하는 전사들이 휴 식 장소로 사용했던 것 같았다. 노르바 일행은 우연히 만난 다낭 왕국 출신의 마술사 나셀을 둘러 싸듯 무리 지어 앉았다. 궁지에 몰려 있던 상황에서 구해 준 은인이긴 하지만 아군이라는 생각은 아직 들지 않았다. 노르바는 사나이에게 이야기를 재촉했다. "내가 이곳 크리스타니아에 올라온 것은 대략 10년 전의 일이다." 나셀은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팔짱을 낀 채 가슴에 지팡이 를 안고 있었다. "10년 전에 크리스타니아로 오르는 길이 열린 사건이 있었지. 근위 기사라면 그 사건에 대해 상세히 알고 있을 텐데." "물론이지." 노르바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10년 전이라고 하면 하크 마을 영주였던 왕족 하벤을 근위 기사가 공격할 때였다. 그때 신의 성벽이 열려 하벤의 아들과 그 일당은 크리 스타니아로 도망쳐버렸다. 10년 전 일이지만 영주의 아들이 레이든이 라는 이름을 가진 청년이라는 것까지 기억하고 있을 정도로 다낭에서 는 큰 사건이었다. "너는 레이든과 한패였나?" "레이든은 친구였다. 어렸을 적부터." "그렇다면 너는 반역자가 아닌가!" 노르바는 앉아 있던 나무등걸에서 일어서며 칼집에 손을 댔다. 위 협하듯 노려보았지만 나셀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공교롭게 그렇게 됐지만 반역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에게 는 다낭 왕국의 실권을 누가 쥐든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친구를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뿐이다." 나셀은 노르바를 올려다봤다. 노르바는 무언가를 잠깐 생각한 뒤 검에서 손을 떼고 다시 나무등 걸에 앉았다. "나를 근위기사로 알아보고 협력해 줬으니 그 말을 믿기로 하겠다." 앞으로 이곳 크리스타니아를 여행하는 데는 10년 이상이나 이곳에 서 생활한 이 사나이의 협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 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세 사람의 모험자나 현지인 이살 리보다 신뢰가 갔다. "그렇게 생각해 주니 고맙군. 사실 난 본질적으로 싸움을 좋아하질 않아." "그런데 넌 그 동안 여기서 뭣하고 지낸 거지?" 노르바의 질문에 나셀은 잠깐 눈길을 먼 곳으로 돌렸다.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그렇지만 나의 진짜 목적은 이곳 세계를 보는 것이었어." "세계를 본다?" 무슨 말인지 종잡기 어려운 대답이었다. 노르바는 상대가 제정신인 가 살펴보려고 그의 검은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광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이지적인 빛이 그 눈동자에 어려 있었다. "나는 마술사라기보다는 현자가 되기를 바랐어. 이곳 크리스타니 아를 보고 그걸 기록하고 싶었지. 그러나 멀리멀리 돌아다니고만 있 다는 생각이 들곤 해." 어깨를 으쓱하면서 마술사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그러더니 그 때 마침 생각난 듯이 등에 진 보따리를 풀러 그 안에서 한 권의 책을 끄집어냈다. "이것이 이곳 세계에 대한 기록이지. 그렇지만 아직은 그다지 많은 분량이 못 돼." 노르바는 일단 그 책을 받아 들고는 기술한 내용을 훑어보았다. 유 려한 필체였다. 하지만 내용에는 그다지 관심이 가지 않았다. 시간이 있을 때 한번 찬찬히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은 들었다. "다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나?"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우리들이 올라온 길은 닫혀 버렸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너희들이 올라온 것을 보면 어쩐지 다시 열렸다는 생각이 드는데?" 나셀은 그렇게 말하고 묘한 웃음을 지었다. "나 말고도 이곳 세계를 방문하고 싶어한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 지." 그 말은 듣는 사람에게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듯한 느낌을 주 었다. 마술사들 중에는 괴짜가 많다고들 하는데 이 사나이는 그 중에서 도 유별나 보였다. 나셀을 보고 나서 리만을 보니 리만은 그저 평범한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야심에 가득 찬 인물보다는 괴 짜 쪽이 덜 위험할 것 같았다. "크리스타니아로 오르는 길이 다시 열리더니 닫힐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 사실이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노르바가 말했다. 길만 열리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이 여기에 있을 리가 없고, 침략의 위험에 시달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다만 근위기사단이라는 권력의 중추에서 실력을 행사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길이 열렸다면 크리스타니아가 다시 요동 치고 있다는 증거군. 앞 으로 다낭도 그럴 것이고. 어떻게 바뀌어갈지……."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한 마술사의 말에 노르바는 불쾌감을 느꼈다. "미래의 일은 아무도 모르잖아. 내일 벌어질 일조차 알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렇게 말하며 땅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나는 근위기사단장의 명령으로 이곳 세계를 탐색하러 왔다. 그러 나 사태는 심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간 다낭 은 머지 않아 대전쟁에 휘말리고 말 거야." "그게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지!" 똑같은 말이 동시에 두 사람에게서 나왔다. 나셀과 이살리였다. "너희들은 미래를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노르바는 기분이 점점 더 사나워졌다. 생각해 보면 크리스타니아에 파견되고 나서 기분이 상쾌했던 적이 하루도 없었다. "알 리가 없지. 그렇기 때문에 다낭 지방이 전쟁에 휘말린다고도 말할 수 없는 거 아닌가. 그림자부족 사나이여, 자네는 미래가 어떠하 리라고 예지하고 있나?" 마지막 말은 노르바가 아니라 이살리를 향한 것이었다. 질문을 받은 이살리의 얼굴에 깊은 주름과 함께 냉소적인 미소가 떠올랐다. "우리들이 가진 미래 예지 능력에는 한계가 있어. 시간의 거대한 흐름을 정확히 예지하기란 불가능하지." "미래를 예지한다고? 너한테 그런 능력이 있어?" 처음 듣는 말이었다. 노르바는 놀라움과 함께 분노를 느꼈다. 미래 를 예지할 수 있다면 위험을 회피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닌가? "비밀을 가지는 건 이해해. 하지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은 모 두 사용해 주기 바래. 그렇게 해야 진짜 협력하는 거 아니냐고." 노르바는 비난 어린 시선으로 이살리를 노려보았다. "……알았어. 약속하지.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말아줘. 우리들의 예지 능력이란 것이 얼마나 뻔한지 곧 알게 될 테니까." "그래도 판단을 내리는 데 중요한 재료 역할은 할 거 아냐." 성난 어조로 노르바가 말했다. 이살리는 그런 노르바에게 익살맞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말해 줄 수 있는 건 기껏 이 정도밖엔 안 돼. 다낭에서 함께 온 일행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어. 난 앞으로 얼마간은 그들의 소식 을 좇으면서 이곳 세계에 대한 견문을 넓힐 생각이고." "혹시 만나게 되면 다낭으로 돌아오지 말라고 전해. 재상 각하는 위험한 인물은 절대 그냥 두지 않을 테니까." 나셀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일단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자, 그럼 다음으로 너희들 얘기를 듣고 싶은데." 노르바는 거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순서를 밟아 이야기하기 시작 했다. 수개월 전에 여왕을 유괴하겠다고 적이 왕성에 숨어들어 왔던 일. 그 적을 체포하고 이곳 세계를 조사하기 위해 열린 길을 올라 왔던 일. 그리고 그 적과 근위기사단장의 아들이 함께 행동하고 있는 일 따 위가 모두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동행하는 세 사람의 인상 착의도 말했다. 이살리와 만난 적이 있으면 쓸데없는 말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은 말해 두었다. 별다르게 숨길 필요는 없었다. 이 남자는 다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돌아간다 해도 이 정도의 정보로 어떻게 해볼 도리도 없을 것이다. "현재 근위기사단장은 누구지?" 마술사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랏셀 경이다. 피보라 기사라는 별명은 너도 들은 적이 있을 텐데." 노르바가 대답하는 순간 마술사의 표정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팔짱 을 풀고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바꿔들었다. 맑은 눈동자에 놀라움의 빛이 역력했다. "랏셀이라고? 그렇다면 네가 쫓고 있는 사람이 레일즈냐?" "레일즈님을 알고 있어?" 이번에는 노르바가 놀랐다. "난 하크 마을에서 자랐다. 레일즈가 어렸을 때 여러 차례 만난 적 이 있고, 우리집에도 자주 놀러 왔지. 그 소년은 내 여동생과 언제나 함께 돌아다녔거든." "하프엘프의 마술사 후보생 말이군. 그 소녀라면 레일즈님과 동행 해서 이곳에 올라와 있을 거야. 살아 있다면 지금도 함께 행동하고 있 겠지." "사이아가 올라왔다, 이곳으로……." 나셀은 눈을 깔면서 자기 말을 확인하듯 중얼거렸다. "아버지는 건재하신가? 마을에서 좀 벗어난 곳에 사시는 브라이언 이라는 노인이신데." "브라이언 노인이라고?" 왕도를 출발할 때 위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재상에게서 주의 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20여 년 전에 현자 학 원에서 최고 도사의 지위를 버리고 하크 마을로 은거해 들어간 인물 로, 하벤 공작과의 관계가 깊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하벤 공작 을 칠 때 노인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하크 마을을 떠났을 때는 살아계셨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노 인이니 지금도 그러리라고는 보증할 수 없지." "그런가……." 마술사는 가슴에 담아 놓았던 한숨을 후 하고 내뱉었다. "용케도 아버지가 허락하신 모양이군……." "그런 점에 관해선 네가 물어도 대답해 줄 수가 없다." 나셀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겨우 웃는 얼굴로 돌아왔다. "알려줘서 정말 고맙다." "감사한다면 앞으로도 협력해 주기 바란다. 우린 뭐니뭐니 해도 적 을 체포해야 한다. 그리고 랏셀 경의 아들을 보호해 다낭으로 데려가 야 하고." 노르바가 말하자 나셀은 다시 팔짱을 낀 최초의 자세로 돌아갔다. "자기 의사로 올라 왔을 텐데. 만약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다면 실 력을 행사할 건가?" "두 반역자는 잡아서 끌고 가야 하겠지만 랏셀 경의 아들에게까지 강제력을 행사할 순 없지. 다만 아버지에게 편지라도 쓰게 해서 단장 을 납득시키는 수밖에." 노르바는 쓸데없이 말을 너무 많이 하고 있다고 느꼈다. 하지만 눈앞의 마술사는 말하는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묘한 분위기 가 있었다. 거기다 지금까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만한 상대가 없 었던 것도 노르바의 방심을 재촉한 셈이었다. 이렇게까지 말한 바에 야 마술사에게 협력을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여기 있는 세 사람은 과거의 동료들을 잡아들이려고 온 셈 이군." "너하고는 관계없는 일이다!" 살기 등등한 목소리로 전사 테딘이 답했다. 말없이 앉아 있긴 했지 만 리만이나 코랄도 험악한 표정이었다. 그 반응은 노르바를 안심시 켰다. 그들이 성내는 것으로 보아 과거의 동료를 체포할 생각임에 분 명했다. "물론 관계없는 일이긴 하지." 싸늘한 표정으로 맞받으면서 나셀은 그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 았다. "그럴 리 없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적들 편에 설 생각은 없겠지." "그럴 생각은 없다. 그러나 남에게 아픔을 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 아. 만약 내 여동생을 다치게 만드는 일이 생기면……." "그러니까 협력해 달라는 거 아냐. 쓸데없는 싸움은 나도 하고 싶 지 않아." 레일즈와 적의 관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식으로 일이 전개될지는 노르바도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어쨌든 모든 게 레일즈 에게 달려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최악의 경우,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적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때는 결심할 수밖에 없으리라. 깨끗하게 싸우다 죽을 맘 은 없었다. 상황에 따라 그들 편에 설 생각이었다. 랏셀이 어떤 생각으로 이곳에 자신을 파견했든 그렇게 호락호락 생명을 내던지지는 않으리라. 어떻게든 살아남아 조금이라도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싶었다. 동란의 시대가 오면 그것도 가능할 것이다. "협력하지. 사이아가 와 있다면 레일즈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있을 거야." "그게 정말인가?" 노르바가 자기도 모르게 벌떡 몸을 세웠다. "아버지가 동생을 위해 만들어주신 마술사 지팡이를 가지고 있다 면……." "탐지(로케이션)의 주문이로군." 리만의 말에 나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더니 걸터앉았던 나무등 걸에서 일어나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마치 제단 앞에서 의식을 거 행하기라도 하듯 기다란 지팡이를 두 손에 쥐고 눈을 감은 채 기도하 는 자세를 취했다. "……나의 눈동자는 그 모습을 찾아내고 내 귀는 그 소리를 듣는도 다." 주문은 완성되었다. 나셀은 눈을 감은 채 이리저리 방향을 잡더니 마침내 서남쪽을 향 해 바로 섰다. "알아냈나?" "틀림없어. 사이아는 이곳 크리스타니아에 있어. 그것도 반나절 정 도밖에 안 떨어진 거리야." 나셀은 하프엘프 소녀의 모습을 뇌리에 떠올렸다. 그때부터 10년이 지났으니까 틀림없이 아리따운 처녀로 성장해 있 을 것이다. 마술사의 지팡이를 갖고 있으므로 나셀의 고대어 마법이 통했던 것이다. 가슴뭉클한 기억들이 가슴 저편에 꽉 차 올랐다. 나셀은 그런 동생 과 늙으신 아버지를 버리고 길을 떠났던 것이다. 이곳 세계를 보고 싶 다는 욕구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서둘러 출발하자. 놈들이 우리를 쫓아올지도 모르니까." 노르바의 말에 세 명의 모험자는 말없이 각자의 짐을 챙겼다. 노르 바는 그들 세 사람의 표정을 살짝 훔쳐 보았지만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현지인 마술사도 마찬가 지였다. 긴장과 의심에 시달리는 나날이었지만 겨우 출구를 찾아냈다는 생 각이 들었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마침내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노르바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