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 ...(2) 2 "노르바다. 다낭 왕국의 근위 기사단에 속해 있다." 좁은 천막 안에 들어온 사나이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인사를 했 다. 그러나 눈길만은 쏘아보듯 딜란트를 향한 채였다. 딜란트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기사의 목인사를 받으며 자기 이 름만을 간단히 밝혔다. "암흑기사단장 딜란트다." 그리고 곧바로 물었다. "근위기사라면 기사대장이 아닌가?" 비록 왕국은 달라도 기사라면 어디나 엄격한 서열에 위해 유지되 는 법이다. 기사대장이라면 틀림없이 상급 기사였다. 작위도 수여받 았을 것이고 영지도 소유하고 있어 일반 기사와는 큰 차이가 나게 마 련이었다. "근위기사단의 기사는 정규 기사대장과 동격이다. 독자적인 재량 권도 갖고 있고 권한이란 점에서는 기사단장에게 조금도 떨어지지 않 는다." 노르바는 바닥에 깔린 사슴 모피 위에 앉으며 이야기했다. 딜란트 의 질문에 동요하는 기색이 전혀 없는 걸 보면 허세를 부리는 것 같지 는 않았다.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깔보고 넘어갈 만한 상대도 아니었다. "만나고자 하는 이유는 전달자에게서 들었다. 우리 왕국과 동맹을 맺고 싶다고 했던가?" 딜란트는 천막 입구로 시선을 향했다. 천막 안에 있는 사람은 딜란 트와 노르바뿐이었고 그림자부족의 이살리는 천막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밖에도 부하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동행하지 않았 다. 아마도 만일의 사태를 생각해서 그렇게 했을 것이다. 딜란트의 말에 노르바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베르디아인들은 신왕 바르바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있다. 그리고 신왕 폐하는 크리스타니아 대륙 전체를 정복하기를 바라신 다." 딜란트는 종이에 쓰여 있는 문장을 읽는 듯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동맹 의사가 없다는 말인가?" "없다. 종속, 아니 예속을 맹세한다면 무력에 의한 침공은 하지 않 을 수 있지. 신왕 폐하는 제국의 신민이 된 자에게는 관대하시니까." "신이 인간을 지배하려 든다니……." 혼잣말을 하듯 노르바가 중얼거렸다. "인간이 이곳 세계의 주인이었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영원의 제 왕이 세계를 통일한다. 이 대륙도, 우리 고향의 섬도, 나아가 북의 대 륙까지도 포함되리라!" "지난번 전투는 덕분에 잘 보았다. 조그마한 성채 하나를 함락시키 기 위해 엄청난 손실을 입더군." 노르바가 살짝 비꼬아 말했다. "전투를 봤다면 신왕의 기적도 보았겠지. 아직 완전히 각성하신 건 아니다. 각성을 완전하게 이루시게 되면 더욱 강대한 기적을 행사하 시게 된다. 아무리 견고한 성채일지라도 순식간에 소멸시키고 말 것 이다." 딜란트의 말투가 날카로워졌다. "옛날 고향의 섬에선 사신을 신봉하는 왕국이 있었다. 파괴의 여신 을 부활시켜 세계에 파멸을 초래하려고 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 지." 노르바는 그림자부족의 이살리에게서 베르디아 제국에 관해 대체 적인 정보를 들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낭인들과 고향이 같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 사신 왕국의 후예들이 바로 우리들 암흑민족이다. 그러나 이 대륙에서도 똑같은 결과가 되리라고 오판하진 마라. 신왕 폐하는 완전하진 않지만 이미 각성해 계시다. 게다가 신왕 바르바스 는 사신이 아니다. 지배를 관장하는 신이시다. 그 지배의 법칙이란 바 로 약육강식인 것이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르바스의 제국 에서는 실력만 있으면 아무리 높은 신분도 올라갈 수 있었다. 가문이 나 혈통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다. 반대로 실력이 없는 사람은 설령 귀족의 자제라 할지라도 노예에 불과한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런 내용 들을 딜란트가 확신에 차서 이야기했다. "그대가 만약 우리 제국에서라면 어느 정도의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겠는가?" 딜란트는 씩 웃으며 물었다. "난 하급 기사 출신이다. 근위기사가 될 수 있었던 건 나의 실력이 라고 믿는다." 노르바가 언짢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노르바가 근위기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시대의 추세를 읽고 재상 에게 접촉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근위기사단장 랏셀은 보기 드물게 뛰어난 검사로 이름 높다. 만약 다낭군이 신왕의 제국에 가담하게 된다면 그대는 랏셀 경을 단 장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근위기사단장, 랏셀?" 어디서 들어본 이름이었다. 누구에게서 들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레일즈와 이야기할 때 나왔던 이름이었다. 그래! 그의 아버지가 분명 랏셀이었다. 차근차근 생각해보니 다낭 왕국의 상급 기사라고 말했던 것까지 기억났다. 레일즈의 아버지라면 눈앞의 기사가 한 말이 그다지 허풍이 아닐 지도 모른다. "그레일의 팔을 벤 검술 솜씨는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것이군." "아버지에게서 이어받다니?" 딜란트의 혼잣말에 노르바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갑자기 일어서 며 딜란트 앞으로 다가왔다. "혹시 레일즈님을 만난 적이 있나?" "만났고말고. 그대는 성채의 용병을 지휘한 사람이 다름 아닌 레일 즈였다는 것을 몰랐는가?" "레일즈님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노르바가 얼빠진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 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레일즈님은 죽은 건가? 아니면……." "레일즈는 살아 있다. 우리에게 잡혔지만 내가 놓아주었다. 적이지 만 훌륭한 용사였고 그의 목적이 달성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노르바는 그게 무슨 목적이냐고는 묻지 않았다. 레일즈가 살아 있 음을 안 것만으로도 저절로 마음이 놓였다. 이제 랏셀에게 그의 아들 이 죽었다는 보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대의 배려에 감사한다." 노르바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결정한 일일 뿐! 그렇게 감사받을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무뚝뚝한 반응을 보였지만 노르바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았다. "레일즈님은 어디로 가셨나? 동행자는 없었는가?" "여행의 목적지는 회합의 땅이다. 은빛늑대부족의 소녀를 비롯해 여섯 명이 동행하고 있다." "회합의 땅? 은빛늑대부족의 소녀?" "자세한 이야기는 그림자부족의 이살리에게서 들어라. 아마도 그 자는 소상한 내용을 알고 있을 것이다." 딜란트는 이제 회담을 마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해 천천히 자리에 서 일어섰다. 그 의도를 눈치채고 노르바도 조용히 일어났다. "다낭에 돌아가 말리드 재상에게 그대의 말을 전하겠다. 언젠가 정 식 사자를 통해 회답을 보내도록 하겠다." "목숨이 아깝다면 신왕 폐하께 예속을 맹세토록 하라!" 그 말에 대해 노르바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가볍게 인사를 하고 천막 밖으로 나섰 을 뿐이다. "생각보다 빨리 끝났구만." 천막 밖으로 나온 노르바를 맞은 사람은 이살리였다. 그의 곁에는 암흑기사단의 기사가 서 있었다. 노르바는 이살리에게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숲 쪽으로 걸 어가기 시작했다. 이살리는 미끄러지듯 움직여 노르바 곁에 나란히 섰다. 두 사람 뒤 로 암흑기사단의 호위 기사가 말없이 따라왔다. 두 사람이 무사히 떠 나가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야영지 끝까지 따라왔던 호위 기사는 인사도 하지 않은 채 돌아섰 다. 기사의 서열을 생각하면 무례한 태도였지만 그런 것까지 따질 마 음은 없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암흑기사단의 감시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수확은 있었나?" 숲에 들어서자마자 이살리가 물었다. 그 말과 동시에 고대어 마법 가운데 불빛의 주문을 외워 어둠의 장 막이 드리워져 있는 숲에 빛을 비추었다. "회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관해서라면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나?" 언짢은 표정을 감추지 않으며 노르바가 말했다. 이 사나이는 아직도 많은 비밀을 감추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물론 그것은 노르바도 마찬가지였다. 다낭에서부터 동행해 온 과거의 모험 자들도 그다지 신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설령 어떠한 상황에서든 노르바는 랏셀을 만족시킬 만한 성과를 거둬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언가 한 가지 이상 선물이 필요했다. 베르디아군 기사단장과의 회담은 그다지 성공적이라고는 할 수 없 었지만 그 선물을 거둘 만한 실마리는 찾았다. 그건 적지 않은 수확이 었다. "묻고 싶은 것이 몇 가지 있다." 노르바는 옆눈으로 이살리를 힐끗 쳐다보면서 힐문하듯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라니?" 이살리는 노르바의 날카로운 질문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기려는 듯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도대체 회합의 땅이 뭐지? 그리고 은빛늑대 소녀는 누구고?" 질문하는 내용에 대해 이살리는 담담하게 설명했다. "회합의 땅은 신들이 자신들의 육체를 버리고 짐승의 육체에 혼을 봉한 장소로, 신수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지. 거기에는 버려진 신들의 육체가 조각상처럼 늘어서 있다고 해. 그리고 은발의 인간은 은빛늑 대 페네스를 섬기는 은빛늑대부족 사람들 가운데서도 특별히 신이 선 택한 인물이지. 그런데 이거 뭐, 수수께끼 놀이를 하는 것 같군. 그 두 가지가 무슨 연관이 있길래 갑자기 물어보는 거지?" 이살리는 설명을 끝내면서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하느냐는 투로 이야기했다. "난 지금 수수께끼 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냐!" 대답하는 노르바의 목소리가 거칠었다. 현재 자신이 곤경에 처한 까닭은 랏셀의 수수께끼 같은 말 때문이 었다. 도대체 무얼 바라고 피보라 기사가 이곳에 자신을 파견했는지 아직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찾고 있는 인물이 은발의 소녀와 함께 회합의 땅을 찾아가고 있다는군." 이살리는 이제야 제대로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는 노르 바가 찾고 있는 인물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 지금까지 그 사람을 찾은 건가?" "그래. 네가 말하는 그 인물만 찾으면 난 다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이런 세계와는 완전히 결별하고……." "이런 세계라니, 무슨 말이 그래?" 이살리가 어깨를 으쓱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디를 보든 낯익은 이스칼리아의 숲뿐이었다. 이 대륙은 수천 년에 걸쳐 신수와 신수민 족에게 성지였다. 신민족과 암흑민족이 출현한 것은 기껏해야 2, 3백 년에 불과했다. 결계부족이 암흑민족과 신민족을 배제하라고 절규하는 것도 다 이 유가 있었다. 그들이 찾아들기 전까지는 크리스타니아에 큰 전쟁이란 없었다. 화재 때문이었는지 밤의 숲에는 새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때때 로 불어오는 바람에 나뭇잎이 살랑거릴 뿐, 깊고 깊은 정적만이 주위 를 맴돌았다. "그래, 사실 나도 한시라도 빨리 너의 고향으로 가고 싶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신수 아르케나에게서 받은 신탁을 수 다. 다낭 왕국의 현재 상황을 파악해, 신수 아르케나의 미래 예지를 보 다 확실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 미래가 어떤 모습이건 간에 그림자부 족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4권 ...(3) 3 그 사나이가 쫓아오고 있다! 레일즈는 그렇게 확신했다. 복수심에 불타는 양날검 공작 그레일이 쫓아오고 있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신수의 어금니를 둘러싼 격전을 치른 지, 벌써 이레가 지났다. 레일 즈 일행 여섯 명은 지금 이스칼리아의 서쪽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숲 가운데를 달리는 가도를 피해 크게 남쪽으로 우회하는 길을 골라 잡았다. 이스칼리아 숲의 서쪽은 이미 베르디아군의 수중에 떨어져 있었다. 작은 가도가 뻗어 있고 자그마한 부락들이 산재했지만 지금은 대부분 무인 부락이 되어버렸고, 유인 부락은 모두 베르디아군이 접수해서 바르바스의 지배 법칙을 실천하고 있었다. 강자는 지배를, 약자는 복종을. 자존심이 센 은빛늑대부족에게 그건 더할 나위 없는 굴욕감을 안 겨 주었다. 그러나 그런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감행하려고 하지는 않 았다. 그들이 비겁하다고 누가 매몰차게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살아 있 기 때문에 미래는 열린다. 죽고 나면 모든 것이 끝장인 것이다. 그러나 레일즈는 자진해서 사지를 향하고 있었다. 잠들기 전엔 항 상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신수의 어금니를 둘러싼 지난번 전투에서 인간의 삶과 죽음의 모 습은 수도 없이 겪었다. 그런데도 조금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아니, 절대로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전쟁을 그만두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전쟁이 끝나지는 않는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원흉을 처단하는 길밖에 없다. 그리고 이번 대전의 원흉은 예전엔 지배의 신수왕이라고 불렸고 지금은 신왕으로 각성을 이룬 바르바스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바르바스를 쓰러뜨리는 것 이외에는 전쟁을 끝마칠 방법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회합의 땅을 향하는 것이다. 신왕 바르바스와 대결 하기 위해서……. 물론 바르바스를 이길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수 의 어금니 성채를 멸망시킨 기적만 놓고 보아도 분명했다. 신왕 바르 바스는 땅, 물, 불, 바람이라는 4대 정령왕을 모두 소환하여 성채를 완 전히 파괴했다. 그리고 결국 수많은 용병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들은 모두 용감했다. 어떤 때는 무기를 들고 어떤 때는 능력을 써서 전투에 임했다. 그런 용사들이 하나같이 개죽음을 당하고 만 것 이다. 이젠 자신의 차례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들의 눈앞에서 신왕과 싸워 죽음을 당한다……. 그런다고 해서 신수들이 신왕과 싸울 결심을 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레일즈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죽게 마련인 사람의 아들로서 유일하게 신을 능가하는 것은 죽음 이 외에는 없었다. 목숨을 버림으로써 성취 가능한 것도 있다고 믿고 싶 었다. 그렇기 때문에 회합의 땅에 도착하기 전에 죽음을 당해선 안 된다. 쫓아오는 자의 그림자가 지나치게 신경 쓰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양날검 공작 그레일. 만일 이번에 그자와 맞붙는다면 이로써 네 번 째가 된다. 지금까지 한 번 패하고 두 번 이겼다. 다음번이 마지막이 되리라. 어느 쪽이 이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대결을 피할 수 없는 것만은 분명했다. 싸울 각오는 돼 있었다. 그러나 그레일은 싸움을 걸지 않았다. 지난 이틀 동안 늘 주위에 머물고 있었지만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저 레일즈 주위를 맴 돌고 있다는 느낌만을 안겨주었다. 그레일이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 레일즈는 알 수 없었다. 이쪽이 지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레일의 의도는 과녁을 맞추고 있는 셈이었다. 레일즈가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긴장의 끈을 조이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도 그랬다. 검을 품에 안고서 동료들이 쉬고 있는 모습을 가만 히 바라보고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끊임없이 주위에 신경을 썼기 때 문에 늘 피곤했다. 그런 탓에 요 며칠 동안은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신경이 곤두 서 다른 사람이 망을 보고 있을 때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때 비인이 뒤척거렸다. 지난 전투에서 목숨을 잃을 만큼 큰 중상을 입었지만 회복은 아주 순조로웠다. 처음 사흘 동안은 샤일론이 둘러매고 이동했지만 어제부 터는 쉬엄쉬엄 자기 발로 걷기 시작했다. 레일즈는 비인을 항상 겁쟁이 소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의 진정 한 용기를 지난번 전투에서 분명히 보게 되었다. 불꽃의 마신 에프리트가 눈앞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소년은 목숨 을 걸고 대결해 마신의 분노를 진정시켰던 것이다. 레일즈 일행이 여기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그 덕분이었다. 비인의 어머니는 아주 뛰어난 정령사였다. 비인은 틀림없이 그 피 를 이어받은 것이다. 그 비인이 몸을 움츠리고 모포를 뒤집어쓴 채 잠들어 있었다. 대지의 요정족 샤일론이 매일처럼 비인을 치료해 주었다. 이 행운 신의 신관 전사는 신의 기적, 곧 신성마법을 써서 전신에 입은 비인의 화상을 갓 태어난 아이의 살결처럼 회복시켜 주었다. 완치(리프레쉬)라고 하는 고도의 치유 주문이었다. 샤일론이 이 기 적을 일으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신전에 돌아가면 고사제 로 영입될지도 모른다. 그만큼 높은 덕이 있어야만 일으킬 수 있는 기 적이었던 것이다. 드워프족 신관은 부끄러워하며 비인의 용기에 감화되어서 가능했 다고 겸손하게 말했다. 비인이나 샤일론 모두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하 프엘프 사이아도, 도적 밧소도 성장했고, 그건 레일즈도 마찬가지였 다. 신들이 사는 땅 크리스타니아에 올라와 모두가 성장을 이뤘다. 그 리고 바뀌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뿐만 아니라 기술에서도 놀랍게 성 장했다. 사람의 인생은 짧지만 살아가는 동안에 끝없이 성장한다. 티없는 갓난아기로 세상에 태어나 죽을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변화를 겪는가?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강인함을 여실히 보여준다고 레일즈는 확신했다. 그때였다. 그림자 하나가 움직였다. 모포를 몸에 두른 채 일행 가운데 한 사람이 일어섰다. 나무들 사이를 통해 비치는 별빛을 받아 머릿결이 은빛으로 빛났 기 때문에 누가 일어났는지를 금세 알 수 있었다. 마리스였다. 그녀의 은발은 주기의 신수왕이며 신수왕의 좌장인 은빛늑대 페네 스에게 선택된 성스러운 표지였다. 그래서 은발의 인간은 은빛늑대부 족의 요직에 취임하도록 나면서부터 정해져 있었다. "교대할까요?" 마리스는 레일즈 곁으로 다가와 동료들을 의식해 조그마한 소리로 이야기했다. "아직 잠이 안 와. 망이라면 내가 계속 봐도 되겠는걸." 레일즈가 대답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묘하게도 마음이 안정되면서 달빛같 이 투명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마리스는 레일즈의 곁에 와서 앉더니 모포 자락을 끌어올렸다. 레 일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리스의 어깨에 모포를 걸쳐주었다. 그러나 품에 안은 검은 떼어놓지 않았다. 언제 그레일이 도약의 능력을 동원 해 덤벼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맹호부족의 수인들이 장기로 삼는 순 간이동 능력은 정말이지 무서웠다. 여간해선 대적하기가 불가능할 지 경이었다. "그레일이 주위에 있는 것 같지?" 레일즈가 마리스에게 물었다. "지금은 느껴지지 않아요." 마리스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은빛 머리가 출렁이며 레일즈의 뺨을 산들바람처럼 간질였다. 그레 일이 쫓아오고 있다는 것을 처음 느낀 사람은 마리스였다. 능력을 사 용하면 그녀의 후각과 청각은 마치 늑대처럼 예민해졌다. 뒤에서 들 려오는 발소리나 체취까지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인가 그녀의 후각과 청각에 한 사람이 계속해서 잡혔다. 신수의 어금니 잔당을 사냥하기 위해 맹호부족은 사방으로 부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만일 그들이라면 적어도 네다섯 명의 기색이 느껴 져야 했다. 그리고 이쪽 일행을 알아차렸다면 용서 없이 습격해 왔을 것이다. 마리스와 레일즈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뒤쫓아오는 자는 그레일 이 분명했다. 감각이 예민한 것은 그레일도 마찬가지였다. 맹호부족의 수인은 먹이를 노리는 육식동물의 감각을 갖고 있었다. 설령 시야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해도 레일즈 일행의 움직임을 손바닥 처럼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잠을 안 자면 정말로 일이 벌어졌을 땐 훨씬 힘들어져요." 크리스타니아 말이었다. 최근 들어서야 안 사실이지만 마리스는 레일즈의 모국어이기도 한 베르디아 말로 이야기할 때는 말투가 딱딱했다. 하지만 그 대신 크리 스타니아 말로 이야기할 때는 감정이 듬뿍 담겨 있었다. 레일즈 자신 이 이 말을 쓰는 데 익숙해지자 겨우 그 사실을 알아차렸던 것이다. 그래서 마리스와 이야기할 때는 되도록 크리스타니아 말을 썼다. 유감인 것은 레일즈가 그 말로는 능숙하게 자기 감정을 표현하지 못 한다는 점이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마음대로 되질 않아. 거쉰처럼 언제 어디서나 잘 수 있는 성격을 가진 사람이 부러워." 레일즈는 전쟁의 신수왕 블루저를 섬기는 백인대장을 떠올렸다. 거 쉰이 그리웠다. 그는 아마도 무사히 도망쳤으리라. 부족에게 돌아가 족장이 되기에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 용사였다. 레일즈는 그가 어 금니부족을 하나로 묶어 베르디아군과 다시 싸울 것이라고 굳게 믿었 다. 거쉰뿐만이 아니었다.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 모두는 부족으로 돌아 가면 높은 지위를 약속받을 사람들이었다. 신수의 어금니는 잃고 말 았지만 그들이 각기 자신의 부족으로 돌아가서 부족 사람들을 각성시 켜 주기를……. 그래서 각 부족들이 베르디아군과 싸우기 위해 떨쳐 일어나 주기를 레일즈는 기대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신왕이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어도 쉽사리 정복되진 않을 것이다. 부족 중진들의 단결된 의지로 나서게 되면 침 묵하던 다른 신수들도 떨쳐 일어설 게 분명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레일즈 일행이 회합의 땅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마리스가 기도하듯 말했다. "모두 다 무사하긴 힘들겠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사지를 벗어났다 면 정말 좋겠어." 레일즈는 고개가 꺾인 마리스의 어깨에 손을 둘러 자기 쪽으로 조 금 가까이 끌어당겼다. 그녀와 닿아 있으면 어디 먼 데로 떠났던 자기의 반쪽이 돌아온 듯 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마리스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태어 나면서부터 줄곧 함께 지내온 듯한 느낌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함께 지내온 사이아보다 더……. 두 사람만의 조용한 시간이 그렇게 지나갔다. 생명을 잃는다는 것은 이런 행복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미 결심이 섰다. 신왕과 싸울 때는 마리스도 함께 할 것이 다. 죽을 때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레일즈에게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괴로움만 더할 뿐이었다. 그레일의 말에 따르면 마리스는 은발의 인간 가운데서도 특별히 선택된 한 사람이라고 했다. 수백 년이나 수천 년에 한 번 크리스타니아를 지배하는 주기가 바 뀔 때, 회합의 땅에서 신수들이 모여 크리스타니아의 다음 주기에 대 해 결정을 내린다고 했다. 그것은 주기가 완전하지 않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주기를 뒤흔드는 몇 가지 요인들이 존재하는데 그것들이 미묘하게 주기의 안 정을 깨뜨렸다. 바로 그러한 주기의 불안정을 제거하고 혼란 요인을 없애는 것이 신수들의 의무였다. 신수들은 종자로 삼고 있는 부족민 가운데 한 사람만을 신수의 회 합에 방청인으로 임석시키는데 대개는 족장이 그 역할을 맡아왔다고 했다. 지금도 아마 크리스타니아 곳곳에서 선발된 신수민족의 대표들 이 회합의 땅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이 신수의 회합에서는 주기의 신수왕 페네스의 대표자와 지배의 신수왕 바 표자가 다툼을 벌여, 다음 주기에 누가 신수왕 가운데 좌장이 될 것인가를 결정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 모두가 그레 일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번 회합은 지금까지와는 다를 것이다. 이번 회합이 어느 쪽으로 흘러가게 될지는 신수들조차도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그레일은 언제……." 레일즈의 입에서 하품이 쏟아져 나왔다. 그걸 본 마리스가 소리 죽 여 웃었다. "이제야 졸립네." 레일즈는 선선히 인정했다. 긴장하고 있던 마음이 풀어지자 맹렬하 게 졸음이 쏟아졌다. "그레일이 덤벼오면……." "즉시 깨울게요." 마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 뒤, 어깨에 걸쳤던 모포를 옷깃까 지 깊숙이 덮어 썼다. 레일즈는 얼마 안 돼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마리스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일어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자연적 으로 늑대의 감각을 사용하고 있었다. 청각과 후각이 예리해지고 어 둠 속도 마치 대낮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다.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달이 구 름 속으로 숨어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