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결 전 1 강 건너 기슭에 검은 그림자가 떠올랐다. 처음에는 하나둘 드문드 문 나타나더니 잠시 후엔 속속 늘어나서 마침내 맞은편 기슭을 완전 히 메웠다. 잔치가 벌어진 밤부터 꼭 사흘째 되던 날 낮이었다. 생각보다 느긋 한 진군 속도였다. 베르디아군의 통제 역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지도 모른다. "드디어 왔구만." 거쉰이 성채 북서쪽에 만든 망루 위에 진을 치고는 언제나 자랑하 는 신성무기 쌍아창의 돌날로 통나무 바닥을 탕탕 쳤다. 레일즈도 거 쉰과 함께 망루에 올라가 있었으므로 맞은편 기슭의 상황을 관찰할 수 있었다. 베르디아군의 총공격이었다. 수는 헤아려볼 기분이 아니었다. 어쨌 든 대군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장비도 충실하다고 여겨졌다. 눈 아래 로 흘러가는 강물을 내려다보았다. 흐름은 느렸지만 깊이가 있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는 헤엄쳐 건널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되면 무 방비 상태나 다름없었다. 강을 건너는 중에 공격을 당하게 되면 수많 은 희생자가 생기리라. "과연 다리를 건너올까?" 레일즈는 자문하듯 중얼거렸다. "건널 거야. 우리들이 덫을 놓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할걸. 우 리들은 그런 유식한 수단을 쓴 적이 없거든." "미안한데, 그런 유식한 수단을 동원해서." 레일즈가 머쓱한 얼굴로 말했다. "아아, 그러니까 우리가 승리를 거두지 못했던 거지."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는 단련된 전사를 상대보다 많이 거느려야 해. 그렇게 할 수 없으니까 책략을 사용하는 거고."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성격적으로 따지자면 자신도 책략 따위 는 좋아하지 않았다. 정정당당하게 겨뤄서 승리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번에 그렇게 했다가는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전멸할 게 확실했다. "모든 전사들에게 준비를 갖추라고 전해줘." 거쉰이 청색 헝겊을 감은 가벼운 전투복 전사에게 말했다. 조정자 란 별명을 가진 신수 실버리를 섬기는 발굽부족의 전사였는데 그들은 부대와 부대 사이의 연락을 취하는 전령의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그 들도 총력전이 벌어지게 되면 무기를 들고 싸웠다. 그들 또한 우수한 역전의 용사들이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적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달려 있지. 성채에 공격을 가해오면 격퇴 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그리고 포위해 들어오면 우리 쪽에서 나 가 교란을 시도하고." 레일즈는 왼손으로 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위에 언제나처럼 불쾌 감이 일었다. 지금은 그래도 괜찮지만 싸움이 시작되면 더 지독하게 불쾌감이 일어날 것이다. "타닐이 이끄는 부대는 괜찮을까?" 거쉰은 남쪽 숲을 바라보며 말했다. "적에게 발견되면 도망치라고 말해뒀어. 숨어 있을 부락은 얼마든 지 있잖아. 그러니까 안심해도 괜찮을 거야. 식량과 물도 분산시켜 숨 겨 두었으니까 다른 부담 없이 싸울 수 있을 거고." 레일즈는 그렇게 대답하고 망루 사다리를 내려가기 시작했다. 레일즈의 부대는 성채를 끝까지 지킬 돌격 부대였다. 가장 위험한 역할이었지만 스스로 그것을 선택했다.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용병 들의 신뢰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다리를 다 내려섰을 때 귀가 찢어질 듯한 함성이 일었다. 성채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는데 성채의 목책이 떨리고 망루가 흔들릴 정 도로 컸다. 신수의 용병들도 지지 않겠다는 듯 큰 소리를 질렀다. 짐승들이 울 부짖는 포효처럼 야만스럽지만 힘이 넘쳤다. 아군의 사기가 높다는 생각을 하며 레일즈는 안심했다. 밑에는 사이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비인도 함께였 다. 둘 다 보라색 헝겊을 팔에 둘러 마법사와 수인들로 이루어진 지원 부대원이라는 걸 나타냈다. 마리스도 이 부대 소속이었다. 그녀는 무 기로 싸워도 되겠지만 그 이상으로 뛰어난 능력자였기 때문에 이쪽에 배속된 것이다. 치유자 역할을 맡아야 할 사람이 절실했기 때문이다. 밧소는 전령, 샤일론은 레일즈와 같은 돌격대에 배속되었다. "드디어 시작되는 거야?" 사이아가 창백한 표정으로 말했다. 레일즈는 그렇다는 표시로 고개 를 끄덕였다. 그녀의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싶은 생각은 굴뚝 같았지 만, 사실 자신도 대단히 긴장하고 있어서 다른 사람을 챙겨줄 형편이 아니었다. "한 놈도 성채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해." 비인이 어울리지 않게 큰 소리를 치자 레일즈가 참지 못하고 웃음 을 터뜨렸다. 비인의 말에 긴장이 조금이나마 풀어진 것이다. 물론 한 놈의 적도 성채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야 마찬 가지였다. 그때 땅이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드디어 적군이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다리를 건너는 소리가 수백 명의 나무꾼이 한꺼번에 나무에 도끼질하는 소리처럼 들렸다. 함성도 끊이지 않았다. 주위가 온통 시 끄러웠다. "준비! 발사!" 고고부족의 백인대장 난스의 호령이 울리고 망루와 목책에 늘어선 화살 부대가 비 쏟아지듯 활을 쏘기 시작했다. 대군이었기 때문에 일 일이 겨냥할 필요도 없었다. 화살을 맞고 적병들이 다리 곳곳에서 강물로 떨어졌다. 레일즈는 검은 헝겊을 팔에 감은 돌격대 전사들이 서쪽 문 앞에 집합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전사들 가운데 샤일론과 개미인간족의 전사 길리엄의 모습이 보였 다. 길리엄은 백인대장에 필적하는 실력이었지만 개미인간족 전사는 원래 자신의 자유 의사로 행동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 부대로 보내 졌다. 그들 개미인간족의 전사들은 지금 길리엄이 레일즈의 명령에 따르고 있듯이 붉은개미의 황제 크로이세를 섬기는 진홍부족 수인들 의 명령에 맹종했다. 다들 용감한 전사들로 이루어진 부대였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믿음직한 사나이였다. "문을 열어라!" 레일즈의 외침과 동시에 문 밖에서 비명이 들렸다. 쏟아져 들어오 는 대군을 감당하지 못하고 다리가 붕괴하기 시작했음에 틀림없었다. 다리 위에 있던 수백 명의 베르디아 병사들이 물러서지도 나아가 지도 못한 채 다리와 함께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무거운 갑옷을 입은 전사들은 그대로 물 한가운데로 자취를 감췄다. 가벼운 전투복을 차 려입은 자들도 워낙 갑작스럽게 당한 일이라 젖은 옷이나 갑옷이 거 치적거려 평소처럼 헤엄치질 못했다. "몇 놈이나 건너왔을까?" 스스로에게 물어보았다. 아마도 수십 명은 건너왔을 것이다. 퇴로 가 막힌 적을 무찌르기 위해 막 성문을 나서려는 참이었다. 문이 육중 한 소리를 내며 바깥쪽으로 열렸다. 적군이 문 앞에까지 다가오지 않 았나 생각했지만 적은 없었다. 무너진 다리의 중심부에서 그저 망연 자실한 모습으로 서 있었는데 그 수가 백 명은 넘어 보였다. 다리는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버티고 있었다. "돌격, 앞으로!" 있는 힘을 다해 외치며 마리스에게서 받은 은제검을 뽑아들고 선 두에 서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오십여 명 가까운 용병이 레일즈를 뒤 따랐다. 적의 복장을 보고 그들이 두얼굴부족의 전사단이라는 사실을 알았 다. 부적처럼 여우 꼬리를 허리에 늘어뜨리고 있었다. "맹호부족도 암흑기사단도 아니잖아?" 선봉이 베르디아군의 주력이 아님을 알아보고 레일즈는 적지 않게 실망했다. 적의 주력을 덫에 빠뜨려 타격을 가해야만 앞으로의 전투 가 유리하게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투는 언제나 생각한 대로 착착 진행되지는 않는 법이다. 레일즈는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는 놀라서 어쩔 줄 모르는 적군에 게 뛰어들었다. 다리를 건넌 적군은 레일즈 부대보다도 숫자가 많았 다. 그러나 그들은 완전히 넋이 빠져 있었다. 강가로 뛰어내려 다시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달아나려는 자도 있 었다. 싸우기 전부터 이미 승패가 갈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른쪽 왼쪽으로 검을 휘둘러 레일즈는 혼란스럽게 달아나는 적군 을 차례차례 베어넘겼다. 순식간에 온 몸이 적군의 피로 물들었다. 최초의 전투에서는 일단 완승을 거두었다. 아군의 희생자는 겨우 세 명뿐이었는데 베르디아군은 강물에 빠져 죽은 자들을 포함해 수백 명이 넘었다. 선봉이 전멸하는 모습을 보고 적의 대군은 숲 속으로 모습을 감췄 다. 그러나 완전히 퇴각하지는 않았다. 태세를 갖춰 다시 공격해올 것 이다. 적의 전력은 아직도 충실했다. 첫 전투 후 성채 전체가 승리의 환성에 휩싸여 전사들의 사기가 한 껏 솟아올랐다. 그러나 레일즈는 너무나 일방적으로 치러진 전투였기 때문에 승리를 기뻐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마치 잔혹한 살육자가 된 듯한 느낌이었다. 기분 전환을 위해 적이 다음엔 어떻게 나올까를 따져보았다. 다리 가 무너졌더라도 성채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올 것이 분명했 다. 그러나 성채의 눈앞에서 강을 건널 만큼 어리석지는 않으리라. 안 전하게 상류나 하류로 이동해서 강을 건너올 확률이 높았다. 그들이 올 만한 곳에 미리 가서 저지하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성 채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작전이 아니었다. 강을 건너면 성채까지는 장애물이 없었다. 숲에 가설해둔 덫으로 유인해 약간은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나기 전에 성채로 압박해 들어올 것이므로 총력전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다음 번 전투가 가장 괴롭게 치러질 거야." 안마당을 걸으면서 낮게 중얼거렸다. 이미 날이 저물어가고 있었 다. 한낮의 전투는 실제로 레일즈 부대만이 치렀을 뿐이기 때문에 전 사들은 심하게 피곤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야습을 감행해오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슴푸레한 숙소 그늘에서 조그마한 불꽃이 보였다. 깜짝 놀라 불꽃이 일어난 쪽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숙 소 뒤편으로 돌아가자마자 불길의 정체가 밝혀졌다. 조그맣게 지핀 장작불이었다. 그 너머로 비인이 눈을 감고 앉아 있 었다.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런 데서?" 맥이 빠진 목소리였다. 이살리의 예언 때문에 불에 대해 레일즈는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다. "젠장, 집중을 할 수 없잖아." 비인이 항의 섞인 말투로 한 마디 하고는 불길 너머로 레일즈를 바 라봤다. "보면 모르겠어? 정령과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불길이 높이 솟아나는가 싶더니 도마뱀을 닮은 짐승이 불꽃 속에 서 슬금슬금 기어나왔다. 비늘 대신에 진홍빛 불꽃에 휩싸여 있는 걸 보면 불꽃의 정령 살라만더가 틀림없었다. "정령하고 이야기를 해서 뭘 하려고?" 무심결에 나온 말이었다. "정말 멍청하네. 조금이라도 레일즈 너한테 도움이 됐으면 해서 이 렇게 애쓰고 있는데……." 화를 내는 비인의 자세가 한 순간에 무너지자 살라만더는 순식간 에 불꽃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 참 미안하게 됐어. 매일 이렇게 한 거야?" 요즘은 정말 바빴기 때문에 비인과 사이아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사이아와는 얼굴도 마주하지 못했다. 아니 솔직 히 말하자면 마음을 가다듬기 위해 일부러 마주치기를 피했다. "레일즈도 매일 검술 훈련을 해서 강해졌잖아. 그래서 나도 노력하 고 있는 거지." "훌륭한 마음가짐인데." 레일즈는 웃으면서 비인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런데 많이 나아졌니?" "응. 하지만 부정한 마음이 있는지 쉽지 않아. 하위 정령들의 소리 는 어렵지 않게 듣는데 상위 정령들의 소리는 전혀 들리질 않아." "그것 참 유감인데?" 레일즈는 격려하기 위해 짧게 깎은 그의 흑발에 손을 얹었다. "레일즈 너까지 날 어린애 취급하니?" 비인이 불만스러워하며 이야기했다. "어린애 취급이라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무 초조해 할 것 없어. 검과 마법은 전혀 달라. 소질만 있으면 검술은 얼마든지 가능해. 젊은 용사들은 과거에도 수없이 많았어. 하지만 정령사나 마술사는 오랜 동안 수행에 힘쓰지 않으면 숙달될 수가 없잖아." "그럴 시간이 있다면야 문제가 다르지." 비인은 진지한 표정으로 레일즈를 바라봤다. "하지만 눈앞에서 전투가 치러지고 있잖아. 역시 초조하게 돼. 자기 몸을 지킬 정도는 돼야 살아남을 수 있지 않겠어? 우리 어머니는 상 위 정령들과도 이야기를 할 수 있었어. 나도 틀림없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야." "물론이지." 레일즈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수행을 계속해. 사이아하고 네가 위험에 휩쓸리지 않도록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부탁해, 레일즈." 비인이 살짝 웃었다. 지난 1년 동안 비인은 키도 훌쩍 컸고 콧등에 난 여드름도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해졌다. 비인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앉아 눈을 감자 장작불의 불꽃이 다 시 크게 타올랐다. 방해가 되지 않으려고 레일즈는 곧 자리를 떴다. 2 적의 대군이 다시 공격해온 것은 다음날 저녁 무렵이었다. 이번에 는 몇 군데에서 도강을 시도해 남과 북과 동쪽 세 방향에서 성채를 둘러싸고 함성을 질렀다. 그러나 쉽사리 공격해 들어오려고는 하지 않았다. "어휴, 초조해 죽겠구만." 동쪽 문 안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레일즈는 그의 부대 전사 가운데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적의 대군에 포위당하니 역전의 전사들도 불안을 숨기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성채 전체가 긴 장 때문에 조여드는 느낌이 확 전해져왔다. "이거 재미 없게 진행되는걸." 생각해보니 곧바로 공격받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싸움이 시 작되면 불안을 느낄 짬도 없을 것이다. 상황은 어제와는 전혀 달랐다. 적은 강 건너에 늘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성채 주위를 완전히 둘러싸고 있었다. 도강할 필요도 없고 진 군하기만 하면 곧바로 목책까지 아무런 장애물도 없었다. 이대로 계 속 포위한 채 함성만 올려대고 있으면 아군이 먼저 지쳐 나자빠질지 도 몰랐다. "어쩌면 곧바로 공격을 가해오지 않을지도 몰라." 레일즈는 큰 소리를 지르며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서 있는 것도 피곤하니 앉아서 기다리자." 전원이 이상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았지만, 레일즈는 아무렇지도 않 은 듯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허리에 찬 물통을 들고 벌컥 벌컥 물을 들이켰다. 돌격대의 전사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한 채 고개 를 갸웃거리면서도 레일즈의 말을 따랐다. 레일즈 부대가 전원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목책에 올라간 화살 부 대와 창 부대의 용병들도 어찌된 일인가 싶어 찔끔찔끔 훔쳐보았다. 레일즈는 몸에서 떼어낸 검을 땅바닥에 꽂아 세우고 팔짱을 꼈다. 적의 함성은 아직 계속되고 있었지만 성채에선 그에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적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레일즈 부대가 하는 대로, 자기가 담당한 자리에 앉아버리는 용병도 나타났다. 언젠가 아버지로부터 아군의 사기를 돋구는 기술을 갖춘 사람만이 뛰어난 지휘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그러기 위해서 는 한바탕 연극도 꾸밀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전설로 전해오는 사막의 영웅왕도 의외로 능숙한 연기자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성채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을 알고는 적이 내지르는 함성도 점차 사그러들었다. 그 소리가 사그러든 순간 또 다른 큰 소리가 울렸 다. 눈앞에는 성채의 문이 가로막혀 있어 밖의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적의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틀림없었다. 땅바닥이 울리고 몸이 밑에서 들어올려지는 듯했다. "자, 가자!" 레일즈는 기합 소리를 내며 일어서서 검을 뽑아들었다. 머리 위로 높이 들려진 검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그것을 신호 삼아 신수의 어금 니 용병들은 소리 높여 외쳤다. 잔뜩 뒤로 당긴 활로 화살을 쏘아 다가오는 적을 쓰러뜨리고는 다 시 조준해 활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적의 대군은 대지를 메우며 세차 게 다가와서 얼마 안 돼 목책에 덤벼들었다.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은 적을 향해 돌과 창을 던졌다. 적들도 활이 나 창으로 반격을 꾀했다. 몇몇 용병이 활과 창의 공격을 받아 목책에 서 떨어지기도 했다. 부상자들은 치유자들이 치유의 능력을 사용해서 곧바로 치료해 주 었다. 회복한 전사들은 곧바로 자기가 맡은 자리로 돌아갔다. 쉬고 있 을 여유가 없다는 사실을 모두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 투 불능이 된 중상자는 숙소로 옮겼다. 전투가 치열해지자 전사들은 변신의 능력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 떤 사람은 멧돼지로, 어떤 사람은 사자로, 그리고 어떤 사람은 독수리 로 머리 모습이 바뀌었다. 목책 위와 아래에서 격렬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목책을 타 고 넘어온 적은 아직 하나도 없었다. 레일즈는 아군의 우세를 확신했 다. 그러나 눈앞에서 문의 빗장이 들썩였다. 문을 파괴하려고 적들이 통나무로 세차게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서의 문은 모 두 마법으로 단단히 봉해놓은 상태여서 암호를 외우든지 마법으로 해 제하지 않는 한 절대로 열리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신수의 어금 니 용병들 가운데 적기는 하지만 마술사나 정령사가 존재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마술사는 그림자 부족의 이살리였다. 그래서 그가 사라진 것은 아군의 입장에선 커다 란 손실이었다. 사이아와 비인은 실력상 이살리와 큰 차이가 났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적은 아군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많은 마술사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다. 베르디아 제국에는 아예 궁정 마술 사단이 따로 조직되어 있는 정도여서 도사급 마술사만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어쩌면 마법으로 문의 봉함을 해제하고 강제적으로 부술지도 모른다. 그때를 대비해 레일즈 부대는 안에서 대기하고 있는 것이다. 적이 안으로 침입해오더라도 끝까지 성채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게 바로 레일즈 부대의 임무였다. 그러나 만에 하나 레일즈 부대가 밀린다 해 도 성채 내부를 여러 개의 구획으로 나누어놓았기 때문에 성채 전체 가 난전에 휩싸일 염려는 없었다. 난전에 빠지게 되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아군이 승리하지 못할 게 확실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도록 확실히 준비해놓은 셈이었다. 현재로선 레일즈가 기대한 대로 전투가 치러지고 있었다. "어쩌면 출격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는데……." 큰도끼를 거머쥔 채 곁에 있던 샤일론이 눈앞의 문을 노려보며 혼 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랬으면 좋겠어. 문이 부서지면 고전을 피하기가 어려울 테니." 이번 공격은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레일즈 는 간신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퇴각하는 적을 추격할까? 아니면 야습을 감행할까?" 스스로에게 물었다. 적들로 하여금 지는 전쟁이라는 생각을 통렬하 게 안겨주어야 했다. 그래야만 적들을 뼈저린 패배감으로 몰아넣어 전의를 꺾고 다음 전투 때 아군을 우위에 서게 해 줄 것이다. "두 가지를 모두 다 해볼까?" 어느 쪽이나 대담한 행동이지만 적은 그 어느 것도 대비하고 있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제대로 먹 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좋다!" 레일즈는 결단을 내렸다. 아군에게도 희생자가 적지 않게 나올 것 이지만 그것만 걱정하고 있다가는 진짜 승리를 거머쥘수 있을 것 같 았다. 레일즈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자기 생각을 전했다. "재미있겠는걸." "해보자." 돌격대 전사들은 용감한 반응을 보였다. 표정으로만 판단한다면 겁 먹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모두 신수에게 선택받은 역전의 용 사들이었다. "깊숙이 쳐들어갈 필요는 없다. 어느 정도 타격을 주면 바로 철수 한다." "알았어, 대백조 형제. 네가 말한 것은 언제나 틀림없었어." 곁에 있던 전사가 소리 높여 웃었다. "그래, 믿어줘." 레일즈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자신이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면 타인은 불안에 빠질 뿐이다. 남 위에 선 사람은 절대로 그런 모습을 보여선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결단을 내린다는 것은 아무래도 괴로운 법이다. 전투에서는 결단 하나로도 싸움의 승패가 갈리는 것이다. 더구나 수많은 전사들 의 목숨이 걸려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국왕의 잘못된 판단으로 국가가 망한 예가 얼마 든지 있었다. 판단의 자료조차 없이 스스로의 직감만으로 결정을 내 려야만 할 때도 있었다. 만약 그 판단이 잘못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었 다.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래, 우린 해내야 돼."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적을 끌어들여!" 그때 전사들의 함성이 들렸다. "좋다, 문을 열어라! 적을 추격한다!" 레일즈는 돌격대의 전사들에게 명령했다. "우리가 나가면 문을 닫아라!" 옆에 있던 은빛늑대부족의 정령사에게 말했다. 스스로 퇴로를 끊는 셈이지만, 만약 적의 철수가 덫이라면 문이 열린 틈을 타 적이 성채로 침입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때는 앞뒤로 적에게 둘러싸인 레일즈 부대는 전멸을 당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너희 부대만 가는 거야?" 정령사는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아아, 우리들만으로 충분해." 이렇게까지 나오게 되면 이미 망설임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암 호를 외워 마법으로 봉해놓은 문을 열었다. 레일즈 부대는 문이 완전 히 열리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해 대지는 붉게 물들었다. 그 위에 요마들과 베르디아 병사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피가 대 지를 더욱 짙은 적색으로 물들였다. 베르디아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하고 숲을 향해 정신 없이 도망 치는 중이었다. 레일즈 부대는 도망치는 베르디아군을 뒤쫓아 전속력 으로 달리면서 커다란 함성을 질렀다. 성채에서 올리는 승리의 환성 이 레일즈 부대의 함성에 힘을 보태줬다. 도망가다 뒤처진 적을 레일즈 부대는 차례차례로 거꾸러뜨렸다. 도 망칠 수 없음을 깨닫고 반격에 나선 적은 두 명이나 세 명 정도가 둘 러싸 확실하게 처치했다. 순식간에 이삼십 명의 적을 처리하고 나서 레일즈는 돌격대 전사 들에게 진격을 멈추라고 명령했다. 밤중에 다시 야습을 도모할 예정 이었기 때문에, 여기서 지나치게 힘을 많이 쓰게 되면 그만큼 야습에 성공하기가 어려웠다. 레일즈 부대는 의기양양하게 성채로 돌아왔다. 전날에 이은 승리로 온 성채가 들썩들썩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레일즈 부대는 흥분하는 전사들에게 둘러싸여 빈대떡이 될 지경이었다. 레일즈도 드디어 이겼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분명히 적은 신수 어 금니의 전력을 과소 평가했다. 저녁 무렵에 공격을 가해 일몰 때쯤이 면 성채를 떨어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걸까. 맹호부족의 전사단이나 암흑기사단 같은 주력 부대는 이번 공격에 참여하지 않았다. 은빛늑 대부족과의 결전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겠지만, 어쨌든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왔더라면 성채는 훨씬 더 고전을 했을 것이다. 밀정 매카티의 말에 의하면 암흑민족은 싸움을 할 의욕이 없다고 했으니 맹호부족의 전사단만이 유일하게 강적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들에게만 타격을 가하면 적은 퇴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을 너무 서두르면 그르치게 마련이다. 아군은 전투 하나 하나마다 승리해야만 했다. 어제와 오늘은 그렇게 패배를 당했다지만 적은 아 직도 막강했다. 이번 전쟁은 심리전이 되리라고 레일즈는 생각했다. 그래서 아군에 게는 승리를 확신시키고 적에게는 패배감을 안겨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적을 전멸시킬 대승은 바라기 어려웠기 때문에 적으로 하 여금 이번 공격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것이 신수의 어금니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승리의 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작은 승리를 계속해 나가는 방법밖에는 없었다. 오늘밤의 야습이 실패해선 안 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3 밤하늘에 떠오른 달빛은 숲의 바닥까지를 비춰주진 않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은빛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숲의 나무들에 기대 두얼굴부족의 전사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곳곳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오는 그들의 모습은 이야기를 나눌 기력 조차 없어 보였다. 무기력한 동작으로 술을 마시며 마른 고기를 물어 뜯었다. "칠칠치 못한 놈들 같으니라구!" 의기소침한 전사들을 노려보며 한 사나이가 땅바닥에 침을 뱉었다. 맹호부족의 족장 그레일이었다. 그를 어떤 사람은 존경심으로 어떤 사람은 공포에 떨면서 양날검 공작이라고 불렀다. 그 칭호는 신왕 다 음 가는 존재임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두들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신왕이 신들을 통치하는 최고의 존재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다면 이곳 크리스타니아의 모든 인 간을 지배하는 것은 그레일의 몫이 될 게 분명했다. "저 따위 보잘것없는 성채를 왜 함락시키지 못하는 거지. 적의 수 는 기껏해야 천 명도 되지 않는데." 한 전사의 멱살을 잡고 그레일은 포효하듯 외쳤다. 그 전사는 벌벌 떨면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레일은 분풀이를 하듯이 그 사내를 나무 줄기에 내동댕이쳤다. 그 전사는 머리와 등을 세차게 부딪쳐 신 음 소리도 내지 못하면서 땅바닥에 굴러떨어졌다. 그때 오른쪽에서 붉은 빛이 다가왔다. 그리고 곧이어 빈정거리는 말투가 들려왔다. "소란을 피우고 계시는군요." 그레일로선 가장 듣기 싫은 목소리였다. 붉은 빛은 횃불이었다. 검 은 갑옷을 입은 늙은 기사가 왼손으로 횃불을 들고 있었다. 늙은 기사 뒤로 역시 검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가 걸어왔다. "딜란트 경."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분노와 증오가 얽혀 있었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심각하게 패배를 당하셨더군요." "남의 이야기하듯 하지만 경이야말로 한 사람의 병사도 움직이지 않았잖나!" "잊으셨습니까? 이슬로를 출발하면서 그레일 공께서는 신수의 어 금니 성채 따위야 개미집 부수듯 하리라고 호언장담하지 않으셨나요. 우리 기사단이 나설 것까지 없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공께서도 맹 호부족 전사들에게 대기하도록 명해놓지 않으셨던가요?" 한 번도 본마음을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비웃는 그의 모습 에 그레일은 분노가 끓어올랐다. 언젠가 그 입을 찢어놓고야 말리라. 그레일은 마음속으로 맹세했다. 복수를 관장하는 신왕 바르바스의 이 름을 걸고. "두얼굴부족과 깨달음부족, 침묵부족의 전사단만으로도 5천을 넘 는다. 거기에 요마들을 보태면 1만은 훨씬 넘지. 그들만의 전력으로 공격해서 이기지 못하는 것은 신왕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하기 때문이 다. 용기라고는 눈곱만큼도 갖고 있지 않다는 증거지!" "오호, 그런가요. 그도 그렇지만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도 무시할 수 없겠던걸요. 그렇게 단기간 동안에 별 볼일 없는 성채를 철벽처럼 만 들지 않았습니까? 오늘처럼 공격했다가는 몇 년이 걸려도 이곳 성채 를 함락시킬 수 없을걸요." "딜란트 경이라면 해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아닙니다. 그런 자신은 없습니다." "그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떨리는 목소리로 양날검 공작이 외쳤다. "기분 나쁘시더라도 용서하십시오. 저는 제안을 하러 온 것입니다. 이런 조그마한 성채에 신경을 빼앗기는 건 쓸데없는 낭비입니다. 신 왕의 바람은 시레네 부락을 공격해 페네스의 성지를 유린하는 것입니 다. 신왕의 기적을 동원해 저 대부락을 멸망시키면 천 명 남짓한 전사 가 무슨 수로 저항하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저들 따위는 아무런 위협 이 되질 않을 것입니다." 딜란트의 제안에 대해 그레일은 대답 대신 말없이 노려보기만 했 다. 그 눈동자는 늙은 기사의 손에 들린 횃불의 불빛이 옮겨붙어 새빨 갛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딜란트는 대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태연하게 그레일의 시선을 받아 넘겼다. "말하고 싶은 게 그것뿐인가?" "그것뿐입니다." 딜란트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번 전투를 지휘하는 사람은 그레일 공이므로 판단은 맡기겠습 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고개를 살짝 숙이며 딜란트는 그레일에게서 돌아섰다. 딜란트가 뒤 돌아 걸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횃불을 든 늙은 기사가 깊이 머리 숙였 다가 딜란트 뒤를 따랐다. 그때였다.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지?" 그레일은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귀를 기울였다. 비명뿐만이 아니라 외침 소리와 금속 부딪치는 소리도 뒤섞여 들려왔 다. 싸움이 벌어진 것이 틀림없었다. "야습인가!" 그레일은 미간을 찌푸리고 이빨을 갈며 말했다. "대담한 놈들이로군. 저놈들이 공격을 가해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딜란트는 멈춰서서 그레일을 돌아보았다. 딜란트가 무슨 말을 하는 동안에 또 다른 방향에서 외침 소리가 들렸다. 약간 사이를 두고 다시 반복되는 들렸다. 야습은 세 개의 야영지를 노리고 행해졌다. "아아, 생각나는군요. 제가 풀어놓은 밀정의 보고입니다만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놈은 잃어버린 대지에서 온 대백 조부족의 전사라고 하더군요. 분명 레일즌가 뭔가 하는 이름이었습니 다만……." "정말인가?" 그레일의 눈이 먹이를 발견한 육식동물처럼 빛났다. "그게 사실이었나?" 그레일 자신이 풀어놓은 밀정으로부터는 결국 아무런 연락이 없었 다. 연락을 위해 추가로 보낸 자도 신수의 어금니 성채로 잠입하고 나 서는 돌아오질 않았다. 아마도 정체가 폭로되어 둘 다 살아남지 못했 을 것이다. "제가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맞을 겁니다." 딜란트의 말은 어디까지나 정중했다. 그런 만큼 그레일의 신경을 더 긁어놓았다. "뭘 쭈뼛거리고 있는 거야!" 그레일은 딜란트에게서 눈길을 거두고 불안하게 눈치만 살피고 있 는 두얼굴부족의 전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빨리 무기를 들고 나가서 싸워! 하나도 살아서 돌아오지 마!" 마치 호랑이의 포효 같은 그레일의 명령에 두얼굴부족의 전사들은 벌떡 일어나 어둠 속을 향해 뛰어갔다. 그리고 그레일 자신은 도약의 능력을 사용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군요." 주위에서 인기척이 사라지기를 기다려 횃불을 손에 든 늙은 기사 가 딜란트에게 말을 붙였다. 벡이라는 이름의 노인은 대대로 딜란트 집안을 모셔온 기사였다. "이렇게까지 공격해오다니, 솔직히 말해 나도 놀랐어. 레일즈라는 사나이, 만일 적으로 돌아서면 무서운 상대가 되겠지?" "처치해 버릴까요? 그렇다면 매카티에게 명령을 내리겠습니다만 ……."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어. 지금은 살려두는 것이 우리 상 황에 더 나을 것 같아." 벡은 두말 없이 알겠다는 표시로 고개를 숙였다. "이번 전쟁은 시간을 많이 끌게 되겠지. 그러면 신왕 폐하께서는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실 게 분명해. 아무리 늦어도 머지 않아 맞이하 는 회합의 때까지는 은빛늑대부족을 굴복시키고 싶으실 테니까." 부활했다고는 하지만 신왕은 아직 본래의 힘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했기 때문에 신수 모두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부족의 군사적인 우위 확보가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군사적 우위를 배경 으로 회합에 임해서 스스로 신수의 왕이라고 선언해 버리고 싶은 것 이다. 은빛늑대부족의 성지 시레네를 정복할 수 있을지 여부는 회합에서 바르바스가 행하는 발언의 무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레일은 집착이 지나쳐. 복수를 수행하는 것이 맹호부족에게는 신성한 의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습죠." "복수심은 분노나 증오보다 훨씬 강한 감정이어서 목적을 이루기 위해 큰 힘이 되기도 하지. 그러나 그것을 이루지 못하는 동안에는 더 큰 목적을 향해 나아갈 수가 없어. 놈의 왼쪽 눈에는 레일즈라는 사나 이밖에 비치지 않는 거야. 결국 이번 전쟁에선 찌부러진 오른쪽 눈으 로만 보고 있는 거지.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전쟁에서 이길 수 없어." "이대로 가다간 저자가 자멸할지도 모르겠군요." 벡은 그 사실이 너무나 유쾌해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 의미 심장한 미소를 띠었다. 신왕의 위엄을 배경으로 암흑민족조차 지배하려고 하 는 그레일을 이 늙은 기사는 마음속 깊이 증오했다. "자, 우리 야영지로 돌아가자. 충분히 경계하지 않고 있다간 자칫 우리 암흑기사단도 큰 타격을 받을지 모르지. 그렇게 되면 더 이상 그 레일을 비웃을 수가 없어." 큰 소리로 웃으며 딜란트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언제나처럼 늙은 기사 벡이 그 뒤를 따랐다. 레일즈 부대의 야습은 아슬아슬하게 성공을 거두었다. 애초의 목적 이 적병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니라 동요시키는 것이었다. 적의 야영 지로 쳐들어가 혼란에 빠뜨리는 것이 목적의 전부였던 만큼 오래 머 무르는 것은 쓸데없는 피해를 가져올 뿐이었다. 그래서 야습의 효과 를 충분히 거두었다고 생각한 순간 미련 없이 후퇴해 성채로 돌아왔 다. 쓰러뜨린 수는 10여 명 남짓이었지만 아군은 한 사람도 피해를 입 지 않았다. 야영지의 베르디아군은 레일즈 일행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아직 공포에 사로잡혀 있었다. 함성도 잦아들지 않았다. 어쩌면 같은 편끼 리 살육을 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는 암시 능력이 없는 한 적과 아군을 분간하기가 힘들다. 한낮의 패배로 의기소침해 있던 참에 불의의 습격을 받았기 때문 에 베르디아군의 놀라움은 그만큼 더 컸다. 레일즈는 목적이 달성된 만큼 만족감을 느꼈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다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런 외줄타기 모험 같은 행동을 앞으로도 계속 취할 수밖에 없 다는 데 있었다. 야습에는 타닐이 이끄는 유격 부대도 참여했다. 어떻게 싸웠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크리스타니아에서 이름 높은 은빛늑대부족의 전사들 인 만큼 소리 없이 접근해서 난리를 피운 뒤 바람처럼 철수했을 것이 다. 이 삼림 지대는 그들에겐 안마당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헤매는 일 같은 건 상상할 수도 없었다. 어두운 숲을 내달려 성채로 돌아오자 레일즈는 피로를 느꼈다. 지 휘부는 전 부대에게 해산을 명령하고 내일을 대비해 푹 쉬어두라고 전했다. 오늘밤 적이 습격해온다 해도 일어나 싸울 필요는 없을 것이 라고 스스로 다짐했다. 피곤할 때 무리하게 되면 생각지도 못한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채는 다시 조용해졌다. 승리의 흥분도 가시고 모두 휴식을 취하 고 있을 시간이었다. 언제 다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르나 긴장하고만 있어서는 휴식을 취할 수 없다. 쉴 수 있을 때 충분히 쉬어 두는 것은 전사들의 으뜸가는 행동수칙이었다. "어서 오세요." 숙소에 돌아오자 마리스가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을 보는 순간 레일즈는 긴장이 풀어졌다. "뭐, 마실 것 좀 드릴까요? 괜찮으면 가벼운 먹을 거리라도……." "고마워, 마리스." 레일즈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모처럼이니까 호의로 생각하고 기다릴게." "그럼 밖에서 기다리세요. 곧 갖고 나올 테니까." 그렇게 말하고 마리스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레일즈는 숙소의 뒤편으로 돌아가서는 화톳불을 하나 쓰러뜨려 땅 위에 횃불을 만들어 놓았다. 며칠 전 이 자리에서 비인이 정령과 교신하는 훈련에 몰두하 고 있던 것이 기억났다. 별 생각 없이 하늘을 올려보았다. 달은 이미 서쪽 하늘로 기울어 강 건너 숲으로 자취를 감추려 했다. 어스름하게 펼쳐진 구름에 별빛 이 가려 어두운 밤하늘이었다. 그러나 성채의 하늘은 화톳불로 밝혀져 있는 탓에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마리스가 나왔다. 레일즈는 일어서서 술병과 술잔을 받았다. 꼬치 두 줄과 치즈에 나 무 열매 따위가 곁들여 있었다. 구운 치즈를 레일즈가 특히 좋아한다 는 것을 마리스는 기억하고 있었던 게다. 세세한 마음 씀씀이가 참으 로 고맙고 기뻤다. 마리스는 레일즈 곁에 앉아 치즈를 꼬치에 꽂아 장작불 곁의 땅바 닥에 꽂아세웠다. 그렇게 하면 치즈가 부드러워지고 표면이 살짝 눌 어서 가장 맛있는 상태가 되었다. 레일즈는 술잔에 술을 부어 우선 마리스에게 건네고 나서 자기 잔 에도 부었다. 그러곤 건배하듯 술잔을 가볍게 들어올리고 부드러운 과실주에 입을 댔다. 피곤한 몸 구석구석까지 술기운이 퍼져가는 것 이 느껴졌다. "성채 전사들이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용사라고 칭송하고 있어요." 마리스가 자랑스러운 듯 말을 꺼냈다. "제 생각도 그들과 똑같아요." "고마운 말이지만 그렇게 불리기엔 아직 일러." 레일즈는 과실주를 또 한 모금 마시고는 숨을 깊이 내쉬었다. "베르디아군을 완전히 격퇴하고 나면 정말 기뻐할 수 있을지도 모 르겠지만." "이길 수 있어요. 반드시……." 마리스는 잘 익은 치즈 꼬치를 레일즈에게 내밀었다. "레일즈님의 생각은 누구보다도 뛰어나요. 적들이 이곳 성채를 함 락시키기 위해 취하는 행동과는 비교도 되지 않죠. 그리고 레일즈님 의 생각은 성채의 전사들에게 확실하게 전달되고 있어요." "하지만 생각만으로 전쟁을 이길 수는 없겠지." 뜨거운 치즈를 입에 넣으며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길 수 있어요, 레일즈님이라면." "그래 나도 믿겠어. 마리스의 말이니까." 얼굴을 마주하며 두 사람이 함께 웃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간은 깨지고 말았다. "적의 습격이다!" 망을 보는 전사의 목소리와 함께 비명 소리가 계속되었다. "적의 습격이라니…… 너무 방심하고 있었나?" 레일즈는 이를 꽉 물었다. 장작 하나를 왼손에 움켜쥐고 안마당으 로 뛰었다. 벌써 오른손으로 검을 뽑아들었다. 안마당 중앙에 두 사람의 전사가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싸움은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지만 레일즈가 있는 곳에서 볼 때 가장 가까운 곳은 거기였다. 분명히 아군이 열세였다. 도와주러 나서지 않으면 적에게 당하고 말 것이다. "어디로 침입해왔지?" 레일즈가 신음 소리를 냈다. "조심하세요! 저들은 맹호부족의 전사들이에요." 따라온 마리스가 레일즈에게 말했다. 그것으로 의문은 풀렸다. 맹 호부족의 수인들은 순간 이동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 때문이다. 도약이라는 능력이었다. "맹호부족이라고?" 진저리 나는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동시에 레일즈의 눈앞에서 싸 움의 결말이 났다. 창을 무기로 쓰던 신수의 어금니 용병이 검을 휘두 르는 적군을 이기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 것이다. 그 검은 날이 크고 뒤로 휘어 있어 대도(그랜드 샴셔)라고 불리기 도 하는 대형의 곡도였다. 대도를 든 전사는 다섯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레일즈 쪽으로 천천히 얼굴을 돌렸다. 그 눈이 노란 빛 을 띠는 것 보면 암시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레일즈는 자신의 진저리 나는 예감이 적중했음을 알았다. 그것도 최악의 형태였다. "양날검 공작……." 레일즈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