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3권 ...(17) 불타오르는 망루 사다리를 한 남자가 낑낑거리며 올라가고 있었다. 그의 오른발이 무릎부터 사라지고 없었다. 지혈도 하지 못했는지 피 가 뚝뚝 떨어졌다. 그러나 그는 그 점에 대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두 팔과 왼발만으로 한 계단 한 계단을 올라갔다. 어금니부족의 백인대장 거쉰이었다. 거쉰은 서문으로 도망치려던 참에 물의 정령왕이 일으킨 파도에 휩싸이고 말았다. 그런데 운 나쁘 게도 물이 날라온 나무 틈에 끼여 발이 부서졌다. "도망치긴 틀렸군." 순간적으로 그렇게 마음 먹은 거쉰은 부서진 다리를 자기 손으로 절단하고 신성무기 쌍아창을 지팡이 삼아 그때까지 남아 있던 세 개 의 망루 가운데 하나로 간신히 왔다. 그러나 그 망루도 불꽃이 크게 번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쉰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쌍아창 을 바닥에 꽂은 뒤 사다리를 오르기 시작했다. 다 오르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마지막에는 구르듯이 망루 로 올라갔다. 주위의 통나무가 불꽃을 뿜어냈다. 머지 않아 이 망루는 불에 타 떨어지고 말리라. 그러나 그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때까지 자신의 생명이 붙어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려다보니 성채로 몰려오 는 베르디아군의 모습이 보였다. 성채에서 탈출을 도모하는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없애겠다는 의도였다. "이제야 분명히 알겠어, 타닐. 네 마음이 어땠는지……." 분명한 목소리로 거쉰이 말했다. 이렇게 엄청난 힘에 휘둘리고 말 면 무력감에 빠지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거쉰의 마음에 무력감은 없었다. 있다면 분노와 증오뿐이었다. 성채에 기적을 사용한 신왕 바 르바스에 대한 무한한 분노였다. 그리고 용병들을 참살하겠다고 쇄도 하는 베르디아군에 대한 증오였다. "이건 전쟁이 아냐." 승패는 이미 갈렸다. 더 이상은 전쟁이 아니었다. 단지 살육일 뿐이 었다. "오냐, 신왕의 기적까지는 못 될지라도 나도 힘껏 너희를 죽여주리 라." 거쉰의 눈이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몰려오는 베르디아군을 휙 둘러보았다. 맹호부족의 전사단이 보였다. 그들은 선두에 서서 성채 로 물밀 듯이 밀려오고 있었다. "신수왕 블루저는 그 무한의 창을 들고……." 노래 부르듯 거쉰이 말했다. 그러곤 금빛으로 빛나는 눈길로 선두 에 선 사내를 노려보았다. 빛나는 눈이 일순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그 눈길을 받고 선두에 선 전사가 소리도 내지 않고 푹 쓰러졌다. 그 육체는 이제 영혼이 빠져나간 빈 껍데기에 불과할 것이었다. "수많은 용왕을 도륙한……." 다시 노래를 불렀다. 신화 시대에 암흑신 패라리스가 풀어놓은 용 왕들에게 쫓긴 크리스타니아를 지킨 것은 전쟁신 마일리의 종자이기 도 했던 블루저였다. 그때 블루저는 무한히 긴 창을 가지고 용왕들을 쓰러뜨렸다고 했다. 무한히 긴 창, 그것은 곧 눈길이었다. 블루저의 눈길에는 주문에 의해 죽음을 안길 수 있는 능력이 담겨 있었던 것이 다. 그것은 세상에 사악한 눈(이블 아이)이라는 별명으로 전해졌다. 블루저의 수인 중에서도 극히 한정된 사람만이 이 힘을 사용할 수 있었다. 거쉰이 두 번째 사람을 노려보았다. 으악, 하는 소리와 함께 또 한 사람이 땅바닥을 굴렀다. 또 한 사람, 그리고 또 한 사람……. 맹호부족 전사들은 멈칫거리며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원인도 모르는 채 계속해서 전사들이 죽어가기 때문이었다. 그건 당연했다. 그러나 거쉰은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공 포에 떨면 더욱 좋을 뿐이었다. 자기 힘이 미치지 않는 곳에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되는 터무니없 는 세상사를 씹어볼 수 있다면 더욱 좋으리라. 신왕 바르바스는 이보 다 수십 수백 배의 인간의 목숨을 순식간에 박탈하지 않았는가. 신이 행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물론 거쉰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도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거쉰의 눈동자는 정확히 열 차례 빛났 다. 그러고는 의식이 가물가물해졌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위 가 온통 불꽃이었다. 거쉰의 옷도 타들어가면서 연기를 뿜어냈다. 열 기가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고통은 거의 느낄 수 없었다. 발 밑에 피가 흥건히 괴어 있었다. 몸 안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왔다 고 생각될 만큼 많은 양이었다. "아, 이 정도로 해두고 가야 하나!" 거쉰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복스, 제노바……. 결국 너희들을 맞이해 주지 못하는구나. 이제부 터 가는 곳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더라도 용서해 주게나. 그리고 레일 즈, 너는 아직 살아 있어야 해……." 말을 마친 순간 거쉰은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 했다. 동시에 거쉰의 옷에서 격렬하게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불꽃은 이미 온 몸을 휘감았다. 마치 다비식을 치르는 것만 같았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3권 ...(끝) 5 불타오르는 성채를 탈출한 레일즈 일행은 동쪽을 향해 달려갔다. 적은 남쪽에서 쳐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쪽으로도 적 이 쳐들어올 법한데 이쪽만큼은 쳐들어오는 적이 보이지 않았다. 레 일즈는 덫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적의 한가운데를 돌파할 기력은 도저히 없었다. 거기다 지금은 부상자를 둘러메고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비인의 상태가 걱정이었다. 적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어딘가 안전한 장소에서 안정시키고 싶었다. 샤일론이 치유의 힘을 썼다고는 하지만 화상이 결코 가볍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레일즈의 생각은 어긋나고 말았다. 눈앞에 베르디아군이 나 타났던 것이다. 암흑기사단이었다. 말을 탄 전사도 있었다. 숲 속이므 로 그렇게 빨리 달릴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의 발보다는 빠를 것 이 분명했다. 도망칠 수 없다는 계산이 서자 레일즈는 곧바로 그들을 향해 나아 갔다. 싸워서 돌파하는 수밖에 없었다. "운수가 사납구만." 밧소는 남의 일 말하듯 했다. 그러나 각오는 돼 있는지 소검을 뽑아 들었다. "마리스……. 상황이 어려우면 마리스만이라도 도망쳐." 레일즈는 앞을 가는 마리스에게 그렇게 말했다. "모두 남겨두고 나만 말이에요?" 굳어진 얼굴로 마리스가 뒤를 돌아봤다. 아름다운 은발에는 진흙이 엉겨붙어 있고 얼굴 곳곳에는 생채기가 나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마리스뿐이라면 달아날 수 있잖아. 은빛늑대부족의 수인이 달리 면 말도 쫓아오지 못할 거야. 그러나 우린 안 돼. 그리고 너한테는 소 중한 사명이 있잖아." "……레일즈님은 어떻게 되고요?" "그건 저 암흑기사들에게 물어봐야 알지." 레일즈가 농담을 섞어 대답했다. "알겠어?" 확인하듯 물었다. "모르겠어요!" 마리스는 화가 난 말투였다. "알 리가 없지요. 제가 왜 성지로 가려는지 알고 있어요?" "신수들의 회합에 참가한다며? 은빛늑대부족의 대표로서……." "그래요. 신수왕 페네스에게 제 마음을 전할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달아나라는 거지." 마리스는 멈춰서서 레일즈에게로 아예 돌아섰다. "저는 방황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그 방황을 풀어줄 사람은 레 일즈님밖에 없다는 것도. 그것이 제 답이에요." "모르겠는걸……." 마리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레일즈로선 정말 알 수 없었다. "도망갈 거라면 함께 가자는 말 아냐!" 사이아가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골난 목소리였다. "맞아요, 바로 그 뜻이에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면서도 마리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처음 에 레일즈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에 무시하려고 했다. 그런데 슬며시 화가 났다. 이들을 죽게 할 수는 없었다. 물론 밧소와 샤일론 도 마찬가지였다. 비인이 홀로 목숨을 걸고 마신과 대결해준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던 생명들이었다. "어떻게든 해보자." 레일즈는 마음을 정하고 말했다. 상대방의 수는 많았지만 돌파해보 는 수밖에 없었다. 암흑기사들은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은 채 레 일즈 일행이 다가오는 것을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모두 합쳐 스무 명 정도 돼보였는데 기사가 다섯, 마술사가 하나, 전쟁신 마일리의 신관 전사도 하나 있었다. 나머지는 창이나 다른 무 기를 든 잡병이었다. 뚫고 지나가기 힘들 것 같았다. 그러나 하는 수 없다. 그들에게서 다섯 걸음 정도 남겨진 곳에서 레일즈가 멈춰섰다. "우릴 지나가게 해달라!" 베르디아 말로 말했다. 즉 다낭의 말이었다. 최근에는 완전히 크리 스타니아 말에 익숙해져 있었지만, 태어나서부터 쭉 써온 말인 만큼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 경우 중요한 것은 박력이었다.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지나가고 싶었다. "너희로선 모처럼 거둔 승리 아닌가! 이런 데서 목숨을 잃고 싶지 는 않겠지." 단순히 협박하는 소리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몇 사람의 목숨을 빼 앗는 것은 자신 있었다. 역효과가 날지도 모르지만 목숨을 구걸하는 것보다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너희들은 운이 좋다. 우리 기사단은 그렇게 명령을 받았다." 한 기사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뭐라고?" 너무나 놀라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딜란트 경의 명령이다. 도망가는 자는 쫓지 말라고 하셨다." "딜란트의……." 레일즈도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레일즈에 관해 알아보기 위해 밀 정을 보냈던 암흑기사단의 단장이었다. "혹시 레일즈 아닌가?" 갑자기 베르디아 병사 가운데에서 놀란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잡병이라고 생각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레일즈가 놀랐다. "너는……." 매카티였다. 바로 딜란트가 파견한 밀정이었다. "이게 우연인가?" 언제나 밧소가 빙글거리는 것처럼 매카티가 실실거렸다. "입장이 역전되었구만." 밧소가 뒤에서 살짝 중얼거렸다. "아는 놈들인가?" 암흑기사 가운데 한 사람이 매카티에게 물었다. "약간요." 매카티가 대답했다. 그리고 레일즈를 향해 말했다. "사로잡을 생각은 없지만 나와 함께 가지 않겠어? 딜란트님이 너를 만나고 싶어 하시니까." 레일즈는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레일즈도 딜란트라는 사나이에게 는 흥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슨 마음으로 레일즈를 만나고 싶어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레일즈는 성채의 방어전을 지휘해 베르디아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힌 장본인이었다. 그것을 자기 공적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 만 적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다.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지." 샤일론이 말했다. "비인도 걱정되고. 어디서든 좀 쉬어야 돼." 이런 상황에선 상대방의 말을 신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레일즈는 결론 내렸다. "알았다, 함께 가지." 베르디아의 야영지는 신수의 어금니 성채와 시레네를 연결하는 가 도 사이에 설치되어 있었다. 이 가도는 성채로서는 보급로이기도 했 고 퇴로이기도 했다. 거기를 틀어쥐고 있는 것을 보고 딜란트라는 인 물이 보통이 아님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성채는 시레네에 의존 하지 않았고 전쟁 전에 충분한 식량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가 도를 장악한 것은 실전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이었다. 전사들에게 호송되는 형식으로 레일즈 일행은 딜란트가 머물고 있 는 천막으로 안내되었다. 그러나 샤일론만은 비인 곁에 남아 다른 천 막에서 쉬었다. 다른 기사들은 모두 본래 임무로 돌아가라고 명령받았다. 명령을 내린 것은 물론 딜란트였다. 딜란트 말고는 늙은 기사 한 사람만이 남 았을 뿐이었다. "네가 레일즈인가?" 레일즈의 전신을 훑어보면서 감정이 한껏 고조된 듯 딜란트가 말 했다. "생각보다 젊구만." 그렇게 말하는 딜란트 자신도 그렇게 나이를 먹은 것은 아니었다. 삼십이 될까 말까한 정도였다. 딜란트가 자기 소개를 한 뒤 늙은 기사 도 연이어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어딘지 모르게 귀공자로 자라난 느낌이었다. 명문 기사 가문의 태 생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레일즈도 상급 기사의 아 들이었지만 성장 과정이 그렇게 좋지만은 않았다. 어렸을 적의 기억 이지만 하크 마을 영주의 아들이 바로 이런 분위기였다. 그가 바로 소 문으로 전하는 레이든이었다. 눈앞에 있는 암흑기사단장도 어쩌면 그 사람과 인연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일즈는 자신의 이름을 먼저 밝힌 뒤 함께 온 동료들도 일일이 소개했다. "우선 귀공들의 용기와 작전에 깊은 존경을 표한다." 딜란트는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결국 지고 말지 않았는가." 레일즈가 무참한 표정으로 말했다. "신왕의 기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그건 우리가 이긴 것이 못 된다." "고마운 말이긴 하나 위안은 되지 않는다. 신왕 바르바스는 당신들 의 왕이 아닌가!" "어쨌거나 그건 사실이다." 긍정하긴 했지만 딜란트의 표정은 복잡했다. 밀정 매카티의 말로 추측해보면 이 암흑기사단장은 신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에게 무슨 용건이 있나?" 레일즈가 물었다. 순수하게 그것을 알고 싶었다. "사실 용건 따윈 없다. 다만 이야기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렇 게 젊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내가 젊어서 유감이란 얘긴가?' 레일즈는 속으로 웅얼거렸다. 그것만큼은 노력한다고 어떻게 되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내 감상을 말했을 뿐이다. 나는 나이로 사람을 판단할 생각은 없 다. 다만 솔직히 말해 놀랐다는 것뿐이다. 그래서 네가 대체 어떤 사 람이냐고 묻고 싶을 뿐이다." "나에 대해서 말인가?" "그렇다." 딜란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단순한 전사일 뿐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우리 모국의 상급 기사시다." "다낭 왕국을 말하는 건가? 우리들과 고향이 같다는?" 레일즈도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 이야기다. 감정상으로는 뭐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실감이 나 진 않는다. 우리한테 전해지는 전설에선 너희들 조상은 그다지 좋은 사람들이 아니다."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다." 전설이라는 것은 원래가 그런 것이라고 늙은 기사가 진지한 표정 으로 설명을 보탰다. "네 아버지는 상급 기사라고 했나?" "근위기사단장이다. 그러나 검술 솜씨 하나로 단번에 그 자리에 올 라선 것이므로 유서 있는 집안은 아니다. 할아버지는 사냥꾼이라고 들었다." "크리스타니아에 온 것은 아버지의 명령 때문이 아니었나?" 레일즈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곳 세계로 올라오 게 된 이유와 경과를 이야기했다. "모험자란 말인가?" "전설 속의 자유기사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내 꿈이다." "자유기사? 아아, 사막의 용병왕 수하에 있던 기사를 말하는군." 딜란트는 관심 없어 하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과연 벡이라는 늙은 기사가 말한 대로 전설이란 것은 극히 일방적인 견해를 취하게 마련이 아닌가. "다낭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말리드라는 이름의 재상이다. 야 심가로 왕위의 찬탈을 노리고 있지. 아버지는 그의 오른팔이다. 그러 나 나는 아버지와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난 재상을 좋지 않게 생각하 는 사람이다. 같이 다니는 동료 두 사람은 반역자로 쫓기고 있는 몸이 다." "그렇다면 레이든과 같은 입장이 아닌가?" 역시 그 이름이 나왔다. "입장으로 보자면 그렇다. 그러나 레이든이라는 사나이와 나는 아 무런 관계가 없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그때 나는 어린 애에 불과했다." "레이든이라면 내가 기억하고 있어." 사이아가 멈칫거리며 이야기에 끼여들었다. "나는 레일즈보다 약간 나이가 많으니까. 멋있는 사나이였어. 강하 고 부드럽고…… 온 마을의 여자들이 다 그를 동경의 대상으로 삼았 었지. 게다가 영주님의 아들이었고……." "그런 걸 묻고 있는 게 아니잖아." 레일즈가 짜증내며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얘기를 꺼낸다는 게 불쾌했다. 영주 하벤을 죽이고 레이든을 이곳 세계로 쫓아낸 것은 재상 말리드와 레일즈의 아버지 랏셀이었다. "레이든은 이곳 세계에서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레일즈가 물었다. "신왕을 쓰러뜨리려 하고 있다. 그러기 위해서 크로이세 부족의 전 사단을 이끌고 있지." "황제를 말하는 거예요." 마리스가 말했다. 붉은개미의 신수 크로이세의 부족은 러브래들이 라 불리는 지협 지대를 지배했는데 토지가 척박한 황야인 탓에 극히 사회적이고 조직적인 삶을 영위하며 살아갔다. 대백조부족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전사가 진홍부족을 지도하 고 있다는 이야기는 레일즈도 알고 있었다. 그 황제라는 인물이 레이 든이었던 것이다. "황제를 자칭하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아. 그것은 야심의 시작이 지." "힘에는 힘,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진홍부족의 군사력은 위협적이 지. 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 거기다 개미인간족 전사들은 모 두 가공할 만한 능력들을 갖고 있어." 그건 잘 알고 있다. 개미인간족 길리엄은 신수의 어금니에서도 손 꼽힐 정도로 훌륭한 전사였다. 그는 과연 무사히 도망쳤을까? "당신은 레이든과 동맹을 맺고 있는가?" 레일즈가 물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렇기는커녕 지금은 적대관계다. 다만 동맹을 맺 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가 뜻하는 바와 내가 뜻하는 바가 거의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덧붙여 말한다면 레일즈, 너도 그렇 다." "뜻이 같다?" 의외의 말이었다. "왜, 내 말이 틀린가?" 틀리다고는 할 수 없었다. 지금 레일즈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걸 이룩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를 따져 들어가면 자연스 럽게 답이 나왔다. "나는 신왕의 종복이다. 충실하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만일 신 왕의 명령이 떨어진다면 레이든이 됐건 너희들이 됐건 다 죽일 수밖 에 없다." "그런데도 뜻이 같다는 말은?" "같다." 딜란트가 선뜻 말했다. "신왕은 나의 마음까지도 꿰뚫어보신다. 어쩌면 지금 이 이야기도 듣고 계실지 모른다. 나 같은 존재야 신왕에게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 르는 하찮은 인간에 불과하다. 다만 암흑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책임만 은 제대로 수행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왕 폐하께서 날 처분하지 않고 계시지. 아니, 내가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인지도 모르지만." 그의 입장에 대해서 레일즈는 머릿속으로는 확연히 이해할 수 있 었다. 암흑기사단으로서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고 있다면 지금 단계에서는 신왕의 종복이 되는 것이 최선임에 분 명했다. "나의 마음은 결정되어 있다." 레일즈는 우선 딜란트를 바라본 뒤 동료들을 훑어보면서 천천히 말머리를 이었다. "머지 않아 신수들이 성지에서 회합을 연다고 한다. 나는 그 회합 에 나갈 생각이다. 딜란트가 무척이나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어떻게 하려고?" "싸울 것이다, 신왕과!" 레일즈는 분명하게 말했다. "성채가 신왕의 기적으로 말미암아 파괴되었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 전쟁은 신왕을 쓰러뜨리지 않으면 끝나지 않는다고. 레이든도 또 그의 동료들도 틀림없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나한테는 현 재 아무런 수단도 방법도 없다. 그러니 정공법으로 싸우겠다. 정면에 서." 사이아가 숨을 꼴깍 삼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이길 수가 없을 거야." 밧소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그러나 난 할 거야. 비록 내가 쓰러지는 걸 보여 주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신왕에게 죽어간 사람들의 비참함을 되갚 아 줄 거야." "죽을 작정인가? 그렇게 해서는……." "해결되지 않을 거란 말인가?" 레일즈는 딜란트에게 되물었다. "……네가 의도하는 것이 뭔지 알겠다. 그러나 나는 신수들도 믿지 않아." "나는 신수를 믿습니다." 마리스가 무언가 결심한 표정으로 레일즈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레일즈의 두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레일즈님이 만약 신왕과 싸운다면 저도 함께 싸울 것입니다. 아마 도 신수왕 페네스에 대한 답이 될지도 모릅니다." "은발의 인간인가?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흥미 있다는 듯이 딜란트는 레일즈와 마리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신수가 들고 일어선다는 이야긴가? 신왕과 싸우기 위해?" "만일 그렇지 않다면 우리들은 더 이상 신수를 믿지 않을 것입니 다." 마리스가 말했다. "신수민족이 신수를 버린다는 말인가?" 딜란트가 묘한 여운을 남기며 웃었다. "협력해줄 수는 없지만 너를 잊지는 않겠다. 혹시 살아서 만날 수 있다면 또 다른 이야기도 할 수 있겠지." 그것으로 딜란트와의 회담은 끝이 났다. 레일즈 일행은 중상을 입 은 비인을 안고 베르디아군의 야영지를 떠났다. 가도를 피하고 숲을 통과해 동쪽으로 나아갔다. 목표지는 시레네 부락이었다. 이 은빛늑 대부족의 대부락에 도착해서 일단 비인의 상처가 낫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이스칼리아 지방의 서남부에 있는 크리스타니아 최대의 성 지로 여행을 떠날 생각이었다. 거기가 신왕과의 대결이 이루어질 장 소였다. 숱한 어려움이 기다리는 여행길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스칼리아의 서부 지역은 베르디아의 세력권 내에 있기 때문에 말도 못 할 위험이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레일즈는 떠나기 직전 딜란트가 해준 충고를 잊지 못했다. "맹호부족의 족장 그레일이 자취를 감췄다. 부족을 버리고 족장의 이름을 버리고 오직 자신의 복수를 위해서……." 숲 속을 걸어가면서도 양날검 공작이 내뿜는 증오와 분노의 느낌 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와는 언젠가 결판을 지 어야 하리라. 그리고 그 결판에서 둘 중 하나의 목숨은 분명히 끊어질 것이다.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레일즈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운명은 어느 쪽인가로 결정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은 이살리의 예언대로 불길 속에서 사라지고 만 신수의 어금니 성채 처럼……. 어디선가 흉조의 큰까마귀가 우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4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