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3권 ...(14) 2 암흑기사단의 야영지는 신수의 어금니 성채의 동쪽 가도에 설치되 어 있었다. 바로 시레네 부락과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가르는 위치인 것이다. 그러나 용병단은 성채에서 농성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에, 퇴 로를 차단당했다고 해서 아무런 심리적 압박감도 받지 않았다. "이건 져도 너무 심하게 졌는걸." 딜란트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리자 곁을 따르던 벡이 말없이 끄덕였다. 천막에 수용하지 못한 부상자들이 통나무처럼 길바닥에 누워 있었 다. 전날의 결전에 임했다가 암흑기사단은 전체의 약 4분의 1에 달하 는 사상자를 냈다. 전력은 가능한 한 온존시킬 생각이었지만, 결전이 벌어지면 암흑기사단도 전투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왕에 대 한 충성심을 의심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딜란트는 신왕에게 충성을 다할 생각까진 없었다. 인간을 지배하는 건 역시 인간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신이건 신수이건 간에 인 간을 초월하는 존재에 의해 지배받는다는 건 참을 수가 없었다. 인간 은 자립적인 종족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지배의 신수왕 바르바스는 신왕으로서 부활했 고, 맹호부족의 수호자로서 그리고 베르디아의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암흑민족에게는 신왕과 그 종자인 맹호부족을 거스를 만한 힘이 없었다. 사실, 신왕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맹호부족에게 쫓겨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딜란트는 암흑민족을 위해 신왕에게 복종하는 길을 택했다. 완전하 게 힘을 회복하면 신왕이 이곳 대륙을 지배하는 것은 거의 확실하다 고 생각했다. 신왕의 통치 아래 유력한 지위를 구축하는 것이 암흑민 족에게도 유리하다는 판단도 내렸다. 그 선택 외에는 다른 여지가 없었다. 그러나 양날검 공작만은 제거 하고 싶었다. 그레일은 신왕의 권위를 배경으로 암흑민족에게 종속을 강요했다. 그가 강요하는 굴욕을 딜란트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제 그레일의 실각은 거의 확실해 보였다. 전날의 결전을 지휘한 사람은 예비 족장 바디오였다. 그레일은 그 전날 밤 성채로 기 습을 감행했다가 적의 전사에게 왼팔을 베이고 말았던 모양이다. 신 수의 어금니 성채에 그레일의 왼팔과 무기가 군기처럼 장식되어 있던 것을 딜란트 자신의 눈으로 확인했다. 족장의 굴욕을 되갚으려고 바디오는 강력한 공격을 감행했지만, 결 국 그 자신의 목숨을 잃는 것으로 어제의 싸움은 끝이 났다. 그레일의 모습은 야영지에서 사라졌다. 왼팔을 벤 전사에게 복수하 기 위한 여행을 나섰으리라. 딜란트는 상대가 그의 왼눈을 빼앗은 사 람이라고 확신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무서운 전사였다. 암흑민족에 게 전설적으로 전해오는 영웅들인 암흑 황제나 표류왕의 젊은 시절에 뒤지지 않는 활약상이었다. 맹호부족 전사단은 딜란트가 얼굴도 모르는 사나이에 의해 지휘되 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통솔력을 갖추지 못한 것 같았다. 신왕이 전 장에 모습을 드러내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이런 혼란은 당분간 수습 되지 않을 것으로 보였다. 성채에서도 공격해올 기색을 보이지 않았지만 이쪽에서도 공세를 펼 기력이 전혀 없었다. 전쟁은 완전히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일단은 적의 승리였다. 그것도 위대한 승리라고 할 만했다.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왜 패전했는지를 되짚어보고 있지." 딜란트는 아주 진지한 얼굴로 벡에게 대답했다. "어떤 결론을 내리셨는지?" 그건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이기도 했다. 딜란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요마들과 신수민족 출신 전사들 가운데 탈주자가 속출하고 있어. 병력이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지. 나한테 지휘권이 있다면 어떻게든 해보겠지만 지금 상태로는 바라기가 힘들어." 지금 이대로의 전력을 유지한 채 시레네로 향한다 해도 은빛늑대 부족의 정예 부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기란 불가능했다. 물론 신왕 의 기적을 계산에 넣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지금 예상으론 신왕 의 기적은 그곳에서 발휘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되면 설사 절반 정도의 전력일지라도 은빛늑대부족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어떻게 하느냐였다. 어떻게든 공격해 함락시킬 것인가, 아니면 아예 무시하고 진격을 할 것인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신왕의 신탁이 없으면 이야기가 전혀 진행될 수가 없지." 딜란트는 쓴웃음을 지었다. 신에게 인도받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신수민족이 지닌 최대의 약점이었다. 적어도 딜란트 는 그렇게 생각했다. 신수의 의지에 속박되어 거기서 한 걸음도 내딛 지 못하다니……. 암흑민족 쪽이 인간으로서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신수민족보다 강인하다는 사실만큼은 틀림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굴욕적인 종속도 견뎌내고 있는 것이다. 그때였다. 딜란트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것이 스치고 지나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머리를 감싸쥐는 딜란트를 보고 벡이 걱정스러운 듯 물었 다. 하지만 딜란트에게 말을 걸어오는 소리는 하나가 아니었다. 그것 은 그의 마음속에서 울려퍼졌다. 압도할 만큼 강하고 큰 소리가 마음속 전체를 울리고 있었기 때문 에 귀를 막아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미 들은 적이 있는 소리였 다. 제국의 수도 도튼의 왕성에서……. "신왕 폐하." 딜란트가 절규했다. "신왕이십니까?" "기적을…… 쓴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단편적으로 중얼거리는 딜란트의 말을 벡은 경악하는 표정으로 바 라보고 있었다. 보통 때는 일부러 냉정함을 가장해 자기 마음속의 동 요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도저히 냉정 할 수가 없었다. "설마! 신탁입니까?" 딜란트는 큰 몸짓으로 몸서리쳤다. "공포야말로 절대적인 지배의 법칙임을 뼈저리게 느끼리라……." 온 몸에 닭살이 돋으며 피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신왕은 우리들의 대화까지도 듣고 계신 것 같아. 어쩌면 마음속까 지도……."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벡은 맞장구를 치긴 하지만 분한 표정이었다. "인간이 신에게 종속되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진 않아. 그러나 이건 운명이라고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 딜란트가 이마에 밴 식은땀을 닦아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신왕은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날이 온다면 신왕 은 자신을 먼지 털어내듯 처리해버릴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신왕이 무슨 말을?" "이미 말한 대로야. 결국 신수의 어금니에 기적을 쓴다는군. 이 성 채를 쓸어버리고 시레네를 포위하라고 명령을 내리셨어." "신수의 어금니에다 기적을 쓴다면 시레네 공격은 어떻게 되는 겁 니까? 그리고 왜 이런 내용을 딜란트님에게……." "모르겠어!" 딜란트는 세차게 머리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맹호부족 놈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이제 맹호부족 놈들 중에는 믿을 만한 자가 없다는 뜻인지도 모르지." "납득하실 수 있으신가요?" "물론이지. 내 말대로 신왕이 기적을 행한다면!" "생각납니다. 이슬로 부락을 치던 때가……." 중얼거리는 벡의 눈에 무언가 애절한 빛이 떠올랐다. 그 전쟁에서 죽은 은빛늑대부족 사람들의 있는지도 모른다. 딜란트도 눈을 감았다. 부락 전체를 뒤덮는 새빨간 불길이 눈동자 에 어렸다. "싸우다 죽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런 개죽음은 당하고 싶지 않 아. 벌레처럼 밟혀 죽는 개죽음만큼은……." "동감입니다." 벡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신왕이 일으킨 기적은 온 하늘을 빛 으로 가릴 정도로 강렬한 낙뢰였다. 수백 수천 가닥의 벼락이 이슬로 부락을 내리쳤다. 부락의 건물은 산산 조각나고 불꽃의 정령계가 과 연 이럴까 할 정도로 맹렬한 불길이 치솟았다. 딜란트는 정신 없이 달아나는 은빛늑대부족의 소탕 작전을 지휘했 다. 하지만 쓰디쓴 뒷맛은 달랠 길이 없었다. "신이 신이라면 인간도 인간이 아닌가!" 당시 딜란트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저 성채의 전사들은 진정한 용사들이다. 가능하다면 당당히 싸워 서 함락시키고 싶었는데." 딜란트는 신수의 어금니 성채 쪽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했다. "그래, 도망가는 적은 살려주자. 저 성채를 잃고 나면 그들로서도 더 이상 저항할 길이 없겠지. 기껏해야 자기들 부족에게로 돌아가는 길밖엔." "지당하신 생각입니다." 마치 임금의 말을 듣는 것처럼 깊숙이 머리 숙이는 벡을 보자 딜란 트는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이 나왔다. 어려서부터 당연한 일처럼 받 아들여 왔지만 때로는 이 늙은 기사가 충성을 맹세하는 이유를 알 수 가 없었다. 베르디아에서는 능력만 있으면 주인 자리를 빼앗는 것쯤은 얼마든 지 허용되었다. 자신이 대단한 기사인 양 떵떵거리는 지배 계급이라 는 사람들도 따지고 보면 오랑캐나 들도적에 불과한 경우도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벡 가문의 그런 태도는 3백 년 동안 흔들림이 없 었다. 현재의 암흑기사단은 기사도 정신뿐만 아니라 가문의 전통도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암흑민족이 이곳 신천지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베르디아 식의 관념이나 형식을 따라야만 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고 해 서 암흑신 교단의 가르침이 베르디아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것만은 아니었다. 베르디아의 오랜 가르침인 네가 생각하는 것을 이루라는 것과 똑같은 사고 방식이 암흑민족의 뇌리 속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 었다. 그러나 어찌 됐든 가치관이 뒤엉켜 대단히 혼란스러운 것만큼은 사실이었다. 그런 불안정한 상태 속에서 베르디아 제국의 역사는 3백 년이 넘게 이어져 왔다. 왕국으로서는 대단한 장수라 할 만했다. 그 동안 제국의 영원한 상징이라 할 표류왕이 황제 자리에 올랐고 대대 로 암흑민족을 지배해온 지배자는 국왕이 되었다. 표류왕은 전설상의 인물이지만 지금도 존재했다. 북녘 바다에 떠 있는 고향의 섬에서 베르디아 제국의 모국이 전쟁에 패배했을 때 수 백 수천을 헤아리는 사람들과 요마들이 바다를 건너왔는데 이 대탈출 을 지휘한 사람이 다름 아닌 표류왕이었다. 오랜 항해 끝에 도착한 신천지가 이곳 크리스타니아였다. 그러나 이 대륙은 신수왕 루미스가 지키는 결계로 폐쇄되어 있어서 상륙하기 가 불가능했다. 식량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아사자가 생겨났다. 사 람의 살을 베어먹고 피를 빨아먹으며 연명한 사람도 있었다. 표류왕은 크리스타니아의 신들을 향해 저주의 말을 뱉었다. 대륙을 폐쇄하고 표류민의 상륙을 막는 신들을 향해서였다. 그런데 그 저주 의 말은 신수왕 루미스의 결계를 넘어 지배의 신수왕 바르바스에게까 지 전해졌고, 바르바스는 표류민들에게 자신이 지배하는 토지 에르난 드를 개방했다. 대가는 표류왕 자신의 육체였다. 신수왕 바르바스는 표류왕의 육체를 검치호(사브르 타이거)를 대 신해서 자신의 혼을 담을 그릇으로 선택했던 것이다. 신과 가장 가까 운 인간의 육체를 그릇으로 삼음으로써 일찍이 신이었던 시절의 힘을 회복하려는 의도였다. 표류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표류왕은 이 거래에 따랐다. 그리고 신수왕 바르바스의 혼은 검치호의 육체에서 나와 표류왕의 육체로 들 어갔다. 거기서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했는가? 진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 었다. 상급 기사인 딜란트조차 모든 내막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추측해 보건대 표류왕은 바르바스의 혼을 받아들이지 않았 던 것 같다. 자신의 자아를 지키며 신수왕의 혼을 굴복시키려고 저항 했던 것이다. 신수왕과 표류왕. 신과 인간의 혼이 하나의 육체를 둘러싸고 처절 한 싸움을 벌였다.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싸움이었다. 신의 혼을 담을 그릇이 될 정도로 훌륭한 육체였기 때문에 그 육체 에 깃든 혼은 불멸하는 신의 혼과도 대결 것이다. 3백 년 동안 표류왕의 육체는 계속 잠들어 있었다. 늙지도 않았고 쇠하지도 않았다. 불가사의한 결계로 둘러쳐져 조그마한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표류왕의 육체는 항상 옥좌에 놓여 있었으며 그 곁에는 맹호부족 가운데 선발된 무녀가 지켜서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암흑민족의 시녀가 3백 년 동안 항상 곁에 있었다. 영원한 생명을 가진 다크엘프 였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기사 서훈을 받아 왕성으로 출사하게 된 딜란트는 옥좌의 표류왕 과 그 곁에서 검은 백합같이 서 있는 다크엘프 여성의 모습을 매일 보게 되었다. 그 두 사람의 모습은 젊은 딜란트의 눈에 더할 수 없이 아름답게 여겨졌다. 진실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게 바로 저 모습이라고 생각했 다. 눈뜨기 전의 표류왕은 틀림없이 암흑민족과 맹호부족 쌍방의 수 호자였다. 맹호부족과 암흑민족은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다툼 없이 베 르디아의 땅에 새로운 질서를 세워나가고 있었다. 무너진 결계를 회복하려 하는 신수민족과 싸워서 그것을 저지할 수 있었던 것도 두 부족이 연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것을 신수민 족은 침략 전쟁이라고 했지만 베르디아 주민들 입장에서는 자유를 지 키기 위한 전쟁이었다. 육지로 이어지는 길을 일방적으로 폐쇄당한다 는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위가 아닌가. 표류왕의 육체가 눈을 뜬 지는 약 10년 전의 일이었다. 눈을 뜬 혼 은 신수왕 바르바스였다. 역시 인간은 신에게 이길 수 없었다는 소문 이 퍼졌다. 딜란트에게는 그 말이 너무나 굴욕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또 다른 소문이 떠돌았다. 표류왕의 혼을 봉하고 신수왕 바 르바스를 부활시킬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제기의 힘에 의해서였다는 것이다. 그 제기를 가져온 사람은 여우의 신수 스매쉬를 섬기는 두얼 굴부족의 족장이었는데 당시 맹호부족의 예비 족장이었던 그레일도 이 일에 협조했다고들 했다. 이 사실을 듣고 신왕에게 이의를 제기해 난리를 일으킨 사람들도 있었다. 맞대결의 결과 자연적으로 패배했다면 혹 모르지만 타자의 개입으로 결말이 난 것이라면 딜란트로서도 절대로 승복할 수 없는 일이었다. 신수왕과 표류왕의 혼이 벌이는 대결은 그 누구도 끼어들 어선 안 되는 신성 불가침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세한 내막은 딜란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알고 있는 것은 언제나 표류왕의 곁에 있던 다크엘프 여성이 신왕이 깨어난 뒤 자취 를 감췄다는 사실이었다. 그 밖에도 몇 사람, 암흑민족에게 중요한 인 물들이 추방당해 모습을 감췄다. 그들이 하려고 했던 일에 관해서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동조했던 사람들 중에 신수 민족과 잃어버린 대지 다낭에서 찾아온 대백조부족의 사람이 끼여 있 었다. 그 대백조부족의 사나이는 레이든이라고 했는데, 항상 다낭에 서 온 동료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밀정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수의 어 금니 성채를 지휘하고 베르디아군의 침공을 저지하고 있는 사나이와 는 관계가 없는 것 같았다. 딜란트에게는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졌다. 10년 전의 사나이가 하려 했던 일과 지금 성채를 지휘하는 사나이가 하려 하는 일이 본질적으로 동일했기 때문이었다. 신왕 바르바스와 대결해서 그를 꺾는다는 건 보통사람으로선 생각 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불가능해 보이는 그 일을 성취하려고 온 힘을 다 쏟아붓고 있었다. 신왕이 깨어난 날부터 맹호부족과의 동맹은 끝났다. 맹호부족의 족 장이 된 그레일은 스스로를 양날검 공작이라고 이름하더니 신왕 다음 가는 사람으로서 암흑민족에게 복종을 요구했다. 당시 기사대장에 지 나지 않았던 딜란트로서는 그걸 저지할 만한 힘이 없었다. 아니, 지금까지도 그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레일이 사라졌으므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사실이었지만 신왕 바르바스에 의한 지배만은 영 원히 변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인간을, 그리고 신들을 지배하는 왕으로서. 그것이 딜란트에게는 한없이 무거운 짐처럼 다가왔다. 그에 대항하 기에는 자신이 너무나도 무력했다. 조금 전에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 은 공포에 시달렸다. 그런데 그런 신왕에게 정면으로 대결하려는 사 람들도 있었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끝까지 지키고 있는 전사들도 그들 중 일부분이었다. "……만나고 싶어." "예?" 갑자기 중얼거리는 딜란트를 벡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오 랜 침묵 끝에 불쑥 튀어나온 말이 그것이었으니 어리둥절해 하는 것 도 무리는 아니었다. "도대체 누굴 만나고 싶다는 말씀인지……." 벡 정에는 꼭 알아야겠다는 의지 같은 게 보였다. "혼잣말에 대해서까지 그렇게 응대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벡이 머리를 숙였다. "저 성채를 지휘하는 대백조부족의 전사를 말한 것이었어." "레일즈라고 했던가요……." "만나고 싶어. 성채에 신왕의 기적이 행해지면 그도 목숨을 잃을 거야.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싶어. 대백조 부족이라고는 하지만 우리와 고향이 같은 표류민이기 때문에 의외로 생각이 비슷할지도 몰라." "그럴까요?" "모르겠어. 그러니까 만나고 싶은 거지. 적이라고는 하지만 이야기 를 나눌 정도는 가능하지 않겠나." 벡의 눈은 무언가를 말하고 싶어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잠시 뜸을 들이고서 조용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만났으면 좋겠군요." "군사 회의를 열자고 맹호부족에게 연락을 취하고 다른 신수민족 전사단에게도 대표를 보내도록." "알겠습니다." 늙은 기사는 공손히 예를 취하고 잰 걸음으로 사라졌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3권 ...(15) 3 레일즈는 오랜 만에 평화스런 기분을 한껏 맛보고 있었다. 어제까 지는 밥맛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긴장했지만 지금은 물고기의 담 백한 맛이 확실하게 느껴졌다. 아침 일찍 성채를 빠져나가 성채 밖의 강에서 고기를 잡아오는 일명 강심장의 전사에게 한 마리를 얻은 것 이었다. 그 고기는 척 보기에도 한 아름은 될 정도로 컸다. 혼자서는 도저히 다 먹지 못할 크기였다. 마침 단장의 방에서 호출이 있었기 때문에 가 지고 가서 나눠 먹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호출한 용건은 알 만했다. 타닐이 시레네 부락에서 돌아왔던 것이다. 은빛늑대부족으로부터 사자를 한 사람 데리고 와 있었다. 놀랍게도 그 사자 또한 은발이었 다. 틀림없이 은발의 인간은 부족 전체에서 네 명밖에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 중 세 사람이 이 성채에 모여 있는 것이다. 사자를 환영하는 잔치가 열리고 레일즈가 가져 온 물고기는 그 잔 치의 주역 노릇을 했다. 단장의 방에 모인 사람들은 각 부대의 대장들 이었다. 지난날의 전투에서 네 명의 대장이 목숨을 잃었다. 그 중에는 백인대장 난스와 칼리오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일즈 부대도 절반 이상이 전사했다. 레일즈와 길리엄이 부상을 당해 물러서 있을 동안 필사적으로 방어전에 임하다가 목숨을 잃었던 것이다.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베르디아군은 전의를 상실했는지 야영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전투가 벌어진 지 벌써 열흘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어 떤 움직임도 없었다. "나는 메일렌의 장로 탈리오다." 시레네에서 온 사자가 자기의 이름을 밝혔다. "은빛늑대부족은 원군을 보낼 생각이 있습니까?" 방 안에 날라온 음식을 대충 다 먹었다는 생각이 들자 레일즈가 탈 리오에게 물었다. " 생각은 어디까지나 시레네에서 결전을 치러야 한다는 입 장이다. 그러기 위해 은빛늑대부족의 모든 전사들을 불러모으고 있는 것이다." "그건 잘 알고 있습니다." 레일즈의 목소리가 약간 거칠어졌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습니다. 우리는 베르디아군에게 심각한 타격 을 가했습니다. 적은 전의를 상실했고 더 이상 진군하지 못할 것입니 다. 그것을 확실하게 못박아두기 위해서는 원군이 필요합니다. 천 명, 아니 5백 명이라도 좋습니다. 원군이 파견되었다고 전해지면 베르디 아군은 이슬로 성채로 철수를 시작할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렇겠지?" 탈리오는 레일즈를 지긋이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일반적인 은빛늑 대부족 사람들보다 약간 뚱뚱한 만큼 부드러운 인상이었지만, 그 눈 길만큼은 타닐과 거의 비슷하게 날카로웠다. 탈리오의 말에 눌린 탓인지 입을 다물었다. "진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 내가 여기에 왔지."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레일즈가 분개하며 말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닐세. 다만 쉽게 믿을 수 없는 것뿐이 지. 생각해 보게나. 이 신수의 어금니에는 1천 남짓한 전사밖에 더 있 는가? 베르디아의 대군을 저지할 수 있으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하겠 는가? 그렇기 때문에 내가 내 눈으로 전황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일 세. 내 말이라면 족장도 믿어주기 때문이지." "충분히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타닐이 묵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납득하시게 되면 원군을 보내 주십시오. 2천 명 정도면 됩니다. 메 일렌의 전사단만으로도 그 정도는 보내주실 수 있을 텐데요."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내 그럴 생각이네." "부탁드립니다." 안도하는 표정으로 레일즈가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그렇게 인사할 것까지는 없네. 그보다도 정말 잘 막아냈구만. 이 성채의 전사들 모두에게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네." "이번에는 간신히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적의 통솔력이 뒤졌기 때문입니다. 다음 번에도 우리 원하는 대로 될지……." "그건 그래." 거쉰이 중얼거렸다. "우리가 입은 피해도 막심해. 어찌 됐든 전력이 보충되지 않으면 위험하기 짝이 없어." "그 점에 대해서는 따로 생각이 있어……." "승인하지." 레일즈가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올겐스가 말을 막았다 "그래도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주십시오." 레일즈가 어색하게 웃으며 단장을 보았다. 올겐스는 소리 없이 웃 으며 레일즈에게 어서 이야기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옛날 신수의 어금니는 아주 큰 세력을 이루었다고 들었습니다. 그 것을 재현하면 됩니다." 레일즈가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했다. 다낭에서 보이던 어투였다. 하 지만 한동안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나오지 않았던 어투였다. "우선 각 신수의 부족들마다 한 사람씩 고향의 부락으로 돌아가게 한 뒤 거기다 신수의 어금니 연락소를 만들도록 하는 겁니다." "성채를 만든다는 뜻인가?" 거쉰이 영문을 몰라 물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 연락소니까 조그마한 집 한 채 정도 면 돼." "거기서 뭘 하지?" 한 대장이 일어서서 물었다. "용병 지원자를 모으며 무기와 각종 물자를 조달하는 겁니다. 각 부족마다 그 정도는 부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건 그럴지도……." 비교적 나이가 젊은 그 대장은 말꼬리를 흐리며 자리에 앉았다. "전쟁터는 떨어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 전쟁은 암흑민족과 신수 민족 사이의 총력전입니다. 이미 이 성채에 있는 사람은 모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만으론 부족합니다. 이것을 신수민족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어차 피 사람과 물자가 필요한 법입니다. 전사는 신수의 어금니에 참가하 고 전사가 아닌 사람은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 제 제안입니다." "사람과 물자를 모아 성채로 돌아오자는 이야긴가?" 거쉰이 떫은 표정으로 말했다. 팔짱을 끼고 있는 팔에 털이 숭숭 나 있었다. "그거 성가셔서 어디 되겠어?" "돌아올 필요가 없지. 모집은 늘 이루어지는 것이 좋으니까. 수송하 는 것은 별도로 담당을 맡기는 거지. 두얼굴부족이 가장 적당하겠지 만 발굽부족도 큰 어려움 없이 해낼 수 있을 거야." "우리는 장사라곤 해본 적이 없어." 신수 실버리의 부족인 전령대의 대장이 말했다. 조정자라는 별명으 로 불리는 신수 실버리는 신들의 사자이며 그 종자인 발굽부족도 분 쟁의 조정을 맡았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는 중립적인 입장을 버리 고 전쟁터로 뛰어들었다. 다만 본질적으로 그들은 전쟁이 아니라 대 화를 통한 해결을 바람직하게 여기고 있었다. "교역을 기대하고 있는 게 아니지. 어디까지나 수송만을 이야기하 는 거야." "사람과 물자를 나르기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레일즈가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대답하자 전령대의 대장은 얼마든 지 해낼 수 있다고 자신있게 말하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문제 없이 잘 돌아갈까?" "연락소의 담당자가 하기 나름 아니겠어? 만약 잘 돌아가지 않으면 신수의 어금니는 아주 어렵게 되겠지만." 그 말은 모두가 이해했다. "그런 방법밖에 없을까?"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그 방법밖에 없어!" 레일즈가 자기 말에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 끝까지 들었다. 대백조 형제, 네가 지휘하는 거지?" 레일즈는 거기서 멈칫 했다. 순간적으로 마리스의 얼굴이 떠올랐 다. 그녀는 적지를 뚫고 크리스타니아 최대의 성지인 시작의 땅으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녀와 함께 길을 떠나 지금처럼 지켜주고 싶다 는 생각이 무럭무シㅆ피어올랐다. 그러나 마음속 깊이 묻어둘 수밖에 없었다. 성지로 향하는 것이 그녀의 사명이라면 레일즈의 사명은 끝 까지 베르디아군과 싸워 승리를 이끌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일즈는 분명하게 말했다. "어디까지나 신수의 어금니로 싸운다는 뜻인가?" 탈리오가 조용하게 물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신왕과의 전쟁은 은빛늑대부족만의 전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수민족의 총의로 모인 우리들이 싸우는 것이 정당합니다." "여기는 우리의 땅이다." 탈리오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협력해서 싸워야 한다는 말입니다." 레일즈는 진지한 얼굴로 탈리오에게 대답했다. "그건 타협하라는 이야기가 아닌가?" 탈리오의 표정이 약간 바뀌었다. "이 성채가 견디기 위해서는 은빛늑대부족의 협력이 반드시 있어 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식량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은빛늑대부족에 게도 싸움에 서투른 사람들을 전쟁에 내보내기보다는 각 부락에 돌아 가게 해 일상적인 생활을 영위토록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일 것입니다. 물론 제 생각입니다만 은빛늑대부족의 전사단만으로도 충분히 전쟁 을 수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족장님은 뭐라고 하실까." 탈리오는 가슴에 고인 한숨을 뱉어내며 천장을 올려보았다. 열려 있는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와 텅 빈 식기를 환하게 비쳤다. "만일 족장이 끝까지 반대한다면 내가 족장을 베어버리겠습니다." 타닐이었다. 탈리오를 위협할 생각인가 싶어 타닐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타닐의 얼굴은 굳은 의지 그 자체였다. 타닐의 본심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감 정이 격해져서 튀어나온 말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꺼낸 말이 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거 참 살벌하게 말하네." 누군가의 소리가 들렸다. "이슬로…… 내 부락을 습격한 비극이 시레네에서 반복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그걸 위해 족장이 뭘 했습니까? 신수왕 페네스가 뭘 했습니까?" "자네가 했어야 할 일은 이슬로가 멸망했을 때 족장에게 그렇게 진 언하는 것이었네." "그때 전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신도 인간도 나 자신도. 그 런 인간에게는 남을 설득할 자격도 그럴 힘도 없습니다." "지금은 어떤가?" 은발의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 본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적어도 전 이 사나이의 말은 믿습니 다. 저도 이 성채를 지킬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 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시레네로 돌아가세나." "시레네로요? 도대체 뭣 때문이죠?" "자넨 은빛늑대부족의 예비 족장이 돼야 하네. 족장도 이젠 고령일 세. 그 뒤를 잇기에는 나도 젊질 않아. 다음번 은빛늑대부족은 자네와 마리스가 이끌어야만 하네. 그것이 은발의 인간에게 주어진 사명이 야." "제가 차기 족장이 된다구요? 그건 이제 다 지난 일일 뿐입니다." 타닐은 자조하듯 웃었다. "제가 끼여들 문제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레일즈가 염려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은발의 두 사람이 동시에 레 일즈를 바라보았다. "내 생각엔 타닐이 그 역할을 맡아 주었으면 해. 은빛늑대부족의 예비 족장이 되어서 이 성채를 지원해 주는 거야. 신수의 어금니가 싸 워나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은빛늑대부족의 협력이 필요해. 바로 그 렇기 때문에 이 용병단을 이해하는 사람이 은빛늑대부족을 이끄는 지 도자로 나섰으면 하는 거지." "제멋대로 생각하는군." 탈리오는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었지만 더 이상 다른 말은 하지 않 았다. "타닐, 받아들여. 넌 여기서 도망칠 수 없어. 사람에게는 역할이란 게 있는 법이야. 너의 역할이 은빛늑대부족의 예비 족장으로서 베르 디아군과 싸우는 거라면 나의 역할은 여기 남아 성채를 지키는 거야." "성가신 역할이야. 나는 고독한 것이 성격에 맞아. 이슬로의 예비 족장이었던 시절에는 나도 남도 다 속이고 산 느낌이야. 또 다시 그런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니, 그건 왠지……." 돌려서 하는 말이었지만 타닐의 반응은 은빛늑대부족의 예비 족장 이 되겠다는 승낙으로 들렸다.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 사실 지금의 은빛늑대부족 족장과 협상하기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일을 타닐이 맡아준다면 마치 관객석에서 연극을 보듯 성수의 어금니 성채의 싸움을 지켜보았던 은빛늑대부족 의 태도도 바뀔 것이 분명했다. 더 이상 바라보기만 하는 입장이 아니 라 무대 위로 올라와 무언가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연극의 주연이었다. "레일즈, 너 좋아하고 있는 거 아냐?" 레일즈의 표정을 알아차리고 타닐이 불만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라고 했던가? 그거 기분 괜찮은데." "이거 참!" 타닐이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타다타닥 발소리가 들리더니 방문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모두가 문을 주목했다. 놀랍게도 비인이 서 있었다. 그는 웬만한 일 로는 단장의 방으로 오려고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레일즈가 일어서서 외쳤다. 베르디아군의 습격일지도 모른다는 생 각이 들었다. 그러나 비인의 대답은 의외였다. "모르겠어!" "모르다니…… 여기에 왜 온 거야?" "왠지 전혀 모르겠어. 그렇지만 정령의 힘이 너무나도 강해. 아니, 점점 강해지고 있어. 다른 정령사들도 극심하게 혼란을 겪고 있다구." "지진인가?" 신의 성벽을 가르고 길이 생긴 지진이 났을 때 비인이 이야기했던 것을 레일즈가 기억해냈다. "대지의 정령력이 강해지고 있다든가……." "대지의 정령력만이 아니야. 땅, 물, 불, 바람! 이 4대 정령력 모두가 강해지고 있어. 그것도 엄청나게." 비인은 머리를 감싸쥐고 휘청거렸다. "어떻게 된 거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지?" "모른다고 했잖아. 정말 모르겠어. 지진과 태풍과 해일과 화산 폭발 이 동시에 일어날지도 몰라. 그 정도밖에는 떠오르지 않아!" 태풍은 바람과 물, 지진은 대지, 해일은 물, 화산은 대지와 불꽃의 정령력에 큰 이상이 생기면서 발생하는 천재지변이라고 비인은 설명 을 덧붙였다. "그런 일이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을까……." 레일즈는 절규하며 타닐을 돌아보고 있었다. 은발 전사의 얼굴이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보였다. 그 또한 레일즈와 생각이 같았던 것 이다. 그런 천재지변이라면 오직 한 사람! 신왕만이 만들어 낼 수 있 는 기적이었다. "모두 숙소 밖으로 나가라고 전해! 목책과 망루에서도 어서 빨리 내려오라고 하고." 올겐스가 보기 드물게 긴박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안전한 장소는 어디에도 없다. 어쨌든 성채를 버리고 한 시각이라 도 빨리 도망가게 하라!" 숨가쁜 명령이었다.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올겐스 밖에는 없었다. 올겐스는 다만 명목상으로 단장을 하고 있는 것은 아 니었다. 그야말로 누구보다도 성채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 렇기 때문에 레일즈에게 전권을 위임했던 것이다. 레일즈가 제안한 것들이 믿음직스럽지 않았다면 절대로 그 제안을 승인하지 않았을 것 이다. 그가 보이는 태도가 그다지 무거워 보이진 않았지만 이 사나이에 게 승인받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의미를 가지는지를 레일즈는 뼈저리 게 느껴왔다. 그의 승인이 있었기 때문에 성채의 용병 모두가 레일즈 의 개혁에 협력해 주었던 것이다. 긴급 사태에 대장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뒤 밖으로 뛰어나갔 다. 개중에는 창문으로 뛰어나가는 사람도 있었다. "성채를 버린다는 말입니까?" 탈리오가 확인하듯 물었다. "성채는 다시 만들면 됩니다. 나는 지금껏 그렇게 해왔습니다." "그대들의 생각, 내 명심하고 있겠네." "자, 서둘러 탈출하세. 우리가 무사하게 귀환하지 않으면 시레네 족 장을 설득하기도 불가능해지니까." 타닐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올겐스에게 말했다. "성채 재건을 부탁해. 그렇지 않으면 지원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러더니 창문을 통해 밖으로 몸을 날렸다. 탈리오가 그 뒤를 따랐 다. 두 은발은 소리 없이 지면에 내려서더니 거기서 변신의 능력을 사 용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은빛늑대로 모습이 바뀌었다. 그들은 옷가 지가 귀찮은지 다 떨어내더니 곧바로 목책을 향해 질주해 가볍게 뛰 어넘었다. 두 마리의 은빛늑대가 그렇게 서쪽 숲으로 모습을 감췄다. "레일즈, 어딘가에서 다시 만나자!" 올겐스는 최후까지 방에 남아 있던 레일즈에게 미소를 지은 뒤 벽 에 세워둔 창을 창으로 몸을 날렸다. 레일즈는 가벼운 인 사로 대장을 전송했다. 그리고 문으로 뛰쳐나갔다. 문 밖엔 비인이 갈팡질팡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들을 모두 불러와! 숙소 뒤쪽, 우리가 항상 모이던 장소에서 기다려!" 그 장소는 레일즈가 항상 검술 훈련을 하던 곳이었다. 최근에는 비 인이 거기서 정령과의 교신에 힘쓰곤 했다. "아, 알았어!" 비인은 창백한 얼굴로 달리기 시작했다. 다낭에서 함께 온 친구들 모두가 이곳 숙소 1층에서 머물고 있었으므로 모두 함께 모여 있기를 기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떨어지게 되면 영원히 못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레일즈는 먼저 안마당으로 나섰다. 그리고 신왕의 기적을 직접 목 격했다. 남쪽의 목책 바로 위로 한 거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 거인은 작렬하는 불꽃으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불꽃의 마신……." 레일즈는 중얼거렸다. 실제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 모습 은 전설로 전해지는 그대로였다. 파괴를 관장하는 불꽃의 상위 정령 에프리트였다. 제 목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3권 ...(16) 4 레일즈는 숙소 바로 밖에서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레일즈?" 뒤에서 비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일즈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뒤를 돌아봤다. 다낭에서 함께 온 동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기쁘게 도 마리스의 모습도 있었다. 그 밖에도 몇 사람, 은빛늑대부족의 전사 들도 끼여 있었다. "저걸 봐!" 레일즈가 불꽃의 마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비인은 절규했다. 얼 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상태였다. "……아냐 아냐, 불꽃의 마신만이 아냐. 틀림없이 또 있어!" 비인은 중얼거리며 몇 걸음 앞으로 나서더니 성채의 사방을 둘러 보았다. "그래, 역시 그래!" 그리고 절망감에 사로잡혀 말했다. "봐, 성채 바로 위로 회오리바람이 보이지. 저건 바람의 왕 진이야. 강 쪽에서 강한 물의 정령력이 전해져오는 것은 해마 크라켄 때문이 지. 북쪽 목책 너머로는 대지의 마수 베히모스의 머리가 보여……." "4대 상위 정령이 모두 모습을 드러낸 거야?" 레일즈는 마침내 절규하고 말았다. 비인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건성 이었다. "땅, 물, 불, 바람 이렇게 4대 자연력을 관장하는 상위 정령들이 모 여 있어……." "무얼 위해서? 누가 소환한 거야?" 사이아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어서 다시 한 번 물어보는 것이리라. 그러나……. "신왕이 소환한 거야. 이 성채를 멸망시키기 위해서." 샤일론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중지시켜야 해." 비인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무리야." 레일즈는 드디어 이성을 되찾았다. "인간으로선 무리야. 상위 정령을 중지시키기란……." "도망치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분해 하는 목소리로 밧소가 말했다. "모처럼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기회였는데." "우리가 너무 일방적으로 이긴 거야. 그래서 신왕이 기적을 쓸 생 각을 한 거고." 레일즈도 분했던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때였다. 거대한 울림 소 리가 나더니 땅바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대지진의 경험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질 리가 없었다. 땅바닥이 흔들 려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레일즈는 한쪽 무릎을 꿇고서야 간신히 균 형을 잡았다. 밧소도 자세를 낮춰 요동을 견뎌냈다. 마리스는 균형을 잃고 땅바 닥에 앉았다. 샤일론과 사이아도 땅바닥에 앉아 요동이 가라앉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요동은 여간해서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지진이 끝난 것과 동시에 이번에는 폭풍이 불어와 레일즈 와 친구들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지금껏 경험해본 적이 없는 매운 돌풍이었다. 옷이 다 뜯기고 머리 가 다 뽑힐 것같이 강렬했다. 땅바닥에 있던 수많은 것들이 바람 속으 로 빨려 들어갔다. 돌풍은 성채의 목책을 따라 휘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안마당에서 한 회오리바람이 발생했다. 회오리 바람은 춤을 추면서 모래와 돌을 비롯해 걸려드는 모든 것을 허공 속 으로 날려보내더니 이동하기 시작했다. 회오리바람이 가는 길에 있던 건물은 하나도 남김없이 파괴되었다. 통나무를 부수고 그것조차도 허 공으로 날려버렸다. 전사들도 그 앞에선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은 허 망하게 회오리바람에 끌려들어가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아마 돌절구통 같은 회오리바람 안에서 수천 수만의 고기 조각으로 찢어졌 을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죽어가리라고 상상한 사람이 과연 누가 있 겠는가? 그러나 레일즈는 불행한 희생자를 동정할 수조차 없었다. 땅바닥에 엎드린 채 회오리바람이 이쪽으로 오지 않기를 그저 기도할 따름이었 다. "이것이 상위 정령의 힘인가……." 레일즈는 가물가물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렇게 생각했다. 숙소 하 나, 망루 두 동을 집어삼키더니 회오리바람은 갑자기 사라졌다. 휘감 겨 올라간 것들이 땅바닥에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딘가 먼 하늘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 기서는 흙과 돌, 통나무 파편, 그리고 인육 조각이 비처럼 쏟아질 것 이다. 바람이 멈추었지만 레일즈 일행은 일어날 기력조차 없었다. "대지와 바람……." 그렇다면 4대 정령 가운데 두 가지가 더 남아 있다. "온다!" 비인이 비명을 질렀다. "물이야, 불이야?" 레일즈는 비틀비틀 일어서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비인의 대답보다 먼저 레일즈 자신이 답을 찾았다. 서쪽 강물이 거대한 벽처럼 우뚝 서 있었다. 마치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변의 성난 파도 같았다. "떠내려간다! 모두 서로를 꽉 잡아!" 레일즈는 절규하며 다시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가장 가까이 있 던 마리스의 손을 움켜쥐었다. 누군가가 자기 발을 잡는 것이 느껴졌 다. 그걸 확인할 틈도 없이 성난 물결이 서쪽 목책을 치고 들어왔다. 우선 서문이 날아갔다. 이어서 목책들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러 나 파도의 기세는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가 없었다. 엄청난 물이 부서 진 통나무들을 싣고서 레일즈 일행에게로 밀려왔다. 물을 들이키지 않을 수 없었다. 급류에 떠밀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온 힘을 다해 숨을 멈추고 물을 들이키지 않으려고 신경을 썼다. 금속 갑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레일즈는 급류의 바닥을 굴렀다. 몇 번씩 이나 땅바닥에 얼굴을 부딪쳐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그러나 여기서 의식을 잃으면 두 번 다시 눈을 뜨지 못한다고 스스 로를 다잡으면서 간신히 견뎠다. 레일즈와 친구들은 남쪽 목책까지 떠밀려와 거기서 간신히 멈췄다. 물은 아직 허리까지 차 있었지만 흐 름은 많이 약해졌다. 지금은 강을 향해 거꾸로 흘러가고 있었다. 레일즈는 격렬하게 기침을 했다. 많이는 아니지만 물을 마셨기 때 문이었다. 코끝이 찡하니 아팠다. 머리도 곳곳이 찢어졌는지 이마에 서도 뚝뚝 피가 흘렀다. "이런 제기랄, 난 평생 동안 수영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사람이 란 말야!" 샤일론이 악담을 했다. 온화한 행운신의 사제로서는 보기 드문 모 습이었다. 대지의 정령인 드워프족인 만큼 물과는 사이가 좋을 리가 없었다. "모두 무사한가?" 레일즈가 주위를 둘러보며 물어보았다. 여기저기 떨어진 곳에 있었 지만 모두들 무사한 것 같았다. 무릎까지 물이 빠지기를 기다려 모두 한 장소에 모였다. 하나같이 물에 푹 젖은 몰골이었다. 상처를 입은 사람도 있었다. 중 상을 입은 사람은 사이아로, 오른팔에 심한 멍이 들어 있었다. 어쩌면 뼈가 부러졌는지도 모른다. 샤일론이 치유의 주문을 외웠다. "고마워, 덕분에 좋아졌어." 그렇게 말은 하지만 사이아의 안색은 아직도 푸르죽죽해서 생기라 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마에 눌러붙어 있는 머리카락들이 성가 신지 계속 뒤로 쓸어넘겼다. 아름다운 금발이 지금은 진흙투성이가 돼 갈색으로 보였다. 레일즈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채 전체를 다시 둘러보았다. 처참 했다. 망루는 세 개만 남고 완전히 부서졌고 여섯 채 있던 숙소도 네 채는 완전히 찌부러졌다. 서쪽 목책은 완전히 사라져버려 강물의 전 경이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해마 크라켄의 모습은 이제 보이지 않았 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흘러가는 강물이 평화로워 보였다. 흘러넘 쳤던 물도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다. 물이 빠져 땅바닥이 드러났다. 지진 때문에 여기저기서 땅이 벌어 져 있었다. 그리고 쓰러져 움직이지 않는 전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레일즈 바로 곁에 격류에 휘말려온 나무에 얻어맞고 있는 전사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 너머로 허리가 완전히 꺾여 죽은 잡역부의 모 습도 보였다. 살아 움직이는 전사들도 보였지만 모두 기진맥진해서 정신을 차리 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옥으로 변한 성채에서 도망치려고 발버 둥치듯 목책이 무너진 곳이나 문을 향해 걸어가는 전사도 보였다. "이제, 하나 남았나……." 레일즈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중얼거렸다. "레일즈, 정면이야!" 비인이 외쳤다. 이번에야말로 틀림없는 경고의 목소리였다. 머리를 든 순간 레일즈는 빳빳이 얼어붙고 말았다. 불꽃의 마신이 정면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 틈에……." 레일즈는 신음했다. 사실은 왜 내가 있는 곳으로 오는 거야, 라고 말하고 싶었다. 반사적으로 검을 뽑았다. 은제검이라면 설령 정령계 의 마신일지라도 상처를 입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신을 이 길 수는 없었다. 그들 상위 정령은 신에 버금가는 힘을 지녔다. 게다 가 불꽃의 마신 에프리트는 검이 미치지 않는 공중에 떠 있었다. 불꽃의 마신은 가슴 앞으로 두 손을 교차시켰다. 무얼 하는 것인지 몰라 레일즈는 우두커니 올려보기만 했다. 그런데 교차시킨 팔이 활 짝 열리는 순간 수천 가닥의 붉은 빛이 성채 전체로 흩어졌다. 그 가 운데 하나는 레일즈 일행 바로 곁의 아직 무사했던 숙소로 떨어졌다. 불꽃이 피어오르며 연기가 하늘로 치솟았다. 불꽃의 마신이 내쏟은 불화살의 직격탄을 맞은 곳은 집이든 건물이든, 모두 마른 장작처럼 활활 타올랐다. 온 몸이 불꽃에 휩싸여 미친 듯이 내달리는 전사의 모습이 멀리로 보였다. 뜨거운 열기와 연기가 성채를 가득 메웠다. 파괴를 관장하는 불꽃의 마신은 만족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천천히 레일즈 쪽을 향해 다가왔다. 온 몸을 작렬하는 불꽃으로 뒤덮은 채……. "이제 끝장인가……." 사이아가 절망의 소리를 질렀다. "포기하지 마." 레일즈가 반사적으로 말하긴 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힘이 없었다. 에프리트의 불꽃으로 신경이 다 불에 타고 말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발견한 것은 절망뿐이었다. "불꽃의 마신, 태초의 거인이 분노하시는 마음. 파괴를 관장하는 맹 렬한 정령왕이시여……." 그 소리는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비인의 목소리 였다. 레일즈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 계속 이어졌다. "정령어인가……." 레일즈는 천천히 비인을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고 레일즈는 깜짝 놀랐다. 레일즈에게는 비인의 옆모습만이 보였다. 비인은 대단히 진 지한 표정이었다. 에프리트와 마주하고 있으면서도 조금도 겁먹은 표 정이 아니었다. 마치 친구를 향해 이야기하는 것처럼 친밀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 였다. "어떻게 할 생각이지?" 레일즈가 그렇게 중얼거렸을 때 누군가가 소매를 끌어당겼다. 사이 아였다. "비인은 정령왕을 설득하고 있는 거야." "그게 가능할까?" "모르겠어. 하지만 비인의 어머니는 상위 정령과 통했다고 하잖 아." 비인이 언제나 자랑처럼 하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비인의 어머니와 비인의 능력에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정말로 비인이 정령왕을 설득 할 수 있을지 레일즈는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비인이 설득에 성공하 지 않으면 레일즈 일행은 이제 살아날 길이 없었다. 비인은 어렵지만 웃음까지 띠며 정령왕에게 말을 걸었다. 이 겁쟁이 소년의 어디에 이 토록 강인한 용기가 숨겨져 있었던가. 레일즈는 진심으로 놀랐다. 상 대가 정령이기 때문일까? 레일즈에겐 불꽃의 마신은 무섭기 짝이 없 는 괴물일 따름이었다. 에프리트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됐다!" 레일즈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안 돼!" 비인이 외치는 것과 동시에 불꽃의 마신은 온 몸으로부터 새빨간 불꽃을 뿜어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소용돌이를 이루며 비인이 있던 장소를 휘감았다. "비인!" 레일즈가 절규하며 무작정 검을 거머쥐고 불꽃을 향해 달렸다. "레일즈!"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는데 마리스인지 사이아인 지 구별할 수 없었다. 레일즈는 정신 없이 검을 휘둘렀다. 눈앞의 불 꽃을 향해 휘두르는 것이었다. 그 순간 불꽃이 사라졌다. 쓰러져 있는 비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 다. 옷은 다 타버리고 짧은 머리카락도 거의 타들어간 상태였다. 아무 런 움직임도 소리도 없었다. "이 자식! 이 못된 마신아!" 레일즈가 얼굴을 들어 욕설을 퍼부었다. 그 거기엔 이미 마신 의 모습이 없었다. 어디로 갔나 주위를 살폈다. "……알았어, 레일즈! 간신히 알았어." 발 밑에서 소리가 들렸다. 비인이었다. "말하지 마!" 레일즈는 무릎을 꿇고 비인의 머리를 감싸올렸다. "샤일론!"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드워프족 신관이 달려왔다. "알았어. 불꽃의 상위 정령의 마음을. 다음번에 만나면 반드시 마음 이 통할 거야." 거기까지 말하고는 비인은 정신을 잃었다. 깜짝 놀라 목에다 손을 댔다. 맥박은 아직 있었다. 그러나 아주 미약했다. "괜찮을까?" 레일즈가 샤일론에게 물었다. "글쎄, 모르겠는걸……." 혼잣말하듯 샤일론이 대답했다. 그는 아직껏 치유의 주문을 계속 외우고 있었다. 워낙 강인한 그였지만 얼핏 보기에도 지쳐 보였다. 그 렇지만 이 드워프족 신관 전사는 주문 외우기를 그치려 하지 않았다. "바보…… 이런, 바보!" 레일즈는 주먹을 불끈 쥐며 심하게 화상을 입은 비인의 얼굴을 내 려다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얼굴을 타고 내렸다. "베르디아군이 다가오고 있어. 빨리 성채에서 도망쳐야 해." 레일즈의 어깨를 두드리며 밧소가 말을 걸었다. 언제나 웃음기가 배 있는 밧소였지만 지금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진지했다. 레일즈는 주변을 돌아봤다. 분명히 성채 밖에서 함성이 다가오고 있다. 살아남은 전사들을 치기 위해서 베르디아군이 다가오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비인은 어떻게 하고!" 레일즈는 밧소에게 소리질렀다. "내가 업고 갈게." 샤일론이 그 말과 함께 비인을 어깨에 들쳐맸다. "괜찮을까?" "괜찮지는 않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잖아." 샤일론의 대답에 레일즈는 감동했다. 드워프족이 신뢰할 수 있는 종족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마음이 깊을 줄은 정말 몰랐 다. "부탁해." 레일즈가 정말 고마운 마음을 표하듯 머리를 숙였다. "어느 쪽으로 도망가지?" "시레네로 갈 수밖에 없어. 마리스, 안내해 줘." 마리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선두로 나섰다. 우선 동쪽 문을 통과해 야 했다.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누군가가 먼저 탈출한 모양이었다. 모두 무사하기만을 마음속으로 기원했다. 그러나 솔직히 몇 사람이나 탈출에 성공했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바로 가까이로 한 사람도 살려보내지 않겠다는 듯이 베르 디아군이 쳐들어오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