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전투 소리를 들었을 때 레일즈는 아직 모포를 휘감고 있었다. 벌떡 일어나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몇 번씩이나 머리를 흔들 고 눈을 비벼봤지만 허사였다. 그러다가 돌 아래 숨어 있던 지렁이가 기어나오듯 간신히 모포 속에서 나왔다. 다시 공격해오리란 생각은 했지만 의외로 빨랐다. "아직 좀더 쉬는 게 낫지 않겠어?" 레일즈를 본 샤일론이 걱정스러운 듯 말을 걸었다.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가 아닌 것 같은데." 레일즈는 억지로 웃으며 샤일론에게 대답했다. 베르디아군의 총공격이 시작된 것은 그 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 다. 그러나 힘겨운 전투를 치르게 될 것이 뻔한 이때에 느긋하게 쉴 수는 없었다. 레일즈의 결의를 깨달은 샤일론은 기력을 나눠주는 신성마법의 주 문을 다른 사람 몰래 외웠다. 그만큼 자기는 피곤하게 되겠지만 강인 함에 관한 한 드워프족은 사람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 덕분에 레일즈는 원기를 회복했다. 샤일론에게 감사하고 나서 레일즈는 곧바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맨 먼저 눈에 잡힌 것은 맞은편 숙소의 지붕 위로 세워진 깃대였다. 그 끝에는 인간의 팔뚝과 대도가 매달려 있었다. 그레일의 무기와 왼손을 빼앗았다는 소식을 들은 누군가가 숙소의 옥상 위에 매달아놓은 것이다. 처음에 레일즈는 야만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걸 매달아놓음 으로써 아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군기 같은 것으로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이미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전투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우선 망루로 올라섰다. 이번에야말로 적군은 총력을 기울여 공격해왔 다. 암흑기사와 맹호부족의 전사단도 공격에 가담한 것으로 보였다. 이쪽도 전력을 기울여 방어전에 임하는 수밖에 없었다. 성채의 목 책을 사이에 두고 피 튀기는 전투가 반복되었다. 화살 부대는 소나기처럼 화살을 퍼부었고 다른 전사들도 창으로 찔러 다가오는 적들을 몰아내거나 돌을 던져 적들이 성으로 침입하지 못하게 막았다. 적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다. 연속적으로 발사되는 화살을 사용해 응전하기도 하고 각종 장대를 동원해 창과 겨루기도 했다. 그러면서 방비가 허술해진 곳을 통해 목책을 넘어오려 했다. 실제로 목책을 넘어와 성채의 수비병과 격렬한 육박전을 벌이는 적군도 있었다.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도 엄청난 피해를 입고 있었지만 아직 목책 이 완전히 무너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베르디아의 피해는 훨씬 심했다. 마치 피해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한 공격이었다. 베르 디아군의 시체로 성채 주위가 다 메워질 정도였는데 공격의 속도를 조금도 늦추지 않았다.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공격해 들어왔다. 마법으로 봉해진 동쪽 큰 문이 부서진 것은 점심 때를 조금 지나서 였다. 적의 마술사가 마법 해제의 주문을 사용해 문에 걸린 봉인의 마 력을 제거했던 것이다. 적은 마법의 해제와 함께 거대한 파괴용 통나 무를 문 안으로 들이밀었다. 그러자 문에 걸린 빗장이 뿌드득 소리를 내며 부러지고 말았다. 문이 열리자 적군이 밀물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을 맞이한 것 은 레일즈가 이끄는 돌격대와 마리스 등이 소속된 지원 부대였다. 모 든 전사가 망루와 목책에 올라 적과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군 에겐 이 이상의 예비 전력은 없었다. 만약 레일즈 부대가 무너진다면 성채 안으로 수많은 적이 몰려들어 난전이 벌어질 것이 틀림없었고 그렇게 되면 수적으로 열세인 신수의 어금니로서는 이길 가능성이 없 었다. 뭉쳐서 돌격해오는 적에게 지원대가 먼저 주문 공격을 가했다. 하 프엘프 사이아는 전격(라이트닝 볼트)의 주문을 사용했다. 황백색을 띤 섬광이 나무 모양으로 퍼지며 열 명 남짓한 적군을 그 자리에서 쓰러뜨렸다. 정령사 비인은 대지의 정령 노옴에게 명해 선두에 선 적 들의 다리를 얽어 놓았다. 때문에 그들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런 마법 공격으로 한꺼번에 성채 안으로까지 침입하려던 적의 시도가 무산되자 이번에는 그 한복판으로 레일즈가 이끄는 돌격 부대 가 나갔다. 레일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선두에 섰다. 개미인간족의 전사 길리엄도 레일즈를 따라 앞으로 나왔다. 이 두 사람은 적군에게 마치 단단한 성벽과 같은 위압감을 안겨줬다. 레일즈가 은제검을 사용해 적을 쓰러뜨리는 동안 길리엄은 창을 휘둘렀다. 이 개미인간족 전사는 때때로 입에서 강한 산을 뿜어내 적 군들이 기겁하게 만들었다. 베르디아군은 레일즈와 길리엄의 손에 걸려 차례차례 쓰러졌다. 두 사람의 뒤에서 지원대의 전사가 마법과 능력을 써서 베르디아군을 더 욱 혼란에 빠뜨렸다. 문 양옆의 목책에서는 화살 부대의 전사가 성채 로 침입한 적병의 머리 위로 화살을 쏘아댔다. 문을 둘러싼 공방전은 그런 상태로 한참 동안 계속됐다. 베르디아 군이 자신들의 수만 믿고 계속 몰아붙여서 한때는 아주 위험한 상태 에 빠진 적도 있었다. 결국은 길리엄도 레일즈도 부상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던지 몇 군데 상처를 입고 후퇴했다. 그러자 그들을 대신해 돌 격대의 다른 전사들이 선두로 나섰다. 레일즈는 아무도 보지 않는 장소에서 샤일론에게 상처를 치료받았 다. 길리엄의 상처 치료를 맡은 어금니부족의 수인은 치료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레일즈는 그냥 샤일론에게 갔던 것이다. 치료가 끝난 레일즈 혼자 샤일론과 함께 전열에 복귀했다. 돌격대 전사들은 아직 문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한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희생자가 많았다. 지금 공격해오는 적들은 아무래도 맹호부족 전사들 같았다. 그들 대부분이 곡도(폴션)를 손에 쥐고 있었을 뿐 아니라 도약의 능력을 써 서 돌격대 뒤로 다가서는 자들도 있었다. 계속해서 돌격대 전사들은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했다. 레일즈는 샤일론과 눈길로 의견을 나눈 뒤 뒤로 돌아온 맹호부족 의 전사들을 처치하러 갔다. 이렇게 되자 맹호부족의 전사들도 뒤에 서 적을 맞이한 꼴이 되었다. 레일즈와 샤일론은 돌격대의 전 맹호부족 전사들 을 하나씩 처치해나갔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밀리면 그들이 다시 도약 능력을 써서 도망치리라 생각해 바짝 긴장하면서 싸웠다. 그런 데 이상했다. 그들은 불리한 상황인데도 있던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돌격대의 전사들도 한 사람씩 쓰러져갔다. "왜, 이렇게까지……." 레일즈는 갑자기 오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돌격대의 뒤 를 공격하던 적을 간신히 무찔렀을 때 갑자기 돌격대의 전면이 무너 지면서 한 전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레일즈는 그를 차단하려고 앞으로 나섰다. "레일즈, 부탁해. 저자는 은으로 만든 무기가 아니면 해치울 수 없 어." 중상을 입고 바닥에 쓰러진 한 돌격대 전사가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며 간신히 말했다. 레일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즈가 손에 들고 있는 검은 마리스에게서 받은 은제검이었다. 맹호부족의 전사는 온 몸이 피로 물들어 있었지만 자기 몸에 상처 를 입은 것이 아니라 상대를 벨 때 튀어오른 피가 묻은 것 같았다. 처음에는 양날검 공작 그레일로 생각했다. 그러나 체격이 달랐다. 전신이 근육질인 것은 같았지만 그레일보다 더욱 다부진 체격에다 칼 대신 워해머를 손에 들고 있었다. 게다가 워해머의 앞부분은 지금까 지의 싸움을 말해 주듯이 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 공격을 받으면 어지간한 갑옷 따위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 같 았다. 갑옷은 종이처럼 갈가리 찢기고 살과 뼈도 성하지 못하리란 생 각이 들자 온 몸이 돌처럼 굳는 듯했다. "그대가 레일즈인가!" 맹호부족 전사의 눈은 적의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그게 어쨌다는 거지?" 레일즈는 검을 고쳐쥐고는 거리를 쟀다. 워해머보다는 검이 길기 때문에 거리만 잘 재고 싸운다면 무서울 것까지는 없었다. 도약의 능 력만큼은 반드시 머릿속에 넣어둬야겠지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적이 레일즈를 향해 똑바로 공격해 들어왔다. 의표를 찔린 셈이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레일즈는 재빨리 검 을 휘둘렀다. 적의 어깨가 레일즈의 칼에 닿았다. 하지만 약했다. 가죽 갑옷을 찢 어놓았을 뿐 단단한 어깨 근육까지는 가를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반격이었다. 레일즈는 검을 수습하고는 뒤로 물러서려 했 다. 그러나 분명히 적의 기세에 눌리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몸 끼리 맞부딪쳤다. 순간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 가해 져 왔다. 레일즈는 튕겨나가 땅바닥을 굴렀다. 등을 세차게 받혀 숨조 차 쉬지 못할 지경이었으나 오른손의 검은 놓치지 않았다. 이제 레일즈에게 남은 것은 전사로서의 본능뿐이었다. 땅바닥에 쓰 러진 채 옆으로 계속 굴러가며 일어서려 했다. 그때였다. 무언가가 레 일즈 얼굴 바로 옆을 스치는 감촉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잠시 후 간신히 시력을 되찾자마자 한쪽 무릎을 딛고 적을 확인했 다. 적은 정면에서 워해머를 크게 휘두르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 구르 는 레일즈를 향해 거대한 손을 휘둘렀다. 등이 으스러지는 것만 같아 땅바닥에 쭉 뻗었다. 그러나 오른손에 든 검으로 상대의 다리를 후려칠 정도의 힘은 남아 있었다. 비록 공격 이 얕긴 했지만 그도 상처를 입은 게 분명했다. 잠깐이었지만 적의 자세가 무너졌다. 그 틈에 레일즈는 옆으로 굴 러 간신히 일어설 수 있었다. 그때 새로운 함성이 일었다. 또 다른 부대가 성채 문을 공격하는 거라면 더 이상 문을 지키기란 불가능할 것이었다. 레일즈는 순간적으로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목책에 올라 있던 아군 가운데 한 사람이 타닐이라고 외치 는 소리가 들렸다. 절망은 순식간에 희망으로 바뀌었다. 타닐이 유격 대 전사들을 거느리고 적의 배후를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이 있었다. 레일즈는 자신감을 회복하고 눈앞의 전사 를 노려보았다. "퇴로가 사라졌다. 괜찮겠나?" 적의 집중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말을 걸었다. "나는 뒤로 물러서지 않아!" 적은 이렇게 외치며 레일즈를 향해 돌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레 일즈도 그 공격을 예측하고 있었다. 허리를 낮춘 뒤 검 끝을 앞으로 쭉 내밀었다. 그리고 자신도 돌진했다. 그러곤 무서운 외침 소리와 함께 레일즈 앞으로 다가온 워해머를 잽싸게 피하며 검에 힘을 주었다. 순간 레일즈의 검 끝이 적의 가슴으 로 파고들었다. 단단했다. 그렇지만 장벽을 헤치고 들어가는 감촉이 전해왔다. 조 금씩 적의 가슴으로 검이 들어갔다. 결국 검은 그의 몸을 거의 관통한 뒤에야 멈췄다. 레일즈 머리 위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분하다.……" 목덜미로 따뜻한 것이 방울방울 떨어졌다. 머리 위로도 계속해서 무언가가 흘러내리다가 목 언저리에서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붉은 액체였다. 머리 위에 있던 숨결은 천천히 잦아들더니 이윽고 멈췄다. 그러자 레일즈는 뒤로 물러나며 검을 뽑아들었다. 그 반동으로 서 있는 채 시 체로 변한 적의 육체가 천천히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레일 말고도 이런 용사가……." 과연 맹호부족의 전사답다고 생각했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문 쪽을 돌아봤다. "예비 족장이 쓰러졌다." 적의 전사 하나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후에서도 적이……." "퇴각하라!" 최초로 목소리를 낸 자가 명령했다. 그것이 신호가 되어 맹호부족 의 전사는 퇴각하기 시작했다. "간신히 지켜냈구나." 레일즈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어냈다. 퇴각을 시작한 맹호부족 전사들 대신, 문 쪽에 다른 한 부대가 모습을 나타냈다. 레일즈는 두 팔을 활짝 벌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그 부대의 선두에는 은발의 전사 타닐의 모습이 보였다. 놀랍게도 타닐 또한 웃음을 띠고 있었다. 타닐이 이끄는 유격대가 도착함으로써 전투의 승패가 결정되었다. 적은 후퇴하여 야영지로 돌아갔다. 이미 정오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긴 건지 짧은 건지 시간의 감각을 잊어버릴 정도로 격렬하게 치른 전 투였다. 앞으로 일생 동안 싸운다 해도 이렇게 격전을 치를 기회는 아 마 없을 것 같았다. 어찌 되었거나 성채는 지켰다. 하지만 패배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해서 승리했다는 기분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어림잡아 계산해 봐도 2백 명이 넘는 전사가 목숨을 잃었다. 적의 손실은 아마도 수천 명이 넘을 것 같았다. 숫자상으로는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러나 수가 적은 아군에게 전력의 감소는 저들보다 훨씬 심한 타격이었다. 레일즈는 성채의 전체 상황을 시찰하기 위해 걷기 시작했다. 가까 이서 휴식을 취하던 타닐이 그걸 보고 일어섰다. "이런 공격을 다시 한 번 당하게 되면 성채를 지킬 전사가 한 사람 도 남지 않을 거 같아." 타닐이 다가오기를 기다려 레일즈가 말을 붙였다. 그에게는 치하의 말을 해야 했다. 절묘하게 시간을 맞춰 공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전황 을 보는 눈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얘기였다. "무슨, 그런 말을." 심드렁한 말투로 타닐이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이 있었다는 것이 의외였다. "적도 필사적이었지?" 타닐은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말대로 오늘 베르디아군이 싸우는 모습은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아군의 시체를 타고 넘어서 계속 공격해왔다. 레일즈 혼자만도 적을 스무 명 이상 베어넘겼다. 그렇게 많은 아군이 죽는데도 사기가 떨어지지 않는 것이 신기했 다. 신왕의 권위 때문이었을까? 그렇지 않으면 신의 힘을 회복한 지배 의 신수왕을 두려워하기 때문일까? "필사적으로 공격했는데도 함락시키지 못했잖아. 이제 베르디아 병사 중에서도 이 성채를 두려워하는 자가 생겼을지도 몰라." "그랬으면 좋겠지만……." 레일즈는 그렇게까지 단정할 자신이 없었다. "증원이 필요해. 다음 공격을 막아내려면 전사의 수가 너무 모자라. 원군이 도착하면 아군의 사기를 상승시켜 적들의 사기를 확 꺾어놓을 수 있을 텐데." "시레네에 부탁해볼까?" "은빛늑대부족에게 말이야?" 타닐의 말은 레일즈를 놀라게 했다. 그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일 뿐더러, 만약 시도해본다고 해도 완고한 시레네 족장이 그걸 허락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닐의 다음 말은 레일즈를 더욱 놀라게 했다. "내가 가도 좋아." "네가 직접?" 은발의 인간인 타닐이라면 족장을 설득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 었다. 게다가 마리스가 사자로 나섰을 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에, 약간의 원군만 있다면 적을 퇴각시킬 수 있다고 설득하면 족 장이 생각을 바꿀 가능성은 충분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렇게까지 협 않았잖아!" "이상한가?" 타닐이 되물었다. "응, 조금은. 아니 솔직히 말하면 많이 이상해." 레일즈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 생각이 바뀌었어." "어떻게 바뀐 거지?" 레일즈가 묻자 타닐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한테 말할 게 못 될지도 모르지만……." 타닐은 조금 뜸을 들이더니 망설이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슬로 부락이 신왕의 기적으로 멸망당했을 때, 그때까지 내가 믿 던 모든 것을 잃고 말았어. 신수왕 페네스도, 은빛늑대부족도, 그리고 내 자신도. 신왕의 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력하다고 생각했지. 페네 스는 신왕과 대결하려 하지 않았어. 족장은 이슬로 탈환을 위한 전사 를 파견하지도 않았고. 그리고 예비 족장이었던 나도 내 부락을 지키 지 못했어." "타닐……." 레일즈는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타닐의 표정에서는 깊은 고뇌의 흔적이 배여 있었는데 그것은 신수민족이 아닌 레일즈로 서는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고뇌처럼 보였다. "믿는 것이 사라진 인간만큼 허약한 것은 없어. 내가 스스로 목숨 을 끊지 못했던 것은 전사라는 사명감뿐이었지. 적과 싸우다 쓰러지 자, 그것만이 내가 살아가는 버팀목 역할을 해줬어." 그 말엔 레일즈도 공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모든 전사들이 짊어져 야 하는 슬픈 운명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잃어도 무기를 들고 계 속 싸워야 하는……. 알고 보면 레일즈가 크리스타니아 땅에서 이렇게 전쟁에 나서고 있는 까닭도 전사의 사명 때문이었다. 죽는 것을 두려워하고 적을 살 해하기를 혐오하면서도 결국 싸움터에서 달아날 수는 없는 것이다. "너를 보고 생각을 바꿨다. 어차피 싸워야 하는 것이라면 목적을 갖고 싸우기로." "어떤 목적을?" 레일즈는 기대감을 가지고 물었다. "물론 신왕을 쓰러뜨리는 것이지." 레일즈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상 어떤 말도 필요치 않았 다. 마음 든든한 벗이 생겼다는 생각에 레일즈는 너무나 기뻤다. "시레네로 다녀와줘." 레일즈가 말했다. 머리 숙여 인사를 건네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한테 맡겨." 타닐의 대답은 언제나처럼 무뚝뚝했다. 그러나 그 말은 그 어느 때 보다도 믿음직하게 느껴졌다. 제3장 부러진 어금니 1 커다란 검은 새 한 마리가 이파리가 살랑대는 나무 꼭대기에서 신 수의 어금니 성채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제는 장렬하리만치 격렬한 전투가 펼쳐졌지만 오늘은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창과 활을 든 전사들이 망루와 목책에서 숲 건너편에 진을 친 베르디아군의 움 직임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움직일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따분해서 그런 건 아니겠지만 검은 새는 갑자기 날개를 펼치더니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두 날개의 길이는 보통 사람이 두 팔을 활짝 폈을 때와 같았다. 독수리 정도의 크기라고나 할까. 재빠른 속도로 상승하더니 북쪽을 향해 날개를 퍼덕였다. 바람에 실린 때문인지 날개를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시냇물이 비탈을 내려 가듯 서서히 고도를 낮추더니 숲 속의 나무들에 부딪힐 정도가 될 때 까지 새는 활강을 계속했다. 다시 한 번 날개를 움직였지만 상승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들 을 피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고도는 더욱 낮아졌고 이미 대지에 가까 워진 상태였다. 발이 땅바닥에 닿을까 말까 하는 곳에서 새는 갑자기 모습을 바꿨 다. 인간의 모습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전라의 사내였다. 깡마른 모습 이긴 했지만 단련된 육체로 어디 하나 군살이 없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이살리. 흉조의 큰까마귀 아르케나를 섬기는 수 인이었다. 가까운 나무 밑에 숨겨둔 옷을 입고 소검을 허리에 찬 뒤 걷기 시작했다. 발길은 역시 북쪽을 향하고 있었다. 잠시 부락이 나타났다. 숲에 늘어선 나무들 사이를 누비 며 통나무를 이어 짠 집들이 늘어서 있는 자그마한 부락이었다. 가구 수는 50호 남짓으로 사람들을 다 합쳐봐야 2백 명도 되지 않을 것 같 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 은빛늑대부족의 성지 가 있는 시레네의 대부락으로 철수했던 것이다. "다녀왔다." 이살리는 부락에 들어선 순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그 러자 어느 집의 문이 열리며 한 사나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튼튼한 갑 옷으로 무장한 장년의 사내였는데 짧게 깎은 머리에 수염도 단정했 다. 얼핏 보아서는 베르디아의 암흑기사 같았지만 입고 있는 갑옷의 형태나 색상, 그리고 가슴에 그려진 문장이 전혀 달랐다. 사나이는 배 반의 땅이 아니라 잃어버린 대지에 번성하고 있는 왕국에 속하는 기 사였던 것이다. 이름은 노르바. 그는 세 사람의 종자를 데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 종자들은 문 밖으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이살리가 보기에 주인 은 종자들을 신뢰하지 않는 듯했다. 오히려 경계심을 품고 있다고 느 껴졌다. 그리고 종자들도 주인의 그런 태도를 알고 있음에 틀림없었 다. 그래선지 주인에게 조금도 충성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상황이 어떤가?"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노르바가 물었다. 햇빛에 그을린 얼굴엔 답답 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총력전이었지만 성채는 아직 함락되지 않았네. 어쩌면 이번 전쟁 이 장기화되겠던걸." 뭔가 아주 즐거워하는 말투였다. "스무 배나 전력 차이가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째서 성채 를 함락시키지 못하는 거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노르바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이살리가 낮은 소리로 웃었다. "저 성채에는 용사가 한 사람 있어. 성채가 함락되지 않는 까닭은 그 용사 때문이지." 이살리의 말에 다낭 왕국의 기사는 더욱더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용사의 존재를 부정하고 싶은 기분이리라. "자, 그럼 어떡한다? 성채를 방문토록 할까, 아니면 베르디아의 야 영지로 가볼까?" "난 모르겠어. 솔직히 말해서 어느 쪽이나 다 적이잖아. 성채 사람 들은 폐쇄적인 민족이고 베르디아 사람들은 영원한 침략자들이니까 그 어느 쪽과도 협상할 여지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다면 왜 넌 우리에게 협력하는 거지?" "불만이라면 지금이라도 사라져주지. 내 목적은 이미 말했잖나. 너 희들의 세계로 내가 갈 때 길안내를 부탁하고 싶다고. 그 대신 이곳 세계의 길안내는 내가 해 주겠어. 타당한 거래가 아닌가?"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진 않았다." "이곳에서 너희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할걸." 조롱하듯 말하는 이살리가 불쾌하게 느껴지긴 했지만 노르바는 반 론을 펴지 못했다. 사실 낯선 세계를 여행하기란 지나치게 위험했다. 최초로 만난 이 사나이만큼은 우호적이었지만 다른 주민들은 노골적 인 적대감을 보였다. 무작정 무기를 들고 공격해와 쫓겨다닌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재상의 허가가 날 때까지, 아니면 랏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현지 인과는 절대로 싸움을 벌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했었다. 전쟁이 벌어지는 것은 그다지 두렵지 않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책임일 때는 문제가 달랐다. 그런 걸로 역사서나 음유시인의 서사시에 이름을 올 리고 싶진 않았다. "이 전쟁이 끝나면 어떻게든 대화를 해보자. 그때까지는 기다려야 겠지." 이살리라는 사내를 따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렇게 사람 없는 부락에 몸을 숨긴 채 가까운 성채를 둘러싼 공방전을 지켜보고 있었 다. 그 동안 노르바는 눈앞의 수수께끼 같은 사내로부터 크리스타니 아에 관해 대체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사나이는 다낭 왕국의 존재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어쩌면 도망친 모험자들을 만난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근위기사단장 랏셀의 아들도 이곳 세계에 와 있을 게 분명했다. 하 지만 그들이 반역자들과 함께 행동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 다. 레일즈는 두 친구들과 함께 여행에 나섰다고 추정되는데, 대수롭 지 않은 마음으로 여행에 나섰다가 이곳 대륙의 전란에 휩쓸렸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레일즈란 소년은 벌써부터 대단한 실력을 지 니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과연 피보라 기사라는 이름으로 명성이 자 자한 랏셀의 아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는 속일 수 없다고 했던가. 그 나이에 벌써 누구한테도 꿇리지 않는 전사가 되어 있다니 믿어지 지 않았다. 하지만 모험자의 한 사람인 도적을 체포한 것도 다름 아닌 레일즈였다. 그것도 1대1의 맞대결로 생포한 것을 보면 소문이 사실 인 게 확실했다. 어떻 그의 생사 여부를 확인하고 싶었지만, 눈앞의 사내는 핵 심적인 이야기에 미치면 교묘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동행하고 있는 마술사 리만은 이 사나이가 자기와 같은 마술사라고 단정했다. 유파 나 계통 따위는 분명히 다르지만 틀림없이 상위 고대어를 구사하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이처럼 정체를 알 길 없는 사내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언제나 꺼림칙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노르바의 기분을 꼬이게 만드는 것은 무슨 까 닭으로 피보라 기사 랏셀이 자기를 이곳 대륙으로 파견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게다가 동행시킨 사람들까지 도망다니는 두 모험자들과 지 난날의 동료들이니, 도망자들을 쫓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배반당할지 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떨쳐내기 어려웠다. 아무도 신용할 수 없는 의 심스러운 상황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적당히 임무를 마치고 다 낭으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그러나 그렇게 했 다간 살아 남기 어려웠다. 재상 말리드도 두려웠지만 대부분의 근위 기사단 전사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단장인 랏셀이었다. 그 공포 에 비하면 전쟁의 공포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근위기사들 은 전쟁터에서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적과 맞서 싸웠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는 것이 어려운 법이다.' 랏셀이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크리스타니아에 와서야 노르 바는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적이란 말인가? 아니 원래 내 편은 한 사람도 없는 것 이 아닐까? 누가 이기든 성채를 둘러싼 공방전이 한시라도 빨리 끝나 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공방전은 장기전으로 돌아설 가능성이 커 보였다.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떨칠 길이 없었다. 노르 바는 애꿎게 땅바닥에 발길질을 했다. "아아, 너무 그렇게 초조해 하지 마." 이살리는 달래듯 말하더니 물과 식량을 조달해오겠다며 자리를 뜨 려고 했다. "부탁해." 노르바는 고개를 숙였다. 다낭에서 가지고 온 물과 식량은 이제 다 떨어졌다. 사냥이나 고기잡이 따위의 일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이 오 로지 징발에만 의존해 살아온 노르바였다. 그러나 여기는 그의 영지 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가축은 물론이고 논밭의 작물도 남김없이 베 어져 있었다. 집들을 뒤져 간혹 남아 있는 식량을 긁어모았지만 그것 으로는 사흘을 넘기지 못했다. 이살리는 야영에 익숙했던지 토끼나 꿩을 잡아오기도 하고 나무 열매와 산나물 따위에 대해서도 훤했다. 지난 열흘 동안은 이살리가 거의 먹여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동행하는 모험자들은 그 런 걸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노르바는 신분이 낮긴 했지만 건국초부터 이어져온 기사 가문에 태어난 사람이었고 그런 만큼 이런 상태를 비굴하다고밖에 느낄 수 없었다. "감사할 것까진 없어. 그 대신 네가 잃어버린 대지로 돌아갈 때 날 동행시켜줘." 이살리는 경쾌한 발놀림으로 걷기 시작했다. "기억해두지." 이살리의 등뒤에 대고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와 함께 다 낭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리드 재상과 랏셀 경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지금으로선 전혀 자신이 서지 않았다. "어쨌든 그 친구에게 연락을 취했으면 좋겠는데." 노르바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이살리는 혼잣말 을 했다. 그 친구란 물론 레일즈였다. 그러나 다른 용병들 앞에 모습 을 나타내선 안 된다. 어쨌거나 자신은 탈주자였기 때문이다. 탈주하 지 말라는 규칙이 있던 것은 아니지만 결전을 앞두고 도망친 자신을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이 용서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이살리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렸다. 노르바라는 사나이는 아무 래도 레일즈 일행을 쫓아 이곳 세계로 온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을 체포할 생각인지 구출할 생각인지가 확실치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레일즈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게다가 노르바도 모든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지는 않고 있는 듯했다. 결국 상대방의 진 심을 모른 채 탐색만 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레일즈를 만나 이 사내들에 대해 묻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살 리로선 이 사내들이 잃어버린 대지로 빨리 돌아갔으면 하고 바랐다. 그들과 동행해서 다낭으로 내려가는 것이 자신의 새로운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레일즈는 정말 잘 해내고 있었다. 술기운으로 자기가 본 미래의 광경을 레일즈에게 이야기했을 뿐인데……. 그런데 왜 그런 기분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레일즈라면 고뇌 하리라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무언가 주지 않 을까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거쉰이나 타닐에게 말해봤자 아무런 쓸모 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단순한 전사였다. 죽는 것을 두 려워하지 않기에 아무리 적이 우세하다고 해도 도망칠 사람들이 아니 었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책략을 동원할 사람도 아니었다. 지금 갖춘 전력 그대로 정면에서 맞붙었다가는 패배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레일즈는 단기간 내에 성채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탈 바꿈시켰다. 용병들의 신뢰를 얻어 그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 준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제의 맹공격을 절대 견딜 수 없 었으리라. "내 예언이 빗나가는 건가?" 이살리는 오히려 즐거운 마음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때부터 성채의 미래에 관한 예지는 행하지 않았다. 이살리 자신이 성채를 향하려는 의지가 없어졌기 때문에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레일즈에게 작별을 고하고 모습을 감춘 지 얼마 안 돼, 이살리는 신민족의 기사 노르바를 만났다. 우연이라면 우연이겠지만 신수 아르 케나에게 이끌렸다는 생각이 더 지배적이었다. 흉조의 큰까마귀라는 별명을 가진 아르케나는 이살리가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투철하게 미래를 볼 것임에 틀림없었다. 신수 아르케나는 그 종자들인 그림자부족의 수인들에게 신탁을 내 려 다양한 장소로 파견한 뒤 미래를 바꾸려는 징조를 찾아내게 했기 때문에 수인들은 정밀성 높은 미래 예지를 행할 수가 있었다. 신민족의 기사를 만났을 때 이살리의 뇌리에는 신수 아르케나의 목소리가 분명하게 울려퍼졌다. 이 기사와 동행한 뒤 잃어버린 대지 로 내려가 그가 사는 땅에 번성하는 왕국에 대해 조사하라는 내용이 었다. 이살리는 물론 아르케나의 신탁에 따를 예정이었기 때문에, 하루라 도 빨리 잃어버린 대지로 가고 싶었다. 레일즈라는 젊은이에 대한 깊 은 흥미도 그가 잃어버린 대지로 가보고 싶어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 다. 잃어버린 대지에 사는 크리스타니아의 신민족 가운데에서도 아마 그 젊은이는 특별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나 레일즈 같은 사나이를 탄 생시킨 토양이 그 왕국에는 갖춰져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 세계의 역사가 움직인 것은 배반의 땅에 암흑민족이 표류해 왔기 때문이었다. 지배의 신수왕 바르바스는 그들 표류민의 왕을 보 고 자신의 혼을 담을 그릇이 될 만하다고 판단 내렸다. 사실 3백 년이 라는 휴면기가 있긴 하지만 바르바스는 신왕으로서 부활을 이루었다. 그리고 신이었던 무렵의 힘을 계속 회복해 가고 있었다. 이곳 크리스타니아의 주민들 사이에서는 신수의 혼을 담을 만한 인간이 하나도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겨우 수천 명에 지나지 않는 표류민의 지도자에게 그 자격이 있었다니……. 이살리에겐 그 사실이 불가사의하기만 했다. 그러나 레일즈를 보 고, 그리고 그의 행동을 보고 뭔가 알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신을 섬기지 않았다. 신을 믿고는 있지만 절대로 신의 비호 아래 살려 고 하지 않았다. 만일 적대 관계라고 한다면 설령 신일지라도 망설이 지 않고 싸우려 들 것임에 틀림없었다. 이살리가 예지한 미래를 보면 그것은 한층 분명해졌다. 그렇기 때 문에 신과 동등한 혼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표류민들은 크리스타니아의 백성이 잃어버린 무언가를 가지고 있 었다. 그렇지 않다면 이리저리 떠다니는 세월의 풍파에 시달리면서 무언가를 찾아냈거나. 이살리는 그 문제에 흥미를 느꼈다. 잃어버린 대지에는 미래를 변 화시키는 징조가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것을 철저하게 파헤 칠 수 있기를 이살리는 바랐다. 베르디아군과 은빛늑대부족 사이의 전쟁도 관심이 있었지만 당분 간 결판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신하는 것이 있었다. 전쟁의 승패와 관계 없이 주기는 이미 이 땅에서 사라졌다는 사실이 었다. 게다가 크리스타니아의 세계율이 다시 자리 잡는다는 건 아예 불가능해 보였다. 그건 예지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이살리의 육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육감은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살 리는 확신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