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이게 다 신왕 폐하의 이끄심인가. 설마 이렇게까지 빨리 만나리라 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우하하하!" 그레일이 잔인하게 웃으면서 레일즈 쪽으로 다가서자 거리를 재기 위해 레일즈도 뒤로 물러섰다. 그걸 겁먹은 것으로 보았는지 그레일 의 웃음소리가 조소로 바뀌었다. 그때 마리스가 다가와 레일즈 곁에 나란히 섰다. 그녀가 숨을 넘기 는 소리가 레일즈 귀에도 확실하게 들렸다. "은발의 소녀까지 함께 계시구만." 더 이상 좋아서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그레일의 웃음소리가 점점 커졌다. "신왕이시여, 감사드리옵니다. 제가 복수를 할 수 있게 되어서." "제멋대로구만." 레일즈는 장작불을 바닥에 던지고는 검을 두 손으로 고쳐잡았다. 마리스도 허리에서 소검을 뽑아 가슴 앞에서 바깥쪽으로 잡았다. "어디 덤벼보시지!" 그레일은 두 팔을 펼치며 포효하듯 외쳤다. 순간 레일즈의 눈에 틈 이 보였다. 망설이지 않고 거리를 좁히며 상단에서 검을 휘둘러 내리 쳤다. 예상하지 못한 재빠른 동작에 그레일의 반응이 순식간에 늦고 말았다. 레일즈의 검이 그레일의 어깨를 스쳤다. "너무 얕았나!" 레일즈는 혀를 찼다. 그레일은 검이 닿는 순간 몸을 가능한 최대로 움츠렸기 때문에 검 끝만 간신히 그레일의 어깨를 찢었다. 그 바람에 피가 튀어 레일즈의 얼굴을 점점이 물들였다. 그레일이 비명을 올리며 반격해왔다. 레일즈는 뒤로 성큼 물러서서 대도의 일격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했다. 어깨의 상처를 힐끗 바라보 고는 그레일이 인상을 쓰면서 말했다. "조각조각 찢어죽일 테다!" "어디 해보시지!" 레일즈는 큰 소리로 맞받았다.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기에서 밀리 지 않는 것이 고작이었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마리스가 속삭이며 그레일의 뒤로 돌아가려고 움직였다. "물러서 있어. 이자하고는 혼자서 결말을 짓겠어." 이 말이 레일즈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레일즈……." 마리스는 놀라서 레일즈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자는 내가 쓰러뜨릴 거야." 레일즈는 단언하듯 말했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일과 혼자서 대적하지 못하는 자기를 용사라고 생각할 수는 없었 다. 이자를 쓰러뜨리지 못하면 지금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한 걸음 도 더 나아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자에게 지고 나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 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 때 이후로 자신은 이미 변했기 때문이다. 변해버린 자신이 이자를 뛰 어넘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시험하고픈 생각뿐이었다. 레일즈의 결의를 알아차렸는지 마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 니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늑대의 울음을 닮은 소리를 질렀다. 길게 꼬리를 끌며 마리스의 울음 소리는 어두운 밤하늘을 물들여 갔다. 능력을 사용했던 것이다. 그녀가 발하는 경고의 소리는 성채에 있는 모든 용병들에게 전달될 것이다. 여기저기의 숙소 문이 열리며 무기를 쥔 용병들이 뛰쳐나왔다. 습 격해온 맹호부족의 전사는 수십 명 정도였다. 도약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이므로 모두 뛰어난 전사들임에 틀림없었다. 불의의 습 격을 당해 망보던 전사들이 상당히 많이 희생당하고 말았다. 동료들 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만으로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이 적에게 몰려 갔다. 레일즈 곁으로도 몇 명의 전사가 다가왔다. 레일즈와 그레일은 서 로를 노려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레일에게서는 전혀 틈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섣불리 앞으로 나섰다간 이쪽의 허점이 드러나 대도로 일격을 당 할 판이었다. 달리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므로 검으로 받아넘 기는 수밖에는 없겠지만, 그 공격 기세를 꺾어놓지 못하면 자세가 완 전히 무너질 게고 그렇게 되면 끝장이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것은 그레일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움직 이는 순간을 노려 공격해 들어가려는 레일즈의 생각을 미리 알아차렸 는지 전혀 틈을 보이지 않았다. 그레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는 전사인 것이다. '이 싸움은 서두르는 자가 진다.' 레일즈는 마음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리며 스스로를 자제했다. 여기 는 아군의 성채다. 시간을 끌면 불리한 건 그레일이다. "대백조 형제!"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레일은 레일즈의 어깨 너머로 다 가오는 용병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철수하라!" 그레일은 온 성채에 울려퍼질 정도로 큰 소리를 질렀다. 성채 곳곳 에 있는 맹호부족의 전사들에게 퇴각을 명령했던 것이다. 도망치는가 싶어 레일즈는 잠깐 어안이 벙벙했다. 도약의 능력을 사용해 도망치 면 마법을 쓰지 못하는 레일즈로서는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팽팽하 던 긴장의 끈이 자연스럽게 느슨해졌다. 그러나 머릿속 한 쪽에서 경 보가 울렸다. 그때 그레일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레일즈 도 옆으로 풀썩 뛰어 몸의 방향을 정반대로 바꾸었다. 그러자 대도를 두 손으로 치켜든 그레일의 모습이 거기 있었다. 양날검 공작은 자기 야영지가 아니라 레일즈의 배후로 도약했던 것이다. 이자와 최초로 싸웠을 때도 그랬다. 레일즈로서는 꿈에서도 잊지 못할 대결이었다. 그 대결에서 레일즈는 패배당하고 거의 죽을 정도 로 중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갖고 있던 자신감과 용기를 모두 잃고 말았다. 그러나 그레일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는 레일즈 따위야 흔하디 흔한 잡병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똑같은 전법이 통할 리가 없었다. 기괴한 소리를 지르며 그레일은 대도를 휘둘렀다. 레일즈가 그곳에 있으리라고 믿고 힘껏 휘두른 일격이었다. 그러나 그 칼날은 허무하 게 허공을 가르고는 땅바닥을 깊숙이 파고들고 말았다. "같은 수작에 두 번 당하진 않아!" 레일즈는 기합 소리와 함께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자세가 무너진 그레일은 그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레일즈의 검은 대도를 휘두른 그레일의 왼팔을 향했다. 근육을 가르고 뼈를 자르는 촉감이 전해져왔다. 그레일의 왼손은 대도를 쥐고 있는 채로 팔꿈치 윗부분부터 절단당하고 말았다. 피가 많이 흘러 대도의 날과 지면을 검게 물들였다. 그레일은 비명 소리조차 지르지 못했다. 뒤로 숨가쁘게 물러서며 레 일즈의 공격권에서 벗어났다. 레일즈의 자세도 흐트러져 있었기 때문 에 계속해서 공격하진 못했다. 그러나 상대의 왼손과 검을 빼앗았기 때문에 승부는 이미 났다고 해도 좋았다. 레일즈는 상단으로 검을 들 어올리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했다. "이 자식이!" 그레일은 포효하며 전신을 부들부들 떨었다. 레일즈는 상관하지 않 고 발을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그 순간 그레일의 모습이 다시 사 라졌다. 레일즈는 배후로부터 공격당하지 않도록 위치를 바꾸었다. 그러나 그레일의 모습이 어디에도 없었다. 야영지로 돌아간 것이리라. "도망갔나?" 레일즈는 숨을 깊게 내쉬며 그레일이 남기고 간 대도와 왼손을 바 라보았다. 피곤이 엄습해왔다.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간신히 숨을 내 쉬었다. 정말 대단한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일에게 입힌 상처는 중상임에는 틀림없었지만 치명상은 아니 었다. 맹호부족에게는 재생의 능력이 있기 때문에 다음에 만날 때는 원래대로 회복되어 있을 게 뻔했다. "레일즈, 괜찮아?" 말을 걸어온 사람은 거쉰이었다. 뒤로 두 사람의 전사가 더 있었다. "그래, 괜찮아." 공격당하기 바로 전에 육감이 작용해서 상처를 입힐 수 있었지, 만 일 한 순간이라도 판단이 늦었더라면 오히려 그레일에게 당했을지도 모른다. 종이 한 장 차이로 승패가 갈렸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양 날검 그레일 공작과의 싸움에서 레일즈는 승리했다 "맹호부족의 전사들이었어. 이제야 그놈들도 진짜 강적을 만났다 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거쉰이 자신의 창을 어깨에 매고 베르디아의 야영지 쪽을 향해 먼 시선을 보냈다. "정말 성가시기 짝이 없는 놈들이야. 마법으로 도약해오면 목책도 문도 아무 소용이 없다니까." 레일즈는 어깨를 으쓱했다. "맹호부족 모두가 도약할 수는 없잖아. 방비만 제대로 하면 물리칠 수 있어. 오늘 당한 것은 우리가 방심했기 때문이라구." "망보는 부대를 더 늘리자. 화살 부대 전사들에게 육박전은 아무래 도 무리야." 레일즈는 그레일에게 쓰러진 고고부족 전사들의 시체를 묵묵히 바 라보았다. "우리 부대와 칼리오 부대가 그걸 맡을게. 밤눈 밝은 전사를 골라 야간 보초를 세우겠어. 다음 번에 왔을 때는 한 놈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하자." 레일즈가 고개를 끄덕였다. 신수의 어금니 전력이 소수라고는 하나 이곳 성채에는 어림잡아 천 명이 넘는 전사들이 농성하고 있었다. 거 기에 겨우 수십 명의 전사로 습격하는 것은 광기나 다름없었다. 아무 리 생각해봐도 우세한 쪽에서 취할 수단이 아니었다. 도약 능력을 사 용할 정도의 수인은 맹호부족 전사단의 핵심 중의 핵심이었다. 그들 을 이런 형태로 소모시키는 것은 커다란 전력 낭비였다. "그레일이란 놈, 무슨 생각을 하고……." 레일즈는 그레일이 남긴 대도를 들어올려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날 이 은으로 된 검이었는데 맹호부족의 신성무기인지도 몰랐다. "레일즈님과 제게 복수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닐까요?" 마리스였다. "복수하러?" 그러고 보니 그레일도 그런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에는 전쟁을 치르고 있잖아. 그리고 그자는 베르디아 군의 지휘자고. 아무리 복수가 중요하다고 해도 그렇게 어리석은 행 동을 하겠어?"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그런 터무니없는 수단을 동원했는지도 모른 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에게 이 번 야습은 냉수를 뒤집어 쓴 듯한 느낌을 안겨주었다. 연승하던 기분 은 훌쩍 사라지고 만 것이다. "맹호부족에게 복수는 신성한 행위입니다. 강한 것이 절대화되는 부족인 만큼 만약 누군가에게 패배를 당했을 경우 그 사람에게 복수 하지 못하면 약자라는 낙인이 찍힙니다. 그의 오른쪽 눈이 찌부러진 채 있는 것을 보지 못했나요?" "그러고 보니……." 그레일의 왼쪽 눈은 노란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맹호부족의 수인은 어둠 속에서도 무엇이나 볼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나기 때문에 마치 야 행성 동물처럼 눈에서 빛이 났다. 그러나 오른쪽 눈은 빛을 발하고 있 지 않았던 것 같았다. 마법의 단검(대거)으로 상처 입은 안구가 아직 낫지 않았기 때문인 지도 몰랐다. "맹호부족의 수인은 재생의 능력을 가지고 있잖아. 그런데 왜 그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을까?" "잃어버린 눈을 걸고 복수를 맹세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런 건가?" 그레일이 복수에 혈안이 돼 있다면 그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 전 쟁의 승패가 자연적으로 갈릴 것이기 때문이다. "이젠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굳게 맹세했다. 그레일을 이 싸움은 이미 이긴 것이나 마찬가 지였다. 지휘관을 잃어버린 셈이므로 태세를 정비하기 위해 이슬로의 주둔지까지 물러날 것임에 틀림없다. "어쨌든 오늘은 휴식을 취하세요. 레일즈님 부대의 전사들에게 야 습이 있어도 결코 싸우지 말라고 직접 명령하시지 않았나요." "참, 그랬지." 마리스가 지적하자 레일즈가 어색하게 웃었다. "체력에는 자신이 있지만 정말 오늘 같으면 결딜 수 없겠는걸. 만 약 지금 적이 눈앞에 나타난다면 난 꼼짝없이 당하고 말 거야. 설사 형편없는 고블린 나부랭이일지라도." 오늘밤은 느긋하게 쉬도록 하자고 레일즈는 다짐했다. 내일 적이 다시 습격해오리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항상 들어맞곤 했다. 그러나 단 하나, 이살리의 예언을 예외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만큼 은 늘 변함이 없었다. 상처는 심장의 고동 소리에 맞춰 점점 더 고통스러워졌다. 이상하 게도 잘려나간 팔꿈치에서부터 아픔이 느껴져 왔다. 계속해서 단검을 맞는다는 착각에 시달렸다. 양날검 공작 그레일은 맹호부족 전사단의 야영지로 돌아와 있었다. 도약의 능력은 거구인 그를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서 순식간에 이곳 야영지까지 이동시켜 주었다. 지금은 자신의 천막 안에 앉아 있었다. 지난밤의 전투를 생각할 때 마다 격심한 굴욕감이 뭉게뭉게 피어올라 온 몸을 갈가리 찢어놓는 듯했다. 얼굴이 불타오르듯 뜨거운 것은 상처 때문이 아니라 분노 때 문이었다. 이미 지혈은 끝나 있었다. 팔꿈치 바로 위를 가죽끈으로 묶고는 상 처에 술을 쏟아붓고 붕대로 감아두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레일은 오른손 주먹으로 무릎을 탕탕 쳤다. 그런 젊은 놈에게 거 듭 망신을 당하다니 참을 수가 없었다. 이마와 관자놀이에 핏줄이 불거져 나왔다. 뺨에도 푸르스름한 반점 같은 줄이 세 가닥이나 나타났다. 그것은 바르바스가 부여해준 능력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색줄은 전쟁터에서 기력과 용기를 고무하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레일은 무의식중에 그런 능력을 사 용할 만큼 자신을 주체하지 못했다. "족장님, 부상을 당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얼핏 그런 소리가 들렸는데 곧바로 천막 입구가 열리며 한 사내가 들어왔다. 어슴푸레한 천막 안으로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쏟아졌다.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동안에 아침이 되었던 것이다. 탕카라 부락의 장로이자 맹호부족의 예비 족장을 맡고 있는 바디 오였다. 벌써부터 맹호부족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가 그레일을 뒤이어 족장이 될 거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그레일보다 키는 작지만 체중은 거의 같았고 괴력을 당할 사람이 없었다. 육중한 워해머를 무기로 사 용했는데 앞머리가 송곳 같은 날로 이루어져 있어 거기에 한 번 맞으 면 아무리 단단한 갑옷일지라도 그 안의 근육을 찢고 뼈를 부서뜨릴 정도였다. "약간의 상처를 입었을 뿐이야." 그레일은 바디오를 바라보며 듣기에도 섬뜩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 디오는 그레일의 잘려나간 팔을 보며 눈을 크게 떴다. "재생하시지요. 왼손도 왼눈도. 그렇게 상처 입은 모습으론 만족스 럽게 싸우실 수 없습니다." "그렇게는 안 돼." 그레일은 고개를 저었다. "어째서?" 바디오가 물었다. "이 상처는 복수의 증거다. 복수를 할 때까지는 상처를 치유할 수 없다." "그러나……." "신왕 바르바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바르바스 신께, 말입니까?" 맹호부족에게 그 이름은 대단히 신성했다. 바디오는 아무 말 없이 땅바닥에 놓인 은빛늑대의 모피 위에 가만히 앉았다. "신왕으로부터 신탁이 있었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화제를 바꾸려는지 바디오가 말을 꺼냈다. "신탁이라니?" 그레일의 굵은 눈썹과 아직 남아 있는 팔꿈치 윗부분이 파다닥 움 직였다. 바디오는 잠깐 숨을 멈추고 족장을 올려보았다. 부족이 자랑 하는 용사인 양날검 공작이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엔 낭패스러 운 표정이 가득했다. "없었습니까?" 그레일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살짝 하늘을 올려봤다. "신탁 따윈 없었다. 언제나 같은 이야기다." "오늘 아침 일입니다. 머릿속에 신왕의 목소리가 울려 이렇게 명하 셨습니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 신수의 어금니를 함락시키고 시레네를 향하라고 말입니다." 바디오는 등을 굽히며 그레일을 올려다보았다. "빨리 상처를 고치라는 신왕의 보살핌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신탁을 내려주신 것이 아닐까요." 그레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오른쪽 눈에 손을 얹고 정면을 노려보기만 했다. 그 앞에 바디오가 있었지만 그의 눈길은 더 먼 곳으 로 향해 있었다. "신탁대로 네가 맹호부족을 거느리고 성채를 공격하라. 암흑민족 의 딜란트 같은 놈에게는 절대로 지지 마라." "그러나 족장님……." "나는 반드시 복수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신왕은 나를 우리 부족의 족장으로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바디오의 입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여러 차례 움찔하곤 했다. 그러 나 그 입에서 결국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가거라! 신왕께서 시간이 없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느냐." 천천히 고개를 숙인 뒤 바디오는 일어섰다. "저녁때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바디오는 그 말을 끝으로 그레일의 천막을 나섰다. 다시 혼자 남은 그레일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신왕이시여……." 신음하듯 그레일이 중얼거렸다. "저를 버리셨나이까? 저는 선택받은 전사가 아니란 말입니까?" 대답은 없었다. 신왕으로부터도, 그리고 자기 자신의 마음속으로부 터도. 그레일은 새로운 대도를 구하기 위해 천막을 나섰다. 복수를 이루 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각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