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3권 제1장 전 야 1 멀리 북쪽 바다에 한 섬이 떠 있다. 그 섬의 주민들은 그곳을 해방의 섬이라 부르며 자랑스러워했다. 잿빛의 속박과 파괴의 여신이 안겨주는 공포와 싸우며 마침내 승리했 기 때문이다. 그 섬에는 여러 왕국이 번성했다. 백 년이 넘는 오랜 세월에 걸쳐 섬에는 전쟁 한 번 없이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 평화를 깨뜨 린 것은 어느 왕국의 황태자였다. 황태자는 섬의 통일을 기치로 내걸 고 인근 왕국에 대해 침략 전쟁을 일으켰다. 그것을 계기로 왕국들은 서로를 정복하기 위해 치열한 전쟁을 시작했고 결국 대전쟁이 한창이 던 어느 날 한 왕국이 멸망의 운명을 맞이했다. 왕도는 유린되고 왕족 은 모두 살해되었다. 그러나 단 한 명 둘째공주가 살아남았다. 왕국에 충성을 맹세하는 천여 명의 사람들은 공주를 모시고 신천지를 향해 출항했다. 한 척의 범선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러나 험악한 폭풍우에 휘 말려 범선은 정처 없이 표류하고 말았다. 드디어 식량도 바닥을 드러 내 이제 운명이 다한 것이 아니냐 하는 절망감이 범선의 분위기를 사 로잡았다. 그때였다. 한 마리의 백조가 배 위에 나타나 새로운 대지로 사람들 을 이끌고 갔다. 그곳은 거대한 대륙의 북쪽에 튀어나온 반도였다. 그러나 대륙과는 거대한 절벽으로 격리되어 있는 육지의 고도이기도 했다. 계시에 따라 사람들은 이 반도를 다낭이라고 이름 붙였다. 서글픈 표류민들을 위해 위대한 신들이 그 성지 일부를 떼어주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의 성벽이라고 이름 붙인 절벽 너머를 이렇게 불렀다. 신들이 사는 땅 크리스타니아라고. 오십 명 남짓한 은빛늑대부족이 가재 도구를 잔뜩 실은 짐마차를 끌고 신수의 어금니 성채 안마당을 묵묵히 지나갔다. 요 며칠 동안 매 일같이 보는 광경이었다. 그들은 이 성채 주변에 부락을 이루며 살던 은빛늑대부족의 주민들이었다. 시레네 대부락의 족장으로부터 각 부 락을 버리고 시레네로 모이라는 명령이 내려진 지 이제 겨우 사흘밖 에 지나지 않았는데도, 은빛늑대부족 백성들은 준비를 마친 뒤 서둘 러 부락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는 이스칼리아 지방을 동서로 연결하는 도로 위에 건설되어 있기 때문에 성채보다 서쪽에 위치하는 부락 사람들은 이곳을 통과하여 시레네로 가게 마련이었다. 성채의 문은 밤낮 없이 개방되어 있어 난민이 된 은빛늑대부족을 안으로 받아들였다가는 곧 바로 내보내는 역할을 했다. 레일즈는 2층의 창을 통해 무리 지어 성문으로 들어와서는 밖으로 빠져나가는 은빛늑대부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크리스타니아에 온 지도 거의 1년이 지났다. 그러나 자꾸만 그 이 상의 세월을 이곳에서 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성채의 동료 전사들 은 아무 거리낌 없이 레일즈를 대백조 형제라고 불렀다. 다낭 반도를 지배했던 대백조 후지를 섬기는 종자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레일즈는 대백조 후지의 종자가 아니었다. 종자이기는커녕 1년 전만 해도 그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신수 후지는 대백조부족에게 커다란 재앙이 운명지어졌을 때 그 가혹한 운명에서 그들을 구하려고 다낭 반도를 크리스타니아로부터 떼어낸 뒤 바다 높이에 가까울 정도로 다낭 반도를 하강시켰다. 대략 7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원인 모를 역병이 돌아 대 백조부족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 뒤 북쪽 섬에서 찾아온 표류민이 새 로운 다낭 반도의 주민이 되었다. 레일즈는 이 표류민들의 후예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자신이 진짜 신수민족처럼 느껴졌다. 대백조 형제라는 호칭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 문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레일즈가 신수의 어 금니 전사들과 똑같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다른 신수 의 어금니 전사들과 마찬가지로 배반의 땅 베르디아를 멸망시키는 것 을 최후의 목표로 삼아 온 몸을 바쳐 싸웠다. 마치 그들이 자신의 고 향을 침략한 적들인 것처럼. 혹시라도 신왕이 승리하면 세계는 신왕에 의해 통일되고 새로운 세계율이 이곳 크리스타니아를 지배하게 될 것이 분명했다. 바로 지 배의 신수왕이라 불린 바르바스가 관장하는 두렵기 짝이 없는 지배의 법칙이 새로운 세계율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배의 법 칙은 약자가 강자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므로 크리스타니아 전역이 혼란스러운 싸움과 복종으로 얼룩지게 되 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그러나 신수민족이 승리하면 주기가 부 활되고 크리스타니아 대륙은 다시 결계로 둘러싸이게 돼 다낭은 다시 육지의 고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망설이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눈앞에 커다란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신수의 어금니 성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 하지만 큰 앵무새의 신수 아 르케나의 종자인 이살리가 남겨준 불길한 예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 았다. 정말로 성채는 불길에 휩싸이고 수많은 전사들이 죽음을 맞이 하게 되는 걸까? 흉조의 큰까마귀라는 별명을 가진 신수 아르케나의 종자로 선택된 수인은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부여받는다고 했다. 이살리는 이 능 력으로 성채의 멸망을 예지하고는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렸다. 살아서 이곳 대륙이 어떤 미래를 맞이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그에게 부여된 부족의 사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떠나면서 자신이 예지한 미래를 바꿔달라는 부탁을 레일즈에게 남겼다. '어떻게 해야 성채를 지킬 수 있을까?' 레일즈는 이살리가 사라지고 난 이후 줄곧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하자만 아직 아무런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우리가 지켜주고자 했던 사람들이 사라진다니 참 낭패스럽구만. 그래선지 전사들의 사기가 많이 떨어졌어."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사자의 신수 딜레온을 섬기는 갈 기부족의 전사이며 용병단의 단장인 올겐스였다. 레일즈는 조용히 단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원래 갈기부족의 전사는 남의 주목을 끄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능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이 갈기부족 전사의 목 소리에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력이 느껴졌다. "우리만 남겨진 기분이 듭니다." 레일즈가 아직도 약간 더듬거리며 크리스타니아어로 말했다. "실제 그렇지 않아?" 올겐스의 말에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은빛늑대부족의 족장은 신수의 어금니를 버렸다. 아니 처음부터 눈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신수의 좌장인 주기의 신수왕 페네스의 종자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부심은 자기 부족은 자기들 부족의 힘으로 지킨다는 기개와 직결되었다. "그렇게 해서는 전쟁에서 이길 수 없어."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좋은 소식도 있獵冒  은빛늑대부족의 전사들이 수십 명 성채에 남 기로 했네. 식량과 무기도 기증해왔고. 시레네 대부락은 어찌 됐건 이곳 지방의 은빛늑대부족이 우리를 믿어준다는 증거가 아니겠는 가?" 레일즈가 기운이 빠져 있다고 보았는지 단장은 화제를 바꿨다. 남 을 격려하려는 활기 찬 말투였다. "마음을 든든하게 해 주는 소식입니다." 레일즈도 약간이나마 표정이 누그러졌다. 베르디아와의 결전을 앞 두고 아군이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했다. 더구나 은빛늑대 전사들 은 매우 용감했기 때문에 전투에 큰 도움이 되었다. "수로 보면 적이 우리보다 훨씬 우세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전 사는 그다지 강하지 않은 것 같네. 정예를 꼽아보자면 베르디아의 암흑기사단과 맹호부족의 전사들뿐이지. 두얼굴부족, 침묵부족, 깨 달음부족의 전사단은 억지로 전쟁에 참가하고 있기 때문에 사기가 낮을 수밖에 없을 테고 요마들 따위야 설령 수만 명이 무더기로 덤벼와도 두려울 게 없지." "글쎄요, 인원이 많다는 건 역시 위협적인 요인입니다. 앞의 적을 상대하는 사이에 뒤를 치는 공격을 당하면 아무리 강한 전력을 해도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으음, 과연…… 자네가 베르디아군에 없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 각하네. 저들이 자네가 말한 전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행운이고." "적이 그렇지 하지 않은 게 나로서는 오히려 이상한 생각이 드는 군요. 베르디아군도 썩 잘 통솔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신왕 아래 단결하고 있는 듯하지만 맹호부족과 암흑 민족 사이에 주도권 경쟁이 치열하다고들 하더군요. 그 싸움에 신 왕이 개입할 생각은 물론 없을 테고." "약육강식의 원리를 따른다, 그 말인가요?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강약이 결정된다는……." "그런 얘기가 되지." 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신왕 바르바스는 신이었다. 스스로 관장하는 지배의 법칙에는 어떤 예외도 인정하지 않았다. 설령 그 들이 자신들의 백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신왕이 크리 스타니아 전 영토를 지배한다면 충성을 맹세한 모든 자는 공평하 게 취급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강자일 경우 설령 베르디아 사람이 아닐지라도 타인을 지배할 수 있고, 반대로 약자 일 경우 베르디아 사람일지라도 강자에게 복종을 강요당하게 될 수도 있으리라. 만약 그렇다면 레일즈는 신왕의 통치 아래 놓인다 고 해도 얼마든지 살아나갈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높은 지위일지 라도 힘만 있으면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은 매력적으로까지 느껴졌 다. 그러나 레일즈는 그런 생각을 훌훌 털어버렸다. 약자에 대한 학대 를 긍정하는 사회는 역시 인정할 수 없었다. 약자를 지키는 것은 강자의 사명이고 그렇기 때문에 기사 같은 특권 계급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약자들은 위기가 발생할 경우 그 특권 계급이 자신 들을 지켜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에 세금을 내고 노역에 참여한다. 만약 지배하고 착취할 뿐이라면 들도적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지금 다낭 왕국의 지배자들은 과연 어떠한가. 들도적과 다 르다고 반론할 수 있을까? 신수의 어금니를 구성하는 용병들은 지배자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부족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앞장서서 싸웠다. 매일 지급되는 식 량만이 유일한 보수인 셈인데도 그들은 자기 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 성채로 왔다. 그러나 더 이상 그것을 지원하는 사 람은 아무도 없었다. "베르디아가 드디어 총공격을 가해온단 말이지……." 단장이 새삼스럽게 생각난 듯이 중얼거렸다. 레일즈는 입을 굳게 다물고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은 이미 온 성채 안에 퍼 졌으므로 결전의 날이 다가왔음을 모르는 용병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살리의 예언에 관해서는 아직 그들에게 이야기하지 않았 다. 그렇지 않아도 인근의 은빛늑대부족이 철수하는 바람에 허탈 해 하고 있는 상황인데 그 이야기까지 들으면 걷잡을 수 없을 정 도로 사기가 떨어질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이 성채는 지켜야 합니다. 베르디아군에게 이기기 위해서는 신수 민족이 더욱 강력하게 연합해야 합니다. 이 성채는 그 상징이라고 도 할 수 있습니다." "자네가 뭘 말하려는 건지는 알지만……." 단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수염이 풍성한 턱에 손을 얹었다. "이 신수의 어금니를 조직한 것은 여우의 신수 스매쉬를 섬기는 두얼굴부족이었어. 베르디아군의 침략에 대항할 만한 충분한 전력 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크리스타니아 곳곳을 돌아다니며 우 리들 같은 용병을 모았지. 식량과 무기 등의 보급로도 확보했고. 그러나 두얼굴부족이 베르디아군 쪽으로 돌아서자 신수의 어금니 는 사실상 붕괴했어. 초원에서 패배를 당하고 이슬로의 부락에서 깨져나가고 용병의 수도 어느덧 절반이 안 될 정도로 줄어들고 말 았지. 지금 이 성채에 남아 있는 사람들은 돌아갈 기회를 놓친 사 람들이 대부분이야. 신참자도 가끔 들어오긴 하지만." "그렇지만 이 성채는 아직 존재하고 있으며 신수민족이 공동투쟁 을 벌이고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습니다." 새로 용병을 모으고 보급로를 확보하면 옛날의 세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은빛늑대부족의 협력만 얻을 수 있다면 베르 디아군의 침공 따위는 거뜬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번 대침공은 현재 가진 전력만으로 막아내야 한다. "어쨌든 승인해 주겠네." 단장의 갑작스런 말에 레일즈는 의아한 눈빛을 띠었다. "……전 아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네의 눈을 보고 있으면 알아. 이 성채를 지키기 위해 자네가 하 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을 모두 승인하겠네. 그러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닌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됐네. 소리 높여 웃으며 창가에 선 레일즈 곁으로 걸어왔다. "맡기겠네, 새로운 크리스타니아 백성의 전사여. 훌륭하게 이 성채 를 지켜 주게나." 레일즈는 단장의 옆모습을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문을 굳게 닫고 지구전을 편다면 다섯 배 아니 열 배의 적을 상대해도 너끈히 전투를 치를 수 있다.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아니, 저것은?" 단장의 소리에 놀라 레일즈도 창 밖을 바라보았다. 은빛늑대부족 의 난민들이 동쪽 문으로 들어오는 짐차의 길을 열며 환한 표정으 로 선두에 선 여성을 맞이하고 있었다. 햇살에 반사된 은빛 머리 때문에 눈이 부셨다. "마리스!" 레일즈는 놀라 소리쳤다. 하지만 마리스는 듣지 못했는지 문을 지 나자 길의 가장자리로 내려섰다. 짐차는 속속 성채 안으로 들어왔 다. 마대 자루와 통이 가득 쌓여 있는 짐차도 있었고 새로 만든 칼과 창 같은 무기만 실은 짐차도 있었으며 갑옷을 꼼꼼히 포개서 실은 짐차도 있었다. "은발의 소녀가 돌아왔군. 이제 식량 걱정은 사라지겠는데!" "예." 레일즈는 얼굴 가득 기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안에 쌓여 있던 불안도 씻겨졌다. 지구전을 벌이기 위해서는 충분 한 식량과 무기가 필요했기 때문에 은근히 걱정이 되는 게 사실이 었다. 그런데 이 정도만 보급된다면 마음껏 싸울 수 있을 것 같았 다. 레일즈는 창을 열고 힘껏 마리스를 불렀다. "레일즈님!" 마리스의 맑은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레일즈는 거기 있으라고 큰 소리로 외치면서 창 밖으로 몸을 던졌 다. 땅에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다리가 휘청거렸으나 조금도 아프 지 않았다. 레일즈는 멈추지 않고 달려갔다. 기다리겠다고 말은 했지만 마리스 또한 그 자리에 가만 있을 수가 없었다. 레일즈가 2층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보자마자 길 가장자리 에 늘어선 사람들을 헤치며 달려왔다. 결국 마지막에는 레일즈가 맞이해 주는 장면이 되었다. 두 손을 활짝 벌리고 달려오는 은발의 소녀를 기다렸다. 마리스는 얼굴 가 득 미소를 지으며 레일즈에게로 다가왔다가 그 기세를 멈추지 않 고 품안으로 힘껏 뛰어올랐다. 잠깐 당황했지만 레일즈는 이미 마 리스를 있는 힘껏 꼭 껴안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곤 허공으로 들어올려 올려다보았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 살에 눈이 부셔서 그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게다 가 긴 은발 머리가 흘러내리며 레일즈의 얼굴을 부드럽게 간질였 다. 햇살이 튕겨나가며 조그마한 무지개가 수도 없이 생겨나는 것 처럼 보였다. "고마워, 마리스!" 레일즈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레일즈님." 마리스는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레일즈님을 보고 싶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있어요." "나한테 하고 싶은 이야기?" 마리스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굴을 가까이 대며 속삭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대로 그냥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럼 제가 겪는 혼돈이 사라질 것 같아요." "혼돈?" 레일즈는 의아해 하며 되물었지만 마리스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레일즈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 았다. 마치 신에게 기도 드리는 신관 같은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신성해 보여서 레일즈도 그 모습 그대로 가만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놀라 떠드는 사람들의 시선도 웅성거리는 소리도 신경 쓰 이지 않았다. 마치 신수왕 루미스의 결계로 둘러싸인 듯한 기분이 었다. "괜찮아, 사이아?" 비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콧등에 난 작은 여드름 이 낯설게 여겨져 사이아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 고 발만 쳐다보았다. "뭐, 어때서 그래." 애써 태연한 척하려 했지만 목이 메여 제대로 말을 할 수도 없었 다. "하지만 봐! 저 둘이 꼭 연인 사이 같잖아." 사이아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찔하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사랑 스럽게 서로를 껴안고 있는 마리스와 레일즈, 그들 모습을 사이아 는 잠시도 참고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문득 눈이 흐려졌는가 생각 했는데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뺨에는 점점이 눈물 자국이 어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레일즈를 보는 것뿐이야. 하지만 마리스는 레 일즈와 나란히 걸을 수도 있어." "그래서?" 비인이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좋잖아, 비인!" 사이아는 오른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먹이며 말했다. "저 두 사람, 참 잘 어울리잖아.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건 알 고 있었어. 알고 있었단 말야!" 거기까지만 간신히 말하더니 숙소 쪽으로 달려갔다. "어디가 좋단 말야. 전혀 어울리지 않는걸." 사이아의 등을 바라보며 비인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돌아보 니 마리스와 레일즈는 떨어져 있었다. 그 둘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두 사람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성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사이아 외의 여성과는 말을 나누는 것조차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레일즈가 아닌가. 레일즈는 어릴 적부터 쭉 사이아와 친했는 데 크리스타니아에 올라온 지 1년 만에 사이아보다 더 친한 여자 가 생겼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상대는 말도 다르고 습관도 다른 신수민족이었다. "그래, 그게 남자와 여자 사이인 거야."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비인도 사이아의 뒤를 쫓아 숙소 쪽으로 돌아갔다. 2 선선한 밤바람이 레일즈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숲 속은 끊이 지 않는 물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이따금 뒤편 성채에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해질녘부터 시작된 신참들을 환영하는 잔치가 계속되는 중이 었다. 커다란 바위에 걸터앉은 레일즈는 말없이 물 위를 바라보았다. 곁 에는 마리스가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허공에 떠 있는 달빛을 모 아놓은 듯한 은빛 머리카락이 은은하게 빛났다. 바쁘기 짝이 없는 하루였다. 시레네 부락에서 가져온 식량을 창고 로 운반하고 각종 무기들도 배급해 주었다. 마리스가 돌아온 것을 보 고 성채에 남아 있을 결심을 한 은빛늑대 전사들이 더욱 늘었다. 아마 도 백 명 이상은 증강되었을 것이다. 베르디아군과의 결전을 앞둔 신 수의 어금니에는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그러나 성채가 무너진 후 그만큼 희생자의 수가 는다는 것도 사실 이었다. 그 생각만 하면 레일즈는 억장이 무너질 것만 같았다. 이살리 의 예언대로 된다면 성채는 불길에 휩싸여 함락되고 말 것이기 때문 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성채를 지켜야 한다고 다시 한 번 각오했다. 레일즈는 거쉰과 타닐 등 백인대장을 하나씩 불러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하고 협력을 부탁했다. 대군을 상대해야 하므로 지금처럼 통제 되지 않은 전투 방법으로는 승리를 얻을 수 없었다.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도록 부대의 편제를 완전히 새로 짤 생각이었다. 그것이 왜 효과 적인지는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지만 올겐스의 승인이 있었다고 하자 기꺼이 협력을 약속했다. 그들도 이번 전투에 승리하기가 쉽지 않다 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레일즈의 제안을 받아들 일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앞으로 계속해서 정신 없이 바쁜 나날이 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은 편안한 기분이었다. 곁에 마리스가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은빛 머리는 신수왕 페네스에게 선택받았다는 성스러운 징표였고 그녀는 은빛늑대부족의 성녀였다. 그 둘은 낮에 있었던 짧은 만남 뒤 로는 이야기를 나눌 짬이 전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잔치가 시작되자 마자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자리에서 일어나 강가로 찾아왔던 것이다. 오른쪽 바로 곁에는 통나무로 짠 다리가 있었다. 레일즈는 다리를 바라보며 결전을 벌일 때는 이 다리를 없애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눈앞의 강 서쪽으로는 한 명의 은빛늑대부족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므로 언젠가 반격에 나서기 전까지 다리는 필요 없었다. 강가로 나오고 나서 두 사람은 아직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낮 동안의 피로 때문인지 아니면 떠들썩한 잔치 마당에서 빠져나와 다행 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지만 둘 사이의 침묵은 꽤나 오래 지속되었다. 레일즈가 한숨을 내쉬었다. "따분해요?" 마리스가 고개를 들며 말하자 레일즈가 당황스러운 듯 고개를 저 었다. "요즘 들어 한숨이 늘었어. 이것저것 생각할 게 많아졌거든." "성채 때문이군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고도 생각하는 것이 있었지만 일단 그 문 제가 가장 중요했다. "괜찮다면 저한테 알려주세요." "나중에 해줄게. 그보다도 마리스가 먼저 이야기해줘. 시레네 부락 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있었어요. 그것도 아주 많이." 마리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그리고 시레네 부락에서 있었던 일 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레네의 족장은 신수의 어금니 성채로는 베르디아군의 침공을 막아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마리스는 그 말부터 시작했다. "아마 그럴 거야." 레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답이었다. 수만의 베르디아군 에 비해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은 고작해야 천 명 남짓한 인원이었다. 누가 봐도 승리를 얻어낼 수 있는 조건이 아니었다. "족장은 시레네 부락을 결전장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각지 에서 전사들을 소집하는 결정을 내렸던 거예요." "족장의 생각은 알 만해." 전력을 소단위로 나누기보다는 한 군데로 집중하는 편이 효과적이 라는 생각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소부락 의 희생을 어느 정도 각오해야 한다. 전사들이 소집되어 전력이 저하 된 소부락으로는 요마들의 습격을 막아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가령 내가 베르디아 지휘관이라고 해보자구. 나 같으면 시레네는 무시하고 근처의 소부락들을 하나하나 점령해나가겠어. 그렇게 하면 시레네에 소집된 전사들은 잇따라 시레네 부락에서 빠져나올 거야. 부족을 지킨다는 생각보다 가족과 이웃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더 강하게 마련이기 때문이지. 그렇게 해서 전력도 떨어지고 사기도 형 편없어진 시레네와 일전을 겨루는 거야." 심각한 표정으로 레일즈가 말했다. "베르디아가 정말 그렇게 나오면 문제가 심각해지겠네요." "정말 심각하지. 그리고 실제로도 그런 식으로 공격해왔잖아. 느긋 하게 공격할 생각이라면 놈들은 틀림없이 그렇게 나올 거야." "그렇겠군요." 마리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전법 때문에 성채가 식량 부족 에 시달리는 심각한 상황까지 오게 된 것이다. "어쨌든 식량을 보내준 것만 해도 감사해야지." 레일즈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맹활약을 하면 훨씬 놀라운 법이다. 기다리던 적군이 오지 않으면 시레네의 족장은 어떤 생각을 할까? "이곳 성채의 전력만으로 베르디아의 대군을 물리치고 그 사실을 널리 알려 옛날처럼 용병들을 더 불러모으는 거야. 물론 보급로도 확 보해야겠지. 그렇게 되면 누구도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무시할 수 없 을걸." 마리스도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결전을 벌일 때 저도 이곳 성채에 남아 있을 생각이에요. 거기서 살아남을 수 있으면……." 말을 듣자마자 레일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번 전투에서 마리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기 때문 이다. 이 성채에 머무르는 한 사이아나 비인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그들도 이미 성채에서 전사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사이아와 비인은 마법사로, 밧소와 샤일론은 전사로서 충분한 기량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순시 때 보인 그들의 전투력 덕분에 잡역부에서 전사로 승격 했던 것이다. 결전을 앞두고 그들에게 다낭으로 돌아가라고 할 수는 없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용병들이 자신을 신뢰하지 않게 될 것이 불 을 보듯 뻔했다. 전쟁에 나선 이상 언제 목숨을 잃게 될지 알 수 없다. 게다가 성채 의 수비에 전력을 기울일 생각이기 때문에 다낭에서 같이 온 친구들 에게 신경을 써줄 여유가 없을 것 같았다. "걱정되세요?" 레일즈가 심각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자 마리스는 기분을 풀어 주려는 듯 살짝 미소 지었다. "물론이지. 다낭에서 같이 온 친구들도 걱정되고." 그러고는 이살리의 예언을 이야기해 주었다. 마리스에게까지 그 사 실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 혼자서만 알고 지내 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문제였다. 마리스라면 그런 고역을 함께 나눌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마리스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희미한 달빛 아래였지만 레일즈 에게 분명하게 보였다. "흉조의 큰까마귀 아르케나의 종자가 그런 예언을……." "그들이 예지한 미래는 바뀔 수 있다고 들었어. 그렇기 때문에 우 리는 성채를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할 생각이야. 이살리가 예지한 미 래에는 내 생각이 바뀌었다는 것까지 들어가 있진 않을 거라구." "몽환의 나비라고 불리는 신수 레스펜에 따르면 사람의 마음 깊은 곳은 혼돈 그 자체래요. 시간과 마찬가지로 말이에요. 설령 신수 아르 케나일지라도 확실한 미래를 예지할 순 없어요." 듣고 보니 혼돈의 세계는 몽환의 세계라고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떠 올랐다. 사이아의 스승 브라이언이 해준 말이었다. 사이아의 양아버 지였던 그 마술사는 비록 성격이 괴팍하기는 했지만 레일즈에게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레일즈가 지금부터 시험해보려는 전술 전략에 관한 지식은 대부분 그가 가지고 있던 책에서 배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마리스, 마리스도 결전이 끝날 때까지 성채에 남겠다고 말 하지 않았나?" 레일즈는 원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러면 결전이 끝나고 나면 어떻게 할 생각이야? 이 성채를 떠나 는 건가?" 거의 그녀가 어딘가로 떠나리라는 건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곁에 있으면서 도와주고 자신을 이끌어주 리라고 생각했다. "꼭 가야 할 곳이 있어요." 더없이 진지한 말투였다. 얼굴을 바라보니 중대한 결심을 감춘 표 정이었다. "어디로 간다는 말이지?" 레일즈가 물었다. 목이 타는 듯한 느낌이었다. "시작의 땅으로……." "시작의 땅?" 레일즈가 되물었다. "크리스타니아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입니다. 거기에는 신수들이 신이었던 시절의 육체가 있습니다. 석상으로 변해서 다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지만……." "왜 그런 곳으로……." 왜 가느냐는 질문을 눈길에 담아 마리스를 보았다. "가야만 합니다. 거기에는 신수왕 페네스가 있을 겁니다. 회합의 때 가 다가오고 있으니까요." "회합의 때?" "대주기와 대주기의 사이에 신수들은 시작의 땅에 모여 다음 대주 기를 위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어떤 세계율로 이곳 대륙을 다스릴 것인가, 누가 신수들의 좌장이 될 것인가 등을 이야기한다고 들었습 니다." "신왕, 지배의 신수왕 바르바스도 참가하나?" 레일즈는 놀라는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아마도 당당히 선언하겠지요. 은빛늑대 페네스의 주기는 끝났고 큰뱀 루미스가 친 결계도 소멸됐으며 사자 딜레온의 승인도 이제 아 무 의미가 없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자신이 신수들의 좌장이며 크리 스타니아의 절대신으로 군림한다고 선언하겠죠." "신수들이 그걸 인정할까?" "그건 모르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가봐야 해요. 신들의 회합에 서 무슨 결정이 내려지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레일즈는 그녀가 은빛늑대부족의 성녀임을 다시 한 번 확실하게 느꼈다. 마리스의 은발은 신수 페네스에게 선택받았다는 증거였다. 그렇기 때문에 신수들의 회합에 참가하라는 사명이 주어졌으리라. "시작의 땅은 어디에 있지?" "이스칼리아의 서쪽, 감시자 포르티노가 지배하는 산악 지대의 최 고봉에 있어요." "여기서 서쪽이라고!"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베르디아의 세력권 안에 있잖아. 거긴 너무 위험해." "위험한 건 각오하고 있어요."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마리스의 굳은 결심이 분명하게 묻어났다. 레 일즈는 밤하늘을 올려보며 한순간 눈을 감았다. 동행하고 싶지만 성 채를 생각하면 그건 아무래도 불가능했다. "가서는 어떻게 하지? 신수들의 대화를 단지 바라보고만 있는 건 가?" "그냥 보고 있진 않을 겁니다." 마리스가 힘 있게 대답했다. "저는 신수들에게 의견을 제시할 생각입니다. 제 생각을 그리고 현 재 크리스타니아가 처한 상황을 알리겠습니다. 신수들은 인간의 수호 자입니다. 우리들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을 겁니다." "……제시하다니, 어떤 내용으로?" 레일즈는 갈피를 잡지 못해 다시 물었다. 대답을 듣기가 두렵기도 했다. 그녀가 주기의 부활을 바라고 있다면 또 그것을 신수들이 받아 들인다면 다낭은 다시 육지의 고도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마리스 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결정할 수가 없습니다. 주기는 무너지고 이곳 크리스타니아는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 변화를 모두 긍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모두를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마리스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레일즈의 정면 으로 왔다. "전란이 계속되는 건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결계가 무너졌 기 때문에 레일즈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마리스가 약간 고개를 숙였다. "마리스……." "그것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은빛늑대부족 전체의 의 견은 아닙니다. 그리고 레일즈님도 신민족의 대표자가 아닙니다. 레 일즈님의 부족들이 이곳 크리스타니아를 더욱 혼란에 빠뜨릴지도 모 르고……." 레일즈는 반론을 펼 수가 없었다. 지금 다낭 왕국을 지배하고 있는 사람은 왕위의 찬탈을 노리는 야심가 말리드 재상이었다. 그가 크리 스타니아에 대해서도 야심을 품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레일즈는 마리스에게 생각을 바꿔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러나 무슨 말인가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 희망을 말해도 좋을까?" 레일즈도 굳게 결심하며 말을 꺼냈다. "말씀하세요." 기다리기나 한 것처럼 마리스는 레일즈를 재촉했다. "크리스타니아와 격리되지 않았으면 해. 우리 다낭에 사는 사람들 은 지금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어. 그건 폐쇄된 장소에 살고 있기 때문 이야. 인간이 살아가기 는 꿈이 필요해. 보다 넓은 세계, 커다 란 세계로 날아오르겠다는 꿈이. 그 꿈이 닫혀 있기 때문에 다낭 사람 들은 활기를 잃고 왕국은 어지러움에 빠져 있지. 그러나 크리스타니 아라는 신천지로 이어지는 길이 열려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 들은 희망을 찾게 될 거야. 장사꾼들과 모험자들이 찾아와 장사도 하 고 모험도 하게 되겠지. 물론 그들 모두가 착한 사람들은 아닐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나쁜 사람도 아닐 거야. 다만……." "다만?" "다만 지금 다낭의 지배자는 위험 인물이야. 그자를 쓰러뜨리고 정 통 여왕을 복권시켜야 해. 나는 마리스처럼 선택받은 사람은 아니지 만 신민족이 신수민족과 우호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 각이야." "그러니까 다낭을 폐쇄하지 말아달라는 말이군요?" 너무나 진지한 문제였기에 레일즈는 서슴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마리스는 숨을 고르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다낭 사람들이 주기를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크리스 타니아에서 떨어져나가기 전의 대백조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건 할 수 없어. 우리는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어. 신 들의 시대가 끝나고 수천 년이 지났어. 그걸 바꾸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주기라는 세계율은 폐쇄된 세계가 아니면 성립되지 않아요. 불안 정한 요소는 가능한 한 배제해야 하죠. 그렇기 때문에 루미스가 결계 를 치고 우르스 백성이 혼돈을 정화하며 포르티노가 감시를 해야 해 요. 그들 말고도 다른 모든 신수들의 협력이 있어야만 가능하지요." "즉 우리들은 혼돈과 같다는 말이 되네." "예, 유감스럽지만 그래요. 우리들에게 주기를 버리고 시간의 지배 를 받아들이라는 말은 혼돈에 몸을 맡기라는 말과 같아요." "시간은 혼돈이 아냐!" 레일즈가 힘을 담아 말했다. "미래에 좋은 일이 생길지 나쁜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몰라. 그러 나 우리는 현재를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갈 수 있어. 그 결과가 미래인 거지. 난 적어도 그렇게 생각해. 물론 행운과 불운은 분명 객관적으로 존재하겠지만." "마치 아르케나의 종자 같은 말씀이군요." 마리스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그만두라고 소리 쳤다. 그 아르케나의 종자가 한 말 때문에 지금 이렇게 터무니없 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지 않은가. "미안해요. 진심을 말하자면 전 레일즈님에게 설득당하고 싶어요. 레일즈님의 이상이 저의 이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아요. 시간에 대한 편견도 있고 다낭 사람들에 대한 불 신감도 다 털어내질 못하겠어요." 마리스는 레일즈를 똑바로 쳐다봤다. "레일즈님이 제 혼란을 없애주시겠어요?" "약속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레일즈가 조용한 말투로 물었다. "지금까지처럼 생각하고 행동해 주세요. 성채를 지키고 신수의 어 금니를 부활시키고 당신의 왕국에 정통 여왕을 복위시켜 주세요.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으니까 더 바랄 것은 없습니다." "그것만큼은 약속하겠어.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힘겨운 시련이리라. 레일즈라고 그걸 부정할 순 없었다. 그러나 지 난날 고향의 섬에서 사람들의 입에서 떠돌던 여섯 영웅과 사막의 영 웅왕, 그리고 자유 기사는 모두 그런 어려운 시련과 싸운 사람들이었 다. 그들이라고 해서 처음부터 시련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진 못 했을 것이다. 뜻을 품고 나서 한 순간도 그 뜻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 에 위업을 달성할 수 있었으리라. 그렇다면 자신도 그걸 달성할 수 있 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현재를 있는 힘을 다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밝은 미래를 여는 행동이 아니겠는가. "믿습니다." 마리스는 짧게 대답했다. 그러곤 꺼림칙하던 것이 싹 가신 개운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도 레일즈의 말을 믿기 때문이리라. "오랜 여행이 될 거야." 레일즈는 강 너머 펼쳐진 숲을 바라보며 한 마디 툭 던졌다. "그럴 거예요. 레일즈님한테나 저한테나." 마리스는 레일즈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그때 성채 쪽에서 커다 란 함성이 일었다. 내기 시합이라도 시작한 것일까. "걱정되세요?" 마리스가 얼굴을 들었다. 레일즈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러면 여기서 좀더 있지요." 물론 레일즈가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밤을 새서라도 마리스와 이 야길 나누고 싶은 기분이었다. 크리스타니아에 와서 보고 느끼고 생 각한 것들을 남김없이 털어놓고 자신이 생각한 미래까지도 그녀에게 다 주고 싶었다. 밤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3 때때로 팔에 감은 빨간 헝겊에 신경 쓰면서 밧소는 언제나처럼 빙 그레 웃는 얼굴로 성채의 안마당을 거닐었다. 스쳐지나가는 용병들도 모두 같은 위치에 헝겊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색깔은 달랐다. 이 색 깔이 바로 자신이 속한 부대를 표시하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레일즈 가 추진하고 있는 개혁 가운데 하나였다. 열한 사람의 백인대장과 그 밖에 아홉 명의 솜씨 있는 전사를 택해 대장으로 삼고 각 대장에게 약 오십 명 정도의 용병을 붙여 하나의 부대를 구성했다. 레일즈는 용병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능력을 확인하고 효과적인 편 제를 짜기 위해 고심했다. 예를 들어 활을 잘 쏘는 사람은 감시자라는 별명이 붙은 신수 포르티노의 수인 부대에 배속시켜 화살 부대를 만 들었다. 또 그들은 성채의 경비 역할도 맡았다. 그리하여 여덟 개로 늘린 망루에 올라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계속 망을 봤다. 포르티노의 수인 가운데에서도 특히 뛰어난 사람은 보통사람의 시야 밖 상황까지 도 쉽게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대로 가도를 감시 하며 베르디아군의 침공을 보고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은밀한 행동과 빠른 발이 장기인 은빛늑대부족의 전사들은 은발의 타닐과 또 한 사람의 대장에게 인솔시켜 주민이 사라져 텅 빈 부락에 주둔하게 했다. 적에게 포위당했을 때 후방을 교란시키려는 사전 준 비였다. "정말 의외인데. 대단한 책사로구만." 밧소는 혼잣말을 하고 나선 휘파람을 불었다. 과연 피보라 기사의 아들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위기사단장도 검술 솜씨뿐만이 아니라 지략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말리드 재상을 적대시하던 다낭 귀족들을 쓰러뜨릴 때 힘으로만 공격한 게 아니라 냉혹하면서도 치밀한 책략을 동원했었다. 레일즈는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온 지가 아직 1년밖에 안 되었는데 도 모든 용병들의 신임을 받았다. 검술 솜씨도 눈에 띄게 훌륭해졌다. 어제는 내기 시합에서 타닐과 겨루었는데 결국 무승부로 끝나 승패를 가르지 못했다. 검술만으로 겨룬다면 이곳 성채에서 레일즈와 겨룰 만한 사람은 한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곳 용병들은 마법을 닮은 특수한 능력을 사용하기 때문에 진짜 싸움이 벌어진다면 레일즈를 고전하게 만들 전 사들이 여럿 있었다. 레일즈는 어떤 부족이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를 조사해서 그 또 한 이번 전투에 써먹을 생각이었다. 이 용병단은 이번 결전에서 수백 년 역사상 처음으로 진짜 실력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미 밧소 또한 죽지 않을 정도로 거들겠다고 결심했다. 전투 지휘로 바쁜 레일즈 대 신 사이아와 비인을 지켜 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성실하게 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성채 사람들은 전사나 잡역부 할 것 없이 모두 바쁘게 움직였다. 사방을 잘 관찰할 수 있도록 성채 주변의 나무를 자른 뒤 잘라놓은 나무로 성채를 튼튼하게 보수하기도 하고 통을 만들어 그 안에 강물을 저장해놓기도 했다. 나무로 만든 성 채인 만큼 화공을 당할 때를 대비해서였다. 또 날이 무옛ㅈ 무기를 손 질하고 화살도 무수히 만들어놓았다. 강가에 널린 자갈을 옮겨와 목 책 위쪽에 쌓아놓기도 했다. 목책을 기어오르는 자들에게 돌세례를 퍼부을 속셈이었다. 야만스런 방법이긴 했지만 솜씨 없는 자가 활이 나 창을 쓰는 것보다는 훨씬 뛰어난 무기였다. 온 성채가 다 바쁘게 움직이며 하나같이 비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밧소만큼은 유일한 예외였다. 성실하게 일하는 건 성격에 맞 질 않았다. 일하는 척하며 게으름 피우는 것은 밧소에게 식은 죽 먹기 나 다름없었다. 그가 막 숙소로 돌아가려는 찰나였다. 이상한 사나이가 눈에 띄었 다. 등에 군살이 붙은 삼십대 후반의 사람이었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 었다. 밧소는 한 번 본 사람의 얼굴은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았다. 이름도 마찬가지였다. 기억력은 도적에게 필수불가결한 기술이기 때문이었 다. 신참자인 모양인지 무기나 갑옷이 없었다. 물을 긷는 통을 나르고 있었지만 걷는 폼이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혹시……." 밧소는 발소리를 죽이며 그 사내의 뒤를 따라갔다. 그러나 완전히 죽이지는 않았다. 다만 보통사람이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였다. 그 런데……. 세 걸음 정도 남기고 다가섰을 때 사내가 갑자기 몸을 돌려 뒤를 바라보였다. 밧소는 자신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우연이 아 니었다. 사내는 다가서는 밧소를 알아채고 돌아본 것이었다. 사내는 밧소와 마찬가지로 도적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솜씨를 갖춘. 사내의 눈에 살기가 흘렀다가 금세 사라졌다. "놀랬잖아." 사내가 주뼛거리며 말했다. "나도 놀랬어. 이런 데서 설마 동업자를 만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거든." 밧소는 다른 사람들이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죽여 말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에헤, 그래봤자 소용없어. 내 눈은 속일 수 없거든. 우린 말야, 의 식하지 않고서도 발소리를 죽이고 걷지. 나쁜 버릇이지만." "동업자라고 했나?"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사내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바뀌었다. "신수민족에게는 조직이 없어. 그럼 너는 우리 패거린가? 모르는 얼굴인데……." 사내는 베르디아 말로 바꿔 말했다. 조금 사투리인 듯한 느낌이 들 긴 했지만 크리스타니아 말보다 알아듣기 쉬웠다. "유감이지만 틀렸네. 뭘 찾으러 온 거지? 정직하게 자백하면 동업 자라는 걸 참작해 목숨만은 살려주지." 밧소도 베르디아 말로 대답했다. 사내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는 험악한 얼굴로 밧소를 노려보았다. 밧소는 상대의 손 움직임에 주의 를 기울였다. 언제 단검이 날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도 이미 소매 안에 숨겨놓은 단검에 손이 가 있었다. 상대가 어설프게 행동하면 용서 없이 목을 향해 던질 참이었다. 잠깐 동안을 그렇게 노려보던 사내는 갑자기 험상궂은 표정을 풀 었다. "잃어버린 대지에서 온 전사를 찾고 있다." 그 사내는 아주 사람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암살하러 온 건가?" "그럴 리가 있나? 어떤 분에게서 부탁을 받았지. 어떤 인물인지 가 늠할 수 있도록 정보를 알아내라고." "가늠해본다고? 레일즈를 말인가?" "그래." 이미 이름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히 여러 사람에게서 레일즈 에 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밧소는 레일즈가 벌써 유명인이 돼 있 는 것 같아 코웃음을 쳤다. "그렇다면 만나게 해 주지. 우리에게는 달리 숨길 만한 이유가 없 으니까. 오히려 그 친구가 네 이야기를 듣고 싶어할 거다. 예를 들어 그 어떤 분이 누군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용의 증거로 선물을 하나 주지. 창을 쓰는 전사 가운데 루탄다 란 놈이 있을 거다. 그자는 베르디아의……, 아니 맹호부족의 밀정이 다. 본명은 가델라. 양날검 공작 그레일의 부하지." "뭐라고?" 밧소는 깜짝 놀랐다. 그레일의 이름이 나온 것도 그랬지만, 베르디 아의 밀정이 동료의 정체를 폭로하는 것이 너무나도 의외였기 때문 이다. 루탄다라는 이름은 밧소도 알고 있었다. 그는 신수 타르키를 섬기 는 침묵부족의 전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침묵부족은 베르디아 지방 을 영토로 삼는 소부족이지만 베르디아군의 침공에는 그다지 협력적 이 아니었기 때문에 군으로부터 압박을 받고는 부락을 버리고 유랑길 에 나선 사람들이 많았다. 루탄다도 그 중 한 사람이며 베르디아군에게 복수하기 위해 신수 의 어금니에 가담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는 지금 거쉰 부대 소속이었다. "왜 그런 걸 가르쳐주는 거지?" 밧소가 의심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신용의 증거라고 하지 않았나. 그리고 같은 밀정이긴 하지만 동업 자는 아니기 때문이지." "그랬나. 그렇다면 알아듣겠어." 밧소는 보기 드물게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리고 사내 앞서 걷게 했다. 레일즈는 지금 숙소 쪽에 있을 것이다. "딜란트 경?" 스무 명 정도의 전사가 묶고 있는 큰 방 한구석에서 레일즈는 밧소 가 데리고 온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밧소가 입구에서 망을 보면서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했다. 백인대장 레일즈와 잡역부 사내가 밀담을 나누는 모습은 아무래도 이상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내는 매카티라는 베르디아 출신의 도적이라고 했다. 본명인지 아 닌지는 의심스러웠지만 그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의 입을 통 해 베르디아 사정을 가능한 한 많이 들을 필요가 있었다. "암흑기사단의 실질적인 단장이다." 매카티는 덧붙이듯 말했다. "그런 거물이 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거지?" 레일즈는 딜란트라는 이름의 베르디아 상급 기사가 자신을 찾기 위해 밀정을 파견했다는 것이 아무래도 납득이 가질 않았다. "당연하지. 잃어버린 대지에서 온 낯선 전사인데다가 그레일에게 상처를 입힐 정도로 뛰어난 솜씨를 가졌기 때문이지." 그가 하는 말이 입에 발린 소리라는 느낌이 들어 레일즈는 노골적 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양날검 공작 그레일과의 싸움 이후로 레일 즈에게 남은 것은 신체의 상처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거의 죽음의 문 턱까지 몰고 간 상처 자국은 지금도 어깨에서 가슴까지 깊이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깊은 상처가 가슴속에 문신처럼 남아 지워 지질 않았다. 그날 이후로 싸우는 것이 두려워졌다. 만약 자신이 전사 가 아니었다면 도망치는 길을 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투에 임한 전 사는 무슨 일이 있어도 등을 보이고 달아나선 안 되는 법이다. 전쟁을 종결시키기 위해, 힘없는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검을 다시 잡아야 한다는 걸 레일즈는 이곳 신수의 어금니에서 배워가고 있었다. "알고 싶은 것이 내 자신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인가?" "너에 대한 것만이다.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은 어차피 누설될 테니 까." 언뜻 웃음기를 띠며 매카티가 말했다. "안됐지만 이 이상 정보를 줄 생각은 없다. 루탄다가 밀정인지 아 닌지는 물론 조사해보겠다. 그보다도 왜 그 사실을 내게 가르쳐주는 거지? 암흑민족과 맹호부족 사이의 내부 항쟁이 원인인가?" "대충 그런 셈이지." 매카티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뭘 알고 싶지?" "레이든이란 이름을 가진 남자를 알고 있나?" "레이든?"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는데 누군지는 기억 나질 않았다. 하 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10년 전 신의 성벽에 길이 만들어졌을 때 올라간 여섯 젊은이 가운데 레이든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레일즈가 살았던 하크 마을 영주의 아들이었는데 정통 혈족은 아니었지만 왕가 의 피를 이어받은 인물이었다. 레이든의 아버지 하벤은 왕당파의 중심 인물로 지목받은 사람으로 말리드 재상은 막 근위기사가 된 레일즈의 아버지 랏셀에게 명령을 내려 하벤을 공격하도록 했다. 하벤은 도저히 상대할 수가 없다고 생 각했던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일을 처리한 후 랏셀은 하크 마을의 영주가 되었다. 그리고 나중 에 근위기사단장으로 출세하게 된 것도 이때의 활약이 큰 배경으로 작용했다. 말리드가 얼마나 하벤을 두려워했는지를 잘 알려주는 대목 이었다.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레이든은 친구들과 함께 신의 성벽에 열린 길을 통해 크리스타니아로 올라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리고 그들 은 전설상의 인물이 됐다. 최초의 모험자가 된 것이다. 왕당파 사람들 가운데에는 신에게 선택된 하벤의 아들이 돌아와 왕가의 정통을 회복하리라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가 만약 다낭에 돌아온다면 재상에게 붙잡혀 살아남지 못할 게 분명했다. 레일즈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레이든이 밟아온 길을 따라 이곳 크리스타니아에 올라와 있고 심정적으로 레이든이란 사나이에 게 친밀감을 느꼈다. 그러나 아버지 랏셀이 그의 아버지의 원수이고 보니 그가 레일즈를 용서할 리가 없었다. 현재 레이든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는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붉 은개미의 황제 크로이세 부족을 통솔하고 있는 방랑자가 대백조부족 의 전사라고 밝히고 있다는데 어쩌면 그 사람일지도 모른다. "이름은 알고 있지만, 만나본 적은 없다." 레일즈는 용어를 골라가며 대답했다. "그런가……." "레이든과 내가 관계하는 것이 딜란트 경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나 아니면 나쁜 영향을 끼치나?" '이건 서로 뱃속을 탐색하는 거야.' 레일즈는 속으로 생각했다. 상대편 모든 것을 털어놓 지 않는 이상 이쪽에서 먼저 섣불리 말할 순 없었다. "딜란트 경이 신왕 폐하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고 계신 건 아 니다. 이번 원정을 지휘하는 양날검 공작 그레일에게는 적의를 품고 계시다. 그것만큼은 분명하게 기억해두기 바란다."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매카티는 슬쩍 화제를 바꿨다. 레일즈는 마치 수수께끼 시합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지휘를 하든 공격해오면 나는 전력을 다해 싸울 뿐이다." 레일즈는 대답했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는 양날검 공 작 그레일의 이름만 떠올려도 몸이 떨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증상 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사나이의 존재 따위는 사소한 것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레일즈가 떠안고 있는 시련은 컸고 희망하는 미래로 가는 길은 멀기만 했다. "그레일은 네게 복수하려고 생각하고 있지." "성가시겠군." 레일즈는 일부러 무관심을 가장하며 말했다. 눈앞에 나타나면 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지막지한 전사 그레일은 복수의 집념에 불타 칼을 갈고 있을 게 뻔했다. 물론 그와 싸워 틀림없이 이긴다는 자신은 없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죽음의 공포 앞에 벌벌 떨고만 서 있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레일과의 싸움 에서 얻은 마음의 상처마저 치료된 것은 아니었다. 그 상처는 언제나 자신의 가슴 한편에 남아 있을 멍에처럼 느껴졌다. 이미 그는 각오하 고 있었다. 체념이라고 해도 굳이 거부할 생각은 없었다. 그런 생각이 레일즈의 삶을 지탱해 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레일즈의 말에 매카티는 잠시 감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다." 매카티는 긴장이 풀렸는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딜란트라는 이름은 기억해두겠다. 다만 침략에 가담하는 이상 적 군임에는 틀림없다. 전쟁을 종결시키는 이야기라면 언제든지 들어줄 용의가 있다." "그 말은 꼭 전해 주겠다." 레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내에게 어서 빨리 성채에서 떠나라고 말했다. 다시 눈에 띄면 가차없이 베어버린다는 말과 함께. "알겠다." 베르디아의 밀정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 없이 일어섰다. 그때 문이 열리며 밧소가 안으로 들어왔다. "다 끝난 모양이지." 밧소는 빙긋 웃으며 레일즈 곁으로 다가왔다가 매카티에게 한 손 을 들어올려 인사를 했다. "네가 시원시원한 사람이라 도와준 거야. 자, 기회가 있으면 또 만 나자구. 동업자 양반." 매카티는 쓴웃음을 지으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레일즈는 그가 문 에서 나갈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고 밧소도 평소와 달리 묵 묵히 베르디아의 동업자를 전송했다. "저렇게 그냥 보내도 괜찮을까?"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밧소가 돌아보았다. "괜찮아." 레일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적에게 알려진다고 해서 나빠질 게 뭐가 있겠어?" "대백조부족, 다낭 왕국 건에 관해선?" "들었어?" "내 전공이잖아." 밧소는 의기양양했지만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소문으 로 들어서 아는 것이지만 도적들은 전혀 방심하거나 틈을 보이는 법 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밀정 노릇도 할 수 있고 이번처럼 밀정을 찾아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저자는 말야, 너에 대해서보다 다낭에 관해 알고 싶었던 것이 아 닐까? 어떤 민족이고 어느 정도 힘이 있는지?" "그럴지도 모르지." 레일즈는 창 밖으로 눈길을 옮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딜란트라는 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어. 어쩌면 신왕의 지배에 불만이 있는지도 모르지. 그보다도……." "물론, 벌써 알고 있었어." 밧소가 평소보다 더 빙긋거렸다. "너무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지 마. 루탄다라는 자식이 보고 있어." 루탄다가 그리 멀지 않은 집의 창가에서 이쪽 상황을 엿보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까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레일즈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의심을 품고 보니 이상하게 보이는 걸까?" "너무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어쩌면 저자도 너한테 관심이 있 는지도 모르잖아." 밧소는 레일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덧붙였다. "저자에 관해선 나한테 맡겨." 레일즈가 가만히 밧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무슨 뜻으로 말 하는지 레일즈도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자기 혐오에 빠지진 마." "신경 쓰지 마. 이것도 전쟁 중의 하나야. 이런 때가 있기 때문에 귀족들도 우리 존재를 인정해 주는 거라구." 레일즈는 그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된 거야. 너는 사람을 부리는 문제에 더 신경을 써야 해. 그렇지 않으면 진짜 큰 인물이 되질 못해." "명심해둘게." 레일즈는 선선히 받아들였다. 자기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었다. 앞으로 전개될 시련을 이겨내려면 다른 사람 하고 때로는 명령도 내려야 했다. "자, 그럼 먼저 나간다." 밧소는 휙 돌아섰다. "고마워." 그의 등을 보며 레일즈는 말했다. 늘 빙글거리는 도적은 뒤도 돌아 보지 않고 한 손을 들어 인사를 표시했다. 분명히 부끄러워하는 얼굴 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레일즈는 이상하게도 그것이 분명 하게 느껴졌다. 며칠 뒤 창잡이 루탄다는 행방불명이 됐다. 여러 가지로 소문이 떠 돌았지만 정신 없이 바쁜 와중이라 그런 소문은 금세 잠잠해졌다. 그 일의 진상은 레일즈도 몰랐다. 밧소가 결코 말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건 물어서도 안 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래서 묻지도 않았다. 4 "베르디아군이다, 내습이다!" 그 정보가 전해진 것은 루탄다가 행방불명 되고 나서 열흘 정도 뒤 의 일이었다. 숙소에서 명상에 잠겨 있던 고고부족의 수인이 '큰독수 리의 눈'의 능력을 써서 발견했던 것이다. 수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더구나 맹호부족의 전사단과 암흑기사단, 궁정 마술사 같은 정예 부대로 구성된 베르디아의 주력군이었다. 두 꼬리여우라는 별명을 가진 신수 스매쉬를 섬기는 두얼굴부족의 전사 단과 베르디아에 지배당하고 있는 소부족들의 전사단도 동원되었다. 소부족이라고는 하지만 대다수가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수인 들이었다. 무시하기 어려운 마법 전사인 것이다. "드디어 때가 왔는가!"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긴장 분위기가 역력했다. 올겐스는 주요 용 병들을 불러모아 형식상의 군사 회의를 개최했고, 레일즈는 그 자리 에서 끝까지 농성하며 싸울 것을 주장했다. 모두들 굳은 결심으로 레 일즈의 의견에 동의했다. 다만 은빛늑대부족의 대장이 이끄는 2개 부대는 성채를 나가 사람 이 없는 주변의 부락에 숨어 있도록 했다. 적의 보급 부대를 습격하기 도 하고 성채가 포위되었을 때는 뒤에서 적을 기습하기 위한 대비책 이었다. 성채의 본대도 단지 농성하며 방어하는 것만이 아니라 때때 로 적극적인 공세를 펼칠 예정이었다. 서쪽 강의 다리는 널빤지를 지탱하는 나무를 잘라서 대규모의 적 군이 공격해오면 끊어지도록 조작해놓았다. 이 작업을 지휘한 사람은 드워프족의 신관 샤일론이었다. 그들 대지의 요정족은 뛰어난 목수이 자 세공사였으므로 효과를 보게 될 게 분명했다. 사냥꾼들에겐 숲 여기저기에 덫을 만들어 두도록 했다. 함정이나 특수 장치된 화살 따위였다. 큰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을 혼란시키기에는 충분할 정도였다. 가능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는 적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짧은 군사 회의를 마치고 결전을 앞둔 마지막 잔치를 열었다. 전투 가 시작되면 적이 퇴각할 때까지 한순간도 마음 편하게 있을 수 없 으리라. 잔치는 한밤중이 지나서도 끝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최근 한 달 가까이 방어 준비에 쫓겨 기진맥진할 정도로 뛰어다녔는데도 누구 하 나 피곤해 하는 사람이 없었다. 모두들 시끌벅적한 분위기를 마음껏 만끽했다. 저녁 무렵에 시작된 내기 시합은 얼마 전에 결판이 났다. 스무 명의 백인대장 전원이 참가해서 말을 탄 채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마상창 시합 방식으로 우승자를 결정했는데 심판은 밧소가 맡았다. 그는 다 른 건 몰라도 내기 방면에선 용병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용병들 이 알지 못하는 다낭의 여러 가지 도박 방법을 재미있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작정 가르쳐주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적당하게 져주면서도 확실하게 원금을 늘려갔다. 크리스타니아에서는 화폐가 없었기 때문에 금화나 보석과 같은 진귀한 물건들이 하나씩 하나씩 그의 수중에 들어왔다. 다낭에 돌아가면 한 재산 일굴지도 모르지만 그걸 가지고 돌아갈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그는 사형이 결정 된 죄인인 것이다. 우승한 사람은 거쉰이었다. 그의 우승 확률은 세 번째였으나 두 번 째와 첫 번째 우승 확률을 가진 레일즈와 타닐이 3회전에서 맞붙는 바람에 우승자가 되었다. 레일즈은 장시간의 격렬한 격투 끝에 어렵 게 타닐을 이겼지만 피로가 역력해 그 다음에 맞붙은 백인대장 칼리 오에게 완패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레일즈는 은발 전사 타닐에게 이긴 것만으로도 굉장한 만 족을 느꼈다. 이 은발 전사와의 첫 번째 내기 시합에서 무참하게 짓밟 힌 자존심의 빚을 이제서야 갚은 셈이었기 때문이다. "축하한다." 결승전을 마치고 돌아온 거쉰을 레일즈가 미소 띤 얼굴로 맞아주 었다. 다낭의 친구 네 명 곁에 마리스와 타닐도 함께 앉아 있었다. 타 닐이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는 것을 보고 마리스가 억지로 데리고 온 것이다. 이 은발의 전사는 여전히 말이 없었고 누구와도 사귀려 하지 않았다. "난 말야, 너희들 외에는 호락호락 지질 않아." 거쉰이 그렇게 말하며 바닥에 주저앉자 사이아가 땀 닦을 수건을 내주었다. "고마워." 거쉰은 수건을 받아들고는 흐르는 땀을 급하게 닦더니 다 닦기도 전에 마리스가 건네주는 술잔을 받아 단번에 비워버렸다. 신맛이 나는 과실주였는데 숲에서 채집한 과실을 적당하게 섞어서 발효시킨 것이었다. 크리스타니아는 다낭보다 술의 종류나 맛이 조금 떨어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색다른 맛이 있었다. 레일즈는 그 중 적당 히 단맛이 나는 술을 좋아했다. 사이아나 비인도 물을 좀 섞긴 했지만 맛있게 마셨다. "오늘은 쭉 뻗을 때까지 마셔보자구." 거쉰이 기분 좋게 말했다. "잔치를 할 때마다 늘 그렇게 말했잖아." 비인이 이죽거렸다. "아, 그래도 오늘은 특별한 잔치야." 사이아가 그렇게 말하며 거쉰의 잔에 넘치도록 술을 부었다. "우와, 정말 기분 좋은데!" 거쉰이 정말 기분이 좋은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잔을 받았다. "적은 언제 오는 거지?" 비인이 문뜩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다. "이삼 일 걸리겠지." 레일즈가 대답했다. "이길 수 있을까?" "글쎄, 이번만큼은 자신이 없는데." 거쉰이 남의 일 말하듯 했다. "덕분에 내 마음껏 준비를 할 수 있었잖아. 만약 이길 자신이 있었 다면 성가시게 구는 내 의견을 누가 들어줬겠어. 아마 아무도 안 들어 줬을걸?" "당연하지. 난 아직도 모르겠어. 싸움이란 건 몸에 무기 하나만 있 으면 되는 거 아냐?" "소규모라면 그렇게 해도 좋아. 그러나 이번에는 충분한 준비를 하 지 않으면 순식간에 짓밟혀 버리고 말걸." 레일즈는 거쉰을 바라보며 웃었다. 하지만 거쉰은 레일즈의 말을 듣는지 안 듣는지 콧등을 긁으며 옆으로 눕더니 곁에 있던 사이아의 무릎 위에 머리를 얹었다. 하지만 깜짝 놀란 사이아가 뒤로 달아나는 바람에 거쉰의 머리는 그대로 땅바닥에 떨어졌다. 쿵 하는 소리가 제 법 크게 들렸다. "그만둬요." 곤혹스런 표정으로 사이아는 말했지만 거쉰은 누운 채로 호쾌하게 웃고만 있었다. 모두들 그걸 보고 따라 웃었다. 그러나 타닐만큼은 전 혀 표정이 바뀌지 않았다. "오늘만큼은 서로 편안한 마음으로 지내면 어떻겠어요?" 타닐의 표정이 여전히 무거운 걸 보고 마리스가 책망하듯 말했다. 하지만 타닐은 여전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마리스는 한숨을 쉬면서 도움을 청하듯 레일를 바라봤다. 그러나 레일즈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그냥 두라고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마리스는 불만스런 마음을 참기 어려웠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 다. 그때였다. "그래, 그날 전야였어. 그때 이슬로 부락에서도 똑같이 잔치가 열렸 지." 갑자기 타닐이 말문을 열었다. "그날 전야?" 레일즈는 타닐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는 무표정하게 술잔을 쥐고 있다가 사이아가 멈칫멈칫 술병을 꺼내들자 술잔을 약간 들어올렸다. 어느 틈엔가 그의 술잔은 텅 비어 있었다. "이슬로 부락이 모두 살해당한 그날을 말하는 거야?" 누운 채로 거쉰이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적이 온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소대로 우린 승리한다고 믿 었지." "타닐, 그 얘기는……." 불안한 얼굴로 마리스가 타닐의 말을 막으려 했다. 이 이상 타닐이 이야기를 계속하면 술판이 깨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괜찮아, 계속해." 레일즈였다. 마리스가 돌아보자 레일즈는 진지한 표정으로 타닐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슬로가 패배했는지 알고 싶었어. 신왕의 기적이 어떤 것인지 도." "전투는 낮에 시작됐어. 적은 대군이었지만 전혀 의욕이 없었어. 우 리들은 적을 격퇴하고 저녁에 부락으로 돌아왔지. 그때 놈이, 신왕 바 르바스가 힘을 휘둘렀던 거야." "신왕 바르바스……." 레일즈는 금지된 단어를 외우듯 그 이름을 반복했다. "어떤 힘을 사용한 거지?" 신왕이 힘을 써서 이슬로가 멸망당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 었다. 그러나 어떤 기적을 썼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것은 이슬 로 부락의 유일한 생존자인 타닐만이 알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늘에서 무수한 벼락이 떨어졌어. 하늘도 땅도 새하얗게 될 정도 로." "벼락이라구!" 레일즈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 벼락에 맞아 집은 불타고 사람들은 숨이 끊어졌지. 눈 깜짝할 사이에 이슬로 주민의 3분의 1가량이 시체로 변해 있었어." "무, 무서워……." 사이아가 두 팔로 얼굴을 감싸며 중얼거렸다. "바르바스는 그래도 신이잖아. 신이 인간에게 그렇게 험한 짓을 하 다니……." "일찍이 신수 루미스가 크리스타니아의 세계율을 왜곡시키는 원흉 이라는 핑계로 고민족을 공격한 적이 있지. 그때도 수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잃었어. 자신을 따르지 않는 인간의 목숨 따위는 강가의 모래 알과 다를 바가 없으니까." "타닐……." "그리고 놈들이 다시 왔어. 일단 퇴각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베르디 아군이었어. 부락민들은 싸울 기력조차 잃어버리고 다만 어떻게든 도 망쳐보겠다는 생각밖엔 없었던 거야. 그러나 놈들은 용서가 없었어. 여자고 어린애고 노인이고 간에 전혀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살해했 지. 그 속에서 단 한 사람, 나만 살아남았던 거야." "신왕 바르바스……." 레일즈는 분노했다. 그런 힘을 휘두른다면 아무리 굳건히 방어 체 계를 갖춘다 해도 전혀 의미가 없었다. 마치 개미를 눌러 죽이듯 이곳 성채를 분쇄하고 말 것이다. "너무 신경 쓰지 마, 레일즈. 신왕은 아직 완전하게 부활을 이루진 못했어. 그렇게 아무 때나 기적을 일으키진 못해." 거쉰이 말하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약 기적을 사용한다 해도, 이곳 성채에서는 아니야. 시레네의 대 부락에서나 사용할 거야." "어떻게 그걸 알지?" 레일즈는 거쉰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라면 다행 이지만 그 보증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구나 이곳 성채 따위는 신왕의 기적을 사용하지 않아도 함락시 킬 수 있다고 생각할 게 뻔하니까." "그렇지만 우리들은 승리할 생각으로 싸우는 거야. 계속 우리가 이 기면 언젠가 신왕은 이곳 성채에도 기적을 사용할지도 모르잖아." "그런 걸 두려워하고 있으면 처음부터 승리를 거두지 못해." "그건 그렇지만……." 이살리의 예언이 레일즈의 머릿속에서 반복적으로 울렸다. '이 성채는 불길에 휩싸여 함락된다. 용병들의 목숨을 길동무 삼아 서…….' 이슬로 부락을 덮친 비극과 마찬가지 일이 반복되면 이살리의 예 언은 그야말로 현실이 되는 것이다. "신왕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마. 신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야. 인간 도 그렇게 무력한 존재만은 아니잖아." "그러나 신왕이 있는 한 이 전쟁은 영원히 이길 수가 없을지도 몰 라. 우선 신왕에게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를 생각하지 않으면……." 레일즈가 필사적인 모습으로 이야기하자 거쉰이 웬일인지 빙긋 웃 었다. "크리스타니아의 신민족은 똑같은 걸 생각하는군." "똑같은 것?" "그래. 옛날에 너와 똑같은 말을 하는 자가 있었지. 그자도 잃어버 린 대지에서 찾아온 전사였어." "최초의 기사와 그 친구들을 말하나?" 그러고 보니 암흑기사 딜란트가 파견한 밀정 매카티도 레이든에 대해 언급했다. 아니 그때 그 밀정은 레일즈가 그와 관계가 있느냐고 묻기까지 했다. 그들 여섯 사람은 도대체 이곳 세계에서 어떤 행동을 했을까? 10년 전의 모험자들이 걸은 길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레일즈 일행이 뒤 따르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레이든? 그래 맞았어. 그 이름이었지. 여자 이름은 쉽게 기억하지 만 남자들 이름은 영 기억하기가 힘들단 말야." "그래서, 그들이 도대체 뭘 한 거야?" "글쎄,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 여러 가지 일이……." 거쉰은 보기 드물게 애매한 말투를 취하며 먼 산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건 아니야. 하긴 알아서 좋을 것만 있 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이것만큼은 알아둬. 지금 신수의 어금니 용병 두 사람이 레이든의 동료들과 함께 신왕을 쓰러뜨리기 위한 여행에 나서 있네. 그래그래, 베르디아 사람도 하나 동행을 하고 있지." "뭐라구!" 레일즈는 놀라서 소리 친 후 흠칫하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았 다. 다른 용병들이 들어서 좋을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레일즈 무리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잔치가 한창 절정에 올라 있어 모두들 먹고 마시고 노는 데 정신 없이 빠져 있었다. 아마도 오늘밤 잔치는 날이 샐 때까지 계속될 모양 이었다. "그러니까 신왕에 대해서까지 고민하진 마. 나는 그 사람들을 믿고 있어. 반드시 신왕을 쓰러뜨릴 거야. 이번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그들 이 시간을 맞출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거쉰은 다시 술잔에 입을 댔다. 그러고는 옆에 경직된 자세로 앉아 있는 사이아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하프엘프 소녀는 깜짝 놀라며 술병을 들어올려 거쉰의 잔을 채웠 다. 병에서 쏟아져나온 술이 거쉰의 잔을 넘쳤는데도 사이아는 술 붓 는 동작을 잠시 멈추지 않았다. "어, 어!" "앗, 미안해요!" 사이아는 곁에 두었던 수건을 집어올려 넘쳐흐른 술을 허겁지겁 닦기 시작했다. 거쉰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이아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조금씩 떨렸다. "왜 그래?" "아, 아니에요." 사이아는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잠시 후 무슨 생각에선 지 고개를 들고 거쉰을 바라보았다. "혹시, 나셀이란 사람에 대해서는 모르나요?" "나셀? 아아, 알고 있어. 아마 주술사였지. 그 사람이라면 지금 신 왕을 쓰러뜨릴 여행에 동참해 있을 거야." "어디에, 도대체 어디에!" 사이아는 큰 소리로 외치고는 몸을 일으켜 거쉰 쪽으로 성큼 다가 갔다. 그 기세에 눌려 거쉰은 자기도 모르게 물러나 앉았다. "좀 천천히 이야기하자." 거쉰이 사이아의 어깨를 두 손으로 누르며 앉혔다. "나도 그건 잘 몰라. 연락을 취하고 있는 건 아니니까. 다만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간 것만큼은 분명하다구." "쫓아갈 수 없을 만큼 멀리?" 사이아는 거쉰의 말을 반복하더니 두 주먹을 무릎에 얹고 침통하 게 되뇌었다. "그렇구나." 레일즈는 사이아가 돌변하는 모습을 깜짝 놀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녀가 크리스타니아에 올라온 이유 중의 하나는 그녀의 양부 브라이언의 아들 나셀을 찾는 것이었다. 만 나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셀을 꼭 찾아야겠다는 그녀 의 결심은 매우 확고했다.. "심각한 이야기를 하게 되고 말았군." 타닐이었다. "아니야!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을 텐데 이야기해줘서 정말 고마웠 어. 거쉰도 귀중한 이야기를 해줘서……."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거쉰은 만나자마자 호의적이었던 것이다. 레일즈는 10년 전의 여섯 사람이 참으로 고마웠다. 그들은 크리스타 니아에 와서 이처럼 믿음직한 사나이의 신뢰를 얻었던 것이다. 그 덕 분에 자신들은 신수민족에게 뒤섞여 아무런 문제 없이 살고 있지 않 은가. 이처럼 신뢰하는 마음이 자신뿐만 아니라 다낭의 백성들 모두에게 퍼지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 다시 한 잔 하면서 쓸데없는 생각은 잊어버리자구. 오늘밤에 신나게 놀지 못하면 전투가 시작되고 나서 영 섭섭할 거라구." "그, 그래." 사이아가 아직 경직된 목소리였지만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 했다. "오늘밤은 즐거워야 해. 나, 노래 불러도 괜찮아?" 억지로 밝게 보이려는 모습이 누가 보아도 역력했다. 레일즈는 사 이아의 야무진 태도가 오히려 슬프게 껴졌다. "베르디아 말로 부르진 마!" 비인이 작은 소리로 충고했다. "알고 있어. 엘프 말이면 괜찮겠지?" 그 말과 함께 사이아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바람에 살랑이는 나뭇잎의 속삭임을 닮은 목소리였다. 사이아의 노랫소리는 듣는 사람 의 마음을 맑은 샘의 물처럼 투명하게 만들어주었다. 거쉰이 사이아의 노래에 맞춰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진짜 악기 를 사용하는 것같이 뛰어난 솜씨였다. 그러자 마리스가 자리에서 일 어서더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달빛 속에서 늑대가 뛰어다니는 것처 럼 경쾌한 몸놀림이었다. 그러고는 타닐에게 손을 뻗었다. 놀랍게도 타닐이 마리스의 요청에 응했다. 은발의 두 사람이 춤추는 모습은 환상적이었다. 질투가 느껴졌지만 그 아름다움에 취해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가까이 있던 은 빛늑대부족 사람들이 몰려와 두 사람의 춤에 가담했다. "나중에 레일즈님 부족의 춤도 가르쳐주세요." 마리스가 춤을 추면서 레일즈 곁에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그래, 당연하지." 레일즈는 웃는 얼굴로 대답했다. "우리 부족의 춤은 남성과 여성이 한 짝이 돼서 추지. 내 상대가 돼 주겠어, 마리스?" "아무렴요, 레일즈님." 마리스는 아름다운 얼굴을 밝은 미소로 빛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