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14) 01/31 09:24 103 line 밧소는 그 이상은 모른다는 뜻으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장로의 얼굴을 보고 왔는데, 심각하더라구." 샤일론이 가르쳐 주었다. "물어보자." "와, 날렵한 몸, 정말 매력적인데." 밧소가 언제나처럼 빙글거리며 레일즈에게 농담을 걸어왔지만 레 일즈는 도저히 그에 응할 기분이 아니었다. 예정대로 성채로 돌아가 면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 자신만은 아니었다. 밧소도, 샤일론도, 사 이아도, 비인도……. "정말 괴롭게 만드는군."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이살리의 기분을 알 것만 같았 다. 레일즈는 시레네에서 온 사자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는 라로 즈 부락의 장로에게로 걸어갔다. 사자는 허리를 살짝 가렸을 뿐 거의 나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장로님……." "아, 어서 오시오. 백인대장!" 목소리를 들어보니 장로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다른 장로와 달리 아직 건장한 신체를 가진 장년이었지만 지 금은 아주 작은 존재로 보였다. 그의 얼굴을 비치는 장작불이 흔들렸 다. 그게 마치 장로의 마음을 그대로 비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나쁜 소식이라도 있었습니까?" 장로는 얼굴을 묻고 어떻게 할까 망설이다가 레일즈가 참을성 있 게 기다리자 드디어 결심이 섰는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이 부락을 포기하라고 족장에게서 기별이 왔어요. 이슬로의 베르 디아 성채에서 드디어 어떤 움직임이 포착된 모양입니다. 아마도 총 공격에 나서는 것이겠지요." "베르디아군이 총공격을……." 레일즈는 전율하며 눈을 크게 떴다. 손가락 끝이 떨려와 서둘러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살리가 예지했다는 미래가 정말 현실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다 른 부락에도 기별해야 한다며 시레네에서 온 사자는 그 자리에서 은 빛늑대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성수변신(비스트 폼)이라는 능력이었 다. 수인이라고 아무나 이처럼 고도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 라는 말을 레일즈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사자를 전송한 뒤 레일즈는 다시 장로에게 물었다. "이리 생각하나 저리 생각하나 따를 수밖에 없지요. 겨우 2백 명 정 도로는 버틸 재간이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결집해서……." 레일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신수의 어 금니 성채에 인근 부락의 전사들을 모아놓으면 전력이 단번에 다섯 배 이상으로 커진다. 그러나 신수의 어금니에는 그 정도 숫자를 흡수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힘써서 위기를 막아 주셨는데 부락을 버려야 하니 정말 유감스럽 습니다." 장로는 아주 분하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레일즈에게 정중하게 인삿 말을 건넸다. "이 부락에 어차피 대단한 재산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전부 갖고 갈 수도 없으니 나머지 것들은 성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그리고 장로는 내일이라도 준비를 시작해서 며칠 안으로 부락을 버리고 이동을 시작할 것이라고 주민들에게 선언했다. 울먹이는 소리 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개중에는 그 자리에서 털썩 쓰러져 통곡하는 사람도 있었다. "손님들 앞이다. 모두 조용히!" 장로는 애써 밝게 이야기했다. "아직 축하연이 끝나지 않았다. 창고에 남아 있는 식량도 어차피 모두 가져가긴 불가능하니 필요한 만큼만 남기고 가급적 오늘 저녁에 먹고 마시도록 하라. 어려운 때일수록 춤추고 노래하는 법이다. 고난 이야 있겠지만 지금부터 걱정한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이 부락에 서 지냈던 날 중 가장 멋진 추억이 되도록 한바탕 신명을 발휘토록 하자. 그리고 신수의 어금니 용사들에게도 축복을!" 레일즈는 장로의 이야기를 들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주민들도 장로의 말을 듣고는 충격에서 벗어나 단단히 각오하는 모습이었다. "정말, 용감한 부족이다." 레일즈는 다시 감동했다. "이거, 심각한 상황인 모양인데." 밧소가 피식피식 웃으며 레일즈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행운신의 가호가 있으시기를." 샤일론이 기도의 말을 올렸다. "어떻게 하지, 대장? 이대로 순회를 계속해봤자 부락에는 사람도 없을 텐데." 밧소의 질문을 받고 레일즈는 가슴이 철렁했다. "어떻게 된 거야, 안색이 창백해." "성채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물론 오늘은 밤새 신나게 잔치를 벌이고서……." "그만둬!" 레일즈가 자기도 모르게 소리질렀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며 레일즈에게 주목했다. "내가 말을 잘못 했나?" 샤일론이 미안한 듯 말한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레일즈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샤일론이 말하는 대로다. 답은 하나 밖에 없었다. 성채로 돌아가야 한다. 설사 그 성채가 잿더미로 변하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다 해도. 레일즈는 애써 미소 지으며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에게 잔치를 계 속하라고 말했다. "이상하네, 평소의 레일즈답지 않아." 밧소가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레일즈를 들여다보았다. "아무 것도 아냐. 잠시 동안만 혼자 있게 해줘." 레일즈는 그 말을 남기고 이살리가 앉아 있었던 나무 그늘로 들어 갔다. "어떻게든 성채를 사수해야 해." 레일즈는 아무도 들리지 않게 혼자 말했다. 적의 병력은 얼마 정도 될까. 어떤 수단으로 공격해올까. 효과적으로 성채를 지키기 위해서 는 어떤 방법이 있을까. 그러나 어떤 수단을 써도이살리가 예지한 미 래는 피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레일즈는 거듭 자신에게 물어보았다. 그러나 그 대답은 짙은 안개 에 싸여 있는 것만 같아 진실에 도달하는 길조차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레일즈는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 자리에 머물러 있 다고 해서 그 안개가 걷히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므로…….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