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13) 01/30 09:40 310 line 빛의 화살이라는 보다 직접적인 공격 주문도 떠올랐다. 마력을 그 대로 상대에게 명중시켜 쓰러뜨리는 주문이었다. 그 밖에도 검에 마력을 더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마법의 방패나 갑옷의 주문을 외워 다른 사람들을 지켜줄 수도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잠의 구름이 제일 낫겠어." 사이아는 그렇게 결정했다. 효과적으로 쓰기만 하면 많은 수의 적 을 한 번에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잠든 상대는 설사 아이들일지라도 쉽게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레일즈한테 들은 대로 전투에 휩쓸리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면서 사이아는 자리를 옮겼다. 고블린들은 혼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자 소리를 지르며 몇몇씩 모 이려 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집단 가운데 하나를 골랐다. 껑충하게 체 격이 큰 고블린을 중심으로 대여섯 마리의 고블린이 모여 있었다. "만물의 근원, 만능의 힘……." 사이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상위 고대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마력의 근원은 달리 말해 사물과 힘의 근원이다. 세계는 마력을 소 재로 삼아 창조되었으며 마력에 의해 영위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술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숨어 있다. 인간은 마술의 비밀을 알고 나 서부터 그 방면에 관한 학문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그것은 왜곡 된 길을 걸어왔다. 결국 마술은 무력한 인간이 다른 종족과의 싸움에 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고, 인간은 마술이 전쟁에서 최상 의 무기가 되기를 기대했다. 마술의 역사는 바로 인간의 역사며, 그것 은 동시에 전쟁의 역사기도 했다. "나도 이제 전쟁을 위해 마법을 사용하겠어." 사이아는 깊은 슬픔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망설임은 없었다. 레일 즈는 남 모르는 고뇌 끝에 신수민족을 위한 전쟁에 나서기로 결심했 다. 그가 그렇게 결정 내린 이유를 분명하게는 알 수 없었다. "내가 싸우는 것은 레일즈를 위해서일 뿐이야. 다른 이유 따윈 필 요 없어." 사이아는 이 말을 자기 가슴에 깊이 새겨두었다. "……잠을 재촉하라, 부드러운 대기여." 주문은 완성되었다. 브라이언 스승에게서 허락도 없이 훔쳐온 마술 사의 지팡이를 휘두르고 그 끝을 똑바로 고블린들의 집단에게로 향했 다. 그 순간 눈에 보이지 않는 검에라도 맞은 것처럼 고블린들이 픽픽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걸 알아차린 한 전사가 달려가 땅바닥에 떨어 진 열매를 줍듯이 고블린의 급소에 검을 쑤셔넣었다. 비명조차 없이 고블린들이 차례차례 숨이 끊겼다. "아아……." 사이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그렇지만 그 광경을 끝까지 바라봤 다. 죄책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너무 그렇게 가슴 아파 할 것 없어." 밧소가 말을 건네 왔다. 온 신경을 마법을 쓰는 데 집중하고 있어서 몰랐지만 마법을 외우고 있는 동안 밧소가 지켜주고 있었음에 분명했 다. 바로 앞에 고블린 두 마리가 소검에 찔려 숨이 끊어진 것이 보였 다. "저 고블린들을 죽인 건 네가 아냐. 너는 검으로 고블린을 찌르지 못해. 나처럼 말야." "고마워, 밧소. 그렇지만 저 고블린들은 내가 죽인 거야. 그렇게 생 각해야 해. 죄책감을 속이게 되면 언제나 똑같은 죄를 범한다고 생각 하게 될 테니까." 밧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동안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지었지만 곧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러 고는 싸움터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밧소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 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는 큰도끼를 휘두르는 샤일론과 그 뒤에서 필사적으로 정령 마법을 외우고 있는 비인의 모습이 보였다. 비인이 쓰고 있는 것은 속 박의 주문으로 숲의 정령에게 명해서 나무들의 가지를 마치 살아 있 는 생물처럼 부리는 것이었다. 비인은 그 주문을 이용해 나뭇가지를 고블린의 몸에 휘감았다. 나뭇가지에 휘감긴 고블린은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샤일론에게 맡겨두면 되겠지만 손이 비어 있으니까 도와주러 가 자." 사이아도 그럴 생각이었다. 사이아는 흥건한 땀을 훔쳐낸 손으로 마술사 지팡이를 고쳐 잡고 장신의 밧소 등뒤에 붙어 달려나갔다. 전 투를 벌이는 소리가 차츰 잦아들었다. 전투는 곧 끝이 났다. 아군이 승리했고 모두 살아남았다. 지금은그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전투가 어떤 것인지 이제 알 만했다. 그리고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을 것임도 알았다. 그렇지만 사이아는 새삼스럽게 결심했다. 레일즈가 계속 싸우는 한 자신도 그와 함께 싸우겠노라고. 그리고 이런 생각도 했다. 어떻게 해 야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마칠 수 있을까를……. 5 활활 타오르는 화톳불이 어둠을 사르고 있었다. 그 화톳불을 중심 으로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과 은빛늑대부족의 남녀가 신이 나서 춤을 추었다. 고블린들을 퇴치하고 라로즈 부락에귀환한 것은 저녁 무렵 이었다. 장로는 전승 축하연을 열어 전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 를 만들었다. 그 축하연이 지금껏 이어지고 있었다. 전투는 완승이라 할 만했다. 사망자는 하나도 없었고 부상자가 다섯 명이었다. 2대5라는 불리한 전력 차이를 감안하면 대단한 승리였다. 샤일론도 부상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투가 끝난 뒤 몰래 치유의 주문을 써서 스스로 상처를 고쳤다. 그 밖의 부상자는 라로즈 부락에 돌아오고 나서 제의를 맡아보는 여성이 능력을 사용해 치료해 주었다. 제의는 신수왕에게서 뛰어난 능력을 부여받은 사람으로 6대신 교단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관이나 사제에 해당하는 직책이었다. 그들은 신수왕 페네스의 신상을 모신 예배소의 주인 노릇을 하며 신에 관계된 일을 관장했다. 이 부락의 제의는 아직 젊고 미숙하긴 했지만 샤일론을 제외한 네 사람의 상처를 완치시켜 주었다. 은빛늑대부족의 수인은 상처를 핥아서 치료했다. 그건 늑대의 신수 페네스에게 부여받은 마법의 힘이었다. 전에 레일즈가 입은 상처도 은발의 마리스가 그렇게 해서 낫게 해줬을 것이다. 레일즈는 그것만 생각하면 수치심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여성에 대한 열등감을 가져본 적도 없고 부끄러워한다거나 괜히 남성스러움을 자랑하고 싶지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레일즈는 아직 젊었고 진정한 의미에서 여성을 알지 못했다. 우정과 애정의 차이도 아직 잘 몰랐다. 호의를 느끼는 여성이 몇 명 있었지만 그 중 누군가 를 한 사람만 꼽으라면 대답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리스는 틀림없이 호의를 품은 여성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신수민족 중에는 은빛늑대부족 말고도 치유 능력(탤런트)을 가진 부족이 있다. 예를 들어 어금니부족의 수인은 진흙에 회복 효과를 부 여하는 능력을 쓰는데 그 진흙을 상처에 발라서 치료했다. 기초의 신 수왕 우르스를 섬기는 봉인부족도 상처를 봉하고 정화하는 능력을 갖 고 있고 대백조부족도 손으로 대기만 해도 남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 는 능력이 있다고 했다. 큰뱀부족이나 갈기부족의 수인들도 치유 능 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자기 자신을 치료할 수 있을 뿐이다. 신수 또한 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제들이 사용하는 신성마법과 마찬가지로 치유의 능력이 대단했다. 어찌 보면 신수의 용사들은 마 법 전사이며 신관 전사였다. 그것을 명심해두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 는 잘못을 범할 수 있었다. 실제로 바로 그것 때문에 레일즈도 목숨을 잃을 뻔했다. 축하연이 절정에 오른 느낌이었다. 레일즈는 술이 과하지 않도록 신경 쓰면서 혹시 술 취한 전사들이 부락 주민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 을까 주의를 기울였다. 술에 취하고 나면 이성이 마비되는 사람을 여 럿 보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거칠기 짝이 없는 용병들이었다. 싸움을 벌이거나 여성에게 농지거리를 거는 일이 생겨 나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성채에서는 술 취한 전사가 소동을 일으키는 일이 종종 있 었다. 2개월쯤 전에는 술에 만취한 끝에 두 전사가 검 승부를 벌이기 시작해 둘 다 중상을 입는 믿지 못할 사건이 일어났다. 이런 사건이 생기면 다낭 기사단의 경우 쌍방 모두 엄벌을 받았다. 그러나 신수의 어금니에는 규율이 잡혀 있지 않아서 이틀 동안 밥을 주지 않고 서로 화해시킨 뒤에는 그걸로 끝이었다. 레일즈는 술병을 한 손에 든 채 노래하고 춤추는 전사들 사이를 천 천히 걸었다. 사이아와 비인은 처음 치르는 전투라 긴장하기도 하고 마법을 쓰느라 기진맥진해서 예배소에서 잠자리를 빌려 일찌감치 쉬 러 들어갔다. 축하연은 아직 조금 더 계속될 터였지만 완전히 취해 잠들어버린 전사들 모습도 군데군데 보였다. 부락의 주민들도 아이들을 집으로 돌아가게 한 뒤 이젠 자기들끼리 즐기고 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전 쟁의 긴장감 속에서 그들도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한 번쯤 갖고 싶었 을 것이다. "어떻게 된 거야, 대백조 형제! 전혀 술을 안 마셨잖아!" 가까운 나무 그늘에서 누군가가 말을 걸어왔다. 이살리였다. 그는 술병과 요리가 가득 담긴 접시를 앞에 두고 나무에 기대어 있었다. 오늘 전투에서 가장 큰 공로자는 이살리였다. 이 그림자부족의 수 인은 화구의 주문을 고블린들에게 명중시켜 많은 적을 쓰러뜨렸다. 그리고 새까만 날개로 적의 반격이 미치지 않는 상공으로 날아올라 빛화살 주문을 썼다. 잠깐 사이에 빛화살에 맞은 적들이 차례차례 거 꾸러졌다. 그가 레일즈 부대에 합류한 것은 이틀 전이었다. 처음 순회에 나설 때도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제의해봤으나 이살리는 얘기를 꺼 내자마자 당장 퇴짜를 놓았다. 그런데 일단 성채로 돌아와 다시 출발 하려 할 때 갑자기 동행을 지원한 것이다. 물론 레일즈는 거절할 까닭 이 없었으므로 기쁘게 그의 말을 받아들였다. 비교적 젊은 전사들이 많은 레일즈 부대의 전력에 크게 보탬이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이 그림자부족의 전사가 가담해줌으로써 레일즈는 한층 자유로워 졌다. 적극적으로 전투에 가담하지 않고 오히려 전황을 냉정히 분석 할 수 있는 여유를 얻은 것이다. 그래서 전투를 총체적으로 지휘하고 위험한 곳에 가세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덕에 희생이 적게 날 수 있 었다. "술은 잘 못 마셔. 취해 가지고 실수하면 곤란하잖아?" "술 취해서 설치는 걸 갖고 뭐라고 할 사람은 없어." 이살리는 꽤 술을 마신 모양이었다. 평소에도 다소 쉰 듯한 목소리 였는데 지금은 마치 심한 감기라도 걸린 것 같았다. 말투도 이상했다. "별난 일인데. 천하의 이살리가 이렇게 술에 취하다니." 레일즈는 이살리 옆에 앉아 아직 술이 적잖이 남아 있는 병을 내 밀었다. 이살리는 그걸 받아들고 꿀꺽꿀꺽 들이마셨다. 그러곤 레일 즈에게 술병을 돌려주었다. 레일즈도 술병에 입을 대고 몇 모금 마 셨다. 목에서 위까지 뜨거운 액체가 흘러들어가는 느낌이 확연히 전 해 왔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평소에도 그렇게 행동하고 다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 정도는 하고 있었지." 레일즈는 솔직하게 대답하고 다시 술병을 건네주었다. 이번엔 받지 않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오늘 전투는 대단했어." "네가 가담해줬기 때문에 가능했어."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난 오늘 고블린을 두 마리밖에 처치하지 못했어." "그러나 적어도 세 사람의 목숨을 구했어. 허공에서 내려다보고 있 었으니까 내 눈엔 잘 보였지. 검술 솜씨가 뛰어나다는 생각은 했지만 그보다 머리가 더 좋은 것 같아." "괜히 사람 들뜨게 만들지 마. 진짜 그렇다고 착각할지도 몰라." 레일즈는 멋쩍게 웃으며 음식에 손을 뻗은 뒤 접시에 담긴 열매를 주워들고 입 안에 던져넣었다. 열매는 안줏감으로 적당하게 매운 맛 이 가미되어 있었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라 그런지 우리한테는 없는 지혜를 갖 고 있더군. 전쟁이란 것은 전사들이 서로 뒤엉켜 그냥 신나게 싸우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우리 나라에는 용병술이란 것이 있어." 레일즈는 말을 하고 나서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입 안에 남아 있던 나무 열매의 매운 맛이 달콤한 과일주에 쓸려 목을 넘어갔다. "다낭에 상륙하고 나서는 달라졌지만 우리 선조가 살던 고향의 섬 에서는 전쟁으로 날을 샜다더군. 그러니까 용병술 같은 게 발달할 수 밖에. 귀족이 될 생각으로 약간 공부를 했지. 솔직히 말해 검을 잘 다 루는 전사가 되고 싶었을 뿐야." "전쟁만 이야기하는 게 아냐. 외부 사람인 너한테는 여러 가지가 객관적으로 보일 거야. 이 전쟁이 어떻게 전개될지, 그리고 신수민족 이 얼마나 후진적인지 말야. 내 생각엔 우린 지금 주기에 의존하여 진 보를 거부한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아." 레일즈는 이살리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지만 우리 그림자부족에게도 보이는 것이 있지." "미래가 보이는 거 아냐?" "맞아." 이살리는 레일즈의 손에서 술병을 억지로 뺏어들고 또다시 꿀꺽꿀 꺽 들이켰다. "한꺼번에 그렇게 마시면 몸에 좋지 않아." "그건 나도 잘 알아. 우리들에게는 미래가 보이니까 말야. 더군다나 이렇게 마시면 다음날 두통 때문에 골이 빠개지는 것처럼 아플 것도 누구보다 잘 알아." "운명의 고지자라고 했나, 이살리가 섬기는 신수가?" "운명의 고지자, 흉조의 큰까마귀……." 이살리는 대답하면서 진짜 까마귀가 우는 것처럼 웃었다. "미래가 보인다는 것은 때때로 잔혹한 거야. 더구나 그 미래를 회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더 더욱 심하지." 이 마술사가 말하는 대로 그들은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는 있지만 확실한 형태를 갖추고 발휘되진 않는다고 들었다. 꿈속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환상으로 보일 때도 있는데 능동적으로 예지의 능력을 써도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고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 한 건 예지한 미래가 확정적이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미래의 가 능성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며 전혀 다른 결과로 전개되는 경우도 많 다고 했다. "나는 내가 죽는 광경을 열 번도 넘게 봤어." 이살리가 힘 없이 말했다. 레일즈는 왠지 기분 나쁜 생각이 들어 단번에 술이 다 깨버리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은 그럭저럭 운명을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 그게 다 능력 덕분 아니겠어." 레일즈는 목이 잠기는 것 같은 불쾌감이 일어 술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이런 말은 뭐하지만 말야.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할 생 각이야." "또 본 거야?" 레일즈가 놀란 눈으로 이살리를 바라보았다. 이살리 정도의 전사 가 목숨을 잃을 상황이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이살리가 가담한 레일즈의 부대에도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것 이었다. "어때,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살리가 진지하게 말을 이어갔다. "당연히 위험에 닥쳐 있는 건 나만이 아냐. 너희들도 그래." "어떤 미래를 예지했지?" 레일즈는 이살리의 정면으로 나와 앉았다. 그리고 그의 눈을 똑바 로 쳐다봤다. "불꽃이야……." 레일즈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이살리는 얼른 눈길을 다른 데로 돌렸다. "성채가 불길에 타오르고 나는 그 불꽃에 파묻혀 죽게 돼." "성채가 불탄다고!" 레일즈는 놀라서 이살리의 어깨를 잡았다. "그래, 신수의 어금니 성채가 불에 타 함락되는 거야. 그 불길로 수 많은 전사들이 목숨을 잃게 될 거야." "그게 언제 일이지?" "그건 몰라." 이살리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리 멀지 않았어. 신수가 아닌 나 같은 사람한테 보이는 미래니 까, 한계가 있지. 그렇지만 이건 분명해. 내일이나 모레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1년이나 2년 뒤도 아냐." "정말이야?" 레일즈는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는 느낌이 들었다. "그대로 된다고는 확신 못 해. 그렇지만 거짓말도 아니야. 만약 거 짓말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어떻게 하면 좋지? 어떻게 해야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있지?" 레일즈는 이살리의 어깨를 격렬하게 흔들었다. "간단해." 이살리는 레일즈의 손을 뿌리치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가르쳐줘, 부탁해!" "도망가는 거야. 이대로 성채로 돌아가지 않는 거지. 그렇게 하면 성채와 함께 불타 죽는 일도 없을 테지." "그렇지만 성채에는 수많은 동료들이 있잖아." "그렇다면 알려주는 게 낫겠지. 빨리 성채를 포기하고 도망가라 고." "어떻게 그렇게!" 레일즈는 큰 소리로 외치며 반사적으로 일어섰다.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싸우지도 않고 도망갈 순 없다. 그렇게 하면 이살리가 예지한 미래는 바뀌게 되겠지만 패배를 당한다는 점은 똑같다. "어떻게 해볼 수가 없어……." 자조하는 이살리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렇다면 네가 우리한테 가담한 것은?" "그래, 성채의 파멸을 예지했기 때문이야. 사실은 아무한테도이야 기하지 않고 사라질 생각이었지. 그러다가 휘적휘적 걷고 있는 널 보 고 마음이 변한 거야. 술을 마신 탓인지도 모르지. 그러나 상관 없어. 나는 계속 살아가고 전쟁의 행방을 계속 살필 거야. 그것이 나한테 주 어진 그림자부족의 사명이니까." "이살리……." "왜 그러나, 대백조 형제. 아니 신민족의 용사여. 미래를 아는 것은 정말 잔혹해. 혹시라도 운명을 바꿀 수 있다면 그걸 보여줘. 난 예지 한 미래가 빗나가는 걸 환영하지." 이살리는 그렇게 말하고 달빛과 화톳불의 불꽃이 미치지 않는 나 무 그늘 속으로 천천히 물러섰다. 레일즈는 그가 사라지려 한다는 사 실을 알았다. 멈춰 세워야 하겠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이살리는 그늘 속에 들어가는 순간 마치 연기처럼 모습이 사라졌 다. 능력을 사용했음이 틀림없다. '이살리, 너도 참 고독했겠구나.'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이살리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너한테는 보였을 거야. 동료들에게 몰려오는 죽음의 그림자 가…….' 그러나 그걸 알려준다 해도 운명이 바뀌진 않는다. 이살리는 목숨 을 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바로 이살리 아닌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아니, 한 사람이 목숨을 건졌기 때문에 더 많은 희생자가 나올지도 모른다. 이살리는 아마도 고뇌하고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예지한 미래를 동료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나, 어째야 하나. 경고한다고 해도 도대체 누가 그걸 기쁘게 생각하겠는가? 경고를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전사 들의 사기가 떨어져 더욱 심각한 패배를 당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레일즈는 이살리의 고뇌를 자신이 떠맡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마술사 대신에 예언자로서의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알려줄 수 있을까……." 레일즈는 그 자리에서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마치 자기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하고 있고 관객들이 그것을 관람 하고 있다는 착각에 사로잡혔다. 운명은 어떤 대본을 준비해놓고 있 는 것일까? 그때였다. 화톳불 쪽에서 사람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싸움이라도 벌어진 건 아닐까 염려하며 급히 그쪽으로 달려갔다. 사 람들이 모여 있었다. 밧소와 샤일론의 모습도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 레일즈는 밧소에게 물어보았다. "시레네라는 부락에서 사자가 찾아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