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12) 01/29 09:35 315 line 신전 입구에는 문이 없어서 계단을 올라가면 그대로 안으로 들어 갈 수 있었다. 건물 안은 텅 비어 있고 바스락거리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어디서 들어오는지는 모르나 은은한 흰빛으로 꽉 차 있다. 마리스는 의례에 따라 두 팔을 가슴 앞에 교차시키고 얼굴을 그 사 이에 묻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신전 안은 무대처럼 한 단 높게 만들 어졌다. 신수왕 페네스가 앉아 계시는 성스러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마리스는 잠시 동안 주인 없는 신수왕의 의자를 바라봤다. 그러고 서 그 자리 아래까지 나아가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은빛늑대는 마리 스 곁으로 다가와 그 자리에 편히 앉았다. "신수왕 페네스여……." 마리스는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잡념을 물리치고 정신을 고양시켰다. 그리고 신수왕의 이름을 거듭 되뇌었다. "주기의 신수왕, 숲의 지배자, 달을 주관하시는 분, 어둠 속의 빛의 신……." 자신은 알지 못했지만 옆에 웅크린 은빛늑대처럼 마리스의 몸은 엷은 은빛에 감싸였다.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마리스 의 기도는 계속되었다. ―나의 종복이여……. 압도적인 의지가 마리스의 마음에 갑자기 울려퍼져왔다. "신수왕 페네스여!" 마리스는 그 자리에 엎드렸다. "저의 부름에 응답해 주셔서 감사하옵나이다." ―무얼 묻고 싶은가? "여러 가지가 있사옵니다." 마리스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며 자신의 생각을 가다듬었다. 주기는 무너지고 크리스타니아에 커다란 변화가 찾아들고 있다. 신왕 이 이끄는 베르디아군의 침공은 더욱 맹렬해지고 있다. 그에 맞서 은 빛늑대부족은 성지 시레네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이려 하고 있다. 이 전쟁에서 패배하면 은빛늑대부족은 다시는 베르디아에 저항하지 못 하게 될것이다. 그리고 잃어버린 대지로 통하는 길이 열려 신민족이 크리스타니아로 상륙해 왔다. 이 신민족 전사 레일즈는 암흑민족과는 달리 신수민족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 한다. 물론 그의 생각이 신 민족 전체의 의견은 아니다. 그러나 마리스 자신은 그의 말이 드러내 는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가르쳐 주소서, 신수왕 페네스여. 혹시 제가 은빛늑대부족을 이끌 운명이온지요. 저는 어떻게 해야 좋은지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 요." ―나의 종복아……. 신수왕 소리는 힘차고 압도적인 위엄이 넘쳤다.그러나 마리스는 그 의지에서 흔들림을 읽었다. ―결계는 무너지고, 주기 또한 흔들리고 있다. 크리스타니아의 세 계율은 이제 존재하지 않고 신왕 바르바스의 지배의 원칙이 대륙을 정복하려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가르침을 바라는 것이옵니다. 어떻게 해야 주기를 지킬 수 있사옵니까? 어떻게 해야 바르바스의 지배를 저지할 수 있사 옵니까?" 마리스는 간절하게 물었다. 그리고 신수왕의 대답을 기다렸다. ―네 질문에 대답할 수가 없구나…….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 전달돼온 신수왕의 의지였다. "왜입니까?무엇 때문에 대답해 주시지 않사옵니까! 우리는 페네스 님을 믿고 섬기는 부족입니다. 제발 우리를 이끌어 주소서. 우리는 모 두 신수왕의 말씀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발!" 마리스는 일어서서 페네스의 의자를 향해 절규했다. 그러나 거기에 신수왕의 모습은 없다. ―네 질문에 답을 얻고자 하면 네 자신에게로 돌아가라. 자신에게 서 답을 찾도록 하라. 신수왕의 의지가 떠나가는 느낌이 일었다. "페네스 님!" 마리스는 허공을 향해 절규하며 페네스를 불렀다. 그러나 신수왕은 마리스의 염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주기의 신수왕 페네스는 사라졌 다. 그 의지가 떠나기 직전에 신수왕은 마리스에게 이 말을 남겼다. ―회합의 때가 다가오고 있느니라. 시작의 땅으로 가도록 하라… …. 마리스는 신수왕이 남긴 말을 곱씹어 보았다. 시작의 땅에 관해 마 리스는 들은 적이 있었다. 신수들이 신의 육체에서 해탈한 성스러운 장소로 이스칼리아 서남부에 위치한 높고 험한 산 아르스나셀의 꼭대 기였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베르디아가 지배하는 지역을 통과하고 정 령과 환수가 지키는 바람의 봉우리를 지나야 했다. 만일 가기로 한다 면분명 위험한 여행이었다. 그런 위험을 무릅써서 도대체 무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신수왕은 답을 찾아내는 것은 마리스 자신이라고 하 지 않았는가? 그리고 또 한 마디, 회합의 때라는 건 무얼 말하는 건 가? "역시 이곳에 있었는가……." 그때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마리스는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족장 로프와 탈리오 장로가 한 여성을 동반하여 신전 입구에 서 있었다. 그 여성은 제의였다. 나이는 서른 살 정도로 흑발이 허리께까지 늘어져 있었다. 아마도 수년 동안 머리를 자른 적이 없으리라. "족장님, 장로님……." 마리스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공손히 인사를 드렸다. "아까는 제가 무례를 범했습니다." "그건 이제 그만 접어두자. 그보다 신수왕께서는 무어라 대답이 있 으셨는가?" 장로가 묻자, 마리스는 신수왕과 나눈 대화를 상세히 이야기했다. "족장님께서는 무슨 말씀이신지 아시겠습니까?" "그 대답이라면 나도 들었다. 답을 찾는 것은 자신이라고." "그럼 찾아내셨습니까?" "찾아내진 못했다. 아니, 나는 찾아낼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 살고 있는 게 죄스럽게만 느껴지 는구나." 족장이 쓸쓸하게 말하며 마리스 바로 앞으로 다가섰다. "넌 우리 부족의 다음 대를 이을 사람이다. 그 점을 절대 잊지 말도 록." "신수의 어금니 성채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명을 쓸데없이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족장의 뒤에 서 있던 메일렌의 탈리오가 동조하듯 말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성채로 돌아갈 것입니다." "도대체 무얼 위해서?" 탈리오는 초조감에 발을 굴렀다. "분명한 이유는 없습니다. 단 한 가지를 빼고……." "한 가지뿐이라니, 그게 뭐지?" "예, 신수왕께서 말씀하신대로 답을 찾아내는 것이 자기 자신이라 면 그 단초가 되는 것은 성채라는 느낌입니다." 마리스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멀리로 시선을 돌렸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있는 한 전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족을 초월하고 아니 민족 조차도 뛰어넘어 침략자와 싸우려 하는 젊은 용사. 자신이 상처 입을 까 두려워하고 남을 상처 입히는 것을 싫어하면서도 달아나지 않고 계속 싸우려 하는 전사의 얼굴이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족장은 언제나처럼 위엄이 담긴 소리로 말했다. 탈리오는 아직 불 만이 남아 있는 듯했지만 족장의 말에 반론을 펴진 않았다. "목숨을 헛되이 여길 생각은 없습니다." 마리스는 탈리오를 향해 미소 지었다. "저는 살아남아 반드시 돌아올 것입니다. 부족을 위해, 아니 이곳 크리스타니아를 위해 제가 무얼 해야 하는지 꼭 답을 찾아내겠습니 다." 은발의 두 노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하마. 너의 총명함, 그리고 젊음에." 4 "온다. 저기……." 그림자부족의 마술사 이살리가 갑자기 속삭였다. 라로즈라는 부락 에 도착하여 짐을 내려놓고 잠시 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레일즈 일 행이 성채 주변 부락을 순회하러 나온 지 벌써 일 주일이 지났다. 처 음 닷새 동안에는 성채의 남쪽 지역을 돌고 한 차례 성채에 돌아갔다 가 이번에는 남동쪽을 순회하기 위해 출발했다. 순회를 시작하고 나서 열 개가 넘는 부락을 돌았다. 잠깐 들르기만 한 부락도 있고 하룻밤을 보낸 부락도 있었다. 어디를 가든 일행은 나 름대로의 환영을 받았다. 입 밖으로 꺼내지야 않지만 은빛늑대부족 사람들은 지금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인구 천 명도 안 되는 작은 부락으로는 베르디아의 주력 부대가 공격해 오면 그야말로 속수무책 이었다. 겨우 몇십 명밖에 안 되는 요마들의 습격으로도 쩔쩔맬 정도 였다. "오다니, 도대체 무슨 말야?" 레일즈는 멍한 얼굴로 검은 옷의 마술사를 바라봤다. 이살리는 백 인대장은 아니었지만 사이아에게 물어보니 마술 실력만큼은 대단하 다고 했다. "당연히 적이 다가온다는 말이지.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이살리가 높은 음으로 웃으며 마술사의 지팡이를 들어올렸다. 운명 의 고지자라는 별명처럼 흉조의 큰까마귀 아르케나를 섬기는 수인은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들 했다. 적이 쳐들어오는 미 래의 광경이 보였음에 틀림없었다. "언제 오지…….." 레일즈가 이살리에게 그렇게 묻는 참이었다. "적이다! 암흑민족의 요마들이 부락을 향해 오고 있다!"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 나는 쪽으로 돌아보니 사냥꾼 차림의 젊은이가 숲 속에서 나와 뛰어갔다. "그건 저 친구한테 물어봐!" 이살리가 피시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운이 좋은 건가, 나쁜 건가."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순회에 나온 것 은 이런 때를 위해서였다. 그러나 적과 만나기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 었다. 더구나 이번 순회에는 전투 경험이 없는 사이아와 비인까지 함 께 왔다. 레일즈는 두 사람 쪽을 돌아봤다. "출격하는 거야?" 레일즈의 눈길을 받은 사이아가 물었다. 안타까울 정도로 얼굴이 창백했다. "당연하지." 대답하는 것이 괴로워서 레일즈는 딱 잘라서 말했다. "알았어……." 사이아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그녀의 곁에서 침착성을 잃고 있던 비인도 사이아의 모습을 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괘, 괜찮아. 내 몸 정도는 혼자서 지킬 수 있어." 비인은 마음과는 달리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믿고 있어." 레일즈가 격려의 말을 건네자 비인은 기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나한테 맡겨. 여유가 있으면 사이아도 지켜줄 테니까." "기대할게." 사이아도 긴장의 끈을 풀면서 입가에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레일 즈는 밧소와 샤일론을 돌아보았다. "나는 거추장스럽지 않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밧소는 자기한테 맡겨두라는 듯이 오른손 엄지를 세웠다. 사이아와 비인 정도는 돌볼 수 있다는 뜻이었다. 샤일 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지만 그가 전력을 기울여줄 것이란 점에 대해서 레일즈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레일즈는 라로즈 부락의 족장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사냥꾼에게서 자세한 정보를 얻었다. "백 명까진 안 되지만 오십 명은 돼보여." 사냥꾼은 그렇게 대답했다. 그가 본 것은 고블린뿐이고 사람은 하 나도 없는 모양이었다. 고블린들이 햇빛을 피해 야영하는 것을 발견 했던 것이다. 위치는 라로즈 부락에서 서쪽으로 반나절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샘 근처였다. "놈들의 뭘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어. 우리 부락을 습격할 생각인 지, 아니면 다른 부락을 노리는지……." 사냥꾼은 그 말로 보고를 끝냈다. "놈들이 뭘 노리건 상관이 없어." 레일즈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장로에게 지금 곧 출격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출격하시겠습니까?" 라로즈 부락의 장로는 안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장로라고는 하지 만 아직 40대 중반의 장년이었다. 은빛늑대부족의 남자로선 보기 드 물게 몸집이 퉁퉁하고 둥그스름한 얼굴이었다. "우리 부락 전사들도 함께 가도록 할까요?" "고마운 말씀이십니다만……." 레일즈는 그 제의를 정중하게 거절했다. "우리가 없으면 여러분들 힘만으로 싸워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건 저희들이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솔직히 마음이 놓입니다." 장로는 레일즈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언제 다시 습격을 받을 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수가 적은 전사단에서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은 것이 장로의 마음이었다. 레일즈는 그런 마음을 읽고 있었고 그 렇기 때문에 장로의 제의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나 길 안내는 적을 발견한 젊은 사냥꾼에게 부탁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입니다." 레일즈의 제의를 젊은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는 어깨에 활을 매고 허리에는 소검을 차고 있었으므로 언제라도 그 차림새 그대로 전투를 치를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단순한 길 안내역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고블린들과 싸울 마음으로 따라나선 것 같았다. 그 젊은이를 데리고 사이아 있는 곳으로 돌아오니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은 이미 출격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적의 숫자는 오십 안팎이다. 그러나 모두 고블린뿐이다." 레일즈는 전사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아군의 배 이상을 상대 해야 하지만 신수의 전사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고블린은 등급 이 떨어지는 요마에 불과했다. 1대1로 싸워서 밀리는 전사는 신수의 어금니 용병단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출격!" 레일즈가 호령이 떨어지자, 전사들은 무기를 쳐들며 우렁찬 소리를 질렀다. 전사들은 숲의 오솔길을 잰 걸음으로 달려갔다. 길을 안내하는 젊 은이의 이야기로는, 고블린은 자신들이 발각된 것을 모른다고 했다. 제대로 된 사냥꾼이라면 자기의 움직임을 상대방이 눈치 못 채게 하기 때문에 레일즈는 그의 말을 그대로 믿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불의의 습격을 가하는 것이 좋다. 레일즈는 고블린들이 야영하는 장소 가까이 가서 스무 명의 전사들을 두 패로 나누었다. 그 리고 그 중 한 패를 적의 배후로 돌아가게 했다. 그렇게 한 뒤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면서 신중하게 고블린들에게 다가갔다. 기습은 완전히 성공하진 못했다. 갑옷과 무기에서 나는 소리로 기 습 바로 전에 고블린들이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앞쪽에서 새가 푸드 득거렸다. 외침 소리도 뒤섞여 들렸다. 레일즈는 긴장했다. "들켰나!" 레일즈는 망설임 없이 행동에 옮겼다. 적의 태세가 정비되기 전에 전투를 개시하지 않으면 숫자가 적은 레일즈 쪽이 고전을 할 것이 분 명했다. "돌격, 앞으로!" 레일즈는 전사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 호령하고 자신도 전속력으로 달려나갔다. 그 소리는 숲에 메아리쳐 적의 배후로 돌아가 있는 별동 대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왼쪽으로 짐승의 포효 같은 외침이 들렸다. 협공은 할 수 없게 됐 지만 측면을 치는 것은 가능했다. 별동대의 지휘는 그림자부족의 마 술사 이살리에게 맡겼다. 틀림없이 요마들의 태세를 무너뜨릴 것이 다. 레일즈는 자기 뒤를 바짝 붙어 따라오는 사이아와 비인을 돌아보 았다. "전투에는 절대로 뒤섞이지 마. 주위를잘 살펴보고 안전한 장소에 가 있어. 그러다가 마법으로 지원해 주는 거야. 알겠지!" "아, 알았어." 사이아가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보통 때는 앵두처럼 빨간 입술이 었는데 지금은 병든 사람처럼 핏기가 없어 보였다. "두 사람을 부탁해." 레일즈는 밧소와 샤일론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내고 허리에 찬 검 을 빼들었다. 정면을 살펴보니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고블린들이 눈에 잡혔다. 그 모습을 보고 레일즈는 승리를 확신했다. 아군은 태세 가 정비돼 있고 적들은 혼란에 빠져 있다. 고블린들은 비록 숫자는 많 지만도망갈 길을 찾아 우왕좌왕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적이 밀집된 장소에 굉음과 함께 폭발이 일어났다. 작렬 하는 불꽃에 휘말려 열 마리 가까운 고블린이 파닥거리며 쓰러졌다. "화구의 주문인가!" 레일즈는 사이아가 마법을 쓴 건가 하며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그 러나 금세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놀랐다기보다는 겁먹 은 표정으로 불을 내뿜는 주문의 결과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주 문을 건 사람은 곧 모습을 나타냈다. 파닥파닥 날개 치는 소리가 나 더니 새까만 날개를 어깻죽지에 단 이살리가 허공으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레일즈는 그가 마술사임과 동시에 큰까마귀의 신수 아르케나의 수 인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대단하군." 레일즈는 감탄하며 중얼거렸다. 그가 일격을 가한 마법은 혼란에 빠져 있던 고블린들을 완전히 얼이 빠지게 만들었다. 먹이에게 달려 드는 맹수들처럼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고블린들 을 압박해 들어갔다. 피로 물드는 육박전이 시작됐다. 그 순간 레일즈 는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전투가 시작되면 언제 나 그랬다. 그러나 머리는 이상할 정도로 맑았다. 레일즈의 생각은 어 떻게 하면 전투에 이길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희생을 줄일 수 있는가에 있었다. 그 결론은 곧바로 나왔다. 자기 자신은 직접 전투에 가담하지 않는 것이었다. 싸움터를 폭넓게 관찰하다가 고전하는 전사가 있으면 도와 주러 그쪽으로 갔다. 레일즈는 그것만이 자신이 수행해야 할 역할이 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정리되자 레일즈는 그대로 행동에 옮겼다. 검과 방패를 거 머쥐고 싸움터를 종횡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면서 자신은 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아군 전사들의 전투 양상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아군에게 단 한 사람의 희생자도 생기지 않기를 바라면서. 불을 내뿜는 화구의 주문이 작렬했을 때 사이아는 심장이 다 멎을 정도로 놀랐다. 브라이언 스승이 외우는 것을 딱 한 번 본적이 있지만 그때는 엄중히 닫힌 실험실에서였다. 그래서 부풀어오른 불꽃은 실험 실 벽에 닿기만 하면 거짓말처럼 스르르 꺼졌다. 그러나 지금은……. 폭발의 충격과 뜨거운 불꽃으로 인해 여러 마 리의 고블린이 땅바닥에 쓰러져 몸부림쳤다. "마술의 힘이다. 검이나 활과 무엇 하나 다를 게 없지. 그 점을 잊으 면 잘못을 범하게 된다." 스승 브라이언의 말이 가슴에 절절하게 느껴졌다. 사이아 같은 미 숙한 마술사가 다루는 주문도 이런 싸움터에선 전사들이 휘두르는 어 떤 무기보다도 무서운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다간 언제 칼을 맞을지 몰라!" 밧소의 말에 사이아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소검을 뽑아들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그렇지만 그 얼굴에는 언제나처럼 웃음기가 배어 있 었다. 사이아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천천히 전투의 진행 상황을 살폈다. 처참한 광경이었다. 눈을 돌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고 자기 나 름대로 전황을 분석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살리는 화구의 주문을 적이 가장 밀집해 있는 곳에 사용했다. 비 정했지만 가장 효과적인 사용법이라 할 만했다. 이제는 그런 솜씨를 배워야 한다. 사이아는 우선 무슨 주문을 쓸 것인지 생각해봤다. 잠의 구름(슬립 클라우드)이라는 주문이 떠올랐다. 그건 상대를 잠들게 하 는 마법으로 마력을 써서 공기를 변질시키는 주문이었다. 이 주문을 극도로 발전시키면 순식간에 상대를 마비시키거나 목숨을 앗아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주문이 걸리는 범위가 넓기 때문에 아군이 말려 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