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11) 01/29 09:33 308 line 팔을 풀어 마리스를 놓아준 뒤 탈리오는 마리스의 얼굴을 두 손으 로 감쌌다. 어린아이 취급이었지만 마리스는 그것이 기뻤다. 이 활기 찬 노인에게서는 마치 아버지 같은 친근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부락을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합니다." 하켄 부락의 비극이 생각 나서 마리스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마 리스의 부모님은 무사히 도망칠 수 있었지만 장로는 마을과 운명을 함께 했다. 그리고 전사들의 우두머리 자이트도 마리스를 도망시키기 위해 양날검 공작과 맞서다 생명을 빼앗겼다. 자이트는 은빛늑대부족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실력을 지닌 용사였다. "하켄 같은 작은 부락으로는 도저히 막아낼 수가 없어. 그러나 이 곳 시레네는 달라. 물론 우리 메일렌도." 탈리오는 마리스의 어깨에 손을 두르고 대청 안쪽으로 들어가자고 권했다. "족장이 기다릴 거야." 그러고 나서 탈리오는 대청 안에서 대기하던 사람들에게 오늘 청 원은 끝났다고 알렸다. "다만, 장로와 전사장은 나와 함께 가주길 바란다. 족장과 협의해야 할 사항이 있다." 마리스는 자기가 특별 취급받는 것에 대해 사람들이 불만을 품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그들은오히려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들 돌 아갔다. "저들의 바람은 자기들 부락을 지켜달라는 것이야. 최근 시레네 주 변에도 암흑민족과 요마들이 자주 출몰하고 있거든." 마리스의 불안을 의식한 모양인지 탈리오가 설명해 주었다. "아니, 이 주변에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디아군이 요마들을 써서 이곳에도 교 란 작전을 펴고 있다니. 그 마수가 신수의 어금니 성채만이 아니라 시 레네에까지 미치고 있었던 것이다. 안쪽 문을 열자 곧바로 복도로 이어졌다.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 평 평하게 깐 바닥은 때 때문인지, 촘촘히 칠한 수지 때문인지 새까만 색 깔이었다. 창문은 없었다. 기름을 부은 작은 접시에 심지를 이은 간소 한 램프가 사방의 벽에 설치돼 있었다. 거기에서 불빛이 비쳐 복도를 밝혔다. 램프의 그을림이 눈과 코를 자극했다. 복도의 끝은 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그곳은 족장이 공무를 처리 하는 곳이고 아마도 가족들과의 생활은 2층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았 다. 마리스는 탈리오를 따라 어슴푸레한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갔다. 마리스 뒤로는 열 명 정도의 장로와 전사장이 따라왔다. 그들 모두 가 심각한 얼굴이어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낄 수 있었다. '한두 번 요마에게 습격당한 정도로 이렇게까지 동요하다니…….' 마리스는 마음속에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곧바로 생각을 바꿨다. 그들의 부락이 습격당한 것은 크리스타니아 창세 이래 최초의 일이었 던 것이다. 2 족장의 방문은 열려 있었다. 그래서 복도를 걷는 동안에도 안의 동 정을 살펴볼 수 있었다. 넓지만 단정한 실내에 호화롭게 만든 의자와 책상이 놓여 있을 뿐 그 밖의 장식품은 거의 없었다. 바닥에는 검은 곰의 모피가 깔려있고 방 안의 벽에는 호화로운 무늬의 모직물이 걸 려 있었다. 천장에다 수레바퀴를 옆으로 눕혀 사슬로 매달아놓고 거기에 램프 를 여섯 개 고정시켜 놓았다. 여섯 개 가운데 세 개에만 불이 켜져 있 었는데 높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햇빛과 뒤섞여 실내를 환하게 비추었 다. "여러분 모두 어서 오시오." 족장 로프는 방 안쪽 바닥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는데 이미 예순을 넘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생기가 엿보였다. 마치 명상하듯 눈을 감고 야윈 몸을 곧추세운 채로 사람들을 맞아들였다. 은발이긴 하지만 족장의머리카락은 이미 눈처럼 새하얗게 변한 상태였다. "실례합니다." 탈리오를 선두로 전원이 실내로 들어섰다. "마리스, 이쪽으로 오거라." 마리스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족장은 눈을 뜨고 탈리오 뒤를 따라오는 마리스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마리스는 긴장된 얼굴로 장로 곁으로 다가섰다. "하켄 부락이 함락되고 나서 4개월 동안 넌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 며 지냈느냐?" 책망하는 목소리였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몸을 의탁하고 있었습니다. 족장님께 사정 을 전해드리라고 부락 사람에게 말해두었는데 소식을 듣지 못하셨습 니까?" "그런 통지를 받은 바 없다."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죄할 것까지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일단 마리스는 고개를 숙 였다. "어쨌든 무사하다니 다행이다.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에게도 분명 히 말해둬야겠다. 우리 은빛늑대부족은 설령 부락이 다르다 해도 모 두 한 가족이다. 만약 모든 부락이 불행히 적에게 함락당한다 해도 절 대로 절망해선 안 된다. 우리 부족이 살아남는 한 부락은 다시 재건할 수 있다. 그러나 잃어버린 생명은 다음 주기까지 되돌릴 수가 없게 된 다. 생명을 소중히 여기도록. 이미 패배를 경험했다 해도 중요한 건 최후에 이기는 것이다. 모두 이 말을 명심하도록 해라." 족장의 말은 마치 타닐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적어도 마리스에 겐 그랬다. 타닐은 자신이 무사하다는 통지조차도 하지 않은 게 분명 했다. 그러니 여기 있는 사람들은 타닐이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 연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신수의 어금니에 관심이 있었다면 알 수 도 있는 일이었다. 마리스는 용병단 신수의 어금니가 은빛늑대부족에 겐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족장님, 오늘 제가 찾아뵌 것은 드릴 말씀이 있어서입니다." 지금부터 어떤 식으로 이야기가 진행될지 모르므로 마리스는 우선 자신의 사명을 이야기하기로 했다. "무슨 부탁이라도 있는가?" 족장이 조용히 물었다. "예, 신수의 어금니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네가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용병단을 말하는가?" 마리스가 신수의 어금니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 는 투였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는 지금 중대한 위기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베르디아군 때문이 아닙니다. 식량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식량이 부족하다고?" "예, 이대로 가면 일 주일 안에 식량 창고가 바닥날 겁니다. 성채를 지원하고 있던 인근 부락이 요마들에게 습격당해 식량이 생각대로 걷 히지 않고 있습니다." "……상황이 그렇게 됐군." 족장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레네 주변에도 드물긴 하지만 적들이 출몰하고 있다. 하지만 숲 을 통해서 쳐들어오니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어. 가축을 빼앗고 식 량 창고에 불을 놓는 걸 보면 적들의 목적은 식량에 있는 것 같다." "모든 다리에 병영을 설치하고 전사를 주둔시키면 어떻습니까? 신 출귀몰하는 요마들이라고는 하지만 강을 건너오지는 못할 겁니다." 마리스는 반사적으로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말에 깜짝 놀랐다. 레 일즈라면 이런 식으로 말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자기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주위 사람들의 반응에 신경이 쓰였다. 전사장 가운데 몇 사람인가 는 묘안이라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임무를 위해 전사들의 전력을 나눌 순 없다." 장로 한 사람이 반론을 폈다. "장로님 부락의 인구와 전사들의 수를 알려주십시요." 마리스는 엄숙한 낯으로 돌아보며 그 노인에게 물었다. "우리 티샬은 작은 부락이다. 인구는 3백 명 정도이고 훈련받은 전 사들은 스무 명도 되지 않는다. 부락이 습격당하면 백 명 정도는 무기 를 들 수 있을 테지만……." "그 정도 수면 설령 오십 마리의 요마가 공격해 온다고 해도 충분 히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베르디아 요마들의 한 개 집단은 기껏해 야 삼십 마리 정도입니다."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은 열 명으로 세 배 정도의 요마를 무찔렀다. 그 정도를 상대할 경우엔 한 사람의 전사자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전사들의 임무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부락을 지키는 거야." 장로의 얼굴에 핏기가 오르고 목소리도 떨렸다. 자신이 겁쟁이 취 급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티샬 장로, 그대의 말이 옳다." 로프 족장의 엄중한 목소리가 울렸다. "전사들은 그것 이외의 역할을 맡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것 보라는 듯이 티샬의 장로가 마리스를 노려보았다. 그런 시선 에 대해 신경 쓰진 않았지만 장로의 말에는 적이 실망을 느꼈다. 단지 적을 지키고 있어서는 절대로 적을 이길 수 없다. 그러나 족장의 말에 반론을 제기할생각은 없었다. 전사들에게 부 여된 역할은 장로가 말하는 대로였다. 그것은 신수왕 페네스가 정해 놓은 원칙이었다.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은 어떤 대가도 없이 베르디아군과 싸우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제쳐두고라도 그들에게 만족할 만한 식량 정도 는 제공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스의 말끝에 한숨이 가득 섞였다. "여기 시레네에도 식량이 남아돌진 않아." "오십 개가 넘는 식량 창고 가운데 하나만 비우면, 그곳 성채는 1년 동안을 버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비운 창고는 1년 후에는 다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아무리 여유가 없다고 해도 3만 명이 넘는 인구를 헤아리는 시레네 다. 천 명 정도의 용병을 먹여 살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마리스는 초조해하며 거듭해서 식량을 보내달라고 족장에게 부탁했다. "그렇다면, 좋아. 식량 창고를 통째로 하나 비울 생각은 없지만 백 일 정도를 버틸 수 있는 식량은 원조키로 하지. 아마도 그 이상은 필 요치 않게 될 게고." "그건 무슨 뜻에서 하시는 말씀입니까?" 마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성채가 앞으로 백 일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뜻이다. 서쪽 부락 에서 기별이 와 있다. 이슬로의 베르디아 성채에서 움직임이 포착된 모양이다. 아마도 그들이 본격적으로 침공해올 모양이다." 마리스는 침을 삼켰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베르디아군 이 총력전을 펼쳐오면 천 명 정도의 성채 따위는 단숨에 날아가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식량뿐만이 아니라 전사들도 보내 그곳을 지켜야 합 니다. 그 성채가 무너지게 되면 강 저편은 완전히 베르디아의 지배 아 래 놓이게 되고……." "알고 있어." 엄숙한 말투로 족장은 마리스의 말을 막았다. "서쪽 부락을 포기할 생각은 아니다. 부락을 버리고 시레네로 모이 도록 하라고 이미 장로들에게 사자를 보냈다. 침략자들과는 이곳 시 레네에서 끝을 볼 것이다. 그때를 위해 전사를 하나라도 더 많이 확보 해야 한다." "그럼 신수의 어금니 성채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 성채에는 크 리스타니아 각지에서 온 신수민족 출신의 전사들이 모여 있습니다." "물론 알고 있다. 식량을 보낼 때 그들에게도 경고해둘 것이다. 각 기 자기들 부족에게로 돌아가든가 끝까지 성채에서 전투를 벌이든가 그 선택은 그들 스스로가 해야 할 것이다." 마리스는 자꾸만 앞쪽으로 쏠리는 은빛 머리를 쓸어넘기면서 족장 의 야윈 얼굴을 바라봤다. 이미 마리스의 얼굴은 놀람으로 하얗게 질 려 있었다. "알았습니다." 긴 침묵 끝에 마리스는 가슴에 담아놓았던 큰 한숨을 뱉어내듯 말 했다. "식량을 제공해 주시는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겠습니다." 마리스는 유연한 동작으로 일어서더니 여러 족장들에게 정중히 인 사했다. "어디 가려고?" 탈리오였다. "저는 장로도 전사장도 아니므로 여기에 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부락은 잃어버렸지만 너는 하켄 부락의 족장이나 마찬가지다. 이 자리에 있을 자격은 충분하다." 탈리오는 족장의 얼굴을 살피면서 마리스를 다시 앉히려 했다. "너는 이 마을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부족의 전사들은 너의 모습 을 보고 용감히 싸우게 될 것이다." '은발이고 또 여자이기 때문인가? 탈리오는 내가 싸움의 용기를 관 장하는 정령 발키리의 대역이라도 해 주기를 기대하는 건가?' 마리스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는 지금 신수의 어금니에 몸을 의탁하고 있습니다. 전사로서가 아니라 다만 잡심부름꾼에 불과합니다만 성채가 무사한 한 반드시 돌 아가야 합니다." "바보 같은 소리하지 마라. 너는 신수왕 페네스에게 선택받은 몸이 다. 잡스럽게 모여든 용병단에 끼어 있을 신분이 아니란 말이다. 은빛 늑대부족 사람들이 결전을 치를 곳은 이곳 성지 시레네다. 넌 그런 정 도도 모른단 말이냐?" "은빛늑대부족에게 결전장은 분명히 이곳 시레네 부락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수민족에게는 다릅니다. 여기저기서 모여들었다고는 하지 만 신수의 어금니는 단순한 용병단이 아닙니다. 부족의 틀을 뛰어넘 어 신수민족 전체를 위해 싸우는 용사들의 집단입니다. 저는 그들을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나서 마리스는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족장의 방을 뛰쳐나왔다. 이 이상 족장이나 탈리오와 얼굴을 맞대고 싶지 않 았다. 그들이 은빛늑대부족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장로들이 자기 부락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과 마찬가 지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크고 넓은 측면에서 사물을 꿰뚫어보지 않으 면 침략자와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지금 시대는 신수민족에게 변 화를 요구하고 있었다. 만약 신수민족이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받아들 이지 않는다면 낡은 습관을 맹신하다 멸망당할 게 분명했다. 마리스는 문득 새로운 것을 깨달았다. 이곳 크리스타니아에서 낡은 습관이란 다름 아닌 주기가 아닌가! "주기를 버리지 않으면 이번 전쟁에 이길 수 없다……." 그 결론은 은빛 머리를 지닌 자신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었다. 그러나 그것 이외의 해답은 도저히 찾아낼 수 없었다. "주기를 신봉하며 순순히 죽을 것인가, 주기를 버리고서라도 승리 를 구해야 하는가?" 마리스는 가슴속에서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대답해야 할 상대는 자신이 아니라는 걸……. 3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햇살이 기울고 있었다. 성채를 출발한 지 사흘째 되는 저녁이 다가오는 중이었다. 내일은 짐차를 조달하고 식 량을 싣느라 분주할 것이다. 짐차를 끌고 갈 인부도 모아야 한다. 마리스가 제지하는 손길도 뿌리치고 밖으로 나왔기 때문에 족장 로프의 기분이 상했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런 걸 가지고 약 속을 깨뜨릴 족장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 위에 선 사람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켄의 장로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자주 들었 던 말이었다. 문을 지키는 전사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족장의 저택을 뒤로 했다. 오가는 사람들로 왁자한 큰길을 걸으면서 마리스는 생각을 굳혔다. 전사들은 술집에서 마리스가 오기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나 마리스의 발길은 술집과는 반대 방향이었다. 나무와 인가가 즐비하게 늘어선 큰길을 좀더 걸어나가 작은 개울 에 걸린 다리 앞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그대로 개울가의 오솔길을 따 라 상류로 올라갔다. 드디어 부락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한적한 곳이 나왔다. 눈앞에는 야트막한 구릉이 있고 개울은 왼쪽으로 돌아 흘렀 다. 그러나 오솔길은 그대로 똑바로 나 있었다. 마리스는 잠깐 망설였지만 그대로 길을 나아갔다. 나무의 가지 위 에서 작은 새가 호들갑스럽게 울어댔다. 개울의 살살거리는 소리도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멀어져갔다. 문득 아주 친숙한 숲의 향기가 느껴 졌다. 부락 가운데서는 인가의 냄새가 짙게 배어 숲의 향기가 사라져 있게 마련이다. 그때 마리스의 눈에 은빛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잡혔다. 정신을 바짝 차리며 그림자 쪽으로 시선을 향했다. 은빛늑대였다. 신수왕 페 네스의 켄족이 경계하듯 마리스를 바라보았다. 마리스를대신해 목숨 을 잃은 은빛늑대 싸지가 생각나 마리스의 가슴은 미어터질 듯했다. "여기서부터는 신수왕의 성지다." 수인은 켄족과 서로 마음이 통한다. "알고 있다." "무엇 하러 이곳에 들어가려 하는가?" "신수왕의 의지를 알기 위해서다." "신수왕은 계시지 않는다. 나중에 다시 찾아오는 게 좋겠다." 역시 신수왕은 성지에 계시지 않는 것일까. 마리스는 슬픈 생각이 들었다. 은빛늑대부족은 지금 최대의 시련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런 데 신수왕은 성지를 떠나 어디에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족장이나 장 로들이 느끼는 불안과 초조는 결국 신수왕의 부재 때문이 아닐까. 마리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악몽에 시달리다 눈을 뜨면 곁에 서 주무시고 계셔야 할 엄마가 없다는 걸 알아차린 어린애 같은 기분 이었다. "그렇지만 들어가야겠다. 성지에서 명상하고 신수왕에게 호소하겠 다. 내 목소리는 들으실 수 있을 것이다." 은빛늑대는 천천히 마리스 곁으로 다가왔다. 그 눈빛에는 이미 경 계심 따위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은빛 털이 숲의 그늘 속에서 은은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 탓에 은빛늑대의 윤곽이 드러나 실체를 희미하 게나마 살필 수가 있었다. 켄족은 단순한 동물이 아니었다. 신에게 선 택받은 신성한 짐승이었다. 그제야 살펴보니 은빛늑대는 한 마리가 아니었다. 여기저기 나무 그늘마다 한 마리씩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 이야말로 주기의 신수왕 페네스의 성지를 지키는 병사들이었다. 마리스는 최초의 은빛늑대에게 따라오라고 부탁하고 다시 걷기 시 작했다. 목표 지점은 야트막한 구릉 꼭대기에 선 거대한 한 그루 나무 였다. 그 나무는 금빛 나뭇잎이 무성한 신성한 나무였는데 고대수라 고 불렸다. 신수왕 페네스가 정령계로 가서 태초의나무라는 세계수 를 들고 와 자기 손으로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졌다. 이스칼리아의 숲은 이 고대수를 중심으로 넓게 펼쳐져 있었다. 고 대수 아래에는 페네스의 신전이 세워져 있었는데, 보통의 경우 신수 왕 페네스는 이 신전에서 명상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주기의 지배를 크리스타니아 전역에 미치게 했다. "신수왕은 언제부터 성지를 비우셨지?" 마리스는 자기 곁을 어슬렁어슬렁 걷는 은빛늑대에게 말을 걸었다. "달이 차고 이지러진 지 서른 번은 반복되었을 것이다." 은빛늑대의 의지가 전달돼왔다. 신수왕페네스는 2년 반 가까이나 신전을 비우고 있다는 얘기였다. 마리스가 알고 있는 한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어디에 가셨는지는 아니?" 마리스는 물어보았지만 은빛늑대로부터 대답은 없었다. 아마도 그 들도 모르기 때문이리라. 길이 오르막으로 바뀌었다. 서 있는 나무들 을 따라 길은 굽이쳐 이어졌다. 오르막을 다 올랐을 무렵 이미 해는 나무들의 대해에 빠져버렸다. 마리스의 눈앞에 장엄한 신전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 너머로 거대 한 고대수가 보였다. 심호흡을 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신전 입구로 들 어섰다. 그 옆으로는 제의가 머무르는 소박한 집이 있었다. 제의는 언 제나 신수왕의 곁에 있으면서 페네스의 의지를 전하는 역할을 맡았 다. 다른 부락에도 제의가 있긴 했지만 그들은 페네스의 신상을 지키 고 수확제 등의 제전을 집행할 뿐이었다. 제의는 미혼의 여성들만이 집전이 가능했다. 대개는 25세 정도까지 제례를 집행하고 그 뒤로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하기도 하고 개중에는 평생 동안 독신으로 지내며 신수왕을 섬기는 사람도 있었다. 마리스 는 제의에게 인사도 건네지 않고 그대로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