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10) 01/28 11:19 299 line 지난날 이슬로라는 부락이 있던 장소는 3년 전부터 베르디아군의 주둔지가 되어 있었다. 넓은 범위에 걸쳐 숲을 걷어내고 그 중앙에 견 고한 성채가 건설되었다. 성채 주위에는 왁자지껄한 거리가 들어서고 밤낮으로 혼돈스런 활기가 넘쳤다. 거리를 걸어다니는 사람들도 다양 하기 그지없었다. 먼저 베르디아 땅에 거주하던 신수민족으로 지배의 신수왕 바르바 스를 섬기는 맹호부족, 녹색 날개의 앵무새 타르키의 종자들인 침묵 부족, 그리고 얼룩 무늬의 산 고양이 메르키슈를 섬기는 깨달음부족 이 있었고 십 년 전에 신수민족의 연합 세력을 배반하고 베르디아군 에 가세한 두 꼬리의 여우 스매쉬를 섬기는 두얼굴부족 사람들도 많 이 보였다. 베르디아군에 반항한 신수민족은 노예로 잡혀와 손발에 족쇄가 채워졌다. 거기에 표류민인 암흑민족 사람들과 요마들까지 있 어 복장이나 문화가 전혀 다른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모습은 베르디아 영토 밖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 거리는 밤낮으로 흥청거렸다. 그런 거리 모양을 성채의 맨 꼭대 기에서 내려다보면서 양날검 공작 그레일은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있 는 밀정이 보낸 보고를 듣고 있었다. 보고하고 있는 것은 밀정이 아니라 연락책이었다. 의외로 신수의 어금니 성채가 과거에 없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주 변의 부락을 순회하고 요마들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보고를 그레일은 오히려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새로운 백인대장이 제안한 것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린 대지에서 찾아온 대백조부족의 전사라고 합니다만……." "잃어버린 대지에서 찾아온 전사라고?" 듣고 흘려버릴 수 없는 말이었다. 뒤돌아선 그레일의 얼굴이 자신 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증오 때문에 추악하게 일그러졌다. "어떤 사내냐, 그 백인대장이! 금발의 젊은 놈인가?" "어떤 사내를 말씀하시는지……." 연락을 맡은 사내는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그레일의 말에 의해 뒤로 밀려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알고 있나, 아니면 모르고 있나?" "죄송합니다. 곧바로 보고하도록 밀정 가델라에게 전하겠습니다." 연락책은 잔뜩 주눅든 목소리로 답하고는 도망치듯 방문을 나섰다. 그가 나가는 것과 동시에 새까만 갑옷으로 온 몸을 감싼 기사풍의 사 나이가 방 안에 들어섰다. "너무, 그렇게 화내지 마시오." 그레일은 그 흑기사를 노려봤다. 그러나 기사는 전혀 겁먹은 기색 이 없었다. 그렇기는커녕 미소를 지으며 양날검 공작의 시선을 받아 넘겼다. 그 기사는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흰 얼굴의 사나이로 코밑에 수염 을 기르고 있지 않았으면 여성으로 착각할 수도 있을 정도로 아름다 웠다. 나이는 20대 후반쯤으로 보였는데 중후한 갑옷을 입고 있음을 의식시키지 않을 정도로 발놀림이 경쾌했다. 고도의 훈련을 거듭한 전사가 아니면 도저히 취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공작의 오른쪽 눈을 빼앗은 자라도 발견했습니까?" 흑기사는 그렇게 말하며 뿌옇게 흐린 그레일의 눈을 지긋이 바라 보았다. "딜란트 경, 날 모욕할 생각인가?" "설마 그럴 리가 있나요. 기분이 나쁘시다면 부디 용서하여 주십시 오." 기사는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천천히 그레일 앞으로 다가섰다. "신왕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신 모양이지요?" "그렇다." 그레일은 중얼거리며 딜란트라는 이름의 기사를 내려다보았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뿌리째 뽑아버리고 시레네 부락을 공격하 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그 말에 딜란트는 일부러 놀라는 체했다. "대단한 명령이군요. 그러면 신왕 폐하께서는 우리에게 힘을 빌려 주신답니까?" "물론이다." "그렇다면 승리는 틀림없는 것이겠군요." 딜란트는 웃음 지으며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전쟁의 승리를 축하 했다. 그걸 본 그레일의 얼굴이 다시금 증오로 일그러졌다. "이 전쟁은 내가 진두 지휘한다. 결국 딜란트 경의 암흑기사단에게 도 출전해달라고 부탁하게 되겠지만." "좋습니다. 직접 의뢰하신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습니다. 3백 명 정 도의 기사를 거느리고 후진을 이루겠습니다. 공작님의 마음에 꼭 맞 게 싸울 수 있도록 하지요." 표면적으로는 은근했지만 그 목소리는 싸늘해서 그레일을 존경하 는 따위의 느낌은 전혀 없었다. 딜란트는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발자 국 소리도 우렁차게 복도 쪽으로 내려갔다. 발자국 소리에 뒤섞여 높 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레일은 흑기사가 사라진 문 쪽을 향해 불타오르는 시선을 거둘 줄 몰랐다. "언제까지 불손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지 어디 두고 보자." 그레일은 내뱉듯이 말했다. 그러나 복도를 걸어가면서 딜란트 또한 양날검 공작이 말한 것과 똑같은 대사를 중얼거렸다. "어떻게 됐습니까? 딜란트 경!" 복도가 꺾어지는 곳에서 한 남자가 그를 공손하게 맞아들였다. 검 게 칠한 갑옷을 입은 중년을 넘긴 나이의 남자였다. "고생 많다, 벡. 저택에서 기다렸어도 될 텐데." "그렇지 않습니다. 저 비열한 자가 어떤 함정을 파 놓았을지 모릅 니다." "저자가 술책을 부리면 오히려 내게 좋은 기회가 오는 거지. 저자 를 처단할 좋은 구실이 생기니까." "그렇지만 저자는 신왕 폐하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습니까?" "신왕 폐하께서 또다시 기적을 일으키실 모양이야. 신수의 어금니 성채를 뿌리뽑고 단번에 시레네를 함락시키겠다고 그레일 놈이 기염 을 토하더군." "그게 가능할까요?" "아마도 가능할 거야. 지금까지 열심히 버텼지만 은빛늑대부족도 이제 끝장일 테지. 이건 다른 이야긴데 말이야……." 딜란트는 기사를 곁으로 불러 무언가 귓속말을 나누었다. "호오, 그런 일이."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사나이의 표정이 금세 환하게 변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들었지. 신뢰할 수 있는 놈을 하나 부탁해." "알겠습니다." 두 기사는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성채의 복도를 걸었다. 발자국 소리 가 뚜벅뚜벅 사방으로 퍼졌다. 제4장 주기의 신수왕 1 시레네 부락은 이스칼리아 지방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 부락의 중앙은 이스칼리아 지방을 동서로 가르는 도로가 지나고 있으며 망각 의 땅 포레슬에서 러브래들의 대지협 지대까지 이르는 길의 출발 지 점이기도 하다. 크리스타니아에선 최근까지 도로가 발달하지 못했다. 이스칼리아 를 종단하는 이 도로조차 두 대의 짐차가 겨우 지나갈 정도에 불과하 며 돌이나 벽돌 등으로 포장되지도 않았다. 맨땅의 도로는 비가 내리 면 질척거려 걷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짐차의 바퀴 폭도 통일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바퀴를 앞서 난 수레 자국을 따라 달리게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지난날 신수민족은 자기 부족의 지배지에서 밖으로 나간 적이 없 었다. 사람의 왕래도 거의 없고 주변 부락과도 거의 교류가 없었다. 그러나 3백년 전에 암흑민족이 배반의 땅에 상륙하고 크리스타니 아 본토로 침략하자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베르디아 반도와 영토 를 접하고 있는 핀갈 지방 북부에 세력을 둔 큰사슴의 신수 딜레온을 섬기는 갈래뿔부족과 이스칼리아 서부의 초원지대를 지배하는 여우 의 신수 스매쉬에 속하는 두얼굴부족은 다른 부족에 비해 무력이 뒤 졌다. 그런 까닭에 다른 부족에게 원군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리 하여 조직된 것이 용병단 신수의 어금니였다. 신수민족에 속해 있는 각 부족은 전사들을 보내고 식량과 무기 등 의 원조를 해 왔다. 어떤 면에서는 두얼굴부족이 상인들을 조직해 크 리스타니아 각지를 돌며 다른 부족들로부터 전사를 모으고 원조 물자 를 구했다고도할 수 있다. 두얼굴부족의 대상들은 각 부족의 특산품을 다른 부족의 특산품과 교환하면서 여행을 계속해 최종적으로는 신수의 어금니 성채로 날라 왔다. 이것이 크리스타니아의 교역의 시초를 이루었다. 도로가 정비된 것 은 그 이후의 일이었다. 그리고 신수민족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을 떠 나 낯선 땅을 여행하게 되었다. 두얼굴부족의 상인들은 십 년 전에 신 수 스매쉬의 신탁에 의해 베르디아군 쪽으로 돌아선 뒤 모습을 나타 내지 않았다. 그러나 교류와 교역은 남았다. 이곳 시레네 부락에도 은빛늑대 백 성들에 뒤섞여 다른 부족 사람들의 모습이 드문드문 보였다. "여기 부락도 변했어……." 서문으로 들어가 족장의 저택 쪽을 향해 걸어가면서 마리스는 아 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를 둘러 싸듯 다섯 전사들이 묵묵히 곁에서 걸었다. 그들은 모두 하켄 부락 출 신의 전사들로 용병단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서 이곳에 이르는 동안 마리스의 호위병 역할을 맡았다. 보통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서 시레네 부락까지는 닷새 정도 걸리 지만 마리스는 사흘이 안 돼 이곳에 도착했다. 물론 능력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은빛늑대의 다리 힘을 빌려 단숨에 달려왔던 것이다. 마리스가 이곳 은빛늑대부족 최대의 부락을 방문한 것은 3년 만의 일이었다.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부락의 분위기는 놀라울 정 도로 달라졌다. 시레네 부락도 다른 은빛늑대 부락과 마찬가지로 가능한 한 숲을 손상시키지 않고 건조되었다. 통나무를 짜올린 뒤 지붕에 짚을 얹은 집들이 나무들 사이에 줄지어 이어졌기 때문에 마을은 길고 가늘게 형성되어 있었다. 주위의 나무에서 뻗어나온 큰 나무 줄기가 지붕 위 를 덮을 듯이 무성해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이 지붕 위에 물고 기 비늘을 닮은 모양을 그려냈다. 숲의 나무들이 거의 같은 간격으로 나 있기 때문에 건물 또한 나란 히 지어졌고 도로도 격자 모양이었다. 그러나 부락의 한가운데를 지 나는 작은 강이 뱀처럼 꾸불꾸불 흐르고 있어 단조로운 부락 풍경에 많은 변화를 안겨주었다. 마리스가 걷고 있는 길 양쪽으론 주막과 식당들이 즐비하게 늘어 섰고, 그 사이사이에 화려한 색상의 천 위에 여러 가지 물건을 늘어놓 고 파는 행상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다. 두얼굴부족의 대 상이 오지 않게 되고 나서 교역의 매력에 빠져든 사람들이 자기가 태 어난 부락에서 나와 행상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은이나 금과 같은 보석들이 화폐로 쓰였다. 모피의 수와 곡물의 양으로 물건값을 매기던 것은 이제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주기가 무너지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고민족의 왕국 슬루프나 베르디아, 그리고 잃어버린 대지에 왕국을 세운 신민족은 아주 먼 옛날부터 그런 것을 가지고 물건을 교환했다 고 한다. "주기의 원칙은 변화를 부정하고 있는 게 아닐까?" 마리스는 무심결에 혼잣말을 했다. 변화는 혼돈에 속하는 힘이었 다. 주기가 다스리는 세계에서는 같은 역사가 영원히 반복되기 때문 에 변화라는 개념과는 인연이 멀었다. 그래서 크리스타니아는 영원히 계속되는 완전한 세계였다. 시레네의 족장과 하켄의 족장으로부터 그렇게 배웠다. 그러나 신수 민족은 외부로부터의 압력에 의해 바라건 바라지 않건 변화를 강요당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시레네 부락을 보니 사람들은 이미 그 변화를 받아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발……." 그때 갑자기 마리스를 가리키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한 노인이 마리스를 향해 정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마 리스는 노인을 향해 미소 지으면서도 착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은발 인간이라는 이유 때문에 마리스는 동족들로부터 언제나 특별 한 취급을 받아왔다. 존경, 숭배, 경외, 선망 등등……. 태어났을 때부 터 계속 그랬다. 그런데도 마리스는 아직 그것에 익숙해지지 않았다. 머리카락이 은빛이라는 이유만으로 왜 다른 아이들과 달라야 하는 지 마리스는 어려서부터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는 놀 수도 없었다. 전사들은 마리스에게 무기 다루는 법을 알려주었 고, 노인들은 부족의 전설과 관습을 가르쳤으며, 장로는 부락을 다스 리는 데 필요한 핵심적인 가르침을 전수시켰다. 그 모든 까닭을 알게 된 것은 열 살 때 하켄의 예비 족장이 되어 이곳 시레네 부락에 사는 족장을 만나고 나서였다. 족장은 은발을 한 사람만이 페네스에게 선택받은 사람이고 차기의 족장이 될 자격을 가 지게 된다는 것을 마리스에서 알려주었다. 10만 명이 넘는 은빛늑대부족 가운데 은발은 현재의 족장 로프와 동쪽의 대부락 메일렌의 장로 탈리오, 그리고 이슬로의 예비 족장이 었던 타닐과 하켄의 예비 족장 마리스 등 단 4명에 불과했다. 자신이 은발이라는 것이 마리스는 기쁘지 않았다. 고통이라고까지 야 말할 수 없었지만 커다란 중압감으로 다가오는 것만은 분명했다. 게다가 지금 은빛늑대부족은 크리스타니아 창세 이래 최대의 위기 상 황이었다. 은발이라는 이유만으로 마리스는 이 위기를 타개해야 하는 책임을 떠안게 됐다. 인구 5백 명이 채 안 되는 하켄 부락조차 구하지 못한 자신이 과연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잠겨 무심결 에 걷다보니 어느새 장로의 저택 앞이었다. 장로의 저택은 큰길에서 옆길로 꺾어들어간 막다른 곳에 있었는데 이곳만큼은 넓은 숲을 침범하여 나무를 베어 넘기고 만들어졌다. 저 택의 주위에는 사람 키 정도 높이의 담장이 원형으로 둘러져 있고 정 면에는 통나무로 짠 튼튼한 문이 달려 있었다. 지금은 안쪽으로 열려 있지만 밤이 되면 꼭 닫혔다. 그것은 전쟁이 벌어질 때도 마찬가지였 다. 문 앞에는 건장한 전사 두 명이 장창을 들고 서 있었다. 갑옷은 입 고 있지 않았지만 상반신이 다 가려질 정도의 커다란 원형 방패로 무 장한 상태였다. 마리스는 그들 쪽으로 다가서면서 가볍게 인사를 했 다. "당신은 분명 하켄의……." 전사 가운데 한 사람이 마리스를 알아보고는 말을 걸어왔다. 마리 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비 족장 마리스입니다. 족장님께 드릴 부탁이 있어 찾아왔습니 다." 그 수위의 얼굴을 기억할 순 없었지만 3년 전에 찾아왔을 때 만났 던 모양이었다. "자, 안으로 드시죠. 마침 메일렌 장로님도 계십니다. 두 분 모두 기 뻐하실 겁니다." "메일렌의 탈리오님께서?" 마리스는 의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탈리오 또한 은발이었다. "암흑민족이 쳐들어올 것 같기 때문이랍니다. 어떻게 맞싸울까 협 의를 하고 계실 겁니다." 수위는 대답하면서 마리스에게 손을 내뻗으며 문 안쪽으로 어서 들어가라는 손짓을 했다. 마리스는 성채에서부터 호위를 맡아준 다섯 전사들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내고는 문턱을 넘어서 저택 안마당으로 들어갔다. 정면 안쪽에는 장로의 안채가 있고 왼쪽에는 마구간, 오른 쪽에는 병영이 세워져 있었다. 마리스와 다섯 전사는 세 건물로 둘러 싸인 안마당을 가로질렀다. 장로가 있는 안채 현관 앞에도 전사가 한 사람 서 있었지만 마리스 의 모습을, 아니 그보다는 그녀의 은발을 보자 말없이 고개 숙인 뒤 길을 비켜주었다. 마리스는 같이 온 전사들에게 안마당에서 기다리라고 말하고는 혼 자 문을 열고 안채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선 곳은 대청이었다. 그곳에선 각종 청원과 분쟁의 조정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30명 정도 보였다. 족장의 저택에 찾아오는 사람은 부락의 장로나 예비 족장, 기 사단의 우두머리, 제사관 같은 부족의 실력자들뿐이었는데 그들의 능 력을 벗어나는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곳에 찾아오는 것이었다. 마리스는 사람들 속에 메일렌의 족장 탈리오의 은발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족장 로프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으로 들어온 마리스를 보고 대청에서 대기하던 사람들 사이에 작은 동요가 일어났다. "은발!" "분명 하켄의……." 그런 속삭임이 들렸다. 마리스는 사람들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비어 있는 통나무 의자에 앉았다. 바로 옆 테이블에 먹을 것이 놓인 접시가 늘어져 있고 도자기 병에는 마실 것도 준비되어 있었다. 여기 오는 사흘 동안 거의 먹지도 마시지도 못한 채 달렸기 때문에 심한 공복감이 느껴졌다. '은발을 한 사람도 배가 고프지.' 마리스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난폭한 손놀림으로 음 식물을 집어들었다. 가까이 있던 젊은 전사가 긴장된 표정으로 마리 스에게 음료가 담긴 잔을 건네주었다. "고마워요." 마리스는 웃는 얼굴로 인사하고는 잔을 받아들었다. 잔에 담겨 있 는 것은 포도주였다. 가볍게 한 모금 목에 흘려넣었는데도 온 몸이 불 에 데인 듯 달아오르다가 축 풀어졌다. 마리스는 무의식적으로 나무 열매를 재료로 얇게 구운 빵을 찢어서 입으로 날랐다. 문득 문 밖에서 기다릴 다섯 전사도 먹은게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떠올라 비어 있는 접시에 빵 열 개 정도를 얹은 뒤 포도주가 든 병을 들고 일어섰 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건물 모퉁이에 원을 이루고 앉아 있는 전 사들에게로 걸음을 옮기니 한 전사가 환성을 올리며 마리스에게로 뛰 어왔다. "여기서 잠시 기다려야 할 것 같아요. 여러분은 큰길 중간에 있던 주막에라도 가서 기다리세요. 장로와 이야기가 끝나면 나도 갈 테니 까." 마리스는 허리에 찬 작은 주머니에서 보석 한 개와 금붙이 약간을 꺼내서 그 전사에게 건넸다. "이거 받아도 괜찮은가요?" "물론입니다." 마리스는 미소로 답했다. 그리고 다섯 사람에게 인사를 건넨 뒤 다 시 족장의 안채로 들어갔다. "오오, 이거 하켄의 예비 족장이 아닌가!" 집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활기 찬 소리가 들렸다. "탈리오님!" 메일렌 부락의 족장 탈리오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40대 후반의 사 나이였다. 탈리오는 마리스 곁으로 다가와 통나무 같은 팔로 덥석 마 리스를 껴안았다. 키가 상당히 컸기 때문에 마리스의 얼굴은 두툼한 가슴에 파묻혀버려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하켄이 침략당했다는 건 소문을 들어서 알고있었지. 얼마나 걱정 했는지 알아. 정말, 다행이야. 이렇게 무사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