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9) 01/28 11:15 318 line "이런 경우 강하고 약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아. 예를 들면 아이일 지라도 관계가 없어. 중요한 것은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뭉치는 거야." "신수민족을 하나로……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까요?" "그건 모르겠어. 그렇지만 우리들 고향의 섬에서는 영웅을 중심으 로 사람들이 결속했어. 고대의 미궁으로부터 재앙을 일으키는 신들이 해방되었을 때에는 여섯 영웅들이 마신왕을 무찔러 섬의 위기를 구했 고, 암흑민족의 조상들과 싸웠을 때에는 사막 나라의 영웅왕과 자유 기사로 불리던 용사가 나타나 선두에 서서 싸웠어. 그들의 힘이 없었 다면 고향의 섬은 암흑민족에게 지배당하고 말았을 거야. 만약 그랬 다면 암흑민족이 베르디아에 상륙하는 일도 없었을 테지." 계단을 내려가면서 레일즈는 복잡한 생각에 잠겼다. "신수민족이 단결해서 베르디아군과 싸운다면 틀림없이 승리를 거 두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마리스는 슬프게 미소 지었다. "신수민족 가운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게 문제지." 신수민족은 각 부족마다 독립적으로 움직였는데 그것이 바로 폐해 가 되고 있는 셈이었다. "전쟁을 종결시키는 문제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로 하지. 그보다 지금은 이곳 성채의 식량 문제가 시급해. 이곳 성채가 함락당하지 않 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해." 마리스는 그 말이 옳다며 애써 밝은 표정을 지었다. 계단을 다 내려 와 레일즈와 마리스는 1층 복도로 나왔다. 1층에는 큰 방이 열 개 있 었고 각각 열 명에서 스무 명 정도의 전사나 잡무를 처리하는 비전투 원이 기거했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는 같은 규모의 병영이 여덟 동 이 있었는데 모두 1천5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았다. 베르디아군의 정확한 수는 모르지만 이슬로 부락의 자리에 세워진 성채에는 1만 명 정도의 군사가 주둔하고 있다고 했다. 거쉰의 이야 기에 따르면 그 중 대다수가 요마 아니면 신왕 지배하의 맹호부족의 전사들인데, 암흑민족의 지배자 계급에 해당하는 암흑기사단은 이번 전쟁에서는 왠지 눈에 띄는 움직임이 없다고 했다. 신왕이 부활했을 때 베르디아 내부에서 내란이 있었던 것 같다는 소문도 떠돌았다고 했다. 하지만 설사 사실이라 해도 그건 십 년 전의 일일 뿐, 지금은 정국이 안정돼 있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이 다낭과 일치하는 것 같아 레일즈는 신왕에 대한 반대 세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해보았다. 그 세력과 연합해 적을 안 쪽에서부터 무너뜨릴 수 있다면 전황을 호전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 였다. "저는 내일 아침 일찍 성채를 출발하겠습니다. 열흘 안에는 돌아올 테니까 기대해 주십시오." 레일즈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마리스와 헤어지는 것은 섭섭했지만 그런 감정에 사로잡혀 지낼 때가 아니었다. 레일즈도 다른 백인대장 을 설득해 주변 부락의 순회를 할 부대를 조직해야 했다. 자신이 낸 의견이었기에 레일즈도 순회에 나설 생각이었다. 레일즈는 마리스와 작별을 고하고 사이아가 기다리는 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3 다음날 아침, 날이 새기 전에 마리스는 시레네 부락을 목표로 삼아 길을 나섰다. 레일즈는 동문 쪽에서 그녀를 전송하며 잠시 동안 작별 하는 아쉬움을 달랬다. 호위병으로서 그녀 부락의 전사들 몇 사람이 동행했다. 마리스는 어쩌면 타닐도 함께 가기를 원했던 것 같았다. 그 러나 은발의 백인대장은 마리스의 희망을 한 마디로 거절했다. 마리스와 타닐이 어떤 관계인지 레일즈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단순한 관계가 아닌 것은 분명했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아 11명의 백인대장이 올겐스 단장 방에 모여들었다. 단장은 레일즈로부터 제안이 있었으며 그것을 승인했다 고 선언하고는 주변 부락을 순회하라고 명령했다. 불만의 소리도 몇 마디 있었지만 강경하게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갈기부족 사람이 승인했다면 그 결정에 대해 무조건 경의를 표하 게 돼 있는 신수민족 사이의 법칙 때문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식량 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서 모두가 뼈저리게 느끼고 무언가손을 써 야 한다는 데에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그 뒤 백인대장들은 누가 순회하는가, 어떤 부락을 어떤 순서로 순 회하는가를 결정했다. 순회하는 부대의 지휘에는 레일즈 외에 갈기부족의 백인대장 칼리 오와 고고부족의 백인대장 난스가 거명되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거 쉰이 지명했다. 이 두 사람은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최고참 백 인대장의 지명이라서 거절하진 않았다. 거쉰과 타닐이 성채에 남아 있기로 한 것은 레일즈에게도 다행이었다. 이유야 어찌 됐건 부락 순회는 전력을 분산시키는 결과가 되므로 만일그때 성채의 허약한 틈을 타 적이 공격해 오면 여간 심각한 문제 가 아니었다. "우리가 순회하게 되면 부락 사람들은 심리적 안정감을 얻고 우리 를 신뢰하게 될 것이다. 순회지 부락에선 틀림없이 성대히 음식을 내 올 터이므로 여분의 식량이 있으면 가지고 돌아오는 것을 잊지 말도 록." 다짐하는 단장의 말을 끝으로 그 자리는 해산되었다. 단장의 방을 나와 자기 방으로 돌아오면서 레일즈는 지금부터가 걱정이었다. 누구 를 데리고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같은 방에 있는 어금니 부족의 전사들과 친하긴 했지만, 그들이 과연 전투를 벌일지의 여부 도 확실하지 않은 순회 길에 나서려 할지 자신이 없었다. 전투 이외의 것에 대해서는 게을러야 한다는 것이 그들 부족의 신 조였다. 거쉰이 순회에 나서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임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되면 신참자들 가운데서 골라야 하는데 레일즈와 마음을 터놓 고 지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갈래뿔부족의 젊은이 딜은 내기 시합이 있던 날 밤 이후로, 레일즈 가 전투에 나설 때마다 동참했다. 그리고 짬만 나면 레일즈에게 검술 을 배워 조금씩 어엿한 전사로 성장하고 있었다. 레일즈가 부탁하면 딜은 따라줄 것이다. 그러나 그 밖에는 딱히 짚이는 사람이 없었다. 적당히 대화를 나눠 데리고 가는 방법밖에 없다. 그렇게 결심했을 때 레일즈는 어느덧 자 기 방 앞에 와 있었다. 거쉰은 방에 돌아올 생각이 없었던지 어느 틈 엔가 사라졌다. 문을 열자 사이아 등이 맞아주었다. "어떻게 됐어?" 사이아가 염려스럽게 물었다. "내가 제안한 대로 결정됐어. 이제 곧 순회에 나서서 닷새 정도 지 나면 돌아올 거야." "닷새나……." 사이아는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순식간이야." 레일즈는 사이아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물 흐르는 듯한 금빛 머리 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사이아는 얼굴을 들고 가만히 레일즈를 바라봤다. 맑은 샘물 같은 빛깔의 눈에 진지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레일즈는 자신이 사이아를 너무 어린애 취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 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나도 갈 거야." 사이아가 말했다. "가다니, 우리는 싸우러 가는 거야." 사이아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있어, 그런 것쯤은." 골이 난 것 같기도 하고 울 것 같기도 한 목소리로 사이아가 말했 다.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의 목소리였다. "난 말야, 도대체 무얼 해야 하나 쭉 생각하고 있었어. 그리고 결심 했어. 레일즈에게 힘이 돼주고 싶어. 그러기 위해서 나도 강하게 변할 거야." "네 마음만은 정말 기뻐. 하지만……." "내가 성가시단 말이니?" "그런 말이 아니야."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레일즈는 기가 질렸다. "하지만 너무 위험해. 솔직히 말하면 사이아와 비인에게는 지금이 라도 다낭에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할 정도야. 이곳 성채에 머 물러 있으면 언제 전쟁에 휘말려 목숨을 잃을지 모르니까……." "그런 정도는 알고 있어." "무섭지 않아?" "무서워, 그건 당연하잖아." 그 말을 뒷받침하듯 사이아는 몸을 떨었다. "처음엔 나도 죽는 게 무서워서 많이 떨었어. 시간이 꽤 지난 지금 도 그래. 전쟁터에서는 언제나 떨어. 떨면서 싸우는 거야. 전투가 끝 나고 나서 토한 적이 한두 번이 아냐. 그리고 사이아한테는 다른 사람 을 해치는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아." "내가 여자라서?" "그것도 있어." 레일즈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여성은 새로운 생명을 낳고 기르는 신성한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였다. 피묻은 손으로 천진무구한 갓난아 이를 안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라고 남을 해치고 싶겠어? 하지만 너를 해치려는 사람은 누가 됐건 용서하지 않을 거야. 나에게는 마법이 있어. 전쟁을 위해 마법을 쓰는 것은 금기시되긴 하지만 옛날부터 마법은 사실 전쟁을 위한 도 구였어. 그렇지 않았다면 화구(파이어 볼)의 주문 따위가 생겨났을 리 없어. 그 주문은 파괴 이외의 목적에는 사용할 수 없는 거잖아." 그 말도 의심할 수 없는 진실이었다. 마술사들은 스스로를 현자라 고 칭하기도 하지만 여러 종류의 파괴의 마법을 개발했고 특히 전쟁 때에는 작전 고문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기도 했다. 틀림없이 말리드 재상 아래에도 중요한 결정에 도움을 주는 우수한 마술사가 있을 것이다. 사이아의 마음은 레일즈에겐 정말 큰 기쁨이었다. 이런 정도로까지 자신을 염려해 주었는가 싶어 새삼스럽게 고마움을 느꼈다. 최근에는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도저히 사이아에게까지 신경을 써줄 수 없었는 데……. "우리는 이곳 세계에 모험을 하기 위해 찾아왔어. 하지만 잘 생각 해보면, 이게 무슨 모험이야?"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었다. "얼버무리지 마!" "얼버무릴 생각은 없어. 단지……." "부탁이야, 레일즈. 나도 데리고 가줘. 주문서가 없어도 마법을 걸 수 있게 되었단 말야." 레일즈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망설였다. "그래, 레일즈." 이번에는 비인이었다. 이 정령사 소년은 변성기도 아직 지나지 않 은데다 혀까지 짧아서 때때로 여자 목소리처럼 들렸다. 비인 또한 결심을 굳힌 얼굴로 이야기했다. "무슨 소리야?" "사이아의 말을 듣고 나도 결심했어. 여기 성채에서 레일즈를 기다 려봤댔자 아무 소용없어. 이야기를 들어보면 베르디아군은 무자비하 다고 그러던데 뭐. 지배의 신수왕의 가르침이라는 게 한 마디로 약육 강식이더라구. 나 같은 겁쟁이는 그런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에선 살 아갈 수가 없어." "그래서 싸운다는 거야?" "싸울지 어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레일즈를 따라가겠어. 만약 위급한 일이 생기면 은신의 주문을 써서 사라져버릴 거야. 줄행랑 치 는 건 누구한테도 안 져!" 비인의 말에 레일즈는 마음을 굳혔다. 이대로 성채에 있는다 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차라리 자기에게 가까이 있는 편 이 만일의 경우 보호해 주기에 유리했다. 레일즈는 밧소와 샤일론 두 사람에게 의견을 물었다. "싸우는 게 그렇게 선뜻 내키진 않아. 그렇지만 성채에 남아 답답 하게 지내는 것도 불안해." 어쩌면 두 사람도 행동을 함께 해줄 것 같았다. 숙련된 모험자 둘이 따라온다면 힘이 될 게 분명했다. "좋아, 결심했다." 그렇게 말하고 레일즈는 사이아에게 미소 지었다. "모두 함께 가자. 임무는 어디까지나 순회하는 것이니까 전투가 벌 어질 가능성은 적어. 게다가 마법의 호위까지 있다면, 마음 든든하 지." "고마워, 레일즈." 사이아는 얼굴을 활짝 펴며 레일즈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말할 것 없어. 그렇지만 정말 정신 차려야 해. 그리고 전투 가 벌어지면 재빨리 달아나야 해. 마법의 호위라면 싸움터에서 좀 떨 어진 곳에서라도 가능할 테니까." 그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사이아는 레일즈의 등 뒤로 손을 두르 고 꼭 껴안았다. 그녀의 연약한 가슴에 살짝 솟은 봉우리가 느껴졌다. 레일즈는 가볍게 안아주고 나서 등을 살짝 두드리며 떨어지라는 신호 를 보냈다. 아쉬움을 잔뜩 남긴 채 사이아가 레일즈의 품을 벗어났다. "이왕 가기로 했으니 준비를 서둘러. 해가 지기 전에 최초의 부락 에 도착해야 하니까." "정말, 넌 바쁜 놈이야." 밧소가 질렸다는 듯이 말했다. "바쁘지. 지금부터 15명 정도를 더 모아야 하니까." 레일즈는 밧소에게 대답하고 그 말대로 곧바로 방에서 뛰쳐나갔다. 다른 백인대장보다 빨리 행동에 옮기지 않으면 강한 전사를 모을 수 없게 된다. 지금 그에게는 믿음직한 조력자가 애타도록 아쉬웠다. 4 폭포 소리가 격렬하다. 바람에 실려 물보라가 날아오는 모양이다. 잿빛이 뒤섞인 금발이 습기를 머금어 무거워진 느낌이다. 눈앞에는 웅대하게 치솟은 절벽이 있었다. 신의 성벽이라 불리는 절벽이다. 이 절벽 때문에 다낭 사람들은 2백 년이 넘는 오랜 세월 동 안 신들이 사는 땅이라고 노래 부르는 크리스타니아 대륙으로 한 걸 음도 내디딜 수가 없었다. "십 년 전과 똑같군……." 남자는 중얼거리며 신의 성벽을 가르고 있는 거대한 균열에서 눈 길을 떼지 못했다. 동시에 마음은 먼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이 변 경의 마을 하크의 영주로서 왕도에서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다. 재상 으로부터 이 마을에 웅크리고 있는 왕당파를 쓸어버리고 한 남자의 생명을박탈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 남자의 이름은 하벤으로, 하크 마을의 본디 영주이며 서자이긴 하지만 선왕의 피를 이어받은 왕족이었다. 그 남자는 다투기를 원하지 않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하 벤의 피를 이어받은 한 젊은이가 다섯 사람들과 함께 지금 눈앞에 있 는 균열을 통해 신들이 사는 땅으로 올라갔다. 음유시인들은 이들 여섯 사람을 신에게서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노 래해 그들의 이름은 세상에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물론 그들이 올라 가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기억 속에도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 남자는 피보라 기사라고 불리는 다낭 왕국의 근위 기사단장 랏 셀 윈잘이었다. 한 왕국의 기사단장이지만 상급 기사가 되어 가명(家 名)을 부여받은 지는 아직 십 년밖에 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다시 이 절벽 앞에 와 있는 것이다. 갑옷도 없이 장검만을 허리에 찬 채 밤색 의 준마에 걸터앉은 그에게선 왠지 모를 차가운 바람이 일었다. 바람 에 펄럭이는 망토는 겉과 속이 모두 진홍빛이었는데 피보라 기사라 불리게 되고 나서 즐겨 입는 색이었다. 랏셀은 짧게 깎은 머리를 뒤로 넘기고 다녔기 때문에 널따란 이마 가 더욱 강조돼 보였다. 야윈 뺨에서 턱까지 더부룩하게 수염이 나 있 었다. "이 균열이 생기고 나서 이미 4개월이 지났는데도 다시 닫힐 기색 이 없다는 건가?" 랏셀은 정면에 눈을 둔 채로 혼잣말처럼 물었다. 음유시인도 이럴 까 할 정도로 맑은 목소리가 깐깐한 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그럴 것 같습니다." 랏셀의 뒤에 있던 남자가 그렇게 대답했다. 그 남자 또한 기사의 복장이었다. 이름은 노르바. 4개월 전에 왕성에 숨어든 도적을 추격하 라는 명을 받고 하크 마을까지 찾아왔다. 도적은 일단 체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대지진으로 인 해 감옥이 부서지고 도적은 다시 도망쳤다. 기를 쓰고 행방을 조사하 다가 이 거대한 균열을 발견했던 것이다. 노르바는 이 사실을 왕성에 있는 재상에게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 렸다. 도적들은 이 균열을 타고 올라가 신의 성벽 저 너머로 도망갔음 에 틀림없다. 왕도로부터 새로 몇 명의 기사가 더 파견되었다. 그러나 사람 수는 늘었지만 하급 기사로서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어쨌 든 이 신의 성벽 너머에 있는 것은 신들의 성지가 아닌가. 이리저리 망설이다가 노르바는 근위 기사단장 랏셀의 내방을 원했다. 기사단장 에게 보내는 탄원서에는 몰래 그의 아들에 관한 소문도 첨부했다. 피보라 기사의 아들이 두 친구와 함께 신들이 사는 땅으로 올라갔 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왕도로 간다는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난 뒤 그의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사단장의 부인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녀의 입에서도 소문을 긍정하는 듯한 대답을 얻었다. 탄원서를 보내고 나서도 1개월 이상 기다렸다. 북쪽에서 소규모의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랏셀은 근 위기사단의 정예를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지만 반란군의 저항이 거세 그의 귀환이 예상보다 늦어졌다. 랏셀이 이 마을에 도착한 것은 어젯 밤 늦게였다. 그리고 아침 일찍 이곳 신의 성벽으로 안내되어 왔던 것 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노르바가 물었다. "가는 수밖에 없지." 랏셀은 그렇게 대답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너는 도적을 토벌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니 도적이 신들이 사는 땅으로 도망쳤다면 그 땅 끝까지라도 쫓아가는 것이 너의 임무다." 생각도 못 한 대답이었다. 경악하는 마음으로 노르바는 피보라기사 를 곁눈질했다. 턱 끝이 살짝 휘어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드님을 찾아오라는 말씀이십니까?"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내 아들은 자기 의지로 저 땅 으로 올라갔을 뿐이다. 그러니 자기 의지로 내려올 것이다." 그렇게 말하고 랏셀은 노르바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이 실낱처럼 가늘었다. "아, 알겠습니다……." 그 날카로운 시선에 압도되어 노르바는 말 위에서 설설 기었다. "알았으면 즉시 떠날 채비를 차리도록." "저, 저 혼자 갑니까?" "불안한가?" 하크 마을 쪽으로 말을 달리면서 기사단장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 했다. "아닙니다, 절대로 그럴 리가." "그렇다면 혼자서 가라. 불안하면 두세 사람 데리고 가도 좋고……." "죄, 죄송합니다. 본심을 말하자면 아무래도 약간……." 노르바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말꼬리를 흐렸다. "그럼, 누굴 붙여 주시겠습니까?" "적임자를 데리고 왔다." 랏셀의 얼굴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지난날 도적의 동료였던 모험자들이다. 모두 상당한 솜씨가 있다. 재상 각하에 대한 충성심만큼은 모르겠다만." 노르바는 경악했다. 어떻게 그 사람들이 적임자란 말인가. 그는 도 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어쩌면 랏셀은 자기를 처분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밀하게 아들에 관해 조사해 알렸기 때문 에 도리어 의심을 품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얼굴이 창백하군. 마음속에 불만이 있는 것을 상대방에게 읽혀서 는 근위기사의 품위가 떨어진다." "죄, 죄송합니다." 피보라 기사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은 단순히 검술 솜씨 때문만 이 아님을 노르바는 새삼스레 머리에 떠올렸다. 날카로운 그의 눈은 사람의 마음까지 꿰뚫어본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안심해도 좋다. 내가 보는 한 그 모험자들은 이익을 위해 움직인 다. 괴로운 도망 생활보다도 재상 각하의 충실한 종복으로서 영화를 누리길 바라고 있다. 위엄을 잃지 말라. 크리스타니아에 올라가고 나 서는 임기응변으로 대처토록 하라. 재상 각하가 무엇을 바라고 계시 는가, 그것만을 생각토록 하라. 그렇게 하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노르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곁에서 보면 살짝 고개를 숙인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폭포 소리를 뒤로 하면서 두 기사는 숲의 오솔길로 말을 달렸다. 노르바는 뒤로 돌아 다시 한 번 거대한 절벽을 바라봤다. 우뚝 솟은 절벽 그 너머에는 신들의 성지가 있다고 한다. 그곳으로 가라고 명령받았다.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고픈 심정이었다. 어떻게 자기 같은 속물이 신에게 선택받을 수 있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