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8) 01/27 09:21 310 line 제3장 징 조 1 레일즈가 백인대장의 지명을 받고 나서 이미 1개월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신수의 어금니는 들여다보면 볼수록 이상한 용병단이었다. 내기 시합이 있던 날 밤에 거쉰이 백인대장에 추천한다고 했을 때 레 일즈는 그냥 지나가는 농담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진심 이라고도 보지 않았다. 어찌 됐건 레일즈는 신참자에 불과했다. 게다 가 이민족 출신임을 거쉰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거쉰은 정말 레일즈를 올겐스 단장에게로 데 리고 갔다. 단장도 이상했다. 레일즈의 기예는 백인대장이 될 만하다 면서 그 자리에서 승인해 주었다. 이리하여 11번째의 백인대장이 탄 생했다. 그리고 백인대장이 됨과 동시에 선두에 서서 싸울 의무가 부 여되었다. 백인대장이 되고 나서 레일즈는 열 번 이상 출격했다. 근래에는 성 채 인근 부락을 베르디아군이 집중적으로 위협하고 있기 때문에 소규 모 전투가 끊이지 않았다. 처음 만났을 때 거쉰이 염려하던 대로 베르 디아군은 이곳 성채를 말려죽이려는 것 같았다. 신수의 어금니로 들 어가는 식량을 저지하는 것을 목표로 해서 인근 부락을 계속 습격했 다. 실제로 신수의 어금니는 심한 식량 부족을 겪고 있었고 시일이 지 남에 따라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오늘도 성채에서 강을 건너 서쪽으로 반나절 걸리는 마케트라는 부락이 베르디아의 요마들에게 습격당했다. 레일즈는 열 명 정도의 전사들을 데리고 마을로 달려갔다. 다행히 부락의 전사들과 협력해 그들을 격퇴할 수 있었지만 논밭이 황폐해지고 가축들이 몰살되어 부 락 사람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달아나는 요마들을 추격하여 궤멸시킨 뒤 돌아왔을 때는 이미 깊 은 밤이었다. 늦게나마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식탁에 앉았지만 사이 아가 날라온 접시 위에 놓여 있는 것은 끓는 물에 넣었다 건져낸 고기 한 조각과 나무 열매 몇 개, 거기에 본적이 없는 야채가 미안할 정도 로 조금 첨가되어 있을 뿐이었다. "겨우 이걸 먹으라고 내놓은 거야?" 날라온 요리를 보고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신음 소리를 냈다. "미안해, 레일즈." 사이아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오늘 할당된 것은 이것뿐이야. 물고기라도 좀 남았으면 좋았을 텐 데……." "그럼 왜 남겨 주지 않았지?" 레일즈는 아이들처럼 푸념을 해대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편 으론 분별력이 있다고 믿어온 자신이 지금 이런 일로 사이아에게 화 를 내고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레일즈는 순식간에 접시에 놓 인 음식을 비우고 텅 빈 접시를 사이아에게 건넸다. "미안해……." 접시를 돌려받을 때 사이아는 다시 한 번 사과했다. "사과할 것 없잖아. 잘못이 사이아한테 있는 것도 아닌데." 레일즈는 그렇게 말하면서 억지로 웃었다. 그렇지만 솔직히 말해 이렇게 해서는 체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전투에 나서면 몸과 마음이 모두 격렬하게 소모되기 때문에 충분한 식사와 휴식이 있어야만 몸상 태를 정상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레일즈는 사이아에게 식량이 얼 마나 남았는지 물어보았다. "아껴 쓰면 열흘은 버틸 수 있겠지만……." "열흘?" 생각보다 심각했다. "식량 조달도 전쟁 가운데 하나인데." 모험자가 될 꿈을 버리고 기사가 될 결심을 했을 때 레일즈는 기사 의 기본 소양이라고 생각하고 용병술을 연구한 적이 있었다. 수백 년 전에 고향의 섬에서 있었던 대전쟁을 기록한 역사서를 읽고 당시의 군제와 전술 등을 연구했던 것이다. 그 역사서에 따르면 커다란 전쟁 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보급이 얼마나 중요한지가 분명히 나와 있 었다. 영웅 전쟁과 거기에 뒤이어 사신전쟁이라 불린 대전 때에 사악한 암흑의 섬은 요마병단을 투입해 성왕국의 후방을 교란하고 능란하게 보급선을 차단함으로써 커다란 전과를 올렸고, 이 대전을 종결시킨 사막의 영웅왕은 기사단을 기능적으로 편성해 보급에 대해서도 주도 면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신수의 어금니는 보급에 관한 대책 이 전혀 없었다. 식량은 인근 부락에 의존하고 있었고 각종 무기의 보 급은 용병들의 책임 아래 이루어졌다. 무기는 사용하면 상하거나 부서지게 마련인데도 성채에는 예비 무 기가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최근에 레일즈는 섬멸한 적의 무기를 긁 어모아 성채로 가지고 돌아왔다. 마치 산적이나 들도적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부족한 무기를 어디에서도 대치할 수 없었다. 게다가 무기에 관한 한 베르디아군이 한발 앞섰다. 베르디아의 정규병은 연 속해서 쏠 수 있는 활과, 칼날을 물결 무늬로 가공해 성능을 높인 검 등을 갖추고 있었다. 그때 방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레일즈 일행이 들어 있는 방은 스무 명 정도가 들어가는 큰 방이었는데 레일즈 일행 다섯 명 외에 백인대장 거쉰과 어금니부족 전사들이 열 명 정도 함께 지냈다. 마리 스는 하켄 부락의 생존자 가운데 갈 곳이 없거나 스스로 신수의 어금 니에 머무르는 사람들과 다른 방에서 기거했다. 누가 들어왔나 살펴보니 비인과 밧소였다. 샤일론은 이미 방구석에 서 모포도 덮지 않은 채 자고 있었다. 샤일론의 코 고는 소리가 호쾌 하게 들려오는 덕분에 목소리를 낮추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다. "도대체 어디에 갔다 오는 거지?" 레일즈는 의아하게 생각하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이렇게 늦은 밤 에 급하게 처리할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잠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볼일이 있었어." 비인은 밧소의 대답을 흉내 내며 배시시 웃었다. 두 사람은 양손 가득히 먹을 것을 쥐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사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비인과 밧소가 가져온 것을 바라보 았다. "벌어왔어." 밧소는 자랑스럽다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벌어 왔다니, 혹시……." "훔쳐온 건 아냐!" 밧소는 시큰둥한 목소리로 사이아에게 대답했다. "은화 약간하고 술잔을 써서 말야." "써서, 말야." 비인이 다시 밧소를 흉내 내서 말하며 배꼽을 잡고 웃었다. "너 혹시 도박을 해서 벌은 거 아니니?" 레일즈가 묻자 밧소와 비인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래, 그거야." 그러면서 둘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만들 둬. 괜히 기분이 나빠지니까." 사이아가 그렇게 말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기를 치진 않았겠지." 레일즈는 다짐하듯 말했다. "당연하잖아. 그런 짓은 안 해." 밧소는 불만스러운 듯 말했다. 당연하다고만 했지 정확한 대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하긴 했지만, 레일즈는 더 이상 깊이 추궁하 지 않기로 했다. "모두 배가 고파 어쩔 줄 몰라 하는 상황에서 식량을 탈취하는 건 올바르지 못해." "하지만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해야 할 거 아냐. 배를 곯는 건 전사 들만이 아냐. 우리들에겐 전사들 먹는 것의 절반밖에 할당이 안 돼. 전투가 없을 때는 우리가 더 바쁘게 마련인데도 말야." "그렇잖아도 지금 막 사이아하고 그 얘길 하고 있었어.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아." "심각한 정도가 아냐. 완전히 맛이 가고 있어." 밧소가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 "그래? 이거 진짜 손을 쓰지 않으면 큰일 나겠는걸. 신수민족에게 는 그들 나름대로의 전투 방식이 있다고 해서 가만히 있었는데……." "어떻게 선처해 주시지 않겠어요, 백인대장님!" 밧소가 짓궂게 웃으며 손에 든 과일 하나를 레일즈에게 던졌다. 레 일즈는 왼손으로 받아들고 그대로 입으로 옮겨서는 통째로 씹어 먹었 다. 아직 다 익지 않아선지 시큼한 맛이 입 안에 확 퍼졌다. "우리들은 신참이고 더군다나 타관 사람이야. 사실 이러니저러니 말하기 난처한 상황이지. 하지만 식량 문제만큼은 어떻게든 처리해야 해. 이대로 가다 보면 성채 전체의 사기가 뚝 떨어지고 말 거야." 전사들의 사기가 떨어지면 절반도 되지 않는 적에게 패배를 당하 는 경우도 생기는 법이다.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것은 의외로 정신 적인 요인이 컸다. "어쨌든 단장을 만나고 올게." 단장 올겐스의 방은 같은 병영의 2층이었다. "지금 당장?"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리고 나가는 레일즈를 향해 밧소가 놀라며 물 었다. "당연하지. 식량 여유분이 열흘치밖에 없다는데." "뭐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좋은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어쩌면 단장에게도 계책이 있는지도 모르고. 듣고 나면 안심할 수도 있잖아." 그 말을 남기고 레일즈는 방을 나서 계단 쪽으로 사라졌다. "허 참, 성미 급하기는." 멍하니 사라지는 레일즈를 지켜보며 밧소가 중얼거렸다. "레일즈다워, 옛날로 돌아간 것 같아." 비인이 으스대며 말했다. "아니네, 잘못 봤네!" 사이아는 비인에게 미소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옛날의 레일즈하고는 달라. 뭐라고 딱히 말하긴 곤란하지만 레일 즈는 변했어. 틀림없어." 사이아는 눈을 가늘게 하고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계단을 기 세 좋게 올라가는 소리가 문을 통해 들려왔다. 그 발소리에 귀를 기울 이면서 사이아는 생각했다. 레일즈에게 힘이 돼 주기 위해서는 나 자신도 변해야 하지 않을까? 2 레일즈는 단장실의 문을 가볍게 노크한 뒤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복도를 걷고 있을 때부터 낭랑한 올겐스 단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깨어 일어나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마리스……." 놀라지 않을 수없었다. 방 안에는 은발의 마리스가 있었기 때문이 다. 그녀는 길지 않은 옷을 머리부터 푹 뒤집어쓴 채 허리께를 끈으로 가볍게 묶었다. 놀라울 만큼 부드러운 손발이 옷소매와 옷단에서 뻗 어나와 어슴푸레한 불빛 속에서도 하이얀 살결이 눈부시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는 마리스도 놀라는 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는 녹색으 로 빛나는 눈동자가 불빛 때문인지 지금은 붉게 보였다. "레일즈님이 어떻게 이곳에?" "그건 내가 할 말인데." 레일즈는 당황해 하면서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단장을 향해 직립 부동의 자세를 취했다. "밤늦게 실례하겠습니다." "이상한 인사법이로군." 단장의 말에 레일즈는 문득 정신이 들었다. 신수의 어금니에는 상 하 관계가 없으므로 예의를 차리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레일즈는 기 사가 되려 했던 습성이 아직 다 사라지지 않은 탓인지 높임말을 사용 하거나 아주 정중한 태도를 취해 상대를 당황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 종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 무슨 볼일이라도 있나?" 기세가 꺾이고 말았지만 레일즈는 어쨌든 이 방에 찾아온 용건을 이야기했다. "식량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물론 알고 있다.식사 할당량을 줄여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이 있어 조사해보니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승인했지." "알고 있으면 왜 해결책을 찾아보지 않는 거죠!" 레일즈는 어조를 세게 하며, 단장 쪽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앞서 와 있던 마리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레일즈를 옆 눈으로 보며 마리스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뭐가 이상한가?" "이상하다니요. 다만 레일즈님이 저와 똑같은 이야기를 하기에… …." "똑같은 말을?" 레일즈는 약간 놀랐다. "내용은 거의 같다. 그러나 은빛늑대 소녀는 내가 무대책이라고 비 난하지는 않았네." "갈기부족 사람들에게는 의견을 물어봤자 소용없어요. 그들은 자 기 의견을 갖지 않고 남의 의견을 되도록 공평하게 들어주려 하니까 요." 마리스의 말을 듣고 레일즈는 올겐스가 '의견을 말하지 말라, 타인 의 의견을 들어라, 그리고 선택하라'는 승인자 딜레온의 가르침을 섬 기는 갈기부족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가르침은 레일즈도 납득 이 갔다. 자기 의견을 내게 되면 남의 의견을 받아들이기가 어렵게 된다. 아무래도 자기 의견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해 버리기 때문 이다. "자, 이제 알았으면 자네 의견을 들려주지 않겠나? 이 사태를 해결 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책이 있을까?" "마리스는 도대체 어떤 의견을?" 밧소들에게도 이야기한 것처럼 레일즈에게는 몇 가지의 방책이 있 었다. 그러나 마리스가 어떤 제안을 했는지 궁금했다. "시레네 부락에 사자를 보내 식량을 원조받자고 제안했습니다." "보내줄까?" "제가 부탁하면 문제 없을 겁니다." 마리스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마음 든든한데." 그녀는 변경 부락의 예비 족장에 불과했지만 신수 페네스에게 선 택받은 은발의 인간이었고 특히나 장로가 총애하는 인물이었다. 장래 은빛늑대부족의 족장이 될 운명이라고 양날검 공작 그레일도 말한 바 있지 않은가. 시레네는 은빛늑대부족 가운데 최대 부락으로 인구가 3만이 넘었 는데 부락의 주변은 은빛늑대 페네스에게 축복받은 풍요로운 숲으로 3만의 인구를 먹여살리고도 충분한 여유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베 르디아군과의 대결에 대비해 식량을 비축하고 있다는 소문도 있어, 신수의 어금니에 식량을 분배해줄 수 있을지 의문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마리스의 한 마디로 그것은 해소되었다. "레일즈, 자네 의견은?" "몇 가지 있습니다." 올겐스가 의견을 묻자 레일즈는 자신이 준비해 온 생각을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하나는 적으로부터 식량을 빼앗아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격해 오리라고는 적도 전혀 생각지 못하고 있을 것이므로 어느 정도 성공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지금까지 해 온 것처럼 인근의 부락 에 의지하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에는 용병들을 주변의 부락에 순회 시켜 사람들을 안심시키고 우리에 대한 신뢰감을 회복시켜야 합니다. 또 하나는 우리 나라, 곧 잃어버린 대지 다낭에 가서 식량을 사오는 방법입니다. 이 경우의 문제는 무엇을 식량과 교환할 것인가 하는 점 입니다." "대담한 의견도 있고 견실한 의견도 있구만." 올겐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의견을 내놓기도 어려운데 세 가지나 의견을 내다니 훌륭 해." "저에게는 아직 이곳 세계의 전체적 상황이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방법이 가장 실현 가능하고 효과적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마리스의 제안이 가장 견실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마리스의 제안은 분명히 효과적일 것이네. 은발의 전사가 사자로 나서주기만 하면 틀림없이 식량을 보내올 걸세. 동시에 자네 의견대 로 주변 부락에 대한 경계는 엄중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네." "고맙습니다." 레일즈는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습격해 오는 요마의 수는 삼십에서 오십 정도라고 합니다. 스무 명 정도의 부대를 다섯 개 정도 조직해서 정기적으로 부락을 순회시 키면 좋지 않겠습니까. 각각의 부락에는 하룻밤 정도 머무르다가 적 의 습격이 있으면 부락의 전사들과 협력하여 싸우면 됩니다. 지금은 요마들의 습격에 뒤쫓아가기에도 바쁩니다만 그렇게 하면 더 효과적 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봅니다." "흐음." 올겐스는 팔짱을 끼고 잠시 침묵했다. 레일즈는 자신이 지나친 말 을 한 건 아닐까 해서 불안했다. 지금 한 제안은 아무리 생각해도 신 수민족에게 어울리는 전략은 아니었다. "자네 의견은 하나하나 똑 맞아떨어지네." 레일즈의 예상과는 달리 올겐스는 힘차게 대답했다. 그리고 레일즈 의 제안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주었다. "내일부터라도 시작하지. 다른 백인대장에게는 내가 부탁하도록 하겠네." "고맙습니다." 레일즈는 환한 얼굴로 단장에게 인사한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마리스도 그 뒤를 따랐다. "아깐 정말 깜짝 놀랐어요." 복도로 나오자마자 마리스가 말을 꺼냈다. "나도 놀랐어." 레일즈가 대답하며 단장실을 뒤돌아봤다. "어쨌든 식량 문제를 처리할 길을 찾게 돼 안심이야. 이대로 가다 간 이곳 성채의 운명도 그다지 길지 못할 거야." "적의 목표는 역시 여기 성채일까요?" "틀림없이 그럴 거야. 내가 베르디아 입장이라면 작은 부락 따윈 모두 제쳐놓고 어쨌든 이곳 성채부터 뿌리뽑아 버리려고 할 거야. 그 러고서 시레네 부락을 함락시킨다면 조직적인 저항은 사라질 테니까. 작은 부락은 그때부터 이 잡듯이 하나하나 처리해도 문제가 없지." "이치에 맞는 전략이군요." 마리스가 어두운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그것이 곧 전쟁이지. 이곳 성채의 전사들은 모두 용맹해. 그렇지만 수세에 몰려 있는 까닭을 이해할 수가 없어. 베르디아군 쪽 병력이 더 많은 건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지."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요?" "어떻게라고 묻는다면……." 레일즈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리스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다. 농담처럼 되받으려고 생각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나도 몰라. 전쟁의 상황이 전체적으로 파악되지 않고 있으니까." "그래요. 아니, 그렇겠지요." 마리스의 어깨가 푹 처지며 목소리도 낮아졌다. 그 가녀린 어깨에 레일즈는 살짝 손을 얹었다. "어쩌면 틀릴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찮겠어?" 레일즈가 마리스에게 다짐하듯 묻는다. "예, 말해 주세요." "모든 부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영웅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생 각해. 신왕과 대결할 수 있을 만한 지도자가." "신왕과 대결한다구요? 그렇지만 상대는 신이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