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7) 01/25 09:20 285 line "그렇다면."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외치며 곧바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그 러자 순식간에 날카로운 찌르기 공격이 가슴을 노렸다. 예상했던 공 격이었다. 레일즈는 밑에서부터 검을 쳐올리며 길리엄의 장창을 크게 튀겼다. 화톳불의 바깥쪽에서 동요하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관객들도 레 일즈가 만만한 신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챈 분위기였다. 레일즈는 창 밑을 재빨리 피해나가며 길리엄의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상대방의 몸체를 노리며 검을 옆으로 휘둘렀다. 길리엄은 펄쩍 뛰며 달아났다. 그러나 레일즈는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으며 오로지 앞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길리엄은 전혀 초조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레일즈의 공격에 정 확하게 대응하면서 기선을 제압하려고 노력했다. "정말 끈질기군!" 레일즈는 알고 있는 모든 기예를 사용해서 한 걸음 한 걸음 길리엄 을 압박해 들어갔다. 이미 길리엄은 화톳불 있는 곳까지 밀렸다. 결정 적 일격을 위해 레일즈는 날카롭게 공격해 들어갔다. 길리엄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화톳불 밖으로 나가는 건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끝까지 창자루로 레일즈의 검을 막아보려 했다. 그 러나 레일즈의 검은 장창을 한가운데에서 정확히 두 동강 내고 그의 가슴에서 탁 멈췄다. "레일즈의 승리!" 관객의 감탄사가 연발했다. 레일즈는 깊은 심호흡을 하며 검을 칼 집에 꽂았다. 그러고는 환성에 답하듯 살짝 미소 지었다. "네가 이겼다, 대백조의 형제." 길리엄이 레일즈에게 한 마디하고 화톳불 밖으로 나갔다. 레일즈도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격렬한 불만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렸 다. 레일즈는 어쩔 수 없이 다시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다음은 내가 상대하겠다." 누군가가 이름을 말하며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상대하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다. "연습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지." 레일즈도 검을 빼들었다. 격렬한 환성에 파묻혀 사이아는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레일즈는 아직도 화톳불에 둘러싸인 경기장 안에 있었다. 이미 다섯 명째였다. 두 번째 전사는 단 세 차례 겨룬 끝에 물리쳤다. 세 번째와 네 번째도 레일즈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났다. 레일즈는 아버지에게서 정식으로 검술을 익혔다. 그에 비해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은 힘만 잔뜩 들어간 공격이 대부분이었다. 레일즈는 장기인 속이기를 이용해 상대에게 일부러 틈을 보인 다음 숨 돌릴 틈 없이 연속 공격을 가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레일즈의 검술 솜씨에 모여 있는 용병들이 저마다 감탄사를 연발했다. 사이아도 절 규하듯 레일즈를 응원했다. "그럼, 내가 한 번 나서볼까." 다섯 번째로 나선 사람은 거쉰이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는 레일 즈도 잘 알고 있었다. 레일즈도 긴장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날 생 각은 없었다. "넌 정말 강해." 거쉰은 레일즈에게 진심에서 우러난 칭찬을 했다. "강한 전사는 대환영이지." 그리고 시합이 시작되었다. 신수왕 블루저가 창조했다는 두날창을 손에 들고 짐승이 포효하는 듯한 기합 소리를 내며 세찬 찌르기 공격 을 가해 왔다. 레일즈는 갑자기 방어하기에 급급한 형국으로 몰렸다. 거쉰의 맹공을 간신히 검으로 막거나 몸을 비틀어 피할 뿐이었다. 그 러는 사이에 상대의 속도에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여유가 생기고 반 격의 틈도 노리게 되었다. 그러나 검을 휘두를 수 있는 거리 안으로 다가서지 못하면 전혀 소용이 없었다. 어떻게든 좀더 앞으로 나가 보 려고 레일즈는 여러 차례 시도했다. 그러나 그런 의도를 이미 알아차 렸는지 거쉰의 창이 더욱 날카롭게 레일즈를 공격해 들어왔다. 허공 을 가르는 바람 소리만으로도 살이 잘려나갈 듯한 맹공격이었다. 그러나 스스로도 이상스러울 만큼 레일즈는 침착했다. 상대의 공격 을 정확하게 받아넘기거나 피했다. 그리고 틈틈이 반격을 해나갔다. 먼저 실수하는 쪽이 지는, 그야말로 백지 한 장 차이가 날까 말까 하 는 승부였다. 그러나 레일즈는 이 참을성 겨루기에서 승리했다. 좀처 럼 승부가 결정 나지 않자 초조해진 거쉰이 창을 깊숙이 찌르자 재빨 리 옆으로 피하며 서둘러 창을 거둬들이려는 거쉰의 창을 검으로 쳐 서 떨어뜨렸다. 거쉰의 신성한 창은 그런 공격으로 부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창 끝이 지면에 부딪치면서 거쉰의 자세가 무너졌다. 레일즈 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쉰에게 다가섰다. 승부는 그걸로 결정 났다. 그 뒤로 레일즈의 세찬 공격이 거푸 이어 졌다. 숨 돌릴 틈도 없는 연속 공격이 다섯 차례 이어지자 레일즈의 검이 거쉰의 눈앞에 와서 멈췄다. 순간 관객들이 침묵 속에 빠져들었 다. 시합을 바라보던 전사들은 경악한 나머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 했다. 잠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그러나 금세 그 침묵이 깨지고 용병들이 소란을 떨기 시작했다. 신 참이 백인대장을 깨뜨린 것은 대단한 사건이었다. "내가 졌나?" 의외로 홀가분한 목소리로 거쉰은 화톳불 밖으로 나갔다. 그때 거 쉰은 한 사나이에게 눈으로 신호를 보냈다. 물론 레일즈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강적을 꺾고 마음이 한껏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자랑 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믿을 수 없어. 거쉰이 지다니……." 가까이에서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사이아가 들었다. 어느 틈 엔가 그녀는 관객들의 맨 앞에까지 나와 있었다. 시합에서 연승을 거 두는 레일즈의 모습에 푹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당연하지, 레일즈는 강한 사람이니까." 사이아는 입 속으로 조그맣게 중얼거리며 주위의 관중들이 놀라는 것을 불만스럽게 바라봤다. "정말 그래요." 사이아의 혼잣말에 대답한 사람은 마리스였다. 설마 마리스가 곁에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이아는 무척 놀랐다. 그러나 재빨리 마음을 진정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즈와 어려서부터 친구 라는 사실을 자랑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제야 주위를 살펴보니 비 인과 밧소도 앞으로 나와 있었다. 그들도 도저히 뒤에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어, 다음 상대가 또 나왔네." 밧소의 말에 사이아는 화톳불로 둘러싸인 시합 무대로 시선을 되 돌렸다. "타닐……." 대전 상대를 보고 마리스가 먼저 놀랐다. 아무도 무대에 나서지 않 는 것을 보고 은빛 머리 타닐이 천천히 화톳불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 미 검은 빼든 자세였다. "내가 상대를 해 주지, 신참." 타닐의 등장으로 조용하던 관객들이 다시 시끌벅적 떠들어댔다. 전 혀 서둘지 않는 동작으로 타닐은 앞으로 나섰다. 그 동작을 보고 레일 즈는 이 은발의 사나이가 놀랄 만큼 고수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 사나이가 전투를 치르는 장면을 본 적은 있었다. 마치 상처를 입었거 나 굶주린 들짐승처럼 싸웠다. 그때도 강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눈앞에서 마주하고서야 비로소 타닐의 진짜 실력을 알 것 같았다. 기 량이 아니었다. 압도적인 기력의 차이가 느껴졌다. 레일즈는 손바닥에 촉촉이 젖는 땀을 닦아낸 뒤 다시 한 번 검을 고쳐쥐었다. "이 사내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아." 레일즈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 은발의 전사에게 마리스가 신경 쓰 는 것이 언제나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 데다 타닐은 마리스의 호의를 묵살하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볼 때마다 늘 레일즈는 화가 나곤 했 다. 이슬로라는 부락의 예비 족장이었다는 사람이 부락 사람들이 모 두 죽은 전투에서 혼자서만 살아남다니 그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드시 이기고야 말겠다." 백인대장 거쉰에게도 이겼다. 같은 백인대장인 타닐에게 질 이유가 없다. 억지 이유를 붙여가며 레일즈는 기력을 북돋웠다. 상대의 박력 에 짓눌리면 그대로 패배로 직행할 것이 분명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레일즈는 가볍게 검을 뻗었다. 기사의 예를 갖춰 한 번씩 검을 마주 치고 나서 시합을 시작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타닐은 검을 갑자기 탁 쳤다. 그 금속음을 신호로 시작이라는 구호가 메아리쳤다. 레일즈 는 자세가 무너져 서둘러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타닐은 성큼 앞으로 내딛더니 힘을 모아 레일즈의 머리 위를 노리며 일격을 가해 왔다. 레 일즈는 간신히 그 공격을 검으로 막았다. 새하얀 불꽃이 피어나고 격 렬한 충격이 전신을 훑었다. 뼈라는 뼈는 모두 비명을 지르고 발끝이 땅 밑으로 파고드는 느낌이었다. "진짜 싸우자는 건가?" 타닐의 공격에는 멈추려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레일즈의 머리를 두 조각 내려는 일격이었다. 만약 검으로 받지 못했다면 틀림 없이 그렇게 되고 말았을 것이다. 레일즈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타닐 의 얼굴을 보았다. 눈에 살기가 가득 찬 것처럼 보였다. '이 사나이는 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건가?' 갑자기 덜컥 겁이 났다. 하지만 타닐은 가차 없는 공격을 거듭 가해 왔다. 빠르면서도 무거운 공격이었다. 장검을 마치 몽둥이 다루듯 했 다. 레일즈는 압도되어 무참하게 후퇴를 거듭했다. "왜 이러는 거야!" 레일즈는 외쳤다. 화톳불 밖에서 구경하던 전사들도 이번 시합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성원이나 환성은 잦아들고 웅성거림으 로 바뀌었다. 이것은 시합이 아니라 죽기살기식 싸움이라는 것을 본 능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죽여버릴 생각인가."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 레일즈는 확신했다. 이 사나 이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레일즈는 후퇴하면서 필사적으로 검을 휘 둘렀다. 한 번이라도 잘못 받아넘기면 타닐의 검이 자신의 생명을 가 를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이 아득해지고 무릎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 그만둬!" 레일즈는 비명을 질렀다. 그것은 신수민족이 쓰는 말이 아니라 다 낭의, 그리고 베르디아에서 쓰이는 말이었지만 레일즈의 비명은 쉰 목소리였기 때문에 아무도 그걸 눈치채지 못했다. 레일즈의 숨결이 거칠어지고 검을 쥔 손이 돌처럼 딱딱해져 둔해져갔다. 그때 계속해서 뒤로 밀리던 레일즈의 등에 무언가가 닿았다. 화톳 불이었다. 불꽃에 머리가 그을려 불쾌한 냄새가 주위에 퍼졌다. 긴장 의 끈이 완전히 풀렸다. 발이 꼬였다. 레일즈가 비명을 올리며 뒤로 자빠졌다. 화톳불을 받치던 대까지 옆으로 쓰러져 관객들 사이로 불타는 장 작이 굴렀다.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놀라서 그 자리를 피했다. 레일즈 는 뒤로 손을 짚고 상체를 일으켰다. 타닐이 은빛 머리를 날리며 큰 나무처럼 버티고 섰다. 레일즈는 손을 내뻗고 패배를 인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공포에 질 린 나머지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타닐은 기분 나쁘게 입술을 일그리 더니 혼신의 힘을 넣어 검을 내둘렀다. 레일즈는 이제 죽었다고 생각 했다. 머리 위에서부터 뜨거운 바람이 훅 끼쳐왔다. 그 충격으로 레일 즈의 마음이 순간 새하얗게 변했다. 그러나 타닐의 검은 레일즈의 머리카락에 살짝 닿더니 그대로 멈 췄다. "타, 타닐의 승리!" 누군가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소리에 레일즈는 온 몸 의 힘이 빠져 그 자리에서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땅바닥에 머리가 부 딪쳐 통증이 일자 비로소 자기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뒤로 쓰러진 채 레일즈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낯빛이 창백해진 전사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내기 시합은 이제 파장이었다. 만약 이것이 실전이었다면 레일즈의 목숨 줄이 틀림없이 끊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호흡이 진정되기를 기다린 뒤 레일즈는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온 몸에서 땀이 비오듯 솟아났다. 천천히 발 아래 떨어뜨린 검을 주워들 었다. "레일즈……."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사이아였다. 소리 나는 쪽으로 돌 아보니 사이아뿐만이 아니라 비인과 밧소와 샤일론도 모여 있었다. 마리스도 함께였다. 그리고 마리스 곁에는 또 한 사람의 은발 전사가 있었다. 타닐이었다. 은발 전사에게 이미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무표정한 그 얼굴에서는 숨이 막힐 듯한 압박감이 전해져왔다. 공포 와 증오와 굴욕 따위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으로 레일즈는 타닐을 노 려보았다. 상대의 진의를 확인해보고 싶었지만 말을 걸 기운조차 없 었다. "수고했어." 사이아가 웃는 얼굴로 레일즈에게 수건을 건넸다. "정말 대단하던데. 내가 네 친구인 게 너무너무 자랑스럽더라구." "누가 말야?" 레일즈는 풀 죽은 표정으로 말했다. 타닐이 머리 위로 검을 내려쳤 을 때 레일즈는 몸 속의 피가 증발하여 머리털까지 새하얗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섯 명이나 이겼잖아. 보통사람이라면 그렇게 못 했을 거 야. 백인대장 거쉰에게도 이겼고……." "이거 지고 나니까, 영 찜찜한걸." 그때 마침 거쉰이 모습을 나타냈기 때문에 사이아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진짜 붙어도 내가 질까? 시합이라서 능력은 쓰질 못하잖아." 거쉰은 기합 소리와 함께 입을 확 벌렸다. 그러자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나며 화톳불 하나가 요란스럽게 날아갔다. 거쉰이 충격파를 발산한 것이었다. 전쟁의 신수왕 블루저에게서 부여받은 능력 가운데 하나로 그 파괴력은 절대적이며 단 일격으로 상대방을 끝장낼 수가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무기만 가지고 싸우는 건내가 못 당하겠다. 대단해, 레 일즈. 백인대장에 추천해야 되겠어." 거쉰은 호쾌하게 웃으며 레일즈의 어깨를 툭툭 쳤다. "정말 대단한 친구야." 그때 또 다른 사내의 소리가 났다. 레일즈와 거쉰은 동시에 소리나 는 쪽으로 돌아봤다. 젊은 전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낯익은 전 사였다. "딜이잖아……." 레일즈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정말 훌륭하던데, 대백조 형제." "뭘, 그 정도를 가지고." 레일즈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모처럼 다섯 사람을 꺾었지만 타닐과의 싸움에서 패배하여 빛이 바랬다. "그 정도라니?" 딜은 갑자기 분노하며 격한 말을 쏟아부었다. "넌 틀림없이 강해.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기나 해?" "왜 화를 내는 거야. 내가 화나게 만든 점이 있으면 사과할게." 레일즈는 멍한 표정으로 화가 나서 날뛰는 딜을 바라보았다. "사과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프레드야!" "프레드?" 그 이름을 듣고서야 비로소 레일즈는 딜이 왜 화를 내는지를 알았 다. 프레드는 오늘 낮의 전투에서 우두머리 고블린 로드에게 살해당 했다. "그 친구는 너를 지켜주려고 생각했던 거야. 그리고 나도……." 딜의 눈에 눈물이 솟았다. 죽은 프레드는 같은 부족 출신이고 사이 가 좋았다.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나이가 비슷하기도 했고, 레 일즈 또한 그들과 친하게 지냈다. 프레드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프레드에겐 정말 미안해." 레일즈는 머리를 숙였다. "백인대장에게도 이기는 사나이를 지켜주려고 했다니 우리들이 바 보들이었어. 게다가 프레드는 죽어버렸어. 그게 개죽음이 아니고 뭐 야?" 딜이 절규하며 울부짖었다. 레일즈는 가슴이 꽉 막히는 느낌으로 갈래뿔부족의 젊은이를 바라보았다. "역시 부족의가르침을 지켰어야 해. 달아나고, 달아나고, 또 달아 나면 죽지는 않았을 텐데. 다만 다른 누군가가 죽을 뿐인데……." 갈래뿔부족이 섬기는 신수 라폰텔은 영원한 도망자라고 불린다. 도망함으로써 자유를 얻고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해낼 수 있다고 가 르치기 때문이다. 실제로 베르디아의 침략에 대해서도 무저항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흩어져 도망치라는 것이 부족의 방침으로 정해졌다고 했다. 딜과 프레드는 소극적인 부족의 결정에 혐오감이 일어 신수의 어 금니에 전사로 지원했던 것이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수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행동이기 때문에 갈래뿔부족 내에서는 이단이라고 할 수 있 었다. 물론 수인은 아니었다. 지금 한 말은 아마도 딜의 혼잣말로 레일즈를 책망하려는 발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레일즈에게 그 말은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 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달아나면 누군가가 대신 희생될 뿐……." 레일즈는 그 말을 곱씹었다. 실제로 프레드는 레일즈 대신 죽은 셈 이었다. "싸우든 도망가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한, 누군가는 죽어야 한단 말인가!" 레일즈는 혼자서 중얼거렸다. 자기 손으로 그렇게 했느냐, 그렇지 않았느냐 하는 차이뿐이었다. "백인대장이란 말야, 원래 백 명의 적을 죽일 수 있는 전사를 말하 지. 그렇지만 바로 그 말은 백 명의 아군을 살릴 수 있다는 뜻도 돼." 레일즈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던 모양인지 거쉰이 백인대장에 대한 나름의 해석을 보태 말했다. "그래, 알겠어." 레일즈는 조용히 다짐하듯 말했다. "그래, 이제 난 도망치지 않겠어." 그러나 전쟁에 푹 빠져버리지는 않으리라. 타인에게 상처 입히기를 주저하고 스스로가 상처 입기도 두려워하리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혐오하고, 하루라도 빨리 그 전쟁을 끝내고자 노력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레일즈는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짐이 사라져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백인대장에 추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받아들일 수 있지?" 거쉰이 말했다. "그래, 그렇게 하겠어." 레일즈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