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6) 01/24 10:07 307 line 선택의 여지가 없어졌다. 레일즈는 마음을 정했다. 두 마리의 고블 린을 상대로 정하고 맞싸울 태세를 취했다. 레일즈가 무기를 거머쥔 순간 고블린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깨달았는지 둘 다 그 자리에 급히 멈춰섰다. 그러면서 레일즈가 강한지 약한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가며 살폈다. 레일즈는 검을 들어올리고 발 놓을 자리를 확인하며 한 걸음 앞으 로 나섰다. 놀란 고블린은 침착성을 잃었다. '달아나려면 달아나라. 그리고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면서 다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나 레일즈의 바람과는 달리 고블린은 소검(숏 소드)을 휘두르며 쳐들어왔다. 어디를 노리는 것도 없었고 연결 동작도 없는 공격이었 다. 레일즈는 힘들이지 않고 두 마리의 공격을 막아 넘겼다. 그리고 한 마리의 머리를 베어 넘겼다. 비명을 올릴 짬도 없이 고블린은 목숨 이 끊어졌다. 하나가 순식간에 죽자 다른 한 마리는 공포에 사로잡혀 달아나버렸다. 검을 한 번 휘두르면 수월하게 베어버릴 수 있었다. 그러나 레일즈 는 그만뒀다. 죽일 것까지도 없었다. 상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했기 때 문이다. 그때 레일즈의 뒤에서 처절한 절규가 들렸다. 레일즈는 깜짝 놀라 며 소리 나는 쪽을 보았다. 새빨간 칼 끝이 프레드의 등에서 보였다. 처음에 레일즈를 공격하려고 했던 고블린 로드가 들고 있는 검 끝이 었다. 검은 정확히 프레드의 심장을 꿰뚫었다. "프레드!" 레일즈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질렀다.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프레드는 이제 누구도 구할 수 없었다. 치 유의 능력을 가진 마리스조차도 불가능했다. 레일즈는 분노 때문에 온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검을 틀어쥐고 고블린 로드를 향했다. 잔인하게 입술을 일그러뜨리며 고블린 로드는 프레드의 몸에서 칼 을 뽑아들었고, 이미 힘이 빠진 프레드의 몸은 바닥으로 소리 없이 무 너졌다. "각오해라!" 레일즈는 자신이 다낭 말로 외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고블린은 조금도 겁내지 않고 검을 쥐고 싸우는 자세를 취했다. 레일 즈는 조금도 뜸을 들이지 않았다. 상단으로 치켜든 검을 혼신의 힘을 다해 휘둘렀다. 고블린도 검을 들어 레일즈의 검 쪽으로 들이밀었다. 금속과 금속 이 맞부딪치는 새된 소리가 울리고 격렬한불꽃이 튀어올랐다. 그러 나 튀어오른 것은 불꽃만이 아니었다. 프레드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 던 고블린 로드의 검이 둘로 동강 나 검 끝이 빙글빙글 돌며 허공으로 튀었다. 마리스에게서 받은 은제검은 고블린 로드의 어깨에서 가슴까지 일 직선으로 베어 들어갔다. 레일즈가 양날검 공작에게서 받은 공격과 똑같았다. 튀어오르는 피의 양과 속도를 보고 레일즈는 상대의 심장을 갈랐 다고 확신했다. 오른손으로 근육을 파헤치고 뼈를 가른 감촉이 생생 하게 전달되어 왔다. 고블린의 튀어오르는 피로 범벅이 된 채 레일즈는 멍청히 서 있었 다. 그러는 사이 고블린 로드는 프레드 위에 거의 겹쳐지듯 쓰러졌다. "끝났어." 뒤에서 누가 어깨를 두드리는 바람에 레일즈는 멍하니 돌아봤다. 거쉰이었다. "프레드가……." 레일즈는 고불린 로드 밑에 깔려 있는 프레드의 시체를 가리켰다. 거쉰은 언짢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저 친구만이 아니야. 둘이 더 죽었어. 기별받은 것보다 숫자가 많 았어. 좀더 데리고 오는 건데. 타닐이 없었으면 더 많이 죽었을 거야." "프레드를 묻어 줘야지." "그대로 둬. 세월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가니까." 신수민족에겐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습관이 없는 걸까? 아니면 계 속 전쟁을 하다 보니 그런 감각이 마비된 것일까? 레일즈는 당황스러 웠다 "프레드가 죽었다고?" 비통한 목소리로 외치며 딜이 나타났다. "프레드……." 고블린의 시체를 걷어차고는 프레드의 주검을 끌어일으켰다. "가자, 신참!" 거쉰이 재촉하자 딜은 튀어오르듯 일어섰다. "죽음은 영원의 도망, 최후의 자유……." 딜은 가슴에 손을 모우고 엄숙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레일즈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거쉰의 말을 따르기로 마음을 정했다. 전투에 이 겼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무 기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 려 씁쓸했다. 자신의 손으로 두 생명을 빼앗았고 다정했던 친구마저 잃었기 때문이다. "성채로 돌아가자!" 거쉰은 큰 소리로 명령했다. 이것이 전쟁이었다. 레일즈는 다시 한 번 숨을 깊이 내쉬었다. 자신 이 전사의 신분인 이상 전쟁은 도망칠 수 없는 숙명이었다. 5 레일즈가 성채로 돌아왔을 때 이미 해는 져 있었다. 하늘에는 아직 어스름이 남아 있었지만 성미 급한 사람은 벌써 장작불을 지피고 그 주위에 둘러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술을 마시는 사람, 악기를 한 손에 들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 자세 를 잡고 명상을 하는 사람 등등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섬기는 신수들만 다른 것이 아니라 생활이나 습관 또 한 저마다 달랐다. 그래서 그런지 전쟁할 때 외에는 모두 자기 마음대 로 행동했다. 그러나 베르디아의 침략으로부터 크리스타니아를 지킨 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굳게 뭉쳤다. 레일즈는 그런 용병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오늘 치룬 싸움을 되돌아보았다. "뭘 생각하고 있니?" 사이아였다. 다낭에서 쓰던 말이었기 때문에 레일즈는 놀라 주위를 살폈다. 주변에는 비인과 밧소와 샤일론뿐이었다. 모두 다낭에서 온 동료들이었다. 다낭 말은 신수민족이 원수로 여기는 베르디아 말과 같아서 지금 하는 말을 용병들이 듣는다면 암흑민족이 보낸 밀정이라고 오해할지 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아마도 목이 붙어 있지 못할 것이다. "아니, 별로 생각하는 거 없어." 레일즈는 신수민족이 쓰는 말로 대답했다. 그리고 손에 꼬치고기를 잡고 후후 몇 차례 불어 식힌 뒤 입에 넣어 천천히 씹었다. 이곳 성채 에서 자주 나오는 요리였는데 여러 가지를 꼬치에 꽂아 장작불로 익 혔다. 레일즈는 이 요리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름도 알지 못하는 곤충 이나 버섯을 재료로 쓰는 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찜찜한 기분이 들었 다. "방해해도 괜찮을까요?" 그때 장작불 저쪽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다가오는 그 림자가 둘이었다. "마리스?" 레일즈는 서둘러 고기를 삼켰다. 마리스와 타닐이 술병을 몇 개 들 고 서 있었다. "그럼." 사이아가 미소 지으며 두 사람을 위해 자리를 비웠다. 마리스와 타 닐은 레일즈 양쪽으로 나누어 앉았다. "공을 세우셨다고 들었습니다." 마리스가 살짝 웃으며 레일즈에게 잔을 건네고는 술을 따랐다. "공이라니?" 레일즈는 술잔을 든 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거쉰에게서 들었습니다. 고블린 로드를 베어 넘기셨다면서요." "공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오히려 거치적거리기만 했지. 아 무래도 싸울 생각이 나질 않아서 멍하니 서 있기만 한걸." "레일즈님과 관계가 없는 전쟁이기 때문이지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않겠어요?" "그런 이유가 아니야." 레일즈는 서둘러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난 베르디아를 적으로 생각하고 있어. 그자들은 사악한 침략자들 이야.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지. 그런 것쯤은 이치상으로 얼마든 지 알고 있어. 그런데 막상 전쟁터에 나서면 몸이 움직이질 않는 거 야. 내가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고 남을 죽이고 싶지 않다는 생 각도 들고……." 레일즈의 말에 사이아와 비인이 놀라서 얼굴을 마주본다. "그런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어?" 사이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물었다. "미안해, 아무 문제도 아닌 걸 가지고……." 레일즈의 표정이 금세 어색해졌다. "아냐, 그렇진 않아. 너무나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 하지만 고민 이 있었으면 우리한테도 이야기를 했어야지." "어떻게 상담 같은 걸 할 수 있겠어. 나는 전사야. 어려서부터 그것 외엔 생각해본 적이 없어. 그러던 사람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다니, 내 가 생각해도 정말 한심해. 갓난아기한테 물어봐도 알만한 걸 가지고." "이치상으로 아는 것과 실감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달라." 사이아의 목소리는 상냥했다. "그렇지만, 그런 문제로 고민하다간 전사가 될 수가 없지. 그런 어 려운 문제는 생각하지 않는 게 좋아. 전쟁이란 원래 그런 거라고 싹둑 잘라내고 생각하면 죄책감도 사라지지 않겠어?" 밧소였다. 그는 레일즈를 정신이 조금 이상한 사람을 보듯 쳐다보 았다. "밧소가 말하는 대로야. 그러니까 고민하는 거지. 나는 이제 전사로 되돌아갈 수 없는 건가 하고." "무리해서 돌아갈 건 없겠지. 전사만이 인간이 살아갈 길은 아니니 까." 샤일론이었다. 과연 사제답게 그의 말에는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도 알고 있어. 하지만 나는 전사 말고 다른 삶은 꿈도 꿔본 적 이 없어.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난 틀림없이 전사지. 검술 연습을 하고 있으면 기분이한없이 좋아져. 타인이 싸우고 있는 것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분노로 자신을 잃어버리면 무의식중에 싸움을 하고 있지." "그것 참 복잡하구만." 밧소가 큰 소리로 웃었다. "그래, 내가 생각해도 복잡해." 레일즈가 한숨을 쉬었다. "마치 전설에 나오는 광전사(비서커) 같아. 선량한 인간이 전사가 되기 위해서는 감정을 죽이든지, 분노에 몸을 맡겨야 하든지 해야 돼. 그렇지만 정신 차려야 돼. 진짜 광전사가 되면 자기를 포함해 적도 아 군도 모두 죽여버리게 되니까. 분노의 정령 퓨리가 미쳐 날뛰게 되면 아무리 뛰어난 정령사일지라도 진정시킬 수가 없어." 비인이 정령사답게 이야기를 끌어나갔다. 레일즈도 예전에 광전사 의 전설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광전사와 같다고는 생각 지 않았다. 아무리 해도 그 정도로 선량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싸움터에 나서는 거야. 그러는 동안에 습관이 들고 습관이 들다가 죽게 되겠지 뭐." "밧소!" 사이아가 소리쳤다. "밧소 말이 옳아, 사이아.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전투에 나섰어. 이 상태로 지내다간 그레일이 눈앞에 나타나도 싸울 수 없을 것 같아." "그, 그럼 정말 곤란해. 우리는 레일즈만 믿고 있는데……." 비인의 얼굴은 정말 창백해져 있었다. 레일즈는 퍼뜩 그런 문제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레일의 복수 대상은 레일즈 하나만이 아닐 지도 모른다.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아팠다. "타닐, 여기 있었나?" 그때 갑자기 굵은 남자 음성이 들렸다. 소리 나는 쪽을 보니 땅딸막 한 체형의 사내가 술병과 두 날 장창(롱 스피어)을 들고 불길 너머에 서 있었다. 어금니부족의 전사 거쉰이었다. "내기 시합이 시작됐어." 거쉰은 일부러장작불을 뛰어넘어 타닐 앞에 섰다. "지금 길리엄이 다섯 명을 꺾었어. 이대로 가만둘 수 없잖아." 내기 시합은 실력에 자신 있는 사람끼리 1대1로 붙고 주위에 둘러 선 관객은 누가 이길지 저마다 내기를 거는 것으로 신수의 어금니 용 병들 사이에서는 옛날부터 행해져온 일종의 축제였다. 모두 부족의 명예가 걸려 있기 때문에 진지하게 임했다. 훈련의 일환으로 치러지 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전에 더욱 가까웠다. "길리엄이?"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타닐이 일어섰다. 길리엄이라는 이름은 레일 즈도 알고 있었다. 정확히말해 잊을 수가 없었다. 길리엄은 개미인간 족의 전사로 개미인간족은 직립한 개미 모습을 한 독특한 아인(亞人: 인간 비슷하게 창조된 부족)이었다. 그들은 진홍빛 개미 제왕이라 불 리는 신수 크로이세에 의해 창조되었다. 신수 크로이세는 인간의 종자인 진홍부족과 함께 이 개미인간족을 거느리고 러브래들 지방에서 폐쇄적으로 살았다. 신수의 어금니에도 전사를 보냈지만 개미인간족의 전사는 길리엄 하나뿐이었다. 새빨간 외골격을 삐걱거리며 걷는 그의 모습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말을 거의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과 말을 나누는 법도 드물었다. 그러 나 전투가 벌어지면 언제나 선두에 나서서 창을 휘두른다고 들었다. "어이, 신참! 너도 가자!" 거쉰이 팔을 잡아끌자 레일즈가 깜짝 놀라서 그를 올려다봤다. 설 마 자기를 나가게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이것저것 고민하고 있는 것보단 훨씬 기분이 좋아질 거다." "그럴지도 모르지……."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진검을 사용하는 시합이 라고는 하지만 분명 대련이었다. 자기가 죽는 것도 아니고 상대를 죽 이는 것도 아니었다. 레일즈는 바지에 붙은 흙을 털면서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은제 검을 허리에 찼다. "기다려. 나도 갈 거야." 사이아도 서둘러 일어섰다. 6 내기 시합은 병영과 성루로 둘러싸인 성채 중앙에 위치한 광장에 서 벌어졌다. 화톳불이 환하게 타오르는 가운데 이미 즉석 경기장이 만들어져 있었다. 화톳불을 둘러싸고 내기 시합을 관전하는 사람들이 또 하나의 원을 이루었다.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쳐 일어나는 금속 음 그리고 기합 소리. 갑자기 커다란 함성이 일어나 그런 소리들을잠 재웠다. 거쉰은 사람의 벽을 억지로 헤쳐, 가장 앞줄로 나섰다. 레일 즈와 타닐도 거쉰의 뒤를 따라갔다. "타닐!" 은발의 전사를 알아보고 가까이 있던 사내가 쾌재를 올렸다. "벌써 여덟 명째야. 이대로 가면 네가 세운 기록을 뛰어넘겠는걸." 자기 기록에는 관심이 없는지 타닐은 애매한 태도를 취할 뿐이었 다. 그는 바닥에 앉아 팔짱을 끼고 시합을 벌이는 광경을 무뚝뚝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봐도 무뚝뚝한 사내였다. 레일즈는 타닐과 거쉰 사이에 앉았다. 그러고 나서 사이아가 어디 로 갔는지를 찾아봤다. 사이아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녀는 앞 에 나오는 건 그만두고 뒷줄에 서서 보기로 한 모양이었다. 레일즈와 시선이 마주치자 오른손을 흔들어 신호를 보냈다. 그녀 곁에는 다낭 에서 온 동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마리스의 모습도 보였다. 그때 다시 환성이 일었다. "이로써 여덟 명을 꺾었다." 레일즈는 승부가 결정 나는 순간을 세심하게 살펴봤다. 화톳불에 비쳐 검붉게 물든 개미인간족의 길리엄이 훌륭한 창솜씨로 상대의 검 을 공중으로 날려버렸다. 패배한 전사는 억울하다는 듯 땅바닥을 자 기 주먹으로 내리쳤다. "백인대장 난스도 패배했다!" "아홉 명째는 누구냐!" 여기저기서 환성 소리가 났다. "허어, 난스도 졌다고?" 거쉰이 술병을 바닥에 놓고 천천히 일어섰다. "거쉰이 나온다!" 누군가가 그의 움직임을 눈치 빠르게 발견하고 외쳤다. "아니, 나설 사람은 내가 아냐." 거쉰은 큰 소리로 말하며 갑자기 레일즈의 팔을 잡고 억지로 일으 켜 세웠다. 그리고 등을 밀어 화톳불 안으로 들여보냈다. "거쉰!" 거쉰의 갑작스런 행동에 레일즈는 허둥댔다. "입으로 대답할 것 없어. 저자와 싸워서 이기기만 하면 돼." 말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였다. 거쉰은 레일즈의 팔을 끌고 화톳불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얼래, 저건 누구야?" 어딘가에서 그런 소리가 들렸다. "최근에 들어온 신참 아냐? 대백조부족인가 뭔가 하는……." "아, 잃어버린 대지에서 왔다는 거쉰의 손님 말인가?" "정말이냐, 거쉰? 딴 사람도 아니고 벌써 여덟 명이나 꺾은 길리엄 한테 저런 신참을 붙이다니." 거쉰은 용병들이 떠드는 소리에 전혀 개의치 않고 레일즈를 데리 고 원의 한가운데까지 나아갔다. "자, 길리엄. 아홉 번째는 이 친구가 상대한다. 잃어버린 대지에서 찾아온 대백조부족의 용사, 레일즈다." 거쉰은 그렇게 말한 뒤 레일즈를 그 자리에 남긴 채 화톳불 바깥쪽 으로 나가버렸다. 남겨진 레일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위에 불타 고 있는 화톳불을 둘러보았다. 그 바깥에 있는 관객의 얼굴은 아예 보 이지도 않았다. 내기의 배율을 가지고 사람들은 쉬지 않고 떠들어댔고, 여기저기서 불만의 소리도 들려왔다. 갑자기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 미인간족의 길리엄은 레일즈 앞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걸음마다 끼익 끼익 소리가 났다. 레일즈는 지금 사슬 갑옷을 입지 않은 평상복 차림 이었다. 내기시합에서는 상대방의 몸에 공격을 가해서는 안 되게 돼 있으므로, 갑옷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상대가 상대인지라 아무래도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대백조 형제여, 이리 나서라!" 마치 기계를 돌리듯 거대한 턱을 천천히 열었다 닫았다 하며 기묘 한 발음의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레일즈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뽑으면서 마치 마취를 하듯이 이건 연습일 뿐이라고 자신에게 이야기했다. 연습이라면 망설일 필요가 없 었다. 전력을 다해 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부탁합니다." 레일즈는 바른 자세를 취하며 몸을 가다듬었다. 길리엄과 레일즈가 다섯 걸음 정도 남기고 다가섰을 때 시작을 외치는 합창이 주위 관객 들 사이에서 일어났다. 레일즈는 무의식적으로 움직였다. 검을 거머쥔 채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으로 상대방과의 거리를 줄여나갔다. 거리를 떨어뜨리고 있다 가는 장창에 밀릴 게 분명했으므로 어떻게 해서라도 검으로 상대할 수 있는 거리 안으로 다가서야 했다. 개미인간족의 길리엄이 갑자기 공격해 왔다. 레일즈의 발을 노리는 강렬한 찌르기 공격이었다. 레일 즈를 떼구르르 뒹굴게 만들어 한 번에 승부를 낼 작정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레일즈는 간발의 차이로 뛰어올라 그 공격을 벗어났다. 그러 자 재빨리 창을 거둬들이더니 이번에는 가슴께를 노렸다. 레일즈는 몸을 비틀어 그 창을 피하면서 창자루를 향해 검을 휘둘러보았다. 그 러나 길리엄의 창은 이미 원래 위치로 돌아간 상태였다. 과연 여덟 명을 연달아 꺾은 전사다웠다. 공격해 오는 창 끝이 날카 롭고 구사하는 전법도 뛰어났다. 그러나 따라잡지 못할 정도의 움직 임은 아니었다. 아버지보다 몇 단계 처지는 실력이었다. 아버지 랏셀 과 다섯 번 겨뤄 한 번은 이기곤 했던 레일즈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레일즈는 거리를 좁히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견 제하는 공격을 가해와 좀처럼 성공하지 못했다. 길리엄은 레일즈가 초조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