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5) 01/24 10:05 317 line 양날검 공작 그레일의 치명적인 공격을 받고 갑자기 죽음을 의식 하게 되었을 때 레일즈의 마음은 공포로 시달렸다. 용기를 잃고 안전 한 장소로 도망치는 것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마리스가 없었다 면 지금쯤은 왕도 스파이아에 계시는 아버지의 집에서 모포를 뒤집어 쓰고 꼼짝도 하지 않았으리라. 그녀의 질책과 격려 덕분에 레일즈는 마지막 용기를 내서 죽음의 공포와 맞싸웠다. 이제 그 일은 어느 정도 극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에 잠 못 이 루는 일도, 악몽에 놀라 일어나는 일도 없어졌다. 그러나 또 다른 생 각이 레일즈의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바로 생명의 존귀함이었다. 죽음과 직면해서야 비로소 그걸 알게 된다는 말이 있었다. 레일즈 또한 그러했다. 스스로 죽기를 바라는 사 람은 없었다. 아무도 죽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쟁이란, 그리고 전사란 남의 생명을 빼앗도록 운명지워졌다. 설령 그것이 자신을 지 키기 위해서일지라도. 이제 레일즈의 마음은 많이 바뀌었다.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사의 길을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레일즈 한 사람이 전사의 길을 버린다고 전쟁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 다. "왜 자기가 죽는 게 두렵지 않을까. 왜 타인을 죽이고도 태연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휘말리면 곧바로 레일즈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이 성채 안에서 나 하나뿐일 거야." 무엇보다도 양날검 공작은 그런 생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자신의 생각에 대답하기 위해서라도 그레일에게 패배해서는 안 된다. 어떻든 검술 훈련은 열심히 해둬야 한다고 레일즈는 스스로에게 다짐 했다. 그자를 꺾지 못하면 평생 동안 도망 다니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검을 상단으로 치켜올리며 기합 소리와 함께 날카롭게 베어내렸다. 마치 자기 눈앞에 양날검 공작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병영의 2층 창을 통해 두 사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한 사람은 멋진 수염을 기른, 신수의 어금니 단장인 올겐스였고 또 한 사람은 열 명의 백인대장 가운데 한 사람인 거쉰이었다. "십 년 전의 여섯 사람도 팔팔했었는데 이번에 온 친구들도 재미있 어. 아직 다들 제 몫은 못 하고 있지만 하나같이 진지한 사람들이야." 거쉰은 열심히 레일즈를 살펴보는 단장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그런 것 같아." 올겐스는 턱에 손을 대고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뺨에서 턱까지 길 게 늘어진 금빛 수염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승인자 딜레온을 섬기 는 갈기부족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같은 갈기부족의 전사 칼리오 는 올겐스가 수인화하기 전의 모습은 사자를 닮았다고 말한 적이 있 었다. "저들의 정체를 다른 용병들도 알고 있나?" "약간씩은 느끼고 있겠지. 그러나 얼굴을 맞대고 불평하는 사람은 없어. 그렇게 했다간 칼리오하고 내가 눈을 부릅뜨니까 말야. 게다가 다섯 명 모두 열심히 일하고 있잖아. 그 엘프 아가씬 얼마나 애교가 넘치는지, 인기가 대단해." 거쉰은 사이아를 아직도 엘프라고 생각했다. 하프엘프라는 존재를 알지 못하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지?" 올겐스의 질문에 거쉰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글쎄. 저 친군 모르겠어. 그렇지만 십 년 전의 여섯 사람처럼 만들 고 싶진 않아. 큰뱀부족과 봉인부족에게선 지켜줘야지. 그 뒤에야 저 친구들 하기에 달리지 않았을까……." 거쉰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먼 과거를 돌이켜보았다. 그때 성채는 훨씬 서쪽에 있었고 거쉰 자신은 갓 입단한 신참이었다. 올겐스도 같 은 시기에 입단했지만 신수의 어금니 단장에는 전통적으로 갈기부족 사람이 앉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으므로 당연히 올겐스는 차기의 단장 으로 지목되었다. 여섯 사람의 젊은이는 신수의 어금니에 협력을 구하러 왔다. 대백 조부족의 정통을 이은 족장이 유폐되어 있으니 그 족장을 구출해내기 위해 원군을 보내달라는 요청이었다. 그러나 신왕이 강림하고 베르디 아의 대침공이 시작된 때여서 그렇게 할 여유가 없었다. 그 젊은이들은 실망에 사로잡혀 성채를 뒤로 하고 떠났다. 그 뒤 그들은 결계를 깨뜨린 자들이라 하여 큰뱀부족 전사들에게 쫓기고 외 계로부터 찾아온 혼돈이라 하여 봉인부족 전사들에게도 쫓겼다. 어떤 싸움이 벌어졌는지는 소문으로밖에 듣지 못했다. 추격자들이 전멸하고 여섯 젊은이 가운데 한 사람이 죽었다고 했다. 나머지 다섯 사람은 거기서 어떤 생각들을 했을까? 그 뒤 그들의 행동은 전혀 알 려지지 않았다. 다만 몇 년 전에 러브래들 대지협을 지배하는 크로이 세 부족에 한 사람의 전사가 모습을 나타냈는데 그 전사는 크로이세 를 섬기는 진홍부족을 강력한 군사 국가로 변혁시키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그 황제가 대백조부족의 전사라는 소문을 최근에야 들었다. 소문의 사실 여부는 알지 못하지만 만약 사실이라면 그 젊은이들 가 운데 한 사람, 곧 레이든이라는 이름의 전사일 게 분명했다. 거쉰과 올겐스는 잠깐 동안이긴 했지만 그들 여섯 사람과 행동을 함께 했었다. 아니 한 마디로 의기 투합했다고 할 수 있다. 젊었기 때 문에 이민족인 그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으리라. 언젠가는 헤어질 운 명이었지만 그때까지는 좋은 친구가 되자고 서로 맹세했다. "아델리시아라고 했던가? 참 좋은 여자였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거쉰이 말했다. "누가 좋은 여자였다고? 저 은발 소녀 말인가?" 올겐스의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검술 훈련을 계속하는 레일즈 곁 으로 은빛 머리 소녀가 수건과 마실 것을 들고 나타났다. 레일즈는 웃 는 얼굴로 소녀를 맞았다. 마실 것은 단숨에 마셔버리고 수건으론 흐 르는 땀을 닦았다. "저 아가씨도 좋은 여자지." 거쉰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올겐스는 짓궂은 표정으로, 자네 눈엔 세상 여자가 다 좋은 여자 아닌가, 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하긴 그런 것 같네." 거쉰도 피식 웃었다. 그러나 곧 웃음을 지우고 다시 진지한 얼굴로 돌아갔다. "그런데 단장! 이상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도대체 무얼 위해 싸우고 있지?" "……자네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걸. 전쟁 의 신수왕 블루저를 섬기는 수인이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한 거지?" "우리라고 해서 아무런 생각 없이 전쟁만 하는 건 아닐세." 화난 얼굴로 거쉰이 단장을 노려보았다. "우린 빈둥거리는 것이 가장 큰 즐거움이지. 전사가 빈둥거릴 수 있으려면 평화로워야 해. 그런데 그 평화가 낡은 질서를 회복하는 것 만으로 가능할까? 주기가 부활하면 세상이 잘 돌아갈까?" "나한테 묻지 마. 우리들은 의견을 말하지 않아. 자기 의견을 밝히 게 되면 타인의 의견을 공정하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지. 그렇지만 승인받을 만한 의견이 있다면 언제라도 나한테 말하게. 그때는 전력 을 다해 협력해 줄 테니까." "그럼 필요할 때 서슴없이 부탁하지. 하지만 우선은 저 친구를 시 험해봐야겠어. 저 표류민 출신의 전사가 흔들리고 있는 것 같거든." 올겐스는 무엇으로 시험하겠느냐고 굳이 묻지 않았다. 블루저 부족 의 전사가 시험한다고 말했을 땐 한 가지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 베르디아의 요마가 습격했다는 기별이 온 것은 다음날 오후였다. 성채에서 가까운 은빛늑대부족의 부락을 집단적으로 습격했다는데 다행히도 부락의 남자들이 용감하게 맞서 이미 공격해 온 요마 부대 는 모두 격퇴했고 나머지 달아나는 요마를 추격해달라고 용병단에게 의뢰한 모양이었다. 요마의 수는 대략 서른 정도라고 했다. "내가 간다." 기별을 듣자마자 거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요마 30마리면 네가 나설 정도가 아니잖아." 누군가가 그렇게 말했지만 거쉰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열 명만 데리고 가겠다. 너하고 너, 그리고……." 거쉰은 우렁찬 소리로 하나하나 지목하며 용병들 머리를 탁탁 치 고 지나갔다. "그리고 레일즈, 너도." 머리를 한 대 맞고 레일즈는 어벙하게 입을 벌렸다. 설마 자기가 지목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용병들의 무구를 손질해 주려고 병영에 나와 있었다. 어릴 적 부터 여러 가지 무기와 갑옷을 접해 왔던 덕택에 그의 손질 솜씨는 평판이 아주 좋았다. 싸움에 지친 용병들의 무구를 숫돌과 기름으로 수리하는 실력이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빨리 갑옷을 입어라. 무기와 방패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레일즈의 귀에 대고 거쉰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재미있는데, 대백조 형제의 출정이라!" 그런 소리가 멀리서 들린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네가 나간다면 나도……." 한 젊은이가 서둘러 앞으로 나섰다. "그렇다면 나도 나간다." 또 한 사람이 무기를 흔들며 앞으로 나섰다. 레일즈도 누군지 궁금 해져 앞으로 나섰다. 딜과 프레드였는데 두 사람 모두 낯익은 얼굴이 었다. 대륙 서부의 핀갈 지방에 세력을 가진 큰사슴의 신수 라폰텔을 섬기는 부족의 전사로 레일즈와 같은 시기에 이 성채로 들어왔다. 같은 신참이기도 하고 나이도 비슷했기 때문에 레일즈는 그들과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함께 밥도 먹고 그들이 공을 세운 이야기도 들 어주곤 했다. 지금도 그들의 무기를 손질해 주던 참이었는데 무기가 상처 입은 상태만 살펴봐도 그들이 초보 무사임을 곧바로 알 수 있었 다. 그러나 실전을 거듭하다 보면 머지 않아 일류 전사로 변모되리라. 그때까지 목숨을 잃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염려하지 마. 우리가 널 지켜줄게." 프레드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고블린 따위는 몇 마리가 있든 두려울 게 없어." 딜의 말이었다. 레일즈는 거쉰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그의 표정 을 살폈다. "이곳 사나이들은 놀고 있을 여유가 없다." 그 말에 레일즈도 마음을 굳혔다. "알았어……." 레일즈는 거북살스럽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첫 출전은 아니 지만 레일즈는 밧소와 싸우던 때보다 더 긴장했다. "그때 난 두려움이 무엇인지조차 몰랐어."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리며 딜과 프레드를 살짝 쳐다봤다. 지 금의 레일즈는 죽음의 공포뿐만 아니라 생명의 소중함도 알았다. "과연 싸울 수 있을까?" 레일즈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그 대답을 얻기 위해서라도 지금은 출격해야만 한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로 오고 나서 마리스는 한 번도 전투에 나선 적 이 없었다. 자신의 부락민이 다른 부락에 몸을 맡기도록 설득하는 것 만으로도 시간이 모자랐기 때문이다. 혈연이 있는 사람은 그 부락에 의지하라 했고 혈연이 없는 사람은 시레네의 대부락으로 가라고 권했 다. 시레네의 족장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준 뒤, 가지고 나온 마을의 재산을 하나도 남김없이 나누어주었다. 살아남은 전사들 대부분은 신수의 어금니에 가담할 것을 맹세했다. 모두 가족이나 이웃이 살해당한 원한에 사무쳐 너나없이 복수를 맹세 했던 것이다. "복수는 지배의 신수왕이 관장하는 것. 우리들은 크리스타니아의 질서 회복과 평화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마리스는 그들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납득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 아 보였다. 거쉰이 열 명 남짓한 전사를 데리고 성채 서문으로 달려나가는 것 을 보았을 때 마리스는 같은 은발 머리의 타닐과 나란히 병영을 향하 고 있던 참이었다. 타닐은 열 명의 백인대장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전사로서의 역량 은 높이 평가받았지만 친하게 지내는 용병은 하나도 없었다. 언제나 무겁게 침묵하고 있기 때문에 아무도 이야기를 걸려고 하지 않았다. 호방한 거쉰만이 타닐에게 거리낌없이 말을 거는 유일한 사람이었지 만 이야기를 걸어봤자 무뚝뚝한 반응을 보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타닐을 보며 마리스는 어두운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뚝뚝하기 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이렇게 심하진 않았었다. 마리스 가 미소 지으면 어색한 미소나마 지어줄 줄 알았다. 말수가 적긴 했지 만 타닐의 말에는 생기 넘치는 강인함과 다듬어지지 않은 상냥함이 배여 있었다. 그리고 레일즈를 제외하면 은발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 을 특별 취급하지 않는 유일한 이성이기도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장래 의 반려자가 되기로 마음을 정했던 것이다. 마리스는 과거의 타닐을 아는 사람으로서 그가 마음을 열어 줄 기 회가 닿을 때마다 이야기했다. 그러나 언제나 예상을 밑도는 결과밖 에 얻지 못했다. 그것조차도 타닐은 너무나 성가시게 여겼다. 지금도 그랬다. 마리스는시레네 대집회 때의 추억을 정겹게 이야 기하려 했지만 전혀 관심 없다는 태도였다. 번거롭다고 생각했으면 마리스를 물리치면 될 터인데 타닐은 그조차도 귀찮아하고 있다는 생 각이 들었다. 마리스가 오히려 지쳐 무슨 이야기를 해야 좋을지 몰라 하고 있을 때 거쉰이 전사들을 거느리고 출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거쉰이 출격을……." 타닐은 중얼거리며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달려갔다. 마리스는 불만 스런 표정으로 타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말에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더니 거쉰을 보고는 순식간에뛰어가다니. 마리스는 어쩐지 굴욕스러웠다. 병영에 돌아갈까 하며 다시 발걸음을 옮길 때였다. 눈앞에 보이는 건물의 문을 열며 한 소녀가 뛰어왔다. 하프엘프 사 이아였다. 아주 당황한 모습으로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렸다. 손에는 마술사의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요?" 마리스가 묻자 사이아의 눈에선 당장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레일즈가 나갔어." 사이아의 목소리는 흥분돼 있었다. "나가다니, 어디를 말이에요?" "전쟁에, 거쉰이 데리고 갔어." "거쉰이……." 마리스는 서문 쪽을 돌아보았다. 두터운 나무문이 아직 열려 있었 다. "레일즈를 구해야 해. 어디로 갔는지 알려줘." "침착해요, 사이아." 마리스는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차분히 미소 지었다. 우선은 그 녀를 안심시켜야 했다. "레일즈님이라면 아무 문제 없어요. 틀림없이 돌아올 거예요. 그렇 지만 사이아가 나서선 안 돼요. 전투에 익숙지 않잖아요. 따라가면 레 일즈님 마음만 흔들려요." 사이아는 눈물을 글썽이며 가만히 마리스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 도 방울져 흐를 것만 같았다. 마리스는 괜찮을 거라며 고개를 끄덕거 렸다. "알았어……." 마리스는 사이아의 어깨를 껴안고 병영으로 데리고 갔다. "우리들은 레일즈님을 믿고 여기서 기다려요." 4 격렬한 소리가 사방에 퍼졌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높고 날카로운 소리는 마치 수십 명의 대장장이가 한 작업장에 모여 쇠망치를 내려 치는 것 같이 요란스러웠다. 그 요란스러운 금속 소리 사이로 절규하 는 소리와 고함 치는 소리가 겹쳐 소름끼치는 불협화음을 이루었다. 이것이 전쟁이다. 레일즈는 마음 한구석에다 이 광경을 깊게새겨 놓았다. 눈부시게 화려한 의상으로 몸을 감싼 음유시인이 영웅이야기 속에서 노래하는 웅장하고 화려한 전쟁 따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존 재하지 않았다. 귀를 막고 싶은 단말마의 비명과 증오에 가득 찬 절 규, 그리고 피냄새. 그것이 바로 전쟁의 참된 모습이었다. 레일즈는 눈앞이 캄캄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검을 꽉 쥐었다. 전쟁에 대한 혐 오감이 피어올라 제발 그만두라고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외 친다고 해도 누구 하나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을 게 분명했다. 레일즈는 그것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이 검을 휘둘러 적을 전멸시키는 방법 외에는 어떠한 해결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자신 앞으로 그 적들이 달려드는 중이었다. 50명 이 좀 넘는 고블린들은 크리스타니아 대륙의 정복을 노리는 신왕 바 르바스의 첨병들이었다. 신수의 어금니에서 나온 열 명 내외의 전사들은 고블린 무리와 맞 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다. 부족 단위, 부락 단위로 싸우는 신수민족을 생각하면 신수의 어금 니는 일종의 이단 군단이었다. 그들은 베르디아의 침략에 맞서 싸우 는 부족들을 구하기 위해 먼 곳으로부터 무기만을 거머쥐고 모여들었 다. 그리고 그들의 하루는 매일 밥 먹는 일 외에는 목숨을 걸고 싸우 는 게 전부였다. 베르디아의 백성이 크리스타니아 대륙을 침공하기 시작하던 때 결성됐다고 하니 이미 2백 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 었다.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이미 얼굴이나 팔이 짐승처럼 변해 있었다. 신수의 전사들에게 부여된 능력, 곧 신수화였다. 멧돼지의 얼굴을 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자의 갈기를 휘날리는 사람도 있다. 짐승뿐만 이 아니다. 새나 곤충의 얼굴을 가진 전사들도 있었다. 마치 수빙의 주문에걸린 사람들의 집단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늑대인간처럼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아니었다. 전투를 치르는 모습이 용감하긴 했지만 무모하지는 않았다. 대개는 이성적이었으며 보통사람과 무엇 하나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의 신 이 짐승들에게 혼을 봉해 신수가 되었던 것처럼 그들 또한 짐승들 모 습으로 변모함으로써 그 짐승들의 능력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건 마법과도 흡사한 힘이었다. 레일즈는 싸움터 한가운데 있었지만 거의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 았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전투에 대한 공포 때문이기도 했지 만, 그보다는 적을 쓰러뜨리는 것이 아무래도 꺼림칙했다. 상대는 사 악하고 추악한 요마들이었고 지고신 패리스의 가르침에 따르자면 요 마를 죽이는 것은 정의였다. 그러나 레일즈는 신의 가르침이라고 해 서 그대로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신은 인간에게 삶의 방식을 제시 할 뿐이고 그 나머지는 자신의 이성으로 판단하고 선택해야 한다고 믿었다. 인간의 목숨만이 존귀하고 요마의 생명은 그렇지 않다고 누 가 단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그런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은 이곳 전쟁터에선 레일즈 한 사람뿐임에 틀림없었다. 이상한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생각을 하는 것 이 오히려 이상한 법이다. 전투는 아군이 유리했다. 적은 숫자가 많았지만 뛰어난 신수의 어 금니 용병에겐 상대가 되지 않았다. "레일즈! 뭐하는 거야, 조심해!" 누군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레일즈의 정신이 자신 만의 방에서 치열한 전쟁터로 돌아왔다. 서둘러 주위를 살펴보니 고 블린 한 마리가 레일즈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그것도 보통 고블린 이 아니었다. 다른 고블린의 두 배 정도는 되는 고블린 로드였다. "왜 나한테 오는 거야!" 마음속으로 절규하며 검을 고쳐잡았다. 죽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렇 다고 레일즈가 죽을 순 없었다. 궤변임을 알면서도 레일즈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이미 고블린 로드는 다섯 걸음 정도 앞으로까지 다가왔 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또 다른 그림자가 날아들었다. 그는 레일즈를 지켜 주겠다는 듯이 두 손을 펼치고 고블린 로드 앞으로 나섰다. 고블 린 로드는 위협적으로 어금니를 드러냈다. "저 자식은 나한테 맡겨, 대백조 형제." "프레드!" 도와주러 온 사람은 프레드였다. 프레드는 출격할 때 자기가 레일 즈를 지켜주겠다고 이야기했었다. "안 돼! 저 자식은 보통 고블린이 아니야!" "척 보면 알잖아. 실력이 있어 보여. 그러니까 네가 상대하긴 벅차. ……자 네가 다섯 마리째다." 프레드는 스스로에게 용기를 돋우려는지 이렇게 외쳤다. 프레드를 말려야 할지 어쩔지 레일즈는 망설였다. 잘못하다간 프레드의 자존심 에 상처를 입힐지도 모른다. 그때, 다른 방향에서 두 마리의 고블린이 돌진해 왔다. 그걸 보고 프레드가 외쳤다. "저 자식들은 네가 맡아. 첫 출전하는 너한테는 마침 좋은 상대인 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