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4) 01/22 09:30 293 line 마리스는 강을 가로질러 숲 속으로 향했다. 레일즈는 무엇 때문에 가는지 궁금했지만 도저히 그녀의 등뒤에 대고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마리스의 등뒤로 무언가 강인한 의지 같은 것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숲 속으로 더 걸어들어가자 평평한 곳이 나왔다. 마리스는 갑자기 걸 음을 멈추고 레일즈를 돌아보았다. "마리스……." 마리스는 빙긋 미소 지으며 조용히 허리에 손을 대더니 가죽끈을 풀기 시작했다. 레일즈는 어안이 벙벙하여 소리조차 낼 수 없었다. 멍 청히 서 있는 레일즈 앞에서 마리스는 가죽으로 된 갑옷을 벗더니 새 빨갛게 물들인 옷마저도 벗어던졌다. 은색 달빛을 받아 마리스의 투명해 보이는 피부가 환상적으로 빛 났다. 마리스는 신발과 바지도 벗어던져 이제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페네스 신이시여." 마리스는 기도하듯 중얼거리고는 조용히 땅바닥에 앉았다. 그러곤 두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그때가 돼서야 레일즈는 그녀의 의도를 깨달았다. 마리스는 변신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일즈의 짐작이 맞았다 는 것이 증명되었다. 마리스의 온 몸에서 은색의 털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레일즈가 두 번 눈을 깜빡하는 사이에 마리스의 변신이 완성됐다. 레일즈의 눈앞 에 한 마리 은빛늑대가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은빛늑대는 차분히 레일즈를 올려다보았다. 아름다웠다. 마리스가 변신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었다. 은 색 모피로 둘러싸인 늑대의 모습이 그냥 아름답게 느껴졌다. 이제는 죽고 만 은빛늑대 싸지를 처음 만났을 때도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만약 마리스가 거쉰들처럼 수인화했어도 그 모습이 역시 아름답다 고 생각했을까? 눈에 익지 않은 모습이기에 수빙 이야기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이상한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으로 변신했든 수인화했든 마리스는 마리스야." 레일즈는 은빛늑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은빛늑대가 빙긋이 미소 짓는 것 같았다. 마리스는 변신을 풀고 인간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레 일즈 앞에서 옷을 다시 입기 시작했다. 신수민족은 이성 앞에서 벌거벗는 것을 금기시하지 않는 것 같았 다. 그건 하크 마을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젊은 처녀들도 우물이나 냇가에서 거리낌없이 목욕을 했다. 물론 왕도 스파이아에 사는 사람 들은 그렇게 하지 않겠지만. "우리들은 마물이 아닙니다. 인간입니다, 레일즈님과 똑같은……." "그건 알겠어. 하지만 나만 알아선 소용없어. 다낭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으면……." "레일즈님만 마물로 보지 않으면 저는 상관 없어요." 어쩐지 마리스는 다낭 사람들 모두에게 신수민족을 이해시킬 생각 은 없어 보였다. 그 생각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마리스가 그렇게 생각 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마리스는 나의 은인이야. 마물이라고 생각할 턱이 있나." "은인이라고 생각해 주길 바라는 게 아니에요." "그래도 은인임에는 틀림없지. 그러면 동료라고 하지. 아니, 친구라 고 할까?" 레일즈의 말에 마리스가 웃었다. "거쉰한테 미안하다고 해야겠는걸. 괴물 취급해서 말야……." "이미 잊어버렸을 거예요." 마리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한 마디 덧붙였다. "그 블루저 부족의 전사는 정말 묘한 사람이에요." 그 점에 대해서는 레일즈도 동감이었다. 거쉰은 첫 대면 때부터 놀 라울 정도로 레일즈에게 호의적이었다. 아까 어깨를 쳤을 때도 정말 로 화가 나서 그랬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만난 지 이제 하루도 지나지 않았지만 레일즈는 거쉰에 대해 호감 과 신뢰감을 갖고 있었다. 더구나 전사로서도 초일류였다. 앞서 치룬 전투에서 보인 그의 실력은 정말 출중했다. 레일즈도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지만 거쉰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더군다나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실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심리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지. 민족 이 같다든가 다르다든가 하는 점은 관계가 없어." 레일즈는 마음속으로 읊조렸다. "다낭에 돌아갈 겁니까? 아니면……." 마리스가 물었다. 레일즈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예정은 변함 없어. 거쉰과 신수의 어금니 성채로 갈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레일즈는 이곳 세계를 좀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도 ……. 제2장 신수의 어금니 1 "정말 날이 갈수록 지겨워지누만." 밧소가 음식 찌꺼기가 묻어 있는 식기를 강물 속에 텀벙 내던지며 자갈이 널린 모래 사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던진 나무 식기가 잠깐 물에 잠겼다가 솟아올라 물 위에서 춤추듯 너울거렸다. "우리가 이런 잡일이나 하려고 여기에 온 게 아니잖아." "그럼 뭐하러 왔는데?" 비인은 밧소가 내던진 식기를 손에 들고 하나하나 닦기 시작했다. "뭐하러라니? 신에게 선택받아서 온 거 아냐!" 밧소는 대답과 함께 모래 사장 위에 벌러덩 누워버렸다. "어떤 신한테 선택받은 거지? 크리스타니아에 있는 신은 짐승의 모 습을 한 신들밖에는 없는데." "어허, 이거 무슨 소리. 어른한텐 말야, 대답하고 싶지 않은 말씀도 있단 말이지. 아직 그런 것도 모르는가!" "어린애라고? 그래, 내가 나이가 어리니까 그렇다고 하지 뭐. 하지 만 나이 핑계 대고 말꼬리를 흐리는 건 좋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원 한다고 지금 곧바로 어른이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야." "억울하겠지." 밧소는 빙긋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어느 쪽이 어린앤지 알 수가 없구만." 샤일론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옷가지가 잔뜩 든 커다란 바구니를 안고서 성채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칭찬하는 말로 알아듣겠어." 밧소는 몸을 뒤집으며 오랜 동안 같은 길을 걸어온 드워프족 신관 을 돌아보았다. 샤일론의 머리 너머로 성채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용병단 신수의 어금니 성채였는데 테르케트 강의 동쪽 기슭에 숲 을 베어내고 통나무로 세운 거대한 건물로 정면에 서문이 있고 거기 서부터 놓여 있는 다리를 통해 건너편 기슭까지 건너갈 수 있었다. 그 길은 이스칼리아 지방을 동서로 나누는 가도였는데 이 가도의 서 쪽으로 가게 되면 이미 베르디아군의 수중에 떨어진 초원 지대가 나 오고 동쪽으로 가면 은빛늑대부족의 최대 부락인 시레네가 있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삼림 지대를 벗어나면 결계의 신수왕 루미스가 다 스리는 백 개의 호수와 천 개의 소택지라고 불리우는 호수늪 지대가 펼쳐졌다. "벌써 3개월이나 됐구나." 밧소는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3개월 전, 유폐된 여왕을 구해 내려고 왕성에 숨어들어갔다가 샤일론과 함께 재상에게 쫓겨 변경의 하크 마을로 도망쳤던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근위 기사단장의 아들 레일즈와 함께 신의 성벽을 넘어 신들이 사는 땅 크 리스타니아까지 오게 되다니. 운명이란 과연 알 수 없는 것이었다. 3 개월 전에는 지금 자신의 모습을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이민족들의 성 채에서 잡무에 날을 지새는 신세가 되리라고는……. "밧소?" 애교 넘치는 목소리가 자기 이름을 부르자 밧소는 허둥지둥 자리 에서 일어났다. "사이아 아냐, 놀래키지 마!" "놀래키다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프엘프 소녀는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멍청하게 있는 밧소가 이상한 거 아냐? 나는 발소리조차 죽이지 않고 걸었는걸." "어휴, 미안미안. 내가 나빴어. 하여튼 난 얼간이 도적이라니까." 밧소는 금세 풀 죽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야, 오히려 아까 그 얼굴 굉장히 멋있던데. 난 딴 사람인줄 알 았어." "내가 원래 잘생긴 얼굴이잖아. 아직까지 그걸 몰랐단 말이야?" 으스대며 말하는 밧소의 얼굴엔 좋게 말하면 여자에게 구애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치근덕거릴 때나 보이는 표정이 떠올랐다. 이 런 표정은 정보를 얻고자 할 때는 대단히 유용하게 쓰이곤 했다. 사실 그의 얼굴은 지나치게 단정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남들 눈에 쉽게 띄 었고 그런 점은 도적에겐 상당히 불리한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보통은 억지로 웃음을 흘리고 다니곤 했다. "너무 잘난 척하지 말라구, 도둑 아저씨." 사이아가 쿡쿡 웃으며 밧소 앞에 앉았다. "그보다 레일즈 봤어?" "레일즈? 못 봤는데. 병영에서 무기 손질하고 있는 거 아냐?" "글쎄 병영은 들여다봤는데……." "그러면 모르겠는걸. 크리스타니아로 오고 나서 상당히 고민하고 있잖아. 그것도 젊다는 증거겠지만." "또 나이 탓하고 있네." 갑자기 비인이 목소리를 높였다. "참 성가신 놈일세." 밧소는 돌아보며 투덜댔다. 비인은 그릇을 다 씻었는지 그릇이 가 득 든 나무통을 들고 일어나던 중이었다. "난 어른도 어린애도 아냐. 그게 뭐 문제 있어?" 비인은 당당하게 말하고 나서 사이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레일즈라면 아마 병영 안마당에 있을 거야. 요즘 검술 연습을 시 작한 것 같아." "검술 연습?" 사이아의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레일즈는 마리스의 부락이 습격 받은 날 이후에 많이 달라졌다. 레일즈가 부락에 남아 습격해 온 베르 디아군과 싸우는 동안, 사이아와 비인은 밧소와 샤일론이 지켜줘 한 발 앞서 탈출했기 때문에 그 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레일즈에게 물어봐도 말을 흐릴 뿐 아무런 설명도 해 주지 않았다. 다 만 알고 있는 것은 레일즈가 확실하게 변했다는 사실뿐이었다. 전보 다 말이 없어졌고 어쩐지 믿음직하지 못했다. 원체 자신감이 넘쳤던 사람이었던 만큼 레일즈의 변모는 그를 전부터 알아왔던 비인이나 사 이아에게는 퍽이나 당황스런 일이었다. 용사나 영웅이라 불려질 전사가 된다! 얼마 전까지 레일즈의 머릿 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오히려 위험스럽게 느껴졌을 정도였다. 그러나 레일즈가 말로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검을 쥘 수 있는 연령 이 되자 곧바로 훈련을 시작하더니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사이아보 다 두 살이나 어렸지만 하크 마을에서 레일즈를 이기는 사람은 단 하 나도 없었다. "훈련을 시작했다는 건 원기를 회복했단 얘기네!" 사이아는 가만히 중얼거렸다. 그날 밤 이후로 레일즈가 검술 훈련을 하는 모습은 한 차례도 보지 못했다.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이 전투에 나갈 때도 따라나선다고 하 지 않았다. 원기를 회복한 것은 기뻤지만 불안한 느낌도 없지 않았다. 이곳 성채에 머물고 나서 도대체 얼마나 많은 전사들이 목숨을 잃었 던가. 사이아는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꽉 막히는 고통을 겪 고는 했다. 그것이 전쟁이 초래하는 엄연한 현실이었다. 사실 사이아 로선 레일즈가 전쟁에 나서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다. 다낭과 크리스타니아를 연결하는 길 위에서 레일즈를 기다릴 때 느꼈던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기분을 두 번 다시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날 밤 결국은 한 잠도 자질 못했다. 레일즈를 크리스타니아로 데리 고 온 사람이 다름 아니라 자신이라는 부담감도 무시할 수 없었다. 사이아에게 크리스타니아는 어려서부터 꿈에 그리던 세계 이상이 었다. 자신의 양부이자 스승인 브라이언의친아들 나셀은 십 년 전에 이곳으로 여행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입으로야 아무 말 않지 만 브라이언이 아들 때문에 노심초사한다는 걸 어린 사이아라고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노마술사의 슬픔이 가슴 아파서만은 아니었다. 그 와 피가 섞이지 않은 사이아로선 어떻게 한다고 해도 나셀을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에 크리스타니아로 올라가서 직접 나 셀을 찾아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하지만 레일즈에게는 그 사실을 아직 말하지 않았다. 말하고 나면 화가 나서 다낭으로 돌아간다고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목적을 위해 레일즈를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아직도 자기가 어리다는 생각에 매달려 레일즈가 지켜주기 만을 바라고 있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그래, 강한 사람이 돼야 해." 사이아는 살그머니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그래, 그 말이 맞아." 혼잣말이었을 뿐인데 어디선가 대답이 들려왔다. 깜짝 놀란 사이아 가 얼굴을 들었다. 비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사이아의 얼굴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강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지금처럼 쩔쩔매며 살 수밖에 없어." "레일즈 얘기야?" "그래 맞아." 사이아는 비인를 보며 미소 지었다. "레일즈는 더욱 강한 사람이 돼야 해. 우리도 마음을 단단히 먹어 야 하구." 2 레일즈는 마리스에게서 받은 은제검을 손에 쥐고 거친 숨을 내뱉 었다. 천 명 남짓한 용병들이 머물고 있는 병영의 안마당에서는 무술 연습이 한창이었다. 태양은 강 너머 숲 뒤로 숨어들어 주위는 저녁 무 렵의 어둠으로 잠겨갔다. 온 몸이 땀에 젖고 속옷이 피부에 착 달라붙었다. 보통 때라면 당연 히 불쾌하게 느꼈겠지만 지금은 그것이 오히려 기분 좋았다. 오랜만 에 기분이 상쾌했다. 신수의 어금니 성채에 머문 지 벌써 3개월이나 지났다. 용병들에게 는 잃어버린 대지에서 찾아온 대백조민족이라고 소개되었다. 신수민 족의 말을 쓰지 못하는 까닭은 수백 년이 넘는 단절의 세월 동안 말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둘러댔다.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이 그의 설명을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레일즈 일행을 동료로서 받아들 여주었다. 거쉰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수의 어금니에는 이런저런 사정 이 있는 사람이 레일즈 일행 말고도 몇 사람 더 있다고 했다. 신수 아르케나를 섬기는 그림자부족의 마술사 이살리도 그 가운데 한 사람이며 타닐 또한 자신의 과거를 비밀에 부쳤다. 자신의 내력을 전혀 밝히지 않는 사람도 있고 부락에서 추방당해 갈 곳이 없어 이곳 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도 있다고 했다. 신수의 어금니가 의병단이 아니라 용병단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지금은 레일즈 또한 용병들과 말이 통하게 됐다.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노력의 결과였다. 주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틈이 나면 마리스에게서 배웠다. 다행이었던 점은 크리스타니아의 말이나 다낭의 말 모두 신화 시대에 신에게서 부여받은 것이어서 어원이 같 다는 점이었다. 다낭의 말은 세월이 흐르면서 상당히 변화되긴 했지 만 크리스타니아의 말은 신화 시대부터 거의 변화하지 않았다. 그 덕 분에 발음이나 문법 등에서 다낭의 말과 공통되는 점이 많아 단어를 외우는 것만으로도 단편적인 대화가 가능했던 것이다. 일행 가운데 가장 빨리 말을 배운 사람은 역시 사이아였다. 그녀가 뛰어난 마술사 견습생이었음은 잘 알고 있었지만 겨우 한 달 만에 크 리스타니아 말을 완전히 습득한 점에 대해서는 놀랄 따름이었다. 마 리스의 평가에 따르면 사이아는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보다도 정확하 게 크리스타니아 말을 구사한다고 했다. 그런데 말이 통하게 되자 좋 은 일만 생긴 것은 아니었다. 말이 통하게 되자 레일즈 일행은 바쁘게 일을 해야만 했다. 베르디아군에게 부락을 습격당해 쫓겨온 여성이나 아이들처럼 취급당했지만 뭐라고 불만을 토로할 상황이 아니었다. 석 달 동안 레일즈는 여러 가지를 알게 됐다. 그러나 가장 놀라운 사실은 신수의 어금니 용병들의 무질서였다. 그들은 계급이 나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모든 전사들이 그걸 당연시했다. 용병들 중에서 제일 높은 단장 이외에는 백인(100) 대장이라는 계급이 있을 뿐이었 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백인대장 밑에 전사들이 배속되어 있지도 않다. 백인대장은 백 명의 전사를 묶어서 지휘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 지 백 명의 적을 쓰러뜨린 전사에게 주어지는 존칭이었다. 적의 침공 을 통보받으면 백인대장은 닥치는 대로 전사들을 모아 성채를 뛰쳐나 갔다. 경우에 따라선 다른 백인대장에게 이야기해 함께 나가기도 했 다. 하지만 백인대장이 모두 성채를 비우는 일도 허다했다. 백인대장 이 없을 때 성채를 기습당하거나 한다면 조직적인 전투는 도저히 치 를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아무도 그 점을 위험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전력은 있지만 전략이나 전술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레일즈는 딱 한 차례 거쉰에게 그런 점을 지적했지만 관심 없다는 반응밖에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들에게는 우리들 나름의 전투 방식이 있기 때문이야." 거쉰은 그렇게 말할 뿐이었다. 납득할 순 없었지만 레일즈가 우길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그의 입장은 성채의 잡일 처리반에 불과했다. 이곳 성채에서 확실하게 서열이 매겨지는 경우는 전사와 그렇지 않은 사람과의 관계뿐이었다. 전쟁의 신수왕 블루저의 종자인 어금니부족 의 원칙을 따르고 있는 셈이었는데, 어금니부족의 전사는 싸우는 것 이외의 모든 노역으로부터 해방되었다. 목숨걸고 싸우는 보답으로서 충분한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요즘 레일즈가 절실히 느끼고 있는 점 한 가지는 자신이 역시 타고 난 전사라는 사실이었다. 전사들 뒤치다꺼리를 하다 보면 불만이 무 럭무럭 솟았다. 전투에 나서는 용병들을 보고 있으면 성채 안에서 가 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전사인 자신 이 성채 안에서 평안히 있을 수 있겠는가 싶어 매번 심한 초조감에 시달렸다. 최근 들어 짬이 나기만 하면 검술 훈련을 시작했다. 오래 전부터의 일과였지만 두 달 이상이나 손을 놓고 있었기 때문에 훈련을 다시 시 작한 날에는 온 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 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은제검이 레일즈의 몸에 익었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제가 처음이었 다. 은제검을 상단에서 중단까지 수백 번씩 휘두르며 형(型)을 잡는 연습을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기가 살아나는 느낌이 왔다. 그러나 문 득 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것이 사람을 죽이는 훈련이라는 생각이 가끔 그의 검을 떨리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