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3) 01/21 09:36 330 line 이 검은 옷의 마술사는 아르케나라는 큰까마귀 레이븐의 신수를 섬기고 있었다. 운명의 예언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주기가 지배 하는 크리스타니아에서는 유일하게 시간을 수호하는 신수이기도 하 다. 신수왕 페네스와는 의견이 다르며 베르디아와의 전쟁에 대해서도 사실은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런 탓에 신수의 어금니에 가담한 아르케나 부족의 사람은 이살 리 하나뿐이었는데 그가 참가하고 있는 이유도 정의감 따위가 아니라 전쟁의 경과를 부족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사실을 거 쉰은 레일즈에게 웃으면서 이야기해 주었다. "동료들을 속이는 건 내키지 않는데……." 어두운 표정으로 말한 사람은 큰독수리의 신수 포르티노의 종자인 난스였다. 난스가 섬기는 신수 포르티노는 크리스타니아 세계의 질서 를 감시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데 그 종자들은 이스칼리아 서남부의 급경사를 이룬 산악 지대에 살고 있으며 고고부족이란 이름으로 불렸 다고 했다. 하지만 이스칼리아 북부가 베르디아군의 지배 아래 놓이 고부터는 다른 지방으로부터 분리되어 부족의 이름 그대로 고립된 상 태에서 전쟁에 휘말려 있다고 한다. "좀 봐줘.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려는 거짓말은 아니니까 말야." 난스는 코방귀를 뀌며 두 눈을 날카롭게 뜨고 거쉰을 노려보았다. "그래, 다 들통났을 때는 솔직하게 이야기를 하는 거야. 다행히 성 채에 큰뱀부족은 없어. 불평할 사람도 없을 거야." "그러면 좋겠지만……." 난스는 떫은 표정이었지만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유익한 교류는 서로를 행복하게 한다. 너희들과 좋은 관계를 이루 었으면 좋겠다." 샤일론이 갑자기 말문을 열었다. "갑자기 설교를 시작하는군." 밧소가 어이없어 하는 표정으로 그렇게말했지만 레일즈는 샤일론 의 기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다섯 전사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으면 서 신수민족이 얼마나 폐쇄적인지를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다. 대륙 을 폐쇄함으로써 완성된 세계의 주민이라는 의식 때문일까? 그러나 지금 크리스타니아의 완전성은 상실되었다. 레일즈가 이 자 리에 있는 것 자체가 그 증거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신조차도 완전한 세계를 만들 수 없는 걸까?" 레일즈는 복잡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이제 완전한 세계는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그건 자칫하면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의욕을 꺾어버리고 마는 관념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타닐은 어디에 있지?" 거쉰의 말에 레일즈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은빛늑대 부족의 전사 타닐이 보이지 않았다. "강가로 갔어. 마리스와 함께." 밧소가 엉큼한 웃음을 띠며 이야기했다. "무슨 일로?" 레일즈는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낭패감을 느꼈다. 강가로 고개를 돌리고 어둠 속을 투시하려고 두 눈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레일즈에 게는 드워프나 정령사 같은 암시(暗視)의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에 가로막혀 두 사람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느릿하게 흐 르는 강물 소리가 들려올 뿐이었다. 마리스와 타닐은 같은 부족 사람이고 오래 전부터 아는 사이다. 다 른 사람들에게는 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을 것이다. 이치상으로는 납 득이 갔지만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자신이 얼마나 마리스를 의지하 고 있는지를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건 당연한 결과이다. 그녀는 생명의 은인이며 동시에 죽음의 공 포에 사로잡혀 용기도 자부심도 다 잃었을 때 그를 질타하여 용기를 북돋워준 사람이 아닌가. 그 공포심은 아직 마음속에서 완전히 사라 지지 않았다. 아마도 완전히 사라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공포와 싸우는 용기만큼은 회복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곳 세 계에 머무를 결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리스에게는……. 멍한 눈길로 어둠 속을 바라보면서 레일즈는 자신이 신수민족과는 전혀 다른 민족의 사람임을 새삼 느꼈다. "살아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어요." 물가의 큰 바위에 걸터앉아 마리스는 어둠 속에서 흘러가는 강물 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도 바로 근처에……." 마리스는 얼굴을 들고 자신과 같은 색의 머리카락을 가진 전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전사 타닐은 팔짱을 낀 채 강 건너편 언덕을 바라볼 뿐이었 다. 그 눈이 녹색으로 빛났다. 마리스는 자기 눈도 같은 색일 것이라 는 생각을 했다. "왜 알려 주지 않았어요? 시레네 족장도 당신이 무사한 줄 알았으 면 정말 기뻐하셨을 텐데……." "부락이 습격받아 모두가 죽었어." 마리스는 슬픈 낯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3년 전에 그 소식을 들었 을 때 마리스는 격한 슬픔과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무기를 부 여잡고 그대로 달려가려고까지 했다. 부락의 젊은전사들도 행동을 함께 하려 했지만 장로가 이를 막았다. 타닐의 부락까지는 전력 질주 한다 해도 닷새는 걸렸다. 시간상으로도 계산이 서질 않았지만 그곳 에 성채를 쌓으려 하는 베르디아의 대군을 상대로 어떻게 해볼 도리 가 없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죽을 작정이었고 실제 죽었을 거야. 부락은 베르디아의 대군에게 겹겹이 포위당했고 도망갈 길은 전혀 없었어. 내 머릿속에 있던 생각은 하나라도 더 베르디아 놈들과 저승길에 동행해야 한다는 거였지. 나는 검을 손에 들고 적들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닥치는 대로 베어넘겼어. 몇 명이나 베었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지. 문득 정신이 들 고 보니 숲 속에 혼자서 서 있었던 거야. 주위에는 적의 시체가 산더 미처럼 쌓여 있었고. 불타오르는 부락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어. 그렇 게 하면 틀림없이 죽었을 거야. 그러나 난 그렇게 하지 않았어." 타닐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그러니까 이렇게 살아 있는 거지, 라고 말했다. 타닐의 목소리에 고뇌가 실려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뇌하 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고뇌하다 지쳐 감각이 마비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무언가 결심한 것이 있었던 것일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타닐 은 과거 자신이 알고 있던 이슬로의 예비 족장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 럼 보였다. "당신은 도망친 것이 아니라 싸워서 살아남은 거예요. 그리고 그건 자랑할 만한 일입니다." 타닐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리스를 돌아봤다. "자랑할 생각도 없고 부끄럽다고도 생각지 않아. 타인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그건 자유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계속 싸우는 것 뿐이야. 내가 살아 있는 한……." "타닐!" 마리스는 거의 절규하듯 외치며 일어섰다. 일어섰어도 타닐은 마리 스보다 훨씬 컸다. 사나운 타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뺨에서 턱까 지 듬성듬성 털이 나 있었는데 수염도 역시 은색이었다. 눈썹의 빛깔 도 마찬가지였다. 그 눈썹 사이에 깊게 패인 주름 하나가 보였다. 처 음 만났을 때부터 새겨져 있긴 했지만 그렇게 깊고 길지는 않았었다. "잊진 않으셨겠죠. 우리들은 족장의 이름을 걸고 결혼을 약속했어 요. 두 사람이 살아 있는 한 그 약속은 유효하잖아요?" 다음 대의 은빛늑대부족을 이끌어갈 사람으로서 장로는 두 사람의 결합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주위에서 그렇게 바랐기 때문이 아니 라 마리스 자신이 이남자라면 장래를 약속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물 론 마리스는 아직 어릴 때였으므로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제대 로 이해하지 못했지만. "잊고 있었어." 타닐은 또렷하게 답했다. "난 기억하고 있어요!" 마리스의 목소리가 마침내 거칠어졌다. 타닐이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리스는 반려자를 잃었을 때 행 하는 부족의 관습에 따라 5일 동안 음식을 끊고 누구와도 얼굴을 맞 대지 않았다. 그런데 상복까지 입게 만든 바로 그 사람이 자기에 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니 여간 자존심 상하는 문제가 아니 었다. "잊어줘." 타닐은 또다시 또렷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마리스는 충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 했다. 타닐의 말이 진심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마리스도 3년이란 세 월 동안 타닐에 관해서는 거의 잊고 지냈다. 장래를 약속했다고는 하 지만 시레네의 대부락에 머무를 당시 겨우 며칠 동안의 추억밖에 없 었다. 매일같이 격렬한 전투를 치르는 와중에 언제까지 과거의 추억 에 매달려 지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약속했던 것은 잊겠습니다. 당신에 대해선 신수의 어금니에 속하 는 전사 가운데 한 사람으로 기억해두지요. 당신도 나에 관해 그렇게 생각해 주세요. 나도 신수의 어금니에 가담할 생각이니까요." "알았어." 짧게 대답하고 타닐은 일행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마리스 는 조그맣게 한숨을 쉬고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다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앞을 걷던 타닐도 무언가를 감지한 듯했다. "들었어요?" 마리스는 조그만 소리로 말했다. 멀리서 자갈 부딪치는 소리가 들 렸던 것이다. 누군가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래, 냄새가 나. 저건 사브르 타이거 냄새야." 뒤돌아보는 타닐의 눈에는 자신감이 어려 있었다. "켄족을 데리고 나타나다니, 깔볼 수 없겠는걸." 마리스는 타닐의 자신어린 표정을 보고 안도감을 느꼈다. 두 손은 이미 창을 거머쥐고 있었다. 창 끝에 붙은 날은 은으로 만들었다. "숫자가 많은 것 같아요. 동료들에게 알리지요." "아니, 그럴 필요 없을 거야." 타닐의 말을 듣고 마리스도 알아차렸다. 야영을 하고 있던 쪽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잠시 기다리자 거쉰 등이 모습을 나 타냈다. 모두 무기를 거머쥐고 언제든지 싸울 수 있는 태세였다. 마리스는 그들 가운데 레일즈가 있는 것을 보았다. 무의식중에 그 녀의 얇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며 미소가 어렸다. 레일즈는 마리스의 모습을 확인하자 강가의 자갈을 밟으며 뛰어 왔다. "적이 쳐들어온 것 같아. 마리스는 장작불 있는 데로 가." 레일즈는 크게 당황했는지 목소리가 무척 상기돼 있었다. "나도 싸웁니다. 은빛늑대부족은 남자나 여자나 모두 전사의 훈련 을 받습니다." "그렇지만……." 은빛늑대부족의 여성들이 뛰어난 전사라는 사실은 레일즈도 알고 있었다. 마리스의 부락이 습격당했을 때 여성들이 맞서 싸우는 모습 을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력에 관한 한 남자 쪽이 강하게 마련이다. 최강의 전사는 역시 남자들 속에서 나온다. 그런 점들을 생각하면 일부러 여성이 싸 울 필요는 없었다. 적어도 레일즈의 생각은 그랬다. "사이아와 비인이 장작불 쪽에 있어. 두 사람을 지켜줘. 밧소와 샤 일론 두 사람으로는 마음이 놓이질 않아." "적들이 그 사람들 있는 데까지는 가지 못해요." 자신만만한 목소리였다. 레일즈는 그녀가 부러웠다. 과거에는 그도 자신이 넘쳤다. 그러나 지금의 그에게는 그런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 다. 당장은 만족스럽게 싸울 수 있을지조차 걱정이었다. "그래, 어쨌든 싸워야 해." 레일즈는 스스로 다짐하듯 말했다. 그때 뒤에서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꿀꺽 침을 삼키며 레일즈는 돌아섰다. 이미 어둠에 눈 이 익었고 마침 달도 떠올라 발 밑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발 디딜 자리 가 썩 좋진 않았지만 자유로이 싸울 만했다. 긴장된 얼굴로 무기를 고쳐잡았다. 마리스가 건네준 은제검이었다. 그 검은 은빛늑대부족 가운데 진정한 용사가 아니면 지닐 수 없는 검 이라고 했다. 검의 무게가 오른쪽 어깨에 실렸다. 입술을 깨물며 칼자 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마침내 어둠의 커튼 너머에서 인간의 두 배는 됨직한 거대한 짐승 이 모습을 나타냈다. 줄무늬 모양의 털로 뒤덮인 맹수였다. 달빛 아래 에선 검은 색과 회색의 줄무늬로밖에 보이지 않지만 아마도 더 선명 한 색일 것이다. 특징적인 것은 위턱에서 튀어나온 거대한 어금니였는데 아래턱을 지나 땅바닥에 닿을 정도였다. "저게 뭐지?" 레일즈가 마리스에게 물었다. "사브르 타이거, 지배의 신수왕 바르바스의 켄족이에요." "마리스의 은빛늑대같은 것인가?" 마리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은 넘겠는걸." 레일즈는 낮게 중얼거렸다. 호랑이라면 다낭 반도 북동쪽의 숲에 서식하고 있었지만 인가 쪽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별로 볼 기회가 없었다. 레일즈는 수년 전에 하크 마을에 맹수 조련사 일행이 왔을 때 살아 있는 호랑이를 가까이서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 는 맹수는 그때 본 호랑이보다 두 배나 큰 몸집이었다. 그리고 사브르 타이거의 뒤로 네 명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 어서 추악한 고블린들이 슬금슬금 나타났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다른 고블린에 비해 키가 크고 억센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이 소문으 로 듣던 고블린의 왕, 홉고블린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고블린들 의 리더인 것만은 틀림없었다. 레일즈는 적 가운데 양날검 공작 그레일의 모습을 찾았다. 그 불사 신의 전사가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레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레일즈는 그렇다면 이길 수 있다고 마음속으로 자신을 격려했다. "모두 죽여버려!" 그때 베르디아 말로, 적의 전사 하나가 호령했다. 사브르 타이거가영혼을 뒤흔들 듯이 포효하자, 레일즈는 반사적으 로 몸을 움츠렸다. "쉽게 죽을소냐!" 레일즈는 자신감을 북돋기 위해 크게 외치며 검과 방패를 거머쥐 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더 큰 전율이 레일즈를 덮쳤다. 그 전율은 적에게 서 온 것이 아니었다. 레일즈보다 몇 발짝 앞서 있던 거쉰 일행으로부 터 받은 것이었다. 히쭉 웃으며 레일즈를 뒤돌아본 거쉰의 얼굴이 달빛 아래서 분명 하게 변하고 있었다. 얼굴 전체에 굵은 털이 솟아나더니 점점 자라기 시작했다. 코가 크게 벌어지고 털의 앞부분이 돌출되었다. 위턱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비죽 튀어나오더니 아래로 약간 구부러지다가 곧장 앞으로 뻗어나갔다. 귀도 삼각형으로 변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거쉰의 얼굴은 짐승으로 변해 있었다. 거대한 이빨을 가 진 멧돼지의 얼굴로. 싸움의 신수왕 블루저가 멧돼지의 신수라는 것을 레일즈는 퍼뜩 떠올렸다. "수빙(라이칸쓰로프)! 당신들은 수빙이었나!" 레일즈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고향의 섬에는 늑대인간(워울프)이나 호랑이인간(워타이거)과 같 은, 수인화(파셜 비스트)하는 마물들이 있었다. 이것들은 전염성을 가 진 질병이었다. 그들은 보름달이 뜰 때가 가까워지면 자신의 의사와 는 상관없이 수인화하여, 미친 듯이 사람들을 습격해댔다. 그리고 수 빙에게 물리거나 할퀸 자들은 새로운 수빙이 되었다. 그러나 다낭 왕국에서는 수빙이 나타났다는 기록이 없다. 어쩌면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의 실체가 밝혀지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 지만……. "수빙? 처음 듣는 소리군." 거쉰의 목소리는 희미해서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수인이다. 수인은 이렇게 변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거쉰은 밤하늘을 향해 용맹스러운 포효를 터뜨렸다. "이게 우리들의 싸움 방식이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돌아보니 칼리오의 얼굴은 사자로, 타 닐의 얼굴은 늑대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적의 전사들 가운데 둘이 사 브르 타이거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수인은 종자 중에서도 가장 충실한 신수의 종이에요. 신수로부터 능력을 받아 신수의 모습 비슷하게 변할 수가 있답니다." 마리스가 레일즈의 옆으로 다가와서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그런 설명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레일즈는 몇번 이나 고개를 흔들며 수인화한 전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그저 망연하게 지켜보면서. 3 전투는 격렬했지만 오래지 않아 끝났다. 강력한 적이긴 했지만 그 레일을 처치하겠다는 결심 아래 파견나온 신수의 어금니 정예요원들 을 상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리더가 전투중에 사망하자 고블린들은 공포감에 사로잡혀 도망치 기 시작했다. 네 명의 적 가운데 순식간에 둘이 쓰러지고 사브르 타이 거로 수인화(獸人化)한 전사는 도약의 능력을 사용해 싸움터에서 멀 찍이 달아났다. 단 한 마리 남은 켄족 사브르 타이거만이 불사신이라 느껴질 정도 로 강인하게 신수의 어금니 전사들을 괴롭혔다. 벌써 여러 차례 칼을 맞았지만 조금도 움직임이 둔해지지 않았다. 발톱을 곧추세우고 어금 니를 번들거리며 전사들의 육체를 찢으려 들었다. 간신히 마음의 동요에서 벗어난 레일즈는 사브르 타이거의 빈틈 을 노려 필살의 의지로 양미간에 단검을 던졌다. 그것이 치명상을 입혔다. 사브르 타이거는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지며 기다란 혀를 축 늘어 뜨렸다. 그러고는 단말마의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맛있는 부분을 떼 가지고 가자."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로 거쉰이 말했다. 레일즈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브르 타이거를 쓰러뜨렸다는 기쁨도 솟지 않았다. 목숨 을 걸고 싸웠던 것은 아니었다. 수인화한 거쉰 일행들에게 경악해 전 쟁터에 있다는 공포조차도 잊고 있었다. 어느 순간 사브르 타이거의 빈틈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쓰러뜨릴 수 있었을 뿐이었다. 이미 전사 들은 변신을 풀고 인간의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너희들은 변신하고 제 모습으로 돌아오는 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모양이지?" 레일즈는 거쉰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수빙은 그렇게 할 수 없나?" "다낭에서는 수빙을 일종의 질병으로 보지……." 레일즈는 간단히 대답했다. "그런 괴물들과 우리를 똑같이 보는 거 아냐!" 거쉰은 격분하여 레일즈의 어깨를 툭 쳤다.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 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 내가 그렇게 보지 않게 생겼나." 레일즈는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로 말했다. "내가 보기엔 마물과 마물이 서로 얽혀 싸우고 있다고밖에 보이질 않으니까." "속마음이 나오는구만." 거쉰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너희들은 고민족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망각의 대지에 사는 친구들은 짐승의 모습을 한 신은 섬길 수 없다고 하면서 오로지 육체 를 가진 신들의 강림을 기다리고 있지. 이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의 강림을 말야." "육체는 없어도 신의 혼은 존재하지. 기도는 기적을 불러일으키고. 우리가 살던 고향의 섬에는 대지모신을 강림시킨 대사제가 있었는데, 암흑섬에 떠돌던 사악한 기운을 정화시켰다고 들었어." "신수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힘을 빌려주지. 신수 스스로의 의지로 기적을 일으키는 거야." 레일즈는 가만히 거쉰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우리들 신수민족과 너희들 새로운 표류민은 서로 교류를 해선 안 되겠군. 교류가 생기게 되면 아마도 전쟁이 벌어질 거야." "전쟁이 벌어진다…… 너희들과 우리들 사이에." 레일즈는 그 말을 머릿속에서 곱씹었다. 암흑민족과는 적대관계였 다. 그러나 그건 과거의 이야기였다. 그들과는 같은 말을 사용하며 문 화도 같았다. 하지만 문화도 다르고 말도 다른 신수민족과는 공통점 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신수민족 대다수는 다낭에 살고 있는 표류민 들을 그대로 다낭에 가둬둔 채 신수왕 루미스의 결계로 봉해 버리려 하고 있다. 마리스와 거쉰조차도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다낭의 사람들이 크리스타니아에 대해 알게 되면 그렇게 되도록 놔두 려고 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렇게 되면 양자 사이에 전쟁이 벌어 질 거라는 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부서진 결계는 원래대로 복구될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으므로 좋든 싫든 양자는 교류를 하게 돼 있다. 다낭 사람도 언젠가는 크리스 타니아 대륙과 다낭 반도를 잇는 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이다. 재상 말리드는 결코 우둔한 사람이 아니다. 틀림없이 정찰대를 파견할 것이고 정찰대가 신수민족과 만난다면 싸움은 피할 수 없다. 그리고 정찰대가 돌아가 그 사실을 보고하면 재상은 곧바로 원정군 을 조직해 그 선두에 자신의 아버지를 세울 것이다. 레일즈의 머릿속 에 마리스와 아버지가 싸우는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레일즈……." 그때 마리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꿈에서 깨어난 듯 깜짝 놀라며 마리스 쪽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따뜻한 미소를 보자 혼란스럽던 마 음이 거짓말처럼 평온을 되찾았다.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여신에게 명령이라도 받은 것처럼 레일즈는 그 말에 따라야 한다 는 생각 외에는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몽유병자처럼 어슬 렁어슬렁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