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9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2권 ...(1) 01/18 12:39 237 line 제1장 수 인 1 다낭. 거대한 대륙의 최북단에 위치하여 자연의 은총으로 풍요를 누리는 반도, 그리고 높고 험한 절벽으로 인해 대륙으로부터 단절된, 육지인 동시에 외로운 섬. 이 땅에는 한 왕국이 번성하고 있다. 북방의 섬에서 범선을 타고 찾아온 표류민의 후예들이다. 사람들은 믿고 있다. 다낭이야말로 서글픈 표류민들을 위해 자비로 운 신들이 그 성지의 일부를 할양해 주신 것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절벽 너머의 세계를 이렇게 부른다. 신들이 거주하는 대륙, 크리스타니아라고. 레일즈는 잡초가 드문드문 자란 메마른 황야 위에 서 있었다. 옆구 리를 때리는 세찬 바람이 동쪽에서 불어왔다. 멀리로는 질서정연하게 늘어선 활엽수로 이루어진 숲이 펼쳐져 있다. 이 황야가 바로 2백 년 넘게 다낭 백성들의 침입을 거부해 온 크리스타니아의 대지라는 사실 에 경이로움이 느껴졌다. 레일즈의 시선은 숲 쪽에서 다가오고 있는 다섯 남자들을 향하고 있었다. 마리스는 그들이 우리 편 전사들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열명 정도가 보였지만 그 중 절반 가까이가 숲으로 되돌아갔다. 십중팔구 는 아직 이 주변에 숨어 있을 베르디아의 잔당을 없애러 갔을 것이다. 사이아와 비인도 레일즈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가오는 남자 들을 바라보았다. 사이아는 한 손으론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다른 한 손으론 마술사의 지팡이를 움켜쥐고 있었다. 사이아의 등뒤 에 숨어 얼굴만 내놓고 있는 비인의 표정엔 불안함이 역력하게 드러 났다.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듯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섯 전사가 다가오는 걸 바라보았다. 재상 말리드에게 쫓겨 왕도 스파이아에서 도망쳐온 두 사람의 모 험자 드워프족의 신관 전사 샤일론과 도적 출신 밧소는 평상시와 다 름없는 모습이다.琯? 또 습격당하는 일은 없겠지?" 비인은 목소리를 한껏 낮춰 사이아에게 물었다. "괜찮아. 만일 그렇게 되면 레일즈가 지켜줄 거야." "그거야 물론 레일즈가 지켜주겠지만, 난 습격받지 않는 게 더 좋 아." "행운신을 믿는 길밖에 없지." 뒤에서 샤일론의 소리가 들렸다. 과연 행운신의 사제다운 말이었지 만 비인은 도리어 불안해졌다. 신에게 의지하는 길밖에 없다는 것으 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걱정해봤자 아무 소용없어. 지금 발버둥친다고 달라질 게 있겠 어?" 비인의 불안을 진정시키려고 밧소도 한 마디 거들었다. 사태는 이 미 예측한다고 달라질 단계가 아니니 어떻게 생각해봤자 무리라는 말 이었다. "아이구, 아무리 그래도 역시 불안해." 비인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마음 한편에서 소정령 스프라이트의 힘 을 빌려 모습을 감추는 주문을 써볼까 하는 충동이 일었다. 써본 적이 없어서 성공할지 어떨지 자신은 없지만……. 그때 은빛늑대 싸지를 잃은 비통함을 털어내고 마리스가 의연한 태도로 레일즈 일행 앞으로 나섰다. 그녀를 보고 다섯 전사는 몹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왜 놀라는 거지?" 사이아가 의아하게 여기며 속삭였다. "마리스가 은발이기 때문이 아닐까?" 레일즈가 대답했다. 은빛 머리는 주기를 관장하는 신수왕 페네스의 신자 가운데에서도 선택받은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성스러운 표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사이아는 다가오는 다섯 전사 가운데 한 사람을 가리켰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사 가운데 한 사람, 거대한 장검을 등에 진 남자도 은빛 머리였다. 다른 전사들이 어떤 부족에 속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이 은빛 머리 전사만은 틀림없이 신수왕 페네스를 따르는 사람이리라. "그래서 나도 놀라고 있어." 레일즈는 중얼거리며 마리스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마리스도 놀라 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눈을 부릅뜨고 은발의 남자를 쳐다보았다. 은 발의 하얀 얼굴에 그나마 얇은 핏기마저 가셔 더욱 창백해 보였다. "타닐……." 사람의 이름 같았다. "아는 사람입니까?" 레일즈가 작은 소리로 물었다. "예? 예." 마리스는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5년쯤 전에 시레네 부락에서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서쪽 부락 이슬로의 젊은 지도자였습니다." 이야기하는 동안 마리스는 평소의 침착함을 되찾아갔다. 그녀는 시 레네가 은빛늑대부족 최대의 부락이며 신수왕 페네스가 거주하는 성 지가 있는 곳아마도 신왕 바르바스가 힘을 발휘했겠지요." 마리스의 말은 담담했지만 그 마음 밑바닥에는 분노와 슬픔이 가 득 차 있음에 틀림없었다. 레일즈는 가슴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 그도 자신처럼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전쟁터에서 도망쳐 나왔단 말인가. 그렇다면 아직도 전사라는 것이 설명되지 않았다. 조금 전부터 부자연스러운 침묵이 이어지고 있었다. 레일즈 쪽도 다섯 전사 쪽도 모두 침묵을 지킨 채 상대가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리 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말을 꺼내기가 어렵게 마련이 다. 사실 레일즈는 침묵을 견뎌내기 힘들어하는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그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었다. 어쨌둑에 소속된 전사들이군요." 마리스는 거쉰이라는 전사에게 물었다. "그렇다. 양날검 공작이 이쪽을 향했다는 말을 듣고 이번에야말로 그놈의 숨통을 끊어놔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왔는데……." 그가 내보이는 자신감은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그들 다섯 사람은 모두 솜씨가 뛰어난 전사답게 동작 하나하나에 기민함과 강인함이 두 드러졌다. 베르디아의 침략으로부터 신수민족을 지키기 위해 몇 세대 이전에 조직된 용병단인 신수의 어금니는 각 부족들 중에서 특별히 선발된 용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눈앞의 다섯 사람은 그 중에서도 특히 솜 씨가 빼어난 사람들임에 분명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맹호부족의 용사인 양날검 공작 그레일에게 도전할 생각을 했겠는가. 마리스는 자신들이 이미 그레일과 싸웠고, 부상을 입히긴 했지만 결국 놓치고 말았다고 말했다. "너희들이?" 거쉰은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 있는 전사가 공작의 한쪽 눈을 멀게 했습니다." 마리스는 자신들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은 거쉰의 태도에 화가 난 듯 강한 어조로 말을 되받았다. "뭐라고!" 얼빠진 소리였지만 거쉰의 눈은 이미 웃고 있지 않았다. 레일즈의 머리에서 발끝까지를 훑어보며 그의 역량을 가늠하고 있었다. "그것 참, 대단한데! 그런데 저 사나이는 도대체 어느 부족 출신이 지?" 예상했던 질문이었다. 그들은 레일즈 일행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 다. 당연했다. 그들의 복장은 신수민족이 입는 옷과 달랐을 뿐만 아니 라 샤일론 같은 드워프나 사이아 같은 엘프 등도 망각의 땅 포레슬의 북부에 조금밖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보다도 우리 부락이 어떻게 됐는지 모르십니까?" 언젠가는 진실을 이야기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고 생 각하며 마리스가 말을 다른 데로 돌렸다. "어제 아침에 보니 부락은 다 타버렸더군. 적잖은 사람들이 죽긴 했지만 그렇게 절망적이지만은않아. 살아남은 주민들은 우선 우리 성채로 옮겨 보호하고 있어. 수습이 되면 다른 부락으로 옮겨가도록 권하고 있는 중이지." 거쉰은 마리스가 대답을 얼버무리는 것에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묻는 말에 솔직하게 대답해 주었다. 거쉰의 대답이 고맙긴 했지만 마 리스榕駭? 거쉰은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고 두 요 정을 바라보았다. 특히 두 사람의 귀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귀 위쪽이 뾰족 튀어나온 것이 요정족과 인간의 차이점이었다. 그때 마리스는 레일즈 쪽을 뒤돌아봤다. "마리스?" 레일즈는 그녀와 신수민족 전사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레일즈 일행을 의심하고 있다는 것은 그들의 말투와 태도만 보아도 분명했다. 마리스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기 쪽을 돌아보았을 때 레일즈는 은빛 머리 소녀가 어떻게 말해야 할지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 순간 레일즈가 먼저 말을 꺼냈다. "우리는 다낭 사람들이다. 신의 성벽 아래 세계에서 왔다." "베르디아 말이잖아!" 예상했던 대로 전사들은 긴장했다. 무기를 거머쥔 자도 둘이나 되 었다. "너희들은 암흑민족인가?" 깃털을 짜넣은 독특한 망토를 입은 사나이가 베르디아 말로 물었 다. 왼손에는 팽팽한 줄의 커다란 활을 들고 오른손은 등의 화살통에 댄 상태였다. "그건 아닙니다." 마리스도 베르디아 말로 대답했다. "지금 이분들이 말하는 대로입니다. 그들은 잃어버린 대지로부터 찾아왔습니다. 암흑민족과 고향이 같은 표류민들이었지만 암흑민족 과는 적대 관계에 있었다고 합니다." "잃어버린 대지에는 대백조부족이 살고 있었을 텐데." 망토 입은 사나이는 그렇게 외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모습 을 본 비인은 조그마하게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역시 은신의 주문을 사용해둘 걸 그랬어." "내 뒤로 와……." 밧소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비인을 밀쳐내며 앞으로 나섰다. 샤일 론도 사이아를 자기 뒤로 오게 하고 나서 큰도끼(그레이트 액스)를 두 손으로 거머쥐었다. "싸우는 건 이야기를 듣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아." 거쉰은 망토 입은 사나이를 손으로 제지했다. "우리들은 누구도 정복할 생각이 없다. 전설에서는 우리들 조상이 대백조에 의해 인도되어 다낭에 상륙했고 그때 다낭 반도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들은 대백조에게 선택받은 백성입니다. 그리고 민족은 달라도 똑같은 인간 아닙니까." 마리스가 레일즈의 말을 이어받았다. "그런 정도는 알고 있어." 거쉰은 귀찮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싸우고 있는 암흑민족과 같은 종 족이로군." "이분들은 암흑민족과는 다릅니다. 우리들과 함께 싸우겠다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구해준다는 건가? 그 보답은 뭐지? 재산, 토지, 아니면 여 자?" 거쉰은 창 끝으로 지면을 세차게 두들겼다. "우리들은 큰뱀의 형제와는 달라서 타관 사람이라고 함부로 죽이 려들진 않지. 그러나 타관 사람을 받아들이고 싶은 생각도 없어." "왜지?" 사나이의 말에 레일즈는 분통이 터졌다. "우리들도 이 대륙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니 타관 사람이 아니잖아." "너희들도 신수를 섬기는가? 주기의 지배를 받아들이고 있는가?" "그건…… 아니다." "그렇다면 너희들은 우리들의 형제가 아니다. 이 대륙에 들어올 자 격조차 없어." "그런 것을 너희가 결정할 이유가 없다!"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사이아가 옷깃을 잡아당겨 어떻 게든 제지하려 했지만 레일즈는 스스로도 이상할 정도로 자제력을 잃 고 있었다. "좁아터진 반도에 갇혀 살면서 우리들이 어떤 기분으로 이곳 크리 스타니아를 올려다봤는지 아나? 우리들은 이곳 세계에 신이 살고 있 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믿으려 애써왔다." "우리가 알 바 아니지." 사나이는 위압적으로 한 마디 하고는 손에 든 창을 머리 위로 빙글 빙글 돌렸다. "물론 너희들에게 강요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어찌 됐든 크리스타 니아에 머물겠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다." 그러더니 갑자기 창 끝을 레일즈에게로 돌렸다. 관자놀이 부근에서 촉촉이 땀이 배어나와 뺨으로 흘러내렸다. 심장이 멎는 듯한 공포감 이 온 몸을 싸고돌았다. "죽이겠다는 건가?" 레일즈 얼굴이 순간적으로 창백해지는 것을 보고 거쉰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차림은 그럴 듯하면서." 거쉰이 계속 이죽거리는 것으로 보아 레일즈를 겁쟁이로 여긴 것 이 틀림없었다. "전쟁이 무서우면 빨리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이곳 대륙에 있으면 전쟁에서 도망칠 수가 없으니까." "그건…… 잘 알고 있다." 레일즈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결론을 내리기 전에 이리 와 보시겠습니까? 여러분들에게 보여드 릴 것이 있습니다." 마리스가 레일즈를 제치고 앞으로 나서며 전사들에게 말했다. 그리 고 신의 성벽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거쉰은 동료들을 돌아보며 어떻 게 하면 좋겠냐는 듯 눈으로 물었다. "아까 네가 말한 대로다. 이야기 정도는 들어줄 수 있지." 머리를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사나이가 대답했다. 그는 다섯 사람 가운데 가장 키가 컸는데 그 다음으로 큰 타닐보다도 머리 하나가 더 올라가 있었다. "알았다, 마리스." 거쉰이 승낙하자 나머지 세 사람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마리스 는 고맙다고 말한 뒤 크리스타니아와 다낭을 갈라놓은 절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레일즈 일행도 그녀를 따라갔다. 그렇게 걷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깃털 망토를 걸친 전사가 법석 을 떨었다. "저렇게 땅이 갈라지다니, 도대체……." 대지에 새겨진 장대한 균열을 발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