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20)/끝 01/17 09:40 258 line "어쨌든 우리 모두 목숨을 건졌잖아." 밧소가 큰일 날 뻔했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레일즈한테 들은 대로 여기까지 와서 기다리는데 저놈 들이 찾아온 거야. 우리는 네가 붙잡혀 우리들에 관해 낱 낱이 말했을 거라고 짐작했지 뭐야. 어쩐지 뭔가 찜찜하더 라구." 샤일론은 땅에 꿇어앉아 행운신에게 감사의 축원을 올 리며 몸을 지키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타인에게 불행을 안 긴 것을 참회했다. 그때 숲 쪽에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 가 들려왔다. 새로운 적인가 싶어 잔뜩 긴장하며 소리나는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1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곧바로 레일즈 쪽으로 걸어오 고 있었다. 다시 외침 소리가 있었다. 이번 외침은 확실히 들었으나 레일즈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저 소린 우리 동료들입니다!" 마리스가 기뻐하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크게 흔들었다. 은빛 늑대 싸지도 꼬리를 흔들며 짧게 짖어 동 료가 오는 것을 반겼다. 레일즈 일행도 모두 일어서 그들 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우리들이 죽지 않고 살았어……." 레일즈는 가슴에 맺혀 있던 것을 모두 털어내려는 듯 말 했다. 그리고 자신의 모험이 끝났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 다. 이제 이곳 크리스타니아로 찾아오는 일은 두 번 다시 없 을 것이다. 이 당차고 아름다운 은빛 머리 소녀도 만나지 못하게 된다. 레일즈는 문득 마리스의 옆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마리 스는 계속 미소 띤 얼굴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때 그 미 소 띤 얼굴이 갑자기 레일즈를 향했다. 그리고 레일즈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지 금세 자기 부족들 사람 쪽으로 돌렸다. 레일즈는 새삼스럽게 느꼈다. 자기가 그녀를 평생 동안 잊지 못하리라고. 마찬가지로 그녀 또한 자기를 기억해 주 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레일즈는 무슨 생각이 났는지 마리스 곁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빌려 차고 있던 검을 허리에서 끌러내 두 손에 받쳐들고 마리스에게 내밀었다. "고마웠어, 마리스……." 레일즈는 주저하면서 마리스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마 리스는 입가에 미소를 띠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 검을 받아 주십시오." "이건 은으로 만든 검인데. 이런 값진 물건을 받을 순 없 어." "아닙니다, 그건 분명 우리 부족에게 전해 오는 소중한 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일즈님께서 받아 주시길 바라 는 것입니다. 우리 부족의 용사 중의 용사에게만 주어졌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난 용사가 아니야. 그건 누구보다 마리스가 가장 잘 알 잖아." "아닙니다, 레일즈님. 당신이야말로 그 검을 차지하기에 합당한 분이십니다." 마리스는 그렇게 말하고서 일단 레일즈에게서 검을 받 아들었다가 다시 자기 손으로 그의 벨트에 매어주었다. 레 일즈는 마리스를 마주본 채 잠시 동안 그녀의 눈동자에 자기 눈길을 붙박아두었다. 마리스의 눈동자 속에 자신의 눈동자가 비쳐 있음이 느껴졌다.그리고 레일즈의 눈동자 도 마리스의 눈동자를 사로잡고 있었다. 마치 마주 놓인 거울처럼 서로의 눈동자를 무한히 비춰주며 서로의 마음 에까지 다다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마리스의 입이 희미하게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려고 했다. 그때였다. 은빛 늑대 싸지가 용수철처럼 튀어올랐다. 거대한 은빛 몸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레일즈와 마리스의 머리 위를 가 볍게 뛰어넘었다. 레일즈는 반사적으로 목을 낮췄다. 마리스는 은빛 늑대 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으며 이 성스러운 동물이 무슨 행 동을 하는지 파악하려고 했다. 그 몸이 아직 공중에 있는 동안 싸지는 짧은 비명을 울 렸다. 그러곤 지면에 가볍게 내려섰다. 그러나 서자마자 힘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축 처진 사지가 가볍게 경련을 일으켰다. "싸지!" 놀람과 슬픔의 외침 소리를 지르며 마리스는 쓰러진 은 빛 늑대 곁으로 달려가려고 했다. 그러나 레일즈는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은빛 늑대 싸지는 이미 움직이지 않았다. 양미간에 깊게 단검이 박혀 있는 것을 레일즈는 얼른 알아보았다. 그 단 검은 틀림없이 그의 것이었다. 분노에 몸을 떨다 양날검 공작그레일에게 집어던진 바로 그 마법의 단검이었다. 레일즈 일행이 경악하며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고 생 각한 양날검 공작이 천천히 일어섰다. "불사의 몸인가……." 레일즈는 격렬한 갈증을 느끼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신의 성벽을 올려보던 때처럼 상대의 거대함에 압도당했 다. "불찰이었어……." 양날검 공작은 두 발로 대지를 딛고 서서는 시선을 돌려 가며 레일즈 일행 한 사람 한 사람을 뚫어져라 노려보았 다. 오른쪽 눈에서는 아직도 피가 흐르고 있었는데 닦으려 고조차 하지 않았다. "은빛 머리 소녀, 그리고 새 왕국의 전사!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의 신왕 바르바스가 복수를 관장하 고 있다는 사실을. 신왕의 이름과 내 잃어버린 오른쪽 눈 에 맹세코, 언젠가 이 그레일이 너희들의 숨통을 끊어놓고 말 테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양날검 공작은 램프의 불이 꺼지듯 그 자리에서 사라져버렸다. 레일즈는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기분 나쁜 기억 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거구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 었다. "저게 저자의 능력인가?" 레일즈는 입술을 깨물며 마리스를 잡았던 두 손을 놓았 다. 그러자 마리스는 튕겨나가듯 움직이지 않는 은빛 늑대 곁으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이마에 박힌 단검을 뽑아들고 냅다 땅에다 내던진 뒤 덥석 껴안았다. 그것만으로도 단검은 마력을 발휘해 화살처럼 날아가 지면에 팍 꽂혔다. "싸지……, 우리를 위해 네가 죽다니. 미안해, 정말 미안 해……." 마리스는 꼭 어린애처럼 흐느껴 울며 미안하다는 소리 를 반복했다. 양날검 공작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며 레일즈 는 마음속으로부터 다시 공포를 맛보고 있었다. 양날검 공 작이 남긴 말이 마치 사형 선고처럼 생각됐다. "그자는 괴물인가?" 레일즈는 마리스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신수였던 바르바스가 복수의 수호 신이었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싸늘하게 식은 은빛 늑대의 머리를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마리스가 힘 없이 말했다. 그 대답에 레일즈는 전신에 식은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괘, 괜찮아. 다낭에 돌아가면 그자도 쫓아올 수 없을 테 니……." 레일즈는 그 자리에서 중얼거렸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죠. 하지만 조심하세요. 그 남자 는 자신이 원하는 장소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 왕의 이름을 내건 이상 반드시 그는 복수를 달성하려 할 것입니다. 설령 어디로 도망가도 그의 손길을 벗어나긴 쉽 지 않을 것입니다." 레일즈는 두 팔로 자기 몸을 감싸안았다. 오한이 심해 전신이 얼어붙는 듯했다. "도망칠 수 없다, 어디로도……." 레일즈는 멍청해진 모습으로 마리스의 말을 곱씹었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왕도에만 가면……." 왕도에 가면 아버지가 있다. 아무리 양날검 공작이 강하 다 해도 아버지에게는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에게도 져본 적이 없다.모험자였을 무렵, 그리고 기 사가 되고 나서도 수많은 전투에 나서 승리만을 거뒀지 패배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그러나……. 레일즈의 마음에 남아 있던 최후의 용기가 그 생각을 지 워버렸다. 만약 여기서 아버지를 의존하고 만다면 일생 동 안 자기 혼자 힘으로는 살아나갈 수가 없게 된다는 생각 이 들었다. 물론 자신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양날검 공작과 의 결투만큼은 다른 누가 아닌 자신의 책임이었다. "다낭에는 돌아갈 수 없어……." 레일즈는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천천히 말했다. "다낭에 돌아갈 수 없다니요?" 레일즈의 말을 알아듣고 마리스가 놀라서 얼굴을 들었 다. "돌아갈 수 없어. 아니, 돌아가선 안 돼. 만일 이대로 다 낭으로 돌아가면 나는 비참한 패배자에 불과해. 마리스가 말한 대로 살아갈 가치조차 없는 겁쟁이가 돼버리고 마는 거지." "그래서 이곳 세계에 머무른다는 겁니까?" 은빛 늑대를 살짝 밑에 내려놓고 마리스는 일어섰다. 그 리고 레일즈의 참마음을 묻듯 똑바로 그의 눈동자를 들여 다보았다. "그렇게 할 생각이야." 레일즈는 한 마디 한 마디를 또박또박 말했다. "나는 다낭에 돌아가지 않아. 설령 죽음을 모르는 괴물 이 나를 노리고 있다 해도. 그자가 내게 복수하겠다고 한 다면 당당히 도전을 받아들이겠어. 기껏 죽음을 두려워하 며 기다리고 있을 이유가 없어." 자신이 큰소리 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레일즈도 알고 있었다. 사실은 겁이 나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두려움을 떨쳐내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용기를 갖지 못하는 사내가 될 것만 같았다. "나는 양날검 공작과 싸운다. 그리고 이긴다." "레일즈……." 마리스가 무슨 말인가를 하려 하자 레일즈가 제지했다. "마리스…… 이건 나의 싸움이야. 물론 마리스에게 번거 로움은 끼치지 않겠어. 다만 지금부터 당분간 내가 이곳 크리스타니아에 있는 걸 눈감아줘." 마리스는 레일즈의 눈동자를 응시한 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결국 이곳 세계에 남겠다는 거야?" 밧소가 빙글거리며 레일즈에게 말을 붙였다. "난 여기서 이젠 안녕이라고 생각했는데?" "싫으면 얼마든지 가도 좋아." 레일즈는 진지한 얼굴로 밧소에게 말했다. "바보 같은 소리 마! 이제 조금 사귀기 시작한 거 아냐? 이제부터는 좀더 즐거운 여행을 해 보자구." "그러나 그자가 날 노리고 있어. 같이 다니면 너희들도 위험에 빠져." 레일즈가 그렇게 말하자 밧소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난 말야, 재상한테 쫓기고 있잖아. 그야말로 피장파장 이야." "그랬던가……." 레일즈가 살짝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이 있게 해 줘." 사이아가 말했다. 염려스러워 하는 목소리였다. 레일즈 는 크게 놀라며 고개를 가로 저었다. "안 돼, 사이아! 너도 알잖아. 이곳 세계는 너무 위험스 러워. 너는 그 노인네한테로 돌아가야 해." "돌아갈 수 없어……." 겸연쩍은 표정으로 사이아는 말을 이었다. "돌아갈 수 없어. 난 말야 사부님 허락도 없이 이곳 세계 에 왔어. 게다가 이 마술사의 주문서는 정식으로 얻은 게 아냐. 그게, 그게…… 허락도 없이 빌려서 갖고 온 거야." "훔쳤단 말이니?" 레일즈는 깜짝 놀랐다. 잠시 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게다가 말야, 난 이곳 세계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어 ……." 사이아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넘쳤다. "알았어, 사이아. 하지만 함께 간다면 하루라도 빨리 마 술사의 주문을 외워야 해. 가능하면 신수민족이 사용하는 말도." "그건 나한테 맡겨!" 레일즈의 말에 마음을 놓았는지 사이아가 활기 찬 목소 리로 대답했다. "두 사람이 돌아가지 않는다면 나도 이곳 세계에 남을 거야." 비인이 다짐을 받겠다는 듯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 다. "알고 있어." 레일즈는 비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그리고 마리스 쪽으 로 몸을 돌려 머뭇머뭇 말을 꺼냈다. "동료가 조금 늘었어, 마리스. 허락해 줄 수 있을까?" "레일즈님, 걱정 마세……." 마리스는 말을 다 맺지 못했다. 다만 그 눈에 살짝 눈물 이 번졌다. 그러나 그건 순식간의 일이었을 뿐, 곧바로 의 연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저도 결심했습니다. 부족장이 될 운명이 정해져 있다면 그에 따라야지요. 부족 사람들을 이끌고 신왕과 싸우겠습 니다. 그리고 주기의 지배를 이곳 세계에 반드시 되돌려 놓겠습니다." 그러더니 마리스는 그 자리에 가만히 무릎 꿇으며 싸늘 히 식은 은빛 늑대의 시체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자가 신왕과 잃어버린 오른쪽 눈에 맹세한다면 저는 신수왕 페네스와 저 대신 죽음을 당한 싸지에게 맹세코… …." 레일즈는 운명이나 주기 따위를 믿을 기분이 들지 않았 다. 그러나 마리스만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의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마음속으로 빌었 다. 그것이 설사 다시금 다낭 반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때 다시 외침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보니 마리스 부족 사람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일 정도로 다가왔다. 마리스 는 싸지의 은빛털을 쓰다듬으면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레일즈는 마리스 대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 어 신호를 보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면서 마음속으로 생각 했다. 앞으로의 자기 운명이 어떤 것일지를. 마치 자신이 폭풍 우 몰아치는 바다에 나선 돛단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힘에 놀림당하며 여기저기 떠다닐 수밖에 없는 돛 단배 같다는……. 과연 어디까지 떠가게 될까? 가는 길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다낭 백성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표류가 끝 나게 되는 그 어느 날 신천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레일즈의 여행은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