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6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9) 01/16 09:34 305 line 그러나 레일즈는 동료들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도 변 함없이 얼굴이 굳은 채 마리스 뒤에 숨어서 몸을 한껏 움 츠렸다. 마리스는 실망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다시 양날 검 공작과 대치했다. "그 사람들은 당신의 적들이 아니다. 빨리 풀어줘라. 그 렇지 않으면 새로운 적을 만들게 될 것이다." "새로운 적, 그거 괜찮은데." 양날검 공작 그레일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마리스의 몸을 징그러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걸 알아챈 마리스는 혐오감에 온 몸이 굳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자들한테서 남김없이 들었다. 절벽 밑에 새로운 왕국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정말 놀랐지. 그 것도 우리들의 원수였던 자들의 후예라니. 우하하하, 세상 은 정말 좁아!" "그건 벌써 수백 년 전의 일일 뿐이다." "그래그래, 그건 어쨌든 좋아. 나는 신수민족이다. 암흑 민족이 품은 한 따위는 어쨌거나 관계가 없다." "그렇다면 빨리 그 사람들을……." "그건 안 돼!" 양날검 공작은 마리스의 말허리를 툭 자르며 대답했다. "왜지?" "우리들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왕 바르바스의 목적은 이곳 크리스타니아 전 영토를 지 배하는 데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언젠가 이들 신(新)민족 도 정복해야 한다. 그때 상대방이 우리의 존재를 알지 못 해야 정복 전쟁이 훨씬 수월할 거 아닌가." 양날검 공작의 말에 레일즈는 소름이 끼쳤다. 이들 암흑 민족에게 알려진 이상 틀림없이 다낭은 전쟁터가 될 것이 고 그때는 레일즈가 태어나고 자란 하크 마을이 맨 먼저 싸움터로 변할 것이 뻔했다. 다낭 백성들 중 도대체 누가 이민족의 습격을 미리 알아챌 수 있겠는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변경 마을쯤이야 단숨에 정벌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하크 마을에서왕도 스파이아까지는 겨우 10일 정 도의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왕도가 순식간에 함락당한다 면 그 뒤 다낭의 백성들이 아무리 저항에 나선다 해도 승 산이 서질 않는다. 다낭 왕국은 베르디아 백성의 지배 아 래 들어가고, 근위 기사단장인 아버지와 어머니도 살해당 할 것임에 틀림없었다. 그 왕국의 위기를 불러들인 사람이 자기들 모험자가 되 는 것이다. 레일즈는 극단적인 굴욕감과 후회에 지금 당장 죽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에 시달렸다. "한 왕국을 그렇게 간단히 정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가? 그들에게도 용맹한 기사가 얼마든지 있다. 쉽사리 싸 움을 걸었다간 너희들이 먼저 패배할 것이다. 그것도 모르 는가?" "신왕은 위대하다. 어떤 자도 신왕을 이길 순 없어." 양날검 공작은 포효하듯 말했다. "글쎄, 그 포악이 얼마나 갈까……." 피를 토하는 듯한 마리스의 말이었다. 뒤에 숨어 있는 레일즈는 분노로 이글거리는 마리스의 눈동자가 빨갛게 타오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누가 우리를 막는단 말인가? 너희들 수호신 페네스가? 신왕의 권위가 두려워 성지에서도 모습을 감춘 겁쟁이 신 에게 도대체 무슨 기대를 하고 있는건가!" "어떻게 그걸……." "신왕은 전지전능하다. 어떤 비밀도 신왕 앞에선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며 양날검 공작은 두터운 검지손가락으로 똑바로 마리스를 가리켰다. "은빛 머리 소녀, 처음 넌 나한테 목적이 뭐냐고 물었다. 그럼 대답해 주마. 내 목적은 은빛 머리 소녀, 바로 너다! 난 널 죽여야만 한다. 그것도 그냥은 안 된다. 고통과 굴욕 을 안겨주면서 서서히 죽여주겠다." "나를 죽인다…… 왜지?" 마리스는 중얼거리며 의아한 듯 눈썹을 치켰다. 죽인다 는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르쳐주고말고. 은빛 머리 소녀, 페네스는 네가 지고 있는 버거운 운명에 대해 아무 것도 가르쳐주지 않았구 나." "나의 운명?" "그래, 너의 운명이다. 너는 가까운 장래에 은빛늑대부 족의 족장이 된다. 하나의 주기 끝에 어울리는 위대한 족 장이. 지난날 환생할 때마다 너는 항상 그래왔다. 그리고 은빛 늑대의 백성들은 너의 지휘 아래 결속하여 우리 부 족들에게 대항한다……." 이야기를 계속하는 양날검 공작 그레일의 눈에 증오의 빛이 서리기 시작했다. "너와 나는 언제나 대결해 왔다. 주기의 종말인 동시에 시작이기도 한 끄트머리 무렵에." "끄트머리 무렵?" "그렇다. 그리고 너와 나의 싸움은 우리 위대한 신수왕 바르바스와 숲 속의 은빛 늑대 페네스의 싸움이기도 하다. 새로운 주기를 맞는 크리스타니아의 질서를 정하는 신수 왕들의 좌장을 결정하기 위한 싸움인 것이다." "내가 족장이 된다고? 주기의 끄트머리에서 내가 너와 항고 다음에 올 새로운 질서는 우리들의 신왕 바르바스의 손으로 세워진다. 너는 낡은 질 서와 함께 영원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은빛 소녀!" 마리스가 고개를 들어 그레일을노려보았다. 그 눈동자 에 분노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주기의 지배를 받는 자는 주기의 비밀에 대해 이야기 해선 안 된다. 그것은 모든 신수들이 맹세한 원칙이다. 신 왕 바르바스는 그 원칙조차도 깨뜨렸단 말인가." "주기 따윈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 "뭐, 말도 안 돼!" 마리스는 한 마디 외치고는 두 손으로 창을 거머쥔 뒤 창 끝을 양날검 공작 그레일을 향해 돌렸다. 은빛 늑대 싸 지 또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언제라도 덤벼들 태세를 취 하였다. 그때까지 두 사람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에 멍하니 서 있던 레일즈는 곧 싸움이 벌어질 듯한 상황 때문에 정신 을 차렸다. "잠깐만, 마리스. 싸움을 벌이면 사이아가……." 레일즈가 뒤에서 마리스를 멈춰 세우며 필사적으로 말 했다. "놔요! 떨어지세요. 지금 이야기를 들었죠. 저는 저 남자 를 쓰러뜨려야만 해요. 설령 내 목숨이 끊어진다 해도… …." "안 돼, 마리스. 저놈에게 상대가 안 된다고 말한 것은 마리스잖아. 지금은 항복하는 수밖에 없어. 항복하면 살 길이 있을지도 몰라. 틈을 보아 달아나는 것도 가능하고." "레일즈!" 마리스는 레일즈의 얼굴을 눈도 깜박이지 않고 바라봤 다. "진심으로 말하는 거예요? 겨우 하루 만에 그렇게까지 용기를 잃어버리다니…… 자존심을 잃은 인간은 더 이상 살 가치가 없어요. 앞으로 평생 동안을 겁쟁이란 오명을 짊어진 채 살아가고 싶으세요? 그것은 다음 주기에도, 또 그 다음 주기에도 겁쟁이로 살아가게 된다는 사실을 의미 해요." "우리들의 일생은 단 한 번뿐이야. 그러니까 겁쟁이라 불리는 것이 죽는 것보다는 나아. 죽어버리면 모든 것이 끝장이야." 레일즈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나는 저 전사에게 베였을 때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어. 내가 이 세상에서 죽어 없어졌다고 생각했단 말이야. 이제 두 번 다시 생각도 행동도 할 수 없다는 절망감은 말로 설 명할 수 없어. 그걸 한 번 맛보고 나니 이제 두 번 다시 똑 같은 경우를 당하고 싶지 않아. 마리스도 사이아도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고 싶진 않고." "레일즈……." 마리스의 눈동자에 가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눈동 자가 레일즈의 마음에 꽂혀 들었지만 마리스를 껴안은 팔 을 놓을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얼굴만을 양날검 공작 쪽 으로 돌렸다. "항복을 인정해 달라! 내 아버지는 다낭 왕국의 기사단 장이다. 몸값이라면 얼마든지 준비할 수 있다. 마리스는 다낭으로 데리고 가 이 세계에 두 번 다시 관여하지 않도 록 맹세시키겠다. 주기는 네 말대로 이미 사라졌으니 그녀 를 살려보내든 죽이든 이제 아무런 관계가 없지 않나." 레일즈는 양날검 공작에게 애원했다. 그런 레일즈를 물 끄러미 바라보던 동료들의 모습이 양날검 공작의 큰 몸집 뒤로 살짝 보였지만 레일즈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여 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하는 길은 이 남자의 자비심 에 기대하든가, 욕심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었다. 포로가 된 상류 기사가 몸값을 지불함으로써 풀려난 사례는 옛날 부터 있어온 일이었다. "네 아버지가 기사단장이라면?" 양날검 공작은 그렇게 말하고는 한참을 웃었다. "과연 새로운 왕국을 정복하기란 손바닥 뒤집기보다 쉽 겠군. 싸움도 해 보기 전에 갑자기 목숨 구걸을 하는 놈이 기사단장의 아들이라니. 모르긴 몰라도 그 기사단장 나리 도 내 모습을 보기만 해도 울음을 터뜨리고 목숨을 구걸 해 오겠구만. 안 봐도 뻔하지 않겠어?" 양날검 공작은 온 몸을 흔들어대면서 호들갑스럽게 웃 었다. 주인의 웃음소리에 맞장구치듯 졸개 전사들도 소리 높여 웃기 시작했다. 레일즈를 비웃는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사방에 날렸다. 물론 레일즈의 귀에도 그 웃음소리가 들렸 다. 그 소리가 귓속에서 점점 세차게 증폭되어 머리가 깨 질 정도로 크게 울렸다. "베르디아의 기사들은 굴욕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 그러나 너희 나라의 기사는 죽기보다 굴욕을 택한 다는 말이로구나. 과연 살아갈 가치가 없는 겁쟁이 놈들이 로군." 양날검 공작의 웃음은 대지조차도 들썩거리게 하는 것 같았다. "겁쟁이는 정복되어야 한다. 타인 위에 서는 사람은 강 한 자뿐이야. 허약한 자는 노예로서 강한 자에게 절대적으 로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이 세계를 꿰뚫는 유일한 법칙 이다. 다음에 오는 주기는 이 절대의 법칙으로 통치될 것 이다." 레일즈는 이미 마리스를 끌어안은 팔을 풀고는 그레일 의 말을 듣고 있었다. 얼굴이 빨개져 마치 불이 붙은 듯했 다. 조금 전까지 마리스를 잡고 있던 두 손을 굳게 쥐고 부 들부들 떨었다. 눈에서는 눈물이 나왔다. 공포 때문에 흘 리는 눈물이 아니었다. 분노와 굴욕감으로 저도 모르게 마 음속에서 솟아오르는 절규의 눈물이었다. "아버지를, 아버지를 모욕했어……." 그 중얼거림은 레일즈가 그렇게 마음 먹어서 뱉은 말이 아니었다. 레일즈의 영혼이 육체의 껍질을 깨뜨리고 밀어 내는 말이었다. 레일즈는 핏기 어린 눈길을 양날검 공작에 게로 향했다. "감히 우리 아버지를 욕하다니!" 레일즈는 허리에 찬 벨트에 꽂힌 단검을 뽑아들고 눈 깜 짝할 사이에 양날검 공작을 향해 온 힘을 다해 내던졌다. 양날검 공작은 아직도 껄껄거리고 있었다. 그러나 레일즈가 단검을 던진 순간 그 웃음이 확 멎었 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날아오는 단검을 노려보았다. 거대한 전사는 숲 속의 호랑이처럼 날랜 몸동작으로 단검 을 피하려 살짝 움직였다. 아니, 그렇게 하려고 했다. 보통의 경우였다면 틀림없이 피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 일즈가 던진 단검에는 강력한 마력이 비장돼 있었다. 실력 이 출중한 양날검 공작도 거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던 모 양이다. 레일즈가 던진 마법의 단검은 양날검 공작의 오른 쪽 눈에 거의 칼자루까지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단검에 맞은 오른쪽 눈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 다. 그러더니 거대한 전사는 갑자기 땅바닥에 뻗어버렸다. 둔탁한 소리가 주위에 울렸다. 졸개 전사들은 주인이 쓰러짐과 동시에 격렬한 동요를 보이기 시작했다. 여섯 전사들이 시끌벅적 떠들었다. 그 틈을 노련한 모험자들이 놓칠 리가 없었다. 샤일론과 밧소 두 사람이 동시에 움직였다. 밧소는 한 발 물러섰다가 한 전사의 정강이를 힘껏 찼고 샤일론은 또 다른 전사를 온 몸으로 세차게 받았다. 그 둘 의 행동에 정신을 차리고 비인이 큰 소리로 땅바닥을 구 르며 적들에게서 달아났다. 그러자 네 명의 적에게 둘러싸 여 도망치지 못한 사이아만 위기 속에 남게 되었다. 그때 은빛 늑대 싸지가 길게 이어지는 포효 소리와 함께 사이아에게로 덮쳐 들어갔다. 마리스가 은빛 늑대에게 무 슨 말인가를 외치고 그녀 또한 창을 거머쥐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은빛 늑대 싸지는 곧바로 사이아한테 달려들었다. 싸지 의 행동에는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쓰러진 사이아의 옷 깃을 물고 가볍게 뛰어올라 갑자기 벌어진 사태에 멍해 있는 전사들의 포위를 순식간에 돌파했다. "빨리들 도망치세요!" 마리스는 사이아들에게 외치며 그녀의 충직한 은빛 늑 대와 같이 맹렬하게 적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적의 한 전 사가 마리스의 창에 가슴을 관통당하고는 입으로 피를 쏟 으며 그 자리에서 숨이 끊어졌다. 바로 그때쯤 드디어 적 의 전사들도 반격 태세를 갖춰 마리스를 되받아 치려고 덤벼들고 있었다. 거기로 은빛 늑대 싸지가 돌아와 주인을 구하려고 어금 니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일단 그 자리에서 도망쳤던 샤일론과 밧소 두 사람 모두 무기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순식간에 그 둘을 감시하던 두 전사들과 대결했다. 샤일론은 온 힘을 다해 큰 도끼를 휘둘렀고 밧소도 재빠 른 몸동작으로 상대를 희롱하면서 작은 칼을 능숙하게 부 렸다. 적과 아군이 뒤섞인 격렬한 싸움이 레일즈의 눈앞에 서 전개됐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레일즈는 단검을 내던진 자세 그대 로 멍하니 서 있었다. 아버지를 모욕했다는 분노에 떨다 단검을 집어던진 뒤 다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었다. 자기 가 무슨 일을 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역전된 형세를 지켜볼 따름이었다. "뭐하고 있는 거야! 와서 빨리 도와 줘!" 움직이려 하지 않는 레일즈를 발견하고 밧소가 급한 소 리를 했다. 그렇지만 레일즈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 직이려 했지만 눈앞에 전개되는 격렬한 싸움에 압도당해 발이 그 자리에 붙어버렸다. "레일즈!" 멀리서 들리는 사이아의 목소리에 드디어 레일즈가 정 신을 차렸다. 멍하니 자기 허리에 매달린 검을 바라보다 손잡이에 손을 댔다. 그러고는 천천히 칼을 뽑아들었다. 하늘로 들어올려진 검은 태양 빛을 받아 은으로 만들어진 칼날이 번쩍였다. "레일즈, 빨리 와서 도와줘!" 비인의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용기를 내라, 레일즈! 행운신의 가호를 믿어!" 샤일론의 용기를 북돋는 말도 들려왔다. 레일즈는 검을 상대편 눈높이에 맞춰들고 천천히 호흡 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소리 쳤다. 그것은 마음 밑바닥에서 용솟음 치는 전사의 우렁찬 외 침이었다. 3 얼마 지나지 않아 싸움은 끝이 났다. 샤일론과 밧소는 각각 자신의 상대를 쓰러뜨렸다. 마리스는 두 사람의 적을 꺾었고 나머지 적은 은빛 늑대 싸지와 뒤늦게 싸움에 가 담한 레일즈가 하나씩 저 세상으로 보냈다. 양날검 공작과 그 부하들은 피범벅이 되어 땅바닥에 쓰러진 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짧고도 긴 싸움에 승리하고 난 뒤 모두 숨을 헐떡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단 하나 은빛 늑대 싸지만이 고른 숨을 쉬며 땅바닥에 사지를 뻗고 있었다. 기쁨의 환성을 올리며 사이아와 비인 두 사람이 달려왔다. "레일즈,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 사이아는 눈물을 흘리며 레일즈의 가슴으로 뛰어들었 다. 그 탄력에 레일즈는 뒤로 넘어질 뻔했다. 두 손을 바닥 에 짚으며 간신히 몸을 지탱했다. "틀림없이 구해 주러 올 줄 알았어. 레일즈, 레일즈… …." 사이아는 반복해서 레일즈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가슴 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사이아……." 레일즈는 곤혹스런 표정을 지으며 도움을 청하듯 마리 스를 보았다. 마리스는 레일즈와 시선이 마주치자 당황스 러운 표정으로 눈길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은빛 늑대 싸지 를 불러들였다. "레일즈, 아까는 정말 놀랐어. 대단한 연극이야. 정말 레 일즈가 겁쟁이가 된 게 아닌가 생각했어." 비인이 부끄러운 미소를 지으며 레일즈 곁으로 다가왔 다. "연극…… 이라니?" 레일즈가 입을 벌린 채로, 비인을 올려보았다. 그건 연극이 아니었다. 아까 보인 추태는 레일즈의 있는 모습 그대로였다. 양날검 공작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혀 그 어떤 수모를 받고서라도 살아남으려고 했던 것뿐이었다. 마리스나 사이아 일행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도 물론 했었 다. 그러나 싸울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다. 그럼에도 아버지가 모욕당했을 때 레일즈의 마음은 참 기 어려운 분노로 가득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마법의 단검을 집어던진 뒤였 다. 자신의 내면에 아버지의 존재가 이토록 컸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재상의 부하가 되고 나서는 아버지를 모 멸하는 마음까지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곳 크리스타니아 에 올라와 아버지가 모험자 시대의 아버지로 되돌아갈 수 있다고 기대했을 땐, 소년시절에 존경하고 동경했던 그 마 음으로 되돌아갔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