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8) 01/15 08:49 272 line 그 말에 레일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리스는 그를 호위 해서 다낭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와 수치심이 뒤섞인 감정이 돌풍처럼 마음속에 불어 닥쳤다. 그리고 모든 생각과 감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백지 상태같이 되었다. "미안해. 그리고 부탁해." 레일즈는 어깨가 축 처져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다낭에서 크리스타니아로 들어올 수 있는 길 부 근에서 동료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레일즈는 자기 자신의 입으로 뱉은 말을 혐오했다. 이렇 게까지 겁쟁이가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적과 마주친다면 양날검 공작은커녕 고블린에게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다낭으로 돌아가 침대 속으로 뛰어들고 싶 었다. 오직 그것만이 레일즈의 소원이었다. 레일즈는 마리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상처는 아직도 통증을 안겨줬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우선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강을 목표 삼았다.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 무렵 강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따라 이번에는 북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레일즈는마리스 바로 뒤에서 어깨를 떨어뜨린 채 터벅터벅 걸었다. 이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 먼 과거처럼 느껴 졌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어제의 일에 불과했다. 단 하루 가 지났을 뿐인데 레일즈는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다르다. 자기가 변한 것이 아니고 진실한 자기에 눈 떴을 뿐이었다. 강기슭을 따라 나아가는 동안에 마리스는 레일즈가 염 려스러운지 몇 차례나 뒤를 돌아봤다. 레일즈는 그것을 알 고 있었으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레일즈 를 바라보기가민망했는지 마리스가 갑자기 멈춰섰다. "용기를 내세요." 레일즈는 눈을 빠끔히 뜨고 마리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신수 페네스가 그녀에게 능력을 부여해 준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마리스는 아름다웠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빛나는 은빛 머리가 물결이 이는 듯 흔들리고 있 다. 맑은 눈동자는 숲에서 솟아나는 샘물보다도 맑고 깊 다. "어제 본 레일즈님의 모습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마." 레일즈는 기가 팍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까지의 난 오만한 애송이일 뿐이었어. 그렇지만 이 제 알았어. 어제처럼 무례한 행동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거야."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마리스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레일즈 가까이로 왔다. "전 어제 본 레일즈님의 모습에 더 호감을 갖고 있습니 다. 용기 있고 자신만만하며 불가능한 것도 어떻게든 풀어 보려는 노력하는 모습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양날검 공작 에게 당신이 덤벼들 때 더 확실하게 막았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혹시나 레일즈님이 그 가증스런 남자를 때려눕 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만…… 그러니까 사과를 해 야 될 사람은 오히려 접니다." 마리스는 고개를 숙여 곁에 멈춰선 은빛 늑대의 등줄기 를 살짝 두드렸다. "말투는 난폭했습니다만 저에게는 그것조차 기뻤습니 다. 부족 사람들은 모두 저를 성녀처럼 취급했지만……." "성녀처럼?" 레일즈는 마리스의 말을 따라했다. "당연하지 않아? 그대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어. 거의 다 죽은 나를 살려 준 것만 봐도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 알 수 있잖아. 그러니까 부족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소 중히 여긴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 거기다 촌장까지도 나를 특별 하게 대우하는걸요." 마리스는 무언가 탈출구를 찾는 듯이 레일즈를 바라보 았다. 그러나 레일즈는 마리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 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레일즈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 야기입니다." 그런 레일즈의 표정을 보고 마리스는 눈을 내리깔면서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자, 가시지요. 해가 지기 전에 조금 더 걷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2 두 사람은 달이 중천에 뜰 때까지 계속 걷다가 야영을 하기로 했다. 배고픔을 은빛 늑대 싸지가 사냥해 온 토끼 와 마리스가 창으로 찍어올린 물고기로 간단히 해결한 뒤 나무 밑에서 두 사람과 늑대 한 마리가 나란히 누웠다. 눈을 감기만 하면 그 전사의 잔인한 웃음이 떠올라 레일 즈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 숲 속에 틀림없이 그 자가 있다. 그리고 지금 레일즈를 사냥하려고 샅샅이 수색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공포 때문에 가슴이 꽉 조여왔다. 그러 면서도 어느 사이 레일즈는 잠에 빠져들었다. 몸의 피로가 생각보다 심했기 때문이리라. 눈을 떴을 때는 눈부신 햇살이 동쪽 하늘 높이 솟아 있 었다. 악몽에 시달렸기 때문인지 몸이 썩 개운하진 않았 다. 기분이 우울해서 한시라도 빨리 이 숲을 벗어나면 좋 겠다는 생각만이 레일즈를 일으켜 세웠다. 마리스는 레일즈보다 훨씬 전에 일어나 있었던지 이미 먹을 만한 것을 준비해 두었다. 가볍게 식사를 마치고 옷 매무새를 살핀 뒤 두 사람은 다시 강을 따라 걷기 시작했 다. 숲을 벗어난 것은 점심 때가 지나서였다. 갑자기 시야가 확 트이며 들판이 나타났다. 드문드문 자라난 풀들이 한들 거렸다. 그리고 대지는 지평선까지 이어지지 않고 갑자기 툭 잘렸다. 거기에 신의 성벽이 있는 것이다. 일찍이 레일즈는 이 절벽이 다낭의, 그리고 자신의 꿈을 가로막는 장벽으로밖에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평 화로운 삶을 지켜주는 참으로 고마운 성벽처럼 느껴졌다. 절벽을 흘러내리는 폭포 소리가 들려왔다. 레일즈의 귀 에 익은 소리였다. 폭포가 떨어지는 주위에 안개가 피어오 른 것도 보였다. 안개가 그대로 하늘로 올라가 만들어진 구름이 눈길 저 멀리로 뭉게뭉게 떠다녔다. 폭포에서 조금 왼쪽 대지에 검은 그림자처럼 틈이 벌어 져 있었다. 길이었다. 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 그 길을 따라 내려 가면 다낭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그리운 집으로도. 집 을 떠나온지 이제 겨우 사흘밖에 지나지 않았다. 어머니는 집에 계실 것이다. 레일즈와 마리스는 나란히 서서 그 길을 향해 걸었다. 숲에 있을 때에는 별로 불지 않았던 바람이 쉬지 않고 불 어왔다. 마리스의 은빛 머리가 날려 바람이 부는 쪽에서 레일즈의 뺨을 간질이곤 했다. "바람의 계절도 끝나가는구나……." 마리스가 혼잣말을 했다. 레일즈는 마리스의 옆 모습을 지켜보며 이제 곧 그녀와도 이별해야 한다는 사실을 처음 으로 깨달았다. 한시라도 빨리 다낭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마리스와 헤어지는 것만은 정말 싫었다. 마치 성녀 같은 그녀가 전란의 땅에 남고 자기만이 평화로운 다낭으로 돌 아간다는 자책감이 일기조차 했다. 그때 레일즈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다낭에 같이 가지 않을래?" 잠시 망설였지만 레일즈는 솔직하게 속을 털어놓았다. 마리스에겐 말도 안 되는 소리였음에 틀림없었다. 레일즈 의 진의를 묻는 듯 그녀는 그의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 봤다. "마리스 같은 사람에게 전쟁은 어울리지 않아. 다낭에 가면 평화로운 생활을 보낼 수가 있어." 레일즈는 자기 말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말했다. 마리스는 한 순간 먼 눈길을 하고 신의 성벽 너머를 바 라봤다. "전 이곳 세계의 사람입……." 마리스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부족 사람들이 걱정돼선가?" 마리스는 솔직한 자세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싸우고 있는데 저만 도망치다니 그건 안 됩니 다." "어제 전투에서 모두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앞으로 어디로 가든 그건 그대의 자유야." 레일즈는 진지한 얼굴로 설득을 시도했다. "다낭에 가면 아무도 그대를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을 거야. 당연히 보통 여성으로서 살아갈 수 있고." 끊임없이 말을 계속하려는 레일즈를 손으로 제지하고, 마리스는 미소 지으며 조용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생각해 주는 건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만 하시지요. 나는 행복한 생활을 바라고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소원은 이곳 세계에 주기의 지배를 되돌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돼 있습니다." 마리스의 말에는 강한 신념이 배어 있었다. "그런가, 그렇단 말인가……." 레일즈의 어깨가 푹 처졌다. 예상했던 대답이긴 하지만 정말 안타까웠다. 그러나 어 쩔 수 없다. 마리스는 부족 사람들에게 특별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부족의 성녀로서 앞으로도 암흑민족과 싸워나 갈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레일즈는 다시 생각했다. 운명이라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잔혹하지 않은가. 갑자기 그런 운명을 이런 가련한 소녀에게 강요하는 크 리스타니아의 신들에게 심한 분노를 느꼈다. 아무런 도움 도 되지 않는 자신도 미웠다. 이곳 세계에 머물며 그녀와 함께 싸우려 한다 해도 성가신 존재밖에 되지 않을 자신 이……. 레일즈는 길 주변에 사이아가 없는가 둘러보았다. 그러 나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길에서 훨씬 왼쪽에 있는 언덕도 살펴보았지만 역시 없었다. 이틀 전의 전투에 서 사로잡혔거나 살해당하지는 않았는지 너무나 불안했 다. 길로 향하는 레일즈의 걸음걸이가 자연히 빨라졌다. 그때 대지의 틈에서 사람의 머리가 하나 나타났다. 아직 꽤 먼 거리였기 때문에 누구의 머리인지 분간할 수는 없 었지만 새까만 것으로 보아 비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전의 불안이 가시고 레일즈는 오랜 만에 기쁜 표정 을 지으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러면서 비인과 사이아의 이름을 외쳐보았다. 그러나 레일즈의 외침은 바람에 묻혀 사라져버렸다. 기대한 반응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시야에 잡혔던 사 람의 모습도 레일즈의 외침 소리에 땅 속으로 파묻혔는지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레일즈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섰다. 다른 동료들에게 레일즈가 나타난 것을 알려주러 간 것 일까. "무슨 일이야, 싸지!" 그렇게 말하는 마리스의 목소리가 잔뜩 긴장되어 있었 다. 무슨 일인지 몰라 마리스 쪽을 보았다. 싸지가 어금니 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마리스는 당장이라도 달려나 갈 것 같은 은빛 늑대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은빛 늑대는 답답하다는 듯 길고 크게 포효했다. 레일즈 가 자기도 모르게 귀를 틀어막았다. 멀리 하크 마을에서도 들릴 정도로 포효 소리가 컸기 때문이다. "혹시 적이?" 마리스는 숨을 꼴깍 삼키면서 절벽 사이에 난 길로 눈길 을 돌렸다. "적이라니!" 레일즈는 온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무 릎이 와들와들떨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다낭에 돌아갈 수 있게 됐는데 여기서 적을 만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지 않았다. "그럴 리가, 농담이겠지." 레일즈의 목소리도 떨렸다. "틀림없습니다. 싸지가 지금 내는 소리는 적이 있다는 경고입니다. 풍향의 반대 쪽으로 온 것이 잘못이었습니 다." 마리스의 눈에 굳은 결심이 서려 있었다. 싸지에게서 손 을 떼고 두 손으로 창을 거머쥔 뒤 상대가 나타나기를 기 다렸다. "도망치자. 아직 시간이 있어." 레일즈는 필사적으로 마리스의 팔을 쥐고 끌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마리스는 냉정하게 레일즈의 손을 뿌리쳤다. "진정하세요. 레일즈님 동료들과는 여기서 만나기로 했 죠." "그래. 그랬어……." 레일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대답했다. 그런데 저쪽 에서 길을 올라오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틀림없이 인간 이었다. 모두 여섯이었다. "레일즈!" 그리고 소리가 들려왔다. 눈물이 배인 비통한 목소리. 사이아의 목소리였다. "비겁한……." 마리스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렸다. "사이아!" 레일즈는 공포도 잊은 채 달려가고 있었다. 마리스도 은 빛 늑대도 레일즈를 뒤쫓듯 달렸다. 충분히 거리가 가까워 졌을 때 레일즈는 모든 것을 알아차렸다. 사이아의 뒤에서 한 남자가 칼을 겨눈 채 다가오고 있었 던 것이다. 그녀 주위에는 무기를 든 남자들이 세 명 정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맨 선두에는 꿈에도 잊지 못하던 그 거대한 전사의 모습이 보였다. "양날검 공작!" 레일즈와 마리스는 동시에 외쳤다. 레일즈는 눈앞이 깜깜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조금만 더 가면 다낭인데 이렇게 재수 없이 저 전사와 다시 만나다 니. 이제 살아날 길은 없을 것 같았다. 몇백 번 싸워봤자 자신이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레일즈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마리스를 바라보았 다. "저한테 맡기세요." 마리스는 속삭이듯 말했다. 레일즈는 당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레일즈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양날검 공작, 도대체 목적이 뭐냐!" 마리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고 있는 털복숭이 전 사를 향해 말을 걸면서 레일즈를 지키려는 듯 앞으로 나 섰다. "과연 햇빛 아래서 바라보니 더욱 아름답군, 은빛 머리 소녀! 내 이름은 그레일이다. 기억해 두면 고맙겠군." "이름을 물은 적은 없다. 그 여자는 무사한가?" 마리스가 계속해서 말을 걸자 양날검 공작은 낮은 소리 로 웃으면서 한 걸음 바싹 다가왔다. "무사하고 말고. 아직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아서……." 양날검 공작은 배후에 버티고 선 전사에게 턱짓을 했다. 그 전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길 쪽으로 일단 모습 을 감추었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에는 비인과 샤일론, 그 리고 밧소 세 사람을 끌고 왔다. 세 사람 조금 뒤로는 창을 거머쥔 두 명의 남자가 따라오고 있었다. 비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지만 샤일론과 밧소는 언제나의 모습과 그다지 다름없었다. 레일즈가 보이자 살 짝 표정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레일즈, 구해 주러 온 거지?" 비인도 레일즈를 알아보았는지 기쁜 얼굴로 소리 질렀 다. 그러나 등뒤의 남자가 창으로 쿡쿡 찔러 더 이상은 아 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마리스는 일단 마음을 놓은 표정으 로 레일즈를 힐끔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