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7) 01/14 09:26 324 line 제4장 양날검 공작 1 아주 멀리서 무언가가 고동 치고 있었다. 고동 치는 것은 둘이었다. 하나는 불규칙하고 약했고 다 른 하나는 규칙적이고 강했다. 그 고동에 겹쳐 멀리서 말 소리가 들렸다. "레일즈, 레일즈……." 목소리는 그렇게 반복되고 있었다. 그 소리에 이끌려 잿빛 안개 같았던 의식이 분명하게 돌 아오기 시작했다. 레일즈라는 이름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다양한 기억들이 모여들어 차츰 선명한 자신의 모습으로 변해 갔다. 전투 소리가 들려왔다. 추악한 식인 괴물 오우거의 모습 도 보였다. 거한 전사의 일그러진 웃음, 그리고 레일즈에 게 덥쳐오던 굽은 칼날. 왼쪽 어깨를 후벼드는 격렬한 통 증……. 촘촘히 쌓여 있는 부드러운 낙엽 위에 자기가 똑바로 눕 혀져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그리고 처음 느낀 두 고동 이 하나는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였고 또 하나는 상처의 통증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간신히 뜬 눈에 사물이 점차 제 모습대로 비치기 시작했 다. 하늘에는 눈부신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한낮의 태양 이 뿜어내는빛. 그때부터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 일까? 레일즈는 두 얼굴이 그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 다. 하나는 털이 뒤덮인 짐승의 얼굴이었고 또 하나는 젊 은 여성의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사이아……."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 저었다. "마리스?" 그녀가 다소곳이 고개를 끄덕였다. 빛나는 은빛 머리가 신의 성벽으로 떨어지는 폭포처럼 레일즈의 얼굴로 흘러 내렸다. "내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레일즈는 최후의 순간에 자신이 죽는다고 확신했다. 몸 이 두 쪽으로 갈라지는 느낌이 아직도생생했기 때문이다. "죽어 있었습니다, 거의." "그렇지만 지금 살아 있잖아." "튼튼한 갑옷 덕택입니다. 우리 부족에게 제작 기술을 가르쳐 주기를 바랄 정도입니다." 그러고 보니 마리스 부족은 털가죽을 뒤집어 있을 뿐, 금속 갑옷을 착용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집을 지은 것 만 봐도 그네들의 문화가 결코 다낭보다 발달되지 않았다 는 걸을 알 수 있었다. 반면 암흑민족은 다낭 사람들과 고 향이 같으므로 갑옷이나 무기가 거의 같을 것이다. 그것만 생각해 봐도 마리스 부족이 얼마나 불리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그때 싸움은 어떻게 됐지? 지고 말았나?" 서서히 기억이 분명해졌다. 레일즈는 몸을 일으키려고 얼굴을 들었지만 상처에서 극심한 통증이 일어나 다시 누 웠다. 마리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즈님이 쓰러지고 나서 곧바로 마을 사람들 모두에 게 후퇴하라고 했습니다. 공격해 온 자가 그 남자였기 때 문에 마을의 운명이 이제 다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도대 체 무슨 목적으로 이런 작은 마을을 쳐들어온 건지……." "양날검 공작……."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격렬한 오한이 레일즈의 온 몸을 꿰뚫고 지나갔다. "그 자는 반역의 신수 바르바스 부족의 용사입니다." "설마 마법을 쓰리라고는……." 그 거한 전사는 레일즈의 검에 맞기 바로 전에 모습을 감추고 어느 틈엔가 레일즈의 뒤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 술수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 이외에는 없었다. 그 러나 그 전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마법사 같지 않았다. "마법이 아닙니다. 그 남자의 수호신 바르바스에게 부여 받은 능력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도 페네스로부터 능력을 부여받았습니다." "신수에게서 받은 능력이라고? 신성 마법 같은 것인 가?" "신성 마법?" 레일즈가 질문한 뜻을 모르겠는지 마리스가 고개를 갸 우뚱했다. "사제들이 신들로부터 부여받는 기적을 말하는 거지. 우 리 동료 중에 드워프가 있었잖아. 그 사람은 행운신의 사 제라서 신성 마법을 쓸 수 있지." "암흑민족이나 고(古)민족에게는 그런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고 해요. 하지만 전 이해할 수가 없어 요. 어떻게 여러분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을 믿을 수 있 나요?" 마리스는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고민족이라니 처음 듣는 말인걸." 레일즈가 말하자마리스가 설명했다. 고민족이란 이곳 크리스타니아에 살면서 신수를 따르지 않고 고대의 육체 를 가진 신들이 부활하기를 기다리는 사교도들이라고 설 명했다. "보통신들을 믿는 것이 이단이 되는군. 내 입장에선 짐 승의 형상을 한 신들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 "레일즈님도 만나보면 압니다. 신수는 대단히 아름답고 고귀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혹 모르겠지만……." 레일즈도 애매하게 대답하고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 다. 대신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으면서 몸을 일으켰다. 왼 쪽 어깨는 헝겊이 싸매져 있었다. 마른 피와 체액이 묻어 제 살색이 드러나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상반신은 다 벗고 있었고 하반신도 갑옷 속에 받쳐입은 면바지뿐이 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곁에 레일즈의 갑옷과 방패, 마리스가 빌려준 검까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난리통에 검까지 주워오다니 마리스의 침착성에 놀랄 뿐이었다. 벨트에는 세 개의 단검까지도 잘 꽂혀 있었다. 레일즈는 두려운 마음을 꾹 누르며 어깨를 싸맨 헝겊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상처 상태를 살펴보지 않고는 견딜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리스도 굳이 막으려고 하지 않았 다. "이럴 리가 없는데……." 살에 붙은 헝겊을 억지로 떼어냈을 때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칼에 맞은 상처가 거의 아물어 있 었기 때문이다. 어깨에서 가슴까지 단칼에 베어진 붉은 상처의 자국이 똑똑히 보였다. "도대체 내가 며칠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던 거지?" 레일즈는 창백한 얼굴을 마리스에게로 돌렸다. "싸움이 있었던 것은 어젯밤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이 상처는……." 레일즈는 믿을 수 없어서 고개를 가로 저었다. "능력을 썼기 때문입니다. 그냥 두면 틀림없이 죽고 말 것이라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신……, 아니 그대도 치유 마법을 부릴 수 있나?" "능력입니다. 마법이 아닙니다." 마리스는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능력이건 마법이건 레 일즈에겐 어느 쪽이라도 상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 한 것은 그녀가 목숨을 구해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정말 고마워." 마리스가 마을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있는 까닭은 이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크리스타니 아의 주민 모두가 이런 능력을 소유하진 않았을 것이 분 명했다. 그걸 묻자 그녀는 순순히 그렇다고 대답했다. "능력을 부여받는 사람은 부족 가운데 몇 사람뿐입니다. 저는 태어났을 때부터 왠지 이 능력이 강해서……." 그런 까닭에 부족의 어른들이 그녀를 소중하게 돌보았 다고 했다. 즉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심각한 상처 를 너무나도 간단히 치유시킬 정도의 능력을 지녔으니 그 정도로 대우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일즈는 다시 한 번 자기가 입은 상처를 확인해 보았 다. 손가락으로 만져보니 격렬한 통증이 일어났다. 그 아 픔과 함께 자신의 영혼을 쥐어짜는 듯한 오한이 느꼈졌다. 온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떨림을 그치게 하려고 했으나 마음처럼 쉽지가 않았다.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 다. 떨림은 점점 심해 갈 뿐이어서, 손으로 땅을 지탱하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전투에서 죽는다는 것은 그렇게도 간단한 일일 것이다. 틀림없이 그 거대한 전사에게는 레일즈가 처음에 베어버 린 고블린처럼 무력한 존재로 비쳤을 것이다. 레일즈는 내심 자기만은 절대로 죽지 않으리라고 생각 했었다. 모든 전쟁에서 계속 승리해, 마침내 영웅이 될 인 물이라고 자부했다. 그런데 그것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음 을 레일즈는 지금 뼈저리게 느꼈다. 레일즈는 전사인 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것을, 아니 죽음이라는 것 자체를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제야 비로소 죽음이 자신에게 가까이 있는 것으로 느꼈다. 죽음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암흑이고 허무였다. 그것은 어 떤 재앙보다도 쓰라리고 어떤 고문보다도 괴로웠다. 갑자기 심한 구토가 느껴졌다. 아버지라면 어떨까? 이런 절망적인 공포를 알고 계실까? 과거에는 모험자였고 지금 은 기사였다. 지난날에 수많은 전쟁에 참가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의 공포를 모르 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을 극복했기 때문인가. 갑자기 눈에서 뜨거운 액체가 흘러넘쳤다. 눈물이었다. 레일즈는 마리스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시선을 돌 렸다. 그렇게 시선을 돌리고 목이 꺾인 채 한참을 오열했 다. 철이 덜 든 오만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뿐 이었다. "그렇게 상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남자에게 이기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 부족의 용사들도 그 남자의 손에 숱하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마리스가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 말조차 도 지금의 레일즈에겐 가슴에 못으로 박혀왔다. 졌다고 분 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전사가 무서워서 눈물을 흘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눈물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뼈가 울리고 온 몸이 갈가리 찢겨나가는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 고 있었다. 마리스가 치유해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틀림없이 죽었 으리라는 것, 그리고 거대한 전사의 압도적인 능력, 칼날 이 내리 박히는 광경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렇지만 마리스가 보고 있다는 수치심 때문에 조금이 나마 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대로 계속 추태를 보이 고 있으면 더욱더 부끄러워질 뿐이었다. 레일즈는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고 마리스를 돌아보았 다. 그러자 어느 틈엔지 곁에 있던 은빛 늑대가 왼쪽 어깨 의 상처를 혀로 핥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상처의 통증이 약해져갔다. 그러나 레일즈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강렬한 상처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정말 잘 길들인 것 같아." 레일즈가 망설이는 태도로 은빛 늑대의 머리로 손을 뻗 었다. 은빛 늑대는 그 손을 피하려 들지 않았다.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았다. "길들이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싸지는 저에게 단 하나밖 에 없는 친구입니다." 마리스는 은빛 늑대를 부르더니 그 목을 부드럽게 끌어 안았다. "싸지 같은 은빛 늑대는 신수 페네스가 늑대의 몸에 혼 을 봉했을 때 보통 늑대보다 성스러움을 띠게 되었습니다. 신수 페네스에게는 충실한 가신이고 은빛늑대부족 사람들 에게는 성스러운 동물입니다. 그리고 저한테는 소중한 친 구이구요." "소중한 친구……." 레일즈는 마리스의 말을 입 속에서 되뇌어 보았다. 그러 자 머릿속에서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참, 사이아, 사이아와 비인은 어디에 있지?" 레일즈는 마리스에게 다급하게 물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전투가 벌 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스는 레일즈가 의식을 잃고 나서의 상황을 이야기 해 주었다. 레일즈가 쓰러지고 바로 뒤 마리스는 부족 사람들에게 마을을 버리고 도망가라고 말했다. 빈사 상태에 빠진 레일 즈를 옮긴 것은 마리스 곁에 얌전히 자리한 은빛 늑대였 다. 마리스 곁에는 처음에 십여 명 정도가 있었지만 끈질 기게 따라붙는 추격자들을 막느라 한 사람 한 사람 떨어 져나가고 어느 틈엔가 마리스와 레일즈를 등에 실은 은빛 늑대만이 남게 된 모양이었다. "왜, 나를 구해 준 거지?" 레일즈는 이상했다. 많은 부족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을 것이 분명했다. 레일즈가 아니라 그들을 구해 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어제의 전쟁은 레일즈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습니 다. 그런 무의미한 전쟁으로 목숨을 잃어서는 안 됩니다." 마리스는 은빛 늑대의 등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머리 를 들지 않고 그렇게 말했다. "결국 이 전쟁은 우리들 신수민족이 치러야 할 짐일 뿐 입니다." "미안해……." 레일즈는 마리스에게 깊숙이 머리를 숙였다. "그런 인사나 사과를 하실 필요 없습니다. 전 당연한 일 을 했을 뿐입니다." 마리스는 고개를 숙이면서 조용히 말했다. 마치 죽어간 동료들의 명복을 비는 것처럼. "지금부터 어떻게 할 생각이지?" 어색한 침묵을 깨뜨린 쪽은 레일즈였다. "물론 계속 싸울 겁니다. 하지만 그 전에……." 마리스는 일단 말허리를 자르고 살포시 미소 지으며 레 일즈를 바라보았다. "레일즈님을 잃어버린 땅까지 모셔드려야지요. 이 부근 에는 베르디아의 전사들이 아직 숨어 있을 것이 틀림없습 니다. 물론 도움을 요청하면 금방 부족 사람들이 달려오리 라고 생각합니다만 그 전에 적에게 들킬지도 모릅니다. 그 러니 기다리고 있기보다 우리가 먼저 이동하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레일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리스는 그를 호위 해서 다낭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노와 수치심이 뒤섞인 감정이 돌풍처럼 마음속에 불어 닥쳤다. 그리고 모든 생각과 감정이 사라지고 마음이 백지 상태같이 되었다. "미안해. 그리고 부탁해." 레일즈는 어깨가 축 처져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말했다. 그러면서 다낭에서 크리스타니아로 들어올 수 있는 길 부 근에서 동료들과 만나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레일즈는 자기 자신의 입으로 뱉은 말을 혐오했다. 이렇 게까지 겁쟁이가 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 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적과 마주친다면 양날검 공작은커녕 고블린에게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한시라도 빨리 다낭으로 돌아가 침대 속으로 뛰어들고 싶 었다. 오직 그것만이 레일즈의 소원이었다. 레일즈는 마리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상처는 아직도 통증을 안겨줬지만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우선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강을 목표 삼았다. 해가 서쪽 하늘로 기울 무렵 강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흐름을 따라 이번에는 북쪽으로 진로를 틀었다. 레일즈는 마리스 바로 뒤에서 어깨를 떨어뜨린 채 터벅터벅 걸었다. 이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던 것이 먼 과거처럼 느껴 졌다. 그러나 그것은 겨우 어제의 일에 불과했다. 단 하루 가 지났을 뿐인데 레일즈는 자신이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건 다르다. 자기가 변한 것이 아니고 진실한 자기에 눈 떴을 뿐이었다. 강기슭을 따라 나아가는 동안에 마리스는 레일즈가 염 려스러운지 몇 차례나 뒤를 돌아봤다. 레일즈는 그것을 알 고 있었으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런 레일즈 를 바라보기가 민망했는지 마리스가 갑자기 멈춰섰다. "용기를 내세요." 레일즈는 눈을 빠끔히 뜨고 마리스의 얼굴을 바라봤다. 신수 페네스가 그녀에게 능력을 부여해 준 기분을 알 것 같았다. 그 정도로 마리스는 아름다웠다.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빛나는 은빛 머리가 물결이 이는 듯 흔들리고 있 다. 맑은 눈동자는 숲에서 솟아나는 샘물보다도 맑고 깊 다. "어제 본 레일즈님의 모습은 어디로 갔습니까?" "아무 말도 하지마." 레일즈는 기가 팍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까지의 난 오만한 애송이일 뿐이었어. 그렇지만 이 제 알았어. 어제처럼 무례한 행동은 두 번 다시 하지 않을 거야."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마리스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레일즈 가까이로 왔다. "전 어제 본 레일즈님의 모습에 더 호감을 갖고 있습니 다. 용기 있고 자신만만하며 불가능한 것도 어떻게든 풀어 보려는 노력하는 모습 말입니다. 솔직히 말해 양날검 공작 에게 당신이 덤벼들 때 더 확실하게 막았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혹시나 레일즈님이 그 가증스런 남자를 때려눕 힐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그만…… 그러니까 사과를 해 야 될 사람은 오히려 접니다." 마리스는 고개를 숙여 곁에 멈춰선 은빛 늑대의 등줄기 를 살짝 두드렸다. "말투는 난폭했습니다만 저에게는 그것조차 기뻤습니 다. 부족 사람들은 모두 저를 성녀처럼 취급했지만……." "성녀처럼?" 레일즈는 마리스의 말을 따라했다. "당연하지 않아? 그대는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어. 거의 다 죽은 나를 살려 준 것만 봐도 그 능력이 얼마나 위대한 지 알 수 있잖아. 그러니까 부족 사람들이 모두 그대를 소 중히 여긴다는 건 당연한 일이지." "그러나 아버지와 어머니, 거기다 촌장까지도 나를 특별 하게 대우하는걸요." 마리스는 무언가 탈출구를 찾는 듯이 레일즈를 바라보 았다. 그러나 레일즈는 마리스의 기분을 이해할 수 없었 다.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당황하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레일즈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 야기입니다." 그런 레일즈의 표정을 보고 마리스는눈을 내리깔면서 조그마하게 중얼거렸다. "자, 가시지요. 해가 지기 전에 조금 더 걷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