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3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6) 01/13 16:35 259 line 5 "괜찮을까? 저대로 가게 두는 게……." 밖으로 뛰어나가는 레일즈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밧소가 나지막이 외쳤다. "좋진 않아. 하지만……." 사이아는 불안한 시선으로 레일즈가 사라져간 문을 바 라보았다. 열려 있는 문이 아직도 흔들리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원래가 저런 성격이니." 사이아의 말을 받아 비인이 대답했다. 비인은 저택 밖에서 들려오는 전투 준비 소리에 신경이 곤두서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이 고함을 칠 때마다 깜짝깜 짝 목을 움츠렸다. "그렇지만, 이건 장난이 아니잖아. 진짜 전쟁이야. 게다 가 이 부족이 열세에 놓여 있고…… 지는 전쟁에 가담하 다니 정말 멍텅구리야." "기질이 그러니 어쩔 도리가 없지." 사이아가 속상해 하면서도 살짝 미소 지으며 밧소에게 말했다. "레일즈는 약한 사람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질 못하는 성격이야. 말하자면 공연한 참견을 좋아한다고나 할까. 레 일즈가 우리 집에 놀러오게 된 건 내가 마을에서 심하게 놀림을 받는 것을 보고 날 도와준 뒤였어. 보다시피 난 하 프엘프고 마술사니까……." "그것 참, 꼭 놀려달라는 이야기 같군." 밧소가 너무나도 솔직하게 대답했기 때문에 사이아는 오히려 기분 좋게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비인과 사이 좋게 된 것도 비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 고 나서부터였어." 사이아의 말에 비인이 가볍게 끄덕였다. 그는 아직껏 입 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군." 밧소가 깊은 숨을 쉬었다. "그렇지만 이건 진짜 전쟁이잖아. 죽을지도 모르고… …." "알고 있어, 알고 있단 말이야!" 사이아가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머리카락이 사납게 날렸다. "그렇다고 레일즈가 그만두라는 말을 들을 사람이 아냐. 그리고 난 레일즈가 그렇게 간단히 쓰러지리라곤 생각 안 해. 강인한 전사가 되기 위해 레일즈가 얼마나 노력을 해 왔는지 난 잘 알고 있어." 밧소는 사이아의 단호한 태도에 밀려 그 이상 아무런 말 도 할 수 없었다. 하프엘프 소녀는 레일즈라는 저 건방진 전사를 진심으 로 걱정하고 있었다. 일부러 심사를 긁어놓을 이유는 없었 지만 밧소는 한 마디 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았다. "전쟁이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라구." 그러면서 드워프를 바라봤다. "어떻게 하지, 샤일론?" "글쎄, 저 친구가 걱정되긴 해. 하지만 지금은 행운신의 가호가 따르기를 바랄 뿐……." 샤일론이 중얼거리면서 큰 도끼를 거머쥐었다. "어쨌든 지금은 여기 두 사람을 안전하게 피신시키는 걸 생각해야겠지. 레일즈는 너한테도 이겼잖아. 여간해서 다치진……." 샤일론은 마지막까지 말을 계속할 수가 없었다. 바로 그 때 열린 문을 통해 고블린이 뛰쳐들어왔기 때문이다. 추악한 요마는 괴상한 소리를 내지르면서 일행을 노려 보았다. "우왓, 고블린이다!" 지금 당장 죽기라도 할 듯 비인이 소리쳤다. 사이아도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며 마술사 지팡이를 양손으로 거머쥐었다. "쳇, 느긋하게 움직이긴 틀렸군!" 밧소는 작은 검을 쉬익 소리를 내며 뽑아들고 몸의 자세 를 낮췄다. 그러면서 입가에 밧소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여긴 나한테 맡겨." 샤일론은 밧소를 손으로 제지하고는 큰 도끼를 휘저으 며 성큼성큼 나아갔다. 그 기세에 겁을 먹었는지 아니면 이쪽의 숫자를 보고 놀랐는지 요마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쳤다. 드워프가 행운신의 자비를 기원하고 나서 대청을 쩌렁 쩌렁 울리는 기합 소리를 질렀다. 그러고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고블린이 숨어든 기둥을 도끼로 내리찍었다. 그와 동시에 고막이 터질 듯한 비명 소리가 났다. 샤일론이 휘 두른 큰 도끼는 기둥을 절반 가량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 뒤에 숨어든 고블린도.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샤일론은 기둥에 박힌 큰 도끼를 빼들었다. 그와 동시에 고블린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바닥 에 쓰러졌다. "자, 서둘러야겠어." 샤일론이 사이아와 비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레일즈가 걱정되겠지만 일단 밧소를 따라 달리는 거야. 뒤쪽은 내가 맡을 테니까." 사이아는 핏기가 가신 얼굴로고개를 끄덕였다. 비인은 머리를 감싸고 몇 번씩이나 도리질을 했다. 잠시 뒤 밧소를 선두로 삼아 네 사람은 밖으로 뛰쳐나갔 다. 격렬한 전투 소리가 울리는 한밤 속으로. 레일즈가 밖으로 나섰을 땐 이미 전투가 시작되어 있었 다. 사람들의 외침 소리와 늑대의 포효 소리가 뒤섞여 들 렸다. 소리는 들리지만 불빛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적인 지 아군인지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은 채 달빛만을 의지 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전투 상황을 전혀 파악할 수 없 었다. "이런 어둠 속에서 잘도 싸우네!" 레일즈는 마리스가있는 곳으로 달려가선, 시끌벅적한 소리를 의식해 일부러 큰 소리를 질렀다. "저희들은 환하게 느낍니다만…… 여러분들은 밤눈이 어둡습니까?" 그렇게 대답하며 돌아보는 마리스의 얼굴을 보고 레일 즈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초록빛을 발산하 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야행성 짐승들의 눈처럼 보였 다. 찬찬히 살펴보니 눈이 빛나는 것은 마리스뿐만이 아니 었다. 여기저기서 번쩍거리는 눈동자가 꼬리를 끌 듯이 움 직이고 있었다. 늑대 형상을 취한 신을 모시고 있는 만큼 늑대의 시력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름달은 이미 하늘 높이 떠올라 있어서 레일즈도 힘들 이지 않고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무 그늘 속으로 들어 가지 않도록 조심하기만 하면 충분히 힘을 쓸 수 있다고 판단했다. "적과 구별이 안 될 수도 있으니 제 곁에서 떨어지지 않 도록 하십시오." 마리스는 허리까지 늘어진 은빛 머리를 성가시지 않게 하려고 가죽끈으로 단단히 묶고 있었다. 장창을 쥔 모습이 아주 늠름했다. 그러나 갑옷을 입고 있지 않은 것이 마음 에 걸렸다. 털가죽이라도 걸치면 좋을 것 같았다. 상황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적은 마을을 포위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어느 쪽에서나 적들의 소리가 들렸다. 비인과 사이아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 걱정스 러웠다. "자, 슬슬 나서볼까." 레일즈는 눈에 힘을 모아 적의 모습을 찾았다. 적은 쉽 사리 눈에 띄었다. 왼쪽 집 안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 사 람의 머리를 들고 선 커다란 그림자가 나왔다. 인간이라기 에는 너무 컸다. 그래서 레일즈는 적이라고 판단했다. "조심하십시오. 저놈은 식인귀인 오우거입니다. 힘으로 는 절대 꺾을 수 없습니다." 마리스가 경고의 말을 건넸지만 그땐 이미 소리를 지르 며 그 괴물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손에 든 사람 머리가 젊은 여성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 괴물아!" 격한 소리를 지르며 레일즈는 검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큰 낫을 든 오우거의 왼손을 노리고 검을 내리쳤 다. 오우거는 거대한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한 동작으 로 레일즈의 공격을 피하면서 오른손으로 잡고 있던 사람 머리를 던졌다. 레일즈는 옆으로 몸을 돌려 날아오는 사람 머리를 피하면서 오우거를 향해 검을 들이밀었다. 큰 낫을 들어올려 대결 자세를 취하려던 오우거의 배에 레일즈의 검이 파고들었다. 상대의 내장을 도리질하는 느낌이 확실히 전해졌다. 그 러나 오우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태도로 큰 낫을 휘두 르며 다가왔다. 레일즈는 놀라서 방패로 그 공격을 막아보 려 했다. 금속끼리 맞부딪는 소리가 울리고 격렬한 불꽃이 밤의 어둠을 환하게 비쳤다. 큰 낫 끝이 부서졌는지 파편이 레 일즈의 뺨을 살짝 스쳤다. 마리스가 경고한 대로 놀랄 만한 괴력이었다. 레일즈는 그 바람에 튕겨져나가 형편없이 땅바닥을 뒹굴었다. "이 자식 봐라!" 레일즈는 일어서서 뺨에 흐르는 피를 손등으로 훔쳤다. 오우거는 부서진 무기를 내던지고 두 팔을 휘두르며 울부 짖었다. 설령 무기가 없다 해도 저 괴력에 얻어맞으면 그 걸로 끝장날 것 같았다. 레일즈는 신중하게 거리를 재며 오우거의 움직임을 살 폈다. 그러다가 재빨리 검을 땅바닥에 박고 허리띠에 찬 단검 가운데 하나를 뽑아들어 곧바로 오우거를 향해 던졌 다. 레일즈는 가볍게 던졌을 뿐이었다. 그러나 레일즈의 손을 떠나는 순간, 단검은 놀라우리 만 치 빠르게 허공을 달려갔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단검에 배 어 있는 마력이 발동된 것이다. 피할 틈이 없었다. 마법의 단검은 오우거의 목 안으로 깊숙이 박혀 들어갔다. "이 괴물아, 맛이 어떠냐!" 레일즈는 환호성 치며 오우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대로 땅바닥에 엎어지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오 우거는 입으로 피거품과 함께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레일 즈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일즈는 침착하게 땅바닥에 꽂아놓은 검을 빼들고 그 자리에서 두 발을 벌렸뉼?대기하던 전사가 그 거대 한 적을 맞서 싸우고 있었다. 아까 건물 안에서 보았을 때 는 강건한 전사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눈앞의 적에 비하니 너무나도 빈약했다. 나머지 네 명은 굽은 칼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쪽에선 은 빛 늑대가 홀로 싸움에 가담하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은빛 늑대 쪽이 우세했다. 네 명은 은빛 늑대의 재빠른 움 직임에 홀린 듯 한 차례도 칼을 휘두르지 못했다. 레일즈는 마리스 곁으로 뛰어갔다. "여기로 오면 안 됩니다! 도망쳐요, 빨리!" 레일즈의 모습을 보자마자 마리스는 외쳤다. 안색이 창 백한 것이 달빛 속에서도 분명하게 보였다. "도망치라니?" 레일즈가 의아한 눈길로 마리스를 쳐다봤다. 아군이 완패하여 후퇴를 시작했다면 또 모르겠다. 그러 나 상황은 그렇게까지 나빠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서 싸 우는 소리가 들렸다.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도 들리고 있으 므로 마리스 부족이 일방적으로 눌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 다. "저놈이 적의 두목인가? 저놈만 쓰러뜨리면 우리가 이 긴다." "안 돼요!" 마리스의 목소리는 거의 절규에 가까웠다. "저 남자에겐 절대로 이길 수 없어요. 양날검 공작…… 저 남자만은 절대로." 마리스는 겁먹고 있었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분명히 보통 상대는 아니다." 레일즈는 거대한 전사를 찬찬히 살펴보며 검을 고쳐쥐 었다. 마리스 부족의 전사는 열심히 싸우고 있지만 상당히 수 세에 몰린 상태였다. 그러나 레일즈가 가세하면 형세가 역 전될 것 같았다. 아무리 크다고는 하지만 아까 상대한 오우거에 비하면 한 단계 아래로 보였다. 완력도 뒤질 것 같았다. 검을 다루 는 솜씨도 조잡했고 동작도 그다지 민첩해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같았으면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을 거야." 레일즈는 혼잣말을 했다. 그리고 2대1이라면 자신도 쓰 러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한테 맡겨!" 레일즈는 자신에 찬 미소를 지으며 거대한 전사 앞으로 나섰다. "안 돼요!" 뒤에서 마리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레일즈 는 그 경고를 무시하고는 검을 위로 들고 달려갔다. 위로 공격하는 체 속임수를 쓴 뒤 상대의 몸통을 노릴 생각이 었다. 레일즈는 힘차게 함성을 질렀다. 상대의 기선을 제압하 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속임수에 반드 시 넘어가리라 믿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거대한 전사 가 자기 쪽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 레일즈는 승리를 확신 했다. "이얍!" 레일즈는 큰 소리를 지르며 위로 쳐들었던 검을 곧바로 밑으로 내렸다. 그러나 거한 전사는 그 검을 피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마치 최초에 죽인 고블린처럼 무방비나 다름 없었다. 그렇다면 이대로 머리를 내리치면 된다는 생각에 레일즈는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이제 피하기 힘들 것이 라는 판단이 서자 마음속에는 벌써부터 승리의 기쁨으로 가득 찼다. 그러나 레일즈가 휘두른 검이 전사의 정수리에 닿기 직 전 갑자기 전사가 싹 사라졌다. 속도가 붙어 있던 레일즈의 검이 허무하게 바닥을 내리 쳤다. "사라졌어. 이럴 리가……." 레일즈는 자기가 내리친 검을 멍청히 바라보며 그 자리 에 우뚝 섰다. "레일즈, 뒤를!" 그때 마리스의 비명에 가까운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는 레일즈의 눈에 홀연히 모습을 감춘 거대한 전 사가 비쳤다.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짓고서 이미 상대는 거대한 굽은 칼을 쳐들고 있었다. 눈에 잡히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칼날이 레일즈를 내리쳤다. 마치 통나무로 얻 어맞는 듯한 격렬한 통증이 레일즈의 왼쪽 어깨를 덮쳤다. 온 몸이 불길에 휩싸이듯 뜨거워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레일즈는 혼란에 사로잡혀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 었다. 다만 어두운 땅바닥이 눈앞으로 올라온다는 착각이 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또한 잠시였다. 시야가 흐려 지며 의식이 가물가물했다. 최후의 한순간, 레일즈는 비로소 깨달았다. 자신이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