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5) 01/11 09:25 277 line 레일즈는 깊숙이 한숨을 쉬면서 사이아와 얼굴을 마주 했다.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라 도저히 실감할 수가 없 었다. 마리스가 안고 있는 고뇌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가 신이라면 검의 힘으로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다낭의 기사들이 전쟁에 가담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상 황을 바꿀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라면 방법 이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이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레일즈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를 의지하려는 생각은 진작에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백 년이나 싸우고 있다니……." 사이아는 그 이상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가로 저었다. 레일즈가 동감하듯 온순한 얼굴로 끄덕였다. 사람이라 면 누구나 전쟁에는 염증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런데 베르디아에 표류해 온 암흑민족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지?" "모르시겠습니까?" 레일즈의 물음에 마리스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어떻게 알겠어? 우린 어제까지만 해도 이 세계에 다른 주민이 살고 있다고는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그렇지만 제가 지금 쓰는 말은 그들 베르디아의 백성 들이 쓰는 것입니다." "그럴 리가!" 레일즈는 경악해서 외쳤다. "혹시……." 사이아가 창백한 얼굴로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짚이는 게 있나?" 샤일론이 사이아를 재촉하자 사이아는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그들이 우리와 같은 말을 쓰는 이상 우리와 고향이 같 을지도 몰라. 베르디아, 그리고 암흑민족…… 이런 이름들 을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러자 레일즈가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사신전쟁? 3백년 전에 고향의 섬에서 벌어졌던 그 전쟁 을 말하는 거야?" "얘기가 지금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퉁명스런 목소리로 밧소가 레일즈에게 불평했다. "음유 시인들이 흔히 서사시에서 노래하잖아. 3백 년 전 에 요마들의 제국과 우리의 조상들이 격렬한 전쟁을 치렀 다고. 자유 기사와 영웅왕 같은 용사들의 손으로 사악한 제국은 멸망했지만 배를 타고 탈출한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런 이야기가 있었어?" 밧소는 아직도 제대로 알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아, 그렇다면 그놈들이 우리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폭풍 우를 이기고 이 세계로 흘러들어 와서 우리 조상이 다낭 반도에 상륙한 것처럼 베르디아라는 땅에 새로운 제국을 만들었다는 거야?" 밧소가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언 제나 말투 속에 담겨 있던 까불거리는 느낌이 완전히 사 라졌다. "그놈들 입장에선 우리가 원수가 되겠군. 그렇지만 수백 년이 지난 조상들이 싸웠던 거 아냐. 우리들과는 관계가 없어." "그놈들도 그렇게 생각해 주면 좋겠지. 어쩌면 우리 쪽 에서 먼저 공격해 들어가는 게 좋을지도 몰라. 신왕이란 자가 얼마나 강한지가 문젠데……." 그러면서 레일즈는 밧소를 향해 웃었다. 밧소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잘난 체하네. 네가 나서봤댔자 달라질 건 하나도 없어." "그렇지도 않을걸. 다낭 왕국을 움직이면 될 수 있을지 도 몰라." 레일즈의 머릿속에 좀 전의 생각이 다시 살아났다. "우리 아버지는 왕국의 근위 기사단장이니 이 세계의 상황을 보고하면 분명 가만히 계시진 않을 거야." "피보라 기사 랏셀이 네 아버지라고?" 밧소가 손가락으로 레일즈를 가리키며 거의 자리에서 일어설 정도로 놀랐다. "아니 그렇게 상급 기사의 아들이 시골 깡촌에서 살았 던 거야?" "그건 내 사정이고, 어쨌든 아버지의 명령 한 마디면 다 낭의 전사들을 모두 움직일 수 있어. 왕국이 총력을 기울 여 참전하면 상황이 바뀔 수 있을지도 몰라." 모험자 시대의 아버지라면 분명 베르디아와 싸울 결심 을 했을 것이다. 그리고 크리스타니아의 상황을 알고 나면 모험자 시대의 피가 다시금 끓어오를 것이다. 적어도 레일 즈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버지가 모험자 생활을 마치고 기사가 된 이유는 모른 다. 무언가를 계기로 모험자 생활에 절망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이유는 다낭에서 모험자로 살아나갈 수 없게 된 것이라고 레일즈는 생각하고 있었다.그렇기 때문에 레일즈 또한 모험자가 될 꿈을 버리고 기사가 될 수밖에 없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만약 신의 성벽에 틈이 벌어지지 않았다면 레일즈도 지금쯤 왕도로 가고 있었을 지 모를 일이었다. 다낭과 크리스타니아를 연결하는 길이 닫히지 않는다면 모험자들은 떼를 지어 이 신천지로 올라올 것임에 틀림없 었다. 그리고 암흑민족과 싸울 것이다. 만일 다낭 왕국이 불개입 정책을 취하기로 결정한다면 아버지는 기사직을 버리고 모험자로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레일즈의 마음이 춤추기 시작했다. 아버지 와 함께 모험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0년 전의 아버지가 돌아왔을 때와 같은 기분에 사로잡 혔다. "다낭으로 되돌아갈 생각이니?" 사이아의 얼굴에 불안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럴 생각이야. 다낭 사람들은 크리스타니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전혀 몰라. 누군가가 알려 주지 않 으면 불의의 습격으로 정복당하고 말 거야. 다낭은 우리들 의 나라야. 그런 사태를 가만히 두고만 볼 수는 없어." "제멋대로 생각하고 제멋대로 말하는군." 밧소가 레일즈에게 대들었다. "우리는 다낭에 돌아갈 수 없어. 너와는 달라. 재상은 우 리의 적이란 말야." "그쪽 사정은 알겠지만 도리가 없어.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겠지." "친구 삼을 보람이 없는 놈이로군." 밧소가 골이 나서 불평을 했다.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으 며 마리스를 돌아보았다. "다낭 왕국이 그대들 부족과 동맹을 맺을 수 있도록 노 력해 보겠다. 그렇게 하면 베르디아의 무리들을 없애버릴 수 있을 거야."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마리스가 살짝 미소 지었다. "무슨?" "우리는 여러분들이 싸우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여러분 은 우리처럼 신수를 섬기는 민족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베르디아를 깨뜨린 뒤에는 다시 크리스타니아를 루미스의 결계로 폐쇄하고 우리의 힘으로 페네스의 주기에 의해 질 서를 되찾고 싶습니다. 그렇게 되면 잃어버린 대지의 그 누구도 이 대륙으로 찾아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하하하, 그것 보라니깐!" 밧소는 떼굴떼굴 구르며 웃어댔다. 레일즈는 머릿속으 로 피가 솟구쳤다. "그러니까, 그대들로선 우리들도 필요 없다 그 말인가?"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그렇습니다." 마리스의 표정은 애처로워 보였지만 말만큼은 단호했 다. "레일즈님의 마음만은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나 다낭 사 람들 모두가 똑같이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어떤 의미지?" 레일즈가 이상하게 생각하며 물었다. "예를 들어 말리드 재상이 이곳 크리스타니아를 정복하 겠다는 마음을 먹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 밧소가 그런 것도 모르냐는 투로 끼여들자 레일즈는 험 악한 눈으로 밧소를 노려봤다. 그러나 재상이 야심만만한 인물이라는 것만큼은 레일즈도 부정할 수 없었다. 혹시라 도 다낭의 무력이 크리스타니아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하 면 그는 제2의 신왕이 되겠다고 나설지도 모를 일이었다. "재상은 다낭의 실질적인 왕이야. 크리스타니아까지 지 배하려고는 하지 않을걸!" 그러자 밧소가 코웃음쳤다. "야심이란 건 말야, 점점 커지는 속성이 있어. 말리드가 다낭만으로 만족할 인물인가?" 대답이 궁색해진 레일즈는 잠시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 밧소의 말이 맞을지도 몰라. 남자들이란 누구 할 것 없이 야심이 있는 게 사실이니까." "나도 남자지. 하지만 다른 사람을 밟고 올라서려고는 하지 않아. 밑에서 윗자리 놈들을 끌어내리는 건 좋아하지 만." "그래서 도적이 되었나?" "그것도 한 이유지." 밧소는 능글맞게 답했다. "인간이란 저마다 제멋에 사는 거야. 재상 같은 놈이 있 는가 하면 나 같은 분도 계시단 말이지. 그래서 세상이 팡 팡 돌아가는 거라구. 하나같이 재상 같은 생각만 갖고 살 아봐. 허구한 날 전쟁만 벌어지고 세상은 파멸을 맞이하고 말 거야. 그렇지만 나 같은 도둑님만 계셔도 문제가 크지. 순식간에 거리가 굶어죽는 사람들로 꽉 찰걸." 레일즈는 눈치 빠진 도적에게 놀림 당한다는 기분이었 다. 하긴 저 능란한 화술도 도적들의 장기 아닌가? "요컨대 당신은 재상을 믿을 수 없다, 그 말이지." "그래 그래, 바로 맞았어. 재상을 어떻게 믿나." "간단한 이야길 가지고 빙빙 돌리긴……." "어쨌든 네가 피보라 기사의 아들이니까 나름대로 생각 해서 신중하게 말하는 거라구." "난 기사가 아냐. 그리고 기사 따윈 추호도 될 생각이 없 어. 너희들을 붙잡아서 재상한테 끌고 갈 생각도 전혀 없 으니까 안심하라구." 그리고 '아버지도 좋아서 기사가 된 건 아니야'라고 마 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정말 안심이군." 밧소가 껄껄 웃었다. 그제서야 레일즈도 웃음을지었다. 웃으면서 마리스를 바라보니 그녀도 미소 지으며 레일즈 일행을 바라보고 있 었다. 레일즈는 쑥스러워하며 머리를 긁었다. "미안해. 지금 한 얘기는 우리들 왕국의 사정에 대해서 였어." 레일즈는 변명하듯 마리스에게 이야기했다. "부러워요. 두 분이 정말 사이가 좋으신 것 같아서……." "사이가 좋다고? 우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벙벙했다. 레일즈와 이 도 적이 싸움을 벌인 지 아직 열흘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쨌든." 레일즈는 다시 아까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려 했다. "그대들 신수민족이 우리를 믿기 어려운 건 잘 알겠어. 말도 다르고 모시는 신들도 다르니까. 하지만 그대들만으 로 암흑민족을 이길 수 있을까? 적에게는 신의 힘을 회복 한 바르바스 같은 놈이 있잖아." "우린 이겨야만 합니다……." 마리스는 힘 주어 말했다. 그러나 그 대답은 동시에 그 들의 싸움이 얼마나 힘겨운 상황에 처해 있는가를 말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오래도록 침묵이 흘렀다. 방 안의 분위기도 착 가라앉았 다.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 어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램프 불빛 말고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과 정적은 갑작스럽게 깨지고 말았다. 저 택의 문이 열리고 한 젊은이가 나는 듯이 뛰어들어왔기 때문이다. 전사가 일어서서 날카로운 목소리로 그 젊은이에게 뭔 가를 물었다. 젊은이는 긴박감을 느끼게 하는 태도로 대답 했다. 그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레일즈조차도 중대한 일이 발생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무슨 일이지?" 레일즈가 마리스에게 물었다. "놈들이 습격해 왔습니다." 그러는 마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암흑민족인가!" 마리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들은 이제 적들과 싸우러 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빨리 이 마을에서 떠나도록 하십시오. 아직 늦지 않았습니 다." "어떻게 하지, 레일즈? 빨리 도망가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잖아. 칼에 맞아 죽긴 정말 싫어." 비인이 거의 울상이 되어 레일즈를 물고 늘어졌다. "도망가다니, 내가?" 레일즈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비인을 내려다봤다. "상대가 어떤 놈들인지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잖아. 생포한 포로를 다낭으로 끌고 돌아가면 아무도 내 말을 의심하지 않을 거야. 가능하다면 요마가 좋겠지. 전설상의 괴물을 보면 하크 마을의 사람들 모두가 아연실색할걸." 그러더니 레일즈는 전투 준비를 하고 있는 마리스 곁으 로 갔다. "나도 싸우게 해 줘. 어떤 놈들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보겠어." "아까, 거절의 말씀을 드렸지요. 이것은 여러분들과는 관계가 없는 전쟁입니다." "그대들 부족이 이기면 아무 문제도 없겠지. 그러나 만 일 패배한다면 우리들의 왕국까지 위험해질지도 몰라." 마리스는 가만히 레일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말씀은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레일즈님이 싸 우실 때가 아닙니다. 한시라도 빨리 다낭으로 돌아가 이곳 세계의 일은 잊어버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들은 여 러분들과도 싸워야 됩니다." "무슨 말을 하든 내 결심은 흔들리지 않아. 도와 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야. 이것은 이미 내 전쟁이기도 해. 난 벌써 저 요물들에게 습격을 받았다고…… 그러니까 마 음대로 싸울 수 있어." 레일즈는 검을 뽑아들었다. 검 끝에 걸린 마법의 빛은 아직 사라지지 않아서 넓은 실내를 눈부신 빛으로 감싸주 었다. 그걸 보고 마리스가 쿡쿡 웃었다. "참, 좋은데요. 하지만 그 칼로 싸우면 적의 눈에 금방 띄겠네요." 마리스는 벽에 걸려 있는 무기 중에서 장검 하나를 들고 왔다. "이걸 쓰세요." "고마워, 잘 쓸게." 레일즈는 검을 받아들고는 천천히 검을 뽑았다. 잘 닦인 검은 마치 거울 같았다. 램프의 빛을 받아 날카로운 빛을 발했다. 레일즈가 보기에 은을 단련해 만든 검 같았다. 레 일즈는 검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이리저리 휘둘러보았다. 은제 검인 만큼 약간 무거운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쓰기 에 불편하진 않았다. "내 검은 맡겨둘게." 레일즈는 허리에서 검을 풀더니 그걸 마리스에게 건네 주었다. "정말 싸울 생각이니?" 사이아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당연하지. 요마 따위한테 엉덩이를 보이고 도망가?" 레일즈는 자신감에 넘쳤다. 아까 상대한 고블린 같으면 야 열이 덤벼도 절대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그만두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을 거지." "미안해. 사이아하고 이 마을에서 빨리 도망쳐. 좀 멀긴 하지만 처음 발견한 그 길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자. 혹시 이틀이 지났는데도 내가 돌아오지 않을 땐 다낭으로 돌아 가. 그리고 아버지에게 이곳 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전해 드려. 알겠어?" 그 말을 끝으로 레일즈는 열려 있는 문을 박차고 나갔 다. 그땐 이미 전쟁 준비를 마친 마리스 족들도 저택 밖에 모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