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1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4) 01/10 09:38 347 line 4 은빛 머리 소녀의 이름은 마리스였다. 그녀는 마을에 도 착하자 마을에서 가장 큰 건물로 레일즈 일행을 안내했다. 나무로 지었지만 신전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저택이었다. 마을이라고 하지만 50호 정도밖에 안 되는 조그마한 곳 이었다. 통나무를 짜서 만든 조잡한 집들이 일부러 숲 속 의 나무들을 피해서 건축되어 있었다. "그래서 원견의 주문으로도 찾아낼 수가 없었구나!" 사이아가 마을의 모습을 보고 말했다. 마을 안에는 사육 하는 여러 마리의 늑대가 자유롭게 돌아다녔다. 모두 보통 늑대였고 은빛 늑대는 한 마리밖에 없는 특이한 존재였다. 은빛 늑대는 언제든지 마리스가 데리고 다녔다. 숲과 짐승 과 사람이 공존하는 그들의 생활에 레일즈는 강렬한 흥미 를 느꼈다. 전쟁을 하고 있다는 마리스의 말을 뒷받침하듯 창으로 무장한 남자들이 몇 사람씩 마을을 순찰하고 있었다. 레일즈 일행이 안내된 저택 안은 몇 개의 기둥으로 천장 을 떠받친 커다란 마루로 이루어져 있었다. 왼쪽 벽에는 창이나 칼 등의 무기가 늘어져 있고 눈동자 형상을 한 목 제 방패도 준비되어 있었다. 정면의 가장 안쪽에는 거대한 목조 늑대상이 놓여 있었다. 그 목조상 앞에는 대형 램프 가 두 개 놓여 있고 짐승의 기름이 타들어가는 느끼한 냄 새가 방 안에 꽉 찼다. 그들이 늑대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기다리자 촌장 같은 노인과 매우 힘 이 세 보이는 전사 한 사람이 들어왔다. 마리스는 레일즈 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 그들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 표정으로 보건대 심각한 협의인 것만큼은 분명했다. 마리스의 발 아래엔 아까의 은빛 늑대가 웅크리고 있었 는데 잠이 든 듯 바닥에 납짝엎드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나 이상한 소리만 났다 하면 날카로운 귀를 움직였다. 무슨 일이 생기면 이 거대한 늑대는 곧바로 행동에 옮길 것 같았다. 노인과 전사 두 사람은 머리를 숙였다가 한숨을 쉬곤 했 다. 힘 없어 보이는 그들에 비해 마리스의 태도는 의연했 다. 위엄을 간직한 채 때로는 두 남자를 격려하듯 미소를 띠기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비인이 살짝 레일즈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글쎄. 어쨌든 저들 표정으로 보아 깊이 알고 싶은 기분 은 안 드는걸." "우리 모두를 어떻게 요리하면 좋을지에 대해 상의하는 것이 아니면 좋겠는데……." 비인이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사람 고기를 먹는 습관이 있는 것 같나?" 밧소가 능청맞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협의가 끝난 모양인지 마리스가 레일즈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오래 기다리셨죠." "그쪽 이야기는 잘 끝났나?" 레일즈가 물었다. "예, 끝났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마리스의 표정이 약간 괴로워 보였다. 이야기가 잘 안 풀렸는지 그들이 처한 상황이 심각해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뭔가에문제가 있는 것만 은 분명했다. "자, 무엇부터 이야기할까요?" 마리스는 가만히 레일즈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램프 의 빛을 배경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그녀의 은빛 머리는 이제 금빛으로 빛나 보였다. "무엇이든 좋아. 어쨌든 난 모든 것을 알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곳 세계, 크리스 타니아의 비밀을……. 크리스타니아의 탄생은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신들 의 시대가 최후를 맞이하던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 다. 창조주인 신들이 빛과 어둠, 두 진영으로 나뉘어 싸운 신들의 대전쟁 때였다. 빛의 신들의 수장이 된 신은 지고신 패리스. 그리고 어 둠의 신들의 수장은 암흑신 패라리스였다. 빛과 어둠의 신 들은 서로를 멸망시키기 위해 가능한 마력을 모두 쓰는 한편 강력한 고대 종족들을 싸움에 소집했다. 그 중에서도 최강의 전사는 용왕이라 불리는 환상의 동 물이었다. 그들이 입에서 뱉어내는 불꽃은 모든 것을, 심 지어는 불멸의 혼을 가진 신들의 육체마저도 태워버렸다 고 한다. 용왕들의 불꽃으로 빛의 신들도 어둠의 신들도 모두 소멸된 채 혼만을 지닌 존재로 바뀌고 말았다. 육체 를 잃어버린 신들은 세계에 개입하는 방법까지 잃어버려 간신히 사제들이 사용하는 신성 마법의 '힘의 원천' 노릇 을 하는 데 불과하게 됐다. 다낭에서 전해지는 신화는 여기서 끝나고 인간의 역사 가 막을 올린다. 그 후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의 암흑 시대 를 거쳐 드디어 마술사들의 왕국이 흥하고 마법이 지배하 는 시대가 찾아왔다고 하는데 이것이 마법 시대였다. 그 마법 왕국 또한 약 8백 년 전에 멸망하고 지금은 새 로운 왕국이 지배하는 검의 시대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크리스타니아의 창조 신화는 신들의 대전쟁을 신화의 끝이라 부르지 않았다. 그들은 이 대전쟁을 신화의 시작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신들의 대전쟁 때 모든 신들이 멸망했던 것은 아닙니 다. 모습을 바꾸어 살아남은 신들도 비록 적긴 하지만 존 재했습니다." 그때 마리스는 마루 안쪽에 놓여 있는 늑대의 목조상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에 모셔져 있는 것은 우리 부족을 수호하는 신수 왕(神獸王) 페네스의 신상입니다." "저게 신이라면?" 레일즈는 놀라서 의자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보아도 늑대의 조상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다 낭의 신화에 의하면 신은 모두 거대한 인간의 모습을 하 고 있다고 전해지기 때문이다. "신들의 대전쟁 때 신들은 빛과 어둠으로 진영으로만 나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쪽에도 속하지 않고 세계 창조 를 완성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중립적인 신들도 있었습니 다. 그러나 암흑신은 자기 진영에 속하지 않은 신들을 모 두 말살하려고 수백에 달하는 용왕을 풀어놓았던 것입니 다. 중립신들은 암흑신이 풀어놓은 용왕에 쫓겨 이 변경의 대륙까지 도망쳐 왔습니다. 그 도중에 몇몇 신들은 용왕의 불길에 녹아버려 육체를 잃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위대한 신들조차도 용왕의 추격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 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들은 용왕들로부터 도망치는 유일 한 방책을 찾아냈습니다. 그것은 신의 육체를 버리고 짐승 의 몸으로 영원히 혼을 봉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신은 사자의 몸에 혼을 봉했습니다. 또 어떤 신은 큰 뱀의 몸을 새로운 혼의 그릇으로 선택했습니다. 호랑이의 몸에 혼을 봉한 신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수호신 페네 스는 늑대의 몸에 혼을 봉한 것입니다." "신들이 육체를 버리고 짐승의 몸에 옮겨갔다고?" 샤일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까딱까딱 했다. 그 가 섬기는 행운신의 전통에는 그런 신화가 전해지지 않았 던 것이다. "신수로 변한 신들은 이 크리스타니아를 외계로부터 차 단시켰습니다. 외계로부터 혼돈이 침입하지 않도록 그리 고 이 대륙만으로도 완성된 세계가 되도록 했던 것입니 다." "완성된 세계라니?" "그렇습니다, 완성된 세계입니다." 마리스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야기를 이어나갔 다. "세계가 완성되기 전에 신들의 대전쟁이 일어나고 말았 던 것은 대단히 불행한 일입니다. 그 때문에 여러분들의 세계가 미완인 채 무력한 인간의 손에 맡겨졌다고 들었습 니다. 그러나 이 크리스타니아는 신수로 변한 신들의 힘으 로 완성된 세계가 되었습니다. 주기라는 이름의 위대한 힘 으로 세계의 법칙은 최소한으로만 흔들림이 허락되고 우 리 인간들 또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었습니다… …." 마리스의 이야기는 아무래도 황당하게만 느껴졌다. 사 실 무턱대고 믿으라고 한다면 그게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 나 앞에 있는 은빛 머리 소녀의 진지한 얼굴을 보자 도저 히 거짓말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 그녀가 레일즈 일행에게 거짓말을 해서 도대체 무슨 이익을 보겠는가. "그렇다면 그대는 수천 년 전부터 살아 있다는 이야기 가 되는가?" 마리스의 모습은 아무리 잘 봐 주어도 십대로밖에 보이 지 않았다. 자기와 같던가 어쩌면 두세 살 어릴 것이라고 레일즈는 생각했다. "여러분은 늙지 않고 죽지 않는다는 식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과는 다릅니다. 나는 16년 전에 태어났고 보통 사람처럼 늙고 죽습니다. 고대의 엘프들 같 은 영원불멸의 생명과는 다릅니다. 우리들 세계는 일정한 세월을 단위로 동일한 역사가 반복되어 왔습니다. 그 반복 되는 역사가 바로 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주기마 다 이 세계에 다시 태어나 똑같은 인생을 보낼 수가 있습 니다. 당연히 저도 주기가 반복될 때마다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길 하는 거야?" 밧소가 미친 사람 보듯 마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중 얼거렸다. "당신들이 그렇게 믿고 있을 뿐인 거 아냐?" "제가 하는 말이 꿈 이야기처럼 들립니까." "나한텐 그렇게 들리는걸." "분명 믿기 어려운 이야기긴 해." 레일즈는 팔짱을 끼면서 솔직하게 말했다. "짐승의모습을 한 신, 반복되는 역사. 우리로선 솔직히 전혀 믿을 수 없는 이야기지. 우리들이 믿는 신들은 육체 를 잃어서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어. 역사는 반복되는 일이 없고 끊임없이 흘러가는 것으로 여길 뿐이지." "알겠습니다." 마리스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 았다. "우리들에게도 그랬습니다. 이 크리스타니아 바깥에 인 간이 살고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금부터 3백년 전에 외부 세계에서 침략자가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 그 침략자들은 수십 척이나 되는 선단을 짜고 이곳크리 스타니아에 상륙했다고 한다. 그들은 크리스타니아 북서 부에 튀어나온 반도에 상륙해서는 그 반도를 베르디아라 고 이름 붙였다. 그 이름은 그들 표류하는 백성들의 전설 적인 왕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크리스타니아 백성들 은 베르디아의 표류민들을 암흑민족이라고 불렀다. 암흑 신을 믿고 사악한 요마들과 함께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리스는 자기들을 신수민족이라고 했다. "원래 이 대륙은 결계의 신수왕인 무지개빛의 큰뱀 루 미스가 창조한 불가침의 절벽으로 외부 세계로부터 완전 히 격리시켰다고 합니다. 베르디아의 땅도 여러분들의 반 도도 모두 크리스타니아 대륙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죽고 마는 인간은 이 결계를 깨뜨릴 수가 없었습 니다." 신의 성벽을 창조한 존재가 큰 뱀의 모습을 한 신이라는 설명은 레일즈도 쉽사리 납득할 수 있었다. 그 절벽의 바 위 표면이 뱀비늘을 닮았다는 사실은 다낭의 백성들이라 면 아주 어린아이까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마리스는 슬픈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번 주기를 맞아 루미스 신이 쳐놓은 결계는 몇 차례 무너졌습니다. 맨 처음은 대백조 후지가 주기를 피해 이 대륙에서 떨어져 나갔을 때였습니다. 그 이유는 주기의 동 요 때문에 후지의 백성들이 큰 재앙에 시달릴 운명에 처 해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자애로운 신 후지는 그것 을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후지가 지배하던 북녘 끝의 반도는 바다 높이까지 내려앉았습니다. 이리하여 태어난 것이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반도, 잃어버린 대지 다낭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릴 처음 만났을 때 대백조부족이냐고 물었 군." 마리스는 그렇다고 조용히 대답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조상이 상륙했을 때 다낭 반도에는 아무도 살고 있지 않았다고 하던데? 일찍이 사람이 살았 던 흔적은 남아 있었지만." "그랬습니까? 주기의 가호를 벗어났으니 대백조부족도 살아 남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마리스는 가슴 앞에 손을 모으고 그들의 명복을 비는 듯 잠시 눈을 감았다. "그렇지도 않아. 다낭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건국 여왕 메네아 1세는 대백조에게 인도되어 다낭에 도착했다고 했 거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리들이 대백조부족이라고 못 할 것도 없지." "신수 후지를 만나본 적이 있습니까?" "그런 적은 없어. 혹시 만난 적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대 백조가 신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탈 하는 신수도 있었다니 주기의 힘이 완전하진 못했던 모양 이군." 레일즈는 솔직한 감상을 자기도 모르게 입에 담고 말았 다. 아차 실수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리스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마리스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 순순히 고개 를 끄덕일 뿐이었다. "지금 말씀하신 대로 주기의 지배도 완전하진 않습니다. 본래의 육체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신수들은 지난날만큼의 기적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때로는 혼돈의 침 입을 허락하고 세계의 법칙이 왜곡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게 바로 재앙의 씨앗 노릇을 해 이 대륙에 덮쳐들고 있 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후지라는 신수가 크리스타니아에서 떨어져나 갔다. 정해진 운명이 아니라 미지의 가능성에 부족의 미래 를 걸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 결과는 자신의 백성들을 멸망시키고 만 셈이다. 신수 후지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 까. "후지의 이탈 뒤 루미스는 새로운 결계를 잃어버린 대 륙과 대륙 사이에 창조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여러분들 의 세계와이 세계가 교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말이 맞아. 우리도 자력으로 신의 성벽을 타오를 수 는 없었으니까." 레일즈는 분한 듯이 오른 주먹을 왼손에 내리쳤다. 팡 하는 소리가 나자 은빛 늑대가 눈을 뜨고 두리번두리번 머리를 들었다. "신수왕 루미스가 창조한 결계니까 당연하겠지요." 마리스는 미소 지으며 은빛 늑대의 목덜미를 살짝 쓰다 듬어 주었다. 은빛 늑대는 기분 좋은 듯 다시 바닥에 턱을 묻었다. "루미스의 결계를 부술 수 있는 존재는 역시 신수들뿐 입니다. 지배의 왕인 밀림의 맹호 바르바스가배반했을 때 도 그 결계가 크게 부서진 적이 있습니다." 바르바스라는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마리스의 눈동자 에는 증오의 불길이 타올랐다. "신수왕 바르바스는 표류해 온 암흑민족에게 베르디아 토지를 팔아넘긴 것입니다. 그들의 사악한 힘을 가지고 이 크리스타니아를 자기 손 아래 지배하기 위해서였죠. 그리 고 온전한 신이었던 때의 힘을 되찾기 위해서도…… 그리 하여 베르디아의 땅도 바다 높이까지 가라앉혀 암흑민족 으로 하여금 크리스타니아에 상륙하게 했던 것입니다." "잠깐만!" 계속 이야기하려는 마리스를 레일즈가 서둘러 제지했 다. "바르바스라면 신수왕이겠지? 왜 왕이면서 배반해야만 했지? 왕이라면 종속된 사람들에게 명령하면 그만 아닌 가."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신수왕은 다섯 신입니다. 바르바 스는 지배를 관장하며 우리의 페네스 신은 신수왕의 좌장 (座長)으로서 이 세계의 주기를 관장합니다. 그 밖에도 결 계의 신수왕 루미스, 전쟁의 신수왕 블루저, 토대의 신수 왕 우르스, 이렇게 세 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타니 아에는 훨씬 많은 신수가 있어 크리스타니아의 삼라만상 을 분담하여 관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그런가?" "그렇습니다. 크리스타니아의 창조 이래 변함없이……." "그렇다면 그대들의 전쟁에는 신수들도 가담하고 있겠 군. 각각이 수호하는 부족을 위해서." 그렇다면 과연 장대한 광경이리라고 레일즈는 상상했 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신화 속의 전쟁이 현실로 다가와 있지 않은가. "그건 아닙니다." 레일즈의 말에 마리스는 심하게 동요했다. "신수들은 전쟁에는 참가하지 않습니다. 만약 신수들이 싸우면 신들의 대전쟁과 마찬가지로 파국이 찾아올지도 모르므로……." 마리스는 그렇게 설명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도 신수가 개입하지 않는 것이 불만인 것이라고 레 일즈는 이해했다. 몇 천년이나 크리스타니아를 지배해 온 질서가 무너지고 완전했던 세계가 파멸되고 있는데 스스 로 나서서 싸우려 하지 않다니 도대체 무엇을 위한 신이 란 말인가? "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신들이 수호하는 부족을 지키 려 하지 않다니, 인간의 왕보다도 못하잖아." 레일즈가 침울하게 말했다. "신수는 위대합니다! 우리의 페네스가 일어나시지 않는 것은 숭고한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리스가 격한 감정을 감추지 않고 레일즈에게 쏘아붙 였다. 마리스의 돌변한 태도에 놀랐는지 노인과 전사가 마 리스의 옆 모습을 바라보았다. 은빛 늑대도 눈을 뜨고 으 르릉거리며 레일즈에게 어금니를 내밀었다. 마지막엔 전 사까지 레일즈에게 손가락질하며 마리스에게 무슨 말을 했다. 그러나 마리스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분노하는 전사 를 달랬다. 그녀가 한 마디 하자 전사도 은빛 늑대도 온순 해졌다. 도대체 이 소녀는 어떤 사람일까? 신비롭게 느껴졌다. 장로로 보이는 노인보다, 강건해 보이는 전사보다 마리스 가 더 높은 지위에 있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내가 잘못했어. 그대가 믿는 신을 모독할 생각은 없었 다. 다만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레일즈는 순순히 사과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마리 스에게 상처 입힌 것을 후회했다. "아닙니다, 저야말로 심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마리스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윤기 나는 은빛 머리가 뺨 위로 흘러 가슴께로 떨어졌다. 마리스가 중얼거렸다. "솔직하게 말해 저로서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른다고?" 레일즈는 깜짝 놀라 마리스를 바라봤다. 힘 없이 중얼거린 마리스 얼굴에 도와달라는 표정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여운 소녀라는 것을 레일즈는 처음으로 의식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사랑이 피어오르 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때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의연한 태도로 돌아왔다. "신수왕 바르바스는 그때까지 깃들어 있던 호랑이의 몸 을 버리고 표류자들 왕의 육체를 새로운 혼의 그릇으로 선택했습니다. 신과 가장 비슷하게 생긴 인간의 몸을 수중 에 넣음으로써 신이었을 때의 능력을 다시 얻겠다는 의지 겠지요. 그리하여 3백 년에 걸친 의문의 잠 끝에 바르바스 는 신왕(神王)으로 부활했습니다. 결국 암흑민족과 그가 수호하는 부족의 선두에 서서 우리들 신수민족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것입니다." "즉, 바르바스라는 신만은 스스로 싸움에 나섰다는 얘기 군." 레일즈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리스 쪽의 괴로움이 느 껴졌다. 신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존재는 신들의 대전쟁 때 사라진 용왕 정도뿐이었다. "상황에 대해선 웬만큼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