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0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3) 01/09 09:32 267 line 3 처음 보인 것은 어둠 속에서 초록빛으로 빛나는 두 눈동 자였다. "드디어 왔는가!" 레일즈는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 아 마법의 빛 안으로 한 마리의 늑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또 한 마리, 또 한 마리……. 다낭에 살고 있는 늑대와 전혀 다를 것이 없는 종류였 다. 군데군데 갈색이 뒤섞인 잿빛털이었다. 길다란 혀와 날카로운 어금니를 보이며 늑대들은 신중한 자세로 레일 즈 일행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세 마리의 늑대는 레일즈 일행에게서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갑자기 멈춰섰다. 그때, 늑대들 뒤에서 새로운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이잖아!" 사이아가 침을 꼴깍 삼켰다. 레일즈도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늑대 뒤에서 사 람이 나타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동요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레일즈는 의외의 상황 전개에 당황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을 주 의 깊게 살펴보았다. 그들 숫자는 여섯 명으로 모두 남자 였다. 마법의 빛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다낭 사람들보다 약간 피부가 더 희다고 생각됐다. 키가 크고 훤칠했다. 긴 머리 카락을 기묘한 천으로 묶고 목 부근에는 짐승의 어금니를 끈으로 엮은 장식품을 달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 람은 한쪽 귀에도 어금니 장식을 달고 있었다. 여섯 사람 전원이 긴 창으로 무장하고 조잡한 가죽을 몸 에 두르고 있었다. "야만인?" 레일즈가 스스로에게 묻듯 말했다. 그다지 발달된 문명 을 이루고 있다고는 보이지 않았다. 늑대들은 자기들 뒤에 인간이 모습을 나타낸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지르며 레일즈 일행을 위협하고 있 을 뿐이었다. "저들이 늑대를 사육하는 것 같아." "아무래도 그런 것 같은데……." 레일즈의 혼잣말에 샤일론이 대답했다. "우리는 싸울 생각이 전혀 없다." 레일즈는 여섯 남자들을 향해 말을 걸었다. 적의가 없다 는 걸 보이기 위해 두 손을 펼쳐 보이고 미소 띤 얼굴을 지었다. 그리고 상대의 반응을 살폈다. 잠시 기다렸지만 남자들은 그저 서로 서로를 바라만 보 면서 레일즈 일행이 이해할 수 없는 말로 한두 마디 말을 건넬 뿐이었다. 창 끝은 레일즈 일행을 향하고 있어서 분 명히 경계하고 있는 눈초리였다.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아. 사이아의 마법으로 어떻게 안 될까?" 사이아는 면목 없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미안해. 말이 통하는 주문이 있긴 한데, 아직 쓸 줄을 몰라." "이참에 연습 좀 하지 그래." 레일즈는 그렇게 말하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정령의 말이 통할까?" 그 말과 함께 비인은 물 흐르듯 퍼져가는 말로 말을 걸 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드워프의 말이라면 어떨까?" "엘프어라면 할 수 있는데……." 샤일론과 사이아가 동시에 제안했지만 레일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그만 두는 게 좋겠어. 상대방이 오히려 경계하는 것 같 아." 레일즈는 실제로 서로간의 긴장이 높아가는 것을 느꼈 다. 주변의 공기가 팽팽히 긴장되어 있어서 별 것 아닌 것 가지고도 한바탕 싸움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쪽도 뭐라고 말해 봐!" 레일즈는 초조한 기색으로 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한 사 람이 갑자기 무슨 소린가를 질렀다. 레일즈 일행 발 밑에 구르고 있는 요마의 시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고함 소 리를 신호로 그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빠른 말로 무 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지." 레일즈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혹시 고블린과 한패 아닐까?" 입에 담기도 꺼려지는 듯 사이아가 두려워하며 말했다. "만일 그렇다면 도저히 싸움을 피할 수 없지." 늑대가 세 마리, 무장한 사람이 여섯. 아무래도 힘겨운 싸움이 아닐 수 없었다. "이길 수 있을까?" 레일즈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때 남자들 뒤편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렸다. 투명한 울림을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목소리였는데 여 자임에 분명했다. 레일즈는 잘 조율된 현악기를 퉁기면 그 런 소리가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마치 마법에 사로 잡힌 듯 레일즈는 소리 나는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남자들 뒤로는 칠흑 같은 어둠이 이어지고 있었는데 갑 자기 그 어둠의 문을 열고 늑대 한 마리가 들어섰다. 처음 나타난 세 마리에 비하면 몇 배나 큰 늑대였다. "아름다운 늑대야……." 사이아가 상황도 잊은 채 멍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러나 레일즈도 사이아의 말에 전적으로 찬성이었다. 과연 그 늑 대는 아름다웠다. 탐스러운 털은 빛나는 은색이었다. 마치 달빛이 물든 것 같았다. 은빛 늑대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발산하면서 유유 히 걸었다. 그 은빛 늑대 뒤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이번에는 사람이었다. 여섯 남자가 길을 연 한 가운데 은빛 늑대가 인도하듯 앞으로 나서자 그림자로만 보였던 여성이 레일즈의 검 끝에 달린 빛 안으로 선뜻 들 어섰다. 이번에 목이 바싹 타들어간 사람은 레일즈였다. 레일즈 와 비슷한 또래일 것 같았는데 허리에 닿을 정도로 긴 머 리카락이 은빛 늑대의 털과 똑같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보름달이 대지에 내려선 것이 아닌지 착각될 정도였 다. 맑은 눈동자가 곧바로 레일즈를 사로잡았다. 입가의 희미한 미소와 함께. 은빛 머리의 소녀는 남자들과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는 데 고귀한 신분인지 남자들의 태도가 대단히 겸손해 보였 다. 자기들끼리 협의가 끝나자 소녀는 은빛 늑대만을 데리 고 남자들보다 조금 앞으로 나섰다. "제 말을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소녀는 천천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약간 낯선 느낌을 주는 말투이긴 했지만 틀림없이 다낭 사람들이 쓰는 말이 었다. "말할 수 있나, 우리말을……." 레일즈는 놀란 눈으로 소녀를 보았다. "예." 레일즈의 가슴속에 안도감이 퍼졌다. 다낭 사람들은 모 두 같은 말을 썼기 때문에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 이 이렇게도 성가시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 다.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레일즈는 은빛 머리의 소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희도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소녀의 태도와 목소리에는 기품이 서려 있었다. "알았다. 우선 그쪽부터 질문해라." 레일즈도 기가 꺾이면 안 된다는 생각에 가슴을 펴며 소 녀에게 말했다. "그럼 저부터 묻겠습니다. 발 아래 쓰러져 있는 요마를 죽인 것은 여러분들입니까?" "그렇다." 레일즈는 잠깐 망설였지만 정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그 녀의 눈동자를 보니 거짓말을 해 봤자 도저히 속일 수 없 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소녀가 요마와 한 패라고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오 히려 그들은 이 요마들을 쫓아왔다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 스러운 결론일 것 같았다. "이들이 우리에게 덤벼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 였다." "죽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들이 저 요마들 을 죽였는가 아닌가를 알고 싶었을 따름입니다. 자, 그러 면 여러분의 질문에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 레일즈는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지를 몰라 잠시 생 각에 잠겼다. 결국 문제의 핵심부터 묻기로 했다. "그대들은 어떤 종족인가? 그리고 이곳 세계는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져 있나?" "무슨 뜻입니까?" 은빛 머리의 소녀는 놀란 얼굴을 한 채 물었다. "말 그대로다. 우리들은 어제 이 세계에 처음으로 찾아 왔다. 그러니까 이 세계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른다. 그대들 은 어떤 사람이며 어떤 생활을 하고 사는가? 우리는 모든 것을 알고 싶다. 이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대들에대해." 소녀는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움직이지 않았다. 레일즈 의 질문에 어떻게 답하면 좋을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레일즈는 소녀가 무언가 이야기를 꺼낼 때까지 기다렸 다. "여러분들은 어디에서 오신 분들입니까?" 소녀가 다시 물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가면 절벽이 있다. 그 절벽 아래 세계 에서 올라왔다." "북쪽에 있는 반도?" "우린 그 땅을 다낭이라고 부른다." "다낭…… 여러분들이 대백조부족?" "대백조?" 소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레일즈는 이해할 수 없었 다. 다낭 반도에는 분명히 백조가 많았다. 그러나 주민과 는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모르신다면 됐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은빛 머리의 소녀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우리들에 관해, 이 세계에 관해…… 당신의 질문에 답 하기가 간단치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걸 위해 시간 을 쪼갤 수가 없습니다." 은빛 머리의 소녀는 미안한 기색으로 살짝 머리를 숙였 다. "왜 그런가?" 레일즈가 되물어도 소녀는 고개를 가로 저을 뿐이었다. "우리들은 지금 대단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 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 머무르는 한 그 위험은 여러분들 에게도 미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하루라도 빨리 이 세계 에서 벗어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우리는 애매한 대답은 질색이다. 간단히라도 좋다. 이 유를 말해달라." "우리들은 전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쓰러뜨 린 요마와 그리고 그 일당들과……." "이 요마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고?" 레일즈는 소녀의 말을 믿을 수 없어 반사적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은빛 머리의 소녀는 한 차례 고개를 끄덕였을 따름이다. "전쟁은 어디에나 있는 것이지." 레일즈는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슬픈 현실이지." 레일즈의 말을 듣고 샤일론이 대화에 끼여들었다. 행운 신의 교의에 따르면 전쟁은 만인에게 불행을 초래할 뿐인 재앙이었다. 그러나 행운신의 신관 가운데에도 샤일론처 럼 교단과 신자를 지키기 위해 전사의 훈련을 받는 사람 이 있었다. 이 드워프는 아마도 전사로서 수련을 쌓으려고 모험자의 길에 나섰는지도 모른다. "이유를 알았으면 빨리 여러분들의 세계로 돌아가십시 오." "우리는 전사다. 전쟁이 벌어졌다고 해서 간단히 도망칠 수는 없다." 레일즈는 분명하게 대답했다. "멋진 말이야, 정말 용감한데!" 밧소가 짧은 휘파람을 불면서 익살을 떨었다. "난 좀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경우에 따라선 다 시는 다낭에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절벽이 벌어져 생긴 길이 닫혀버렸으면……." "절벽이 벌어져 생긴 길?" 은빛 머리 소녀는 험악한 표정으로 레일즈를 보았다. 그 녀의 세계에서 쓰는 언어로 무슨 말인가를 중얼거렸다. "……그 길은 이제 영원히 닫히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 길이 닫히지 않는다니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지?" "전쟁 때문입니다. 전쟁 때문에 이 세계는 점점 혼돈에 빠지고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마침내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까지 다다랐습니다. 절벽에 나 있는 길도 그 중 하나 입니다." "혼돈……." 레일즈는 도움을 청하려고 사이아의 얼굴을 살폈다. "이 세계가 혼란에 빠졌기 때문에 길이 열렸다는 것 같 은데." "길이 닫히지 않는다니 더 자세한 정보를 알고 싶다. 이 세계의 전쟁이 언제 우리 나라로 불똥이 튈지 모르는 일 이니 우리들로서도 싸울 준비를 갖춰야 하지 않겠나?" "도대체 누구와 싸울 생각입니까?" 은빛 머리 소녀는 가만히 레일즈를 바라봤다. 그 눈동자에 잡히자 왠지 숨이 막혔다. 그 시선에는 속 박하는 주문의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그러 나 요마 무리가 사악하다는 것쯤은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사실 우리들 조상은 요마들과 수백 년 동안 싸웠던 사람 들이다. 지고신 패리스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도 좋다." "패리스?" 소녀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마음을 굳혔는지 일단 입을 닫았다. "……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결심이 굳으시다면 어쩔 수 없군요. 우리들 마을까지 같이 가시죠. 모든 건 거기서 말 씀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야기가 길어질 것입니다. 대단 히 오랜 이야기일 겁니다." "그건 문제가 없다. 시간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긴장이 풀린 레일즈 얼굴에 드디어 미소가 번졌다. 은빛 머리의 소녀가 여섯 남자들을 돌아보고 레일즈 일 행이 알지 못할 언어로 이야기를 하자 여섯 남자들은 하 나같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저마다 떠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은빛 머리 소녀가 의연한 자세로 고개를 가로 젓 더니 무언가를 말하자 여섯 남자들은 그 이상 떠들지 않 았다. 다만 레일즈 일행을 향해 창을 한 번 휘둘러 따라오 라고 몸짓을 했을 뿐이었다. 레일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낙의 표시였다. "괜찮을까? 마을에 도착해서 갑자기 공격하는 건 아니 겠지?" 비인이 불안한 듯 물었다. "그들이 우릴 습격하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전쟁에 말려들지도 몰라." 이미 은빛 머리 소녀 일행은 오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 했다. 레일즈가 서둘러 뒤쫓아가자 나머지 네 사람도 도리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레일즈를 따라나섰다. 늑대들을 부리는 이상한 사람들을 뒤따르면서 레일즈는 드디어 자신의 운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만족 감을 느꼈다. 이 크리스타니아에서는 지금 진짜 전쟁이 벌 어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영웅으로서의 단계를 올라가는 데 이보다 더 어 울리는 상황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