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2) 01/08 09:40 354 line 2 레일즈 일행은 강을 따라 나아갔다. 큰 강이었다. 그러 나 건너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강은 아니었다. 수영 에 자신 있는 사람이라면 얼마든지 건너갈 수 있을 정도 였다. 흐름은 완만해 보였지만 깊이는 상당할 것 같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강 가운데에 들어가면 사람의 키를 훌 쩍 넘을 것처럼 보였다. 샤일론과 밧소 두 사람은 일부러 언덕의 기슭까지 와서 레일즈와 친구들이 내려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능하 면 함께 움직일 심산인 것 같았다.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것은 모험자인 그 둘에게도 불 안한 일임에 분명했다. 레일즈에게도 그들이 동행하는 것 이 마음든든했다. 어쨌든 그들은 경험이 풍부한 모험자들 었다. 만일의 사태가 벌어질 때 도움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일행은 해가 질 때까지 계속 걸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걸어도 어디를 보아도 단조로운 나무들과 강물만이 계속 될 뿐 마치 같은 장소를 뱅뱅 돌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 였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숲 속에 사는 작은 동물들과 새, 그리고 강물 속에 사는 물고기들이 크리스타니아의 주민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 다. 결국 그날은 아무런 일도 생기지 않았다. 해가 지기를 기다려 레일즈 일행은 강 주변에서 야영을 하기로 했다. 간단한 저녁 식사를 마치고 피곤했는지 얼마 되지 않아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레일즈가 눈을 뜬 것은 동이 트기 전이었다. 스스로 잠 에서 깬 것이 아니라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소리에 깨워진 것이었다. 샤일론과 밧소 두 사람은 벌써 일어나 있었다. 레일즈는 비인과 사이아를 깨우고 나서 눈을 비볐다. 길 다랗게 뒤로 끌리는 소리였다. 바람 소리라고 하기에는 너 무 높은 소리였다. "꼭 피리 소리처럼 들리는데……." 도적 밧소가 히죽 웃었다. "아아, 저건 멀리서 늑대가 울부짖는 소리야." 늑대란 말을 듣고 비인이 비명을 지르며 목을 움츠렸다. "가, 가까이에 있어? 숫자는?" "침착해. 저놈들 소리는 멀리까지 들리는 법이야. 지금 듣기에는 여기서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어." 밧소는 세 사람의 반응을 재미있어 하며 바라보았다. "늑대는 영리한 동물이니까. 이렇게 사람이 많으면 공격 해 오는 법이 드물지." 샤일론이 단언하듯 말했다. 행운신의 신관인 만큼 이 드워프는 상황을 낙관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지?" 밧소는 샤일론에게 의견을 물었다. "가까이 올 때까지 가만 놔 둘 수밖에 없잖아." "그렇겠구만." 밧소는 낄낄거리며 웃더니 레일즈를 돌아보았다. 겁쟁 이 취급을 받았다는 생각이 들어 레일즈가 기분 나쁜 표 정을 지었다. 늑대 떼가 가까이 온다면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뿐, 크게 두려움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긴장 감이 유쾌할 정도였다. 늑대 따위는 설령 떼지어 온다고 해도 때려눕힐 자신이 있었다. 다시 잠을청하기도 어정쩡한 시간인지라 일행은 그대 로 출발하기로 했다. 간단한 아침을 먹고 각자의 짐을 정 리한 뒤 그들은 떠났다. 쉬지 않고 걸었지만 그날도 역시 아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았다. 같은 패턴을 반복하는 숲 속의 나무들과 강물만을 계속 만났을 뿐이었다. 동이 트기 전에 멀리서 들렸던 늑대의 울부짖음도 두 번 다시 귀에 들리지 않았다. 따분하고 단조로운 시간을 보내 고 사방을 둘러보니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태양이 막 서쪽 지평선을 넘어가려고 할 때 조잡 한 목제 다리와 아주 오래된 상처처럼 숲으로 나 있는 좁 은 길이 보였다. 너무나도 갑작스러웠기 때문에 레일즈는 그 자리에서 멍하니 멈춰서고 말았다. 저 다리와 길에 도대체 무슨 의 미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사이아가 마음속 깊이 기뻐하는 표정으로 레일즈의 등 뒤로 바싹 다가섰다. 레일즈는 사태의 중요성을 퍼뜩 이해 했다. 이 세계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이외에 다리를 만드는 동물을 레일즈는 알지 못했 다. 밧소가 재빨리 앞서가 길 주위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과연 모험자 생활을 해온 탓인지 솜씨가 좋았다. 길은 조그마한 마차가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폭이었다. 다낭의 정비된 가도처럼 돌과 벽돌이 깔려 있는 대신 노 랗게 마른 땅이 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람이 밟고 다녀서 바닥이 다져진 것 같은데…… 발 자국 같은 것이 남아 있어. 그렇지만 사람의 것인지 어쩐 지는 자신 없어." 밧소가 돌아와서 그렇게 보고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분명히 마을이 나올 거야." 사이아가 활기 찬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럴 거야. 그렇지만 환영받을지 어쩔지는 모르겠 는걸. 갑자기 습격당할지도 모르니 단순하게 기뻐하고 있 을수만은 없어." 레일즈는 사이아가 아니라 자신을 경계시키듯 이야기했 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격렬한 흥분을 느끼고 있었다. 드디어 크리스타니아의 주민을 만나게 된다. 단조로운 숲 속 풍경은 이제 지긋지긋했다. 레일즈는 일행에게 의견을 구하려는 듯 다른 사람들을 쭈욱 둘러보았다. "모처럼 길을 만났다. 따라가보는 수밖에 없겠지?" 샤일론이 말했다. "어쨌든 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어떤 무리인지 확인 은 해야지. 앞으로 평생 동안 이 세계에서 살게 될지도 모 르잖아." 이건 밧소의 말이었다. "혹시라도 위험한 무리라면 어떻게 한다?" "그때는 다낭으로 돌아가 꽁꽁 숨어 살아야지. 결국 어 느 쪽이 더 위험한가가 문제 아니겠어?" "그래, 그 말이 맞아." 레일즈는 밧소에게 동의했다. 이 도적의 말은 명쾌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레일즈는 위험으로부터 도망칠 생 각은 없었다. 위험과 맞서지 않으면 자신의 가능성이 열리 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미 틈이 닫혀버렸 을 가능성도 있었다. "좋다, 이 길을 따라가자. 다만 충분히 대비하고서다." 레일즈는 그렇게 선언하고 선두에 서서 숲으로 난 길을 따라가기 시작했다. 조금 걷는 사이에 해는 완전히 지고 말았다. 사이아가 빛을 밝히려고 했지만 레일즈가 만일을 대비해서 막았다. 주위가 밝아지는 건 좋지만 자신들의 존재를 일부러 과시 할 필요는 없었다. 그리고 동녘 하늘로 떠오른 보름달이 숲 속의 나무들에 막히면서도 은은한 은색 빛을 뿌려주고 있었기 때문에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시각이라면 인가의 창문에서 새는 빛으로 마을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러나 마을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 내지 않았다. 오두막 하나 표지판 하나 눈에 띄지 않았다. 걷다가 지쳐 야영을 하기로 결정한 바로 그때였다. 숲의 나무들이 술렁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레일즈는 깜짝 놀라 머리 위를 쳐다봤다. 나뭇가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레일즈 는 느끼지 못했지만 바람이 불었던 모양이다. 그리고 바람 에 실려 멀리서 늑대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이에 와 있는 거 아냐?" 비인이 몸을 움츠리면서 말했다. 레일즈는 끄덕거렸다. 동트기 전보다 늑대들의 울부짖 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레일즈 일행이 향하고 있는 방향에서 그 소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재수 없게 숫자도 많은 것 같은데." 레일즈 귀에는 여러 마리의 늑대가 서로를 부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늑대는 배가 고프지 않는 한 사람에게는 달려들지 않 아." 그렇게 말하면서도 샤일론은 큰 도끼를 두 손으로 고쳐 잡고 있었다. 그도 위험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불안해 하면서 늑대들의 울부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제발 좀 멀리 떠나가라고 마음속으로 빌었지만 소용없 었다. 늑대의 포효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소 리도 커졌다. 어쩐지 레일즈 일행을 향해 곧바로 달려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레일즈도 허리의 검을 확인하고 눈앞을 가로막고 있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일행 앞으로 뻗어 있는 길이 희미하 게나마 형태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길 반대쪽에서 지금이 라도 늑대들이 무리 지어 나타날 것만 같았다. 사냥이라도 하고 있는 것인지 늑대의 울부짖음에는 맹 렬함이 묻어 있었다. "벌써 우리를 발견한 게 아닐까?" 사이아가 불안해하며 레일즈 곁으로 다가왔다. "모르겠는데. 그렇지만 이쪽을 향해 오고 있는 건 틀림 없어." 레일즈는 사이아를 슬며시 자기 뒤로 오게했다. "늑대 따위에게 죽고 싶진 않아." 긴장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비인이 비명을 질렀다. "당연하지!" 레일즈는 천천히 검을 뽑아들었다. 사이아가 등짐 자루를 벗고서 그 안에서 주섬주섬 뭔가 를 찾기 시작했다. 아마도 주문서를 꺼낼 생각이리라. 샤 일론도 큰 도끼를 쥐고서 레일즈 곁으로 다가왔다. "아무래도 싸움이 벌어지겠지?" 레일즈가 행운신의 사제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기도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 대답은 레일즈의 질문을 긍정한 것이었다. 늑대의 숫 자가 많지 않으면 좋겠다고 레일즈는 생각했다. 자신은 사 슬 갑옷으로 몸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늑대 따위에 크게 상처 입지는 않겠지만 사이아와 비인은 얇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매우 위험했다. 숫자가 많으면 두 사람 을 지켜줄 여유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더욱 긴장되었다. 일행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끈기 있게 기다렸다. 그 동 안에도 늑대의 울부짖는 소리는 점점 커졌다. 바로 가까이 까지 다가온 것 같았다. 그리고 늑대의 소리에 섞여 다른 소리가 들려왔다. 짧고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마른 소리 였다. "발소리 같아." 사이아가 레일즈 뒤에서 속삭였다. "그런 것 같은데." 레일즈는 긴장하며 검을 고쳐쥐었다. 소리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발자국 소리 쪽이 늑대보다 도 레일즈 일행에게 가까이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가 늑대에게 쫓기고 있는 게 아닐까?" 사이아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그런 생각이 들어." 레일즈는 눈을 부릅뜨고 정면의 어둠 속을 응시했다. 소리는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왔다. "온다!" 레일즈가 한껏 긴장해서 말했다. 어둠 저편에서 그림자 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두 개의 그림자였다. "사이아, 빛을!" "아, 알았어." 사이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지팡이를 양손으로 들었다. 그리고 입 속에서 주문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서 소리 내 어 읊조렸다. "빛이 되어 빛나거라, 만능의 힘이여……." 사이아의 주문이 완성되자 레일즈의 검 끝에 빛이 서려 환하게 빛나더니 드디어 찬연한 마법의 빛을 뿜기 시작했 다. "하필 왜 검 끝에다 빛을 달아놔." 레일즈는 사이아를 바라보며 투덜댔다. "무언가에 걸리지 않으면 빛을 옮길 수가 없어. 마침 네 가 선두에 있고 손에 들고 있는 건 방패하고 칼뿐이잖아." 사이아는 허둥대며 그렇게 변명했다. "지금 입씨름하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샤일론이 드물게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알고 있어." 레일즈는 드워프에게 도리어 큰 소리를 지르고는 몸의 방향을 정면으로 바꿨다. 푸르스름한 마법의 빛에 비쳐 두 동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다리로 직립한 조그마한 생명체였는데 둘 다 아무런 장식도 없는 소검을 손에 들고 있었다. 언뜻 보기에는 애 들 같았다. 그러나 이런 밤중에 무기를 들고 밖으로 나다 니는 아이들이 있을 턱이 없었다. 레일즈는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고 신중을 기했다. "너희들은 누구냐. 우리들은 싸울 생각이 없다!" 레일즈는 그렇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갑자기 빛나기 시작한 마법의 불빛에 눈을 동그 랗게 뜨더니 팔로 얼굴을 가리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레 일즈는 불빛이 달린 검을 앞으로 내밀며 상대방을 좀더 자세히 관찰하려고 했다. 몸에 비해 머리가 턱없이 크고 머리카락이 전혀 없었다. 옷은 여기저기 헤져서 거의 다 찢어졌고 옷자락과 소매 밖으로 나온 손발은 마른 나뭇가 지처럼 가늘었으며 굵은 뼈마디가 나 있었다. 게다가 피부 는 기분 나쁠 정도로 검었다. 전체적으로 야위었으면서도 묘하게 불룩 튀어나온 배가 추악한 인상을 안겨주었다. "이런 종족이 크리스타니아의 주민인가?" 레일즈는 아연실색했다. 잠시 기다렸지만 상대방으로부터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 다. "말이 통하지 않는 거 아냐?" 비인이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지도 몰라. 하지만 그 이유만은 아닌 것 같은데." 레일즈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대답했다. 드디어 불빛에 눈이 익었는지 그 중 하나가 얼굴을 들고 증오가 배인 눈으로 레일즈를 보았다. 그 얼굴또한 추하 게 일그러져 있었다. 갈고리처럼 휜 코에 귀까지 찢어진 입, 둘둘 말아올린 것처럼 생긴 귀까지 어디 한 군데 정상 인 곳이 없었다. "싸울 생각은 없다고 했잖아!" 레일즈는 적의가 없음을 알리려고 일단 검을 뒤로 물리 는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상대의 기세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나머지 하나도 검을 제대로 잡고 돌격해 왔 다. 겁을 먹은 것도 같았지만 그들은 사악한 살기에 가득 차 있었다. 레일즈는 이야기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사 이아와 비인이 싸움에 말려들게 하지 않으려고 레일즈는 다섯 걸음 정도 앞으로 나서서 검과 방패로 싸울 준비 자 세를 취했다. 먼저 둘이 차례로 레일즈를 향해 덤벼들었다. 레일즈는 첫째 상대의 공격을 검으로 밀쳐내고 두 번째 상대는 방 패로 막아넘겼다. "싸움을 먼저 시작한 건 너희들이야!" 레일즈는 이렇게 외치면서 검을 쳐들었다. 바람을 가르 는 소리와 함께 레일즈의 장검이 휘익 빛을 냈다. 손에 묵 직하게 감촉이 전해져왔다. 레일즈는 먼저 달려든 적을 어 깨에서 배까지 완전히 갈라놓았다. 그러자 짧은 비명을 지 르며 상대가 땅바닥에 쓰러졌다. 단 일격으로 하나를 베어버리고는 오히려 레일즈가 놀 랐다. 견제를 위해 한 번 휘둘렀을 뿐인데…… 부상이라도 입힐 수 있으면 행운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상 대는 마치 무기 다루는 법조차 모르는 바보가 아닌가. 상 대의 공격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기본조차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눈을 뜬 채로 목숨이 끊어져 검은 피를 뿜어내는 적의 모습이 레일즈의 검 끝에서 반짝이는 마법의 빛에 비치어 선명하게 보였다. "죽이지 않아도 되잖아." 사이아는 눈에 눈물을 가득 담은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 했다. 레일즈는 그녀를 살짝 돌아봤을 뿐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리고 큰 소리를 질러 또 하나의 적을 위협했다. 제발 도망가라고 속으로 빌면서. 그때 그 소리에 응하기라도 하듯 늑대들의 울부짖는 소 리가 들려왔다. 아주 가까이에 있는 것 같았다. 늑대들은 당장이라도 모습을 나타낼 듯 했다. 동료의 죽음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또 하나의 적이 다시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레일즈는 그 공격을 대수롭지 않게 검으로 받아넘겼다. "도망가라고 말하잖아." 레일즈는 무기를 들고 있는 오른팔을 향해 검을 내리쳤 다.그러자 상대는 그것을 피하려고 튀어올랐다. 그러나 튀어오른 방향이 나빴다. 왼쪽으로 튀어올랐으면 좋았을 걸 공교롭게도 오른쪽으로 튀어오른 것이다. 게다가 머리 를 숙인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마치 칼날에 머리를 내놓은 꼴이었다. 레일즈가 아차 싶었을 땐 이미 때가 늦었다. 레 일즈의 검은 오른팔이 아니라 상대의 목을 제대로 내리치 게 됐던 것이다. 가볍게 한 차례 내려친 것이었지만 목이 절반 가까이 잘 려 입에서 비명과 피거품이 튀어나오면서 그대로 땅에 엎 어져 버렸다. "이것들은 무슨 종족이지?" 그들은 거미처럼 쫙 뻗은 채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후면 멈추고 말 것이었다. 검붉은 피를 천으로 깨끗이 닦아내고 나서 여느 때의 습 관처럼 레일즈는 검을 칼집에 꽂으려 했다. 그러자 마법의 빛이 사라져 주위가 어두워졌다. "내 검은 횃불이 아닌데……." 레일즈가 장난스럽게 말을 하며 다시 한 번 검을 뽑아들 었다. 피를 닦은 천은 그 자리에서 버렸다. 가지고 있으면 악취 때문에 토해 버릴 것 같았다. "대단한 솜씨야." 박수를 치며 밧소가 레일즈의 곁으로 다가왔다. "죽일 생각은 없었어." "말은 잘하네, 둘 다 즉사했잖아." "이러쿵저러쿵 변명하는 성격 아닌 거 잘 알잖아." 설명해 봤자 별수 없을 것 같아서 레일즈는 그쯤 말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런데 늑대들이 가까이 오고 있단 말씀이야. 그놈들도 지금처럼 멋지게 처리해 줘." 밧소가 사근사근 말했다. "알았어." 레일즈는 긴장하면서 빛이 나는 검을 쥐고 길이 나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머지 세 사람도 레일즈 있는 데 까지 다가왔다. 비인과 사이아는 부들부들 떨면서 시체를 힐끔 쳐다봤다. 샤일론은 과연 사제답게 두 시체를 향해 기도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레일즈는 기분이 상했다. "아, 아니, 이럴 리가…… 우와, 말도 안 돼!" 시체를 훔쳐본 사이아가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레일즈가 무슨 일인가 궁금해서 입에 손을 대고 있는 사 이아를 돌아보자 그 무언의 질문에 답하기라도 하듯 사이 아는 놀란 손으로 시체를 가리켰다. "고, 고블린이야……." "고블린이라니?" 레일즈는 놀라서 소리 쳤다. 그 이름은 레일즈도 알고 있었다. 고블린은 사악한 요마의 일족이었다. 북쪽 바다에 떠 있는 마을에서는 고블린 같은 요마가 결코 진기한 존 재가 아니었다. 인적 없는 깊은 산 속이나 숲 속에 무리 지 어 사는 고블린이 얼마든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신천지 다낭에는 이런 기분 나쁜 요마 따위는 하 나도 살고 있지 않았다. 게다가 다낭 사람들에겐 고블린 같은 요마는 겨우 전설 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존재였다. "크리스타니아에 살고 있는 것이 요마인가. 이런 놈들이 이 윗세계를 장악하고 우릴 내려다보며 살았던 거야." 터져나오는 분노를 삭이기 힘들었는지 레일즈는 검을 쥔 손에 잔뜩 힘을 주었다. "아직은 모르잖아. 처음 만난 게 재수 없이 요마였을 수 도 있어."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레일즈는 어깨를 추스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요마 다음에 만나는 것은 늑대일지도 모르지. 정말 재 미있는 세계 아냐?" 레일즈는 요마들이 나타난 방향을 노려보며 늑대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늑대들이 모습을 나타내는 데는 그다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