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들녘 (addhpf2 ) [크리스타니아 표류전설] 제1권 ...(11) 01/07 09:36 264 line 일행은 잠시도 쉬지 않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발이 마비 되어 감각이 없을 지경이었고 심장도 몹시 두근거렸다. 좌 우의 절벽 때문에 그늘이 짙은 것이 무엇보다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흘러나오는 땀을 흡수한 속옷이 피부에 달라붙 었다. 사이아는 마술사의 지팡이를 의지할 수 있을 뿐이었고 비인과 밧소 또한 얼굴을 들 힘조차 없어 자기 발 밑만 바 라보며 걸었다. 단 한 사람, 샤일론만이 드워프다운 강인 함을 발휘해 숨도 고르고 발걸음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영원히 이 상태를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일기도 했지만 어느 틈엔가 좌우의 절벽이 낮아지고 하늘 이 가까워져 있었다. 길의 종착점도 확실하게 보였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에 레일즈는 가슴이 뛰 었다. 벌써 한나절 가까이 계속 걸었다. 거기서 몇 시간 더 올라가 햇살이 자기 얼굴을 비쳤을 때, 레일즈는 피곤도 잊은 채 오르막길을 세차게 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기다려, 레일즈." 뒤에서 사이아가 괴로운 목소리로 불렀다. "빨리 와!" 레일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최후의 거리를 단숨에 뛰어 올라가자 시야가 확 트인 장소에나왔다. 그 때 옆으로 세찬 바람이 불어와 엉겁결에 바람에 쏠린 몸 의 중심이 흔들렸다. 레일즈는 쓴웃음을 지으며 구두 뒤축 에 지긋이 힘을 줬다. 주위를 주욱 둘러보니 온통 잡초가 나 있는 들판이었다. 멀리 푸르른 나무들이 보였다. 원추 형으로 나뭇잎이 나 있는 활엽수 숲이 펼쳐져 있는 것 같 았다. 일행을 돌아보았다. 사이아는 숨을 헐떡이면서 비탈길 을 잰 걸음으로 올라오고 있었고 비인도 뒤를 바싹 따르 고 있었다. 나중 두 사람은 느긋하게 올라오는 중이었는데 비인과 상당히 떨어진 상태였다. 레일즈는 다시한 번 찬찬히 처음 찾아온 대지를 둘러보 았다. 발 아래 잡초가 바람에 쏠리며 기분 좋게 흔들렸다. 땅은 바싹 마른 붉은 흙이었고 크고 작은 돌들이 굴러다녔 다. 레일즈는 몸을 숙여 지면에 손을 댔다. 차갑지도 뜨겁지 도 않았다. 구르고 있는 돌도 그저 흔하디 흔한 보통 돌이었 다. "다낭하고 무엇 하나 다를 게 없구나." 레일즈는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그의 상상 속에서 크리스타니아는 다낭과는 전혀 닮지 않은 곳이었다. 다낭 반도 전체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런 곳은 얼마든지 찾아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갑자기 다낭을 밑으로 내려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절 벽 끝에 서는 것이 내키지 않았다. 바람도 세고 무엇보다 절벽이 무너질지도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금 떨어진 장소에 조그마한 언덕이 눈에 띄었다. 저 위에 올라가면 다낭도 크리스타니아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사이아와 비인이 드디어 뒤따라왔다. "왜 이렇게 늦게 오는 거야." 레일즈는 약간 뽐내듯이 말했다. "네가 너무 서두른 거지." 사이아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얄밉다는 표정으로 레일즈를 올려봤다. "알았어.여기서 잠깐 쉬자. 그리고 저기 보이는 언덕에 올라가자. 저기 가면 멀리까지 볼 수 있을 거야." 비인과 사이아는 레일즈가 가리키는 언덕들을 보고는 지겹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올라간다구." 비인이 질리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로 엄살을 부리다니 앞날이 걱정된다. 우리 아 버지가 모험자 생활을 할 때는 사흘 밤낮을 쉬지 않고 산 길을 걸은 적이 있다고 하시던걸." 그때 밧소와 샤일론이 모습을 나타냈다. "생각한 것보다 더 힘드는데." 쏟아지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밧소가 가벼운 말 투로 말을 걸었다. 그 수건에는 마른 핏자국이 나 있었다. 잘 보면 입고 있는 옷도 온통 핏자국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들이 얼마나 심한 고문에 시달렸는지 충분히 상상이 갔 다. 상처는 샤일론의 치유 마법으로 치료했을 것이다. 레일즈는 다시 일행이 올라온 길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틈이 메워진다고 해도 그 사이에 끼일 염려는 없었다. 그 러나……. "이 길이 닫히면 우리는 두 번 다시 다낭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몰라. 그래도 좋아?" 레일즈는 땅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이아와 비인에게 물었다. "물론이지, 그건 각오하고 왔어. 어쨌든 나는 쭉 여기로 오는 꿈을 꿔 왔거든." 그렇게 말하고 사이아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레일즈와 함께라면 어디로 가든 상관 없어." 비인도 수줍어하며 대답했다. "그래?" 레일즈는 두 사람에게 짧게 되묻고 다시 길 쪽으로 눈길 을 돌렸다. 그 길은 다낭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러나 다낭 에서의 생활은 레일즈에게 아무런 매력도 없었다. 재상의 졸개 노릇이나 하는 기사로서 생활하는 것 이외에는 자기 에게 열려 있는 길이 아무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곳 크리스타니아에서는 무한한 가능성이 기다 리고 있었다. 자신의 검술 솜씨 하나만으로도 얼마든지 운 명을 개척해 나갈 수가 있는 것이다. 전설로 전해지는 영 웅들과 어깨를 견주는 일도 가능했다. "자, 저기 언덕으로 올라가자." "벌써 간다고? 잠깐이라도 좀 쉬고 가야지." 레일즈가 하는 말을 듣고서 밧소가 불평을 했다. 그는 이제 막 땅바닥에 허리를 비스듬히 기대고 가죽 물통에 입을 갖다댄 참이었다. "피곤하면 여기서 기다리면 되잖아. 경치를 보고 가려는 것뿐이니까." 레일즈는 짐을 어깨에 둘러맸다. "그러면 짐은 우리가 봐줄게." 드워프 샤일론이 제안했지만 레일즈는 고개를 저었다. 짐을 들고 둘이 날라버리면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아무래도 아직 신용할 수 없다는 말이군." 밧소가 샤일론을 바라보며 웃는다. "무리는 아니지." "미안." 레일즈는 사이아와 비인에게 신호를 보내고 언덕을 향 해 걷기 시작했다. "어때? 윗세계로 찾아온 기분이." 사이아가 약간 불안한 표정으로 레일즈에게 물었다. "뭐랄까, 다낭과 별 차이가 없어 보여. 역시 여기엔 신들 의 성지 같은 건 없는 모양이야." "그래, 내가 말한 대로야." 사이아가 기분 좋은투로 말했다. "그렇지만 이제 막 입구에 들어선 것뿐이야." "비인이 말하는 게 맞아. 방심은 금물이지." 세 사람은 평탄한 지면을 걸어나가 언덕의 기슭에 도착 했다. 거기서부턴 또다시 고갯길이어서 완만하게 경사진 길을 나란히 걸어 올라갔다. 강렬한 바람이 잠시도 쉬지 않고 불었다. "바람이 기분 좋게 부는데." 비인이 온 몸으로 바람을 맞아보고 싶은지 뒤로 돌아 크 게 기지개를 폈다. "아주 자연스럽고 강력한 정령의 힘이 느껴져." "그거 정말 반가운 소린데. 네 수행에도 도움이 되겠는 걸." "그러면 더 반갑지." 비인은 기쁜 낯빛으로 대답했다. 올라오면서 알았지만 이 언덕은 생각보다 높아서 정상 에 오르기까지는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았다. 게다가 언덕 의 경사면에는 키 작은 풀들이 가득 나 있어서 자칫하다 간 발이 미끄러져 버릴 수도 있었다. 세 사람은 몸을 앞으 로 기울이고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바닥을 밟으며 걸어가 야 했다. 드워프의 충고대로 짐을 두고 오지 않은 게 후회스러웠 다. 너무나 지친 나머지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 을 때쯤 그들은 산의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에 도착하자 사이아는 녹초가 되어 그 자리에 쓰러 졌다. 레일즈도 두 무릎에 손을 대고 상체를 아래로 꺾었 다. 비인은 비교적 멀쩡했고 바람과 이야기하듯 하늘을 바 라보고 있었다. 이만큼 오랜 시간 동안 가파른 길을 올라본 것은 레일즈 도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게다가 그는 완전무장을 하고 있 었다. '신체 단련을 하는 데는 최고겠는걸.' 레일즈는 자신의 용기를 북돋기 위해 마음속으로 그렇 게 말했다. 한참을 그러고 있으니 간신히 심장 박동이 진 정되었다. 레일즈는 상체를 들어올리고 우선 크리스타니 아를 멀리 바라보았다. "이것이……." 레일즈는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신의 성벽으로부터 잠시 황무지가 계속되다가 지형이 갑자기 숲으로 바뀌었다. 그 앞으로는 광대하긴 하지만 특 별할 것이 없는 숲이 지평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을 뿐 이었다. 장대한 건물도 보이지 않았고 시가지나 마을도 눈 에 띄지 않았다. 다낭의 숲과 약간 다른 것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간 격이 상당히 떨어져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까? 그런데 그 간격이 대부분 엇비슷하게 벌어져 있어서 대지에 격자 모양의 보자기를 펼쳐놓은 것 같았다. 강은 숲 사이로 언 뜻언뜻 보였다. "정말 이상한 숲이네." 레일즈 곁에서 늘어져 있던 사이아가 불쑥 한 마디했다. "이상하다니?" "이 숲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야. 누군가가 일부러 나무를 심었어. 이렇게 넒은 땅을 저렇게 질서 정 연한 숲으로 만들어 놓다니……." "듣고 보니 정말 그런데." 레일즈는 끄덕거리며 다시 숲의 모양을 살펴보았다. 사 이아가 말한 대로 누군가가 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면 엄청난 공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왜 숲을 만들었는 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낙원은 오만 가지 색으로 빛났다. 천 년 정도 앞서 번성했던 마법 왕국의 문화도 장대했다 고 했다. 거대한 도시를 공중으로 띄워놓기도 하고 용왕이 나 정령왕들까지도 지배했다고 했으니 그 정도를 쉽게 짐 작할 수 있었다. 레일즈는 크리스타니아에 가면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으 리라고 상상했다. 그러나 실제로 만난 것은 질서 정연하게 나무가 심어진 숲이었다. 신들의 낙원이나 마법 왕국을 끄 집어낼 것도 없이 다낭의 왕도와 비교해도 수수하기 짝이 없었다. 단지 압도되는 것이 있다면 그 광대함뿐이었다. 그것조차도 만 명정도의 노예만 확실하게 부리면 누구든 지 조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됐다. 그러다가 레일즈는 문득 뭔가를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 어 눈길을 절벽 쪽으로 돌렸다. 언덕의 북쪽 경사면을 따 라 내려가다보면 그 기슭이 끝나는 곳쯤에서 절벽으로 단 절된 곳이 있었는데 거기서 거대한 낙차를 그리며 그 아 래 다낭 반도가 펼쳐졌다. 레일즈 일행이 통과해 온 다낭의 숲은 크리스타니아의 숲에 비하면 그 규모가 아주 초라했다. 그 맞은편에 있는 하크 마을은 마치 하나의 점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태어 나서 그 마을을 떠나본적이 없는 레일즈는 자신이 마치 시시한 인간처럼 느껴졌다. "크리스타니아가 얼마나 넓은지는 잘 알겠어. 그렇지만 ……." "그렇지만 뭐?" 사이아가 되물었다. "도대체 이 끝없어 보이는 숲 어디에 사람이 살고 있는 것일까?" 레일즈의 말을 듣고 사이아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는 지 맞장구를 쳤다. "맞아, 그러고 보니까 시가지나 마을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네." "자, 잠깐만 기다려봐." 사이아는 등짐 자루에서 한 권의 책을 끄집어냈다. "뭐야, 그게?" "나한테 방법이 있어. 이게 스승님한테서 가져온주문서 야. 고대어는 확실하게 공부했으니까, 이 책만 있으면 어 떤 주문이라도 걸 수 있어." 사이아는 그렇게 말하며 마음을 진정시키려는지 주문서 를 가슴에 꼭 안았다. "주문서와 이 마술사의 지팡이가 주문의 마력을 발동시 켜주는 보조 용구 노릇을 하는 거야." "대단한데." 레일즈는 마법에 대해 자세한 걸 알지 못하므로 그렇게 밖에 말하지 못했다. "그런데 무슨 주문을 쓰려고 하는 거야?" "원견(멀리 보는)의 주문이지. 그렇게 하면 내 시력이 평 소의 몇 배가 돼." 말을 마치며 사이아는 주문서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몇 장 뒤적거리다가 그녀의 손이 탁 멈췄다. 그러곤 그 페이지를 펼친 채 주문서를 어깨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한 손에는 마술사의 지팡이를 쥔 채로 그녀는 마치 주문서를 낭독하는 것처럼 낯선 말들을 천천히 읊조렸다. 마술사들이 마법을 발동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마법어였 다. 상위 고대어라고 불리는 룬어는 천 년이 지난 과거의 고대 왕국 주민들이 연구하여 완성시켜 놓은 것이었다. 그 들은 이 신비로운 룬어의 힘으로 위대한 마법 문명을 세 워 전세계를 지배했다. "나의 눈을 꽉 채워다오, 만능의 힘이여……." 아무래도 아직은 신출내기 마법사 티를 못 벗어서인지 주문을 더듬더듬 외웠다. 그렇지만 어쨌거나 사이아의 마 법은 완성된 것 같았다. 주문서에서 눈을 떼고 지팡이를 휘두르면서 천천히 크리스타니아의 대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얼마 후 광대한 숲을 잠깐 살펴보고 나서 사이아는 가슴 에 담긴 숨을 천천히 뱉어냈다. 주문을 읊조리는 데도 엄 청난 힘이 소모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됐어?" "대단한 숲인데. 마법을 사용해도 아직 끝이 보이지 않 아." "마을은?" 사이아는 고개를 저으며 미안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였 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를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하지." "어쨌든 강을 가로질러 가보자. 정처 없이 숲 속을 헤매 다간 두 번 다시 밖으로 못 나올지도 몰라. 마을이나 시가 지가 형성되려면 반드시 강을 끼고 만들어져야 하고 폭포 위쪽에서 물건들이 떠내려왔으니까. 그쪽으로 가는 게 가 장 안전할 거야." "제발 그랬으면 좋겠어." 크리스타니아에 올라오면 곧바로 파란만장한 모험이 시 작된다고 생각했었다. 음유시인들이 말하는 모험자들의 영웅담이 모두 그런 것처럼. 하지만 현실과 이야기는 늘 다르게 마련이지. 레일즈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깊은 한 숨이 새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일행은 모두 사이아의 말을 따라 언덕의 경사진 길을 내 려가기 시작했다. 우선은 그것이 최선인 것 같았다. 이 자 리에 그냥 있어봤댔자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